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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와 담배, 강추 강추!!

뭐야, 너무 재밌어서 눈물이 다 나잖아.

 

그젯밤, 밤늦도록 잠이 오지 않아 이불속에서 한참을 뒹굴다

부팅을 하고 영화 헌팅을 시작,  짐 자무쉬 오빠의 '커피와 담배'로 낙찰.

 

네이버 영화 검색을 해보니 네티즌들이 "영화보다가 담배피고 싶어 정말 중는 줄 알었다",

"중간에 영화를 포기하고 나가서 담배를 썌리느냐 담배를 포기하느냐 끝까지 갈등했다."

등등 무시무시한 만들이 써 있길래

그길로 편의점에 내려가 담배 두 갑과 칸타타(요즘 올인한 커피음료..세가지 맛 다 맛나요)

네병을 쭐래쭐래 사들고 영화 감상 시작.

 

영화는 커피와 담배에 대한 한없는 경배로 이뤄진 11편의 단편들.

자무시 오빠가 팔십 몇년부터 십 몇년간 쭉 찍어왔던 걸 하나로 모았다고 한다.

 

첫번째 편부터 아주 뻑갔다.

매우매우 쌍큼하고 젊은 모습의 로베르토 베니니가 손을 덜덜 떨며 커피와 담배를

연신 들이키고 피워 잡수시며 처음 본 남자와 나누는 말도 안되게 어색하고 웃기는 대화들.

 

어쩜 좋아, 이거 쓰는데도 계속 생각나서 너무 웃겨웃겨.

 

역쉬 압권은 이기팝과 전세계 루저들의 우상 탐 웨이츠가 나왔던

세번째(캘리포니아 어디선가, 맞나?)편.

으하하하하...여러분들 이거 꼭 봐야돼. 내가 뒷북인가?

 

나름 팝 음악의 거장들이 나와서 한다는 말이,

이 바의 쥬크 박스에 니 음악은 없네 어쩌구 하며 신경전 벌이는 모습도 쥑이고,

 

크하..테이블 위에 전손님이 놔두고 간 담배를 놓고

너 피냐? 난 끊었다. 어, 그래? 나도 끊었는데..

담배하나 못끊는 인간들의 의지력 박약에 대해서 침튀기며 까주다가

 

근데 너 금연의 미덕이 뭔 줄 아냐? 끊었으니까 한대 쯤은 펴줘도 된다는거...

우린 끊었으니까!!!!!

하며 조낸 깊이 한대 죽~빨아주시는거다. 양 볼이 쑥 들어갈 정도로.

 

아!! 이장면 나도 영화관에서 봤으면 뛰쳐나왔을지도 몰라~

 

어머어머 그리고 사촌?에서 알프레도 몰리나랑 스티브 쿠건 나오는 것도

정말 미치게 웃겨!!! 우헤헤헤

 

나중에 나의 완소배우 빌 머레이 나오는 편에서 머레이 오빠 주전자 째

커피 계속 먹는 미친 모습도 완전 뒤집혀~~!! 꺙

 

더이상 쓰면 스포일러 될까봐 참습니다.

여튼 오래간만에 웃었다.

이런 웃음은 정말 조낸 질긴거다.

온 몸에 척척 달라붙어서 깊이 잠복해 있다가 다시 생각만 해도 온 몸이 근질근질

스멀스멀 삐져 나오면서 웃게 된다.

영화 끝나고 이불 속에서도 열라 킥킥거렸다.

누가 보는 사람도 없는데, 웃는다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막 웃음을 참으면서 웃었다. 캬캬.

이런 웃음은 막 참으면서 웃어줘야 되거덩.

 

참. 근데 이거 사진들은 어떻게 갖다붙이는거지.

사진도 막 올려붙이고 싶은데.

컴맹인데다 블로그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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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땅

오랜 세월 아무도 갈아주지 않았던 땅.

비가 내리면 조금 축축하게 질척해졌다

맑은 날이면 다시 마르고

바람에 휩쓸려 온 잔가지들과 돌멩이들이

성긴 땅 사이사이에 박히고

그것들이 다시 부서져

켜켜이 더 두꺼운 딱딱한 지층을 만들어온지 오래.

이제 웬만한 자극으로는

갈라지지도 파헤쳐지지도 않는 땅.

 

다락에 깊이 처박아두었던

곡괭이로 퍽! 딱! 칵! 땅을 깬다.

더, 더 내리친다.

작은 흙알갱이들이 조금씩 튕겨져 나가더니

푹, 날카로운 곡괭이의 끝이 땅에 가 박힌다.

거기서부터 힘을 주어 으어어 쩌어억

얼마간의 땅을 들어낸 후

더 깊이, 더 넓게

곡괭이질을 한다.

이렇게 바싹 딱딱하게 굳어 있던 땅 밑에

이리 부드러운 흙이 숨어있었던가 싶게

촉촉하고 맑은 생기있는 것들의 냄새가 난다.

 

다 갈아엎는다, 모두 다.

힘찬 곡괭이질로 땅이 움푹움푹

발로 밟으면 여기저기 발자국이 움푹움푹

생기는 신선한 땅이 생겼다.

아무 씨를 뿌려도 기쁘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해도 시원한 상상이다.

굳은 땅을 내려치는 곡괭이로

나를 내려치고 싶다.

 

감동도, 한없는 슬픔도, 넘치는 기쁨도 없이

더 두껍고 굳어져가기 전에

어서 내려쳐야 한다.

 

명백한 위기감이다.

이 작업을 바로 시작하지 않으면

더 이상 진실해지지 못하리라는 자명한 현실.

 

지금으로선 춤도, 참선도, 연기도, 여행도, 출가도, 스승도

나를 깨기는 커녕

나를 더 굳건히 지키고 켜켜이 켜켜이

두껍게만 만들 것이다.

 

어떡하지.

그래도 다행이다.

굳은 땅을 내려치는 곡괭이가 생각나서.

 

정진이다.

나를 완전히 해체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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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에 관한 역설

당신은 친구나 정부가 죽자마자 그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쓸 수 있습니까?

아니죠. 그럴 때마저도 자신의 재능을 즐길 수 있는 자에게 불행 있기를!

시를 쓸 수 있는 때는 커다란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고 극단적인 감정이 가라앉고

재난의 순간에서 멀리 떨어져 영혼이 잔잔해진 다음, 지나가버림 행복을 기억해내고

잃어버린 것을 감상할 수 있게 될 때, 기억이 추억과 만나, 하나는 그것을 반추하고

하나는 지나간 시간의 달콤함을 과장하게 될 때, 바로 사람들이 자신을 제어하고

말을 잘할 수 있게 될 떄입니다.

 

사람들은 운다고 말하지만, 스스로를 부인하는 정력적인 형용사를 추구하고 있을

때 그는 울고 있지 않습니다. 운다고 말하겠지만 조화로운 운율을 만드는 일에

골몰하고 있을 때 그는 울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눈물이 흐른다면 펜은

손에서 떨어질 것이고, 감상에 빠져 글쓰기를 멈출 수밖에 없으니까요.

 

하지만 속깊은 고통만큼이나 격렬한 기쁨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말을 잃게

되겠죠. 어떤 정겹고 감성적인 사람이 오랫동안의 부재로 인해 잃게 되었던

친구를 다시 보게 됩니다. 그 친구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다시 나타나자 상대방의

심장은 두근거립니다. 그는 뛰어가 친구를 껴안고 말을 나누고 싶어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그에게선 그저 토막난 단어들이 더듬거리며 튀어나올 뿐입니다.

무엇을 말할지 모르고, 친구가 하는 대답도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들뜬 상태를 상대방과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눈치챌 때, 그는 또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중략)

 

감성은 무대 위나 사회 속에서나 똑같이 해롭고, 오히려 1천배는 더 해롭습니다.

자 두 연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서로 해야 할 말이 많습니다. 누가 그런 난처한

상황을 더 잘 극복하겠습니까? 그건 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느 언제나 벌벌 떨면서 사랑하는 대상에게 다가가곤 했습니다. 심장은 벌떡거리고

생각들도 뒤죽박죽이 되곤 했습니다. 목소리도 어찌할 바 모르게 되고 말하는 모든

내용을 망쳐버렸죠. 저는 '네'라고 해야 할 때 '아니오'라고 대답했고, 수천 가지 서투른

짓과 끝없는 실수를 해댔습니다.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스꽝스러워지는 것이었습

니다. 그러는 사이 바로 제 눈앞에 어느 명랑한 라이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재미있고

가벼우면서도 스스로를 잘 통어할 줄 알고, 자기 자신을 잘 즐길 줄도 알고, 또 칭찬할

수 있는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으며, 그것도 아주 섬세하게 칭찬하고 웃기고 즐겁게

하는 행복한 사람이었지요. 그는 상대방의 손을 유혹해 자기 손에 내맡기게 했고,

가끔씩은 유혹 없이도 그 손을 수중에 넣기도 했고, 거기다 입 맞추고 또 한 번 맞추고

계속 그러더군요. 저는 한쪽 구석에 파묻혀 울화를 돋우는 그 광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면서 주먹을 꽉 쥐고 손가락 우드득 거리는 소리를 냈습니다. 우울함으로 괴로워

하면서, 식은땀으로 온통 뒤덮이면서, 제 고통을 내놓고 드러내지도 숨기지도 못하고

있었던 거죠.

 

사랑은 그것을 품은 사람에게선 재기를 빼앗아가고, 사랑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겐

재기를 준다는 말이 있지요. 다르게 말해, 사랑은 어떤 사람들을 감성적이고 바보스럽게

만든다면, 다른 사람들은 차갑고도 대담하게 만들어준다고 하겠습니다.

 

감성적인 인간은 자연의 충동에 복종하고 정확히 심장의 외침 소리만을 낼 수 있을

뿐입니다. 그가 이 마음의 외침을 완화시키거나 정화시키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라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됩니다.

 

위대한 배우는 현상을 관찰합니다. 감성적인 인간을 모델로 삼아 그를 깊이 생각하고

사색과 명상을 거듭함으로써, 최선의 상태를 위해 덧붙이거나 떼내야 할 것을 발견해

냅니다. 그리고 이성 외에 사실들도 염두에 둡니다.

 

- 드니 디드로, [배우에 관한 역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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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의 글에 대해

어제밤 돕헤드가 쓴 '성폭력 가해를 반성합니다'란 글을 보고 지금까지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복잡했다.

이 세상이 얼마나 단순하지 않은지,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라고 시원스럽게

말할 수 없는 일들은 대체 또 왜 이렇게 많은지 새삼 깨달았다고 할까.

 

몇일 전 돕이 쓴 문제의 글을 읽었을 땐, 다소 '위험스럽다' 느꼈지만 별 생각없이 넘겼고

어젯밤 반성글문을 봤을 땐 '아, 이 사람이 오해받고 있구나' 란 마음에 안타까웠다.

 

그건 내가 억압적인 언사에 대한 감수성이 떨어지는 민감하지 못한 사람이라서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단 돕헤드를 아는 사람으로서(최근엔 얘기조차 나눠보지 못했지만), 돕헤드가 생물학적으로는

남성이지만 젠더적으로는 거의 여성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마 돕을 비판했던 사람들에게 돕을 아는 사람들이 달았던 '이해해 달라'류의 답글도 아마 나와

비슷한 맥락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돕의 글에 어떤 식으로든 문제를 제기한 다른 이들의 글 또한 보면서 돕의 글은 그가 어떤 사

람이건간에 많은 문제가 있었으며 더구나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 '말한 행위'자체는 더욱 큰 문제라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인식자(발화자)의 위치성에 관한 문제다.
 
얼마전 들었던 강좌 시간에 정희진이 들려준 자신의 남성 친구에 관한 얘기를 해보자.
한창 성매매가 성폭력이냐 성노동이냐에 관한 논쟁이 있었을 때 그 남성은 자신이 비록 그 두 가지 중

어떤 것에 무게 중심을 갖고 생각하던지 간에 자신이 남성인 이상 성매매는 '성폭력', 그 이상의 말을

할 수 없다고 하더라.

 

여성주의자인 내가 많은 남성들 앞에서 남녀의 성기를 자지와 보지라고 거리낌없이 말하는 것과

그 반대의 경우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또, 여성주의로 뼛속까지 무장한 남성이 많은 여성들에게 여성주의를 가르치는 상황은?

...

 

결국 인식하는 자(말하는 자)가 그 자신이 어떤 위치와 맥락에 놓여 있는 지 분명히 자각할 때,

알고 있어도 말하지 않고, 이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아야 할 많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윤리다.

그렇기 때문에 돕의 '....평화기행'에 관한 글은 인식자(발화자) 자신의 위치성에 대한 생각없음에서

나온 몰지각한, 비윤리적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아, 이렇게 까지 써 놓아도 뭔가 후련하진 않다.

다만 한가지 확실하게 느끼는 건,
진보넷 블로그에서 일어난 지금과 같은 일이
결국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위치성을 자각하지 못해 본의 아니게 폭력적 언설을 뱉어버린 돕도,  정당한 문제를

용기있게 제기했지만 더 괴로움에 빠져버린 듯한 블로거들도, 돕을 이해했다가 자괴감에

괴로워하는 또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상처받으면서 더 민감해지고, 조금씩 더 알게 되는 것이니까.

 

하여튼 괜찮다. 너무 괴로워하지 말기를.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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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시작

억지로라도 기록하며 의미를 향해 맹렬히 돌진할 것인가,

아니면

흔적을 남기지 않고 흐를 것인가,

 

헤매다가

 

전자로 결론내림.

 

시간이 흐른 뒤 문득 뒤돌아 본 내가 귀엽기도 한 때문이고,

아직까지는 소통(이라기보다는 인정, 혹은 성취)이 그립기 때문이고,

물질화되지 않는 시간이 무의미로 화하는 것이 불현듯 무서워졌기 때문이고,

가장 크게는 더 버리고, 더 가볍게 매 찰나에 깨어 있을 자신이 없다.

 

차르코, 내가 졌어. 이제부턴 블로그에 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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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인도에서의 메모들

1.

누가 인도인들을 가난하지만 행복하다 하는가. 내가 목격한 인도의 충격적 가난은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은폐-유지되는 재앙이다.

공중 화장실의 축축한 바닥에 옷을 다 벗고 앉아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 화장실 변기 옆

밑을 닦는 물로 온 몸의 때를 벗겨내는 사람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창문도 문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빈민굴 속의 사람들 얼굴에서 난 그 어떤 '영적인' 충만함도 발견하지

않는다.

인도인들은 잘 웃지 않는다. 그것이 인도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20040114 뭄바이.

 

2.

시간이 더디 흐른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느리다.

하늘을 본다. 구름이 멈춰 잘게 흩어져 있다. 이런 걸 양털구름이라고 하나.

그 사이에 초생달 하나가 여리게 떠 있다.

그리고 단 하나의 별이 그 달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둔 채 빛나고 있다.

놀랍다. 아무리 찾아봐도 저 별 외에 그 어떤 별도 찾을 수가 없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서로 닿을 수 없는 달과 별. 그러나 저 거리 이상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질기고 강한 인력.

달과 별의 끈질긴 인연.

20049125 우다이뿌르

 

3.

더러운 누더기를 걸친 아이, 유태인 거주 지역의 학살로 부모를 잃은 유태인 아이가

악취 풍기는 지하실 한가운데에 서서 세계와 인간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 게스트하우스 안, 걱정을 달래기 위해 차분히 읽고 있는 '유럽의 교육' 중 빨치산 은신처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한 아이의 모습에 대한 묘사 중.

20040204 자이살메르

 

4.

그래도 여행과 탐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오만함을 죽이고 겸손해지기 위해서.

인간이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곧 내것일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추함과 짜증 속에서 문득 아름다움을 발견하고선 스스로 탄성을 내지르는 자신에게

놀라고 있지 않은가.

좁은 나라에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당연하게 취해왔던 그 모든 방식에 대해 회의하는 것, 모든 절대적인 것을 상대화시키는 연습.

그것은 결국 모든 문화와 인종과, 종교와 민족이 평등하다는 것을 처절하게 각인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카슈미르 게이트에서 탄 버스 안에서 미친년처럼 짜증을 냈던 나.

나는 왜 문명화되지 못한, 도시화되지 않은 어떤 상태에 대해 그토록 화가 치밀었던 것일까.

발전-문명과 편리, 그리고 인간성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숨어 있는 것일까.

3세계를 여행하는 것은 내 인간성의 바닥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20040220 델리

 

5.

터벅터벅 빨리까 바자르까지 걸어가다가 마주친 낯선 맥도널드 매장의 스피커에서

너와 내가 그토록 가사를 알고 싶어 했던 트레이시 채프먼의 "fast car"가 흘러나오고

있었라. 쓰레기같은 다국적 기업의 브랜치에서 흘러나오는 민중 가수(?)의 노래라니.

20040223 델리

 

6.

하루종일 생각, 생각 또 생각 뿐이다.

그리고 침묵, 침묵, 절대적인 침묵.

이러다 내 무의식까지 하나하나 끄집어 내 분석해 볼 수 있을 정도니.

모국어로 대화할 대상이 없다는 게 이렇게 쉽게 자폐아가 되는 길인 줄 누가 알았으랴.

아까 기차를 타고 오면서는 내 바나나와 오렌지를 다 줘버린 너무 예쁜 거지 남자 아이가

보내온 수줍은 웃음에 나도 따라 미소를 지어보이다 울컥, 눈물이 났다.

20040248 잔시

 

7.

당신은 찬 적도,

           빈 적도,

           욕망하는 자였던 적도,

           욕망의 대상이었던 적도 없기 때문이다.

20040310 오로빌, 수르야의 일기

 

 

--- 난지도 쓰레기 하치장같던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낡은 메모들을 발견.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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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챙피해.

뭐야, 불로그 만들면 초기화면에 올라가는 게야?

몰랐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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