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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는 라디오 다시!’가 100번째 방송을 하게 됐습니다.
14년 동안 읽는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다섯 번째 맞이하는 100회 방송입니다.
첫 시즌인 ‘내가 우스워 보이냐?’는 100회 방송을 끝으로 마무리를 했었는데요
그때는 ‘지치다’는 느낌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을 향해 뭔가 소리를 내고 싶어서 시작한 방송이었지만
세상의 차가운 현실만 확인하고 끝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100회까지는 해보자”고 이 악물고 버티며 2년 5개월을 버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두 번째 시즌인 ‘들리세요?’의 100회 방송은 공동 진행자였던 꼬마인형과 함께 진행했었습니다.
삶의 구렁텅이에서 일어서려는 저를 응원 해주고 질책도 해줬던 꼬마인형 덕분에 조금씩 나아가려고 노력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방송을 다시 보니 꼬마인형이 더 그리워지고, 돌아가신 아버지 모습도 보여서 가슴이 애잔해지고,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하는 성민이 모습에도 뭉클함이 느껴집니다.
세 번째 시즌인 ‘살자’의 100회 방송은 좀 복잡 미묘했습니다.
지옥에서 빠져나온 저는 행복을 느끼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폐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었고, 주위에서는 아프거나 갑작스럽게 죽은 사람들의 소식이 들려 왔기 때문입니다.
그 묘한 긴장감이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됐고, 읽는 라디오를 계속 할 수 있는 동력이 됐던 것 같습니다.
들풀님이 진행하셨던 네 번째 시즌인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는 100회가 마지막 방송이었습니다.
자꾸 내면으로만 숨어버리는 저를 도와주기 위해 들풀님이 나서서 이런저런 노력들을 많이 했던 방송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을 진행하면서 들풀님은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느끼게 됐다고 하셨지만, 저는 세상으로 나가지 못한 채 제 자리에서 맴도는 느낌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들풀님은 더 진행하고 싶어 하셨지만 결국 제 고민에 발목이 잡혀 방송은 100회에서 마치게 됐었죠.
지금 돌아보면 들풀님에게 참으로 미안한 마음이 많이 생기는 방송입니다.
이제 다섯 번째 시즌인 ‘다시!’가 또 100번째 방송을 맞았습니다.
100회 방송이라지만 솔직히 무덤덤합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100회 방송을 맞이하는 소감을 한마디 해주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무심한 척 하며 “100회까지 진행하려면 2년 정도 걸리는데요, 14년을 진행하다보니까 이 정도는 그냥 가볍게 되는 것 같습니다”라며 으스댈 수 있을 것 같네요. 하하하
돌아보면 나름대로 치열하게 노력해왔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밀려나기를 반복해왔지만
그 과정들 속에서 버티는 힘과 유연해지는 능력을 쌓을 수 있었던 과정이기도 합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100회를 맞이한 ‘읽는 라디오 다시!’는 그렇게 더 이어가보려고 합니다.
2
오랫동안 읽는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많은 분들과 접촉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분들과 소중한 인연이 만들어졌습니다.
연결된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은
한 분 한 분이 다 생생하게 기억난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 소중하고 정겨워지기도 합니다만
오늘은 그 분들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 방송과 인연을 이어왔던 분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읽는 라디오를 오랫동안 지켜봐왔던 분들은 지난 시즌인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의 진행자로서도 기억하실 텐데요
오래간만에 들풀님의 따뜻하면서도 따끔한 얘기를 듣고 싶어서 모셨습니다.
성민이 : 어서오세요, 들풀님.
들풀 : 오래간만이네요, 반갑습니다.
성민이 : 지난 시즌을 마치고는 단 한 번도 찾아오시지 않으셨어요. 조금 서운하던데요. 혹시 제가 강제 하차를 시켜버려서 삐졌나 싶기도 하고...
들풀 : 하하하, 조금 삐졌죠. 솔직히 그때 더 진행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기는 했어요. 읽는 라디오라는 것을 진행하면서 세상의 소음에 흔들리지 않으면서 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방법을 배웠으니까요. 그래서 참 소중하고 고마웠어요. 그런데 성민씨 입장에서 생각해보니까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제 욕심을 내려놓기로 했건 거죠.
성민이 : 결국 저 때문에 강제하차 했다는 얘기네요. 그래서 이후에는 참여도 하지 않으시고...
들풀 : 그 이후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면서 진행자에서 애청자로 다시 돌아가니까 읽는 라디오를 접하는 맛이 달라지더라고요. 뭐랄까, 몸과 마음에 와 닿는 느낌이 달라졌다고 하면 이해하시려나? 좀 더 편안하고 푸근한 느낌이랄까... 출렁거리는 그 가벼운 반동에 몸과 마음을 맡기고 있으면 편안해져요. 그것만으로 충분했어요. 제가 굳이 참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편안함을 느꼈달까. 성민씨도 누군가 일부러 애써 찾아주는 수고로움을 즐기시지 않잖아요?
성민이 : 아, 왜 이러십니까? 저도 사람의 온기가 그립습니다. 헤헤헤. 기록을 찾아보니까 들풀님이 읽는 라디오에 처음 사연을 보내신 것이 2013년 3월 25일이더라고요. 그때는 ‘내가 우스워 보이냐?’를 진행할 때였는데... 그때부터 아주 가끔씩 사연을 보내주시면서 저를 위로해주시기도 하고 따끔하게 질책을 해주시기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읽는 라디오라는 것을 계속 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들풀 : 오래됐네요, 그쵸? 읽는 라디오의 부침을 다 지켜봐왔으니까요. 처음에는 저희처럼 별 볼일 없이 비루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솔직한 얘기를 해주시는 것이 좋았어요. 세상에서 관심을 가져주지 않은 이들의 얘기였기 때문에요. 그래서 성민씨에게 힘이 되 주고 싶었고, 가끔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이면 힘내라고 모진 얘기도 했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제 생각이 짧아도 너무 짧았어요. 나중에 제가 직접 읽는 라디오를 진행하게 되면서야 이것을 진행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벅찬 것인지를 알게 됐어요. 그것을 이렇게 오랫동안 해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제가 배워야할 것이 너무 많았어요. 그때 성민씨의 내공에 대해 정말 감탄했고요. 그런 사람한테 제가 감히 위로와 충고를 해댔으니...
성민이 : 아, 아, 우리 서로 지나친 자화자찬은 삼갑시다. 너무 속 보이잖아요. 헤헤.
들풀 : 이 얘기도 하고 싶네요. 제가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를 진행할 때 롤모델로 삼았던 것이 꼬마인형이에요. 두 번째 시즌에서 성민씨와 공동 진행자로 참여하셨죠.
성민이 : 아, 꼬마인형! 정말 잊을 수 없는 존재죠. 에너지 팍팍 넣어주면서 저를 다시 일어서게 만들어줬으니까요.
들풀 : 저도 그 에너지가 너무 부러웠어요. 따뜻하기는 하지만 조금은 삭막했던 읽는 라디오에 살아 움직이는 활력을 불어넣었으니까요. 제가 성민씨의 제안을 받아들여 읽는 라디오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런 삶의 활력을 불어넣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정말 어렵더라고요. 꼬마인형의 멘트들을 자주 보면서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러면서 ‘나도 나이가 들었나?’ 싶었어요, 그런 에너지가 안 나오니까. 그래서 조금 좌절도 하고 그랬었는데...
성민이 : 들풀님만의 에너지가 있으니 그걸 느껴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들풀 : 그래요, 그때 성민씨가 그랬죠. 그러면서 슬럼프를 조금씩 극복했었죠. 그런 과정들을 거치고 나니까 꼬마인형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스럽게 느끼겠더라고요.
성민이 : 저도 그 힘과 에너지를 다시 느낄 수 없는 것이 너무 아쉽네요. 그 짧은 인연 속에 참 많은 것을 주고 갔는데...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맹숭맹숭한 방송이 되 버렸네요.
들풀 : 아니요, 저는 지금 방송에서도 또 다른 힘과 에너지를 느끼고 있어요. 꼬마인형이 뿜어냈던 그 열정과는 다르지만... 뭐랄까... 요즘 세상이 엄청 요란하고 거세게 요동치잖아요. 그런데 이곳에 오면 그런 세상과 달리 편안하고 포근해요. 그렇다고 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고 혼자만의 은신처로 숨어든 것도 아니잖아요. 거친 세상을 향해 열려 있으면서도 편안함을 유지하려면 그 거센 파도만큼의 힘과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것이 읽는 라디오의 최고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성민이 : 아이고, 또 자화자찬이네요. 들풀님이라면 뭔가 따끔한 얘기를 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들풀 : 아까도 얘기했잖아요. 이곳은 제가 성민씨를 위로하고 격려해줘야 할 곳이 아니라 제가 위로받고 격려 받아야 할 곳이에요.
성민이 : 들풀님이 첫 사연을 보내주셨을 때 이런 얘기를 했어요.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가슴 속에 꽉 차 있는데, 그 얘기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누군가에게 숨기고 싶어서 가슴 깊숙이 넣어두고 있는 얘기를 꺼내서 햇볕을 쬐어주어서 고맙습니다.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얘기를 들려줘서 고맙습니다.”
저는 그 말이 너무 고마웠거든요.
그리고 몇 달 후에는 이런 얘기도 해주셨어요.
“불편한 얘기를 솔직하게 하는 것이 힘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얘기를 매번 펼쳐놓기만 하는 것은 투정일 뿐이지 않을까요? 친한 친구를 만날 때마다 ‘요즘 힘들어 죽겠어’라는 얘기를 계속 들어야 한다면, 진행자님은 그 친구에게 무슨 얘기를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 얘기를 듣고는 정신이 번쩍 뜨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그때 들풀님의 얘기를 다시 곱씹어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가슴 속에 꽉 차서 꺼내놓지 못하는 얘기들이 많을 텐데, 내 가슴 속에는 이제 그런 얘기들이 들어있지 않거든요. 그래서 맨날 이곳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에 대해서만 얘기하는데, 그런 얘기가 누군가에게는 투정으로 들리지 않을까?
들풀 : 성민씨, 그것은 저도 마찬가지네요. 시간이 흐른 만큼 우리가 변했다는 것도 인정해야할 것 같아요. 성민씨가 항상 하는 얘기가 있잖아요. ‘과거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고요. 지금 읽는 라디오가 해야 될 일은 그런 것이 아닐까 싶네요.
성민이 : 앗싸~ 역시 들풀님의 따끔함은 제게 힘이 됩니다. 오늘 저를 수다 떨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들풀 : 제가 고맙죠.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마디가 더 하고 싶은데요. 오늘 방송이 다섯 번째 100회 방송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제가 계산을 해보니까 지금까지 진행된 읽는 라디오를 다 합치면 오늘이 602회째 방송이더라고요. 100회 방송으로는 다섯 번째이지만 또 하나의 100회 방송이 숨어있었던 거죠. 그 속에는 뭔가 또 다른 것들이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봤습니다.
성민이 : 어, 그래요? 앞으로 그것이 무언인지를 느낄 수 있도록 더 노력해봐야겠네요. 즐거운 시간 함께 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들풀 : 네, 즐거운 시간이었네요.
3
고추건조기가 쓸 일이 없어서 중고거래로 내놓았습니다.
고장 한 번 없이 잘 써왔던 거였지만 오래된 것이어서 싼 가격에 올려놓았더니
몇 분이 물건을 보러 오셨습니다.
건조기의 상태를 요모조모 살펴보시면서 이런저런 질문들을 하는데
사소한 문제들을 지적하거나 오래된 제품임을 재차 강조하시더군요.
그리고 가격을 논의하는 단계에 가서는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는 바람에 어의가 없어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중고라서 싸게 내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분들은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더 깎아보려고 툭툭 태클을 거는 겁니다.
그분들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조금 불쾌하더군요.
그렇게 건조기는 팔지도 못한 채 그분들을 돌려보내고 나서 제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나는 사소한 이익을 위해 남을 불편하게 한 적이 없을까?”
ott에서 예전 영화를 보는데 여주인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젊고 예쁜 여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이야 놀랄 일이 아니지만
나이 든 그 배우의 모습만 알고 있는 저는 젊었을 때 그 모습이 너무 화사해서 다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탱탱했던 젊은 날의 모습이 나이 들어 활기를 잃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풍기는 이미지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는 겁니다.
깐족거리는 젊은 날의 유재석씨의 영상을 봤을 때 지금의 유재석씨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던 것과 비슷했습니다.
유재석씨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품이 넓어지고 여유로워지는 인상으로 변했는데, 그 배우는 화사하고 단아했던 젊은 날의 모습은 사라지고 도도하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변해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게 또 물어봤습니다.
“너는 어떤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니?”
100회 방송을 준비하면서 지난 14년의 읽는 라디오를 돌아봤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는데 참 많은 변화들이 있었습니다.
그 변화의 발자취들을 돌아보며 지금 이곳은 어떤 곳인지를 다시 살펴보게 됩니다.
변한 것은 무엇이고 변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애초에 가고자 했던 방향과 지금 향하고 있는 방향은 어떻게 다른지
그동안 나는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
이런 점들을 심각하지 않게 생각해봤습니다.
읽는 라디오라는 것이 제게는 거울과 같은 존재입니다.
제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14년 동안 꾸준히 들어준 존재였고
제가 힘들 때 묵묵히 곁에 있어준 존재였고
제가 흔들릴 때 따끔하게 한마디도 해줄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런 녀석을 지긋이 바라보며 진지하게 물어봤습니다.
“나 잘 해나가고 있는 거야?”
(류금신의 ‘또 다시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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