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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번역하기: <헤겔 레스토랑 ...> 72~92쪽

<헤겔 레스토랑, 라캉 카페> 슬라보예 지젝, 새물결, 2012

 

* <헤겔 레스토랑>의 '일러두기'에서 빠져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고딕체로 강조되어 있는 것은 원서에서 대문자로 강조된 부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원서에서 이탤릭체로 강조한 부분은 굵은 글씨로 강조하고, 대문자로 강조한 부분은 기울임꼴로 강조할 것이다.

 

81쪽

 

□ 들뢰즈는 영원한 이데아와 감각적 현실에서의 그것들의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실체적(물질적) 몸체와 의미의 되될릴 수 없는 순수한 표면,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선 자체에 위치시켜야 할 되기의 흐름이라는 이원론으로 '뒤집는 것'부터 시작한다.

[원문] Deleuze begins by "inverting" Platos dualism of eternal Ideas and their imitations in sensuous reality into the dualism of substantial (material) bodies and the pure impassive surface of Sense, the flux of Becoming which is to be located on the very borderline of Being and non-Being.

[나의 번역] 들뢰즈는 영원한 이데아와 감각적 현실에서의 그것들의 모방이라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실체적(물질적) 몸체와 의미라는 무표정한 순수한 표면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선 자체에 위치시켜야 할 되기의 흐름이라는 이원론으로 '뒤집는 것'부터 시작한다.

 

→ "의미의 되돌릴 수 없는 수수한 표면"에서 '의미'는 Sense의 번역어로, 69쪽의 "우리는 그러한 세부사항들을 상징들로 독해하고 그것들의 감추어진 의미를 찾고 싶은 해석학적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그것들은 의미에 저항하는 실재의 노출된 단편들이다."에서의 "의미"와는 다르다. 69쪽에서의 "의미"는 meaning을 번역한 것이다. 81쪽에서 지젝/들뢰즈는, 이데아와 현실의 대립을 의미(sense)와 몸체의 대립에 대응시키므로, meaning과 sense는 서로 대립된다고 볼 수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meaning은 존재에 속하는 것이고, sense는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선 자체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되될릴 수 없는"은 impassive를 번역한 것인데, 사전에는 '무표정한', '무감각한'과 같은 뜻을 지닌 것으로 되어 있다. 번역자는 sense가 '현실로 환원할 수 없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 의역을 한 것 같다. 나는 그 뒤에 나오는 "표면"이라는 말과 연관시켜 '무표정한'으로 직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왜냐하면 물체들과 그들의 상태들, 양들, 질들은 실체와 원인으로서의 모든 특성을 지니게 되지만 역으로 플라톤적 이데아가 지닌 특성들은 이 되돌릴 수 없고 무능력한 열외-존재로, 사물들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이차적 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원문] For if bodies with their states, qualities, and quantities, assume all the characteristics of substance and cause, conversely, the characteristics of the Idea are relegated to the other side, that is to this impassive extra-Being which is sterile, inefficacious, and on the surface of things:

[나의 번역] 왜냐하면 상태와 양과 질을 지닌 물체들이 실체와 원인이라는 모든 특성들을 취한다면, 이데아의 특성들은 그 반대 측면으로, 즉 불임의, 무효한, 사물의 표면에 있는, 무표정한 열외-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 번역자는 appearance를 '가상', '외관', '출현'으로 번역하고, appear, appearing을 '나타나다', '출현하다'로 번역했는데, 나는 '외양', '외양하다'로 번역했다.

 

84쪽

 

 

 초감각적인 것은 현상체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기서는 현상체가 피안계로 통하는 매개체가 된다. 이렇게 본다면 현상체야말로 내면이나 피안의 본질로서, 사실상 내면이나 피안을 충만케 하는 것이다.

[원문] the supersensible comes from the world of appearance which has mediated it; in other words, appearance is its essence and, in fact, its filling.

[나의 번역] 초감각적인 것은, 그것을 매개하는, 외양의 세계로 부터 유래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외양이 초감각적인 것의 본질이고, 사실, 초감각적인 것의 내용이다. 

 

 즉 초감각적인 것이 감각이나 지각에서 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감각적이거나 지각된 것의 진상은 초감각적인 것이 현상화한 데 있다고 해야만 하겠다. 하지만 감각되거나 지각된 것의 정체는 현상체의 존재라 하겠으니 그렇다면 초감각적인 것 세계가 곧 현상체 그 자체라는 것이 된다.

[원문] The supersensible is the sensuous and the perceived posited as it is in truth; but the truth of the sensuous and the perceived is to be appearance. The supersensible is therefore appearance qua appearance.

[나의 번역] 초감각적인 것은, 마치 진상인 것처럼 정립되는 감각-지각된 것이다. 하지만 그 감각-지각된 것의 진상은 외양일 것이다. 그러므로 초감각적인 것은 외양으로서의 외양이다.

 

 흔히 초감각적 세계는 현상체는 아니라고들 하는데, 이는 현상체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감각적 사물의 세계가 현상체로 간주되는 데서 기인한다.

[원문] It is often said that the supersensible world is not appearance; but what is here understood by appearance is not appearance, but rather the sensuous world as itself the really actual.

[나의 번역] 흔히 초감각적인 세계는 외양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여기서 외양이라고 이해되는 것은 외양이 아니라, 현실로서의 감각적인 세계이다.

 

85쪽

 

 가상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공의 존재이지만 이 가공에 불과한 존재가 본질의 유일한 존재이며, 따라서 본질의 반성적 운동은 무에서 무로 가는 운동이며, 따라서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하는 운동이기도 하다.

[원문] Appearance is nothing in itself; it is just an illusory being, but this illusory being is the only being of essence, so that the reflective movement of essence is the movement nothing to nothing, and so back to itself.

[나의 번역] 외양은 그 자체로 무(nothing)이다. 따라서 외양은 단지 하나의 환영적(illusory) 존재이지만 이 환영적 존재가 본질의 유일한 존재이고, 그래서 본질의 반성적 운동은 무에서 무로 가는 운동이며, 또한 자기 자신에게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이행 속에서 움트는 타자란 결코 어떤 존재의 비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에서 무로 화한는 것이니, 이렇듯 무의 부정이 곧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다.

[원문] the other that in this transition comes to be, is not the non-being of a being, but the nothingness of a nothing, and this, to be the negation of a nothing, constitutes being.

[나의 번역] 이러한 이행 속에서 존재하게 되는 타자는 한 존재가 비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가 없어지는 것이며, 이러한 하나의 무의 부정이 존재를 구성한다.

 

 존재는 무의 무를 향한 운동을 뜻하는 가운데 모름지기 본질로 화하는 것이다.그런데 여기서 본질은 이러한 운동을 자체 내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려니와 오히려 절대적 가상으로서의 이 운동은 순수한 부정일 뿐이다. 결국 이러한 부정성은 자기를 떠나서 바로 그 자신을 부정하는 그 어떤 것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그것은 이러한 부정의 행위 속에 깃든 스스로의 부정성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일 뿐이다.

[원문] Being only is as the movement of nothing to nothing, and as such it is essence; and the latter does not have this movement within it, but is this movement as a being that is itself absolutely illusory, pure negativity, outside of which there is nothing for it to negate but which negates only its own negative, and this negative, which latter is only in this negating.

[나의 번역] 존재는 단지 무의 무로의 운동 뿐이고 그러한 것으로서 존재는 본질이다. 그리고 본질은 그 자신 속에 이러한 운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운동, 절대적으로 환영적인 어떤 존재로서의 이 운동, 순수한 부정이다. 이 운동, 순수 부정의 외부에는 이 운동이 부정할 어떤 것도 없고 이 운동은 단지 그 자신이 가진 부정을 부정하고, 단지 이렇게 부정하는 도중에만 차후로 존재하는 이 부정을 부정한다.

 

87쪽

 

 향유는 항상 잉여로, 초과 속에 있다.

[원문] enjoyment is always a surplus, in excess. 

[나의 번역] 향유는 항상 잉여이며 초과적이다. 

 

 대상 그 자체(광자, 원자)는 여기서 부정/매개되지 않으며  매개의 (소급적) 결과로 출현한다.

[원문] The object-in-itself (photon, atom) is here not negated/mediated, it emerges as the (retroactive) result of its mediation.

[나의 번역] 여기서 대상 그 자체(광자, 원자)는 부정/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매개의 (소급적) 결과로 출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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