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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평화에 대하여

정말 오랫만에 '국경없는 친구들'에 대한 글을 올리는군요. 제가 올해 정말 너무 바쁜(바쁜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는 일입니다) 탓에 만원계 사이트를 거의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아래 번역한 글은 핌이 보내온 '국경없는 친구들'의 소식지 서문입니다. 버마 민주화 항쟁과 유혈진압이 있은 직후에 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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핌, '국경없는 친구들'

 

 

안녕하세요. 

이번 ‘국경없는 친구들’의 주제는 ‘정의로운 평화’입니다. 이 문제는 언뜻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정의’를 정의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이론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양심에 근거할 때, ‘정의로운 사회’는 ‘수탈자’도 ‘상실자’도 없는 것이고,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는 이런 것들이 존재한다면 가해자가 이익을 취하지 못하도록 중단시키는 과정이요, 생존자를 ‘상실’로부터 보호하는 과정이요, 불평등한 상황을 평등으로 바꾸는 과정이 정의일 겁니다.


버마 랑군과 그 외 도시에서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필요로 하는 것을 요구했던 수천의 민중과 승려들로부터 온 뉴스를 듣고 저는 처음에는 정의에 대해 의심했습니다. 몽둥이 세례가 있기전부터 총이 발사되기 전부터 피의 냄새가 진동했지만, 우리 중 누구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극도의 혼란에서 비롯된 침묵의 소리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용감한 운동을 무의미한 것으로 분명 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우리는 그것이 오래 갈 것을 은밀하게 기대했고 또한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그렇게 오랜 억압을 애써 참아왔던 버마 인민이 군부가 씌운 공포의 새장에서 나올 것이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오면 피를 흘릴 것이라는 것도.


우리 모두는 고통을 느꼈지만, 아무도 비탄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 잔인한 일은 국경지대의 소수민족 친구들이 매일매일 겪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더 이상 울수가 없습니다. 보다 중요한것은 이런 우울한 순간에 우리 가슴속에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경제 정의를 향한 절규는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정의에 대한 요구로 분명히 들렸습니다. 나는 용감한 시위자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는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붙드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제 마음이 정의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데 사로잡혀있을 때, 언론이 물어온 첫마디가 절 깨웠습니다. “그러니까 더많은 난민들이 생기겠지요. 그것이 타이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무엇이고 타이가 그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하나요?” 그건 별로 이상한 질문이 아니었지만 제가 충격 받은 것은 그것이 첫 질문이었다는 점입니다. 아직 피가 식지 않았고 눈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나온 첫 질문이었습니다. 피흘리는 버마의 9월의 뉴스는 영화나 비디오 게임의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총탄의 천둥소리는 진짜였습니다. 총알이 정말로 사람의 몸을 관통했습니다. 비명과 고통은 훨씬 더 진짜였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정의하려는 저의 첫시도가 성공하기도 전에 제 머릿속엔 또다른 답이 떠올랐습니다. 정의와 평화의 부정은, 버마에서건 타이에서건, 궁극적으로 또다른 곳에 불의와 폭력을 창조할 것이라는 겁니다. 불의를 피해 도망친 사람들을 다루는 것은(난민문제 대응)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불의를 피해 도망왔지만, 그들이 이곳에서 정의를 구하리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통받는 친척을 대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들의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며 공정하게 다루는 것이 아주 어려운 일일까요?


인간은 국경선에 중요한 의미를 두지만, 불의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불의가 발생할 때마다 그것은 화재처럼 폭력을 퍼뜨립니다. 국경에 상관없이. 오직 정의와 평화만이 그 불을 끌 수 있을 겁니다.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으로


Pim Koets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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