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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와 100년 전쟁, 카렌족 난민촌 르포 1

버마와 100년 전쟁, 카렌족 난민촌 르포 1

갑자기 추워진 날씨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잠시나마 따뜻한 남쪽 나라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만일 ‘버마의 카렌족(Karen)’이란 표현이 친숙하게 다가온다면, 당신은 아마 다음 세가지 부류 가운데 한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첫째,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선교활동에 관심이 많은 분. 둘째, 태국 북부의 명소 ‘치앙마이’에 오랜 기간 여행한 분. 마지막으로 전세계의 민주화 운동, 혹은 소수민족에 높은 관심을 가진 분이겠지요.

이제껏 이것저것 주어들은 것이 적지 않다고 자부해왔지만, 부끄럽게도 이번 설 연휴 직전까지는 ‘버마의 카렌족’에 대해서 완벽하게 백지 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스스로 버마나 태국은커녕 동남아 여행조차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위안 삼아 봅니다.(아~! 제가 왜 정식 국호인 ‘미얀마(Myanmar)’가 아닌 ‘버마(Burma)’란 표현을 쓰는지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대개는 ‘카렌족 난민(Karen Refugee)’이란 표현으로, 비교적 우울한 어휘(난민)가 함께 쓰이는 이 소수민족에 대해서, 저처럼 처음 접한다는 분이 태반이라는 전제를 깔고 짤막한 여행기를 공유해 보고자 합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카렌족이란?

▼ 카렌족 난민촌을 향해서

태국 여행을 해보신 분이라면 쉽게 감을 잡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태국 북부터미널에서 약 7시간(2등 버스)을 달려가니 버마국경과 인접한 매솟(Mae Sot) 이라는 조그만 국경마을이 나옵니다. 다시 그 도시에서 버마 국경을 향해 1시간 정도 달려가면 태국 내 최대(약 5만 이상)의 난민촌이라 불리는 ‘맬라(Mae La) 캠프’에 도달하게 됩니다. (실제로 태국 군인들이 삼엄하게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난민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간단치 않다고 합니다. 그러나 20여 개나 되는 국제 NGO들이 난민들의 생활에 도움을 주는 활동을 펴고 있기 때문에, 사전에 적절한 협의를 거치면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난민촌?! 사실 듣기만 해도 끔찍한 표현입니다. 나라를 잃거나 군사정부의 폭정 혹은 민족갈등을 피해 딴 나라에 얹혀 살아야 하는 피난민의 이미지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코소보나 소말리아 난민, 혹은 북한 난민의 처지가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태국의 국회의원 선거가 2월 7일, 흥분감과 긴장감을 가슴에 품고 난민촌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버마 국경에 가까워졌다는 순간, 갑자기 도로변에 난민촌이 등장했습니다. 어랍쇼?
어디가 난민촌이냐구요? 조금 더 집중해서 보면 매직 아이처럼 떠오르게 됩니다. (저쪽 높은 산 너머가 버마 국경 쪽이군요)





2번의 검문소를 지나, 태국 정부가 관리하는 대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면 카렌족 난민촌인 맬라 캠프가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합니다.(아, 이문을 넘어가는 순간 시간은 30분 늦게 흐르기 시작합니다. 비록 태국 땅이라 할지라도 버마 시간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돌아가고 싶다는 또 다른 표현이겠지요.)





자. 이제는 집의 형태가 갖춰졌지요. 저 멀리 정글에 숨어 오밀조밀 모여있는 난민촌의 모습들이 조금씩 가까워 지기 시작합니다.





혹자는 “정말 평화로운 광경이구나”하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첫인상에 비쳐진 우리 옛 시골과 비슷한 정감 넘치는 풍경에 적잖이 놀랬습니다. ‘난민촌’이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오는데, 실제 무슨 안락한 산촌 마을에 온 것처럼 느껴지는군요.(물론 이는 이방인이 느낀 편견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뒤늦게 깨닫게 됐습니다)





맬라 캠프의 중심을 이루는 광장의 풍경입니다. 유달리 어린아이들이 많이 보이죠. 바로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인근에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평화로운 모습이군요. 이곳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좀 살펴볼까요?





  
우리나라 아이들이라고 주장해도 믿을 분이 많이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들은 몽고족 혹은 티벳족 계통일 거라고 추측됩니다. 태국 북부지방 혹은 버마 북부지방의 고산족들은 중국 쪽에서 남하한 민족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에 남아시아 인종과는 뚜렷하게 구분되고, 오히려 우리와 더 가까운 정감을 느끼게 됩니다.
(고구려 민족의 후예라고 알려진 라후(La hu)족도 태국 북부 지방에 있습니다.)




  
교회에서 만난 이 어린이는 유달리 더 한국사람과 닮아 있군요.(약간 이마가 튀어나오고 콧대가 움푹 패어 있는 게 이들 민족의 특색입니다) 실제로 이들에게 몽고반점이 있다는 의사선생님의 증언(?)도 있기도 합니다.



놀랍게도, 최대 500만에서 700만까지 추산되는 카렌족은 전체 인구의 25~30%가 기독교 인이라고 합니다. 물론 19세기 영국의 지배와 서구 선교사들의 활동이 결정적인 이유가 됐을 법도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몇 안 되는 민족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70%가 불교도라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혹자는 이들이 놀라운 신화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황금의 책’이란 신화이지요. 카렌족 신화에 따르면 자신들이 고생하는 이유가 아주 오랜 과거에 하늘이 주신 귀중한 책을 잊어버렸기 때문인데, 하얀 피부를 가진 형제가 그 책을 갖고 오면 구원 받으리라는 신화입니다.(신화 속에 책이 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실제 이 신화 때문에 하얀 영국인들이 가져온 성경을 환대했다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멕시코 께짤꼬아들 신화와 유사성도 엿보입니다.)  

카렌족은 스스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는 자부심도 대단합니다. 현재 카렌의 정부 역할을 하는 KUN(카렌국민엽합)의 지도부들 역시 대부분이 기독교 인들이고, 일부 카렌족 불교인들이 같은 불교 국가인 버마정부에 협력하고 있다는 점도 그런 이유를 부추기고 있습니다.(정말 일부랍니다) 특히 난민촌에 기독교 비율이 높습니다. 불교 국가인 버마와 달리 태국 내에 자리잡고 있는 난민촌의 경우 서구 NGO를 통해 외부문물을 보다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제시대 우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신학대학을 나오신 종교지도자들이 독립지도자로 활약하는 비율도 더 높습니다. 독립운동 혹은 민주화 운동을 위해서는 근대화 정신이 필요하다는 논리와 비슷합니다.

좀 더 카렌족 아이들을 만나볼까요?


잉크를 가지고 장난치는 아이들의 표정이 너무나 천진난만 합니다. 별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는 아이들이, 구슬치기를 하고 있습니다. 구멍을 6개를 파서, 구멍을 오가며 상대편의 구슬을 따먹는 게임. 어릴 적 제 동네에서는 ‘알롱’ 이라고 했는데(워낙 지방 마다 이름이 달라서…^^), 꼭 그 모습과 같더군요. 아이들의 문화는 오랫동안 지속되기 때문에 굉장하게 유사한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구멍 파고 구슬치기 놀이하는 모습이 보이시죠?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지나치게 많군요. 아무래도 난민촌이다 보니까 아이들과 노인들이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일찍 결혼하는 풍습때문인지 한 가구 당 대개 8명에 달하는 자녀들을 갖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부모 없이도 형제끼리 잡초처럼 자라고 있었습니다. 좀 더 정확한 이유를 대자면 쓸만한 청ㆍ장년층 남자 어른들은 버마 땅에서 독립 전쟁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내전의 여파 때문인지 결손 가정 아이들이 유달리 많았습니다.


<사진 이지호>




▼  왜 난민이 됐을까

자 이제 왜 이들이 난민촌을 형성하고 살아야 했는지에 대해서 짧게나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왜 버마에 살고 있던 카렌족은 이웃나라 태국으로 밀려오게 됐을까요.



한 젊은이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을 갖고 계시던 한 여인은 “내 아들인데 오래 전에 죽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이른바 전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내전인 버마족과 카렌족의 내전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버마라는 나라는 다수 민족인 버마족과 무려 130여 개에 달하는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대표적인 소수 민족이라면 중국 국경 지방의 샨족(한때 쿤사라는 ‘마약왕’의 집단으로 더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태국 국경과 이라와디강의 황금 삼각주 지방에 분포한 카렌족, 카친족 등이 있습니다.
최대의 민족이라면 역시 카렌족이지요. 버마 정부는 유엔의 눈치가 있다 보니 약 220만 정도로 추산하지만, 실제로 500만 이상이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박해 받는 민족이다 보니 제대로 된 통계조차 불가능합니다.

버마 내의 다른 소수 민족들 역시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독립할 꿈을 가졌지만 실제 실행에 옮긴 민족은 카렌족이 유일합니다. 벌써 1949년에 벌어진 일이니 55년도 넘었군요. 지금도 전쟁은 계속 되고 있으니 세계 최장기간 내전 기록을 갱신 중에 있습니다.

1949년 당시 카렌족은 자기가 살아온 땅에 툰구(Toungoo)라는 독립국을 선포합니다. 곧장 버마와 치열한 전쟁에 들어갔지요. 일부는 점령되고 점점 땅을 빼앗기더니 결국은 1997년 신의 아들이 이끄는 본거지를 점령당하면서, 버마 동부지역 일부와 태국 쪽으로 좁혀지고 말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살육과 강간 등 민족 말살 정책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그래서 맬라 캠프를 비롯한 난민촌들이 80년대 후반과 90년 초반에 대량으로 건설되기에 이릅니다. 버마 정부의 소탕 작전에 맞선 카렌족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영국의 지원도 있었지만 더 큰 힘이 된 전쟁비용은, 이 지역의 특산물인 ‘티크’ 나무 판매로 충당했다고 합니다. 티크 나무를 팔아서 탱크까지 보유하면서 끊임없이 독립 전쟁을 펼쳐왔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카렌족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하는 카렌국민연합(KNU) 힘이 많이 미약해졌다고 합니다.

현재 태국 국경에는 8개의 카렌족 난민촌이 30만에 가까운 카렌족 난민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유엔은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태국 정부로는 줄곧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왔습니다. 태국도 정치상황이 시끄러웠는데, 딱히 이웃 버마 군부와 관계도 있는데 소수 민족인 카렌족 편을 들어줄 필요가 없습니다. 실상 동남아 모든 나라들이 이 소수민족 정책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강경정책으로 절대로 독립을 못하게 막는 원칙을 유지해 나가고 있습니다.(태국도 남부의 종교가 다른 무슬림 민족간의 갈등이 심각한 편입니다)

태국정부는 유엔난민협약에도 가입해 있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이미 1990년부터 이곳에서 살기 시작한 난민들에게 돌을 사용해서 집을 짓지 못하게 규제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집들이 하나같이 나무로 이뤄졌는지 감이 잡히시죠?



난민촌 시장의 모습입니다. 미약하게나마 여기도 시장경제가 돌아가고 있네요. 물론 생산은 거의 불가능하고, 자연에서 수집한 수준에서 시작해서, 인근 마을에서 노동해서 모은 돈으로 물건을 사고 파는 수준이지요. 계속 집 모양이 인상적이지요?





이게 바로 티크 나무 잎사귀를 모아 나르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열대지방의 나무다 보니 잎이 굉장히 크고 넓습니다.이 나뭇잎을 하나 하나 엮어서 기왓장을 만드는 거지요. 아무래도 추위가 덜한 지방이다 보니까 나무 만으로도 집을 지을 수 있는 장점이 있기는 합니다.




  
조그만 상점의 주인이신 한 할아버지. 그는 “나도 젊었을 적에는 버마 군대랑 참 치열하게 싸웠다”는 말씀을 해주십니다.
계속 전쟁 이야기시더군요.



설명을 조금 더 계속해야 합니다. 버마와 카렌이 싸우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가 남아있기 때문이지요. 단순한 민족문제라면 조금이라도 화해할 길이 열리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부분이 바로 외세의 침략으로 모른 것이 흐트러지고 만 셈입니다.

버마는 인도가 점령된 이후 영국의 동진 정책에 의해 1885년에 인도의 한 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됐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효과적인 버마 지배를 위해서 민족 이간질 정책을 씁니다. 분열정책이란 강대국이 작은 나라들을 다스리기 위한 가장 보편적인 정책이기도 하지요. 버마 민족을 탄압하면서 동시에 카렌족을 1등 시민으로 부각시킨 것이지요. 이렇게 되면 버마족의 분노는 영국에서 카렌족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물론 카렌족이 영국과 친해진 이유는 재빨리 기독교로 개종한 이유도 있을테고 정복왕조인 버마 민족에 대한 악감정도 작용했겠지요.

또 다른 변수는 일본이었습니다. 2차 대전을 기화로 일본군이 잽싸게 동남아시아의 점령자로 부각되자 버마족은 이틈을 타서 일본군과 한편이 되서 ‘영국-카렌’ 연합군과 대립전선을 형성하게 됩니다. 결국 일본군이 버마를 완전 점령하게 되자(콰이강의 다리를 기억하시지요?) 버마족은 카렌족의 교회를 불태우고 수많은 카렌족을 학살하는 대한 피의 보복을 벌이게 됩니다.

그 때부터 시작된 전쟁의 상흔은 55년 동안 진행중입니다. 맬라 캠프만 해도 건설된 지 16년이 지났지만 90년대 말까지도 이곳 태국에 있는 난민촌까지도 버마군에 의해 공격을 받아 왔다고 합니다. 여러 난민촌이 전소되고 주요 인사들의 암살도 계속되자 카렌족 정치 지도자들은 이곳 난민촌을 떠나 모처에 은신 중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사진에서 본 난민촌들이 산 바로 밑에 은거해 있는지 아셔야 합니다. 바로 산 너머 버마 국경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피하기 위해서 랍니다. 이 곳 맬라 난민촌 역시 깎아지르는 듯한 산 아래 있기 때문에 버마군대의 포탄에서 약간이나마 안전하다고 합니다.



새벽의 난민촌 시장 광경입니다.





▼  신학교

  
여기에 자리한 신학교이지요. 서구 사회와 기독교의 연관성 때문에 많은 NGO들의 관심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요즘에는 약간 그 관심이 줄었다고 합니다.


  

한 신학생의 기숙사를 잠깐 훔쳐봤습니다. 아무래도 열대성 기후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 가고 있는지 한 눈에 들어오리라 생각합니다. 프라빗(Provit)이라는 이 스무 살 청년은 영어에 익숙하더군요.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궁금함으로 가득 차 있어 보였습니다.  

  
카렌족 교회 내부 살짝 살펴보시지요.


  

다음주 주말 2부가 계속 됩니다.

도깨비 뉴스 리포터 호자이 Hojai@dk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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