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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9

다시 번역하기: <헤겔 레스토랑> 438~479쪽

 

[453쪽] 이러한 운동 전체는 자기 자신의 운동이 아니다.

[원문] the entire movement is its own movement.

[재번역] 이러한 운동 전체는 자기 자신의 운동이다.

 

[457쪽] 즉 '객관적 기만',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생성적 순환운동을) 부인하는 '무의식적' 판타지가 그것으로,

[원문] namely, the "objective deception," the disavowed "unconscious" fantasy (of the mysterious self-generating circular movement of capital),

[재번역] 즉 '객관적 기만',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생성적 순환운동이라는) 부인된 '무의식적' 판타지가 그것으로,

 

[457쪽] 권력과 통제의 궁극적 요소는 더 이상 투자의 연쇄의 최후의 연결고리가 아니다. -- 생산수단의 '실 소유자인' 기업 또는 개인이 그것이다.

[원문] the ultimate element of power and control is no longer the last link in the chain of investment -- the firm or individual who "really owns" the means of production.

[재번역] 권력과 통제의 궁극적 요소는 더 이상 투자의 연쇄의 최후의 연결고리 -- 생산수단의 '실 소유자인' 기업 또는 개인 -- 가 아니다.

 

[458쪽] 자본의 논리를 정식화하기 위해 마르크스에게 헤겔이 필요했던 사실(마르크스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돌파는 1848년 혁명의 실패 후 다시 헤겔의 <논리과학>을 읽기 시작한 1850년대 중반에 일어났다)은 헤겔이 볼 수 없었던 것은 어떤 헤겔 이후의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셩제의 본래 헤겔적 측면이었음을 의미한다.

[원문] the fact that Marx needed Hegel to formulate the logic of capital (the crucial breakthrough in Marx's work occurred in the mid-1850s, when, after the failure of the 1848 revolutions, he started to read Hegel's Logic again) means that what Hegel was not able to see was not some post-Hegelian reality but rather the properly Hegelian aspect of the capitalist economy.

[재번역] 자본의 논리를 정식화하기 위해 마르크스에게 헤겔이 필요했다는 사실(마르크스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돌파는 1848년 혁명의 실패 후 다시 헤겔의 <논리과학>을 읽기 시작한 1850년대 중반에 일어났다)은 헤겔이 볼 수 없었던 것은 어떤 헤겔 이후의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셩제의 본래 헤겔적 측면이었음을 의미한다.

 

[458쪽] 여기서 역설적으로 헤겔은 충분히 관념론적이지 않았는데, 그가 보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본래 투기적인 내용, 금융자본이 '현실의 사람들'을 가공하는 순전히 가상적인 개념으로 기능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원문] Here, paradoxically, Hegel was not idealist enough, for what he did not see was the properly speculative content of the capitalist economy, the way financial capital functions as a purely virtual notion processing "real people."

[재번역] 여기서 역설적으로 헤겔은 충분히 관념론적이지 않았는데, 그가 보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본래 사변적인 내용, 금융자본이 '현실의 사람들'을 가공하는 순전히 가상적인 개념으로 기능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458쪽] 재현적 예술은 경험의 완전한 주제성을, ... 표현할 수 없다.

[원문] Representational art cannot adequately express the full subjectivity of experience

[재번역] 재현적 예술은 경험의 완전한 주체성을, ... 표현할 수 없다.

 

[462쪽] 이러한 헤겔적 의미에서 '추상화'는 "예술자체에 내재적이지 않은 모든 것"의 추상화가 아니라 감각적 직접성에 의존하는 것을 추상화시키는 것, ...

[원문] 'i\bstraction" in this Hegelian sense does not mean abstraction of "everything that was not intrinsic to art as such;' but abstraction from dependence on sensual immediacy, ...

[재번역] 이러한 헤겔적 의미에서 '추상화'는 "예술자체에 내재적이지 않은 모든 것"의 추상화가 아니라 감각적 직접성에 의존하는 것으로 부터 추상화시키는 것, ...

 

[471쪽] 여기서 핵심적인 특징은 재전유의 행위 주체인 주체는 단독자 속에 있다는 데 있다(비록 그것이 집단적 주체로 간주되더라도 말이다).

[원문] The key feature here is that the subject, the agent of re-appropriation, is in the singular (even if it is conceived as a collective subject);

[재번역] 여기서 핵심적인 특징은 재전유의 행위 주체인 주체는 단독자라는 데 있다는 데 있다(비록 그것이 집단적 주체로 간주되더라도 말이다).

 

[417쪽] 그리하여 라캉이 '큰 타자'라고 부르는 것의 차원이, 최소한으로 '대상화된' 상징적 질서가, 홀로 상호주체성의 차원을 지탱하고  있는 최소한의 자기투명성이 사라진다. -- 상호주체성은 결코 개인들의 직접적인 상호작용 속으로 해소될 수 없다.

[원문] what thereby disappears is the dimension of what Lacan calls the "big Other," the minimally "objectivized" symbolic order, the minimal self-transcendence which alone sustains the dimension of intersubjectivity --  intersubjectivity can never be dissolved into the direct interaction of individuals.

[재번역] 그리하여 라캉이 '큰 타자'라고 부르는 것의 차원이, 최소한으로 '대상화된' 상징적 질서가, 홀로 상호주체성의 차원을 지탱하고  있는 최소한의 자기초월성이 사라진다. -- 상호주체성은 결코 개인들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으로 용해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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