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의 양심적 치과 추천하기 댓글에 달린 치과 정리.

메모

전세에 사는 사람이 많아 이사를 많이 다녀 '지역사회' 같은 건 없고, 의사는 사회의 건강을 책임지는 스승(師)이 아닌철저한 자영업자로서 형성되며, 기업화한 병원과 상류층 자영업자인 의사들마저 등골이 휘는 과도한 건물 임대료는 부당,과잉의료를 부추긴다. 의료지식이 없는 일반사람들은 몸소 부당의료를 경험해야만(그러니까 의료지식이 없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때도 엄청나게 잘못된 결과를 가져온 의료행의를)  이러한 현실에서 각자의 경험을 서로 부지런히 전달하는 것만이 당장에는 좀 더 나은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길인 것 같다. 일반사람들이 제일 도둑놈으로 보는 의사 중의 하나가 치과의사일텐데, 치과진료에 대한 불만과 '좋은, 양심적인' 치과의사에 대한 기대가 아래의 두 게시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자신이 경험한 양심적, 추천하고픈 병원을 댓글로 달아놨다. 그러나 이러한 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의료지식이 그렇게 전문적이지는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추천된 병원들 중에는 눈에 띄지 않을 정도만 '해먹는' 병원들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의료시장이 변하면, 윙버스/윙스푼 맛집이나 메뉴판 닷컴 같이 병원에 진료경험리뷰를 쓰고, 별점평가를 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 반대편에는 '가족같은' 주치의제도가 있으려나?   

http://www.82cook.com/entiz/read.php?bn=15&num=1364967

http://www.82cook.com/entiz/read.php?num=1365152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3/02/13 03:40 2013/02/13 03:40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almondoctopus/trackback/22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또 다른 시스몽디 인용

글쓰기

또 다른 발견!

   책을 보다보니 (길판으로) 17장 노동력 가치, 가격의 임금으로의 전화 다음에도 시스몽디가 자주 나오더군요. 21장 단순재생산, 22장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화에서도 시스몽디가 자주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히 위에서 언급된 『상업적 부에 관하여』 해당부분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부분 입니다.

 

그래도 양자는 모두 이득을 얻는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이 이루어지기도 전(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의 노동이 결실을 맺기 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에 자신의 노동(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노동자의 불불노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에 대한 결실을 제공받기 때문이며, 고용주는 이 노동자의 노동이 그에게 지불된 임금보다 더 큰 가치를 갖기(정확하게 말하면 ‘그에게 지불된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낳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때문이다.(같은 책, 135쪽) -길판 803쪽

 

   여기서 같은 책이란 시스몽디의 『신경제학 원리』(Nouveaux principes d’économie politique)를 말합니다. 이 부분은 펭귄판에도 나오는데, 펭귄판 편집자가 이 부분을 포함한 앞 뒤 몇 페이지는 엥겔스가 마르크스가 프랑스어판에 추가한 것을 독일어 4판에 집어넣은 것이라고 각주에 써놨습니다. 순서대로 펭귄판과, 프랑스어판입니다.

 

‘ Both of them still benefited : the worker because he was advanced the fruits of his labour ‘ (should read : of the unpaid labour of other workers) ‘ before the work was done ‘ (should read:before his own labour had borne fruit) ; ‘ the employer, because the labour of this worker was worth more than his wages ‘ (should read : produced more value than the value ofhis wages).(732p)

 

« Tous deux gagnaient encore; l’ouvrier parce qu’on lui avançait les fruits du travail (lisez du travail gratuit d’autres ouvriers) avant qu’il fût fait (lisez avant que le sien eût porté de fruit); le maître, parce que le travail de cet ouvrier valait plus que le salaire (lisez : produit plus de valeur que celle de son salaire). »(MIA[http://www.marxists.org/francais/marx/works/1867/Capital-I/kmcapI-24-1.htm])

 

여기서도 마르크스는 시스몽디의 본문 사이사이에 괄호를 넣고 여러 말들을 써넣었네요. 아래는 순서대로 시스몽디의 원문 부분(『신경제학 원리』135쪽)과 그에 대한 John S. Vertegaal이라는 사람의 번역입니다.

 

tous deux gagnaient encore: l’ouvrier, parce qu’on lui avançait les fruits du travail avant qu’il fût fait; le maître, parce que le travail de cet ouvrier valait plus que son salaire.

 

so that the two parties involved, both gain here as well. The worker, because he is given an advance on the eventual output of his labour, and the employer, because the to be collected proceeds will be greater than the paid out advances.(123p:http://www.vcn.bc.ca/~vertegaa/sismondi.pdf)

 

이 부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스몽디의 자본의 형성에 대한 일관된 시각을 볼 수 있습니다.『상업적 부에 관해서』에서는 ‘앞으로 수행될 노동’과 ‘이미 수행된 노동’을 대립시켰는데, 여기서는 ‘노동자의 노동(que le travail de cet ouvrier)과’ ‘임금(salaire)’을 대비시키고 있네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3/01/30 03:50 2013/01/30 03:50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almondoctopus/trackback/19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자본론에 인용된 시스몽디 [상업적 부에 관하여]

글쓰기

   1월 17일 자본론 강독을 하다가  1권 6편 임금,  17장 노동력의 가치 또는 가격의 임금으로의 전화, 길판으로 737쪽을 보다가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각주 4)번의 시스몽디의 인용 때문이었는데요(비봉판도 각주 4번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먼저 각주4)가 달린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는 대상화된 노동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 있는 노동이라는 형태상의 구별에서 더 많은 양의 노동과 더 적은 양의 노동의 교환을 도출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4)  -길737

 

   앞 문단에서는 12시간 노동이 10시간이나 6시간 등의 노동으로 교환되는 현실에서 화폐, 즉 대상화된 노동과 살아있는 노동이 직접 교환된다는 말이 얼마나 어불성설인지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금과 노동의 형태가 다르다고해서 다른 양을 가진 노동끼리의 교환을 합리화 하려는 것도 비판하고 있고요. 문제가 되는 각주 4)번은 아래와 같습니다.

 

4) "이미 수행된 노동이 앞으로 수행될 노동과 교환되는 경우에는 언제나 후자(자본가)가 전자(노동자)보다 큰 가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합의되어야 할 것이다"(이것도 '사회계약'의 신판이다)(시스몽디, 『상업적 부에 관하여』, 제네바, 1803, 제1권, 37쪽.).

 

     저는 이 각주를 보고 의문이 생겼는데요, 그것은 이미 수행된 노동을 대상화된 노동으로 본다면 그것은 화폐 소유자가 될테고, 앞으로 수행될 노동을 살아있는 노동이라고 보면 이 노동은 노동자를 뜻하는 것이 될텐데, 이 각주에서는 후자 즉, 앞으로 수행될 노동을 자본가라고 하고있고, 전자 - 이미 수행된 노동을 노동자라 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무래도 아귀가 맞지 앉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전자, 후자의 순서는 제가 확인해 본 판본에서는 모두 같았는데요,  아래는 순서대로 펭귄판과 재익님이 보내주신 영독 합본에 있는 독일어 4판의 각주 인용문입니다.

 

4. 'It was nesessary to reach an agreement' (yet another edition of the contrat social!) 'that every time completed labour was exchanged for labour still to be performed, the latter' (the capitalist) 'would receive a higher value than the former' (the worker). Sismonde(i.e. Sismondi),  De la richesse commerciale (Vol. 1, Geneva, 1803, p. 37).

 

 

”Man mußte vereinbaren“ (auch eine Ausgabe des ”contrat social“), ”daß, wann immer geleistete Arbeit gegen zu leistende Arbeit ausgetauscht wird, der letztere“ (le capitaliste) ”einen höheren Wert erhalten müßte als der erstere“ (le travailleur).

 

 

    독일어를 할 줄 몰라서 구글 번역기에 넣고 해당하는 단어를 찾아 봤습니다. (그래서 잘 못 찾았을 수도 있습니다.) 시스몽디의 원문은 찾을 생각도 못하고 이리저리 고민만 했는데, EM님께서 저에게 어느날 『상업적 부에 관하여』36-37페이지를 프린트해서 던져 주셨습니다. archive.org 에서 원문 pdf를 찾을 수 있다는 말씀도 해주셨고요. 문제는 제가 영어도 잘 못하지만 프랑스어는 정말 까막눈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pdf를 긁어서 복사하고, 원문과 다른 글자를 수정하고, 번역기를 3개, 사전을 4개 띄워놓고 생난리를 쳤습니다. 그러다가 사전에도 없는 이상한 옛날 프랑스말을 검색하다가 신기한 발견을 하게됩니다. 시스몽디의 『상업적 부에 관하여』를 한 단락, 한 단락 영어로 번역한 어떤 위대하신 분의 블로그를 발견한 것입니다! 아래는 De la richesse commerciale; ou, Principes d'économic politique, appliqués à la Législation du Commerce (1803) Vol. 1, Jean-Charles-Léonard Simonde. 36에서 37쪽에 걸친 문단입니다.

 

 

Dans le premier période de la civilisation, lors qu’une nation n’est composée que de chasseurs, on ne distingue chez elle ni riches, ni pauvres, et chacun de ses membres pourvoit par soi-même à ses propres besoins: la division des professions, en rendant possible l’accumulation des richesses, a introduit pour la première fois cette inégalité dans la société. Lorsqu’elle a commencé, celui-là a été riche, qui après avoir pourvu à sa consommation par l’échange des fruits de son travail, a eu encore du superflu; et celui-là a été pauvre, qui n’a pas eu en avance et par devers [par-devers] lui, dequoi [de quoi] subsister pendant qu’il travailloit [travaillait], jusqu’à ce que son ouvrage fut achevé et susceptible d’être échangé. Comme tout homme est forcé de consommer avant de produire, l’ouvrier pauvre se trouve dans la dépendance du riche, et ne peut ni vivre ni travailler, s’il n’obtient de lui des denrées et des marchandises déjà existantes, en retour de celles qu’il promet de produire par son travail. Ce marché ne peut être gratuit, car l’avantage en seroit [serait] tout du coté de l’ouvrier, tandisque [tandis que] le riche ne seroit [serait] point intéressé à le conclure: pour l’y faire consentir, il a fallu convenir que toutes les fois qu’il échangeroit [échangerait] du travail fait contre du travail à faire, le dernier auroit [aurait] une valeur supérieure au premier, ou en d’autres termes, que le propriétaire du superflu accumulé, retireroit [retirerait] un profit proportionné à ses avances.(36-37, 괄호는"François-Marie Kubel" KUBO님의 수정)

 

 

   원문 pdf에는 무슨 글자인지 분간하기 힘든 글자도 많고, 옛날 프랑스 단어가 많아서 어려움을 겪었는데 KUBO님 덕분에 수고를 덜었습니다. 아래는 순서대로 KUBO님의 영어 번역과 저의 한글 번역입니다. KUBO님이 잘 정리를 해주셨지만,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고, 의역을 좀 하신 것 같아서 사전과 번역기를 사용해서 부분부분 수정했습니다. 프랑스어도 못하지만, 영어도 잘 못해서 정말 발번역입니다. 저보다 프랑스어와 영어를 잘하시는 분이 꼭 제대로 번역해주셔야만 합니다.

 

 

  In the first stage of civilisation, when a nation is composed only of hunters, you cannot tell rich from poor among them. Each of them could satisfy their own wants for themselves. The division of professions, by making possible the accumulation of wealth, introduced that inequality in the society for the first time. When the division took place, the rich were those who, after having satisfied their consumption by exchanging fruits of their labour, had still some surplus, and the poor were those who did not have in hand and in advance what is needed for their subsistence during their labour, until their labour had been completed and capable of being exchanged. As everyone is forced to consume before to produce, the poor labourer finds himself dependent upon the rich, and he cannot live or work unless he obtains some foods and commodities which has already existed in the hands of the rich, in return for those which he promises to produce by means of his labour. This deal cannot be gratuitous, because all the advantage of it would be on the side of the labourer, while the rich would not be interested in conducting the deal. In order to make the rich agree to the deal, the necessary condition was that, whenever labour already expended would be exchanged for labour yet to expend, the latter would be of more value than the former; in other words, that the owner of accumulated surplus would derive profit proportional to his advances.(http://reading-french.blogspot.kr)

 

 

   문명의 첫 번째 단계에서, 국민(nation)이 오직 사냥꾼으로만 구성되어 있었을 때에는, 그들을 부자와 가난한자로 구분할 수 없었다. 그들 각자는 스스로 필요한 것을 공급했다. 부의 축적을 가능하게 한 직업의 분화는 처음으로 사회에 불평등을 가져왔다. 이러한 분화가 시작되었을 때,부자들이란 그들이 한 노동의 결실과 교환한 것들을 소비하면서 그 자신의 소비를 충족시키고 나서도 여전히 여분의 것이 남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가난한자들은 가진 것이 없어서 그들이 노동을 할 동안에,노동의 결과물이 완성되고 그것이 교환되기 전에,그들을 먹여살릴 생활수단이 없는 자들이었다. 모든 인간은 생산하기에 앞서 소비해야 하기 때문에,가난한 노동자는 부자에 대한 의존 속에 있게 되고,노동자들은 그들의 노동에 의한 생산을 약속한 물건의 대가로 받는 부자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음식과 상품들을 얻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도 일 할 수도 없다. 이 거래는 공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이익이 노동자 쪽에만 있기 때문이고,반면에 부자들은 거래가 성립되는 데에 아무런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부자가 이 거래에 동의할 수 있게 하려면 필요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이미 수행된 노동(du travail fait)앞으로 행될 노동(du travail à faire)과 거래할 때마다 후자전자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축적된 잉여의 소유자가 그의 선불(avances)에 합당한 이익을 되찾아야(retirerait) 한다는 것이다.

 

 

   자본론에 인용된 이 부분은 시스몽디가 결코 등가교환이 아닌 임금과 노동(시간)의 거래를 가상의 역사에 기대어 설명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태초에 노동을 해서 그 결과물로 풍족하게 소비하고도 남은 잉여를 가진 부자들이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에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지금 당장 뱃속에 뭐라도 넣어야하지만 먹을 것을 얻기위해 일을 하려다가도 그 일의 대가가 주어지는 사이에 굶어죽는 상황에 처한 빈털터리 가난뱅이들이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태초에 노동을 하면서 새참으로는 무엇을 먹었는지 궁금하지만, 아무튼 이런 세계에서 가난뱅이들은 부자들에게 자신의 노동생산물을 바칠 것을 맨입으로 '약속'만! 하고 부자들의 잉여로 생활하며 노동합니다. 이런 상황을 시스몽디는 노동자에게만 이득이 있다고 보고, 이득이 없는 부자들이 이런 거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거래는 공짜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은 가난뱅이들이 맨입으로 약속만하고 완성품을 전달하기 전까지 공짜로 밥 얻어먹는 상황에 기초하는 거래는 성립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들이 이 거래에서 얻을 이득을 위해서 부자들의 이미 수행된 노동(du travail fait)이 더 많은 양의 앞으로 수행될 노동(du travail àfaire)과 거래되어야 한다고 시스몽디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12시간 노동이 10시간이 대상화된 임금과 거래되는 것을 그만의 역사적, 논리적 설명으로 풀어보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고 보면 자본론의 후자 - 앞으로 수행될 노동 - (자본가), 전자 - 이미 수행된 노동 - (노동자) 라는 설명과 틀리게 됩니다. 저는 "후자가 전자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져야 한다" 를 많은 양의 후자(앞으로 수행될 노동)가 적은 양의 전자(이미 수행된 노동)와 교환되어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어 원문은 "... le dernier aurait une valeur supérieure au premier, ..." 입니다. supérieure는 upper, higher, superior 과 같은 뜻이 있고, 프한사전에서는 -을 넘어서는, 상회하는,의 뜻도 있지만 대체로 질적인 측면에서 뛰어나다고 보는 뜻풀이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수행될 노동이 이미 수행된 노동보다 더 높은 질의, 단위시간당 더 많은 가치를 가지는 노동이라고 본다면 시스몽디의 설명과는 앞뒤가 안맞게 됩니다. 그러면 대상화된 12시간의 노동이 살아있는 10시간의 노동과 교환된다는 말을  시스몽디가 하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자본가를 앞으로 수행될 노동이 아니라, 이미 수행된 노동과 연결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은 시스몽디의 다음 문단을 보면 확실할 것 같습니다. 위에부터 『상업적 부에 관하여』37쪽 두번째 문단의 원문 첫문장, 그리고 첫문장의 영어 번역, 한글 번역(발번역 ㅠ)입니다.

 

Dès que les propriétaires du superflu accumulé que nous appellerons désormais capital, ont pu l’accroître en l’échangeant contre un travail à faire, ils ont multiplié autant qu’ils ont pu de pareils échanges, et ils se sont bien gardés de suspendre la faculté productive de leurs capitaux, en les laissant chômer. (37p)

 

 

Hardly were owners of accumulated surplus (we call capital hereafter) able to multiply it by exchanging it for some labour yet to expend before they came to make as many exchanges as they could, and to feel free to exercise the productive faculties of their capital, without leaving it unemployed. -KUBO

 

 

축적된 잉여(앞으로 자본으로 부르기로 하자)의 소유자가 그것을 그것과 앞으로 수행될 노동(un travail à faire)과의 교환을 통해서 증식시킬 수 있게 되자마자, 그러한 교환을 가능한 한 많이 증가시키고, 그들 자본의 생산능력이 사용되지 않은 채 중단되는 것을 주의한다.

 

 

   여기서 확실히 축적된 잉여(앞으로 자본이라고 부를)의 소유자를 앞으로 수행될 노동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당연히 축적된 잉여는 이미 수행된 노동이고, 그 소유자는 자본가 이겠지요. 그리고 앞으로 수행될 노동을 가진 사람은 노동자이고요. 부자가 이미 수행된 노동을 더 많은 앞으로 수행될 노동과 교환시키는 것을 계속 반복해서 자본을 증식시킨다는 말입니다.

   저는 "후자가 전자보다 더 많은 가치를 받아야 한다" 처럼  후자(앞으로 수행될 노동)와 전자(이미 수행된 노동)를 각각 인격으로 해석한 것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고 봅니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순서를 바꿔서 넣어봐도 한 인격이 다른 인격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는다라고 해석하면, 여전히 말이 안됩니다. 그러면 노동자가 자본가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게 된다는 말이 되니까요. 후자와 전자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대입해서 해석해서는 안되고, 후자가 전자보다 같은 시간 대비 많은 가치를 가진다고 봐서도 안될 것 같습니다. "거래할 때마다(que toutes les fois) 후자가 전자보다 많은 가치(량)을 가져야한다."는 해석이 시스몽디의 본문과 충돌하지 않는 것 같고요. 이런 문제는 독일어 4판도 똑같은 걸로 봐서, 시스몽디 인용문 사이에 (the capitalist), (the worker)를 집어넣었을 때부터 생긴 것 같습니다. MEGA를 찾아보면 괄호치고 자본가, 노동자를 써넣은 사람이 마르크스인지, 엥겔스인지, 다른 사람인지, 언제 그랬는지 나오나요? 궁금합니다.

 

- (추가 2013.01.28.)EM님의 더 많은 판본과의 비교와 깔끔한 해석이 들어있는 글을 보시려면 여기(http://socialandmaterial.net/?topic=%EC%9E%90%EB%B3%B8%EB%A1%A0%EC%97%90-%EC%9D%B8%EC%9A%A9%EB%90%9C-%EC%8B%9C%EC%8A%A4%EB%AA%BD%EB%94%94%EC%9D%98-%EC%83%81%EC%97%85%EC%A0%81-%EB%B6%80%EC%97%90-%EA%B4%80%ED%95%98%EC%97%AC-%EA%B8%B8/#post-5206)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3/01/26 06:52 2013/01/26 06:52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almondoctopus/trackback/18
외딴방 2013/01/26 12:21 URL EDIT REPLY
수행된 노동과 수행될 노동을 인격으로 해석하는 건 글쓴이가 아니신가...생각됨. 저는 각주 4의(자본가)와 (노동자)는 전자와 후자의 소유자 혹은 주체라는 뜻이 아니라 전유혹은 귀속받는쪽을 뜻한다고 생각함.

수행된 노동이 화폐=임금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래의 댓가로 전유하는 자가 각주 4)의 (노동자)라는 뜻임.
수행될 노동은 임금과 교환된 노동력이 수행할 노동이고 이것을 전유하는 자가 각주4)의 (자본가)라는 뜻.

17장의 제목이 노동력의 임금으로의 전화인 만큼 각주4)를 달은 것은 본문의 내용인 대상화된 노동과 산노동이라는 형태적 차원에서의 교환이 정당하니 마니를 논하는 것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맑스는 말하고있는 것임.

글쓴이의 해석처럼 노동자가 더 많은 양의 노동을 수행할 것에 대해 자본가가 더 적은 양이 대상화된 임금을 주는 것을 통해 즉 이런 부등가 교환을 통해 자본이 증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그건 시스몽디의 주장이고(인용하신37P에나온그대로) 맑스는 "더 많은 양의 노동과 더 적은 양의 노동의 교환을 도출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쓸데없는 짓을 한 시스몽디의 주장을 각주4)에 쓰고 그게 사회계약이 신판이라고 조롱하고 있다고...저는 독해하고 있음.

핵심은 노동력의 비밀을 푸는 것 아닌감...
0126 2013/01/26 20:56 URL EDIT REPLY
괄호안의 글은 맑스의 것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일단 하나씩 봅시다.

(24) "Man mußte vereinbaren" (auch eine Ausgabe des "contrat social" <"Gesellschaftsvertrags">), "daß, wann immer geleistete Arbeit gegen zu leistende Arbeit ausgetauscht wird, der letztere" (le capitaliste ) "einen höheren Wert erhalten müßte als der erstere" (le travailleur ). (Simonde (i.e. Sismondi) "De la Richesse Commerciale", Genève 1803, t. I, p. 37) <=

길판에서는 이렇게 옮겼습니다.

"이미 수행된 노동이 앞으로 수행될 노동과 교환되는 경우에는 언제나 후자(자본가)가 전자(노동자)보다 큰 가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합의되어야 할 것이다"(이것도 '사회계약'의 신판이다)(시스몽디, 『상업적 부에 관하여』, 제네바, 1803, 제1권, 37쪽.).

이 문장에서 erhalten은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보유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실행된 노동이 앞으로 실행할 노동과 교환될 경우에는 언제라도 후자(자본가)가 전자(노동자)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두 사람이 합의해야한다는 겁니다. 괄호 안의 말은 사회계약이 여기서도 또 나왔다고 빈정대는 것으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이미 실행된 노동은 실현된 노동력이고 노동입니다. 앞으로 실행될 노동은 임금입니다. 전자는 노동을 대표하고 후자는 임금을 대표합니다. 아몬드문어님이 인용하신 시스몽디의 글을 보면 더욱 정확합니다.

whenever labour already expended would be exchanged for labour yet to expend, the latter would be of more value than the former; in other words, that the owner of accumulated surplus would derive profit proportional to his advances.
이미 실행된 노동이 아직 실행되지않은 노동과 교환될 때는 언제나, 후자가 전자보다 더 가치가 있을 것이다. 즉 축적된 잉여의 소유자는 자신의 선불에 합당한 이익(이윤)을 끌어낼 것이다. 잉여의 소유자는 아직 실행되지 않은 노동에 대해 선불을 했다고 합니다. 이 선불은 이미 실행된 노동보다 더 가치가 있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이 받은 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해야합니다.

Hardly were owners of accumulated surplus (we call capital hereafter) able to multiply it by exchanging it for some labour yet to expend before they came to make as many exchanges as they could, and to feel free to exercise the productive faculties of their capital, without leaving it unemployed.
축적된 잉여(자본)의 소유자들이 자본을 아직 실행되지 않은 노동(앞으로 실행될 노동)들과 교환해서 증식시키기가 무섭게 그들은 가능한 많은 교환을 할 수 있고 자신들의 자본의 생산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유휴자본으로 놔두지 않는다.. 이런 뜻인 것 같습니다. 이 문장에서 아직 실행되지 않은 노동은 자본의 생산 능력을 의미합니다. 노동력입니다.

전 그렇게 이해했습니다.
아몬드문어 2013/01/28 17:19 URL EDIT REPLY
EM님께서 Collected Works와 초판, 61-63 수고 등을 포함한 깔끔한 분석을 해주셨습니다!(http://socialandmaterial.net/?topic=%EC%9E%90%EB%B3%B8%EB%A1%A0%EC%97%90-%EC%9D%B8%EC%9A%A9%EB%90%9C-%EC%8B%9C%EC%8A%A4%EB%AA%BD%EB%94%94%EC%9D%98-%EC%83%81%EC%97%85%EC%A0%81-%EB%B6%80%EC%97%90-%EA%B4%80%ED%95%98%EC%97%AC-%EA%B8%B8/#post-5206)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2012/10/04

감상

<홉스봄 타계 3일 후>

 

  병신같이 과제물에 홉스봄 인용만 하다가 홉스봄이 죽은 줄 방금 전에 알았다. 인민전선의 주창자이자 '블레어의 아버지'라는 비판을 들으며 실망하다가도, 쪼다같은 서양사 교수가 좌나우나 개나소나 홉스봄을 좋아하지만 나는 싫어한다고 할 때는 눈앞에 있는 놈을 한심해하는 만큼 홉스봄에 대한 존경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http://www.youtube.com/watch?v=14531gqXc6A&feature=relmfu

 

  한 번도 본적없고 말도 안통하는 쭈구렁방탱이 늙은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게 터무니없다. 홉스봄의 생각을 따라하고 그의 입을 빌려 숙제를 처리하는데 바쁘다가 이 자상한 늙은이가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고 하니 감상에 빠지는 것 같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10/04 00:24 2012/10/04 00:24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almondoctopus/trackback/5
앙겔부처 2012/10/04 13:23 URL EDIT REPLY
이 글 디게 슬프네영 ;ㅅ;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

박노자, 독자와의 만남 - 홍대 카톨릭청년회관 12.07.16.

감상

  박노자 선생은 그의 블로그 글을 보면 맨날 감기로 고생하시는 모양이다. 보통 글이 일주일에 한 번 올라오는데, 한 달에 두 번 이상 감기에 걸렸음을 언급하신다.  글 앞머리에 감기로 정신이 혼미하여 글을 오래 쓰지 못할 것이라거나, 말미에 더 이상 글을 이어갈 수 없음을 토로하시기 마련이다. 나이도 젊으시고, 얼마전에 득녀하신 걸로 아는 데 감기로 골골하시니 걱정이다.

 

  한겨레 출판사에서 『당신을 위한 국가는 없다』독자와의 만남을 기획하여 여러곳에다가 광고를 했는데 나는 운좋게 알라딘 배너에서 발견했다. 당첨까지 되어 16일에 카톨릭청년회관에 갔다. 행사를 진행하시는 분이 테트리스 하듯이 일일이 앞에서부터 빈자리없이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입장할 때 좌석번호가 적힌 자리표를 나누어주었으면 좀 더 쉬웠을 텐데.

 

  박노자 선생은 한국의 세 혁명이 실패한 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 성격에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첫째는 해방직후의 한국인들의 노력이고, 두 번째는 60년의 4.19혁명, 그리고 마지막으로 87년의 6월 항쟁을 들었다. 80년대에는 재벌해체라는 구호가 유행했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경제민주화'논쟁을 떠올리게 했다.

 

  그 다음은 한국 사회가 가진 모순과 그러한 모순이 가져온 문제에 대응하는 시급한 변혁을 이야기 했다. 모순은 토대의 모순과 상부구조의 모순으로 구분하여 설명됐다. 토대의 모순으로는 한국 경제의 내수/수출 불균형과 대외 의존형 경제, 대기업 집중 등이 있었다. 노동자 계급의 분화(정규직-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여성 등의 구분)와 과도한 노동, 저임금이 뒤따르는 문제로 등장했다. 그리고 원전문제를 언급하면서 한국경제를 "핵폭탄 위에 지어진 수출기지"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상부구조의 모순으로는 재벌의 이해관계에 종속된 정책과 경쟁/성공 이데올로기, 차별구조(여성, 외국인, 장애인, 저학력자 등), 담론의 대외의존과 퇴행(예로 든건 포스트모더니즘), 한국형 종교의 성행을 들었다. 경쟁, 성공과 같은 단어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서 생긴 번역어라는 설명,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개인적 기복으로 환원하는 기독교를 비롯한 '한국형 종교'라는 설명이 있었다. 경쟁 이데올로기와 함께 사회적 모순을 개인 윤리적인 차원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토대와 상부구조가 낳는 문제들에 대해서 시급한 변혁으로는 재벌지배 타파, 사회 공공성 확대, 균등한 분배, 외부에 의존하지 않는 경제의 내부적 완결성, 환경 보존을 들었다. 그리고 부동산 문제와 주거 정책 문제를 중요히 언급했는데,  손낙구 선생의 『부동산계급사회』를 인용하면서 한국의 가계총소득대비 주거비비율의 구체적 숫자를 보여주었다. 한국인 전체로는 약 11%이고 소득분위 하위 20%계층의 경우에는 약 16%, 그리고 무주택자의 경우에는 약 23%라는 통계였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주거임대료가 소작지대화 되었다는 인상깊은 비유를 들었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과세를 강화하고, 임대료 제한을 법제화하며, 공공임대주택정책을 들었다 .그런데 위와 같은 해결책을 기존 정치세력이 추진할 수 없다면서 급진 좌파 정당의 필요성을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좌파운동이 한국형 자본주의와 국민국가 형성에 뒤진 8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가진다고 하기도 했다.

 

  질의 응답 시간에 나온 기억나는 구절은 개인의 욕망을 문제로 삼기보다는 그것을 제어하는 사회적 구조의 문제에 집중해야한다는 말과, 역사는 단절과 지속이라는 두 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진로에 대한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박노자 선생이 유학원 브로커가 아닌 이상에야 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학자로서 박노자의 이야기, 예를 들면 잠깐 나왔던 근대 메이지 번역어 같은 문제에 대해서도 더 듣고 싶은데, 그가 쓴 이전의 책들을 찾아보고나 앞으로의 기회를 기다릴 수 밖에 없겠다.

 

  질의 응답시간에 누군가가 대선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박노자는 최근 블로그에 올린 이 글(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50782 )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좌파 운동이 '최악과 차악의 문제'와 무관한 것일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7/18 20:40 2012/07/18 20:40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almondoctopus/trackback/2
Name
Password
Homepage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