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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식 학자금 대출제도, 문제야 문제!!




등록금 후불제? 
'반값 등록금' 공약에 침묵하던 이명박 정부가 집권 2년 만에 드디어(!!!) 대학 등록금 문제를 거론했다. "학자금을 대출받으면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못해도 갚아야 되니까 신용불량자가 된다는 뉴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이대통령의 말대로, 이번 정책의 취지는 단순하다.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라는 명칭 그대로, 학자금 대출 상환을 일정 소득 발생 이후로 미룬다는 것. 그리고 거치기간을 현행 10년에서 최장 25년으로 늘려서, 말하자면 빚을 좀더 늦게, 좀더 천천히 갚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장 학자금을 대출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해준다는 점에서 환영할만도 하다.

 

 

 

 

그러나 이를 두고 서민을 위한 정책이니, 사실상 '등록금 후불제'라니 호들갑떠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사실 빚 갚는 걸 좀 수월하게 만들었다 뿐이지, (이것도 그래 보이는 건지, 정말 그런지 따져봐야겠지만) 대학 좀 다녀보겠다고 어마어마한 빚을 져야한다는 점에서는 현행 학자금 대출제도와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제도도입의 효과로 '학자금을 학생본인이 책임짐으로써 가정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데, (http://blog.naver.com/mestblog 참조) 그냥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어차피 가족이라는 하나의 경제단위로 묶여있는 상황에서, 학자금 대출이 부모 명의가 되든 학생 명의가 되든 가족 전체가 빚으로 인해 고통 받는다는 점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교과부에서는 현행 학자금 대출제도에서는 사실상 학자금이 부모의 부담으로 남는다고 말하지만, 도대체 지금까지 학자금 대출을 받았던 학생 중에서 그걸 자기 부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묻고 싶다.


 

 


요컨대 교육비가 고스란히 개별 가정의 부담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이번 정책은 기존의 정책과 차이가 없으며, 또한 지금까지 시민단체나 야당에서 도입을 주장해왔던 '등록금 후불제'와도 전혀 다르다. 등록금 후불제란 단순히 빌린 돈 나중에 갚는 정책이 아니다. 다들 알고 있듯, 이는 근본적으로 정책 시행의 배경인 교육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까놓고 말해서, 현 정권에서 등록금 문제가 어떤 식으로든 해결될 거라는 기대는 안 하는게 좋을지도 모른다. 이건 현 정권에 대한 비난도 아니고 비관적 체념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왜? 교육에 대한, 근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현 정부의 관점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이다. 'mb도 나라 망치고 싶진 않겠지만...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건 삽 한 자루'라는 진중권의 지적처럼, (http://www.ohmynews.com 6월 18일자 기사 참조) "비지니스 프렌들리" 운운하며 규제 완화, 시장 경쟁 등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뇌구조가 교육 문제에서만 정상적으로 작동할 리 없는 것이다.

단편적인 예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강행된 일제고사나 자율형 사립고 확대를 보라. 투입 대비 산출의 극대화가 가장 중요한 신자유주의에서, 교육에서의 경쟁이나 엘리트 교육을 강조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정체성에 비추어봤을때 이상한 건 오히려, "교육의 기회는 균등해야" 한다며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이다. 국가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무한경쟁에서 살아남는 상위1%를 활용하는 것이 효율성의 측면에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 정부가 등록금이나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건, 국민을 상대로 사기치는 거거나 아니면 정말 자기 자신을 모르고 헛소리하는 거거나 둘 중 하나다. 서민을 위한답시고 내놓은 이번 등록금 정책이 실상 아무 해결이 안 되는 것 역시 그러한 신자유주의적 뇌구조가 가진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번 정책이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발상인 이유. 근본적인 문제 해결, 즉 빚을 안 지고도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돈없는 사람도 대학에 갈 수 있어야한다"라고 선심쓰듯 말하며 오히려 '돈없는 사람'을 빚쟁이로 만들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 빚을 빌미로 신자유주의 체계에 복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레이버(David Graeber, 아나키스트 인류학자)가 지적하듯, '빚'이라는 기제를 통해 폭력이나 폭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정당하고 도덕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http://trans-r.tistory.com/28 "학자금 대출? 그냥 안 갚으면 안 돼? 참조) 

이러한 통념은 이미 우리의 머릿속에 뿌리깊게 박혀있다. 돈을 빌렸으면 당연히 갚아야한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 자는 부도덕하다! 그러나 문제는 애초에 돈을 빌려야만 하는, 우리가 빚쟁이가 되어야만 하는 상황 그 자체이다. 삶을 저당잡힌 채로 근면하게 노동하며 살아가기 전에, 우리가 왜 우리의 삶을 저당잡혀야만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러한 정체(!)에 대한 파악없이 "그 분이 다 해결해주실 거야"라는 식으로 표를 던지거나, 혹은 아직도 내 자식만은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공정택같은 교육감을 뽑거나, 아이들 급식비가 아까워 예산 삭감해버리는 인간을 국회의원으로 뽑는한, 또 우리가 여전히 '등록금이 비싸긴 하지만, 그만큼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타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면 된다'는 근면하고 선량한 인간으로 사는한,
슬프지만 우린 "안 될 거다".



우리의 청춘을 돌려줘
앞서 구구절절 말한 바와 같이, 정부가 내놓은 이번 등록금 정책이 결코 '등록금 후불제'일 수 없는 이유, 그리고 진짜 돈없는 서민들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등록금 후불제는 기본적으로 교육이 공공재라는 인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등록금 후불제가 등록금 상한제 등과 함께 제안되는 것도 그때문이다. 교육을 공공재로, 혹은 공공재 비슷한 것으로라도 간주해야 한다는 발상은  교육의 기회 균등, 그리고 경쟁 아닌 교육이 가져오는 풍요로운 사회적 효과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대부분의 북유럽 국가에서 대학 교육을 아예 무상 교육으로 시행하거나 최소한의 등록금만을 책정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상위1%를 위한 교육이 아닌 99%를 위한 교육, 그것은 99%를 위한, 즉 우리 모두를 위한 사회로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이, 대놓고 친기업, 친재벌, 친부자를 내세우는 현 정부가 절대로 서민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는 이유다.

그러니 '나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근면하고 선량한 생각은, 사실 더이상 아무 소용이 없다. 열심히 해서, 대체 뭐가 되는지 생각해보자. '취업 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도'라는 긴 이름을 가진, 그래서 우리의 자립심을 길러준다는 이 고마운 제도가 시행되고 나면, 우리는 애써 취업한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쥐꼬리만한 월급에서 다달이 떼여나가는, 국민연금보다 더 무시무시한 학자금 대출빚을 보게 될 것이다. 다행히 부모님이 등록금을 책임질 여유가 된다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부모도 자식에게 일종의 투자를 한다. 투자의 대가는 자식이 부모가 원하는 수준, 원하는 형태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가 투자 비용이 높을수록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에 우리의 삶을 저당잡히는 것이다. 당신은, 그래도 정말 괜찮은가? 당연히, 괜찮을리 없지 않은가. 

 '나만 열심히 하면 되겠지'라는, 99%인 우리 모두를 진창에 처넣는 선량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바꿔야한다. 단지 대출빚을 갚을 시기를 조금만 늦춰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애초에 대학 좀 다녀보겠다는 죄로 기나긴 인생을 빚쟁이로 살아야하는 지금의 상황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야한다. 풍요로워야 할 교육의 공간이 단지 학점 경쟁의 공간으로, 고시 공부를 위해 청춘을 유예시키는 공간으로, 임금 노동자가 될 자격을 얻기 위해 거액의 비용을 지불해야하는 이상한 공간으로 작동하는 지금의 상황 자체에 의문을 제기해야한다. 말로만 핀란드의 교육제도를 부러워하지말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당신의 풍요롭고 건강한 삶에의 욕망을 함께 이야기해야한다. 대학 교육의 무상 교육화, 하다못해 반값 등록금 공약 실천 요구는 결코 게으름뱅이의 투정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건강한 삶을 위한 지극히 당연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알바와 취업 스트레스에 찌든 우리의 슬픈 청춘이, 언제까지나 "안 될 거야, 아마"라고 말하지 않도록.  



posted by. 재이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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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금 대출, 그까이거 그냥 안갚으면 되지 뭐!

 

소문자r의 더 많은 이야기 보러 가기 http://trans-r.tistory.com

 

 

나카다상과 쿠리하라상과의 인터뷰

학자금 대출? 그냥 안 갚으면 안돼?


 


 

우리들이 기거하는 뷁수의 방에 저 멀리서라 하면 오버이고, 하여튼 좀 멀리 바다건너서 친구들이 찾아왔다.

공자께서도 “먼 곳에서 벗이 찾아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바다 건너 니뽄에서 벗들이 찾아왔으니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짜잔. 나카타 상과 쿠리하라상이 이들이다. 한 눈에 봐도 니뽄풍으로 생기셨다. 노다메 칸타빌레에 나오는 치아키 선배를 닮았다는 평도 있었는데.. 그건 음.. 뭐랄까..음..
자, 허튼 소리 그만하고, 뭣들 하시는 분이길래 이런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셨나 궁금하실거다. 
 

 

 

이들은 일본에서 학자금 안 갚기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 사람은 대학원생이고 한 사람은 강사란다. 학자금 안 갚기 운동? 뭐지? 왜 이런 일들을 하시나 궁금했다. 얘기하다 보니 등록금 관련해서 이들 빚도 많단다. 1억 정도..(ㅡㅡ;) 일본의 학자금 문제도 우리만큼 심각한가보다. 며칠전 우리 MB님께서 ‘취업후 상환 학자금 대출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셨다. 나중에 졸업해서 취직하고 돈 열라 벌어서 학자금 갚어라 뭐 이 얘기다. 물론 이런 제도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등록금이 천정부지로 어처구니없이 오르고, 그걸 모두 학생들에게 떠넘기는 제도가 문제인 것이다. 이들에게서 학자금 안 갚기 운동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훗. 천잰데” 하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왜 우리는 이런 생각을 못했던거지.. ㅡㅡ; 각설하고 이들 뭔 생각을 갖고 있는지 인터뷰를 해봤다.

 





Q: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주시죠
..


우리는 일본의 등록금 시스템에 반대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등록금은 아주 비쌉니다. 일 년에 약 1000만원에 달할 정도니까요. 사립대학인 경우에요. 여기다 시내에 사는 경우 생활비까지 치면 3000만원 이상이 들어갑니다. 국립대학은 사립대학의 절반 정도이지요.

 

 

우리는 그 비용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거의 모든 학생이 그렇지요.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장학금입니다. 하지만 일본의 장학금 제도는 엄밀히 말하면 장학금 제도가 아닙니다. 일본의 장학금 제도는 이름만 장학금이지, 실제로는 학생 대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갚아야 하는 거지요. 졸업 후에 말입니다. 이를 관장하는 기구가 바로 ‘JASSO(japan's student services organization)’입니다.

 

이처럼 원래부터 일본의 장학금 제도는 평범하지 않았습니다만, 최근엔 학생에게 빚을 돌려 받는 것을 더욱 엄격하게 하려 하고 있어요. 작년 12월 JASSO는 장학금(대출학비와 같은 것)을 갚는 것이 3개월 정도 늦으면, 그 사람의 개인 정보를 금융기관에 통보하겠다고 공표했습니다. 한번 통보되고 나면, 신용카드를 만들 수 없게 되거나, 집을 얻는 게 어려워지거나 합니다. 우리들은 이것이 학생을 블랙 리스트에 올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쿄 블랙 리스트 모임, the association of blacklisted students of Tokyo>를 결성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제(나카타) 대출 빚은 총 800만 엔(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억 가량입니다..ㅡㅡ;) 입니다. 쿠리하라는 650만 엔(8천 5백만원 정도..ㅡㅡ;) 정도일 겁니다. 그는 대학생일 때 대출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저보다 빚이 적습니다. 저는 대학 2학년 때부터 대출을 받았기 때문에 그보다 빚이 많게 되었죠. ㅠㅠ

 


Q: 그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대출을 받나요
?

 

일본에 있는 장학금을 모두 포함하면, 40%의 학생이 받습니다. 약 120만 명의 학생이 대출을 받는 것이지요. JASSO만 치더라도 25%의 학생이 돈을 빌리고 있어요. JASSO에는 두 종류의 대출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자가 없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자가 있는 겁니다. 이자가 있어서 계속 대출금이 증가하죠. JASSO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JASSO가 대학별로 무이자 대출을 받을 사람의 수를 분배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각 대학이 그 수혜자를 결정하게 됩니다. 물론 학점 등이 중요한 결정요인이 되지요. 더 큰 문제는 JASSO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최근 10년 동안, JASSO에서 장학금을 받는 학생수가 70만 명 늘었습니다만, 이자가 붙어 있는 대출을 받는 비율이 상당히 늘었습니다.


 

Q: 본인이 원해서 대학에 가고 대출을 받는 건데, 대출금을 갚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게 통념이잖아요. ^^;

 

맞아요. 모두 대학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부자만 대학에 갈 수 있다면 그것은 기회의 평등이란 기준(norm)에 어긋납니다.






그레이버(David Graeber, 아나키스트 인류학자)가 빚에 관한 에세이에서 말했듯이,
빚은 폭력이나 폭력에 근거한 불평등을 누구에게나 정당하며 도덕적인 것인 양 가장하는 기제로 작동합니다. 불평등한 상황을 개선하기보다는, ‘빚’이라는 객관적이며 경제학적으로 보이는 개념으로 그 상황을 정당화하는 것이지요. 고로 빚을 개인적 문제나 도덕적인 차원으로 환원하는 태도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소득불평등이 재생산되는 것을 정당하게 여기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거죠. 우리가 채무의 무효, 나아가 무상교육이 실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배경은 바로 이것입니다.


 

 

 

Q: 학교에서 오히려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해서 한마디 해주시죠.

 

우리들은 대학처럼 대규모로 명백하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노동(비불노동)이 조직되는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대학에 돈을 지불하고 무엇을 받았던 것일까요. 무언가를 해주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교수의 강의에 참여하는 행위는 그것만으로도 임금을 요구하기에 충분한 노동이 아닐까요. 대학에서 학생들은 많은 것들을 생산합니다. 그들은 공부하고, 문화 활동, 정치 활동 등. 많은 생산 활동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대학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죠.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의 생산이 없으면 대학은 존재할 수 없다고. 대학을 재생산하는 것은 대학의 임금체계에서 배제되어 있는 학생과 학교 밖의 사람들(学外者)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학교에서 대학교수들만 돈을 받는 것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학생들도 그만큼의 생산을 하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많은 학생들은 비정규직으로 일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이유인즉, 등록금이 비싸기 때문이죠. 등록금을 내고, 책을 사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본의 젊은이들은 비정규직으로 일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 비정규직들이 자본주의를 서포트한다고 봅니다. 1970년대 이후, 산업구조의 변화(서비스업의 증가)에 따라, 도심에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직장이 증가했습니다. 부모가 보내주는 돈이 부족하더라도 부족한 부분은 아르바이트로 보충해서 대학에 다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는 기업에겐 일회용으로 쓰고 버릴 수 있는 싼 노동력이 공급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학생은 두 가지 의미에서 노동자인 것입니다.

또한 대학이 연구를 위한 장이 아니라 기업에 들어가기 스텝이라고 해도, 학비는 무상이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학비는 회사에 다니기 위한 교통비와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교통비니까 당연히 학비는 무료이어야 하는 거죠. 기업은 책임을 지고 학비를 0엔으로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만 합니다.


 

Q: 일반 학생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아마 대부분의 학생들이 비웃거나, 우리를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하겠지요. 앞서 말했던 것처럼 빚은 폭력에 기반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정말로 유효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레이버가 말한 것처럼 '빚이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기 위한 절차인 것'입니다. 최근의 추세는 우리의 활동에 동의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활동을 재밌게 생각하고, 동조하는 사람들이, 조금씩입니다만, 늘어나고 있어요.


 

Q: 호응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요?

 

 

음.. 무엇보다 우리 활동에 관한 기사를 쓰고, 데모나 비정규직의 집회를 열기도 합니다. JASSO에 항의나 문제제기를 하러 가거나, 집회를 열거나, 프리타 메이데이 집회에 참가하거나 합니다. 정기적으로는 회의나 세미나를 열거나 합니다. 프리타 메이데이 등에서는 비정규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우리들은 그것과는 생각이 다릅니다. 우리들이 주장하는 것은 <기본소득보장>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학생은 부불노동(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원래 인간이란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노동을 하고 있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Q: ‘반 G8 포럼’도 함께 하는 걸로 아는데 그것과 등록금 시스템 반대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합니다.

 

 

먼저, 홋카이도에서 저항 캠프를 만들었습니다. 사는 곳은 도쿄인데요, 홋카이도에 가서 2~3달 정도를 지내야 했습니다.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 후 평상시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곳에서 운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 단지 캠프를 운영하는 동안, 캠프는 대학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음은 사실입니다. ... 반세계화 운동, 자율, 상호부조 등의 주제가 핵심이었지요. 그러고나서 『현대사상』이라는 잡지에 글을 냈습니다. 제목은 「군중(swarm)이라고 불리는 대졸자들(仲田教人,「群れを呼ぶ大学院生たち―反洞爺湖サミット運動とキャンプ大学」,『現代思想 2008年9月号―大学の困難特集』、青土社)입니다. 내용은 군중이라 불리는 대졸자들이 만들어 냈던 유동적으로 이동하는 자치의 실천이 바로 대학의 진수, 본질이라는 주장을 담고 있지요.

 

 

또 한 가지 중요한 경험은 독일의 하이렌겐담(heilligendam)에 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G8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독일 학생들도 많이 참여했습니다. G8서미트에 반대하기 위해서 매우 강하게 데모를 벌였고, 도로를 봉쇄했습니다. 저는 독일 학생들에게 이런 데모와 도로봉쇄에 참가하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몇 명의 학생들이 대학 등록금 때문이라고 답하더군요. 원래 독일에는 대학 등록금이 없었다고 해요. 그런데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따라서 헌법이 바뀌었고,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 돈을 내야만 했다고 합니다. 일본이나 한국과 비교해서는 싼 돈이에요. 약 15만원 정도요..(ㅡㅡ;) 하지만 많은 독일 학생들은 화를 참을 수 없었죠. 그들은 “교육은 무료여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무척 흥미로운 일이죠. 이때부터 저는 대학 프로그램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어요.^^v 독일의 G8 반대 투쟁에 참가하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학생들이 대학에 돈을 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이 운동에 참가한 이후에, 학생들이 대학에 돈을 내는 것은 참으로 부도덕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또한 대학이 무료라는 게 사회를 얼마나 풍부하게 할 수 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독일에서는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반G8 운동에 참여하고 있고, 몇 천 명의 사람들이 도로를 점거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조직할 수 있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독일 활동가들은 이렇게 답합니다. “독일 학생들은 대학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시간이 많기 때문이죠.” 독일 학생들은 돈 벌 시간을 줄이고, 대신에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합니다. 이에 반해 일본 학생들은 늘 자신의 등록금에 대해서 부담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돈을 벌지 않으면 부모님께 폐가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정규직이건 뭐건 닥치는 대로 일을 하게 되고, 이것이 결국 무지막지한 일본의 자본주의를 지탱하게 하는 것입니다.



 

Q: 한국에서는 등록금 인하 투쟁이 그렇게 큰 운동의 주제로 부각되지 않고 있어요. 한국에서 등록금 인하 투쟁은 다른 이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기보다는, 학생들의 이익투쟁으로 제한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과 같은 포괄적이고 거시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경우는 반G8 운동과 밀접히 연결돼 있어서 매우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운동이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학생운동은 전통적으로 학비 인상 반대 투쟁을 해왔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만 열을 올린다는 비난을 듣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자본주의자들의 흔한 수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부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것은 재정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일본의 정부나 재계의 주장입니다만, 거짓말이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선진국에서 고등교육은 무상이거나 혹은 거의 무상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선 규범적인 레벨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왜 그런 운동을 정부가 계속 거부한다고 생각하나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인 문제에요. 일본은 가난하게 시작한 나라입니다. 재정이 무척 부족했기 때문에 잘 갖춰진 복지는 요원한 일이었죠. 즉 일본정부는 무상교육을 실시할 역량이 없었다는 겁니다. 저는 둘째의 경우가 보다 본질적인 문제라고 봐요. 바로 자본주의적인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학생을 빚쟁이로 만드는 건 학생을 임금노동에 종사하도록 하기 위한 중요한 절차입니다.



 

Q: 한국 학생 운동에 대해 할 말이 있으면 해주세요.

 

우리는 한국 학생 운동과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한국에도 우리와 비슷한 학생 운동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수유 연구실에 온 것이 한국 학생운동과의 연결을 위한 기반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방문이 매우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부터는 특히 블랙리스트회의 멤버이기도 한 프랑스 문학자 시라이시(白石嘉治: 최근 나온 책으로는 『신자유주의 현대생활비판서설(ネオリベ現代生活批判序説, 白石 嘉治, 野 英士, 新評論, 2008)』)씨의 주장입니다만, 그는 “대학은 인류의 세계적인 프로젝트다”라는 시점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콘돔을 만드는 일본의 회사가 국가 별로 섹스의 횟수를 매년 조사하고 있습니다만, 일본은 OECD 각 국가 중 매회 최하위를 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일본의 학비가 높은 것과 분명히 관계가 있다고 우리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ㅡㅡ;) 수업료로 큰 돈을 내고 있기 때문에, 데이트 같은 게 불가능한 것입니다. 데이트에는 시간이 듭니다. 데이트에 가기 전에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거나, 차분히 혼자서 생각을 하거나, 그러한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시라이시씨는 말이나 감정이 최고로 발휘되는 것이 연애라고 한다면, 대학이란 연애를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연애에는 감흥이나 감각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있습니다. 이런 것에 강렬한 신뢰가 없다면 혁명, 봉기, 혹은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뷰는 갈수록 흥미진진해졌다. 이들과 말하면서 우리는 빚이란 무엇인지, 운동이란 무엇인지 다시 근본적으로 사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번 글에서 한국의 대학 등록금 문제에 대해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사요나라 나카다상, 쿠리하라상, 아리가또 고자이마시타.. (ㅡㅡ;)



POSTED BY   
소문자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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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은 해야, 시작이다.

 

 

 

 

 

 

 

 

 

 

은 해야, 시작이다.

 

 

 - ‘시작이 반이다’를 뒤집자!


                                                                                                                                                   

 


 

 

 

# 시작이 반이다?


 

 어느 날 우연히 몇몇 지인과 한 스님과 함께 차담을 하게 되었다. 한 분이 스님께 말을 건냈다.


 

  “저도 108배를 시작했어요.”

  “네. 얼마나 되셨어요?”

  “4일 되었어요.”

  “아직 시작 안 하셨네요.”


 

순간 “딱”, 세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 나는 “시작이 반이다.”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말을 할 때의 상황은 가지각색이지만, 초점은 언제나 ‘시작’에 맞춰져 있다. 뒤늦게라도 시작한 나를 위로하기 위해서 또 어떤 일을 새로 시작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도 이 말은 참 유용하다.

시작이라는 말이 주는 설레임에, 일의 절반이 벌써 이루어졌다는 의미까지 덧붙어 있으니 이 보다 더 좋은 문장이 있을까. 그래서 나는 마감을 하루 앞둔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시작이 반이잖아~” 하지만 자신 있게 뱉은 말과는 반대로, 밤새 밀린 일을 하느라 몸은 몸대로 축나고, 억지로 기간을 맞춰 끝낸 일은 대부분 엉망이다. 반도 못한 격이다. 야심차게 시작한 일들은 쉽게 접기 일쑤이고, 미루고 미루다 시작한 일들은 마무리를 제대로 못하니, 결국 나에겐 무수한 시작만 있었을 뿐 뿌듯한 맺음은 없었다.


 

 # 시작의 과잉


 

나는 참 많은 것들을 ‘시작’하곤 한다. 대부분 내 삶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다. 사람들과 함께 책 읽고 토론하는 세미나도 그렇고, 외국어 공부도 그렇고, 하다못해 집에서 윗몸 일으키기를 하루에 50번씩 하겠다는 결심도 그렇다. 시작할 때부터 기분은 들뜬다. 마치 벌써부터 나의 S라인 몸매에서는 지적인 매력이 뿜어져 나오고, 입에서는 외국어가 술술 나올 거 같다. 

하지만 기분은 기분일 뿐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내가 참고 견디고 노력해야 할 시간이 결코 짧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때면, 어느새 나는 그 일을 접은 지 오래다. 

그렇다고 내가 내 능력과 게으름을 탓하며 무기력하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하다가 그만 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 전에, 이미 다른 책, 다른 외국어, 다른 운동(팔굽혀펴기와 같은)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는다.

시작의 과잉. 시작만 있을 뿐, 이렇다 할 맺음은 없는 상황이다. 자, 진단은 끝났으니, 여기서 벗어날 길을 모색해보자. 
시작은 했는데 끝을 보지 않는 것이 문제인데,,,음... 그렇담 해결의 실마리는 ‘끝’에 있는 것일까.


 

 # 반은 해야, 시작이다.


 

나는 항상 내가 일을 마무리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 시작 안 하셨네요.”라는 스님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시작을 오해해도 한참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제의 핵심은 일을 마무리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우리는 새롭고, 몸에 좋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좋다면 일단 시작하고 본다. 하다가 힘들거나 아니다 싶으면, 그만두면 된다. 시작한 게 많으면 포기도 쉽다. 그 일을 그만두는 변명거리도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이때 시작은 아무 의미 없는 행위가 되고 만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지 시작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하면 일을 끝마치기는 그리 어렵지 아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 ‘시작은 반이다’는 자신의 게으름이나 끈기 없음을 포장하는 말로 둔갑하고 만다. 

요즘처럼 새로운 것이 넘쳐나고, 눈 뜨기가 무섭게 소비해야 할 것이 늘어나고 또 그만큼 많은 것들이 쓰레기가 될 때에는, ‘시작은 반이다’라는 말을 뒤집어 생각해야 한다. ‘반은 해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고 말이다.

다른 이의 강요나 유혹이 의미 없어지고, 시작이 주는 거품과 열기가 다 식어 오롯이 그 행위와 내 삶이 마주했을 때, 그때 우리는 시작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지루함과 게으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의 끝까지 그리고 내 능력의 한계까지
묵묵히 그 행위를 밀고 나갈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시작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닐까. 어느새 시작의 설레임도 포부도 순간 활활 타오른 열정도 다 식어 때려 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멋진 후반전을 향해 마음을 다잡고 맺음을 향해 달려갈 때!

그때 우리는 ‘시작은 반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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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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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뷁수의 전지구화 : 뷁수의 번역은...

뷁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오프라인에 모여, 뷁수로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글을 한국어로 번역해

올리는 카테고리입니다. 전지구적으로 뿔뿔히 흩어져 있는 뷁수들과 소통하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외국어로 된 좋은 글을 함께 읽으면서 친목도 다지고, 외국어 실력도 늘리고, 토론하고

글쓰는 능력까지 기를 수 있으니, 진정한 뷁수 수행 아니겠습니까!

수유너머 r에서 번역세미나(영어/일어)팀이 공동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관심있으신 분은 http://cafe.daum.net/trans-r (수유너머 r 카페)로 GO! GO!

첫 번째 번역글은 전지구적으로 활동하는 아나키스트 집단인

(Midnight Notes Collective) '한밤중의 쪽지 연대' 웹진에 실린 글 요약본입니다.
(원문과 번역본은 모두 수유너머 r 카페이 있습니다. 클릭! (http://cafe.daum.net/trans-r)
'한밤중의 쪽지 연대'는 민중 투쟁을 위해 전지구적 정치, 사회, 경제조건에 대한 분석을 수행하는

활동가 지식인들 집단으로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구성원들은 사유의 경향, 활동, 그리고

출신 민족이 다양합니다. 이 집단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시면 다음 페이지를 참고하세요.  www.midnightnotes.org/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
위기crisis에서 공통의 것commons의 구성으로


 

자본주의가 탄생한지 오백년, 자본가들은 또다시 위기를 이야기하면서 우리에게 희생 강요하고 있다.
점점 더 노골적인 폭력으로 대응하는 정부를 보면서, 우리는 시대의 종언을 예감한다. 한 시대의 종언은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개시이기도 하다. 지금은 이러한 혁명적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기에 더없이 좋은 때다.

이번 위기에 대한 좌파진영의 해석도 주로 금융 순환과 헤지펀드, 파생매매에 관한 것에 머물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투쟁을 간과하고, 위기의 상황에서 어떻게 저항해야할지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반면 우리는 이번 위기를 지구를 횡단해서 벌어지는 자본의 지배와 이에 직면한 민중들의 투쟁의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지난 세기 동안 계급투쟁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내재적 모순을 강력하게 드러내면서 자본주의를 한계점으로 몰아왔다. 이는 노동자들의 혁명적 잠재성과 능력을 증명한다.  
                                                                                    

                                                                                               
 신자유주의의 위기 : 원인과 결과

 
케인즈주의의 종결 선언하며 등장한 신자유주의적 전지구화는 ‘자유 시장 회복’을 기치로 내세웠다. 전반적인 정책은 노동력 저평가, 임금 체계 재조직, 노동자들을 비정치적인 상품으로 전락시키기, 자본의 탈영토화, 노동시장 확장을 통한 노동자간 경쟁 심화, 복지국가 폐지, 토지수용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처음에는 케인즈주의, 사회주의, 탈식민주의에 대한 성공적인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적인 개발정책의 결과는 자본의 무능력을 입증했다. 신자유주의적 계획은 왜 실패한 것일까? 우리는 이에 답하기 위해 민중들의 투쟁에 주목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투쟁 역시 등장했다.

 

전지구적 신자유주의는 실패(fail)했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규제와 각종 장벽을 철폐하는 법체계에 의존한다. 그러나 80년대 중반 잠비아, 카라카스, 사파티스타에 이르는 곳곳에서 반구조조정 운동이 발생했다. 서유럽과 미국에서 반지구화 운동과 WTO, G8회담 반대시위가 일어났다. 또한 WTO, IMF, 세계은행에 주권의 마지막 한줌을 내주지 않으려는 제3세계 정부들의 노력이 있었다(그 이유는 순수하게 애국적이지만은 않았다). 이러한 폭동과 항거는 ‘지구는 평평하다’는 전지구적 이데올로기의 정당화를 저지했다.

 

1999년 이후 전쟁을 이용해 신자유주의를 부활시키려한 시도―대표적으로 이라크 침략―은 무장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수십만의 아군과 적군 사상자를 낸 결과 결국 현재도 국영석유회사와 OPEC이 여전히 석유산업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은 군사적, 재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임금 투쟁 역시 통제 불가능이었다. 특히 중국에서 가장 두드러졌는데, 수천건의 파업 결과 결국 이들은 두자리수의 임금 상승을 얻어냈다. 수백만의 사람들을 아프리카, 아메리카에서 추방시킨 신인클로저 역시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볼리비아 물 전쟁, 가스전쟁, 니제르 삼각주 해방운동 등.

완전금융화는 제조업에서 수확체감에 직면한 자본가들이 ‘돈으로 돈벌기’를 시도한 것이자, 권력관계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재편하려는 신지유주의적 노력의 일환이다. 자본가들은 한편으로는 헤지펀드 시장에 뛰어들었고, 또 한편으로는 미국 노동자의 대출 한도 높여줌으로서 소비를 진작시키고 중국을 비롯한 제 3세계에서 엄청난 저임금 기조로 초고수익 획득하여 이를 다시 미국 대출 시장에 투자하여 금융의 몸을 불려나갔다.



그러나 금융화로 인해 신자유주의는 역설적으로 신용영역에서 계급투쟁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소위 복지국가 폐지로 인해 주택, 건강, 교육 등의 재생산에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던 미국의 노동자들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학생 대출, 신용카드 등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재생산 수단에 접근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의 열망과 자본가들의 축적하고자 하는 열망이 결합한 것이 바로 금융화이다. 금융화는 단순히 자본가들의 구상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과정이자 생산물인 것이다.

 

 

3년 후 서브 프라임 모기지의 이자 지불액은 급증하고, 신용카드의 이자 비율은 고리대금업 수준에 육박하고, 학자금 대출은 졸업과 함께 임금 노예 입장권이 된다. 노동자들이 제안 받은 신자유주의적 거래의 결과는 신용 시스템의 불안정성을 증명한다. 이에 대해 미국 노동자들은 우편함에 열쇠를 남겨두고 떠나는 방법으로 그들의 부채를 갚지 않겠다는 암시적인 위협을 하면서 시스템을 위기로 끌어들였다.

금융화는 계급 갈등이 야기하는 불확정성에 대항해 자본에 하나의 방패를 마련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본으로 하여금 갈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게 하고, 동시에 그 갈등의 주체들을 금융 기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이 계획이 바로 현재 위기의 기반이 되었다. 전체 부채에서 노동자 계급의 몫은 기업 부채나 국가 부채에 비해 미미하지만, 그것은 질적으로 특별하다. 노동자 계급의 부채는 계급 상호적이며 가장 큰 긴장을 만들어낼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위기에 대한 자본과 노동계급의 대응

 
자본의 대응

이번 위기는 확실히 자본주의 시스템에 본질적으로 도전적인 태도를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자본은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 두 가지의 대응 방식을 예상해볼 수 있다. 하나는 금융시스템에 엄격한 규제가 도입되고 그로 인해 자본이 금융에서 녹색 산업으로 이동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금융이 완전히 승리하는 것이다. 전자는 친환경 영역을 통해 산업 기반을 다시 살리는 것이고, 후자는 금융 자본의 이익이 창출되도록 다시 법을 제정하는 것이다. 만약 위기를 이용해 자본주의를 이탈하려는 다른 움직임이 없다면, 이 둘이 섞인 어떤 형태가 현실화될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케인즈주의적 녹색 정책과 몇몇 규제가 추진될 것이다. 그러다가 위기의 심각한 국면이 지나간 후에는 자본주의에 대해 용서와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현재 노동자들의 연금은 자본 시스템에서 엄청난 자원이고, 노동자들의 채무는 미국 전체 채무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신용체계로 인해 노동자들이 자본에 집단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는 21세기의 금융은 노동자의 광범위한 참여 없이 작동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신용 영역을 19세기와 같이 자본가 고유의 영역으로 되돌리려 한다면 이는 계급 전쟁을 불러올 것이다. 그러나 금융 기계가 다시 작동하고 노동계급이 위기 이전과 같은 수준으로 신용에 접근 할 수 있다면 또다시 비슷한 위기와 투쟁이 반복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딜레마.

 
노동계급의 대응

이번 위기에 노동자들이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오바마의 선거캠페인이 정치적 에너지를 거리에서 선거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위기로부터의 비혁명적 탈출을 제안했고, 이는 중산층에게 크게 어필했다. 그러나 그의 실패가 몰고 올 결과-노동계급의 희생 없이 자본주의가 부활할 거라는 희망의 좌절-에 대한 위협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한편 세계 곳곳에서는 식품과 에너지 가격 급등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저항의 물결이 있었다. 중국과 남․북부 유럽(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라트비아)에서 눈에 띄는 저항이 있었다. 특히 그리스에서는 알렉시스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대규모 폭동과 두 거대 노조의 파업이 있었다.





위기에서 공통의 것의 구성으로

 

 2008년 겨울 그리스, 높은 실업률과 열악한 교육 환경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된 시위는 15세 소년 알렉시스가 경찰관의 총에 맞아 사망하면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로 번졌다. 왼편 그리스 시위 사진 출처 : http://blog.naver.com/booyaso/50039747626) 오른편 싸파티스타를 표현한 사진.

 
자본가들은 노동과 지구 생태계라는 두 거대한 공유자원을 조작하여 부를 축적해왔다. 우리는 자본가들에게 몰수당한 이 부를 해방시키고 재전유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구성적 관점’이라는 투쟁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구성적 관점이란 과거로부터 축적되어온 부와 현재 자원들의 공통의 것을 공유하는 원칙들을 제안하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생산․재생산 영역에서 시장과 수익체계를 넘어서는 사회적 협력 집단 건설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자본주의가 조장한 무책임하고 낭비적인 삶의 태도 멈추고 우리 삶의 총체감을 되찾아야 한다. 구성적 정치는 ‘군림하는 권력’(포더 poder, 'power to')이 아닌 ‘지향하는 권력’(포텐시아 potencia ‘power to’)를 지향한다. 또한 대모 때뿐만이 아니라 삶의 매순간 총체적으로 자본에 맞설 것을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요구사항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되고 있는 존재'의 표현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우리의 주택을 스스로 보장하자. 버려진 주택 재점유하고, 집단적인 임대료 감축을 추진하자. 생태적 주택을 짓고, 룸펜 정글을 세우자. 우리의 전통적, 협력적 삶을 부활시켜야 한다. 또한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 성차별주의, 고령자차별주의, 쇼비니스트, 생태 파괴적 정책들에 지불된 비용에 대한 배상 문제를 제기하고, 전쟁과 투옥의 정치에 반대하며, 사형제도 폐지를 요구해야 한다.

임금체계를 해체하고 사회적 필요노동을 분담함으로써 최소한의 수입을 보장하자. 보장된 수입은 보험, 금융, 복지 기구들을 포함한 다양한 영역들을 대체하고 우리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시킬 것이다. 이는 협동적 삶에 대한 동기를 유발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의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 역시 감소시킬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이 함께 농사를 지음으로써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별 없애자. 금융시스템은 궁극적으로 금융의 제거를 목표로 하는, 집단에 기반하는 신용 연합으로 대체하자. 이렇게 생계를 일정 수준으로 보장한다면, 지적 생산물의 자유로운 공유 역시 가능할 것이다.


혁명적 투쟁의 특성들


투쟁은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위계질서를 전복하고 더 큰 평등을 이끌어 낸다. 또한 투쟁은 상호관계 강화하고 연대를 강화한다. 투쟁은 각자의 이슈에 머무르지 않고 서로의 이슈들을 연결한다. 결국 이민자, 수감자, 동성애자를 비롯한 억압받는 사람들이 겪고 있는 벽은, 우리 모두의 투쟁 대상이 된다.

투쟁은 모든 의사결정이 관련된 사람들의 삶과 밀접하게 이루어지고, 의사결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그 결정에 대해 실질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을 의미한다. 투쟁은 자본가의 통제 밖 시간을 확대한다. 이는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가사노동의 생산성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투쟁은 낭비성과 파괴성을 감소시키며, 생태적 건강을 보호하고 복구한다.



투쟁은 공통의 것을 강화하고 탈상품화된 관계와 공간을 확장한다. 설령 완벽하게 상품화를 피할 수 없다 하더라도, 비상품적 형태를 지향하는 정치적 입장과 활동적 힘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대중들의 삶에서 상품화와 시장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것이 투쟁의 목표이다.

 

그리고 끝내 투쟁은 정의를 가져올 것이다…….


                                                                    


                                                                                  posted by 수유너머 r 번역세미나(영어)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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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r의 첫 번째 이야기 : 뷁수의 탄생

 

r의 첫 번째 이야기 :
 
뷁수(Break-手)의 탄생


# 뷁수의 탄생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뷁수(Break-手)라는 유령이.
 

유령이 떠돌고 있긴 한데 있는 놈들은 이들을 두려워하기는 커녕 대강 무시하고 있다. 사실 뷁수들에게 딱히 무서운 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확산속도만은 바퀴벌레와 같아, 전 영역에 걸쳐 뷁수가 퍼지고 있다. 청년층뿐만 아니라 장년층, 노년층, 심지어는 유년층이 뷁수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뷁수는 누구인가? 바로 당신이다. 여기서 뷁수는 단지 실업자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뷁수는 눈치 보며 사느라 안절부절하는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다. 

그렇다. 짤렸는지 안짤렸는지 헷갈리는 불안한 비정규직이 뷁수고, 90%의 확률로 비정규직이 되거나 직장을 잡지 못할 이 땅의 600만 중/고/대학생들이 뷁수고, 스위트 홈을 꿈꾸며 결혼했다가 돈 안 받고 집안일 해주고 있는 주부들이 뷁수며, 은퇴해서 자식들 눈치 보며 살아가야 하는 노인들이 뷁수다. 이들은 상사의 눈치를 보고, 선생과 교수의 눈치를 보며, 돈 번다고 집안에서 유세하는 것들의 눈치를 본다. 정규직이라 해도 억지로 집 사고, 사교육 시킨답시고 야근과 대출에 허덕이며 사장 눈치에 전전긍긍 하는 이들 역시 늠름한(!) 뷁수다.

 


뷁수들이여, 눈치보기를 그만두자.
 

눈치 봐 봤자 직장 안생기고, 억지로 직장 잡아봤자 불안하게 삶에 찌들려 사는건 마찬가지다. 사실,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안정된 직장을 얻을려고, 지킬려고 생난리쳤나? 그렇지 않으면 세상 무너질것 같이 호들갑 떠니까 직장 잡겠다고, 안 짤리겠다고 난리쳤지. 언제부터 대출을 받아가면서까지 그럴듯한 아파트에 중형차 굴리고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나? 그런게 성공한 부자 엄마/아빠라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광고를 하도 때려대니까 그런가보다 했던거지. 있는 놈들의 이 잡스런 불안 조장 작전에서 빠져나오자. 갖은 협박에 시달리지 않고 살 궁리를 해보자. 돈, 번듯한 직장, 삐까뻔쩍한 외모, 영어 점수, 스펙 관리, 자식의 시험 성적에서 벗어나 우정을 나눌 친구를 만나고 삶을 풍요롭게 만들 방법을 찾아보자. 


뷁수들이여 어처구니 없는 삶에 브레이크(뷁!)를 걸자

돈 드는 순수 예술이나 고상한 락 스삐릿(Rock Spirit)은 엿이나 먹으라며, 나름의 방식으로 가난하게 열창하던 아티스트 희준은 뷁수의 위대한 선두주자다. (이건 비꼬는게 아니다) 그가 소리 높여 외쳤던 ‘뷁!’(Break!)이야말로 뷁수 스삐릿(Break-手 Spirit)이다. 이런 저런 눈치에 숨 가쁘게 내달리던 생에 브레이크를 걸고(뷁!), 세상사람들이 주입한 되지도 않은 헛된 꿈을 접고(뷁!), 뷁수인 채로 행복을 찾으라는 일갈이다. 그렇다. 이제 당당하게 말하자. 우리는 뷁수다!부자가 되어보겠다고, 폼 나게 살아보겠다고 전전긍긍하는 소심한 삶에 뷁(Break)을 거는 뷁수다. 원한에 차 세상에 복수하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대신, 있는 놈들이 조장하는 불안에 뷁(Break)을 날리고 유쾌한 삶을 구성하는 뷁수다. 돈을 많이 벌지 않아도 풍요롭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래서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 그런 당당한 뷁수다.

뷁수에게는 친구가 필요하다.
 

재미있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돈은 없어도 친구는 있어야 한다. 삶을 풍요롭게 할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이를 실행할 친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돈 없으면 친구 만나기도 힘든 세상이 되었다. 돈이 있어도 친구나 애인을 만날 때 소비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보단있는 놈들 더 배부르게 한다. 소비가 소비를 부르는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자. 가볍게  인터넷에서 만나자. 선진IT강국을 만든답시고 깔아놓은 광케이블을 타고 만나 쑥덕거리자. 인터넷에 뷁수들의 아지트를 만들자. 이 아지트에서 세상 눈치 보지 않고 살아가는 노하우를 쌓고, 서로가 서로에게 든든한 빽이 되어주자.


수유너머r 블로그는
건전한 뷁수문화 창달을 위한 공간이 되려한다


#r 블로그의 구성 ver 1.0


 
건강한 뷁수문화 창달을 위해 r 블로그는 총 네 개의 행동강령을 제안한다.


첫 번째! <뷁수의 서재 : 불을 품은 책, 불태워진 책>
  
뷁수는 공부를 해야 한다!


'눈치 보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똑똑하고 아이디어가 많아야 한다. 지금처럼 눈치보고 기죽어 있는 모습에서 벗어나려면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세상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고, 거꾸로 있는 놈들을 무시할 수 있다. 뷁수는 쉬운게 아니다. 공부하지 않고서는, 수련하지 않고서는 뷁수가 될 수 없다.
물론 공부는 여러 방식으로 가능하다. 삶을 돌보고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방법이 하나만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굳이 책 읽기를 택한 것은 저렴하고 손쉽기 때문이다. 책은 아무리 비싸도 2만원을 넘지 않고, 동네 도서관 어디서든 빌릴 수 있지만, 그 한권이면 2주일 이상 생각하고 고민할 수 있다. 불필요한 소비를 지양하는 뷁수에게 아주 알맞은 활동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 책이나 읽을 수는 없다. 세상에는 쓰레기 같은 책도 많이 있다. 뷁수의 서재가 추천하는 책은 두 가지 기준을 가진다.
첫째, 불온한 책이어야 한다. 책을 읽고 전에 알지 못했던 내 불행의 원인을 파악하거나, 삐까뻔쩍한 세상의 내면을 알게 되거나,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얻거나 하지 못한다면 그 책은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다. 요컨대 내 삶을 바꾸지 못하는 책은 무의미하다. 지금껏 있는 놈들은 뷁수들이 들고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그런 책을 금서로 만들고 불태워 없애려 했다. 뷁수의 서재는 바로 그런 불온한 책을, 불을 품은 책을 발굴하고자 한다.
둘째, 독특한 책이어야 한다. 책을 읽고 상식선에서는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얻어야 한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면서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복잡하고 아카데믹한 책을 읽자는 말이 아니다.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를 담은 책을 읽자는 말이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논리와 세계가 그 안에 펼쳐져 있는 책, 뷁수는 그런 책을 읽어야 한다. 뷁수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 우리도 이미 익숙해진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생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책은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저렴한 활동을 추구하는 뷁수 스삐릿에도 부합한다.



두 번째! <뷁수의 눈 : 뷁리안> 

세상은 뷁수를 한시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사실 뷁수가 눈치를 보며 설설 기어야 세상이 별 탈 없이 돌아간다. 물론 있는 놈들의 기준에서 말이다. 그래서 별의 별 일을 다 벌인다. 취직 안하고 결혼 안하면 인간쓰레기라도 되는 마냥 선전해대고, 부자 엄마 아빠가 되기 위해 보험에 펀드를 들지 않으면 부모 도리를 져버린 양 협박 하고, 자기들 맘에 안드는 말만 하면 시끄럽다고 뭐라고 그런다. 여기에 분명히 대응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눈치 안보고 공부하며 살 방법을 찾을 수 없다.

뷁수는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일에 짜증만 내는 사춘기 소녀 마냥 신경증을 부려서는 안된다. 뷁수는 부자들이 치는 사고에 화만 내서는 안된다. 오히려 사고는 뷁수가 쳐야 한다. 아직도 그럴싸한 인생을 꿈꾸면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우리 친구들을 뷁수의 진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리가 사고를 쳐야 한다. 이를 위해 세상에 칠 사고가 뭐가 있는지, 문제를 던질 구석이 어디에 있는지 살펴야 한다. <뷁수의 눈: 뷁리안>에서는 사고치는 뷁수들을 위해 세상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세 번째! <뷁예종 : 뷁수예술종합학교>

 
뷁수는 새로운 감각을 가져야 한다.
 

세상을 만드는 것은 죄다 부수고 바닥부터 다시 짓는 것이 아니다. 어딘가로 도피하는 것도 더더욱 아니다. 지금 존재하는 세계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 틈새에서 엉뚱한 영역을 구성할 때 뷁수의 세상은 가능하다. 다른 눈과 귀를 갖출 때, 다른 삶을 열 수 있다.
예술은 여기에 아주 적합한 도구다. 그런데 통상적인 예술은 돈도 많이 들고, 복잡하다. 미술관이라도 한 번 갈라치면 몇 만원이 깨지는건 다반사고 봐도 뭐가뭔지 모르겠다. 음악회라도 갈라치면 뭘 입고 가야할지 모르겠고, 어디서 박수쳐야 좋은건지 감이 안온다. 그렇다고 남들 다보는 영화, 남들 다 보는 연극 챙겨보면서 눈치 보며 비슷하게 살기도 싫다. 그래서 뷁수의 탄생은 2000원 안쪽의 비용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을 뷁수 예술로 제시하고자 한다. 인터넷만 접속하면 무궁무진하게 열리는 만화, 영화, 무협지 등으로 뷁수 예술 종합학교, 뷁예종을 연다. 불을 품은 책을 읽느라 지친 머리를 잠깐 풀어줄 수도 있고, 정신나간 독특한 만화가들의 세계를 보면서, 같이 정신줄을 놓고 즐거워지자. < 뷁예종 : 뷁수예술종합학교>에서는 영화와 만화등 예술작품들을 추천하고, 함께 키득키득대며 즐겨보려한다.


 

 

네 번째! <뷁 라이프>
  
뷁수는 행복해야 한다.
 

뷁수들도 사랑하고, 아이 낳고, 집짓고, 좋은 이웃들과 살아가야 한다. 텔레비전에서는 이를 고급 아파트에 입주함으로써 해결하라고 하지만, 뷁수에게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연애 한답시고 건강에도 좋지 않은 페밀리 레스토랑 음식을 먹고 비싼 기름 써가며 드라이브를 하는 대신, 돈 안들이고 갈 수 있는 경치 좋고 은밀한(!) 산책로는 어떤가? 이웃들과 억지로 돈 들여 해외여행 가는 대신, 돈 들이지 않고 함께 즐겁게 할 수 있는 운동을 찾아보는 것은 어떤가? <뷁 라이프>는 이런 방법을 공유함으로써 뷁수 수련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창출하려 한다.



# "블로그 r " 을 만드는 사람들


[뷁수의 탄생]은 우선 수유너머r(이하 r) 이라는 집단이 만들고 있다. r은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있던 뷁수들이 뷁수들의 눈으로 현상을 분석하고 사회를 바라보기 위해 만든 소집단이다. [뷁수의탄생]을 운영하는 한편, 오프라인에서도 뷁수의 비전을 찾기 위해 세미나와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자세한 정보는 r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를 참조하면 좋겠다. r과 함께 하고픈 이들, 언제든 찾아와 보시라!



혁명가 최개바라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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