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전의원
죽음엔 순서가 없다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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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님이 충격을 받을까봐 김홍일 전 의원의 사망소식을 알리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도 발 빠르게 박지원 의원이 나서서 언론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알리지 않는 사람들은 무슨 권리, 무슨 생각에서인지 모르겠고 이것이 과연 옳은 행동인이 잘 모르겠습니다.

인명은 재천이라 하는데 아들이나 딸이 먼저 갈 수도 있고 어머니나 아버지가 뒤이어 세상을 뜰 수도 있습니다.

‘김홍일 전 의원’은 10여 년 전에도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상태로 병중에 있었고, 부친이신 고 김대중 대통령님의 장례식장에 나온 모습은 전 국민들이 충격을 먹을 정도로 처참했습니다.

광주민중항쟁 때 감옥에 끌려가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 등 여러 이유에서 갖게 된 병으로 인해서입니다.

그 분의 신체 모습도 모습이려니와 언어력조차 퇴화된 상태를 보며 “고문의 후유증이 저렇게 무섭구나!” 하며 충격에 빠진 일이 엊그제입니다.

이희호 여사께서는 아들인 김홍일 전 의원의 모습을 바라보며 늘 자신보다 먼저 갈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김홍일 전 의원이 어제 4시경에 별세함으로서 아드님이 먼저 세상을 하직하게 됐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나이 지금 97세라 하는데, 지금 선에서 아드님인 김홍일 전 의원이 먼저 가신 일을 알려드리면 충격을 받을까봐서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남편이신 고 김대중 대통령님의 5번의 죽을 고비와 6년의 감옥 생활과 10년의 연금생활 등 온갖 일을 몸소 겪으신 분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감옥살이도 하지 않고, 죽을 고비에 닥쳐보지 않은 사람들이 의원이야 장관이야 당 대표야 온갖 호의호식을 다 한 사람들이 더 난리입니다.

여사님을 생각한다는 이유로 인륜과 천륜을 자기들 마음대로 재단하고 있습니다.

이희호 여사님은 누구 보다 담대하셨던 분 아니었습니까? 그런 여사님의 건강에 누가 될까봐서 알리지 않는다 하는 군요.

과연 이것이 옳은 결정일까요? 알리는 게 마땅하다고 보는 저의 생각이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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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21 17:10 2019/04/21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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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⑨
-시베리아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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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긴장했다. 그렇지만 우린 길을 잘못 들거나 헤맬 일은 없는 팀이다. 길을 잘 아는 러시아인 운전사와 현지에 사는 한국인 가이드가 동행하는 단체여행이기 때문이다. 얼마 있으면 장시간 동안 타게 될 기차역에 도착할 것이다.

뜻밖의 짐꾼들

온갖 생각으로 정신 줄을 놓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던가 보다. 차창 밖 풍경에 눈길을 준 사이도 없었는데 멈추고 보니 역 광장이었다. 35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캐리어가 바닥에 부려졌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금 사십시오.”라며 가이드가 광장 한쪽에 있는 마트를 가리킨다. 그러면서 여행사 직원과 함께 부리나케 달려가더니 5리터짜리 물통을 잔뜩 들고 나타났다. 아홉 개의 객실에 한통씩 들여 줄 생수다. 아차, 싶었다. 잠깐의 게으름 때문에 뭇 나라 사람들이 드나드는 시발역의 생활용품장 구경을 놓쳤다 싶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열차가 특이한 것은 개찰이나 집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때문에 열차표나 입장권이 없어도 아무나 승강장에 들어갈 수가 있다. 역사를 거쳐 가지 않고 좌측으로 돌아 역 광장으로 올 수 있었던 이유다. 플렛폼으로 곧바로 진입하기 위해 육교 앞에 차를 세웠다. 대형 캐리어와 등에 맨 가방에 보조가방 셋을 한꺼번에 감당하기엔 힘에 겨운 상황에 처했다. “어떻게 육교에 오르나?” 그런데 순식간에 러시아인 몇이 한국인 가이드 곁으로 다가왔다. 짐꾼들이다. 돈은 좀 들었지만 그들의 도움으로 계단과 울퉁불퉁한 육교 위로 캐리어를 수월하게 운반하고서 플랫폼을 밟았다. 

현지가이드는 소박한 인상의 재러 한국인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과 갸름해 보이는 얼굴의 소유자, 이 선생이라고 부르는 가이드는 선량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IMF당시 러시아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었는데 부인은 회사 동료로 만난 처지라 했다. 당시 한국인은 러시아 여성들에게 꽤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부인과의 사이에서는 “두 자녀를 뒀다”면서 “연료비가 저렴해서 겨울에도 추위를 모르고 잘 살고 있다.”며 자신의 근황을 재미나게 얘기했다. 가이드 이 선생은 이르쿠츠크 역까지 우리 팀과 동행을 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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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 한국인들의 특징

한때는 해외여행지에서 맞닥뜨린 한국인들의 특징이라고 말해지던 모습이 있었다. 주머니가 잔뜩 달린 조끼패션을 입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이 보이면 영락없는 한국 사람들이라는 거다. 하지만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건 없다고 본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는 것이야 낯선 곳에 맞닥뜨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이는 공통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보고 많이 살피려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그럴 필요는 없으리라.

요는 복합적인 거다. 비약해서 생각해보자면 한국사람의 경우 쇄국이라는 이름과 무관할 수도 없고 말이다. 구한말의 대원군만 쇄국정책을 편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최근까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늘 쇄국 상태였다고 본다. 환경적으로도 그랬다. 언감생심 일반인들이 해외로 나가거나 유학길에 오르는 일은 꿈도 못 꾸며 살았잖은가. 최근에야 해외여행에 관한 각종 규제가 풀리고, 외국유학 역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고 보니까.

조선 조 500백 년 동안 나라 밖으로 나가 본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니 됐을까 싶다. 중국으로 가는 국책사절단 약간 명이 전부가 아니었을까. 그나마 사신으로 발탁된 사람들은 양반관료들과 일부 통역관 같은 특정인들이었다. 수백 년 동안 내내 그랬다. 근현대에 와서는 가난한 식민지시대를 거치고 6.25전쟁과 냉전시대를 7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위정자들에 의한 쇄국정책과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 겪을 수밖에 없는 족쇄는 다양하게 존재해왔다. 아주 최근까지만 해도 유학 차 해외로 나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신세를 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때에 따라서는 폐가망신에 이른 엄혹한 시대를 살기도 했다. 국민소득마저 시원치 않은 터였기에 거금을 들여서 바다 건너 남의 나라 땅을 밟아보기란 도무지 용이한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다 외국 한 번 나갔다 온 사람들은 벼슬이나 한 것처럼 목에 힘을 주고 티를 내기도 했다. 믿거나 말거나 필자가 어렸을 적까지만 해도 외국 한 번 나갔다 오면 그 중에는 대책 없이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해대는 사람이 허다했다. 듣는 사람 쪽에서도 그것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였다 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었지만, 하여튼 “미쿡 가 슬 때 저어말 저어말 차도 마코 빌딩도 노파서 놀라서어요.”하는 식으로. 예컨대 사고의 폭도 외연의 폭도 견문도 협소해서 웃지 못 할 에피소드가 흔하게 유통되던 시기가 있었다. 이건 펙트다. 아무튼 지금은 해외여행정도는 더없이 자유로운 세상이 됐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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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객 폭증

해외여행 2천만 시대라고 한다.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다. 2017년도 기준으로 지난해 우리나라는 2650만 명의 해외여행객 숫자를 기록했다고 한다. 전년보다 약 420만 명(18.4%)이 많은 숫자인데 한국인들이 해외에서 사용한 카드 금액은 20조원에 육박했으며 비율로 따져도 19.7% 증가해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출처 천지일보 2018.2.22.일) 폐 일언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 참 해외여행을 많이 간다. 인구수는 5100만 정도인데 국민의 절반이 넘는 해외여행객 숫자를 기록한 걸 보니 가히 국제화 시대를 열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우리 <대륙으로 가는 길>에서도 해마다 시베리아 바이칼 탐사 여행을 떠난다. 일종의 특화된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시작은 6년 전에 했다. 현재까지 5회 째 이어가는 여행이다. 그렇게 됐다. 맞춤형 여행이 활발해지고, 모집 주체도 다양한 현실 말이다. 시민단체와 언론사들도 회원들 모집에 나선다. 여행형태와 모집주체도 다양하고 복장이나 떠나는 모습도  개성을 추구하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스치는 생각들!

이야기가 길어졌다. 모든 것이 순간이다. 시간과 세월의 측면에서 보면 영겁과 찰나가 한 순간에 피고 지고 교차한다. 장구한 세월 동안 끈질기게 버티고 있던 것들도 사라질 땐 순식간이다. 기억도 이 같은 맥락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하고 많은 것들이 제아무리 많을지라도 내 것으로 주워 담지 않으면 기억의 창고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눈을 치켜뜨고 대상을 탐색하는 행위는 그래서 나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행위라 할 수 있다. 사냥감을 찾아서 광야를 헤매는 짐승처럼 어디엔가 잠복해 있던 유랑의 본색을 끄집어내어 바람처럼 부유하는 시간을 희구해본다는 것은 순간일망정 가치가 있다 하겠다.

하지만 생각은 혼자 달리다가도 멈추고, 멈췄다가도 다시 떠오른다. 그래 잊지 말자꾸나. 좁쌀처럼 작은 것들이라 할지라도 기억이 되고 추억이 된다. 홀로 방황하는 나그네가 되어 고독하고 싶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고도 싶다. 그래서 갈래갈래 흩어 진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작별인사

눈앞에는 1940년대 증기기관차가 보였다. 검정과 빨강색이 주조를 이룬 기차가 멋진 인상을 줬다. 러시아인들은 의외로 화려한 색감을 자랑한다. 육교를 건너고, 짐을 들어올리고, 플랫폼에서 서성이던 기억 모두를 비비고 섞으면서. 서둘러 005기차 12차량 칸에 올랐다.

좁은 복도를 지나 몸체만한 캐리어를 밀면서 나아갔다. 8호실 침대칸 4인실을 찾아 들었다. 길다란 좌석이 있었다. 잠잘 때는 침대가 될 자리다. 밖에서 보낸 시간이 많아서였는지 다리가 아팠다. 긴장이 풀리며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조금 지체하다가 룸메이트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짐 가방을 열었다. 벌러덩 나자빠진 사람처럼 활짝 열린 가방에서 조그만 양푼과 세면도구를 꺼냈다. 실내화, 핸드폰 배터리, 세면도구 등등 3일 동안 필요한 물건들을 심사를 하는 기분으로 소지품을 점검했다.

기차가 ‘덜커덩’ 소리를 내고 있었다. 출발이 가까웠다는 신호다. 실(室) 안으로 얼굴을 내미는 사람이 있다. 정동영 의원이다. 작별인사를 하려는 가보다. 이 지점에서 떠나는 사람과 남는 사람이 갈릴 것 같았다. 우리 일행의 중심인물인 정동영 의원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기 때문이다. 민주평화당의 당대표 선거를 한 달 앞둔 시기라서 여러 가지 변수가 생긴 것임에 틀림없다. 부득이하게 귀국을 결정한 측면이 농후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 같이 극동연방대에서 세미나를 했는데 정 의원 혼자서 목적지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돌리게 되다니, 서운한 마음을 가득안고 손을 흔들어 배웅을 했다. “동행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서너 번이나 되풀이하는 모습에서 정 의원과 우리 남는 자들의 표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⑩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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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6 19:12 2019/04/16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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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역과 도시의 간략사⑧
-시베리아 여행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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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크뉴스 박정례 기자]= 우리 탐사단은 오전에 첫 코스로 우스리스크에서 이상설 유허비를 거쳐 라즈돌노예 역에 들렸다. 다음으로 한인문화센터를 찾고 이어 최재형 선생 생가 방문을 마쳤다. 중요한 일 끝에 기대하는 것은 맛있는 식사일 터, 고려인 식당을 찾았다.

연해주에서의 마지막 식사

앞에서 말했다시피 이번 여행에는 3대 목표가 있다. 첫째 고려인 유적지 탐사다. 다음은 흔히 연해주라 부르는 프리모르스키 주(州)의 주도인 블라디보스토크의 루키스 섬 안에 있는 러시아 극동연방대학에서의 세미나 개최, 그런 후 바이칼호수 들르기다. 예정대로 “한반도의 평화체재와 신북방경제 세미나를 마친 후의 일정은 속도감 있게 진행됐다. 이어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차질 없이 오르는 것이 눈앞에 닥친 과제였다고나 할까. 35명의 인원이 열차 한 칸을 몽땅 예약한 상태다. 만약에 이 인원 전부가 열차를 놓치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난감한 일이다.

그렇더라도 먼저 들려야 할 곳은 민생고 해결이다. 세미나를 마치고 전용버스로 이동하여 찾아간 곳은 조선인 식당이었다. 그냥 편하게 북한식당이라고 부르자. 원래는 다른 식당을 예약했다가 교포식당에서 밥 한 끼 먹어보자는 뜻에서 찾아간 곳이다. 러시아에서 해결한 21끼니의 식사에서 느낀 점은 뒤에 가서 좀 더 소개할 예정이다. 그렇더라도 북한식당에서 잘 먹은 한 끼에 대한 추억은 미리 강조해둔 달들 지나친 일은 아닐 것 같다. 밥이라서 좋았고, 나물과 채소재료가 익숙한 것들이라 괜찮았다. 모두 대체로 만족한 모습에 환한 얼굴로 일어섰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인간의 다섯 가지 욕망이라는 것이 재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이라고 한다. 이중의 으뜸은 식욕이 아닐까? 나머지는 욕구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식욕을 채우고 난 뒤에라야 추구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배를 채웠으니 또 다른 목적지를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구가 60만이라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그런데 오늘 날의 도시 사정은 교통체증을 걱정해야할 정도로 인구증가도 있으려니와 늘어난 방문객들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 것 같았다. 서둘러야 한다는 가이드의 재촉 소리가 왠지 자주 듣던 소리처럼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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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빼앗은 땅

딴은 그렇다. 100여년 기준에서 블라디보스토크는 지금처럼 혼잡한 곳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동쪽 최 변방 국경지대에 있는 ‘블라디’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역할이 점점 증대된 케이스다. 빼앗은 영토였기에 자기네 땅으로 굳히기 위한 필요 조치를 때맞춰 진행하기 시작했다. 17세기 중엽부터 러시아는 헤이룽 강(흑룡강, 아무르강) 방면으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는데 영국과 청나라가 2차 아편전쟁을 치르는 틈을 타서 하바롭스크를 건설하고 이어 아무르 강의 이북 지역을 차지한 케이스다. 더해서 1860년에는 영국과 청나라를 중재한다는 구실로 끼어들어 베이징 조약을 체결한다. 연해주는 이때 러시아 땅이 되었다.

그들은 재빨리 95개나 되는 정착지를 건설했다. 우스리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 건설도 이때 이루어졌다고 한다. 1905년에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랄산맥 아래의 첼랴빈스크까지 개통되었다. 러시아 내전에서 승리한 볼세비키들이 계획에 따라 도시 발전과 군사 항(港)으로서의 기능을 본격적으로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39년 스탈린 시대에 와서는 고려인들에게 악명 높기로 유명한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책을 자행하고 말이다.

스탈린의 일국가 일민족주의, 고려인 강제이주도 일 국가 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실시한 정책의 일환이 아니겠는가. 고려인들은 첫 해에 7천, 이듬에 4천이 희생되어 주검이 산을 이루다시피 한다. 황인종들을 소개시키려면 그들과 연고가 더 많은 중국 쪽으로 월경(越境)하도록 했어야지 말과는 전혀 딴 판으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킨 것은 왜인가. 노동력은 필요하고 인권은 무시하고. 사람을 짐짝 부리듯이 부려놓고, 불모지를 개간하여 씨를 뿌리고 거둬들여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했다. 내심 넓으나 넓은 연해주 땅의 연고권을 주장할까봐 일찌감치 영토반환의 싹수를 잘라버리려는 가혹한 탄압 아니었던가 싶다. 지들과 피부빛깔이 다른 사람들은 오로지 착취와 탄압의 대상일 뿐, 달리 무슨 해석이 필요할까 싶다.

고려인들에게는 슬픈 역사였다. 억울하고 분한 과거였다. 구소련이 붕괴한 후 고려인들이 살게 된 나라는 러시아를 비롯하여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탄, 우크라이나, 타자기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이다. 이들은 대충 잡아 총 50만이다. 13가구로 시작한 연해주 농업 이주가 이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율배반적인 말이긴 하나 이 또한 ‘시작은 미약했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에 해당되는 경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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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R 간략 사(史)

러시아의 철도 역사는 당시 수도인 상트페테르브르와 황제의 별장 구간의 24km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1857년에는 알렉산더 2세 차르가 철도 건설 법령을 반포하는 등 19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의 철도는 급격히 늘어난다. 지금의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본선에 해당하는 모스크바-첼랴빈스(Chelyabinsk) 구간도 이 시기 건설되었다. 이때도 유럽에 속한 러시아 땅에 국한 되는 것일 뿐, 시베리아 너머의 지역은 여전히 미개발지역으로 남아있었다이러던 것이 점차 정치 경제적 필요성에 더해 부동항 건설이라는 군사적인 필요성까지 대두됐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내놓은 러시아 도로교통부가 ‘위대한 시베리아철도’라는 보고서를 보더라도 철도건설 계획은 러시아의 세력 확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황제는 앞서 캐나다 태평양 횡단열차가 완공되는 것을 보게 된다. 중국의 혼란을 틈타 빼앗은 땅을 좀 더 확실하게 먹어치우기 위한 제국주의 본연의 야심이 작동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891년 당시 알렉산드르 3세의 칙령에 따라서 모스크바 시베리아횡단 열차가 착공된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사(驛舍) 완공이 1912년이고 러시아 국내 전 구간을 횡단하는 열차 개통은 착공 25년 만인 1916년 일이다. 이 철도의 등장과 함께 지구의 최대 자원보고인 시베리아가 본격개발의 계기를 맞는다. 인구유입이 촉진돼 철로 변을 중심으로 잇따라 대도시가 건설됐고 대학·도서관·극장 등이 들어서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왔다.

TSR, 올 들어 개통 102년째다. 블라디보스토크 역 주변은 이제 도시의 중심지가 되어 교통체증을 유발하기까지 하는 곳이 됐다. 블라디는 그러니까 세 얼굴의 사나이다. 군사도시, 국경도시, 극동정책의 전초기지로서의 모습이다. 예전엔 아니었지만 오늘 날엔 도심 한복판에 역사가 위치하게 된 때문에 함대배치에는 보안문제가 걸린다. 이를 의식한 러시아 정부는 군사적 기능을 인근 나홋카와 볼쇼이카멘으로 분산시켰다. 앞서 말한 대로 동북아국가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져 여행객들이 많이 찾아드는 곳이 됐다. 오랜 기간 동안 외국인 금지구역이었던 곳을 해금조치를 한 것을 보면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미묘한 긴장감이 돌고 있는 다면성을 보이고 있다. ⑨에서 계속

*글쓴이/박정례 선임기자.르포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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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4 12:37 2019/04/14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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