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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1/17
    다시 번역하기: <헤겔 레스토랑 ...> 93~103쪽
    심연
  2. 2014/01/17
    다시 번역하기: <멈춰라, 생각하라> 145~241쪽
    심연
  3. 2014/01/17
    다시 번역하기: <헤겔 레스토랑 ...> 72~92쪽
    심연
  4. 2014/01/17
    2014/01/17
    심연

다시 번역하기: <헤겔 레스토랑 ...> 93~103쪽

[95쪽] 픽션들로부터 상블랑들로

[원문] From fictions to semblances

→ fiction은 '허구'로, semblance은 '유사물'로도 번역된다.

 

[95쪽] 실제로 오직 시니피앙으로만 만들어진, 언어의 사실로서 벤담의 적법한 픽션들은 그럼에도 쾌락과 고통을 분배하고 한정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

[원문] Indeed, as a fact of language, made of nothing but the signifier, Bentham's legal fictions are nonetheless capable of distributing and modifying pleasures and pains, thereby affecting the body.

[나의 번역] 벤담은 허구를, 언어의 사실로서, 기표로만 만들어진 것으로 규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허구는 쾌락과 고통을 유통시키고 조정할 수 있으며 그것을 통해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

→ signifier는 '기표'로도 번역된다. 

 

[96쪽] 주이상스라는 상블랑(완전히 실재적인 것이 아닌 주이상스)과 상블랑(우리가 다루는 것이 단지 상블랑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대한) 속의 주이상스가 그것이다.

[원문] the semblance of jouissance (not a fully real one) and a jouissance in (the fact that what we are dealing with is a mere) semblance.

[나의 번역] 향유의 유사물(완전히 진짜는 아닌 것)과 유사물에 대한 향유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단지 유사물일 뿐이라는 사실 속에서의 향유)가 그것이다.

→ jouissance는 '향유'로도 번역된다. 

→ 내가 생각하기에, 지젝은, 현실(reality)과 대립되는 '실재'를 말할 때는 Real을 쓰고, real은 가짜와 진짜의 구분에서 '진짜'라는 의미로 쓰는 것 같다.

 

[98쪽] 비록 두 경우 모두 우리가 그것이 단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환상이 작동한다는 점 같지만 이 둘을 나누는 섬세한 선이  있다.

 

[103쪽]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실재'는  대상에 대한 '중립적인' 비관점주의적 관점에 도달하는 것을처럼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103쪽] 하지만 이 진리는 일방 투시도법에 따른 부분적 관점에 의해 왜곡된 진리가 아니라 관점주의적 왜곡 그 자체의 진리이다.

[원문] but this truth is the truth of the perspectival distortion as such, not a truth distorted by the partial view from a one-sided perspective.

[나의 번역] 하지만 이 진리는 일방 투시도법에 따른 부분적 관점에 의해 왜곡된 진리가 아니라 관점주의적 왜곡이라는 진리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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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번역하기: <멈춰라, 생각하라> 145~241쪽

<멈춰라, 생각하라> 슬라보예 지젝, 와이즈베리, 2012

 

147쪽

 

□ 오늘날의 좌파는 '제한된 부정(determinate negation)'의 문제에 호되게 시달리고 있다.

[원문] For the left today, the problem of "determinate negation" has returned with a vengeance.

[나의 번역] 오늘날의 좌파는 '규정적 부정(determinate negation)'의 문제에 호되게 시달리고 있다.

 

149쪽

 

□ 인디그나도스는 (아직) 자신들을 위해 혁명을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간디의 말을 빌리자면) 본인들이 스스로 바라는 변화가 될 것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원문] the indignados do not (yet) claim that no one will do it for them, that (to paraphrase Gandhi) they themselves have to be the change they want to see.

[나의 번역] 인디그나도스는 우리들을 위해 혁명을 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간디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들 자신이 우리가 보길 원하는 그 변화가 되어야 한다고 (아직은) 주장하지는 않는다.

 

165쪽

 

□ 아니다. 각자 모르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중은 답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자신들이 답을 가진 (혹은 스스로가 답인) 질문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원문] No, because the respective ignorance is not symmetrical. It is the people who have the answers, they just do not know the questions to which they have (or, rather, are) the answer.

[나의 번역] 아니다. 각자의 무지가 대칭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대중(the people)이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답에 대한 -- 아니, 오히려, 바로 그 자신들이 답인 -- 질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뿐이다.   

 

8_ <더 와이어>, 이 아무일도 없는 시대에 해야 할 일

 

172쪽

 

□ 그것은 (노동계급이 사라지게 만들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 체제 그 자체일까, 아니면 국가 제도일까?

[원문] is it the capitalist market system as such (which is causing the working class to disappear) or the state institutions?

[나의 번역] 그것은 (노동계급 사라지게 만들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 체제 그 자체일까, 아니면 국가 제도일까?

 

176쪽

 

□ 여기서 근본적으로 모호한 것은 만약 이 유토피아가 현실의 일부라면, 그리고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요소라면, 우리가 과연 선과 악의 구분을 뛰어넘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원문] The underlying ambiguity here is that if these utopias are part of reality, and what makes the world go round, are we then beyond good and evil?

[나의 번역] 여기서 근본적으로 모호한 것은 만약 이 유토피아가 현실의 일부라면, 그리고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요소라면, 우리는 선과 악의 구분 너머에 있는 것인가?

 

197쪽

 

□ 따라서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창조자가 반드시 수용해야 할 것은 근본적인 존재의 무관심이다. 

[원문] What the hystericized prime mover must embrace is thus a fundamental existential indifference:

[나의 번역] 따라서 히스테리가 극에 달한 창조자가 반드시 수용해야 할 것은 근본적인 실존적 무관심이다.

 

□ 그녀는 더 이상 기생자에게 협박당하는 인질로 남으려 하지 말고,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의미하는 존재의 핵심까지도 포기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며,

[원문] she must no longer be willing to remain hostage to the second-handers' blackmail, she must be ready to give up the very kernel of her being, that which means everything to her,

[나의 번역] 그녀는 더 이상 기생자에게 협박당하는 인질로 남으려 하지 말고, 그녀에게 모든 것을 의미하는 그녀 자신의 존재의 핵심까지도 포기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며,

 

9_ 시기와 분노를 넘어

 

203쪽

 

□ 슬로터다이크가 제안하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문화적 혁명이자 급진적인 심리·사회적 변화로, 오늘날 착취당하는 ... 

[원문] What Sloterdijk proposes is a new kind of cultural revolution, a radical psycho-social transformation base on the insight that, today, the exploited productive stratum is no longer the working class, but the (upper-)middle class.

[나의 번역] 슬로터다이크가 제안하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문화적 혁명이자 급진적인 심리·사회적 변화인데, 그것은 오늘날 착취당하는 ...

 

215쪽

 

□ 그를 광적인 민주주의자가 아닌 급진적인 좌파로 ... 

 

10_ 미래가 보내는 징후

 

230쪽

 

□ 징후의 상태는 주관적으로 중개된다. 

[원문] their status is subjectively mediated;

[나의 번역] 징후의 지위는 주관적으로 매개된다.

 

235쪽

 

□ 그의 저서 『법철학』의 유명한 말 "모든 개인은 그 시대의 아들이다"와 같은 제한적인 진술에서 드러나듯이, 헤겔이 미래를 대하는 기본 태도는 '부정적'이다. 그는 당연히 정치학에 대해서도 동일한 한계를 드러낸다. 

[원문] whose opening towards the future is a negative one, articulated in limiting statements like the famous "one cannot jump ahead of one's time" from his Philosophy of Right. No wonder Hegel formulated this same limitation apropos politics:

[나의 번역] 그의 저서 『법철학』의 유명한 말 "아무도 그 자신의 시대를 뛰어 넘을 수 없다"와 같은한계를 명확히 하는 진술에서 드러나듯이, 헤겔이 미래를 대하는 기본 태도는 '부정적'이다. 그가 정치학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한계를 정식화한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236쪽

 

□ 이것이 우리가 급진적인 악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원문] This is how react to radical Evil:

[나의 번역] 이것이 우리가 근본악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240쪽

 

□ 파국에 맞서 싸우는 방법은 파국적인 '고정점'으로 치닫는 이 표류를 중단시키고, '도래할' 급진적 타자성을 야기할 위험을 스스로 떠안는 것이다.

[원문] The way to combat the catastrophe is through acts that interrupt this drifting towards the catastrophic "fixed point" and take upon themselves the risk of giving birth to some radical Otherness "to come."

[나의 번역] 파국에 맞서 싸우는 방법은 파국적인 '고정점'으로 치닫는 이 표류를 중단시키고, '도래할' 근본적 타자성을 야기할 위험을 스스로 떠안는 것이다.

 

□ 즉 이익(profit)과 착취가 없는 확대 재생산(self-reproduction)으로 남아 있다. 

[나의 번역] 즉 이윤(profit)과 착취가 없는 자기재생산(self-reproduction)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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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번역하기: <헤겔 레스토랑 ...> 72~92쪽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슬라보예 지젝, 새물결, 2012

 

* <헤겔 레스토랑>의 '일러두기'에서 빠져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고딕체로 강조되어 있는 것은 원서에서 대문자로 강조된 부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원서에서 이탤릭체로 강조한 부분은 굵은 글씨로 강조하고, 대문자로 강조한 부분은 기울임꼴로 강조할 것이다.

 

81쪽

 

□ 들뢰즈는 영원한 이데아와 감각적 현실에서의 그것들의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실체적(물질적) 몸체와 의미의 되될릴 수 없는 순수한 표면,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선 자체에 위치시켜야 할 되기의 흐름이라는 이원론으로 '뒤집는 것'부터 시작한다.

[원문] Deleuze begins by "inverting" Platos dualism of eternal Ideas and their imitations in sensuous reality into the dualism of substantial (material) bodies and the pure impassive surface of Sense, the flux of Becoming which is to be located on the very borderline of Being and non-Being.

[나의 번역] 들뢰즈는 영원한 이데아와 감각적 현실에서의 그것들의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실체적(물질적) 몸체와 의미라는 무표정한 순수한 표면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선 자체에 위치시켜야 할 되기의 흐름이라는 이원론으로 '뒤집는 것'부터 시작한다.

 

→ "의미의 되돌릴 수 없는 수수한 표면"에서 '의미'는 Sense의 번역어로, 69쪽의 "우리는 그러한 세부사항들을 상징들로 독해하고 그것들의 감추어진 의미를 찾고 싶은 해석학적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그것들은 의미에 저항하는 실재의 노출된 단편들이다."에서의 "의미"와는 다르다. 69쪽에서의 "의미"는 meaning을 번역한 것이다. 81쪽에서 지젝/들뢰즈는, 이데아와 현실의 대립을 의미(sense)와 몸체의 대립에 대응시키므로, meaning과 sense는 서로 대립된다고 볼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meaning은 존재에 속하는 것이고, sense는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선 자체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되될릴 수 없는"은 impassive를 번역한 것인데, 사전에는 '무표정한', '무감각한'과 같은 뜻을 지닌 것으로 되어 있다. 번역자는 sense가 '현실로 환원할 수 없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 의역을 한 것 같다. 나는 그 뒤에 나오는 "표면"이라는 말과 연관시켜 '무표정한'으로 직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왜냐하면 물체들과 그들의 상태들, 양들, 질들은 실체와 원인으로서의 모든 특성을 지니게 되지만 역으로 플라톤적 이데아가 지닌 특성들은 이 되돌릴 수 없고 무능력한 열외-존재로, 사물들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이차적 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원문] For if bodies with their states, qualities, and quantities, assume all the characteristics of substance and cause, conversely, the characteristics of the Idea are relegated to the other side, that is to this impassive extra-Being which is sterile, inefficacious, and on the surface of things:

[나의 번역] 왜냐하면 상태와 양과 질을 지닌 물체들이 실체와 원인이라는 모든 특성들을 취한다면, 이데아의 특성들은 그 반대 측면으로, 즉 불임의, 무효한, 사물의 표면에 있는, 무표정한 열외-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 번역자는 appearance를 '가상', '외관', '출현'으로 번역하고, appear, appearing을 '나타나다', '출현하다'로 번역했는데, 나는 '외양', '외양하다'로 번역했다.

 

84쪽

 

 

 초감각적인 것은 현상체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기서는 현상체가 피안계로 통하는 매개체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현상체야말로 내면이나 피안의 본질로서, 사실상 내면이나 피안을 충만케 하는 것이다.

[원문] the supersensible comes from the world of appearance which has mediated it; in other words, appearance is its essence and, in fact, its filling.

[나의 번역] 초감각적인 것은, 그것을 매개하는, 외양의 세계로 부터 유래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외양이 초감각적인 것의 본질이고, 사실, 초감각적인 것의 내용이다. 

 

 즉 초감각적인 것이 감각이나 지각에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감각적이거나 지각된 것의 진상은 초감각적인 것이 현상화한 데 있다고 해야만 하겠다. 하지만 감각되거나 지각된 것의 정체는 현상체의 존재라 하겠으니 그렇다면 초감각적인 것 세계가 곧 현상체 그 자체라는 것이 된다.

[원문] The supersensible is the sensuous and the perceived posited as it is in truth; but the truth of the sensuous and the perceived is to be appearance. The supersensible is therefore appearance qua appearance.

[나의 번역] 초감각적인 것은, 마치 진상인 것처럼 정립되는 감각-지각된 것이다. 하지만 그 감각-지각된 것의 진상은 외양일 것이다. 그러므로 초감각적인 것은 외양으로서의 외양이다.

 

 흔히 초감각적 세계는 현상체는 아니라고들 하는데, 이는 현상체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감각적 사물의 세계가 현상체로 간주되는 데서 기인한다.

[원문] It is often said that the supersensible world is not appearance; but what is here understood by appearance is not appearance, but rather the sensuous world as itself the really actual.

[나의 번역] 흔히 초감각적인 세계는 외양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여기서 외양이라고 이해되는 것은 외양이 아니라, 현실로서의 감각적인 세계이다.

 

85쪽

 

 가상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공의 존재이지만 이 가공에 불과한 존재가 본질의 유일한 존재이며, 따라서 본질의 반성적 운동은 무에서 무로 가는 운동이며, 따라서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원문] Appearance is nothing in itself; it is just an illusory being, but this illusory being is the only being of essence, so that the reflective movement of essence is the movement nothing to nothing, and so back to itself.

[나의 번역] 외양은 그 자체로 무(nothing)이다. 따라서 외양은 단지 하나의 환영적(illusory) 존재이지만 이 환영적 존재가 본질의 유일한 존재이고, 그래서 본질의 반성적 운동은 무에서 무로 가는 운동이며, 또한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이행 속에서 움트는 타자란 결코 어떤 존재의 비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에서 무로 화한는 것이니, 이렇듯 무의 부정이 곧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다.

[원문] the other that in this transition comes to be, is not the non-being of a being, but the nothingness of a nothing, and this, to be the negation of a nothing, constitutes being.

[나의 번역] 이러한 이행 속에서 존재하게 되는 타자는 한 존재가 비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가 없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하나의 무의 부정이 존재를 구성한다.

 

 존재는 무의 무를 향한 운동을 뜻하는 가운데 모름지기 본질로 화하는 것이다.그런데 여기서 본질은 이러한 운동을 자체 내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려니와 오히려 절대적 가상으로서의 이 운동은 순수한 부정일 뿐이다. 결국 이러한 부정성은 자기를 떠나서 바로 그 자신을 부정하는 그 어떤 것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그것은 이러한 부정의 행위 속에 깃든 스스로의 부정성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원문] Being only is as the movement of nothing to nothing, and as such it is essence; and the latter does not have this movement within it, but is this movement as a being that is itself absolutely illusory, pure negativity, outside of which there is nothing for it to negate but which negates only its own negative, and this negative, which latter is only in this negating.

[나의 번역] 존재는 단지 무의 무로의 운동 뿐이고 그러한 것으로서 존재는 본질이다. 그리고 본질은 그 자신 속에 이러한 운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운동, 절대적으로 환영적인 어떤 존재로서의 이 운동, 순수한 부정이다. 이 운동, 순수 부정의 외부에는 이 운동이 부정할 어떤 것도 없고 이 운동은 단지 그 자신이 가진 부정을 부정하고, 단지 이렇게 부정하는 도중에만 차후로 존재하는 이 부정을 부정한다.

 

87쪽

 

 향유는 항상 잉여로, 초과 속에 있다.

[원문] enjoyment is always a surplus, in excess. 

[나의 번역] 향유는 항상 잉여이며 초과적이다. 

 

 대상 그 자체(광자, 원자)는 여기서 부정/매개되지 않으며  매개의 (소급적) 결과로 출현한다.

[원문] The object-in-itself (photon, atom) is here not negated/mediated, it emerges as the (retroactive) result of its mediation.

[나의 번역] 여기서 대상 그 자체(광자, 원자)는 부정/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매개의 (소급적) 결과로 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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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7

다음은 슬라보예 지젝의 <멈춰라, 생각하라> 7장 '월가점령시위, 또는 새로운 시작을 부르는 폭력적 침묵'을 요약한 것.

 

『월가점령시위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싱정적인 내용을 제시하는 것보다 거부하는 제스처의 형식을 취하며 시작해야 한다.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시위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찬양하고픈 유혹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실패 뒤에 남은 결과에 집중해야 한다. 시위대의 주장은 개인의 부패나 탐욕이 아니라 부패를 조장하는 시스템이 문제라는 것이다. 시위대를 지지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시위를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바꾸어 의미를 희석시키고자 갖은 애를 쓰는 가짜 친구들을 조심해야 한다.

시스템의 변화 -- 전체 사회생활의 재조직화 -- 를 위해서는 신속한 의사결정을 내리고 필요한 모든 세력을 동원하여 그 결정을 실현할 수 있는 강력한 조직체가 필요하다. 반드시 지배적인 경제 조직체 대신 무엇을 제안할지 고민하고, 대안적인 조직 형태를 상상하고 실험하며, 현 체제 속에서 새로운 조직의 싹을 발굴하기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형태의 조직을 발명하려는 이 충동은 동시에 거리를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 단계에서는 시위의 에너지를 일단의 '구체적' 요구로 전환하려는 모든 성급한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 시위는 진공상태, 즉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진공상태로 만들었고, 이 공백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채우려면 시간이 걸린다.

시위대에게 끊임없이 쏟아지는 질문 "너희가 원하는 게 뭔데?"는 바로 진정한 대답을 방해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정치의 기술은 또한 철저히 '현실주의적'이면서도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중핵을 교란시키는 특정한 요구를 고집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는 실현 가능하고 정당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미국의 전 국민 의료보험 같은) 요구 말이다. 월가점령시위가 끝난 지금, 우리는 그러한 요구 주위로 사람들을 집결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물론 그와 동시에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협상과 '구체적인' 제안에 저항하여 그 요구를 고집하는 것이다.

현재와 같은 다당제 형태의 대의민주주의의 단순한 확장만으로는 자본주의의 병폐를 해결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는 다시 발명되어야 한다. 설사 진정한 '자유' 선거라고 해도, 국가가 조직한 다당제 선거라는 형태 자체가 초월적이고 형식적인 층위에서 부패해 있으므로 투표에서 스스로를 빼내야 한다. 이집트의 봄이 2011년 반무바라크 시위에서 역할이 미미했던, 이슬람 세력이 선거에서 승리한 것으로 막을 내렸다는 사실로부터 다음과 같은 일관된 결론을 도출해야 한다. '자유선거'와 진정한 해방적 반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월가점령시위에서도 사실상 '99퍼센트'를 대변하며 제도적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정당화한 것은 주코티 공원에 모인 소수의 군중이었다. 

다당제 대의민주주의를 뛰어넘어 재발명된 민주주의에 과연 이름이 있을까? 있다.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아무도 우리가 요구하는 바를 대신 이루어주지 않는다. 우리는 직접 그것을 해야 한다.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우리다. 아니, 오히려 답은 우리다. 우리는 다만 질문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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