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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농업에서의 변화

「인간과 계획 제4장 (2)」 『총명한 유물론』 제3집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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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에서의 변화

 

제2차 농업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농촌 소자본가들─쿨라크(부농)─의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그리고 1917-8년에 대지주들의 토지를 분배했던 것과 달리 농민들 사이에 이를 분배하지 않고 집단농장의 새로운 공동소유로 합쳐놓음으로써 마지막으로 남은 “사적소유의 요새”는 실제로 사라졌다. 그에 더하여, 또다른 중대한 결과는, 농민들이 비록 초기(1929-32)에 흔히 그랬듯 기계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한 상황에서도 대규모 생산의 이점을 직시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스탈린은 이 주제에 대해 1929년 10월에 다음과 같이 논했다:1

“구(舊) 돈 지역의 호페르 지구의 집단농장을 예시로 들어보자. 이 집단농장들의 기술적 수준은 외형상 소규모 농장들의 그것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기계도 드물고, 트랙터도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농장 내부에서 농민들의 생산도구를 단순히 하나로 결합한 것은 우리 실무일꾼들이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성과들을 낳았다. 이러한 성과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집단농업으로의 이행이 곡물경작면적을 30, 40, 50%까지 증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아찔한’ 성과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이는 개별적 노동의 조건 하에서는 무력했던 농민들이, 생산도구를 하나로 모으고 집단농장으로 단결하자마자 거대한 역량으로 변모했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또한, 개별적 노동으로는 경작하기 어려웠던 황무지와 옥토를 농민들이 경작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우리의 기계-트랙터사업소(MTS)와 트랙터 종대가 싹트기 시작한 집단농장을 지원하러 나설 때, 집단농장이 개인농장에 대해 가지는 우월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더욱더 명백해질 것이다.”

대규모 농업경리의 우월성에 대한 농민들의 이러한 각성은 과거에는 결코 다루어진 적이 없던 문제들을 곧바로 제기했다. 그것은 영세한 소농경리에서는 결코 불가능했던, 보다 효율적인 분업과 개인의 적성에 따른 전문화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이었다. 게다가, 과거 러시아에서 더 나은 영농법이 활용되던 곳들은 다소 현대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던 소수의 사유지들에서, 즉 자본주의적 조건 하에서 실행됐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전례없는 짧은 시간 안에 수만의 대규모 농업기업소가 동시다발적으로 탄생하게 됐고, 이 동일한 문제들은 협동조합적 소유의 기반 위에서, 즉 해고의 위협이라는 채찍 아래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설득의 방법에 의해, 그리고 모든 협동조합이 보유하고 있는 최후의 예비수단인 제명(출자지분의 박탈)만을 남겨둔 채 해결해야 했다. 과거에는 소수의 계몽된 지주가 러시아 내외의 농업대학 출신의 숙련된 관리인력의 보조를 충분히 받을 수 있었던 데 반해, 집단농장 운동이 전개되는 그 방대한 규모는 그러한 공급원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따라서 관리인력은 주로 농민들 자신들로부터, 즉 그 누구 못지않게 협동조합적 경리의 조직화에 관한 경험이 전혀 없지 않았던 남녀 농민들로부터 충원되어야 했다.

 

집단농장체제의 출현과 동시에 곧바로 대두된 개인적 책임, 개인적 노력, 개인적 주도성에 관한 문제는 이로써 선명하게 부각됐다. 집단농장을 “부활한 형태의 농노제”, “농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기계장치” 등으로 상상하는 적대적 비판가들이, 그와는 정반대로 집단농장이 계획의 영역에서 러시아 농민들의 개인적 주도성을 발휘하는 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만들었고 또 그 필여성을 낳았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스탈린은 이 주제와 관련하여 농업지구의 사업상태를 다룬 1933년 1월의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집단농장은 대규모 기업이다. 대규모 기업소는 계획이 없이는 관리될 수 없다. 수백 가구를, 때때로 수천 가구를 포괄하는 대규모 농업기업소는 오직 계획적 관리의 기초 위에서 작동할 수 있다. 그것이 없이는 필연적으로 폐허로 변하거나 쇠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당과 정부의 책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집단농장제의 결과로 증대한다고 그는 말했다.2 그러나 이는 공산주의자들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그 다음 달에, 제1차 집단농장돌격대원 대회에서 스탈린은 이 점을 특별히 강조했다. 이미 집단농업을 통해 달성한 중대한 성과들을 확장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은 의식적인 사업이었다. 그는 이 점을 보다 명확하게 정의했다. “일한 만큼의 양에 따라 집단농장의 소득을 분배할 것; 집단농장 재산을 잘 살필 것; 트랙터와 농기계들을 돌볼 것; 말들의 관리를 체계적으로 조직할 것; 노동자-농민 국가의 과제를 완수할 것; 집단농장에 잠입한 쿨라크들과 그들의 아첨꾼들을 쫒아낼 것. 이러한 측면들에서 가장 효율성을 내는 것은 모든 집단농장 농민들을 번영하는 농민들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가 선언하였듯 공산주의자들만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비당원 인민들을 가르쳐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3

 

사실, 여러 5개년 계획─스탈린이 연설하던 제2차 5개년 계획의 착수 시점─은 소련의 농민들을, 비록 다른 경로를 거치긴 했으나, 우리가 보아왔듯 1928-9년 이후 공장노동자(및 기타 모든 임금노동자)들이 갈수록 그 폭과 깊이를 더해가며 해결해오던 것과 정확히 동일한 과제, 즉 집단적 이익 및 목적을 개인의 주도성 및 이익과 결합하는 과제로 이끌어주었다.

 

집단농장의 돌격대원들이 대회로 모인 것은 공장 돌격대원들의 제1차 대회가 열린 지 3년이 더 지난 뒤였지만, 그러한 대회가 개최됐다는 사실 그 자체는 농민의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가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단계에서 핵심은 계급으로서 농민의 변화된 사회적 의식뿐만이 아니라, 개별 인격체로서 농민들의 변화된 세계관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3년의 경험이 더 쌓인 1936년 11월에, 스탈린은 (국가의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기 위해 열린) 제8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 소련의 농민은 전적으로 새로운 농민이다. 소련의 농민은 자신의 사업과 부의 토대를 개별적 노동과 낙후된 기술장비가 아니라 집단적 노동과 현대적 기술장비에 두고 있다.” 소련의 농민은 실로 “인류사가 일찍이 알지 못했던 부류의 농민”이었던 것이었다.4

 

1939년 전연방공산당(б) 제18차 대회에서 몰로토프는 집단농장과 공업부문에서 스타하노프 운동의 발전을 당당히 지적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집단농장의 구성원들이 참으로 빈번히 “노동생산성을 성공적으로 개선하는 데에 있어 노동자들에게 결코 뒤쳐지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5

 

이 주장을 더욱 면밀히 검증하기에 앞서, 집단농장의 채택으로 말미암아 소련 농업에 초래된 변화를 먼저 개괄해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집단농업에서 스타하노프 운동은 공업부문 못지않게 자체의 물질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 경작지와 말, 가축, 장비가 전혀 없는 농가는 소련의 농촌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모든 농가들은 생산에 참여하게 됐으며, 합리적인 농업체계를 위한 기반이 창출됐다. 가정을 지탱하기 위해 해마다 혹은 연중 일정 기간동안 자신보다 더 부유한 자의 토지에서 머슴으로 일하며 노동력을 팔아야 했던 “빈농”은 사라졌다. 토지의 경작에 투입되는 전체 동력 중 기계적 견인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1916년에 불과 0.8%에 지나지 않았으나, 1938년에는 70% 턱밑까지 도달했다.6 여러 5개년 계획기간을 살펴본다면, 봄철 쟁기갈이의 기계화율이 1932년 19%에서 1940년에는 67%에 육박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봄철 파종작업의 기계화율은 1932년에 20%에서 1940년 52% 이상으로 증가했으며, 콤바인을 통한 수확작업은 1932년에 불과 4%에서 1940년에는 약 43%에 달했다. 이 세 가지 수치들은 제4차 5개년 계획에 따라 1950년에 각각 90%, 70%, 55%로 끌어올리도록 계획되어 있었다.7 이러한 기계화의 결과는 노동생산성의 비약적인 향상과 공업 및 운수부문으로의 수백만 명의 새로운 노동력의 방출, 농촌에서 더욱 생산적인 작업형태에 여성 농민의 대규모 참여(노동일제 원칙이 “작업성과에 따른 임금률”의 확립을 수반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새로운 농업부문의 출현, 파종면적의 확대, 농촌 내 노동열의와 사회주의 경쟁의 발전이었으며, 농업계획을 역사상 최초로 실질적인 가능성으로 전환시켜 놓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국을 “소비지역”과 “생산지역”으로 나누던 오랜 구분은 거의 일소됐다. 1913년 당시 작물재배면적이 450만 헥타르에 불과했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니즈니, 예카테린부르크와 같은 고전적인 “소비지역” 현(縣)들은 1938년에 이르러─모스크바, 레닌그라드, 고리키, 스베르들롭스크 주(州)로 변모하여─600만 헥타르에 육박하는 땅에 씨를 뿌렸고, 이 경작지의 거의 전부가 집단농장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변혁을 가능하게 한 일차적 요인은 단연코 단위당 수확량의 눈부신 성장이었다. 헥타르당 평균곡물생산량은 1910-4년에 7.3첸트네르에서 1933-7년에는 9.1첸트네르로, 1938년과 1939년에는 9.3첸트네르로, 1940년에는 10.7첸트네르로 지속해서 상승했다.8 우리는 본 장의 도입부에서 1950년까지 단위당 수확량을 (12첸트네르로) 대폭 끌어올리는 일이 현실적 계획의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1927년에서 1937년 사이 곡물과 공업용 작물 총생산량의 증가는 인구의 증가를 앞질렀고, 상품화된 잉여의 비약적인 증대를 실현할 수 있게 했다. 이에 따라 곡물의 경우 (시장 출하용으로) 이용 가능해진 총생산 대비 비중은 12%에서 40%로 상승했다. 육류의 경우 그 비중은 35%에서 59%로, 우유는 15%에서 31%로, 그리고 양모는 27%에서 75%로 각각 상승했다.”9

이것이 집단농장에게 무엇을 의미했는가는 1노동일당 평균곡물배분량의 성장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1932-3년에 11.76센트너에 불과했던 곡물배분량은 1937-8년에 34.13센트너에 달하며 거의 세 배로 뛰어올랐다. 후자[1937-8년; 역자]의 연도에 1노동일당 현금지급액은 1932년 대비 3.5배에 달했다. 1913년에 농민의 절반 이상은 한 해 내내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한 충분한 곡식을 보유하지 못했다. 1938년에 집단농장의 평균적인 가구는 새 수확기를 앞둔 시점에도 이미 창고에 2/3톤에 달하는 밀가루를 비축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1노동일당 곡물 2kg 이하를 배분받은 집단농장 농민들은 1934년에 80%였지만 1937년에는 16%에 불과했다. 첫해에 1노동일당 2-3kg를 배분받은 농민들은 전체의 14%였지만, 두 번째 해에는 27.4%로 늘어났다. 3-5kg를 배분받은 농민들은 1934년에 겨우 5%를 약간 상회하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1937년에는 42% 이상을 차지했다. 5kg와 그 이상을 배분받은 농민들은 1934년에 1% 미만에 불과했지만, 1937년에는 14%를 차지했다.10 이러한 비중의 변화가 불러온 도덕적·정치적 변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눈부신 성과는 소련의 농업이 전시에 달성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국몰재배면적은 11% 감소했고, 수확량은 2년동안 22% 하락했다. 실제로 1918년도의 파종면적은 1916년보다 거의 2,500만 에이커나 더 줄어들어 있었다.11 1941년에 추파성(秋播性) 작물의 재배면적은 미점령 지역에서 거의 400만 에이커 정도 증가했고, 1942년에는 추가로 600만 에이커 정도 불어났다. 1943년에는 그 전해에 러시아 남동부에서 독일군의 대공세에도 불구하고 미점령 지역에서 작물재배총면적은 1913년보다 여전히 26% 더 넓었다. 1944년에는 1,700만 에이커의 토지에 추가로 파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미점령 지역에서 1941-3년에 실제로 노동에 종사하는 집단농장 농민 1인당 총생산량은 1938-40년보다 더 높았다. 중앙 “비흑토”지대(즉, 이전에 곡물을 소비하던 주들)에서 1인당 생산량은 53% 이상 증가했으며, 우랄 지역에서는 43%, 볼가 지역에서는 13%, 서시베리아에서는 10%가 상승했다.12

 

제1차 및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경험 사이에서 이러한 눈부신 대조가 주로 경제조직의 형태로서 이미 돋보였던 높은 수준의 기계화와 결부된 집단농장의 우월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오직 이것만이 경험을 덜 갖춘 여성들이 중요 지위에 있는 남성들의 자리를 그토록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처럼 촉박한 상황에서도 그와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 집단농장 여성 농민들에게 인정된 노동일은 전쟁 전에 전체의 38%를 차지했지만, 1944년에는 80%를 초과했다. 1940년에는 트랙터 운전수의 4%와 콤바인 운전수의 6%만이 여성들이었지만, 1944년에 그 비율은 각각 81%, 62%로 상승했다.13 전시에 소련이 농산물 공급에 주로 의존했던 동부 지역─볼가, 우랄, 시베리아─에서는 축산농장 관리자 중에서 8분의 1만이 여성이었지만, 1943년에는 거의 5분의 3에 달했다. 집단농장에서 가장 중요한 모든 작업단위─“작업반”이나 분조─의 지도자들은 1940년에 3.5%에 불과했지만 1943년에는 38.5%에 달했다. (중앙) “비흑토” 지대에서 집단농장의 여성위원장들은 1940년에 3.5%였지만, 1943년에는 17.5%에 달했다. 분조장 중에서 여성의 비중은 5%에서 64%로, 축산농장의 관리자 중에서는 30%에서 72%로 상승했다.14

 

농민들의 물질적 번영에서의 변화는 생활수준과 편의, 그리고 문화적 수준에서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문제의 핵심은 더 이상 마을에서 쫓겨나 기아의 공포 속에 살아가며 떠도는 실업자와 유랑 농민들에게 공업부문의 자리를 마련해주는 것─즉 시혜의 차원에서 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러한 농민들이 있었던 시절은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스탈린은 전쟁 이전의 마지막 공산당 대회에서 말했다.15 히틀러의 침략 직전에 집단농장 농민들의 일상은 보다 광범위한 문화적 지평들과 물질적 안정으로 가득 차고 더욱 다채로워졌다. 농업 집단화 이전에 농촌 인구의 5분의 4는 문맹이었으나, 1939년 초반에 이 비율은 4분의 1 이하로 떨어졌으며, 그마저도 주로 노년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문화회관과 도서실 및 독서실, 중등학교와 군중예술극장, 그리고 문화적 진보를 위한 수많은 기타 물질적 요건들이 이제 대단히 많은 수로 존재하고 있다. 몰로토프는 같은 당 대회에서 집단농장 농민들 사이에서 무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상당한 규모의 지식인들─농업기술자, 교사, 의사 및 기타 보건노동자, 그리고 기계-트랙터사업소가 발행한 수천 개의 농촌 신문들에서 단련된 언론인 및 작가들─의 출현에 대해 주목했다. 지난 수년간 소련 언론에는─불과 몇 달 남짓한 기간에 걸쳐 무작위로 발췌한─다음과 같은 부류의 보도기사들이 풍부하게 넘쳐났다:

“1914년에는 단 3,100명의 의사만이 8,000만 명에 달하는 농촌 주민을 진료했다. 현재 러시아 연방의 마을들에만 해도 약 11,000명의 의사와 40,000명 이상의 준의사 및 조산사, 그리고 29,000명 이상의 간호사가 근무하고 있다. 새로운 유형의 예방기관과 치료기관들─산원(産院), 탁아소, 종합병원, 집단농장 요양소 등─이 집단농장 마을에 출현했다. 전쟁 기간에 마을의 보건시설은 계속해서 발전되고 개선됐다. 전쟁의 4년 동안 농촌의 병원들에서 침상의 숫자는 45,000개나 증가했고, 1,770명의 의사가 마을보건시설에 추가로 충원됐다. 볼로그다(Vologda) 지역의 몇몇 지구들에서 집단농장들은 자체의 재원을 동원하고 주 및 지구별 기관들의 도움을 받아 집단농장 아동요양소를 설립했다. 집단농장들은 가장 뛰어난 건물들을 이 요양소의 이용에 선뜻 내주었으며, 땔나무와 식량을 원할히 공급해주었다. 의사들과 의료노동자, 교사들은 이러한 보건시설들에서 아동들을 정성껏 돌보았다. 짧은 기간 동안 8,000명이 넘는 아동들이 이곳에서 요양을 받았다.16 ⋯ 노브고로드, 9월 18일. 이 지역의 수많은 집단농장들은 문화회관과 독서실, 도서관을 건설하고 있다. 심스크 군17의 골린스키 농촌소비에트18에서 집단농장의 농민들은 대규모 문화회관을 짓고 있다. 이 문화회관은 200석의 대강당과 독서실, 휴게실을 갖출 예정이다. ⋯ 스타라야 루사 군19의 칼리닌 및 할투린 집단농장은 소강당과 도서실, 학습실을 갖춘 독서회관20을 짓고 있다.21 ⋯ 슬렙촙스카야, 그로즈니 주, 11월 27일. 아스타강에서 순자강까지 12마일을 잇는 관개용 운하의 건설은 이 지역의 순자 군에서 시작됐다. 이는 이곳 농민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이 운하는 1만 2천 에이커를 넘는 토지의 관개를 가능하게 할 것이며, 그 수력은 곧 지어질 예정인 1,300 킬로와트급 수력발전소 두 곳의 동력으로 활용될 것이다. 운하의 건설은 36일 만에 완료하기로 결의됐고, 집단농장은 16만 입방미터에 달하는 토사를 처리하는 이 작업을 위해 상시적인 분조들을 편성, 배치했다. 순자 군의 집단농장 농민 1,500명이 이러한 국민적 대건설사업에 합류했다.22 ⋯ 스베들롭스크, 11월 29일. 아치트스크 군의 ‘여명’ 집단농장은 매년 풍작을 거두며, 사회적 소유에 기초한 모든 경제부문을 확대해왔다. 이 집단농장은 11월 7일에 맞춰 수력발전소의 건설을 완수했다. 집단농장의 농민들은 마을의 재건을 위한 전반적인 계획을 적용하기 시작했는데, 110가구가 잘 지어진 문화주택을 지급받게 될 예정이었다. 각각의 농가마다 전기와 라디오, 상수도 시설이 들어서고, 저마다 과수원을 갖추게 된다. 이 집단농장의 구성원들은 기한을 앞당겨 생산물에 대한 국가의무수매량을 기한을 앞당겨 완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계획을 초과하여 약 320톤의 곡물을 국가에 추가로 매각했다.23”

소련 농업성이 발행하는 일간지 《사회주의농업(Sotsialisticheskoe Zemledelie)》은 1947년 1월 1일자 보도에서 드랴블로보의 집단농장에서 독일로부터 해방된 지 18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1945년에 강변에 스트렐레츠 전력발전소를 건설했다고 전했다. 이 당시와 향후 수 개월동안 이 집단농장의 포전에서 일한 사람들은 여성들과 노인, 그리고 청소년들밖에 없었다. 푸치코프 집단농장 위원장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여름(1946)은 바싹 가물었다. 들판의 거의 모든 것이 말랐다. 이전 시기에 이러한 가뭄은 엄청난 재앙이 됐을 것이다. 마을마다 그토록 많은 걸인들과 몰락농민들이 쏟아져 나왔겠는가! 그러한 가뭄이 지나가고 나면 수많은 농민들은 죽는 날까지 다시는 제발로 일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집단농장에서 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스탈린과 소비에트 국가가 곡물과 씨앗, 기계들로 우리를 도와주었다; 다음 여름에 우리는 대풍작을 거둘 것이다. 추파작물은 적기에 파종됐고, 봄농사를 위한 휴경지의 정비도 철저히 보장해놓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현재 전력을 활용하여 탈곡을 하고 짚을 썰고 있으며, 봄이 오면 농가별 개인 텃밭에 물을 대는 양수작업에 전력을 활용할 예정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더 멀리 떨어진 포전의 전동탈곡기에 전력을 송전하기 위해 제재소를 만들었고 변압기 두 대를 들여오는 중이다. 그들의 1947년도 계획에는 영사기와 자동차의 구매, 그리고 문화회관의 건설이 포함됐다.

 

스탈린이 1934년 1월 전연방공산당(б) 17차 대회 보고에서 “미래 공산주의 사회의 농업단위─”코뮌, 즉 집단농장 운동의 가장 높은 형태”─는 발달하고 번영하고 있는 집단농장들에서 솟아오를 것”이라고 연설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고 가리킨 것은 바로 장차 한층 더 확대되고 발전하여 나갈 이와 같은 활동들이었다:24

“미래의 농촌코뮌은 아르텔의 포전과 농장이 곡물과 양, 돼지, 채소 및 여타 모든 생산물로 가득 찰 때, 아르텔이 기계화된 세탁소와 현대적인 공공식당, 기계화된 제빵소 등을 갖출 때, 집단농장 농민이 집단농장의 육류 및 유제품 부서로부터 고기와 우유를 받는 것이 자신의 소와 소량의 가축을 간직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것을 인지할 때, 집단농장 여성 농민이 공공식당에서 식사를 나누고 공공제빵소에서 빵을 구하며 옷감을 공공세탁소에서 세탁받는 것이 그녀가 이 모든 것을 스스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인지할 때 솟아날 것이다. 미래의 코뮌은 훨씬 현대적인 기술적 토대 위에서, 훨씬 발전한 아르텔의 토대 위에서, 풍족한 생산물의 토대 위에서 솟아날 것이다. 그때는 언제 올 것인가? 물론 당장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날은 올 것이다.”

한편, 그 당시와 전쟁 직전의 차기 당 대회 시기,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더더욱 핵심 당면과제는 말할 것도 없이 집단농장 자체의 생산효율성을 높이고 그에 상응하여 집단농장을 더욱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제4차 5개년 자체에 명시된 집단농장에 관한 언급들이 이러한 보다 당면한 목적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았다. 그리고 1947년 초에 전연방공산당(б) 중앙위원회가 5개년 계획의 틀 내에서 채택한 1947-9년도 소련 농업의 복구를 위한 행동강령에서는25, 집단농장이 완수해야 할 구체적인 목표치들이 대단히 정밀하게 설정되어 있었다. 이 목표에는 소련 전역에 걸친 총 3,000만 에이커에 가까운 파종면적 확대분 중에서 1947년과 1948년에 집단농장이 맡은 2,500만 에이커 이상의 곡물파종면적의 확대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울러 1947년 이내로 각 집단농장에 주요 곡물의 파종면적을 계획하는 체계를 복구하는 것, 그리고 모든 집단농장에 가능한 한 신속히 윤작제를 도입하는 것, 그리고 가축 두수를 대폭 늘리는 것이 포함됐다.

 

번역: 김의진 | 사무위원

 

2026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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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eninism, 1944, 314-6.텍스트로 돌아가기
  2. Ibid., 446-7.텍스트로 돌아가기
  3. Ibid., 461, 465.텍스트로 돌아가기
  4. Ibid., 566.텍스트로 돌아가기
  5. Treti Pyatiletni Plan, 1939, 38.텍스트로 돌아가기
  6. Bolshevik, 7/8, 1946.에 실린 볼고프(Bolgov)의 기사.텍스트로 돌아가기
  7. Itogi Vypolnenia Vtorogo Pyatiletnego Plana, 1939, 96-9.; Bolshevik, 10, 1946.에 기고된 슬레포프(Slepov)의 논문.텍스트로 돌아가기
  8. Ibid. 1첸트네르는 100kg, 즉 220파운드이다.텍스트로 돌아가기
  9. Bolgov, Bolshevik, 7/8, 1946.텍스트로 돌아가기
  10. 이 수치들은 니키타 흐루쇼프가 1939년 3월 13일 제18차 당 대회 연설에서 제시한 수치들이다. (Land of Socialism Today and Tomorrow, 387-8.에 수록.)텍스트로 돌아가기
  11. U.S.S.R. Speaks for Itself, 1943, 12.; Soviet Monitor, 1st November, 1944.텍스트로 돌아가기
  12. Bolgov, Sila i Zhiznennost Kolhoznogo Stroia, 1945, 11, 13-4.와 앞서 인용한 그의 논문도 참조할 것.텍스트로 돌아가기
  13. Gatovsky, Ekonomicheskaya Pobeda Sovetskogo Soyuza, 1946, 82.; Voyennaya Ekonomika SSSR, 1947, 92-3.텍스트로 돌아가기
  14. “Co-operatives in the Soviet Union”, Soviet News, 1945, 63-4.텍스트로 돌아가기
  15. Leninism, 1944, 641.텍스트로 돌아가기
  16. 《프라우다》, 1946년 2월 1일자.에 실린 러시아SSR 보건인민위원 A. F. 트레타코프의 기고문.텍스트로 돌아가기
  17. 〔역자 주〕 원문의 ‘Shimsk district’에서 ‘district’는 이 경우 러시아어 원어로 ‘Район’, 즉 군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해당 단어를 번역할 때 ‘심스크 군’이라고 번역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8. 〔역자 주〕 원문의 ‘rural district’는 러시아어 원어로는 ‘Сельсовет’, 즉 ‘농촌소비에트’로 표현된다.텍스트로 돌아가기
  19. 〔역자 주〕 원문의 ‘Staraya Russa district’ 역시 ‘Shimsk district’의 경우처럼 ‘district’라는 용어가 러시아어로 ‘Район’이라 불리는 만큼 ‘스타라야 루사 군’이라고 번역했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0. 〔역자 주〕 원문의 ‘reading-cottage’는 소련 시기 농촌에서 농민들을 계몽, 선전, 교양하는 기관으로 운영됐던 이즈바-치타델냐(Изба-читальня)를 의미한다. ‘도서관’과 구분하기 위해, 번역 시에는 ‘독서회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텍스트로 돌아가기
  21. 같은 책, 1946년 9월 16일자.텍스트로 돌아가기
  22. 같은 책, 1946년 11월 28일자.텍스트로 돌아가기
  23. 같은 책, 1946년 11월 29일자.텍스트로 돌아가기
  24. Leninism, 1944, 519-20.텍스트로 돌아가기
  25. 1947년 2월 28일자 ≪이즈베스티야≫에 게재됨.텍스트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