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잊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의 특징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과거를 미화하는 것이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서 기억을 지우거나 편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방편이다. 우리는 과거의 불행에 사로잡혀 현재를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때 될수 있으면 마음이 편하도록 기억의 일부를 좋은 쪽으로 계열화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거는 한 개인의 기억처럼 특정한 부분만을 모아 편집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역사와 기억이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음이 편하고 보기에 좋다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짜맞출 수는 없는 것이다. 어제 노무현 전대통령과 전태일 열사가 함께 웃으며 손을 내밀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포스트를 보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잊은 것인지 잊고 싶어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음 편하자고 마음대로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일까? 서글픈 생각에 글 하나를 찾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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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칼럼] 盧정권에는 정치가 없다 (경향신문, 2007-01-04)

송년·신년회에서 정치의 정자(字)도 꺼내지 말라는 말을 들은 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거기에 누구 이름 석자까지 보태면 거의 경기하는 분도 있다. ‘밥맛 없어진다’ ‘술맛 떨어진다’는 아우성을 각오해야 한다. 사실 정치를 싫어하는 절대 다수를 위해 새해라는 말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며칠 만이라도 정치에 관해 쓰지 않는 것이 예의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경제를 경제논리로 풀어가야지, 정치적으로 접근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교육문제도 교육 논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정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술집에? 이제 술집에서도 퇴출당할 위기이다. 짐싸서 이 땅을 떠나라고 해야 할까. 한국에서 ‘정치’ 혹은 ‘정치적’이라는 말은 ‘나쁜 짓’ ‘거짓말’ ‘속임수’의 동의어로 간주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정분리 실험도 이런 인식의 결과일 것이다. 국정이 정당 혹은 정치와는 거리가 먼 고상한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바람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노무현정부에서는 정치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가 줄었다. 그 유래를 알 수 없는 ‘정무’가 ‘정치’를 대신했다. 뉴스전문 검색 사이트 카인즈에서 종합일간지를 대상으로 ‘정무’ 혹은 ‘정무적’이란 단어를 찾아 보았다. 1987년 12월에서 2001년 12월까지 14년간 14건이었다. 그러나 2002년 12월에서 2006년 12월까지 4년 동안 658건을 기록했다. 노무현정부가 ‘정무’를 유행시키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아무개는 정치적 판단력이 부족하다”라는 말이 “아무개는 정무적 판단력이 부족하다”로 바뀌었다. 이 언어변용의 원인을 정확히 밝혀낼 수는 없지만, ‘정무적’이 ‘정치적’보다 세련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술집에서도 퇴출당한 ‘정치’-

왜 그럴까. ‘정치적’은 너무 노골적이고 ‘정무적’은 은근해서? 정무는 나라 운영을 위해 필요한 할 일이고, 정치는 나라 운영을 망치는 나쁜 짓이라서? 좋다. 그렇게 해서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진 노대통령은 어떻게 됐나. 갑자기 한나라당에 권력을 통째로 넘겨주겠다며 대연정을 제안한다. 노동자와 투쟁한다. 한국을 미국화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한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만든다. 이렇게 자기 지지자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마음껏 누린 대가가 무엇인가. 참여정부의 정치적 기반의 상실이다. 몰락이다. 집권당은 거수기로 전락했다. 곧 문을 닫는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노대통령이 탈정치를 했을까. 아니다. 그는 지난 총선 전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돕는다”부터 최근의 신당반대까지 숱한 ‘정무적’ 활동, 아니 ‘정치적’ 활동을 했다. 이중적이다. 그러나 비난할 일은 아니다. 애초에 대통령과 정부가 정치를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부가 집권당과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 정치와는 무관한 국정 과제가 따로 존재한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이었다. 정치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규칙을 만드는 활동이다. 인간의 견해와 욕구는 다양하고 무한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다 충족시켜줄 수 없다. 따라서 누가, 어떤 것에 우선 순위를 둘지 정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다수가 우선 순위를 선택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정치는 정책의 우선 순위를 둘러싼 경쟁, 갈등, 협력이기 때문이다. 경제·교육정책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결정된다. 정치가 없는 세상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의미한다. 왜 인간을 ‘정치적 동물’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kus·정치적 인간)’라고 했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정치 개념은 너무 협소하다. ‘대통령은 정치에 개입하지 말고 국정에 전념하라’는 여당의 비판에 시민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는데, 말이 안된다. ‘정치 없는 국정’이란 없다.

-정치를 구할 기회가 온다-

가령, 이 나라의 국정을 좌우하는 최고 정치지도자인 대통령과 총리가 만났다면 그것은 당연히 정치적인 행위이다. 국정을 논하는 것만한 정치가 없다. 그런데 청와대는 지난해 12월29일 두 사람의 만남에 정치적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분명히 하자.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 부재’에 있다.

올해 대통령 선거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정치라고 부를 수도 없는 정치에 벌써 지쳤다. 그래도 정치를 버리면 안된다. 정치를 구출해야 한다. 그 기회가 오고 있다.

〈이대근/ 정치·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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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0 17:12 2012/01/2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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