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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5/24
    <스타스톤>, 진심과 성의 없는 대인관계 능력증진게임(2)
    퍼플렉싱
  2. 2008/04/16
    고찰하는 게이밍
    퍼플렉싱

<스타스톤>, 진심과 성의 없는 대인관계 능력증진게임

<스타스톤>은 한국게임산업진흥원과 청소년폭력예방재단에서 기획하고, 베토인터랙티브가 제작한 시리어스 게임(기능성 게임)이다.

게임의 배경이야기는 이렇다. 태어나면서 누구나 하나씩 갖게되는 별자리의 황도 12궁좌는 사람의 심성을 곱게 만들어주는데, 악의 신이 야욕을 위해 그 힘을 빼앗아가고, 별의 힘에 민감한 아이들에게 나쁜 감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12궁좌의 성인들은 각 별자리의 특성을 타고난 12명의 용사를 이용해 별자리를 다시 빛낼 '스타스톤'이라는 보석을 찾게 한다. 그리고 플레이어는 6명의 캐릭터(어라, 6명?)중 자신의 플레이어 캐릭터와 함께 할 동료 캐릭터를 선택해 게임을 진행하게 된다.

이 게임 <스타스톤>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것은 동료와 함께 모험하는 과정이다. '게임의 목표'인 보석을 모아 별자리를 다시 빛내는 엔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상대를 얼마나 잘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게임의 목적'이 중요하다는 숭고한 선언을 매뉴얼에서 하고 있다!!

하지만 게임의 실체는 매뉴얼에서 선언한 숭고한 이상과는 전혀 다르다. 그 문제는 그 선언에 대한 진심과 성의의 부족이다.

아이들의 대인관계 개선을 위해 나왔다는 게임에 진심과 성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작사인 베토인터랙티브의 상업용 작품인 <피싱온>과 비교해봐도, 회사가 이 게임에 얼마나 무성의했는지 알 수 있다.

불편한 인터페이스와 조작감, 게임 진행에 대한 안내의 부족, 공간활용 전혀 못 하는 맵 디자인은 그렇다고 치자. 매뉴얼에서 이 게임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대인관계 증진은 동료와의 회화를 통해 나타난다. 이 회화는 갑작스럽게 나타나 플레이어에게 답변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회화에 게임과의 개연성은 없다. 모험과 회화라는 게임플레이가 거의 따로 분리된 것처럼, 회화는 모험 도중에 갑작스럽다고 생각할만큼 아주 단순한 조건에 의해 등장한다. 회화의 결과 역시 모험에 주는 영향은 거의 없다. 모험과 전투에 대한 전략적인 회화도 있지만 그것이 정말로 모험과 전투의 전략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고, 이 게임의 시스템에서 가능한 범위를 벗어난 회화마저도 있다.

이 게임의 모험과 전투는 이상한 던전 시리즈 같은 형태를 띄고 있다. 플레이어 캐릭터가 움직이면 적도 움직이고, 플레이어 캐릭터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플레이어의 목표는 보석을 모으는 것이기에 굳이 몬스터와 싸울 필요는 없다. 이런 면에서 <스타스톤>의 턴제 시스템은 플레이어가 몬스터를 피하거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제압하기 위한 전략적인 플레이를 생각하게 한다. 특히 몬스터를 직접공격으로 없애려 하면 폭력성 게이지가 올라가는데 그 게이지가 가득 차면 게임오버가 된다. (아마 배경설정상 스스로 악의 화신이 되어버린다는 거겠지만, 그런 것에 대한 캐릭터의 고민은 게임 상에 전혀 표현되지 않는다. 폭력성 게이지가 가득 차면 그저 게임 오버 화면을 띄워줄 뿐인데, 어떠겠나?) 때문에 가능한 몬스터와의 접촉은 피한 채 보석을 수집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문제는 그러한 전략적 고민에서 동료는 철저히 배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투와 모험에 있어 동료는 플레이어 뒤를 따라오며 간혹 말을 걸어올 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전략적 회화를 내놓아도 그것은 말일 뿐, 실제 전략에 있어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말 뿐인 동료는 대인관계에 어떤 적극적인 기여도 하지 않는다. 회화도 일방적으로 말을 걸어올 뿐, 직접 말을 걸어 대답을 바랄 수는 없다. 회화부터 전투와 모험까지 모든 것을 플레이어에게 바라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런 것이 대인관계일까?

과연 형식뿐인, 이름뿐인, 허울뿐인 선언만으로 대단한 게임을 만들었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 말은 대단하다! 매뉴얼도, 보도자료도, 서울대 교수의 효과검증도, 교사들을 위한 지침서의 발간까지. 그런데 그런 대단한 게임에서 아이들의 대인관계 개선을 바라는 진심은 커녕 성의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은 나 뿐일까?



p.s. <스타스톤>의 제작을 기획한 한국게임산업진흥원은 제작사인 베토인터랙티브의 <피싱온>을 2006년 9월의 우수게임으로 선정했었다.


스타스톤
기획/한국게임산업진흥원
제작/베토인터랙티브

2006년 12월 출시.
2008년 3월 일반에 공개.

http://www.kogia.or.kr/culture/gc2_502.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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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찰하는 게이밍

고찰하는 게이밍. 이것은 탐구적인 게이밍, 질문하는 게이밍, 알고자 하는 게이밍으로 불러도 좋다. 이것은 플레이어가 게임을 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게임 디자이너가 게임에서 의도하는 플레이 방식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핵심은 게임을 통해 어떠한 것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다. 플레이어로서 고찰하는 게이밍을 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인내심이 있다면, 아무 게임이나 실행하고 10분간의 화면 상의 픽셀 정보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자. 물론 이것은 그 게임의 디자이너가 의도하는 게이밍의 방식이 아닐 뿐더러, 99%의 플레이어에게는 지루하고 무의미한 일이다. 때문에 애초에 게임의 플레이에 고찰하는 게이밍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거나, 고찰하는 게이밍을 의도한 게임이어야 한다.

 

픽셀 정보의 변화 말고도 우리 삶에는 고찰할 것이 많다. 왜 하늘은 파란 것인가, 마음에 드는 여자를 사귀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정치인들은 왜 말만 하는 것처럼 보일까, 나는 누구인가, 이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은 누군가에게는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은 그런 주제의 가치를 다루는 게 아니니, '이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 같은 질문따윈 쓸모없다는 생각을 한다면 일단 거두어주길 바란다.

 

고찰하는 게이밍은 우리가 고찰할 것들에 대한 고찰을 도와주는 게이밍이다. 고찰하는 게이밍은 알고 싶어하는 것을 알려줄 수도 있지만, 알고 싶은 것을 아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이 세계의 본질은 무엇인가'처럼 결론이 없는 (최소한 아직 알 수 없다고 할 수 있는) 주제도 고찰하는 게이밍에서 허용된다. 결과가 아니라 고찰의 과정이 주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고찰하는 게이밍의 한 예를 써보았다. 바로 '세계의 본질'에 대해 고찰하는 게임이다.

 

"어떠한 일련의 법칙으로 생성되고 유지되며 소멸하는 세계가 있다. 플레이어는 그 속을 탐험하면서, 그 세계의 본질에 대해 하나씩 알아나간다. 마치 뉴턴이 중력의 법칙을 밝혀내고,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수립했으며, 철학자들이 존재를 생각한 것처럼. 그리고 플레이어는 본질을 알아낼 때마다 그 본질을 이용해 세계에서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 마치 핵폭탄을 만들고, 순간 이동 장치를 만드는 것처럼.

그리고 최종적으로 플레이어가 세계의 모든 본질을 꿰뚫으면, 그는 세계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다."

 이과대학 입학을 장려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예에서, 플레이어는 세계를 탐구한다. 그 탐구의 목적은 세계를 구하는 것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도 아닌 세계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다. 그런데, 이 예에는 앞서 말한 세계의 본질에 대한 질문과 달리 '세계의 모든 본질과 세계의 조작'이라는 결론이 있다. 이것은 플레이어의 수고에 대한 보상을 위한 게임 내의 장치로 이 게이밍의 핵심은 아니다. 마치 영화 <올드보이>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의 딸이란 것이 아니라, 그에 투영된 복수의 잔인함인 것처럼 말이다. 플레이어도 우리도 아직 실제 세계의 본질에 대한 결론이 없다는 것을 안다. 때문에 이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론이 아니라, 결론을 이끌어낸 추론의 과정, 즉 '고찰'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찰하는 게이밍은 고찰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게이밍이다. 생각하고 탐구하는 것은 우리 일생에 있어 중요한 일이고, 즉시 결론을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수단이다. (설사 그 결론이 틀리거나 잘 알려진 것과 다르다 해도) 바꿔 말하면, 고찰하는 게이밍은 실제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한 고찰의 훈련이라고 할 수도 있다.

 

고찰하는 게이밍은 손가락의 빠른 움직임이나 반응 속도같은 신체적인 능력보다는, 깊고 넓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게이밍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특정한 장르를 개척하거나 게임의 본질을 꿰뚫을 수는 없다. 이것은 단지 장르나 소재에 관계없이 많게 혹은 적게 들어갈 수 있는 게이밍의 정신이다. 본능으로 점철된 혼란스러운 전장 한복판에 작은 비율로 들어갈 수도 있고, 바둑처럼 게임 자체를 점철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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