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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73회 – 명절이라는 폭력 속에서

 

 

 

1

 

명절이 다가오면 의례적인 기사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명절에 하는 ‘언제 결혼 하냐?’ ‘취업은 했냐?’ 같은 덕담, 요즘 세대들에게는 악담”

“추석 명절 스트레스 관리법”

“달라진 명절 분위기, 가족들끼리 따로따로”

“시댁 차례상 피하기 위해 가짜 깁스 며느리”

변화하는 세태를 반영하는 척하는 기사들은 정작 변화한 현실은 반영하지 못한 채 이전에 썼던 기사들만 재탕 삼탕 할 뿐입니다.

아직도 명절이면 대부분의 국민들이 고향을 향해 고난의 행군을 하고, 고향에서는 오래간만에 만난 친척들이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그런 가운데 애뜻한 가족애와 함께 세대 간 갈등도 불거진다는 이미지를 꾸준히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위를 보면 명절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명절에도 일하는 사람들은 무지무지 많습니다.

이주노동자들에게는 남의 나라 명절이 그저 쉬는 날일뿐입니다.

도시가 고향인 사람들에게 ‘고향을 향한 고난의 행군’은 옛날이야기처럼 들릴 뿐이고

혼자 사는 사람들에게 명절은 무료하게 시간을 때워야하는 기간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명절만 되면 만들어진 거짓 이미지를 들이부으면서 다수의 폭력을 행사합니다.

 

 

2

 

추석이라고 평소와 특별히 다르지 않았습니다.

새벽 일찍 일어나서 사랑이와 산책을 하고는 하우스에 들어가 일을 했습니다.

하우스가 너무 더워서 일을 하기 어려워지면 밖으로 나와서 주변 텃밭을 살펴봅니다.

그렇게 오전 일과를 마치면 샤워를 하고 잠시 쉬었다가 점심을 먹었습니다.

오후에는 동생들과 함께 근처에 있는 아버지 산소에 추석 인사를 갑니다.

그렇게 간단히 추석 차례를 마치고는 다시 집으로 와서 동영상이나 영화를 보며 쉽니다.

동생들과의 저녁 약속을 위해 나서려는데 근처에 사시는 분이 “나눠 먹으려고 만들었다”면서 반찬 몇 가지를 갖고 오셨습니다.

홀로 외롭게 추석을 보내시는 분에게서 뜻밖의 추석선물을 받아들고는 기분이 아주 좋아졌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동생네 가족들과 함께 근처 식당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으며 기분 좋게 술도 한 잔 했습니다.

모처럼 맛있는 것들을 먹으며 즐겁게 술을 마셔서 그런지 다음날 숙취도 별로 느끼지 않은 채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하우스에 들어가 일을 조금 하고는 주변 텃밭에 겨울채소 모종을 심으며 조금 뒤늦은 파종을 마쳤습니다.

평소와 그리 다르지 않은 추석이면서도 따뜻하고 즐거운 추석이었습니다.

 

 

3

 

추석 연휴 동안 sns를 통해 세상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자기과시와 홍보, 주장들이 넘쳐나는 곳에서

추석에도 일을 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이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수다스러운 온갖 얘기들 속에서 그 작은 목소리를 들으며

따뜻하고 즐거운 추석을 보낸 제 얘기가

다수의 폭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워졌습니다.

 

누군지 모르는 그분들의 얘기를 듣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이렇게라도 귀를 기울여 그분들의 목소리를 담아두는 것으로

조그만 위안을 삼아봅니다.

 

 

 

(전진희의 ‘비가 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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