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판 <킹콩>(피터잭슨 감독, 나오미 왓츠, 아드리안 브로디, 잭 블랙 주연 - 잭 블랙 좋아^^)

 

 

얼마 전에 여자친구랑 <킹콩> 2005년 판을 보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두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더랬다.

 

1. 과연 킹콩은 수컷일까, 암컷일까?(영화에 명시적으로 킹콩이 수컷임을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 다만 이성애 코드에 익숙한 우리들이 킹콩을 '당연히' 수컷으로 받아들일 뿐.)

 

2. 대체 왜 킹콩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간 걸까?(허구 많은 장소중에 왜 그리 높은 곳에, 도망칠 곳도 없는 그 곳에 간걸까?)

 

두 개의 물음에서,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과 관련이 있는데, 당시 여자친구와 내가 제시한 두 가지 가능한 답은 다음과 같았다.

 



1. 킹콩은 수컷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킹콩은 백인 여성을 욕망하는 유색인종 남성을 상징한다. 사실 "자신들의 부인과 딸을 넘보는 흑인 혹은 유색 인종 남성들"에 대한 백인 부르주아 남성들의 공포와 이에 대한 응징은, 그리피스 이후 오랫동안 헐리우드 영화의 내러티브를 지배해온 정치적 무의식이었다.

 <킹콩>은 이러한 무의식을 반영한 대표적인 영화로, 이 영화에서 킹콩은 나오미 왓츠라는 백인 여성을 욕망하고, 따라서 스스로 서구적 남근과 동일시되고자 그것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서구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상징하듯 우뚝 솟은 그 모습을 보라!!)으로 향한다. 하지만 백인 남성들은 이러한 시도를 용납할 수 없었고, 결국 또 하나의 서구적 남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기관총을 이용해 킹콩을 살해한다. 그리고 나오미 왓츠는 다시 아드리안 브로디의 품으로.. 

 

2. 킹콩은 암컷이다. 그리고 킹콩이 나오미 왓츠에게 모성애를 느꼈건 동성애를 느꼈건 간에, 그녀는 나오미 왓츠와 여성들 만의 공동체를 세우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서구적 남근을 붕괴시키기를 원했고, 따라서 그것의 상징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향한다. 그녀는 그 곳 꼭대기에서 여성들만의 연대를 확인함으로써 서구적 남근을 무력화시키려 했으나 결국 남성 권력의 상징인 기관총에 의해 살해당한다.

 

첫번째 해석을 따를 경우, <킹콩>은 백인 남성들의 무의식을 반영한 보수적인 텍스트가 될테고, 두번째 해석을 따를 경우, <킹콩>은 한 영웅적 인물의 저항과 실패를 다룬 좀 더 비극적인 텍스트가 된다.  당시 여자친구와 내가 좀 더 선호했던 해석은 두 번째 것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헐리우드 영화가 담고 있는 정치성으로 보나 피터 잭슨의 전작들을 보나, 아무래도 첫 번째 해석이 좀 더 <킹콩>의 은밀한 메세지에 가깝긴 하겠으나, 뭐.. 실제 의도와 상관없이 <킹콩>을 좀 더 전복적으로 읽어보는 것도 재밌어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어제 우연히 케이블 채널에서 <킹콩> 1977년 판을 보게됐다. 그런데 이 영화에선 킹콩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아닌 WTC 쌍둥이 빌딩(911로 무너진 바로 그 빌딩)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킹콩이 그 곳으로 향한 것은,  나란히 서 있는 WTC 쌍둥이 빌딩이, 킹콩이 살던 해골섬의 모습과 유사하다는 매우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2005년 판 킹콩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향한 이유는 단지 "WTC가 무너졌으니까...."라는 싱거운 이유 때문이었나?;;;; (1933년 원조 <킹콩>에서는 킹콩이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었던 것 같은데..)

 

(뭐..막 밀어 붙이자면.. 1977년이라는 시대적 배경 상, 킹콩이 WTC로 향했던 건 제 3세계를 억압하는 양극체제-미국과 소련-을 상징한다는 구라를 풀 수도 있겠지만.. 이건 좀 오버이니 자제하고..) 그래서 결국 거창한 해석과는 달리 킹콩이 WTC로 혹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향한 이유는 실망스럽게도 아주 단순한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변명처럼 덧붙이자면) 어차피 제멋대로 읽기는 영화 보기의 가장 큰 묘미 중 하나가 아니던가? 하하하;;;;

 

 

덧 1. <킹콩>은 1977년 작도 무척 재밌더라. 특히 제시카 랭이 그렇게 섹시한 배우였는지 처음 알았다.(늙은 모습만 봤더니..-.-) 나오미 왓츠보다도 훨씬 멋지던데..

 

덧 2. 1977년작 <킹콩>에서 킹콩을 뉴욕으로 잡아오는 사람들은, 해골섬에 석유를 탐사하러간 석유 기업가와 고릴라의 생태를 탐구하는 동물학자였다. 다시말해, 킹콩을 죽음으로 이끈 건 전통적인 제국주의 권력 형태인 자본과 지식-권력의 결합이었다. 그런데 이 두 쌍이 2005년 판에서는 영화 감독과 극작가의 쌍으로 변한다. 이거.. 정말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얘가 1977년 킹콩.. 2005년 애보다 훨씬 더 흉폭해보인다.

북한 전투기를 마구 때려부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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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09 02:09 2006/07/09 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