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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당장의 기쁨을 위해 ‘양심’을 저당 잡힌다. - 감옥 안에서의 ‘빽’들...

선고공판이 끝난 후 기결수가 되어 확정방으로 올라가기 전까지 언 한 달 동안은 저에게 편안한 시절이었지요. 왜냐하면 ‘병역법 위반’으로 들어온 이들이 많이 수용하는 방 특성상 구속 후 한두 달 후에 있는 1심에서 집행유예로 출소하거나 실형을 선고한 즉시 항소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 바로 나가는 이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먼저 자리 잡던 이들이 몇 주후가 되어 방에서 나가서 제가 No.3이 되었지요. 그러기에 봉사원은 제가 나이가 많고 오래 있었다는 걸로 이따금 설거지나 청소를 하는 것 이외에는 이후에 들어온 사람에게 방내 시설의 사용법이나 규칙을 알려주거나 방내 업무(?)에 대한 기획 정도만 하는 역할이어서 편했지요.


그리고 위의 두 어르신 또한 성격이 나쁜 편이 아니라서 저에게 뭐라 터치를 하지 않았지요. 물론 다른 이에게도 마찬가지이어서 자화자찬으로 이 방이 편한 방이다 이라고 말할 정도이었지요.


하여튼 그렇게 파란 옷을 입을 때를 기다렸던 저에게 참 대단하신 분을 보았지요. 먼저 이후에 들어온 ‘군무 이탈자’인데 이 사람은 (지금도 근무하고 있어 실명을 말할 수 없고...) 모 법원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를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원 거주지는 서울 쪽인데 이 사람의 친형이 바로 그 모 법원에서 공무원으로 근무를 하고 있어서 좀 편하게 있으려고 여기로 끌어온 것인데...


본인의 말로는 구속된 것이 여자 친구와 어디 좀 갔는데 데드라인인 8일 동안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걸 몰랐다고 하면서 친형을 통해 이 사실을 무마하려고 하였는데 걸린 것이라고 하다군요.


그래서 이후에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자진 출두를 한 후 잡혔는데, 초범이어서 집행유예로 나올 것이라고 봉사원은 판단을 하였는데 문제는 심리공판에 간 후 선고기일을 알려주지 않고 구형량도 1년만 주는 거예요.


물론 본인의 말로는 그 법원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검사나 판사들과 안면이 있다고 하였고, 추석 전까지 나올 수 있도록 말을 하였지만 통산 2주 터울로 정하기에 ‘빽’이 없이는 안 될까라고 보았지요.


그 후 나흘 후에 그 사람의 선고일이 나왔다고 직원이 알려주었고, 역시 그날 아침에 나간 뒤 정오가 되어도 오지 않은 채 방에 붙여있는 표도 뺐지요. 더욱이 이런 경우에는 통상 변호사를 사지 않는 것이 태반인데도 그 법원에서 잘 나가는 이를 샀다는 걸아니까 좀 씁쓸함이 드네요.


더욱더 확정방으로 가기 전쯤에 들어온 어느 ‘군무이탈자’의 경우 앞서 집행유예로 선고를 받았는데 유예기간 막바지에 같은 걸로 실형을 받고 법정구속을 당했다고 하면서 몇 주 후에는 앞선 결정이 ‘깨진다’고(소멸이 되는 것이 맞지만 이 쪽 용어로...) 말을 하여서 결국 변호사를 사야 공판연기가 가능하다고 판단을 하였지요.


그럼에도 문제는 부모님과의 연락이 오지 않아서 이 작전을 성공할 수 없을 수가 있어서 걱정이 태산 같았지요. 물론 이후 소식을 모르지만 아마도 이대로 구금시설에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어느 전직 조폭인 듯한(대화를 듣어보니...) 근육질의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인데, 앞서 김지태 이장에 대한 글을 쳤지만 그렇게 오래있지 않게 놀라운 사실을 보았습니다. 바로 오후 4시 반쯤에 재소자를 방콕하게 하는 ‘폐방’의 잠금 소리 이후 도무지 알 수 없는 열쇠소리가 나는 것이에요.


그리면서 그 직원이 그 아저씨를 부르면서 나오라고 하더군요. 그리면서 그토록 듣고 싶었던 ‘보석’이란 말과 함께... 물론 저를 포함한 방 사람들 모두 이 사실에 기뻐서 축하한다는 말을 하면서 식기를 챙기고 나갔지요.


물론 그 분이 변호인 접견을 통해 보석신청을 할 것이라는 건 알려 주어서 미리 알고 있었지만 그 걸 실현이 되었다는 걸 보면서 내 자신도 어서 나가고 싶다는 심정이 들었지요.


특히 방에서 두 번째로 있는 ‘수청동 주민’에게는 더욱 참담한 심정이 들었지요. 이 분의 경우 지역의 공안사건을 담당하는 모 변호사가 아닌 ‘전관예우’로 벼락부자를 꿈꾸는 최근 퇴직한 검사출신 변호사를 선임을 하였는데 그 당시 철거민 투쟁에서 처음 사망사건이 나왔고 구속자도 26명이나 되어서 정말 비싼 돈을 주어서 빨리 출소를 하려고 발버둥을 치었지요.


그래서 장시간 공판이 길어져 있어서 그 일환으로 변호인 일동이 ‘보석’ 신청을 하려고 시도를 하였는데, 역시 담당 판사는 안 되는 반응이었지요. 그 후 ‘양심수 후원회’ 소식지를 보며 대다수에게 중형을 선고한 걸 보며 역시나 판사** 이라고 되묻고 싶었지요.


끝으로 저에 대한 말인데, 아마 추석연후 전일 것입니다. 오후 쯤 어느 직원이 갑자기 절 부르면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통상 무슨 일이 있으면 그 걸 말하고 나오라고 하는데 앞서 지문날인에 대한 국가인권위의 진정확인으로 나오라고 한 것 이외에는 이런 경우는 없었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오더니 사동에 있는 직원공간에 기다리더니 앞에서 또 다른 직원이 다가와서 저의 신원 확인을 하더니 2층으로 내려가 조사실에 넣어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그리면서 전 혹시 말로만 듣었던 특별면회가 아닌가란 상상을 하였지만 다른 것도 있겠지이라고 생각을 하였지요.


잠시 후 어느 직원이 절 부르면서 어느 사무실으로 가라고 하더니 제 앞에 어느 낮선 두 분이 있었습니다. 그리면서 본능적으로 정식명칭으로 장소변경접견 즉 특별면회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요.


그 다음 소개를 듣으니 ‘유선희’ 민주노동당 전 최고위원과 청년 담당 당직자이라고 하면서 지금 추석이 다가오는데도 갇혀진 ‘구속당원’에게 위안을 주려고 당 차원에서 특별면회를 하였다고 하네요. 이 때 저는 언제나 불만이 쌓였던 민노당에 약간 덕을 보았구나 싶었지요.


그리면서 저는 ‘지문날인거부’로 당하고 있는 불편에 대하여 해결을 요구를 하였더니 이미 중앙당에서도 알고 있으니 노력하고 있다는 지극히 사무적인 답변을 듣었지요. 또한 지역에서 ‘면회’나 편지 조직을 안하고 있는 등의 본인에게 너무 관심을 없다고 말하더니 역시나 지역위위원장에게 알아보겠다고 말했지요.


하여튼 이런저런 불만이나 요구를 말한 것에 고마웠지요. 그럼에도 제 성격이 나쁜 건 알지만 밖에서 무관심한 것에 불만을 표출한 대화이었지요. 그리면서 당내에서 병역거부에 관심있는 모 씨에게 와달라고 전하는 걸 끝으로 그 밖의 대화와 잠깐의 손을 만지는 걸로서 30여분의 접견이 끝났습니다.


이후 몇 번의 특별면회를 하였는데, 앞서 모 님의 특별면회에 대한 냉소한 듯 한 글을 보며 생각한 것이 있었어요.


바로 비록 짧은 시간의 면회이지만 재소자의 입장으로는 소중하거든요. 특히 최근 전국 행형시설에서 무인접견시스템이 도입한 후 여분 없이 정해진 시간동안 마이크를 통해 대화를 하니 감시당하는 건 싫지만 대동한 직원에게 몇 분이라도 시간을 얻어내었던 예전 시스템이 좋았다는 걸 느꼈어요.


그렇기에 마이크는 물론이고 서로에게 장벽이 되어버린 유리창 없이 시간이 넉넉히 주면서 직원 눈치를 보며 가끔 손을 잡을 수 있는 이 장소변경접견은 당사자에게는 정말 소중한 것임에도, 누구나 신청할 수 있지 못하고 국회의원이나 정부기관을 통해서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씁쓸한 느낌입니다.


또한 이러한 ‘빽’에 저항해야 함에도 이용해 버리는 공범이 되거나 추가 면회를 허용하라면서 단식을 해야 하는 투쟁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이 현실에 미안하고 감옥 내 다른 문제에 제기하지 못 하였다는 것에 고개가 숙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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