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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4 21:27 2012/01/24 21:27

과거를 잊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의 특징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과거를 미화하는 것이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서 기억을 지우거나 편집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방편이다. 우리는 과거의 불행에 사로잡혀 현재를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때 될수 있으면 마음이 편하도록 기억의 일부를 좋은 쪽으로 계열화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거는 한 개인의 기억처럼 특정한 부분만을 모아 편집하거나 왜곡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역사와 기억이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마음이 편하고 보기에 좋다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짜맞출 수는 없는 것이다. 어제 노무현 전대통령과 전태일 열사가 함께 웃으며 손을 내밀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포스트를 보면서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를 잊은 것인지 잊고 싶어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음 편하자고 마음대로 저렇게 할 수도 있는 것일까? 서글픈 생각에 글 하나를 찾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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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칼럼] 盧정권에는 정치가 없다 (경향신문, 2007-01-04)

송년·신년회에서 정치의 정자(字)도 꺼내지 말라는 말을 들은 분들이 많았을 것이다. 거기에 누구 이름 석자까지 보태면 거의 경기하는 분도 있다. ‘밥맛 없어진다’ ‘술맛 떨어진다’는 아우성을 각오해야 한다. 사실 정치를 싫어하는 절대 다수를 위해 새해라는 말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며칠 만이라도 정치에 관해 쓰지 않는 것이 예의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이다.

사람들은 경제를 경제논리로 풀어가야지, 정치적으로 접근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교육문제도 교육 논리에 충실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정치는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술집에? 이제 술집에서도 퇴출당할 위기이다. 짐싸서 이 땅을 떠나라고 해야 할까. 한국에서 ‘정치’ 혹은 ‘정치적’이라는 말은 ‘나쁜 짓’ ‘거짓말’ ‘속임수’의 동의어로 간주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당정분리 실험도 이런 인식의 결과일 것이다. 국정이 정당 혹은 정치와는 거리가 먼 고상한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바람이 반영됐을 것이다. 그래서인가. 노무현정부에서는 정치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가 줄었다. 그 유래를 알 수 없는 ‘정무’가 ‘정치’를 대신했다. 뉴스전문 검색 사이트 카인즈에서 종합일간지를 대상으로 ‘정무’ 혹은 ‘정무적’이란 단어를 찾아 보았다. 1987년 12월에서 2001년 12월까지 14년간 14건이었다. 그러나 2002년 12월에서 2006년 12월까지 4년 동안 658건을 기록했다. 노무현정부가 ‘정무’를 유행시키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아무개는 정치적 판단력이 부족하다”라는 말이 “아무개는 정무적 판단력이 부족하다”로 바뀌었다. 이 언어변용의 원인을 정확히 밝혀낼 수는 없지만, ‘정무적’이 ‘정치적’보다 세련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술집에서도 퇴출당한 ‘정치’-

왜 그럴까. ‘정치적’은 너무 노골적이고 ‘정무적’은 은근해서? 정무는 나라 운영을 위해 필요한 할 일이고, 정치는 나라 운영을 망치는 나쁜 짓이라서? 좋다. 그렇게 해서 정치로부터 자유로워진 노대통령은 어떻게 됐나. 갑자기 한나라당에 권력을 통째로 넘겨주겠다며 대연정을 제안한다. 노동자와 투쟁한다. 한국을 미국화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한다. 부자들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만든다. 이렇게 자기 지지자로부터 정치적 자유를 마음껏 누린 대가가 무엇인가. 참여정부의 정치적 기반의 상실이다. 몰락이다. 집권당은 거수기로 전락했다. 곧 문을 닫는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노대통령이 탈정치를 했을까. 아니다. 그는 지난 총선 전 “민주당 찍으면 한나라당 돕는다”부터 최근의 신당반대까지 숱한 ‘정무적’ 활동, 아니 ‘정치적’ 활동을 했다. 이중적이다. 그러나 비난할 일은 아니다. 애초에 대통령과 정부가 정치를 벗어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부가 집권당과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 정치와는 무관한 국정 과제가 따로 존재한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이었다. 정치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규칙을 만드는 활동이다. 인간의 견해와 욕구는 다양하고 무한하지만, 세상은 그것을 다 충족시켜줄 수 없다. 따라서 누가, 어떤 것에 우선 순위를 둘지 정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다수가 우선 순위를 선택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결정된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정치는 정책의 우선 순위를 둘러싼 경쟁, 갈등, 협력이기 때문이다. 경제·교육정책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결정된다. 정치가 없는 세상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의미한다. 왜 인간을 ‘정치적 동물’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kus·정치적 인간)’라고 했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정치 개념은 너무 협소하다. ‘대통령은 정치에 개입하지 말고 국정에 전념하라’는 여당의 비판에 시민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는데, 말이 안된다. ‘정치 없는 국정’이란 없다.

-정치를 구할 기회가 온다-

가령, 이 나라의 국정을 좌우하는 최고 정치지도자인 대통령과 총리가 만났다면 그것은 당연히 정치적인 행위이다. 국정을 논하는 것만한 정치가 없다. 그런데 청와대는 지난해 12월29일 두 사람의 만남에 정치적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분명히 하자.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정치 부재’에 있다.

올해 대통령 선거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정치라고 부를 수도 없는 정치에 벌써 지쳤다. 그래도 정치를 버리면 안된다. 정치를 구출해야 한다. 그 기회가 오고 있다.

〈이대근/ 정치·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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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0 17:12 2012/01/20 17:12

학교폭력

사진 1 2012/01/19 20:10

아이들과 읽기 좋은 '좋은 칼럼'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뒤적거리면서도 마땅한 칼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좋은 칼럼'의 범위를 너무 제한했기 때문일까? 아이들과 부담없이 읽기 위해서는 현실 정치가 소재가 되면 곤란할 거라고 생각한 내가 문제가 있는 걸까? 아무래도 정치는 부담스러울 게 분명하다. 그러다 박노자의 칼럼을 발견했다. 대부분의 신문 칼럼은 정치적인 이슈에서 자유롭지 않다. 더욱이 그 박노자가 아닌가?

박노자의 이 칼럼은 2007년 3월 한겨레신문에 실린 글이다. 학교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방책을 제시한 글인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내가 고등학생이었던 28년전이나 큰 차이가 없는 모양이다. 문제의 원인을 짚기는 쉬우나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는 어려운 법. 그러나 박노자는 명쾌하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조금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 보았을 그런 방책을 말이다.

그러나 교육이 사라진 사회에서, 교육의 의미가 교육과 무관하게 되어버린 사회에서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교육개혁이 사회개혁이라는 말조차 부질없어 보이는 시대에 교육을 둘러싼 문제들이 교육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도 당연한 일인가 보다. 그래서 제도를 혁파하자는 박노자의 방책이 방책으로 들리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박노자칼럼] 아이들이 폭력화되는 이유(한겨레신문, 20070321 18:33)

폭력 관련 뉴스의 ‘선정성’ 때문인가? 최근에 하루가 멀다고 매체에서 중·고등학생,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의 잔혹한 친구 폭행 소식이 올라 세인들의 눈길을 끈다. 언론들은 뉴스의 충격성만을 부각시켜 폭력의 원인을 기껏해야 ‘폭력 만화의 영향’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고, 또 학교 폭력 관련 기사에 달려 있는 댓글들을 보면 ‘가해자 엄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만 높다. 아이들이 왜 ‘고문 기술자’들을 흉내 내게 되는지에는 관심이 거의 가지 않는 모양이다. 폭력을 인간의 내재적 본능으로 봐서 그런 것인가?

인간에게 폭력 능력이 부여돼 있지만 폭력성이란 인성 발달의 당연한 결과라고 보기가 어렵다. 물론 사춘기에 들어 자기 과시 욕구가 강해지지만, 이 욕구는 교육자들이 얼마든지 비폭력적으로 분출하게 할 수 있다. 1921년에 영국에서 세워진 서머힐과 같은 대안학교에서는, 학교의 모든 사항들에 대한 결정권과 이성 교제의 권리 등을 갖고 있는 아이들이 폭력이 아닌 민주적 참여를 통해 인정 욕구를 분출해 왔다. 그런데 일반적 근대 교육, 특히 오늘날 한국의 교육은 과연 어떤가? 어른들을 흉내 내면서 자신들의 사회를 꾸미게 돼 있는 아이들에게는 학교는 ‘폭력 교사’ 노릇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서 폭력이란 아직도 입시 위주 교육의 현장에서 ‘학급 통제를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으로 인식돼 있는 체벌이나 폭언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자기 차별화 욕구를 억눌러 결국 그 욕구가 폭력을 통해 분출되도록 유도하듯 하는 두발 규제나 교복 착용 등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훈육주의적 제도들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직접적인 폭력보다는, 학교생활의 중심을 이루는 간접적인 폭력들은 아이들의 폭력화에 더 많은 ‘기여’를 한다.

학교에서의 전체적인 권위주의 질서와 출세주의, 철저한 위계 서열의 관계는 결국 학생들로 하여금 주먹의 서열에서 더 높은 위치를 점하려는 욕망을 갖도록 부추긴다. 예컨대 교장과 일선 교사 사이의 관계가 절대 평등하지 않다는 점, 일부의 평교사들이 교장에게 굴복함으로써 학교사회에의 ‘출세’를 꾀해야 한다는 점 등을 학생들이 과연 눈치채지 못할 것인가? 군림·굴복의 현실을 목격하는 그들에게는 ‘힘’을 매개체로 군림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이 생기게 돼 있다. 이미 중학교부터 학생들이 성적순으로 위계·서열화된다면 암기력과 인내력이 부족해서든 가정이 어려워 학습 환경이 조성돼 있지 않아서든 어떤 불가피한 이유로 하위권이라는 이름의 ‘천민’이 된 학생은 과연 자신을 폭력적으로 하위에 배치시킨 체제를 두고 복수욕을 불태우지 않겠는가? 물론 친구들에게 주먹을 휘둘러 자신의 억울함을 푸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방법이지만, 낙오자·하위자의 복수욕을 키운 것도, 학교 현실 속의 체벌과 텔레비전의 온갖 폭력적 영상들을 통해 그 복수 방법을 가르쳐준 것도 바로 이 사회다. 생활과 무관한 지식들을 아무런 흥미 유발이나 개인적인 동기 부여 없이 주입시키고, 거기에다 주입 과정에서의 ‘약육강식’ 경쟁에서 하위로 밀려나는 이들을 가장 민감한 나이에 멸시의 대상물로 만든다면 이것은 폭력의 ‘부추김’ 그 자체다.

오늘날 우리 학교는 기회주의, 출세주의를 가르치는 동시에 수많은 아이들을 폭력자로 만든다. 피해자와 가해자들의 망가진 인생들에 대한 책임은, 학교를 ‘우승열패’의 지옥으로 만든 학벌 카스트 제도와 이 제도의 폐단을 다 알면서도 혁파시키려 하지 않는 우리들 모두 같이 지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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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9 20:10 2012/01/19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