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선배와 가벼운 말다툼을 했다. 문제의 발단은 내가 보기엔 전형적으로 코포라티즘(corporatism)의 관점에서 쓰여진 어떤 논문에 대해, 선배가 좌파적 관점이라는 코멘트를 했던 것.

논의는 점점 더 나가서, 대체 '좌파'의 의미가 뭐고, 한국 사회에서 좌파의 의미는 뭐냐는 데까지 나아갔고, 그럴 때면 으레 등장하는 "좌파와 우파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상투적인 선배의 말로, 일단 정전협정을 맺었다.  



 

"그렇게 열심히 날아봤자 새지...뭐.."

 

 

몇 년 전에 이 말을 듣고 한바탕 자지러지게 웃었었다. 이영희 씨의 명언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는 말이 이전 세대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90년대 후반 학번 "운동권"인 우리들에게, 저 말은 오히려 하나의 '공식' 이데올로기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사실 우파와 좌파의 필요성을 모두 인정하며 둘의 상호 협력과 균형을 주장하는 입장은, 한국사회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전복적'이거나 '놀라운' 주장이 아니다. 이제 저 말은 고등학교 논술참고서의 주된 논조이고, 애들은 과거에 국민교육헌장을 암기하듯이 저 말을 외운다. (알바로 논술학원에서 고등학생 애들의 글을 들여다본 적이 있는데, 어쩌면 한결같이 저 말들을 암기한 듯이 인용하던지..) 미디어는 어떤가? 몇몇 코미디 언론들을 제외한다면, 오늘날 '좌파'의 경계를 문제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좌파'의 존재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없다.(물론 여기엔 "상호 대화를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한가지 전제조건이 덧붙긴 하지만..) 아니, 더 나아가 '탈냉전 실용주의' 노선을 내세우는 개혁주의적 자유주의 세력의 입장이 바로 이런 것 아닌가? "오른쪽 날개로 날든, 왼쪽 날개로 날든 새만 잘 날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입장. (물론 다시 한 번 여기서도 기묘하게 "새가 잘 날아야 한다"에 강조점이 찍혀 버리지만.)

 

이러한 시대적 배경 탓 만은 아니지만, 나로서는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식의 발언이 담고 있는 정치적 상상력의 틀이 한없이 불만스럽다. 왜냐하면, 좌파와 우파의 관계를 대칭적이고 상호협력해야하는 관계로 묘사하고 있는 그 명제와 그것이 기반한 정치적 상상틀이, 결국에는 좌파에게서 어떤 전복성을 제거하려는 함의를 가진 것은 아닌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좌파를 우파와 대칭적인 것으로 놓고, 상호 협력을 통해 "새를 날게 만드는 것"을 좌/우파의 공통 과제로 만드는 것은, 표면적인 중립성(혹은 개방성)과는 달리 좌파를 우파의 한 보충물(supplement)로 만드는 담론일 뿐이다.

 

논의를 좀 더 확장시키자면,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는 명제는 그 강조점에 따라 "좌파의 존재는 인정할 수 있으되, 그들은 새를 날게 만들어야 한다" 혹은 "새를 제대로 날게 만들기 위해서 좌파는 필요하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 둘은 각각 오늘날 열우당 식의 개혁주의적 자유주의 입장과 (홍세화 식의) 중도 좌파적 입장을 대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입장에서 공통적으로 잊혀지고 있는 것은,  "새를 날게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이러한 전제로 인해 두 입장 모두에서 좌파의 존재는 인정되지만, 동시에 일정부분 그것의 전복성은 거세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암묵적으로 동의되는 전제에 맞서 혹시 이런 질문이 가능하지는 않을까? 새를 날게 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집단은 우파인가, 좌파인가? 진정한 좌파적 입장은 새가 나는 방향 자체를 정반대로 틀어버리려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혹시 새를 날게 만드는 게 아니라 새를 추락하게 만드는 것이 좌파의 역할이라면?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이러한 좌/우파를 대칭적으로 파악하는 정치적 상상력 속에서 잊혀지는, 제 3항의 존재이다. 나로서는 진정한 의미의 '좌파'는 우파와 수평적인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를 재생산하려는 우파와 재생산 매커니즘을 붕괴시키려는 좌파가, 어떻게 대칭적인 관계이면서 사회를 원할히 굴러가게 만드는 상호협력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 둘은 지배와 저항이라는 수직적 관계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좀 더 손쉽게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 식의 정치적 상상력의 기원과 그 한계를 찾기 위해서, 좌파란 용어의 기원을 살펴보자. 주지하다시피, '좌파(la gauche)'란 용어는 프랑스 대혁명 전에 소집된 삼부회에서, 군주의 오른쪽에 앉았던 성직자-귀족 계급과 대립하여 군주의 왼쪽에 앉은 시민계급들을 가리켜 사용된 용어였다. (그렇다면 애초에 '좌파'의 규정은 지배자(군주)를 중심으로, 의회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우리가 여기서 잊혀진 제 3항, 즉 진정한 좌파를 찾는다면, 그건 의회 밖에서 봉기를 위한 잠재력을 키워나가고 있던 도시 소시민 계급 상뀔로뜨들이 아닐까? 의회의 '좌파' 시민계급들이 우파와 함께 삼부회를 구성함으로써 왕권을 지탱하는 역할을 거부하고, 의회를 박차고 나와 상뀔로뜨들과 적극적으로 결합했을 때, 그들은 비로소 '좌파'의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었을까?

 

 

다시 선배와의 말다툼으로 돌아가서..

논쟁 중에 대체 '좌파'의 의미를 뭘로 생각하냐는 나의 질문에, 선배는 "인간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는 언제나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들을 내버려두자는 것이 우파의 입장이라면, 이들을 사회적으로 보호하자는 것이 좌파적 입장"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를 다시 한 번 선배의 말에 적용하자면, 나로서는 이러한 방치/보호라는 좌파/우파의 대칭적 파악 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것은 (대칭 구도 밑에 놓여 있는) "사회적 약자 자신들의 목소리"라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선배의 용어를 이용해 '좌파'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방치/보호의 지배적 담론을 뚫고 사회적 약자(피지배자)들이 직접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적 조건들을 만들려 노력하는 이들 혹은 이러한 노력을 전개하는 피지배자들 자신"이 아닐까?

 

 

덧.

글을 쓰다 생각난 것이지만, 좀 더 학술적으로 '좌파'라는 개념의 문제에 접근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앞서 밝혔듯이 전통적으로 '좌파'의 의미는 "대의적 질서"(의회 내의)와 "군주의 자리"(왕의 왼쪽)을 가정한 한에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좌파의 탄생과 동시에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은 왕의 목을 잘랐지만, 푸코의 말처럼 현실 정치 제도는 마치 아직 목이 잘리지 않은 것처럼 작동하고 있다. 즉, 왕의 자리 자체는 군주권의 형태로 텅 빈 지점으로 구조화되어 여전히 남겨져 있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좌파에 대한 규정은 이러한 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의 장에 참여한 한 세력들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러한 논리적 흐름을 쫓아가자면, 오늘날 '정치적 공간'의 확장, 대의제와 군주권의 위기, 파퓰리즘적 정치의 등장과 '좌파'의 정의에 대한 개념적 혼동(예컨대, 오늘날 영국 노동당은 좌파인가?)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단순한 우연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결국에 이러한 새로운 정치적 상황은, 우리에게 새로운 전제를 가진 좌파 개념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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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3 01:35 2006/08/03 0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