퍼포먼스와 기자회견,,7.4 남북공동성명 42돌

                        -5.24조치 해제, 남북경협 재개하고 합의정신 이행하라!

[브레이크 뉴스 박정례]= 오늘은 7.4 남북공동선언 42주년이다. 이보다 앞선 어제(3일 11시) 오전에 광화문 이순신동상 앞에서는 ‘남북관계개선 촉구 기자회견’이 있었다.

이날은 국내 평화통일연대 21개 단체가 모여 7.4성명 42주년을 되새겨보며, 정부는 하루 속히 2010년 이래 중단되고 있는 남북 간 경제협력과 평화교류를 재개할 것을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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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의장과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의 인사말과 이윤배 흥사단 이사장과 김대선 원불교 평양교구장 교무를 비롯한 오현경 통일농사협동조합 총괄사업본부장 등의 각개발언에 이어서 30여 명의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퍼포먼스가 있었다.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경제협력과 상호교류의 재개를 염원하는 마음이 간절한 탓인지 한 점 흩어짐 없이 진행되는 모습에서 이날의 행사 취지와 당위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먼저 각 단체장들이 발언한 요지는 아래와 같다.

이창복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상임의장은 “7.1일 북측에서 7.4 공동선언을 맞는 0시를 기점으로 ‘상호 비방 중상 중단 및 군사적 적대행위를 중단하자!’ 했으므로 이를 정부는 겸허히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통일을 원한다.’면서도 우리 정부가 상호 합의한 것조차도 존중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국제 정세는 냉엄하고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서 7.4공동성명에서 합의한 바에 충실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어서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은 “우리는 그동안 남북문제에 관한한 말만 있고 실천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때도 그렇고 지금 역시 ‘통일은 대박이니,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드레스덴 선언이니’ 말만 있고 도무지 실천이 뒤따르지 않고 있다. 지금 개성에는 국민의 세금을 들여서 조성해 놓은 100만평이나 되는 공단이 있다. 그런데 그 70%가 7년 째 놀고 있다. 이는 이명박 정부시절에 5.24조치로서 남북경협을 중단시킨 때문이다. 전기, 수도, 도로망 산업시설 등 모든 것을 갖춰 놓고 펑펑 놀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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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일본은 전쟁을 할 수 없는 나라에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돼가고 있다. 일본이 한반도 문제에 군사적으로 관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국민은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나서야 한다. 남북경협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개성공단에 입주한 중소기업이 늘어나서 임대료가 거의 들지 않고, 임금도 1인 당 14만원 안팎인 조건을 이용하여 기업도 살고 우리경제도 더 살아야 한다. 이는 국민이 원하는 것이다. 자국민이 원하는 소원도 못 들어주는 정부가 제대로 된 정부일리 없다.”

정 전 통일부장관에 이어 남북경협비상대책위원회 유동호 위원장, 흥사단 이윤배 이사장도 거듭 강조하기를 남북문제를 상호 평화롭게 풀어나갈 수 있는 대안이 있음에도 정부가 실천하지 않아서 중단되고 있는 모든 문제를 푸는 선제조건으로서 5.24조치를 해제할 것을 촉구했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평화 통일단체 들이 연대하여 개최한 이날의 7.4남북공동성명 42돌 기념식 말미에는 21개 산하단체에서 공동으로 특별 제작한 10.4선언→ 6.15선언→ 남북기본합의서→ 7.4성명→ 한반도 평화 통일(한반도기 등장) 판넬을 들고 나와 한반도 지도를 완성함과 동시에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과 찍은 기념사진을 출력한 펼침 막을 내보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박정례/ 기자, 르포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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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4 13:17 2014/07/04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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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병장 사건과 병영문화의 문제점과 개선책

                        [단독 인터뷰] 17대 국회의원 임종인 변호사가 말하는 임 병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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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 지난 달 21일 오후 8시 넘어 총기사건이 있었다. 사망자 5명과 부상자 7명이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 말이다. 사건이 발생한 곳은 동부전선 최전방 초소 가 있는 22사단에서다.

남북한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다른 나라 같지 않은 이런 특수성으로 인해서 국토는 3.8선으로 갈라졌고, 정부는 이곳에 우리 군의 최전방초소를 설치해 놓고 있다. GOP는 이와 같이 남북한이 상시 대치중인 최전방이고 보니 그 어느 곳보다도 철저한 관리와 안전을 요하는 곳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사고 때마다 재발을 위한 약속은 구두선에 그치고 확실한 조치가 이루어지기는커녕 끔찍한 총기사건이 되풀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정부는 환부를 도려내는 심정으로 근원을 제거하기 보다는 임시방편으로 일관하고, 해당 부대나 국방부에서는 일개인의 일탈로 인한 개인사고로 치부하는가 하면 축소은폐하기에만 바쁘다. 지난 21일에 발생한 임 병장 사건은 아직 조사 중이므로 그 원인과 동기가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하지만 제대를 3개월 앞둔 고참병사가 왜, 무엇 때문에 자신은 물론 남의 인생까지 파멸로 이끈 끔찍하고도 극단적인 총기난사 사건을 저지르게 됐는지에 안타까운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이 개인이라 할지라도 국가와 사회가 오랫동안 형성해 놓은 관계망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하나도 없다. ‘절대 권력은 절대 망한다.’는 속설처럼 우리나라는 오랜 군사독재와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적폐가 여전한 실정이다.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무능은 물론 복지부동과 부도덕성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자본 우선주의에서 오는 황금만능주의와 인명경시풍조 같은 불량요소까지 겹쳐있다.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위협하고 삶을 옥죄고 있다. 하여 개인은 국가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끝내는 허망한 죽음의 희생자로 전락하게 됨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폐일언하고 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임종인 변호사를 만나서 이번 22사단 GOP 내에서 벌어진 사건의 원인과 치유책에 대해서 알아본다. 임종인 변호사는 10여 년 이상 군 법무관으로 재직하며 특전사 중령으로 제대한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제 17대 국회의원으로 재임하던 시기에는 국회국방위원회 소속 의원으로서 2005년 경기도 연천의 28사단에서 벌어진 ‘김일병 총기난사사건’을 조사한 바 있다.

군대문화의 개선을 위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임종인 변호사로부터 군대문화의 잘못된 점은 무엇인지 진단과 처방을 기대해 본다.

유사한 사건이 재발하고 있는데요?

“군대문화의 적폐에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잔뜩 부풀어 오른 풍선은 스치기만 해도 그냥 터지게 되죠. 왕따와 집단 괴롭힘에 시달려온 병사가 그와 같습니다. 극단적인 처지에 내몰린 병사가 하는 행동이란 자살을 하거나 들고 있던 총을 남에게 겨냥하거나 입니다. 사건이 나면 일반적으로 군에서는 개인 탓으로 돌려버리는데 그래야 책임질 일 없이 사건이 종결되거든요. 사건을 축소은폐하려고만 했지 환골탈태 하는 심정으로 개선하려고 들질 않습니다.”

이번에 임 병장 사건이 일어난 22사단은 2년 전 노크귀순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가장 동해안 쪽에 있는 최전방으로서 월북사고 또한 일어난 곳이다.

임 병장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진단해주십시오.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병사가 전출되는 것은 이례적이고요. 자기들하고 같이 있던 병장이 아니니까 병장을 병장답게 대우해주지 않았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듭니다. 임 병장은 최전방지대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고충을 잘 다스리질 못했던 거지요. 말과 같이 제대 3개월 남겨놓고 벌어진 일이라서 안타까움이 더합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유효한 문제점이 있을 텐데요

“그때만 해도 사병 월급이 1만원이었습니다. 참여정부 때 비로소 8만원으로 올랐지요. 제 주장은 병사들에게 지급하는 월급이 30만원은 돼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근무 연한도 18개월이 과학적으로도 딱 좋다고 생각해요. 신병으로 6개월을 보내다가 군대생활에 익숙해지는 시기로 6개월을 보내고, 나머지 6개월은 군대생활이 신나고 할 만하다고 생각하면서 제대기를 맞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군대기간을 18개월 설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시 21개월로 돌아갔지요.”

월급 30만원에 군대연한 8개월이면 환호할 사람 많겠네요?

“저는 계급도 2단계만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일병과 병장으로 하면 어떻습니까? 평등한 상태로 지내다가 제대할 무렵이면 병장으로 마무리하는 것도 지장이 없다고 봐요. 휴대폰도 지급하라는 주장도 했습니다. 가정과 학교를 나와 갑자기 유리된 공간에 놓이다 보면 얼마나 고립감이 크겠어요? 막사를 마저 더 현대화 하는 것도 미룰 일이 아니지요. 형제나 아는 사람이 있으면 같은 부대에 소속되게 하고 동네친구들끼리 한 부대에 소속되게 하는 제도는 전에도 발표가 난 것입니다만 더 민주화 되고 더 현대화 돼야 하지요.

군대 일 년 예산의 대부분이 무기 사는 데 쓰이는데, 무기도 중요하지만 사병들의 복지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막사의 현대화도 마저 진행해야지요. 그래서 30여 명 씩 머리 마주 보며 자는 환경을 개선해야 합니다. 월급은 더 주고, 서로 잘 지낼 수 있도록 병영 환경을 개선해야 합니다. 80년대 만 해도 군대 내 사망자가 연 평균 대대병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엔 150명 정도로 줄었는데 자살자가 80에서 100명 정도고 사고사가 50명 정도입니다. 

이는 뭘 말해줍니까? 군대내 괴롭힘과 왕따 문화를 개선하고, 억압적이고도 폐쇄적인 병영문화를 민주적이고도 전우애가 넘치는 곳으로 만들면 사고는 노력을 기울인 만큼 줄어들 수 있음을 말합니다. 가고 싶은 군대, 사람냄새 묻어나는 곳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합니다.

“군 수뇌부부터 당당하고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군대내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그 원인을 개인의 일탈로 치부해버리는 책임회피만 할 게 아니라 진단을 올바르게 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제대로 된 처방을 내놓을 때 서로 교감을 이루는 병영문화가 정착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국민의 절반이 다녀오는 곳이 군대다. 군 수뇌부들은 골프장을 짓는다든지 하는 데만 골몰할 것이 아니라 하루 속히 사병들의 복지 개선에 힘쓰고 평등하고 조화로운 병영문화를 이루는데 잰걸음으로 힘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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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3 23:31 2014/07/03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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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황토현, 120년 전 관군에 맞서 승리한 동학농민운동의 전적지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맞서 분연히 일으킨 농민혁명

[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너희가 전쟁을 아느냐? 그것도 진짜 전쟁을. 하고 묻는다면 혹자는 뭐라 대답할까. 사람에 따라서 대답하는 내용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관점이 다르고 생각하는 틀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 다르다. 국가도 그렇다. 그러나 현대는 분명히 말하지만 “역사 전쟁이다.” ‘역사를 잃은 민족을 혼을 잃은 민족’이기에 우리는 현재의 거울인 역사를 들여다보고 한시라도 소홀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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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다. 열흘 가는 꽃 없듯이 시간 앞에 영원한 권력이란 없다. 역사상 가장 넓은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제국도 몽고제국도 지금은 한 낱 건축물이나 유물 같은 얼마 남지 않은 흔적들로 그 실재를 증명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없는 민초들의 삶은 무엇으로 찾아야 할까. 찬란한 문화재를 만들었지만 그것을 함께 누리지 못했던 민중들의 저항은 어디서 그 흔적을 찾아야 할까? 만감에 젖어 갑오농민전쟁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1894년 농민 전쟁은 조선 말 외세를 물리치고 압정에 저항하여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려 한 민중 항쟁이고, 봉건적 신분제를 철폐하여 민중이 사회의 주인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고자 하는 혁명 운동이었다.

그러나 농민군이 집결했던 곳,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졌던 황토현, 이런 곳엔 애초부터 무슨 볼만한 유적이 남아있을 리 없다. 다만 그들이 밟았던 땅에 발 딛고, 그들이 바라보던 들판을 바라보며 어떤 마음으로 흙과 삽과 괭이를 버리고 죽창을 들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목숨을 걸었는지를 떠올려 볼 뿐이다.

동학유적지 황토현(黃土峴)은 글자 그대로 황토로 덮인 작은 언덕이다. 이곳은 태인에서 고부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던 곳으로 해발고도 35.5m의 야트막한 고개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전라북도 정읍시 덕산면 하학리에 있는데 전에는 ‘진등’이라고도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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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은 1893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못 이겨 봉기하여 이듬해 정월에는 고부관아를 습격하였다. 전봉준의 지휘 아래 무기고(武器庫)를 파괴하고 무기를 빼앗았고, 수세곡(水稅穀)을 창고에서 꺼내어 원래의 주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萬石洑)를 파괴하였다.

전봉준은 마항 장터에 장막을 치고 사태를 엿보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정부는 조병갑을 체포하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아 사태를 조사케 하였다. 그러나 이용태는 일체의 잘못을 동학농민군에게 전가하고 탄압하니 전봉준을 중심한 동학군은 격분하여 인근의 접주(接主)들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保國安民)을 위하여 궐기할 것을 선언하였다.

처음에는 고부읍 북쪽의 백산을 점령하였다. 이때 수만 명이 모여 전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는데 그는 강령(綱領)을 선포하고 격문을 사방에 띄워 호응을 얻었다. 이어 전봉준은 부안관아를 점령하고 다시 돌아와 도교산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전라감사 김문현은 부안이 점거 당했다는 소식에 급히 별초군 250명과 많은 보부상(褓負商)을 이끌고 동학군을 토벌하러 나섰다.

동학군(東學軍)에서는 4월 6일(5월 10일) 어둠을 틈타 보부상을 가장하여 황토현(黃土峴)에 있는 관군을 살피고, 관군이 깊은 잠에 빠진 이튿날 이른 새벽에 군대를 둘로 나누어 편성한 후, 일대는 서쪽과 남쪽의 정면에서 들이치고, 또 하나의 대오는 동북쪽의 뒤쪽에서 기습을 감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수백 명의 관군(官軍)은 목숨을 잃고, 많은 무기와 곡식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반면에 동학혁명군은 황토현의 승리로 사기가 하늘에 닿을 듯 높아져, 그날로 정읍을 점령하고 죄 없이 갇힌 죄수들을 석방하고, 무기도 탈취하였다. 5월 12일에는 흥덕과 고창, 무장을 석권하고, 이곳에서 동학군이 봉기한 취지를 재천명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황토현은 처음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는데 1981년 12월 10일에 사적 제 295호로 격상되어 성역화사업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기념관 40평을 비롯하여 3월의 백산봉기, 전주집강소, 9월의 삼례 봉기, 우금치전투 외 유품자료 등을 비치하였다. 그 바로 옆에는 높이 2.7 m 좌대 3.7m의 전봉장군의 동상이 서있다.

우리나라는 4대강국에 들러 싸여 예나 지금이나 결코 순탄한 세월을 살지 못하고 있다. 역사문제에서도 그렇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하기에 우리역사의 보존과 바로 알기에 기울여야 하는 지난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역사를 모르는 자, 역사에 휩쓸려 가리라!’ ‘역사를 잃은 민족은 혼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 이기에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 지키려는 정신으로 우리 역사를 잘 보존하고 지켜나가야겠다.

정녕 그렇다. 뿌리 없는 생명은 없다. 뿌리는 생명의 근거이자 삶의 원천이다. 역사는 민족의 뿌리를 말해준다. 우리역사의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동학농민전적지인 황토현과 고부관아와 만석보를 둘러보면서 새삼스럽게 그날의 정신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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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3 09:19 2014/07/03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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