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  2008/03/20 10:37

총선에 대하여

총선이라는 정치일정에 대하여

총선의 시간은 나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부르조아정치일정을 따르는 철새들은 벌써부터 마음은 부풀어 올라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거나 올라가기를 바라면서 대중에게 온갖 아부를 하면서 투표기계로 만들어 가고 있다. 몇년에 한번식 치루어지는 정치일정은 그 인물에 대한 평가를 작위적인 형태로 만들어 계급적인 요서를 버리고 정권에 대한 비판이라는 형식으로 치부하면서 대중의 의식을 한명의 인물에 의한 마음이 정하는대로 양심에 맞기기를 바랄 뿐임을 속삭인다.

 

60%정도의 투표율은 대중이 이미 자본주의세계에 대한 거부하기 위한 반항의 몸짓이 한계를 넘어 서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자본주의세계에서 대중의투표율은  대부분이 떨어지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계급적인 내용을 담보하지 못하는 정치계급은 피지배계급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괴리되어 진다는 것은 알고 잇지만 대안이 없을 경우에는 대중의 선택은 환상속에서 보수우익의 날개를  달아주어 더 높게 비상하는 모습을 역사속에서 보여 주고있다. 대중의 투쟁이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급겨하게 변하는 상황에선 대중은 자신의 계급적인 입장을 지지하거나 같이하는 형식적인 입장에서조차도 지배계급의 지백적인 이데올로기의 공세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자신의 이 열망을 높은 투표율과 더불어서 그나마 진보적인 쁘띠부르조아정당의 지지로 선화를 해 왔었다. 서구 사민주의정당의 기세는 대중의 압박을 통하여 이루어 졌고 배신을 했기에 집권을 유지했었지만 이데올로기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중의 무기력은 혁명적인 상황의 연출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푸른페인트의 색깔론에 빨간색을 혼합하여 보라색으로 치장시켜 위상을 올려 지배자들의 위치로 올라서기를 바랬다.

 

민주노동당의 파산은 더 이상 미룰수가 없다. 계급간이 연합체는 언제나 노동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역사적인 진리를 다시 더 각인 시켰다. 계급간의 연합은 언제나 계급간의 협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계급의 구분을 무시하면서 물에 술탄듯이  은근 쓸적 넘어가기 위한 비민주적인 형태의 모습인 관료주의를 양산한다. 자본주의의 민주주의는 형식적인 모습을 띤다는것은 대리주의로 표현되어 왔다는것은 인식하고 있었어야 한다. 그것을 이제 구분하여 대중을 투표기계로 만들었음에도 계급투표를 만들어야 한다든지 하면서 지지율이 3%라든지라는 의미로 해석을 한다는것은 사회주의로 가기위한 길을 퇴색시킨다.

 

혁명은 바닥에서부터 시작된다. 대중과의 결합되는 현장에서 혁명의 원초적인 본능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 혁명에 대한 열정은 자신들의 위치에서 존재를 인식하는 순간에 물질적임 힘을 부여받는다. 계급적인 모습을 가지지 못한 정치조직은 혁명에 대한 배신으로 대중의 뒤를 노려왔다. 계급적인 인식을 해야 하는것은 삶에서 자신의 존재를 부각해야만이 가능하다. 자본주의사회의 바닥에 자리를 잡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노예의 신분에서 지배계급의 신분으로 도약해야 하는 지위를 가졌음에도 그들의 정치조직의 부재로 인하여 타락의 길로 떨어져 한 많은 세상에 술로 마음을 달래고 있다. 혁명에 대한 자신의 신분을 잊어 가는 노동계급의 모습에서 혁명은 마치 위로부터의 지시로 이루어진다는 망상으로 빠져 쁘띠부르조아의 사상인 테러리즘, 조급성, 책임회피, 관료주의, 위에서의 지시에 따라가는 순종적인 미덕 등등의 모습에서 민주주의 혁명의 길은 험란하게 멀어져갈 뿐이다. 선진노동자는 자신의 안전를 걱정하게 된다. 자신의 가족을 위한 노동에 다한 노력을 가짐으로써 혁명에 대한 열정보다는 차가운 현실에 몸을 맡껴 외면하고 제외하고픈 욕망으로 자신의 욕구를 달랜다. 관료주의의 힘은 이때부터 맹위를 떨친다. 쁘띠부르조아의 힘은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피지배계급의 힘을 약화시키고 분쇄하는데 주역으로 떠 오른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의 이득은 스스로 찾아내지 못하는 상항에서 오른쪽날개보다 절대적으로 작은 왼쪽날개의 날개짓은 애써도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깃털만을 날리는데 만족하고 있다.

 

이젠 각성의 시대가 왔다. 민주노동당의 쁘띠부르주아속성은 대중의 체험속에서 녹아 내리고 있지만 대안이 없다면 대중은 대안으로써 쁘띠부르조아정당의 보수성에 감탄을 하고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릴 것이다. 대안으로써 나타난것은 전위정당이며 계급정당으로써 사회주의정당의 출현인 것이다. 많은 선진노동자들의 갈망하는 사회주의 정치조직의 탄생을. 혁명에 대한 순수성을 간직하고 계급성을 인식하면서 대중과 함께 전선에서 사회주의 이념을 현실화하기 위한 노력의 대안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정당의 출현은 지배계급의 심장을 싸늘하게 만들어 줄것이다. 아직까진 그러한 정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젠 만들어야 하며 하나의 단체를 중심으로 해서 만들어야 하지만 그 안에서의 정치적인 입장의 자유로운 토론을 전제로 정치단체는 만들어져야 한다. 행동통일을 위한 민주주의적 원칙의 충실함은 당의 실현과 발전과정에의 모든 장애를 극복하게 된다.

 

당을 만들어야함은 선진노동자들은 인식하고 있다지만 현실화하기 위한 문제는 당의 형태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선진노동자의 활동이다. 당의 출현을 목마르게 기달리지 말고 현실에 대한 당의 모습을 실현하고자 한다면 당적활동을 해야하는 것이다. 당적활동은 당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강령과 행동규약 및 정치활동의 구체적인 방안을 가지고 활동을 이끌어야 하는것이다. 도깨비방망이를 이용하여 만들어 내는것이 계급정당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문제점은 써클적인 만남의 장으로써 그룹활동이였다면 강령의 출현을 기달리지 말고 만들어가면서 당적활동의 힘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선진노동자가 가고자하는 길은 멀고도 험란하다. 자본주의세상을 사회주의 세상으로 바꾸고자 한다면 창조적인 자신의 능력을 백분 발휘해야 한다. 차별이 없는 세상의 건설은 차별을 철폐하고자하는 노력이 존재할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당건설이라는 명분은 당적활동을 한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져야하는 것이지, 당건설을 위해서만이 당적인 활동을 배제한채로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혁명을 원하면서 혁명에 대한 활동을 방기한다는 것은 무엇으로 나타나는 것인지는 대중을 의식화 시킬수 있는 매개적인 역활을 수행하는 강령이 존재하는가라는 점이다. 대중을 혁명적인 의식화를 시킬수있는 것은, 대중을 사회주의 사회의 길로 나가는 것을 활성화 시키고,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매개고리는 강령인것이다. 강령이 현실적인 세계에서 사회주의 세계로의 변화를 추진하는 가교역활을 수행한다.

 

"요구들이 강령에 직접적으로 표현되든 가 아니면 암묵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조항'이든 간에, 우리의 실천적요구들은, 주어진 세력편성아래서 실현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현존사회제도와 양립할 수 있는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투쟁을 용이하게 하고 촉진시킬 수 있는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의 길을 닦을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고려에 따라 확증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재의 세력 편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 강령은 주어진 시기를 위해 쓰여지지 않는다.- 가능한 한 오늘날의 사회의 모든 우발적인 사건들을 포괄하여야 한다. 그것은 실천적 행동뿐만 아니라 선전을 위해서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요구들의 형태로 추상적 주장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가리켜야한다. 유토피아적 사변에 빠지는 일 없이 우리 스스로 세울 수 있는 실천적 목표들이 멀면 멀수록 더 좋다. 즉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대중에게 더욱 더 분명해질 것이다.-- 심지어 우리의 이론적 전제들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분명해질 것이다. 강령은 우리가 현존하는 사회, 현존하는 국가에 무엇을 요구하는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지,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러시아 사회민주주의 농업강령 중에서. 레닌 저작집2-1 전진출판사)

 

꿈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몫이다. 꿈을 해석하고 현실에 어떻게 나타나는 것인가를 바라보는 것은 사회주의자들이 아니다. 당건설의 목표는 하나의 정파를 만들어 가는 것이지만 그안에는 꿈을 이루고자 하는 여러가지 생각들이 존재하고 그 존재들을 하나로 통합 할 수 있는 토론이 중요하게 자리를 잡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 모습에서 핵심은 누가 힘을 가질수잇는 권위를 확보 할 수있는  결정권을 가지는 것인가부터 성립이 된다. 힘과 권위는 이글거리는 대중의 불꽃으로부터 나타나며 구름을 가르는 강령의 힘으로 태양의 따듯함을 보여줄때 비로서 태어난다.

 

선거라는 공간에 집착을 하는 어느 대중운동가들의 집단의 모습은 이젠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선거라는것은 부르조아정치일정의 부분이라는 형식으로 이젠 몇년에 한번식 얼굴마담을 바꾸는 고급술집의 주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줄을 데어서라도 참석을 해야 한다라고 강조를 함으로써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 정파도 존재 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치라는 것은 바르게 다스리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누가 다스리는가?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을 다스리는 것이다. 계급사회에서의 정치는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에게 대항하지 못하게 만들어가는것이 정치의 올바른 모양인것이다. 선거는 지배계급과의 모양새를 좀더 가다듬은 상태에서 표현되어 나오는 것이다. 선거에 첨여하고자 한다면 몇가지의 원칙이 존재해야 한다. 첫번째는 주체적인 역량의 모습이 갖추어져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부르조아들 처럼 인물의모양새로 보여주는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세상을 보여주어 그러한 세상을 세상을 바꾸고자함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회주의사상을 제대로 학습하고 실천을 한 선진대중에 의해서 만이 나갈 수잇는 것이다. 부르조아 사회의 정치의 모습의 핵심은 덩선이후의 모든 결과는 개인의 양심에 맞껴지는 것이기에 그것에 따르는 결과물은 동지의 사상적인 경향에 따라갈수 밖에 없는 것이기에 철저한 학습 과 실천을 담보하지 못한 외지 인물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가한다. 두번째로는 선거의 유세공간은 노동계급과 함게해야 한다. 대중의 선전선동의 목적은 노동계급이 지배자로써의  위치로 자리 바꿈을 외치는 것이다. 앞으로의 주인의 세상을 알리고자한다면 노동계급의 현장에서 선전선동이 필요하다. 역량이 남는다면 그 외지역에서도 가능하다지만  계급적인 존재의 모습과 대중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부수어나가기 위한 곳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만이 가장 열정적인 모습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세번째로는 이러한 부분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정치조직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삶에 가장 적극적인 개입을 통하여 스스로가 주인된 의식으로 무장하게 되는 그런 모습을 각인시킬수 있는 전위정당의 탄생은 필연이다. 선거투쟁은 어떠한 위치를 가지는가 하는것은 피지배계급의 정치조직의 힘이 어느 정도의 역량이 되는가에 나타나는 것이지 대중의 모습에 고무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선거를 통한 투쟁의 쟁점은 이미 특정한 시기의 모습에서 찾아 보기에는 힘들다. 대중이 선거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정치투쟁으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집중하고 있을 때 높아 졌음을 통계적으로보면 나타났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지만 현재에선 대중에 대한 선진노동자의 모습에선 현재 무엇을 집중해야 하는지는 인식을 해야 한다라고 판단된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실현하고자 한다. 선거를 위한 강령이라는 추잡한 이름의모습으로 대중을 더이상 현혹하지 말아야한다. 강령은 확정이 안되어진 상황이며, 당적활동을 하는 정치조직의 모습은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지 못했지만 대중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대중을 부르조아 정치일정에 끼워 맞추는 부속품으로 전락시키는 우매한 정치조직들이 존재한다는것은 살아있어도 살아 있음을 보여주지 못하는 좀비의 신세와 뭔가 다르단 말인가!

 

본인은 예전부터 꾸준히 부르조아 정치일정에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인 입장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주장해 왔었다. 선거는 더이상 혁명에 대한 매개고리의 역활을 할 수가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몇년에 한번 대선은 5년, 총선은 4년, 지방의회및 단체장선거는 4년, 이러한  일정에 따라 나타나는 습관적인 형태의 모습은 대중이 정치투쟁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의 의미를 둘 필요성은 없다. 차라리 그러바엔 평조합원운동을 통한 부르조아 및 관료지배질서에 타격을 줄수있는 점거파업을 할 수있는 역량을 키워 나가는것이 옳다. 할 수잇다면 지금이라도  기계를 멈추게 하고 대중의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정치일정에 따라가는 피지배계급의 입장이다. 

 

추신;
이제서야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출진을 축하한다. 조금은 늦었다.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나선것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찬성을 하고 같이 호흡을 하고 싶지만 아직은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노동해방실천연대라는 곳에 메여 있는 존재이기에 아직은 같이 할 수 없음을 안타가운 마음을 달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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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3/20 10:37 2008/03/20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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