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이오덕

좋은글 2012/02/19 15:09
애국가
/이오덕

얼마 전 어느 자리에 나갔다가 '국민의례'가 있어 애국가를 부르게 되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목청을 가다듬어 부르는데, 그날 따라 나는 벙어리가 되었다. 애국가를 부를 마음이 안 났던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부르는 애국가를 들으면서, 이제부터 내 입으로 이 애국가를 부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국민이면 어린아이들도 누구나 부르는 애국가, 나 자신이 50년도 넘게 불러온 애국가를 왜 부르지 않겠다고 생각했나?

그 까닭은 이렇다. 바로 그 며칠 전에 어느 일간신문에서, 애국가 노랫말을 지은 사람이 윤치호란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 신문은 윤치호 자신이 지은 애국가를 손수 붓으로 써서 '윤치호 작사'라 해 놓은 것을 사진으로 공개했다. 이래서 지금까지 누가 지었는지 확실히 몰랐던 애국가 작사자가 윤치호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윤치호라면 세상이 다 아는 친일파로 우리 민족을 배반한 사람이다. 우리가 얼마나 부를 노래가 없어서 하필이면 민족을 팔아먹은 반역자가 지은 노래를 의식 때마다 불러야 하나? 지금까지는 몰라서 불렀지만, 그 사실을 안 다음에는 부를 수가 없었다. 그런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내 감정과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잖아도 나는 전부터 우리 애국가를 별로 신통찮게 여겨 온 터이다. 노랫말도 그렇고, 곡도 좋게 안 보였다. 우리 애국가 노랫말이 일본 제국의 국가인 '기미가요'를 닮았다고 하는 말은 진작부터 있었다. 일본의 '기미가요'를 우리말로 옮겨 보자. '우리 천황 거룩한 세상은/ 천년이고 만년이고/ 조그만 돌이 큰바위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영원하리라)'

이 일본의 국가는 '조그만 돌이 큰 바위 되어…' 했는데, 우리는 반대로 그 넓고 커다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했으니 더욱 좋지 않다는 말도 가끔 들었다. 아무튼 우리 애국가는 국민들의 정서에서 자연스럽게 안겨 들거나 가슴을 찡하게 울려 주는 것이 없는, 다만 머리로 만들어 낸 말로 되어 있는 것만은 동등하다.

다음은 곡이 또 문제가 된다. 이 곡은 우선 크고 무거운 느낌을 주어서 점잖고 엄숙한 몸가짐으로 부르게 된다. 우리가 부르고 들어온 의식 노래는 일제시대부터 '기미가요'를 비롯해서 으레 사람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거나 굳어지게 하는 것이었기에 애국가도 당연히 그래야만 된다고 여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노래와는 반대로 사람의 마음을 활짝 열어 주고 피어나게 하는 노래, 따뜻하고 기쁘게 해주는 노래, 또는 가슴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듯한 노래는 애국가나 국가로 될 수 없을까? 민주주의로 살아가는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서 부르는 노래라면 당연히 이런 노래라야 참된 나라 사랑의 노래가 되고, 땅 사랑, 사람 사랑의 노래가 될 것 아닌가? 나는 세계의 다른 많은 나라의 노래를 그다지 알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처럼 꼿꼿하게 '차려'를 해서 한결같이 굳은 표정으로 애국가나 국가를 부르는 사람은 우리 말고는 일본 사람들밖에 없는 줄 안다.

무슨 일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먼저 애국가를 부르고 나면 그만 자리가 아주 차가워지고 흥이 나지 않아서 그 일이 제대로 안 되는 수가 많다. 의논을 할 때는 딱딱한 말, 형식으로 꾸민 말, 겉도는 말부터 나온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교실에서 어린이회나 학급회 회의를 할 때 먼저 애국가를 부르고 나면 그만 아이들 마음이 얼어붙어서 말이 잘 안 나온다. 선생님이 언제나 지시하는 말을 흉내내고 되풀이하다가 끝내기가 보통이다. 이것이 애국가의 효용성이다.

좋은 애국가를 새로 만들 수는 없는가?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참된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마음을 일으키려 한다면 차라리 '아리랑'이니 '고향의 봄'을 부르는 것이 좋지 않겠나 싶다. 이런 노래라면 부르는 사람 모두가 저마다 가슴속에서 조국과 고향을 생각하는 뜨거운 마음이 터져 나와, 그 자리가 모든 사람을 하나로 이어 주는 참으로 바람직한 자리가 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애국가와 국가를 견주어 보면 두 나라가 어떤 점에서 아주 닮았다는 느낌이 들면서, 며칠 전 신문 <아침 햇살>에 쓴 논설주간의 글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글의 중간 제목이 '한·일, 비겁한 동반자'로 되어 있는데, 마지막에 맺은 말이 다음과 같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침략 전쟁을 반성하지 않은 일본과, 식민지 청산을 주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의 혈손이 정신적 후손이 강고히 권력을 붙잡고 있는 한국은 사실 정신적으로 동반자 관계에 있다. 그 비겁한 관계를 이제껏 지속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뒤에도 군사 정권의 잔재가 여전히 활개를 치는 것을 보면서 더욱 착잡해지는 것은, 그 연유가 어제오늘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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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9 15:09 2012/02/19 15:09

"폭력은 사회적 모순이 논리적으로 표출된 것일 뿐이다." 이 말을 누가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폭력에 대한 이 짧은 명제는 마치 "국가는 경제적 지배계급의 정치적 지배도구이다."라고 말한 레닌의 이 말만큼이나 명료하게 들린다. 학교나 직장, 그리고 여타의 공동체에서 자행되는 물리적 폭력이나 비물리적인 폭력은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가장 일반화된 억압이자 일종의 공포다.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은 부도덕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 맺음은 필연적으로 억압적이다.

미국처럼 나라가 부유해도 부가 골고루 돌아가지 않으면 가난함만 못하다
/경향신문


사용자 삽입 이미지2005년 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들이닥쳤을 때, 미국 뉴올리언스는 아비규환이었다. 사망자가 최소한 1836명, 실종자는 700명이었다. 인명사고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그때 뉴올리언스에서는 인류가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이룩했던 문명이 사라졌다. 카트리나 이후 수주 동안 약탈, 살인, 방화, 강간, 기아가 이어졌다. 투입된 군대는 사람을 구출하거나 구호품을 전달하는 대신, 약탈자를 찾는 데 집중했다. 그것이 21세기의 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의 적나라한 모습이었다.

미증유의 자연재해 때문이었을까.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2008년 중국의 대지진, 2011년 일본의 대지진도 상상하기 어려운 재난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엔 문명, 질서, 신뢰가 남아 있었다. 미국은 일본, 중국과 무엇이 달랐을까.

미국은 부유한 나라다. 지난해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4만8000달러로 세계 7위다. 그러나 돈이 많다고 살기 좋은 사회는 아니라는 점이 카트리나 때 입증됐다. 아울러 세계은행이 발표한 가장 부유한 50여개 국가 중에서 미국은 정신질환 환자, 기대수명, 신생아 1000명당 사망한 유아수, 비만율, 수학과 읽기 평균 점수 등에서 최악의 수치를 보인다.

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인을 연구해온 영국의 역학자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은 유엔개발계획의 인간개발지수가 보여주는 소득 불평등에 주목했다. 상위 20%와 하위 20%를 비교해 소득 불평등의 정도를 나타낸 것이다. 나라 전체가 아무리 부유해도, 그 부가 골고루 돌아가지 않으면 가난함만 못하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미국의 소득 격차는 책에서 제시된 23개의 부국 중 싱가포르에 이어 가장 크다. 일본, 핀란드, 노르웨이 등은 상위 20%가 하위 20%보다 4배에 못 미치는 부를 갖고 있는 반면, 미국은 9배다. 즉 불평등이 문제고, 평등이 답이다.

여전히 가난한 제3세계 국가들이 있긴 하지만, 지금 인류는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지는 않다. 경제성장이 인류의 평안과 행복을 보장하는 시기는 지났다. 저마다 다른 경제 발전 단계를 거치고 있는 나라들의 기대수명을 비교해보자. 가난한 국가에서는 경제 발전 초기 단계에서 기대수명이 빠르게 증가하지만, 중진국 수준에 이르면 증가 속도는 감소한다.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의 수도 마찬가지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5000달러 수준에 이르면 수명과 행복의 그래프는 평평해진다. 2만5000달러를 번다고 짧게 사는 것도, 10만달러를 번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부유한 국가에서 건강문제와 사회문제는 국가 평균 소득과 관계가 미약하다(그림1). 그러나 소득 불평등은 관계가 있다. 미국이나 포르투갈처럼 불평등한 사회에서 건강과 사회문제는 나빠진다. 일본과 북유럽 나라처럼 평등하면 문제가 좋아진다(그림2). 미국의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는 “가난은 재화의 양이 적다는 뜻이 아니다.… 가난은 무엇보다 사람 사이의 관계다. 가난은 사회적 지위며(…) 계급 간의 불쾌한 구별이 되었다”고 말했다. 가난과 불평등 중에 더 나쁜 것은 불평등이다.

불평등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민감할까. 인간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그 와중에 자부심이라는 방어기제를 강화시킨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자부심이란 사실 불안정한 자기도취의 다른 이름이다. 과거의 가족, 이웃 중심의 안정적인 공동체가 붕괴하면서 사람들은 익명의 사회 속에 내던져졌다.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빠른 시간에 남의 시선을 끌고 자의식을 강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낯선 관계일수록 사회적 지위는 그 사람의 유일한 특징이 되기도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는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적 지위를 둘러싼 경쟁도 심해진다.

불평등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들이 있다. ‘사람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불평등한 포루투갈에서는 10%만이 ‘그렇다’고 답했지만, 평등한 스웨덴에서는 66%였다. 평등한 노르웨이의 카페에서는 테이블과 의자를 거리에 내놓고 그 위에 손님이 따뜻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도록 담요를 올려놓는다. 고객이나 행인이 담요를 훔쳐갈까봐 걱정하지 않는다. 반면 불평등하고 신뢰 수준이 낮은 미국에서는 카트리나 이후의 뉴올리언스와 같은 혼란이 일어났다. 때로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생명을 구하기도 한다. 1995년 미국 시카고에서 폭염이 발생했을 때, 신뢰도가 낮고 범죄율이 높은 흑인 지역에서는 사망률이 높았다. 사람들이 문을 열어두는 것을 두려워했고, 집을 비우기가 겁나 시에서 설치한 냉방 지역에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흑인 지역만큼 가난하지만 신뢰도가 높은 히스패닉 거주지에선 사망률이 훨씬 낮았다.

그리스인의 평균 수입과 1년 건강 관리 비용은 미국인의 절반 정도다. 그러나 그리스에서 태어난 아기의 기대수명은 미국에서 태어난 아기보다 1~2년이 길다. 심지어 미국 할렘의 흑인 남성이 65세까지 살 확률은 방글라데시인보다 더 낮았다. 불평등은 낮은 기대수명, 높은 유아 사망률, 작은 키, 저체중 출산, 에이즈, 우울증과 관련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불평등하고 사회 신뢰 수준과 통합 정도가 낮은 사회에 사는 젊은 남녀는 평등한 사회와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에게 닥친 난관에 맞선다. 10대 소녀는 임신을 한다. 15~19세 여성 1000명당 출산한 자녀수는 미국이 50여명, 일본과 북유럽 국가들은 10명 미만이다. 사회에 안정적으로 진입할 수단이 없는 10대 여성은 엄마가 됨으로써 성인의 사회관계망에 가입하려 한다. 이는 진화론적 관점에서도 타당한 전략이다. 배우자나 다른 어떤 사람, 자원에 의지할 수 없으면 일찍 어른이 돼 자녀를 많이 갖는 게 유리하다. 그 아이들 중 최소 몇 명은 살아남기 때문이다. 반면 배우자나 가족이 도와줄 거라고 믿으면 소수의 자녀를 적당한 시기에 가진 뒤 그에게 관심을 쏟는다.

10대 소년은 폭력을 쓴다. 하버드 의대 정신과 의사인 제임스 길리건은 폭력 행위란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참을 수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수치심과 모욕감을 피하거나 제거해 이를 정반대 감정인 자신감으로 대치하려는 시도”라고 말했다. 지위를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을 모두 박탈당한 남성이 자신의 마지막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평등한 사회에 사는 남자는 무례한 대우를 받아도 좋은 교육, 좋은 직장, 가족, 미래의 가능성으로 이를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불평등한 사회에 사는 사람은 이런 보호 장치 없이 폭력에 호소한다.

불평등을 완화하면 가난한 사람들만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불평등은 사회 전반에 퍼지는 ‘공해 물질’이다. 미국인의 기대수명이 일본인보다 4.5년 짧은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빨리 죽기 때문이 아니다. 비교적 잘사는 미국 백인들의 사망률도 다른 선진국 사람들보다 높다. 평등한 스웨덴과 불평등한 영국의 직업별 사망률을 비교하면, 비숙련 육체 노동자부터 전문 직업인까지 모든 부문에서 스웨덴이 낮았다. 영국 시인 존 던은 “사람은 아무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모든 사람은 대륙의 한 조각, 본토의 일부”라고 말했다. 불평등은 부자와 빈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저자들은 생물학, 인류학, 역사학의 근거를 들어 인간에겐 평등의 본능이 있다고 말한다. 근대 이후 불평등이 보편적이라는 인식이 퍼졌지만, 인간의 역사를 훑어보면 오히려 현재의 불평등한 사회가 예외라는 것이다. 인간 두뇌의 거울 신경세포는 다른 이의 특정 움직임을 관찰할 때 활동한다. 거울 신경세포의 존재가 밝혀짐으로써 인간이 서로에게 공감하는 능력, 영화 속에서 누군가 고통받는 장면을 볼 때 움찔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은 그 생물학적 근원부터 사회적 존재다.

평등한 사회를 위해 중요한 것은 정치적 의지다. 기업 최고위층에게 과도한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게 하고, 일터로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부자에게 높은 세금을 매겨야 한다. 마틴 루터 킹은 “도덕적 세계의 활은 매우 길지만 이는 결국 정의를 향해 굽는다”고 말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가 전면에 등장하자, 강한 정의감을 가진 사람들은 ‘밀실 평등주의자’가 됐다. 저자들은 “이제는 평등주의자들이 공공 영역으로 돌아올 때”라고 말한다.

원제인 ‘The Spirit Level’은 건설 현장에서 바닥의 수평도를 측량하는 도구인 수준측량기를 의미한다. 바닥이 기울어지면 건물이 무너지듯이, 불평등 정도가 심하면 사회가 망가진다. 2009년 영국에서 처음 나온 이 책은 당시 보수당 당수이자 현재 영국 총리인 데이비드 캐머런과 그와 정치적으로 반대편인 노동당 당수 에드 밀리밴드로부터 동시에 추천받았다. 지금 평등은 좌파의 표어가 아니라 시대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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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8 20:36 2012/02/18 20:36

녹색당과 육식

녹색당 2012/02/11 21:42

나는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 아니 일전에도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완전히 안 먹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찾아서 먹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먹을 수 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떡국을 먹으러 갔는데 첨가된 소고기를 먹지 않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들과 육개장을 시켜 먹으면서 나만 다른 것을 먹기가 약간 어색할 때가 있다. 그래도 술 안주로 소고기를 시켜 먹는 자리는 잘 가지 않는 편이고 굳이 소고기를 시켜 먹는 분위기가 아니면 나서서 다른 것을 시키려고 한다.

내가 소고기를 안 먹는 이유는 나의 어린 시절의 경험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10살까지 지리산 골짜기 산골 마을에서 자랐는데 소는 재산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가족이었다. 소가 아프면 모두 잠을 못자고 걱정했고 소가 새끼를 낳으면 외양간 주변에는 얼씬도 않고 마치 도둑질이라도 하듯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떠들고 웃지도 못했다. 나는 누렁소나 송아지와 자주 놀았고 자주 싸웠다. 그러니 시골에서 소는 나의 친구들과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지난해 말 녹색당 창준위에 참여하고 주위 사람들과 동료들에게 당원 가입을 권유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이런저런 말들을 듣는다. '그렇게 고기를 먹으면서 녹색당을 한단 말이야?' '나는 채식주의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가입할 수 없다', '육식을 끊으면 가입하겠다' 이런 말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녹색당을 채식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다. 물론 나는 채식주의자가 아니고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돼지국밥을 즐겨 먹는다.

내가 녹색당에 가입한 이유는 녹색당의 정책과 활동이 좌파'적'으로 되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고 사회주의자로서 나의 정치 활동이 녹색당을 통해 표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여전히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나의 이런 이유에 대해 '어처구니 없는 망상'이라고 비난한다. 사실 육식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면서 어떻게 초록과 생명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비난은 당연하다.

나는 평소 필수영양을 초과하는 영양섭취는 죄악이라는 말을 종종했지만, 그 말이 나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을 오늘 깨달았다.(이 문장을 10번쯤 고쳐썼다.) 그런 생각을 평소에는 왜 못했겠느냐마는 그 말이 나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애써 부정했던 것이다. 한겨레신문의 이 기사를 읽으면서 육식에 대한 문제를 다시 생각하기로 결심했다.


도축 직전의 소·돼지 “제발 기절하게 해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당신 가정(4인 기준)의 식탁을 위해 한해 64마리의 동물이 죽는다. 닭 7억2528만마리, 돼지 1463만마리, 소 75만마리 등 국내에서 한해 가축 8억1550만마리가 도축된다. 하지만 이들이 어떻게 죽는지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내에서 도축되는 돼지 10마리 가운데 1마리는 의식이 있는 채로 도살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돼지의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먼저 기절을 시킨 뒤 온몸의 피를 빼는 방혈 작업을 시작하지만, 기절이 제대로 안 되거나 다시 깨어나는 개체가 10%를 넘고 있는 것이다.

 9일 <한겨레>가 입수한 ‘도축시 동물복지 평가기준 확립에 관한 연구’를 보면, 도축장에서 전기기절시킨 돼지 7089마리 가운데 12.3%인 874개체가 의식을 회복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태에서 도축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는 농림수산식품부가 국내 최초로 2009년 전국 23개 도축장에 대해 동물복지 실태 조사를 벌인 결과다.

 돼지는 각 농장에서 화물트럭에 실려 각 도축장으로 이동한다. 운송밀도가 높고 운송거리가 길수록 돼지의 고통은 커진다. 죽음을 앞둔 돼지는 덜컹거리는 화물트럭 위에서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다. 돼지 한 마리가 서 있는 공간은 불과 0.37㎡, 신문지 한 장(0.43㎡)보다 작다. 이런 상태로 돼지들은 도축장까지 짧게는 7㎞, 길게는 237㎞를 실려간다. 평균 거리는 71.2㎞, 약 1시간30분 정도의 거리다.

 도축장에 도착한 돼지들은 계류장으로 옮겨진다. 돼지들은 들어가지 않으려고 저항한다. 이때 전기봉이 사용된다. 전기봉을 맞은 돼지는 계류장으로 쫓겨간다. 지난해 대한양돈협회가 전기봉 사용이 육질을 떨어뜨린다며 사용 자제를 요청한 데 이어 정부도 축산물위생관리법 시행규칙에서 사용 금지를 명문화했지만, 일부 도축장에서는 아직도 작업 편의를 위해서 전기봉이 이용되곤 한다.

 본격적인 해체 작업 전에 돼지들은 몸을 씻는다. 계류장에 달린 샤워 꼭지에서 물이 나오고 특별히 더러운 돼지는 사람이 다가가 호스로 물을 뿌린다. 그리고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진다. 전기기절기가 위에서 기다리고 있다. 돼지는 통나무처럼 굳어 떨어진다.

 이번 조사 대상 도축장 23곳 가운데 전기기절 방식을 이용하는 곳이 21곳으로 91%를 차지했다. 나머지 2곳에선 돼지가 밀폐된 이산화탄소 기기에 들어가 기절한다.

 돼지가 기절하면 곧바로 방혈을 시작해야 한다. 온몸의 피를 빼내 해체를 준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절 뒤 방혈 과정에서 5초 이상 뒷다리를 차는 등 의식이 회복된 것으로 의심되는 개체는 12.3%에 이르렀다. 전기기절 방식의 경우 돼지의 크기에 따라 완전히 기절이 안 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이산화탄소 방식의 경우 811마리 가운데 14마리로 1.7%에 불과했다. 농림수산식품부 관계자는 “이산화탄소 방식을 전면적으로 쓰는 곳은 제주 농협공판장 등 소수밖에 없고 다른 곳은 2~4마리를 넣는 소형기기만 쓰이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산화탄소 기절법을 유도하고 있지만, 민간 도축업체로선 비용이 들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조금만 노력해도 동물의 고통은 크게 줄어든다. 충북 음성의 농협중앙회가 운영하는 도축장은 ‘소 도축 예약제’를 도입했다. 과거엔 선착순 방식이어서, 늦게 도착한 도축 물량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농협중앙회 관계자가 말했다.

농협중앙회 음성축산물공판장의 도축장 내 계류장에 들어선 소 한 마리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 큰 소들이 좁은 화물트럭에 위에서 몸을 부비고 기다렸죠. 어떨 땐 날을 새우고 주말·명절엔 사나흘을 기다리기도 했어요. 그동안 소들은 물도 못 마시고 밥도 못 먹어요. 하지만 지금은 예약시간에 따라 소가 와 계류장에 잠시 머물렀다 도축돼요. 예약제가 동물의 고통을 줄여준 거죠.”

 그나마 농협이 운영하는 곳은 시설이 나은 편이지만, 민간이 운영하는 도축장의 경우 열악한 시설도 적지 않다. 정부는 현재 83곳인 소·돼지 도축장을 2015년까지 36곳으로 줄이는 구조조정을 추진중이다. 농림수산식품부 관계자는 “도축장이 대규모화되면 위생이나 동물복지 수준이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구조조정만 기다리지 말고 정부가 적극적인 규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동물보호단체인 생명체학대방지연합의 박창길 대표(성공회대 교수)는 “지난해 구제역 생매장과 최근의 송아지 도태를 보면, 정부는 말로만 동물복지를 외쳤지 실제로 한 것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동물보호법 시행규칙에 근거를 마련해 ‘도축장 동물복지 기준’을 만들 방침이다. 국내 제도 미비로 한-유럽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과정에서 지적당했던 부분이다. 이달께 시행규칙이 확정되는 대로 전문가 협의체를 만들어 제정에 나서면, 이 기준은 내년께 시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농림수산식품부는 강제성이 없는 ‘가이드라인’ 수준을 상정하고 있어서, 고통 없이 죽을 동물들의 권리가 얼마나 인정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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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1 21:42 2012/02/11 2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