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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1회 – 장마는 시작되고...

 

 

 

1

 

국민학교 5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일주일에 한 번씩 일기 검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지만 그 당시에는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일기 검사를 하면서 매번 끝에 한두 줄씩 메모를 남기셨습니다.

 

 

하루의 생활반성을 솔직히 잘 표현했군요. 글짓기를 연습하면 좋은 작품이 나오겠어요.

 

성민이 일기 내용을 보면 “참 진지(내용이 알차고 차분한)하다”고 표현해 주고 싶을 때가 있어요. 허나 못쓴 날의 일기를 공책을 띠지 마세요.

 

성민이가 만든 감자튀김을 선생님도 같이 먹었드라면 얼마나 좋을까? 참으로 꿀맛 같았을 거야, 그렇지?

 

 

이런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나서는 일기를 쓰고 제출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 됐습니다.

그때 엄마가 돈 벌러 일본에 자주 가시곤 했었는데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일기에 쓰면 선생님은 제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주시기도 했습니다.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성민이의 마음, 선생님은 알 수 있어요. 엄마가 오실 때까지 훌륭한 아들, 착한 형이 되도록 항시 노력하세요.

 

엄마가 오시니까 성민이 무척 기쁘겠네요. 어른스럽게 언니노릇 하느라 고생 많이 했지요. 효도하는 어린이, 착한 어린이예요.

 

 

친구들과의 이런저런 트러블이 생겼을 때도 일기에 쓰면 선생님이 저를 응원해주셨습니다.

 

 

친구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성민이는 착한 어린이예요.

 

선생님은 성민이를 알고 있어요. 엄마가 입혀주는 데로 그래도 일본 옷을 입고 있는 걸. 성민이 마음속에서나 그 일본 사람들을 미워하면 되는 거예요.

 

 

매번 칭찬이나 따뜻한 포옹만 해주신 것은 아니어서 고쳐야 할 점이 있으면 부드럽게 지적도 해주셨죠.

 

 

글씨연습이 잘 안되나 보죠. 곱지 않드래도 또박또박 썼으면.

 

방학계획을 세울 때 일어나는 시간을 정하여 엄마에게 깨워 달라 해서는 버릇을 고치도록 해보세요.

 

 

오래간만에 어릴 적 일기장에서 선생님의 글들을 읽으니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그때부터 일기 쓰는 습관이 생겨서 20대 초반까지 계속 일기를 썼었고

지금 이렇게 읽는 라디오를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것도 그때의 영향입니다.

 

정규수업이 끝나면 희망하는 아이들을 모아서 붓글씨를 가르쳐주시기도 하고

독후감 숙제를 참고서에서 베껴서 냈을 때는 조용히 저를 불러서 아무 말 하지 않고 다시 쓰게 하시기도 하고

항상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화내는 모습 한 번 보이지 않았던 선생님이었습니다.

 

나중에 고등학교 때 동창들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뵀던 적이 있지만

그 이후 선생님과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살아계시면 많이 늙으셨겠죠.

그때 선생님보다 훨씬 나이가 들어버렸지만

아직도 ‘착한 성민이’라는 칭찬에 가슴이 벌렁이는 걸 보니

사랑 가득한 칭찬의 힘은 대단하네요.

 

누군가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일이 요즘에는 sns라는 형식으로 아주 흔해졌습니다.

그 일기들을 읽으면서 ‘좋아요’ 한 번 누르거나 댓글 한 번 쓰는 것도 점점 쉽지 않아지고 있지만

가끔은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을 담은 따뜻한 댓글을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안개는 가장 낮게 뜨는 구름이라 생각할 수 있다. 층운이라는 특색 없는 구름층이 땅에 바짝 붙어서 생긴 것이 안개다. 순수주의자라면 구름으로 인정받으려면 일정 수준의 고도가 필수적이며, 따라서 안개는 진정한 구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 구름감상협회 사람들은 순수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는 안개를 몸을 낮추어 땅 위로 우리를 찾아온 하나밖에 없는 구름으로 인정하고 거기에 감사한다. 안개는 풍경을 숨김으로써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개빈 프레터피니의 ‘날마다 구름 한 점’이라는 책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이 책은 구름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사진들로 가득했는데

그 속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표현을 만났을 때

마음이 경건해지기까지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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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사는 이곳은 바다가 비교적 가까이 있고 한라산 중산간 지역으로 올라가는 오르막지형이라서 안개가 자주 낍니다.

짙은 안개가 꼈을 때의 몽롱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몸을 낮추어 땅으로 내려온 구름이 풍경을 숨김으로서 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고 표현하니

구름을 타고 다니는 신선이 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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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드물게

안개가 걷힌 후

무지개가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그 아름다운 모습에 마음이 환해지면서도

나를 감싸던 어떤 기운이 떠나버려서 허전한 아쉬움이 남기도 하네요.

 

 

3

 

장마가 시작됐습니다.

그동안 타지역과 달리 비교적 선선한 날씨를 즐기고 있었는데

빗줄기와 함께 덥고 습한 날씨가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부랴부랴 선풍기를 꺼내서 틀고 여름이 시작됐음을 실감합니다.

 

빗줄기는 계속 오락가락 하고

덥고 습한 날씨에 몸 컨디션이 살짝 다운되는데

감귤나무에는 병충해가 보이지만 약을 뿌릴 시기를 잡기 어렵고

고치지 못한 수도계량기에서는 여전히 물이 새고

털갈이하는 사랑이는 털이 계속 빠지고

곳곳에서 잡초들은 왕성하게 올라오고

새벽 2시에 옆 펜션에서 술 먹고 떠드는 소리에 잠이 깨고...

 

자칫 몸과 마음의 균형이 무너질 것 같아서

새벽에 일어나

간단히 명상을 하고는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을 하고

범능스님의 노래를 들으며

오이와 열무와 쑥갓으로 차려진 아침을 먹었습니다.

몸과 마음을 살살 달래며 여름에 들어가야겠습니다.

 

 

 

(범능스님의 ‘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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