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당 의제 토론

 

맑스는 상품을 사용가치와 가치의 이중성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봅니다. 상품은 단지 우리에게 유용한 물건, 한 단계 더 나아가면 판매를 위해 생산된 노동생산물이라는 겁니다. 특정한 재료(원료)에 일정한 노동력이 투여되어 하나의 형태를 가진 물건인 셈이지요. 상품을 이런 식으로 분석하는 것은 상품생산 체제가 야기하는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우리가, 비유해서 말하자면, 어떤 물건을 잠시 째려 본다거나 잠시 손으로 만져보는 것만으로 그 물건의 본질을 간파할 수 있다면 과학은 필요가 없겠지요. 우리는 아무로 레이와 같은 뉴타입이 아닙니다. 과학은 그 대상에 따라 논리를 수단으로 삼거나 실험을 그 수단으로 삼아 대상을 분석하여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거지요.

맑스가 상품을 사용가치와 가치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분석하는 것은 상품의 본질에 다가가기 위한 분석의 첫 단계에 불과합니다. 앞서 사용가치는 충분하게 설명했습니다만,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사용가치는 타인에게 유용한 사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사용가치가 실현된다고 표현합니다. 마치 내가 머릿 속에 모짜르트도 울게 만들 그런 엄청난 곡을 간직하고 있다 하더라도 악보위에 옮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머릿 속에 아직 관념으로 존재하고 있는 황홀한 음악은 악보 위에 하나의 기호로 실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상품의 사용가치가 그 상품을 만든 개인의 구체적인 노동의 결과인 반면 상품의 '가치'는 단순히 인간노동 일반의 지출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합시다. 맑스는 한 상품의 가치가 제대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교환을 위해 다른 상품과 마주서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가치는 단지 그 상품을 만든 노동자가 남자건 여자건 백인이건 흑인이건 '일반적인 인간노동'의 지출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치를 눈으로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고 머릿 속에 이미지를 떠 올릴 수도 없습니다. 가치는 감적적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노동 엑기스"인 거지요.

맑스는 가치가 "상품과 상품이 마주서는 일정한 관계 속에서만 감지될 수 있는 초감각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x량의 상품 A = y량의 상품 B, 또는 한가마의 쌀 = 10개의 호미

한가마의 쌀과 10개의 호미가 교환된다면 분명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기준이 있을 겁니다. 두 상이한 사용가치를 가진 상품을 교환 가능하게 해주는 어떤 것이 상품의 가치입니다. 사용가치는 질적 차이를 나타내지만 가치는 단지 양적 차이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가치는 크기로 나타나며 상품이 교환되는 비율의 지수로 나타납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 상품의 가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추상적 노동이며 오직 양적인 의미만을 가집니다. 이것은 가치가 서로 다른 노동형태의 서로 다른 특성을 모두 사상한 단순한 인간노동의 "엑기스"라는 측면에서, 개별 생산자들의 구체적인 노동의 특수한 내용이 지워진, 오직 대상화된 노동시간의 크기로만 측정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중언부언하는 것이 오히려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한 번 [자본]에 있는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재봉노동과 직포노동이 사용가치로서의 상의나 아마포의 형성요소인 것은 바로 재봉노동과 직포노동이 서로 다른 질(質)인 까닭이다. 재봉노동이나 직포노동이 상의의 가치나 아마포의 가치의 실체인 것은 오로지 재봉노동이나 직포노동의 특수한 질이 사상(捨象)되어 양자가 동등한 질, 곧 인간노동이라는 질을 지니고 있는 한에서이다."

맑스는 이러한 전제로부터 가치를 규정합니다. 가치는 상품 그 자체와 구별되며, 상품의 일반적인 교환능력이자 상품이 가지고 있는 교환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상품이 교환되는 비율을 나탄낸다는 점에서 인간노동을 양으로 환산한 단위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상품의 가치를 형성하는 것은 추상적 노동의 양입니다. 이것은 각기 다른 장소와 다양한 형태의 노동이 수행된다 하더라도 모든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투여된 노동시간을 통해 결정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품이 사용가치와 가치라는 이중성 가진다는 것은 상품을 만드는 노동의 상이한 두 측면을 나타낸다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거지요.

상품의 사용가치 = 구체적 노동 = 상품의 유용성 가치 = 추상적 노동 = 상품이 교환되는 비율의 지수(指數)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물신주의의 모든 문제가 바로 이와 같은 상품의 이중성에서, 그리고 상품의 이중성으로 나타나는 노동의 이중성에서 비롯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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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3 16:07 2012/06/13 16:07

녹색당 의제 토론

 

상품물신성에 대한 단적인 정의는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가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을 전도(Verkehrung, conversion)라고 합니다. 맑스에 의하면 이러한 전도된 관계는 자본주의 상품생산 체제에서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상품생산 체제가 사라지면 이와 같은 전도된 관계도 사라지겠지요. 앞서 시몬느 베이유의 주장을 요약하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바로 악의 근원인 셈이지요.

맑스는 [자본]의 서문에서 이 책을 쓴 궁극적 목표가 "근대 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혀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본]을 "상품" 분석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상품이 자본주의의 경제적 세포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맑스의 [자본](Das Kapital)이 어렵다고 말들을 하는데 이건 좀 과도한 겸손의 표현이거나 저작에 대한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맑스의 이 책은 주어지는 논리 그대로만 읽어도 충분히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당원 동지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먼저 [자본]의 서술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면 상품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자본주의에서 상품은 "(사회적)부의 기본형태"라는 거지요. 맑스는 상품의 분석에서 화폐 분석으로 나아가는데 결론을 미리 약간 언급하자면 상품이 곧 화폐라는 겁니다. 그래서 상품분석은 곧 화폐의 비밀을 파헤치는 전제가 되는 셈이지요. 화폐가 무슨 그런 비밀스러운 거냐고 되물을 수 있겠지만 잠시 맑스가 [경제학 철학 수고]에서 인용하고 있는 세익스피어의 시를 살펴보면 이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금? 귀중하고 반짝거리는 순금? 아니라네, 신들이여!
실없이 내가 그것을 기원하는 것은 아니라네.
이만큼만 있으면, 검은 것을 희게,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든다네.
나쁜 것을 좋게, 늙은 것을 젊게, 비천한 것을 고귀하게 만든다네
이것은 사제를 제단으로부터 ...... 꾀어낸다네
다 나아가는 병자의 머리 밑에서 베개를 빼내가 버린다네
그렇다네, 이 황색의 노예는
....
도둑에게 작위와 궤배와 권세를 부여한다네, 또 이 노예는
늙어 빠진 과부에게 청혼자를 데리고 온다네.
양로원에서 상처로 인해 심하게 곪고 있던 그 과부가
메스꺼운 모습을 떨쳐버리고 오월의 청춘으로 되어서
청혼한 남자에게 간다네. 에이. 빌어먹을 금속아,
너는, 국민들을 모욕하는 인간 공동의 창녀로다

-세익스피어의 [아테네의 타이몬] 중에서

이어 맑스는 "화폐는 눈에 보이는 신(神)이며, 모든 인간적 자연적 속성의 그 반대의 것으로의 전환이요, 사물의 보편적 혼동과 전도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화폐가 이런 신과 같은 권능을 가지게 되었을까? 이게 맑스가 상품 분석을 통해 밝혀 내려는 화폐의 비밀입니다. 모든 도둑이 최고의, 궁극의 한탕으로 열망하는 곳이 바로 은행 아닙니까? 수천장의 수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이죠.

3. 상품의 이중성

모든 상품이 인간의 필요와 욕구의 산물이 아닌 것처럼 인간의 욕구와 필요의 산물이라고 해 서 모두 상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물의 유용성이 그 사물의 사용가치입니다. 분필의 사용가치는 칠판에 자신의 흔적을 부드럽게 남기는 거지요. 만약 분필이 삑삑 소리만 나고 칠판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면 그런 분필을 누가 사겠습니까? 그러나 사용가치를 가지는 모든 물건이 상품은 아닙니다. 맑스는 하나의 사물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자립적이고 서로 독립해 있는 사적 노동의 생산물만이 상품이 되며 이 상품은 특수한 인간 욕망에 맞추려는 특수한 합목적적 생산 활동을 통해 매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만드는 물건은 상품이 아니지요. 상품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생산한 물건입니다. "자립적이고 서로 독립해 있는 사적 노동의 생산물"이란 말의 의미가 이겁니다. 노동생산물인 상품은 궁극적으로 타인을 위한 물건인 만큼 상호 교환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맑스는 상품을 가장 기초적인 단계에서, 말하자면 가장 단순한 단계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먼저 상품과 상품들 간의 교환관계에서 시작하는 거지요.

맑스에 의하면 "상품은 자연형태와 가치형태라는 이중형태를 갖는 한에서만 상품"이 됩니다. 자연형태란 분필이나 의자와 같은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고 가치형태란 그 상품이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는 가치를 가져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내가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면 한 상품의 사용가치는 서로 교환을 통해 상품이 되었을 때에만 실현될 수 있겠지요. 본인은 정작 다른 상품과 교환하기 위해 만들었는데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지 '유용한 물건'일 뿐 상품은 아닌 거지요. 말하자면 상품은 상호 교환을 통해 매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상품은 이렇게 교환됨으로서 그 가치를 실현합니다.

그래서 맑스는 상품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이라고 규정합니다. 사용가치와 가치는 분리불가능합니다. 사용가치가 없다면, 즉 상품이 유용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누구도 그것을 사려고 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한 상품이 어떻게 다른 상품과 교환될 수 있을까요? 단지 그저 누군가가, 서로가 상대가 가진 것을 필요로 한다고 다 교환될 수 있을까요? 호미 한자루를 가지고 나온 사람이 쌀 한가마니를 지고 온 사람에게 서로 교환하자고 하면 그냥 교환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쌀 한가마니를 가진 사람이 호미가 필요하다해도 덥석 교환하지는 않을 겁니다. 각자의 물건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어떤 비교할 수 있는 근거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용가치로서 상품의 형태와 용도가 다양한 것처럼 각각의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또한 상이 한 활동으로 나타납니다.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은 구체적이고 특수한 노동인 동시에 개별적인 사적 노동입니다. 우리는 의자를 만드는 목수가 나무를 다듬고 못질 하는 것을 머릿 속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목수의 이러한 구체적 노동이 사용가치를 형성합니다. 이와 반대로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은 추상적이며 일반적인 인간노동입니다. 맑스는 추상적 노동이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노동형태를 사상한 "생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노동력의 지출"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목수의 노동과 미싱공의 노동은 대상도 서로 다르고 결과물도 다릅니다. 하지만 목수나 미싱공이나 일정한 시간동안 "노동을 수행"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이 때 두 사람이 수행한 노동은 맑스의 표현을 따르자면 “생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노동력의 지출”입니다. 상품의 가치를 형성하는 노동이 바로 이 생리학적인 의미에서 인간 노동입니다. 두 사람은 그저 노동력을 지출했다는 점에서 노동을 수행해서 어떤 결과물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좀 우스운 이야깁니다만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엑기스"라는 말을 사용하지요? 그런데 이 엑기스가 뭡니까? 홍삼 엑기스. 제가 있는 대학에서 강의시간에 학생들에게 엑기스가 뭔지 물었더니 어떤 학생이 "원액"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홍삼 엑기스는 홍삼 원액인 셈이지요.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엑기스는 영어 "extract" '익스트랙트'의 일본식 발음입니다. 추상적 노동은 각 개인의 구체적 노동에서 인간의 생리학적 의미에서의 노동일반, 즉 "노동 엑기스"인 셈이지요. 헐헐.

그래서 상품의 '가치'는 단순히 인간노동 일반의 지출만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게 참 중요한데 길군요. 또 추후에 연결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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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3 16:03 2012/06/13 16:03

이번 학기에 서양철학사를 중심으로 강의하면서 맑스의 [자본]에서 상품물신성을 3주 강의했다. 마지막 강의를 어떻게 정리하나 고민하다 이전에 메모해 두었던 글을 떠 올렸다. 아무래도 맑스의 화폐물신성에 대한 비판을 반동일성의 관점에서 긴 글을 작성할 계획을 했는데 그만 시간만 흘려 보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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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는 1970년 <레닌과 철학> 서문에서 자신의 시대를 "맑스와 무조건 싸우든지 아니면 부르주아적 해석들(경제주의, 기술관료주의, 휴머니즘)로 맑스를 왜곡하면서 그를 학문적 영예로 들씌워버리는 이 시대"라고 비판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도 그의 시대와 다르지 않다. 철학과 대학원에서조차 맑스의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학에서 맑스의 철학이 추방당한지 오래되었다. 20대 맑스를 읽고 맑스주의자였다고 말하는 사람들마저 맑스를 언급하기를 꺼리고 맑스주의를 시대착오적이라고 비웃는다. 이제 맑스는 비웃음과 어리석음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90년대 초에는 맑스를 '죽은 개' 취급한다는 비판과 분노가 조직되기도 했지만, 오늘날 맑스와 맑스주의는 죽은 개보다 더한 치욕으로 전락했다. 그래도 여전히 맑스주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단 한 문장으로, '맑스주의는 배제와 폭력이라는 동일성의 논리에 불과하다.' 이 말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피억압자들의 차이를 노동계급이라는 하나의 동일자로 환원한다는 것이다.

특히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 아닌 비난은 들뢰즈를 전공하는 분들의 논문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사실 나는 그 분들이 맑스의 저서를 읽기나 했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물론 이 분들은 헤겔도 비판 아닌 비난을 한다. 그런데 그분들의 글을 읽다보면 어이없게도 헤겔의 글뿐 아니라 헤겔에 관한 책조차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판단되는 부분들이 아주 많다. 끔찍한 현실이다.

맑스는 <자본>에서 상품 물신성을 비판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산자들에게는 그들의 사적 노동의 사회적 관계가 있는 그대로 즉 그들의 노동에서 맺는 사람들끼리의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과 사람의 물적 관계(das sachliche Verhältniss der Personen) 및 사물과 사물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난다."

헤겔을 조금이라도 공부해본 사람은 맑스의 상품 물신성비판이 곧 헤겔의 관념 철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맑스의 헤겔 비판은 헤겔 변증법에 대한 비판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자본> 1장 "상품"의 가치이론에서 전개하고 있는 것처럼 상품으로부터 화폐를 연역하는 과정이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비판을 축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맑스의 경우 보편자인 가치와 개별자인 상품의 관계는 헤겔의 무한자와 유한자의 관계와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다. 말하자면, 헤겔에게 개별자는 무한자로 이행하고 무한자는 개별자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이와 반대로 맑스의 경우 화폐는 개별자로부터 보편자로의 이행이 아니다. 오히려 개별자를 통해 존재하게 되는 보편자로서 화폐의 존재를 연역해내는 것이다.

이것은 헤겔의 "정신" 또는 "개념"이 자신의 외부에 대립해있는 개별자로 자신을 외화시키는 것과 정반대의 과정이다. 이러한 보편자의 외화에 대한 맑스의 비판은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전화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보편자는 개별자가 사유 속에 반영된 결과일 뿐이다.

결국 맑스(주의)를 비판하면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을 동일성의 논리로 환원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 되도 심하게 전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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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08 15:04 2012/06/08 1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