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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글 출처 : http://cafe.naver.com/jubo/2085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2인, 239 p , 1996.3 , 큰샘출판사
제 1장 옥중에서 만난 사나이 17
재림 메시아로 믿고
일본의 조선통치시대에 만주 신경(현재 중국)의 공업전문학교 토목과를 졸업한 나는 만주국 관사(길림성)를 거쳐 일본군의 공병대 중위로서 중대장으로 근무한 경험도 있고 북한에서는 말하자면 엘리트로서 장래가 촉망되어 있었다. 그런데 착임해서 얼마 않되는 5월 7일 엉뚱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제 2대대의 제 3중대장으로서 황해도 신막에 근무하고 있던 허정이란 사람이 엉뚱하게도 군의 차량으로 상인들의 물자를 수송해 주고 돈을 받기도 하고 여성들의 모발등 북의 상품을 남쪽 한국측에 파는 암매상에 협력하고 있던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체포된 허정은 2월 2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또 대대장인 나는 부하의 부정 행위에 대한 감독 불충분이란 것으로 책임을 물어 직무태만죄로 징역 3년형에 선고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평양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흥남 특별 노무자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2월 2일 35세 때의 일이다.
18
콩, 좁쌀, 보리쌀, 옥수수 등을 뭉친 조그만 주먹밥인데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것 처럼 엉성했다. 이가 엉망으로 빠진 그릇에 국이 담겨져 나왔는데 두 서너 조각의 미역이 둥둥 뜬 소금기가 좀 있는 그런 국이었다. 어제부터 한방울의 물도 입에 대지 못한 채로 흔들림 속에 담겨온 몸 동아리는 지치고 지쳐서 속은 공복인데도 식욕이 나지 않는다.
수용소에서 조선 질소 비료 주식회사(구 일본질소) 흥남 공장까지는 약 4킬로의 거리가 된다. 이날부터 비가 오나 눈이 쌓이거나 우리들은 매일 걸어서 감옥과 공장을 왕복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횐 암모니아비료 가루가 산처럼 괌인 곳에서 10인 1조가 되어 비료포대의 가마니에 하루, 1,300포대를퍼 넣어야 하는 책임량(노루마)을 할당받았다. 산더미 같은 비료앞에 저울이 놓여 있고 공장측의 검량원이 중량을 달기 위해서 앉아 있다.
20
배가 고파서 잠을 이를 수가 없을 때 미수가루 봉지를 쳐다 본체로 밤을 새운 일도 여러번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일어나니까 어제 밤에 미수가루를 도적맞았다고 모두들 떠들석 하였다. 훔친자가 눈에 띄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자루 돌림으로 패댔다. 이러한 꼴은 징역생활이라고 하기 보다 아귀지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22
그러던 어느날 40키로의 비료가 든 가마니의 짐 꾸리기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내 옆에 10인의 조원 가운데서도 훨씬 건장해 보이는 30세가량의 사나이가 와서 "가르쳐 들이지요"하고 말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자기의 일거리를 가볍게 해치우면서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더욱 일에 익숙해져서 훌릉하게 해 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건강해서 힘은 있었으므로 몇일 동안 계속해서 가르쳐 주는 바람에 그럭저럭 한사람 몫의 작업 책임량을 해낼 수가있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다.
그 사람과는 방이 달랐으므로 작업이 끝나고 만원이 된 방으로 돌아오면 공복의 쓰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깊은 잠에 떨어진 동료들이 있을 뿐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하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지워져서 돌아가신 후 삼일 후에 부활되어 40일간 이곳 저곳에서 재림하였다. 그리고 감람산(성경에 나오는 산)에서 여러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실 때 예수님은 "너희들은 어찌하여 하늘을 처다 보는가, 나는 이처럼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이 머지 않아또 재림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간밤에 꿈을 꾸었지요 꿈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말 하던가요"라고 묻는 것이다. 어떻게 그가 알고 있는 것민지 이상 하였지만 나는"재림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 사람이 죄수번호 596을 단 문용명 이었다.
그로부터 15일정도 지난 어느날 아침 집회에서 "919번 소장실로 오도록"호출되었다. 919번은 나의 죄수번호이다. 무슨 일일까?나는 겁에 질린 채 가보니까 소장은 나를 쳐다보고 "어제 총반장이 만기로 출옥하였으므로 지금부터는 네가 전죄수의 총반장으로 복무하라."
단순하게 계산한다면 1년 남짓해서 전감한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흥남수용소에는 그 보충을 위해서 매월 100명 정도의 죄수가 각지의 형무소에서 후송되어 오고 있었다. 총반장이 되고 나면 사내에서는 자유가 꽤 통하므로 기회를 엿보아서는 문선생을 찾아가 잡담을 하기도 하고 되도록이면 편안한 작업으로 회부될 수 있도록 손을 쓰기도하였다. 어쨋거나 꿈속의 노인에게서 계시를 받아 내가 꿈에 본것을 먼저 알고 있던 이상스런 힘에 놀란 나에게는 문선생은 바로 재림주라고, 나는 믿게되었다.
26 "여수 뒤편에 있는 묘지 가운데 이런이들의 무덤이 있다. 그 앞에서 세번째 어린이 무덤속에 시가 수억원의 보석이 들어있는 상자를 자기가 묻었다. 이제 나의 명은 다한것 같으니까 주반장에게 들이는 것이니 남쪽에 갈 기회가 있거든 꼭 찾아내시오"
그런데 2년후의 부산시대, 문선생은 친구와 둘이서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여수로 가서 필연적으로 찾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묘지장소는 알아 냈으나 가장 중요한 아이의 묘는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문선생은 여수에 갔던 일조차 나에겐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선생의 이야기는 유아세례를 받아서 젊었을때에는 교회 집사로도 일했고, 조금은 성경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 할수 있는 나에게도 이해는 커념 대단히 반발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예를들면 세례요한은 들녘 에서 가죽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어가면서 수도를 했고 "천국이 가까와오니까 회개하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자기의 책임 분담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을 잘리어 죽음을 당한것이다 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기독교에서는 세례요한은 아주 훌릉한 인물로 가르치고 있는 만큼 나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더욱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책임을 다 할수가 없었다. "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와서 여느때처럼 두사람씩 손을 묶은 죄수들 1,500명을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 오직 땅만 보고 비료공장으로 서둘렀다. 도착한 후에 총반장인 나는 아마 10분정도 전원의·점검과 작업배치를 정했다. 그무렵 문선생에게는 빈 가마니에 짚을 넣어두는 일로 병자나 노인들이 할 수있는 손쉬운 작업을 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서 "총반장으로서 볼일이 있으니 잠간만 오세요"라고 불러내서 조용한 창고 속의 빈 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인 그 위에 올라가서 둘이서 마주보고 앉았다. 총반장에게는 작업장에서도 이러한 자유가 인정되어 있어서 간수나 죄수도 이의를 하는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몇 시간이라도 이야기 할수가 있었다.
28 이날의 이야기는 성경의 "창세기"부분이었다. 창세기의 요지는 6000년전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사람으로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며 에덴의 동산에 살게 하였다. 그리고 걸맞는 반려를 만들기 위해서 아담이 자고 있을 때 아담의 갈빗대 한개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해와'이다.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만은 따 먹어서는 안된다고 명하였으나 뱀이 해와를 꼬였기 때문에 해와는 드디어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고 남편인아담에게도 권해서 먹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금단의 나무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발견된 때에는 부끄러운듯 무화과의 잎으로 하체를 가리우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해와를 만든 목적은 해와가 성숙하면 이세상에 죄없는 자손을 번식 시키려고 그랬던 것인데, 하나님을 배반한 두 사람은 얼마 안돼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죄를 범하고 더럽혀진 아담은 땀 흘러 일하지 않으면 살아 갈수 없게 되었고, 해와는 해산하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가인과 아벨의 형제가 태어났는데 얼마 안가서 형인 가인은 동생인 아벨을 죽이게 되어 이 세상에 처음으로 죄인이 된 것이다. 이상이 성경에 씌어져 있는 것이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온 해석인 것이다. 그런데 문선생은 "성경의 이러한 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세계의 크리스챤들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문선생의 해석은 이러하다. 해와를 꾀인 뱀이란 천사장 루시엘의 이름인데 루시엘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감언으로 미 성숙한 해와를 유혹해서 금단의 나무 열매를 따먹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루시엘은 해와와 섹스를 한것이다. 그리고 처녀성을 범행당한 해와는 하나님께 발각되기 전에 사탄의 피로 더럽혀진 몸 그대로 남편인 아담과도'성교를 했다. 지금까지는 금지 되었던 실과를 따 먹은것이 죄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들켰을 때 왜 해와는 무화과의 잎으로 하반신을 가리운 것일까? 사람은 몸에 상처가 나면 상처에 반창고 같은 것을 붙여서 아물게 하는데 그것과 같은 논리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이 금지시킨 성행위을 하고 깨끗했을 하반신에 상처가 생겨 그래서 무화과의 잎으로 그 부분을 가리운 것이다 해와는 그패 까지 나체로 있어도 부끄러움을 모르지 않았던가. 그것은 말하자면 하반신의 성기부분으로 성행위를 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부분에 죄가 있으니까 하반신을 가리운 것이다.
신랑 신부가 결흔식을 올리고 정정당당하게 첫날밤을 지내도 다음날 가족들 앞에 모양을 나타낼때 어던지 모르게 마음속에 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6천년 전에 천사장 루시엘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처녀인 해와와 성행위를 할 때에 "색큼"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미숙한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성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미숙한 과실을 따 먹으면 색큼한 맛이 나는 것도 미숙한 해와와 천사장 루시엘이 성행위를 함으로서 "색큼"함을 느낀것과 같은 것이다.
30 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탄생케 한 목적은 그 4천년전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간세계를 창조 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제2의 아담으로서 탄생시켜, 제1의 아담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했던 목적을 실현 시키고자 한 때문이다.
첫째로 자기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성행위를 해서 제1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겼던것을 되찾아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달성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때 예수는 마리아에게 "여인이여, 당신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요"라고 말했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성행위 할 생각은 전혀 없이 이웃집의 잔치집에서 포도주를 만들것만을 원하였으므로 정말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으로 말 한것이다. 성모마리아가 예수와 성교를 한다고 하는 것은 제1의 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되돌려 빼앗아 온다고 하는 복귀의 원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마리아가 모자협조(모자간의 성교)를 하지 않았으므로 예수가 순혈을 이어 받을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후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 자매를 대단히 사랑하였고, 그녀들도 예수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막달라 마라아와 결혼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인가롯 유다의 연인으로서 곧 결혼할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인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 하였으므로 유다는 질투하고 있었다.
유다는 예수에게 반역해서 예수를 로마의 병정에게 은화30냥에 몰래 팔아 넘기게 되었는데 실은 돈이 욕심이 나서 판것이 아니라 자기의 여인을 예수에게 빼앗긴것을 질투해서 판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데리고 각지를 돌고 있을때 일행은 수가촌이라는동네에 이르러 제자들과 먹을것을 찾고 있었다. 그사이 예수는 고단해서 우물가에 앉아서 쉬고 있을때 사마리아의 여인이 물을 뜨려고 왔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당신의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라고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물을 내가 마시면 또 목이 마른다.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물은 당신속에서 생수와 같이 영원히 흐르게 된다. "(주=성경과는 역순이지 만 문선명의 이야기대로) 예수는 이 사마리아의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예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기때문에 실현하지 못하였다. 32 또 어느때 세리와 바리새인의 사람들(성경에는 세리와 바리새인의사람이 제일 악인으로 되어 있는듯 하다) 이 간통한 여인을 예수앞에 데려왔다. 예수가 "이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말하면 모세의 계율에 간통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으므로 모세의 계율에 상반되는 것이되고, 또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면 예수가 언제고 "죄 있는 자가 있거든 일곱번씩 칠십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쳤던 말이 거짓이 된다. 참으로 거북살스런 문제로서 대답하기가 난감한 것이었는데 이때 예수는 아무 말도하지 않고 땅에 글자를 썼다. 사람들이 다가가서 보니까 거기에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죄없는 자가 있거든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쓰여 있었다. 모여있던 많은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 죄를 지고 있었으므로 하나 둘 다 사라지고 예수와 여인만이 남았다. 거기서 예수는 여인에게 말했다. "나도 당신을 용서하는 것이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도록 하라" 이때에도 또 예수는 복귀섭리에 따라 이 여인과 성교를 해야만 했었는데도 실현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음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나병환자가 있는 시몬의 집에 갔을 때의 일, 모두들 식사를 하고 있을때 한 여인이 귀중한 향유가 든 항아리를 가지고 와서 감동의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었다. 여자는 머리털로 발의 눈물을 밖고나서 예수의 발위에 기름을 부었다. 제자들은 "어째서 귀중한 기름을 그렇게 함부로 쓰는가 그것을 많은 돈을 받고 판다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쓸수 있을 테낀데"라고 그여인을 비난하였다. 예수는 "그 여인을 책망하는 것은 그만해라 그 여인은 나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해 주었으니까"라고 말했다. 예수는 이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때에도 또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으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질머지고 십자가에서 죽어 갔으므로서 그 피의 댓가로 죄인이 깨끗하게 되어 구원한다고 하는것처럼 모두 믿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창조의 이상을 옳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제2의 아담으로서 이세상에 예수를 탄생시킨 것은 제 1의 아담이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도로 찾아서 본래대로 돌려 놓기 위한 것이고 요컨대 복귀섭리를 실현하는 사명을 달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가 복귀섭리를 위해서 이세상에 탄생 한것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예수가 성모마리아와 최초의 성교를 한다고 하는 죄없는 피를 전하게 되기 위한 중요한 의식의 챤스를 예수에게 주지 않았다. 첫째로 필요한 "모자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서 예수는 이상에 태어났어도 복귀섭리를 다하지 못하였고 결흔조차 하지 못한 동안에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
만약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즉음으로서 그 피의 대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 되였다고 하는 해석이 을다고 한다면 그러한 기도를 했을리가 없다.
그렇다 재림주(메시아)는 어디로 와서 어떻게해서 인간을 구제하는 것인가? 구름을 타고 감람산을 통해서 오는 것인가? 34 아니 그렇지 않다 동방에 있는 나라, 횐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고, 4계절이 분명한 나라, 동쪽에서 해가 뜨는 나라, 그것은 우리들의 대한민국이고, 이 나라에 재림하기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재림주는 제3의 아담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예수가 하지 못했던 복귀섭리를 이세상에서 실천해서 인간의 6천년간 죄악의 역사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고 사탄의 피로 더렵혀진 인간의 피를 성스러운 하나님의 피와 교환 함으로서 이 세상을 영원히 죄와는 관계가 없는 세 그것이 재림주의 사명으로서 잃어버린 해와의 순결을 되찾아 만인 앞에서 처녀와 "어린양찬치"를 행하고 참된부모 아담과 해와에 의해서 전세계의 인간의 피가 더럽히지 않은 피와 교환되게 되는 것이다.
부모님이 같은 기독교 신자이신 집안에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교회 집사 까지한 경험이 있는 나는 문선생의 성경해석에는 귀를 의심하고 머리를 갸우뚱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반면 꿈속에서 "문선생이야 말로 재림의 메시아다"라고 하는 계시를 받은 나는 반신 반의 하면서도 차츰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선생님은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이며,어떻게 해서 이상의 천국을 완성시켜 나아가실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우선 천사장 루시엘의 성교로 인해서 빼앗겼던 것을 그것과 같은 방법으로 남편이 있는 부인 6인 즉 6인의 마리아를 빼앗음으로서 되돌려 놓지 않으면 아니된다.
또 이나라의 법률에서도 유부녀와 성교하면 간통죄가 됩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수 있습니까? 아니야 걱정할것 없네 머지않아 세상은 극도로 성이 문란해지네 길바닥에 남녀가 천연덕스럽게 성교를 하게 되고 통행인은 그것을 보더라도 지금의 악수하는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을것이며, 이상스럽게 느낄것도 없게 된다. 또 그무렵이 되면 인간의 심리상태도 달라져서 자기의 처나 연인이 다른 남자와 성교를 하더라도 노한다던지 질투를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복귀원리를 들은 여인들은 복귀를 받고 싶어서(성교를 하고 싶어서)자기들이 자원해서 오게 된다. 그 시기가 오면 재림 메시아는 6인의 유부녀를 마리아로서 남편에게서 빼앗아 더렵혀진 사탄의 피를 정화하기 위해 피를 교환하는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을 "혈대교환(血代交換)" (주=말하자면 "피 나눔"이라고 하는것.후술)이라고 하는 것인데 복귀의 의식인 성교에는 지금의 사단의 세상과는 달라서 일정한 규정이 있다. 재림메시아가 유부녀의 더렵혀진 사단의 피를 정화하여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하기 위해서 복귀의 의식으로서 행하는 성교는 메시아가 위에서 3회씩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것은 소생, 장성, 완성의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6마리아와 도합 18회의 성교에 의해서 유부녀들은 마리아로서 환생하는 것이다. 6마리아를 복귀시키면 재림의 메시아는 다음에 성교경험이 없는 처녀를 골라서 해와로 정해 "어린양잔치의식"(정식 결혼)을 한다. 아담의 대리인 메시아와 해와는 참아버지, 참어머니이며, 그 두사람에게서 태어나는 자손은 영원히 죄가 없는 선한 존재가 된다. 36 그래서 이 세상을 6천년전에 하나님이 창조하려고 하였던 이상의 원점으로 돌려 놓을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 이 세상에는 천사장 루시엘에게 해독을 입은 사단의 피를 받은 인간이 50억인이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전부를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최초에 재림 메시아에게 복귀된 여인은 다른 남자의 식구(신자를 말한)와 여자가 2회 위에서 "소생, 장성, 완성"의 3회에 걸쳐 복귀를 해 줄수가 있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넓혀가게 되는 것이다. 다만, 복귀를 받으면 그전에 7년간은 "성별"(성교를 하지 않는 기간)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복귀를 받을 자격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만큼 7개월간의 성별만으로 가능하며, 그 후에는 훨씬 짧아져서 7일간만의 성별로 남여 서로 복귀를 받을 자격을 주게 될것이다. 나는 거기서 이 세상에는 국적도 언어도 피부색도 이상도 다르다. 이만큼 다수의 사람들이 있고, 한국 뿐이라면 또 몰라도 어떻게 그렇게 될수가 있는것인가"고 물었다. 문선생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조건만 만들어 놓으면 국적, 민족, 언어 따위와는 관계없이 실행할 수 있다"고 답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때가 되면 진정한 부모 밑에서 온 세계의 인간이 하나의 가족처럼 되어서 국적이나 언어 따위에 관계없이 전세계가 가깝게 된다. 한국인이 아프리카에 가고 싶을 때에는 아프리카의 어디라도 갈수있고, 어느집이고 찾아가서 그집에서 하루고 몇일이고 지낼수 있게 된다. 또 그집에 있는 모든물건을 자기의 물건처럼 사용 할 수도 있다. 양껏 먹고 즐겁게 마셔도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 있는 혹인이 한국에 오더라도 몇일씩이고 묵을수 있고 우리들의 물건을 무엇이던 자기의 물건처럼 쓸수가 있으며, 좋을대로 먹고 마시더라도 누구도 군소리를 할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의 사단의 세상에서는 모든 물자나 돈을 사단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용방법이 틀렸던것 이다. 참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식구들은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단의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이나 돈은 참 부모와 함께 있는 식구들이 가령 그것을 훔쳐서 썼다 하여 그것이 세속의 법률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된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 것이었던 물자나 돈을 사단이 탈취해서 썼던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적으로 대단한 고통도 없어지고 모든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어서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갈수있게 된다. 지금 우리들 죄수 1,500인이 하루 온종일 노동해서 겨우 될수있는 일거리도 그때가 되면 한사람이 3시간만 일하면 모두 될수있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 삼아 3시간 정도만 하면 되게 되는 것 이다. 그리고 알라스카와 같이 추운 지방의 식구들은 하고 싶으면 일년내내 따뜻한 하와이와 같은 경치좋은 곳에 와서 자유롭게 먹고, 마시고,서로 사랑 할 수가 있다. 만약 그것이 싫증이 나면 4계절이 뚜렷한 한국과 같은 나라에 와서 즐길수가 있다. 또 일본과 같이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 가서 자유롭게 구경하고 생활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기가 반듯이 오는 것이다. 38 전세계의 사람들이 '참 아담'과 '참 해와'라고 하는 두사람의 부모의 자식이 되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문선생은 '원화원이상 (圓和園理想)" 이라고 한다.
또 복귀라고 하는 명목의 성행위로 문선생이 얼마나 많은 여성을 불행하게 하였는가, 그자신이 얼마나 음난하고 방자한 성욕에 탐익 하였는가를 이 책속에서 밝혀두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반면에 사회악이라고 말 할수 있다. 복귀의 진실을 고발하는 나 자신, 실은 문선명의 명령에 따라 많은 여성과 복귀한 사실도 있다. 여하한 이제 한동안 무지했던 나와 문선명의 당시의 관계를 읽어 주십시요.
평양을 소란케 한 이단자
그날도 나는 죄수들과 함께 작업장으로 나가서 작업배치를 한 후에 문션생과 함께 조용한 창고로 가서 빈 가마니가 쌓여 있는 곳에서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긴 이야기를 하였다.
나의 꿈속에서는 분명하게 문선생은 재림 메시아라고 하는 계시를 받았다. 나의 해석으로는 재림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종말의 날에 심판을 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추수 할때에 잘 익은 곡식은 알뜰히 수확하고, 제때에 여물지 못한 것이나 쭉정이 같은것은 불에 태워 버리는것 처럼, 재림메시아의 심판에 따라 참된 신자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믿지않은 사람들은 지옥으로 떨어트려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메시아의 사명이라고 성서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문선생과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감옥에서 이와같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긴 시간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최초의 체포 구속
문선생은 서울의 영등포구 상도동에 살고 있을때 김 백문이 라고 하는 사람이 지도하고 있는 이스라엘 수도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김백문의 성경의 원리해석을 배워 나가던 중에 그 원리에 흠뻑 빠저 버리게 되었다. 40 그러던 중에 하나님으로 부터의 계시를 받아 북한으로 가도록 말이 있었다고 한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1946년 6월6일의 일이었다. 그 당시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고 전체가 거의 공산주의로 물들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문선생은 그러한 시기에 처자를 서울에 남겨둔채, 배낭 하나만을 짊어지고, 38선을 넘어서 평양으로 왔다. 평양으로 와서 맨 먼저 정득은(T得恩)이란 여인을 만났다. 의기 상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를 받은 평양성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것에 합의하고 서로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때 문선생은 26세 , 정득은은 40세정도였다. 두 사람은 평양시 상수구리의 검은다리에 있던 정득은의 집에서 원리를 전도해 나가기로 하였다. 며칠이 채 못가서 이집에는 열성적인 신자들이 10명이 넘게 모여들었다. 여기서 문씨는 처음으로 창조원리에 대해서 강의를 하였다.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알아 차리고 해와를 유혹해서 타락시킨 일, 예수의 모친이었던 마리아가 모자협조(성교)를 하지 않아서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죽게 되었다. 이때 모인 신자는 정득은, 옥상현*, 지승도, 정선옥*, 김인주, 김종화등의 여성과 김원필, 정명선, 차상순 등이었다. 문선생이 집회를 열고, 성경해석의 원리를 강의하면 특히 여인들은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모양을 보고 근처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 하였던것 같다.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열사람 남짓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든가 소리를 지르던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선생에게 말을 시키면 창조원리와 타락원리의 강의 그리고 복귀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 6천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누구던지 울면서 기도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이와같은 집회가 허용 될리가 없다. 근처의 사람들이나 기성교회의 신자들, 특히 교회의 목사와 장노들은 문선생의소행을 이단시하였다. 이 이상스러운 집회를 하고 있다고 경찰에 고발하였기 때문에 문선생은 평양으로 와서 2개월째인 1946년 8월2일 대동보안서에 체포되어 약 100일간 구속되었다. 그간에 가혹한 고문을 받아 한잠도 못자게 하든가, 식사를 2일도 주지 않는등, 학대를 받었으나 특별한 죄가 없었기 때문에 석방되었다. 그때 문선생은 꽤 쇠약해 있었으나, 신자들의 도움과 한약의 덕분으로회복하였다고 한다.
이집에서 문선생은 복귀원리를 실현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있는 부인네를 천사장 루시엘이 해와를 빼앗아 성교를 한것과 같이 빼앗아서 하필 남편과 아이들이 옆에 있는 방에서 김종화와 동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문선생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김종화와 "어린양잔치"(정식결혼)을 하기로 하였다. 신자들은 쌀을 거두어 떡을 만들고 양복과 이불을 만드는 등 푸짐하게 의식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42 마을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1948년 2월 22일 문선생이하 전원이 체포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선생은 사회질서 문란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로 오게 된것이다. (6월 20일)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김종화는 징역 1년의 실형으로 복역하고, 옥상현은 그녀의 집이 상당한 재산가였으므로 2개월 만에 석방 되었다고 한다. 또 몇해 후에 남한 서울에 피난하고 있던 김종화를 찾아가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서, 나는 당시의 진상을 들어 보았다. 믿음을 잃고 쉬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문선명의 이야기와는 달라서 흥미 진진한 것이 있었다.
김일성 은사
같은 하늘 아래인데도 공장안과 밖은 이렇게도 다른 것인가를 눈물이 넘쳐 흐르는 생각으로 하늘을 바라 보았다. 오전 10시경이었다. 비료 공장 옆을 지나보니 폭격당한 흔적의 비참한 광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기 저기 있는 큰 구덩이에서 시체가 산산히 흩어진 살점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이 공장속에서 문선생은 오늘도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을 것인가고 생각하니까 자기 혼자서만 먼저 석방 된것이 면목이 없었다. 출옥의 인사차 갔을 때에 문선생은 "평양에 가거든 경창리에 살고 있는 김종화를 찾아서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라 고 전해 주시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종화 여인은 문선생과 결혼하려고 하였다가 투옥 당하게 된 원인이 된 바로 그 유부녀인 것이다. 홍남의 도로는 인민군의 군수물자를 실은 트럭이 많이 달리고 있었다. 인민군은 선제공격으로 승리하여 서울을 점령한것 같았다. 지금은 전쟁중인 것이다. 평양행 군용트럭을 세워서 사정을 말하였더니 평양까지 태워다 주게 되었다.
제2장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평양에서 서울로
북의 공산당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평양시내는 전승분위기로 넘쳐 있었으나 9월 15일에 UN군이 인민군의 배후를 찔러 인천으로 상륙, 전황은 뒤집혔다. UN군의 진격은 재빨라서 그러한 어느날 나는 보안대라고 자칭하는 무법자들 일당에게 둘러싸였다. 본바닥의 불량배들로서 북이 오면 북을 맞이하고 남이 오면 남에 꼬리를 치는 패거리들 이었다. "너는 북조선 군의 대대장을 지낸 진짜 공산당원이니까 죽인다. 죽어라 !!』몇사람이 나에게 달려들어 망치로 내다리를 쳤다. 발목뼈가 부러져서 나는 움직일수 없게 되었다. 마침 지나가던 한국군 헌병대의 찝차에 구조되어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직무태만 이러한 곳에서 살해 당하는가 싶어서 한때는 죽음을 각오하였던 만큼 '정말 사람에게는 무엇이 행운을 가져 오는지 알수 없다'고 무심결에 실소한 일도 있었다. 그때 유치장에 남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중죄인들은 모두 총살 당한것 같다. 전쟁으로 시내의 병원은 어디고 제대로 되는것이 없었다. 유도가 5단이었던 나는 할 수 없이 약국에서 적당한 약을 구해서 먹고 부러진 발목에는 응급조치로 나무쪽을 대서 묶어 두었다. 45
나는 리야커에 실려서 얕은 언덕받이에 있는 옥상현의 집으로 갔더니 문선생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순간 나와 문선생은 손을 잡고 울어버렸다. UN군에 의해서 흥남감옥이 10월 14일에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 문선생은 10일 동안이나 걸어서 평양으로 온것같다.
일주일정도 지나니까 옥상현의 남편인 우하섭의 가족전원이 피난 나갔던 서울에서 돌아 왔으므로 우리들은 쓰고 있던 방을 비워 주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모두들 의논한 결과 서성리 라고 하는 곳에 있는 방을 하나 빌리기로 하고 그 다음날에 이사를 했다. 문선생과 김원필, 문정빈 그리고 나까지 4인이 함께 살게 되었다. 문선생은 그사이 아는이의 안부를 찾아 들락거렸고, 김원필에게 자기의 출옥을 알리는 일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또 평양에서는 1950년 12월2일 시내전역의 시민에게 피난명령이 내렸다. 그것은 중국군이 대량으로 투입되어 인해저술로 거센 파도(노도)처럼 몰려오고 있기 때문에 한국군과 UN군이 일단 후퇴 하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는 조선반도의 맨 북쪽까지 쫓겨 갔던 북조선 인민군과 그것을 지원하는 중국지원군(10월 25일에 참전)의 전진은 예상외로 빨랐던 것 같다. 그날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의 탄약고가 폭격 당해서 밤새도록 폭발하는 바람에 한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1950년 12월 4일 10시경에 평양을 출발하였다. 계절은 겨울이였으나 아직 그렇게 춥지는 않았으므로 피난 하기에는 비교적 장해는 없었다. 도중 대동군에 있는 나의 본집에 들려 가기로 하였다. 우리집에 도착하니까 가족은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가 부자유한 다리를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남으로 출발한다는 것은 온가족이 "엄청난 무리"라고 크게 반대하였다.
50 평양의 후방에는 중공군이 물밀듯이 멀려오므로 우리들은 되도록 빨리 대동강을 건너야 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정근에게 부탁해서 그날 밤중에 배로 남충면 효남리로 건널 수 있었다.
52 "이제 부터 한평생 문용명(본명)과 박정화는 고락을 함께하고 영원히 같이 살자"고 옥중에서 서로 맹서하였기 때문에 정다운 고향을 떠나서 사랑하는 가족들 부모, 형, 그리고 처 다섯식구 들(17살 장남,15살 차남, 13살의 3남 , 10살의 큰 딸, 다섯살 4남)과 헤어져서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내 일생은 모두 재림 메시아로 믿고 있는 문선생에 맡긴것이다. 역시 나도 고단했던 가보다.
악전고투의 피난 길
"나는 이제 안 되겠오 나를 두고 앞으로 가시오 나는 여기서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나의 운명에 따르겠오." 그했더니 문선생은 화를 내며 "당신과 나는 죽음까지 함게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금후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살자 걱정말게 !! 라고 말해 원필에게 자전거를 끌게 하고 나를 업고서 고개를 54 겨우 서을에 도착하다.
이집은 2층집인데 양옥집이고, 가재도구가 그대로 놓아둔 채로였다. 할수없이 우리들은 그 곳에서 문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후 한동안 하숙을 하고 있었다. 이기봉이라고 하는 할머니 한테 찾아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렇게 반갑게 대해 주지 않는 것이
다행히도 문선생과 원필은 국민방위군의 자체검사에서 불학격이 되어 돌아와서 세사람은 또 흑석동의 곽씨의 자택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새해가 밝아 1951년 1월 2일, 서울전역에 퇴거명령이 내려졌다. 공산군이 가까이 까지 남하해 온 것이다. 우리들은 또 피난길에 나서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 이번의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지금까지 검문을 받던지 할 때에는, 우선 먼저 증명서의 제시를 요구 받았다. 그런것을 생각해서, 나는 가까이 있는 치안대를 찾았다. 유홍이라고 하는 치안대의 대장이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서 우리들은 "피난민증명서"를 한통씩 만들어 줄것을 요청하였더니 친절하게 증명서를 발행해 줄뿐만 아니라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위로의 말까지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 때의 기분은 지금껏 잊을수가 없다. 평양에서 마련해 가지고온 돈도 모두 떨어졌으므로 우리들은 할수없이 곽노필씨 집에 남아있던 양복이나 돈이 됨직한 것을 자전거 뒤에 싣고 서울을 출발하였다.만약 그대로 남겨 두었다 하더라도, 인민군이나 중국군이 처들어 온다면 아무것도 남아 나지 않을것은 명백하였다. 사실 서울은 1월4일 재차 공산군에게 제압되고 말았다. 56
서울에서 부산으로
제2의 피난때에는 전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 가짐에도 얼마간의 여유가 생겨서 그렇게 서둘지 않고 느긋하게 갈수가 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일찌감치 마을에 찾아들고 서둘러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잘하는 방법인 것이다. 가지고 있던 쌀이 떨어 졋으므로 가까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렸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갔는지 상점은 거의 닫혀 있었다. 그러나 우려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이 작은 마을 가운데 있는 큰 집을 찾아가서 곽씨집에서 가지고 온 양복 한벌을 꺼내서 집에있는 할머니에게 건네고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70은 넘은 듯한 기품좋은 할머니는 우리들이 측은하게 보였던지 아니면 양복이 탐이 났던지, 팔 뒤주를 열고 쌀 한말 가량을 주었다. 장호원, 원주를 거쳐 제천으로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 헤맨 숙부의 집은 이미 피난해서 빈집이 되어 있어 맥이 쪽빠졌지만, 그래도 앞으로나아가 조령(새재)의 마루턱에 도착하였을때 UN군의 헌병이 "피난민은 도로로 가서는 안된다"고 제지를 당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걷기 힘든 산길을 갈수 밖에는 없었는데, 그 무렵에는 나의 다리도 거의 나아갔으므로 산길이라도 악을 써서라도 걸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별안간 UN군의 헌병이 문선생과 원필을 강제적으로 데려갔다, 55 여기서 세번째 이별이 되는 것인가 하고 나는 무척 불안하였다. 처음에는 북에서 피난할때 보안대에 연행되었다. 다음에는 서울에서 국민방위군에게 연행되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또 혼자 남게 된 것이다. 그러한 곳에 혼자 남겨 지더라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매우 걱정 스러웠는데 한참 만에야 두사람이 돌아왔다. UN군의 군용 차에서 작업을 시켰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 길 이었으므로 나 혼자서도 갈수 있을것 같았다. "여기서 부터는 지팡이를 버리고 걸어서 가자"고 문선생이 말했다. 두달 가까이나 지팡이에 의지해서 자전거에 타기도 하고 네리기도 하였으므로 아직 자신은 없었지만 다부지게 마음먹고 지장이를 버리고 보니가 지팡이가 없이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후의 길을 나는 혼자서 걸어 다닐수 있었다. 단양, 점촌, 풍기, 안동, 의성으로 피난길은 이어졌다.
방을 빌린 후에 원필은 저녘 반찬거리를 사려고 시장으로 나아갔다. 어항이 있는 포항이 가까이 있어서 오징어를 세마리 사다가 죽을 쑤었다. 원필이 방을 빌려 준 주인에게 죽 한구릇을 가져갔더니, 뒤에 그집 아주머니가 "이러한 죽은 어떻게 쑨것이냐"고 물어 원필이 설명을 하니까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오징어로 족을 쓸 때에는 먹장을 떼내고서 죽을 쑤는 거예요. 그냥 하신거죠" 우리들은 어두운 곳에서 먹었기 때문에 그런것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는데 아주머니가 가져 온 죽을 보니까 과연 새까만 것이었다. 그것을 그냥 먹었는가 하고 생각하고 우리들은 서로 웃고 말았다. 이집의 주인은 황해도가 고향인데 자기는 어렸을 때에 경주로 살러와서 생활을 위해서"밥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어른들은 지금도 북에 계시고 자기의 가족들만이 이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장만영이라고 3일간 이집에서 쉬었다. 식사는 물론 우리들이 만들어 먹었다. 그래도 피난민이 넘쳐서 한곳에 오래동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주인에게 "우리들은 오늘 부산쪽으로 갑니다"라고 인사를 하니까 젊은 사람은 가도 괜찮을터이지만‥‥하면서 그는 나를 가르쳐 말했다. "당신은 제일 나이도 많는것 같고 몸도 쇠약한것 같다 부산에 가더라도 피난민으로 꽉 차 있을 터이니까 두사람이 먼저 가서 자리잡은 다음에 당신도 가면 좋지 않은가" 여기까지 문선생과 원필이 함께 사선을 넘어왔으므로 나는 "아니야 나도 부산으로 가겠다"고 말했더니 문선생은 "이집 주인의 마음씨가 고맙다"고 말하고 "정화 자네는 이곳에 이려하여 나는 경주에 장만영써 집에 남고 문선생, 원필은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때의 나의 심경은 무척 복잡하였다. 피난도중 문 선생과 함께 사선을 몇 차례나 넘어 왔는데,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려고 하는 위대한 일거리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60
"전쟁중에는 만들어도 별로 팔리지도 않으니까 공장을 페쇄하고 있다"하는 것이었으나, "밥상만 만들어 준다면 내가 자전거에 싣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팔아 올 터이니 해보지 않겠오"라고 내가 권하였더니 주인도 그러 할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전부터 공장에서 일하던 아들과 식객 노릇을 하고 있던 피난민 나와 주인등 셋이서 밥상을 만드기 시작하였다. 나는 한번에 20개씩 자전거에 싫고 포항으로도 가고, 영천으로도 가고, 또 울산에도 갔다. 익숙하지 못한 장사였지만 싣고 나간 밥상은어떻게든 다 팔렷으므로 그 대금을 주인에게 넘겨 주었다. 경주 주변에는 사방에 시장이 있었다 영천에도, 울산에도, 포항에도 언양에도, 감포에도, 경주에서 2,30키로 거리에 있었으므로 5일마다 서는 장이 그 시장에 매일같이 밥상을 실어다 팔았다. 또 저녘때가 되면 그집의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가정교사 노릇도 이렇게 지내고 있는 동안 그 다음해의 3월 7일 별안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문선생이 부산에서 오셨다. 그 기쁨이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군용 모포 한장으로 공장에서 기거하고 있는 나로서는 문선생을 환영할 방도가 없었다. 주인이 돈을 내주어서 저녘 식사만은 접대를 하였으나 밤에 나무조각 투성이의 방에서 주무시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선생은 그동안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나 금후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꿈과 같은 이야기 뿐이었다. 흡사 몇 십년만에 만나 밤이 깊도록 둘이서 이야기를 했고, 다음날 문선생은"오늘은 부산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내 기분 같아서는 여기에 방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여기서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 할만한 활동을 해서 문선생과 함께 있고 싶은 심정 이었지만 아직 상황이 좋지 못해서 할 수 없는 노릇 이었다. 경주에서 헤어지고서 1년만의 재회이었는데 문선생을 전송하고 돌아온 나는 정말로 깊은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무엇이든 장사를 해서 자금을 마련해 가지고 부산으로 가서 문선생과 함께 위대한 사업 달성에 힘쓰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원필은 식당에서 일하고 있고, 문선생 자신은 일본의 공업학교에 함께 유학하였던 동창생 집에 식객으로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계시기에 무척 불편 하실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62 어떻게 해야만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수 있을까 하는 것을 나는 늘상 생각해 왔다. 날마다 변함없이 밥상을 운반해다가 시장에서 파는 것이 내 일의 전부였다. 이러한 일거리라도 열심히 붙잡고 있으면 기회 가 찾아을 것이 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 고 여기서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것일까? 아니면 집어 치우고 부산으로 가는 편이 났지 않을까도 생각 하였으나 아직 피난민으로 가득한 부산으로 간다 한들 별 볼일이 없을것 같이 생각되어 좀더 경주에 있기로 하였다.
그러나 민간인의 사상자만도 남북 합해서 2백만명 이상, 이산가족도 일천만명을 넘는다고 그러한 1953년 봄 부산에서 저 옥상현 할머니가 경주로 나를 찾아와서 오랜만에 대면하였다 평양에서 피난 할때에 헤어져서 서로 알길이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가웠다. 하루 빨리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해서 원리를 출판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전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옥상현의 장남이 군인용 트럭을 가지고 온 덕분으로 가족전원이 무사히 남쪽으로 올수 있었던 것이다. 자리잡히면 부산에서 함께 일할수 있게 하루 속히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문선생과 함께 6,000년전의 하나님의 뜻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할때가 이제 곧 다가 올것 등등 열심히 이야기 하였다 원필은 지금 미군부대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범일동에 교회를 마련하여 새로 입교한 식구들이 원리를 들으려고 모여들게 되었고, 평양에 있던 식구들도 부산으로 와 있다고 한다. 교회의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문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왔던것 같다. 옥상현은 하루밤을 같이 지내고 다음날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동만 있다가 이요한 이라고 하는 목사가 나를 찾아 왔다. 부산에 있는 문선생이 보냈다고 하는 것이었다 방으로 안내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새로운 식구들이 많이 모여와서 원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으므로 박정화씨도 선생이 계시는 부산으로 발리 오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었다. 그 다음날 이목사는 부산으로 돌아갔다. 나도 곧 부산으로 간다고 문선생에게 전하도록 부탁을 하고 혼자서 생각하였다. 저 흥남감옥에서 문선생이 빈 가마니 위에 앉아서 눈을 감은채 신비의 세계를 변화하게 할 이상, 즉 "원화원 이상(圓和園理想)"의 세계를 실현시키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나에게 말한 것을 생각 하였다. 그 때의 전경이 눈에 아물 거렸다. 희망의 세계가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 죄악이 없는 세계, 그리고 질투, 음모, 배신, 전쟁 같은 것이 없는 세계, 그 이상세계의 회원만 된다면 노동은 취미로서 하루에 세시간 정도만 하면 된다.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갈 수 있게 되고, 회원 집에 가면 자고, 먹고, 쓰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받는것 보다는 주는것을 기뻐하는 세계, 남을 책망하지 않으며, 존경을 받기 보다는 존경
제3장 통일교회의 창립전후
부산 수정동 교회
나, 박정화는 1953년 5월 15일 새로 사드린 부산 수정동의 집으로 문선생을 찾아갔다. 문선생은 대단히 반가워 하며 그간의 경과와 금후의 계획에 관해서 자세히 들려 주었다. 당시 김원필은 미군부대에서 일 하고 있었는데, 저녘때가 되면 미군들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70 마침 그날밤은 월식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그 부부는 하늘에서 빛이 비쳤다고 큰 소리를 지르며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월식이라 설명을 해서 간신히 진정하게 한일도 있었지만 또 어느날오후 지승도, 옥상현*, 이기환 등이 영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너무나도 신비스러움에 홀려서 실신한 일도 있었다. 몇일후에 문선생 이 나를 불렀다. 문선생은 곧 부인 식구들이 헌납한 귀금속 따위를 처분해서 37,000원이란 자금을 마련되었다. 그 돈으로 새끼를 생산하고 있는 삼천포의 흥해로 가서 새끼를 사다가 부산전매청의 창고에 납품하고 납품서를 받는것이 나의 일과로 되어 농촌에 몇일씩 묵으면서 "새끼"를 사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 오니까 문선생은 최선길에게서 도망치듯 주된 식구들을 데리 이봉운장노는 대지공원에 판자집을 한채 사서 그리로 이사해서 거기서 임시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수정동 교회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들어 와서 살고 있었다. 최선길의 대 난동으로 부산의 수정동 교회는 어처구니 없이 날라가 버린 것이다. 나는 하는 수없이 여관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서울로 갔다. 그때 청진동에 문선생과 함께 있던 사람은 옥상현*, 신정순*, 양윤신*, 오명춘*, 이순철*.이 성화* 등 7-8인인데 여자 식구들 뿐이 었다. 나는 그다음날 기차를 타고 부산의 전매청지점에서 납품서를 받아 들고, 또 기차를 타고 되짚어 서울로 돌아왔다. 문선생에게는 낮 12시에 도착한다고 전보를 처 놓았으므로 그길로 바로 청진동 집으로 직행하니까 문선생도 여자식구들도 어디론가 가고 없어서 행방을 알수가 없었다. 그대신 최선길이 혼자 지켜 앉았고 최부인은 가재도구 같은것을 전부 처분하기 위해서 짐을 싸기도 하였다. 문선생 앞으로 보낸 나의 전보를 보고 나라면 문선생의 거처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재도구 중에는 문선생의 성경과 찬송가, 그리고 놀라운것은 원필이 정서한 원리원본까지 들어 있지 않은가. 나는 필사적으로 최부인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찾으면 선생 계신 곳을 알수 있을 터이고 알게되면 반드시 연결 할것이니 성경과 원리원본 만은 나에게 돌려두세요. 최 부인이 나에게그 서 류들을 건네 주었음으로 가지고 돌아 갈수가 있었다. 만약 그때 원리원본을 되돌려 받지 못했더라면 나중에 원리해설을 정리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후 옥상현*, 신정순등과 만났으나 그녀들도 문선생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녀들이 내가 서울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물어 보게 되면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문선명의 복귀 의식이란 미명을 빌어 눈에 넘치는 난맥상을 이룬 성교로 화가 치민 최 선길 부인은 수정동 교회에서 대난동을 피워서 여자 식구들을 두들겨 내 쫓았다. 겁을 먹은 문선명은 여자들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해서 청진동에 있는 으슥한 집을 빌어서 여인들과 살았다. 그러나 그것도 겨우 1주일만에 최부인에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내가 부산의 전매청지점에서 돌아오기 직전 문선명은 혼비 백산할 지경이 되어 여자들을 사방으로 분사시키고 목숨보다는 귀중하게 여기는 원리원본의 초고도 그대로 놓아둔채, 최 부인에게서 도망쳐 버린것이다. 여자식구들에게 포위되어 산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소란한 "여국나라"를 의미 한다. 74 당시 문선명 선생으로 우러러 그 원리를 맹신하고 있던 나는, 때로는 복귀의 실제현장인 성교를 목격하기도 하고, 실제 의식에 걸맞지 않는 여자식구들의 광기나 교성을 직접 보았다.
경찰서에서 전기고문
"내가 박정화요" 말하자 종로경찰서의 형사라고 말하면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며 묻고 싶은것이 있으니 경찰서까지 같이 갑시다라고 말한다. 갑작 스런 일이라서 영문을 몰랐지만 따라 갈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당신은 모든것을 다알고 있을 것이다. 문선명은 지금 어디 있는지 바른대로 대라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므로 "모른다"고 할수 밖에 없었다. 이쪽 저쪽에서 질문이 있었으나 "정 말 모른다"고 대답하였더니 그 형사는 "그러면 알도록 해주지"라고 하더니 밧데리를 가져왔다. 그리고 밧데리에 연결되어 있는 두 줄의 전기선을 나의 양손 엄지 손가락에 붙잡아 매고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몸 전체에 이상한 고통이 흐르더니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이래도 모른다고 할테냐!고 하면서 점점 더 세게 돌렸다. 온몸이 찌릿 찌릿 경련을 이르켜 내 몸이 내몸이 아닌것 갔았다. 손잡이를 돌리다가는 그치고, 그치다가는 돌리면서 욕설을 퍼 웃기도 하고 때로는 간사한 목소리로 말 하기도 하는등 거의 3시간 정도나 짓궂게 계속 당했다 나는 "죽일려거든 죽여라 모르는 것은 모를 뿐이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랬니 옆방에서 계급이 높은듯한 이가 나와서 "말씨를 듣자니까 평양사람 같은데, 그런가?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 하였다.
마침 그때 소낙비가 퍼못기 시작했다. 그여들이 우왕 좌왕하고 있는 틈에 나는 버스에 뛰어 오르고 말았다. 안양에서 내려서 1키로쯤 가면 길가쪽으로 남향 받이의 작은 집 한채가 있다고 들었으므로 곧바로 찾을수가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니까 문선생과 이순철이 같이 있다가 무척 반가히 맞이해 주었다. 우선 나는 전매청 관계의 업무의 경과와 어제 있었던 경찰의 사건을 간단히 보고 하였다.
나는 이틀동안 그곳에서 지내고 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이순철*의 남편이 눈에 쌍불을 켜고 문선생을 찾으려고 사방 여러곳에 수배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금 이대로 지금 집에 있는것은 위험해서 그 다음날 나와 함께 문선생과 이순철*세사람이 부산으로 가게 되었 그 이틀후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도록 고생하며 부산까지 왔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김안미라고 하는 여자 식구가 여관까지 찾아 왔다. 그녀는 6마리아(문선명이 복귀한 유부녀중-후술)의 한사람이었는데, -문선생이 뒤에 6마리아가 된 이순철만을 데리고, 부산쪽으로 내 뺀 것을 괘심하게 생각하고 여기까지 이를 잡듯 찾아 왔다고 하는 것이다. 김안미 와 이순철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자기들의 영적인 지위다툼으 나는 김안미 를 불러내서 문선생의 상황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지금 매우 복잡한 상태에 놓여 있어서 틈만 생기면 사단이 언제라도 참소 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하시려고 하는 계획의 장애가 된다. 선생은 한동안 이대로 부산에 계실 모양이니까 우선 조웅히 하는것이 좋겠다고 간청하였더니 김안미는 노한 채로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들은 부산에서 5일동안 유숙하고 또 서울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오명춘*이 손을 써서 친척집을 빌어서 문선생과 신당동 중택에 있는 어느집에 살게 되었다. 이순철*은 자기집에 돌아갔으나 노한 남편에게 두들겨 맞아서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고 백인제병원에 입원하였다. 문선생과 나와 오명춘*과 함께 병원으로 문병을 갔으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예감 들어서 다시 오기로하고 바로 돌아섰다. 나중에 오명춘써 말에 의하면 문선생과내가 병원을 나온 즉시, 이순철의 남편이 들어가 "지금 나간 남자들은 문션명과 박정화가 아닌가"고 다그치는 바람에 어물어물 둘러대느라고 혼이 났다고 한다. 만약 그때, 남편이 문선생과 마주쳤다고 하면 큰 사건이 일어날것은 틀림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선생을 둘러 싼 여자 문제가 여기 저기 일어나 그야말로 나도 손들고 말 지경 이었다. 복귀원리를 구실로 삼아 유부녀던, 처녀던, 눈에 나타나는 여인들은 조만간에 문선생과 성교하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남편되는 자나 부모들은 노할 것이다. 그중에는 어머니와 두딸까지 세사람과 관계를 한일도 있다. 대사건으로 되지 않았던 것은, 이것도 하나님의 가호 라고나 할까? 이동안에 청진동 집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이렇다. 부산에 있던 문선명이 서울로 도망처온 그러나 좀처럼 믿지 않는 남편을 서울까지 쫓아 온 최부인은 청진동 집에 내가 와있으면 문선명의 거처를 알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라갈 작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 영도(謄島) 집회
그 무렵 나는 대구를 거점으로해서 문선생과 함께 이곳 저곳 식구들에게 원리강의를 하기 위해서 각지로 나돌아 다니고 있었다. 또 문선생의 지시로 부산이나 서울에 가서 식구들에게 문선생 이야기를 전하기로 하였다. 그 당시는 아직 기차여행이 대단히 힘든 시대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꼭 12시간이 걸렀다. 추풍령에서 부터 대구까지는 군사상 차내의 등불을 모두 꺼 버렷으므로 캄캄하였다. 한밤중이 되면 난방까지도 꺼 버렸고, 창유리도 거의 깨져 있어서 겨울에는 대단히 추웠다. 유리가 없는 창에서는 연료로 쓰는 석탄의 연기나 냄새가 스며들어 터널에 들어갔을 때에는 질식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문선생과 함께 있던 어느날, 부산의 이봉운 장로에게서 "부산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자 방도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부산까지 와 주십시오"라고는 하지만 부산까지의 여비가 없어서 난처하게 있는 터에 마침 오명춘 집사가 왔다. 그녀가 여비를 마련해 주어서 그날밤 문선생과 함께 다음날 아침 8시 부산에 도착하였다.
안내된 곳은 허술한 집이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넓직한 방이었고 잘 정리되어 있어서 식구들의 성의가 나타나 있었다. 이집 주인은 신성묵이란 사람인데 유신희와 부부였다. 아침을 마치고 문선생은 여느때와 같이 원리강의를 시작하였다. 유효원이란 사람은 결핵성 고관절 유착으로 굳어 버려 앉아 있을수가 없어서 누워서 강의를 듣고있었다. 이 사람은 무척 과민한 성격인듯 누구 옆에서 기침을 하면 표정으로 그것을 제지하기도 하였다. 28인 가량이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방안은 무척 조용해서 엄숙한 분위기였다. 식사 이외에는 휴식시간도 없이 강의는 밤중 한시, 두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듣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는 시종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날 처음으로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은 유효원, 유효영의 형제, 신성묵,유신희 부부, 김관성, 차집사등. 식구들은 신정순, 옥상현, 이기환, 지승도, 양윤신, 오명춘, 이봉운장로, 그리고 가족들이었다. 82 개학이 시작되고 돈을 전부 써 버린것을 안 김영희는 노했다. 그래서 숙모가 다니는 교회가 어떠한 교회이고 무엇을 가르치며 선생이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고나서 항의하려고, 아침부터 밤까지 꼼짝을 하지 많고 그녀는 문선생의 강의 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반대편 끝쪽에 누었던 김영희의 소리였다. 문선명의 성교를 여러차례 목격해온 나지만 이것은 정말로 놀랐다. 다른 5인의 여자들은 한사람은 마리아이고, 다른 4인도 이미 문선명과 관계가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후술한다. 또 그후 김영희는 문선명의 아이를 임신해서 실로 비참한 인생 첫발을 걷게 되었다.
그의 처 유신희도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후에 서울로 가서 문선생에게 복귀를 받게 되었다. 약 3주간이 지나니까 식구들은 문선생의 강의를 되풀이해서 듣고 있어서 찬송가와 기도를 할때에는 딴 사람 같아서 성령이 충만해서 큰 소리로 울기도 하였다. 이집에서는 사람이 모이면 아침부터 저녘까지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해서 곧 근처 사람들의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고,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수사기관에 조사를 부탁하였다는 소문도 들려 왔다. 뿐만 아니라 또 평양에서의 식구의 가족 중에서 남으로 와서 검사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어서 기회만 있으면 선생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어서 부산영도의 집회를 중지 하기로 하였다. 84 실제로 이 무렵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한테 쫓기는듯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나와 문선생은 여기 저기를 돌면서, 고심하고 있는 식구들과 그가족을 격려 하고 있었지만 겨우 방을 얻더라도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문선명이 어디 어디에 있다고 하는 소문이 나서, 수사기관에서 사람이 조사를 받는 상황이 계속되곤 하였다. 이유는 문선생이 이전에 북한에서 사회질서 문란죄로 복역한 사실이 있어서 남쪽으로 가서도 또 고치지 못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것이, 북에 있던 식구의 가족들이 남으로와서 수사기관에 들어간 사람이 보복을 겸해서, 뒤쫓아 다니고 있기 때문 이었다. 식사는 동대문에 있는 이창환의 형이 경영하고 있는 대중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종로에 있는 여관에서 숙박하면서 작업하는 날이 열흘쯤 계속되었다. 우리들은 어떠한 괴로움도 참아 낼수 있었으나,여관주인과 식당주인들은 왜 그런지 우리들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대구에 있는 문선생을 찾아가 사정을 보고 하였더니, 5만원을 내 주면서 부산에서 간 양윤신과 함께 방을 마련해서 유효원과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곧 서울로 돌아와서 성동구 북학동에 방을 빌려 우선 되는대로 본거지로 삼았다. 이곳에 숙식을 같이 하고 있던 식구는 나, 유효원, 유효민 세사람 이었다. 이창환은 날마다 와 있었고,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 옥상현,이기환 등 여자식구들도 매일같이 와서 여러가지 일을 협력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 통행금지 시간이 되여, 그날합은 시경에서 자고 아침에 돌아온 일이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연행사건 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양윤신과 함께 여러가지 가재도구를 사러 갔다. 이렇게 함께 장을 보노라니까 그녀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양여사는 년령이 나보다 훨씬 아래였다. 인생은 길어야 할 터인데도 그녀는 몇해후에 나보다 앞서 죽고 말았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에게도 알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그녀가 우리들의 교회에 들어 와서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복귀 받으려고 그녀는 대단히 노력한 사람이었다. 어느 정치가가 지능이 좀 떨어지는 딸을 한사람 우리들의 교회로 데려고 왔다. 이 교회에 한동안 맡겨 두면 낳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덟살 된 그 아이는 식사를 하고 있노라면 꼭 똥을 싸기 때문에 모두들 큰 일이었다. 이 무렵 이수경은 우리들 식구의 생활비 때문에 일하러 나가서 사진에 색을 칠하는 작업을 해서 돈을 벌어 온일도 있다. 이창환은 교회의 전도문을 영문으로 작성해서 세계각국의 유명한 인사들, 특히 유명한 목사등 백여명에게 발송한 일도 있다. 88 그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다 동쪽 나라에 재림메시아가 왔다. 숭배하자. 의심스러운 자는 기도를 통해서 들어 봅시다. 그리고 문장 끝머리에 이창환 자신의 사진을 붙여서 발송하였다. 유효원은 뒷일은 하늘에 맡길수 밖에 없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자기류로 집필하였다. 김상 이 당시는 식구들의 생활비가 큰 일이었다. 유효민은 본래 사진업을 해서 솜씨도 좋았으므로 시내나 지방을 돌아 다니면서 각지의 여러 유적지를 사진으로 찍어다가, 그것을 푸로마이드로 만들어서 파는 장사를 생각해 냈다. 우선 닥치는대로 해 보니까 예상외로 잘 팔렸으므로 우리들은 푸로마이드 제작에 온 힘을 쏟게 되었다. 나는 사진에 광택을 내는 일을 담당하여 밤중까지 작업을 하였다. 임명신도 부엌일이 끝나면 바로 사진을 씻는 일에 열중하었다. 식구들이 힘을 합해서 푸르마이드를 대량으로 제작 하였다. 이 일이 적중해서 한꺼번에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 식구들의 생활비를 모두 충당 할수 있게 되었다 1954년 5월3일 성동구 북학동 391에 있었던 교회에서 문선생을 중심한 이창환, 유효원, 김상철, 박정화, 유효민의 다섯 사람이 에워싸고 있었다. 드디어 문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전세계에 원리를 포교하기 위한 일을 개시하는 날이 왔다. 우리들은 어떠한 명칭으로 하면 좋을까 하고 의논 하는데 우선 세계의 기독교를 통일 한다고 하는 목적에 알맞게 "세계기독교통일"이라고 하는 머리글자를 붙이기로 하였다. 그 다음을 "심령협회"로 할것인가 신령협회"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논이 있었지만 나는"신령협회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해서 최종적으로 "신령협회"로 결정 된 것이다 이리하여 원리를 내세워서 전세계의 기독교를 통일하려고 하는 종교단체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 統一神靈協會)"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창립되게 된 것이다. 초대협회장에는 여러가지 의논한 결과 이창환이 취임 하였다 그런데 그는 3개월만에 탈퇴하고 말았다.
이화여자대학 사건무렵
교수와 학생들의 대거입교
서울의 명문교 이화여자대학의 음악교수 양문영*이 입교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녀는 3일간 文씨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더니 기적이 일어나서 성령이 충만한 그녀는 별안간 지금까지 사단에서 가로막했던 벽을 차고 떠들어 대면서 발로 벽을 걷어 차는등 크게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이 때에는 이미 복귀를 받았던 김인주가 복귀에 대한것을 귀뜸 하였다. 김인주에게 권유를 받은 유신희는 용기를 내서 복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후에 유신희는 여러 남성 식구들과 복귀를 하였다. 나도 실은 유신희와 복귀를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바로 뒤에 등장하는 김 덕진과도 복귀를 하고, 나아가 김 덕진은 다른 여성과 복귀 하고 그 여성은 또 . . 별안간 70몇 사람의 바퀴가 되고 말았다. 그후 목사가 된 김덕진은 너무나도 난맥을 이룬 통일교회의 섹스를 스스로 고발하고 책으로 해서 발표하겠다고 선언하여 큰 소동이 일기도 하였었다.
그 무렵 나는 매일밤 10시경까지 사진의 광택을 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검은 UN군 코트를 입은 청년이 찾아와서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여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물으니까, 김덕진이라고 하며 북쪽의 숭실전문학교의 문과 출신으로, 간첩죄로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을구형 받었으나 판결은 무기징역으로 복역중에 재심에서 무죄가 되어 남쪽의 동촌육군형무소에서 나온 길이라고 한다. 그리고 형무소 안에서 만난 이석빈이란 사람이 문선생에게 전해달라며 "아버님께"라고 쓴 편지 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를 문선생이 있는 양문영의 자택으로 안내 하였다. 그에게는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작곡과 작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입교하자 마자 곧 성가(찬송가)의 작곡과 작사를 하기도 해서 문선생도 그 음악적 재능을 칭찬하고, 식구들 중에서 제1번으로 문선생에게서 양복을 얻어 입는 영광을 맞았다. 그 다음에 들어온 이는 지원대, 안정국, 김순화, 신미식,정대화, 김주화, 이관선, 이기석, 박봉애, 남궁철, 이영일, 최정순,이인복, 김화영, 김정은, 사길자, 박영숙, 서명진, 이정호, 김영휘 등이다. 교수에 이어서 이화여자대학 학생도 많이 입교 하고 있었으나, 이단적인 신앙을 이유로 14인이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전에 교수들은 사표를 내고 퇴직하고 있었다) 퇴학이 된 학생은 신미식,사길자, 김정은, 서명진, 박승규, 정대화, 박영숙, 박승희, 이계순
본부교회는 다음해인 1955년 1월 북학동에서 같은 성동구의 흥인동에 있는 새 집으로 이사 하였고, 또 다시 3개월 후인 4월 27일 중구의 장충동으로 옮겼다. 그러한 긴박감을 알지 못하고 지방에서 온 나이든 여자 식구들은 기가나서 떠들거나 날뛰고 있어 상황을 이야기하고 주의를 한일도 있었다. 대구에 있는 문선생 한테로 가서 이 상황을 보고 하고 금후의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서 나는 서울역으로 나아갔다. 그때 역에는 김영희*가 와 있었고 황환채등이 전송하러 나와 있었다. 나는 김영희가 부산에 가는 목적을 알고 있었으므로 대구까지 함께 가기로 하였다. 앞에서도 기술 하였지만 김영희는 연세대학의 학생시절에 부산의 영도에서 문선명에게 정조를 때앗긴 여성이다. 자세한것은 후술 하겠지만 이때 그녀의 배는 출산 직전이어서 제법 눈에 띄이고 있었다. 대구에 도착해서 우선 이요한 목사의 집을 찾았더니 방은 텅비어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서둘러 나왔으나 어디서 지켜보고 있던 형사가 나와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면서 이집에는 무슨 목적으로 찾아 왔느냐. 이목사와는 어떠한 관계이냐. 문선명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느냐 등을 물어 왔다. 신분증명서를 제시 하라고 해서 보여 주었더니 당신이 박정화 인가라고 말하였다. 대구경찰서까지 연행되어 밤새도록 조사를 받았다 그 내용은 나라면 문선생이 있는 거처를 알터이니까 대라고 하는 것이였다. 나는 정말 몰랐으므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라고 말했다. 만약 알았다 하더라도 나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96 푸로마이드 제작판매
이 무렵 유효민의 제안으로 전국울 순회 하면서 명소의 경치나 유적등을 촬영한 사진과 서울의 거리나 배우들을 찍은 사진을 푸로마이드로 해서 판매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말하였다.
그러한 경제적인 지원은 전부 이 푸로마이드 판매로 충당하고 있었다. 서울 거리에는 한동안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피난민의 노천상들이 그때까지는 널판지 위에 미국담배를 올려 놓고 팔고 있었는데, 그것 대신에 몇 백 종류나 되는 푸로마이드 사진을 올려놓고 팔고 있을 즈음 노점 상인들이 거리 구석구석에 늘어나 사진 판매수입에 재미보게 되었다.
98 그로부터 20년 가량 지난뒤 그를 만날 기회가 있을 때, 당시의 나의 심경을 고백해서 서로
부산 영도에서 입교한 송도욱 집사는 살충제 행상 방문 소독을 하던 사람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만주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해온 사람이다. 교육은 대단스레 받은것이 없었으나 짜임새 있는 체격, 대나무를 쪼갠듯한 성격에 행동력이 있고 판단력도 있었다. 문선생의 비서역은 우선 내가 오랫동안 맏았었고, 그 뒤를 유효민이 맡아 주었다. 그리고 3대째가 송도욱이 었다. 그는 송비서에서 송장로로 승격, 동시에 문선생과 함께 보좌 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내가 서진 광산에 있을 때 (후술) 그는 문선생의 심부름 와서 온갖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자랑끼(뽐내고자) 어린 태도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잘난 뿐만 아니라 또한 지방을 순회할때 순진하고 얌전한 식구들을 놀래키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허풍을 떨지 못하도록 충고를 하였다. 잠시 숨을 돌리며
흥인동 교회에서 푸로마이드 사진 작업을 하고 있을 때이다. 프로마이드 판돈 가운데서 500원 정도를 떼어 가지고 토요일 저녁때가 되면 유효영, 나, 이수경 등과 함께 작업의 피로도 풀겸, 동대문 시장으로 나가서 노천에서 부인들이 다라에 돼지고기나 순대를 파는 것을 사 먹었다. 맛있는 안주감으로 맛있는 소주를 한잔쯤 곁들인다. 그러면 기운이 나는듯 했다. 일에 몰려 피로해지면 토요일이 되면 돼지고기와 순대로 기운을 차리자고 서로 격려하기도 했었다. 그것도 역시 어느덧 엊그제 일 같이 생각이 난다. 이렇게 해서 흥인동 시대의 식구들은 교회의 확장을 도모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열심히 작업하는 것으로서 버티어 갔던 것이다. 이때 들어온 수입은 단위가 틀릴 정도로 커서 몇 십억 이 나 되었다. 지금은 탈퇴해서 식구는 아니지 만, 유효민은 라순열 (지금은 고인)과 결혼하여 36가정의 일원으로서 축복(결혼)을 받은 사람인데 3남매의 아이들이 있다. (후술) 100
문선명의 체포
또 출입하는 식구들의 신원을 검문도 하고 일상생활에 관해서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 두달 동안 우리 식구들과 침식을 함께 하면서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여러 가지 말이 나와서 좀처럼 방침이 서지 못했다. 결국 이번에는 도망칠 수도 없을 것 같으니 우리들이 경찰로 가는 편이 금후를 위해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서 그렇게 결정하였다. 협회장에 대해서는 원리의 내용에 관한 조사가 있었다. 원리의 어떠한 부분이 대학교수나 대학생들에게 학교를 떠나게 하여 통일 교회에 입회하게 하였는가?통일 교회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신앙하고 있는가? 우리들이 어떤 죄가 성립하는가를 수사당국이 검토하고 있을 무렵 , 한가지 문제가 떠 올라왔다. 103 그후 드디어 간통문제(혼음관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신자인 부인네들이 박정화는 대사단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 고 물었을 때에는 정말 난처하였다. 내가 잠자코 있으려니까 담당관이 큰소리로 역정을 내면서 당신은 문선명과 오랫동안 같이 있었으니까 그가 하는 행위를 다 보았을 것이다. 이 문제는 그 다음날 대구 할머니가 하나넘의 계시를 받았기 때플에 그대로 말한것 뿐이다라고 하는 것을 자진해서 치안국에 출두하여 담당관에게 설명하였다.
그만큼 문선명의 구속은 식구들에게는 위기감을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 7장의 유효민의 항목 참조)
담당관은 점점 깊은 곳을 찾아 내게 되어, 당신들의 원리에 따르면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성교를 하고 해와는 또 다시 아담과 성교를 함으로서 원죄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원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죄없는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 이세상에 나타나서 그사람에 의한 성교가 행해지면 그 죄가 깨끗해진다. 요컨데 복귀 한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정말인가? 그 원리에 따라서 문선명은 여자들에게 자기가 재림 메시아니까, 자기와 섹스를 함으로서 복귀된 인간이 된다고 말하여 많은 여성 특히 유부녀들과 섹스를 하고 있는것 같다. 당신은 그것을 목격한 일이 있는가"고 추궁당했다. 물른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원리문제에 관해서는 협회장의 유효원이 담당하고 있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그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경제부문을 담당하고 있어서 그러한 일은 생각해 본바도 없다. 104 문선생을 감옥에 있을 무렵부터 믿고 따랐을 뿐이다. 많은 여성 특히 유부녀와 섹스를 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본일도 들은 일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랬더니 담당관은, 당신들의교회에는 두갈래 의견이 있는것 같다. 하나는 원리를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들, 문선명과의 섹스로 피를 바꿔 넣음으로 해서 진정한 복귀가 되어 죄와는 관계가 없는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난다. 이와같은 부부에게서 태어난 자손들이 이세상을 지배 할 때에만, 완전복귀된 에덴의 동산과 같이 죄없는 세상이 된다고 하는 것을 믿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문선명도 우리들과 같은 인간으로서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문경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째서 그가 죄없는 원죄와 관계가 없는 재림메시아가 되어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할 수 있어서 복귀 시킬 수가 있는가 라고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섹스로 복귀가 된다" 않된다 하는 이야기는 누군가 꾸며내서 퍼뜨린 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없다. 문선명은 북쪽에 계실때 기독교의 성경원리를 연구하고 있었고, 새로운 진리를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기성교회의 신자들이 많이 몰려왔다. 그 신자들의 가족이 남쪽으로 피난와서 문선생이 부산, 대구등지에서 성경 원리의 이야기를 전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수사기관에 통고해서 그 때문에 다소의 문제가 생긴것 같다. 부인은 최 선길과 장남인 성진군이 있오, 극히 최근까지 부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서울에 와 있을거요. 그 부인이 문선명이 여러 여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산에서도 그랬지만, 또 서울에 와서 집안살림을 모두 때리치워 버리고 여인들이 오는 것을 방해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가? 이것은 혼음관계의 증거가 될만한것 아닌가? 부인이 부산에서 서울로와 그러한 짓을 한 것은 사실 이지만 단지 신앙의 문제로 일어난 것이지 절대로 섹스관계라고 하는 것은 있을수 없다. 그러한 사실은 없다.
나의 다음으로 남자 식구로서 유효민과 유효영이 조사를 받았다. 김원필이 그 다음에 조사를 받았는데 그는 지금까지 병역을 기피하고 있어서 그것이 문제가 됐다. 그리고 부인 식구들이 조사가 시작되었다. 옥상현이 맨 먼저 조사를 받았다. 여성의 조사는 낮에만 하였고, 하루에 한사람씩 조사해 갔다. 5일에는 김원필이 구속되고 6일에는 유효민 유효영이 13일에는 유효원이 그리고 18일에는 여자인 이성화가 구속되었다. 결국 문선생을 포함해서 다섯분이 구속된 셈 이다. 검찰에서 출두명령이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출두시킬 터이니라고 약속한 덕에 나는 구속되지 않았다. 1955년 7월 29일 남자 5인은 전원 병역기피만으로 기소되었다.
그의 집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전부 믿었고 낮이나 밤이나 울면서 기도하였다. 양여사는 혼비백산해서 요양원 일도 못하게 되어 그 요양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가 서울로 집을 빌려서 이사 하였으므로 나도 대구로 이동하였다. 108 그래서 친척이 살고 있는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여기서 신문을 읽으면서 서울 지방검찰청의 재판동향을 알수 밖에 없었다. 이 보도를 신문에서 읽고 문선생을 모신 사람으로서 무척 반가웠다. 유효원은 벌금 오천원 유효민, 유효영 두사람은 제2국민병법위반 (병역기피죄)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어 석방되었다. 김원필만이 병역기피죄로 징역 1년의 실형을 받았다. 이때의 조사목적은, 복귀라고 하는 혼음(섹스)의 사실관계의 입증이었다. 그러나 부인 식구들이 자기들의 부끄1러운 이야기를 할 리가 없고, 그 남편들도 또 남자의 체면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문 선명을 고소하지 않았다. 결국 관계자 전원이 위증하였기 때문에 문 선명은 살아난 것이다. 부인 식구들이 문 선명과 섹스관계에 있었던 것은 물론 사실이다.
제4장 희생당한 여인들
대공로자 옥 상현의 말로
옥중에서 재림 메시아라고 믿고 "선생"이라고 부르며 맹종해온 나의 어리석은 발자취나 심정을 모두 기술해서 고백했다. 글 속에 등장하는 "문선명 선생"의 행동은 모두 사실이다. 우직한 군인이었던 나는 "선생"과의 약속을 지켜서 북쪽에 부모도 처도 다섯명의 아이들도 남겨두고 남하해서 "선생"의 충실한 분신으로서 노력해 왔다. 그런데 "선생"측에서 어느날 별안간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는 제자를 배신한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나이 였는지도 모른다 마을에서 쪽 떨어진 깊은 산속의 광산 사장이란 직함이 붙여져서 돌아치게 한 나는 몇해 동안을 보수도 없이 일만 하였다. 그리고 나와 교대라도 하는 것처럼 등장해서 통일 교회속에서 차츰 세력을 키워가는 군사정권의 무엇인가 괴상한 냄새를 옆눈질로 보았다.
112 머리카락으로 짠 양말
이제와서 생각하면 맨처음에 문 선명과 관련이 있던 여성으로서 인상에 남는것은 옥 상현*이었다. 흥남 감옥중에 있었던 문 용명(당시)에게서 자주 들었다. 그리고 문 용명에게 차입하기 위해서 미수가루를 정성껏 만들고, 겨울이 되면 속옷을 털실로 짜고 습을 넣어서 수용소까지 그 먼 길을 면회하러 다녓다. 여름에는 미수가루와 엿을 만들어서 때로는, 엿을 말랑말랑하게 해서 미수가루에 개가지고 가져오기도 하고, 삼베 옷을 만들어 오기도 하였다. 영양을 위해서 간유를 사 먹으라고 돈까지 주고 갔다고 한다. 자기와 피도 섞여있지 않은 사람에게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남득이 되지 않았다. 내·사정과 비교해 본다면 나에게는 어머니도 계시고 처도 있지만, 3개월이나 4개월에 한번 면회오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녀는 자주 면회를 와서 언제나 여러가지 준비물을 가져오는 데는 나는 놀랄수 밖에 없었다. "옥 상현이 자기의 머리카락을 짤라서 털실과 함께 짠 양말을 가져다 주었다. " 옛말에 진정한 은혜를 받은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의 머리카락을 짤라서 그것으로 신을 삼아 은혜에 보답하였다고 했다지만 그러한 사람이 실제로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머리가 숙여질 뿐이었다. 그 여성은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헌신적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문 용명 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다. 6 · 25동란이 시작되고 UN군의 북진으로 문용명은 10월 14일(1950) 출옥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죄수이였던 문 정빈과 함께 걸어서 열흘만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후, 나는 처음으로 옥상현의 집에서 그녀와 만났다. 옥상현의 자택은 상당한 부자집 같았고, 큰 마당이 있고, 집이 여러채 틀어서 있었다. 딸인 우정애, 우정순 자매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문씨의 신자였던 김원필은 사단의 집(자기집을 지칭)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며 옥상현이 치워준 방에서 문용명, 나, 문정빈, 김원필의 네 사람이 숙박하고 있었다. 114
그날 오후 우장로가 나에게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그의 방으로 갔다. 자기는 평양고무연맹의 이사장인데 당신의 동서에 해당하는 정황고무의 최내봉씨를 잘 알고 있다. 서로 절친한 사이다 얘기거리는 딴것이 아니고, 처와 문 용명의 관계되는 일이었다. 자기는 교회의 장로이고, 처인 옥 상현도 권사로서 교회에 열심히 시무하고 있는데 남쪽에서 왔다고 하는 청년이 이상스런 설교를 하고서 부터, 처가 몇주일간 이 집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원만한 부부로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는데 별안간 처가 자기와 동침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이들은 다 자랐고 기독교의 장로집에서 이러한 이상한 것을 겉으로 들어내 놓고 따질수도 없고해서 처음에는 오랜기간에 걸쳐 설득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아무러 해도 허사였다고 한다. 훌릉했던 처가 틈만나면 돈을 챙겨가지고 문 용명을 위해서 나갔다. 우장로는 자기의 얼굴이 있어서 겉으로는 나서지 못하고 조카에게 부탁해 경찰과 연락을 하고 처인 옥 상현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박형도 예수를 믿는 크리스챤 이니까 문 용명과 같은 사나이와 함께 행동하면 언젠가는 벌을 받은것은 물론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매우 힘들게 될것이오. 문 용명 같은 사람과는 함께 행동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문 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채산도 다 바쳐온 옥 상현은 6 · 25동란으로 남쪽으로 피난해 부산에 들어가 개명한 문 선명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면서 굶주렸던 문 선명의 생활기반을 마련했다 주택건설이 끝날 무렵 목사가 된 우 장로의 말에 의하면 「집사람 옥 상현에게 마음 돌리라고 일렀지만 허사였고 결국 이혼 할수 밖에 없었다. 그후 자기는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어 지금 조그만 교회에 시무하고 있다」고 한다 116 처와 이흔후 교회 부인 집사와 재혼 했단다. 또 사위인 권창정 박사는 자기 사위인데, 사위가 신청한 주택은 자기의 집인데 좀 보여달라고 하여 완성된 주택을 보여주며 장시간 이야기 했다. 문선명이 처 최선길이 남편이 여자관계로 행패를 부려 그주위에 있기가 거북 스럽게 됐다. 그래서 초창기 문선명의 됫바라지는 옥상현이가 맡아했다. 결국에는 식구들 전원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게 된 것이다. 이번에는 서울의 청진동의 작은 집으로 거점을 옮겼으나 어떻게 알아 냈는지 이집에도 최부인이 찾어와서 또 똑같이 가재도구는 물론 문 선명의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 일 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서울에서는 문선명에게 체포영장이 떨어져서 옥 상현을 데리고 갔다가 도중에서 경찰에게 심문이라도 받는다면 큰 일이어서 할수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또 그녀는 문 선명과 식구들의 생활을 몽땅 돌보게 되었다. 7·4사건으로 문 선명이 경찰에 구속되었을 때의 옥 상현의 슬퍼하는 모습은 참아 볼수가 없을 정도였다. 어느날 유 효민에게 옥 상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옥 상현이 유 효민에게로 와서 돈을 좀 빌려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옥 상현의 딸인 우 정애양이 와서 또 돈을 백 칠십만원만 빌려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었다는 것이다. 돈을 빌려 주었으나 갚아주지 않더라고 하는 것과 옥 상현은 그후 몇 차례나 돈을 꾸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걸어 왔지만 그 이상은 빌려 줄 수가 없어서 거절 했다고 한다. 118 퇴원해도 갈 곳이 없다.
문 선명 은 그때 27세로 21세나 연상이 었다. 북으로 갔던 문 선명의 복귀원리를 믿고 육체관계를 가졌다. 제일 최초의 마리아 이다. 그 당시부터 문 선명을 따라서 약 40년간 몸도 마음도 재산도 바쳐서 보살펴 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 터에 강산이 네번이나 바뀌는 세월이었다. 그렇게 오랜동안 문 선명의 옆에서 시종을 들던 사람이었다. 교회에서 쫓겨날때, 단 일천만원의 돈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장사 밑천도 되지 못하는 금액이다. 딸 내외에게 주택자금의 일부로 빌려준것 같은데, 먼 곳에서는 교회에도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교회에 다니기 위해서, 교회 근처에 작은 방을 하나 빌려서 거기서 살고 있 만약 내가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어서 사업이라도 하고 있었더라면, 살만한 집 한채 정도는 마련해 주고 싶고, 매달 적어도 생활비 정도의 돈을 보내주고 싶었다. 아흔몇살이나 되는 큰 공로자가 교회 떠난 사람에게 돈을 빌리러 다닌다니 눈물이 나을 정도로 불쌍한 이야기가 아닌가? 1985년 8월 16일 일승일(一勝一)을 선언하였다. 과거의 모든 죄를 전부 용서하고 사단을 복종시켜 그후에는, 사단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상으로 복귀시켜 모든 축복이 통일교회의 식구들에게 가져와 준다고 본부 교회의 송 영석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이야기 보다는 우선 옥 상현과 같은 사람에게 집 한채 라도 주워서 생활에 곤란하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라고 생각하였다. 옟날, 흥남의 옥중에서, 문 선명에게서 원리나 "원화원이상"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가슴이 벅차서 그것이 어느때 쯤 되는 것 인가요 라고 물었다. 그때 문 선명이 "7년후에는 그 시기가 온다"고 대답하던 것을 어제 일 처럼 기억 하고 있다. 그로부터 벌써 40년이 지났다. 분명히 문 선명 자신은 큰 돈을 벌어 놓았을지 모르지만 꿈같은 이야기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1993년 5월경 이었다. 유 효민으로부터 나에게 연락이 있었는데 옥 상현이 지금 인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중인데 문병을 가자고 하는 것이다. 나와 유 효민은 인천 가좌동"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서 옥 상현을 문병하고 왔다. 올해에 96세라고 한다. 그래서 유 효민이 돈을 대서, 아파트를 빌려서 퇴원 시키고저 하였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통일 교회측이 서둘러 방을 빌려서 퇴원시키고 말았다. 문 선명을 일생동안 떠 받쳐온 옥 상현의 노후가 이렇게도 비참하게 된 것을 보니까 정말로 슬펏다. 그러나 옥 상현 뿐만 아니라 이와같이 희생된 사람은 아직도 몇백명이 더 있다. 121 박 봉식과 오 명춘
부부가 문 선명에게 헌신
송 도욱, 박 봉식 부부가 들어 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본래 신앙이 돈독한 사람 들이어서 다음해 봄, 송부처는 서올로 올라와서 교회의 헌신자가 되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등 여러가지 일을 해 온 사람이었다. "해방"후 귀국해서 부산에서 박 봉식과 결혼하였다. 원만한 부부생활로 딸이 하나 태어났다. 세사람이 생활하기 위해서 송 도욱은 가정 방문을 하면서, 살충제 약을 팔기도 하고, 약을 뿌리기도 하였다. 처의 박 봉식은 부산의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원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장사를 집어치우고 부부가 문 선명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122 서울에서 부산간 기차 여행에 터널을지날때는 석탄연기가 들어와서 양복이 그 끄럼으로 새까맣게 돼버린다. 어느 때인가는 내가 입고 있던 스프링 코트가 베이지 빛이었는데 검정색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을수가 없다. 송 장로 부부의 딸은 매우 성격이 활발하여서 문 선명이 그녀가 마음에 들어 그녀에게 가야금을 사주어 배우게 했다. 그리고 교회의 모임이라던가 친목을 위한 식구들의 모임이 있을때는 그녀에게 가야금을 타고 창을 부르게 했다. 우리들은 모두 축복해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결국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 당시 처음에는 내가 비서역으로
서울로 올라 온 박봉식 은 경상남도 거 창을 비 롯한 각지 에서 통일교회의 원리를 전도하는 순회전도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남편인 송장로에게 큰 문제가 일어 나게 되었다. 닷새째 되던 어느날, 밖에서 볼일을 마치고 김모의 집으로 돌아가니까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부인이 정신적으로 약간 이상한 상태로 되어 있어서, 「자기를 복귀시켜 달라」고 나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남자를 보면 누구에게나 「복귀하고 싶다」고 중얼대고 있었다. 원리 이야기에 열중하게 되면, 이러한 상황으로 되는것은 자주있던 일이었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나는 몇번이고 이와같은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걱정은 하지 않았다.
나는 박봉식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원리에서부터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송도욱과 박봉식은 부부로서 문선명한테 와서 식구가 된것 이다. 송장로는 문선명의 비서가 되었고, 박집사는 그때까지 하던 집 일을 모두 걷어치우고 전도에만 전념하였다. 문선명이 축복을 하는 것이라면 박집사와 송장로가 축복을 받는것이 상식적으로나 원리적으로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오집사와 송장로가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두사람의 동거를 인정 했다고 하는것이 되지 않는가. 이것은 여러가지 면으로 모순되고 있다. 송 장로가 젊은 여자와 축복을 받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죽음의 자리 옆에 있었다고 하니, 현여라고 해야 옳을지, 열녀라고 해야 옳을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오집사는 장리욱박사의 친척이나, 김안실 같은분에게도 전도해서 입교하게 하였고, 이순철도 신정순도 신정순의 딸 이성화 성례와 양윤신에게도 전도하였다. 그 때문에, 자기의 집을 팔아서 그 대금 오백만원을 고스란히 문선명에게 드려 미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문선명이 구속된 뒤에 섭외비를 염출하기 위해서 조그마한 가계를 원효로에다 열고 신정순등과 함께 경 영하고 있었다. 126 내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효민을 통해서, 딸이 장혜숙의 집으로 오도록 전달이 왔다. 찾아 갔더니 그 웅담을 나에게 건네주며 딸에게는 또 기회가 있으면 사서 줄수 있으니까 우선 지금은 이것을 잡수시고 기운을 차려 보십시오. 박선생님은 병환이 나서도 필요한 사람 이니까 이것을 드리는 것이에요 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문선명이나 교회와 나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문선생은 박선생님을 더 나는 웅담을 고맙게 받아, 그것을 먹고나서 한달만에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명춘은 여러가지로 노력해 주었으나, 물론 문선명한테서는 전화도 없었다. 이와 같이 최초의 교회의 식구들은 함께 고생해 온 일도 있어서 서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도와주곤 할 수가 있었다.
식모살이라도 해서 살아야지
박봉식은 청평 통일교 수련소로 가서 산에 천막을 치고 기도 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몇일이 못가서 그것을 안 수련소 관리인이 와서 또 몰아내고 말았다고 한다. 박봉식은 할 수 없이 다시 시내로 나와서 먹고 살기위한 참기름 장사를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선 교회의 간부의 집을 찾았다. 원식구인 박봉식이 부탁하면 한집에서 한명쯤이야 참기름을 사 줄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 다녔던 것이다. 맨 처음에 협회장 부인 한테 가서 참기름 한병을 내 놓고 진짜 참기름이니 시장에서 파는 값으로 한 병만 사달라고 부탁 하였다. 그했더니 그 부인이 통일교회의 식구가 참기름 따위나 팔다니 너무나 창피하니까 그만두라고 말하며, 박봉식을 내 쫓아버렸다. 그리고 또 원협회장의 집을 찾아 갔더니, 먼저 집에서 당한것과 같이 문전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박봉식은 통일교회 간부들에게는 사랑이라고 하는것은 한조각도 없는 참으로 냉정한 사람들이다 라고 한숨 지었다. 그래서 협회장의 부인이 두 사람이나 다 거절하는 것을 보면 다른곳에 간들 어차피 헛수고 일것이라고 참기름 장사를 체넘해 버리고 말았다. 살어가기 위해서는 통일교회 따위를 기대 할 것이 아니라 식모살이던, 무엇이던 해 나가야 겠다고 그 박봉식은 쓸쓸히 말했다.
김종화(金鐘和)의 눈물과 노여움
그것은 문선명이 투옥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된 유부녀 김종화의 사건이다. 흥남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먼저 출소하는 나에게 그는 평양 경창리에 있는 김종화의 집을 찾아 가서 내가 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정화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여 나는 출소하자 바로 그곳으로 갔으나, 이미 피난길을 떠난후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 문선명의 열렬한 신자가 되어 주인과 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방에서 문선명과 동침해서 드디어는"어린양의 잔치"를 올리는 소란을 피워서 체포되어 징역 일년의 형을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리의 이론에서 말하자면 6마리아(유부녀)를 복귀한 뒤에 오는"어린양의 잔치(정식결혼)"는 상대가 더러움이 없는 처녀가 되여야 한다. 어째서 남편이나 자식이 있는 유부녀를 선택한단 말인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문선명에게는 서울에 두고 온 처자도 있다. 내가 서울에서 간신히 찾아 냈을때, 김종화는 이문동에 살면서 집사로서 기성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정명선은 파고다 공원앞에 코롬비아 라고 하는 구듯방을 경영하고 있었다. 내가 김종화를 방문 하였을때, 그녀는 그때의 일을 후회 하면서 사단이 나를 유혹해서 죽을때 까지 참회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때는 이름을 문용명에서 문선명으로 바꾼것을 모르고‥‥그녀는 말했다. 문용명은 엄청난 대사단인데, 나는 흠뻑 속았습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많이 만든 나쁜 사람이예요. 박선생도 빨리 그만두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커다란 눈물 방울을 흘리면서 울었다. 평양시절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나의 남편은 내가 하는 행동을 그늘에서 야속하게 생각 하였을뿐 어째서 성을 내지 않았을까요. 자기의 처와 저남자가 매일 같은 방에서 함께 자며 복귀를 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섹스를 하고 있는것을 옆에서보면서 어째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나중에 그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것을 알고 그때 나는 너무나도 큰죄를 범하고 말았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나는 김종화 집사에게 더 한번 물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매일밤 그때는재림 메시아라고 믿었고, 그 남자에게 미쳐서 그 사람과 섹스를 하는때에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천국으로 올라 가는 듯한 심경 이었습니다. 문용명이 지금 서울에 있는데 더 한번 만나 볼 용의는 없는가, 하고 물어 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면서 엄청나게 큰 죄를 범한 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므로 대사단의 문용명은 나와 같은 유부녀나 처녀들을 교묘한 말로 범하고, 많은 사람을 죄의 구렁텅이로 떨어트리고 있어요. 어떻게 또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겠어요 라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세상에서 더 이상 우리들에게 한것 같은 죄를 두번다시 그가 범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다. 그 남자를 죽이고 싶도록 원망하고 있어요. 그녀는 그야말로 불처럼 노하고 있었다. 130
6마리아의 비극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6마리아"의 부분이었다. 평양 시절은 그렇다 치고, 식구들 가운데서 6마리아로서 복귀를 받은 사람들은 제일 첫번째가 신정순, 그리고 오명춘, 이순철, 김안실, 강옥실, 정전옥의 순이라고 문선명은 이야기 했다. 그 후 한동안 지나서 이 6마리아의 얼굴생김이 바뀌었다. 그 이유는 강옥실과 정선옥에게는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남편이 있는 유부녀 가 아니면 6마리아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 이었다. 6마리아 자격이 있는것은 유부녀라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형체가 없는 하나님은,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성숙하면, 형체있는 인간의아담으로 재림하여 아담과 해와가 결혼해서 더렵혀 지지 않은 자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자손이 이 세상에 번식 함으로서 이 세상을 선한 죄 없는 사회 할 것을 '창조이상'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해와를 유혹해서 따먹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사단의 것이 되어, 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범죄한 천사의 사랑의 대상인 유부녀를 빼았음으로서, 사단에게 더럽혀진 피를 깨끗이 하는 '복귀섭리의 의식'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문선명 은 설명하였다. 그 복귀의 방법이란, 지금까지의 사탄의 세상에서는 섹스를 할때에 남자가 위로 되고, 여자가 아래로 되었지만, 복귀를 할 때에는 두번 까지는 여인이 위로되고 남자가 아래로 되는 것이고, 세번째는 남자가 위에서 행위 한다. 그래서 소생, 장성, 완성으로 3회에 걸쳐서 복귀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것이다. 특히, 나는 문선명의 섹스에 의해서 복귀된 여자와 최초로 섹스를 해서,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내가 문선명에게 제일 신뢰 받는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6마리아 들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를 추적해 보자.
신 정 순*
자산가인 이순모의 처였던 신정순은 내가 1953년 5월 IS일에 부산의 수정동 교회에 갔을 때부터 두 사람의 아들을 데리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같은해 12월 24일 문선명이 직접 원리강의를 하기 위해서 부산영도의 집회에 갔을때 그는 나에게 정화 너는 장래 신정순과 이상적인 상대(부부)가 되어서 우리 교회의 경제 문제를 해결 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 한 일이 있다. 그런데 문선명은 이 신정순의 장녀로 처녀인 이성화를 장래에 해와가 될 사람이라고 말하고 범하였는데, 김영희 사건으로 그 거짓말이 탄로나고 말았다. 또 둘째딸인 성례도 문선명한테 복귀를 받다, 아이까지 낳게되었다. 신정순은 6마리아가 된것으로서, 문선명의 곁에서 영원히 평화로운 생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132 그래서 부산 초량동에 있던 집을 팔아서 문전명에게 바쳤다. 내가 부산에서 새끼장사를 시작 하였을때 그 자금을 마련해준 것도 역시 신정순 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된 두 딸의 모녀 3인이 문선명과 섹스를 했다고 하는 사실은 신정순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궁암에 걸려 몇해 후에 죽고 말았다. 저 세상으로 간 신정순은 지금의 문선명을 어떻게 보고 있을 것인가?
이순철의 남편은 당시 관세청의 간부였다. 그녀는 남편몰래 많은 재산을 문선명에게 헌금 하였다. 문선명이 대단히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에, 우리들이 안양, 부산 등지를 돌아 다녔다는 것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그 후의 이순철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어느날 노동휘가 나를 찾아 와서 아침 예배에 가자고 재촉한다. 청파동 교회로 예배를 가니까, 마침 문선명이 나와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선명이 별안간 지금 수택리(경기도 소재) 총포공장을 건축하고 있는데, 오늘밤 안으로 그 총포공장을 완성 시키시오 라고 명령 하는 것 이었다. .매일 문선생이 오는 길에 기다리고 있다가 먼발치에서 나마 얼굴 만이라도 뵙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선생은 차로 오기때문에 내가 서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 다른 길로 가 버리고 맙니다 라고 이야기 한다.
마침, 내가 와 있다는 것을 듣고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세시간 동안이나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한 이순철은 문선명에게 재산도 자기의 몸도 모두 바쳤다고, 남편에게서는 이혼당하고, 자식들은 남편에게로 따라가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문선명을 만나고 싶어서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문선명은 어째서 이다지도 냉정하게 배신 할 수가 있을까? 134 이것이, 재림메시아를 자칭한 사나이의 할 수 있는 일인가. 우리들은 손을 맞잡고 한 없이 울었다. 이날부터 한달 후에 오명춘 집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명춘이 혼자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순철은 그 한 많은 인생을 마치고, 이세상에서 사라졋다고 하는 것이다. 그 옛날 문선명은 밤에나 낮에나 이순철 없이는 못 살것 같이 굴더니만, 이제 와서는 이순철이 문선명을 만나고 싶어서 수택리 총공장 근처로 이사까지 와서 문선명을 기다렸는데 얼굴 한번 마주대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 버리고 말다니 ‥‥ 저 세상에서 이순철은 문선명을 얼마나 원망하며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인가?
오 명 춘*
집을 판 대금 5백만원을 몽땅 문선명에게 바쳐서 남편과는 이혼하고, 아이들은 남편한테로 가 버려서, 혼자서 문선명을 위해서 살아 왔다. 이 오명춘 집사의 이야기는 앞에서도 자세히 썼으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해 둔다. 그 후 오명춘집사는 교회에 못있게 돼서, 지금은 필립핀에 있는 아들을 찾아간 것이다. 서 이제 새삼 자기의 집으로 오는 것을 그리 반가워 할 이가 없다. 유효민과 내가, 올 봄에 오명춘을 찾아 갔더니 그 딸 한데서도 나가 달라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지금쯤은 낮선 나라에서 어떠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것인가? 유효민과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사람들을 장래 남은 인생을 평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서 서로 노력 할 것을 약속 하였다.
그러는 동안 열심히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김안실은 문선명을 제일 사랑하고 있었다. 그 후, 김안실의 남편은 미국에서 귀국해서, 서울 청량리에 병원을 개업하였다. 한동안은 남편과 살고 있었지만 역시 문선명을 못 잊겠다며 교회로 돌아왔다. 문선명에게서 복귀를 받을 당시의 김안실은 30세 가량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문선명은 그 젊은 안실이가 마음에 들어서, 내가 서울에서 부산에 갈때마다 반드시 편지를 써서 내가 그것을 전해주는 책임을 맡았다. 지금 다 나이든 이 사람을 문선명은 돌아다 보지도 않는다. 이제 새삼 남편한테도 돌아갈수도 없어서 혼자서 방을 빌려 가지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리치고 또 혼인 중매로 직업화 하다시피 홀홀 단신 쓸쓸한 인생살이를 하고 있다. 유효민과 나는 이와같이 문선명과 통일교회에 배신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책임을 지고 남은 인생을 보낼수 있도록 노력 할것을 결심 하였다. 136
그러나 유신희씨는 아들들 집에 살 면목도 없고, 아이들도 어머님 모시기가 서먹하다 하여 구로동에 방을 두칸 빌려서 바느질 일을 해 가면서 겨우 살아 가고 있는 형편이다. 과거 눈이 멀어서 문에게 속은것을 한탄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날그날 고생 이 사람에 관해서는 유효민과 나는 도와 줄 것을 약속 하였다. (제 7장 참조)
임영신은 다섯살쯤 되는 딸이 하나 있었고 혼자사는 몸인고로 가볍게 교회로 들어올수 있어서 푸로마이드 사진을 추운 겨울철에도 우물물로 수세작업을 하여 열심히 도왔다. 이 또한 문선명 이 누구보다도 매우 사랑을 받아왔다. 교회가 발전하여 여러번 이사를 했고 용산구 청파동 시절 문선명은 남녀 이상상대 설교를 한참 역설할 때다. 교회 교인들은 이심전심으로 임영신은 자기와의 이상상대의 꿈이 깨진줄 알고 탈교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시내모처에 단신으로 생활중 교회에서 친숙하게 지내던 딸을 만난 인연으로 그딸 아버지 재산가 이순모의 끈질긴 구애끝에 다시 부부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 번창하여 재벌급에 들었다. 그 사장도 병사로 아들하나 낳고 또 과부가 되었다. 미망인이 된후 많은 사업체를 전처 장남에게 물려 주고 외롭게 아들하나 바라보며 외롭게 살고 있다. 그리고 한동안 어느 예능인과 결혼하였으나, 그 사람과도 이혼해서 또 독신이 되어, 자기의 가정부 아줌마와 같이 살고 있다. 그렇게도 사이가 좋았던 이순모와의 결혼생활 무렵 시간만 있으면 가만히 불러내서 만나고 하던 문선명도 임영신 만은 전연 돌아 보지 않았다. 지금은 방 한칸을 빌려서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유효민과 함께 그녀를 만났는데, 그 생활 형편은 쌀 살돈이 없을 정도로 궁색하였다.
138 문선명에게 배신 당하고 버려져서 지금은 60-80세가 된 할머니들은 인생 여한을 품은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와같이 정도에 넘치는 행위는 인간의 상식에서 보던지, 종교가의 입장에서 보던지 간에 절대로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며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파탄을 가져 올것으로 필연적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문선명 이야 말로 진짜 대 사단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한 6마리아라고 하는것은 모두 재산가의 아내뿐이었고, 가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2천년전에 예수는 그가 만났던 간통한 여인, 향유의 여인등 육인의 여자와 섹스를 하지 못했기에 예수는 죽었다. 육인의 유부녀를 복귀하는 것은 원리의 근본이다 등등으로 말한 문선명의 이야기는 실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 악용한 함정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케 된다. 사실 그들은 문선명의 호색적인 섹스의 포로가 되어 미쳐서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문선명 한테로 달려와서 돈이나 재산이 확실하게 문선명의 손아귀에 모였다. 그리고 빨아 먹을 만큼 발아 먹은 뒤에는 돈있는 여인을 찾아내서 6마리아의 이름으로 꾀였던 것이다. 정말 그대로 풍부했던 그녀들은 하나같이 허수아비 빈 털털이와 같이 되어 버림을 당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도 사랑도 없다. 문선명의 색과 금욕의 가련한 희생자의 죽음만이 남았다. 더욱이 해마다 새로운 마리아로 교체해서 볼일이 끝난 마리아는 자꾸만 버려 치워서 두번 다시 돌보지 않는 것이다. 6마리아란 무서운 함정에 빠진 여성들의 대명사로서 그 이면에는 실로 몇십명, 몇백명이라고 하는 희생자의 예비군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의 재산이나 자금이 없었다면 통일교회가 발족해서 발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를 아는 내가 첫번째 증인이다. 예를들어 이북에 원적을 둔 황모 중년 부인은 통도 크고, 뱃장도 좋아서 자기의 것을 다 바치고 남에 돈도 잘 들러다 댓다. 그래서 사랑을 받게 되니 인신이 아닌가. 자기 돈도 다 떨어지고 하여 문에게 낙태 수술비를 달라고 했더니 무정하게도 딱 잡아 떼며 노발대발 울면서 탈교선언에 겁이나 유 부장이 문교주에 이야기 해서 수술비를 얻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교회에 돌아오지 않았다 140
김 원덕 이란 사나이
부산의 교회에서 노여움이 치밀어 미친듯 했던 최선길 부인에게서 문선명을 구출해낸 김원덕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시대에 육군사관학교 포병과를 나와서 일본군에 복무하던중, 포병소위 로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후 그는 북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포병사령관 무정의 한쪽 팔 노릇을 하며 근무하면서 북조선의 비밀을 몇차례 남쪽에 흘려 보냈다. 이 사실이 사령관인 무정이 군사회의로 중국에 가있는 동안에 폭로 되었다. 당초 사형을 선고받아 집행되는 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김원덕은 명랑한 성격으로 솔직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냥 사형의 집행을 기다리는 정도라면 죽는편이 났다고 결심하고 옥중에서 자살을 도모 하였다. 다행이도 그것은 미수에 그쳤고 수갑을 찬채로 독방에 들어 있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귀국한 무정장군은 자기의 한쪽 팔이었던 부하가 사형을 선고 받아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을 알았다. 무정장군은 고급 군사기관에 입김을 넣어서 그가 신원보증을 한다는 조건으로 김원덕의 사형은 4년 8개월의 형으로 감형된 것이었다. 감형 통고를 받은 김원덕은 평양 형무소에서 홍남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위기일발로 총살을 면한 김원덕과는 내가 홍남 수용소에서 총반장이 된 후에 문선명으로부터 소개되어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세사람은 친형제처럼 문선명을 중심으로 모든것을 의논하면서 쓰라린 상황을 극복해 왔다. 또 김원덕과 나는 북쪽의 평남 대동군 용연면 출신이어서 서로 가까운 이웃 마을의 출신이라고 하는 점에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142 한참이 지나자, 그 소리는마치 선녀가 노래하는 것 처럼 들렸다. 그대로 위축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얼굴 생김새로는 자신도 있었으므로 큰맘 먹 그로부터 부산역에 도착하기 까지는 아직 세신간이 있었으나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열심히 이야기에 빠졌다. 야간열차 속에서 알게 된이 부인과 김원덕은 완전히 호흡이 맞아서 그날 어떤 곳에서 만날것을 약속하고, 부산역에서 헤어졌다. 약속한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같이 하였는데 그 부인은 그에게 마치 연인에게 대하는것첨럼 행동하였다. 그녀의 행동에는 일본여성 처럼 사교적인 여자티가 넘쳐 흘러서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김원덕은 부산에서 볼일을 마치면 다음날 야간 열차로 서울로 올 예정이었으나, 그 부인과 같이 있으니까 한 주일이 금방 춘몽으로 어제 서울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 이었다.
아름다운 부인과 진수성찬
그리고 오늘 그녀의 자택으로 갈 약속을 한 것인데 자기 혼자서 가기는 쪽스러워서 박선생님도 같이 가셨으면 합니다 라고 한다. 일본사람이 살던 헌집이라서 그다지 깨끗한 집은 아니었다. 현관으로 가니까 문패에는 "윤청정심(尹淸淨心)"이라고 책어 있었다. 두 사람이 현관에 들어서자 20세 가량의 두 여인이 나와서 우리를안내해 주었다. 첫방에는 큰 불단이 있고, 그 중앙에는 순금인지 도금인지 잘 모르겠으나 황금빛 불상이 놓여 있고, 좌우에 놓인 놋쇠 촛대에는 밝은 낮인데도 불이 켜져있다. 다음방은 자리가 열개도 더 깔릴만큼 큰 방이었는데 객실인것 같았다. 그곳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한참만에 여인이 정중하게 차를 날라다 주었다. 대단히 좋은 향기로서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중년부인이 들어와 앉으면서 그녀는 얼굴을 약간 숙여서 미소지으며 그리고 인사를 하였다. 김선생 흔자서 오시라고 말 한것인데 이렇게 누추한 곳에 선생님까지 오셔서 정말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 목소리는 밝고도 대단히 깨끗하였다. 40대 후반 정도로보였는데 매우품위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김원덕에게 소개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인사 하였다. 무엇인가 마음까지 관통된듯한 분위기였다. 마음을 진정하고 맞아서 그 부인을 다시 보니까 머리는 빗어올려 쪽을 짓고 긴비취 비녀를 꽃고 옛날의 궁전에서나 쓴듯한 금빛장식에 빨간 댕기를 드리우고 있었다. 감색저고리에 엷은 옥색치마를 입은 모양은 멋진 우리의 전통 정식 복장이 었다. 144 그것은 첫날밤을 맞이하는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듯한 모양이었다. 부인의 안내로 옆의 방으로 갔더니 고급요리집과 같은 한식요리상이 놓여 있고 은제의 주전자에는 노오란 빛갈의 술이 들어 있어서 한잔 드시지요 라고 은제 술잔으로 한잔 받은 술은그야말로 최고의 가슴설레임 이 아닌가! 중국의 시인 이백은 장강폭 아래서 술을 마시며, "삼천자 높이에서 똑바로 떨어지는 물은, 흡사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과 같구나"라는 시를 읊었다.
그 부인은 금강산에서 10년간 수업해서 이 세상일은 무엇이고 내다 볼 수가 있어서 사람의운명을 점칠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여명을 판단 할 수도 있고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그 사람의 당선을예언 할 수 있게 되고, 대학의 입학시험 때에는 그 사람의 합격 여부도 알수 있게 되었다고한다. 그 덕분으로 그녀가 경영하고 있는 알루미늄 그릇의 제조공장은 그녀로서는 본업이 아니라 부업으로 된것 같다고 한다. 그녀의 참 목적은 불쌍한 고아들 특히 여자 고아를 길러 대학교육까지 받게해서 사회에 내 놓는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길러낸 여자 아이들을 전원 이화여자대학을 졸업시켜, 현재 돌보고 있는 고아는 17명 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고 있자니까, 감히 얼굴을 들고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국회의원 선거때가 되면, 이 부인집에는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대학의 입학시험때도 역시 같다고 하는것이었다. 우리들은맛있는 성찬을 잘 먹고 이상한 그 부인의 이 야기 를 듣고 또 오십시요 라고 전송을 받으며 그집을 나셨다 그로부터 김원덕과 나는 그집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김원덕의 덕분으로 나는 언제고 성찬을 먹을 수 있어서 한 동안은 괜참은 생활을 보냈고, 서로간에 친하게 되니까, 나는 불단에 놓여 있는 싱싱한 과실을 마음대로 집어 먹어도 실례되지 않을 만큼 친숙해겼다. 회사의 명칭은 윤여사가 "운흥공사"라고 명명한 이름인데, 구름처럼 일어난다고 하는 의미였다. 사장이 된 김원덕은 토목건축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경영은 그리 잘되지 못해서 얼마 못가서 이 회사의 간판을 내리게 되고 말았고, 그후에도 또 여러가지 사업으로 김원덕과 윤여사는 협력하였으나 운이 없는 탓인지 그리 잘 되지 않았다 146 나는 김원덕과 의논하여 문선명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 하였더니 만나도 상관없다고 말하여 1954년 10월 25일 오후 6시에 신당동 양문영여사의 자택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 다음날 윤여사에게 그 일을 전하였더니 그녀는 대단히 기뻐 하였다.
약속의 날, 김원덕과 나는 윤여사를 데리고 양여사의 자택에 안내하였다. 양문영, 신정순, 오명춘, 옥상현, 지승도, 이순천, 이기환, 양윤신, 등의 여자 식구들과 유효원, 유효민. 이수경, 김원태등이 모였다. 그날은 예수가 세사람의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간 때와 같은 분위기가 되어, 문선명도 원리강의를 밤새도록 이야기 했다. 문선명도 신랑이 신부집에 간것 같은 태도로 윤여사와 앉아 있었다. 문선명은 송도욱 장로를 비서역으로 하고 부터는 자주 윤여사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148 통일교회의 원리가 아무리 훌륭해도, 자기는 더 믿을 기분도 없다. 선생 아니 문선명을 용서 할 수 없다. 문선명은 종교의 이름을 빌어서 여자를 속이는 사기꾼이다. 김원덕은 군인출신답게 외골수인 데가 있어, (나도 그렇지만) 정말로 격분했다. 그래서 문선명이란 사나이는 발정한 개다. 음수다 라고 뱃속에서 짜내듯이 매도했다. 김원덕의 억울함은 잘 알기 때문에 나는 그 이상 댓구할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해뒤의 일, 윤여사, 식모, 양녀(대학생딸)의 일가 3인이 누군가에 의해서 타살당한 사건이 생겨서 큰 소란이 되었다. 경찰도 필사적으로 수사를 한 모양이지만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김원덕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어, 나도 당시 경찰의 조사를 받다 그의 소재를 물었었다. 김원덕한테는 전혀 변한 것이 없어서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러던 그는 죽어서 이미 3년이 되었다.
제5장 재림 메시아의 정체
원리와 실천의 모순
나의 수기는 진실의 기록
한동안 나는 경주에 있었고 문선명은 부산에 있었다. 그와 채차 합류하고서도 이 세상의 창조의 역사와 타락의 원인, 그리고 이 세상을 복귀시켜 하나님이 구원한 깨끗한 세상의 창조 목적대로 되돌리는 원리를 듣게 되었다. 원리의 주인공인 재림 메시아 참부모의 이름 아래 통일교회는 이제야 세계 백수십개 국가에 퍼져 있다. 진정한 어머니인 해와가 된다고 하는 것으로 한 사람을 선택하여 "어린양의 잔치(정식결혼)"를 행하고 열한사람의 아이들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그 첫번째 아들을 아버지 문선명의 후계자로 하고자 하는 세습체제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다만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 만을 쓴, 겉치례 만의 내용 이었다. 그러한 책에 책에 씌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나도 비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이 책에서 써 온 것은, 문선명과 같이 있으면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행동해 온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 했다고 단언해 두고 싶다. 문선명이 흥남수용소에서 시간만 있으면 나에게 이야기한 "원리"는 부산 수정교회에서 원고로 써 냈다. 152 이것이 '원리원본'이다 (이것은 종이에 연필로 쓴 것인데, 이것을 대구에 와있던 정선옥이 보관하고 있었고, 내가 서진광산에 있을때 박애자가 가져다 주었다. 그때 내가 공책에 베껴쓴 것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 이 원리원본을 기초로해서, 두뇌가 뛰어난 유효원이 '원리해설'(原理解說)을 썼다.
우리 한국이나 한반도에는 단군을 비롯한 건국의 신화가 있다. 일본에는 천조대신이 있고, 중국에는 덕왕형제 11인 등이 있다. 그런데 내가 따랐던 문선명은 한나라의 국조가 아니라, 세계의 재림 메시아라고 한다. 지금까지 출판된 많은 책 가운데는 문선명을 구세주라고 쓴 것도 있다. 문선명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계를 통일 하려고 주장 하고 있으나 내가 믿어온 재림메시아는 점점 그 모양이 커감에 따라, 그 원리와 실천이 점점 상반 되어 가는듯한 느낌이 드는것을 어찌하라. 2천년전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간 예수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있다. 문선명은 제3의 아담 참부모로서, 통일교회 교인은 물론 온 세계 사람들로 부터 추앙받아 백수십개 나라에 넓혀져 있다. 그러나 식구라고 불리는 통일교회의 신자가 되더라도, 사단의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와 생활에 변화된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나빠지던가 비명의 죽음을 맞은 사람도 있다. 나는 그점에 대하여 계속 의문을 가져왔다. 많이 있는 통일교회 관계의 출판물 가운데 실제로 내가 읽은것에는, 통일교회는 이러한 윤곽의 교회이며, 그 교주인 문선명은 원리라고 하는 교리에 나오는 재림메시아 이다 라고 하는정도의 표면적인 것밖에 씌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문제는 문선명이 얼마만큼 재림메시아 로서의 역활을 다 하고 있는가. 구세주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가 하고 하는 것으로 귀결 된다. 그런데 뻔뻔스러운 문선명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지금부터도 계속해서 희생 시키려고 하고 있음으로, 더 이상 잠잠코 보고 있을 수 만은 없다고 생각되어, 이책을 쓰기로 한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통일교회 교인들은, 지금도 백수십개 나라에서 문선명을 참아버지로 생각하고, 한학자를 참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이 세계가 통일될 것을 매일 같이 기원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나도 문선명이 진짜 재림메시아가 되어서 이 세상을 구원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는 식구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만약 문선명이 재림메시아가 아니고, 요한 묵시록 20장에 씌여 있는대로 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154 또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고 한다면, 진짜 참 신부와 어린양의 잔치를 올려 참부모가 되여, 열 한사람의 아이들을 출산하고 있는데, 어째서 참 부모한테서 남은 아이들이 두명씩이나 교통사고로 죽어 갔는가. 또 다른 여자에게 출산시켜 입적한 세사람 가운데 한사람도 사고로 죽었다. "요한묵시록 21장 4절"에는 사람의 눈에서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신다. 이미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부르첫음도 아품도 없다. 먼저 것이 지나가 버렷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다.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면, 복귀 원리대로 어린양의 잔치를 행해서 이 세계의 모든것을 해방하는 날짜 까지 정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세상은 그대로인 것인가. 원죄의 근원을 모두 없애고 복귀의 의식을 거쳐 참부모가 되었을 터인데 어째서 거기서 태어난 어린 자식들이 죽어 가는가. 또 그 자손들 가운데는 부끄러운 스캔들을 일으켜서 언짢은 소문까지 내는 자도 있다. 나는 문선명이 원죄를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 왔는가. 원리대로 실천하였는가? 등에 관해서 밝혀두고 싶다. 문선명의 장래는 하나님 만이 결정 할 수 있는 문제 이다. 나는 다만 문선명이 발표한 원리에 근거해서 그 원리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함께 살고 있었던 때의 사실에 대해서 써 보려고 생각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문선명의 원리를 복습해 두자.
156 그의 그 원리와 실천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복귀를 설명하면 해와가 성숙하지 않았을 때에 천사장 루시엘이 섹스를 해서 해와의 정조를 빼앗았기 때문에 이 죄악을 깨꽃이 하기 위해서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복귀를 실현하는데 우선 하나님과 같이 더렵혀 지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서 루시엘 에게서 정조를 빼앗긴 해와와 같은 여인과 루시엘이 해와와 섹스한것과 같이 이 두 사람이 섹스를 하는것이 펼요하게 된다. 그리고 루시엘은 해와 위에 올라타고 섹스를 하였으므로, 지금 이 사단의 세상에서도 똑같이 남자가 위로 타고 섹스를 하는 것이 보통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과 동격으로 복귀할 수 있는 사람은 말 할것도 없이 문선명 이라고 원리 에서는 단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선명은 왜 죄 없는 하나님과 동격의 입장에서 복귀 시킬수가 있는가. 문선명이 이 사단의 제상에서 극히 평범한 가정에 태어난 것에서부터 생각하자면, 도저히 납득 할 수없는 일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납득되는 부분이 없다. 한번 더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흥남 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을 문선명과 같이 지냈다. 이 수용소에서의 1년 6개월간은 외부생활의 16년 정도에 해당되는 기간이라고 서로 간에 이야기 하곤 했다. 그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문선명이 16세때 (1935년), 부활절 전날밤, 예수가 꿈속에 나타나 예수가 달성 하고자 하였던 일을 하지 못한채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므로, 당신이 나 대신 그 사명을 완수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선명도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몇번이나 부탁을 하였으므로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이 예수에게서 부탁 받았다고 하는 것은 후에, '원리'에서 말하는 '복귀'의 실천이며, 섹스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의 여부는 본인 밖에 알지 못하는 이야기 이므로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예수의 꿈을 봤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있을 터이고, 꿈속의 말씀에 의한 예수의 이야기 한 것이, 이렇게 엉뚱한 섹스 복귀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무래도 이해 할 수 없다.
1955년(소화30년) 7월 4일, 문선명 등이 체포되어 중부경찰서의 유치장에 수감 되었을때 평양시절의 정득은 이 찾아와서 나에게 그녀의 집까지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註 : 나도 마침 그당시 문선명의 평양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김종화를 찾던 중이어서 정득은이 살고 있는 집 까지 가기로 하였다. 50세가 되는 정득은은 원효로 3가에 조그만 집을 빌려서 살고 있었다. 여기서 1주일을 함께 지냈다. 그리고 문선명이 서울에서 평양에 도착한 후의 정득은 과의 신비(?)에 싸인 생활을 듣게 되었다. 158 정득은 은 북녁의 평안북도에서 한때 번성하였던 이웅도 목사, 황국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복중교 와도 관계는 없었다. 다만 기독교를 믿고 있었는데, 1946년 6월 6일 하늘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평양으로 향하고 있으니, 나가서 그 사람을 맞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 했다는 것이다. 정득은 은 부랴 부랴 남쪽으로 찾아 갔더니, 사동이라고 하는 곳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릭구삭 하나를 멘 청년이 이쪽을 향해서 왔다. 그것이 문선명(당시는 문용명)이었다. 정득은은 그의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한 후에 자기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정득은의 자택은 만수대 밑에 있었다. 문선명을 안내하여 온 정득은은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는것. 선생이 오는것을 알고 마중하러 갔던 것을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득은은 자기가 여호와에게서 성모로서 인정 받았으므로 문선명과 섹스를 하면 문선명은 신과 동격의 입장이 되어 타락한 부부의 입장에 있는 여인들을 복귀 시킬수가 있게 된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문선명이 밑으로 가고, 정득은 은 그 위에 올라타서 소생, 장성, 완성의 3회의 섹스를 하였다. 미 복귀의 실천공식과 방법은 흡사 문선명의 원리와 같다. 성모 마리아 대신에 성스러운 정득은 파 복귀를 한 것으로서, 문선명은 온전한 하나님 처럼 죄 없는 정득은 은 꿈속에서 여호와와 섹스를 하였으므로 자기는 성모라고 말한다. 너무나도 잘 꾸며진 이야기지만, 문선명의 한쪽 팔과 같은 입장에 있던 당시의 나는 오직놀랄 뿐이며 감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창조, 타락, 복귀의 원리도 완성되 있지 않았을 때에, 원리도 모르고 문선명과는 처음대면의 정득은 이 도저히 생각 할 수 없다. 앞뒤의 사정으로 보아 두 사람이 육체관계는 있었던 듯 하지만 아무래도 후에 억지로 끌어다 붙인 조작된 이야기라고 나는 지금 믿고 있다. 백보를 앙보해서, 만약 그것이 진실이었다면, 통일교회의 인쇄물은 어째서 이 (정득은의 대기적)에 관한 것을 한 줄을 쓰지 않았을까 ?
이 후, 문선명은 나최섭의 집으로 옮겼고 다음에는 경창리에 있는 정명선, 김종화 부부의 집으로 가서 거기서 예배를 올리게 되었다. 이미 섹스관계가 있었던 지승도 옥상현들과의 여러가지 갈등이 있어서 정득은 은 독립해서 다른 신자를 모아놓고 예배를 올리고 있었다. 또 여기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160 요컨데, 신자이었던 여자들이 문선명과 섹스 함으로서, 문선명에게 복귀할 자격을 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거기서 문선명은 나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것에 관해서, 통일교회의 출판물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문선명이 복역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여성을 역시 6마리아 논법으로 꾀어내서 육체와 금품을 뜯어 냈던 것이다.
색과 욕과 돈과
남편의 돈을 훔쳐 오라 1955년 7월 4일 문선명은 서울시 경찰에 구속 되었는데 재판에서 무죄로 선고되어 석방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통일교회는 죄없는 사람이 구속 되었으나, 그 후 사실이 밝혀져 석방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당시 문선명과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있었던 내가 그간의 사정이나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문선명은 실제로 여러가지 많은 죄 를 범 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의 기민한 대책으로 경찰의 조사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았던 것과, 위증이나 거짓으로 뒷말을 맞추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던 덕분에 무죄로 되어 석방 되었던 것이다. 사실로 말하면, 재림주로 믿었을 때 어떻게 허락없이 재림주의 연령을 내 마음대로 올릴수 있겠는가. 이건 생각도 못할 일이다. 재림주 문과 의논해서, 허락아래 연령을 올려서, 제 2국민병을 기피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태산 같지만 가령 이순철이라고 하는 유부녀를 자기는 재림 메시아 이니까 자기와 복귀 하면 당신도 6마리아 의 한 사람 예수의 마리아로 된다고 속여서 섹스를 했다. 훌릉한 간통죄 이다. 또, 이 세상을 사단이 주물르고 있으나, 이 세상의 모든 재산은 본래 하나님 것이므로, 사단이 쓰고 있는것, 남편의 돈이나 집에 있는 재산은 전부 훔쳐서라도 나에게 헌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이 이상적인 세계로 되며 하나님은 수천배도 넘는 행운을 주실 것이다. 어느 때에는 문선명에게 강요되어 당시의 미국달러 1만 5천불이나 되는 돈을 집에서 끄집어내서, 그돈으로 두달동안 문선명을 마음껏 놀아나게 하였다. 절도의 훌륭한 공범이다. 이것이 어찌하여 죄가 안 될 것인가. 남펀이 경찰에 그런 이야기를 안하고, 간통죄로 고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디어 냈을 뿐이다. 다른 마리아의 남편들도 모두 그러했다. 또 처녀인 딸들에게, 문선명은 나의 처가 되면 세계의 진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해서 믿게 하고, 속임수 섹스를 했었다. 쾌락에 빠지고 결흔을 구실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청순한 처녀들을 범한 문선명이 어째서 죄가 되지 않았을까? 식구들의 눈물어린 심정을 통일교회는 생각해야 할 것 이다
왜 죄없는 아이들이 죽는가
그리고 나는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탈세라고 하는 죄명으로 미국의 형무소에 투옥 되었던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요한 묵시록 21장 3~4에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살며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스스로 사람과 함께 계셔서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신다. 이미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부르짖음도 아픔도 없다. 먼저 것이 이미 지나가 버렷기 때문이다 라고 쓰어져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것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 재림 메시아 시다.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그했던 것 처럼, 미국에서의 사건도 6천년간 하나님의 희망이었던 복귀의 실천을 하고 있어서 사단 세상의 법률에 걸려서 투옥되는 것은 원리의 예정에 있다고 문선명은 말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원리대로, 처녀를 신부로 맞이하여 "어린양의 잔치"를 행해서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였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는 교통사고로 또는다른 형태로 죽은자 들도 있고, 세상에 여러가지 좋지 못한 소문을 퍼트리고 있는 장본인도 있는 것은 무슨 이치일까? 문선명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왜 그런지 당연한 사실을 왜곡해서 선전하며 전도하고 있다. 그 때문에 도리어 문선명의 장래는 점점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라고생각한다. 나는 문선명이 원리의 실천이라고 말하면서 하고 있던 행위를 옆에서 직접 보아온 사람으로서, 그 사실을 명확하게 하여 .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인가? 아니면 남달리 여색을 좋아하는 돈벌이 주의자인가 라고 하는 것을 밝혀둘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그 대신 제3의 아담으로서 재림 메시아의 임무를 다 해 주기 바란다 라고 말했다는것(통일교회의 신문에도 명기 되어 있다)의 두 가지를 들수 있다. 만약 그대로 문선명이 하나님의 실체로서 복귀의 임무를 실천 하였다면, 창조 당시의 에덴의 동산이 복귀되어, 통일교회의 교인들은 참 부모와 함께 눈물도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복귀(復歸)라고 하는 미명으로 섹스
사탄에 의해서 해와를 빼았긴 것 때문에, 하나님은 6천년 동안이나 노여움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나넘은 해와를 도로 찾기 위해서 제2의 아담인 예수를 이 세상에 보냈으나, 예수의 생모인 마리아는 예수를 자기의 아들로 밖에 생각지 않고, 자기의 아들이 우선 어머니와 섹 그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고 원리는 설명하고 있다. 또 원리원본에는, 가롯 유다의 연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가 빼앗아 복귀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원한을 없애기로 되어 있었는데, 유다가 이에 복종하지 않고 은화 30냥을 받고 예수를 팔았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예수가 복귀하려고한 6여인의 마리아를 복귀 시켰더라면 원리대로 실천되게 되는 것이라고, 나도 이해 하였었다. 그런데 6인의 마리아를 복귀시킨 후에도 문선명은 손에 닿는대로 몇십명이 넘는 여인을 복귀 시켰다. 166 한충화는 열열한 크리스챤으로서 미망인이 되어 사무엘 이라고 하는 벙어리 아이를 데리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었는데,그 '원리'에 속아서 문선명에게 자기의 몸을 제공 하는것이 하나님의 뜻 이라고 믿고 기뻐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선명이 또 다른 여자와 복귀하고 있는것을 알자, 그 길로 서울로 돌아와서 문선명과 결별하였을 뿐아니라, 그곳이 더럽혀 졋다고 자궁 수술까지 하였단다. 그때 까지의 자기의 경솔한 행동과 섹스에 미쳐있던 문선명에게 정조를 빼앗긴 것을 후회하면서 그 뒤 얼마 안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누구 때문이며, 누구의 죄라고 말 할수 있을 것인가? 1955년 이화여자대학의 5인의 교수가 퇴직하도록 추궁하여 사표를 내고, 14인의 학생이 학교에서 를겨나게 되었다. 이일은 역시 문선명과 교수와 학생과의 복귀 사건에 얽혀 있던 일이다. 그리고 복귀를 한다고 하는 것만이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여성 식구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고 ,또 원리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여인들에게는 무작정 복귀를 받는 일에만 필사적인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통일교회에 대해, 외부에서는 통일교회에서는 벗고, 춤추며 한번 입교하면 마취에 걸려서 두번다시 올수 없도록 해 버린다 고 하는 소문이 널리 퍼져 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문선명의 원리의 이야기를 듣고, 타락원리와 복귀원리를 들음으로서, 각계 각층에서 와있던 사람들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 왔다. 지금까지 아이들과 함께 평화로운 생활을 해온 부부와 처가 통일교회에 들어가고 나서는 옷을 벗는 것도, 남편과의 섹스도 거부하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람들은 문선명에게 바치는 경제 문제만도 골머리를 앓았다 . 그래서 결국 이혼하게 되고, 문선명의 원리에 따라 가정생활이 파탄나게 된다. 경제적 기반이 없는 가정에서는, 더욱이 믿기만 하던 남편이 처에게 절망해서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고 말게 된다. 그 당시 통일교회의 섭외부장이었던 김인철은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는것이 큰일의 하나였다. 이와같이 파탄된 가정 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도 170가정 이나 된다. 그 당시 문션명으로부터 복귀를 받기는 하였으나, 문선명의 행위를 보고 체험하고서는 저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오직 색에 미친 행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여인들은 남편에게는 모르는체 하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이 여인들의 심경은 지금쯤 어떠할 것인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 식구들은 그래도 모든 것을 바쳐서 봉사했다. 168 그때는 웃으면서, 그러믄요 하나님이니까 라고 대꾸해 두었으나, 재림메시아의 복귀의 의식인 만큼 엄숙한 것이라고 상상 하는것도 당연 하겠지,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하나님 이었어야 할 문선명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앞에두고 입 맛을 다시는 개같이 되어굶주림에서 해갈이나 된듯이 섹스를 했을뿐이다.
사실 문선명은 정력이 뛰어 나서 하루밤에 열번 한 일도 있다고 한다. 본처였던 최선길의 말이니까 이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복귀를 받을 때의 부인 식구들도 그렇다. 순수했던 여성들이니까 당연 하겠지만 멋대로 너브러져서 곧 기를 쓴다. 큰 소리를 지르며 실신한 사람도 있다. 내가 돌봐 주었으니까 이것도 틀림 없는 사실이다. 사단을 부정하고 있는 문선명의 복귀라지만, 결국은 사단 세상의 섹스와 무엇 하나도 다를것이 없다. 그러한 문선명의 정체를 재발리 눈치채고 가정으로 복귀한 부인네들은 정말로 현명하였다. 그녀들은 엄청난 피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원한은 여름에도 서리를
그리고 지금까지 희생이 되어온 사람들에게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문선명을 원망하면서 통일교회를 나서는 여성이 날마다 늘어 가고있는 상황이다. 문선명은 장래 어떠한 방법으로 무슨 원리를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 갈 것인가 ? 미국의 목사들에게 원리의 비디오 테이프를 35만개나 만들어서 발송 하였는데 그것으로 이런 것이 방지되게 될 것인가? 미국의 목사들이 원리설명회란 명목으로 세계각국을 방문하여 몇억원이란 돈을 쓰면서 포교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을 방지 할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미국, 한국의 유명한 학자들에게 비싼 원고료를 주고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 구세주로서 치켜 올리려고 하고 있지만, 한국의 속담에 여자의 원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註 - 이것은 음력이니까 5, 6월은 한 여름이다)고 하는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청춘시절에 문선명에게 복귀되었던 여인들은 재산을 전부 털어 넣고, 남편한테는 이혼 당하고 자식들과도 헤어져서 지금은 폭삭 늙어 버렸다. 이 사람들은 거의 식모를 두고 살았을 만큼 넉넉한 가정의 부인들이었는데 재림주! 문선명을 맞아서 그에게 모든것을 바쳐 버리고 지금은 먹고 지내는 것도 옹색해서 자기(자신)가 식모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사람이 몇 십명이나 된다. 또 원한을 품은채 일생을 보낸 사람들은 몇백명이나 될 것이다. 170 나는 이 여인들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 보려고 생각 하였으나, 나의 경제적인 사정둥 여러가지 문제로 실현 하지 못해서 참으로 민망하게 생각한다.
인간 사회의 원죄를 뿌리에서 부터 뽑아버린 후에, 또 죄없는 깨끗한 세상으로 되돌려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이, 영원히 참 부모를 모시고 살아 갈수 있는 세상이 창조 된다고 하는것이 원리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참어머니인 처녀 한사람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또 알기 힘든 문제가 많이 있다. 문선명이 평양에 있을 무렵 정명선 씨의 처이며 아이들의 어머니인 김종화가 "어린양의흔인 잔치"의 상대로서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문선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징역 5년의 선고를 받아 문선명이 흥남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는 것은 몇차레나 썼다. 부산 영도의 신성묵의 자택에서는 김영회라고 하는 처녀를 복귀 시켰으나 그 후에도 관계를 계속해서 김 영희는 임신하였다.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문선명은 오승택이란 학생에게 연애한 것처럼 연극을 꾸며 김영희와 함께 일본으로 밀항 시켰다. 김영희는 일본에서 문선명의 아들을 낳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살게 되었다. 또 더욱이 이성례 라고 하는 처녀와도 복귀하여, 남자아이를 낳게 했다. 서울로 와서는 6마리아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문선명은 신부인 처녀를 선택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이성화를 서울역 앞의 여관에서 복귀한 것이다. 이성화는 그 후 자기가 참 어머니 후보의 첫번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성화를 선동한 그녀는 신부 참어머니로 선택되어 복귀한 증표로서 금반지를 만들어 이 가련한 처녀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선명은 이 처녀들을 모두 버리고 홍순애의 딸 한학자와 "어린양의 잔치"를 올려, 한학자가 참 어머니가 된다고 말하며 결혼했다. 지금은 많은 통일교회 관계의 출판물 중에서 참 아버지로 되어있는 문선명과 참 어머니로 되어있는 한학자와 함께 살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 한다는 목표를 걸고, 여러 단체와 많은 경제력을 동원해서 문선명을 옥중의 구세주라고 치켜 세워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로서 돋보이게 하기위한 여러 가지 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173
배신한자는 누구냐
문선명의 소개장
그 후, 서울시 북학동에 집을 전세임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고 유효민의 제안으로 푸로마이드 사진을 제작 판매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되어서 교회를 흥인동으로 옳겼다. 식구들도 점점 늘어서 통일교회는 번창해가고 있었다. 그해(1955년)에 7.4 사건 (이화대학 퇴학퇴직사건)으로 문선명과 간부 다섯명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문선명이 출옥한 후에 청파동 (현재 통일교회 본부가 있다)으로 일본식으로 지은 이층집을 사서 본부교회를 이전하였다. 그 후 나는 문선명한테서 수고 하였소 한동한 서진광산으로 가서 쉬십시오 라고 말하기에 그가 써주는 소개장을 가지고 서진광산으로 가게 되었다. 1956년 7월 나는 거기서 생각해 보지도 앉았던 광산의 책임자가 되어 몇 달간을 지내게 되었다. 이 서진광산은 통일교회의 간부였던 정석천이 기부해서 문선명의 소유가 되고, 그가 직접 경영하고 있던 광산이었다. 내가 광산에 가 있는 동안 유효민은 산탄 공기총을 발명해서 특허를 얻었다. 174 이 공기총을 제작 해 보니까 꽤 성능이 뛰어 났으므로 본격적으로 제작 · 판매하게 되어
그 당시 문선명의 친척으로서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문성균이 처음인데 문선명이 찝차를 구입한 때에 운전수로 들어왔다. 그 다음이 문용선 인데 정석천 장로가 경영하고 있던 아산의 토기 공장에 가서 일하고 있었다. 문선명의 친척은 이 두사람 이외에는 한사람도 없었다. 그 이전에 내가 문선명과 부지런히 일하고 있을 무렵에 문선명의 친척은 한사람도 없었고 이름조차 들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현재 문선명의 친척들이 통일 교회의 경제를 좌우하는 상황이 되어 있어서 내부에서도 큰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원리에 반하는 것이다. 문선명은 그전부터 이세상의 모든 돈과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남편의 돈을 훔쳐다가 나에게 헌금 하더라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에 있 그렇기 때문에 여성식구들은 양심의 가책 같은것은 조금도 느끼지 않고 남편의 지갑에서 돈을 몰래 가져다가 문선명에게 쏟아 부었다. 그 덕분으로 오늘날의 통일교회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렇게 식구들이 고생해서 경제적인 토대를 만들어 놓은곳에 문선명의 친척들이 뛰어 들어와서 경제를 주무르며 자유자제로 쓰면서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반면 최초의 단계에서 경제적인 토대를 만드느라고 고생한 사람들은 거의 탈퇴 하든가 쫓겨 나고 있다. 현재 그 당시의 사람으로 남아 있어서 경제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것은 일성종합건설의 사장을 거쳐 작년(1992년)부터 일신석재로 옮겨 간 이수경 사장과 일화식품의 김원필 사장 뿐이다. 이수경은 당시 아직 열여덟살 정도라 문선명의 뒷일은 아무것도 몰랐다. 또 북에서 우리들과 함께 남하 하였을 때는 22세 정도였던, 김원필은 문선명 이 죽으라고 말하면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충실한 심복이었다. 공기총 제작을 시작한 무렵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입교함으로 가정이 산산조각이 되어 고아원으로 보내져서 거기서 키워진 15~6세의 아이들이 수택리에 있던 통일산업(주) 예화공기총 제작소의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통일산업 당시의 사장은 김인철) 그 인원수는 350명 정도였으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그들에게 지불된 돈은 한달에 단 어느때 지금은 고인이 된 김희옥 집사의 17세된 아들이 고아원에서 도망해 나와서 어머니를 찾아 통일교회로 왔다. 그리고 이 모자가 서울에서 주택건설의 공사를 하고 있는 나를 찾아 176 아들은 통일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혹사해서 참을수가 없어서 도망쳐 온 것이었다. 이 사실을 내가 그 아들을 사원으로 쓰고 있을 때에 들은 이야기임으로 틀림없다.
그 이유로서 통일교회는 문선명선생이 숭공강연을 하고 있을때 사단이 문선명선생을 죽이 문선명과 그의처 한학자는 이 세상에 군림한 참아버지 어머니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원리에서는 죄도 더러움도 없을 터인데 교통사고로 별안간 죽기도 하며 사단과 똑같이 행동하는 나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또 일본인의 아스기요시는 옥중의 구세주 문선명이라고 하는 책명을 청년구세주 문효진이라고 바꿀 것인가?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느 사람에게서 들었다. 178 그때 모여있던 식구들은 문선명의 후계자인 그가 참회하기 전의 본래의 불량자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하고 말했다고 한다. 북조선에서 김일성이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정권을 넘기려고 한다는 것으로온 세계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거기에 곁들여 한국에도 통일교회의 문선명이 자기의 아들에게 재림메시아의 자격과 권한을 넘긴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기만 하다. 통일교회는 이제까지 막대한 자금으로 문선명을 재림메시아라고 선전해 왔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일본인 나스기요시가 쓴 옥중의 구세주 구세주 나타나다등 많은 책이 출판되고 있다. 나스기요시가 돈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통일교회의 체질에서 보아 많은 돈을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한 원리 어디를 읽어도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고 한다면 그 아들에게 재림 메시아 를 계승 시킨다고 하는 원리는 없다. 이와같은 통일교회의 내용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 그때의 편의주의로 멋대로 이유를 붙여서 상식으로는 생각 할 수 없는것, 인간의 도리에 맞지 않는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히 하여야 할 원리에 맞지 않는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니까 무섭다.
나는 이러한 사람을 많이 알고 있지만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이므로 그 중에서 일부만 소개한다. 우선 나 박정화 자신의 문제부터 기술하기로 한다. 통일교회사(상권)에 실려 있는 나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다. 박정화가 누님집에 다만 개 한마리가 남아있는 빈 집에 혼자 있을때 김원필이 찾아 가서 다쳐서 다리를 질질 끌고 있는 박정화를 자전거에 태워서 문선명과 함께 피난해 왔는데 그 선생을 박정화가 서진광산 시절에 배신하고 통일교회에서 나가 버린 것이다. 이와같이 통일교회에 기록되어 있는 박정화는 배신자로 되어있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느냐의 한마디다. 이것은 모든 진상을 똘똘 싸서 감추고 문선명의 우상화 하도록 꾸며 붙인 거짓 기록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그 진상을써 두고자 한다. 우선 지금까지의 요점을 정리 한다면 북에서 피난 할 때의 경과(제2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나는 가족을 버리고 다쳐서 상처를 입은 몸에 채찍을 가하면서 문선명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일생동안 고락을 같이 하자고 한 옥중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그후로는, 문선생을 도와 경제적인 문제로 말로서 다 할수 없을 정도의 고생을 해 왔다. 문선생과 유부녀의 복귀라고 하는 섹스에서 생기는 갖가지 충돌에도 내가 대처 하였고 여러가지 고생을 겹쳐 가면서도 살아 왔다. 문선명과 함께 있던 7년간에 두번씩이나 경찰의 전기고문까지 받았다. 최대의 고비 7. 4사건에서는 5인의 간부가 체포된 중에 수사당국의 끈질긴 심문에 대해서 나는 온갖 수단을 구사해서 문선명의 죄상을 숨기고 무죄가 되도록 노력하였는데 이것도 통일교회의 기록에는 아무런 죄도 없었던 문선명선생은 구속 되었으나 무죄로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식구들의 덕분이었던 것은 앞에서 기술하였다. 180 통일교회는 문선명의 신격화에 열중하였으나 1년6개월간의 감옥생활이나 부산의 수정동에서 서울의 청파동에 이르는 7년간 문선명의 한쪽 팔 노룻을 하며 함께 지낸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문선명의인격은 신격적이란 어림도 없고 회노애락이 심하며 금욕과 호색가인 기상이 약한 문선명은 내가 경찰에서 최초의 고문을 받았을 무렵 누가 그를 찾아 가면 항상 피하기가 일쑤여서 안절부절 불안해 했다. 너무나도키가작고 약골처럼 보여서 이 사단의 세상을 맑고 깨끗한 세상으로 복귀해서 본래 그러한일로 이 우주나 세계를 복귀시킬수가 있겠습니까 고 몇번 문선생에게 말한 일이 있다. 1954년 5월 3일의 일이다. 이것도 또 통일교회에서는 무슨 일인지 날짜를 5월 1일로 고쳐서 발표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의 통일교회의 관련 출판물에는 박정화라고 하는 이름은전연 나오지 않는다. 제일로 오래된 나에게 "배신자" 딱지를 붙여서 말살해 버린 것이다.
사실은 전혀 다르다. 배신 한것은 문선명 자신이었다. 그것은 내가 서진광산에 있을때의 일이다. 서진광산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날 조동석이 찾아와서 지금 서울에서 사건이 일어나서 선생은 도망갔고, 그때에 문선명 말이 곧바로 광산에 있는 박정화한테 가서 빨리 다른곳으로 도망하도록 전하시오. 만약 경찰이 광산까지 가서 박정화를 체포해서 취조 당할때에 심하게 고문이라도 당해서 박정화가 나의 일을 고백하게 되면 큰일난다고 지시 한 모양이 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어디를 도망하면 좋을까. 이러한 산 속도 위태롭다고 하는것은 당연히 서울의 교회도 식구들집도 위험하다. 이것 저것 생각한 끝에 우선은 문선명을 만나서내 몸가짐을 어떻게 한면 좋을지 의논 해 보려고 생각했다. 나는 그 동안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서울역전의 지저분한 간이 숙박시설에서 하루에 빵 한개를 씹으면서 살고 있었다. 182
배신자는 문선명이다
한달이상 기다려도 문선명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나는 의심스러운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뒤에 남은것은 서울에서 온 김덕진과 대구에서 거들어 주려고 와 있던 여자식구 세사람뿐 한 동안은 매식을 하면서 견디고 있었으나 얼마 안되어 바닥이 들어나서 끼니도 거르게 되었다. 너무나도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서 밥짓는 아주머니는 대구로 가고 말았다. (그리고 탈퇴 한 김덕진도 서울로 철수해 버렸고 단지 흘로 남은 나에게 같은 마을에 사는 화약주임인 전종만이 때때로 놀러 올 뿐이다. 내가 산속의 광산에서 먹을것에 어려움을 려고 있던 수년 동안에 통일교회는 미국으로 진출하고, 일본에도 통일교회를 창립시켰다. 그리고 3쌍 합동 성혼식(동년 4월 16일) 33조 합동성혼식(1961년 5월 15일)과 소위 36가정의 조직을 만들었다. 36가정의 신부들의 자격은 원칙으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들로 만들었다. 36가정의 신부들의 자격은 원칙으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어야 했으나 기성가정도 있었다. 이제까지의 경위를 지나치게 알고, 문선명의 여성관계도 상세하게 알고 있는 나는 역시 거북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한 때에 또다시 일어난 여자사건으로 쫓기던 그가 광산에 있는 184 문선명은 나를 오래도록 살게 하기 위해서, 도망치라고 한것은 아니다. 자기가 오래도록 살아 남기 위해서 나를 과거의 우리에 가두어 버린채 도망치도록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만은 신장 개점한 통일교회의 안방자리에 나를 돌아오지 못하도록 찬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된것은 정말 훨씬 뒤에서야 알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당시의 나는 하루 한개의 빵조각으로 허기를 채우며 살아가면서 한여름의 땀에 흠뻑 젖는 간이숙박시설에서 한달 이상을 문선명으로 부터의 연락이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이며 거짓이 아니다. 배신한것은 문선명 이다.
제6장 진짜 사단은 문선명이다
산 증인의 이용가치
재혼해서 신천지로
나는 문선명에게 배신 당하고, 서울역전의 간이 숙박시설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나를 구해 준것은 엄덕문씨 였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가서 주택건설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일본 와세다 대학의 건축과 출신으로서 지금은 세계의 건축가 100명중의 한 사람) 그래도 하늘에 맹세하고 출발한 분신으로서 일해온 나를 절대로 방치 할 리가 없다. 흥남의 옥중에서 「생사를 같이하자」고 맹세 하고 여기까지 서로 도와 가며, 생명을 걸고온 두사람이다. 마음 한구석에 그것을 믿고 있던 나였으니, 14년간에 걸쳤던 문선명과의 인연도 이것이 마지막이고 자나 깨나 나의 인생이었던, 통일교회에서도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188 제1의 인생은 북조선시대 제2의인생은 흥남 형무소에서 통일교회 시대이다. 이때 나는 45세 처는 37세였다.
1981년 나는 뇌일혈로 쓰러져서 약 두달 동안 인천 기독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처의 오빠 엄덕문의 처 고희용과 누님의 엄순태가 나에게 「당신과 문선명 선생과는 하늘이 맺어준 깊은 인연이 있으므로 통일교회에서 떠나서는 않됩니다. 떠났기 때문에 당신은 병에 걸린 것이니까, 지금 부터라도 참회해서 통일교회로 되돌아 오시오」라고 권했다. 나도 생각지 않았던 병으로 조금은 마음이 약해 있던 상황이었다. 진실한 크리스찬 이었지만 신앙심이 얇어져이었던지도 모른다. 통일교회의 그 뒷일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열심히 모이는 식구들의 근처의 통일교회에 가서 그들과 이야기라도 나누며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도록 노력하자고 생각하게 되였다. 그랬더니 그녀는 대구교회에있던 류권사의 딸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선진광산에 있으면서 대구교회까지 예배를 다니고 있을때 아직 고교생이었던 류집사의 딸이었다 지금은 이곳 교구장인 문홍권목사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류권사라는 사람은 신앙심이 두터워서 여러가지 고생을 경험하면서도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모두 교회에 다녔던 사람인데 그 아이들은 모두 교회의 임원이 되어 있었다.
오랜간만에 만나 간부 190 남대문에 있는 그랜드호텔의 커피숍에 당시 승공연맹의 회장이었던 김인철과 국제부장 겸 섭외를 담당한 안병일, 김덕진목사, 유효민, 그리고 나, 다섯 사람이 모였다. 이 날 본부교회가 나에게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 한 이유는,「김덕진의 행동을 억제 할수 있는것은 박선생 밖에 없으므로, 어떻게 좀 설득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김덕진은 전술 한바와 같이 작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통일교회의 식구였을때 통일교회에서 애창하는 성가 20여곡을 작사작곡한중, 성가편집사 유효민씨가 19곡만을 발취 게재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통일교회가 그 노래를 작자의 이름도 게재하지 않고 무단으로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수만부나 인쇄를 해서 판매 하였다. 또 김목사는 그가 통일교회에 있을무렵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복귀를 받은 유신회 한테서 복귀의 섹스를 받은 뒤에 릴레이식으로 그도 열사람이 넘는 여인들을 복귀 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복귀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복귀하고 그 복귀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복귀 시키면 섹스의 둘레가 점점 넓어져서 온 세계의 인간이 모두 복귀하게 된다. 그에게는 이 복귀원리의 실천의 실천 방법에 관해서 자기의 체험을 그대로 쓴 원고를 각 신문에 발표하고 싶다고 하는 의향도 있었다. (제7장참조) 동시에 5천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동을 민사재판에 걸어 김덕진 목사가 5백만원의 공탁금을 내서 「성가」의 가창 금지처분을 신청할 계획도 있었다. 김 목사는 이러한 계획을 변호사와 의논해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날 회합이 이루어 졌던 것이다.
통일교 창립의 산증인
서울의 본부교회에서는 가장 고참인 원로인 나에게 어떤 직책이라도 붙여 주려고 이것저것 제안해 왔으나 나는 모두 거절 하였다. 통일교회의 태동기에서 부터 관여 해 온 한 사람인 나는, 나이먹고 늙은 식구로서 통일교회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 되는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협력은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낳은 자식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어버이의 심경이기도 하였다. 192 나는 복잡한 심경 이었지만 사실 있었던 그대로를 이야기 했다. 문선명과 함께 평양에서 부산까지 내려갔던 피난과정을 재현 하기위해서 임진강에서 영등포까지 걸어 주었으면 하는 부탁 이었다. 나는 임진강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것을 부자유한 몸으로 18키로의 거리를 도보로 강행했다. 74세라고 하는 나이 에다가 너무나도 장시간을 걸었기 때문에 혈액의 순환이 나빠져 병원에서는 이 부어 오른 독이 뱃속으로 돌면 위험하다고 겁을 준다. 맨 처음 치료에서 약값이 2만원 침값이 5천원 교통비 4천원등 약 3만원인데 완치 하기 까지 나의 경제 형편으로는 지불이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학생회장에게 연락 해 보았으나 아무런 답변도 없었으므로 하는수 없이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간직해 두였던 수표를 은행에 넣고 한달에 백만원이란 비용을 들여서 겨우 치료할 수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이 사진에 대해서 그들이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미국에 있는 문선명이 이사진을 맨 처음에 보고, 이것은 내가 피난할 때에 박정화를 업고 한겨울 추운때에 맨발로 냇물을 건너는 장면이다 라고 이야기 한듯 하다.
말해 버린다면 문선명이 거짓말을 한것이 된다. 그렇게되면 일본의 식구들은 실망한것이 틀림 없다. 일본의 식구들은 감격해 있었으나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대단히 괴로웠다.
흥남에서는 평양의 여성들과의 성문란한 행위로 사회질서 문란죄, 서울에서는 식구들의 위증과 우리들의 필사적인 행동으로 증거인멸을 한 덕택에 무죄로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대로 라면 장기형이 되는 것 이었다. 196 미국의 탈세사건 외에도, 부동산취득을 둘러 싼 미묘한 소문도 얽혀있다. 1년을 넘게 옥중에서 보내고 다음해 8월 20일에 석방 되었으나, 통일교회는 문선명선생은 사실 무근이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더구나 통일교회가 보배처럼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창조, 타락, 복귀의 원리」는 문선명의 발안(發案)이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 밑에 최선길 부인과 다니고 있던 문선명이 김백문의 논리를 그 되는데로 외워서 논리일관이 되지 못한채, 종이에 연필로 쓴 문선명의 메모를 유효민이 정서해서 정리 하고, 유효원이 논리에 모순없이 구성 한 것이다. 통일교회의 원리는 문선명이 김백문의 는리를 도용해서 유효원이 정리해 낸 것이라고 내가 지적하는 근거는, 김백문 저작 「기독교 근본원리와 성신신학」을 읽으면 일목요연하다.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 병이 웬만하면 곧 찾아 가리다 라고 말하였는데, 3일후에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다. 이 죽은 송사장이 생전에 몇차례 나에게 문선명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일이 있다. 한국의 관습상 남매결혼이란 말도 되지 않는 것으로서 있어서는 않되는 일이다. 나는 열심이 그렇지 않다. 무슨 착오 이겠지 하고 그를 이해 시키려고 애썼다. 이 송사장은 부산에서 내가 문선명을 소개 해서 식구가 되었다. 서울의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출신으로 매우 친하게 지내고있었다. 부산의 세관과장을 퇴직하고 나서 통관사무소를 경영한 사장이었다 198 처음 한 동안은 왜 열심으로 나오는식구로서 제법 많은 헌금도 하였는데, 문선명이란 남자의 정체를 보고는 크게 실망했다고 노해서 탈퇴해 버렸으나 그후에도 문선명의 일을 그 송사장이 자신을 가지고 사실이다 라고 말한 이상 나는 반론 할 수 없었다.
원리대로 실천한 김덕진(金德振)
그 유신희 한테서 복귀를 받은 그는 종로 5가의 엄순태의 집에서 5인의 여자들을 복귀 시켰다 .그 여자들이 또다른 남자들을 복귀시켜 불과 한주일동안에 70여명의 남녀가 복귀 의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점점 넓혀져 갔던바 복귀라고 하는 남녀의 섹스 소문이 협회장인 유효원이나 문선명의 귀에 들어갔다. 광산으로 온 김덕진은 광산의 굴속에는 들어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 혼자 처 밖혀 그때 나는 분명히 당신은 원리대로 실천 한것이니까 당신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약 2년간 나는 그와함께 대화했다. 또 유효원이 나에게 연락이 왔으므로, 나는 서울로 가서 복귀의 실천을 하고 있던 김덕 200
속출한 재림 메시아들의 대책
도리켜 생각해 본다면, 원리대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 남자 식구를 복귀시켜 그남자 식구들이 또 다른 여자식구를 복귀 시킨다고 하는 방식으로 이세상의 전인간을 복귀하여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은 당연 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중에 「나만이 재림 메시아다. 저 문선명은 엉터리고 사단이다」라고 부르짖어 자기의 복귀를 받지 않으면 진짜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몇 사람씩 각곳에 출현해서 그사람에게서 복귀를 받고자 모여드는 신자들도 늘어 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되니까 문선명 은 생각끝에 「36가정」이 란것을 생각해 냈다. 문선명이 세계의 인간을 모두 복귀해서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므로이 36가정만을 직접복귀(혈대교환)시키기로 한것이다. 그 후에는 진정한 부모가 「성수」를 뿌려서 새로 결혼하는 신부에게 축복을 준다고 하는 형태로 바꾸어 「합동결혼식」을 하기로 한것이다. 36가정이라고 하는것은 이러한 경로로 만들어 진 것인데 그러면 왜 36인가? 「구약시대」의 12지파,「신약시대」의 예수의 12제자, 그리고 문선명의 원리를 「성약시대」라고 해서 12제자, 합계 36가정을 택하여 빼앗긴 종적(縱的)인역사를 횡적(橫的)으로 벌려 놓코, 탕감복귀 한다는 조건만을 세워 구약, 신약, 성약과 전세계를 탕감복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36인의 신부는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나 상대가 아니고서는 자격 이 없다고 되어 있다. 복귀라고 하는 것은 섹스를 뜻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혈대교환(血代交換)」이다. 제2의 아담인 예수가 이루지 못했던것을, 제3의 아담(요컨대 문선명)이 이세상에 재림해서,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한다. 이것은 요컨대 메시아가 세계의 대표로서 6인의 마리아와, 36가정의 아내들과 섹스를 하면, 더러워진 피가 깨끗하게 된다고하는 것인데, 이 의식을 혈대교환(血代交換)이라고 한다. 그리고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한 36가정에서 태어 나는 아이들은, 죄없는 하나님의 자녀 뿐이며 이러한 사람들이 세계에 널리 퍼짐으로써 죄악이 없는 세상에 태어 난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에는 36가정과 6마리아와 같이 문선명과 직접 간접복귀의 혈대교환(血代交換)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 한다. 제아무리 식성좋은 문선명이라도 전부 먹어 치울 수 없는 많은 수 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문선명이「성수」를 뿌림으로서 그것에 대신하고 있으며 섹스 3회의 방법은 그대로 하고 있다. 또 일본에서는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피나누기 라는 표현으로 인식되고 있는것 같은데, 통일교회에는 피나누기란 말은 없다. 어디에선가 잘못 전해진 것이 라고 생각된다. 202 이 36가정은 혈대관계를 한 신성한 가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통일교회의 식구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원리에 의하면, 잃어버린 해와를 도로찾고, 6마리아도 도로 찾는다면,참부모와 함께 살수 있게 되어서 타락했던 인간이 창조 본래의 인간으로 회복되고, 그 원리대로 생각하면 두번다시 이세상에는 이 36가정과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죽음도 없고, 고통도 없고, 타락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되는데,어찌하여 이 36가정중의 14가정이 죽든지 탈회 하던지 하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그 원리에 잘못이 있음으로써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204
또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 라고 한다면, 초기(처음)부터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양말을 짜 신긴 옥상현*, 자기 인생의 절반 이상을 문선명에게 바쳐 충성한 96세나 되는 그녀가 셋방살이로 겨우살아가고 있는 상황을 문선명은 무슨짓을 해서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본래 송도욱 장로의 처 였던 박봉식집사의 경우를 보자. 문선명이 송도욱 장로와 오명춘* 집사를 결혼 시켰기 때문에, 홀로 되고 말았다. 그리고 늙은이는 더이상 소용없다고 하는 교회의 방침으로 교회에서도 쫓겨나서 먹고 살기도 어렵게 되었다. 열심히 문선명을 받들어 온 여인들을 어째서 이다지도 몰인정하게 못본체 내버려 둘 수가 있을까? 초기에 자기가 복귀 시킬 때에는 좋아서 함부로 아무짓이나 하고 그 젊음과 아름다움과 돈이 없어 지니까 곧바로 따돌려 치우고, 다른 여자에게로 옮겨가서 두번다시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것은 원리에 써 있지 않다. 이것을 여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 박정화처럼 부러진 다리를 끌며 함께 남쪽으로 피난 해 온 사람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만들어서 배신자로 소문을 퍼트려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원고를 완성해서 진상을 밝혀야겠다고 결심 했다.
다음에는 유효원씨에 대해서 밝혀 두고자 한다. 이것을 근거로 유효원이 구성 집필한「원리해설」를 완성 할 뿐만아니라, 불구의 몸으로 정력을 다해서 전도사 양성에 밤낮이 따로 없이 충성을 다했으며, 36가정을 선정 할 때에는 그가 고생해서 각자의 짝 짓기를 결정하는 임무를 수행 했다. 유효원은 구 경성제국대학의 의학과 중퇴자로 자기가 환자의 몸 인데도, 자기병에 대해서는 자제히 알고 있었다. 306 두뇌가 좋은 인격자로 신자들의 인기가 대단 하였던 유효원에게 문선명은 많은 비밀을 지령하고 후에 위험 한 존재 임을 느끼고 유효원을 거세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또 당시 미국에 있던 대간부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36가정의 멤버였던 이기석, 박종구(주.이 두사람은 당시 이미 죽었었다) 두 사람은 영계에서 대단히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유효원씨는 제일 말석에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그는 통일세계 라고 하는 잡지에 이 기사를 기재하고 청평기도원에서도 발표 하였다. 참으로 죽은 사람에 대해 가혹한 매질이 아닐수 없다. 유효원이야 말로 통일교회 최대의 공로자인데도 볼일이 끝나면 들어덤벼서 못살게 굴고는 죽은 다음에도 매질을 하는 것이다.
유효민은 초기에 경제적 사정이 대단히 어려웠을 때에 푸로마이드 사진을 제작 판매하는 아이디어를 발휘해 당시의 식구들의 생활을 지탱시켜 주는등, 통일교회의 발전에 공헌한사람이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 공헌자인 유효민에게는 주권을 단 천주를 주었을뿐(후에 다 회수하였지 만) 공기총의 발명특허권 (실용신안국제특허 )은 문선명의 명의로 기증하는 것으로 공증되어 조립부장이라는 직책만을 부여했다. 드디어 유효민은 통일교회와 인연을 끊고 1972년에 탈퇴하고 말았다. 나의 다음으로 그림자 같은 존재가 탈퇴 한다고 하는것은 유효민이 두번째이다. 이와같이 가장 최초의 비서였던, 박정화를 배신하고, 두면째 유효민을 못견디게 굴어서 탈회 시키고 ,제3의 송도욱이나 교회최고의 두뇌이자 공로자인 유효원을 사망케 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인지, 문선명의 계획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문선명과 같이 있었던 1953년에서 1956년에 서진광산으로 갈때까지의 말하자면 통일교회 발전의 제일 고생한 무렵에는 문선명의 친척은 한사람도 없었다. 208 실은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가 아닌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것은, 문선명 자신이다. 통일교회의 재산을 안심 할수 있는 자기의 친척에게 넘겨서 장래의 생활기반을 확립하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제7장 참조)
이것은 어림도 없는 생각이다. 이회사 일신석재는 유효영사장이 사장겸 목수겸 노동자로 스스로 청소까지 해가며 여기까지 키워 온 회사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부산-대구-서울시대, 북조선에서의 형무소 시대의 일을 생각 하였다.
그런데 그다지도 어려웠던 시대가 지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까 들어보지도 못했던 문선명의 친척들이 몰려 들어 차지하고 문선명 일족의 천하가 되어 버렸다. 문선명 이 탈세관계로 미국의 형무소에서 복역한 그것도 통일교회에 발표대로 「문선명선생은 아무 죄도 없는데 복역했다. 」고 하는것이 된다. 그 복역하고 있을때에도 막대한 돈을 마구 뿌리며 지내고 있다고 폭로되었는데, 타인의 명의로 부동산을 부정구입 하는 맞잡이나 돈이 되는 기업은 거의 문선명의 친적에게 빼앗기고 있는 현실을 볼때 대관절 이것이 종교 단체인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210 원리의 이상사회등은 꿈같은 이야기일뿐 재림메시아의 아버지는 별것 아닌 허상에 불과 하다는 것을 빨리 알아야할 것이다.
종교인가? 단순히 배금 기업체인가? 문선명 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메시아를 자칭 하고 있을뿐이라면 원리 는 어떻게 된 것 인가? 문선명의 행위가 원리에 따라서 복귀를 한 것이라고 한다면 원리대로 6인의 마리아로 충분하지 않은가? 6인의 마리아의 정조를 빼앗앗을 뿐만아니라 그외에 더 복귀라고 하는 명목으로 헤아릴수 없을 정도의 많은 여성을 범하고 재산을 착취 한것은 용서할 수 없다. 이러한것은 재림 메시아를 자칭하는 문선명의크나큰 범죄이며 통일교회로서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외국에서의 생활을 보장 한다고 약속해서 부산에서 일본으로 탄피를 밀수출하는 작은 배 가지고 왔던 얼마 안되는 돈은 다 써버렸고 문선명 한테서의 생활비도 오지 않아 기다리다 지쳐버린 오승택은 일본으로 밀항시킬때 문선명이 부를 때까지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있었지만, 문선명한테로 돌아 오기 위해서 또 다시 밀항을 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대단한 고생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우선 오청년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직접 문선생에게 이야기 해서 생활비를 얻어낼 예정 이었다. 오승택은 문선명을 만나서 자기들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 하고 생활비를 구하였더니 문선명은 이것을 한마디로 거절 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가혹한 이야기는 들어 본 일이 없다. 보통사람이라도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에게 이와같은 처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212 하물며 「재림 메시아」라고 하는 그사람이 자기가 책임을 지는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다지도 비정한 배신을 태연하게 당하였으므로 오승택은 몹시 노하여 그길로 지금첫 재림메시아로 믿고 우러러 오던 문선명과 결별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때 문선명은 그런 돈은없다. 너희들이 생각해서해 ! 라고 말한 것이다. 오청년이 노해서 뛰쳐나갈때 그자리에 7,8인이 있었으나 누구도 내심으로는 괘심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그러 한 김영희 모자를 일본 오오무라 수용소에서 발견한 한국인의 황모씨가 그녀를 한국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이 아이는 황모라고 하는 사람의 부인이 숨겨서 양육하고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죽어 버렸다. 이사건에 대해선 영계가서 소년들을 동원하러 영계에 갔다고 미화 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 이외에는 「어린양의 잔치」를 거행한다는 구실로 처녀인 이성녀를 복귀해서 그녀에게도 아이를 낳게 했다. 이러한 일이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214
6인의 마리아는 예수가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는데, 그것을 못했으므로 예수는 죽었다. 그래서 제3의 아담이 이세상에 와서, 6인의 유부녀를 마리아로 복귀시킨다고 하는 구실로 문선명이 섹스를 하고 그 육체도 재산도 빼앗았다. 그리고 처녀 한사람을 선택하여 「어린양의 잔치」라고 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문선명과 처인 한학자를 「참아버지」「참어머니」라고 부르게 한다. 참어머니는 이미 있는데도 「최원복어머니」라는 명칭은 원리가운데 어디에서 끄집어 낸 이론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선명은 6인의 마리아를 선택 하였고 그중에서 한사람을 특별히 어머니 라고 부르게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제3장에서 문선명으로부터 이순철이 만든 영계의 역사에 관한 시험을 치라는 이순철이 강요에 문제를 보고 답을 썼더니 「됐어 합격」이야 라고 말했다고 썼는데, 사실은 이때 문선명의 눈앞에서 6마리아의 한사람인 이순철과 섹스를 하도록 명령을 받았던 터였다. 나는 이미 문선명이 복귀한 6마리아 중 한사람 한테서 복귀를 받았으므로 문선명의 원리에 말하자면 유자격자였다. 216 전술한 바와 같이 남편 몰래 집에서 많은 돈을 가지고 나온 이순철은 격노한 남편한테 쫓기고 있었다. 남편의 노여움을 모른체 두사람은 이순철이 가지고 온 돈으로 호화스런 강산유람의 여행을 했다. 그리고 매일밤 두사람의 섹스를 문선명은 나에게「보라」고 말하며 「자네도 하게」라고 명령했다. 거기에는 종교도 없었고 원리도 없었다. 성욕에 놀아난 남녀 세사람이 귀신들린 광란의 성희가 아닌가! 문선명이 말하는 복귀의 정체를 나는 그때 실증이 나도록 체험 하였다. 또 부산의 영도의 밤 비좁은 방에서 자고 있는 나의 옆에서 문선명은「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돼 잠잘코 있어」라고 말했다. 재림메시아라고 자칭 하려면 원리대로 하였을 뿐이지, 왜 감추려고 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해못할것이 많이 있지만 원리를 앞세워 가장하고 해괴한 복귀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피할런지!
붉은 용(龍)이 세상을 미혹
자칭 재림메시아의 문선명은 그원리를 김백문으로 부터 배워가지고 평양으로가서 파렴치한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어 실형을 받고 복역한 후에 서울로 왔다. 그러나 오늘에서 원리와는 관련이 없는 문선명의 행동으로 많은여성들과 남성들이 희생되어 죽은 시체가 가득 쌓인 속에서 원한의 소리가 들려 오는듯 하다. 그리고 지금은 「복귀 실천의 비밀」이나 「실천의 치부」를 알지 못하는 철부지 교인을 전면에서 내세워서 가면을 쓰고 있다. 미국의 형무소에 들어 갔던것을 영광된 큰 기적등으로 선전하여 옥중에 있었어도 막대한 돈을 쓰고 있었다. 그 돈은 여러 식구들이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귀 한 돈인 것이다. 수년전 미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여신자가 한국 인삼차를 팔기 위해서 흑인촌을 찾아 갔다가 집단으로 윤간을 당하고 죽음을 당했다. 흑인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도로에 그 시체를 끌어 내다가 차로 몇차례 깔고 뭉개버린 사건 이었는데 시체의 주머니에서 통일교회 회원증이 나와서 신원이 판명되었다. 이와같이 비참한 희생으로 들어온 돈을 물쓰듯 써버리면서 문산명은 재림메시아를 자칭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식구들이 총동원되어 영감상법(靈感商法)이나 초코렛 껌팔기로 술취한 사람들의 희롱을 받아가면서 돈을벌어, 그돈을 전부 문선명 한테로 보내진다. 그렇게 보내진 돈을 쓰는 명목으로 문선명은 엉뚱한 계획을 꾸며 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국제 하이웨이 건설계획」이다 현해탄에 해저터널을 통해서 일본, 한국 , 중국, 러시아,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 하이웨이를 만들자고 하는 것이다. 통일교회의 내부에서 조차 「실현 불가능」이라고 실소의 소리가 있는데도 말이다. 재림메시아! 문선명이 이세상에 나타나서 국제 하이웨이를 건설하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한다는 거야! 국제 하이웨이건설 같은 것을 계획하기 전에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해서 참 부모가 되어있을 터인데, 그 재림 메시아는 무엇보다도 죄악이없는 세상을 만들어서 에덴의 동산을 복귀해 놓는것이 본래의 그가 할일이 아니었던가. 218 문선명은 미국의 신문이나 매스컴에서 자기를 「목사」라고 자칭했다. 문선명은 신학교에 다닌 일도 없고, 목사로서의 안수 받은 일도 없다. 만일 통일교회 계열의 신학교에서 얻은 자격이라면, 질문이 있다. 문선명은 처음 부터 자기는 재림 메시아이며, 제3의 아담이다. 그리고 자기의 할 일은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통해서 본래 그대로의 죄없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것이 사명이다 라고 계속 말해 왔다. 그렇다면 재림 메시아가 목사로 변신해서 어떻게 해서 사명을 다 할수 있는가 ! 스스로 지 금까지의 속임수는 말 할것도 못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 문선명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 와서 이름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성경의 「요한계시록 12:91에 이 세상에는 끝날에 붉은 용이 나타나서, 이세상을 미혹케 한다고 씌어져 있다. 자기의 이름에 용(龍)이 들어있는 문용명(文龍明)은 그것에 착안해서, 서둘러 이름을 문선명으로 바꾼 것이 었다. 이것은 자기 가 붉은용=사단 임을 인정 한것이 된다. 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천하에 내밝혀 쓴 이 고백에 거짓은 없다. 문선명 이야 말로 진짜 사단이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진짜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속에서 부터 기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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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증언-우리들이 체험한 사실
통일교회의 경제적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이화여자대학사건으로 문선명과 옥고 동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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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성경원리를 들을 무렵, 문선명을 위시해서 모인 식구들은 , 그날 먹을 것도 어려운 형편이어서 북한에 있을 때에 사진관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나는 푸로마이드를 제작 판매 하는 일을 제안했다. 이것이 적중해서 하루에 일만 장이나 매상이 있었다. 박정화씨가 말한 바와 같이 남자 식구들은 작업을 분담해서 일을 하고, 여자 식구들은 가위로 잘라서 정리하는 일에 몰두 하였다. 이 일은 2년정도 계속되 었다고 생각한다. 산탄 공기총을 발명한 내가 「통일산업」의 사장이 되지 못했던 것은 소위 7.4사건(이화여대 14인 퇴학사건)문교주와 옥고를 같이 치렀음으로 전과 기록으로 총포제조 허가조건에 하자가 있었다. 그래서 김인철씨가 사장 문선명의 6촌 문승룡이 공장장,그 아우가 생산부장이 되고 발명자인 나는 "조립부장" 이라고 하는 세상에 유래없는 기묘한 직 책을 받았다. 주요간부는 문선명 친척들 뿐, 그들은 한사람이 한대의 차를 가지고 화려하게 타고 돌아다녔으나, 나는 도보를 걸어다닐 수 밖에 없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은 더욱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나에게 「당신은 사진에 솜씨가 있으니까 사진관이나 안해보려나」농담 말이, 사진관이나 하고 있을 그런 기분이라면 나 혼자서도 된다. 요컨대 이것은 공기총사업도 궤도에 올라셨고 또 문교주의 여자관계도 지나치게 알게 되여 산탄공기총을 발명한 나도 더이상 필요 없으니 그만두라고 하는 암시 아닌가! 1971년 어느날 나는 미국에서 막 귀국한 문선명을 만나서 여러가지 의논을 해 보려고 생각했다. 224 아무리 온순한 나라 하더 라도 이 것만은 머리가 화끈거렸다. 전신이 막 뜨거워지며 열이 나고 떨려오는 것을 자신으로서도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박정화씨의 체험과 너무나 꼴이 같아서 나는 그의 억울함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본질을 이야기 할 사건에 관해서 나는 한가지 더 구체적 인 것을 증언 해두고 싶다. 그것은 1955년의 「7 4사건」문선명과 우리들 간부가 체포되 었던 사건인 것이다. 7월 4일의 문선명에 이어서 6일에 나도 체포되었다. 체포이유는 「병역기피용의」우리들 북한에서 남으로 나온 피난민에게는 호적이 없었으므로 신분증명서를 만들어 받을 때에 「제 2국민병」으로서의 병역을 면하기 위해서 실제연령보다 5-6세 정도 올려(연상으로)신고 하였었다. 그런데 이 「병력기피」용의는 문선명 이하의 간부를 체포해서 취조하기 위한구실이고 실은 「간음과 혼음」을 조사할 목적이었다. 수사관의 질문은 날이 갈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당신들은 부부사이는 어떠한가? 여자 신자들과는 몇번이나 했는가 병 역기 피 와는 관계가 없는가· . 남의 사생활 문제를 집요하게 심문하는 형사에게 큰소리로 대들고 수사관과 입씨름을 한일도 있었다. 그러나 수사관의 조사는 끈질겨서 책상 위에는 문선명과 여자식구들이 관계를 도표로 그린 그림을 놓아두고 섹스관계의 확인을 하는 것이아닌가 ? 나는 시종일관 모른다. 없다고 버티었으나 내심으로는 그 정확함에 탄복하였다 유치장안에 있는 우리들은 밖의 상황을 잘몰랐으나 박정화씨들의 은폐공작의 결과인지 조사를 받은 여성들은 나는 문선명선생과 그런 짓을 한 일이 없고, 나는 꿈에서 섹스는 하였다 등등으로 적당이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226 참고로 이때 체포되었던 간부의 유치번호는 문선명 390번, 유효원380번, 유효영 1709번 ,나는 1175번 이었다. 김원필도 체포되어 그만이 1년 실형의 판결을 받고 수감 되었다. 하여간 통일교회와 결별하여 두고 두고 냉정하게 문선명이나 협회의 실정을 보니까, 여러가지 모순과 이념이 눈에 띈다. 비민주적인 횡포로서 독재일방의 역사를 거슬러간다. 또 통일교회의 인쇄물에는 어느 것이나 문선명선생이 1948년에 북한에서 체포된것은 공산당의 종교말살정책에 의해서 내무성에 구속 되었던 것이라고 판에 박은 듯이 거짓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북쪽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진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공산주의가 싫어서 1947년 8월 사진관도 각종기계도 그대로 두고 28세때 혼자서 월남했다. 이것은 통일교회의 거짓의 역사이며 박정화씨가 자세히 쓴 바와 같다. 그런데 최근의 합동결혼식은 마치 마작판의 마작말패 섞드시 남의 인권을 아무렇게나 적당히 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성스러운 축복 행복한 꿈이 채 가시기전에 여기 저기서 이흔소동이 발생하고 있으니 과연 땅에서 재림주에게 축복 받은것이 하늘에서도 영원한 부부가 될 수 있을까? 그 책임은 또 누가 져야 하는가?
1954년부터 수년간 6마리아의 한사람. 문선명의 원리를 믿고 복귀를 받아, 5-6인의 남
-유신희씨는 부산 영도에서 남편인 신성묵씨와 다섯 아이들과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때 근처에 살고 있던 사촌오빠 유효원의 권유로 문선명의 포교집회에 방을 빌려 주셨던 것이지요. 유 :그렇습니다. 1953년 12월 24일이었읍니다. 처음에도 3일간만 쓰겠다는 약속 이었읍니다만 결국 25일간이나 되고 말았읍니다. 그때 사촌오빠인 유효원, 효영형제, 그리고'유효민등 머리가 좋은 오빠들이 믿게 되므로 우리들 부부도 덩달아 믿게 됐어요. 228
-그래서 얼마후에 부부가 서울로 가셨군요? 아이들은 어떻게 하셧읍니까? 유 :남편이 먼저 집을 나갔으므로 내가 가족회의 처럼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하였읍니다. 「아빠도 엄마도 재림주가 오셔서 대단히 바쁘게 되었다. 그래서 너회들의 뒷바라지를 할 수 없게 되었구나‥‥」
-벌써 40년이나 지났읍니 다만 지금 아이들은? 유 :모두 기독교신자로서 그저 얌전하게 잘 지내고 있읍니다. 그래도 막내딸하고는 자주 충돌이 있읍니다. 어머니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대단히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나를 책망 한답니다.
-문선명과 복귀의 섹스를 한 여성으로서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인터뷰에 응해준 사람은 아마도 유신회씨가 처음이 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지금의 심정은? 유 :지금까지 침묵해 온것은 아이들에게 북귀의 사실이 알려지는것이 부끄럽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벌써 나이가 나인만큼 참을 수 있읍니다만은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사실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기는 합니다만은 나같이 미혹
-문선명과의 복귀에 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해 주십시요? 유 :여자 식구 한사람한테 꾀임에 빠져서 밤늦게 캄캄한 문선명의 방으로 갔읍니다.
-그것은 왜? 유 : 문선명은 여러 여자와의 관계가 많아서 다음에는 언제 내 차례가 돌아 올런지도 몰랐고 또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피난민 시절에 그것은 다름 아닌 범냇골(지금은 성지로 명명 , 통일교 교인들이 세계 각처에서 참배 하러옴) 당시 나는 근처에 살고 있는 터이여서, 우리 아버님과 문선생은 매일 등산 산책을 하는 처지여서 어느날과 같이 나도 손을 잡고 아침 등산 하던중 문선명이 철부지 나를 움막으로 끌고 들어가 성폭행을 해 많은 출혈이 심했었다고 울면서 이야기 하여‥‥ 아무리 복귀라 하는 명분 이라지만 타락이니 복귀니 전혀 귀가 열리지 않은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가 있읍니까?
-문션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다음 유씨는 몇사람의 남성과 복귀를 하였지요. 유 : 그때는 문선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 여성은 다른 남성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쳐서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6인의 남성과 복귀 했읍니다 -그래서 유씨는 6마리아의 한사람이었다고 박정화씨가 썼던데요. 유 : 6마리아의 이야기는 듣기는 하였읍니다만 누가 그런지는 알지 못하였읍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처지 인지 나는 잘 몰랐읍니다.나 보다 훌릉한 여인들이 많이 있었고 문선명의 주위에는 항상 세사람 정도가 바짝 붙어 있어서 나와는 격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 230 -그 세사람 이 란 누구인가요? 유 :신정순*, 이순철*, 양윤신*씨 들입니다. 문선명이 유난히도 귀여워했고 후에 재산을 노리고 재벌과 결혼시킨 임영신이 들어 온 것은 그 뒤의 일 입니다. 문선명은 차례 차례로 새 여성을 신변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하는데 같은 여성들 끼리 특탁거리는 일은 없었읍니까? 유 :있었지요. 여자들 끼리니까 질투나 독점욕은 당연히 있읍니다. 그래서 여자들 끼리 심한 싸움이 있을때에는 문선명이 그러한 여자를 때 린 일도 있었읍니다.
-6마리아는 그때 그때의 정원으로 적당이 교체가 되어 결국은 재산이나 새로운 여 인이 목표 이었던가요. 신구교체는 문선명의 독단으로 행해 졌읍니까? 유: 우리들은 옆의 일도 몰랐었읍니다. 그래서 어느땐 그 주위에서 쫓겨난 여자만도 다섯사람이나 되어서 서로 이야기 한일도 있읍니다. 그 정보교환으로 알았읍니다만 실로 여러 여자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것입니다.
-여러가지 비극이 셀수 없을 정도로 속출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모두가 참말로 분개 하였었읍니다. 유 : 그렇다고 생각 합니다. 사람이 모여 있을 어느땐가 원리의 설명을 내 사촌오빠인 유효원이 열심히 땀을 흘려가면서 열심히 강의하고 있는데 문선명은 여성들과 히히덕 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 신자들에게는 유효원쪽이 존경을 받았고 인기가 있었읍니다.
-지금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 보고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232
평양 숭설전문학교 출신.
나는 어느 한국육군의 고급 장교의 보신을 위한 모략으로 북의 스파이로 몰려서 유엔군 제1형무소에 무기징역수(438번)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것이 사실무근인 것으로 증명되어 누이동생 집에서 한동안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 그럼 문선명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그 당시는 아직 통일교회 따위는 아무도 몰랐었다. 거처를 모르고서는 편지를 건네 줄 수가 없다.
좁은곳인데 풍금도 아무 것도 없었읍니다. 처음에 노래한 찬송가란 것이6천년 한이 맺힌 싸움의 동산 승리의 월계관을 찾아 구하여‥‥ 문선명이 작사 하였다고 하는 「복귀의 낙원」이라던가 이 세상을 에덴의 동산으로 복귀한다고 하는것 같은 가사였는데 웬일인지 그 노래를 일본의군함 행진곡의 곡조로 노래하고 있는 거예요. 놀란 나는 끝난 뒤에 말 세계를 통일하는 살아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한국인의 원수인 일본국의 그것도 가장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군함 행진곡으로 자작의'찬송가를 부른다는것은 무슨 일이요? 이렇게 바보스러운일이 어디에 있오? 234 잠깐 이야기는 조금 뒤로 돌아 갑니다만, 문선명을 방문했던 다음날 부터 아름다운 여성들이 매제의 집으로나를 찾아 오게 되었읍니다. 김선생님 저희들의 교회로 다니시지요 하는 것 이었읍니다. 작곡을 맡은것도 있고 해서 다니기 시작 하였더니 대우가 좋았다. 모두들 같이 푸로마이드 사진을 만들고 있었고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도하고 있는 신자도 있던 시대였다. 그렇게 가난한 속에서 나에게 신사복을 여러벌 만들어 주어서 즐거워서 열심히 작곡을 한 셈이지요. 요컨대 문선명은 젊었을 시절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재림메시아 임으로 섹스로 파탄이 된 세상을 자기가 여성과 섹스 하는것으로 원래의 모양으로 복귀시켜 혈대교환(피갈음)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겉으로 내세울수 없는 비밀의 원리임으로 대외적인 설교에서는 그 비유로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기전에 하나님에게 「될수 있으면 이잔을 피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원리 에서는 하나님은 95%까지 는 인간을 인도하여 주시지 만 나머지5%로는 인간자신이 생각해서 해결 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에게도 하나님은 자기가 해결 하라고 발하였으므로 피의 눈물을 흘리는 수고끝에 깨달았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 하 이 원리를 재빨리 나는 깨달은 것이지요. 인간의 몸을 쓴 하나님(문선명)의 섹스의 무리를 점점 널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희망을 성취하는 것이 된다. 원래가 불량해서 청춘주식회사사장을자칭하며 아색을 탐미하고 있던 나는 딱 집히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죄가 아니고 좋은 일이라고 학생시절에 일본에서 다방의 여자들을 유혹해서 그날밤에 범한 경우 같은것은 죄의식을 느낄때도 있었는데·그렇지만 통일교회의 복귀원리는 열심히 섹스에 전념하면 전념할수록 하나넘의 섭리가 성취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문선명으로부터 복귀받은 유신회씨에서 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피」를 나누어 받기로 한것이다 지금은 이미 할머니가되어 늙었지만 당시의 유신희씨는 대단한 미인이었고 머리가 좋은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문선명이 가르쳐 준 원리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다른 남성 에게 넘겨줘 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녀는 남편이 있는 몸이었는데도 욕구불만도 있었던지 몰라도 불량하고 오입쟁이로 여러 여성과 경험해 온 나의 기교에 이미 흐물흐물하게 돼서 즐거워 했어요. 236 복귀원리의 실천 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이미 보통 남녀의 섹스 그대로여서 여자가 위라던가 아래라던가는 관계 없어요. 그후에도 다른 여성과 좋을대로 했다. 원리의 책을 쓴 유효원씨들 처럼 온순하고 꼼꼼한 사람들은 문선명이 자기가 범해서 복귀시킨 누구 누구와 자라고 지시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바보들이예요. 나는 달랴요. 95%는 하나님의 가르침이지만 남어지 5%는 자기가 찾아야 합니다. 문선명과 섹스를 한 여인은다른 남자와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해야만 한다.
남자는 제2의 여자와 하고 여자는 제3의 남자와 하며 그래서 제4의 여자에게로 릴레이식으로 해간다. 이렇게해서 넓혀 가는것이 원리 아닙니까? 그렇게 함으로서 온세계의 남녀가 하나님의 혈통으로 사단에게 빼앗긴 전인류, 즉 사단혈통의 세계를 하나님편으로 복귀해야 사단의 발판을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문선명이 가르치고 있어요.
이것도 훌릉한 원리실천의 성과이지요. 몇백사람에게 둘레를 넓혀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성질이 났어요 이 새끼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 라고 사단이 해와를 범했을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단을 이기는데는 조건만 맞으딘 되는게 아닌가. 그런데 문선명과 3회하지 않으면, 여성은 복귀가 안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문선명이 대구의 미인 신도 우옥례와 나를 정식으로 결혼 시켜서 무마 하라고 지시 하였다는 것입니다. 박정화씨 협조해 주었으므로 이석빈이 근무하는 교회의 장로의 장녀 강혜환 집사와 나는 재혼 하였읍니다. 가난했던 내가 결흔식에서 입을 옷이없어서 박정화씨 한테서 빌린것 238 재혼해서 2년째 되던해에 우리들 부부는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해서 나는 성동고등학교의 음악교사가 되었고 밤에는 신학교의 생도로서 공부 하였읍니다.
문선명은 호색가로서 성욕이 장성해 내가 문과 결흔해서 자식(문성진)을 낳기 까지 부부관계를 매일밤 10회이상 해도 기운이 펄펄났었다. 이것은 그가 뱀처럼 이상하게 정력이 강한 때문입니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였다.
통일교회는 종교가 아닙니다.
음란한 섹스교단일 뿐입니다.
문선명과 싸움을 하고서 대구로 옮길때 까지 나는 박정화씨가 있었던 광산으로 쫓겨 간 일이 있었다. 1년반 정도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부터 친구들이 빌려준 방에서 남자 6인 여자 3인이 즐겁게「복귀게임」을 한일이 있읍니다 통일교회의 원리를 실천 한것 뿐이지만거기에는 종교다운 것은 하나도 없었읍니다.
나는 깨 달았읍니다.
문선명의 섹스원리는 잘못된것 이란는것을.
그는 이 원리를 내 세워서 어머니와 그의딸 형제를 범하고 끝의 딸에게는 아이까지도 낳게 하고 있읍니다. 극악 무도한 행위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 겠읍니까? 이번에야말로 문선명도 통일교회도 하나님의 제재를 받을 때가 왔읍니다. 그리고 많은 희생자 들에게 그죄를 보상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자신도 불량청년시대에 죄를 짓고 통일교회에 들어 와서는 원리를 미끼로 제멋대로 음행을 자행 한 죄는 몇천만가지 엄 벌을 받는다 해도 할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부터 통회하며 열심히 경찰목사로서의 사명과 고아들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읍니다
http://cafe.naver.com/jubo/2085 , 통일교 문선명 -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 큰샘출판사 http://cafe.naver.com/jubo/1739 , 통일교 문선명 -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박준철 저,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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