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  2005/12/26 16:44

우에서 좌로

우에서 좌로 

 

 

한국의 정치 세력을 각기 계급적인 구도로 보면 첫 번째로는 한나라당으로서 지배계급중 보수중 최고의 우익으로서 수구세력으로서의 정점을 이른다. 이들은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 오로지 피지배계급의 저항을 물리치기 위한 제반의 노력을 하고자 하며 친일 파 잔존세력으로서 오로지 민족과 국가는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서 존재한다라고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이 절대적으로 침해를 받아서는 안된다라고 행동한다. 두 번째로는 열린우리당을 기준으로하는 중소자본가 계급을 대표하는 보수진영이다. 이들은 독점자본에게 대항하면서도 같은 자본가의 입장에서 자본가를 위한 정치 및 경제구조를 위한 활동을 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에서 자유경쟁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고자 노동자계급의 비정규직화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더 이상의 독점자본에 대항 할 수 있는 세력이 아니며, 프롤레타리아트의 적으로서 부르조아의 한 축을 형성한다. 한나라당과는 같은 부르조아세력이기 때문에 피지배계급의 투쟁이 격화가 되면 피지배계급을 혁명적인 진출을 막기 위한 세력의 형성을 위하여 하나가 될 수 있는 계급적인 존재들이다. 80년대의 독점자본이 수구세력에 대한 막강한 지원을 받을땐 그나마 독점자본에 대한 반발심이라도 존재했으나 80년대 중반의 노동운동의 발전에 따른 상대적인 위축감은 이들은 자본가라는 위치를 깨달게 해주었으며, 더 이상 한국의 자본에 흡수가 되어서 보수진영의 한 축을 형성한다. 세 번째로는 민주노동당이다. 이는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입장을 가지고 잇지 않으며 자본주의에 혜택을 받고 잇다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들이다. 노동관료, 노동귀족, 중소상인, 중소농민 등등 어느 정도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 물적인 여유가 있는 존재를 대변한다. 자본가계급을 대변하지는 않지만 자본가계급에게 수혜를 받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하고자 하지만 그들보단 물적인 기반이 취약한 관계로 부르조아로 발전하고자 하는 욕망과 현실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조금 더 낳은 조건으로 거래를 하고자 효율성, 합리성으로 무장된 타협과 협조라는 테두리를 의회라는 장소로 만들고자 한다. 이미 비정규직 문제에서, 농민들의 투쟁에서 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선진 노동자들은 알고 있지만 대중들은 아직도 그들의 계급적인 형태를 깨달지 못하고 있으니 이를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네 번째로는 특별한 정치조직을 건설하지 못하고 대중들의 투쟁을 따라 잡기 바쁜 자칭 사회주의자들의 그룹들이다. 아무리 노동자 세상을 건설하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어떠한 대안도 없이  87년의 '호헌철폐 직선제쟁취'라는 투쟁 속에서 나타나듯이 쁘띠부르조아들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답습하는 비정규직 철폐투쟁 속에서 매몰되어 노동대중의 투쟁을 한계 지우고 있다. 아직도 대중들의 투쟁이 패배주의에 만연하여 지역적으로 고립되오 있으며, 생존권투쟁이라는 낮은 경제적인 제 요구 투쟁으로 하고 있다라는점을 두고 있으나 실지로 대중들의 투쟁은 지금부터 시작이며, 패배주의는 자칭 사회주의자들의 생각뿐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노동조건의 문제는 비정규직의 문제로 표현되어 나타나면서 시작되었으며, 실지로 이들의 투쟁은 부르조아의 언론에 통제가 되어져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지역적으로 고립되었으며, 또한 그들의 요구수준을 처음부터 정치투쟁으로 할 조직화가 되어 있지 못한 관계로 가장 낮은 수준의 투쟁부터 이루어져 갈 수뿐이 없는 것을 이해를 못한 것이다. 오히려 써클속에서 반합법적인 활동을 하면서 그 안에 매몰되어 있는 조직원들이 이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패배한 현실이라고 단정지었다. 실지로 노동대중이 어떠한 물리력을 소모했던가, 아니면 개량속으로 만연된 낙원을 걸어갔는가 아니다. 오히려 쁘띠부르조아의 환상 속에서 이제 깨어나 걸음마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술에 물을 탄 듯이, 물에 술을 탄 듯이 두리 뭉실하게 넘어가려는 진보진영이라고 외치고 이를 대변한다고 하는 정치조직인 민주노동당은 더 이상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변자라고 자처 할 수 없음을 선진 노동자들은 알고 있다. 개량주의정당을 혁명의 한 축으로 이끌고자 민주노동당을 사회주의세력으로 만들고 싶은 끝없는 욕망은 아집이 되어서 한집에 살수 없는 것을 한 지붕으로 만들고자 노력하면서 단병호, 권영길씨 등등에게 여러말을 듣고자 노력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한탄 일뿐이란 것을 모르는 것은 오로지 전진과 해방연대들 뿐이다. 이미 대중들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실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재선거에서 여실히 모습을 보여 주었고, 실망은 자신들의 한탄에서 더욱 더 박차를 가하고 자신들만이 자신들을 지킬 수 있다는 모습으로 선회하여 더 이상 정치권에 기대는 모습에서 벗어나고 자 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모습은 이젠 자신들의 길을 걸어 갈 뿐이다.
 

개량주의 정당은 사회주의자들에겐 무엇으로 나타나야 하는가? 그것은 세가지 조건에서 바라 봐야 하는 것이다. 첫 번째가 어떻게 활용하는 가이다. 개량주의정당이라는 것은 그들의 계급적인 기반에서 중간에서 동요하는 쁘띠부르조아계급정당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들의 위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여과하여 피지배계급에게 전달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살리기 위해서  피지배계급의 피를 먹고사는 존재들이다. 즉 자본주의 체제안에서 이득을 얻고 자본주의체제가 무너질 땐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배계급에게 협박과 타협을 하기 위해서 대중의 투쟁을 볼모로 하여 자신들의 입지를 체제안에서 다지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의 시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대중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중간계급의 이데올로기로서 표현을 하면서 현실에 안주하고자 한다. 이들을 피지배계급에게서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선전과 선동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계급적인 모순을 설명해야 - 혁명의 시기에선 자신들의 모습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그 모습에서 대중들은 새로운 정치적인 경험을 하면서 우에서 좌로 한발 더 움직이게 된다. 실지로 혁명의 시기에는 대중은 전위들의 생각보단 한발짝 더 좌로 움직인다. - 그 모습을 대중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 일정한 연대가 필요한 것이며, 여기서의 주된 목적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혁명의 주체세력이 될 뿐이라는 점을 각인 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판단 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며, 그 기준점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을 대변하는 계급정당이 되어야 한다. 두 번째로는 개량주의정당의 힘은 무엇으로 표현되어지는 가이다. 이들은 합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투쟁의 명분만을 찾아  다니는 독수리 같은 존재들이다. 대중의 투쟁은 자신들의 힘으로써 활용하기 위해서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말을 잘 들어야한다고 늘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대하기 위해서 의회라는 정치 도구를 이용하여 그 안에서 그 힘을 가지면 다 가진 것 같은 환상을 퍼뜨리며, 타협과 협조라는 사상을 민족과 국가라는 이념으로 무장시켜 대중의 투쟁을 발목 잡아 우리 안에 호랑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개량화된 자본주의 세상에 남는 것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이 파견근로자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것뿐이지만 이들에겐 이 무기가 대중의 투쟁을 멈칫거리게 할 수 있다면 언제든지 지배계급에게 아부를 하고자 오른손을 내밀 것이다. 농민의 투쟁 속에서 나타낸 그들의 모습은 투쟁을 더욱 더 높이자 그때가 되어서 단식을 하다가 거리로 나오게 되었다. -예전의 누구의 모습이 생각난다. 민주화를 위해서 단식을 했던 모습이, 투쟁을 하는 현장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하면서 명당자리를 잡아 단식을 하는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투쟁이 격해져야 나와서 자중을 외치고 자신들을 믿어 달라고, 의회에서 활동하는 선진적인 모습을 보면서 2012년엔 대권을 잡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모습 속에서 이들은 결코 노동자계급의 힘을 통해서만 타협의 길이 더욱더 짧아 질 수 잇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피지배계급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러나 체제를 뛰어넘지 않는 한에서 중간계급의 개량주의 정당은 언제든지 자신들의 힘을 지배계급에게 대 타협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받아 갈 수 잇는 것이다. 세 번째로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부분을 앞에서 짧게 했지만 이들의 대표적으로 내세우는 것이 합리화와 효율성이라는 이념적인 표현으로서 모든 것이 그 안에서 해결하고픈 욕망으로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들의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타협과 협조에 있다. 물론 운동진영중에 대표선두주자인 NL친구들이 있다고 하지만 이들은 이미 쁘띠부르조아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변인을 자처하고 있으니 별 차이는 없다라고 해도 무방하다. 계급협조, 계급간의 타협은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합법이라는 테두리 속으로 가져오고자 하며, 투쟁의 힘을 지배계급에게 협박하는데 이용을 하여 더 많은 기득권을 얻고자 노력을 한다.  의회에서 의회를 통한 권력 획득을 위해서 투쟁의 쟁점을 법률제정이라는 곳으로 한정 지우고자 하며, 진정한 투쟁의 핵심인 의회 밖에서의 투쟁을 자제시키고자 노력을 하면서 타협이라는 법 제정 - 파견근로자에 대한에 대한 법률제정을 서두르고 있다. 법으로 나타내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강도가 약해지고 이들은 더 많은 환상을 대중에게 심어 줄 수 있으며,  환상을 대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르고자 할 수 있기 원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중간 계급에 대한 명확한 태도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선전 선동을 해야 하는 것이  선진 노동자의 몫이다. 그러나 중간계급에 대한 태도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잇기만 할 뿐이며, 비판보단 포용으로 일관하여 그들을 사회주의자들로 만들고자 험란한 여정을 하고 있으니 언제까지나 우리는 뒷북을 치고 다니게 만드는 것인지,  혁명은 없고 오로지 개량만이 남았다.

혁명에 다가갈수록 대중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존재를 무시하지 않는다. 자신의 계급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면 시킬수록 그들은 그 사이에서 자신들의 길을 찾고자 한다. 중간적인 계급의 존재는 방황을 하면서 지배계급에게 다가설수록 피지배계급의 투쟁의 산물을 더욱더 이용하고자 하면서 자신들의 품안에서 활동하게 꿈과 이상을 퍼뜨리고자 하며, 피지배계급은 자신들이 목적 의식적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투쟁의 힘은 더욱더 좌측으로 이동하게 될 수뿐이 없어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어 수호하고자 하지만 이데올로기적인 한계로 인하여, 그 이익을 중간계급에게 헌납한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다. 숨져간 영혼 강물되어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흐를 때 자칭 선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안주하기를 바랄 뿐  더 이상 혁명에 대한 이상은 사라지고 떠 먹여주기만을 간절히 원할 뿐이다. 선진 대중의 자발성이 사라지고 뚜렷한 대안을 제시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은 원칙조차도 사라지고 대안이 아닌 대안으로서 투쟁을 이끌어 가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타협이라는 글귀 속으로 패배와 한탄 속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잇다. 노무현 정권과 의회라는 부르조아 정치기구를 이용하는 노동관료와 민주노동당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어떠한 정치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잇는 관계로 그들은 대타협이라는 명분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건과 시간을 가지고만 떠들고 있으니, 실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의 내용은 정규직과의 차별을 철폐, 같은 근로조건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무시를 하고 법으로만 해결하고픈 그들의 앙상한 노력은 법이라는 만능잣대로서 노동자를 자본주의 틀 속에서 안주하게 만들고자 하는 신선한 발상이다. 이를 도와주고 있는 민주노동당내의 좌파계열은 폭넓은 대중의 지지를 얻고자 대중을 기만하는 최전선에서 복무를 하고 잇다. 기회주의 사상을 버리고자 한다면  조직의 변화를 가져와야 하고, 그것이 안 된다면, 그 조직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직의 건설에 대안을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변화를 두려워 할 사회주의자들은 없을 것이다. 자신이 그 조직에서 이익을 얻기 때문에 벗어 날수 없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노동자 계급은 현재도 스스로 투쟁을 이끌어 가고 있으며, 그 투쟁에 고무가 되면서 하나하나 깨어나고 있다. 그들의 투쟁은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자본주의세상을 뒤집어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자 자신들을 채찍질을 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자본주의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현재는 노동자투쟁이 퍼져나갈 수 있는 명분과 의지가 있으며, 그들의 조건이 더욱더 부채질을 하고 있다. 혁명의 조건은 경제적인 결핍으로 인하여 대중이 스스로 뛰여 나갈 수뿐이 없는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기본이다. 이미 기본은 이루어 졌다 노동자대중은 일어서서 뛰어갈 차비를 차렸다. 오로지 지금 필요한 것은 혁명적인 노동자 계급의 정치조직으로서 이들과 함께 싸우고, 그들에게 뚜렷한 전망과 대안을 제시해야 하는 혁명정당이 필요하다. 언제나 필요하지만 대중의 투쟁은 이를 더욱더 필요하게 만들어가고 잇다. 선진 대중이라고 자칭 사회주의자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잇는가. 마음속으로만 혁명정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현실에서는 자신들 속에서 안주하는 써클주의와 선후배사이라는 명분 속에서 벗어나고자 하지 않고 있으니, 앞서간 열사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지금 노동해방의 그 날을 생각만 하고 잇다.

같은 노동자계급이라고 정규직 노동자에게 투쟁은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정규직 노동자에겐 조합주의 투쟁으로서 이익의 분배를 원할 뿐 더 진전을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들이 비정규직으로 떨어지기 싫어하는 마음과 없는자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제 형태로서 부르조아와 타협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그들의 지금의 모습일 것이다. 물론 혁명의 시기에는 바뀔수도 있지만, 더 이상 떨어지기 싫어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투쟁에 대한 집착은 찾아보기 힘들고 방기하고 벗어나서 더 쉬운길로 돌아가는 모습은 투쟁의 현장에선 진취적으로 투쟁하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자본주의는 투쟁하는 피지배계급만이 자신의 밥그릇을 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계급사회는 투쟁하지 않는 계급에겐 밥그릇을 채울 국물도 빼앗아 버리는 곳이다. 정리해고라는 틀 속에서 칼날위서 춤을 추는 무당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는 정규직 노동자계급은 타협과 협조라는 사상으로 무장 할 때만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지나가고 난 후에는 투쟁만이 길이었다고 생각을 했다고 해도 경험으로 만족 할 것이다. 현실에선 이들은 이미 투쟁을 방기하고 있는 관계로 - 이미 부르조아에게 일부의 이익을 분배받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 혁명의 주축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체제에서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이 체제를 부수어 나갈 구 밖에 없는 계급의 선도적인 역할이 필요한 것이며, 이는 부르조아에게 분배를 받고 있는 일부 기득권층에겐 의미가 없는 말이다. 혁명의 모습에선 언제든지 가장 핍박받던 계급이 선도적인 투쟁을 하고 이끌어갈 수뿐이 없으며, 이 계급만이 혁명에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할 수 뿐이 없다.  현재는 비정규직 노동자-파견근로자로 이름이 정해진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 나갈 존재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이 비정규직 철폐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배계급의 양보를 통한 정규직노동자로 등록이 되기 위해서 생산성을 높여 더 많은 이윤을 남겨줄 때 가능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 세계가 자본주의로 변해버린 세상에 그리고 이미 자본가들의 경쟁은 국경과 민족과 사상을 초월하여 자신들의 이윤을 위하여 총칼을 앞세워서라도 더 높은 잉여를 찾아내기 위하여 자국의 노동자계급을 분열시킴으로서 

비정규직 노동자계급의 비율이 높아 졌다. 이미 세계화 속에서 정규직 노동자계급은 비정규직 노동자와는 별개의 모습이라고 바라보는 것이 올바르며 그들의 존재를 중간계급의 한 형태로 보는 것이 정확한 것이다.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을 개량주의정당, 쁘띠부르조아 정당이라고 보는 것은 정당하다. 이들은 더 이상 혁명의 원동력이 아니며 노동자대중을 개량이라는 틀 속으로 매몰시켜 자신들의 수권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고픈 여우일 따름이다. 호랑이가 없는 곳에선 여우가 왕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리고 있으며, 여기서 기생하는 제 사회주의 그룹들은 또 다른 기생충으로 변화한 기득권의 세력으로 남을 것이다.

동지들이여! 동지들은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쁘띠부르조아계급의 타협과 협조라는 명예를 뒤집어쓰고 효율성이라는 감투를 가지고 있는 정치조직을 사회주의 조직으로 만든다는 자신감은 실지로 동지들을 또 다른 기생충으로 변화하는 동력으로 남을 것이며, 개혁이라는 미명으로 혁명적인 투쟁의 힘을 꺾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고 싶은가?

지금의 정세는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자본주의 세계에 철퇴를 내리기 위해서 선전포고를 시작했다. 노동자 계급에게 필요한 것은 쁘띠부르조아의 정치조직이 아니다. 자신들의 계급적인 입장을 옹호하고 선도적인 투쟁을 지휘할 수 있는 혁명정당이 필요하다. 이미 노동자에겐 경험적으로도 쁘띠부르조아에게 실망을 하고 있으며, 더 낳은 조건의 좌익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그들은 보수정당에게 차라리 기대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는 피지배계급에겐 도나 모나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이 승리하기 위해선 객관적인 조건이 아무리 성숙했다고 하더라도 주관적인 요건이 갖추어 있지 않으면 승리는 없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겐 필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필요한 것과 같다.  혁명과 사상을 이끌어 나갈 조직, 전국적인 정치조직으로서 혁명정당인 전위조직이 필요한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대중의 힘을 등에 두어 조직을 건설 할 수 있는가! 또 다시 10년의 세월을 보낼 것인가!  지금부터도 늦지 않았다. 진군의 북소리를 울려 퍼뜨리기 위해서 당 건설이라는 불꽃을 태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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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26 16:44 2005/12/26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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