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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개천, 그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

아마도 1992년이었을 것이다.
전쟁을 시작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한 모임을 갖기 위해서 공동체들을 돌아다닐 때 나는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마을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아들이 나를 마중 나왔다. 우리는 목장과 커피 농장을 지나쳐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 사람들이 전쟁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있을 때,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내 팔을 잡아끌어 마을 아래쪽으로 백미터 이상 떨어진 강가로 이끌었다.
때는 5월이었다. 강바닥은 보이지 않았지만 강은 푸르렀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나무 둥치에 걸터앉아 아무 달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윽고 그가 말했다.
"무엇이 보이는가? 모든 것이 너무 조용하고 맑기만 하지 않은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말일세."
"음....."
그가 '예' 혹은 '아니오'라는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게 대꾸한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잠시 후에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산의 정상을 가리켰다. 산꼭대기엔 잿빛 구름이 누워 있었다. 그때 갑자기 번개가 번쩍 치더니 언덕에 서린 푸른 기운을 들쑤셨다. 정말로 폭풍우가 몰아닥치고 있었다. 그러나 꽤 먼 곳처럼 여겨져 우리를 덮칠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담배를 만들더니, 가져오지도 않은 라이터를 찾았다. 내가 라이터를 건네줄 때까지.
"모든 것이 착 가라앉아 고요할 때, 산에선 폭풍우가 몰아닥친다네. 개울물은 불어나 세차게 흐르기 시작하고, 골짜기께로 물줄기를 틀기 시작한다네."
담배 한 모금을 빨더니 그가 말했다.
비 내리는 철이 되면 강은 맹렬한 기세로 흐르고, 붉은 갈색 채찍처럼 거칠게 요동치고, 강 밖으로 거대한 진동이 지진처럼 땅을 뒤흔든다. 이런 힘은 강기슭에 떨어지는 비로부터 오지 않는다. 산에서부터 내려온 실개천이 바로 강물에 힘을 준다. 강물은 모든 것을 부순다. 강물은 땅을 갈아엎어 새롭게 만든다. 그 강물은 옥수수가 되고, 콩이 되고, 부드러운 치즈가 되어 밀림에 사는 이들의 식탁에 오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투쟁이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내게 말한다.
"힘은 산에서 생겨난다네, 그러나 물이 아래에 이르기 전에는 그 힘이 보이지 않지."
나는 그에게 이제 전쟁을 시작할 때가 된 것 같냐고 묻는다. 그는 내 질문에 이렇게 덧붙인다.
"이제야말로 강물의 색깔이 바뀔 시간이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침묵하더니 내 어깨에 팔을 짚고 윗몸을 일으킨다. 우리는 느릿느릿 걸으며 되돌아온다. 그가 내게 말한다.
"자네들은 실개천이라네, 우리들은 강물이고..... 자, 이제 내려오게나!"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오두막집으로 돌아왔다. 날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졌다. 잠시 후,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아들이 마을 회의의 결의문을 들고 돌아왔다. 그 결의문에는 대략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은 지금이 자유를 위한 전쟁을 시작할 때인지 서로의 생각을 나누기 위해 마을의 작은 학교에 모였다. 이곳에서 세 팀으로, 즉 여자들, 아이들, 남자들로 나뉘어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나서 다시 학교 강당에 모였다. 이제 전쟁을 시작할 때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왜냐하면, 지금 멕시코가 외국인들에게 팔리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멕시코를 팔면 빈곤은 사라지겠지만, 이제 더 이상 우린 멕시코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 열두 명의 남자, 스물세 명의 여자, 여덟 명의 어린이들은 이 사실을 이제 분명히 깨닫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서명할 수 있는 사람은 서명하고,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손도장을 찍어 결의를 표한다."
새벽녘에 나는 길을 나섰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오두막집에 없었다. 일찍 강가로 나갔다. 내가 다시 안토니오 할아버지를 본 것은 약 두 달 전이었다. 그가 나를 보았을 때 나는 그의 곁에 가 앉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도와 옥수수 이삭을 흝기 시작했다.
"강물이 불어났더군."
그가 내게 말했다.
잠시 뒤에 내가 그에게 답했다.
"예."
그러고 나서 나는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아들에게 회의의 경과 과정에 대해 설명한 다음 우리의 요구와 정부의 회답이 담김 문서들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오코싱고(Ocosingo)에 가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다음날 새벽, 나는 돌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산길을 떠나 신작로로 막 들어서려는 참에, 모퉁이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안토니오 할아버지를 만났다. 나는 그의 곁에 잠시 멈춰 서서는 그에게 줄 담배잎을 꺼내기 위해 가방을 내렸다.
"지금은 괜찮네."
가는 담배잎이 든 손가방을 사양하면서 말했다. 그러더니 나를 부대 행렬에서 따로 불어내서는 길가의 케이폭나무 아래로 이끌었다.
"자네 기억하는가?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실개천들과 강에 대해 얘기했던 것을."
속삭이듯이 나직이 묻는다.
"그럼요."
나도 그처럼 나직이 답한다.
"그런데, 내가 빠뜨린 얘기가 있다네."
그가 신발을 신지 않은 발가락 끝을 내려다보면서 말한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그의 말에 답한다.
"그 실개천들은....."
온몸이 자지러질 듯한 거친 기침으로 인해 그는 잠시 말을 멈춘다. 그리고 공기를 약간 들이마시더니 다시 잇는다.
"그 실개천들은..... 한번 내려오면....."
거친 기침이 다시 그의 말을 끊는다. 나는 보다 못해 부대 행렬에서 위생병을 부른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어깨에 붉은 십자가 견장을 달고 있는 동지의 진찰을 사양한다. 그 반란군 전사는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에게 부대 행렬로 돌아가라는 눈짓을 보낸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의약품 가방을 멘 병사가 새벽녘의 어스름한 분위기 속으로 멀어지기를 기다린다. 그러더니 계속 얘기한다.
"그 실개천들은.... 한번 내려오면.....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네. 오직 땅 속으로...... 땅 속으로....."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나를 포옹하더니 황급히 떠난다. 나는 그의 그림자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리고 나서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가방을 다시 짊어지고 말 위에 오른다. 내 머릿속에는 그의 뒷모습이 지워지지 않은 채 또렷이 남는다. 왠지는 모르겠다. 아주 어두운 뒷모습이었다. 아마도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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