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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믿으세요?

 

 

없이 살면서 억눌려온 사람들은 서로 의지하면서 힘을 합쳐야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다. 그래서 무수한 변혁사상들은 대중의 단결과 그 단결된 힘을 이끌어갈 수 있는 사상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던 것이다. 사회변혁을 꿈꿔왔던 무수한 활동가들이 대중 속에서 그 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매우 지나한 과정이고, 때로는 믿었던 대중으로부터 배신을 경험하기도 해야 하는 힘겨운 과정이다.

 

87년 6월항쟁을 광주에서 경험했던 노동변호사 박훈은 ‘거대한 민중의 바다’라는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민중의 열기라는 것은 앞에 나서는 사람보다는 뒤에서 받쳐주는 사람들이 진짜 민중의 바다예요. 어디가도 숨겨줘요. 없다고 그러고... 아니면 ‘씨발놈아 왜 들어와’ 그러면서 자기 오십년 역사에서 최초의 항거를 하는 사람들... 그런 거 보면서 ‘민중의 바다 속으로 숨는 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두려움도 없었지요.”

- 노동변호사 박훈

 

대중투쟁은 한순간에 자동으로 폭발하는 것이 아니다. 활동가들이 끝임 없이 대중과 호흡하는 일상 활동을 벌였던 힘이 어느 순간 터져 나오는 것이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조 상집으로 노동안전 활동을 벌여왔던 김정곤은 대중과 호흡하는 일상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푸른등’ 해갖고 비닐봉지에 꼽도록 깔끔하게 만들었어. A4지에 쓰는데, 예를 들면 ‘산재라는 것은 어떤 것이다’ ‘과로사라는 것은 뭐다’ 이렇게... 간단하고 쉽게... 한 달에 한 번씩 발행을 했어. 전 야드에 화장실이 엄청 많은데 우리가 다 그걸 못 붙이잖아. 그래서 대의원들에게 나눠져서 붙이는데 대의원들의 평가가 들리는 거야. 조합원들이 ‘화장실 소자보 안 바꾸냐’고 그런다고... 그러면 안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리고 늦어지면 빨리 하라고 그러고... 그래서 성공한 거야.”

- 대우조선노조 전 위원장 김정곤

 

대중을 믿고 함께 한다는 것은 투쟁이 용솟음쳐 오를 때만이 아니라 투쟁이 사그라지면서 버티는 것 자체가 힘겨울 때도 중요하다. 학생운동이 침체기로 빠져들던 97년 소수의 간부로 학생회를 운영했던 공유정옥은 그 당시 활동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남자 동기 애가 학생회장 하고, 언니가 사무국장 하고, 내가 사회부장 하고... 셋이서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전에는 집행부가 5~6명 됐는데, 셋이니까 다 같이 했어요.

대자보를 다섯 벌을 만들어야 되거든요. 되게 부지런히 했고... 늘 새벽 예닐곱 시에 모여서 대자보 다섯 벌을 만들어서 쫙 붙이고... 뒷간 토론이라는 걸 했어요. 매주 주제를 정하고, A3용지에 볼펜 달아서 월요일날 붙이고, 금요일날 모아서, 의견을 다 잘라서 ‘학우들의 의견’ ‘우리의 답변’ ‘다음 주제에 대한 의견’ 이렇게 다시 대자보를 만들어서 붙이고... 품은 정말 많이 팔았어요. 근데 ‘애들이 조금 하다 말겠지’하는 걸 1년을 했으니까 되게 신뢰를 많이 받았어요.

96년 여름에 연대사태가 있었어요. 학생회장 하는 친구 아버지가 부산대 교직원인데 ‘한총련을 탈퇴하라’는 압박이 들어와서 고민이 많았어요. 학생운동 내에서 우리는 소위 좌파성향이었는데, 한총련이랑 같이 해본 게 없으니까 한총련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는데, ‘이거는 학생운동 탄압이니까 이거는 아니다’해서 버티다가 그 친구가 ‘아버지가 잡아 내리려고 강하게 나오신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풀 거냐?’ ‘이건 우리 셋이 결정할 수 없다’ 그래서 친구들하고 1대1 면접을 했어요. 종이를 들고 ‘너 한총련 연대사태 알지? 우리는 한총련을 탈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낸 거 본적 있지? 그런데 학생회장이 되게 힘들데, 그래서 우리 되게 고민 돼.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러면서 몇 십 명을 했어요. 결국 탈퇴하기로는 결정이 났어요.

지금은 구체적인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렇게 발상을 하고 애썼던 게 되게 소중한 기억인 거 같애요. 그래서 우리가 학내문제나 과의 복지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해도 애들이 굉장히 많이 지지를 해줬어요.

97년 연말 대선 때 나는 투표를 안 했었거든요. ‘권영길이 왜 찍냐?’ 그랬는데... 학년이 올라가니까 학생회 정리하고 도서관에서 시험공부하고 있었는데, 친구들 몇 명이 와서 ‘집이 인천인데 집에까지 가서 권영길 찍고 왔어. 나 잘했지?’ 이러는 거예요. ‘그렇게 안 하면 너한테 부끄러울 것 같아서 했다’ 이런 얘기를 하고...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학생대중조직으로서의 민주성은 참 열심히 만들었다’ 생각이 들어요. 나름대로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친구들이 막 나서지는 못하는데, ‘운동하는 애들은 우리랑 달라’ 이런 게 아니라 ‘나도 여기까지 하면 얘네랑 같이 힘을 보탤 수 있겠구나’ 하는... 집행부는 세 명인데, 늘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20~30명 정도 있었어요. 그게 되게 좋았죠.”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공유정옥

 

일상 속의 대중은 매우 수동적이고 개별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속에서 대중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대중과 눈높이를 맞추고 호흡을 함께 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구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노금호는 장애인 당사자이면서 장애인과 제대로 호흡하지 못했던 경험을 얘기했다.

 

“하면서 정말 힘들었죠. ‘왜 이 사람들이 이럴까? 나랑 별로 다른 사람도 아닐낀데’ 그런 의문점이 들었죠. 그러다가 함께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누나한데, 그 누나도 장애인인데, ‘왜 그럴까’ 물어보고... 그러면서 돌이켜보니 그 사람들하고는 내 의무감 때문에 ‘하자’라고만 하면서 막 땡기려고만 했었지,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의 상황이나 이런 걸 들으려고 하지 않았죠.

물어보니까... 장애인들이 살아온 삶이 경쟁사회나 이런 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었고, 또한 처음부터 무기력한 존재가 아니지만 계속적으로 동정과 시해 그리고 배제로 인해서 자신의 결정권이 박탈당하면서 체내화 된 일상적인 무기력함, 그리고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 동기부여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스스로 동기부여 해서 뭔가 해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고...

‘그런 것들이 있어왔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게 얘기 되면서 ‘아, 그렇구나’ 하는 걸 내가 알게 됐죠. 그러면서 ‘내가 너무 속도 위주로 해왔구나. 그런 거보다는 이들에게 동기부여하고 그들의 결정들이 비록 어설프더라도 존중하면서 동아리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금호

 

대중에 대한 신뢰를 갖고 대중과 함께 호흡하기 위해 노동현장으로 들어갔던 활동가들은 예상하지 못한 배신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 배신은 어떤 탄압보다도 활동가를 힘들게 한다. 95년 진주햄에 입사해서 의욕적인 활동을 하다가 97년 해고를 맡은 이은아에게 의욕을 심어줬던 대중은 한순간 싸늘한 태도로 돌변했다.

 

“더더욱 힘들었던 게, 조합원들이 손가락질 하고 욕을 하는 거야. 회사가 그렇게 붙여 놓은 거(‘불순 세력이 침투해서 회사를 문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선동한다’는 내용)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거 아니에요? 그 조합원들이 그때는 너무 너무 싫데요. 막 미치겠데... ‘어떻게 사람들이 저럴 수가 있노’...

그리고 (복직투쟁) 한창 할 때가 12월에서 1월 넘어가는 시기라서 조합원들에게 신년카드를 다 보냈어요. ‘복직과 조합원들의 고용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해가지고... 그걸 받았다고 받은 사람들을 회사에서 다 불러가지고 면담하고... 그걸 받은 걸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거예요. 그때는 아줌마들도 많았지만, 아가씨들도 많았거든요. 아가씨들하고 친해서 연락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그때 연락하던 애들도 ‘그런 거 보내지 마라. 그런 거 때문에 괴롭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때 당시에는 ‘그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 생각은 못하고, ‘어떻게 니가 그렇게 말할 수 있노? 내가 이렇게 조합원들을 위해서 하다가 짤려서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런 카드를 보낸 게 뭐 그렇게 잘못이라고 그걸 갖고 그렇게 힘들어하냐?’ 이런 심정이 억수로 앞섰어요.

그게 너무 힘들어서 복직 판정이 났는데도 기쁘지가 않는 거예요. 진주햄에 다시 안 들어가고 싶었어요. 운동을 하겠다고 들어갔는데, 운동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때는 내 심정만 너무 앞서 있었던 거예요. 너무 힘들어서 안 들어가고 싶은데, 지노위에서 복직판정이 났으니 당위성에 다시 들어갔어요(웃음).”

- 진주햄 이은아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서 굳은 신뢰가 쌓인 상태에서도 자본과 정권의 강경한 탄압이 길어지고, 전망이 점점 불투명해질 때 대중은 간부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2004년 초부터 공장 가동중단, 정리해고 통보, 폐업, 인수협상 등에 맞서 험난한 투쟁을 쉽 없이 벌여왔던 금강화섬 노동조합은 더 이상 밀리지 않기 위해 2005년 5월부터 공장점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긴장 속의 공장점거가 예상외로 길어지면서 내부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가면서 자본의 전략은 고립이었어요. 공권력이 보기에 칠만한 사업장 같으면 빨리 쳐버려서 정리해버리고, 괜히 쳐서 투쟁을 확대시킬 것 같으면 안치는 거지. 우리는 최선의 방법으로 점거투쟁을 했는데, 고립을 스스로 자초했던 거지.

......

그러면서 내부적으로 문제가 불거지지 시작해요. 단전 단수를 하니까 한여름에 물도 없고 전기도 발전기를 돌려서 살아가는데 얼마나 짜증이 나요? 그래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생기는데... 나중에 40명 중에서 의식적으로 후퇴하는 동지들이 불만을 제기하는데 ‘인수자본이 위로금으로 10억을 주겠다고 했는데 지도부가 그 안을 안 받은 거 아니냐?’부터 시작해서 ‘지도부가 나중에 민주노총 가려고 그러는 거 아니냐?’ 등 오만 잡다한 유언비어들이 엄청 나오는 거죠. 의식적으로 후퇴하는 동지들의 영향을 받아 중간에 있는 동지들마저 서서히 동화되어 가는 거지. 전망은 안 보이고, 힘은 들고 하니까. 그러면서 술 먹고 상황실 유리창을 쇠파이프로 깨고 그랬어요. 신나를 밖에 막 뿌리고... 그런 사건이 두 번 벌어져요.

간부들은 조합원들 믿고 대중에 대한 신뢰와 책임감으로 밀고 나가잖아요. 그런데 조합원들이 무너지니까 간부들도 같이 무너지는 거예요. 그때 가장 상처를 많이 받은 동지가 위원장 같애요. 조합원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장 아파한 것도 위원장일 것이고...”

- 금강화섬 차헌호

 

세상을 바꿔내는 거대한 힘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배신감과 상처를 안겨주기도 하는 대중 속의 활동에서 묘책은 없다. 그래도 끊임없이 대중을 믿고 함께 호흡하면서 대화하는 것만이 방법이다. 2001년 구조조정 속에 민주노조가 들어서고, 사측의 탄압 속에서도 공세적인 투쟁으로 현장을 계속 장악해올 수 있었던 두원정공 노동조합의 힘은 조합원과 함께 토론하고 결정하는 기풍에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이 몇 년간 이어지면서 현장은 예상하지 못한 역풍을 맞는다. 그 역풍에 대응하는 방식도 역시 조합원과 함께 토론하고 결정하는 방식이다.

 

“최근에는 이런 식의 대응이 한계에 오지 않았나 하는 고민을 해요. 현장에서 일부 조합원들이 ‘언제까지 이렇게 현장을 방치할거냐’라고 문제제기를 해요. 마치 노조 때문에 생산이 잘 안되고 현장질서가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가 과제예요.

현장의 문제제기가 있을 때마다 현장토론을 자주해요. 우선 투쟁해왔던 과정들을 설명하고, 그 결과로 우리 고용이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 가를 설명하죠. 이걸 밑바탕으로 깔고 있으니까 그런 기본적인 신뢰는 갖고 있어요. 그런 것을 기본으로 해서 토론을 하니까 현장이 얘기가 되요.”

- 두원정공 이기만

 

88년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이후 20년 동안 파업과 구속·해고, 현장의 침체와 일부 조합원들의 파업지침 거부의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경험했던 부산지하철 이영호는 조합원과 활동가의 믿음을 강조한다.

 

“조합원과 활동가 사이에 제일 중요한 거는 믿음이라고 보는데, 믿음이 없어졌을 때는 조합원들은 지 생각대로 갈 수밖에 없는 거지. 회사에 붙어서 살 수밖에 없고, 노동조합에서 뭐 하자 그래도 안 하고... 그나마 노동조합을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을 때 노동조합 중심으로 단결하고 파업을 했고... 그런 경우가 94년이고, 2004년이고, 2007년이라고.

보통 보면 활동가나 조합 간부 했던 사람들이 맨날 ‘조합원들이 안 따라준다’라고 하지만 실제 활동가 몫이 더 크다고. 조합원들이 믿지 못하게 했으니까 안 따라오는 건 당연한 거지.”

- 부산지하철 이영호

 

대중 속에서 희망을 만들어간다는 것은 생각 외로 힘겨운 부침을 무수히 반복해야 하는 과정이다. 전북 부안의 계화도에서 바다일로 살아가다 10년 가까이 새만금 저지투쟁을 벌여왔던 고은식은 쉽게 벋어날 수 없는 삶의 밑바닥에서 그 힘이 나온다고 믿고 있다.

 

“여기서 힘들면 떠날 사람들 다 떠나고 떠나지도 못하는 이런 분들을 또 어떤 생각을 할까? 그 정도 되면 이제 실체를 다 알기 때문에... 우리한테 주는 보상이나 이런 것도 허구라는 거, 결국에는 우리가 살 수 있는 거는 우리가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은 알거 아니냐는 거죠.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은 ‘치르기들’ 이거든요. 여기 방언인데 아무 힘도 없고 돈도 없고 어쩔 수 없이 살아야만 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에요. 그 사람들과 뭔가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은 있어요.”

- 전북 부안 계화도 주민 고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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