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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83회 – 겸손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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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다. 돈도 없고 백도 없는 사람들, 어디 의지하거나 하소연할 데도 없는 사람들, 그나마 있는 몸뚱이마저 성치 못한 사람들은 이 험한 세상에서 크고 작은 상처들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상처투성이 사람들 속에서 그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도 또 다른 상처를 역시 숙명처럼 받아들어야 한다.
세상의 다수가 되어버린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들의 고통에 대한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버려서 식상해졌을까?
“2005년 4월에 그 유명한 잡담해고가 발생해요. 문자로 ‘내일부터 나오지 마시오. 해고사유는 잡담이다’ 이런 거예요. 그게 왜 그랬냐 하면 조장한데 ‘이거 이렇게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업무적인 건의를 했는데 ‘너 그랬게 잘났냐?’ 해서 해고시켜 버린 거예요.
해고의 권한이 조·반장한테 있어요. ‘말 안 듣는 애들 명단 올려’ 그러면 걔네가 명단을 올려요. 일요일까지 일 시키고 월요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그래요. 이 사람들이 힘들어도 말을 못해요. ‘내가 여기서 해고당하면 어디 가서 일을 할까’ 그러고 있는데... 그게 반복이 되니까 우린 다 알죠. 일이 없으면 쫙 해고 했다가, 일이 있으면 또 쫙 뽑고... 1주일 상간에 20~30명을 해고했다가 뽑고 그러니까...
지각 몇 번하고, 잔업 안 하고, 이런 사람들을 해고 시켰는데... 일도 열심히 했던 아줌마 한 명을 해고시켰어요. 그 이유가 1년 가까이 했는데 업무가 너무 힘들고 건강문제가 심각해서 공정을 바꿔달라고 한 거예요. ‘너 그렇게 아프면 그만 둬’해서 해고예요.”
- 기륭전자 김소연
그나마 안정적이라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좀 나을까?
“당시에 아줌마 한 명이 다리를 절고 다니실 정도로 아주 아픈 분이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어깨가 아팠는데 이게 자꾸 내려가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본인이 휴직을 내가지고 치료를 받아서 복직을 했는데, 3개월 휴직해서 병이 제대로 낫습니까? 안 낫잖아요. 그런 상태로 더 이상 휴직을 연장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복직해 일을 하는데 상태는 더 심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안 되가지고 그만두고 나가시데요. 뒤에 들리는 얘기로 길에서 회사 사람이 이 아줌마를 봤는데 병원 앞에서 휠체어를 타고 있더랍니다. 우리가 몇 번을 얘기했거든요. ‘아줌마, 그라시면 안 됩니다. 산재는 나쁜 게 아닙니다. 아줌마 몸을 보이소’ 그래도 산재를 못 하는 거예요. 그거 보고 인간이 이렇게 나약한 존재인가 싶데요.”
- 진주햄 이은아
7살 때 루게릭(근육무력증, 근육이 점차적으로 퇴화되는 근육장애) 진단을 받은 노금호에게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죽음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중학교 2학년 말부터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는 버릇이 생기다 보니까 그때부터 갑자기 몸의 퇴화가 심해지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좌절을 좀 했죠. 아무리 그래도 공부한다고 앉았는데 그렇게 급격하게 안 좋아질 줄 몰랐죠. 그래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게 어쨌든 중3때 대게가 공부를 많이 하기 때문에... 어쨌든 점수 잘 받아서 좋은 고등학교 가야된다는 강박관념도 있었고... 그러다보니까 중3 때는 입시준비 때문에 그럭저럭 지냈죠. 그때 몸이 힘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웬만한 건 다했기 때문에... 자전거 타기 좀 힘들어지고, 장거리 걷는 게 좀 힘들어지고, 이런 거였지 아예 안 되고 그런 건 아니었거든요. 제가 반이 2층이었는데도 계단 올라가기 힘들긴 힘들었지만 많이 힘들지 않았고...
그래서 어쨌든 입시를 치고 고등학교를 갔는데 그때부터가 문제였죠. 고등학교 들어오니까 그때 4층이었어요. 몸도 힘들어지는 상황에서 공부도 해야 하고... 포항은 그때 입시 이런 게 굉장히 심했거든요. 그런 경쟁의식 플러스해서... 예전에 중학교 때 까분다고 때리고 그랬던 애들이 고등학교 오니까 자기도 덩치 커지고 하니까 도전을 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성격도 계속 거칠어지고... 몸으로 안 되니까 입이 거칠어지고... 그런 갈등이나 고민들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그러면서 1학년 때 자살하려고 약도 먹고...”
-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 노금호
민족주의와 가부장성이 유난히 강한 한국에서 다문화가정의 고통은 대를 이어서 자식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아이들 문제는 정말 심각해요. 특히 첫째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좀 있어요. 머리는 정말 좋은데 다혈질이에요. 엄마가 없으면 불안해하고... (엄마가) 한국에 오자마자 한국이 어떤 나란지도 모르고 겁나죠. 그런 상태에서 애를 가지고... 엄마가 정서적으로 불안하니까 아이들도 불안한 거예요. 둘째 애들은 잘해요. 애들이 밝아요. 큰 애는 뭔가 거칠다거나, 아니면 괴팍하다거나, 아니면 너무 조용하다거나...”
- 부안 이주여성 한글학교 김영표
96년 춥고 배고픈 속에 모진 학대를 참지 못한 에바다학교 농아원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던 에바다학교 선생님들도 함께 힘을 합쳤다. 그렇게 시작된 에바다투쟁은 지옥과 같은 7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우리가 애들에게 ‘때리면 맞아라. 절대 대응하지 말아라. 너희가 뜻이 옳았던 만큼 행동 바르게 해야 한다’ 그랬어요. 애들 말로 반대선생이라고 그러는데, 재단측 선생들 있죠. 애들이 선생님보고 인사를 하면 인사도 안 받고 그런다고 해아래집에 오면 울어요. 그래서 일단 학교에 등교하기 전에 교회에 들려가지고 기도를 하고, 그리고 애들한테 ‘오늘 학교에 가서 선생님이 인사를 안 받으면 오늘은 더 숙이고, 내일은 더 숙여라. 언젠가는 자기들이 부끄러워서라도 인사를 받을 거다. 그리고 재단측 애들이 때리면 절대 대응하지 마라. 매일 맞으면 계속 때리진 못할 거다. 며칠만 고생해라. 뜻도 옳은 만큼 행동도 바로해라. 학교에 청소당번이 아니라도 너희가 먼저 쓸고 닦고 해라’라고 거의 세뇌시키다시피 했어요.
애들이 교실에서 자기들 보는 앞에서 선생님이 끌려 다니고 그러면 괴롭잖아요. 유도를 잘 하는 애가 있는데, 제가 맞는 것을 보고 견디다 안 되니까 한 애를 확 밀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4명이 파바박 하면서 쓰러지더라고요. 제가 되게 야단을 쳤죠. 내가 그만큼 얘기를 했는데 말을 안 듣냐고, 차라리 보기 힘들면 교실에서 나가라고 그랬죠.
하루는 해아래집에 선생님들이 있는데, 애들이 오다가 동네에서 맞았나 봐요. 다 큰 놈들이 눈이 벌겋게 돼서 웃으면서 오드라고요. ‘오늘 삼거리에서 맞았는데 같이 안 때리고 참고 왔다’고 웃으면서 들어오는데... 애들이 대견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이 대목에서 권오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잠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 에바다학교 권오일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87년 첫 구속과 88년 첫 테러를 경험하고, 그 이후 구사대나 경찰들과 크고 작은 충돌을 무수히 겪었던 김정곤은 2000년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 하는 과정에서 집단린치사건을 겪게 된다. 폭력에는 이골이 나있는 그였지만 “정말로 대우조선을 떠나고 싶더라”고 얘기할 정도로 모멸감이 컸다.
“작업을 하고 있는데 부서 현장관리자인 직장이 온 거야. ‘거기 좀 오라고 한다. 가 봐라’ 그래. 그래서 가 보니까 구사대들이 있어. 컨테이너 박스에 들어갔더니 처음에는 이야기 좀 하다가 나 보고 ‘하청노동자 손 때라’ 이거야. ‘뭔 소리냐’고 그러는데 이 새끼가 협박을 하는 거야. ‘하청노동자와 같이하는 활동을 안 하겠다’는 각서를 쓰래. ‘내가 왜 쓰냐?’고 그러니까 불이 딱 꺼지는데 문이 닫히면서 밖에서 잠기고, 여기서 우르르 저기서 우르르 나와. 그래서 여러 대 맞았지. 그러면서 ‘각서 써라’ 그러니까 또 ‘못 쓴다’ 그랬지. 그러니까 ‘현민투 회원들 하나하나씩 불러다가 조진다. 그러면 너희 조직 다 작살난다’ 그러는 거야. 미치겠더라고. 시간이 한참 지나니까 얘들이 도저히 안 되겠는지 몸을 막 수색을 해. 녹음기 있는지 보려고. 핸드폰도 빼앗고... 끝까지 버티는데 정말 죽겠더라고... 사람이 비굴해지고 미치겠는 거야. 안 쓴 거에 대해 안도의 한숨도 나오지만...”
- 대우조선 노조 전 위원장 김정곤
2001년 정리해고에 맞선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투쟁은 격렬했다. 그에 맞선 경찰은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으로 대응했다.
“경찰들이 다 싸고 있었거든요. 공장 안과 밖에 3만 명 정도의 병력이 부평을 싸고 있었거든요. 노동조합 사무실이 현장 안에 있는데 못 들어가게 했으니까.
3월 8일 노조활동 방해금지 가처분을 냈는데 한 달 동안 아무런 투쟁이 없을 때 그게 받아들여져 버린 거예요. 2월 8일부터 3월 8일까지는 열심히 싸움을 했고, 싸움이 안 되니까 내가 소송을 낸 거예요. ‘이거 갖고 들어가면 되겠다’ 싶은 거죠.
법원의 결정문도 있는데 자본이 그렇게 나올지 몰랐어요. 법원이 그렇게 판결했으니까 당연히 열어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막히는 순간 나는 선택을 해야 했어요. 다시 법원으로 쫓아갈 것이냐, 여기서 한 번 붙을 것이냐... 아무도 결정할 수 없고 내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사람을 300명 데리고 투쟁하는 현장에서 1시간 동안 고민을 했어요. ‘오늘 여기서 결판내겠다’고 결정했어요. 그건 명확한 불법적인 공권력 집행이었거든요. 그래서 내가 마음대로 했지요.
‘씨발놈들이 법원 결정문이 있는데도 지들이 가로막아!’ ‘죽지 않을 만큼 패라’고 그랬어요. 그때는 우리가 완전히 주도권을 장악했으니까... 방패 뺏어 부셔 버리고, 헬멧 벗겨서 버리고... ‘노동조합의 업무를 방해하는 현행범 체포하라’고 그랬어요. 16명을 체포했는데, 전경뿐만 아니라 경찰서에 근무하는 경찰들도 체포해버렸어요. 사람들이 경찰들 풀어주라고 그러는데 내가 다 거부했어요.
경찰들이 들어올 거라고 예상 못한 것은 아닌데... 그게 나한테 평생의 한으로 남는데...
들어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내가 양쪽 도로가에 반으로 나눠서 웃옷 벋고 누우라고 그런 거예요. 그렇게 하면 쉽게 진압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죠. 나는 연와시위를 엄청나게 싫어하는데 처음으로 연와시위 전법을 쓰게 된 거예요.
그렇게 들어올 줄 알았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쳤는데... 97명이 다치고, 4명은 장애2급을 받아요. 상상불허의 일들이 벌어진 거예요. 나도 현장에서 그대로 맞았는데 전경 애들이 나를 방패로 찍어도 별로 세게 찍지 않았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냥 마구 찍어버리더군요. 도망가다가 떨어지고... 씨발....
내가 체포하도록 한 경찰들을 풀어줬으면 되었는데... 그게 내 두 번째 트라우마예요. 그 뒤로는 사람 많은데 가지를 못해요. 공황장애의 일종인데... 북적북적한 사람들 많은데 가지를 못하고, 출구가 없는데 가지를 못해요. 지하철을 못 타요. 아직도 피가 분수처럼 올라오는 꿈을 꿔요.”
- 노동변호사 박훈
풀무원 춘천공장 노동조합은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할 수 있는 너무도 상식적인 현장을 만들기 위해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조직력이 무너진 이후 현장은 ‘아프면 나가야 하는 현장’으로 변해버렸다.
“2005년에도 근골격계 환자들은 계속 발생했어요. 2006년에도 나왔고... 2005년에 요양했던 사람이 2006년에 들어왔더니 여름 뙤약볕 아래서 ‘돌 주워라. 풀 뽑아라’ 그런 게 겨울까지 갔어요. 여름에 더위, 겨울에 추위... 비 왔을 때는 우산 쓰고 풀 뽑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걸 인권위 제소를 하자고 여러 가지 얘기가 모아지기는 했는데, 조합원들이 회사의 탄압 속에서 떨쳐 일어나지 못했던 거 같아요. 모이지가 않았어요. 그런 횡포들이 12월까지 왔죠. 그래서 현장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고 그랬는데, 들어간 사람 중에도 (노조) 탈퇴를 한 사람이 있어요.”
- 풀무원 박엄선
노동재해로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투쟁하는 이들도 또 다른 고통에 신음한다.
“하이텍(하이텍알씨디코리아 노조) 투쟁을 하는데 내가 1주일에 하루씩 가서 농성을 하는 것으로는 힘이 모자란 상황인데... 나는 그 이상 할 수는 없는데... 자격지심인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현대자동차 대공장 정규직노조에서 돈 받고 하는 사업만 하고, 13명 조합원의 하이텍투쟁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내가 울산에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오는데, 느낀 것도 나누고 싶고, 얘기도 하면서 정리도 하는 싶은데 그게 하나도 안 되는 거예요. 연구소 안에서 활동하는 동지들끼리 만나고 흐르고 서로 보듬고 그랬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나는 나대로 소외감 느끼고, 그런 벽들을 조금씩 조금씩 느껴갔어요. 그래서 2005년 여름에서 가을은 되게 힘들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우울증 치료를 받아야 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불면증과 만성두통... 그때 난생 처음으로 혼자 술 먹고 그랬어요.
......
2006년 상반기가 힘들었던 거 같애요. 그때 술 먹으면 울고 맛이 가고 그랬어요. 그게 혼자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도 있는데, 연구소에 있는 다른 동지들이 많이 지지해준 거 같애요. 다를 아팠기 때문에... 상처를 더 덧나게 만드는 과정도 있었지만, 그러면 그 다음 주에 만나서 다시 해소하고... 그러면서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는다고, 그때부터 많이 친해졌죠. 연구소 활동을 떠나서 ‘남매 아니야?’ 할 정도로... 주변 사람들에게 나도 많이 의지를 했고, 서로 의지를 했던 거 같애요.”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공유정옥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며 3년을 넘게 힘겨운 투쟁을 벌였던 평택 대추리 주민들은 2006년 결국 고향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그들은 격렬했던 투쟁만큼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분들이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시지만, 정신적인 피해가 치료를 받아야 되는 사람들이예요. 이분들은 그렇게 살다가 돌아가시기에는 너무 비참한 거예요. 그 안에 있을 때 의사들과 학생들도 의료봉사 같은 거 오고 그랬거든. 지금도 와달라고 많이 얘기를 하는데, 그게 안 되지. 어디가면 했던 단체들 다 아니까 그래도 얘기를 해요. 그분들에 대한 치유는 정부에서 해줄게 아니거든. ‘우리 손으로 마음의 병을 고쳐줘야 하는데,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를 계속 해요. 안 되는 게 답답할 뿐이지...
지금도 주변에서 ‘저 새끼들, 빨갱이 새끼들’ 이렇게 보는 시각이 대단해요. 나는 이 싸움에서 나간다면 이민 갈려고 그랬어요. 그런데 주민들하고 같이 해왔으니까 같이 있는 거지... 누구나 다 똑같을 거예요. 다른 데 가서 모르는 사람들하고 사는 거 보다 그 아픔 같이 했던 사람들이 같이 살자고 해서 사는 거예요. 여기 이주단지보다 더 좋은 데 갈 수 있는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대추리라는 그런 거 때문에 ‘같이 살자’ 그랬어요.”
- 평택 대추리 이장 신종원
20년이 넘는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속에서 3번의 구속과 장기 수배,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동지, 깨져나가는 인간관계, 관료적 노동조합운동의 무기력과 허무함 등을 겪어왔던 유미희는 이제 겨우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삶의 다른 패러다임을 보게 되요. 사회과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삶을 가졌던 내가 심리학적인 인간의 마음 갈래들을 보기 시작하고... 나도 상담을 장시간 받으면서 내 마음 안에 있었던 또아리들과 피해의식들을 다시 보게 되고... 기존에 갖고 있었던 관계들에 대한 애착을 털어내는 과정이 있었죠. 그러면서 새롭게 만나는 관계들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고, 그걸 담는 그릇을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죠.
따지고 보면 내가 최초에 생각했던 길들을 나는 꾸준히 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큰 벽을 만나면서 기존 것을 털어내고 다시 담아내려고 하는 과정이 있었고, 그런 과정 안에서는 지독하게 힘들었고... ‘아무도 안 만나고 싶다’부터 시작해서 납작 엎드려서 혼자 울기만 하는 시간도 몇 년간 있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서 폭력적으로 터뜨려지고... 그러고 보니까 비로소 ‘23살 그 어린 친구가 감당하기 어려운 세상을 살았구나. 너 참 힘들었지?’ 하는 게 된 거죠. 그 전까지는 ‘해야 된다. 그건 누구나 겪는 거다’하면서 스스로 힘들었던 거를 방치시켰는데, 진짜로 넘어질 지경이 되니까 자기를 다시 보게 되는 거 같애요. 그게 되니까 타인들을 향한 원망이나, 거대한 운동에 대한 회의나 이런 것들을 벋어날 수 있게 되는 거 같애요.”
- 문화활동가 유미희
무수한 아픔과 상처를 줬던 현실은 바뀌고 있을까?
그 아픔과 상처를 줬던 새끼들은 벌을 받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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