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주위 동료들이 제게 묻습니다. 도대체 녹색당에 들어간 이유가 뭐냐? 남이사 녹색당에 가입을 하든 새누리당에 가입을 하든 나의 정치적 결정권에 대해 웬 말이 많냐? 이렇게 되받아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진 않습니다. 혼자 살면서 차를 몰고 다니고 밥 퍼면서 양 조절을 못해 음식을 남기고 여름에는 더위를 참을 수 없어 매일 선풍기 틀어 놓고 하니 제 꼴에 녹색당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소련이 무너졌는데 당시 공부하든 책들이 대부분 동독이나 소련에서 나온 책들이라 다들 충격을 받았지요. 누구는 학생운동을 떠나고, 소위 운동판에 있던 선배들은 '이것이 아닌가벼'라며 다 접고 고시공부하던 그런 시기가 있었지요. 뭐 다들 잘 먹고 잘 살겠지만 당시에는 안타까운 상황들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이가 들면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들어갔지요. 대학원에 들어간 이유는 단지 하나뿐이었습니다. 왜 맑스주의가 문제일까? 맑스의 철학이 소련이 망한 것과 독일이 망한 것과 전혀 관련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저는 맑스주의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정식으로 공부를 한 번 해보자고 생각했지요. 그 때 한 선생님은 제게 '시대착오주의자'라고 놀리기도 했습니다.

아, 제가 녹색당에 가입한 이유는 학부학생 시절 막연하게 한국에 '사회주의노동자당'과 '녹색당' 중에 먼저 생기는 당에 가입하겠다고 스스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뭐 단순하지요?

이런 식으로 제가 약간 아는 걸 마치 많이 아는 것처럼 거들먹거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군요. 앞서 거창하게 강령의 해석을 한 번 시도하자고 시작했는데, 결국 맑스의 [자본]을 강의하듯 설명하는 꼴이 되었습니다만 강령에서 제시하고 있는 물신주의 극복이 녹색당의 강령에 없었다면 저는 아마 녹색당을 선택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녹색당의 이념이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으나 우리의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 녹색의 의미를 실현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에서 물신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우리의 실천이라는 점에서 만용을 부려봅니다.

화폐의 본질

맑스는 자본주의 상품경제체제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상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화폐로 나아가는데, 이것은 상품이 가치로서 교환되기 때문이고 가치는 모든 상품의 내재적인 화폐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품이 내재적인 화폐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상품이 곧 화폐라는 말이지요. 예를 들어 천원으로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을 쭉 늘어 놓았을 때,

"1000원 = 컵 하나 = 볼펜 1자루 = 가위 하나 = 새우깡 한봉지 = 소주 한병 = ....."

이런 식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상품을 나열할 수 있겠지요. 결국 컵 하나의 가치와 볼펜 1자루의 가치가 같으니 두 상품은 서로 교환될 수 있습니다.

결국 화폐는 보편적 교환의 매개물인 셈이지요. 모든 상품이 가지고 있는 가치라는 속성은 화폐라는 양적 단위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상품의 사용가치가 상품의 유용성을 나타낸다면 상품의 가치는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는 비율의 지수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화폐란 바로 상품의 가치를 화폐라는 형태로, 상품 내부에서 상품 바깥으로 꺼집에 내어 화폐형태를 부여한 거지요.

뭐 사실 맑스의 [자본]을 이해하는 데 이 부분이 가장 어렵다고들 합니다. 상품에서 화폐로 나아가는 이 과정을 분석하는 부분이 [자본]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고 또 [자본]의 나머지 부분을 이해하기 위한 전제인 셈이고요. 그래서 방법론과 관련하여 아직도 많은 논문이 생산되고 있답니다.

여하튼 맑스는 개별적인 상품들의 가치를 화폐라는 보편자의 형태로 상품의 외부에 이끌어 냅니다. 이것을 우리는 상품이 자신의 가치를 보편자인 화폐를 통해 실현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맑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품은 화폐 속에서 “동족의 아름다운 가치의 혼”을 알아보는 것이지요. 화폐가 모든 상품의 신이 된 비결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화폐는 상품 교환의 과정에서 교환의 편리를 위한 매개 수단에 불과한데도 화폐는 모든 상품과 교환될 수 있는 속성을 가짐으로써 궁극적으로 모든 상품의 신, 눈에 보이는 신'처럼' 군림하게 된 거지요. 여기서 조사 '처럼'이 가지는 의미가 상당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신성의 가장 큰 문제가 여기서 발생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들 간의 관계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물신주의의 본질은 사실 이러한 전도된 관계를 일반적인 관계로 만드는 근원을 파헤치지 않으면 이 후 제기되는 문제, 사실 우리 삶의 실제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거지요.

"어떻게 화폐가 모든 상품의 신이 되었는가?" 라는 물음은 곧 "개인들의 사적 노동이 어떻게 사회적 노동으로 전환되는가?"라는 물음의 답이고 이 물음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사적 부(富)가 어떻게 사회적 부(富)로 전환되는가" 라는 물음의 답을 제공하는 셈이지요. 이 말은 곧 개인의 사적 권력이 어떻게 공적 권력이 되는가 라는 문제와 같은 거지요. 정몽준이나 이건희가 그저 한국에서 돈이 좀 많은 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결국 물신주의에 대한 이해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부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과 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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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8 15:28 2012/07/08 15:28

동대구에서

사진 2 2012/07/04 19:07

어제 모처럼 대구에 갔다. 동대구 역사를 빠져 나오면서 하늘을 보니 하늘은 뿌옇게 흐린 구름 사이로 강한 햇살을 쏟아낸다. 지난 번 동대구 역에 내렸을 때는 비가 줄줄 내리고 있었는데 7월의 대구는 너무 더워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고 구름이 그늘을 만들어 줄만큼은 아니었는데 하늘을 보니 겹겹히 쌓인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뿌옇게 햇빛을 반사하는 구름. 뿌옇게 번들거리는 도시. 매캐한 공기. 지루하게 늘어서 있는 택시들.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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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4 19:07 2012/07/04 19:07

최근 경향신문의 기사를 보면 좀 못마땅한 면이 있다. 무성의한 기사 구성과 그간 경향신문이 보여준 보도 방향과 맞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는 기사. 어제 토요일 신문의 경우 40대 싱글에 대한 기사는 최악이었다. 그래도 나는 경향신문을 매일 "읽는다". 그 중에서도 '여적'을 가장 사랑한다.

며칠 전 민주당의 대선후보인 손학규 씨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고 출판기념회에서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나누자는 취지의 연설을 한 모양이다. 뭐 민주당을 믿었으면 벌써 수십 년 전에 믿었겠지만 믿을 놈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진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동안 한나라당에서 대선후보까지 했을까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여적]저녁이 있는 삶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대선 출마 키워드로 내놓은 ‘저녁이 있는 삶’이 상당한 반향을 얻고 있나 보다. 반응을 보면 “그저 그런 이미지의 정치인이었는데 ‘저녁이 있는 삶’은 애잔하다 못해 적어도 그가 어떤 정치인인지 구글링하게 만들었다” “백수에겐 감흥이 어떨지 몰라도 휴가도 못 가고 매일 야근하다 지친 어떤 사람들에겐 아련한 꿈처럼 유혹이 된다” 등이 있다. “진보정당을 ‘멘붕’시킨 저녁 있는 삶”처럼 특이한 것도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엄숙·도덕주의로 범벅이 되곤 했던 정치구호가 비로소 인간의 숨결을 찾은 듯하다”고 평가했다. 이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론 이것이 우리가 몹시 일그러진 삶을 살고 있음의 방증이란 생각이 고개를 든다. ‘저녁이 있는 삶’이 단박에 와닿은 이유는 그만큼 고달프게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탓 아니던가. 내친김에 더 나가보자. 대한민국은 노동자에게 어떤 나라인가. 비정규직이 절반이고, 노동시간은 OECD 최대를 자랑한다. OECD 연평균이 1700시간인 데 한국은 500시간이나 많다. 가족과의 저녁시간이 여의치 않을 수밖에 없다.

기존의 우리네 ‘저녁이 없는 삶’은 성장·개발주의, 속도전에 길든 가치관의 소산이었다. 말하자면 ‘저녁이 있는 삶’은 이명박류의 가치체계와 철학에서는 죽었다 깨도 나올 수 없는 발상이었다. 그 점에서 획기적이긴 하다. ‘저녁이 있는 삶’을 키워드든 화두든 무엇으로 부르든 그것은 결국 공약이다. 그런데 공약을 내거는 것과 실천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이 점은 대선 유세 때부터 “경제를 살리겠다”고 목청을 높인 이명박 대통령이 본보기다. 경제도 못 살리면서 양극화만 심화시켰다.

‘저녁이 있는 삶’의 풍경은 분명 목가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는 세계가 목가적이라고 해서 그 실현방식도 목가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노동자들에게 저녁시간을 돌려준다는 것은 엄청난 성취라고 봐야 한다. 어느 편이냐 하면 그것은 좋은 말로 타협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치열한 투쟁을 통해 전취될 대상이다. 복지 확대, 행복권 추구, 비정규직 해결 등 온갖 문제가 연결돼 있다.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 모르겠다. 물 위를 유영하는 백조의 우아한 자태는 물밑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물갈퀴 덕분이다. 목가적 삶의 해법은 결코 목가적일 수 없다.(김철웅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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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1 17:48 2012/07/01 1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