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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아름답다"

 

월간사람

7호 | 2006년 1월

"아이들이 아름답다"
버마 파안(pa-an)의 아이들

 

유해정 |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

아이들의 모습이 사라진 곳에서 한참을 떠나지 못하고 엉엉 울기만 했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 해맑은 웃음과 고운 마음들을. 불과 4일을 함께 지냈을 뿐인데, 통하는 말이라곤 ‘하이’라는 인사 밖에 없었는데 헤어지던 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와 아이들은 부둥켜안고 소리 내 울고 말았습니다.


레퍼허에서는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하루 두 끼, 반찬이라곤 나물 두 접시. 평소 때 같으면 ‘배고프다’를 연발하며 식사시간만 기다렸을텐데 여기서는 그 두 끼를 챙겨먹는다는 것마저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린 듯 언짢았습니다. 마치 가난한 자의 밥그릇을 빼앗은 기분으로 내 몫으로 차려진 밥상을 받아 들 때면 기도라는 것을 하지 않곤 배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계신다면 이 마을에 꼭 오셔야 합니다. 소년들은 소년병이 되지 않게 하셔야 하고, 여자아이들은 강간당하지 않게 하셔야 합니다.”
아이들을 떠나보낸 날부터 저는 한 가지 소망을 더 보탰습니다.
“혹여 이마저 욕심이라면 어떻게라도 좋으니까 제발 아이들이 살아남게는 해주셔야 합니다.”라고. “총을 들고, 몸이 불구가 되고, 강간을 피해갈 다른 도리가 없다면, 그건 어쩔 수 없다고 하셔도 그래도 제발 아이들이 살아남게는 해주셔야 한다”고. “그래야 단 하루라도 이 아이들이 공포와 굶주림에서 벗어나 그들의 땅에서 마음껏 웃을 수 있는 날을 맞이할 수 있지 않겠냐”고.

강 하나로 교차되는 희비
태국 북부 메솟에서 차로 3시간을 달려 검문소 6곳을 통과하고 나니 차는 좁은 산길로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강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폭이 50m나 될까요? 이 작은 모에이(Moei)강을 경계로 땅은 태국과 버마로 나뉘고, 사람들의 운명도 희비가 엇갈립니다.
차에서 내려 보트로 강을 건너고 가파른 언덕을 지나 ‘레퍼허’ 마을에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 남짓. 뜨거운 태양 아래로 우리나라의 오두막을 닮은 대나무로 지은 버마의 전통가옥들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레퍼허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5년 전.
버마의 민주화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낯설지 않은 화두지만 버마 소수민족들이 겪어온 인권침해의 역사와 이들의 자유를 향한 긴 여정은 그 참혹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생소하기만 합니다. 버마는 인구의 68%를 차지하며 권력을 장악한 버마족 이외에 샨족, 카친족搔등 130여 개의 민족이 공존하는 땅입니다. 버마의 침략자 영국은 이런 민족적 특성을 악용해 버마족 위주의 소수민족 통제정책을 폈고 이러한 통치 이데올로기는 1948년 독립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독립 전부터 버마족을 또 다른 식민통치자로 받아들였던 소수민족들은 이듬해 카렌족의 ‘토운구(Toungoo) 독립국가’ 선포를 기점으로 독립과 연방을 요구하며 저항을 시작했습니다.

설사가상으로 62년 네윈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소수민족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정책을 시작하면서 사태는 더욱 격화됐고요. 들불처럼 번진 독립요구와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소수민족들의 외침은 무장투쟁 등을 통해 지난 반세기 동안 계속되고 있습니다. 버마군에게 있어 소수민족은 모두 반군의 추종자일 뿐입니다. 해서 그들은 반군세력이 미칠만한 곳이라고 판단되면 그곳을 철저히 파괴했습니다. 총과 칼 앞에서 법은, 군사독재 정권 앞에서 인권은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군인들은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죽이고 고문하고 강간하고 폭행했습니다. 버마군에 의한 강제노동의 과정에서 죽거나 고향을 등진 이들의 수는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그 참혹한 역사, 버마 민중들의 고통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파안에 사는 카렌민들 모두가 그렇게 가족을 잃고, 고향을 빼앗기고, 가슴과 몸에 깊숙한 상처를 안고 여기까지 밀려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정말 우둔한 저는 보이는 평화에 속았습니다. 건물은 보잘 것 없고, 입성과 행색은 초라했지만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 사람들이 모여 아이들의 장기자랑에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면서, 아이들이 서로를 아끼며 노래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이 마을이 ‘평화롭다’ 생각했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아이들이 이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카렌군(Karen National Union 카렌민족연맹)의 호위를 받으며 마을회관에 모였다는 것을.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가 ‘카렌민족의 해방가’임을. 그 노래를 자칫 잘못 흥얼거렸다간 버마군에 의해 아이는 물론, 선생님과 가족까지 나아가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몰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아이들 모두가 아는 이 간단한 사실을 저는 뒤늦게서야 알았습니다.

마르기만 한 사람들
레퍼허는 파안에 속한 12개 마을 중 하나입니다. 파안의 전체 인구는 2천여 명. 어른들은 밭을 일구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8백여 명의 아이들은 작은 학교에서 꿈을 키워갑니다. 하지만 정부에 의해 반군 동조세력으로 낙인찍히면서 지원은 물론 심지어는 필요한 학용품을 구해 올 통로마저 막혀버렸습니다. 학교라고는 하지만 대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나뭇잎으로 지붕을 덮어 놓은 큰 공간에 낡은 칠판 3개와 의자가 전부입니다. 교재는 항상 모자라고, 연필이나 공책 같은 간단한 학용품도 이곳에서는 귀하기만 합니다. 기타 하나만 있으면 음악수업이 가능하고, 들에서 나무로 엮은 공을 차는 것이 체육시간 입니다. 평생 학교 문턱조차 넘어보지 못한 마을 이장님이 국어를 가르치고, 영어 몇 마디를 안다는 이유로 동네 아저씨가 영어선생님이 됩니다. 언뜻 보면 친자연적이라, 아름답다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선택이 아닌 강요된 상황에서, 이것 이외엔 허락되지 않은 조건에서 배워야 하는 아이들도 가르쳐야 하는 선생님들도 목마르기는 마찬가집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분쟁에서 인생과 꿈을 잃어버린 어른들이기에 태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주고 싶지만 이들은 가난하고 동네는 위험합니다. 해서 태국인이나 고등교육을 마친 버마 난민캠프의 카렌민들을 선생으로 청해보아도 찾는 이는 드물기만 합니다. 다른 지역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미얀마 동부 지역의 아이들 중 11%만이 정상적인 학교에 갈 수 있답니다. 심지어는 종전지역에서도 예산부족과 정부의 강제노동 때문에 학교가 문을 닫아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고요.

내 꿈은 소년병
“군인이 될 거예요” 꿈이 뭐냐는 질문에 한 꼬맹이가 자랑스럽게 답합니다. 옆에 있는 친구의 꿈도 같습니다.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까요? 머리가 멍해지면서 다리에 힘이 빠집니다. 허를 찔린 기습에 “왜?”라는 반문도 못했습니다. 마을 이장 레인보우의 꿈도 군인이 되는 거였답니다. 배꼽친구로 자라 지금은 교장선생님이 된 마이크로와 함께 16살에 군대에 자원했었다고 그가 말합니다. 배불리 먹고 싶어서, 가족들을 죽이고 때린 버마군을 혼내주기 위해서 그는 군인이 되길 바랐답니다. 하지만 절친한 친구가 교전 중 죽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는 꿈을 바꿨습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군인이 아닌 사람들을 돌보고 더불어 사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그는 사람들을 모으고, 마을을 건설하고 학교의 지붕을 올렸습니다. 몇 년간의 노력 끝에 마을이 조금씩 변하고 사람들은 활기를 띄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그가 바꾸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아이들의 꿈입니다.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복수를 위해 군인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의 꿈을 바꿔내기에는 언제 버마군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은, 아이들의 열악한 현실을 알면서도 버마정부와 태국정부와의 관계를 고려해 어떠한 지원도 불가능하다는 국제원조 기구와 NGO들의 한결같은 답변은 그의 절망을 더욱 깊게만 만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억지로 끌려간 아이가, 강압을 못이긴 아이들이 더욱 많겠지만서도 버마 정규군에만 18세 미만의 소년병이 5~8만 명에 이른답니다. 반군진영엔 어느 정도의 소년병이 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채 10살도 안된 아이들이 소년병이 되겠다며 군 막사를 기웃거리는 것은 여기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항상 똑같은 밥과 찬, 고기는 생일날이나 볼 수 있는 귀한 동네에서 개떡은 어른 아이 모두에게 ‘별미’ 중 별미이지만, 합창대회 상품으로 탄 손바닥만 한 개떡을 누구랄 것도 없이 엄지손가락만큼 떼어 스무 명의 친구들과 나눠먹으면서도 웃을 줄 아는 아이들이기에, 그들의 꿈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머리빗이, 칫솔이, 크레파스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아픈 친구, 몸이 불편한 친구랑 손잡아 놀아주고, 내어준 코코아 한 잔 마시고는 컵을 닦아 돌려주는 아이들이기에 심장이 저려옵니다. 처음이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한 명의 아이가 5천원만 있다면 1년 동안 교육 받을 수 있는 현실에서, 5천원만 있다면 1년에 3~4번씩 말라리아에 걸려 의식을 잃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주머니가 빈곤한 것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초콜릿을 사오지 않았음을 후회했습니다. 악마의 유혹 같은 달콤함이기에 한 번도 아이들에게 주어본 적이 없지만 맛이라곤 쌀과 야채가 전부인 아이들에게,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세상의 단맛을 선물로 주고 싶었습니다. 도둑질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치 구세주라도 되는 냥 으시대며 가끔 영사기를 가지고 산간마을 아이들에게 영화를 틀어준다던 한 사내가 생각났습니다. 이 아이들이 영화를 통해 화면을 통해 보다 넓은 세상을 알게 된다면 혹여 그 꿈을 달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사내의 친구가 되지못했음이 아쉬웠고, 할 수만 있다면 영사기를 훔쳐오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을 꿈꾸게 하자
동행했던 친구가 아이들에게 주문을 알려주었습니다. 쿰바야 마이 로드(Kumbaya my lord). 어렸을 적 교회에서 배운 노래라고 하던데 내용인 즉,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간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부른 노래였다고 합니다. ‘주님 여기 오소서. 고통과 절망이 가득한 땅에’. 눈물은 그럴 때 나나 봅니다. 친구와 아이들이 그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동네를 거니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버마 정부의 소수민족 배제 정책에 순응하며 폭력에 조금만 비굴해지면 지금보단 편히 살 수 있을 텐데, 고국을 버리고 태국으로 넘어가 난민캠프에서 살면 조금 갑갑해도 배불리 먹고 언제 버마군이 쳐들어오나 맘 졸이지 않아도 될 텐데 그들은 자유와 버마를 갈망합니다. 5년 동안 3번의 버마군 침입을 경험하면서 마을은 전소되고, 정글에서 몇 일간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두려움에 떨었으면서도, 그들은 카렌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존엄성과 해방된 세상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준비합니다. 삶이 위대하다는 것과 가혹하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차이일까요?

너무나 참담한 환경에서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그들을 보며, 고운 결로 커나가는 아이들을 보며 새삼 삶이 참 가혹하단 생각을 하면서도 그들의 위대함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더군요. 태국에는 이런 노래가 있더군요. ‘전쟁은 수 천 번 일어났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아름답다’는. 왜냐고 물어보니 누군가 답하더군요. 아이들은 꿈을 꾸기 때문이라고. 그 꿈을 파안의 아이들이 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군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고, 배고프지 않아도 되고, 도망가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매일 아침에 일어날 때면 학교가 문을 닫았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그저 보통의 아이들처럼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마을에서 평온히 뛰어 놀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의 입에서 다양한 꿈들이 쏟아져 나오고 버마를 위한 새로운 세상을 위해 버팀목으로 자라나 주면 좋겠습니다. 아직 그 아이들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전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 속에 속하지 못한 제가 어떻게 그 맑은 눈동자를, 곱디고운 결속에 숨겨진 삶의 고단함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대인지뢰에 다리를 잃고도 다른 친구들에게 다시는 그런 불행이 닥치지 않기를 기도한다는 14살 서투루의 마음을 제가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죽어가는 농촌 앞에서, 경찰의 폭력 앞에서 농민들이 죽어나가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습니다. 아직도 이라크와 수많은 국가들이 전쟁 중이고, 국가보안법도, 테러방지법도 그 어느 하나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마음은 분주하고 몸과 정신은 힘겹고. 그 고단함, 나눠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만 그래도 이 글을 읽는 동안에는 파안의 아이들을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만나지 못했지만, 보지도 못했지만 절망 속에서도, 전쟁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는 아이들을요.
  
이 글의 원고료 전액은 파안 아이들의 교육비로 쓰입니다. 파안 아이들에 대한 지원을 기다립니다. 국민은행 [예금주 유해정레퍼허 076901-04-007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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