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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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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7/09/19
    "아이들이 아름답다"
    burma

“틸라 쌀러키”

 

월간사람

11호 | 2006년 5월

“틸라 쌀러키”
우리의 희망은 자유로운 버마로 돌아가는 것

 

이상희 | 변호사

카렌족은 200만 명 정도의 버마 최대의 소수민족으로서 버마가 영국 지배를 받을 당시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이후 많은 탄압을 받아오고 있다. 레퍼허 마을은 미얀마에서 이러한 탄압을 피해 이주해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현재 귀국하여 인권영화제 준비를 하고 있는 이상희 변호사는 지난 12월 유해정 활동가의 기고에 이어 그 다음 이야기를 월간 <사람>에 보내왔다. 틸라 쌀러키는 ‘또 만나요.’라는 뜻의 카렌말이다. [편집자 주]


카렌족은 200만 명 정도의 버마 최대의 소수민족으로서 버마가 영국 지배를 받을 당시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는 이유로 이후 많은 탄압을 받아오고 있다. 레퍼허 마을은 미얀마에서 이러한 탄압을 피해 이주해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현재 귀국하여 인권영화제 준비를 하고 있는 이상희 변호사는 지난 12월 유해정 활동가의 기고에 이어 그 다음 이야기를 월간 <사람>에 보내왔다. 틸라 쌀러키는 ‘또 만나요.’라는 뜻의 카렌말이다. [편집자 주]
2005. 11. 25.
3월부터 여행을 같이 한 해정이가 잠시 한국을 다녀오기 위해 떠났다. 카렌 여성들이 만든 가방을 한 보따리 들고(월간 사람 12월 호, 6호 참조).
버마 국경지역에 있는 레퍼허 마을에서, 가슴 속 너무 깊은 곳에 아이들을 담아 두고 왔나보다. 그 동안 가난과 분쟁에 찌든 몇 개의 지역을 다녀보았지만 버마는 종합선물세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시아 일부 국가가 겪고 있는 군부독재 문제와 소수 민족 문제가 장기간 복잡하게 얽혀 있으니 말이다. 그 문제들의 최대 피해자가 버마 정글에 사는 국내난민들이 아닐까? 폭력 앞에 일그러진 또는 일그러질 그들의 존엄성과 얼굴들이 자꾸 생각난다.

2006. 12. 15.
가방을 더 보내달라는 연락이 왔다. 가방 구입을 위해 치앙마이에 있는 위브(WEAVE, http://www.weave-women.org) 사무실을 방문했다. 이 단체는 태국-버마 국경지역에 있는 난민캠프 여성들을 지원하고 있다. 난민캠프에서는 교사나 간호사 등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소득 활동을 할 수 없다. 결국 국제 엔지오 등이 제공하는 배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모든 것이 부족하다. 그래서 난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길을 찾다가 인신매매의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난민캠프 인근 지역의 공장에서 착취를 당한다고 한다. 이 단체는 움피엠 난민 캠프 여성들을 위하여 천과 가방 등을 만들 수 있는 작업공간을 마련했고, 그들이 만든 가방 등을 판매해 주고 있다. 일할 수 있는 권리마저 빼앗긴 이들이 태국 당국의 감시를 피해 몰래 만든 가방들. 가방은 난민들을 대신하여 난민캠프의 현실과 그들이 어쩔 수 없이 그곳까지 오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해주는 듯하다.

2006. 12. 30.
요즘 매일 한국으로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내가 속해 있는 사무실과 단체에서 가방 판매 수익금 이외에 별도로 지원금을 보내주겠다고 한다.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하다.
그러나 이번 일이 괜한 선심성 이벤트에 그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그리고 레퍼허 아이들이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 동정과 시혜의 대상으로 비쳐질까 봐 걱정이다. 우리와 비슷한 일상 속에서 그들 방식대로 아름답고 즐거움을 찾아가며 사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그럼, 레퍼허 아이들 지원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걸까? 한국에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다.

2006. 2. 2.
맬라 캠프에 온 지 3일째.
확성기에서 나오는 라디오 방송으로 하루가 시작된다. 사람들이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인다. 태국 매솟 지역 인근에 7개의 난민캠프가 있는데, 맬라 캠프는 그 중 가장 큰 규모다. 마른 나뭇잎을 얼기설기 엮어 만든 지붕들이 산 바로 밑에 빼곡하게 들어차있는 모습이 사람을 질리게 만든다. 가로 2킬로미터, 세로 0.5킬로미터 밖에 안 되는 공간에 4만 천여 명 정도가 거주한다. 그 내에도 여성 단체, 청년 단체, 환경단체, 장애인 단체, 인권단체 등이 있다.

인권단체에서 만난 3명의 여성들을 인터뷰했다.
57세의 줄리 아주머니. “첫번째 남편이 사고로 사망하여 재혼하였는데, 두 남자 모두 약물과 알코올에 중독되었고, 폭력을 일삼았다.”
28살의 미베이. “현재 유치원 교사로 일하고 있는데, 남편이 일을 그만두라며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 캠프 리더들이 가정 폭력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있어 문제이다.”
33살의 투웨이. “여성운동에 반대하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던 남편과 결국 이혼을 했다. 난민캠프에서 열심히 여성운동을 한 뒤 그 경험을 가지고 버마에 돌아가 버마 여성들을 위해 일할 것이다.”
여성문제와 난민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문제가 심각해 보였다.
인권단체 활동가 아웬이 이야기했다. “우리는 난민이다. 정부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 나온 사람들이다. 언제까지 이곳에서 살아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그리고 버마에 있는 우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이곳에서 도망가고 싶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있냐? 그것도 아니다. 결국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술과 약에 손을 댄다. 그리고 알코올과 약물 중독이 많은 경우 가정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내일 모레 레퍼허 마을에 들어가야 하는데 문제가 생겼다. 레퍼허 마을에 필요한 물품들을 알려주기로 한 친구가 연락두절이다. 그런데 마침 저녁에 카렌 청년조직(KYO)에서 활동하는 지지윈이 구세주로 나타났다. 지지윈은 난민캠프에서 환경운동을 하고 있다. 한정된 캠프 공간 속에서 인구는 계속 증가하는데 물 부족과 숲의 황폐화 문제가 발생하자 환경운동을 결심했다고 한다. 마침 그녀가 레퍼허 마을에서 학교를 다녔고, 우리가 이번에 새롭게 방문하려고 한 매써리 마을이 그녀의 고향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 마을 학교 지원 계획을 이야기하니 너무나 반가운 얼굴로 필요한 물건들을 이야기해줬다. 시계, 공책, 노트, 축구공, 커다란 물통…. 아니 물통은 왜? 수도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식수를 보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한다. 지지윈과 함께 일하는 단체가 매솟에 있는데, 그곳을 통해 필요한 학용품과 모기장 등을 싸게 구입하기로 했다.
지지윈이 계속 이야기했다. 난민캠프 상황이 그나마 레퍼허나 매써리 마을보다 훨씬 낫다고. 난민캠프에는 국제단체 지원이라도 있지만, 버마 정글에는 그런 지원이 거의 없다. 불법으로 국경을 넘거나 또는 버마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국제단체로서는 이 두 가지 모두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 난민들이 버마 정글에 사는 사람들에게 담요나 학용품, 필요한 의료물품 등을 보내기도 하고, 리더십 프로그램이나 인권교육 활동 등도 함께 한다고 한다.
지지윈! 꿈이 뭐예요? “꿈이라니! 희망이지, 희망!” 주먹을 불끈 쥐고 이야기했다. “꿈은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지만, 희망은 가능성이 있는 거야. 내 희망은, 우리 모두 자유로운 버마로 돌아가는 거야.”


2006. 2. 4.
드디어 모에이강을 건너 버마로 들어왔다. 이렇게 다시 왔구나! 반갑게 우리를 맞이한 레인보우도 한마디 한다. “어, 정말 왔네요.” 너무 행복하다. 약속을 지킬 수 있어 행복하고, 많은 한국 친구들의 마음과 함께 올 수 있어 행복하다.
저녁을 먹는데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기숙사에 있는 아이들이 시험공부를 하는 거란다. 기숙사라니? 레인보우 이야기인즉슨, 레퍼허 인근 마을에서 학교가 없거나 올라갈 학년이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많이 만났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주민들과 상의하여 지난 해 그 아이들을 위한 기숙사를 만들었다고 한다.

2006. 2. 6.
학교에 놀러 갔다. 아이들이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그곳에서 몇 명의 아이들과 인터뷰를 했다.
지뢰로 다리 한쪽을 잃은 15살의 서툴룩. “어렸을 때 버마 군인들의 공격을 피해 모에이강을 건넜는데, 강 건너에서 마을이 불타는 것을 목격했어요. 그리고 버마군인들이 심어 놓은 지뢰에 다리를 잃었어요. 친구들과 함께 뛰어 놀지 못해 슬퍼요.”
16살의 에도시. “원래 살던 마을에 학교가 있었는데, 버마군이 공격해서 무너졌어요. 그래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다가 레퍼허 마을에 와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리고 버마군이 아버지에게 순찰, 포터(porter)일을 강제로 시켰는데, 너무 힘들어서 결국 가족 모두 고향을 떠났어요.”
12살의 쏘네이무. “버마군이 아버지에게 포터일을 강제로 시켰는데, 하루는 정찰병들의 포터로 일하다가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를 잃으셨어요.”

공부하는 모습은 진지하고, 노는 모습은 한없이 맑고 귀엽다. 아이들에게 장래 꿈을 그려 보라고 했는데 에도시가 여자 친구를 그렸다. 하하~~

2006. 2. 7.
지난 11월 레퍼허에서 열린 학생축제에서 만나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매써리 아이들을 만났다.

레인보우와 함께 모에이강을 건너 태국 쪽으로 나온 뒤, 차를 타고 약 30분, 다시 모에이강을 건너 매써리 마을로 들어갔다. 그곳 학교 교장인 라써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아주 넓은 운동장 저 멀리 자그만 대나무 집 한 채가 보였다. 그곳이 학교란다. 과연 아이들이 있을까? 설렘 반, 떨림 반. 학교에 점점 다가가니 아이들이 한 명씩, 한 명씩 대나무 벽 바깥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아, 그 아이들!!!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나요? “예~~~”

라써 교장에게 이 마을 주민들이 몇 명이냐고 물어보니 주민은 학교 선생님들 가족과 일부 군인 가족을 빼면 없다고 한다. 한마디로 군인과 아이들만이 있는 마을. 버마 군인들을 피해 정글로 도망 다닌 아이들이 학교가 없어 공부를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라써와 그의 형이 그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처음에는 태국 쪽에서 학교를 세우려고 했는데 학교 승인 문제로 포기했고, 버마 쪽에서 버마 군의 통제 지역을 피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카렌민족연맹(Karen National Union) 무장 그룹이 통제하는 이 지역에까지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해 학교를 세웠는데, 우리가 첫 손님이란다.

2006. 2. 8.
아침부터 아이들이 분주했다. 운동장과 기숙사, 학교 청소를 했다. 큰 아이들은 풀로 엮어 만든 빗자루로 쓸고, 작은 아이들은 휴지를 주웠다. 수도시설이 전혀 없다 보니 우물가에 모여 고양이 세수를 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 아주 적은 양의 피쉬페이스트(생선을 으깨서 물에 끓인 것)를 비빈 밥이 전부였다.
학교에서 조례시간에 카렌 국가를 부르고 수업을 시작했다. 돈이 없어 교재는 선생님들만 보고, 아이들은 선생님이 정리한 내용을 공책에 받아쓰며 공부했다.
이 학교에는 나이 든 유치원생들이 많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학교를 다니지 못하다가 지난 해 처음 이곳 학교에 온 아이들이다. 이곳에서 아이들 전원에게 물어보았다. 언제가 제일 행복하냐고?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라고 답했다. 그리고 무엇을 가장 원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대부분이 계속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는 답을 했다.

12살의 므끄저가 이야기했다. “아빠가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시다가 버마군인들에게 맞아 언덕에서 떨어진 사고를 당했대요. 엄마는 며칠 수소문 끝에 아빠가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답니다. 엄마가 아빠를 집에 모시고 와서 간호했으나 1년 만에 돌아가셨대요.”
12살의 체체포가 이야기했다. “저는 버마군인이 싫어요. 버마군인들이 KNU를 수색한다고 순찰을 도는데 아빠를 포터로 끌고 갔어요. 그 때 아버지가 군인들에게 많이 맞으셨대요. 저에게도 등과 다리에 난 상처를 보여주셨어요. 아버지와 엄마는, 그 일이 있고 나서 바로 마을을 떠났답니다.”

아이들은 점심을 거르고 일찍 저녁을 먹는다. 레퍼허와 마찬가지로 이곳도 먹을 것이 없어 점심을 거른다고 한다. 저녁 식사 후 아이들이 운동장 곳곳에 흩어져 중얼중얼거린다. 숙제도 하고 복습도 한다. 운동장이 이들의 도서관인 셈이다.

2006. 2. 9.
매써리를 떠났다. 너무 짧은 기간. 괜히 아이들에게 상처만 준건 아닌지. 배타는 곳까지 배웅 나와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들이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 그들의 외로움이 전달되어 가슴이 아팠다. ‘틸라 쌀러키, 틸라 쌀러키’를 외쳤다. 또 만나자고. 또 만나자고.

다시 레퍼허 마을로 돌아왔다. 한국 사람들이 모아 준 지원금으로 지지윈과 같이 구입한 학용품과 모기장 등을 13개 학교에 보냈다.

2006. 2. 10.
레퍼허 마을의 아이들과도 작별을 했다. 틸라 쌀러키를 외치면서.
레인보우가 이야기했다. 현재의 미래는 다음 세대의 미래 밖에 없다고. 그러나 레인보우, 매써리, 레퍼허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거 아닐까?

계속 고민이다. 레퍼허 지원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번 여행이 한 가지는 이야기해주었다. 내전과 버마군부의 인권탄압을 피해 도망 온 레퍼허 아이들과 함께 하고 그들의 투쟁에 함께 할 때, 우리의 인권의식이 물리적 거리라는 한계를 넘어 확장될 거라고.




  
레퍼허 지원에 함께 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레퍼허, 매써리 아이들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달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 아이들을 사진과 화면에 담아왔습니다. 2006. 5. 4.부터 2006. 5. 22.까지 평화박물관에서 전시와 상영을 합니다.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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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아이들이 아름답다&quot;

 

월간사람

7호 | 2006년 1월

"아이들이 아름답다"
버마 파안(pa-an)의 아이들

 

유해정 |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아이들의 모습이 사라진 곳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엉엉 울기만 했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 해맑은 웃음과 고운 마음들을. 불과 4일을 함께 지냈을 뿐인데, 통하는 말이라곤 ‘하이’라는 인사 밖에 없었는데 헤어지던 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와 아이들은 부둥켜안고 소리 내 울고 말았습니다.


레퍼허에서는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루 두 끼, 반찬이라곤 나물 두 접시. 평소 때 같으면 ‘배고프다’를 연발하며 식사시간만 기다렸을텐데 여기서는 그 두 끼를 챙겨먹는다는 것마저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린 듯 언짢았습니다. 마치 가난한 자의 밥그릇을 빼앗은 기분으로 내 몫으로 차려진 밥상을 받아 들 때면 기도라는 것을 하지 않곤 배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계신다면 이 마을에 꼭 오셔야 합니다. 소년들은 소년병이 되지 않게 하셔야 하고, 여자아이들은 강간당하지 않게 하셔야 합니다.”
아이들을 떠나보낸 날부터 저는 한 가지 소망을 더 보탰습니다.
“혹여 이마저 욕심이라면 어떻게라도 좋으니까 제발 아이들이 살아남게는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총을 들고, 몸이 불구가 되고, 강간을 피해갈 다른 도리가 없다면, 그건 어쩔 수 없다고 하셔도 그래도 제발 아이들이 살아남게는 해주셔야 한다”고. “그래야 단 하루라도 이 아이들이 공포와 굶주림에서 벗어나 그들의 땅에서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날을 맞이할 수 있지 않겠냐”고.

강 하나로 교차되는 희비
태국 북부 메솟에서 차로 3시간을 달려 검문소 6곳을 통과하고 나니 차는 좁은 산길로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강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폭이 50m나 될까요? 이 작은 모에이(Moei)강을 경계로 땅은 태국과 버마로 나뉘고, 사람들의 운명도 희비가 엇갈립니다.
차에서 내려 보트로 강을 건너고 가파른 언덕을 지나 ‘레퍼허’ 마을에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 남짓. 뜨거운 태양 아래로 우리나라의 오두막을 닮은 대나무로 지은 버마의 전통가옥들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레퍼허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5년 전.
버마의 민주화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화두지만 버마 소수민족들이 겪어온 인권침해의 역사와 이들의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은 그 참혹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생소하기만 합니다. 버마는 인구의 68%를 차지하며 권력을 장악한 버마족 이외에 샨족, 카친족搔등 130여 개의 민족이 공존하는 땅입니다. 버마의 침략자 영국은 이런 민족적 특성을 악용해 버마족 위주의 소수민족 통제정책을 폈고 이러한 통치 이데올로기는 1948년 독립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독립 전부터 버마족을 또 다른 식민통치자로 받아들였던 소수민족들은 이듬해 카렌족의 ‘토운구(Toungoo) 독립국가’ 선포를 기점으로 독립과 연방을 요구하며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설사가상으로 62년 네윈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소수민족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정책을 시작하면서 사태는 더욱 격화됐고요. 들불처럼 번진 독립요구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소수민족들의 외침은 무장투쟁 등을 통해 지난 반세기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버마군에게 있어 소수민족은 모두 반군의 추종자일 뿐입니다. 해서 그들은 반군세력이 미칠만한 곳이라고 판단되면 그곳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총과 칼 앞에서 법은, 군사독재 정권 앞에서 인권은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군인들은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하고 강간하고 폭행했습니다. 버마군에 의한 강제노동의 과정에서 죽거나 고향을 등진 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그 참혹한 역사, 버마 민중들의 고통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파안에 사는 카렌민들 모두가 그렇게 가족을 잃고, 고향을 빼앗기고, 가슴과 몸에 깊숙한 상처를 안고 여기까지 밀려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말 우둔한 저는 보이는 평화에 속았습니다. 건물은 보잘 것 없고, 입성과 행색은 초라했지만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 사람들이 모여 아이들의 장기자랑에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이 서로를 아끼며 노래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 마을이 ‘평화롭다’ 생각했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아이들이 이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카렌군(Karen National Union 카렌민족연맹)의 호위를 받으며 마을회관에 모였다는 것을.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카렌민족의 해방가’임을. 그 노래를 자칫 잘못 흥얼거렸다간 버마군에 의해 아이는 물론, 선생님과 가족까지 나아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몰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아이들 모두가 아는 이 간단한 사실을 저는 뒤늦게서야 알았습니다.

마르기만 한 사람들
레퍼허는 파안에 속한 12개 마을 중 하나입니다. 파안의 전체 인구는 2천여 명. 어른들은 밭을 일구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8백여 명의 아이들은 작은 학교에서 꿈을 키워갑니다. 하지만 정부에 의해 반군 동조세력으로 낙인찍히면서 지원은 물론 심지어는 필요한 학용품을 구해 올 통로마저 막혀버렸습니다. 학교라고는 하지만 대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나뭇잎으로 지붕을 덮어 놓은 큰 공간에 낡은 칠판 3개와 의자가 전부입니다. 교재는 항상 모자라고, 연필이나 공책 같은 간단한 학용품도 이곳에서는 귀하기만 합니다. 기타 하나만 있으면 음악수업이 가능하고, 들에서 나무로 엮은 공을 차는 것이 체육시간 입니다. 평생 학교 문턱조차 넘어보지 못한 마을 이장님이 국어를 가르치고, 영어 몇 마디를 안다는 이유로 동네 아저씨가 영어선생님이 됩니다. 언뜻 보면 친자연적이라, 아름답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선택이 아닌 강요된 상황에서, 이것 이외엔 허락되지 않은 조건에서 배워야 하는 아이들도 가르쳐야 하는 선생님들도 목마르기는 마찬가집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분쟁에서 인생과 꿈을 잃어버린 어른들이기에 태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주고 싶지만 이들은 가난하고 동네는 위험합니다. 해서 태국인이나 고등교육을 마친 버마 난민캠프의 카렌민들을 선생으로 청해보아도 찾는 이는 드물기만 합니다. 다른 지역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미얀마 동부 지역의 아이들 중 11%만이 정상적인 학교에 갈 수 있답니다. 심지어는 종전지역에서도 예산부족과 정부의 강제노동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아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고요.

내 꿈은 소년병
“군인이 될 거예요” 꿈이 뭐냐는 질문에 한 꼬맹이가 자랑스럽게 답합니다. 옆에 있는 친구의 꿈도 같습니다.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까요? 머리가 멍해지면서 다리에 힘이 빠집니다. 허를 찔린 기습에 “왜?”라는 반문도 못했습니다. 마을 이장 레인보우의 꿈도 군인이 되는 거였답니다. 배꼽친구로 자라 지금은 교장선생님이 된 마이크로와 함께 16살에 군대에 자원했었다고 그가 말합니다. 배불리 먹고 싶어서, 가족들을 죽이고 때린 버마군을 혼내주기 위해서 그는 군인이 되길 바랐답니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가 교전 중 죽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는 꿈을 바꿨습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군인이 아닌 사람들을 돌보고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그는 사람들을 모으고, 마을을 건설하고 학교의 지붕을 올렸습니다. 몇 년간의 노력 끝에 마을이 조금씩 변하고 사람들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그가 바꾸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아이들의 꿈입니다.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복수를 위해 군인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의 꿈을 바꿔내기에는 언제 버마군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은, 아이들의 열악한 현실을 알면서도 버마정부와 태국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해 어떠한 지원도 불가능하다는 국제원조 기구와 NGO들의 한결같은 답변은 그의 절망을 더욱 깊게만 만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억지로 끌려간 아이가, 강압을 못이긴 아이들이 더욱 많겠지만서도 버마 정규군에만 18세 미만의 소년병이 5~8만 명에 이른답니다. 반군진영엔 어느 정도의 소년병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채 10살도 안된 아이들이 소년병이 되겠다며 군 막사를 기웃거리는 것은 여기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항상 똑같은 밥과 찬, 고기는 생일날이나 볼 수 있는 귀한 동네에서 개떡은 어른 아이 모두에게 ‘별미’ 중 별미이지만, 합창대회 상품으로 탄 손바닥만 한 개떡을 누구랄 것도 없이 엄지손가락만큼 떼어 스무 명의 친구들과 나눠먹으면서도 웃을 줄 아는 아이들이기에, 그들의 꿈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머리빗이, 칫솔이, 크레파스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픈 친구, 몸이 불편한 친구랑 손잡아 놀아주고, 내어준 코코아 한 잔 마시고는 컵을 닦아 돌려주는 아이들이기에 심장이 저려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한 명의 아이가 5천원만 있다면 1년 동안 교육 받을 수 있는 현실에서, 5천원만 있다면 1년에 3~4번씩 말라리아에 걸려 의식을 잃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주머니가 빈곤한 것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초콜릿을 사오지 않았음을 후회했습니다. 악마의 유혹 같은 달콤함이기에 한 번도 아이들에게 주어본 적이 없지만 맛이라곤 쌀과 야채가 전부인 아이들에게,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세상의 단맛을 선물로 주고 싶었습니다. 도둑질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치 구세주라도 되는 냥 으시대며 가끔 영사기를 가지고 산간마을 아이들에게 영화를 틀어준다던 한 사내가 생각났습니다. 이 아이들이 영화를 통해 화면을 통해 보다 넓은 세상을 알게 된다면 혹여 그 꿈을 달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사내의 친구가 되지못했음이 아쉬웠고, 할 수만 있다면 영사기를 훔쳐오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을 꿈꾸게 하자
동행했던 친구가 아이들에게 주문을 알려주었습니다. 쿰바야 마이 로드(Kumbaya my lord). 어렸을 적 교회에서 배운 노래라고 하던데 내용인 즉,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간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부른 노래였다고 합니다. ‘주님 여기 오소서. 고통과 절망이 가득한 땅에’. 눈물은 그럴 때 나나 봅니다. 친구와 아이들이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동네를 거니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버마 정부의 소수민족 배제 정책에 순응하며 폭력에 조금만 비굴해지면 지금보단 편히 살 수 있을 텐데, 고국을 버리고 태국으로 넘어가 난민캠프에서 살면 조금 갑갑해도 배불리 먹고 언제 버마군이 쳐들어오나 맘 졸이지 않아도 될 텐데 그들은 자유와 버마를 갈망합니다. 5년 동안 3번의 버마군 침입을 경험하면서 마을은 전소되고, 정글에서 몇 일간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으면서도, 그들은 카렌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존엄성과 해방된 세상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준비합니다. 삶이 위대하다는 것과 가혹하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차이일까요?

너무나 참담한 환경에서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그들을 보며, 고운 결로 커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새삼 삶이 참 가혹하단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의 위대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더군요. 태국에는 이런 노래가 있더군요. ‘전쟁은 수 천 번 일어났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아름답다’는. 왜냐고 물어보니 누군가 답하더군요. 아이들은 꿈을 꾸기 때문이라고. 그 꿈을 파안의 아이들이 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군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고, 배고프지 않아도 되고, 도망가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면 학교가 문을 닫았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보통의 아이들처럼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마을에서 평온히 뛰어 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의 입에서 다양한 꿈들이 쏟아져 나오고 버마를 위한 새로운 세상을 위해 버팀목으로 자라나 주면 좋겠습니다. 아직 그 아이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전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 속에 속하지 못한 제가 어떻게 그 맑은 눈동자를, 곱디고운 결속에 숨겨진 삶의 고단함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대인지뢰에 다리를 잃고도 다른 친구들에게 다시는 그런 불행이 닥치지 않기를 기도한다는 14살 서투루의 마음을 제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죽어가는 농촌 앞에서, 경찰의 폭력 앞에서 농민들이 죽어나가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습니다. 아직도 이라크와 수많은 국가들이 전쟁 중이고, 국가보안법도, 테러방지법도 그 어느 하나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마음은 분주하고 몸과 정신은 힘겹고. 그 고단함, 나눠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이 글을 읽는 동안에는 파안의 아이들을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만나지 못했지만, 보지도 못했지만 절망 속에서도, 전쟁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는 아이들을요.
  
이 글의 원고료 전액은 파안 아이들의 교육비로 쓰입니다. 파안 아이들에 대한 지원을 기다립니다. 국민은행 [예금주 유해정레퍼허 076901-04-007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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