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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2회 – 장마가 따뜻해지는 날

 

 

 

1

 

법적으로 나이를 계산하는 방식이 바뀌면서 이래저래 말들이 많습니다.

입학이나 입대, 취직 같이 민감할 수 있는 시기를 다 지난 저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데다가

그런 변화가 실제 사회생활에서도 기자들이 떠드는 것만큼 큰 의미가 있겠나 싶기는 합니다.

 

사실 저는 제 나이가 몇 살인지 모릅니다.

태어난 해를 떠올려서 얼추 계산하면 금방 나오기는 하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나이를 잊고 살아갑니다.

 

예전에 노동운동을 할 때도 나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위아래로 서 너 살 정도는 서로 동지적 관계로 편하게 지냈고

서열관계를 극도로 싫어하는 저는 서 너 살 차이는 쉽게 무시하면서 말을 놓고 지냈거든요.

이렇게 지내면 가끔 싸가지 없다는 얘기를 듣기는 하지만 서로 친해지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저보다 나이 많은 이들은 저의 그런 행동을 용인해주는데 저보다 나이 어린 이들은 저한테 그렇게 쉽게 대하는 경우가 많지 않더군요.

저랑 열 살 가까이 차이나는 동지가 어느 날부터 존칭을 빼고 제 이름만 불렀는데, 저는 그게 좋아서 서로 그렇게 이름을 부르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 동지가 저를 부를 때 ‘형’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렇게 호칭이 바뀐 것에 대해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추측컨대 주위에서 뭐하고 한마디 한 것 같았습니다.

서로가 편하고 좋아서 자연스럽게 정리된 호칭도 주위에서 곱지 않은 눈으로 보면 서열관계로 원상회복하는 현실이 우습더군요.

 

그 이후 나이가 마흔이 넘어가기 시작하면서 저는 나이를 잊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밀려나기 시작하며 사람들과의 관계가 사라져버린 것도 이유겠지만

의식적으로 나이를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마흔이 넘으면서부터는 왠지 죽음을 향해서 한 해 한 해 다가서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나이를 세는 것이 싫어졌고

한 살이라도 많으면 형님 동생하면서 서열을 정하려는 것도 싫어서 나이를 잊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특별히 불편하거나 그렇건 없었습니다.

가끔 사람을 만날 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을 받기는 하지만 “오래 전에 마흔은 넘은 것 같은데 그 다음부터는 계산을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요”라고 대답하면 그쪽이 머쓱해져서 더 이상 묻지 않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코로나가 유행할 때 백신접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이를 계산해보니 제 나이가 쉰이 넘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뿐 저는 지금도 제 나이가 몇 살인지 모릅니다.

 

사랑이랑 같이 산책을 하고 있으면 가끔 사람들이 사랑이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그때마다 하는 질문은 “견종이 뭐예요?”랑 “강아지 몇 살이에요?”가 대부분입니다.

어릴 때 사랑이 견종을 보고 데려온 것이 아닌데다가 제 나이도 모르는데 사랑이 나이를 계산하며 살아갈 리도 없어서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모른다고 하거나 적당히 대답하고 넘어가버립니다.

사람이든 개든 왜 이렇게 출신성분과 나이에 관심들이 많은 건지...

 

 

2

 

어렸을 때 학교 선생님의 칭찬은 온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뿌듯함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칭찬을 듣는 일은 나이와 반비례하더라고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던데.. 아무쪼록 살면서 더 많은 칭찬을 해야 하지 싶어요. 칭찬을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칭찬을 하는 사람까지 흐뭇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ㅎㅎ

서로에게 칭찬이나 덕담을 자주 하게 되면, 꿉꿉한 장마를 뽀송뽀송하게 잘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민님의 글은 늘 따뜻한 모닥불을 떠올리게 합니다.^^

 

 

지난 방송을 보시고 곰탱이님이 댓글을 남겨주셨습니다.

가끔씩 찾아와서 편안한 메모를 남기고 가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좋습니다.

그 메모를 보며

이곳이 무인도가 아니라는 것도 확인하게 되고

따뜻한 온기가 마음을 건드리기도 하고

그 온기로 세상과 사람들을 편안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고

그것이 동력이 돼서 읽는 라디오를 10년 넘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웃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입니다.

 

 

3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날씨가 더워서 선풍기를 틀어놓고 지냅니다.

아직 에어컨을 켤 정도는 아니어서 선풍기로만 지내고 있습니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편안하게 tv를 보고 있는데

사랑이가 슬글슬금 선풍기 앞으로 가서 자리는 잡고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차 싶었습니다.

저는 침대 위에 누워있고

사랑이는 바닥에 누워있는데

선풍기는 제 기준으로 높이가 높여져있었던 겁니다.

 

얼른 침대에서 내려가서 선풍기 높이를 낮추고 방향도 사랑이쪽으로 향하게 조절했습니다.

한 방에서 같이 지내고 있으면서도 사랑이도 더울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던 겁니다.

그저 묵묵히 저를 따르는 사랑이가 사랑스럽다고만 생각했을 뿐

사랑이가 뭘 원하고 어떤 고충이 있는지를 세심하게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주위에 익숙한 관계들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배려하며 살도록 노력해야겠네요.

이상은의 ‘둥글게’ 들으면서 오늘 방송 마치겠습니다.

같이 시간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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