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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2

다시 번역하기: <헤겔 레스토랑> 481~508쪽

 

[487쪽] 이율배반관 관련된 범주들의 내재적 본성(유한성 대 무한성, 연속성 대 불연속성)을 실제로 분석하는 대신 분석 전체를 생가가하는 주체로서 우리가 그러한 범주들을 이용하거나 적용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버린다.

[원문]  Instead of really analyzing the immanent nature of the categories involved in antinomies (finitude versus infinity, continnity versus discontinuity, etc.), he shifts the entire analysis onto the way we, as thinking subjects, use or apply these categories.

[재번역] 이율배반관 관련된 범주들의 내재적 본성(유한성 대 무한성, 연속성 대 불연속성 등등)을 실제로 분석하는 대신 분석 전체를 생가가하는 주체로서 우리가 그러한 범주들을 이용하거나 적용하는 방식으로 바꾸어 버린다.

 

[488쪽] 범주 분석의, 순수한 개념적 규정들에 대한 분석의 고유한 한계들을 넘어서 부당하게 이 공간에 시간적 주체성이라는 주제를 투사하는 사람은 오히려 칸트 본인이다. 

[원문] it is rather Kant himself who oversteps the proper limits of the analysis of categories, of pure notional determinations, illegitimately projecting onto this space the topic of temporal subjectivity, and so forth.

[재번역] 범주 분석의, 순수한 개념적 규정들에 대한 분석의 고유한 한계들을 넘어서 부당하게 이 공간에 시간적 주체성 등등의 주제를 투사하는 사람은 오히려 칸트 본인이다.

 

[495쪽] 주체를 자신은 부재하는 대체적 현실을 목격하고 있는 불가능한 시선으로 환원시키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방식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대체적 현실이라는 토포스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우주적인 존재 이전의 카오스로부터 (로고스에 의해 지배되는 완전히 구성된 현실의) 우주의 생성을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신지학적인 신화적-시적 내러티브의 신비화를 피하려고 그것을 재정식화하는 것이다.

[원문] The way to avoid this utopian reduction of the subject to the impossible gaze witnessing an alternate reality from which it is absent is not to abandon the topos of altenate reality as such, but to reformulate it so as to avoid the mystification of the theosophic mytho-poetic narrative which pretends to render the genesis of the cosmos (of the fully constituted reality, ruled by logos) out of the proto-cosmic pre-ontological chaos.

[재번역] 주체를 자신은 부재하는 대체적 현실을 목격하고 있는 불가능한 시선으로 환원시키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방식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대체적 현실이라는 토포스 자체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원형-우주적인 선-존재론적인 카오스로부터 (로고스에 의해 지배되는 완전히 구성된 현실의) 우주의 생성을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신지학적인 신화적-시적 내러티브의 신비화를 피하기 위해 그것을 재정식화하는 것이다.

 

[496쪽] 즉 (가족의 성원 중 하나에 유혹당했다거나 성추행을 당했다는 등의) 드러난 '기억들', 산 자들의 기억 속에서 계속 떠오르는 억압된 이야기들은 다름 아니라 바로 불가능성이라는 궁극적인 암초와, 즉 '성적 관계는 없다'는 사실과 마주칠 수 밖에 없음을 예언할 운명인 그러한 '원초적 거짓말'이다.

[원문] the "memories" unearthed (being seduced or molested by a family member), the repressed stories that haunt the imagination of the living, are precisely such "primordial lies" destined to forestall the encounter with the ultimate rock of impossibility, the fact that "there is no sexual relationship."

[재번역] 즉 (가족의 성원 중 하나에 유혹당했다거나 성추행을 당했다는 등의) 드러난 '기억들', 산 자들의 상상 속에 계속 출몰하는 억압된 이야기들은 다름 아니라 바로 불가능성이라는 궁극적인 암초와, 즉 '성적 관계는 없다'는 사실과의 마주침을 방지할 운명인 그러한 '원초적 거짓말'이다.

 

[500쪽] 하나의 표상을 원초적인 요소로 분해하는 것은 적어도 누구나 손쉽게 표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유 주체로서의 자신에게 그처럼 표상된 존재를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요소로 환원하는 것이 된다.

[원문] To break up an idea into its ultimate elements means returning upon its moments, which at least do not have the form of the given idea when found, but are the immediate property of the self.
[재번역]하나의 관념을 궁극적 요소들로 분해한다는 것은, 발견될 때는 그 주어진 관념의 형식을 취하지 않지만 자아의 직접적 속성인, 계기들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 이 구절은 국역본 <정신현상학>에서 인용된 것인데, 대응되는 영역본의 구절과 그 내용이 많이 달라,  다시 번역해 보았다.

 

[501쪽] 어떤 의미에서 이성은 오성 이상이 아니라 이하이며, -- 말하기를 원하는 것과 실제로 말하는 것을 대립시키는 헤겔의 잘 알려진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 바로 그것이 오성이 활동 속에서 하길 원하는 것 또는 하길 바라는 것과 반대로 자신의 현실성 속에서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원문] Reason is, in a way, not more but less than Understanding, it is -- to put it in the well-known terms of Hegel's opposition between what one wants to say and what one actually says -- what Understanding, in its activity, really does, in contrast to what it wants or means to do.

[재번역] 어떤 의미에서 이성은 오성 이상이 아니라 이하이며, -- 말하기를 원하는 것과 실제로 말하는 것을 대립시키는 헤겔의 잘 알려진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자면 --  오성이 하길 원하거나 하려고 하는 것과 다르게 자신의 활동 속에서 실제로 하고 있는 그것이다.

 

[501쪽] 다시 말해, 오성으로부터 나와 이성에 이르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라고는 오성으로부터 그것을 구성하는 환상을 빼는 것뿐이다.

[원문] In other words, all we have to do to get from Understanding to Reason is to subtract from Understanding its constitutive illusion.

[재번역] 다시 말해, 오성으로부터 나와 이성에 이르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라고는 오성으로부터 그것의 구성요소인 환상을 빼는 것뿐이다.

* 오성은 환상이 구성한 것이 아니라, 환상이 오성에 속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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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9

다시 번역하기: <헤겔 레스토랑> 438~479쪽

 

[453쪽] 이러한 운동 전체는 자기 자신의 운동이 아니다.

[원문] the entire movement is its own movement.

[재번역] 이러한 운동 전체는 자기 자신의 운동이다.

 

[457쪽] 즉 '객관적 기만',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생성적 순환운동을) 부인하는 '무의식적' 판타지가 그것으로,

[원문] namely, the "objective deception," the disavowed "unconscious" fantasy (of the mysterious self-generating circular movement of capital),

[재번역] 즉 '객관적 기만',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생성적 순환운동이라는) 부인된 '무의식적' 판타지가 그것으로,

 

[457쪽] 권력과 통제의 궁극적 요소는 더 이상 투자의 연쇄의 최후의 연결고리가 아니다. -- 생산수단의 '실 소유자인' 기업 또는 개인이 그것이다.

[원문] the ultimate element of power and control is no longer the last link in the chain of investment -- the firm or individual who "really owns" the means of production.

[재번역] 권력과 통제의 궁극적 요소는 더 이상 투자의 연쇄의 최후의 연결고리 -- 생산수단의 '실 소유자인' 기업 또는 개인 -- 가 아니다.

 

[458쪽] 자본의 논리를 정식화하기 위해 마르크스에게 헤겔이 필요했던 사실(마르크스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돌파는 1848년 혁명의 실패 후 다시 헤겔의 <논리과학>을 읽기 시작한 1850년대 중반에 일어났다)은 헤겔이 볼 수 없었던 것은 어떤 헤겔 이후의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셩제의 본래 헤겔적 측면이었음을 의미한다.

[원문] the fact that Marx needed Hegel to formulate the logic of capital (the crucial breakthrough in Marx's work occurred in the mid-1850s, when, after the failure of the 1848 revolutions, he started to read Hegel's Logic again) means that what Hegel was not able to see was not some post-Hegelian reality but rather the properly Hegelian aspect of the capitalist economy.

[재번역] 자본의 논리를 정식화하기 위해 마르크스에게 헤겔이 필요했다는 사실(마르크스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돌파는 1848년 혁명의 실패 후 다시 헤겔의 <논리과학>을 읽기 시작한 1850년대 중반에 일어났다)은 헤겔이 볼 수 없었던 것은 어떤 헤겔 이후의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셩제의 본래 헤겔적 측면이었음을 의미한다.

 

[458쪽] 여기서 역설적으로 헤겔은 충분히 관념론적이지 않았는데, 그가 보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본래 투기적인 내용, 금융자본이 '현실의 사람들'을 가공하는 순전히 가상적인 개념으로 기능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원문] Here, paradoxically, Hegel was not idealist enough, for what he did not see was the properly speculative content of the capitalist economy, the way financial capital functions as a purely virtual notion processing "real people."

[재번역] 여기서 역설적으로 헤겔은 충분히 관념론적이지 않았는데, 그가 보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본래 사변적인 내용, 금융자본이 '현실의 사람들'을 가공하는 순전히 가상적인 개념으로 기능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458쪽] 재현적 예술은 경험의 완전한 주제성을, ... 표현할 수 없다.

[원문] Representational art cannot adequately express the full subjectivity of experience

[재번역] 재현적 예술은 경험의 완전한 주체성을, ... 표현할 수 없다.

 

[462쪽] 이러한 헤겔적 의미에서 '추상화'는 "예술자체에 내재적이지 않은 모든 것"의 추상화가 아니라 감각적 직접성에 의존하는 것을 추상화시키는 것, ...

[원문] 'i\bstraction" in this Hegelian sense does not mean abstraction of "everything that was not intrinsic to art as such;' but abstraction from dependence on sensual immediacy, ...

[재번역] 이러한 헤겔적 의미에서 '추상화'는 "예술자체에 내재적이지 않은 모든 것"의 추상화가 아니라 감각적 직접성에 의존하는 것으로 부터 추상화시키는 것, ...

 

[471쪽] 여기서 핵심적인 특징은 재전유의 행위 주체인 주체는 단독자 속에 있다는 데 있다(비록 그것이 집단적 주체로 간주되더라도 말이다).

[원문] The key feature here is that the subject, the agent of re-appropriation, is in the singular (even if it is conceived as a collective subject);

[재번역] 여기서 핵심적인 특징은 재전유의 행위 주체인 주체는 단독자라는 데 있다는 데 있다(비록 그것이 집단적 주체로 간주되더라도 말이다).

 

[417쪽] 그리하여 라캉이 '큰 타자'라고 부르는 것의 차원이, 최소한으로 '대상화된' 상징적 질서가, 홀로 상호주체성의 차원을 지탱하고  있는 최소한의 자기투명성이 사라진다. -- 상호주체성은 결코 개인들의 직접적인 상호작용 속으로 해소될 수 없다.

[원문] what thereby disappears is the dimension of what Lacan calls the "big Other," the minimally "objectivized" symbolic order, the minimal self-transcendence which alone sustains the dimension of intersubjectivity --  intersubjectivity can never be dissolved into the direct interaction of individuals.

[재번역] 그리하여 라캉이 '큰 타자'라고 부르는 것의 차원이, 최소한으로 '대상화된' 상징적 질서가, 홀로 상호주체성의 차원을 지탱하고  있는 최소한의 자기초월성이 사라진다. -- 상호주체성은 결코 개인들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으로 용해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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