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잠깐(한 일주일정도?^^) 네이버 블로그를 할 때 썼던 글인데, 진보넷 불로그에 자리잡기로 마음먹은 이상 옮겨놓는 게 좋을 것 같아 옮긴다.

 

 

<내 곁에 있어줘(Be With Me, Eric Khoo, 2005)>



영화 속에는 네 명의 중심 인물들(죽은 아내를 잊지 못해 외로워하는 노인, 한 소녀를 사랑했지만 버림받고 자살을 선택하는 소녀, 회사의 여직원을 짝사랑하는 한 경비원, 그리고 이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청각·시각 장애인 테레사)이 등장하지만, 이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맺음은 매우 제한적이다. 단적으로, 영화 전반을 통틀어 대사가 있는 장면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노인은 고객들과도 대화를 나누지 않으며(셔터도 반쯤 내린 채로), 어머니가 정신이상으로 말을 잃은 상태인 소녀는 답장없는 문자메세지를 일방적으로 보낸다. 경비원은 가족들에게 외면당한 채 홀로 밥을 먹고, 그가 타인에게 듣는 말들은 모욕적 언사들뿐이다. 마지막으로 시·청각 장애인인 테레사는 장애로 인해 세상과 자신 사이에 생긴 거대한 벽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 등장인물 각자는 소통이 부재한 자신의 닫힌 세계 속에서 살고 있으며, 심지어 이들끼리 서로 스쳐지나갈 때에도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노인이 경비원에게 물건을 팔 때 혹은 경비원이 죽기 직전 노인을 스쳐지나갈 때 혹은 테레사와 노인의 만남을 다룬 장면에서, 그들 사이에는 어떤 언어를 통한 소통도 오가지 않는다. 감독도 밝히고 있듯이, 소통의 부재와 단절 그리고 그 속에서 구원의 문제는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핵심적인 주제이다.

 

 

1.

 

그런데 이 영화는 이러한 ‘소통의 부재’를 그 자체로 다루지 않는다. 영화는 '소통의 부재'를 ‘사랑’이란 기표로 덧씌우면서 이 문제에 접근한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조용히 울려퍼지는 타자기 소리와 함께 다음과 같은 문답이 화면에 새겨진다. “변하지 않는 진정한 사랑이 존재할까? 물론.. 당신의 따뜻한 마음씨만 있다면...” 이 문답은 이 영화가 소통의 부재라는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어지는 영화의 내러티브 속에서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직면한 ‘소통의 부재’ 상황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로 (별다른 설명없이) 치환된다. 이는 경비원과 소녀의 에피소드에서 명확히 드러나는데, 경비원은 자신의 가족과의 소통의 부재를 한 여성과의 소통을 시도함으로써 해결하려 하며, 이는 자신을 배신한 소녀에게 집착하는 소녀 역시 마찬가지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의 치환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방식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어서 사실 이 치환 자체가 문제인지를 눈치채는 것조차 쉽지 않다. 예컨대, 대중 상업 영화 속에서 소통의 부재는 (대개는 배타적 이성애 관계로 재현되는) 연인관계의 부재로 치환되고, 연인과의 결합은 그 자체로 완전한 소통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처럼 제시된다.(사랑만 이루어지면 해피엔딩.) 우리는 주변의 일상에서도 이러한 문제의 치환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현실에서 누군가가 연인 관계의 부재를 한탄하며 연애(사랑)을 하고 싶다고 말할 때,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특정한 연인의 존재보다는 ‘타인과의 소통’ 그 자체에 있음을 확인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연인의 존재가 이러한 소통의 부재 상황을 해결해줄 수 있느냐/없느냐라는 결론 없는 논쟁에 있지 않다. 오히려 문제는 소통에 대한 욕망을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연인'에 대한 요구로 치환시키는 사회적 담론의 힘과 그것이 가져오는 효과이다. 대중 소설·영화·TV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확산되는 이러한 담론은, 소통에 대한 대중의 열망과 좌절을 배타적 이성애 관계의 유/무로 협소화시키려는 지배 담론의 전형적인 전략이다. 투표를 중심으로 한 대의적 정치제제가 대중의 소통과 정치에 대한 열망을 매개의 ‘투명성’을 둘러싼 논쟁으로 협소화시키듯이.

 

 

2.

 

하지만 <내 곁에 있어줘>는 블랙 유머를 통해 ‘사랑’을 ‘구원의 방법’으로 삼는 전형적인 상업 영화의 공식을 살짝 빗겨간다. 사랑에 좌절해 옥상에서 몸을 던진 소녀는, 마침 짝사랑하던 여성에게 편지를 전달하러 길을 가던 노동자를 덮치고 노동자는 소녀 대신 죽는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통해 감독은 메세지의 전달 불가능성 내지는 일방적이고 뒤틀려진 전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경비원이 짝사랑하던 여성은, 바람에 날려간 경비원의 편지가 아닌 신문의 부고를 통해 그의 존재에 대해 깨닫는다. 몸을 던지기 직전, 소녀는 사랑하던 소녀에게 문자를 보내고 곧바로 핸드폰을 옥상에서 던져버린다.(문자를 받은 소녀가 갈등하던 말던 답장은 불가능하다.) 이어 소녀는 자살을 통해 자신이 사랑하던 이에게 메세지를 보내길 원하지만, 기막힌 우연으로 이 메세지 전달은 실패한다.

 

 결국 이 두 에피소드 속에서 소통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고, 비틀어진 메세지의 전달 혹은 전달의 실패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에피소드들만 보자면, 이 영화는 비관적인 블랙코미디의 전형을 보여준다.

 

 

3.

 

그런데 <내 곁에 있어줘>의 감독 에릭 쿠는 이러한 냉소적인 비판에서 더 나아가 자신이 생각하는 ‘구원’의 방식까지 제시하려는 욕심을 부린다. 감독이 좀 더 심도 깊게 다루는 영화의 다른 두 에피소드는, 감독이 상상하는 구원의 방식을 보여준다. 시·청각 장애인 테레사와 홀로된 노인은 아들을 통해 교환되는 자서전과 음식으로 서로 조금씩 소통하며, 결국 아들이란 매개 없이 둘 간의 직접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 서로의 눈물과 함께 둘 사이에는 완전한 이해의 감정이 형성된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이루어지는 이 둘의 만남, 그리고 이 둘이 같이 흘리는 눈물은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일종의 ‘구원의 메세지’이다. 여기에 담겨져 있는 것은, 소통의 단절 상황을 뚫고 나올 수 있는 그래서 타자를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는 치유적인 소통 가능성에 대한 낙관적 확신이다.

 

 소녀와 경비원의 충돌 장면과 함께 이 장면은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여기서 표현된 감독의 구원의 메세지에는 동감할 수 없었다. 영화를 보던 나로서는, 이러한 갑작스런 구원의 메세지가 감동적이기보다는 당황스러웠는데, 그건 아마도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선 첫번째 이유는 이러한 구원의 제시가 앞서 이야기한 두 에피소드에 깔린 냉소적 태도와 이루는 불협화음에서 찾을 수 있다. 영화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테레사와 노인의 만남은, 혼자 된 노인의 아픔과 테레사의 아픔을 동시에 치유하는 효력을 발휘한다. 이들은 어떤 ‘말’도 하지 않지만 눈물과 포옹을 통해 일종의 완전하고 ‘투명한’ 소통에 도달하는데, 이는 소통의 가능성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내비친 전작 에피소드들과 비교해볼 때 너무나 갑작스러워, 감독의 진짜 생각이 무엇인지 모호하게 만든다.

 

 이러한 구원의 메세지가 당황스러웠던 두 번째 이유는, -이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인데- 노인과 테레사 간의 투명한 소통이 ‘테레사의 장애’(눈과 귀가 먼)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테레사의 장애 혹은 장애인으로서의 테레사는 구원의 ‘매개’ 역할을 하고 있다. 눈과 귀가 먼 테레사의 장애는 소통의 불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만한 소통의 가능성, 투명한 소통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개인적으로 시·청각 장애인인 테레사(이 영화는 긴 자막을 통해 그녀의 장애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 고로 그녀의 존재를 ‘시·청각 장애인’으로 단순화시키는 위험성에 대한 책임은 내가 아니라 영화에 있다)와 그녀의 장애에 대한 이러한 방식의 접근은, 오늘날 사회적 타자화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4.

 

 테레사에 대한 접근이라는 이 문제는, 사회적 타자와의 관계맺기란 점과 관련하여 조금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개인적으로 사회적 타자 혹은 소수자에 대한 윤리적 태도는, 기본적으로 그들에 대한 자신의 양가적인 감정과 태도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시작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즉, 개인은 사회적 타자들에 대해 ‘그들은 우리와 달라’와 ‘우리와 그들의 차이는 없어’라는 양가적 감정과 태도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 두 감정을 그 자체로 인정한 채 행동해야 한다. 이러한 양가적이고 이중적인 태도를 인정한 위에서만,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폭력적 타자화를 피하면서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관계맺음과 실천의 공간이 열릴 수 있다.

 

 이 양가적 감정 혹은 태도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동시에 공존하는 것으로 수용하지 않은 채, 손쉽게 한 쪽으로 경도되거나 혹은 이 둘을 변증법적 계기 속에서 결합시켰을 때 우리는 ‘그들’에 대한 ‘폭력적 타자화’라는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네그리가 헤겔의 특수/보편의 쌍과 구분되는 특이(the singular)/공통(the common)의 쌍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 역시, 이러한 양가적 태도의 소멸을 경계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예컨대, “그들과 우리는 다르다”는 외침만큼이나 “우리 모두는 소수자다”라는 성급한 외침은, 실질적인 차별의 구조 혹은 외상적 경험의 완전한 공유 불가능성을 은폐할 수 있는 만큼 위험하다. “난 널 이해해”라는 말이 창출하는 비대칭성과 그것의 폭력적 효과.

 

 한편, 이러한 한 쪽으로의 경도보다 더 세련되고 정교한 (그리고 ‘타자성이 생산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좀 더 유행하는) 타자화의 방식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다름’과 ‘같음’의 원리를 변증법적 계기 속에서 통합시키는 것이다. 예컨대, 특정한 사회적 소수자가 일정한 능력을 결여하고 있거나 혹은 여타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완전한 ‘정상성’을 실현할 능력을 담지하고 있다는 식의 담론은 그 대표적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테레사의 존재가 구원의 매개가 되었을 때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테레사의 존재가 이러한 타자화의 세련된 판본이 가진 전형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아톤>에서 주인공이 특정한 지적능력을 결여한 장애인이기에, ‘순수함’이라는 ‘정상적 가치’들을 소위 ‘정상인’보다 더 정상적으로 체현할 수 있는 것으로 재현되듯이, <내 곁에 있어줘>에서 테레사는 ‘소통적 능력’의 결여 때문에 오히려 ‘충만한 소통’을 이룰 수 있는 인물로 재현된다.

 

<내 곁에 있어줘>에 등장하는 사회적 타자에 대한 이런 방식의 접근이, 기존에 지식인들이 민중 혹은 노동계급을 바라보는 ‘속류화된 관점’과 동일하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 지식인들이 노동계급이 (어떤 구체적인 실정적이고 정세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결여된 존재’이기 때문에 이들이 역으로 자본주의의 병리적 현상을 해결하고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할 때, 여기에는 노동계급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이 가진 현실적 욕망의 실존을 거부하려는 지식인들 자신의 은밀한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 징후적이게도, 다른 세 명의 주인공들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 테레사의 욕망의 대상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녀는 결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어떤 현실적 욕망의 대상도 같지 않아야 한다. 결여 그 자체로서의 그녀의 지위는 충만한 소통의 매개자로서 ‘보상’받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를 이런 존재로 재현하는 이의 ‘시선’이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그것이 가지는 효과는 무엇인가에 놓여져 있다.

 

(다시 한 번, ‘말아톤’의 예로 돌아가보자. 여기서도 주인공의 욕망은 은밀히 삭제되거나 특정한 시점에서 재구성되는데, 대표적으로 주인공이 지하철역에서 여성의 엉덩이를 만지는 장면이 바로 그러하다. 이 장면에서 자폐증인 주인공은 상대 여성의 치마가 가진 얼룩무늬를 보고 얼룩말을 상상하면서 그녀의 엉덩이에 다가간다. 문제는 이것이 그의 ‘실제’ 욕망에 대한 하나의 ‘해석’임에도, 실제 영화에서 카메라는 마치 그것이 그의 욕망의 진실인 양, 여성의 치마와 얼룩말이 오버랩되는 장면을 주인공의 ‘시점 샷’으로 처리해버린다는데 있다. 이 때 (그 자체로 성적 욕구를 담고 있을지도 모르는) 주인공의 행동을 ‘순수함의 발현’으로 해석하고 상징화하는 것은 과연 ‘누구’의 시점인가? 그리고 이것이 낳는 효과는 주인공이 가진 실정적 욕망의 삭제 혹은 특정 시점에서의 재구성이 아닌가?)

 

 이러한 점에서, 난 ‘소통 기관 장애자’인 테레사를 매개로 에릭 쿠가 제시하는 구원의 방식에 동의할 수가 없다. 이러한 구원의 방식은 '사랑하는 이를 통한 구원'이라는 문제에 대한 환상적인 접근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사회적 타자에 대한 정교한 타자화·신비화에 기반해 있다는 점에서 한계적이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급한 구원의 제시보다는 소통의 부재라는 문제상황을 좀 더 근본적이고 냉정하게 바라보고자 하는 시선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 영화가 한 편의 잘 만든 블랙코미디에서 성급한 구원의 메세지로 엇나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덧 1.

 

본문에서 사회적 소수자를 ‘그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변명할 필요가 있겠다.(이러한 표현이 소수자를 자신의 외부에 분리되어 존재하는 타인의 집단으로 바라보는 인상을 줄 수 있으므로) 주지하다시피, 사회적 소수자는 실정적인 집단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과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어떠한 사회적 위치이다. 예컨대, ‘빈곤층 흑인 미혼모’조차 특정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다수자의 위치에서 소수자와 대면할 수 있다. 따라서 언제나 사회적 소수자는 나와 대립되는 ‘그들’로서 지칭될 수 있다. 여기서 ‘그들’이 지칭하는 것은, 특정 집단이 아니라 다수자와의 관계 속에서 소수적 주체들이 차지하는 위치이다.

 

 

덧 2.

 

테레사는 왜 10살 때까지 사용했던 광둥어를 놔두고 발음조차 부정확한 영어를 사용하는 걸까? 왠지 어려움을 딛고 자수성가한 인물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비틀린’ 우월의식을 보여주는 듯 해, 영화 내내 테레사의 처지에 감정이입을 할 수 없더군.(이 놈의 완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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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7/30 01:46 2006/07/30 0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