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풍운아 노원(병) 지역위원장 이동섭

-                                                   -실력과 투혼을 두루 갖춘 열정의 민주당 노원 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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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했다. 꽃은 열흘을 붉지 못하고 권세는 10년을 못 간다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꽃을 통해서 위안을 받고, 10년 못 간다는 권력을 통해서 천하를 얻으려한다. 뿐만 아니라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뜻을 펴고자 한다. 꽃과 돈, 그 얼마나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이름인가.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꽃과 돈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안다. 특히 정치권력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고 사람의 행불행을 쥐락펴락하며 재앙을 잉태하기도 하고 온 누리에 평화의 씨앗을 퍼뜨리는 등의 지대한 선 기능을 수행하기도 한다.

 

정치, 그래 지난 4월이었다. 전국의 여러 곳에서 재보선이 치러졌는데 그때 유달리 주목받은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민주당 노원(병) 이동섭 위원장이다. 이동섭 씨는 당시 가시덤불 속에 홀로 내박쳐진 길 잃은 한 마리 양과 같았다. 거대 야당이라고 하는 민주당의 노원(병) 지역위원장이니만큼 때마침 그 지역에서 보궐선거가 벌어짐에 따라서 지역위원장의 선거 출마는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후 사정을 보건데 당선 또한 따 놓은 당상이었기에 당은 자당후보를 마땅히 공천했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무 공천이었다. 이런 민주당의 방침에 따라서 보궐선거를 대비하며 절치부심하고 있던 이동섭 노원(병) 위원장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고 말았다. 이동섭 민주당 노원(병) 지역위원장을 직접 만나 당시의 상황과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알아본다.

 

노원(병) 지역구 사정과 4.24 재보선 전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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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4 재보선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해주십시오! 서울시 지구당 중에서 노원(병)처럼 힘든 곳은 드믈 겁니다. 여야 간에 자주 당락이 혼재하는 곳이고요. 이 틈을 이용하여 당권 파들은 낙하산 공천이나 상황논리를 전개하려들고 말입니다. 19대 대선 때가 그랬지요. 대선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야권을 결집해야한다며 당은 서울과 경기일원에서 타 당 후보에게 지역구를 거저 내주다시피 했습니다. 노원(병) 지역도 그중 하나였지요. 이후의 후유증에 대해서는 국민들께서도 익히 알고 있을 겁니다.

먼저 모바일을 통한 부정투표 사례입니다. 야권연대가 이루어진 곳 중 세 곳에서 부정투표 문제로 소송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저만은(서울, 노원병) 소송을 걸지 않았습니다. 이유야 어쨌든 야권 연대니 결집이니로 전례 없는 의석수를 거머쥔 통진당사태’를 봅시다. 그들은 언감생심 자력으로는 넘보지도 못할 의석수를 쥐더니 이내 내분에 휩싸이지 않았습니까.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말았던 거죠.

정치란 국가의 백년대계를 세워 도도한 흐름과 비전을 가지고 움직여도 시원찮은데 위에서 말 한 것처럼 눈앞의 이익과 당권을 쥔 일개 정파의 즉발적인 필요성에 의해서 움직였습니다. 오랜 동안 당에 헌신하고 가꿔온 지역위원장의 출마권리를 두 번에 걸쳐서 빼앗는 작태 말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구체적으로 짚어주시지요. 정당이란 정권을 잡는데 목적을 둔 결사체입니다. 1,2년 된 신생정당이라 하더라도 선거에 임해서는 처절하게 싸워야하는 거고요. 60년 선명야당이라는 민주당에서 불임정당의 길을 택했으니 결과는 자명합니다. 정체성도 절실함도 처절함도 느껴지지 않는 정당에 국민이 지지를 보내 줄 리가 없지요.

야권은 이명박 정부의 실수나 반발 심리에서 나오는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기 보다는 민생문제나 생활정치에 힘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허구 한 날 야권 연대니 빅 텐트 론이니 하면서 이합집산을 꿈꿔왔습니다. 야권연대만 하면 승리는 따 논 당상이요, 집권은 불문가지라는 신조였던 게지요. 그 결과 민주당은 지금 어떻게 됐습니까?

선거공학적인 접근으로 야권연대가 이뤄졌고, 그 와중에서 고소고발전도 있었는데 노원(병) 이동섭 위원장님은 그러지 않았다고 하셨는데요. 그렇습니다. 저라고 서운한 점이 없었겠습니까? 공정하지 못한 투표행태를 발견하지 못했겠습니까? 그러나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밝혀야 할 진실도 있습니다. 침묵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희 지역에서는 노희찬 후보가 제 상대였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단일화 투표과정에서 서운하고 미심쩍은 부분이 있더라도 저는 연대의 대상인 노희찬 씨를 걸어서 소송을 한다거나 당에 항명하는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선대위원장을 맡은 저를 위시해서 시의원, 구의원들이 나서고 당 조직을 동원해서 그분의 당선을 위해서 도왔지요. 문제는 당선 전후를 비롯한 오늘 날까지 노희찬 씨가 보여준 행태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내비치기로 했습니다.

 

정치인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자괴감을 느끼다

 

알려지지 않은 일이 있었나 봐요? 네. 다른 지역에서는 소송을 한다든지 투표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강하게 어필하곤 했잖습니까. 하지만 저는 선대위원장까지 맡아서 타당후보일망정 협조했다고 자신합니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가 뭡니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말은 왜 있습니까? 상대는 선거가 끝난 후 입에 발린 말이라도 제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제 개인은 차치하고라도 자신을 배려해준 민주당에 대한 예의의 차원에서라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쯤은 할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혀,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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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있었던 4.24 보선 때 역시나 겪은 일이 있습니다. 저희 노원(병)에 재보선 공고가 난 후 이 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어서 전화 3번과 문자와 그리고 사무실 방문 등 도합 5~6번이나 연락을 시도했는데도 단 한 번의 답신이 없었습니다. 남이 주는 도움은 당연한 거고, 상대의 전화나 문자는 그렇게 하찮은 것인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더군요.

저나 그분이나 정치인 이전에 인격을 갖춘 성인입니다. 오고가다 스치기만 해도 인연이라는데, 인간으로서 기본 예의라는 것이 있는 건데, 작년 총선 때 자신의 당선에 일조한 사람에게 대하는 태도나 금년 4월의 재보선 문제로 연락을 시도하면서 보인 행태는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비인간적인 처사라고 보았습니다. 전 정말 이런 일을 겪고 나서 시체 말로 멘붕 상태였습니다.

이번엔 안철수씨를 도우셨는데요? 그렇습니다. 당은 지난 대선 때 안철수 씨가 민주당 후보를 위해서 단일화 해준 것에 대한 답례를 한다는 명분으로 무 공천 방침을 발표했습니다. 선거를 또 접은 것이지요. 이런 당의 결정이 앞으로 어떤 영향으로 이어질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지요. 다만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된 분이고, 그 분이 민주당에 공헌한 것은 확실한 사실이므로 다시 한 번 저를 희생한 것이지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안철수씨는 “미안하다. 희생하고 지지해준 결단을 잊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한 점입니다.

 

정치인으로서의 계획과 인간 이동섭에 관해서

 

정치인 이동섭 님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다시 뛰는 겁니다. ‘진인사 대천명’이라고 저의 할 바를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면서 다음 총선에서는 무소속 안철수 씨든 타당의 어떤 후보와도 맞붙어 싸우라면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뛸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민주당의 사무부총장으로서 중앙당 일에 성심을 다해서 이 한 몸 부서질 각오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가족사항이라든지 정치인 이전의 이야기 좀 부탁합니다, 공직생활을 20여 년간 했습니다. 착한 아내 덕분에 딸 둘과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시골에서 올라온 동생 다섯 명과 처제 4명까지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늘 대식구였지요. 아내는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저는 공무원으로 복무하면서 정말 열심히 아옹다옹 살았지요.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려서 떨이 생선을 사오는 게 제 제 마지막 일과일 정도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덕분에 아내의 별명은 ‘콩나물 아줌마’ 제 별명은 ‘갈치 아저씨’였고요. ㅎㅎ 지금이니까 이렇게 웃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다가 동대문에서 종합체육센터를 하면서부터는 전환기를 맞이하게 됐지요. 제가 태권도를 하는 체육인이다 보니 건장하고 다부지게 보여서인지 주변에서 정치인으로 나설 것을 권했습니다. 덕분에 민주당 청년위원장을 5번이나 역임하면서 크고 작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지금은 보시다시피 노원(병)에 25년 째 살면서 자나 깨나 노원 사람으로 뛰고 있습니다. 저의 소원은 여전히 노원 일꾼을 향하여 꿈을 꿉니다. 한결 같습니다. 다시 시작할 겁니다. 늘 기도하며 제 곁은 지켜주는 아내와 저를 아껴주는 지역민들의 격려가 힘이 됩니다.

V자를 그리며 결의를 다지는 이동섭 민주당 노원(병) 지역위원장님의 모습에 숙연한 감정이 인다. 20대 국회 때는 반드시 꿈을 이루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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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1 22:40 2013/08/01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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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 하면 떠오르는 것이 어디 한 둘일까. 우선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 칭호를 사용한 사람이다.  중국이 오늘날의 통일국가로 존재할 수 있게 천하통일을 이룬 왕이다. 중국인들은 오늘 날 중국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을 꼽으라면 모택동과 함께 진시황을 꼽는다고 한다. 진시황 하면 연상되는 단어는 아방궁, 만리장성, 분서갱유, 여산릉, 불로초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들 단어가 거론될 때마다 중국역사가 요동치고 그에 관련된 인물들의 생사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명멸한다. 이 뿐만 아니다. 진시황의 탄생비화는 워낙 흥미진진해서 오늘날 방송에서 유행하는 막장 드라마는 뺨칠 정도로 극과 극을 오가는 이야기거리로 회자되고 있다.

그의 탄생비화는 이렇다. 진나라 왕족인 자초는 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진나라 상인 여불위가 자초를 방문했다가 자초에게서 투자하고 싶은 가치를 발견한다. 그리고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1단계는 자초가 적적하게 지내는 것을 알고는 자기의 애첩을 자초에게 보내 인연을 맺게 한다. 한편 자초의 품위 유지를 위해 돈과 선물을 제공하고 체면을 세워준다. 이렇게 여불위는 자초의 생활을 돌보며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더불어서 진나라 공자들 중에서 왕위 계승이 유력한 안국군을 눈여겨 보고는 그가 총애하는 부인에게 혈육이 없음을 알고 비싼 선물을 보내서 환심을 산다음에 자초를 그 부인의 양자로 삼게 한다.

그런데 안국군(효문왕)은 여불위가 예측한대로 왕이 된다. 하지만 불과 3일만에 죽는다. 당연히 효문왕이 제일 아끼는 부인의 양자인 자초가 진나라로 돌아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그런데 진시황(양정)의 아버지인 자초(장양왕)도 명이 짧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왕이 된지 3년 만에 죽게 됐던 것이다. 이에 양정이 13세 때 자초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정이는 과연 누구의 씨를 받은 사람일가? 자초인가 아니면 여불위인가. 사기에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진시황 정이는 진나라 상인 여불위의 자식이라고 한다.

정이의 어머니는 여불위가 아끼는 이름난 무희였고 자초에게 가기 전에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한 몸이었다고 한다. 여불위는 이런 전후 사정을 다 알면서도 자신의 애첩을 적적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초에게 보내어 마음을 사로잡게끔 일을 추진한다. 여불위의 예측은 맞아떨어져서 자초가 왕이 됐을 때는 어려울 때 자초를 돌봐준 은인으로서 실권을 쥐고 어린 정이가 13세에 왕위에 올랐을 때는 정이의 후견인으로서 전권을 휘두르는 실력자가 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정이도 어느덧 왕으로서의 틍치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한편 모후는 여불위를 놓아주지 않으면서 옛정을 상기시키며 위험한 관계를 계속 요구한다. 여불위는 황제의 모후와 정을 통하다가는 머지 않아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을 알고 고민에 빠진다. 그래서 그녀의 요구를 직접 들어주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구해서 관계를 맺도록 주선한다. 모후는 이내 여불위가 주선해준 '노애'라는 사내에게 흠뻑 빠지게 되고 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

이 사실을 어느 날 황제가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선수를 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지만 실패로 돌아간다. 반란에 실패한 노애와 아이들은 처형당하고 모후의 목숨은 차마 죽이지 못하겠던지 유폐를 시키는 것으로 끝낸다. 이러한 사건의 한복판에서 여불위는 모든 화살이 자기한테 돌아올 것을 알고 자살로서 생을 마감한다.

이후 진시황은 모든 정사를 손수 처리하면서 친정체재를 굳히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복전쟁을 수행하면서 국내 정치를 반석위에 올려놓고 마침내는 천하를 통일한다. 분서갱유는 진시황의 황권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데 진시황은 전국을 일체 군현으로 나누고는 그동안과는 달리 모든 지방관리를 중앙에서 임명하고 파견해서 관리한다. 일체의 세습을 일체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면 이는 세계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최초의 중앙집권이었다.

혁명적 조치였던 만큼 반발도 많았으리라 여겨진다. 기록상 두드러진 반발은 봉건제를 이상적인 정치형태로 보는 유학자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이는 ‘문화적 통일’, 즉 자유 언론과 사상 탄압을 촉발하는데, 진시황 최대의 악행으로 거론되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그 일환이었다. 그런데 분서갱유가 말 그대로 “기술서적 외에 모든 경전과 역사서를 불태우고, 모든 유학자를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버리는” 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 많다. 일단 지금까지 살아남은 경전 사서도 많으며, 유학 역시 죽지 않고 머잖아 중국의 지배 이념이 된다.

그럼 현대판 분서갱유는 없는가. 왜 없을까. 군력울 쥔 자들은 자신의 통치행위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나타나면 하나같이 제거하려는 속성이 있다. 모 재벌도 자신을 비판하는 서적이 나오면 인력과 자금을 총 동원하여 책을 수거한 적이 있다. 책이 시중에 풀리기 전에 모조리 사들이는 것이다. 분서갱위는 바꾸어서 말하면 언론탄압일 수 있고, 정권의 방송장악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넓은 의미에서 현대판 분서갱유에 속한다,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이 탄생하면 제일 먼저 손대는 일이 방송장악이었다. 그리고 언론탄압이었고, 정권에 비협조적인 언론인들의 목을 치는 일이었다. 이같은 일은 최근에 이명박정권 하에서 어김없이 벌어졌고, 지금 박근혜정권 또한 여전히 친 정부적인 인물들로 언론을 장악하게 하여 정권에 불리한 기사를 알아서 내보내지 않는 방법을 시행하고 있다. 지금 박근혜정권은 방송장악의 덕을 제일 많이 보는 중이라고 한다. 정권과 권력에 순치된 대한민국의 미래가 암담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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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31 07:47 2013/07/31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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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중지추 모수자천

낭중지추라는 말은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가만히 있어도 주머니 밖으로 뽀족한 끝이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뜻이다. 오늘 날 쓰이기는 재능이나 실력이 특출난 사람은 기어코 얼마 지나지 않아 두각을 드러내어 그 우수함이 알려진다는 뜻이다,

중국 전국시대에는 4공자가 있었는데 제나라의 맹상군, 조의 평원군, 위의 신릉군 그리고 초의 춘신군을 말한다. 그런데 조나라는 진나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어서 이러한 전국을 타개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판이었다. 평원군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식객 중에서 20명을 뽑아서 이웃나라로 가서 동맹을 맺으러 떠나는데 수행원으로 삼으려던 참이었다. 같이 떠날 사절을 선발하는데 끝내 마지막 명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모수'라는 식객이 자신을 뽑아달라고 자천하고 나섰다.

그런데 평원군은 덕망이 있고 사람이 너그러워서 늘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사람이었다. 평원군의 집에 드나들며 밥을 먹는 식객들이 무려 3천여명이나 될 정도였다. 이웃나라로 합종연횡을 하러 떠나려던 판에 인재를 뽑는데 모수라는 사람은 평원군의 식객노릇을 한지 3년이 돼도 도무지 눈에 띄지 않은 인물이었던지라, 모수 자신이 자천을 하고 나서자 평원군도 떱떠름하게 여기면서 말한다. '낭중지추'라고 주머니 속의 송곳은 그 뽀족한 끝이 자연히 드러나게 마련인데 모수 자네는 3년 동안 존재감을 드러내 본 적이 없는데 무슨 실력과 재주로서 우리 조나라를 위해서 이롭게 한단 말이요? 하고 묻기에 이른다.

모수가 말하기를 "소인은 아직 주머니에 들어 가 본 적이 없는데 군(君)의 주머니에 들어만 간다면 그 끝이 아니라 송곳 자루까지 다 드러나게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답했다. 이렇게 해 모수는 평원군을 따라 초나라에 가서 초왕과 평원군의 협상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러나 초나라 왕은 핑게만 대면서 평원군의 청에 선뜻 응해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하루 온종일이 지나도 일이 지지부진하게 잘 되지 않자 모수는 급히 칼을 빼어들고 초왕을 협박하며 합종(合縱)의 타당성을 역설해 초왕으로부터 조나라에 대한 지원군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받고 성공리에 귀국했다.

이리하여 조나라는 멸망의 나락에 빠졌다가 모수의 지략과 지혜로 다시 회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부터 낭중지추라는 말은 사람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리는 말이 되었다. 특히나 미처 모르고 있던 우수한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로. 요즘 같이 자기 피알시대, 가만히 있으면 누가 알아주는 세상이 아닌 때는 자신이 실력과 담력을 갖추기만 했다면 전국시대 조나라 모수처럼 '모수자천' 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본다. '모수자천'이야말로 중요한 처세술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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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9 19:49 2013/07/29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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