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 기고할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서평을 쓰던 중에, 짬짬이 <에반게리온> 시리즈를 전부 챙겨봤다.(사실 서평에 투자한 시간보다 <에반게리온>보는데 걸린 시간이 더 많다.;;;) 책의 저자인 아즈마 히로키가 문학평론가보다는 오타쿠 문화연구자로 더 유명한데다, 그에게 이러한 명성을 안겨 준 계기 중 하나가 그의 <에반게리온> 평론과 소위 '에반게리온 세대'라고 불리는 새로운 오타쿠 세대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이다(라고는 하지만, 실은 "중간에 그만 볼 수가 없어서"가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의 <에반게리온> 평이 궁금하신 분은 참고하시라. "Anime or Something like It: Neon Genesis Evangelion")

 

<에반게리온>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때 일본애니메이션 팬이었던 친구의 권유 때문이었는데, 솔직히 그 때는 이 어수선한 텍스트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거의 10년이 지나 다시 본 <에반게리온>은 충분히 흥미로웠는데, (나의 가설이 맞다면) 그건 크게 봐서 '신지의 성장담'이라 할 수 있는 <에반게리온>이 암묵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청중들이, 실재 어린이들이 아니라 어른이 되지 못한 채 나이를 먹어가는 아이-어른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성장의 문제, 아이-어른의 문제 혹은 유아화의 문제는, 요즘 개인적으로 (반쯤은 사적인 이유로, 반쯤은 학술적인 이유로)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

 

일본의 이론가 아사다 아키라는 어디에선가 체제가 발달할수록 그 구성원은 점점 더 어려지는 자본주의의 역설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발달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같은 노년 자본주의에서, 영국과 미국의 성인 자본주의를 거쳐, 일본으로 대표되는 유아 자본주의로 귀결되었다. 노년 자본주의가 왕이나 신같은 초월적 기표아래 안정을 추구하는 노인들의 자본주의라면, 성인 자본주의의 주체들은 초월적-경험적 이중체(doublet)로 분열되어 스스로를 규율하고 식민화하는 외디푸스적 존재들이다. 이들은 목숨을 건 도약을 위해 혁신을 추구하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경쟁의식을 내면화한 기업가적 주체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최근의 자본주의인 소비자본주의에서는 이러한 성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초월적 기표의 자리는 무엇이든 들어설 수 있는 텅 빈 자리로 대체되고, 소비 자본주의의 주체들은 이러한 텅 빈 중심이 제공하는 모성적(母性的) 공간 속에서 소(小)타자들과의 작은 차이의 게임에 한없이 열중하는 '유아(infant)'들로 변한다. 포스트-외디푸스의 모성적 공간이 제공하는 관용과 허용 속에서, 이들에게는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추구해야할 어떤 초월적 가치도, 이를 위한 혹독한 규율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타자의 애정과 관심 그리고 자신의 즉자적인 안전과 안녕이다.(그런 점에서, 이들은 幼兒 혹은 唯我적 나르시스트들이다.) 

 

물론 아사다 아키라가 유아적 자본주의에 대해 말했을 때, 그가 1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일본이라는 소비 사회와 오타쿠라는 주체성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사다 아키라의 분석이 요즘 부쩍 한국의 현실과 겹친다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가라타니 고진의 말처럼, 주체의 유아화와 나르시스트화는 굳이 일본의 현상이 아니라 오늘날 발달된 소비 자본주의 국가의 보편적인 현상일지 모른다.(한국에서의 하루키 열풍을 보고 얻은 이러한 깨달음이, 그가 "근대 문학의 종언"을 선언한 직접적인 배경이다.) 예컨대, 나는 토요일 저녁 <무한도전>을 볼 때마다, 아사다 아키라의 거대한 농담이 떠오른다. "하찮은 아버님"과 함께 장난치면서 무의미한 게임을 진지하게 즐기는 이들의 모습에는, 진정으로 유쾌하면서도 진정으로 끔찍한 유아적 자본주의의 모습이 있다. 거기에는 덜 자란 어른들의 무의미하면서도 무한한 경쟁이 있고, 캐릭터 쟁탈의 이름으로 소비되는 차이의 게임이 있으며, 이러한 경쟁과 질시와 어수선함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안전과 변화-없음을 보장하는 모성적인 어떤 것이 있다.

 

혹은 이러한 유아적 자본주의의 징후는, 지난 주말에 읽은 김영하의 <퀴즈쇼>에서도 발견된다. 88만원 세대의 애환을 다뤘다는 <퀴즈쇼>에서 묘사되는 공간, 즉 퀴즈를 통해 치열하게 경쟁하고 즉각적으로 노력의 결과가 확인되며 역시나 즉각적인 보상이 주어지고, 이러한 경쟁에 전념하는 이들을 위한 온갖 배려와 외부로부터의 격리가 존재하는 공간은,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다름아닌 "학교"다. 물론 김영하가 소설에서 노린 것은 IMF 이후 한국 사회 전반에 대한 은유이겠지만, 어쩌면 한국 사회가 거대한 학교로(동시에 주체들은 학생들로) 변해버렸다는 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한국 사회에는 치열한 경쟁과 온갖 권모술수가 존재하지만, 사실 이 경쟁은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어른들 간의 적대도 갈등도 아니며, 단지 통제된 룰과 투명화된 공간 속에서 진행되는 아이들의 게임일 뿐이다. 어머니의 관심을 받기 위해 어린 아이들이 벌이는 경쟁이 그렇듯이, 이러한 게임 속에는, 성취는 있지만 성장은 없다.(그래서 김영하의 <퀴즈쇼>의 주인공은 성장하지 않고, 이 소설은 성장담이 아니다.) 

 

다시 본 <에반게리온>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흔히 <에반게리온>은 가장 오타쿠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反-오타쿠적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왜 그러한가? 아마도 그것은 <에반게리온>이 일종의 "모친 살해"의 신화를 선동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오타쿠의 어원은 "집"을 뜻하는 "宅"이다. 아사다 아키라의 말처럼, 포스트-외디푸스적인 소비 자본주의의 공간 속에서, "집"은 가혹한 아버지에 대한 투쟁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모성으로 둘러싸여 생권력(biopower)의 보살핌(care)을 받는 공간이다. 그리고 오타쿠는 이러한 안락한 공간 속에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근본적으로 세계와 타자와의 소통에 무관심한, "AT 필드"로 둘러싸인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세대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이카리 신지에게 있어, 당연히 아버지는 그에게 근본적으로 무관심하며, 이미 그로부터 도주한 자이다.(그는 신지에게 "에바를 타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오히려 끊임없이 "에바를 타든 말든 선택은 네게 달려있다"고 말한다.) <에반게리온>에서 신지가 성장을 위해 싸워야할 대상 혹은 죽여야할 대상은, 이러한 부재한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들)"이다. 이런 막무가내식 개념 적용을 결코 좋아하지 않지만, <에반게리온>에서 신지가 욕망하는 세 명의 여인들, 레이, 아스카, 미사토는 각각 실재적 어머니, 상상적 어머니, 상징적 어머니의 완벽한 구현이다. 레이가 신지의 어머니인 유이의 금지된 신체와 연결된다면, 아스카는 오타쿠들의 상상 속 욕망의 대상인 "전투 미소녀"의 전형이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신지에게 안정된 공간을 제공해주며 그를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미사토는 정확히 상징적 어머니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신지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죽여야 하는 대상은, 이들 모두이다.

 

세계 종말과 신인류의 탄생이라는 거창한 주제를 다루는 이 장대한 서사시의 결말 부분에서, 신지는 어머니 유이(혹은 레이)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신"을 자신의 힘으로 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살해를 통과한 후에야, 그는 비로소 유아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나올 수 있다." <에반게리온>은 모친 살해를 오늘날 유아-어른이 가득찬 세상을 벗어나는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다. 모친 살해의 신화는 오이디푸스라는 부친 살해의 신화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마도 유이의 몸과 하나됨은 신지에게 안락함과 평안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 공간 속에는 타자로부터 오는 고통과 번민, 회한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모성적 공간 속에서도 경쟁은 이루어지겠지만, 그 경쟁은 목숨을 건 인정투쟁이라기보다는 애정의 서열을 즉각적으로 확인시켜주는 "전국 일제고사"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우리가 세상을 부정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푸코에게 군주권의 잔혹함에 대한 저항보다 더 어려운 일이 생권력의 안락함에 대한 저항이었듯이, 부친 살해보다 더 어려운 것은 모살 신화의 창조일 것이다.(<에반게리온>의 분열증적인 결론은 이러한 어려움의 반영일지 모른다.)   

 

이 블로그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어온 이야기이지만, 오늘날 부친 살해 신화의 때늦은 반복은, 강한 아버지의 재림을 갈구하는 목소리와 한쌍을 이루고 있다. 이 대립 구도는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움직임, 즉 모친 살해의 필요를 감춘다.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권력의 형상은, 명령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나와 하나가 되자"라고 속삭이는 외설적 어머니이며, 따라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부살 신화의 반복이 아니라 모살 신화의 새로운 창조이다. <에반게리온>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다시 회귀하고, 여전히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서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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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5 01:11 2008/04/15 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