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알라딘 블로그에 올렸던 글인데 블로그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렸다. 그런데 얼마전 그 글을 찾았다. 여기저기 뒹굴고 있는 글을 정리해야겠다. 아주 약간 수정을 했다.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이라는 문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우리가 한 번밖에 살 수 없다면 우리에게 삶이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뭐 이런건데, 한 번의 삶은 사실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선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모든 선물이 다 받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선물은 곤혹스러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선물을 거부할 수 없다. 그래서 이 곤혹스러운 선물은 세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강요된 선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먼저 우리는 이 선물을 받을 시점을 선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느 곳에서 받을 지도 알 수 없으며, 선물을 주는 당사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다. 사실 잘 알다시피, 아직까지 인간 문명의 발달 정도를 고려해봤을 때 어느 시점에,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받느냐에 따라 이 선물은 굉장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주제는 서양철학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플라톤에서 헤겔까지 서양 철학은 이러한 모티브를 상이한 관점에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헤겔은 관념론의 요체가 유한한 존재를 참된 존재자로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고 서슴없이 주장했다. 참된 존재자는, 헤겔식으로 말하자면 정신이나 신이다. 맑스는 이런 점에서 헤겔 철학이 보편자가 개별자를 통해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편자가 개별자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는 오류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맑스에 의하면 관념적인 것은 인간의 머리 속에서 전화되고 번역된 물질적인 것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니다. 말하자면 보편자는 개별자의 사유 속에 반영된 결과일 뿐이다. 맑스 비판의 요지는 헤겔이 실재의 과정을 사유의 과정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기독교의 논리와 동일하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존재인 신의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은 신의 전능함을 나타낼 뿐이다. 뭐 이런 정도. 말하자면 유한한 존재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언제나 무한자를 저 편에 설정함으로써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점에서 종교는 시대를 초월한다. 종교적 근본주의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은 단지 무한성을 실현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마찬가지다.

내가 유한성과 무한성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가지게 된 최초의 계기는 아마도 유년시절 TV에서 본 시리즈 애니메이션인 <은하철도 999>를 성인이 되어 다시 보았을 때라고 기억한다. 물론 내가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이 TV만화는 단지 재미있는 만화영화였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유한한 존재의 유한성이라는 문제가 나에게 중요한 관심거리였고 우연히 <은하철도 999>를 다시 보았을 때 불현듯 내 머리 속에 떠올랐던 것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데츠로(철이)는 어머니를 죽인 기계 백작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어머니의 몫까지 살기 위해 신비로운 여인 메텔과 은하철도 999를 타고 기계별로 향한다. 이 만화 영화는 일종의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다. 데츠로와 메텔은 기계별로 가는 여정에서 많은 기착지를 거치게 되고 이들은 기착지에서 특수한 상황과 특별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과 마주친다. 데츠로는 이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끊임없이 ‘인간이 산다는 것의 의미’를 고민하게 된다.

이 과정의 주요한 모티브는 대립과 화해다. 첫 째는 기계인간과 인간의 대립인데, 기계인간은 무자비하게 인간을 살해하고 탐욕적인 존재로 제시된다. 두 번째는 기계인간이 무한한 생명을 얻었지만 오히려 붉은 피를 가진 인간의 신체를 그리워 한다는 거다. 그리고 어떤 경우건 기계인간은 쓸쓸하게 죽는다. 기계 또한 인간처럼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고 파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영원성을 누리는 건 아닌 셈이다. 이렇게 기착지를 거쳐 갈 때마다 데츠로는 정신적으로 성숙해간다. 작가인 마쓰모토 레이지의 말대로 우리들이 이미 겪었으며 누구나 겪는 소년 시절에 대한 일종의 우화인 셈이다.

여하튼 이 애니의 모티브는 삶과 죽음, 유한성과 무한성, 즉 영원한 생명이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에서 이와 같은 모티브는 도덕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대개의 경우 악당은 기계몸을 가진 기계인간이고 그들은 무자비하고 난폭하며, 잔인하다. 한마디로 도덕적인 존재가 아니다. 이 말은 비도덕적이라는 의미와 다른데, 기계인간은 도덕성과 무관하다. 그들은 양심의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고 따라서 도덕적 갈등에서 자유롭다. 한참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X-files에서 “왜 외계인이 인간을 납치해서 생체실험을 하겠는가?” 라고 반문하는 스컬리에게 멀더는 이렇게 되 묻는다. 인간이 아프리카의 개미를 잡아다 실험하거나 개구리를 해부할 때 도덕적 가책을 느끼는가? 도덕성은 존재의 차원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유한성이 문제가 된다면 유한한 존재에게 윤리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은하철도 999> 시리즈 이후에 나온 마쓰모토 레이지의 애니메이션 <메텔 레전드>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대사가 나온다.

"기계몸이 된다는 것은 인간 이상의 힘을 얻게 된다는 것
그 힘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지 않으면 좋겠지만
기계몸은 무한한 힘과 영원한 생명
분명히 인간의 마음을 계속해서 잡아 두는 건 무리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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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27 15:04 2012/06/27 15:04

나는 노동이 싫어

일상 2012/06/17 21:07

나는 급여를 받고 일하는 노동, 몸을 움직여 노동을 수행하는 신체노동이든 컴퓨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문서를 작성하는 사무직 노동이든 나는 일정한 시간 동안 일정하게 정해진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직업으로서의 노동을 견디지 못한다. 학부 학생이었을 때 방학 동안 동생과 함께 소위 노가다를 하기도 했는데 동생은 일을 잘하는 편이었고 나는 일이 힘들고 괴롭기만 했다. 동생이 일주일 내내 일을 하면 나는 겨우 3일 정도만 했다. 나는 노동을 자랑스러워 하지도 않았고 노동을 대단한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금리 생활자가 아니라면 노동을 전혀 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내가 대학의 비정규교수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 때가 있다. 경제적으로 생활이 어렵고 다양한 압박에 시달리기는 해도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에 얽매어 있지 않다는 그 사실 하나가 다른 모든 압박을 상쇄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역시 방학이 되면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것이 또 다른 진실이기도 하다. 농담처럼 한 말이 현실이 되기도 한다. no job, no money, no drink.

언젠가 사촌이 집에 와서 내 방과 거실 뒤켠 벽에 쌓아둔 책을 보고 놀라며 도대체 몇 권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많은 책을 설마 다 읽었겠나. 물론 다 읽었을리가 없다. 내가 사서 쌓아둔 책이라는 게 하루에 한 권씩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읽지 않고 읽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산다. 습관처럼. 그래도 이 책들이 마치 자랑이라도 되는 듯이 허허 웃기까지 했다. 지식 노동자로서 내가 그렇다고 열심히 지식 노동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 요즘은 자괴감이 든다.

내가 신체노동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저 공장에 들어갔다. 87년 공장의 환경은 열악하고 엉망이었다. 내 심정은 그로부터 몇 년후에 읽게 되었던 공장에 불을 질러 법정에 선 15살 어린 소년의 심정과 똑 같았다. 가난하여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장에서 노동을 하게 된 소년은 일이 너무 힘들어 어떻게 하면 공장을 쉴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소년은 공장에 불을 질렀다. 공장에 불이나면 일을 쉴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이 이야기는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라는 책에 부록으로 실려있다.

나는 그 때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노동자로서 살지는 않겠다. 신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말이다. 맑스의 말처럼 노동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문제가 없다면 사람들은 노동을 마치 페스트처럼 기피할 것이다. 맑스는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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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노동이 노동자에게 외적이며, 즉 그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노동자는 그의 노동 속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하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느끼며, 자유로운 신체적, 정신적 에너지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고행으로 그의 신체를 쇠약하게 만들고, 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에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노동 바깥에서야 비로소 자기가 자신과 함께 있다고 느끼며, 노동 속에서는 자기가 자신을 떠나 있다고 느낀다. 노동자는 자신이 노동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고, 노동을 할 때에는 편안하지 못하다. 그의 노동은 그러므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 강제 노동이다. 그의 노동은 그러므로 어떤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그의 노동 바깥에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의 노동의 낯설음은, 어떠한 신체적 혹은 기타의 강제도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노동이 마치 페스트처럼 기피된다는 것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외적 노동, 즉 그 속에서 인간이 외화되는 노동은 자기 희생의 노동, 고행의 노동이다. 결국 노동자에 대한 노동의 외적 성격은 노동이 노동자의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사람의 것이라는 것, 노동이 노동자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 노동자가 노동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에서 나타난다. 종교에서 인간의 환상, 인간의 두뇌, 인간의 심장의 자기 활동이 개인으로부터 독립되어, 즉 신적인 혹은 악마적인 낯선 활동으로서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듯이, 노동자의 활동은 그의 자기 활동이 아니라. 노동자의 활동은 다른 어떤 사람에게 속하며, 그 자신의 상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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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7 21:07 2012/06/17 21:07

[김종철의 수화한화]IAEA와 도덕적 감수성

/경향신문, 2012. 6. 14.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국제원자력기구(IAEA) 소속 전문가들에 의한 고리원전 1호기 안전점검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들은 발전소의 ‘안전문화’에는 문제가 없지 않지만, 설비상태는 양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쿠시마 이후 안전성 강화 대책이 착실히 이행되고 있다는 점도 덧붙였다. 이런 발표에 반발할 지역주민이나 탈핵활동가들을 의식해서인지 이들은 또한 자신들이 한국 원전당국의 ‘들러리’가 아니라 ‘독립적인 전문가’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환영해야 할 뉴스이다. 고리원전 상태에 대한 심각한 불안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한국의 원전당국은 평판이 매우 나쁜 고리원전 문제를 ‘국제기구’의 도움으로 척결하려는 의도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기관도 아니고, IAEA 점검단을 초빙해서 조사를 맡겼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 문제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처리할 의사가 없었음을 스스로 폭로했다고 할 수 있다.

원전당국의 설명에 의하면, IAEA는 “국제연합 산하의 중립적 비영리 독립기구로서 모든 나라가 공인하는 원자력 안전 관련 최고, 최후의 기관”이다. 한국수력원자력 관계자의 이 말은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원자력 문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수준 낮은 농담에 불과하다. 보통 IAEA는 핵확산 방지를 위해 존재하는 국제기구라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이 원자력 일반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는 기관으로 오인할 수 있다.

하기는 핵무기를 반대하면, 핵무기와 쌍둥이인 원자력발전소를 반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당연하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계의 핵심적인 비극의 하나는 핵 주도세력이 핵을 군사용과 민수용으로 구분한 다음에, 한편으로는 핵무기 확산을 막는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이름으로 원자력 시설을 세계 전역으로 확대하는 모순적인 행동을 위선과 거짓 언어로 치장하여 되풀이해왔다는 데에 있다.

바로 그 위선과 거짓을 집약하고 있는 대표적인 조직이 IAEA라고 할 수 있다. 1957년에 미국 정부의 주도로 국제연합 산하 기구로 창설된 IAEA는 그 헌장에서 이미 “세계 전역에 걸쳐 평화와 건강과 번영을 위해서 원자력의 공헌을 가속화·확대한다”는 자신의 목적을 천명했다. 이 창설 목적을 보더라도, IAEA는 자신이 군부와 원자력 산업계를 위한 명백한 ‘로비단체’, 그것도 미국 정부의 비호를 받는 유엔 산하 조직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로비단체임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IAEA가 원자력이나 방사능에 관련된 치명적인 문제에 대해서 늘 눈을 돌리고, 무관심한 자세를 취해온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IAEA가 방사능 문제에 대해 취해온 행동의 역사는 완전히 범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59년에 세계보건기구(WHO)와 맺은 협정이다. 이 협정은 상대편 기관이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반드시 “상호합의에 따라” 계획하거나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원자력에 관한 WHO의 권한, 즉 방사능의 위험에 대해 조사하거나 경고해야 할 WHO의 고유한 역할을 저지하기 위한 ‘협정’이었다. 원래 1956년까지 WHO는 “원자력 산업과 방사능의 증대에 의해서 미래 세대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9년의 협정 이후 WHO는 방사능의 영향 문제에 관해서 사실상 침묵을 지키거나 극히 소극적인 관심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이 비겁한 행동은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방사능 문제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국제적 권위기관이라고 하는 WHO가 IAEA와 다름없는 원자력 홍보기구로 전락한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평가이다. 2005년 WHO와 IAEA 합동회의에서 발표된 체르노빌 피해상황에 대한 최종 결론에 의하면 사망자 56명, 갑상샘암 사망 아동 9명, 그리고 사망에 이어질 암에 걸린 사람 4000명뿐이었다. 적잖은 독립적 과학자와 의료인들이 지적해왔듯이, 이것은 많은 독립적 자료와 조사를 철저히 외면하고, 계속해서 고농도 방사능 지역에 거주하면서 치명적인 피해를 가져올 오염 식품을 먹을 수밖에 없는 900만명 이상의 인간을 완전히 무시한 결론이었다(르몽드디플로마틱 2009년 5월).

생각해보면, 후쿠시마는 물론이고 체르노빌로 인한 재앙도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랜 잠복기간이 있고, 오염된 토양에서 자란 농산물로 인한 방사능 섭취에 따라 앞으로 몇 세대에 걸쳐 발생할 유전자 손상을 고려하면 IAEA와 WHO의 합동 결론은 과학이라기보다 저열한 수준의 은폐 공작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방사능의 위험을 이처럼 비상식적으로 은폐하고, 과소평가하는 행위가 버젓이 과학과 국제기구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공식적인 자료나 문헌에 의존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장 피에르 뒤퓌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체르노빌 사고 20주년인 2006년에 우크라이나를 직접 방문해본 결과, 그동안 접했던 자료와 현지 사정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존재함을 발견했다. 돌아와서 그는 <체르노빌로부터의 귀환-분노한 한 남자의 수기>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관련 과학자와 기술관료들이 원자력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이유를 찾아보려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찍이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막스 베버가 지적한 문제, 즉 현대적 학문의 운명인 과잉 전문화로 인한 과학의 왜소화, 그리고 시야가 협소해진 과학자의 ‘근본적인 무교양’에 연유하는 도덕적 감수성의 결여를 무엇보다 주목하고 있다.

참고로 덧붙이면, 장 피에르 뒤퓌는 현재 ‘프랑스 방사선 방호 및 원자력안전연구소’라는 준(準)국가기관의 윤리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하다. 원자력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지식인이 원자력 관련 중책을 맡게 하는 것. 이게 진정으로 원자력의 안전관리를 생각하는 사회의 상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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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5 19:48 2012/06/15 19: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