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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1/03/22
    無限 폭탄-核 폐기물
    장동만
  2. 2011/03/16
    원자로 과연 안전한가
    장동만
  3. 2011/03/12
    '강남 좌파'가 뜬다?
    장동만
  4. 2011/03/07
    전/현직 대통령의 comedy
    장동만
  5. 2008/11/23
    Obamerica의 도전과 시련
    장동만
  6. 2007/03/12
    보수/진보 넘어 사회정의로
    장동만
  7. 2007/02/05
    메모 쪽지가 하던 재판
    장동만

無限 폭탄-核 폐기물

 

dong36
  • dong36
  • Dong Man Jang

 


  • 어떤 Anachronism의 삶 (CXVIII)

    "無限 폭탄-核폐기물"~"원자로 과연 안전한가", 1974년 4월 호 '新東亞' 에 실린글 (필자:張東萬) 입니다.

  • 이번 일본 원전(폭발) 사고에서 보듯이 원자로 그 자체 보
    다 사용후 핵 연료, 즉 '核 폐기물'이 더욱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 '無限 폭탄-核 폐기물', 이 문제가 본 글에서 상세히 다뤄졌습니다. 위험을 안고 사는 현대인, 一讀을 '강추 '합니다. 글 전문은 다음 사이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kr.blog.yahoo.com/dongman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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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54분 전 twtkr 에서 작성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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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로 과연 안전한가

 

dong36
  • dong36
  • Dong Man Jang

 

  • "원자로 과연 안전한가"--1974년 4월 호 '新東亞'에 실린 글 입니다. 그 당시 까지의 각종 data를 종합,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 쓴 글 입니다.

  • 이번 일본 지진/쓰나미/원자로 폭발 사고를 당하면서, 참고가 되겠기에 일독을 '강추' 합니다.

  • http://kr.blog.yahoo.com/dongman1936에 가셔, 좌측 'My e-book' '아, 멋 새 한국'을 click, 책 끝 부분에 나옵니다.--장동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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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 1분 전 twtkr에서 작성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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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가 뜬다?

 

타임라인

 
  • dong36약 1분 전
    어떤 Anachronism의 삶 (CXVII)


  • 1) '강남 좌파'가 뜬다--진보(세력)가 분화되고 있다. '있는 자=우파', '없는 자=좌파' 이분법을 탈피, 고학력/ 전문직 (교수/ 의사/ 법조인/ 엔지니어 등) 화이트 칼라 중산층이면서 진보적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부쩍 늘고 있다 <중앙 11/03/06>.


  • 2) 숙시숙비(熟是熟非)--뭣이 '右'이고, 뭣이 '左' 인가? '있는 자'는 무두 '右' 이고, '없는 자'는 모두 '左' 란 말인가? 자기네들 (보수 언론들) 정체성을 카무플라주 하는 묘한 논리라는 생각이다. 문제는 '좌/우'가 아니라 '보수'냐 '진보' 냐다. '이대로 좋습니다" 라는 보수, "아니다, 변해야 한다"는 진보, 있건 없건 그 생각이 이 중 어느 쪽이냐가 문제가 돼야 할 줄 안다. 이때 그 판단의 기준은 '사회 정의'가 돼야 함은 물론이다.


  • http://kr.blog.yahoo.com/dongman1936
    twtkr에서 작성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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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직 대통령의 comedy

어떤 Anachronism의 삶 (CXVI) 1) 전/ 현직 두 대통령의 comedy- a) 현직의 경우: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무릎을 꿇고 通聲 기도를 하는 모습, 그 현장의 상황과 분위기를 감안한다 해도 대통령이라는 신분을 망각, 공식 석상에서 개인의 신앙을 표출한 '輕率'이었고, b) 전직의 경우: 回婚式場에서, 그것도 난데없이 50대 '새 아들'이 불쑥 나타난 마당에 부인과 입맞춤을 하는 모습, 아무리 時流를 고려한다 해도 그 나이 (83세)에 어울리지 않는 '주책' 이었다는 생각이다. "기도는 골방에서 은밀하게..." 성경의 가르침이고, 傘壽 노인이 대중 앞에서 '뽀뽀'를 한다는 것은 우리 세대의 정서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妄靈 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P.S. 전직 님께: 군사 독재 시절 무기 단식 하실 때, 국내 매스콤들이 이를 '쉬! 쉬!' 할 때, 이 곳 교포지 몇 곳에 "굶어 죽어가는 民主에의 恨" (부제: "김영삼씨의 단식에 붙여")이라는 기사를 쓴 사람 입니다). http://kr.blog.yahoo.com/dongman1936 twtkr에서 작성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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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america의 도전과 시련

Obamerica의 도전과 시련 (상) 15 세기 (1492년) 콜럼버스의 발이 닿기까지 미 대륙은 인류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역사 뒤에 숨겨져 있었다. 남미 대륙엔 마야/잉카/아스텍 문명의 기록이라도 남아 있지만, 북미 대륙엔 아메리칸 인디언 여러 부족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살았다는 사실 외엔 아무러한 역사 기록이 없다. 이를 두고 고 함석헌 선생은 이런 해석을 하셨다. "신의 뜻이었다. 15 세기까지 꽁꽁 감춰 두었다가 세상에 내 보이셨다. 거기엔 하얀 색, 검은 색, 노란 색, 붉은 색, 모든 인종이 함께 모여 한 번 살아 보라, 인류의 理想國을 만들어 보라! 는 뜻이 있었다." 1776년 (한국 연대로는 이조 英祖 시대), 드디어 세계 각 곳 각종 인종들-초창기엔 주로 유럽계이지만-이 모여들어 미합중국을 만들어 냈다. 인류 역사 이래 최초 유일의 다 인종, 다 민족, 다 문화, 다 원화, 복합 국가였다. 그로부터 230여 년, 그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최강국이 됐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오늘날의 미국이 이루어진 것은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 그 기적을 이룬 원동력 중의 하나에 미국은 역사적인 원죄를 안고 있다. 흑인 노예 제도다. 1863년 링컨이 노예 해방-한국은 1894년 갑오개혁 때 軍國機務處議案에 의해 노예(slavery)와 다를 바 없는 公/私 노비 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되었다-을 선언하기까지 장장 87년 동안 노예 제도를 유지했다. 그 기간엔 '건국 아버지들'의 "모든 人間은 평등" (독립 선언)에서 흑인은 사람이 아니었다. 오직 "말하는 도구"일 뿐이었다. 곧 그 '人間'이 소외된 백인들만의 나라였다. 2008년, 노예 해방 145년 만에 드디어 흑인-엄밀한 의미에서 '흑백'이라고 해야 옳다. '피 1% 논리'는 백인 우월주의가 아닌가-대통령이 출현했다 (득표율 52%, 사상 최다 득표수). 백인 67%, 흑인 13%의 나라에서 그야말로 또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함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또 다른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무엇이 흑인 대통령을 출현케 하였는가. 이번 선거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화두는 '변화 (CHANGE)'와 '개혁 (REFORMING)' 이었다. 그 기치(旗幟)를 흑인들, 소수 인종들, 투표한 백인 43%가 받아 들였다. 세계 제 1의 부국이자 강국인 나라의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변화'와 '개혁'을 갈망하는가? 그리고 그들이 그 같이 갈망하는 '변화'와 '개혁'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지금 미국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70%를 넘는다. 또 다른 조사에선 "미국의 전성기는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48%나 된다. 무엇이 어떻게 그렇게 잘못되고, 잘못 되어가고 있는가? 각종 통계를 인용, 오늘 날 미국의 현주소를 한 번 짚어 본다. (주: 모든 수치는 미 정부 기관 발표 및 신빙성 있는 여론 매체 보도 인용.) 1) 사회 양극화, 빈부 격차가 너무나 심하다. 2005년 기준, 상위 계층 1%의 소득 규모가 미국민 전체소득의 21.2% (전년 비 19%상승)를 차지한다. 반면 하위 5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불과 12.8% (전년 비 13.4% 감소)이다. 고용 인구 중 연간 소득이 $27,000 (약2,700 원) 이하가 25% 이다. 한편 연방 정부가 정의한 '가난한 (poverty)'-가구 당 연 소득 $23,000 이하-사람이 인구의 12.37%를 차지한다. 빈부 격차가 계속 심화되고 있다. 이를 두고 EPI 재리드 번스타인 연구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소득이 이같이 상위 계층으로 집중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지속될 수 없다" 2) 미국은 총기의 나라다. "집안의 살인자(Killer at Home)", NYT가 총기 문제에 붙인 제목이다. 현재 미국인들이 보유한 각종 총기는 2억 5,000만 정으로 추산한다. 미국 인구 3억명 중 성인 모두를 무장시킬 정도의 양이다. 매년 1만여명이 총에 맞아 사망한다. 2004년엔 총기 살인이 1만 654 건이었다. 3) 미국은 감옥의 나라다. 성인 138명 중 1명 (220만명)이 주립/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거나 국립/시립 구치소에 구금되어 있다(2005 년도). 흑인남성(25-29세) 13명 중 1명 (8.1%)이 감옥에 갇혀있다. 전체적으론 10만 명 당 815명으로 백인의 6.6배(종신형은 백인의 10배)나된다. 한편 집유/가석방 상태에 있는 교화 대상 성인 인구가 700여만 명이 넘는다. 이번 대선 이후 인종 혐오 범죄가 부쩍 늘고 있다. (2007년 10월 현재 LA, NY 등 6개 도시 한국계 수감자 233명). 4) 선진국 중 의료 혜택이 가장 뒤쳐진 나라다. 건강 보험 없는 사람이 4천 660만 명(2005년 기준) 이다. 국민 부담 의료비가 1인당 연간 $5,700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평균 수명은 日/英/加/佛보다 짧고, 영아 사망률은 쿠바 보다도 높다. 5) "미국은 탈락 국가이다". 몇 년 전 타임지 커버 스토리 제목이다. 미 전국 고교 중퇴 비율이 20% (5명중 1명)가 넘는다. 대학 진학률은 30-35% 안팎이다. 그러고도 2년-4년제 대학 중퇴 비율이 43%나 된다. 1992년 문맹률 조사에선 전체 노동자 계층의 4%가 기능적으로 문맹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Obamerica의 도전과 시련 (하) 6) 미국은 세계 최대 대외 채무국이다. 2005년 말 현재, 미국의 해외 부채는 $13조 6,000만 (가구 당 $ 11만 9,000)에 이른다. 2006년 회계 연도 재정 적자가 $ 2,480억, 경상 수지 적자는 $ 8,570억, 합계 $1조 1,000억에 달한다. 2014 년까지 누적 재정 적자가 $ 2조 3,000억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2008년 9월말 현재, 중국이 보유한 미 국채는 $5,850억, 일본은 $5,732억, 영국이 $3,384억 이다-11/18/08 미 재무부 발표) 7) 미국이 이렇게 천문학적인 '쌍둥이 적자'를 안고 있으면서도 경제가 그런 대로 돌아가는 것은 소위 '달러 리사이클링 (dollar recycling-외국이 미 국채를 사면, 미국은 그 국채를 팔아 얻은 '빚'으로 소비를 하고 투자하는 현상)' 때문인데 이것이 언제 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이를 가능하게 하는 미 달러의 국제 결재 기축 통화 체제 그리고 미국의 달러 발권권(發券權)이 지금 큰 도전을 받고 있지 않는가. 미국이 이렇게 빚더미 위에서 '떵떵거리는' 것을 두고 워커(정부 회계검사원) 는 말한다. "지금 미국은 로마 제국의 운명을 답습하고 있다". 8) 경제의 원동력이 생산/제조업에서 돈장사/금융업으로 바뀌고 있다. 일컬어 '경제의 금융화'다. 1980년 대 초 미국 전체 기업 수익 중 금융 부문 수익은 10% 안팎이었다. 그렇던 것이 2000년엔 금융 부문 수익이 40%로 증가했다. 세계를 풍미하던 'Made in USA' 제품이 사라지고 (GM등 자동차가 좋은 예다), 미 달러를 앞세운 돈놀이 (이번 금융 위기를 몰고 온 금융 파생 상품이 대표적인 예다)가 국내외 시장을 휩쓴다. 제조업이 쇠퇴하고 금융업만이 번성하는 경제 구조,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견해다. 9) 2004 회계 연도 미 국방비는 $4,915억 (GDP대비 3.9%)이었다. 2008년도엔 $7,000억이 계상되여 있다. 군비지출 세계2위-15위 국가들의 군사비를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다. 한편 2008 회계 연도에 미국은 탱크, 전투기, 미사일, 군함 등 $320억 상당의 각종 무기와 군사장비를 외국에 팔았다. 10) 매년 80만 명의 어린이가 실종되거나 납치되고 있다. 이 중 4%가 시체로 발견된다. 11) 저축률은 소득의 17%로 세계 순위 100위 안팎이다. 12) 온실 가스 배출량이 세계 최고이다. 13) 미 전역에 노숙자 (the homeless)가 60만 명이 넘는다. 이상의 통계는 무엇을 말하는가? 가장 잘 사는 나라, 가장 선진국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인들에게 그야말로 참기 어려운 치부이자 큰 수치(shame)일 수밖에 없다. 겉으로는 뻔지르르한 나라, 속으로는 이렇게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니 "변해야 한다" "뜯어 고쳐야 한다."는 외침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이리해서, 백인 후보보다 '변화'와 '변혁'의 기치를 더욱 높게 치켜든 흑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 하나의 신화를 창조했다"는 그의 앞길엔 너무나 많은 장애물이 가로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변화' '변혁'은 어떻게 보면 일대 혁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나 어디서나 힘있는 사람들, 살 만한 사람들, 기득권자들은 결코 '변화' '변혁'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모든 면에 걸친 다양한 주창의 근저에는 하나의 일관된 메시기가 담겨 있다. 평등 사상과 사회 정의다. 이는 곧 미국 '건국 아버지'들의 정신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의 이상과 미국의 현실 사이에는 너무나 큰 괴리가 있다. 그 '현실'은 하루아침에 '지금 같이' 되어진 것이 아니다. 300여 년 동안 백인들 주도로 구축되어 온 시스템이 굳게 다져져 있다. 그 시스템을 깨지 않고선 어떠한 '변화' '변혁'도 불가능한데 그는 외친다. "우리는 미국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고,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다"고. 과연 그의 "Yes, we can do" 가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은 모든 것이 사람에 앞서, 확립된 시스템/메커니즘 으로 돌아가는 사회다. 그런데 그 시스템 작동의 주역들인 뷰러크래트 (bureaucrat)들, 그 절대 다수가 모든 분야에서 거의 백인들이다. 그들이 흑인 대통령의 정치 철학에 동조/협력/복종하지 않을 때 그의 꿈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을 설득/승복/협조케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 벌써 '뉴스위크'지 같은 데선 네오콘들의 '반(反)자본주의 정책' 운운하는 오바마노믹스 (Obamanomics)를 경계, 우려하는 기사가 실린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이자 '세계의 대통령'으로서 어려운 점은 또 있다. 미국의 국익과 범 세계적 인류를 위하는 것과의 상충이다. 당장 한미 간 에는 자동차 문제, 자유 무역 협정 (FTA) 문제가 대두된다. 그리고 또 그가 부르짖는 인간 평등, 사회 정의는 미국만의 가치가 아니다. 범 세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가치다. "우리의 자유/민주, 최고의 선이고 가치이다" 라고 독단/일방적으로 밀어붙여 온 부시이즘을 벗어나, 이 새로운 가치를 어떻게 범 지구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을 것인가. Obamerica의 큰 도전이자 시련이다. <장동만> ://kr.blog.yahoo.com/dongman1936 저서: '조국이여 하늘이여' & '아, 멋진 새 한국'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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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진보 넘어 사회정의로

                                             보수/진보 넘어 사회정의로
 
건강한 보수, 건전한 진보, 그 둘은 역사의 수레 바퀴를 돌리는 두 축(軸)이다. 보수는 진보의 급진적인 무리한 변혁을 저지/방어하고, 진보는 보수의 기득권 횡포와 전횡을 억지/견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의 존립 의미이자 또한 담당해야 할 역사적 책무이기도 하다.
 
그리해서 어떤 중대한 이슈가 있을 때 마다 이를 에워싸고 보수/수구 vs. 진보/개혁의 이념 논쟁이 뜨겁게 벌어진다. 사회 발전을 위해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이 둘의 논쟁이 최선(最善)을 찾아내 전 국민의 역량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는 어떤 국민적인 공감/합의를 이끌어 내는데 기여하기 보다, 이념/계층/지역 간 갈등/알력을 더욱 부채질, 사회 분열을 조장하는 구실밖에 못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보수란 무엇인가? 거두절미, 한마디로 “이대로 좋다” 이다. 진보란 무엇인가? “바꿔야 한다” 이다. 그런데 이같은 보/혁이 충돌할 때에 어떻게 할 것인가? 서로가 자기 주의/주장만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고집, 양보/승복을 않는 한
그 해결책은 있을 수가 없다. 더욱이 그 주의/주장이 독선/맹신에 바탕한다면 그야말로 절망적일 수 밖에 없다. 오늘 날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각 부면에 걸쳐 팽배해 있는 극심한 갈등/반목/분열이 야기되는 근본 원인이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극심한 이념 대립, 계층 갈등, 세대 분열 속에서 서로 으르렁/허우적 거리기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럴 여유가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바깥 세상 돌아감이 이제 우리에게 또 한 번의 새로운 굳은 결의를 하루같이 다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무섭게 뻗어나고 있는 BRICs, 새로이 등장하는 VISTA 각 나라들을 보라! 우리가 일치단결, 총력을 기울여도 그들을 따라갈찌 말찌 하지 않은가.
 
진정 나라의 장래를 생각한다면, 이제 보수이고 진보이고 치열한 자기 성찰, 일대 혁신이 있어야 한다. 사사건건 서로 발목을 잡고 늘어질 것이 아니라, 상호 동의/공조할 수 있는, 그리해서 보수/진보가 다 함께 밀고 나갈 수 있는, 어떤 최선의 공약수를 발굴해 내야 한다. 그리고 이를 국민적인 합의로 이끌어 낼 수 있는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여기서 감히 제안하고져 한다. 보수/진보를 불문하고 모든 사안의 가치 척도, 그 판단 근거를 사회 정의 (social justice) 기준 위에 설정하는 국민적인 대타협을 이루자고.
 
사회 정의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요약, 최대 다수의 최대 복지 도모다. 지금 새로이 태어나고 있는 중국이 이념으로 삼는 “조화 (和諧)사회론” “공부 (共富) 상생론” 이다. “다 함께 잘 살자”는 이념이다. 부익부 빈익빈의 결과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 서구 자본주의/시장 만능주의 병폐를 극복,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자는 운동이다. 이제 개인이고 국가이고 “나만 잘 살겠다”는 시대는 지났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갈 길이 명료해진다. “다 함께 잘 사는“ 이념 추구다. 이의 실현을 위해 보수이건 진보이건 어떤 이슈를 다룰 때 그 옳고/그름, 그 잘/잘못을 이 정신에 비추어 토론/논쟁 하고, 그 기준에 부합 되는가/아닌가 여부를 최우선적으로 검토하기로 하자. 이런 검토 과정을 거쳐 다수결 원칙에 의해 결정되는 것, 보수고 진보고 더 이상 불평/불만치 말고 이를 함께 밀고 나가는 민주 정신을 발휘토록 하자.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참여 정부 들어 빈부 격차/사회 양극화가 더욱 심화 [상위 10% 계층의 순자산이 전체의 51.9% (미국은 69.5%)-2006년 가계자산 조사] 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보수 세력의 비난/매도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 진영에서 조차 노 정권의 진보 정책은 실패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참 진보의 길을 걷지 못하고 중도에 이런 저런 이유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발목이 잡혔기 때문이라는 비난이다.
 
돈 놓고 돈 먹는” 자본주의의 근본 체제-예컨데 부동산/증권 투자 등-, 그리고 급변하는 사회 구조-예컨데 IT등 고기술 전문인의 높은 보수 등-를 전혀 고려치 않고, 이를 오직 정부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는데, 그 이유/원인이 어디에 있건 우리가 여기서 주시해야 할 것은 부(富)쪽은 몇 안되는 소수, 빈(貧)쪽은 많은 다수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양극화를 개탄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좌가 됐건, 우가 됐건 당연히 이 많은 다수에 눈을 돌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할 일은 가진 소수를 끌어 내리는 것이 아니라, 없는 소수를 끌어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수이건 진보이건 가야 할 길은 하나다. 못가진 절대 다수를 돌보는 일이다. 곧 최대 다수 최대 복지라는 사회정의의 길이다. 사회정의의 길을 가는 보수/진보, 당연히 모든 논쟁의 촛점이 여기에 맞춰져야 한다. 따라서 지금 큰 쟁점이 되어 있는 성장 vs. 분배 같은 문제도 이를 다루는데 있어 어느 쪽이 더욱 사회정의에 부합되는가가 우선적으로 검토 되어져야 한다.
 
보혁/여야를 불문하고 모든 사안을 이렇게 최대 다수 /최대 복지라는 사회 정의 정신에 입각해 정책을 입안하고, 법안을 만들고, 이를 시행한다면, 정부 불신/정치인 불신이 해소되고, 절대 다수의 전폭적인 지지/성원을 받게 될거다. 정치란 만인을 위해야 하는 것, 만인을 위한 일을 펴는 것을 그 누가 어떻게 시비를 걸 수 있을 것인가.                            <장동만: e-랜서 칼럼니스트>
 
저서: “조국이여 하늘이여” & ‘아, 멋진 새 한국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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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쪽지가 하던 재판

                                           메모 쪽지가 하던 재판 (옛 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과거사위)’는 2007년 1월 31일, ‘70년대 긴급 조치 위반 사건 판결 분석 보고서’를 발표했다. 수구 언론들은 이번에도 사안의 본질적인 의의는 덮어둔 채 사건 관여 판사들의 명단 공개가 옳으니 그르니, 극히 지엽적인 문제에 촛점을 맞추는 포퓰리즘 보도 행태를 보이고 있는데, 다음은 필자가 오래 전에 써 놓았던 글 (그 동안 발표할 수가 없었음) 이다. 유신 헌법/긴급 조치법 하에서 한국 사법부 위상의 일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오늘 여기에 싣는다-장동만>
 
D 판사,
 
이 곳 해외 언론 매체를 통해 그 동안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혁당/민청 학련/고려대 시위 사건 등 여러 공안 시국 사범 공판에 관련된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접하고, 한국 사법부에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D 판사에게 이 글을 띄웁니다.  
 
D판사,
 
현대 민주 국가에서 왜 입법/사법/행정의 삼권 분립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 중 특히 사법부의 기능/역할이 무엇인지, 정치 원론은 펴고 싶지도 않고 또 펼 필요조차 없을 것 같습니다.
 
정치가 실종된 땅의 정치를 왈가왈부 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인 것과 같이, 총칼의 명령이 곧 법이 되는 현 상황에서 법의 정신이니, 법의 기능이니, 운운 하는 것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D 판사,
 
상황이 비록 그렇게 어렵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또 그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그럴 수 밖에 없다손 치더라도, 소위 ‘인권의 보루’라고 일컬어지는 사법부가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인지, 언제 까지나 그럴 것인지, 한 번쯤 서 있는 좌표를 점검하고 자화상을 들여다 보는 것도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그 것은 국가 민족을 위해서라는 거창한 담론에 앞서, 법조인 개개인의 개인적인 신상과 명예를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D 판사,
 
언제인가 D판사는 저에게 이런 비밀 (?)을 들려준 일이 있습니다.
판결을 어디 우리 판사가 하나?”
그럼 누가 한단 말인가?”
‘(공안/시국) 사건 때 마다 3년, 5년, 7년… ‘메모 쪽지’가 외부에서 날아 온다네. 이상하게도 나에게 오는 것은 모두 홀수이네. 그러면 우리 법복을 입은 사람들은 그것을 앵무새 처럼 외울 뿐이라네.”
그러고도 법관으로서 양심의 가책이라고 할까, 직업인으로서 직무 포기라고 할까, 어떤 갈등을 안 느낀단 말인가?”    
어쩌겠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선 다른 선택이 없는데…”
 
D판사,
 
언젠가 어떤 큰 시국 사범 사건을 담당, 법관으로서 자신의 소신과는 아랑곳 없이, 이같은 외부의 ‘메모 쪽지’에 따라 판결을 했던 X 판사는 미국에 왔을 때 저에게 그 심경을 이렇게 털어놓은 일이 있습니다.
심히 괴롭다. 내가 왜 그렇게 판결할 수 밖에 없었는지, ‘양심 선언’을 써놓고 있다. 때가 오면 이를 세상에 공표할 생각이다”라고.
 
D판사,
 
옛날 학생 시절 S대 도서관에서 삼복 더위에 웃통을 벗은채 고시 준비에 여념이 없던 D 판사는 휴식 시간이면 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아직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이상주의자로서 우리는 사회 정의에 대해 많은 토론을 벌였고, 특히 D 판사는 법학도로서 앞으로 고시에 패스해 법복을 입게 되면, 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열을 올려가며 그 포부를 피력하기도 하였지요. 그러던 D 판사가 오늘 날 법복을 입고 재판관 자리에 앉아서 외부로부터 날아오는 ‘메모 쪽지’에 따라 판결을 내릴 수 밖에 없다니…그저 슬퍼질 뿐입니다.
 
D판사,
 
D판사의 인간적인 고뇌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나 세차게 불어오는 ‘외풍’, 그 것을 혼자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 것을 섣불리 막으려 하다가는 너무나 큰 희생이 따른다는 것 등… 모든 것을 이 곳에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상황이 그렇게 어렵다고 해도, 행정부가 총칼의 명령부가 되고 입법부가 그 총칼의 한갓 거수기가 되어있는 현실에서 ‘인권의 보루’인 사법부마저 그렇게 돌아 간다면 도대체 그 나라가 가는 길이 어디 입니까?
곰곰히 생각해 봅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나마 D판사와 같은 정의감 있는 법관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고…
 
D판사,
 
최소한 총칼이 하는 일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주는 일만은 어떻게든 피해야 겠습니다. 총칼이 하는 무지와 억지, 그리고 부정과 과오에 법을 원용 (援用), 이를 법적으로 정당화/합리화 시켜주는 역할만은 하지 말아야 겠습니다. 이는 곧 ‘법’이 총칼에 협조/공모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는 일에 법적 뒷받침을 해줌으로써, 민중의 판단을 오도하고 정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 입니다.
 
D 판사,
 
그러면 이를 위해 지금 그 어려운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 ‘메모 쪽지’대로 판결은 하되 판결문(내용)을 건성건성, 요령 부득으로 작성 하십시요. 그리고 거기에 겉으론 나타나지 않는 어떤 함축적인 의미를 담으십시요. 그렇지 않고 ‘메모 쪽지’의 형량을 뒷받침하기 위해, 즉 정당화 시키기 위해, 열심히 육법 전서를 뒤적이는 행위는 마지못한 피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인 협조로 민중들 눈에 비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메모 쪽지’사건, 즉 시국 사범 아닌 일반 사건 판결에 있어 그 형량을 법관의 재량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가능한 한 가볍게 판결 하십시요. 이는 총칼로 ‘양심의 상실’을 강요하는 그릇된 체제에 간접적으로 저항한다는 의미가 있고, 또 역설적이긴 하지만 한 쪽에서 ‘잃어버린 양심’을 다른 한 쪽에서 만회한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세째, X판사와 같이 ‘메모 쪽지’ 판결 때 마다 ‘양심 선언’을 작성해 두십시요. 이것은 훗날 새 역사가 펼쳐질 때 D판사 개인적으로는 하나의 자구책이고, 역사에 대해서는 ‘산 증언’이 될수 있기 때문 입니다.
 
끝으로 영어 격언, “A Good Lawyer is a Bad Neighbor”를 나름대로 고쳐 쓰면서 이 글을 끝 맺습니다.
“A Good Lawyer to the People should be a Bad Lawyer to Them.”
<장동만: e-랜서 칼럼니스트 >
 
저서: “조국이여 하늘이여” & ‘아, 멋진새 한국 “(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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