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시대다. 마치 민주주의의 척도가 투표율이라도 되는 것처럼 반드시 투표하여 심판하자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지난10월 재선거에서부터 기세를 올리고 있는 이 망할놈의 투표 운동이 끝나려면 올 한해가 다 가고 내년이 지나도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조차 든다. 이명박 찍은 놈들 손가락 잘라라고 아무리 외쳐도 손가락을 자를리 만무하지만 그 손가락 탓하는 사람들의 입을 꿰메는 편이 더 낫겠다.

선거와 투표에 올인하자고 나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패배자들일 텐데 그들은 꿈도 희망도 버린지 올래다. 오직 자신의 현세적 바람을 타인의 잘못을 탓하면서 대리보충하려는 속셈이다. 꿈도 희망도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처신은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투표일은 거룩한 종교의식을 치르는 기념일과 같다. 붉은 잉크로 얼룩진 투표 용지는 신전에 바치는 헌화인 셈이다. 거룩한 참여가 그들에게는 유일한 안식이기 때문이다.

블로그 communist left의 "우리를 위한 투표가 아니다 (1%를 위한 투표일 뿐이다)"를 읽고 오래전 쓴 글을 떠올리고 댓글로 달았는데,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여기 올린다.


반드시 투표를 해야 하는가?

아니다. 나는 오히려 투표 행위를 부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투표 행위는 지배자들의 정기적인 파티에 들러리를 서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회에서 투표를 독려하는 것을 보면 좀 화가 난다. 학생들의 정치 의식이 지배적 통념을 넘어서지 못하고 오히려 지배적 통념을 재생산 하는데 협력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최근 선관위에서 유명 배우와 심지어는 축구 선수들까지 동원하여 투표 독려에 애쓰고 있다. Tv 광고가 짜증스럽다. 우리가 누군가를 찍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그들의 의도가 가증스럽다.

거리 곳곳에 장식된 출마자들의 포스터를 보면 저들은 분명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안다. 정치가 이제 다른 많은 직업들처럼 하나의 직업이 되었다. 저들은 인민에 대한 지배를 직업으로 삼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저들은 인민 위에 군림하고 인민의 수고를 자신들의 전리품으로 가져갈 것이다.

이런 말이 정치적 허무주의를 유포시킨다고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왜 우리는 투표를 해야 하는가? 뭐 굳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를 거부하는 것도 권리 행사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왜 국가는 투표를 독려하는가? 투표율이 높고 낮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가?

투표율이 높으면 저들은 웃으면서 지배를 정당화할 것이다. 투표율이 현저하게 낮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물론 저들은 불안해할 것이다. 왜냐하면 저들은 언제나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인민들에게 저들의 억압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느냐고 물어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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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7 18:27 2012/01/27 18:27

[김종철의 수하한화]비례대표제, 합리적 정치의 선결조건(경향신문, 2012. 1. 26)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보를 전부 폭파하고 강을 원상태로 돌리면 됩니다.”
“얼마 전에 완공했는데 폭파하려 하겠습니까? 22조원이나 들인걸요.”

“이제 시작입니다. 4대강에 만들어놓은 보들을 그냥 놔두면 그 후유증 때문에 돈이 계속 들어갈 겁니다. 수질악화, 퇴적, 역행침식, 홍수 증가가 나타날 것이고, 앞으로 한국 국민의 출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겁니다. 4대강사업의 후속비용을 지속적으로 부담할 경제력을 가진 나라는 지금 지구상에 없습니다. 독일의 경제력으로도 어림없습니다. 보를 폭파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가장 값싸고 효과적입니다. 22조원이 소모된 지금 없애는 것이 앞으로 후속비용을 더 많이 들이고 없애는 것보다 훨씬 이익이지요.”

이것은 지금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어떤 한국인과 독일의 저명한 하천관리 전문가 사이에 최근 있었던 대화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이 대화의 질문자를 포함한 몇몇 재독한인들은 2010년 6월부터 현지에서 ‘번역연대’라는 모임을 결성하여 외국어로 된 자료와 정보들을 우리말로 옮겨 인터넷을 통해 열성적으로 소개해왔다.

정부의 완강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4대강사업’이 ‘대운하’를 상정하지 않고는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공사였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독일 거주 한국인들이 이 문제에 특히 민감했던 것은 까닭이 있다. 원래 ‘대운하’ 계획은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독일의 마인-다뉴브 운하를 둘러본 끝에 얻은 착상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번역연대’의 출발점은, 독일의 예로써 ‘대운하’ 혹은 그 위장된 형태인 ‘4대강사업’을 정당화하고자 한 정부와 어용학자, 어용언론의 논리에 내포된 속임수와 거짓을 묵과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럽의 하천상황에 관련된 귀중한 과학지식에 근거하여, 국내의 어떤 비판세력보다도 더 안타깝고, 더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우리나라의 보물 중의 보물인 4대강과 그 유역이 전면적인 파괴에 노출된 현실에 맞서왔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공사 완료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4대강사업’의 온갖 후유증을 열심히 은폐하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계속 덮고 간다면 막대한 돈이 들어간 이 국책사업이 결국 나라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재앙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4대강사업’은 정부의 실책이라기보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인재(人災)로 규정될 날이 곧 올 것이다.

따져보면 ‘4대강사업’은 극단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꼭 이명박 정부만 그런 게 아니지만, 특히 이 정부는 4대강 이외에도 광우병 쇠고기 수입문제, 용산참사, 미디어법, 한·미 FTA 등등 사활적인 중요성을 가진 대부분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국민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보려는 자세를 한번도 취하지 않았다. 명백히 주권재민을 천명하고 있는 헌법을 정부 자신이 끊임없이 무시·폄하해온 것이다.

국제사회가 알아주는 훌륭한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자유선거로 집권한 정부에 의해 이처럼 허망하게 민주주의가 퇴행을 강요당해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여러 원인을 들 수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현행의 한국정치를 규정하는 제도적 틀 그 자체의 결함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정치인 개개인의 자질도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많은 한국인들이 양심적인 정치가들을 고대하는 심정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물이 아니라 결국 제도와 시스템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오늘날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유일한 현자임을 자처하며 전횡과 폭주를 계속하더라도, 그가 국회 다수당을 지배하고 있는 이상, 권력남용을 제어할 방법이 없다. 그 필연적인 결과는 나라 전체에 미치는 재앙일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권력자 자신도 불행을 면치 못한다. 이것은 숱한 선례에서 보아온 역사적 철칙이다. 그런데도 권력자의 권력남용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은 무릇 절제된 권력행사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권력자 개인의 사람됨만 괜찮으면 권력과 겸손이 양립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환상임이 분명하다.

양심과 상식에 어긋나는 정치에 오래 익숙해져온 결과, 사람들은 대개 정치라면 무조건 더럽다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한다. 나 자신도 오랫동안 그런 정서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정치에 대한 미련은 접고, 지역 중심의 소규모 공동체 속에서의 협동적 자치생활이 더 현실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새만금, 4대강, 한·미 FTA, 남북관계의 악화, 그리고 후쿠시마 사태는 국가 차원의 건전한 정치적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한, 모든 게 허사라는 것을 명확히 상기시켜주었다. 그래서 나는 어둠을 저주하기보다는 촛불 하나라도 켜는 게 낫다는 심정으로 최근에 녹색당 창설에 용기있게 나선 젊은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녹색당은 아직 한국에서는 낯설지만, 이미 세계 70여 국가에 걸쳐 인류사회가 부닥친 공통 현안을 ‘녹색적 비전’에 입각하여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결집한 21세기 유일한 국제주의적 정당이다.

그런데 새 정당을 꿈꾸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새삼 시야에 들어왔다. 즉, 지역구 중심 소선거구제에 의한 지금과 같은 의회 구성 방법으로 한국의 국회가 앞으로 끊임없이 닥칠 온갖 엄중한 위기에 대처하는 것은 차치하고,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합리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게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현재처럼 국회의원 대다수가 지역구라는 국지적 이해관계에 얽매여 협소하고 단기적인 시야밖에 가질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국가와 세계적 차원의 문제에 집중하는 국회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선거법을 고쳐 적어도 독일 정도의 비례대표제를 확보하는 것보다 더 나은 현실적 해법이 없는 듯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회가 편협한 국소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대표자들에 의한 진실로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정책 결정의 장이 되기를 기다려봤자 백년하청일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독일이 핵발전소의 단계적 폐기라는 실로 모범적인 결정을 내린 데에는 3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녹색당 이외에 비례대표제라는 요인이 큰 작용을 했음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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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6 15:43 2012/01/26 15:43

나의 카메라

사진 2 2012/01/24 22:41

나는 자주 하늘 사진을 찍는다. 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서면서, 혹은 신호대기 중인 차에서 고개를 내밀기도 하며 심지어 운전 중에도 하늘에 걸린 구름에 마음이 동하여 오른 손으로 가방을 뒤져 카메라를 꺼내 창문을 내리고 하늘을 찍는다. 내가 사진을 찍지 않는 날은 거의 하늘을 보지 못하는 날이다. 그래서 하늘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의 노트북에는 하늘을 찍은 사진이 엄청나게 많다. 아마 현재 남아있는 사진의 두 배 이상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어제 우연히 리차드를 만났다. 리차드는 미국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부전공으로 이탈리아 문학과 이탈리아어를 전공했다. 한국에서는 초등학교 외국인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항상 엄청나게 큰 트라이포드와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들고 다닌다. 어제 그는 그동안 자기가 찍은 사진을 내게 보여주며 굉장히 자랑을 했는데 사실 그가 자랑하고 싶었던 것은 그가 그동안 사 모은 카메라일 거라고 생각했다. 리차드는 수입의 대부분을 렌즈 구입에 쓴다고 한다. 그가 내게 보여주는 렌즈들은 50mm 표준렌즈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수백만원 짜리다. 35mm 렌즈 하나가 1백만원이 넘는단다.

리차드가 주로 찍는 사진은 풍경화다. 그가 찍은 사진들을 보면 아이크로 렌즈로 거미나 잠자리, 꽃잎에 앉아 꿀을 빩고 있는 꿀벌, 배추벌레 등 곤충과 식물을 세밀하게 촬영한 것들과 자연이나 도시 풍경들이다. 나도 물론 가끔 풍경을 찍기는 하지만 내가 찍는 대상들은 주로 하늘의 구름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사용하는 카메라는 200만 화소의 폰카와 아이팟의 푸딩카메라, 작은 500만 화소의 니콘 카메라가 전부다. 그래도 나는 카메라를 세 개나 가지고 있는 셈이다.

 

사실 나는 꽤 괜찮은 카메라가 좀 있다. 니콘 FM2와 F4, 콘탁스G1. 이 카메라들은 모두 필름 카메라다. 콘탁스G1은 Carl Zeiss 렌즈를 달고 있어서 호기심에 구입한 물건인데 니콘 렌즈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뭐 혹자는 색감이 뛰어나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물론 이 카메라들은 모두 책장에서 휴식 중이다. 앞으로도 계속. 나도 괜찮은 DSLR 카메라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사진은 지난해 가을에 200만 화소 폰카로 찍은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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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4 22:41 2012/01/24 2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