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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좌파의 역사 - 로렌 골드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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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과거 <노동자평의회를 향한 서울회의> 시절에  '자본주의, 좌익공산주와 계급투쟁' 공개 강연 기획을 하면서,자료집에 실은 글이다. 여기서 울트라 좌파의 역사는 좌익공산주의 역사로 읽어도 된다.

 

 

이 글을 쓴 로렌 골드너는  미국 학생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인 버클리에서 1960년대 후반 급진 좌파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혁명적 관점에서는 반-스탈린주의적이자 반-사회민주주의적인 마이너집단에서 시작했다. 로자룩셈부르크를 통해 이 집단의 레닌주의에서 멀어졌고 이후 상황주의자들, 보르디가, 독일과 네덜란드의 평의회 공산주의, 그리고 보르디가와 평의회 공산주의를 통합을 시도하는 프랑스의 신-보르디가주의적 좌파 공산주의자들 (도브 Dauve, 까마트 Camatte)의 영향을 받았다.

 

 

울트라 좌파의 역사

Christophe Bourseiller (Paris : Denoël, 2003)

 

 

Reviewed by Loren Goldner

 

 

15년 동안 500페이지가 넘는 25권의 책을 출판한다면, 크리스토프 부르셀러 같은 작가를 의심스러워 할지 모른다. 그러나 병적 다변증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르셀러의 1999년 Guy Debord의 전기는 역사적 정밀성이 작가의 강력한 방패막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손안에 있는 책처럼 그곳에 인용된 사람들은 부르셀러가 특별히 그들에 대해 썼던 모든 것들이 그중에 심각한 의심을 가지는 결점이 있다고 충분히 말해왔다. 집필하고 있는 책으로 되돌아오기 전, 부르셀러는 대중 주간지 파리-마치(Paris-Mach)에 한 꼭지를 포함하여, 미디어에 일련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극좌파도 울트라 좌파도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해, 이들이 자동적으로 자격 박탈되는 것은 아니며, 혁명적 좌파에 관한 신중하고 의미 있는 책들은 오직 관찰자인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다. 즉 사람들은 Burnett Bolleton의 ‘스페인 혁명’을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서 부르셀러의 책의 발간은 격렬한 반응을 가져왔고, 다양한 흐름에 대한 그의 표현을 혹평하는 일련의 리뷰들이 발간되었다. 그의 책은 그의 실수와 잘못 모두를 수정하기 위해 요구될 ‘카운터 북’을 모아 정리한 것이었다. 다른 이들은 최근에 고인이 되었거나 실재하는 안 알려진 조직에 연계된 많은 사람들 이름을 출판하는 것은 경찰에게 일거리를 준 것이라고 그를 비난했다.

부르셀러의 책 이래, 프랑스 중산층의 온건 좌파들 중에는 그것을 분명히 차테이블에서의 대화꺼리로 여길 것이며, 전체적으로 볼 때 울트라 좌파의 역사를 다루는 것을 시도한 어떤 언어로 쓰인 책 가운데서도 실존하는 유일한 것이다. 이 모두는 불운한 것이다.

그 책이 분명하고 광범위하게 평판을 나쁘게 하지 않은 것이라면, 이는 젊은 투사들을 위한 참고서가 될 만한 책이다. 젊은 투사들은 여태까지 Anton Pannekoek, Karl Korsch, Herman Gorter, Amadeo Bordiga, Otto Rühle, Paul Mattick, Maximilien Rubel, Daniel Guérin, Grandizo Munis, Guy Debord, Cornelius Castoriadis, Claude Lefort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며, 그들은 옛 소비에트나 현존하는 노동자국가인(트로츠키주의자들이 부르는)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를 ‘맑시즘’과 연관시키고 있다.

주의 깊게 읽기에 앞서, 전체적으로 조망해 보면, 이 책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울트라 좌파의 역사) 전통에 대한 외견상 전화번호부처럼 보일지 모르나, 전화번호부 일지라도 아마도 이 책의 목록과 색인은 유용하다. (불행하게도 거의 프랑스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프랑스어가 부족한 독자에게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이런 저술 행위는 무해한 관음자가 아닌 어떤 부르셀러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의 첫 번째 왜곡은 레닌의 1921년 팸플릿 ‘좌익공산주의와 유아적 무질서(Left-wing Communism: an Infantile Disorder)’로 되돌아가 조롱의 호칭으로써 비롯된 ‘울트라 좌파’를 자유롭게 사용한 것이다. 여러 패퇴된 흐름의 역사적 복권과 그들의 (1920년대부터 대부분 유래하고 1968년에 시작하여 무엇보다 1989-1997년 이래의 조류) 이론가들로 소생된 더 적절하고, 덜 선동적인 말은 ‘좌익공산주의자’이다 (다시 말해 그 말이 부르셀러의 책에 언급된 ‘Socialisme ou Barbarie(사회주의냐 야만인가)’옛 성원, 상황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평의회주의자,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의 전 구성원에 의해 기각됐지만). 최종적 말이 무엇이든지간에 가장 정밀하고 간단한 정의는 상당히 단순하다. 즉 트로츠키주의 좌파로 스스로의 위치한 자기 선언한 혁명적 흐름이다.(짧은 기간이지만) 이는 그들이 레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좌익공산주의자로써, ‘반(反)레닌주의자’ 보다 더 좋은 정의이다.

 

그러나 부르셀러의 비평에 앞서, 그가 논의하고, 왜곡하고 있는 역사적 흐름의 윤곽을 그리는 것이 필요하다.

명확하게 ‘좌익공산주의자’라 일컫는, 실제 수만 명 노동계급 구성원을 가진 대중적이고, 여러 자유주의적 계승자 모두에 대비되는, 두개의 역사적 그룹들은 독일-네덜란드(German-Dutch)평의회공산주의 좌파와 1910년대와 1920년대 이태리 공산주의 좌파였다. (혁명적 익명성의 퇴행으로, 개인숭배를 반영하는 것으로써 딱지를 거부하기 위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후자는 보르디가주의자(Bordigist)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이들 흐름 둘 다는 다른 흐름에 융합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복잡성이 즉각 시작된다. 즉, 독일-네덜란드 좌파와 그 계승자 평의회공산주의자는 보르디가주의자를 권위주의적 레닌주의자로 여긴다. 그리고 보르디가주의자는 프르동주의자에서 생디칼리스트로, 무정부주의자로, 반맑스주의자로 조롱하는 독일-네덜란드 좌파를 레닌의 「좌익공산주의(Left-Wing Communism)」에서 표현되는 모멸적인 언사를 퍼붓는다.

 

어쨌든 간에, 독일-네덜란드와 이태리 좌파 둘 다 공통적인 것은 세계1차대전 후 즉각적으로 서유럽에 러시아 혁명 모형의 일반화를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즉 레닌의 1921년 팸플릿과 초기 코민테른 정책의 근본적인 가정의 일반화이다. 1930년 이후 그들이 알려진 반정당 평의회주의에 기반한 그들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초기 20년대 독일-네덜란드 좌파의 대부분은 그들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분명히 말하고 코민테른의 밀사에 의해 전달된 레닌주의 당을 거부했을지라도 공산주의당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특별히 (영-러시아 무역협정, 크론슈타트의 궤멸, 독일 3월 행동(German March Action)의 실패, NEP의 도입에 따른) 1921년 코민테른 우경화 이후에 독일-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당 둘 다는 비혁명적 세력과의 전략적 연대를 위한 레닌의 논점을 기각했다. 1921년 Herman Gorter의 1921년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Open Letter to Comrade Lenin)’에서 그는 ‘이중혁명’에서 노동계급이 농민과 동맹할 수 있는 러시아와 대조적인 관점에서 서유럽에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립했다는 단순하고 (올바른) 관점을 보였다.

 

항상 정통 레닌주의자로써 스스로를 표방했던 이탈리아 좌파는 다른 방침을 가진다. 그들은 코민테른 1921년 제3차 대회에 의해 수용된 통일전선전략을 기각했다. 그들은 새롭게 설립된 PCd'I에서 ‘이탈리아사회주의자당’의 ‘Serratian 좌파’(각 공산당으로 수용됐던 여러 국가들의 좌파 사회주의자 같이 세계1차대전에서 전쟁찬성 입장이었고 1924년 이후 스탈린적 광신자 가된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는)를 상대로 논쟁을 벌였고, 독일 Thuringia주의 공산주의자-사회민주주의 통치연합 창설에서의 통일전선의 적용을 1921년 비판했다. 보르디가주의자는 레닌에 대해 이들 의견 불일치가 단순히 전술적이었으며, 20년대 초기 PCd'I는 당연히 서유럽 공산주의자 정당의 가장 엄격한 레닌주의자로 구성되어졌다고 주장해왔다.

 

독일-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는 제1차 대전에 따른 전 세계적인 혁명적 봉기의 이전에 결코 목격하지 못했던 정도와 깊이를 가진 산물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위업이 그들을 내몰고 침묵하게 만들기 전, 외국 공산주의자들이 코민테른 내부에서 동등하게 볼셰비키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던 (1921년 까지) 짤막한 시기에, 그들은 (그들의 결점이 무엇이든 간에) 노동자-농민 연대에 기반한 러시아의 ‘이중혁명’과 다르게 독자적인 노동계급이 있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혁명의 문제에 직면하는 순수한 노동계급을 대표했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에서 소규모 민주 집중주의 그룹(Democratic-Centralist)이나 Miasnikov의 「노동자 그룹」과 같은 상대자를 가졌다. 그러나 이들 후자는 세계혁명의 쇠퇴기에 대항하여 패배하는 전투를 위해 투쟁하는 고립된 분파 이외 아무 것도 아니었다. 독일-네덜란드, 이탈리아 ‘울트라 좌파’를 만든 역사적 경험은, 그 후에 잠재적 혁명적 상황은 말할 필요 없이, 풍부한 대중파업의 전통으로부터 길러진 중요한 노동자계급과 세계전쟁 이전과 와중의 반전운동을 포함한다. 분파 역사에 집중한 부르셀러는 전체적으로 (이들 흐름의 진화와 그들의 나중 분파의 흐름에 대한 이해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이 더 큰 사회적 역사를 생략하고 있다. 상당히 최근까지 ‘핵심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잘 알려진 국제적 좌파 조직으로써 트로츠키주의의 우세는 이 경험의 기억을 잊어버리게 했고, 대부분 열렬 투쟁주의자들은 레닌의 1921년 팸플릿을 넘어서서 보지 않았다.

 

부르셀러는 ‘미시 역사에 경도된’ 관찰자로써 자신을 드러냈다. 그는 Gulag(러시아어 'Glavnoye Upravleniye Ispravitelno - Trudovykh Lagerey'(교화노동수용소관리국)의 약어 - 역자)나 베를린 장벽을 세우지 않았던 공산주의, 즉 ‘다른 공산주의’로써 울트라 좌파를 묘사하는 것으로 그의 책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의 주제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 책의 대부분을 통해 leitmotiv로써 다루는 덜 교훈적인 아젠다와 혼재되어 있고, 종말에 대한 실제 ‘교훈’으로써 나타난다. 그 아젠다는 단순하고 직설적이다. 즉, 부르셀러는 (세계1차대전의 찜머발트 좌파의 모형에서 ‘제국주의 상호 간 전쟁을 내전으로’ 돌린)세계2차대전에 대해서 국제주의자 또는 ‘제3캠프’ 전망을 가지는 누군가가 1980년, 1990년대 쇠퇴기에 프랑스 울트라 좌파 주변에 분출했던 기괴한 ‘nagationist’의 전위나 열렬주의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원한다. (이로 인한 결론으로써 ‘반파시즘’에 대한 좌파 비판을 가진 이들은 같은 하늘 아래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1920년대 좌익공산주의자에 대한 부르셀러의 역사적 대우에서, 함부르크 노동자평의회에서 출현한 ‘민족적 볼셰비키’(우파의 좌익)는 그때나 지금이나 독일-네덜란드 울트라 좌파 그들의 중요성과는 전혀 균형 안 잡힌 대우를 받는다. 그는 또한 자본주의 통치의 또 다른 얼굴인, 또는 부르주아민주주의의 최고점인 파시즘을 목격했던 1920년대 초기 이탈리아 좌파의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던) 정식화(formulations)의 일부를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나중에 몇 백 페이지를 그의 요약된 결론을 위한 무대로 설정하고 있다.

 

마음속에 이 아젠다를 가지고 부르셀러의 주제로 되돌아 가보자.

1920년대 후반, 독일과 네덜란드 양국에서 독일-네덜란드 좌파는 작은 분파로 쇠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의 다음 역사는 (흥미롭게도) 그런 분파의 역사였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은 세계2차대전 직후 소규모 대중정당을 구성했었다). 이탈리아의 경우에서, 안토니오 그람시가 1924-5년 PCd'I의 기구(apparat)로부터 보르디가주의자를 제거하는 스탈린의 정책을 이식하는 핵심 인사였다는 것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부르셀러는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한 그람시는 망명 중 그 당의 1926년 Lyons 대회에 그 주류에 반대한 투표를 집중시키는 것을 도왔다. 1970년대에 비로소 (민족주의자 편의를 위해 살짝 재명명 된) 전후 PCI(이탈리아공산당)가 당 초기에 보르디가의 선도적 역할을 인정할 수 있었고 PCI는 학문적 ‘서구 맑스주의’의 세련된 경지에 있는 많은 순수한 사람들에게 깜짝 놀람을 가져올, 그람시의 친 스탈린적 음모를 용인하는 단계로 갈 수는 없었다. 보르디가는 1970년까지 살았고, 맑스의 1844년 수고에 대한, 러시아 자본주의 본질에 대한 훌륭한 이론적 작업뿐만 아니라 오늘날 재발견되어지는 자본주의의 환경파괴에 관한 텍스트를 1960년대에 집필했다.

 

역사적인 이유 때문에 1920년대 울트라 좌파를 계승하는 유산은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에서 보다는 프랑스에서 더 많은 반향이 있었다. 전체주의 (파시스트 또는 스탈린주의자) 또는 1940년 나치 점령 이후, 프랑스에서 은신처를 발견한 양 세계전쟁 시기의 반동적인 정권을 벗어나려는 많은 전투주의자들은 점유되지 않은 지역(무엇보다 Marseilles)으로 재배치 할 수 있었으며, 1945년까지 재 결집 하거나 나중에 미국과 멕시코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에서 트로츠키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보르디가주의자, 평의회공산주의자들, 특히 「프랑스 좌익공산주의」와 RKD(프랑스에 망명한 그룹)는 가장 혹독한 필요성에 의해 부여된 불안한 단체로 전쟁기간 동안 게슈타포와 스탈린 억압에서 살아남았다.

 

이들 그룹과 개인들은 부르셀러가 그의 책 전체를 통해서 추적하고 있는 부르주아지-민주주의적 ‘반파시즘’에 대한 거부에 기초하여 2차세계대전에 대한 부끄럽지 않은 국제주의적 경향을 지녔다. 그러나 부르셀러는 ‘주적은 자국에 있다’라는 국제주의자의 관점은 1939-40년 ‘허위(phoney) 전쟁' 동안과 스탈린-히틀러 협약 이라는 이유 때문에 울트라 좌파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스탈린주의자, 사회민주주의 좌파, 트로츠키주의자가 보유한 관점이라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1941년 6월 히틀러의 러시아 침략은 첫 번째 세 그룹을 연합국을 위한 노골적이고, 비판적 또는 호전적인 지원으로 강제했다. 그 결과로 프랑스(또는 점령된 유럽 어디에서든지)에서 그러한 국제주의적 관점으로 조직된 어떤 전투적 조직도 생존의 위협을 받았고 , RKD의 한 원로는 나중에 파리의 Renault-Billancourt 공장에 리플릿 살포되었을 때, 그 구성원들은 게슈타포보다 스탈린주의자가 지배하는 레지스탕스를 더욱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트로츠키주의자 같은 이들 그룹의 대부분은 1917-21년 보다 2차 세계대전에 뒤따르는 심화된 세계혁명 물결을 기대했지만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이유들이 있다. 그러나 그 이유 중 하나는 연합국이 역사를 학습했다는 것과 세계 1차대전 이후 봉기의 재현을 군사적으로 선점하기 위해 그들 힘의 모든 것을 쏟았다는 것이다. 1989년 이후 ‘민주주의의 승리’ 물결의 유행에 울부짖는 부르셀러는 전체적으로 2차 세계대전의 이 측면을 잊어버렸다. 독일에 대한 연합국의 폭격은 공장보다는 노동자 거주지역과 시설물을 목표로 했다. 즉 붉은 군대는 소비에트의 도시 수복에 앞서 1944년 반란을 소탕하도록 나치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어 Warsaw의 동부에서 전진을 멈추었고 이는 독립적 해방주의자들을 제거하게 만들었다. 부르셀러는 무솔리니를 몰아냈던 1943년 봄 북부 이탈리아 파업 물결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일주일 후, 밀란과 튜린(Turin)에 대한 연합국 폭격이 시작되었던 것을 언급하지 않는다. 국제주의 그룹의 위태로운 존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존했으며, 전후 첫 번째로 중요한 파업 (1947년 5월 정부와 결별한 프랑스 공산주의자당에 기여한 Renault-Billancourt 공장) 하나에서 Lutte Ouvriére의 창립 구성원을 포함한 몇몇 그들의 구성원, 보르디가주의자, Socialisme ou Barbarie의 미래 구성원들은 파업투쟁위원회에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전후시기로 가져가고, 생존했던 흐름들에 대한 재분류를 조사하면서 부르셀러는 Socialisme ou Barbarie의 역사로 되돌린다. 1945년에 1944-47년 그리스 내전에서 살인마 스탈린주의자와 ‘트르만 독트린’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그리스 트르츠키주의자Cornelius Castoriadis는 프랑스에 도착했다 (Castoriadis는 놀랄만한 그리스의 혁명가 Aghis Stinas에 의해 결정적으로 형성되어졌다). 1949년 경, Castoriadis와 그의 동조 그룹은 제4인터내셔널과, 소비에트 블록이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하고 레닌주의적 전위당을 기각한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했다. 몇 달 후,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Castoriadis와 Claude Lefort는 Socialisme ou Barbarie 그룹을 설립했다. Socialisme ou Barbarie는 이미 미국의 Johnson-Forest(C.L.R James-Raya Dunayevskaya-GraceLee) 경향과 또한, 그것의 존재과정에서 연줄을 가졌던 영국 그룹 ‘연대(Solidarity)’, Pannekoek, Canne-Meier, Paul Mattick을 포함한 생존한 네덜란드, 독일 평의회공산주의자들과 같은 국제주의적 상대방과 연락하고 있었다.

 

1949년에서 1965년까지 (그리고 냉전에 의해 초래된 극심한 긴장과 국제적, 국내적 환경에서) Socialism ou Barbarism은 혁명 프로젝트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것의 실제 장점은 전후 1950년대 영국, 미국, 프랑스를 제외한 ‘선진 자본주의’ 전체에 걸쳐 계속 표면화된 와일드캣 투쟁(wildcat struggles)에 대한 동조였다. (미국의 존슨주의자(Johnsonistes)와 같이) 이들은 트로츠키주의자보다 더 명쾌하게, 의심스런 ‘개혁적’ 스탈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자 정당, 혁명에 대한 ‘조합 포섭’의 트로츠키주의적 전망의 한계를 보고 스스로를 ‘Social Barbarians’ 로 불렀다. Castoriadis의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에 대한 분명한 기각과, 정통적인 위기의 형태에 대한 복속과 맑스의 가치법칙에 의해 형성된 시스템에 대한 반대로써, 'order givers and order takers'의 시스템으로써 전체적으로 자본주의를 보는 증대되는 경향은 통찰력이 부족한 것이었다. (이는 Castoriadis의 1959-62년 시리즈에서 가장 명백하고, 나중에 널리 확산된 팸플릿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혁명적 운동(The Revolutionary in Modern Capitalism)’에서 더욱 그렇다) Socialism ou Barbarism의 진화에 영향을 미치는 중심적 발전은 1953년 동독 노동자의 봉기, 1956년 ‘사건들’(제20차 CPSU 대회, 헝가리 혁명, 폴란드 노동자 불안, 수에즈 위기 등),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에서 프랑스의 패퇴, 4공화국의 붕괴와 5공화국 수장으로써 드골(DeGaulle)의 귀환, 일반적인 탈식민지화이다. 트로츠키주의적 ‘정통’의 확산되는 변형들에서 경직되어지는 것에 대한 거부와 워싱톤-모스크바 세계공동권력에서 ‘자신의 캠프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거부라는 개방성으로 인해, ‘Social Barbarians'은, 그들의 이론 생산과 노동계급 속에서 그들 중재의 한계가 무엇이든 간에, Guy Debord, Gilles Dauvé(별칭 Jean Barrot), Informations et Correspondances Ouvrieres(ICO)의 설립자들은, 젊은 사람들에게 공간을 창출한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들 일부 한계는 그 해산을 발표했던 Socialism ou Barbarism 의 1967년 진술에 의해 드러나며 (그 저널은 1965년에 발간이 중단되었다), 1968년 5월에서 6월 동안 6주간의 와일드캣 총파업 1년 전에 노동계급의 혁명적 봉기가 없을 것이라 기대했다고 말한 것에 있다. 그러나 Socialism ou Barbarism의 ‘평의회 사상’은 혁명 개념의 역사적 퇴조기 동안 확산되었고, 또한 (1973년까지 미국과 영국, 1977년까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에서) 계속되는 노동계급 격동에 대한 이론화를 도왔다.

 

부르셀러(문제 많은 Guy Debord의 자서전의 작가이기도 한)는 그의 진술에서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을 거의 생략할 수 없었다. 상황주의자와 1967년 Debord와 Raoul Vaneigem의 책은 어떤 다른 흐름 보다 더 1968년 5월 혁명의 ‘정신’을 예상했다. 1968년 이전, 울트라 좌파를 포함하여, 보다 분명한 맑스주의 좌파의 엄격성에 의해 쫓겨난 많은 사람들은 Debord의 ‘스펙터클한 사회(The 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 그들이 알지 못했던 맑스가 존재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이전 울트라 좌파가 접근하지 못했던 길에서 현대 자본주의 일상에서 맑스가 살고 있다는 것을 연결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상황주의자들은 강령적 기반위에서 구성원들을 찾는 그룹이 아니며, 공식적으로는 1972년 해산했다. 그래서 그들의 텍스트는 맑스, 노동자평의회의 역사적 역할, 다른 것을 모색하는 사람들의 위한 울트라 좌파의 다른 흐름의 탐색에 대한 출입문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Rene Lefeuvre 주변집단인 Editionas Spartacus가 출간한 책과 팸플릿과 유명한 Vieille Taupe 서점은 울트라 좌파로 가는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마오주의자, 트로츠키주의자, 심지어 무정부주의 흐름으로 더욱 유명한 1968년 프랑스 5월, 6월 총파업은 실제 역사적 망각에서 울트라 좌파를 끄집어내는 중기적 효과가 있었다. James/Castoriadis/Lee의 책 ‘Facing Reality’는 1958년에 예언적으로 그것을 지적했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움직일 것이고, 그들이 행동할 때, 그들은 죽음이 임박한 프랑스공산당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5월은 사실 독일, 이태리, 영국, 미국, 일본, 중국, 멕시코, 브라질,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다른 사회적 계층(특히 학생)과 노동자의 ‘급진화’를 보여준 1968년 전 세계적 봉기의 유일한 부분이었으며, 뒤에 가장 유명한 경우로 이름 붙여진 것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반향을 보인 가장 심도 깊은 운동이, 정확하게 울트라 좌파 전통이 가장 복잡한, 상대적으로 온전하게 계속성을 가졌던 국가에서 발생했던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갑자기 ‘프랑스가 재치기할 때 유럽은 감기에 걸린다’라는 오래된 농담이 급격하게 다시 만들어 졌다.

 

프랑스 노동계급에 의한 대중행동의 관점에서, 1968년 5월은 사실 이전에는 결코 달성되지 못했던 한 정점이었다. 1969년에서 1977년 동안 이태리의 ‘오싹한 오월(The creeping May)’과 1974-5년 포르투갈의 봉기는 심화된 노동계급의 계기로써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 프랑스 사건의 국제적 영향 같은 어떤 것도 달성하지는 못했다. 5월은, 역사적 독일-네덜란드 좌파, Socialism ou Barbarism, 상황주의자에 의해 발전됨으로써, 1970년대 초 「사회당」이 ‘자주관리(self-management)’에 관해 논의해야 했던 지점에 대해 평의회 사상을 ‘전달’했다. 그러나 대중운동이 쇠퇴 되었을 때, 무엇보다도 1973년 세계적 경제 위기가 시작된 후에, (Socialism ou Barbarism나 상황주의자 둘 다 어떤 것을 말하지 않았다. 부르셀러 역시 이것에 관해 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다른 흐름들이 표면화되기 시작됐다. 초기에 일부 마오주의자와 세 개의 지배적인 트로츠키주의 그룹은 프랑스 5월의 주된 조직적 수혜자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레닌과 트로츠키로부터 물려받은 이론적 틀의 반복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1968년 이후 정치적 영역의 순간을 넘어서는 정치적 조류를 담는 책과 팸플릿을 거의 쓰지 않았다.

 

현재의 이론적 이해에 가장 많이 기여한 일부는 독일-네덜란드, 이탈리아 공산주의 좌파의 종합을 시도하는 흐름이다. 이 격론의 가장 중요한 인물은 Jacques Camatte와 그의 저널 ‘Invariance’이며, 그리고 ( 몇 년 동안 필명 Jean Barrot을 활동했던) Gilles Dauvé이다. (당, 평의회)같은 ‘조직 형태(에 대한)’ 끝없는 논쟁의 환경에서 이들의 기여는 맑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의 범주, 특히 자본론 I권의 ‘미 출판된 6장 (Unpublished Sixth Chaper)’에 역사적 조직 형태를 구체적으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부르셀러가 이 발전에 대해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은 그의 책이 가지는 천박한 특징이다. 그는 Jacques Camatte의 저작들이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고 세 번 Jacques Camatte를 언급한다. 그리고는 그의 책 또는 ‘Invariance’의 진화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negationist’ 사건에 도달하는 것을 몹시 서두른다. 그 사건은 Deilles Dauvé/Jean Barrot가 (자의에 의해 negationist 아니라 어떤 이유가 negationist에 대해 만족하는) 함축하고 있다. 그가 Dauvé의 초기 저작에 관한 실체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데 Dauvé의 초기 저작은, 1970년대 Camatte의 저작의 일부와 더불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을 가치를 가지는 (여전히 읽혀지고 있는) 프랑스의 1968년 후 시기 몇 가지 이론적 저술 중 몇 안 되는 것이다.

이 소동의 배경에 있는 한 인물은 Mark Chirik(1907-90)이었다. 부르셀러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삶 중 하나를 살아온 그를 말하면서 (그럼에 따라 Malaquais의 “roman a clef”의 주된 인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는 Chirik에 대해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1907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Chirik는 1919년 팔레스타인공산당 창립 멤버였고, 후에 1920년대 프랑스로 이주했다. Chirik는 울트라 좌파의 영향력이 미치기 전에 트로츠키주의를 경험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세계 2차대전 동안 살아남았으나, 1952년 세계 3차대전 예견하면서 베네수엘라로 떠났다. 그는 학생들의 작은 흐름이 성장하고 있던 베네수엘라에서 1968년까지 머물렀으며, 그런 다음 프랑스로 되돌아갔다. 프랑스는 그와 그의 베네수엘라 추종자들이 「혁명인터내셔날(RI)」를 발진시켰던 곳이며, RI는 커다란 좌익그룹의 그늘 아래 조직을 체계적으로 건설하고자 시도했던 1968년 이후 유일한 프랑스 울트라 좌파였다. 1980년대 퇴조기의 시작과 특히, 1990년 Chirik의 죽음 이후 RI는 분열되었다.

 

1970년 초 이후 프랑스에서 대중투쟁은 감소했고, 그리고 좌익 중에서 울트라 좌파는 희생이 있었다. 많은 소그룹과 출판물은 사라졌다. 이런 퇴조기는 1979년과 1996년 사이에 몇 번의 경우에 확 솟아올랐던 ‘negationist’ 에피소드의 무대가 됐으며, 울트라 좌파 주변을 상당한 정도를 오염시켰다. 나치 가스실 존재와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협의된 계획의 존재에 대한 ‘revisionist(수정주의자)’ 의 부정에 집중된 이 에피소드의 분규는 여기서 열거될 수 없다. 그러나 ‘social-barbarian’ 주변으로부터 출현한 전투주의자 4분의 3이 1979년 몇 달 안에 ‘revisionist’ 테제에 대해 승리했다는 것은 부르셀러의 (책 전체에 걸쳐 많은 측면이 생략된) 사악한 단정을 강조하는데 필수적이다(pp. 439-40).

 

전체 사건의 중심에는 Pierre Guillaume이 있다. Pierre Guillaume는 Vieille Taupe 서점 설립자이다 (오늘날 사실상 울트라 좌파 전체와 결별되어진 이후 범극우파에 소속된다). Guillaume 와 negationist 사건에서 초기 그를 추종했던 울트라 좌파 일부는, 만약 나치 가스실의 ‘신화’를 폭로하는 것에 성공했다면, 그들은 세계2차대전에서 파시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라는 기초위에 세워진 전체 부르주아지 이데올로기의 구성체를 파멸시켰을 것이라는 Robert Faurisson의 논문에 포획되었다. 전쟁과 그 이후 다른 국제주의적 흐름의 어느 누구도 이를 통해 생존한 울트라 좌파와 함께 시작하는 이 단계를 밟기 위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는 보르디가주의자를 포함한다. 나치의 인종말살을 부정하는 방법이 없지만, 보르디가주의자의 논문 ‘Auschwitz or Great Alibi’ 이에 대한 매우 기계주의적 분석을 내 놓았다. (1979년 La Vieille Taupe에 의한 팸플릿으로써 이 논문의 재출판은 울트라 좌파 주변에서 negationist 사건의 공적 시작으로써 비추어질 수 있다). 내 느낌은 20년 동안 대중투쟁이 침체되었던 시기에 negationism과 그것에 매혹된 진지한 미디어 관심은 몇 백 명 정도 되는 주변적 소규모 동아리에 새로운 삶과 움직임을 주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1989-91년 사건 후에 이는 또한 지배 사회의 이데올로그에게 (부르셀라 책 같이), 극좌와 극우는 만난다는 옛 속담과 함께 그리고 탈 신화로써 그들 스스로를 회복하기 위한 훌륭한 기회를 인지한 Didier Daeninckx와 같은 전 스탈린주의자의 사과처럼 반파시즘과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흐름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는 훌륭한 구실을 제공했다.

 

500페이지에 걸쳐 부르셀러는 ‘울트라 좌파는 있는 그대로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결론적으로 서술한다. 그런 단언은 다시 한 번 이 비열한 ‘미시 역사학’ 수집가가 그의 주제를 떠올리게 했던 사회 역사에, 특히 1920년대 초반 독일-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가 수만 명 노동자의 표현이었고, 또한 1968년과 그 부산물로써 부르셀러가 추적해왔던 사상이 수천 명의 전투주의자를 형성한 것에 대해 눈을 감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1989-91년 이래로 미국의 IWW로부터 C.L.R. James, 독일-네덜란드, 이탈리아 좌파에 이르기까지의 ‘다른 공산주의’가 이론적으로 무장된 전투파들의 주의를 왜 끄는지 설명하지 못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Camatte, Debord, Dauvé/Barrot, Bordiga, Munis, and Gorter의 책이 처음 출판됐을 때 보다 수많은 언어로 쓰인 이들의 책을 왜 읽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부르셀러의 책은 세계자본주의 하에서 하향하는 상황의 나선형으로 ‘대안 없음’을 쌓아 놓은 Stephane Courtois의 ‘공산주의의 암울한 책(Black Book of Communism)’의 장르에 속한다. 이것이 그들이 너무나 많이 주장한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생산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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