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일본 애니메이션 <늑대아이>를 보면서 아마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지독하게 냉소적이거나 아주 웃기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이유로 끝까지 보지 못하고, 여전히 보지 못하고 있는데, 나는 이 영화의 기본적인 전제가 남자와 아이들은 모두 '짐승'이라는 은유에서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잔인하다. 스스로 잔인함에 대한 반성이 없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이지만 아이들의 행동이 잔인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생각은 이성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본능이 아이들의 심성의 근본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아이들의 잔인성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지양된다. 만약 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잔인성을 지양할 수 없거나 제거할 수 없는 사회는 그 자체로 잔인하다. 내가 아이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여기 있나 보다.
 

사랑이 이 모든 것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는 그렇게 믿었다. 가족과 부모의 사랑만이 아이들을 잔인한 짐승의 세계로부터 인간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그런 믿음이 많이 사라졌다.


“루터와 칼뱅의 사상, 그리고 칸트와 프로이트의 사상 저변에 깔려 있는 가정은, 이기심과 자기애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미덕이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악이다. 게다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은 서로 배타적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적으로 사랑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다. 사랑은 원래 어떤 특정한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오래 머물러 있는(lingering) 자질이 어떤 ‘대상’에 의해 현실화될 뿐이다. 증오는 파괴를 원하는 열망이고, 사랑은 어떤 ‘대상’을 긍정하려는 열망이다. 사랑은 ‘애착’이 아니라, 그 대상의 행복과 성장과 자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이고, 그 대상과 내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사랑은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도 얼마든지 나아가게 할 수 있다. 배타적인 사랑이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물론 누군가가 명백한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런 특정한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너무 많고 복잡해서 여기서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특정한 ‘대상’에 대한 그 사랑은 마음 속에 오래 머물러 있던 사랑이 한 사람과 관련하여 현실화되고 그 사람에게 집중되었을 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사랑에 대해 낭만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은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뿐이라고 말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생을 사는 동안 그 사람을 찾을 가능성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그 사람에 대한 사랑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람과 관계를 끊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느낄 수 있는 사랑은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사랑이 아니라 가학-피학적 집착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에는 기본적인 긍정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긍정이 애인을 향하는 것은 그 애인을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자질들의 구현으로 보았을 때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당연히 인간에 대한 사랑을 수반한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에 대한 사랑은 특정한 한 사람에 대한 사랑 ‘다음에’오는 추상 개념도 아니고 특정한 ‘대상’과의 경험을 확대한 것도 아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은 발생적으로는 구체적인 개인들과의 접촉에 의해 생겨나지만,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특정한 한 사람에 대한 사랑도 생겨날 수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원칙적으로 나 자신의 자아는 타인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의 대상이다. 내 삶과 행복, 성장과 자유에 대한 긍정은 기본적으로 그런 긍정을 할 준비가 되어 있고 긍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데 뿌리를 둔다. 개인이 이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자신에 대해서도 그런 준비가 되어 있다. 그가 오직 타인만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예 사랑을 할 수 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원칙적으로 나 자신의 자아는 타인과 마찬가지로 내 사랑의 대상이다. 내 삶과 행복, 성장과 자유에 대한 긍정은 기본적으로 그런 긍정을 할 준비가 되어 있고 긍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데 뿌리를 둔다. 개인이 이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면, 자신에 대해서도 그런 준비가 되어 있다. 그가 오직 타인만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예 사랑할 수 없다.

이기심은 자기애와 동일하지 않다. 오히려 자기애와는 정반대의 것과 동일하다. 이기심은 일종의 탐욕이다. 모든 탐욕이 그렇듯이, 이기심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불만족을 포함하며, 그 결과 진정하 만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은 바닥이 없는 구덩이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끝없이 노력하지만 끝내 만족에 도달하지 못하고 기진맥진한다. 자세히 관찰해보면, 이기적인 사람은 항상 불안하게 자신을 걱정하지만, 절대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안절부절못하고, 충분히 얻지 못하거나 뭔가를 놓치거나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사로잡혀 있다. 그는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에 대한 불타는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무의식적 역학 관계를 좀 더 관찰해 보면, 이런 유형의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며, 사실은 자신을 몹시 혐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이 수수께끼는 쉅게 풀 수 있다. 이기심은 바로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이 별로 없다는 데 뿌리를 두고 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 자신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자신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 그에게는 진정한 사랑과 긍정의 기반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내면의 안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본적으로 안정과 만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걱정해야 하고 스스로 모든 것을 차지하려고 탐욕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자기도취적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을 위해 뭔가를 얻는 데 관심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칭찬하는 데 관심이 많다. 이들은 표면 상으로는 자신을 무척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며, 그들의 자기도취는--이기심과 마찬가지로--자기애의 근본적인 결핍에 대한 과잉 보상인 것이다. 자기도취적인 사람은 사랑을 남으로부터 빼앗아,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고 프로이트는 지적했다. 이 말의 앞부분은 맞지만 뒷부분은 틀렸다. 자기도취적인 사람은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다."(에리히 프롬, 자유로부터의 도피, 김석희 옮김, 휴머니스트,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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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08 19:31 2014/02/08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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