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명

from The Ticklish Subject 2006/08/05 09:52

캐즘님의 [새가 좌우 날개로 난다고?] 에 관련된 글.

 

오늘 우연히 위의 내 글에 대한 글 하나를 발견했다.(글 쓰신 분이 트랙백을 걸어 놓지 않아 순전히 우연한 계기로 발견했다.)

 

http://blog.jinbo.net/laborman/?pid=119

 

공돌님의 포스팅인데, 공돌님은 내 글이 결국 좌파의 순수성을 높이자는 얘기일 뿐이라고 결론짓고 계셨다.

 

하지만 내가 저 글을 통해서 짚고자 했던 부분은, 좌파의 순수성 보존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다시 내 포스팅을 읽어보니 글의 쓸데없는 수사에 가려 논의의 핵심이 잘 전달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이에 대한 몇 가지 해명을 남긴다.



 

우선 내 글의 중심 주제와 관련된 논의부터 시작하자. 내가 저 글을 통해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좌파의 순수성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좌파에 대한 지배전략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즉, 과거 반공규율 사회에서는 좌파 그 자체가 배제-부정되어야 할 대상이었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지배집단은 공적공간 내에 좌파의 자리를 일정부분 마련해 준다.(단, "이들이 사회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고서..)

 

이러한 변화는 당연히 기존의 치열한 투쟁의 성과이지만, 동시에 기존의 투쟁 방식을 위협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과거처럼 좌파 자체를 말살하려는 지배전략 속에서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로 대표되는 공식공간에 대한 좌파의 시민권 요구가 그 자체로 일정한 전복적 의의를 지녔다면,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 명제만을 반복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이미 지배체제 자체가 일정부분 그렇게 작동하고 있으므로..) 글 본문에서 고등학교 논술 참고서 얘기나 미디어 논의 등을 예로들면서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는 명제가 "공식 이데올로기" 처럼 되었다고 설명한 부분은 바로 이를 의미한다.

 

이영희 씨의 명제에서 "새"는 공돌님의 말처럼 당연히 "사회"를 뜻한다. 다만 지적하고 싶었던 것은,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가 과연 "같은 방향"으로 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고,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채 과거처럼 공적 공간에 대한 좌파의 시민권을 요구하는 것만으로는,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지배 집단의 "(사회 발전을 위한) 이념적 다양성"이라는 담론 전략에 휩쓸려 버릴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위험성을 지적하고 우려를 표명하는 것은 좌파의 순수성을 지켜야한다는 주장과는 애초에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가 보자.

그래서 내가 글에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좌파를 새의 왼쪽 날개로 상상하는 기존의 "정치적 상상틀"이다. 애초에 나는 개인적으로 '좌파'란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게다가 좌파의 순수성 따위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다. 다만 '좌파'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오늘날 위와 같은 지배 전략의 변화 속에서 좌파를 상상하는 "상상력의 틀" 자체가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결국 내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원래 존재하는)좌파의 순수성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좌파를 조망하는 우리의 정치적 상상력의 틀이 변화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다.(공돌님의 말처럼, 이는 실제로는 별로 도움이 안되는 지적인 문제제기 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공부를 하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관점의 변화가 가져오는 효과를 완전히 관념적인 것으로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게 따지게 되면, 새로운 인식을 열려는 이론적 작업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된다.) 

 

글에서도 밝혔듯이, 기존의 정치적 상상틀에서 공적 공간에서 우파와 대칭적으로 대립하는 이들을 가리켜 좌파라고 칭해왔다. 하지만 이 정치적 상상틀은, 공돌님의 지적처럼 지나치게 넓어서 문제가 아니라(그래서 내가 교조적으로 그 정의를 '엄밀히' 적용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좁아서 문제이다. 예컨대,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한강다리에서 투쟁하시는 시각장애인 분들은 기존의 정치적 상상틀에서는 '좌파'로 이해되지 않는다. (포스팅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나와 다툰 한 선배의 시각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기존의 정치적 상상틀에서는, 이들은 '보호'해야할 대상(혹은 이익집단)일 뿐이고 이들을 위한 보호입법을 마련하는 사람들이 '좌파'이다.(과연 이러한 정치적 상상틀을 통해 수혜를 입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러나 공적인 정치적 장에서의 우파와의 수평적 관계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지배/저항의 문제로 전환시켰을 때, 우리는 좀 더 폭넓은 의미에서의 사회 운동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은유 속에서 종종 잊혀질 수 있는 제 3항이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피지배자들의 사회운동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던 오늘날의 지배전략의 변화로 돌아가보자. 오늘날 "새는 좌우로 난다"는 말이, 지배집단이 구사하는 "(사회 발전을 위한) 이념적 다양성"의 담론 전략과 구분되는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이 은유 밑에 숨겨져 있는 이러한 사회운동 속에서만 찾아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오늘날 사회의 오른쪽 날개/왼쪽 날개 모두가 류마티스에 걸려있다는 공돌님의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공돌님이 마지막에 이러한 류마티스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라고 했을 때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유일한 치유 방법은 "피지배 집단 스스로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들에 의해 전개되는 대중운동"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오른쪽 날개가 왼쪽 날개를 고쳐줄리 만무하며, 왼쪽 날개의 자가 치료가 힘들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금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정치적 상상력 "밑에" 놓여 있는 대중운동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마지막에 공돌님이 제기하신 문제에 대한 답이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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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05 09:52 2006/08/05 0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