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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라 쌀러키”

 

월간사람

11호 | 2006년 5월

“틸라 쌀러키”
우리의 희망은 자유로운 버마로 돌아가는 것

 

이상희 | 변호사

카렌족은 200만 명 정도의 버마 최대의 소수민족으로서 버마가 영국 지배를 받을 당시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이후 많은 탄압을 받아오고 있다. 레퍼허 마을은 미얀마에서 이러한 탄압을 피해 이주해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현재 귀국하여 인권영화제 준비를 하고 있는 이상희 변호사는 지난 12월 유해정 활동가의 기고에 이어 그 다음 이야기를 월간 <사람>에 보내왔다. 틸라 쌀러키는 ‘또 만나요.’라는 뜻의 카렌말이다. [편집자 주]


카렌족은 200만 명 정도의 버마 최대의 소수민족으로서 버마가 영국 지배를 받을 당시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이후 많은 탄압을 받아오고 있다. 레퍼허 마을은 미얀마에서 이러한 탄압을 피해 이주해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현재 귀국하여 인권영화제 준비를 하고 있는 이상희 변호사는 지난 12월 유해정 활동가의 기고에 이어 그 다음 이야기를 월간 <사람>에 보내왔다. 틸라 쌀러키는 ‘또 만나요.’라는 뜻의 카렌말이다. [편집자 주]
2005. 11. 25.
3월부터 여행을 같이 한 해정이가 잠시 한국을 다녀오기 위해 떠났다. 카렌 여성들이 만든 가방을 한 보따리 들고(월간 사람 12월 호, 6호 참조).
버마 국경지역에 있는 레퍼허 마을에서, 가슴 속 너무 깊은 곳에 아이들을 담아 두고 왔나보다. 그 동안 가난과 분쟁에 찌든 몇 개의 지역을 다녀보았지만 버마는 종합선물세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시아 일부 국가가 겪고 있는 군부독재 문제와 소수 민족 문제가 장기간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말이다. 그 문제들의 최대 피해자가 버마 정글에 사는 국내난민들이 아닐까? 폭력 앞에 일그러진 또는 일그러질 그들의 존엄성과 얼굴들이 자꾸 생각난다.

2006. 12. 15.
가방을 더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 가방 구입을 위해 치앙마이에 있는 위브(WEAVE, http://www.weave-women.org) 사무실을 방문했다. 이 단체는 태국-버마 국경지역에 있는 난민캠프 여성들을 지원하고 있다. 난민캠프에서는 교사나 간호사 등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득 활동을 할 수 없다. 결국 국제 엔지오 등이 제공하는 배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이 부족하다. 그래서 난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길을 찾다가 인신매매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난민캠프 인근 지역의 공장에서 착취를 당한다고 한다. 이 단체는 움피엠 난민 캠프 여성들을 위하여 천과 가방 등을 만들 수 있는 작업공간을 마련했고, 그들이 만든 가방 등을 판매해 주고 있다. 일할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긴 이들이 태국 당국의 감시를 피해 몰래 만든 가방들. 가방은 난민들을 대신하여 난민캠프의 현실과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그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해주는 듯하다.

2006. 12. 30.
요즘 매일 한국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내가 속해 있는 사무실과 단체에서 가방 판매 수익금 이외에 별도로 지원금을 보내주겠다고 한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하다.
그러나 이번 일이 괜한 선심성 이벤트에 그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그리고 레퍼허 아이들이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비쳐질까 봐 걱정이다. 우리와 비슷한 일상 속에서 그들 방식대로 아름답고 즐거움을 찾아가며 사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그럼, 레퍼허 아이들 지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걸까? 한국에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다.

2006. 2. 2.
맬라 캠프에 온 지 3일째.
확성기에서 나오는 라디오 방송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사람들이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인다. 태국 매솟 지역 인근에 7개의 난민캠프가 있는데, 맬라 캠프는 그 중 가장 큰 규모다. 마른 나뭇잎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지붕들이 산 바로 밑에 빼곡하게 들어차있는 모습이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가로 2킬로미터, 세로 0.5킬로미터 밖에 안 되는 공간에 4만 천여 명 정도가 거주한다. 그 내에도 여성 단체, 청년 단체, 환경단체, 장애인 단체, 인권단체 등이 있다.

인권단체에서 만난 3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했다.
57세의 줄리 아주머니. “첫번째 남편이 사고로 사망하여 재혼하였는데, 두 남자 모두 약물과 알코올에 중독되었고, 폭력을 일삼았다.”
28살의 미베이. “현재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남편이 일을 그만두라며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캠프 리더들이 가정 폭력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있어 문제이다.”
33살의 투웨이. “여성운동에 반대하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던 남편과 결국 이혼을 했다. 난민캠프에서 열심히 여성운동을 한 뒤 그 경험을 가지고 버마에 돌아가 버마 여성들을 위해 일할 것이다.”
여성문제와 난민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문제가 심각해 보였다.
인권단체 활동가 아웬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난민이다. 정부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 나온 사람들이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살아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그리고 버마에 있는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있냐? 그것도 아니다. 결국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술과 약에 손을 댄다. 그리고 알코올과 약물 중독이 많은 경우 가정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일 모레 레퍼허 마을에 들어가야 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레퍼허 마을에 필요한 물품들을 알려주기로 한 친구가 연락두절이다. 그런데 마침 저녁에 카렌 청년조직(KYO)에서 활동하는 지지윈이 구세주로 나타났다. 지지윈은 난민캠프에서 환경운동을 하고 있다. 한정된 캠프 공간 속에서 인구는 계속 증가하는데 물 부족과 숲의 황폐화 문제가 발생하자 환경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마침 그녀가 레퍼허 마을에서 학교를 다녔고, 우리가 이번에 새롭게 방문하려고 한 매써리 마을이 그녀의 고향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 마을 학교 지원 계획을 이야기하니 너무나 반가운 얼굴로 필요한 물건들을 이야기해줬다. 시계, 공책, 노트, 축구공, 커다란 물통…. 아니 물통은 왜? 수도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식수를 보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한다. 지지윈과 함께 일하는 단체가 매솟에 있는데, 그곳을 통해 필요한 학용품과 모기장 등을 싸게 구입하기로 했다.
지지윈이 계속 이야기했다. 난민캠프 상황이 그나마 레퍼허나 매써리 마을보다 훨씬 낫다고. 난민캠프에는 국제단체 지원이라도 있지만, 버마 정글에는 그런 지원이 거의 없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거나 또는 버마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국제단체로서는 이 두 가지 모두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 난민들이 버마 정글에 사는 사람들에게 담요나 학용품, 필요한 의료물품 등을 보내기도 하고, 리더십 프로그램이나 인권교육 활동 등도 함께 한다고 한다.
지지윈! 꿈이 뭐예요? “꿈이라니! 희망이지, 희망!” 주먹을 불끈 쥐고 이야기했다. “꿈은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지만, 희망은 가능성이 있는 거야. 내 희망은, 우리 모두 자유로운 버마로 돌아가는 거야.”


2006. 2. 4.
드디어 모에이강을 건너 버마로 들어왔다. 이렇게 다시 왔구나! 반갑게 우리를 맞이한 레인보우도 한마디 한다. “어, 정말 왔네요.” 너무 행복하다. 약속을 지킬 수 있어 행복하고, 많은 한국 친구들의 마음과 함께 올 수 있어 행복하다.
저녁을 먹는데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이 시험공부를 하는 거란다. 기숙사라니? 레인보우 이야기인즉슨, 레퍼허 인근 마을에서 학교가 없거나 올라갈 학년이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많이 만났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과 상의하여 지난 해 그 아이들을 위한 기숙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2006. 2. 6.
학교에 놀러 갔다. 아이들이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그곳에서 몇 명의 아이들과 인터뷰를 했다.
지뢰로 다리 한쪽을 잃은 15살의 서툴룩. “어렸을 때 버마 군인들의 공격을 피해 모에이강을 건넜는데, 강 건너에서 마을이 불타는 것을 목격했어요. 그리고 버마군인들이 심어 놓은 지뢰에 다리를 잃었어요. 친구들과 함께 뛰어 놀지 못해 슬퍼요.”
16살의 에도시. “원래 살던 마을에 학교가 있었는데, 버마군이 공격해서 무너졌어요. 그래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다가 레퍼허 마을에 와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버마군이 아버지에게 순찰, 포터(porter)일을 강제로 시켰는데, 너무 힘들어서 결국 가족 모두 고향을 떠났어요.”
12살의 쏘네이무. “버마군이 아버지에게 포터일을 강제로 시켰는데, 하루는 정찰병들의 포터로 일하다가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를 잃으셨어요.”

공부하는 모습은 진지하고, 노는 모습은 한없이 맑고 귀엽다. 아이들에게 장래 꿈을 그려 보라고 했는데 에도시가 여자 친구를 그렸다. 하하~~

2006. 2. 7.
지난 11월 레퍼허에서 열린 학생축제에서 만나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매써리 아이들을 만났다.

레인보우와 함께 모에이강을 건너 태국 쪽으로 나온 뒤, 차를 타고 약 30분, 다시 모에이강을 건너 매써리 마을로 들어갔다. 그곳 학교 교장인 라써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아주 넓은 운동장 저 멀리 자그만 대나무 집 한 채가 보였다. 그곳이 학교란다. 과연 아이들이 있을까? 설렘 반, 떨림 반. 학교에 점점 다가가니 아이들이 한 명씩, 한 명씩 대나무 벽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 그 아이들!!!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나요? “예~~~”

라써 교장에게 이 마을 주민들이 몇 명이냐고 물어보니 주민은 학교 선생님들 가족과 일부 군인 가족을 빼면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군인과 아이들만이 있는 마을. 버마 군인들을 피해 정글로 도망 다닌 아이들이 학교가 없어 공부를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라써와 그의 형이 그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태국 쪽에서 학교를 세우려고 했는데 학교 승인 문제로 포기했고, 버마 쪽에서 버마 군의 통제 지역을 피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카렌민족연맹(Karen National Union) 무장 그룹이 통제하는 이 지역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해 학교를 세웠는데, 우리가 첫 손님이란다.

2006. 2. 8.
아침부터 아이들이 분주했다. 운동장과 기숙사, 학교 청소를 했다. 큰 아이들은 풀로 엮어 만든 빗자루로 쓸고, 작은 아이들은 휴지를 주웠다. 수도시설이 전혀 없다 보니 우물가에 모여 고양이 세수를 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 아주 적은 양의 피쉬페이스트(생선을 으깨서 물에 끓인 것)를 비빈 밥이 전부였다.
학교에서 조례시간에 카렌 국가를 부르고 수업을 시작했다. 돈이 없어 교재는 선생님들만 보고, 아이들은 선생님이 정리한 내용을 공책에 받아쓰며 공부했다.
이 학교에는 나이 든 유치원생들이 많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학교를 다니지 못하다가 지난 해 처음 이곳 학교에 온 아이들이다. 이곳에서 아이들 전원에게 물어보았다. 언제가 제일 행복하냐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라고 답했다. 그리고 무엇을 가장 원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대부분이 계속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답을 했다.

12살의 므끄저가 이야기했다. “아빠가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시다가 버마군인들에게 맞아 언덕에서 떨어진 사고를 당했대요. 엄마는 며칠 수소문 끝에 아빠가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답니다. 엄마가 아빠를 집에 모시고 와서 간호했으나 1년 만에 돌아가셨대요.”
12살의 체체포가 이야기했다. “저는 버마군인이 싫어요. 버마군인들이 KNU를 수색한다고 순찰을 도는데 아빠를 포터로 끌고 갔어요. 그 때 아버지가 군인들에게 많이 맞으셨대요. 저에게도 등과 다리에 난 상처를 보여주셨어요. 아버지와 엄마는, 그 일이 있고 나서 바로 마을을 떠났답니다.”

아이들은 점심을 거르고 일찍 저녁을 먹는다. 레퍼허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먹을 것이 없어 점심을 거른다고 한다. 저녁 식사 후 아이들이 운동장 곳곳에 흩어져 중얼중얼거린다. 숙제도 하고 복습도 한다. 운동장이 이들의 도서관인 셈이다.

2006. 2. 9.
매써리를 떠났다. 너무 짧은 기간. 괜히 아이들에게 상처만 준건 아닌지. 배타는 곳까지 배웅 나와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들이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 그들의 외로움이 전달되어 가슴이 아팠다. ‘틸라 쌀러키, 틸라 쌀러키’를 외쳤다. 또 만나자고. 또 만나자고.

다시 레퍼허 마을로 돌아왔다. 한국 사람들이 모아 준 지원금으로 지지윈과 같이 구입한 학용품과 모기장 등을 13개 학교에 보냈다.

2006. 2. 10.
레퍼허 마을의 아이들과도 작별을 했다. 틸라 쌀러키를 외치면서.
레인보우가 이야기했다. 현재의 미래는 다음 세대의 미래 밖에 없다고. 그러나 레인보우, 매써리, 레퍼허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거 아닐까?

계속 고민이다. 레퍼허 지원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번 여행이 한 가지는 이야기해주었다. 내전과 버마군부의 인권탄압을 피해 도망 온 레퍼허 아이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투쟁에 함께 할 때, 우리의 인권의식이 물리적 거리라는 한계를 넘어 확장될 거라고.




  
레퍼허 지원에 함께 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레퍼허, 매써리 아이들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 아이들을 사진과 화면에 담아왔습니다. 2006. 5. 4.부터 2006. 5. 22.까지 평화박물관에서 전시와 상영을 합니다.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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