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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8/20
    mb식 학자금 대출제도, 문제야 문제!!(1)
    죠스
  2. 2009/08/16
    학자금 대출, 그까이거 그냥 안갚으면 되지 뭐!
    죠스
  3. 2009/08/04
    반은 해야, 시작이다.
    죠스

mb식 학자금 대출제도, 문제야 문제!!




등록금 후불제? 
'반값 등록금' 공약에 침묵하던 이명박 정부가 집권 2년 만에 드디어(!!!) 대학 등록금 문제를 거론했다. "학자금을 대출받으면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못해도 갚아야 되니까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이대통령의 말대로, 이번 정책의 취지는 단순하다.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라는 명칭 그대로, 학자금 대출 상환을 일정 소득 발생 이후로 미룬다는 것. 그리고 거치기간을 현행 10년에서 최장 25년으로 늘려서, 말하자면 빚을 좀더 늦게, 좀더 천천히 갚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학자금을 대출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는 점에서 환영할만도 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서민을 위한 정책이니, 사실상 '등록금 후불제'라니 호들갑떠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실 빚 갚는 걸 좀 수월하게 만들었다 뿐이지, (이것도 그래 보이는 건지, 정말 그런지 따져봐야겠지만) 대학 좀 다녀보겠다고 어마어마한 빚을 져야한다는 점에서는 현행 학자금 대출제도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제도도입의 효과로 '학자금을 학생본인이 책임짐으로써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데, (http://blog.naver.com/mestblog 참조) 그냥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어차피 가족이라는 하나의 경제단위로 묶여있는 상황에서, 학자금 대출이 부모 명의가 되든 학생 명의가 되든 가족 전체가 빚으로 인해 고통 받는다는 점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교과부에서는 현행 학자금 대출제도에서는 사실상 학자금이 부모의 부담으로 남는다고 말하지만, 도대체 지금까지 학자금 대출을 받았던 학생 중에서 그걸 자기 부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묻고 싶다.


 

 


요컨대 교육비가 고스란히 개별 가정의 부담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이번 정책은 기존의 정책과 차이가 없으며, 또한 지금까지 시민단체나 야당에서 도입을 주장해왔던 '등록금 후불제'와도 전혀 다르다. 등록금 후불제란 단순히 빌린 돈 나중에 갚는 정책이 아니다. 다들 알고 있듯, 이는 근본적으로 정책 시행의 배경인 교육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까놓고 말해서, 현 정권에서 등록금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 거라는 기대는 안 하는게 좋을지도 모른다. 이건 현 정권에 대한 비난도 아니고 비관적 체념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왜? 교육에 대한, 근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현 정부의 관점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mb도 나라 망치고 싶진 않겠지만...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건 삽 한 자루'라는 진중권의 지적처럼, (http://www.ohmynews.com 6월 18일자 기사 참조) "비지니스 프렌들리" 운운하며 규제 완화, 시장 경쟁 등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뇌구조가 교육 문제에서만 정상적으로 작동할 리 없는 것이다.

단편적인 예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강행된 일제고사나 자율형 사립고 확대를 보라. 투입 대비 산출의 극대화가 가장 중요한 신자유주의에서, 교육에서의 경쟁이나 엘리트 교육을 강조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정체성에 비추어봤을때 이상한 건 오히려, "교육의 기회는 균등해야" 한다며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이다. 국가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무한경쟁에서 살아남는 상위1%를 활용하는 것이 효율성의 측면에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 정부가 등록금이나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건, 국민을 상대로 사기치는 거거나 아니면 정말 자기 자신을 모르고 헛소리하는 거거나 둘 중 하나다. 서민을 위한답시고 내놓은 이번 등록금 정책이 실상 아무 해결이 안 되는 것 역시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뇌구조가 가진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번 정책이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발상인 이유. 근본적인 문제 해결, 즉 빚을 안 지고도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돈없는 사람도 대학에 갈 수 있어야한다"라고 선심쓰듯 말하며 오히려 '돈없는 사람'을 빚쟁이로 만들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 빚을 빌미로 신자유주의 체계에 복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레이버(David Graeber, 아나키스트 인류학자)가 지적하듯, '빚'이라는 기제를 통해 폭력이나 폭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정당하고 도덕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http://trans-r.tistory.com/28 "학자금 대출? 그냥 안 갚으면 안 돼? 참조) 

이러한 통념은 이미 우리의 머릿속에 뿌리깊게 박혀있다. 돈을 빌렸으면 당연히 갚아야한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는 부도덕하다! 그러나 문제는 애초에 돈을 빌려야만 하는, 우리가 빚쟁이가 되어야만 하는 상황 그 자체이다. 삶을 저당잡힌 채로 근면하게 노동하며 살아가기 전에, 우리가 왜 우리의 삶을 저당잡혀야만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러한 정체(!)에 대한 파악없이 "그 분이 다 해결해주실 거야"라는 식으로 표를 던지거나, 혹은 아직도 내 자식만은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공정택같은 교육감을 뽑거나, 아이들 급식비가 아까워 예산 삭감해버리는 인간을 국회의원으로 뽑는한, 또 우리가 여전히 '등록금이 비싸긴 하지만, 그만큼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면 된다'는 근면하고 선량한 인간으로 사는한,
슬프지만 우린 "안 될 거다".



우리의 청춘을 돌려줘
앞서 구구절절 말한 바와 같이, 정부가 내놓은 이번 등록금 정책이 결코 '등록금 후불제'일 수 없는 이유, 그리고 진짜 돈없는 서민들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등록금 후불제는 기본적으로 교육이 공공재라는 인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등록금 후불제가 등록금 상한제 등과 함께 제안되는 것도 그때문이다. 교육을 공공재로, 혹은 공공재 비슷한 것으로라도 간주해야 한다는 발상은  교육의 기회 균등, 그리고 경쟁 아닌 교육이 가져오는 풍요로운 사회적 효과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북유럽 국가에서 대학 교육을 아예 무상 교육으로 시행하거나 최소한의 등록금만을 책정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상위1%를 위한 교육이 아닌 99%를 위한 교육, 그것은 99%를 위한, 즉 우리 모두를 위한 사회로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대놓고 친기업, 친재벌, 친부자를 내세우는 현 정부가 절대로 서민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는 이유다.

그러니 '나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근면하고 선량한 생각은, 사실 더이상 아무 소용이 없다. 열심히 해서, 대체 뭐가 되는지 생각해보자.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라는 긴 이름을 가진, 그래서 우리의 자립심을 길러준다는 이 고마운 제도가 시행되고 나면, 우리는 애써 취업한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쥐꼬리만한 월급에서 다달이 떼여나가는, 국민연금보다 더 무시무시한 학자금 대출빚을 보게 될 것이다. 다행히 부모님이 등록금을 책임질 여유가 된다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부모도 자식에게 일종의 투자를 한다. 투자의 대가는 자식이 부모가 원하는 수준, 원하는 형태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가 투자 비용이 높을수록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에 우리의 삶을 저당잡히는 것이다. 당신은, 그래도 정말 괜찮은가? 당연히, 괜찮을리 없지 않은가. 

 '나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99%인 우리 모두를 진창에 처넣는 선량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바꿔야한다. 단지 대출빚을 갚을 시기를 조금만 늦춰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대학 좀 다녀보겠다는 죄로 기나긴 인생을 빚쟁이로 살아야하는 지금의 상황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야한다. 풍요로워야 할 교육의 공간이 단지 학점 경쟁의 공간으로, 고시 공부를 위해 청춘을 유예시키는 공간으로, 임금 노동자가 될 자격을 얻기 위해 거액의 비용을 지불해야하는 이상한 공간으로 작동하는 지금의 상황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야한다. 말로만 핀란드의 교육제도를 부러워하지말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당신의 풍요롭고 건강한 삶에의 욕망을 함께 이야기해야한다. 대학 교육의 무상 교육화, 하다못해 반값 등록금 공약 실천 요구는 결코 게으름뱅이의 투정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건강한 삶을 위한 지극히 당연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알바와 취업 스트레스에 찌든 우리의 슬픈 청춘이, 언제까지나 "안 될 거야, 아마"라고 말하지 않도록.  



posted by. 재이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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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금 대출, 그까이거 그냥 안갚으면 되지 뭐!

 

소문자r의 더 많은 이야기 보러 가기 http://trans-r.tistory.com

 

 

나카다상과 쿠리하라상과의 인터뷰

학자금 대출? 그냥 안 갚으면 안돼?


 


 

우리들이 기거하는 뷁수의 방에 저 멀리서라 하면 오버이고, 하여튼 좀 멀리 바다건너서 친구들이 찾아왔다.

공자께서도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바다 건너 니뽄에서 벗들이 찾아왔으니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짜잔. 나카타 상과 쿠리하라상이 이들이다. 한 눈에 봐도 니뽄풍으로 생기셨다. 노다메 칸타빌레에 나오는 치아키 선배를 닮았다는 평도 있었는데.. 그건 음.. 뭐랄까..음..
자, 허튼 소리 그만하고, 뭣들 하시는 분이길래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셨나 궁금하실거다. 
 

 

 

이들은 일본에서 학자금 안 갚기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은 대학원생이고 한 사람은 강사란다. 학자금 안 갚기 운동? 뭐지? 왜 이런 일들을 하시나 궁금했다. 얘기하다 보니 등록금 관련해서 이들 빚도 많단다. 1억 정도..(ㅡㅡ;) 일본의 학자금 문제도 우리만큼 심각한가보다. 며칠전 우리 MB님께서 ‘취업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셨다. 나중에 졸업해서 취직하고 돈 열라 벌어서 학자금 갚어라 뭐 이 얘기다. 물론 이런 제도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등록금이 천정부지로 어처구니없이 오르고, 그걸 모두 학생들에게 떠넘기는 제도가 문제인 것이다. 이들에게서 학자금 안 갚기 운동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훗. 천잰데” 하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왜 우리는 이런 생각을 못했던거지.. ㅡㅡ; 각설하고 이들 뭔 생각을 갖고 있는지 인터뷰를 해봤다.

 





Q: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주시죠
..


우리는 일본의 등록금 시스템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등록금은 아주 비쌉니다. 일 년에 약 1000만원에 달할 정도니까요. 사립대학인 경우에요. 여기다 시내에 사는 경우 생활비까지 치면 3000만원 이상이 들어갑니다. 국립대학은 사립대학의 절반 정도이지요.

 

 

우리는 그 비용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거의 모든 학생이 그렇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장학금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장학금 제도는 엄밀히 말하면 장학금 제도가 아닙니다. 일본의 장학금 제도는 이름만 장학금이지, 실제로는 학생 대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갚아야 하는 거지요. 졸업 후에 말입니다. 이를 관장하는 기구가 바로 ‘JASSO(japan's student services organization)’입니다.

 

이처럼 원래부터 일본의 장학금 제도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만, 최근엔 학생에게 빚을 돌려 받는 것을 더욱 엄격하게 하려 하고 있어요. 작년 12월 JASSO는 장학금(대출학비와 같은 것)을 갚는 것이 3개월 정도 늦으면, 그 사람의 개인 정보를 금융기관에 통보하겠다고 공표했습니다. 한번 통보되고 나면, 신용카드를 만들 수 없게 되거나, 집을 얻는 게 어려워지거나 합니다. 우리들은 이것이 학생을 블랙 리스트에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쿄 블랙 리스트 모임, the association of blacklisted students of Tokyo>를 결성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제(나카타) 대출 빚은 총 800만 엔(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억 가량입니다..ㅡㅡ;) 입니다. 쿠리하라는 650만 엔(8천 5백만원 정도..ㅡㅡ;) 정도일 겁니다. 그는 대학생일 때 대출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저보다 빚이 적습니다. 저는 대학 2학년 때부터 대출을 받았기 때문에 그보다 빚이 많게 되었죠. ㅠㅠ

 


Q: 그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대출을 받나요
?

 

일본에 있는 장학금을 모두 포함하면, 40%의 학생이 받습니다. 약 120만 명의 학생이 대출을 받는 것이지요. JASSO만 치더라도 25%의 학생이 돈을 빌리고 있어요. JASSO에는 두 종류의 대출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자가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자가 있는 겁니다. 이자가 있어서 계속 대출금이 증가하죠. JASSO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JASSO가 대학별로 무이자 대출을 받을 사람의 수를 분배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이 그 수혜자를 결정하게 됩니다. 물론 학점 등이 중요한 결정요인이 되지요. 더 큰 문제는 JASSO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최근 10년 동안, JASSO에서 장학금을 받는 학생수가 70만 명 늘었습니다만, 이자가 붙어 있는 대출을 받는 비율이 상당히 늘었습니다.


 

Q: 본인이 원해서 대학에 가고 대출을 받는 건데, 대출금을 갚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게 통념이잖아요. ^^;

 

맞아요. 모두 대학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부자만 대학에 갈 수 있다면 그것은 기회의 평등이란 기준(norm)에 어긋납니다.






그레이버(David Graeber, 아나키스트 인류학자)가 빚에 관한 에세이에서 말했듯이,
빚은 폭력이나 폭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누구에게나 정당하며 도덕적인 것인 양 가장하는 기제로 작동합니다. 불평등한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빚’이라는 객관적이며 경제학적으로 보이는 개념으로 그 상황을 정당화하는 것이지요. 고로 빚을 개인적 문제나 도덕적인 차원으로 환원하는 태도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소득불평등이 재생산되는 것을 정당하게 여기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거죠. 우리가 채무의 무효, 나아가 무상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배경은 바로 이것입니다.


 

 

 

Q: 학교에서 오히려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해서 한마디 해주시죠.

 

우리들은 대학처럼 대규모로 명백하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노동(비불노동)이 조직되는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대학에 돈을 지불하고 무엇을 받았던 것일까요. 무언가를 해주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교수의 강의에 참여하는 행위는 그것만으로도 임금을 요구하기에 충분한 노동이 아닐까요. 대학에서 학생들은 많은 것들을 생산합니다. 그들은 공부하고, 문화 활동, 정치 활동 등. 많은 생산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대학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죠.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의 생산이 없으면 대학은 존재할 수 없다고. 대학을 재생산하는 것은 대학의 임금체계에서 배제되어 있는 학생과 학교 밖의 사람들(学外者)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학교에서 대학교수들만 돈을 받는 것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학생들도 그만큼의 생산을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많은 학생들은 비정규직으로 일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이유인즉, 등록금이 비싸기 때문이죠. 등록금을 내고, 책을 사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본의 젊은이들은 비정규직으로 일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비정규직들이 자본주의를 서포트한다고 봅니다. 1970년대 이후, 산업구조의 변화(서비스업의 증가)에 따라, 도심에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직장이 증가했습니다. 부모가 보내주는 돈이 부족하더라도 부족한 부분은 아르바이트로 보충해서 대학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기업에겐 일회용으로 쓰고 버릴 수 있는 싼 노동력이 공급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학생은 두 가지 의미에서 노동자인 것입니다.

또한 대학이 연구를 위한 장이 아니라 기업에 들어가기 스텝이라고 해도, 학비는 무상이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학비는 회사에 다니기 위한 교통비와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교통비니까 당연히 학비는 무료이어야 하는 거죠. 기업은 책임을 지고 학비를 0엔으로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만 합니다.


 

Q: 일반 학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아마 대부분의 학생들이 비웃거나, 우리를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하겠지요. 앞서 말했던 것처럼 빚은 폭력에 기반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정말로 유효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버가 말한 것처럼 '빚이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한 절차인 것'입니다. 최근의 추세는 우리의 활동에 동의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활동을 재밌게 생각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조금씩입니다만, 늘어나고 있어요.


 

Q: 호응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음.. 무엇보다 우리 활동에 관한 기사를 쓰고, 데모나 비정규직의 집회를 열기도 합니다. JASSO에 항의나 문제제기를 하러 가거나, 집회를 열거나, 프리타 메이데이 집회에 참가하거나 합니다. 정기적으로는 회의나 세미나를 열거나 합니다. 프리타 메이데이 등에서는 비정규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우리들은 그것과는 생각이 다릅니다. 우리들이 주장하는 것은 <기본소득보장>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학생은 부불노동(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원래 인간이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노동을 하고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Q: ‘반 G8 포럼’도 함께 하는 걸로 아는데 그것과 등록금 시스템 반대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홋카이도에서 저항 캠프를 만들었습니다. 사는 곳은 도쿄인데요, 홋카이도에 가서 2~3달 정도를 지내야 했습니다.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 후 평상시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곳에서 운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 단지 캠프를 운영하는 동안, 캠프는 대학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음은 사실입니다. ... 반세계화 운동, 자율, 상호부조 등의 주제가 핵심이었지요. 그러고나서 『현대사상』이라는 잡지에 글을 냈습니다. 제목은 「군중(swarm)이라고 불리는 대졸자들(仲田教人,「群れを呼ぶ大学院生たち―反洞爺湖サミット運動とキャンプ大学」,『現代思想 2008年9月号―大学の困難特集』、青土社)입니다. 내용은 군중이라 불리는 대졸자들이 만들어 냈던 유동적으로 이동하는 자치의 실천이 바로 대학의 진수, 본질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지요.

 

 

또 한 가지 중요한 경험은 독일의 하이렌겐담(heilligendam)에 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G8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독일 학생들도 많이 참여했습니다. G8서미트에 반대하기 위해서 매우 강하게 데모를 벌였고, 도로를 봉쇄했습니다. 저는 독일 학생들에게 이런 데모와 도로봉쇄에 참가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몇 명의 학생들이 대학 등록금 때문이라고 답하더군요. 원래 독일에는 대학 등록금이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따라서 헌법이 바뀌었고,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을 내야만 했다고 합니다. 일본이나 한국과 비교해서는 싼 돈이에요. 약 15만원 정도요..(ㅡㅡ;) 하지만 많은 독일 학생들은 화를 참을 수 없었죠. 그들은 “교육은 무료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무척 흥미로운 일이죠. 이때부터 저는 대학 프로그램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v 독일의 G8 반대 투쟁에 참가하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학생들이 대학에 돈을 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 운동에 참가한 이후에, 학생들이 대학에 돈을 내는 것은 참으로 부도덕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또한 대학이 무료라는 게 사회를 얼마나 풍부하게 할 수 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독일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반G8 운동에 참여하고 있고, 몇 천 명의 사람들이 도로를 점거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조직할 수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독일 활동가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독일 학생들은 대학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시간이 많기 때문이죠.” 독일 학생들은 돈 벌 시간을 줄이고, 대신에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합니다. 이에 반해 일본 학생들은 늘 자신의 등록금에 대해서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돈을 벌지 않으면 부모님께 폐가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정규직이건 뭐건 닥치는 대로 일을 하게 되고, 이것이 결국 무지막지한 일본의 자본주의를 지탱하게 하는 것입니다.



 

Q: 한국에서는 등록금 인하 투쟁이 그렇게 큰 운동의 주제로 부각되지 않고 있어요. 한국에서 등록금 인하 투쟁은 다른 이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보다는, 학생들의 이익투쟁으로 제한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과 같은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경우는 반G8 운동과 밀접히 연결돼 있어서 매우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동이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학생운동은 전통적으로 학비 인상 반대 투쟁을 해왔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만 열을 올린다는 비난을 듣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자본주의자들의 흔한 수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부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재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일본의 정부나 재계의 주장입니다만, 거짓말이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선진국에서 고등교육은 무상이거나 혹은 거의 무상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 규범적인 레벨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왜 그런 운동을 정부가 계속 거부한다고 생각하나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인 문제에요. 일본은 가난하게 시작한 나라입니다. 재정이 무척 부족했기 때문에 잘 갖춰진 복지는 요원한 일이었죠. 즉 일본정부는 무상교육을 실시할 역량이 없었다는 겁니다. 저는 둘째의 경우가 보다 본질적인 문제라고 봐요. 바로 자본주의적인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학생을 빚쟁이로 만드는 건 학생을 임금노동에 종사하도록 하기 위한 중요한 절차입니다.



 

Q: 한국 학생 운동에 대해 할 말이 있으면 해주세요.

 

우리는 한국 학생 운동과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한국에도 우리와 비슷한 학생 운동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수유 연구실에 온 것이 한국 학생운동과의 연결을 위한 기반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방문이 매우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부터는 특히 블랙리스트회의 멤버이기도 한 프랑스 문학자 시라이시(白石嘉治: 최근 나온 책으로는 『신자유주의 현대생활비판서설(ネオリベ現代生活批判序説, 白石 嘉治, 野 英士, 新評論, 2008)』)씨의 주장입니다만, 그는 “대학은 인류의 세계적인 프로젝트다”라는 시점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콘돔을 만드는 일본의 회사가 국가 별로 섹스의 횟수를 매년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은 OECD 각 국가 중 매회 최하위를 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본의 학비가 높은 것과 분명히 관계가 있다고 우리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ㅡㅡ;) 수업료로 큰 돈을 내고 있기 때문에, 데이트 같은 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데이트에는 시간이 듭니다. 데이트에 가기 전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거나, 차분히 혼자서 생각을 하거나, 그러한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시라이시씨는 말이나 감정이 최고로 발휘되는 것이 연애라고 한다면, 대학이란 연애를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연애에는 감흥이나 감각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습니다. 이런 것에 강렬한 신뢰가 없다면 혁명, 봉기, 혹은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는 갈수록 흥미진진해졌다. 이들과 말하면서 우리는 빚이란 무엇인지, 운동이란 무엇인지 다시 근본적으로 사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번 글에서 한국의 대학 등록금 문제에 대해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사요나라 나카다상, 쿠리하라상, 아리가또 고자이마시타..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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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자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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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은 해야, 시작이다.

 

 

 

 

 

 

 

 

 

 

은 해야, 시작이다.

 

 

 - ‘시작이 반이다’를 뒤집자!


                                                                                                                                                   

 


 

 

 

# 시작이 반이다?


 

 어느 날 우연히 몇몇 지인과 한 스님과 함께 차담을 하게 되었다. 한 분이 스님께 말을 건냈다.


 

  “저도 108배를 시작했어요.”

  “네. 얼마나 되셨어요?”

  “4일 되었어요.”

  “아직 시작 안 하셨네요.”


 

순간 “딱”, 세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 나는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말을 할 때의 상황은 가지각색이지만, 초점은 언제나 ‘시작’에 맞춰져 있다. 뒤늦게라도 시작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또 어떤 일을 새로 시작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도 이 말은 참 유용하다.

시작이라는 말이 주는 설레임에, 일의 절반이 벌써 이루어졌다는 의미까지 덧붙어 있으니 이 보다 더 좋은 문장이 있을까. 그래서 나는 마감을 하루 앞둔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시작이 반이잖아~” 하지만 자신 있게 뱉은 말과는 반대로, 밤새 밀린 일을 하느라 몸은 몸대로 축나고, 억지로 기간을 맞춰 끝낸 일은 대부분 엉망이다. 반도 못한 격이다. 야심차게 시작한 일들은 쉽게 접기 일쑤이고, 미루고 미루다 시작한 일들은 마무리를 제대로 못하니, 결국 나에겐 무수한 시작만 있었을 뿐 뿌듯한 맺음은 없었다.


 

 # 시작의 과잉


 

나는 참 많은 것들을 ‘시작’하곤 한다. 대부분 내 삶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다. 사람들과 함께 책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도 그렇고, 외국어 공부도 그렇고, 하다못해 집에서 윗몸 일으키기를 하루에 50번씩 하겠다는 결심도 그렇다. 시작할 때부터 기분은 들뜬다. 마치 벌써부터 나의 S라인 몸매에서는 지적인 매력이 뿜어져 나오고, 입에서는 외국어가 술술 나올 거 같다. 

하지만 기분은 기분일 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가 참고 견디고 노력해야 할 시간이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면, 어느새 나는 그 일을 접은 지 오래다. 

그렇다고 내가 내 능력과 게으름을 탓하며 무기력하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하다가 그만 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 전에, 이미 다른 책, 다른 외국어, 다른 운동(팔굽혀펴기와 같은)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시작의 과잉. 시작만 있을 뿐, 이렇다 할 맺음은 없는 상황이다. 자, 진단은 끝났으니, 여기서 벗어날 길을 모색해보자. 
시작은 했는데 끝을 보지 않는 것이 문제인데,,,음... 그렇담 해결의 실마리는 ‘끝’에 있는 것일까.


 

 # 반은 해야, 시작이다.


 

나는 항상 내가 일을 마무리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시작 안 하셨네요.”라는 스님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시작을 오해해도 한참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의 핵심은 일을 마무리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우리는 새롭고, 몸에 좋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좋다면 일단 시작하고 본다. 하다가 힘들거나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면 된다. 시작한 게 많으면 포기도 쉽다. 그 일을 그만두는 변명거리도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이때 시작은 아무 의미 없는 행위가 되고 만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일을 끝마치기는 그리 어렵지 아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 ‘시작은 반이다’는 자신의 게으름이나 끈기 없음을 포장하는 말로 둔갑하고 만다. 

요즘처럼 새로운 것이 넘쳐나고, 눈 뜨기가 무섭게 소비해야 할 것이 늘어나고 또 그만큼 많은 것들이 쓰레기가 될 때에는, ‘시작은 반이다’라는 말을 뒤집어 생각해야 한다. ‘반은 해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이다.

다른 이의 강요나 유혹이 의미 없어지고, 시작이 주는 거품과 열기가 다 식어 오롯이 그 행위와 내 삶이 마주했을 때, 그때 우리는 시작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루함과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의 끝까지 그리고 내 능력의 한계까지
묵묵히 그 행위를 밀고 나갈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시작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어느새 시작의 설레임도 포부도 순간 활활 타오른 열정도 다 식어 때려 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멋진 후반전을 향해 마음을 다잡고 맺음을 향해 달려갈 때!

그때 우리는 ‘시작은 반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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