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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메시아 통일교 문선명 IMF 통일그룹 부도 국민혈세 1조7천억을 갚아야 한다 !

http://cafe.naver.com/jubo/2085  , <- 적그리스도,통일교 문선명-야록 통일교회사(野緣 統一敎會史)박정화 외,큰샘출판사 클릭해서 책 읽기.

 

사이비 섹스종교, 통일교 문선명이나, 그 사생아 JMS 정명석은 성경을 맘대로 해석 왜곡하며, 제3의 아담이라며 재림 메시아로 둔갑,  날조한 이야기인 타락한 사탄 천사장 루시엘이 강간한 이브(Eve)의 혈통세계를 복귀 (復歸)라는 미명으로 혼음, 섹스릴레이, 혈대교환(血代交換) 실천(처녀잉태, 유부녀) 하고, 재산을 갈취하며,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키는 영혼사기꾼 이지요. 

 

많은 여성은 성적 수치심으로 인신매매범 보다 더 지옥 같은 삶뿐...  

 

IMF때 통일그룹 부도내서 공적자금 1조7천억 떼어먹고, 국가 모든 빚 갚아 구해 주겠다는 둥 사기나 치고, M&A, 부동산 투기나 하고...  국민혈세 1조7천억 갚아야 합니다.

 

이런 사이비 사기꾼의 문빠들은, 인터넷이 정체를 숨긴 문빠들 세상이 되고 있지요.

 

통일교 문선명 - 흥남교도소 5년형 죄수번호 '596' 문용명(文龍明)

 

통일교 문선명 - 6마리아 60마리아 (문선명의 섹스 기쁨조) 섹스 릴레이

 

통일교 문선명 - 통일교 36가정의 내막 (가정 모두 문선명과 섹스를) 등, 이 책에 자세히 있습니다.

 

1971년말 미국으로 옮겨 가서, 미국서 교도소 생활도 했지만, 그 사이 JMS 정명석은 문선명이는 실패한 자이고, 자기가 진짜 재림 메시아라며 나쁜짓 하다 결국 해외로 도망 갔지요. 

 

문선명이 미국서 남미에 땅 사가지고 또 흔드는 내용, 뭐를 섞은 '순결캔디' 학생들에게 먹이는것, 여자가 위에서 하는것 등,  여기 클릭해서 다 읽어 보세요.

 

http://cafe.naver.com/jubo/1739  ,<-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박준철 전 통일교 목사 저 (클릭,책 읽기)

 

합동결혼식, 재산착취 지옥가는 의식 자세히 나와 있고, 일본에서는 민사소송에서 패소하고, 죽은 조상 죄 탕감비가 요즘 크게 말썽이 되고 있지요.

사이비들은 하나같이, 두번째 아담인 예수는 영적인 구원만 했으니 실패자고, 구약과 신약의 시대는 끝나고, 세번째인 성약시대, 세번째 아담인 자기가 육적인 구원까지 하는 재림주 메시아라나 모라나...  할딱 거리며 죄를 사하는 피가름 한다며 무수한 여자들 섹스에 빠지고...  십자가가 없답니다.

위 2권을 읽어보니, 이단이 자라면서 이상한 포르노 사이비가 되는 겁니다.


 

(세번째 책, 통일교 원리강론을 읽고)

- 문선명씨는 인간남여의 생식과 섹스 소설쓰기를 하고 있다. -


통일교 홈피에 들어가서 창세기의 창조론을 읽어보면, 우선 알수도 없는 온갖 철학 용어에 가위눌린다. 무슨 이성성상이니 수수작용이니 사위기대니 정분합작용이니.... 끝도 없이 육중한 철학용어의 밀림이 전개 되지만, 그것은 문선명씨 교주가 자기 혼자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르키는 선문답 같은 허구일 뿐이다.

그렇게 하므로써 무식한 사람들에겐 일단 기를 꺾어서 굴복시키고, 유식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겐 그 선문답에 아는 것처럼 으시대도록 하게 하는 교만의 왕관을 씌워서 출발시킨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존재론적 무거운 철학용어로 거창하게 창세기를 포장했다 해도 ,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6일동안 인간을 포함한 자연 만물을 지으셨다는 성경문자 그대로를 나열한 유치부였다는 점이다.
즉 성경은 특히 창세기는 마지막 때에 일점일획도 가감없이 낱낱이 풀어져야 할 비유문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비유문자를 한마디 풀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자연계 창조로 말하고 있다. 이는 성경에 대해 완전히 깜깜한 칠흑 바다가 자기의 깡 무식을 감추기 위해 현학적 허장성세만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부턴 문선명씨 자신을 중심한 소설쓰기에 들어가서 성경역사 6천년을 일주하는 에덴호를 출발시킨다. 하지만 다시 뱀이 있는 에덴으로 귀항하고야 만다.

6천년 도성을 돌아서 뱀이 있는 곳으로 다시 들어가면 그것은 천국입성이 아니라 지옥행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방향키를 마음대로 잡고 사통팔달 잘도 미끄러져간다.

그리고 창1,2,3장을 문자 그대로 자연만물 창조라고 주장한다면, 창1장에서는 말씀으로 지으셨고, 창2장에서는 흙으로 지으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말씀으로의 창조와 흙으로의 창조는 각각 어떻게 다른 것인가도 최소한 밝혀야 함에도 그의 말 많은 유식한 입은 꽉 봉해져 있다.

그러다가 창2장에서 역시 문자 그대로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가 창조되었다는 성구 하나를 골라서 거론한다. 남자는 먼저이고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뒤에 지어진 자이므로 남자는 사랑의 주체자이고 여자는 사랑의 대상이란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와 대상의 상호 수수작용 등, 예의 무거운 존재론적 철학용어로 끌고 들어가지만 결국은 남자와 여자의 생식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의 생식문제를 위하여 뚝딱 남자의 갈비뼈를 빼어서 여자를 짓는 그런 황당무계한 도깨비 하나님인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그런 하나님과 비할바가 아니게 한없이 세련되고 유식한 불세출의 메시야로 전개 시켜간다. 하나님은 신들린 박수무당으로 만들어놓고 자기는 찬란하게 높은 바벨탑 꼭대기에 올라 군림해 있다.

다시 창3장에선 어떤가? 밑도 끝도 없이 아담은 생명나무이고 하와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라는 전제를 붙인 후, 이러한 두 남여의 상호관계에 대해 또 끝없이 예의 이성성상이니 수수작용이니 사위기대니 정분합작용이니 등으로 어마어마한 언어성찬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하와는 뱀이 주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것은 하와가 사단과의 동침을 맺은 불륜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빛나던(?) 언어성찬은 그만 다시 섹스성찬으로 더렵혀진다.

사단은 보기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하와인지라 그런 하와가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고, 하와의 눈에는 지혜의 계명성(뱀)이 또한 너무나 지적으로 아름답게 보여서 둘이는 서로 섹스를 따먹고 그 때부터 인간의 섹스원죄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와는 그 선악과를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하므로써, 그것은 하와가 불륜의 몸으로 다시 아담과 교접한 것이 되어 에덴동산은 단번에 피가 더러워진 불륜의 도가니가 되어 폐쇠당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가 더러워졌으므로 다시 깨끗한 피를 공급할 수 있는 참부모를 찾아내는 게 하나님의 재창조 역사 6천년의 과제요, 인류의 사명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문선명씨 자신이 그 참부모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문선명씨는 인간남여의 생식과 섹스 소설쓰기를 하고 있다.

 

그 소설인즉 간략히 정리하면...

창 1장에서는 하나님이 자연계 만물을 창조했다고 했다.

창 2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다고 했다.

창 3장에서는 사단(뱀)이 하와를 성적으로 범하고, 성이 더러워진 하와가 다시 아담을 성적으로 범하므로써 세상이 더러워졌다고 했다.

그래서 성경역사 6천년만에 문선명씨는 "성적으로 깨끗한 참부모 역활을 내가 해주마" 이다.
 

이 따위 성경풀이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남여의 성 사용이나 살피는 관음증 환자인가?

통일교 여러분, 속지 마시라.
 


 

성경은 일곱인으로 봉한 책이고 그것을 풀어주실 분은 오직 재림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재림주는 성경을 풀어주실 때 가장 먼저 창세부터 풀어주시리라 하셨는데, 그 이유는 창세기 1,2,3장은 전체 성경역사에 대한 창조의 프로그램이 되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프로그램이 되기 때문에 창세기는 성경전체를 조명해주고 봉한 성경 전체의 빗장을 열게 하는 열쇠가 된답니다. 이처럼 열쇠가 되기 때문에 창세기 1,2,3장은 단순히 흘러간 옛적 자연계 창조가 아니며 문자 그대로 읽고 믿으면 안되는 비유문자 입니다.

비유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자연계창조로 보면 앞뒤 문맥이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문자 그대로 보면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시조가 되는데,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도망다니게 될 때 고백하기를 자기를 만나 죽일자가 있고 놋땅에서 아내될 자를 만났다고 하는 등이
그것입니다.

또 문자 그대로 보면 아담과 하와는 최초로 지어진 인간조상이므로 아담의 부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라는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는 비유문자이므로 창1장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하셨고, 창2장에서는 흙으로 창조하셨다고 하는 등의 문맥상 배반이 일어나고 있음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창세기 1,2,3은 온전히 감추어진 비유이기 때문에 한자 한자 꼼꼼히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리강론에서는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창세기 1,2,3장을 모두 문자 그대로 흘러간 자연계창조로 봅니다.
자연계 창조로 본다면 풀어야할 하등의 이유도 없고 손댈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그게 논리입니다. 따로 말하지 아니해도 거기 성경에 잘도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문선명씨의 창조론은 왜 그리 길고 복잡하고 현란하고 요란했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유식을 자랑하고 메시야로 추앙받기 위해 거기에 쓸데없이 온갖 형이상학적인 철학용어로 철갑을 둘러쳤던 속임수 였습니다.

 

"아 과연 유식한 우리 선생님이로다" 라는 탄성이 나오게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들을 부르시는데 현대인들은 반대로 그런 인간의 교만한 유식과 허장성세에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희한하고 묘하게도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뱀만은 비유라고 했습니다. 생명나무는 아담, 선악나무는 하와, 뱀은 계명성, 이렇게만 비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뱀은 범죄하기 전의 계명성이라고 거짓 주장을 하는데 성경기록엔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도 후에도 시종일관 뱀을 뱀이라고 했습니다. 뱀은 이미 계명성이 아니고 하나님께 범죄해서
쫓겨난 마귀로 에덴에 입주해 있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문선명씨는 뱀을 계명성으로 둔갑시켜 놓았습니다.

뱀을 왜 계명성으로 둔갑시켜 놓았을까요? 
 

 

창세기의 그 많은 비유문자와 그속에 감추어 있는 그 많은 비밀한 메세지를 사그리 무시한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마귀 뱀을 거룩한 계명성으로 왜 둔갑시켜 놓았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제부터 계명성과 하와의 불륜의 섹스문제를 시발로해서 그 불륜의 섹스가 아담까지 파급되고, 그것이 결국 일파만파 온 인류까지 미친 거창한 섹스 소설쓰기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음과 양의 섹스문제를 다루는 소설쓰기를 위한 준비작업으로 그는 예의 이성성상이니, 수수작용이니, 사위기대니, 정분합 작용이니의 음양의 아름다운 논리로 이미 포장하고 단단히 세뇌까지 시켜놓았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와 계명성의 섹스를 중심한 삼각관계가 문선명씨의 행복한(?) 성경읽기 입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불륜으로 시작했으나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육천년전부터 실패의 연속이었으나 자기는 이제 마침내 그것을 올바로 돌려놓는 참부모로서 이긴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했고 자기는 성공하는 이긴자가 되는 소설 쓰기입니다.
그 소설의 중심은 오직 인간남여의 육적 생식과 섹스입니다.

오직 인간 남여의 올바른 섹스와 애정과 그 자녀 생산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육적인 문제로 포인트를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을 잘 사용하는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하나님의 근본과 인간존재의 근본을 아는 지상명제가 되나요?

말도 안됩니다.

도덕적인 남여가 되는 일은 땅에 속한 일입니다. 하늘의 일이 아닙니다.
 

땅에 속하는 일, 즉 도덕적인 남여가 되는 일은 성경에서 봉한 일도 없습니다. 성경은 항상 도덕적인 남여가 되라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산상수훈 등 모든 성경기록이 그 도덕적인 일로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풀어야할 비밀의 계시가 전혀 아닙니다.

하늘의 일, 즉 비밀한 창조의 계시를 땅의 일, 즉 도덕적인 일로 기록을 했기 때문에 성경은 봉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원리강론은 엉뚱하게 땅의 일을 말해놓고, 그것을 왜 구태여 거창하게 풀었다고 주장합니까? 풀긴 뭘 풀었나요?

그것은 소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소설을 진리로 믿다니 착각을 너무 많이 하더군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사람이 될것을 요구하셨으나 그것은 땅의 일로서이고 하늘의 일로서는 그 훨씬 이상입니다.
하늘의 일은 하나님의 창조론을 아는 일입니다.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위에 있었다" 는 태초 전의 하나님과 우리의 근본을 드러내는 일이 하늘의 일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통일교는 자꾸만 하나님을 실패하신 하나님으로 만들고, 문선명씨를 마침내 승리한 메시야(하나님)로 만들어 놓았는데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신 분이 아닙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었다는 그 태초 전의 흑암(마귀)을 창조 하룻만에 이기신 것이 아니고, 창조 6일동안 이기셔야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항상 시대마다 백프로 완성이 못된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패라니요?
 

쉽게 예를 들어 말한다면

첫날에 10프로까지, 둘째날에 20프로까지, 셋째날에 30프로까지, 넷째날에 40프로까지, 다섯째날에 50프로까지, 그리고 여섯째날인 ,오늘날에는 나머지 50프로까지, 이렇게 해서 마침내 100프로 완성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조역사 6천년을 공회전시켜서 하나님은 실패자, 문선명씨는 승리자, 이런 도식은 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문선명씨가 끌고 들어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다시 뱀이 있는 에덴동산으로의 귀항이 아닙니까?
 

우리가 왜 창조역사를 공회전해서 뱀이 있는 곳으로 가야합니까?
뱀은 마귀요 마귀는 흑암인데 흑암은 지긋지긋 합니다.
 

우리는 이제 창조완성의 백프로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문선명씨도 말로는, 하나님을 인자하시고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등, 다함없는 칭송을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만물 창조에서 마지막으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는데, 그럼에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아직 완성이 아닌 미완중에 있었기 때문에 그만 계명성의 유혹을 받아 두 남여의 사랑놀이 동산은 파괴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파괴된 놀이동산을 6천년만에 문선명씨가 본래대로 복귀시켜 기필고 완성하는 참부모(재림주) 역활을 하므로써 그 만이 만천하에 명실공히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고 인자하신 오늘의 오메가 하나님이 되신다는 논리전개 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은 창조 과정에서 실패만 거듭하셨고, 자신은 그 실패를 미증유의 성공으로 이끌어내어 완성시키는 오메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실패담론은 이렇습니다.


하와가 계명성에게 섹스를 도둑맞은 이후에, 어느 시대에는 누가 누구를 다시 만나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누가 탕감 복귀시켜 어느 시대에는 또 누가 누구를 만나 결혼하여 자녀를 낳으려고 했으나 또 실패하고...

계속 이런 식으로 ,아담에서부터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시대마다 탕감복귀와 실패의 연속으로써, 하나님을 늘 눈물과 한으로 지새우는 참담한 하나님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까지도 그 남여의 성스런(?) 결혼이 이루어지지 못해서 예수님은 실패하고, 그래서 그만 십자가에 돌아가고 말았다는 겁니다.
초림예수님은 후 아담으로 와서 첫 아담때 이루지 못한 그 성스런 남여의 결혼을 이루어 자녀들을 생산하려 했으나 ,또 실패하여 어쩔 수없이 한많은 죽음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6천년은 오로지 성적으로 도덕적인 두 남여를 찾는데, 실패만 거듭하면서 직선으로 흐른 시간들입니다.

그리고 재림주인 자기는 그 실패한 직선의 시간을 유턴시켜 본래의 에덴동산으로 복귀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섭습니다.

복귀되면 그 에덴동산엔 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선명씨는 뱀을 계명성이라고 주장했으나 그것은 거짓 말입니다.
 

뱀은 뱀일 뿐 계명성이 아닙니다. 뱀은 사단입니다. 마귀입니다.
 

왜 우리가 6천년을 창조의 대상으로 고생하다가 결국은 후진해서 다시 마귀를 만나야 합니까? 왜 하나님의 창조를 실패와 무위로 돌려서 다시 뱀에게 돌아가라고 합니까?

그리고 문선명(본명:문용명,文龍明)씨는 원리강론에서 자신을 "구리뱀" 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문선명씨만 구리뱀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성교단도 예수님을 구리뱀이라고 하며 요즘에 성경을 풀어낸다고 주장하는 신흥교단들도 다투어서 예수님이 구리뱀이라고 주장들을 하긴 합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뱀은 옛뱀이고, 모세가 장대에 높이 달아서 보인 구리뱀은 옛뱀의 후손 용이요, 용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과 예수님을 적그리스도인 구리뱀이라고 천명하므로써, 실토 아닌 실토를 하고 있으니 기가막힙니다.

그러므로 뱀의 후손 용이, 옛뱀이 있는 에덴동산으로 우리를 추락시키겠다는 논리입니다. 뱀을 계명성이라고 속이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왜 문선명씨는 이런 자기파멸의 논리를 전개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성경을 너무나 모르면서 오직 메시야가 되는 일에 집착해서 엉터리로 성경을 풀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성경에 대해 까막눈인 세상의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첫째,
창세기는 창조의 프로그램이며, 실제 삶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돌아갈 낙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는 성경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에, 에덴동산을 실제 아름다운 삶의 공간으로 알고 복귀한다고 했는데 그곳은 알고보면 뱀이 있는 악한 곳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모세가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려죽는 백성들을 살려주기 위해 장대에 구리뱀을 높이 매달아 보여줬는데, 이 때의 불뱀은 옛뱀을 뜻하고 구리뱀은 옛뱀의 후손인 적그리스도(용)를 뜻합니다.
하나님과 마귀는 모두 우리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므로 사람들은 그 영 분별을 못하여 뱀에게 넘어가 죽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마귀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귀를 보이는 사람으로 내세워야 합니다. 즉 적그리스도로 내세워야 합니다. 오늘날 적그리스도는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자들인데, 그게 곧 복음백성들 속에 들어있는 옛뱀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기 위해
옛뱀의 후손으로 세운 자들입니다.

마귀가 어떤 못된 행동으로 하나님(메시야)노릇을 하는지 알아야 복음백성 속에 있는 못된 마귀의 본질도 알게 되고, 그리하여 진정한 메시야가 오셨을 때에 하나님께 도망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게 불뱀에게 물려죽게 된 자들을 살리는 공식입니다.


이러한 공식이 우리의 모형으로써 이미 이스라엘민족에게 일어났던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오늘의 우리 모습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반드시 마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것을 알리기 위해 모세가 구리뱀을 장대에 매달았고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기록을 인용하여 예수님도 모세가 매달은 구리뱀처럼 달릴 것을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모세가 매달은 구리뱀을 보고 살수 있었듯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살게 될것이란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결코 예수님이 구리뱀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가짜 메시야 적그리스도도 알아야 하고, 진짜 메시야 예수님도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구리뱀처럼 예수님도 달리신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문선명씨가 자기자신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이기 때문에 자신이 구리뱀이라고 한것은 성경의 내용을 너무나 모르는 까막눈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주장이 마찬가지임)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존재의 정체성을 알라는 신령한 진리와 깊은 계시를 주셨던 엄중한 분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문선명씨는 흥미위주로 겨우 인간의 육적생식과 섹스소설로 바꿔버린 파렴치한 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의 거짓됨을 일일이 다 지적을 할 수 있을까요?

부디 속지 마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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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naver.com/jubo/2085  , 적그리스도 통일교 문선명 -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 큰샘출판사

 

http://cafe.naver.com/jubo/1739  , 적그리스도 통일교 문선명  -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박준철 저,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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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메시아 적그리스도 통일교 문선명과 그 사생아 JMS 정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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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섹스종교, 통일교 문선명이나, 그 사생아 JMS 정명석은 성경을 맘대로 해석 왜곡하며, 제3의 아담이라며 재림 메시아로 둔갑,  날조한 이야기인 타락한 사탄 천사장 루시엘이 강간한 이브(Eve)의 혈통세계를 복귀 (復歸)라는 미명으로 혼음, 섹스릴레이, 혈대교환(血代交換) 실천

 

(처녀잉태, 유부녀) 하고, 재산을 갈취하며,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키는 영혼사기꾼 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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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때 통일그룹 부도내서 공적자금 1조7천억 떼어먹고, 국가 모든 빚 갚아 구해 주겠다는 둥 사기나 치고, M&A, 부동산 투기나 하고...  국민혈세 1조7천억 갚아야 합니다.

 

이런 사이비 사기꾼의 문빠들은, 인터넷이 정체를 숨긴 문빠들 세상이 되고 있지요.

 

통일교 문선명 - 흥남교도소 5년형 죄수번호 '596' 문용명(文龍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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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naver.com/jubo/1739  ,<-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박준철 전 통일교 목사 저 (클릭 책읽기)

 

합동결혼식, 재산착취 지옥가는 의식 자세히 나와 있고, 일본에서는 민사소송에서 패소하고, 죽은 조상 죄 탕감비가 요즘 크게 말썽이 되고 있지요.

 

사이비들은 하나같이, 두번째 아담인 예수는 영적인 구원만 했으니 실패자고, 구약과 신약의 시대는 끝나고, 세번째인 성약시대, 세번째 아담인 자기가 육적인 구원까지 하는 재림주 메시아라나 모라나...  할딱 거리며 죄를 사하는 피가름 한다며 무수한 여자들 섹스에 빠지고...  십자가가 없답니다.

 

위 2권을 읽어보니, 이단이 자라면서 이상한 포르노 사이비가 되는 겁니다.

 


(세번째 책, 통일교 원리강론을 읽고)

- 문선명씨는 인간남여의 생식과 섹스 소설쓰기를 하고 있다. -


통일교 홈피에 들어가서 창세기의 창조론을 읽어보면, 우선 알수도 없는 온갖 철학 용어에 가위눌린다. 무슨 이성성상이니 수수작용이니 사위기대니 정분합작용이니.... 끝도 없이 육중한 철학용어의 밀림이 전개 되지만, 그것은 문선명씨 교주가 자기 혼자 손가락 끝으로 달을 가르키는 선문답 같은 허구일 뿐이다.

그렇게 하므로써 무식한 사람들에겐 일단 기를 꺾어서 굴복시키고, 유식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겐 그 선문답에 아는 것처럼 으시대도록 하게 하는 교만의 왕관을 씌워서 출발시킨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존재론적 무거운 철학용어로 거창하게 창세기를 포장했다 해도 ,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6일동안 인간을 포함한 자연 만물을 지으셨다는 성경문자 그대로를 나열한 유치부였다는 점이다.
즉 성경은 특히 창세기는 마지막 때에 일점일획도 가감없이 낱낱이 풀어져야 할 비유문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비유문자를 한마디 풀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자연계 창조로 말하고 있다. 이는 성경에 대해 완전히 깜깜한 칠흑 바다가 자기의 깡 무식을 감추기 위해 현학적 허장성세만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다음부턴 문선명씨 자신을 중심한 소설쓰기에 들어가서 성경역사 6천년을 일주하는 에덴호를 출발시킨다. 하지만 다시 뱀이 있는 에덴으로 귀항하고야 만다.

6천년 도성을 돌아서 뱀이 있는 곳으로 다시 들어가면 그것은 천국입성이 아니라 지옥행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방향키를 마음대로 잡고 사통팔달 잘도 미끄러져간다.

그리고 창1,2,3장을 문자 그대로 자연만물 창조라고 주장한다면, 창1장에서는 말씀으로 지으셨고, 창2장에서는 흙으로 지으셨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말씀으로의 창조와 흙으로의 창조는 각각 어떻게 다른 것인가도 최소한 밝혀야 함에도 그의 말 많은 유식한 입은 꽉 봉해져 있다.

그러다가 창2장에서 역시 문자 그대로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가 창조되었다는 성구 하나를 골라서 거론한다. 남자는 먼저이고 여자는 남자의 갈비뼈로 뒤에 지어진 자이므로 남자는 사랑의 주체자이고 여자는 사랑의 대상이란다. 그리고 이러한 주체와 대상의 상호 수수작용 등, 예의 무거운 존재론적 철학용어로 끌고 들어가지만 결국은 남자와 여자의 생식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의 생식문제를 위하여 뚝딱 남자의 갈비뼈를 빼어서 여자를 짓는 그런 황당무계한 도깨비 하나님인 것이다. 그리고 자기는 그런 하나님과 비할바가 아니게 한없이 세련되고 유식한 불세출의 메시야로 전개 시켜간다. 하나님은 신들린 박수무당으로 만들어놓고 자기는 찬란하게 높은 바벨탑 꼭대기에 올라 군림해 있다.

다시 창3장에선 어떤가? 밑도 끝도 없이 아담은 생명나무이고 하와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라는 전제를 붙인 후, 이러한 두 남여의 상호관계에 대해 또 끝없이 예의 이성성상이니 수수작용이니 사위기대니 정분합작용이니 등으로 어마어마한 언어성찬으로 포장한다.

하지만 하와는 뱀이 주는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것은 하와가 사단과의 동침을 맺은 불륜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빛나던(?) 언어성찬은 그만 다시 섹스성찬으로 더렵혀진다.

사단은 보기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하와인지라 그런 하와가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고, 하와의 눈에는 지혜의 계명성(뱀)이 또한 너무나 지적으로 아름답게 보여서 둘이는 서로 섹스를 따먹고 그 때부터 인간의 섹스원죄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와는 그 선악과를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하므로써, 그것은 하와가 불륜의 몸으로 다시 아담과 교접한 것이 되어 에덴동산은 단번에 피가 더러워진 불륜의 도가니가 되어 폐쇠당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피가 더러워졌으므로 다시 깨끗한 피를 공급할 수 있는 참부모를 찾아내는 게 하나님의 재창조 역사 6천년의 과제요, 인류의 사명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오늘날 문선명씨 자신이 그 참부모임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이렇게 문선명씨는 인간남여의 생식과 섹스 소설쓰기를 하고 있다.

 

그 소설인즉 간략히 정리하면...

창 1장에서는 하나님이 자연계 만물을 창조했다고 했다.

창 2장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다고 했다.

창 3장에서는 사단(뱀)이 하와를 성적으로 범하고, 성이 더러워진 하와가 다시 아담을 성적으로 범하므로써 세상이 더러워졌다고 했다.

그래서 성경역사 6천년만에 문선명씨는 "성적으로 깨끗한 참부모 역활을 내가 해주마" 이다.
 

이 따위 성경풀이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이 남여의 성 사용이나 살피는 관음증 환자인가?

통일교 여러분, 속지 마시라.
 


성경은 일곱인으로 봉한 책이고 그것을 풀어주실 분은 오직 재림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재림주는 성경을 풀어주실 때 가장 먼저 창세부터 풀어주시리라 하셨는데, 그 이유는 창세기 1,2,3장은 전체 성경역사에 대한 창조의 프로그램이 되기 때문입니다.

창조의 프로그램이 되기 때문에 창세기는 성경전체를 조명해주고 봉한 성경 전체의 빗장을 열게 하는 열쇠가 된답니다. 이처럼 열쇠가 되기 때문에 창세기 1,2,3장은 단순히 흘러간 옛적 자연계 창조가 아니며 문자 그대로 읽고 믿으면 안되는 비유문자 입니다.

비유이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자연계창조로 보면 앞뒤 문맥이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문자 그대로 보면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시조가 되는데,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도망다니게 될 때 고백하기를 자기를 만나 죽일자가 있고 놋땅에서 아내될 자를 만났다고 하는 등이
그것입니다.

또 문자 그대로 보면 아담과 하와는 최초로 지어진 인간조상이므로 아담의 부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라는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는 비유문자이므로 창1장에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했다고 하셨고, 창2장에서는 흙으로 창조하셨다고 하는 등의 문맥상 배반이 일어나고 있음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창세기 1,2,3은 온전히 감추어진 비유이기 때문에 한자 한자 꼼꼼히 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리강론에서는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창세기 1,2,3장을 모두 문자 그대로 흘러간 자연계창조로 봅니다.
자연계 창조로 본다면 풀어야할 하등의 이유도 없고 손댈 이유도 전혀 없습니다. 그게 논리입니다. 따로 말하지 아니해도 거기 성경에 잘도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문선명씨의 창조론은 왜 그리 길고 복잡하고 현란하고 요란했을까요?

그것은 자기의 유식을 자랑하고 메시야로 추앙받기 위해 거기에 쓸데없이 온갖 형이상학적인 철학용어로 철갑을 둘러쳤던 속임수 였습니다.

 

"아 과연 유식한 우리 선생님이로다" 라는 탄성이 나오게끔 말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들을 부르시는데 현대인들은 반대로 그런 인간의 교만한 유식과 허장성세에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희한하고 묘하게도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뱀만은 비유라고 했습니다. 생명나무는 아담, 선악나무는 하와, 뱀은 계명성, 이렇게만 비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뱀은 범죄하기 전의 계명성이라고 거짓 주장을 하는데 성경기록엔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도 후에도 시종일관 뱀을 뱀이라고 했습니다. 뱀은 이미 계명성이 아니고 하나님께 범죄해서
쫓겨난 마귀로 에덴에 입주해 있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문선명씨는 뱀을 계명성으로 둔갑시켜 놓았습니다.

뱀을 왜 계명성으로 둔갑시켜 놓았을까요?
 

창세기의 그 많은 비유문자와 그속에 감추어 있는 그 많은 비밀한 메세지를 사그리 무시한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마귀 뱀을 거룩한 계명성으로 왜 둔갑시켜 놓았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제부터 계명성과 하와의 불륜의 섹스문제를 시발로해서 그 불륜의 섹스가 아담까지 파급되고, 그것이 결국 일파만파 온 인류까지 미친 거창한 섹스 소설쓰기에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음과 양의 섹스문제를 다루는 소설쓰기를 위한 준비작업으로 그는 예의 이성성상이니, 수수작용이니, 사위기대니, 정분합 작용이니의 음양의 아름다운 논리로 이미 포장하고 단단히 세뇌까지 시켜놓았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와 계명성의 섹스를 중심한 삼각관계가 문선명씨의 행복한(?) 성경읽기 입니다.

성경은 태초부터 불륜으로 시작했으나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육천년전부터 실패의 연속이었으나 자기는 이제 마침내 그것을 올바로 돌려놓는 참부모로서 이긴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했고 자기는 성공하는 이긴자가 되는 소설 쓰기입니다.
그 소설의 중심은 오직 인간남여의 육적 생식과 섹스입니다.

오직 인간 남여의 올바른 섹스와 애정과 그 자녀 생산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육적인 문제로 포인트를 맞추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성을 잘 사용하는 도덕적인 인간이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하나님의 근본과 인간존재의 근본을 아는 지상명제가 되나요?

말도 안됩니다.

도덕적인 남여가 되는 일은 땅에 속한 일입니다. 하늘의 일이 아닙니다.
 

땅에 속하는 일, 즉 도덕적인 남여가 되는 일은 성경에서 봉한 일도 없습니다. 성경은 항상 도덕적인 남여가 되라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을 비롯하여 예수님의 산상수훈 등 모든 성경기록이 그 도덕적인 일로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풀어야할 비밀의 계시가 전혀 아닙니다.

하늘의 일, 즉 비밀한 창조의 계시를 땅의 일, 즉 도덕적인 일로 기록을 했기 때문에 성경은 봉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원리강론은 엉뚱하게 땅의 일을 말해놓고, 그것을 왜 구태여 거창하게 풀었다고 주장합니까? 풀긴 뭘 풀었나요?

그것은 소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소설을 진리로 믿다니 착각을 너무 많이 하더군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도덕적인 사람이 될것을 요구하셨으나 그것은 땅의 일로서이고 하늘의 일로서는 그 훨씬 이상입니다.
하늘의 일은 하나님의 창조론을 아는 일입니다.

"땅이 혼돈하며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위에 있었다" 는 태초 전의 하나님과 우리의 근본을 드러내는 일이 하늘의 일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통일교는 자꾸만 하나님을 실패하신 하나님으로 만들고, 문선명씨를 마침내 승리한 메시야(하나님)로 만들어 놓았는데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신 분이 아닙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었다는 그 태초 전의 흑암(마귀)을 창조 하룻만에 이기신 것이 아니고, 창조 6일동안 이기셔야 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항상 시대마다 백프로 완성이 못된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패라니요?
 

쉽게 예를 들어 말한다면

첫날에 10프로까지, 둘째날에 20프로까지, 셋째날에 30프로까지, 넷째날에 40프로까지, 다섯째날에 50프로까지, 그리고 여섯째날인 ,오늘날에는 나머지 50프로까지, 이렇게 해서 마침내 100프로 완성을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창조역사 6천년을 공회전시켜서 하나님은 실패자, 문선명씨는 승리자, 이런 도식은 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문선명씨가 끌고 들어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다시 뱀이 있는 에덴동산으로의 귀항이 아닙니까?
 

우리가 왜 창조역사를 공회전해서 뱀이 있는 곳으로 가야합니까?
뱀은 마귀요 마귀는 흑암인데 흑암은 지긋지긋 합니다.
 

우리는 이제 창조완성의 백프로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문선명씨도 말로는, 하나님을 인자하시고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등, 다함없는 칭송을 합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만물 창조에서 마지막으로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아담과 하와를 지으셨는데, 그럼에도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아직 완성이 아닌 미완중에 있었기 때문에 그만 계명성의 유혹을 받아 두 남여의 사랑놀이 동산은 파괴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파괴된 놀이동산을 6천년만에 문선명씨가 본래대로 복귀시켜 기필고 완성하는 참부모(재림주) 역활을 하므로써 그 만이 만천하에 명실공히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고 인자하신 오늘의 오메가 하나님이 되신다는 논리전개 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하나님은 창조 과정에서 실패만 거듭하셨고, 자신은 그 실패를 미증유의 성공으로 이끌어내어 완성시키는 오메가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실패담론은 이렇습니다.


하와가 계명성에게 섹스를 도둑맞은 이후에, 어느 시대에는 누가 누구를 다시 만나 결혼을 하여 자녀를 낳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다시 누가 탕감 복귀시켜 어느 시대에는 또 누가 누구를 만나 결혼하여 자녀를 낳으려고 했으나 또 실패하고...

계속 이런 식으로 ,아담에서부터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시대마다 탕감복귀와 실패의 연속으로써, 하나님을 늘 눈물과 한으로 지새우는 참담한 하나님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초림 때까지도 그 남여의 성스런(?) 결혼이 이루어지지 못해서 예수님은 실패하고, 그래서 그만 십자가에 돌아가고 말았다는 겁니다.
초림예수님은 후 아담으로 와서 첫 아담때 이루지 못한 그 성스런 남여의 결혼을 이루어 자녀들을 생산하려 했으나 ,또 실패하여 어쩔 수없이 한많은 죽음의 길을 택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6천년은 오로지 성적으로 도덕적인 두 남여를 찾는데, 실패만 거듭하면서 직선으로 흐른 시간들입니다.

그리고 재림주인 자기는 그 실패한 직선의 시간을 유턴시켜 본래의 에덴동산으로 복귀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섭습니다.

복귀되면 그 에덴동산엔 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문선명씨는 뱀을 계명성이라고 주장했으나 그것은 거짓 말입니다.
 

뱀은 뱀일 뿐 계명성이 아닙니다. 뱀은 사단입니다. 마귀입니다.
 

왜 우리가 6천년을 창조의 대상으로 고생하다가 결국은 후진해서 다시 마귀를 만나야 합니까? 왜 하나님의 창조를 실패와 무위로 돌려서 다시 뱀에게 돌아가라고 합니까?

그리고 문선명(본명:문용명,文龍明)씨는 원리강론에서 자신을 "구리뱀" 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문선명씨만 구리뱀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성교단도 예수님을 구리뱀이라고 하며 요즘에 성경을 풀어낸다고 주장하는 신흥교단들도 다투어서 예수님이 구리뱀이라고 주장들을 하긴 합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뱀은 옛뱀이고, 모세가 장대에 높이 달아서 보인 구리뱀은 옛뱀의 후손 용이요, 용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과 예수님을 적그리스도인 구리뱀이라고 천명하므로써, 실토 아닌 실토를 하고 있으니 기가막힙니다.

그러므로 뱀의 후손 용이, 옛뱀이 있는 에덴동산으로 우리를 추락시키겠다는 논리입니다. 뱀을 계명성이라고 속이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왜 문선명씨는 이런 자기파멸의 논리를 전개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성경을 너무나 모르면서 오직 메시야가 되는 일에 집착해서 엉터리로 성경을 풀었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입니다.

성경에 대해 까막눈인 세상의 모든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첫째,
창세기는 창조의 프로그램이며, 실제 삶의 기록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돌아갈 낙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는 성경을 너무나 모르기 때문에, 에덴동산을 실제 아름다운 삶의 공간으로 알고 복귀한다고 했는데 그곳은 알고보면 뱀이 있는 악한 곳이라는 점입니다.

둘째,
모세가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려죽는 백성들을 살려주기 위해 장대에 구리뱀을 높이 매달아 보여줬는데, 이 때의 불뱀은 옛뱀을 뜻하고 구리뱀은 옛뱀의 후손인 적그리스도(용)를 뜻합니다.
하나님과 마귀는 모두 우리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므로 사람들은 그 영 분별을 못하여 뱀에게 넘어가 죽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마귀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주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귀를 보이는 사람으로 내세워야 합니다. 즉 적그리스도로 내세워야 합니다. 오늘날 적그리스도는 자칭 메시야라고 하는 자들인데, 그게 곧 복음백성들 속에 들어있는 옛뱀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시기 위해
옛뱀의 후손으로 세운 자들입니다.

마귀가 어떤 못된 행동으로 하나님(메시야)노릇을 하는지 알아야 복음백성 속에 있는 못된 마귀의 본질도 알게 되고, 그리하여 진정한 메시야가 오셨을 때에 하나님께 도망나올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 게 불뱀에게 물려죽게 된 자들을 살리는 공식입니다.


이러한 공식이 우리의 모형으로써 이미 이스라엘민족에게 일어났던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오늘의 우리 모습을 알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반드시 마귀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것을 알리기 위해 모세가 구리뱀을 장대에 매달았고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기록을 인용하여 예수님도 모세가 매달은 구리뱀처럼 달릴 것을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모세가 매달은 구리뱀을 보고 살수 있었듯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살게 될것이란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결코 예수님이 구리뱀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가짜 메시야 적그리스도도 알아야 하고, 진짜 메시야 예수님도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 구리뱀처럼 예수님도 달리신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문선명씨가 자기자신이 예수님이고, 예수님이기 때문에 자신이 구리뱀이라고 한것은 성경의 내용을 너무나 모르는 까막눈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 점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주장이 마찬가지임)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존재의 정체성을 알라는 신령한 진리와 깊은 계시를 주셨던 엄중한 분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문선명씨는 흥미위주로 겨우 인간의 육적생식과 섹스소설로 바꿔버린 파렴치한 자인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그의 거짓됨을 일일이 다 지적을 할 수 있을까요?

부디 속지 마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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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문선명 - 6마리아 60마리아 (문선명의 섹스 기쁨조) 섹스 릴레이

퍼온글 출처 : http://cafe.naver.com/jubo/2085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2인,  239 p , 1996.3 ,  큰샘출판사

 

 

이 책은 한국에서 발생한 가장 악랄한 사이비종교, 통일교(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문선명교주의 복귀(復歸)라는 미명으로 혼음, 섹스, 혈대교환(血代交換) 실천(처녀잉태, 유부녀)과 그 실제 경험했던 실화를 적나라하게 밝혀 놓은 책이다.

 

그 비극의 섹스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통해서 구원(복귀) 받는다는  사이비종교 통일교집단에 빠져 인생을 망치고 가정파괴를 당한 사실과, 어린양잔치라고 처녀들을 미혹 잉태시켜 놓고 책임을 회피당한 비극의 여인들.

 

유부녀와 결혼(어린양 혼인잔치) 소동을 일으켜 5년 실형을 받고 흥남감옥 노무자였던 문교주의 죄수번호 596.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환(血代交換)의식과 통일교 복귀(復歸)라는 구원방법, 문교주 체포와 혼음(섹스)관계 조사와 거짓말 증언들.

 

문교주에게 몸도 맘도 재산도 다 빼앗긴후 (유부녀) 여인들의 비참한 말로.

나의 부끄러운 체험들 (섹스, 혈대교환 실천 내용).

황금에 눈이먼 문교주의 노동력 착취와 문씨족벌 체제운영.

문교주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별짓을 다한다.

김백문의 원리를 도용, 문교주의 것으로 만든 사이비, 이단교리.

통일교 창설 전후 최초로 문교주와 13년간 함께 생활해 왔던 저자의 산 글이다.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타종교인, 일반 시민들에게도 사이비 종교(틀일교)를 알기쉽게 체험한 사실 그대로 밝혀 놓은 책이다.

 

 

 

머 리 말

나는 1985년부터 이 원고를 쓰기 시작 하였다.

「야록. 통일교회사」라고 표제도 정했다. 일본식으로 말한다면 우선「도큐메토. 통일교회사」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목적은 문선형과13년간에 걸쳐 행동을 함께 해 온 기록을 분명하게 기록해서 그 허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이다.

재림메시아를 자칭하는 문선명이 아마도 종교인에게 있을 수 없는행위를 통일교회 창설의 전후 나는 가장 잘알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도대체 신변에 많은 여성을 두어 시중들게 하며 복귀원리를 명목으로 유부녀이건 학생이건 닥치는 대로 섹스를 해서 임신시킨 처녀를 일본으로 밀항 시켜서 아기를 낳게한 사실등 인간으로서 용서 받을 일이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문선명의 수제자였고 결과적으로 그녀들이 행복 해 주었으면 하고 원리의 가르침을 믿고 지켜 볼수 밖에 없었다. 문선명의 악행을 지나치게 알고난후 나는 1962년 그의 비열한 배신으로 인연을 끊고 탈회 하였다.

그리고 거의 20년후 이제서야 대간부가 된 당시의 동료나 부하의 요청에 따라 본부교회에 발길을 다시 옮겨 놓게 되었다. 교회측의 기대는 나를 귀중한 옛날의 산 증인으로서 이용 하는 것. 다만 일정한 범위안에서만 신자들 앞에서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옥중에서 남하할때의 문선명의 고생한 이야기등)

나에게도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통일교회의 그 이후와 고락을 함께했던 많은 신자들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것이 글속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비극 투성이었다.

원리를 믿고 문선명에게 따르면 행복하게 된다던 여자식구들은 내일 먹을 양식도 궁핍하고 어려워서 산 시체와 같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문선명이 때문에 가련한 고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원고에 착수한 동기는 거기에 있으며 그녀들 또한 하루라도 빨리 출판을 재촉하였고, 내가 아는 바로는 젊었을 시절의 그녀들은 모두 풍부한 재산가로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문선명이 달러 붙은 것이지만 정조를 빼앗기고, 재산을 잃고, 가족과 흩어지고, 아이들과도 소원해진 현재의 그녀들은 홀로 쓸쓸한 노후를 보내는 길 밖에없다.

그 원인과 과정 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사실을 공포할 의무와 책임을 통감하게 되었다. 유서 대신에 생명을 걸고 써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새삼 생명도 아깝지는 않지만 출판을 실현하기 전에 죽음을 당해서는 목적 수행이 어렵다. 그러한 이유로 원고를 조금씩 써 놓아 가면서 나는 때가 올 것을 기다리며 바라고 있었다.

때는 흐르고 착실한 크리스관의 장로로서 인망있는 김영삼 대통령이탄생했다. 김대통령의 용단으로 지금 한국은 눈부신 속도로 정계는 물론 각계각층의 정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도 때에 오랜 세월의 염원이 이루어져서 나는 정말로 기뻐하고 있다.

출판에 있어서는 6000매에 이르는 원고 정리 분류, 번역, 집필, 편집과 대단한 작업이 계속 되였는데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돌린다.

나는 이책의 인세를 문선명에게 희생이 되어 노후로 고생하는사람들의 구제에 힘이 되어 진다면 기부할 작정이다.

끝으로 진정한 행복은 멀어지고 원한을 풀지 못하고 돌아가신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희생자」들의 영령에게 깊은 기도를올리고 싶습니다.

1993.10      박정화

 

 

 

차  례

머리말   6

제1장 옥증에서 만난 사나이   15

재림 메시아로 믿고 17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 17

죄수번호 596 문용명(文龍明) 22

총반장으로 임명되고 24

해와는 왜 하반신을 강추었나 26

예수와 6인의 여인들 30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판(血代交換)을 34

평양을 소란케 한 이단자 39

최초의 체포 구속 39

유부녀와의 결흔소동으로 징역5년 41

한국전쟁과 대공습 42

김일성 은사 44

제2장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45

평양에서 서울로 47

불량배에게 다리를 절골 당했다 47

문용명(文龍明)과의 재회 48
가족을 이북에 버리고 문선생을 따랐다 49
죽을때까지 함께하자던 사나이의 약속 50
악전고투의 피난길 52
겨우 서울에 도착하다 54

서울에서 부산으로 56
제2의 피난행 56
경주에서의 작별 58
생활에 쫓긴 문선생이 찾아옴 60
평양에서 온 옥상현과의 재회 62


제3장 통일교회의 창립전후  67

여자신도 들의 열의  69
부산 수정동교회 69
최선길(문교주의 본처) 부인의 큰난동 70
경찰서에서 전기고문 74
하늘의 뜻에 관한 시험 75
노한 이순철의 남편 76

부산 영도(影島)의 집회 80
여자대학생 김영희의 비극 80
수사기관에 쫓기는 나날 83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 창립 85
유효원이 원리해설을 집필 85     

통일교회 창립의 날 89
이화여자대학사건 무렵 91
교수와 학생들의 대거 입교 91
김덕진(金德振)이라는 사나이 92
대구에서 또 전기고문 93
푸로마이드의 제작판매 95
3대째의 비서역 송도욱 98
잠시 숨을 돌리며 99
간부 체포 사건의 진상 100
문선명의 체포 犯0
조사의 촛점은 혼음관계 軸3
간부 5인을 기소 If15
수사의 손길에서 도피 107


제4장 희생당한 여인들   109

대공로자 옥상현의 말로 111

머리카락으로 짠 양말 112
주인 우하섭 장로의 탄식 113
문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재산도 1또
퇴원해도 갈곳이 없다 117

박봉식과 오명춘 121

부부가 문선명에게 헌신 121
남편 송도욱의 불륜 122

탁월한 인격자 박봉식 123
큰돈을 바친 오명춘 124
식모살이라도 해서 살아야지 126

김종화(金鐘和)의 눈물과 분노 128

문용명(文龍明)을 죽이고 싶다 128

6마리아의 비극 130

유부녀 여섯을 빼았다 130
신정순, 이순철, 오명춘, 김안실, 유신희, 임영신 131
6마리아 아니라 60마리아 137


연인을 빼앗기고 살해되고 140

김원덕(金元德)이란 사나이 140
신비적인 낭만 141
아름다운 부인과 진수성찬 143
이상한 예지능력 144
제자의 연인을 빼앗은 문선명(文鮮明) 146

제5장 재림메시아의 정체    149

원리와 실천의 모순 151
나의 수기는 진실의 기록 151
아무것도 모르는 신자들 152
문선명이 무슨 메시아 154
정득은(T得恩)과의 이상한 관계 157
체포도 당연한 섹스포교 159

색과 욕과 돈과 162
남편의 돈을 훔쳐 오라 162
왜 죄없는 아이들이 죽는가 164
복귀(泌購)라고 하는 미명으로 섹스 165
않은 가정이 파괴 되다 167
여자의 원한은 여름에도 서리를 169
처녀에게 낳게한 아이들 170

배신한자는 누구냐 173
문선명의 소개장 173
악착같은 노동력착취 174
문의 아들 흥진과 효진 176
삭제된 창시자의 이름 178
사건이 생겼다 바로 피하라 180
배신자는 문선명이다 182

제6장 진짜 사탄은 문선명이다     185

산증인의 이용가치 187
재혼서 신천지로 187
병으로 쓰러지다 189
오래간만에 만난 간부 189
통일교회 창림의 산증인 191
문선명의 거린말과 일본의 신자 193
원리는 김백문(金百文)의것 도용 195
이복형제 결혼 의혹 197
원리대로 실천한 김덕진(金德振) 198

36가정의 역할     200

속출한 재림메시아들의 대책 200
희생된 공로자 204
문선명보다 뛰어난 인격자-유효원 204
재정을 이룩한 실업가-유효민 206
화제의 다보탑을 수출한 일신석재사장-유효영
문선명의 부정과 범죄 209
김영희의 비참 211
또 한사람의 어머니 214
나의 부끄러운 체험 215
붉은용(龍)이 세상을 미혹 216


제7장 우리들이 체험한 사실    219

유효민-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221
유신희-6마리아의 한사람 이었다 227
김덕진-섹스릴레이 실천자 232

참고사항  *는 가명표시 입니다.
 

 

제 1장 옥중에서 만난 사나이         17


 

재림 메시아로 믿고


나는 북한의 내무성에 소속된 제 2여단 제 1대대 제 3중대장으로서 1947년 5월부터 황해도 해주에서 철도보안대의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해 12월 1일 같은 여단의 제 2대대장으로 승진발령을 받아 황해도 사리원의 큰 기지로 옮겼다.

일본의 조선통치시대에 만주 신경(현재 중국)의 공업전문학교 토목과를 졸업한 나는 만주국 관사(길림성)를 거쳐 일본군의 공병대 중위로서 중대장으로 근무한 경험도 있고 북한에서는 말하자면 엘리트로서 장래가 촉망되어 있었다.

그런데 착임해서 얼마 않되는 5월 7일 엉뚱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제 2대대의 제 3중대장으로서 황해도 신막에 근무하고 있던 허정이란 사람이 엉뚱하게도 군의 차량으로 상인들의 물자를 수송해 주고 돈을 받기도 하고 여성들의 모발등 북의 상품을 남쪽 한국측에 파는 암매상에 협력하고 있던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체포된 허정은 2월 2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또 대대장인 나는 부하의 부정 행위에 대한 감독 불충분이란 것으로 책임을 물어 직무태만죄로 징역 3년형에 선고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평양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흥남 특별 노무자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2월 2일 35세 때의 일이다.


흥남 특별 노무자 수용소


이송된 우리들 약 100명의 죄수들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2인1조로 팔목을 툴여서 흡사 소나 돼지처럼 화물열차에 쓸어 넣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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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4시간 멈쳤다가는 달리고 달렸다가는 멈추는 화물차속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한잠도 못잔 채 날이 밝을 무렵인 새벽 4시경에 학교운동장 같은 광장에 도착하였다. 끄집어 내려서 주변을 보니까 무장한 간수나 경찰관들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어서 개미새끼도 빠저나가지 못할 정도로 엄중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이 흥남의 특별노무자수용소, 속칭 흥남감옥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였다.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는 강제노동의 지옥인 것이다. 우리들은 먼저 들어와 있던 죄수들과 함께 좁은 방에 32명씩 동거하도록 인원수가 할당되어 집어 넣어졌다. 7시가 되니까 조반이 나왔다.

콩, 좁쌀, 보리쌀, 옥수수 등을 뭉친 조그만 주먹밥인데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것 처럼 엉성했다. 이가 엉망으로 빠진 그릇에 국이 담겨져 나왔는데 두 서너 조각의 미역이 둥둥 뜬 소금기가 좀 있는 그런 국이었다. 어제부터 한방울의 물도 입에 대지 못한 채로 흔들림 속에 담겨온 몸 동아리는 지치고 지쳐서 속은 공복인데도 식욕이 나지 않는다.


장차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며 멍청하니 있자니까 옆의 사내가 기운이없구먼 못먹겠으면 내나 먹지 하며 내 밥에 손을 대더니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린다. 깜짝 쉴 사이도 없을  만큼 감옥의 엄격함을 실감케 하는 기분이 들었다.


8시 "전원노동이다"하는 간수의 큰소리에 떠밀려서 운동장으로 나오니까 1,500명 정도의 죄수들이 집합되어서 정문을 향해서 정령하고 정좌하게 하였다. 소좌의 계급장을 단 소장이 이송되어 온 신입 죄수들에게 소대의 규칙등 수용소의 작업에 대한 설명과 주의사항을 들려주고는 전원 출발이 라는 것이다.


죄수들은 두사람씩 손을 묶고 4열로 나란히 정면에서 부터 나가기 시작하였다. 정면 좌우에는 간수가 줄지어 늘어싫고 완장을 단 "총반장"이 죄수들을 점검 인수하였다. 두사람씩 손을 묶게 하는 것은 역시 도망방지 때문인 것이다.

수용소에서 조선 질소 비료 주식회사(구 일본질소) 흥남 공장까지는 약 4킬로의 거리가 된다. 이날부터 비가 오나 눈이 쌓이거나 우리들은 매일 걸어서 감옥과 공장을 왕복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횐 암모니아비료 가루가 산처럼 괌인 곳에서 10인 1조가 되어 비료포대의 가마니에 하루, 1,300포대를퍼 넣어야 하는 책임량(노루마)을 할당받았다. 산더미 같은 비료앞에 저울이 놓여 있고 공장측의 검량원이 중량을 달기 위해서 앉아 있다.


작업의 순서는 이러하였다. 우선 한사람이 빈 가마니를 잡고 아구리를 벌리면 두사람이 삽으로 비료를 두번 정도 퍼 넣는다. 그래서 40킬로가 되면은 다른 한사람이 가마니를 저울대에서 내려놓고 남은 6인이 그것을 운반해다가 새끼로 음어서 포장을 한다. 10인 1조의 작업이므로 한 사람이라도 태만하거나 서투르거나 하면 조 전체의 책임량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원이 반장한테 된통 혼나게 되므로 10인은 서로서로 격려하기도 하고 감시 하기도 하는 것이다. 눈깜벅거릴 틈도 없을 정도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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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은 아침 8시에 시작되고 낮참 쉬는게 30분 저녘 5시에 끝나는데 매일 8시간반의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극심한 노동을 한일도없었고, 6개월간이나 평양에서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서 이 중노동을 참아 낸다고 하는 것은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감옥생활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여러가지 끔찍한 가혹행위를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버티어 내기 때문에 하루의 일을 마치면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별하기 조차 어려운 상태로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 의지로 똑똑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 저녁때가 되면 하루의 작업량을 검사하고 인수를 점검한 후에 아침이 왔을 때와 똑같이 두사람씩 손을 매고 4열로 늘어서서 4키로나 되는 수용소길을 걸어서 돌아온다.


그때는 제발로 걸은 것인지 어떤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문에서 재차 인수점검을 한후에 운동장에 정열해서 정리하고 나면 또 주의사항이 설명된다. 그리고 면회를 허락받은 사람들이 면회실로 간 후에야 각자 제방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불과 4톨평정도의 좁은 방에 32명이나 쓸어 넣어 하루종일 작업을 해서 땀 투성이가 된 몸뚱이를 씻지도 못하고 고단하다고 두러 누울수도 없는 상태로 그대로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감옥생활이란 것을 통감하게 하였다.


저녁밥은 조반과 같이 여러가지 잡곡이 섞인 주먹밥 한 덩어리와 소금기가 있는 국물 한그릇뿐, 식욕이라곤 전혀 없지만 서도 내일의 작업을 생각하면 먹어 두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같은 방의 동배들도 지쳐 있음인지 모두 험악한 얼굴들이다. 죄명 또한 가지가지였다. 취침은 밤 10시이지만 좁은 방에서 머리와 다리를 서로 어긋매겨 잔다. 서로의 다리가 옆 사람의 머리나배위에 걸쳐지는 일도 있었지만 32인이 억지로 옆으로 누울 수가 있었다. 변기는 방의 구석에 놓여 있었는데 아침이 되면 일제히 서로 쓰려고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대소동이 벌어진다.


이리하여 중노동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무사히 출소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기로 및장을 정한 나이지만 어느새 손과 발에는 군살이 박혀있었다. 나는 비료포대를 새끼줄로 끓어내는 요령만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해서 큰 곤욕을 치렀다. 다른 사람들이 두포대를 묶을 동안에 나는 한포대도 제대로 못 묶는 때도 있었다. 동료들의 싸늘한 눈길을 느끼며 책임량을 다하지 못해서 폐를 끼친 때가 제일 괴로웠다.


그리고 더욱 더 참을수 없는 것은 배가 고파 죽을지경인 것이다 감방의 다락에는 면회가 있었던 사람들이 차입받은 미수가루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훔쳐 먹으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한들 여기까지 와서 도둑질을 해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으로 자제하였다.

배가 고파서 잠을 이를 수가 없을 때 미수가루 봉지를 쳐다 본체로 밤을 새운 일도 여러번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일어나니까 어제 밤에 미수가루를 도적맞았다고 모두들 떠들석 하였다. 훔친자가 눈에 띄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자루 돌림으로 패댔다. 이러한 꼴은 징역생활이라고 하기 보다 아귀지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30인이 넘게 쳐 박혀진 방안에서는 몇일에 한번씩 그야말로 큰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것은 쳐 박혀진 인간최후의 순간이 것이다. 배만 앙상하게 남아서 숨도 제대로 못쉬는 상태로 쇠약한 사람이 한 주먹의 밥을 소중하게 움켜 편채로 속에 들어 있는 콩알을 집어서 넣으려는 순간 죽는 사람도 있었다. 옛말에 자식이 죽은 때나 부모가 돌아가신 때보다도 더 서럽고 매정한 것은 배가 고픈 때다 라는 말이 있다. 먹는다고 하는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나는 몸소 절실히 체험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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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되박의 미수가루는 양복한벌과 맞바꿀 정도로 귀중품이었다. 매월 집에서 면회를 와서 차입을 받는 사람은 그런대로 견디어 나가는데 면회나 차입이 전혀 없는 사람의 경우는 언제라도 죽음과 직면해 있는 상황이었다.


죄수번호 596. 문용명(文龍明)


나의 작업은 여전히 서틀러서 차마 볼수없던지 조장이 가마니의 아구리를 벌리는 일이나 삽으로 비료를 가마니에 퍼 놓는 일로 돌려 주었으나 어느 것이고 제대로 익숙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40키로의 비료가 든 가마니의 짐 꾸리기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내 옆에 10인의 조원 가운데서도 훨씬 건장해 보이는 30세가량의 사나이가 와서 "가르쳐 들이지요"하고 말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자기의 일거리를 가볍게 해치우면서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더욱 일에 익숙해져서 훌릉하게 해 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건강해서 힘은 있었으므로 몇일 동안 계속해서 가르쳐 주는 바람에 그럭저럭 한사람 몫의 작업 책임량을 해낼 수가있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나보다 반년정도 먼저 흥남감옥으로 후송되어 온 듯해서 소내의 사정이나 물물교환으로 살아가는 지혜등 여러가지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지옥에서 부처님 만나기란 바로 이런 것인가. 나는 괴롭고 쓰라린감옥의 중노동속에서 비로서 따뜻한 사람의 마음씨에 접하게 되었고 절망속에서 어렴풋이 희망이 보이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는 방이 달랐으므로 작업이 끝나고 만원이 된 방으로 돌아오면 공복의 쓰
라림과 잠을 푹 자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그래도 아침이 되어 비료공장의 일터로 나가면 그 사람과 같이 일을 할 수있다. 지옥과 같은 곳에서나마 서로간에 마음을 주고 받을 수가있게 되었으므로 한 시간이라도 빨리 일터로 나가는 것이 기다려지곤 했다.


아침 8시 운동장으로 나가면 나는 서둘러서 그 사람을 찾아서 그뒤에 앉는다. 점검이 끝나면 그사람과 2인 1조가 되어 비료공장까지 손을 묶고 걸을수가 있다. 지금까지는 비오는 날 같은 때는 그야말로 죄수생활의 비참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도보행진이었는데 어느새 나에게는 그 사람과 매일 아침 만나서 함께 일을 하는 것이 옥중에서 그나마 즐거운 일과였다.


이렇게 20일 정도 지난 어느날 초반 회색 옷에 갓을 쓴 백발노인이꿈속에 나타나 나의 이름을 부르며, "네가 매일 함께 도와주고 거둬주는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그 분은 무척 친절하고 좋은 분이므로 함께 지내고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노인은 "그분은 네가 어릴때부터 배워 온 성경에 장차 이세상에 오신다고 가르쳐 온 재림주(메시아)이시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깊은 잠에 떨어진 동료들이 있을 뿐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하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지워져서 돌아가신 후 삼일 후에 부활되어 40일간 이곳 저곳에서 재림하였다. 그리고 감람산(성경에 나오는 산)에서 여러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실 때 예수님은 "너희들은 어찌하여 하늘을 처다 보는가, 나는 이처럼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이 머지 않아또 재림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재림주라고 하는 꿈이 마음에 걸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도록 생각하고 있었으나 복잡한 심경으로 조반을 마쳤다. 나는 어느 때와 같이 운동장으로 나아가 그사람 뒤에 앉았다. 그리고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해서 무슨 일인가를 물어 보고자 하였다.
그런데 내가 말을 걸기 전에 그가 별안간 돌아보면서

"간밤에 꿈을 꾸었지요 꿈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말 하던가요"라고 묻는 것이다.

어떻게 그가 알고 있는 것민지 이상 하였지만 나는"재림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29세로 나이로는 7년이나 손아래 이었지만 반드시 "선생"이라고 존경해서 부르게 되었으며 그 사람도 "정화"라고 나의 이름을 불러서 점점 친근감을 느끼면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 사람이 죄수번호 596을 단 문용명 이었다.


총반장으로 임명되고

 

그로부터 15일정도 지난 어느날 아침 집회에서 "919번 소장실로 오도록"호출되었다.

919번은 나의 죄수번호이다. 무슨 일일까?나는 겁에 질린 채 가보니까 소장은 나를 쳐다보고 "어제 총반장이 만기로 출옥하였으므로 지금부터는 네가 전죄수의 총반장으로 복무하라."


이곳에는 1,500명의 죄수가 수용되어 있다. 10인에 1인, 조장 18을 파악하는 것이 반장, 총반장은 I5인의 반장을 소관하고 매일의 작업배치나 분담을 자치적으로 결정하는 등 전죄수의 대표로서 크나 큰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아니된다.


소장은 죄수전원의 경력 이나 기내기록을 본 후에 전문학교 출신으로서 군의 대대장을 한일이 있는 나를 골라 "후임은 너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역을 맡을것인가 말것인가를 망서렀으나 문선생의 권고도 있고 해서 맡기로 하였다.


총반장이 되니까 여러가지 것을 알게 되었다. 죄수들이 가장 바라는 작업은 취사이고, 다음은 수용소내의 잡역, 선반공장 선반공으로 이어지고 끝으로 비료공장 순이다. 선반공도 중노동이지만, 일하면서 철가공의 기술을 취득할 수 있다고 하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비료공
.장에서의 가마니 작업은 오직 힘이들 뿐이고 아무것도 이점이 없는 최저 최악의 중노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일 3식이란 작으나마 주먹밥 한덩어리와 소금국 한그릇만으로는 몸둥이가 견델 수가 없는 것이다. 조악한 식사때문에 영양실조자가 속출하고 과로와 허기로 한달이면 100명 정도가 죽어갔다.

단순하게 계산한다면 1년 남짓해서 전감한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흥남수용소에는 그 보충을 위해서 매월 100명 정도의 죄수가 각지의 형무소에서 후송되어 오고 있었다. 총반장이 되고 나면 사내에서는 자유가 꽤 통하므로 기회를 엿보아서는 문선생을 찾아가 잡담을 하기도 하고 되도록이면 편안한 작업으로 회부될 수 있도록 손을 쓰기도하였다. 어쨋거나 꿈속의 노인에게서 계시를 받아 내가 꿈에 본것을 먼저 알고 있던 이상스런 힘에 놀란 나에게는 문선생은 바로 재림주라고, 나는 믿게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반장인 주흥식이 묘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담당의 죄수가 병이 들었는데 내일이 어떨지 알수없을 정도의 중태인데 주반장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 죄수는 일본의 식민지시대에 큰 화물선의 선장으로서 전세계를 누비고 다딘는데, 전쟁이 끝 나고서는 고향인 여수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에 있는 친척을 방문했을때 공교롭게도 죄를 범해서 체포 투옥되게 되 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가 죽기 직전에 비단보에 그려진 지도와 무엇인가 영문으로 쓴 종이 쪽지를 주반장에게 건네 주었다. 얼마 안있어 그는 죽고 말았는데 영문을 읽을줄 모르는 주반장은 그후 영문을 아는 반공사상의 죄수중 김진수목사에게 번역을 해달래서 그것을 받았다. 그 종이쪽지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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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뒤편에 있는 묘지 가운데 이런이들의 무덤이 있다. 그 앞에서 세번째 어린이 무덤속에 시가 수억원의 보석이 들어있는 상자를 자기가 묻었다. 이제 나의 명은 다한것 같으니까 주반장에게 들이는 것이니 남쪽에 갈 기회가 있거든 꼭 찾아내시오"


주반장은 이와같은 이야기를 하고 나서 "총반장은 나보다 먼저 출소할 것이니까꼭 남쪽의 여수에 가서 그것을 찾아내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나에게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였으므로 나는 그대로 문선생에게 전했다.


나는 그후 남한에 살게 되었으나 여수는 가본일도 없고 또 이야기는 깨끗이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2년후의 부산시대, 문선생은 친구와 둘이서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여수로 가서 필연적으로 찾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묘지장소는 알아 냈으나 가장 중요한 아이의 묘는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문선생은 여수에 갔던 일조차 나에겐 말하지 않았다.


훨씬 뒤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을때 나는 진짜 재림주라면 보석상자 정도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선생의 정체에 대해서 새로운 의혹을 갖게하는 자료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재림메시아, 문선명의 정체·.·"그것만이 이 책의 주체이며, 나의 고백의 주안인 것이지만 이무렵 무지한 나는 그저 오로지 문용명을 존경하고 믿고 있었다.


해와는 왜 하반신을 감추었나


총반장의 완장을 단 나는 작업장으로 가는 죄수의 점검과 죄수들의 작업 배치를 정한 후에는 대수로운 일거리도 없이 자유롭게 지낼수가 있었다. 그래서 빈 가마니를 쌓아 놓은 창구로 문선생을 불러내서 그에게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문선생의 이야기는 유아세례를 받아서 젊었을때에는 교회 집사로도 일했고, 조금은 성경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 할수 있는 나에게도 이해는 커념 대단히 반발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예를들면 세례요한은 들녘 에서 가죽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어가면서 수도를 했고 "천국이 가까와오니까 회개하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자기의 책임 분담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을 잘리어 죽음을 당한것이다 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기독교에서는 세례요한은 아주 훌릉한 인물로 가르치고 있는 만큼 나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더욱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책임을 다 할수가 없었다. "


"예수님은 본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처지는 아니었다"등 등으로 말한다.


내가 더욱 더 충격 받을 이야기를 들은것은 잊어 지지도 않는 1950년 3월 29일 토요일의 일이 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와서 여느때처럼 두사람씩 손을 묶은 죄수들 1,500명을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 오직 땅만 보고 비료공장으로 서둘렀다. 도착한 후에 총반장인 나는 아마 10분정도 전원의·점검과 작업배치를 정했다.

그무렵 문선생에게는 빈 가마니에 짚을 넣어두는 일로 병자나 노인들이 할 수있는 손쉬운 작업을 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서 "총반장으로서 볼일이 있으니 잠간만 오세요"라고 불러내서 조용한 창고 속의 빈 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인 그 위에 올라가서 둘이서 마주보고 앉았다.

총반장에게는 작업장에서도 이러한 자유가 인정되어 있어서 간수나 죄수도 이의를 하는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몇 시간이라도 이야기 할수가 있었다.


사회질서 문란죄로 5년의 형을 받고 복역중인 문용명은 죄수번흐596, 부하 잘못으로 인한 책임을 물어 직무태만죄로 징역 3년인 나는 죄수번호 919, 두사람의 죄수는 서로 마주보고 596은 이야기를 하고 919는 열심히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해가며 중요한 대목은 메모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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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이야기는 성경의 "창세기"부분이었다.

창세기의 요지는 6000년전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사람으로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며 에덴의 동산에 살게 하였다. 그리고 걸맞는 반려를 만들기 위해서 아담이 자고 있을 때 아담의 갈빗대 한개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해와'이다.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만은 따 먹어서는 안된다고 명하였으나 뱀이 해와를 꼬였기 때문에 해와는 드디어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고 남편인아담에게도 권해서 먹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금단의 나무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발견된 때에는 부끄러운듯 무화과의 잎으로 하체를 가리우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해와를 만든 목적은 해와가 성숙하면 이세상에 죄없는 자손을 번식 시키려고 그랬던 것인데, 하나님을 배반한 두 사람은 얼마 안돼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죄를 범하고 더럽혀진 아담은 땀 흘러 일하지 않으면 살아 갈수 없게 되었고, 해와는 해산하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가인과 아벨의 형제가 태어났는데 얼마 안가서 형인 가인은 동생인 아벨을 죽이게 되어 이 세상에 처음으로 죄인이 된 것이다.

이상이 성경에 씌어져 있는 것이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온 해석인 것이다.

그런데 문선생은 "성경의 이러한 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세계의 크리스챤들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문선생의 해석은 이러하다. 해와를 꾀인 뱀이란 천사장 루시엘의 이름인데 루시엘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감언으로 미 성숙한 해와를 유혹해서 금단의 나무 열매를 따먹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루시엘은 해와와 섹스를 한것이다.

그리고 처녀성을 범행당한 해와는 하나님께 발각되기 전에 사탄의 피로 더럽혀진 몸 그대로 남편인 아담과도'성교를 했다.

지금까지는 금지 되었던 실과를 따 먹은것이 죄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들켰을 때 왜 해와는 무화과의 잎으로 하반신을 가리운 것일까?

사람은 몸에 상처가 나면 상처에 반창고 같은 것을 붙여서 아물게 하는데 그것과 같은 논리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이 금지시킨 성행위을 하고 깨끗했을 하반신에 상처가 생겨 그래서 무화과의 잎으로 그 부분을 가리운 것이다 해와는 그패 까지 나체로 있어도 부끄러움을 모르지 않았던가.

그것은 말하자면 하반신의 성기부분으로 성행위를 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부분에 죄가 있으니까 하반신을 가리운 것이다.


지금도 남자가 여자와 성행위를 하고자 노력하며 만족한 성행위가 되면 "어디어디의 처녀(부인)를 따 먹었다"고 표현 하는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랑 신부가 결흔식을 올리고 정정당당하게 첫날밤을 지내도 다음날 가족들 앞에 모양을 나타낼때 어던지 모르게 마음속에 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6천년 전에 천사장 루시엘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처녀인 해와와 성행위를 할 때에 "색큼"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미숙한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성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미숙한 과실을 따 먹으면 색큼한 맛이 나는 것도 미숙한 해와와 천사장 루시엘이 성행위를 함으로서 "색큼"함을 느낀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죄없는 인간을 세상에 번식시키려고 하였는데 천사장 루시엘 때문에 그 목적을 방해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가인이 그의 동생인 아벨을 죽임으로서 이 세상에 죄인의 번식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절대로 방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죄악이 가득해 있던 소돔과 고모라에는 불로 심판하고 노아때에는 홍수로 심판하였다. 그래도 죄 악으로 가득한 인간을 구제할 수는 없었으므로 유대 땅에 2천년전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예수를 탄생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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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탄생케 한 목적은 그 4천년전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간세계를 창조 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제2의 아담으로서 탄생시켜, 제1의 아담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했던 목적을 실현 시키고자 한 때문이다.


예수와 6인의 여인들


그리고 예수는 3십년간 요셉의 집에서 목수일을 하면서 켰고, 30세가 되어서 예수는 구세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예수는 12 제자를 골라 제2의 아담으로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케 하기 위해서 우선,

첫째로 자기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성행위를 해서 제1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겼던것을 되찾아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달성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와같은 하늘의 섭리를 알지 못해서 육신의 자식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아서 예수와성교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예수가 행한 기적은 가나안 잔치집에 가서 결혼 축하를 하기 위해서 어머니인 마리아와 함께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것이다.


그 집의 술이 없어졌으므로 어머니 마리아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예수와 의논하였다. 말하자면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수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에게 부탁한것이다.

그때 예수는 마리아에게 "여인이여, 당신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요"라고 말했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성행위 할 생각은 전혀 없이 이웃집의 잔치집에서 포도주를 만들것만을 원하였으므로 정말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으로 말 한것이다.

성모마리아가 예수와 성교를 한다고 하는 것은 제1의 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되돌려 빼앗아 온다고 하는 복귀의 원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마리아가 모자협조(모자간의 성교)를 하지 않았으므로 예수가 순혈을 이어 받을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후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 자매를 대단히 사랑하였고, 그녀들도 예수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막달라 마라아와 결혼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인가롯 유다의 연인으로서 곧 결혼할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인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 하였으므로 유다는 질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의 매제인 마르다 마리아와 유다를 결혼시키고, 자기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다는 예수에게 반역해서 예수를 로마의 병정에게 은화30냥에 몰래 팔아 넘기게 되었는데 실은 돈이 욕심이 나서 판것이 아니라 자기의 여인을 예수에게 빼앗긴것을 질투해서 판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데리고 각지를 돌고 있을때 일행은 수가촌이라는동네에 이르러 제자들과 먹을것을 찾고 있었다. 그사이 예수는 고단해서 우물가에 앉아서 쉬고 있을때 사마리아의 여인이 물을 뜨려고 왔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당신의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라고 말했다.


여인이 대답이 없음으로 예수는 "당신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어서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물을 한잔 청하고 채차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물을 내가 마시면 또 목이 마른다.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물은 당신속에서 생수와 같이 영원히 흐르게 된다. "(주=성경과는 역순이지 만 문선명의 이야기대로)

예수는 이 사마리아의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예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기때문에 실현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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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느때 세리와 바리새인의 사람들(성경에는 세리와 바리새인의사람이 제일 악인으로 되어 있는듯 하다) 이 간통한 여인을 예수앞에 데려왔다. 예수가 "이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말하면 모세의 계율에 간통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으므로 모세의 계율에 상반되는 것이되고, 또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면 예수가 언제고 "죄 있는 자가 있거든 일곱번씩 칠십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쳤던 말이 거짓이 된다.

참으로 거북살스런 문제로서 대답하기가 난감한 것이었는데 이때 예수는 아무 말도하지 않고 땅에 글자를 썼다. 사람들이 다가가서 보니까 거기에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죄없는 자가 있거든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쓰여 있었다.

모여있던 많은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 죄를 지고 있었으므로 하나 둘 다 사라지고 예수와 여인만이 남았다.

거기서 예수는 여인에게 말했다.

"나도 당신을 용서하는 것이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도록 하라" 이때에도 또 예수는 복귀섭리에 따라 이 여인과 성교를 해야만 했었는데도 실현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음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나병환자가 있는 시몬의 집에 갔을 때의 일, 모두들 식사를 하고 있을때 한 여인이 귀중한 향유가 든 항아리를 가지고 와서 감동의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었다. 여자는 머리털로 발의 눈물을 밖고나서 예수의 발위에 기름을 부었다.

 제자들은 "어째서 귀중한 기름을 그렇게 함부로 쓰는가 그것을 많은 돈을 받고 판다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쓸수 있을 테낀데"라고 그여인을 비난하였다.

예수는 "그 여인을 책망하는 것은 그만해라 그 여인은 나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해 주었으니까"라고 말했다.

예수는 이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때에도 또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으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질머지고 십자가에서 죽어 갔으므로서 그 피의 댓가로 죄인이 깨끗하게 되어 구원한다고 하는것처럼 모두 믿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창조의 이상을 옳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제2의 아담으로서 이세상에 예수를 탄생시킨 것은 제 1의 아담이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도로 찾아서 본래대로 돌려 놓기 위한 것이고 요컨대 복귀섭리를 실현하는 사명을 달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가 복귀섭리를 위해서 이세상에 탄생 한것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예수가 성모마리아와 최초의 성교를 한다고 하는 죄없는 피를 전하게 되기 위한 중요한 의식의 챤스를 예수에게 주지 않았다.

첫째로 필요한 "모자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서 예수는 이상에 태어났어도 복귀섭리를 다하지 못하였고 결흔조차 하지 못한 동안에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


예수는 재림을 약속한 최후의 기도때에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한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십시요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으나 이것은 죽는것을 두려워 해서가 아니라 제2의 아담으로서 이 세상에 와 빼앗긴 해와를 되돌려 받지 못한 채로 어머니들에게 복귀섭리의 실천(성교)도 못한채로 죽는것이 허전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즉음으로서 그 피의 대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 되였다고 하는 해석이 을다고 한다면 그러한 기도를 했을리가 없다.


예수는 육적으로는 실패하였으나, 영적으로는 승리해서 재림이라고 하는 숙제를 남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 재림주(메시아)는 어디로 와서 어떻게해서 인간을 구제하는 것인가? 구름을 타고 감람산을 통해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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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지 않다 동방에 있는 나라, 횐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고, 4계절이 분명한 나라, 동쪽에서 해가 뜨는 나라, 그것은 우리들의 대한민국이고, 이 나라에 재림하기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재림주는 제3의 아담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예수가 하지 못했던 복귀섭리를 이세상에서 실천해서 인간의 6천년간 죄악의 역사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고 사탄의 피로 더렵혀진 인간의 피를 성스러운 하나님의 피와 교환 함으로서 이 세상을 영원히 죄와는 관계가 없는 세
계로 하는것이 하나님의 참된 뜻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주의 사명으로서 잃어버린 해와의 순결을 되찾아 만인 앞에서 처녀와 "어린양찬치"를 행하고 참된부모 아담과 해와에 의해서 전세계의 인간의 피가 더럽히지 않은 피와 교환되게 되는 것이다.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환(血代交換)을

 

부모님이 같은 기독교 신자이신 집안에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교회 집사 까지한 경험이 있는 나는 문선생의 성경해석에는 귀를 의심하고 머리를 갸우뚱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반면 꿈속에서 "문선생이야 말로 재림의 메시아다"라고 하는 계시를 받은 나는 반신 반의 하면서도 차츰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선생님은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이며,어떻게 해서 이상의 천국을 완성시켜 나아가실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것은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달성하지 못했던 여인들과의 복귀다.

우선 천사장 루시엘의 성교로 인해서 빼앗겼던 것을 그것과 같은 방법으로 남편이 있는 부인 6인 즉 6인의 마리아를 빼앗음으로서 되돌려 놓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것은 복귀섭리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하지 않으면 안될 숙제이고, 목숨을 걸고라도 해내지 않으면 안될 중대한사명인 것이다.


나는 놀랍고도 반발을 느끼면서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남편이 있는 유부녀와 더구나 여섯 사람씩이나 유부녀와 성교를 한다고 하는것은 그 남편에게 죽임을 당할 염려가 많고, 설혹 남편들이 모른다고 하더라도 간통은 하나님이 가르침이신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이나라의 법률에서도 유부녀와 성교하면 간통죄가 됩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수 있습니까?

아니야 걱정할것 없네 머지않아 세상은 극도로 성이 문란해지네 길바닥에 남녀가 천연덕스럽게 성교를 하게 되고 통행인은 그것을 보더라도 지금의 악수하는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을것이며, 이상스럽게 느낄것도 없게 된다.

또 그무렵이 되면 인간의 심리상태도 달라져서 자기의 처나 연인이 다른 남자와 성교를 하더라도 노한다던지 질투를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복귀원리를 들은 여인들은 복귀를 받고 싶어서(성교를 하고 싶어서)자기들이 자원해서 오게 된다. 그 시기가 오면 재림 메시아는 6인의 유부녀를 마리아로서 남편에게서 빼앗아 더렵혀진 사탄의 피를 정화하기 위해 피를 교환하는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을 "혈대교환(血代交換)" (주=말하자면 "피 나눔"이라고 하는것.후술)이라고 하는 것인데 복귀의 의식인 성교에는 지금의 사단의 세상과는 달라서 일정한 규정이 있다.

재림메시아가 유부녀의 더렵혀진 사단의 피를 정화하여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하기 위해서 복귀의 의식으로서 행하는 성교는 메시아가 위에서 3회씩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것은 소생, 장성, 완성의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6마리아와 도합 18회의 성교에 의해서 유부녀들은 마리아로서 환생하는 것이다.

6마리아를 복귀시키면 재림의 메시아는 다음에 성교경험이 없는 처녀를 골라서 해와로 정해 "어린양잔치의식"(정식 결혼)을 한다.

아담의 대리인 메시아와 해와는 참아버지, 참어머니이며, 그 두사람에게서 태어나는 자손은 영원히 죄가 없는 선한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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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세상을 6천년전에 하나님이 창조하려고 하였던 이상의 원점으로 돌려 놓을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 이 세상에는 천사장 루시엘에게 해독을 입은 사단의 피를 받은 인간이 50억인이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전부를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최초에 재림 메시아에게 복귀된 여인은 다른 남자의 식구(신자를 말한)와 여자가 2회 위에서 "소생, 장성, 완성"의 3회에 걸쳐 복귀를 해 줄수가 있다.


복귀를 받은 남자식구는 다른 여자 식구들과 여자가 위에서 2회, 아래에서 1회 성교를 해서 복귀시킨다. 또 그 여자식구가 다른 남자 식구에게 여자가 위에서 2회, 아래에서 1회 성교를 해서 복귀 시킨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넓혀가게 되는 것이다.

다만, 복귀를 받으면 그전에 7년간은 "성별"(성교를 하지 않는 기간)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복귀를 받을 자격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만큼 7개월간의 성별만으로 가능하며, 그 후에는 훨씬 짧아져서 7일간만의 성별로 남여 서로 복귀를 받을 자격을 주게 될것이다.

나는 거기서 이 세상에는 국적도 언어도 피부색도 이상도 다르다. 이만큼 다수의 사람들이 있고, 한국 뿐이라면 또 몰라도 어떻게 그렇게 될수가 있는것인가"고 물었다.

문선생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조건만 만들어 놓으면 국적, 민족, 언어 따위와는 관계없이 실행할 수 있다"고 답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들은 세계각국에서 동쪽에서 해가 뜨고, 횐옷을 입은 4계절 나라에 재림한 메시아 아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몰려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진정한 부모 밑에서 온 세계의 인간이 하나의 가족처럼 되어서 국적이나 언어 따위에 관계없이 전세계가 가깝게 된다. 한국인이 아프리카에 가고 싶을 때에는 아프리카의 어디라도 갈수있고, 어느집이고 찾아가서 그집에서 하루고 몇일이고 지낼수 있게 된다.

또 그집에 있는 모든물건을 자기의 물건처럼 사용 할 수도 있다. 양껏 먹고 즐겁게 마셔도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 있는 혹인이 한국에 오더라도 몇일씩이고 묵을수 있고 우리들의 물건을 무엇이던 자기의 물건처럼 쓸수가 있으며, 좋을대로 먹고 마시더라도 누구도 군소리를 할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의 사단의 세상에서는 모든 물자나 돈을 사단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용방법이 틀렸던것 이다.

참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식구들은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단의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이나 돈은 참 부모와 함께 있는 식구들이 가령 그것을 훔쳐서 썼다 하여 그것이 세속의 법률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된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 것이었던 물자나 돈을 사단이 탈취해서 썼던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적으로 대단한 고통도 없어지고 모든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어서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갈수있게 된다.

지금 우리들 죄수 1,500인이 하루 온종일 노동해서 겨우 될수있는 일거리도 그때가 되면 한사람이 3시간만 일하면 모두 될수있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 삼아 3시간 정도만 하면 되게 되는 것 이다.

그리고 알라스카와 같이 추운 지방의 식구들은 하고 싶으면 일년내내 따뜻한 하와이와 같은 경치좋은 곳에 와서 자유롭게 먹고, 마시고,서로 사랑 할 수가 있다. 만약 그것이 싫증이 나면 4계절이 뚜렷한 한국과 같은 나라에 와서 즐길수가 있다. 또 일본과 같이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 가서 자유롭게 구경하고 생활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기가 반듯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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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사람들이 '참 아담'과 '참 해와'라고 하는 두사람의 부모의 자식이 되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문선생은 '원화원이상 (圓和園理想)" 이라고 한다.


현재 형무소 안에서 고생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그것은 꿈속의 또 꿈과 같은 이야기라서 나는 그저 명청하게 듣고만 있었다. 옥중에서 나는 총반장이란 처지를 이용해서 시간을 벌어 가지고 문선생에게서 몇 주간에 걸쳐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생각한다면 그로서는 형편이 좋은 전도였고 포교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창조원리'나 '복귀원리'는 실은 그가 가르침을 받은 김백문이나 이용도의 이론의 복사판이었을 뿐아니라 몽땅 받아다 파는 식의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훨씬 후에야 알았다.

또 복귀라고 하는 명목의 성행위로 문선생이 얼마나 많은 여성을 불행하게 하였는가, 그자신이 얼마나 음난하고 방자한 성욕에 탐익 하였는가를 이 책속에서 밝혀두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반면에 사회악이라고 말 할수 있다. 복귀의 진실을 고발하는 나 자신, 실은 문선명의 명령에 따라 많은 여성과 복귀한 사실도 있다.

여하한 이제 한동안 무지했던 나와 문선명의 당시의 관계를 읽어 주십시요.

 

평양을 소란케 한 이단자

 

그날도 나는 죄수들과 함께 작업장으로 나가서 작업배치를 한 후에 문션생과 함께 조용한 창고로 가서 빈 가마니가 쌓여 있는 곳에서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긴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은 서울에서 평양까지 오게된 동기와 평양에 와서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 때문에 사회질서 문란죄라고 하는 죄명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되었는가를 들었다.

나의 꿈속에서는 분명하게 문선생은 재림 메시아라고 하는 계시를 받았다. 나의 해석으로는 재림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종말의 날에 심판을 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추수 할때에 잘 익은 곡식은 알뜰히 수확하고, 제때에 여물지 못한 것이나 쭉정이 같은것은 불에 태워 버리는것 처럼, 재림메시아의 심판에 따라 참된 신자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믿지않은 사람들은 지옥으로 떨어트려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메시아의 사명이라고 성서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문선생과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감옥에서 이와같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긴 시간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최초의 체포 구속

 

문선생은 서울의 영등포구 상도동에 살고 있을때 김 백문이 라고 하는 사람이 지도하고 있는 이스라엘 수도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김백문의 성경의 원리해석을 배워 나가던 중에 그 원리에 흠뻑 빠저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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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하나님으로 부터의 계시를 받아 북한으로 가도록 말이 있었다고 한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1946년 6월6일의 일이었다.

그 당시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고 전체가 거의 공산주의로 물들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문선생은 그러한 시기에 처자를 서울에 남겨둔채, 배낭 하나만을 짊어지고, 38선을 넘어서 평양으로 왔다.

평양으로 와서 맨 먼저 정득은(T得恩)이란 여인을 만났다. 의기 상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를 받은 평양성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것에 합의하고 서로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때 문선생은 26세 , 정득은은 40세정도였다.

두 사람은 평양시 상수구리의 검은다리에 있던 정득은의 집에서 원리를 전도해 나가기로 하였다. 며칠이 채 못가서 이집에는 열성적인 신자들이 10명이 넘게 모여들었다. 여기서 문씨는 처음으로 창조원리에 대해서 강의를 하였다.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알아 차리고 해와를 유혹해서 타락시킨 일, 예수의 모친이었던 마리아가 모자협조(성교)를 하지 않아서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죽게 되었다.
예수는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것은 아니었으나, 십자가위에서 육체는 죽어 버리고 영혼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된 것이므로 또 재림할 것을 약속한 것이라는등‥‥

이때 모인 신자는 정득은, 옥상현*, 지승도, 정선옥*, 김인주, 김종화등의 여성과 김원필, 정명선, 차상순 등이었다.

문선생이 집회를 열고, 성경해석의 원리를 강의하면 특히 여인들은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모양을 보고 근처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 하였던것 같다.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열사람 남짓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든가 소리를 지르던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선생에게 말을 시키면 창조원리와 타락원리의 강의 그리고 복귀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 6천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누구던지 울면서 기도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이와같은 집회가 허용 될리가 없다. 근처의 사람들이나 기성교회의 신자들, 특히 교회의 목사와 장노들은 문선생의소행을 이단시하였다.

이 이상스러운 집회를 하고 있다고 경찰에 고발하였기 때문에 문선생은 평양으로 와서 2개월째인 1946년 8월2일 대동보안서에 체포되어 약 100일간 구속되었다. 그간에 가혹한 고문을 받아 한잠도 못자게 하든가, 식사를 2일도 주지 않는등, 학대를 받었으나 특별한 죄가 없었기 때문에 석방되었다. 그때 문선생은 꽤 쇠약해 있었으나, 신자들의 도움과 한약의 덕분으로회복하였다고 한다.

 


유부녀와의 결혼소동으로 징역5년


문선생은 그후 경창리에 있는 김종화(金鍾和)라는 열렬한 여신자의집에 머물렀는데, 그녀의 남편인 정명선과 세자녀가 있는 가정이었다.

이집에서 문선생은 복귀원리를 실현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있는 부인네를 천사장 루시엘이 해와를 빼앗아 성교를 한것과 같이 빼앗아서 하필 남편과 아이들이 옆에 있는 방에서 김종화와 동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문선생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김종화와 "어린양잔치"(정식결혼)을 하기로 하였다. 신자들은 쌀을 거두어 떡을 만들고 양복과 이불을 만드는 등 푸짐하게 의식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매일같이 사람을 모아 놓고는 울면서 기도하다가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시끌벅끌하며 밤중까지 떠들석했다. 그위에 남편이나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지붕밑에서 동거하고 있다. 그것이 이번에는 결혼식을 올린다고 큰 소란을 떨고 있는 것이니까 그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잠자코 있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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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1948년 2월 22일 문선생이하 전원이 체포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선생은 사회질서 문란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로 오게 된것이다.

(6월 20일)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김종화는 징역 1년의 실형으로 복역하고, 옥상현은 그녀의 집이 상당한 재산가였으므로 2개월 만에 석방 되었다고 한다. 또 몇해 후에 남한 서울에 피난하고 있던 김종화를 찾아가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서, 나는 당시의 진상을 들어 보았다.

믿음을 잃고 쉬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문선명의 이야기와는 달라서 흥미 진진한 것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대공습


1950년에 접어들자 형무소안은 한층 더 엄중해졌다. 비료공장의 작업장은 웬일인지 유안분이 돌처럼 굳어져서 일에 능률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책임량(노루마)은 증량일로 이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일을 하여도 달성되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 더구나 노동시간은 1시간이 연장되어 6시에 종업이 된다. 참으로 "죽으라"고 하는것 같았다.


1,500인의 죄수중에서 매월 100인정도는 툭특 쓸어져 죽어서 공장의 노동자들은 매일 장사를 치르는 것으로서 일과가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죽은사람의 인수만큼 죄수가 평양형무소에서 확실하게 보충되어 왔다.
젊은 간수들이 많이 줄어 든것을 알아차린 것은 5월경 이었다.


아무래도 사원들이 "이 것은 비밀이지만‥‥라고 말하면서 소근거리며 "소련쪽으로 비료를 운반해 간 배가 돌아올 때에는 고사포 같은 무기를 잔뜩 싣고 오곤 한다. 아마도 곧 전쟁이 시작되는것은 아닐까"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수용소내의 경계나 작업소내의 감시가 한층 더 엄해졌고 죄수들은 큰소리로 이야기를 할수없는 분위기가 계속되어 있었는데 6월 25일 드디어 전쟁이 시작 되었다.


북한의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서 남진하여 3일후에는 서울이 함락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죄수들을 연령별로 나누어 군대로 보내서 위험한 최전선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뜬 소문이 나돌았을 때에는 불안한 나머지 수용소 안이 크게 떠들석 하였다. 그런 가운데 8월1일 오전 11시 비료공장의 상공을 UN군의 비행기가 약30분이나 정찰하고 갔다.


나는 군대시절의 경험에서 계호계장인 간수에게 "여기는 틀림없이 폭격 당합니다. 수용소쪽이 안전할 테이니까 죄수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진언하였으나 전쟁을 모르는 간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할수없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가요란하게 공급경보의 싸이렌이 올렸다.


UN군의 B29가 공습해서, 12시경부터 약4시간 비료공장은 맹렬한 폭탄비의 세례를 받았다. 북한 산골 옥수수 농사짓던 농민이었던 간수들은 넋이 빠져서 우왕좌왕 할뿐이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만약 또 폭격이 있더라도 국제법상 형무소나 수용소는 폭격하지 않을터이다. 안심하고 수용소로 가기를 서두르자, 간수들은 죄수가 전원 따라오는지 뒤에서 감독해 주시오라고 큰 소리로 지시하고 선두로 달려서 수용소로 돌아왔다.


비료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총 인원수는 8천명 정도 이었고, 죄수는 1,500명이었는데 돌아와서 조사해보니까 죄수의 사망자는 불과 70명, 공장 전체로서는 약 3천 7백명 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다.
참으로 무서운 대공습이었다 수용소로 돌아온 나는 서둘러 문선생을 찾아 폭격으로 다친데나 없나 하고 걱정 하였는데 상처 하나없이 무사하였다.

 

김일성 은사


북한이 김일성 정권의 수립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서 독립하였는데(1948) 은사로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던 나는 대공습 다음날(50년 8월 2일) 간신히 형기를 마치고 지옥의 수용서에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하늘 아래인데도 공장안과 밖은 이렇게도 다른 것인가를 눈물이 넘쳐 흐르는 생각으로 하늘을 바라 보았다. 오전 10시경이었다. 비료 공장 옆을 지나보니 폭격당한 흔적의 비참한 광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기 저기 있는 큰 구덩이에서 시체가 산산히 흩어진 살점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이 공장속에서 문선생은 오늘도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을 것인가고 생각하니까 자기 혼자서만 먼저 석방 된것이 면목이 없었다. 출옥의 인사차 갔을 때에 문선생은 "평양에 가거든 경창리에 살고 있는 김종화를 찾아서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라 고 전해 주시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종화 여인은 문선생과 결혼하려고 하였다가 투옥 당하게 된 원인이 된 바로 그 유부녀인 것이다.

홍남의 도로는 인민군의 군수물자를 실은 트럭이 많이 달리고 있었다. 인민군은 선제공격으로 승리하여 서울을 점령한것 같았다. 지금은 전쟁중인 것이다. 평양행 군용트럭을 세워서 사정을 말하였더니 평양까지 태워다 주게 되었다.

 

 

제2장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평양에서 서울로

 


불량배에게 다리에 절골 당했다.

 


폭격을 피해서 산길을 뛰기도 하고 도중에서 자기도 하며 평양에 도착한 것은 3일 뒤였다. 공습을 피해서 교회로 소개되어 있던 가족과 합류한 다음날, 나는 김종화 여인의 집을 찾았으나 찾을수가 없었다. 그 무렵 한국군은 인민군에 밀려 1950년 8월 18일에는 부산으로 한
국정부가 옮겨가 있었다.

북의 공산당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평양시내는 전승분위기로 넘쳐 있었으나 9월 15일에 UN군이 인민군의 배후를 찔러 인천으로 상륙, 전황은 뒤집혔다. UN군의 진격은 재빨라서
9월 하순에는 한국군과 UN군이 평양에 입성하였다.

그러한 어느날 나는 보안대라고 자칭하는 무법자들 일당에게 둘러싸였다. 본바닥의 불량배들로서 북이 오면 북을 맞이하고 남이 오면 남에 꼬리를 치는 패거리들 이었다.

"너는 북조선 군의 대대장을 지낸 진짜 공산당원이니까 죽인다. 죽어라 !!』몇사람이 나에게 달려들어 망치로 내다리를 쳤다. 발목뼈가 부러져서 나는 움직일수 없게 되었다. 마침 지나가던 한국군 헌병대의 찝차에 구조되어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직무태만
죄로 투옥 되었던 것을 알게 되어 석방되었다.

이러한 곳에서 살해 당하는가 싶어서 한때는 죽음을 각오하였던 만큼 '정말 사람에게는 무엇이 행운을 가져 오는지 알수 없다'고 무심결에 실소한 일도 있었다. 그때 유치장에 남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중죄인들은 모두 총살 당한것 같다.

전쟁으로 시내의 병원은 어디고 제대로 되는것이 없었다. 유도가 5단이었던 나는 할 수 없이 약국에서 적당한 약을 구해서 먹고 부러진 발목에는 응급조치로 나무쪽을 대서 묶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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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명(文龍明)과의 재회


10월 27일 김원필과 문정빈이 나를 찾아 왔다. 문선생은 출옥해서 10월 24일에 평양에 도착하여 나를 찾고 있었으므로 데릴러 왔다는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서 기쁘고 반가워서 말조차 잘나오지 않았다.

나는 리야커에 실려서 얕은 언덕받이에 있는 옥상현의 집으로 갔더니 문선생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순간 나와 문선생은 손을 잡고 울어버렸다. UN군에 의해서 흥남감옥이 10월 14일에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 문선생은 10일 동안이나 걸어서 평양으로 온것같다.


옥상현의 자택은 일본식 주택으로 부지가 수백평이나 되고, 집이 여러채 서있어서 큰 부자임에 틀림없었다. 옥상현과 딸 정애, 정순, 문선생, 김원필, 문정빈, 그리고 나까지 7인이 한 가족처럼 생활하였다.

일주일정도 지나니까 옥상현의 남편인 우하섭의 가족전원이 피난 나갔던 서울에서 돌아 왔으므로 우리들은 쓰고 있던 방을 비워 주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모두들 의논한 결과 서성리 라고 하는 곳에 있는 방을 하나 빌리기로 하고 그 다음날에 이사를 했다. 문선생과 김원필, 문정빈 그리고 나까지 4인이 함께 살게 되었다.

문선생은 그사이 아는이의 안부를 찾아 들락거렸고, 김원필에게 자기의 출옥을 알리는 일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또 평양에서는 1950년 12월2일 시내전역의 시민에게 피난명령이 내렸다. 그것은 중국군이 대량으로 투입되어 인해저술로 거센 파도(노도)처럼 몰려오고 있기 때문에 한국군과 UN군이 일단 후퇴 하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는 조선반도의 맨 북쪽까지 쫓겨 갔던 북조선 인민군과 그것을 지원하는 중국지원군(10월 25일에 참전)의 전진은 예상외로 빨랐던 것 같다. 그날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의 탄약고가 폭격 당해서 밤새도록 폭발하는 바람에 한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족을 이북에 버려두고 문선생을 따랐다.


우리들은 남쪽으로 피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리골절 상처가 다 났지 않은 나는, 걸을수가 없었기 때문에 상수구리에 있는 누님댁에서 자전거를 가져다가 나는 그것을 타고 김원필은 뒤에서 밀고 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1950년 12월 4일 10시경에 평양을 출발하였다. 계절은 겨울이였으나 아직 그렇게 춥지는 않았으므로 피난 하기에는 비교적 장해는 없었다. 도중 대동군에 있는 나의 본집에 들려 가기로 하였다.

우리집에 도착하니까 가족은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가 부자유한 다리를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남으로 출발한다는 것은 온가족이 "엄청난 무리"라고 크게 반대하였다.
조카인 정근은 "삼춘이 그 다리로 어떻게 남으로 피난 갈려고 생각하는가"하면서 필사적으로 말리려고 하였다. 문선생은 우리가족을 납득시키려고 평양성을 눈앞에 바라 보이지만 북에서는 목적을 달성 할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뜻에 따라 일단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설명하였다.


나는 옥중에서 맺은 사나이의 약속으로 문선생과 함께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마음 속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미 80세가 되신 어머님께 작별 인사를 들인 뒤에 처에게 가족들 일을 부탁하였다. 그때 맏딸 효순이가 나와서 "나도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를 돌보면서남쪽으로 따라 가겠다"고 눈물을 흘렸으나 문선생이 말렸다. 문선생은 흥남에서 같이 온 문정빈과도 나중에 기회를 봐서 남쪽으로 오라고 타일러 우리집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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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후방에는 중공군이 물밀듯이 멀려오므로 우리들은 되도록 빨리 대동강을 건너야 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정근에게 부탁해서 그날 밤중에 배로 남충면 효남리로 건널 수 있었다.
그날 밤은 근처에 있는 누님댁에서 묵었다. 남쪽으로 피난하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다음날 아침인 12월 5일 누님이 마련해준 식량을 자전거에 싣고 나는 타고 김원필은 밀면서 출발하였다.
누님은 문선생을 목사라고 생각하고, 목사님 제발 제 동생을 잘부탁드립니다 라고 머리를 숙여 인사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후 43년간 가족과의 만남은 사라져 가는 꿈같고 아내와 다섯 아이들은 어떻게들 하고 있는지 )


죽을때까지 함께 하자던 사나이의 약속


남쪽으로 내려 가는 피난길은 사람들로 넘쳐 있었다. 피난민들은 저 마다 손을 잡고 그야
말로 몇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서서히 남쪽으로 남쪽으로 걷고 있었다. 우리들은
역포를 거쳐 용연면에 들어서서 12시경에야 가학리 에 도착하였다.서쪽에서는 폭격기의 공습과 총격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날은 흐려 있어서 해가 아직지지 않았는데도 해가
넘어 간것처럼 어두었다. 오늘은 앞으로 더 가는것을 체념하고 숙소를 찾아서 쉬기로 하자는 문선생 지시로 우리들은 근처의 마을에 들러 초입에 있는 농가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아무도 살고 있는것 같지 않았다. 가재도구는 있었으나 아마도 주인은 남쪽으로 피난해 갔는지 부및에 가보니까 쌀은 물론 김치, 간장, 된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말로 인류최후의 날이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세상은 이제부터 어떻게 되어가는 것일까? 가구와, 살림도, 의복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가족만이 증발해 버린것 같다. 피난 도중에 쉬려고 맨 처음에 들어간 집의 광경을 보고 나는 여러가지 것을 생각케 하였다
원필이가 저녘 준비를 해서 가져 왔다. 횐 쌀밥에 물김치를 차린 밥상이었다. 우리들은 감사의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하였다 문선생이 "정화는 다리가 부러져서 고생하고 있지만 좀 있으면 낳을것이다. 또 자유롭게 걸을 수 있을 터이니 안심하시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가족들을 생각해서 쓸쓸해 보였던지 "우리들은 지금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는 것이다. 다만 피난하기 위한 길만은 아니다. 평양성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 세상에 창조하려고 한 것인데, 나를 감옥으로 보냈기 때문에 허사가 된것이다.
남쪽에서 다시 한번 해내는 것이야"라고 격려해 주었다. 쌀 뒤주 위에 가지런히 개서 올려져 있었던 이불을 펴고 누됐으나, 나는 아무리해도 잠이 들수가 없었다. 원필은 피곤한지 바로 잠이 들었으나 문선생도 한동안 잠이 안 오는것 같았다. 이제 부터의 계획이라
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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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부터 한평생 문용명(본명)과 박정화는 고락을 함께하고 영원히 같이 살자"고 옥중에서 서로 맹서하였기 때문에 정다운 고향을 떠나서 사랑하는 가족들 부모, 형, 그리고 처 다섯식구 들(17살 장남,15살 차남, 13살의 3남 , 10살의 큰 딸, 다섯살 4남)과 헤어져서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내 일생은 모두 재림 메시아로 믿고 있는 문선생에 맡긴것이다.

역시 나도 고단했던 가보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가깨어 보니 벌써 아침해가 떠 있었다.


피난 길에 우리들의 복장은 문선생은 횐 명주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검은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일본 식민지시대의 말기를 생각케 하는 검은빛의 반공두건을 쓰고 있었다. 흡사 봉건시대의 부인들이 입고 있던 당의와 같은 느낌인데 얼굴 앞 부분만이 보일뿐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겉차림뿐만 아니라, 여인과 같은 음성이였으므로, 진짜 여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작업복 상하에 일본군의 구두를 신고 머리 에는 누런 방한모를 쓰고 있었다.
외국제의 밝은 자전거에 짐을 싫고 다리가 불편한 내가 걸터 앉아 핸들을 쥐고, 원필과 문선생이 교대로 뒤에서 밀고 있던 모습이 아마도 기묘하게 보였을 것이리라.
 

악전고투의 피난 길


남쪽으로의 길은 간선도로를 가면 비교적 평탄하고 수월하겠지만 미헌병이 여기저기 서 있어서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결국 피난민이 통행할 수 있는곳은 좁고 기복이 많은 옆길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피난민의 수는 늘고 그야말로 인산 인해 좁은 길에 넘쳐나고 있었다. 남으로 가기만 하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보증도 아무것도 없건만 그래도 무언간에 희망을 가지고 사람들은 남쪽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었다.


평양을 떠날때 의복이나 살림을 한짐씩 싸짊어지고 피난길에 올랐으나 그짐도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 들었다. 줄곳 걷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지쳐 그리 대수롭지 않은 물건들은 자꾸 내버려 피난길 20일 정도 된 때에는 짐들은 거의 줄어졌다. 피로가 겹친 몸에는 한 겨울의 추위가 한층 더 느껴졌다. 따뜻한 곳을 찾아서 풀위에 눈이 녹아있는 곳이 눈에 띄이면 주저 않았다가 쉬엄쉬엄 걸었다. 그래도 잠 자리와 식사 걱정만은 대단하지 않았다.


그날도 조금 일찍이 숙소를 찾아서 쉬기로 하고 가까운 마을로 들어갔다. 어느집에 들어가니까 꽤 잘 살던 집처럼 보였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살림살이와 식량은 놓아둔 채였다. 방을 정하고 한참 쉬고 나서 원필이 저녘밥을 마련해 주어서 세사람이 식사를 했다.  아픈 다리로 이대로 부산까지 갈수 있을런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우리들은 점점 늘어가는 피난민에 섞여서 남으로 남으로 향하였다.


그 도중에 광주근처에 각도가 거의 30도정도는 되는 가파른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는 150M정도로 길어서 자전거를 밀고 올라 갈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내가 자전거에 타고 원필이 아무리 힘껏 민다 해도 그리 쉽사리 올라 갈수 없었다. 조금 올라간듯 하면 미끄러져서 자전거가 뒤로 나 자빠지고 만다.


주위에는 피난민이 가득차서 저마다 앞을 다투어 먼저 가려고 하였다. 이대로 하다가는 아무리 해도 나아갈수 없겠다고 생각한 나는 나 때문에 문선생과 원필도 남쪽으로 못가게 된다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서 문선생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안 되겠오 나를 두고 앞으로 가시오 나는 여기서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나의 운명에 따르겠오." 그했더니 문선생은 화를 내며

"당신과 나는 죽음까지 함게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금후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살자 걱정말게 !! 라고 말해 원필에게 자전거를 끌게 하고 나를 업고서 고개를
넘었다. 감격 한 나는 문선생을 믿고 따라 가기로 다시금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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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서을에 도착하다.


우리들 세사람은, 그후 남쪽으로 온 피난민속에 공산군이 섞여 있을것 이라고 하는 정보에 따른 UN군의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여럿이 죽는 고초를 겪기도 하고, 이의 등살에 견디기 힘들었던 어려운 고비를 참고 넘어서 사리원, 하성, 동해주, 청단, 내성, 용매도, 영양, 토성,장서를 거치고 임진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들어가 마포를 지나서 서울로 향하였다.


12월 27일 눈이 퍼블는 속에 얼어붙은 한강을 미끄러지고 구르면서 건너서 24일만에 우리들 세 사람은 꿈에 본 서울에 당도 하였다. 우리들은 우선 영등포구 흑석동에 있는 곽이라고 하는 사람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문선생의 옛날의 친우였던 곽이란 사람은 이미
부산쪽으로 피난해서 그 집은 빈집이 되어 있었다.

이집은 2층집인데 양옥집이고, 가재도구가 그대로 놓아둔 채로였다. 할수없이 우리들은
이 빈집에서 한동안 지내기를 하였다. 서울은 문선생이 학생시절부터 살아서 신앙적인 면으로도 여러가지 것을 체험 해온 제2의 고향이었다.

그 곳에서 문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후 한동안 하숙을 하고 있었다. 이기봉이라고 하는 할머니 한테 찾아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렇게 반갑게 대해 주지 않는 것이
다. 그 후에도 몇 사람 옛 친구를 찾아 갔으나, 문선생의 꼴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들의 모양이 거지같이 보였든지 그리 친절하게 대해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무렵 서울시민은 국민방위군요원에게 물겨 다니고 있었다. 나는 또 다리가 부자유스러워서 걸리지 않았지만, 문선생과 원필 두 사람은 무조건 끌려갔다. 세사람이 사선을 넘어 평양에서 겨우 서울에 닿았는데 이것은 또 어떻게 된 것인가. 나만 홀로 남겨지고 금후의 일이 걱정인데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서울은 낯선 고장으로, 아는 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곳이다. 더구나 전쟁 중이다. 문선생이 찾아가도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가령 내가 찾아간다 하더라도 나 같은 것에 동정 해 줄리가 없다.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무것도 떠 오르지 않았다. 문 선생만을 믿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문선생과 원필은 국민방위군의 자체검사에서 불학격이 되어 돌아와서 세사람은 또 흑석동의 곽씨의 자택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새해가 밝아 1951년 1월 2일, 서울전역에 퇴거명령이 내려졌다. 공산군이 가까이 까지 남하해 온 것이다. 우리들은 또 피난길에 나서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 이번의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지금까지 검문을 받던지 할 때에는, 우선 먼저 증명서의 제시를 요구 받았다. 그런것을 생각해서, 나는 가까이 있는 치안대를 찾았다. 유홍이라고 하는 치안대의 대장이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서 우리들은 "피난민증명서"를 한통씩 만들어 줄것을 요청하였더니 친절하게 증명서를 발행해 줄뿐만 아니라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위로의 말까지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 때의 기분은 지금껏 잊을수가 없다.

평양에서 마련해 가지고온 돈도 모두 떨어졌으므로 우리들은 할수없이 곽노필씨 집에 남아있던 양복이나 돈이 됨직한 것을 자전거 뒤에 싣고 서울을 출발하였다.만약 그대로 남겨 두었다 하더라도, 인민군이나 중국군이 처들어 온다면 아무것도 남아 나지 않을것은 명백하였다. 사실 서울은 1월4일 재차 공산군에게 제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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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산으로

 


제2의 피난행



우리들은 1월3일 이번에는 부산을 행해서 500키로의 피나길에 올랐다. 두번째의 피난인 것이다. (1·4후퇴 때)
자전거에 타고 그저 밀려 다니는 꼴이 었지만, 자유를 찾아가는 희망의 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서울을 출발해서 부터 우리들은 부산까지 경부선을 따라 가지않고 중앙선을 따라 가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나의 숙부가 되는 정기수씨가 제천이라는 곳에 살고 있어서 그곳을 들러 가면 여러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성남을 지나서 이천으로 향하였다. 이번에는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피난 때와는 달리 모르는 피난민들끼리 줄을 짓기도 하고, 또 무더기로 몰려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끼리라든가, 가족들끼리 함께 이동해 가는 것이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그의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에는 거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빈 집이 눈에 띄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집에 가서 하루밤 쉬어 가기를 부탁하면 쾌히 들어주어 방을 빌려서 쉴 수가 있었다. 빈 방이 없을 때에는 부엌이나 헛간 같은 데서도 쉬어 갈 수가 있었다. 쉴 장소가 마련되면 다음은 가지고 은 쌀로 식사를 마련해서 먹고 자는것 뿐이 었다.

제2의 피난때에는 전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 가짐에도 얼마간의 여유가 생겨서 그렇게 서둘지 않고 느긋하게 갈수가 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일찌감치 마을에 찾아들고 서둘러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잘하는 방법인 것이다. 가지고 있던 쌀이 떨어 졋으므로 가까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렸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갔는지 상점은 거의 닫혀 있었다. 그러나 우려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이 작은 마을 가운데 있는 큰 집을 찾아가서 곽씨집에서 가지고 온 양복 한벌을 꺼내서 집에있는 할머니에게 건네고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70은 넘은 듯한 기품좋은 할머니는 우리들이 측은하게 보였던지 아니면 양복이 탐이 났던지, 팔 뒤주를 열고 쌀 한말 가량을 주었다.

장호원, 원주를 거쳐 제천으로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 헤맨 숙부의 집은 이미 피난해서 빈집이 되어 있어 맥이 쪽빠졌지만, 그래도 앞으로나아가 조령(새재)의 마루턱에 도착하였을때 UN군의 헌병이 "피난민은 도로로 가서는 안된다"고 제지를 당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걷기 힘든 산길을 갈수 밖에는 없었는데, 그 무렵에는 나의 다리도 거의 나아갔으므로 산길이라도 악을 써서라도 걸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별안간 UN군의 헌병이 문선생과 원필을 강제적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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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세번째 이별이 되는 것인가 하고 나는 무척 불안하였다. 처음에는 북에서 피난할때 보안대에 연행되었다. 다음에는 서울에서 국민방위군에게 연행되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또 혼자 남게 된 것이다.

그러한 곳에 혼자 남겨 지더라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매우 걱정 스러웠는데 한참 만에야 두사람이 돌아왔다. UN군의 군용 차에서 작업을 시켰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 길 이었으므로 나 혼자서도 갈수 있을것 같았다.

"여기서 부터는 지팡이를 버리고 걸어서 가자"고 문선생이 말했다.

두달 가까이나 지팡이에 의지해서 자전거에 타기도 하고 네리기도 하였으므로 아직 자신은 없었지만 다부지게 마음먹고 지장이를 버리고 보니가 지팡이가 없이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후의 길을 나는 혼자서 걸어 다닐수 있었다. 단양, 점촌, 풍기, 안동, 의성으로 피난길은 이어졌다.


경주에서의 작별


경주에 도착한것은 저녘때였다. 시내에는 피난민이 넘쳐 있었고 비어있는 방은 여간해서 찾아 볼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사방을 헤매서 겨우 시내의 로서리를 거처 쉴만한 집을 찾아냈다. 현관문을 판자로 X형으로 막어 놓은 집인데 그집을 찾아 가니까 30세가량의 젊은 사람이 나왔다. 우리들이 방문한 이유를 물었으므로 "판자로 문판을 막어 놓았기에 아무도 안사는것 같아서 하루밤 쉬어 가려고 생각 한것이다"하고 하였더니 안으로 들여 보내주었다.
집안을 살펴 보니까 판자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공장같은데 집 주인의 설명으로는 "밥상"을 만들고 있었는데 전쟁 때문에 직공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공장을 폐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방을 빌린 후에 원필은 저녘 반찬거리를 사려고 시장으로 나아갔다. 어항이 있는 포항이 가까이 있어서 오징어를 세마리 사다가 죽을 쑤었다. 원필이 방을 빌려 준 주인에게 죽 한구릇을 가져갔더니, 뒤에 그집 아주머니가 "이러한 죽은 어떻게 쑨것이냐"고 물어 원필이 설명을 하니까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오징어로 족을 쓸 때에는 먹장을 떼내고서 죽을 쑤는 거예요. 그냥 하신거죠"

우리들은 어두운 곳에서 먹었기 때문에 그런것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는데 아주머니가 가져 온 죽을 보니까 과연 새까만 것이었다. 그것을 그냥 먹었는가 하고 생각하고 우리들은 서로 웃고 말았다.

이집의 주인은 황해도가 고향인데 자기는 어렸을 때에 경주로 살러와서 생활을 위해서"밥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어른들은 지금도 북에 계시고 자기의 가족들만이 이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장만영이라고 3일간 이집에서 쉬었다. 식사는 물론 우리들이 만들어 먹었다. 그래도 피난민이 넘쳐서 한곳에 오래동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주인에게 "우리들은 오늘 부산쪽으로 갑니다"라고 인사를 하니까 젊은 사람은 가도 괜찮을터이지만‥‥하면서 그는 나를 가르쳐 말했다. "당신은 제일 나이도 많는것 같고 몸도 쇠약한것 같다 부산에 가더라도 피난민으로 꽉 차 있을 터이니까 두사람이 먼저 가서 자리잡은 다음에 당신도 가면 좋지 않은가"

여기까지 문선생과 원필이 함께 사선을 넘어왔으므로 나는 "아니야 나도 부산으로 가겠다"고 말했더니 문선생은 "이집 주인의 마음씨가 고맙다"고 말하고 "정화 자네는 이곳에
있으면서 좀더 기다리게, 우리들이 부산으로 가서 자리 잡히면 연락할 것이니까. 그때 또 서로 합쳐서 큰 일을 하기로 하세나"

이려하여 나는 경주에 장만영써 집에 남고 문선생, 원필은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때의 나의 심경은 무척 복잡하였다. 피난도중 문 선생과 함께 사선을 몇 차례나 넘어 왔는데,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려고 하는 위대한 일거리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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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떨어진 나의 심경은 서러워서 함께 가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했으나 피난길은 한 사람이라도 적은 편이 수월한 것이 라고 생각해서 잠시의 이별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후에 문 선생이 경주로 왔을때 들은 바로는, 이때는 울산까지 걸어가서 울산에서 처음으로 기차를 탈 수 있었다고 한다. 기차는 기차였지만 화물 차량의 지붕까지 사람이 타고 있는 상황에서 간신히 화칸 부근에 탈수 있어서 부산의 초량역에 겨우 내렸다는 것이다. 그날이 1951년 1월 20일 이였다고 한다.


생활에 쫓긴 문선생이 찾아옴


나는 혼자서 경주에 남아 장만영씨 집에 식객이 되었다. 4월이 되어 날씨도 따뜻해졌다. 식객도 오래 되었기에 무슨 짓이라도 해서 밥값 정도는 치러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어느날 주인과 의논하였는데

"전쟁중에는 만들어도 별로 팔리지도 않으니까 공장을 페쇄하고 있다"하는 것이었으나, "밥상만 만들어 준다면 내가 자전거에 싣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팔아 올 터이니 해보지 않겠오"라고 내가 권하였더니 주인도 그러 할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전부터 공장에서 일하던 아들과 식객 노릇을 하고 있던 피난민 나와 주인등 셋이서 밥상을 만드기 시작하였다.

나는 한번에 20개씩 자전거에 싫고 포항으로도 가고, 영천으로도 가고, 또 울산에도 갔다. 익숙하지 못한 장사였지만 싣고 나간 밥상은어떻게든 다 팔렷으므로 그 대금을 주인에게 넘겨 주었다. 경주 주변에는 사방에 시장이 있었다 영천에도, 울산에도, 포항에도 언양에도, 감포에도, 경주에서 2,30키로 거리에 있었으므로 5일마다 서는 장이 그 시장에 매일같이 밥상을 실어다 팔았다.

또 저녘때가 되면 그집의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가정교사 노릇도
하였고 식객으로 지내는 동안의 밥값 정도는 특특히 한 셈이다.

이렇게 지내고 있는 동안 그 다음해의 3월 7일 별안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문선생이 부산에서 오셨다. 그 기쁨이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군용 모포 한장으로 공장에서 기거하고 있는 나로서는 문선생을 환영할 방도가 없었다. 주인이 돈을 내주어서 저녘 식사만은 접대를 하였으나 밤에 나무조각 투성이의 방에서 주무시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선생은 그동안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나 금후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꿈과 같은 이야기 뿐이었다. 흡사 몇 십년만에 만나 밤이 깊도록 둘이서 이야기를 했고, 다음날 문선생은"오늘은 부산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내 기분 같아서는 여기에 방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여기서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 할만한 활동을 해서 문선생과 함께 있고 싶은 심정 이었지만 아직 상황이 좋지 못해서 할 수 없는 노릇 이었다.
마침 그날은 울산에 장이 서는 날이라서 문선생과 같이 기차로 가기로 하였다 오전중 내가 시장에서 밥상을 팔고 있는것을 문선생은 보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문선생은 기차로 부산으로 떠났다. 밥상이 많이 팔리면 용돈 이래도 드릴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하필 그날은 웬일인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경주에서 헤어지고서 1년만의 재회이었는데 문선생을 전송하고 돌아온 나는 정말로 깊은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무엇이든 장사를 해서 자금을 마련해 가지고 부산으로 가서 문선생과 함께 위대한 사업 달성에 힘쓰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원필은 식당에서 일하고 있고, 문선생 자신은 일본의 공업학교에 함께 유학하였던 동창생 집에 식객으로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계시기에 무척 불편 하실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실은 이때, 그는 나에게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상태를 보러 온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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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만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수 있을까 하는 것을 나는 늘상 생각해 왔다. 날마다 변함없이 밥상을 운반해다가 시장에서 파는 것이 내 일의 전부였다. 이러한 일거리라도 열심히 붙잡고 있으면 기회 가 찾아을 것이 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 고 여기서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것일까? 아니면 집어 치우고 부산으로 가는 편이 났지 않을까도 생각 하였으나 아직 피난민으로 가득한 부산으로 간다 한들 별 볼일이 없을것 같이 생각되어 좀더 경주에 있기로 하였다.


평양에서 온 옥상현과의 재회


공산군에 의해서 2년전의 1월4일 재차 함락된 서울은 꼭 두달후의 3월 4일 UN군이 탈환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이무렵 일진일퇴 하면서도 간신히 전황은 시드러 들기 시작해서 휴전협정의 준비가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민간인의 사상자만도 남북 합해서 2백만명 이상, 이산가족도 일천만명을 넘는다고
하여 국민간에 불안과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있었다.

그러한 1953년 봄 부산에서 저 옥상현 할머니가 경주로 나를 찾아와서 오랜만에 대면하였다 평양에서 피난 할때에 헤어져서 서로 알길이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가웠다.
옥상현은 그녀의 피난 이야기와 부산의 문선생의 안부와 식구들을 키우는 일에 열중하고 원리를 책으로 만들기 위해서 원고를 써냈다는것, 흥남감옥 당시에 이야기 했던 원리를 정리해서 출판해야 하겠다고 항상 문선생이 이야기 하던 것을 생각하고 이렇게 엄청난 피난 생활 중에도 기어히 써 냈구나 하고 감격하였다.

하루 빨리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해서 원리를 출판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전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옥상현의 장남이 군인용 트럭을 가지고 온 덕분으로 가족전원이 무사히 남쪽으로 올수 있었던 것이다. 자리잡히면 부산에서 함께 일할수 있게 하루 속히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문선생과 함께 6,000년전의 하나님의 뜻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할때가 이제 곧 다가 올것 등등 열심히 이야기 하였다 원필은 지금 미군부대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범일동에 교회를 마련하여 새로 입교한 식구들이 원리를 들으려고 모여들게 되었고, 평양에 있던 식구들도 부산으로 와 있다고 한다. 교회의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문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왔던것 같다.

옥상현은 하루밤을 같이 지내고 다음날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동만 있다가 이요한 이라고 하는 목사가 나를 찾아 왔다. 부산에 있는 문선생이 보냈다고 하는 것이었다 방으로 안내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새로운 식구들이 많이 모여와서 원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으므로 박정화씨도 선생이 계시는 부산으로 발리 오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하나넘을 위한 위대한 사업에 전진할 시기가 지
금 막 왔다고 가슴이 벅차 있었다.

그 다음날 이목사는 부산으로 돌아갔다. 나도 곧 부산으로 간다고 문선생에게 전하도록 부탁을 하고 혼자서 생각하였다. 저 흥남감옥에서 문선생이 빈 가마니 위에 앉아서 눈을 감은채 신비의 세계를 변화하게 할 이상, 즉 "원화원 이상(圓和園理想)"의 세계를 실현시키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나에게 말한 것을 생각 하였다. 그 때의 전경이 눈에 아물 거렸다. 희망의 세계가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

죄악이 없는 세계, 그리고 질투, 음모, 배신, 전쟁 같은 것이 없는 세계, 그 이상세계의 회원만 된다면 노동은 취미로서 하루에 세시간 정도만 하면 된다.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갈 수 있게 되고, 회원 집에 가면 자고, 먹고, 쓰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받는것 보다는 주는것을 기뻐하는 세계, 남을 책망하지 않으며, 존경을 받기 보다는 존경
하는것을 기뻐하는 세계, 이 이상세계가 지구의 구석 구석까지 넓혀져서 우리들은 어느 나라와도 마음이 상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가까운 여기 지금 부산에서 고생하고 계신"문용명 선생"에 의해서 완성 될것을 생각한다면 감사할 뿐이다.


나는 한시바삐 부산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마음에 재촉을 받았다.

 

 

제3장  통일교회의 창립전후

 


여신도들의 열의

 

부산 수정동 교회

 

나, 박정화는 1953년 5월 15일 새로 사드린 부산 수정동의 집으로 문선생을 찾아갔다. 문선생은 대단히 반가워 하며 그간의 경과와 금후의 계획에 관해서 자세히 들려 주었다.
마침내 위대한 사업을 위해서 일 할때가 왔다. 마음 단단히 힘써 나아가자고 문선생은 말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많이 들려 주었던 6,000년의 역사의 과정, 창조원리, 타락원리, 복귀윈리, 재림예수의 사명과 그 자세등을 종이에 써 가면서 개인교수 하는것 처럼 가르쳐 주
었다.
문선생은 어느새 이름자의 용(龍)을 떼고 문선명(文鮮明)으로 바꿔 쓰고 있었다.
그 당시 동거하고 있었던 주된 식구들은 김원필, 정성옥 강옥실*,옥상현*, 지승도, 이기환, 이봉운, 이수경과 그가족, 문선생의 처, 최선길과 장남인 성진, 이요한 목사등 이었다. 새로 들어온 식구로 예배에만 참가하고 있던 사람들은 신정순, 김안실, 김재책, 김복순과 그가족, 오명춘 등이었다. 장남은 별로치고라도 김원필, 이봉운, 이수경,이요한 외 에는 모두 여자이다.

당시 김원필은 미군부대에서 일 하고 있었는데, 저녘때가 되면 미군들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데 울산에서 왔다는 젊은 부부가 새로 들어 왔다. 어느날 그 부부는 하루종일 전도하러 나가서 밤이 늦어서야 돌아왔는데, 성령에 열중한 나머지 딴 사람같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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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날밤은 월식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그 부부는 하늘에서 빛이 비쳤다고 큰 소리를 지르며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월식이라 설명을 해서 간신히 진정하게 한일도 있었지만 또 어느날오후 지승도, 옥상현*, 이기환 등이 영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너무나도 신비스러움에 홀려서 실신한 일도 있었다.

몇일후에 문선생 이 나를 불렀다.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서든지 경제적기반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어떠한 사업을 하면 좋을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요. 무슨 좋은 사업이 없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던 때에 알고 지내던 김동기라는 사람을 만나서 의논하였다.
그foT더니 그는 "친구와 공동으로 전매청에 새끼를 납품하는 계약을 체결 하였으나 자금이 딸려서 계약량의 남어지를 납품하지 못하게 되였다고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돈을 받지 못하게 되는데‥‥라고 말하면서 나머지의 납품을 나에게 맡겨도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반가워서 이 이야기를 문선생에게 전했다.

문선생은 곧 부인 식구들이 헌납한 귀금속 따위를 처분해서 37,000원이란 자금을 마련되었다. 그 돈으로 새끼를 생산하고 있는 삼천포의 흥해로 가서 새끼를 사다가 부산전매청의 창고에 납품하고 납품서를 받는것이 나의 일과로 되어 농촌에 몇일씩 묵으면서 "새끼"를 사
모아 가지고 화물차에 실어 운반하고, 또 삼천포에서 배편으로 운반하기도 하였다 6월 20일경에 일을 시작해서 새끼를 생산하는 농가를 찾아 다니며 계약잔량을 거의 다 채워가고 있었다.


최선칠(문교주의 본처) 부인의 큰난동


그러던 어느날, 삼천포로 이봉운 장로가 별안간 예고없이 찾아 왔다. 이장로는 수정동의 교회에 큰 일이 벌어지고 있오이다.최선길씨가 문선명선생이 부인 식구들과 복귀의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난동을 벌려 식구들을 전부 내쫓아 버렸다.
그리고 수정동의 교회를 최씨가 가재도구채 팔아 치워서, 교회가 없어져 집회도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되도록 빨리 돌아가십시다.
그래서 나는 급히 각지를 돌며 새끼 계약잔량을 조달해서 전매청에 완납하는 절차를 취했다. 계약조건과 새끼의 매입가격과 경비를 계산해 보니까 30,000원이나 이익이 남은 것을 알았다.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 오니까 문선생은 최선길에게서 도망치듯 주된 식구들을 데리
고 서울로 가고(9월17일), 원필도 영도(부산교외 마을, 열심인 식구의 집에 있고, 전도의 거점이 되어 있었다)로 도망갔다라고 한다.

이봉운장노는 대지공원에 판자집을 한채 사서 그리로 이사해서 거기서 임시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수정동 교회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들어 와서 살고 있었다. 최선길의 대 난동으로 부산의 수정동 교회는 어처구니 없이 날라가 버린 것이다. 나는 하는 수없이 여관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서울로 갔다.
서울에 있는 식구들에게 물어서, 청진동에 있는 문선생을 심방 하였더니 반가이 맞아 주었다. 불문곡직 하고 나는 그동안 새끼 납품결과를 보고하고 내일 부산으로 가서 납품서를 받아오면, 전매청에서 돈을 받을 수 있게 되고,그 이익은 30,000만원 정도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때 청진동에 문선생과 함께 있던 사람은 옥상현*, 신정순*, 양윤신*, 오명춘*, 이순철*.이 성화* 등 7-8인인데 여자 식구들 뿐이 었다. 나는 그다음날 기차를 타고 부산의 전매청지점에서 납품서를 받아 들고, 또 기차를 타고 되짚어 서울로 돌아왔다.

문선생에게는 낮 12시에 도착한다고 전보를 처 놓았으므로 그길로 바로 청진동 집으로 직행하니까 문선생도 여자식구들도 어디론가 가고 없어서 행방을 알수가 없었다. 그대신 최선길이 혼자 지켜 앉았고 최부인은 가재도구 같은것을 전부 처분하기 위해서 짐을 싸기도 하였다.

문선생 앞으로 보낸 나의 전보를 보고 나라면 문선생의 거처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재도구 중에는 문선생의 성경과 찬송가, 그리고 놀라운것은 원필이 정서한 원리원본까지 들어 있지 않은가. 나는 필사적으로 최부인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찾으면 선생 계신 곳을 알수 있을 터이고 알게되면 반드시 연결 할것이니 성경과 원리원본 만은 나에게 돌려두세요. 최 부인이 나에게그 서 류들을 건네 주었음으로 가지고 돌아 갈수가 있었다. 만약 그때 원리원본을 되돌려 받지 못했더라면 나중에 원리해설을 정리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후 옥상현*, 신정순등과 만났으나 그녀들도 문선생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녀들이 내가 서울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물어 보게 되면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문선명의 복귀 의식이란 미명을 빌어 눈에 넘치는 난맥상을 이룬 성교로 화가 치민 최 선길 부인은 수정동 교회에서 대난동을 피워서 여자 식구들을 두들겨 내 쫓았다. 겁을 먹은 문선명은 여자들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해서 청진동에 있는 으슥한 집을 빌어서 여인들과 살았다.

그러나 그것도 겨우 1주일만에 최부인에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내가 부산의 전매청지점에서 돌아오기 직전 문선명은 혼비 백산할 지경이 되어 여자들을 사방으로 분사시키고 목숨보다는 귀중하게 여기는 원리원본의 초고도 그대로 놓아둔채, 최 부인에게서 도망쳐 버린것이다. 여자식구들에게 포위되어 산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소란한 "여국나라"를 의미 한다.
왜냐하면 문선명을 둘러싼 여자 식구들은 복귀원리에 따라 몸을 내놓으면 소생, 장성, 완성, 복귀에 미달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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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문선명 선생으로 우러러 그 원리를 맹신하고 있던 나는, 때로는 복귀의 실제현장인 성교를 목격하기도 하고, 실제 의식에 걸맞지 않는 여자식구들의 광기나 교성을 직접 보았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메시아로서의 임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한편 아무리 생각해도 모른것은 무엇때문에 수차에 걸쳐 꼬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최부인에게서 도망을  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메시아라면 처 앞에서라도 당당하게 하면 좋을텐데, 처 한사람 전도를 못하고서 어떻게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새삼 솟아 난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렇게도 귀중한 전도에는 없어서는 아니 되는 원리원본을 내 팽개 치고 줄행랑을 처버린 문선명에게 언행 불일치의 의심을 품게 된것도 사실이 었다.


청진동에서 도망친 문선명은 또 다른 곳에서 여자들과 함께 지냈는데, 그것이 또 엉뚱한 사건으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경찰서에서 전기고문


그날은 청계천에 있는 여관에서 일박하기로 하였다. 마침 잠이 들 무렵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까 "이방에 박정화라고 하는 자가 묵고 있는가"고 말한다.

"내가 박정화요" 말하자 종로경찰서의 형사라고 말하면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며 묻고 싶은것이 있으니 경찰서까지 같이 갑시다라고 말한다. 갑작 스런 일이라서 영문을 몰랐지만 따라 갈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당신은 모든것을 다알고 있을 것이다.

문선명은 지금 어디 있는지 바른대로 대라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므로 "모른다"고 할수 밖에 없었다. 이쪽 저쪽에서 질문이 있었으나 "정 말 모른다"고 대답하였더니  그 형사는 "그러면 알도록 해주지"라고 하더니 밧데리를 가져왔다. 그리고 밧데리에 연결되어 있는 두 줄의 전기선을 나의 양손 엄지 손가락에 붙잡아 매고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몸 전체에 이상한 고통이 흐르더니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이래도 모른다고 할테냐!고 하면서 점점 더 세게 돌렸다. 온몸이 찌릿 찌릿 경련을 이르켜 내 몸이 내몸이 아닌것 갔았다. 손잡이를 돌리다가는 그치고, 그치다가는 돌리면서 욕설을 퍼 웃기도 하고 때로는 간사한 목소리로 말 하기도 하는등 거의 3시간 정도나 짓궂게 계속 당했다 나는 "죽일려거든 죽여라 모르는 것은 모를 뿐이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랬니 옆방에서 계급이 높은듯한 이가 나와서 "말씨를 듣자니까 평양사람 같은데, 그런가?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 하였다.
그 사람은 나도 평양 출신이요. 동난이 끝난 후에 남쪽으로 와서 경찰서에 근무하고 있오, 그리고 고문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심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풀어주라고 해서 고문을 중시시켰다. 아침까지 심문을 받고 아침 아흡시가 지 나서 야 겨우 석방 되었다.


하늘의 뜻에 관한 시험


경찰서에서 나온 나는 씁쓸한 조반을 먹은후에 엄덕문을 찾아서 YMCA 옆에 있는 3층집으로 갔다. 그때 거기에 건축설계 사무소를 열고 있었다. 내가 서울로 온것을 그는 무척 반가워 하며 문선생 있는 곳을 지도를 그려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전매청 볼일을 끝마치고 나는 그날 저및무렵 문선생을 만나러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옥상현 등 부인 식구들에게 붙들려서 나와 같이 문선생한테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경찰에서도 찾고 있고 해서 지금은 도저히 무리라고 말해서 어떻게든지 설득하려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마침 그때 소낙비가 퍼못기 시작했다. 그여들이 우왕 좌왕하고 있는 틈에 나는 버스에 뛰어 오르고 말았다. 안양에서 내려서 1키로쯤 가면 길가쪽으로 남향 받이의 작은 집 한채가 있다고 들었으므로 곧바로 찾을수가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니까 문선생과 이순철이 같이 있다가 무척 반가히 맞이해 주었다. 우선 나는 전매청 관계의 업무의 경과와 어제 있었던 경찰의 사건을 간단히 보고 하였다.


그후에 문선생에게 이순철이 만든 하늘의 계시에 관한 시험을 받도록 말하였다. 문제를 보고 답을 썼더니 문선생이 "좋아 합격이다"라고 말하고 어제 엄덕문도 시험을 받았다 그도 합격하였으므로,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장남이고,정화는 다음에 합격 하였으니까 차남이다 라고 말했다. 그때 이철순은 영계의 계시라고 이불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방 가득히 솜이 널려 있었고 그것을 자기전에 치우는 것이 큰일이었다 (후술)


노한 이순철*의 남편

 

나는 이틀동안 그곳에서 지내고 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이순철*의 남편이 눈에 쌍불을 켜고 문선생을 찾으려고 사방 여러곳에 수배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금 이대로 지금 집에 있는것은 위험해서 그 다음날 나와 함께 문선생과 이순철*세사람이 부산으로 가게 되었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었으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산까지의 직행표를 살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안양에서 수원까지 가서 일박, 그후 대전, 대구, 마산에서 각각일박, 5일만에 겨우 부산에 도착하였다. 우선 세사람이서 서면에 있는 거제여관에 한동안 유숙하기도 하였다.

그 이틀후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도록 고생하며 부산까지 왔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김안미라고 하는 여자 식구가 여관까지 찾아 왔다. 그녀는 6마리아(문선명이 복귀한 유부녀중-후술)의 한사람이었는데, -문선생이 뒤에 6마리아가 된 이순철만을 데리고, 부산쪽으로 내 뺀 것을 괘심하게 생각하고 여기까지 이를 잡듯 찾아 왔다고 하는 것이다. 김안미 와 이순철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자기들의 영적인 지위다툼으
로 여자끼리의 싸움이 더욱 귀찮게 되었다. 알기쉬운 이야기로 질투의 불꽃이었다.

나는 김안미 를 불러내서 문선생의 상황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지금 매우 복잡한 상태에 놓여 있어서 틈만 생기면 사단이 언제라도 참소 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하시려고 하는 계획의 장애가 된다. 선생은 한동안 이대로 부산에 계실 모양이니까 우선 조웅히 하는것이 좋겠다고 간청하였더니 김안미는 노한 채로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들은 부산에서 5일동안 유숙하고 또 서울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오명춘*이 손을 써서 친척집을 빌어서 문선생과 신당동 중택에 있는 어느집에 살게 되었다. 이순철*은 자기집에 돌아갔으나 노한 남편에게 두들겨 맞아서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고 백인제병원에 입원하였다.

문선생과 나와 오명춘*과 함께 병원으로 문병을 갔으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예감 들어서 다시 오기로하고 바로 돌아섰다. 나중에 오명춘써 말에 의하면 문선생과내가 병원을 나온 즉시, 이순철의 남편이 들어가 "지금 나간 남자들은 문션명과 박정화가 아닌가"고 다그치는 바람에 어물어물 둘러대느라고 혼이 났다고 한다.

만약 그때, 남편이 문선생과 마주쳤다고 하면 큰 사건이 일어날것은 틀림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선생을 둘러 싼 여자 문제가 여기 저기 일어나 그야말로 나도 손들고 말 지경  이었다.

복귀원리를 구실로 삼아 유부녀던, 처녀던, 눈에 나타나는 여인들은 조만간에 문선생과 성교하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남편되는 자나 부모들은 노할 것이다. 그중에는 어머니와 두딸까지 세사람과 관계를 한일도 있다.

대사건으로 되지 않았던 것은, 이것도 하나님의 가호 라고나 할까?

이동안에 청진동 집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이렇다. 부산에 있던 문선명이 서울로 도망처온
뒤에 본처인 최선길은 남편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서 청진동으로 찾아왔다.부산에서는 최선길이 부인 식구들을 모두 내쫓고 문선명이 자유롭게 나갈 수 없도록 해서 화장실에 가는것 까지도 엄하게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마침 흥남 감옥에 있을 때의 제자이던 김원덕이 문선명을 찾아왔다. 이 모양을 보고  그는 성진의 어머니이며 본처인 최선길에게 이러한 것을 해서는 안된다고 화를 내고 문선명을 끄집어 냈던 모양이다. 최선길이 김원덕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은 것은 그 당시 치안국에 근무하고 있던 현직 경찰관이었던 김원덕이 문선명이 무슨 일이 있어서 연행되게 되면 바로 석방해 주던 전예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믿지 않는 남편을 서울까지 쫓아 온 최부인은 청진동 집에 내가 와있으면 문선명의 거처를 알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라갈 작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청진동 집에서 도망친 직후 문선명은 이순철과 서울역 앞에있는 여관으로 가서 영적인 의식이란 명목으로 처녀인 이성화와 복귀의식을 행하였다.
요컨대 세사람은 거기서 영적인 의식이 아닌 육체적인 의식 즉 성교를 하였을 뿐인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복귀의식은 그 옆에서 다른 식구가 증인으로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 날은 이순철이 증인으로서 협력하였다. 이성화는 처녀였으므로 절차는 "어린양 잔치 (묵시 록 21장 9절)"를 올려서 말하자면 정식으로 결흔해서 문선명의 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순철은 이성화에게 이때 "미래의 어머니께"라고 말하며 값비싼 금반지까지 선물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당사자인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들은 것이니까 틀림 없는 일이다.

 

 

부산 영도(謄島) 집회

 


여자대학생 린영희의 비극

 

그 무렵 나는 대구를 거점으로해서 문선생과 함께 이곳 저곳 식구들에게 원리강의를 하기  위해서 각지로 나돌아 다니고 있었다. 또 문선생의 지시로 부산이나 서울에 가서 식구들에게 문선생 이야기를 전하기로 하였다. 그 당시는 아직 기차여행이 대단히 힘든 시대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꼭 12시간이 걸렀다. 추풍령에서 부터 대구까지는 군사상 차내의 등불을 모두 꺼 버렷으므로 캄캄하였다.

한밤중이 되면 난방까지도 꺼 버렸고, 창유리도 거의 깨져 있어서 겨울에는 대단히 추웠다. 유리가 없는 창에서는 연료로 쓰는 석탄의 연기나 냄새가 스며들어 터널에 들어갔을 때에는 질식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문선생과 함께 있던 어느날, 부산의 이봉운 장로에게서 "부산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자 방도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부산까지 와 주십시오"라고는 하지만 부산까지의 여비가 없어서 난처하게 있는 터에 마침 오명춘 집사가 왔다. 그녀가 여비를 마련해 주어서 그날밤 문선생과 함께 다음날 아침 8시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봉운장로를 위시해서 10여인의 식구들이 마중을 나왔다. 문선생이 부산까지 왔으므로 모두 기뻐하며 인사를 한후, 택시로 시내의 영도로 갔다. 이 날은 1953년 12월 24일이었다.

안내된 곳은 허술한 집이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넓직한 방이었고 잘 정리되어 있어서 식구들의 성의가 나타나 있었다. 이집 주인은 신성묵이란 사람인데 유신희와 부부였다.

아침을  마치고 문선생은 여느때와 같이 원리강의를 시작하였다. 유효원이란 사람은 결핵성 고관절 유착으로 굳어 버려 앉아 있을수가 없어서 누워서 강의를 듣고있었다. 이 사람은 무척 과민한 성격인듯 누구 옆에서 기침을 하면 표정으로 그것을 제지하기도 하였다.

28인 가량이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방안은 무척 조용해서 엄숙한 분위기였다. 식사 이외에는 휴식시간도 없이 강의는 밤중 한시, 두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듣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는 시종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날 처음으로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은 유효원, 유효영의 형제, 신성묵,유신희 부부, 김관성, 차집사등.

식구들은 신정순, 옥상현, 이기환, 지승도, 양윤신, 오명춘, 이봉운장로, 그리고 가족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 김 영희*라고 하는 여자대학생이 처음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그녀는 교인인 양윤식의 질녀로 연세대학 학생이었다. 성적이 우수해서 장래성이 있는 학생 이었으므로 대학 총장에게도 귀염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언더우드 총장이 귀국할 때 그녀에게 1년분의 학비를 선사해주었다. 그러한 큰돈을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숙모인 양윤신에게 전액을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양윤신은 식구들의 경제사정이 대단히 말이 아니었으므로 교회를 위해서 문선생께 몽땅 바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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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이 시작되고 돈을 전부 써 버린것을 안 김영희는 노했다. 그래서 숙모가 다니는 교회가 어떠한 교회이고 무엇을 가르치며 선생이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고나서 항의하려고, 아침부터 밤까지 꼼짝을 하지 많고 그녀는 문선생의 강의 를 듣고 있었다.


밤중에 폐회가 되어 참가자의 태반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집 단칸 방에서 문선생과 남자 두사람, 옥상현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김영희의 여자 5인이 함께 자게 되었다.
이것이 부산 영도 집회의 첫날밤이었다.
실은 여기서 처음으로 밝히는 바이지만 김영희는 이날밤 문선명과 성교를 한 것이다.
같은 방의 맨 아래목에 문선명, 그다음에 나, 그리고 여섯사람의 여인들이 이름은 든 순으로 누웠다.  나는 고단했으나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는데 묘한 기척에 눈이 띄었다. 내 옆에 누워있던 문선명의 자리에서 비명소리도 허덕임 소리와도 같은  여자의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것도 반대편 끝쪽에 누었던 김영희의 소리였다. 문선명의 성교를 여러차례 목격해온 나지만 이것은 정말로 놀랐다.
복귀원리로 설득을 당한 그녀가 먼저 그했는지 몰래 문선명이 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것이 복귀의 의식 따위가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약한 처지로서의 나로서는 잠자코 옆의 행위에 자는 척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다른 5인의 여자들은 한사람은 마리아이고, 다른 4인도 이미 문선명과 관계가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후술한다.

또 그후 김영희는 문선명의 아이를 임신해서 실로 비참한 인생 첫발을 걷게 되었다.


수사기관에 쫓기는 나날


그 다음날도 똑같이 선생은 강의를 하였고, 유효원은 열심히 메모를 해 가면서 듣고 있었다. 수염을 기르고 있던 김관성은 한방의라고 자기 소개를 한 사람인데 역시 열심히 듣고 있었다. 집주인인 신성묵도 강의에 빨려 들고 있었다.

그의 처 유신희도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후에 서울로 가서 문선생에게 복귀를 받게 되었다. 약 3주간이 지나니까 식구들은 문선생의 강의를 되풀이해서 듣고 있어서 찬송가와 기도를 할때에는 딴 사람 같아서 성령이 충만해서 큰 소리로 울기도 하였다. 이집에서는 사람이 모이면 아침부터 저녘까지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해서 곧 근처 사람들의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고,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수사기관에 조사를 부탁하였다는 소문도 들려 왔다.

뿐만 아니라 또 평양에서의 식구의 가족 중에서 남으로 와서 검사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어서 기회만 있으면 선생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어서 부산영도의 집회를 중지 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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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 무렵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한테 쫓기는듯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나와 문선생은 여기 저기를 돌면서, 고심하고 있는 식구들과 그가족을 격려 하고 있었지만 겨우 방을  얻더라도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문선명이 어디 어디에 있다고 하는 소문이 나서, 수사기관에서 사람이 조사를 받는 상황이 계속되곤 하였다.

이유는 문선생이 이전에 북한에서 사회질서 문란죄로 복역한 사실이 있어서 남쪽으로 가서도 또 고치지 못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것이, 북에 있던 식구의 가족들이 남으로와서 수사기관에 들어간 사람이 보복을 겸해서, 뒤쫓아 다니고  있기 때문 이었다.

식사는 동대문에 있는 이창환의 형이 경영하고 있는 대중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종로에 있는 여관에서 숙박하면서 작업하는 날이 열흘쯤 계속되었다. 우리들은 어떠한 괴로움도 참아 낼수 있었으나,여관주인과 식당주인들은 왜 그런지 우리들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대구에 있는 문선생을 찾아가 사정을 보고 하였더니, 5만원을 내 주면서 부산에서 간 양윤신과 함께 방을 마련해서 유효원과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곧 서울로 돌아와서 성동구 북학동에 방을 빌려 우선 되는대로 본거지로 삼았다.

이곳에 숙식을 같이 하고 있던 식구는 나, 유효원, 유효민 세사람 이었다. 이창환은 날마다  와 있었고,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 옥상현,이기환 등 여자식구들도 매일같이 와서 여러가지 일을 협력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선생이 별안간 대구에서 서울로 왔다.
그런데 바로 그날밤 시경에서 왔다고 하는 6~7인의 남자가 신분증명서를 보이면서 시경까지 같이 가자고 말한다. 거기에 있던 전원이 연행되었는데 특별히 이렇다할 조사도 받은것이 없고, 일반적인 종교문제에 대해서 물었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통행금지 시간이 되여, 그날합은 시경에서 자고 아침에 돌아온 일이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연행사건 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양윤신과 함께 여러가지 가재도구를 사러 갔다. 이렇게 함께 장을 보노라니까 그녀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양여사는 년령이 나보다 훨씬 아래였다. 인생은 길어야 할 터인데도 그녀는 몇해후에 나보다 앞서 죽고 말았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에게도 알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그녀가 우리들의 교회에 들어 와서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복귀 받으려고 그녀는 대단히 노력한 사람이었다.
식구들이 점점 늘어나 이제까지 쓰던 방으로는 식구들 전원이 함께 일하면서 지내기가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같은 북학동에 있는 대문이 셋이 나 있는 큰 집으로 옮겼다.
문선생은 그집의 남쪽에 따로 방을 빌렸다. 식구들이 많이 모여서, 부산에 있던 이수경, 김상철과 이창환도 함께 있었다. 이즈음에 유효원 동생 효영씨가 조기 잡이를 하던 차에 금빛 같은 조기를 한 가마니 갖어와 식구들이 포식한 일도 있다. 또 잊을수 없는 일이 하나가 있다.

어느 정치가가 지능이 좀 떨어지는 딸을 한사람 우리들의 교회로 데려고 왔다. 이 교회에  한동안 맡겨 두면 낳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덟살 된 그 아이는 식사를 하고 있노라면 꼭 똥을 싸기 때문에 모두들 큰 일이었다.
그래도 함께 기도를 받던지 하면 기적이 일어 날지도 모르겠다고 우리들도 생각해서 열심히 참고 견디어 봤다. 그러나 1년이 경과해도 상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서 부모들은 그
아이를 데려가고 말았다.

이 무렵 이수경은 우리들 식구의 생활비 때문에 일하러 나가서 사진에 색을 칠하는 작업을 해서 돈을 벌어 온일도 있다. 이창환은 교회의 전도문을 영문으로 작성해서 세계각국의 유명한 인사들, 특히 유명한 목사등 백여명에게 발송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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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다 동쪽 나라에 재림메시아가 왔다. 숭배하자. 의심스러운 자는 기도를 통해서 들어 봅시다. 그리고 문장 끝머리에 이창환 자신의 사진을 붙여서 발송하였다.
이러한 작업으로 아침부터 저녘까지 분주 하였다. 유효원은 매일 원리해설 집필에 몰두하고 있었고 유효민과 나는 줄곧 원리 원본을 베껴 쓰고 있었다. 유효원이 어느때 「이 원리는 모순이 잔뜩 있어서 잘 모르는 곳이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나에게 말했다. 둘이서 문선명에게 철저히 질문 하였더니 그는 대답을 못하였다.

유효원은 뒷일은 하늘에 맡길수 밖에 없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자기류로 집필하였다. 김상
철은 이무렵 영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하게 되어 여권 수속을 하는 서류를 써 달라고 나에게 부탁 하기에 써준 일이 있다. 김재근(대구할머니)이라고 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대구에서 서울로 와서 한 겨울에도 우물가에 가서 냉수를 퍼끼었는 일을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늦으신 분이라서 병이라도 나면 안된다고 염려 하였지만, 무척 건강해서 열심히 견디고 있었다.
이 무렵 부산에서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하던 송도욱이란 사람이 입교 하였다. 병역을 기피하고 있던 김원필은 영도의 송도욱의 집 이층에 방을 하나 빌려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당시 부산에는 식구들은 그리 많지 않으나 서울에서는 낮에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 이순철, 김인주등의 부인 식구가와 있었지만 임영신이란 미망인이 새로 유효민의 전도로 들어 왔다. 그녀에게는 어린딸이 있었는데 부산의 송도욱의 집에 맡겨서 길러 달라고 하였다. 임영신은 식구들의 식사 준비를 돕고 있었다.

이 당시는 식구들의 생활비가 큰 일이었다. 유효민은 본래 사진업을 해서 솜씨도 좋았으므로 시내나 지방을 돌아 다니면서 각지의 여러 유적지를 사진으로 찍어다가, 그것을 푸로마이드로 만들어서 파는 장사를 생각해 냈다. 우선 닥치는대로 해 보니까 예상외로 잘 팔렸으므로 우리들은 푸로마이드 제작에 온 힘을 쏟게 되었다.

나는 사진에 광택을 내는 일을 담당하여 밤중까지 작업을 하였다. 임명신도 부엌일이 끝나면 바로 사진을 씻는 일에 열중하었다. 식구들이 힘을 합해서 푸르마이드를 대량으로 제작 하였다. 이 일이 적중해서 한꺼번에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 식구들의 생활비를 모두 충당 할수 있게 되었다

1954년 5월3일 성동구 북학동 391에 있었던 교회에서 문선생을 중심한 이창환, 유효원, 김상철, 박정화, 유효민의 다섯 사람이 에워싸고 있었다. 드디어 문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전세계에 원리를 포교하기 위한 일을 개시하는 날이 왔다.

우리들은 어떠한 명칭으로 하면 좋을까 하고 의논 하는데 우선 세계의 기독교를 통일 한다고 하는 목적에 알맞게 "세계기독교통일"이라고 하는 머리글자를 붙이기로 하였다. 그 다음을 "심령협회"로 할것인가 신령협회"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논이 있었지만 나는"신령협회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해서 최종적으로 "신령협회"로 결정 된 것이다

이리하여 원리를 내세워서 전세계의 기독교를 통일하려고 하는 종교단체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 統一神靈協會)"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창립되게 된 것이다. 초대협회장에는 여러가지 의논한 결과 이창환이 취임 하였다 그런데 그는 3개월만에 탈퇴하고 말았다.
(주=현재는 5월1일이 창립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5월3일 이었던 것이다.)

 

이화여자대학 사건무렵

 

교수와 학생들의 대거입교

 

서울의 명문교 이화여자대학의 음악교수 양문영*이 입교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녀는 3일간 文씨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더니 기적이 일어나서 성령이 충만한 그녀는 별안간 지금까지 사단에서 가로막했던 벽을 차고 떠들어 대면서 발로 벽을 걷어 차는등 크게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그 후 신당동의 양문영 여사의 집에서 유효원이 매일같이 원리해설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이화여자대학의 기숙사 사감인 한충화가 입교해 왔다. 또 같은 대학의 영문과 교수 최원복과 김영운, 연세대학의 교수 박상래 ,학생인 유경규, 황환채, 오승택도 입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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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서울로 온 식구중에 유신희라고 하는 여성이 있었다. 저 영도집회때 집을 빌려  준 신성묵의 처이다. 그녀는 어느날밤 교회 옆에 방을 빌려살고 있던 文씨의 방을 찾아가 방을 노크하니까 누구냐고 가만히 묻기에 신희입니다 라고 이름 대자 들어오라고 하여 안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복귀의 실천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때에는 이미 복귀를 받았던 김인주가 복귀에 대한것을 귀뜸 하였다. 김인주에게 권유를 받은 유신희는 용기를 내서 복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후에 유신희는 여러 남성 식구들과 복귀를 하였다. 나도 실은 유신희와 복귀를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바로 뒤에 등장하는 김 덕진과도 복귀를 하고, 나아가 김 덕진은 다른 여성과 복귀 하고 그 여성은 또 . .  별안간 70몇 사람의 바퀴가 되고 말았다. 그후 목사가 된 김덕진은 너무나도 난맥을 이룬 통일교회의 섹스를 스스로 고발하고 책으로 해서 발표하겠다고 선언하여 큰 소동이 일기도 하였었다.
(후술)


김덕진(金德振)이란 사나이

 

그 무렵 나는 매일밤 10시경까지 사진의 광택을 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검은 UN군 코트를 입은 청년이 찾아와서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여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물으니까, 김덕진이라고 하며 북쪽의 숭실전문학교의 문과 출신으로, 간첩죄로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을구형 받었으나 판결은 무기징역으로 복역중에 재심에서 무죄가 되어 남쪽의 동촌육군형무소에서 나온 길이라고 한다. 그리고 형무소 안에서 만난 이석빈이란 사람이 문선생에게 전해달라며 "아버님께"라고 쓴 편지 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를 문선생이 있는 양문영의 자택으로 안내 하였다. 그에게는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작곡과 작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입교하자 마자 곧 성가(찬송가)의 작곡과 작사를 하기도 해서 문선생도 그 음악적 재능을 칭찬하고, 식구들 중에서 제1번으로 문선생에게서 양복을 얻어 입는 영광을 맞았다.
식구들도 늘었다. 김찬균, 정린정, 안창성, 강정원, 차만춘, 이소담, 유광렬, 이진태, 박승규, 이월성, 김원민, 황은자, 지생연, 유동회 등이다.

그 다음에 들어온 이는 지원대, 안정국, 김순화, 신미식,정대화, 김주화, 이관선, 이기석, 박봉애, 남궁철, 이영일, 최정순,이인복, 김화영, 김정은, 사길자, 박영숙, 서명진, 이정호, 김영휘 등이다.

교수에 이어서 이화여자대학 학생도 많이 입교 하고 있었으나, 이단적인 신앙을 이유로 14인이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전에 교수들은 사표를 내고 퇴직하고 있었다) 퇴학이 된 학생은 신미식,사길자, 김정은, 서명진, 박승규, 정대화, 박영숙, 박승희, 이계순
정원, 최순화, 김숙자 들이다.


대구에서 또 전기 고문

 

본부교회는 다음해인 1955년 1월 북학동에서 같은 성동구의 흥인동에 있는 새 집으로 이사 하였고, 또 다시 3개월 후인 4월 27일 중구의 장충동으로 옮겼다.
이전하고 얼마 안되는 5월 13일 교회로 치안국의 형사 2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교회에 스며들어 우리들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고 경찰의 수사관도 버티고 있었다. 경찰의 수사에는  꽤 익숙해 있는 편이었지만 이번만은 좀 다르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수사관이 투입되어 있었다.

그러한 긴박감을 알지 못하고 지방에서 온 나이든 여자 식구들은 기가나서 떠들거나 날뛰고 있어 상황을 이야기하고 주의를 한일도 있었다.

대구에 있는 문선생 한테로 가서 이 상황을 보고 하고 금후의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서 나는 서울역으로 나아갔다. 그때 역에는 김영희*가 와 있었고 황환채등이 전송하러 나와 있었다. 나는 김영희가 부산에 가는 목적을 알고 있었으므로 대구까지 함께 가기로 하였다.

앞에서도 기술 하였지만 김영희는 연세대학의 학생시절에 부산의 영도에서 문선명에게 정조를 때앗긴 여성이다. 자세한것은 후술 하겠지만 이때 그녀의 배는 출산 직전이어서 제법 눈에 띄이고 있었다.
연세대 재학중인 오승택도 함께 일본에서 출산을 돕기 위해 부산에서 밀항하려는 참이었다. 그리고 대단한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대구에 도착해서 우선 이요한 목사의 집을 찾았더니 방은 텅비어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서둘러 나왔으나 어디서 지켜보고 있던 형사가 나와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면서 이집에는 무슨 목적으로 찾아 왔느냐. 이목사와는 어떠한 관계이냐. 문선명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느냐 등을 물어 왔다. 신분증명서를 제시 하라고 해서 보여 주었더니 당신이 박정화 인가라고 말하였다.

대구경찰서까지 연행되어 밤새도록 조사를 받았다 그 내용은 나라면 문선생이 있는 거처를 알터이니까 대라고 하는 것이였다. 나는 정말 몰랐으므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라고 말했다. 만약 알았다 하더라도 나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밤 10시경에 연행되어서 아침 10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그때도 밧데리를 양쪽 엄지손가락에 연결하는 전기고문을 받았다 서을에서 한차례, 지금이 두번째였다.
그후 경찰서에서 나와서 들은 이야기지만, 내 바로 뒤에 김안실의 형이 경찰이 있는것을 모르고 이목사를 찾아 왔다가 내가 붙잡혀 간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그때 문선생은 이목사와 대구의 식구들을 데리고 용문산에 가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서 피할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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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로마이드 제작판매

 

이 무렵 유효민의 제안으로 전국울 순회 하면서 명소의 경치나 유적등을 촬영한 사진과 서울의 거리나 배우들을 찍은 사진을 푸로마이드로 해서 판매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말하였다.
사진촬영과 현상기술, 재료구입 등은 본업인 유효민이 담당하고, 암실에서의 작업을 김원필, 유효영, 이수경이 도왔다. 흥인동의 본부교회는 단독 주택 이었으므로 방이 다섯이나  있고, 응접실과 부엌을 겸한 방까지 있었다. 푸로마이드의 제작과 원리강의를 하는 장소로서는 대단히 편리한 곳이었다. 정원에는 나무도 있고 대단히 좋은 집이었다.


이집으로 이사와서 부터 입교하는 사람도 불어나서 통일교회는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그때에 신문이나 소문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통일교회에 한번 들어가면 어찌된 방법인지는 몰라도 2~3 일에 세뇌되어 가족을 버리고 입교하게 된다. 소문에는 교회의 내막을 조사하려고 작은 방에 빨간 불이 켜져 있어서 밤새도록 사람이 드나 드는 것을 보고  저 방이 사람을 홀리게 해서 유혹하는 장소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그 방은 사진제작 하는 암실이었다.


푸로마이드 제작은 밤중에 사진에 광택을 내는 작업을 해서 날이 밝기전 완성해 놓았다. 새벽녘이 되어 통행금지가 해제 되는 것을 기다려서 제일착으로 거리에서 담배 라이타 돌을  행상하는 전쟁 고아들이 와 도매 떼기로 사기 때문에 푸로마이드는 곧 모두 팔려 나가고 말았다.
이렇게 푸로마이드가 잘 팔려서 제법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교회에서는 매일 70-80명 가량의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어서 그 때문에 매일 같이 쌀 한가마 정도의 밥을 해댔다. 당시의 부인 식구들에게는 엄청난 고생이었을 것이고, 식사비도 꽤 많이 들고 있었다.

그러한 경제적인 지원은 전부 이 푸로마이드 판매로 충당하고 있었다. 서울 거리에는 한동안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피난민의 노천상들이 그때까지는 널판지 위에 미국담배를 올려 놓고 팔고 있었는데, 그것 대신에 몇 백 종류나 되는 푸로마이드 사진을 올려놓고  팔고 있을 즈음 노점 상인들이 거리 구석구석에 늘어나 사진 판매수입에 재미보게 되었다.


어떤 날 아침은 광택작업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나가보니까 남자 세사람이 원리를 들으러 왔다고 하면서 서있었고 맨앞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 바로 김인철이었다.


이 사람과는 내가 북조선의 내무성 제2여단에서 해주 중대장을 하고 있을때 잘 알던 사이였다. 그는 운수 주식회사의 해주지점장으로 근무하면서 해주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다. 내가 그 여관에 약 두달동안 투숙하고 있을때, 두 사람은 술 친구가 된 사이였다.


우연히 이러한 곳에서 만 날줄은 정말로 몰랐다 서로 반가워서 어쩔줄을 몰랐다. 서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바도 있었다. 만약 그가 북조선군의 38선 부근에서 대대장을 근무한 나의 전력을 밀고 한다면, 수사당국은 북의 간첩용의자라고 하는  구실로 나를 구속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페를 끼치게 되고 중대한 영향이  될 것이다.
우선 이일을 먼저 문선생에게 보고 하고, 다음은 그의 행동에 주의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인철은 열심히 교회에 다녀서 중요한 간부가 되였고 나의 과거의 일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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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0년 가량 지난뒤 그를 만날 기회가 있을 때, 당시의 나의 심경을 고백해서 서로
간에 크게 웃은 일이 있었다.


3대째의 비서역 송도욱(宋道旭)

 

부산 영도에서 입교한 송도욱 집사는 살충제 행상 방문 소독을 하던 사람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만주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해온 사람이다. 교육은 대단스레 받은것이  없었으나 짜임새 있는 체격, 대나무를 쪼갠듯한 성격에 행동력이 있고 판단력도 있었다.

문선생의 비서역은 우선 내가 오랫동안 맏았었고, 그 뒤를 유효민이 맡아 주었다. 그리고 3대째가 송도욱이 었다.

그는 송비서에서 송장로로 승격, 동시에 문선생과 함께 보좌 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내가 서진 광산에 있을 때 (후술) 그는 문선생의 심부름 와서 온갖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자랑끼(뽐내고자) 어린 태도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잘난
체 하며 큰 소리를 치고 뽐내는 말을 함부로 해서 나는 정석천 장로 앞에서 송장로에게 충고한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지방을 순회할때 순진하고 얌전한 식구들을 놀래키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허풍을 떨지 못하도록 충고를 하였다.
그때의 일이 흡사 어제일 처럼 생각되는데 지금은 송장로도 정장로도 돌아가셧다. 하늘나라에 오르셔서 지금쯤 어떻게 하고 계실까?당시의 식구 중에서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은 서울의 김영도씨로서 해방후 상해에서 귀국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송기주, 조동석, 김병욱,유효
원, 송도욱, 정석천, 유경규, 신정순 양윤신, 김재근, 라순렬, 이기환의 손으로 그 밖에도 부인 식구들이 몇 사람인가 죽었다.

잠시 숨을 돌리며

 

흥인동 교회에서 푸로마이드 사진 작업을 하고 있을 때이다. 프로마이드 판돈 가운데서 500원 정도를 떼어 가지고 토요일 저녁때가 되면 유효영, 나, 이수경 등과 함께 작업의 피로도  풀겸, 동대문 시장으로 나가서 노천에서 부인들이 다라에 돼지고기나 순대를 파는 것을 사 먹었다.

 맛있는 안주감으로 맛있는 소주를 한잔쯤 곁들인다. 그러면 기운이 나는듯 했다. 일에 몰려 피로해지면 토요일이 되면 돼지고기와 순대로 기운을 차리자고 서로 격려하기도 했었다. 그것도 역시 어느덧 엊그제 일 같이 생각이 난다.
정말로 시간의 흐름이란 흐르는 물과 같이 빠르구나 푸로마이드의 제작에는 무엇보다도 유효민의 두뇌와 기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사진 기술에 무지한 나는 푸로마이드의 제작이나 판매 따위는 아이들의 장난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었는데 막상 시작해 보니까 예상외로 수입이 많았다. 또 대량 생산에 필요한 재료 같은 것을 그때 그때 맞추어서 정확하게 요령 있게 구입하는 유효민의 치밀한 계획성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흥인동 시대의 식구들은 교회의 확장을 도모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열심히 작업하는 것으로서 버티어 갔던 것이다.
또 그후 유효민이 발명해서 특허를 얻은 "산탄 공기총"의 대량 생산에도 성공하였다.

이때 들어온 수입은 단위가 틀릴 정도로 커서 몇 십억 이 나 되었다.

지금은 탈퇴해서 식구는  아니지 만, 유효민은 라순열 (지금은 고인)과 결혼하여 36가정의 일원으로서 축복(결혼)을 받은 사람인데 3남매의 아이들이 있다.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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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 체포 사건의 진상

 

문선명의 체포


이화여자대학의 5인의 교수(양문영*, 한충화, 최원복, 김영운, 이정호), 이화여자대학생 14인 뿐만 아니라 연세대학의 교수 박상래등이 대거 입교하면서 부터, 이화여자대학 측에서는 이 사태에 분개해서 수사 기관에 고소하여 그 진상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앞에도 썼지만 1955년 4월 27일에 본부 교회가 장충동으로 이전한 뒤에 5월 13일 검찰에서 수사원 한사람과 치안국 특수 정보과에서 형사 두사람이 교회에 왔다. 그들은 교회에 스며들어 원리 강의를 듣고 그것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또 출입하는 식구들의 신원을 검문도 하고 일상생활에 관해서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 두달 동안 우리 식구들과 침식을 함께 하면서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경찰 출신의 조동석을 통해서 경찰의 수사 방침을 알아 본 결과 문선생을 비롯하여 몇 사람의 간부가 구속 될 것이 예측되었다.
문선생은 삼각산 밑에 임시로 빌린 집에서 박상래와 같이 숨어살고있었는데, 7월1일 최종 방침을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모이게 했다. 나, 유효원, 유효민, 조동석, 노동휘, 이순철, 오명춘, 김인주,신정순 등이 문선생 있는 곳으로 가서 여러 가지 대책을 상의하였다.
그때 이순철은 선생님을 경찰에 넘길 수는 없습니다. 한동안 일본에 가 계시도록 하면 어떨까요? 하고 주장하였다. 자금도 모두 준비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말이 나와서 좀처럼 방침이 서지 못했다. 결국 이번에는 도망칠 수도 없을 것 같으니 우리들이 경찰로 가는 편이 금후를 위해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서 그렇게 결정하였다.
그 무렵 입이 가벼워서 문제가 되었던 김덕진은 이순철, 김인주 두사람이 감시하기로 하고 중구 산림동에 집 한채를 빌려서 살도록 하였다. 나도 그 방에서 3일간 감시역으로서 함께 있었다.
1955년 7월 4일 드디어 문선생이 구속되었다.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두달 이상의 내탐과 수사가 있었다. 치안국 특수 정보과의 경감이담당관이었는데, 우선 당시의 협회장 유효원이 조사를 받았다.

협회장에 대해서는 원리의 내용에 관한 조사가 있었다. 원리의 어떠한 부분이 대학교수나 대학생들에게 학교를 떠나게 하여 통일 교회에 입회하게 하였는가?통일 교회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신앙하고 있는가?
등에 관해서 하루종일 조사를 받았다.
다음에는 내가 조사 받았다. 문선명과의 관계는 언제부터인가?흥남감옥에서 함께 있었을 때의 상황은?등등을 물었으므로 앞에 쓴 바와같이 (제1장) 요약해서 말했다. 전에는 문용명 이었었는데 왜 부산으로 와서부터 문선명으로 개명하였는가?를 물었으나 나로서는 모른다고 대답해 두었다.

우리들이 어떤 죄가 성립하는가를 수사당국이 검토하고 있을 무렵 , 한가지 문제가 떠 올라왔다.
북에서 온 사람들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시민증이 발급되지 못하는 것인데 어째서 문선명은 가지고 있는 것인가? 나이도 속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 조사 때에는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인데, 그후 문선생이 자기의 증명서의 작성 경위에 의해서 추궁되자 매우 곤경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날 나는 치안국으로 출두해서 북학동 교회 시절, 동회 사무장에게 부탁해서 신청 서류를 준비하고, 내가 선생의 시민증을 만들어 냈다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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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됫돈을 주어서 매수해 가지고 "위조한 서류"로 발행된 것이다. 내 시민증도 그때 만들었다. 나이를 속였다는 것은 병역기피 때문이었다. 뿐만아니라 거기서 많은 신자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드는 비용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고 질문을 받았다.
·프로마이드"를 제작 · 판매해서 그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 다음에는 경제담당은 누구이며 조직은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 고 물었다.
경제의 담당자는 나 박정화이고, 선생의 지시에 따라 모든것을 처리해 왔다. 푸로마이드에 관해서는 사진관을 했던 유효민이 재료의 구입이나 제작을 위해서 전력을 다 하였고, 요효영, 김원필, 이수경, 박정화등이 도와 주워서 아침까지 완성해 놓으면 새벽녘에 소매인들이 와서 모두 도매로 떼어 갔다. 그 돈을 생활비로 쓸수가 있었다.

그후 드디어 간통문제(혼음관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신자인 부인네들이 박정화는 대사단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 고 물었을 때에는 정말 난처하였다. 내가 잠자코 있으려니까 담당관이 큰소리로 역정을 내면서 당신은 문선명과 오랫동안 같이 있었으니까 그가 하는 행위를 다 보았을 것이다.
그것을 모두 말하시오. 문선명은 재림 메시아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것처럼 그도 죄값으로 죽는다고 하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정말인가 대답하시오 하며 책상을 치며 윽박질렀다.
나는 내가 대사단이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들은바가 없다. 식구들의 부인네들이 어째서 그러한 말을 했는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고 대답했다. 그했더니 담당관은 대구에서 온 신자의 김채근 할머니가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을 자기들의 조사관이 듣고 왔다 당신이 모를이가 없다 고 말했다.

이 문제는 그 다음날 대구 할머니가 하나넘의 계시를 받았기 때플에 그대로 말한것 뿐이다라고 하는 것을 자진해서 치안국에 출두하여 담당관에게 설명하였다.


이무렵 박정화는 대사단이다 라는 소리가 일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문선명의 일을 속속드리 알고도 남음이 있는 내가, 만약 수사당국에 말한다면 문선명은 절대로 온전하게 있을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재림 메시아인 문선생"은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며, 그래서 그 열쇠를 쥐고 있는 박정화는 사단이라고 순진한 할머니들의 발상이었다.

그만큼 문선명의 구속은 식구들에게는 위기감을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 7장의 유효민의 항목 참조)
그 참뜻을 알았다면 담당관은 더욱 철저하게 집중적으로 나에게 불도록(사실을) 하였을 것이다.


조사의 촛점은 혼음관계


혼음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엄하게 집중적인 조사가 계속되었다.

담당관은 점점 깊은 곳을  찾아 내게 되어, 당신들의 원리에 따르면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성교를 하고 해와는 또 다시 아담과 성교를 함으로서 원죄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원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죄없는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 이세상에 나타나서 그사람에 의한 성교가 행해지면 그 죄가 깨끗해진다. 요컨데 복귀 한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정말인가?

그 원리에 따라서 문선명은 여자들에게 자기가 재림 메시아니까, 자기와 섹스를 함으로서 복귀된 인간이 된다고 말하여 많은 여성 특히 유부녀들과 섹스를 하고 있는것 같다.

당신은 그것을 목격한 일이 있는가"고 추궁당했다. 물른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원리문제에 관해서는 협회장의 유효원이 담당하고 있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그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경제부문을 담당하고 있어서 그러한 일은 생각해 본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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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생을 감옥에 있을 무렵부터 믿고 따랐을 뿐이다. 많은 여성 특히 유부녀와 섹스를 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본일도 들은 일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랬더니 담당관은, 당신들의교회에는 두갈래 의견이 있는것 같다.

하나는 원리를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들, 문선명과의 섹스로 피를 바꿔 넣음으로 해서 진정한 복귀가 되어 죄와는 관계가 없는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난다. 이와같은 부부에게서 태어난 자손들이 이세상을 지배 할 때에만, 완전복귀된 에덴의 동산과 같이 죄없는 세상이 된다고 하는 것을 믿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문선명도 우리들과 같은 인간으로서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문경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째서 그가 죄없는 원죄와 관계가 없는 재림메시아가 되어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할 수 있어서 복귀 시킬 수가 있는가 라고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먼 문선명도 결국 원죄를 이어받은 타락한 인간이지, 하나님은아니며, 복귀(섹스)로 사람을 구제한다고 하는 따위의 일은 할 수 없다 고 하는 의견인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섹스로 복귀가 된다" 않된다 하는 이야기는 누군가 꾸며내서 퍼뜨린 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없다.
문선생은 북한에 있을때에 대관절 무엇을 했는가, 또 남쪽으로 피난해 와서 부산이나, 대구에서도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은 일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일이었던가 알고 있는가?

문선명은 북쪽에 계실때 기독교의 성경원리를 연구하고 있었고, 새로운 진리를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기성교회의 신자들이 많이 몰려왔다.

그 신자들의 가족이 남쪽으로 피난와서 문선생이 부산, 대구등지에서 성경 원리의 이야기를 전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수사기관에 통고해서 그 때문에 다소의 문제가 생긴것 같다.
그렇다면 문선명에게는 처자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거요.

부인은 최 선길과 장남인 성진군이 있오, 극히 최근까지 부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서울에 와 있을거요. 그 부인이 문선명이 여러 여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산에서도 그랬지만, 또 서울에 와서 집안살림을 모두 때리치워 버리고 여인들이 오는 것을 방해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가?

이것은 혼음관계의 증거가 될만한것 아닌가?

부인이 부산에서 서울로와 그러한 짓을 한 것은 사실 이지만 단지 신앙의 문제로 일어난 것이지 절대로 섹스관계라고 하는 것은 있을수 없다. 그러한 사실은 없다.


간부 5인을 기소

 

나의 다음으로 남자 식구로서 유효민과 유효영이 조사를 받았다. 김원필이 그 다음에 조사를 받았는데 그는 지금까지 병역을 기피하고 있어서 그것이 문제가 됐다.

그리고 부인 식구들이 조사가 시작되었다. 옥상현이 맨 먼저 조사를 받았다. 여성의 조사는 낮에만 하였고, 하루에 한사람씩 조사해 갔다.
신정순*, 오영춘*, 양윤신등이 차례로 조사를 받았다 그내용은 모두혼음관계 (섹스관계)의 사실 수사였다.

5일에는 김원필이 구속되고 6일에는 유효민 유효영이 13일에는 유효원이 그리고 18일에는 여자인 이성화가 구속되었다.

결국 문선생을 포함해서 다섯분이 구속된 셈 이다.
그 당시 교회의 섭외담당은 노정우, 조동석 두사람이 담당하고 있었다. 조동석이 치안국에 나아가 박 정화선생이 구속되면 몇십명이나 되는 식구들의 생활에 영향이 있으니까 우선 보류해 주었으면 한다.

검찰에서 출두명령이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출두시킬 터이니라고 약속한 덕에 나는 구속되지 않았다.
이때 문선생은 중부경찰서의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중부 경찰서에는 김덕진의 처남 김선환이 경찰관으로 있어서 비교적 간단하게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이 성화*는 아직 젊었기 때문에 담당관의 혼음관계 조사에서 유도심문에 걸려 구속되게 되었으나, 부친이 끈질긴 교섭으로 기소는 되지 않고 일주일 후에는 석방 되었다.

1955년 7월 29일 남자 5인은 전원 병역기피만으로 기소되었다.
검찰에서 출두명령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조 동석은 나에게로 와서 치안국에는 미국에서거짓말 탐지기가 도입되어 있어서 혹시 박선생이 치안국에 또 끌려가서 조사를 받게 된다면 이제까지 숨겨져 있던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이 폭로된다면 큰일이니까 재판이 끝날때까지 어디던지 숨어 있는것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선생님도 꼭 찬성하실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빨리 숨을것을 제안 하였다.
나는 생각끝에 그 제안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수사의 손길에서 도피


그리고 문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장충동교회의 문선생의 책상 서랍속에 5만원짜리 수표가 있는데 여차할 때에는 쓰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마산으로 가서 마산 국립결핵요양원에 있는 양윤신을 찾아 갔다.
마산요양원에는 그 당시 양윤신이 간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약 보름동안 거기서 식객 노릇을 했다.
내가 마산에 있을때, 별안간 이원주라고 하는 사람이 그의 동생인 이덕순, 부산에서 온 신성묵과 박봉식, 거기에다가 양윤신의 친딸 김정숙 등과 함께 찾아왔다. 모두 우리들의 교회의 교인들이었다.
우리들은 언제나 모이면 서울서의 문선생과 간부들의 재판에 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열흘 정도 지나고 나서 이원주는 어디론가 가 버렸는데 한참 뒤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이원주가 별안간 자기만이 재림 메시아 이고, 문선명은 재림 메시아가 아니다 라고 말하고 나선것이다.

그의 집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전부 믿었고 낮이나 밤이나 울면서 기도하였다.
이원주는 원리를 악용해서 양여사의 딸 김정숙을 비롯하여 여러명의 여성과 실제로 복귀의 섹스를 하면서 하늘의 원한을 풀어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등 떠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여사는 혼비백산해서 요양원 일도 못하게 되어 그 요양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가 서울로 집을 빌려서 이사 하였으므로 나도 대구로 이동하였다.
대구로 이사는 하였으나 여기에도 교회가 있어서 도망해서 숨어 있는 몸이라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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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친척이 살고 있는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여기서 신문을 읽으면서 서울 지방검찰청의 재판동향을 알수 밖에 없었다.
1955년 9월 20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윤학로 재판장, 강서룡 검사에 의한 일심공판이 열렸고, 같은해 10월 4일에 결심공판에서 문선생은 무죄로 선고되었다.

이 보도를 신문에서 읽고 문선생을 모신 사람으로서 무척 반가웠다. 유효원은 벌금 오천원 유효민, 유효영 두사람은 제2국민병법위반 (병역기피죄)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어 석방되었다. 김원필만이 병역기피죄로 징역 1년의 실형을 받았다.

이때의 조사목적은, 복귀라고 하는 혼음(섹스)의 사실관계의 입증이었다.

그러나 부인 식구들이 자기들의 부끄1러운 이야기를 할 리가 없고, 그 남편들도 또 남자의 체면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문 선명을 고소하지 않았다. 결국 관계자 전원이 위증하였기 때문에 문 선명은 살아난 것이다.

부인 식구들이 문 선명과 섹스관계에 있었던 것은 물론 사실이다.

 

 

제4장 희생당한 여인들

 

 

대공로자 옥 상현의 말로

 


전항까지 나는 당시의 사실들을 일기나 메모를 기초로하여 기술하였다. 경찰둥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서 겨우 살려놓은 몇권의 일기도 이제와서는 귀중한 기록이다.

옥중에서 재림 메시아라고 믿고 "선생"이라고 부르며 맹종해온 나의 어리석은 발자취나 심정을 모두 기술해서 고백했다. 글 속에 등장하는 "문선명 선생"의 행동은 모두 사실이다.

우직한 군인이었던 나는 "선생"과의 약속을 지켜서 북쪽에 부모도 처도 다섯명의 아이들도 남겨두고 남하해서 "선생"의 충실한 분신으로서 노력해 왔다.

그런데 "선생"측에서 어느날 별안간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는 제자를 배신한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나이 였는지도 모른다

마을에서 쪽 떨어진 깊은 산속의 광산 사장이란 직함이 붙여져서 돌아치게 한 나는 몇해 동안을 보수도 없이 일만 하였다. 그리고 나와 교대라도 하는 것처럼 등장해서 통일 교회속에서 차츰 세력을 키워가는 군사정권의 무엇인가 괴상한 냄새를 옆눈질로 보았다.


문선명 선생은 어느새 내마음 속에서 더 이상 목숨을 바쳐서 지킬 가치도 없는 단순한 문선명으로 되버리고 말았다.
전항까지는 그래도 "문씨" 라고 쓸 수가 없어서 "선생"으로 기술하였으나, 이항부터는 모두  "문 용명" , "문 선명"으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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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으로 짠 양말

 

이제와서 생각하면 맨처음에 문 선명과 관련이 있던 여성으로서 인상에 남는것은 옥 상현*이었다. 흥남 감옥중에 있었던 문 용명(당시)에게서 자주 들었다.
그 당시는 평양에서 흥남까지의 차표를 입수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 파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옥 상현은 차표를 사기 위해서 밤새도록 늘어서서 문 용명 을 면회하기 위해서 고생끝에 손에 넣을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문 용명에게 차입하기 위해서 미수가루를 정성껏 만들고, 겨울이 되면 속옷을 털실로 짜고 습을 넣어서 수용소까지 그 먼 길을 면회하러 다녓다. 여름에는 미수가루와 엿을  만들어서 때로는, 엿을 말랑말랑하게 해서 미수가루에 개가지고 가져오기도 하고, 삼베 옷을 만들어 오기도 하였다.

영양을 위해서 간유를 사 먹으라고 돈까지 주고 갔다고 한다. 자기와 피도 섞여있지 않은 사람에게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남득이 되지 않았다. 내·사정과 비교해 본다면 나에게는 어머니도 계시고 처도 있지만, 3개월이나 4개월에 한번 면회오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녀는 자주 면회를 와서 언제나 여러가지 준비물을 가져오는 데는 나는 놀랄수 밖에 없었다.
나와 문 용명은 감옥 안에서 서로 아무일이고 의논하고 무엇이고 숨기는 것이 없었다. 어느날 그가 말했다.

"옥 상현이 자기의 머리카락을 짤라서 털실과 함께 짠 양말을 가져다 주었다. "

옛말에 진정한 은혜를 받은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의 머리카락을 짤라서 그것으로 신을 삼아 은혜에 보답하였다고 했다지만 그러한 사람이 실제로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머리가 숙여질 뿐이었다.

그 여성은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헌신적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문 용명 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가 가져온 미수가루등 을 나누어 주어서 그저 고맙게 먹었을 따름이다.

6 · 25동란이 시작되고 UN군의 북진으로 문용명은 10월 14일(1950) 출옥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죄수이였던 문 정빈과 함께 걸어서 열흘만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후, 나는 처음으로 옥상현의 집에서 그녀와 만났다. 옥상현의 자택은 상당한 부자집 같았고, 큰 마당이 있고, 집이 여러채 틀어서 있었다. 딸인 우정애, 우정순 자매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문씨의 신자였던 김원필은 사단의 집(자기집을 지칭)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며
식객으로 있었다.

옥상현이 치워준 방에서 문용명, 나, 문정빈, 김원필의 네 사람이 숙박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닷새쯤 지낼 무렵, 서울로 피나했던 가족 전원이 돌아왔다.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아침을 마치고 옥 상현과 남편인 우 하섭 장로가 성경을 들고 인사차 왔다.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이니 함께 예배를 올립시다 라고 말했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였으며, 우하섭(禹夏燮) 장로가 성경을 낭독하고 설교하였다.
그는 평양의 장대현 교회의 장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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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우하설 장로의 탄식

 

그날 오후 우장로가 나에게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그의 방으로 갔다. 자기는 평양고무연맹의 이사장인데 당신의 동서에 해당하는 정황고무의 최내봉씨를 잘 알고 있다. 서로 절친한 사이다

얘기거리는 딴것이 아니고, 처와 문 용명의 관계되는 일이었다. 자기는 교회의 장로이고, 처인 옥 상현도 권사로서 교회에 열심히 시무하고 있는데 남쪽에서 왔다고 하는 청년이 이상스런 설교를 하고서 부터, 처가 몇주일간 이 집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원만한 부부로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는데 별안간 처가 자기와 동침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이들은 다 자랐고 기독교의 장로집에서 이러한 이상한 것을 겉으로 들어내 놓고 따질수도 없고해서 처음에는 오랜기간에 걸쳐 설득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아무러 해도 허사였다고 한다.

훌릉했던 처가 틈만나면 돈을 챙겨가지고 문 용명을 위해서 나갔다.
경제적 여유도 있고 해서 조금쯤은 어떠냐 싶어서 처음에는 생각만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빨리 부부가 전과같이 사이좋게 살고 싶어서 그것을 기대하고 열심히 기도하였으나 헛일 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청년을 비롯하여 저의 처까지 전원이 경찰에 구속 되고 말았다.
우장로는 평양 시내에서는 얼굴도 잘 알려져 있다. 체면도 있고 해서 경찰에 가서 구속한  이유를 조사였더니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 김종화라고 하는 유부녀와 그 청년이 "어린양 잔치"라고 하며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어서 이웃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구속되게 된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았다.

우장로는 자기의 얼굴이 있어서 겉으로는 나서지 못하고 조카에게 부탁해 경찰과 연락을  하고 처인 옥 상현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그 청년이 문 용명인데 자기는 그가 감옥에 있으니까 안심하고 있었다. 처가 저렇게 먼 흥남 수용소 까지 면회를 다니고 있어서 처음에는 그만두도록 설득한 일도 있었지만 결국은 듣지 않아서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박형도 예수를 믿는 크리스챤 이니까 문 용명과 같은 사나이와 함께 행동하면 언젠가는 벌을 받은것은 물론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매우 힘들게 될것이오. 문 용명 같은 사람과는 함께 행동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문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재산도

 

문 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채산도 다 바쳐온 옥 상현은 6 · 25동란으로 남쪽으로 피난해 부산에 들어가 개명한 문 선명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면서 굶주렸던 문 선명의 생활기반을 마련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서울 흥인동으로 교회가 이사한 후의 일이다.
푸로마이드 제작에 성공해서 경제적인 상황도 상당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합숙한 교인들은 전원이 홀아비 살림이어서 옥상현이 선두가 되어 세탁을 하고 있었다.
식구들 양복이나 속옷 등을 넣어 두었다 각자가 자기의 것을 자기
의 상자에서 꺼내서 갈아입고 있었는데, 그 상자가 자그만치 24개나 되었다. 그 때의 옥상현의 고생은 필 설로 다할수 없을 것이었다고 생각 된다.
훨씬 뒤의 이야기인데, 문선명과 결별하고나서 나는 부산으로 가서 주택건설 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권 창정이란 박사가 찾아왔다.
자기도 집을 한체사고 싶은데 살수 있느냐고 하여 나는 그의 신청을 받아 들였고, 그는신청금을 내고 돌아갔다. 그후에 옥 상현이 찾아와서 자기의 둘째 아들을 건설현장에 써줄  수 없느냐고 한다. 사원은 필요치 않았지만 옥 상현의 부탁이기도 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부터 그 아들을 고용해서 1년 남짓 함께 일 한일이 있다.

주택건설이 끝날 무렵 목사가 된 우 장로의 말에 의하면 「집사람 옥 상현에게 마음 돌리라고 일렀지만 허사였고 결국 이혼 할수 밖에 없었다. 그후 자기는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어 지금 조그만 교회에 시무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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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와 이흔후 교회 부인 집사와 재혼 했단다. 또 사위인 권창정 박사는 자기 사위인데, 사위가 신청한 주택은 자기의 집인데 좀 보여달라고 하여 완성된 주택을 보여주며 장시간 이야기 했다.

문선명이 처 최선길이 남편이 여자관계로 행패를 부려 그주위에 있기가 거북 스럽게 됐다. 그래서 초창기 문선명의 됫바라지는 옥상현이가 맡아했다.
부산 수정동 교회시절에는 네번씩이나 쫓겨 다니게 되었다. 그것은본처 최선길이 문선명이 있는 곳에 모여드는 부인 식구를 질투하고 집에 가재도구를 팔아 치우고 모여드는 사람들을내 몰기 때문에 하는수 없이 다른데로 뺑소니 이사갈 수 밖에 없었다.
새로 이사 가면 문선명 처가 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끈질기게 추적 하다가 기발한 생각을  하였다. 옥상현 친척집에 가정부에게 돈을 주고 옥상현이 찾아오면 그뒤를 밝게 하여 미행에 성공했었다. 그것이 성공해서 새집을 찾아내 가지고 또 한차례 반복해서 큰 소란을 피웠다.

결국에는 식구들 전원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게 된 것이다.
그때 부인은 두번 다시 큰소란은 떨지 않겠다고 하는 것으로서 석방되었다. 그후로는 교회에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는 약속이었으나, 그 뒤 수정동 집에서도 최선길 부인은  또 같은 짓을 했다. 가재도구는 물론 집까지 팔아 치우고 문 선명은 서울로 도망쳐 버렸다.

이번에는 서울의 청진동의 작은 집으로 거점을 옮겼으나 어떻게 알아 냈는지 이집에도 최부인이 찾어와서 또 똑같이 가재도구는 물론 문 선명의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문 선명이 원리 원본책도 집어 던지고 도망친 것은 이때 일이다.
그 때 문 선명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옥 상현은 문 선명이 없어져서 무척 걱정하였다. 내가 혼자서 문 선명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니까 밤중에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에서 내 소매를 잡고 함께 가고 싶다라고 울었으나 나는 거절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 일 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서울에서는 문선명에게 체포영장이 떨어져서 옥 상현을 데리고 갔다가 도중에서 경찰에게 심문이라도 받는다면 큰 일이어서 할수 없었던 것이다.
옥 상현은 한동안 대구 교회에서 살면서 문 선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유 효원을 부산에서 서올로 데리고 와서 북학동에 방을 빌렸을때, 대구에 있는 옥 상현을 서울로 불렀다.

그때부터 또 그녀는 문 선명과 식구들의 생활을 몽땅 돌보게 되었다.
 

7·4사건으로 문 선명이 경찰에 구속되었을 때의 옥 상현의 슬퍼하는 모습은 참아 볼수가 없을 정도였다.
매일 단식하고 기도하며 마음속으로 부터 슬퍼하며 우는 모습은 옆에서 보고 있는 우리들도 머리가 숙여 질 것 같았다.
그후 청파동으로 이사한 후에도 쪽 교회의 살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동안 교회를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옥 상현은 교회 에서 쫓겨나고 없었다.
 

어느날 유 효민에게 옥 상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옥 상현이 유 효민에게로 와서 돈을 좀 빌려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옥 상현의 딸인 우 정애양이 와서 또 돈을 백 칠십만원만 빌려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었다는 것이다.

돈을 빌려 주었으나 갚아주지 않더라고 하는 것과 옥 상현은 그후  몇 차례나 돈을 꾸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걸어 왔지만 그 이상은 빌려 줄 수가 없어서 거절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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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해도 갈 곳이 없다.

 


옥 상현은 1946년 11월 6일 48세 때에 평양에서 문 선명과 만났다,

문 선명 은 그때 27세로 21세나 연상이 었다.

북으로 갔던 문 선명의 복귀원리를 믿고 육체관계를 가졌다. 제일 최초의 마리아 이다.
 

그 당시부터 문 선명을 따라서 약 40년간 몸도 마음도 재산도 바쳐서 보살펴 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 터에 강산이 네번이나 바뀌는 세월이었다. 그렇게 오랜동안 문 선명의 옆에서 시종을 들던 사람이었다.
한 순간도 문 선명과 떨어져서는 못 살아갈 것 같은 옥 상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옥 상현의 사정을 들어보면 교회가 노인 식구들을 전부 내쫓기로 하였기 때문에 그녀도 30수년간 다니던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교회에서 쫓겨날때, 단 일천만원의 돈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장사 밑천도 되지 못하는 금액이다.

딸 내외에게 주택자금의 일부로 빌려준것 같은데, 먼 곳에서는 교회에도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교회에 다니기 위해서, 교회 근처에 작은 방을 하나 빌려서 거기서 살고 있
다고 하는데 참으로 어이 없고 마음 아픈 이야기였다.

만약 내가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어서 사업이라도 하고 있었더라면, 살만한 집 한채 정도는 마련해 주고 싶고, 매달 적어도 생활비 정도의 돈을 보내주고 싶었다. 아흔몇살이나 되는 큰 공로자가 교회 떠난 사람에게 돈을 빌리러 다닌다니 눈물이 나을 정도로 불쌍한 이야기가 아닌가?

1985년 8월 16일 일승일(一勝一)을 선언하였다. 과거의 모든 죄를 전부 용서하고 사단을 복종시켜 그후에는, 사단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상으로 복귀시켜 모든 축복이 통일교회의 식구들에게 가져와 준다고 본부 교회의 송 영석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이야기 보다는 우선 옥 상현과 같은 사람에게 집 한채 라도 주워서 생활에 곤란하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라고 생각하였다.

옟날, 흥남의 옥중에서, 문 선명에게서 원리나 "원화원이상"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가슴이 벅차서 그것이 어느때 쯤 되는 것 인가요 라고 물었다.

그때 문 선명이 "7년후에는 그 시기가 온다"고 대답하던 것을 어제 일 처럼 기억 하고 있다.

그로부터 벌써 40년이 지났다.

분명히 문 선명 자신은 큰 돈을 벌어 놓았을지 모르지만 꿈같은 이야기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1993년 5월경 이었다.

유 효민으로부터 나에게 연락이 있었는데 옥 상현이 지금 인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중인데 문병을 가자고 하는 것이다.

나와 유 효민은 인천 가좌동"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서 옥 상현을 문병하고 왔다. 올해에 96세라고 한다.
이미 병은 다 나아서 건강 하였으므로 병원에서도 퇴원하라고 말하고 있다지만 퇴원해도갈 곳이 없어서 병원에 눌러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 효민이 돈을 대서, 아파트를 빌려서 퇴원 시키고저 하였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통일 교회측이 서둘러 방을 빌려서 퇴원시키고 말았다.

문 선명을 일생동안 떠 받쳐온 옥 상현의 노후가 이렇게도 비참하게 된 것을 보니까 정말로 슬펏다.

그러나 옥 상현 뿐만 아니라 이와같이 희생된 사람은 아직도 몇백명이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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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봉식과 오 명춘

 

부부가 문 선명에게 헌신


내가 문 선명과 함께 부산 영도로 신성묵, 유 신회 부부의 집을 찾아 간 것은 1953년 12월  24일이었다. 새로 입교한 사람은 유 효원, 유 효민,유 효영, 신 성묵 부부, 김 관성, 최 집사
등, 섬유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최집사는 3개월 후에는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송 도욱, 박 봉식 부부가 들어 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본래 신앙이 돈독한 사람 들이어서 다음해 봄, 송부처는 서올로 올라와서 교회의 헌신자가 되었다.
송집사는 그리 교육은 받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튼튼한 몸매를 하고 있는 커다란 사나이로 대쪽을 쪼갠듯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등 여러가지 일을 해 온 사람이었다. "해방"후 귀국해서 부산에서 박 봉식과 결혼하였다.
 

원만한 부부생활로 딸이 하나 태어났다. 세사람이 생활하기 위해서 송 도욱은 가정 방문을 하면서, 살충제 약을 팔기도 하고, 약을 뿌리기도 하였다.

처의 박 봉식은 부산의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원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장사를 집어치우고 부부가 문 선명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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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집은 작은 판자집이었는데, 이층에 방이 하나 비어 있어서 김 원필이 거기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끔 김 원필을 찾아 갔었다.

서울에서 부산간 기차 여행에 터널을지날때는 석탄연기가 들어와서 양복이 그 끄럼으로 새까맣게 돼버린다. 어느 때인가는 내가 입고 있던 스프링 코트가 베이지 빛이었는데 검정색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박 봉식은 밤중에 그렇게 새까맣게 된 코트를 세탁해서 말려 가지고, 아침에 서울로 돌아갈 무렵에는 새옷과 똑같이 빳빳하게 입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을수가 없다.

송 장로 부부의 딸은 매우 성격이 활발하여서 문 선명이 그녀가 마음에 들어 그녀에게 가야금을 사주어 배우게 했다. 그리고 교회의 모임이라던가 친목을 위한 식구들의 모임이 있을때는 그녀에게 가야금을 타고 창을 부르게 했다.
그후 어떤 청년과 열열한 연애 중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축복해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결국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 당시 처음에는 내가 비서역으로
문 선명과 함께 돌아 다녔는데 유 효민이 입교하고, 나서부터는 그가 비서역이 되었다. 그후, 문 선명은 그 비서역을 유 효민으로부터 송 도욱으로 바꾸고. 또 송집사는 장로로 승진하였다.


남편 송도욱의 불륜

 

서울로 올라 온 박봉식 은 경상남도 거 창을 비 롯한 각지 에서 통일교회의 원리를 전도하는 순회전도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남편인 송장로에게 큰 문제가 일어 나게 되었다.
그 무렵 서진 광산에 있던 나는 볼일이 있어 군산에 갔다. 김모에게사정을 설명하고 월명동에 있던 김모 집에 약 일주일동안 머물러 있은 일이 있었다. 이집은 군산의 교회로도 쓰고 있어서 김모씨의 부인과는 전부터 아는 사이 였다.

닷새째 되던 어느날, 밖에서 볼일을 마치고 김모의 집으로 돌아가니까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부인이 정신적으로 약간 이상한 상태로 되어 있어서, 「자기를 복귀시켜 달라」고 나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남자를 보면 누구에게나 「복귀하고 싶다」고 중얼대고 있었다. 원리 이야기에 열중하게 되면, 이러한 상황으로 되는것은 자주있던 일이었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나는 몇번이고 이와같은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 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 광산으로 돌아오자 마자 서울의 유효원협회장에게 연락을 하였다. 그래서 송 장로가 군산으로 나가서 부인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 갔다. 노량진(교회를 떠난 임영신 집)집이 있어서 거기서 부인의 병을 치료하기로 하였다. 송장로 혼자서는 그녀를 돌 볼 수 없기 때문에 오명춘과 함께 지내면서 돌보기로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송장로와 오명춘과는 서로 좋아하게 되고 말았다. 부인은 회복 되었으나 송장로와 오집사는 서로가 헤어질수 없는 관계가 되어 있어서 결국은 문선명에게서 축복을 받고 함께 지내게 되었다.


탁월한 인격자 박봉식

 

나는 박봉식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원리에서부터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송도욱과 박봉식은 부부로서 문선명한테 와서 식구가 된것 이다. 송장로는 문선명의 비서가 되었고, 박집사는 그때까지 하던 집 일을 모두 걷어치우고 전도에만 전념하였다.

문선명이 축복을 하는 것이라면 박집사와 송장로가 축복을 받는것이 상식적으로나 원리적으로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오집사와 송장로가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두사람의 동거를 인정 했다고 하는것이 되지 않는가. 이것은 여러가지 면으로 모순되고 있다.
문선명 이 축복을 하였다고 하니까 달리 아무말도 말할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박집사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문제였다 망연하게 어깨를 떨군 그녀의 심정을 살필 수 있다. 축복을 받은 후, 한동안 지나서 송 장로는 간 암에 걸려서 대단히 고생스러운 생활을 보냈으며, 수술을 받았으나 개복한 때에는 이미 상당히 진전되어 있어서 배를 꿰맬수도 없는 상태에서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박집사가 임종하는 옆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듣고, 나는 그녀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송 장로가 젊은 여자와 축복을 받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죽음의 자리 옆에 있었다고 하니, 현여라고 해야 옳을지, 열녀라고 해야 옳을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송장로가 죽고 난 뒤에, 함께 축복을 받았던 오집사도 병이 들어 꿈속에 송 장로가 나타나서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고 신음 하였다고 한다.
이, 병이든 오집사를 ,박집사가 또 몇달동안 함께 살면서 간병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저 머리가 숙여 질뿐이었다.


큰 돈을 바친 오명춘


문선명은 옥상현 등과 함께 부산에서 네차례나 집을 옮겨 다녓는데, 이때의 비용은 모두 오명춘 집사가 내 준 것이었다.

오집사는 장리욱박사의 친척이나, 김안실 같은분에게도 전도해서 입교하게 하였고, 이순철도 신정순도 신정순의 딸 이성화 성례와 양윤신에게도 전도하였다.
교회의 초기에 매우 중요했던 부인 간부의 대부분은 오집사가 전도한사람들이다.
그 후, 문선명이 이순철의 복귀라고 말하며,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을 때에, 집을 빌릴 돈도 없었는데, 오 집사가 신당동에 사는 자기의 매제에게 돈을 건네 주며, 문선명이 살만한  방을 주선해 주었다.
이화대학사건이 터져서 문선명을 위시하여 간부들이 구속되었는데 이때의 뒷바라지도 오집사가 맡았었다.

그 때문에, 자기의 집을 팔아서 그 대금 오백만원을 고스란히 문선명에게 드려 미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문선명이 구속된 뒤에 섭외비를 염출하기 위해서 조그마한 가계를 원효로에다 열고 신정순등과 함께 경 영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온 이익으로 문선명이나 간부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문선명이나 내가 돈이 필요하게 되면 반드시 오집사가 마련해 주었다. 부산의 영도로 처음에 갔을 때도 그러하였다.
그 당시 문선명은 한푼도 없어서 곤경에 있을때 오집사가 여비를 마련해서 가져다 주었고, 그 돈으로 부산으로 갈수 있었고, 유씨네 삼형제가 입교하게 되면서 부터 교회의 기초가 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오명춘은 그 후 미국으로 가서 의사가 된 아들한테서 살고 있었는데 83년에 한국에 돌아 왔을때, 오명춘은 딸 장혜숙에게 주려고 응담을 하나 가지고 왔다. 그 당시로서는 백오십만원 상당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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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효민을 통해서, 딸이 장혜숙의 집으로 오도록 전달이 왔다.

찾아 갔더니 그 웅담을 나에게 건네주며 딸에게는 또 기회가 있으면 사서 줄수 있으니까 우선 지금은 이것을 잡수시고 기운을 차려 보십시오. 박선생님은 병환이 나서도 필요한 사람 이니까 이것을 드리는 것이에요 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문선명이나 교회와 나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문선생은 박선생님을 더
욱 아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선생은 지금 서울에 계실 터이니까 두 분이서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라고 약속해 주었다.
그때 옛날 자기집을 팔아서 조달한 오백만원은 지금첫 한푼도 갚아 주지 않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당시의 오백만원은 지금으로서는 오천만원 이상이 되는 셈이다.

나는 웅담을 고맙게 받아, 그것을 먹고나서 한달만에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명춘은 여러가지로 노력해 주었으나, 물론 문선명한테서는 전화도 없었다.

이와 같이 최초의 교회의 식구들은 함께 고생해 온 일도 있어서 서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도와주곤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만 잘난체하고 있는 문선명은, 원리의 공론만을 앞세우고 인간성이라고 하는것은 찾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식모살이라도 해서 살아야지


그런데 옥상현이 행적도 비쳤지만 본부교회는 몸과 마음을 몽땅 문선명과 교회에 바치고, 돈도 집도 없는 "박봉식"을 나가라고 내 몰았다. 그 후 박봉식은 갈 곳이 없어서 대단히 불쌍한 지경이 되었다.

박봉식은 청평 통일교 수련소로 가서 산에 천막을 치고 기도 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몇일이 못가서 그것을 안 수련소 관리인이 와서 또 몰아내고 말았다고 한다. 박봉식은 할 수 없이 다시 시내로 나와서 먹고 살기위한 참기름 장사를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선 교회의 간부의 집을 찾았다. 원식구인 박봉식이 부탁하면 한집에서 한명쯤이야 참기름을 사 줄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 다녔던 것이다. 맨 처음에 협회장 부인 한테 가서 참기름 한병을 내 놓고 진짜 참기름이니 시장에서 파는 값으로 한 병만 사달라고 부탁  하였다.

그했더니 그 부인이 통일교회의 식구가 참기름 따위나 팔다니 너무나 창피하니까 그만두라고 말하며, 박봉식을 내 쫓아버렸다.

그리고 또 원협회장의 집을 찾아 갔더니, 먼저 집에서 당한것과 같이 문전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박봉식은 통일교회 간부들에게는 사랑이라고 하는것은 한조각도 없는 참으로 냉정한 사람들이다 라고 한숨 지었다.
 

그래서 협회장의 부인이 두 사람이나 다 거절하는 것을 보면 다른곳에 간들 어차피 헛수고 일것이라고 참기름 장사를 체넘해 버리고 말았다. 살어가기 위해서는 통일교회 따위를 기대  할 것이 아니라 식모살이던, 무엇이던 해 나가야 겠다고 그 박봉식은 쓸쓸히 말했다.

 

 

김종화(金鐘和)의 눈물과 노여움

 


문용명을 죽이고 싶다


평양으로 간 문선명은 미완성이라서 엉터리 같은 원리를 설교해 신자를 모으고 있었다. 가련하게도 옥상현은 그 무렵부터의 희생자인데, 더 한사람 써두지 않으면 않될 사람이 있다.
 

그것은 문선명이 투옥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된 유부녀 김종화의 사건이다.

흥남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먼저 출소하는 나에게 그는 평양 경창리에 있는 김종화의 집을 찾아 가서 내가 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정화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여 나는 출소하자 바로 그곳으로 갔으나, 이미 피난길을 떠난후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
다.

문선명의 열렬한 신자가 되어 주인과 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방에서 문선명과 동침해서 드디어는"어린양의 잔치"를 올리는 소란을 피워서 체포되어 징역 일년의 형을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리의 이론에서 말하자면 6마리아(유부녀)를 복귀한 뒤에 오는"어린양의 잔치(정식결혼)"는 상대가 더러움이 없는 처녀가 되여야 한다.

어째서 남편이나 자식이 있는 유부녀를 선택한단 말인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문선명에게는 서울에 두고 온 처자도 있다.

내가 서울에서 간신히 찾아 냈을때, 김종화는 이문동에 살면서 집사로서 기성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정명선은 파고다 공원앞에 코롬비아 라고 하는 구듯방을 경영하고 있었다.

내가 김종화를 방문 하였을때, 그녀는 그때의 일을 후회 하면서 사단이 나를  유혹해서 죽을때 까지 참회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때는 이름을 문용명에서 문선명으로 바꾼것을 모르고‥‥그녀는 말했다. 문용명은 엄청난 대사단인데, 나는 흠뻑 속았습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많이 만든 나쁜 사람이예요.

박선생도 빨리 그만두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커다란 눈물 방울을 흘리면서 울었다.

평양시절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나의 남편은 내가 하는 행동을 그늘에서 야속하게 생각 하였을뿐 어째서 성을 내지 않았을까요.

자기의 처와 저남자가 매일 같은 방에서 함께 자며 복귀를 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섹스를 하고 있는것을 옆에서보면서 어째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나중에 그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것을 알고 그때 나는 너무나도 큰죄를 범하고 말았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나는 김종화 집사에게 더 한번 물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매일밤
섹스를 한다는 것이, 그 당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때는재림 메시아라고 믿었고, 그 남자에게 미쳐서 그 사람과 섹스를 하는때에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천국으로 올라 가는 듯한 심경 이었습니다.
 

문용명이 지금 서울에 있는데 더 한번 만나 볼 용의는 없는가, 하고 물어 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면서 엄청나게 큰 죄를 범한 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므로 대사단의 문용명은 나와 같은 유부녀나 처녀들을 교묘한 말로 범하고, 많은 사람을 죄의 구렁텅이로 떨어트리고 있어요.

어떻게 또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겠어요 라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세상에서 더 이상 우리들에게 한것 같은 죄를 두번다시 그가 범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다. 그 남자를 죽이고 싶도록 원망하고 있어요.

그녀는 그야말로 불처럼 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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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마리아의 비극

 


유부녀 여섯을 빼앗다
 


나 박정화는 1953년 5월 15일 경주에서 피난생활을 끝마치고 부산 수정동에 마련한 교회에서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원리강의를 들었다.
그 내용은 흥남 수용소에서 문선명이 나에게 "원화원이상"에 관해서 이야기 한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었다.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6마리아"의 부분이었다.

평양 시절은 그렇다 치고, 식구들 가운데서 6마리아로서 복귀를 받은 사람들은 제일 첫번째가 신정순, 그리고 오명춘, 이순철, 김안실, 강옥실, 정전옥의 순이라고 문선명은 이야기 했다.

그 후 한동안 지나서 이 6마리아의 얼굴생김이 바뀌었다.

그 이유는 강옥실과 정선옥에게는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남편이 있는 유부녀 가 아니면 6마리아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 이었다.
문선명은 이 두사람 대신으로 유신희, 임영신을 6마리아로 선택 하였다.

6마리아 자격이 있는것은 유부녀라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형체가 없는 하나님은,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성숙하면, 형체있는 인간의아담으로 재림하여 아담과 해와가 결혼해서 더렵혀 지지 않은 자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자손이 이 세상에 번식 함으로서 이 세상을 선한 죄 없는 사회  할 것을 '창조이상'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해와를 유혹해서 따먹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사단의 것이 되어, 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범죄한 천사의 사랑의 대상인 유부녀를 빼았음으로서, 사단에게 더럽혀진 피를 깨끗이 하는 '복귀섭리의 의식'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문선명 은 설명하였다.
문선명은 나에게 복귀하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 복귀의 방법이란, 지금까지의 사탄의 세상에서는 섹스를 할때에 남자가 위로 되고, 여자가 아래로 되었지만, 복귀를 할 때에는 두번 까지는 여인이 위로되고 남자가 아래로 되는 것이고, 세번째는 남자가 위에서 행위 한다.

그래서 소생, 장성, 완성으로 3회에 걸쳐서 복귀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것이다.

특히, 나는 문선명의 섹스에 의해서 복귀된 여자와 최초로 섹스를 해서,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내가 문선명에게 제일 신뢰 받는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6마리아 들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를 추적해 보자.

 

신 정 순*

 

자산가인 이순모의 처였던 신정순은 내가 1953년 5월 IS일에 부산의 수정동 교회에 갔을 때부터 두 사람의 아들을 데리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같은해 12월 24일 문선명이 직접 원리강의를 하기 위해서 부산영도의 집회에 갔을때 그는 나에게 정화 너는 장래 신정순과 이상적인 상대(부부)가 되어서 우리 교회의 경제 문제를 해결 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 한 일이 있다.

그런데 문선명은 이 신정순의 장녀로 처녀인 이성화를 장래에 해와가 될 사람이라고 말하고 범하였는데, 김영희 사건으로 그 거짓말이 탄로나고 말았다.

또 둘째딸인 성례도 문선명한테 복귀를 받다, 아이까지 낳게되었다. 신정순은 6마리아가 된것으로서, 문선명의 곁에서 영원히 평화로운 생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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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부산 초량동에 있던 집을 팔아서 문전명에게 바쳤다. 내가 부산에서 새끼장사를 시작 하였을때 그 자금을 마련해준 것도 역시 신정순 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된 두 딸의 모녀 3인이 문선명과 섹스를 했다고 하는 사실은 신정순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궁암에 걸려 몇해 후에 죽고 말았다.

저 세상으로 간 신정순은 지금의 문선명을 어떻게 보고 있을 것인가?

 


이 순 철*


이순철은 내가 경주의 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의 수정동교회로 갔을 무렵, 오명춘의 전도로  입교하게 되어 문선명의 복귀를 받고부터 쪽 그에게 따라 다닌다.

이순철의 남편은 당시 관세청의 간부였다.

그녀는 남편몰래 많은 재산을 문선명에게 헌금 하였다.

문선명이 대단히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에, 우리들이 안양, 부산 등지를 돌아 다녔다는 것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그 후의 이순철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어느날 노동휘가 나를 찾아 와서 아침 예배에 가자고 재촉한다.

청파동 교회로 예배를 가니까, 마침 문선명이 나와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선명이 별안간 지금 수택리(경기도 소재) 총포공장을 건축하고 있는데, 오늘밤 안으로 그 총포공장을 완성 시키시오 라고 명령 하는 것 이었다.
급작스러운 일 이라서 건축 일꾼을 모은다는 것이 큰일 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천호동에 주택을 건설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축일꾼 18명을 트럭에 태워 실어다가 밤샘 작업을 해서 어거지로 그 공사를 완료시켰다.
작업이 끝나서 돌아 가려고 하는데, 이순철이 느딘없이 찾아와서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같이 가자고 해,그이를 따라 가니까 통일 산업 주식회사의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방을  빌려서 살고 있는데, 방안에는 다 날가 빠진 헌이불과, 꾸겨진 양복등, 겨우 몇가지 가재도구가 놓여 있을뿐, 그렇게 화려한 생활을 하던 이순철이 왜 이다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그에게 어째서 이런데 와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으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문선생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로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아 백방으로 생각 끝에 할 수없이 통일산업에는 문선생이 하루에 한번은 꼭 온다고 하기에 이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매일 문선생이 오는 길에 기다리고 있다가 먼발치에서 나마 얼굴 만이라도 뵙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선생은 차로 오기때문에 내가 서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  다른 길로 가 버리고 맙니다 라고 이야기 한다.


그녀는 이 슬픈 사정을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 내가 와 있다는 것을 듣고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세시간 동안이나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한 이순철은 문선명에게 재산도 자기의 몸도 모두 바쳤다고, 남편에게서는 이혼당하고, 자식들은 남편에게로 따라가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문선명을 만나고 싶어서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문선명은 어째서 이다지도 냉정하게 배신 할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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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재림메시아를 자칭한 사나이의 할 수 있는 일인가.

우리들은 손을 맞잡고 한 없이 울었다.

이날부터 한달 후에 오명춘 집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명춘이 혼자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순철은 그 한 많은 인생을 마치고, 이세상에서 사라졋다고 하는 것이다.

그 옛날 문선명은 밤에나 낮에나 이순철 없이는 못 살것 같이 굴더니만, 이제 와서는 이순철이 문선명을 만나고 싶어서 수택리 총공장 근처로 이사까지 와서 문선명을 기다렸는데  얼굴 한번 마주대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 버리고 말다니 ‥‥

저 세상에서 이순철은 문선명을 얼마나 원망하며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인가?

 

오 명 춘*


오명춘은 제주도에 피난 생활 중에서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부산에서 문선명의 원리를 듣고 감격해서 복귀를 받은 뒤에도 문선명이 어려운일이 생기면 이 오명춘 집사가 전부 해결해 주었다.

집을 판 대금 5백만원을 몽땅 문선명에게 바쳐서 남편과는 이혼하고, 아이들은 남편한테로 가 버려서, 혼자서 문선명을 위해서 살아 왔다.

이 오명춘 집사의 이야기는 앞에서도 자세히 썼으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해 둔다.

 그 후 오명춘집사는 교회에 못있게 돼서, 지금은 필립핀에 있는 아들을 찾아간 것이다. 서
울에 살고 있는 딸도 문선명으로부터 합동결혼 을 받었으나 이상이 맞지 않아 이혼하고 말았다.

이제 새삼 자기의 집으로 오는 것을 그리 반가워 할 이가 없다.

유효민과 내가, 올 봄에 오명춘을 찾아 갔더니 그 딸 한데서도 나가 달라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지금쯤은 낮선 나라에서 어떠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것인가?

유효민과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사람들을 장래 남은 인생을 평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서 서로 노력 할 것을 약속 하였다.

 


김 안 설*


김안실은 내가 부산의 수정동 교회에 있을 때에 오명춘 집사에 전도되어 입교했다. 문선명으로부터 원리를 듣고 복귀를 받은 뒤에는, 신정순과 같이 유효원 등을 열심히 전도한 장본인이다.
김안실은 장리욱씨의 자부인데, 남편은 의사였고 미국으로 가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김안실은 남편이 유학중 아이들과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열심히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김안실은 문선명을 제일 사랑하고 있었다. 그 후, 김안실의 남편은 미국에서 귀국해서, 서울 청량리에 병원을 개업하였다.

한동안은 남편과 살고 있었지만 역시 문선명을 못 잊겠다며 교회로 돌아왔다. 문선명에게서 복귀를 받을 당시의 김안실은 30세 가량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문선명은 그 젊은 안실이가 마음에 들어서, 내가 서울에서 부산에 갈때마다 반드시 편지를 써서 내가 그것을 전해주는 책임을 맡았다. 지금 다 나이든 이 사람을 문선명은 돌아다 보지도 않는다.

이제 새삼 남편한테도 돌아갈수도 없어서 혼자서 방을 빌려 가지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리치고 또 혼인 중매로 직업화 하다시피 홀홀 단신 쓸쓸한 인생살이를 하고 있다.

유효민과 나는 이와같이 문선명과 통일교회에 배신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책임을 지고 남은 인생을 보낼수 있도록 노력 할것을 결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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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신 희*


유신희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도 밝혔기에 여기에는 지금의 상태만을 간단히 말해둔다.


고아원에 어린것들을 맡겼던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다 졸업하고 제집도 마련하고, 교회집사 일도 잘보고 장사도 잘되여, 사회에 모범 청년층에 속한다.

그러나 유신희씨는 아들들 집에 살 면목도 없고, 아이들도 어머님 모시기가 서먹하다 하여  구로동에 방을 두칸 빌려서 바느질 일을 해 가면서 겨우 살아 가고 있는 형편이다.

과거 눈이 멀어서 문에게 속은것을 한탄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날그날 고생
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이 사람에 관해서는 유효민과 나는 도와 줄 것을 약속 하였다. (제 7장 참조)

 


임 영 신 *


서울의 북학동 교회에서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가 창립될 무렵 신정순이 임영신의 집을 알려주어서 유효민의 전도로 임영신은 통일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임영신은 다섯살쯤 되는 딸이 하나 있었고 혼자사는 몸인고로 가볍게 교회로 들어올수 있어서 푸로마이드 사진을 추운 겨울철에도 우물물로 수세작업을 하여 열심히 도왔다.

이 또한 문선명 이 누구보다도 매우 사랑을 받아왔다.

교회가 발전하여 여러번 이사를 했고 용산구 청파동 시절 문선명은 남녀 이상상대 설교를 한참 역설할 때다. 교회 교인들은 이심전심으로 임영신은 자기와의 이상상대의 꿈이 깨진줄 알고 탈교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시내모처에 단신으로 생활중 교회에서 친숙하게 지내던 딸을 만난 인연으로 그딸 아버지 재산가 이순모의 끈질긴 구애끝에 다시 부부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 번창하여 재벌급에 들었다.

그 사장도 병사로 아들하나 낳고 또 과부가 되었다. 미망인이 된후 많은 사업체를 전처 장남에게 물려 주고 외롭게 아들하나 바라보며 외롭게 살고 있다.

그리고 한동안 어느 예능인과 결혼하였으나, 그 사람과도 이혼해서 또 독신이 되어, 자기의 가정부 아줌마와 같이 살고 있다.

또 자기가 낳은 아들도 어머니를 보살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도 사이가 좋았던 이순모와의 결혼생활 무렵 시간만 있으면 가만히 불러내서 만나고 하던 문선명도 임영신 만은 전연 돌아 보지 않았다. 지금은 방 한칸을 빌려서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유효민과 함께 그녀를 만났는데, 그 생활 형편은 쌀 살돈이 없을 정도로 궁색하였다.
문선명은 복귀 한다는 명목으로 몸뎅이 를 유린하는 것은 물론 재산까지 전부 들어 먹고는 급기야는 차 내버리는 것이었다.

 


6마리아가 아니라 60마리아


문선명은 한 학자와 "어린양의 잔치 의식"을 행하고 학자가 참 어머니라고 떠들어대고 있지만, 이 대표적인 6마리아 이외도 문선명에게 농락 당하고 재산까지 도적 맞은 여성은 몇 십명이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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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에게 배신 당하고 버려져서 지금은 60-80세가 된 할머니들은 인생 여한을 품은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와같이 정도에 넘치는 행위는 인간의 상식에서 보던지, 종교가의 입장에서 보던지 간에 절대로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며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파탄을 가져 올것으로 필연적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문선명 이야 말로 진짜 대 사단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한 6마리아라고 하는것은 모두 재산가의 아내뿐이었고, 가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2천년전에 예수는 그가 만났던 간통한 여인, 향유의 여인등 육인의 여자와 섹스를 하지 못했기에 예수는 죽었다.

육인의 유부녀를 복귀하는 것은 원리의 근본이다 등등으로 말한 문선명의 이야기는 실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 악용한 함정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케 된다.

사실 그들은 문선명의 호색적인 섹스의 포로가 되어 미쳐서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문선명 한테로 달려와서 돈이나 재산이 확실하게 문선명의 손아귀에 모였다.

그리고 빨아 먹을 만큼 발아 먹은 뒤에는 돈있는 여인을 찾아내서 6마리아의 이름으로  꾀였던 것이다.

정말 그대로 풍부했던 그녀들은 하나같이 허수아비 빈 털털이와 같이 되어 버림을 당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도 사랑도 없다. 문선명의 색과 금욕의 가련한 희생자의 죽음만이 남았다.

더욱이 해마다 새로운 마리아로 교체해서 볼일이 끝난 마리아는 자꾸만 버려 치워서 두번  다시 돌보지 않는 것이다.

6마리아란 무서운 함정에 빠진 여성들의 대명사로서 그 이면에는 실로 몇십명, 몇백명이라고 하는 희생자의 예비군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의 재산이나 자금이 없었다면 통일교회가 발족해서 발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를  아는 내가 첫번째 증인이다.

예를들어 이북에 원적을 둔 황모 중년 부인은 통도 크고, 뱃장도 좋아서 자기의 것을 다 바치고 남에 돈도 잘 들러다 댓다. 그래서 사랑을 받게 되니 인신이 아닌가. 자기 돈도 다 떨어지고 하여 문에게 낙태 수술비를 달라고 했더니 무정하게도 딱 잡아 떼며 노발대발 울면서 탈교선언에 겁이나 유 부장이 문교주에 이야기 해서 수술비를 얻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교회에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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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빼앗기고 살해되고

 

김 원덕 이란 사나이

 

부산의 교회에서 노여움이 치밀어 미친듯 했던 최선길 부인에게서 문선명을 구출해낸 김원덕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시대에 육군사관학교 포병과를 나와서 일본군에 복무하던중, 포병소위 로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후 그는 북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포병사령관 무정의 한쪽 팔 노릇을 하며 근무하면서  북조선의 비밀을 몇차례 남쪽에 흘려 보냈다.

이 사실이 사령관인 무정이 군사회의로 중국에 가있는 동안에 폭로 되었다. 당초 사형을 선고받아 집행되는 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김원덕은 명랑한 성격으로 솔직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냥 사형의 집행을 기다리는 정도라면 죽는편이 났다고 결심하고 옥중에서 자살을 도모 하였다.

다행이도 그것은 미수에 그쳤고 수갑을 찬채로 독방에 들어 있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귀국한 무정장군은 자기의 한쪽 팔이었던 부하가 사형을 선고 받아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을 알았다.

무정장군은 고급 군사기관에 입김을 넣어서 그가 신원보증을 한다는 조건으로 김원덕의 사형은 4년 8개월의 형으로 감형된 것이었다. 감형 통고를 받은 김원덕은 평양 형무소에서 홍남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위기일발로 총살을 면한 김원덕과는 내가 홍남 수용소에서 총반장이 된 후에 문선명으로부터 소개되어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세사람은 친형제처럼 문선명을 중심으로 모든것을 의논하면서 쓰라린 상황을 극복해 왔다. 또 김원덕과 나는 북쪽의 평남 대동군 용연면 출신이어서 서로 가까운 이웃 마을의 출신이라고 하는 점에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김원덕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 남쪽으로 피난하여 경찰의 치안국 외사계의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통일교회가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을때 김원덕이 나타나서 문선명을 끌어 낸 것인데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최선길은 차마 반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비적인 낭만


어느날 김원덕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좀 샘이나는 듯한 그의 사랑 로맨스이다.
그 몇일전 김원덕은 부산에 볼일이 있어서 용산역에서 야간열차를 탓다. 그는 상등석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 품위 있어 보이는 부인이 몇사람의 경찰관에게 둘러싸여서 같은 기차에 타려고 하였다.
그녀의 복장이나 전송나온 사람들을 보니까 어던지 모르게 고급관리의 부인이 여행을 떠나는것 같이 보였다.
그부인은 공교롭게도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수원역을 지나 대전역을 지났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때때로 보는 정도로 그대로 부산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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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 지나자,
그 부인은 한국의 유명한 시한구로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내는 흐르고 있어서 옟 물이 남아 있을수가 없다. 사람도 이와 같아서 한번 흘러 버리면 또 다시는  못 돌아오네 라고 하는 내용의 노래를 김원덕의 옆 얼굴을 보면서 작은 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 소리는마치 선녀가 노래하는 것 처럼 들렸다.
다시 한번 부인을 뜯어 보니까, 그 모양은 엄숙하게 보였으나 또 정이 넘쳐 흐르는 듯 하기도해서 한동안은 함부로 말을 건낼수도 없어그저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러나 김원덕도 만고풍상을 경험해온 사나이다.

그대로 위축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얼굴 생김새로는 자신도 있었으므로 큰맘 먹
고 말을 걸었다고 한다. 실례합니다. 당신은 용산역에서 보았습니다만, 부산에는 여행으로 가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은, 용산역 가까이에서 알미늄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부산에는 볼일이 있어서 가는 길입니다.

그로부터 부산역에 도착하기 까지는 아직 세신간이 있었으나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열심히 이야기에 빠졌다. 야간열차 속에서 알게 된이 부인과 김원덕은 완전히 호흡이 맞아서 그날 어떤 곳에서 만날것을 약속하고, 부산역에서 헤어졌다.

약속한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같이 하였는데 그 부인은 그에게 마치 연인에게 대하는것첨럼 행동하였다. 그녀의 행동에는 일본여성 처럼 사교적인 여자티가 넘쳐 흘러서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태도와 행동에 도취한 김원덕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 후에 영화를 보러 갔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어느쪽이라고 할것도 없이  이심전심으로 어느 호텔로 발걸음을 옴겼다. 이날 둘이서 맺은 사랑은 도저히 말로서는 설명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김원덕은 부산에서 볼일을 마치면 다음날 야간 열차로 서울로 올 예정이었으나, 그 부인과 같이 있으니까 한 주일이 금방 춘몽으로 어제 서울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 이었다.

 

아름다운 부인과 진수성찬

 

그리고 오늘 그녀의 자택으로 갈 약속을 한 것인데 자기 혼자서 가기는 쪽스러워서 박선생님도 같이 가셨으면 합니다 라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호기심이 생겨 김원덕과 함께 열두시에 용산시장으로 갔다. 철길을 건너서니 공지가 있는데 서쪽으로는 옛날 모리나가 제과의 공장이 있었고, 그 동남쪽으로 단충집이 있었다.

일본사람이 살던 헌집이라서 그다지 깨끗한 집은 아니었다.

현관으로 가니까 문패에는 "윤청정심(尹淸淨心)"이라고 책어 있었다.

두 사람이 현관에 들어서자 20세 가량의 두 여인이 나와서 우리를안내해 주었다. 첫방에는 큰 불단이 있고, 그 중앙에는 순금인지 도금인지 잘 모르겠으나 황금빛 불상이 놓여 있고, 좌우에 놓인 놋쇠 촛대에는 밝은 낮인데도 불이 켜져있다.

다음방은 자리가 열개도 더 깔릴만큼 큰 방이었는데 객실인것 같았다.

그곳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한참만에 여인이 정중하게 차를 날라다 주었다.
이 집의 구조를 보고 있는데, 옆의 문이 열리며 향수와 같은 냄새가풍겨왔다.

대단히 좋은 향기로서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중년부인이 들어와 앉으면서 그녀는 얼굴을 약간 숙여서 미소지으며 그리고 인사를 하였다.

김선생 흔자서 오시라고 말 한것인데 이렇게 누추한 곳에 선생님까지 오셔서 정말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 목소리는 밝고도 대단히 깨끗하였다. 40대 후반 정도로보였는데 매우품위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김원덕에게 소개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인사 하였다. 무엇인가 마음까지 관통된듯한 분위기였다. 마음을 진정하고 맞아서 그 부인을 다시 보니까 머리는 빗어올려 쪽을 짓고 긴비취 비녀를 꽃고 옛날의 궁전에서나 쓴듯한 금빛장식에 빨간 댕기를 드리우고 있었다. 감색저고리에 엷은 옥색치마를 입은 모양은 멋진 우리의 전통 정식 복장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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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첫날밤을 맞이하는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듯한 모양이었다. 부인의 안내로 옆의 방으로 갔더니 고급요리집과 같은 한식요리상이 놓여 있고 은제의 주전자에는 노오란 빛갈의 술이 들어 있어서 한잔 드시지요 라고 은제 술잔으로 한잔 받은 술은그야말로 최고의 가슴설레임 이 아닌가!

중국의 시인 이백은 장강폭 아래서 술을 마시며, "삼천자 높이에서 똑바로 떨어지는 물은, 흡사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과 같구나"라는 시를 읊었다.
나도 그러한 기분으로 술을 마시고 안주를 들었다.


이상한 예지능력

 

그 부인은 금강산에서 10년간 수업해서 이 세상일은 무엇이고 내다 볼 수가 있어서 사람의운명을 점칠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여명을 판단 할 수도 있고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그 사람의 당선을예언 할 수 있게 되고, 대학의 입학시험 때에는 그 사람의 합격 여부도 알수 있게 되었다고한다.

그 덕분으로 그녀가 경영하고 있는 알루미늄 그릇의 제조공장은 그녀로서는 본업이 아니라 부업으로 된것 같다고 한다. 그녀의 참 목적은 불쌍한 고아들 특히 여자 고아를 길러 대학교육까지 받게해서 사회에 내 놓는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길러낸 여자 아이들을 전원 이화여자대학을 졸업시켜, 현재 돌보고 있는 고아는 17명 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고 있자니까, 감히 얼굴을 들고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국회의원 선거때가 되면, 이 부인집에는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대학의 입학시험때도 역시 같다고 하는것이었다.

우리들은맛있는 성찬을 잘 먹고 이상한 그 부인의 이 야기 를 듣고 또 오십시요 라고 전송을 받으며 그집을 나셨다
김원덕씨를 연인으로 삼았다고 내비치면서 그녀는 김씨에게 부인이있어도 관계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자기를 사랑해 주고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서로가 좋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세속적인 감각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김원덕과 나는 그집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김원덕의 덕분으로 나는 언제고 성찬을 먹을 수 있어서 한 동안은 괜참은 생활을 보냈고, 서로간에 친하게 되니까, 나는 불단에 놓여 있는 싱싱한 과실을 마음대로 집어 먹어도 실례되지 않을 만큼 친숙해겼다.
재림 메시아의 아버지와 함께 있으니까 생명이 없는 불단 앞에 이러한 물건을 놓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부인은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항상 주의 깊게 들었던 것 같다.
그 후 그 부인 윤여사는 김여사라고 하는 다른 부인을 사이에 넣어서 토목 건축회사를 설립하여 김원덕을 사장으로 앉혔다.

 회사의 명칭은 윤여사가 "운흥공사"라고 명명한 이름인데, 구름처럼 일어난다고 하는 의미였다. 사장이 된 김원덕은 토목건축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경영은 그리 잘되지 못해서 얼마 못가서 이 회사의 간판을 내리게 되고 말았고, 그후에도 또 여러가지 사업으로 김원덕과 윤여사는 협력하였으나 운이 없는 탓인지 그리 잘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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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한동안 윤여사는 불단의 과일을 먹을때에 말한 그 말의의미를 물어왔기에 설명하였더니 꼭한번 그 선생을 만나보고 싶다고 윤여사가 말하지 않는가 !

나는 김원덕과 의논하여 문선명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 하였더니 만나도 상관없다고 말하여 1954년 10월 25일 오후 6시에 신당동 양문영여사의 자택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 다음날 윤여사에게 그 일을 전하였더니 그녀는 대단히 기뻐 하였다.


제자의 연인을  빼앗은 문선명

 

약속의 날, 김원덕과 나는 윤여사를 데리고 양여사의 자택에 안내하였다. 양문영, 신정순, 오명춘, 옥상현, 지승도, 이순천, 이기환, 양윤신, 등의 여자 식구들과 유효원, 유효민. 이수경, 김원태등이 모였다.
그때의 윤여사는 최고의 한국정장으로 몸을 싸서 흡사 신부가 신랑집으로 첫날밤을 맞으려 들어가는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본 식구들 특히 부인 식구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
인사를 나눈 후에 윤여사는 자기의 영적인 눈으로 선생을 우러러 뵈오니까 참 어머니가될 여인이 없어서 근심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제가 신부로서 신랑인 선생님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라고, 당돌하게 첫 인사를 하여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날은 예수가 세사람의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간 때와 같은 분위기가 되어, 문선명도 원리강의를 밤새도록 이야기 했다.
또 윤여사는 시를 노래하고 창을 불렀다. 그 소리는 그 집의 주인이며 이화여자대학의 음악교수인 양문영 여사가 들어도 놀랄 정도였다.
그 당시는 문선명에 대한 감시가 엄하게 되어 있었다. 밤 열두시가 되면 통행금지가 되어있어 다음 기회에 또 만날것을 약속하고 그 밤은 다 헤어졌다.
일주일 정도지난 어느날, 문선명이 별안간 유효민과 같이 윤여사의 집을 찾아 왔다. 김원덕과 나는 문선명이 오는것을 몰랐으므로 대단히 놀랐다. 윤여사는 정성을 다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문선명을 접대 하였다.

문선명도 신랑이 신부집에 간것 같은 태도로 윤여사와 앉아 있었다.
또 윤여사는 성경에 나오는 신랑을 맞이하러 가기 위해서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신부가 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것 같은 분위기였다.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나와 김원덕은 밤도 깊었으므로 문선명과 유효민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이날밤 문선명은 윤여사와 복귀 (섹스)를 했다고 한다.
김원덕은 북에서 피난하여 남으로 올때 살곳이 없었던 문선명을 자기의 셋집에 한동안 머물러 있게 하기도 하고, 부산에서 문선명이 곤난한 상황에 놓였을때, 선두에 서서 몇번씩해결해 주었다. 그 김원덕이 자기의 사랑하는 연인 윤청정심과 문선명에게 배신 당한 심경이되어 그후 문선명을 피하게 되었다.

문선명은 송도욱 장로를 비서역으로 하고 부터는 자주 윤여사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1955년 7월 4일 문선명이 경 찰에 구속되고 부터는 윤여사도 한동안 우리들의 통일교회 와는 발을 끈었다.
김원덕은 그 후에도 몇차례 나와 만나서 문선명에 대한 원한과 노여움을 말했고 나는 열심히 복귀원리를 설명해서 문선명을 감쌌으나 김원덕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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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인이 있는 가운데 어째서 자기의 제자가 사랑하는 연인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 뺏아서 가는가. 선생은 나를 바보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짓을 하는 선생에게 어떻게 복종할 수 있는가?

통일교회의 원리가 아무리 훌륭해도, 자기는 더 믿을 기분도 없다.

선생 아니 문선명을 용서 할 수 없다.

문선명은 종교의 이름을 빌어서 여자를 속이는 사기꾼이다.

김원덕은 군인출신답게 외골수인 데가 있어, (나도 그렇지만) 정말로 격분했다.

그래서 문선명이란 사나이는 발정한 개다.

음수다 라고 뱃속에서 짜내듯이 매도했다.

김원덕의 억울함은 잘 알기 때문에 나는 그 이상 댓구할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해뒤의 일, 윤여사, 식모, 양녀(대학생딸)의 일가 3인이 누군가에 의해서 타살당한 사건이 생겨서 큰 소란이 되었다. 경찰도 필사적으로 수사를 한 모양이지만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그 전까지도 문선명과 윤여사의 사이는 계속되고 있었고, UN군의 인천상륙으로 6 25동란이 유리하게 된것을 찬양하는 영화 "오오 인천" 의 준비가 두 사람 공동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윤여사의 돌연한 죽음으로 자금이 나오지 않아서 중단되었다.

김원덕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어, 나도 당시 경찰의 조사를 받다 그의 소재를 물었었다.
그 후 김원덕과는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어, 나도 슬적 모양새를 살펴 보았으나 김원덕 자신도 그 사건에는 대단히 놀라고 있고 둘이서 진짜 범인 찾기의 연상게임을 한 일도 있다.

김원덕한테는 전혀 변한 것이 없어서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러던 그는 죽어서 이미 3년이 되었다.

 

 

제5장  재림 메시아의 정체

 

원리와 실천의 모순

 

나의 수기는 진실의 기록

 


나는 흥남수용소에서 문선명을 알았고, 1년 6개월을 같이 생활 하였다. 6.25동란으로 출옥한 그와 두달간에 걸쳐서 남쪽으로 피딘하여 평양에서 서울 부산까지 왔다.

한동안 나는 경주에 있었고 문선명은 부산에 있었다.

그와 채차 합류하고서도 이 세상의 창조의 역사와 타락의 원인, 그리고 이 세상을 복귀시켜 하나님이 구원한 깨끗한 세상의 창조 목적대로 되돌리는 원리를 듣게 되었다.

원리의 주인공인 재림 메시아 참부모의 이름 아래 통일교회는 이제야 세계 백수십개 국가에 퍼져 있다. 진정한 어머니인 해와가 된다고 하는 것으로 한 사람을 선택하여 "어린양의 잔치(정식결혼)"를 행하고 열한사람의 아이들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그 첫번째 아들을 아버지 문선명의 후계자로 하고자 하는 세습체제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문선명은 각국의 학자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소개 되었다. 그를 위대한 인물로서 존경하고 있는듯한 책도 있다. 나는 그러한 책은 거의 읽었으나 그러한 책은 문선명이 지금까지 그 목적과 실천을 어떠한경과로 해 왔느냐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쓰지 않고 있다.

다만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 만을 쓴, 겉치례 만의 내용 이었다.

그러한 책에 책에 씌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나도 비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이 책에서 써 온 것은, 문선명과 같이 있으면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행동해 온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 했다고 단언해 두고 싶다.

문선명이 흥남수용소에서 시간만 있으면 나에게 이야기한 "원리"는 부산 수정교회에서 원고로 써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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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원리원본'이다 (이것은 종이에 연필로 쓴 것인데, 이것을 대구에 와있던 정선옥이 보관하고 있었고, 내가 서진광산에 있을때 박애자가 가져다 주었다. 그때 내가 공책에 베껴쓴 것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
 

이 원리원본을 기초로해서, 두뇌가 뛰어난 유효원이 '원리해설'(原理解說)을 썼다.


그리고 이 '원리원본'과 '원리해설'이 통일교회의 기초가 되어 문선명이 세계 백수십개 나라에 진출하게 되는 기초가 된 것이다. 이 원리원본과 원리해설을 전부 인용 할 수는 없으므로, 우선 요약해 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자들


그러나 이 '원리해설'에는 그 원리와 실천과의 모순되는 것이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를 몇 항목만 지적해 둔다.


어느나라에도 그 역사의 시초에는 신화가 있다.

우리 한국이나 한반도에는 단군을 비롯한 건국의 신화가 있다.

일본에는 천조대신이 있고,

중국에는 덕왕형제 11인 등이 있다.

그런데 내가 따랐던 문선명은 한나라의 국조가 아니라, 세계의 재림 메시아라고 한다.

지금까지 출판된 많은 책 가운데는 문선명을 구세주라고 쓴 것도 있다.

문선명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계를 통일 하려고 주장 하고 있으나 내가 믿어온 재림메시아는 점점 그 모양이 커감에 따라, 그 원리와 실천이 점점 상반 되어 가는듯한 느낌이 드는것을 어찌하라.

2천년전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간 예수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있다.

문선명은 제3의 아담 참부모로서, 통일교회 교인은 물론 온 세계 사람들로 부터 추앙받아 백수십개 나라에 넓혀져 있다.

그러나 식구라고 불리는 통일교회의 신자가 되더라도, 사단의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와 생활에 변화된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나빠지던가 비명의 죽음을 맞은 사람도 있다.

나는 그점에 대하여 계속 의문을 가져왔다.

많이 있는 통일교회 관계의 출판물 가운데 실제로 내가 읽은것에는, 통일교회는 이러한 윤곽의 교회이며, 그 교주인 문선명은 원리라고 하는 교리에 나오는 재림메시아 이다 라고 하는정도의 표면적인 것밖에 씌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문제는 문선명이 얼마만큼 재림메시아 로서의 역활을 다 하고 있는가.

구세주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가 하고 하는 것으로 귀결 된다.

그런데 뻔뻔스러운 문선명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지금부터도 계속해서 희생 시키려고 하고 있음으로, 더 이상 잠잠코 보고 있을 수 만은 없다고 생각되어, 이책을 쓰기로 한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통일교회 교인들은, 지금도 백수십개 나라에서 문선명을 참아버지로 생각하고, 한학자를 참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이 세계가 통일될 것을 매일 같이 기원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나도 문선명이 진짜 재림메시아가 되어서 이 세상을 구원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는 식구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만약 문선명이 재림메시아가 아니고, 요한 묵시록 20장에 씌여 있는대로 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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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고 한다면, 진짜 참 신부와 어린양의 잔치를 올려 참부모가 되여, 열 한사람의 아이들을 출산하고 있는데, 어째서 참 부모한테서 남은 아이들이 두명씩이나 교통사고로 죽어 갔는가.

또 다른 여자에게 출산시켜 입적한 세사람 가운데 한사람도 사고로 죽었다.

"요한묵시록 21장 4절"에는 사람의 눈에서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신다.

이미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부르첫음도 아품도 없다.

먼저 것이 지나가 버렷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다.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면, 복귀 원리대로 어린양의 잔치를 행해서 이 세계의 모든것을 해방하는 날짜 까지 정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세상은 그대로인 것인가.

 원죄의 근원을 모두 없애고 복귀의 의식을 거쳐 참부모가 되었을 터인데 어째서 거기서 태어난 어린 자식들이 죽어 가는가.

 또 그 자손들 가운데는 부끄러운 스캔들을 일으켜서 언짢은 소문까지 내는 자도 있다.

나는 문선명이 원죄를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 왔는가.

원리대로 실천하였는가? 등에 관해서 밝혀두고 싶다.

문선명의 장래는 하나님 만이 결정 할 수 있는 문제 이다.

나는 다만 문선명이 발표한 원리에 근거해서 그 원리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함께 살고 있었던 때의 사실에 대해서 써 보려고 생각한다.


문선명이 무슨 메시아 !

 

여기서 다시 한번 문선명의 원리를 복습해 두자.

 

(창조원리) -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흙으로 사랄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인간이 되었다.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며 에덴의 동산에 두어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쓸쓸해 보여서 그가 자고 있는 동안에 그의 갈비대의 하나를 빼어 여인을 만들었다 그 이름을 해와라고 하며 아담과 함께 에덴의 동산에서 세상의 모든것을 지배하도록 하였다.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 따 먹어도 좋으나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만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명령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경고하였다.

 


(타락원리) - 해와가 성숙한 뒤 하나님이 모양이 있는 아담의 몸에 임재하여, 해와와 함께 사랑해서, 즉 섹스를 해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됨으로 거기에서 부터 생겨나는 죄없는 아들에 의해서 자손이 번영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천사장 루시엘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해와를 유혹해서 섹스를 하고 말았다.
또 해와에게 아담과도 섹스를 하도록 시켰으므로, 이것이 타락한 사단 루시엘의 혈통 세계가 되었다.

 

 

(복귀원리) - 이와같이 성숙하지 않은때에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섹스를 한 것으로 인해서 인간이 타락케 된 것이다.
그때 해와와 아담이 나무열매를 따 먹었다면 죄를 범한 입을 감추었어야 할 터인데 하나님  앞에서 두 사람은 부끄러워서 무화과의 잎으로 하체를 감추었으므로 섹스를 한것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도 인간은 신체에 상처가 생기면 그것을 가리우려고 하는것이 본성인데 부끄럽다고 하체를 가리우는 것은, 그곳에서 범죄하였음을 자증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이 타락한 것을 어떻게 복귀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해와에게 사단의 피가 흘러들어간 것으로서 ,아담과 해와는에덴 동산 땅을 파며 해와는 아이를 낳는 해산의 고통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 게 되었다.
그 후, 아담과 해와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 두 사람이 인간의 시조가 된것이다. 가인이그 아우인 아벨을 죽였으므로 이것이 에덴 동산에서 최초의 살인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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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복귀하면 이 세상이 깨끗하게 될 것인가 여기서 문선명은 이 복귀의 실천을 하기 위해서 많은 장해를 뛰어 넘어 왔다.

그의 그 원리와 실천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복귀를 설명하면 해와가 성숙하지 않았을 때에 천사장 루시엘이 섹스를 해서 해와의 정조를 빼앗았기 때문에 이 죄악을 깨꽃이 하기 위해서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복귀를 실현하는데 우선 하나님과 같이 더렵혀 지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서 루시엘 에게서 정조를 빼앗긴 해와와 같은 여인과 루시엘이 해와와 섹스한것과 같이 이 두 사람이 섹스를 하는것이 펼요하게 된다.

그리고 루시엘은 해와 위에 올라타고 섹스를 하였으므로, 지금 이 사단의 세상에서도 똑같이 남자가 위로 타고 섹스를 하는 것이 보통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복귀 할 때에는 남자가 밑이 되고 여자가 위에 올라타고 섹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같은 이치로 문선명은 이러한 체위로 복귀의 실천을 계속하고있다.

하나님과 동격으로 복귀할 수 있는 사람은 말 할것도 없이 문선명 이라고 원리 에서는 단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선명은 왜 죄 없는 하나님과 동격의 입장에서 복귀 시킬수가 있는가.

문선명이 이 사단의 제상에서 극히 평범한 가정에 태어난 것에서부터 생각하자면, 도저히 납득 할 수없는 일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납득되는 부분이 없다.

한번 더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흥남 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을 문선명과 같이 지냈다. 이 수용소에서의 1년 6개월간은 외부생활의 16년 정도에 해당되는 기간이라고 서로 간에 이야기 하곤 했다.

그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문선명이 16세때 (1935년), 부활절 전날밤, 예수가 꿈속에 나타나 예수가 달성 하고자 하였던 일을 하지 못한채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므로, 당신이 나 대신 그 사명을 완수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선명도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몇번이나 부탁을 하였으므로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이 예수에게서 부탁 받았다고 하는 것은 후에, '원리'에서 말하는 '복귀'의 실천이며, 섹스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의 여부는 본인 밖에 알지 못하는 이야기 이므로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예수의 꿈을 봤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있을 터이고, 꿈속의 말씀에 의한 예수의 이야기 한 것이, 이렇게 엉뚱한 섹스 복귀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무래도 이해 할 수 없다.


정득은 과의 이상한 관계

 

1955년(소화30년) 7월 4일, 문선명 등이 체포되어 중부경찰서의 유치장에 수감 되었을때 평양시절의 정득은 이 찾아와서 나에게 그녀의 집까지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註 :
이 할머니도 또 이상한 존재로서, 좀 길어지지 만 주의해서 읽어 보시오)

나도 마침 그당시 문선명의 평양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김종화를 찾던 중이어서 정득은이 살고 있는 집 까지 가기로 하였다.

50세가 되는 정득은은 원효로 3가에 조그만 집을 빌려서 살고 있었다. 여기서 1주일을 함께 지냈다. 그리고 문선명이 서울에서 평양에 도착한 후의 정득은 과의 신비(?)에 싸인 생활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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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득은 은 북녁의 평안북도에서 한때 번성하였던 이웅도 목사, 황국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복중교 와도 관계는 없었다.

다만 기독교를 믿고 있었는데, 1946년 6월 6일 하늘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내용은 지금 38선을 넘어서 한 청년이 가방 하나를 메고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그 청년은 하나님이 중요한 책무를 지워서 이세상에 보낸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 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평양으로 향하고 있으니, 나가서 그 사람을 맞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 했다는 것이다.

정득은 은 부랴 부랴 남쪽으로 찾아 갔더니, 사동이라고 하는 곳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릭구삭 하나를 멘 청년이 이쪽을 향해서 왔다. 그것이 문선명(당시는 문용명)이었다.

정득은은 그의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한 후에 자기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정득은의 자택은 만수대 밑에 있었다.

문선명을 안내하여 온 정득은은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는것.

선생이 오는것을 알고 마중하러 갔던 것을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득은은 자기가 여호와에게서 성모로서 인정 받았으므로 문선명과 섹스를 하면 문선명은 신과 동격의 입장이 되어 타락한 부부의 입장에 있는 여인들을 복귀 시킬수가 있게 된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문선명이 밑으로 가고, 정득은 은 그 위에 올라타서 소생, 장성, 완성의 3회의 섹스를 하였다.

미 복귀의 실천공식과 방법은 흡사 문선명의 원리와 같다.

성모 마리아 대신에 성스러운 정득은 파 복귀를 한 것으로서, 문선명은 온전한 하나님 처럼 죄 없는

정득은 은 꿈속에서 여호와와 섹스를 하였으므로 자기는 성모라고 말한다.

너무나도 잘 꾸며진 이야기지만, 문선명의 한쪽 팔과 같은 입장에 있던 당시의 나는 오직놀랄 뿐이며 감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창조, 타락, 복귀의 원리도 완성되 있지 않았을 때에, 원리도 모르고 문선명과는 처음대면의 정득은 이 도저히 생각 할 수 없다.
 

앞뒤의 사정으로 보아 두 사람이 육체관계는 있었던 듯 하지만 아무래도 후에 억지로 끌어다 붙인 조작된 이야기라고 나는 지금 믿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평양으로 갔을 무렵의 문선명의 행동이, 원리를 무시한 엉망 진창인데가있다. 생활안정을 위해서 필사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당시의(후에도 그렇지만) 그의 무기는 미완성의 괴상스러운 원리론과, 그것에 빠져서 몰려드는 여인들에 대한 섹스공격 밖에 없지 않았을까 ?

백보를 앙보해서, 만약 그것이 진실이었다면, 통일교회의 인쇄물은 어째서 이 (정득은의 대기적)에 관한 것을 한 줄을 쓰지 않았을까 ?


체포도 당연한 섹스포교


평양시 대의 이야기를 계속하자.

이 후, 문선명은 나최섭의 집으로 옮겼고 다음에는 경창리에 있는 정명선, 김종화 부부의 집으로 가서 거기서 예배를 올리게 되었다. 이미 섹스관계가 있었던 지승도 옥상현들과의 여러가지 갈등이 있어서 정득은 은 독립해서 다른 신자를 모아놓고 예배를 올리고 있었다.

또 여기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그 내용은, 여자 신자들이 제각기 문선명과 섹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간에 자기만이 문선명을 낳은(영적으로 이세상에 낳은) 성스러운 어머니다 라고 하는 주장이 얽히고 설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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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데, 신자이었던 여자들이 문선명과 섹스 함으로서, 문선명에게 복귀할 자격을 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밝힌 바이지만 그 후의 문선명은 김종화의 집에서 남편인 정명선과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부녀인 김종화와 같이 살았다.
그리고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그 유부녀와 "어린양의 잔치"를 구실 삼아 결혼 한다는 소동을 피워서 경찰에 체포되어 사회질서 문란죄(社會秩序 紊亂罪)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흥남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거기서 문선명은 나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것에 관해서, 통일교회의 출판물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문선명이 복역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기성 기독교 교단의 투서와 공산당의 종교 말살정책으로 인해서 내무성에 구속되어 공판서 5년의 형을 받았다
이것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것은 독자들은 이해 하실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공산당이 실제로 종교 말살정책을 행하였다면 기성 그리스도 교단이 질시할 여유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옥상현 남편인 우하섭은 그 무렵 평양 장대현 교회의 신망있는 장로였다.
또, 이 3개월전인 1946년 8월에도 문선명은 북조선의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후에 겨우 석방되었다.
통일교회는 이것도 원인은 신도를 빼앗긴 목사들의 반감과 질투로 고발 당했다고 하고 있으나, 똑같이 분에 넘치는 섹스포교의 결과였다.
나는 이 책에서 남쪽의 한국(부산, 대구, 서울)을 중심으로 문선명과 함께 걸은 발자취와 생긴 일들을 써 왔으나, 문선명은 이미 평양시절에 다수의 여성을 섹스로 식구를 삼아 항상몸 주면서 신봉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여성을 역시 6마리아 논법으로 꾀어내서 육체와 금품을 뜯어 냈던 것이다.

 

 

색과 욕과 돈과

 

남편의 돈을 훔쳐 오라

1955년 7월 4일 문선명은 서울시 경찰에 구속 되었는데 재판에서 무죄로 선고되어 석방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통일교회는 죄없는 사람이 구속 되었으나, 그 후 사실이 밝혀져 석방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당시 문선명과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있었던 내가 그간의 사정이나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문선명은 실제로 여러가지 많은 죄 를 범 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의 기민한 대책으로 경찰의 조사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았던 것과, 위증이나 거짓으로 뒷말을 맞추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던 덕분에 무죄로 되어 석방 되었던 것이다.
통일교회는 그 사실을 감추고 있지만, 내 자신도 위증을 해서 교인들의 말문을 맞추기에손 쓰느라고 뛰었고 증거인멸을 행 했던 것이니까 틀림없다.

사실로 말하면, 재림주로 믿었을 때 어떻게 허락없이 재림주의 연령을 내 마음대로 올릴수 있겠는가. 이건 생각도 못할 일이다.

재림주 문과 의논해서, 허락아래 연령을 올려서, 제 2국민병을 기피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태산 같지만 가령 이순철이라고 하는 유부녀를 자기는 재림 메시아 이니까 자기와 복귀 하면 당신도 6마리아 의 한 사람 예수의 마리아로 된다고 속여서 섹스를 했다.

훌릉한 간통죄 이다.

또, 이 세상을 사단이 주물르고 있으나, 이 세상의 모든 재산은 본래 하나님 것이므로, 사단이 쓰고 있는것, 남편의 돈이나 집에 있는 재산은 전부 훔쳐서라도 나에게 헌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이 이상적인 세계로 되며 하나님은 수천배도 넘는 행운을 주실 것이다.
이 이야기를 믿어 이순철은 자꾸만 가져다 바쳤다.

어느 때에는 문선명에게 강요되어 당시의 미국달러 1만 5천불이나 되는 돈을 집에서 끄집어내서, 그돈으로 두달동안 문선명을 마음껏 놀아나게 하였다.
드디어 남편도 노해서 팔방으로 손을 써서 찾고 있었다.

절도의 훌륭한 공범이다.

이것이 어찌하여 죄가 안 될 것인가.

남펀이 경찰에 그런 이야기를 안하고, 간통죄로 고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디어 냈을 뿐이다. 다른 마리아의 남편들도 모두 그러했다.

또 처녀인 딸들에게, 문선명은 나의 처가 되면 세계의 진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해서 믿게 하고, 속임수 섹스를 했었다.
이러한 수법으로 김영희라고 하는 여자 대학생도 이성화도 속아서 문선명과 섹스를 했었다.

쾌락에 빠지고 결흔을 구실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청순한 처녀들을 범한 문선명이 어째서 죄가 되지 않았을까?

식구들의 눈물어린 심정을 통일교회는 생각해야 할 것 이다

 

왜  죄없는 아이들이 죽는가

 

그리고 나는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탈세라고 하는 죄명으로 미국의 형무소에 투옥 되었던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요한 묵시록 21장 3~4에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살며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스스로 사람과 함께 계셔서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신다.

이미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부르짖음도 아픔도 없다.

먼저 것이 이미 지나가 버렷기 때문이다 라고 쓰어져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것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 재림 메시아 시다.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그했던 것 처럼, 미국에서의 사건도 6천년간 하나님의 희망이었던 복귀의 실천을 하고 있어서 사단 세상의 법률에 걸려서 투옥되는 것은 원리의 예정에 있다고 문선명은 말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원리대로, 처녀를 신부로 맞이하여 "어린양의 잔치"를 행해서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였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는 교통사고로 또는다른 형태로 죽은자 들도 있고, 세상에 여러가지 좋지 못한 소문을 퍼트리고 있는 장본인도 있는 것은 무슨 이치일까?

문선명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왜 그런지 당연한 사실을 왜곡해서 선전하며 전도하고 있다. 그 때문에 도리어 문선명의 장래는 점점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라고생각한다.

나는 문선명이 원리의 실천이라고 말하면서 하고 있던 행위를 옆에서 직접 보아온 사람으로서, 그 사실을 명확하게 하여 .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인가?

아니면 남달리 여색을 좋아하는 돈벌이 주의자인가 라고 하는 것을 밝혀둘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문선명이 하나님과 동격으로 복귀된다고 하는 근거는 성스러운 어머니 ! 정득은이 재림메시아 로서의 문선명을 낳은것과, 문선명이 16세때의 4월 17일 부활절의 전날밤 꿈속에서 예수가 나는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복귀의 임무를 다 하지 못했다.

당신이 그 대신 제3의 아담으로서 재림 메시아의 임무를 다 해 주기 바란다 라고 말했다는것(통일교회의 신문에도 명기 되어 있다)의 두 가지를 들수 있다.

만약 그대로 문선명이 하나님의 실체로서 복귀의 임무를 실천 하였다면, 창조 당시의 에덴의 동산이 복귀되어, 통일교회의 교인들은 참 부모와 함께 눈물도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복귀(復歸)라고 하는 미명으로 섹스


우선 6마리 아 복귀문제에서 부터 생각해 보자.

사탄에 의해서 해와를 빼았긴 것 때문에, 하나님은 6천년 동안이나 노여움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나넘은 해와를 도로 찾기 위해서 제2의 아담인 예수를 이 세상에 보냈으나, 예수의 생모인 마리아는 예수를 자기의 아들로 밖에 생각지 않고, 자기의 아들이 우선 어머니와 섹
스를 하기 위해서 생겨 났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 (註 - 이와같이 어머니와 아들이 섹스 하는것을 원리에서는 '모자협조'라고 한다. )

그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고 원리는 설명하고 있다.

또 원리원본에는, 가롯 유다의 연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가 빼앗아 복귀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원한을 없애기로 되어 있었는데, 유다가 이에 복종하지 않고 은화 30냥을 받고 예수를 팔았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예수가 복귀하려고한 6여인의 마리아를 복귀 시켰더라면 원리대로 실천되게 되는 것이라고, 나도 이해 하였었다.

그런데 6인의 마리아를 복귀시킨 후에도 문선명은 손에 닿는대로 몇십명이 넘는 여인을 복귀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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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들면 이화여자대학의 사감 선생이었던 한충화는 문선명에게 복귀된 후에 결국 섹스의 마수에 빠져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어 문선명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무렵 볼일이 생겨서 문선명과 전주에 있을 때, 미인 여자와 만나게 되어 그 여성과 복귀하는 것을 나는 바로 옆에서 보았다. 그것이 그녀였다.

한충화는 열열한 크리스챤으로서 미망인이 되어 사무엘 이라고 하는 벙어리 아이를 데리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었는데,그 '원리'에 속아서 문선명에게 자기의 몸을 제공 하는것이 하나님의 뜻 이라고 믿고 기뻐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선명이 또 다른 여자와 복귀하고 있는것을 알자, 그 길로 서울로 돌아와서 문선명과 결별하였을 뿐아니라, 그곳이 더럽혀 졋다고 자궁 수술까지 하였단다.

그때 까지의 자기의 경솔한 행동과 섹스에 미쳐있던 문선명에게 정조를 빼앗긴 것을 후회하면서 그 뒤 얼마 안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누구 때문이며, 누구의 죄라고 말 할수 있을 것인가?

1955년 이화여자대학의 5인의 교수가 퇴직하도록 추궁하여 사표를 내고, 14인의 학생이 학교에서 를겨나게 되었다. 이일은 역시 문선명과 교수와 학생과의 복귀 사건에 얽혀 있던 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부산 수정동시대에 이미 6마리아는 결정되어 있었으며, 섹스의 실천도 끝났던 것이다. 그런데도 또 새로운 마리아를 복귀 시키려고해 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복귀를 한다고 하는 것만이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여성 식구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고 ,또 원리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여인들에게는 무작정 복귀를 받는 일에만 필사적인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통일교회에 대해, 외부에서는 통일교회에서는 벗고, 춤추며 한번 입교하면 마취에 걸려서 두번다시 올수 없도록 해 버린다 고 하는 소문이 널리 퍼져 가게 된 것이다.


많은 가정이 파괴되다.

 

그래서 실제로 문선명의 원리의 이야기를 듣고, 타락원리와 복귀원리를 들음으로서, 각계 각층에서 와있던 사람들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 왔다.

지금까지 아이들과 함께 평화로운 생활을 해온 부부와 처가 통일교회에 들어가고 나서는 옷을 벗는 것도, 남편과의 섹스도 거부하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람들은 문선명에게 바치는 경제 문제만도 골머리를 앓았다 .

그래서 결국 이혼하게 되고, 문선명의 원리에 따라 가정생활이 파탄나게 된다.

경제적 기반이 없는 가정에서는, 더욱이 믿기만 하던 남편이 처에게 절망해서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고 말게 된다.

그 당시 통일교회의 섭외부장이었던 김인철은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는것이 큰일의 하나였다.

이와같이 파탄된 가정 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도 170가정 이나 된다.

그 당시 문션명으로부터 복귀를 받기는 하였으나, 문선명의 행위를 보고 체험하고서는 저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오직 색에 미친 행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여인들은 남편에게는 모르는체 하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이 여인들의 심경은 지금쯤 어떠할 것인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 식구들은 그래도 모든 것을 바쳐서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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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당시 통일교회의 어느 남자식구로부터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문선명 선생의 복귀는, 그야말로 엄숙한 것이 겠지요.

 그때는 웃으면서, 그러믄요 하나님이니까 라고 대꾸해 두었으나, 재림메시아의 복귀의 의식인 만큼 엄숙한 것이라고 상상 하는것도 당연 하겠지,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하나님 이었어야 할 문선명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앞에두고 입 맛을 다시는 개같이 되어굶주림에서 해갈이나 된듯이 섹스를 했을뿐이다.


오로지 성욕 불덩어리 같았다.

사실 문선명은 정력이 뛰어 나서 하루밤에 열번 한 일도 있다고 한다.

본처였던 최선길의 말이니까 이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복귀를 받을 때의 부인 식구들도 그렇다. 순수했던 여성들이니까 당연 하겠지만 멋대로 너브러져서 곧 기를 쓴다.

큰 소리를 지르며 실신한 사람도 있다.

내가 돌봐 주었으니까 이것도 틀림 없는 사실이다.

사단을 부정하고 있는 문선명의 복귀라지만, 결국은 사단 세상의 섹스와 무엇 하나도 다를것이 없다.

그러한 문선명의 정체를 재발리 눈치채고 가정으로 복귀한 부인네들은 정말로 현명하였다. 

그녀들은 엄청난 피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원한은 여름에도 서리를


그런데 문선명은 지금 자기가 재림메시아 진정한 아버지가 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복귀한 식구들의 뒷바라지는 하나도 해 주지 않는다.
외국 특히 일본과 미국에서 참 아버지로 군림하게 되어, 일본에서는 영감상법(靈感商法) 따위로 반사회적으로 돈을 들어 모아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희생이 되어온 사람들에게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문선명을 원망하면서 통일교회를 나서는 여성이 날마다 늘어 가고있는 상황이다.

문선명은 장래 어떠한 방법으로 무슨 원리를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 갈 것인가 ?

미국의 목사들에게 원리의 비디오 테이프를 35만개나 만들어서 발송 하였는데 그것으로 이런 것이 방지되게 될 것인가?

미국의 목사들이 원리설명회란 명목으로 세계각국을 방문하여 몇억원이란 돈을 쓰면서 포교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을 방지 할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미국, 한국의 유명한 학자들에게 비싼 원고료를 주고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 구세주로서 치켜 올리려고 하고 있지만, 한국의 속담에 여자의 원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註 - 이것은 음력이니까 5, 6월은 한 여름이다)고 하는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청춘시절에 문선명에게 복귀되었던 여인들은 재산을 전부 털어 넣고, 남편한테는 이혼 당하고 자식들과도 헤어져서 지금은 폭삭 늙어 버렸다.

이 사람들은 거의 식모를 두고 살았을 만큼 넉넉한 가정의 부인들이었는데 재림주! 문선명을 맞아서 그에게 모든것을 바쳐 버리고 지금은 먹고 지내는 것도 옹색해서 자기(자신)가 식모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사람이 몇 십명이나 된다.

또 원한을 품은채 일생을 보낸 사람들은 몇백명이나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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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여인들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 보려고 생각 하였으나, 나의 경제적인 사정둥 여러가지 문제로 실현 하지 못해서 참으로 민망하게 생각한다.


처녀에게 낳게 한 아이들


원리 중에서 제일 중요시 되는 참어머니가 되는 처녀의 선택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 했
다고 생각한다. 참 아버지로 자칭하는 문선명과 어린양의 잔치를 올리는 사람이 참어머
니가 된다고 하는 것인데 , 그의식에 따라서 에덴의 동산을 타락전의 상태로 되돌려서 하
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원죄를 뿌리에서 부터 뽑아버린 후에, 또 죄없는 깨끗한 세상으로 되돌려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이, 영원히 참 부모를 모시고 살아 갈수 있는 세상이 창조 된다고 하는것이 원리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참어머니인 처녀 한사람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또 알기 힘든 문제가 많이 있다. 문선명이 평양에 있을 무렵 정명선 씨의 처이며 아이들의 어머니인 김종화가 "어린양의흔인 잔치"의 상대로서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문선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징역 5년의 선고를 받아 문선명이 흥남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는 것은 몇차레나 썼다.

부산 영도의 신성묵의 자택에서는 김영회라고 하는 처녀를 복귀 시켰으나 그 후에도 관계를 계속해서 김 영희는 임신하였다.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문선명은 오승택이란 학생에게 연애한 것처럼 연극을 꾸며 김영희와 함께 일본으로 밀항 시켰다. 김영희는 일본에서 문선명의 아들을 낳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살게 되었다.

또 더욱이 이성례 라고 하는 처녀와도 복귀하여, 남자아이를 낳게 했다. 서울로 와서는 6마리아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문선명은 신부인 처녀를 선택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이성화를 서울역 앞의 여관에서 복귀한 것이다.

이성화는 그 후 자기가 참 어머니 후보의 첫번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의 공범은 이순철이었다.

이성화를 선동한 그녀는 신부 참어머니로 선택되어 복귀한 증표로서 금반지를 만들어 이 가련한 처녀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선명은 이 처녀들을 모두 버리고 홍순애의 딸 한학자와 "어린양의 잔치"를 올려, 한학자가 참 어머니가 된다고 말하며 결혼했다.

지금은 많은 통일교회 관계의 출판물 중에서 참 아버지로 되어있는 문선명과 참 어머니로 되어있는 한학자와 함께 살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 한다는 목표를 걸고, 여러 단체와 많은 경제력을 동원해서 문선명을 옥중의 구세주라고 치켜 세워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로서 돋보이게 하기위한 여러 가지 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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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한자는 누구냐

 

문선명의 소개장

 


다음에는 경제문제의 내정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앞에서도 쓴 바와 같이 1953년 내가 서울로 올라 왔을 무렵은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려고 해도 기차의 3등석 자리의 여비도 없어서 여자 식구들이 준 돈으로 겨우 왕복 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 후, 서울시 북학동에 집을 전세임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고 유효민의 제안으로 푸로마이드 사진을 제작 판매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되어서 교회를 흥인동으로 옳겼다. 식구들도 점점 늘어서 통일교회는 번창해가고 있었다.

그해(1955년)에 7.4 사건 (이화대학 퇴학퇴직사건)으로 문선명과 간부 다섯명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문선명이 출옥한 후에 청파동 (현재 통일교회 본부가 있다)으로 일본식으로 지은 이층집을 사서 본부교회를 이전하였다.

그 후 나는 문선명한테서 수고 하였소 한동한 서진광산으로 가서 쉬십시오 라고 말하기에 그가 써주는 소개장을 가지고 서진광산으로 가게 되었다. 1956년 7월 나는 거기서 생각해 보지도 앉았던 광산의 책임자가 되어 몇 달간을 지내게 되었다.

이 서진광산은 통일교회의 간부였던 정석천이 기부해서 문선명의 소유가 되고, 그가 직접 경영하고 있던 광산이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후에 또 쓰기로 하겠다.

내가 광산에 가 있는 동안 유효민은 산탄 공기총을 발명해서 특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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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기총을 제작 해 보니까 꽤 성능이 뛰어 났으므로 본격적으로 제작 · 판매하게 되어
통일교회 의 경제적인 기반을 굳혔다.


악착같은 노동착취

 

그 당시 문선명의 친척으로서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문성균이 처음인데 문선명이 찝차를 구입한 때에 운전수로 들어왔다. 그 다음이 문용선 인데 정석천 장로가 경영하고 있던 아산의 토기 공장에 가서 일하고 있었다. 문선명의 친척은 이 두사람 이외에는 한사람도 없었다.

그 이전에 내가 문선명과 부지런히 일하고 있을 무렵에 문선명의 친척은 한사람도 없었고 이름조차 들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현재 문선명의 친척들이 통일 교회의 경제를 좌우하는 상황이 되어 있어서 내부에서도 큰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원리에 반하는 것이다.

 문선명은 그전부터 이세상의 모든 돈과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남편의 돈을 훔쳐다가 나에게 헌금 하더라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에 있
는 돈을 훔쳐다가 우리에게 써 버렸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법률로서는 죄가 되지만 하나님의 법률로서는 죄가 안된다고 식구들에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식구들은 양심의 가책 같은것은 조금도 느끼지 않고 남편의 지갑에서 돈을 몰래 가져다가 문선명에게 쏟아 부었다. 그 덕분으로 오늘날의 통일교회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렇게 식구들이 고생해서 경제적인 토대를 만들어 놓은곳에 문선명의 친척들이 뛰어 들어와서 경제를 주무르며 자유자제로 쓰면서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반면 최초의 단계에서 경제적인 토대를 만드느라고 고생한 사람들은 거의 탈퇴 하든가 쫓겨 나고 있다.

현재 그 당시의 사람으로 남아 있어서 경제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것은 일성종합건설의 사장을 거쳐 작년(1992년)부터 일신석재로 옮겨 간 이수경 사장과 일화식품의 김원필 사장 뿐이다. 이수경은 당시 아직 열여덟살 정도라 문선명의 뒷일은 아무것도 몰랐다.

또 북에서 우리들과 함께 남하 하였을 때는 22세 정도였던, 김원필은 문선명 이 죽으라고 말하면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충실한 심복이었다.

 공기총 제작을 시작한 무렵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입교함으로 가정이 산산조각이 되어 고아원으로 보내져서 거기서 키워진 15~6세의 아이들이 수택리에 있던 통일산업(주) 예화공기총 제작소의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통일산업 당시의 사장은 김인철)

그 인원수는 350명 정도였으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그들에게 지불된 돈은 한달에 단
돈 500원 이었다. (일본 엔화로 환산하면 겨우 100엔정도-1965년 당시) 이것은 엄청난 노동력 착취로써 말도 되지않는 실례이다.

어느때 지금은 고인이 된 김희옥 집사의 17세된 아들이 고아원에서 도망해 나와서 어머니를 찾아 통일교회로 왔다. 그리고 이 모자가 서울에서 주택건설의 공사를 하고 있는 나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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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아들이 통일산업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듣지 않아서 박선생 한테서 써 주실수 없겠습니까? 하고 부탁을 한다. 176

아들은 통일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혹사해서 참을수가 없어서 도망쳐 온 것이었다. 이 사실을 내가 그 아들을 사원으로 쓰고 있을 때에 들은 이야기임으로 틀림없다.


문의 아들 흥진과 효진


1983년 문선명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를 돌며 강연을 한 일이 있다. 그때 문선명의 아들 문흥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그 이유로서 통일교회는 문선명선생이 숭공강연을 하고 있을때 사단이 문선명선생을 죽이
려고 노렸으나 그것을 안 아들 문홍진이 아버지의 대신으로 죽었다 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문선명선생이 그 아들을 청년영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므로 그는 영계의 청년들을 데리고 지구로 내려와서 문선명선생의 재림메시아 활동을 도와 협력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이미 하나님이 모든것을 해결 하는 것을 기다릴수 밖에 없는데 이야기에는 후일담이 있다. (후술)

문선명과 그의처 한학자는 이 세상에 군림한 참아버지 어머니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원리에서는 죄도 더러움도 없을 터인데 교통사고로 별안간 죽기도 하며 사단과 똑같이 행동하는 나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 참부모가 낳은 문효진의 스캔들은 통일교회의.내부 뿐만 아니고 사회적으로도여러가지 소문이 흘러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통일교회에서는 아들 문 효진은 한겨울에 문선명 선생이 결정한 성지 성스러운 땅에서 40일간 단식 철야기도를 함으로서 참회하여 문효진의 인격은 깨끗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효진은 문선명 한학자 부부의 장남인데 성화사에서 출판한 성공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문효진의 시집을 읽어 보면, 그를 그의 아버지 문선명의 후계자로서 만들어 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명백한 것이다.
이 또한 이해 할수 없는 문제이다. 지금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자기의 정권을 아들인 김정일에게 넘기려고 하고 있는 모양인데 공산주의 체제의 세습이란 믿을수 없는 폭거와 같은것을 통일사단의 세상에서 당당하게 행해 지고 있는 세습체제를 답습해서 아들의 문효진에게 재림메시아의 권력을 넘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세상을 구할수 있는 이는 문선명선생 밖에 없다고 하는 책을 쓴 김은우 박사는 책이름을 바꾸어서 이 세상을 구할수 있는 이는 문효진 선생밖에 없다고 하는 책을 출판 할 것인가?

또 일본인의 아스기요시는 옥중의 구세주 문선명이라고 하는 책명을 청년구세주 문효진이라고 바꿀 것인가?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느 사람에게서 들었다.
축복을 받은 가정의 제2세들이 40일간 청평기도원에서 집회를 하고 있을때의 일이다.
문효진의 주최로 1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출석해 있었다. 옛날부터 식구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36가정 이요한 목사가 원리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별안간 문효진이 나타나서 집회에 모여있던 사람들 앞에서 이요한 목사를 끌어내리며 아버지 문선명이 쓴 원리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대단히 노했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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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모여있던 식구들은 문선명의 후계자인 그가 참회하기 전의 본래의 불량자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하고 말했다고 한다. 북조선에서 김일성이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정권을 넘기려고 한다는 것으로온 세계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거기에 곁들여 한국에도 통일교회의 문선명이 자기의 아들에게 재림메시아의 자격과 권한을 넘긴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기만 하다.

통일교회는 이제까지 막대한 자금으로 문선명을 재림메시아라고 선전해 왔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일본인 나스기요시가 쓴 옥중의 구세주 구세주 나타나다등 많은 책이 출판되고 있다.

나스기요시가 돈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통일교회의 체질에서 보아 많은 돈을
써서라도 그 아들에게 전권을 넘기는 구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한 원리 어디를 읽어도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고 한다면 그 아들에게 재림 메시아 를 계승 시킨다고 하는 원리는 없다.

이와같은 통일교회의 내용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 그때의 편의주의로 멋대로 이유를 붙여서 상식으로는 생각 할 수 없는것, 인간의 도리에 맞지 않는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히 하여야 할 원리에 맞지 않는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니까 무섭다.

 


삭제된 창시자의 이름


더욱이 또 통일교회는 역사를 바꿔쓰며 태연하게 거짓을 쓴다. 통일교회의 태동기에서 부터 오랜동안 문선명을 믿고 문선명을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수고해 온 많은 식구들을 거저 내 쫓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사단으로 딱지를 부쳐서 명예도 푸라이드도 빼앗아 버리고 배신자라는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이러한 사람을 많이 알고 있지만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이므로 그 중에서 일부만 소개한다.

우선 나 박정화 자신의 문제부터 기술하기로 한다.

통일교회사(상권)에 실려 있는 나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다.

박정화가 누님집에 다만 개 한마리가 남아있는 빈 집에 혼자 있을때 김원필이 찾아 가서 다쳐서 다리를 질질 끌고 있는 박정화를 자전거에 태워서 문선명과 함께 피난해 왔는데 그 선생을 박정화가 서진광산 시절에 배신하고 통일교회에서 나가 버린 것이다.

이와같이 통일교회에 기록되어 있는 박정화는 배신자로 되어있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느냐의 한마디다. 이것은 모든 진상을 똘똘 싸서 감추고 문선명의 우상화 하도록 꾸며 붙인 거짓 기록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그 진상을써 두고자 한다.

우선 지금까지의 요점을 정리 한다면 북에서 피난 할 때의 경과(제2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나는 가족을 버리고 다쳐서 상처를 입은 몸에 채찍을 가하면서 문선명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일생동안 고락을 같이 하자고 한 옥중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그후로는, 문선생을 도와 경제적인 문제로 말로서 다 할수 없을 정도의 고생을 해 왔다. 문선생과 유부녀의 복귀라고 하는 섹스에서 생기는 갖가지 충돌에도 내가 대처 하였고 여러가지 고생을 겹쳐 가면서도 살아 왔다.

문선명과 함께 있던 7년간에 두번씩이나 경찰의 전기고문까지 받았다.

최대의 고비 7. 4사건에서는 5인의 간부가 체포된 중에 수사당국의 끈질긴 심문에 대해서 나는 온갖 수단을 구사해서 문선명의 죄상을 숨기고 무죄가 되도록 노력하였는데 이것도 통일교회의 기록에는 아무런 죄도 없었던 문선명선생은 구속 되었으나 무죄로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식구들의 덕분이었던 것은 앞에서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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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회는 문선명의 신격화에 열중하였으나 1년6개월간의 감옥생활이나 부산의 수정동에서 서울의 청파동에 이르는 7년간 문선명의 한쪽 팔 노룻을 하며 함께 지낸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문선명의인격은 신격적이란 어림도 없고 회노애락이 심하며 금욕과 호색가인
점 만이 유별나서 정말로 사단 세계의 사나이였다.

기상이 약한 문선명은 내가 경찰에서 최초의 고문을 받았을 무렵 누가 그를 찾아 가면 항상 피하기가 일쑤여서 안절부절 불안해 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나가서 용건을 듣곤하였다.

너무나도키가작고 약골처럼 보여서 이 사단의 세상을 맑고 깨끗한 세상으로 복귀해서 본래
의 에덴의 동산을 되살아 나도록 하려는 선생이 어째서 그렇게도 쩔쩔매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한일로 이 우주나 세계를 복귀시킬수가 있겠습니까 고 몇번 문선생에게 말한 일이 있다.
여러가지 고생을 거쳐 내 이름으로 빌린 서울시 북학동 집에서 "세계 기독교 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였다.

1954년 5월 3일의 일이다.

이것도 또 통일교회에서는 무슨 일인지 날짜를 5월 1일로 고쳐서 발표하고 있다.
이때의 출석한 간부는 문선명, 이창환, 박정화, 유효원, 유효민, 김상철의 6인으로 이 6인을 통일 교회의 창시자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통일교회의 관련 출판물에는 박정화라고 하는 이름은전연 나오지 않는다. 제일로 오래된 나에게 "배신자" 딱지를 붙여서 말살해 버린 것이다.


사건이 생겼다 바로 피하라

 

사실은 전혀 다르다. 배신 한것은 문선명 자신이었다.

그것은 내가 서진광산에 있을때의 일이다.

서진광산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날 조동석이 찾아와서 지금 서울에서 사건이 일어나서 선생은 도망갔고, 그때에 문선명 말이 곧바로 광산에 있는 박정화한테 가서 빨리 다른곳으로 도망하도록 전하시오.

만약 경찰이 광산까지 가서 박정화를 체포해서 취조 당할때에 심하게 고문이라도 당해서 박정화가 나의 일을 고백하게 되면 큰일난다고 지시 한 모양이 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어디를 도망하면 좋을까. 이러한 산 속도 위태롭다고 하는것은 당연히 서울의 교회도 식구들집도 위험하다. 이것 저것 생각한 끝에 우선은 문선명을 만나서내 몸가짐을 어떻게 한면 좋을지 의논 해 보려고 생각했다.
조동석에게 선생님의 행방을 물었더니, 짚차를 타고 충무에 있는 용화사라고 하는 절에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듣고 나는 곧바로 그곳으로 가기로 하였다.
광산 주변 산중에 사는 화약주임인 전종만에게 여비를 빌려 가지고 출발하여 밤중 열두시에 충무에 도착했다.
여기서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 그날은 용화사까지 갈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숙소를 정해서 일박하고 아침 일찍이 용화사에 갔더니 정말로 한발차이로 문선명이 송도욱 장로와 조일청, 송병호 등 네사람이 같이 제주도 방면으로 출발한 뒤였다.
절 마당에는 문선명등이 타고 있던 찝차 타이아의 흔적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언제까지 어떻게 해야만 좋은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만 좋은가? 앞일이 막막하다.
어찌할 바를 모른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경찰을 경계하면서 서울로 갔다.
그리고 은밀히 여기에 있으며 연락을 기다림이라고 문선명에게 전해지도록 수배했다.
나는 문선명으로부터의 연락을 열심히 기다렸으나, 한달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서울역전의 지저분한 간이 숙박시설에서 하루에 빵 한개를 씹으면서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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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는 문선명이다

 

한달이상 기다려도 문선명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나는 의심스러운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내가 서진광산으로 간것은 1956년 3월 28일, 7.4사건으로 체포되었던 문선명이 무죄로 된것은 전년의 10월 4일, 약 9개월 뒤의 일이다. 당초에 7~8인의 광부가 있어서 문선명으로 부터 필요경비도 송금되고 있었다.
그 무렵 서울 청파동의 본부에 갔던 나는 새로 입교했다고 하는 육군장교 두사람을 문선명 에게서 소개 받았다. 박보희와 한상국이었다.
그때 문선명은 박정화는 처음부터 같이 해온 한쪽 팔로서 넘버2의 사나이요. 당신들은 박정화한테서 여러가지를 배우시라고 그들에게 나를 소개 했고 두사람 모두그 3년후에 일어난 박정회 장군에 의한 군사정권 구테다(1961년)로 초대 KCIA(한국중앙정보부)장이 된 김종필의 심복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또다른 군인 두사람이 더 들어온 듯 했으나, 나는 만나지 않았다. 또 박보회는 그후 미국으로 가서 활약하여 통일교회의 제2인자로 올라섰다. 그리고 두사람은다같이 36가정의 축복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안되서 문선명으로부터의 송금이 뚝 끊겼다. 아무리 청구해도 기다려도 송금은 없었다 .원래부터 적자이어서 자금이 없었으니까 광산개발은 무리임으로 작업을 중지하고 갱부들은 돌아가도록 하였다.

뒤에 남은것은 서울에서 온 김덕진과 대구에서 거들어 주려고 와 있던 여자식구 세사람뿐 한 동안은 매식을 하면서 견디고 있었으나 얼마 안되어 바닥이 들어나서 끼니도 거르게 되었다.

너무나도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서 밥짓는 아주머니는 대구로 가고 말았다. (그리고 탈퇴 한
것 같다. )

김덕진도 서울로 철수해 버렸고 단지 흘로 남은 나에게 같은 마을에 사는 화약주임인 전종만이 때때로 놀러 올 뿐이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위태로우니 바로 피하라고 문선명의 심부름으로 조동석이 온 것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도망쳐 버린다면 이제 아무도 없게된다. 충무시로 출발하기 전에 됫치닥거리와 정리하는것 만은 얌전하게 끝내기로 하였다. 전 화약주임에게는 발동기를 한대 주고 여비를 조달했던 것이다. 훨씬 뒤 에 안 일인데 ,이때의 사건은 다시 문선명을 둘러싼 복잡한 여성관계가 원인이었다.

내가 산속의 광산에서 먹을것에 어려움을 려고 있던 수년 동안에 통일교회는 미국으로 진출하고, 일본에도 통일교회를 창립시켰다.
(1959년 10월 2일) 더욱이 60년 4월 11일 문선명은 한학자라고 하는 처녀 와 또다시 "어린양 잔치"로 결혼하였다.

그리고 3쌍 합동 성혼식(동년 4월 16일)  33조 합동성혼식(1961년 5월 15일)과 소위 36가정의 조직을 만들었다.

36가정의 신부들의 자격은 원칙으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들로 만들었다.

36가정의 신부들의 자격은 원칙으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어야 했으나 기성가정도 있었다.

이제까지의 경위를 지나치게 알고, 문선명의 여성관계도 상세하게 알고 있는 나는 역시 거북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나를 섬 (島)유배가 아닌 산유배로 긍지에 몰아놓고, 먹는지 마시는지의 상황으로까지 몰아놓고 그 동안에 문선명은 야망을 채우기 위해서 모순 투성이 원리를 추진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때에 또다시 일어난 여자사건으로 쫓기던 그가 광산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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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화를 도망가게 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경찰이 또 고문을 해서 박정화에게 불게 한다면 큰일이다라고 일부러 삼복중에 광산으로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해 낸것 만으로도 문선명이 나를 과거의 사람으로 취급하려 했던 참뜻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문선명은 나를 오래도록 살게 하기 위해서, 도망치라고 한것은 아니다.

자기가 오래도록 살아 남기 위해서 나를 과거의 우리에 가두어 버린채 도망치도록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만은 신장 개점한 통일교회의 안방자리에 나를 돌아오지 못하도록 찬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된것은 정말 훨씬 뒤에서야 알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당시의 나는 하루 한개의 빵조각으로 허기를 채우며 살아가면서 한여름의 땀에 흠뻑 젖는 간이숙박시설에서 한달 이상을 문선명으로 부터의 연락이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1962년 8월의 일이다.

이것은 사실이며 거짓이 아니다.
나는 결단코 문선명 을 배신하지 않았다.

배신한것은 문선명 이다.

 

 

제6장  진짜 사단은 문선명이다

 

산 증인의 이용가치

 

재혼해서 신천지로

 

나는 문선명에게 배신 당하고, 서울역전의 간이 숙박시설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나를 구해 준것은 엄덕문씨 였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가서 주택건설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일본 와세다 대학의 건축과 출신으로서 지금은 세계의 건축가 100명중의 한 사람)
그래도 나는 문선명 한테서 한번쯤은 무슨 연락이 있을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으나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문선명으로부터 단한번의 연락도 없었다. 문선명은 하나님과는 다른 속된 성격의 사나이라는 것을 남들보다 훨씬 더 알고 있는 나였다.

그래도 하늘에 맹세하고 출발한 분신으로서 일해온 나를 절대로 방치 할 리가 없다. 흥남의 옥중에서 「생사를 같이하자」고 맹세 하고 여기까지 서로 도와 가며, 생명을 걸고온 두사람이다.

마음 한구석에 그것을 믿고 있던 나였으니, 14년간에 걸쳤던 문선명과의 인연도 이것이 마지막이고 자나 깨나 나의 인생이었던, 통일교회에서도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이무렵 나는 엄덕문의 누이동생과 결혼 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로서 훌릉한 인물 이었는데 6·25동란으로 북의 인민군에게 집앞에서 사살 되었다. 아이들이 세사람 있었다.
나는 또 가정을 갖게 되어 땅에 발을 붙이고 제3의 인생을 내 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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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의 인생은 북조선시대  제2의인생은 흥남 형무소에서 통일교회 시대이다. 이때 나는 45세 처는 37세였다.
그로부터 10년간 나는 부산에서 주택건설 사업에 몰두하였다. 당초부터 계획 했던 300동의 주택건설과 아파트건축도 끝내서 무사히 책임을 다 할 수가 있었다.
다음 약10년은 통일교회의 식구였던 사람으로부터 부탁을 받아 매립공사에 협력하였다. 중국 신경공업고등학교 토목과 출신으로 군의공병대에 있었던 나로서는 토목공사는 전문분야이다.
많은 작업원(인부)을 지휘 감독하며 즐겁게 일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직책상 부하들과 친목의 술을 매일 호쾌하게 퍼 마셨다. 그런데 그것이 않 좋았다


병으로 쓸어지다

 

1981년 나는 뇌일혈로 쓰러져서 약 두달 동안 인천 기독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처의 오빠 엄덕문의 처 고희용과 누님의 엄순태가 나에게 「당신과 문선명 선생과는 하늘이 맺어준 깊은 인연이 있으므로 통일교회에서 떠나서는 않됩니다. 떠났기 때문에 당신은 병에 걸린 것이니까, 지금 부터라도 참회해서 통일교회로 되돌아 오시오」라고 권했다.

나도 생각지 않았던 병으로 조금은 마음이 약해 있던 상황이었다.

진실한 크리스찬 이었지만 신앙심이 얇어져이었던지도 모른다.
나는 인천 송도에 있던 나의집 뒷산에 들어가 3개월간 기도 하였다.
내가 기도 한 것은 「지금까지의 나의 살아온 방법이 옳바른 것이었던가 아닌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또 「병이 든 이몸으로 지금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 가면 좋은가」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계속 하였다. 병의 후유증으로 부자유한 몸이 된 나였으나, 사업의 제1선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시간만은 넉넉히 있었다.

통일교회의 그 뒷일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열심히 모이는 식구들의 근처의 통일교회에 가서 그들과 이야기라도 나누며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도록 노력하자고 생각하게 되였다.
내가 다리를 움직일수 있을만한 때의 인천지구교회의 목사는 문흥권 이라고한다. 몇 달 동안인가 다니고 있던 어느날 예배가 끝난 뒤에, 어느 중년의 여인이 나에게 인사를 하며 나를 아시겠습니까 하고 그녀는말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대구교회에있던 류권사의 딸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선진광산에 있으면서 대구교회까지 예배를 다니고 있을때 아직 고교생이었던 류집사의 딸이었다

지금은 이곳 교구장인 문홍권목사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류권사라는 사람은 신앙심이 두터워서 여러가지 고생을 경험하면서도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모두 교회에 다녔던 사람인데 그 아이들은 모두 교회의 임원이 되어 있었다.
1983년 나이 들은 식구들의 위로여행을 겸해서 성지순례 여행을 가게 되었다. 70세의 나도 노인식구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 하였다. 그 때 류권사와 20년만에 만나서 그동안의 이야기와 아이들이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서울의 본부교회에서 연락이 온것은 여행에서 돌아 온 무렵인데 중요한 의논할 것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서울로 와 주십시오 라고 한다.

 

오랜간만에 만나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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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에 있는 그랜드호텔의 커피숍에 당시 승공연맹의 회장이었던 김인철과 국제부장 겸 섭외를 담당한 안병일, 김덕진목사, 유효민, 그리고 나, 다섯 사람이 모였다.

이 날 본부교회가 나에게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 한 이유는,「김덕진의 행동을 억제 할수 있는것은 박선생 밖에 없으므로, 어떻게 좀 설득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김덕진 목사는 경찰의 유치장에서 용의자나 피해자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설교해서 솔직하고 평온한 심경이 되도록 하는 전도 사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김덕진은 전술 한바와 같이 작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통일교회의 식구였을때 통일교회에서 애창하는 성가 20여곡을 작사작곡한중, 성가편집사 유효민씨가 19곡만을 발취 게재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통일교회가 그 노래를 작자의 이름도 게재하지 않고 무단으로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수만부나 인쇄를 해서 판매 하였다.
그 출판권과 저작권의 문제를 제기 하기 위해서 김목사가 용산경찰서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협회장인 이재석을 고소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김목사는 그가 통일교회에 있을무렵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복귀를 받은 유신회 한테서 복귀의 섹스를 받은 뒤에 릴레이식으로 그도 열사람이 넘는 여인들을 복귀 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복귀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복귀하고 그 복귀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복귀 시키면 섹스의 둘레가 점점 넓어져서 온 세계의 인간이 모두 복귀하게 된다.

그에게는 이 복귀원리의 실천의 실천 방법에 관해서 자기의 체험을 그대로 쓴 원고를 각 신문에 발표하고 싶다고 하는 의향도 있었다. (제7장참조) 동시에 5천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동을 민사재판에 걸어 김덕진 목사가 5백만원의 공탁금을 내서 「성가」의 가창 금지처분을 신청할 계획도 있었다.

김 목사는 이러한 계획을 변호사와 의논해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날 회합이 이루어 졌던 것이다.
나는 김덕진과 친하고 그의 심정이나 노여움도 잘 이해 할 수 있었으나, 한 식구들로서 통일교회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좀 더 통일교회의 꼴을 두고 보자. 문제제기는 아무때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라고 김덕진을 설득시켜 우선 소송을 중지 시킬 수가 있었다.
그 때 안병일과 김인철이 나에게 「박선생 당신은 인천에 있는 것보다 서울 본부로 오는것이 좋겠오」라고 말해서 그로부터 3년간 나는 본부교회로 나오게 되었다.

 

통일교 창립의 산증인

 

서울의 본부교회에서는 가장 고참인 원로인 나에게 어떤 직책이라도 붙여 주려고 이것저것 제안해 왔으나 나는 모두 거절 하였다.

통일교회의 태동기에서 부터 관여 해 온 한 사람인 나는, 나이먹고 늙은 식구로서 통일교회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 되는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협력은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낳은 자식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어버이의 심경이기도 하였다.
나는 1981년에서 5년간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몸과 마음을 다해 기도도 했다. 또 통일교회에는 「박정화는 재림 메시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산증인」으로 선전되어 이곳 저곳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일본에도 가서 십 수개소에서 40회에 걸쳐 약 5천명 앞에서 강연도 했다.
다만 나의 증언에는 반드시 조건이 붙었다.
강연하는 내용은 「흥남감옥에서 남쪽으로 피난 한것 까지」로. 그 이외의 것은 말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요컨대 문선명이 얼마나 고난의 길을 넘고 넘어온 위대한 인물인가 를 많은 사람에게 인상 깊게 심어 주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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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복잡한 심경 이었지만 사실 있었던 그대로를 이야기 했다.
그래도 나는 통일교회의 열렬한 식구는 좋아 했다.
어떤 종교도 그러하지만 위의 간부는 썩어 있어도, 말단의 신자는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1985년 7월 8일 나는 통일 신학교 학생회장들의 요청으로 「피난길을 실현했다.

문선명과 함께 평양에서 부산까지 내려갔던 피난과정을 재현 하기위해서 임진강에서 영등포까지 걸어 주었으면 하는 부탁 이었다.

나는 임진강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것을 부자유한 몸으로 18키로의 거리를 도보로 강행했다.
이 때문에 발이 부어 올라서 병원에 다니게 되었다.

74세라고 하는 나이 에다가 너무나도 장시간을 걸었기 때문에 혈액의 순환이 나빠져
서 옛날에 골절했던 부위가 부어 올라 오는 것이 아닌가?

병원에서는 이 부어 오른 독이 뱃속으로 돌면 위험하다고 겁을 준다.

맨 처음 치료에서 약값이 2만원 침값이 5천원 교통비 4천원등 약 3만원인데 완치 하기 까지 나의 경제 형편으로는 지불이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학생회장에게 연락 해 보았으나 아무런 답변도 없었으므로 하는수 없이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간직해 두였던 수표를 은행에 넣고 한달에 백만원이란 비용을 들여서 겨우 치료할 수 있었다.
통일신학교의 교장 이었던 이요한 목사에게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치료비의 분담을 사정해 보았으나 이목사도 「자기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고 냉정하게 거절 당하고 말았다.
이요한목사 정도의 고참도 이렇게도 명확한 문제를 「어떻게도 할 수 없다 」고 한것은 사람을 이용 할 만큼 이용하고 다음은 쓰고 버리듯 하는 문선명의 체질과 독재 지배가 변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83년의 어느날 통일교회의 국제부에서 나에게 연락이 있었다.
「잠깐 물어 보고 싶은것이 있으니 와 주십시요」하고 하는 것이었다.
가 보았더니 「중앙일보」에 실린 사진을 보여 주며 이 사진을 알고 있는가 하고 국제부장의 안병일이 물어 왔다.
그 사진은 머리카락이 짧은 사람이 겨울용 방한모자를 쓰고 무엇인가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을 업고서 바지를 걷어 올리고 냇물을 건너고 있는 사진 이었다. 이 사진은 문선명선생이 박선생을 등에 업고 시냇물을 건너고 있는 사진이 아닙니까 하고 안병일이 물어 왔다.
나는 그 당시는 사진을 찍을만한 여유 같은 것도 없었고, 선생한데 업혀서 냇물을 건넌일은 없소 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국제부에 있던 직원들도 아무말도 못하고 이 건은 그것으로 끝났다고 나는 생각 했었다.
그런데 그해 5월 나는 일본에 가게 되었다. 동경 시부야의 본부교회로 안내되어 갔더니 아랫층 응접실에 걸려 있는 문선명 선생의 초기의 발자취 라고 하는 전시장에 중앙일보에 실렸던 사진을 벽의 크기만큼 확대한 것이 걸려 있었다. 일본 본부교회 간부들이 몰려와서 그사진 앞에 나를 세워 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 사진에 대해서 그들이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미국에 있는 문선명이 이사진을 맨 처음에 보고, 이것은 내가 피난할 때에 박정화를 업고 한겨울 추운때에 맨발로 냇물을 건너는 장면이다 라고 이야기 한듯 하다.


그 장본인이 왔다고 해서 일본에 있는 식구들이 감격해서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으면 하고 부탁을 했다.
한국의 통일교회의 국제부에서 말한 것 처럼 이런 사진은 촬영한 일이 없오. 문선명선생이 나를 등에 업고 맨발로 내를 건넌 일은 없다고.

말해 버린다면 문선명이 거짓말을 한것이 된다.

그렇게되면 일본의 식구들은 실망한것이 틀림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할수 없이 거짓말을 할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용매도에 있을때 청룡반도에서 돌아을 때에 만조되어 할 수없이 선생한테 업혀서 건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 15.6인 정도의 식구가 따라와서 우리들의 모양을 사진으로 찍어 놓았다. 이승만대통령의 부인 후란체스카여사가 동란의 사진을 수집하고 있어서 중앙일보에 제공한 것이겠지오 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식구들은 감격해 있었으나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대단히 괴로웠다.
이 사진이 또 1985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의 「비화6 25=정일권회상록」에 기재 되었는데 중앙일보에 실었던것 보다도 훨씬 또렸하게 보였다.
그 사진을 보니까 찍혀져 있는 것이 문선명과 내가 아닌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사실이 아닌것을 사실인것 처럼 만들어 내는 것은 통일교회로서는 극히 보상적인 것으로서 그들이 선전하는 때의 상투적인 수단인것이다.


원리는 김백문(金百文)의것 도용


서울의 본부에 나가게 되면서 부터 나는 창립당시에 수고한 많은 식구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탈퇴한 사람도 많고 또 그속에서 버티고있는 사람도 있었다. 년로(늙으신)한 부인들이 더욱 불쌍했다.
복귀원리를 구실로 문선명에게 몸을 마구 짓밟히고 재산도 가족도 잃고 생활에 어려운 처지가 되어 버린 그 사람들은 문선명을 원망하며 이런 인생으로 만들어 버린 하나님도 나쁘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통일교회는 표면적으로는 대단한 세력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 같았으나,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돈에 얽힌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1984년 7월 20일 문선명은 탈세한 죄로 아메리카 커네티같주의 렌단베리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함께 수감되어 5개월 가까이나 형무소에서 문선명과 생활한 일본인 가미야마(챠ㄴU)(그후. 일본 통일협회의회장에 취임 92년)은 형무소에서의 문선명 선생의 태도는 훌륭했다는 등으로 발표했으나, 그것은 문선명이 형무소에 들어가는 일이 세번째로서 이미 길이잘 들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 이야기다.

흥남에서는 평양의 여성들과의 성문란한 행위로 사회질서 문란죄, 서울에서는 식구들의 위증과 우리들의 필사적인 행동으로 증거인멸을 한 덕택에 무죄로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대로 라면 장기형이 되는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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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탈세사건 외에도, 부동산취득을 둘러 싼 미묘한 소문도 얽혀있다. 1년을 넘게 옥중에서 보내고 다음해 8월 20일에 석방 되었으나, 통일교회는 문선명선생은 사실 무근이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35만명이나 되는 미국의 목사에게 통일원리의 비디오나 책을 증정하며 막대한 돈을 써서 출소잔치를 하는것 보다도 좀더 발밑을 비쳐보는 행동이야말로 진짜 원리가 아니었을까.

더구나 통일교회가 보배처럼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창조, 타락, 복귀의 원리」는 문선명의 발안(發案)이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 밑에 최선길 부인과 다니고 있던 문선명이 김백문의 논리를 그
대로 도용 한 것이다.

되는데로 외워서 논리일관이 되지 못한채, 종이에 연필로 쓴 문선명의 메모를 유효민이 정서해서 정리 하고, 유효원이 논리에 모순없이 구성 한 것이다.
통일교회의 원리는 죽은 유효원이 진짜이며, 원칙대로 하자면 오직 유효원이 진짜 교주이다. 그 큰 은혜를 입은 유효원의 우수한 두뇌와 인격을 질투한 문선명은 그 후 갖은 수단으로 몹쓸짓을 곁드려서 드디어는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도 있다. (후술)

통일교회의 원리는 문선명이 김백문의 는리를 도용해서 유효원이 정리해 낸 것이라고 내가 지적하는 근거는, 김백문 저작 「기독교 근본원리와 성신신학」을 읽으면 일목요연하다.


이복헝제 결혼 의혹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어느 때인가 부산에 있는 송병호 가족이 별안간 나에게 전화를 해서 부산의 대학병원에 송사장이 입원중인데, 박선생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송사장은 위독한 상태 입니다 라고 말한다. 나는 바로 달려 가고 싶었으나 그때는 나도 마침 병이 들어서 몸을 가누기 조차 어려운 형편 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 병이 웬만하면 곧 찾아 가리다 라고 말하였는데, 3일후에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다.

이 죽은 송사장이 생전에 몇차례 나에게 문선명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일이 있다.
문선명의 처인 학자 이외의 여자에게서 난 아들과, 간부의 딸이 결혼했는데 이것은 남매결혼이 아닌가?
그 간부 부인은 9세의 차이가 크게 있어서 웬만해서는 결혼의 상대가 될수 없는 터 인데 ,
36가정 (후술)의 하나로 되었다.
실은 그때 그처는 문선명과의 복귀로 임신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적당한 식구가 없어서 김영희나 이성례의 경우처럼 부탁 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할수 없이 한 간부에게 맡겨서 문선명이 임신시킨 식구와 결혼 시켰던 모양이다.
문선명의 아들인 그남자 아이와, 간부와 그의처 두사람 사이에서 낳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문선명의 아이인 딸이 결혼 하는 것은 남매 결혼이 틀림없다.

한국의 관습상 남매결혼이란 말도 되지 않는 것으로서 있어서는 않되는 일이다. 나는 열심이 그렇지 않다. 무슨 착오 이겠지 하고 그를 이해 시키려고 애썼다.

이 송사장은 부산에서 내가 문선명을 소개 해서 식구가 되었다. 서울의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출신으로 매우 친하게 지내고있었다. 부산의 세관과장을 퇴직하고 나서 통관사무소를 경영한 사장이었다
통일교회가 드디어「원리해설」을 출판하게 되었을때 내가 부탁해서 50만원의 자금을 내 준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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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 동안은 왜 열심으로 나오는식구로서 제법 많은 헌금도 하였는데, 문선명이란 남자의 정체를 보고는 크게 실망했다고 노해서 탈퇴해 버렸으나 그후에도 문선명의 일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 송사장이 자신을 가지고 사실이다 라고 말한 이상 나는 반론 할 수 없었다.
또 당시는 광산에 있어서 36가정의 경위를 몰랐던 나에게는 또 반론의 재료도 없었다.

 

원리대로 실천한 김덕진(金德振)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복귀문제로 무어라 해도 기록에 남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앞에서도 기술한 바 있는 김 덕진의 문제이다.
서진광산 시절에 조동석이 서울에서 김덕진을 데리고 대구로 왔다는연락이 있어서 내가 대구로 가니까, 문선명이 김덕진은 서울에 문제가 많으니까 광산에 있는 박정화 한테로
데려 가라고 명령해서 데리고 왔다고 한다. 김덕진은 본래 음악에 재능이있는 예술가로서 솔직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나는 김덕진과 같이 광산으로 돌아 왔으나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깊은 산골에 오게된 경유를 그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문선명의 원리를 듣고, 문선명 한테 복귀를 받은 여자 한테서 자기도 복귀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도 다른 여인에게 복귀 해 주었는데, 그것은 원리대로 실천 한것 뿐이다 라고 말한다. 문선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 유신희 한테서 김덕진은 원리대로 세차례에 걸쳐 복귀를 받은 모양이다.

그 유신희 한테서 복귀를 받은 그는 종로 5가의 엄순태의 집에서 5인의 여자들을 복귀 시켰다 .그 여자들이 또다른 남자들을 복귀시켜 불과 한주일동안에 70여명의 남녀가 복귀 의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점점 넓혀져 갔던바 복귀라고 하는 남녀의 섹스 소문이 협회장인 유효원이나 문선명의 귀에 들어갔다.
그 결과 문제의 김덕진을 서진광산의 나있는 곳으로 추방해서 두번 다시 서울에 나타나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광산으로 온 김덕진은 광산의 굴속에는 들어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 혼자 처 밖혀
서 오직 열심히 원리에 근거한 작사나 작곡을 하고 있었다. 나는 김덕진에게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정직하게 말해 주었으면 하고 물었더니 나는 원리대로 실천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당신은 원리대로 실천 한것이니까 당신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약 2년간 나는 그와함께 대화했다.
김덕진은 문선명 한테서 오는 송금이 뚝 끊겨서 먹을것도 없을 때, 또 서울로 가서 재차 복귀의 실천을 하기 시작 했다.

또 유효원이 나에게 연락이 왔으므로, 나는 서울로 가서 복귀의 실천을 하고 있던 김덕
진을 대구로 데려와서 현재의 부인과 결혼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김덕진은 원리대로 실천한 것 뿐이다. 무엇이 나쁘다고 할 것인가?
문선명은 원리의 설교를 해서 일일이 셈 할 수 없을 정도의 가정을 파괴하였으며 김덕진도 문선명의 원리대로 실천 했을 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을 산속의 광산에 가두어 두고, 서울에는 두번다시 나타나지 못 하도록 강금한 것은 이해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때의 나로서는어떻게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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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가정의 역할

 

속출한 재림 메시아들의 대책

 

도리켜 생각해 본다면, 원리대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 남자 식구를 복귀시켜 그남자 식구들이 또 다른 여자식구를 복귀 시킨다고 하는 방식으로 이세상의 전인간을 복귀하여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은 당연 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중에 「나만이 재림 메시아다. 저 문선명은 엉터리고 사단이다」라고 부르짖어 자기의 복귀를 받지 않으면 진짜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몇 사람씩 각곳에 출현해서 그사람에게서 복귀를 받고자 모여드는 신자들도 늘어 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되니까 문선명 은 생각끝에 「36가정」이 란것을 생각해 냈다.

문선명이 세계의 인간을 모두 복귀해서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므로이 36가정만을 직접복귀(혈대교환)시키기로 한것이다.

그 후에는 진정한 부모가 「성수」를 뿌려서 새로 결혼하는 신부에게 축복을 준다고 하는 형태로 바꾸어 「합동결혼식」을 하기로 한것이다.

36가정이라고 하는것은 이러한 경로로 만들어 진 것인데 그러면 왜 36인가?

「구약시대」의 12지파,「신약시대」의 예수의 12제자, 그리고 문선명의 원리를 「성약시대」라고 해서 12제자, 합계 36가정을 택하여 빼앗긴 종적(縱的)인역사를 횡적(橫的)으로 벌려 놓코, 탕감복귀 한다는 조건만을 세워 구약, 신약, 성약과 전세계를 탕감복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36인의 신부는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나 상대가 아니고서는 자격 이 없다고 되어 있다.

복귀라고 하는 것은 섹스를 뜻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혈대교환(血代交換)」이다.

제2의 아담인 예수가 이루지 못했던것을, 제3의 아담(요컨대 문선명)이 이세상에 재림해서,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한다.

이것은 요컨대 메시아가 세계의 대표로서 6인의 마리아와, 36가정의 아내들과 섹스를 하면, 더러워진 피가 깨끗하게 된다고하는 것인데, 이 의식을 혈대교환(血代交換)이라고 한다.

그리고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한 36가정에서 태어 나는 아이들은, 죄없는 하나님의 자녀 뿐이며 이러한 사람들이 세계에 널리 퍼짐으로써 죄악이 없는 세상에 태어 난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에는 36가정과 6마리아와 같이 문선명과 직접 간접복귀의 혈대교환(血代交換)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 한다. 제아무리 식성좋은 문선명이라도 전부 먹어 치울 수 없는 많은 수 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문선명이「성수」를 뿌림으로서 그것에 대신하고 있으며 섹스 3회의 방법은 그대로 하고 있다.

또 일본에서는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피나누기 라는 표현으로 인식되고 있는것 같은데, 통일교회에는 피나누기란 말은 없다. 어디에선가 잘못 전해진 것이 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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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6가정은 혈대관계를 한 신성한 가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통일교회의 식구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어떠한 중요한 일이 생기면 대개 이 36가정에서 그 책임자를 선임하게 된다고 하는 중요한 지위 에 있다. 이 가정에서 어느 한쪽이 사망한 가정이 5가정 또 탈퇴한 가정이 9가정이 있다.
이들 14가정의 존재가, 문선생의 원리의 어디엔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생각케 해 준다.

원리에 의하면, 잃어버린 해와를 도로찾고, 6마리아도 도로 찾는다면,참부모와 함께 살수 있게 되어서 타락했던 인간이 창조 본래의 인간으로 회복되고, 그 원리대로 생각하면 두번다시 이세상에는 이 36가정과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죽음도 없고, 고통도 없고, 타락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되는데,어찌하여 이 36가정중의 14가정이 죽든지 탈회 하던지 하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그 원리에 잘못이 있음으로써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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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된 공로자

 

또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 라고 한다면, 초기(처음)부터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양말을 짜 신긴 옥상현*, 자기 인생의 절반 이상을 문선명에게 바쳐 충성한 96세나 되는 그녀가 셋방살이로 겨우살아가고 있는 상황을 문선명은 무슨짓을 해서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본래 송도욱 장로의 처 였던 박봉식집사의 경우를 보자.

문선명이 송도욱 장로와 오명춘* 집사를 결혼 시켰기 때문에, 홀로 되고 말았다.
그후 남편도 곧 죽고, 갈곳이 없어진 박봉식 집사는 교회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늙은이는 더이상 소용없다고 하는 교회의 방침으로 교회에서도 쫓겨나서 먹고 살기도 어렵게 되었다. 열심히 문선명을 받들어 온 여인들을 어째서 이다지도 몰인정하게 못본체 내버려 둘 수가 있을까?

초기에 자기가 복귀 시킬 때에는 좋아서 함부로 아무짓이나 하고 그 젊음과 아름다움과 돈이 없어 지니까 곧바로 따돌려 치우고, 다른 여자에게로 옮겨가서 두번다시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것은 원리에 써 있지 않다.

이것을 여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 박정화처럼 부러진 다리를 끌며 함께 남쪽으로 피난 해 온 사람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만들어서 배신자로 소문을 퍼트려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원고를 완성해서 진상을 밝혀야겠다고 결심 했다.
아무리 생각 해봐도 내가 문선명을 배신 한것이 아니라, 문선명이 나를 배신 한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선명보다 뛰어난 인격자-유효원

 

다음에는 유효원씨에 대해서 밝혀 두고자 한다.

이것을 근거로 유효원이 구성 집필한「원리해설」를 완성 할 뿐만아니라, 불구의 몸으로 정력을 다해서 전도사 양성에 밤낮이 따로 없이 충성을 다했으며, 36가정을 선정 할 때에는 그가 고생해서 각자의 짝 짓기를 결정하는 임무를 수행 했다.

유효원은 구 경성제국대학의 의학과 중퇴자로 자기가 환자의 몸 인데도, 자기병에 대해서는 자제히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 결핵성 고관절염으로 다리뼈와 환도뼈가 유착되어 앉을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수술을 받으면 완치가 안될 몸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것을 알고 있는 문선명이 와서 하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수술하도록 명령 하였다.
문선명은 그때 그래도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것은 하늘의 명령에 거역하는 것이다 라고 까지 말했다고 한다.
유효원은 울면서 수술 하는것을 거부 하였다.
자기는 주사로 살아가는데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고 나에게 의논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문선명한테는 거역하지 못하고 할수없이 수술을 받아 그대로 죽고 말았다.
이때의 문선명의 비정한 행실은 내부에서도 간접살인 이다 라고 까지 말했을 정도이다.
유효원의 장례식이 끝나고 산에서 돌아온뒤 교회에서 간부들이 모여 않은 자리에서 효원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었나 했더니 죽었구먼 !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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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가 좋은 인격자로 신자들의 인기가 대단 하였던 유효원에게 문선명은 많은 비밀을 지령하고 후에 위험 한 존재 임을 느끼고 유효원을 거세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또 당시 미국에 있던 대간부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36가정의 멤버였던 이기석, 박종구(주.이 두사람은 당시 이미 죽었었다) 두 사람은 영계에서 대단히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유효원씨는 제일 말석에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그는 통일세계 라고 하는 잡지에 이 기사를 기재하고 청평기도원에서도 발표 하였다. 참으로 죽은 사람에 대해 가혹한 매질이 아닐수 없다.

유효원이야 말로 통일교회 최대의 공로자인데도 볼일이 끝나면 들어덤벼서 못살게 굴고는 죽은 다음에도 매질을 하는 것이다.


재정을 이룩한 실업가 - 유호민


유효민의 이야기도 해 두어야겠다.

유효민은 초기에 경제적 사정이 대단히 어려웠을 때에 푸로마이드 사진을 제작 판매하는 아이디어를 발휘해 당시의 식구들의 생활을 지탱시켜 주는등, 통일교회의 발전에 공헌한사람이다.
또 산탄공기총을 발명하여 그것을 제조 판매 함으로서 통일교회의 경제적인 토대를 이룩한 공로자,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통일산업주식회사」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 공헌자인 유효민에게는 주권을 단 천주를 주었을뿐(후에 다 회수하였지 만) 공기총의 발명특허권 (실용신안국제특허 )은 문선명의 명의로 기증하는 것으로 공증되어 조립부장이라는 직책만을 부여했다.
유효민은 그후 을지로의 예화 공기총 센타에서 백구섭에게 영업부장 일을 맡기고 계속 밖에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30원짜리 차값까지도 영수증을 요구 할정도로 무섭게 감시를 당했다고 한다. -문선명의 지시였을 것이지만, 나와 같은 모양으로 그를 통일교회에서 몰아내려고 한 수작이었다고 생각된다.

드디어 유효민은 통일교회와 인연을 끊고 1972년에 탈퇴하고 말았다. 나의 다음으로 그림자 같은 존재가 탈퇴 한다고 하는것은 유효민이 두번째이다.

이와같이 가장 최초의 비서였던, 박정화를 배신하고, 두면째 유효민을 못견디게 굴어서 탈회 시키고 ,제3의 송도욱이나 교회최고의 두뇌이자 공로자인 유효원을 사망케 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인지, 문선명의 계획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문선명과 같이 있었던 1953년에서 1956년에 서진광산으로 갈때까지의 말하자면 통일교회 발전의 제일 고생한 무렵에는 문선명의 친척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후에도 도중에 문성균, 문용선, 문승룡 두사람이 들어 왔을 뿐이고, 통일교회의 경제가 커 지니까, 거의 대부분의 경제지배를 문선명의 친척 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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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가 아닌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것은, 문선명 자신이다. 통일교회의 재산을 안심 할수 있는 자기의 친척에게 넘겨서 장래의 생활기반을 확립하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제7장 참조)


화제의 다보탑을 수출한 일신석재사장-유호영


나는 어느때 일신석재사장인 유효영(註 - 92년에 그만두고 탈회)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유효영의 이야기로는 자기가 경영하고 있는「일신석재주식회사」에서 열심히 지혜를 짜서 연구한 결과 다보탑을「100분의 16」크기로 축소 한 것을 제작해서 일본에 판매하여본 결과 예상외로 수출이 잘되 매월 20억원 상당을 수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수입에 탐이난 문승룡(문선명의 6촌)은 다보탑 제조부문은 자기가 그 나머지 부분만을 유효영 사장이 담당하는 공장 분활 경영안을 끈길기게 요구했다. 다보탑부분의 수입이 회사 전체 수입의 95%나 차지했다.
지금까지 참고 견디어 온 나에게는 5%만을 건네주고 남어지 95%를 문승룡이 가로 채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림도 없는 생각이다.

이회사 일신석재는 유효영사장이 사장겸 목수겸 노동자로 스스로 청소까지 해가며 여기까지 키워 온 회사이다.
그런데도 전연 관계가 없었던 사람이 뛰어들어 빼앗으려고 하니까 어림도 없는 짓이다 라고 말하며 유효영은 크게 싸웠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부산-대구-서울시대, 북조선에서의 형무소 시대의 일을 생각 하였다.
그 당시는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라고 우러러보며 원리를 듣고 새로운 식구를 모으기에 필사적 이었다. 이 식구들과 함께 원리 그대로의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매일처럼 노동했다 여성들은 재산도 질투도 생각지 않고 원리에만 열심이었다. 자아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오로지 원리의 달성을 기원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력하였다.


문선명의 부정과 범죄

그런데 그다지도 어려웠던 시대가 지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까 들어보지도 못했던 문선명의 친척들이 몰려 들어 차지하고 문선명 일족의 천하가 되어 버렸다.
문선명은 박모라고 하는 사람에게 자금을 건네주고 그 박의 명으로 몰래 부동산을 구입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세무서의 조사에 들통나 자그만치 1억 2친만원의 막대한 세금부과에 놀란 박이 밝힘으로 통일교회의 문선명이 부동산을 부정으로 구입하고 있던것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행위 가 메시아를 자칭하는 사나이가 할짓인가?

문선명 이 탈세관계로 미국의 형무소에서 복역한 그것도 통일교회에 발표대로 「문선명선생은 아무 죄도 없는데 복역했다. 」고 하는것이 된다. 그 복역하고 있을때에도 막대한 돈을 마구 뿌리며 지내고 있다고 폭로되었는데, 타인의 명의로 부동산을 부정구입 하는 맞잡이나 돈이 되는 기업은 거의 문선명의 친적에게 빼앗기고 있는 현실을 볼때 대관절 이것이 종교 단체인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선명이 나에게 이야기 해 준 원리와 이상세계 그리고 그 이상세계의 공생 공의(共生公義)주의 시대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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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일족의 「더 돈을 보내라」「빨리 현금을 보내라」고 하는 소리가 되어 세계로 날은다. 특히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통일교회의 실태를 모르는 식구들이 이상세계의 실현을 믿고 돈 수집에 열심히 뛰어서 영감상법(靈感商法) 이라고 하는 반사회적인 큰문제로 발전했다.
초창기의 노고를 알지 못하는 일족이 저지른 폐해(弊害)라고 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법에 저촉되 어 훔치더라도 하나님은 용서해 준다」고 여자식구를 꾀어서 문선명의 친척인체 하는 말투로 물욕 금전욕에 한층 더 박차를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한국은 일제지배로 피해를 받았다. 그 일본에 원한을 갚기 위해서도 일본의 돈을 싹싹 긁어 내야 한다고 문선명이 호언하고 있던 사실(여러사람의 간부가 들은바 있다)을 일본의 순수한 교인들은 알고 있을것인가?

원리의 이상사회등은 꿈같은 이야기일뿐 재림메시아의 아버지는 별것 아닌 허상에 불과 하다는 것을 빨리 알아야할 것이다.


도대체 통일교회 란 무엇인가?

종교인가?

단순히 배금 기업체인가?

문선명 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메시아를 자칭 하고 있을뿐이라면 원리 는 어떻게 된 것 인가?

문선명의 행위가 원리에 따라서 복귀를 한 것이라고 한다면 원리대로 6인의 마리아로 충분하지 않은가?

6인의 마리아의 정조를 빼앗앗을 뿐만아니라 그외에 더 복귀라고 하는 명목으로 헤아릴수 없을 정도의 많은 여성을 범하고 재산을 착취 한것은 용서할 수 없다.
참 어머니로 한다고 속여서 처녀인 이성화를 서울역전의 여관에서 범하고 또 이순철도 같은 구실로서 범하고 그밖에 김영희라고 하는 처녀도 같은 구실로 복귀해서 임신 시켜서 학생 이였던 그녀의 인생을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것은 재림 메시아를 자칭하는 문선명의크나큰 범죄이며 통일교회로서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김영희의 비찰


연세대학교의 우수한 학생이었던 김영희의 경우를 특기하면 김영희를 임신 시킨것을 알게 된 문선명은 자기의 입장이 위태로울 것을 두려워해서 그녀를 같은 대학의 학생으로서 교인이 된 순수한 청년 오승택과 함께 일본으로 가도록 계획을 꾸몄다.

외국에서의 생활을 보장 한다고 약속해서 부산에서 일본으로 탄피를 밀수출하는 작은 배
에 숨겨서 밀항했던 것이다. (이 비용은 오군이 등록금으로 아버지를속여 받은것)
일본에서의 두 사람은 언어도 통하지 않고 밀항자의 몸으로 입원도 할수가 없어서 극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해산 하였다. 젊은 오승택은 갓난애기의 탯줄을 자기의 이발로 끊고 애기를 출산 시켰다고 한다.

가지고 왔던 얼마 안되는 돈은 다 써버렸고 문선명 한테서의 생활비도 오지 않아 기다리다 지쳐버린 오승택은 일본으로 밀항시킬때 문선명이 부를 때까지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있었지만, 문선명한테로 돌아 오기 위해서 또 다시 밀항을 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대단한 고생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우선 오청년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직접 문선생에게 이야기 해서 생활비를 얻어낼 예정 이었다.

오승택은 문선명을 만나서 자기들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 하고 생활비를 구하였더니 문선명은 이것을 한마디로 거절 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가혹한 이야기는 들어 본 일이 없다. 보통사람이라도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에게 이와같은 처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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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재림 메시아」라고 하는 그사람이 자기가 책임을 지는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다지도 비정한 배신을 태연하게 당하였으므로 오승택은 몹시 노하여 그길로 지금첫 재림메시아로 믿고 우러러 오던 문선명과 결별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때 문선명은 그런 돈은없다. 너희들이 생각해서해 ! 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문선명 옆에 있었으므로 잘 기억하고 있다.
문선명의 말에 오승택은 노발대발 하며 무슨 말인가? 잘 기억해 두라!
너는 사단이다 ! 하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가고 말았다.
김영희가 임신한 당시 연세대학교에서 입교한 세사람의 학생 가운데 사정을 듣고 상의를 받은 오승택이 문선명 메시아와 통일교회를 위하는 것 이라고 믿고서 내가 맡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크리스챤인 부모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고 부산에서 김영희와 만나서 소형 어선을 타고 일본 규슈로 밀항한 것이다.

 오청년이 노해서 뛰쳐나갈때 그자리에 7,8인이 있었으나 누구도 내심으로는 괘심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나는 그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동 ·서도 모르는 일본에서 김영희는 오로지 돈을 가지고 돌아을 오승택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동안의 나날은 김영희와 그 간난애기(문희진)에게는 그 고생 이야말로 대단한 것 이었다.

그러 한 김영희 모자를 일본 오오무라 수용소에서 발견한 한국인의 황모씨가 그녀를 한국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돈도 여권도 없는 김영희는 오오무라 수용소에서 3개월간이나 수용 되었다고 한다.
김영희가 아이를 데리고 돌아 왔으므로 문선명은 할수 없이 아이만은 자기의 호적에 입적 시켰다 아이의 이름은 "문희진" 이라고 한다.

이 아이는 황모라고 하는 사람의 부인이 숨겨서 양육하고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죽어 버렸다.

중학교 여름 방학때 하기 전도 나간다고 큰 학생을 따라 나갔다가 무더운 때라 객차에 오를때 두손으로 붇잡고 오르는 난간을 붇잡고 뒤로 잔득 느러져 시원하게 바람을 쏘이다가 역에 들어갈때 역 시설물에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으로 죽었다.

이사건에 대해선 영계가서 소년들을 동원하러 영계에 갔다고 미화 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 이외에는 「어린양의 잔치」를 거행한다는 구실로 처녀인 이성녀를 복귀해서 그녀에게도 아이를 낳게 했다.
그 아이도 어느 간부의 아들로서 양육 되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다.

이러한 일이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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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사람의 어머니


납득되지 않는 사실은 그밖에도 있다. 최원복의 문제이다.
이 사람은 「7.4사건」때에 문선명이 구속되어 교수들이 사표를 내고 졸업반 대학생들이 퇴학을 당하는 소란이 일어 났을때에 우연히 나와 만날 기회가 있어서 대단히 걱정을 해 준 사람이다.
「나도 힘이 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수가 없네요」하며 아쉬워 했다.
그녀는 이미 통일교회에 입교해서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그후 가정도 버리고 문선명 한테로 달려 왔다.
무슨 일에서인지 식구들은 최원복을 「어머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어머님」이라고 하는것은 원리의 어느곳에 나오는 것일까?

6인의 마리아는 예수가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는데, 그것을 못했으므로 예수는 죽었다. 그래서 제3의 아담이 이세상에 와서, 6인의 유부녀를 마리아로 복귀시킨다고 하는 구실로 문선명이 섹스를 하고 그 육체도 재산도 빼앗았다.

그리고 처녀 한사람을 선택하여 「어린양의 잔치」라고 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문선명과 처인 한학자를 「참아버지」「참어머니」라고 부르게 한다.

참어머니는 이미 있는데도 「최원복어머니」라는 명칭은 원리가운데 어디에서 끄집어 낸 이론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선명은 6인의 마리아를 선택 하였고 그중에서 한사람을 특별히 어머니 라고 부르게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문선명 자신이 좋아서 열을 내고 있는 여인 이었으니까, 어머니 라고 이름을 붙인것 뿐이리라. 대단한 이야기다.
나중에 말하자면 문선명의 처인 한학자의 어머니 홍순애가 「미국에가 있는 최원복은 2호다. 첩이다」라고 어린아이들에게 충동질해서 비상수습책으로 선화예술 학교의 교장으로 최원복을 한국으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이 학교는 박보희의 동생 박노희가 이사장으로 있었는데 교장이란 명칭도 다만 겉치레
의 이야기일뿐 문선명이 당황해서 붙여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원리」를 내세우며 뒤로 돌아서면 전연 종교인 답지 않은 문선명의 언동은 여전히 변함없이 여자문제나 부동산의 부정구입 탈세사건 「남의 돈을 훔쳐 와도 하나님은 용서 한다」고 하는 교사등, 일일이 다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이지만, 한가지만 더 나의 체험을 써두고자 한다.


나의 부끄러운 체험

 

나는 제3장에서 문선명으로부터 이순철이 만든 영계의 역사에 관한 시험을 치라는 이순철이 강요에 문제를 보고 답을 썼더니 「됐어 합격」이야 라고 말했다고 썼는데, 사실은 이때 문선명의 눈앞에서 6마리아의 한사람인 이순철과 섹스를 하도록 명령을 받았던 터였다.
 

나는 이미 문선명이 복귀한 6마리아 중 한사람 한테서 복귀를 받았으므로 문선명의 원리에 말하자면 유자격자였다.
그런 나에게 문선명은 이순철과 이자리에서 하라고 재촉했다. 메시아의 명령에는 따를 수 밖에 없어 나는 그 자리에서 이순철과 섹스를 하고 「합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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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술한 바와 같이 남편 몰래 집에서 많은 돈을 가지고 나온 이순철은 격노한 남편한테 쫓기고 있었다.
그래서 위험을 느낀 문선명과 이순철과 함께 여기저기 도피하며 5박을 하면서 부산으로 간것인데 그때도 같은 것을 명령 받았다.

남편의 노여움을 모른체 두사람은 이순철이 가지고 온 돈으로 호화스런 강산유람의 여행을 했다. 그리고 매일밤 두사람의 섹스를 문선명은 나에게「보라」고 말하며 「자네도 하게」라고 명령했다. 거기에는 종교도 없었고 원리도 없었다.

성욕에 놀아난 남녀 세사람이 귀신들린 광란의 성희가 아닌가!

문선명이 말하는 복귀의 정체를 나는 그때 실증이 나도록 체험 하였다.

또 부산의 영도의 밤 비좁은 방에서 자고 있는 나의 옆에서 문선명은「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돼 잠잘코 있어」라고 말했다.

재림메시아라고 자칭 하려면 원리대로 하였을 뿐이지, 왜 감추려고 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해못할것이 많이 있지만 원리를 앞세워 가장하고 해괴한 복귀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피할런지!

 

붉은 용(龍)이 세상을 미혹

 

자칭 재림메시아의 문선명은 그원리를 김백문으로 부터 배워가지고 평양으로가서 파렴치한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어 실형을 받고 복역한 후에 서울로 왔다.
1954년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 여러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통일교회는 점점 성장해서 일본에는 최봉춘(일본이름 니시가와)을 밀항시켜 해외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또 김상철과 김영운이 미국에 포교하여 미국에서도 식구들은 문선명을 아버지로 우러러 재림메시아로 믿고 있다.

그러나 오늘에서 원리와는 관련이 없는 문선명의 행동으로 많은여성들과 남성들이 희생되어 죽은 시체가 가득 쌓인 속에서 원한의 소리가 들려 오는듯 하다.

그리고 지금은 「복귀 실천의 비밀」이나 「실천의 치부」를 알지 못하는 철부지 교인을 전면에서 내세워서 가면을 쓰고 있다.

미국의 형무소에 들어 갔던것을 영광된 큰 기적등으로 선전하여 옥중에 있었어도 막대한 돈을 쓰고 있었다. 그 돈은 여러 식구들이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귀 한 돈인 것이다.

수년전 미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여신자가 한국 인삼차를 팔기 위해서 흑인촌을 찾아 갔다가 집단으로 윤간을 당하고 죽음을 당했다.

흑인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도로에 그 시체를 끌어 내다가 차로 몇차례 깔고 뭉개버린 사건 이었는데 시체의 주머니에서 통일교회 회원증이 나와서 신원이 판명되었다.

이와같이 비참한 희생으로 들어온 돈을 물쓰듯 써버리면서 문산명은 재림메시아를 자칭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식구들이 총동원되어 영감상법(靈感商法)이나 초코렛 껌팔기로 술취한 사람들의 희롱을 받아가면서 돈을벌어, 그돈을 전부 문선명 한테로 보내진다.

그렇게 보내진 돈을 쓰는 명목으로 문선명은 엉뚱한 계획을 꾸며 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국제 하이웨이 건설계획」이다 현해탄에 해저터널을 통해서 일본, 한국 , 중국, 러시아,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 하이웨이를 만들자고 하는 것이다.

통일교회의 내부에서 조차 「실현 불가능」이라고 실소의 소리가 있는데도 말이다.

재림메시아! 문선명이 이세상에 나타나서 국제 하이웨이를 건설하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한다는 거야!

국제 하이웨이건설 같은 것을 계획하기 전에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해서 참 부모가 되어있을 터인데, 그 재림 메시아는 무엇보다도 죄악이없는 세상을 만들어서 에덴의 동산을 복귀해 놓는것이 본래의 그가 할일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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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은 미국의 신문이나 매스컴에서 자기를 「목사」라고 자칭했다. 문선명은 신학교에 다닌 일도 없고, 목사로서의 안수 받은 일도 없다.

만일 통일교회 계열의 신학교에서 얻은 자격이라면, 질문이 있다.

문선명은 처음 부터 자기는 재림 메시아이며, 제3의 아담이다. 그리고 자기의 할 일은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통해서 본래 그대로의 죄없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것이 사명이다 라고 계속 말해 왔다.

그렇다면 재림 메시아가 목사로 변신해서 어떻게 해서 사명을 다 할수 있는가 !

스스로 지 금까지의 속임수는 말 할것도 못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

문선명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 와서 이름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성경의 「요한계시록 12:91에 이 세상에는 끝날에 붉은 용이 나타나서, 이세상을 미혹케 한다고 씌어져 있다.

자기의 이름에 용(龍)이 들어있는 문용명(文龍明)은 그것에 착안해서, 서둘러 이름을 문선명으로 바꾼 것이 었다.

이것은 자기 가 붉은용=사단 임을 인정 한것이 된다. 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천하에 내밝혀 쓴 이 고백에 거짓은 없다.

문선명 이야 말로 진짜 사단이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 붉은용 문선명으로 인해서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이상, 기만 당하거나 희생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해서 나는 이 원고를 목숨을 걸고 발표 할 결심을 한 것이다.

 

 

진짜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속에서 부터 기원하는 바이다.

 


「1985년 8월 31일 - 1993년 9월30일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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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증언-우리들이 체험한 사실

 

 

통일교회의 경제적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유호민-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문선명의 초대 비서적 이었던 박정화씨의 뒤를 이어 2대의 비서역 사촌간인 유효원, 유
효영 형제와 함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간판을 걸고 발족에서부터 기반 만들기에 크게 공헌

 이화여자대학사건으로 문선명과 옥고 동참
자이며, 36가정의 멤버, 1972년 탈회, 현재
서울거주, 회사사장, 현 72세


나는 통일교회가 정식으로 창립되기 전의 1954년 1월 4일에 부산에서 사촌인 유효원, 유효영과 함께 문선명의 추종자가 되었다.

박정화씨는 그 무렵 식구(신자)의 중심적 존재로서 문선명의 한 팔로서 활동하고 있었고, 나 또한 대단히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는 문교주가 박정화씨를 밖으로 멀리 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원인은 박정화씨는 너무나 문교주의 비밀을 지나치게 알고 있는 처지다. 만약 그가 수사당국에 모든 것을 폭로하게 되면 문선명 선생은 중죄로 될 것은 물론 그가 반대하면 문교주의 모든 행각이 다 탄로 나므로 이 사회에서 파렴치범으로 이 땅에 있을 곳이 없게 된다.
그러니까 박정화는 요주의 인물로서 교인 식구들이 접근치 못하도록, 박정화의 비리에 대한 뉴앙스를 풍겼다. (전매청에 새끼 남품한 돈을 잘라 먹었다는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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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속에서 박씨를 「대구의 할머니들이 박정화는 대사단이다」라고 꿈의 계시를 받았다고 ,귀속말로 퍼뜨렀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박정화씨를 멀리 하기 위한 구실이며, 뒤에서 문선명이 시킨 음모였다고 생각한다.
박씨는 문선명의 여자관계나 돈 출처 문제를 너무나도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소외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상투적 수단이고 나의 경우도 그러 했다.

내가 처음 성경원리를 들을 무렵, 문선명을 위시해서 모인 식구들은 , 그날 먹을 것도 어려운 형편이어서 북한에 있을 때에 사진관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나는 푸로마이드를 제작 판매 하는 일을 제안했다.

이것이 적중해서 하루에 일만 장이나 매상이 있었다.
한장에 7원 전후로 도매한 것을 학교에 못가는 전쟁고아들이 담배나 라이타돌 등을 판자에 넣어 행상하는 때가 유행이 되었다. 10원씩에 팔고 매일 7만원정도씩이나 현금수입이 되었으므로 부엌사정은 단번에 해결하였다.

박정화씨가 말한 바와 같이 남자 식구들은 작업을 분담해서 일을 하고, 여자 식구들은 가위로 잘라서 정리하는 일에 몰두 하였다. 이 일은 2년정도 계속되 었다고 생각한다.
공기총은 1961년부터 시작하여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서 일본에 수출하였으나 공장도 가격으로 1정에 1만원(지금이라면 30만원)에 15만정 이상이 팔렸다.도합 15억원 이었으니까 통일교회에서는 꽤 큰 재원이 되었다.

산탄 공기총을 발명한 내가 「통일산업」의 사장이 되지 못했던 것은 소위 7.4사건(이화여대 14인 퇴학사건)문교주와 옥고를 같이 치렀음으로 전과 기록으로 총포제조 허가조건에 하자가 있었다.

그래서 김인철씨가 사장 문선명의 6촌 문승룡이 공장장,그 아우가 생산부장이 되고 발명자인 나는 "조립부장" 이라고 하는 세상에 유래없는 기묘한 직 책을 받았다.
총의 제 2차특허권은 문교주 지시로 문선명의 명의로 양도 공증까지하였다.

주요간부는 문선명 친척들 뿐, 그들은 한사람이 한대의 차를 가지고 화려하게 타고 돌아다녔으나, 나는 도보를 걸어다닐 수 밖에 없었다.
신앙보다 친척중심의 돈벌이 주의 라고 밖에 생각 할수 없는 입장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은 더욱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나에게 「당신은 사진에 솜씨가 있으니까 사진관이나 안해보려나」농담 말이, 사진관이나 하고 있을 그런 기분이라면 나 혼자서도 된다.
나는 이렇게 강한 반발을 느줬다.

요컨대 이것은 공기총사업도 궤도에 올라셨고 또 문교주의 여자관계도 지나치게 알게 되여 산탄공기총을 발명한 나도 더이상 필요 없으니 그만두라고 하는 암시 아닌가!

1971년 어느날 나는 미국에서 막 귀국한 문선명을 만나서 여러가지 의논을 해 보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측근중에 어머니라고 호칭하는 최원복에게 연락을 하였더니 효민씨라면 시간을 정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와서 만나면 될 것입니다 라고 전화로 통화되어 가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럿이 문교주 중심으로 모여 있는데 예전과 같이 끼여 들었다. 통금시간 12시가 다가 옴으로 한사람 두사람 다 집으로 돌아가고 단둘이 남았다.
그때 뒷문으로 훌적 나가 길래 화장실 가나보다 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다시 들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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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온순한 나라 하더 라도 이 것만은 머리가 화끈거렸다. 전신이 막 뜨거워지며 열이 나고 떨려오는 것을 자신으로서도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나는 문선명이나 통일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온갖 노력과 봉사를 다해 옥고 동참상, 모범상, 14년공로상, 전도상등 교회에 상주하며, 그림자처럼 어디든지 모셨지만 단 한가지라도 가르침에 상반된다든가, 폐를 끼 친 일은 없다.
다만 경제문제나 여자문제를 너무나도 지나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문선명 쪽에서 나를 께름직하게 여기고 배신한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확실하게 인연을 끊고 탈회 하였다.

박정화씨의 체험과 너무나 꼴이 같아서 나는 그의 억울함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본질을 이야기 할 사건에 관해서 나는 한가지 더 구체적 인 것을 증언 해두고 싶다.

그것은 1955년의 「7 4사건」문선명과 우리들 간부가 체포되 었던 사건인 것이다.

7월 4일의 문선명에 이어서 6일에 나도 체포되었다.

체포이유는 「병역기피용의」우리들 북한에서 남으로 나온 피난민에게는 호적이 없었으므로 신분증명서를 만들어 받을 때에 「제 2국민병」으로서의 병역을 면하기 위해서 실제연령보다 5-6세 정도 올려(연상으로)신고 하였었다.
그것이 위반이라고 하는 것인데 문선명 자신도 박정화씨에게 지시해서 위조시키고 있었다.
우리들은 말을 맞추어서 위조에 협력하였다고 공술 하였으나 한편에서 문선명은 자기는 모르는 사이에 제자들이 맘대로 한것 이라고 책임회피하고 있었다.
하나님과 같이 모시는 입장에서 우리들 제자가 그의 연령을 함부로 변경 한다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다. 실제로는 모든 것을 문선명의 지시 에 따랐을 뿐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 「병력기피」용의는 문선명 이하의 간부를 체포해서 취조하기 위한구실이고 실은 「간음과 혼음」을 조사할 목적이었다.

수사관의 질문은 날이 갈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당신들은 부부사이는 어떠한가?
당신부인들과 동침은 언제했나?
한주일에 몇번씩 이나 하는가?
한달에는 몇번이나 했나?

여자 신자들과는 몇번이나 했는가 병 역기 피 와는 관계가 없는가· .

남의 사생활 문제를 집요하게 심문하는 형사에게 큰소리로 대들고 수사관과 입씨름을 한일도 있었다. 그러나 수사관의 조사는 끈질겨서 책상 위에는 문선명과 여자식구들이 관계를 도표로 그린 그림을 놓아두고 섹스관계의 확인을 하는 것이아닌가 ?

나는 시종일관 모른다. 없다고 버티었으나 내심으로는 그 정확함에 탄복하였다 유치장안에 있는 우리들은 밖의 상황을 잘몰랐으나 박정화씨들의 은폐공작의 결과인지 조사를 받은 여성들은 나는 문선명선생과 그런 짓을 한 일이 없고, 나는 꿈에서 섹스는 하였다 등등으로 적당이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경찰은 거의 정확하게 문선명을 둘러싼 여성들의 성관도를 쥐고는있었으나 본인의 친고나 남편으로부터의 고소가 없었고 이사건으로 문교주는 3개월만에 무죄선고로 풀려 났다.
그래서 「7.4사건」은 단순한 병역기피문제가 아니라 통일교회의 안방 깊숙이 숨겨져 있는 섹스문제의 수사가 경찰의 노리는 바였는데 통일교회가 말하는 「아무 것도 아닌 사실무근의 혐의」가 아니라 간신이 문교주와 혼음 사실이 천하에 공포되는 것을 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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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때 체포되었던 간부의 유치번호는 문선명 390번, 유효원380번, 유효영 1709번 ,나는 1175번 이었다.

김원필도 체포되어 그만이 1년 실형의 판결을 받고 수감 되었다. 하여간 통일교회와 결별하여 두고 두고 냉정하게 문선명이나 협회의 실정을 보니까, 여러가지 모순과 이념이 눈에 띈다.
인류역사의 대세는 분명히 민주주의의 흐름인데도 불구하고 통일교회의 체질은 신앙과 관계없이 문선명에게 아부하는 무리들만 주위에 둘러 있는 독재체제 이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을 어거지로 되돌려서 문명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식구들이 몸을 깍아서 모은 거액의 돈은 문선명 한사람이 관리하고 있어서 어디에 얼마만큼 숨겨 두고 있는지, 현재의 최고 간부들도 모르고 있다.

비민주적인 횡포로서 독재일방의 역사를 거슬러간다. 또 통일교회의 인쇄물에는 어느 것이나 문선명선생이 1948년에 북한에서 체포된것은 공산당의 종교말살정책에 의해서 내무성에 구속 되었던 것이라고 판에 박은 듯이 거짓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북쪽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진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공산주의가 싫어서 1947년 8월 사진관도 각종기계도 그대로 두고 28세때 혼자서 월남했다.
그때까지 나는 선천북교회의 집사였다
그런데 그때 기독교 탄압 같은 것은 없었다.

이것은 통일교회의 거짓의 역사이며 박정화씨가 자세히 쓴 바와 같다.
또 이책 가운데에 소개 되어 있는 것처럼 나자신도 말하자면 36가정의 한사람이지만, 그저 원리만 앞세웠을 뿐 ,으시 대고 폼만재지 아무런 섭리도 없는 일당 독재 체제이다.
그래도 그당시는 부부의 짝짓기를 신중히 생각해서 종로의 유명한 백운학(관상가) 또 이명학(사주가)에게 찿아가 짝짓기 궁합을 맞춰 달라고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최근의 합동결혼식은 마치 마작판의 마작말패 섞드시 남의 인권을 아무렇게나 적당히 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이래서야 참부모가 정해주는 이상상대 축복이 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성스러운 축복 행복한 꿈이 채 가시기전에 여기 저기서 이흔소동이 발생하고 있으니 과연 땅에서 재림주에게 축복 받은것이 하늘에서도 영원한 부부가 될 수 있을까? 그 책임은 또 누가 져야 하는가?

 


유신희 - 6마리아의 한 사람 이었다.

 

1954년부터 수년간 6마리아의 한사람. 문선명의 원리를 믿고 복귀를 받아, 5-6인의 남
성과도 복귀의 실천을 했다.
지금 회고하면 「참으로 어리석었다. 」고 후회하며, 「문선명은 죽어 마땅한 남자다」라고 단언한다.

 

-유신희씨는 부산 영도에서 남편인 신성묵씨와 다섯 아이들과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때 근처에 살고 있던 사촌오빠 유효원의 권유로 문선명의 포교집회에 방을 빌려 주셨던 것이지요.

유 :그렇습니다. 1953년 12월 24일이었읍니다. 처음에도 3일간만 쓰겠다는 약속 이었읍니다만 결국 25일간이나 되고 말았읍니다. 그때 사촌오빠인 유효원, 효영형제, 그리고'유효민등 머리가 좋은 오빠들이 믿게 되므로 우리들 부부도 덩달아 믿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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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 메시아의 위대한 사람이 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세히는 이해하지 못하였었지만, 오빠들이 전부 믿어 우리부부도 덩달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후에 부부가 서울로 가셨군요? 아이들은 어떻게 하셧읍니까?

유 :남편이 먼저 집을 나갔으므로 내가 가족회의 처럼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하였읍니다. 「아빠도 엄마도 재림주가 오셔서 대단히 바쁘게 되었다. 그래서 너회들의 뒷바라지를 할 수 없게 되었구나‥‥」
위 아이는 중학교 2학년생이었고 제일 끝의 막내딸은 아직 여섯살 이었읍니다만, 다섯 아이들이 이해해 주어서 서로 손잡고 고아원으로 보냈읍니다.
정 말로 해서는 않될 짓을 했읍니다.
그로부터 7년동안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벌써 40년이나 지났읍니 다만 지금 아이들은?

유 :모두 기독교신자로서 그저 얌전하게 잘 지내고 있읍니다. 그래도 막내딸하고는 자주 충돌이 있읍니다. 어머니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대단히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나를 책망 한답니다.

 

-문선명과 복귀의 섹스를 한 여성으로서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인터뷰에 응해준 사람은 아마도 유신회씨가 처음이 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지금의 심정은?

유 :지금까지 침묵해 온것은 아이들에게 북귀의 사실이 알려지는것이 부끄럽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벌써 나이가 나인만큼 참을 수 있읍니다만은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사실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기는 합니다만은 나같이 미혹
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죽기보다 어려운 이 사실을 밝혀야 겠다는 결심을 한 바입니다.

 

-문선명과의 복귀에 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해 주십시요?

유 :여자 식구 한사람한테 꾀임에 빠져서 밤늦게 캄캄한 문선명의 방으로 갔읍니다.
거 기서 복귀를 받은 것입니다. 나의 경우는 극히 짧은 시간에 깜딱 할 사이에 끝났읍니다. 사단의 피를 밝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 두번 더 복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었읍니다만은 나는 한번 만으로 끝냈읍니다.

 

-그것은 왜?

유 : 문선명은 여러 여자와의 관계가 많아서 다음에는 언제 내 차례가 돌아 올런지도 몰랐고 또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피난민 시절에 그것은 다름 아닌 범냇골(지금은 성지로 명명 , 통일교 교인들이 세계 각처에서 참배 하러옴) 당시 나는 근처에 살고 있는 터이여서, 우리 아버님과 문선생은 매일 등산 산책을 하는 처지여서 어느날과 같이 나도 손을 잡고 아침 등산 하던중 문선명이 철부지 나를 움막으로 끌고 들어가 성폭행을 해 많은 출혈이 심했었다고 울면서 이야기 하여‥‥ 아무리 복귀라 하는 명분 이라지만 타락이니 복귀니 전혀 귀가 열리지 않은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가 있읍니까?
그래서 나는 두번 복귀를 단념 했읍니다.

 

-문션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다음 유씨는 몇사람의 남성과 복귀를 하였지요.

유 : 그때는 문선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 여성은 다른 남성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쳐서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6인의 남성과 복귀 했읍니다

-그래서 유씨는 6마리아의 한사람이었다고 박정화씨가 썼던데요.

유 : 6마리아의 이야기는 듣기는 하였읍니다만 누가 그런지는 알지 못하였읍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처지 인지 나는 잘 몰랐읍니다.나 보다 훌릉한 여인들이 많이 있었고 문선명의 주위에는 항상 세사람 정도가 바짝 붙어 있어서 나와는 격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
각하고 있었으니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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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사람 이 란 누구인가요?

유 :신정순*, 이순철*, 양윤신*씨 들입니다. 문선명이 유난히도 귀여워했고 후에 재산을 노리고 재벌과 결혼시킨 임영신이 들어 온 것은 그 뒤의 일 입니다.

문선명은 차례 차례로 새 여성을 신변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하는데 같은 여성들 끼리 특탁거리는 일은 없었읍니까?

유 :있었지요. 여자들 끼리니까 질투나 독점욕은 당연히 있읍니다. 그래서 여자들 끼리 심한 싸움이 있을때에는 문선명이 그러한 여자를 때 린 일도 있었읍니다.
그리고 육체도 재산도 빼앗고 볼일이 끝난 여인은 계속 주변에서 내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내 쫓긴 중의 한사람 입니다.

 

-6마리아는 그때 그때의 정원으로 적당이 교체가 되어 결국은 재산이나 새로운 여 인이 목표 이었던가요. 신구교체는 문선명의 독단으로 행해 졌읍니까?

유: 우리들은 옆의 일도 몰랐었읍니다. 그래서 어느땐 그 주위에서 쫓겨난 여자만도 다섯사람이나 되어서 서로 이야기 한일도 있읍니다. 그 정보교환으로 알았읍니다만 실로 여러 여자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것입니다.
처녀를 임신시켜서 아이를 낳게 하기도 하고 유부녀나 어머니와 딸들의 정조를 닥치는 대로 짓밟아서 가족이 풍지박산이 되기도 하고 유복했던 사람이 재산을 빼았겨서 빈털털이가 되기도 하고

 

-여러가지 비극이 셀수 없을 정도로 속출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모두가 참말로 분개 하였었읍니다.

유 : 그렇다고 생각 합니다. 사람이 모여 있을 어느땐가 원리의 설명을 내 사촌오빠인 유효원이 열심히 땀을 흘려가면서 열심히 강의하고 있는데 문선명은 여성들과 히히덕 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 신자들에게는 유효원쪽이 존경을 받았고 인기가 있었읍니다.
그 유효원 오빠는 수술을 받지 않았더라면 좀더 오래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의학부 출신답게 자기 병을 잘 알고 있어서 수술을 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싫어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선명은 병 따위는 진짜 메시아라면 고칠수 있을게다고 말 할것을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러 한 소리도 있었읍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유효원씨에게 무리하게 수술을 시켜서 죽게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기가 높은 효원씨에게 정상의 자리를 빼앗길 일도 없게 되어 문선명은 모름지기 안심 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 보고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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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이제 생각 하는것은 「한(恨)」그것인데 정말로 후회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할말이 없읍니다 나도 정말 바보 였읍니다. 좀더 현명 하였더라면 그때에 선악의 구별이 섰을 터인데 어리석었기 때문에 이렇게 돼 버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남편과도 이흔하고 아이들과도 떨어져서 혼자서 조용히 살고 있읍니다. 나뿐만 아니라 그 무렵 문선명의 신변에서 봉사하게 한 여성으로서 행복하게 된 사람은 한사람도 없읍니다.
모두 문선명의 사기에 속아서 몸도 마음도, 재산도 바치고 걸레가 되어 당장 내일 생활에도 곤난을 겪고있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러한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 할때 우리들의 소원은 단 한가지.문선명은 재림 메시아가 아니다. 죽어 맞당한 사나이 하루라도 랄리 죽었으면 하는 인간이다 라고 하는것 뿐입 니다.

 

 


김덕진 -섹스릴레이의 실천자

 

평양 숭설전문학교 출신.
일본의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일도 있고 음악의 외길틀 걸음.
통일교회에서 애청중인 성가 19골을 작곡,
문선명의 가르침대로, 섹스원리를 실천한 산증인
현대 서울 계주.
경찰목사.
현 80세

 

나는 어느 한국육군의 고급 장교의 보신을 위한 모략으로 북의 스파이로 몰려서 유엔군 제1형무소에 무기징역수(438번)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것이 사실무근인 것으로 증명되어
1954년 11월 27일에 무죄로 석방이 되었읍니다.
그래서 출소 할때 형무소에서 내가 노래를 가르쳐주고 있던 이석빈이란 남자가 자기는 재 림주 문선명의 제자 이므로 출소해서 서울로 가거던 찾아서 바드시 이 편지를 전해 주십시요 라고 하며 한통의 편지를 맡겼다.
봉투곁에 「아버님전상서」 뒷면에는 제자 이석빈 이라고 써 있었읍니다.

누이동생 집에서 한동안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 그럼 문선명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그 당시는 아직 통일교회 따위는 아무도 몰랐었다. 거처를 모르고서는 편지를 건네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친한 친구인 중부경찰서장에게 부하에게 명해서 빨리 찾아주게나 하고 부탁하였읍니다.
보잘것 없는 작은 집을 찾아 가서 나는 이런 사람인데 형무소 안에서 이런 편지를 맡아 가지고 왔다고 말하니까 문선명을 만나게 해주더군요.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여성이 선생님 예배 시간 입니다 예배를 하셔야· .
그리고 나에게도 함께 어떻습니까 하기에 같이 참가 하였지요.

 

좁은곳인데 풍금도 아무 것도 없었읍니다. 처음에 노래한 찬송가란 것이6천년 한이 맺힌 싸움의 동산 승리의 월계관을 찾아 구하여‥‥ 문선명이 작사 하였다고 하는 「복귀의 낙원」이라던가 이 세상을 에덴의 동산으로 복귀한다고 하는것 같은 가사였는데 웬일인지 그 노래를 일본의군함 행진곡의 곡조로 노래하고 있는 거예요. 놀란 나는 끝난 뒤에 말
해 주었읍니다.

세계를 통일하는 살아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한국인의 원수인 일본국의 그것도 가장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군함 행진곡으로 자작의'찬송가를 부른다는것은 무슨 일이요? 이렇게 바보스러운일이 어디에 있오?
어찌 당신이 재림메시아란 말이요? 여러가지 질문을 하였더니 문선명은 얼굴을 벌겋게 하고 있더니만 김선생 부탁이 있오. 내가 작사 한것이 또 다른것도 있으니‥‥ 라고 말하며 나에게 작곡을 부탁 하였읍니다.
즉석에서 좋다고 대답하고 그후 약 2,3년간에 나는 통일교회의 성가를 작곡하였읍니다. 문선명 작사가 5곡, 유효원 작사가 1곡, 나의 작사가 13곡 모두 19곡이 나의 작곡인데 지금도 전 세계의 통일교회에서 열심히 불리우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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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만든 성가책에는 「작사, 작곡, 김덕진을 지워 버렸고 다만 일본책에는 문선명 작사, 김덕진 작곡」이 5곡과, 「작사, 작곡 김덕진」14곡 모두 19곡이 실려 있읍니다.
 

잠깐 이야기는 조금 뒤로 돌아 갑니다만,

문선명을 방문했던 다음날 부터 아름다운 여성들이 매제의 집으로나를 찾아 오게 되었읍니다. 김선생님 저희들의 교회로 다니시지요 하는 것 이었읍니다. 작곡을 맡은것도 있고 해서 다니기 시작 하였더니 대우가 좋았다.

모두들 같이 푸로마이드 사진을 만들고 있었고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도하고 있는 신자도 있던 시대였다. 그렇게 가난한 속에서 나에게 신사복을 여러벌 만들어 주어서 즐거워서 열심히 작곡을 한 셈이지요.
그러는 동안에 싫어도 문전명의 원리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6천년전 에덴의 동산에서 아직 고교생 정도의 나이로 미성숙했던 해와을 사단의 천사장 루시엘이 범하고 말았다.
이것이 세상에 악을 가져온 원죄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눈에는 눈을 이에는 이로 이번에는 사단을 속이고 세상의 여성들을 복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문선명은 젊었을 시절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재림메시아 임으로 섹스로 파탄이 된 세상을 자기가 여성과 섹스 하는것으로 원래의 모양으로 복귀시켜 혈대교환(피갈음)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겉으로 내세울수 없는 비밀의 원리임으로 대외적인 설교에서는 그 비유로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기전에 하나님에게 「될수 있으면 이잔을 피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원리 에서는 하나님은 95%까지 는 인간을 인도하여 주시지 만 나머지5%로는 인간자신이 생각해서 해결 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에게도 하나님은 자기가 해결 하라고 발하였으므로 피의 눈물을 흘리는 수고끝에 깨달았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 하 이 원리를 재빨리 나는 깨달은 것이지요. 인간의 몸을 쓴 하나님(문선명)의 섹스의 무리를 점점 널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희망을 성취하는 것이 된다.

원래가 불량해서 청춘주식회사사장을자칭하며 아색을 탐미하고 있던 나는 딱 집히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죄가 아니고 좋은 일이라고 학생시절에 일본에서 다방의 여자들을 유혹해서 그날밤에 범한 경우 같은것은 죄의식을 느낄때도 있었는데·그렇지만 통일교회의 복귀원리는 열심히 섹스에 전념하면 전념할수록 하나넘의 섭리가 성취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문선명으로부터 복귀받은 유신회씨에서 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피」를 나누어 받기로 한것이다 지금은 이미 할머니가되어 늙었지만 당시의 유신희씨는 대단한 미인이었고 머리가 좋은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문선명이 가르쳐 준 원리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다른 남성 에게 넘겨줘 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래서 「김덕진선생 보세요 내가 복귀해 들이지요‥‥」라고 말하며 그녀 쪽에서 다가 왔다. 물른 나도승락했다. 그리하여 나는 유신희씨와고맙게 섹스를 했읍니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몸이었는데도 욕구불만도 있었던지 몰라도 불량하고 오입쟁이로 여러 여성과 경험해 온 나의 기교에 이미 흐물흐물하게 돼서 즐거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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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중에 제일 좋았어요 문선명선생 보다 몇 십배나 더 좋았어요」라고 말하면서요.

복귀원리의 실천 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이미 보통 남녀의 섹스 그대로여서 여자가 위라던가 아래라던가는 관계 없어요.

그후에도 다른 여성과 좋을대로 했다.

원리의 책을 쓴 유효원씨들 처럼 온순하고 꼼꼼한 사람들은 문선명이 자기가 범해서 복귀시킨 누구 누구와 자라고 지시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바보들이예요.

나는 달랴요. 95%는 하나님의 가르침이지만 남어지 5%는 자기가 찾아야 합니다.

문선명과 섹스를 한 여인은다른 남자와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해야만 한다.

 

남자는 제2의 여자와 하고 여자는 제3의 남자와 하며 그래서 제4의 여자에게로 릴레이식으로 해간다.

이렇게해서 넓혀 가는것이 원리 아닙니까?

그렇게 함으로서 온세계의 남녀가 하나님의 혈통으로 사단에게 빼앗긴 전인류, 즉 사단혈통의 세계를 하나님편으로 복귀해야 사단의 발판을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문선명이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순풍에 돛단배처럼 유효원 협회장이 답답한 고지식쟁이를 비웃으면서 하나님의 뜻도 이루고 성적만족도 느끼며 동분서주 하면서 쾌락의 나날을 보냈지요.
서울은 물론 대구에서도 부산에서도 깨끗하고 예쁜이들만을 엄선해서 15-6인과 관계했을 거 예요.
서울에서 내가 5인의 여성과 섹스 한짓이 일주일 후에는 자그만치 72인의 그룹이 되었다더군요.

 

이것도 훌릉한 원리실천의 성과이지요.
그런데 문선명 이나 유효원씨가 안된다고 말했읍니다.
그 이유는 메시야 문선생 한테서 받는 복귀의 섹스는 소생, 장성, 완성의 원리로 3회 섹스 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는 아직 1회 밖에 하지 않은 유신희와 했으니까 무효다.

몇백사람에게 둘레를 넓혀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성질이 났어요 이 새끼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 라고 사단이 해와를 범했을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단을 이기는데는 조건만 맞으딘 되는게 아닌가.

그런데 문선명과 3회하지 않으면, 여성은 복귀가 안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 개새끼야 라고 노해서 싸움을 했어요.
그런일이 있은후에 나는 대구로 가서 영신중고등학교의 음악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문선명의 수제자 였던 박정화씨가 대구로 찾아온것 입니다.

문선명이 대구의 미인 신도 우옥례와 나를 정식으로 결혼 시켜서 무마 하라고 지시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여성과 문은 섹스를 한 사이 입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어는 곳에서 이석빈(형무소에서 같이 복역함)과 공교롭게 만났읍니다. 형무소에서 나에게 문선명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던 그사람입니다.
이석빈은 출옥한 후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지금은 대구시내의 작은교회의 전도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이 기회에 당신도 자기와 같이 일반여성과 재혼해서 하나님앞에 용서를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는 것이 어떠 하겠는가?

박정화씨 협조해 주었으므로 이석빈이 근무하는 교회의 장로의 장녀 강혜환 집사와 나는 재혼 하였읍니다. 가난했던 내가 결흔식에서 입을 옷이없어서 박정화씨 한테서 빌린것
이었읍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 나는 대단히 행복하고 75세때에 귀여운 손자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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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해서 2년째 되던해에 우리들 부부는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해서 나는 성동고등학교의 음악교사가 되었고 밤에는 신학교의 생도로서 공부 하였읍니다.
마침 그무렵 친구인 김경래씨(현재는 한국기독교 총회 사무국장)가 신문기자로서 「통일교회의 정체」라고 하는 기사를 크게 쓴 것입니다.
그 신문기사를 읽었다던가 생각지도 않았던 부인이 나를 찾아 왔는데 정말 깜짝 놀랬읍니다.


그 부인이란 문선명의 본처였던 최선길씨 였읍니다. 최여사는 문선명의 인격이나 통일교회의 성의 난맥을 알고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흔하고 가련하게도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때 최여사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읍니다. 김선생님 이 기회에 문션명이란 남자가 재림주가 아니라는것은 물론 사람도 아닌 무서운 독사 같은 자식 이라는 것을 온 세계에 알립시다.

 

문선명은 호색가로서 성욕이 장성해 내가 문과 결흔해서 자식(문성진)을 낳기 까지 부부관계를 매일밤 10회이상 해도 기운이 펄펄났었다.

 이것은 그가 뱀처럼 이상하게 정력이 강한 때문입니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였다.

 

통일교회는 종교가 아닙니다.

 

음란한 섹스교단일 뿐입니다.

 

문선명과 싸움을 하고서 대구로 옮길때 까지 나는 박정화씨가 있었던 광산으로 쫓겨 간 일이 있었다. 1년반 정도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부터 친구들이 빌려준 방에서 남자 6인 여자 3인이 즐겁게「복귀게임」을 한일이 있읍니다 통일교회의 원리를 실천 한것 뿐이지만거기에는 종교다운 것은 하나도 없었읍니다.

 

나는 깨 달았읍니다.

 

문선명의 섹스원리는 잘못된것 이란는것을.

 

그는 이 원리를 내 세워서 어머니와 그의딸 형제를 범하고 끝의 딸에게는 아이까지도 낳게 하고 있읍니다. 극악 무도한 행위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 겠읍니까?

이번에야말로 문선명도 통일교회도 하나님의 제재를 받을 때가 왔읍니다.

그리고 많은 희생자 들에게 그죄를 보상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자신도 불량청년시대에 죄를 짓고 통일교회에 들어 와서는 원리를 미끼로 제멋대로 음행을 자행 한 죄는 몇천만가지 엄 벌을 받는다 해도 할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부터 통회하며 열심히 경찰목사로서의 사명과 고아들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읍니다

 

 

http://cafe.naver.com/jubo/2085  , 통일교 문선명 -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 큰샘출판사

http://cafe.naver.com/jubo/1739  , 통일교 문선명  -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박준철 저,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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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문선명 - 문선명은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키는 영혼사기꾼

 
<도서 안내>  http://cafe.naver.com/joyfulsound/347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출간일 : 2002년 05월 10일, 520쪽   정가 : 12,000원 (국내도서-종교)

광화문 교보문고나,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여, 저자 박준철 목사에게 작은 도움이 됩시다.

한국기독교 통일교 대책협의회 후원금  ·국민은행 525201-01-041142 예금주 통일교 대책협의회

 

통일교 박준철 목사의 생생한 증언

 

1. 문선명은 이단사이비 교주요. 적그리스도입니다.

 

2. 문선명은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키는 영혼사기꾼입니다.

 

3. 문선명은 자신의 자녀도 구원못하는 사이비 교주입니다.


4. 합동결혼식은 천국가는 의식이 아니라 지옥 가는 의식입니다.


5. 문선명 통일그룹이 IMF때 부도났습니다. 국민의 세금인 국가빛 1조 7천억을 갚아야 할 것입니다.


6. 문선명 집단은 합동결혼식을 시켜 I억씩의 거액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자금줄인 합동결혼식을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막아야 할 것입니다.


7. KBS. MBC. SBS. EBS공익방송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조장하는 방송을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교인이 방송에 출연하여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8. 문선명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여 축사. 격려사 하는 여야 정치 지도자들을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이 단결하여 낙선시켜야 합니다.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에서 시장군수 시구의원들이 통일교 집회에 참석할 수 없게 막아야 할 것입니다.


9. 기독교 목사, 성도들이 통일교 단체인 초교파 기독교협의회나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 총회장 김광명이나 이런 단체에서 주최하는 이스라엘 성지순례 무료여행. 세미나 등에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참석할 수 없도록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것입니다.


10. 문선명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하는 지역의 유지나 노인들을 참석하지 못하도록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에서 막아야 합니다.


11. 전국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통일교 행사인, 가정교회 순결캠페인, 순결캔디, 참가정 순결운동본부 서명날인, 충효 사상 예절교육 등을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12. 박준철 목사가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문선명 집단이 이단 사이비 집단이라는 것을 매일 입으로 외쳐야 합니다. 박목사는 통일교에 입교 전까지 통일교 집단이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본문중에서-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머리말

죽을 죄인 박준철은 지난 30년 동안 문선명 사이비 이단인 사단의 앞잡이로 살았던 날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합니다. 이제 오직 나의 구주는 예수님 뿐이고, 인류를 구원할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30년동안 통일교에 빼앗긴 지옥 같은 생활의 산 체험과 진실을 세상에 알려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를 막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이 책을 썼습니다.

저는 생애 처음으로 접한 통일교 전도지에 끌려 이단 사이비인 줄도 모르고 통일교에 입문하여 지난 30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문선명 이단 사이비 교주에게 충성하며 최일선 목회자로서 살아왔습니다. 통일교 목회자가 된 후로 언제나 항상 사력을 다하여 무슨 일이든 2등을 하지 않고 1등을 하며,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야 지난 30년이 사단의 종인 문선명 이단 사이비 교주에게 빼앗긴 세월 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통한의 세월을 눈물로 통곡하며 삼위일체 하나님께 회개하며 이 글을 씁니다.

이 책은 제가 통일교회 현직목사로서 30년 동안 매일 일기를 써가며 기록했던 사실들을 토대로 통일교의 실체를 밝히고 문선명의 비리를 세상에 알리는 최초의 저서입니다.

이 저서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실명도 있고 가명도 있습니다. 혹시 본의 아니게 거명되어 선의의 피해가 있으시다면 문선명 사이비 종교의 비리와 잔악상을 알려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없도록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음을 양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도 통일교에 빠져 인생을 허송하는 분들이 있다면 즉시 통일교회에서 탈출하여 진정한 행복과 축복 받는 하나님의 안에서 삶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에게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동안 체험한 진실과 문선명 교주의 사악한 교리와 음모, 패륜, 가정 파탄, 비진리성을 하나님과 인류에게 고발해야 된다는 사명만이 있습니다.

저는 사이비 집단에 속아 살았던 30년 동안 지옥 같은 생활을 하면서 빼앗긴 청춘과 병든 몸, 파멸된 영혼을 만천하에 고발하지 않고서는 이대로 눈을 감을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 통일교회의 실체를 알리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30년 동안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를 참 부모인 동시에 메시아 구세주인 만 왕의 왕 재림주라고 믿고 복종하며 사랑하였는데 이제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발합니다. 지금 통일교회는 기독교인들이 방심하는 사이에 한국은 물론 일본, 아시아,유럽권까지 침투하여 많은 영혼들을 미혹하여 문선명 개인의 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선명 사이비 교주로 말미암아 인생을 빼앗겨 가정 파탄, 재산 착취를 당하여 온갖 시련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겉 모습으로는 양의 탈을 썼지만 사이비 교주일 뿐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사랑과 희생, 봉사를 외치지만 말 뿐이고 통일교 교인들의 생활은 처절한 지옥생활과 같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미혹에 빠져 세뇌, 마취, 교육되어 문선명에 끌려 다니는 통일교 교인들이 불쌍합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영혼의 노예가 되었고 그들의 병들고, 지친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픔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에게 처음부터 오직 구원은 예수님 뿐이요,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고신앙으로 이끌어 주는 성도가 있었다면 30년 동안 지옥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통일교가 문선명 개인이 만든 이단 사이비 집단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면 처음부터 발을 내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단에 속한 생면부지의 사람이 건내준 한 장의 전단지가 저와 저의 가족의 일생을 결정지었다면, 참되신 하나님의 자녀요 참구원을 주는 기독교회 성도들의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수 있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은 처음부터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생애 최고의 축복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놀라운 구원을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선물로 받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땅에 만연된 이단 사이비를 몰아내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성직자와 1천 2백만 기독교 성도들이 하나로 단결하고, 모든 언론과 지성인들이 합심하여 통일교와 같은 사이비종교를 이 땅에서 뿌리뽑을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추천해주신 한기총 대표회장 김기목사님, 한기총 직전 대표회장 이만신 목사님, 한기총 명예 회장이신 지덕 목사님, 민족 복음화 운동본부 총재이신 신현균 목사님, 전 총신대 총장이신 신학자 김의환 박사님, 한국 기독교 지도자협의회 상임회장이신 신신묵 감독님, 통합교단 총회장이신 최병두 목사님, 기독교 대한 감리회 장광영 감독님, 기독교 대한 성결교 총회장이신 이정복 목사님, 기하성 총회장이신 이재창 목사님, 한기총 총무이신 박영률 목사님, 한기협 대표회장 최재우 목사님, 한기총 이단 사이비 대책 위원장 이용호 목사님, 한기총 이단사이비 상담소장 최삼경 목사님, 한국 기독교 이단문제 연구소 이사장 심영식 장로님 등 범 기독교단 적으로 문선명 이단집단 궤멸을 위해 이 책을 추천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제가 2001년 1월 9일 통일교 현직 목사직을 탈퇴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통일교 비교리성과 비리를 지속적으로 보도해준 모든 기독교 방송과 언론사 관계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제 오직 성삼위 일체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1,200만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교회의 헌금을 하나님의 대적이며 우상인 문선명과 같은 사이비종교를 뿌리뽑는데 투자해 주십시오. 저에게 기독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모든 성직자와 기독교 성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2002년 2월 17일

저자 박준철 목사 드림

 





추 천 사‥‥‥‥‥‥‥‥‥‥‥‥‥‥‥‥‥‥‥‥‥‥‥‥‥‥‥‥‥‥‥04
머 리 말‥‥‥‥‥‥‥‥‥‥‥‥‥‥‥‥‥‥‥‥‥‥‥‥‥‥‥‥‥‥‥12


제 1장 나의 유넌 시절과 잃어버린 한쪽날개‥‥‥‥‥‥‥‥‥‥‥‥‥‥‥23
제 1절 나의 어린 시절
제 2절 잊지 못할 억울한 누명
제 3절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중학시절
제 4절 부산 오육군 병원의 생활
제 5절 양보중학교에 복학
제 6절 보상금 15만원이 나의 왼팔이라니
제 7절 고향을 떠나 자활의 길로



제 2장 통일교 전단지 한 장에 빼앗긴 30넌, 잃어버린 30년‥‥‥‥‥‥‥‥35
제 1절 단 한번의 악연으로 통일교 입교
제 2절 천안교회 청년회 부회장
제 3절 새벽 기도 하던 중 영계에 가보고 나서..
제 4절 통일교의 제2차 기동대 활동
 


제 3장 첫 사역인 충북보은 적암교회‥‥‥‥‥‥‥‥‥‥‥‥‥‥‥‥‥‥‥46
제 1절 기적은 일어나고
제 2절 성결교 신학교
제 3절 문교주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의식인 합동결혼식



제 4장 서울 강서교구 ‥‥‥‥‥‥‥‥‥‥‥‥‥‥‥‥‥‥‥‥‥‥‥‥‥52
제 1절 교구본부교회 개척, 부흥, 교회건축
 


제 5장 노원교구 달부 개척교회 제1차 건축
제 1절 그래도 끈질긴 충성
제 2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길
제 3절 제 1차 노원 교회 교회 대지 매입 건축


제 6장 새 생명의 결실인 3남매‥‥‥‥‥‥‥‥‥‥‥‥‥‥‥‥‥‥‥‥‥63
제 1절 첫 딸인 '박은주'
제 2절 아들 '박영진'
제 3절 막내인 '박은영'



제 7장 서을 노원 교구본부‥‥‥‥‥‥‥‥‥‥‥‥‥‥‥‥‥‥‥‥‥‥‥70
제 1절 2차 교회 대지 매입 재건축 성공
 


제 8장 서을 노원 교구에서 경기 화성 교회로 강제로 인사 이동‥‥‥‥‥‥75
제 1절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박길남 교구장의 거짓 약속
제 2절 꿈에 나타난 문선명



제 9장 경기 화성 교회가 전국 통일교 최우수 교회로 부흥‥‥‥‥‥‥‥‥‥80
제 1절 다시 일어선 교회 개척
제 2절 화성 교회 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제 3절 마지막까지도 아버지께 불효
 


제 10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교회로 다시 인사발령‥‥‥‥‥‥‥‥‥‥‥‥‥89
제 1절 통일교에 바친 목숨
제 2절 서울 노원교회에서 3차 발전



제 11장 서울 노원 교회가 한국 통일교 우수 교회로 121회장상 수상‥‥‥‥‥93
제1절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제2절 3차 교회 대지 161평을 매입
 


제 12장 서울 노원교회 교회 건축 ‥‥‥‥‥‥‥‥‥‥‥‥‥‥‥‥‥‥‥‥98
제 1절 1988년도 교회 건축 목표
제 2절 국회의원 당선에 관여한 통일교
제 3절 노원교회 역사적 교회 건축 기공식
제 4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상량식
제 5절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당한 폭력과 폭행
제 6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준공을 완료311



제 13장 통일교 아름다운 교회 헌당식 ‥‥‥‥‥‥‥‥‥‥‥‥‥‥‥‥‥‥114
제 1절 노원교회 3차 교회 건축 헌당식
제 2절 베풀어 준 은혜와 축복을 배반으로 갚은 사람들
 


제 14장 노원교회를 찾은 문선명‥‥‥‥‥‥‥‥‥‥‥‥‥‥‥‥‥‥‥‥‥120
제 1절 자칭 감동받은 문선명



제 15장 서울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 받은 비극적인 사건‥‥‥‥‥‥‥‥‥‥‥122
제 1절 동토의 왕국인 통일 제국의 교구장 임명
제 2절 김승철 총무국장의 인사비리와 폭행사건
제 3절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얻은 심장병



제 16장 빼앗긴 교구장직과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 총무국장과 협회전직원시위대‥133
제 1절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총무국장과 협회직원들
제 2절 나상렬 노원교구장의 배신
제 3절 공릉동 교회의 지옥 같은 생활



제 17장 전국 통일교 목사 전체 500명의 박탈당한 목사직‥‥‥‥‥‥‥‥‥‥141
제 1절 교회사택에서 쫓겨난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
제 2절 7개월 만에 박탈당한 500명의 목사들
제 3절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독서실 운영
제 4절 고시원 운엉 중 다시 꿈꾸게 된 목회 길



제 18장 부산 영도교회‥‥‥‥‥‥‥‥‥‥‥‥‥‥‥‥‥‥‥‥‥‥‥‥‥ 152
제 1절 부산 영도 통일교로 인사발령
제 2절 부산 엉도교회 부흥 발전
제 3절 죽음의 자리에서 두 천사의 도움으로 구한 생명



제 19장 자살을 결심하고 죽음의 문턱에 서서‥‥‥‥‥‥‥‥‥‥‥‥‥‥‥168
제 1절 족벌왕국에 환멸을 느끼고
제 2절 "준철아! 죽지 말아라"



제 20장 폭언 폭력 배신으로 일괄된 통일교 지도자‥‥‥‥‥‥‥‥‥‥‥‥‥171
제 1절 황선조 회장에게 한 직언
제 2절 김용갑 교구장의 폭언과 폭행
제 3절 문책인사를 약속한 황선조 회장
제 4절 눈물로 세운 부산 영도 교회를 떠남
제 5절 과천통일교회에서의 비참한 생활
제 6절 연속되는 폭행과 폭력과 거짓말들
제 7절 위장된 합동 결흔식
제 8절 비참한 현실의 벽을 넘어선 사투
제 9절 저는 하나님 뿐 아니라 아내와 자녀에게 죄인입니다.



제 21장 목숨을 건 문선명 통일제국 탈출 ‥‥‥‥‥‥‥‥‥‥‥‥‥‥‥‥‥‥192
제 1절 '준철아, 붉은 통일교 감옥을 탈출하라.'
 


제 22장 통일교 과천교회 박준철 현직목사 탈퇴 기자회견 54가지 비리폭로 ‥‥‥196


제 1절 문선명의 정체와 통일교 비리폭로
제 2절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통일제국의 정체폭로
제 3절 기독교 성도들에 대한 박준철 목사의 호소문한국 기독교 이단 종파 문제 연구소 설립
제 4절 한국 기독교 통일교 대책협의회 설립,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한국 기독교 이단 종파 문제 연구소 설립
제 5절 국제 자살 ·살인 방지 연구소 설립 계획
 


제 23장 문선명 통일교 비판‥‥‥‥‥‥‥‥‥‥‥‥‥‥‥‥‥‥‥‥‥‥‥‥‥242


제 1절 문선명의 출생과 통일교 창단 배경
제 2절 원리강론은 김백문 교리를 도용한 것
제 3절 문선명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비판
제 4절 예수, 공자, 석가를 자신의 제자라고 말하는 문선명



제 24장 혈통복귀 피가름 집단인 문선명 통일교 ‥‥‥‥‥‥‥‥‥‥‥‥‥‥‥‥254


제 1절 처음부터 혈통복귀집단이 된 통일교
제 2절 문선명은 혈통복귀교리를 통해 가정을 파괴한다
제 3절 통일교는 혈통복귀의식이라는 3일식 피가름행사
제 4절 문선명이 창안한 혈통복귀 피가름의식
제 5절 문선명 통일교의 혈통복귀 피가름 3일간 복귀의식



제 25장 문선명은 모든 사람의 재산물 착취하고 파멸시킨다‥‥‥‥‥‥‥‥‥‥‥265


제 1절 문선명은 자녀와 가족 구원도 못시킨 거짓 메시아이다
제 2절 문선명의 둘째 아들 문흥진의 사망
제 3절 재림한 문흥진 노릇한 에지프트
제 4절 문선명과 친인척은 재산착취를 통해 초호화 생활을 누린다
제 5절 문선명의 브라질 자르딘 계획
제 6절 재산착취 수단인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제 7절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임을 증명한 사람들



제 26장 통일왕국을 꿈꾸는 문선명‥‥‥‥‥‥‥‥‥‥‥‥‥‥‥‥‥‥‥‥‥‥‥285


제1절 통반격파를 지시한 문선명
제2절 통일제국 건설을 위한 문선명의 음모
제3절 문선명 한학자 교주의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



제 27장 문선명 통일교 척결을 위한 주장 ‥‥‥‥‥‥‥‥‥‥‥‥‥‥‥‥‥‥‥292


제 1절 통일교는 사이비 교주의 온상입니다
제 2절 문선명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기독교 교인을 추방해야 합니다
제 3절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하는 전 현직 국회의원을 낙선시켜야 합니다
제 4절 기독교회에 부탁의 말씀

 

통일교 집단과 외로운 싸움을 하는 박준철 목사를 돕자 ‥‥‥‥‥‥‥‥‥‥‥‥305
그림 및 사진 화보 ‥‥‥‥‥‥‥‥‥‥‥‥‥‥‥‥‥‥‥‥‥‥‥‥‥‥‥‥‥313
참고 도서 목록‥‥‥‥‥‥‥‥‥‥‥‥‥‥‥‥‥‥‥‥‥‥‥‥‥‥‥‥‥‥364
저자소개‥‥‥‥‥‥‥‥‥‥‥‥‥‥‥‥‥‥‥‥‥‥‥‥‥‥‥‥‥‥‥‥‥366


 


제 1장 나의 유년시절과 일어버린 한쪽날개

 

제 1절 나의 어린 시절

 

저의 고향은 남한의 명산인 지리산과 어우러져 있는 경남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중하쌍 부락이라는 60호 정도 되는 작은 산골마을입니다

처음에 저희 집은 아버지께서 지리산에서 숯을 구워 시장에 내다 팔아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가산을 꾸려갈 수 없어 중하쌍 부락 건너편에 집이 두 채밖에 안 되는 구덕골의 윗집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바로 그 쓰러져 가는 작은 초가집에서 부친 박복식씨와 모친 정남시씨의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이 세상에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남의 농토도 임대해서 농사를 짓고, 산에서 숯도 구워서 팔고, 나무도 해 가지고 시장에 팔아서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봄에는 쑥을 캐어서 쑥밥을 해 먹고, 산의 소나무껍질을 벗기고 칡을 캐어 먹고, 일본사람들이 거름으로 사용하는 콩기름을 짜고 남은 콩 찌꺼기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습니다. 그 때 우리 7남매는 무밥, 감자밥, 고구마라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산 때문에 아버지는 매일 술로써 시름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동네에서 제일 인정스러운 분이셨고 일을 할 때에는 동네에서 부지런하기로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3,500평 의 논밭을 사게 되었고 농사를 지어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가정 환경 탓에 2살 때에는 홍역과 황달로 온몸에 부스럼 이 생기며 사경을 헤맨 때도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언제나 욕심이 많고 고집이 세며, 싸움을 해도 지지 않으려는 승부근성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가정을 탓하지 않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전, 오후 각각 한번씩 나무를 하고 풀을 베는 일을 지만, 저는 하루에 세 번씩 일을 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소를 산으로 끌고 다니며 풀을 먹이고, 아침저녁으로 소죽을 끓여서 먹였습니다. 돼지 밥과 닭 먹이를 주는 것도 항상 제 몫 이었습니다. 먼 거리의 우물에서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어오는 것도 저의 일과였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한 꼬마로 통했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효도하려고 심부름도 잘하고 팔다리도 주물러드렸습니다. 어쩌다가 돈 10원이라도 생기면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그 돈을 모아 놓았다가 저에게 용돈으로 주셨고 엿 장사가 오면 엿도 사 주시고 과자도 사 주셨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제 2 절 잊지 못할 억울한 누명

 

초등학교 4년 때 잊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체육을 하고 반 친구들과 같이 교실에 들어오니 '박용진' 선생님이 저를 지목하여 돈 30원을 훔쳤다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저는 해명도 못하고 누명을 뒤집어 썼습니다.

박 선생님은 저의 귀를 잡고 운동장으로 끌고 다니면서 어디 에 돈을 숨겼느냐고 호통을 치며 다그쳤습니다. 저는 돈을 훔치지도 않았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오후에 남아 많이 매를 맞았습니다매를 맞은 손과 장딴지가 부어서 며칠 동안 걸을 수 얼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저는 분한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는 왜 변명 한 마디 못하였는지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왜 박용진 선생이 저를 지목하여 누명을 씌워 학생들 앞에서 망신을 시켰는지 지금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며칠 후, 우리 동네에 사는 같은 반 배정순이라는 여학생이 하옥실이가 체육시간에 당번을 하면서 돈 30원을 훔치는 것을 보았다. ' 고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며칠이 지난 후여서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누명을 쓴 채 말도 못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친구들 중에는 병으로 죽는 일이 많았습니다. 절친했던 동네 친구 박준국이 폐병으로 죽었고 이어서 유영이라는 친구도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어린 나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같이 뛰어다니며 웃고 떠들며 놀던 친구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너무나 가슬 아프고 슬펐습니다.

 

제 3 절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중학시절

 

저는 두 학급만 뽑는 양보중학교 시험에 합격하여 1963년 3월부터 집에 서 학교까지 왕복 20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까밖 고무신을 신고 책 보따리를 허리에 매고 놋쇠 사발에 밥을 넣어 갖고 다떠 서 창피했는데 중학교 때부터는 양은 도시락을 갖고 다녀서 좋았습니다.

집안 일을 하며 학교에 다녔으므로 시간이 모자라 항상 뛰어가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소에게 풀을 먹였고, 겨울에는 새벽부터 소죽을 끓여 먹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새벽부터 집안 일을 하다 보면 아침 식사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물에 밥을 말아서 급하게 먹고 학교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해 가는 1963년 7월 3일 오전 10시, 하동지방에 대홍수가 나서 저희 학생 40명은 수해복구를 하기 위해 군 트럭을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콩나물 시루같이 가득 태운 GMC 군 트럭 이 과속을 하다가 장암리에 있는 양보초등학교 앞 작은 개울에서 전복사고를 일으켰습니다. 브레이크도 소용없이 트럭은 개울 위로 날아가 아름드리 벚꽃나무를 두동강이 내며 추락했습니다. '쾅' 하는 순간 차를 타고 있던 학생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차바닥은 순간 피로 넘치고 고통의 신음소리도 가득차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이 사고로 왼쪽편에 탄 13명의 착생들이 심하게 다쳤습니다. 다친 학생들은 하동 읍내 작은 의원으로 후송되었는데 저의 왼쪽 팔도 부서져 버렸습니다. 저는 어깨 죽지까지 뼈만 앙상하게 남고 팔 관절이 부서지고 손바닥까지 뼈가 드러난 것을 보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식을 잃어가면서 저의 왼팔로 피가 쏟아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며 3일 후에야 깨어나 아버지와 어머니를볼 수 있었습니다

장마 때문에 보리가 썩어 마당에 말리고 있는 중 아버지, 어머니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그 날 신문에도 우리의 교통사고가 보도 되었습니다. 교통사고는 저의 인생이 온갖 멸시와 천대, 행동의 부자유, 생활의 고통.아픔이 동반된 생지옥 같은 생활이 되는 출발점 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막 태어난 막내 동생 준서와 그 위로 여동생 영희가 걱우 걸음마 할 정도였습니다. 저의 사고로 어머니가 간병을 하기 위해 병원에 계셨기 때문에 그 때부터 8개월 동안 준서는 젖을 먹지 못하고 영희와 다른 동생들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동생들에게 죄인 같은 심정 입니다. 학생 13명이 다쳤기 때문에 학교 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병 문안을 왔습니다.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도 많이 왔습니다. 지금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폐병으로 돌아가신 영어 선생님이 가장 병 문안을 많이 오셨고 자식이 사고를 당한 것처럼 가슴 아파해 주셨습니다.

하동의원 의사는 아버지에게 저의 팔 관절이 완전히 부서져서 가루가 되었기 때문에 어깨 죽지까지 잘라야 찬다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팔을 붙여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사는 뼈가 부서진 관절과 팔 뼈들을 모아 대강 붙이고 살을 바늘로 꿰매 놓았습니다. 그러나 팔은 계속 썩어 들어갔습니다. 한 달 동안 하동의원에서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꼼짝 못하고 누워 있다가 부산 오 육군병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 육군병원에 도착해서 처음 진료한 군의관들이 '팔의 뼈가 굳기 전에 병원에 왔더 라면 어느 정도 나을 수 있었을 것을 무지해서 시기를 놓쳤다. '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사고 즉시 큰 병원으로 후송해서 치료 하였더라면 어느 정도는 고칠 수 있었을 텐데 한 달간 하동병원에 방치했었기 때문에 치료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는 '제 주위에 스승이나 어른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큰 병원으로 후송해 팔을 치료 하라는 말을 해 주었더라면. . .' 하는 마음을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제 4 절 부산 오육군 병원의 생활

 

부산 영도다리 옆에 있는 오육군 병원에 8월 1일부터 입원한 후 썩은 부분을 수술로 잘라 내는 일을 수 차례 했습니다. 거듭되는 수술로 팔에 남아있는 살이 없어서 양쪽 허벅지 살을 떼어서 입히는 대 수술을 네 번이나 하였습니다. 그리고 팔을 'ㄱ' 자로 려어 긴 대못 2개로 박아 고정시켰습니다. 수술과 치료 때마다 밀려오는 아픔은 중학교 1학년 학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이였습니다. 오 육군병원에서는 1964년 2월말까지 7개월 정도 지냈습니다.

병원 생활은 어린 저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사고 전에는 마음껏 달리고, 씨름하고, 철봉대에 매달려서 운동했는데 이제 왼쪽 팔을 잃었으니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비관하고 학대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비관적인 생각 때문에 병원 옥상에올라가 밑을 내려다보며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당시 오 육군병원에는 민간인으로는 저 혼자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군의관과 간호원 뿐 아니라, 군인 아저씨들은 저를 장애자라는 이름대신 '꼬마' 라 부르며 따뜻한 사랑과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지금도 금보다 더한 희망적인 격려의 말씀만 들려준 그 군인아저씨들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1964년 2월말에 오육군 병원을 퇴원하여 하동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사고는 저에게 왼팔을 잃어버린 2급 장애자라는(1999년 5월 28일판정)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절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저는 37년 동안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장애인의 혜택을 받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 모든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고 적은 혜택이라도 받기 위해 장애자 등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8개월 동안의 고통스러운 병원생활이었지만 사고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 5 절 영보 중학교에 복학

 

그 해 3월에 중학교 1학년에 복학하여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친구들은 2학년인데 저는 1학년이라서 속상했습니다. 건강했던 육신은 어디로 가고 한쪽 팔을 못 쓰는 장애자가 된 제 자신의 모습을 보니 매일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할수 있는 일이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겨울교복을 입을 때는 긴 팔이라서 괜찮았지만 여름교복을 입을 때는 매일 매일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습니다. 남을 의식하여 팔이긴 흰 내의를 입은 다음 짧은 하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이런 저의 복장은 학교에서나 밖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저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혼자 학교를 뛰어 다녀야 했습니다. 체육시간에는 언제나 의자에 앉아서 운동하는 친구들을 바라만 보았습니다. '언제나 1년 전 같이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운동도 하고 같이 행동할 수있을까?' 하고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영원히 불가능한 꿈이 되어버렸습니다.

군 트럭을 같이 탔던 '박상길' 은 사고 즉시 팔을 어깨부분까지 절단을 하였고 그 외 여러 친구들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박상길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끝내는 외롭고 괴로웠는지 술을 먹고 열차사고로 먼저 사망하였습니다. 김순길도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마산 통일산업에 다니며 성실하게 살았는데도 백혈병으로 먼저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순식이도 포크레인을 운전하다가 돌이 날아와 뇌진탕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제 주위의 여러 친구들이 결혼도 못 해보고 저의 곁을 떠났습니다. 저는 팔 때문에 자연적으로 왕따가 되기도 했지만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활동적인 학생으로 자라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 공부를해야 하는지,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목표가 없었습니다. 저의 장애 때문인지 주위에서 아무도 공부하라는 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공부의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저는 장애자가 공부를 해도 쓸 곳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누군가가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학업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저에게는 집안일 밖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소 풀을 먹이고, 퇴비를 해오고 다시 학교 갈 준비를 하여 10리 길을 뛰어갔습니다. 수업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오후에도 소 풀을 먹이고 펄감도 하고, 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장암리 양조장이나 '방성지기' 주막집에서 술이 취하신 아버님을 밤늦게 집으로 모셔오는 것이 저의 일과였습니다.

아버님이 집에 오시면 술이 깰 때까지 온 가족의 이름을 불러댔습니다. 어머니는 논농사, 밭농사에 허리가 다 휘어질 정도로 일생동안 고생만 하였습니다. 아버님의 술 때문에 참다 못한 어머니가 집을 나가서 며칠을 오지 않아 온 동네사람들이 대방골 못에 가서 물을 빼고 어머니를 찾는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절에 있다가 3일 후에 돌아오셨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술 먹지 않는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 그 당시 저의 소원 이었습니다.

한 팔을 못쓰다 보니 나무를 하다가 왼쪽 손목을 낫으로 찍어서 피투성이가 된 때도 있었고 오른 손가락을 찍어서 뼈가 다 나을 정도로 잘라진 때도 있었으며, 겨울에 나무를 하다가 바지에 불이 붙어 무릎을 다 태워서 몇 달을 고생을·한 때도 있었습니다. 풀베기와 나무를 하도 많이 해서 허리에 큰 종기가 나서 치료를 하느라 2달 동안 고생을 한 때도 있었습니다. '정한봉' 에서 풀을 해 오다가 절벽으로 떨어져 죽을 고비도 넘겼으며 땔감 나무를 하다가 7m정도 높이의 나무에서 떨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비록 팔 장애를 가졌지만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리타작을 할 때면 보리이삭을 주우러 다녔고, 가을이면 나락이삭을 주우러 다녔습니다. 고구마를 캔 자리에 고구마 이삭을 캐러 다녔습니다. 겨울에는 산에서 나무를 해서 팔기도 했고 장작을 도로까지 날라주고 돈을 번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였지만 일에 미친 사람같이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저의 학창시절은 학교생활 보다는 가정 일에 더 열심이었습니다.

 

제 6절 보상금 15만원이 나의 왼팔이라니

 

저는 그 당시 군 트럭으로 인한 교통사고를 국가가 보상해 준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저의 어머니 아버지나 동네 친척들도 순박한 산골 사람들이라 알지 못하였습니다. 누구도 저의 한쪽 팔을 잃어버린 현실에 대한 피해보상과 저의 장래에 대한 계획과 대책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저의 한쪽 팔의 장애에 대한 피해보상 보다는 집안 일과 학교 다니는 일에만 매달려야 했습니다. 저는 어리지만 언제나 7남매를 키우기 위하여 밤낮 없이 논밭에서 일하시는 어머님을 도와 어머님의 손발이 되어 드리고자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통사고 브로커가 와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 보상금을 받아 주겠다고 하여 아버님과 형님은 소송을 맡겼습니다. 1966년에그 브로커가 다시 와서 처음에는 10만원을 주고 한 달 후에 와서 5만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상금이 얼마나 나왔는지는
얘기해 주지 않아 아무도 몰랐습니다. 돈 15만원이 나의 왼팔을 대신 하였는데  5만원은 부모님이 쓰시고 10만원은 형님이 쓰고 끝났습니다. 저는 그 당시 어른들의 무지함과 무책임과 무관심을 지금도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1970년에 변호사에게 물어보았더니 시효 3년이 지나 불가능 하다고 하였습니다.

일제 시대의 정신대 피해보상, 6 · 25 전쟁 보상, 월남전 고엽제 피해, 5·18피해도 3년이 지났지만 보상을하고 있습니다. 이 처참한 현실 앞에 왜 3년 시효가 지났다고 피해보상을 받을 수 없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수시로 팔이 아파서 진통제와 약을 사먹고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도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 고아원, 양로원, 장학재단을 설립하겠다는 것이 꿈이 었습니다.

 

제 7 절 고힝을 떠나 자활의 길로

 

저는 서울에 계신 큰 형님의 가구 공장에서 일을 하기로 하고 1968년 2월 21일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하동에서 서울까지 완행기차로 14시간이나 걸려 서울에 도착하엿습니다. 제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이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양보중학교 위에 있던 절의 주지승은 저에게 '학생은 세상에서 장사를 하면은 큰 부자가 되고, 도를 닦으면 큰 인물이 된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저는 악몽을 꾼 것 같은 지난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큰 부자가 되어 학교도 설립을 하고, 양로원도 운영하고, 고아원도 운영을 하고자 고향을 떠나 낮설은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돈을 벌어 이 사회를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형님의 가구 공장에서 1년을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도 형제지간이라 월급은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해 겨울 하동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두 번 째로 고향을 떠난 것은 1969년 2월 21일 입니다. 하동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우리나라 중앙 부분인 대전역에 내리자 밤이 되었습니다. 역 옆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시장구경을 하던 중 큰돈을 투자하지 않고도, 김장사와 미역장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수중에 돈 2만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연히 만난 사람이 빌려 달라고 하여 7천원을 빌려주고,남은 돈으로 방 값을 내고, 밥을 사 먹는 생활을 하다가 돈이 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돈 50원으로 국수를 한 다발을 사면 15일 동안 먹을 수있었는데 그것마저 떨어져서 거지 신세가 되어 길에서 가게마다 다니며 빵을 구걸하여 먹고살았습니다.

할 수없이 저는 대전서 청주까지 걸어가며 막노동 일을 찾아 다녔습니다. 청주에서 2일 동안 돈이 없어서 굶다가 재산 목록 1호인 시계를 5백원에 팔았습니다. 청주서 버스를 타고 신탄진까지 와서 신탄진에서 버스비를 아끼려고 걸어서 대전까지 왔는데 헤매다가 보니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자취방에 돌아왔습니다.

또 다시 막일을 찾았지만 일이 없어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저의자존심과 체면도 배고픔 앞에서는 송두리째 무너져 갔습니다. 집주인에게 밀린 방세 때문에 온갖 욕을 얻어 먹었습니다 구걸하면서 젊은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이 없어서 얻어먹고 사느냐는 비난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돈 빌려 준 집을 찾게 되어 한달 만에 7천원을 받아 대전시장에서 미역과 김을 사서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미역과 김을 팔기 위해 금산장에도 가고, 공주 장에도 가고, 옥천 장에도 가고, 신탄진 장에도 돌아다니는 말그대로 장돌뱅이가 되어 5일장을 부지런히 쫓아 다녔습니다.

돈이 약간 모아지자 나이론 옷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옷을 고르는 척하다가 자꾸 훔쳐가서 할 수없이 옷장사를 정리 하였습니다. 저는 수도공사를 하는 공사장에서 땅 파는 일을 하다가 겨울에 다시 고향인 하동에 돌아가 가사일을 돌보며 산에서 땔감나무 해오는 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1970년 2월 21일 그 동안에 모아두었던 3만원을 가지고 완행열차를 타고 이 번에는 천안에 갔습니다. 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자고 그 이튿날 천안 방죽거리에 하숙집을 정하고 바로 그 날 서울 중부시장에 가서 김 1박스를 도매로 가져와서 천안, 온양, 진천, 안성, 병천, 오산, 평택 장으로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김 뿐만 아니라 북어도 팔고 미역도 팔며 기반을 닦아 갔습니다. 그리고 쌍용동에 살다가 성정동의 새 양옥집 전세방 한 칸을 얻어 이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돈버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장사를 하고 저녁마다 집에 돌아와 돈보따리를 정리하여 돈을 세는 재미에 고달픔도 잊을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돈을 보내고 옷도 사서 부쳐 드렸습니다. 동생들의 책값과 용돈도 보내주었습니다.

매일 외롭고 고달픈 하루의 생활이었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꿈에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하루 하루 돈이 불어나는 재미에 희망을 갖고 열심히 장사를 하였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참으로 열심히 살며자립의 기반을 다져갔습니다.

 

 

제 2장 통일교 전단지 한장에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넌


제 1 절 단 한번의 악연으로 통일교 입교

 

저는 1970년 7월 31일. 5일장이 안 서는 날이라 마당 수돗가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있던 중,  키가  150cm정도 되는 아주 작고 배가 만삭인 정선자라는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전단지 한 장을 주면서 "밤에 우리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니 와서 들어보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객지생활에서 외로웠던 저는 그  전단지 한 장에 끌려 내 발로 걸어가 통일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전단지를 주며 문선명의 통일교를 믿으라는 정선자 씨의 말 한마디가 결국 제 인생을 빼앗고 파멸시켜 버렷습니다.

제가발을 내디딘 천안 통일교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은 단촐한 분위기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40일 하계 전도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에는 통일교 부인들이 남편과 자녀를 떠나 전국    각 통일교에 배치되어 전도 활동을 합니다. 천안 통일교에도 처음에 몇 명이 나와 열심히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학동안에는 부인 전도 대원들이 전도를 했지만 모두 자기 가정으로 돌아갔고 교구 본부인 천안교회는 교인들이 얼마 되지 않아 교회형편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1970년 11월 25일. 777쌍 합동 결혼식을 올린 부인 전도 대원들이 결혼 후에도 남편과 같이 살지않고 3년동안 전도를 하기 위해 천안교회에 전도대원으로 배치되어 왔습니다. 천안 통일교는 지원나온 전도대원들의 전도를 적극적으로 해서 조금씩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김민중 목사는 저에게 열정을 가지고 통일교 교리를 가르치면서 3년 후면 기독교가 통일교로 전부 흡수되고 불교, 유교 등 모든 종교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게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원리 강론인 창조 원리부터 채림론까지 들으면서 문선명이 틀림없이 재림주이며 참부모님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김목사는 3년 안에 종교 통일은 물론 정치, 경제, 언론, 문화까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고 순종하고 따르며 전체가 통일된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으면 3년  내에 지상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강의하였습니다.

부인 전도 대원들은 합동 결혼식을 하고도 제일 깨가 쏟아진다는 신혼 초인데도 남편과 살지 않고 문선명 교주를 위해 시간을 바쳐서 전도 활동을 하여 죽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 부모인 문선명에게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 왔다고 기쁜 보고를 드리기 위해 전도 활동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꽁보리밥과 김치만으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미역을 주면서 미 역국도 끓여 먹게 했습니다.

김민중 목사의 사모는 큰그릇에 빵을 가득 담아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구장 사모가 머리에 빵을 이고 집집마다 돌아 다니며 장사를 하는 것을 보니 통일교 목사의 길을 알 것 같았습니다.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구 본부의 총무 부장인 박무병씨는 호떡 장사를 하여 천안교회의 재정을 돕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전도 대원들은 생활비를 조금씩 냈지만 교회운영비로서는 너무 부족했습니다. 저도 간간이 교회에 가서 꽁보리 밥과 시래기 국을 먹은 때도 있었습니다.

 

제 2 절 천안교회 청넌회 부회장

 

저는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운영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5일장을다니며 미역 장사, 김 장사, 건어물 장사를 하여돈 버는 재미에 빠져 있었습니다. 매일 자전거에 미 역과 김을 싣고 안성, 진천, 온양, 오산, 천안장에가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갈 때면 왼쪽 팔을 사용할 수 없어서 오르막을 올라갈 때는겨울에도 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자전거에 짐을 싣고 갈 때 버스나 트럭이 인정사정 없이 저를 스쳐 지나가서 위험한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찬 바람에 자전거와 육중한 건어물 짐과 같이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는상처를 입을 때도 많았습니다. 힘 들었지만 건어물 장사를 할 때 좋은 장소를 잡았고 저의 열성 때문에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제가 장사가 잘되니까 주위 다른 장사들 중에 시기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 잘 대해주어서 대인관계도 좋았습니다.

천안 방죽거리에서 자취할 때 시장에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밤 9시경에 천안 시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저의 집까지 기독교 목사님 한분이 기진맥진 하여 찾아 왔습니다. 충남 서산에서 교회를 하다가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교회를 떠나 사모와 삼남매를 데리고 여인숙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3일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딱한 사정을 듣고 목사님을 자전거에 태우고 천안역 앞 여인숙에 가서 사모님과 자녀들을 데리고 가서 식사 대접을 하고 돈을 조금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떠날 때까지 적은 정성이지만 도움을 드렸습니다.

하루는 장사를 하고 막 돌아와 밥을 지으려고 하는데 멋진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맨 신사가 와서 배가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얼굴도 점잖고 잘생긴 분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열차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음료수 한 병을 주어서 마셨더니 수면제를 탄 음료수인지 모르고 잠들게 되었고 일어나 보니 상위 양복과 지갑을 도둑 맞았다고 했습니다. 할 수없이 옥천에서 내려 천안까지 철길로만 걸어올라 왔다고 하였습니다. 집이 서울이기 때문에 먹을 것을 얻어먹고 영등포에 있는 집에까지 걸어서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분을 모시고 천안 시내까지 가서 식당에서 짜장면을 곱빼기로 사드리고 집에 들어 갈 때 과자와 과일을 얘들에게 사가라고 돈을 조금 드리고 서울행 버스표를사서 보내 드렸습니다. 며칠 후 주인 아주머니 말이 저에게 도움을 받은 분이 서울 올라가서 은혜를 갚기 위해 천안 자취 집에까지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저의 자취방은 도로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일이 많았습니다.

천안 성정동에 살 때는 우연히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는 화가를알게 되었는데 그 화가도 생활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몇 달 동안 쌀, 라면,반찬을 사다 드렸는데 그때마다 저의 어머니처럼 생각되어서 항상 많이 못사다 드리는 것아 가슴 아팠습니다.

저는 길에서 행려 병자가 쓰러져 있거나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얼마라도 도와주어야 마음이 가벼운 성격 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여자 분에게는 시장에 가서 옷을 사다 드리고 남자 분에게는 집에 있는 제 옷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가서 드린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사이비 종교인 통일교에 발을 내 디딤이 영혼과 육신을 빼앗기고, 꿈도 청춘도 가정의 모든 것도 빼앗기는 순간인 것을 그땐 몰랐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깨닫고 보니 그것은 악몽의 만남, 죽음의 속삭임, 사단 마귀의 역사였습니다. 그 당시 통일교 교인보다 먼저 기독교 교인이 저의 귀에 통일교는 이단교회라 교육을 했더라면 제가 통일교에 입교하여 인생이 파멸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통일교가 이단교회라고 매일 한명에게라도 외친다면 저같이 어리석은 사람도 이단교회에 빠지는 일이 없이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통일교가 사이비 종교라는 외침을 통일교 입교 전까지 단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입교 후에는 이미 통일원리로 세뇌 교육이 되어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재림주로 믿고 섬길 때라서 통일교가 이단교회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 귀에는 기독교 교인이 통일교 반대하는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저는 진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참 부모님으로 재림주님으로 믿고, 우상으로 섬기며,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는 데 앞장섰고, 문선명을 재림 주님으로 구세주, 참부모, 천지 부모로 증거하는 데 모든 청춘을 바쳤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의 자녀나 형제, 친척, 친구가 지금 사악한 유혹에 빠져 통일교에 입교한다면 저와 같이 파멸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통일교 전도를 막아주십시오.

세계에서 사이비 종교의 천국이 대한민국이라 합니다. 사이비 교주들이 아름다운 금수강산, 지상천국인 이 땅에서 기독교를 모태로 하여 우후죽순같이 생겨났습니다. 살인집단 백백교, 암살 자살집단오대양교, 동방교,전도관 등 약 150파가 넘는 사이비 교주들이 저마다 주님이라고 자칭하며 선량하고양심적인 국민들의 영혼을 빼앗아 영적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가정 파탄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모든 성도는 일치 단결하여 목숨을 걸고 통일교와 사이비 이단을뿌리 뽑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4에 "하나님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 이라" 고 말씀했듯이 하나로 단결만하면 문선명 이단궤멸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와 각 교회에서 저를 간증집회에 초청하여 통일교의 정체와 비리를 알리고 싶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내 이웃을 전도하지 않으면 문선명 통일교 집단에 영혼을 빼앗겨 지옥으로 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은 경각심을 갖어야 합니다.

각 지역마다 사이비 종교 박멸운동을 범 기독교 운동으로 활성화시켜 나간다면 이 땅에 다시는 저 같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혼을 빼앗는 이단궤멸을 위해 싸워서 승리하라는 기독교 성도들에 대한 지상 명령 입니다.

 

제 3 절 새벽 기도 하던 중 영계에 가보고 나서..

 

1971년 7월 21일. 집에서 새벽기도 중 잠시 입신했습니다. 저의 육신이 방바닥에 쓰러졌는데 "준철아, 준철아, 준철아!" 라며 3번을 부르는 음성이 들렸고 마지막에 제가 "네!" 하고 대답을 했을 때 영혼이 육신에서 이탈하여 공중에 서 있었습니다.

그 음성은 다시 나에게 "준철아, 이 도끼를 받아.!"라고 말할 때 하늘로부터 큰 쇠도끼가 나에게 날아왔고 엉겁결에 오른 손을 내밀어 그 큰 쇠도끼자루를 잡게 되었습니다.

다시 "준철아, 쇠도끼를 잡았느냐?" 라고 묻자 나는 "잡았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더니 "이 세상을 내려다보아. 바짝 마른 나무는 사이비 종교이며 사단 마귀이니 다 짤라 버려라. 푸른 나무는 살아있는 신앙자이니 살려두어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백발 노인이 되어 쇠도끼로 썩은 나무를 베었습니다. 제가 베기를 다하고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허리를 펴고 일어섰을 때 "준철아, 이제 떠나거라." 라는 큰 음성이 천둥 번개소리 같이 저의 귀에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터널이 나오면 그 터널을 통과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저는 그 명령에 따라 터널을 통과하였습니다. 제가 터널을 통과하니 저 세상 영계였습니다. 한참을 그 곳에서 서 있으니 바다 가운데 수중 다리가 있었고,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자가용 한 대가 제 앞으로 왔습니다. 그차에 있던 운전 기사는 천사였는데, 그 천사가 말하기를 "제가 이제부터 모시겠습니다. " 하고 자가용 뒷 자리의 문을 열어주어 저는 차를 타고 끝 없는 길을 달려갔습니다.

마침내 그 차는 바다를 지나 육지에 도달했고 아름다운 궁전 입구에 정지하였습니다. 그 운전기사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따뜻하고 겸손한 자세로 대해 주셨고, "이제 제가 할 책임은 끝났다" 고 말했습니다. 저를 보고 그 천사 운전기사는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l서도 궁전 입구에 있던 남자가 자가용 문을 열어주면서 저에게 "어서 오십시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 하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안내를 받아 호화 찬란한 궁전 제일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올라가 가장 아름다운 방으로 안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방에 들어갔을 때 강렬한 빛이 있어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저에게는 음성만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하나님을 믿겠느냐!! 천국과 지옥을 믿겠느냐." 하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곳에서 "이제 준철아 떠나거라" 라고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죽은 나무 사단 마귀를 다 잘라버리고 백발노인이 되어 죽어서 할 일을 다하고 저승에 왔습니다. "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너에게 사명이 있어. 이 세상의 모든 사단 마귀와 죄악을 쇠도끼로 찍어 버려라." 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궁전을 내려와 수중다리를 통과하고 이승과 저승의 터널을 통과하여 내 집으로 들어왔는데 제 육신은 아직도 쓰러져 있었습니다. 영혼이 몸 속으로 들어가자 저는 의식에서 깨어났습니다.

저는 다시 살아난 후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제가 죽으면 끝이 아니고 영계의 시작이요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즉시 정 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끼를 받은 것은 목사의 사명을 받아 사단마귀를 찍어 없애라고 하나님이 저에게 명령한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통일교에 목사과정을 밟아 목사가 되었고 통일교 30년 신앙목사생활 중 생지옥같은 문선명 집단의 생활을 체험한 후 세뇌에서 깨어나 탈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며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단 사이비 교주인 문선명적그리스도를 궤멸하라고 저에게 도끼를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 이름으로 언론방송을 통하여 보도하고 각 교회에서 간증하는 일이 통일교회를 궤멸하는도끼받은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보도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문선명의 정체와 피가름 의식, 비리를 폭로하여 인류역사에 가장 큰 문선명 적그리스도를 뿌리 뽑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문선명은 1971년 1월 3일, 예수님 탄신일이라고 주장하며 통일교도인 처녀 장정순을 예수님과 결혼시켰습니다. 통일교 원리강의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제사장 사가랴와 마리아가 관계를 맺어 예수님이 탄생 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의 원리강의에는 '예수를 믿어도 완전구원을 받지 못하며, 실패한 예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이 참 부모요 재림주로서 이 땅에 탄생했기 때문에 예수가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은 1900년 음력 3월 1일을 참부모, 재림주로 섬기는 날로 정했습니다. 문선명의 생일인 1920년1월 6일을 재림주 탄신일로 정한 것을 통일교인들이 세뇌되어 모두 믿듯이 저도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목사가 강의하는 대로 모두 수긍하고 받아들이고 따랐습니다. 저는 3년 동안 모진비바람과 추위와 싸우면서 기반을 닦은 장사가 너무나 아까웠지만 물건을 팔고 다 정리하였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의 길이 제가 가야할 사명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제 4 절 통일교의 제 2차 기동대 활동

 

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목사 가정 인 제2차 기동대에서 6개월 동안 활동하기 위해 순전단 21일 교육에 들어갔습니다. 1972년 11월 21일.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수택리 중앙 수련소에 21일 원리 수련을 받았습니다. 창조원리부터 재림론까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재림주 참부모로 믿고 복종하며 증거하기 위한 세뇌교육 기간 이었습니다.

그 교육 후에 제2차 기동대 대원으로서 충북 순회 전도단 46명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기동단 단장은 임순도씨였습니다. 46명의 대원은 충북지역을 다니면서 6개월 동안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매일매일이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고 복종하며 통일교 발전을 위하여 충성을 맹약하는 고된 세뇌교육 훈련기간 이였습니다. 저는 훈련 기간 동안 무엇이든지 1등을 하고자 어떤 순전단 대원들보다도 더욱더 열심히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얼음 목욕도하고, 밤새도록 철야 기도도 하며, 산꼭대기 성지 기도회도 가졌습니다. 저는 특별 헌신대원으로서 전도를 하면서도 연필사업, 성미사업을 했습니다. 1960~1970년대의 통일교는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을 시켜 전국적으로 성미 구걸 사업과 연필사업, 떡 장사등을 하며 성금함을 들고 모금운동을 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나 추석, 설 명절 때도 모금 운동을 하였습니다. 저는 모금 운동에 자신 있게 활동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 가지 구실로 진행되는 통일교 모금활동에 동참하였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기 위하여 학자금 마련을 위해 헌신사업을 나왔다고 하며 집집마다 쌀과 돈을 달라고 하며 다녔습니다. 시골 동네를 다니면서 집집마다 쌀자루를 가지고 동정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순수하고 착한 시골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동정을 하여 100원, 500원, 1000원을 주었습니다. 연필 한 자루에 쌀을 한 되나 주시는 분도 있고 한 홉 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프면 찬밥이나 국수도 얻어 먹을 때가 많았고,고구마로 점심을 대신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쌀자루에 쌀을 모으면 나중에는 어깨에 둘러매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장거리를 갔다가 교회로 돌아 올 때면 밤 10시가 넘고 11시가 될 때도 있습니다. 교회에 도착하면 매일 녹초가 되었습니다. 모금 활동을 끝내고 밤늦게 돌아오면 결과 보고회, 원리강의 듣기, 기도회를 마치면 자정을 넘기기가 일수였습니다. 아무리 늦게 자도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정성스런 기도를 위해 냉수 마찰을 했습니다. 소변을 보면 그 자리에서 얼음이 어는 추운 겨울날에도 이런 일은 쉬지 않았습니다.

새벽 4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새벽기도를 하였습니다. 통일교는 각시 군 지역에 하나님이 임재하고 함께 하는 땅이라고 하는 '성지' 를 산꼭대기마다 정해 놓고 성지 기도라는 명목으로 새벽마다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헐벗고 굶주리며 매일매일 극기 훈련하는 심정 이었습니다.

이런 저의 노력으로 6개월의 순전단 졸업 때는 46명 가운데 1등을 했습니다 전도도 106명을 하여 우수상을 받고 개근상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문선명을 믿는다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요, 최고의 은사요, 최고의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6개월 동안 저는 매일 꽁보리밥에 김치만 주어도 감사했고, 한끼는 국수만을 주었는데도 저는 참 부모님, 재림주님이라고 믿었던 문선명의 은혜로 알고 감사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것이 예배, 기도, 전도, 쌀 거두는 성미 모으기, 봉사, 심정교육 생활이었습니다. 저는 코피를 다 쏟으며 6개월 동안 극기훈련을 받음으로서 문선명 통일교의 말단 목사, 교회장 자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된 훈련으로 피골이 상접하여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6개월의 수련 후 하동의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제가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첫 번째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의 사슬은 저를얽어 메기 시작했습니다.

1973년 5월 20일 수료 후 6월 1일날 임순도 단장으로부터 충북 보은군 적암교회로 발령을 했으니 임지로 빨리 와서 목회활동을 하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즉시 충북보은 적암교회로 갔습니다.

저는 통일 원리로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일교를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문선명의 교리에 세뇌되었기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 하였습니다. 통일교를 탈출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친 것이었습니다.



제 3장 첫 사역인 충북보은 적암교회

 

제 1절 기적은 일어나고

 

제가 충북 보은 적암교회에 취임식을 하고 부임했을 때 전임목사는 인수인계도 없이 가버리고 난 뒤였습니다. 저는 통일교 교인들 몇 분을 중심으로 전심전력을 다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4개월만에 교인을 70여명으로 늘렸습니다. 보리 벨 때는 보리를 베 주고, 모심을 때는 못줄도 잡아주고, 가을에는 대추도 따주고, 벼 벨 때는 일손을 도우며, 때에 따라서는 아기도 봐주며 무엇이든 봉사를 했습니다.

적암교회 목사로 취임한 후 매일 끼니때 마다 물을 끓여 밀가루 한 주먹을 집어넣고 간장도 없어 소금으로 간을 해서 먹었습니다. 어쩌다 라면이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적암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밥을 먹은 것은 한달 반 만인 1973년 7월 9일월요일이었습니다. 777가정인 유철재 부목사가 쌀 2되를 성미로 가져 온 것이었습니다. 쌀로 밥을 지어서 맨밥에 간장만 가지고 먹었지만 꿀맛이었습니다. 저는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그 후 교회 옆 땅을 개간하여 돌과 나무를 걷어내고 옥수수를 심어 옥수수 밭을 만들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서 점심, 저녁이나마 끼니로 때우려고 매일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해 길렀습니다. 옥수수 싹이 무릎까지 자라 올라 왔을 때였습니다. 심방 갔다가 오니까 동네 큰 암소와 새끼 송아지가교회에 들어와서 그 옥수수 싹을 잘라먹어 버린 것 이었습니다.

저는 매우 화가 나고 한편으로는 서러웠지만 그래도 남은 옥수수를 잘 길러 충북 청주 본부 교회와 보은 교회에도 한 자루 주었습니다. 그리고 적암교회 교인들과 옥수수 잔치를 벌렸습니다. 남은 것은 저의 아침 저녁 식사대용 양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적암교회 땅은 통일교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교회땅 120평을 매입하기로 작정하고 헌금을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이 3천원을 헌금하였고 나머지 돈은 제가 서울 중부시장에 미역과 김을 사다가 추석 때 각 시장에서 팔아 번 돈을 모았습니다. 또한 보은 속리산 산줄기 인 구봉산에 까지 올라가하루종일 칡덩굴을 잘라서 동네로 가져오면 한 관에 100원씩을 주었는데 매일 칡덩굴을 팔아 300원씩을 벌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대금을 지급하고 대지 120평을 매입 하였습니다.

적암 교회에서의 생활은 저에게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최악의 가난이었고 처절한 생활 이였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1인당 매월 50원을 내는 회비도 내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녁마다 강의를 할 때나 일요 예배, 수요 예배때 온 열정으로 설교를 하다보면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렸습니다. 저는 그래도 죽으면 살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전력을 다했습니다.

 

제 2절 성결교 신학교

 

저는 목회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신학에 대한 깊이와 교회 예배, 기도, 전도, 교회관리, 행정, 교육 등 모든 것을 제대로 교육받고자 성결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수님들은 문선명이 사이비교주며 통일교는 이단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통일교에 세뇌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먼 달나라 말씀처럼 제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성결신학교에서 6개월 수업 후에 성결교 신학대학교 2학기에 편입했습니다. 당시 학교에는 김응조 학장님, 전영식 학감님, 성기호 교수님(지금의성결대학교 총장님), 조두만 목사님 등 많은 분들의 열정적인 가르침에 감동 받고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초조하고 불안한 나날이었습니다. 통일교는 이단이라 했기 때문에 같은 신학생들과 차도 같이 못타고 빨리 타거나 늦게 버스를 타고 4년 동안 다녔습니다.

성결교 교단에서는 저를 장로교회의 전도사로 알고 있었습니다. 전영식 학감님은 저에게 열정적으로 기도도 잘한다며 능력있는 부흥사가 되어 성결교 교단에서 목회 활동을 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갈 길이 있어 따를 수는 없었지만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성결교 신학교 신학생 시절에 하나님에게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재림 주인가, 적 그리스도인가 간절한 심정으로 100일 단판 기도라도 드려서 하나님께 문선명의 정체를 알려달라고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무지하고 몽매한 저는 문선명을 재림 주, 참 부모로 믿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 다.

그러나 지금 생각을 해보니 그 당시 단 한번이라도 통일교에 대해 교수님과 상담을 했더라면, 통일교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기도를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저를 붉은 적 그리스도인 문선명 통일교교주로부터 구원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 교주의 붉은 철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도 통곡하셨을 것입니다. 저도 지금에야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제 3절 문교주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가는 의식인 합동결혼식

 

1975년 1월 13일. 청파동 통일교구본부 교회에서 전국에서 많은 미혼남녀가 참석한 가운데 집회가 열렸습니다. 미혼남녀를 양쪽으로 두 패로 만들고 가운데 길로 자칭 재림주인 문선명이 왕복을 하면서 미혼남녀의 얼굴 관상을 봅니다. 조상 위로 7대, 아래로 후손 7대 관상을 보고 천 년을 내다보며 가정 천국과 행복한 가정을 꾸며 이혼이 없는 참가정 합동결혼식을 올릴 짝을 맞춘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이 "너, 너 이렇게 만나봐!" 라고 명령하면 미혼남녀는 옆의 만남의 장소에 가서 서로 만나보고 문선명 앞에 와서 경배하고 결혼할 것을 맹세하고 마지막에 약혼 축도식을 받습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제가 신학 대학을 다니고 있고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하오니 저의 아내로 착한 사람으로 짝을 맞추어 주십시오." 라고 용감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문선명은 "그래? 내가 목사 사모로서 착한 색시감을 찾아 주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끝부분까지 미혼 여자들을 둘러보고 맨 마지막에 앉은 이영희씨를 저의 결혼할 대상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영희씨와 만나 대화를 해보고 결혼 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이영희씨에게 만나 나는 신학생이라는 것, 앞으로 목회자의 사명을 다할것, 교통사고로 팔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말했을 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축복 결흔식이 남편으로써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자녀들 앞에 아버지로써 역할을 다하지못하는 비극의 출발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1975년 2월 8일 서울 장충체육관에는 성대한 통일교 할동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저의 집이나 장인, 장모님 집에서는 통일교를 반대할뿐 아니라, 합동결혼식은 더욱 만류했었습니다. 그러나 장인, 장모님은 결혼식장인 장충체육관에 오셨습니다.

결혼식에서 문선명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예수님도 축복을 받지 못하였는데 부족한 너희들이 축복을 받아 원죄, 혈통죄, 연대죄, 자범죄도 없는축복 가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통해 합동 결혼식을 올린 통일교 교인들 가정은 죄 없는 자녀가 탄생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개인천국과 가정천국을 이루어 천국 백성으로써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부는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통일교 규례에 따라 3년의 전도기간이 있기 때문에 서로 혜어져 살았습니다.

1975년 6월 7일 토요일, 구국세계대회를 위해 각 나라 60개국 대표가 입국했고 1백 20만명이 서울 여의도 광장에 모였습니다. 전국 통일교 교인들은 각 지역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여의도 광장으로 모여 극적으로 1백20만명 집회를 성공리에 잘 마쳤습니다. 통일교에서 최초 합동결혼식자(1961년 5월 15일, 36가정)을 박종구 총단장(지금은 고인이 됨)은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우지 못하면 전국의 목회자와 통일교 교인들은 한강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자." 고 강조하면서 "전국의 기독교 교회에서는 6월 7일에 집회를 못하도록 비가 오라고 금식철야 기도하며 정성을 모으고 있다. " 고 하였습니다.

그날 오전엔 비가 와서 매우 초조했으나 행사를 하는 오후에는 비가 그쳤습니다. 통일교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통일교에서는 하나님이 문선명 자칭 재림주 편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기독교를 떠났고, 통일교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지금 생각을 해보니 구국세계대회는 문선명이 자기 욕망과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행사였습니다.

그 당시 통일교 교인은 1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교세를 자랑하기 위해 1백20만명을 집결하게 한 집회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날 동원된 전국의 교인들의 피눈물이 섞인 헌금으로 승공연합 사람들과 노인들의 식사대접, 관광버스 제공 등 온갖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제 4 장 서울 강서 교구

 

제 1 절 교구본부교회 개척, 부흥, 교회건축

 

1975년 7월 1일 서울 시내 12곳에 통일교 협회 본부에서 12명의 목회자를 추천하여 파송했는데 저는 서울 강서구를 맡게 되었습니다. 교회 마련을 위해 강서구 전지역의 건물을 수소문하고 다녔습니다. 마침내 화곡본동 2층에 교회를 마련하여 9월 1일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협회에서 단 10원도 지원 없이 자비로 교회를 마련 하다보니 경제적인 어려움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감사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없어도 사명감으로 충만하고 충과 효와 열을 다하겠다는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기필코 교회를 건축하여 크게 부흥하고 넘치는 제단을 만들 것이라고 다짐 하였습니다.

매일 문선명 사진을 걸어놓고 경배드리기, 문선명 교주에게 충성하는 서약인 나의맹세, 가정맹세, 성초기도, 조식금식, 전도, 봉사 생활로 일관 하였습니다. 개척교회이다 보니 교인들은 있어도 교회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저의 집과 논 600평을 판돈으로 어렵지만 교회를 이끌고 갔습니다.

신학교 등록금 마련, 교통비, 교회운영비, 교회건축 준비, 전도 등 여러가지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교회건축을 위한 30일, 60일, 120일 조식 금식기도를 했고, 전쟁을 하는 심정으로 피, 땀, 눈물로 정성을 쏟았습니다.

강서교회는 2층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교회 건축을 할 때까지 박현종 430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강서구철거민 동네인 신월동에 18만원짜리 방을 얻어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160명 재적과 120명 예배를 목표로 밤낮 없이 혼자서 1인 5역을하며 전도에 주력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였고 그 사람들을 통일교 교인으로 만들기에 몸부림을 쳤습니다.

개척 교회이다 보니 매일매일 목사가 직접 전도하러 다녀야 하고 심방해야 했습니다. 거의가 새로 전도된 교인이다 보니 헌금도 별로 모이지 않아신학 대학 등록금과 교통비와 생활비가 필요해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은 원리 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각 교회마다 흑판이 필요하였습니다. 저는 교회 운영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흑판은 물론, 자동 스탬프 도장, 책도 팔았습니다. 심지어는 콘크리트 쓰레기통 장사도 직접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기도를 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취침 때까지 매일 미친듯이 경배, 나의 맹세, 기도를 하며 살았습니다. 협회에서는 개척교회인데도 교회 전세금이나 교회 운영비, 생활비 등을 단10원도 지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인 5역을 해서라도 교회를 이끌고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6년 1월 1일 문선명은 '자녀로 인한 천국 실현' 이라는 표어를 통일교 교인들에게 내려주었습니다. 저는 강서교회 개척목사로서 한 해를출발하는 첫 시간을 얼마 되지 않은 교인들과 함께 철야 기도로 정성을 모았습니다. 당시 강서구 화곡동은 허허 벌판 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강서교구본부교회 건축을 최우선 목표로 세웠습니다.

문선명은 1975년 12월 31일 오후 8시 15분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통일교 목회자들과 교인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서 역사적인 통일교 현시점을 사수하라고 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은 역사적인 결실시대에 통일교 교인들이 죽음으로서 이 민족을 구하고 통일교 발전에 제물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문선명의 시책에 따라 강서교회를 기필코 발전시키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저는 "강서교회 교회건축을 하여 자칭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님이 안식 할 수 있는 강서교회 제단을 만들 수 있게 축복해 주옵소서" 하고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매일 신들린 사람처럼 밥을 먹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매년 1월 3일은 2000여년 전 예수님이 탄생한 날이라고 하여 통일교 교회에서는 예수 탄생 예배를 드립니다. 그날도 저는 새벽 제단에서 예수님 탄생 기도회와 간단한 예배 정성을 모았습니다.

1976년 1월 5일 서울 용산 통일교에서 서울교구의 목사 전체 전진 대회가 있었습니다. 김 영휘 한국협회장과 회의를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강서교회당 건축을 해준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서울 시내에는 대 선배 목사들이 있었지만 거의 전월세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척목사로서 교회건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때부터 만사를 제쳐놓고 교회 건축 대지를 사기 위하여 강서구 전체를 돌아 다녔습니다. 부동산 소개소는 거의 다 다녔을 정도로 많이 알아 보았습니다. 교통 좋고 인구도 밀집된 장소 3곳을 정하여 협회에 가져 갔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김수한 건설 대장이 통일교 A타입 교회의 교회는 산꼭대기에 건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 차례 산꼭대기는 안된다고 간절히 호소하였지만 욕만 얻어먹고 결국은 화곡동 고지대에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정하려던 교통 좋고 인구도 밀집된 대지와 산꼭대기 대지와는 가격 차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몇 천 원 차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김수한 건설대장 때문에 산꼭대기에 짓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지 125평의 총 금액은 5백62만5천원이었습니다. 대지 125평에 건평 42평의 예배당을 계획했습니다.

1976년 3월 3일 대지125평을 매입하고 교회 건축 설계를 준비하며 교회건축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강서교회 옆에 있던 영등포 통일교 정호영 목사에게 교회 건축을 하는 2달 동안 3명만 강서교회에 교회 건축 인부들 식사 준비, 물 길러 오는 것 등을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관할 교회의 건축인데도 거절 하였습니다.

통일교가 천국을 외치며 3년 내에 통일교와 기독교의 통일이 이루어 진다고 하고 문선명이 만 인류에게 재림주로 추앙을 받는다고 하였지만, '사랑과 식구' 라는 말이 허구에 불과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희생,봉사, 탕감 제물이라는 말도 입으로만 외치고 실천하지 못하는 죽은 신앙이라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 교인들이 서로 부를 때 '식구님' 이라고 합니다. 적든 많든 한 솥 밥을 먹는 가족처럼 사랑과 희생을 나누자는 뜻에서 식구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리나 사랑을 외치지만 제가 통일교에서 경험한 것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함과 냉정함 뿐이었습니다.

교회당 건축일은 우리 강서교회의 몫이었습니다. 교회 부인 몇이 아이들을 업고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점심 식사 준비를 하였습니다. 저도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하였습니다. 벽돌도 나르고, 나무 판자도 자르고,시멘트 일, 페인트칠, 자재 운반, 200m 아래에서 물을 길어 오는 일 둥을 하였습니다. 건축하는 동안 저는 예배와 심방 외에 건축일로 재단과 협회에 뛰어 다니며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 하였습니다. 너무 일이 많고 힘들어 1인 10역을 해도 모자랐습니다. 오진수씨는 강서교구 본부 교회 건축을 위하여 고향 함안에서 강서교회로 와 무보수로 교회 건축 일을 도와줬습니다. 서정수씨도 봉사활동을 너무 많이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착하고 진실한 청년들 이였습니다.

드디어 강서교회가 완공되자 그간의 많은 시련과 고통, 배고픔, 외로움, 기쁨 등 만감이 교차 하였습니다. 그 순간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대지 125평 가격이 560만원 정도였지만 지금은 100배가 넘는 5억 정도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육신을 벗고 영계에 갈 때까지 강서교회에서 목회하여 점점 더 큰 대형 교회로 성장시킬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강서교회를 건축하던 중 여러 가지 일이 많았습니다. 철물점에 가서 못을 사려고 쌀 배달을 온 쌀가게 아저씨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급경사 길을 내려가는데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아 순간적으로 도로 옆 시멘트 벽으로 자전거 핸들을 꺽었습니다. 저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벽에 부딪히면서 오른쪽 무릎 위에 뼈가 보일 정도로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제가 쓰러지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자전거 주인은 브레이크가 고장났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생명을 구한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뼈 속까지 심을 박아서 썩지 않게 하고 새 살이 차 오를 때까지 두 달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붕대로 다리를 싸매고 전과 다름없이 건축 일을 하였습니다. 건축하는 동안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배웠습니다. 벽돌쌓기 시멘트일, 미장일 등 전문 기술자와 비슷하게 일을 많이 했습니다.

피와 땀, 눈물로 사력을 다한 서울의 강서교회 건축은 1976년 6월 10일 성공적으로 완공 하였습니다. 통일교 역사가 21년이 지났지만 당시 서울시내 영구교회는 몇 개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전세, 월세 교회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제일 후배 목회자로써 개척 1년 만에 교회 건축을 완공하게 되어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강서교회에서 1인 10역을 하며 새로 전도된 80여명을 교육시키고 교회를 교인들로 넘치게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1962-1963년대 선배 목사들 5명이 서울로 발령 받아 지방에서 올라와 강제로 강서교회를 빼앗았습니다. 본부에서는 강서교회를 저에게 빼앗아 이영진 목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철거민 달동네인 노원교구본부 상계동 개척 교회를 시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교회 건축을 했던 강서교구 본부에서 헌당 예배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눈물을 머금고 노원교구본부 개척 교회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임 이영진 목사는 목회 활동은 하지 않고 버스토큰 가게나 하고 신문 판매를 하였습니다. 저는 박탈감과 충격으로 한동안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은 회의 때 "재주는 곰이 넘고 덕은 엉뚱한 사람이 받는다" 며 저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때 통일교를 탈출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당시 문선명 통일교를 떠나면 죽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나 식구들은 한 두 번 충격을 받고 상처를 받으면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버리고 통일 교회를 탈출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는 외골수여서 그때는 문선명을 떠나면 천국을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문선명 통일교를 버리고 미련을 끊으라고 꿈으로 경고하며 감옥에서 탈출하라고 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왜 문선명 통일 교회에 미련을 버리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저는 바보였습니다. 세번째로 통일교를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포기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 5장 노원교구 본부 개척교회 제 1차

 

건축

 

제 1절 그래도 끈질긴 층성
 

1976년 8월 10일 노원 상계 교회로 부임하였습니다. 앞서서 여러 선배 목회자가 상계동에 교회를 세우려고 왔었지만 너무나 최악의 조건이라 다 실패하고 방 한 칸도 마련하지 못한 채 그만 두었던 곳이었습니다. 저는 작은방에서 상을 강대상으로 삼고 몇 사람과 노원교회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비록 강서교회 일로 마음은 아팠지만 목숨을 다해 몸부림치며 교회발전에 주력했습니다.

김 영휘 한국협회장도 부당한 인사이동에 마음이 아팠는지 상계동 비포장도로의 먼지를 뒤집어쓰시고 직접 찾아 와서 제게 1만 5천원을 주어 쌀과연탄을 샀습니다. 저는 교인을 전도하기 위해 미혼 남녀들을 취직 시켜 주었습니다. 합동 결혼식을 한 사람이라도 실직자는 취직을 시켰습니다.

첫 번째 노원교회 개척을 했던 상계 3동 95-75호 교회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장민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렵고 힘든 가정적 어려움을 해결 해주고 통일그룹인 일화제약에 취직 시켜 주었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라고 취직 시켜 주었는데, 처음에는 나왔지만 나중에는 잘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인은 50분의 1도 되지 않는 1200원을 월정 헌금으로 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회사에서 퇴근 후 교회에 와서는 저의 멱살을잡고 뺨을 때렸습니다. 제가 노원교회 장년 회장인 성영낙 씨에게 '장민수씨가(777쌍 합동결혼식자) 일화제약 내의 이순주(1800 가정) 부인과 연애를 한다' 고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일화제약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또 성영낙 씨에게 그런 말을 한 일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연애 헛소문의 진상을 알고자 성 영낙 씨에게 다그치니까 자기 교회 목사인 저에게 누명을 씌웠던 것입니다.

장민수 씨는 자초지정을 알아 보지도 않고 갑작스럽게 교회에 들어와서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고 폭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잘 살게 해주고 취직까지 시켜 주고 살려 주었더니 누명을 씌우고 폭행까지 하다니 웬 일이란 말입니까? 저는 꿈에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살면서 먼저 원인제공을 하여 싸움하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언제나 원인제공을 하여 문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통일교가 천국인줄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목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제 전부를 바쳐 교인들을 사랑한 결과 돌아온 것은 누명과 폭행과 상처 뿐 이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저는 통일교 문선명을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며 교인들을 사랑한 것 밖에 없습니다.

 

제 2 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길

 

1972년 11월 21일부터 2000년 8월까지 통일교 목사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가난은 나의 친구였습니다. 제가 통일교 목회를 하기 전에 장사해서 모은 돈은 작은 집과 땅을 살 정도였습니다. 그 돈을 형님에게 맡겼는데 형님은 제가 사이비종교 목사라고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형님은 가구공장을 했는데, 가서 돈을 달라고 하면 나무 막대기로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폭행했습니다. 저는 이단 교회 거지 목사라고 온갖 핍박을 받아도 문선명 참 부모님을 믿고 견뎟습니다 결혼 반지, 시계는 전당포에 팔아서 교회 생활비로 쓰고 돈이 될 수 있는 책은 중고 서점에 팔아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1975년 12월 23일엔 형님에게 돈을 받으려고 밤 10시까지 형님을 기다리다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날은 발목까지 찰 정도로 눈이 많이 왔습니다. 그때 학생 차비는 25원이었는데 저는 15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지 못하고 마포에서 강서교회 옆에 있는 신월동 월세방까지 걸어와야 했습니다. 오는 도중 눈길에 몇 번이고 넘어져 옷이 얼음 덩어리가 되어 도착하였습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통행금지를 넘긴 새벽 1시에 집에 도착하여 추위에 떨며 방에 들어갔습니다.

연탄불이라도 꺼지지 않았더라면 몸을 녹일 수 있었을 것인데 연탄불은꺼져 있었습니다. 집주인이 구들도 없이 연탄 아궁이만 만들어 저를 속이고 세를 놓았던 것입니다.

구들도 놓지 않고 시멘트만 바르고 도배만 하여 방을 만들었기 때문에 벽에는 고드름이 얼어 있었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추위와 배고픔,고난의 날이었습니다. 노원 교구 본부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도 가난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노원교회는 헌금도 없고 몇 명을 가지고 개척 교회를 하였기 때문에 신혼초인 저의 아내 이영희씨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으로 이를 악물어야 했습니다. 끼니를 거르는 비참한 노원교회 생활에 절약을 생명으로 알고 알뜰하게 생활 하였습니다.

아내는 상계동 도깨비 시장에서 버린 배추 잎을 주어다가 김치를 담았습니다. 어쩌다 계란을 사게 되도 깨진 것을 모아 파는 것을 사다 먹었습니다. 쌀도 7~8년 된 정부미로 속은 벌레가 다 파먹고 껍질만 있는 쌀을 헐값에 사다 먹었습니다. 밥을 하면 밥이 죽이 되어버 리고 입에 들어가면 씹은 것도 없이 녹아버렸습니다.

어쩌다 밥이 남으면 점심에 먹을때는 밥이 죽이 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매일 국수, 라면, 밀가루 수제비를 점심이나 저녁으로 먹었습니다. 저의 자녀들은 먹는 것에 너무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상계교회에서 서대문 행촌동에 있던 신학교까지 토큰 2개만가지고 다녔습니다. 토큰이 없어서 몇 시간이나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상계동 교회까지 온 때도 있었습니다. 양가 부모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양가 부모 형제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협회, 교구에서는 목회자가 아무리 생활이 궁핍해도 단 10원도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서울 교구 내에서 저와 같이 12명의 목사들이 개척을 시작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다 그만두고 3~4명만 어려운 목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1978년 2월 23일 성결교 신학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교인들,부모, 형제들에게 졸업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인만 졸업식에 왔습니다. 그러나 겨우 차비만 있었기 때문에 꽃다발 살돈이 없었습니다. 제게 비상금 5천원이 있어서 아내에게 5천원을 주어 꽃을 사오도록 했습니다. 카메라도 없어서 동료에게 찍어 달라고 하여 한 장을 찍었습니다.

후에 편지로 사진 한장 받은 것이 유일한 졸업식 사진입니다 이제는 그 한장 마저 액자 속에서 곰팡이가 피어 하얗게 되었습니다.

 

제 3절 제 1차 노원 교회 교회 대지 매입 건축

 

1976년 12월 13일 상계3동 95-75호에 대지 20평을 매입하고 교회를 재건축 하였습니다. 1977년 3월 3일 중소기업 은행과의 잘못된 계약에 이의를 제기하여 재판에 승소해서 교회를 영구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교인들 이사짐을 옮겨주고 취업알선, 속옷 빨래 등 온갖 일을 하면서 교회를 위해 목사가 아닌 머슴으로 살았습니다. 진심으로 교인 한 사람 한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 20평 교회가 가득 차고 넘쳤습니다. 지방 중소도시나 산골에서 통일교를 개척, 부흥시키려 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최악조건인 강서교구본부와 노원교구본부를 개척, 부흥을 시킨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승리였습니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교회 건축을 하였더라면 선배 목사들에게 교회를 빼앗기지 않고 한국 최고의 통일교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제가 서울 최악의 허허벌판에서 개척하여 교회를 부흥발전을 시키면 선배들에게 교회를 빼앗긴 것은, 교회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바람 잘 날 없는 시련과 처절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통일교 대 선배 목사들을 제치고 크고 좋은 환경의 교회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와 같이 목회를 시작했던 서울시내 교회 12곳이 다 폐쇄되고 3곳만 남은 것은 개척교회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를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제 6장 새생명의 결실인 3남매

 

제 1절 첫 딸 '박은주'

 

1978년 1월 IS일 주일 오후 1시 26분에 첫 딸 은주가 태어랐습니다. 태몽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 장군이 바로 네 아들이다. " 라고 들었기 때문에 저는 은주가 태어날 때까지도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교인, 이웃집 사람들도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1월 14일부터 하루종일 진통을 하고 14일 밤에는 밤새도록 진통을 하였지만 아기를 낳을 수가 없었습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사단 세계 사람이 아기를 보면 안 된다고, 성별 된 참 부모님의 아들딸은 자연분만 해야 한다고 교육했기 때문에 집에서 아기를 받으려고 했으나 불가능 했습니다.

1월 15일 새벽 상계 3동 도깨비 시장에 있는 40년 된 조산원으로 산모를 데리고 갔습니다. 산모는 기진맥진을 하였습니다. 오전 11시까지 진통을 했지만 아기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교회로 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산모에게 가려고 했으나 새 신자가 그 날 따라 두 사람이나 와서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낮 12시 40분까지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조산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까지도 아기를 낳지 못하고 '조산원' 원장과 산모가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습니다. 원장님은 40년 동안 아기를 받았어도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병원으로 빨리 후송하지 않으면 산모나 아기가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산모는 기진맥진하여 의식이 희미한 상태고 양수도 밖으로 다 빠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저는 7초대에 성초를 켜놓고 성령 하나님께 산모와 아기를 살려달라고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4Kg이나 나가는 아기가 나왔습니다. 산모와 아기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진실하게 하나님을 안믿었지만 믿었고, 제 마음속에는 통일교 목사를 하고 문선명에게 세뇌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잘 길러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것을 다짐했습니다.

1980년 10월 5일 오후2시에 두 돌이 된 은주를 잃어버렸습니다. 파출소에 신고도 하고, 동사무소에 가서 박은주를 찾는다는 안내방송도 수 차례 하였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상계동 전체를 오후2시~저녁 7시까지 울면서 찾아다녔습니다.

은주 엄마와 교인들 몇 사람도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은주는 항상 밥만 먹으면 교회 밖으로 나갔고 겁이 없었습니다. 아무데나 아장아장 잘 걸어 다녔습니다. 은주는 아기 때부터 용감하고 겁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날도 교회를 벗어나 여러 군데를 아장아장 걸어 다니다가 혼자서 새마을시장 구경을 하였나 봅니다.

제가 은주를 찾았을 때는 시장 도로변 독립문 메리야스 가게 진열대 앞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녁 7시여서 제법 어두울 때였습니다. 저는 은주를 찾은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은주 엄마나 교인들도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파출소나 동사무소에서도 다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찾지 못하면 고아원으로 갈 뻔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미쳐 있었기에 문선명씨에게 충성하는 구구 절절의 심정을 직접 웅변원고로 써서 은주에게 주었습니다 은주에게 웅변연습을 시켜 통일교 전국 웅변대회에 나갔습니다. 은주는 1985년 2월25일 참부모님 탄신기념 제26차 전국교구 대항 웅변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고 1987년 2월 3일 국민학생부 자칭 재림주 문선명 부모님 탄신기념 제28차 전국교구 대항 웅변대회에서도 1등을 하였습니다.

은주는 초등 학교 때부터 각종 상을 수없이 많이 받았습니다. 용감하고 인정이 많으며 자상합니다. 은주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용돈, 세배든 등을 알뜰하게 모아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생활이 어려워 그 돈을 다 썼습니다.

은주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얼마 되지도 않는 용돈을 모아 양복 한 벌을 사주었습니다. 제가 입을 옷이 없을 때마다 은주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지금까지 양복을 5벌이나 사주었습니다. 은주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저의 아내에게도 제가 못해 주는 옷을 해주고 반지도 해주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질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고기를 사오고 약을 사왔습니다.

은주는 밥값을 아끼려고 밥을 굶고 다닐 정도로 자신에게는 알뜰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들, 후배들에게는 어렵게 모은 돈으로 얼마나 많이 베풀고 사는지 모릅니다. 마음씨 곱고 항상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해주는 은주는 우리 집의 효녀 입니다.

 

제 2 절 아들 '박영진'  

 

1979년 5월 12일 오후 1시 29분에 둘째 영진이가 첫 딸이 태어났던 곳에서 진통도 전혀 없이 순산으로 태어났습니다.

영진이가 태어날 무렵 통일교에서 5,000만 달러(한화 400억 정도)를 들여서 '오인천' 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시내 목사들과 교인들은 총 동원되어 엑스트라를 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저도 맥아더 장군과 작전회의를 하는 삼성장군으로 출연하고 이북의 포로로 교회에서 끌려 나오는 역할도 했습니다.

영진이가 태어나는 날에도 영화촬영을 하고 교회로 돌아오는데 벌써 아들 영진이를 낳은 것이었습니다. 이후, 영진이는 황달, 부스럼, 탈장 수술등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영진이가 첫 돌이 지나 걸음마를 할 때 아내와 장모님 생신으로 처갓집에 갔었습니다.

1980년 5월 저 혼자 잠을 자는데 새벽 1시경 하나님의 음성이 저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너의 아들을 빨리 찾아라..."

꿈에 시체를 넣는 관을 보여주는데 시체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꿈에서 깨어나 밤새도록 우리 가정에 우환과 환란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침 일찍 울산에 있는 영진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영진이가 아무 탈이 없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새벽에 영진이가 일찍 일어나 아장아장 걸어서 마루를 나와 부엌을 내려다보다가 새빨간 연탄 아궁이에 거꾸로 머리가 처박혔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부엌에 있던 영진이 엄마가 놀라서 다리와 목을 잡고 영진이를 버쩍 거꾸로 들어 올렸다고 했습니다. I~2초도 안 되는 찰라에 영진이 목숨을 구했습니다.

영진이 엄마가 마당이나 방에 있었더라면 영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얼굴 전체가 화상을 입어 차마 볼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영진이는 이마에 물집만 잡히고 머리만 조금 태웠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음의 자리에서 영진이의 생명을 구해주셨습니다.

영진이는 어릴 때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영진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매년 반장,부반장을 했고 우등상도 받았습니다. 중학교 때는 전교 3등으로 장학금을 받아 저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저는 가족들과 노원교구 교인들과 같이 매일 오인천 영화에 출연을 했습니다. 북한군인이 6·25때 소련제 탱크를 몰고 3·8선을 넘어와 우리 가족이 사는 초가집을 송두리째 탱크로 밀어버리는 장면에서 마당에 있던 영진이가 놀라서 울고 아내는 빨래를 너는 역을 하였습니다. 단역 이였지만 그 때는 사명감에 불타 올랐고 감사하는 마음 뿐이였습니다.

그러나 400억을 투자한 오인천 영화는 한국에선 개봉도 못했고 미국에서만 일부 상영이 되었습니다. 400억이면 서울시내 각 동에 1억짜리 빌딩400개를 살 수 있는 돈이었는데 빌딩을 샀으면 지금은 수 천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선명 주위에 있는 충성꾼들이 끊임없이 일을 저질러 교인들의 피눈물을 짜고 파멸시켜 갔습니다.

통일교에서 추진했던 중국 판다 프로젝트는 항공, 자동차, 공업단지, 도시 등을 만드는 공사도 추진했지만 모두 실패를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4억 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알지만 공사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중간에서 사기 당하고 말았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피눈물 어린 통일교 교인들의 헌금을 사기 쳐서 교인들의 영혼과 육신을 죽이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엄청난 실패와 낭비를 하면서도 그 책임을 통일교 교인들에게 전가시켜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제 3 절 막내 '박은영'

 

1981년 4월 8일 새벽 5시 15분에 둘째 딸 은영이가 태어났습니다. 3남매가 매년 태어나다 보니 아내는 종일 3남매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한 무능한 남편인 저는 아내에게 고통만 안겨 주어 미안한마음뿐이었습니다. 아내는 하루종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예배, 전도,심방을할뿐 아니라 가난한 살림을 불평 한마디 없이 잘 극복해 나갔습니다.

저는 노원 상계 교회의 발전을 위해 밤낮 없이 뛰어다녔기 때문에 아내는3남매를 키우느라 저녁에는 녹초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녁부터 새벽 기도까지는 제가 교회에서 어린 3남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기저귀도 빨고,가사 일도 도왔습니다. 연탄불 가는 것은 기본 이었습니다. 그러나 혹독한 고생과 처절한 가난으로 남편과 아버지로써 역할을 다하지 못해 한없이 가슴 아파 했던 날들이었습니다. 은영이는 언제나 언니가 입던 옷을 받아 입었습니다. 영진이가 입던 옷을 은영이가 입었을 때는 벌써 옷이 헤어질 정도로 낡아 버렸지만 은영이는 불평 없이 입었습니다.

1987년 2월 21일 우리 부부가 심방간 사이에 도둑이 교회에 들어와 18만원을 주고 산 카메라와 10만원을 주고 산 카세트를 훔쳐갔습니다. 은주와 영진이는 학교에 가고, 사택에는 7살인 은영이 혼자만 있었습니다. 도둑은 보자기에 물건을 다 싸 가지고 밖으로 나가다가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대형 액자 사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저의 부부가 심방을 갈 때마다 경배하고 기도하며 돌아와서도 경배하며 잘 다녀왔다고 보고하는 문선명 교주의 대형 액자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은 문선명 교주의 대형 액자를 집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경배하며 기도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하나님의 대적이며 자칭 신이 되어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자기에게 경배하고 기도를 하도록 시키고 있었습니다.

도둑이 문선명 통일교 교주 사진 액자를 떼려고 하자 은영이는 어린 나이인데도 도둑을 발로 걷어찼던 것입니다. 도둑은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그  자리에서 벌렁 넘어졌습니다. 도둑이 일어나 "아! 이 새끼" 하면서 온영이의 목을 졸랐습니다 은영이는 고함을 질렀습니다. 교회 라에서 떡볶이 장사를 하는 할머니가 고함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왔습니다. 떡볶이 할머니가 도둑을 보고 "너 뭐야! 아기 목을 왜 졸라?" 하면서 도둑을 때리자 할머니를 확 밀치면서 쓰러뜨리고는 카메라와 카세트, 라디오를 가지고 도망갔습니다.

추운 겨울이라 두꺼운 목 폴라를 입고 있던 은영이의 목에 깍란 멍과 상처만 조금 나고 무사했습니다. 은영이는 착하게 자라나 걱정, 근심을 끼치지 않고 효도를 잘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반장도 하고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각종 상도 여러 차례 받아서 저희 부부를 기쁘게 했습니다. 처절하게 가난했지만 3남매를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자녀로 기르고자 노력했고, 가난하지만 생활비를 쪼개며 자녀 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7 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제 1 절 2차 교회 대지 매입 재건축 성공

 

상계교회는 날로 발전하여 교회에서 모든 교인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가득찼습니다. '김영휘' 한국 협회장도 노원교회에 와 보고 자랑스러워 하며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1978년에 전도 우수 한국협회장상을 받았습니다.

1979년 6월 1일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 코너에 40평을 매입하고 교회재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현 교회 매도 대금과 협회 재단의 지원금으로 한 것입니다. 재건축을 할 때도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하수도 공사, 수도공사, 시멘트 일, 보일러 설치하는 일 등 열 손가락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마침내 제 2차 교회 재건축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제일 후배 가정으로써 서울서만 3번째 교회 건축을 한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의 정성도 있었지만 사랑, 진실,은혜를 져 버려서 가슴에 못을 박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통일교인들의 신앙적인 배반으로 저는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물질적으로 노원교회 교인을 도와 주었다가 어려움을 겪은 때도 있습니다.

저는 박상수 집사에게 1979년 7월에 50만원을 빌려주었습니다. 그 당시돈 50만원은 상계 전철역앞 무허가 건물 4평 짜리 2채 값이었습니다. 은행 금리정도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3개월 후 계를 타면 받기로 했습니다. 1개월치 이자를 받고 그 집에 심방을 갔는데 사람이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박집사 부인인 이희선 집사에게 내 돈 내놓으라고 하면서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싸움을 말린 후 박 집사 부인에게 사정을 물어보았습니다.

박상수 집사는 보증금 5만원도 안되는 산꼭대기 집에서 월세 8천원을 내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렵게 살지만 신용을 잘 지킨다고 하여 주위 사람들은 1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 철저히 신용을 지키면서 비싼 이자를 주기로 하고, 돈을 빌려서 그 돈으로 생활하고 이자를 주며 천 만원이 될 때까지 끌고 왔는데 마지막에 돈을 빌릴 데가 없어 저에게 돈을 빌렸던 것입니다.

저는 박집사 내외에게 그 동안 이자를 원금보다 많이 주었으므로 원금만 갚는 조건으로 하고 장기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박상수 집사에게 빌려 준 돈이 옆집 아주머니에게 빌린 것이었습니다. 저의 돈으로 이자를 매달 주다가 나중에 그 돈을 마련하여 갚았습니다. 박집사는 지방에 가서 집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이희선 집사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네 자녀들과 같이 끼니를 거르면서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형편이 되면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박집사 자녀들은 너무나 착했습니다. 부모의 잘못으로 자녀들이 고통 당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심방할 때 라면 1박스와 과자를 사다 주었습니다. 돈이 될 땐 쌀도 사다 주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지라고 항상 격려해 주었습니다. 박집사는 3년 후 저에게 20만원을 주었습니다. 나머지 30만원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집사가 어디에 살던지 자녀들과 같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교역자와 교인은 절대 금전거래를 하면 시험이 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잠언 6:6)

어처구니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한 때도 있습니다 1960년대 말에 잠시 통일교에 나왔던 김태수씨와 저는 인연을 맺어 노원교회로 다시 나오게 하였습니다. 저는 김태수 씨를 전도하여 교회에 나오게 하기까지 온갖 정성을 들였고 아버지와 형님같이 모셨습니다.

어느 날, 제가 심방 전도를 간 사이에 김태수 씨가 교회에 와서 저의 아내에게 아줌마라며 교회 그만 두고 장사나 해서 먹고 살라고 빈정 거렸습니다. 저의 아내는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인내하며 비록 김태수 씨가 헌금을 하지 못했지만 깍듯이 어른으로 대접하며 모셨습니다. 목사인 제가 얼마나 비참하게 보이고 저의 아내가 불쌍히 보였으면 막말을 하고 장사나 하라고 하면서 무시했겠습니까?

심방 전도에서 돌아온 저는 모욕적인 말을 하고 갔다는 것을 듣고 김태수씨 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김태수 씨에게 동생 같고 자식 같은 목사와 사모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지는 못하고 사모를 아줌마라고 하고 장사나 해먹고 살라는 등의 그런 모욕적인 막말을 했느냐고 했습니다.

성질 급한 김태수 씨는 교만에 빠져 안하무인격으로 "뭐! 이 새끼? 어린놈이" 하면서 저의 뺨을 세차게 때렸습니다. 저는 아버지 같은 사람과 싸울수가 없어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있으면싸움이 될 것 같아 저는 그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철거민 달동네이고 마음이 강팍한 사람들이 많은 상계 지역이라 할 지라도 저는 죽도록 교인들을 섬기고 사랑으로 축복하며 정을 베푼 죄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로 마음이 강팍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나이 어린 목사이지만 2차례나 억울한 폭행을 당하다 보니 통일교가 천국이라고들 하는데 제겐 지옥 이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교인들이 영혼을 구원받고 달라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에 들어와서도 세상에 있을 때의 죄 많은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악행만 하였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은 참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수치와 폭행을 당하고 뺨이나 맞는 역할을 하기 위해 통일교에 입교하여 목사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목숨을 걸고 사명감을 갖고 목회를 한 것이었습니다. 억울해서 눈물이 비오듯 흘러 내렸습니다. 그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부족하고 나이가 어려서 무시당하고 뺨을 맞았다고 생각하며 저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통일교에서 선배 목사가 되고 나이가 많은 목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배반하고 은혜를 져버리는 통일교 교인을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노원교구 본부 제단에서 귀신 들린 자가 저의 기도로 악귀가 몰러가고 폐병 말기 환자가 역사로 완재되고 아들딸 못 낳는 사람이 기적적으로 자녀를 낳았습니다. 신유의 역사는 노원교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980년 국회의원 선거 때는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에 저의 교회가 건축을 완료할 때였습니다. 국회의원 후보 한 사람이 저를 잘 아는 분과 같이 밤 10시에 교회로 찾아와 돈 봉투를 내밀면서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30분 동안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도와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국회의원 후보는 도봉구와 노원구 관내에서 유일하게 돈을 받지 않은 목사는 박준철 목사라고 하였습니다. 몇 십만원이면 저에게는 거금 이였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생을 그렇게 고지식하고 정직하게 살아왔습니다.

국제 승공연합 강연회 때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행사 때 나오는 행사비를 행사 참석자 식사대접과 수건, 볼펜 등의 선물비용으로 다 사용하였습니다. 그러자 저를 관할하는 이상수 도봉구 목사는 저에게 그 돈을 왜 다 쓰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저보다 사례비를 4배나 많이 받았던 이상수 목사는 행사비를 남겨서 자식들 교육비, 생활비로 사용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이상수 목사는 그 이후 협회 통일교 전도 국장이 되자 목사 사모들을 모아 놓고 단 10원도 공금을 횡령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는 언제나 먹는 것마저도 허락되지 못한 생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제 8장 서울 노원교구에서경기 화성 교회로 강제로

 

인사 이동

 

제 1 절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박길남 교구장의 거짓약속

 

1981년 10월 19일부터 21일까지 수택리 교회 김민중 목사를 모시고 3일간 부흥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서울 노원교회는 이제 교인들이 다 앉을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강제 인사 이동 처사로 충격을 받아 또 한번의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문선명은 서울에 있는 통일교를 집중 발전시키고 통일그룹 내 기업체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많은 통일교 교인을 회사에서 퇴사시키는 잔인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통일교는 이단이며, 사이비 종교로 사회에서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처럼 발전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통일교에 교인 한 사람을 전도하여 부흥시킨다는 것은 기독교 이름으로 부흥 시키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목숨을 걸고 교회를 부흥 시켜 넘치게 만들었는데 또 다시 빼앗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20일 경기 수택리 중앙 연수원에서 목회자 중 1968년에 합동 결혼식을 한 사람 430가정 이상 목회자는 지방 교회에서 서울 교회로 올라와 목회 하라고 인사발령을 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통일교 수는 영구 통일교, 전세교회, 월세 교회 다 합해서 27개밖에 없었습니다.

27개 교회를 400개 교회로 늘리기 위해 통일재단 기관기업체 430가정 이상 되는 사람은 전체가 사표를 내도록 하고 300만원씩 주면서 방 한 칸을 얻어 서울 400개 동 가운데 1동씩을 맡아 교회를 개척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400개 개척교회에서 수십 개로 축소되었습니다. 김민중 목사가 수택리 집회에서 결정이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였을 때 저는 문선명 특유의 잔인성이 또 드러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통일교 기관 기업체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모든 생활을 박탈 당하고 행복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간부들 가운데 고통 당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정이 파탄되어 통일교를 떠나는 상처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통일교 기업체 간부들을 강제 퇴직 시켰던 것은 기업체를 살리기 위한 구조 조정 이었습니다.

언제나 이중 인격자인 문선명은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회자도 이용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가차없이 잔인하게 잘라버립니다. 1981년10월 21일부터 서울 시내 통일교 목사들의 인사 이동 문제로 목회자 전체가 모여 매일 회의를 하였습니다.

박길남 교구장은 "박준철 목사는 교회를 3번이나 개척하여 교회를 건축을 했기 때문에 반드시 부당한 인사 이동을 하지 않고 수도권 안에 위치한 부천이나 부평 교회로 발령을 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다른 목회자들도 박준철 목사는 실적을 많이 쌓았으니 그 동안의 공적을 감안해서 이번에는 억울한 일이 없도록 인사 이동을 시컥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재남 한국 협회장은 본부 교회에 주일 예배 때나 설교 때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 같은 사람도 있다고 말한 것을 들었고, 문선명에게도 노원교회의 박준철 목사 공적을 보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사이동 공문에는 약속과 신의를 져버리고 '경기교구 부' 라고 해놓고 임지교회도 없이 저를 잘라 버렸습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수 차례 만나 10시간도 넘게 대화했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김영휘 협회장과 김민중 목사는 문선명이 지방에 있는 목회자를 서울로 올리라고만 했고 서울 시내에 있는 현직 통일교 목사들은 자기 교회에 그대로 시무 하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재남 협회장은 부당한 강제 인사이동을 통해 저를 갈 곳도 없이 잘라버렸던 것입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기관 기업체에 근무하던 430가정 선배들이 너무나 큰충격을 받고 청파동 본부 교회에서 대문 밖에 프랭카드를 크게 걸고 데모를 하였습니다. 본부교회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협회 2인자인 양준기 총무국장은 무차별으로 폭행을 당하고 양준기 협회 총무국장이 병원에 입원하는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이같은 폭력,폭행 사태에 전투 경찰이 투입되어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저는 10월 20일~1982년 1월 17일까지 3개월 동안 '경기교구 부' 라는 인사 발령 때문에 제가 시무 해야 될 교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아 병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3개월을 아내와 자녀들과 같이 피눈물을 흘리며 보내야 했습니다. 통일교를 그때라도 탈출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때도 저는 통일교를 떠나면 지옥에 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통일교를 탈퇴하는 것이 죽음 그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마음의 충격을 해소할 길이 없어 산 기도도 가보고, 큰 기독교 교회도 가서 기도도 하였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움에서 벗어나려고 하여도 벗어날 수 없고 울분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문선명을 위하여 제물이 된 저는 한없는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이를 악물고 노력하였습니다. 헤아릴 수없이 많은 성초 기도를 몇 시간씩 눈물로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원리 교육으로 세뇌되어 있어서, 문선명이 메시아요, 재림주라고 믿고 충성하며 재림주를 버릴 수 없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노원 교구에 임지를 받은 사람은 정한길 목사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언제 이사를 가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갈곳이 없기 때문에 갈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목사는 교회에 취임도 하지 못하고 암으로 죽었습니다.

지옥 같은 노원 교회 대기발령 생활 3개월이 다 되어 가는 1982년 12월30일에 협회에서 가평 교회와 화성 교회(오산교회) 중 선택하여 목회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가평이나 화성(오산)은 교인이 몇 명에 불과하여 생활을 할 수 없고, 이재남 한국 협회장이 약속을 어겨서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억울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노원 교구 예배 수준과 재정 수준으로 수평 이동이라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선명의잔악상을 보면서도 그때는 문선명의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제 2 절 꿈에 나타난 문선명

 

1982년 1월 4일 밤 꿈에 문선명이 나타났습니다. 전국 통일교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하던 중에 산봉우리 5개를 보여주면서 이 산을 개발할 사람이 없느냐고 했는데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문선명이 제 앞에 오더니 "박준철! 네가 이 산 5개를 개발하라" 고 명령했습니다. "네가 임자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삽과 낫을 주었습니다.

꿈을 깬 후 생각을 해보니 산봉우리 5개는 화성(오산)이었습니다. 사명감이 충만한 목회자가 없어서 화성교회(오산교회)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목회자들이 화성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경기 교구에서도 제일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전국 통일교에서도 제일 가난한 교회 중 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이 못난 사람을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가 또 한번 꿈에 현몽을 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화성교회로 가라는 명령 인줄 알고 순종하는 맘으로 죽더라도 오산교회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오산교회로 부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9장 경기 화성 교회가 전국 통일교 최우수

 

교회로 부흥

 

제 1절 다시 일어선 교회 개척

 

1982년 1월 17일날 배신과 불신 속에서 그동안 닦아놓은 기반을 송두리째 남겨두고 어린 3남매와 처를 데리고 오산교회로 왔습니다. 그리고 1982년 2월 17일에 취임식을 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가는 목사마다 잠시 있다가 떠나버렸습니다. 오죽하면 문선명은 집회를 하면서 오산교회는 사단역사를 하는 곳이니 이름을 진산 교회로 바꿔야 한다고 할 정도엿습니다.

전임목사는 제직당시 승공 연합의 돈 1천2백 만원 때문에 오산교회 교인들과 승공 연합 회원들이 큰 시험에 들었습니다. 전임목사는 오산교회 사택에서 살지 않고 수원에서 살면서 전국을 다니며 양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 있던 목사도 교인이 얼마 되지 않고 헌금도 몇 만원에 불과하여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을 개설하여 그 수익금을 생활비로 썼는데, 이를 알게된 전도 대원 몇 사람이 협회에 올라가 목사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여 문책 인사이동을 시켜 버렸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통일교 목사들이 문선명을 재림주, 참 부모를 믿고 순종하며 목숨을 바친 죄밖에 더 있겠습니까? 저 자신도 불쌍하지만, 너무나도 처절하게 불쌍한 사람들이 통일교 목사들 입니다.

저는 경기 화성교회로 가면서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사단 마귀가 역사를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정성을 들여 빠른 시일 내에 발전을 시키겠다고 굳은 각오로 다짐했습니다. 저는 취임하는 날부터 100일 기도,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 수요예배 개설, 금요 속회예배 개설, 주일학교 개설,중고풍부 예배 개설, 전도, 심방 등을 중심으로 교회의 발전에 온 몸과 마음을 다 쏟았습니다.

노원교구 본부에 있을 때 자전거도 없이 걸어 다니면서 심방과 전도를 하며 봉사 했었습니다. 나중에 오인천 영화 출연료로 받은 2만원으로 중고 자전거 1대를 사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심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속회예배와 전도를 하니 신바람이 났습니다. 노원구 상계1 · 2 · 3 · 4동, 도봉구, 중계동, 하계동, 공릉동까지 자전거를 타고 심방 전도 활동을 했듯이 화성교회에서도 자전거를 활용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화성 관내 17개 읍 면 동에 심방 전도를 다녔습니다. 이렇게 자전거를 계속 타니 새 팬티라도 한 달이 못 가서 엉덩이 부분에 구멍이 나고 헤어져 매달 팬티를 구입해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양쪽 엉덩이에 물집이 생기고 터져서 바지까지 버리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문선명 통일 교주를 위해 매일 밤 12시까지 심방 전도를 했습니다. 새벽 I~2시가 되는 때도 허다하게 많았습니다.

문선명에게 목숨을 걸고 한국 최고의 실적과 공적을 쌓는 한국 통일 교회의 푯대가 되고자 몸부림을 치며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문선명은 집회 때마다 "나는 호랑이니 너희들은 고양이 새끼가 되지 말고 호랑이 새끼가 되어라" 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말이 그 당시에는 꿀같이 달게 느껴졌습니다. 죽더라도 뜻을 위해 죽고 문선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의를 매일 기도로써 다짐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활동을 하여 체력이 극도로 떨어지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의식 불명이 될 정도로 쓰러져 있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교인을 전도할 때나 교인을 심방 할 때면 저는 굶더라도 과자나 음료수를 사 가지고 심방을 했습니다.

화성교회에 교회 총무로 세웠던 추진복 집사가 있었는데 신앙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합동결혼식을 하고 갓난 아들 하나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습니다. 튀김집을 운영했는데 저는 매일 그 집에 가서 축복 기도를 해주며 그 날 심방할 집에 가지고 갈 튀김을 샀습니다. 그 날 심방을 하는 집이 10집이면 10봉지를 사서 자전거에 싣고 다니며 전도하고 심방을 했습니다.

저는 추진복  집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다른 가게에서 사지 않고 그 집에 가서 튀김을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사랑과 정성을 알아주기는 커녕 추진복 집사는 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추진복 집사 집에 가서 조용히 신앙적 인 교육을 시키려고 했는데 첫마디가 욕 이었습니다. 왜 욕을 하냐고 했더니, 자기 가게 식탁을 저를 향해서 밀어 버렸습니다. 그순간 오른손 약지가 식탁에 끼어 큰통증을 느꼇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고 당황하여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크게 부어 올랐습니다 즉시 병원에 가서 뼈를 수술했어야 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20일 동안을 방치했습니다. 손가락은 벌겋게 부어 올라 움직일 수 없었고 뼈까지 아팠습니다. 손가락 겉에만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습니다. 20일이 가도 손가락의 부기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조금씩 부기가 빠지고 괜찮아 졌지만 그날 다친 손가락 하나가 휘어진 채로 굳어 버렸습니다. 즉시 병원에 가서 X-ray 촬영을 하고 손가락을 고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손가락을 제대로 펼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추집사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저는 추집사가 성격 때문에 그런 것으로 알고 용서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집사는 제가 그 날 다쳐서 일생동안 손가락이 구부러진 채로 사는 것을 지금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 추집사는 집에서 닭튀김을 할때 나오는 창자를 그날 그날 모아서 개를 기르는 이건숙 집사에게 주었습니다. 이건숙 집사는 개35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한 마리에 300만원도 넘는 좋은 개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추집사가 쥐를 잡는다고 닭 창자에 쥐약을 버무려서 여러 군데 놓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무의식 중에 쥐약으로 놓았던 닭 창자를 새벽에 일어나 모아가지고 쥐약을 안 넣은 창자와 같은 그릇에 담았습니다. 그것을 몰랐던 이건숙 집사는 아침에 창자를 가져가 35마리 개에게 끓여서 먹였습니다. 그 창자를 먹었던 개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쓰러져 갔습니다. 이건숙 집사가 추진복 집사에게 무엇이 잘못 되었냐고 물었을 때 닭 창자에 쥐를 잡으려고 쥐약을 섞었다고 했습니다.

순간의 실수로 이건숙 집사의 고급 개 35마리가 죽었습니다. 그 일로 추집사는 몇 십 만원을 이건숙 집사에게 보상금으로 물어주고 튀김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 갔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제 2 절 화성 교회 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100일 기도를 마치면 2차 100일 기도, 3차 100일 기도로 숨돌릴 여유도 없이 교인들과 합심하여 기도드린 결과 1982년도에 교회가 급성장을 했고 전도 우수 교회로 협회장 상을 받았습니다. 1983년 4월과 9월에는 협회 우수 교회상을 분기별로 수상을 했습니다. 1985년도에도 전국 최우수 협회장상을 교회 우수상과 전도상 까지도 저는 받았습니다.

화성교회에서도 많은 이적기사가 있었습니다. 이준영 씨는 독자였는데 딸만 3명을 낳고 몇 년 동안 아기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다고 이준영씨에게 말했습니다. 얼마후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시어머니나 주위 사람들은 태몽이 또 딸이라고 아기를 지우려고 했습니다. 10달 동안 많은 시험과 시련이 있었지만 저의 말을 믿고 이준영씨는 아기를 지우지 않았습니다. 10달이 되어도 아기가 출생하지 못했는데 11개월이 되었을 때 마침내 건강한 아들을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 전체 앞에서 이준영 씨가 아들을 낳는다고 했는데 11개월이 지난 후 그 가정에 행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몇 대 독자인 강호길 씨도 아들을 낳은 후 통일교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종수 씨는 기독교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는데 악령이 3,000명이나 들어와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정신병원으로 갔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안수 기도도 받았지만 악령이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모든 친척과 가족들이 오산 통일교로 나오는 조건으로 악령을 물리쳐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동안에도 제가 악령을 많이 물리쳤기 때문에 그 가족들과 이종수 씨를 불러다 놓고 찬송가를 부르며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이종수씨는 교회 강대상 앞에서 기도를 받은 후 쓰러졌습니다. 한참후 이종수 씨가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오랜 악령의 시달림과 고통이 끝이 났습니다. 회사에도 복직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독실한 통일교 교인이 되었으며 친척들도 통일교에 모두 나오고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이종수 씨는 점점 더 헌신과 봉사로 충성을 다하여 화성 교회 재정 담당 총무까지 수행을 잘 했습니다.

문흥기라는 사람은 수원 빈센트 병원에서도 포기한 병자였습니다. 이제는 살 수 없다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제가 문흥기 씨를 보았을 때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고 몸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습니다. 의식이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 상태로 임종을 기다리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미 부인과 자녀들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문흥기씨만 교회에 안 나오는 상태여서 의식이 돌아 왔을 때 교회에 나을 것을 간절히 권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저는 기도를 했습니다. 문흥기 씨는 매일 고통으로 아우성 치던 사람이었지만 기도를 받은 그 날 밤에는 편안히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부터 기적같이 기력을 회복하여 걸어 다닐 수 있었고 일주일 후 건강을 회복하여 예배도 참석을 했습니다. 처음 2달은 열심히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러나 석 달째는 되는 주일부터는 일요일마다 막노동일을 나가거나, 교회를 오지 안기 위해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습니다. 저는 온갖 방법으로 문흥기 씨에게 말을 했지만 말을 듣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문흥기 씨는 석달 후 금요일 막노동을 잘 다녀오고 토요일 새벽에 이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회에서 적은 정성을 모아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 외에도 제가 가는 개척 교회마다 이적, 기사, 신유 은사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문선명 재림주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가는 곳마다 스스로 희생 재물이 되어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화성교회도 전국 최하위에서 최상위 교회로 부흥 ·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 3 절 마지막까지도 아버지께 불효

 

소년 시절에 저는 아버지같이 불쌍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결혼하면 능력 있는 남편, 능력있는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존경 받는 아버지, 사랑 받는 아버지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에 입교한 이후 영혼과 육신을 빼앗기고 언제나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처절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릴 때는 자라서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어 부모에게 효도하겠다는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제대로 부모님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통일교에 들어온 후로 단 한 번도 부모님께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잔인한 문선명의 역사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문선명은 입으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외치면서 행동으로는 자신만이 참 부모이며, 육신을 낳아준 부모는 사단의 부모라고 주장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오직 자신만을 참 부모로 섬기라고 강요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1985년 9월 24일 고인이 되셨는데 제가 너무나 불효를 하여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픔니다. 아버지는 추석 명절 직전 화성교회에 오셨습니다. 막걸리 5병을 받아놓고, 사골을 사다가 끓여 국을 만들어 나름대로 아버지를 모실 준비를 했습니다. 서울 큰아들 집에 계시는 아버지를 직접 서울까지 가서 버스로 모셔 왔습니다. 오산 버스 터미널에서 화성 통일교 까지는 IKm 거리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저는 아버지 팔을 부축을 하여 교회까지 오는데 4차례나 길바닥에 주저 앉아서 쉬었다 오고 해서 겨우 도착했습니다. 교회로 모시고 와서 식사를 대접하고 술도 드렸습니다. 저녁에 주무실때 이불을 펴 드리면서 밤에 방에 있는 술을 많이 잡수시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야, 이 놈아, 내가 술을 안 먹으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주무셨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첫 말씀이 "하동 집에 빨리 가야겠다" 였습니다. 저는 "며칠 저희 집에서 계시기로 하시고 오셨으니 편히 계십시오. 술, 고기와 여러 가지 반찬을 준비해 놓았으니 오래 계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님은 "준철아!" 하면서 "술 먹게 용돈이나 많이 달라" 고 했습니다. 아무리 가시지 말라고 말려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저는 다른 때보다 용돈을 조금 더 드렸습니다.

저는 서울로 모셔다 드렸고 아버지는 경남 하동 집에 가셔서 바로 운명을 하셨습니다. 71세로 고인이 되셨습니다. 생전에 아버지는 언제나 저에게 용돈을 많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제대로 용돈을 많이 드리지 못해 아버지께 죄송했습니다.

제가 언제나 목회를 성공하고 교회를 부흥시켜 안정이 되면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교회를 빼앗기고 처절하게 가난한 목사길을 걸었습니다 순리대로 통일교 목사 인사이동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문선명 교주의 명령 한마디에 교역자는 강제로 움직 입니다.

저는 아버님이 저희 집에 온 것이 마지막 오시는 길이고,용돈을 많이 달라는 것이 마지막 말씀인줄 알았다면 빛을 내어서라도 돈을 많이 드렸을텐데 교회가 어렵다보니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날 아버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술을 적게 잡수시라고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일생동안 저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언제나 불효자였습니다. 성공해서 부모님을 편히 모시겠다는 다짐을 한번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땅 속에 계신 아버지께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아버지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신 후 생전에 아버지 앞에 음식 한번 제대로 해 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이 아파 음식을 대할 때마다 한동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아버님께 못다 한 효도까지 합하여 어머님께 효도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목회 현실은 성공해서 교회가 안정되면 폭력적인 인사이동으로 또다시 지옥 같은 개척 교회 생활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저를 낳아준 육신의 부모는 사단의 피를 이어받은 가짜 부모라고 했습니다. 문선명만이 인류를 구원할 참부 모 재림주라고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할 경제적인 능력이나 시간이 허락되지않았으며 오직 저를 구원하신 인류의 구세주 문선명 참부모에게 그 당시에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머님께 효도하는 길마저 막아 버렸습니다. 처절한 가난한목사 생활에서 헤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광란의 부당한 인사정책으로 부모님에 효도하는 길마저 잔인하게 막아버렸습니다.

 

 

제 10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교회로다시 인사발령

 

제 1 절 통일교에 바친 목숨



경기 화성교회 목사에서 서울 노원교구 본부교회로 인사 발령을 받은 것은 1986년 5월 1일이였습니다. 만 4년 4개월만에 땀과 눈물로 발전시킨 화성교회를 떠나 서울 노원 교구 본부 교회로 재발령을 받고 5월 18일에 노원교회에 취임했습니다. 노원교구 본부교회로 부임하고 보니 제가 전에 시무할 때 있던 교인 몇 사람만 교회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10여명에 불과한 교인과 매월 14만원 정도가 총 헌금이었습니다. 목사 생활비나 활동비는 없고 10여만원 이상이나 되는 교회 운영비나 관리비도 되지 못했습니다.

저의 생활은 또다시 하루아침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이였습니다. 화성교회에서는 재적 인원 160명에 헌금은 약 200만원이 되었습니다. 통일교 내에서는 최고 A급 교회로 성장을 시킨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전도하고 교회를 부흥시킨다는 것이, 이단 교회라는 이미지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화성교회의 20분의 1도 되지 않은 서울 노원교회로 부임하고 보니 눈물 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혼자라면 밥을 먹지 않고 굶어도 라면이나 국수만 먹어도 괜찮습니다. 버스 차비가 없으면 얼마든지 걸어다닐 수 있습니다. 병이 들어도 병원에 안 갈 수도 있습니다. 가난은 인내와 극기 훈련하는 심정으로 참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라도 통일교 목회를 그만두고 통일교를 탈출 했다면 지옥에서 15년 전에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저 혼자 고통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아내나 자녀들에게 남편 잘못 만나고 ,아버지 잘못 만나 너무나도 비참하고 가난한 생활을 계속적으로 강요하는 제 자신이 정말 싫었습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 을 때는 강서교구 본부교회로 부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강서 교구는 교회를 건축한 후 헌당 예배도 못 올리고 건축 2달만에 눈물로 떠난 교회였기에 목회 생활을 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강서 교구 본부 교회로 가서 저의 슬픈 과거를 청산하고 한국 통일교에 선봉장이 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저는 서울 강서교회를 자랑스러운 통일교로 만들 자신이 있었습니다. 협회에서 강서교회로 옮겨 주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강서교구는 1963년도 합동 결혼식을 한 124가정 진철수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서울 구로교회로 가고 제가 서울 강서교회로 가기로 결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 구로교회 목사님이 떠나지 않음으로 제가 강서교회로 취임을 하지 못하고, 서울 노원 교구 본부 교회로 재취임을 하게 된 것이 었습니다.

 

제 2 절 서울 노원교회에서 3차 발전

 

1986년 5월 18일 경기 화성교회를 떠나 서울 노원교회에 취임했습니다. 배고픔, 슬픔, 아픔, 분노, 배신감을 인내로서 극복하며 숨 돌릴 틈도 없이새벽 제단에서부터 수요 예배, 300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예배, 기도,전도, 봉사, 심방을 중심으로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김 영휘 협회장님은 노원교회에서 일생동안 목회를 하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한국 최고의 교회를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1986년 5월에 부임하여 노원교회 교인들과 합심하여 밤낮 없이 목회활동을 한 결과 7개월만인 12월에는 노원교회를 교인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매일 심방과 전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을 위해 이사짐을 날라주고, 실직자를 취직시켜 주고, 신유 역사로 귀신 들린 자를 건강하게 완쾌 시켰습니다. 무엇이든지 교인들이 원하면 저는 손과 발이 되어 사명을 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86년 6월 29일 주일예배에 바쁘신 중에도 김영휘 한국 협회장과 정대화 사모님(회장)이 노원교회에 순회를 오셔서 주일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참 자녀가 되자는 설교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역대 협회장 중 ,저의 능력을 인정해 주시고 시련과 고통 당할 때마다 격려하며 희망, 용기를 주신분은 김 영휘 한국 협회장님 뿐이었습니다.

김 회장님은 저를 가장 염려하며 고통 당할 때마다 저의 억울함과 능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김 영휘 한국 협회장님은 전국 통일교 순회를 하시면서 목사들에게 서울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와 같이 최악의 조건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성공적인 목회를 해야한다고, 그것이 박목사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리석었고 바보였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이용하고 성경을 인용하여 자칭 재림주로 통일제국을 꿈꾸는 가짜 메시아를 저는 자랑하고 증거 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를 위해 통일교를 부흥시키고 발전시켜 수많은 영혼이 이단에 빠지게 하는 일에 저는 앞장섰던 것입니다.

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국 통일교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통일교에 모델이 되고자 노원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일이면 사력을 다하여 일을 했습니다.

통일교 기관, 기업체에 새로운 교인을 전도하여 취직을 시킬 때 부족한 사람들의 취직을 부탁하다 보니 커피, 식사비, 섭외비 등의 경비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직접 냈습니다. 그러면서 부장이나 이사에게 교회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하여 취직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가정의 물질적인 고통도 아내와 자식들의 마음의 고통도 외면한 채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교인들을 위해 제 전부를 다 주었습니다. 마음, 몸, 물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습니다. 처절하고 가난한 생활에도 아내나 자녀들보다 교인들을 더 사랑했기에 노원교회도 부흥되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제 11장 서울 노원 교회가한국 통일교 우수 교회로

 

협회장상 수상

 

제 1절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1986년 6월부터 1987년 6월까지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고 바쁘게 살았습니다. 교회 재정이 어려워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녀들의 교육비는 밀리기가 일수였습니다. 아내가 절약을 하고 또 절약을 하여도 가정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경기 화성교회에 내려가기 전 노원교회를 개척 할 때는 저의 자녀들이 갓난 아기였기 때문에 교육비는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커서 지출은 많고 수입은 적어 아내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도 꿀 먹은 벙어리같이 할말이 없었습니다. 결혼 전에 저의 아내는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과 같이 넉넉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에 입교하면서 부모와는 담을 쌓았습니다. 딸이 이단 교회에 다닌다고 야단을 치다가 화난 부모님에게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집을 나와 순전단 생활을 한 6개월 동안 부모님이 울면서 찾아와 애걸하며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저의 아내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통일교에 세뇌되어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 불효를 했습니다. 속담에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 떡을 얻어 먹는다' 는 말이 있듯이 부모 말을 듣지 않은 자녀는 불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수없이 많은 역경과 시련을 딛고 가난한 목사 사모로서 살아온 것에 대하여 제가 교회를 부흥시켜 안정이 되면 장인, 장모님께 효도 할 것을 누차 다짐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를 발전시키면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생활이 안정이 될 것이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1986년에는 경기 화성교회에서 백 만원 정도 생활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울 노원교회로 오니 매월 총 헌금이 10만원 남짓 이었습니다. 교인들은 많아도 새 신자이고 철거민 달동네이다 보니 다들 생활이 너무나 어려워 교회 재정도 어려웠습니다.

저는 교회를 급속도로 부흥시켜 매월 30만원의 생활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비하면 엄청나게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30만원의 생활비를 받으면 십일조 헌금, 감사헌금을 제하고 활동비로 15만원을 써야 했습니다 10만원을 가지고 저의 아내는 자녀 3명 학비, 학원비로 써야 했습니다.

1988년 1월 12일 은주와 영진이 쓴 반성문 중에는 '나는 동생과 먹는 것 때문에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다. ', '나는 누나와 먹는 것 때문에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다. ' 라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3남매를 바라보며 제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오뎅이나 떡볶이도 제대로 먹일 수 없는 현실 앞에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제 2 절 3차 교회 대지 161평을 매입

 

노원교회는 주일 예배에 늦게 오는 교인은 교회 의자에 앉을 자리가 없어 교회 밖 출입구에 서서 예배를 드려야 할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저는 1987년 1월 1일 하나님의 날 예배 때 교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3번째 교회 건축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의 모든 기도 내용이 교회건축으로 모아졌습니다.

서울의 강북 교구는 월세 교회가 13곳이나 되고 전세 교회가 11곳이 되었슬니다. 월세금, 전세금도 통일교 협회나 재단에서 지원하기가 어려운 입상이 었습니다. 그러나 노원교회는 단기간에 한국 최고의 부흥과 발전된 교회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박준철 목사가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이루는 부흥사, 단기간에 선배 목사들을 제치고 부흥 시켰다고 문선명에게 보고가 되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단독으로 수차례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인정받고 사랑 받는 것, 단독으로 찾아 뵌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건축을 목표로 1차로 교회 대지를 매입 하기로 했습니다. 하루종일 교회 대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에 살 것인가를 길을 가면서도 식사를 하면서도 온통 노원교회 대지 사는 생각만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에 교회 건축 대지 매입을 목표로 매일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협회에서 5월 19일 반 승낙이 떨어졌습니다. 5월 27일부터 6월 8일까지 1차 릴레이금식을 실시했습니다.

6월 5일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한 김영휘 협회장에게 노원교회 교회 대지 등본 지적도, 도시계획원 등 여러가지 서류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건축에 적절한 3곳을 선정하여 서류를 갖추어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무려 8차례나 문선명에게 "박준철 목사가 그렇게 사명감이 철저하고 가는 곳마다 통일교 목사들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능력이 있는 목회자라면 노원교회 교회 대지를 사 주어야겠구만"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한남동 유엔 빌리지 문선명 저택에 가서 직접 노원교회 교회대지를 사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6월 5일 서울 강북 1교구 책임자로 있는 임순도 교구장에게 밤12시 30분까지 말씀을 드리고 집에 오니 새벽 2시가 되었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바늘 방석이요, 초조하고 긴장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떨리는 순간 이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제가 교회 건축을 하여 한 단계 더 크게 발전하느냐, 현재에 그대로 머무르느냐 하는 순간 이었습니다.

6월 6일 서울 강북 교구 총 책임자로 계시는 임순도 교구장 내외분이 상계동에 오셔서 교회 대지로 매입 할 수 있는 몇 곳의 땅을 보았습니다. 6월7일 김영휘 한국 협회장과 임순도 교구장이 문선명에게 박준철의 과거 실적과 사명감, 현재 교회 발전을 1년만에 10배로 발전시킨 것을 간절히 보고를 드렸습니다.

6월 8일 김영휘 회장이 문선명에게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해야 한다고 또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물의 날 행사장에서도 잠시 시간을 내어 노원교회 교회 대지 문제를 김영휘 회장께 말씀 드렸습니다. 6월 12일 협회에 가서 김영휘 회장을 만나 노원교회 교회 대지 매입 문제로 눈물어린 심정으로 또 부탁을 했습니다.

6월 13일 문선명 교주는 노원교회에 161평의 교회 대지를 사라고 2억 2천만원에 싸인을 해주었습니다. 문선명이 2억 2천만 원에 싸인한 것은 통일교 재단 본부의 결정이 아닙니다. 저를 한국 최고의 통일교 부흥사로 인정하고 특별히 문선명이 돈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교회 건축비는 노원교회를 매매하여 마련했습니다 저는 교통과 모든 시설을 감안하여 노원 전철역 옆에 교회대지를 매입했습니다. 저의 꿈에 여러 교회 대지 중상계 2동 380번지 1호 땅을 사라고 땅 모양까지 보였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대지 매입 결재가 결정 났다는 김 영휘 회장의 전화로 듣고 만사를 제치고 버스, 지하철을 타고 청파동 통일교 협회 사무실과 본·곁 교회까지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김영휘 회장께 감사를 드리면서 죽도록 충성하여 노원교회를 발전시켜 넘치는 노원교회로 만들 것을 약속 드렸습니다.

역사적으로 서울 노원 전철역 옆 380번지에 교회대지를 매입했습니다. 교회 대지 계약금, 중도금, 잔금은 협회와 재단에서 직접 땅 주인과 만나 제가 있는 자리에서 전달을 했습니다. 상계 3동 140번지 4거리 코너 통일 교회는 주위의 부동산에 팔기 위해서 매물로 내어 놓았습니다.

1979년 5월에 처음 노원교회를 지을 때는 총 1천 6백 10만원이 들어갔는데 7천 2백 만원을 받고 팔았습니다. 교회 위치가 좋아 높은 가격에 팔게 되었습니다. 노원교회 매매 대금은 계약금, 중도금, 잔금을 협회와 재단에서 담당자가 와서 돈을 받아 갔습니다. 통일 교회는 교회의 대지 매매, 모든 서류나 부동산 처리는 목사들이 하지만 교회대지를 사고 팔 때 일절 돈을 만지지 않고 협회와 재단에서 전국 통일교 재산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1987년 6월에 교회대지를 매입한 후 노원교회 교인들과 합심하여 연말까지 교회 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12장 서울 노원교회 교회 건축

 

제 1 절 1988년도 교회 건축 목표

 

1988년 노원교회 목표를 교회 건축의 해로 결정하고 1월 1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철야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1월 1일부터 4월 10일까지 교회 건축을 위한 1차 100일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를 드리기로 결정하고 시행을 했습니다.

저는 1월 1일 오전 9시에 문선명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문선명 말이 '꿀같이 달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통일교 원리 교육으로 무장되고 세뇌되어 있기에 그렇게 많은 고통과 배신과 속임을 당했으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재림주 참 부모님 이라고 증거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통일교 원리 강의를 했습니다. 1월 1일부터 쉬지 않고 전도, 심방을 했습니다. 다른 목회자들은 연휴라고 쉬지만 저는 매년 새해의 첫 시간, 첫 날, 첫달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정성을 드렸습니다.

제 자신이 교회 건축에 미쳐 있었습니다. 협회와 재단을 매일 찾아가서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빨리 해달라고 간절히 말씀 드렸습니다. 초조하고 안타까움만 나날이 더하여 갔습니다.

1988년 5월 1일 통일교 협회 창립 기념일에 노원교회가 전국 통일로 우수 교회 협회장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저는 1년 안에 12명 이상 전도한 목사나 교인들에게 주는 전도상과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을 받았습니다. 제게 상금으로 20만원과 구두 티켓 한 장을 주었습니댜. 그 돈으로 주일날 음식을 장만하여 교인들과 같이 먹었습니다.

1988년 5월 2일 월요일에 한남동 문선명 저택을 방문하였습니다. 새벽기도 후, 문선명에게 선물을 하려고 경동 시장에 가서 최고 품질의 바나나 한 상자와 참외 한 상자를 샀습니다 택시에 싣고 한남동 문선명 저택에 도착 하였습니다. 김영휘 협회장과 사모님이 계셔서 선물을 드리고 문선명에게 교회 건축 문제를 말씀 드리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김영휘 협회장께도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말씀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 답변이 문선명의 승인이 안 나와서 교회 건축 공사를 못 한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를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문선명이 일화제약에 갔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은 결판을 내야겠다는 심정으로 수택리에 있던 일화제약으로 달려갔습니다. 일화제약 건물 옥상에서 문선명 참 부모가 통일교 기업체 사장들과 같이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앞에 나아가 땅바닥에 머리를 대고 경배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문선명 통일 교주는 저를 보시더니 "너 여기 어찌 왔어? 어떻게 왔나?"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수많은 통일교 목사들 중에 저의 얼굴을 문선명이 알아 주어서 감격했습니다. 문선명이 제 얼굴을 알아준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문제를 눈물로 호소하고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문선명은 교회 건축을 그 자리에서 허락하셨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에게는 먼저 교회 건축 공사를 시작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상계 3동 140번지 노원교회 매매 대금으로 빨리 공사를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김영휘 회장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으로부터 빠른 시 일 내에 교회 건축 공사를 할 것을 약속 받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제 2 절 국회의원 당선에 관여한 통일교

 

문선명 통일교 명령과 지시로 전국 통일교에서 국회의원 후보들을 지원하여 당선시킨 국회의원들을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 집결 시켜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당선사례 감사 인사를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국회의원 후보에게 서명 날인을 받은 후 맥콜 2백 박스를 지원하고 제가 있는 통일교 조직 전체를 가동하여 인적인 지원도 해주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지원했던 그 국회의원 후보는 400여표의 근소한 차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교에서 지원 받아 당선한 국회의원들을 모아놓고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서 2박 3일동안 통일교 원리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지원으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문선명 교주에게 복종해야 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공갈 협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통일교 입당 원서를 쓰고 문선명 교주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문선명 통일교를 지지하고 찬동한다는 국회의원들은 문선명의 노예인 것입니다. 국회의원 후보 중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충성하겠다는 싸인을 한 국회의원후보를 경제적인 지원, 물질적 지원, 인원 동원 지원을 하여 저도 중진급 국회의원을 당선시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중진급  K 국회의원을 만나 문선명 교주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2박 3일 통일교 원리 교육을 받을 것을 간절히 말씀을 드려서 5월 5일 문선명 교주에게 감사 인사 갈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5월 5일 오후 2시에 K당 중앙 당사에 도착하여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기다렸습니다. 국회의원 비서관이 메모지를 저에게 전해 주었는데 국회의원은 총재와 조직 인사관계로 회의 중이기 때문에 문선명에게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K 국회의원이 충주 수안보 통일교 호텔인 와이키키 호텔에 가서 문선명에게 인사도 드리고 2박 3일 통일교 원리 수련을 받고 와야 한다고 설득을 시켰습니다. 비서관이 30분을 여러 곳에 연락을 한 결과 청량리 맘모스 호텔에서 K 총재와 인사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잠시 K국회의원을 호텔에서 내려오시라고 하여 K국회의원의 그랜저로 청주 수안보 와이키키 관광호텔까지 2시간만에 갔습니다. 저는 차안에서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위대성, 재림주라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K국회의원은 자신의 업무가 바쁘기 때문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가서 인사만 드리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충주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 도착하니 문선명교주가 도착전이라 곽정환회장, 유종영 회장, 권혁서 교구장에게만 인사를 시켜 드렸습니다. 제가 호텔에 갔을 때 통일교 지원 받은 여야 국회의원 당선자 35명이 2박 3일 통일교 원리 교육을 받기 위해 도착해 있었습니다. 여러 국회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저는 K국회의원과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인사를 드린 후에 그 길로 충주에서 서울 노원교회까지 도착하니 밤 12시 30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위해 사회의 고위층인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인사 시켰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K 국회의원에게 돌아 오면서도 2시간 동안 통일교 원리교육을 하였습니다. K 국회의원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박준철 목사가 제일 끈질긴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K국회의원이 도움을 받았으니 문선명에게 인사를 왔다고 하였지만 K국회의원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붉은 유혹에 말려들고 문선명의 정치적인 야심에 K국회의원은 이용 당했을 뿐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정치적인 야망과 정권 쟁취를 위해 통일당을 창당하고 국회의원을 포섭하여 통일교 교세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차후에 통일교 문선명 교주에게 관련된 사이비 정치 인, 종교인들은 정치 일선에서 낙선운동을 하여 낙선을 시컥 다시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 앞잡이 노릇을 못하게 1200만 기독교 교인은 철저히 막아야 할 것입니다.

 

제 3 절 노원교회 역사적 교회 건축 기공식
 

1988년 5월 6일 금요일 아침 7시부터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노원교회는 제가 철거민 달동네에서 먼지만 일으키는 허허벌판인 상계동 지역에 작은 방안에서부터 몇몇 통일교 교인들과 예배를 시작했던 곳이었습니다. 이제 3번째 노원 교구 본부 교회 건축 기공식을 한다니 감개가 무량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70년 된 낡은 집을 허무는데, 집 무너지는 소리가 폭탄 떨어지는 소리같이 컸습니다. 흙으로 된 집이라 무너질 때마다 흙먼지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물을 뿌려도 주위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가득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이단 교회를 짓는다는 소문이 교회 주위에 퍼져나가 주위 사람들이 데모를 하였습니다 교회의 옆에 집들이 시기하고 질투하여 항의를 하고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저는 집을 허물기전에 선물을 사서 집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래도 항의와 시비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바로 옆집에 살던 전과범은 알코을 중독자였는데 매일 수시로 와서 의도적으로 공사를 방해하였습니다. 대낮에 술을 먹고는 낫, 망치를 가지고 와서 공사를 집요하게 방해하였습니다. 수시로 술도 사 먹이고 담배도사 주고 용돈도 주었습니다. 때로는 강하게 말을 해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의 방해는 노원교회 교회완공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술만 먹으면 저를 가슴 아프게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를 짓기 전에 집이 폐허나 다름이 없는 집들이라 아이들이나 동네 불량 청소년들의 놀이 장소로 사용되어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밤중에도 사고가 없는지 와서 돌아보고 가슴을 졸이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집을 다 허물고 나니 속이 후련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4시에 통일 재단 김명운 부장으로부터 공사 중단하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의 지시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동안 통일교에서 목사 생활을 하면서 많은 충격을 받아 단련이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가슴이 철렁하였습니다. 저는 즉시 김영휘 협회장을 찾아가 간절히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호소하여 "다시 내일부터 공사 재개 할수 있게 해달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재단에서 공사재개를 시켜주었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 마치면 아침 식사 전부터 교회 건축 공사 현장에 가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오후에도 전력을 다하여 교회 건축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건축 공사는 통일교 회사인 일성 종합 건설회사에서 공사를 하였습니다.

1988년 5월 10일에는 대지 경계선 때문에 시비가 벌어져 주위 집주인들을 모시고 재 측량을 하였고 점심을 후하게 대접해 드렸습니다. 오후에는 주위의 아주머니와 주민들이 통일교 건축 중단하라고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습니다.

5월 30일에는 정득천 상계 2동 민정당 지도장을 만났습니다. 노원교회 주위에 200명 주민들이 통일교 교회 건축 반대 운동 서명해 놓은 것을 수습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청, 경찰서, 소방서, 동사무실, 파출소, 지역 주민들까지 수습을 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저는 노력하였고 잘 해결이 되었습니다. 저는 통장, 반장 주위에 큰 소리 치는 사람까지 다 접대하고 밤 11시가 넘어 교회에 왔습니다.

저는 노인회 등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하는데 인사해야 될 곳은 정성을 모아 조금씩 성의를 표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하는데 왜 이리시비가 많고 모셔야 될 어른이 많은지, 그 전에도 몇 차례 교회 건축을 하면서 느꼈지만 특별히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주위의 반대와 시위 때문에 수습하느라 교회 건축을 완료 할 때까지 너무나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면 교회 건축을 하는데 가서 기도회를 하고 나무 정리,목재 정리, 철근 정리 등 매일 교회 건축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보를 만들고 심방을 하고 속회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국민연합, 승공 연합지부장을 만나 행사를 준비하는 등 1인 5역도 넘는 일을 매일 해 나갔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장을 잠시도 비워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1988년 5월 18일에는 지하공간을 흙으로 메우기 위하여 덤프트럭을 기다리다 잠깐 3동 에 있는 교회에 다녀왔습니다. 그 사이 15톤 덤프 트럭이 와서 지하실 바닥에 새까만 흙이 려인 것을 바닥에 붓고 가버렸습니다. 흙에서 땀새도 나고 하여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교회건축을 하면서 저는 깨끗하고 좋은 자재를 써서 최고의 아름다운 교회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콘크리트 친 공간에 악취가 나는 썩은 검은 흙을 메웠다는 생각을 평생 동안 하고싶지 않았기 때문에 공사를 지연시켰습니다.

오후에 상계동 전체 건축 공사장을 다 다녀 장복 건설 공사장에서 포크레인을 5만원을 주고 빌려 왔습니다. 트럭 2대를 3만원에 빌려서 포크레인으로 썩은 흙을 다 거두어 내어 깨끗한 흙으로 지하실 공간을 매웠습니다. 그땐 정말 속이 시원하고 기뻤습니다. 목수들이나 철근, 콘크리트, 벽돌 기술자들에게 내 집을 짓는다는 주인 정신을 가지고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6월 7일은 2층 철근 구조물을 제작 하였습니다. 저는 교회 건축에 새벽부터 밤까지 매달렸습니다.

저는 서울 시내 선배목사들의 부러움 속에서 노원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해 교회 건축을 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고난 중에도 감사했습니다. 저에게 일성 종합건설회사 현장소장 성하준 씨는 "목사님이 이렇게 철저한 사명감과 주인정신을 가지고 교회 건축공사를 하기 때문에 노원교회가 발전되고, 튼튼한 교회를 건축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장 소장이나 공사장 인부들이 저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 후 100년을 내다보았습니다. 제가 욕을 얻어먹더라도 튼튼한 교회를 건축하려고 교회 건축을 철저하게 관리, 감독을 하였습니다.

 

1988년 6월 22일 김영휘 회장과 정대화 사모가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장을 점검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김영휘 회장은 한국 통일교 협회장을 2회 째 맡고 있었습니다. 김영휘 회장님께 노원교회 교회 건축 설계도가 협회와 재단에서 잘못 설계되어 하나에서부터 백까지를 바르게 고치다 보니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에서 노원교회 교회 건축 설계 잘못으로 수십 차례 뜯어 고쳐야 했습니다.

김영휘 회장님과 교회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하실 뚜껑을 덮지 않으면 비가 올 때 비가 바로 지하실로 들어간다고 지하실 뚜껑을 해 달라고 하였고 물탱크, 안방, 벽돌도 적 벽돌로 공사를 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옥상에도 루핑을 깔고 검은 기와로 끝내는 것을 좀더 아름답게 구운기와로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담장도 앞면에 미관상 좋지 않은 시멘트로 만든 큰벽돌을 쌓는 것이 설계였는데 붉은 벽돌로 설계 변경을 하였고 대문도 없는 것을 만들었고 사택 올라가는 계단도 시멘트 계단이었는데 고급 계단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 외벽에도 페인트칠 대신 붉은 벽돌로 설계 변경을하였습니다.

한가지 한가지를 설계 변경 할 때마다 언쟁이 벌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협회 본부 간부들과 재단 간부들도 저보고 적당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이 저의 건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는 저의 집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저는 2급 장애를 갖고서도 사지가 멀정한 439곳의 통일교 목사들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여 노원교회를 전국 우수 교회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건강한 목사들보다 10배, 100배의 고통과 서러움, 외로움, 아픔을 갖고서도 저는 문선명에게 세뇌되어 교회를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어떤 통일교 목사들도 노원 통일교 교인들도 제 사정과 제 심정을 모를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온 신경을 저의 팔에 두고있기 때문에 항상 행동을 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의 장애를 모르고 있습니다. 같은 통일교 목사들이 회의할 때나 공석 · 사석에서 반갑다고 갑자기 제 팔을 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왼 팔에 소대를 두툼하게 넣어 오른팔과 같이 크기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저는 목회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해수욕장과 야외 풀장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일생동안 여름에 짧은 소매 옷을 입지 못하고 긴 팔옷만 입고 살면서 여름에는 긴팔 긴옷으로 인해 온몸에 땀띠와 전쟁을 하며 살았습니다. 목사들과 교인들이 "왜 짧은 소매 옷을 입지 않느냐?" 고 물을 태마다 저는 "습관이 되어서 괜찮습니다. "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처럼 단 한 번만이라도 해수욕도 하고 짧은 소매 옷을 입어보는것이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모든 것을 제 운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전국 통일교 모든 합동 결혼식을 한 부인들에게 고향으로 가서 전도를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내는 고향으로 옷 보따리를 싸가지고 전도하러 내려갔습니다 전국 통일교 모든 목사 부인들과 합동 결혼식 한 가정의 부인들은 남편과 자식들, 직장,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전도하러 갔습니다.

통일교는 지금까지 매년 여름에 40일 하계 전도기간이 있습니다. 그 해에는 6월 7일부터 8월 30일까지 약 3개월 동안부부가 헤어져 살아야했습니다.

모든 통일교 교인은 전도 기간에 전도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합동 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 가정은 하루 아침에 홀아비가 되어 자녀들과 같이 생활해야 했습니다. 저 혼자서 초등학교 5학년인은주, 3학년인 영진, 1학년인 은영 3남매 학교 보내는 일,빨래하는 일,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새벽 기도 후에 교회 건축 현장에 가서 어떤 사고가 없는지 돌아보고 기도 후 자전거를 타고 교회에 돌아와 부지런히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고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매일 국제 승공연합, 국민 연합의 조직 관리, 접대, 행사 동원, 세미나,전도 심방 등 저의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가쁜 나날이었습니다. 어느 때는 정신이 없고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주위의 통일교 선배 목사들이 제가 통일교 최고의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 하니 시기를 해도 저는 참아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모든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에게 가정의 행복과 사랑, 자녀교육, 생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가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은 말이 고향이지, 일생동안 통일교에 들어와 처절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였는데 무슨 돈이 있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고향으로 이사를 갈 수 있겠습니까?

통일교 목사와 합동 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자기 고향에 가서 문선명 교주가 참 부모요, 메시아 재림 주라고 증거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할 때 저는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성공을 하고 출세를 해야 고향 생각이 나고, 여유가 있어야 부모 형제들도 찾아 뵙고 여러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게 됩니다.

통일교에서는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주일 예배 한명에 몇 점, 새벽기도 한명에 몇 점, 전도 한명에 몇 점, 수련 한명에 몇 점, 교회 헌금에 몇 점, 통일교 합동 결혼식 하는 미혼 남녀 한명 전도에 몇 점 이렇게 점수제로 하여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미혼 남자한명 전도하는데 10만원을 지불하고 미혼 여자 한명을 전도하는데 15만원을 지불하고 이렇게 전국에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매월 평가제로 지금까지 교회의 등급을 매겼습니다. 이렇게 잔인하고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통일교 목회자의 길이며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교인의 길입니다.

통일교는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입니다. 각종 행사에 이용되고 그 행사를 위하여 끊임 없이 봉사하며 재산을 투자해야 되는 악순환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액 재산을 바쳐야 되는 통일교 교인들은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든 지경입니다. 저도 그런 통일교 문선명 교주를 만나 일생을 세뇌 되고 마취되어 청춘도 건강도 전부 빼앗겼습니다.

 

제 4 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상량식

 

1988년 6월 28일 상량식을 올리기 위하여 통일 민주당 청원군 위원장인 박동인씨에게 상량판을 받아 노량진 박동화씨에게 갔습니다. 상량판에는 붓글씨로 조국통일 선봉장 박준철 천지인 삼강 입주 상량이라고 썼습니다. 저는 교회로 돌아와 성염(소금)으로 성별을 하고 노원교회 상량식 봉헌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진을 찍고 음식을 교회 주위에 집집마다 돌렸습니다. 그동안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1988년 7월 3일에는 통일교 협회 문화부에서 노원교회 부흥과 발전을 취재하고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취재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매월 통일교에서 발행되는 통일세계에 노원교회 기사를 대서특필하기 위하여 유창수 기자가 와서 사진도 찍고 좌담회를 취재하였습니다. 이 기사가 1988년 7월달 통일 세계에 한국 통일교 부흥과 성장교회 탐방이라는 제목을 가지고"내일의 승리를 위해 도약하는 상계교회" 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특집 기사에 저 한 사람의 희생과 봉사로 문선명 통일 교주에게 충성하고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등불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발전한 소식을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알려서 조금이나마 자극제가 되어 전국의 통일교가 발전 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때로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개척하여 부흥을 시켰더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랬다면 점점 대도시나 서울로 와서 통일교식 승진을 하였을 것이고 승승장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일 후배 목사로써 지방중소 도시도 아린 대도시도 아닌 서울 교구에서 개척을 하여 성공을 하다보니 언제나 선배를 위해 강제로 부당한 인사이동을 수 차례나 당하였던 것입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서울 교구에서 기적의 개척과 발전, 부흥, 교회건축을 반복하며 상처받고 폭행을 당한 것은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과의 정과 관계를 끊어가는 과정이였습니다. 저는 박대 받고 부당한 인사 이동을 당하며 세뇌에서 점차 깨어나 탈퇴하라는 하나님의 뜻 이었습니다.

 

제 5 절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당한 폭력과 폭행
 

저보다 직급이 높은 공릉교회에 김수정 목사가 있었는데 저보다 직급이 높은 선배 목사였지만 교회는 2층 30평 전세 교회였습니다. 교인이나 예배헌금이 노원교회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김목사는 회의를 하면서 때로는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1988년 8월 30일 공릉교회 월말 목회자 회의중에 김수정 목사에게 회의 때 연락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김목사는 저에게 욕설을 하고 폭행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제가 잠시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떠나 심방 하는 사이에 다른 목사들을 데리고 와서 노원교회를 자기 교회로 할 것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 건축을 해 놓으면 선배 목사들이 빼앗았는데 또 저의 노원교회를 빼앗느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새끼!뭐 이런 새끼가 있어?너 한 번 맞아볼래? " 하면서 뺨을 때리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승창 목사와 여동석 목사가 저를 뒤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김목사는 저를 무차별하게 폭행을 하여 허리를 다치고 가슴을 얻어맞아 입술이 터지고 코피를 흘렸습니다. 저는 한 달 반 동안 온몸이 결리고 허리와 가슴이 아파서 몸을 지탱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회의석상에서 폭행을 당하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매스컴에 날까봐 병원에 입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놓고 협회의 김영휘 회장님과 김승철 국장, 각과의 국장단을 모시고 김수정 목사를 인사 위원회에 세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김목사의 양쪽 말을 듣고 결정을 하시라고 하였습니다. 양쪽 목사 말을 듣고 문책 인사 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목사는 문책 인사를 당한다면서 전세 교회가 아닌 강남의 큰 교회로 인사이동이 되었습니다. 남 잘리는 것을 배 아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여 폭행하는 목사를 예배와 교인이 많고 헌금이 많은 큰 교회로 승진 인사를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목회를 성공하고 능력이 많아도 제게 돌아오는 것은 지옥과 같은 목회 길뿐이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이 교회 건축헌금을 다해도 철거민 지역이라 몇 백만원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헌금을 제일 많이 한 통일교 교인이 50만원 정도였습니다 장로는 20만원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는 문선명까지 층층시하 어른이고 이 눈치 저 눈치 봐야 되는 입장입니다. 교회 목사라 할지라도 합동 결혼식 한 서열 순서대로 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나 대우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에 따라 교인이 어느 날 갑자기 목사로 임명을 받는 때도 있고 명령에따라 목사직을 박탈 당하고 교인이 되어 통일교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교인은 구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 목사들은 통일교를 한꺼번에 50명~100명이 그만두고 떠나는 일이 많습니다.

모든 통일교 목사들은 일회용 목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많은 문제가 돌발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매일 매일 협회 지시에 숨이 막힐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 끝까지 차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건축을 하면서 내외적으로 영적인 싸움과 함께 교회긴축 공사 과정이 하나하나 진행될 때 전투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성하준 소장은 설계대로 한가지 한가지를 건축해 가야 하는데 건축을 잘 못하였습니다.

잦은 변경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재단 본부의 설계 잘못으로 모든 일을 현장에서 고쳐나가려다보니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습니다. 제가 협회나 재단에서 노원교회 교회건축을 하는 대로 두었더라면 교회건물은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하준 소장은 성실하게 일을 잘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재단과 협회는 노원교회 목사인 저를 불러서 설계 도면을 만들었더라면 자재를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많은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와도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나이, 같이 합동 결혼식을 올린 통일교 협회 총무부장인 박석균은 저에게 "노원교회가 네 집이가?그만좀 해라. 적당히 좀 해라." 며 김승철 총무국장 앞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주인정신 없는 박 부장이나 재단 본부 김명운 부장 등에게 온갖 모욕과 무시를 당하며 피눈물로 노원교회를 건축해나갔습니다.

 

제 5 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준공을 완료
 

1988년 9월 29일 제3차 노원교회 건축 이전예배를 드렸습니다.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코너 노원통일교 시대를 마감하고 상계 2동 380번지 1호의 노원교회로 이사짐을 실어다 날랐습니다. 새벽에 문선명 사진을 모시고 정중히 새로운 교회까지 걸어왔습니다.

교회 대문, 3층 교회, 2층 사무실, 교회 사택, 1층 사무실, 식당, 방, 지하1층 방, 강당, 보일러 기계실 등 교회 전체를 성염(소금)으로 사단을 물리치는 성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무당이 하는 의식을 통일교에서는 하고 있기 때문에 저도 그때는 그 의식대로 소금으로 새로 건축한 교회 전체에 성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새로 건축한노원교회에 이사하는 날 떡 다섯 말을 하여 동사무실,파출소. 이웃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 반대 운동을산 900여명의 서명 날인을 한 집에도 떡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1988년 10월 10일 교회 대지 161평에 건물 554평, 지하 1층, 지상 3층 교회를 준공하였습니다. 한국 통일교 중 최고로 아름다운 교회로 교회 건축을 하였습니다. 12월 달에는 통일 세계에 표지 모델로 실렸습니다. 지금까지 통일 세계에 표지 모델은 문선명씨 사진이나 통일교 행사 사진 등 이었는데 통일교 30년 역사에 처음으로 노원교회가 표지 모델이 되었던 것입니 다. 그 동안에 저는 장인 장모님에게 효도 한 번을 하지 못하고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서울 박 서방이 노원교회를 개척하여 노원교회에서 3번째 교회 건축을 하고 이사를 했다" 고 울산에서 축하를 하기 위하여 올라 오셨습니다. 그리고 방에 가구가 너무 없다며 2층 절반 40평이 사택이었는데 거기에 장롱, 식탁, 가구 등을 2백만원의 거금을 들여 장만해 주셨습니다.

 

 

제 13장 통일교 아름다운 교회 헌당식

 

제 1 절 노원교회 3차 교회 건축 헌당식
 

1988년 11월 20일 노원교회에서 역사적 헌당식을 올렸습니다. 한국 통일교 김 영휘 회장님과 정대화 사모님 이 참석하셔서 격려사와 축도를 해 주셨고,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 이상덕 전도국장, 심평근 국장, 권혁서 제 1교구장, 김명대 제 4교구장, 김원종 목사 내외분 등 저의 친목회 목사들,서울 시내 선배 목사들이 참석하고 제가 목사로 있었던 경기화 성교회 교인들이 많이 참석하여 노원교회 예배 교회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축하예배 교인들로 가득 찼습니다. 헌당식에는 250명이 넘는 교인들이 와서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이 날을 위하여 살아온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모 당의 원내 총무였던 분이 대형 축하 거울도 기증을 하였습니다. 곽정환 세계일보사장, 문승룡 재단이사장 등 많은 전국의 통일 그룹기관 기업체 사장단의 이름으로 축하 화한과 축전을 엄청나게 보내 왔습니다. 저는 부족한 제 자신이 이렇게 통일교의 대표적인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했다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날 하루만큼은 외로운 마음, 배신감, 배고픔도 없이 꿈꾸는 심정 이었습니다.

'노원교회는 저의 피눈물의 교회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노력과 기적의 교회입니다. 저는 목숨을 걸고 한국 최고의 실적과 공적을 가지고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인정을 받아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완공시킨 것입니다. 이제 저의 책임은 노원교회를 교회가 가득 찰 정도로 넘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나깨나 교회 발전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드리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 중에 통일교 교인들 가운데 5명에게 상계전철역 앞 벽산아파트 딱지를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딱지는 무허가 건물 4평, 8평 짜리로 30평 짜리나 25평 짜리 아파트 입주권 이였습니다. 조건은 노원교회 발전을 위해서 충성하고 저의 손발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참부모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교회를 만드는데 모든 것을 앞장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고 충성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너무나 큰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풀었습니다.

 

제 2 절 베풀어 준 은혜와 축복을 배반으로 갚은 사람들
 

저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진심을 다해 도와주고도 뺨을 맞는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제 목숨보다도 더 아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을 제 아내나 자녀들보다도 더 아끼고 제 모든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반이라는 이름으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천국 백성이라는 통일교 교인이라는 이름을 갖고도 자기 목사에게 가슴속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단 말입니까? 은혜 뒤에 시련이 있다는 것을 통일교 목사 생활을 통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겪었습니다.

저는 노원 통일교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통일교에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통일교 한국협회 김승철 총무국장에게도 상계 전철역 앞 벽산아파트 30평짜리 무허가 건물 딱지를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김승철은 1962년도 문선명 통일 교주로부터 72쌍 합동 결혼식을 한 대 선배였습니다. 교구장도하고 협회의 이인자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북교회로 나가는 김승철 국장에게 문선명 참 부모님의 한을 풀어 드리자고 말씀드리고 저의 손발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노원교회 건축도 하고 교회를부흥시켜야 될 책임과 사명이 있는데 김승철이 와서 노원교회 어린 교인들을 잘 교육시키고 이끌고 가는 신앙자가 되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노원교회에 사랑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간절히 부탁 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아파트를 사게 해 주어 이사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박주성 집사에게도 벽산 아파트 딱지를 사주었습니다. 후일 아파트가 완공되어 입주를 하였고노원교회로 김승철 국장부부와 박주성 집사부부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3명 중 2명은 노원교회 발전을 위해 제가 부동산 소개업소 역할까지 하며 아파트를 살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돈만 벌고 이사도 오지 않고 노원교회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 분은 저에게 아파트를 팔아 감사하다고 100만원을 저에게 주었지만 그 100만원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분은 저를 격려해 주시고 희망과 용기를 주시며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 항상 저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분 이었습나다. 저는 말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100만원을 끝까지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노원교회에 있으면서 생애에 최고의 실수를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김승철 국장에게 아파트까지 살 수 있게 해주며 실질적인 돈을 벌게 해주었습니다. 문선명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노원교회에 충성을 해달라고 김승철 통일교 협회 총무국장을 성북구 종암동에서 데리고 온 것이 화근이 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자기보다 합동 결혼식을 한 서열순위가 아래인 목사에게는 잘 순종하지 않고 받들지 않습니다. 제가 김승철 국장보다 13년 늦게 합동 결혼식을 한 후배이다 보니 김승철 국장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노원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방해하며 반대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노원교회 목사 노릇까지 다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목사인 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제가 추진하고자 하는 교회 일을 거부하며 불신하였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교회를 불신하는 문성숙 집사, 제가 아파트를 사 주었던 박주성 집사, 제가 40일을 통일교 원리강의를 하며 사랑으로 교육했던 고귀숙 집사 등을 끌어들여 저를 배신하게 했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불신의 주모자가 되어 노원교회에 오지 않고 아파트에서 불신하는 5명과 일요일 대예배를 드렸습니다. 저와 심정 일체가 되어 충성하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어린 교인들을 사랑으로 바르게 신앙교육을 하지 않고 불신의 주모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받게 하고 해주었지만 은혜를 배반하고 노원교회 발전과 부흥을 가로막는 역적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김승철 총무 국장은 문선명 겹사돈인 홍성표 협회장(현재 문선명 통일교 교주와 원수가 되어 자녀들이 이혼하고 통일교를 탈퇴함), 재단 이사장 결재도 받지 않고 4천 만원을 협회에서 불법으로 가져와 2층을 전세 내었습니다. 제가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 직접 4천 만원이 홍성표 협회장 결재를 받은돈인가 물어 보았으나 결재한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그곳에서 목사 노릇을 하고 은혜를 배반한 통일교 교인을 끌어 모아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김승철 국장은 불법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에 교회를 폐쇄하고 돈을 협회에 반납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의 70세 고희기념 잔치를 하라고 전국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에게 지시 하였습니다. 전국 시 ·군 ·구·면 ·동 통일교에서 교인들이 헌금을 하여 지역에 국민연합, 승공연합 노인들을 모아놓고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 부모로 증거하라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47년동안 교회각종 행사와 헌금 강요로 처절한 가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상계1동부터 10동까지 노원교회 교인들을 각 동에 한명씩 구역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동~상계10동까지 문선명 참 부모 칠순 잔치를 승공연합, 국민 연합 회원을 모셨습니다. 그 동에 사는 통일교 구역장과 교인들이 돈을 내어 잔치를 해 드린 것입니다 잔치를 다 하고 김승철 국장이 책임 지고 있는 상계 5동만 문선명 잔치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협회에 갔다가 김승철 총무국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전국 통일교에 목사들과 교인들을 진두 지휘하는 사람이 총무국장이고 다른 구역장들은 잔치 다 했으니 문선명 잔치할 돈 10만원을 내달라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왜 어려운데 돈을 걷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총무국장이 전국 통일교에 문선명 참부모 잔치하라고 통일교 목사들에게 명령 해놓고, 그런 말씀을 하면은 어떻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문선명 교주 칠순 잔치 때 자기 교회에 잔치하라고 50만원, 100만원 헌금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은 한국 통일교 이인자 자리에 있으면서 돈 10만원이 아까워서 저에게 야단을 쳤던 것입니다. 그 이후 김승철 국장은 문선명 고희잔치 돈을 내지 않고 간단하게 과일, 떡을 마련하여 잔치를 끝냈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전국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온갖 명령과 지시를 합니다.

김승철 국장은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100일 새벽 제단 기도를 하시오. 40일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하시오. 전도하시오." 등의 명령을 하였지만 김 국장은 노원교회와 100m도 안 되는 거리에 살면서 새벽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도 드리지 않고 아들이 군대에 갔다고 면회 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전도도 하지 않았고 십일조 생활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참으로 김승철 국장을 노원교회로 오게 한 것을 후회하였지만 그것은 때늦은 후회였습니다.

 

 

제 14장 노원교회를 찿은 문선명

 

제 1절 자칭 감동받은 문선명
 

저는 1989년 1월 1일 제22회 참 하나님의 날을 맞이하여 문선명에게 1년 한 해를 충성할 것과 절대 신앙, 절대 복종, 절대 사랑할 것을 맹세 했습니다. 문선명에게 영광을 돌리는 한해가 되자고 100명이 넘는 노원교회 교인들과 모여 철야 기도회를 드렸습니다.

1989년 노원교회 목표를 360명의 재적과 210명의 예배 목표를 세웠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새해를 출발하였습니다. 1989년 1월 9일날, 문선명이 큰아들인 문효진 장남과 문현진 삼남과, 곽정환 회장 등 기관 기 업체 사장단 20여명을 데리고 노원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문선명은 서울 시내 통일교나 전국 통일교 어느 곳에도 방문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 도착하기 30분전에 노원교회로 온다는 소식에 저는 너무나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 문선명을 맞이할 준비하는 시간이 너무나 촉박 하였습니다. 심장이 떨리고 어떻게 모셔야 할지 노원교회 교회건축 브리핑을 어떻게 보고 드려야 할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칭 재림주 문선명이 노원교회로 오면 식사, 과일, 떡 등의 음식과 음식 담을 그릇, 상 등이 필요한데 모든 것의 준비가 부족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에게 급하게 전화 연락을 하여 노원교회로 문선명이 오시니 빨리 오시라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교회대문을 열어놓고 카메라와 필름 준비 청소와 교회 주변 정리 등을 일사천리로 준비 하였습니다. 그러나 준비가 다 되기도 전에 문선명은 통일교 최고위층 교인들과 같이 노원교회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서울 시내 통일 교회의 목사 중 제일 어린 목사였습니다. 그런데도 문선명은 저를 기억하시고 저의 교회를 부흥시키는 능력을 인정하시고 왔던 것입니다. 저는 지하 1층~지상 3층까지 곳곳을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브리핑하였습니다. 2층 사택 쪽으로도 모시고 가 구경을 시켜 드렸습니다. 문선명은 중국의 진시황제 때 9,999칸의 아방궁 같이 노원교회 교회 건물을 잘 하였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았습니다. 문선명에게 교회 전체를 보여 드렸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에 온 것만으로도 영광이었고 축복 이였습니다. 저는 문선명과 같이 찍은 사진을 확대하여 큰 액자에 넣어서 노원교회 교회 계단마다 걸어 놓았습니다.

통일 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은 문선명 참부모가 제가 목회하고 있는 노원교회에 내방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자칭 구세주 문선명이 감화 감동을 받았파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가 노원교회까지 왔다는 것은 통일교 내에서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치를 통일교의목사들과 교인들만이 알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문교주에게 세뇌된 상태였기 때문에 노원교회가 자랑스러웠습니다.

1988년 7월 달에는 통일 세계에 노원교회가 한국 통일 교회의 우수 교회로 크게 소개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고난의 시간들이었지만 기쁨과 감사가 함께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나님이 문선명까지 노원교회로 왕림하게 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15장 서울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비극적인 사건

 

제 1 절 동토의 왕국인 통일 제국의 교구장 임명


1991년 1월 5일, 오전 11시에 노원교구 내의 목사 회의를 권혁철 교구장과 하였습니다. 권교구장이 통일교 협회에서 노원 교구장으로 박준철 목사를 임명했다고 전체 목사들 앞에 발표 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박준철 목사님이 너무나도 많은 실적과 한국 최고의 공적을 가지고도 언제나 선배 통일교 목사들 때문에 교구장 자리에서 밑려났으나, 이제 박준철 목사님이 노원 교구장으로 협회의 임명을 받았으니 소원 풀이를 한 것이라고 축하 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그 당시 이제야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여 기쁜 마음 이었습니다. 선배 목사들인 하계동이나 중계동, 월계동 등 여러 목사들이 저고 교구장이 되었다고 축하 인사를 하였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저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권혁철 교구장이 내일 오후 1시에 서울 시내 각 구 교구장들만 한남동 UN 빌리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 저택에서 회의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 저의 아내에게 이번에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내도 기뻐했습니다.

1991년 1월 6일 새해 첫 주일 예배를 맞아 저는 광고 시간에 전체 교인들 앞에서 어제 홍성표 한국 협회장이 서울 시내 교구장들을 임명하여 저도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후 1시에 UN 빌리지 문선명 참 부모님 공간에서 교구장들 회의가 있어서 다녀오겠다고 노원교회 교인들에게 보고하였습니다.

통일교는 온갖 아부를 교구장과 협회장에게 해야 출세를 합니다. 저는 출세하기 위해서 통일교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에 순수한 통일교 목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문선명 교주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온갖 가시밭길을 피눈물을 흘리며 누명을 쓰고 강제로 부당한 인사 이동을 당하고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정으로 개척을 하고 성공하기를 반복 하였습니다. 저는 박탈감과 빼앗긴 배신감에 가슴 아픈 때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억울하게 폭행과 폭력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 항변하지 못하고 사회에 고발하지 못하는 제 처지가 한없이 미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원 교구장이 된 것이었습니다. 노원교회에 모든 교인들이 저와 일심동체가 되어 교회발전과 부흥을 하여 문선명 재림주에게 충성 할 것을 더 더욱 다짐을 하였습니다. 모든 노원교회, 모든 통일교 교인들도 목사에게 교구장이 된 것을 박수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는 늦었지만 교구장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동안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 10회와 교구장상 등 16회 총 26회를 수상 받아 통일교 역사에도 없는 최고의 실적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교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배 후 식사도 하지 않고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성북교회 교구장으로 임명된 김민중 목사님을 제 차로 같이 모시고 갔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가면서 서울 시내 동 책임자인 교회 목사들도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였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제 목사 회의에서는 서울 시내 각 구 단위 교구장들만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였는데 동 책임자인 교회장들도 후에 참석 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김민중 교구장과 같이 한남동 문선명 교주 저택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 시내 새로 임명받은 22명의 교구장과 교회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단상에 앉아 있고 통일교 기관 기업체 사장들도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협회 이인자인 김승철 총무국장이 교구장 인사 발령을 다시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제 발표한 인사 발령 중 22명의 교구장은 그대로 발령하고 노원 교구장으로 발령 받은 저만 교구장 명단에서 제외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성동구 구의동에 있는 동책임자인 구의교회 서유성 목사를 교구장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저는 순간 심장이 멎고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단 하루 교구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다가 빼앗긴 것 이었습니다. 저는 배신감을 또 한번 느낌으로 문선명 교주와 멀어질 수 있었습니다.

구의교회 서유성 교회장은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이 전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 부인이 서유성 교회장을 전도하였던 것 입니다. 통일교는 크나큰 모순이요, 폐단이 있습니다. 가장 암적인 일이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영적으로 구원해 주었다고 하여, 믿음의 아들 딸이라고 호칭을 쓰는데 자신이 전도한 사람을 자기 자식 이상으로 통일교에서는 아끼고 사랑합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취직시키고 신앙교육을 시키며 죽을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기하 급수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1년에 12명 이상을 전도한 사람에게는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을 시상하여 통일교 교인들 간에 경쟁을 붙이고 위화감을 조성하였습니다. 저도 전도한 사람이 통일교를 탈퇴한 사람까지 합하면 200명도 넘었습니다.

전도한 사람은 믿음의 아들딸을 출세시키고 생활을 돌보며 통일그룹 내에 회사에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취직을 시키는 일까지 책임을 지고 합니다. 저를 전도한 사람은 통일교 송탄교회 박길수 목사 부인 이었는데 그 목사는 자기 교회 부인 회장과 간통을 하여 아내와 자녀들 5명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통일교 부인 회장과 살림을 차렸습니다. 저는 저를 전도한 목사 부부를 가정이 파탄된후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통일교에서 1961년도 통일교 최초 합동 결혼식자인 36가정 곽정환 회장이 저를 전도하였다면 곽 회장이 저를 얼마나 잘 이끌며 출세를 시켰겠습니까? 제가 폭력과 폭행을 당하며 박해받는 통일교를 개척을 하여 성공하면 선배 목사를 위하여 강제로 7번이나 빼앗기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저는 서유성 교회장의 부인이 노원구 상계동의 김승철 총무국장 집에 와서 빨래며 청소, 부엌일등 모든 일을 파출부와 같이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김승철 국장집에 심방을 하였더니 김승철 국장이 전도한 통일교 교인 몇 십명이 모여 단합 대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전도한 사람중에는 통일 그룹 내에 핵심적 인 자리에 있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을 1년에 I~2차례씩 전국에서 초청하여 단합대회를 열어 과시를 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자기가 문선명을 믿게 한 통일교 교인들이 이렇게 많다고 세를 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족하고 힘이 없어서 제가 전도한 사람들을모 아 단한번도 단합 대회를 열지 못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는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믿음의 아들 딸이라 하고 전도 받은 사람은 전도해준 사람을 믿음의 부모라고 호칭을 합니다. 통일교 간부들은 그런 단합 대회를 자신의 생일날이나 명절 때를 택하여 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975년 2월 8일날 1,800쌍 합동 결혼식 때 결혼을 했기 때문에 후배 목사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통일교는 1961년부터 1963년까지 36가정, 72가정, 124가정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통일교 최고의 지도자이고 통일 그룹 내 핵심적 인 요직에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제 2 절 김승철 총무국장의 인사비리와 폭행사건
 

저는 1991년 1월 6일 첫 주일 오후 문선명 저택에서 전체 목사들 앞에서 일어나 감히 문선명 교주에게 직언을 하였습니다. 제가 언제나 처절하게 개척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건축하면 빼앗고 선배를 위하여 강제로 희생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7번이나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에게 제 충성과 실적과 공적을 보고하였습니다.

저는 통일교는공산주의보다 못하고 적당주의, 형식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I~2년이 있으면 다른 교회로 인사발령을 받아 가는데 왜 땀 흘려 목회를 하겠느냐고 말을 했습니다. 통일교는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력을 다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놓는 목사가 따로 있고 그것을 빼앗고 가로채는 목사가 따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래서 어떻게 통일교가 발전이 되며 목회자들이 사명의식을 가지고 목회를 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 답변으로 문선명은 전체 목사들 앞에서 저에게 노원교회 박 목사는 그런 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리하고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가는 개척교회마다 교회를 발전시키니 순종하고 다른 교회로 가면 또 교회를 발전시킬 것이고 후손 대대로 자손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흥분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제 자신이 박해받고 억울한 가운데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말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제 목사 회의석상에서 권혁철 교구장이 통일교 협회로부터 저를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고 목사들 앞에서 발표하여 축하인사까지 받았다는 말과 김승철 총무국장이 자기가 전도한 믿음의 아들인 서유성을 교구장으로 저하고 바꿔치기 한 것이라고, 인사부장을 했다고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 없어서 그 말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제 말을 마치자 마자 분노와 배신감, 그 동안 김승철 총무국장의 행위를 생각하며 그 길로 문선명 교주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노원교회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제가 나오는 중에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 박목사 데리고 오라고 두 세차례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제 후임 목사로 왔던 엄철상 목사가 승진을 거듭하여 문선명 교주의 총애를 받아 비서실장이라는 요직에 있었는데 저를 붙들고 못 가게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박준철 목사를 데리고 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에 문선명 교주에게 그 동안에 쌓인 분노와 배신감 때문에 심장이 떨려서 터질 것만 같고 흥분하여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길로 노원교회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저를 교구장 명단에서 빼버린 후 동 단위 통일교 목사들이 자기가 가서 목회 할 곳을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제일 마지막에 남은 한 곳 노원구의 동 단위인 공릉동 통일교가 제가 시무 해야 할 곳이 되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저를 헐뜯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폭행을 하고 온갖 모함으로 노원교회를 빼앗아 자기가 목사 활동을 할 것이라고 했던 김수정 목사가 있던 곳 이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2층에 30평 전세 교회였고 교세도 노원교회 보다 20분의 1도 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따로 목사 사택도 없었습니다. 교회 30평안에 5평 정도를 합판으로 막아 작은 방 2개를 만들어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저는 순간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힘이 없고 부족하여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을 생각하니 저는 24시간 동안 잠도 오지 않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배신감 때문에 심장이 떨려왔습니다.

저는 매일 매일 미친듯이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제 차를 타고 청평까지 과속으로 달려도 보고 판문점까지 통일로를 죽기살기로 달려도 보았지만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도봉산에도 가서 기도도 해 보았지만 해결이 되지 않고 점점 더 고통스러운 나날 이였습니다.

 

제 3 절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얻은 심장병

 

저는 김승철 국장의 인사 부정을 밝히기 위하여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 진실을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1991년 1월 7일 문선명 통일교 교주 겹사돈인 홍성표 한국 통일교 협회장에게 인사부정을 이야기하고자 한남동UN빌리지 문선명 저택에 찾아갔습니다. 문선명이 한국에 있을 때에는 매일 아침 7시면 통일그룹 내 최고위층 통일교인들 전체가문선명 저택에 모여서 자칭 구세주 문선명에게 경배를 드리고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노원교회에서 경배식과 새벽기도 후 새벽 5시에 그 추운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에도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기 위하여 문선명 교주 저택에 찾아갔습니다. 그 동안에는 교회 건축을 위하여 몇 번 김영휘 회장님과 같이 저택 안에 문선명 교주를 만나러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교주 저택에 들어가지 않고 저택 밖에서 홍성표 통일교 협회장이 문선명 교주에게 문안 인사와 경배를 하고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홍성표 협회장의 운전기사와 같이 살을 에이는 칼바람 같은 그 추운 겨울에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침식사와 점심식사도 하지 않고 홍성표 협회장을 기다렸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부정인사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기 위하여 저를 속이고는 아침 9시경에 다른 통일교 간부의 차를 타고 통일교 협회 사무실로 가버렸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김정수 목사에게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를 피하여 한남동 저택에서 도망 왔다고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통일교 폭력집단의 한국 통일교 협회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홍성표 협회장의 운전기사가 저를 속이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문선명 교주와 회의하는 줄 알았습니다 참으로 그 추운 겨울날 하루 종일 식사도 하지 않고 새벽부터 저녁 5시까지 그 긴 시간을 발을 동동 구르며 떨어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 바람이 저를 떨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일교의 잔인한 폭력과 야비한 홍성표 협회장과 김승철 총무국장의 악한 행위 때문 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1월 8일 강남의 홍성표 협회장 집으로 찾아가 새벽 5시부터 밤7시까지 기다렸습니다.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가 만나 뵈러 왔다고 했지만,"협회장이 나가셨다" , "안 들어왔다" 고 계속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홍성표협회장이 저를 만나지 않기 위하여 집에서 운전기사와 서로 연락하며 피하는 것으로 알고 마음도 몸도 얼음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기진맥진하여 노원교회로 돌아왔습니다.

통일교에 입교하여 목숨을 걸고 온갖 박해와 가시밭길을 걸어온 목사의 길이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배신감에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끝없는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통일교 부정과 충격적인 쇼크로 저는 그만 화병을 얻어 심장병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통일교가 아니라 사람을 파멸시키는 죽음의 교회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겹사돈인 홍성표 합회장은 문선명 교주에게 최고의 충성과 사랑,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협회장 직에서 박탈당하였고 문선명 교주와 원수가 되어 겹사돈도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뇨와 여러 병으로 바깥 출입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첫째 아들인 문효진과 홍성표 협회장의 첫째 딸인 홍난숙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홍난숙은 25살의 나이에 이미 5남매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지만 문효진의 마약과 SEX, 감옥, 폭행을 참다 못해 이혼하여 가정이 파탄되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의 아들딸은 문선명 교주와 원수가 되었고 통일교를 탈퇴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아들딸을 바친 홍성표 협회장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을 것입니다. 홍성표 전 협회장은 당뇨병과 만병으로 거동도제대로 하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 문선명 교주에게 영혼과 육신을 빼앗긴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시 1991년 1월 11일 금요일 아침 9시에 통일교 협회 김승철 총무국장을 만나 눈물로 호소하고자 찾아갔습니다. 저는 그 며칠 동안 쇼크를 받아 매일 심장이 떨리고 숨이 가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조식 금식 기도를 하고 아침 일찍 김승철 국장을 만나기 위하여 청파동 협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제가 눈물로 호소하는 소리를 김승철 국장은 단칼에 잘라 버렸습니다. 저는 김승철 국장이 노원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불신하는 몇 사람을 회개시키지 않고 끌어 모아서 저를 더 불신하게 한 것에 대한 직언을 하였습니다. 협회에서 교구장으로 발령하고 하루만에 김승철 국장이 전도한 서유성 교회 장을 교구장으로 바꾼 이유와 불법을 저지른 내용을 놓고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김승철 국장에게 왜 인사부정을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동시에 저에게 공갈 협박을 하며,주먹으로 제 뺨을 쳤습니다. 순식간에 제 입이 찢어져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자 저는 왜 때리느냐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먹으로 제가슴과 배를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그리고 두 국장이 합세하여 저를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하였습니다.

통일교 협회에는 홍성표 협회장만 없고 전 국장과 부장, 과장, 계장, 여직원들까지 모여 박준철 목사의 폭행장면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저를 잔인하게 두 국장이 무차별적으로 폭행하였던 것입니다. 협회 총무국 사무실에서 전체 직원들이 모여들어 저 한 사람을 가운데 놓고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누구 한 사람 말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폭행을 당하여 몸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폭력에 대항해 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한 쪽 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 때문에 더 힘들었습니다 저는 몰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저의 양복과 와이셔츠는 피범벅이 되었고 옷이 찢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한참을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한 후 이상수 전도국장과 몇 사람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가하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국장을 제지하여 수습이 되었습니다. 저는 몸을 가눌 수도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겨우 협회 총무국을 나와 출입구 계단에 앉아 많은 시간을 보낸 후 겨우 의식을 회복하여 태릉 성심의원에 갔습니다. 병원에서 응급 처치후 4주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가정국장을 고소하여 감옥에 집어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에 마취되고 세뇌되어 문선명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고소하지 못하였습니다. 노원교회 목사가 통일교 최고위층 협회 총무국장과 가정국장에게 부정 인사를 당하고 통일교 협회 사무실에서 무차별적으로 폭행까지 당했다고 신문에 보도되어 통일교가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노원교회에 돌아와 눈물로 몇 달을 보내야 했으며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두 국장의 폭행으로 인하여 저의 머리와 배, 가슴, 옆구리를 걷어차여 그 충격으로 회복할 수 없는 심장병을 얻었습니다.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에게 폭행을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고 양복이 다 찢어진 모습으로 제가 노원교회에 돌아왔을 때도 어린 저의 자녀 3남매와 저희 부부는 절망하며 울었습니다. 매일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는 저를 보고 어린 저의 자녀 3남매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린 저의 자녀 3남매는 통일교 목사들이 사람 패는 깡패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깡패보다도 더한 폭력집단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 폭행사건은 문선명 자칭 참부모 구세주를 믿고 '절대신앙, 절대복종,절대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세뇌되었지만 서서히 문선명 교주로부터 세뇌에서 깨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사랑 받았다면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제16장 빼앗긴 교구장직과 노원교회까지 쳐들어 온

 

김승철 총무국장과 협회 전직원 시위대
 

제 1 절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총무국장과 협회 직원들
 

1991년 1월 13일 일요 예배날 이었습니다. 저는 온 몸이 아파서 몸을 가눌 수 없었지만 사력을 다하여 단상에 올라가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전체 교회가 가득 찬 가운데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막 시작한 순간 한국 통일교 이인자 김승철 총무국장, 이상수 전도국장(1962년도 합동 결혼식자), 김철현 가정국장 등 협회 전 국장과 협회 총무부장 박석규, 전도부장 오덕수 등 부장 전체, 과장 전체, 계장전체, 협회 여직원 전체를 총동원하여 왔습니다.

저를 쫓아내고 폭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협회장을 제외한 수십명이 노원교회로 데모를 하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저와 절친했던 신승철 가정부장과 김형길 문화부장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김승철 국장에게 미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승철 가정부장은 후일 간경화로 죽었습니다.

통일교에서 열정을 가지고 문선명 교주를 믿고 충성했던 사람중에 암병이나 심장병, 그 밖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 제 주위에 많았습니다. 과중한 스트레스와 충격적인 쇼크로 죽은 사람이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의리를 지켜준 신승철 가정부장과 김형길 문화부장에 대해서 그 당시에고맙게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신승철 가정부장은 서울에서 같이 목회를 하며 노원교회 교회 건축 헌당식 때도 축전까지 보내주었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 헌당식 때 협회장과 간부들이 거의 왔었습니다. 그러나 협회 총무부장인 박석규와 전도부장인 오덕수는 오지 않았습니다. 헌당식에도 오지 않았던 박석규와 오덕수는 김승철 하수인이 되어 오니 배신감과 분노가치 밀어 올랐습니다.

일촉두발의 순간이었습니다. 교회 예배 시간에 웅성웅성하고 몸싸움이 일어나고 노원교회 교인들과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부터 평직원이 떼거리가 되어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저는 예배 설교 단상에서 내려가 112에 전화를 걸어 경찰을 오라고 해서 협회 국장과 부장, 과장, 여직원까지 노원교회 교회에서 밖으로 다 끌어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통일교가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는 주일 예배 때 어떻게 설교를 하고 끝마쳤는지 모릅니다 재직 회장과 부인 회장, 충성했던 변함숙 권사 등 전체 식구들과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 이하 협회 직원들과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통일교는 조직이 있었기에 통일교 이인자인 김승철 국장과 국장단, 전 직원들 앞에 노원교회 교인들은 원통하고 분하지만 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을 중심으로 문성숙, 고귀숙, 최인자 등은 그 동안에 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암적인 역사를 했습니다. 저를 불신하며 김승철 국장과 합세했던 몇 명의 교인들까지 총동원하여 김승철 총무국장은 밀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 교회에서 충성했던 이수성 집사(1970년 합동 결혼식자-777쌍)도 그 자리에서 의리를 저 버리고 저를 배신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구장으로는 김승철 총무국장의 동서인 나상렬 목사(1962년도 72쌍 결혼식자)가 교구장으로 왔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 부인과 나상련 목사 부인은 같은 자매였던 것입니다. 치욕적인 수치와참을 수 없는 분노의 날이었습니다. 이런 악연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가증스러운 죄악의 역사 앞에 저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고 한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김영휘 회장이 1990년 11월 26일날, 문선명 통일 교주의 명령으로 한국통일교 협회 회장직에서 사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임으로는 일화 홍성표 사장이 취임을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1970년부터 1990년 11월 26일까지 전국 통일교 목회자들의 형님이었고, 아버지 같이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의 심정과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 이였습니다. 김 영휘 회장님은 중간에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을 뿐 저는 거의 전부를 김 영휘 협회장을 모시고 목회를 하였습니다.

저는 1991년 1월 13일 홍성표 협회장을 제외한 김승철 총무국장과 각 국장들, 부장, 여직원까지 시위를 벌리며 밀고 들어왔을 때 저는 몇 마디만 하고 2층 사택으로 내려왔습니다. 제 자신이 무력하고 힘이 없는 목회자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껴야 했습니다. 3층에서는 김승철 국장이 노원교회 교인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교인들에게 온갖 말로 변명만 늘어놓았습니다.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의 감언이설에 속은 노원교회 교인 중 저의 은혜와 사랑을 배반한 몇몇 교인이저에게 직접 시위를 벌렸습니다. 2층 사택의 안방 안에서 3일 동안이나 문을 걸어 잠그고 온갖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노원교회의 이수성 집사였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1970년 777쌍 합동 결혼식자인데, 잠시 목회도 하였던 사람입니다. 한쪽 팔을 못 쓰는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후 두 아들을 낳고 아내는 사망하였습니다. 혼자두 아들을 키우며 사는 것을 저는 안타깝게 생각하고 노원교회 어떤 통일교 교인들보다도 불쌍히 보고 긍흘하게 보는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충성하라고 장년 회장 직책까지 임명하였습니다.

저는 이수성 집사의 두 아들을 위하여 자주 심방하였습니다. 갈 때마다 먹을 것을 사다 주었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화물차 한 대로 짐을 실어 나르는 영업을 하였습니다. 이수성 집사가 집에 없을 때도 두 아들을 위해 저는 심방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수성은 저의 은혜와 사랑을 저버리고 김승철 국장과 단번에 짝이 되었습니다. 재직회장, 부인회장, 전 교인이 김승철 총무국장에 대하여 분노하는데 오직 장년 회장인 이수성 집사 혼자만 김승철 총무국장편에 서서 은혜를 배반하는 행위를 하였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목사 사택인 저의 안방으로 들어가 3일 동안을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를 보고 목사라고 하지도 않고 "너는이제 노원교회 목사가 아니다. 노원교회 목사는 나상렬 교구장이다(김승철총무국장 동서 - 1962년 72가정 합동 결혼식자). 박준철, 너는 노원교회에서 나가라" 고 하면서 시위를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그 당시의 충격으로 통일교를 떠나버렸습니다. 저의 가족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눈물로 3일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의 부부는 안방에서 못 자고 이불도 없이 마루에서 추운 겨울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악몽같고 지옥 같은 통일교의 목사 길을 극기 훈련하는 심정으로 인내하고 문선명 교주를 믿으며 충성하고 살아온 날들이 한없이 후회되었습니다.

저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가정국장의 폭행과 인사비리 부정에 대한 쇼크로 심장병을 얻었으며 간을 너무나 못쓰게 되고 과도한 스트레스로 담석증을 얻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위장병도 얻고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사이비 종교 중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종교 같이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잔인하게 인사 부정을 하고 자르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목사와 회사 직원들이 아내, 자녀들이 있고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는데도,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그룹 내 기업체 통일교 교인들의 회사 직책을 하루아침에 박탈시켜 버립니다. 손바닥 뒤집듯 칼로 생선을 자르듯 목사 직책과 기업체 직책을 박탈하는 살인적인 행위를 생각하니 치가 떨립니다.

저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로부터 잔인한 인사와 간부들에게 폭력 및 폭행을 당하며 언제 심장병으로 쓰러져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문선명 가짜 재림주에게 미쳐 있었습니다.

 

제 2절 나상렬 노원교구장의 배신
 

저는 폭력과 폭행 앞에 항변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제 목숨을 바쳤던 노원교구 본부를 피눈물을 흘리며 떠나야 했습니다. 저는 목회 의욕을 잃어버렸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자주 충격을 받고 폭행을 당하여 실어증과 심장병, 불면증 합병증으로 지금 현재까지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곤란할 때마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심장병으로 죽으면 억울해서 영계에 어떻게 가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현실 앞에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상렬 교구장에게 당분간 노원교회 목사 사택에 살면서 빠른 시일 내에 노원교구 관할인 공릉동 교회로 가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사짐은 지하실 창고에 쌓아 놓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나상렬 노원 교구장은 대 선배 목사로서 항상 좋은 자리만 차지했기 때문에 강남에 좋은 저택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그런 나상렬 교구장은 강남 집에서 노원교회로 출퇴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나상렬 노원교구장과 약속한대로 노원교회에 잠시 생활했습니다만,나상렬 교구장은 온갖 방해와 여러가지 압력을 행사 하였습니다. 결국에는 나가라고 하는 소리까지 하였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나가겠다고 하였는데도 나상렬은 김승철국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노원교회 교인들을 동원하여 차마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저에게 하였습니다.

저는 나상렬 교구장의악 랄한 처사에 못견뎌 눈물로 공릉동 2층 전세 교회 내에 있는 합판으로 만든작은 방 2칸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셔서 제가 죽을 때까지 노원교회에 교구장으로 있을줄 알고 사준 장롱, 화장대, 장식장 등 온갖 가구들은 공기도 통하지 않는 지하실창고에 다른 이사짐과 함께 쌓아 놓았습니다. 곰팡이가 피고 습기가 차 못쓰게 된 가구와 옷,책은 제가 1년 후 이사를 할 때 버려야 했습니다.

저를 불신한 통일교 교인들은 힘 있는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달라붙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노원교회교인들에게 김승철 국장은 그 국장자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은 7개월 만인 1991년 8월 30일에 문선명으로부터 총무국장직을 박탈당하였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은그 후 몇 년 동안 일본의 통일교 선교사 일을 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망하였습니다.

 

제 3 절 공릉동 교회의 지옥같은 생활
 

공릉동 교회는 노원교회보다 건물이나 재적인원, 예배인원, 헌금 등이 2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10여명의 통일교 교인이 있는 개척교회의 목사로서 시무해야 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거지 목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억울한 일들 때문에 심장병을 얻어 모든 의욕을 잃어 버리고 눈물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도 불안과 공포 속에서 지냈습니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고 괴로움의 나날이었습니다. 가정 분위기는 초상집과 같이 침울하였고 제 자신은 그 동안에 통일교에서 당한 한을 풀 길이 없어 강팍해져 버렸습니다.

제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형님같이 저를 이끌어 주셨던 K교구장님이 있었습니다. K교구장님은 자신이 통일교 대 선배 축복 가정 목사였는데도 뺨을 맞고 폭력을 당했다고 하며 제가 폭행을 당한 것을위로해 주었습니다. 유지철 목사도 1981년도 10월 20일, 서울 시내 선배 목사 동원령이 내렸을때 후배 목사인 최정철 목사에게 나무 몽둥이로 무차별적 인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최목사는 피와 땀으로 교회를 개척하여 전세 교회를 마련 하였는데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후임 목사인 유지철 선배 목사에 자기 교회를 빼앗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정철 목사는 나무 몽둥이로 폭력을 행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정철 목사는 능력 있고 교회를 잘 부흥시키는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문선명 교주가 환멸과거짓, 재림 주라는 것을 알고 통일교를 탈퇴하였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사업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1991년 2월 3일 노원교구 관내인 공릉동 통일교에 취임을 하였습니다. 그 동안 공릉동교회는 비참하고 어려워 목사가 없었습니다. 이 무슨 역사인지 제 목숨을 바쳤던 노원교구 본부교회를 멀리 떠나지 못하고 노원교구 본부교회 지시를 받아야 되는 공릉동 개척교회로 취임식을 해야 했습니다. 매달 월말 회의를 노원교구 본부로 가서 해야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를 빼앗겼는데 그 곳으로 매달 회의를 가야했습니다. 저는 매달 목사들 월말회의 때가 회의시간이 아니라 고문하는 시간 같았습니다.

월말 목사들 회의시간이 지옥 같았고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헌금이 없기 때문에 생활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교인이 아닌 세상 사람이 가끔씩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단 10원의 생활비도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녀 교육과 생활을할 수가 없어 아내가 파출부일과 식당일을 계속하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공릉동 개척 통일교로 취임을 한 후, 하루아침에 생활과 재정이 파탄 되었습니다. 노원교회 재직 회장이었던 윤승운 장로와 부인 회장 최선례 집사,노원교회의 정신적인 어머니였던 변함상 권사, 저의 동생들이 노원교회를떠나 공릉동교 회로 옮겨 저를 도왔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을 가지고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심장병과 육신의 병으로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육신의 병도 문제지만 제 영혼의 아픔과 배신감 때문에 목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제 17장 전국 통일교 목사전체 500명의 박탈당한 목사직

 

제 1절 교회사택에서 쫓겨난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


1991년 8월 30일날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전국의 목사들을 단 한 마디 회의나 상의 없이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자기 친척들을 전도하는 종족적인 메시아 활동을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전국의 통일교 목사 500명 전체를 단칼에 무우 자르듯 목사 직책을 박탈하여 버렸습니다.

전국 통일교를 1991년 8월 30일부로 모두 폐쇄하고 해산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통일그룹 내, 통일교 합동 결혼식 한 교인은 무조건 통일교 회사에서 퇴사하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 친척들을 전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통일교 교인이나 세상 회사에 다니는 통일교 교인들도 폐업과 퇴사를하고 고향으로 돌아 가라고 문선명 교주가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그룹 내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통일교 교인들을 강제적으로 퇴사를 시켜구조조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통일교 회사를 살리고자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만 근본적인 회사경영의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통일그룹이 IMF때 부도를 내고 파산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을 박탈당한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교 회사에 다니던 통일교 교인들은 강제 퇴직을 당하여 대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은 불안과 공포, 방황 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더불어 당장 먹고 살 곳이 없었습니다. 목사들은 통일교에서 쫓겨나 거리에 내몰렸습니다 졸지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데 갑작스런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목사직 박탈이 되어 처절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목사들에게 목사 경력에 따라 돈을 지급해 주었습니다. 통일교 목사 생활 1~5년을 한 목사는 100만원, 5~10년 목사 생활을 한목사는 300만원, 10~15년 목사생활을 한 목사는 300만원, 15년 이상 목사생활을 한 목사는 400만원씩을 지급하였습니다.

서울 시내 5인 가족이 방3칸 정도의 전세방을 얻으려고 하여도 5천 만원 이상을 주어야 전세를 얻을수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언제나 교회 사택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집이 필요 없었습니다. 통일교목사들은 언제나 처절하게 가난하게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아 놓은 돈도 없었습니다. 매 주일마다 나오는 헌금으로 자녀 교육비와 가정생활 하기도 벅찼습니다. 문선명은 그런 통일교 목사 500명을 졸지에 갈 곳도 없이 교회에서 쫓아내고 엄청난 충격를 주었습니다. 전국 통일교를 폐쇄하고 해산한다고공문으로 전국 통일교와 교인들에게 명령을 시달했습니다. 그러고는 1달만에 전국 통일교를 해산하지 않고 폐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전국 통일교와 교인들에게 공문으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선명 교주는 위선과 거짓으로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속인 것이었습니다 전국 통일교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 큰아들인 문효진 9세 재림주 체제를 만들기 위하여 문선명 교주와 홍성표 협회장이 현직 목회자들의직책을 박탈시켰던 것입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통일그룹 내 기업체 살리기위 한 작전으로 통일교 교인들을 잘라 낸 것이었습니다. 회사 구조조정과 경영개선을 하려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이 나이가 많고 교회 부흥은 안 시키고 적당주의, 형식주의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70세가 넘는 고령이어서 자식인 문효진을 자신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로 세우려고 작전을 한 것이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이 문선명의 큰아들이며 홍성표 협회장의 첫 번째 사위인 문효진 체제를 만들고자 문선명과 한 짓 이었습니다. 문선명은 홍성표 협회장과 같이 통일교 해산 1달후문효진이 마음대로 명령하고 지시할 수 있도록 젊은 목사체제로 구축하였습니다.

저보다 7년 늦게 합동결혼식을 한 1982년도 6,000쌍 합동 결혼식을 한 젊은 사람만 통일교 목사직을 수행할 수 있게 했습니다. 1982년도 이후 합동 결혼식자인 어린 목사들을 전국 통일교에 목사로 발령했습니다. 문선명은 젊은 통일교 목사들을 모아놓고, 나이 많은 전 통일교 목사들을 멱살잡이를 해서라도 전국 통일교 사택에서 끌어내 쫓아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교주는1991년 1월에 "젊은 통일교 목사들이 힘을 두었다가 어디다 쓸 것이냐?" 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전세금도 자녀 교육비도 집도 없어 당장 갈 곳이 없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당한 나이 많은 통일교 목사들은 젊은 목사 눈치를 보며 한 교회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나이 많은 40대 통일교 목사들은 20대, 30대 젊은 통일교 목사들에게 온갖 모욕과 무시를 당하며 생지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자기 교회의 교인들까지도 전임 목사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전국의 통일교에서 전임목사와 후임 젊은 목사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문선명에게 하루살이 같이 일생 동안 충성하고 이용물이 되어 목사직에서 박탈당한 후 자신의 고향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통일교 기업체에서 직책을 박탈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난 통일교 교인도 이사 짐을 싸서 고향에 갈 수 없었습니다. 고향은 커녕 통일교에서 쫓겨난 목사들과 통일교 회사에서 쫓겨난 통일교 교인들은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했습니다. 배운 것도 기술도 경험도 없었습니다. 당장 아내와 자녀들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몇몇 통일교 목사들은 빛을 내고 있는 돈을 모아 식당을 했지만 대부분 망해 버렸습니다. 가게를 해도 경험이 없어 실패를 하는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돈이 없는 통일교 목사들은 지하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고 건설 현장에서 벽돌과 시멘트일, 도배일, 온갖 막노동을 하였습니다. 어떤 통일교 목사들은 목사직 박탈 후 다단계 판매 사업을 하여 빚더미에 올라 앉았습니다. 여러 명의 목사들이 다단계 금융 사기에 걸려들어 거액을 날리고 다단계 금융사기죄로 전과자가 되어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 당한 통일교 목사들은 문선명 한 사람의 죄악으로 졸지에 한참 정상에 서야되는 40대. 50대에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거지가 되며 전과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도처에서 목사직을 박탈당한 목사 가족들이 단칸 지하셋방에서 3대가 같이 살아야 하는 비극적 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당한 목사의 아내는 파출부로 신문배달로 식당 종업원으로 막노동 일로 생선장사로 보험 모집원으로 이 세상에 밑바닥 일을 했습니다. 처참하고 가난하며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2 절 7개월만에 박탈당한 500명의 목사들
 

1991년 9월 1일부터 전국의 통일교 목사 500명과 통일교 회사에서 퇴사한 통일교 교인들과 자영업을하는 통일교 교인은 종족적인 메시아 역할을 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본래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집을 매도하고 전세금을 빼고 하여 완전히 고향으로 이사를 가라는것이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명령 이었습니다. 생업이나 회사생활. 자녀교육은 문선명 교주에게 안중에도 없는 일입니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문선명 사이비 교주만이 그런 공포의 명령을 내릴 수가 있는것입니다.

저도 노원교구 내 공릉동 통일교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들과 같이 목사직을 박탁 당하였습니다 .선배통일교 목사들은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에 최고 충성하고도_그렇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고 폭헹을 당했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 ?"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 형제, 친척과 고향 동네 사람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경남 하동 고향 땅에 가 고인이 되신 아버닐과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하동 교회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 도착 신청서를 제출하였슴니 다. 그리고 어머님을 뵙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통일교는 모든 교회 일 처리가 명령만 있고 형식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언제나 행사로 시작해서 행사로 끝나버리는 것이 통일교의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47여 년을 통일교는 내실 없이 형식에 치우친 행사만 하였습니다.

경날 하동 고향에 갔던 것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 목사 직분을 박탈당한 목사들은 고향에 있는 통일교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 신청서를 내야 문선명 교주에게 순종했다는 표시가 되기 때문 이었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에서 박탈당한 목사들에게 2~3개월 생활비밖에 되지 않는 1백~4백만원을 퇴직금이라고 주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것이라도 받아와야 당장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고향에 다녀왔던 것 입니다. 저는 공릉동 통일교에 합판으로 방 3칸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빼앗겨야 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교회 책임자로 처녀 전도사가 왔습니다. 저는 양해를 구하고 겨울을 나고 이사 가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저는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지만 영혼과 육체가 폐인이 되었고 심장병으로 막노동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아내는 아침부터 밤까지 파출부 일과 식당 일을 했습니다. 참으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무력한 모습을 아내나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엄동설한과 더불어 제 마음은 더 혹독한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 3 절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독서실 운영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로부터 목사직이 박탈된 후 저의 아내와 자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신설동 부근의 동신 독서실을 계약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저를 속인 것이었습니다. 독서실에서는 독서실 실장이 관리를 잘못하여 독서실 내에서 술을 마시고 기타치고 남학생이 여학생을 추행하는등 독서실을 망쳐놓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120명 있다고 했는데 2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해약해 달라고 하였습니다만 계약금 일부를 겨우 돌려 받고 계약금을 포기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둔 후 첫 사업이었는데 잘못 계약한 것 이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정릉에 있는 고명상고 옆 대원독서실을 계약하고 인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수후 한달만에 재개발 지역이 되어 미아리 고개와 아리랑고개 사이에 있는 집들이 철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서실을 소개하는 전문 부동산 업자도 저를 속였던 것입니다.

독서실 주위에 한 쪽 부분만 철거가 되지 않고 주위 전체가 다 철거를 하고 아파트를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년 동안 대원 독서실을 운영했는데 전 가족들이 매달려 고생만 하였습니다. 그나마 철저하게 독서실을관 리하고 운영한다는 소문이 나서 현상유지는 할 수 있었습니다. 대원 독서실을 1년 동안 팔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천지에는 저 같은 바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대원독서실을 폐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증금은 건물주인에게 받았지만 시설비 2천5백만원은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다 날렸습니다. 선풍기 5천원, TV 5천원, 냉장고 1만원, 자판기 3만원을 받고 고물 장사에게 팔고 독서실 의자와 책상은 중고 물품 취급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돈을 주고 철거해야 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교문으로 나오면 학생들을 차에 태워 독서실까지 데려와 공부를 시키고 새벽 2시에 학생들을 집에까지 실어다 주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학습분위기 조성, 청소 등 너무나 힘든 일 이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목사생활을 할 때처럼 정신적인 충격과 스트레스 등이 없었기 때문에 독서실 운영하는 것이 마음은 훨씬 편했습니다. 1년 동안의 대원독서실의 운영은 제가 2번째 속아서 계약하여 2번째로 독서실운영의 피해를 본 것이었습니다. 사회 경험이 없는 저는 또 한 번의 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제 4 절 고시원 운영 중 다시 꿈꾸게 된 목회 길
 

저는 싸고 낡은 고대 옆 고시원을 인수하였습니다. 고시원은 대학생 중심으로 한 생활이기 때문에 밤마다 독서실에서 처럼 중 고등학교 학생들 같이 차로 집에 데려다 주지 않아서 조금 편했습니다. 지옥 같은 공릉동 통일교를 떠나 고시원 옆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동안에 한푼 두푼 적금을 붓고 은행에 예금하고 모은 돈과 상계동 무허가 집을 팔은 돈으로 고시원을 인수하고 집도 전세로 얻었습니다. 고시원 학생들의 식사도 해 주었습니다.

고시원 시설은 낡았지만 대학 내에 저희 고시원에서 시험을 보면 무슨 시험이든지 합격이 잘 된다는소문이 퍼져 많을 때는 60명이 넘어 고시원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I~2년 운영 후 주위에 점점 최신식 고시원이 들어서고 원룸 고시원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저희 고시원은 저희 부부 인건비 정도 수익이 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시, 행시, CPA, 취직시험, 각종 공무원 시험을 치는 학생들에게 아버지 같고 형님 같이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그 낡은 고시원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용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각종시험에 합격되었다고 할 때마다 고시원 원장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습니다. 제가 고시원에서 한 학생, 한 학생을 놓고 기도 하다 보니 각종 시험에 합격을 잘하였던 것입니다. 학생들은 저희 고시원은 행운이 따르는 고시원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고시원 운영 중 임순도 종로 교구장 겸 통일교 부협회장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의 통일교 충성과 저의 사명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분 이셨습니다. 임순도 부협회장이 계실 때 제가 서울 강서 교구 본부 교회를 허허벌판에서 개척하고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 건축을 하고 하나님께 봉헌하는 헌당식도 못한 사실을 임 교구장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배 통일교 목사에게 눈물로 양보했던 서울 강서 교구 본부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서울 강서 교구 본부 목사로 저를 발령을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고난과 눈물, 충성, 한국 최고의 목사로서 실적을 잘 알고 있었던 임순도 부 협회장님은 저를 서울 강서교회 목사로추천해 발령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의 억울함,부정 인사이동, 언제나 통일교 선배 목사에게 양보하고 온갖 폭행과 폭력을 당하며 그 충격으로 심장병 ·담석증 ·위장장애 ·불면증까지 겹쳐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저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하루 하루를 살고 있으면서도 마지막으로 제가 땀과 눈물로 교회 건축을한 강서 교구본부에서 마지막 목회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통일교 목사로 지옥 같은 통일교 목사 생활을 했으면서도 통일교 목사직을 또 소망했습니다. 제 자신이 정신 이상자가아니고서는 어찌 문선명 교주의 쇠사슬에 코를 끼려고 했겠습니까? 저는 너무나 세뇌되어 다시 통일교 목사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소망을 갖고 제가 운영하는 고시원을 매매한다고 바로 광고를 내었습니다. 고시원만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부동산 회사에서 즉각 저의 고시원을 팔아주었습니다. 너무나도 문선명 교주에게 빠져있었던 저는 제 사명이 목사이기 때문에 목회를 해야 한다고 다른 길은 저에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때 고시원을 매도하였던 것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고시원 정리 후 임순도 부협회장과 변함숙 권사를 만나 함께 곽정환 협회장을 찾아갔습니다. 임부회장은 박준철 목사가 서울 강서교구를 개척하여 발전시켜 강서교구 본부를 건축하였는데 헌당식도 못하고 선배 통일교 목사 때문에 강제 인사이동이 된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곽회장은 고향인 경상남도로 가서 목회활동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목사 활동을 해야 한다고 거절했습니다.

곽정환 회장에게 1년 전에도 변함숙 권사님과 함께 곽정환 회장집을 방문하여 서울 강서교회 목사로 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제가 노원교회의 변함숙 권사와 함께 곽정환 회장을 만난 것은 서로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변함숙 권사는 통일교를 초창기에 나오신 분으로 통일교가 이단교회라고 남편이 핍박하고 마침내 이혼까지 당하고 외동딸과 같이 다녔습니다. 문선명은 변권사에게 "변권사는 이름대로 변함없이 참 부모님을 영원히 믿고 충성하는 신앙자이기 때문에 나도 기억하고 있다" 고 하며 칭찬도 하였습니다. 변권사는 문선명의 교주 옷을 만들었고 외동딸은 통일교 합동 결흔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통일교 사업으로 꽃을 팔며 전도를 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일생 동안 재혼도 하지 않고 외동딸을 키워 통일교 합동 결혼식까지 시켜 놓았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 때문에 사랑하는 외동딸이 전도와 꽃팔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변함숙 권사님은 찢어지는 마음과 충격으로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장례를 치른 후 변함숙 권사님의 딸은 교통사고 피해자였기 때문에 소송을 하려고 했습니다.

 가해자는 미국 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통일교 협회에서는 소송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 전도하고 꽃팔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인데 소송을 걸게되면 문선명 교주와 통일교가 미국 사회에서 명예가 훼손된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가 망신을 당한다고 손해배상 소송을 걸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교주와 통일교 협회에서는 변함숙 권사님의 외동딸의 교통사고 보상과 위로금을 단 10원도 주지 않았습니다.

변함숙 권사님은 일생동안 문선명 재림주만 믿고 충성하고 순종하며 직업이라고는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사이비교에 다닌다고 남편에게 이혼 당할 때 위자료로 받은 큰집을 팔아서 일생동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변함숙 권사가 남편과 이혼하고 외동딸과 살 때 변권사님 집에서 3년 동안을 함께 생활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곽 회장님을 만나 억울한 사정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차디차고 냉정한 곽정환 회장은 통일교 최고의 회장자리에 있어서 그런지 저 같은 목사의 말은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통일교 초창기 때는 목회를 조금 했지만 1970년 이후부터 세계 대학생 선교 본부장을 했기 때문에 목회자들과 저는 곽정환 회장을 잘 몰랐습니다. 문선명 교주 세 번 째 아들인 문현진과 곽정환 협회장 딸인 곽정숙은 결혼하였습니다.

큰아들인 문효진은 방탕과 마약, 이혼파경 등으로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둘째 아들인 문흥진은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문교주가 살아있는 처녀와 영혼 결혼시켜 놓고, 죽은 문흥진을 천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21세기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통일교 집단에서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죽은 문흥진이 재림했다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세뇌시키기도 합니다. 세 번째 아들인 문현진이 문선명 교주의 후계자가 되어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곽정환 회장은 홍성표 협회장이 자기 사위를 후계자로 세워서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던 것과 같이 자기 사위인 문현진을 후계자로 세웠습니다. 그 문현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또다시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하여 무자비하게 목사직을 박탈하였습니다.

2000년 9월 18일 세계일보 국제 연수원에서 벌어진 대 사건이 었습니다. 2000년 4월 30일에는 문현진이 통일교 세계 대학생 회장으로 취임을 하였고 전 세계 통일교 부회장 직책까지 갖고 문선명 교주의 지시에 의해 대를 이어 전세계 통일교를 이끌고자 동분서주 하고 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문선명 교주의 명령에 의하여 세계일보 부 회장직에서 박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선명 교주의 후계자인 자기 사위 문현진과 문선명 교주의 부인 한학자를 내세워 모든 실권을 거머쥐었습니다. 곽회장이 문선명 교주로부터 세계일보 부회장직에서도 박탈되었지만 한학자가 문선명 교주의 사후를 생각하라며 강력하게 곽정환 회장을 복직시키라고 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을 다시 세계 일보 부회장으로 임명하라고 남편인 문선명 교주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여 한학자의 힘에 의해 곽회장은 이틀만에 세계 일보 부회장으로 복직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이 한국에 없을 때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 통일교 회사 사장단은 곽정환 회장의 명령과 지시를 받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사망하였을 때를 대비하여 곽정환 회장을 통일그룹 총 회장으로 세웠습니다.

 

 

제 18 장 부산 영도교회

 

제 1 절 부산 영도 통일교로 인사발령
 

저는 서울 고시원을 정리한 후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로 많은 돈을 쓰게 되었습니다. 서울 강서교회로 가는 것으로 알고 고시원을 정리 하였던 것인데 시간이 지난 후 제가 또 큰 실수 한 것을 알았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었던 고시원을 팔고 보니 잘못 결정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남의 고시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이 저를 "출신지인 경상남도에 가서 목사 생활을 하고 오라"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고향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가 되어 가정집에서라도 친척들을 불러 모아놓고 통일교 교인들로 만들어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문선명의 명령 이었습니다.

무슨 빽으로,무슨 부정이 있었는지 저는 알수 없지만 통일교식 법을 지키지 않고 고향에 가지 않고도 서울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만 고향 교회에 가서 목사 생활을 하고 오라는 것 이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저보고 고향에 다녀오라는 말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임순도 부 협회장님도 저보고 잠시만 부산 목회를 하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심장병이 있어서 고려대학 병원에 수 차례 가서 심장, 간, 담석증, 위장, 불면증 등으로 수술과 입원치료를 받았고 집에서 고려대학 병원까지 차로 실려간 해도 있었습니다. 가족들끼리 같이 살아도 힘들었는데 혼자 부산 영도에 가서 제 육신의 병고를 안고 거센 바닷바람과 싸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부산에 곽정환 회장이나 임순도 부 협회장이 고향에 다녀왔다는 조건만 세우면 바로 서울 강서교회 목사나 노원교회 목사로 올라오는 것으로 믿고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취임을 하였습니다.

말이 영도 통일교 취임식이지, 영도 통일교 교인은 제가 갔을 때 실제로 2가정 밖에 없었습니다. 헌금은 교회 운영하는 공과금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부산 통일교 내에서 제일 최하위 교회인 부산 영도 통일교로 저를 추천하여 공문을 올렸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데 1996년 2월 28일날 협회 임종호 총무국장이 저에게 전화를 하여 "부산 정성호 교구장의 전화가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임종호 총무국장은 제가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발령이 났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부산 영도교회 수준이 어떠냐고 임종호 총무국장에게 물었습니다. 임종호 총무국장은 통일교가 어느 곳이나 가난하고 어렵듯이 부산 영도 통일교도 어려우니까 담임 목사가 없는 교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너무나 많은 고통과 가난, 시련에 생지옥과 같은 목회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먼저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시무하라는 말을 임종호 총무국장으로부터 듣기 전에 꿈에서 제가 큰 다리를 건너간 후 예배를 드리려고 몇명이 앉아 있는 광경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예배 장소가 쓰레기와 대변으로 가득 찬 교회였습니다. 저는 꿈에서 그 몇 사람과 쓰레기와 대변을 깨끗이 다 치웠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이 앉아 예배를 드렸는데 나중에는 그  예배 장소가 교인들로 가득 찬 꿈을 꾸었습니다. 꿈을 깨고 바로 다음날 협회 임종호 총무국장으로부터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저를 발령하였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꿈에 보여준 대로 부산 영도라는 곳은 영도다리를 건너가야 하는 섬입니다.

영도교회는 총각 목사도 못하겠다고 도망을 쳐버린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런 곳에 저를 발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의 뜻이 영도교회에 가라는 것이구나! 영도교회 교인 몇 사람을 데리고 교회를 발전시키라는 것이구나!' 라는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부산에는 교인은 많고 교세가 크고 안정된 통일교가 많았습니다. 저보다 합동결혼식을 7~17년을 늦게 한 어린 후배 목사들이 안정된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혀서 더 이상 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 했는데 부산 영도교회 목사로 부임하고 보니 자부심과 긍지는 또 한번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통일교 목사 생활로 문선명 교주에게 죽도록 충성한 것을 생각하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러운 마음이 울컥하고 올라왔습니다. 저는 부산 영도 태종대 절벽바위 위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영도교회는 예배 장소만 있는 교회였습니다. 예배 인원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이고 교인들 헌금도 교회 관리비, 운영비를 하면 꼭 맞는 액수였습니다. 목사 생활비는 꿈도 꿀 수 없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세뇌되어 끌려가면서 하나님이 저를 필요로 하고 영도교회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으로 알고 결단을 한 후 영도교회에 취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1996년 3월 10일에 서울에 가족들을 두고 홀로 부산 영도교회로 가서 자취생활을 하며 목사로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심장병과 만병을 갖고서 옛날 조선시대에 간신들의 모함에 의해 충신들이 귀양갔던 영도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이 영도 섬에서 제가 살아서 서울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첫 기도를 하였습니다. 20년을 서울에서만 목사 활동을 하였는데 우리 나라 남단 부산 지방 영도 섬에 와서 목회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제 이름은 호적에 박준기 라고 되어있습니다. 불꽃 '준' 에,구부러진 낭떠러지 '기' 자 입니다. 뜻을 말씀 드리면 제가 불꽃같이 성공하여 구부러진 낭떠러지에서 항상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열차, 절벽, 나무에서 떨어졌었고, 교통사고로 육신의 팔을 잃어버렸고, 목회에 성공하면 강제 부당 인사이동으로 빼앗기는 아픈 세월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고쳐주셨고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래도 사라(공주)로 고쳐주셨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을 생각하고 박준기를 버리고 박준철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박준철 목사는 교회 건물만 있으면 교회를 부흥발전 시킬 줄 알고 인사발령을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오랜 시간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수택리 연수원에서 전국 통일교 목회자 교육을 하고 난 후 저에게 협회 국장들 앞에서 "부산 영도교회에 가서 성공하고 올라오라","잘 다녀 오라" 고  5번이나 당부하였습니다. 임순도 부협회장도 "부산에 잠시 다녀 오라" 고 하였습니다.

저는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처음부터 100일 기도, 전도, 심방 등 정말 밤낮 없이 교회 발전을 위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로 이적이 일어나고 매 주일마다 새로운 교인들이 입교하여 순식간에 교회가 부흥 되었습니다.

부산 영도 통일교를 목사님도 없이 지키고 있었던 2가정이 있었습니다. 이진상, 하진희 순회사님 가정과 이광철, 이상희 부인회장님 가정으로 2가정이 저의 손발이 되어 죽도록 충성 하셨기에 교회를 부흥 발전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영도구 봉래동(지금현재 봉래 목욕탕 자리)에 신상진, 유신선 부부집에서 문선명이 교회 간판도 없이 방안에서 부흥 집회를 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1953년 12월 24일에서 1954년 1월 14일까지 21일간 문선명 통일교 재림주는 부흥 집회를 밤낮으로 열정을 가지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원리강론을 정리하고 집필하였던 유원효 통일교 2대 협회장 유민효, 유영효, 송도욱장로(문선명 참부모 3대 비서실장), 신상진 유신선 부부, 김영희(여자,Y대학생, 문선명과 김영희는 SEX교리로 혈통 복귀하여 문희진 출생) 등이통일교 문선명 교주 부흥집회에서 통일교에 입교하였습니다. 그들은 최고로 충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통일교에 최고로 충성했던 교인들이 영도교회를 떠난 후 영도 통일교는 폐허가 되었고 47년이 된 영도 통일교는 중간에 폐쇄되는 때가 많았습니다. 많은 통일교 목회자들이 영도 통일교에서 노력했지만 좋은 결과가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부산 시내에서 사업이나 장사에 실패하여 방세가 싼 영도 섬에 와서 잠시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이나 영도 통일교인은 영도 섬에서 살다가 부산 시내에 방 한 칸만 얻을 수 있는 돈만 되면 영도 섬을 떠나 부산 시내로 이사를 갔습니다.

제가 서울 노원 교구본부 철거민 달동네에서 개척할 때도 사업에 실패하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시내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상계동에 와서 살다가 돈을 조금 모으면 교통 좋은 시내로 이사를 가버리곤 했습니다.

서울 노원교회와 같이 영도 통일교도 온갖 정성으로 교인을 만들어 놓으면 이사를 가버리기 때문에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도 통일교에서 모든 악조건을 물리치고 3월 첫 달부터 순식간에 '일요일 예배드리는 교인 2배가 운동' 을 달성하여 교회가 부흥 발전을 하였습니다.

하진희 영도구 통일교 여성연합회장과 이상희 영도 통일교 부인회장과같이 하진희 회장님 자가용을 타고 매일 새벽 1시까지 말씀과 기도하며 전도하였습니다. 하진희 회장님은 사업을 하시는데 시간을 교회 발전에 전부를 투자하셨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님도 야구르트 배달을 하면서 영도구 야구르트 배달원 친목회장과 총무, 서기 등 많은 사람을 통일교 교인으로 전도하였습니 다.

 

제 2 절 부산 영도교회 부흥 발전
 

영도통일교는 지금까지 막다른 골목 안에 갇혀 있는 교회였습니다. 영도교회의 47년의 역사 속에서 사명감과 주인의식으로 사력을 다하여 목사생활을 했던 목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도교회는 47년 동안 단 한 사람의 사명감 있는 통일교 목사가 시무하지 않았기 때문에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던 것입니다. 

영도 통일교에 길이 좁아서 자동차가 한 대도 들어 올 수가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수시로 불법주차 스티커를 받아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저는 교회의 콘크리트 기둥과 이중 대문을 전부 헐어 내어 교인들의 차를 교회 안까지 진입시킬 수 있게 대공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교회와 내부에 페인트칠을 하였습니다. 외부 페인트칠도 영도 통일교 교회 건축 16년만에 처음으로 하였습니다. 화단을 다시 만들고 문 전체를 수리하고 지하실과 창고마다 가득가득 쌓인 쓰레기를 전부 밖으로 끌어내 10 리어카 정도 되는 많은 양을 폐기 처분하였습니다.

제가 영도 통일교에 오기 전에 꿈에 본 그대로 영도 통일교는 쓰레기장 이었습니다. 창문 하나 하나마다 저의 정성을 들여야 했습니다. 그 동안 영도통일교는 독 안에 든 것같이 앞에 2층, 3충 집들이 가로 막혀 공기가 통하지 않고 사각형 안에 갇혀 있어서 도둑을 맞을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영도교회에 시무하면서도 몇 차례 도둑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둑을 잡아서 교육하고 돌려보낸 때도 있고 파출소에 인계하여 부모형제를 불러 집으로 보낸 때도 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교회 안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막혀 있었습니다. 제가 영도교회로 가고 나서 영도와 육지의 새 다리가 만들어진다는 계획 때문에 교회 앞의 2~3층 주택 전체가 헐리게 되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8차선 도로에서도 보이게 시야가 확 트였습니다. 멀리서 보고도 영도 통일교를 알 수 있도록 새로 페인트칠을 하고 교회간판을 달았습니다. 옆의 주택은 도로 보상비를 평당 300만원씩을 받았는데 영도교회의 땅 10평은 도로라는 지목으로 평당 100만원밖에 주지 않갰다고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개인 땅이었는데, 통일교 협회에서나 과거 이곳의 목사는 도로가 만들어 질 때 개인 땅이라고 서류를 만들어 놓지 않고 교회 출입구를 도로라고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보상을 100만원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협회와 통일교 중앙 재단 본부에서는 저에게 지금까지 통일교 대지가 도로로 편입된 것을 재판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보상을 더 받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도로로 된 대지는 보상가격의 3분의 1밖에 받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에서는 2~3일 후에 영도 통일교 대지 10평의 보상 가격 1천만 원을 재단본부에서 받을 것이라고 저에게 통보해 왔습니다. 재단본부와 통일교 협회에서는 저에게 영도 통일교 도로 편입 보상을 관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단돈 100만원이라도 주인 정신을 갖고 노력하여 보상을 더 받아 보겠다고 협회와 재단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협회와 재단은 저에게 손을 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부터 사명의식과 주인정신을 가지고 보상을 더 받기 위해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갖추려고 동사무실과 구청을 뛰어 다녔습니다.

협회에서 통일교 대지를 관리하는 사람이나 재단 본부의 교회 대지 보상책임을 맡은 사람에게 저는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고자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습니다. 사진을 찍고 서류를 꾸며 구청과 과천 종합 청사에 서류를 보내고 하여 다시 감정을 받았습니다.

영도 통일교 대지에 대한 재 감정을 받은 결과 처음에 보상금이 1천 만원으로 결정된 것을 약 2천 4백만 원으로 받았습니다. 평당 보상가격이 1백만원이었는데 2백 40만원 가격으로 보상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협회와 재단에서는 저에게 지금까지 이렇게 승리한 일이 없다며 수고했다고 하였습니다. 재단과 협회 전문가도 못하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저는 1995년 8월 25일 합동 결혼식을 한 36만 쌍 중에서 합동결혼식을했지만 신앙이 없고 교회에 나오지도 않는 사람을 전부 수습하였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고 이혼을 한 가정과 가정이 파탄된 가정도 수습하여 아들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올린 가정을 심방하고 돌볼 때 언제나 제 옆에는 영도교회 이진상 순회사가 있었습니다. 이진상 순회사는 저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여호수아가 모세의 손발이 되었듯이 저의 손발이 되어 애를 썼습니다. 미진상 순회사의 부인인 하진희 회장도 저의 뜻이라면 '아멘!' 하고 무엇이든지 순종하고 따라주었습니다.

제가 영도교회를 떠난지도 2년이 흘렀지만 이진상, 하진희 회장과 이상희 부인회장은 아직도 명절 때와 제 생일에 정성을 모아서 서울에 있는 저에게 선물을 보내곤 합니다. 부모 형제도 이렇게 정성을 모으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 신앙목사생활 30년이 되었지만 통일교 안에서 이진상 순 회사와 하진희 회장과 같은 신앙 자를 아직까지 저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만사람에게 등불이 되는 신앙자 입니다.

이광철 집사와 아내 되는 이상희 영도 통일교 부인 회장도 제가 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상희 부인 회장은 사명의식이 강하고 영도 통일교 어머니로서 새로 전도된 통일교 교인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저는 1996년 3월 9일~1998년 8월 2일까지 약 2년 5개월 동안 영도 통일교에서 혼자 자취를 하면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은 시장을 다녀와 일주일 먹을 김치를 담그고 국 한 솥을 끓여 놓고 매주 불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은 제가 떠날 때까지 영도 통일교 살림과 저의 식사를 맡아서 수고하였습니다. 영도 통일교 부인 교인들도 제가 식사할때 먹으라고 반찬 준비를 많이 해왔습니다.

이진상 순회사와 이광철 회장이 주축이 되어 저에게 중고 자동차를 사주었습니다. 제가 버스를 타고 다니고 심방을 할 때면 영도섬 전체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골목길과 오르막길을 걸어 다니기가 힘에 겨웠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사주셨기 때문에 예배, 기도, 전도, 심방을 자동차로 기동성 있게 많이 하였습니다.

저는 부주의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죽을 뻔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서울집에 자가용을 가지고 오르내릴 때마다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게 되어 졸면서 운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위험천만한 위기의 순간도 많았습니다. 경부 고속도로를 달릴때 빗 길에 미끄러지고 눈길에 미끄러져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습니다.

1998년 음력 1월 6일 문선명 78회 탄신기념 행사를 해야 했습니다. 1월4일날 저는 행사준비를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서울에서 구정 명절이어서 자녀 3명에게 세뱃돈 1만원씩을 주고 나니 제 지갑에는 7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명절에 가족들과 같이 쉬고 1월 4일날 아침에 출발하는데 기름 5만 5천원을 넣고 남은 돈이 1만 5천원 밖에 없었습니다. 고속도로비를 내고 나면 딱 맞게 부산 영도까지 내려갈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서울에는 눈이 안 왔지만 전날 밤에 전남 지방과 충청도 지방에는 눈이 많이 왔었습니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 나서야 부산에 해지기 전에 도착 할 수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오후에 출발하고 싶었지만 추운 겨울이라 빨리 부산 영도까지 도착하려고 아침에 나섰습니다.

서울 집에서 아침 9시에 출발하여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화성(오산) 까지는 눈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눈이 오지 않아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화성 밑으로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체인도 감지 않고 시속 70km로 3차선을 달리다 천안 인터체인지 입구에서 2차선으로 차선변경을 하는 순간 차가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속도로는 큰 버스나 트럭으로 인해 아스팔트에 구덩이가 파져 있었습니다. 제가 100m 거리인 경사진 도로를 미끄러져 내려갈 때 주위에 수많은 차들이 불을 켜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불을 켜고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 고만 기도하였습니다. 차와 같이 미끄러져 내려가면서도 정신을 차려야 산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차가 100m를 지그재그로 밀려 내려가면서도 옆 차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고 마지막에 브레이크를 잡았습니다.

차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방향이었는데 차가 유턴하여 차 머리는 2차선에서 3차선으로 들어와 3차선과 갓 길에 걸쳐져 서울로 가는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살려달라!' 고 기도 하였던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차는 수많은 차들과 연쇄 충돌 하지도 않고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기적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차가 멈춰 섰을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30분을 정신이 없이 멍해 있다가 차에서 내려 차를 뒤로 밀어서 천안 인터체인지 다리밑 눈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부산 방향으로 다시 차를 틀어 3차선으로만 천천히 갔습니다. 영동 밑 추풍령에서 부터는 눈이 쌓여 있지 않아 부산까지 안전하게 내려갔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회에 제가 목사로 부임하여 이진실, 하진희 회장과 이철, 이상희 회장 두 가정을 가지고 영도 통일교에 발전과 부흥을 위하여 심히 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영도 통일교는 2년만에 120명의 교회로 부흥 발전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영도 통일교가 최하위 교회였는데 최고 A급 교회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갔을 때는 총 헌금도 교회 관리비와 공과금 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산의 통일교에서 영도교회 재직회가 목사 생활비를 제일 많이 주게 되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최고 책임자의 말 한마디 약속을 믿고 혼자서 부산 영교로 폐인이 된 몸을 이끌고 내려가 가족들과 떨어져도 영도교회에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돌아오는 것은 약속을 밥먹」기는 통일교 최고 책임자의 배신행위로 또다시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 두 번 속은 것도 아니요, 통일교에서 수없이 많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왜 또 속고 내려왔는지 저는 제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바보 천치라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자책을 해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던 것입니다.

 

제 3 절 죽음의 자리에서 두 천사의 도움으로 구한 생명
 

시간이 흐른 후 제가 서울에서 부산 영도 통일교로 발령을 밭은 것은 저에게는 또 한번의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싸움을 해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심장병과 간, 위장병, 불면증을 기도로서 다스리며 기적같이 죽지 않고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옆에서 돌보아 주어도 제 자신을 지탱할 수 없고 건강이좋지 않아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와서 자취 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혼자서 자취를 하며 빨래와 청소,심방, 전도, 교회 부흥 · 발전, 승공 연합, 각종 세미나, 강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영도교회에서 1996년 3월 10일 취임을 하자마자 매일 3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며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전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제가 혼자서 의 ·식 ·주를 해결한다는 것이 어려웠고 혼자과로를 하며 먹지 못한 상태에서 1인 5역을 한다는 것이 무리였습니다.

그래도 영도교회는 나날이 교인이 늘어나고 발전하며 새로운 교인들이 영도 통일교로 많이 입교하여 넘치는 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저는 신바람이 나게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과로하며 먹지 못하여 1996년4월 20일 독감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심장병에는 독감이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저는 1996년 3월 17일 셋째주 주일 예배 광고 시간에 하나님은 저에게 음성으로 "감기 조심하라" 며 경고 했다고 교인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독감 감기까지도 조심 하라고 알려주고 계신다고 교인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과로하지 말고 음식 조절하여 독감을 주의를 하였어야 했습니다.

1996년 3월 10일~4월 20일까지 40일은 제 몸과 마음 전부를 바쳐 충성한 기간이었습니다. 밤낮 없이 심방하고 전도하고 기도하며 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해 새벽 1시~2시까지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4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 40일 동안을 감기에 걸려 생활해야 했습니다. 누워 잠을 자면 기침이 심하게 나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질식의 순간이 여러 번 있어 책상 의자에 앉아 잠을 자지 않고 살았습니다. 40일은 제가 심장병으로 생사의 기로에서 살기 위한 구원의 몸부림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밥을 한 숟갈 정도밖에 먹을 수 없었고 국물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영도 통일교 교인들에게는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은 감기가 걸린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목사님이 감기가 걸려서 잘 드셔야 된다고 회나 반찬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심장 판막 4개 중 1개가 정지되었고 심부전증으로 식사나 먹은 물을 대소변으로 배출하지 못하였습니다. 심장기능이 저하되어 숨을쉴 수 없고 1층에서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설교나 심방, 전도, 기도는 처음과 같이 열심히 하였습니다. 부산 영도 교인들은 진실하고 인정스러운 마음으로 염소보약, 일반 보약까지 지어 왔습니다. 밥을 먹지 못해서 링겔 주사를 7병이나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몸이 죽음의 기로에 서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호흡 곤란으로 열 발자국도 걸을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몸은 고무풍선 같이 부었기 때문에 65kg에서 85kg이 되었습니다. 저의 배는 만삭이 되어 아기를 낳기 직전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1996년 5월 10일 그 날도 역시 책상에 엎드려 잠시 잠을 자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비몽사몽간에 검은 옷을 입은 4명의 저승사자들이 제게 와서"이제 너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4명이 양쪽에서 저의 팔을 붙들었습니다. 저는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4명에게 끌려가는 중 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명의 천사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천사들은 큰 칼을 빼어들고 4명의 검은 복장을 한 저승사자들에게 저를 데려 갈 수 없다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4명의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에게 칼을 휘둘러 4명을 전부 죽였습니다. 저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저는 2명의 천사에게 "저의 생명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천사들은 저에게 "앞으로 당신이 할 일이 많기 때문에 구해준 것입니다. " 하고는 순식간에 제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저는 비몽사몽간에 깨어나 하나님께서 저를 저승에 데려가지 않고 죽음에서 생명을 구해줄 것을 확신하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상희 부인 회장이나 교인들이 제가 심한 독감에 걸린 1996년 4월 20일 이후부터 반찬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이미 심장병과 간담석증, 위장병, 불면증을 가지고 있는 상태여서 혼자 무모하게 부산 영도교회에 와서 자취 생활 한 것이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너무나 처절하고 비참하며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아내가 옆에서 병간호를 해주어도 목회활동하기가 어려운데 혼자 자취 하면서도 영도교회 부흥발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심전력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심장병이 악화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기 조심하라" 고 저에게 경고를 하였는데도 저는 무관심하게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2명의 천사를 통해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저를 사지에서 생명을 구해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부산에서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 병원으로 갔습니다 응급실에 입원을 하여 응급 처치를 받았습니다. 심장기능이 약화되어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제대로 심장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심장에 고인 물부터 제거하기 위하여 저의 등에 구멍을 뚫어 척추를 관통하고 허파를 지나 호스를 집에 넣고 물부터 빼내었습니다.

병원에서 심장병 치료를 받은 후 부산 영도교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 서울에 저를 아는 분들과 부산 영도 교인들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통일교 황선조 협회장과 부산 교구장인 김용갑에 대하여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통일교로 말미암아 폐인이 되어 심장병으로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 병원으로 입원하였지만 통일교 협회에서는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부산의 김용갑 교구장이 협회에 보고를 하였는데 단 한 사람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병원 수술비를 한푼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잔인한 곳은 없습니다. 김용갑 교구장도 부산에서 서울로 와서 교구장 회의에 참석하면서도 회의만 참석하고 저의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서울 청파동 회의 장소에서 고대 안암 병원은 불과 30분 거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용갑 교구장은 부산 시내 통일교 전체 목사들을 대표하는 지도자입니다. 저는 김용갑 교구장의 부하였습니다.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이 서울까지 한명도 문병을 오지 않았다 할지라도 김용갑 교구장은 서울회의까지 왔으면서도 저의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저와 같이 1972년부터 충북 기동대 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충북 기동대는 통일교 목사가 되기 위한 6개월 훈련과정입니다. 그런 김용갑은 정성호 전임 부산 교구장과 같은 고향 진주 출신이라며 강력하게 협회장에게 추천하여 교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김용갑이 교구장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였습니다.

제가 1996년 3월 9일 부산 교구본부에 들렸을 때 김용갑은 부교회장 이였습니다. 저는 처음 김용갑 얼굴을 보았을 때 계시가 나왔었습니다. 저는 바로 김용갑이 교구장이 된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김용갑은 통일교 협회에서 1월 달에 전국 통일교 교구장 인사이동이 있는데 1년 후에나 있지, 그전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용갑은 이번에 바로 교구장이 되면 감사보답으로 저에게 크게 한턱을 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교구장이 되면 제가 서울에서 영도까지 내려온 것은 제 뜻이 아니라 하늘 뜻이니 제가 서울에 올라갈 때까지 마음이나 상하게 하지 않게 해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그런 예언을 한 후 한달 만인 4월 달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선배 통일교 지도자들과 교구장들을 전 세계 185개국의 국가 메시아로 발령을 하였습니다. 정성호 부산교구장이 떠나면서 김용갑을 부산 교구장으로 협회에 추천하여 교구장이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 후 부산에 내려와 김용갑 교구장에게 병원비를 협회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협회에서 병원비를 받아 주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몇일이 지나서 협회에서 병원비를 지원해 줄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고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서울의 교구장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듣고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에게 날짜를 설명했더니 그때서야 김용갑 교구장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서울 회의에 참석을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이 미안하다고 사과만 하였더라도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원비도 지원해 준다고 약속을 해놓고 왜 지원하지 않느냐고 말을 했더니 그때서야 억지로 조금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일 김용갑 교구장은 제 버릇 개 못 주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충고를 하고 조언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 19장 자살을 결심하고죽음의

 

문턱에 서서
 

제 1 절 족벌왕국에 환멸을 느끼고
 

약속을 어겼던 곽정환 회장은 문선명의 명령으로 한국 통일교 회장에서계 통일교 회장으로 인사발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문선명의 사촌 조카사위인 황선조가 취임을 하였습니다. 황선조는 단 한번도 개척하지 않고 교구장이 되었고, 실적도 공적도 없는데 문선명의 사촌인 문용현 사장의 딸과 합동 결혼식을 하여 하루아침에 한국 통일교 협회장이 되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한국 통일교회 회장직을 물려받은 황선조에게 박준철 영도 목사를 교구장으로 추천하니 문선명 교주에게 보고 드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선조 회장은 저에 대한 실적과 공적(협회장 상 10회, 교구공로 16회, 총 26회 수상, 부흥 교회 건축)을 문선명 교주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황선조 협회장은 그 당시 문선명 교주가 머물고 있는 제주도 영빈관으로 박준철, 양우진(전남 부흥단 단장)을 교구장 후보로 복수 추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곽정환 회장이 추천한 저는 간단히 설명 후 탈락시켰고, 전국 통일교 우수교회 협회장 상을 한차례도 수상하지 못한 양우진을 종로 교구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문선명의 통일제국은 족벌왕국입니다.

저는 점점 더 건강이 악화되어 심장 판막과 심부전증으로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전도활동과 심방활동, 통일교 합동결혼식 행사로 밤낮으로 황동을 하여 밤에 코피를 흘리고 모든 물체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영도 통일교를 총책임지고 있는 이진상 순회사가 정성을 다하여 저를 보살폈고 이상희 부인 회장이 저의 식사 준비에 정성을 다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제 영혼과 육신을 문선명 교주에게 빼앗긴 사실과 건강악화,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무능한 남편이라는 자괴감 때문에 밤마다 괴로워하였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문선명 교주가 참 부모 메시아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 받았다는 새 진리요 성약이라고 주장하는 통일교 원리강론은 김백문 사이비 교주의 교리인 성서신학과 기독교 근본원리를 문선명이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새 진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을 속인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김백문 교리를 이용하여 자칭 재림주가 되고 수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가는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속았다는 배신감에 통곡해야 했습니다.

통일교 전단지 한 장에 청춘을 빼앗기고 저를 30년 동안이나 노예로 삼고 이용한 문선명 교주를 생각하면 제자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미친 사람 같이 밤마다 '부산 영도섬에서 죽어야지' 라는 그 생각으로 머릿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제 2 절 "준철아! 죽지 말아라."
 

저는 문선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배신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밤마다 새벽 4시~5시까지 불면증에 시달리며 새벽 기도 후에야 겨우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차를 몰고 나가 영도 섬을 돌며 절벽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으려고 수십 번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으려고 할 때마다 "죽지 말아라!" 라는 음성이 제 귀에 생생히 들렸습니다.

낮에 전도하며 심방을 하다가도 영도섬 끝에 있는 태종대 유원지 자살바위에 서서 천길 절벽 아래로 뛰어 내리려고 했습니다. 태종대 등대에도, 신선대 절벽 바위에도 여러번을 가서 한 많은 제 인생을 마쳐야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준철아! 죽지 말아라" 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자살하려는 순간 그 음성을 듣고 번번이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때로는 분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를 자해 하기도 하고, 방을 뒹굴며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습니다. 배신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1998년 4월 30일 오후 5시경 자살을 결심하고, 영도 신선대 바위에서 뛰어 내리려는 순간 이었습니다, 지금 까지보다 훨씬 더 크고 뚜렷한 음성이 저를 사로 잡았습니다.

"준철아! 죽지 말아라. 문선명 통일교 집단을 궤멸하여 박준철과 같은 제2의 희생자를 막아라. 이단집단을 궤멸하라."

저는 그 음성에 압도되어 자살하려는 생각을 단념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선명 집단에서 겪은 것을 책으로 써서 이 세상에 문선명의 정체를 폭로하여 수많은 영혼을 구할 결심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이름으로 문선명 집단과 같은 사이비 집단을 궤멸하라는 사명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책이 발행될 때까지 심장병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기도와 약으로 병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제 20장 폭언 폭력 배신으로일괄된

 

통일교 지도자  
 

제 1 절 황선조 회장에게 한 직언
 

황선조 한국 통일교 회장이 전국 통일교회 순회 집회를 하였습니다. 부산교구 본부 교회에는 1998년 4월 14일에 왔습니다. 낮12시부터 부산시내 통일교 목회자 부부들이 황선조 회장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통일교를 배반하고 나갔던 문선명 비서실장인 박정화씨(야록 통일교회사 책을 발행한 저자)와 합의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 중 최고 실적과 공적을 많이 쌓은 목사로 부산교구 목사 대표자로 선정되어 황선조 회장에게 영도교회 발전과 통일교 발전안을 놓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앞으로 한국 통일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직언을 했습니다.

"통일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통일교 기업체를 정리하고 사명감 있는 목사들을 양성하며 통일교 교인들이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말로만 공생 공영 공의주의를 주장하고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실천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47년 동안 통일교회 교인들은 희생의 제물만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는 사회를 위하여 고아원 하나도 없고, 사회인과 통일교 교인들을 하여 양로원도 병원도 하나 없는 무풍지대입니다. 통일교 교인들에게 40년 동안 명령만 하였지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위하여 협회에서 무엇을 해주었습니까? 통일교 목사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도, 통일교 협회에·는 조금도 혜택이 없었습니다. 목회자 자녀 교육비나 노후를 위해서도 신바람 나는 목회가 아닙니다.

저는 서서히 마음정리를 해가고 있었습니다. 생활이 있고 처자식이 있다 보니 빨리 서울로 올라가서 가족과 합하지 않고서는 안되었습니다. 병든 몸을 가지고 홀로 목회하면서 정리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였습니다. 저는 빨리 서울로 올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 2 절 김용갑 교구장의 폭언과 폭행
 

김용갑 교구장은 마침내 회복할 수 없는 사건을 저질렸습니다. 그 날은 1998년 6월 11일 금요일 이였습니다.

문선명은 1998년 6월 13일에 있을 1억 2천만 쌍 합동 결혼식을 위하여모든 통일교인들을 몰아 세웠습니다. 저도 영도 통일교회 미혼남녀들의 합동결혼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동분서주하며 뛰었습니다.

합동결혼에 참석할 예비 신랑 신부의 약혼이 거의 다 성사되고 최종적으로 이상희 부인회장 아들 이봉규와 김영주 장년회장 딸인 김혜진만 제일 늦게 사진으로 약혼이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과 약혼이 되어 일본에서 신랑, 신부 될 사람 사진이 부산 교구 본부에 도착했습니다.

6월 11일 영도 통일교회의 이봉규와 김혜진은 김용갑 교구장의 축도를 받기 위하여 저녁 늦게 교구본부에 갔습니다. 부산 시내 통일교 18명의 목사들은 한 사람도 자기 교회에 미혼 남녀 약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목사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전에는 심방활동을 하였고 오후에는 영도 여성연합 하진희 회장의 부탁으로 악령에 사로잡힌 김숙자씨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김숙자씨에게 남편과 자녀들이 통일교회를 나오면 확실하게 악령을 제거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교회를 빠른 시일 내에 나오지 않으면 김숙자씨가 자살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달 후인 1998년 7월 10일에 김숙자씨는 정말로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 하였습니다. 김숙자씨는 자살시도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의식을 회복하였지만 뇌세포가 많이 파괴되어 정신병원에서 폐인이 되어 가정에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김숙자씨를 만나고 저녁에 영도 통일교회에 돌아와 속회예배를 드렸고 기진맥진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우리 교인의 일이라 책임감을 느끼고 부산 통일교 교구 본부 교회로 갔습니다.

저는 김용갑 교구장에게 이상희 부인회장의 아들인 이봉규의 아내 될 사람과 김영주 장년회장의 딸인 김혜진의 남편 될 사람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진을 보았더니 너무나 착하고 아름다운 신랑, 신부였습니다. 이봉규씨는 19살이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잘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용갑 교구장이 저에게 하는 말이 "영도 통일교회 부인회장 아들인 이봉규는 000네."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모욕적인 욕을 하였습니다. 저는 "둘이 행복하게 잘 살라고 하지 못할 망정 결혼을 파괴하려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래도 김용갑씨는 "김혜진 신랑 될 사람은 키가 너무 작다" 고 또 다시 부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이봉규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에 마음이 상당히 상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밤 10시가 되어 일본에서 온 신랑, 신부 사진을 각자 받았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약혼이 된 신랑, 신부 사진을 보고 마음에 안 들면 파혼하라" 고 5번이나 외쳤습니다. 저는 김용갑 교구장이 말하는 것을 보고 못 마땅 하였습니다.

합동 결혼식을 할 미혼 남녀들은 사진으로 자기의 아내 될 사람과 자기남편 될 사람을 보게 된 것이니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들면 기쁘고 다행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파혼을 해야 되는 상황에서 김용갑 교구장은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였던 것입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기도실에서 약혼 축도를 하기 위하여 신랑, 신부를 모았습니다.

일본이나 필리핀에서 온 신랑, 신부 사진을 한국의 약혼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영도 통일교회 차례7,1 되어 상대방의 사진을 받았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 아들인 이봉규씨 아내 될 사람은 얼굴도 착하고 키도 크고 빠지는 데가 없었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과 이봉규씨는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영주 장년회장 딸인 김혜진씨는 '남편 키가 작네." 하면서 불평을 하였습니다. 김영주 장년회장도 사위 될 사람이 키가 작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신랑 될 사람은 김혜진씨 보다 9cm이나 컸습니다. 저는 김혜진의 키가 작다는 불평 소리에 결혼할 사람이 착하고 진실한 얼굴이고 천생연분이라고 말하고 격려하는 뜻에서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산교구 본부 부인회장이 "영도 또 시작한다. " 라며 빈정거렸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김용갑 교구장이 영도 통일교회 목사인 저에 대해 무수한 비난을 했다는 증거였습니다. 저는 여러 사람 앞에 참을수가 없어서 조용히 밖으로 나왔습니다. 

저는 복도에서 마주친 김용갑씨에게 "어떻게 교인들 신앙 교육을 시켰으면 교인이 다른 교회 목사에게 반말을 씁니까?저는 그 여자 교인을 알지도 못하는데 영도교회 일에 끼여 들어 파혼을 시키려고 합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용갑 교구장은 "영도교회 목사가 잘못하였다" 고 하며 자기 교인만 감싸고 돌았습니다.

저는 다시 기도 실로 들어가 그 부인회장에게 '당신이 누구냐? 영도 또 시작 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시작하느냐? 왜 목사에게 반말을 하느냐?" 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교구 본부 교회 부인 회장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저와 여러 교인들이 "왜 거짓말을 하느냐?" 고 따졌더니 그때서야 시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교구 부인 회장도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였고 교구 부인회장의 남편이 되는 장로도 저에게 내용을 알지 못하고 영도 교회 일을 방해하여 죄송하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밖으로 나와 밤12시가 다 되어 영도 통일교회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남의 교인에게까지 무시당한 데 대한 아픔으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습니다.

다음날인 1998년 6월 12일은 부산 교구 본부 회의실에서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회의 시간에 회의 분위기를 망칠까봐 어제 밤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이 저에게 사과를 하고 서로 화해하고 조용히 처리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용갑 교구장은 저에게 사과를 하지 않자 할 수 없이 어제 밤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동래 허한경 목사와 김진수목사도 교구 본부 부인회장이 잘못한 것이고, 김용갑 교구장이 저에게 잘못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 전체가 "승공 연합 빼앗은 일이나 이번 사건은 김 용갑 교구장이 잘못 했다" 고 저에게 사과를 하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김용갑 교구장은 제가 말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막말로 '알 다했냐?" 하면서응접실 의자에 앉았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병신새끼, 꼴값하네!!" 하며 저에게 욕설을 하였습니다.

그 말 한마디는 저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꽃혀 버렸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교통 사고 후 단 한차례도 '병신새끼' 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였는데 통일교회에 들어와 병신새끼라는 말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나오려고 일어났습니다. 그랬더니 김용갑교구장은 갼자기 의자위로 올라가 저에게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저-'김용갑 교구장의 폭력에 더 이상 때리지 못하도록 넥타이를 잡았을 뿐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래교회 허한경 목사와 부산진교회 김진규 목사가 김용갑 교구장을 말려 걱우 진정이 되었고 저는 교구장실을 나와 버렸습니다. 저는 충격과 심장판막과 심부전증으로 인하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영도 통일교회에 돌아왔지만 몸을 가눌 수도 없었습니댜.

하나님의 뜻을 이끌어내시고자 문선명과 나와의 관계를 구세주 참 부모와 참 아들 효자의 관계에서 서서히 세뇌마취에서 깨어나 사랑과 믿음을 끊고 조금씩 조금씩 문교주에게 절대복종의 자리에서 점차적으로 세뇌에서 깨어나 통일교를 떠나게 만드는 역사를 해오신 것입니다

 

제 3 절 문책인사를 약속한 황선조 회장
 

1998년 6월 13일 1억 2천만 쌍 합동 결흔식을 위하여 영도 통일교회에서 교인들을 합동결혼식 하객으로 총동원하여 서울의 잠실 체육관에 참석하여야 했습니다. 1억 2천만 쌍 합동결혼식이라고 전 세계 언론과 매스컴을 통하여 알렸지만 과장되고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잠실 체육관에서 2천쌍 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3일 동안의 폭언과 폭력을 겪어 몸이 만진창이 되었지만 합동결혼식 행사를 치렀고 서울 집에 있는 자녀들을 보지도 못한 채 영도교회로 내려왔습니다.

1998년 6월 26일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 회의석상에서도 통일교 목사들이 김용갑 교구장에게 영도교회 박준철 목사에게 사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용갑 교구장은 사과를 하겠다고 했지만 사과는커녕 오히려 저를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통일교 콘도인 설악산 일성 콘도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 회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심장병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김용갑 부산 교구장은 설악산에서 황선조 협회장과 김종우 총무국장 등에게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고 오히려 저를 비난하는 말을 하며 저를 인사 조치하여 잘라 버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용갑 교구장의 모두 잘못한 것이 드러나서 저를 인사발령 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김용갑 교구장 자신이 문책 인사로 부산 교구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지혜롭지 못하여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에게 사과하고 조용히 끝내기를 바랬는데 오히려 사건을 황선조 협회장에게까지 끌고 가 일을 확대시킨 것이었습니다. 저는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통일교 협회 김종우 총무국장이 부산 영도교회로 전화를 해주어 알게 되었습니다.

김용갑 부산 교구장은 교만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교구장의 직분을 망각하고 회개하지 않고 사과할 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산 시내 18곳의 통일교회 목사를 책임지고 명령하는 직책이 교구장입니다.

김용갑씨는 18곳의 교회 헌금을 받아 임의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불법이고 공금 횡령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주위의 통일교 목사들이 욕을 얻어먹을 각오를 하고 충고를 하여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1998년 7월 1일 서울 통일교 협회 사무실로 갔습니다. 황선조 통일교 회장을 만나 김용갑 이야기만 듣지 말고 저의 이야기도 듣고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황선조 회장이 화를 내고 격하게 이야기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김용갑 교구장의 잘못을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박준철 목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김용갑 교구장을 문책인사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있는 앞에서 황선조 회장은 김용갑 교구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박준철 목사의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김용갑 교구장이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뒤에 사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그 자리에서 김용갑 교구장에 대한 문책 인사를 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길로 서울 .집에 잠시 들렀다가 부산 영도 통일교회로 내려갔습니다.

 

제 4 절 눈물로 세운 부산 영도 교회를 떠남


저는 이 사건 후 7월 20일에 김종우 협회 총무국장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황선조 회장의 전화가 왔는데 "김용갑 부산 교구장의 잘못을 놓고 문책인사를 하고 박준철 목사도 영도 통일교회를 떠나 서울 시내나 경기도 통일교 목사로 발령을 하면 어떻겠느냐?" 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김용갑 교구장이 부산 교구장에서 면직되고 서울 시내 구단위 교구장으로 문책 인사를 당하는데 전국 교구장들은 이번 사건을 주시 하고 있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통일교 회장의 체면을 보아서 박준철 목사가 황선조 회장의 체면을 세워 달라" 고 하였습니다.

총무국장은 "지금까지 황선조 협회장이 한국 통일교 교구장과 목회자 인사이동을 시키면서 단 한번도 먼저 전화를 하거나 양해를 구한 일은 없는데 박준철 목사가 처음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생사를 넘나들며 전력을 다했던 영도 통일교회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김종우 총무국장은 "황선조 회장이 미국에서 김종우 총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반드시 박준철 목사를 기억 하였다가 내년 1999년 2월 7일 3억 6천만 쌍 합동결혼식 후에 교구장으로 발령을 하겠다고 약속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1998년 6월 설악산 일성 콘도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 총회때 전체 교구장들의 사표를 받아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3억 6천만 쌍 합동결혼식 할 때 실적이 나쁜 교구장들의 사표를 받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를 교구장으로 발령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몇달 동안만 과천교회에서 교인들을 수습하고 너무 어려우면 한 달만 교구장 자리가 나면 바로 저를 발령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2년 5개월 만에 영도 통일교회를 목사로서의 사명을 마치고 죽음의 고개를 넘어 살아서 영도섬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998년 8월 2일 주일날에 영도 통일교회에서 마지막 이임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마지막 이임 예배에서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회에 이진상 하진희 순회사님 가정, 이광철 이상희 회장 가정, 김봉민 사찌꼬 가정, 김옥순씨 가정 등 영도 통일교회 전체 교인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 뿐 이었습니다.

심장병으로 고려대학 병원에 응급실에 2차례나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자살을 30번도 넘게 결심하고 시도하였지만 죽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 했습니다. 영도 통일교회를 떠나며 모든 영도 통일교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뜻은, 저를 문선명 자칭 구세주로 부터 빨리 통일교로 부터 탈출시켜 통일교 궤멸을 시키고자 고난, 시련, 가시밭길을 저는 걸어야 했습니다. 문선명과 저와의 관계가 참부모 구세주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문선명을 불신하게 만들고 정을 끊고 통일교를 떠나게 만들고자 마지막까지 인사문제 폭행 폭언을 당하며 저는 생사를 넘나든 병고와 싸워야 했습니다.

 

제 5 절 과천통일교회에서의 비참한 생활
 

과천교회는 세워진 후 8년 동안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처음엔 처녀 전도사가 목회를 하였고 후임으로는 1992년 3만 쌍 합동결혼식을 한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아 과천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다음은 제가 1982년도 경기 화성 교회에 목사 생활을 하며 합동결혼식을 시키고 신앙 지도를 하였던 이정만씨가 과천교회 목사였습니다.

이정만 과천교회 목사는 교인 20명에 불과한 개척교회에서 교인들이 모이면 언쟁을 벌이고 교인들이 이정만목사와 싸움을 하여 허탈과 배신감으로 통일교 목사직을 사직하였습니다. 이정만 목사는 과천에 온지 3개월 만인 1998년 4월에 과천교회 목사직을 그만두었습니다.

이정만 목사는 진실하고 정직하며 착한 목사입니다. 제가 화성교회 목사로 있을 때도 가장 모범 된 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 신학대학을 다녔지만 통일교 교인으로 학교에 알려져 신학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통일교 선문대학 4학년에 편입하여 신학교를 졸업하여 열심히 목회자의 사명을 가지고 살았던 이정만 목사는 배신감에 통일교 목사직을 버렸습니다.

과천교회 통일교 교인들은 몇 달 동안 목사도 없이 교인 10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저를 그렇게 처참한 과천교회 목사로 발령하였던 것입니다.

그 곳에는 개척도 하지 않고 협회장상을 한번 받지 않고 교회를 부흥시킨 일이나 교회 건축한 일도 없는 교구장이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저는개척, 부흥하여 교회건축을 한 서울 강서교구 본부나 노원교구 본부에 간 후 통일교회를 떠날 생각을 했지만, 과천교회에서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두고 탈퇴할 결심을 하였습니다.

1998년 8월 3일부터 저는 아내와 같이 과천교회를 수습하였습니다. 8월달에 비가 그렇게 많이 왔는데도 비를 맞아 가며 심방활동을 하였습니다. 과천 통일교회는 종교 부지 내에 3층을 분양 받아 2칸으로 막아 교회와 사택을 꾸몄습니다. 70평이라고 하는데 실제 평수는 50평 정도에 불과 했습니 다.

과천교회는 매년 여름만 되면 비가 올 때마다 옥상에서부터 비가 새어 4층 학원으로 쏟아지고 4층 학원을 채운 빗물은 3층 통일교회로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교회에 발목까지 물이 차서 물을 퍼내야 했습니다. 매년 겪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택이나 방에도 비가 새고 교회에 발목까지 물이 차다보니 그 물을 다 퍼내는데는 10일이 넘게 걸렸습니다. 교회에 물을 다 퍼내고 나면 벽에서 물이 나오고 교회 콘크리트에서 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교회 내의 전기는 누전이 되어 매년 여름에는 전기 불을 켤 수 없습니다. 교회에 창문이 없어서 교회에만 들어가면 숨이 막혔습니다.

저는 가는 곳곳마다 통일교회를 부흥 발전시켰으며 교회와 가정적인 생활안정을 지금까지 시켰지만, 과천교회에서는 더 이상 교회를 발전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 자신을 정리해야 했고 가족들의 처절한고통과 가난,배고픔으로 내몰아야 했습니다.

저는 과천교회에서 통일교 목사직을 탈퇴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더 이상 교회를 발전시키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개척교회 마다발전시켰지만 더 이상 수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일을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교회를 발전시켜 가정생활이 안정되는 길을 포기하고 가난을 선택하였습니다. 저의 자녀 대학생 3명의 등록금도 없어서 휴학계를 내고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습니다. 아내는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병든 몸을 이끌고 파출부와 식당 일을 해야 했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킬 능력이 있지만, 가난을 선택해야 했고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위해 교회를 부흥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황선조 회장이 미국에서 한 전화약속도 져버리고, 협회 김종우 총무국장의 약속을 받고 과천으로 왔지만 하나님은 빨리 통일교회를 탈퇴하라는 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 생활비를 4달 동안이나못 받고 자동차 기름값이 없고 버스 탈 돈도 없는 처절한 생활고로 목회자 교육 때도 가지 못하는 비참한 생활 이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참 부모 재림주라는 통일교 교주를 믿어도, 통일교회는 구원이 없고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없는 지옥 그 자체 생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6 절 연속되는 폭행과 폭력과 거짓말들
 

1999년 1월 28일날 문선명 통일교 교주 사돈인 곽정환 통일교 총 회장, 황선조 한국 통일교 회장을 협회 회장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그 곳에 김종우 협회 총무국장도 같이 있었습니다. 2월 7일 3억 6천만쌍 합동결혼식 행사를 위한 준비 모임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통일교 역대 협회장들이 저에게 약속과 신의를 저버리고 배신한 행위와 부당한 인사이동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데 대하여 직언을 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저를 보고 "박준철 목사가 죽던지, 황선조 회장이 죽던지싸워보자" 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동안에 폭력, 폭행을 하다가 이제는 살인까지 할거냐?" 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황선조 회장이 저를 치는 바람에 저는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사이 김종우 협회 총무국장이 저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저는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강제 부정인사와 폭행, 폭력으로 심장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곽정환 회장의 말 한마디를 믿고, 혼자 부산 영도교회목사로 부임하였던 제 어리석음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고향인 경상남도로 가서 잠시 다녀 오라" 고 해서 부산의 영도까지 다녀온 저는 "과천 개척교회 목사로 부임하기 위하여 부산 영도교회까지 간 것이 아닙니다" 라고 곽정환 회장과 황선조 회장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곽정환 회장은 "내가 언제 그랬느냐?" 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곽정환 회장이 저에게 잠시만 부산에 다녀오라고 5번이나 말을 하였고, 임도순 부 협회장도 바로 서울로 원대 복귀하게 될 것이라고 저를 위로해 주었는데 말입니다.

저는 김종우 총무국장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고 물었습니다. 그는 "곽정환 회장의 약속을 황선조 회장이 책임질 이유가 없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선조 회장과 김종우 총무국장은 2월 7일 축복 후 교구장 인사 이동시 최선을 다하여 박준철 목사를 교구장으로 발령하겠다" 고 또 다시 저에게 약속하였습니다.

김종우 총무국장은 "1999년 2월 7일 3억 6천 쌍 통일교 합동결혼식 측복 후 최선을 다하여 교구장으로 발령하겠다" 고 또 다시 약속하였습니다. 저는 그 소리에 눈과 귀가 멀고 영혼까지 멀어 명예 회복을 한 후 통일교를 탈출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에 유린당하며 약속을 지키는 협회장을 한 사람도 못 보았으면서도 속았던 것입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너무나 세뇌되고 교육되어 있었기에 마음으로는 통일교를 탈출 한다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탈출 하지 못하였습니다. 제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럽고 미웠습니다.

 

제 7 절 위장된 합동 결혼식


1999년 2월 7일 3억 6천 쌍 합동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거짓된 숫자임) 저는 과천 통일교회 책임량인 버스 4대에 과천시 대한 노인회 소속인 3단지, 4단지와 문원동 1, 2단지 노인정의 노인들을 태워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으로 갔습니다. 식사대접, 선물 준비, 음료 과일 접대 등을 과천 통일교회 교인들이 준비하였습니다.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에 혹독한 겨울 추위가 몰아쳐 전국에서 몰려온 노인정의 노인들은 추위에 떨며 아수라장을 이루었습니다. 서로 밀고 밀치며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12만 명의 노인들과 통일교 교인이 모였던 것입니다. 출입구에서는 노인정에서 온 노인 12만 명에게 하얀 목도리 한 장씩과 빵을 하나씩 선물하였습니다. 통일교 행사장의 사회자는 하얀 목도리를 목에다 감지 말고 하얀 목도리 끝이 무릎까지 내려오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합동결혼식은 매스컴이나 언론 기자들은 세계 통일교 교인들에게 공중헬기 중치로 방송하기 때문에 노인들까지 하얀 목도리를 어깨에 걸침으로 미혼 신랑, 신부같이 보이게 하기 위한 위장전술이 었습니다.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노인들이 서울 잠실 경기장에 모여 문선명 교주의 거짓된 합동 결혼식장의 들러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 추운 걱울 날씨에 서울까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올라온 것이 아니라 관광 버스를 태워주고 식사를 대접하니까 노인들은 서울까지 올라와서 문선명 교주의 이용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 미혼남녀 전도를 하는 사람에게 한 명당 10~15 만원씩 상금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 교인들은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며 이 엄청난 거짓된 통일교 합동결혼식 행사를 위하여 재산을 바치고 헌금을 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돈을 찍어내는 기계가 아닙니다. 돈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통일교 교인들에게 재산을 갈취하여 2천 쌍도 되지 않는 합동결혼식을 3억6천만 쌍 합동결혼식이라고 주장하며 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문선명은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며 기독교 교인과 통일교 교인을 속이는 사기꾼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 합동결혼식 한 교인은 일생 동안 각종 행사에 매일 동원되어 활동을 해야 합니다. 매일 통일교 활동을 하기 때문에 가정생활은 무관심과 비참함으로 가정생활이 어렵고 힘들며 결국에는 파탄되는 가정도 있습니다. 통일교 교인은 각종 행사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거액 재산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치지 않으면 일생 동안 지옥과 같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며 불안과 공포 속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30년 동안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각종 행사를 주관했고 강의를 했으며 인원을 동원했던 저는 문선명 교주의 일회용 허세 거짓말 행사에 가증스러움과 치가 떨리는 심정입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행사에 지치고 가난한 가정살림에도 재산을 바쳐 헌금을 내야 하는 비극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1999년 2월 7일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올린 이후 지금까지 수 차례의 교구장 인사이동이 있었지만 저는 황선조 회장을 찾아 사정하지 않았습니다. 협회 김종우 총무국장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곽정환회장 도 1월 28일 이후 단 한차례 전화를 하거나 만난 적도 없습니다.

제가 대우받는 자리에 있으면 문선명 집단의 세뇌에서 깨어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저에게 닥치는 끊임없는 폭행 폭언충 격으로 심장병을 얻고 부당한 인사 고난 시련을 통하여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점점 정을 끊고 불신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이였습니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적인 문제와 문교주의 정체, 자녀들의 방탕한 모습과 1998년 1월 IMF로 말미암아 통일그룹이 부도 남으로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국민의 세금인 융자금 1조 7천억을 갚지 않고 전국 통일교 땅과 건물을 경매 처분을 피하기 위하여 통일교 유지재단에서 통일교회로 증여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합동 결혼식한 통일교 교인들을 속이고 지옥간 조상들을 1대부터 120대까지 천국에 보내준다며 거액재산을 착취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에게 죄를 용서해준다는 면죄부 탕감비 1200만원을 바치라고 하여 바쳤고 천국의 황제요, 재림주로서 통일교 교인들을 천국 황족 가족으로 입적 시켜준다고 통일교 교인들을 속여 1만6천달러(2100만원)을 바치게 하였다.

이외에도 매월 통일교 교인들은 십의 삼조 헌금을 바쳐야 하고 문선명 나라 건국기금 매월 17만원을 바쳐야 하며 각종 거액 재산 착취에 통일교 교인들은 자살, 이혼, 가정파탄 등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으로 매일 오전10시부터 통일교 교인들이 동원되어 저녁까지 통일교자금줄인 합동결혼식을 시키기 위하여 골목 골목을 누비며 영혼을 빼앗고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자칭 참 부모 재림주 문선명을 믿고 복종하며 합동결혼식을 해야만이 천국가고 가정천국을 이룬다고 주장하지만 제가 체험한 30년 빼앗긴 세월 동안 생생한 지옥 생활 이였으며 비극적인 한순간의 악연으로 잃어버린 30년 세월 이였습니다.

 

제 8절 비참한 현실의 벽을 넘어선 사투
 

비록 30년의 처절한 삶을 마감하는 결단을 내렸지만 저는 아직도 수돗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집에서 살며 기약이 없는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1층에서 아침저녁으로 수돗물을 틀어 사용하면 2층에 있는 우리 집은 그릇을 씻고 쌀을 씻다가도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식사 준비를 할 수 없습니다. 화장실도 물을 퍼부어야 되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5년 동안 물통에 물을 받아 놓고 사용을 했습니다.

안방은 여름에 비가 올 때면 언제나 비가 흘러내려 물통을 대어야 합니다. 저의 집은 마루에도 비가 흘러내려 물통 여러 개를 놓고 살았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천장이 높아 안방이나 마루에 있어도 성애가 끼고 마루 유리창이 얼어 유리창을 비닐로 막아야 했습니다. 봄이 되어 따뜻해질 때까지 문도 한번 열지 못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추운 겨울에는 제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이 집이 문선명 통일 제국 만큼이나 추운 동토의 집이었습니다.

겨울이면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는 난방이 제대로 안되어 저와 저의 가족들은 옷을 두겹 세겹으로 끼워 입고 자야 했습니다. 심장병에는 감기가 가장 무섭기 때문에 저는 잠바를 2개, 3개를 입고 밤마다 감기에 안 걸리려고 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저는 집에 올라오려면 대문을 들어와 'ㄷ' 자로 된 사각형 길을 와야 집 안으로 들어 올 수 있습니다. 'ㄷ' 자 길을 들어 을 때마다 저와 가족들이 큰 건물을 지을 때 쓰는 강철로 만든 'H Bim'과 비슷한 아슬 아슬한 길을 걸어 2충으로 올라 와야 합니다. 특히 밤에는 어두워서 몸의 중심을 잡고 걸어 올라오기가 어려워 위험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3번이나 지하실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아파트로 이사를 갔더라면 아내와 자녀들을 이토록 추위와 더위에 고생시키지 않고 비참하게 만들지 말았을 것입니다. 이 집은 정화조와 하수구가 바로 연결 시켜져 있어서 세면대 하수구에서 정화조 냄새가 1년 365일을 코를 찌릅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을 떠나 마음의 감옥과 가정생활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길만이 살길입니다. 고통스러운 이 집에서 이사를 가려고 하여도 지금까지 이사를 갈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경제적인 생활고로 가족들은 추위에 떨어야 했고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지옥 같은 집에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한 집은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수돗물이 잘나오고 방이 따뜻해서 조금 살 것 같습니다.

저는 통일 교회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매일 대학 병원에서 조제한 심장약을 아침, 저녁으로 먹고 생명을 이어 갑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기도와 약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이 땅에 태어나 성공과 좌절을 겪으면서 육신의 병고와 빼앗긴 생활로 인하여 비참한 심정 입니다.

문선명 통일교에 빠져 제 고향도 부모, 형제도 버렸습니다. 특히 늙으신 어머니 마저 병마에 시달려 1년 내내 병원에 계셔도 찾아보지 못하는 불효자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이 땅에서 뿌리 뽑는 것이 제 마지막 소망입니다.

저는 참으로 육신의 고통과 싸우며 이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는 그 날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통일교회의 충성꾼 이었던 저는 과천 통일교회 현직 목사직을 탈퇴하고 지옥 같은 통일교회를 탈출합니다. 그러나 저는 통일교회를 탈퇴하는 순간까지 과천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간절한 마음을 갖고 기도 드렸습니다.

저는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 두면 지옥 가고, 통일교를 떠나면 지옥 가는 것으로 믿고 살았습니다. 단 한번의 인연이 단 한장의 통일교 전단지가 30년의 청춘을 빼앗고 지옥 길 이었고 죽음과 같은 삶 이였습니다. 저에게 예수님만이 오직 구주요 성경만이 진리라고 기독교 성도들이 통일교 입교전에 저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26년 동안 제 아내는 문선명 통일교주의 잔인한 인사와 횡포에 불안과 공포, 긴장 속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 세상 천지에 저의 아내같이 알뜰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 한 방울도 아끼고 전기 한 등도 아끼며 근검 절약으로 살았습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청량리 경동시장에 가서 시래기를 줍고 배추 잎 버린 것을 주어다가 김치를 담아 먹습니다. 계란도 깨진 것을 사와 먹습니다. 쌀도 언제나 최하품만 삽니다. 저의 아내와 자녀들은 돈 600원을 아끼려고1시간이 걸리는 거리도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닙니다.

이렇게 피눈물 나게 알뜰하게 살아도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회 목사 아내로서는 살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고 26년 동안 지옥 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충성한 목사 아내의 처절한 생활입니다.

저는 제 아들, 딸에게도 2000년에 들어와 너무 많은 책망과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지울 수 엾는 상처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와 자녀들이 문선명 교주와 저 때문에 이렇게 마음의 지옥과 생활의 지옥에서 살게 된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까지 30년을 빼앗긴 세월 속에서 억울한 생지옥에서 살아온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저의 아내와자녀들에게 억지소리를 하는 때가 많습니다. 저는 자녀들에게도 "음식을 사먹지 말라", "음료수도 사 먹지 말라", '학교도 버스비만 가지고 다녀라" , "등록금도 벌어 가지고 써라" 등 간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녀들에게 하곤 합니다. 자녀들은 안 쓰고 안 먹고 친구도 안 만나고 피눈물나게 사는데도 걸어 다니라고 하고 온갖 고통을 자녀들에게 주어 자녀들이 눈물 흘리는 때가 많습니다.

모든 근심걱정 염려를 제가 한다고 해결 되겠습니까? 주님께 맡기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고 푯대를 향해 달려 가노라고 했던 사도 바울 같이, 통일교 궤멸을 위해 엘리야와 스데반 집사와 같은 심정으로 문선명 집단과 싸워 승리하겠습니다.

 

제 9절 저는 하나님 뿐 아니라 아내와 자녀애게 죄인 입니다.
 

그 동안 저의 아내는 근검 절약을 하여 모았던 돈을 3남매 교육비와 생활비로 모두 써 버렸습니다. 그래서 3남매 자녀들의 대학 학비를 빚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졸업 무렵엔 저의 딸이 문방구에서 종이와 재료를 사다가 장미꽃을 만들었습니다. 손이 얼어서 마루에서 난로를 피워놓고 그 추운 겨울에 손을 불에 녹여가며 하루 종일 손으로 장미꽃을 만들었습니다. 저의 딸은 새벽까지 장미 꽃다발과 장미 바구니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장미 꽃다발과 장미 꽃바구니를 들고 집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서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두딸이 꽃팔이 소녀가 되어 "꽃 사세요!" 라고 외쳤습니다.

K대학교 졸업식에도 꽃을 팔러 갔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장미 꽃다발과 꽃 바구니를 만들어 놓은 것을 저는 학교 앞에 딸들과 같이 갖다 주고 돌아왔습니다. 딸들은 그 곳에서도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고 손을 불어가며 꽃을 사라고 외쳤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와 같이 딸들이 만든 꽃을 가지고 두 딸과 같이 D대 졸업식장에 가서 학생들과 학부형들에게 꽃을 팔았습니다. 통일교 목사가 대학교 졸업식장 앞에 가서 "꽃을 사세요"하고 몇 시간을 외쳤습니다.

저의 딸들은 사회 경험을 하기 위하여 꽃을 만들어 졸업식장에서 꽃팔이 소녀가 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친 것이었습니다. 저의 딸은 지금도 매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서 아끼느라고 학교에서 점심을 굶으면서도 부모에게 옷을 사주고 고기를 사주며 동생들에게도 정성을 베품니다.

저의 아내는 목사 사모지만 아침에서 밤12시까지 파출부 일과 식당 일을 합니다. 저의 아내와 딸은 주택가 대문 앞에 버려진 음료수 병과 신문을 들고 집으로 들어와 모아 놓았다가 많이 모아지면 폐휴지 수집소에 가져가 팔아서 생활비로 보태고 있습니다.

제가 넉넉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가운데 폐품을 수집하여 팔아서 생활에 보태 썼다면 검소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나 저의 가족들은 알뜰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버린 쓰레기, 폐휴지를 모아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적당히 아부하고 또 목회를 열심히 하면 교회가 부흥되어 안정된 이단 집단생활이 되겠지만 저는 예수님 이름만이 나의 구주요 성경만이 진리라고 내 마음속에 각인 되었기에 거짓된 부자보다 가난을 선택 하였습니다.

 

 

제 21 장 목숨을 건 문선명 통일제국 탈출

 

제 1절 "준철아, 붉은 통일교 감옥을 탈출하라."


저는 1996년 3월 17일 날 새벽에·꿈을 꾸었는데'우리나라 지도가 제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러더니 지도가 우리나라 땅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 대 지진이 일어나 산과 들, 집이 땅이 갈라지면서 땅 속으로 들어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갈라진 땅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너무나 놀라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 하였습니다.

제 앞에서도 길이 갈라지고 산이 갈라져 길 가던 사람들이 땅 속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순간 어찌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는데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빨리 네가 있는 그 자리에서 탈출하라."

저는 땅이 갈라지고 수많은 사람이 땅 속으로 사라져 갈 때 극적으로 몇몇 사람들과 같이 갈라진 땅 속에서 결사적으로 기어 나와 산으로 피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의 명령 때문에 수많은 통일교 교인이 고통 당하고 처절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을 꿈에 본 것입니다. 저 자신도 통일교회에서 몇 몇 통일교 교인들과 같이 탈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저에게 1998년 1월 IMF로 통일그룹의 부도로 통일교 기업체가 국가로 넘어가고 몰락할 것과 한국 경제의 파탄으로 IMF가 올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꿈이 시련과 고통,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회를 탈출하라는 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통일교회를 떠나야지' 하면서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때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일교회를 탈출 했다면 제 모든 환경이 달라져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1999년 2월 10일 밤에 또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끝없는 모래사막을 기진맥진하여 가고 있었는데 제 앞에 사각형의 높다란 담을 두른 강철 쇠로 만든 집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밥을 얻어먹고 물을 마시기 위하여 쇠 대문을 통과하여 쇠로 된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쇠문 밖에서 키가 2미터 정도 되는 검은 사람이 쇠문을 잠가버렸습니다. 저는 쇠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밖으로 탈출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은 탈출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 쇠 집을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사각형 안에 갇힌 사람들을 총 지휘하는 붉은 옷을 입은 저 사람의 사슬을 벗어나야 한다" 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였습니다. 저를잡으려고 문선명 교주가 쫓아왔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붉은 쇠 감옥에서 저를 잡으려고 쫓아온다는 것은 사단 마귀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 때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사이비 교주로서 수많은 영혼을 죽이는 지옥으로 끌고 가는 영적 살인마" 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준철아, 너는 빨리 통일교회를 탈출하라. 그 길만이 네가 살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순간 죽을힘을 다하여 쇠로 된 높은 담 장을 기적같이 뛰어넘어 탈출하였던 것입니다.

심장판막증, 심부전증, 담석증, 불면증, 위장장애 등으로 호흡이 곤란i고 계단을 잘못 오르 내리며 사경을 헤매는 저는 어디에서 힘이 솟았는지 다윗과 같고 여호수아와 같은 힘과 용기가 넘쳐 났던 것입니다.

기진맥진 하였던 제가 아니라 이제는 힘이 넘치는 박준철이 되었습니다. 꿈에 사막을 가로질러 도시에 가서 수많은 사람에게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교주에게 받았던 박해와 통일원리의 비 진리성을 놓고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문선명이 제 꿈에 나타날 때마다 "뜻을 위해 일 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를 지금까지 그토록 많이 칭찬해 주고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며 축복한 가짜 재림주 문선명은 그 동안에 저를 통일교회에 끌어들여 이용만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문선명 교주의 세뇌교육에 영혼까지 노예가 되어 살아왔기 때문에 문선명 교주는 저를 이용 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 부모로 믿고 절대신앙, 절대복종, 절대사랑으로 충성할 때는 문선명 교주가 꿈에 나타날 때마다 "네가 최고다" 라고 칭찬 하였습니다.

이제는 제가 문선명 교주에 대한 믿음이 없고 '통일교 목사직을 버리고 탈퇴하여 통일교 궤멸운동을 해야지' 이런 생각을 했을 때 문선명 교주는 저를 붉은 감옥에 가둬놓고 탈출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저를 잡으려고 그토록 역사 하였던 것입니다.

2000년 2월 13일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잠실 체육관에서 4억쌍 1차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저는 과천 노인들을 관광버스 4대에 모시고 거짓된 핵사에 동참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이 되겠다고 노인들이 서명한 것도 아니요, 통일교 교인도 아니며, 합동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아닌데 신랑, 신부로 위장하기 위하여 하얀 목도리 1개씩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문선명은 자기 교세를 과세하기 위하여 언제나 40년 동안 허세를 부려왔습니다.

통일교회는 대외적으로 교인이 많은 것처럼 홍보하지만 안에는 교인들이 텅텅 비어있습니다. 전국 통일교회 교인 전체가 3만 3천 명 재적이고 예배인원은 1만 7천명입니다. (학생포함) 큰 기독교회 한곳의 20분의 1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협회본부 안호열 기획국장은 "통일교 재적인원이 20만명 이며, 예배인원은 재적인원의 10분의 1인 2만명이 통일교 전국 한 주일 예배인원이다" 라고 2002년 7월 12일 서울지방 검찰청 조사실에서 주장하였지만 거짓입니다.

일본에 통일교 교인은 2만명에 불과한 것을 3백만명 이라고 허위 주장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그의 제자들은 언제나 합동결혼식 숫자나 예배 재적 행사숫자를 허위로 부풀려 대외적인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4억 쌍 1차 합동 결혼식은 실제로 신랑과 신부는 극소수 였습니다. 전국에서 끌어 모은 노인들 10만 명은 신랑, 신부가 아닙니다 전국의 노인들을 관광버스에 태워 서울 구경과 식사 제공 및 선물을 제공하기 때문에 참석한 것입니다.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는 각지역 노인정 노인들을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단 한번의 만남으로 노인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이 이용물이 되고 통일교(가정교회)에 입교 하여 영혼을 빼앗기고 지옥길로 끌려 가는 것입니다.

 

 

제 22 장 통일교 과천교회 박준철 현직목사 탈퇴

 

기자회견 54가지 비리폭로

 

제 1절 문선명의 정체와 통일교 비리폭로


저는 드디어 2001년 1월 9일 과천통일교회 현직목사로 있다가 기독교 회관에서 가짜 사이비 참부모 재림주 문선명 교주를 만천하에 고발하면서 탈퇴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박준철이라는 한 인간의 출생과 파멸은 문선명 교주와 만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일순간의 악연으로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세뇌되어 재림주 참부모로 믿고 빼앗긴 30년동안 목숨을 바쳐 폐인이 될 때까지 충성하며 지옥생활을 했던 것을 세상에 고발했던 것입니다.

저는 「빼앗긴 30년, 잃어 버린 30년」책을 통하여 문선명의 정체, 피가름 의식, 혈통복귀 구원의식, 합동결혼식의 비극, 문선명의 사생아 등 합동 결혼식후 통일교 한가정당 1억씩을 착취하는 문선명 교주의 잔악상, 통일교 제국의 실체를 테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공익을 위해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를 방지하기 위해 세상에 폭로해야 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탈퇴기자회견을 연기 할 수 없었습니다 탈퇴준비를 했던 것을 마침내 결단하고 통일교 실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던 것을 일간지와 기독교방송, 기독교 언론 40여 곳을 통하여 2001년 1월 9일부터 2003년 1월 9일까지 900회에 걸쳐 낱낱이 문선명의 정체와 통일교의 비리를 폭로하였습니다.

1200만 기독교 성도들이 문선명 집단에 대하여 이단이라고 제쳐둘 것이 아니라 경각심을 갖고 통일교 궤멸을 위하여 1200만 기독교 교인이 하나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궤멸 하기를 바라고 목숨을 바쳐 통일교 실체를 보도 하였습니다.

저는 1999년 10월 1일을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에서 탈출할 날로 정했지만 제 마음이 약하여 자꾸만 미루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과천교회에 올라오는 즉시 탈퇴할 준비를 하였지만 뜻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번번이 시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혼자라도 탈퇴하여 문선명 통일교 궤멸을 위해 외쳐야 한다는 절박감에 통일교를 탈퇴하여 홀로 외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저의 지팡이가 되 주셨고 저의기도를 들어주시고 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문선명이 인류 역사에 없는 사악한 영혼 사기꾼으로 고발합니다 문선명은 선량한 사람들을 끌어다가 합동결혼식을 시켜놓고 천국 가는 면죄부라며 1억원씩 받고 헌금이라는 미명하에 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거액재산 착취 때문에 자살, 이혼, 가정불화, 처절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극적인 삶입니다. 문선명을 믿고 복종하며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하면 구원받고 가정천국을 이루고 천상천국에 간다고 세뇌시키고 있지만 지옥생활이 바로 통일교 생활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하루라도 빨리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합동 결흔식은 파멸과 죽음, 생지옥과 같고 가난한 결혼생활이 되며 문선명 교주는 영혼 사기꾼이라는 것을 세상에 고발했어야 했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재산 착취범이라는 것을 준비부족으로 세상에 늦게 고발한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갈라디아 1:8 '다른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통일교 문선명 이단집단을 이단사이비집단이요, 문선명은 적그리스도라고 매일 이웃집에 전해주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만 통일교가 이단 사이비집단이라고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 성도가 저에게 단 한번이라도 "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요 사이비 교주" 라고 말해 주었다면 저는 통일교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마음속으로 통일교가 이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씀으로 소리 내어 이웃집이나 만나는 사람마다 통일교는 이단 집단이라고 외쳐주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매일 "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요 사이비 교주" 라고 외치지 않으면 박준철 목사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통일교회에매일 매시간 전도되어 영혼을 빼앗기고 지옥으로 끌려 갈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문선명 집단을 궤멸하여 주십시오.

제가 세뇌된 다음에 통일교가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는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요,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 라고 기독교 성도들이 매일 외쳐서 통일교회에 빠지지 않도록 영혼을 구원해야 할것입니다.

 

제 2절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통일제국의 정체폭로


2001년 1월 9일 15:00시(오후 3시), 한국 기독교회관 2층 예배실에서 통일교 현직 박준철 목사의 탈퇴성명서 기자회견문

 

2001년 1월 9일,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기자회견문. 국민일보, 기독교TV(ch 42), 기독교방송, 극동방송, 크리스찬뉴스위크지, 교회연합신문,한국선교신문 특집보도, 기독공보, 기독신문, 개혁공보 연재, 기독교보, 기독타임스 연재, 기독교 타임스, 장로신문, 침례신문, 크리스찬연합신문, 크리스찬한국신문, 복음신문, 크리스찬신문, 목회자신문, 선교신문, 들소리신문, 뉴스앤조이, 크리스찬데일리뉴스(CDN), 기독교연합신문, 기독교신문,교회와신앙, 현대종교 등 그 외 기독교 모든 교단지와 모든 초교파지에서 문선명 집단 궤멸을 위해 언론사 관계자님께서 사명감을 가지시고 적극적으로 보도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 문선명은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거 역했다.


하나님께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말씀 하였는데,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자신이 인류의 구세주 재림주 참 부모라고 하며 통일교 교인들 앞에 신으로 군림한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은 하나님 이름을 이용하여 기독교 교인들과 통일교 교인을 속이는 최고의 자칭 신이요, 인류역사에 가장 큰 살아 움직이는 우상이다.

 

2. 문선명은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거 역했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경배하지 말라" 말씀하였는데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이 자신에게 경배하게 하는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우상이다. 통일교 교인들은 문선명 사진을 걸어놓고 아침 · 저녁으로 경배하며 예배 때 마다 문선명에게 경배한다 또한 문선명은, 17살에 교통사고로 죽은 문선명의 아들인 문흥진을 천국과 영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문흥진이 재림 부활했다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주장하며 미혹하여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다.

문선명의 청평 천성 왕림 궁전 주위에는 참 생명과 희망을 주는 다섯 나무와 생명수가 있다. 그리고 문선명은 자칭 하나님이 세웠다며 천신 수나무를 만들었다. 사랑나무(수양버들나무), 심정나무(뽕나무), 만물나무(밤나무), 충성나무(소나무), 축복나무(잣나무) 등이 다섯 나무에 속하고, 통일교  교인들은 이 다섯나무에 경배하고 기도한다.

문선명은 일본 천지종교 대만 불교와 하나되어 우상숭배를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 때 마다 불교 스님이 염불을 외우고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우는가 하면 힌두교, 회교, 유사 사이비종교 지도자를 합동 결혼식장에 모아 하나님에게 우상 숭배자 총대회를 한다. 그것이 바로 문선명이 하나님의 대적 원수라는 증거이다.

 

3. 문선명은 십계명의 셋째 계명을 거역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말씀하였는데 문선명은 스스로를 참 부모, 천지부모, 재림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었다. 따라서 문선명은 적그리스도이며 희대의 영혼, 육신을 빼앗는 사기꾼이다. 문선명은 자신과 통일교 교인을 속이고 온갖 무당, 푸닥거리를 하여 스스로 이단 사이비임을 증명하였으며 통일교 교도들을 지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4. 문선명의 통일교 원리강론은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 교리를 훔쳐온 것이다.

 

문선명은 16세(1935년)때에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인계를 받아 재림 주님으로 세워 졌다고 통일교인들에게 강조한다. 그러나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참 부모도 재림주도 아니고 사악한 거짓 선지자다.

문선명은 1939년 경성 상공 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을 하였고 1941년 3월에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고등학교 전기과에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2년후 중퇴 하였다. 1944년에는 한국에 귀국을 하여서 토목 건설회사 전기기사로 취직을 해 있다가 1945년 10월에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에서 성서신학과 기독교 근본원리 교육을 6개월 받고 탈퇴하여, 문선명 자신이 김백문과 같이 사이비 교주 노룻을 하기 위하여 통일교를 만들어서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 교리를 훔쳐온 것이 통일교 원리강론인 것이다. 이런 통일교 원리강론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새로운 진리요, 성약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문선명은 거짓말쟁이다.

문선명이 김백문 교리를 도용하여 재림주 행세를 하듯이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탈퇴한 정명석(JMS)이 통일교 교리를 이용하여 30개론을 만들었다. 정명석은 문선명과 똑같이 사이비교단을 만들어 문선명과 같은 재림주 노릇을 하며 수많은 영혼을 빼앗고 피가름 의식을 치르며 합동결혼식을 하여 교세확장을 꾀하고 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 밑에는 또 다른 사이비 교주 생산공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문선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거짓말이다. 이스라엘 수도원 사이비 교주 김백문의그 교리를 훔쳐 기독교 근본 원리 교리를 6개월 동안 교육받은 문선명이 도용한 것이 사악한 사이비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창조원리, 타락론, 복귀원리, 재림론까지 김백문 교리와 동일하며 원리강론은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고 복종하여 영원한 노예로 세뇌 시키기 위한 것이다.

 

5. 문선명 교주가 메시아요 참 부모라면 자녀들은 통일교 원리에서 주장하는 4대 죄인 원죄, 혈통죄, 연대죄, 자범죄가 없어야 할 것이다.

문선명 자녀들은 죄가 없는 완벽한 인격자가 태어나야 하는 것인데 결혼한 자녀들이 음란죄, 간통죄, 마약 등 온갖 죄를 짓는 것을 볼 때 문선명은 가짜 재림주, 적그리스도, 가짜 부모인 것이다.

(미국 CBS TV방송, KBS 위성TV(2000.09.02방송) - 문선명의 큰아들:문효진과 홍난숙 부부의 결혼, 이혼, 마약, 음란, 파경프로 1시간 방송함)

 

6. 문선명은 이 시대 최고의 혈통복귀 피가름광이요, 가정 파괴범이다.


문선명의 원리 강론 교리는 음란죄, 혈통복귀 피가름 죄를 가장 큰 죄로 강조한다. 그러면서 자신은,혈통복귀, 피가름 역사로 첫번째 부인인 최선길과 그의 아들 문성진을 버리고 이혼하였다. 문선명 교주는 수많은 여인과 간통을 했다.

문선명은 혈통복귀 피가름을 통한 혈통 복귀 원리의식으로 지금까지 처녀와 유부녀를 간음하여 개인과 가정을 파괴시켰다. 이렇게 문선명의 혈통 복귀 의식으로 낳은 자녀만도 18명으로 밝혀졌으며 이것은 문선명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을 저질렀는가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문선명은 천사장 루시엘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이 지의 뿌리가 아니라, SEX로 타락한 것이 선악과요 지의 뿌리이기 때문에 문선명 재림주가 SEX로 타락한 인류를 SEX로 복귀 해야된다는 혈통복귀의식 즉 피가름 의식을 행해야만 구원받고 천국 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선명은 인류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처녀들과 유부녀들은 3일 행사인 혈통복귀 피가름 의식을 치러야 완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여 3일 의식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피가름, 혈대교환, 혈통 복귀 의식으로 3일간 간음, 간통 의식을 치러 수 많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을 간통하여 사생아를 낳고 가정을 파괴하였던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1953 년 12월 24일 밤부터 부산영도 신성묵과 유신희 부부 집에서 21일 동안 부흥집회를 하였다. 부흥집회를 하는 첫날밤에 Y대 여대생 김영희와 혈통복귀 피가름 혈대 교환의식을 통하여 장래가 촉망 받는 여대생의 인생을 파멸시켰다.

그 외에도 문선명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을 혈대교환 의식으로 희생시켜 인생을 파멸시켰고 수많은 가정을 파괴시켰다. 문선명 교주는 희대의 가정파괴범, 패룬범으로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를 통한 혈대교환 혈통복귀로 간음하였으며 하나님도 사탄도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이다.

그 외에도 6~60마리아와의 혈통 복귀의식을 치렀으며, 수많은 가정을 파괴시켰다. 문선명은 현재 부인인 한학자와 1960년 4월 11일 문교주(40세), 한학자(17세)에 어린양 결혼잔치를 하고도 1965년도에 최순주 처녀와 간음혈통 복귀의식을 하여 '박사무엘' (박준경)이라는 사생아를 낳아 길렀다. 미국에서도 간음 혈통 복귀의식으로 '새미' 라는 사생아를 낳아 문선명이 기르고 있다.

 

7.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지옥간 조상귀신을 위해서라며 거액 헌금을 받고 천국행 면죄부를 팔고 있다.

 

그러나 문선명은 자신의 전처인 아내도 전도하지 못하고 이혼하였으며,자식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이비 적그리스도이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에게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서 지옥간 조상들 천국행 표를 사라고 명령하고 천국행 표를 팔고 있다. 1대부터 7대까지는 남편과 아내 직계조상 280만원, 일본축복 가정은 2,000만원, 7대부터 14대 조상, 14대부터 21대 조상까지 일정헌금을 내야 되고 120대 조상까지 천국행 표를 팔고 있는데 특히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에게 조상을 팔아 거액재산을 착취하는 행위를 즉시 중단 시켜야 할 것이다.

문선명은 인류역사에 가장 부도덕한 개인 가정 파괴범이다.

 

8. 문선명 교주는 참가정 순결 운동본부를 만들어 초 · 중 · 고등학교 순결 캠페인을 하고 있다.

 

문선명이 자칭 재림주, 참 부모라면 가장 순결하고 깨끗해야 될 메시아데 오히려 그렇게 수많은 여인들과 혈통복귀 피가름 관계를 갖음으로 하나님, 기독교인, 통일교회와 교인을 속였다.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통일교 교리는 순결을 가장 강조하면서 간통죄를 가장 큰 죄로 여긴다. 그것은 단지 문선명 교주의 교활한 위선이요, 거짓된 행위인 것이다.

통일교 세력확장과 전도 활동목적으로 순결캔디를 학생들에게 먹이며 순결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거짓된 혈통 복귀의식을 감추기 위해 통일교 교인들에게는 음란죄를 가장 큰 죄악으로 교육을 하고 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참으로 가증스러운 사람이다.

 

9.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거액 재산착취의 수단이다.


통일교는 합동결혼식을 하면 구원을 받고 자녀들도 원죄, 혈통죄, 연대죄, 자범죄가 없어진다고 했지만 통일교 교인들은 여전히 죄가 남아 있고 구원받지 못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집단에서는 필리핀, 태국 처녀들을 1천 만원을 주고 데려와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이다. 합동 결혼식 후 7천만원~l억원의 거액 재산을 바쳐야 한다. 통일교 교인들이 문선명 교주에게 내야하는 헌금으로는 죄를 용서해준다는 총 탕감비 1200만원이 있다.

또, 통일교 교인은 문선명 교주의 참 아들 딸이기 때문에 자기 재산을 참부모인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 소유권 이전이라는 뜻의 총 생축 헌금 2100만원, 나라를 위한 구국 헌금 1천만원(성인 6인 가족기준), 지옥간 조상 천국 보내는 헌금 3300만원, 천성 왕림 궁전헌금 320만원, 문선명 비행기 헌금100~1000만원, 병원헌금 160만원, 구국헌금(5인 가족기준) 800만원, 문선명 나라 건국헌금 매월 1인당 17만원, 매월 10의 3조 헌금, 8대 명절헌금, 각종 교회 행사헌금 등 30가지가 넘는다.

따라서 전 재산을 바치고도 빚 더미에 올라 앉은 것이 비극적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인들의 처참한 생활이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 후 일생 동안 천국이 아니라 생지옥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또 합동결혼식 후 문선명을 믿고 복종을 하여도 구원이 없다. 나는 통일교회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눈 감으면 지옥 갈 문선명이 전용비행기가 왠 말인가?

 

10. 문선명은 한국과 일본에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에게 전용 비행기 헌금을 강요하여 2000년 2월 10일에 전용 비행기를 5천만달러에구입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 그룹이 1998년 IMF 때 부도나 멸망하였는데도 통일교 교인 들에게 거액의 재산을 착취하여 초호화판 생활을 하고 있다. 게다가 81세나 되는 문선명 교주는 불쌍하고 가난한 통일교 교인들에게 가정당 100만원에서 1000만원씩의 헌금을 거 두어 전용비행기를 샀다.

과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81세 노인이 통일교 교인들의 피눈물 어린 헌금으로 전용 비행기를 사야만 했는가? 또한 문선명은 각 나라마다 초호화 주택과 최고급 자동차를 구입하여 온갖 호의호식을 하면서 제왕처럼 살고 있다.

통일교 교인들은 피골이 상접하여 죽어가는데도 문선명은 교인들에게 공갈 협박을 하여 거액 재산을 착취하고 문선명의 제국을 세워야 하는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불쌍하고 가련한 처지를 이해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와 통일교 교인들과 더불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교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문선명은 입으로는 사랑과 희생, 봉사, 제물을 외치지만 불쌍한 통일교 교인들의 처절한 피, 땀, 눈물을 먹고 사는 사악한 사이비 교주일 뿐이다.

 

11. 문선명은 자칭 황제 재림주 참 부모라면서 자녀 신앙도 책임 지지 못하는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의 자녀들은 4가지 죄가 없다는데 오히려 그들은 마약, 혈통 복귀 피가름, 이혼,간통으로 타락하여 감옥을 가는 현실이며, 이 세상의 죄인들 보다도 더 많은 죄를 지었다. 그것은 문선명이 자신도 구원을 받지 못한채 죄악을 저질러 하늘에 죄가 닿아 자녀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다.

 

12.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통일교 목사들의 목숨은 하루살이같은 일회용이다.

 

반면에 통일교 목사들은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수 십명에서 백 여명의목사들이 매년 생활고로 목회를 그만두고 통일교회를 이탈하고 있다.

2000년 1월 이후부터 9월말까지 목회를 그만 둔 목회자만도 전국 시 ·군 250명 목회자중 150명이 넘는다.

게다가 전세계 각 나라의 대표자가 되는 국가 메시아 185명을 문선명 교주는 목사 직분을 박탈하고 한국의 시군구 연합회장이라는 직분을 주어 각나라 국가 메시아직에서 박탈시켰으며 월급 50만원씩을 받게하여 가정 생활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2000년 9월 18일에는 전국의 통일교 목사직을 박탈하는 살인적인 인사를 행하였다. 통일교에 충성한 한국 40~60대 목사 217명의 목사직분을 문선명 교주는 박탈하였다. 전국 시군구 통일교 목사가 250명인데 217명이라면 거의 전체 목사들을 파리 목숨같이 짤라 버린 것이다.

통일교 목사들은 일생동안 문선명 교주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아내와 중 고 · 대학생인 자녀들을 데리고 교육비와 생활비, 퇴직금 10원도 받지 못하고 쫓겨 났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개인의 인격과 가정의 행복을 빼앗았다 현재 전국 통일교 목사들은 배신과 분노, 자괴감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인사단행은 예전에도 심심치 않게 이루어졌다. 1981년 10월 20일에 전국 통일교 목사들을 잔인하게 내쫓았고 1988년 6월에도 잔인한 인사이동으로 통일교 목사들의 가정을 파탄시켰으며 1991년 8월 30일에는 전국 통일교 전체 목사 500명을 사전에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단칼에 잘라버렸다.

문선명은 자신에게 충성한 목사들을 상대로 인권말살, 가정파괴, 생활파괴를 한 것이다.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들 가정은 생활을 해야 했는데 문제는 이들 중 중 · 고 · 대학생 의 자녀와 있으며 결혼을 목전에 두고 있는 자녀들이 있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데도 문선명 교주는자신에게 30년간 충성한 통일교 목사들에게 퇴직금 10원도 주지 않고 잔인하게 쫓아내어 버렸던 것이다.

인류 역사에 '네로 황제 , '히틀러' , 어떤 공산주의자도 문선명 교주처럼 이렇게 잔인한 종교 지도자도, 파괴자도 없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그 죄악과, 문선명 교주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3. 잔인한 사이비 교주 문선명은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그룹 내 통일교 회사의 교인들에게 말 한마디 명령으로 100억, 1000억의 거액 헌금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통일교 목사들을 몇 번이나 단칼에 무 자르듯 잘라 버리는 잔인한 폭군이다.

 

하루아침에 가정천국을 외치는 문선명 교주가 통일교 목사들 가정과 통일교 교인가정의 행복추구권을 박탈 시켜 버리는 행위는 참부모가 할 행위가 아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일회용으로 이용당하고 버림을 받았다. 통일교회를 탈퇴한 목사와 교인들은 문선명 교주에게 빼앗긴 세월을 한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문선명은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 또한 문선명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14. 문선명 통일제국을 세우기 위해 각분야 지도자를 포섭하는 행위를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막자.

 

문선명은 통일교인들의 피살을 짜서 정치인, 경제인, 교수,종교인, 언론인을 매수하였다. 그들을 매수하기 위해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통일교 48년 역사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통일교 교인들의 피·눈물을 짜서 각종 국제회의라는 구실로 왕복 항공편,호텔, 각종 만찬, 선물 비용 일체를 받았음은 물론 문선명 본인의 야망과 욕망인 메시아로 인정을 받기 위해 돈을 물 쓰듯이 투자하였다. 통일교 교인들이 장사와 온갖 노동, 파출부 일로 거액 헌금을 하면 문선명은 그 헌금을 물쓰듯 하며 자신을 참부모 재림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와 생활고로 자살하고 가장 파탄이 된 통일교 교인들을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문선명의 죄악은 하나님에게 이미 보고되어 있어서 심판 받을 날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15. 문선명의 아들 문흥진이 17세에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영계의 총사령관으로 해놓고 예수님도 시중을 드는 부하라고 주장하여 기독교를 희롱하고 있다.

 

1200만 기독교 교인은 예수님을 믿고 성경진리를 믿는다면 문선명의 정체를 알고 예수님을 명예훼손죄로 고발하여 사법조치를 해야할 것이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에게 교통사고로 1984년도 1월 2일날 죽은 둘째 아들이 희생의 제물로 간 것이라고 거짓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죽은 문흥진을 통일교 교인들은 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문선명은 지금 청평에 천성 왕림 궁전을 건축해놓고 문흥진을 영계의 총 사령관이라며 살아있는 통일교 처녀와 영혼 결혼을 시켜 놓았다. 참으로 이 지구상에 이런 사이비 집단이 있다는 것을 1200만기독교 성도들은 경각심을 갖고 통일교를 대처해야 할 것이다.

 

16. 문선명 사이비 집단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에게서 공갈 협박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불어넣어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다.

 

1대~120대 지옥에 간 조상을 천국에 보내는 구원헌금으로 무조건3,300만원~5천만원의 거액 재산을 빼앗는다.

 

17 문선명 교주의 하수인 사이비 정치 지도자들을 낙선시키자.


문선명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이 낙선시키자.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의 각종 만찬, 세미나, 남북통일운동, 승공연합, 훈독회 행사장에 참석하여 문선명 교주를 참 부모, 재림주, 구세주라고 격려사, 축사, 극찬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1200만 성직자,성도들이 전국 시 · 군 · 구에서 총궐기 하여 낙선 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18. 문선명은 중풍으로 죽은 혼순애 장모까지 대모라고 칭하여 재림했다고 사기치는 사건.

 

문선명의 장모는 중풍으로 쓰러져 10여 년을 주위사람이 대 ·소변을 받아내야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였다. 문선명은 장모가 죽자 홍씨 대모님이라고 큰 칭호를 내리고 재림하였다고 통일교 교인들을 속이고 있다. 또한 이상길 통일사상 연구원장이 사망하였는데, 이상길이 '하나님의 사자' 라고 하며 통일교 세뇌교육에 이용하고 있다.

 

19, 문선명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는 기독교 목사를 근절하자.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에서는 통일교회의 모든 자금을 투입하여 모든 항공료 ·왕복 차비 ·호텔비용 일체를 부담하며, 기독교 목사 장로를 포섭하고 있다. 통일교 각종 만찬 세미나, 행사장에 참석하여 문선명을 참 부모 재림주로 극찬하는 성직자와 성도들을 회개시키고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것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막대한 자금투자로 만든 기독교 목사·장로 ·종교인 포섭단체

①초 교파 기독교 협의회 회장인 이재석은 문선명의 최초36가정 이며, 핵심 인사이다.

② 한국 8대 종교인 협의회 회장 이재석.

③ 한국 민족 종교 협의회 회장 이재석.

④ 한국 종교 지도자 협의회 회장 이재석.

⑤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 회장 이재석.

⑥ 세계평화 초종교 연합 회장 곽정환(통일교 이인자).

⑦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 회장 곽정환.

⑧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총회 총회장 김광명,

⑨대한예수교장로회 총화총회 총회장 이병옥 등이 통일교에서 세운위장된 기독교 단체이다.

 

20.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각종 만찬, 세미나에 참석하는 언론인.학계 · 문화계 인사들을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이 추방시키자.

 

21. 한국방송 언론의 공익을 위한 것이라면 문집단의 비리를 고발 보도하라. 매일 희생자가 늘어가고 있다.

 

각종 언론 방송에서 통일교 교리비판, 부정부패, 재산착취, 우상숭배, 가정파괴 행위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다시는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22,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 이주계획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IMF때 통일그룹 부도 후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 3만 5천명을 남미 브라질 자르딘에 1억 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만든 새 소망 에덴동산으로 이주할 것을 계획한때도 있었다.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에 초 · 중 · 고 · 대학은 이미 건축 완공을 하였으며, 주택을 건축 중에 있고, 앞으로 50억 평을 더 매입 할 계획이다. 그 50억 평에서 통일교 교인들은 후손 대대로 문선명의 노예가 되어 밀림을 개간하고 농업, 어업, 산업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또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일교인들은 전 재산을 바쳐야 할지도 모른다.

 

23. 문선명 통일교 집단은 세계 각 도시, 건물, 대지를 매입하는데, 금융감독원과 검찰에서는 철저히 조사하여 외화 밀반출 여부를 조사해야 할 것이며 위법을 하였다면 사법조치를 내려야 할 것이다.

 

24. 문선명 통일교 사교 집단은 1998년 IMF직후 통일그룹이 1조 7천억 은행빚을 갚지 못하고 부도되어 파산했을 때 전국 통일교회 대지와 교회,재단을 분리시컥 국민의 재산을 빼돌렸다.

 철저하게 사법부에서 조사하여 위법을 하였다면 종교법인을 박탈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25. 문집단의 청평천성왕림궁전의 의혹을 환경단체는 조사하라.


문선명 사이비 집단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중림리에 1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청평 천성 왕림궁전이라는 건축물을 지어놓고 매주 5천 명~l만 명의세계 각지에 있는 통일교 교인들을 모아서 우상숭배, 세뇌교육, 재산착취, 공갈협박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통일교 교인들은 매주 수 천명이 모여 집회를 하면서 대 · 소변을 보느라고 수도 서울 시민의 식수원을 오염시키고 있다. 환경부와 환경단체는 철저히 조사하여 위법한 사실이 있으면 건축물을 철거하고 사법 조치해야 한다. 통일교 제주 영빈관이나 수택리 영빈관도 조사하여 위법을 하였다면 철거해야 할 것이다.

 

26. 문선명 통일교 집단은 폭행 · 폭력 집단이다.

 

저자의 교회를 빼앗고, 강제 인사부정으로 교구장 직에서 끌어내렸다. 통일교 협회 국장 ·부장 ·평직원까지 수십명이 동원되어 내가 시무하는 서울 노원 교회 안에 밀고 들어와 노원 교회 교인들과 시위와 몸싸움을 했었다. 협회본부에서는 전 김승철 총무국장과 전 김철현 가정국장이 협회 전 직원들 앞에서 저자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하여 그 때의 후유증으로 지금 심장병에 시달리고 있다.

 

27. 저자 주위에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단의 살인적 재산 착취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처절한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가정파탄,별거, 이혼, 자살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가정 파괴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28.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자금줄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 그룹 부도 후에도 초호화 생활과 최고급 외제자동차, 궁전같은 각 나라의 저택을 구입하였다. 통일교 교인 가정당 3백60만원~l천 만원까지 거액 헌금을 거두어 2000년 2월 10일에는 5천만 달러를 주고 개인전용 비행기까지 구입하였다. 문선명 교주는 81살 된 노인이라 저녁에 자다가 아침에 못 일어나면 죽음을 맞아 영계에 갈 수 있는데 무슨 초호화 비행기 (5천만달러/한화 6백억)가 필요한가?

문선명이 그 동안에 지은 죄악으로 억만년 지옥 불에 들어가 살도록 하나님께 고발할 것이다. 통일교 교인들이 처절한 가난 속에서 막노동, 파출부, 식당 일로 모은 거액 헌금을 낭비하는 것이 문선명은 참 부모 재림주가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탄 마귀 사이비 교주라는 증거이다. 

 

29. 저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용서할 수 없다.

 

저는 30년 동안 세뇌되고 마취되어 죽도록 충성했던 잃어버린 그  시간을 찾을 수가 없다. 저는 더 이상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이용 당할 수 없고, 사이비 교단에서 충성할 수 없기 때문에 저의 양심에 따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통일 교회를 탈퇴하고 비리를 폭로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30.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세계 평화 통일당을 창당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그 동안에 각종 정치인들을 포섭하고 세뇌 교육을 시켰다. 문선명 교주는 "2천년 전 예수님이 나라와 백성이 없고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고 강조하면서 문선명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통일당을 창당한 것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최종목적이다.

 

31.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2004년 4월30일까지 전세계 185개국 통일교 교인 총 동원령을 내렸다.

 

대한민국을 통일 제국으로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 목적달성을 위해 통일교 합동 결혼식한 부인들은 전 재산을 바쳐야 되었다. 또한 남편과 초 '중 · 고 · 대학생 자녀를 집에 두고 가정을 떠나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합동 결혼식한 부인 1만 5천명은 전국 시군구에 있는 통일교회에 합동결혼식한 통일교 부인들이 20~70명씩 배치 되어서 목숨을 걸고 미혼남녀를 전도하고 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부인들은 교회에 매월 생활비로 각자 10 만원씩을 지불하며 생활하고 있다. 통일교회에서 합동결혼식한 부부들은 일생동안 각종 전도활동에 동원되어 부부가 별거하는 때가많다. 행복한 가정천국이 아니라 처절한 비극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32,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전국 시군구에서 범 기독교적인 통일교, 사이비종교 반대 뿌리 뽑기운동 귈기대회를 해야 한다.

통일교회 미혼남녀 합동결혼식을 하면 가정이 파탄되고 우상숭배를 하고 재산착취를 당하며 영혼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 통일교회와 사이비 종교 교리 비판과 피해자 폭로 대회도 같이 열어야 글다.

 

33. 세계일보는 통일교인들의 매달 50억 헌금으로 유지되는 적자신문.


문선명 통일교 대변지이며 방패막 역할을 하는 세계일보는, 매월 일본에서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꽃팔이, 생선장사, 막노동을 하여 모은 50억이라는 거액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 돈으로 세계일보 1,200억 융자금 이자를 지불하고 세계일보 사원들의 월급을 주고있다.

세계일보는 통일그룹 부도 후에 6개월 동안 월급을 못 주는 때도 있었다. 게다가 새계일보 기자 월급은 다른 신문사의 절반이다. 세계일보를 폐간하는 길만이 통일교 교인들을 재산 착취에서 해방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34. 문선명은 통일제국을 건설하지만 무너진 통일제국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그룹 부도 후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여 교회와 통일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금융감독원과 통일그룹 주 거래은행이 였턴제일은행은 통일교에 1조 7천억을 환수하라. 국민의 재산을 완전 환수하여 통일그룹을 완전 폐업시컥야 한다. 그 길만이 통일교 교인들이 문선명 사이비교주에게 재산을 빼앗기지 않고 지옥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35.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한국과 일본의 방송언론이 대대적인 비리와 부정을 보도하면 궤멸될 수밖에 없다.

 

전세계 통일교회 운영 자금줄인 한국과 일본 통일교회 교인 재산 착취를 근절시키면 통일교회는 자동적으로 궤멸될 수 밖에 없다. 한국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은 단결하여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궤멸과 악랄한 사이비 교단 궤멸을 위해 외쳐야 한다.

현재 사이비 교단은 300곳이넘고 있다. 300만 사이비 교단의 교인들은 영혼을 빼앗기고 처절한 노예가 되어 지금도 고통 당하고 있다. 그들도 우리 부모 형제요, 이웃이다. 해외선교도 중요하지만 내 나라, 내땅, 내 이웃에 사이비 교주가 나타나 영혼을 빼앗고 이리와 같이 선량한 사람을 파멸시키는 사이비 교주를 궤멸시키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께 무엇을 보고할 것인가? 선각자 된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이 가장 시급하며 사이비 교단 궤멸을 위해 싸우고 외쳐야 한다. 이단교회를 뿌리뽑아야 한다.

 

36.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이 그 동안에도 사이비 종교에 대한 대책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는 사이비 교주와교단이 선량한 영혼을 미혹하여 영혼과 육신을 파멸시키고 간통, 우상 숭배,참부모 재림주라고 자칭하고 거액재산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고 있다.

 

이제는 성경 진리의 말씀대로 사탄 마귀의 화신인 문선명 통일교를 뿌리 뽑기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 사이비 교단과 싸워서 승리해야 한다.

일본 기독교 1%인 120만명인데 통일교 합동결혼식후 거액 재산착취를 집중 언론 방송 보도하여 통일교 교인이 300만명 이라고 재판정에서 거짓증언 하였지만 실제 2만명에 불과하다.

 

37.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그 동안에 통일교 교인들에게 기도 마지막에 "문선명 참 부모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라고 시켰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라고 한다는 것은 상상도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 바뀌어서 통일교 교인들에게 재산착취와 책임강조를 위해 "참부모님의 승리권을 축복으로 이어받은 000목사(교인들은 장로,권사, 집사직분을 넣음)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이 기도 끝마무리를 "축복의 중심가정 000(교인들은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넣음)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라고 한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야말로 자기 자산도 구하지 못하고 자기 자녀들도 구하지 못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는가?

통일교 교인들을 노예로 삼아 지옥으로 끌고 가며 사악한 기도 마무리를 시키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대적이다. 한국 1200만 기독교인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4명 중 1명이 기독교인이다.

통일교인 오전국 총재적 인원이 33000이며 예배는 학생을 포함해서 17000명이다. 기독교인 1200만 목사 성도가 예수님 이름으로 단결하여 궤멸하자. X 통일교회(가정교회)는 예배때 주기도문도 사도신경도 없다.

 

38.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우상숭배, 재산 착취의식은 인류역사의 최대 사기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통일 그룹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통일그룹은 1998년 IMF 때 부도로 망하여 기업체가 국가관리 기업이 되었다. 또한 5,000만 달러를 투자한 오인천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도 하지 못하였으며 실패작이 되어 버렸다. 중국 판다 프로젝트도 통일교 교인들의 고혈인 12억 달러를 투입하였지만 사기 당하여 망해버린 결과가 되었다.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미국 뉴요커 호텔(43층)을 매입하여 운영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미국 워싱턴 D.C 셀라톤 호텔도 적자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파라과이 아메리카노 호텔도 경영이 어렵고, 해양산업도 실패한 입장이다. 미국 워싱턴 타임지는 적자로 부도위기에 있다.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의 고액 헌금이 없으면 그날로 통일교 관련 신문사가 부도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세계일보도 부도직전으로 매월 50억을 한국 ·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이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을 바쳐서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통일교 방패막인 세계일보는 통일교 교인들의 헌금이 끊어지면 운영 자금이 고갈되어 그날로 부도가 날 지경에 이르렸다.

그 외에도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계획하는 것마다 실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문선명 교주의 통일교 목회자 양성기관인 선문대 신학과 학생들도 문선명 교주의 살인적 목회자 인사조치와 통일교 선배 목회자들의 처절한 파멸과 죽음의 길을 보고서 80%도 넘게 목회를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고 있는 실정이다.

문선명 교주가 목회자를 양성한다고 했지만 통일교 목회자는 파리목숨이라는 것을 알고 신학생들도 도망치고 있는 실정이다. 문선명은 하루아침에 전국 통일교 목회자 전체 500명을 사전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잘라 버리는 잔인한 폭력 인사를 몇 번씩이나 서슴지 않고 행하였다.

그래서 통일교 목회자 가정은 처절한 가난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나와 같이 가정이 파탄된 것이다. 통일교회 후배 목회자나 2세 목회자들은 선배 목회자들의 비극적 인 파멸과 박준철 목사의 결과를 되새걱 보아야 할 것이다.

통일제국은 문선명 교주의 야망에서 나온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하나남의 원수요, 전세계 19억명 기독교인의 원수요 한국 1200만 기독교인의 원수다. 통일교회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 고액헌금과 생활고에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교인들의 원수요, 가정파탄, 이혼, 별거로 통일교회를 탈퇴하고 원한이 맺힌 사람들의 원수이다. 통일교 교인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문선명 교주는 하나님의 심판과 역사의 심판, 인류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39.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제국은 구원이 없다.

 

저는 30년 동안 통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제가 존경 할만한 신앙자나 구원을 받았다는 통일교 교인을 만나보지 못했다. 미혼 남녀가 통일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과 아내, 자녀들이 문선명의 노예가 되는 길이며 가난의시작인 것이다. 제2의 박준철이 되는 것이다.

저는 죽도록 충성해도 잔인한 문선명 교주의 사악한 명령과 행위로 폭력 ·폭행을 당하고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되어 폐인이 되었다. 선량한 한국의 미혼 남녀가 문선명 집단에 들어와 인간노예가 되어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보다는 독신으로 혼자 사는 것이 차라리 백배 나을 것이라고생각한다.

 

40. 한국과 일본의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을 천국에 보내준다는 미명하에 거액 재산을 착취하여 1200억을 만들었다고 한다.

 

문선명과 사돈 관계인 통일교 이 인자 곽정환은 D종합금융에 부실 여부도 알아보지 않고 투자했다가 부도나는 바람에 단 10원도 돌려 받지 못하고 날렸다는데 사실인가?

곽정환 회장이 하는 것마다 실패요, 파멸이라고 생각한다. 통일교 교인들은 목숨을 바쳐 거액헌금을 만들어 문선명 교주에게 바치지만 헛된 수고일 뿐이다.

 

41.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기 위하여 브라질에 황족 입적 40일 수련 때 2100만원을 받은 것도 모자라 청평 천성왕림궁전에서 재탕으로 황족 입적수련 21일 수련회에 120만원씩을 받았으며 입적 통일 축복식에서는 70만원씩을 통일교 교인들에게 내라고 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은 처절한 가난, 빛더미에 올라앉는 것이다.

 

42.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최종 목적은 백성과 나라를 세워 통일 제국을 건설하여 황제로 취임식을 하고 군림하는 것이다.

 

문선명의 황제 취임식은이미 1985년 12월 25일에 완료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2001년 1월13일에는한국 청평 천성 왕림궁전에서 전세계 합동결혼식을한 통일교 교인들 3천명을 모아놓고 하나님 왕권 즉위식을 올렸다. 그러나 이 의식은 문선명 황제즉위식이었다. 2003년 1월 1일, 1월 13일에도 청평 천성왕림궁전에서 문선명 우상화 극이 열렸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동토의 왕국인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통일교 교인들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피를 흘리는 희생을 시키고 있다. 사이비교주의 죄악과 말로를 하나님은 보고 계시고, 심판만이 남아있다. 문선명은 지금까지 나라를 위하고 이 민족을 위하여 국제 승공연합 활동과 국민 연합 활동, 기독교 초교파 활동, 세계 언론인 연합활동, 세계 평화교수 협의회, 세계 평화문화연합활동, 국제교육재단, 세계평화 종교연합,국제과학 통일회의, 전국 시 · 군 · 구 통일교회 각 동 · 통 · 반 지역 전도활동, 훈독회 활동, 각종 만찬·세미나 대회, 통일교 합동결혼식 행사 대회,부도난 통일그룹 각종 사업체 활동, 문화단체 활동, 세계평화 초 종교연합활동, 세계 평화여성쳔합 활동, 세계평화청년연합 활동, 세계 평화 정상회의 활동 등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자신을 재림주 참부모 메시아 구세주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 47년 동안 활동을 한 것이다. 그것이 문선명의 최종 활동목적이다.

문선명 교주는 지금까지 인류 구원과 평화와 사랑, 지상천국을 외치고 있지만 자신의 야망과 통일제국을 만들기 위한 욕망으로 통일교 교인들을 처절하게 희생시키고 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가정파괴 우상숭배 지옥에 간 조상의 이름을 팔아 거액의 재산을 빼앗고 있다. 구원을 외치지만 지옥이요 평화와 사랑을 외치지만 저 같이 가정파탄 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문선명은 가련한 통일교 교인들의 영혼을 빼앗아 통일제국을 세우는 이용물일 뿐이다. 통일교회에서 갈라져나간 사이비종파가 정명석(JMS)등이 문선명 교주 밑에서 배운대로 통일교를 떠나 사이비교주 노릇을 하고 있다. 지금 통일교회 출신이단이 30파로 늘어났으며 앞으로 70파, 120파가 넘는 사이비 교파로 늘어나 분열되어 산산조각이 나서 파멸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43. 문선명은 예수, 공자, 석가, 무하멧을 축복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통일교 여인들과 결혼시켰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예수님을 실패자 부하로 격하시키고 예수님을 믿어도 완전구원이 없으며 기독교 교인들이 천국도 갈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도 구하지 못하고 자식들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문선명 자신 만이 참부모 재림주로서 예수를 천국 보낼 권한이 있고 인류와 기독교교인을 천국 보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예수탄생일을 1971년 1월 3일날 계시를 받아 정하고, 통일교 차만숙 권사의 딸인 장정숙을 '성신' 이라고 정하여 예수와 결혼을 시켜 예수님의 명예를 파멸시켜 버렸다. 차만숙 권사의 딸인 장정숙을 일생동안 시집도 가지 못하는 처녀로 만들어 인생을 파멸 시켜 버린 결과가 되었다.

문선명은 통일교 세뇌 교육용으로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이라는 책에 통일교 교인이였던 이상길이 죽어 영계에 가서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예수, 공자, 석가, 무하멧을 만났다고 했다.

예수, 공자, 석가, 무하멧은 문선명 재림주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세미나를 열고 통일교 교리 교육을 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수가 영계에서 지상에 있는 문선명에게 장정숙과 축복결혼을 시켜 주어서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주장하며 통일교 교인들 세뇌 교육용으로 이용하고 있다.

문선명은 1999년 12월 29일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예수 드림 이라고 편지를 보내왔다고 하는데 이것을 통일교 교인들은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공자, 석가, 무하멧도 문선명이 통일교 여인들과 결혼시켜 주었다. 21세기 최첨단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이 때에 문선명과 古 이상길, 김영숙을 내세워 통일교 교인들 아침, 저녁 세뇌교육용으로 활용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문선명의 조상 귀신을 구원해준다고 속이고 거액재산 착취 행위나, 통일교 합동결혼식만 하면 천국간다고 해놓고 이제와서 통일교인을 죄가 많으니 죄를 용서해주는 탕감비 1300만원을 천국행 티켓파는 행위는 문선명은 희대의 사기꾼이다.

이 거짓된 일로 통일교 교인들 거액 재산 착취에 활용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 비극이며 언론과 방송이 대대적으로 보도 해야 한다. 기독교 성직자,1200만 성도들은 통일교회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합동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의 비극을 만천하에 알려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 p,554~572)

김일성이 영계에서 문선명 재림주에게 보내는 편지, 한국 기독교계를 대표한 고 김할란 이화여대 총장이 문선명 재림주에게 보내는 편지를 문선명은 광고하였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문흥진(17세)을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이 영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 아들 문흥진이가 영계에서 문선명에게 보내온 편지를 통하여 문선명을 재림주 참부모로 만들기 일한 웃지 못할 비극적인 조작사건이 통일교내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모든 내용은 예수,공자, 석가,무하짓 위에 문선명 재림주가 존재한다는 인식과 문선명만이 인류를 구원하고 4대 성인을 구원해 준다는 사악하고 조작된 거짓 편지이다.

구세주는 오직 예수님이 아니고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라는 것을 인식시키고자 조작을 하여 불안 공포심을 갖게 하고자 통일교인을 세뇌시키고 있다. 1998년 6월 13일날 3억 6천만 쌍 1차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미국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하면서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무슨 권한으로 90억의 죽은 영흔을 합동결혼식을 시켰는가? 그리고 문선명은 자신의 사돈인 통일교 이인자 곽정환 부부를 내세워 33명의 영계에 간 성인 영혼 결혼을 시켰다.

예수를 1971년도에 장정숙과 결혼시켜 놓고, 또다시 예수와 결혼식을 시켰다. 공자 부인은 이경준 현 선문대 총장, 석가부인은 최원복 전 이대 교수,무하멧 부인은 이정옥(전 세일여행사 사장), 소크라테스와 결혼한 김명희(문선명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처녀출산- 문희진) 지금도 김명희는 매월통일교 협회로부터 60만원의 생활비를 받으며 문선명 교주에게 충성하며 독신으로 살고 있다.

또, 문선명은 1955~1960년. 연대, 이대출신의 문선명 여인들을 영혼 결혼을 시켰다. 각 종교지도자들이 문선명 여인들에게 결혼 축하 예물로 금시계를 바치게 했다. (통일교 월간지인 '통일세계' 1998년 7월호 p.83) 문선명 사이비교주의 사악한 행위는 기독교 파괴와 세계 종교인에 대한 명예를 훼손하였다. 즉시 예수님의 명예를 훼손시킨 문선명을 명예 훼손죄로 고발하여 사법처리 하여야 한다

 

44. 통일교 세뇌 교육용 책인「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의 편지조작 사건,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세뇌 교육용 책인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에 아담 · 하와가 보낸 편지중 "책임 분담을 다하지 못하여 수천 년 동안 고생했으며 언제나 죄인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잘 모시고 있다" 며 1997년 8월 14일에 편지를 보내왔다고 조작하였다. (p.155참조)

노아, 아브라함, 가롯 유다, 세레요한 편지 중에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여 죄송하다" 고 하며 "지옥문이 열릴 날은 문선명 구세주가 열어 줄 것이다" 라고 조작한 사건(1997.08.20)

김일성, 레닌, 히틀러, 뭇솔리니, 이승만(전 대통령), 모세, 김활란(이대전 총장), 박정희(전 대통령) 조작사건. "박정희 대통령이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가 이 나라(영계)오실 때 모든 것에 대해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으며 영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와 영계에서 농사를 짓고 사냥을 다닌 다고 문선명 집단에서 책에 주장하고 있다. 21세기에 문선명 사이비 집단의 조작과 사기성을 알고 고발해야 할 것이다. (1998.06.11)

일본 정치계의 기시(전 수상), 후꾸다(전 수상), 이께다(전 수상), 나까소네 편지 조작사건. 이께다 전 수상의 의견은 "나까소네가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의 협조를 받아 움직이면 일본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 라고 주장하였다. (1998.06.11)

고르바초프는 "문선명 참부모님의 뜻을 잘 알고 있으며 참부모님의 뜻 성취에 적극적인 열정도 갖고 있다" 고 주장하며 죽은 닉슨은 "클린턴의정책과 문선명 재림주 아버님의 뜻이 아주 가깝게 연결되기를 노력하고 혐조하겠다" 고 영계에써 주장하여 조작하였다. (1998.06.11)

16세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교하여 죽은 유관순은 "문선명 참부모님을 영계에서 자랑하고 전세계의 영웅이라고 외치고 있다" 고 주장하몄다. (1999.09.30)

 

※ 영계에서 문선명 재림주님에게 보내온 편지 조작사건.

 


① 예수님이 영계에서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님에게 보내온 메시지


"문선명 아버님께 올립니다. 아버님! 저는 예수라고 합닐다. 아버님! 저를 장여사와축복 영혼결혼을 시컥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아내는 정말 저에게 과분한 여인입니다. 정말 황공합니다. 이제 문선명 참부모님의 뜻을받들어 아름다운 가정을 꾸며 참부모님을 모시고 참부모님의 뜻대로 복귀섭리역사 앞에 열심히 기도하며 노력할 것입니다. 아버님! 예수 지인을 용서하소서. 언젠가는 한이 풀릴 것입니다. 아버님!정말 감사합니다. 예수는제 아내 장여사를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선명 참부모님 ! 만수무강 하옵소서. 천상에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가 아버님께 올립니다. "(1999.12.29) 예수드림

 

② 소크라테스가 문선명 참부모님에게 보내온 메시지


"문선명 참 아버님, 어머님께 드리옵니다. 저를 김명희와 축복결혼을 시컥주어서 감사합니다‥‥‥(생략)‥‥ 옥체 만강하옵소서." 천상에서 소크라테스 올림(1998.08.13)

공자가 참부모님에게 보내온 메시지 등을 조작하였다. 「영계의 실상과 인류의 구세주는 문선명지상생활」의 책을 통하여 통일교 교인들에게 오직교주라는 것을 인식시키고자 이 책을 합동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이 아침 · 저녁으로 읽고 믿고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2002년 1월 1일에 청평 천성왕림궁전에서 통일교 교인들을 모아놓고 "문선명 교주는 하나님의 메시지" 라는 것을 만들어 "나는 만군의 여호와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다. 문선명 참부모는 만왕의 왕이요, 구세주요, 메시아" 라고 말을 하며 하나님이 직접 메시지를 보낸 것같이 조작하였다. 그 자리에서 문선명 교주는 또 다시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교인들은 천국황족 입적을 하려면 재산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문선명 집단이 이 땅에 뿌리뽑힐 때까지 함께 기도하고 반대운동을 하며 다각적으로 대책을 세워 다시는 이 땅에 문선명 집단과 같은 사이비 집단이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45.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2000년 1월 13일에 4억쌍 1차 합동결혼식을 하였다. 신랑 ·신부가극소수였기 때문에 추운 걱울에 있는 10만명 정도의전국 노인들을 잠실 종합운동장에 데려다놓고 무료 관광버스, 식사 대접과선물을 주었다. 실제 합동결혼식을 한 미혼 남녀는 2 천 쌍에 불과하였다.

 

전국 노인들을 흰 목도리를 목에 두르게 하여 행사 때마다 신랑 '신부로 위장한 행위를 하여 세상을 미혹하였다.

2001년 1월 27일에 4억쌍 2차 합동결혼식이라면서 미국 뉴욕 맨해튼UN본부 경제사회 이사회 회의실에서 문선명, 한학자 사이비 교주 부부가 황제 의상을 입고 합동결혼식을 할 210쌍의 미혼남녀를 모아놓고 퉁일교 합동결혼식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전세계, 전 현직 수상, 국왕 정치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그 자리에서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2002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대하였다. 문선명은 개인과 가정의 파괴범이며, 통일교 교인들의 거액재산을 착취하는 사탄 마귀의 형상이다.

이런 사이비교주가 노벨 평화상 후보로 된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인류를 기만하는 가증스러운 일이다. 개인과 가정을 파괴한 문선명, 한학자 부부에게 '세계 NGO 만국평화상' (2000.08.18)을 주었다는 것은 전세계 기독교 교인들의 수치이며 NGO에서 통일교를 축출해야 할 것이다.

문선명은 노벨상에 목숨을 걸고 전략을 세워 또 한번의 세상의 이목을 받는 행위를 하고 싶은 것이다. 1200만 기독교는 UN을 움직이고, 노벨 평화상에 도전하는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재림주 참부모가 아니라면 궤멸 시켜야 할 것인가? 지금 전 성직자와 교인들이 결정 해야되는 순간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또 한번의 통일교 전도용 선전물인 UN에서 2001년 1월 27일에 합동결혼식을 하여 세상을 미혹하고 UN에서 인정한 것과 같이 선전을 하게 한 것이다. 한국 방송언론 각종 기독교 신문에서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합동결혼식이 재산 착취와 파멸의 결혼식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주어야 할 것이다.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은 통일교 미혼 남녀 합동 결혼식을 전국 시 · 군 ·구에서 결사적으로 막아야 할 것이다. 젊은 미혼남녀가 유혹 당하지 않도록 기독교인들은 외쳐야 할 것이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은 우상숭배, 재산착취, 영혼과 육신이 노예가 되어 일생 동안 지옥 같은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통일교회는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이며, 구원이 없는 곳이다.

초대 순교를 당했던 주기철 목사님과 같이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은 영혼을 파멸시키는 사이비 집단의 궤멸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쳐야 할 것이다.

 

46. 문선명의 부인과 그의 자녀들(총 19명)

 

문선명은 개인가정 파괴범이라는 증거- 재림주 참 부모라면 어린양 혼인잔치를 한번만 해야 하는데 문선명은 사악한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수 많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을 파탄시켰다.

문선명은 수많은 여인과 피가름, 혈대교환, 혈통복귀, 간음 의식을 행하여 처녀와 유부녀들의 개인가정을 파탄시켰다. 그 후에 문선명이 40살이 되었을 때 당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인 17세의 한학자와 1960년 3월 16일에 어린양 혼인잔치를 한 후 낳은 14명의 자녀들. (한학자와 결혼하고도 처녀와 간음혈통 복귀 의식으로 사생아를 낳음.)

문선명의 큰아들인 문효진은 홍난숙과 결혼하였으나 마약, 간음, 가정폭력, 전과, 알콜 중독, 포르노 편집증, 이혼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다. 이는 문선명은 거짓된 부모라는 증거이며, 그는 참 부모 재림주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지 1998년 9월 23일자 참고)

문선명의 큰며느리 홍난숙은 미국 CBS 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00분간 그녀의 시아버지인 문선명을 참부모 재림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문선명의 현재 부인 한학자를 통해 출생한 4번째 딸인 문은진은 홍난숙과 같이CBS방송에 출연하여, 부친인 문선명은 구세주, 재림주가 아닌 자신의 아버지일 뿐이라고 말하였으며 자신은 통일교 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문선명의 죄악으로 자식들이 고통 당하고 있으며, 문선명은 오히려 통일교 교인들이 죄악을 많이 범하여 자신의 자식들이 제물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교인들에게 40일, 100일 릴레이 회개 금식 운동을 지시하였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문선명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을 한 숫자를 부부로 쳤을 때, 18억 4천 만명이 통일교 교인 숫자이다. 한 가정 당 자녀를 2명으로 잡았을 때, 통일교 교인 총 숫자는 총 36억 9,604만 명이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전세계 통일교 교인을 모두 합하여도 7만명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기독교 교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가증스러운 거짓 숫자로 하나님을 속이고 인류를 속였다. 문선명 집단의 주장대로라면 전세계 인류 60억 가운데 60%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이라는 숫자가 되는 것이다.

 

47.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교주는 2001년 1월 19일날, 미국 조지 W-부시 대통령 취임식 전야 기념 축하예배를 주체를 하고, 설교를 하였다. 그러기 위해 문선명은 세계 정치, 경제, 문화, 언론, 교육, 종교 지도자들의 세미나, 만찬, 항공료, 호텔경비, 선물 일체를 지불했다. 세계 각 나라 모든 연구단체에 많은 지원금은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이 막노동, 파출부, 꽃팔이 등으로 바친 거액 재산이다.

 

그 돈이 문선명 통일제국을 건설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문선명 교주의 원리강론과 책자는 교계지도자와 미국 정치계의 최고 지도자들, 언론계 지도자들에게 배포하였다.

문제는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레이건 전 대통령이나 닉슨 전 대l통령, 부시전 대통령, 현 조지 W-부시대통령 등을 통일교 신문인 워싱턴 타임지와 UPI통신을 이용하여 정계 지도자들을 움직여 왔다. 조지 W-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을 하루 앞둔 날, 워싱턴 DC에서 문선명을 중심 삼고, 행사가 이루어졌다. 그 때 제임스 메릿 남 침례교 총회장이 축사를 했다.

미국 기독교 보수파 제리 포웰 목사(리버티대학교 총장), 단알규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 전 회장,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래험 목사의 축사가 있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한국의 사이비 통일교회가 모두 없어져도 이미 세계를 움직이는 사이비 교주가 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침묵할 것인가? 문선명 적그리스도의 궤멸을 위해 외칠 것인가? 지금도 문선명은 한국에서 통일교회가 모두 뿌리 뽑힌다고 하여도 세계 185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하는 것에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단결하여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48. 2001년 1월 현재, 한국 문선명 통일교 교인 재적 총 숫자는 3만 5천 명이며, 예배 인원은 1만 7천명이다(어린 학생들 포함.)

 

49. 문선명 집단 신조

 

①유일신(雄一神)이신 창조주掛」造主) 하나님을 인간의 아버지로 믿는다.

② 신 구약(新 · 舊約)성서를 경전(經傳)으로 받든다.

③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이신 예수님을 인간의 구주(救主)인 동시에복귀(復歸)된 선의 조상으로 믿는다.

④ 예수님께서 한국에 재림(再臨)하실 것으로 믿는다.

⑤인류세계(人類世界)는 계림하시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하나의 대가족사회(大家族社會)가 될 것을 믿는다.

⑥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최종목표(最終目標)는 지상(地上)과천상(天上)에서 악(惡)과 지옥(地獄)을 없애고 선(善)과 천국(天國)을 세우는데 있는 것으로 믿는다.

 

50. 나의 맹세(세뇌교육용 매일 아침 저녁으로 살아있는 우상 자칭 아버님 재림주라는 문선명 교주에게 경배하며 낭독하는 내용)

 

①천주의 중심존재로서 아버님의 뜻(창조목적)과 맡겨주신 책임(개성완성)을 완수하며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선의 자녀가 되어 창조 이상 세계에서 영원히 아버님을 시봉하는 참 효자(녀)가 되기를 000는 맹세 하나이다.

②아버님께서 육천년간 제물된 십자가 노정을 참으시며 죽은 oo를참 자녀로서 살리시기 위하여 말씀과 인격과 심정을 주시어 일체가되게 하심으로써 천주의 상속권을 주시려는 거룩한 뜻을 000는 완전히 상속받을 것을 맹세 하나이다.

③원수에게 잃어버린 자녀와 천주를 복귀하기 위하여 아버님께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시고 종의 몸을 쓰시고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시며 000대신 역사 노정을 두시고 원수 사탄을 무찌르시던 무기를 지니고 그들을 완전히 심판할 때까지 아버님의 본을 받아 참 아들 딸 000는 적진을 향하여 용진할 것을 맹세 하나이다.

④아버님께서는 평화와 행복과 자유와 이상의 원천이시며 아버님을 모시려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와 천주는 본성의 인간을 통하여서 만이 심정일체 이상세계를 완결함으로 000는 참 사람이 되어 심정의 세계에서 아버님 대신자가 됨으로써 피조 세계에 평화와 행복과 자유와 이상을 옮겨주고 아버님께 기쁨과 만족을 돌려드리는 참아들 딸이 될 것을 맹세 하나이다.

⑤우리는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주권을 자랑하고 하나의 백성을 자랑하고 하나의 국토를 자랑하고 하나의 언어와 문화를 자랑하고 하나의 부모를 중심한 자녀 됨을 자랑하고 하나의 전통을 이어받을 혈족임을 자랑하고 하나의 심정세계를 이룩하는 역군임을 자랑하고 이를 실현시킬 것을 000는 맹세하나이다.

이러한 의미와 사명을 성취하는데 책임을 지고 생명을 바처 싸울것을
000는 선서하며 맹세하나이다. 선서하며 맹세하나이다. 선서하며 맹세하나이다

서기 1962년 자녀의 날(음 10월 1일)

'나의 맹세'나 '가정맹세'에 나오는 참부모는 자칭 재림주 참부모인 문선명을 지칭하는 말이다.

 

51. 가정맹세(문선명이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에게 '나의맹세' 를 하지말고 '가정맹세' 로 하라고 명령함)

 

①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본향 땅을 찾아 본연의 창조이상인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을 창건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②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모시어 천주의 대표적 가정이 되며 중심적 가정이 되어 가정에서는 효자, 국가에서는 충신, 세계에서는 성인, 천주에서는 성자의 도리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③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사대심정권과 삼대왕권과 황족권을 환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④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의 창조 이상인 천주대 가족을 형성하여 자유와 평화와 통일과 행복의 세계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⑤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매일 주체적 친상세계와 대상적 지상세계의 통일을 향해 전진적 발전을 측진화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⑥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대신 가정으로서 천운을 움직이는 가정이 되어 하늘의 축복을 주변에 연결시키는 가정을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⑦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본연의 철통과 연결된 위하는 생활을 통하여 심정문화 세계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⑧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성약시대를 맞이하여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으로 신, 인, 애 일체이상을 이루어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의 해방권을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 통일교 행사 때나 아침 · 저녁으로 문선명 사진에 경배하며 세뇌 교육용으로 '가정맹세' 를 통일교 교인들이 하고 있다. 통일 교회에서는 문 선명교주가 단상에 올라 을 때 성경을 들고 나오는 일이 없으며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예배나 행사때 일명 가정교회에서는 낭독하지 않는다. 통일교 교회와 통일교인 집에는 통일교 깃발이 걸려있다.

 

52.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각종 8대 명절


① 참부모님 탄신일 : 문선명(1920년 1월 6일(음력)),한학자(1943년 1월 6일(음력))

②참부모넘의 날 : 1960년 3월 1일(음력)

③ 참자년의 날 : 1960년 10월 1일(음력)

④ 참만물의 날 : 1963년 5월 1일(음력)

⑤ 잠하나님의 날 ' 1968년 1월 1일(양력)

⑥ 세계통일국개천일 : 1988년 10월 3일(양력)

⑦ 하나님축복영원선포일(칠일절) : 1991년 7월 1일(양력)

⑧ 7 8절(천지부모 천주안식권 선포일) : 1997년 8월 9일(음력 7월 7일)

 

53. 법무부장관,각 언론사장, 기자, 기독교 성직자와성도들은 이 엄청난 사이비 종교인 통일교를 이대로 방치할 것입니까?

 

문선명의 명령 한 마디에 통일교 교인들이 고통을 당하며 거액 재산착취의식으로 말미암아 처절한 가난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므로 사법부는 조사하여 위법사실이 있을때  법적인 조취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통일교 교인들이 세뇌에서 깨어나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가 없어야 할 것이다.

 

54.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1억이 넘는 거액재산 착취의식의 시작이다.
 

기독교 최고의 전성국가인 한국 땅에서 통일교회가 뿌리가 뽑힐 때까지 기독교 성직자와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일치 단결하여 싸워야 한다. 양심적인 사람 한 명이라도 합동 결혼식이라는 미명하에 통일교회에서 결혼하고 청춘을 빼앗기는 비극적인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전 기독교 성도들이 일심단결을 하여 붉은 적 그리스도인 문선명 통일교 이단 집단이 이 땅에서 멸망할 때까지 예수님 이름으로 외쳐야 할 것이다.

 

 

제 3절 기독교 성도들에 대한 박준철 목사의 호소문


통일교회 궤멸을 위해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전국 시군구 기독교연합회에서 스데반 집사의 심정으로 통일교 궤멸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언론과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이 단결하고 합심하여 기도하며이 땅의 통일교회가 뿌리 뽑힐 때까지 전쟁을 하고, 성경 진리대로 사탄마귀인 통일교회를 없애는데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입니다.

국내의 살인집단 백백교나 용화교, 32명의 목숨을 빼앗은 1987년의 오대양교, 종말론, 휴거론을 주장하는 이장림 집단, 박태선 집단, 문선명 집단에서 집사까지 지냈던 JMS(정명석)등 수많은 사이비종교로 말미암아 이 땅의 수백만 영혼이 사이비교주에게 영혼을 빼앗겼습니다.

특히 이단교회 중 살아있는 우상인 문선명 통일 집단보다 큰 것은 역사에 없습니다. 통일교회를 궤멸시키지 않고서는 이단 교회에 대해서 반대운동을 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한국 기독교회가 이단교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영혼을 말살하는 이단 교회의 참극을 알고있습니다.

1955년대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에서 전 기독교 교인들과 합세하여 통일교회 반대운동을 대대적으로 하였습니다.

기독교 학교였던 연대와 이대에서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부모로 믿고있는 대학교수와 학생들은 "학교를 선택하느냐, 문선명 교주를 선택하느냐" 에 2가지 중 1가지를 선택하라고 학교에서 지시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대학교수와 학생들은 문선명 교주를 믿고 교수직과 학생직을 박탈당하면서 문선명을 따라나온 것입니다. 참으로 사이비교주에게 세뇌되면 부모형제를 버리고 교수직까지도 포기하면서 사이비교주에게 세뇌된 것을 볼 때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55년 3월 24일, 감리교 학교였던 이대는 교수 5명(양윤영, 한충화, 최원복, 김영운, 이정호)과 1955년 5월 11일은 통일교 이단교회 신앙을 함으로 학생 14명이 퇴학 처분되었습니다. 1955년 3월 5일, 박상래 연대교수는 통일교회의 신앙문제로 퇴직 되었습니다.

한국 1200만 기독교 목사와 성도들은 문선명 통일집단이 이단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잘 모릅니다. 기독교가 수 십년 동안을 침묵함으로써 통일교회는 47년 동안 세계 185개국에 통일교회의 원리강론 교리를 전파하여 뿌리를 내렸습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인류역사에 전무 후무한 사악한 사이비 교주요, 우상입니다. 기독교는 통일교회와 전쟁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통일교회와 이단교회를 이단이라고만 생각하고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선명 집단과 같은 이단들이 번성하는 기회로 삼고 문선명이 의도 하는데로 움직여주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진리대로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같이 갈멜산에서 바알신 450명을 궤멸시켰던 역사와 주기철목사의 순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문선명 사이비 종파를 없애야 합니다.

기독교는 통일교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1200만 기독교목사와 성도들이 통일교  궤멸을 위해 외치지 않는다면 누가 문선명 사이비종파를 파멸시키겠습니까? 한국 기독교는 초대교회의 순교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2의 말틴 루터와 같은 심정으로 저는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외치겠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교주를 이 땅에서 기독교 교인들이 단결하여 없애지 않는다면 한국 기독교는 이단교회에 방치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이제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집단의 멸망할 때가 왔습니다. 전 기독교는 사탄 마귀와 가라지요, 영혼을 파멸시키며 가정을 파탄시키는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궤멸시키는데 동참해 주십시오.

이 저서는 일생 동안 문선명 사이비집단을 이길 수 있는 방패요, 무기가 될 것입니다. 이단교회의 정체와 비리를 알 수 있고, 1명의 전도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교재가 될 것입니다.

저의 저서는 한국 기독교 목사와 신학생, 교회 입직자, 평신도와 양심적인 사람들이 구독해야 될 교재입니다. 또한 일생동안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알고, 대처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저의 글을 읽는 분들 가정에 하나님께 영광이요, 은혜와 축복이 넘칠 것입니다.

 

제 4 절 한국 기독교 통일교 대책협의회 설립,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한국 기독교 이단 종파 문제 연구소 설립

 

저는 문선명 사이비 통일교 교주에게 원리강의로 세뇌되고 교육되어 30년 동안 영혼을 빼앗기고 청춘을 빼앗겼습니다. 이제 심장판막증, 심부전증 등으로 인하여 죽음까지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어떠한 핍박과 고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대적이요, 기독교의 원수인 사이비 종교와 교주를 뿌리뽑고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틈타 사이비 교주들이 이 땅에 붉은 용이 되고 늑대가 되어 선량한 영혼을 미혹하여 빼앗고 세뇌시컥 삼키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이비 교주가 만들어짐으로 강간, 우상 숭배, 재산 착취, 가정파탄 등 그 피해가 실제로 혜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납니다.

사이비 교주들은 불쌍하고 선량한 이 땅의 국민들의 영혼을 빼앗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세를 외치며 자칭 재림주 구세주 메시아 참 아버지로 자칭하며 문선명과 같은 이단 사이비교주가 자신의 제국을 세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들은 공갈협박으로 힘없는 교인들을 세뇌시키고 교육시켜 피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끝내는 배반하며 버리는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자기 교인들을 이용하고 쓰레기 버리듯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이 땅에 사이비 종교를 박멸하고 사이비교주를 뿌리뽑는데 앞장서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 땅의 사이비 종교를 박멸하여 뿌리뽑는데 기독교성직자와 성도들이 앞장서신다면 이 땅의 사이비 교주들은 한 사람도 발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 동안에도 사이비 종교에 대한 많은 비판과 기도회를 실시해왔습니다. 그러나 80~90년대 기독교는 사이비 종교를 뿌리뽑는 데 무관심, 무방비, 무책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사이비 교주에게 수많은 영혼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통일교 집단도 이단이라고 제처 둘 것이 아닙니다. 진작 궤멸 운동하여 뿌리를 뽑았더라면 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매일 전도되어 지옥 길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마음 속으로만 통일교가 이단이라고 제쳐둘 것이 아니라 입으로 소리내어 직장이나 내 이웃, 가게 분들에게 "문선명은 사이비교주요 적그리스도요 합동결혼식을 하면 1억씩을 착취하는 사이비집단" 이라고 매일 외쳐야 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이비 종교에 빼앗긴 사랑하는 아들 · 딸을 찾기 위하여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기독교회가 일치 단결하여 사이비 종교근절을 위한 대책을 세우기를 바랍니다. 언론과 기독교회는 연합이 되어 대대적인 사이비 종교 퇴치를 위한 기도회와 캠페인을 매달 전국 시군구 기독교연합회 벌려야 할 것입니다.

 

제 5 절 국제 자살 · 살인 방지 연구소 설립 계획


1998년 5월 1일, 저의 꿈에 하나님의 큰 음성이 "너와같이 분노와 배신감을 갖고 한이 많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마지막 선택하는 길이 자살이다. 너는 네 자신이 자살 시도를 수십 번을 하였듯이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을 바꾸어 주어라. 그러면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수많은 사람이 자살하지 않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새로운 소망을 갖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주어라" 들렸습니다.

그 때 살인 방지 연구소를 설립하라는 마음속의 생각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간증 예배 때 경각심을 갖는 말씀을 증거합니다.

통일교회는 문선명 교주를 믿고 합동결혼식을 하여 가정 천국을 이루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천국이 아닌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 교회 때문에 자살해 죽는 사람이 제 주위에도 있었습니다. 통일교 부산 교구본부에 소속된 36만 쌍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김동수씨도 결혼을 하여 살다가 1998년 5월에 목을 매고 자살해 죽었습니다.

오진수씨와 이인자씨 부부는 1982년도 6,000쌍 합동결혼식을 받았습나다. 1997년 9월 13일날 추석을 목전에 두고 이인자씨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와 통일교에 대한 배신, 합동결혼식의 처절한 생지옥 생활을 뒤로하고 아파트 안방 문고리에 목을 매고 자살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 합동결혼식은 처참한 가정파탄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오진수씨와 이인자씨는 통일교 회사인 일화제약과 통일산업에 근무하며 요령을 부릴 줄 모르고 아부할 줄도 모르는 우직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성실하게 일을 했지만 아부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살다 보니 통일산업에서 53세에 퇴사할 때까지 반장이나 주임 한 번도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진실하고 성실한 교인 이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통일산업에서 근무하면서 IMF 때 부도가나 월급을 11개월이나 받지 못하여 가정생활이 처절한 상태에서도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십의 삼조 헌금, 구국헌금, 160쌍 행사비, 1600쌍 행사비등 각종 통일교 헌금을 내라고 하였고 가정은 파탄 되었습니다.

이인자씨는 착한 성품을 갖고 가정천국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삶을 포기하고 안방 문고리에 목을 매어 죽음으로서 문선명 교주에게 항변하였던 것입니다.

경남 교구장과 사모는 1년 동안 교회 앞에 있는 오진수씨와 이인자씨 가정에 단 한번도 심방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인자씨가 자살을 할 때까지 경남 통일교 교구장은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어도 무관심, 무책임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회에 들어와 오진수씨와 이인자씨가 합동결혼식을 하지 않았다면 가정은 파탄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자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인자씨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지만 자살로 인생을 마치자 너무나 허탈하여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 계기로 자살과 살인 방지 연구소를 설립해야 되겠다고 더욱더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과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저는 자살하려는 한 생명이라도 구할 수만 있다면 그 길을 갈 것입니다.

회사가 부도가 나고 실업자가 되고 가정이 파탄되어 이혼되고 전 가족이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의 원혼을 누가 풀어 줄 것입니까? 저는 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이 외롭고 고독하고 의지할 곳도 없이 모진 인생의 비 바람을 맞으며 마지막 자살을 선택할 때 속수무책 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빠른 시일 내에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사정이 허락하면 자살 살인 방지 연구소를 설립하여 한 생명이라도 구하고 싶습니다.

 

 

 

제 23 장 문선명 통일교 비판

 

 

제 1 절 문선명의 출생과 통일교 창단 배경


문선명은 1920년 1월 6일(음력)에 이북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부 문경유, 모 김경계 사이에서 13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문성명은 1935년 4월 17일 부활절에 예수님을 만나 특별 계시를 받아 재림주 사명 인계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1938년 4월에 경성 상공실무학교 입학, 1941년 2월 25일에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졸업을 하였다. 1944년도에 서울에 있는 가시마구미 토목 건설회사 전기기사로 취직하여 근무하였다.

 

문선명은 1945년 10월부터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섭절리 이스라엘 수도원에서 김백문 교주에게 6개월 동안 기독교 근본원리 교육을 받고 세뇌되어 있다가 서울 상도동에서 교회 인도자로 있다가 문선명 교주는 1946년 6월 6일에 김백문을 배반하고 김백문 사교 교리인 성서신학과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교리로 만들어 평양에 가서 문선명은 재림주 참부모를 자칭하며 기독교를 비판하고 포교 활동을 하였다.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할 정도로 평양은 기독교회가 왕성하였습니다. 평양에서 부터 문선명은 사교교리를 통하여 통일교 포교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양에서 김종화 유부녀 집에서 어린양 혼인잔치를 문선명이 하게 되어 사회혼란 음행죄로 감옥에 가게 되어 1948년 2월 20일에 평양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1948년 4월 7일에 문선명의 재판결과 5년 감옥생활을 언도 받고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이후 1948년 5월 20일에 흥남 감옥소로 이송되어 형무소 생활을 하던 중 터지지 말아야 될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말미암아 문선명이 감옥에서 해방되어 남한으로 피신하여 부산 수정동에서 교회를 하다가 최선길 본부인이 문선명의 피가름 행위, 혈대 교환의식을 참다 못하여 문선명 교주를 폭행함으로 문선명은 부산 범냇골 이라는 산에서 기독교인을 포교하였다.

 

그 이후에도 최선길 본부인이 찾아와 문선명 교주의 부도덕한 행위 때문에 싸움을 하여 문선명 교주는 서울로 도망쳐 올라왔고 서울 성동구 북학동 세대문집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간판을 1954년 5월 3일에 걸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 교주는 온갖 피가름의식과 혈통복귀의식으로 최선길 부인과 불화중 자기 아내도 전도하지 못하고 1957년에 이혼하였다.

 

문교주는 김백문 교리를 훔쳐 1954년 5월 3일에 2대 협회장 '유효원'과 '김원필', '박정화' 등 6인이 정리하여 1957년 8월 15일 통일교 원리해설로 만들었다. 1966년 5월 1일에 통일교 원리 강론으로 책을 출판한 것이다.

 

부산 영도 신상진씨 집에서 통일교 2대 협회장인 유원효 씨와 사촌 유민효, 유영효 3형제가 입교하게 되었다. 유원효는 서울대학교 의대를 다니다가 결핵성 관절염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문선명 교주는 김백문에게 교육받은 그 기독교 근본원리 강의를 유원효 씨에게 다시 통일교 원리로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유원효 씨는 다리가 굳어서 쓸 수 없어 눕거나 의자에 앉아서 문선명 교주의 강의를 밤낮으로 들었다.

 

1954년 2월부터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 교주의 기독교 근본원리 강의를 갖고 문선명 교주와 유원효, 유민효, 유영효 3형제와 이창환(초대 통일교협회장), 김원필, 박정화 이렇게 6명이 종로에 있는 여관에서 하숙을 하며 통일교 교리를 썼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김백문의 강의를 통일교 원리강의로 만드는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그때 6명에게 5만원을 주면서 전세 집을 마련하여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 작업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유원효씨는 매일 원리해설을 정리하였고 유민효씨와 박정화씨는 원리원본을 기록하면서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 교주의 교리가 문제가 많다고 하였다. 유원효 통일교 2대 협회장도 원리해설을 집필하면서 통일교 교리로 사용한다는 것이 모순이 많이 하며, 기독교 근본원리 강론을 이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강론을 고치기 위해 문선명 교주에게 여러 의견을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문선명 교주가 대답을 하지 못하는 부분은 유원효씨 생각대로 원리해설을 썼다.

 

문선명은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어 놓고도 통일교 목사 교인들에게 재림주가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계시 받은 새진리라고 주장하지만 조작된 것이며 거짓이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을 속인 것이다.

 

문선명은 여러 사람이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던 중에 성동구 북학동 391번지 통칭 세대문집이라는 가정집에서 1954년 5월 1일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 협회라는 간판과 통일교 창립을 하게 되었다.

 

통일교 협회 창립일을 1954년 5월 1일로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통일교 창립일은 1954년 5월 3일이다. 김백문이라는 사이비 교주에게 6개월 동안 교육 받은 문선명 교주가 그것을 도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 또 한 사람의 가짜 재림주인 문선명 교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훔쳐온 교리로 1954년 5월 3일, 원리 해설이라는 통일교 원리강의를 선포하고 통일교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유원효 씨와 사촌인 유민효, 유영효 3형제는 통일교에 충성꾼 이었고, 통일교의 산 증인이다. 30가정 최초 합동결혼식을 하였지만 유원효는 1970년사망을 하였고 유민효, 유영효 형제는 문선명 교주가 일생동안 이용하고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버렸다. 그들은 일생 동안 이용만 당하고 통일교를 떠났고 버림받은 것이다.

 

제 2 절 원리 강론은 김백문 교리를 도용한 것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 창조원리, 타락론, 복귀원리, 재림론까지 만들고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한 것이 아니라 사생아이고,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메시아 재림주라고 주장한다.

또한 기독교는 구원이 없는 종교라고 강조하여 오직 구원은 예수가 아닌 문선명 자신만이 재림주로서 구원 해 줄수 있고 성경진리가 아닌 통일교 원리강론 새진리 성약말씀만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혈대교환, 혈통복귀의식, 피가름,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한다고 주장한다.

 

문선명의 통일교 원리강론인 창조원리, 타락론, 복귀 원리, 재림론은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와 동일한 내용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 기독교 근본원리를 문선명이 도용한 것이다.

 

문선명은 통일원리 강론이 성약 말씀이며, 재림주가 계시를 받아쓴 새로운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거짓이다.

 

제 3 절 문선명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비판


(지면관계상 요점만 말씀 드리고 교리전체비판은 다음 책에 논할 것입니다)

 

1. 통일교회의 원리 주장은 새 진리의 필요성과 사명을 역설하고 있다.

 

(요한복음 3:12, 요한복음 16:25)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만이 새진리요, 성약이라고 주장하며 성경은 사명이 끝났고 진리(통일교원리)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반증- (계시록 22:18) '성경진리를 가감하면 생명록에서 이름을 제 할 것이다·(마태복음 5:18) '율법 일점 일획도 가감말라'(요한복음 3:16) '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시며 진리는 성경말씀 뿐이다. '(갈라디아1:8) 성경말씀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자, 저주를 받을 것이다'

 

2.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새 말씀의 사명을 역설하고 있다. (요한복음 16:25, 계시록 5:1, 계시록10:11)

 

통일교 참조원리는 성경의 진리성을 부인하고, 구약과 신약 66권 사명이 끝났다고 주장한다. 예수를 믿어도 진리를 찾아가는 교과서라고 주장한다. 문선명 재림주 시대는 원리강론이 성약이며, 새진리라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성경진리 말씀을 자칭 황제 참부모 재림주라는 세뇌교육용으로 인용 할뿐이다. (요한복음 16:12)

*반증-(요 3:16),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요, 진리는 성경뿐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3. 문선명 사이비 재림주에게만 구원이 있고, 기독교 성경말씀은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반증-(사도행전 4:12, 16:31), 주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4. 원리강론은 창조목적이 문선명 교주를 자칭 재림주 참부모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세기 1:26~31)"

 

반증-(사 43:1, 고전 10:31), 통일교 교리에 하나텀의 이성성상을 주장하는데 문선명 교주가 하나님을 닮아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졌고 몸과 마음 즉 이성성상으로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미 성서에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아 되어진 것을 문선명 교주는 자신이 발명특허나 낸것같이 주잔하지만 거짓이다. 만유원력 수수작용도 되어진 결과를 논하는것이지 새진리가 아니다.

 

5. 통일교 인류역사 종말론은 기독교 종말론과 정면 배치된다.

 

기독교는 성경진리대로 불심판을 믿지만, 통일교 문선명 교주는 불심판을 부정하며 말씀 심판이라고 주장한다. 문선명 교주 자신이 재림주로서 통일교 성약말씀인 원리강론을 새진리라고 주장하며 문선명과 통일교 원리강론을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거짓이다. (벧후 3:10~12)통일교 원리강론에는 진리심판 곧 말씀심판이라고 주장한다. (약 3:6)

"반증- 벧후 3:10~12, 살전 4:16~17, 마태복음 27:52, 마태복음24:29

 

6.구주론은 예수를 실패자요, 예수 십자가를 믿어도 구원이 없으며, 영적 구원만 있고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를 믿어야만 영육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거짓이며 적그리스도이다.

 

기독교 교인들도 문선명 재림주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지만 문선명 자신은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이비 교주이다. (마태복음 16:23)

"반증- (요3:16, 창1:28), '사단아! 물러가라.'(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3:14), (눅 9:31)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시며 십자가 보혈로만이 인류가 죄사함을 받을 수있다.

 

7. 통일교 원리강론 부활론은 예수 십자가 부활을 부정하며 기독교 성도 부활을 부정한다. (살전 4:16)

"반증-(마 27:25, 눅 9:60, 롬 G:23)

 

8. 통일교 원리강론 재림론은 문선명 자신을 재림주로 만들기 위한 교리 이다.

 

① '재림주님은 언제 오시나?' 문선명 교주가 이 땅에 태어난 때이다. (마 24:14, 땅끝까지 천국, 마24:32) 문선명 자신이 참부모 재림주로 태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증-(마 24:36, '그날 그때 모름' , 계 3:3 '도적같이 주님 이 온다' )

 

② '재림주님은 어떻게 오시나?' 재림주는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고 여인의 (마24:30)몸을 통해 태어난 문선명 교주가 재림주라고 주장한다.

"반증-(계 12:5 '철장' , 눅 17:20, 마 7:21 '주의 뜻' )

 

③ '재림주는 어디로 오시나?' 동방 대한민국으로 오신다 (계7:2~3)문선명의 주장과 통일교 원리강론 주장은 언제 오시나? 한국에 재림주가 오고 1920연대에 태어난 문선명 교주(본이름 문용명)만이 재림주라고 통일교 교인들이 받들고 있다. 어떻게 오시나? 재림주는 구름 타고 오는 것이 아니고 여인의 몸을 통하여 낳은 문선명이 재림주 황제 참부모 구세주라고 주장한다.

 

재림주는 어디로 오시나? 극동의 중심 동방삼국인 한국으로 재림주가 온다고 교리적으로 가르치며 통일교 자칭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문선명만이 인류의 구세주 메시아라고 세뇌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참으로 인류역사에 이렇게 날조를 밥 먹듯이 하는 이단 사이비교주는 문선명 밖에 없다.

(마태복음 23:33, 포도원비유)

'동방삼국은 중국, 일본, 한국인데 중국은 신을 부정하는 공산국가 이기 때문에 재림주가 못 오시고, 일본은 천주대신 우상 숭배 국가이기 때문에 재림주가 못 오신다고 주장한다. 재림주는 한국에 오기 싫어도 한국으로 와야 된다고 주장한다. 문선명만이 오직 참부모 재림주라고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반증-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이며 수많은 영혼을 빼앗는 사악한 사이비 교주일 뿐이다. (계시록 12:9 '하늘에서 큰 용이 되어 쫓기니 이는 곧 옛 뱀이요 사단이다. ')

문선명은 본래 이름이 문용명 인데 가운데 '용' 자 '적그리스도용자' 를 빼어버리고 '선' 자를 집어넣어 자신은 태양이다. 문은 달이며 선은 태양,명은 스타(별)이다. (창세기 37:1 요셉의 꿈.)

 

모세 오경과 구약은 촛불에 해당되고 이미 전깃불인 예수님 신약 말씀이 선포됨으로 구약의 사명이 끝났고 문선명의 이름인 태양인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 교주가 재림하심으로 예수님의 사명은 끝났다고 문선명 사이비교주와 통일교 원리강론은 재림론에서 결론을 맺고 있다.

문선명 교주야 말로 하나님의 대적원수이며 전세계 19억 기독교 교인들의 원수요, 한국1200만 기독교 교인들의 원수이며 일순간의 악연으로 통일교회에 빠져 세뇌되어 지옥 길로 가는 사람들의 원수이다. 억울하게 자살하고 이혼, 가정 파탄된 불쌍한 영혼들의 원수요, 박준철 목사의 빼앗긴 30년을 짓밟은 원수가 바로 문선명 교주이다.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은 예수님을 정말 믿고 성경 진리안에 산다면 하나되고 단결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를 막기 위해 문선명 통일교 집단을 뿌리 뽑아야 할 것이다.

 

9. 통일교 원리강론, 타락론은 아담과 하와가 지의 뿌리가 된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하와의 종이었던 천사장 루시엘과 하와가 불륜한 사랑관계로 영적 타락을 하였고 아담과 하와가 불륜한 사랑관계로 육적 타락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되는 재림주 문선명 교주가 인류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복귀해야 된다는 복귀 원리 교리 이다. (창세기 3:I~7)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면 완전구원의식을 치르기 위하여3일 혈통복귀 피가름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반증-(요 1:3, 창2:17),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지요, 성경 어느 구절에도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타락했다는 성경구절이 없는데 통일교 원리강론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타락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예수를 부정하고 성경을 부정한 것이다. 통일교 원리강론은 예수님 성령잉태를 부정하며 사생아요,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간 예수라고 주장한다. 오직 구주는 문선명이라고 주장하지만 적 그리스도요, 사이비 교주일 뿐이다.

 

 

제 4 절 예수, 공자, 석가를 자신의 제자라고 말하는 문선명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지금까지 집회 때마다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 등 역대 정권을 싸잡아 통일교회를 이용하고 배신했다고 온갖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했습니다.

 집회 때마다 "여기에 정보부나 안기부에서 온 사람이 있으면 청와대에 보고하라" 고 온갖 만용을 떨었습니다. 또한 기독교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하며 "문선명을 이단으로 규정짓고 반대하지만 통일교는 성공하고  기독교는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를 반대하기 때문에 심판 받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1950년에 박태선 장로와 나운몽 장로가 문선명과 하나 되었더라면 기독교와의 통일은 1950년에 이루어져 문선명 통일제국을 세웠을 것이 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문선명은 "구약적 복귀패는 박태선이 책임자이고 신약적 복귀패는 나운몽 장로패이다. 복귀패 재림주님은 통일교 신령집단 재림주인 내가 책임자이다. 주님을 위한 기독교가 되어야 하는데 자기 교파 교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망하고 통일교와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승리할 것이다. 기독교가 아무리 반대해도 통일교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승리할 것이다. " 라고 했습니다.

 

문선명은 ''나는 재림주 참부모로서 영계에 가면 참부모 이름이 최고이다. 이 지상에서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고 충성한 사람은 최고의 축복이고 문선명 재림주를 믿고 복종하지 않은 기독교인은 원수가 되어 지옥을 가게 될 것이다 지상에 있는 기독교 교인들에게 문선명 통일교 재림주를 믿으라고 아무리 외쳐도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간다. " 그러면서 문선명은 "석가, 공자, 예수는 내 제자다" 라고 외쳤습니다.

 

통일사상 연구원 원장을 하다가 죽은 이상길의 '영계에서 보내온 편지'라는 책이 있는데 문선명이 인정한 책이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에게는 필독서인 '영계의 실상과 지상 생활 1, 2, 3, 4, 5권' 에 예수님을 저승에서는 한없이 외롭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어 명예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문집단의 통일교 천국 가는 구원 의식인 합동결혼식은 문선명으로부터 용서 기도를 받고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어야 구원받고 천국 간다고 주장하여 영혼결을 시킨 것이다. 예수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1200만 기독교 교인이 매일 궤멸을 위하여 외쳐야 한다.

예수님이 역대 성인들이 문선명 교주를 믿고 구원받고 싶다고 했으며 통일교 구원의식인 영혼결혼을 시켜달라고 했습니까? 참으로 사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문선명을 구세주 참부모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연세가2000세고 문선명은 나이가 83세 입니다. 누가 아버지 입니까?왜 통일교 세뇌용 책에는 문선명 참 부모님이 불효 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예수님이 문교주에게 빌고 있다는데 이런 조작으로 통일교 교인을 세뇌시키는 문집단은 1200만 기독교 목사 성도들이 의분심을 갖고 통일교 집단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교통사고로 죽은 문흥진의 지시를 받고 마호메트, 공자, 석가등 인류 역사에 왔다 갔던 영웅, 열사, 기독교 순교자들이 영계의 총 사령관인 문흥진의 명령과 지시에 복종하고 있다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문선명 재림주가 죽어서 천국 문을 열고 천국에 갈 때 예수님은 구원받는다고, "영계에서 보내온 편지" 에 써 놓았습니다. 참 부모님이 영계에 오셔서 영계를 정리할 때까지 예수님은 기다려야 한다고 책에 써놓고 예수님의 명예를 훼손했습니다.

 

적 그리스도인 문선명의 사주로 통일교 교인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계의 가짜 책을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하게 하고 있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한 통일교 교인들을 각종 공갈 · 협박으로 재산을 착취하는 도구로 이용하곤 있습니다.

 

지금도 사이비 교주에게 미혼 남녀가 매일 통일교 집단에 유혹되어 영혼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로 믿다가 통일교 교인이 통일교를 떠나 문선명한테 배운대로 자신을 재림주라고 칭하며 사이비 교를 창단한 사람도 수십 명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80년까지 통일교 집사일을 했던 JMS(정명석)사이비교주입니다. 정명석 집단에서 20만명이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1만 5천명의 영혼이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중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다가 탈퇴한 주영희 패거리들이 교단을 만들었는데 그는 자기가 재림주고, 2000년 전 세례요한이 예수를 증거 해 주듯이 문선명의 사명은 끝났다고 하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제 24 장 혈통복귀 피가름 집단인

 

문선명 통일교

 

제 1 절 처음부터 혈통복귀집단이 된 통일교


문선명은 통일교 협회창립 일인 1954년 5월 1일 이전인 1953년 12월 24일부터 1954년 1월 14일까지 부산의 신상진, 유신선 씨의 집에서 21일간 밤낮으로 부흥집회를 열었다. 부산시 범냇골(부산시 동구 범6동 1513번지) 산꼭대기 토탐집에서 생활하다가 1953년 3월에 수정동(부산시 동구 수정5동 427번지)에 가정주택을 사서 통일교로 사용하였다.

 

문선명은 사악한 통일교 복귀원리라는 섹스교리로 통일교에 예쁜 여자 교인들과 피가름 구원의식을 치뤘다. 문선명이 복귀 원리라는 미명하에 통일교 여자교인들과 혈대교환 혈통복귀 의식인 섹스를 하는 걸 첫번째 부인 최선길씨가 알았다. 최선길씨는 혈통복귀 의식을 치른 여자교인들을 폭행하고 남편인 문선명의 멱살을 잡고 폭행을 하였다. 문선명은 도망을 쳤고 최선길씨는 수정동 가정 주택 교회에서 생활했던 여자 통일교 교인들을 전부 쫓아내고 수정동 통일교의 집과 가재도구를 1953년 9월에 몽땅 팔아버렷다.

 

문선명은 최선길씨를 피해 이곳저곳을 도망 다니다가 1953년 9월 17일 통일교 본거지를 옮기려고 서울까지 왔다. 그러나 문선명에게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1953년 12월 24일 서울에 있는 문선명에게 부산 영도에 신상진이라는 통일교 교인이 자기 집에서 부흥회를 해달라고 하였다. 부산 시내 전체 통일교 교인 28명이 신상진씨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문선명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12시간 걸리는 완행열차의 기차비가 없어서 올 수가 없자 6마리아의 한 사람인 오명춘 집사가 여비를 급하게 마련해 주어서 서울에서 부산 영도교회까지 올 수 있었다.

 

후일 오명춘 집사는 문선명 교주와 혈통복귀 의식을 치른 후 문선명의 노예가 되어 집을 판대금 거액인 500만원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쳤다. 이 사건으로 오명춘 집사는 가정이 파탄되어 이혼하고 버림받고 결국 문선명 교주에게 까지 버림을 받았다.

 

문선명 교주는 혈통복귀 원리 섹스교리로 말미암아 영도에서도 처녀와 복귀의식을 치러 한 처녀 대학생의 파멸을 가져왔고 그 처녀는 사생아까지 낳았다.

문선명은 서울에 올라와서도 수많은 처녀들과 6마리아, 60마리아를 만들어 혈통복귀 섹스를 통한 의식으로 완전 구원, 사기교리를 실천하였다.

 

서울에서 이성화라는 처녀를 혈대교환, 피가름, 혈통복귀 의식인 섹스로 복귀의식을 치렀다. 이성화 처녀는 후일 아들을 낳는 비극을 가져왔다.

문선명은 40세에 1960년 4월 11일, 몇 번째 부인인지 알 수 없는 어린17세(고등학교 2학년)의 나이 어린 한학자를 아내로 맞아 어린양 혼인잔치를 하여 지금까지 14남매를 낳았다. 한학자와 살면서도 1965년도 최순화라는 처녀와 혈통복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간통하여 박 사무엘(박준경)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미국 이스튼 가든 호화 궁전 저택에서 유럽, 미국의 젊고 예쁜 통일교 여자교인들이 문선명 교주에게 인사를 할 때 끌어안고 키스를 하였다. 문선명 교주와 끌어안고 키스 하는 광경을 본 한학자는 모든 유럽 미국 여자들은 문선명 교주에게 경배 드리고 인사할 때 문선명 교주와 1m 거리로 접근금지를 시키라고 명령하였다.

 

제 2 절 문선명은 혈통복귀교리를 통해 가정을 파괴한다


문선명 교주야말로 이 땅의 혈통복귀 피가름 종교를 창립하여 윤리와 도덕을 파괴시킨 최초의 가정 파괴범입니다.

 

문선명은 자기의 혈통복귀 피가름교리를 위장하기 위하여 타락론을 강조하고 가정의 윤리와 도덕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에게는 간통죄가 가장 큰 죄라고 말합니다. 또한 자신의 섹스교리를 위장하기 위해 선문 대학교에 순결학과를 만들어 놓고 미혼 남녀들이 순결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정정 파괴범이 어떻게 자기를 위장하고 가증스럽게 통일교 교인들을 속이고 국민까지 속인단 말입니까?

 

문선명은 신정순, 이순철, 오명춘, 김안실, 유신선, 임영신 이렇게 6마리아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혈통 복귀하였습니다. 6마리아는 60마리아로 늘어났고 수많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이 문선명 교주의 피가름 혈통복귀의식으로 희생이 되었습니다.

 

문선명은 수많은 처녁들과 유부녀들의 영혼을 빼앗아 자신의 남편보다도 문선명 교주를 더 극진히 모시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일례로 수많은 60마리아 중에 옥상현씨는 원래 장대현 교회의 권사였습니다. 옥상현 권사는 통일원리를 들은 후 장대현 교회에 나가지 않고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라고 믿고 따랐던 여자 교인입니다. 그녀는 문선명 교주와 복귀의식을 치르고 미혹에 빠져 가정이 파탄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옥상현 권사는 문선명 교주와 김종화와 같이 구속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장대현 교회에는 우화섭이라는 장로님이 계셨는데 평양 고무 연맹의 이사장으로 돈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옥상현 권사는 우화섭 장로의 힘으로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으나 문선명 교주는 평양 감옥에서 흥남 감옥소로 이송 되었습니 다.

 

그러자 옥상현 권사는 그 먼 거리를 쫓아가서 돈을 마련하고 사식을 마련하여 문선명 교주의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문선명이 흥남 감옥소에 있을때 옥상현 씨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털실로 짠 것처럼 양말을 만들어 문선명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옥상현씨는 두 딸과 같이 살았는데 그 곳에서 문선명, 문정빈, 김원필씨도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옥상현씨는 문선명 교주의 부산 피난 시절에는 1945년 4월 28일에 결혼한 첫 번째 부인 최선길을 대신해 문선명의 뒷바라지를 다 했습니다. 40년을 문선명을 모시고 그림자 처럼 따라 다녔지만 그녀는 통일교회에서 버림받고 보살핌도 받지 못했습니다. 후회와 처절한 가난으로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제 3 절 통일교는 혈통복귀의식이라는 3일식 피가름행사


통일교에서는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기하급수적으로 릴레이식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복귀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복귀의식을 치른 사람만이 완성된 아담, 하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통일교 원리인 타락론에는 죄의 뿌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되어 죄의 뿌리가 된것이 아니고 아담 하와의 불륜한 사랑관계로 타락된 것이 선악과요 죄의 뿌리라고 통일교 원리 강론 교리는 주장합니다. 따라서 천사장 루시엘이 하와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더럽혀 죄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에 문선명 재림주 메시아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혈통복귀를 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혈통복귀 피가름을 통한 혈통복귀야 말로 모든 인류를 하나님 앞으로 구원한다는 의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동방 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서 그 당시 문선명 교주와 같은 혈통복귀 피가름교주가 나타나 선량한 처녀들과 수많은 가정을 파괴해도 징벌하는 법조인이 없었고, 종교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문선명 교주는 자신의 수재자에게도 복귀의식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제 4 절 문선명이 창안한 혈통복귀 피가름의식


통일교 교인이 많아지자 문선명은 개개인에게 혈통복귀의식을 치를 수가 없었습니다. 점점 세상 이목과 언론의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문선명 교주 자신이 통일교 수 많은 여자들을 모두 혈통 간음 관계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방법을 짜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이 합동결혼식을 할때 포도주인 성주의식을 먼저하게 되는데 이때 포도주에 21가지의 과일즙과 포도주를 넣고 자신의 00을 넣어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는 신랑, 신부에게 혈통 복귀 의식인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입니다. 그 포도주는 문선명 교주의 피와 살을 의미합니다.

 

또한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고 3년 전도기간이 지난 다음 3일 혈통복귀 피가름의식을 함으로 문선명의 혈통을 이어받고 혈통복귀를 한 통일교 교인들은 아담이 지었던 원죄는 물론 조상 대대로 지었던 혈통죄와 형제들이 지었던 연대죄 그리고 자신이 지었던 자범죄가 깨끗해지고 완전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제 5절 문선명 통일교의 혈통복귀 피가름 3일간 복귀 의식

 

다음은 문선명 자신이 처녀와 유부녀들에게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 구원의식을 행한 것 같이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신랑 신부에게 통일교 원리강론 복귀원리 완전구원교리가 3일 행사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라는 증거의 공문이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신랑 신부가 행하는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의식
 

1. 의의


가. 전체 복귀섭리역사를 탕감 복귀하는 실체적인 복귀식(탕감식)이다.

첫째 날은 구약시대(타락한 아담, 구약권)의 복귀식이다.

둘째 날은 신약시대의 예수님 입장을 탕감 복귀하는 의식이다.

셋째 날은 복귀된 신랑으로서 신부를 재창조하는 의식이다.

 

나.문선명 참부모님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는 조건을 세우는 탕감의식으로 아내가 먼저 복귀되어 남편을 다시 낳도록 하는 가정을 외적으로 통과하는 탕감의식이다 내적인 의식이 문선명의 00포도주성주의식 임.

 

2. 준비


가.준비물 : 문선명 참부모님 존영(사진), 심정초 또는 통일초, 성건(수건에 포도주를묻힌 것), 성건을 담는 그릇, 성염(소금),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 행사 식순 등 준비

 

나,본 혈통복귀 피가름 의식은 통일교 합동결혼식 축복 후 40일 동안 부부관계를 하지 않고 성별 생활을 하여 성공한 남편과 아내가 통일교 목사님에게 축도를 받고,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 의식행사를 치르게 된다. 반드시 하루에 1번은 혈통복귀 피가름 행사를 하여야 하며,하루에 2번만 하여도 재 타락한 결과가 되어 죄인이 되는 것이다.

 

다. 3일 혈통복귀 피가름행사에 사용하는 방과 침구일체를 성염(소금)으로 뿌려서 깨끗하게 성별한다.

 

라.신랑 ·신부는 적당한 장소(주로 북쪽)에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 온영(사진)을 모시고 심정초 또는 통일초에 불을 밝힌다.

 

마. 성건(수건에 포도주를 묻힌 것)의식

1) 남편과 아내는 먼저 정성껏 목욕을 한다.

2) 성건을 담근 그릇은 가로 20cm, 세로 10cm, 높이 3cm정도로 하고물은 성건 하나를 적실 정도로만 준비해서 신랑·신부가 서로 완전 나체 상태에서 성건 (수건)으로 몸을 닦은 다음에 그릇에 물이 남지 않도록 한다.

3)성건은 남편과 아내의 것이 바뀌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3일 동안 반드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4)몸을 닦을 때에는 자기가 자기의 몸을 닦아야 하며, 닦는 순서는 머리부터 닦는다.

5)이 의식은 성건으로 몸을 닦아 외적으로 성결케 하는 조건을 세우는 것이다

 

3. 행사


가. 제1일

 

1)성건으로 물을 적셔 몸을 닦은 다음에 다시 양복 또는 하얀 예복을입고, 하나님과 참부모님 존영(사진)에 찬송과 경배를 드리고 가정 맹세를 봉독한다.

2) 아내가 앉고 남편이 아내에게 3배 경배를 드린다(이 때의 아내는 어머니 입장이기 때문에 어머니, 나를 낳아 주십시오 하는 심정으로 경배한다. )

3)아내가 어머니 입장에서 기도한다. (기도내용 : 통일교 축복에 대한감사와 문선명 참부모님 가정의 전통을 상속받는 가정을 이룰 것을결심하고 또한, 어머니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심정을 상속받는 남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4)아내 상위로 사랑행위를 한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남편이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는 의식이다. )

= 참고사항 : 사랑행위(삽입)을 위해서 애무를 해도 된다. 반드시 삽입이 이루어져야 하며 사정을 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정이 안되면(어려우면)사랑행위를 마쳐도 된다. 단, 반드시 삽입은 이루어져야 한다. (주체가 발기가 되지 않아서 삽입이 되지 않을 경우 아내가 남편의 성기를 손으로 잡고 자신의 성기 속으로 밀어 넣어서라도 성공을 시켜야 한다. 사랑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아 시간이 연장될 때에 24시간 이상 경과하면 안 된다. 사랑 행위시 콘돔이나 피임기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

5) 다시 신랑 ·신부는 1회 성행위를 마친 후 다시 정장을 입고 남편이 아내에게 1배 경배를 드린다. (이 때에 남편은 아내에게 "어머니, 나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심정으로 경배한다. )

6) 아내가 두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과 문선명 앞에 첫날 혈통복귀 피가름 혈통복귀 행사를 마쳤다는 보고 및 감사기도를 드린다.

 

나. 제2일 :혈통복귀 피가름행위를 남편이 아래에서 부부관계를 하고,아내가 남편위에서 부부 관계를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1) 첫째날 혈통복귀의식과 둘째날 셋째날 피가름 혈통복귀 의식은 하루한 번만 성교의식을 해야지 통일교 합동결혼식 후 3년 동안 합방을 안해서 정욕이 넘쳐 두번 피가름을 하면 탕감봉으로 매를 맞고 천국 구원의식이 깨어지고 7년동안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

 

다. 제3일


1)제3일째 의식은 남편이 비로소 남자의 주관성을 복귀하는 의식이다.

2)성건의식 후 정장을 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 존전(사진)에 찬송과 경배를 드런다.

3) 남편과 아내가 마주보고 맞절 3배를 한다.

4) 남편이 주관성 복귀된 남자의 입장에서 하나넘 앞에 기도한다. (기도내용 : 남자의 주관성 복귀와 잃었던 조건회복을 감사하는 내용)

5) 아내가 답례기도를 한다.

6)남편 상위로 남편이 3일째에는 혈통복귀 피가름관계를 할 때 아내 위에서 부부관계를 하고, 아내는 남편 밑에서 사랑행위를 한다. 복귀된 아담 가정에서 혈통복귀 피가름로 타락했기 때문에 통일교 복귀 원리인 혈통복귀 피가름로 완전구원을 받은 아담 가정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7)사랑행위 후 성건으로 하체를 닦는다. 닦은 성건은 세탁하지 않고,그대로 말려서 이스라엘 민족이 법궤를 보관하듯이 소중하게 보관하여 자손만대까지 물려준다 그 이유는 완전구원을 받은 중생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8) 정장을 한 후에 남편이 앉고 아내가 남편에게 1배 경배를 드린다.

9)남편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전체 행사의 종료 보고와 절대로 타락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기도 및 3일 행사 성공을 감사하는내용으로 기도한다. )

 

4. 주의사항


가. 3일 행사를 1일이나 2일에 끝내거나 4일 이상해서는 안 된다. 단,3일행사 도 중 불가피한 사유(긴급한 일)로 첫날 행사 후 그 다음날 행사를 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 며칠 뒤 2일째 행사를 할 수는 있다. 기성가정(결혼 후 통일교 입교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합동결혼식을 한 가정)의 경우 나이와 건강의 문제로 계속해서 3일간 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 첫날 행사 후 수일간을 띄워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개월 씩 띄워서 해서는 안된다.

 

나. 성건 사용시 주의사항


1) 마른 성건을 사용해도 안되고 세탁한 성건을 사용 해도 안 된다.

2) 성건을 사용하지 않고 3일 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

3)성건을 서로 바꾸어 사용해도 안되고, 하나의 성건을 둘이서 사용해도 안 된다.

다. 아래와 같이 사랑행위를 한 경우에는 실패가 된다.
1) 첫째 날 둘째 날 남편상위로 사랑행위를 한 경우

2) 셋째 날 아내상위로 사랑행위를 한 경우

3) 삽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행위를 끝낸 경우

4) 본 식 외에 다른 사랑행위를 한 경우

 

라. 3일 행사 첫째 날(둘째 날이나 셋째 날도 해당됨)의 행사를 수일에 걸쳐서 행할 경우도 실패가 된다. 시작된 시간으로부터 24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

 

마. 3일 행사는 반드시 허락하신 목사의 축도를 받은 후에 실시해야 한다

 

바.본 식대로 3일 행사를 하지 못했을 경우 협회 가정국에 상담한 후성별의 탕감조건을 세워야 한다. 그 다음 축도를 받고 성건을 다시지급 받아 3일 행사를 실시한다.

 

사.제1일 제2일 사랑행위 한 후에는 타월로 하체를 닦되 제3일째 날은 반드시 성건으로 하체를 닦은 후 그대로 말려 보관한다.

 

아. 3일 행사중 동일한 일자에 사랑 행위가 중복되지 않도록 한다. 즉,3 일 행사의식이 끝나는 시간과 새로 시작하는 시간이 동일한 날짜에 중복되지 않아야 한다.

 

 

 

제 25 장 문선명은 모든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고

 

파멸시킨다


제 1 절 문선명은 자녀와 가족 구원도 못 시킨 거짓 메시아 이다


문선명은 자신은 하나님이 적그리스도이며 희대의 영혼 사기꾼이다. 첫번째 아내 최선길도 전도하지 못하고 이혼 하였으며 문선명은 혈대교환, 혈통복귀의식, 피가름,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신과 자녀들도 구원하지 못 하였으며 방탕과 음란, 자살, 마약, 이혼, 사고로 자녀들이 죽었다.

문선명의 죄악은 자식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으며 이는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라는 증거이다. 자녀들도 방탕, 마약, 이혼, 동거, 자살, 사고사, 감옥 생활 등으로 고통 당하고 있다. 자신의 자녀들 신앙교육도 책임 지지 못하는 문선명 사이비교주가 인류의 구세주 참부모 재림주라는 것은 거짓이며 영혼 사기꾼이라는 증거이다.

 

문선명이 결혼하여 낳은 여섯 번 째 아들인 문진영(21세)은 1999년 9월26일날 호텔 경영 수업을 위해 미국 네바다주로 가는 길에 있는 '리노'라는도시 호텔에 투숙하던 중 17층 발코니에서 떨어져 자살하였다고, 미국 신문에 대서특필하였습니다. (리노 미국 레바다주 AP=연합뉴스/1999. 11. 11)

그 당시 문진영은 문선명이 수많은 통일교 2세 가운데 뽑은 유화주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유화주에게는 애인이 있었고 그의 애인은 한남동 저택과 미국 문선명 왕국의 저택인 이스튼 가든까지도 찾아가 크나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문진영이는 괴로워 하였습니다. 아기를 하나 낳았지만 별거 하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문진영이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자신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신의 며느리 될 사람의 신앙을 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며느리 후보 중 학벌, 미모만보고 결정하고 맞이하여 결국 사랑하는 아들인 문진영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문선명이 본부인인 첫 번째 부인 최선길과 아들을 버리고 이혼하고 처녀를 피가름하여 사생아를 낳고 그 수많은 가정을 파탄시켰다. 1960년 4월11일 문선명(40세) 부인 한학자(17세)에 자칭 재림주 참부모 어린양 혼인잔치를 하고 낳은 큰아들이 문효진이다.

 

문선명과 한학자 사이에 낳은 큰아들 문효진이 당시 19세, 홍난숙 15세에 결혼하여 5남매를 두고 이혼하였는데 전 며느리 홍씨는 "전 시아버지인문선명 교주는 구세주가 아니며 사기꾼" 이라고 미국 CBS방송에 한 시간 동안 보도 하였습니 다.

 

문선명의 딸 문은진도 "문선명은 자기 아버지일 뿐이지 재림주 구세주가 아니다" 라고 주장 하였습니다 (조선일보, 1998. 10. 08)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며느리 감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그런 부모입니다. 자신의 자녀도 신앙책임을 갖지 못하고 파경을 맞는 자녀들이 있는데 통일교 미혼남녀를 합동결혼식을 시켜 완전 구원해주고 후손대대로 복을 빌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귀중하고 소중한 자식을 죽게 만든 사람이 바로 문선명 교주인 것입니다. 문진영이 죽은 후 통일교회 내에서는 7일 동안 문진영의 죽음을 통일교 교인들에게 숨겼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숨길 수 없어 호텔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발표 하였던 것입니다. 문진영의 죽음은 결국 부모를 잘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처녀인 Y대 여대생 김명희도 간음 간통 복귀의식을 치러 문희진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문희진은 1955년 6월 30알(양력 8월 17일)출생하였고 1969년 8월 1일 14살 때 조치원 부강역에서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유혹으로 통일교인이 된 이득삼과 그 딸 최순화는 문선명 교주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처녀인 최순화와 혈통복귀라는 미명으로 복귀의식을 치러 박 사무엘이라는 사생아 아들을 1965년도에 낳아 길렸습니다.

 

제 2 절 문선명의 둘째 아들 문흥진의 사망


미국에서 1983년 12월말에 문선명의 둘째 아들 문흥진(17세)의 차와 트레일러가 부딪혀 문흥진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문흥진의 시체를 한국에 가져와 1984년 1월 2일 승하식이라며 거창하게 장례를 치렸습니다. 문선명은 1984년 1월 3일 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뉴욕 벨베디아 수련소에서 죽은 문흥진을 위한 애승일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문흥진을 영계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을 세뇌시키기 위하여 재림주 천지부모 행세를 하면서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까지도 신으로 섬기라고 공갈 협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문흥진이 통일교 전체 교인들을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죽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에게 1984련 1월 1일부터 1월 30일까지 금식 철야 회개 기도를 실시하라고 명령하여 실행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죽은 문흥진과 박보희 회장의 살아있는 큰딸 박훈숙을 영혼 결혼시키고 박훈숙을 문훈숙으로 성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1971년에 문선명이 미국 시민권을 가졌을 때 미국성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훈숙은 일생동안 영혼결혼을 하여 살아있는 처녀가 문선명 교주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문선명은 박훈숙에게 죽은 아들 문흥진을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과천교회에 목사로 있으면서 국내의 유명한 사건을 해결한 강창수(가명)라는 형사를 만나 문흥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문흥진이 미국 뉴욕에서 교통사고로 죽기 전 국내에서 과속으로 교통사고를 내어 경찰서에 잡혀 온 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문흥진의 비서 역할을 했던 과장이 강창수 경정을 찾아와 "제발 문흥진의 운전 면허증을 빼앗아 달라" 는 부탁을 한 일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문흥진을 수행하는 비서는 과속으로 차를 운전하는 문흥진이 무섭다고 하며 운전 면허증을 빼앗아 달라고 담당형사에게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떻게 운전하고 다녔는가? 하는 것을 저는 안 보아도 훤히 알 것 같았습니다.

 

제 3 절 재림한 문흥진 노릇한 에지프트


문선명은 통일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문흥진이 죽고 난 후 반드시 이 땅에 재림하여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문흥진이 재림하였다고 떠벌리기 위하여 아프리카 케냐 주재 곽정환 회장과 아프리카 짐바브웨 청년흑인 에지프트와 만났습니다. 에지프트는 1983년부터 통일교 사람들과 접촉한 사람이 었습니다. 짐바브웨 책임자인 어거스틴 마튼 고시와 만나 통일교 원리강의를 듣고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로, 메시아로 믿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문선명은 1987년 에지프트가 적극적이며 설교도 잘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문선명과 곽정환 회장은 에지프트에게 문흥진이 되라고 강요하고 명령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문흥진이 되기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곽정환 회장, 간부들의 설득으로 재림한 문흥진이 되어 통일교 회개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에지프트에게 전세계 통일교회를 다니며 통일교 교인들을 회개시키는 고백식 설교를 하게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을 회개시킨다고 하며 죽은 문흥진이 살아서 재림해서 에지프트에게 영이 들어 왔다고 외쳤습니다. 에지프트를 문흥진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에지프트는 죄있는 통일교 교인들을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에게 죄악을 용서를 받는 조건이라며 죄악의 정도에 따라 몽둥이로 탕감봉이라는 구실로 10대, 7대, 3대, 1대를 무자비 하게 폭행하였습니다.

 

유럽, 아프리카, 남미, 미국, 일본, 한국에서 흑인인 에지프트가 사망한 문흥진이라고 자칭하며 통일교 교인들이 저지른 간통죄, 강간죄, 성 추행죄, 공금 횡령죄, 절도죄, 부부 싸움한 죄를 심판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에게 문선명 교주를 배반한 죄, 욕설한 죄는 몽둥이를 맞아야 용서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공개적으로 에지프트에게 죄악 고백식을 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죽은 문흥진 행세를 하며 전 세계 통일교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죄악을 저지르는 통일교 교인들에게 죄를 용서하여 준다는 면죄부 형식으로 폭행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합동 결혼식 전에 혼전 혈통복귀 피가름 한 것과 합동 결혼식 후 혈통복귀 피가름을 한 것까지도 몽둥이로 폭행을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미국 호화 저락인 이스트 가든에서 에지프트를 불러 환영 만찬회를 열었습니다. 에지프트는 자신을 교통 사고로 죽은 문흥진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문선명 큰아들인 문효진, 셋째 아들인 문현진, 넷째 아들인 문국진은 진짜 문흥진이 재림 한 것이라면 어린 시절에 대하여 말을 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어린 시절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에지프트가 문흥진이라는 것은 거짓이었기 때문에 예언할 능력도 없고 영을 볼 수도 없으며 투시력도 없었습니다. 에지프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문선명, 곽정환, 에지프트 3명은 통일교 교인들의 죄악을 회개시킨다며 사기극, 조작극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협회 최고위층 간부들과 통일그룹 내 기업체 사장들은 에지프트에게 하는 고백식을 피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겹사돈이었던 홍성표 일화사장도 곽정환 회장에게 고백식을 안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곽정환 회장은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겹 사돈인 박보희 총재도 에지프트에게 죄악을 고백하는고백식을 했습니다. 에지프트는 60세가 넘는 박보희 총재를 무차별적으로 폭행 하였습니다. 그래서 박보희 총재는 뇌출혈을 일으컥 뇌수술을 받았고 조지타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습니다.

 

통일교 최초 합동결혼식을 한 36가정(1901년 결혼)부터 6,500가정까지의 모든 축복 가정도 고백식을 하였습니다. 그중 1,800쌍(1975년 결혼) 고백식에 저도 갔습니다.

1988년 12월 18일이었습니다. 그 날 통일교 본부 교회에 1,800쌍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전국에서 모였습니다 1,800쌍 전부가 지를 지었다며 고백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10가지도 넘는 지의 종류 중에 한 가지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1,800쌍 전부가 죄가 있다며 몽둥이로 지를 탕감해 주는 탕감봉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지를 지은 1800쌍 부부는 자리에 앉고 저와 다른 한 목회자가 일어서 있었습니다. 죄악의 조건에 걸리지 않는 저와 다른 목회자는 통일교 죄악 고백식 중 노아 같은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저는 진실과 정직으로 살아 온 목회 길을 회고하며 그 당시 문선명에게 미쳐서 참 부모님께서 저를 지켜 준 것에 대하여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문흥진 행세를 하며 폭력을 행사했던 에지프트는 문선명, 곽정환의 1회용 이용물로 사용되었습니다. 통일교회에서 에지프트를 버림으로 에지프트는 통일교회를 탈퇴했고 문선명 통일 교주는 고백식 후에 문흥진이 에지프트를 떠나 영계로 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1992년 8월 4일 일본 지바시 지바깽 마꾸바리에 있는 국제회의장 대 강당에서 통일교회와 문선명 교주의 문흥진 조작 행사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사이비 교주이고 적 그리스도며 인류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하나님의 대적이라고 문흥진 군 행세를 했던 에지프트가 폭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교 교인들은 이런 내용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 흑인청년 에지프트의 고백식 사건으로 수많은 통일교 교인은 신앙의 타격을 받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부부지간에 간통, 성추행 사건 등이 서로 폭로되어서 왕따가 되고 가정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통일교회 목회자 회의에도 타격을 주었습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에지프트는 교회에 많은 사건을 일으키고 통일교회를 탈퇴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재림주라며 호의호식하는 모습을 보고 에지프트도 사이비 재림주가 되었습니다. 에지프트는 문선명 교주가 하던 것처럼 재림주 노릇을 배웠던 것입니다. 에지프트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에 가서 가루트라는 기독교 종파를 만들어 가짜 재림주가 되어 포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문선명으로 인하여 또 하나의 사이비 교주가 수많은 영혼을 죽이는 재림주가 된 것입니다.

 

제 4 절 문선명과 친인척은 재산착취를 통해 초호화 생활을 누린다.


문선명 교주는 부 문경유, 모 김경계에게 효도하기 위하여 부모가 사망하였는데도 이북에 갔습니다. 이북 김일성이 문선명 교주에게 전세 비행기를 중국까지 내어주어 비행기를 타고 이북에 입국하였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통일교 교인들로부터 거액재산을 착취하여 얼마나 많이 투자 하였겠습니까? 갈 수 없는 이북 평북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고향 땅에 전세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출세하여 개선 장군같이 고향에 가서 죽은 부모에게도 효도하고 형제, 친척들에게도 온갖 선물로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교인1인 당 8만원씩의 돈을 거두어 고향에 땅 30만 평을 마련하고 수백억의 돈을 투자하여 예수님이 탄생한 베들레햄 같이 문선명의 고향 땅인 정주를 평화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남한에 살고 있는 문선명 교주의 사촌 육촌 형제들과 친척들을 통일그룹 사장, 기업체 총 책임자들로 세워 통일그룹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그룹이 망한 후에도 문선명 친척들은 돈을 가지고 초호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 5 절 문선명의 브라질 자르딘 계획


문선명은 통일그룹이 1998년 IMF때 부도가 났는데 전 세계 통일교의 자금줄이 막히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통일교 교인들 가정의 재산 착취 운동에 돌입하였습니다. 문선명은 교인들과 한가족이라고 세뇌 교육을 시키며 부자관계에 네 돈, 내 돈이 따로 없고 아버지 돈이 자식 돈이고, 자식 돈이 아버지 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의 돈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소유권을 이전하라고 하였습니다. 한국의 전통은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인데 어느 누가 자식이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줍니까? 문선명교주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한국과 일본의 통일교 교인들에게 무조건 재산을 자신의 소유로 이전하라는 공문을 내렸습니다. 교인들은 무조건 문선명에게 2,100만원을 총 생축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내야 했습니다.

죄를 용서해주는 천국행 면죄부인 탕감비 1300만원을 바쳐야 되고 조상 구원헌금 수천만원 등 재산을 바치지 않으면 통일교 교인이 아니고 죄인이 되며 지옥을 가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온갖 공갈 협박에도 통일교 교인들은 문선명에게 세뇌가 되고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재산을 바치게 됩니다.

 

문선명은 재산 착취를 통해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통일교 교인은 브라질의 자르딘 40일 수련에 무조건 참석 해야 하며, 만약 40일 수련을 참석하지 않으면 통일교 교인이 아니고 문선명 통일교 제국의 황족의 자격을 박탈한다고 하였습니다. 온갖 공갈 협박으로2,100만원 헌금을 내고 브라질 40일 세뇌교육 수련에 일천만원 경비를 쓰고 참석하는 사람만 문선명 사이비 종교 통일 제국의 황족 자격을 갖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문선명은 1차로 1억 평의 남미의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수련소를 매입하였습니다. 이 땅은 통일교 교인들을 잔인하게 공갈 협박하여 재산을 착취한 돈으로 사들인 것입니다.

 

문선명은 이 땅에 통일교 교인들 세뇌교육을 시키기 위한 교육수련소와 앞으로 50억 평을 매입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리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학교 건물을 건축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이라는 거창한 이름도 붙였습니다. 새 소망 에덴동산은 문선명 통일교 제국의 새 세계, 새 국가 건설을 하여 통일제국을 만들자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나라와 백성이 없었기 때문에 십자에 달려 죽었다고 문선명이 주장합니다. 문선명은 문선명 통일교 제국을 세우기 위하여 2004년 4월30일까지 세워야 한다고 통일교 교인들을 명령하며 독촉하고 있습니다.

 

이미 문선명은 주권 복귀와 조국 광복, 왕권 복귀라는 대명제를 가지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재림주 천지 부모, 통일교 제국의 왕으로 취임을 하였던 것입니다.

 

1차는 새 소망 에덴동산에 새 세계, 새 국가 통일제국 건설이 목적입니다. 2차는 산업 개발을 하여 임업농업 생산환경을 성공하자는 계획입니다. 3차는 공업도시를 만들자는 것이 목적입니다. 4차는 건설업을 육성하는 것이 목적이고 5차는 문화, 예술, 이상세계, 통일제국 건설이 목적입니다.

 

문성명은 한국에서 통일그룹 부도 후 한국 통일교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통일교 교인들을 남미 브라질로 대 이동하는 방대한 계획을 세워 각종학교를 세우고 1억 평 대지를 매입하였던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중심 삼고 애굽이라는 나라에서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여 애굽을 탈출하였고 홍해 바다를 건너 가나안 7족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은 고향 땅을 400년만에 찾게 되었다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역사의 동시성을 반복하고 복귀 섭리역사를 위해서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통일교 교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하면 브라질 자르딘 에덴동산에서 1억 평의 밀림을 무보수로 논과 밭을 개간해야합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세뇌되어있기 때문에 자자손손 영혼의 노예가 되어 죽을 때까지 밀림을 농업도시,공업도시, 상업도시, 어 업도시로 개간하고 건설하여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자신의 욕망과 통일교 제국을 세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엄청난 자원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통일교 교인들에게 부끄러움도 없이 재산의 소유권 이전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에서 세뇌교육을 40일 동안 받았던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은 2,100만원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친다는 각서를 쓰고 무조건 40일 동안 브라질에 가야 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같이 40일 수련을 가는 통일교 교인 부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부부와 같이 천국 황족으로 입적하는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그 기념사진을 10만원씩에 판매하고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에서 40일 수련 세뇌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식사비로 120만원을 바칩니다. 이 나라에서 40일 식사비는 1인당 5만원도 되지 않지만 식사비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한국 통일교 교인들이 외화를 밀 반출하여 브라질에 가져가서 문선명 교주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통일교 교인들 부부가 브라질 40일 세뇌교육 수련을 받기 위해서 가정생활도 할 수 없으며 직장도 퇴직해야 되고 장사도 문을 닫고 브라질에 가야 했습니다 부부왕복 항공경비 등 일 천 만원 정도의 금액이 들어갔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피골이 상접한 일본 통일교 교인과 한국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 2만 쌍을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농장으로 대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한국 통일교 교인 1만 5천 명을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농장으로 대 이주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 재산을 빼앗기 위하여 세뇌 교육을 시켜야 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야망에 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 통일교 교인과 일본 통일교 교인의 집을 팔고 융자를 받아서라도 무조건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교육에 참석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일생 동안 통일교 교세 발전을 위하여 매일 각종 전도 대회와 행사에 일회용 이용물이 되었고 재산을 바쳤습니다. 처절하고 불쌍한 통일교 교인들은 세상에서 돈 벌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통일교 교인이 되려면 계속 행사에 이용당하고 참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직업을 갖고 개인 장사를 할지라도 운영하기가 힘이 듭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일생동안 인생의 밑바닥에서 처절한 가난과 싸우면서 그 날 그 날 식사 끼니를 걱정해야 되는 처지니 자녀 교육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고 있는 통일교 교인들은 재산을 바칠것이 없어 집을 팔고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7천 만원에서 1억원을 바쳐야 했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에 복종하여 거액 재산을 바치기 위해서 통일교 교인들은 막노동을 하고 파출부 일을 하고 식당 일을 하며 매월 분납하는 교인도 있고 처절한 생활입니다.

 

제 6 절 재산착취 수단인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문선명은 1998년 6월 22일~7월 21일까지 30일 교육을 하였습니다. 전세계 각 나라 185개국에 개척 교회를 하고 있는 국가 메시아 148가정인 296명을 포함하여 통일교 최고위층 지도자 600명에게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1차 브라질 자르딘 40일 세뇌교육 때는 7월 22일~8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 2,000명이 참석했습니다.

 

2차 브라질 자르딘 세뇌교육 때는 9월 1일~10월 10일까지 3,400명의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부부가 자녀들을 40일 동안 떼어놓고 1천만 원씩을 교육비를 내고 브라질에서 세뇌교육을 받았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2,100만 원씩을 총 생축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문선명 교주에게 바쳤습니다.

 

3차 세뇌교육 때는 10월 11일~11월 17일까지 700명의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이 참석하였습니다.

 

4차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세뇌교육 때는 11월 18일~12월 28일까지 문선명 교주가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총 15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거듭되는 명령과 지시에 남미 브라질 자르딘 40일 세뇌교육에 우리 부부도 어쩔 수 없이 약 1천만 원 정도의 돈을 내고 세뇌교육에 참석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목사 부부까지도 40일 교육에 참석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목사들은 교육비가 없으면 교인들이 헌금을 마련하여 목사 부부 경비를 지원하여 참석하라" 고 명령 하였습니다.

교인들의 정성으로 경비를 마련하여 저의 부부는 4차 세뇌 교육 때 브라질 자르딘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저의 부부는 문선명 교주와 황족으로 살 수 있다는 입적 사진도 같이 찍었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통일교 교인들이 재산소유권 이전하라는 2100만원을 바치고 오라고 했습니다. 만일 바치지 않은 통일교 교인은 브라질 자르딘에서 40일 교육 등록할 때 2100만원 총생축 헌금을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에게 바칠 것이라는 서약서를 제출하였습니다.

 

5차 때는 1998년 12월 29일~1999년 2월 6일까지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6차 때는 1999년 2월 6일~3월 17일까지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에게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통일교 역사가 있는 한 총탕감비 1300만원이나 총생축헌금 2100만원,조상구원헌금 1대부터 120대 조상까지 수천만원, 10의 3조헌금, 문선명 나라 건국기금 매월 17만원, 8대명절 헌금 등을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은 무조건 바쳐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40일 수련이 회를 거듭할수록 한국과 일본의 통일교 교인들이 적게 오자 말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브라질 자르딘까지 40일 교육을 못 오는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까지도 2,100만원씩을 나에게 바쳐라" 하고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에게 공문으로 명령하였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직장에 다니거나 장사하는 통일교 교인들은 브라질 40일 세뇌 교육을 안 가더라도 집을 팔거나 융자를 받아 총 생축헌금 2,100만원씩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저는 브라질 자르딘에 가서 문선명 교주 부부를 아침 식사할 때 만났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새벽 집회를 마치고 6시 30분에 식사할 때 통일교 교인 경호원 여러 명이 경호를 서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김윤상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 원장과 부원장인 윤정로씨에게 저의 이야기를 하고 아침에 몇 분만이라도 문선명 교주 부부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가 식사를 하는 중에 그 앞에서 땅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 전부는 문선명 앞에 나아갈 때 경배 세 번이나 한 번을 무조건 해야합니다. 그러고는 문선명 교주에게 억울한 강제 인사를 당했던 것을 간단하게 설명 하였습니다.

1991년도 1월 6일 노원 교구 본부에 제가 교구장으로 발령을 받았지만 김봉철 총무국장이 서유암 교회장을 교구장으로 만들기 위하여 노원 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된 저를 강제 박탈시키고 서유암으로 교체 시켜 버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서울 시내 교회 전체 목사들 앞에서 일어나 부당성을 발언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던 것은 제 마음이 상했기 때문에 나갔다고 문선명 교주에게 보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김봉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저를 폭행한 내용이나 충격으로 심장병이 되었다는 내용은 차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저에게 "수련을 잘 받고 가라!" 고 말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르딘 수련 받는 교육생들에게 세뇌 교육을 시킨 후 아침새벽 설교를 하고 6시 30분에 식사를 한 후 바로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을 떠나갔습니다.

저는 브라질까지 간 것은 40일 세뇌 교육 조건도 세우는 것 이었지만 제가 문선명 교주에게 할말을 하기위해 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할 말을 다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문선명 교주는 미국에서 이미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브라질 자르딘 수련소에 와서 문선명 교주의 가족이 되는 황족 입적 사진도 안 찍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뿌리까지 썩은 통일교회는 한국과 일본 통일교회에서 공갈 협박으로 걷어지는 헌금이 없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브라질 자르딘 40일 세뇌교육 수련이나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서의 조상 해원 헌금을 한국과 일본에서 하지 않으면 전 세계 통일교회는 순식간에 쓰러지는 것입니다.

미국 소수의 통일교 교인들과 유럽 극소수의 통일교 교인들, 남미 통일교 교인들, 아시아 통일교 교인들은 절대로 문선명 교주에게 헌금을 바치지 않습니다.

 

오직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만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노예가 되어 재산을 착취당하고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1998년 12월 21일 밤에 브라질 자르딘 수련소까지 와서 통일교 40일 세뇌 교육생들과 하늘나라 천국 황족 입적 사진을 부부끼리 찍어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자칭 재림주로 의자에 앉고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부부는 문선명 교주의 뒤에 서서 황족 입적 사진을 찍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적 수련을 받은 합동 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1천만 원의 경비를 쓰고 2천 1백만원의 재산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쳐야 합니다.

 

브라질 자르딘에서 수련생 전체에게 매일 회개기도와 새벽에 문선명의 기도책을 읽는 훈독회와 세뇌 교육 프로그램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저의 뇌리에서 맴돌 뿐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제국 건설과 주권 복귀, 왕권 복귀가 최종목적입니다.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자르딘 수련은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 재산 착취에 목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이 지구상에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회에서 문선명 교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사악합니다.

 

제 7 절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임을 증명한 사람들


통일교 초창기에는 문선명 교주의 오른팔 격 이였던 통일교회의 충성꾼인 유민효, 유영효, 홍성표, 이진태, 박종화 등 수많은 사람들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36가정 최초 축복을 받고도 통일교를 탈퇴하거나 통일교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같이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던 엄덕문 회장도 초창기 통일교 청파동 시절부터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로 믿고 따랐지만 통일교회를 탈퇴 하였습니다.

 

엄덕문 회장은 문선명 교주의 축복을 받았고 통일교회의 산증인 이었습니다. 엄덕문 회장은 세종 문화회관 설계 등국내 설계의 일 인자로 통일교의 전국 교회를 설계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엄덕문 회장은 문선명 교주의 사이비 성을 알고 통일교회를 탈퇴하고 떠나 지금은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김덕진이라는 음악가는 일본음악 대학에서 공부를 하여 국내에 들어온 사람으로 통일교회 성가 19곡을 작곡한 열렬한 통일교회의 충성꾼 이었습니다.

지금도 통일교회는 김덕진이 작사 작곡한 19곡 성가를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선명 교주는 한국의 성가에는 김덕진 작사, 작곡을 지워 버리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 통일교 성가에만 김덕진 작사, 작곡 19곡이라고 인쇄되어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김덕진과 여자 교인 들에게 아담과 하와 때문에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파탄된 세상을 자신이 완성된 아담으로서 세상의 여성들을 혈통복귀 피가름을 통하여 복귀의식으로 구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여성들을 원래의 모양대로 복귀시키는 혈대 교환, 피가름 의식을 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덕진씨는 복귀원리,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유신선씨와 피가름 의식을 치렸습니다. 김덕진씨는 서울에서 통일교 여자 5명과 릴레이 혈통복귀를 한 것이 일주일 후에는 72명으로 불어났다고 문선명 교주에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또한 문선명 교주는 소생 장성 완성 3일 동안 혈통복귀 피가름관계 행사를 치러야 구원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김덕진씨에게 한번만 혈통복귀 피가름을 하여 혈통복귀를 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문선명 교주와 김덕진 씨는 이 새끼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싸움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김덕진씨는 문선명 교주와 싸운 후 통일교회를 탈퇴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기독교 신학교를 나와 경찰 목사가 되어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오른팔인 박정화씨도 이북 흥남 감옥 에서부터 알게되어 이남에 까지 같이 내려와 초창기 통일교회에 충성한 산 증인 입니다. 그는 문선명 교주의 통일원리가 김백문 교리라고 증거하였고 문선명 교주의 지시에 의해 혈통복귀와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를 실천하여 통일교 여자들과 관계를 많이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지시를 잘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 박정화씨는 문선명의 비서실장으로 수행하면서 일기로 쓴것을 '야록 통일교회사' 라는 책을 저술하려 통일원리가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이며 문선명 교주가 수많은 처녀와 유부녀들을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복귀하여 개인과 가정을 파괴한 문선명 교주라는 것을 폭로하였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통일교 비리 폭로운동이 벌어졌으며 특히 일본에서는 언론과 방송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일본 통일교 활동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황선조 한국 통일교 협회장을 박정화씨와 만나게 하여 자신의 비리와 혈통복귀 피가름 스캔들을 감추고자 하였습니다.

박정화씨는 문선명 교주의 부산 피난 시절부터 비서실장 일을 보면서 문선명 교주와 같이 동행하고 행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문선명 교주와 혈통복귀 피가름한 여자들과 혈통복귀, 혈대 교환을 한 내용을 일기로 써 놓을 수 있었는데 그것을 책으로 발행하여 일본과 한국에 폭로하였던 것입니다.

 

박정화씨는 1998년 1월에 문선명 교주의 잔악성과 통일교 원리가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수백 권의 책을 발송하여 읽게 하였습니다. 다급해진 문선명 교주는 황선조 한국 통일교 회장을 통하여 통일교 교인들의 피살인 거액의 돈을 주고 박정화씨를 매수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박정화씨는 거액의 돈을 받고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야록 책을 통일교회에 팔았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황선조 한국 회장이 1998년 4월 14일 부산 교구 내 통일교 목사 부부 회의석상에서 박정화씨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야록 책을 회수하고 사들였다고 한 말이 사실을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과 저의 부부는 황선조 회장의 그 말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제가 마포교회에 있을 때 전도한 문희숙씨는 1975년 2월 8일날 1,800쌍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하며 짝을 맞추어주어 합동결혼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문희숙씨는 그 남편과 이혼하였습니다. 이혼한 7년후 1982년 10월 14일날 6,000쌍 합동결혼식을 다시 올렸습니다. 문선명은 이혼을 당한 문희숙에게 박철수라는 사람이 최고 좋은 신랑감이라며 또 짝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문희숙씨는 남편과 두 남매를 두었습니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중고등학교 등록금을 내지 못하여 졸업도 시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렸습니다. 문희숙씨는 저에게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을 통곡하며 하소연을 합니다. 문희숙씨는 아무리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불가능하였고, 가난 때문에 두 아들을 고아원에 보내고 싶어도 다 커서 고아원에서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을 중고등학교도 졸업시켜 줄 수 없는 무능한 엄마가 되었다고 통탄하였습니다. 문희숙을 전도한 믿음의 부모인 저는 통일교회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부모로 믿게 한 결과로 이렇게 비참한 가정 파탄을 몰고 온 것에 대하여 제자신 스스로가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문희숙씨는 이제 죽더라도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재림주로 믿지 않을 것이고 통일교를 탈퇴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문희숙씨는 장로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대종교(단군교)에서 통일교회로 입교하였던 이백림 논산할머니에게 전국 통일교 교인들 조상 구원 해원식을 문선명이 명령하여 통일교 조상들을 1973년도에 모두 구원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이 합동결혼식인 축복을 받으면 조상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다시 지옥간 조상을 들고 나와 통일교 교인들을 미혹하여 1대부터120대까지 조상구원 하라고 명령을 내려 실천하는 것은 거액 재산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제 26 장 통일왕국을 꿈꾸는 문선명

 

제 1 절 통반격파를 지시한 문선명


문선명은 1998년 6월 20일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에서 자신이 참부모 재림주로 세뇌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40일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40일 세뇌 교육 중에 문선명 교주의 '원리강론' 과 문선명 교주의 '아버지의 기도 1권부터 12권' 을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서 발행한 죽은 이상길씨의 '영계에서 보내온 편지' 중 1권인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 , 2권인 '인류의 범죄자 누시엘' , 3권인 '새로운 세상' 은 통일교 교인의 재산을 착취하기 위한 세뇌 교육용 교재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 조상이 지옥간 것을 천국으로 보내 준다는 약속을 하고 지를 용서해 준다며 면죄부를 팔아 통일 교인 재산을 빼앗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성약시대 청평역사와 축복가정의 길', '축복가정과 이상천국 I~2권' 등을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 통일교 교인과 일본 통일교 교인을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매일 1시간 씩 전 가족과 친척이 모여 훈독회라는 이름으로 책을 소리 내어 읽습니다 전국적으로 각종세미나,각종 행사,국민연합 세미나 행사를 통하여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기 위한 세뇌교육으로 지속적인 훈독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 교인을 뛰어 넘어 이제는 전국 시군구 면동리까지 국민연합을 조직하여 훈독회를 하고 통반격파를 하라고 명령하며 통일교 교세 확장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지역의 노인들과 유지, 전도 대상자들이 있으면 무조건 문선명 교주의 책을 전달하고 글 읽는 행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2004년 4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 남편과 아내 3만명이 총동원되어 전도 목표를 세워 교세 확장에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남북통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기독교를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통일하여 조국광복을 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주권 복귀를 외치고 왕권 복귀를 외치며 통일교 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대통령은 문선명에게 경배하고 문선명을 남북한 7천만 국민들에게 메시아요 천지 부모가문선명 교주라고 국민들에게 증거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이 나라의 국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1990년 2월 27일날 한남동 문선명 교주의 저택에서 하늘나라 왕권 정착이라는 설교를 통하여 자신이 세상의 천지 부모라고 선포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칭 참부모요, 재림주 메시아라고 주장합니다.

문선명 교주는 1990년 4월 9일~13일까지 제 11회 세계 언론인 대회를 모스크바에서 개최하고 국내에 들어와 4월 30일에 충북 수안보 통일교 호텔인 와이키키 호텔에서 전국 12개 대도시에 수천명의 사람을 모아놓고 참부모 메시아 재림주 선포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문선명 교주는 "전국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통반 격파를 하자" 고 외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책을 훈독회라는 이름으로 통일교 교인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읽게 만들어 문선명 교주가 재림주라고 세뇌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제 2 절 통일제국 건설을 위한 문선명의 음모


문선명은 2004년 4월 30일까지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전 세계에각 나라 국가 메시아 부인들 185명을 한국으로 불러 전국 시군구에 배치하여 국민 연합회장으로 발령을 하였습니다. 통일교회 발전과 실세화를 위한 것입니다. 현지 통일교회 목사와 하나되어 그 지역의 정치인, 경제인, 기독교 교인을 전도하여 통일교회 교인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제는 국가 메시아 185명의 부인들까지 21일 세뇌 교육 후 전국 통일교회에 배치하여 전도활동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가정 생활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부부를 갈라놓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자녀들이 견우와 직년 같이 서로 떨어져 그리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비극적으로 전도 활동을 하여야 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으라고 전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이제 그것도 모자라 통일교 최초 합동결혼식을 한 1961년의 36가정, 1962년의 72가정, 1963년의 124가정, 1968년의 430가정, 1970년의 777가정, 1975년의 1800가정, 1982년의 6000가정, 1987년의 6500가정, 1992년의 3만 가정까지 통일 제국 건설을 위해 가정을 떠나 총 출동하라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 40일 세뇌교육을 다녀와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 2100만원씩을 바친 그런 교인까지도 무조건 청평 천성 왕림궁전 21일 세뇌교육에 참석하여 식사대로 115만원씩을 바쳐야 했습니다. 식사 수준은 21일 식대로 7만원을 받으면 적당한 정도인데, 문선명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에게 천국생활 황족으로 입적한다는 명목으로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2중, 3중으로 입적 수련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늘 황족으로 등록된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사람도 수련을 받아야 합니다.

문선명은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 한국과 일본 합동 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 920명을 모아 통일교회 원리강론보다 한 단계 높은 세뇌 교육을 시켰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불어 넣으며 희생의 제물이 되어 가정을 떠나 전도에 앞장서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지금은 3차 교육생으로 1982년도 6천 가정 합동결혼식을 한 여자 통일교 교인 3천명을 모아놓고 세뇌교육을 21일 동안 시켰습니다. 통일교 부인들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딸을 떠나 가정이 파탄되어도 3년 4개월 동안 문선명 통일교 제국 건설에 목숨을 바쳐 미혼 남녀를 전도하여 합동결혼식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6천 5백 가정도 아내 되는 3천 여명의 여자 교인들이 총동원된 전국 통일교회 미혼남녀를 전도하여 합동결혼식을 시켜 통일제국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공갈협박을 한 것이었습니다.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 교육받던 한국과 일본 합동 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 920명은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총 생축헌금 2100만원과 총 탕감비 1200만원을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재산을 바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만일 재산을 바치지 않으면 교육 받을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36가정~1800가정까지가 1차 교육생이고, 2차 교육생은 6000가정~6500가정까지 21일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합동결혼식을 받은 통일교 교인은 무조건 재산을 바쳐야 되고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떠나 전국 통일교회에 배치되어 계속적으로 교육이 되어집니다.

이 교육을 받은 교인들은 합동결혼식을 했더라도 문선명이 통일교 교인들의 죄를 용서해 천국 보내준다는 면죄부로 가정당 1200만원씩을 바쳐야 합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 바치는 총 생축헌금 2100만원과 1200만원을 합하면 각 가정 당 3300만원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7천 가정만 계산하여도 2천 1백억의 거액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21일 청평 천성 왕림 궁전 황족 입적 세뇌 교육에 참석하면 앞의 사회자와 몇 사람이 북을 치고 각종 악기로 흥을 돋우며 1000명~5000명의 사람들에게 일시에 "악령을 물리치자. 악한 귀신을 성별하자" 고 외치며 머리를 계속 치고 가슴을 두 손으로 계속 치게 합니다.

집회 분위기는 온통 세뇌 분위기이고 회개 분위기입니다. 진짜 나의 악령이 떠나가고 지옥간 조상들이 구원받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세뇌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고 있습니다.

과천교회에도 21일 교육을 받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부인 6명이 왔습니다. 미혼남녀 합동결혼식 대상자를 전도하기 위하여 가정을 버리고 와있는 것입니다. 불쌍한 교인들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야망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통일교 교인들은 탕감복귀와 가인 아벨과 희생의 제물이라는 이름으로 이용당하며 희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2004년 4월 30일까지 통일교 교회의 모든 기관 기업체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의 힘을 모아 한국 전도에 총력을 다하여 미혼 남녀 확보에 주력합니다. 그들에게 합동결혼식을 시켜 문선명 개인의 야망, 통일제국 건설에 이용물로 쓰려고 합니다 모든 통일교 교인이 통반격파와 주권복귀, 조국 광복,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총 출동하였습니다.

2000년 8월 25일 1차 21일 세뇌교육을 받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920명의 부인들이 서울과 수도권 통일 교회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전도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한국과 일본의 부인 2만 명이 한국 통일교회에 집중 배치되어 미혼남녀 합동결혼식에 통일교회 운명을 걸게 되었습니다.

 

제 3 절 문선명 한학자 교주의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


1985년 12월 25일 문선명 교주 부부는 미국 벨베디아에서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사이비 종교의 극치로 말로를 장식하는 초호화판 황제 즉위식 이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 당시에는 세뇌되어 있는 상태여서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을 거행하는 것을 거룩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곳엔 통일교회 최고위 간부들만 참석하였습니다. 부인들은 몇 달 동안을 황제 황후 즉위식을 위하여 이씨 조선의 화려한 황제 비단의복을 몇 달 동안을 준비하였습니다. 황제 왕관도 순금과 비취왕관을 준비하여 머리에 썼습니다.

문선명은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에 몇 억을 사용하여 통일교 교인들의 피살 같은 눈물의 헌금을 낭비하였습니다.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가 아니고서는 자기 과시, 욕망으로 허황된 황제 즉위식을 했겠습니까?

문선명과 12명 자녀,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는 최고급으로 화려한 왕자와공주의 옷을 입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이 세상에서 역사 이래에 없는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을 올렸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황제 즉위식에서 어떤 통일교 고위층 간부도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기 스스로 가짜 참부모요,가짜 재림주요, 가짜 천지부모라는 것을 세계 황제 즉위식을 통해서 알린 것입니다. '저는가짜요' 하고 만천하에 공표 한 것입니다.

비참하고 처절하게 가난한 통일교 교인들은 이 황제 즉위식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꽃팔이, 생선장사, 파출부일, 막노동일 등을 하여 헌금을 했습니다. 문선명이 참 부모라면 자식이 헐벗고 굶주리며 피골이 상접하여 죽어가는데도 그런 돈을 썼겠습니까? 통일교인들은 참 부모라고 하는 문선명을 위하여 헌금을 하며 죽어가는 것입니다. 어찌 참 부모라면 향락, 방탕, 호화사치, 허영심의 극치를 통일교 교인들 앞에서 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문선명은 통일교 교세가 강력해지면 대통령을 하려고 1990년에 통일 가정당을 창당하였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앞으로 한국에서 여자대통령이 나와야 된다고 외칩니다. 문선명 교주의 부인 한학자를 대통령으로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통일 가정당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 가정당 주최로 전국 대 도시에 남북 통일운동 국민연합 이름으로 국내의 정치 지도자들과 시군구 의원 유지들을 초청하여 통일 가정당 대회를 열었으며 2000년 2월 15일 이후에 전국에서 대대적인 통일 가정당 주최로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사활을 걸어놓고 2004년 4월 30일 까지 이 민족을 통일교 제국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 통일교회 전체 교인은 33,000명 정도 뿐이고 예배 인원은 어린 학생 포함하여 17,000여명입니다. 전국 통일교 시 ·군 단위 교역 본부는 246여 곳이고 면 동 단위 교회는 170여 곳입니다. 대학생들 학사 교회는 01곳 뿐입니다.

 

선문대는 통일교가 세운 대학교입니다, 선문대학교 신학과에서는 통일교 목사를 양성합니다. 그러나 1998년도 졸업생 73명중 11명만 목회를 지원하고 62명은 통일교 목사 생활을 하지 않고 포기하였습니다. 통일교 선배 목사들의 비참함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통일교 목회를 보고 포기 한 것입니다. 통일교 목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인 선문대학교 신학과는 이미 사명 있는 목사들을 양성하지 못하는 기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27 장 문선명 통일교 척결을 위한 주장

 

제 1 절 통일교는 사이비 교주의 온상입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 한 명의 출생으로 지금 통일교를 탈퇴한 통일교 출신 이단사이비 교주가 수십명이 되어지고 수많은 영혼을 지옥길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사이비 이들로 인해 수 십만명의 영혼을 빼앗고 살육하는 일이 세계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사이비교주 때문에 엄청난 피해와 파탄, 파멸이 세계 각 나라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 중에 남미 가이아나의 조지타운이라는 도시에서 사이비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와 같이 923명이 집단자살을 한 것은 1978년 11월 21일전 세계 언론을 경악하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독극물 사건의 옴 진리교도 파멸하였습니다.

 

국내에만 하더라도 1925년에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며 재림주 황제라고 칭하고 황제 즉위식까지 올렸던 차경석, 차전자가 70만 명의 자기 교인들의 영혼을 빼앗고 우상숭배 재산 착취로 가정을 파탄시켰습니다. 1930년도에는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가 교인들을 천국에 보내준다고 해놓고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살게 했으며 마지막에는 자기 교인들을 타살시켜 땅속에 수 십구 수 백구씩 파 묻어 버렸습니다.

1960년도에 대전에서 휴거론을 주장했던 박용주는 교인들과 같이 천국에 가는 것으로 알고 하얀 한복을 갈아입고 교회에서 7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않자 에덴 수도원의 박 교주가 자살 함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60년대 사이비 교단을 창설하여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용화교 교주 서백일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수도원의 김백문 교주의 제자였던 전도관, 박태선 장로는 수십만 영혼을 60년대 부터 빼앗아 사단 마귀의 역사를 지금까지도 행하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일어났던 1987년 오대양교도 마지막 파멸 장소로 경기도 용인 남사면을 택하여 교인 32명의 동반타살과 자살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땅에는 사이비 교주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살인과 강간, 우상숭배, 가정파탄, 재산 착취를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동방교, 전도관, JMS의 정명석 교주는 문선명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 문선명 사이비 교주 한 명의 출생으로 지금 통일교를 탈퇴한 통일교 출신의 사이비교주가 30명이 넘습니다. 이들로 인해 수십만 명의 영혼을 빼앗고 살육하는 일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사이비 교주 때문에 엄청난 피해와 파탄, 파멸이 세계 각 나라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 중에 남미 가이아나의 조지타운이라는 도시에서 사이비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와 같이 923명이 집단 자살을 한 것은 1978년 11월 21일전 세계 언론을 경악하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독극물 사건의 옴 진리교도 파멸 하였습니다.

국내에만 하더라도 1925년에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며 재림주 황제라고 칭하고 황제 즉위식까지 올렸던 차경석, 차전자가 70만 명의 자기 교인들의 영혼을 빼앗고 우상숭배 재산착취로 가정을 파탄시켰습니다. 1930년도에는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가 교인들을 천국에 보내준다고 해놓고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살게 했으며 마지막에는 자기 교인들을 타살 시켜 땅속에 수 십구 수 백구씩 파묻어 버렸습니다.

 

1960년도에 대전에서 휴거론을 주장했던 박용주는 교인들과 같이 천국에 가는 것으로 알고 하얀 한복을 갈아입고 교회에서 7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않자 에덴 수도원의 박 교주가 자살함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60년대 사이비 교단을 창설하여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용화교 교주 서백일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수도원의 김백문 교주의 제자였던 전도관, 박태선 장로는 수십만 영혼을 60년대부터 빼앗아 사단 마귀의 역사를 지금까지도 행하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일어났던 1987년 오대양교도 마지막 파멸장소로 경기도용인 남사면을 택하여 교인 32명의 동반타살과 자살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땅에는 사이비 교주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살인과 강간, 우상숭배, 가정파탄, 재산 착취를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동방교, 전도관, JMS의 정명석 교주는 문선명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재림주의 사기성을 배워 가지고 나가 사이비 교단을 창단 하였습니다.

통일교 출신 재림주만 하더라도 혜아릴 수 없이 너무 많아 재림주 사태가 날 정도입니다. 이 땅은 사이비 종교 교주의 천국이요, 재림주 천국입니다.

 

1960~2000년도까지 30년 동안 종교의 자유 국가인 한국에서 수많은 영혼을 빼앗고 살육하는 사이비 교주들이 우후죽순 같이 생겨났습니다.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불쌍한 영혼 수 십, 수 백만명이 사이비 교주의 노예가 되어 지옥으로 끌려 가는데 그 고통의 절박한 소리를 듣고 예수이름으로 구원해 주어야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중동 등 세계 각 나라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영혼을 구하는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국 땅에서 사이비 종교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선량한 국민들의 영혼과 재산을 빼앗고 가정을 파탄 시켜도 기독교회는 사이비 종교에 대한 대책이 미미하고 자신의 교회를 부흥 시키는데만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교주 밑에는 이단 사이비 교주 양성소입니다.

 

사이비 재림주의 사기성을 배워 가지고 나가 사이비교단을 수도 없이 만들어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통일교 출신 재림주만 하더라도 혜아릴 수 없이 너무 많아 재림주 사태가 날 정도입니다. 이 땅은 사이비 종교 교주의 천국이요, 재림주 천국입니다.

 

 

제 2 절 문선명의 앞잡이 노룻을 하는 기독교 교인을 추방해야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종교 포섭 단체로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가 있습니다.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회장인 통일교 이재석 회장을 통해 사이비 기독교 목사, 장로, 기독교 교인들이 각종 물질적 혜택을 받으며 통일교 세력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일찍이 문선명 통일 교주는 기독교 목사, 교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1966년11월 7일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를 조직하여 이재석 (36가정, 통일교 최초 합동결혼식자)을 회장으로 세워 기독교를 가장한 포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만찬, 세미나, 호텔 경비, 해외 왕복 비행기 요금, 이스라엘 성지 순례 등 일체의 경비를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무료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기독교 목사 가운데 통일교 초교파 회원에게는 매월 생활비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협회 예산의 몇 배를 기독교인 포섭에 투자했다고 합니다. 초대의장에는 방부신 목사, 본부장에는 박창번 목사, 상임 이사에는 이재석씨,이사에는 박철수 목사, 총무에는 김융관 목사 등 5명이 초교파 운동 본부를 결성했습니다.

조직이 활성화되지 못하다가 1975년 12월 8일 서울 문화 회관에서 33명의 기독교 각 교파 인사들이 모여 초교파를 재 결성했습니다. 회장에 강흥수목사, 부회장에는 기독교 장로회 증경 총 회장을 포섭하는데 성공한 송흥국, 양풍원 목사, 총무에는 박철수 목사, 장영석, 유영근, 박무신, 박영주목사를 이사로 세우고 통일교 측에서는 이재석을 이사로 세웠습니다.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회원으로 한국 기독교 목사, 장로, 집사, 청년, 평신도를 가입시켰습니다. 모든 경제 지원은 통일교 측에서 담당하고 각 교단 별로 조직을 다시 결성했고, 각 직책 별로 기독교 목사 평신도를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조직으로는 성노회로 각 기독교 교단 성목회를 기독교 교단별로 조직하고 성장회로 기독교 각 교단별로 원리수련, 수양회, 해외여행, 호텔 세미나를 실시하여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성청회로 기독교 각 교단 청년회를 통일교 원리수련을 통해 포교 활동을 했고 성녀회로 기독교 교단별로 온갖 경제적인 지원을 통하여 포섭 활동을 했습니다.

초교파를 통하여 기독교 목사 가운데 통일교 원리수련을 받고 세뇌 교육된 장로교 목사를 문선명 통일교 협회에서 용산교회 목사(나인수)로 발령한 일도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기독교 목사가 통일교 목사로 재직한 일이 있습니다.

 

통일교 문선명 교주는 포교 활동을 목적으로 정치인, 경제인, 종교인, 대학교수, 예술인, 언론인,각계 각층의 유명 인사들을 온갖 세미나,만찬,해외여행, 선물 등으로 유혹하며 통일교 세력으로 끌어들여서 활용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만찬 세미나에 초청하는 것은 영혼을 죽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테복음 16:26)에 판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고 말씀을 했듯이,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통일교 각종 행사장에 발을 끊으십시오. 그것만이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이 문선명 교주로부터 탈출하는 길이고 영혼의 죽음과 지옥 길을 피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1988년 5월 1일 제 34회 협회 창립 기념일에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이 서울 본부 교회에서 문선명에게 경배와 예배를 드리고 목회자 총회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문선명 통일 교주는 전국 통일교 목사들이 자기 고향에 가서 목회를 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또 다시 불안과 공포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목사들도 아내와 자녀들이 있으며 생활기반이 있는 것인데 문선명은 목사들 목숨을 하루살이 파리 목숨처럼 여겨 고향에 가라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 소리는 지옥으로 가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매일 불안과 공포 속에서 목회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무슨 재미로 목회를 하겠습니까?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미국 알래스카나 남미 바닷가에서 일생 동안 낚시질을 하며 고기를 잡았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고기를 잡으면서 '통일교 교인들을 어떻게 요리할까?', '어떻게 재산을 착취할까?' 그 연구만 하고 있습니다.

 

간간이 한국과 세계를 순회하면서 통일교 교인들에게 불안과 공포심을 유발하는 무자비하고 살인적인 인사이동을 시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목사들과 기업체 간부들을 손바닥 뒤집 듯 이동 시켜 생업을 빼앗고 가정 파탄을 일으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곧 죽음인 것입니다.

1988년 6월 1일, 전국 통일교 목사들 총회를 본부교회에서 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교 모든 남편들은 고향으로 가라. 아내는 무조건 친정 고향으로 가라" 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1988년 6월 6일,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한남동 저택에서 통일 그룹 기 업체 과장급 이상과 서울 시내 1교구, 4교구, 목사 전체를 모아놓고 사표를 내라고 했습니다.

서울 목회자들은 서울도 중요하니 목회활동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교인 많은 교회는 다른 교회에 20명씩 나누어주라고 했습니다. 6월 1일 에는 목사 그만두고 고향에 가라고 명령했다가 6월 6일에는 서울 목사 하라고 6일만에 말을 바꾸어서 뒤집어 버린 것입니다. 콩 볶듯이 강제 인사 이동을 또 당했던 것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제국의 제왕이며 공산주의에도 없는 잔인한 인사 정책으로 목을 붙였다 떼었다 온갖 횡포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제 3 절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하는 전 현직 국회의원을 낙선 시켜야합니다.

 

문선명은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정치인들을 각종 세미나, 만찬 장에 초청하여 원리 교육을 시키고 국회의원 선거 당락에 온갖 직악을 저질렸습니다. 180명의 여야 정치인들을 포섭하여 부하로 삼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선명 재림주 교주의 말씀집', '조국 광복' 이라는 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990년 4월 자신이 메시아요, 재림주 참부모라고 선포 했습니다.

정치인 중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면서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하수인이 되어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목숨을 걸고 사이비 정치인을 색출해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각종 행사장과 만찬장에 참석하는 정치인을 철저히 낙선시키는 범 기독교적인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각종 만찬행사 세미나에 참석하는 전 현직국회의원,도지사,시장,군수, 시 ·군 구 의원들을 그냥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1천2백만 기독교 목사, 교인들은 하나님의 대적인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돕는데 선봉장이 되는 사이비 정치인을 용납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문선명은 정권야욕이 있어서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정치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물질적 지원,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온갖 만찬행사에 정치인들을 초대하여 통일교 세력을 과시했습니다.

문선명은 2001년 7월 13일, 국회회관 대강당에서 현직 국회의원 27명과전직 국회의원, 시군구 의원, 통일교 교인 등 600명을 참석시켜 통일교 원리강론을 설파하고 통일교 선전장을 만들었습니다. 1200만 기독교인이 있고 또 국회의원 273명 중 112명이 기독교 장로, 집사인데 통일교의 국회강연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였습니다.

 

저는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 이만신 회장님과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박준철의 이름으로 모든 일간지와 방송, 기독교 언론을 총 동원하여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여 축사와 격려사를 하는 국회의원, 정치 지도자들은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과 합심하여 낙선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2001년 10월 29일부터 11월 8일까지 전국 8대 도시에서 문선명 교주는'천주 평화 통일국' 이라는 이름으로 문선명 제국을 세우자는 정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행사를 하였는데 7월달 행사 때 보다도 정치 지도자들이 극소수로 참석하였습니다. 그것은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의 표를 의식하여 정치 지도자들이 문선명 교주의 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결과로 믿습니다.

2001년 11월 8일, 신라호텔 문선명 집회에 현직 국회의원 몇 명과 전직국회의원 극소수가 참석하여 문선명 강연장이 아닌 별실에서 강연을 듣고 몰래 빠져나가는 정치 지도자들의 실상을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정치지도자들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이 두려워 얼굴을 강연장에 내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박준철 소장은 한기층과 1200만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과 합심하여 문선명 교주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정치지도자들을 반드시 심판을 받게하여 낙선시킬 생각입니다.

저는 2001년 10월 29일부터 11월 8일까지 문선명 집회에 참석하여 격려사, 축사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낙선시키자고 기독교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 하였습니 다.

정치인들은 통일교 집회장에 참석한 노인들이 자신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노인들은 통일교 교인이 아니며 문선명 교주의 이용물입니다. 노인들은 행사에 참석하면 식사를 제공하고 선물을 주기 때문에 행사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전국의 노인들은 투표장에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정치인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를 볼때 사이비 정치인들은 착각하지 마십시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정치인들이 만찬이나 집회에 한번 참석하면 각종 통일교 PR선전 책에 인쇄를 하여 전도용으로 활용하고 자랑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김대중 대통령이 순수한 마음으로 80세 생일에 축전을 보내준 것도 책에 인쇄하여 전국 방방곡곡 시 ·군 ·구 ·면 남북 통일운동국민연합 대회와 훈독회 행사에서 수만 명에게 배포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마치 통일교 교인이 된 것처럼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통일교 목사들, 교인들이 자랑하고 있습니다. 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통일교회를 지원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으며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통일교 교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정치인들에게 10원을 투자했으면 1000원을 뽑는 식입니다. 2000년 1월부터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각종 행사장에 참석한 순수한 정치인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그 정치인들을 자신의 노예로 착각합니다. 계속해서 정치인들을 참석시켜 원리교육과 훈독회를 하여 세뇌교육을 시키고 통일교 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회에 각종 만찬이나 세미나 행사장에 참석하는 한국 정치인들을 1천2백만 기독교 교인은 백 번이라도 그런 정치인을 낙선시키는 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1987년 8월에 전직 국회의원 39명을 강원도 설악산 오색 약수 옆 호텔에 모아놓고 문선명 통일교 재림주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원리 교육을 시켰습니다.

1988년에는 국회의원 선거를 맞이하여 대대적인 경제적 지원, 맥콜 200박스 씩 지원, 통일교 교인과 승공 연합 조직을 총 동원하여 전국 국회의원후보를 지원했습니다. 통일교는 당선 가능성 있는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습니다. 또 전국 통일교회에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정치인 포섭은 계속 되었고 2000년 4월 13일 국회의원 선거에도 후보들이 통일교 통일당 입당원서를 내고 인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입당원서를 내지 않은 사람이라도 통일교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사람은 통일교 측에서 인적 지원을 전폭적으로 해 주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표를 얻고자 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다시는 이 땅의 선량한 국민들을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국정에 임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은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꼭두각시 들러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지지 세력 내지 추종세력으로서 통일교 각종 행사에 이용당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앞으로 철저하게 공개하여 1천2백만 기독교 교인의 이름으로 뿌리를 뽑고 낙선시컥야 합니다.

 

 

제 4 절 기독교회에 부탁의 말씀


지금 이 땅에는 이단 사이비집단이 150파에 약 300만 영혼이 이단 사이비집단에 빠져 지옥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구의 죄입니까?그들은 우리 부모형제입니다. 지옥 길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해주어야 할 책임과 사명이 1200만 기독교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의 미혹에 빠져 영혼과 몸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겨 처절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교인들이 회개하고 기독교로 개종하고자 하여도 기독교 교회로 가기가 힘듭니다. 그들을 교육하고 안정시켜 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현재 전국 시군구 통일교회에서는 통일교 교인들이 참 가정운동 실천 본부 미혼남녀 결혼 상담사 라는 이름으로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은 미혼남녀들을 미혹하여 합동결혼식을 시컥 통일원리로 세뇌교육을 시키고 문선명 교주가 참부모 재림주라고 믿게 만들어 버립니다. 전국교회는 참 가정운동실천 본부와 같은 음성적인 통일교 활동에 미혹되어 불행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막아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회가 좀 더 사이비 종교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세웠더라면 한국은 사이비 종교 천국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이비 교주는 이 땅에서 판을 치고 수많은 영혼을 살인하고 노예로 삼아 지옥으로 끌고 가는 현실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사이비 종교궤멸을 위하여 기독교교회 1년 예산의 100분의 1이라도 쓰지 않겠습니까?기독교회는 사이비 종교 퇴치를 위해서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1천 2백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원수인 사이비 교주와 종교를 박멸해야겠습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 모두 어기는 사이비 교주와 종교를 자기 교단 일이 아니라고 방치하고 있지 않으십니까?기독교회는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예수를 모시며 성경을 바르게 가르쳐야 될 사명과 의무가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 3만명이 집중 배치되었습니다. 그들은 시군구 통일교회에 배치되어 통일교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뿌리뽑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 형제,이웃이 통일교회의 미혹에 빠져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통일원리에 세뇌되고 교육된다면 생명을 구할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자기 교단을 부흥시키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급하게 해결해야 될 문제는 선량한 국민들의 영혼을 사이비 교주로부터 빼앗기지 않게 지켜 주셔야겠습니다.

기독교회 성직자와 교인들은 수많은 거룩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를 파멸시키는 데는 투자를 적게 하고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를 박멸하는 데 근 힘이 될 언론을 많이 이용해주십시오.

앞으로 기독교회에서는 정치인과 지역 유지 시군구 의원들이 통일교 행사에 참석하여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라고 증거하는 행위를 용납하면 안됩니다.

 

범 기독교적인 차원에서 문선명 통일교회를 극찬하는 정치인은 철저하게 가려내어 강력하게 낙선운동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들은 사이비 정치인이요, 하나님의 역적이요,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행위를 하여 통일교회 발전을 위한 공로자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1천 2백만 기독교 교인은 사법부, 언론, 기독교가 연합하여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절대로 위장된 거짓 행사 장소를 대여해 주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대대적인 사이비 교주와 교회 척결 운동에 앞장서 주십시오.

 

문선명 집단의 산 증인인 박준철을 기독교 교회와 신학교, 기도원에 초청하여 간증집회를 1번씩은 꼭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를 간증에 초청해주시면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이단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통일교 집단을 척결하여 희생자를 줄이고 전도하는데 크나큰 도움이 될 줄 믿습니다.

 

 

 

한국교회 1200만의 목사님과 성도들이 섬기는 교회와 가정과 직장, 사업장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저자 박준철 목사 드림

 

 

  <<통일교 집단과 외로운 싸움을 하는박준철 목사를 돕자>>

 

※ 박준철 목사가 기독교 방송 ·언론을 통하여 문선명 집단의 정쳬를 900회 폭로하여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작년대비 10분의 1로 줄였다

 

 

1) 문선명 집단의 합동결혼식은 거액재산을 착취하는 의식이다.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소장이며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저자인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 신앙과 과천교회 현직목사직에서 2001년 1월 9일 기독교회관에서 탈퇴기자회견을 하였다.

박목사는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통하여 문선명의 정체, 비리, 피가름 의식, 합동결혼식 후통일교 교인 한 가정당 7천만원~l억씩을 착취하는 내용을 통일교 공문을통하여 낱낱이 폭로하였다

2) 통일교 재산 착취를 재판부에서 내려보낸 문선명 교주의 명령공문.인정한 내용이며 통일교 교인들에게 (1998년 IMF때 통일그룰이 부도나 국가로 넘어감으로 거액재산착취가 시작됨)


▶ 1,000만원의 결혼 비용 부담

 

▶ 통일교 교인 조상구원금 I~120대 조상까지 2천만원~3천만원1통일교 합동결혼식 후 죄를 용서해 주는 천국행 탕감비 1300만원(한가정당)

 

▶ 총생축헌금 2100만원(문선명은 합동결혼식한 교인들에게 자신은 구세주, 재림주 참부모이며 통일교 교인들은 참 아들 · 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재산 소유권 이전하라는 명령공문)

 

▶ 문선명 비행기 헌금 1백만원~l천만원

 

▶ 구국 헌금 성인가족 5인 X160만원 = 800만원

 

▶ 천성왕림궁전 - 320만원 (가정당)

 

▶ 십의 삼조 헌금

 

▶ 문선명 나라건국기금 매월 17만원 (가정기준)

 

▶ 8대 명절 헌금▶ 그 외 각종 헌금이 혜아릴 수 없이 많음

 

▶ 청평 천성왕림궁전 14층 병원짓는 헌금 가정당 160만원

 

3) 문선명은 사이비 교주요 적그리스도라고 입으로 외치자.

 

저는 처음에 통일교에 입문하여 원리강론을 들었을 때 세뇌되고 마취되어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고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30년동안 통일교의 실체를 직접보고 려으면서 문선명 교주는 재림주 참부모가 아니며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1997년부터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 그 거짓된 사단의 실체들을 샅샅이 파헤치게 된 것입니다.

 

4)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문선명이 김백문 교리를 도용한 것이다

 

문선명은 자칭 재림주 참부모로 자신이 가져왔다는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가 새진리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쓴 성약말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의 원리강론이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와 성서신학을 1946년에 도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5) 문선명 교주는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키는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은 자신이 재림주요 참부모라며 성삼위 하나님을 모독하고 기독교로 가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재림주라는 문선명은 첫 번째 부인 최선길과 1945년 4월 28일에 결혼하여 문성진 아들을 낳고도 그들을 전도하지 못하고 이혼하였으며 많은 처녀들을 피가름 음란의식으로 사생아를 낳게하고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킨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부모, 재림주가 될 수 없습니다.

 

6) 문선명 교주는 자칭 재림주 참부모라면서 자기 자녀들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은 1960년 4월 11일 40세의 나이에 한학자(17세) 여학생과 어린양 혼인잔치를 또 하였고 14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자녀들은 간음, 이혼,자살, 동거, 마약, 감옥생활 둥 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신의 자녀들도 신앙교육을 책임지지 못하고 구원하지 못한 문선명 교주는 재림주가 아니며 적그리스도입니다.

 

7)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천국가는 의식이 아니라 문선명의 자금줄이다.

 

합동결혼식을 저지하자.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에게 총 동원령을 내려 매일 오전10시부터 오후5시까지 골목을 누비며 미흔남녀 전도활동을 하여 약혼을 시키고 1년에 한차례 하는 천국 보내준다는 구원의식인 합동결혼식을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통일교는 합동결혼식한 자들에게 문선명의 명령으로 가정당 7천만원~l억원의 헌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또한 참가정'실천 운동본부라는 미명하에 미혼남녀에게 합동결혼식을 시켜 개인과 가정을 파괴하고, 거액 재산을 착취하여 지옥 같은 삶을 살게 하고 있습니다.

 

8) 문선명 교주의 혈통복귀 3일 피가름의식은 구원이 없다

 

문선명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통하여 성주식과 3일 혈통복귀의식을 치르면 완전구원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저도 1975년 2월 8일에 합동결혼식을 하여 3일 혈통복귀의식을 치렀고 그때는 세뇌되어 구원받은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가정은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에 합동결혼식을 할 사람까지도 구원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통일교회 합동결혼식과 3일 섹스의식을 통해서는 구원이 없었습니다. 2001년 5월27일, 밀링고 대주교가 성마리아와 결혼하고 8월에 가정파탄된 것을 보면 문선명의 합동결혼식은 거짓된 허상일 뿐입니다.

 

9) 문선명 교주의 각종 만찬 세미나장에 참석하는 정치, 경제, 종교 학자 들을 막자.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정치와 경제, 문화, 언론, 종교를 장악하여 문선명 제국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은 성경진리로 사이비인 통일교회와 싸워 승리하자.

 

10) 박준철 목사의 폭로로 통일교 합동결혼식이 작년과 대비하여 10분의 1로 줄었다.

 

박준철 목사는 기독교 신문, 찬송을 통하여 문선명 집단의 정체를 900회 폭로하여 통일교 합동결혼식 2001년 1월 27일에는 통일교 신문인 세계일보에 3만 5천쌍 이라고 보도했으나 2002년 2월 10일에는 3천 5백쌍 이라고 보도하였다.

박목사가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통일교 실체를 폭로함으로 합동결혼식이 작년과 대비하여 10분의 1로 줄었다고 국민일보와 기독교계신문에 보도되었다.

문선명은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에게 종족적인 메시아라는 임명장을 주고 160가정을 전도하라는 총동원 전도명령을 내려놓고 전국 시군구 통일교(일명 가정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을 오전 10시~오후 5시까지 매일 전도활동에 동원하고 있다.

통일교 교인들은 매일 집집마다 방문하며 미혼남녀 합동결혼식을 시키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있는데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차원에서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면 가정당 7천만원~l억씩을 착취하여 천국행 면죄부를 파는 집단이라는 것을 폭로하여 제2의 박준철목사와 같은 희생자를 막아야 할 것이다. 2003년 5월에 있을 합동결혼식을 저지하자.

 

11) 박목사는 문선명 집단으로부터 민사소송에 승소하였다. 형사소송은 매달 진행 중이다. 기도해주자.

 

박준철 목사는 2002년 2월 1일에 문선명 집단과의 법정싸움에서 민사재판이 승소하였다. 문선명 집단에서 민사재판과 같이 형사재판에서도『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을 명예훼손지로 걸어 형사재판이 진행중이다.

2002년 10월 4일 1차 형사재판을 하였으며 11월 1일 2차 형사재판, 12월 6일 3차 형사재판이 열릴 예정이다. 앞으로 매달 1번씩 약 2년 동안 형사재판을 받아야 한다.

일본에는 인구의 1%밖에 안되는 기독교 교인이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되고 단결하여 문선명 통일교집단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처하여 궤멸해 가고있다. 일본 통일교 피해자들이 기독교 변호사들의 무조건적인 무료변론으로 통일교와 재판을 하여 모두 승소하였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이 일본 재판정에서 불법이며 문선명을 믿어도 구원받지 못하고 천국갈 수 없다고 도쿄지방법원에서 2002년 8월 21일 판결하였으며 통일교 피해자 3명에게 9200만원을 청춘보상금으로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한국에 박준철목사와 같은 피해자가 통일교와 재판할 때 1200만 기독교 교인이 예수님 이름으로 단결하고 기도하여 문선명 사이비집단과 싸워 승리해야 할 것이다.

이 재판은 박준철 목사와 문선명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이비 교주와의 싸움이며 기독교와 사이비집단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1200만의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이 이단 사이비 집단을 궤멸해야 할 것이다.

박준철 목사는 문선명 집단과 지금 재판중 인데도 변호사비를 지불하지 못하였으며 활동비나 경제적인 어려움에 홀로 감당해야 되는 외로운 싸움을 하는 박목사에게 기도와 간증예배 초청, 후원헌금이 절실히 지금 필요한 입장이다.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박준철 목사가 문선명 집단과 싸워 승리하고 통일교가 궤멸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12) 박준철 목사를 한국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간증예배에 초청하여 성도들이 전도하게 하자.

 

후원헌금을 보내주자.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김기수 목사와 총무 박영률 목사가 박목사를 위해 민 · 형사재판에 탄원서를 제출해주시고 도와주셨다. 한국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모두 기도해주시고 간증예배에 초청해주신 목사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박목사를 위해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지속적으로 기도해 주시고 간증예배에 초청해 주셔야 성도들이 문선명 집단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전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문집단과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박목사를 돕는 길은 기도와 간증예배 초청하는 일과 후원헌금을 아래구좌로 지원해주셔야 형사재판을 하는 변호사 비용과 활동비 등을 할 수 있습니다.

 

13) 김백문과 문선명, JMS(정명석)은 똑같은 교리이며 사이비 교주밑에 사이비 교주 양성소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김백문 사이비 교주의 기독교 근본원리를 제자였던 문선명이 도용한 것이며, 정명석은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1980년에 탈퇴하여 통일교 원리 강론을 도용하여 30개론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빼앗고 지옥으로 끌고가고 있다. 사이비 교주 밑에는 사이비 교주 생산공장이다.

한국 기독교는 이단사이비집단에 빠진 약 300만의 영혼을 예수 이름으로 구원해야 할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1945년 8월 15일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 사이비집단에 빠졌다. 김백문 교리인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1946년부터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포교하여 영적살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명석도 1980년까지 문선명을 받들다가 탈퇴하여 통일교 원리강론을 도용하여 30개론을 만들어 수많은 청년 대학생을 유혹하여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정명석과 같은 통일교 교인이 통일교를 떠나 사이비 적그리스도 노릇을 하며 사기를 치며 영혼을 빼앗는 사이비 교주만도 20여명이 넘는다. 사이비 교주 밑에는 사이비 교주 양성소이다.

 

14) 문선명 교주 집단에 축사, 격려사, 만찬에 참석하는 정치지도자들은 여 ·야를 막론하고 1200만 기독교 교인이 낙선운동을 하자.

 

15) 문선명 통일교 집단에서 기독교 목사들을 포섭하는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가입된 기독교 목사, 장로를 회개시켜 통일교와의 관계를 끊게 하자.

 

16) 박준철 목사가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문선명 집단이 이단 사이비집단이라는 것을 매일 입으로 외치자.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이 이단시하고 적그리스도라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요, 이단 사이비 교주라고 입으로 외쳐야 궤멸될 것이다.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에 들어갈 때까지 단 한번도 문선명 집단이 이단이라는 소리를 못 들어보고 유혹당하여 통일교회에 입교했고 사악한 전단지 한장 때문에 30년의 지옥생활을 하였으며 청춘을 빼앗기고 심장병과 온갖 병을 얻고 죽음의 자리에서 문선명 집단을 탈퇴하여 궤멸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며,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땅끝까지 증거해야 할 것이다.

 

17) 박준철 목사가 목숨을 걸고 쓴「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구입하여 읽고 문집단을 궤멸하자.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1200만의 한국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을 대표하여 한기총 대표회장 김기수 목사님과 각 교단 총회장 교계지도자 IS명이 범교단적으로 통일교를 대체하기 위하여 책을 추천하였으니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문선명 집단 궤멸필독서로 구입하여 읽고 문선명집단 궤멸을 위해 외치자.

 

 

이 책을 발행하여 문선명 집단궤멸을 위해 사용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 책을 보시는 모든 목사님과 성도들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와 사랑이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http://cafe.naver.com/jubo/2085  , 통일교 문선명 -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 큰샘출판사

http://cafe.naver.com/jubo/1739  , 통일교 문선명  -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박준철 저,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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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문선명 - 문선명 집단은 '합동결혼식'을 시켜 I억씩의 거액재산을 착취하고 있다.

 
<도서 안내>  http://cafe.naver.com/joyfulsound/347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출간일 : 2002년 05월 10일, 520쪽   정가 : 12,000원 (국내도서-종교)

광화문 교보문고나,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여, 저자 박준철 목사에게 작은 도움이 됩시다.

한국기독교 통일교 대책협의회 후원금  ·국민은행 525201-01-041142 예금주 통일교 대책협의회

 

통일교 박준철 목사의 생생한 증언

 

1. 문선명은 이단사이비 교주요. 적그리스도입니다.

 

2. 문선명은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키는 영혼사기꾼입니다.

 

3. 문선명은 자신의 자녀도 구원못하는 사이비 교주입니다.


4. 합동결혼식은 천국가는 의식이 아니라 지옥 가는 의식입니다.


5. 문선명 통일그룹이 IMF때 부도났습니다. 국민의 세금인 국가빛 1조 7천억을 갚아야 할 것입니다.


6. 문선명 집단은 합동결혼식을 시켜 I억씩의 거액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자금줄인 합동결혼식을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막아야 할 것입니다.


7. KBS. MBC. SBS. EBS공익방송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조장하는 방송을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교인이 방송에 출연하여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8. 문선명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여 축사. 격려사 하는 여야 정치 지도자들을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이 단결하여 낙선시켜야 합니다.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에서 시장군수 시구의원들이 통일교 집회에 참석할 수 없게 막아야 할 것입니다.


9. 기독교 목사, 성도들이 통일교 단체인 초교파 기독교협의회나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 총회장 김광명이나 이런 단체에서 주최하는 이스라엘 성지순례 무료여행. 세미나 등에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참석할 수 없도록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것입니다.


10. 문선명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하는 지역의 유지나 노인들을 참석하지 못하도록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에서 막아야 합니다.


11. 전국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통일교 행사인, 가정교회 순결캠페인, 순결캔디, 참가정 순결운동본부 서명날인, 충효 사상 예절교육 등을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12. 박준철 목사가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문선명 집단이 이단 사이비 집단이라는 것을 매일 입으로 외쳐야 합니다. 박목사는 통일교에 입교 전까지 통일교 집단이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본문중에서-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머리말

죽을 죄인 박준철은 지난 30년 동안 문선명 사이비 이단인 사단의 앞잡이로 살았던 날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합니다. 이제 오직 나의 구주는 예수님 뿐이고, 인류를 구원할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30년동안 통일교에 빼앗긴 지옥 같은 생활의 산 체험과 진실을 세상에 알려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를 막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이 책을 썼습니다.

저는 생애 처음으로 접한 통일교 전도지에 끌려 이단 사이비인 줄도 모르고 통일교에 입문하여 지난 30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문선명 이단 사이비 교주에게 충성하며 최일선 목회자로서 살아왔습니다. 통일교 목회자가 된 후로 언제나 항상 사력을 다하여 무슨 일이든 2등을 하지 않고 1등을 하며,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야 지난 30년이 사단의 종인 문선명 이단 사이비 교주에게 빼앗긴 세월 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통한의 세월을 눈물로 통곡하며 삼위일체 하나님께 회개하며 이 글을 씁니다.

이 책은 제가 통일교회 현직목사로서 30년 동안 매일 일기를 써가며 기록했던 사실들을 토대로 통일교의 실체를 밝히고 문선명의 비리를 세상에 알리는 최초의 저서입니다.

이 저서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실명도 있고 가명도 있습니다. 혹시 본의 아니게 거명되어 선의의 피해가 있으시다면 문선명 사이비 종교의 비리와 잔악상을 알려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없도록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음을 양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도 통일교에 빠져 인생을 허송하는 분들이 있다면 즉시 통일교회에서 탈출하여 진정한 행복과 축복 받는 하나님의 안에서 삶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에게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동안 체험한 진실과 문선명 교주의 사악한 교리와 음모, 패륜, 가정 파탄, 비진리성을 하나님과 인류에게 고발해야 된다는 사명만이 있습니다.

저는 사이비 집단에 속아 살았던 30년 동안 지옥 같은 생활을 하면서 빼앗긴 청춘과 병든 몸, 파멸된 영혼을 만천하에 고발하지 않고서는 이대로 눈을 감을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 통일교회의 실체를 알리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30년 동안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를 참 부모인 동시에 메시아 구세주인 만 왕의 왕 재림주라고 믿고 복종하며 사랑하였는데 이제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발합니다. 지금 통일교회는 기독교인들이 방심하는 사이에 한국은 물론 일본, 아시아,유럽권까지 침투하여 많은 영혼들을 미혹하여 문선명 개인의 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선명 사이비 교주로 말미암아 인생을 빼앗겨 가정 파탄, 재산 착취를 당하여 온갖 시련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겉 모습으로는 양의 탈을 썼지만 사이비 교주일 뿐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사랑과 희생, 봉사를 외치지만 말 뿐이고 통일교 교인들의 생활은 처절한 지옥생활과 같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미혹에 빠져 세뇌, 마취, 교육되어 문선명에 끌려 다니는 통일교 교인들이 불쌍합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영혼의 노예가 되었고 그들의 병들고, 지친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픔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에게 처음부터 오직 구원은 예수님 뿐이요,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고신앙으로 이끌어 주는 성도가 있었다면 30년 동안 지옥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통일교가 문선명 개인이 만든 이단 사이비 집단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면 처음부터 발을 내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단에 속한 생면부지의 사람이 건내준 한 장의 전단지가 저와 저의 가족의 일생을 결정지었다면, 참되신 하나님의 자녀요 참구원을 주는 기독교회 성도들의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수 있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은 처음부터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생애 최고의 축복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놀라운 구원을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선물로 받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땅에 만연된 이단 사이비를 몰아내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성직자와 1천 2백만 기독교 성도들이 하나로 단결하고, 모든 언론과 지성인들이 합심하여 통일교와 같은 사이비종교를 이 땅에서 뿌리뽑을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추천해주신 한기총 대표회장 김기목사님, 한기총 직전 대표회장 이만신 목사님, 한기총 명예 회장이신 지덕 목사님, 민족 복음화 운동본부 총재이신 신현균 목사님, 전 총신대 총장이신 신학자 김의환 박사님, 한국 기독교 지도자협의회 상임회장이신 신신묵 감독님, 통합교단 총회장이신 최병두 목사님, 기독교 대한 감리회 장광영 감독님, 기독교 대한 성결교 총회장이신 이정복 목사님, 기하성 총회장이신 이재창 목사님, 한기총 총무이신 박영률 목사님, 한기협 대표회장 최재우 목사님, 한기총 이단 사이비 대책 위원장 이용호 목사님, 한기총 이단사이비 상담소장 최삼경 목사님, 한국 기독교 이단문제 연구소 이사장 심영식 장로님 등 범 기독교단 적으로 문선명 이단집단 궤멸을 위해 이 책을 추천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제가 2001년 1월 9일 통일교 현직 목사직을 탈퇴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통일교 비교리성과 비리를 지속적으로 보도해준 모든 기독교 방송과 언론사 관계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제 오직 성삼위 일체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1,200만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교회의 헌금을 하나님의 대적이며 우상인 문선명과 같은 사이비종교를 뿌리뽑는데 투자해 주십시오. 저에게 기독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모든 성직자와 기독교 성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2002년 2월 17일

저자 박준철 목사 드림

 





추 천 사‥‥‥‥‥‥‥‥‥‥‥‥‥‥‥‥‥‥‥‥‥‥‥‥‥‥‥‥‥‥‥04
머 리 말‥‥‥‥‥‥‥‥‥‥‥‥‥‥‥‥‥‥‥‥‥‥‥‥‥‥‥‥‥‥‥12


제 1장 나의 유넌 시절과 잃어버린 한쪽날개‥‥‥‥‥‥‥‥‥‥‥‥‥‥‥23
제 1절 나의 어린 시절
제 2절 잊지 못할 억울한 누명
제 3절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중학시절
제 4절 부산 오육군 병원의 생활
제 5절 양보중학교에 복학
제 6절 보상금 15만원이 나의 왼팔이라니
제 7절 고향을 떠나 자활의 길로



제 2장 통일교 전단지 한 장에 빼앗긴 30넌, 잃어버린 30년‥‥‥‥‥‥‥‥35
제 1절 단 한번의 악연으로 통일교 입교
제 2절 천안교회 청년회 부회장
제 3절 새벽 기도 하던 중 영계에 가보고 나서..
제 4절 통일교의 제2차 기동대 활동
 


제 3장 첫 사역인 충북보은 적암교회‥‥‥‥‥‥‥‥‥‥‥‥‥‥‥‥‥‥‥46
제 1절 기적은 일어나고
제 2절 성결교 신학교
제 3절 문교주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의식인 합동결혼식



제 4장 서울 강서교구 ‥‥‥‥‥‥‥‥‥‥‥‥‥‥‥‥‥‥‥‥‥‥‥‥‥52
제 1절 교구본부교회 개척, 부흥, 교회건축
 


제 5장 노원교구 달부 개척교회 제1차 건축
제 1절 그래도 끈질긴 충성
제 2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길
제 3절 제 1차 노원 교회 교회 대지 매입 건축


제 6장 새 생명의 결실인 3남매‥‥‥‥‥‥‥‥‥‥‥‥‥‥‥‥‥‥‥‥‥63
제 1절 첫 딸인 '박은주'
제 2절 아들 '박영진'
제 3절 막내인 '박은영'



제 7장 서을 노원 교구본부‥‥‥‥‥‥‥‥‥‥‥‥‥‥‥‥‥‥‥‥‥‥‥70
제 1절 2차 교회 대지 매입 재건축 성공
 


제 8장 서을 노원 교구에서 경기 화성 교회로 강제로 인사 이동‥‥‥‥‥‥75
제 1절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박길남 교구장의 거짓 약속
제 2절 꿈에 나타난 문선명



제 9장 경기 화성 교회가 전국 통일교 최우수 교회로 부흥‥‥‥‥‥‥‥‥‥80
제 1절 다시 일어선 교회 개척
제 2절 화성 교회 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제 3절 마지막까지도 아버지께 불효
 


제 10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교회로 다시 인사발령‥‥‥‥‥‥‥‥‥‥‥‥‥89
제 1절 통일교에 바친 목숨
제 2절 서울 노원교회에서 3차 발전



제 11장 서울 노원 교회가 한국 통일교 우수 교회로 121회장상 수상‥‥‥‥‥93
제1절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제2절 3차 교회 대지 161평을 매입
 


제 12장 서울 노원교회 교회 건축 ‥‥‥‥‥‥‥‥‥‥‥‥‥‥‥‥‥‥‥‥98
제 1절 1988년도 교회 건축 목표
제 2절 국회의원 당선에 관여한 통일교
제 3절 노원교회 역사적 교회 건축 기공식
제 4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상량식
제 5절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당한 폭력과 폭행
제 6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준공을 완료311



제 13장 통일교 아름다운 교회 헌당식 ‥‥‥‥‥‥‥‥‥‥‥‥‥‥‥‥‥‥114
제 1절 노원교회 3차 교회 건축 헌당식
제 2절 베풀어 준 은혜와 축복을 배반으로 갚은 사람들
 


제 14장 노원교회를 찾은 문선명‥‥‥‥‥‥‥‥‥‥‥‥‥‥‥‥‥‥‥‥‥120
제 1절 자칭 감동받은 문선명



제 15장 서울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 받은 비극적인 사건‥‥‥‥‥‥‥‥‥‥‥122
제 1절 동토의 왕국인 통일 제국의 교구장 임명
제 2절 김승철 총무국장의 인사비리와 폭행사건
제 3절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얻은 심장병



제 16장 빼앗긴 교구장직과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 총무국장과 협회전직원시위대‥133
제 1절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총무국장과 협회직원들
제 2절 나상렬 노원교구장의 배신
제 3절 공릉동 교회의 지옥 같은 생활



제 17장 전국 통일교 목사 전체 500명의 박탈당한 목사직‥‥‥‥‥‥‥‥‥‥141
제 1절 교회사택에서 쫓겨난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
제 2절 7개월 만에 박탈당한 500명의 목사들
제 3절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독서실 운영
제 4절 고시원 운엉 중 다시 꿈꾸게 된 목회 길



제 18장 부산 영도교회‥‥‥‥‥‥‥‥‥‥‥‥‥‥‥‥‥‥‥‥‥‥‥‥‥ 152
제 1절 부산 영도 통일교로 인사발령
제 2절 부산 엉도교회 부흥 발전
제 3절 죽음의 자리에서 두 천사의 도움으로 구한 생명



제 19장 자살을 결심하고 죽음의 문턱에 서서‥‥‥‥‥‥‥‥‥‥‥‥‥‥‥168
제 1절 족벌왕국에 환멸을 느끼고
제 2절 "준철아! 죽지 말아라"



제 20장 폭언 폭력 배신으로 일괄된 통일교 지도자‥‥‥‥‥‥‥‥‥‥‥‥‥171
제 1절 황선조 회장에게 한 직언
제 2절 김용갑 교구장의 폭언과 폭행
제 3절 문책인사를 약속한 황선조 회장
제 4절 눈물로 세운 부산 영도 교회를 떠남
제 5절 과천통일교회에서의 비참한 생활
제 6절 연속되는 폭행과 폭력과 거짓말들
제 7절 위장된 합동 결흔식
제 8절 비참한 현실의 벽을 넘어선 사투
제 9절 저는 하나님 뿐 아니라 아내와 자녀에게 죄인입니다.



제 21장 목숨을 건 문선명 통일제국 탈출 ‥‥‥‥‥‥‥‥‥‥‥‥‥‥‥‥‥‥192
제 1절 '준철아, 붉은 통일교 감옥을 탈출하라.'
 


제 22장 통일교 과천교회 박준철 현직목사 탈퇴 기자회견 54가지 비리폭로 ‥‥‥196


제 1절 문선명의 정체와 통일교 비리폭로
제 2절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통일제국의 정체폭로
제 3절 기독교 성도들에 대한 박준철 목사의 호소문한국 기독교 이단 종파 문제 연구소 설립
제 4절 한국 기독교 통일교 대책협의회 설립,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한국 기독교 이단 종파 문제 연구소 설립
제 5절 국제 자살 ·살인 방지 연구소 설립 계획
 


제 23장 문선명 통일교 비판‥‥‥‥‥‥‥‥‥‥‥‥‥‥‥‥‥‥‥‥‥‥‥‥‥242


제 1절 문선명의 출생과 통일교 창단 배경
제 2절 원리강론은 김백문 교리를 도용한 것
제 3절 문선명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비판
제 4절 예수, 공자, 석가를 자신의 제자라고 말하는 문선명



제 24장 혈통복귀 피가름 집단인 문선명 통일교 ‥‥‥‥‥‥‥‥‥‥‥‥‥‥‥‥254


제 1절 처음부터 혈통복귀집단이 된 통일교
제 2절 문선명은 혈통복귀교리를 통해 가정을 파괴한다
제 3절 통일교는 혈통복귀의식이라는 3일식 피가름행사
제 4절 문선명이 창안한 혈통복귀 피가름의식
제 5절 문선명 통일교의 혈통복귀 피가름 3일간 복귀의식



제 25장 문선명은 모든 사람의 재산물 착취하고 파멸시킨다‥‥‥‥‥‥‥‥‥‥‥265


제 1절 문선명은 자녀와 가족 구원도 못시킨 거짓 메시아이다
제 2절 문선명의 둘째 아들 문흥진의 사망
제 3절 재림한 문흥진 노릇한 에지프트
제 4절 문선명과 친인척은 재산착취를 통해 초호화 생활을 누린다
제 5절 문선명의 브라질 자르딘 계획
제 6절 재산착취 수단인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제 7절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임을 증명한 사람들



제 26장 통일왕국을 꿈꾸는 문선명‥‥‥‥‥‥‥‥‥‥‥‥‥‥‥‥‥‥‥‥‥‥‥285


제1절 통반격파를 지시한 문선명
제2절 통일제국 건설을 위한 문선명의 음모
제3절 문선명 한학자 교주의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



제 27장 문선명 통일교 척결을 위한 주장 ‥‥‥‥‥‥‥‥‥‥‥‥‥‥‥‥‥‥‥292


제 1절 통일교는 사이비 교주의 온상입니다
제 2절 문선명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기독교 교인을 추방해야 합니다
제 3절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하는 전 현직 국회의원을 낙선시켜야 합니다
제 4절 기독교회에 부탁의 말씀

 

통일교 집단과 외로운 싸움을 하는 박준철 목사를 돕자 ‥‥‥‥‥‥‥‥‥‥‥‥305
그림 및 사진 화보 ‥‥‥‥‥‥‥‥‥‥‥‥‥‥‥‥‥‥‥‥‥‥‥‥‥‥‥‥‥313
참고 도서 목록‥‥‥‥‥‥‥‥‥‥‥‥‥‥‥‥‥‥‥‥‥‥‥‥‥‥‥‥‥‥364
저자소개‥‥‥‥‥‥‥‥‥‥‥‥‥‥‥‥‥‥‥‥‥‥‥‥‥‥‥‥‥‥‥‥‥366


 


제 1장 나의 유년시절과 일어버린 한쪽날개

 

제 1절 나의 어린 시절

 

저의 고향은 남한의 명산인 지리산과 어우러져 있는 경남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중하쌍 부락이라는 60호 정도 되는 작은 산골마을입니다

처음에 저희 집은 아버지께서 지리산에서 숯을 구워 시장에 내다 팔아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가산을 꾸려갈 수 없어 중하쌍 부락 건너편에 집이 두 채밖에 안 되는 구덕골의 윗집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바로 그 쓰러져 가는 작은 초가집에서 부친 박복식씨와 모친 정남시씨의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이 세상에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남의 농토도 임대해서 농사를 짓고, 산에서 숯도 구워서 팔고, 나무도 해 가지고 시장에 팔아서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봄에는 쑥을 캐어서 쑥밥을 해 먹고, 산의 소나무껍질을 벗기고 칡을 캐어 먹고, 일본사람들이 거름으로 사용하는 콩기름을 짜고 남은 콩 찌꺼기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습니다. 그 때 우리 7남매는 무밥, 감자밥, 고구마라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산 때문에 아버지는 매일 술로써 시름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동네에서 제일 인정스러운 분이셨고 일을 할 때에는 동네에서 부지런하기로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3,500평 의 논밭을 사게 되었고 농사를 지어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가정 환경 탓에 2살 때에는 홍역과 황달로 온몸에 부스럼 이 생기며 사경을 헤맨 때도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언제나 욕심이 많고 고집이 세며, 싸움을 해도 지지 않으려는 승부근성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가정을 탓하지 않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전, 오후 각각 한번씩 나무를 하고 풀을 베는 일을 지만, 저는 하루에 세 번씩 일을 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소를 산으로 끌고 다니며 풀을 먹이고, 아침저녁으로 소죽을 끓여서 먹였습니다. 돼지 밥과 닭 먹이를 주는 것도 항상 제 몫 이었습니다. 먼 거리의 우물에서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어오는 것도 저의 일과였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한 꼬마로 통했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효도하려고 심부름도 잘하고 팔다리도 주물러드렸습니다. 어쩌다가 돈 10원이라도 생기면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그 돈을 모아 놓았다가 저에게 용돈으로 주셨고 엿 장사가 오면 엿도 사 주시고 과자도 사 주셨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제 2 절 잊지 못할 억울한 누명

 

초등학교 4년 때 잊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체육을 하고 반 친구들과 같이 교실에 들어오니 '박용진' 선생님이 저를 지목하여 돈 30원을 훔쳤다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저는 해명도 못하고 누명을 뒤집어 썼습니다.

박 선생님은 저의 귀를 잡고 운동장으로 끌고 다니면서 어디 에 돈을 숨겼느냐고 호통을 치며 다그쳤습니다. 저는 돈을 훔치지도 않았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오후에 남아 많이 매를 맞았습니다매를 맞은 손과 장딴지가 부어서 며칠 동안 걸을 수 얼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저는 분한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는 왜 변명 한 마디 못하였는지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왜 박용진 선생이 저를 지목하여 누명을 씌워 학생들 앞에서 망신을 시켰는지 지금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며칠 후, 우리 동네에 사는 같은 반 배정순이라는 여학생이 하옥실이가 체육시간에 당번을 하면서 돈 30원을 훔치는 것을 보았다. ' 고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며칠이 지난 후여서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누명을 쓴 채 말도 못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친구들 중에는 병으로 죽는 일이 많았습니다. 절친했던 동네 친구 박준국이 폐병으로 죽었고 이어서 유영이라는 친구도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어린 나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같이 뛰어다니며 웃고 떠들며 놀던 친구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너무나 가슬 아프고 슬펐습니다.

 

제 3 절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중학시절

 

저는 두 학급만 뽑는 양보중학교 시험에 합격하여 1963년 3월부터 집에 서 학교까지 왕복 20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까밖 고무신을 신고 책 보따리를 허리에 매고 놋쇠 사발에 밥을 넣어 갖고 다떠 서 창피했는데 중학교 때부터는 양은 도시락을 갖고 다녀서 좋았습니다.

집안 일을 하며 학교에 다녔으므로 시간이 모자라 항상 뛰어가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소에게 풀을 먹였고, 겨울에는 새벽부터 소죽을 끓여 먹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새벽부터 집안 일을 하다 보면 아침 식사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물에 밥을 말아서 급하게 먹고 학교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해 가는 1963년 7월 3일 오전 10시, 하동지방에 대홍수가 나서 저희 학생 40명은 수해복구를 하기 위해 군 트럭을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콩나물 시루같이 가득 태운 GMC 군 트럭 이 과속을 하다가 장암리에 있는 양보초등학교 앞 작은 개울에서 전복사고를 일으켰습니다. 브레이크도 소용없이 트럭은 개울 위로 날아가 아름드리 벚꽃나무를 두동강이 내며 추락했습니다. '쾅' 하는 순간 차를 타고 있던 학생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차바닥은 순간 피로 넘치고 고통의 신음소리도 가득차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이 사고로 왼쪽편에 탄 13명의 착생들이 심하게 다쳤습니다. 다친 학생들은 하동 읍내 작은 의원으로 후송되었는데 저의 왼쪽 팔도 부서져 버렸습니다. 저는 어깨 죽지까지 뼈만 앙상하게 남고 팔 관절이 부서지고 손바닥까지 뼈가 드러난 것을 보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식을 잃어가면서 저의 왼팔로 피가 쏟아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며 3일 후에야 깨어나 아버지와 어머니를볼 수 있었습니다

장마 때문에 보리가 썩어 마당에 말리고 있는 중 아버지, 어머니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그 날 신문에도 우리의 교통사고가 보도 되었습니다. 교통사고는 저의 인생이 온갖 멸시와 천대, 행동의 부자유, 생활의 고통.아픔이 동반된 생지옥 같은 생활이 되는 출발점 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막 태어난 막내 동생 준서와 그 위로 여동생 영희가 걱우 걸음마 할 정도였습니다. 저의 사고로 어머니가 간병을 하기 위해 병원에 계셨기 때문에 그 때부터 8개월 동안 준서는 젖을 먹지 못하고 영희와 다른 동생들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동생들에게 죄인 같은 심정 입니다. 학생 13명이 다쳤기 때문에 학교 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병 문안을 왔습니다.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도 많이 왔습니다. 지금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폐병으로 돌아가신 영어 선생님이 가장 병 문안을 많이 오셨고 자식이 사고를 당한 것처럼 가슴 아파해 주셨습니다.

하동의원 의사는 아버지에게 저의 팔 관절이 완전히 부서져서 가루가 되었기 때문에 어깨 죽지까지 잘라야 찬다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팔을 붙여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사는 뼈가 부서진 관절과 팔 뼈들을 모아 대강 붙이고 살을 바늘로 꿰매 놓았습니다. 그러나 팔은 계속 썩어 들어갔습니다. 한 달 동안 하동의원에서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꼼짝 못하고 누워 있다가 부산 오 육군병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 육군병원에 도착해서 처음 진료한 군의관들이 '팔의 뼈가 굳기 전에 병원에 왔더 라면 어느 정도 나을 수 있었을 것을 무지해서 시기를 놓쳤다. '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사고 즉시 큰 병원으로 후송해서 치료 하였더라면 어느 정도는 고칠 수 있었을 텐데 한 달간 하동병원에 방치했었기 때문에 치료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는 '제 주위에 스승이나 어른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큰 병원으로 후송해 팔을 치료 하라는 말을 해 주었더라면. . .' 하는 마음을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제 4 절 부산 오육군 병원의 생활

 

부산 영도다리 옆에 있는 오육군 병원에 8월 1일부터 입원한 후 썩은 부분을 수술로 잘라 내는 일을 수 차례 했습니다. 거듭되는 수술로 팔에 남아있는 살이 없어서 양쪽 허벅지 살을 떼어서 입히는 대 수술을 네 번이나 하였습니다. 그리고 팔을 'ㄱ' 자로 려어 긴 대못 2개로 박아 고정시켰습니다. 수술과 치료 때마다 밀려오는 아픔은 중학교 1학년 학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이였습니다. 오 육군병원에서는 1964년 2월말까지 7개월 정도 지냈습니다.

병원 생활은 어린 저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사고 전에는 마음껏 달리고, 씨름하고, 철봉대에 매달려서 운동했는데 이제 왼쪽 팔을 잃었으니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비관하고 학대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비관적인 생각 때문에 병원 옥상에올라가 밑을 내려다보며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당시 오 육군병원에는 민간인으로는 저 혼자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군의관과 간호원 뿐 아니라, 군인 아저씨들은 저를 장애자라는 이름대신 '꼬마' 라 부르며 따뜻한 사랑과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지금도 금보다 더한 희망적인 격려의 말씀만 들려준 그 군인아저씨들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1964년 2월말에 오육군 병원을 퇴원하여 하동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사고는 저에게 왼팔을 잃어버린 2급 장애자라는(1999년 5월 28일판정)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절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저는 37년 동안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장애인의 혜택을 받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 모든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고 적은 혜택이라도 받기 위해 장애자 등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8개월 동안의 고통스러운 병원생활이었지만 사고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 5 절 영보 중학교에 복학

 

그 해 3월에 중학교 1학년에 복학하여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친구들은 2학년인데 저는 1학년이라서 속상했습니다. 건강했던 육신은 어디로 가고 한쪽 팔을 못 쓰는 장애자가 된 제 자신의 모습을 보니 매일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할수 있는 일이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겨울교복을 입을 때는 긴 팔이라서 괜찮았지만 여름교복을 입을 때는 매일 매일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습니다. 남을 의식하여 팔이긴 흰 내의를 입은 다음 짧은 하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이런 저의 복장은 학교에서나 밖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저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혼자 학교를 뛰어 다녀야 했습니다. 체육시간에는 언제나 의자에 앉아서 운동하는 친구들을 바라만 보았습니다. '언제나 1년 전 같이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운동도 하고 같이 행동할 수있을까?' 하고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영원히 불가능한 꿈이 되어버렸습니다.

군 트럭을 같이 탔던 '박상길' 은 사고 즉시 팔을 어깨부분까지 절단을 하였고 그 외 여러 친구들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박상길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끝내는 외롭고 괴로웠는지 술을 먹고 열차사고로 먼저 사망하였습니다. 김순길도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마산 통일산업에 다니며 성실하게 살았는데도 백혈병으로 먼저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순식이도 포크레인을 운전하다가 돌이 날아와 뇌진탕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제 주위의 여러 친구들이 결혼도 못 해보고 저의 곁을 떠났습니다. 저는 팔 때문에 자연적으로 왕따가 되기도 했지만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활동적인 학생으로 자라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 공부를해야 하는지,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목표가 없었습니다. 저의 장애 때문인지 주위에서 아무도 공부하라는 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공부의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저는 장애자가 공부를 해도 쓸 곳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누군가가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학업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저에게는 집안일 밖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소 풀을 먹이고, 퇴비를 해오고 다시 학교 갈 준비를 하여 10리 길을 뛰어갔습니다. 수업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오후에도 소 풀을 먹이고 펄감도 하고, 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장암리 양조장이나 '방성지기' 주막집에서 술이 취하신 아버님을 밤늦게 집으로 모셔오는 것이 저의 일과였습니다.

아버님이 집에 오시면 술이 깰 때까지 온 가족의 이름을 불러댔습니다. 어머니는 논농사, 밭농사에 허리가 다 휘어질 정도로 일생동안 고생만 하였습니다. 아버님의 술 때문에 참다 못한 어머니가 집을 나가서 며칠을 오지 않아 온 동네사람들이 대방골 못에 가서 물을 빼고 어머니를 찾는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절에 있다가 3일 후에 돌아오셨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술 먹지 않는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 그 당시 저의 소원 이었습니다.

한 팔을 못쓰다 보니 나무를 하다가 왼쪽 손목을 낫으로 찍어서 피투성이가 된 때도 있었고 오른 손가락을 찍어서 뼈가 다 나을 정도로 잘라진 때도 있었으며, 겨울에 나무를 하다가 바지에 불이 붙어 무릎을 다 태워서 몇 달을 고생을·한 때도 있었습니다. 풀베기와 나무를 하도 많이 해서 허리에 큰 종기가 나서 치료를 하느라 2달 동안 고생을 한 때도 있었습니다. '정한봉' 에서 풀을 해 오다가 절벽으로 떨어져 죽을 고비도 넘겼으며 땔감 나무를 하다가 7m정도 높이의 나무에서 떨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비록 팔 장애를 가졌지만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리타작을 할 때면 보리이삭을 주우러 다녔고, 가을이면 나락이삭을 주우러 다녔습니다. 고구마를 캔 자리에 고구마 이삭을 캐러 다녔습니다. 겨울에는 산에서 나무를 해서 팔기도 했고 장작을 도로까지 날라주고 돈을 번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였지만 일에 미친 사람같이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저의 학창시절은 학교생활 보다는 가정 일에 더 열심이었습니다.

 

제 6절 보상금 15만원이 나의 왼팔이라니

 

저는 그 당시 군 트럭으로 인한 교통사고를 국가가 보상해 준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저의 어머니 아버지나 동네 친척들도 순박한 산골 사람들이라 알지 못하였습니다. 누구도 저의 한쪽 팔을 잃어버린 현실에 대한 피해보상과 저의 장래에 대한 계획과 대책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저의 한쪽 팔의 장애에 대한 피해보상 보다는 집안 일과 학교 다니는 일에만 매달려야 했습니다. 저는 어리지만 언제나 7남매를 키우기 위하여 밤낮 없이 논밭에서 일하시는 어머님을 도와 어머님의 손발이 되어 드리고자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통사고 브로커가 와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 보상금을 받아 주겠다고 하여 아버님과 형님은 소송을 맡겼습니다. 1966년에그 브로커가 다시 와서 처음에는 10만원을 주고 한 달 후에 와서 5만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상금이 얼마나 나왔는지는
얘기해 주지 않아 아무도 몰랐습니다. 돈 15만원이 나의 왼팔을 대신 하였는데  5만원은 부모님이 쓰시고 10만원은 형님이 쓰고 끝났습니다. 저는 그 당시 어른들의 무지함과 무책임과 무관심을 지금도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1970년에 변호사에게 물어보았더니 시효 3년이 지나 불가능 하다고 하였습니다.

일제 시대의 정신대 피해보상, 6 · 25 전쟁 보상, 월남전 고엽제 피해, 5·18피해도 3년이 지났지만 보상을하고 있습니다. 이 처참한 현실 앞에 왜 3년 시효가 지났다고 피해보상을 받을 수 없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수시로 팔이 아파서 진통제와 약을 사먹고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도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 고아원, 양로원, 장학재단을 설립하겠다는 것이 꿈이 었습니다.

 

제 7 절 고힝을 떠나 자활의 길로

 

저는 서울에 계신 큰 형님의 가구 공장에서 일을 하기로 하고 1968년 2월 21일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하동에서 서울까지 완행기차로 14시간이나 걸려 서울에 도착하엿습니다. 제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이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양보중학교 위에 있던 절의 주지승은 저에게 '학생은 세상에서 장사를 하면은 큰 부자가 되고, 도를 닦으면 큰 인물이 된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저는 악몽을 꾼 것 같은 지난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큰 부자가 되어 학교도 설립을 하고, 양로원도 운영하고, 고아원도 운영을 하고자 고향을 떠나 낮설은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돈을 벌어 이 사회를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형님의 가구 공장에서 1년을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도 형제지간이라 월급은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해 겨울 하동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두 번 째로 고향을 떠난 것은 1969년 2월 21일 입니다. 하동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우리나라 중앙 부분인 대전역에 내리자 밤이 되었습니다. 역 옆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시장구경을 하던 중 큰돈을 투자하지 않고도, 김장사와 미역장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수중에 돈 2만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연히 만난 사람이 빌려 달라고 하여 7천원을 빌려주고,남은 돈으로 방 값을 내고, 밥을 사 먹는 생활을 하다가 돈이 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돈 50원으로 국수를 한 다발을 사면 15일 동안 먹을 수있었는데 그것마저 떨어져서 거지 신세가 되어 길에서 가게마다 다니며 빵을 구걸하여 먹고살았습니다.

할 수없이 저는 대전서 청주까지 걸어가며 막노동 일을 찾아 다녔습니다. 청주에서 2일 동안 돈이 없어서 굶다가 재산 목록 1호인 시계를 5백원에 팔았습니다. 청주서 버스를 타고 신탄진까지 와서 신탄진에서 버스비를 아끼려고 걸어서 대전까지 왔는데 헤매다가 보니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자취방에 돌아왔습니다.

또 다시 막일을 찾았지만 일이 없어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저의자존심과 체면도 배고픔 앞에서는 송두리째 무너져 갔습니다. 집주인에게 밀린 방세 때문에 온갖 욕을 얻어 먹었습니다 구걸하면서 젊은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이 없어서 얻어먹고 사느냐는 비난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돈 빌려 준 집을 찾게 되어 한달 만에 7천원을 받아 대전시장에서 미역과 김을 사서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미역과 김을 팔기 위해 금산장에도 가고, 공주 장에도 가고, 옥천 장에도 가고, 신탄진 장에도 돌아다니는 말그대로 장돌뱅이가 되어 5일장을 부지런히 쫓아 다녔습니다.

돈이 약간 모아지자 나이론 옷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옷을 고르는 척하다가 자꾸 훔쳐가서 할 수없이 옷장사를 정리 하였습니다. 저는 수도공사를 하는 공사장에서 땅 파는 일을 하다가 겨울에 다시 고향인 하동에 돌아가 가사일을 돌보며 산에서 땔감나무 해오는 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1970년 2월 21일 그 동안에 모아두었던 3만원을 가지고 완행열차를 타고 이 번에는 천안에 갔습니다. 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자고 그 이튿날 천안 방죽거리에 하숙집을 정하고 바로 그 날 서울 중부시장에 가서 김 1박스를 도매로 가져와서 천안, 온양, 진천, 안성, 병천, 오산, 평택 장으로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김 뿐만 아니라 북어도 팔고 미역도 팔며 기반을 닦아 갔습니다. 그리고 쌍용동에 살다가 성정동의 새 양옥집 전세방 한 칸을 얻어 이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돈버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장사를 하고 저녁마다 집에 돌아와 돈보따리를 정리하여 돈을 세는 재미에 고달픔도 잊을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돈을 보내고 옷도 사서 부쳐 드렸습니다. 동생들의 책값과 용돈도 보내주었습니다.

매일 외롭고 고달픈 하루의 생활이었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꿈에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하루 하루 돈이 불어나는 재미에 희망을 갖고 열심히 장사를 하였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참으로 열심히 살며자립의 기반을 다져갔습니다.

 

 

제 2장 통일교 전단지 한장에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넌


제 1 절 단 한번의 악연으로 통일교 입교

 

저는 1970년 7월 31일. 5일장이 안 서는 날이라 마당 수돗가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있던 중,  키가  150cm정도 되는 아주 작고 배가 만삭인 정선자라는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전단지 한 장을 주면서 "밤에 우리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니 와서 들어보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객지생활에서 외로웠던 저는 그  전단지 한 장에 끌려 내 발로 걸어가 통일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전단지를 주며 문선명의 통일교를 믿으라는 정선자 씨의 말 한마디가 결국 제 인생을 빼앗고 파멸시켜 버렷습니다.

제가발을 내디딘 천안 통일교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은 단촐한 분위기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40일 하계 전도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에는 통일교 부인들이 남편과 자녀를 떠나 전국    각 통일교에 배치되어 전도 활동을 합니다. 천안 통일교에도 처음에 몇 명이 나와 열심히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학동안에는 부인 전도 대원들이 전도를 했지만 모두 자기 가정으로 돌아갔고 교구 본부인 천안교회는 교인들이 얼마 되지 않아 교회형편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1970년 11월 25일. 777쌍 합동 결혼식을 올린 부인 전도 대원들이 결혼 후에도 남편과 같이 살지않고 3년동안 전도를 하기 위해 천안교회에 전도대원으로 배치되어 왔습니다. 천안 통일교는 지원나온 전도대원들의 전도를 적극적으로 해서 조금씩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김민중 목사는 저에게 열정을 가지고 통일교 교리를 가르치면서 3년 후면 기독교가 통일교로 전부 흡수되고 불교, 유교 등 모든 종교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게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원리 강론인 창조 원리부터 채림론까지 들으면서 문선명이 틀림없이 재림주이며 참부모님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김목사는 3년 안에 종교 통일은 물론 정치, 경제, 언론, 문화까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고 순종하고 따르며 전체가 통일된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으면 3년  내에 지상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강의하였습니다.

부인 전도 대원들은 합동 결혼식을 하고도 제일 깨가 쏟아진다는 신혼 초인데도 남편과 살지 않고 문선명 교주를 위해 시간을 바쳐서 전도 활동을 하여 죽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 부모인 문선명에게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 왔다고 기쁜 보고를 드리기 위해 전도 활동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꽁보리밥과 김치만으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미역을 주면서 미 역국도 끓여 먹게 했습니다.

김민중 목사의 사모는 큰그릇에 빵을 가득 담아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구장 사모가 머리에 빵을 이고 집집마다 돌아 다니며 장사를 하는 것을 보니 통일교 목사의 길을 알 것 같았습니다.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구 본부의 총무 부장인 박무병씨는 호떡 장사를 하여 천안교회의 재정을 돕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전도 대원들은 생활비를 조금씩 냈지만 교회운영비로서는 너무 부족했습니다. 저도 간간이 교회에 가서 꽁보리 밥과 시래기 국을 먹은 때도 있었습니다.

 

제 2 절 천안교회 청넌회 부회장

 

저는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운영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5일장을다니며 미역 장사, 김 장사, 건어물 장사를 하여돈 버는 재미에 빠져 있었습니다. 매일 자전거에 미 역과 김을 싣고 안성, 진천, 온양, 오산, 천안장에가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갈 때면 왼쪽 팔을 사용할 수 없어서 오르막을 올라갈 때는겨울에도 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자전거에 짐을 싣고 갈 때 버스나 트럭이 인정사정 없이 저를 스쳐 지나가서 위험한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찬 바람에 자전거와 육중한 건어물 짐과 같이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는상처를 입을 때도 많았습니다. 힘 들었지만 건어물 장사를 할 때 좋은 장소를 잡았고 저의 열성 때문에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제가 장사가 잘되니까 주위 다른 장사들 중에 시기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 잘 대해주어서 대인관계도 좋았습니다.

천안 방죽거리에서 자취할 때 시장에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밤 9시경에 천안 시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저의 집까지 기독교 목사님 한분이 기진맥진 하여 찾아 왔습니다. 충남 서산에서 교회를 하다가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교회를 떠나 사모와 삼남매를 데리고 여인숙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3일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딱한 사정을 듣고 목사님을 자전거에 태우고 천안역 앞 여인숙에 가서 사모님과 자녀들을 데리고 가서 식사 대접을 하고 돈을 조금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떠날 때까지 적은 정성이지만 도움을 드렸습니다.

하루는 장사를 하고 막 돌아와 밥을 지으려고 하는데 멋진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맨 신사가 와서 배가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얼굴도 점잖고 잘생긴 분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열차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음료수 한 병을 주어서 마셨더니 수면제를 탄 음료수인지 모르고 잠들게 되었고 일어나 보니 상위 양복과 지갑을 도둑 맞았다고 했습니다. 할 수없이 옥천에서 내려 천안까지 철길로만 걸어올라 왔다고 하였습니다. 집이 서울이기 때문에 먹을 것을 얻어먹고 영등포에 있는 집에까지 걸어서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분을 모시고 천안 시내까지 가서 식당에서 짜장면을 곱빼기로 사드리고 집에 들어 갈 때 과자와 과일을 얘들에게 사가라고 돈을 조금 드리고 서울행 버스표를사서 보내 드렸습니다. 며칠 후 주인 아주머니 말이 저에게 도움을 받은 분이 서울 올라가서 은혜를 갚기 위해 천안 자취 집에까지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저의 자취방은 도로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일이 많았습니다.

천안 성정동에 살 때는 우연히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는 화가를알게 되었는데 그 화가도 생활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몇 달 동안 쌀, 라면,반찬을 사다 드렸는데 그때마다 저의 어머니처럼 생각되어서 항상 많이 못사다 드리는 것아 가슴 아팠습니다.

저는 길에서 행려 병자가 쓰러져 있거나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얼마라도 도와주어야 마음이 가벼운 성격 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여자 분에게는 시장에 가서 옷을 사다 드리고 남자 분에게는 집에 있는 제 옷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가서 드린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사이비 종교인 통일교에 발을 내 디딤이 영혼과 육신을 빼앗기고, 꿈도 청춘도 가정의 모든 것도 빼앗기는 순간인 것을 그땐 몰랐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깨닫고 보니 그것은 악몽의 만남, 죽음의 속삭임, 사단 마귀의 역사였습니다. 그 당시 통일교 교인보다 먼저 기독교 교인이 저의 귀에 통일교는 이단교회라 교육을 했더라면 제가 통일교에 입교하여 인생이 파멸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통일교가 이단교회라고 매일 한명에게라도 외친다면 저같이 어리석은 사람도 이단교회에 빠지는 일이 없이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통일교가 사이비 종교라는 외침을 통일교 입교 전까지 단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입교 후에는 이미 통일원리로 세뇌 교육이 되어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재림주로 믿고 섬길 때라서 통일교가 이단교회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 귀에는 기독교 교인이 통일교 반대하는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저는 진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참 부모님으로 재림주님으로 믿고, 우상으로 섬기며,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는 데 앞장섰고, 문선명을 재림 주님으로 구세주, 참부모, 천지 부모로 증거하는 데 모든 청춘을 바쳤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의 자녀나 형제, 친척, 친구가 지금 사악한 유혹에 빠져 통일교에 입교한다면 저와 같이 파멸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통일교 전도를 막아주십시오.

세계에서 사이비 종교의 천국이 대한민국이라 합니다. 사이비 교주들이 아름다운 금수강산, 지상천국인 이 땅에서 기독교를 모태로 하여 우후죽순같이 생겨났습니다. 살인집단 백백교, 암살 자살집단오대양교, 동방교,전도관 등 약 150파가 넘는 사이비 교주들이 저마다 주님이라고 자칭하며 선량하고양심적인 국민들의 영혼을 빼앗아 영적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가정 파탄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모든 성도는 일치 단결하여 목숨을 걸고 통일교와 사이비 이단을뿌리 뽑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4에 "하나님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 이라" 고 말씀했듯이 하나로 단결만하면 문선명 이단궤멸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와 각 교회에서 저를 간증집회에 초청하여 통일교의 정체와 비리를 알리고 싶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내 이웃을 전도하지 않으면 문선명 통일교 집단에 영혼을 빼앗겨 지옥으로 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은 경각심을 갖어야 합니다.

각 지역마다 사이비 종교 박멸운동을 범 기독교 운동으로 활성화시켜 나간다면 이 땅에 다시는 저 같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혼을 빼앗는 이단궤멸을 위해 싸워서 승리하라는 기독교 성도들에 대한 지상 명령 입니다.

 

제 3 절 새벽 기도 하던 중 영계에 가보고 나서..

 

1971년 7월 21일. 집에서 새벽기도 중 잠시 입신했습니다. 저의 육신이 방바닥에 쓰러졌는데 "준철아, 준철아, 준철아!" 라며 3번을 부르는 음성이 들렸고 마지막에 제가 "네!" 하고 대답을 했을 때 영혼이 육신에서 이탈하여 공중에 서 있었습니다.

그 음성은 다시 나에게 "준철아, 이 도끼를 받아.!"라고 말할 때 하늘로부터 큰 쇠도끼가 나에게 날아왔고 엉겁결에 오른 손을 내밀어 그 큰 쇠도끼자루를 잡게 되었습니다.

다시 "준철아, 쇠도끼를 잡았느냐?" 라고 묻자 나는 "잡았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더니 "이 세상을 내려다보아. 바짝 마른 나무는 사이비 종교이며 사단 마귀이니 다 짤라 버려라. 푸른 나무는 살아있는 신앙자이니 살려두어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백발 노인이 되어 쇠도끼로 썩은 나무를 베었습니다. 제가 베기를 다하고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허리를 펴고 일어섰을 때 "준철아, 이제 떠나거라." 라는 큰 음성이 천둥 번개소리 같이 저의 귀에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터널이 나오면 그 터널을 통과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저는 그 명령에 따라 터널을 통과하였습니다. 제가 터널을 통과하니 저 세상 영계였습니다. 한참을 그 곳에서 서 있으니 바다 가운데 수중 다리가 있었고,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자가용 한 대가 제 앞으로 왔습니다. 그차에 있던 운전 기사는 천사였는데, 그 천사가 말하기를 "제가 이제부터 모시겠습니다. " 하고 자가용 뒷 자리의 문을 열어주어 저는 차를 타고 끝 없는 길을 달려갔습니다.

마침내 그 차는 바다를 지나 육지에 도달했고 아름다운 궁전 입구에 정지하였습니다. 그 운전기사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따뜻하고 겸손한 자세로 대해 주셨고, "이제 제가 할 책임은 끝났다" 고 말했습니다. 저를 보고 그 천사 운전기사는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l서도 궁전 입구에 있던 남자가 자가용 문을 열어주면서 저에게 "어서 오십시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 하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안내를 받아 호화 찬란한 궁전 제일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올라가 가장 아름다운 방으로 안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방에 들어갔을 때 강렬한 빛이 있어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저에게는 음성만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하나님을 믿겠느냐!! 천국과 지옥을 믿겠느냐." 하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곳에서 "이제 준철아 떠나거라" 라고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죽은 나무 사단 마귀를 다 잘라버리고 백발노인이 되어 죽어서 할 일을 다하고 저승에 왔습니다. "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너에게 사명이 있어. 이 세상의 모든 사단 마귀와 죄악을 쇠도끼로 찍어 버려라." 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궁전을 내려와 수중다리를 통과하고 이승과 저승의 터널을 통과하여 내 집으로 들어왔는데 제 육신은 아직도 쓰러져 있었습니다. 영혼이 몸 속으로 들어가자 저는 의식에서 깨어났습니다.

저는 다시 살아난 후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제가 죽으면 끝이 아니고 영계의 시작이요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즉시 정 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끼를 받은 것은 목사의 사명을 받아 사단마귀를 찍어 없애라고 하나님이 저에게 명령한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통일교에 목사과정을 밟아 목사가 되었고 통일교 30년 신앙목사생활 중 생지옥같은 문선명 집단의 생활을 체험한 후 세뇌에서 깨어나 탈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며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단 사이비 교주인 문선명적그리스도를 궤멸하라고 저에게 도끼를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 이름으로 언론방송을 통하여 보도하고 각 교회에서 간증하는 일이 통일교회를 궤멸하는도끼받은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보도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문선명의 정체와 피가름 의식, 비리를 폭로하여 인류역사에 가장 큰 문선명 적그리스도를 뿌리 뽑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문선명은 1971년 1월 3일, 예수님 탄신일이라고 주장하며 통일교도인 처녀 장정순을 예수님과 결혼시켰습니다. 통일교 원리강의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제사장 사가랴와 마리아가 관계를 맺어 예수님이 탄생 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의 원리강의에는 '예수를 믿어도 완전구원을 받지 못하며, 실패한 예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이 참 부모요 재림주로서 이 땅에 탄생했기 때문에 예수가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은 1900년 음력 3월 1일을 참부모, 재림주로 섬기는 날로 정했습니다. 문선명의 생일인 1920년1월 6일을 재림주 탄신일로 정한 것을 통일교인들이 세뇌되어 모두 믿듯이 저도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목사가 강의하는 대로 모두 수긍하고 받아들이고 따랐습니다. 저는 3년 동안 모진비바람과 추위와 싸우면서 기반을 닦은 장사가 너무나 아까웠지만 물건을 팔고 다 정리하였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의 길이 제가 가야할 사명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제 4 절 통일교의 제 2차 기동대 활동

 

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목사 가정 인 제2차 기동대에서 6개월 동안 활동하기 위해 순전단 21일 교육에 들어갔습니다. 1972년 11월 21일.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수택리 중앙 수련소에 21일 원리 수련을 받았습니다. 창조원리부터 재림론까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재림주 참부모로 믿고 복종하며 증거하기 위한 세뇌교육 기간 이었습니다.

그 교육 후에 제2차 기동대 대원으로서 충북 순회 전도단 46명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기동단 단장은 임순도씨였습니다. 46명의 대원은 충북지역을 다니면서 6개월 동안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매일매일이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고 복종하며 통일교 발전을 위하여 충성을 맹약하는 고된 세뇌교육 훈련기간 이였습니다. 저는 훈련 기간 동안 무엇이든지 1등을 하고자 어떤 순전단 대원들보다도 더욱더 열심히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얼음 목욕도하고, 밤새도록 철야 기도도 하며, 산꼭대기 성지 기도회도 가졌습니다. 저는 특별 헌신대원으로서 전도를 하면서도 연필사업, 성미사업을 했습니다. 1960~1970년대의 통일교는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을 시켜 전국적으로 성미 구걸 사업과 연필사업, 떡 장사등을 하며 성금함을 들고 모금운동을 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나 추석, 설 명절 때도 모금 운동을 하였습니다. 저는 모금 운동에 자신 있게 활동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 가지 구실로 진행되는 통일교 모금활동에 동참하였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기 위하여 학자금 마련을 위해 헌신사업을 나왔다고 하며 집집마다 쌀과 돈을 달라고 하며 다녔습니다. 시골 동네를 다니면서 집집마다 쌀자루를 가지고 동정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순수하고 착한 시골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동정을 하여 100원, 500원, 1000원을 주었습니다. 연필 한 자루에 쌀을 한 되나 주시는 분도 있고 한 홉 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프면 찬밥이나 국수도 얻어 먹을 때가 많았고,고구마로 점심을 대신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쌀자루에 쌀을 모으면 나중에는 어깨에 둘러매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장거리를 갔다가 교회로 돌아 올 때면 밤 10시가 넘고 11시가 될 때도 있습니다. 교회에 도착하면 매일 녹초가 되었습니다. 모금 활동을 끝내고 밤늦게 돌아오면 결과 보고회, 원리강의 듣기, 기도회를 마치면 자정을 넘기기가 일수였습니다. 아무리 늦게 자도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정성스런 기도를 위해 냉수 마찰을 했습니다. 소변을 보면 그 자리에서 얼음이 어는 추운 겨울날에도 이런 일은 쉬지 않았습니다.

새벽 4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새벽기도를 하였습니다. 통일교는 각시 군 지역에 하나님이 임재하고 함께 하는 땅이라고 하는 '성지' 를 산꼭대기마다 정해 놓고 성지 기도라는 명목으로 새벽마다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헐벗고 굶주리며 매일매일 극기 훈련하는 심정 이었습니다.

이런 저의 노력으로 6개월의 순전단 졸업 때는 46명 가운데 1등을 했습니다 전도도 106명을 하여 우수상을 받고 개근상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문선명을 믿는다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요, 최고의 은사요, 최고의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6개월 동안 저는 매일 꽁보리밥에 김치만 주어도 감사했고, 한끼는 국수만을 주었는데도 저는 참 부모님, 재림주님이라고 믿었던 문선명의 은혜로 알고 감사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것이 예배, 기도, 전도, 쌀 거두는 성미 모으기, 봉사, 심정교육 생활이었습니다. 저는 코피를 다 쏟으며 6개월 동안 극기훈련을 받음으로서 문선명 통일교의 말단 목사, 교회장 자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된 훈련으로 피골이 상접하여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6개월의 수련 후 하동의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제가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첫 번째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의 사슬은 저를얽어 메기 시작했습니다.

1973년 5월 20일 수료 후 6월 1일날 임순도 단장으로부터 충북 보은군 적암교회로 발령을 했으니 임지로 빨리 와서 목회활동을 하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즉시 충북보은 적암교회로 갔습니다.

저는 통일 원리로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일교를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문선명의 교리에 세뇌되었기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 하였습니다. 통일교를 탈출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친 것이었습니다.



제 3장 첫 사역인 충북보은 적암교회

 

제 1절 기적은 일어나고

 

제가 충북 보은 적암교회에 취임식을 하고 부임했을 때 전임목사는 인수인계도 없이 가버리고 난 뒤였습니다. 저는 통일교 교인들 몇 분을 중심으로 전심전력을 다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4개월만에 교인을 70여명으로 늘렸습니다. 보리 벨 때는 보리를 베 주고, 모심을 때는 못줄도 잡아주고, 가을에는 대추도 따주고, 벼 벨 때는 일손을 도우며, 때에 따라서는 아기도 봐주며 무엇이든 봉사를 했습니다.

적암교회 목사로 취임한 후 매일 끼니때 마다 물을 끓여 밀가루 한 주먹을 집어넣고 간장도 없어 소금으로 간을 해서 먹었습니다. 어쩌다 라면이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적암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밥을 먹은 것은 한달 반 만인 1973년 7월 9일월요일이었습니다. 777가정인 유철재 부목사가 쌀 2되를 성미로 가져 온 것이었습니다. 쌀로 밥을 지어서 맨밥에 간장만 가지고 먹었지만 꿀맛이었습니다. 저는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그 후 교회 옆 땅을 개간하여 돌과 나무를 걷어내고 옥수수를 심어 옥수수 밭을 만들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서 점심, 저녁이나마 끼니로 때우려고 매일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해 길렀습니다. 옥수수 싹이 무릎까지 자라 올라 왔을 때였습니다. 심방 갔다가 오니까 동네 큰 암소와 새끼 송아지가교회에 들어와서 그 옥수수 싹을 잘라먹어 버린 것 이었습니다.

저는 매우 화가 나고 한편으로는 서러웠지만 그래도 남은 옥수수를 잘 길러 충북 청주 본부 교회와 보은 교회에도 한 자루 주었습니다. 그리고 적암교회 교인들과 옥수수 잔치를 벌렸습니다. 남은 것은 저의 아침 저녁 식사대용 양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적암교회 땅은 통일교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교회땅 120평을 매입하기로 작정하고 헌금을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이 3천원을 헌금하였고 나머지 돈은 제가 서울 중부시장에 미역과 김을 사다가 추석 때 각 시장에서 팔아 번 돈을 모았습니다. 또한 보은 속리산 산줄기 인 구봉산에 까지 올라가하루종일 칡덩굴을 잘라서 동네로 가져오면 한 관에 100원씩을 주었는데 매일 칡덩굴을 팔아 300원씩을 벌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대금을 지급하고 대지 120평을 매입 하였습니다.

적암 교회에서의 생활은 저에게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최악의 가난이었고 처절한 생활 이였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1인당 매월 50원을 내는 회비도 내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녁마다 강의를 할 때나 일요 예배, 수요 예배때 온 열정으로 설교를 하다보면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렸습니다. 저는 그래도 죽으면 살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전력을 다했습니다.

 

제 2절 성결교 신학교

 

저는 목회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신학에 대한 깊이와 교회 예배, 기도, 전도, 교회관리, 행정, 교육 등 모든 것을 제대로 교육받고자 성결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수님들은 문선명이 사이비교주며 통일교는 이단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통일교에 세뇌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먼 달나라 말씀처럼 제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성결신학교에서 6개월 수업 후에 성결교 신학대학교 2학기에 편입했습니다. 당시 학교에는 김응조 학장님, 전영식 학감님, 성기호 교수님(지금의성결대학교 총장님), 조두만 목사님 등 많은 분들의 열정적인 가르침에 감동 받고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초조하고 불안한 나날이었습니다. 통일교는 이단이라 했기 때문에 같은 신학생들과 차도 같이 못타고 빨리 타거나 늦게 버스를 타고 4년 동안 다녔습니다.

성결교 교단에서는 저를 장로교회의 전도사로 알고 있었습니다. 전영식 학감님은 저에게 열정적으로 기도도 잘한다며 능력있는 부흥사가 되어 성결교 교단에서 목회 활동을 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갈 길이 있어 따를 수는 없었지만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성결교 신학교 신학생 시절에 하나님에게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재림 주인가, 적 그리스도인가 간절한 심정으로 100일 단판 기도라도 드려서 하나님께 문선명의 정체를 알려달라고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무지하고 몽매한 저는 문선명을 재림 주, 참 부모로 믿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 다.

그러나 지금 생각을 해보니 그 당시 단 한번이라도 통일교에 대해 교수님과 상담을 했더라면, 통일교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기도를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저를 붉은 적 그리스도인 문선명 통일교교주로부터 구원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 교주의 붉은 철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도 통곡하셨을 것입니다. 저도 지금에야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제 3절 문교주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가는 의식인 합동결혼식

 

1975년 1월 13일. 청파동 통일교구본부 교회에서 전국에서 많은 미혼남녀가 참석한 가운데 집회가 열렸습니다. 미혼남녀를 양쪽으로 두 패로 만들고 가운데 길로 자칭 재림주인 문선명이 왕복을 하면서 미혼남녀의 얼굴 관상을 봅니다. 조상 위로 7대, 아래로 후손 7대 관상을 보고 천 년을 내다보며 가정 천국과 행복한 가정을 꾸며 이혼이 없는 참가정 합동결혼식을 올릴 짝을 맞춘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이 "너, 너 이렇게 만나봐!" 라고 명령하면 미혼남녀는 옆의 만남의 장소에 가서 서로 만나보고 문선명 앞에 와서 경배하고 결혼할 것을 맹세하고 마지막에 약혼 축도식을 받습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제가 신학 대학을 다니고 있고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하오니 저의 아내로 착한 사람으로 짝을 맞추어 주십시오." 라고 용감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문선명은 "그래? 내가 목사 사모로서 착한 색시감을 찾아 주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끝부분까지 미혼 여자들을 둘러보고 맨 마지막에 앉은 이영희씨를 저의 결혼할 대상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영희씨와 만나 대화를 해보고 결혼 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이영희씨에게 만나 나는 신학생이라는 것, 앞으로 목회자의 사명을 다할것, 교통사고로 팔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말했을 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축복 결흔식이 남편으로써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자녀들 앞에 아버지로써 역할을 다하지못하는 비극의 출발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1975년 2월 8일 서울 장충체육관에는 성대한 통일교 할동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저의 집이나 장인, 장모님 집에서는 통일교를 반대할뿐 아니라, 합동결혼식은 더욱 만류했었습니다. 그러나 장인, 장모님은 결혼식장인 장충체육관에 오셨습니다.

결혼식에서 문선명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예수님도 축복을 받지 못하였는데 부족한 너희들이 축복을 받아 원죄, 혈통죄, 연대죄, 자범죄도 없는축복 가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통해 합동 결혼식을 올린 통일교 교인들 가정은 죄 없는 자녀가 탄생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개인천국과 가정천국을 이루어 천국 백성으로써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부는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통일교 규례에 따라 3년의 전도기간이 있기 때문에 서로 혜어져 살았습니다.

1975년 6월 7일 토요일, 구국세계대회를 위해 각 나라 60개국 대표가 입국했고 1백 20만명이 서울 여의도 광장에 모였습니다. 전국 통일교 교인들은 각 지역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여의도 광장으로 모여 극적으로 1백20만명 집회를 성공리에 잘 마쳤습니다. 통일교에서 최초 합동결혼식자(1961년 5월 15일, 36가정)을 박종구 총단장(지금은 고인이 됨)은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우지 못하면 전국의 목회자와 통일교 교인들은 한강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자." 고 강조하면서 "전국의 기독교 교회에서는 6월 7일에 집회를 못하도록 비가 오라고 금식철야 기도하며 정성을 모으고 있다. " 고 하였습니다.

그날 오전엔 비가 와서 매우 초조했으나 행사를 하는 오후에는 비가 그쳤습니다. 통일교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통일교에서는 하나님이 문선명 자칭 재림주 편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기독교를 떠났고, 통일교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지금 생각을 해보니 구국세계대회는 문선명이 자기 욕망과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행사였습니다.

그 당시 통일교 교인은 1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교세를 자랑하기 위해 1백20만명을 집결하게 한 집회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날 동원된 전국의 교인들의 피눈물이 섞인 헌금으로 승공연합 사람들과 노인들의 식사대접, 관광버스 제공 등 온갖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제 4 장 서울 강서 교구

 

제 1 절 교구본부교회 개척, 부흥, 교회건축

 

1975년 7월 1일 서울 시내 12곳에 통일교 협회 본부에서 12명의 목회자를 추천하여 파송했는데 저는 서울 강서구를 맡게 되었습니다. 교회 마련을 위해 강서구 전지역의 건물을 수소문하고 다녔습니다. 마침내 화곡본동 2층에 교회를 마련하여 9월 1일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협회에서 단 10원도 지원 없이 자비로 교회를 마련 하다보니 경제적인 어려움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감사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없어도 사명감으로 충만하고 충과 효와 열을 다하겠다는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기필코 교회를 건축하여 크게 부흥하고 넘치는 제단을 만들 것이라고 다짐 하였습니다.

매일 문선명 사진을 걸어놓고 경배드리기, 문선명 교주에게 충성하는 서약인 나의맹세, 가정맹세, 성초기도, 조식금식, 전도, 봉사 생활로 일관 하였습니다. 개척교회이다 보니 교인들은 있어도 교회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저의 집과 논 600평을 판돈으로 어렵지만 교회를 이끌고 갔습니다.

신학교 등록금 마련, 교통비, 교회운영비, 교회건축 준비, 전도 등 여러가지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교회건축을 위한 30일, 60일, 120일 조식 금식기도를 했고, 전쟁을 하는 심정으로 피, 땀, 눈물로 정성을 쏟았습니다.

강서교회는 2층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교회 건축을 할 때까지 박현종 430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강서구철거민 동네인 신월동에 18만원짜리 방을 얻어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160명 재적과 120명 예배를 목표로 밤낮 없이 혼자서 1인 5역을하며 전도에 주력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였고 그 사람들을 통일교 교인으로 만들기에 몸부림을 쳤습니다.

개척 교회이다 보니 매일매일 목사가 직접 전도하러 다녀야 하고 심방해야 했습니다. 거의가 새로 전도된 교인이다 보니 헌금도 별로 모이지 않아신학 대학 등록금과 교통비와 생활비가 필요해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은 원리 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각 교회마다 흑판이 필요하였습니다. 저는 교회 운영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흑판은 물론, 자동 스탬프 도장, 책도 팔았습니다. 심지어는 콘크리트 쓰레기통 장사도 직접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기도를 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취침 때까지 매일 미친듯이 경배, 나의 맹세, 기도를 하며 살았습니다. 협회에서는 개척교회인데도 교회 전세금이나 교회 운영비, 생활비 등을 단10원도 지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인 5역을 해서라도 교회를 이끌고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6년 1월 1일 문선명은 '자녀로 인한 천국 실현' 이라는 표어를 통일교 교인들에게 내려주었습니다. 저는 강서교회 개척목사로서 한 해를출발하는 첫 시간을 얼마 되지 않은 교인들과 함께 철야 기도로 정성을 모았습니다. 당시 강서구 화곡동은 허허 벌판 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강서교구본부교회 건축을 최우선 목표로 세웠습니다.

문선명은 1975년 12월 31일 오후 8시 15분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통일교 목회자들과 교인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서 역사적인 통일교 현시점을 사수하라고 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은 역사적인 결실시대에 통일교 교인들이 죽음으로서 이 민족을 구하고 통일교 발전에 제물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문선명의 시책에 따라 강서교회를 기필코 발전시키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저는 "강서교회 교회건축을 하여 자칭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님이 안식 할 수 있는 강서교회 제단을 만들 수 있게 축복해 주옵소서" 하고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매일 신들린 사람처럼 밥을 먹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매년 1월 3일은 2000여년 전 예수님이 탄생한 날이라고 하여 통일교 교회에서는 예수 탄생 예배를 드립니다. 그날도 저는 새벽 제단에서 예수님 탄생 기도회와 간단한 예배 정성을 모았습니다.

1976년 1월 5일 서울 용산 통일교에서 서울교구의 목사 전체 전진 대회가 있었습니다. 김 영휘 한국협회장과 회의를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강서교회당 건축을 해준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서울 시내에는 대 선배 목사들이 있었지만 거의 전월세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척목사로서 교회건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때부터 만사를 제쳐놓고 교회 건축 대지를 사기 위하여 강서구 전체를 돌아 다녔습니다. 부동산 소개소는 거의 다 다녔을 정도로 많이 알아 보았습니다. 교통 좋고 인구도 밀집된 장소 3곳을 정하여 협회에 가져 갔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김수한 건설 대장이 통일교 A타입 교회의 교회는 산꼭대기에 건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 차례 산꼭대기는 안된다고 간절히 호소하였지만 욕만 얻어먹고 결국은 화곡동 고지대에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정하려던 교통 좋고 인구도 밀집된 대지와 산꼭대기 대지와는 가격 차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몇 천 원 차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김수한 건설대장 때문에 산꼭대기에 짓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지 125평의 총 금액은 5백62만5천원이었습니다. 대지 125평에 건평 42평의 예배당을 계획했습니다.

1976년 3월 3일 대지125평을 매입하고 교회 건축 설계를 준비하며 교회건축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강서교회 옆에 있던 영등포 통일교 정호영 목사에게 교회 건축을 하는 2달 동안 3명만 강서교회에 교회 건축 인부들 식사 준비, 물 길러 오는 것 등을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관할 교회의 건축인데도 거절 하였습니다.

통일교가 천국을 외치며 3년 내에 통일교와 기독교의 통일이 이루어 진다고 하고 문선명이 만 인류에게 재림주로 추앙을 받는다고 하였지만, '사랑과 식구' 라는 말이 허구에 불과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희생,봉사, 탕감 제물이라는 말도 입으로만 외치고 실천하지 못하는 죽은 신앙이라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 교인들이 서로 부를 때 '식구님' 이라고 합니다. 적든 많든 한 솥 밥을 먹는 가족처럼 사랑과 희생을 나누자는 뜻에서 식구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리나 사랑을 외치지만 제가 통일교에서 경험한 것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함과 냉정함 뿐이었습니다.

교회당 건축일은 우리 강서교회의 몫이었습니다. 교회 부인 몇이 아이들을 업고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점심 식사 준비를 하였습니다. 저도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하였습니다. 벽돌도 나르고, 나무 판자도 자르고,시멘트 일, 페인트칠, 자재 운반, 200m 아래에서 물을 길어 오는 일 둥을 하였습니다. 건축하는 동안 저는 예배와 심방 외에 건축일로 재단과 협회에 뛰어 다니며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 하였습니다. 너무 일이 많고 힘들어 1인 10역을 해도 모자랐습니다. 오진수씨는 강서교구 본부 교회 건축을 위하여 고향 함안에서 강서교회로 와 무보수로 교회 건축 일을 도와줬습니다. 서정수씨도 봉사활동을 너무 많이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착하고 진실한 청년들 이였습니다.

드디어 강서교회가 완공되자 그간의 많은 시련과 고통, 배고픔, 외로움, 기쁨 등 만감이 교차 하였습니다. 그 순간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대지 125평 가격이 560만원 정도였지만 지금은 100배가 넘는 5억 정도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육신을 벗고 영계에 갈 때까지 강서교회에서 목회하여 점점 더 큰 대형 교회로 성장시킬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강서교회를 건축하던 중 여러 가지 일이 많았습니다. 철물점에 가서 못을 사려고 쌀 배달을 온 쌀가게 아저씨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급경사 길을 내려가는데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아 순간적으로 도로 옆 시멘트 벽으로 자전거 핸들을 꺽었습니다. 저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벽에 부딪히면서 오른쪽 무릎 위에 뼈가 보일 정도로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제가 쓰러지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자전거 주인은 브레이크가 고장났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생명을 구한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뼈 속까지 심을 박아서 썩지 않게 하고 새 살이 차 오를 때까지 두 달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붕대로 다리를 싸매고 전과 다름없이 건축 일을 하였습니다. 건축하는 동안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배웠습니다. 벽돌쌓기 시멘트일, 미장일 등 전문 기술자와 비슷하게 일을 많이 했습니다.

피와 땀, 눈물로 사력을 다한 서울의 강서교회 건축은 1976년 6월 10일 성공적으로 완공 하였습니다. 통일교 역사가 21년이 지났지만 당시 서울시내 영구교회는 몇 개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전세, 월세 교회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제일 후배 목회자로써 개척 1년 만에 교회 건축을 완공하게 되어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강서교회에서 1인 10역을 하며 새로 전도된 80여명을 교육시키고 교회를 교인들로 넘치게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1962-1963년대 선배 목사들 5명이 서울로 발령 받아 지방에서 올라와 강제로 강서교회를 빼앗았습니다. 본부에서는 강서교회를 저에게 빼앗아 이영진 목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철거민 달동네인 노원교구본부 상계동 개척 교회를 시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교회 건축을 했던 강서교구 본부에서 헌당 예배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눈물을 머금고 노원교구본부 개척 교회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임 이영진 목사는 목회 활동은 하지 않고 버스토큰 가게나 하고 신문 판매를 하였습니다. 저는 박탈감과 충격으로 한동안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은 회의 때 "재주는 곰이 넘고 덕은 엉뚱한 사람이 받는다" 며 저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때 통일교를 탈출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당시 문선명 통일교를 떠나면 죽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나 식구들은 한 두 번 충격을 받고 상처를 받으면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버리고 통일 교회를 탈출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는 외골수여서 그때는 문선명을 떠나면 천국을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문선명 통일교를 버리고 미련을 끊으라고 꿈으로 경고하며 감옥에서 탈출하라고 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왜 문선명 통일 교회에 미련을 버리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저는 바보였습니다. 세번째로 통일교를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포기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 5장 노원교구 본부 개척교회 제 1차

 

건축

 

제 1절 그래도 끈질긴 층성
 

1976년 8월 10일 노원 상계 교회로 부임하였습니다. 앞서서 여러 선배 목회자가 상계동에 교회를 세우려고 왔었지만 너무나 최악의 조건이라 다 실패하고 방 한 칸도 마련하지 못한 채 그만 두었던 곳이었습니다. 저는 작은방에서 상을 강대상으로 삼고 몇 사람과 노원교회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비록 강서교회 일로 마음은 아팠지만 목숨을 다해 몸부림치며 교회발전에 주력했습니다.

김 영휘 한국협회장도 부당한 인사이동에 마음이 아팠는지 상계동 비포장도로의 먼지를 뒤집어쓰시고 직접 찾아 와서 제게 1만 5천원을 주어 쌀과연탄을 샀습니다. 저는 교인을 전도하기 위해 미혼 남녀들을 취직 시켜 주었습니다. 합동 결혼식을 한 사람이라도 실직자는 취직을 시켰습니다.

첫 번째 노원교회 개척을 했던 상계 3동 95-75호 교회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장민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렵고 힘든 가정적 어려움을 해결 해주고 통일그룹인 일화제약에 취직 시켜 주었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라고 취직 시켜 주었는데, 처음에는 나왔지만 나중에는 잘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인은 50분의 1도 되지 않는 1200원을 월정 헌금으로 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회사에서 퇴근 후 교회에 와서는 저의 멱살을잡고 뺨을 때렸습니다. 제가 노원교회 장년 회장인 성영낙 씨에게 '장민수씨가(777쌍 합동결혼식자) 일화제약 내의 이순주(1800 가정) 부인과 연애를 한다' 고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일화제약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또 성영낙 씨에게 그런 말을 한 일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연애 헛소문의 진상을 알고자 성 영낙 씨에게 다그치니까 자기 교회 목사인 저에게 누명을 씌웠던 것입니다.

장민수 씨는 자초지정을 알아 보지도 않고 갑작스럽게 교회에 들어와서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고 폭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잘 살게 해주고 취직까지 시켜 주고 살려 주었더니 누명을 씌우고 폭행까지 하다니 웬 일이란 말입니까? 저는 꿈에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살면서 먼저 원인제공을 하여 싸움하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언제나 원인제공을 하여 문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통일교가 천국인줄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목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제 전부를 바쳐 교인들을 사랑한 결과 돌아온 것은 누명과 폭행과 상처 뿐 이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저는 통일교 문선명을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며 교인들을 사랑한 것 밖에 없습니다.

 

제 2 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길

 

1972년 11월 21일부터 2000년 8월까지 통일교 목사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가난은 나의 친구였습니다. 제가 통일교 목회를 하기 전에 장사해서 모은 돈은 작은 집과 땅을 살 정도였습니다. 그 돈을 형님에게 맡겼는데 형님은 제가 사이비종교 목사라고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형님은 가구공장을 했는데, 가서 돈을 달라고 하면 나무 막대기로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폭행했습니다. 저는 이단 교회 거지 목사라고 온갖 핍박을 받아도 문선명 참 부모님을 믿고 견뎟습니다 결혼 반지, 시계는 전당포에 팔아서 교회 생활비로 쓰고 돈이 될 수 있는 책은 중고 서점에 팔아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1975년 12월 23일엔 형님에게 돈을 받으려고 밤 10시까지 형님을 기다리다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날은 발목까지 찰 정도로 눈이 많이 왔습니다. 그때 학생 차비는 25원이었는데 저는 15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지 못하고 마포에서 강서교회 옆에 있는 신월동 월세방까지 걸어와야 했습니다. 오는 도중 눈길에 몇 번이고 넘어져 옷이 얼음 덩어리가 되어 도착하였습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통행금지를 넘긴 새벽 1시에 집에 도착하여 추위에 떨며 방에 들어갔습니다.

연탄불이라도 꺼지지 않았더라면 몸을 녹일 수 있었을 것인데 연탄불은꺼져 있었습니다. 집주인이 구들도 없이 연탄 아궁이만 만들어 저를 속이고 세를 놓았던 것입니다.

구들도 놓지 않고 시멘트만 바르고 도배만 하여 방을 만들었기 때문에 벽에는 고드름이 얼어 있었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추위와 배고픔,고난의 날이었습니다. 노원 교구 본부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도 가난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노원교회는 헌금도 없고 몇 명을 가지고 개척 교회를 하였기 때문에 신혼초인 저의 아내 이영희씨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으로 이를 악물어야 했습니다. 끼니를 거르는 비참한 노원교회 생활에 절약을 생명으로 알고 알뜰하게 생활 하였습니다.

아내는 상계동 도깨비 시장에서 버린 배추 잎을 주어다가 김치를 담았습니다. 어쩌다 계란을 사게 되도 깨진 것을 모아 파는 것을 사다 먹었습니다. 쌀도 7~8년 된 정부미로 속은 벌레가 다 파먹고 껍질만 있는 쌀을 헐값에 사다 먹었습니다. 밥을 하면 밥이 죽이 되어버 리고 입에 들어가면 씹은 것도 없이 녹아버렸습니다.

어쩌다 밥이 남으면 점심에 먹을때는 밥이 죽이 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매일 국수, 라면, 밀가루 수제비를 점심이나 저녁으로 먹었습니다. 저의 자녀들은 먹는 것에 너무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상계교회에서 서대문 행촌동에 있던 신학교까지 토큰 2개만가지고 다녔습니다. 토큰이 없어서 몇 시간이나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상계동 교회까지 온 때도 있었습니다. 양가 부모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양가 부모 형제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협회, 교구에서는 목회자가 아무리 생활이 궁핍해도 단 10원도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서울 교구 내에서 저와 같이 12명의 목사들이 개척을 시작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다 그만두고 3~4명만 어려운 목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1978년 2월 23일 성결교 신학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교인들,부모, 형제들에게 졸업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인만 졸업식에 왔습니다. 그러나 겨우 차비만 있었기 때문에 꽃다발 살돈이 없었습니다. 제게 비상금 5천원이 있어서 아내에게 5천원을 주어 꽃을 사오도록 했습니다. 카메라도 없어서 동료에게 찍어 달라고 하여 한 장을 찍었습니다.

후에 편지로 사진 한장 받은 것이 유일한 졸업식 사진입니다 이제는 그 한장 마저 액자 속에서 곰팡이가 피어 하얗게 되었습니다.

 

제 3절 제 1차 노원 교회 교회 대지 매입 건축

 

1976년 12월 13일 상계3동 95-75호에 대지 20평을 매입하고 교회를 재건축 하였습니다. 1977년 3월 3일 중소기업 은행과의 잘못된 계약에 이의를 제기하여 재판에 승소해서 교회를 영구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교인들 이사짐을 옮겨주고 취업알선, 속옷 빨래 등 온갖 일을 하면서 교회를 위해 목사가 아닌 머슴으로 살았습니다. 진심으로 교인 한 사람 한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 20평 교회가 가득 차고 넘쳤습니다. 지방 중소도시나 산골에서 통일교를 개척, 부흥시키려 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최악조건인 강서교구본부와 노원교구본부를 개척, 부흥을 시킨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승리였습니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교회 건축을 하였더라면 선배 목사들에게 교회를 빼앗기지 않고 한국 최고의 통일교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제가 서울 최악의 허허벌판에서 개척하여 교회를 부흥발전을 시키면 선배들에게 교회를 빼앗긴 것은, 교회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바람 잘 날 없는 시련과 처절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통일교 대 선배 목사들을 제치고 크고 좋은 환경의 교회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와 같이 목회를 시작했던 서울시내 교회 12곳이 다 폐쇄되고 3곳만 남은 것은 개척교회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를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제 6장 새생명의 결실인 3남매

 

제 1절 첫 딸 '박은주'

 

1978년 1월 IS일 주일 오후 1시 26분에 첫 딸 은주가 태어랐습니다. 태몽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 장군이 바로 네 아들이다. " 라고 들었기 때문에 저는 은주가 태어날 때까지도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교인, 이웃집 사람들도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1월 14일부터 하루종일 진통을 하고 14일 밤에는 밤새도록 진통을 하였지만 아기를 낳을 수가 없었습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사단 세계 사람이 아기를 보면 안 된다고, 성별 된 참 부모님의 아들딸은 자연분만 해야 한다고 교육했기 때문에 집에서 아기를 받으려고 했으나 불가능 했습니다.

1월 15일 새벽 상계 3동 도깨비 시장에 있는 40년 된 조산원으로 산모를 데리고 갔습니다. 산모는 기진맥진을 하였습니다. 오전 11시까지 진통을 했지만 아기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교회로 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산모에게 가려고 했으나 새 신자가 그 날 따라 두 사람이나 와서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낮 12시 40분까지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조산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까지도 아기를 낳지 못하고 '조산원' 원장과 산모가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습니다. 원장님은 40년 동안 아기를 받았어도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병원으로 빨리 후송하지 않으면 산모나 아기가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산모는 기진맥진하여 의식이 희미한 상태고 양수도 밖으로 다 빠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저는 7초대에 성초를 켜놓고 성령 하나님께 산모와 아기를 살려달라고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4Kg이나 나가는 아기가 나왔습니다. 산모와 아기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진실하게 하나님을 안믿었지만 믿었고, 제 마음속에는 통일교 목사를 하고 문선명에게 세뇌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잘 길러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것을 다짐했습니다.

1980년 10월 5일 오후2시에 두 돌이 된 은주를 잃어버렸습니다. 파출소에 신고도 하고, 동사무소에 가서 박은주를 찾는다는 안내방송도 수 차례 하였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상계동 전체를 오후2시~저녁 7시까지 울면서 찾아다녔습니다.

은주 엄마와 교인들 몇 사람도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은주는 항상 밥만 먹으면 교회 밖으로 나갔고 겁이 없었습니다. 아무데나 아장아장 잘 걸어 다녔습니다. 은주는 아기 때부터 용감하고 겁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날도 교회를 벗어나 여러 군데를 아장아장 걸어 다니다가 혼자서 새마을시장 구경을 하였나 봅니다.

제가 은주를 찾았을 때는 시장 도로변 독립문 메리야스 가게 진열대 앞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녁 7시여서 제법 어두울 때였습니다. 저는 은주를 찾은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은주 엄마나 교인들도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파출소나 동사무소에서도 다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찾지 못하면 고아원으로 갈 뻔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미쳐 있었기에 문선명씨에게 충성하는 구구 절절의 심정을 직접 웅변원고로 써서 은주에게 주었습니다 은주에게 웅변연습을 시켜 통일교 전국 웅변대회에 나갔습니다. 은주는 1985년 2월25일 참부모님 탄신기념 제26차 전국교구 대항 웅변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고 1987년 2월 3일 국민학생부 자칭 재림주 문선명 부모님 탄신기념 제28차 전국교구 대항 웅변대회에서도 1등을 하였습니다.

은주는 초등 학교 때부터 각종 상을 수없이 많이 받았습니다. 용감하고 인정이 많으며 자상합니다. 은주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용돈, 세배든 등을 알뜰하게 모아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생활이 어려워 그 돈을 다 썼습니다.

은주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얼마 되지도 않는 용돈을 모아 양복 한 벌을 사주었습니다. 제가 입을 옷이 없을 때마다 은주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지금까지 양복을 5벌이나 사주었습니다. 은주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저의 아내에게도 제가 못해 주는 옷을 해주고 반지도 해주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질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고기를 사오고 약을 사왔습니다.

은주는 밥값을 아끼려고 밥을 굶고 다닐 정도로 자신에게는 알뜰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들, 후배들에게는 어렵게 모은 돈으로 얼마나 많이 베풀고 사는지 모릅니다. 마음씨 곱고 항상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해주는 은주는 우리 집의 효녀 입니다.

 

제 2 절 아들 '박영진'  

 

1979년 5월 12일 오후 1시 29분에 둘째 영진이가 첫 딸이 태어났던 곳에서 진통도 전혀 없이 순산으로 태어났습니다.

영진이가 태어날 무렵 통일교에서 5,000만 달러(한화 400억 정도)를 들여서 '오인천' 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시내 목사들과 교인들은 총 동원되어 엑스트라를 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저도 맥아더 장군과 작전회의를 하는 삼성장군으로 출연하고 이북의 포로로 교회에서 끌려 나오는 역할도 했습니다.

영진이가 태어나는 날에도 영화촬영을 하고 교회로 돌아오는데 벌써 아들 영진이를 낳은 것이었습니다. 이후, 영진이는 황달, 부스럼, 탈장 수술등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영진이가 첫 돌이 지나 걸음마를 할 때 아내와 장모님 생신으로 처갓집에 갔었습니다.

1980년 5월 저 혼자 잠을 자는데 새벽 1시경 하나님의 음성이 저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너의 아들을 빨리 찾아라..."

꿈에 시체를 넣는 관을 보여주는데 시체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꿈에서 깨어나 밤새도록 우리 가정에 우환과 환란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침 일찍 울산에 있는 영진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영진이가 아무 탈이 없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새벽에 영진이가 일찍 일어나 아장아장 걸어서 마루를 나와 부엌을 내려다보다가 새빨간 연탄 아궁이에 거꾸로 머리가 처박혔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부엌에 있던 영진이 엄마가 놀라서 다리와 목을 잡고 영진이를 버쩍 거꾸로 들어 올렸다고 했습니다. I~2초도 안 되는 찰라에 영진이 목숨을 구했습니다.

영진이 엄마가 마당이나 방에 있었더라면 영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얼굴 전체가 화상을 입어 차마 볼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영진이는 이마에 물집만 잡히고 머리만 조금 태웠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음의 자리에서 영진이의 생명을 구해주셨습니다.

영진이는 어릴 때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영진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매년 반장,부반장을 했고 우등상도 받았습니다. 중학교 때는 전교 3등으로 장학금을 받아 저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저는 가족들과 노원교구 교인들과 같이 매일 오인천 영화에 출연을 했습니다. 북한군인이 6·25때 소련제 탱크를 몰고 3·8선을 넘어와 우리 가족이 사는 초가집을 송두리째 탱크로 밀어버리는 장면에서 마당에 있던 영진이가 놀라서 울고 아내는 빨래를 너는 역을 하였습니다. 단역 이였지만 그 때는 사명감에 불타 올랐고 감사하는 마음 뿐이였습니다.

그러나 400억을 투자한 오인천 영화는 한국에선 개봉도 못했고 미국에서만 일부 상영이 되었습니다. 400억이면 서울시내 각 동에 1억짜리 빌딩400개를 살 수 있는 돈이었는데 빌딩을 샀으면 지금은 수 천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선명 주위에 있는 충성꾼들이 끊임없이 일을 저질러 교인들의 피눈물을 짜고 파멸시켜 갔습니다.

통일교에서 추진했던 중국 판다 프로젝트는 항공, 자동차, 공업단지, 도시 등을 만드는 공사도 추진했지만 모두 실패를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4억 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알지만 공사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중간에서 사기 당하고 말았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피눈물 어린 통일교 교인들의 헌금을 사기 쳐서 교인들의 영혼과 육신을 죽이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엄청난 실패와 낭비를 하면서도 그 책임을 통일교 교인들에게 전가시켜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제 3 절 막내 '박은영'

 

1981년 4월 8일 새벽 5시 15분에 둘째 딸 은영이가 태어났습니다. 3남매가 매년 태어나다 보니 아내는 종일 3남매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한 무능한 남편인 저는 아내에게 고통만 안겨 주어 미안한마음뿐이었습니다. 아내는 하루종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예배, 전도,심방을할뿐 아니라 가난한 살림을 불평 한마디 없이 잘 극복해 나갔습니다.

저는 노원 상계 교회의 발전을 위해 밤낮 없이 뛰어다녔기 때문에 아내는3남매를 키우느라 저녁에는 녹초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녁부터 새벽 기도까지는 제가 교회에서 어린 3남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기저귀도 빨고,가사 일도 도왔습니다. 연탄불 가는 것은 기본 이었습니다. 그러나 혹독한 고생과 처절한 가난으로 남편과 아버지로써 역할을 다하지 못해 한없이 가슴 아파 했던 날들이었습니다. 은영이는 언제나 언니가 입던 옷을 받아 입었습니다. 영진이가 입던 옷을 은영이가 입었을 때는 벌써 옷이 헤어질 정도로 낡아 버렸지만 은영이는 불평 없이 입었습니다.

1987년 2월 21일 우리 부부가 심방간 사이에 도둑이 교회에 들어와 18만원을 주고 산 카메라와 10만원을 주고 산 카세트를 훔쳐갔습니다. 은주와 영진이는 학교에 가고, 사택에는 7살인 은영이 혼자만 있었습니다. 도둑은 보자기에 물건을 다 싸 가지고 밖으로 나가다가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대형 액자 사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저의 부부가 심방을 갈 때마다 경배하고 기도하며 돌아와서도 경배하며 잘 다녀왔다고 보고하는 문선명 교주의 대형 액자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은 문선명 교주의 대형 액자를 집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경배하며 기도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하나님의 대적이며 자칭 신이 되어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자기에게 경배하고 기도를 하도록 시키고 있었습니다.

도둑이 문선명 통일교 교주 사진 액자를 떼려고 하자 은영이는 어린 나이인데도 도둑을 발로 걷어찼던 것입니다. 도둑은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그  자리에서 벌렁 넘어졌습니다. 도둑이 일어나 "아! 이 새끼" 하면서 온영이의 목을 졸랐습니다 은영이는 고함을 질렀습니다. 교회 라에서 떡볶이 장사를 하는 할머니가 고함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왔습니다. 떡볶이 할머니가 도둑을 보고 "너 뭐야! 아기 목을 왜 졸라?" 하면서 도둑을 때리자 할머니를 확 밀치면서 쓰러뜨리고는 카메라와 카세트, 라디오를 가지고 도망갔습니다.

추운 겨울이라 두꺼운 목 폴라를 입고 있던 은영이의 목에 깍란 멍과 상처만 조금 나고 무사했습니다. 은영이는 착하게 자라나 걱정, 근심을 끼치지 않고 효도를 잘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반장도 하고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각종 상도 여러 차례 받아서 저희 부부를 기쁘게 했습니다. 처절하게 가난했지만 3남매를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자녀로 기르고자 노력했고, 가난하지만 생활비를 쪼개며 자녀 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7 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제 1 절 2차 교회 대지 매입 재건축 성공

 

상계교회는 날로 발전하여 교회에서 모든 교인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가득찼습니다. '김영휘' 한국 협회장도 노원교회에 와 보고 자랑스러워 하며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1978년에 전도 우수 한국협회장상을 받았습니다.

1979년 6월 1일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 코너에 40평을 매입하고 교회재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현 교회 매도 대금과 협회 재단의 지원금으로 한 것입니다. 재건축을 할 때도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하수도 공사, 수도공사, 시멘트 일, 보일러 설치하는 일 등 열 손가락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마침내 제 2차 교회 재건축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제일 후배 가정으로써 서울서만 3번째 교회 건축을 한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의 정성도 있었지만 사랑, 진실,은혜를 져 버려서 가슴에 못을 박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통일교인들의 신앙적인 배반으로 저는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물질적으로 노원교회 교인을 도와 주었다가 어려움을 겪은 때도 있습니다.

저는 박상수 집사에게 1979년 7월에 50만원을 빌려주었습니다. 그 당시돈 50만원은 상계 전철역앞 무허가 건물 4평 짜리 2채 값이었습니다. 은행 금리정도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3개월 후 계를 타면 받기로 했습니다. 1개월치 이자를 받고 그 집에 심방을 갔는데 사람이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박집사 부인인 이희선 집사에게 내 돈 내놓으라고 하면서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싸움을 말린 후 박 집사 부인에게 사정을 물어보았습니다.

박상수 집사는 보증금 5만원도 안되는 산꼭대기 집에서 월세 8천원을 내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렵게 살지만 신용을 잘 지킨다고 하여 주위 사람들은 1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 철저히 신용을 지키면서 비싼 이자를 주기로 하고, 돈을 빌려서 그 돈으로 생활하고 이자를 주며 천 만원이 될 때까지 끌고 왔는데 마지막에 돈을 빌릴 데가 없어 저에게 돈을 빌렸던 것입니다.

저는 박집사 내외에게 그 동안 이자를 원금보다 많이 주었으므로 원금만 갚는 조건으로 하고 장기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박상수 집사에게 빌려 준 돈이 옆집 아주머니에게 빌린 것이었습니다. 저의 돈으로 이자를 매달 주다가 나중에 그 돈을 마련하여 갚았습니다. 박집사는 지방에 가서 집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이희선 집사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네 자녀들과 같이 끼니를 거르면서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형편이 되면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박집사 자녀들은 너무나 착했습니다. 부모의 잘못으로 자녀들이 고통 당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심방할 때 라면 1박스와 과자를 사다 주었습니다. 돈이 될 땐 쌀도 사다 주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지라고 항상 격려해 주었습니다. 박집사는 3년 후 저에게 20만원을 주었습니다. 나머지 30만원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집사가 어디에 살던지 자녀들과 같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교역자와 교인은 절대 금전거래를 하면 시험이 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잠언 6:6)

어처구니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한 때도 있습니다 1960년대 말에 잠시 통일교에 나왔던 김태수씨와 저는 인연을 맺어 노원교회로 다시 나오게 하였습니다. 저는 김태수 씨를 전도하여 교회에 나오게 하기까지 온갖 정성을 들였고 아버지와 형님같이 모셨습니다.

어느 날, 제가 심방 전도를 간 사이에 김태수 씨가 교회에 와서 저의 아내에게 아줌마라며 교회 그만 두고 장사나 해서 먹고 살라고 빈정 거렸습니다. 저의 아내는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인내하며 비록 김태수 씨가 헌금을 하지 못했지만 깍듯이 어른으로 대접하며 모셨습니다. 목사인 제가 얼마나 비참하게 보이고 저의 아내가 불쌍히 보였으면 막말을 하고 장사나 하라고 하면서 무시했겠습니까?

심방 전도에서 돌아온 저는 모욕적인 말을 하고 갔다는 것을 듣고 김태수씨 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김태수 씨에게 동생 같고 자식 같은 목사와 사모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지는 못하고 사모를 아줌마라고 하고 장사나 해먹고 살라는 등의 그런 모욕적인 막말을 했느냐고 했습니다.

성질 급한 김태수 씨는 교만에 빠져 안하무인격으로 "뭐! 이 새끼? 어린놈이" 하면서 저의 뺨을 세차게 때렸습니다. 저는 아버지 같은 사람과 싸울수가 없어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있으면싸움이 될 것 같아 저는 그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철거민 달동네이고 마음이 강팍한 사람들이 많은 상계 지역이라 할 지라도 저는 죽도록 교인들을 섬기고 사랑으로 축복하며 정을 베푼 죄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로 마음이 강팍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나이 어린 목사이지만 2차례나 억울한 폭행을 당하다 보니 통일교가 천국이라고들 하는데 제겐 지옥 이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교인들이 영혼을 구원받고 달라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에 들어와서도 세상에 있을 때의 죄 많은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악행만 하였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은 참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수치와 폭행을 당하고 뺨이나 맞는 역할을 하기 위해 통일교에 입교하여 목사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목숨을 걸고 사명감을 갖고 목회를 한 것이었습니다. 억울해서 눈물이 비오듯 흘러 내렸습니다. 그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부족하고 나이가 어려서 무시당하고 뺨을 맞았다고 생각하며 저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통일교에서 선배 목사가 되고 나이가 많은 목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배반하고 은혜를 져버리는 통일교 교인을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노원교구 본부 제단에서 귀신 들린 자가 저의 기도로 악귀가 몰러가고 폐병 말기 환자가 역사로 완재되고 아들딸 못 낳는 사람이 기적적으로 자녀를 낳았습니다. 신유의 역사는 노원교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980년 국회의원 선거 때는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에 저의 교회가 건축을 완료할 때였습니다. 국회의원 후보 한 사람이 저를 잘 아는 분과 같이 밤 10시에 교회로 찾아와 돈 봉투를 내밀면서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30분 동안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도와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국회의원 후보는 도봉구와 노원구 관내에서 유일하게 돈을 받지 않은 목사는 박준철 목사라고 하였습니다. 몇 십만원이면 저에게는 거금 이였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생을 그렇게 고지식하고 정직하게 살아왔습니다.

국제 승공연합 강연회 때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행사 때 나오는 행사비를 행사 참석자 식사대접과 수건, 볼펜 등의 선물비용으로 다 사용하였습니다. 그러자 저를 관할하는 이상수 도봉구 목사는 저에게 그 돈을 왜 다 쓰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저보다 사례비를 4배나 많이 받았던 이상수 목사는 행사비를 남겨서 자식들 교육비, 생활비로 사용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이상수 목사는 그 이후 협회 통일교 전도 국장이 되자 목사 사모들을 모아 놓고 단 10원도 공금을 횡령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는 언제나 먹는 것마저도 허락되지 못한 생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제 8장 서울 노원교구에서경기 화성 교회로 강제로

 

인사 이동

 

제 1 절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박길남 교구장의 거짓약속

 

1981년 10월 19일부터 21일까지 수택리 교회 김민중 목사를 모시고 3일간 부흥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서울 노원교회는 이제 교인들이 다 앉을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강제 인사 이동 처사로 충격을 받아 또 한번의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문선명은 서울에 있는 통일교를 집중 발전시키고 통일그룹 내 기업체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많은 통일교 교인을 회사에서 퇴사시키는 잔인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통일교는 이단이며, 사이비 종교로 사회에서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처럼 발전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통일교에 교인 한 사람을 전도하여 부흥시킨다는 것은 기독교 이름으로 부흥 시키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목숨을 걸고 교회를 부흥 시켜 넘치게 만들었는데 또 다시 빼앗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20일 경기 수택리 중앙 연수원에서 목회자 중 1968년에 합동 결혼식을 한 사람 430가정 이상 목회자는 지방 교회에서 서울 교회로 올라와 목회 하라고 인사발령을 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통일교 수는 영구 통일교, 전세교회, 월세 교회 다 합해서 27개밖에 없었습니다.

27개 교회를 400개 교회로 늘리기 위해 통일재단 기관기업체 430가정 이상 되는 사람은 전체가 사표를 내도록 하고 300만원씩 주면서 방 한 칸을 얻어 서울 400개 동 가운데 1동씩을 맡아 교회를 개척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400개 개척교회에서 수십 개로 축소되었습니다. 김민중 목사가 수택리 집회에서 결정이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였을 때 저는 문선명 특유의 잔인성이 또 드러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통일교 기관 기업체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모든 생활을 박탈 당하고 행복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간부들 가운데 고통 당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정이 파탄되어 통일교를 떠나는 상처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통일교 기업체 간부들을 강제 퇴직 시켰던 것은 기업체를 살리기 위한 구조 조정 이었습니다.

언제나 이중 인격자인 문선명은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회자도 이용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가차없이 잔인하게 잘라버립니다. 1981년10월 21일부터 서울 시내 통일교 목사들의 인사 이동 문제로 목회자 전체가 모여 매일 회의를 하였습니다.

박길남 교구장은 "박준철 목사는 교회를 3번이나 개척하여 교회를 건축을 했기 때문에 반드시 부당한 인사 이동을 하지 않고 수도권 안에 위치한 부천이나 부평 교회로 발령을 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다른 목회자들도 박준철 목사는 실적을 많이 쌓았으니 그 동안의 공적을 감안해서 이번에는 억울한 일이 없도록 인사 이동을 시컥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재남 한국 협회장은 본부 교회에 주일 예배 때나 설교 때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 같은 사람도 있다고 말한 것을 들었고, 문선명에게도 노원교회의 박준철 목사 공적을 보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사이동 공문에는 약속과 신의를 져버리고 '경기교구 부' 라고 해놓고 임지교회도 없이 저를 잘라 버렸습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수 차례 만나 10시간도 넘게 대화했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김영휘 협회장과 김민중 목사는 문선명이 지방에 있는 목회자를 서울로 올리라고만 했고 서울 시내에 있는 현직 통일교 목사들은 자기 교회에 그대로 시무 하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재남 협회장은 부당한 강제 인사이동을 통해 저를 갈 곳도 없이 잘라버렸던 것입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기관 기업체에 근무하던 430가정 선배들이 너무나 큰충격을 받고 청파동 본부 교회에서 대문 밖에 프랭카드를 크게 걸고 데모를 하였습니다. 본부교회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협회 2인자인 양준기 총무국장은 무차별으로 폭행을 당하고 양준기 협회 총무국장이 병원에 입원하는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이같은 폭력,폭행 사태에 전투 경찰이 투입되어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저는 10월 20일~1982년 1월 17일까지 3개월 동안 '경기교구 부' 라는 인사 발령 때문에 제가 시무 해야 될 교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아 병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3개월을 아내와 자녀들과 같이 피눈물을 흘리며 보내야 했습니다. 통일교를 그때라도 탈출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때도 저는 통일교를 떠나면 지옥에 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통일교를 탈퇴하는 것이 죽음 그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마음의 충격을 해소할 길이 없어 산 기도도 가보고, 큰 기독교 교회도 가서 기도도 하였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움에서 벗어나려고 하여도 벗어날 수 없고 울분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문선명을 위하여 제물이 된 저는 한없는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이를 악물고 노력하였습니다. 헤아릴 수없이 많은 성초 기도를 몇 시간씩 눈물로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원리 교육으로 세뇌되어 있어서, 문선명이 메시아요, 재림주라고 믿고 충성하며 재림주를 버릴 수 없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노원 교구에 임지를 받은 사람은 정한길 목사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언제 이사를 가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갈곳이 없기 때문에 갈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목사는 교회에 취임도 하지 못하고 암으로 죽었습니다.

지옥 같은 노원 교회 대기발령 생활 3개월이 다 되어 가는 1982년 12월30일에 협회에서 가평 교회와 화성 교회(오산교회) 중 선택하여 목회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가평이나 화성(오산)은 교인이 몇 명에 불과하여 생활을 할 수 없고, 이재남 한국 협회장이 약속을 어겨서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억울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노원 교구 예배 수준과 재정 수준으로 수평 이동이라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선명의잔악상을 보면서도 그때는 문선명의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제 2 절 꿈에 나타난 문선명

 

1982년 1월 4일 밤 꿈에 문선명이 나타났습니다. 전국 통일교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하던 중에 산봉우리 5개를 보여주면서 이 산을 개발할 사람이 없느냐고 했는데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문선명이 제 앞에 오더니 "박준철! 네가 이 산 5개를 개발하라" 고 명령했습니다. "네가 임자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삽과 낫을 주었습니다.

꿈을 깬 후 생각을 해보니 산봉우리 5개는 화성(오산)이었습니다. 사명감이 충만한 목회자가 없어서 화성교회(오산교회)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목회자들이 화성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경기 교구에서도 제일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전국 통일교에서도 제일 가난한 교회 중 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이 못난 사람을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가 또 한번 꿈에 현몽을 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화성교회로 가라는 명령 인줄 알고 순종하는 맘으로 죽더라도 오산교회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오산교회로 부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9장 경기 화성 교회가 전국 통일교 최우수

 

교회로 부흥

 

제 1절 다시 일어선 교회 개척

 

1982년 1월 17일날 배신과 불신 속에서 그동안 닦아놓은 기반을 송두리째 남겨두고 어린 3남매와 처를 데리고 오산교회로 왔습니다. 그리고 1982년 2월 17일에 취임식을 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가는 목사마다 잠시 있다가 떠나버렸습니다. 오죽하면 문선명은 집회를 하면서 오산교회는 사단역사를 하는 곳이니 이름을 진산 교회로 바꿔야 한다고 할 정도엿습니다.

전임목사는 제직당시 승공 연합의 돈 1천2백 만원 때문에 오산교회 교인들과 승공 연합 회원들이 큰 시험에 들었습니다. 전임목사는 오산교회 사택에서 살지 않고 수원에서 살면서 전국을 다니며 양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 있던 목사도 교인이 얼마 되지 않고 헌금도 몇 만원에 불과하여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을 개설하여 그 수익금을 생활비로 썼는데, 이를 알게된 전도 대원 몇 사람이 협회에 올라가 목사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여 문책 인사이동을 시켜 버렸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통일교 목사들이 문선명을 재림주, 참 부모를 믿고 순종하며 목숨을 바친 죄밖에 더 있겠습니까? 저 자신도 불쌍하지만, 너무나도 처절하게 불쌍한 사람들이 통일교 목사들 입니다.

저는 경기 화성교회로 가면서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사단 마귀가 역사를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정성을 들여 빠른 시일 내에 발전을 시키겠다고 굳은 각오로 다짐했습니다. 저는 취임하는 날부터 100일 기도,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 수요예배 개설, 금요 속회예배 개설, 주일학교 개설,중고풍부 예배 개설, 전도, 심방 등을 중심으로 교회의 발전에 온 몸과 마음을 다 쏟았습니다.

노원교구 본부에 있을 때 자전거도 없이 걸어 다니면서 심방과 전도를 하며 봉사 했었습니다. 나중에 오인천 영화 출연료로 받은 2만원으로 중고 자전거 1대를 사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심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속회예배와 전도를 하니 신바람이 났습니다. 노원구 상계1 · 2 · 3 · 4동, 도봉구, 중계동, 하계동, 공릉동까지 자전거를 타고 심방 전도 활동을 했듯이 화성교회에서도 자전거를 활용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화성 관내 17개 읍 면 동에 심방 전도를 다녔습니다. 이렇게 자전거를 계속 타니 새 팬티라도 한 달이 못 가서 엉덩이 부분에 구멍이 나고 헤어져 매달 팬티를 구입해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양쪽 엉덩이에 물집이 생기고 터져서 바지까지 버리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문선명 통일 교주를 위해 매일 밤 12시까지 심방 전도를 했습니다. 새벽 I~2시가 되는 때도 허다하게 많았습니다.

문선명에게 목숨을 걸고 한국 최고의 실적과 공적을 쌓는 한국 통일 교회의 푯대가 되고자 몸부림을 치며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문선명은 집회 때마다 "나는 호랑이니 너희들은 고양이 새끼가 되지 말고 호랑이 새끼가 되어라" 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말이 그 당시에는 꿀같이 달게 느껴졌습니다. 죽더라도 뜻을 위해 죽고 문선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의를 매일 기도로써 다짐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활동을 하여 체력이 극도로 떨어지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의식 불명이 될 정도로 쓰러져 있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교인을 전도할 때나 교인을 심방 할 때면 저는 굶더라도 과자나 음료수를 사 가지고 심방을 했습니다.

화성교회에 교회 총무로 세웠던 추진복 집사가 있었는데 신앙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합동결혼식을 하고 갓난 아들 하나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습니다. 튀김집을 운영했는데 저는 매일 그 집에 가서 축복 기도를 해주며 그 날 심방할 집에 가지고 갈 튀김을 샀습니다. 그 날 심방을 하는 집이 10집이면 10봉지를 사서 자전거에 싣고 다니며 전도하고 심방을 했습니다.

저는 추진복  집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다른 가게에서 사지 않고 그 집에 가서 튀김을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사랑과 정성을 알아주기는 커녕 추진복 집사는 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추진복 집사 집에 가서 조용히 신앙적 인 교육을 시키려고 했는데 첫마디가 욕 이었습니다. 왜 욕을 하냐고 했더니, 자기 가게 식탁을 저를 향해서 밀어 버렸습니다. 그순간 오른손 약지가 식탁에 끼어 큰통증을 느꼇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고 당황하여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크게 부어 올랐습니다 즉시 병원에 가서 뼈를 수술했어야 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20일 동안을 방치했습니다. 손가락은 벌겋게 부어 올라 움직일 수 없었고 뼈까지 아팠습니다. 손가락 겉에만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습니다. 20일이 가도 손가락의 부기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조금씩 부기가 빠지고 괜찮아 졌지만 그날 다친 손가락 하나가 휘어진 채로 굳어 버렸습니다. 즉시 병원에 가서 X-ray 촬영을 하고 손가락을 고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손가락을 제대로 펼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추집사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저는 추집사가 성격 때문에 그런 것으로 알고 용서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집사는 제가 그 날 다쳐서 일생동안 손가락이 구부러진 채로 사는 것을 지금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 추집사는 집에서 닭튀김을 할때 나오는 창자를 그날 그날 모아서 개를 기르는 이건숙 집사에게 주었습니다. 이건숙 집사는 개35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한 마리에 300만원도 넘는 좋은 개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추집사가 쥐를 잡는다고 닭 창자에 쥐약을 버무려서 여러 군데 놓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무의식 중에 쥐약으로 놓았던 닭 창자를 새벽에 일어나 모아가지고 쥐약을 안 넣은 창자와 같은 그릇에 담았습니다. 그것을 몰랐던 이건숙 집사는 아침에 창자를 가져가 35마리 개에게 끓여서 먹였습니다. 그 창자를 먹었던 개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쓰러져 갔습니다. 이건숙 집사가 추진복 집사에게 무엇이 잘못 되었냐고 물었을 때 닭 창자에 쥐를 잡으려고 쥐약을 섞었다고 했습니다.

순간의 실수로 이건숙 집사의 고급 개 35마리가 죽었습니다. 그 일로 추집사는 몇 십 만원을 이건숙 집사에게 보상금으로 물어주고 튀김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 갔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제 2 절 화성 교회 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100일 기도를 마치면 2차 100일 기도, 3차 100일 기도로 숨돌릴 여유도 없이 교인들과 합심하여 기도드린 결과 1982년도에 교회가 급성장을 했고 전도 우수 교회로 협회장 상을 받았습니다. 1983년 4월과 9월에는 협회 우수 교회상을 분기별로 수상을 했습니다. 1985년도에도 전국 최우수 협회장상을 교회 우수상과 전도상 까지도 저는 받았습니다.

화성교회에서도 많은 이적기사가 있었습니다. 이준영 씨는 독자였는데 딸만 3명을 낳고 몇 년 동안 아기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다고 이준영씨에게 말했습니다. 얼마후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시어머니나 주위 사람들은 태몽이 또 딸이라고 아기를 지우려고 했습니다. 10달 동안 많은 시험과 시련이 있었지만 저의 말을 믿고 이준영씨는 아기를 지우지 않았습니다. 10달이 되어도 아기가 출생하지 못했는데 11개월이 되었을 때 마침내 건강한 아들을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 전체 앞에서 이준영 씨가 아들을 낳는다고 했는데 11개월이 지난 후 그 가정에 행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몇 대 독자인 강호길 씨도 아들을 낳은 후 통일교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종수 씨는 기독교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는데 악령이 3,000명이나 들어와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정신병원으로 갔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안수 기도도 받았지만 악령이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모든 친척과 가족들이 오산 통일교로 나오는 조건으로 악령을 물리쳐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동안에도 제가 악령을 많이 물리쳤기 때문에 그 가족들과 이종수 씨를 불러다 놓고 찬송가를 부르며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이종수씨는 교회 강대상 앞에서 기도를 받은 후 쓰러졌습니다. 한참후 이종수 씨가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오랜 악령의 시달림과 고통이 끝이 났습니다. 회사에도 복직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독실한 통일교 교인이 되었으며 친척들도 통일교에 모두 나오고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이종수 씨는 점점 더 헌신과 봉사로 충성을 다하여 화성 교회 재정 담당 총무까지 수행을 잘 했습니다.

문흥기라는 사람은 수원 빈센트 병원에서도 포기한 병자였습니다. 이제는 살 수 없다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제가 문흥기 씨를 보았을 때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고 몸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습니다. 의식이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 상태로 임종을 기다리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미 부인과 자녀들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문흥기씨만 교회에 안 나오는 상태여서 의식이 돌아 왔을 때 교회에 나을 것을 간절히 권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저는 기도를 했습니다. 문흥기 씨는 매일 고통으로 아우성 치던 사람이었지만 기도를 받은 그 날 밤에는 편안히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부터 기적같이 기력을 회복하여 걸어 다닐 수 있었고 일주일 후 건강을 회복하여 예배도 참석을 했습니다. 처음 2달은 열심히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러나 석 달째는 되는 주일부터는 일요일마다 막노동일을 나가거나, 교회를 오지 안기 위해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습니다. 저는 온갖 방법으로 문흥기 씨에게 말을 했지만 말을 듣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문흥기 씨는 석달 후 금요일 막노동을 잘 다녀오고 토요일 새벽에 이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회에서 적은 정성을 모아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 외에도 제가 가는 개척 교회마다 이적, 기사, 신유 은사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문선명 재림주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가는 곳마다 스스로 희생 재물이 되어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화성교회도 전국 최하위에서 최상위 교회로 부흥 ·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 3 절 마지막까지도 아버지께 불효

 

소년 시절에 저는 아버지같이 불쌍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결혼하면 능력 있는 남편, 능력있는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존경 받는 아버지, 사랑 받는 아버지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에 입교한 이후 영혼과 육신을 빼앗기고 언제나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처절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릴 때는 자라서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어 부모에게 효도하겠다는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제대로 부모님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통일교에 들어온 후로 단 한 번도 부모님께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잔인한 문선명의 역사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문선명은 입으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외치면서 행동으로는 자신만이 참 부모이며, 육신을 낳아준 부모는 사단의 부모라고 주장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오직 자신만을 참 부모로 섬기라고 강요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1985년 9월 24일 고인이 되셨는데 제가 너무나 불효를 하여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픔니다. 아버지는 추석 명절 직전 화성교회에 오셨습니다. 막걸리 5병을 받아놓고, 사골을 사다가 끓여 국을 만들어 나름대로 아버지를 모실 준비를 했습니다. 서울 큰아들 집에 계시는 아버지를 직접 서울까지 가서 버스로 모셔 왔습니다. 오산 버스 터미널에서 화성 통일교 까지는 IKm 거리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저는 아버지 팔을 부축을 하여 교회까지 오는데 4차례나 길바닥에 주저 앉아서 쉬었다 오고 해서 겨우 도착했습니다. 교회로 모시고 와서 식사를 대접하고 술도 드렸습니다. 저녁에 주무실때 이불을 펴 드리면서 밤에 방에 있는 술을 많이 잡수시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야, 이 놈아, 내가 술을 안 먹으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주무셨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첫 말씀이 "하동 집에 빨리 가야겠다" 였습니다. 저는 "며칠 저희 집에서 계시기로 하시고 오셨으니 편히 계십시오. 술, 고기와 여러 가지 반찬을 준비해 놓았으니 오래 계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님은 "준철아!" 하면서 "술 먹게 용돈이나 많이 달라" 고 했습니다. 아무리 가시지 말라고 말려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저는 다른 때보다 용돈을 조금 더 드렸습니다.

저는 서울로 모셔다 드렸고 아버지는 경남 하동 집에 가셔서 바로 운명을 하셨습니다. 71세로 고인이 되셨습니다. 생전에 아버지는 언제나 저에게 용돈을 많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제대로 용돈을 많이 드리지 못해 아버지께 죄송했습니다.

제가 언제나 목회를 성공하고 교회를 부흥시켜 안정이 되면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교회를 빼앗기고 처절하게 가난한 목사길을 걸었습니다 순리대로 통일교 목사 인사이동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문선명 교주의 명령 한마디에 교역자는 강제로 움직 입니다.

저는 아버님이 저희 집에 온 것이 마지막 오시는 길이고,용돈을 많이 달라는 것이 마지막 말씀인줄 알았다면 빛을 내어서라도 돈을 많이 드렸을텐데 교회가 어렵다보니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날 아버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술을 적게 잡수시라고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일생동안 저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언제나 불효자였습니다. 성공해서 부모님을 편히 모시겠다는 다짐을 한번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땅 속에 계신 아버지께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아버지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신 후 생전에 아버지 앞에 음식 한번 제대로 해 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이 아파 음식을 대할 때마다 한동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아버님께 못다 한 효도까지 합하여 어머님께 효도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목회 현실은 성공해서 교회가 안정되면 폭력적인 인사이동으로 또다시 지옥 같은 개척 교회 생활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저를 낳아준 육신의 부모는 사단의 피를 이어받은 가짜 부모라고 했습니다. 문선명만이 인류를 구원할 참부 모 재림주라고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할 경제적인 능력이나 시간이 허락되지않았으며 오직 저를 구원하신 인류의 구세주 문선명 참부모에게 그 당시에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머님께 효도하는 길마저 막아 버렸습니다. 처절한 가난한목사 생활에서 헤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광란의 부당한 인사정책으로 부모님에 효도하는 길마저 잔인하게 막아버렸습니다.

 

 

제 10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교회로다시 인사발령

 

제 1 절 통일교에 바친 목숨



경기 화성교회 목사에서 서울 노원교구 본부교회로 인사 발령을 받은 것은 1986년 5월 1일이였습니다. 만 4년 4개월만에 땀과 눈물로 발전시킨 화성교회를 떠나 서울 노원 교구 본부 교회로 재발령을 받고 5월 18일에 노원교회에 취임했습니다. 노원교구 본부교회로 부임하고 보니 제가 전에 시무할 때 있던 교인 몇 사람만 교회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10여명에 불과한 교인과 매월 14만원 정도가 총 헌금이었습니다. 목사 생활비나 활동비는 없고 10여만원 이상이나 되는 교회 운영비나 관리비도 되지 못했습니다.

저의 생활은 또다시 하루아침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이였습니다. 화성교회에서는 재적 인원 160명에 헌금은 약 200만원이 되었습니다. 통일교 내에서는 최고 A급 교회로 성장을 시킨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전도하고 교회를 부흥시킨다는 것이, 이단 교회라는 이미지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화성교회의 20분의 1도 되지 않은 서울 노원교회로 부임하고 보니 눈물 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혼자라면 밥을 먹지 않고 굶어도 라면이나 국수만 먹어도 괜찮습니다. 버스 차비가 없으면 얼마든지 걸어다닐 수 있습니다. 병이 들어도 병원에 안 갈 수도 있습니다. 가난은 인내와 극기 훈련하는 심정으로 참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라도 통일교 목회를 그만두고 통일교를 탈출 했다면 지옥에서 15년 전에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저 혼자 고통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아내나 자녀들에게 남편 잘못 만나고 ,아버지 잘못 만나 너무나도 비참하고 가난한 생활을 계속적으로 강요하는 제 자신이 정말 싫었습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 을 때는 강서교구 본부교회로 부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강서 교구는 교회를 건축한 후 헌당 예배도 못 올리고 건축 2달만에 눈물로 떠난 교회였기에 목회 생활을 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강서 교구 본부 교회로 가서 저의 슬픈 과거를 청산하고 한국 통일교에 선봉장이 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저는 서울 강서교회를 자랑스러운 통일교로 만들 자신이 있었습니다. 협회에서 강서교회로 옮겨 주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강서교구는 1963년도 합동 결혼식을 한 124가정 진철수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서울 구로교회로 가고 제가 서울 강서교회로 가기로 결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 구로교회 목사님이 떠나지 않음으로 제가 강서교회로 취임을 하지 못하고, 서울 노원 교구 본부 교회로 재취임을 하게 된 것이 었습니다.

 

제 2 절 서울 노원교회에서 3차 발전

 

1986년 5월 18일 경기 화성교회를 떠나 서울 노원교회에 취임했습니다. 배고픔, 슬픔, 아픔, 분노, 배신감을 인내로서 극복하며 숨 돌릴 틈도 없이새벽 제단에서부터 수요 예배, 300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예배, 기도,전도, 봉사, 심방을 중심으로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김 영휘 협회장님은 노원교회에서 일생동안 목회를 하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한국 최고의 교회를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1986년 5월에 부임하여 노원교회 교인들과 합심하여 밤낮 없이 목회활동을 한 결과 7개월만인 12월에는 노원교회를 교인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매일 심방과 전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을 위해 이사짐을 날라주고, 실직자를 취직시켜 주고, 신유 역사로 귀신 들린 자를 건강하게 완쾌 시켰습니다. 무엇이든지 교인들이 원하면 저는 손과 발이 되어 사명을 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86년 6월 29일 주일예배에 바쁘신 중에도 김영휘 한국 협회장과 정대화 사모님(회장)이 노원교회에 순회를 오셔서 주일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참 자녀가 되자는 설교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역대 협회장 중 ,저의 능력을 인정해 주시고 시련과 고통 당할 때마다 격려하며 희망, 용기를 주신분은 김 영휘 한국 협회장님 뿐이었습니다.

김 회장님은 저를 가장 염려하며 고통 당할 때마다 저의 억울함과 능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김 영휘 한국 협회장님은 전국 통일교 순회를 하시면서 목사들에게 서울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와 같이 최악의 조건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성공적인 목회를 해야한다고, 그것이 박목사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리석었고 바보였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이용하고 성경을 인용하여 자칭 재림주로 통일제국을 꿈꾸는 가짜 메시아를 저는 자랑하고 증거 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를 위해 통일교를 부흥시키고 발전시켜 수많은 영혼이 이단에 빠지게 하는 일에 저는 앞장섰던 것입니다.

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국 통일교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통일교에 모델이 되고자 노원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일이면 사력을 다하여 일을 했습니다.

통일교 기관, 기업체에 새로운 교인을 전도하여 취직을 시킬 때 부족한 사람들의 취직을 부탁하다 보니 커피, 식사비, 섭외비 등의 경비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직접 냈습니다. 그러면서 부장이나 이사에게 교회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하여 취직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가정의 물질적인 고통도 아내와 자식들의 마음의 고통도 외면한 채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교인들을 위해 제 전부를 다 주었습니다. 마음, 몸, 물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습니다. 처절하고 가난한 생활에도 아내나 자녀들보다 교인들을 더 사랑했기에 노원교회도 부흥되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제 11장 서울 노원 교회가한국 통일교 우수 교회로

 

협회장상 수상

 

제 1절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1986년 6월부터 1987년 6월까지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고 바쁘게 살았습니다. 교회 재정이 어려워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녀들의 교육비는 밀리기가 일수였습니다. 아내가 절약을 하고 또 절약을 하여도 가정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경기 화성교회에 내려가기 전 노원교회를 개척 할 때는 저의 자녀들이 갓난 아기였기 때문에 교육비는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커서 지출은 많고 수입은 적어 아내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도 꿀 먹은 벙어리같이 할말이 없었습니다. 결혼 전에 저의 아내는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과 같이 넉넉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에 입교하면서 부모와는 담을 쌓았습니다. 딸이 이단 교회에 다닌다고 야단을 치다가 화난 부모님에게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집을 나와 순전단 생활을 한 6개월 동안 부모님이 울면서 찾아와 애걸하며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저의 아내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통일교에 세뇌되어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 불효를 했습니다. 속담에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 떡을 얻어 먹는다' 는 말이 있듯이 부모 말을 듣지 않은 자녀는 불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수없이 많은 역경과 시련을 딛고 가난한 목사 사모로서 살아온 것에 대하여 제가 교회를 부흥시켜 안정이 되면 장인, 장모님께 효도 할 것을 누차 다짐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를 발전시키면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생활이 안정이 될 것이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1986년에는 경기 화성교회에서 백 만원 정도 생활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울 노원교회로 오니 매월 총 헌금이 10만원 남짓 이었습니다. 교인들은 많아도 새 신자이고 철거민 달동네이다 보니 다들 생활이 너무나 어려워 교회 재정도 어려웠습니다.

저는 교회를 급속도로 부흥시켜 매월 30만원의 생활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비하면 엄청나게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30만원의 생활비를 받으면 십일조 헌금, 감사헌금을 제하고 활동비로 15만원을 써야 했습니다 10만원을 가지고 저의 아내는 자녀 3명 학비, 학원비로 써야 했습니다.

1988년 1월 12일 은주와 영진이 쓴 반성문 중에는 '나는 동생과 먹는 것 때문에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다. ', '나는 누나와 먹는 것 때문에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다. ' 라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3남매를 바라보며 제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오뎅이나 떡볶이도 제대로 먹일 수 없는 현실 앞에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제 2 절 3차 교회 대지 161평을 매입

 

노원교회는 주일 예배에 늦게 오는 교인은 교회 의자에 앉을 자리가 없어 교회 밖 출입구에 서서 예배를 드려야 할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저는 1987년 1월 1일 하나님의 날 예배 때 교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3번째 교회 건축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의 모든 기도 내용이 교회건축으로 모아졌습니다.

서울의 강북 교구는 월세 교회가 13곳이나 되고 전세 교회가 11곳이 되었슬니다. 월세금, 전세금도 통일교 협회나 재단에서 지원하기가 어려운 입상이 었습니다. 그러나 노원교회는 단기간에 한국 최고의 부흥과 발전된 교회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박준철 목사가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이루는 부흥사, 단기간에 선배 목사들을 제치고 부흥 시켰다고 문선명에게 보고가 되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단독으로 수차례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인정받고 사랑 받는 것, 단독으로 찾아 뵌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건축을 목표로 1차로 교회 대지를 매입 하기로 했습니다. 하루종일 교회 대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에 살 것인가를 길을 가면서도 식사를 하면서도 온통 노원교회 대지 사는 생각만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에 교회 건축 대지 매입을 목표로 매일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협회에서 5월 19일 반 승낙이 떨어졌습니다. 5월 27일부터 6월 8일까지 1차 릴레이금식을 실시했습니다.

6월 5일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한 김영휘 협회장에게 노원교회 교회 대지 등본 지적도, 도시계획원 등 여러가지 서류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건축에 적절한 3곳을 선정하여 서류를 갖추어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무려 8차례나 문선명에게 "박준철 목사가 그렇게 사명감이 철저하고 가는 곳마다 통일교 목사들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능력이 있는 목회자라면 노원교회 교회 대지를 사 주어야겠구만"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한남동 유엔 빌리지 문선명 저택에 가서 직접 노원교회 교회대지를 사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6월 5일 서울 강북 1교구 책임자로 있는 임순도 교구장에게 밤12시 30분까지 말씀을 드리고 집에 오니 새벽 2시가 되었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바늘 방석이요, 초조하고 긴장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떨리는 순간 이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제가 교회 건축을 하여 한 단계 더 크게 발전하느냐, 현재에 그대로 머무르느냐 하는 순간 이었습니다.

6월 6일 서울 강북 교구 총 책임자로 계시는 임순도 교구장 내외분이 상계동에 오셔서 교회 대지로 매입 할 수 있는 몇 곳의 땅을 보았습니다. 6월7일 김영휘 한국 협회장과 임순도 교구장이 문선명에게 박준철의 과거 실적과 사명감, 현재 교회 발전을 1년만에 10배로 발전시킨 것을 간절히 보고를 드렸습니다.

6월 8일 김영휘 회장이 문선명에게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해야 한다고 또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물의 날 행사장에서도 잠시 시간을 내어 노원교회 교회 대지 문제를 김영휘 회장께 말씀 드렸습니다. 6월 12일 협회에 가서 김영휘 회장을 만나 노원교회 교회 대지 매입 문제로 눈물어린 심정으로 또 부탁을 했습니다.

6월 13일 문선명 교주는 노원교회에 161평의 교회 대지를 사라고 2억 2천만원에 싸인을 해주었습니다. 문선명이 2억 2천만 원에 싸인한 것은 통일교 재단 본부의 결정이 아닙니다. 저를 한국 최고의 통일교 부흥사로 인정하고 특별히 문선명이 돈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교회 건축비는 노원교회를 매매하여 마련했습니다 저는 교통과 모든 시설을 감안하여 노원 전철역 옆에 교회대지를 매입했습니다. 저의 꿈에 여러 교회 대지 중상계 2동 380번지 1호 땅을 사라고 땅 모양까지 보였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대지 매입 결재가 결정 났다는 김 영휘 회장의 전화로 듣고 만사를 제치고 버스, 지하철을 타고 청파동 통일교 협회 사무실과 본·곁 교회까지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김영휘 회장께 감사를 드리면서 죽도록 충성하여 노원교회를 발전시켜 넘치는 노원교회로 만들 것을 약속 드렸습니다.

역사적으로 서울 노원 전철역 옆 380번지에 교회대지를 매입했습니다. 교회 대지 계약금, 중도금, 잔금은 협회와 재단에서 직접 땅 주인과 만나 제가 있는 자리에서 전달을 했습니다. 상계 3동 140번지 4거리 코너 통일 교회는 주위의 부동산에 팔기 위해서 매물로 내어 놓았습니다.

1979년 5월에 처음 노원교회를 지을 때는 총 1천 6백 10만원이 들어갔는데 7천 2백 만원을 받고 팔았습니다. 교회 위치가 좋아 높은 가격에 팔게 되었습니다. 노원교회 매매 대금은 계약금, 중도금, 잔금을 협회와 재단에서 담당자가 와서 돈을 받아 갔습니다. 통일 교회는 교회의 대지 매매, 모든 서류나 부동산 처리는 목사들이 하지만 교회대지를 사고 팔 때 일절 돈을 만지지 않고 협회와 재단에서 전국 통일교 재산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1987년 6월에 교회대지를 매입한 후 노원교회 교인들과 합심하여 연말까지 교회 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12장 서울 노원교회 교회 건축

 

제 1 절 1988년도 교회 건축 목표

 

1988년 노원교회 목표를 교회 건축의 해로 결정하고 1월 1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철야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1월 1일부터 4월 10일까지 교회 건축을 위한 1차 100일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를 드리기로 결정하고 시행을 했습니다.

저는 1월 1일 오전 9시에 문선명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문선명 말이 '꿀같이 달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통일교 원리 교육으로 무장되고 세뇌되어 있기에 그렇게 많은 고통과 배신과 속임을 당했으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재림주 참 부모님 이라고 증거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통일교 원리 강의를 했습니다. 1월 1일부터 쉬지 않고 전도, 심방을 했습니다. 다른 목회자들은 연휴라고 쉬지만 저는 매년 새해의 첫 시간, 첫 날, 첫달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정성을 드렸습니다.

제 자신이 교회 건축에 미쳐 있었습니다. 협회와 재단을 매일 찾아가서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빨리 해달라고 간절히 말씀 드렸습니다. 초조하고 안타까움만 나날이 더하여 갔습니다.

1988년 5월 1일 통일교 협회 창립 기념일에 노원교회가 전국 통일로 우수 교회 협회장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저는 1년 안에 12명 이상 전도한 목사나 교인들에게 주는 전도상과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을 받았습니다. 제게 상금으로 20만원과 구두 티켓 한 장을 주었습니댜. 그 돈으로 주일날 음식을 장만하여 교인들과 같이 먹었습니다.

1988년 5월 2일 월요일에 한남동 문선명 저택을 방문하였습니다. 새벽기도 후, 문선명에게 선물을 하려고 경동 시장에 가서 최고 품질의 바나나 한 상자와 참외 한 상자를 샀습니다 택시에 싣고 한남동 문선명 저택에 도착 하였습니다. 김영휘 협회장과 사모님이 계셔서 선물을 드리고 문선명에게 교회 건축 문제를 말씀 드리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김영휘 협회장께도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말씀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 답변이 문선명의 승인이 안 나와서 교회 건축 공사를 못 한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를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문선명이 일화제약에 갔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은 결판을 내야겠다는 심정으로 수택리에 있던 일화제약으로 달려갔습니다. 일화제약 건물 옥상에서 문선명 참 부모가 통일교 기업체 사장들과 같이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앞에 나아가 땅바닥에 머리를 대고 경배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문선명 통일 교주는 저를 보시더니 "너 여기 어찌 왔어? 어떻게 왔나?"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수많은 통일교 목사들 중에 저의 얼굴을 문선명이 알아 주어서 감격했습니다. 문선명이 제 얼굴을 알아준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문제를 눈물로 호소하고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문선명은 교회 건축을 그 자리에서 허락하셨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에게는 먼저 교회 건축 공사를 시작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상계 3동 140번지 노원교회 매매 대금으로 빨리 공사를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김영휘 회장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으로부터 빠른 시 일 내에 교회 건축 공사를 할 것을 약속 받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제 2 절 국회의원 당선에 관여한 통일교

 

문선명 통일교 명령과 지시로 전국 통일교에서 국회의원 후보들을 지원하여 당선시킨 국회의원들을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 집결 시켜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당선사례 감사 인사를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국회의원 후보에게 서명 날인을 받은 후 맥콜 2백 박스를 지원하고 제가 있는 통일교 조직 전체를 가동하여 인적인 지원도 해주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지원했던 그 국회의원 후보는 400여표의 근소한 차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교에서 지원 받아 당선한 국회의원들을 모아놓고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서 2박 3일동안 통일교 원리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지원으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문선명 교주에게 복종해야 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공갈 협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통일교 입당 원서를 쓰고 문선명 교주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문선명 통일교를 지지하고 찬동한다는 국회의원들은 문선명의 노예인 것입니다. 국회의원 후보 중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충성하겠다는 싸인을 한 국회의원후보를 경제적인 지원, 물질적 지원, 인원 동원 지원을 하여 저도 중진급 국회의원을 당선시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중진급  K 국회의원을 만나 문선명 교주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2박 3일 통일교 원리 교육을 받을 것을 간절히 말씀을 드려서 5월 5일 문선명 교주에게 감사 인사 갈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5월 5일 오후 2시에 K당 중앙 당사에 도착하여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기다렸습니다. 국회의원 비서관이 메모지를 저에게 전해 주었는데 국회의원은 총재와 조직 인사관계로 회의 중이기 때문에 문선명에게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K 국회의원이 충주 수안보 통일교 호텔인 와이키키 호텔에 가서 문선명에게 인사도 드리고 2박 3일 통일교 원리 수련을 받고 와야 한다고 설득을 시켰습니다. 비서관이 30분을 여러 곳에 연락을 한 결과 청량리 맘모스 호텔에서 K 총재와 인사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잠시 K국회의원을 호텔에서 내려오시라고 하여 K국회의원의 그랜저로 청주 수안보 와이키키 관광호텔까지 2시간만에 갔습니다. 저는 차안에서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위대성, 재림주라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K국회의원은 자신의 업무가 바쁘기 때문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가서 인사만 드리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충주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 도착하니 문선명교주가 도착전이라 곽정환회장, 유종영 회장, 권혁서 교구장에게만 인사를 시켜 드렸습니다. 제가 호텔에 갔을 때 통일교 지원 받은 여야 국회의원 당선자 35명이 2박 3일 통일교 원리 교육을 받기 위해 도착해 있었습니다. 여러 국회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저는 K국회의원과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인사를 드린 후에 그 길로 충주에서 서울 노원교회까지 도착하니 밤 12시 30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위해 사회의 고위층인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인사 시켰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K 국회의원에게 돌아 오면서도 2시간 동안 통일교 원리교육을 하였습니다. K 국회의원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박준철 목사가 제일 끈질긴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K국회의원이 도움을 받았으니 문선명에게 인사를 왔다고 하였지만 K국회의원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붉은 유혹에 말려들고 문선명의 정치적인 야심에 K국회의원은 이용 당했을 뿐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정치적인 야망과 정권 쟁취를 위해 통일당을 창당하고 국회의원을 포섭하여 통일교 교세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차후에 통일교 문선명 교주에게 관련된 사이비 정치 인, 종교인들은 정치 일선에서 낙선운동을 하여 낙선을 시컥 다시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 앞잡이 노릇을 못하게 1200만 기독교 교인은 철저히 막아야 할 것입니다.

 

제 3 절 노원교회 역사적 교회 건축 기공식
 

1988년 5월 6일 금요일 아침 7시부터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노원교회는 제가 철거민 달동네에서 먼지만 일으키는 허허벌판인 상계동 지역에 작은 방안에서부터 몇몇 통일교 교인들과 예배를 시작했던 곳이었습니다. 이제 3번째 노원 교구 본부 교회 건축 기공식을 한다니 감개가 무량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70년 된 낡은 집을 허무는데, 집 무너지는 소리가 폭탄 떨어지는 소리같이 컸습니다. 흙으로 된 집이라 무너질 때마다 흙먼지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물을 뿌려도 주위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가득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이단 교회를 짓는다는 소문이 교회 주위에 퍼져나가 주위 사람들이 데모를 하였습니다 교회의 옆에 집들이 시기하고 질투하여 항의를 하고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저는 집을 허물기전에 선물을 사서 집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래도 항의와 시비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바로 옆집에 살던 전과범은 알코을 중독자였는데 매일 수시로 와서 의도적으로 공사를 방해하였습니다. 대낮에 술을 먹고는 낫, 망치를 가지고 와서 공사를 집요하게 방해하였습니다. 수시로 술도 사 먹이고 담배도사 주고 용돈도 주었습니다. 때로는 강하게 말을 해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의 방해는 노원교회 교회완공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술만 먹으면 저를 가슴 아프게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를 짓기 전에 집이 폐허나 다름이 없는 집들이라 아이들이나 동네 불량 청소년들의 놀이 장소로 사용되어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밤중에도 사고가 없는지 와서 돌아보고 가슴을 졸이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집을 다 허물고 나니 속이 후련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4시에 통일 재단 김명운 부장으로부터 공사 중단하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의 지시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동안 통일교에서 목사 생활을 하면서 많은 충격을 받아 단련이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가슴이 철렁하였습니다. 저는 즉시 김영휘 협회장을 찾아가 간절히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호소하여 "다시 내일부터 공사 재개 할수 있게 해달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재단에서 공사재개를 시켜주었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 마치면 아침 식사 전부터 교회 건축 공사 현장에 가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오후에도 전력을 다하여 교회 건축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건축 공사는 통일교 회사인 일성 종합 건설회사에서 공사를 하였습니다.

1988년 5월 10일에는 대지 경계선 때문에 시비가 벌어져 주위 집주인들을 모시고 재 측량을 하였고 점심을 후하게 대접해 드렸습니다. 오후에는 주위의 아주머니와 주민들이 통일교 건축 중단하라고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습니다.

5월 30일에는 정득천 상계 2동 민정당 지도장을 만났습니다. 노원교회 주위에 200명 주민들이 통일교 교회 건축 반대 운동 서명해 놓은 것을 수습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청, 경찰서, 소방서, 동사무실, 파출소, 지역 주민들까지 수습을 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저는 노력하였고 잘 해결이 되었습니다. 저는 통장, 반장 주위에 큰 소리 치는 사람까지 다 접대하고 밤 11시가 넘어 교회에 왔습니다.

저는 노인회 등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하는데 인사해야 될 곳은 정성을 모아 조금씩 성의를 표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하는데 왜 이리시비가 많고 모셔야 될 어른이 많은지, 그 전에도 몇 차례 교회 건축을 하면서 느꼈지만 특별히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주위의 반대와 시위 때문에 수습하느라 교회 건축을 완료 할 때까지 너무나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면 교회 건축을 하는데 가서 기도회를 하고 나무 정리,목재 정리, 철근 정리 등 매일 교회 건축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보를 만들고 심방을 하고 속회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국민연합, 승공 연합지부장을 만나 행사를 준비하는 등 1인 5역도 넘는 일을 매일 해 나갔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장을 잠시도 비워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1988년 5월 18일에는 지하공간을 흙으로 메우기 위하여 덤프트럭을 기다리다 잠깐 3동 에 있는 교회에 다녀왔습니다. 그 사이 15톤 덤프 트럭이 와서 지하실 바닥에 새까만 흙이 려인 것을 바닥에 붓고 가버렸습니다. 흙에서 땀새도 나고 하여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교회건축을 하면서 저는 깨끗하고 좋은 자재를 써서 최고의 아름다운 교회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콘크리트 친 공간에 악취가 나는 썩은 검은 흙을 메웠다는 생각을 평생 동안 하고싶지 않았기 때문에 공사를 지연시켰습니다.

오후에 상계동 전체 건축 공사장을 다 다녀 장복 건설 공사장에서 포크레인을 5만원을 주고 빌려 왔습니다. 트럭 2대를 3만원에 빌려서 포크레인으로 썩은 흙을 다 거두어 내어 깨끗한 흙으로 지하실 공간을 매웠습니다. 그땐 정말 속이 시원하고 기뻤습니다. 목수들이나 철근, 콘크리트, 벽돌 기술자들에게 내 집을 짓는다는 주인 정신을 가지고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6월 7일은 2층 철근 구조물을 제작 하였습니다. 저는 교회 건축에 새벽부터 밤까지 매달렸습니다.

저는 서울 시내 선배목사들의 부러움 속에서 노원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해 교회 건축을 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고난 중에도 감사했습니다. 저에게 일성 종합건설회사 현장소장 성하준 씨는 "목사님이 이렇게 철저한 사명감과 주인정신을 가지고 교회 건축공사를 하기 때문에 노원교회가 발전되고, 튼튼한 교회를 건축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장 소장이나 공사장 인부들이 저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 후 100년을 내다보았습니다. 제가 욕을 얻어먹더라도 튼튼한 교회를 건축하려고 교회 건축을 철저하게 관리, 감독을 하였습니다.

 

1988년 6월 22일 김영휘 회장과 정대화 사모가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장을 점검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김영휘 회장은 한국 통일교 협회장을 2회 째 맡고 있었습니다. 김영휘 회장님께 노원교회 교회 건축 설계도가 협회와 재단에서 잘못 설계되어 하나에서부터 백까지를 바르게 고치다 보니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에서 노원교회 교회 건축 설계 잘못으로 수십 차례 뜯어 고쳐야 했습니다.

김영휘 회장님과 교회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하실 뚜껑을 덮지 않으면 비가 올 때 비가 바로 지하실로 들어간다고 지하실 뚜껑을 해 달라고 하였고 물탱크, 안방, 벽돌도 적 벽돌로 공사를 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옥상에도 루핑을 깔고 검은 기와로 끝내는 것을 좀더 아름답게 구운기와로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담장도 앞면에 미관상 좋지 않은 시멘트로 만든 큰벽돌을 쌓는 것이 설계였는데 붉은 벽돌로 설계 변경을 하였고 대문도 없는 것을 만들었고 사택 올라가는 계단도 시멘트 계단이었는데 고급 계단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 외벽에도 페인트칠 대신 붉은 벽돌로 설계 변경을하였습니다.

한가지 한가지를 설계 변경 할 때마다 언쟁이 벌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협회 본부 간부들과 재단 간부들도 저보고 적당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이 저의 건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는 저의 집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저는 2급 장애를 갖고서도 사지가 멀정한 439곳의 통일교 목사들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여 노원교회를 전국 우수 교회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건강한 목사들보다 10배, 100배의 고통과 서러움, 외로움, 아픔을 갖고서도 저는 문선명에게 세뇌되어 교회를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어떤 통일교 목사들도 노원 통일교 교인들도 제 사정과 제 심정을 모를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온 신경을 저의 팔에 두고있기 때문에 항상 행동을 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의 장애를 모르고 있습니다. 같은 통일교 목사들이 회의할 때나 공석 · 사석에서 반갑다고 갑자기 제 팔을 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왼 팔에 소대를 두툼하게 넣어 오른팔과 같이 크기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저는 목회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해수욕장과 야외 풀장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일생동안 여름에 짧은 소매 옷을 입지 못하고 긴 팔옷만 입고 살면서 여름에는 긴팔 긴옷으로 인해 온몸에 땀띠와 전쟁을 하며 살았습니다. 목사들과 교인들이 "왜 짧은 소매 옷을 입지 않느냐?" 고 물을 태마다 저는 "습관이 되어서 괜찮습니다. "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처럼 단 한 번만이라도 해수욕도 하고 짧은 소매 옷을 입어보는것이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모든 것을 제 운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전국 통일교 모든 합동 결혼식을 한 부인들에게 고향으로 가서 전도를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내는 고향으로 옷 보따리를 싸가지고 전도하러 내려갔습니다 전국 통일교 모든 목사 부인들과 합동 결혼식 한 가정의 부인들은 남편과 자식들, 직장,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전도하러 갔습니다.

통일교는 지금까지 매년 여름에 40일 하계 전도기간이 있습니다. 그 해에는 6월 7일부터 8월 30일까지 약 3개월 동안부부가 헤어져 살아야했습니다.

모든 통일교 교인은 전도 기간에 전도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합동 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 가정은 하루 아침에 홀아비가 되어 자녀들과 같이 생활해야 했습니다. 저 혼자서 초등학교 5학년인은주, 3학년인 영진, 1학년인 은영 3남매 학교 보내는 일,빨래하는 일,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새벽 기도 후에 교회 건축 현장에 가서 어떤 사고가 없는지 돌아보고 기도 후 자전거를 타고 교회에 돌아와 부지런히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고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매일 국제 승공연합, 국민 연합의 조직 관리, 접대, 행사 동원, 세미나,전도 심방 등 저의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가쁜 나날이었습니다. 어느 때는 정신이 없고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주위의 통일교 선배 목사들이 제가 통일교 최고의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 하니 시기를 해도 저는 참아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모든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에게 가정의 행복과 사랑, 자녀교육, 생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가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은 말이 고향이지, 일생동안 통일교에 들어와 처절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였는데 무슨 돈이 있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고향으로 이사를 갈 수 있겠습니까?

통일교 목사와 합동 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자기 고향에 가서 문선명 교주가 참 부모요, 메시아 재림 주라고 증거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할 때 저는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성공을 하고 출세를 해야 고향 생각이 나고, 여유가 있어야 부모 형제들도 찾아 뵙고 여러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게 됩니다.

통일교에서는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주일 예배 한명에 몇 점, 새벽기도 한명에 몇 점, 전도 한명에 몇 점, 수련 한명에 몇 점, 교회 헌금에 몇 점, 통일교 합동 결혼식 하는 미혼 남녀 한명 전도에 몇 점 이렇게 점수제로 하여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미혼 남자한명 전도하는데 10만원을 지불하고 미혼 여자 한명을 전도하는데 15만원을 지불하고 이렇게 전국에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매월 평가제로 지금까지 교회의 등급을 매겼습니다. 이렇게 잔인하고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통일교 목회자의 길이며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교인의 길입니다.

통일교는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입니다. 각종 행사에 이용되고 그 행사를 위하여 끊임 없이 봉사하며 재산을 투자해야 되는 악순환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액 재산을 바쳐야 되는 통일교 교인들은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든 지경입니다. 저도 그런 통일교 문선명 교주를 만나 일생을 세뇌 되고 마취되어 청춘도 건강도 전부 빼앗겼습니다.

 

제 4 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상량식

 

1988년 6월 28일 상량식을 올리기 위하여 통일 민주당 청원군 위원장인 박동인씨에게 상량판을 받아 노량진 박동화씨에게 갔습니다. 상량판에는 붓글씨로 조국통일 선봉장 박준철 천지인 삼강 입주 상량이라고 썼습니다. 저는 교회로 돌아와 성염(소금)으로 성별을 하고 노원교회 상량식 봉헌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진을 찍고 음식을 교회 주위에 집집마다 돌렸습니다. 그동안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1988년 7월 3일에는 통일교 협회 문화부에서 노원교회 부흥과 발전을 취재하고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취재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매월 통일교에서 발행되는 통일세계에 노원교회 기사를 대서특필하기 위하여 유창수 기자가 와서 사진도 찍고 좌담회를 취재하였습니다. 이 기사가 1988년 7월달 통일 세계에 한국 통일교 부흥과 성장교회 탐방이라는 제목을 가지고"내일의 승리를 위해 도약하는 상계교회" 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특집 기사에 저 한 사람의 희생과 봉사로 문선명 통일 교주에게 충성하고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등불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발전한 소식을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알려서 조금이나마 자극제가 되어 전국의 통일교가 발전 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때로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개척하여 부흥을 시켰더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랬다면 점점 대도시나 서울로 와서 통일교식 승진을 하였을 것이고 승승장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일 후배 목사로써 지방중소 도시도 아린 대도시도 아닌 서울 교구에서 개척을 하여 성공을 하다보니 언제나 선배를 위해 강제로 부당한 인사이동을 수 차례나 당하였던 것입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서울 교구에서 기적의 개척과 발전, 부흥, 교회건축을 반복하며 상처받고 폭행을 당한 것은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과의 정과 관계를 끊어가는 과정이였습니다. 저는 박대 받고 부당한 인사 이동을 당하며 세뇌에서 점차 깨어나 탈퇴하라는 하나님의 뜻 이었습니다.

 

제 5 절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당한 폭력과 폭행
 

저보다 직급이 높은 공릉교회에 김수정 목사가 있었는데 저보다 직급이 높은 선배 목사였지만 교회는 2층 30평 전세 교회였습니다. 교인이나 예배헌금이 노원교회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김목사는 회의를 하면서 때로는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1988년 8월 30일 공릉교회 월말 목회자 회의중에 김수정 목사에게 회의 때 연락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김목사는 저에게 욕설을 하고 폭행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제가 잠시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떠나 심방 하는 사이에 다른 목사들을 데리고 와서 노원교회를 자기 교회로 할 것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 건축을 해 놓으면 선배 목사들이 빼앗았는데 또 저의 노원교회를 빼앗느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새끼!뭐 이런 새끼가 있어?너 한 번 맞아볼래? " 하면서 뺨을 때리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승창 목사와 여동석 목사가 저를 뒤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김목사는 저를 무차별하게 폭행을 하여 허리를 다치고 가슴을 얻어맞아 입술이 터지고 코피를 흘렸습니다. 저는 한 달 반 동안 온몸이 결리고 허리와 가슴이 아파서 몸을 지탱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회의석상에서 폭행을 당하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매스컴에 날까봐 병원에 입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놓고 협회의 김영휘 회장님과 김승철 국장, 각과의 국장단을 모시고 김수정 목사를 인사 위원회에 세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김목사의 양쪽 말을 듣고 결정을 하시라고 하였습니다. 양쪽 목사 말을 듣고 문책 인사 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목사는 문책 인사를 당한다면서 전세 교회가 아닌 강남의 큰 교회로 인사이동이 되었습니다. 남 잘리는 것을 배 아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여 폭행하는 목사를 예배와 교인이 많고 헌금이 많은 큰 교회로 승진 인사를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목회를 성공하고 능력이 많아도 제게 돌아오는 것은 지옥과 같은 목회 길뿐이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이 교회 건축헌금을 다해도 철거민 지역이라 몇 백만원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헌금을 제일 많이 한 통일교 교인이 50만원 정도였습니다 장로는 20만원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는 문선명까지 층층시하 어른이고 이 눈치 저 눈치 봐야 되는 입장입니다. 교회 목사라 할지라도 합동 결혼식 한 서열 순서대로 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나 대우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에 따라 교인이 어느 날 갑자기 목사로 임명을 받는 때도 있고 명령에따라 목사직을 박탈 당하고 교인이 되어 통일교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교인은 구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 목사들은 통일교를 한꺼번에 50명~100명이 그만두고 떠나는 일이 많습니다.

모든 통일교 목사들은 일회용 목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많은 문제가 돌발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매일 매일 협회 지시에 숨이 막힐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 끝까지 차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건축을 하면서 내외적으로 영적인 싸움과 함께 교회긴축 공사 과정이 하나하나 진행될 때 전투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성하준 소장은 설계대로 한가지 한가지를 건축해 가야 하는데 건축을 잘 못하였습니다.

잦은 변경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재단 본부의 설계 잘못으로 모든 일을 현장에서 고쳐나가려다보니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습니다. 제가 협회나 재단에서 노원교회 교회건축을 하는 대로 두었더라면 교회건물은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하준 소장은 성실하게 일을 잘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재단과 협회는 노원교회 목사인 저를 불러서 설계 도면을 만들었더라면 자재를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많은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와도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나이, 같이 합동 결혼식을 올린 통일교 협회 총무부장인 박석균은 저에게 "노원교회가 네 집이가?그만좀 해라. 적당히 좀 해라." 며 김승철 총무국장 앞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주인정신 없는 박 부장이나 재단 본부 김명운 부장 등에게 온갖 모욕과 무시를 당하며 피눈물로 노원교회를 건축해나갔습니다.

 

제 5 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준공을 완료
 

1988년 9월 29일 제3차 노원교회 건축 이전예배를 드렸습니다.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코너 노원통일교 시대를 마감하고 상계 2동 380번지 1호의 노원교회로 이사짐을 실어다 날랐습니다. 새벽에 문선명 사진을 모시고 정중히 새로운 교회까지 걸어왔습니다.

교회 대문, 3층 교회, 2층 사무실, 교회 사택, 1층 사무실, 식당, 방, 지하1층 방, 강당, 보일러 기계실 등 교회 전체를 성염(소금)으로 사단을 물리치는 성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무당이 하는 의식을 통일교에서는 하고 있기 때문에 저도 그때는 그 의식대로 소금으로 새로 건축한 교회 전체에 성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새로 건축한노원교회에 이사하는 날 떡 다섯 말을 하여 동사무실,파출소. 이웃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 반대 운동을산 900여명의 서명 날인을 한 집에도 떡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1988년 10월 10일 교회 대지 161평에 건물 554평, 지하 1층, 지상 3층 교회를 준공하였습니다. 한국 통일교 중 최고로 아름다운 교회로 교회 건축을 하였습니다. 12월 달에는 통일 세계에 표지 모델로 실렸습니다. 지금까지 통일 세계에 표지 모델은 문선명씨 사진이나 통일교 행사 사진 등 이었는데 통일교 30년 역사에 처음으로 노원교회가 표지 모델이 되었던 것입니 다. 그 동안에 저는 장인 장모님에게 효도 한 번을 하지 못하고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서울 박 서방이 노원교회를 개척하여 노원교회에서 3번째 교회 건축을 하고 이사를 했다" 고 울산에서 축하를 하기 위하여 올라 오셨습니다. 그리고 방에 가구가 너무 없다며 2층 절반 40평이 사택이었는데 거기에 장롱, 식탁, 가구 등을 2백만원의 거금을 들여 장만해 주셨습니다.

 

 

제 13장 통일교 아름다운 교회 헌당식

 

제 1 절 노원교회 3차 교회 건축 헌당식
 

1988년 11월 20일 노원교회에서 역사적 헌당식을 올렸습니다. 한국 통일교 김 영휘 회장님과 정대화 사모님 이 참석하셔서 격려사와 축도를 해 주셨고,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 이상덕 전도국장, 심평근 국장, 권혁서 제 1교구장, 김명대 제 4교구장, 김원종 목사 내외분 등 저의 친목회 목사들,서울 시내 선배 목사들이 참석하고 제가 목사로 있었던 경기화 성교회 교인들이 많이 참석하여 노원교회 예배 교회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축하예배 교인들로 가득 찼습니다. 헌당식에는 250명이 넘는 교인들이 와서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이 날을 위하여 살아온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모 당의 원내 총무였던 분이 대형 축하 거울도 기증을 하였습니다. 곽정환 세계일보사장, 문승룡 재단이사장 등 많은 전국의 통일 그룹기관 기업체 사장단의 이름으로 축하 화한과 축전을 엄청나게 보내 왔습니다. 저는 부족한 제 자신이 이렇게 통일교의 대표적인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했다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날 하루만큼은 외로운 마음, 배신감, 배고픔도 없이 꿈꾸는 심정 이었습니다.

'노원교회는 저의 피눈물의 교회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노력과 기적의 교회입니다. 저는 목숨을 걸고 한국 최고의 실적과 공적을 가지고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인정을 받아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완공시킨 것입니다. 이제 저의 책임은 노원교회를 교회가 가득 찰 정도로 넘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나깨나 교회 발전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드리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 중에 통일교 교인들 가운데 5명에게 상계전철역 앞 벽산아파트 딱지를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딱지는 무허가 건물 4평, 8평 짜리로 30평 짜리나 25평 짜리 아파트 입주권 이였습니다. 조건은 노원교회 발전을 위해서 충성하고 저의 손발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참부모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교회를 만드는데 모든 것을 앞장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고 충성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너무나 큰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풀었습니다.

 

제 2 절 베풀어 준 은혜와 축복을 배반으로 갚은 사람들
 

저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진심을 다해 도와주고도 뺨을 맞는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제 목숨보다도 더 아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을 제 아내나 자녀들보다도 더 아끼고 제 모든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반이라는 이름으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천국 백성이라는 통일교 교인이라는 이름을 갖고도 자기 목사에게 가슴속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단 말입니까? 은혜 뒤에 시련이 있다는 것을 통일교 목사 생활을 통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겪었습니다.

저는 노원 통일교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통일교에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통일교 한국협회 김승철 총무국장에게도 상계 전철역 앞 벽산아파트 30평짜리 무허가 건물 딱지를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김승철은 1962년도 문선명 통일 교주로부터 72쌍 합동 결혼식을 한 대 선배였습니다. 교구장도하고 협회의 이인자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북교회로 나가는 김승철 국장에게 문선명 참 부모님의 한을 풀어 드리자고 말씀드리고 저의 손발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노원교회 건축도 하고 교회를부흥시켜야 될 책임과 사명이 있는데 김승철이 와서 노원교회 어린 교인들을 잘 교육시키고 이끌고 가는 신앙자가 되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노원교회에 사랑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간절히 부탁 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아파트를 사게 해 주어 이사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박주성 집사에게도 벽산 아파트 딱지를 사주었습니다. 후일 아파트가 완공되어 입주를 하였고노원교회로 김승철 국장부부와 박주성 집사부부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3명 중 2명은 노원교회 발전을 위해 제가 부동산 소개업소 역할까지 하며 아파트를 살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돈만 벌고 이사도 오지 않고 노원교회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 분은 저에게 아파트를 팔아 감사하다고 100만원을 저에게 주었지만 그 100만원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분은 저를 격려해 주시고 희망과 용기를 주시며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 항상 저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분 이었습나다. 저는 말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100만원을 끝까지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노원교회에 있으면서 생애에 최고의 실수를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김승철 국장에게 아파트까지 살 수 있게 해주며 실질적인 돈을 벌게 해주었습니다. 문선명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노원교회에 충성을 해달라고 김승철 통일교 협회 총무국장을 성북구 종암동에서 데리고 온 것이 화근이 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자기보다 합동 결혼식을 한 서열순위가 아래인 목사에게는 잘 순종하지 않고 받들지 않습니다. 제가 김승철 국장보다 13년 늦게 합동 결혼식을 한 후배이다 보니 김승철 국장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노원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방해하며 반대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노원교회 목사 노릇까지 다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목사인 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제가 추진하고자 하는 교회 일을 거부하며 불신하였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교회를 불신하는 문성숙 집사, 제가 아파트를 사 주었던 박주성 집사, 제가 40일을 통일교 원리강의를 하며 사랑으로 교육했던 고귀숙 집사 등을 끌어들여 저를 배신하게 했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불신의 주모자가 되어 노원교회에 오지 않고 아파트에서 불신하는 5명과 일요일 대예배를 드렸습니다. 저와 심정 일체가 되어 충성하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어린 교인들을 사랑으로 바르게 신앙교육을 하지 않고 불신의 주모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받게 하고 해주었지만 은혜를 배반하고 노원교회 발전과 부흥을 가로막는 역적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김승철 총무 국장은 문선명 겹사돈인 홍성표 협회장(현재 문선명 통일교 교주와 원수가 되어 자녀들이 이혼하고 통일교를 탈퇴함), 재단 이사장 결재도 받지 않고 4천 만원을 협회에서 불법으로 가져와 2층을 전세 내었습니다. 제가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 직접 4천 만원이 홍성표 협회장 결재를 받은돈인가 물어 보았으나 결재한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그곳에서 목사 노릇을 하고 은혜를 배반한 통일교 교인을 끌어 모아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김승철 국장은 불법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에 교회를 폐쇄하고 돈을 협회에 반납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의 70세 고희기념 잔치를 하라고 전국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에게 지시 하였습니다. 전국 시 ·군 ·구·면 ·동 통일교에서 교인들이 헌금을 하여 지역에 국민연합, 승공연합 노인들을 모아놓고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 부모로 증거하라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47년동안 교회각종 행사와 헌금 강요로 처절한 가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상계1동부터 10동까지 노원교회 교인들을 각 동에 한명씩 구역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동~상계10동까지 문선명 참 부모 칠순 잔치를 승공연합, 국민 연합 회원을 모셨습니다. 그 동에 사는 통일교 구역장과 교인들이 돈을 내어 잔치를 해 드린 것입니다 잔치를 다 하고 김승철 국장이 책임 지고 있는 상계 5동만 문선명 잔치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협회에 갔다가 김승철 총무국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전국 통일교에 목사들과 교인들을 진두 지휘하는 사람이 총무국장이고 다른 구역장들은 잔치 다 했으니 문선명 잔치할 돈 10만원을 내달라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왜 어려운데 돈을 걷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총무국장이 전국 통일교에 문선명 참부모 잔치하라고 통일교 목사들에게 명령 해놓고, 그런 말씀을 하면은 어떻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문선명 교주 칠순 잔치 때 자기 교회에 잔치하라고 50만원, 100만원 헌금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은 한국 통일교 이인자 자리에 있으면서 돈 10만원이 아까워서 저에게 야단을 쳤던 것입니다. 그 이후 김승철 국장은 문선명 고희잔치 돈을 내지 않고 간단하게 과일, 떡을 마련하여 잔치를 끝냈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전국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온갖 명령과 지시를 합니다.

김승철 국장은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100일 새벽 제단 기도를 하시오. 40일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하시오. 전도하시오." 등의 명령을 하였지만 김 국장은 노원교회와 100m도 안 되는 거리에 살면서 새벽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도 드리지 않고 아들이 군대에 갔다고 면회 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전도도 하지 않았고 십일조 생활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참으로 김승철 국장을 노원교회로 오게 한 것을 후회하였지만 그것은 때늦은 후회였습니다.

 

 

제 14장 노원교회를 찿은 문선명

 

제 1절 자칭 감동받은 문선명
 

저는 1989년 1월 1일 제22회 참 하나님의 날을 맞이하여 문선명에게 1년 한 해를 충성할 것과 절대 신앙, 절대 복종, 절대 사랑할 것을 맹세 했습니다. 문선명에게 영광을 돌리는 한해가 되자고 100명이 넘는 노원교회 교인들과 모여 철야 기도회를 드렸습니다.

1989년 노원교회 목표를 360명의 재적과 210명의 예배 목표를 세웠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새해를 출발하였습니다. 1989년 1월 9일날, 문선명이 큰아들인 문효진 장남과 문현진 삼남과, 곽정환 회장 등 기관 기 업체 사장단 20여명을 데리고 노원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문선명은 서울 시내 통일교나 전국 통일교 어느 곳에도 방문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 도착하기 30분전에 노원교회로 온다는 소식에 저는 너무나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 문선명을 맞이할 준비하는 시간이 너무나 촉박 하였습니다. 심장이 떨리고 어떻게 모셔야 할지 노원교회 교회건축 브리핑을 어떻게 보고 드려야 할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칭 재림주 문선명이 노원교회로 오면 식사, 과일, 떡 등의 음식과 음식 담을 그릇, 상 등이 필요한데 모든 것의 준비가 부족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에게 급하게 전화 연락을 하여 노원교회로 문선명이 오시니 빨리 오시라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교회대문을 열어놓고 카메라와 필름 준비 청소와 교회 주변 정리 등을 일사천리로 준비 하였습니다. 그러나 준비가 다 되기도 전에 문선명은 통일교 최고위층 교인들과 같이 노원교회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서울 시내 통일 교회의 목사 중 제일 어린 목사였습니다. 그런데도 문선명은 저를 기억하시고 저의 교회를 부흥시키는 능력을 인정하시고 왔던 것입니다. 저는 지하 1층~지상 3층까지 곳곳을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브리핑하였습니다. 2층 사택 쪽으로도 모시고 가 구경을 시켜 드렸습니다. 문선명은 중국의 진시황제 때 9,999칸의 아방궁 같이 노원교회 교회 건물을 잘 하였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았습니다. 문선명에게 교회 전체를 보여 드렸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에 온 것만으로도 영광이었고 축복 이였습니다. 저는 문선명과 같이 찍은 사진을 확대하여 큰 액자에 넣어서 노원교회 교회 계단마다 걸어 놓았습니다.

통일 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은 문선명 참부모가 제가 목회하고 있는 노원교회에 내방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자칭 구세주 문선명이 감화 감동을 받았파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가 노원교회까지 왔다는 것은 통일교 내에서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치를 통일교의목사들과 교인들만이 알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문교주에게 세뇌된 상태였기 때문에 노원교회가 자랑스러웠습니다.

1988년 7월 달에는 통일 세계에 노원교회가 한국 통일 교회의 우수 교회로 크게 소개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고난의 시간들이었지만 기쁨과 감사가 함께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나님이 문선명까지 노원교회로 왕림하게 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15장 서울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비극적인 사건

 

제 1 절 동토의 왕국인 통일 제국의 교구장 임명


1991년 1월 5일, 오전 11시에 노원교구 내의 목사 회의를 권혁철 교구장과 하였습니다. 권교구장이 통일교 협회에서 노원 교구장으로 박준철 목사를 임명했다고 전체 목사들 앞에 발표 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박준철 목사님이 너무나도 많은 실적과 한국 최고의 공적을 가지고도 언제나 선배 통일교 목사들 때문에 교구장 자리에서 밑려났으나, 이제 박준철 목사님이 노원 교구장으로 협회의 임명을 받았으니 소원 풀이를 한 것이라고 축하 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그 당시 이제야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여 기쁜 마음 이었습니다. 선배 목사들인 하계동이나 중계동, 월계동 등 여러 목사들이 저고 교구장이 되었다고 축하 인사를 하였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저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권혁철 교구장이 내일 오후 1시에 서울 시내 각 구 교구장들만 한남동 UN 빌리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 저택에서 회의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 저의 아내에게 이번에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내도 기뻐했습니다.

1991년 1월 6일 새해 첫 주일 예배를 맞아 저는 광고 시간에 전체 교인들 앞에서 어제 홍성표 한국 협회장이 서울 시내 교구장들을 임명하여 저도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후 1시에 UN 빌리지 문선명 참 부모님 공간에서 교구장들 회의가 있어서 다녀오겠다고 노원교회 교인들에게 보고하였습니다.

통일교는 온갖 아부를 교구장과 협회장에게 해야 출세를 합니다. 저는 출세하기 위해서 통일교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에 순수한 통일교 목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문선명 교주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온갖 가시밭길을 피눈물을 흘리며 누명을 쓰고 강제로 부당한 인사 이동을 당하고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정으로 개척을 하고 성공하기를 반복 하였습니다. 저는 박탈감과 빼앗긴 배신감에 가슴 아픈 때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억울하게 폭행과 폭력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 항변하지 못하고 사회에 고발하지 못하는 제 처지가 한없이 미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원 교구장이 된 것이었습니다. 노원교회에 모든 교인들이 저와 일심동체가 되어 교회발전과 부흥을 하여 문선명 재림주에게 충성 할 것을 더 더욱 다짐을 하였습니다. 모든 노원교회, 모든 통일교 교인들도 목사에게 교구장이 된 것을 박수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는 늦었지만 교구장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동안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 10회와 교구장상 등 16회 총 26회를 수상 받아 통일교 역사에도 없는 최고의 실적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교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배 후 식사도 하지 않고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성북교회 교구장으로 임명된 김민중 목사님을 제 차로 같이 모시고 갔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가면서 서울 시내 동 책임자인 교회 목사들도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였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제 목사 회의에서는 서울 시내 각 구 단위 교구장들만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였는데 동 책임자인 교회장들도 후에 참석 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김민중 교구장과 같이 한남동 문선명 교주 저택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 시내 새로 임명받은 22명의 교구장과 교회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단상에 앉아 있고 통일교 기관 기업체 사장들도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협회 이인자인 김승철 총무국장이 교구장 인사 발령을 다시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제 발표한 인사 발령 중 22명의 교구장은 그대로 발령하고 노원 교구장으로 발령 받은 저만 교구장 명단에서 제외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성동구 구의동에 있는 동책임자인 구의교회 서유성 목사를 교구장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저는 순간 심장이 멎고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단 하루 교구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다가 빼앗긴 것 이었습니다. 저는 배신감을 또 한번 느낌으로 문선명 교주와 멀어질 수 있었습니다.

구의교회 서유성 교회장은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이 전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 부인이 서유성 교회장을 전도하였던 것 입니다. 통일교는 크나큰 모순이요, 폐단이 있습니다. 가장 암적인 일이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영적으로 구원해 주었다고 하여, 믿음의 아들 딸이라고 호칭을 쓰는데 자신이 전도한 사람을 자기 자식 이상으로 통일교에서는 아끼고 사랑합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취직시키고 신앙교육을 시키며 죽을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기하 급수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1년에 12명 이상을 전도한 사람에게는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을 시상하여 통일교 교인들 간에 경쟁을 붙이고 위화감을 조성하였습니다. 저도 전도한 사람이 통일교를 탈퇴한 사람까지 합하면 200명도 넘었습니다.

전도한 사람은 믿음의 아들딸을 출세시키고 생활을 돌보며 통일그룹 내에 회사에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취직을 시키는 일까지 책임을 지고 합니다. 저를 전도한 사람은 통일교 송탄교회 박길수 목사 부인 이었는데 그 목사는 자기 교회 부인 회장과 간통을 하여 아내와 자녀들 5명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통일교 부인 회장과 살림을 차렸습니다. 저는 저를 전도한 목사 부부를 가정이 파탄된후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통일교에서 1961년도 통일교 최초 합동 결혼식자인 36가정 곽정환 회장이 저를 전도하였다면 곽 회장이 저를 얼마나 잘 이끌며 출세를 시켰겠습니까? 제가 폭력과 폭행을 당하며 박해받는 통일교를 개척을 하여 성공하면 선배 목사를 위하여 강제로 7번이나 빼앗기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저는 서유성 교회장의 부인이 노원구 상계동의 김승철 총무국장 집에 와서 빨래며 청소, 부엌일등 모든 일을 파출부와 같이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김승철 국장집에 심방을 하였더니 김승철 국장이 전도한 통일교 교인 몇 십명이 모여 단합 대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전도한 사람중에는 통일 그룹 내에 핵심적 인 자리에 있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을 1년에 I~2차례씩 전국에서 초청하여 단합대회를 열어 과시를 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자기가 문선명을 믿게 한 통일교 교인들이 이렇게 많다고 세를 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족하고 힘이 없어서 제가 전도한 사람들을모 아 단한번도 단합 대회를 열지 못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는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믿음의 아들 딸이라 하고 전도 받은 사람은 전도해준 사람을 믿음의 부모라고 호칭을 합니다. 통일교 간부들은 그런 단합 대회를 자신의 생일날이나 명절 때를 택하여 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975년 2월 8일날 1,800쌍 합동 결혼식 때 결혼을 했기 때문에 후배 목사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통일교는 1961년부터 1963년까지 36가정, 72가정, 124가정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통일교 최고의 지도자이고 통일 그룹 내 핵심적 인 요직에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제 2 절 김승철 총무국장의 인사비리와 폭행사건
 

저는 1991년 1월 6일 첫 주일 오후 문선명 저택에서 전체 목사들 앞에서 일어나 감히 문선명 교주에게 직언을 하였습니다. 제가 언제나 처절하게 개척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건축하면 빼앗고 선배를 위하여 강제로 희생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7번이나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에게 제 충성과 실적과 공적을 보고하였습니다.

저는 통일교는공산주의보다 못하고 적당주의, 형식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I~2년이 있으면 다른 교회로 인사발령을 받아 가는데 왜 땀 흘려 목회를 하겠느냐고 말을 했습니다. 통일교는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력을 다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놓는 목사가 따로 있고 그것을 빼앗고 가로채는 목사가 따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래서 어떻게 통일교가 발전이 되며 목회자들이 사명의식을 가지고 목회를 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 답변으로 문선명은 전체 목사들 앞에서 저에게 노원교회 박 목사는 그런 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리하고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가는 개척교회마다 교회를 발전시키니 순종하고 다른 교회로 가면 또 교회를 발전시킬 것이고 후손 대대로 자손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흥분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제 자신이 박해받고 억울한 가운데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말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제 목사 회의석상에서 권혁철 교구장이 통일교 협회로부터 저를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고 목사들 앞에서 발표하여 축하인사까지 받았다는 말과 김승철 총무국장이 자기가 전도한 믿음의 아들인 서유성을 교구장으로 저하고 바꿔치기 한 것이라고, 인사부장을 했다고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 없어서 그 말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제 말을 마치자 마자 분노와 배신감, 그 동안 김승철 총무국장의 행위를 생각하며 그 길로 문선명 교주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노원교회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제가 나오는 중에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 박목사 데리고 오라고 두 세차례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제 후임 목사로 왔던 엄철상 목사가 승진을 거듭하여 문선명 교주의 총애를 받아 비서실장이라는 요직에 있었는데 저를 붙들고 못 가게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박준철 목사를 데리고 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에 문선명 교주에게 그 동안에 쌓인 분노와 배신감 때문에 심장이 떨려서 터질 것만 같고 흥분하여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길로 노원교회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저를 교구장 명단에서 빼버린 후 동 단위 통일교 목사들이 자기가 가서 목회 할 곳을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제일 마지막에 남은 한 곳 노원구의 동 단위인 공릉동 통일교가 제가 시무 해야 할 곳이 되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저를 헐뜯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폭행을 하고 온갖 모함으로 노원교회를 빼앗아 자기가 목사 활동을 할 것이라고 했던 김수정 목사가 있던 곳 이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2층에 30평 전세 교회였고 교세도 노원교회 보다 20분의 1도 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따로 목사 사택도 없었습니다. 교회 30평안에 5평 정도를 합판으로 막아 작은 방 2개를 만들어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저는 순간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힘이 없고 부족하여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을 생각하니 저는 24시간 동안 잠도 오지 않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배신감 때문에 심장이 떨려왔습니다.

저는 매일 매일 미친듯이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제 차를 타고 청평까지 과속으로 달려도 보고 판문점까지 통일로를 죽기살기로 달려도 보았지만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도봉산에도 가서 기도도 해 보았지만 해결이 되지 않고 점점 더 고통스러운 나날 이였습니다.

 

제 3 절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얻은 심장병

 

저는 김승철 국장의 인사 부정을 밝히기 위하여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 진실을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1991년 1월 7일 문선명 통일교 교주 겹사돈인 홍성표 한국 통일교 협회장에게 인사부정을 이야기하고자 한남동UN빌리지 문선명 저택에 찾아갔습니다. 문선명이 한국에 있을 때에는 매일 아침 7시면 통일그룹 내 최고위층 통일교인들 전체가문선명 저택에 모여서 자칭 구세주 문선명에게 경배를 드리고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노원교회에서 경배식과 새벽기도 후 새벽 5시에 그 추운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에도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기 위하여 문선명 교주 저택에 찾아갔습니다. 그 동안에는 교회 건축을 위하여 몇 번 김영휘 회장님과 같이 저택 안에 문선명 교주를 만나러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교주 저택에 들어가지 않고 저택 밖에서 홍성표 통일교 협회장이 문선명 교주에게 문안 인사와 경배를 하고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홍성표 협회장의 운전기사와 같이 살을 에이는 칼바람 같은 그 추운 겨울에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침식사와 점심식사도 하지 않고 홍성표 협회장을 기다렸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부정인사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기 위하여 저를 속이고는 아침 9시경에 다른 통일교 간부의 차를 타고 통일교 협회 사무실로 가버렸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김정수 목사에게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를 피하여 한남동 저택에서 도망 왔다고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통일교 폭력집단의 한국 통일교 협회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홍성표 협회장의 운전기사가 저를 속이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문선명 교주와 회의하는 줄 알았습니다 참으로 그 추운 겨울날 하루 종일 식사도 하지 않고 새벽부터 저녁 5시까지 그 긴 시간을 발을 동동 구르며 떨어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 바람이 저를 떨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일교의 잔인한 폭력과 야비한 홍성표 협회장과 김승철 총무국장의 악한 행위 때문 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1월 8일 강남의 홍성표 협회장 집으로 찾아가 새벽 5시부터 밤7시까지 기다렸습니다.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가 만나 뵈러 왔다고 했지만,"협회장이 나가셨다" , "안 들어왔다" 고 계속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홍성표협회장이 저를 만나지 않기 위하여 집에서 운전기사와 서로 연락하며 피하는 것으로 알고 마음도 몸도 얼음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기진맥진하여 노원교회로 돌아왔습니다.

통일교에 입교하여 목숨을 걸고 온갖 박해와 가시밭길을 걸어온 목사의 길이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배신감에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끝없는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통일교 부정과 충격적인 쇼크로 저는 그만 화병을 얻어 심장병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통일교가 아니라 사람을 파멸시키는 죽음의 교회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겹사돈인 홍성표 합회장은 문선명 교주에게 최고의 충성과 사랑,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협회장 직에서 박탈당하였고 문선명 교주와 원수가 되어 겹사돈도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뇨와 여러 병으로 바깥 출입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첫째 아들인 문효진과 홍성표 협회장의 첫째 딸인 홍난숙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홍난숙은 25살의 나이에 이미 5남매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지만 문효진의 마약과 SEX, 감옥, 폭행을 참다 못해 이혼하여 가정이 파탄되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의 아들딸은 문선명 교주와 원수가 되었고 통일교를 탈퇴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아들딸을 바친 홍성표 협회장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을 것입니다. 홍성표 전 협회장은 당뇨병과 만병으로 거동도제대로 하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 문선명 교주에게 영혼과 육신을 빼앗긴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시 1991년 1월 11일 금요일 아침 9시에 통일교 협회 김승철 총무국장을 만나 눈물로 호소하고자 찾아갔습니다. 저는 그 며칠 동안 쇼크를 받아 매일 심장이 떨리고 숨이 가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조식 금식 기도를 하고 아침 일찍 김승철 국장을 만나기 위하여 청파동 협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제가 눈물로 호소하는 소리를 김승철 국장은 단칼에 잘라 버렸습니다. 저는 김승철 국장이 노원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불신하는 몇 사람을 회개시키지 않고 끌어 모아서 저를 더 불신하게 한 것에 대한 직언을 하였습니다. 협회에서 교구장으로 발령하고 하루만에 김승철 국장이 전도한 서유성 교회 장을 교구장으로 바꾼 이유와 불법을 저지른 내용을 놓고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김승철 국장에게 왜 인사부정을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동시에 저에게 공갈 협박을 하며,주먹으로 제 뺨을 쳤습니다. 순식간에 제 입이 찢어져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자 저는 왜 때리느냐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먹으로 제가슴과 배를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그리고 두 국장이 합세하여 저를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하였습니다.

통일교 협회에는 홍성표 협회장만 없고 전 국장과 부장, 과장, 계장, 여직원들까지 모여 박준철 목사의 폭행장면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저를 잔인하게 두 국장이 무차별적으로 폭행하였던 것입니다. 협회 총무국 사무실에서 전체 직원들이 모여들어 저 한 사람을 가운데 놓고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누구 한 사람 말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폭행을 당하여 몸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폭력에 대항해 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한 쪽 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 때문에 더 힘들었습니다 저는 몰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저의 양복과 와이셔츠는 피범벅이 되었고 옷이 찢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한참을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한 후 이상수 전도국장과 몇 사람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가하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국장을 제지하여 수습이 되었습니다. 저는 몸을 가눌 수도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겨우 협회 총무국을 나와 출입구 계단에 앉아 많은 시간을 보낸 후 겨우 의식을 회복하여 태릉 성심의원에 갔습니다. 병원에서 응급 처치후 4주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가정국장을 고소하여 감옥에 집어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에 마취되고 세뇌되어 문선명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고소하지 못하였습니다. 노원교회 목사가 통일교 최고위층 협회 총무국장과 가정국장에게 부정 인사를 당하고 통일교 협회 사무실에서 무차별적으로 폭행까지 당했다고 신문에 보도되어 통일교가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노원교회에 돌아와 눈물로 몇 달을 보내야 했으며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두 국장의 폭행으로 인하여 저의 머리와 배, 가슴, 옆구리를 걷어차여 그 충격으로 회복할 수 없는 심장병을 얻었습니다.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에게 폭행을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고 양복이 다 찢어진 모습으로 제가 노원교회에 돌아왔을 때도 어린 저의 자녀 3남매와 저희 부부는 절망하며 울었습니다. 매일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는 저를 보고 어린 저의 자녀 3남매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린 저의 자녀 3남매는 통일교 목사들이 사람 패는 깡패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깡패보다도 더한 폭력집단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 폭행사건은 문선명 자칭 참부모 구세주를 믿고 '절대신앙, 절대복종,절대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세뇌되었지만 서서히 문선명 교주로부터 세뇌에서 깨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사랑 받았다면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제16장 빼앗긴 교구장직과 노원교회까지 쳐들어 온

 

김승철 총무국장과 협회 전직원 시위대
 

제 1 절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총무국장과 협회 직원들
 

1991년 1월 13일 일요 예배날 이었습니다. 저는 온 몸이 아파서 몸을 가눌 수 없었지만 사력을 다하여 단상에 올라가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전체 교회가 가득 찬 가운데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막 시작한 순간 한국 통일교 이인자 김승철 총무국장, 이상수 전도국장(1962년도 합동 결혼식자), 김철현 가정국장 등 협회 전 국장과 협회 총무부장 박석규, 전도부장 오덕수 등 부장 전체, 과장 전체, 계장전체, 협회 여직원 전체를 총동원하여 왔습니다.

저를 쫓아내고 폭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협회장을 제외한 수십명이 노원교회로 데모를 하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저와 절친했던 신승철 가정부장과 김형길 문화부장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김승철 국장에게 미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승철 가정부장은 후일 간경화로 죽었습니다.

통일교에서 열정을 가지고 문선명 교주를 믿고 충성했던 사람중에 암병이나 심장병, 그 밖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 제 주위에 많았습니다. 과중한 스트레스와 충격적인 쇼크로 죽은 사람이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의리를 지켜준 신승철 가정부장과 김형길 문화부장에 대해서 그 당시에고맙게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신승철 가정부장은 서울에서 같이 목회를 하며 노원교회 교회 건축 헌당식 때도 축전까지 보내주었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 헌당식 때 협회장과 간부들이 거의 왔었습니다. 그러나 협회 총무부장인 박석규와 전도부장인 오덕수는 오지 않았습니다. 헌당식에도 오지 않았던 박석규와 오덕수는 김승철 하수인이 되어 오니 배신감과 분노가치 밀어 올랐습니다.

일촉두발의 순간이었습니다. 교회 예배 시간에 웅성웅성하고 몸싸움이 일어나고 노원교회 교인들과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부터 평직원이 떼거리가 되어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저는 예배 설교 단상에서 내려가 112에 전화를 걸어 경찰을 오라고 해서 협회 국장과 부장, 과장, 여직원까지 노원교회 교회에서 밖으로 다 끌어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통일교가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는 주일 예배 때 어떻게 설교를 하고 끝마쳤는지 모릅니다 재직 회장과 부인 회장, 충성했던 변함숙 권사 등 전체 식구들과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 이하 협회 직원들과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통일교는 조직이 있었기에 통일교 이인자인 김승철 국장과 국장단, 전 직원들 앞에 노원교회 교인들은 원통하고 분하지만 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을 중심으로 문성숙, 고귀숙, 최인자 등은 그 동안에 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암적인 역사를 했습니다. 저를 불신하며 김승철 국장과 합세했던 몇 명의 교인들까지 총동원하여 김승철 총무국장은 밀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 교회에서 충성했던 이수성 집사(1970년 합동 결혼식자-777쌍)도 그 자리에서 의리를 저 버리고 저를 배신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구장으로는 김승철 총무국장의 동서인 나상렬 목사(1962년도 72쌍 결혼식자)가 교구장으로 왔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 부인과 나상련 목사 부인은 같은 자매였던 것입니다. 치욕적인 수치와참을 수 없는 분노의 날이었습니다. 이런 악연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가증스러운 죄악의 역사 앞에 저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고 한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김영휘 회장이 1990년 11월 26일날, 문선명 통일 교주의 명령으로 한국통일교 협회 회장직에서 사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임으로는 일화 홍성표 사장이 취임을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1970년부터 1990년 11월 26일까지 전국 통일교 목회자들의 형님이었고, 아버지 같이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의 심정과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 이였습니다. 김 영휘 회장님은 중간에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을 뿐 저는 거의 전부를 김 영휘 협회장을 모시고 목회를 하였습니다.

저는 1991년 1월 13일 홍성표 협회장을 제외한 김승철 총무국장과 각 국장들, 부장, 여직원까지 시위를 벌리며 밀고 들어왔을 때 저는 몇 마디만 하고 2층 사택으로 내려왔습니다. 제 자신이 무력하고 힘이 없는 목회자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껴야 했습니다. 3층에서는 김승철 국장이 노원교회 교인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교인들에게 온갖 말로 변명만 늘어놓았습니다.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의 감언이설에 속은 노원교회 교인 중 저의 은혜와 사랑을 배반한 몇몇 교인이저에게 직접 시위를 벌렸습니다. 2층 사택의 안방 안에서 3일 동안이나 문을 걸어 잠그고 온갖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노원교회의 이수성 집사였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1970년 777쌍 합동 결혼식자인데, 잠시 목회도 하였던 사람입니다. 한쪽 팔을 못 쓰는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후 두 아들을 낳고 아내는 사망하였습니다. 혼자두 아들을 키우며 사는 것을 저는 안타깝게 생각하고 노원교회 어떤 통일교 교인들보다도 불쌍히 보고 긍흘하게 보는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충성하라고 장년 회장 직책까지 임명하였습니다.

저는 이수성 집사의 두 아들을 위하여 자주 심방하였습니다. 갈 때마다 먹을 것을 사다 주었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화물차 한 대로 짐을 실어 나르는 영업을 하였습니다. 이수성 집사가 집에 없을 때도 두 아들을 위해 저는 심방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수성은 저의 은혜와 사랑을 저버리고 김승철 국장과 단번에 짝이 되었습니다. 재직회장, 부인회장, 전 교인이 김승철 총무국장에 대하여 분노하는데 오직 장년 회장인 이수성 집사 혼자만 김승철 총무국장편에 서서 은혜를 배반하는 행위를 하였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목사 사택인 저의 안방으로 들어가 3일 동안을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를 보고 목사라고 하지도 않고 "너는이제 노원교회 목사가 아니다. 노원교회 목사는 나상렬 교구장이다(김승철총무국장 동서 - 1962년 72가정 합동 결혼식자). 박준철, 너는 노원교회에서 나가라" 고 하면서 시위를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그 당시의 충격으로 통일교를 떠나버렸습니다. 저의 가족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눈물로 3일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의 부부는 안방에서 못 자고 이불도 없이 마루에서 추운 겨울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악몽같고 지옥 같은 통일교의 목사 길을 극기 훈련하는 심정으로 인내하고 문선명 교주를 믿으며 충성하고 살아온 날들이 한없이 후회되었습니다.

저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가정국장의 폭행과 인사비리 부정에 대한 쇼크로 심장병을 얻었으며 간을 너무나 못쓰게 되고 과도한 스트레스로 담석증을 얻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위장병도 얻고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사이비 종교 중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종교 같이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잔인하게 인사 부정을 하고 자르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목사와 회사 직원들이 아내, 자녀들이 있고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는데도,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그룹 내 기업체 통일교 교인들의 회사 직책을 하루아침에 박탈시켜 버립니다. 손바닥 뒤집듯 칼로 생선을 자르듯 목사 직책과 기업체 직책을 박탈하는 살인적인 행위를 생각하니 치가 떨립니다.

저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로부터 잔인한 인사와 간부들에게 폭력 및 폭행을 당하며 언제 심장병으로 쓰러져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문선명 가짜 재림주에게 미쳐 있었습니다.

 

제 2절 나상렬 노원교구장의 배신
 

저는 폭력과 폭행 앞에 항변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제 목숨을 바쳤던 노원교구 본부를 피눈물을 흘리며 떠나야 했습니다. 저는 목회 의욕을 잃어버렸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자주 충격을 받고 폭행을 당하여 실어증과 심장병, 불면증 합병증으로 지금 현재까지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곤란할 때마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심장병으로 죽으면 억울해서 영계에 어떻게 가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현실 앞에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상렬 교구장에게 당분간 노원교회 목사 사택에 살면서 빠른 시일 내에 노원교구 관할인 공릉동 교회로 가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사짐은 지하실 창고에 쌓아 놓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나상렬 노원 교구장은 대 선배 목사로서 항상 좋은 자리만 차지했기 때문에 강남에 좋은 저택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그런 나상렬 교구장은 강남 집에서 노원교회로 출퇴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나상렬 노원교구장과 약속한대로 노원교회에 잠시 생활했습니다만,나상렬 교구장은 온갖 방해와 여러가지 압력을 행사 하였습니다. 결국에는 나가라고 하는 소리까지 하였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나가겠다고 하였는데도 나상렬은 김승철국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노원교회 교인들을 동원하여 차마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저에게 하였습니다.

저는 나상렬 교구장의악 랄한 처사에 못견뎌 눈물로 공릉동 2층 전세 교회 내에 있는 합판으로 만든작은 방 2칸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셔서 제가 죽을 때까지 노원교회에 교구장으로 있을줄 알고 사준 장롱, 화장대, 장식장 등 온갖 가구들은 공기도 통하지 않는 지하실창고에 다른 이사짐과 함께 쌓아 놓았습니다. 곰팡이가 피고 습기가 차 못쓰게 된 가구와 옷,책은 제가 1년 후 이사를 할 때 버려야 했습니다.

저를 불신한 통일교 교인들은 힘 있는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달라붙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노원교회교인들에게 김승철 국장은 그 국장자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은 7개월 만인 1991년 8월 30일에 문선명으로부터 총무국장직을 박탈당하였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은그 후 몇 년 동안 일본의 통일교 선교사 일을 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망하였습니다.

 

제 3 절 공릉동 교회의 지옥같은 생활
 

공릉동 교회는 노원교회보다 건물이나 재적인원, 예배인원, 헌금 등이 2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10여명의 통일교 교인이 있는 개척교회의 목사로서 시무해야 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거지 목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억울한 일들 때문에 심장병을 얻어 모든 의욕을 잃어 버리고 눈물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도 불안과 공포 속에서 지냈습니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고 괴로움의 나날이었습니다. 가정 분위기는 초상집과 같이 침울하였고 제 자신은 그 동안에 통일교에서 당한 한을 풀 길이 없어 강팍해져 버렸습니다.

제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형님같이 저를 이끌어 주셨던 K교구장님이 있었습니다. K교구장님은 자신이 통일교 대 선배 축복 가정 목사였는데도 뺨을 맞고 폭력을 당했다고 하며 제가 폭행을 당한 것을위로해 주었습니다. 유지철 목사도 1981년도 10월 20일, 서울 시내 선배 목사 동원령이 내렸을때 후배 목사인 최정철 목사에게 나무 몽둥이로 무차별적 인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최목사는 피와 땀으로 교회를 개척하여 전세 교회를 마련 하였는데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후임 목사인 유지철 선배 목사에 자기 교회를 빼앗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정철 목사는 나무 몽둥이로 폭력을 행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정철 목사는 능력 있고 교회를 잘 부흥시키는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문선명 교주가 환멸과거짓, 재림 주라는 것을 알고 통일교를 탈퇴하였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사업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1991년 2월 3일 노원교구 관내인 공릉동 통일교에 취임을 하였습니다. 그 동안 공릉동교회는 비참하고 어려워 목사가 없었습니다. 이 무슨 역사인지 제 목숨을 바쳤던 노원교구 본부교회를 멀리 떠나지 못하고 노원교구 본부교회 지시를 받아야 되는 공릉동 개척교회로 취임식을 해야 했습니다. 매달 월말 회의를 노원교구 본부로 가서 해야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를 빼앗겼는데 그 곳으로 매달 회의를 가야했습니다. 저는 매달 목사들 월말회의 때가 회의시간이 아니라 고문하는 시간 같았습니다.

월말 목사들 회의시간이 지옥 같았고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헌금이 없기 때문에 생활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교인이 아닌 세상 사람이 가끔씩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단 10원의 생활비도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녀 교육과 생활을할 수가 없어 아내가 파출부일과 식당일을 계속하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공릉동 개척 통일교로 취임을 한 후, 하루아침에 생활과 재정이 파탄 되었습니다. 노원교회 재직 회장이었던 윤승운 장로와 부인 회장 최선례 집사,노원교회의 정신적인 어머니였던 변함상 권사, 저의 동생들이 노원교회를떠나 공릉동교 회로 옮겨 저를 도왔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을 가지고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심장병과 육신의 병으로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육신의 병도 문제지만 제 영혼의 아픔과 배신감 때문에 목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제 17장 전국 통일교 목사전체 500명의 박탈당한 목사직

 

제 1절 교회사택에서 쫓겨난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


1991년 8월 30일날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전국의 목사들을 단 한 마디 회의나 상의 없이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자기 친척들을 전도하는 종족적인 메시아 활동을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전국의 통일교 목사 500명 전체를 단칼에 무우 자르듯 목사 직책을 박탈하여 버렸습니다.

전국 통일교를 1991년 8월 30일부로 모두 폐쇄하고 해산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통일그룹 내, 통일교 합동 결혼식 한 교인은 무조건 통일교 회사에서 퇴사하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 친척들을 전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통일교 교인이나 세상 회사에 다니는 통일교 교인들도 폐업과 퇴사를하고 고향으로 돌아 가라고 문선명 교주가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그룹 내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통일교 교인들을 강제적으로 퇴사를 시켜구조조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통일교 회사를 살리고자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만 근본적인 회사경영의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통일그룹이 IMF때 부도를 내고 파산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을 박탈당한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교 회사에 다니던 통일교 교인들은 강제 퇴직을 당하여 대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은 불안과 공포, 방황 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더불어 당장 먹고 살 곳이 없었습니다. 목사들은 통일교에서 쫓겨나 거리에 내몰렸습니다 졸지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데 갑작스런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목사직 박탈이 되어 처절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목사들에게 목사 경력에 따라 돈을 지급해 주었습니다. 통일교 목사 생활 1~5년을 한 목사는 100만원, 5~10년 목사 생활을 한목사는 300만원, 10~15년 목사생활을 한 목사는 300만원, 15년 이상 목사생활을 한 목사는 400만원씩을 지급하였습니다.

서울 시내 5인 가족이 방3칸 정도의 전세방을 얻으려고 하여도 5천 만원 이상을 주어야 전세를 얻을수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언제나 교회 사택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집이 필요 없었습니다. 통일교목사들은 언제나 처절하게 가난하게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아 놓은 돈도 없었습니다. 매 주일마다 나오는 헌금으로 자녀 교육비와 가정생활 하기도 벅찼습니다. 문선명은 그런 통일교 목사 500명을 졸지에 갈 곳도 없이 교회에서 쫓아내고 엄청난 충격를 주었습니다. 전국 통일교를 폐쇄하고 해산한다고공문으로 전국 통일교와 교인들에게 명령을 시달했습니다. 그러고는 1달만에 전국 통일교를 해산하지 않고 폐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전국 통일교와 교인들에게 공문으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선명 교주는 위선과 거짓으로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속인 것이었습니다 전국 통일교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 큰아들인 문효진 9세 재림주 체제를 만들기 위하여 문선명 교주와 홍성표 협회장이 현직 목회자들의직책을 박탈시켰던 것입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통일그룹 내 기업체 살리기위 한 작전으로 통일교 교인들을 잘라 낸 것이었습니다. 회사 구조조정과 경영개선을 하려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이 나이가 많고 교회 부흥은 안 시키고 적당주의, 형식주의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70세가 넘는 고령이어서 자식인 문효진을 자신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로 세우려고 작전을 한 것이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이 문선명의 큰아들이며 홍성표 협회장의 첫 번째 사위인 문효진 체제를 만들고자 문선명과 한 짓 이었습니다. 문선명은 홍성표 협회장과 같이 통일교 해산 1달후문효진이 마음대로 명령하고 지시할 수 있도록 젊은 목사체제로 구축하였습니다.

저보다 7년 늦게 합동결혼식을 한 1982년도 6,000쌍 합동 결혼식을 한 젊은 사람만 통일교 목사직을 수행할 수 있게 했습니다. 1982년도 이후 합동 결혼식자인 어린 목사들을 전국 통일교에 목사로 발령했습니다. 문선명은 젊은 통일교 목사들을 모아놓고, 나이 많은 전 통일교 목사들을 멱살잡이를 해서라도 전국 통일교 사택에서 끌어내 쫓아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교주는1991년 1월에 "젊은 통일교 목사들이 힘을 두었다가 어디다 쓸 것이냐?" 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전세금도 자녀 교육비도 집도 없어 당장 갈 곳이 없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당한 나이 많은 통일교 목사들은 젊은 목사 눈치를 보며 한 교회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나이 많은 40대 통일교 목사들은 20대, 30대 젊은 통일교 목사들에게 온갖 모욕과 무시를 당하며 생지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자기 교회의 교인들까지도 전임 목사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전국의 통일교에서 전임목사와 후임 젊은 목사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문선명에게 하루살이 같이 일생 동안 충성하고 이용물이 되어 목사직에서 박탈당한 후 자신의 고향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통일교 기업체에서 직책을 박탈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난 통일교 교인도 이사 짐을 싸서 고향에 갈 수 없었습니다. 고향은 커녕 통일교에서 쫓겨난 목사들과 통일교 회사에서 쫓겨난 통일교 교인들은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했습니다. 배운 것도 기술도 경험도 없었습니다. 당장 아내와 자녀들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몇몇 통일교 목사들은 빛을 내고 있는 돈을 모아 식당을 했지만 대부분 망해 버렸습니다. 가게를 해도 경험이 없어 실패를 하는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돈이 없는 통일교 목사들은 지하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고 건설 현장에서 벽돌과 시멘트일, 도배일, 온갖 막노동을 하였습니다. 어떤 통일교 목사들은 목사직 박탈 후 다단계 판매 사업을 하여 빚더미에 올라 앉았습니다. 여러 명의 목사들이 다단계 금융 사기에 걸려들어 거액을 날리고 다단계 금융사기죄로 전과자가 되어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 당한 통일교 목사들은 문선명 한 사람의 죄악으로 졸지에 한참 정상에 서야되는 40대. 50대에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거지가 되며 전과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도처에서 목사직을 박탈당한 목사 가족들이 단칸 지하셋방에서 3대가 같이 살아야 하는 비극적 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당한 목사의 아내는 파출부로 신문배달로 식당 종업원으로 막노동 일로 생선장사로 보험 모집원으로 이 세상에 밑바닥 일을 했습니다. 처참하고 가난하며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2 절 7개월만에 박탈당한 500명의 목사들
 

1991년 9월 1일부터 전국의 통일교 목사 500명과 통일교 회사에서 퇴사한 통일교 교인들과 자영업을하는 통일교 교인은 종족적인 메시아 역할을 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본래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집을 매도하고 전세금을 빼고 하여 완전히 고향으로 이사를 가라는것이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명령 이었습니다. 생업이나 회사생활. 자녀교육은 문선명 교주에게 안중에도 없는 일입니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문선명 사이비 교주만이 그런 공포의 명령을 내릴 수가 있는것입니다.

저도 노원교구 내 공릉동 통일교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들과 같이 목사직을 박탁 당하였습니다 .선배통일교 목사들은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에 최고 충성하고도_그렇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고 폭헹을 당했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 ?"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 형제, 친척과 고향 동네 사람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경남 하동 고향 땅에 가 고인이 되신 아버닐과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하동 교회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 도착 신청서를 제출하였슴니 다. 그리고 어머님을 뵙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통일교는 모든 교회 일 처리가 명령만 있고 형식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언제나 행사로 시작해서 행사로 끝나버리는 것이 통일교의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47여 년을 통일교는 내실 없이 형식에 치우친 행사만 하였습니다.

경날 하동 고향에 갔던 것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 목사 직분을 박탈당한 목사들은 고향에 있는 통일교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 신청서를 내야 문선명 교주에게 순종했다는 표시가 되기 때문 이었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에서 박탈당한 목사들에게 2~3개월 생활비밖에 되지 않는 1백~4백만원을 퇴직금이라고 주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것이라도 받아와야 당장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고향에 다녀왔던 것 입니다. 저는 공릉동 통일교에 합판으로 방 3칸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빼앗겨야 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교회 책임자로 처녀 전도사가 왔습니다. 저는 양해를 구하고 겨울을 나고 이사 가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저는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지만 영혼과 육체가 폐인이 되었고 심장병으로 막노동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아내는 아침부터 밤까지 파출부 일과 식당 일을 했습니다. 참으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무력한 모습을 아내나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엄동설한과 더불어 제 마음은 더 혹독한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 3 절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독서실 운영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로부터 목사직이 박탈된 후 저의 아내와 자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신설동 부근의 동신 독서실을 계약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저를 속인 것이었습니다. 독서실에서는 독서실 실장이 관리를 잘못하여 독서실 내에서 술을 마시고 기타치고 남학생이 여학생을 추행하는등 독서실을 망쳐놓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120명 있다고 했는데 2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해약해 달라고 하였습니다만 계약금 일부를 겨우 돌려 받고 계약금을 포기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둔 후 첫 사업이었는데 잘못 계약한 것 이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정릉에 있는 고명상고 옆 대원독서실을 계약하고 인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수후 한달만에 재개발 지역이 되어 미아리 고개와 아리랑고개 사이에 있는 집들이 철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서실을 소개하는 전문 부동산 업자도 저를 속였던 것입니다.

독서실 주위에 한 쪽 부분만 철거가 되지 않고 주위 전체가 다 철거를 하고 아파트를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년 동안 대원 독서실을 운영했는데 전 가족들이 매달려 고생만 하였습니다. 그나마 철저하게 독서실을관 리하고 운영한다는 소문이 나서 현상유지는 할 수 있었습니다. 대원 독서실을 1년 동안 팔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천지에는 저 같은 바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대원독서실을 폐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증금은 건물주인에게 받았지만 시설비 2천5백만원은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다 날렸습니다. 선풍기 5천원, TV 5천원, 냉장고 1만원, 자판기 3만원을 받고 고물 장사에게 팔고 독서실 의자와 책상은 중고 물품 취급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돈을 주고 철거해야 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교문으로 나오면 학생들을 차에 태워 독서실까지 데려와 공부를 시키고 새벽 2시에 학생들을 집에까지 실어다 주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학습분위기 조성, 청소 등 너무나 힘든 일 이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목사생활을 할 때처럼 정신적인 충격과 스트레스 등이 없었기 때문에 독서실 운영하는 것이 마음은 훨씬 편했습니다. 1년 동안의 대원독서실의 운영은 제가 2번째 속아서 계약하여 2번째로 독서실운영의 피해를 본 것이었습니다. 사회 경험이 없는 저는 또 한 번의 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제 4 절 고시원 운영 중 다시 꿈꾸게 된 목회 길
 

저는 싸고 낡은 고대 옆 고시원을 인수하였습니다. 고시원은 대학생 중심으로 한 생활이기 때문에 밤마다 독서실에서 처럼 중 고등학교 학생들 같이 차로 집에 데려다 주지 않아서 조금 편했습니다. 지옥 같은 공릉동 통일교를 떠나 고시원 옆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동안에 한푼 두푼 적금을 붓고 은행에 예금하고 모은 돈과 상계동 무허가 집을 팔은 돈으로 고시원을 인수하고 집도 전세로 얻었습니다. 고시원 학생들의 식사도 해 주었습니다.

고시원 시설은 낡았지만 대학 내에 저희 고시원에서 시험을 보면 무슨 시험이든지 합격이 잘 된다는소문이 퍼져 많을 때는 60명이 넘어 고시원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I~2년 운영 후 주위에 점점 최신식 고시원이 들어서고 원룸 고시원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저희 고시원은 저희 부부 인건비 정도 수익이 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시, 행시, CPA, 취직시험, 각종 공무원 시험을 치는 학생들에게 아버지 같고 형님 같이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그 낡은 고시원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용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각종시험에 합격되었다고 할 때마다 고시원 원장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습니다. 제가 고시원에서 한 학생, 한 학생을 놓고 기도 하다 보니 각종 시험에 합격을 잘하였던 것입니다. 학생들은 저희 고시원은 행운이 따르는 고시원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고시원 운영 중 임순도 종로 교구장 겸 통일교 부협회장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의 통일교 충성과 저의 사명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분 이셨습니다. 임순도 부협회장이 계실 때 제가 서울 강서 교구 본부 교회를 허허벌판에서 개척하고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 건축을 하고 하나님께 봉헌하는 헌당식도 못한 사실을 임 교구장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배 통일교 목사에게 눈물로 양보했던 서울 강서 교구 본부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서울 강서 교구 본부 목사로 저를 발령을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고난과 눈물, 충성, 한국 최고의 목사로서 실적을 잘 알고 있었던 임순도 부 협회장님은 저를 서울 강서교회 목사로추천해 발령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의 억울함,부정 인사이동, 언제나 통일교 선배 목사에게 양보하고 온갖 폭행과 폭력을 당하며 그 충격으로 심장병 ·담석증 ·위장장애 ·불면증까지 겹쳐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저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하루 하루를 살고 있으면서도 마지막으로 제가 땀과 눈물로 교회 건축을한 강서 교구본부에서 마지막 목회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통일교 목사로 지옥 같은 통일교 목사 생활을 했으면서도 통일교 목사직을 또 소망했습니다. 제 자신이 정신 이상자가아니고서는 어찌 문선명 교주의 쇠사슬에 코를 끼려고 했겠습니까? 저는 너무나 세뇌되어 다시 통일교 목사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소망을 갖고 제가 운영하는 고시원을 매매한다고 바로 광고를 내었습니다. 고시원만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부동산 회사에서 즉각 저의 고시원을 팔아주었습니다. 너무나도 문선명 교주에게 빠져있었던 저는 제 사명이 목사이기 때문에 목회를 해야 한다고 다른 길은 저에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때 고시원을 매도하였던 것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고시원 정리 후 임순도 부협회장과 변함숙 권사를 만나 함께 곽정환 협회장을 찾아갔습니다. 임부회장은 박준철 목사가 서울 강서교구를 개척하여 발전시켜 강서교구 본부를 건축하였는데 헌당식도 못하고 선배 통일교 목사 때문에 강제 인사이동이 된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곽회장은 고향인 경상남도로 가서 목회활동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목사 활동을 해야 한다고 거절했습니다.

곽정환 회장에게 1년 전에도 변함숙 권사님과 함께 곽정환 회장집을 방문하여 서울 강서교회 목사로 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제가 노원교회의 변함숙 권사와 함께 곽정환 회장을 만난 것은 서로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변함숙 권사는 통일교를 초창기에 나오신 분으로 통일교가 이단교회라고 남편이 핍박하고 마침내 이혼까지 당하고 외동딸과 같이 다녔습니다. 문선명은 변권사에게 "변권사는 이름대로 변함없이 참 부모님을 영원히 믿고 충성하는 신앙자이기 때문에 나도 기억하고 있다" 고 하며 칭찬도 하였습니다. 변권사는 문선명의 교주 옷을 만들었고 외동딸은 통일교 합동 결흔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통일교 사업으로 꽃을 팔며 전도를 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일생 동안 재혼도 하지 않고 외동딸을 키워 통일교 합동 결혼식까지 시켜 놓았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 때문에 사랑하는 외동딸이 전도와 꽃팔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변함숙 권사님은 찢어지는 마음과 충격으로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장례를 치른 후 변함숙 권사님의 딸은 교통사고 피해자였기 때문에 소송을 하려고 했습니다.

 가해자는 미국 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통일교 협회에서는 소송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 전도하고 꽃팔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인데 소송을 걸게되면 문선명 교주와 통일교가 미국 사회에서 명예가 훼손된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가 망신을 당한다고 손해배상 소송을 걸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교주와 통일교 협회에서는 변함숙 권사님의 외동딸의 교통사고 보상과 위로금을 단 10원도 주지 않았습니다.

변함숙 권사님은 일생동안 문선명 재림주만 믿고 충성하고 순종하며 직업이라고는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사이비교에 다닌다고 남편에게 이혼 당할 때 위자료로 받은 큰집을 팔아서 일생동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변함숙 권사가 남편과 이혼하고 외동딸과 살 때 변권사님 집에서 3년 동안을 함께 생활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곽 회장님을 만나 억울한 사정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차디차고 냉정한 곽정환 회장은 통일교 최고의 회장자리에 있어서 그런지 저 같은 목사의 말은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통일교 초창기 때는 목회를 조금 했지만 1970년 이후부터 세계 대학생 선교 본부장을 했기 때문에 목회자들과 저는 곽정환 회장을 잘 몰랐습니다. 문선명 교주 세 번 째 아들인 문현진과 곽정환 협회장 딸인 곽정숙은 결혼하였습니다.

큰아들인 문효진은 방탕과 마약, 이혼파경 등으로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둘째 아들인 문흥진은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문교주가 살아있는 처녀와 영혼 결혼시켜 놓고, 죽은 문흥진을 천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21세기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통일교 집단에서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죽은 문흥진이 재림했다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세뇌시키기도 합니다. 세 번째 아들인 문현진이 문선명 교주의 후계자가 되어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곽정환 회장은 홍성표 협회장이 자기 사위를 후계자로 세워서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던 것과 같이 자기 사위인 문현진을 후계자로 세웠습니다. 그 문현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또다시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하여 무자비하게 목사직을 박탈하였습니다.

2000년 9월 18일 세계일보 국제 연수원에서 벌어진 대 사건이 었습니다. 2000년 4월 30일에는 문현진이 통일교 세계 대학생 회장으로 취임을 하였고 전 세계 통일교 부회장 직책까지 갖고 문선명 교주의 지시에 의해 대를 이어 전세계 통일교를 이끌고자 동분서주 하고 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문선명 교주의 명령에 의하여 세계일보 부 회장직에서 박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선명 교주의 후계자인 자기 사위 문현진과 문선명 교주의 부인 한학자를 내세워 모든 실권을 거머쥐었습니다. 곽회장이 문선명 교주로부터 세계일보 부회장직에서도 박탈되었지만 한학자가 문선명 교주의 사후를 생각하라며 강력하게 곽정환 회장을 복직시키라고 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을 다시 세계 일보 부회장으로 임명하라고 남편인 문선명 교주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여 한학자의 힘에 의해 곽회장은 이틀만에 세계 일보 부회장으로 복직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이 한국에 없을 때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 통일교 회사 사장단은 곽정환 회장의 명령과 지시를 받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사망하였을 때를 대비하여 곽정환 회장을 통일그룹 총 회장으로 세웠습니다.

 

 

제 18 장 부산 영도교회

 

제 1 절 부산 영도 통일교로 인사발령
 

저는 서울 고시원을 정리한 후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로 많은 돈을 쓰게 되었습니다. 서울 강서교회로 가는 것으로 알고 고시원을 정리 하였던 것인데 시간이 지난 후 제가 또 큰 실수 한 것을 알았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었던 고시원을 팔고 보니 잘못 결정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남의 고시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이 저를 "출신지인 경상남도에 가서 목사 생활을 하고 오라"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고향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가 되어 가정집에서라도 친척들을 불러 모아놓고 통일교 교인들로 만들어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문선명의 명령 이었습니다.

무슨 빽으로,무슨 부정이 있었는지 저는 알수 없지만 통일교식 법을 지키지 않고 고향에 가지 않고도 서울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만 고향 교회에 가서 목사 생활을 하고 오라는 것 이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저보고 고향에 다녀오라는 말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임순도 부 협회장님도 저보고 잠시만 부산 목회를 하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심장병이 있어서 고려대학 병원에 수 차례 가서 심장, 간, 담석증, 위장, 불면증 등으로 수술과 입원치료를 받았고 집에서 고려대학 병원까지 차로 실려간 해도 있었습니다. 가족들끼리 같이 살아도 힘들었는데 혼자 부산 영도에 가서 제 육신의 병고를 안고 거센 바닷바람과 싸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부산에 곽정환 회장이나 임순도 부 협회장이 고향에 다녀왔다는 조건만 세우면 바로 서울 강서교회 목사나 노원교회 목사로 올라오는 것으로 믿고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취임을 하였습니다.

말이 영도 통일교 취임식이지, 영도 통일교 교인은 제가 갔을 때 실제로 2가정 밖에 없었습니다. 헌금은 교회 운영하는 공과금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부산 통일교 내에서 제일 최하위 교회인 부산 영도 통일교로 저를 추천하여 공문을 올렸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데 1996년 2월 28일날 협회 임종호 총무국장이 저에게 전화를 하여 "부산 정성호 교구장의 전화가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임종호 총무국장은 제가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발령이 났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부산 영도교회 수준이 어떠냐고 임종호 총무국장에게 물었습니다. 임종호 총무국장은 통일교가 어느 곳이나 가난하고 어렵듯이 부산 영도 통일교도 어려우니까 담임 목사가 없는 교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너무나 많은 고통과 가난, 시련에 생지옥과 같은 목회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먼저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시무하라는 말을 임종호 총무국장으로부터 듣기 전에 꿈에서 제가 큰 다리를 건너간 후 예배를 드리려고 몇명이 앉아 있는 광경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예배 장소가 쓰레기와 대변으로 가득 찬 교회였습니다. 저는 꿈에서 그 몇 사람과 쓰레기와 대변을 깨끗이 다 치웠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이 앉아 예배를 드렸는데 나중에는 그  예배 장소가 교인들로 가득 찬 꿈을 꾸었습니다. 꿈을 깨고 바로 다음날 협회 임종호 총무국장으로부터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저를 발령하였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꿈에 보여준 대로 부산 영도라는 곳은 영도다리를 건너가야 하는 섬입니다.

영도교회는 총각 목사도 못하겠다고 도망을 쳐버린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런 곳에 저를 발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의 뜻이 영도교회에 가라는 것이구나! 영도교회 교인 몇 사람을 데리고 교회를 발전시키라는 것이구나!' 라는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부산에는 교인은 많고 교세가 크고 안정된 통일교가 많았습니다. 저보다 합동결혼식을 7~17년을 늦게 한 어린 후배 목사들이 안정된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혀서 더 이상 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 했는데 부산 영도교회 목사로 부임하고 보니 자부심과 긍지는 또 한번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통일교 목사 생활로 문선명 교주에게 죽도록 충성한 것을 생각하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러운 마음이 울컥하고 올라왔습니다. 저는 부산 영도 태종대 절벽바위 위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영도교회는 예배 장소만 있는 교회였습니다. 예배 인원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이고 교인들 헌금도 교회 관리비, 운영비를 하면 꼭 맞는 액수였습니다. 목사 생활비는 꿈도 꿀 수 없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세뇌되어 끌려가면서 하나님이 저를 필요로 하고 영도교회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으로 알고 결단을 한 후 영도교회에 취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1996년 3월 10일에 서울에 가족들을 두고 홀로 부산 영도교회로 가서 자취생활을 하며 목사로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심장병과 만병을 갖고서 옛날 조선시대에 간신들의 모함에 의해 충신들이 귀양갔던 영도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이 영도 섬에서 제가 살아서 서울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첫 기도를 하였습니다. 20년을 서울에서만 목사 활동을 하였는데 우리 나라 남단 부산 지방 영도 섬에 와서 목회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제 이름은 호적에 박준기 라고 되어있습니다. 불꽃 '준' 에,구부러진 낭떠러지 '기' 자 입니다. 뜻을 말씀 드리면 제가 불꽃같이 성공하여 구부러진 낭떠러지에서 항상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열차, 절벽, 나무에서 떨어졌었고, 교통사고로 육신의 팔을 잃어버렸고, 목회에 성공하면 강제 부당 인사이동으로 빼앗기는 아픈 세월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고쳐주셨고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래도 사라(공주)로 고쳐주셨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을 생각하고 박준기를 버리고 박준철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박준철 목사는 교회 건물만 있으면 교회를 부흥발전 시킬 줄 알고 인사발령을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오랜 시간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수택리 연수원에서 전국 통일교 목회자 교육을 하고 난 후 저에게 협회 국장들 앞에서 "부산 영도교회에 가서 성공하고 올라오라","잘 다녀 오라" 고  5번이나 당부하였습니다. 임순도 부협회장도 "부산에 잠시 다녀 오라" 고 하였습니다.

저는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처음부터 100일 기도, 전도, 심방 등 정말 밤낮 없이 교회 발전을 위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로 이적이 일어나고 매 주일마다 새로운 교인들이 입교하여 순식간에 교회가 부흥 되었습니다.

부산 영도 통일교를 목사님도 없이 지키고 있었던 2가정이 있었습니다. 이진상, 하진희 순회사님 가정과 이광철, 이상희 부인회장님 가정으로 2가정이 저의 손발이 되어 죽도록 충성 하셨기에 교회를 부흥 발전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영도구 봉래동(지금현재 봉래 목욕탕 자리)에 신상진, 유신선 부부집에서 문선명이 교회 간판도 없이 방안에서 부흥 집회를 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1953년 12월 24일에서 1954년 1월 14일까지 21일간 문선명 통일교 재림주는 부흥 집회를 밤낮으로 열정을 가지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원리강론을 정리하고 집필하였던 유원효 통일교 2대 협회장 유민효, 유영효, 송도욱장로(문선명 참부모 3대 비서실장), 신상진 유신선 부부, 김영희(여자,Y대학생, 문선명과 김영희는 SEX교리로 혈통 복귀하여 문희진 출생) 등이통일교 문선명 교주 부흥집회에서 통일교에 입교하였습니다. 그들은 최고로 충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통일교에 최고로 충성했던 교인들이 영도교회를 떠난 후 영도 통일교는 폐허가 되었고 47년이 된 영도 통일교는 중간에 폐쇄되는 때가 많았습니다. 많은 통일교 목회자들이 영도 통일교에서 노력했지만 좋은 결과가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부산 시내에서 사업이나 장사에 실패하여 방세가 싼 영도 섬에 와서 잠시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이나 영도 통일교인은 영도 섬에서 살다가 부산 시내에 방 한 칸만 얻을 수 있는 돈만 되면 영도 섬을 떠나 부산 시내로 이사를 갔습니다.

제가 서울 노원 교구본부 철거민 달동네에서 개척할 때도 사업에 실패하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시내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상계동에 와서 살다가 돈을 조금 모으면 교통 좋은 시내로 이사를 가버리곤 했습니다.

서울 노원교회와 같이 영도 통일교도 온갖 정성으로 교인을 만들어 놓으면 이사를 가버리기 때문에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도 통일교에서 모든 악조건을 물리치고 3월 첫 달부터 순식간에 '일요일 예배드리는 교인 2배가 운동' 을 달성하여 교회가 부흥 발전을 하였습니다.

하진희 영도구 통일교 여성연합회장과 이상희 영도 통일교 부인회장과같이 하진희 회장님 자가용을 타고 매일 새벽 1시까지 말씀과 기도하며 전도하였습니다. 하진희 회장님은 사업을 하시는데 시간을 교회 발전에 전부를 투자하셨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님도 야구르트 배달을 하면서 영도구 야구르트 배달원 친목회장과 총무, 서기 등 많은 사람을 통일교 교인으로 전도하였습니 다.

 

제 2 절 부산 영도교회 부흥 발전
 

영도통일교는 지금까지 막다른 골목 안에 갇혀 있는 교회였습니다. 영도교회의 47년의 역사 속에서 사명감과 주인의식으로 사력을 다하여 목사생활을 했던 목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도교회는 47년 동안 단 한 사람의 사명감 있는 통일교 목사가 시무하지 않았기 때문에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던 것입니다. 

영도 통일교에 길이 좁아서 자동차가 한 대도 들어 올 수가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수시로 불법주차 스티커를 받아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저는 교회의 콘크리트 기둥과 이중 대문을 전부 헐어 내어 교인들의 차를 교회 안까지 진입시킬 수 있게 대공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교회와 내부에 페인트칠을 하였습니다. 외부 페인트칠도 영도 통일교 교회 건축 16년만에 처음으로 하였습니다. 화단을 다시 만들고 문 전체를 수리하고 지하실과 창고마다 가득가득 쌓인 쓰레기를 전부 밖으로 끌어내 10 리어카 정도 되는 많은 양을 폐기 처분하였습니다.

제가 영도 통일교에 오기 전에 꿈에 본 그대로 영도 통일교는 쓰레기장 이었습니다. 창문 하나 하나마다 저의 정성을 들여야 했습니다. 그 동안 영도통일교는 독 안에 든 것같이 앞에 2층, 3충 집들이 가로 막혀 공기가 통하지 않고 사각형 안에 갇혀 있어서 도둑을 맞을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영도교회에 시무하면서도 몇 차례 도둑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둑을 잡아서 교육하고 돌려보낸 때도 있고 파출소에 인계하여 부모형제를 불러 집으로 보낸 때도 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교회 안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막혀 있었습니다. 제가 영도교회로 가고 나서 영도와 육지의 새 다리가 만들어진다는 계획 때문에 교회 앞의 2~3층 주택 전체가 헐리게 되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8차선 도로에서도 보이게 시야가 확 트였습니다. 멀리서 보고도 영도 통일교를 알 수 있도록 새로 페인트칠을 하고 교회간판을 달았습니다. 옆의 주택은 도로 보상비를 평당 300만원씩을 받았는데 영도교회의 땅 10평은 도로라는 지목으로 평당 100만원밖에 주지 않갰다고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개인 땅이었는데, 통일교 협회에서나 과거 이곳의 목사는 도로가 만들어 질 때 개인 땅이라고 서류를 만들어 놓지 않고 교회 출입구를 도로라고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보상을 100만원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협회와 통일교 중앙 재단 본부에서는 저에게 지금까지 통일교 대지가 도로로 편입된 것을 재판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보상을 더 받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도로로 된 대지는 보상가격의 3분의 1밖에 받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에서는 2~3일 후에 영도 통일교 대지 10평의 보상 가격 1천만 원을 재단본부에서 받을 것이라고 저에게 통보해 왔습니다. 재단본부와 통일교 협회에서는 저에게 영도 통일교 도로 편입 보상을 관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단돈 100만원이라도 주인 정신을 갖고 노력하여 보상을 더 받아 보겠다고 협회와 재단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협회와 재단은 저에게 손을 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부터 사명의식과 주인정신을 가지고 보상을 더 받기 위해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갖추려고 동사무실과 구청을 뛰어 다녔습니다.

협회에서 통일교 대지를 관리하는 사람이나 재단 본부의 교회 대지 보상책임을 맡은 사람에게 저는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고자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습니다. 사진을 찍고 서류를 꾸며 구청과 과천 종합 청사에 서류를 보내고 하여 다시 감정을 받았습니다.

영도 통일교 대지에 대한 재 감정을 받은 결과 처음에 보상금이 1천 만원으로 결정된 것을 약 2천 4백만 원으로 받았습니다. 평당 보상가격이 1백만원이었는데 2백 40만원 가격으로 보상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협회와 재단에서는 저에게 지금까지 이렇게 승리한 일이 없다며 수고했다고 하였습니다. 재단과 협회 전문가도 못하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저는 1995년 8월 25일 합동 결혼식을 한 36만 쌍 중에서 합동결혼식을했지만 신앙이 없고 교회에 나오지도 않는 사람을 전부 수습하였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고 이혼을 한 가정과 가정이 파탄된 가정도 수습하여 아들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올린 가정을 심방하고 돌볼 때 언제나 제 옆에는 영도교회 이진상 순회사가 있었습니다. 이진상 순회사는 저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여호수아가 모세의 손발이 되었듯이 저의 손발이 되어 애를 썼습니다. 미진상 순회사의 부인인 하진희 회장도 저의 뜻이라면 '아멘!' 하고 무엇이든지 순종하고 따라주었습니다.

제가 영도교회를 떠난지도 2년이 흘렀지만 이진상, 하진희 회장과 이상희 부인회장은 아직도 명절 때와 제 생일에 정성을 모아서 서울에 있는 저에게 선물을 보내곤 합니다. 부모 형제도 이렇게 정성을 모으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 신앙목사생활 30년이 되었지만 통일교 안에서 이진상 순 회사와 하진희 회장과 같은 신앙 자를 아직까지 저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만사람에게 등불이 되는 신앙자 입니다.

이광철 집사와 아내 되는 이상희 영도 통일교 부인 회장도 제가 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상희 부인 회장은 사명의식이 강하고 영도 통일교 어머니로서 새로 전도된 통일교 교인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저는 1996년 3월 9일~1998년 8월 2일까지 약 2년 5개월 동안 영도 통일교에서 혼자 자취를 하면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은 시장을 다녀와 일주일 먹을 김치를 담그고 국 한 솥을 끓여 놓고 매주 불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은 제가 떠날 때까지 영도 통일교 살림과 저의 식사를 맡아서 수고하였습니다. 영도 통일교 부인 교인들도 제가 식사할때 먹으라고 반찬 준비를 많이 해왔습니다.

이진상 순회사와 이광철 회장이 주축이 되어 저에게 중고 자동차를 사주었습니다. 제가 버스를 타고 다니고 심방을 할 때면 영도섬 전체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골목길과 오르막길을 걸어 다니기가 힘에 겨웠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사주셨기 때문에 예배, 기도, 전도, 심방을 자동차로 기동성 있게 많이 하였습니다.

저는 부주의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죽을 뻔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서울집에 자가용을 가지고 오르내릴 때마다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게 되어 졸면서 운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위험천만한 위기의 순간도 많았습니다. 경부 고속도로를 달릴때 빗 길에 미끄러지고 눈길에 미끄러져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습니다.

1998년 음력 1월 6일 문선명 78회 탄신기념 행사를 해야 했습니다. 1월4일날 저는 행사준비를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서울에서 구정 명절이어서 자녀 3명에게 세뱃돈 1만원씩을 주고 나니 제 지갑에는 7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명절에 가족들과 같이 쉬고 1월 4일날 아침에 출발하는데 기름 5만 5천원을 넣고 남은 돈이 1만 5천원 밖에 없었습니다. 고속도로비를 내고 나면 딱 맞게 부산 영도까지 내려갈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서울에는 눈이 안 왔지만 전날 밤에 전남 지방과 충청도 지방에는 눈이 많이 왔었습니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 나서야 부산에 해지기 전에 도착 할 수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오후에 출발하고 싶었지만 추운 겨울이라 빨리 부산 영도까지 도착하려고 아침에 나섰습니다.

서울 집에서 아침 9시에 출발하여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화성(오산) 까지는 눈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눈이 오지 않아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화성 밑으로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체인도 감지 않고 시속 70km로 3차선을 달리다 천안 인터체인지 입구에서 2차선으로 차선변경을 하는 순간 차가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속도로는 큰 버스나 트럭으로 인해 아스팔트에 구덩이가 파져 있었습니다. 제가 100m 거리인 경사진 도로를 미끄러져 내려갈 때 주위에 수많은 차들이 불을 켜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불을 켜고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 고만 기도하였습니다. 차와 같이 미끄러져 내려가면서도 정신을 차려야 산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차가 100m를 지그재그로 밀려 내려가면서도 옆 차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고 마지막에 브레이크를 잡았습니다.

차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방향이었는데 차가 유턴하여 차 머리는 2차선에서 3차선으로 들어와 3차선과 갓 길에 걸쳐져 서울로 가는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살려달라!' 고 기도 하였던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차는 수많은 차들과 연쇄 충돌 하지도 않고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기적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차가 멈춰 섰을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30분을 정신이 없이 멍해 있다가 차에서 내려 차를 뒤로 밀어서 천안 인터체인지 다리밑 눈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부산 방향으로 다시 차를 틀어 3차선으로만 천천히 갔습니다. 영동 밑 추풍령에서 부터는 눈이 쌓여 있지 않아 부산까지 안전하게 내려갔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회에 제가 목사로 부임하여 이진실, 하진희 회장과 이철, 이상희 회장 두 가정을 가지고 영도 통일교에 발전과 부흥을 위하여 심히 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영도 통일교는 2년만에 120명의 교회로 부흥 발전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영도 통일교가 최하위 교회였는데 최고 A급 교회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갔을 때는 총 헌금도 교회 관리비와 공과금 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산의 통일교에서 영도교회 재직회가 목사 생활비를 제일 많이 주게 되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최고 책임자의 말 한마디 약속을 믿고 혼자서 부산 영교로 폐인이 된 몸을 이끌고 내려가 가족들과 떨어져도 영도교회에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돌아오는 것은 약속을 밥먹」기는 통일교 최고 책임자의 배신행위로 또다시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 두 번 속은 것도 아니요, 통일교에서 수없이 많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왜 또 속고 내려왔는지 저는 제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바보 천치라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자책을 해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던 것입니다.

 

제 3 절 죽음의 자리에서 두 천사의 도움으로 구한 생명
 

시간이 흐른 후 제가 서울에서 부산 영도 통일교로 발령을 밭은 것은 저에게는 또 한번의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싸움을 해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심장병과 간, 위장병, 불면증을 기도로서 다스리며 기적같이 죽지 않고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옆에서 돌보아 주어도 제 자신을 지탱할 수 없고 건강이좋지 않아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와서 자취 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혼자서 자취를 하며 빨래와 청소,심방, 전도, 교회 부흥 · 발전, 승공 연합, 각종 세미나, 강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영도교회에서 1996년 3월 10일 취임을 하자마자 매일 3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며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전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제가 혼자서 의 ·식 ·주를 해결한다는 것이 어려웠고 혼자과로를 하며 먹지 못한 상태에서 1인 5역을 한다는 것이 무리였습니다.

그래도 영도교회는 나날이 교인이 늘어나고 발전하며 새로운 교인들이 영도 통일교로 많이 입교하여 넘치는 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저는 신바람이 나게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과로하며 먹지 못하여 1996년4월 20일 독감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심장병에는 독감이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저는 1996년 3월 17일 셋째주 주일 예배 광고 시간에 하나님은 저에게 음성으로 "감기 조심하라" 며 경고 했다고 교인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독감 감기까지도 조심 하라고 알려주고 계신다고 교인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과로하지 말고 음식 조절하여 독감을 주의를 하였어야 했습니다.

1996년 3월 10일~4월 20일까지 40일은 제 몸과 마음 전부를 바쳐 충성한 기간이었습니다. 밤낮 없이 심방하고 전도하고 기도하며 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해 새벽 1시~2시까지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4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 40일 동안을 감기에 걸려 생활해야 했습니다. 누워 잠을 자면 기침이 심하게 나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질식의 순간이 여러 번 있어 책상 의자에 앉아 잠을 자지 않고 살았습니다. 40일은 제가 심장병으로 생사의 기로에서 살기 위한 구원의 몸부림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밥을 한 숟갈 정도밖에 먹을 수 없었고 국물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영도 통일교 교인들에게는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은 감기가 걸린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목사님이 감기가 걸려서 잘 드셔야 된다고 회나 반찬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심장 판막 4개 중 1개가 정지되었고 심부전증으로 식사나 먹은 물을 대소변으로 배출하지 못하였습니다. 심장기능이 저하되어 숨을쉴 수 없고 1층에서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설교나 심방, 전도, 기도는 처음과 같이 열심히 하였습니다. 부산 영도 교인들은 진실하고 인정스러운 마음으로 염소보약, 일반 보약까지 지어 왔습니다. 밥을 먹지 못해서 링겔 주사를 7병이나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몸이 죽음의 기로에 서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호흡 곤란으로 열 발자국도 걸을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몸은 고무풍선 같이 부었기 때문에 65kg에서 85kg이 되었습니다. 저의 배는 만삭이 되어 아기를 낳기 직전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1996년 5월 10일 그 날도 역시 책상에 엎드려 잠시 잠을 자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비몽사몽간에 검은 옷을 입은 4명의 저승사자들이 제게 와서"이제 너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4명이 양쪽에서 저의 팔을 붙들었습니다. 저는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4명에게 끌려가는 중 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명의 천사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천사들은 큰 칼을 빼어들고 4명의 검은 복장을 한 저승사자들에게 저를 데려 갈 수 없다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4명의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에게 칼을 휘둘러 4명을 전부 죽였습니다. 저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저는 2명의 천사에게 "저의 생명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천사들은 저에게 "앞으로 당신이 할 일이 많기 때문에 구해준 것입니다. " 하고는 순식간에 제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저는 비몽사몽간에 깨어나 하나님께서 저를 저승에 데려가지 않고 죽음에서 생명을 구해줄 것을 확신하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상희 부인 회장이나 교인들이 제가 심한 독감에 걸린 1996년 4월 20일 이후부터 반찬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이미 심장병과 간담석증, 위장병, 불면증을 가지고 있는 상태여서 혼자 무모하게 부산 영도교회에 와서 자취 생활 한 것이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너무나 처절하고 비참하며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아내가 옆에서 병간호를 해주어도 목회활동하기가 어려운데 혼자 자취 하면서도 영도교회 부흥발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심전력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심장병이 악화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기 조심하라" 고 저에게 경고를 하였는데도 저는 무관심하게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2명의 천사를 통해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저를 사지에서 생명을 구해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부산에서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 병원으로 갔습니다 응급실에 입원을 하여 응급 처치를 받았습니다. 심장기능이 약화되어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제대로 심장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심장에 고인 물부터 제거하기 위하여 저의 등에 구멍을 뚫어 척추를 관통하고 허파를 지나 호스를 집에 넣고 물부터 빼내었습니다.

병원에서 심장병 치료를 받은 후 부산 영도교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 서울에 저를 아는 분들과 부산 영도 교인들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통일교 황선조 협회장과 부산 교구장인 김용갑에 대하여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통일교로 말미암아 폐인이 되어 심장병으로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 병원으로 입원하였지만 통일교 협회에서는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부산의 김용갑 교구장이 협회에 보고를 하였는데 단 한 사람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병원 수술비를 한푼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잔인한 곳은 없습니다. 김용갑 교구장도 부산에서 서울로 와서 교구장 회의에 참석하면서도 회의만 참석하고 저의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서울 청파동 회의 장소에서 고대 안암 병원은 불과 30분 거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용갑 교구장은 부산 시내 통일교 전체 목사들을 대표하는 지도자입니다. 저는 김용갑 교구장의 부하였습니다.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이 서울까지 한명도 문병을 오지 않았다 할지라도 김용갑 교구장은 서울회의까지 왔으면서도 저의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저와 같이 1972년부터 충북 기동대 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충북 기동대는 통일교 목사가 되기 위한 6개월 훈련과정입니다. 그런 김용갑은 정성호 전임 부산 교구장과 같은 고향 진주 출신이라며 강력하게 협회장에게 추천하여 교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김용갑이 교구장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였습니다.

제가 1996년 3월 9일 부산 교구본부에 들렸을 때 김용갑은 부교회장 이였습니다. 저는 처음 김용갑 얼굴을 보았을 때 계시가 나왔었습니다. 저는 바로 김용갑이 교구장이 된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김용갑은 통일교 협회에서 1월 달에 전국 통일교 교구장 인사이동이 있는데 1년 후에나 있지, 그전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용갑은 이번에 바로 교구장이 되면 감사보답으로 저에게 크게 한턱을 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교구장이 되면 제가 서울에서 영도까지 내려온 것은 제 뜻이 아니라 하늘 뜻이니 제가 서울에 올라갈 때까지 마음이나 상하게 하지 않게 해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그런 예언을 한 후 한달 만인 4월 달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선배 통일교 지도자들과 교구장들을 전 세계 185개국의 국가 메시아로 발령을 하였습니다. 정성호 부산교구장이 떠나면서 김용갑을 부산 교구장으로 협회에 추천하여 교구장이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 후 부산에 내려와 김용갑 교구장에게 병원비를 협회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협회에서 병원비를 받아 주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몇일이 지나서 협회에서 병원비를 지원해 줄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고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서울의 교구장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듣고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에게 날짜를 설명했더니 그때서야 김용갑 교구장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서울 회의에 참석을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이 미안하다고 사과만 하였더라도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원비도 지원해 준다고 약속을 해놓고 왜 지원하지 않느냐고 말을 했더니 그때서야 억지로 조금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일 김용갑 교구장은 제 버릇 개 못 주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충고를 하고 조언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 19장 자살을 결심하고죽음의

 

문턱에 서서
 

제 1 절 족벌왕국에 환멸을 느끼고
 

약속을 어겼던 곽정환 회장은 문선명의 명령으로 한국 통일교 회장에서계 통일교 회장으로 인사발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문선명의 사촌 조카사위인 황선조가 취임을 하였습니다. 황선조는 단 한번도 개척하지 않고 교구장이 되었고, 실적도 공적도 없는데 문선명의 사촌인 문용현 사장의 딸과 합동 결혼식을 하여 하루아침에 한국 통일교 협회장이 되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한국 통일교회 회장직을 물려받은 황선조에게 박준철 영도 목사를 교구장으로 추천하니 문선명 교주에게 보고 드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선조 회장은 저에 대한 실적과 공적(협회장 상 10회, 교구공로 16회, 총 26회 수상, 부흥 교회 건축)을 문선명 교주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황선조 협회장은 그 당시 문선명 교주가 머물고 있는 제주도 영빈관으로 박준철, 양우진(전남 부흥단 단장)을 교구장 후보로 복수 추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곽정환 회장이 추천한 저는 간단히 설명 후 탈락시켰고, 전국 통일교 우수교회 협회장 상을 한차례도 수상하지 못한 양우진을 종로 교구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문선명의 통일제국은 족벌왕국입니다.

저는 점점 더 건강이 악화되어 심장 판막과 심부전증으로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전도활동과 심방활동, 통일교 합동결혼식 행사로 밤낮으로 황동을 하여 밤에 코피를 흘리고 모든 물체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영도 통일교를 총책임지고 있는 이진상 순회사가 정성을 다하여 저를 보살폈고 이상희 부인 회장이 저의 식사 준비에 정성을 다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제 영혼과 육신을 문선명 교주에게 빼앗긴 사실과 건강악화,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무능한 남편이라는 자괴감 때문에 밤마다 괴로워하였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문선명 교주가 참 부모 메시아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 받았다는 새 진리요 성약이라고 주장하는 통일교 원리강론은 김백문 사이비 교주의 교리인 성서신학과 기독교 근본원리를 문선명이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새 진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을 속인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김백문 교리를 이용하여 자칭 재림주가 되고 수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가는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속았다는 배신감에 통곡해야 했습니다.

통일교 전단지 한 장에 청춘을 빼앗기고 저를 30년 동안이나 노예로 삼고 이용한 문선명 교주를 생각하면 제자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미친 사람 같이 밤마다 '부산 영도섬에서 죽어야지' 라는 그 생각으로 머릿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제 2 절 "준철아! 죽지 말아라."
 

저는 문선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배신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밤마다 새벽 4시~5시까지 불면증에 시달리며 새벽 기도 후에야 겨우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차를 몰고 나가 영도 섬을 돌며 절벽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으려고 수십 번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으려고 할 때마다 "죽지 말아라!" 라는 음성이 제 귀에 생생히 들렸습니다.

낮에 전도하며 심방을 하다가도 영도섬 끝에 있는 태종대 유원지 자살바위에 서서 천길 절벽 아래로 뛰어 내리려고 했습니다. 태종대 등대에도, 신선대 절벽 바위에도 여러번을 가서 한 많은 제 인생을 마쳐야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준철아! 죽지 말아라" 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자살하려는 순간 그 음성을 듣고 번번이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때로는 분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를 자해 하기도 하고, 방을 뒹굴며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습니다. 배신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1998년 4월 30일 오후 5시경 자살을 결심하고, 영도 신선대 바위에서 뛰어 내리려는 순간 이었습니다, 지금 까지보다 훨씬 더 크고 뚜렷한 음성이 저를 사로 잡았습니다.

"준철아! 죽지 말아라. 문선명 통일교 집단을 궤멸하여 박준철과 같은 제2의 희생자를 막아라. 이단집단을 궤멸하라."

저는 그 음성에 압도되어 자살하려는 생각을 단념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선명 집단에서 겪은 것을 책으로 써서 이 세상에 문선명의 정체를 폭로하여 수많은 영혼을 구할 결심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이름으로 문선명 집단과 같은 사이비 집단을 궤멸하라는 사명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책이 발행될 때까지 심장병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기도와 약으로 병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제 20장 폭언 폭력 배신으로일괄된

 

통일교 지도자  
 

제 1 절 황선조 회장에게 한 직언
 

황선조 한국 통일교 회장이 전국 통일교회 순회 집회를 하였습니다. 부산교구 본부 교회에는 1998년 4월 14일에 왔습니다. 낮12시부터 부산시내 통일교 목회자 부부들이 황선조 회장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통일교를 배반하고 나갔던 문선명 비서실장인 박정화씨(야록 통일교회사 책을 발행한 저자)와 합의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 중 최고 실적과 공적을 많이 쌓은 목사로 부산교구 목사 대표자로 선정되어 황선조 회장에게 영도교회 발전과 통일교 발전안을 놓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앞으로 한국 통일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직언을 했습니다.

"통일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통일교 기업체를 정리하고 사명감 있는 목사들을 양성하며 통일교 교인들이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말로만 공생 공영 공의주의를 주장하고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실천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47년 동안 통일교회 교인들은 희생의 제물만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는 사회를 위하여 고아원 하나도 없고, 사회인과 통일교 교인들을 하여 양로원도 병원도 하나 없는 무풍지대입니다. 통일교 교인들에게 40년 동안 명령만 하였지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위하여 협회에서 무엇을 해주었습니까? 통일교 목사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도, 통일교 협회에·는 조금도 혜택이 없었습니다. 목회자 자녀 교육비나 노후를 위해서도 신바람 나는 목회가 아닙니다.

저는 서서히 마음정리를 해가고 있었습니다. 생활이 있고 처자식이 있다 보니 빨리 서울로 올라가서 가족과 합하지 않고서는 안되었습니다. 병든 몸을 가지고 홀로 목회하면서 정리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였습니다. 저는 빨리 서울로 올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 2 절 김용갑 교구장의 폭언과 폭행
 

김용갑 교구장은 마침내 회복할 수 없는 사건을 저질렸습니다. 그 날은 1998년 6월 11일 금요일 이였습니다.

문선명은 1998년 6월 13일에 있을 1억 2천만 쌍 합동 결혼식을 위하여모든 통일교인들을 몰아 세웠습니다. 저도 영도 통일교회 미혼남녀들의 합동결혼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동분서주하며 뛰었습니다.

합동결혼에 참석할 예비 신랑 신부의 약혼이 거의 다 성사되고 최종적으로 이상희 부인회장 아들 이봉규와 김영주 장년회장 딸인 김혜진만 제일 늦게 사진으로 약혼이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과 약혼이 되어 일본에서 신랑, 신부 될 사람 사진이 부산 교구 본부에 도착했습니다.

6월 11일 영도 통일교회의 이봉규와 김혜진은 김용갑 교구장의 축도를 받기 위하여 저녁 늦게 교구본부에 갔습니다. 부산 시내 통일교 18명의 목사들은 한 사람도 자기 교회에 미혼 남녀 약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목사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전에는 심방활동을 하였고 오후에는 영도 여성연합 하진희 회장의 부탁으로 악령에 사로잡힌 김숙자씨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김숙자씨에게 남편과 자녀들이 통일교회를 나오면 확실하게 악령을 제거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교회를 빠른 시일 내에 나오지 않으면 김숙자씨가 자살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달 후인 1998년 7월 10일에 김숙자씨는 정말로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 하였습니다. 김숙자씨는 자살시도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의식을 회복하였지만 뇌세포가 많이 파괴되어 정신병원에서 폐인이 되어 가정에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김숙자씨를 만나고 저녁에 영도 통일교회에 돌아와 속회예배를 드렸고 기진맥진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우리 교인의 일이라 책임감을 느끼고 부산 통일교 교구 본부 교회로 갔습니다.

저는 김용갑 교구장에게 이상희 부인회장의 아들인 이봉규의 아내 될 사람과 김영주 장년회장의 딸인 김혜진의 남편 될 사람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진을 보았더니 너무나 착하고 아름다운 신랑, 신부였습니다. 이봉규씨는 19살이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잘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용갑 교구장이 저에게 하는 말이 "영도 통일교회 부인회장 아들인 이봉규는 000네."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모욕적인 욕을 하였습니다. 저는 "둘이 행복하게 잘 살라고 하지 못할 망정 결혼을 파괴하려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래도 김용갑씨는 "김혜진 신랑 될 사람은 키가 너무 작다" 고 또 다시 부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이봉규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에 마음이 상당히 상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밤 10시가 되어 일본에서 온 신랑, 신부 사진을 각자 받았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약혼이 된 신랑, 신부 사진을 보고 마음에 안 들면 파혼하라" 고 5번이나 외쳤습니다. 저는 김용갑 교구장이 말하는 것을 보고 못 마땅 하였습니다.

합동 결혼식을 할 미혼 남녀들은 사진으로 자기의 아내 될 사람과 자기남편 될 사람을 보게 된 것이니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들면 기쁘고 다행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파혼을 해야 되는 상황에서 김용갑 교구장은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였던 것입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기도실에서 약혼 축도를 하기 위하여 신랑, 신부를 모았습니다.

일본이나 필리핀에서 온 신랑, 신부 사진을 한국의 약혼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영도 통일교회 차례7,1 되어 상대방의 사진을 받았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 아들인 이봉규씨 아내 될 사람은 얼굴도 착하고 키도 크고 빠지는 데가 없었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과 이봉규씨는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영주 장년회장 딸인 김혜진씨는 '남편 키가 작네." 하면서 불평을 하였습니다. 김영주 장년회장도 사위 될 사람이 키가 작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신랑 될 사람은 김혜진씨 보다 9cm이나 컸습니다. 저는 김혜진의 키가 작다는 불평 소리에 결혼할 사람이 착하고 진실한 얼굴이고 천생연분이라고 말하고 격려하는 뜻에서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산교구 본부 부인회장이 "영도 또 시작한다. " 라며 빈정거렸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김용갑 교구장이 영도 통일교회 목사인 저에 대해 무수한 비난을 했다는 증거였습니다. 저는 여러 사람 앞에 참을수가 없어서 조용히 밖으로 나왔습니다. 

저는 복도에서 마주친 김용갑씨에게 "어떻게 교인들 신앙 교육을 시켰으면 교인이 다른 교회 목사에게 반말을 씁니까?저는 그 여자 교인을 알지도 못하는데 영도교회 일에 끼여 들어 파혼을 시키려고 합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용갑 교구장은 "영도교회 목사가 잘못하였다" 고 하며 자기 교인만 감싸고 돌았습니다.

저는 다시 기도 실로 들어가 그 부인회장에게 '당신이 누구냐? 영도 또 시작 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시작하느냐? 왜 목사에게 반말을 하느냐?" 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교구 본부 교회 부인 회장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저와 여러 교인들이 "왜 거짓말을 하느냐?" 고 따졌더니 그때서야 시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교구 부인 회장도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였고 교구 부인회장의 남편이 되는 장로도 저에게 내용을 알지 못하고 영도 교회 일을 방해하여 죄송하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밖으로 나와 밤12시가 다 되어 영도 통일교회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남의 교인에게까지 무시당한 데 대한 아픔으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습니다.

다음날인 1998년 6월 12일은 부산 교구 본부 회의실에서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회의 시간에 회의 분위기를 망칠까봐 어제 밤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이 저에게 사과를 하고 서로 화해하고 조용히 처리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용갑 교구장은 저에게 사과를 하지 않자 할 수 없이 어제 밤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동래 허한경 목사와 김진수목사도 교구 본부 부인회장이 잘못한 것이고, 김용갑 교구장이 저에게 잘못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 전체가 "승공 연합 빼앗은 일이나 이번 사건은 김 용갑 교구장이 잘못 했다" 고 저에게 사과를 하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김용갑 교구장은 제가 말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막말로 '알 다했냐?" 하면서응접실 의자에 앉았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병신새끼, 꼴값하네!!" 하며 저에게 욕설을 하였습니다.

그 말 한마디는 저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꽃혀 버렸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교통 사고 후 단 한차례도 '병신새끼' 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였는데 통일교회에 들어와 병신새끼라는 말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나오려고 일어났습니다. 그랬더니 김용갑교구장은 갼자기 의자위로 올라가 저에게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저-'김용갑 교구장의 폭력에 더 이상 때리지 못하도록 넥타이를 잡았을 뿐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래교회 허한경 목사와 부산진교회 김진규 목사가 김용갑 교구장을 말려 걱우 진정이 되었고 저는 교구장실을 나와 버렸습니다. 저는 충격과 심장판막과 심부전증으로 인하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영도 통일교회에 돌아왔지만 몸을 가눌 수도 없었습니댜.

하나님의 뜻을 이끌어내시고자 문선명과 나와의 관계를 구세주 참 부모와 참 아들 효자의 관계에서 서서히 세뇌마취에서 깨어나 사랑과 믿음을 끊고 조금씩 조금씩 문교주에게 절대복종의 자리에서 점차적으로 세뇌에서 깨어나 통일교를 떠나게 만드는 역사를 해오신 것입니다

 

제 3 절 문책인사를 약속한 황선조 회장
 

1998년 6월 13일 1억 2천만 쌍 합동 결흔식을 위하여 영도 통일교회에서 교인들을 합동결혼식 하객으로 총동원하여 서울의 잠실 체육관에 참석하여야 했습니다. 1억 2천만 쌍 합동결혼식이라고 전 세계 언론과 매스컴을 통하여 알렸지만 과장되고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잠실 체육관에서 2천쌍 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3일 동안의 폭언과 폭력을 겪어 몸이 만진창이 되었지만 합동결혼식 행사를 치렀고 서울 집에 있는 자녀들을 보지도 못한 채 영도교회로 내려왔습니다.

1998년 6월 26일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 회의석상에서도 통일교 목사들이 김용갑 교구장에게 영도교회 박준철 목사에게 사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용갑 교구장은 사과를 하겠다고 했지만 사과는커녕 오히려 저를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통일교 콘도인 설악산 일성 콘도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 회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심장병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김용갑 부산 교구장은 설악산에서 황선조 협회장과 김종우 총무국장 등에게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고 오히려 저를 비난하는 말을 하며 저를 인사 조치하여 잘라 버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용갑 교구장의 모두 잘못한 것이 드러나서 저를 인사발령 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김용갑 교구장 자신이 문책 인사로 부산 교구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지혜롭지 못하여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에게 사과하고 조용히 끝내기를 바랬는데 오히려 사건을 황선조 협회장에게까지 끌고 가 일을 확대시킨 것이었습니다. 저는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통일교 협회 김종우 총무국장이 부산 영도교회로 전화를 해주어 알게 되었습니다.

김용갑 부산 교구장은 교만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교구장의 직분을 망각하고 회개하지 않고 사과할 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산 시내 18곳의 통일교회 목사를 책임지고 명령하는 직책이 교구장입니다.

김용갑씨는 18곳의 교회 헌금을 받아 임의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불법이고 공금 횡령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주위의 통일교 목사들이 욕을 얻어먹을 각오를 하고 충고를 하여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1998년 7월 1일 서울 통일교 협회 사무실로 갔습니다. 황선조 통일교 회장을 만나 김용갑 이야기만 듣지 말고 저의 이야기도 듣고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황선조 회장이 화를 내고 격하게 이야기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김용갑 교구장의 잘못을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박준철 목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김용갑 교구장을 문책인사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있는 앞에서 황선조 회장은 김용갑 교구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박준철 목사의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김용갑 교구장이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뒤에 사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그 자리에서 김용갑 교구장에 대한 문책 인사를 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길로 서울 .집에 잠시 들렀다가 부산 영도 통일교회로 내려갔습니다.

 

제 4 절 눈물로 세운 부산 영도 교회를 떠남


저는 이 사건 후 7월 20일에 김종우 협회 총무국장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황선조 회장의 전화가 왔는데 "김용갑 부산 교구장의 잘못을 놓고 문책인사를 하고 박준철 목사도 영도 통일교회를 떠나 서울 시내나 경기도 통일교 목사로 발령을 하면 어떻겠느냐?" 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김용갑 교구장이 부산 교구장에서 면직되고 서울 시내 구단위 교구장으로 문책 인사를 당하는데 전국 교구장들은 이번 사건을 주시 하고 있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통일교 회장의 체면을 보아서 박준철 목사가 황선조 회장의 체면을 세워 달라" 고 하였습니다.

총무국장은 "지금까지 황선조 협회장이 한국 통일교 교구장과 목회자 인사이동을 시키면서 단 한번도 먼저 전화를 하거나 양해를 구한 일은 없는데 박준철 목사가 처음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생사를 넘나들며 전력을 다했던 영도 통일교회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김종우 총무국장은 "황선조 회장이 미국에서 김종우 총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반드시 박준철 목사를 기억 하였다가 내년 1999년 2월 7일 3억 6천만 쌍 합동결혼식 후에 교구장으로 발령을 하겠다고 약속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1998년 6월 설악산 일성 콘도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 총회때 전체 교구장들의 사표를 받아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3억 6천만 쌍 합동결혼식 할 때 실적이 나쁜 교구장들의 사표를 받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를 교구장으로 발령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몇달 동안만 과천교회에서 교인들을 수습하고 너무 어려우면 한 달만 교구장 자리가 나면 바로 저를 발령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2년 5개월 만에 영도 통일교회를 목사로서의 사명을 마치고 죽음의 고개를 넘어 살아서 영도섬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998년 8월 2일 주일날에 영도 통일교회에서 마지막 이임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마지막 이임 예배에서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회에 이진상 하진희 순회사님 가정, 이광철 이상희 회장 가정, 김봉민 사찌꼬 가정, 김옥순씨 가정 등 영도 통일교회 전체 교인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 뿐 이었습니다.

심장병으로 고려대학 병원에 응급실에 2차례나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자살을 30번도 넘게 결심하고 시도하였지만 죽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 했습니다. 영도 통일교회를 떠나며 모든 영도 통일교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뜻은, 저를 문선명 자칭 구세주로 부터 빨리 통일교로 부터 탈출시켜 통일교 궤멸을 시키고자 고난, 시련, 가시밭길을 저는 걸어야 했습니다. 문선명과 저와의 관계가 참부모 구세주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문선명을 불신하게 만들고 정을 끊고 통일교를 떠나게 만들고자 마지막까지 인사문제 폭행 폭언을 당하며 저는 생사를 넘나든 병고와 싸워야 했습니다.

 

제 5 절 과천통일교회에서의 비참한 생활
 

과천교회는 세워진 후 8년 동안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처음엔 처녀 전도사가 목회를 하였고 후임으로는 1992년 3만 쌍 합동결혼식을 한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아 과천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다음은 제가 1982년도 경기 화성 교회에 목사 생활을 하며 합동결혼식을 시키고 신앙 지도를 하였던 이정만씨가 과천교회 목사였습니다.

이정만 과천교회 목사는 교인 20명에 불과한 개척교회에서 교인들이 모이면 언쟁을 벌이고 교인들이 이정만목사와 싸움을 하여 허탈과 배신감으로 통일교 목사직을 사직하였습니다. 이정만 목사는 과천에 온지 3개월 만인 1998년 4월에 과천교회 목사직을 그만두었습니다.

이정만 목사는 진실하고 정직하며 착한 목사입니다. 제가 화성교회 목사로 있을 때도 가장 모범 된 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 신학대학을 다녔지만 통일교 교인으로 학교에 알려져 신학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통일교 선문대학 4학년에 편입하여 신학교를 졸업하여 열심히 목회자의 사명을 가지고 살았던 이정만 목사는 배신감에 통일교 목사직을 버렸습니다.

과천교회 통일교 교인들은 몇 달 동안 목사도 없이 교인 10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저를 그렇게 처참한 과천교회 목사로 발령하였던 것입니다.

그 곳에는 개척도 하지 않고 협회장상을 한번 받지 않고 교회를 부흥시킨 일이나 교회 건축한 일도 없는 교구장이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저는개척, 부흥하여 교회건축을 한 서울 강서교구 본부나 노원교구 본부에 간 후 통일교회를 떠날 생각을 했지만, 과천교회에서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두고 탈퇴할 결심을 하였습니다.

1998년 8월 3일부터 저는 아내와 같이 과천교회를 수습하였습니다. 8월달에 비가 그렇게 많이 왔는데도 비를 맞아 가며 심방활동을 하였습니다. 과천 통일교회는 종교 부지 내에 3층을 분양 받아 2칸으로 막아 교회와 사택을 꾸몄습니다. 70평이라고 하는데 실제 평수는 50평 정도에 불과 했습니 다.

과천교회는 매년 여름만 되면 비가 올 때마다 옥상에서부터 비가 새어 4층 학원으로 쏟아지고 4층 학원을 채운 빗물은 3층 통일교회로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교회에 발목까지 물이 차서 물을 퍼내야 했습니다. 매년 겪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택이나 방에도 비가 새고 교회에 발목까지 물이 차다보니 그 물을 다 퍼내는데는 10일이 넘게 걸렸습니다. 교회에 물을 다 퍼내고 나면 벽에서 물이 나오고 교회 콘크리트에서 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교회 내의 전기는 누전이 되어 매년 여름에는 전기 불을 켤 수 없습니다. 교회에 창문이 없어서 교회에만 들어가면 숨이 막혔습니다.

저는 가는 곳곳마다 통일교회를 부흥 발전시켰으며 교회와 가정적인 생활안정을 지금까지 시켰지만, 과천교회에서는 더 이상 교회를 발전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 자신을 정리해야 했고 가족들의 처절한고통과 가난,배고픔으로 내몰아야 했습니다.

저는 과천교회에서 통일교 목사직을 탈퇴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더 이상 교회를 발전시키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개척교회 마다발전시켰지만 더 이상 수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일을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교회를 발전시켜 가정생활이 안정되는 길을 포기하고 가난을 선택하였습니다. 저의 자녀 대학생 3명의 등록금도 없어서 휴학계를 내고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습니다. 아내는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병든 몸을 이끌고 파출부와 식당 일을 해야 했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킬 능력이 있지만, 가난을 선택해야 했고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위해 교회를 부흥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황선조 회장이 미국에서 한 전화약속도 져버리고, 협회 김종우 총무국장의 약속을 받고 과천으로 왔지만 하나님은 빨리 통일교회를 탈퇴하라는 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 생활비를 4달 동안이나못 받고 자동차 기름값이 없고 버스 탈 돈도 없는 처절한 생활고로 목회자 교육 때도 가지 못하는 비참한 생활 이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참 부모 재림주라는 통일교 교주를 믿어도, 통일교회는 구원이 없고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없는 지옥 그 자체 생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6 절 연속되는 폭행과 폭력과 거짓말들
 

1999년 1월 28일날 문선명 통일교 교주 사돈인 곽정환 통일교 총 회장, 황선조 한국 통일교 회장을 협회 회장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그 곳에 김종우 협회 총무국장도 같이 있었습니다. 2월 7일 3억 6천만쌍 합동결혼식 행사를 위한 준비 모임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통일교 역대 협회장들이 저에게 약속과 신의를 저버리고 배신한 행위와 부당한 인사이동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데 대하여 직언을 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저를 보고 "박준철 목사가 죽던지, 황선조 회장이 죽던지싸워보자" 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동안에 폭력, 폭행을 하다가 이제는 살인까지 할거냐?" 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황선조 회장이 저를 치는 바람에 저는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사이 김종우 협회 총무국장이 저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저는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강제 부정인사와 폭행, 폭력으로 심장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곽정환 회장의 말 한마디를 믿고, 혼자 부산 영도교회목사로 부임하였던 제 어리석음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고향인 경상남도로 가서 잠시 다녀 오라" 고 해서 부산의 영도까지 다녀온 저는 "과천 개척교회 목사로 부임하기 위하여 부산 영도교회까지 간 것이 아닙니다" 라고 곽정환 회장과 황선조 회장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곽정환 회장은 "내가 언제 그랬느냐?" 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곽정환 회장이 저에게 잠시만 부산에 다녀오라고 5번이나 말을 하였고, 임도순 부 협회장도 바로 서울로 원대 복귀하게 될 것이라고 저를 위로해 주었는데 말입니다.

저는 김종우 총무국장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고 물었습니다. 그는 "곽정환 회장의 약속을 황선조 회장이 책임질 이유가 없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선조 회장과 김종우 총무국장은 2월 7일 축복 후 교구장 인사 이동시 최선을 다하여 박준철 목사를 교구장으로 발령하겠다" 고 또 다시 저에게 약속하였습니다.

김종우 총무국장은 "1999년 2월 7일 3억 6천 쌍 통일교 합동결혼식 측복 후 최선을 다하여 교구장으로 발령하겠다" 고 또 다시 약속하였습니다. 저는 그 소리에 눈과 귀가 멀고 영혼까지 멀어 명예 회복을 한 후 통일교를 탈출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에 유린당하며 약속을 지키는 협회장을 한 사람도 못 보았으면서도 속았던 것입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너무나 세뇌되고 교육되어 있었기에 마음으로는 통일교를 탈출 한다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탈출 하지 못하였습니다. 제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럽고 미웠습니다.

 

제 7 절 위장된 합동 결혼식


1999년 2월 7일 3억 6천 쌍 합동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거짓된 숫자임) 저는 과천 통일교회 책임량인 버스 4대에 과천시 대한 노인회 소속인 3단지, 4단지와 문원동 1, 2단지 노인정의 노인들을 태워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으로 갔습니다. 식사대접, 선물 준비, 음료 과일 접대 등을 과천 통일교회 교인들이 준비하였습니다.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에 혹독한 겨울 추위가 몰아쳐 전국에서 몰려온 노인정의 노인들은 추위에 떨며 아수라장을 이루었습니다. 서로 밀고 밀치며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12만 명의 노인들과 통일교 교인이 모였던 것입니다. 출입구에서는 노인정에서 온 노인 12만 명에게 하얀 목도리 한 장씩과 빵을 하나씩 선물하였습니다. 통일교 행사장의 사회자는 하얀 목도리를 목에다 감지 말고 하얀 목도리 끝이 무릎까지 내려오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합동결혼식은 매스컴이나 언론 기자들은 세계 통일교 교인들에게 공중헬기 중치로 방송하기 때문에 노인들까지 하얀 목도리를 어깨에 걸침으로 미혼 신랑, 신부같이 보이게 하기 위한 위장전술이 었습니다.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노인들이 서울 잠실 경기장에 모여 문선명 교주의 거짓된 합동 결혼식장의 들러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 추운 걱울 날씨에 서울까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올라온 것이 아니라 관광 버스를 태워주고 식사를 대접하니까 노인들은 서울까지 올라와서 문선명 교주의 이용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 미혼남녀 전도를 하는 사람에게 한 명당 10~15 만원씩 상금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 교인들은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며 이 엄청난 거짓된 통일교 합동결혼식 행사를 위하여 재산을 바치고 헌금을 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돈을 찍어내는 기계가 아닙니다. 돈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통일교 교인들에게 재산을 갈취하여 2천 쌍도 되지 않는 합동결혼식을 3억6천만 쌍 합동결혼식이라고 주장하며 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문선명은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며 기독교 교인과 통일교 교인을 속이는 사기꾼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 합동결혼식 한 교인은 일생 동안 각종 행사에 매일 동원되어 활동을 해야 합니다. 매일 통일교 활동을 하기 때문에 가정생활은 무관심과 비참함으로 가정생활이 어렵고 힘들며 결국에는 파탄되는 가정도 있습니다. 통일교 교인은 각종 행사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거액 재산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치지 않으면 일생 동안 지옥과 같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며 불안과 공포 속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30년 동안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각종 행사를 주관했고 강의를 했으며 인원을 동원했던 저는 문선명 교주의 일회용 허세 거짓말 행사에 가증스러움과 치가 떨리는 심정입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행사에 지치고 가난한 가정살림에도 재산을 바쳐 헌금을 내야 하는 비극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1999년 2월 7일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올린 이후 지금까지 수 차례의 교구장 인사이동이 있었지만 저는 황선조 회장을 찾아 사정하지 않았습니다. 협회 김종우 총무국장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곽정환회장 도 1월 28일 이후 단 한차례 전화를 하거나 만난 적도 없습니다.

제가 대우받는 자리에 있으면 문선명 집단의 세뇌에서 깨어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저에게 닥치는 끊임없는 폭행 폭언충 격으로 심장병을 얻고 부당한 인사 고난 시련을 통하여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점점 정을 끊고 불신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이였습니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적인 문제와 문교주의 정체, 자녀들의 방탕한 모습과 1998년 1월 IMF로 말미암아 통일그룹이 부도 남으로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국민의 세금인 융자금 1조 7천억을 갚지 않고 전국 통일교 땅과 건물을 경매 처분을 피하기 위하여 통일교 유지재단에서 통일교회로 증여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합동 결혼식한 통일교 교인들을 속이고 지옥간 조상들을 1대부터 120대까지 천국에 보내준다며 거액재산을 착취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에게 죄를 용서해준다는 면죄부 탕감비 1200만원을 바치라고 하여 바쳤고 천국의 황제요, 재림주로서 통일교 교인들을 천국 황족 가족으로 입적 시켜준다고 통일교 교인들을 속여 1만6천달러(2100만원)을 바치게 하였다.

이외에도 매월 통일교 교인들은 십의 삼조 헌금을 바쳐야 하고 문선명 나라 건국기금 매월 17만원을 바쳐야 하며 각종 거액 재산 착취에 통일교 교인들은 자살, 이혼, 가정파탄 등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으로 매일 오전10시부터 통일교 교인들이 동원되어 저녁까지 통일교자금줄인 합동결혼식을 시키기 위하여 골목 골목을 누비며 영혼을 빼앗고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자칭 참 부모 재림주 문선명을 믿고 복종하며 합동결혼식을 해야만이 천국가고 가정천국을 이룬다고 주장하지만 제가 체험한 30년 빼앗긴 세월 동안 생생한 지옥 생활 이였으며 비극적인 한순간의 악연으로 잃어버린 30년 세월 이였습니다.

 

제 8절 비참한 현실의 벽을 넘어선 사투
 

비록 30년의 처절한 삶을 마감하는 결단을 내렸지만 저는 아직도 수돗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집에서 살며 기약이 없는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1층에서 아침저녁으로 수돗물을 틀어 사용하면 2층에 있는 우리 집은 그릇을 씻고 쌀을 씻다가도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식사 준비를 할 수 없습니다. 화장실도 물을 퍼부어야 되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5년 동안 물통에 물을 받아 놓고 사용을 했습니다.

안방은 여름에 비가 올 때면 언제나 비가 흘러내려 물통을 대어야 합니다. 저의 집은 마루에도 비가 흘러내려 물통 여러 개를 놓고 살았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천장이 높아 안방이나 마루에 있어도 성애가 끼고 마루 유리창이 얼어 유리창을 비닐로 막아야 했습니다. 봄이 되어 따뜻해질 때까지 문도 한번 열지 못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추운 겨울에는 제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이 집이 문선명 통일 제국 만큼이나 추운 동토의 집이었습니다.

겨울이면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는 난방이 제대로 안되어 저와 저의 가족들은 옷을 두겹 세겹으로 끼워 입고 자야 했습니다. 심장병에는 감기가 가장 무섭기 때문에 저는 잠바를 2개, 3개를 입고 밤마다 감기에 안 걸리려고 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저는 집에 올라오려면 대문을 들어와 'ㄷ' 자로 된 사각형 길을 와야 집 안으로 들어 올 수 있습니다. 'ㄷ' 자 길을 들어 을 때마다 저와 가족들이 큰 건물을 지을 때 쓰는 강철로 만든 'H Bim'과 비슷한 아슬 아슬한 길을 걸어 2충으로 올라 와야 합니다. 특히 밤에는 어두워서 몸의 중심을 잡고 걸어 올라오기가 어려워 위험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3번이나 지하실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아파트로 이사를 갔더라면 아내와 자녀들을 이토록 추위와 더위에 고생시키지 않고 비참하게 만들지 말았을 것입니다. 이 집은 정화조와 하수구가 바로 연결 시켜져 있어서 세면대 하수구에서 정화조 냄새가 1년 365일을 코를 찌릅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을 떠나 마음의 감옥과 가정생활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길만이 살길입니다. 고통스러운 이 집에서 이사를 가려고 하여도 지금까지 이사를 갈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경제적인 생활고로 가족들은 추위에 떨어야 했고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지옥 같은 집에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한 집은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수돗물이 잘나오고 방이 따뜻해서 조금 살 것 같습니다.

저는 통일 교회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매일 대학 병원에서 조제한 심장약을 아침, 저녁으로 먹고 생명을 이어 갑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기도와 약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이 땅에 태어나 성공과 좌절을 겪으면서 육신의 병고와 빼앗긴 생활로 인하여 비참한 심정 입니다.

문선명 통일교에 빠져 제 고향도 부모, 형제도 버렸습니다. 특히 늙으신 어머니 마저 병마에 시달려 1년 내내 병원에 계셔도 찾아보지 못하는 불효자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이 땅에서 뿌리 뽑는 것이 제 마지막 소망입니다.

저는 참으로 육신의 고통과 싸우며 이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는 그 날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통일교회의 충성꾼 이었던 저는 과천 통일교회 현직 목사직을 탈퇴하고 지옥 같은 통일교회를 탈출합니다. 그러나 저는 통일교회를 탈퇴하는 순간까지 과천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간절한 마음을 갖고 기도 드렸습니다.

저는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 두면 지옥 가고, 통일교를 떠나면 지옥 가는 것으로 믿고 살았습니다. 단 한번의 인연이 단 한장의 통일교 전단지가 30년의 청춘을 빼앗고 지옥 길 이었고 죽음과 같은 삶 이였습니다. 저에게 예수님만이 오직 구주요 성경만이 진리라고 기독교 성도들이 통일교 입교전에 저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26년 동안 제 아내는 문선명 통일교주의 잔인한 인사와 횡포에 불안과 공포, 긴장 속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 세상 천지에 저의 아내같이 알뜰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 한 방울도 아끼고 전기 한 등도 아끼며 근검 절약으로 살았습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청량리 경동시장에 가서 시래기를 줍고 배추 잎 버린 것을 주어다가 김치를 담아 먹습니다. 계란도 깨진 것을 사와 먹습니다. 쌀도 언제나 최하품만 삽니다. 저의 아내와 자녀들은 돈 600원을 아끼려고1시간이 걸리는 거리도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닙니다.

이렇게 피눈물 나게 알뜰하게 살아도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회 목사 아내로서는 살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고 26년 동안 지옥 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충성한 목사 아내의 처절한 생활입니다.

저는 제 아들, 딸에게도 2000년에 들어와 너무 많은 책망과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지울 수 엾는 상처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와 자녀들이 문선명 교주와 저 때문에 이렇게 마음의 지옥과 생활의 지옥에서 살게 된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까지 30년을 빼앗긴 세월 속에서 억울한 생지옥에서 살아온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저의 아내와자녀들에게 억지소리를 하는 때가 많습니다. 저는 자녀들에게도 "음식을 사먹지 말라", "음료수도 사 먹지 말라", '학교도 버스비만 가지고 다녀라" , "등록금도 벌어 가지고 써라" 등 간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녀들에게 하곤 합니다. 자녀들은 안 쓰고 안 먹고 친구도 안 만나고 피눈물나게 사는데도 걸어 다니라고 하고 온갖 고통을 자녀들에게 주어 자녀들이 눈물 흘리는 때가 많습니다.

모든 근심걱정 염려를 제가 한다고 해결 되겠습니까? 주님께 맡기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고 푯대를 향해 달려 가노라고 했던 사도 바울 같이, 통일교 궤멸을 위해 엘리야와 스데반 집사와 같은 심정으로 문선명 집단과 싸워 승리하겠습니다.

 

제 9절 저는 하나님 뿐 아니라 아내와 자녀애게 죄인 입니다.
 

그 동안 저의 아내는 근검 절약을 하여 모았던 돈을 3남매 교육비와 생활비로 모두 써 버렸습니다. 그래서 3남매 자녀들의 대학 학비를 빚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졸업 무렵엔 저의 딸이 문방구에서 종이와 재료를 사다가 장미꽃을 만들었습니다. 손이 얼어서 마루에서 난로를 피워놓고 그 추운 겨울에 손을 불에 녹여가며 하루 종일 손으로 장미꽃을 만들었습니다. 저의 딸은 새벽까지 장미 꽃다발과 장미 바구니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장미 꽃다발과 장미 꽃바구니를 들고 집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서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두딸이 꽃팔이 소녀가 되어 "꽃 사세요!" 라고 외쳤습니다.

K대학교 졸업식에도 꽃을 팔러 갔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장미 꽃다발과 꽃 바구니를 만들어 놓은 것을 저는 학교 앞에 딸들과 같이 갖다 주고 돌아왔습니다. 딸들은 그 곳에서도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고 손을 불어가며 꽃을 사라고 외쳤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와 같이 딸들이 만든 꽃을 가지고 두 딸과 같이 D대 졸업식장에 가서 학생들과 학부형들에게 꽃을 팔았습니다. 통일교 목사가 대학교 졸업식장 앞에 가서 "꽃을 사세요"하고 몇 시간을 외쳤습니다.

저의 딸들은 사회 경험을 하기 위하여 꽃을 만들어 졸업식장에서 꽃팔이 소녀가 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친 것이었습니다. 저의 딸은 지금도 매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서 아끼느라고 학교에서 점심을 굶으면서도 부모에게 옷을 사주고 고기를 사주며 동생들에게도 정성을 베품니다.

저의 아내는 목사 사모지만 아침에서 밤12시까지 파출부 일과 식당 일을 합니다. 저의 아내와 딸은 주택가 대문 앞에 버려진 음료수 병과 신문을 들고 집으로 들어와 모아 놓았다가 많이 모아지면 폐휴지 수집소에 가져가 팔아서 생활비로 보태고 있습니다.

제가 넉넉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가운데 폐품을 수집하여 팔아서 생활에 보태 썼다면 검소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나 저의 가족들은 알뜰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버린 쓰레기, 폐휴지를 모아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적당히 아부하고 또 목회를 열심히 하면 교회가 부흥되어 안정된 이단 집단생활이 되겠지만 저는 예수님 이름만이 나의 구주요 성경만이 진리라고 내 마음속에 각인 되었기에 거짓된 부자보다 가난을 선택 하였습니다.

 

 

제 21 장 목숨을 건 문선명 통일제국 탈출

 

제 1절 "준철아, 붉은 통일교 감옥을 탈출하라."


저는 1996년 3월 17일 날 새벽에·꿈을 꾸었는데'우리나라 지도가 제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러더니 지도가 우리나라 땅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 대 지진이 일어나 산과 들, 집이 땅이 갈라지면서 땅 속으로 들어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갈라진 땅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너무나 놀라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 하였습니다.

제 앞에서도 길이 갈라지고 산이 갈라져 길 가던 사람들이 땅 속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순간 어찌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는데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빨리 네가 있는 그 자리에서 탈출하라."

저는 땅이 갈라지고 수많은 사람이 땅 속으로 사라져 갈 때 극적으로 몇몇 사람들과 같이 갈라진 땅 속에서 결사적으로 기어 나와 산으로 피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의 명령 때문에 수많은 통일교 교인이 고통 당하고 처절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을 꿈에 본 것입니다. 저 자신도 통일교회에서 몇 몇 통일교 교인들과 같이 탈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저에게 1998년 1월 IMF로 통일그룹의 부도로 통일교 기업체가 국가로 넘어가고 몰락할 것과 한국 경제의 파탄으로 IMF가 올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꿈이 시련과 고통,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회를 탈출하라는 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통일교회를 떠나야지' 하면서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때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일교회를 탈출 했다면 제 모든 환경이 달라져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1999년 2월 10일 밤에 또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끝없는 모래사막을 기진맥진하여 가고 있었는데 제 앞에 사각형의 높다란 담을 두른 강철 쇠로 만든 집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밥을 얻어먹고 물을 마시기 위하여 쇠 대문을 통과하여 쇠로 된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쇠문 밖에서 키가 2미터 정도 되는 검은 사람이 쇠문을 잠가버렸습니다. 저는 쇠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밖으로 탈출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은 탈출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 쇠 집을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사각형 안에 갇힌 사람들을 총 지휘하는 붉은 옷을 입은 저 사람의 사슬을 벗어나야 한다" 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였습니다. 저를잡으려고 문선명 교주가 쫓아왔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붉은 쇠 감옥에서 저를 잡으려고 쫓아온다는 것은 사단 마귀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 때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사이비 교주로서 수많은 영혼을 죽이는 지옥으로 끌고 가는 영적 살인마" 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준철아, 너는 빨리 통일교회를 탈출하라. 그 길만이 네가 살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순간 죽을힘을 다하여 쇠로 된 높은 담 장을 기적같이 뛰어넘어 탈출하였던 것입니다.

심장판막증, 심부전증, 담석증, 불면증, 위장장애 등으로 호흡이 곤란i고 계단을 잘못 오르 내리며 사경을 헤매는 저는 어디에서 힘이 솟았는지 다윗과 같고 여호수아와 같은 힘과 용기가 넘쳐 났던 것입니다.

기진맥진 하였던 제가 아니라 이제는 힘이 넘치는 박준철이 되었습니다. 꿈에 사막을 가로질러 도시에 가서 수많은 사람에게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교주에게 받았던 박해와 통일원리의 비 진리성을 놓고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문선명이 제 꿈에 나타날 때마다 "뜻을 위해 일 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를 지금까지 그토록 많이 칭찬해 주고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며 축복한 가짜 재림주 문선명은 그 동안에 저를 통일교회에 끌어들여 이용만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문선명 교주의 세뇌교육에 영혼까지 노예가 되어 살아왔기 때문에 문선명 교주는 저를 이용 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 부모로 믿고 절대신앙, 절대복종, 절대사랑으로 충성할 때는 문선명 교주가 꿈에 나타날 때마다 "네가 최고다" 라고 칭찬 하였습니다.

이제는 제가 문선명 교주에 대한 믿음이 없고 '통일교 목사직을 버리고 탈퇴하여 통일교 궤멸운동을 해야지' 이런 생각을 했을 때 문선명 교주는 저를 붉은 감옥에 가둬놓고 탈출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저를 잡으려고 그토록 역사 하였던 것입니다.

2000년 2월 13일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잠실 체육관에서 4억쌍 1차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저는 과천 노인들을 관광버스 4대에 모시고 거짓된 핵사에 동참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이 되겠다고 노인들이 서명한 것도 아니요, 통일교 교인도 아니며, 합동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아닌데 신랑, 신부로 위장하기 위하여 하얀 목도리 1개씩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문선명은 자기 교세를 과세하기 위하여 언제나 40년 동안 허세를 부려왔습니다.

통일교회는 대외적으로 교인이 많은 것처럼 홍보하지만 안에는 교인들이 텅텅 비어있습니다. 전국 통일교회 교인 전체가 3만 3천 명 재적이고 예배인원은 1만 7천명입니다. (학생포함) 큰 기독교회 한곳의 20분의 1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협회본부 안호열 기획국장은 "통일교 재적인원이 20만명 이며, 예배인원은 재적인원의 10분의 1인 2만명이 통일교 전국 한 주일 예배인원이다" 라고 2002년 7월 12일 서울지방 검찰청 조사실에서 주장하였지만 거짓입니다.

일본에 통일교 교인은 2만명에 불과한 것을 3백만명 이라고 허위 주장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그의 제자들은 언제나 합동결혼식 숫자나 예배 재적 행사숫자를 허위로 부풀려 대외적인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4억 쌍 1차 합동 결혼식은 실제로 신랑과 신부는 극소수 였습니다. 전국에서 끌어 모은 노인들 10만 명은 신랑, 신부가 아닙니다 전국의 노인들을 관광버스에 태워 서울 구경과 식사 제공 및 선물을 제공하기 때문에 참석한 것입니다.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는 각지역 노인정 노인들을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단 한번의 만남으로 노인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이 이용물이 되고 통일교(가정교회)에 입교 하여 영혼을 빼앗기고 지옥길로 끌려 가는 것입니다.

 

 

제 22 장 통일교 과천교회 박준철 현직목사 탈퇴

 

기자회견 54가지 비리폭로

 

제 1절 문선명의 정체와 통일교 비리폭로


저는 드디어 2001년 1월 9일 과천통일교회 현직목사로 있다가 기독교 회관에서 가짜 사이비 참부모 재림주 문선명 교주를 만천하에 고발하면서 탈퇴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박준철이라는 한 인간의 출생과 파멸은 문선명 교주와 만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일순간의 악연으로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세뇌되어 재림주 참부모로 믿고 빼앗긴 30년동안 목숨을 바쳐 폐인이 될 때까지 충성하며 지옥생활을 했던 것을 세상에 고발했던 것입니다.

저는 「빼앗긴 30년, 잃어 버린 30년」책을 통하여 문선명의 정체, 피가름 의식, 혈통복귀 구원의식, 합동결혼식의 비극, 문선명의 사생아 등 합동 결혼식후 통일교 한가정당 1억씩을 착취하는 문선명 교주의 잔악상, 통일교 제국의 실체를 테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공익을 위해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를 방지하기 위해 세상에 폭로해야 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탈퇴기자회견을 연기 할 수 없었습니다 탈퇴준비를 했던 것을 마침내 결단하고 통일교 실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던 것을 일간지와 기독교방송, 기독교 언론 40여 곳을 통하여 2001년 1월 9일부터 2003년 1월 9일까지 900회에 걸쳐 낱낱이 문선명의 정체와 통일교의 비리를 폭로하였습니다.

1200만 기독교 성도들이 문선명 집단에 대하여 이단이라고 제쳐둘 것이 아니라 경각심을 갖고 통일교 궤멸을 위하여 1200만 기독교 교인이 하나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궤멸 하기를 바라고 목숨을 바쳐 통일교 실체를 보도 하였습니다.

저는 1999년 10월 1일을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에서 탈출할 날로 정했지만 제 마음이 약하여 자꾸만 미루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과천교회에 올라오는 즉시 탈퇴할 준비를 하였지만 뜻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번번이 시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혼자라도 탈퇴하여 문선명 통일교 궤멸을 위해 외쳐야 한다는 절박감에 통일교를 탈퇴하여 홀로 외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저의 지팡이가 되 주셨고 저의기도를 들어주시고 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문선명이 인류 역사에 없는 사악한 영혼 사기꾼으로 고발합니다 문선명은 선량한 사람들을 끌어다가 합동결혼식을 시켜놓고 천국 가는 면죄부라며 1억원씩 받고 헌금이라는 미명하에 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거액재산 착취 때문에 자살, 이혼, 가정불화, 처절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극적인 삶입니다. 문선명을 믿고 복종하며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하면 구원받고 가정천국을 이루고 천상천국에 간다고 세뇌시키고 있지만 지옥생활이 바로 통일교 생활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하루라도 빨리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합동 결흔식은 파멸과 죽음, 생지옥과 같고 가난한 결혼생활이 되며 문선명 교주는 영혼 사기꾼이라는 것을 세상에 고발했어야 했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재산 착취범이라는 것을 준비부족으로 세상에 늦게 고발한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갈라디아 1:8 '다른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통일교 문선명 이단집단을 이단사이비집단이요, 문선명은 적그리스도라고 매일 이웃집에 전해주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만 통일교가 이단 사이비집단이라고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 성도가 저에게 단 한번이라도 "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요 사이비 교주" 라고 말해 주었다면 저는 통일교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마음속으로 통일교가 이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씀으로 소리 내어 이웃집이나 만나는 사람마다 통일교는 이단 집단이라고 외쳐주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매일 "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요 사이비 교주" 라고 외치지 않으면 박준철 목사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통일교회에매일 매시간 전도되어 영혼을 빼앗기고 지옥으로 끌려 갈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문선명 집단을 궤멸하여 주십시오.

제가 세뇌된 다음에 통일교가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는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요,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 라고 기독교 성도들이 매일 외쳐서 통일교회에 빠지지 않도록 영혼을 구원해야 할것입니다.

 

제 2절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통일제국의 정체폭로


2001년 1월 9일 15:00시(오후 3시), 한국 기독교회관 2층 예배실에서 통일교 현직 박준철 목사의 탈퇴성명서 기자회견문

 

2001년 1월 9일,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기자회견문. 국민일보, 기독교TV(ch 42), 기독교방송, 극동방송, 크리스찬뉴스위크지, 교회연합신문,한국선교신문 특집보도, 기독공보, 기독신문, 개혁공보 연재, 기독교보, 기독타임스 연재, 기독교 타임스, 장로신문, 침례신문, 크리스찬연합신문, 크리스찬한국신문, 복음신문, 크리스찬신문, 목회자신문, 선교신문, 들소리신문, 뉴스앤조이, 크리스찬데일리뉴스(CDN), 기독교연합신문, 기독교신문,교회와신앙, 현대종교 등 그 외 기독교 모든 교단지와 모든 초교파지에서 문선명 집단 궤멸을 위해 언론사 관계자님께서 사명감을 가지시고 적극적으로 보도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 문선명은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거 역했다.


하나님께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말씀 하였는데,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자신이 인류의 구세주 재림주 참 부모라고 하며 통일교 교인들 앞에 신으로 군림한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은 하나님 이름을 이용하여 기독교 교인들과 통일교 교인을 속이는 최고의 자칭 신이요, 인류역사에 가장 큰 살아 움직이는 우상이다.

 

2. 문선명은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거 역했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경배하지 말라" 말씀하였는데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이 자신에게 경배하게 하는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우상이다. 통일교 교인들은 문선명 사진을 걸어놓고 아침 · 저녁으로 경배하며 예배 때 마다 문선명에게 경배한다 또한 문선명은, 17살에 교통사고로 죽은 문선명의 아들인 문흥진을 천국과 영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문흥진이 재림 부활했다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주장하며 미혹하여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다.

문선명의 청평 천성 왕림 궁전 주위에는 참 생명과 희망을 주는 다섯 나무와 생명수가 있다. 그리고 문선명은 자칭 하나님이 세웠다며 천신 수나무를 만들었다. 사랑나무(수양버들나무), 심정나무(뽕나무), 만물나무(밤나무), 충성나무(소나무), 축복나무(잣나무) 등이 다섯 나무에 속하고, 통일교  교인들은 이 다섯나무에 경배하고 기도한다.

문선명은 일본 천지종교 대만 불교와 하나되어 우상숭배를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 때 마다 불교 스님이 염불을 외우고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우는가 하면 힌두교, 회교, 유사 사이비종교 지도자를 합동 결혼식장에 모아 하나님에게 우상 숭배자 총대회를 한다. 그것이 바로 문선명이 하나님의 대적 원수라는 증거이다.

 

3. 문선명은 십계명의 셋째 계명을 거역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말씀하였는데 문선명은 스스로를 참 부모, 천지부모, 재림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었다. 따라서 문선명은 적그리스도이며 희대의 영혼, 육신을 빼앗는 사기꾼이다. 문선명은 자신과 통일교 교인을 속이고 온갖 무당, 푸닥거리를 하여 스스로 이단 사이비임을 증명하였으며 통일교 교도들을 지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4. 문선명의 통일교 원리강론은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 교리를 훔쳐온 것이다.

 

문선명은 16세(1935년)때에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인계를 받아 재림 주님으로 세워 졌다고 통일교인들에게 강조한다. 그러나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참 부모도 재림주도 아니고 사악한 거짓 선지자다.

문선명은 1939년 경성 상공 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을 하였고 1941년 3월에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고등학교 전기과에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2년후 중퇴 하였다. 1944년에는 한국에 귀국을 하여서 토목 건설회사 전기기사로 취직을 해 있다가 1945년 10월에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에서 성서신학과 기독교 근본원리 교육을 6개월 받고 탈퇴하여, 문선명 자신이 김백문과 같이 사이비 교주 노룻을 하기 위하여 통일교를 만들어서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 교리를 훔쳐온 것이 통일교 원리강론인 것이다. 이런 통일교 원리강론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새로운 진리요, 성약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문선명은 거짓말쟁이다.

문선명이 김백문 교리를 도용하여 재림주 행세를 하듯이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탈퇴한 정명석(JMS)이 통일교 교리를 이용하여 30개론을 만들었다. 정명석은 문선명과 똑같이 사이비교단을 만들어 문선명과 같은 재림주 노릇을 하며 수많은 영혼을 빼앗고 피가름 의식을 치르며 합동결혼식을 하여 교세확장을 꾀하고 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 밑에는 또 다른 사이비 교주 생산공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문선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거짓말이다. 이스라엘 수도원 사이비 교주 김백문의그 교리를 훔쳐 기독교 근본 원리 교리를 6개월 동안 교육받은 문선명이 도용한 것이 사악한 사이비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창조원리, 타락론, 복귀원리, 재림론까지 김백문 교리와 동일하며 원리강론은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고 복종하여 영원한 노예로 세뇌 시키기 위한 것이다.

 

5. 문선명 교주가 메시아요 참 부모라면 자녀들은 통일교 원리에서 주장하는 4대 죄인 원죄, 혈통죄, 연대죄, 자범죄가 없어야 할 것이다.

문선명 자녀들은 죄가 없는 완벽한 인격자가 태어나야 하는 것인데 결혼한 자녀들이 음란죄, 간통죄, 마약 등 온갖 죄를 짓는 것을 볼 때 문선명은 가짜 재림주, 적그리스도, 가짜 부모인 것이다.

(미국 CBS TV방송, KBS 위성TV(2000.09.02방송) - 문선명의 큰아들:문효진과 홍난숙 부부의 결혼, 이혼, 마약, 음란, 파경프로 1시간 방송함)

 

6. 문선명은 이 시대 최고의 혈통복귀 피가름광이요, 가정 파괴범이다.


문선명의 원리 강론 교리는 음란죄, 혈통복귀 피가름 죄를 가장 큰 죄로 강조한다. 그러면서 자신은,혈통복귀, 피가름 역사로 첫번째 부인인 최선길과 그의 아들 문성진을 버리고 이혼하였다. 문선명 교주는 수많은 여인과 간통을 했다.

문선명은 혈통복귀 피가름을 통한 혈통 복귀 원리의식으로 지금까지 처녀와 유부녀를 간음하여 개인과 가정을 파괴시켰다. 이렇게 문선명의 혈통 복귀 의식으로 낳은 자녀만도 18명으로 밝혀졌으며 이것은 문선명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을 저질렀는가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문선명은 천사장 루시엘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이 지의 뿌리가 아니라, SEX로 타락한 것이 선악과요 지의 뿌리이기 때문에 문선명 재림주가 SEX로 타락한 인류를 SEX로 복귀 해야된다는 혈통복귀의식 즉 피가름 의식을 행해야만 구원받고 천국 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선명은 인류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처녀들과 유부녀들은 3일 행사인 혈통복귀 피가름 의식을 치러야 완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여 3일 의식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피가름, 혈대교환, 혈통 복귀 의식으로 3일간 간음, 간통 의식을 치러 수 많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을 간통하여 사생아를 낳고 가정을 파괴하였던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1953 년 12월 24일 밤부터 부산영도 신성묵과 유신희 부부 집에서 21일 동안 부흥집회를 하였다. 부흥집회를 하는 첫날밤에 Y대 여대생 김영희와 혈통복귀 피가름 혈대 교환의식을 통하여 장래가 촉망 받는 여대생의 인생을 파멸시켰다.

그 외에도 문선명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을 혈대교환 의식으로 희생시켜 인생을 파멸시켰고 수많은 가정을 파괴시켰다. 문선명 교주는 희대의 가정파괴범, 패룬범으로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를 통한 혈대교환 혈통복귀로 간음하였으며 하나님도 사탄도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이다.

그 외에도 6~60마리아와의 혈통 복귀의식을 치렀으며, 수많은 가정을 파괴시켰다. 문선명은 현재 부인인 한학자와 1960년 4월 11일 문교주(40세), 한학자(17세)에 어린양 결혼잔치를 하고도 1965년도에 최순주 처녀와 간음혈통 복귀의식을 하여 '박사무엘' (박준경)이라는 사생아를 낳아 길렀다. 미국에서도 간음 혈통 복귀의식으로 '새미' 라는 사생아를 낳아 문선명이 기르고 있다.

 

7.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지옥간 조상귀신을 위해서라며 거액 헌금을 받고 천국행 면죄부를 팔고 있다.

 

그러나 문선명은 자신의 전처인 아내도 전도하지 못하고 이혼하였으며,자식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이비 적그리스도이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에게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서 지옥간 조상들 천국행 표를 사라고 명령하고 천국행 표를 팔고 있다. 1대부터 7대까지는 남편과 아내 직계조상 280만원, 일본축복 가정은 2,000만원, 7대부터 14대 조상, 14대부터 21대 조상까지 일정헌금을 내야 되고 120대 조상까지 천국행 표를 팔고 있는데 특히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에게 조상을 팔아 거액재산을 착취하는 행위를 즉시 중단 시켜야 할 것이다.

문선명은 인류역사에 가장 부도덕한 개인 가정 파괴범이다.

 

8. 문선명 교주는 참가정 순결 운동본부를 만들어 초 · 중 · 고등학교 순결 캠페인을 하고 있다.

 

문선명이 자칭 재림주, 참 부모라면 가장 순결하고 깨끗해야 될 메시아데 오히려 그렇게 수많은 여인들과 혈통복귀 피가름 관계를 갖음으로 하나님, 기독교인, 통일교회와 교인을 속였다.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통일교 교리는 순결을 가장 강조하면서 간통죄를 가장 큰 죄로 여긴다. 그것은 단지 문선명 교주의 교활한 위선이요, 거짓된 행위인 것이다.

통일교 세력확장과 전도 활동목적으로 순결캔디를 학생들에게 먹이며 순결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거짓된 혈통 복귀의식을 감추기 위해 통일교 교인들에게는 음란죄를 가장 큰 죄악으로 교육을 하고 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참으로 가증스러운 사람이다.

 

9.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거액 재산착취의 수단이다.


통일교는 합동결혼식을 하면 구원을 받고 자녀들도 원죄, 혈통죄, 연대죄, 자범죄가 없어진다고 했지만 통일교 교인들은 여전히 죄가 남아 있고 구원받지 못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집단에서는 필리핀, 태국 처녀들을 1천 만원을 주고 데려와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이다. 합동 결혼식 후 7천만원~l억원의 거액 재산을 바쳐야 한다. 통일교 교인들이 문선명 교주에게 내야하는 헌금으로는 죄를 용서해준다는 총 탕감비 1200만원이 있다.

또, 통일교 교인은 문선명 교주의 참 아들 딸이기 때문에 자기 재산을 참부모인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 소유권 이전이라는 뜻의 총 생축 헌금 2100만원, 나라를 위한 구국 헌금 1천만원(성인 6인 가족기준), 지옥간 조상 천국 보내는 헌금 3300만원, 천성 왕림 궁전헌금 320만원, 문선명 비행기 헌금100~1000만원, 병원헌금 160만원, 구국헌금(5인 가족기준) 800만원, 문선명 나라 건국헌금 매월 1인당 17만원, 매월 10의 3조 헌금, 8대 명절헌금, 각종 교회 행사헌금 등 30가지가 넘는다.

따라서 전 재산을 바치고도 빚 더미에 올라 앉은 것이 비극적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인들의 처참한 생활이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 후 일생 동안 천국이 아니라 생지옥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또 합동결혼식 후 문선명을 믿고 복종을 하여도 구원이 없다. 나는 통일교회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눈 감으면 지옥 갈 문선명이 전용비행기가 왠 말인가?

 

10. 문선명은 한국과 일본에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에게 전용 비행기 헌금을 강요하여 2000년 2월 10일에 전용 비행기를 5천만달러에구입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 그룹이 1998년 IMF 때 부도나 멸망하였는데도 통일교 교인 들에게 거액의 재산을 착취하여 초호화판 생활을 하고 있다. 게다가 81세나 되는 문선명 교주는 불쌍하고 가난한 통일교 교인들에게 가정당 100만원에서 1000만원씩의 헌금을 거 두어 전용비행기를 샀다.

과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81세 노인이 통일교 교인들의 피눈물 어린 헌금으로 전용 비행기를 사야만 했는가? 또한 문선명은 각 나라마다 초호화 주택과 최고급 자동차를 구입하여 온갖 호의호식을 하면서 제왕처럼 살고 있다.

통일교 교인들은 피골이 상접하여 죽어가는데도 문선명은 교인들에게 공갈 협박을 하여 거액 재산을 착취하고 문선명의 제국을 세워야 하는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불쌍하고 가련한 처지를 이해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와 통일교 교인들과 더불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교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문선명은 입으로는 사랑과 희생, 봉사, 제물을 외치지만 불쌍한 통일교 교인들의 처절한 피, 땀, 눈물을 먹고 사는 사악한 사이비 교주일 뿐이다.

 

11. 문선명은 자칭 황제 재림주 참 부모라면서 자녀 신앙도 책임 지지 못하는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의 자녀들은 4가지 죄가 없다는데 오히려 그들은 마약, 혈통 복귀 피가름, 이혼,간통으로 타락하여 감옥을 가는 현실이며, 이 세상의 죄인들 보다도 더 많은 죄를 지었다. 그것은 문선명이 자신도 구원을 받지 못한채 죄악을 저질러 하늘에 죄가 닿아 자녀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다.

 

12.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통일교 목사들의 목숨은 하루살이같은 일회용이다.

 

반면에 통일교 목사들은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수 십명에서 백 여명의목사들이 매년 생활고로 목회를 그만두고 통일교회를 이탈하고 있다.

2000년 1월 이후부터 9월말까지 목회를 그만 둔 목회자만도 전국 시 ·군 250명 목회자중 150명이 넘는다.

게다가 전세계 각 나라의 대표자가 되는 국가 메시아 185명을 문선명 교주는 목사 직분을 박탈하고 한국의 시군구 연합회장이라는 직분을 주어 각나라 국가 메시아직에서 박탈시켰으며 월급 50만원씩을 받게하여 가정 생활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2000년 9월 18일에는 전국의 통일교 목사직을 박탈하는 살인적인 인사를 행하였다. 통일교에 충성한 한국 40~60대 목사 217명의 목사직분을 문선명 교주는 박탈하였다. 전국 시군구 통일교 목사가 250명인데 217명이라면 거의 전체 목사들을 파리 목숨같이 짤라 버린 것이다.

통일교 목사들은 일생동안 문선명 교주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아내와 중 고 · 대학생인 자녀들을 데리고 교육비와 생활비, 퇴직금 10원도 받지 못하고 쫓겨 났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개인의 인격과 가정의 행복을 빼앗았다 현재 전국 통일교 목사들은 배신과 분노, 자괴감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인사단행은 예전에도 심심치 않게 이루어졌다. 1981년 10월 20일에 전국 통일교 목사들을 잔인하게 내쫓았고 1988년 6월에도 잔인한 인사이동으로 통일교 목사들의 가정을 파탄시켰으며 1991년 8월 30일에는 전국 통일교 전체 목사 500명을 사전에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단칼에 잘라버렸다.

문선명은 자신에게 충성한 목사들을 상대로 인권말살, 가정파괴, 생활파괴를 한 것이다.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들 가정은 생활을 해야 했는데 문제는 이들 중 중 · 고 · 대학생 의 자녀와 있으며 결혼을 목전에 두고 있는 자녀들이 있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데도 문선명 교주는자신에게 30년간 충성한 통일교 목사들에게 퇴직금 10원도 주지 않고 잔인하게 쫓아내어 버렸던 것이다.

인류 역사에 '네로 황제 , '히틀러' , 어떤 공산주의자도 문선명 교주처럼 이렇게 잔인한 종교 지도자도, 파괴자도 없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그 죄악과, 문선명 교주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3. 잔인한 사이비 교주 문선명은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그룹 내 통일교 회사의 교인들에게 말 한마디 명령으로 100억, 1000억의 거액 헌금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통일교 목사들을 몇 번이나 단칼에 무 자르듯 잘라 버리는 잔인한 폭군이다.

 

하루아침에 가정천국을 외치는 문선명 교주가 통일교 목사들 가정과 통일교 교인가정의 행복추구권을 박탈 시켜 버리는 행위는 참부모가 할 행위가 아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일회용으로 이용당하고 버림을 받았다. 통일교회를 탈퇴한 목사와 교인들은 문선명 교주에게 빼앗긴 세월을 한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문선명은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 또한 문선명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14. 문선명 통일제국을 세우기 위해 각분야 지도자를 포섭하는 행위를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막자.

 

문선명은 통일교인들의 피살을 짜서 정치인, 경제인, 교수,종교인, 언론인을 매수하였다. 그들을 매수하기 위해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통일교 48년 역사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통일교 교인들의 피·눈물을 짜서 각종 국제회의라는 구실로 왕복 항공편,호텔, 각종 만찬, 선물 비용 일체를 받았음은 물론 문선명 본인의 야망과 욕망인 메시아로 인정을 받기 위해 돈을 물 쓰듯이 투자하였다. 통일교 교인들이 장사와 온갖 노동, 파출부 일로 거액 헌금을 하면 문선명은 그 헌금을 물쓰듯 하며 자신을 참부모 재림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와 생활고로 자살하고 가장 파탄이 된 통일교 교인들을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문선명의 죄악은 하나님에게 이미 보고되어 있어서 심판 받을 날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15. 문선명의 아들 문흥진이 17세에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영계의 총사령관으로 해놓고 예수님도 시중을 드는 부하라고 주장하여 기독교를 희롱하고 있다.

 

1200만 기독교 교인은 예수님을 믿고 성경진리를 믿는다면 문선명의 정체를 알고 예수님을 명예훼손죄로 고발하여 사법조치를 해야할 것이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에게 교통사고로 1984년도 1월 2일날 죽은 둘째 아들이 희생의 제물로 간 것이라고 거짓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죽은 문흥진을 통일교 교인들은 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문선명은 지금 청평에 천성 왕림 궁전을 건축해놓고 문흥진을 영계의 총 사령관이라며 살아있는 통일교 처녀와 영혼 결혼을 시켜 놓았다. 참으로 이 지구상에 이런 사이비 집단이 있다는 것을 1200만기독교 성도들은 경각심을 갖고 통일교를 대처해야 할 것이다.

 

16. 문선명 사이비 집단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에게서 공갈 협박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불어넣어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다.

 

1대~120대 지옥에 간 조상을 천국에 보내는 구원헌금으로 무조건3,300만원~5천만원의 거액 재산을 빼앗는다.

 

17 문선명 교주의 하수인 사이비 정치 지도자들을 낙선시키자.


문선명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이 낙선시키자.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의 각종 만찬, 세미나, 남북통일운동, 승공연합, 훈독회 행사장에 참석하여 문선명 교주를 참 부모, 재림주, 구세주라고 격려사, 축사, 극찬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1200만 성직자,성도들이 전국 시 · 군 · 구에서 총궐기 하여 낙선 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18. 문선명은 중풍으로 죽은 혼순애 장모까지 대모라고 칭하여 재림했다고 사기치는 사건.

 

문선명의 장모는 중풍으로 쓰러져 10여 년을 주위사람이 대 ·소변을 받아내야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였다. 문선명은 장모가 죽자 홍씨 대모님이라고 큰 칭호를 내리고 재림하였다고 통일교 교인들을 속이고 있다. 또한 이상길 통일사상 연구원장이 사망하였는데, 이상길이 '하나님의 사자' 라고 하며 통일교 세뇌교육에 이용하고 있다.

 

19, 문선명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는 기독교 목사를 근절하자.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에서는 통일교회의 모든 자금을 투입하여 모든 항공료 ·왕복 차비 ·호텔비용 일체를 부담하며, 기독교 목사 장로를 포섭하고 있다. 통일교 각종 만찬 세미나, 행사장에 참석하여 문선명을 참 부모 재림주로 극찬하는 성직자와 성도들을 회개시키고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것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막대한 자금투자로 만든 기독교 목사·장로 ·종교인 포섭단체

①초 교파 기독교 협의회 회장인 이재석은 문선명의 최초36가정 이며, 핵심 인사이다.

② 한국 8대 종교인 협의회 회장 이재석.

③ 한국 민족 종교 협의회 회장 이재석.

④ 한국 종교 지도자 협의회 회장 이재석.

⑤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 회장 이재석.

⑥ 세계평화 초종교 연합 회장 곽정환(통일교 이인자).

⑦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 회장 곽정환.

⑧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총회 총회장 김광명,

⑨대한예수교장로회 총화총회 총회장 이병옥 등이 통일교에서 세운위장된 기독교 단체이다.

 

20.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각종 만찬, 세미나에 참석하는 언론인.학계 · 문화계 인사들을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이 추방시키자.

 

21. 한국방송 언론의 공익을 위한 것이라면 문집단의 비리를 고발 보도하라. 매일 희생자가 늘어가고 있다.

 

각종 언론 방송에서 통일교 교리비판, 부정부패, 재산착취, 우상숭배, 가정파괴 행위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다시는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22,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 이주계획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IMF때 통일그룹 부도 후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 3만 5천명을 남미 브라질 자르딘에 1억 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만든 새 소망 에덴동산으로 이주할 것을 계획한때도 있었다.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에 초 · 중 · 고 · 대학은 이미 건축 완공을 하였으며, 주택을 건축 중에 있고, 앞으로 50억 평을 더 매입 할 계획이다. 그 50억 평에서 통일교 교인들은 후손 대대로 문선명의 노예가 되어 밀림을 개간하고 농업, 어업, 산업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또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일교인들은 전 재산을 바쳐야 할지도 모른다.

 

23. 문선명 통일교 집단은 세계 각 도시, 건물, 대지를 매입하는데, 금융감독원과 검찰에서는 철저히 조사하여 외화 밀반출 여부를 조사해야 할 것이며 위법을 하였다면 사법조치를 내려야 할 것이다.

 

24. 문선명 통일교 사교 집단은 1998년 IMF직후 통일그룹이 1조 7천억 은행빚을 갚지 못하고 부도되어 파산했을 때 전국 통일교회 대지와 교회,재단을 분리시컥 국민의 재산을 빼돌렸다.

 철저하게 사법부에서 조사하여 위법을 하였다면 종교법인을 박탈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25. 문집단의 청평천성왕림궁전의 의혹을 환경단체는 조사하라.


문선명 사이비 집단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중림리에 1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청평 천성 왕림궁전이라는 건축물을 지어놓고 매주 5천 명~l만 명의세계 각지에 있는 통일교 교인들을 모아서 우상숭배, 세뇌교육, 재산착취, 공갈협박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통일교 교인들은 매주 수 천명이 모여 집회를 하면서 대 · 소변을 보느라고 수도 서울 시민의 식수원을 오염시키고 있다. 환경부와 환경단체는 철저히 조사하여 위법한 사실이 있으면 건축물을 철거하고 사법 조치해야 한다. 통일교 제주 영빈관이나 수택리 영빈관도 조사하여 위법을 하였다면 철거해야 할 것이다.

 

26. 문선명 통일교 집단은 폭행 · 폭력 집단이다.

 

저자의 교회를 빼앗고, 강제 인사부정으로 교구장 직에서 끌어내렸다. 통일교 협회 국장 ·부장 ·평직원까지 수십명이 동원되어 내가 시무하는 서울 노원 교회 안에 밀고 들어와 노원 교회 교인들과 시위와 몸싸움을 했었다. 협회본부에서는 전 김승철 총무국장과 전 김철현 가정국장이 협회 전 직원들 앞에서 저자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하여 그 때의 후유증으로 지금 심장병에 시달리고 있다.

 

27. 저자 주위에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단의 살인적 재산 착취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처절한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가정파탄,별거, 이혼, 자살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가정 파괴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28.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자금줄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 그룹 부도 후에도 초호화 생활과 최고급 외제자동차, 궁전같은 각 나라의 저택을 구입하였다. 통일교 교인 가정당 3백60만원~l천 만원까지 거액 헌금을 거두어 2000년 2월 10일에는 5천만 달러를 주고 개인전용 비행기까지 구입하였다. 문선명 교주는 81살 된 노인이라 저녁에 자다가 아침에 못 일어나면 죽음을 맞아 영계에 갈 수 있는데 무슨 초호화 비행기 (5천만달러/한화 6백억)가 필요한가?

문선명이 그 동안에 지은 죄악으로 억만년 지옥 불에 들어가 살도록 하나님께 고발할 것이다. 통일교 교인들이 처절한 가난 속에서 막노동, 파출부, 식당 일로 모은 거액 헌금을 낭비하는 것이 문선명은 참 부모 재림주가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탄 마귀 사이비 교주라는 증거이다. 

 

29. 저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용서할 수 없다.

 

저는 30년 동안 세뇌되고 마취되어 죽도록 충성했던 잃어버린 그  시간을 찾을 수가 없다. 저는 더 이상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이용 당할 수 없고, 사이비 교단에서 충성할 수 없기 때문에 저의 양심에 따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통일 교회를 탈퇴하고 비리를 폭로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30.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세계 평화 통일당을 창당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그 동안에 각종 정치인들을 포섭하고 세뇌 교육을 시켰다. 문선명 교주는 "2천년 전 예수님이 나라와 백성이 없고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고 강조하면서 문선명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통일당을 창당한 것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최종목적이다.

 

31.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2004년 4월30일까지 전세계 185개국 통일교 교인 총 동원령을 내렸다.

 

대한민국을 통일 제국으로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 목적달성을 위해 통일교 합동 결혼식한 부인들은 전 재산을 바쳐야 되었다. 또한 남편과 초 '중 · 고 · 대학생 자녀를 집에 두고 가정을 떠나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합동 결혼식한 부인 1만 5천명은 전국 시군구에 있는 통일교회에 합동결혼식한 통일교 부인들이 20~70명씩 배치 되어서 목숨을 걸고 미혼남녀를 전도하고 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부인들은 교회에 매월 생활비로 각자 10 만원씩을 지불하며 생활하고 있다. 통일교회에서 합동결혼식한 부부들은 일생동안 각종 전도활동에 동원되어 부부가 별거하는 때가많다. 행복한 가정천국이 아니라 처절한 비극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32,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전국 시군구에서 범 기독교적인 통일교, 사이비종교 반대 뿌리 뽑기운동 귈기대회를 해야 한다.

통일교회 미혼남녀 합동결혼식을 하면 가정이 파탄되고 우상숭배를 하고 재산착취를 당하며 영혼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 통일교회와 사이비 종교 교리 비판과 피해자 폭로 대회도 같이 열어야 글다.

 

33. 세계일보는 통일교인들의 매달 50억 헌금으로 유지되는 적자신문.


문선명 통일교 대변지이며 방패막 역할을 하는 세계일보는, 매월 일본에서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꽃팔이, 생선장사, 막노동을 하여 모은 50억이라는 거액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 돈으로 세계일보 1,200억 융자금 이자를 지불하고 세계일보 사원들의 월급을 주고있다.

세계일보는 통일그룹 부도 후에 6개월 동안 월급을 못 주는 때도 있었다. 게다가 새계일보 기자 월급은 다른 신문사의 절반이다. 세계일보를 폐간하는 길만이 통일교 교인들을 재산 착취에서 해방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34. 문선명은 통일제국을 건설하지만 무너진 통일제국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그룹 부도 후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여 교회와 통일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금융감독원과 통일그룹 주 거래은행이 였턴제일은행은 통일교에 1조 7천억을 환수하라. 국민의 재산을 완전 환수하여 통일그룹을 완전 폐업시컥야 한다. 그 길만이 통일교 교인들이 문선명 사이비교주에게 재산을 빼앗기지 않고 지옥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35.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한국과 일본의 방송언론이 대대적인 비리와 부정을 보도하면 궤멸될 수밖에 없다.

 

전세계 통일교회 운영 자금줄인 한국과 일본 통일교회 교인 재산 착취를 근절시키면 통일교회는 자동적으로 궤멸될 수 밖에 없다. 한국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은 단결하여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궤멸과 악랄한 사이비 교단 궤멸을 위해 외쳐야 한다.

현재 사이비 교단은 300곳이넘고 있다. 300만 사이비 교단의 교인들은 영혼을 빼앗기고 처절한 노예가 되어 지금도 고통 당하고 있다. 그들도 우리 부모 형제요, 이웃이다. 해외선교도 중요하지만 내 나라, 내땅, 내 이웃에 사이비 교주가 나타나 영혼을 빼앗고 이리와 같이 선량한 사람을 파멸시키는 사이비 교주를 궤멸시키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께 무엇을 보고할 것인가? 선각자 된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이 가장 시급하며 사이비 교단 궤멸을 위해 싸우고 외쳐야 한다. 이단교회를 뿌리뽑아야 한다.

 

36.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이 그 동안에도 사이비 종교에 대한 대책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는 사이비 교주와교단이 선량한 영혼을 미혹하여 영혼과 육신을 파멸시키고 간통, 우상 숭배,참부모 재림주라고 자칭하고 거액재산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고 있다.

 

이제는 성경 진리의 말씀대로 사탄 마귀의 화신인 문선명 통일교를 뿌리 뽑기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 사이비 교단과 싸워서 승리해야 한다.

일본 기독교 1%인 120만명인데 통일교 합동결혼식후 거액 재산착취를 집중 언론 방송 보도하여 통일교 교인이 300만명 이라고 재판정에서 거짓증언 하였지만 실제 2만명에 불과하다.

 

37.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그 동안에 통일교 교인들에게 기도 마지막에 "문선명 참 부모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라고 시켰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라고 한다는 것은 상상도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 바뀌어서 통일교 교인들에게 재산착취와 책임강조를 위해 "참부모님의 승리권을 축복으로 이어받은 000목사(교인들은 장로,권사, 집사직분을 넣음)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이 기도 끝마무리를 "축복의 중심가정 000(교인들은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넣음)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라고 한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야말로 자기 자산도 구하지 못하고 자기 자녀들도 구하지 못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는가?

통일교 교인들을 노예로 삼아 지옥으로 끌고 가며 사악한 기도 마무리를 시키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대적이다. 한국 1200만 기독교인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4명 중 1명이 기독교인이다.

통일교인 오전국 총재적 인원이 33000이며 예배는 학생을 포함해서 17000명이다. 기독교인 1200만 목사 성도가 예수님 이름으로 단결하여 궤멸하자. X 통일교회(가정교회)는 예배때 주기도문도 사도신경도 없다.

 

38.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우상숭배, 재산 착취의식은 인류역사의 최대 사기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통일 그룹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통일그룹은 1998년 IMF 때 부도로 망하여 기업체가 국가관리 기업이 되었다. 또한 5,000만 달러를 투자한 오인천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도 하지 못하였으며 실패작이 되어 버렸다. 중국 판다 프로젝트도 통일교 교인들의 고혈인 12억 달러를 투입하였지만 사기 당하여 망해버린 결과가 되었다.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미국 뉴요커 호텔(43층)을 매입하여 운영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미국 워싱턴 D.C 셀라톤 호텔도 적자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파라과이 아메리카노 호텔도 경영이 어렵고, 해양산업도 실패한 입장이다. 미국 워싱턴 타임지는 적자로 부도위기에 있다.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의 고액 헌금이 없으면 그날로 통일교 관련 신문사가 부도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세계일보도 부도직전으로 매월 50억을 한국 ·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이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을 바쳐서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통일교 방패막인 세계일보는 통일교 교인들의 헌금이 끊어지면 운영 자금이 고갈되어 그날로 부도가 날 지경에 이르렸다.

그 외에도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계획하는 것마다 실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문선명 교주의 통일교 목회자 양성기관인 선문대 신학과 학생들도 문선명 교주의 살인적 목회자 인사조치와 통일교 선배 목회자들의 처절한 파멸과 죽음의 길을 보고서 80%도 넘게 목회를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고 있는 실정이다.

문선명 교주가 목회자를 양성한다고 했지만 통일교 목회자는 파리목숨이라는 것을 알고 신학생들도 도망치고 있는 실정이다. 문선명은 하루아침에 전국 통일교 목회자 전체 500명을 사전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잘라 버리는 잔인한 폭력 인사를 몇 번씩이나 서슴지 않고 행하였다.

그래서 통일교 목회자 가정은 처절한 가난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나와 같이 가정이 파탄된 것이다. 통일교회 후배 목회자나 2세 목회자들은 선배 목회자들의 비극적 인 파멸과 박준철 목사의 결과를 되새걱 보아야 할 것이다.

통일제국은 문선명 교주의 야망에서 나온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하나남의 원수요, 전세계 19억명 기독교인의 원수요 한국 1200만 기독교인의 원수다. 통일교회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 고액헌금과 생활고에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교인들의 원수요, 가정파탄, 이혼, 별거로 통일교회를 탈퇴하고 원한이 맺힌 사람들의 원수이다. 통일교 교인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문선명 교주는 하나님의 심판과 역사의 심판, 인류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39.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제국은 구원이 없다.

 

저는 30년 동안 통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제가 존경 할만한 신앙자나 구원을 받았다는 통일교 교인을 만나보지 못했다. 미혼 남녀가 통일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과 아내, 자녀들이 문선명의 노예가 되는 길이며 가난의시작인 것이다. 제2의 박준철이 되는 것이다.

저는 죽도록 충성해도 잔인한 문선명 교주의 사악한 명령과 행위로 폭력 ·폭행을 당하고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되어 폐인이 되었다. 선량한 한국의 미혼 남녀가 문선명 집단에 들어와 인간노예가 되어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보다는 독신으로 혼자 사는 것이 차라리 백배 나을 것이라고생각한다.

 

40. 한국과 일본의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을 천국에 보내준다는 미명하에 거액 재산을 착취하여 1200억을 만들었다고 한다.

 

문선명과 사돈 관계인 통일교 이 인자 곽정환은 D종합금융에 부실 여부도 알아보지 않고 투자했다가 부도나는 바람에 단 10원도 돌려 받지 못하고 날렸다는데 사실인가?

곽정환 회장이 하는 것마다 실패요, 파멸이라고 생각한다. 통일교 교인들은 목숨을 바쳐 거액헌금을 만들어 문선명 교주에게 바치지만 헛된 수고일 뿐이다.

 

41.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기 위하여 브라질에 황족 입적 40일 수련 때 2100만원을 받은 것도 모자라 청평 천성왕림궁전에서 재탕으로 황족 입적수련 21일 수련회에 120만원씩을 받았으며 입적 통일 축복식에서는 70만원씩을 통일교 교인들에게 내라고 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은 처절한 가난, 빛더미에 올라앉는 것이다.

 

42.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최종 목적은 백성과 나라를 세워 통일 제국을 건설하여 황제로 취임식을 하고 군림하는 것이다.

 

문선명의 황제 취임식은이미 1985년 12월 25일에 완료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2001년 1월13일에는한국 청평 천성 왕림궁전에서 전세계 합동결혼식을한 통일교 교인들 3천명을 모아놓고 하나님 왕권 즉위식을 올렸다. 그러나 이 의식은 문선명 황제즉위식이었다. 2003년 1월 1일, 1월 13일에도 청평 천성왕림궁전에서 문선명 우상화 극이 열렸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동토의 왕국인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통일교 교인들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피를 흘리는 희생을 시키고 있다. 사이비교주의 죄악과 말로를 하나님은 보고 계시고, 심판만이 남아있다. 문선명은 지금까지 나라를 위하고 이 민족을 위하여 국제 승공연합 활동과 국민 연합 활동, 기독교 초교파 활동, 세계 언론인 연합활동, 세계 평화교수 협의회, 세계 평화문화연합활동, 국제교육재단, 세계평화 종교연합,국제과학 통일회의, 전국 시 · 군 · 구 통일교회 각 동 · 통 · 반 지역 전도활동, 훈독회 활동, 각종 만찬·세미나 대회, 통일교 합동결혼식 행사 대회,부도난 통일그룹 각종 사업체 활동, 문화단체 활동, 세계평화 초 종교연합활동, 세계 평화여성쳔합 활동, 세계평화청년연합 활동, 세계 평화 정상회의 활동 등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자신을 재림주 참부모 메시아 구세주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 47년 동안 활동을 한 것이다. 그것이 문선명의 최종 활동목적이다.

문선명 교주는 지금까지 인류 구원과 평화와 사랑, 지상천국을 외치고 있지만 자신의 야망과 통일제국을 만들기 위한 욕망으로 통일교 교인들을 처절하게 희생시키고 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가정파괴 우상숭배 지옥에 간 조상의 이름을 팔아 거액의 재산을 빼앗고 있다. 구원을 외치지만 지옥이요 평화와 사랑을 외치지만 저 같이 가정파탄 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문선명은 가련한 통일교 교인들의 영혼을 빼앗아 통일제국을 세우는 이용물일 뿐이다. 통일교회에서 갈라져나간 사이비종파가 정명석(JMS)등이 문선명 교주 밑에서 배운대로 통일교를 떠나 사이비교주 노릇을 하고 있다. 지금 통일교회 출신이단이 30파로 늘어났으며 앞으로 70파, 120파가 넘는 사이비 교파로 늘어나 분열되어 산산조각이 나서 파멸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43. 문선명은 예수, 공자, 석가, 무하멧을 축복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통일교 여인들과 결혼시켰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예수님을 실패자 부하로 격하시키고 예수님을 믿어도 완전구원이 없으며 기독교 교인들이 천국도 갈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도 구하지 못하고 자식들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문선명 자신 만이 참부모 재림주로서 예수를 천국 보낼 권한이 있고 인류와 기독교교인을 천국 보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예수탄생일을 1971년 1월 3일날 계시를 받아 정하고, 통일교 차만숙 권사의 딸인 장정숙을 '성신' 이라고 정하여 예수와 결혼을 시켜 예수님의 명예를 파멸시켜 버렸다. 차만숙 권사의 딸인 장정숙을 일생동안 시집도 가지 못하는 처녀로 만들어 인생을 파멸 시켜 버린 결과가 되었다.

문선명은 통일교 세뇌 교육용으로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이라는 책에 통일교 교인이였던 이상길이 죽어 영계에 가서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예수, 공자, 석가, 무하멧을 만났다고 했다.

예수, 공자, 석가, 무하멧은 문선명 재림주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세미나를 열고 통일교 교리 교육을 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수가 영계에서 지상에 있는 문선명에게 장정숙과 축복결혼을 시켜 주어서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주장하며 통일교 교인들 세뇌 교육용으로 이용하고 있다.

문선명은 1999년 12월 29일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예수 드림 이라고 편지를 보내왔다고 하는데 이것을 통일교 교인들은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공자, 석가, 무하멧도 문선명이 통일교 여인들과 결혼시켜 주었다. 21세기 최첨단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이 때에 문선명과 古 이상길, 김영숙을 내세워 통일교 교인들 아침, 저녁 세뇌교육용으로 활용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문선명의 조상 귀신을 구원해준다고 속이고 거액재산 착취 행위나, 통일교 합동결혼식만 하면 천국간다고 해놓고 이제와서 통일교인을 죄가 많으니 죄를 용서해주는 탕감비 1300만원을 천국행 티켓파는 행위는 문선명은 희대의 사기꾼이다.

이 거짓된 일로 통일교 교인들 거액 재산 착취에 활용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 비극이며 언론과 방송이 대대적으로 보도 해야 한다. 기독교 성직자,1200만 성도들은 통일교회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합동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의 비극을 만천하에 알려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 p,554~572)

김일성이 영계에서 문선명 재림주에게 보내는 편지, 한국 기독교계를 대표한 고 김할란 이화여대 총장이 문선명 재림주에게 보내는 편지를 문선명은 광고하였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문흥진(17세)을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이 영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 아들 문흥진이가 영계에서 문선명에게 보내온 편지를 통하여 문선명을 재림주 참부모로 만들기 일한 웃지 못할 비극적인 조작사건이 통일교내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모든 내용은 예수,공자, 석가,무하짓 위에 문선명 재림주가 존재한다는 인식과 문선명만이 인류를 구원하고 4대 성인을 구원해 준다는 사악하고 조작된 거짓 편지이다.

구세주는 오직 예수님이 아니고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라는 것을 인식시키고자 조작을 하여 불안 공포심을 갖게 하고자 통일교인을 세뇌시키고 있다. 1998년 6월 13일날 3억 6천만 쌍 1차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미국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하면서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무슨 권한으로 90억의 죽은 영흔을 합동결혼식을 시켰는가? 그리고 문선명은 자신의 사돈인 통일교 이인자 곽정환 부부를 내세워 33명의 영계에 간 성인 영혼 결혼을 시켰다.

예수를 1971년도에 장정숙과 결혼시켜 놓고, 또다시 예수와 결혼식을 시켰다. 공자 부인은 이경준 현 선문대 총장, 석가부인은 최원복 전 이대 교수,무하멧 부인은 이정옥(전 세일여행사 사장), 소크라테스와 결혼한 김명희(문선명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처녀출산- 문희진) 지금도 김명희는 매월통일교 협회로부터 60만원의 생활비를 받으며 문선명 교주에게 충성하며 독신으로 살고 있다.

또, 문선명은 1955~1960년. 연대, 이대출신의 문선명 여인들을 영혼 결혼을 시켰다. 각 종교지도자들이 문선명 여인들에게 결혼 축하 예물로 금시계를 바치게 했다. (통일교 월간지인 '통일세계' 1998년 7월호 p.83) 문선명 사이비교주의 사악한 행위는 기독교 파괴와 세계 종교인에 대한 명예를 훼손하였다. 즉시 예수님의 명예를 훼손시킨 문선명을 명예 훼손죄로 고발하여 사법처리 하여야 한다

 

44. 통일교 세뇌 교육용 책인「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의 편지조작 사건,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세뇌 교육용 책인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에 아담 · 하와가 보낸 편지중 "책임 분담을 다하지 못하여 수천 년 동안 고생했으며 언제나 죄인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잘 모시고 있다" 며 1997년 8월 14일에 편지를 보내왔다고 조작하였다. (p.155참조)

노아, 아브라함, 가롯 유다, 세레요한 편지 중에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여 죄송하다" 고 하며 "지옥문이 열릴 날은 문선명 구세주가 열어 줄 것이다" 라고 조작한 사건(1997.08.20)

김일성, 레닌, 히틀러, 뭇솔리니, 이승만(전 대통령), 모세, 김활란(이대전 총장), 박정희(전 대통령) 조작사건. "박정희 대통령이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가 이 나라(영계)오실 때 모든 것에 대해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으며 영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와 영계에서 농사를 짓고 사냥을 다닌 다고 문선명 집단에서 책에 주장하고 있다. 21세기에 문선명 사이비 집단의 조작과 사기성을 알고 고발해야 할 것이다. (1998.06.11)

일본 정치계의 기시(전 수상), 후꾸다(전 수상), 이께다(전 수상), 나까소네 편지 조작사건. 이께다 전 수상의 의견은 "나까소네가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의 협조를 받아 움직이면 일본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 라고 주장하였다. (1998.06.11)

고르바초프는 "문선명 참부모님의 뜻을 잘 알고 있으며 참부모님의 뜻 성취에 적극적인 열정도 갖고 있다" 고 주장하며 죽은 닉슨은 "클린턴의정책과 문선명 재림주 아버님의 뜻이 아주 가깝게 연결되기를 노력하고 혐조하겠다" 고 영계에써 주장하여 조작하였다. (1998.06.11)

16세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교하여 죽은 유관순은 "문선명 참부모님을 영계에서 자랑하고 전세계의 영웅이라고 외치고 있다" 고 주장하몄다. (1999.09.30)

 

※ 영계에서 문선명 재림주님에게 보내온 편지 조작사건.

 


① 예수님이 영계에서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님에게 보내온 메시지


"문선명 아버님께 올립니다. 아버님! 저는 예수라고 합닐다. 아버님! 저를 장여사와축복 영혼결혼을 시컥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아내는 정말 저에게 과분한 여인입니다. 정말 황공합니다. 이제 문선명 참부모님의 뜻을받들어 아름다운 가정을 꾸며 참부모님을 모시고 참부모님의 뜻대로 복귀섭리역사 앞에 열심히 기도하며 노력할 것입니다. 아버님! 예수 지인을 용서하소서. 언젠가는 한이 풀릴 것입니다. 아버님!정말 감사합니다. 예수는제 아내 장여사를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선명 참부모님 ! 만수무강 하옵소서. 천상에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가 아버님께 올립니다. "(1999.12.29) 예수드림

 

② 소크라테스가 문선명 참부모님에게 보내온 메시지


"문선명 참 아버님, 어머님께 드리옵니다. 저를 김명희와 축복결혼을 시컥주어서 감사합니다‥‥‥(생략)‥‥ 옥체 만강하옵소서." 천상에서 소크라테스 올림(1998.08.13)

공자가 참부모님에게 보내온 메시지 등을 조작하였다. 「영계의 실상과 인류의 구세주는 문선명지상생활」의 책을 통하여 통일교 교인들에게 오직교주라는 것을 인식시키고자 이 책을 합동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이 아침 · 저녁으로 읽고 믿고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2002년 1월 1일에 청평 천성왕림궁전에서 통일교 교인들을 모아놓고 "문선명 교주는 하나님의 메시지" 라는 것을 만들어 "나는 만군의 여호와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다. 문선명 참부모는 만왕의 왕이요, 구세주요, 메시아" 라고 말을 하며 하나님이 직접 메시지를 보낸 것같이 조작하였다. 그 자리에서 문선명 교주는 또 다시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교인들은 천국황족 입적을 하려면 재산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문선명 집단이 이 땅에 뿌리뽑힐 때까지 함께 기도하고 반대운동을 하며 다각적으로 대책을 세워 다시는 이 땅에 문선명 집단과 같은 사이비 집단이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45.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2000년 1월 13일에 4억쌍 1차 합동결혼식을 하였다. 신랑 ·신부가극소수였기 때문에 추운 걱울에 있는 10만명 정도의전국 노인들을 잠실 종합운동장에 데려다놓고 무료 관광버스, 식사 대접과선물을 주었다. 실제 합동결혼식을 한 미혼 남녀는 2 천 쌍에 불과하였다.

 

전국 노인들을 흰 목도리를 목에 두르게 하여 행사 때마다 신랑 '신부로 위장한 행위를 하여 세상을 미혹하였다.

2001년 1월 27일에 4억쌍 2차 합동결혼식이라면서 미국 뉴욕 맨해튼UN본부 경제사회 이사회 회의실에서 문선명, 한학자 사이비 교주 부부가 황제 의상을 입고 합동결혼식을 할 210쌍의 미혼남녀를 모아놓고 퉁일교 합동결혼식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전세계, 전 현직 수상, 국왕 정치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그 자리에서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2002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대하였다. 문선명은 개인과 가정의 파괴범이며, 통일교 교인들의 거액재산을 착취하는 사탄 마귀의 형상이다.

이런 사이비교주가 노벨 평화상 후보로 된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인류를 기만하는 가증스러운 일이다. 개인과 가정을 파괴한 문선명, 한학자 부부에게 '세계 NGO 만국평화상' (2000.08.18)을 주었다는 것은 전세계 기독교 교인들의 수치이며 NGO에서 통일교를 축출해야 할 것이다.

문선명은 노벨상에 목숨을 걸고 전략을 세워 또 한번의 세상의 이목을 받는 행위를 하고 싶은 것이다. 1200만 기독교는 UN을 움직이고, 노벨 평화상에 도전하는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재림주 참부모가 아니라면 궤멸 시켜야 할 것인가? 지금 전 성직자와 교인들이 결정 해야되는 순간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또 한번의 통일교 전도용 선전물인 UN에서 2001년 1월 27일에 합동결혼식을 하여 세상을 미혹하고 UN에서 인정한 것과 같이 선전을 하게 한 것이다. 한국 방송언론 각종 기독교 신문에서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합동결혼식이 재산 착취와 파멸의 결혼식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주어야 할 것이다.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은 통일교 미혼 남녀 합동 결혼식을 전국 시 · 군 ·구에서 결사적으로 막아야 할 것이다. 젊은 미혼남녀가 유혹 당하지 않도록 기독교인들은 외쳐야 할 것이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은 우상숭배, 재산착취, 영혼과 육신이 노예가 되어 일생 동안 지옥 같은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통일교회는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이며, 구원이 없는 곳이다.

초대 순교를 당했던 주기철 목사님과 같이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은 영혼을 파멸시키는 사이비 집단의 궤멸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쳐야 할 것이다.

 

46. 문선명의 부인과 그의 자녀들(총 19명)

 

문선명은 개인가정 파괴범이라는 증거- 재림주 참 부모라면 어린양 혼인잔치를 한번만 해야 하는데 문선명은 사악한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수 많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을 파탄시켰다.

문선명은 수많은 여인과 피가름, 혈대교환, 혈통복귀, 간음 의식을 행하여 처녀와 유부녀들의 개인가정을 파탄시켰다. 그 후에 문선명이 40살이 되었을 때 당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인 17세의 한학자와 1960년 3월 16일에 어린양 혼인잔치를 한 후 낳은 14명의 자녀들. (한학자와 결혼하고도 처녀와 간음혈통 복귀 의식으로 사생아를 낳음.)

문선명의 큰아들인 문효진은 홍난숙과 결혼하였으나 마약, 간음, 가정폭력, 전과, 알콜 중독, 포르노 편집증, 이혼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다. 이는 문선명은 거짓된 부모라는 증거이며, 그는 참 부모 재림주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지 1998년 9월 23일자 참고)

문선명의 큰며느리 홍난숙은 미국 CBS 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00분간 그녀의 시아버지인 문선명을 참부모 재림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문선명의 현재 부인 한학자를 통해 출생한 4번째 딸인 문은진은 홍난숙과 같이CBS방송에 출연하여, 부친인 문선명은 구세주, 재림주가 아닌 자신의 아버지일 뿐이라고 말하였으며 자신은 통일교 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문선명의 죄악으로 자식들이 고통 당하고 있으며, 문선명은 오히려 통일교 교인들이 죄악을 많이 범하여 자신의 자식들이 제물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교인들에게 40일, 100일 릴레이 회개 금식 운동을 지시하였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문선명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을 한 숫자를 부부로 쳤을 때, 18억 4천 만명이 통일교 교인 숫자이다. 한 가정 당 자녀를 2명으로 잡았을 때, 통일교 교인 총 숫자는 총 36억 9,604만 명이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전세계 통일교 교인을 모두 합하여도 7만명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기독교 교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가증스러운 거짓 숫자로 하나님을 속이고 인류를 속였다. 문선명 집단의 주장대로라면 전세계 인류 60억 가운데 60%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이라는 숫자가 되는 것이다.

 

47.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교주는 2001년 1월 19일날, 미국 조지 W-부시 대통령 취임식 전야 기념 축하예배를 주체를 하고, 설교를 하였다. 그러기 위해 문선명은 세계 정치, 경제, 문화, 언론, 교육, 종교 지도자들의 세미나, 만찬, 항공료, 호텔경비, 선물 일체를 지불했다. 세계 각 나라 모든 연구단체에 많은 지원금은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이 막노동, 파출부, 꽃팔이 등으로 바친 거액 재산이다.

 

그 돈이 문선명 통일제국을 건설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문선명 교주의 원리강론과 책자는 교계지도자와 미국 정치계의 최고 지도자들, 언론계 지도자들에게 배포하였다.

문제는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레이건 전 대통령이나 닉슨 전 대l통령, 부시전 대통령, 현 조지 W-부시대통령 등을 통일교 신문인 워싱턴 타임지와 UPI통신을 이용하여 정계 지도자들을 움직여 왔다. 조지 W-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을 하루 앞둔 날, 워싱턴 DC에서 문선명을 중심 삼고, 행사가 이루어졌다. 그 때 제임스 메릿 남 침례교 총회장이 축사를 했다.

미국 기독교 보수파 제리 포웰 목사(리버티대학교 총장), 단알규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 전 회장,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래험 목사의 축사가 있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한국의 사이비 통일교회가 모두 없어져도 이미 세계를 움직이는 사이비 교주가 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침묵할 것인가? 문선명 적그리스도의 궤멸을 위해 외칠 것인가? 지금도 문선명은 한국에서 통일교회가 모두 뿌리 뽑힌다고 하여도 세계 185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하는 것에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단결하여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48. 2001년 1월 현재, 한국 문선명 통일교 교인 재적 총 숫자는 3만 5천 명이며, 예배 인원은 1만 7천명이다(어린 학생들 포함.)

 

49. 문선명 집단 신조

 

①유일신(雄一神)이신 창조주掛」造主) 하나님을 인간의 아버지로 믿는다.

② 신 구약(新 · 舊約)성서를 경전(經傳)으로 받든다.

③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이신 예수님을 인간의 구주(救主)인 동시에복귀(復歸)된 선의 조상으로 믿는다.

④ 예수님께서 한국에 재림(再臨)하실 것으로 믿는다.

⑤인류세계(人類世界)는 계림하시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하나의 대가족사회(大家族社會)가 될 것을 믿는다.

⑥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최종목표(最終目標)는 지상(地上)과천상(天上)에서 악(惡)과 지옥(地獄)을 없애고 선(善)과 천국(天國)을 세우는데 있는 것으로 믿는다.

 

50. 나의 맹세(세뇌교육용 매일 아침 저녁으로 살아있는 우상 자칭 아버님 재림주라는 문선명 교주에게 경배하며 낭독하는 내용)

 

①천주의 중심존재로서 아버님의 뜻(창조목적)과 맡겨주신 책임(개성완성)을 완수하며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선의 자녀가 되어 창조 이상 세계에서 영원히 아버님을 시봉하는 참 효자(녀)가 되기를 000는 맹세 하나이다.

②아버님께서 육천년간 제물된 십자가 노정을 참으시며 죽은 oo를참 자녀로서 살리시기 위하여 말씀과 인격과 심정을 주시어 일체가되게 하심으로써 천주의 상속권을 주시려는 거룩한 뜻을 000는 완전히 상속받을 것을 맹세 하나이다.

③원수에게 잃어버린 자녀와 천주를 복귀하기 위하여 아버님께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시고 종의 몸을 쓰시고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시며 000대신 역사 노정을 두시고 원수 사탄을 무찌르시던 무기를 지니고 그들을 완전히 심판할 때까지 아버님의 본을 받아 참 아들 딸 000는 적진을 향하여 용진할 것을 맹세 하나이다.

④아버님께서는 평화와 행복과 자유와 이상의 원천이시며 아버님을 모시려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와 천주는 본성의 인간을 통하여서 만이 심정일체 이상세계를 완결함으로 000는 참 사람이 되어 심정의 세계에서 아버님 대신자가 됨으로써 피조 세계에 평화와 행복과 자유와 이상을 옮겨주고 아버님께 기쁨과 만족을 돌려드리는 참아들 딸이 될 것을 맹세 하나이다.

⑤우리는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주권을 자랑하고 하나의 백성을 자랑하고 하나의 국토를 자랑하고 하나의 언어와 문화를 자랑하고 하나의 부모를 중심한 자녀 됨을 자랑하고 하나의 전통을 이어받을 혈족임을 자랑하고 하나의 심정세계를 이룩하는 역군임을 자랑하고 이를 실현시킬 것을 000는 맹세하나이다.

이러한 의미와 사명을 성취하는데 책임을 지고 생명을 바처 싸울것을
000는 선서하며 맹세하나이다. 선서하며 맹세하나이다. 선서하며 맹세하나이다

서기 1962년 자녀의 날(음 10월 1일)

'나의 맹세'나 '가정맹세'에 나오는 참부모는 자칭 재림주 참부모인 문선명을 지칭하는 말이다.

 

51. 가정맹세(문선명이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에게 '나의맹세' 를 하지말고 '가정맹세' 로 하라고 명령함)

 

①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본향 땅을 찾아 본연의 창조이상인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을 창건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②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모시어 천주의 대표적 가정이 되며 중심적 가정이 되어 가정에서는 효자, 국가에서는 충신, 세계에서는 성인, 천주에서는 성자의 도리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③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사대심정권과 삼대왕권과 황족권을 환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④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의 창조 이상인 천주대 가족을 형성하여 자유와 평화와 통일과 행복의 세계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⑤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매일 주체적 친상세계와 대상적 지상세계의 통일을 향해 전진적 발전을 측진화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⑥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대신 가정으로서 천운을 움직이는 가정이 되어 하늘의 축복을 주변에 연결시키는 가정을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⑦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본연의 철통과 연결된 위하는 생활을 통하여 심정문화 세계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⑧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성약시대를 맞이하여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으로 신, 인, 애 일체이상을 이루어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의 해방권을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 통일교 행사 때나 아침 · 저녁으로 문선명 사진에 경배하며 세뇌 교육용으로 '가정맹세' 를 통일교 교인들이 하고 있다. 통일 교회에서는 문 선명교주가 단상에 올라 을 때 성경을 들고 나오는 일이 없으며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예배나 행사때 일명 가정교회에서는 낭독하지 않는다. 통일교 교회와 통일교인 집에는 통일교 깃발이 걸려있다.

 

52.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각종 8대 명절


① 참부모님 탄신일 : 문선명(1920년 1월 6일(음력)),한학자(1943년 1월 6일(음력))

②참부모넘의 날 : 1960년 3월 1일(음력)

③ 참자년의 날 : 1960년 10월 1일(음력)

④ 참만물의 날 : 1963년 5월 1일(음력)

⑤ 잠하나님의 날 ' 1968년 1월 1일(양력)

⑥ 세계통일국개천일 : 1988년 10월 3일(양력)

⑦ 하나님축복영원선포일(칠일절) : 1991년 7월 1일(양력)

⑧ 7 8절(천지부모 천주안식권 선포일) : 1997년 8월 9일(음력 7월 7일)

 

53. 법무부장관,각 언론사장, 기자, 기독교 성직자와성도들은 이 엄청난 사이비 종교인 통일교를 이대로 방치할 것입니까?

 

문선명의 명령 한 마디에 통일교 교인들이 고통을 당하며 거액 재산착취의식으로 말미암아 처절한 가난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므로 사법부는 조사하여 위법사실이 있을때  법적인 조취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통일교 교인들이 세뇌에서 깨어나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가 없어야 할 것이다.

 

54.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1억이 넘는 거액재산 착취의식의 시작이다.
 

기독교 최고의 전성국가인 한국 땅에서 통일교회가 뿌리가 뽑힐 때까지 기독교 성직자와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일치 단결하여 싸워야 한다. 양심적인 사람 한 명이라도 합동 결혼식이라는 미명하에 통일교회에서 결혼하고 청춘을 빼앗기는 비극적인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전 기독교 성도들이 일심단결을 하여 붉은 적 그리스도인 문선명 통일교 이단 집단이 이 땅에서 멸망할 때까지 예수님 이름으로 외쳐야 할 것이다.

 

 

제 3절 기독교 성도들에 대한 박준철 목사의 호소문


통일교회 궤멸을 위해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전국 시군구 기독교연합회에서 스데반 집사의 심정으로 통일교 궤멸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언론과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이 단결하고 합심하여 기도하며이 땅의 통일교회가 뿌리 뽑힐 때까지 전쟁을 하고, 성경 진리대로 사탄마귀인 통일교회를 없애는데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입니다.

국내의 살인집단 백백교나 용화교, 32명의 목숨을 빼앗은 1987년의 오대양교, 종말론, 휴거론을 주장하는 이장림 집단, 박태선 집단, 문선명 집단에서 집사까지 지냈던 JMS(정명석)등 수많은 사이비종교로 말미암아 이 땅의 수백만 영혼이 사이비교주에게 영혼을 빼앗겼습니다.

특히 이단교회 중 살아있는 우상인 문선명 통일 집단보다 큰 것은 역사에 없습니다. 통일교회를 궤멸시키지 않고서는 이단 교회에 대해서 반대운동을 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한국 기독교회가 이단교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영혼을 말살하는 이단 교회의 참극을 알고있습니다.

1955년대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에서 전 기독교 교인들과 합세하여 통일교회 반대운동을 대대적으로 하였습니다.

기독교 학교였던 연대와 이대에서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부모로 믿고있는 대학교수와 학생들은 "학교를 선택하느냐, 문선명 교주를 선택하느냐" 에 2가지 중 1가지를 선택하라고 학교에서 지시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대학교수와 학생들은 문선명 교주를 믿고 교수직과 학생직을 박탈당하면서 문선명을 따라나온 것입니다. 참으로 사이비교주에게 세뇌되면 부모형제를 버리고 교수직까지도 포기하면서 사이비교주에게 세뇌된 것을 볼 때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55년 3월 24일, 감리교 학교였던 이대는 교수 5명(양윤영, 한충화, 최원복, 김영운, 이정호)과 1955년 5월 11일은 통일교 이단교회 신앙을 함으로 학생 14명이 퇴학 처분되었습니다. 1955년 3월 5일, 박상래 연대교수는 통일교회의 신앙문제로 퇴직 되었습니다.

한국 1200만 기독교 목사와 성도들은 문선명 통일집단이 이단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잘 모릅니다. 기독교가 수 십년 동안을 침묵함으로써 통일교회는 47년 동안 세계 185개국에 통일교회의 원리강론 교리를 전파하여 뿌리를 내렸습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인류역사에 전무 후무한 사악한 사이비 교주요, 우상입니다. 기독교는 통일교회와 전쟁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통일교회와 이단교회를 이단이라고만 생각하고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선명 집단과 같은 이단들이 번성하는 기회로 삼고 문선명이 의도 하는데로 움직여주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진리대로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같이 갈멜산에서 바알신 450명을 궤멸시켰던 역사와 주기철목사의 순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문선명 사이비 종파를 없애야 합니다.

기독교는 통일교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1200만 기독교목사와 성도들이 통일교  궤멸을 위해 외치지 않는다면 누가 문선명 사이비종파를 파멸시키겠습니까? 한국 기독교는 초대교회의 순교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2의 말틴 루터와 같은 심정으로 저는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외치겠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교주를 이 땅에서 기독교 교인들이 단결하여 없애지 않는다면 한국 기독교는 이단교회에 방치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이제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집단의 멸망할 때가 왔습니다. 전 기독교는 사탄 마귀와 가라지요, 영혼을 파멸시키며 가정을 파탄시키는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궤멸시키는데 동참해 주십시오.

이 저서는 일생 동안 문선명 사이비집단을 이길 수 있는 방패요, 무기가 될 것입니다. 이단교회의 정체와 비리를 알 수 있고, 1명의 전도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교재가 될 것입니다.

저의 저서는 한국 기독교 목사와 신학생, 교회 입직자, 평신도와 양심적인 사람들이 구독해야 될 교재입니다. 또한 일생동안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알고, 대처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저의 글을 읽는 분들 가정에 하나님께 영광이요, 은혜와 축복이 넘칠 것입니다.

 

제 4 절 한국 기독교 통일교 대책협의회 설립,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한국 기독교 이단 종파 문제 연구소 설립

 

저는 문선명 사이비 통일교 교주에게 원리강의로 세뇌되고 교육되어 30년 동안 영혼을 빼앗기고 청춘을 빼앗겼습니다. 이제 심장판막증, 심부전증 등으로 인하여 죽음까지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어떠한 핍박과 고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대적이요, 기독교의 원수인 사이비 종교와 교주를 뿌리뽑고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틈타 사이비 교주들이 이 땅에 붉은 용이 되고 늑대가 되어 선량한 영혼을 미혹하여 빼앗고 세뇌시컥 삼키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이비 교주가 만들어짐으로 강간, 우상 숭배, 재산 착취, 가정파탄 등 그 피해가 실제로 혜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납니다.

사이비 교주들은 불쌍하고 선량한 이 땅의 국민들의 영혼을 빼앗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세를 외치며 자칭 재림주 구세주 메시아 참 아버지로 자칭하며 문선명과 같은 이단 사이비교주가 자신의 제국을 세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들은 공갈협박으로 힘없는 교인들을 세뇌시키고 교육시켜 피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끝내는 배반하며 버리는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자기 교인들을 이용하고 쓰레기 버리듯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이 땅에 사이비 종교를 박멸하고 사이비교주를 뿌리뽑는데 앞장서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 땅의 사이비 종교를 박멸하여 뿌리뽑는데 기독교성직자와 성도들이 앞장서신다면 이 땅의 사이비 교주들은 한 사람도 발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 동안에도 사이비 종교에 대한 많은 비판과 기도회를 실시해왔습니다. 그러나 80~90년대 기독교는 사이비 종교를 뿌리뽑는 데 무관심, 무방비, 무책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사이비 교주에게 수많은 영혼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통일교 집단도 이단이라고 제처 둘 것이 아닙니다. 진작 궤멸 운동하여 뿌리를 뽑았더라면 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매일 전도되어 지옥 길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마음 속으로만 통일교가 이단이라고 제쳐둘 것이 아니라 입으로 소리내어 직장이나 내 이웃, 가게 분들에게 "문선명은 사이비교주요 적그리스도요 합동결혼식을 하면 1억씩을 착취하는 사이비집단" 이라고 매일 외쳐야 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이비 종교에 빼앗긴 사랑하는 아들 · 딸을 찾기 위하여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기독교회가 일치 단결하여 사이비 종교근절을 위한 대책을 세우기를 바랍니다. 언론과 기독교회는 연합이 되어 대대적인 사이비 종교 퇴치를 위한 기도회와 캠페인을 매달 전국 시군구 기독교연합회 벌려야 할 것입니다.

 

제 5 절 국제 자살 · 살인 방지 연구소 설립 계획


1998년 5월 1일, 저의 꿈에 하나님의 큰 음성이 "너와같이 분노와 배신감을 갖고 한이 많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마지막 선택하는 길이 자살이다. 너는 네 자신이 자살 시도를 수십 번을 하였듯이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을 바꾸어 주어라. 그러면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수많은 사람이 자살하지 않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새로운 소망을 갖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주어라" 들렸습니다.

그 때 살인 방지 연구소를 설립하라는 마음속의 생각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간증 예배 때 경각심을 갖는 말씀을 증거합니다.

통일교회는 문선명 교주를 믿고 합동결혼식을 하여 가정 천국을 이루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천국이 아닌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 교회 때문에 자살해 죽는 사람이 제 주위에도 있었습니다. 통일교 부산 교구본부에 소속된 36만 쌍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김동수씨도 결혼을 하여 살다가 1998년 5월에 목을 매고 자살해 죽었습니다.

오진수씨와 이인자씨 부부는 1982년도 6,000쌍 합동결혼식을 받았습나다. 1997년 9월 13일날 추석을 목전에 두고 이인자씨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와 통일교에 대한 배신, 합동결혼식의 처절한 생지옥 생활을 뒤로하고 아파트 안방 문고리에 목을 매고 자살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 합동결혼식은 처참한 가정파탄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오진수씨와 이인자씨는 통일교 회사인 일화제약과 통일산업에 근무하며 요령을 부릴 줄 모르고 아부할 줄도 모르는 우직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성실하게 일을 했지만 아부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살다 보니 통일산업에서 53세에 퇴사할 때까지 반장이나 주임 한 번도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진실하고 성실한 교인 이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통일산업에서 근무하면서 IMF 때 부도가나 월급을 11개월이나 받지 못하여 가정생활이 처절한 상태에서도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십의 삼조 헌금, 구국헌금, 160쌍 행사비, 1600쌍 행사비등 각종 통일교 헌금을 내라고 하였고 가정은 파탄 되었습니다.

이인자씨는 착한 성품을 갖고 가정천국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삶을 포기하고 안방 문고리에 목을 매어 죽음으로서 문선명 교주에게 항변하였던 것입니다.

경남 교구장과 사모는 1년 동안 교회 앞에 있는 오진수씨와 이인자씨 가정에 단 한번도 심방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인자씨가 자살을 할 때까지 경남 통일교 교구장은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어도 무관심, 무책임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회에 들어와 오진수씨와 이인자씨가 합동결혼식을 하지 않았다면 가정은 파탄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자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인자씨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지만 자살로 인생을 마치자 너무나 허탈하여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 계기로 자살과 살인 방지 연구소를 설립해야 되겠다고 더욱더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과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저는 자살하려는 한 생명이라도 구할 수만 있다면 그 길을 갈 것입니다.

회사가 부도가 나고 실업자가 되고 가정이 파탄되어 이혼되고 전 가족이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의 원혼을 누가 풀어 줄 것입니까? 저는 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이 외롭고 고독하고 의지할 곳도 없이 모진 인생의 비 바람을 맞으며 마지막 자살을 선택할 때 속수무책 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빠른 시일 내에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사정이 허락하면 자살 살인 방지 연구소를 설립하여 한 생명이라도 구하고 싶습니다.

 

 

 

제 23 장 문선명 통일교 비판

 

 

제 1 절 문선명의 출생과 통일교 창단 배경


문선명은 1920년 1월 6일(음력)에 이북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부 문경유, 모 김경계 사이에서 13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문성명은 1935년 4월 17일 부활절에 예수님을 만나 특별 계시를 받아 재림주 사명 인계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1938년 4월에 경성 상공실무학교 입학, 1941년 2월 25일에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졸업을 하였다. 1944년도에 서울에 있는 가시마구미 토목 건설회사 전기기사로 취직하여 근무하였다.

 

문선명은 1945년 10월부터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섭절리 이스라엘 수도원에서 김백문 교주에게 6개월 동안 기독교 근본원리 교육을 받고 세뇌되어 있다가 서울 상도동에서 교회 인도자로 있다가 문선명 교주는 1946년 6월 6일에 김백문을 배반하고 김백문 사교 교리인 성서신학과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교리로 만들어 평양에 가서 문선명은 재림주 참부모를 자칭하며 기독교를 비판하고 포교 활동을 하였다.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할 정도로 평양은 기독교회가 왕성하였습니다. 평양에서 부터 문선명은 사교교리를 통하여 통일교 포교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양에서 김종화 유부녀 집에서 어린양 혼인잔치를 문선명이 하게 되어 사회혼란 음행죄로 감옥에 가게 되어 1948년 2월 20일에 평양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1948년 4월 7일에 문선명의 재판결과 5년 감옥생활을 언도 받고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이후 1948년 5월 20일에 흥남 감옥소로 이송되어 형무소 생활을 하던 중 터지지 말아야 될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말미암아 문선명이 감옥에서 해방되어 남한으로 피신하여 부산 수정동에서 교회를 하다가 최선길 본부인이 문선명의 피가름 행위, 혈대 교환의식을 참다 못하여 문선명 교주를 폭행함으로 문선명은 부산 범냇골 이라는 산에서 기독교인을 포교하였다.

 

그 이후에도 최선길 본부인이 찾아와 문선명 교주의 부도덕한 행위 때문에 싸움을 하여 문선명 교주는 서울로 도망쳐 올라왔고 서울 성동구 북학동 세대문집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간판을 1954년 5월 3일에 걸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 교주는 온갖 피가름의식과 혈통복귀의식으로 최선길 부인과 불화중 자기 아내도 전도하지 못하고 1957년에 이혼하였다.

 

문교주는 김백문 교리를 훔쳐 1954년 5월 3일에 2대 협회장 '유효원'과 '김원필', '박정화' 등 6인이 정리하여 1957년 8월 15일 통일교 원리해설로 만들었다. 1966년 5월 1일에 통일교 원리 강론으로 책을 출판한 것이다.

 

부산 영도 신상진씨 집에서 통일교 2대 협회장인 유원효 씨와 사촌 유민효, 유영효 3형제가 입교하게 되었다. 유원효는 서울대학교 의대를 다니다가 결핵성 관절염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문선명 교주는 김백문에게 교육받은 그 기독교 근본원리 강의를 유원효 씨에게 다시 통일교 원리로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유원효 씨는 다리가 굳어서 쓸 수 없어 눕거나 의자에 앉아서 문선명 교주의 강의를 밤낮으로 들었다.

 

1954년 2월부터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 교주의 기독교 근본원리 강의를 갖고 문선명 교주와 유원효, 유민효, 유영효 3형제와 이창환(초대 통일교협회장), 김원필, 박정화 이렇게 6명이 종로에 있는 여관에서 하숙을 하며 통일교 교리를 썼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김백문의 강의를 통일교 원리강의로 만드는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그때 6명에게 5만원을 주면서 전세 집을 마련하여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 작업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유원효씨는 매일 원리해설을 정리하였고 유민효씨와 박정화씨는 원리원본을 기록하면서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 교주의 교리가 문제가 많다고 하였다. 유원효 통일교 2대 협회장도 원리해설을 집필하면서 통일교 교리로 사용한다는 것이 모순이 많이 하며, 기독교 근본원리 강론을 이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강론을 고치기 위해 문선명 교주에게 여러 의견을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문선명 교주가 대답을 하지 못하는 부분은 유원효씨 생각대로 원리해설을 썼다.

 

문선명은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어 놓고도 통일교 목사 교인들에게 재림주가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계시 받은 새진리라고 주장하지만 조작된 것이며 거짓이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을 속인 것이다.

 

문선명은 여러 사람이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던 중에 성동구 북학동 391번지 통칭 세대문집이라는 가정집에서 1954년 5월 1일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 협회라는 간판과 통일교 창립을 하게 되었다.

 

통일교 협회 창립일을 1954년 5월 1일로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통일교 창립일은 1954년 5월 3일이다. 김백문이라는 사이비 교주에게 6개월 동안 교육 받은 문선명 교주가 그것을 도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 또 한 사람의 가짜 재림주인 문선명 교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훔쳐온 교리로 1954년 5월 3일, 원리 해설이라는 통일교 원리강의를 선포하고 통일교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유원효 씨와 사촌인 유민효, 유영효 3형제는 통일교에 충성꾼 이었고, 통일교의 산 증인이다. 30가정 최초 합동결혼식을 하였지만 유원효는 1970년사망을 하였고 유민효, 유영효 형제는 문선명 교주가 일생동안 이용하고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버렸다. 그들은 일생 동안 이용만 당하고 통일교를 떠났고 버림받은 것이다.

 

제 2 절 원리 강론은 김백문 교리를 도용한 것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 창조원리, 타락론, 복귀원리, 재림론까지 만들고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한 것이 아니라 사생아이고,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메시아 재림주라고 주장한다.

또한 기독교는 구원이 없는 종교라고 강조하여 오직 구원은 예수가 아닌 문선명 자신만이 재림주로서 구원 해 줄수 있고 성경진리가 아닌 통일교 원리강론 새진리 성약말씀만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혈대교환, 혈통복귀의식, 피가름,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한다고 주장한다.

 

문선명의 통일교 원리강론인 창조원리, 타락론, 복귀 원리, 재림론은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와 동일한 내용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 기독교 근본원리를 문선명이 도용한 것이다.

 

문선명은 통일원리 강론이 성약 말씀이며, 재림주가 계시를 받아쓴 새로운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거짓이다.

 

제 3 절 문선명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비판


(지면관계상 요점만 말씀 드리고 교리전체비판은 다음 책에 논할 것입니다)

 

1. 통일교회의 원리 주장은 새 진리의 필요성과 사명을 역설하고 있다.

 

(요한복음 3:12, 요한복음 16:25)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만이 새진리요, 성약이라고 주장하며 성경은 사명이 끝났고 진리(통일교원리)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반증- (계시록 22:18) '성경진리를 가감하면 생명록에서 이름을 제 할 것이다·(마태복음 5:18) '율법 일점 일획도 가감말라'(요한복음 3:16) '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시며 진리는 성경말씀 뿐이다. '(갈라디아1:8) 성경말씀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자, 저주를 받을 것이다'

 

2.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새 말씀의 사명을 역설하고 있다. (요한복음 16:25, 계시록 5:1, 계시록10:11)

 

통일교 참조원리는 성경의 진리성을 부인하고, 구약과 신약 66권 사명이 끝났다고 주장한다. 예수를 믿어도 진리를 찾아가는 교과서라고 주장한다. 문선명 재림주 시대는 원리강론이 성약이며, 새진리라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성경진리 말씀을 자칭 황제 참부모 재림주라는 세뇌교육용으로 인용 할뿐이다. (요한복음 16:12)

*반증-(요 3:16),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요, 진리는 성경뿐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3. 문선명 사이비 재림주에게만 구원이 있고, 기독교 성경말씀은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반증-(사도행전 4:12, 16:31), 주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4. 원리강론은 창조목적이 문선명 교주를 자칭 재림주 참부모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세기 1:26~31)"

 

반증-(사 43:1, 고전 10:31), 통일교 교리에 하나텀의 이성성상을 주장하는데 문선명 교주가 하나님을 닮아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졌고 몸과 마음 즉 이성성상으로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미 성서에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아 되어진 것을 문선명 교주는 자신이 발명특허나 낸것같이 주잔하지만 거짓이다. 만유원력 수수작용도 되어진 결과를 논하는것이지 새진리가 아니다.

 

5. 통일교 인류역사 종말론은 기독교 종말론과 정면 배치된다.

 

기독교는 성경진리대로 불심판을 믿지만, 통일교 문선명 교주는 불심판을 부정하며 말씀 심판이라고 주장한다. 문선명 교주 자신이 재림주로서 통일교 성약말씀인 원리강론을 새진리라고 주장하며 문선명과 통일교 원리강론을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거짓이다. (벧후 3:10~12)통일교 원리강론에는 진리심판 곧 말씀심판이라고 주장한다. (약 3:6)

"반증- 벧후 3:10~12, 살전 4:16~17, 마태복음 27:52, 마태복음24:29

 

6.구주론은 예수를 실패자요, 예수 십자가를 믿어도 구원이 없으며, 영적 구원만 있고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를 믿어야만 영육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거짓이며 적그리스도이다.

 

기독교 교인들도 문선명 재림주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지만 문선명 자신은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이비 교주이다. (마태복음 16:23)

"반증- (요3:16, 창1:28), '사단아! 물러가라.'(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3:14), (눅 9:31)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시며 십자가 보혈로만이 인류가 죄사함을 받을 수있다.

 

7. 통일교 원리강론 부활론은 예수 십자가 부활을 부정하며 기독교 성도 부활을 부정한다. (살전 4:16)

"반증-(마 27:25, 눅 9:60, 롬 G:23)

 

8. 통일교 원리강론 재림론은 문선명 자신을 재림주로 만들기 위한 교리 이다.

 

① '재림주님은 언제 오시나?' 문선명 교주가 이 땅에 태어난 때이다. (마 24:14, 땅끝까지 천국, 마24:32) 문선명 자신이 참부모 재림주로 태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증-(마 24:36, '그날 그때 모름' , 계 3:3 '도적같이 주님 이 온다' )

 

② '재림주님은 어떻게 오시나?' 재림주는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고 여인의 (마24:30)몸을 통해 태어난 문선명 교주가 재림주라고 주장한다.

"반증-(계 12:5 '철장' , 눅 17:20, 마 7:21 '주의 뜻' )

 

③ '재림주는 어디로 오시나?' 동방 대한민국으로 오신다 (계7:2~3)문선명의 주장과 통일교 원리강론 주장은 언제 오시나? 한국에 재림주가 오고 1920연대에 태어난 문선명 교주(본이름 문용명)만이 재림주라고 통일교 교인들이 받들고 있다. 어떻게 오시나? 재림주는 구름 타고 오는 것이 아니고 여인의 몸을 통하여 낳은 문선명이 재림주 황제 참부모 구세주라고 주장한다.

 

재림주는 어디로 오시나? 극동의 중심 동방삼국인 한국으로 재림주가 온다고 교리적으로 가르치며 통일교 자칭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문선명만이 인류의 구세주 메시아라고 세뇌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참으로 인류역사에 이렇게 날조를 밥 먹듯이 하는 이단 사이비교주는 문선명 밖에 없다.

(마태복음 23:33, 포도원비유)

'동방삼국은 중국, 일본, 한국인데 중국은 신을 부정하는 공산국가 이기 때문에 재림주가 못 오시고, 일본은 천주대신 우상 숭배 국가이기 때문에 재림주가 못 오신다고 주장한다. 재림주는 한국에 오기 싫어도 한국으로 와야 된다고 주장한다. 문선명만이 오직 참부모 재림주라고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반증-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이며 수많은 영혼을 빼앗는 사악한 사이비 교주일 뿐이다. (계시록 12:9 '하늘에서 큰 용이 되어 쫓기니 이는 곧 옛 뱀이요 사단이다. ')

문선명은 본래 이름이 문용명 인데 가운데 '용' 자 '적그리스도용자' 를 빼어버리고 '선' 자를 집어넣어 자신은 태양이다. 문은 달이며 선은 태양,명은 스타(별)이다. (창세기 37:1 요셉의 꿈.)

 

모세 오경과 구약은 촛불에 해당되고 이미 전깃불인 예수님 신약 말씀이 선포됨으로 구약의 사명이 끝났고 문선명의 이름인 태양인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 교주가 재림하심으로 예수님의 사명은 끝났다고 문선명 사이비교주와 통일교 원리강론은 재림론에서 결론을 맺고 있다.

문선명 교주야 말로 하나님의 대적원수이며 전세계 19억 기독교 교인들의 원수요, 한국1200만 기독교 교인들의 원수이며 일순간의 악연으로 통일교회에 빠져 세뇌되어 지옥 길로 가는 사람들의 원수이다. 억울하게 자살하고 이혼, 가정 파탄된 불쌍한 영혼들의 원수요, 박준철 목사의 빼앗긴 30년을 짓밟은 원수가 바로 문선명 교주이다.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은 예수님을 정말 믿고 성경 진리안에 산다면 하나되고 단결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를 막기 위해 문선명 통일교 집단을 뿌리 뽑아야 할 것이다.

 

9. 통일교 원리강론, 타락론은 아담과 하와가 지의 뿌리가 된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하와의 종이었던 천사장 루시엘과 하와가 불륜한 사랑관계로 영적 타락을 하였고 아담과 하와가 불륜한 사랑관계로 육적 타락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되는 재림주 문선명 교주가 인류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복귀해야 된다는 복귀 원리 교리 이다. (창세기 3:I~7)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면 완전구원의식을 치르기 위하여3일 혈통복귀 피가름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반증-(요 1:3, 창2:17),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지요, 성경 어느 구절에도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타락했다는 성경구절이 없는데 통일교 원리강론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타락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예수를 부정하고 성경을 부정한 것이다. 통일교 원리강론은 예수님 성령잉태를 부정하며 사생아요,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간 예수라고 주장한다. 오직 구주는 문선명이라고 주장하지만 적 그리스도요, 사이비 교주일 뿐이다.

 

 

제 4 절 예수, 공자, 석가를 자신의 제자라고 말하는 문선명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지금까지 집회 때마다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 등 역대 정권을 싸잡아 통일교회를 이용하고 배신했다고 온갖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했습니다.

 집회 때마다 "여기에 정보부나 안기부에서 온 사람이 있으면 청와대에 보고하라" 고 온갖 만용을 떨었습니다. 또한 기독교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하며 "문선명을 이단으로 규정짓고 반대하지만 통일교는 성공하고  기독교는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를 반대하기 때문에 심판 받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1950년에 박태선 장로와 나운몽 장로가 문선명과 하나 되었더라면 기독교와의 통일은 1950년에 이루어져 문선명 통일제국을 세웠을 것이 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문선명은 "구약적 복귀패는 박태선이 책임자이고 신약적 복귀패는 나운몽 장로패이다. 복귀패 재림주님은 통일교 신령집단 재림주인 내가 책임자이다. 주님을 위한 기독교가 되어야 하는데 자기 교파 교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망하고 통일교와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승리할 것이다. 기독교가 아무리 반대해도 통일교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승리할 것이다. " 라고 했습니다.

 

문선명은 ''나는 재림주 참부모로서 영계에 가면 참부모 이름이 최고이다. 이 지상에서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고 충성한 사람은 최고의 축복이고 문선명 재림주를 믿고 복종하지 않은 기독교인은 원수가 되어 지옥을 가게 될 것이다 지상에 있는 기독교 교인들에게 문선명 통일교 재림주를 믿으라고 아무리 외쳐도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간다. " 그러면서 문선명은 "석가, 공자, 예수는 내 제자다" 라고 외쳤습니다.

 

통일사상 연구원 원장을 하다가 죽은 이상길의 '영계에서 보내온 편지'라는 책이 있는데 문선명이 인정한 책이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에게는 필독서인 '영계의 실상과 지상 생활 1, 2, 3, 4, 5권' 에 예수님을 저승에서는 한없이 외롭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어 명예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문집단의 통일교 천국 가는 구원 의식인 합동결혼식은 문선명으로부터 용서 기도를 받고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어야 구원받고 천국 간다고 주장하여 영혼결을 시킨 것이다. 예수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1200만 기독교 교인이 매일 궤멸을 위하여 외쳐야 한다.

예수님이 역대 성인들이 문선명 교주를 믿고 구원받고 싶다고 했으며 통일교 구원의식인 영혼결혼을 시켜달라고 했습니까? 참으로 사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문선명을 구세주 참부모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연세가2000세고 문선명은 나이가 83세 입니다. 누가 아버지 입니까?왜 통일교 세뇌용 책에는 문선명 참 부모님이 불효 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예수님이 문교주에게 빌고 있다는데 이런 조작으로 통일교 교인을 세뇌시키는 문집단은 1200만 기독교 목사 성도들이 의분심을 갖고 통일교 집단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교통사고로 죽은 문흥진의 지시를 받고 마호메트, 공자, 석가등 인류 역사에 왔다 갔던 영웅, 열사, 기독교 순교자들이 영계의 총 사령관인 문흥진의 명령과 지시에 복종하고 있다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문선명 재림주가 죽어서 천국 문을 열고 천국에 갈 때 예수님은 구원받는다고, "영계에서 보내온 편지" 에 써 놓았습니다. 참 부모님이 영계에 오셔서 영계를 정리할 때까지 예수님은 기다려야 한다고 책에 써놓고 예수님의 명예를 훼손했습니다.

 

적 그리스도인 문선명의 사주로 통일교 교인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계의 가짜 책을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하게 하고 있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한 통일교 교인들을 각종 공갈 · 협박으로 재산을 착취하는 도구로 이용하곤 있습니다.

 

지금도 사이비 교주에게 미혼 남녀가 매일 통일교 집단에 유혹되어 영혼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로 믿다가 통일교 교인이 통일교를 떠나 문선명한테 배운대로 자신을 재림주라고 칭하며 사이비 교를 창단한 사람도 수십 명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80년까지 통일교 집사일을 했던 JMS(정명석)사이비교주입니다. 정명석 집단에서 20만명이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1만 5천명의 영혼이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중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다가 탈퇴한 주영희 패거리들이 교단을 만들었는데 그는 자기가 재림주고, 2000년 전 세례요한이 예수를 증거 해 주듯이 문선명의 사명은 끝났다고 하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제 24 장 혈통복귀 피가름 집단인

 

문선명 통일교

 

제 1 절 처음부터 혈통복귀집단이 된 통일교


문선명은 통일교 협회창립 일인 1954년 5월 1일 이전인 1953년 12월 24일부터 1954년 1월 14일까지 부산의 신상진, 유신선 씨의 집에서 21일간 밤낮으로 부흥집회를 열었다. 부산시 범냇골(부산시 동구 범6동 1513번지) 산꼭대기 토탐집에서 생활하다가 1953년 3월에 수정동(부산시 동구 수정5동 427번지)에 가정주택을 사서 통일교로 사용하였다.

 

문선명은 사악한 통일교 복귀원리라는 섹스교리로 통일교에 예쁜 여자 교인들과 피가름 구원의식을 치뤘다. 문선명이 복귀 원리라는 미명하에 통일교 여자교인들과 혈대교환 혈통복귀 의식인 섹스를 하는 걸 첫번째 부인 최선길씨가 알았다. 최선길씨는 혈통복귀 의식을 치른 여자교인들을 폭행하고 남편인 문선명의 멱살을 잡고 폭행을 하였다. 문선명은 도망을 쳤고 최선길씨는 수정동 가정 주택 교회에서 생활했던 여자 통일교 교인들을 전부 쫓아내고 수정동 통일교의 집과 가재도구를 1953년 9월에 몽땅 팔아버렷다.

 

문선명은 최선길씨를 피해 이곳저곳을 도망 다니다가 1953년 9월 17일 통일교 본거지를 옮기려고 서울까지 왔다. 그러나 문선명에게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1953년 12월 24일 서울에 있는 문선명에게 부산 영도에 신상진이라는 통일교 교인이 자기 집에서 부흥회를 해달라고 하였다. 부산 시내 전체 통일교 교인 28명이 신상진씨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문선명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12시간 걸리는 완행열차의 기차비가 없어서 올 수가 없자 6마리아의 한 사람인 오명춘 집사가 여비를 급하게 마련해 주어서 서울에서 부산 영도교회까지 올 수 있었다.

 

후일 오명춘 집사는 문선명 교주와 혈통복귀 의식을 치른 후 문선명의 노예가 되어 집을 판대금 거액인 500만원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쳤다. 이 사건으로 오명춘 집사는 가정이 파탄되어 이혼하고 버림받고 결국 문선명 교주에게 까지 버림을 받았다.

 

문선명 교주는 혈통복귀 원리 섹스교리로 말미암아 영도에서도 처녀와 복귀의식을 치러 한 처녀 대학생의 파멸을 가져왔고 그 처녀는 사생아까지 낳았다.

문선명은 서울에 올라와서도 수많은 처녀들과 6마리아, 60마리아를 만들어 혈통복귀 섹스를 통한 의식으로 완전 구원, 사기교리를 실천하였다.

 

서울에서 이성화라는 처녀를 혈대교환, 피가름, 혈통복귀 의식인 섹스로 복귀의식을 치렀다. 이성화 처녀는 후일 아들을 낳는 비극을 가져왔다.

문선명은 40세에 1960년 4월 11일, 몇 번째 부인인지 알 수 없는 어린17세(고등학교 2학년)의 나이 어린 한학자를 아내로 맞아 어린양 혼인잔치를 하여 지금까지 14남매를 낳았다. 한학자와 살면서도 1965년도 최순화라는 처녀와 혈통복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간통하여 박 사무엘(박준경)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미국 이스튼 가든 호화 궁전 저택에서 유럽, 미국의 젊고 예쁜 통일교 여자교인들이 문선명 교주에게 인사를 할 때 끌어안고 키스를 하였다. 문선명 교주와 끌어안고 키스 하는 광경을 본 한학자는 모든 유럽 미국 여자들은 문선명 교주에게 경배 드리고 인사할 때 문선명 교주와 1m 거리로 접근금지를 시키라고 명령하였다.

 

제 2 절 문선명은 혈통복귀교리를 통해 가정을 파괴한다


문선명 교주야말로 이 땅의 혈통복귀 피가름 종교를 창립하여 윤리와 도덕을 파괴시킨 최초의 가정 파괴범입니다.

 

문선명은 자기의 혈통복귀 피가름교리를 위장하기 위하여 타락론을 강조하고 가정의 윤리와 도덕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에게는 간통죄가 가장 큰 죄라고 말합니다. 또한 자신의 섹스교리를 위장하기 위해 선문 대학교에 순결학과를 만들어 놓고 미혼 남녀들이 순결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정정 파괴범이 어떻게 자기를 위장하고 가증스럽게 통일교 교인들을 속이고 국민까지 속인단 말입니까?

 

문선명은 신정순, 이순철, 오명춘, 김안실, 유신선, 임영신 이렇게 6마리아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혈통 복귀하였습니다. 6마리아는 60마리아로 늘어났고 수많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이 문선명 교주의 피가름 혈통복귀의식으로 희생이 되었습니다.

 

문선명은 수많은 처녁들과 유부녀들의 영혼을 빼앗아 자신의 남편보다도 문선명 교주를 더 극진히 모시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일례로 수많은 60마리아 중에 옥상현씨는 원래 장대현 교회의 권사였습니다. 옥상현 권사는 통일원리를 들은 후 장대현 교회에 나가지 않고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라고 믿고 따랐던 여자 교인입니다. 그녀는 문선명 교주와 복귀의식을 치르고 미혹에 빠져 가정이 파탄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옥상현 권사는 문선명 교주와 김종화와 같이 구속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장대현 교회에는 우화섭이라는 장로님이 계셨는데 평양 고무 연맹의 이사장으로 돈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옥상현 권사는 우화섭 장로의 힘으로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으나 문선명 교주는 평양 감옥에서 흥남 감옥소로 이송 되었습니 다.

 

그러자 옥상현 권사는 그 먼 거리를 쫓아가서 돈을 마련하고 사식을 마련하여 문선명 교주의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문선명이 흥남 감옥소에 있을때 옥상현 씨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털실로 짠 것처럼 양말을 만들어 문선명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옥상현씨는 두 딸과 같이 살았는데 그 곳에서 문선명, 문정빈, 김원필씨도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옥상현씨는 문선명 교주의 부산 피난 시절에는 1945년 4월 28일에 결혼한 첫 번째 부인 최선길을 대신해 문선명의 뒷바라지를 다 했습니다. 40년을 문선명을 모시고 그림자 처럼 따라 다녔지만 그녀는 통일교회에서 버림받고 보살핌도 받지 못했습니다. 후회와 처절한 가난으로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제 3 절 통일교는 혈통복귀의식이라는 3일식 피가름행사


통일교에서는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기하급수적으로 릴레이식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복귀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복귀의식을 치른 사람만이 완성된 아담, 하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통일교 원리인 타락론에는 죄의 뿌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되어 죄의 뿌리가 된것이 아니고 아담 하와의 불륜한 사랑관계로 타락된 것이 선악과요 죄의 뿌리라고 통일교 원리 강론 교리는 주장합니다. 따라서 천사장 루시엘이 하와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더럽혀 죄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에 문선명 재림주 메시아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혈통복귀를 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혈통복귀 피가름을 통한 혈통복귀야 말로 모든 인류를 하나님 앞으로 구원한다는 의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동방 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서 그 당시 문선명 교주와 같은 혈통복귀 피가름교주가 나타나 선량한 처녀들과 수많은 가정을 파괴해도 징벌하는 법조인이 없었고, 종교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문선명 교주는 자신의 수재자에게도 복귀의식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제 4 절 문선명이 창안한 혈통복귀 피가름의식


통일교 교인이 많아지자 문선명은 개개인에게 혈통복귀의식을 치를 수가 없었습니다. 점점 세상 이목과 언론의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문선명 교주 자신이 통일교 수 많은 여자들을 모두 혈통 간음 관계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방법을 짜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이 합동결혼식을 할때 포도주인 성주의식을 먼저하게 되는데 이때 포도주에 21가지의 과일즙과 포도주를 넣고 자신의 00을 넣어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는 신랑, 신부에게 혈통 복귀 의식인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입니다. 그 포도주는 문선명 교주의 피와 살을 의미합니다.

 

또한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고 3년 전도기간이 지난 다음 3일 혈통복귀 피가름의식을 함으로 문선명의 혈통을 이어받고 혈통복귀를 한 통일교 교인들은 아담이 지었던 원죄는 물론 조상 대대로 지었던 혈통죄와 형제들이 지었던 연대죄 그리고 자신이 지었던 자범죄가 깨끗해지고 완전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제 5절 문선명 통일교의 혈통복귀 피가름 3일간 복귀 의식

 

다음은 문선명 자신이 처녀와 유부녀들에게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 구원의식을 행한 것 같이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신랑 신부에게 통일교 원리강론 복귀원리 완전구원교리가 3일 행사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라는 증거의 공문이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신랑 신부가 행하는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의식
 

1. 의의


가. 전체 복귀섭리역사를 탕감 복귀하는 실체적인 복귀식(탕감식)이다.

첫째 날은 구약시대(타락한 아담, 구약권)의 복귀식이다.

둘째 날은 신약시대의 예수님 입장을 탕감 복귀하는 의식이다.

셋째 날은 복귀된 신랑으로서 신부를 재창조하는 의식이다.

 

나.문선명 참부모님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는 조건을 세우는 탕감의식으로 아내가 먼저 복귀되어 남편을 다시 낳도록 하는 가정을 외적으로 통과하는 탕감의식이다 내적인 의식이 문선명의 00포도주성주의식 임.

 

2. 준비


가.준비물 : 문선명 참부모님 존영(사진), 심정초 또는 통일초, 성건(수건에 포도주를묻힌 것), 성건을 담는 그릇, 성염(소금),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 행사 식순 등 준비

 

나,본 혈통복귀 피가름 의식은 통일교 합동결혼식 축복 후 40일 동안 부부관계를 하지 않고 성별 생활을 하여 성공한 남편과 아내가 통일교 목사님에게 축도를 받고,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 의식행사를 치르게 된다. 반드시 하루에 1번은 혈통복귀 피가름 행사를 하여야 하며,하루에 2번만 하여도 재 타락한 결과가 되어 죄인이 되는 것이다.

 

다. 3일 혈통복귀 피가름행사에 사용하는 방과 침구일체를 성염(소금)으로 뿌려서 깨끗하게 성별한다.

 

라.신랑 ·신부는 적당한 장소(주로 북쪽)에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 온영(사진)을 모시고 심정초 또는 통일초에 불을 밝힌다.

 

마. 성건(수건에 포도주를 묻힌 것)의식

1) 남편과 아내는 먼저 정성껏 목욕을 한다.

2) 성건을 담근 그릇은 가로 20cm, 세로 10cm, 높이 3cm정도로 하고물은 성건 하나를 적실 정도로만 준비해서 신랑·신부가 서로 완전 나체 상태에서 성건 (수건)으로 몸을 닦은 다음에 그릇에 물이 남지 않도록 한다.

3)성건은 남편과 아내의 것이 바뀌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3일 동안 반드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4)몸을 닦을 때에는 자기가 자기의 몸을 닦아야 하며, 닦는 순서는 머리부터 닦는다.

5)이 의식은 성건으로 몸을 닦아 외적으로 성결케 하는 조건을 세우는 것이다

 

3. 행사


가. 제1일

 

1)성건으로 물을 적셔 몸을 닦은 다음에 다시 양복 또는 하얀 예복을입고, 하나님과 참부모님 존영(사진)에 찬송과 경배를 드리고 가정 맹세를 봉독한다.

2) 아내가 앉고 남편이 아내에게 3배 경배를 드린다(이 때의 아내는 어머니 입장이기 때문에 어머니, 나를 낳아 주십시오 하는 심정으로 경배한다. )

3)아내가 어머니 입장에서 기도한다. (기도내용 : 통일교 축복에 대한감사와 문선명 참부모님 가정의 전통을 상속받는 가정을 이룰 것을결심하고 또한, 어머니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심정을 상속받는 남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4)아내 상위로 사랑행위를 한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남편이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는 의식이다. )

= 참고사항 : 사랑행위(삽입)을 위해서 애무를 해도 된다. 반드시 삽입이 이루어져야 하며 사정을 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정이 안되면(어려우면)사랑행위를 마쳐도 된다. 단, 반드시 삽입은 이루어져야 한다. (주체가 발기가 되지 않아서 삽입이 되지 않을 경우 아내가 남편의 성기를 손으로 잡고 자신의 성기 속으로 밀어 넣어서라도 성공을 시켜야 한다. 사랑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아 시간이 연장될 때에 24시간 이상 경과하면 안 된다. 사랑 행위시 콘돔이나 피임기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

5) 다시 신랑 ·신부는 1회 성행위를 마친 후 다시 정장을 입고 남편이 아내에게 1배 경배를 드린다. (이 때에 남편은 아내에게 "어머니, 나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심정으로 경배한다. )

6) 아내가 두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과 문선명 앞에 첫날 혈통복귀 피가름 혈통복귀 행사를 마쳤다는 보고 및 감사기도를 드린다.

 

나. 제2일 :혈통복귀 피가름행위를 남편이 아래에서 부부관계를 하고,아내가 남편위에서 부부 관계를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1) 첫째날 혈통복귀의식과 둘째날 셋째날 피가름 혈통복귀 의식은 하루한 번만 성교의식을 해야지 통일교 합동결혼식 후 3년 동안 합방을 안해서 정욕이 넘쳐 두번 피가름을 하면 탕감봉으로 매를 맞고 천국 구원의식이 깨어지고 7년동안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

 

다. 제3일


1)제3일째 의식은 남편이 비로소 남자의 주관성을 복귀하는 의식이다.

2)성건의식 후 정장을 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 존전(사진)에 찬송과 경배를 드런다.

3) 남편과 아내가 마주보고 맞절 3배를 한다.

4) 남편이 주관성 복귀된 남자의 입장에서 하나넘 앞에 기도한다. (기도내용 : 남자의 주관성 복귀와 잃었던 조건회복을 감사하는 내용)

5) 아내가 답례기도를 한다.

6)남편 상위로 남편이 3일째에는 혈통복귀 피가름관계를 할 때 아내 위에서 부부관계를 하고, 아내는 남편 밑에서 사랑행위를 한다. 복귀된 아담 가정에서 혈통복귀 피가름로 타락했기 때문에 통일교 복귀 원리인 혈통복귀 피가름로 완전구원을 받은 아담 가정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7)사랑행위 후 성건으로 하체를 닦는다. 닦은 성건은 세탁하지 않고,그대로 말려서 이스라엘 민족이 법궤를 보관하듯이 소중하게 보관하여 자손만대까지 물려준다 그 이유는 완전구원을 받은 중생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8) 정장을 한 후에 남편이 앉고 아내가 남편에게 1배 경배를 드린다.

9)남편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전체 행사의 종료 보고와 절대로 타락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기도 및 3일 행사 성공을 감사하는내용으로 기도한다. )

 

4. 주의사항


가. 3일 행사를 1일이나 2일에 끝내거나 4일 이상해서는 안 된다. 단,3일행사 도 중 불가피한 사유(긴급한 일)로 첫날 행사 후 그 다음날 행사를 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 며칠 뒤 2일째 행사를 할 수는 있다. 기성가정(결혼 후 통일교 입교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합동결혼식을 한 가정)의 경우 나이와 건강의 문제로 계속해서 3일간 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 첫날 행사 후 수일간을 띄워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개월 씩 띄워서 해서는 안된다.

 

나. 성건 사용시 주의사항


1) 마른 성건을 사용해도 안되고 세탁한 성건을 사용 해도 안 된다.

2) 성건을 사용하지 않고 3일 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

3)성건을 서로 바꾸어 사용해도 안되고, 하나의 성건을 둘이서 사용해도 안 된다.

다. 아래와 같이 사랑행위를 한 경우에는 실패가 된다.
1) 첫째 날 둘째 날 남편상위로 사랑행위를 한 경우

2) 셋째 날 아내상위로 사랑행위를 한 경우

3) 삽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행위를 끝낸 경우

4) 본 식 외에 다른 사랑행위를 한 경우

 

라. 3일 행사 첫째 날(둘째 날이나 셋째 날도 해당됨)의 행사를 수일에 걸쳐서 행할 경우도 실패가 된다. 시작된 시간으로부터 24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

 

마. 3일 행사는 반드시 허락하신 목사의 축도를 받은 후에 실시해야 한다

 

바.본 식대로 3일 행사를 하지 못했을 경우 협회 가정국에 상담한 후성별의 탕감조건을 세워야 한다. 그 다음 축도를 받고 성건을 다시지급 받아 3일 행사를 실시한다.

 

사.제1일 제2일 사랑행위 한 후에는 타월로 하체를 닦되 제3일째 날은 반드시 성건으로 하체를 닦은 후 그대로 말려 보관한다.

 

아. 3일 행사중 동일한 일자에 사랑 행위가 중복되지 않도록 한다. 즉,3 일 행사의식이 끝나는 시간과 새로 시작하는 시간이 동일한 날짜에 중복되지 않아야 한다.

 

 

 

제 25 장 문선명은 모든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고

 

파멸시킨다


제 1 절 문선명은 자녀와 가족 구원도 못 시킨 거짓 메시아 이다


문선명은 자신은 하나님이 적그리스도이며 희대의 영혼 사기꾼이다. 첫번째 아내 최선길도 전도하지 못하고 이혼 하였으며 문선명은 혈대교환, 혈통복귀의식, 피가름,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신과 자녀들도 구원하지 못 하였으며 방탕과 음란, 자살, 마약, 이혼, 사고로 자녀들이 죽었다.

문선명의 죄악은 자식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으며 이는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라는 증거이다. 자녀들도 방탕, 마약, 이혼, 동거, 자살, 사고사, 감옥 생활 등으로 고통 당하고 있다. 자신의 자녀들 신앙교육도 책임 지지 못하는 문선명 사이비교주가 인류의 구세주 참부모 재림주라는 것은 거짓이며 영혼 사기꾼이라는 증거이다.

 

문선명이 결혼하여 낳은 여섯 번 째 아들인 문진영(21세)은 1999년 9월26일날 호텔 경영 수업을 위해 미국 네바다주로 가는 길에 있는 '리노'라는도시 호텔에 투숙하던 중 17층 발코니에서 떨어져 자살하였다고, 미국 신문에 대서특필하였습니다. (리노 미국 레바다주 AP=연합뉴스/1999. 11. 11)

그 당시 문진영은 문선명이 수많은 통일교 2세 가운데 뽑은 유화주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유화주에게는 애인이 있었고 그의 애인은 한남동 저택과 미국 문선명 왕국의 저택인 이스튼 가든까지도 찾아가 크나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문진영이는 괴로워 하였습니다. 아기를 하나 낳았지만 별거 하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문진영이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자신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신의 며느리 될 사람의 신앙을 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며느리 후보 중 학벌, 미모만보고 결정하고 맞이하여 결국 사랑하는 아들인 문진영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문선명이 본부인인 첫 번째 부인 최선길과 아들을 버리고 이혼하고 처녀를 피가름하여 사생아를 낳고 그 수많은 가정을 파탄시켰다. 1960년 4월11일 문선명(40세) 부인 한학자(17세)에 자칭 재림주 참부모 어린양 혼인잔치를 하고 낳은 큰아들이 문효진이다.

 

문선명과 한학자 사이에 낳은 큰아들 문효진이 당시 19세, 홍난숙 15세에 결혼하여 5남매를 두고 이혼하였는데 전 며느리 홍씨는 "전 시아버지인문선명 교주는 구세주가 아니며 사기꾼" 이라고 미국 CBS방송에 한 시간 동안 보도 하였습니 다.

 

문선명의 딸 문은진도 "문선명은 자기 아버지일 뿐이지 재림주 구세주가 아니다" 라고 주장 하였습니다 (조선일보, 1998. 10. 08)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며느리 감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그런 부모입니다. 자신의 자녀도 신앙책임을 갖지 못하고 파경을 맞는 자녀들이 있는데 통일교 미혼남녀를 합동결혼식을 시켜 완전 구원해주고 후손대대로 복을 빌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귀중하고 소중한 자식을 죽게 만든 사람이 바로 문선명 교주인 것입니다. 문진영이 죽은 후 통일교회 내에서는 7일 동안 문진영의 죽음을 통일교 교인들에게 숨겼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숨길 수 없어 호텔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발표 하였던 것입니다. 문진영의 죽음은 결국 부모를 잘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처녀인 Y대 여대생 김명희도 간음 간통 복귀의식을 치러 문희진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문희진은 1955년 6월 30알(양력 8월 17일)출생하였고 1969년 8월 1일 14살 때 조치원 부강역에서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유혹으로 통일교인이 된 이득삼과 그 딸 최순화는 문선명 교주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처녀인 최순화와 혈통복귀라는 미명으로 복귀의식을 치러 박 사무엘이라는 사생아 아들을 1965년도에 낳아 길렸습니다.

 

제 2 절 문선명의 둘째 아들 문흥진의 사망


미국에서 1983년 12월말에 문선명의 둘째 아들 문흥진(17세)의 차와 트레일러가 부딪혀 문흥진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문흥진의 시체를 한국에 가져와 1984년 1월 2일 승하식이라며 거창하게 장례를 치렸습니다. 문선명은 1984년 1월 3일 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뉴욕 벨베디아 수련소에서 죽은 문흥진을 위한 애승일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문흥진을 영계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을 세뇌시키기 위하여 재림주 천지부모 행세를 하면서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까지도 신으로 섬기라고 공갈 협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문흥진이 통일교 전체 교인들을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죽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에게 1984련 1월 1일부터 1월 30일까지 금식 철야 회개 기도를 실시하라고 명령하여 실행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죽은 문흥진과 박보희 회장의 살아있는 큰딸 박훈숙을 영혼 결혼시키고 박훈숙을 문훈숙으로 성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1971년에 문선명이 미국 시민권을 가졌을 때 미국성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훈숙은 일생동안 영혼결혼을 하여 살아있는 처녀가 문선명 교주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문선명은 박훈숙에게 죽은 아들 문흥진을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과천교회에 목사로 있으면서 국내의 유명한 사건을 해결한 강창수(가명)라는 형사를 만나 문흥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문흥진이 미국 뉴욕에서 교통사고로 죽기 전 국내에서 과속으로 교통사고를 내어 경찰서에 잡혀 온 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문흥진의 비서 역할을 했던 과장이 강창수 경정을 찾아와 "제발 문흥진의 운전 면허증을 빼앗아 달라" 는 부탁을 한 일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문흥진을 수행하는 비서는 과속으로 차를 운전하는 문흥진이 무섭다고 하며 운전 면허증을 빼앗아 달라고 담당형사에게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떻게 운전하고 다녔는가? 하는 것을 저는 안 보아도 훤히 알 것 같았습니다.

 

제 3 절 재림한 문흥진 노릇한 에지프트


문선명은 통일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문흥진이 죽고 난 후 반드시 이 땅에 재림하여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문흥진이 재림하였다고 떠벌리기 위하여 아프리카 케냐 주재 곽정환 회장과 아프리카 짐바브웨 청년흑인 에지프트와 만났습니다. 에지프트는 1983년부터 통일교 사람들과 접촉한 사람이 었습니다. 짐바브웨 책임자인 어거스틴 마튼 고시와 만나 통일교 원리강의를 듣고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로, 메시아로 믿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문선명은 1987년 에지프트가 적극적이며 설교도 잘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문선명과 곽정환 회장은 에지프트에게 문흥진이 되라고 강요하고 명령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문흥진이 되기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곽정환 회장, 간부들의 설득으로 재림한 문흥진이 되어 통일교 회개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에지프트에게 전세계 통일교회를 다니며 통일교 교인들을 회개시키는 고백식 설교를 하게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을 회개시킨다고 하며 죽은 문흥진이 살아서 재림해서 에지프트에게 영이 들어 왔다고 외쳤습니다. 에지프트를 문흥진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에지프트는 죄있는 통일교 교인들을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에게 죄악을 용서를 받는 조건이라며 죄악의 정도에 따라 몽둥이로 탕감봉이라는 구실로 10대, 7대, 3대, 1대를 무자비 하게 폭행하였습니다.

 

유럽, 아프리카, 남미, 미국, 일본, 한국에서 흑인인 에지프트가 사망한 문흥진이라고 자칭하며 통일교 교인들이 저지른 간통죄, 강간죄, 성 추행죄, 공금 횡령죄, 절도죄, 부부 싸움한 죄를 심판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에게 문선명 교주를 배반한 죄, 욕설한 죄는 몽둥이를 맞아야 용서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공개적으로 에지프트에게 죄악 고백식을 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죽은 문흥진 행세를 하며 전 세계 통일교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죄악을 저지르는 통일교 교인들에게 죄를 용서하여 준다는 면죄부 형식으로 폭행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합동 결혼식 전에 혼전 혈통복귀 피가름 한 것과 합동 결혼식 후 혈통복귀 피가름을 한 것까지도 몽둥이로 폭행을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미국 호화 저락인 이스트 가든에서 에지프트를 불러 환영 만찬회를 열었습니다. 에지프트는 자신을 교통 사고로 죽은 문흥진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문선명 큰아들인 문효진, 셋째 아들인 문현진, 넷째 아들인 문국진은 진짜 문흥진이 재림 한 것이라면 어린 시절에 대하여 말을 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어린 시절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에지프트가 문흥진이라는 것은 거짓이었기 때문에 예언할 능력도 없고 영을 볼 수도 없으며 투시력도 없었습니다. 에지프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문선명, 곽정환, 에지프트 3명은 통일교 교인들의 죄악을 회개시킨다며 사기극, 조작극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협회 최고위층 간부들과 통일그룹 내 기업체 사장들은 에지프트에게 하는 고백식을 피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겹사돈이었던 홍성표 일화사장도 곽정환 회장에게 고백식을 안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곽정환 회장은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겹 사돈인 박보희 총재도 에지프트에게 죄악을 고백하는고백식을 했습니다. 에지프트는 60세가 넘는 박보희 총재를 무차별적으로 폭행 하였습니다. 그래서 박보희 총재는 뇌출혈을 일으컥 뇌수술을 받았고 조지타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습니다.

 

통일교 최초 합동결혼식을 한 36가정(1901년 결혼)부터 6,500가정까지의 모든 축복 가정도 고백식을 하였습니다. 그중 1,800쌍(1975년 결혼) 고백식에 저도 갔습니다.

1988년 12월 18일이었습니다. 그 날 통일교 본부 교회에 1,800쌍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전국에서 모였습니다 1,800쌍 전부가 지를 지었다며 고백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10가지도 넘는 지의 종류 중에 한 가지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1,800쌍 전부가 죄가 있다며 몽둥이로 지를 탕감해 주는 탕감봉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지를 지은 1800쌍 부부는 자리에 앉고 저와 다른 한 목회자가 일어서 있었습니다. 죄악의 조건에 걸리지 않는 저와 다른 목회자는 통일교 죄악 고백식 중 노아 같은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저는 진실과 정직으로 살아 온 목회 길을 회고하며 그 당시 문선명에게 미쳐서 참 부모님께서 저를 지켜 준 것에 대하여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문흥진 행세를 하며 폭력을 행사했던 에지프트는 문선명, 곽정환의 1회용 이용물로 사용되었습니다. 통일교회에서 에지프트를 버림으로 에지프트는 통일교회를 탈퇴했고 문선명 통일 교주는 고백식 후에 문흥진이 에지프트를 떠나 영계로 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1992년 8월 4일 일본 지바시 지바깽 마꾸바리에 있는 국제회의장 대 강당에서 통일교회와 문선명 교주의 문흥진 조작 행사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사이비 교주이고 적 그리스도며 인류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하나님의 대적이라고 문흥진 군 행세를 했던 에지프트가 폭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교 교인들은 이런 내용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 흑인청년 에지프트의 고백식 사건으로 수많은 통일교 교인은 신앙의 타격을 받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부부지간에 간통, 성추행 사건 등이 서로 폭로되어서 왕따가 되고 가정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통일교회 목회자 회의에도 타격을 주었습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에지프트는 교회에 많은 사건을 일으키고 통일교회를 탈퇴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재림주라며 호의호식하는 모습을 보고 에지프트도 사이비 재림주가 되었습니다. 에지프트는 문선명 교주가 하던 것처럼 재림주 노릇을 배웠던 것입니다. 에지프트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에 가서 가루트라는 기독교 종파를 만들어 가짜 재림주가 되어 포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문선명으로 인하여 또 하나의 사이비 교주가 수많은 영혼을 죽이는 재림주가 된 것입니다.

 

제 4 절 문선명과 친인척은 재산착취를 통해 초호화 생활을 누린다.


문선명 교주는 부 문경유, 모 김경계에게 효도하기 위하여 부모가 사망하였는데도 이북에 갔습니다. 이북 김일성이 문선명 교주에게 전세 비행기를 중국까지 내어주어 비행기를 타고 이북에 입국하였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통일교 교인들로부터 거액재산을 착취하여 얼마나 많이 투자 하였겠습니까? 갈 수 없는 이북 평북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고향 땅에 전세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출세하여 개선 장군같이 고향에 가서 죽은 부모에게도 효도하고 형제, 친척들에게도 온갖 선물로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교인1인 당 8만원씩의 돈을 거두어 고향에 땅 30만 평을 마련하고 수백억의 돈을 투자하여 예수님이 탄생한 베들레햄 같이 문선명의 고향 땅인 정주를 평화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남한에 살고 있는 문선명 교주의 사촌 육촌 형제들과 친척들을 통일그룹 사장, 기업체 총 책임자들로 세워 통일그룹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그룹이 망한 후에도 문선명 친척들은 돈을 가지고 초호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 5 절 문선명의 브라질 자르딘 계획


문선명은 통일그룹이 1998년 IMF때 부도가 났는데 전 세계 통일교의 자금줄이 막히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통일교 교인들 가정의 재산 착취 운동에 돌입하였습니다. 문선명은 교인들과 한가족이라고 세뇌 교육을 시키며 부자관계에 네 돈, 내 돈이 따로 없고 아버지 돈이 자식 돈이고, 자식 돈이 아버지 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의 돈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소유권을 이전하라고 하였습니다. 한국의 전통은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인데 어느 누가 자식이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줍니까? 문선명교주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한국과 일본의 통일교 교인들에게 무조건 재산을 자신의 소유로 이전하라는 공문을 내렸습니다. 교인들은 무조건 문선명에게 2,100만원을 총 생축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내야 했습니다.

죄를 용서해주는 천국행 면죄부인 탕감비 1300만원을 바쳐야 되고 조상 구원헌금 수천만원 등 재산을 바치지 않으면 통일교 교인이 아니고 죄인이 되며 지옥을 가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온갖 공갈 협박에도 통일교 교인들은 문선명에게 세뇌가 되고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재산을 바치게 됩니다.

 

문선명은 재산 착취를 통해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통일교 교인은 브라질의 자르딘 40일 수련에 무조건 참석 해야 하며, 만약 40일 수련을 참석하지 않으면 통일교 교인이 아니고 문선명 통일교 제국의 황족의 자격을 박탈한다고 하였습니다. 온갖 공갈 협박으로2,100만원 헌금을 내고 브라질 40일 세뇌교육 수련에 일천만원 경비를 쓰고 참석하는 사람만 문선명 사이비 종교 통일 제국의 황족 자격을 갖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문선명은 1차로 1억 평의 남미의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수련소를 매입하였습니다. 이 땅은 통일교 교인들을 잔인하게 공갈 협박하여 재산을 착취한 돈으로 사들인 것입니다.

 

문선명은 이 땅에 통일교 교인들 세뇌교육을 시키기 위한 교육수련소와 앞으로 50억 평을 매입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리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학교 건물을 건축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이라는 거창한 이름도 붙였습니다. 새 소망 에덴동산은 문선명 통일교 제국의 새 세계, 새 국가 건설을 하여 통일제국을 만들자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나라와 백성이 없었기 때문에 십자에 달려 죽었다고 문선명이 주장합니다. 문선명은 문선명 통일교 제국을 세우기 위하여 2004년 4월30일까지 세워야 한다고 통일교 교인들을 명령하며 독촉하고 있습니다.

 

이미 문선명은 주권 복귀와 조국 광복, 왕권 복귀라는 대명제를 가지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재림주 천지 부모, 통일교 제국의 왕으로 취임을 하였던 것입니다.

 

1차는 새 소망 에덴동산에 새 세계, 새 국가 통일제국 건설이 목적입니다. 2차는 산업 개발을 하여 임업농업 생산환경을 성공하자는 계획입니다. 3차는 공업도시를 만들자는 것이 목적입니다. 4차는 건설업을 육성하는 것이 목적이고 5차는 문화, 예술, 이상세계, 통일제국 건설이 목적입니다.

 

문성명은 한국에서 통일그룹 부도 후 한국 통일교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통일교 교인들을 남미 브라질로 대 이동하는 방대한 계획을 세워 각종학교를 세우고 1억 평 대지를 매입하였던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중심 삼고 애굽이라는 나라에서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여 애굽을 탈출하였고 홍해 바다를 건너 가나안 7족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은 고향 땅을 400년만에 찾게 되었다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역사의 동시성을 반복하고 복귀 섭리역사를 위해서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통일교 교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하면 브라질 자르딘 에덴동산에서 1억 평의 밀림을 무보수로 논과 밭을 개간해야합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세뇌되어있기 때문에 자자손손 영혼의 노예가 되어 죽을 때까지 밀림을 농업도시,공업도시, 상업도시, 어 업도시로 개간하고 건설하여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자신의 욕망과 통일교 제국을 세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엄청난 자원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통일교 교인들에게 부끄러움도 없이 재산의 소유권 이전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에서 세뇌교육을 40일 동안 받았던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은 2,100만원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친다는 각서를 쓰고 무조건 40일 동안 브라질에 가야 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같이 40일 수련을 가는 통일교 교인 부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부부와 같이 천국 황족으로 입적하는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그 기념사진을 10만원씩에 판매하고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에서 40일 수련 세뇌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식사비로 120만원을 바칩니다. 이 나라에서 40일 식사비는 1인당 5만원도 되지 않지만 식사비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한국 통일교 교인들이 외화를 밀 반출하여 브라질에 가져가서 문선명 교주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통일교 교인들 부부가 브라질 40일 세뇌교육 수련을 받기 위해서 가정생활도 할 수 없으며 직장도 퇴직해야 되고 장사도 문을 닫고 브라질에 가야 했습니다 부부왕복 항공경비 등 일 천 만원 정도의 금액이 들어갔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피골이 상접한 일본 통일교 교인과 한국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 2만 쌍을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농장으로 대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한국 통일교 교인 1만 5천 명을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농장으로 대 이주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 재산을 빼앗기 위하여 세뇌 교육을 시켜야 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야망에 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 통일교 교인과 일본 통일교 교인의 집을 팔고 융자를 받아서라도 무조건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교육에 참석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일생 동안 통일교 교세 발전을 위하여 매일 각종 전도 대회와 행사에 일회용 이용물이 되었고 재산을 바쳤습니다. 처절하고 불쌍한 통일교 교인들은 세상에서 돈 벌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통일교 교인이 되려면 계속 행사에 이용당하고 참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직업을 갖고 개인 장사를 할지라도 운영하기가 힘이 듭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일생동안 인생의 밑바닥에서 처절한 가난과 싸우면서 그 날 그 날 식사 끼니를 걱정해야 되는 처지니 자녀 교육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고 있는 통일교 교인들은 재산을 바칠것이 없어 집을 팔고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7천 만원에서 1억원을 바쳐야 했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에 복종하여 거액 재산을 바치기 위해서 통일교 교인들은 막노동을 하고 파출부 일을 하고 식당 일을 하며 매월 분납하는 교인도 있고 처절한 생활입니다.

 

제 6 절 재산착취 수단인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문선명은 1998년 6월 22일~7월 21일까지 30일 교육을 하였습니다. 전세계 각 나라 185개국에 개척 교회를 하고 있는 국가 메시아 148가정인 296명을 포함하여 통일교 최고위층 지도자 600명에게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1차 브라질 자르딘 40일 세뇌교육 때는 7월 22일~8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 2,000명이 참석했습니다.

 

2차 브라질 자르딘 세뇌교육 때는 9월 1일~10월 10일까지 3,400명의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부부가 자녀들을 40일 동안 떼어놓고 1천만 원씩을 교육비를 내고 브라질에서 세뇌교육을 받았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2,100만 원씩을 총 생축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문선명 교주에게 바쳤습니다.

 

3차 세뇌교육 때는 10월 11일~11월 17일까지 700명의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이 참석하였습니다.

 

4차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세뇌교육 때는 11월 18일~12월 28일까지 문선명 교주가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총 15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거듭되는 명령과 지시에 남미 브라질 자르딘 40일 세뇌교육에 우리 부부도 어쩔 수 없이 약 1천만 원 정도의 돈을 내고 세뇌교육에 참석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목사 부부까지도 40일 교육에 참석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목사들은 교육비가 없으면 교인들이 헌금을 마련하여 목사 부부 경비를 지원하여 참석하라" 고 명령 하였습니다.

교인들의 정성으로 경비를 마련하여 저의 부부는 4차 세뇌 교육 때 브라질 자르딘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저의 부부는 문선명 교주와 황족으로 살 수 있다는 입적 사진도 같이 찍었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통일교 교인들이 재산소유권 이전하라는 2100만원을 바치고 오라고 했습니다. 만일 바치지 않은 통일교 교인은 브라질 자르딘에서 40일 교육 등록할 때 2100만원 총생축 헌금을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에게 바칠 것이라는 서약서를 제출하였습니다.

 

5차 때는 1998년 12월 29일~1999년 2월 6일까지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6차 때는 1999년 2월 6일~3월 17일까지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에게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통일교 역사가 있는 한 총탕감비 1300만원이나 총생축헌금 2100만원,조상구원헌금 1대부터 120대 조상까지 수천만원, 10의 3조헌금, 문선명 나라 건국기금 매월 17만원, 8대명절 헌금 등을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은 무조건 바쳐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40일 수련이 회를 거듭할수록 한국과 일본의 통일교 교인들이 적게 오자 말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브라질 자르딘까지 40일 교육을 못 오는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까지도 2,100만원씩을 나에게 바쳐라" 하고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에게 공문으로 명령하였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직장에 다니거나 장사하는 통일교 교인들은 브라질 40일 세뇌 교육을 안 가더라도 집을 팔거나 융자를 받아 총 생축헌금 2,100만원씩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저는 브라질 자르딘에 가서 문선명 교주 부부를 아침 식사할 때 만났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새벽 집회를 마치고 6시 30분에 식사할 때 통일교 교인 경호원 여러 명이 경호를 서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김윤상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 원장과 부원장인 윤정로씨에게 저의 이야기를 하고 아침에 몇 분만이라도 문선명 교주 부부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가 식사를 하는 중에 그 앞에서 땅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 전부는 문선명 앞에 나아갈 때 경배 세 번이나 한 번을 무조건 해야합니다. 그러고는 문선명 교주에게 억울한 강제 인사를 당했던 것을 간단하게 설명 하였습니다.

1991년도 1월 6일 노원 교구 본부에 제가 교구장으로 발령을 받았지만 김봉철 총무국장이 서유암 교회장을 교구장으로 만들기 위하여 노원 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된 저를 강제 박탈시키고 서유암으로 교체 시켜 버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서울 시내 교회 전체 목사들 앞에서 일어나 부당성을 발언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던 것은 제 마음이 상했기 때문에 나갔다고 문선명 교주에게 보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김봉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저를 폭행한 내용이나 충격으로 심장병이 되었다는 내용은 차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저에게 "수련을 잘 받고 가라!" 고 말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르딘 수련 받는 교육생들에게 세뇌 교육을 시킨 후 아침새벽 설교를 하고 6시 30분에 식사를 한 후 바로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을 떠나갔습니다.

저는 브라질까지 간 것은 40일 세뇌 교육 조건도 세우는 것 이었지만 제가 문선명 교주에게 할말을 하기위해 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할 말을 다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문선명 교주는 미국에서 이미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브라질 자르딘 수련소에 와서 문선명 교주의 가족이 되는 황족 입적 사진도 안 찍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뿌리까지 썩은 통일교회는 한국과 일본 통일교회에서 공갈 협박으로 걷어지는 헌금이 없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브라질 자르딘 40일 세뇌교육 수련이나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서의 조상 해원 헌금을 한국과 일본에서 하지 않으면 전 세계 통일교회는 순식간에 쓰러지는 것입니다.

미국 소수의 통일교 교인들과 유럽 극소수의 통일교 교인들, 남미 통일교 교인들, 아시아 통일교 교인들은 절대로 문선명 교주에게 헌금을 바치지 않습니다.

 

오직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만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노예가 되어 재산을 착취당하고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1998년 12월 21일 밤에 브라질 자르딘 수련소까지 와서 통일교 40일 세뇌 교육생들과 하늘나라 천국 황족 입적 사진을 부부끼리 찍어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자칭 재림주로 의자에 앉고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부부는 문선명 교주의 뒤에 서서 황족 입적 사진을 찍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적 수련을 받은 합동 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1천만 원의 경비를 쓰고 2천 1백만원의 재산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쳐야 합니다.

 

브라질 자르딘에서 수련생 전체에게 매일 회개기도와 새벽에 문선명의 기도책을 읽는 훈독회와 세뇌 교육 프로그램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저의 뇌리에서 맴돌 뿐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제국 건설과 주권 복귀, 왕권 복귀가 최종목적입니다.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자르딘 수련은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 재산 착취에 목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이 지구상에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회에서 문선명 교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사악합니다.

 

제 7 절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임을 증명한 사람들


통일교 초창기에는 문선명 교주의 오른팔 격 이였던 통일교회의 충성꾼인 유민효, 유영효, 홍성표, 이진태, 박종화 등 수많은 사람들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36가정 최초 축복을 받고도 통일교를 탈퇴하거나 통일교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같이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던 엄덕문 회장도 초창기 통일교 청파동 시절부터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로 믿고 따랐지만 통일교회를 탈퇴 하였습니다.

 

엄덕문 회장은 문선명 교주의 축복을 받았고 통일교회의 산증인 이었습니다. 엄덕문 회장은 세종 문화회관 설계 등국내 설계의 일 인자로 통일교의 전국 교회를 설계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엄덕문 회장은 문선명 교주의 사이비 성을 알고 통일교회를 탈퇴하고 떠나 지금은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김덕진이라는 음악가는 일본음악 대학에서 공부를 하여 국내에 들어온 사람으로 통일교회 성가 19곡을 작곡한 열렬한 통일교회의 충성꾼 이었습니다.

지금도 통일교회는 김덕진이 작사 작곡한 19곡 성가를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선명 교주는 한국의 성가에는 김덕진 작사, 작곡을 지워 버리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 통일교 성가에만 김덕진 작사, 작곡 19곡이라고 인쇄되어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김덕진과 여자 교인 들에게 아담과 하와 때문에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파탄된 세상을 자신이 완성된 아담으로서 세상의 여성들을 혈통복귀 피가름을 통하여 복귀의식으로 구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여성들을 원래의 모양대로 복귀시키는 혈대 교환, 피가름 의식을 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덕진씨는 복귀원리,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유신선씨와 피가름 의식을 치렸습니다. 김덕진씨는 서울에서 통일교 여자 5명과 릴레이 혈통복귀를 한 것이 일주일 후에는 72명으로 불어났다고 문선명 교주에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또한 문선명 교주는 소생 장성 완성 3일 동안 혈통복귀 피가름관계 행사를 치러야 구원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김덕진씨에게 한번만 혈통복귀 피가름을 하여 혈통복귀를 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문선명 교주와 김덕진 씨는 이 새끼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싸움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김덕진씨는 문선명 교주와 싸운 후 통일교회를 탈퇴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기독교 신학교를 나와 경찰 목사가 되어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오른팔인 박정화씨도 이북 흥남 감옥 에서부터 알게되어 이남에 까지 같이 내려와 초창기 통일교회에 충성한 산 증인 입니다. 그는 문선명 교주의 통일원리가 김백문 교리라고 증거하였고 문선명 교주의 지시에 의해 혈통복귀와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를 실천하여 통일교 여자들과 관계를 많이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지시를 잘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 박정화씨는 문선명의 비서실장으로 수행하면서 일기로 쓴것을 '야록 통일교회사' 라는 책을 저술하려 통일원리가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이며 문선명 교주가 수많은 처녀와 유부녀들을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복귀하여 개인과 가정을 파괴한 문선명 교주라는 것을 폭로하였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통일교 비리 폭로운동이 벌어졌으며 특히 일본에서는 언론과 방송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일본 통일교 활동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황선조 한국 통일교 협회장을 박정화씨와 만나게 하여 자신의 비리와 혈통복귀 피가름 스캔들을 감추고자 하였습니다.

박정화씨는 문선명 교주의 부산 피난 시절부터 비서실장 일을 보면서 문선명 교주와 같이 동행하고 행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문선명 교주와 혈통복귀 피가름한 여자들과 혈통복귀, 혈대 교환을 한 내용을 일기로 써 놓을 수 있었는데 그것을 책으로 발행하여 일본과 한국에 폭로하였던 것입니다.

 

박정화씨는 1998년 1월에 문선명 교주의 잔악성과 통일교 원리가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수백 권의 책을 발송하여 읽게 하였습니다. 다급해진 문선명 교주는 황선조 한국 통일교 회장을 통하여 통일교 교인들의 피살인 거액의 돈을 주고 박정화씨를 매수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박정화씨는 거액의 돈을 받고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야록 책을 통일교회에 팔았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황선조 한국 회장이 1998년 4월 14일 부산 교구 내 통일교 목사 부부 회의석상에서 박정화씨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야록 책을 회수하고 사들였다고 한 말이 사실을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과 저의 부부는 황선조 회장의 그 말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제가 마포교회에 있을 때 전도한 문희숙씨는 1975년 2월 8일날 1,800쌍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하며 짝을 맞추어주어 합동결혼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문희숙씨는 그 남편과 이혼하였습니다. 이혼한 7년후 1982년 10월 14일날 6,000쌍 합동결혼식을 다시 올렸습니다. 문선명은 이혼을 당한 문희숙에게 박철수라는 사람이 최고 좋은 신랑감이라며 또 짝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문희숙씨는 남편과 두 남매를 두었습니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중고등학교 등록금을 내지 못하여 졸업도 시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렸습니다. 문희숙씨는 저에게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을 통곡하며 하소연을 합니다. 문희숙씨는 아무리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불가능하였고, 가난 때문에 두 아들을 고아원에 보내고 싶어도 다 커서 고아원에서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을 중고등학교도 졸업시켜 줄 수 없는 무능한 엄마가 되었다고 통탄하였습니다. 문희숙을 전도한 믿음의 부모인 저는 통일교회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부모로 믿게 한 결과로 이렇게 비참한 가정 파탄을 몰고 온 것에 대하여 제자신 스스로가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문희숙씨는 이제 죽더라도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재림주로 믿지 않을 것이고 통일교를 탈퇴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문희숙씨는 장로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대종교(단군교)에서 통일교회로 입교하였던 이백림 논산할머니에게 전국 통일교 교인들 조상 구원 해원식을 문선명이 명령하여 통일교 조상들을 1973년도에 모두 구원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이 합동결혼식인 축복을 받으면 조상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다시 지옥간 조상을 들고 나와 통일교 교인들을 미혹하여 1대부터120대까지 조상구원 하라고 명령을 내려 실천하는 것은 거액 재산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제 26 장 통일왕국을 꿈꾸는 문선명

 

제 1 절 통반격파를 지시한 문선명


문선명은 1998년 6월 20일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에서 자신이 참부모 재림주로 세뇌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40일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40일 세뇌 교육 중에 문선명 교주의 '원리강론' 과 문선명 교주의 '아버지의 기도 1권부터 12권' 을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서 발행한 죽은 이상길씨의 '영계에서 보내온 편지' 중 1권인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 , 2권인 '인류의 범죄자 누시엘' , 3권인 '새로운 세상' 은 통일교 교인의 재산을 착취하기 위한 세뇌 교육용 교재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 조상이 지옥간 것을 천국으로 보내 준다는 약속을 하고 지를 용서해 준다며 면죄부를 팔아 통일 교인 재산을 빼앗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성약시대 청평역사와 축복가정의 길', '축복가정과 이상천국 I~2권' 등을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 통일교 교인과 일본 통일교 교인을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매일 1시간 씩 전 가족과 친척이 모여 훈독회라는 이름으로 책을 소리 내어 읽습니다 전국적으로 각종세미나,각종 행사,국민연합 세미나 행사를 통하여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기 위한 세뇌교육으로 지속적인 훈독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 교인을 뛰어 넘어 이제는 전국 시군구 면동리까지 국민연합을 조직하여 훈독회를 하고 통반격파를 하라고 명령하며 통일교 교세 확장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지역의 노인들과 유지, 전도 대상자들이 있으면 무조건 문선명 교주의 책을 전달하고 글 읽는 행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2004년 4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 남편과 아내 3만명이 총동원되어 전도 목표를 세워 교세 확장에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남북통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기독교를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통일하여 조국광복을 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주권 복귀를 외치고 왕권 복귀를 외치며 통일교 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대통령은 문선명에게 경배하고 문선명을 남북한 7천만 국민들에게 메시아요 천지 부모가문선명 교주라고 국민들에게 증거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이 나라의 국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1990년 2월 27일날 한남동 문선명 교주의 저택에서 하늘나라 왕권 정착이라는 설교를 통하여 자신이 세상의 천지 부모라고 선포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칭 참부모요, 재림주 메시아라고 주장합니다.

문선명 교주는 1990년 4월 9일~13일까지 제 11회 세계 언론인 대회를 모스크바에서 개최하고 국내에 들어와 4월 30일에 충북 수안보 통일교 호텔인 와이키키 호텔에서 전국 12개 대도시에 수천명의 사람을 모아놓고 참부모 메시아 재림주 선포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문선명 교주는 "전국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통반 격파를 하자" 고 외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책을 훈독회라는 이름으로 통일교 교인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읽게 만들어 문선명 교주가 재림주라고 세뇌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제 2 절 통일제국 건설을 위한 문선명의 음모


문선명은 2004년 4월 30일까지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전 세계에각 나라 국가 메시아 부인들 185명을 한국으로 불러 전국 시군구에 배치하여 국민 연합회장으로 발령을 하였습니다. 통일교회 발전과 실세화를 위한 것입니다. 현지 통일교회 목사와 하나되어 그 지역의 정치인, 경제인, 기독교 교인을 전도하여 통일교회 교인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제는 국가 메시아 185명의 부인들까지 21일 세뇌 교육 후 전국 통일교회에 배치하여 전도활동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가정 생활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부부를 갈라놓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자녀들이 견우와 직년 같이 서로 떨어져 그리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비극적으로 전도 활동을 하여야 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으라고 전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이제 그것도 모자라 통일교 최초 합동결혼식을 한 1961년의 36가정, 1962년의 72가정, 1963년의 124가정, 1968년의 430가정, 1970년의 777가정, 1975년의 1800가정, 1982년의 6000가정, 1987년의 6500가정, 1992년의 3만 가정까지 통일 제국 건설을 위해 가정을 떠나 총 출동하라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 40일 세뇌교육을 다녀와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 2100만원씩을 바친 그런 교인까지도 무조건 청평 천성 왕림궁전 21일 세뇌교육에 참석하여 식사대로 115만원씩을 바쳐야 했습니다. 식사 수준은 21일 식대로 7만원을 받으면 적당한 정도인데, 문선명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에게 천국생활 황족으로 입적한다는 명목으로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2중, 3중으로 입적 수련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늘 황족으로 등록된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사람도 수련을 받아야 합니다.

문선명은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 한국과 일본 합동 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 920명을 모아 통일교회 원리강론보다 한 단계 높은 세뇌 교육을 시켰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불어 넣으며 희생의 제물이 되어 가정을 떠나 전도에 앞장서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지금은 3차 교육생으로 1982년도 6천 가정 합동결혼식을 한 여자 통일교 교인 3천명을 모아놓고 세뇌교육을 21일 동안 시켰습니다. 통일교 부인들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딸을 떠나 가정이 파탄되어도 3년 4개월 동안 문선명 통일교 제국 건설에 목숨을 바쳐 미혼 남녀를 전도하여 합동결혼식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6천 5백 가정도 아내 되는 3천 여명의 여자 교인들이 총동원된 전국 통일교회 미혼남녀를 전도하여 합동결혼식을 시켜 통일제국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공갈협박을 한 것이었습니다.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 교육받던 한국과 일본 합동 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 920명은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총 생축헌금 2100만원과 총 탕감비 1200만원을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재산을 바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만일 재산을 바치지 않으면 교육 받을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36가정~1800가정까지가 1차 교육생이고, 2차 교육생은 6000가정~6500가정까지 21일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합동결혼식을 받은 통일교 교인은 무조건 재산을 바쳐야 되고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떠나 전국 통일교회에 배치되어 계속적으로 교육이 되어집니다.

이 교육을 받은 교인들은 합동결혼식을 했더라도 문선명이 통일교 교인들의 죄를 용서해 천국 보내준다는 면죄부로 가정당 1200만원씩을 바쳐야 합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 바치는 총 생축헌금 2100만원과 1200만원을 합하면 각 가정 당 3300만원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7천 가정만 계산하여도 2천 1백억의 거액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21일 청평 천성 왕림 궁전 황족 입적 세뇌 교육에 참석하면 앞의 사회자와 몇 사람이 북을 치고 각종 악기로 흥을 돋우며 1000명~5000명의 사람들에게 일시에 "악령을 물리치자. 악한 귀신을 성별하자" 고 외치며 머리를 계속 치고 가슴을 두 손으로 계속 치게 합니다.

집회 분위기는 온통 세뇌 분위기이고 회개 분위기입니다. 진짜 나의 악령이 떠나가고 지옥간 조상들이 구원받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세뇌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고 있습니다.

과천교회에도 21일 교육을 받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부인 6명이 왔습니다. 미혼남녀 합동결혼식 대상자를 전도하기 위하여 가정을 버리고 와있는 것입니다. 불쌍한 교인들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야망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통일교 교인들은 탕감복귀와 가인 아벨과 희생의 제물이라는 이름으로 이용당하며 희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2004년 4월 30일까지 통일교 교회의 모든 기관 기업체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의 힘을 모아 한국 전도에 총력을 다하여 미혼 남녀 확보에 주력합니다. 그들에게 합동결혼식을 시켜 문선명 개인의 야망, 통일제국 건설에 이용물로 쓰려고 합니다 모든 통일교 교인이 통반격파와 주권복귀, 조국 광복,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총 출동하였습니다.

2000년 8월 25일 1차 21일 세뇌교육을 받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920명의 부인들이 서울과 수도권 통일 교회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전도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한국과 일본의 부인 2만 명이 한국 통일교회에 집중 배치되어 미혼남녀 합동결혼식에 통일교회 운명을 걸게 되었습니다.

 

제 3 절 문선명 한학자 교주의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


1985년 12월 25일 문선명 교주 부부는 미국 벨베디아에서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사이비 종교의 극치로 말로를 장식하는 초호화판 황제 즉위식 이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 당시에는 세뇌되어 있는 상태여서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을 거행하는 것을 거룩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곳엔 통일교회 최고위 간부들만 참석하였습니다. 부인들은 몇 달 동안을 황제 황후 즉위식을 위하여 이씨 조선의 화려한 황제 비단의복을 몇 달 동안을 준비하였습니다. 황제 왕관도 순금과 비취왕관을 준비하여 머리에 썼습니다.

문선명은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에 몇 억을 사용하여 통일교 교인들의 피살 같은 눈물의 헌금을 낭비하였습니다.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가 아니고서는 자기 과시, 욕망으로 허황된 황제 즉위식을 했겠습니까?

문선명과 12명 자녀,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는 최고급으로 화려한 왕자와공주의 옷을 입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이 세상에서 역사 이래에 없는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을 올렸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황제 즉위식에서 어떤 통일교 고위층 간부도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기 스스로 가짜 참부모요,가짜 재림주요, 가짜 천지부모라는 것을 세계 황제 즉위식을 통해서 알린 것입니다. '저는가짜요' 하고 만천하에 공표 한 것입니다.

비참하고 처절하게 가난한 통일교 교인들은 이 황제 즉위식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꽃팔이, 생선장사, 파출부일, 막노동일 등을 하여 헌금을 했습니다. 문선명이 참 부모라면 자식이 헐벗고 굶주리며 피골이 상접하여 죽어가는데도 그런 돈을 썼겠습니까? 통일교인들은 참 부모라고 하는 문선명을 위하여 헌금을 하며 죽어가는 것입니다. 어찌 참 부모라면 향락, 방탕, 호화사치, 허영심의 극치를 통일교 교인들 앞에서 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문선명은 통일교 교세가 강력해지면 대통령을 하려고 1990년에 통일 가정당을 창당하였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앞으로 한국에서 여자대통령이 나와야 된다고 외칩니다. 문선명 교주의 부인 한학자를 대통령으로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통일 가정당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 가정당 주최로 전국 대 도시에 남북 통일운동 국민연합 이름으로 국내의 정치 지도자들과 시군구 의원 유지들을 초청하여 통일 가정당 대회를 열었으며 2000년 2월 15일 이후에 전국에서 대대적인 통일 가정당 주최로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사활을 걸어놓고 2004년 4월 30일 까지 이 민족을 통일교 제국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 통일교회 전체 교인은 33,000명 정도 뿐이고 예배 인원은 어린 학생 포함하여 17,000여명입니다. 전국 통일교 시 ·군 단위 교역 본부는 246여 곳이고 면 동 단위 교회는 170여 곳입니다. 대학생들 학사 교회는 01곳 뿐입니다.

 

선문대는 통일교가 세운 대학교입니다, 선문대학교 신학과에서는 통일교 목사를 양성합니다. 그러나 1998년도 졸업생 73명중 11명만 목회를 지원하고 62명은 통일교 목사 생활을 하지 않고 포기하였습니다. 통일교 선배 목사들의 비참함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통일교 목회를 보고 포기 한 것입니다. 통일교 목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인 선문대학교 신학과는 이미 사명 있는 목사들을 양성하지 못하는 기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27 장 문선명 통일교 척결을 위한 주장

 

제 1 절 통일교는 사이비 교주의 온상입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 한 명의 출생으로 지금 통일교를 탈퇴한 통일교 출신 이단사이비 교주가 수십명이 되어지고 수많은 영혼을 지옥길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사이비 이들로 인해 수 십만명의 영혼을 빼앗고 살육하는 일이 세계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사이비교주 때문에 엄청난 피해와 파탄, 파멸이 세계 각 나라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 중에 남미 가이아나의 조지타운이라는 도시에서 사이비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와 같이 923명이 집단자살을 한 것은 1978년 11월 21일전 세계 언론을 경악하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독극물 사건의 옴 진리교도 파멸하였습니다.

 

국내에만 하더라도 1925년에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며 재림주 황제라고 칭하고 황제 즉위식까지 올렸던 차경석, 차전자가 70만 명의 자기 교인들의 영혼을 빼앗고 우상숭배 재산 착취로 가정을 파탄시켰습니다. 1930년도에는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가 교인들을 천국에 보내준다고 해놓고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살게 했으며 마지막에는 자기 교인들을 타살시켜 땅속에 수 십구 수 백구씩 파 묻어 버렸습니다.

1960년도에 대전에서 휴거론을 주장했던 박용주는 교인들과 같이 천국에 가는 것으로 알고 하얀 한복을 갈아입고 교회에서 7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않자 에덴 수도원의 박 교주가 자살 함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60년대 사이비 교단을 창설하여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용화교 교주 서백일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수도원의 김백문 교주의 제자였던 전도관, 박태선 장로는 수십만 영혼을 60년대 부터 빼앗아 사단 마귀의 역사를 지금까지도 행하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일어났던 1987년 오대양교도 마지막 파멸 장소로 경기도 용인 남사면을 택하여 교인 32명의 동반타살과 자살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땅에는 사이비 교주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살인과 강간, 우상숭배, 가정파탄, 재산 착취를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동방교, 전도관, JMS의 정명석 교주는 문선명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 문선명 사이비 교주 한 명의 출생으로 지금 통일교를 탈퇴한 통일교 출신의 사이비교주가 30명이 넘습니다. 이들로 인해 수십만 명의 영혼을 빼앗고 살육하는 일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사이비 교주 때문에 엄청난 피해와 파탄, 파멸이 세계 각 나라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 중에 남미 가이아나의 조지타운이라는 도시에서 사이비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와 같이 923명이 집단 자살을 한 것은 1978년 11월 21일전 세계 언론을 경악하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독극물 사건의 옴 진리교도 파멸 하였습니다.

국내에만 하더라도 1925년에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며 재림주 황제라고 칭하고 황제 즉위식까지 올렸던 차경석, 차전자가 70만 명의 자기 교인들의 영혼을 빼앗고 우상숭배 재산착취로 가정을 파탄시켰습니다. 1930년도에는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가 교인들을 천국에 보내준다고 해놓고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살게 했으며 마지막에는 자기 교인들을 타살 시켜 땅속에 수 십구 수 백구씩 파묻어 버렸습니다.

 

1960년도에 대전에서 휴거론을 주장했던 박용주는 교인들과 같이 천국에 가는 것으로 알고 하얀 한복을 갈아입고 교회에서 7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않자 에덴 수도원의 박 교주가 자살함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60년대 사이비 교단을 창설하여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용화교 교주 서백일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수도원의 김백문 교주의 제자였던 전도관, 박태선 장로는 수십만 영혼을 60년대부터 빼앗아 사단 마귀의 역사를 지금까지도 행하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일어났던 1987년 오대양교도 마지막 파멸장소로 경기도용인 남사면을 택하여 교인 32명의 동반타살과 자살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땅에는 사이비 교주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살인과 강간, 우상숭배, 가정파탄, 재산 착취를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동방교, 전도관, JMS의 정명석 교주는 문선명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재림주의 사기성을 배워 가지고 나가 사이비 교단을 창단 하였습니다.

통일교 출신 재림주만 하더라도 혜아릴 수 없이 너무 많아 재림주 사태가 날 정도입니다. 이 땅은 사이비 종교 교주의 천국이요, 재림주 천국입니다.

 

1960~2000년도까지 30년 동안 종교의 자유 국가인 한국에서 수많은 영혼을 빼앗고 살육하는 사이비 교주들이 우후죽순 같이 생겨났습니다.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불쌍한 영혼 수 십, 수 백만명이 사이비 교주의 노예가 되어 지옥으로 끌려 가는데 그 고통의 절박한 소리를 듣고 예수이름으로 구원해 주어야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중동 등 세계 각 나라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영혼을 구하는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국 땅에서 사이비 종교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선량한 국민들의 영혼과 재산을 빼앗고 가정을 파탄 시켜도 기독교회는 사이비 종교에 대한 대책이 미미하고 자신의 교회를 부흥 시키는데만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교주 밑에는 이단 사이비 교주 양성소입니다.

 

사이비 재림주의 사기성을 배워 가지고 나가 사이비교단을 수도 없이 만들어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통일교 출신 재림주만 하더라도 혜아릴 수 없이 너무 많아 재림주 사태가 날 정도입니다. 이 땅은 사이비 종교 교주의 천국이요, 재림주 천국입니다.

 

 

제 2 절 문선명의 앞잡이 노룻을 하는 기독교 교인을 추방해야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종교 포섭 단체로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가 있습니다.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회장인 통일교 이재석 회장을 통해 사이비 기독교 목사, 장로, 기독교 교인들이 각종 물질적 혜택을 받으며 통일교 세력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일찍이 문선명 통일 교주는 기독교 목사, 교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1966년11월 7일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를 조직하여 이재석 (36가정, 통일교 최초 합동결혼식자)을 회장으로 세워 기독교를 가장한 포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만찬, 세미나, 호텔 경비, 해외 왕복 비행기 요금, 이스라엘 성지 순례 등 일체의 경비를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무료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기독교 목사 가운데 통일교 초교파 회원에게는 매월 생활비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협회 예산의 몇 배를 기독교인 포섭에 투자했다고 합니다. 초대의장에는 방부신 목사, 본부장에는 박창번 목사, 상임 이사에는 이재석씨,이사에는 박철수 목사, 총무에는 김융관 목사 등 5명이 초교파 운동 본부를 결성했습니다.

조직이 활성화되지 못하다가 1975년 12월 8일 서울 문화 회관에서 33명의 기독교 각 교파 인사들이 모여 초교파를 재 결성했습니다. 회장에 강흥수목사, 부회장에는 기독교 장로회 증경 총 회장을 포섭하는데 성공한 송흥국, 양풍원 목사, 총무에는 박철수 목사, 장영석, 유영근, 박무신, 박영주목사를 이사로 세우고 통일교 측에서는 이재석을 이사로 세웠습니다.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회원으로 한국 기독교 목사, 장로, 집사, 청년, 평신도를 가입시켰습니다. 모든 경제 지원은 통일교 측에서 담당하고 각 교단 별로 조직을 다시 결성했고, 각 직책 별로 기독교 목사 평신도를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조직으로는 성노회로 각 기독교 교단 성목회를 기독교 교단별로 조직하고 성장회로 기독교 각 교단별로 원리수련, 수양회, 해외여행, 호텔 세미나를 실시하여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성청회로 기독교 각 교단 청년회를 통일교 원리수련을 통해 포교 활동을 했고 성녀회로 기독교 교단별로 온갖 경제적인 지원을 통하여 포섭 활동을 했습니다.

초교파를 통하여 기독교 목사 가운데 통일교 원리수련을 받고 세뇌 교육된 장로교 목사를 문선명 통일교 협회에서 용산교회 목사(나인수)로 발령한 일도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기독교 목사가 통일교 목사로 재직한 일이 있습니다.

 

통일교 문선명 교주는 포교 활동을 목적으로 정치인, 경제인, 종교인, 대학교수, 예술인, 언론인,각계 각층의 유명 인사들을 온갖 세미나,만찬,해외여행, 선물 등으로 유혹하며 통일교 세력으로 끌어들여서 활용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만찬 세미나에 초청하는 것은 영혼을 죽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테복음 16:26)에 판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고 말씀을 했듯이,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통일교 각종 행사장에 발을 끊으십시오. 그것만이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이 문선명 교주로부터 탈출하는 길이고 영혼의 죽음과 지옥 길을 피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1988년 5월 1일 제 34회 협회 창립 기념일에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이 서울 본부 교회에서 문선명에게 경배와 예배를 드리고 목회자 총회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문선명 통일 교주는 전국 통일교 목사들이 자기 고향에 가서 목회를 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또 다시 불안과 공포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목사들도 아내와 자녀들이 있으며 생활기반이 있는 것인데 문선명은 목사들 목숨을 하루살이 파리 목숨처럼 여겨 고향에 가라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 소리는 지옥으로 가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매일 불안과 공포 속에서 목회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무슨 재미로 목회를 하겠습니까?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미국 알래스카나 남미 바닷가에서 일생 동안 낚시질을 하며 고기를 잡았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고기를 잡으면서 '통일교 교인들을 어떻게 요리할까?', '어떻게 재산을 착취할까?' 그 연구만 하고 있습니다.

 

간간이 한국과 세계를 순회하면서 통일교 교인들에게 불안과 공포심을 유발하는 무자비하고 살인적인 인사이동을 시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목사들과 기업체 간부들을 손바닥 뒤집 듯 이동 시켜 생업을 빼앗고 가정 파탄을 일으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곧 죽음인 것입니다.

1988년 6월 1일, 전국 통일교 목사들 총회를 본부교회에서 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교 모든 남편들은 고향으로 가라. 아내는 무조건 친정 고향으로 가라" 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1988년 6월 6일,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한남동 저택에서 통일 그룹 기 업체 과장급 이상과 서울 시내 1교구, 4교구, 목사 전체를 모아놓고 사표를 내라고 했습니다.

서울 목회자들은 서울도 중요하니 목회활동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교인 많은 교회는 다른 교회에 20명씩 나누어주라고 했습니다. 6월 1일 에는 목사 그만두고 고향에 가라고 명령했다가 6월 6일에는 서울 목사 하라고 6일만에 말을 바꾸어서 뒤집어 버린 것입니다. 콩 볶듯이 강제 인사 이동을 또 당했던 것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제국의 제왕이며 공산주의에도 없는 잔인한 인사 정책으로 목을 붙였다 떼었다 온갖 횡포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제 3 절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하는 전 현직 국회의원을 낙선 시켜야합니다.

 

문선명은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정치인들을 각종 세미나, 만찬 장에 초청하여 원리 교육을 시키고 국회의원 선거 당락에 온갖 직악을 저질렸습니다. 180명의 여야 정치인들을 포섭하여 부하로 삼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선명 재림주 교주의 말씀집', '조국 광복' 이라는 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990년 4월 자신이 메시아요, 재림주 참부모라고 선포 했습니다.

정치인 중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면서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하수인이 되어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목숨을 걸고 사이비 정치인을 색출해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각종 행사장과 만찬장에 참석하는 정치인을 철저히 낙선시키는 범 기독교적인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각종 만찬행사 세미나에 참석하는 전 현직국회의원,도지사,시장,군수, 시 ·군 구 의원들을 그냥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1천2백만 기독교 목사, 교인들은 하나님의 대적인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돕는데 선봉장이 되는 사이비 정치인을 용납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문선명은 정권야욕이 있어서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정치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물질적 지원,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온갖 만찬행사에 정치인들을 초대하여 통일교 세력을 과시했습니다.

문선명은 2001년 7월 13일, 국회회관 대강당에서 현직 국회의원 27명과전직 국회의원, 시군구 의원, 통일교 교인 등 600명을 참석시켜 통일교 원리강론을 설파하고 통일교 선전장을 만들었습니다. 1200만 기독교인이 있고 또 국회의원 273명 중 112명이 기독교 장로, 집사인데 통일교의 국회강연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였습니다.

 

저는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 이만신 회장님과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박준철의 이름으로 모든 일간지와 방송, 기독교 언론을 총 동원하여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여 축사와 격려사를 하는 국회의원, 정치 지도자들은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과 합심하여 낙선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2001년 10월 29일부터 11월 8일까지 전국 8대 도시에서 문선명 교주는'천주 평화 통일국' 이라는 이름으로 문선명 제국을 세우자는 정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행사를 하였는데 7월달 행사 때 보다도 정치 지도자들이 극소수로 참석하였습니다. 그것은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의 표를 의식하여 정치 지도자들이 문선명 교주의 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결과로 믿습니다.

2001년 11월 8일, 신라호텔 문선명 집회에 현직 국회의원 몇 명과 전직국회의원 극소수가 참석하여 문선명 강연장이 아닌 별실에서 강연을 듣고 몰래 빠져나가는 정치 지도자들의 실상을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정치지도자들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이 두려워 얼굴을 강연장에 내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박준철 소장은 한기층과 1200만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과 합심하여 문선명 교주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정치지도자들을 반드시 심판을 받게하여 낙선시킬 생각입니다.

저는 2001년 10월 29일부터 11월 8일까지 문선명 집회에 참석하여 격려사, 축사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낙선시키자고 기독교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 하였습니 다.

정치인들은 통일교 집회장에 참석한 노인들이 자신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노인들은 통일교 교인이 아니며 문선명 교주의 이용물입니다. 노인들은 행사에 참석하면 식사를 제공하고 선물을 주기 때문에 행사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전국의 노인들은 투표장에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정치인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를 볼때 사이비 정치인들은 착각하지 마십시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정치인들이 만찬이나 집회에 한번 참석하면 각종 통일교 PR선전 책에 인쇄를 하여 전도용으로 활용하고 자랑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김대중 대통령이 순수한 마음으로 80세 생일에 축전을 보내준 것도 책에 인쇄하여 전국 방방곡곡 시 ·군 ·구 ·면 남북 통일운동국민연합 대회와 훈독회 행사에서 수만 명에게 배포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마치 통일교 교인이 된 것처럼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통일교 목사들, 교인들이 자랑하고 있습니다. 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통일교회를 지원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으며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통일교 교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정치인들에게 10원을 투자했으면 1000원을 뽑는 식입니다. 2000년 1월부터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각종 행사장에 참석한 순수한 정치인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그 정치인들을 자신의 노예로 착각합니다. 계속해서 정치인들을 참석시켜 원리교육과 훈독회를 하여 세뇌교육을 시키고 통일교 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회에 각종 만찬이나 세미나 행사장에 참석하는 한국 정치인들을 1천2백만 기독교 교인은 백 번이라도 그런 정치인을 낙선시키는 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1987년 8월에 전직 국회의원 39명을 강원도 설악산 오색 약수 옆 호텔에 모아놓고 문선명 통일교 재림주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원리 교육을 시켰습니다.

1988년에는 국회의원 선거를 맞이하여 대대적인 경제적 지원, 맥콜 200박스 씩 지원, 통일교 교인과 승공 연합 조직을 총 동원하여 전국 국회의원후보를 지원했습니다. 통일교는 당선 가능성 있는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습니다. 또 전국 통일교회에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정치인 포섭은 계속 되었고 2000년 4월 13일 국회의원 선거에도 후보들이 통일교 통일당 입당원서를 내고 인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입당원서를 내지 않은 사람이라도 통일교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사람은 통일교 측에서 인적 지원을 전폭적으로 해 주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표를 얻고자 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다시는 이 땅의 선량한 국민들을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국정에 임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은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꼭두각시 들러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지지 세력 내지 추종세력으로서 통일교 각종 행사에 이용당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앞으로 철저하게 공개하여 1천2백만 기독교 교인의 이름으로 뿌리를 뽑고 낙선시컥야 합니다.

 

 

제 4 절 기독교회에 부탁의 말씀


지금 이 땅에는 이단 사이비집단이 150파에 약 300만 영혼이 이단 사이비집단에 빠져 지옥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구의 죄입니까?그들은 우리 부모형제입니다. 지옥 길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해주어야 할 책임과 사명이 1200만 기독교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의 미혹에 빠져 영혼과 몸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겨 처절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교인들이 회개하고 기독교로 개종하고자 하여도 기독교 교회로 가기가 힘듭니다. 그들을 교육하고 안정시켜 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현재 전국 시군구 통일교회에서는 통일교 교인들이 참 가정운동 실천 본부 미혼남녀 결혼 상담사 라는 이름으로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은 미혼남녀들을 미혹하여 합동결혼식을 시컥 통일원리로 세뇌교육을 시키고 문선명 교주가 참부모 재림주라고 믿게 만들어 버립니다. 전국교회는 참 가정운동실천 본부와 같은 음성적인 통일교 활동에 미혹되어 불행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막아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회가 좀 더 사이비 종교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세웠더라면 한국은 사이비 종교 천국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이비 교주는 이 땅에서 판을 치고 수많은 영혼을 살인하고 노예로 삼아 지옥으로 끌고 가는 현실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사이비 종교궤멸을 위하여 기독교교회 1년 예산의 100분의 1이라도 쓰지 않겠습니까?기독교회는 사이비 종교 퇴치를 위해서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1천 2백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원수인 사이비 교주와 종교를 박멸해야겠습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 모두 어기는 사이비 교주와 종교를 자기 교단 일이 아니라고 방치하고 있지 않으십니까?기독교회는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예수를 모시며 성경을 바르게 가르쳐야 될 사명과 의무가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 3만명이 집중 배치되었습니다. 그들은 시군구 통일교회에 배치되어 통일교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뿌리뽑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 형제,이웃이 통일교회의 미혹에 빠져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통일원리에 세뇌되고 교육된다면 생명을 구할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자기 교단을 부흥시키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급하게 해결해야 될 문제는 선량한 국민들의 영혼을 사이비 교주로부터 빼앗기지 않게 지켜 주셔야겠습니다.

기독교회 성직자와 교인들은 수많은 거룩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를 파멸시키는 데는 투자를 적게 하고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를 박멸하는 데 근 힘이 될 언론을 많이 이용해주십시오.

앞으로 기독교회에서는 정치인과 지역 유지 시군구 의원들이 통일교 행사에 참석하여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라고 증거하는 행위를 용납하면 안됩니다.

 

범 기독교적인 차원에서 문선명 통일교회를 극찬하는 정치인은 철저하게 가려내어 강력하게 낙선운동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들은 사이비 정치인이요, 하나님의 역적이요,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행위를 하여 통일교회 발전을 위한 공로자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1천 2백만 기독교 교인은 사법부, 언론, 기독교가 연합하여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절대로 위장된 거짓 행사 장소를 대여해 주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대대적인 사이비 교주와 교회 척결 운동에 앞장서 주십시오.

 

문선명 집단의 산 증인인 박준철을 기독교 교회와 신학교, 기도원에 초청하여 간증집회를 1번씩은 꼭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를 간증에 초청해주시면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이단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통일교 집단을 척결하여 희생자를 줄이고 전도하는데 크나큰 도움이 될 줄 믿습니다.

 

 

 

한국교회 1200만의 목사님과 성도들이 섬기는 교회와 가정과 직장, 사업장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저자 박준철 목사 드림

 

 

  <<통일교 집단과 외로운 싸움을 하는박준철 목사를 돕자>>

 

※ 박준철 목사가 기독교 방송 ·언론을 통하여 문선명 집단의 정쳬를 900회 폭로하여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작년대비 10분의 1로 줄였다

 

 

1) 문선명 집단의 합동결혼식은 거액재산을 착취하는 의식이다.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소장이며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저자인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 신앙과 과천교회 현직목사직에서 2001년 1월 9일 기독교회관에서 탈퇴기자회견을 하였다.

박목사는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통하여 문선명의 정체, 비리, 피가름 의식, 합동결혼식 후통일교 교인 한 가정당 7천만원~l억씩을 착취하는 내용을 통일교 공문을통하여 낱낱이 폭로하였다

2) 통일교 재산 착취를 재판부에서 내려보낸 문선명 교주의 명령공문.인정한 내용이며 통일교 교인들에게 (1998년 IMF때 통일그룰이 부도나 국가로 넘어감으로 거액재산착취가 시작됨)


▶ 1,000만원의 결혼 비용 부담

 

▶ 통일교 교인 조상구원금 I~120대 조상까지 2천만원~3천만원1통일교 합동결혼식 후 죄를 용서해 주는 천국행 탕감비 1300만원(한가정당)

 

▶ 총생축헌금 2100만원(문선명은 합동결혼식한 교인들에게 자신은 구세주, 재림주 참부모이며 통일교 교인들은 참 아들 · 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재산 소유권 이전하라는 명령공문)

 

▶ 문선명 비행기 헌금 1백만원~l천만원

 

▶ 구국 헌금 성인가족 5인 X160만원 = 800만원

 

▶ 천성왕림궁전 - 320만원 (가정당)

 

▶ 십의 삼조 헌금

 

▶ 문선명 나라건국기금 매월 17만원 (가정기준)

 

▶ 8대 명절 헌금▶ 그 외 각종 헌금이 혜아릴 수 없이 많음

 

▶ 청평 천성왕림궁전 14층 병원짓는 헌금 가정당 160만원

 

3) 문선명은 사이비 교주요 적그리스도라고 입으로 외치자.

 

저는 처음에 통일교에 입문하여 원리강론을 들었을 때 세뇌되고 마취되어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고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30년동안 통일교의 실체를 직접보고 려으면서 문선명 교주는 재림주 참부모가 아니며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1997년부터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 그 거짓된 사단의 실체들을 샅샅이 파헤치게 된 것입니다.

 

4)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문선명이 김백문 교리를 도용한 것이다

 

문선명은 자칭 재림주 참부모로 자신이 가져왔다는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가 새진리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쓴 성약말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의 원리강론이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와 성서신학을 1946년에 도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5) 문선명 교주는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키는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은 자신이 재림주요 참부모라며 성삼위 하나님을 모독하고 기독교로 가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재림주라는 문선명은 첫 번째 부인 최선길과 1945년 4월 28일에 결혼하여 문성진 아들을 낳고도 그들을 전도하지 못하고 이혼하였으며 많은 처녀들을 피가름 음란의식으로 사생아를 낳게하고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킨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부모, 재림주가 될 수 없습니다.

 

6) 문선명 교주는 자칭 재림주 참부모라면서 자기 자녀들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은 1960년 4월 11일 40세의 나이에 한학자(17세) 여학생과 어린양 혼인잔치를 또 하였고 14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자녀들은 간음, 이혼,자살, 동거, 마약, 감옥생활 둥 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신의 자녀들도 신앙교육을 책임지지 못하고 구원하지 못한 문선명 교주는 재림주가 아니며 적그리스도입니다.

 

7)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천국가는 의식이 아니라 문선명의 자금줄이다.

 

합동결혼식을 저지하자.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에게 총 동원령을 내려 매일 오전10시부터 오후5시까지 골목을 누비며 미흔남녀 전도활동을 하여 약혼을 시키고 1년에 한차례 하는 천국 보내준다는 구원의식인 합동결혼식을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통일교는 합동결혼식한 자들에게 문선명의 명령으로 가정당 7천만원~l억원의 헌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또한 참가정'실천 운동본부라는 미명하에 미혼남녀에게 합동결혼식을 시켜 개인과 가정을 파괴하고, 거액 재산을 착취하여 지옥 같은 삶을 살게 하고 있습니다.

 

8) 문선명 교주의 혈통복귀 3일 피가름의식은 구원이 없다

 

문선명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통하여 성주식과 3일 혈통복귀의식을 치르면 완전구원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저도 1975년 2월 8일에 합동결혼식을 하여 3일 혈통복귀의식을 치렀고 그때는 세뇌되어 구원받은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가정은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에 합동결혼식을 할 사람까지도 구원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통일교회 합동결혼식과 3일 섹스의식을 통해서는 구원이 없었습니다. 2001년 5월27일, 밀링고 대주교가 성마리아와 결혼하고 8월에 가정파탄된 것을 보면 문선명의 합동결혼식은 거짓된 허상일 뿐입니다.

 

9) 문선명 교주의 각종 만찬 세미나장에 참석하는 정치, 경제, 종교 학자 들을 막자.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정치와 경제, 문화, 언론, 종교를 장악하여 문선명 제국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은 성경진리로 사이비인 통일교회와 싸워 승리하자.

 

10) 박준철 목사의 폭로로 통일교 합동결혼식이 작년과 대비하여 10분의 1로 줄었다.

 

박준철 목사는 기독교 신문, 찬송을 통하여 문선명 집단의 정체를 900회 폭로하여 통일교 합동결혼식 2001년 1월 27일에는 통일교 신문인 세계일보에 3만 5천쌍 이라고 보도했으나 2002년 2월 10일에는 3천 5백쌍 이라고 보도하였다.

박목사가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통일교 실체를 폭로함으로 합동결혼식이 작년과 대비하여 10분의 1로 줄었다고 국민일보와 기독교계신문에 보도되었다.

문선명은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에게 종족적인 메시아라는 임명장을 주고 160가정을 전도하라는 총동원 전도명령을 내려놓고 전국 시군구 통일교(일명 가정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을 오전 10시~오후 5시까지 매일 전도활동에 동원하고 있다.

통일교 교인들은 매일 집집마다 방문하며 미혼남녀 합동결혼식을 시키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있는데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차원에서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면 가정당 7천만원~l억씩을 착취하여 천국행 면죄부를 파는 집단이라는 것을 폭로하여 제2의 박준철목사와 같은 희생자를 막아야 할 것이다. 2003년 5월에 있을 합동결혼식을 저지하자.

 

11) 박목사는 문선명 집단으로부터 민사소송에 승소하였다. 형사소송은 매달 진행 중이다. 기도해주자.

 

박준철 목사는 2002년 2월 1일에 문선명 집단과의 법정싸움에서 민사재판이 승소하였다. 문선명 집단에서 민사재판과 같이 형사재판에서도『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을 명예훼손지로 걸어 형사재판이 진행중이다.

2002년 10월 4일 1차 형사재판을 하였으며 11월 1일 2차 형사재판, 12월 6일 3차 형사재판이 열릴 예정이다. 앞으로 매달 1번씩 약 2년 동안 형사재판을 받아야 한다.

일본에는 인구의 1%밖에 안되는 기독교 교인이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되고 단결하여 문선명 통일교집단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처하여 궤멸해 가고있다. 일본 통일교 피해자들이 기독교 변호사들의 무조건적인 무료변론으로 통일교와 재판을 하여 모두 승소하였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이 일본 재판정에서 불법이며 문선명을 믿어도 구원받지 못하고 천국갈 수 없다고 도쿄지방법원에서 2002년 8월 21일 판결하였으며 통일교 피해자 3명에게 9200만원을 청춘보상금으로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한국에 박준철목사와 같은 피해자가 통일교와 재판할 때 1200만 기독교 교인이 예수님 이름으로 단결하고 기도하여 문선명 사이비집단과 싸워 승리해야 할 것이다.

이 재판은 박준철 목사와 문선명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이비 교주와의 싸움이며 기독교와 사이비집단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1200만의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이 이단 사이비 집단을 궤멸해야 할 것이다.

박준철 목사는 문선명 집단과 지금 재판중 인데도 변호사비를 지불하지 못하였으며 활동비나 경제적인 어려움에 홀로 감당해야 되는 외로운 싸움을 하는 박목사에게 기도와 간증예배 초청, 후원헌금이 절실히 지금 필요한 입장이다.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박준철 목사가 문선명 집단과 싸워 승리하고 통일교가 궤멸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12) 박준철 목사를 한국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간증예배에 초청하여 성도들이 전도하게 하자.

 

후원헌금을 보내주자.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김기수 목사와 총무 박영률 목사가 박목사를 위해 민 · 형사재판에 탄원서를 제출해주시고 도와주셨다. 한국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모두 기도해주시고 간증예배에 초청해주신 목사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박목사를 위해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지속적으로 기도해 주시고 간증예배에 초청해 주셔야 성도들이 문선명 집단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전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문집단과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박목사를 돕는 길은 기도와 간증예배 초청하는 일과 후원헌금을 아래구좌로 지원해주셔야 형사재판을 하는 변호사 비용과 활동비 등을 할 수 있습니다.

 

13) 김백문과 문선명, JMS(정명석)은 똑같은 교리이며 사이비 교주밑에 사이비 교주 양성소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김백문 사이비 교주의 기독교 근본원리를 제자였던 문선명이 도용한 것이며, 정명석은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1980년에 탈퇴하여 통일교 원리 강론을 도용하여 30개론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빼앗고 지옥으로 끌고가고 있다. 사이비 교주 밑에는 사이비 교주 생산공장이다.

한국 기독교는 이단사이비집단에 빠진 약 300만의 영혼을 예수 이름으로 구원해야 할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1945년 8월 15일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 사이비집단에 빠졌다. 김백문 교리인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1946년부터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포교하여 영적살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명석도 1980년까지 문선명을 받들다가 탈퇴하여 통일교 원리강론을 도용하여 30개론을 만들어 수많은 청년 대학생을 유혹하여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정명석과 같은 통일교 교인이 통일교를 떠나 사이비 적그리스도 노릇을 하며 사기를 치며 영혼을 빼앗는 사이비 교주만도 20여명이 넘는다. 사이비 교주 밑에는 사이비 교주 양성소이다.

 

14) 문선명 교주 집단에 축사, 격려사, 만찬에 참석하는 정치지도자들은 여 ·야를 막론하고 1200만 기독교 교인이 낙선운동을 하자.

 

15) 문선명 통일교 집단에서 기독교 목사들을 포섭하는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가입된 기독교 목사, 장로를 회개시켜 통일교와의 관계를 끊게 하자.

 

16) 박준철 목사가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문선명 집단이 이단 사이비집단이라는 것을 매일 입으로 외치자.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이 이단시하고 적그리스도라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요, 이단 사이비 교주라고 입으로 외쳐야 궤멸될 것이다.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에 들어갈 때까지 단 한번도 문선명 집단이 이단이라는 소리를 못 들어보고 유혹당하여 통일교회에 입교했고 사악한 전단지 한장 때문에 30년의 지옥생활을 하였으며 청춘을 빼앗기고 심장병과 온갖 병을 얻고 죽음의 자리에서 문선명 집단을 탈퇴하여 궤멸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며,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땅끝까지 증거해야 할 것이다.

 

17) 박준철 목사가 목숨을 걸고 쓴「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구입하여 읽고 문집단을 궤멸하자.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1200만의 한국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을 대표하여 한기총 대표회장 김기수 목사님과 각 교단 총회장 교계지도자 IS명이 범교단적으로 통일교를 대체하기 위하여 책을 추천하였으니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문선명 집단 궤멸필독서로 구입하여 읽고 문선명집단 궤멸을 위해 외치자.

 

 

이 책을 발행하여 문선명 집단궤멸을 위해 사용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 책을 보시는 모든 목사님과 성도들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와 사랑이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http://cafe.naver.com/jubo/2085  , 통일교 문선명 -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 큰샘출판사

http://cafe.naver.com/jubo/1739  , 통일교 문선명  -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박준철 저,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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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문선명 - 통일그룹이 IMF때 부도. 국민의 세금인 국가빛 1조 7천억을 갚아야 할 것이다.

 
<도서 안내>  http://cafe.naver.com/joyfulsound/347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출간일 : 2002년 05월 10일, 520쪽   정가 : 12,000원 (국내도서-종교)

광화문 교보문고나,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여, 저자 박준철 목사에게 작은 도움이 됩시다.

한국기독교 통일교 대책협의회 후원금  ·국민은행 525201-01-041142 예금주 통일교 대책협의회

 

통일교 박준철 목사의 생생한 증언

 

1. 문선명은 이단사이비 교주요. 적그리스도입니다.

 

2. 문선명은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키는 영혼사기꾼입니다.

 

3. 문선명은 자신의 자녀도 구원못하는 사이비 교주입니다.


4. 합동결혼식은 천국가는 의식이 아니라 지옥 가는 의식입니다.


5. 문선명 통일그룹이 IMF때 부도났습니다. 국민의 세금인 국가빛 1조 7천억을 갚아야 할 것입니다.


6. 문선명 집단은 합동결혼식을 시켜 I억씩의 거액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자금줄인 합동결혼식을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막아야 할 것입니다.


7. KBS. MBC. SBS. EBS공익방송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조장하는 방송을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교인이 방송에 출연하여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8. 문선명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여 축사. 격려사 하는 여야 정치 지도자들을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이 단결하여 낙선시켜야 합니다.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에서 시장군수 시구의원들이 통일교 집회에 참석할 수 없게 막아야 할 것입니다.


9. 기독교 목사, 성도들이 통일교 단체인 초교파 기독교협의회나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 총회장 김광명이나 이런 단체에서 주최하는 이스라엘 성지순례 무료여행. 세미나 등에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참석할 수 없도록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것입니다.


10. 문선명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하는 지역의 유지나 노인들을 참석하지 못하도록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에서 막아야 합니다.


11. 전국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통일교 행사인, 가정교회 순결캠페인, 순결캔디, 참가정 순결운동본부 서명날인, 충효 사상 예절교육 등을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12. 박준철 목사가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문선명 집단이 이단 사이비 집단이라는 것을 매일 입으로 외쳐야 합니다. 박목사는 통일교에 입교 전까지 통일교 집단이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본문중에서-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머리말

죽을 죄인 박준철은 지난 30년 동안 문선명 사이비 이단인 사단의 앞잡이로 살았던 날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합니다. 이제 오직 나의 구주는 예수님 뿐이고, 인류를 구원할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30년동안 통일교에 빼앗긴 지옥 같은 생활의 산 체험과 진실을 세상에 알려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를 막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이 책을 썼습니다.

저는 생애 처음으로 접한 통일교 전도지에 끌려 이단 사이비인 줄도 모르고 통일교에 입문하여 지난 30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문선명 이단 사이비 교주에게 충성하며 최일선 목회자로서 살아왔습니다. 통일교 목회자가 된 후로 언제나 항상 사력을 다하여 무슨 일이든 2등을 하지 않고 1등을 하며,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야 지난 30년이 사단의 종인 문선명 이단 사이비 교주에게 빼앗긴 세월 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통한의 세월을 눈물로 통곡하며 삼위일체 하나님께 회개하며 이 글을 씁니다.

이 책은 제가 통일교회 현직목사로서 30년 동안 매일 일기를 써가며 기록했던 사실들을 토대로 통일교의 실체를 밝히고 문선명의 비리를 세상에 알리는 최초의 저서입니다.

이 저서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실명도 있고 가명도 있습니다. 혹시 본의 아니게 거명되어 선의의 피해가 있으시다면 문선명 사이비 종교의 비리와 잔악상을 알려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없도록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음을 양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도 통일교에 빠져 인생을 허송하는 분들이 있다면 즉시 통일교회에서 탈출하여 진정한 행복과 축복 받는 하나님의 안에서 삶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에게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동안 체험한 진실과 문선명 교주의 사악한 교리와 음모, 패륜, 가정 파탄, 비진리성을 하나님과 인류에게 고발해야 된다는 사명만이 있습니다.

저는 사이비 집단에 속아 살았던 30년 동안 지옥 같은 생활을 하면서 빼앗긴 청춘과 병든 몸, 파멸된 영혼을 만천하에 고발하지 않고서는 이대로 눈을 감을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 통일교회의 실체를 알리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30년 동안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를 참 부모인 동시에 메시아 구세주인 만 왕의 왕 재림주라고 믿고 복종하며 사랑하였는데 이제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발합니다. 지금 통일교회는 기독교인들이 방심하는 사이에 한국은 물론 일본, 아시아,유럽권까지 침투하여 많은 영혼들을 미혹하여 문선명 개인의 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선명 사이비 교주로 말미암아 인생을 빼앗겨 가정 파탄, 재산 착취를 당하여 온갖 시련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겉 모습으로는 양의 탈을 썼지만 사이비 교주일 뿐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사랑과 희생, 봉사를 외치지만 말 뿐이고 통일교 교인들의 생활은 처절한 지옥생활과 같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미혹에 빠져 세뇌, 마취, 교육되어 문선명에 끌려 다니는 통일교 교인들이 불쌍합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영혼의 노예가 되었고 그들의 병들고, 지친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픔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에게 처음부터 오직 구원은 예수님 뿐이요,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고신앙으로 이끌어 주는 성도가 있었다면 30년 동안 지옥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통일교가 문선명 개인이 만든 이단 사이비 집단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면 처음부터 발을 내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단에 속한 생면부지의 사람이 건내준 한 장의 전단지가 저와 저의 가족의 일생을 결정지었다면, 참되신 하나님의 자녀요 참구원을 주는 기독교회 성도들의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수 있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은 처음부터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생애 최고의 축복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놀라운 구원을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선물로 받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땅에 만연된 이단 사이비를 몰아내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성직자와 1천 2백만 기독교 성도들이 하나로 단결하고, 모든 언론과 지성인들이 합심하여 통일교와 같은 사이비종교를 이 땅에서 뿌리뽑을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추천해주신 한기총 대표회장 김기목사님, 한기총 직전 대표회장 이만신 목사님, 한기총 명예 회장이신 지덕 목사님, 민족 복음화 운동본부 총재이신 신현균 목사님, 전 총신대 총장이신 신학자 김의환 박사님, 한국 기독교 지도자협의회 상임회장이신 신신묵 감독님, 통합교단 총회장이신 최병두 목사님, 기독교 대한 감리회 장광영 감독님, 기독교 대한 성결교 총회장이신 이정복 목사님, 기하성 총회장이신 이재창 목사님, 한기총 총무이신 박영률 목사님, 한기협 대표회장 최재우 목사님, 한기총 이단 사이비 대책 위원장 이용호 목사님, 한기총 이단사이비 상담소장 최삼경 목사님, 한국 기독교 이단문제 연구소 이사장 심영식 장로님 등 범 기독교단 적으로 문선명 이단집단 궤멸을 위해 이 책을 추천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제가 2001년 1월 9일 통일교 현직 목사직을 탈퇴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통일교 비교리성과 비리를 지속적으로 보도해준 모든 기독교 방송과 언론사 관계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제 오직 성삼위 일체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1,200만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교회의 헌금을 하나님의 대적이며 우상인 문선명과 같은 사이비종교를 뿌리뽑는데 투자해 주십시오. 저에게 기독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모든 성직자와 기독교 성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2002년 2월 17일

저자 박준철 목사 드림

 





추 천 사‥‥‥‥‥‥‥‥‥‥‥‥‥‥‥‥‥‥‥‥‥‥‥‥‥‥‥‥‥‥‥04
머 리 말‥‥‥‥‥‥‥‥‥‥‥‥‥‥‥‥‥‥‥‥‥‥‥‥‥‥‥‥‥‥‥12


제 1장 나의 유넌 시절과 잃어버린 한쪽날개‥‥‥‥‥‥‥‥‥‥‥‥‥‥‥23
제 1절 나의 어린 시절
제 2절 잊지 못할 억울한 누명
제 3절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중학시절
제 4절 부산 오육군 병원의 생활
제 5절 양보중학교에 복학
제 6절 보상금 15만원이 나의 왼팔이라니
제 7절 고향을 떠나 자활의 길로



제 2장 통일교 전단지 한 장에 빼앗긴 30넌, 잃어버린 30년‥‥‥‥‥‥‥‥35
제 1절 단 한번의 악연으로 통일교 입교
제 2절 천안교회 청년회 부회장
제 3절 새벽 기도 하던 중 영계에 가보고 나서..
제 4절 통일교의 제2차 기동대 활동
 


제 3장 첫 사역인 충북보은 적암교회‥‥‥‥‥‥‥‥‥‥‥‥‥‥‥‥‥‥‥46
제 1절 기적은 일어나고
제 2절 성결교 신학교
제 3절 문교주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의식인 합동결혼식



제 4장 서울 강서교구 ‥‥‥‥‥‥‥‥‥‥‥‥‥‥‥‥‥‥‥‥‥‥‥‥‥52
제 1절 교구본부교회 개척, 부흥, 교회건축
 


제 5장 노원교구 달부 개척교회 제1차 건축
제 1절 그래도 끈질긴 충성
제 2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길
제 3절 제 1차 노원 교회 교회 대지 매입 건축


제 6장 새 생명의 결실인 3남매‥‥‥‥‥‥‥‥‥‥‥‥‥‥‥‥‥‥‥‥‥63
제 1절 첫 딸인 '박은주'
제 2절 아들 '박영진'
제 3절 막내인 '박은영'



제 7장 서을 노원 교구본부‥‥‥‥‥‥‥‥‥‥‥‥‥‥‥‥‥‥‥‥‥‥‥70
제 1절 2차 교회 대지 매입 재건축 성공
 


제 8장 서을 노원 교구에서 경기 화성 교회로 강제로 인사 이동‥‥‥‥‥‥75
제 1절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박길남 교구장의 거짓 약속
제 2절 꿈에 나타난 문선명



제 9장 경기 화성 교회가 전국 통일교 최우수 교회로 부흥‥‥‥‥‥‥‥‥‥80
제 1절 다시 일어선 교회 개척
제 2절 화성 교회 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제 3절 마지막까지도 아버지께 불효
 


제 10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교회로 다시 인사발령‥‥‥‥‥‥‥‥‥‥‥‥‥89
제 1절 통일교에 바친 목숨
제 2절 서울 노원교회에서 3차 발전



제 11장 서울 노원 교회가 한국 통일교 우수 교회로 121회장상 수상‥‥‥‥‥93
제1절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제2절 3차 교회 대지 161평을 매입
 


제 12장 서울 노원교회 교회 건축 ‥‥‥‥‥‥‥‥‥‥‥‥‥‥‥‥‥‥‥‥98
제 1절 1988년도 교회 건축 목표
제 2절 국회의원 당선에 관여한 통일교
제 3절 노원교회 역사적 교회 건축 기공식
제 4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상량식
제 5절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당한 폭력과 폭행
제 6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준공을 완료311



제 13장 통일교 아름다운 교회 헌당식 ‥‥‥‥‥‥‥‥‥‥‥‥‥‥‥‥‥‥114
제 1절 노원교회 3차 교회 건축 헌당식
제 2절 베풀어 준 은혜와 축복을 배반으로 갚은 사람들
 


제 14장 노원교회를 찾은 문선명‥‥‥‥‥‥‥‥‥‥‥‥‥‥‥‥‥‥‥‥‥120
제 1절 자칭 감동받은 문선명



제 15장 서울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 받은 비극적인 사건‥‥‥‥‥‥‥‥‥‥‥122
제 1절 동토의 왕국인 통일 제국의 교구장 임명
제 2절 김승철 총무국장의 인사비리와 폭행사건
제 3절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얻은 심장병



제 16장 빼앗긴 교구장직과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 총무국장과 협회전직원시위대‥133
제 1절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총무국장과 협회직원들
제 2절 나상렬 노원교구장의 배신
제 3절 공릉동 교회의 지옥 같은 생활



제 17장 전국 통일교 목사 전체 500명의 박탈당한 목사직‥‥‥‥‥‥‥‥‥‥141
제 1절 교회사택에서 쫓겨난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
제 2절 7개월 만에 박탈당한 500명의 목사들
제 3절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독서실 운영
제 4절 고시원 운엉 중 다시 꿈꾸게 된 목회 길



제 18장 부산 영도교회‥‥‥‥‥‥‥‥‥‥‥‥‥‥‥‥‥‥‥‥‥‥‥‥‥ 152
제 1절 부산 영도 통일교로 인사발령
제 2절 부산 엉도교회 부흥 발전
제 3절 죽음의 자리에서 두 천사의 도움으로 구한 생명



제 19장 자살을 결심하고 죽음의 문턱에 서서‥‥‥‥‥‥‥‥‥‥‥‥‥‥‥168
제 1절 족벌왕국에 환멸을 느끼고
제 2절 "준철아! 죽지 말아라"



제 20장 폭언 폭력 배신으로 일괄된 통일교 지도자‥‥‥‥‥‥‥‥‥‥‥‥‥171
제 1절 황선조 회장에게 한 직언
제 2절 김용갑 교구장의 폭언과 폭행
제 3절 문책인사를 약속한 황선조 회장
제 4절 눈물로 세운 부산 영도 교회를 떠남
제 5절 과천통일교회에서의 비참한 생활
제 6절 연속되는 폭행과 폭력과 거짓말들
제 7절 위장된 합동 결흔식
제 8절 비참한 현실의 벽을 넘어선 사투
제 9절 저는 하나님 뿐 아니라 아내와 자녀에게 죄인입니다.



제 21장 목숨을 건 문선명 통일제국 탈출 ‥‥‥‥‥‥‥‥‥‥‥‥‥‥‥‥‥‥192
제 1절 '준철아, 붉은 통일교 감옥을 탈출하라.'
 


제 22장 통일교 과천교회 박준철 현직목사 탈퇴 기자회견 54가지 비리폭로 ‥‥‥196


제 1절 문선명의 정체와 통일교 비리폭로
제 2절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통일제국의 정체폭로
제 3절 기독교 성도들에 대한 박준철 목사의 호소문한국 기독교 이단 종파 문제 연구소 설립
제 4절 한국 기독교 통일교 대책협의회 설립,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한국 기독교 이단 종파 문제 연구소 설립
제 5절 국제 자살 ·살인 방지 연구소 설립 계획
 


제 23장 문선명 통일교 비판‥‥‥‥‥‥‥‥‥‥‥‥‥‥‥‥‥‥‥‥‥‥‥‥‥242


제 1절 문선명의 출생과 통일교 창단 배경
제 2절 원리강론은 김백문 교리를 도용한 것
제 3절 문선명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비판
제 4절 예수, 공자, 석가를 자신의 제자라고 말하는 문선명



제 24장 혈통복귀 피가름 집단인 문선명 통일교 ‥‥‥‥‥‥‥‥‥‥‥‥‥‥‥‥254


제 1절 처음부터 혈통복귀집단이 된 통일교
제 2절 문선명은 혈통복귀교리를 통해 가정을 파괴한다
제 3절 통일교는 혈통복귀의식이라는 3일식 피가름행사
제 4절 문선명이 창안한 혈통복귀 피가름의식
제 5절 문선명 통일교의 혈통복귀 피가름 3일간 복귀의식



제 25장 문선명은 모든 사람의 재산물 착취하고 파멸시킨다‥‥‥‥‥‥‥‥‥‥‥265


제 1절 문선명은 자녀와 가족 구원도 못시킨 거짓 메시아이다
제 2절 문선명의 둘째 아들 문흥진의 사망
제 3절 재림한 문흥진 노릇한 에지프트
제 4절 문선명과 친인척은 재산착취를 통해 초호화 생활을 누린다
제 5절 문선명의 브라질 자르딘 계획
제 6절 재산착취 수단인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제 7절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임을 증명한 사람들



제 26장 통일왕국을 꿈꾸는 문선명‥‥‥‥‥‥‥‥‥‥‥‥‥‥‥‥‥‥‥‥‥‥‥285


제1절 통반격파를 지시한 문선명
제2절 통일제국 건설을 위한 문선명의 음모
제3절 문선명 한학자 교주의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



제 27장 문선명 통일교 척결을 위한 주장 ‥‥‥‥‥‥‥‥‥‥‥‥‥‥‥‥‥‥‥292


제 1절 통일교는 사이비 교주의 온상입니다
제 2절 문선명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기독교 교인을 추방해야 합니다
제 3절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하는 전 현직 국회의원을 낙선시켜야 합니다
제 4절 기독교회에 부탁의 말씀

 

통일교 집단과 외로운 싸움을 하는 박준철 목사를 돕자 ‥‥‥‥‥‥‥‥‥‥‥‥305
그림 및 사진 화보 ‥‥‥‥‥‥‥‥‥‥‥‥‥‥‥‥‥‥‥‥‥‥‥‥‥‥‥‥‥313
참고 도서 목록‥‥‥‥‥‥‥‥‥‥‥‥‥‥‥‥‥‥‥‥‥‥‥‥‥‥‥‥‥‥364
저자소개‥‥‥‥‥‥‥‥‥‥‥‥‥‥‥‥‥‥‥‥‥‥‥‥‥‥‥‥‥‥‥‥‥366


 


제 1장 나의 유년시절과 일어버린 한쪽날개

 

제 1절 나의 어린 시절

 

저의 고향은 남한의 명산인 지리산과 어우러져 있는 경남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중하쌍 부락이라는 60호 정도 되는 작은 산골마을입니다

처음에 저희 집은 아버지께서 지리산에서 숯을 구워 시장에 내다 팔아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가산을 꾸려갈 수 없어 중하쌍 부락 건너편에 집이 두 채밖에 안 되는 구덕골의 윗집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바로 그 쓰러져 가는 작은 초가집에서 부친 박복식씨와 모친 정남시씨의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이 세상에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남의 농토도 임대해서 농사를 짓고, 산에서 숯도 구워서 팔고, 나무도 해 가지고 시장에 팔아서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봄에는 쑥을 캐어서 쑥밥을 해 먹고, 산의 소나무껍질을 벗기고 칡을 캐어 먹고, 일본사람들이 거름으로 사용하는 콩기름을 짜고 남은 콩 찌꺼기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습니다. 그 때 우리 7남매는 무밥, 감자밥, 고구마라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산 때문에 아버지는 매일 술로써 시름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동네에서 제일 인정스러운 분이셨고 일을 할 때에는 동네에서 부지런하기로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3,500평 의 논밭을 사게 되었고 농사를 지어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가정 환경 탓에 2살 때에는 홍역과 황달로 온몸에 부스럼 이 생기며 사경을 헤맨 때도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언제나 욕심이 많고 고집이 세며, 싸움을 해도 지지 않으려는 승부근성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가정을 탓하지 않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전, 오후 각각 한번씩 나무를 하고 풀을 베는 일을 지만, 저는 하루에 세 번씩 일을 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소를 산으로 끌고 다니며 풀을 먹이고, 아침저녁으로 소죽을 끓여서 먹였습니다. 돼지 밥과 닭 먹이를 주는 것도 항상 제 몫 이었습니다. 먼 거리의 우물에서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어오는 것도 저의 일과였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한 꼬마로 통했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효도하려고 심부름도 잘하고 팔다리도 주물러드렸습니다. 어쩌다가 돈 10원이라도 생기면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그 돈을 모아 놓았다가 저에게 용돈으로 주셨고 엿 장사가 오면 엿도 사 주시고 과자도 사 주셨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제 2 절 잊지 못할 억울한 누명

 

초등학교 4년 때 잊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체육을 하고 반 친구들과 같이 교실에 들어오니 '박용진' 선생님이 저를 지목하여 돈 30원을 훔쳤다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저는 해명도 못하고 누명을 뒤집어 썼습니다.

박 선생님은 저의 귀를 잡고 운동장으로 끌고 다니면서 어디 에 돈을 숨겼느냐고 호통을 치며 다그쳤습니다. 저는 돈을 훔치지도 않았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오후에 남아 많이 매를 맞았습니다매를 맞은 손과 장딴지가 부어서 며칠 동안 걸을 수 얼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저는 분한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는 왜 변명 한 마디 못하였는지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왜 박용진 선생이 저를 지목하여 누명을 씌워 학생들 앞에서 망신을 시켰는지 지금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며칠 후, 우리 동네에 사는 같은 반 배정순이라는 여학생이 하옥실이가 체육시간에 당번을 하면서 돈 30원을 훔치는 것을 보았다. ' 고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며칠이 지난 후여서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누명을 쓴 채 말도 못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친구들 중에는 병으로 죽는 일이 많았습니다. 절친했던 동네 친구 박준국이 폐병으로 죽었고 이어서 유영이라는 친구도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어린 나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같이 뛰어다니며 웃고 떠들며 놀던 친구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너무나 가슬 아프고 슬펐습니다.

 

제 3 절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중학시절

 

저는 두 학급만 뽑는 양보중학교 시험에 합격하여 1963년 3월부터 집에 서 학교까지 왕복 20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까밖 고무신을 신고 책 보따리를 허리에 매고 놋쇠 사발에 밥을 넣어 갖고 다떠 서 창피했는데 중학교 때부터는 양은 도시락을 갖고 다녀서 좋았습니다.

집안 일을 하며 학교에 다녔으므로 시간이 모자라 항상 뛰어가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소에게 풀을 먹였고, 겨울에는 새벽부터 소죽을 끓여 먹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새벽부터 집안 일을 하다 보면 아침 식사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물에 밥을 말아서 급하게 먹고 학교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해 가는 1963년 7월 3일 오전 10시, 하동지방에 대홍수가 나서 저희 학생 40명은 수해복구를 하기 위해 군 트럭을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콩나물 시루같이 가득 태운 GMC 군 트럭 이 과속을 하다가 장암리에 있는 양보초등학교 앞 작은 개울에서 전복사고를 일으켰습니다. 브레이크도 소용없이 트럭은 개울 위로 날아가 아름드리 벚꽃나무를 두동강이 내며 추락했습니다. '쾅' 하는 순간 차를 타고 있던 학생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차바닥은 순간 피로 넘치고 고통의 신음소리도 가득차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이 사고로 왼쪽편에 탄 13명의 착생들이 심하게 다쳤습니다. 다친 학생들은 하동 읍내 작은 의원으로 후송되었는데 저의 왼쪽 팔도 부서져 버렸습니다. 저는 어깨 죽지까지 뼈만 앙상하게 남고 팔 관절이 부서지고 손바닥까지 뼈가 드러난 것을 보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식을 잃어가면서 저의 왼팔로 피가 쏟아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며 3일 후에야 깨어나 아버지와 어머니를볼 수 있었습니다

장마 때문에 보리가 썩어 마당에 말리고 있는 중 아버지, 어머니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그 날 신문에도 우리의 교통사고가 보도 되었습니다. 교통사고는 저의 인생이 온갖 멸시와 천대, 행동의 부자유, 생활의 고통.아픔이 동반된 생지옥 같은 생활이 되는 출발점 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막 태어난 막내 동생 준서와 그 위로 여동생 영희가 걱우 걸음마 할 정도였습니다. 저의 사고로 어머니가 간병을 하기 위해 병원에 계셨기 때문에 그 때부터 8개월 동안 준서는 젖을 먹지 못하고 영희와 다른 동생들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동생들에게 죄인 같은 심정 입니다. 학생 13명이 다쳤기 때문에 학교 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병 문안을 왔습니다.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도 많이 왔습니다. 지금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폐병으로 돌아가신 영어 선생님이 가장 병 문안을 많이 오셨고 자식이 사고를 당한 것처럼 가슴 아파해 주셨습니다.

하동의원 의사는 아버지에게 저의 팔 관절이 완전히 부서져서 가루가 되었기 때문에 어깨 죽지까지 잘라야 찬다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팔을 붙여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사는 뼈가 부서진 관절과 팔 뼈들을 모아 대강 붙이고 살을 바늘로 꿰매 놓았습니다. 그러나 팔은 계속 썩어 들어갔습니다. 한 달 동안 하동의원에서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꼼짝 못하고 누워 있다가 부산 오 육군병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 육군병원에 도착해서 처음 진료한 군의관들이 '팔의 뼈가 굳기 전에 병원에 왔더 라면 어느 정도 나을 수 있었을 것을 무지해서 시기를 놓쳤다. '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사고 즉시 큰 병원으로 후송해서 치료 하였더라면 어느 정도는 고칠 수 있었을 텐데 한 달간 하동병원에 방치했었기 때문에 치료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는 '제 주위에 스승이나 어른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큰 병원으로 후송해 팔을 치료 하라는 말을 해 주었더라면. . .' 하는 마음을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제 4 절 부산 오육군 병원의 생활

 

부산 영도다리 옆에 있는 오육군 병원에 8월 1일부터 입원한 후 썩은 부분을 수술로 잘라 내는 일을 수 차례 했습니다. 거듭되는 수술로 팔에 남아있는 살이 없어서 양쪽 허벅지 살을 떼어서 입히는 대 수술을 네 번이나 하였습니다. 그리고 팔을 'ㄱ' 자로 려어 긴 대못 2개로 박아 고정시켰습니다. 수술과 치료 때마다 밀려오는 아픔은 중학교 1학년 학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이였습니다. 오 육군병원에서는 1964년 2월말까지 7개월 정도 지냈습니다.

병원 생활은 어린 저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사고 전에는 마음껏 달리고, 씨름하고, 철봉대에 매달려서 운동했는데 이제 왼쪽 팔을 잃었으니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비관하고 학대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비관적인 생각 때문에 병원 옥상에올라가 밑을 내려다보며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당시 오 육군병원에는 민간인으로는 저 혼자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군의관과 간호원 뿐 아니라, 군인 아저씨들은 저를 장애자라는 이름대신 '꼬마' 라 부르며 따뜻한 사랑과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지금도 금보다 더한 희망적인 격려의 말씀만 들려준 그 군인아저씨들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1964년 2월말에 오육군 병원을 퇴원하여 하동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사고는 저에게 왼팔을 잃어버린 2급 장애자라는(1999년 5월 28일판정)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절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저는 37년 동안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장애인의 혜택을 받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 모든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고 적은 혜택이라도 받기 위해 장애자 등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8개월 동안의 고통스러운 병원생활이었지만 사고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 5 절 영보 중학교에 복학

 

그 해 3월에 중학교 1학년에 복학하여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친구들은 2학년인데 저는 1학년이라서 속상했습니다. 건강했던 육신은 어디로 가고 한쪽 팔을 못 쓰는 장애자가 된 제 자신의 모습을 보니 매일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할수 있는 일이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겨울교복을 입을 때는 긴 팔이라서 괜찮았지만 여름교복을 입을 때는 매일 매일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습니다. 남을 의식하여 팔이긴 흰 내의를 입은 다음 짧은 하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이런 저의 복장은 학교에서나 밖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저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혼자 학교를 뛰어 다녀야 했습니다. 체육시간에는 언제나 의자에 앉아서 운동하는 친구들을 바라만 보았습니다. '언제나 1년 전 같이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운동도 하고 같이 행동할 수있을까?' 하고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영원히 불가능한 꿈이 되어버렸습니다.

군 트럭을 같이 탔던 '박상길' 은 사고 즉시 팔을 어깨부분까지 절단을 하였고 그 외 여러 친구들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박상길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끝내는 외롭고 괴로웠는지 술을 먹고 열차사고로 먼저 사망하였습니다. 김순길도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마산 통일산업에 다니며 성실하게 살았는데도 백혈병으로 먼저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순식이도 포크레인을 운전하다가 돌이 날아와 뇌진탕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제 주위의 여러 친구들이 결혼도 못 해보고 저의 곁을 떠났습니다. 저는 팔 때문에 자연적으로 왕따가 되기도 했지만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활동적인 학생으로 자라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 공부를해야 하는지,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목표가 없었습니다. 저의 장애 때문인지 주위에서 아무도 공부하라는 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공부의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저는 장애자가 공부를 해도 쓸 곳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누군가가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학업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저에게는 집안일 밖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소 풀을 먹이고, 퇴비를 해오고 다시 학교 갈 준비를 하여 10리 길을 뛰어갔습니다. 수업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오후에도 소 풀을 먹이고 펄감도 하고, 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장암리 양조장이나 '방성지기' 주막집에서 술이 취하신 아버님을 밤늦게 집으로 모셔오는 것이 저의 일과였습니다.

아버님이 집에 오시면 술이 깰 때까지 온 가족의 이름을 불러댔습니다. 어머니는 논농사, 밭농사에 허리가 다 휘어질 정도로 일생동안 고생만 하였습니다. 아버님의 술 때문에 참다 못한 어머니가 집을 나가서 며칠을 오지 않아 온 동네사람들이 대방골 못에 가서 물을 빼고 어머니를 찾는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절에 있다가 3일 후에 돌아오셨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술 먹지 않는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 그 당시 저의 소원 이었습니다.

한 팔을 못쓰다 보니 나무를 하다가 왼쪽 손목을 낫으로 찍어서 피투성이가 된 때도 있었고 오른 손가락을 찍어서 뼈가 다 나을 정도로 잘라진 때도 있었으며, 겨울에 나무를 하다가 바지에 불이 붙어 무릎을 다 태워서 몇 달을 고생을·한 때도 있었습니다. 풀베기와 나무를 하도 많이 해서 허리에 큰 종기가 나서 치료를 하느라 2달 동안 고생을 한 때도 있었습니다. '정한봉' 에서 풀을 해 오다가 절벽으로 떨어져 죽을 고비도 넘겼으며 땔감 나무를 하다가 7m정도 높이의 나무에서 떨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비록 팔 장애를 가졌지만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리타작을 할 때면 보리이삭을 주우러 다녔고, 가을이면 나락이삭을 주우러 다녔습니다. 고구마를 캔 자리에 고구마 이삭을 캐러 다녔습니다. 겨울에는 산에서 나무를 해서 팔기도 했고 장작을 도로까지 날라주고 돈을 번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였지만 일에 미친 사람같이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저의 학창시절은 학교생활 보다는 가정 일에 더 열심이었습니다.

 

제 6절 보상금 15만원이 나의 왼팔이라니

 

저는 그 당시 군 트럭으로 인한 교통사고를 국가가 보상해 준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저의 어머니 아버지나 동네 친척들도 순박한 산골 사람들이라 알지 못하였습니다. 누구도 저의 한쪽 팔을 잃어버린 현실에 대한 피해보상과 저의 장래에 대한 계획과 대책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저의 한쪽 팔의 장애에 대한 피해보상 보다는 집안 일과 학교 다니는 일에만 매달려야 했습니다. 저는 어리지만 언제나 7남매를 키우기 위하여 밤낮 없이 논밭에서 일하시는 어머님을 도와 어머님의 손발이 되어 드리고자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통사고 브로커가 와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 보상금을 받아 주겠다고 하여 아버님과 형님은 소송을 맡겼습니다. 1966년에그 브로커가 다시 와서 처음에는 10만원을 주고 한 달 후에 와서 5만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상금이 얼마나 나왔는지는
얘기해 주지 않아 아무도 몰랐습니다. 돈 15만원이 나의 왼팔을 대신 하였는데  5만원은 부모님이 쓰시고 10만원은 형님이 쓰고 끝났습니다. 저는 그 당시 어른들의 무지함과 무책임과 무관심을 지금도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1970년에 변호사에게 물어보았더니 시효 3년이 지나 불가능 하다고 하였습니다.

일제 시대의 정신대 피해보상, 6 · 25 전쟁 보상, 월남전 고엽제 피해, 5·18피해도 3년이 지났지만 보상을하고 있습니다. 이 처참한 현실 앞에 왜 3년 시효가 지났다고 피해보상을 받을 수 없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수시로 팔이 아파서 진통제와 약을 사먹고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도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 고아원, 양로원, 장학재단을 설립하겠다는 것이 꿈이 었습니다.

 

제 7 절 고힝을 떠나 자활의 길로

 

저는 서울에 계신 큰 형님의 가구 공장에서 일을 하기로 하고 1968년 2월 21일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하동에서 서울까지 완행기차로 14시간이나 걸려 서울에 도착하엿습니다. 제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이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양보중학교 위에 있던 절의 주지승은 저에게 '학생은 세상에서 장사를 하면은 큰 부자가 되고, 도를 닦으면 큰 인물이 된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저는 악몽을 꾼 것 같은 지난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큰 부자가 되어 학교도 설립을 하고, 양로원도 운영하고, 고아원도 운영을 하고자 고향을 떠나 낮설은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돈을 벌어 이 사회를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형님의 가구 공장에서 1년을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도 형제지간이라 월급은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해 겨울 하동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두 번 째로 고향을 떠난 것은 1969년 2월 21일 입니다. 하동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우리나라 중앙 부분인 대전역에 내리자 밤이 되었습니다. 역 옆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시장구경을 하던 중 큰돈을 투자하지 않고도, 김장사와 미역장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수중에 돈 2만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연히 만난 사람이 빌려 달라고 하여 7천원을 빌려주고,남은 돈으로 방 값을 내고, 밥을 사 먹는 생활을 하다가 돈이 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돈 50원으로 국수를 한 다발을 사면 15일 동안 먹을 수있었는데 그것마저 떨어져서 거지 신세가 되어 길에서 가게마다 다니며 빵을 구걸하여 먹고살았습니다.

할 수없이 저는 대전서 청주까지 걸어가며 막노동 일을 찾아 다녔습니다. 청주에서 2일 동안 돈이 없어서 굶다가 재산 목록 1호인 시계를 5백원에 팔았습니다. 청주서 버스를 타고 신탄진까지 와서 신탄진에서 버스비를 아끼려고 걸어서 대전까지 왔는데 헤매다가 보니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자취방에 돌아왔습니다.

또 다시 막일을 찾았지만 일이 없어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저의자존심과 체면도 배고픔 앞에서는 송두리째 무너져 갔습니다. 집주인에게 밀린 방세 때문에 온갖 욕을 얻어 먹었습니다 구걸하면서 젊은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이 없어서 얻어먹고 사느냐는 비난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돈 빌려 준 집을 찾게 되어 한달 만에 7천원을 받아 대전시장에서 미역과 김을 사서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미역과 김을 팔기 위해 금산장에도 가고, 공주 장에도 가고, 옥천 장에도 가고, 신탄진 장에도 돌아다니는 말그대로 장돌뱅이가 되어 5일장을 부지런히 쫓아 다녔습니다.

돈이 약간 모아지자 나이론 옷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옷을 고르는 척하다가 자꾸 훔쳐가서 할 수없이 옷장사를 정리 하였습니다. 저는 수도공사를 하는 공사장에서 땅 파는 일을 하다가 겨울에 다시 고향인 하동에 돌아가 가사일을 돌보며 산에서 땔감나무 해오는 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1970년 2월 21일 그 동안에 모아두었던 3만원을 가지고 완행열차를 타고 이 번에는 천안에 갔습니다. 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자고 그 이튿날 천안 방죽거리에 하숙집을 정하고 바로 그 날 서울 중부시장에 가서 김 1박스를 도매로 가져와서 천안, 온양, 진천, 안성, 병천, 오산, 평택 장으로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김 뿐만 아니라 북어도 팔고 미역도 팔며 기반을 닦아 갔습니다. 그리고 쌍용동에 살다가 성정동의 새 양옥집 전세방 한 칸을 얻어 이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돈버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장사를 하고 저녁마다 집에 돌아와 돈보따리를 정리하여 돈을 세는 재미에 고달픔도 잊을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돈을 보내고 옷도 사서 부쳐 드렸습니다. 동생들의 책값과 용돈도 보내주었습니다.

매일 외롭고 고달픈 하루의 생활이었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꿈에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하루 하루 돈이 불어나는 재미에 희망을 갖고 열심히 장사를 하였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참으로 열심히 살며자립의 기반을 다져갔습니다.

 

 

제 2장 통일교 전단지 한장에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넌


제 1 절 단 한번의 악연으로 통일교 입교

 

저는 1970년 7월 31일. 5일장이 안 서는 날이라 마당 수돗가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있던 중,  키가  150cm정도 되는 아주 작고 배가 만삭인 정선자라는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전단지 한 장을 주면서 "밤에 우리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니 와서 들어보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객지생활에서 외로웠던 저는 그  전단지 한 장에 끌려 내 발로 걸어가 통일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전단지를 주며 문선명의 통일교를 믿으라는 정선자 씨의 말 한마디가 결국 제 인생을 빼앗고 파멸시켜 버렷습니다.

제가발을 내디딘 천안 통일교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은 단촐한 분위기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40일 하계 전도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에는 통일교 부인들이 남편과 자녀를 떠나 전국    각 통일교에 배치되어 전도 활동을 합니다. 천안 통일교에도 처음에 몇 명이 나와 열심히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학동안에는 부인 전도 대원들이 전도를 했지만 모두 자기 가정으로 돌아갔고 교구 본부인 천안교회는 교인들이 얼마 되지 않아 교회형편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1970년 11월 25일. 777쌍 합동 결혼식을 올린 부인 전도 대원들이 결혼 후에도 남편과 같이 살지않고 3년동안 전도를 하기 위해 천안교회에 전도대원으로 배치되어 왔습니다. 천안 통일교는 지원나온 전도대원들의 전도를 적극적으로 해서 조금씩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김민중 목사는 저에게 열정을 가지고 통일교 교리를 가르치면서 3년 후면 기독교가 통일교로 전부 흡수되고 불교, 유교 등 모든 종교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게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원리 강론인 창조 원리부터 채림론까지 들으면서 문선명이 틀림없이 재림주이며 참부모님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김목사는 3년 안에 종교 통일은 물론 정치, 경제, 언론, 문화까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고 순종하고 따르며 전체가 통일된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으면 3년  내에 지상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강의하였습니다.

부인 전도 대원들은 합동 결혼식을 하고도 제일 깨가 쏟아진다는 신혼 초인데도 남편과 살지 않고 문선명 교주를 위해 시간을 바쳐서 전도 활동을 하여 죽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 부모인 문선명에게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 왔다고 기쁜 보고를 드리기 위해 전도 활동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꽁보리밥과 김치만으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미역을 주면서 미 역국도 끓여 먹게 했습니다.

김민중 목사의 사모는 큰그릇에 빵을 가득 담아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구장 사모가 머리에 빵을 이고 집집마다 돌아 다니며 장사를 하는 것을 보니 통일교 목사의 길을 알 것 같았습니다.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구 본부의 총무 부장인 박무병씨는 호떡 장사를 하여 천안교회의 재정을 돕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전도 대원들은 생활비를 조금씩 냈지만 교회운영비로서는 너무 부족했습니다. 저도 간간이 교회에 가서 꽁보리 밥과 시래기 국을 먹은 때도 있었습니다.

 

제 2 절 천안교회 청넌회 부회장

 

저는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운영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5일장을다니며 미역 장사, 김 장사, 건어물 장사를 하여돈 버는 재미에 빠져 있었습니다. 매일 자전거에 미 역과 김을 싣고 안성, 진천, 온양, 오산, 천안장에가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갈 때면 왼쪽 팔을 사용할 수 없어서 오르막을 올라갈 때는겨울에도 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자전거에 짐을 싣고 갈 때 버스나 트럭이 인정사정 없이 저를 스쳐 지나가서 위험한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찬 바람에 자전거와 육중한 건어물 짐과 같이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는상처를 입을 때도 많았습니다. 힘 들었지만 건어물 장사를 할 때 좋은 장소를 잡았고 저의 열성 때문에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제가 장사가 잘되니까 주위 다른 장사들 중에 시기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 잘 대해주어서 대인관계도 좋았습니다.

천안 방죽거리에서 자취할 때 시장에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밤 9시경에 천안 시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저의 집까지 기독교 목사님 한분이 기진맥진 하여 찾아 왔습니다. 충남 서산에서 교회를 하다가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교회를 떠나 사모와 삼남매를 데리고 여인숙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3일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딱한 사정을 듣고 목사님을 자전거에 태우고 천안역 앞 여인숙에 가서 사모님과 자녀들을 데리고 가서 식사 대접을 하고 돈을 조금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떠날 때까지 적은 정성이지만 도움을 드렸습니다.

하루는 장사를 하고 막 돌아와 밥을 지으려고 하는데 멋진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맨 신사가 와서 배가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얼굴도 점잖고 잘생긴 분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열차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음료수 한 병을 주어서 마셨더니 수면제를 탄 음료수인지 모르고 잠들게 되었고 일어나 보니 상위 양복과 지갑을 도둑 맞았다고 했습니다. 할 수없이 옥천에서 내려 천안까지 철길로만 걸어올라 왔다고 하였습니다. 집이 서울이기 때문에 먹을 것을 얻어먹고 영등포에 있는 집에까지 걸어서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분을 모시고 천안 시내까지 가서 식당에서 짜장면을 곱빼기로 사드리고 집에 들어 갈 때 과자와 과일을 얘들에게 사가라고 돈을 조금 드리고 서울행 버스표를사서 보내 드렸습니다. 며칠 후 주인 아주머니 말이 저에게 도움을 받은 분이 서울 올라가서 은혜를 갚기 위해 천안 자취 집에까지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저의 자취방은 도로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일이 많았습니다.

천안 성정동에 살 때는 우연히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는 화가를알게 되었는데 그 화가도 생활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몇 달 동안 쌀, 라면,반찬을 사다 드렸는데 그때마다 저의 어머니처럼 생각되어서 항상 많이 못사다 드리는 것아 가슴 아팠습니다.

저는 길에서 행려 병자가 쓰러져 있거나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얼마라도 도와주어야 마음이 가벼운 성격 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여자 분에게는 시장에 가서 옷을 사다 드리고 남자 분에게는 집에 있는 제 옷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가서 드린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사이비 종교인 통일교에 발을 내 디딤이 영혼과 육신을 빼앗기고, 꿈도 청춘도 가정의 모든 것도 빼앗기는 순간인 것을 그땐 몰랐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깨닫고 보니 그것은 악몽의 만남, 죽음의 속삭임, 사단 마귀의 역사였습니다. 그 당시 통일교 교인보다 먼저 기독교 교인이 저의 귀에 통일교는 이단교회라 교육을 했더라면 제가 통일교에 입교하여 인생이 파멸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통일교가 이단교회라고 매일 한명에게라도 외친다면 저같이 어리석은 사람도 이단교회에 빠지는 일이 없이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통일교가 사이비 종교라는 외침을 통일교 입교 전까지 단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입교 후에는 이미 통일원리로 세뇌 교육이 되어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재림주로 믿고 섬길 때라서 통일교가 이단교회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 귀에는 기독교 교인이 통일교 반대하는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저는 진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참 부모님으로 재림주님으로 믿고, 우상으로 섬기며,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는 데 앞장섰고, 문선명을 재림 주님으로 구세주, 참부모, 천지 부모로 증거하는 데 모든 청춘을 바쳤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의 자녀나 형제, 친척, 친구가 지금 사악한 유혹에 빠져 통일교에 입교한다면 저와 같이 파멸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통일교 전도를 막아주십시오.

세계에서 사이비 종교의 천국이 대한민국이라 합니다. 사이비 교주들이 아름다운 금수강산, 지상천국인 이 땅에서 기독교를 모태로 하여 우후죽순같이 생겨났습니다. 살인집단 백백교, 암살 자살집단오대양교, 동방교,전도관 등 약 150파가 넘는 사이비 교주들이 저마다 주님이라고 자칭하며 선량하고양심적인 국민들의 영혼을 빼앗아 영적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가정 파탄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모든 성도는 일치 단결하여 목숨을 걸고 통일교와 사이비 이단을뿌리 뽑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4에 "하나님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 이라" 고 말씀했듯이 하나로 단결만하면 문선명 이단궤멸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와 각 교회에서 저를 간증집회에 초청하여 통일교의 정체와 비리를 알리고 싶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내 이웃을 전도하지 않으면 문선명 통일교 집단에 영혼을 빼앗겨 지옥으로 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은 경각심을 갖어야 합니다.

각 지역마다 사이비 종교 박멸운동을 범 기독교 운동으로 활성화시켜 나간다면 이 땅에 다시는 저 같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혼을 빼앗는 이단궤멸을 위해 싸워서 승리하라는 기독교 성도들에 대한 지상 명령 입니다.

 

제 3 절 새벽 기도 하던 중 영계에 가보고 나서..

 

1971년 7월 21일. 집에서 새벽기도 중 잠시 입신했습니다. 저의 육신이 방바닥에 쓰러졌는데 "준철아, 준철아, 준철아!" 라며 3번을 부르는 음성이 들렸고 마지막에 제가 "네!" 하고 대답을 했을 때 영혼이 육신에서 이탈하여 공중에 서 있었습니다.

그 음성은 다시 나에게 "준철아, 이 도끼를 받아.!"라고 말할 때 하늘로부터 큰 쇠도끼가 나에게 날아왔고 엉겁결에 오른 손을 내밀어 그 큰 쇠도끼자루를 잡게 되었습니다.

다시 "준철아, 쇠도끼를 잡았느냐?" 라고 묻자 나는 "잡았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더니 "이 세상을 내려다보아. 바짝 마른 나무는 사이비 종교이며 사단 마귀이니 다 짤라 버려라. 푸른 나무는 살아있는 신앙자이니 살려두어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백발 노인이 되어 쇠도끼로 썩은 나무를 베었습니다. 제가 베기를 다하고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허리를 펴고 일어섰을 때 "준철아, 이제 떠나거라." 라는 큰 음성이 천둥 번개소리 같이 저의 귀에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터널이 나오면 그 터널을 통과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저는 그 명령에 따라 터널을 통과하였습니다. 제가 터널을 통과하니 저 세상 영계였습니다. 한참을 그 곳에서 서 있으니 바다 가운데 수중 다리가 있었고,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자가용 한 대가 제 앞으로 왔습니다. 그차에 있던 운전 기사는 천사였는데, 그 천사가 말하기를 "제가 이제부터 모시겠습니다. " 하고 자가용 뒷 자리의 문을 열어주어 저는 차를 타고 끝 없는 길을 달려갔습니다.

마침내 그 차는 바다를 지나 육지에 도달했고 아름다운 궁전 입구에 정지하였습니다. 그 운전기사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따뜻하고 겸손한 자세로 대해 주셨고, "이제 제가 할 책임은 끝났다" 고 말했습니다. 저를 보고 그 천사 운전기사는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l서도 궁전 입구에 있던 남자가 자가용 문을 열어주면서 저에게 "어서 오십시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 하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안내를 받아 호화 찬란한 궁전 제일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올라가 가장 아름다운 방으로 안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방에 들어갔을 때 강렬한 빛이 있어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저에게는 음성만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하나님을 믿겠느냐!! 천국과 지옥을 믿겠느냐." 하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곳에서 "이제 준철아 떠나거라" 라고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죽은 나무 사단 마귀를 다 잘라버리고 백발노인이 되어 죽어서 할 일을 다하고 저승에 왔습니다. "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너에게 사명이 있어. 이 세상의 모든 사단 마귀와 죄악을 쇠도끼로 찍어 버려라." 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궁전을 내려와 수중다리를 통과하고 이승과 저승의 터널을 통과하여 내 집으로 들어왔는데 제 육신은 아직도 쓰러져 있었습니다. 영혼이 몸 속으로 들어가자 저는 의식에서 깨어났습니다.

저는 다시 살아난 후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제가 죽으면 끝이 아니고 영계의 시작이요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즉시 정 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끼를 받은 것은 목사의 사명을 받아 사단마귀를 찍어 없애라고 하나님이 저에게 명령한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통일교에 목사과정을 밟아 목사가 되었고 통일교 30년 신앙목사생활 중 생지옥같은 문선명 집단의 생활을 체험한 후 세뇌에서 깨어나 탈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며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단 사이비 교주인 문선명적그리스도를 궤멸하라고 저에게 도끼를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 이름으로 언론방송을 통하여 보도하고 각 교회에서 간증하는 일이 통일교회를 궤멸하는도끼받은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보도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문선명의 정체와 피가름 의식, 비리를 폭로하여 인류역사에 가장 큰 문선명 적그리스도를 뿌리 뽑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문선명은 1971년 1월 3일, 예수님 탄신일이라고 주장하며 통일교도인 처녀 장정순을 예수님과 결혼시켰습니다. 통일교 원리강의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제사장 사가랴와 마리아가 관계를 맺어 예수님이 탄생 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의 원리강의에는 '예수를 믿어도 완전구원을 받지 못하며, 실패한 예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이 참 부모요 재림주로서 이 땅에 탄생했기 때문에 예수가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은 1900년 음력 3월 1일을 참부모, 재림주로 섬기는 날로 정했습니다. 문선명의 생일인 1920년1월 6일을 재림주 탄신일로 정한 것을 통일교인들이 세뇌되어 모두 믿듯이 저도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목사가 강의하는 대로 모두 수긍하고 받아들이고 따랐습니다. 저는 3년 동안 모진비바람과 추위와 싸우면서 기반을 닦은 장사가 너무나 아까웠지만 물건을 팔고 다 정리하였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의 길이 제가 가야할 사명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제 4 절 통일교의 제 2차 기동대 활동

 

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목사 가정 인 제2차 기동대에서 6개월 동안 활동하기 위해 순전단 21일 교육에 들어갔습니다. 1972년 11월 21일.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수택리 중앙 수련소에 21일 원리 수련을 받았습니다. 창조원리부터 재림론까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재림주 참부모로 믿고 복종하며 증거하기 위한 세뇌교육 기간 이었습니다.

그 교육 후에 제2차 기동대 대원으로서 충북 순회 전도단 46명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기동단 단장은 임순도씨였습니다. 46명의 대원은 충북지역을 다니면서 6개월 동안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매일매일이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고 복종하며 통일교 발전을 위하여 충성을 맹약하는 고된 세뇌교육 훈련기간 이였습니다. 저는 훈련 기간 동안 무엇이든지 1등을 하고자 어떤 순전단 대원들보다도 더욱더 열심히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얼음 목욕도하고, 밤새도록 철야 기도도 하며, 산꼭대기 성지 기도회도 가졌습니다. 저는 특별 헌신대원으로서 전도를 하면서도 연필사업, 성미사업을 했습니다. 1960~1970년대의 통일교는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을 시켜 전국적으로 성미 구걸 사업과 연필사업, 떡 장사등을 하며 성금함을 들고 모금운동을 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나 추석, 설 명절 때도 모금 운동을 하였습니다. 저는 모금 운동에 자신 있게 활동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 가지 구실로 진행되는 통일교 모금활동에 동참하였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기 위하여 학자금 마련을 위해 헌신사업을 나왔다고 하며 집집마다 쌀과 돈을 달라고 하며 다녔습니다. 시골 동네를 다니면서 집집마다 쌀자루를 가지고 동정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순수하고 착한 시골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동정을 하여 100원, 500원, 1000원을 주었습니다. 연필 한 자루에 쌀을 한 되나 주시는 분도 있고 한 홉 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프면 찬밥이나 국수도 얻어 먹을 때가 많았고,고구마로 점심을 대신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쌀자루에 쌀을 모으면 나중에는 어깨에 둘러매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장거리를 갔다가 교회로 돌아 올 때면 밤 10시가 넘고 11시가 될 때도 있습니다. 교회에 도착하면 매일 녹초가 되었습니다. 모금 활동을 끝내고 밤늦게 돌아오면 결과 보고회, 원리강의 듣기, 기도회를 마치면 자정을 넘기기가 일수였습니다. 아무리 늦게 자도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정성스런 기도를 위해 냉수 마찰을 했습니다. 소변을 보면 그 자리에서 얼음이 어는 추운 겨울날에도 이런 일은 쉬지 않았습니다.

새벽 4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새벽기도를 하였습니다. 통일교는 각시 군 지역에 하나님이 임재하고 함께 하는 땅이라고 하는 '성지' 를 산꼭대기마다 정해 놓고 성지 기도라는 명목으로 새벽마다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헐벗고 굶주리며 매일매일 극기 훈련하는 심정 이었습니다.

이런 저의 노력으로 6개월의 순전단 졸업 때는 46명 가운데 1등을 했습니다 전도도 106명을 하여 우수상을 받고 개근상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문선명을 믿는다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요, 최고의 은사요, 최고의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6개월 동안 저는 매일 꽁보리밥에 김치만 주어도 감사했고, 한끼는 국수만을 주었는데도 저는 참 부모님, 재림주님이라고 믿었던 문선명의 은혜로 알고 감사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것이 예배, 기도, 전도, 쌀 거두는 성미 모으기, 봉사, 심정교육 생활이었습니다. 저는 코피를 다 쏟으며 6개월 동안 극기훈련을 받음으로서 문선명 통일교의 말단 목사, 교회장 자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된 훈련으로 피골이 상접하여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6개월의 수련 후 하동의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제가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첫 번째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의 사슬은 저를얽어 메기 시작했습니다.

1973년 5월 20일 수료 후 6월 1일날 임순도 단장으로부터 충북 보은군 적암교회로 발령을 했으니 임지로 빨리 와서 목회활동을 하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즉시 충북보은 적암교회로 갔습니다.

저는 통일 원리로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일교를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문선명의 교리에 세뇌되었기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 하였습니다. 통일교를 탈출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친 것이었습니다.



제 3장 첫 사역인 충북보은 적암교회

 

제 1절 기적은 일어나고

 

제가 충북 보은 적암교회에 취임식을 하고 부임했을 때 전임목사는 인수인계도 없이 가버리고 난 뒤였습니다. 저는 통일교 교인들 몇 분을 중심으로 전심전력을 다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4개월만에 교인을 70여명으로 늘렸습니다. 보리 벨 때는 보리를 베 주고, 모심을 때는 못줄도 잡아주고, 가을에는 대추도 따주고, 벼 벨 때는 일손을 도우며, 때에 따라서는 아기도 봐주며 무엇이든 봉사를 했습니다.

적암교회 목사로 취임한 후 매일 끼니때 마다 물을 끓여 밀가루 한 주먹을 집어넣고 간장도 없어 소금으로 간을 해서 먹었습니다. 어쩌다 라면이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적암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밥을 먹은 것은 한달 반 만인 1973년 7월 9일월요일이었습니다. 777가정인 유철재 부목사가 쌀 2되를 성미로 가져 온 것이었습니다. 쌀로 밥을 지어서 맨밥에 간장만 가지고 먹었지만 꿀맛이었습니다. 저는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그 후 교회 옆 땅을 개간하여 돌과 나무를 걷어내고 옥수수를 심어 옥수수 밭을 만들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서 점심, 저녁이나마 끼니로 때우려고 매일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해 길렀습니다. 옥수수 싹이 무릎까지 자라 올라 왔을 때였습니다. 심방 갔다가 오니까 동네 큰 암소와 새끼 송아지가교회에 들어와서 그 옥수수 싹을 잘라먹어 버린 것 이었습니다.

저는 매우 화가 나고 한편으로는 서러웠지만 그래도 남은 옥수수를 잘 길러 충북 청주 본부 교회와 보은 교회에도 한 자루 주었습니다. 그리고 적암교회 교인들과 옥수수 잔치를 벌렸습니다. 남은 것은 저의 아침 저녁 식사대용 양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적암교회 땅은 통일교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교회땅 120평을 매입하기로 작정하고 헌금을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이 3천원을 헌금하였고 나머지 돈은 제가 서울 중부시장에 미역과 김을 사다가 추석 때 각 시장에서 팔아 번 돈을 모았습니다. 또한 보은 속리산 산줄기 인 구봉산에 까지 올라가하루종일 칡덩굴을 잘라서 동네로 가져오면 한 관에 100원씩을 주었는데 매일 칡덩굴을 팔아 300원씩을 벌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대금을 지급하고 대지 120평을 매입 하였습니다.

적암 교회에서의 생활은 저에게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최악의 가난이었고 처절한 생활 이였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1인당 매월 50원을 내는 회비도 내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녁마다 강의를 할 때나 일요 예배, 수요 예배때 온 열정으로 설교를 하다보면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렸습니다. 저는 그래도 죽으면 살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전력을 다했습니다.

 

제 2절 성결교 신학교

 

저는 목회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신학에 대한 깊이와 교회 예배, 기도, 전도, 교회관리, 행정, 교육 등 모든 것을 제대로 교육받고자 성결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수님들은 문선명이 사이비교주며 통일교는 이단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통일교에 세뇌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먼 달나라 말씀처럼 제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성결신학교에서 6개월 수업 후에 성결교 신학대학교 2학기에 편입했습니다. 당시 학교에는 김응조 학장님, 전영식 학감님, 성기호 교수님(지금의성결대학교 총장님), 조두만 목사님 등 많은 분들의 열정적인 가르침에 감동 받고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초조하고 불안한 나날이었습니다. 통일교는 이단이라 했기 때문에 같은 신학생들과 차도 같이 못타고 빨리 타거나 늦게 버스를 타고 4년 동안 다녔습니다.

성결교 교단에서는 저를 장로교회의 전도사로 알고 있었습니다. 전영식 학감님은 저에게 열정적으로 기도도 잘한다며 능력있는 부흥사가 되어 성결교 교단에서 목회 활동을 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갈 길이 있어 따를 수는 없었지만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성결교 신학교 신학생 시절에 하나님에게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재림 주인가, 적 그리스도인가 간절한 심정으로 100일 단판 기도라도 드려서 하나님께 문선명의 정체를 알려달라고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무지하고 몽매한 저는 문선명을 재림 주, 참 부모로 믿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 다.

그러나 지금 생각을 해보니 그 당시 단 한번이라도 통일교에 대해 교수님과 상담을 했더라면, 통일교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기도를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저를 붉은 적 그리스도인 문선명 통일교교주로부터 구원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 교주의 붉은 철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도 통곡하셨을 것입니다. 저도 지금에야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제 3절 문교주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가는 의식인 합동결혼식

 

1975년 1월 13일. 청파동 통일교구본부 교회에서 전국에서 많은 미혼남녀가 참석한 가운데 집회가 열렸습니다. 미혼남녀를 양쪽으로 두 패로 만들고 가운데 길로 자칭 재림주인 문선명이 왕복을 하면서 미혼남녀의 얼굴 관상을 봅니다. 조상 위로 7대, 아래로 후손 7대 관상을 보고 천 년을 내다보며 가정 천국과 행복한 가정을 꾸며 이혼이 없는 참가정 합동결혼식을 올릴 짝을 맞춘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이 "너, 너 이렇게 만나봐!" 라고 명령하면 미혼남녀는 옆의 만남의 장소에 가서 서로 만나보고 문선명 앞에 와서 경배하고 결혼할 것을 맹세하고 마지막에 약혼 축도식을 받습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제가 신학 대학을 다니고 있고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하오니 저의 아내로 착한 사람으로 짝을 맞추어 주십시오." 라고 용감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문선명은 "그래? 내가 목사 사모로서 착한 색시감을 찾아 주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끝부분까지 미혼 여자들을 둘러보고 맨 마지막에 앉은 이영희씨를 저의 결혼할 대상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영희씨와 만나 대화를 해보고 결혼 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이영희씨에게 만나 나는 신학생이라는 것, 앞으로 목회자의 사명을 다할것, 교통사고로 팔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말했을 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축복 결흔식이 남편으로써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자녀들 앞에 아버지로써 역할을 다하지못하는 비극의 출발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1975년 2월 8일 서울 장충체육관에는 성대한 통일교 할동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저의 집이나 장인, 장모님 집에서는 통일교를 반대할뿐 아니라, 합동결혼식은 더욱 만류했었습니다. 그러나 장인, 장모님은 결혼식장인 장충체육관에 오셨습니다.

결혼식에서 문선명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예수님도 축복을 받지 못하였는데 부족한 너희들이 축복을 받아 원죄, 혈통죄, 연대죄, 자범죄도 없는축복 가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통해 합동 결혼식을 올린 통일교 교인들 가정은 죄 없는 자녀가 탄생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개인천국과 가정천국을 이루어 천국 백성으로써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부는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통일교 규례에 따라 3년의 전도기간이 있기 때문에 서로 혜어져 살았습니다.

1975년 6월 7일 토요일, 구국세계대회를 위해 각 나라 60개국 대표가 입국했고 1백 20만명이 서울 여의도 광장에 모였습니다. 전국 통일교 교인들은 각 지역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여의도 광장으로 모여 극적으로 1백20만명 집회를 성공리에 잘 마쳤습니다. 통일교에서 최초 합동결혼식자(1961년 5월 15일, 36가정)을 박종구 총단장(지금은 고인이 됨)은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우지 못하면 전국의 목회자와 통일교 교인들은 한강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자." 고 강조하면서 "전국의 기독교 교회에서는 6월 7일에 집회를 못하도록 비가 오라고 금식철야 기도하며 정성을 모으고 있다. " 고 하였습니다.

그날 오전엔 비가 와서 매우 초조했으나 행사를 하는 오후에는 비가 그쳤습니다. 통일교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통일교에서는 하나님이 문선명 자칭 재림주 편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기독교를 떠났고, 통일교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지금 생각을 해보니 구국세계대회는 문선명이 자기 욕망과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행사였습니다.

그 당시 통일교 교인은 1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교세를 자랑하기 위해 1백20만명을 집결하게 한 집회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날 동원된 전국의 교인들의 피눈물이 섞인 헌금으로 승공연합 사람들과 노인들의 식사대접, 관광버스 제공 등 온갖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제 4 장 서울 강서 교구

 

제 1 절 교구본부교회 개척, 부흥, 교회건축

 

1975년 7월 1일 서울 시내 12곳에 통일교 협회 본부에서 12명의 목회자를 추천하여 파송했는데 저는 서울 강서구를 맡게 되었습니다. 교회 마련을 위해 강서구 전지역의 건물을 수소문하고 다녔습니다. 마침내 화곡본동 2층에 교회를 마련하여 9월 1일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협회에서 단 10원도 지원 없이 자비로 교회를 마련 하다보니 경제적인 어려움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감사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없어도 사명감으로 충만하고 충과 효와 열을 다하겠다는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기필코 교회를 건축하여 크게 부흥하고 넘치는 제단을 만들 것이라고 다짐 하였습니다.

매일 문선명 사진을 걸어놓고 경배드리기, 문선명 교주에게 충성하는 서약인 나의맹세, 가정맹세, 성초기도, 조식금식, 전도, 봉사 생활로 일관 하였습니다. 개척교회이다 보니 교인들은 있어도 교회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저의 집과 논 600평을 판돈으로 어렵지만 교회를 이끌고 갔습니다.

신학교 등록금 마련, 교통비, 교회운영비, 교회건축 준비, 전도 등 여러가지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교회건축을 위한 30일, 60일, 120일 조식 금식기도를 했고, 전쟁을 하는 심정으로 피, 땀, 눈물로 정성을 쏟았습니다.

강서교회는 2층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교회 건축을 할 때까지 박현종 430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강서구철거민 동네인 신월동에 18만원짜리 방을 얻어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160명 재적과 120명 예배를 목표로 밤낮 없이 혼자서 1인 5역을하며 전도에 주력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였고 그 사람들을 통일교 교인으로 만들기에 몸부림을 쳤습니다.

개척 교회이다 보니 매일매일 목사가 직접 전도하러 다녀야 하고 심방해야 했습니다. 거의가 새로 전도된 교인이다 보니 헌금도 별로 모이지 않아신학 대학 등록금과 교통비와 생활비가 필요해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은 원리 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각 교회마다 흑판이 필요하였습니다. 저는 교회 운영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흑판은 물론, 자동 스탬프 도장, 책도 팔았습니다. 심지어는 콘크리트 쓰레기통 장사도 직접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기도를 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취침 때까지 매일 미친듯이 경배, 나의 맹세, 기도를 하며 살았습니다. 협회에서는 개척교회인데도 교회 전세금이나 교회 운영비, 생활비 등을 단10원도 지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인 5역을 해서라도 교회를 이끌고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6년 1월 1일 문선명은 '자녀로 인한 천국 실현' 이라는 표어를 통일교 교인들에게 내려주었습니다. 저는 강서교회 개척목사로서 한 해를출발하는 첫 시간을 얼마 되지 않은 교인들과 함께 철야 기도로 정성을 모았습니다. 당시 강서구 화곡동은 허허 벌판 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강서교구본부교회 건축을 최우선 목표로 세웠습니다.

문선명은 1975년 12월 31일 오후 8시 15분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통일교 목회자들과 교인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서 역사적인 통일교 현시점을 사수하라고 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은 역사적인 결실시대에 통일교 교인들이 죽음으로서 이 민족을 구하고 통일교 발전에 제물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문선명의 시책에 따라 강서교회를 기필코 발전시키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저는 "강서교회 교회건축을 하여 자칭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님이 안식 할 수 있는 강서교회 제단을 만들 수 있게 축복해 주옵소서" 하고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매일 신들린 사람처럼 밥을 먹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매년 1월 3일은 2000여년 전 예수님이 탄생한 날이라고 하여 통일교 교회에서는 예수 탄생 예배를 드립니다. 그날도 저는 새벽 제단에서 예수님 탄생 기도회와 간단한 예배 정성을 모았습니다.

1976년 1월 5일 서울 용산 통일교에서 서울교구의 목사 전체 전진 대회가 있었습니다. 김 영휘 한국협회장과 회의를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강서교회당 건축을 해준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서울 시내에는 대 선배 목사들이 있었지만 거의 전월세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척목사로서 교회건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때부터 만사를 제쳐놓고 교회 건축 대지를 사기 위하여 강서구 전체를 돌아 다녔습니다. 부동산 소개소는 거의 다 다녔을 정도로 많이 알아 보았습니다. 교통 좋고 인구도 밀집된 장소 3곳을 정하여 협회에 가져 갔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김수한 건설 대장이 통일교 A타입 교회의 교회는 산꼭대기에 건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 차례 산꼭대기는 안된다고 간절히 호소하였지만 욕만 얻어먹고 결국은 화곡동 고지대에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정하려던 교통 좋고 인구도 밀집된 대지와 산꼭대기 대지와는 가격 차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몇 천 원 차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김수한 건설대장 때문에 산꼭대기에 짓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지 125평의 총 금액은 5백62만5천원이었습니다. 대지 125평에 건평 42평의 예배당을 계획했습니다.

1976년 3월 3일 대지125평을 매입하고 교회 건축 설계를 준비하며 교회건축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강서교회 옆에 있던 영등포 통일교 정호영 목사에게 교회 건축을 하는 2달 동안 3명만 강서교회에 교회 건축 인부들 식사 준비, 물 길러 오는 것 등을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관할 교회의 건축인데도 거절 하였습니다.

통일교가 천국을 외치며 3년 내에 통일교와 기독교의 통일이 이루어 진다고 하고 문선명이 만 인류에게 재림주로 추앙을 받는다고 하였지만, '사랑과 식구' 라는 말이 허구에 불과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희생,봉사, 탕감 제물이라는 말도 입으로만 외치고 실천하지 못하는 죽은 신앙이라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 교인들이 서로 부를 때 '식구님' 이라고 합니다. 적든 많든 한 솥 밥을 먹는 가족처럼 사랑과 희생을 나누자는 뜻에서 식구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리나 사랑을 외치지만 제가 통일교에서 경험한 것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함과 냉정함 뿐이었습니다.

교회당 건축일은 우리 강서교회의 몫이었습니다. 교회 부인 몇이 아이들을 업고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점심 식사 준비를 하였습니다. 저도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하였습니다. 벽돌도 나르고, 나무 판자도 자르고,시멘트 일, 페인트칠, 자재 운반, 200m 아래에서 물을 길어 오는 일 둥을 하였습니다. 건축하는 동안 저는 예배와 심방 외에 건축일로 재단과 협회에 뛰어 다니며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 하였습니다. 너무 일이 많고 힘들어 1인 10역을 해도 모자랐습니다. 오진수씨는 강서교구 본부 교회 건축을 위하여 고향 함안에서 강서교회로 와 무보수로 교회 건축 일을 도와줬습니다. 서정수씨도 봉사활동을 너무 많이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착하고 진실한 청년들 이였습니다.

드디어 강서교회가 완공되자 그간의 많은 시련과 고통, 배고픔, 외로움, 기쁨 등 만감이 교차 하였습니다. 그 순간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대지 125평 가격이 560만원 정도였지만 지금은 100배가 넘는 5억 정도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육신을 벗고 영계에 갈 때까지 강서교회에서 목회하여 점점 더 큰 대형 교회로 성장시킬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강서교회를 건축하던 중 여러 가지 일이 많았습니다. 철물점에 가서 못을 사려고 쌀 배달을 온 쌀가게 아저씨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급경사 길을 내려가는데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아 순간적으로 도로 옆 시멘트 벽으로 자전거 핸들을 꺽었습니다. 저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벽에 부딪히면서 오른쪽 무릎 위에 뼈가 보일 정도로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제가 쓰러지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자전거 주인은 브레이크가 고장났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생명을 구한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뼈 속까지 심을 박아서 썩지 않게 하고 새 살이 차 오를 때까지 두 달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붕대로 다리를 싸매고 전과 다름없이 건축 일을 하였습니다. 건축하는 동안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배웠습니다. 벽돌쌓기 시멘트일, 미장일 등 전문 기술자와 비슷하게 일을 많이 했습니다.

피와 땀, 눈물로 사력을 다한 서울의 강서교회 건축은 1976년 6월 10일 성공적으로 완공 하였습니다. 통일교 역사가 21년이 지났지만 당시 서울시내 영구교회는 몇 개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전세, 월세 교회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제일 후배 목회자로써 개척 1년 만에 교회 건축을 완공하게 되어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강서교회에서 1인 10역을 하며 새로 전도된 80여명을 교육시키고 교회를 교인들로 넘치게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1962-1963년대 선배 목사들 5명이 서울로 발령 받아 지방에서 올라와 강제로 강서교회를 빼앗았습니다. 본부에서는 강서교회를 저에게 빼앗아 이영진 목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철거민 달동네인 노원교구본부 상계동 개척 교회를 시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교회 건축을 했던 강서교구 본부에서 헌당 예배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눈물을 머금고 노원교구본부 개척 교회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임 이영진 목사는 목회 활동은 하지 않고 버스토큰 가게나 하고 신문 판매를 하였습니다. 저는 박탈감과 충격으로 한동안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은 회의 때 "재주는 곰이 넘고 덕은 엉뚱한 사람이 받는다" 며 저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때 통일교를 탈출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당시 문선명 통일교를 떠나면 죽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나 식구들은 한 두 번 충격을 받고 상처를 받으면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버리고 통일 교회를 탈출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는 외골수여서 그때는 문선명을 떠나면 천국을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문선명 통일교를 버리고 미련을 끊으라고 꿈으로 경고하며 감옥에서 탈출하라고 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왜 문선명 통일 교회에 미련을 버리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저는 바보였습니다. 세번째로 통일교를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포기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 5장 노원교구 본부 개척교회 제 1차

 

건축

 

제 1절 그래도 끈질긴 층성
 

1976년 8월 10일 노원 상계 교회로 부임하였습니다. 앞서서 여러 선배 목회자가 상계동에 교회를 세우려고 왔었지만 너무나 최악의 조건이라 다 실패하고 방 한 칸도 마련하지 못한 채 그만 두었던 곳이었습니다. 저는 작은방에서 상을 강대상으로 삼고 몇 사람과 노원교회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비록 강서교회 일로 마음은 아팠지만 목숨을 다해 몸부림치며 교회발전에 주력했습니다.

김 영휘 한국협회장도 부당한 인사이동에 마음이 아팠는지 상계동 비포장도로의 먼지를 뒤집어쓰시고 직접 찾아 와서 제게 1만 5천원을 주어 쌀과연탄을 샀습니다. 저는 교인을 전도하기 위해 미혼 남녀들을 취직 시켜 주었습니다. 합동 결혼식을 한 사람이라도 실직자는 취직을 시켰습니다.

첫 번째 노원교회 개척을 했던 상계 3동 95-75호 교회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장민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렵고 힘든 가정적 어려움을 해결 해주고 통일그룹인 일화제약에 취직 시켜 주었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라고 취직 시켜 주었는데, 처음에는 나왔지만 나중에는 잘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인은 50분의 1도 되지 않는 1200원을 월정 헌금으로 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회사에서 퇴근 후 교회에 와서는 저의 멱살을잡고 뺨을 때렸습니다. 제가 노원교회 장년 회장인 성영낙 씨에게 '장민수씨가(777쌍 합동결혼식자) 일화제약 내의 이순주(1800 가정) 부인과 연애를 한다' 고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일화제약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또 성영낙 씨에게 그런 말을 한 일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연애 헛소문의 진상을 알고자 성 영낙 씨에게 다그치니까 자기 교회 목사인 저에게 누명을 씌웠던 것입니다.

장민수 씨는 자초지정을 알아 보지도 않고 갑작스럽게 교회에 들어와서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고 폭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잘 살게 해주고 취직까지 시켜 주고 살려 주었더니 누명을 씌우고 폭행까지 하다니 웬 일이란 말입니까? 저는 꿈에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살면서 먼저 원인제공을 하여 싸움하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언제나 원인제공을 하여 문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통일교가 천국인줄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목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제 전부를 바쳐 교인들을 사랑한 결과 돌아온 것은 누명과 폭행과 상처 뿐 이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저는 통일교 문선명을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며 교인들을 사랑한 것 밖에 없습니다.

 

제 2 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길

 

1972년 11월 21일부터 2000년 8월까지 통일교 목사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가난은 나의 친구였습니다. 제가 통일교 목회를 하기 전에 장사해서 모은 돈은 작은 집과 땅을 살 정도였습니다. 그 돈을 형님에게 맡겼는데 형님은 제가 사이비종교 목사라고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형님은 가구공장을 했는데, 가서 돈을 달라고 하면 나무 막대기로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폭행했습니다. 저는 이단 교회 거지 목사라고 온갖 핍박을 받아도 문선명 참 부모님을 믿고 견뎟습니다 결혼 반지, 시계는 전당포에 팔아서 교회 생활비로 쓰고 돈이 될 수 있는 책은 중고 서점에 팔아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1975년 12월 23일엔 형님에게 돈을 받으려고 밤 10시까지 형님을 기다리다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날은 발목까지 찰 정도로 눈이 많이 왔습니다. 그때 학생 차비는 25원이었는데 저는 15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지 못하고 마포에서 강서교회 옆에 있는 신월동 월세방까지 걸어와야 했습니다. 오는 도중 눈길에 몇 번이고 넘어져 옷이 얼음 덩어리가 되어 도착하였습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통행금지를 넘긴 새벽 1시에 집에 도착하여 추위에 떨며 방에 들어갔습니다.

연탄불이라도 꺼지지 않았더라면 몸을 녹일 수 있었을 것인데 연탄불은꺼져 있었습니다. 집주인이 구들도 없이 연탄 아궁이만 만들어 저를 속이고 세를 놓았던 것입니다.

구들도 놓지 않고 시멘트만 바르고 도배만 하여 방을 만들었기 때문에 벽에는 고드름이 얼어 있었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추위와 배고픔,고난의 날이었습니다. 노원 교구 본부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도 가난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노원교회는 헌금도 없고 몇 명을 가지고 개척 교회를 하였기 때문에 신혼초인 저의 아내 이영희씨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으로 이를 악물어야 했습니다. 끼니를 거르는 비참한 노원교회 생활에 절약을 생명으로 알고 알뜰하게 생활 하였습니다.

아내는 상계동 도깨비 시장에서 버린 배추 잎을 주어다가 김치를 담았습니다. 어쩌다 계란을 사게 되도 깨진 것을 모아 파는 것을 사다 먹었습니다. 쌀도 7~8년 된 정부미로 속은 벌레가 다 파먹고 껍질만 있는 쌀을 헐값에 사다 먹었습니다. 밥을 하면 밥이 죽이 되어버 리고 입에 들어가면 씹은 것도 없이 녹아버렸습니다.

어쩌다 밥이 남으면 점심에 먹을때는 밥이 죽이 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매일 국수, 라면, 밀가루 수제비를 점심이나 저녁으로 먹었습니다. 저의 자녀들은 먹는 것에 너무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상계교회에서 서대문 행촌동에 있던 신학교까지 토큰 2개만가지고 다녔습니다. 토큰이 없어서 몇 시간이나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상계동 교회까지 온 때도 있었습니다. 양가 부모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양가 부모 형제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협회, 교구에서는 목회자가 아무리 생활이 궁핍해도 단 10원도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서울 교구 내에서 저와 같이 12명의 목사들이 개척을 시작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다 그만두고 3~4명만 어려운 목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1978년 2월 23일 성결교 신학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교인들,부모, 형제들에게 졸업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인만 졸업식에 왔습니다. 그러나 겨우 차비만 있었기 때문에 꽃다발 살돈이 없었습니다. 제게 비상금 5천원이 있어서 아내에게 5천원을 주어 꽃을 사오도록 했습니다. 카메라도 없어서 동료에게 찍어 달라고 하여 한 장을 찍었습니다.

후에 편지로 사진 한장 받은 것이 유일한 졸업식 사진입니다 이제는 그 한장 마저 액자 속에서 곰팡이가 피어 하얗게 되었습니다.

 

제 3절 제 1차 노원 교회 교회 대지 매입 건축

 

1976년 12월 13일 상계3동 95-75호에 대지 20평을 매입하고 교회를 재건축 하였습니다. 1977년 3월 3일 중소기업 은행과의 잘못된 계약에 이의를 제기하여 재판에 승소해서 교회를 영구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교인들 이사짐을 옮겨주고 취업알선, 속옷 빨래 등 온갖 일을 하면서 교회를 위해 목사가 아닌 머슴으로 살았습니다. 진심으로 교인 한 사람 한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 20평 교회가 가득 차고 넘쳤습니다. 지방 중소도시나 산골에서 통일교를 개척, 부흥시키려 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최악조건인 강서교구본부와 노원교구본부를 개척, 부흥을 시킨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승리였습니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교회 건축을 하였더라면 선배 목사들에게 교회를 빼앗기지 않고 한국 최고의 통일교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제가 서울 최악의 허허벌판에서 개척하여 교회를 부흥발전을 시키면 선배들에게 교회를 빼앗긴 것은, 교회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바람 잘 날 없는 시련과 처절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통일교 대 선배 목사들을 제치고 크고 좋은 환경의 교회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와 같이 목회를 시작했던 서울시내 교회 12곳이 다 폐쇄되고 3곳만 남은 것은 개척교회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를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제 6장 새생명의 결실인 3남매

 

제 1절 첫 딸 '박은주'

 

1978년 1월 IS일 주일 오후 1시 26분에 첫 딸 은주가 태어랐습니다. 태몽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 장군이 바로 네 아들이다. " 라고 들었기 때문에 저는 은주가 태어날 때까지도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교인, 이웃집 사람들도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1월 14일부터 하루종일 진통을 하고 14일 밤에는 밤새도록 진통을 하였지만 아기를 낳을 수가 없었습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사단 세계 사람이 아기를 보면 안 된다고, 성별 된 참 부모님의 아들딸은 자연분만 해야 한다고 교육했기 때문에 집에서 아기를 받으려고 했으나 불가능 했습니다.

1월 15일 새벽 상계 3동 도깨비 시장에 있는 40년 된 조산원으로 산모를 데리고 갔습니다. 산모는 기진맥진을 하였습니다. 오전 11시까지 진통을 했지만 아기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교회로 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산모에게 가려고 했으나 새 신자가 그 날 따라 두 사람이나 와서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낮 12시 40분까지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조산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까지도 아기를 낳지 못하고 '조산원' 원장과 산모가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습니다. 원장님은 40년 동안 아기를 받았어도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병원으로 빨리 후송하지 않으면 산모나 아기가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산모는 기진맥진하여 의식이 희미한 상태고 양수도 밖으로 다 빠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저는 7초대에 성초를 켜놓고 성령 하나님께 산모와 아기를 살려달라고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4Kg이나 나가는 아기가 나왔습니다. 산모와 아기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진실하게 하나님을 안믿었지만 믿었고, 제 마음속에는 통일교 목사를 하고 문선명에게 세뇌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잘 길러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것을 다짐했습니다.

1980년 10월 5일 오후2시에 두 돌이 된 은주를 잃어버렸습니다. 파출소에 신고도 하고, 동사무소에 가서 박은주를 찾는다는 안내방송도 수 차례 하였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상계동 전체를 오후2시~저녁 7시까지 울면서 찾아다녔습니다.

은주 엄마와 교인들 몇 사람도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은주는 항상 밥만 먹으면 교회 밖으로 나갔고 겁이 없었습니다. 아무데나 아장아장 잘 걸어 다녔습니다. 은주는 아기 때부터 용감하고 겁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날도 교회를 벗어나 여러 군데를 아장아장 걸어 다니다가 혼자서 새마을시장 구경을 하였나 봅니다.

제가 은주를 찾았을 때는 시장 도로변 독립문 메리야스 가게 진열대 앞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녁 7시여서 제법 어두울 때였습니다. 저는 은주를 찾은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은주 엄마나 교인들도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파출소나 동사무소에서도 다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찾지 못하면 고아원으로 갈 뻔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미쳐 있었기에 문선명씨에게 충성하는 구구 절절의 심정을 직접 웅변원고로 써서 은주에게 주었습니다 은주에게 웅변연습을 시켜 통일교 전국 웅변대회에 나갔습니다. 은주는 1985년 2월25일 참부모님 탄신기념 제26차 전국교구 대항 웅변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고 1987년 2월 3일 국민학생부 자칭 재림주 문선명 부모님 탄신기념 제28차 전국교구 대항 웅변대회에서도 1등을 하였습니다.

은주는 초등 학교 때부터 각종 상을 수없이 많이 받았습니다. 용감하고 인정이 많으며 자상합니다. 은주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용돈, 세배든 등을 알뜰하게 모아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생활이 어려워 그 돈을 다 썼습니다.

은주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얼마 되지도 않는 용돈을 모아 양복 한 벌을 사주었습니다. 제가 입을 옷이 없을 때마다 은주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지금까지 양복을 5벌이나 사주었습니다. 은주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저의 아내에게도 제가 못해 주는 옷을 해주고 반지도 해주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질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고기를 사오고 약을 사왔습니다.

은주는 밥값을 아끼려고 밥을 굶고 다닐 정도로 자신에게는 알뜰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들, 후배들에게는 어렵게 모은 돈으로 얼마나 많이 베풀고 사는지 모릅니다. 마음씨 곱고 항상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해주는 은주는 우리 집의 효녀 입니다.

 

제 2 절 아들 '박영진'  

 

1979년 5월 12일 오후 1시 29분에 둘째 영진이가 첫 딸이 태어났던 곳에서 진통도 전혀 없이 순산으로 태어났습니다.

영진이가 태어날 무렵 통일교에서 5,000만 달러(한화 400억 정도)를 들여서 '오인천' 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시내 목사들과 교인들은 총 동원되어 엑스트라를 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저도 맥아더 장군과 작전회의를 하는 삼성장군으로 출연하고 이북의 포로로 교회에서 끌려 나오는 역할도 했습니다.

영진이가 태어나는 날에도 영화촬영을 하고 교회로 돌아오는데 벌써 아들 영진이를 낳은 것이었습니다. 이후, 영진이는 황달, 부스럼, 탈장 수술등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영진이가 첫 돌이 지나 걸음마를 할 때 아내와 장모님 생신으로 처갓집에 갔었습니다.

1980년 5월 저 혼자 잠을 자는데 새벽 1시경 하나님의 음성이 저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너의 아들을 빨리 찾아라..."

꿈에 시체를 넣는 관을 보여주는데 시체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꿈에서 깨어나 밤새도록 우리 가정에 우환과 환란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침 일찍 울산에 있는 영진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영진이가 아무 탈이 없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새벽에 영진이가 일찍 일어나 아장아장 걸어서 마루를 나와 부엌을 내려다보다가 새빨간 연탄 아궁이에 거꾸로 머리가 처박혔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부엌에 있던 영진이 엄마가 놀라서 다리와 목을 잡고 영진이를 버쩍 거꾸로 들어 올렸다고 했습니다. I~2초도 안 되는 찰라에 영진이 목숨을 구했습니다.

영진이 엄마가 마당이나 방에 있었더라면 영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얼굴 전체가 화상을 입어 차마 볼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영진이는 이마에 물집만 잡히고 머리만 조금 태웠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음의 자리에서 영진이의 생명을 구해주셨습니다.

영진이는 어릴 때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영진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매년 반장,부반장을 했고 우등상도 받았습니다. 중학교 때는 전교 3등으로 장학금을 받아 저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저는 가족들과 노원교구 교인들과 같이 매일 오인천 영화에 출연을 했습니다. 북한군인이 6·25때 소련제 탱크를 몰고 3·8선을 넘어와 우리 가족이 사는 초가집을 송두리째 탱크로 밀어버리는 장면에서 마당에 있던 영진이가 놀라서 울고 아내는 빨래를 너는 역을 하였습니다. 단역 이였지만 그 때는 사명감에 불타 올랐고 감사하는 마음 뿐이였습니다.

그러나 400억을 투자한 오인천 영화는 한국에선 개봉도 못했고 미국에서만 일부 상영이 되었습니다. 400억이면 서울시내 각 동에 1억짜리 빌딩400개를 살 수 있는 돈이었는데 빌딩을 샀으면 지금은 수 천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선명 주위에 있는 충성꾼들이 끊임없이 일을 저질러 교인들의 피눈물을 짜고 파멸시켜 갔습니다.

통일교에서 추진했던 중국 판다 프로젝트는 항공, 자동차, 공업단지, 도시 등을 만드는 공사도 추진했지만 모두 실패를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4억 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알지만 공사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중간에서 사기 당하고 말았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피눈물 어린 통일교 교인들의 헌금을 사기 쳐서 교인들의 영혼과 육신을 죽이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엄청난 실패와 낭비를 하면서도 그 책임을 통일교 교인들에게 전가시켜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제 3 절 막내 '박은영'

 

1981년 4월 8일 새벽 5시 15분에 둘째 딸 은영이가 태어났습니다. 3남매가 매년 태어나다 보니 아내는 종일 3남매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한 무능한 남편인 저는 아내에게 고통만 안겨 주어 미안한마음뿐이었습니다. 아내는 하루종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예배, 전도,심방을할뿐 아니라 가난한 살림을 불평 한마디 없이 잘 극복해 나갔습니다.

저는 노원 상계 교회의 발전을 위해 밤낮 없이 뛰어다녔기 때문에 아내는3남매를 키우느라 저녁에는 녹초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녁부터 새벽 기도까지는 제가 교회에서 어린 3남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기저귀도 빨고,가사 일도 도왔습니다. 연탄불 가는 것은 기본 이었습니다. 그러나 혹독한 고생과 처절한 가난으로 남편과 아버지로써 역할을 다하지 못해 한없이 가슴 아파 했던 날들이었습니다. 은영이는 언제나 언니가 입던 옷을 받아 입었습니다. 영진이가 입던 옷을 은영이가 입었을 때는 벌써 옷이 헤어질 정도로 낡아 버렸지만 은영이는 불평 없이 입었습니다.

1987년 2월 21일 우리 부부가 심방간 사이에 도둑이 교회에 들어와 18만원을 주고 산 카메라와 10만원을 주고 산 카세트를 훔쳐갔습니다. 은주와 영진이는 학교에 가고, 사택에는 7살인 은영이 혼자만 있었습니다. 도둑은 보자기에 물건을 다 싸 가지고 밖으로 나가다가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대형 액자 사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저의 부부가 심방을 갈 때마다 경배하고 기도하며 돌아와서도 경배하며 잘 다녀왔다고 보고하는 문선명 교주의 대형 액자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은 문선명 교주의 대형 액자를 집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경배하며 기도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하나님의 대적이며 자칭 신이 되어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자기에게 경배하고 기도를 하도록 시키고 있었습니다.

도둑이 문선명 통일교 교주 사진 액자를 떼려고 하자 은영이는 어린 나이인데도 도둑을 발로 걷어찼던 것입니다. 도둑은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그  자리에서 벌렁 넘어졌습니다. 도둑이 일어나 "아! 이 새끼" 하면서 온영이의 목을 졸랐습니다 은영이는 고함을 질렀습니다. 교회 라에서 떡볶이 장사를 하는 할머니가 고함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왔습니다. 떡볶이 할머니가 도둑을 보고 "너 뭐야! 아기 목을 왜 졸라?" 하면서 도둑을 때리자 할머니를 확 밀치면서 쓰러뜨리고는 카메라와 카세트, 라디오를 가지고 도망갔습니다.

추운 겨울이라 두꺼운 목 폴라를 입고 있던 은영이의 목에 깍란 멍과 상처만 조금 나고 무사했습니다. 은영이는 착하게 자라나 걱정, 근심을 끼치지 않고 효도를 잘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반장도 하고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각종 상도 여러 차례 받아서 저희 부부를 기쁘게 했습니다. 처절하게 가난했지만 3남매를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자녀로 기르고자 노력했고, 가난하지만 생활비를 쪼개며 자녀 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7 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제 1 절 2차 교회 대지 매입 재건축 성공

 

상계교회는 날로 발전하여 교회에서 모든 교인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가득찼습니다. '김영휘' 한국 협회장도 노원교회에 와 보고 자랑스러워 하며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1978년에 전도 우수 한국협회장상을 받았습니다.

1979년 6월 1일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 코너에 40평을 매입하고 교회재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현 교회 매도 대금과 협회 재단의 지원금으로 한 것입니다. 재건축을 할 때도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하수도 공사, 수도공사, 시멘트 일, 보일러 설치하는 일 등 열 손가락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마침내 제 2차 교회 재건축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제일 후배 가정으로써 서울서만 3번째 교회 건축을 한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의 정성도 있었지만 사랑, 진실,은혜를 져 버려서 가슴에 못을 박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통일교인들의 신앙적인 배반으로 저는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물질적으로 노원교회 교인을 도와 주었다가 어려움을 겪은 때도 있습니다.

저는 박상수 집사에게 1979년 7월에 50만원을 빌려주었습니다. 그 당시돈 50만원은 상계 전철역앞 무허가 건물 4평 짜리 2채 값이었습니다. 은행 금리정도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3개월 후 계를 타면 받기로 했습니다. 1개월치 이자를 받고 그 집에 심방을 갔는데 사람이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박집사 부인인 이희선 집사에게 내 돈 내놓으라고 하면서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싸움을 말린 후 박 집사 부인에게 사정을 물어보았습니다.

박상수 집사는 보증금 5만원도 안되는 산꼭대기 집에서 월세 8천원을 내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렵게 살지만 신용을 잘 지킨다고 하여 주위 사람들은 1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 철저히 신용을 지키면서 비싼 이자를 주기로 하고, 돈을 빌려서 그 돈으로 생활하고 이자를 주며 천 만원이 될 때까지 끌고 왔는데 마지막에 돈을 빌릴 데가 없어 저에게 돈을 빌렸던 것입니다.

저는 박집사 내외에게 그 동안 이자를 원금보다 많이 주었으므로 원금만 갚는 조건으로 하고 장기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박상수 집사에게 빌려 준 돈이 옆집 아주머니에게 빌린 것이었습니다. 저의 돈으로 이자를 매달 주다가 나중에 그 돈을 마련하여 갚았습니다. 박집사는 지방에 가서 집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이희선 집사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네 자녀들과 같이 끼니를 거르면서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형편이 되면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박집사 자녀들은 너무나 착했습니다. 부모의 잘못으로 자녀들이 고통 당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심방할 때 라면 1박스와 과자를 사다 주었습니다. 돈이 될 땐 쌀도 사다 주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지라고 항상 격려해 주었습니다. 박집사는 3년 후 저에게 20만원을 주었습니다. 나머지 30만원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집사가 어디에 살던지 자녀들과 같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교역자와 교인은 절대 금전거래를 하면 시험이 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잠언 6:6)

어처구니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한 때도 있습니다 1960년대 말에 잠시 통일교에 나왔던 김태수씨와 저는 인연을 맺어 노원교회로 다시 나오게 하였습니다. 저는 김태수 씨를 전도하여 교회에 나오게 하기까지 온갖 정성을 들였고 아버지와 형님같이 모셨습니다.

어느 날, 제가 심방 전도를 간 사이에 김태수 씨가 교회에 와서 저의 아내에게 아줌마라며 교회 그만 두고 장사나 해서 먹고 살라고 빈정 거렸습니다. 저의 아내는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인내하며 비록 김태수 씨가 헌금을 하지 못했지만 깍듯이 어른으로 대접하며 모셨습니다. 목사인 제가 얼마나 비참하게 보이고 저의 아내가 불쌍히 보였으면 막말을 하고 장사나 하라고 하면서 무시했겠습니까?

심방 전도에서 돌아온 저는 모욕적인 말을 하고 갔다는 것을 듣고 김태수씨 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김태수 씨에게 동생 같고 자식 같은 목사와 사모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지는 못하고 사모를 아줌마라고 하고 장사나 해먹고 살라는 등의 그런 모욕적인 막말을 했느냐고 했습니다.

성질 급한 김태수 씨는 교만에 빠져 안하무인격으로 "뭐! 이 새끼? 어린놈이" 하면서 저의 뺨을 세차게 때렸습니다. 저는 아버지 같은 사람과 싸울수가 없어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있으면싸움이 될 것 같아 저는 그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철거민 달동네이고 마음이 강팍한 사람들이 많은 상계 지역이라 할 지라도 저는 죽도록 교인들을 섬기고 사랑으로 축복하며 정을 베푼 죄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로 마음이 강팍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나이 어린 목사이지만 2차례나 억울한 폭행을 당하다 보니 통일교가 천국이라고들 하는데 제겐 지옥 이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교인들이 영혼을 구원받고 달라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에 들어와서도 세상에 있을 때의 죄 많은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악행만 하였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은 참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수치와 폭행을 당하고 뺨이나 맞는 역할을 하기 위해 통일교에 입교하여 목사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목숨을 걸고 사명감을 갖고 목회를 한 것이었습니다. 억울해서 눈물이 비오듯 흘러 내렸습니다. 그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부족하고 나이가 어려서 무시당하고 뺨을 맞았다고 생각하며 저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통일교에서 선배 목사가 되고 나이가 많은 목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배반하고 은혜를 져버리는 통일교 교인을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노원교구 본부 제단에서 귀신 들린 자가 저의 기도로 악귀가 몰러가고 폐병 말기 환자가 역사로 완재되고 아들딸 못 낳는 사람이 기적적으로 자녀를 낳았습니다. 신유의 역사는 노원교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980년 국회의원 선거 때는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에 저의 교회가 건축을 완료할 때였습니다. 국회의원 후보 한 사람이 저를 잘 아는 분과 같이 밤 10시에 교회로 찾아와 돈 봉투를 내밀면서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30분 동안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도와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국회의원 후보는 도봉구와 노원구 관내에서 유일하게 돈을 받지 않은 목사는 박준철 목사라고 하였습니다. 몇 십만원이면 저에게는 거금 이였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생을 그렇게 고지식하고 정직하게 살아왔습니다.

국제 승공연합 강연회 때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행사 때 나오는 행사비를 행사 참석자 식사대접과 수건, 볼펜 등의 선물비용으로 다 사용하였습니다. 그러자 저를 관할하는 이상수 도봉구 목사는 저에게 그 돈을 왜 다 쓰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저보다 사례비를 4배나 많이 받았던 이상수 목사는 행사비를 남겨서 자식들 교육비, 생활비로 사용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이상수 목사는 그 이후 협회 통일교 전도 국장이 되자 목사 사모들을 모아 놓고 단 10원도 공금을 횡령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는 언제나 먹는 것마저도 허락되지 못한 생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제 8장 서울 노원교구에서경기 화성 교회로 강제로

 

인사 이동

 

제 1 절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박길남 교구장의 거짓약속

 

1981년 10월 19일부터 21일까지 수택리 교회 김민중 목사를 모시고 3일간 부흥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서울 노원교회는 이제 교인들이 다 앉을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강제 인사 이동 처사로 충격을 받아 또 한번의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문선명은 서울에 있는 통일교를 집중 발전시키고 통일그룹 내 기업체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많은 통일교 교인을 회사에서 퇴사시키는 잔인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통일교는 이단이며, 사이비 종교로 사회에서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처럼 발전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통일교에 교인 한 사람을 전도하여 부흥시킨다는 것은 기독교 이름으로 부흥 시키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목숨을 걸고 교회를 부흥 시켜 넘치게 만들었는데 또 다시 빼앗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20일 경기 수택리 중앙 연수원에서 목회자 중 1968년에 합동 결혼식을 한 사람 430가정 이상 목회자는 지방 교회에서 서울 교회로 올라와 목회 하라고 인사발령을 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통일교 수는 영구 통일교, 전세교회, 월세 교회 다 합해서 27개밖에 없었습니다.

27개 교회를 400개 교회로 늘리기 위해 통일재단 기관기업체 430가정 이상 되는 사람은 전체가 사표를 내도록 하고 300만원씩 주면서 방 한 칸을 얻어 서울 400개 동 가운데 1동씩을 맡아 교회를 개척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400개 개척교회에서 수십 개로 축소되었습니다. 김민중 목사가 수택리 집회에서 결정이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였을 때 저는 문선명 특유의 잔인성이 또 드러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통일교 기관 기업체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모든 생활을 박탈 당하고 행복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간부들 가운데 고통 당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정이 파탄되어 통일교를 떠나는 상처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통일교 기업체 간부들을 강제 퇴직 시켰던 것은 기업체를 살리기 위한 구조 조정 이었습니다.

언제나 이중 인격자인 문선명은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회자도 이용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가차없이 잔인하게 잘라버립니다. 1981년10월 21일부터 서울 시내 통일교 목사들의 인사 이동 문제로 목회자 전체가 모여 매일 회의를 하였습니다.

박길남 교구장은 "박준철 목사는 교회를 3번이나 개척하여 교회를 건축을 했기 때문에 반드시 부당한 인사 이동을 하지 않고 수도권 안에 위치한 부천이나 부평 교회로 발령을 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다른 목회자들도 박준철 목사는 실적을 많이 쌓았으니 그 동안의 공적을 감안해서 이번에는 억울한 일이 없도록 인사 이동을 시컥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재남 한국 협회장은 본부 교회에 주일 예배 때나 설교 때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 같은 사람도 있다고 말한 것을 들었고, 문선명에게도 노원교회의 박준철 목사 공적을 보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사이동 공문에는 약속과 신의를 져버리고 '경기교구 부' 라고 해놓고 임지교회도 없이 저를 잘라 버렸습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수 차례 만나 10시간도 넘게 대화했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김영휘 협회장과 김민중 목사는 문선명이 지방에 있는 목회자를 서울로 올리라고만 했고 서울 시내에 있는 현직 통일교 목사들은 자기 교회에 그대로 시무 하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재남 협회장은 부당한 강제 인사이동을 통해 저를 갈 곳도 없이 잘라버렸던 것입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기관 기업체에 근무하던 430가정 선배들이 너무나 큰충격을 받고 청파동 본부 교회에서 대문 밖에 프랭카드를 크게 걸고 데모를 하였습니다. 본부교회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협회 2인자인 양준기 총무국장은 무차별으로 폭행을 당하고 양준기 협회 총무국장이 병원에 입원하는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이같은 폭력,폭행 사태에 전투 경찰이 투입되어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저는 10월 20일~1982년 1월 17일까지 3개월 동안 '경기교구 부' 라는 인사 발령 때문에 제가 시무 해야 될 교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아 병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3개월을 아내와 자녀들과 같이 피눈물을 흘리며 보내야 했습니다. 통일교를 그때라도 탈출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때도 저는 통일교를 떠나면 지옥에 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통일교를 탈퇴하는 것이 죽음 그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마음의 충격을 해소할 길이 없어 산 기도도 가보고, 큰 기독교 교회도 가서 기도도 하였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움에서 벗어나려고 하여도 벗어날 수 없고 울분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문선명을 위하여 제물이 된 저는 한없는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이를 악물고 노력하였습니다. 헤아릴 수없이 많은 성초 기도를 몇 시간씩 눈물로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원리 교육으로 세뇌되어 있어서, 문선명이 메시아요, 재림주라고 믿고 충성하며 재림주를 버릴 수 없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노원 교구에 임지를 받은 사람은 정한길 목사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언제 이사를 가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갈곳이 없기 때문에 갈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목사는 교회에 취임도 하지 못하고 암으로 죽었습니다.

지옥 같은 노원 교회 대기발령 생활 3개월이 다 되어 가는 1982년 12월30일에 협회에서 가평 교회와 화성 교회(오산교회) 중 선택하여 목회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가평이나 화성(오산)은 교인이 몇 명에 불과하여 생활을 할 수 없고, 이재남 한국 협회장이 약속을 어겨서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억울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노원 교구 예배 수준과 재정 수준으로 수평 이동이라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선명의잔악상을 보면서도 그때는 문선명의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제 2 절 꿈에 나타난 문선명

 

1982년 1월 4일 밤 꿈에 문선명이 나타났습니다. 전국 통일교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하던 중에 산봉우리 5개를 보여주면서 이 산을 개발할 사람이 없느냐고 했는데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문선명이 제 앞에 오더니 "박준철! 네가 이 산 5개를 개발하라" 고 명령했습니다. "네가 임자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삽과 낫을 주었습니다.

꿈을 깬 후 생각을 해보니 산봉우리 5개는 화성(오산)이었습니다. 사명감이 충만한 목회자가 없어서 화성교회(오산교회)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목회자들이 화성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경기 교구에서도 제일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전국 통일교에서도 제일 가난한 교회 중 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이 못난 사람을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가 또 한번 꿈에 현몽을 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화성교회로 가라는 명령 인줄 알고 순종하는 맘으로 죽더라도 오산교회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오산교회로 부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9장 경기 화성 교회가 전국 통일교 최우수

 

교회로 부흥

 

제 1절 다시 일어선 교회 개척

 

1982년 1월 17일날 배신과 불신 속에서 그동안 닦아놓은 기반을 송두리째 남겨두고 어린 3남매와 처를 데리고 오산교회로 왔습니다. 그리고 1982년 2월 17일에 취임식을 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가는 목사마다 잠시 있다가 떠나버렸습니다. 오죽하면 문선명은 집회를 하면서 오산교회는 사단역사를 하는 곳이니 이름을 진산 교회로 바꿔야 한다고 할 정도엿습니다.

전임목사는 제직당시 승공 연합의 돈 1천2백 만원 때문에 오산교회 교인들과 승공 연합 회원들이 큰 시험에 들었습니다. 전임목사는 오산교회 사택에서 살지 않고 수원에서 살면서 전국을 다니며 양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 있던 목사도 교인이 얼마 되지 않고 헌금도 몇 만원에 불과하여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을 개설하여 그 수익금을 생활비로 썼는데, 이를 알게된 전도 대원 몇 사람이 협회에 올라가 목사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여 문책 인사이동을 시켜 버렸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통일교 목사들이 문선명을 재림주, 참 부모를 믿고 순종하며 목숨을 바친 죄밖에 더 있겠습니까? 저 자신도 불쌍하지만, 너무나도 처절하게 불쌍한 사람들이 통일교 목사들 입니다.

저는 경기 화성교회로 가면서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사단 마귀가 역사를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정성을 들여 빠른 시일 내에 발전을 시키겠다고 굳은 각오로 다짐했습니다. 저는 취임하는 날부터 100일 기도,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 수요예배 개설, 금요 속회예배 개설, 주일학교 개설,중고풍부 예배 개설, 전도, 심방 등을 중심으로 교회의 발전에 온 몸과 마음을 다 쏟았습니다.

노원교구 본부에 있을 때 자전거도 없이 걸어 다니면서 심방과 전도를 하며 봉사 했었습니다. 나중에 오인천 영화 출연료로 받은 2만원으로 중고 자전거 1대를 사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심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속회예배와 전도를 하니 신바람이 났습니다. 노원구 상계1 · 2 · 3 · 4동, 도봉구, 중계동, 하계동, 공릉동까지 자전거를 타고 심방 전도 활동을 했듯이 화성교회에서도 자전거를 활용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화성 관내 17개 읍 면 동에 심방 전도를 다녔습니다. 이렇게 자전거를 계속 타니 새 팬티라도 한 달이 못 가서 엉덩이 부분에 구멍이 나고 헤어져 매달 팬티를 구입해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양쪽 엉덩이에 물집이 생기고 터져서 바지까지 버리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문선명 통일 교주를 위해 매일 밤 12시까지 심방 전도를 했습니다. 새벽 I~2시가 되는 때도 허다하게 많았습니다.

문선명에게 목숨을 걸고 한국 최고의 실적과 공적을 쌓는 한국 통일 교회의 푯대가 되고자 몸부림을 치며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문선명은 집회 때마다 "나는 호랑이니 너희들은 고양이 새끼가 되지 말고 호랑이 새끼가 되어라" 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말이 그 당시에는 꿀같이 달게 느껴졌습니다. 죽더라도 뜻을 위해 죽고 문선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의를 매일 기도로써 다짐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활동을 하여 체력이 극도로 떨어지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의식 불명이 될 정도로 쓰러져 있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교인을 전도할 때나 교인을 심방 할 때면 저는 굶더라도 과자나 음료수를 사 가지고 심방을 했습니다.

화성교회에 교회 총무로 세웠던 추진복 집사가 있었는데 신앙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합동결혼식을 하고 갓난 아들 하나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습니다. 튀김집을 운영했는데 저는 매일 그 집에 가서 축복 기도를 해주며 그 날 심방할 집에 가지고 갈 튀김을 샀습니다. 그 날 심방을 하는 집이 10집이면 10봉지를 사서 자전거에 싣고 다니며 전도하고 심방을 했습니다.

저는 추진복  집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다른 가게에서 사지 않고 그 집에 가서 튀김을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사랑과 정성을 알아주기는 커녕 추진복 집사는 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추진복 집사 집에 가서 조용히 신앙적 인 교육을 시키려고 했는데 첫마디가 욕 이었습니다. 왜 욕을 하냐고 했더니, 자기 가게 식탁을 저를 향해서 밀어 버렸습니다. 그순간 오른손 약지가 식탁에 끼어 큰통증을 느꼇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고 당황하여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크게 부어 올랐습니다 즉시 병원에 가서 뼈를 수술했어야 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20일 동안을 방치했습니다. 손가락은 벌겋게 부어 올라 움직일 수 없었고 뼈까지 아팠습니다. 손가락 겉에만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습니다. 20일이 가도 손가락의 부기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조금씩 부기가 빠지고 괜찮아 졌지만 그날 다친 손가락 하나가 휘어진 채로 굳어 버렸습니다. 즉시 병원에 가서 X-ray 촬영을 하고 손가락을 고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손가락을 제대로 펼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추집사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저는 추집사가 성격 때문에 그런 것으로 알고 용서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집사는 제가 그 날 다쳐서 일생동안 손가락이 구부러진 채로 사는 것을 지금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 추집사는 집에서 닭튀김을 할때 나오는 창자를 그날 그날 모아서 개를 기르는 이건숙 집사에게 주었습니다. 이건숙 집사는 개35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한 마리에 300만원도 넘는 좋은 개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추집사가 쥐를 잡는다고 닭 창자에 쥐약을 버무려서 여러 군데 놓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무의식 중에 쥐약으로 놓았던 닭 창자를 새벽에 일어나 모아가지고 쥐약을 안 넣은 창자와 같은 그릇에 담았습니다. 그것을 몰랐던 이건숙 집사는 아침에 창자를 가져가 35마리 개에게 끓여서 먹였습니다. 그 창자를 먹었던 개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쓰러져 갔습니다. 이건숙 집사가 추진복 집사에게 무엇이 잘못 되었냐고 물었을 때 닭 창자에 쥐를 잡으려고 쥐약을 섞었다고 했습니다.

순간의 실수로 이건숙 집사의 고급 개 35마리가 죽었습니다. 그 일로 추집사는 몇 십 만원을 이건숙 집사에게 보상금으로 물어주고 튀김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 갔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제 2 절 화성 교회 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100일 기도를 마치면 2차 100일 기도, 3차 100일 기도로 숨돌릴 여유도 없이 교인들과 합심하여 기도드린 결과 1982년도에 교회가 급성장을 했고 전도 우수 교회로 협회장 상을 받았습니다. 1983년 4월과 9월에는 협회 우수 교회상을 분기별로 수상을 했습니다. 1985년도에도 전국 최우수 협회장상을 교회 우수상과 전도상 까지도 저는 받았습니다.

화성교회에서도 많은 이적기사가 있었습니다. 이준영 씨는 독자였는데 딸만 3명을 낳고 몇 년 동안 아기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다고 이준영씨에게 말했습니다. 얼마후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시어머니나 주위 사람들은 태몽이 또 딸이라고 아기를 지우려고 했습니다. 10달 동안 많은 시험과 시련이 있었지만 저의 말을 믿고 이준영씨는 아기를 지우지 않았습니다. 10달이 되어도 아기가 출생하지 못했는데 11개월이 되었을 때 마침내 건강한 아들을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 전체 앞에서 이준영 씨가 아들을 낳는다고 했는데 11개월이 지난 후 그 가정에 행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몇 대 독자인 강호길 씨도 아들을 낳은 후 통일교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종수 씨는 기독교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는데 악령이 3,000명이나 들어와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정신병원으로 갔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안수 기도도 받았지만 악령이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모든 친척과 가족들이 오산 통일교로 나오는 조건으로 악령을 물리쳐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동안에도 제가 악령을 많이 물리쳤기 때문에 그 가족들과 이종수 씨를 불러다 놓고 찬송가를 부르며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이종수씨는 교회 강대상 앞에서 기도를 받은 후 쓰러졌습니다. 한참후 이종수 씨가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오랜 악령의 시달림과 고통이 끝이 났습니다. 회사에도 복직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독실한 통일교 교인이 되었으며 친척들도 통일교에 모두 나오고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이종수 씨는 점점 더 헌신과 봉사로 충성을 다하여 화성 교회 재정 담당 총무까지 수행을 잘 했습니다.

문흥기라는 사람은 수원 빈센트 병원에서도 포기한 병자였습니다. 이제는 살 수 없다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제가 문흥기 씨를 보았을 때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고 몸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습니다. 의식이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 상태로 임종을 기다리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미 부인과 자녀들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문흥기씨만 교회에 안 나오는 상태여서 의식이 돌아 왔을 때 교회에 나을 것을 간절히 권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저는 기도를 했습니다. 문흥기 씨는 매일 고통으로 아우성 치던 사람이었지만 기도를 받은 그 날 밤에는 편안히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부터 기적같이 기력을 회복하여 걸어 다닐 수 있었고 일주일 후 건강을 회복하여 예배도 참석을 했습니다. 처음 2달은 열심히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러나 석 달째는 되는 주일부터는 일요일마다 막노동일을 나가거나, 교회를 오지 안기 위해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습니다. 저는 온갖 방법으로 문흥기 씨에게 말을 했지만 말을 듣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문흥기 씨는 석달 후 금요일 막노동을 잘 다녀오고 토요일 새벽에 이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회에서 적은 정성을 모아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 외에도 제가 가는 개척 교회마다 이적, 기사, 신유 은사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문선명 재림주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가는 곳마다 스스로 희생 재물이 되어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화성교회도 전국 최하위에서 최상위 교회로 부흥 ·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 3 절 마지막까지도 아버지께 불효

 

소년 시절에 저는 아버지같이 불쌍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결혼하면 능력 있는 남편, 능력있는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존경 받는 아버지, 사랑 받는 아버지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에 입교한 이후 영혼과 육신을 빼앗기고 언제나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처절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릴 때는 자라서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어 부모에게 효도하겠다는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제대로 부모님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통일교에 들어온 후로 단 한 번도 부모님께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잔인한 문선명의 역사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문선명은 입으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외치면서 행동으로는 자신만이 참 부모이며, 육신을 낳아준 부모는 사단의 부모라고 주장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오직 자신만을 참 부모로 섬기라고 강요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1985년 9월 24일 고인이 되셨는데 제가 너무나 불효를 하여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픔니다. 아버지는 추석 명절 직전 화성교회에 오셨습니다. 막걸리 5병을 받아놓고, 사골을 사다가 끓여 국을 만들어 나름대로 아버지를 모실 준비를 했습니다. 서울 큰아들 집에 계시는 아버지를 직접 서울까지 가서 버스로 모셔 왔습니다. 오산 버스 터미널에서 화성 통일교 까지는 IKm 거리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저는 아버지 팔을 부축을 하여 교회까지 오는데 4차례나 길바닥에 주저 앉아서 쉬었다 오고 해서 겨우 도착했습니다. 교회로 모시고 와서 식사를 대접하고 술도 드렸습니다. 저녁에 주무실때 이불을 펴 드리면서 밤에 방에 있는 술을 많이 잡수시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야, 이 놈아, 내가 술을 안 먹으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주무셨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첫 말씀이 "하동 집에 빨리 가야겠다" 였습니다. 저는 "며칠 저희 집에서 계시기로 하시고 오셨으니 편히 계십시오. 술, 고기와 여러 가지 반찬을 준비해 놓았으니 오래 계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님은 "준철아!" 하면서 "술 먹게 용돈이나 많이 달라" 고 했습니다. 아무리 가시지 말라고 말려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저는 다른 때보다 용돈을 조금 더 드렸습니다.

저는 서울로 모셔다 드렸고 아버지는 경남 하동 집에 가셔서 바로 운명을 하셨습니다. 71세로 고인이 되셨습니다. 생전에 아버지는 언제나 저에게 용돈을 많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제대로 용돈을 많이 드리지 못해 아버지께 죄송했습니다.

제가 언제나 목회를 성공하고 교회를 부흥시켜 안정이 되면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교회를 빼앗기고 처절하게 가난한 목사길을 걸었습니다 순리대로 통일교 목사 인사이동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문선명 교주의 명령 한마디에 교역자는 강제로 움직 입니다.

저는 아버님이 저희 집에 온 것이 마지막 오시는 길이고,용돈을 많이 달라는 것이 마지막 말씀인줄 알았다면 빛을 내어서라도 돈을 많이 드렸을텐데 교회가 어렵다보니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날 아버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술을 적게 잡수시라고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일생동안 저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언제나 불효자였습니다. 성공해서 부모님을 편히 모시겠다는 다짐을 한번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땅 속에 계신 아버지께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아버지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신 후 생전에 아버지 앞에 음식 한번 제대로 해 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이 아파 음식을 대할 때마다 한동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아버님께 못다 한 효도까지 합하여 어머님께 효도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목회 현실은 성공해서 교회가 안정되면 폭력적인 인사이동으로 또다시 지옥 같은 개척 교회 생활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저를 낳아준 육신의 부모는 사단의 피를 이어받은 가짜 부모라고 했습니다. 문선명만이 인류를 구원할 참부 모 재림주라고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할 경제적인 능력이나 시간이 허락되지않았으며 오직 저를 구원하신 인류의 구세주 문선명 참부모에게 그 당시에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머님께 효도하는 길마저 막아 버렸습니다. 처절한 가난한목사 생활에서 헤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광란의 부당한 인사정책으로 부모님에 효도하는 길마저 잔인하게 막아버렸습니다.

 

 

제 10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교회로다시 인사발령

 

제 1 절 통일교에 바친 목숨



경기 화성교회 목사에서 서울 노원교구 본부교회로 인사 발령을 받은 것은 1986년 5월 1일이였습니다. 만 4년 4개월만에 땀과 눈물로 발전시킨 화성교회를 떠나 서울 노원 교구 본부 교회로 재발령을 받고 5월 18일에 노원교회에 취임했습니다. 노원교구 본부교회로 부임하고 보니 제가 전에 시무할 때 있던 교인 몇 사람만 교회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10여명에 불과한 교인과 매월 14만원 정도가 총 헌금이었습니다. 목사 생활비나 활동비는 없고 10여만원 이상이나 되는 교회 운영비나 관리비도 되지 못했습니다.

저의 생활은 또다시 하루아침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이였습니다. 화성교회에서는 재적 인원 160명에 헌금은 약 200만원이 되었습니다. 통일교 내에서는 최고 A급 교회로 성장을 시킨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전도하고 교회를 부흥시킨다는 것이, 이단 교회라는 이미지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화성교회의 20분의 1도 되지 않은 서울 노원교회로 부임하고 보니 눈물 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혼자라면 밥을 먹지 않고 굶어도 라면이나 국수만 먹어도 괜찮습니다. 버스 차비가 없으면 얼마든지 걸어다닐 수 있습니다. 병이 들어도 병원에 안 갈 수도 있습니다. 가난은 인내와 극기 훈련하는 심정으로 참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라도 통일교 목회를 그만두고 통일교를 탈출 했다면 지옥에서 15년 전에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저 혼자 고통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아내나 자녀들에게 남편 잘못 만나고 ,아버지 잘못 만나 너무나도 비참하고 가난한 생활을 계속적으로 강요하는 제 자신이 정말 싫었습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 을 때는 강서교구 본부교회로 부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강서 교구는 교회를 건축한 후 헌당 예배도 못 올리고 건축 2달만에 눈물로 떠난 교회였기에 목회 생활을 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강서 교구 본부 교회로 가서 저의 슬픈 과거를 청산하고 한국 통일교에 선봉장이 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저는 서울 강서교회를 자랑스러운 통일교로 만들 자신이 있었습니다. 협회에서 강서교회로 옮겨 주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강서교구는 1963년도 합동 결혼식을 한 124가정 진철수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서울 구로교회로 가고 제가 서울 강서교회로 가기로 결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 구로교회 목사님이 떠나지 않음으로 제가 강서교회로 취임을 하지 못하고, 서울 노원 교구 본부 교회로 재취임을 하게 된 것이 었습니다.

 

제 2 절 서울 노원교회에서 3차 발전

 

1986년 5월 18일 경기 화성교회를 떠나 서울 노원교회에 취임했습니다. 배고픔, 슬픔, 아픔, 분노, 배신감을 인내로서 극복하며 숨 돌릴 틈도 없이새벽 제단에서부터 수요 예배, 300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예배, 기도,전도, 봉사, 심방을 중심으로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김 영휘 협회장님은 노원교회에서 일생동안 목회를 하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한국 최고의 교회를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1986년 5월에 부임하여 노원교회 교인들과 합심하여 밤낮 없이 목회활동을 한 결과 7개월만인 12월에는 노원교회를 교인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매일 심방과 전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을 위해 이사짐을 날라주고, 실직자를 취직시켜 주고, 신유 역사로 귀신 들린 자를 건강하게 완쾌 시켰습니다. 무엇이든지 교인들이 원하면 저는 손과 발이 되어 사명을 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86년 6월 29일 주일예배에 바쁘신 중에도 김영휘 한국 협회장과 정대화 사모님(회장)이 노원교회에 순회를 오셔서 주일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참 자녀가 되자는 설교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역대 협회장 중 ,저의 능력을 인정해 주시고 시련과 고통 당할 때마다 격려하며 희망, 용기를 주신분은 김 영휘 한국 협회장님 뿐이었습니다.

김 회장님은 저를 가장 염려하며 고통 당할 때마다 저의 억울함과 능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김 영휘 한국 협회장님은 전국 통일교 순회를 하시면서 목사들에게 서울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와 같이 최악의 조건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성공적인 목회를 해야한다고, 그것이 박목사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리석었고 바보였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이용하고 성경을 인용하여 자칭 재림주로 통일제국을 꿈꾸는 가짜 메시아를 저는 자랑하고 증거 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를 위해 통일교를 부흥시키고 발전시켜 수많은 영혼이 이단에 빠지게 하는 일에 저는 앞장섰던 것입니다.

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국 통일교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통일교에 모델이 되고자 노원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일이면 사력을 다하여 일을 했습니다.

통일교 기관, 기업체에 새로운 교인을 전도하여 취직을 시킬 때 부족한 사람들의 취직을 부탁하다 보니 커피, 식사비, 섭외비 등의 경비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직접 냈습니다. 그러면서 부장이나 이사에게 교회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하여 취직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가정의 물질적인 고통도 아내와 자식들의 마음의 고통도 외면한 채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교인들을 위해 제 전부를 다 주었습니다. 마음, 몸, 물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습니다. 처절하고 가난한 생활에도 아내나 자녀들보다 교인들을 더 사랑했기에 노원교회도 부흥되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제 11장 서울 노원 교회가한국 통일교 우수 교회로

 

협회장상 수상

 

제 1절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1986년 6월부터 1987년 6월까지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고 바쁘게 살았습니다. 교회 재정이 어려워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녀들의 교육비는 밀리기가 일수였습니다. 아내가 절약을 하고 또 절약을 하여도 가정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경기 화성교회에 내려가기 전 노원교회를 개척 할 때는 저의 자녀들이 갓난 아기였기 때문에 교육비는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커서 지출은 많고 수입은 적어 아내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도 꿀 먹은 벙어리같이 할말이 없었습니다. 결혼 전에 저의 아내는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과 같이 넉넉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에 입교하면서 부모와는 담을 쌓았습니다. 딸이 이단 교회에 다닌다고 야단을 치다가 화난 부모님에게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집을 나와 순전단 생활을 한 6개월 동안 부모님이 울면서 찾아와 애걸하며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저의 아내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통일교에 세뇌되어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 불효를 했습니다. 속담에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 떡을 얻어 먹는다' 는 말이 있듯이 부모 말을 듣지 않은 자녀는 불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수없이 많은 역경과 시련을 딛고 가난한 목사 사모로서 살아온 것에 대하여 제가 교회를 부흥시켜 안정이 되면 장인, 장모님께 효도 할 것을 누차 다짐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를 발전시키면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생활이 안정이 될 것이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1986년에는 경기 화성교회에서 백 만원 정도 생활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울 노원교회로 오니 매월 총 헌금이 10만원 남짓 이었습니다. 교인들은 많아도 새 신자이고 철거민 달동네이다 보니 다들 생활이 너무나 어려워 교회 재정도 어려웠습니다.

저는 교회를 급속도로 부흥시켜 매월 30만원의 생활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비하면 엄청나게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30만원의 생활비를 받으면 십일조 헌금, 감사헌금을 제하고 활동비로 15만원을 써야 했습니다 10만원을 가지고 저의 아내는 자녀 3명 학비, 학원비로 써야 했습니다.

1988년 1월 12일 은주와 영진이 쓴 반성문 중에는 '나는 동생과 먹는 것 때문에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다. ', '나는 누나와 먹는 것 때문에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다. ' 라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3남매를 바라보며 제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오뎅이나 떡볶이도 제대로 먹일 수 없는 현실 앞에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제 2 절 3차 교회 대지 161평을 매입

 

노원교회는 주일 예배에 늦게 오는 교인은 교회 의자에 앉을 자리가 없어 교회 밖 출입구에 서서 예배를 드려야 할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저는 1987년 1월 1일 하나님의 날 예배 때 교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3번째 교회 건축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의 모든 기도 내용이 교회건축으로 모아졌습니다.

서울의 강북 교구는 월세 교회가 13곳이나 되고 전세 교회가 11곳이 되었슬니다. 월세금, 전세금도 통일교 협회나 재단에서 지원하기가 어려운 입상이 었습니다. 그러나 노원교회는 단기간에 한국 최고의 부흥과 발전된 교회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박준철 목사가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이루는 부흥사, 단기간에 선배 목사들을 제치고 부흥 시켰다고 문선명에게 보고가 되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단독으로 수차례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인정받고 사랑 받는 것, 단독으로 찾아 뵌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건축을 목표로 1차로 교회 대지를 매입 하기로 했습니다. 하루종일 교회 대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에 살 것인가를 길을 가면서도 식사를 하면서도 온통 노원교회 대지 사는 생각만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에 교회 건축 대지 매입을 목표로 매일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협회에서 5월 19일 반 승낙이 떨어졌습니다. 5월 27일부터 6월 8일까지 1차 릴레이금식을 실시했습니다.

6월 5일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한 김영휘 협회장에게 노원교회 교회 대지 등본 지적도, 도시계획원 등 여러가지 서류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건축에 적절한 3곳을 선정하여 서류를 갖추어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무려 8차례나 문선명에게 "박준철 목사가 그렇게 사명감이 철저하고 가는 곳마다 통일교 목사들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능력이 있는 목회자라면 노원교회 교회 대지를 사 주어야겠구만"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한남동 유엔 빌리지 문선명 저택에 가서 직접 노원교회 교회대지를 사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6월 5일 서울 강북 1교구 책임자로 있는 임순도 교구장에게 밤12시 30분까지 말씀을 드리고 집에 오니 새벽 2시가 되었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바늘 방석이요, 초조하고 긴장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떨리는 순간 이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제가 교회 건축을 하여 한 단계 더 크게 발전하느냐, 현재에 그대로 머무르느냐 하는 순간 이었습니다.

6월 6일 서울 강북 교구 총 책임자로 계시는 임순도 교구장 내외분이 상계동에 오셔서 교회 대지로 매입 할 수 있는 몇 곳의 땅을 보았습니다. 6월7일 김영휘 한국 협회장과 임순도 교구장이 문선명에게 박준철의 과거 실적과 사명감, 현재 교회 발전을 1년만에 10배로 발전시킨 것을 간절히 보고를 드렸습니다.

6월 8일 김영휘 회장이 문선명에게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해야 한다고 또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물의 날 행사장에서도 잠시 시간을 내어 노원교회 교회 대지 문제를 김영휘 회장께 말씀 드렸습니다. 6월 12일 협회에 가서 김영휘 회장을 만나 노원교회 교회 대지 매입 문제로 눈물어린 심정으로 또 부탁을 했습니다.

6월 13일 문선명 교주는 노원교회에 161평의 교회 대지를 사라고 2억 2천만원에 싸인을 해주었습니다. 문선명이 2억 2천만 원에 싸인한 것은 통일교 재단 본부의 결정이 아닙니다. 저를 한국 최고의 통일교 부흥사로 인정하고 특별히 문선명이 돈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교회 건축비는 노원교회를 매매하여 마련했습니다 저는 교통과 모든 시설을 감안하여 노원 전철역 옆에 교회대지를 매입했습니다. 저의 꿈에 여러 교회 대지 중상계 2동 380번지 1호 땅을 사라고 땅 모양까지 보였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대지 매입 결재가 결정 났다는 김 영휘 회장의 전화로 듣고 만사를 제치고 버스, 지하철을 타고 청파동 통일교 협회 사무실과 본·곁 교회까지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김영휘 회장께 감사를 드리면서 죽도록 충성하여 노원교회를 발전시켜 넘치는 노원교회로 만들 것을 약속 드렸습니다.

역사적으로 서울 노원 전철역 옆 380번지에 교회대지를 매입했습니다. 교회 대지 계약금, 중도금, 잔금은 협회와 재단에서 직접 땅 주인과 만나 제가 있는 자리에서 전달을 했습니다. 상계 3동 140번지 4거리 코너 통일 교회는 주위의 부동산에 팔기 위해서 매물로 내어 놓았습니다.

1979년 5월에 처음 노원교회를 지을 때는 총 1천 6백 10만원이 들어갔는데 7천 2백 만원을 받고 팔았습니다. 교회 위치가 좋아 높은 가격에 팔게 되었습니다. 노원교회 매매 대금은 계약금, 중도금, 잔금을 협회와 재단에서 담당자가 와서 돈을 받아 갔습니다. 통일 교회는 교회의 대지 매매, 모든 서류나 부동산 처리는 목사들이 하지만 교회대지를 사고 팔 때 일절 돈을 만지지 않고 협회와 재단에서 전국 통일교 재산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1987년 6월에 교회대지를 매입한 후 노원교회 교인들과 합심하여 연말까지 교회 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12장 서울 노원교회 교회 건축

 

제 1 절 1988년도 교회 건축 목표

 

1988년 노원교회 목표를 교회 건축의 해로 결정하고 1월 1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철야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1월 1일부터 4월 10일까지 교회 건축을 위한 1차 100일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를 드리기로 결정하고 시행을 했습니다.

저는 1월 1일 오전 9시에 문선명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문선명 말이 '꿀같이 달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통일교 원리 교육으로 무장되고 세뇌되어 있기에 그렇게 많은 고통과 배신과 속임을 당했으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재림주 참 부모님 이라고 증거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통일교 원리 강의를 했습니다. 1월 1일부터 쉬지 않고 전도, 심방을 했습니다. 다른 목회자들은 연휴라고 쉬지만 저는 매년 새해의 첫 시간, 첫 날, 첫달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정성을 드렸습니다.

제 자신이 교회 건축에 미쳐 있었습니다. 협회와 재단을 매일 찾아가서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빨리 해달라고 간절히 말씀 드렸습니다. 초조하고 안타까움만 나날이 더하여 갔습니다.

1988년 5월 1일 통일교 협회 창립 기념일에 노원교회가 전국 통일로 우수 교회 협회장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저는 1년 안에 12명 이상 전도한 목사나 교인들에게 주는 전도상과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을 받았습니다. 제게 상금으로 20만원과 구두 티켓 한 장을 주었습니댜. 그 돈으로 주일날 음식을 장만하여 교인들과 같이 먹었습니다.

1988년 5월 2일 월요일에 한남동 문선명 저택을 방문하였습니다. 새벽기도 후, 문선명에게 선물을 하려고 경동 시장에 가서 최고 품질의 바나나 한 상자와 참외 한 상자를 샀습니다 택시에 싣고 한남동 문선명 저택에 도착 하였습니다. 김영휘 협회장과 사모님이 계셔서 선물을 드리고 문선명에게 교회 건축 문제를 말씀 드리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김영휘 협회장께도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말씀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 답변이 문선명의 승인이 안 나와서 교회 건축 공사를 못 한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를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문선명이 일화제약에 갔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은 결판을 내야겠다는 심정으로 수택리에 있던 일화제약으로 달려갔습니다. 일화제약 건물 옥상에서 문선명 참 부모가 통일교 기업체 사장들과 같이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앞에 나아가 땅바닥에 머리를 대고 경배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문선명 통일 교주는 저를 보시더니 "너 여기 어찌 왔어? 어떻게 왔나?"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수많은 통일교 목사들 중에 저의 얼굴을 문선명이 알아 주어서 감격했습니다. 문선명이 제 얼굴을 알아준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문제를 눈물로 호소하고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문선명은 교회 건축을 그 자리에서 허락하셨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에게는 먼저 교회 건축 공사를 시작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상계 3동 140번지 노원교회 매매 대금으로 빨리 공사를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김영휘 회장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으로부터 빠른 시 일 내에 교회 건축 공사를 할 것을 약속 받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제 2 절 국회의원 당선에 관여한 통일교

 

문선명 통일교 명령과 지시로 전국 통일교에서 국회의원 후보들을 지원하여 당선시킨 국회의원들을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 집결 시켜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당선사례 감사 인사를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국회의원 후보에게 서명 날인을 받은 후 맥콜 2백 박스를 지원하고 제가 있는 통일교 조직 전체를 가동하여 인적인 지원도 해주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지원했던 그 국회의원 후보는 400여표의 근소한 차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교에서 지원 받아 당선한 국회의원들을 모아놓고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서 2박 3일동안 통일교 원리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지원으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문선명 교주에게 복종해야 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공갈 협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통일교 입당 원서를 쓰고 문선명 교주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문선명 통일교를 지지하고 찬동한다는 국회의원들은 문선명의 노예인 것입니다. 국회의원 후보 중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충성하겠다는 싸인을 한 국회의원후보를 경제적인 지원, 물질적 지원, 인원 동원 지원을 하여 저도 중진급 국회의원을 당선시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중진급  K 국회의원을 만나 문선명 교주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2박 3일 통일교 원리 교육을 받을 것을 간절히 말씀을 드려서 5월 5일 문선명 교주에게 감사 인사 갈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5월 5일 오후 2시에 K당 중앙 당사에 도착하여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기다렸습니다. 국회의원 비서관이 메모지를 저에게 전해 주었는데 국회의원은 총재와 조직 인사관계로 회의 중이기 때문에 문선명에게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K 국회의원이 충주 수안보 통일교 호텔인 와이키키 호텔에 가서 문선명에게 인사도 드리고 2박 3일 통일교 원리 수련을 받고 와야 한다고 설득을 시켰습니다. 비서관이 30분을 여러 곳에 연락을 한 결과 청량리 맘모스 호텔에서 K 총재와 인사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잠시 K국회의원을 호텔에서 내려오시라고 하여 K국회의원의 그랜저로 청주 수안보 와이키키 관광호텔까지 2시간만에 갔습니다. 저는 차안에서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위대성, 재림주라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K국회의원은 자신의 업무가 바쁘기 때문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가서 인사만 드리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충주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 도착하니 문선명교주가 도착전이라 곽정환회장, 유종영 회장, 권혁서 교구장에게만 인사를 시켜 드렸습니다. 제가 호텔에 갔을 때 통일교 지원 받은 여야 국회의원 당선자 35명이 2박 3일 통일교 원리 교육을 받기 위해 도착해 있었습니다. 여러 국회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저는 K국회의원과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인사를 드린 후에 그 길로 충주에서 서울 노원교회까지 도착하니 밤 12시 30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위해 사회의 고위층인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인사 시켰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K 국회의원에게 돌아 오면서도 2시간 동안 통일교 원리교육을 하였습니다. K 국회의원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박준철 목사가 제일 끈질긴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K국회의원이 도움을 받았으니 문선명에게 인사를 왔다고 하였지만 K국회의원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붉은 유혹에 말려들고 문선명의 정치적인 야심에 K국회의원은 이용 당했을 뿐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정치적인 야망과 정권 쟁취를 위해 통일당을 창당하고 국회의원을 포섭하여 통일교 교세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차후에 통일교 문선명 교주에게 관련된 사이비 정치 인, 종교인들은 정치 일선에서 낙선운동을 하여 낙선을 시컥 다시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 앞잡이 노릇을 못하게 1200만 기독교 교인은 철저히 막아야 할 것입니다.

 

제 3 절 노원교회 역사적 교회 건축 기공식
 

1988년 5월 6일 금요일 아침 7시부터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노원교회는 제가 철거민 달동네에서 먼지만 일으키는 허허벌판인 상계동 지역에 작은 방안에서부터 몇몇 통일교 교인들과 예배를 시작했던 곳이었습니다. 이제 3번째 노원 교구 본부 교회 건축 기공식을 한다니 감개가 무량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70년 된 낡은 집을 허무는데, 집 무너지는 소리가 폭탄 떨어지는 소리같이 컸습니다. 흙으로 된 집이라 무너질 때마다 흙먼지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물을 뿌려도 주위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가득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이단 교회를 짓는다는 소문이 교회 주위에 퍼져나가 주위 사람들이 데모를 하였습니다 교회의 옆에 집들이 시기하고 질투하여 항의를 하고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저는 집을 허물기전에 선물을 사서 집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래도 항의와 시비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바로 옆집에 살던 전과범은 알코을 중독자였는데 매일 수시로 와서 의도적으로 공사를 방해하였습니다. 대낮에 술을 먹고는 낫, 망치를 가지고 와서 공사를 집요하게 방해하였습니다. 수시로 술도 사 먹이고 담배도사 주고 용돈도 주었습니다. 때로는 강하게 말을 해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의 방해는 노원교회 교회완공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술만 먹으면 저를 가슴 아프게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를 짓기 전에 집이 폐허나 다름이 없는 집들이라 아이들이나 동네 불량 청소년들의 놀이 장소로 사용되어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밤중에도 사고가 없는지 와서 돌아보고 가슴을 졸이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집을 다 허물고 나니 속이 후련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4시에 통일 재단 김명운 부장으로부터 공사 중단하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의 지시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동안 통일교에서 목사 생활을 하면서 많은 충격을 받아 단련이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가슴이 철렁하였습니다. 저는 즉시 김영휘 협회장을 찾아가 간절히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호소하여 "다시 내일부터 공사 재개 할수 있게 해달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재단에서 공사재개를 시켜주었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 마치면 아침 식사 전부터 교회 건축 공사 현장에 가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오후에도 전력을 다하여 교회 건축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건축 공사는 통일교 회사인 일성 종합 건설회사에서 공사를 하였습니다.

1988년 5월 10일에는 대지 경계선 때문에 시비가 벌어져 주위 집주인들을 모시고 재 측량을 하였고 점심을 후하게 대접해 드렸습니다. 오후에는 주위의 아주머니와 주민들이 통일교 건축 중단하라고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습니다.

5월 30일에는 정득천 상계 2동 민정당 지도장을 만났습니다. 노원교회 주위에 200명 주민들이 통일교 교회 건축 반대 운동 서명해 놓은 것을 수습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청, 경찰서, 소방서, 동사무실, 파출소, 지역 주민들까지 수습을 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저는 노력하였고 잘 해결이 되었습니다. 저는 통장, 반장 주위에 큰 소리 치는 사람까지 다 접대하고 밤 11시가 넘어 교회에 왔습니다.

저는 노인회 등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하는데 인사해야 될 곳은 정성을 모아 조금씩 성의를 표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하는데 왜 이리시비가 많고 모셔야 될 어른이 많은지, 그 전에도 몇 차례 교회 건축을 하면서 느꼈지만 특별히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주위의 반대와 시위 때문에 수습하느라 교회 건축을 완료 할 때까지 너무나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면 교회 건축을 하는데 가서 기도회를 하고 나무 정리,목재 정리, 철근 정리 등 매일 교회 건축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보를 만들고 심방을 하고 속회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국민연합, 승공 연합지부장을 만나 행사를 준비하는 등 1인 5역도 넘는 일을 매일 해 나갔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장을 잠시도 비워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1988년 5월 18일에는 지하공간을 흙으로 메우기 위하여 덤프트럭을 기다리다 잠깐 3동 에 있는 교회에 다녀왔습니다. 그 사이 15톤 덤프 트럭이 와서 지하실 바닥에 새까만 흙이 려인 것을 바닥에 붓고 가버렸습니다. 흙에서 땀새도 나고 하여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교회건축을 하면서 저는 깨끗하고 좋은 자재를 써서 최고의 아름다운 교회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콘크리트 친 공간에 악취가 나는 썩은 검은 흙을 메웠다는 생각을 평생 동안 하고싶지 않았기 때문에 공사를 지연시켰습니다.

오후에 상계동 전체 건축 공사장을 다 다녀 장복 건설 공사장에서 포크레인을 5만원을 주고 빌려 왔습니다. 트럭 2대를 3만원에 빌려서 포크레인으로 썩은 흙을 다 거두어 내어 깨끗한 흙으로 지하실 공간을 매웠습니다. 그땐 정말 속이 시원하고 기뻤습니다. 목수들이나 철근, 콘크리트, 벽돌 기술자들에게 내 집을 짓는다는 주인 정신을 가지고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6월 7일은 2층 철근 구조물을 제작 하였습니다. 저는 교회 건축에 새벽부터 밤까지 매달렸습니다.

저는 서울 시내 선배목사들의 부러움 속에서 노원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해 교회 건축을 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고난 중에도 감사했습니다. 저에게 일성 종합건설회사 현장소장 성하준 씨는 "목사님이 이렇게 철저한 사명감과 주인정신을 가지고 교회 건축공사를 하기 때문에 노원교회가 발전되고, 튼튼한 교회를 건축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장 소장이나 공사장 인부들이 저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 후 100년을 내다보았습니다. 제가 욕을 얻어먹더라도 튼튼한 교회를 건축하려고 교회 건축을 철저하게 관리, 감독을 하였습니다.

 

1988년 6월 22일 김영휘 회장과 정대화 사모가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장을 점검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김영휘 회장은 한국 통일교 협회장을 2회 째 맡고 있었습니다. 김영휘 회장님께 노원교회 교회 건축 설계도가 협회와 재단에서 잘못 설계되어 하나에서부터 백까지를 바르게 고치다 보니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에서 노원교회 교회 건축 설계 잘못으로 수십 차례 뜯어 고쳐야 했습니다.

김영휘 회장님과 교회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하실 뚜껑을 덮지 않으면 비가 올 때 비가 바로 지하실로 들어간다고 지하실 뚜껑을 해 달라고 하였고 물탱크, 안방, 벽돌도 적 벽돌로 공사를 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옥상에도 루핑을 깔고 검은 기와로 끝내는 것을 좀더 아름답게 구운기와로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담장도 앞면에 미관상 좋지 않은 시멘트로 만든 큰벽돌을 쌓는 것이 설계였는데 붉은 벽돌로 설계 변경을 하였고 대문도 없는 것을 만들었고 사택 올라가는 계단도 시멘트 계단이었는데 고급 계단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 외벽에도 페인트칠 대신 붉은 벽돌로 설계 변경을하였습니다.

한가지 한가지를 설계 변경 할 때마다 언쟁이 벌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협회 본부 간부들과 재단 간부들도 저보고 적당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이 저의 건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는 저의 집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저는 2급 장애를 갖고서도 사지가 멀정한 439곳의 통일교 목사들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여 노원교회를 전국 우수 교회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건강한 목사들보다 10배, 100배의 고통과 서러움, 외로움, 아픔을 갖고서도 저는 문선명에게 세뇌되어 교회를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어떤 통일교 목사들도 노원 통일교 교인들도 제 사정과 제 심정을 모를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온 신경을 저의 팔에 두고있기 때문에 항상 행동을 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의 장애를 모르고 있습니다. 같은 통일교 목사들이 회의할 때나 공석 · 사석에서 반갑다고 갑자기 제 팔을 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왼 팔에 소대를 두툼하게 넣어 오른팔과 같이 크기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저는 목회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해수욕장과 야외 풀장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일생동안 여름에 짧은 소매 옷을 입지 못하고 긴 팔옷만 입고 살면서 여름에는 긴팔 긴옷으로 인해 온몸에 땀띠와 전쟁을 하며 살았습니다. 목사들과 교인들이 "왜 짧은 소매 옷을 입지 않느냐?" 고 물을 태마다 저는 "습관이 되어서 괜찮습니다. "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처럼 단 한 번만이라도 해수욕도 하고 짧은 소매 옷을 입어보는것이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모든 것을 제 운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전국 통일교 모든 합동 결혼식을 한 부인들에게 고향으로 가서 전도를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내는 고향으로 옷 보따리를 싸가지고 전도하러 내려갔습니다 전국 통일교 모든 목사 부인들과 합동 결혼식 한 가정의 부인들은 남편과 자식들, 직장,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전도하러 갔습니다.

통일교는 지금까지 매년 여름에 40일 하계 전도기간이 있습니다. 그 해에는 6월 7일부터 8월 30일까지 약 3개월 동안부부가 헤어져 살아야했습니다.

모든 통일교 교인은 전도 기간에 전도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합동 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 가정은 하루 아침에 홀아비가 되어 자녀들과 같이 생활해야 했습니다. 저 혼자서 초등학교 5학년인은주, 3학년인 영진, 1학년인 은영 3남매 학교 보내는 일,빨래하는 일,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새벽 기도 후에 교회 건축 현장에 가서 어떤 사고가 없는지 돌아보고 기도 후 자전거를 타고 교회에 돌아와 부지런히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고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매일 국제 승공연합, 국민 연합의 조직 관리, 접대, 행사 동원, 세미나,전도 심방 등 저의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가쁜 나날이었습니다. 어느 때는 정신이 없고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주위의 통일교 선배 목사들이 제가 통일교 최고의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 하니 시기를 해도 저는 참아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모든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에게 가정의 행복과 사랑, 자녀교육, 생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가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은 말이 고향이지, 일생동안 통일교에 들어와 처절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였는데 무슨 돈이 있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고향으로 이사를 갈 수 있겠습니까?

통일교 목사와 합동 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자기 고향에 가서 문선명 교주가 참 부모요, 메시아 재림 주라고 증거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할 때 저는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성공을 하고 출세를 해야 고향 생각이 나고, 여유가 있어야 부모 형제들도 찾아 뵙고 여러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게 됩니다.

통일교에서는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주일 예배 한명에 몇 점, 새벽기도 한명에 몇 점, 전도 한명에 몇 점, 수련 한명에 몇 점, 교회 헌금에 몇 점, 통일교 합동 결혼식 하는 미혼 남녀 한명 전도에 몇 점 이렇게 점수제로 하여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미혼 남자한명 전도하는데 10만원을 지불하고 미혼 여자 한명을 전도하는데 15만원을 지불하고 이렇게 전국에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매월 평가제로 지금까지 교회의 등급을 매겼습니다. 이렇게 잔인하고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통일교 목회자의 길이며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교인의 길입니다.

통일교는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입니다. 각종 행사에 이용되고 그 행사를 위하여 끊임 없이 봉사하며 재산을 투자해야 되는 악순환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액 재산을 바쳐야 되는 통일교 교인들은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든 지경입니다. 저도 그런 통일교 문선명 교주를 만나 일생을 세뇌 되고 마취되어 청춘도 건강도 전부 빼앗겼습니다.

 

제 4 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상량식

 

1988년 6월 28일 상량식을 올리기 위하여 통일 민주당 청원군 위원장인 박동인씨에게 상량판을 받아 노량진 박동화씨에게 갔습니다. 상량판에는 붓글씨로 조국통일 선봉장 박준철 천지인 삼강 입주 상량이라고 썼습니다. 저는 교회로 돌아와 성염(소금)으로 성별을 하고 노원교회 상량식 봉헌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진을 찍고 음식을 교회 주위에 집집마다 돌렸습니다. 그동안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1988년 7월 3일에는 통일교 협회 문화부에서 노원교회 부흥과 발전을 취재하고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취재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매월 통일교에서 발행되는 통일세계에 노원교회 기사를 대서특필하기 위하여 유창수 기자가 와서 사진도 찍고 좌담회를 취재하였습니다. 이 기사가 1988년 7월달 통일 세계에 한국 통일교 부흥과 성장교회 탐방이라는 제목을 가지고"내일의 승리를 위해 도약하는 상계교회" 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특집 기사에 저 한 사람의 희생과 봉사로 문선명 통일 교주에게 충성하고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등불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발전한 소식을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알려서 조금이나마 자극제가 되어 전국의 통일교가 발전 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때로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개척하여 부흥을 시켰더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랬다면 점점 대도시나 서울로 와서 통일교식 승진을 하였을 것이고 승승장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일 후배 목사로써 지방중소 도시도 아린 대도시도 아닌 서울 교구에서 개척을 하여 성공을 하다보니 언제나 선배를 위해 강제로 부당한 인사이동을 수 차례나 당하였던 것입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서울 교구에서 기적의 개척과 발전, 부흥, 교회건축을 반복하며 상처받고 폭행을 당한 것은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과의 정과 관계를 끊어가는 과정이였습니다. 저는 박대 받고 부당한 인사 이동을 당하며 세뇌에서 점차 깨어나 탈퇴하라는 하나님의 뜻 이었습니다.

 

제 5 절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당한 폭력과 폭행
 

저보다 직급이 높은 공릉교회에 김수정 목사가 있었는데 저보다 직급이 높은 선배 목사였지만 교회는 2층 30평 전세 교회였습니다. 교인이나 예배헌금이 노원교회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김목사는 회의를 하면서 때로는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1988년 8월 30일 공릉교회 월말 목회자 회의중에 김수정 목사에게 회의 때 연락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김목사는 저에게 욕설을 하고 폭행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제가 잠시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떠나 심방 하는 사이에 다른 목사들을 데리고 와서 노원교회를 자기 교회로 할 것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 건축을 해 놓으면 선배 목사들이 빼앗았는데 또 저의 노원교회를 빼앗느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새끼!뭐 이런 새끼가 있어?너 한 번 맞아볼래? " 하면서 뺨을 때리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승창 목사와 여동석 목사가 저를 뒤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김목사는 저를 무차별하게 폭행을 하여 허리를 다치고 가슴을 얻어맞아 입술이 터지고 코피를 흘렸습니다. 저는 한 달 반 동안 온몸이 결리고 허리와 가슴이 아파서 몸을 지탱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회의석상에서 폭행을 당하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매스컴에 날까봐 병원에 입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놓고 협회의 김영휘 회장님과 김승철 국장, 각과의 국장단을 모시고 김수정 목사를 인사 위원회에 세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김목사의 양쪽 말을 듣고 결정을 하시라고 하였습니다. 양쪽 목사 말을 듣고 문책 인사 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목사는 문책 인사를 당한다면서 전세 교회가 아닌 강남의 큰 교회로 인사이동이 되었습니다. 남 잘리는 것을 배 아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여 폭행하는 목사를 예배와 교인이 많고 헌금이 많은 큰 교회로 승진 인사를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목회를 성공하고 능력이 많아도 제게 돌아오는 것은 지옥과 같은 목회 길뿐이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이 교회 건축헌금을 다해도 철거민 지역이라 몇 백만원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헌금을 제일 많이 한 통일교 교인이 50만원 정도였습니다 장로는 20만원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는 문선명까지 층층시하 어른이고 이 눈치 저 눈치 봐야 되는 입장입니다. 교회 목사라 할지라도 합동 결혼식 한 서열 순서대로 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나 대우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에 따라 교인이 어느 날 갑자기 목사로 임명을 받는 때도 있고 명령에따라 목사직을 박탈 당하고 교인이 되어 통일교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교인은 구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 목사들은 통일교를 한꺼번에 50명~100명이 그만두고 떠나는 일이 많습니다.

모든 통일교 목사들은 일회용 목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많은 문제가 돌발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매일 매일 협회 지시에 숨이 막힐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 끝까지 차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건축을 하면서 내외적으로 영적인 싸움과 함께 교회긴축 공사 과정이 하나하나 진행될 때 전투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성하준 소장은 설계대로 한가지 한가지를 건축해 가야 하는데 건축을 잘 못하였습니다.

잦은 변경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재단 본부의 설계 잘못으로 모든 일을 현장에서 고쳐나가려다보니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습니다. 제가 협회나 재단에서 노원교회 교회건축을 하는 대로 두었더라면 교회건물은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하준 소장은 성실하게 일을 잘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재단과 협회는 노원교회 목사인 저를 불러서 설계 도면을 만들었더라면 자재를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많은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와도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나이, 같이 합동 결혼식을 올린 통일교 협회 총무부장인 박석균은 저에게 "노원교회가 네 집이가?그만좀 해라. 적당히 좀 해라." 며 김승철 총무국장 앞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주인정신 없는 박 부장이나 재단 본부 김명운 부장 등에게 온갖 모욕과 무시를 당하며 피눈물로 노원교회를 건축해나갔습니다.

 

제 5 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준공을 완료
 

1988년 9월 29일 제3차 노원교회 건축 이전예배를 드렸습니다.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코너 노원통일교 시대를 마감하고 상계 2동 380번지 1호의 노원교회로 이사짐을 실어다 날랐습니다. 새벽에 문선명 사진을 모시고 정중히 새로운 교회까지 걸어왔습니다.

교회 대문, 3층 교회, 2층 사무실, 교회 사택, 1층 사무실, 식당, 방, 지하1층 방, 강당, 보일러 기계실 등 교회 전체를 성염(소금)으로 사단을 물리치는 성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무당이 하는 의식을 통일교에서는 하고 있기 때문에 저도 그때는 그 의식대로 소금으로 새로 건축한 교회 전체에 성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새로 건축한노원교회에 이사하는 날 떡 다섯 말을 하여 동사무실,파출소. 이웃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 반대 운동을산 900여명의 서명 날인을 한 집에도 떡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1988년 10월 10일 교회 대지 161평에 건물 554평, 지하 1층, 지상 3층 교회를 준공하였습니다. 한국 통일교 중 최고로 아름다운 교회로 교회 건축을 하였습니다. 12월 달에는 통일 세계에 표지 모델로 실렸습니다. 지금까지 통일 세계에 표지 모델은 문선명씨 사진이나 통일교 행사 사진 등 이었는데 통일교 30년 역사에 처음으로 노원교회가 표지 모델이 되었던 것입니 다. 그 동안에 저는 장인 장모님에게 효도 한 번을 하지 못하고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서울 박 서방이 노원교회를 개척하여 노원교회에서 3번째 교회 건축을 하고 이사를 했다" 고 울산에서 축하를 하기 위하여 올라 오셨습니다. 그리고 방에 가구가 너무 없다며 2층 절반 40평이 사택이었는데 거기에 장롱, 식탁, 가구 등을 2백만원의 거금을 들여 장만해 주셨습니다.

 

 

제 13장 통일교 아름다운 교회 헌당식

 

제 1 절 노원교회 3차 교회 건축 헌당식
 

1988년 11월 20일 노원교회에서 역사적 헌당식을 올렸습니다. 한국 통일교 김 영휘 회장님과 정대화 사모님 이 참석하셔서 격려사와 축도를 해 주셨고,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 이상덕 전도국장, 심평근 국장, 권혁서 제 1교구장, 김명대 제 4교구장, 김원종 목사 내외분 등 저의 친목회 목사들,서울 시내 선배 목사들이 참석하고 제가 목사로 있었던 경기화 성교회 교인들이 많이 참석하여 노원교회 예배 교회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축하예배 교인들로 가득 찼습니다. 헌당식에는 250명이 넘는 교인들이 와서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이 날을 위하여 살아온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모 당의 원내 총무였던 분이 대형 축하 거울도 기증을 하였습니다. 곽정환 세계일보사장, 문승룡 재단이사장 등 많은 전국의 통일 그룹기관 기업체 사장단의 이름으로 축하 화한과 축전을 엄청나게 보내 왔습니다. 저는 부족한 제 자신이 이렇게 통일교의 대표적인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했다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날 하루만큼은 외로운 마음, 배신감, 배고픔도 없이 꿈꾸는 심정 이었습니다.

'노원교회는 저의 피눈물의 교회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노력과 기적의 교회입니다. 저는 목숨을 걸고 한국 최고의 실적과 공적을 가지고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인정을 받아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완공시킨 것입니다. 이제 저의 책임은 노원교회를 교회가 가득 찰 정도로 넘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나깨나 교회 발전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드리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 중에 통일교 교인들 가운데 5명에게 상계전철역 앞 벽산아파트 딱지를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딱지는 무허가 건물 4평, 8평 짜리로 30평 짜리나 25평 짜리 아파트 입주권 이였습니다. 조건은 노원교회 발전을 위해서 충성하고 저의 손발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참부모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교회를 만드는데 모든 것을 앞장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고 충성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너무나 큰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풀었습니다.

 

제 2 절 베풀어 준 은혜와 축복을 배반으로 갚은 사람들
 

저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진심을 다해 도와주고도 뺨을 맞는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제 목숨보다도 더 아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을 제 아내나 자녀들보다도 더 아끼고 제 모든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반이라는 이름으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천국 백성이라는 통일교 교인이라는 이름을 갖고도 자기 목사에게 가슴속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단 말입니까? 은혜 뒤에 시련이 있다는 것을 통일교 목사 생활을 통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겪었습니다.

저는 노원 통일교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통일교에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통일교 한국협회 김승철 총무국장에게도 상계 전철역 앞 벽산아파트 30평짜리 무허가 건물 딱지를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김승철은 1962년도 문선명 통일 교주로부터 72쌍 합동 결혼식을 한 대 선배였습니다. 교구장도하고 협회의 이인자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북교회로 나가는 김승철 국장에게 문선명 참 부모님의 한을 풀어 드리자고 말씀드리고 저의 손발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노원교회 건축도 하고 교회를부흥시켜야 될 책임과 사명이 있는데 김승철이 와서 노원교회 어린 교인들을 잘 교육시키고 이끌고 가는 신앙자가 되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노원교회에 사랑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간절히 부탁 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아파트를 사게 해 주어 이사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박주성 집사에게도 벽산 아파트 딱지를 사주었습니다. 후일 아파트가 완공되어 입주를 하였고노원교회로 김승철 국장부부와 박주성 집사부부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3명 중 2명은 노원교회 발전을 위해 제가 부동산 소개업소 역할까지 하며 아파트를 살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돈만 벌고 이사도 오지 않고 노원교회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 분은 저에게 아파트를 팔아 감사하다고 100만원을 저에게 주었지만 그 100만원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분은 저를 격려해 주시고 희망과 용기를 주시며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 항상 저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분 이었습나다. 저는 말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100만원을 끝까지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노원교회에 있으면서 생애에 최고의 실수를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김승철 국장에게 아파트까지 살 수 있게 해주며 실질적인 돈을 벌게 해주었습니다. 문선명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노원교회에 충성을 해달라고 김승철 통일교 협회 총무국장을 성북구 종암동에서 데리고 온 것이 화근이 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자기보다 합동 결혼식을 한 서열순위가 아래인 목사에게는 잘 순종하지 않고 받들지 않습니다. 제가 김승철 국장보다 13년 늦게 합동 결혼식을 한 후배이다 보니 김승철 국장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노원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방해하며 반대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노원교회 목사 노릇까지 다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목사인 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제가 추진하고자 하는 교회 일을 거부하며 불신하였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교회를 불신하는 문성숙 집사, 제가 아파트를 사 주었던 박주성 집사, 제가 40일을 통일교 원리강의를 하며 사랑으로 교육했던 고귀숙 집사 등을 끌어들여 저를 배신하게 했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불신의 주모자가 되어 노원교회에 오지 않고 아파트에서 불신하는 5명과 일요일 대예배를 드렸습니다. 저와 심정 일체가 되어 충성하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어린 교인들을 사랑으로 바르게 신앙교육을 하지 않고 불신의 주모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받게 하고 해주었지만 은혜를 배반하고 노원교회 발전과 부흥을 가로막는 역적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김승철 총무 국장은 문선명 겹사돈인 홍성표 협회장(현재 문선명 통일교 교주와 원수가 되어 자녀들이 이혼하고 통일교를 탈퇴함), 재단 이사장 결재도 받지 않고 4천 만원을 협회에서 불법으로 가져와 2층을 전세 내었습니다. 제가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 직접 4천 만원이 홍성표 협회장 결재를 받은돈인가 물어 보았으나 결재한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그곳에서 목사 노릇을 하고 은혜를 배반한 통일교 교인을 끌어 모아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김승철 국장은 불법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에 교회를 폐쇄하고 돈을 협회에 반납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의 70세 고희기념 잔치를 하라고 전국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에게 지시 하였습니다. 전국 시 ·군 ·구·면 ·동 통일교에서 교인들이 헌금을 하여 지역에 국민연합, 승공연합 노인들을 모아놓고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 부모로 증거하라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47년동안 교회각종 행사와 헌금 강요로 처절한 가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상계1동부터 10동까지 노원교회 교인들을 각 동에 한명씩 구역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동~상계10동까지 문선명 참 부모 칠순 잔치를 승공연합, 국민 연합 회원을 모셨습니다. 그 동에 사는 통일교 구역장과 교인들이 돈을 내어 잔치를 해 드린 것입니다 잔치를 다 하고 김승철 국장이 책임 지고 있는 상계 5동만 문선명 잔치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협회에 갔다가 김승철 총무국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전국 통일교에 목사들과 교인들을 진두 지휘하는 사람이 총무국장이고 다른 구역장들은 잔치 다 했으니 문선명 잔치할 돈 10만원을 내달라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왜 어려운데 돈을 걷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총무국장이 전국 통일교에 문선명 참부모 잔치하라고 통일교 목사들에게 명령 해놓고, 그런 말씀을 하면은 어떻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문선명 교주 칠순 잔치 때 자기 교회에 잔치하라고 50만원, 100만원 헌금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은 한국 통일교 이인자 자리에 있으면서 돈 10만원이 아까워서 저에게 야단을 쳤던 것입니다. 그 이후 김승철 국장은 문선명 고희잔치 돈을 내지 않고 간단하게 과일, 떡을 마련하여 잔치를 끝냈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전국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온갖 명령과 지시를 합니다.

김승철 국장은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100일 새벽 제단 기도를 하시오. 40일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하시오. 전도하시오." 등의 명령을 하였지만 김 국장은 노원교회와 100m도 안 되는 거리에 살면서 새벽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도 드리지 않고 아들이 군대에 갔다고 면회 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전도도 하지 않았고 십일조 생활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참으로 김승철 국장을 노원교회로 오게 한 것을 후회하였지만 그것은 때늦은 후회였습니다.

 

 

제 14장 노원교회를 찿은 문선명

 

제 1절 자칭 감동받은 문선명
 

저는 1989년 1월 1일 제22회 참 하나님의 날을 맞이하여 문선명에게 1년 한 해를 충성할 것과 절대 신앙, 절대 복종, 절대 사랑할 것을 맹세 했습니다. 문선명에게 영광을 돌리는 한해가 되자고 100명이 넘는 노원교회 교인들과 모여 철야 기도회를 드렸습니다.

1989년 노원교회 목표를 360명의 재적과 210명의 예배 목표를 세웠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새해를 출발하였습니다. 1989년 1월 9일날, 문선명이 큰아들인 문효진 장남과 문현진 삼남과, 곽정환 회장 등 기관 기 업체 사장단 20여명을 데리고 노원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문선명은 서울 시내 통일교나 전국 통일교 어느 곳에도 방문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 도착하기 30분전에 노원교회로 온다는 소식에 저는 너무나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 문선명을 맞이할 준비하는 시간이 너무나 촉박 하였습니다. 심장이 떨리고 어떻게 모셔야 할지 노원교회 교회건축 브리핑을 어떻게 보고 드려야 할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칭 재림주 문선명이 노원교회로 오면 식사, 과일, 떡 등의 음식과 음식 담을 그릇, 상 등이 필요한데 모든 것의 준비가 부족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에게 급하게 전화 연락을 하여 노원교회로 문선명이 오시니 빨리 오시라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교회대문을 열어놓고 카메라와 필름 준비 청소와 교회 주변 정리 등을 일사천리로 준비 하였습니다. 그러나 준비가 다 되기도 전에 문선명은 통일교 최고위층 교인들과 같이 노원교회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서울 시내 통일 교회의 목사 중 제일 어린 목사였습니다. 그런데도 문선명은 저를 기억하시고 저의 교회를 부흥시키는 능력을 인정하시고 왔던 것입니다. 저는 지하 1층~지상 3층까지 곳곳을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브리핑하였습니다. 2층 사택 쪽으로도 모시고 가 구경을 시켜 드렸습니다. 문선명은 중국의 진시황제 때 9,999칸의 아방궁 같이 노원교회 교회 건물을 잘 하였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았습니다. 문선명에게 교회 전체를 보여 드렸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에 온 것만으로도 영광이었고 축복 이였습니다. 저는 문선명과 같이 찍은 사진을 확대하여 큰 액자에 넣어서 노원교회 교회 계단마다 걸어 놓았습니다.

통일 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은 문선명 참부모가 제가 목회하고 있는 노원교회에 내방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자칭 구세주 문선명이 감화 감동을 받았파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가 노원교회까지 왔다는 것은 통일교 내에서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치를 통일교의목사들과 교인들만이 알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문교주에게 세뇌된 상태였기 때문에 노원교회가 자랑스러웠습니다.

1988년 7월 달에는 통일 세계에 노원교회가 한국 통일 교회의 우수 교회로 크게 소개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고난의 시간들이었지만 기쁨과 감사가 함께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나님이 문선명까지 노원교회로 왕림하게 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15장 서울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비극적인 사건

 

제 1 절 동토의 왕국인 통일 제국의 교구장 임명


1991년 1월 5일, 오전 11시에 노원교구 내의 목사 회의를 권혁철 교구장과 하였습니다. 권교구장이 통일교 협회에서 노원 교구장으로 박준철 목사를 임명했다고 전체 목사들 앞에 발표 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박준철 목사님이 너무나도 많은 실적과 한국 최고의 공적을 가지고도 언제나 선배 통일교 목사들 때문에 교구장 자리에서 밑려났으나, 이제 박준철 목사님이 노원 교구장으로 협회의 임명을 받았으니 소원 풀이를 한 것이라고 축하 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그 당시 이제야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여 기쁜 마음 이었습니다. 선배 목사들인 하계동이나 중계동, 월계동 등 여러 목사들이 저고 교구장이 되었다고 축하 인사를 하였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저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권혁철 교구장이 내일 오후 1시에 서울 시내 각 구 교구장들만 한남동 UN 빌리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 저택에서 회의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 저의 아내에게 이번에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내도 기뻐했습니다.

1991년 1월 6일 새해 첫 주일 예배를 맞아 저는 광고 시간에 전체 교인들 앞에서 어제 홍성표 한국 협회장이 서울 시내 교구장들을 임명하여 저도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후 1시에 UN 빌리지 문선명 참 부모님 공간에서 교구장들 회의가 있어서 다녀오겠다고 노원교회 교인들에게 보고하였습니다.

통일교는 온갖 아부를 교구장과 협회장에게 해야 출세를 합니다. 저는 출세하기 위해서 통일교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에 순수한 통일교 목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문선명 교주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온갖 가시밭길을 피눈물을 흘리며 누명을 쓰고 강제로 부당한 인사 이동을 당하고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정으로 개척을 하고 성공하기를 반복 하였습니다. 저는 박탈감과 빼앗긴 배신감에 가슴 아픈 때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억울하게 폭행과 폭력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 항변하지 못하고 사회에 고발하지 못하는 제 처지가 한없이 미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원 교구장이 된 것이었습니다. 노원교회에 모든 교인들이 저와 일심동체가 되어 교회발전과 부흥을 하여 문선명 재림주에게 충성 할 것을 더 더욱 다짐을 하였습니다. 모든 노원교회, 모든 통일교 교인들도 목사에게 교구장이 된 것을 박수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는 늦었지만 교구장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동안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 10회와 교구장상 등 16회 총 26회를 수상 받아 통일교 역사에도 없는 최고의 실적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교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배 후 식사도 하지 않고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성북교회 교구장으로 임명된 김민중 목사님을 제 차로 같이 모시고 갔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가면서 서울 시내 동 책임자인 교회 목사들도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였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제 목사 회의에서는 서울 시내 각 구 단위 교구장들만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였는데 동 책임자인 교회장들도 후에 참석 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김민중 교구장과 같이 한남동 문선명 교주 저택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 시내 새로 임명받은 22명의 교구장과 교회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단상에 앉아 있고 통일교 기관 기업체 사장들도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협회 이인자인 김승철 총무국장이 교구장 인사 발령을 다시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제 발표한 인사 발령 중 22명의 교구장은 그대로 발령하고 노원 교구장으로 발령 받은 저만 교구장 명단에서 제외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성동구 구의동에 있는 동책임자인 구의교회 서유성 목사를 교구장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저는 순간 심장이 멎고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단 하루 교구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다가 빼앗긴 것 이었습니다. 저는 배신감을 또 한번 느낌으로 문선명 교주와 멀어질 수 있었습니다.

구의교회 서유성 교회장은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이 전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 부인이 서유성 교회장을 전도하였던 것 입니다. 통일교는 크나큰 모순이요, 폐단이 있습니다. 가장 암적인 일이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영적으로 구원해 주었다고 하여, 믿음의 아들 딸이라고 호칭을 쓰는데 자신이 전도한 사람을 자기 자식 이상으로 통일교에서는 아끼고 사랑합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취직시키고 신앙교육을 시키며 죽을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기하 급수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1년에 12명 이상을 전도한 사람에게는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을 시상하여 통일교 교인들 간에 경쟁을 붙이고 위화감을 조성하였습니다. 저도 전도한 사람이 통일교를 탈퇴한 사람까지 합하면 200명도 넘었습니다.

전도한 사람은 믿음의 아들딸을 출세시키고 생활을 돌보며 통일그룹 내에 회사에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취직을 시키는 일까지 책임을 지고 합니다. 저를 전도한 사람은 통일교 송탄교회 박길수 목사 부인 이었는데 그 목사는 자기 교회 부인 회장과 간통을 하여 아내와 자녀들 5명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통일교 부인 회장과 살림을 차렸습니다. 저는 저를 전도한 목사 부부를 가정이 파탄된후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통일교에서 1961년도 통일교 최초 합동 결혼식자인 36가정 곽정환 회장이 저를 전도하였다면 곽 회장이 저를 얼마나 잘 이끌며 출세를 시켰겠습니까? 제가 폭력과 폭행을 당하며 박해받는 통일교를 개척을 하여 성공하면 선배 목사를 위하여 강제로 7번이나 빼앗기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저는 서유성 교회장의 부인이 노원구 상계동의 김승철 총무국장 집에 와서 빨래며 청소, 부엌일등 모든 일을 파출부와 같이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김승철 국장집에 심방을 하였더니 김승철 국장이 전도한 통일교 교인 몇 십명이 모여 단합 대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전도한 사람중에는 통일 그룹 내에 핵심적 인 자리에 있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을 1년에 I~2차례씩 전국에서 초청하여 단합대회를 열어 과시를 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자기가 문선명을 믿게 한 통일교 교인들이 이렇게 많다고 세를 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족하고 힘이 없어서 제가 전도한 사람들을모 아 단한번도 단합 대회를 열지 못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는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믿음의 아들 딸이라 하고 전도 받은 사람은 전도해준 사람을 믿음의 부모라고 호칭을 합니다. 통일교 간부들은 그런 단합 대회를 자신의 생일날이나 명절 때를 택하여 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975년 2월 8일날 1,800쌍 합동 결혼식 때 결혼을 했기 때문에 후배 목사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통일교는 1961년부터 1963년까지 36가정, 72가정, 124가정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통일교 최고의 지도자이고 통일 그룹 내 핵심적 인 요직에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제 2 절 김승철 총무국장의 인사비리와 폭행사건
 

저는 1991년 1월 6일 첫 주일 오후 문선명 저택에서 전체 목사들 앞에서 일어나 감히 문선명 교주에게 직언을 하였습니다. 제가 언제나 처절하게 개척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건축하면 빼앗고 선배를 위하여 강제로 희생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7번이나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에게 제 충성과 실적과 공적을 보고하였습니다.

저는 통일교는공산주의보다 못하고 적당주의, 형식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I~2년이 있으면 다른 교회로 인사발령을 받아 가는데 왜 땀 흘려 목회를 하겠느냐고 말을 했습니다. 통일교는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력을 다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놓는 목사가 따로 있고 그것을 빼앗고 가로채는 목사가 따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래서 어떻게 통일교가 발전이 되며 목회자들이 사명의식을 가지고 목회를 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 답변으로 문선명은 전체 목사들 앞에서 저에게 노원교회 박 목사는 그런 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리하고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가는 개척교회마다 교회를 발전시키니 순종하고 다른 교회로 가면 또 교회를 발전시킬 것이고 후손 대대로 자손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흥분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제 자신이 박해받고 억울한 가운데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말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제 목사 회의석상에서 권혁철 교구장이 통일교 협회로부터 저를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고 목사들 앞에서 발표하여 축하인사까지 받았다는 말과 김승철 총무국장이 자기가 전도한 믿음의 아들인 서유성을 교구장으로 저하고 바꿔치기 한 것이라고, 인사부장을 했다고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 없어서 그 말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제 말을 마치자 마자 분노와 배신감, 그 동안 김승철 총무국장의 행위를 생각하며 그 길로 문선명 교주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노원교회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제가 나오는 중에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 박목사 데리고 오라고 두 세차례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제 후임 목사로 왔던 엄철상 목사가 승진을 거듭하여 문선명 교주의 총애를 받아 비서실장이라는 요직에 있었는데 저를 붙들고 못 가게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박준철 목사를 데리고 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에 문선명 교주에게 그 동안에 쌓인 분노와 배신감 때문에 심장이 떨려서 터질 것만 같고 흥분하여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길로 노원교회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저를 교구장 명단에서 빼버린 후 동 단위 통일교 목사들이 자기가 가서 목회 할 곳을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제일 마지막에 남은 한 곳 노원구의 동 단위인 공릉동 통일교가 제가 시무 해야 할 곳이 되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저를 헐뜯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폭행을 하고 온갖 모함으로 노원교회를 빼앗아 자기가 목사 활동을 할 것이라고 했던 김수정 목사가 있던 곳 이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2층에 30평 전세 교회였고 교세도 노원교회 보다 20분의 1도 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따로 목사 사택도 없었습니다. 교회 30평안에 5평 정도를 합판으로 막아 작은 방 2개를 만들어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저는 순간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힘이 없고 부족하여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을 생각하니 저는 24시간 동안 잠도 오지 않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배신감 때문에 심장이 떨려왔습니다.

저는 매일 매일 미친듯이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제 차를 타고 청평까지 과속으로 달려도 보고 판문점까지 통일로를 죽기살기로 달려도 보았지만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도봉산에도 가서 기도도 해 보았지만 해결이 되지 않고 점점 더 고통스러운 나날 이였습니다.

 

제 3 절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얻은 심장병

 

저는 김승철 국장의 인사 부정을 밝히기 위하여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 진실을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1991년 1월 7일 문선명 통일교 교주 겹사돈인 홍성표 한국 통일교 협회장에게 인사부정을 이야기하고자 한남동UN빌리지 문선명 저택에 찾아갔습니다. 문선명이 한국에 있을 때에는 매일 아침 7시면 통일그룹 내 최고위층 통일교인들 전체가문선명 저택에 모여서 자칭 구세주 문선명에게 경배를 드리고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노원교회에서 경배식과 새벽기도 후 새벽 5시에 그 추운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에도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기 위하여 문선명 교주 저택에 찾아갔습니다. 그 동안에는 교회 건축을 위하여 몇 번 김영휘 회장님과 같이 저택 안에 문선명 교주를 만나러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교주 저택에 들어가지 않고 저택 밖에서 홍성표 통일교 협회장이 문선명 교주에게 문안 인사와 경배를 하고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홍성표 협회장의 운전기사와 같이 살을 에이는 칼바람 같은 그 추운 겨울에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침식사와 점심식사도 하지 않고 홍성표 협회장을 기다렸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부정인사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기 위하여 저를 속이고는 아침 9시경에 다른 통일교 간부의 차를 타고 통일교 협회 사무실로 가버렸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김정수 목사에게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를 피하여 한남동 저택에서 도망 왔다고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통일교 폭력집단의 한국 통일교 협회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홍성표 협회장의 운전기사가 저를 속이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문선명 교주와 회의하는 줄 알았습니다 참으로 그 추운 겨울날 하루 종일 식사도 하지 않고 새벽부터 저녁 5시까지 그 긴 시간을 발을 동동 구르며 떨어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 바람이 저를 떨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일교의 잔인한 폭력과 야비한 홍성표 협회장과 김승철 총무국장의 악한 행위 때문 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1월 8일 강남의 홍성표 협회장 집으로 찾아가 새벽 5시부터 밤7시까지 기다렸습니다.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가 만나 뵈러 왔다고 했지만,"협회장이 나가셨다" , "안 들어왔다" 고 계속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홍성표협회장이 저를 만나지 않기 위하여 집에서 운전기사와 서로 연락하며 피하는 것으로 알고 마음도 몸도 얼음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기진맥진하여 노원교회로 돌아왔습니다.

통일교에 입교하여 목숨을 걸고 온갖 박해와 가시밭길을 걸어온 목사의 길이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배신감에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끝없는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통일교 부정과 충격적인 쇼크로 저는 그만 화병을 얻어 심장병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통일교가 아니라 사람을 파멸시키는 죽음의 교회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겹사돈인 홍성표 합회장은 문선명 교주에게 최고의 충성과 사랑,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협회장 직에서 박탈당하였고 문선명 교주와 원수가 되어 겹사돈도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뇨와 여러 병으로 바깥 출입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첫째 아들인 문효진과 홍성표 협회장의 첫째 딸인 홍난숙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홍난숙은 25살의 나이에 이미 5남매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지만 문효진의 마약과 SEX, 감옥, 폭행을 참다 못해 이혼하여 가정이 파탄되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의 아들딸은 문선명 교주와 원수가 되었고 통일교를 탈퇴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아들딸을 바친 홍성표 협회장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을 것입니다. 홍성표 전 협회장은 당뇨병과 만병으로 거동도제대로 하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 문선명 교주에게 영혼과 육신을 빼앗긴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시 1991년 1월 11일 금요일 아침 9시에 통일교 협회 김승철 총무국장을 만나 눈물로 호소하고자 찾아갔습니다. 저는 그 며칠 동안 쇼크를 받아 매일 심장이 떨리고 숨이 가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조식 금식 기도를 하고 아침 일찍 김승철 국장을 만나기 위하여 청파동 협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제가 눈물로 호소하는 소리를 김승철 국장은 단칼에 잘라 버렸습니다. 저는 김승철 국장이 노원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불신하는 몇 사람을 회개시키지 않고 끌어 모아서 저를 더 불신하게 한 것에 대한 직언을 하였습니다. 협회에서 교구장으로 발령하고 하루만에 김승철 국장이 전도한 서유성 교회 장을 교구장으로 바꾼 이유와 불법을 저지른 내용을 놓고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김승철 국장에게 왜 인사부정을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동시에 저에게 공갈 협박을 하며,주먹으로 제 뺨을 쳤습니다. 순식간에 제 입이 찢어져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자 저는 왜 때리느냐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먹으로 제가슴과 배를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그리고 두 국장이 합세하여 저를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하였습니다.

통일교 협회에는 홍성표 협회장만 없고 전 국장과 부장, 과장, 계장, 여직원들까지 모여 박준철 목사의 폭행장면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저를 잔인하게 두 국장이 무차별적으로 폭행하였던 것입니다. 협회 총무국 사무실에서 전체 직원들이 모여들어 저 한 사람을 가운데 놓고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누구 한 사람 말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폭행을 당하여 몸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폭력에 대항해 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한 쪽 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 때문에 더 힘들었습니다 저는 몰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저의 양복과 와이셔츠는 피범벅이 되었고 옷이 찢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한참을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한 후 이상수 전도국장과 몇 사람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가하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국장을 제지하여 수습이 되었습니다. 저는 몸을 가눌 수도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겨우 협회 총무국을 나와 출입구 계단에 앉아 많은 시간을 보낸 후 겨우 의식을 회복하여 태릉 성심의원에 갔습니다. 병원에서 응급 처치후 4주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가정국장을 고소하여 감옥에 집어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에 마취되고 세뇌되어 문선명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고소하지 못하였습니다. 노원교회 목사가 통일교 최고위층 협회 총무국장과 가정국장에게 부정 인사를 당하고 통일교 협회 사무실에서 무차별적으로 폭행까지 당했다고 신문에 보도되어 통일교가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노원교회에 돌아와 눈물로 몇 달을 보내야 했으며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두 국장의 폭행으로 인하여 저의 머리와 배, 가슴, 옆구리를 걷어차여 그 충격으로 회복할 수 없는 심장병을 얻었습니다.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에게 폭행을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고 양복이 다 찢어진 모습으로 제가 노원교회에 돌아왔을 때도 어린 저의 자녀 3남매와 저희 부부는 절망하며 울었습니다. 매일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는 저를 보고 어린 저의 자녀 3남매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린 저의 자녀 3남매는 통일교 목사들이 사람 패는 깡패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깡패보다도 더한 폭력집단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 폭행사건은 문선명 자칭 참부모 구세주를 믿고 '절대신앙, 절대복종,절대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세뇌되었지만 서서히 문선명 교주로부터 세뇌에서 깨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사랑 받았다면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제16장 빼앗긴 교구장직과 노원교회까지 쳐들어 온

 

김승철 총무국장과 협회 전직원 시위대
 

제 1 절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총무국장과 협회 직원들
 

1991년 1월 13일 일요 예배날 이었습니다. 저는 온 몸이 아파서 몸을 가눌 수 없었지만 사력을 다하여 단상에 올라가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전체 교회가 가득 찬 가운데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막 시작한 순간 한국 통일교 이인자 김승철 총무국장, 이상수 전도국장(1962년도 합동 결혼식자), 김철현 가정국장 등 협회 전 국장과 협회 총무부장 박석규, 전도부장 오덕수 등 부장 전체, 과장 전체, 계장전체, 협회 여직원 전체를 총동원하여 왔습니다.

저를 쫓아내고 폭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협회장을 제외한 수십명이 노원교회로 데모를 하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저와 절친했던 신승철 가정부장과 김형길 문화부장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김승철 국장에게 미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승철 가정부장은 후일 간경화로 죽었습니다.

통일교에서 열정을 가지고 문선명 교주를 믿고 충성했던 사람중에 암병이나 심장병, 그 밖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 제 주위에 많았습니다. 과중한 스트레스와 충격적인 쇼크로 죽은 사람이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의리를 지켜준 신승철 가정부장과 김형길 문화부장에 대해서 그 당시에고맙게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신승철 가정부장은 서울에서 같이 목회를 하며 노원교회 교회 건축 헌당식 때도 축전까지 보내주었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 헌당식 때 협회장과 간부들이 거의 왔었습니다. 그러나 협회 총무부장인 박석규와 전도부장인 오덕수는 오지 않았습니다. 헌당식에도 오지 않았던 박석규와 오덕수는 김승철 하수인이 되어 오니 배신감과 분노가치 밀어 올랐습니다.

일촉두발의 순간이었습니다. 교회 예배 시간에 웅성웅성하고 몸싸움이 일어나고 노원교회 교인들과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부터 평직원이 떼거리가 되어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저는 예배 설교 단상에서 내려가 112에 전화를 걸어 경찰을 오라고 해서 협회 국장과 부장, 과장, 여직원까지 노원교회 교회에서 밖으로 다 끌어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통일교가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는 주일 예배 때 어떻게 설교를 하고 끝마쳤는지 모릅니다 재직 회장과 부인 회장, 충성했던 변함숙 권사 등 전체 식구들과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 이하 협회 직원들과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통일교는 조직이 있었기에 통일교 이인자인 김승철 국장과 국장단, 전 직원들 앞에 노원교회 교인들은 원통하고 분하지만 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을 중심으로 문성숙, 고귀숙, 최인자 등은 그 동안에 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암적인 역사를 했습니다. 저를 불신하며 김승철 국장과 합세했던 몇 명의 교인들까지 총동원하여 김승철 총무국장은 밀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 교회에서 충성했던 이수성 집사(1970년 합동 결혼식자-777쌍)도 그 자리에서 의리를 저 버리고 저를 배신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구장으로는 김승철 총무국장의 동서인 나상렬 목사(1962년도 72쌍 결혼식자)가 교구장으로 왔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 부인과 나상련 목사 부인은 같은 자매였던 것입니다. 치욕적인 수치와참을 수 없는 분노의 날이었습니다. 이런 악연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가증스러운 죄악의 역사 앞에 저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고 한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김영휘 회장이 1990년 11월 26일날, 문선명 통일 교주의 명령으로 한국통일교 협회 회장직에서 사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임으로는 일화 홍성표 사장이 취임을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1970년부터 1990년 11월 26일까지 전국 통일교 목회자들의 형님이었고, 아버지 같이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의 심정과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 이였습니다. 김 영휘 회장님은 중간에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을 뿐 저는 거의 전부를 김 영휘 협회장을 모시고 목회를 하였습니다.

저는 1991년 1월 13일 홍성표 협회장을 제외한 김승철 총무국장과 각 국장들, 부장, 여직원까지 시위를 벌리며 밀고 들어왔을 때 저는 몇 마디만 하고 2층 사택으로 내려왔습니다. 제 자신이 무력하고 힘이 없는 목회자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껴야 했습니다. 3층에서는 김승철 국장이 노원교회 교인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교인들에게 온갖 말로 변명만 늘어놓았습니다.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의 감언이설에 속은 노원교회 교인 중 저의 은혜와 사랑을 배반한 몇몇 교인이저에게 직접 시위를 벌렸습니다. 2층 사택의 안방 안에서 3일 동안이나 문을 걸어 잠그고 온갖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노원교회의 이수성 집사였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1970년 777쌍 합동 결혼식자인데, 잠시 목회도 하였던 사람입니다. 한쪽 팔을 못 쓰는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후 두 아들을 낳고 아내는 사망하였습니다. 혼자두 아들을 키우며 사는 것을 저는 안타깝게 생각하고 노원교회 어떤 통일교 교인들보다도 불쌍히 보고 긍흘하게 보는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충성하라고 장년 회장 직책까지 임명하였습니다.

저는 이수성 집사의 두 아들을 위하여 자주 심방하였습니다. 갈 때마다 먹을 것을 사다 주었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화물차 한 대로 짐을 실어 나르는 영업을 하였습니다. 이수성 집사가 집에 없을 때도 두 아들을 위해 저는 심방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수성은 저의 은혜와 사랑을 저버리고 김승철 국장과 단번에 짝이 되었습니다. 재직회장, 부인회장, 전 교인이 김승철 총무국장에 대하여 분노하는데 오직 장년 회장인 이수성 집사 혼자만 김승철 총무국장편에 서서 은혜를 배반하는 행위를 하였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목사 사택인 저의 안방으로 들어가 3일 동안을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를 보고 목사라고 하지도 않고 "너는이제 노원교회 목사가 아니다. 노원교회 목사는 나상렬 교구장이다(김승철총무국장 동서 - 1962년 72가정 합동 결혼식자). 박준철, 너는 노원교회에서 나가라" 고 하면서 시위를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그 당시의 충격으로 통일교를 떠나버렸습니다. 저의 가족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눈물로 3일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의 부부는 안방에서 못 자고 이불도 없이 마루에서 추운 겨울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악몽같고 지옥 같은 통일교의 목사 길을 극기 훈련하는 심정으로 인내하고 문선명 교주를 믿으며 충성하고 살아온 날들이 한없이 후회되었습니다.

저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가정국장의 폭행과 인사비리 부정에 대한 쇼크로 심장병을 얻었으며 간을 너무나 못쓰게 되고 과도한 스트레스로 담석증을 얻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위장병도 얻고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사이비 종교 중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종교 같이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잔인하게 인사 부정을 하고 자르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목사와 회사 직원들이 아내, 자녀들이 있고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는데도,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그룹 내 기업체 통일교 교인들의 회사 직책을 하루아침에 박탈시켜 버립니다. 손바닥 뒤집듯 칼로 생선을 자르듯 목사 직책과 기업체 직책을 박탈하는 살인적인 행위를 생각하니 치가 떨립니다.

저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로부터 잔인한 인사와 간부들에게 폭력 및 폭행을 당하며 언제 심장병으로 쓰러져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문선명 가짜 재림주에게 미쳐 있었습니다.

 

제 2절 나상렬 노원교구장의 배신
 

저는 폭력과 폭행 앞에 항변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제 목숨을 바쳤던 노원교구 본부를 피눈물을 흘리며 떠나야 했습니다. 저는 목회 의욕을 잃어버렸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자주 충격을 받고 폭행을 당하여 실어증과 심장병, 불면증 합병증으로 지금 현재까지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곤란할 때마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심장병으로 죽으면 억울해서 영계에 어떻게 가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현실 앞에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상렬 교구장에게 당분간 노원교회 목사 사택에 살면서 빠른 시일 내에 노원교구 관할인 공릉동 교회로 가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사짐은 지하실 창고에 쌓아 놓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나상렬 노원 교구장은 대 선배 목사로서 항상 좋은 자리만 차지했기 때문에 강남에 좋은 저택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그런 나상렬 교구장은 강남 집에서 노원교회로 출퇴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나상렬 노원교구장과 약속한대로 노원교회에 잠시 생활했습니다만,나상렬 교구장은 온갖 방해와 여러가지 압력을 행사 하였습니다. 결국에는 나가라고 하는 소리까지 하였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나가겠다고 하였는데도 나상렬은 김승철국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노원교회 교인들을 동원하여 차마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저에게 하였습니다.

저는 나상렬 교구장의악 랄한 처사에 못견뎌 눈물로 공릉동 2층 전세 교회 내에 있는 합판으로 만든작은 방 2칸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셔서 제가 죽을 때까지 노원교회에 교구장으로 있을줄 알고 사준 장롱, 화장대, 장식장 등 온갖 가구들은 공기도 통하지 않는 지하실창고에 다른 이사짐과 함께 쌓아 놓았습니다. 곰팡이가 피고 습기가 차 못쓰게 된 가구와 옷,책은 제가 1년 후 이사를 할 때 버려야 했습니다.

저를 불신한 통일교 교인들은 힘 있는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달라붙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노원교회교인들에게 김승철 국장은 그 국장자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은 7개월 만인 1991년 8월 30일에 문선명으로부터 총무국장직을 박탈당하였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은그 후 몇 년 동안 일본의 통일교 선교사 일을 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망하였습니다.

 

제 3 절 공릉동 교회의 지옥같은 생활
 

공릉동 교회는 노원교회보다 건물이나 재적인원, 예배인원, 헌금 등이 2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10여명의 통일교 교인이 있는 개척교회의 목사로서 시무해야 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거지 목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억울한 일들 때문에 심장병을 얻어 모든 의욕을 잃어 버리고 눈물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도 불안과 공포 속에서 지냈습니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고 괴로움의 나날이었습니다. 가정 분위기는 초상집과 같이 침울하였고 제 자신은 그 동안에 통일교에서 당한 한을 풀 길이 없어 강팍해져 버렸습니다.

제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형님같이 저를 이끌어 주셨던 K교구장님이 있었습니다. K교구장님은 자신이 통일교 대 선배 축복 가정 목사였는데도 뺨을 맞고 폭력을 당했다고 하며 제가 폭행을 당한 것을위로해 주었습니다. 유지철 목사도 1981년도 10월 20일, 서울 시내 선배 목사 동원령이 내렸을때 후배 목사인 최정철 목사에게 나무 몽둥이로 무차별적 인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최목사는 피와 땀으로 교회를 개척하여 전세 교회를 마련 하였는데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후임 목사인 유지철 선배 목사에 자기 교회를 빼앗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정철 목사는 나무 몽둥이로 폭력을 행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정철 목사는 능력 있고 교회를 잘 부흥시키는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문선명 교주가 환멸과거짓, 재림 주라는 것을 알고 통일교를 탈퇴하였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사업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1991년 2월 3일 노원교구 관내인 공릉동 통일교에 취임을 하였습니다. 그 동안 공릉동교회는 비참하고 어려워 목사가 없었습니다. 이 무슨 역사인지 제 목숨을 바쳤던 노원교구 본부교회를 멀리 떠나지 못하고 노원교구 본부교회 지시를 받아야 되는 공릉동 개척교회로 취임식을 해야 했습니다. 매달 월말 회의를 노원교구 본부로 가서 해야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를 빼앗겼는데 그 곳으로 매달 회의를 가야했습니다. 저는 매달 목사들 월말회의 때가 회의시간이 아니라 고문하는 시간 같았습니다.

월말 목사들 회의시간이 지옥 같았고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헌금이 없기 때문에 생활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교인이 아닌 세상 사람이 가끔씩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단 10원의 생활비도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녀 교육과 생활을할 수가 없어 아내가 파출부일과 식당일을 계속하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공릉동 개척 통일교로 취임을 한 후, 하루아침에 생활과 재정이 파탄 되었습니다. 노원교회 재직 회장이었던 윤승운 장로와 부인 회장 최선례 집사,노원교회의 정신적인 어머니였던 변함상 권사, 저의 동생들이 노원교회를떠나 공릉동교 회로 옮겨 저를 도왔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을 가지고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심장병과 육신의 병으로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육신의 병도 문제지만 제 영혼의 아픔과 배신감 때문에 목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제 17장 전국 통일교 목사전체 500명의 박탈당한 목사직

 

제 1절 교회사택에서 쫓겨난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


1991년 8월 30일날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전국의 목사들을 단 한 마디 회의나 상의 없이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자기 친척들을 전도하는 종족적인 메시아 활동을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전국의 통일교 목사 500명 전체를 단칼에 무우 자르듯 목사 직책을 박탈하여 버렸습니다.

전국 통일교를 1991년 8월 30일부로 모두 폐쇄하고 해산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통일그룹 내, 통일교 합동 결혼식 한 교인은 무조건 통일교 회사에서 퇴사하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 친척들을 전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통일교 교인이나 세상 회사에 다니는 통일교 교인들도 폐업과 퇴사를하고 고향으로 돌아 가라고 문선명 교주가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그룹 내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통일교 교인들을 강제적으로 퇴사를 시켜구조조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통일교 회사를 살리고자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만 근본적인 회사경영의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통일그룹이 IMF때 부도를 내고 파산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을 박탈당한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교 회사에 다니던 통일교 교인들은 강제 퇴직을 당하여 대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은 불안과 공포, 방황 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더불어 당장 먹고 살 곳이 없었습니다. 목사들은 통일교에서 쫓겨나 거리에 내몰렸습니다 졸지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데 갑작스런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목사직 박탈이 되어 처절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목사들에게 목사 경력에 따라 돈을 지급해 주었습니다. 통일교 목사 생활 1~5년을 한 목사는 100만원, 5~10년 목사 생활을 한목사는 300만원, 10~15년 목사생활을 한 목사는 300만원, 15년 이상 목사생활을 한 목사는 400만원씩을 지급하였습니다.

서울 시내 5인 가족이 방3칸 정도의 전세방을 얻으려고 하여도 5천 만원 이상을 주어야 전세를 얻을수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언제나 교회 사택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집이 필요 없었습니다. 통일교목사들은 언제나 처절하게 가난하게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아 놓은 돈도 없었습니다. 매 주일마다 나오는 헌금으로 자녀 교육비와 가정생활 하기도 벅찼습니다. 문선명은 그런 통일교 목사 500명을 졸지에 갈 곳도 없이 교회에서 쫓아내고 엄청난 충격를 주었습니다. 전국 통일교를 폐쇄하고 해산한다고공문으로 전국 통일교와 교인들에게 명령을 시달했습니다. 그러고는 1달만에 전국 통일교를 해산하지 않고 폐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전국 통일교와 교인들에게 공문으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선명 교주는 위선과 거짓으로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속인 것이었습니다 전국 통일교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 큰아들인 문효진 9세 재림주 체제를 만들기 위하여 문선명 교주와 홍성표 협회장이 현직 목회자들의직책을 박탈시켰던 것입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통일그룹 내 기업체 살리기위 한 작전으로 통일교 교인들을 잘라 낸 것이었습니다. 회사 구조조정과 경영개선을 하려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이 나이가 많고 교회 부흥은 안 시키고 적당주의, 형식주의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70세가 넘는 고령이어서 자식인 문효진을 자신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로 세우려고 작전을 한 것이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이 문선명의 큰아들이며 홍성표 협회장의 첫 번째 사위인 문효진 체제를 만들고자 문선명과 한 짓 이었습니다. 문선명은 홍성표 협회장과 같이 통일교 해산 1달후문효진이 마음대로 명령하고 지시할 수 있도록 젊은 목사체제로 구축하였습니다.

저보다 7년 늦게 합동결혼식을 한 1982년도 6,000쌍 합동 결혼식을 한 젊은 사람만 통일교 목사직을 수행할 수 있게 했습니다. 1982년도 이후 합동 결혼식자인 어린 목사들을 전국 통일교에 목사로 발령했습니다. 문선명은 젊은 통일교 목사들을 모아놓고, 나이 많은 전 통일교 목사들을 멱살잡이를 해서라도 전국 통일교 사택에서 끌어내 쫓아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교주는1991년 1월에 "젊은 통일교 목사들이 힘을 두었다가 어디다 쓸 것이냐?" 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전세금도 자녀 교육비도 집도 없어 당장 갈 곳이 없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당한 나이 많은 통일교 목사들은 젊은 목사 눈치를 보며 한 교회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나이 많은 40대 통일교 목사들은 20대, 30대 젊은 통일교 목사들에게 온갖 모욕과 무시를 당하며 생지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자기 교회의 교인들까지도 전임 목사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전국의 통일교에서 전임목사와 후임 젊은 목사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문선명에게 하루살이 같이 일생 동안 충성하고 이용물이 되어 목사직에서 박탈당한 후 자신의 고향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통일교 기업체에서 직책을 박탈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난 통일교 교인도 이사 짐을 싸서 고향에 갈 수 없었습니다. 고향은 커녕 통일교에서 쫓겨난 목사들과 통일교 회사에서 쫓겨난 통일교 교인들은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했습니다. 배운 것도 기술도 경험도 없었습니다. 당장 아내와 자녀들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몇몇 통일교 목사들은 빛을 내고 있는 돈을 모아 식당을 했지만 대부분 망해 버렸습니다. 가게를 해도 경험이 없어 실패를 하는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돈이 없는 통일교 목사들은 지하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고 건설 현장에서 벽돌과 시멘트일, 도배일, 온갖 막노동을 하였습니다. 어떤 통일교 목사들은 목사직 박탈 후 다단계 판매 사업을 하여 빚더미에 올라 앉았습니다. 여러 명의 목사들이 다단계 금융 사기에 걸려들어 거액을 날리고 다단계 금융사기죄로 전과자가 되어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 당한 통일교 목사들은 문선명 한 사람의 죄악으로 졸지에 한참 정상에 서야되는 40대. 50대에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거지가 되며 전과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도처에서 목사직을 박탈당한 목사 가족들이 단칸 지하셋방에서 3대가 같이 살아야 하는 비극적 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당한 목사의 아내는 파출부로 신문배달로 식당 종업원으로 막노동 일로 생선장사로 보험 모집원으로 이 세상에 밑바닥 일을 했습니다. 처참하고 가난하며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2 절 7개월만에 박탈당한 500명의 목사들
 

1991년 9월 1일부터 전국의 통일교 목사 500명과 통일교 회사에서 퇴사한 통일교 교인들과 자영업을하는 통일교 교인은 종족적인 메시아 역할을 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본래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집을 매도하고 전세금을 빼고 하여 완전히 고향으로 이사를 가라는것이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명령 이었습니다. 생업이나 회사생활. 자녀교육은 문선명 교주에게 안중에도 없는 일입니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문선명 사이비 교주만이 그런 공포의 명령을 내릴 수가 있는것입니다.

저도 노원교구 내 공릉동 통일교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들과 같이 목사직을 박탁 당하였습니다 .선배통일교 목사들은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에 최고 충성하고도_그렇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고 폭헹을 당했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 ?"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 형제, 친척과 고향 동네 사람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경남 하동 고향 땅에 가 고인이 되신 아버닐과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하동 교회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 도착 신청서를 제출하였슴니 다. 그리고 어머님을 뵙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통일교는 모든 교회 일 처리가 명령만 있고 형식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언제나 행사로 시작해서 행사로 끝나버리는 것이 통일교의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47여 년을 통일교는 내실 없이 형식에 치우친 행사만 하였습니다.

경날 하동 고향에 갔던 것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 목사 직분을 박탈당한 목사들은 고향에 있는 통일교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 신청서를 내야 문선명 교주에게 순종했다는 표시가 되기 때문 이었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에서 박탈당한 목사들에게 2~3개월 생활비밖에 되지 않는 1백~4백만원을 퇴직금이라고 주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것이라도 받아와야 당장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고향에 다녀왔던 것 입니다. 저는 공릉동 통일교에 합판으로 방 3칸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빼앗겨야 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교회 책임자로 처녀 전도사가 왔습니다. 저는 양해를 구하고 겨울을 나고 이사 가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저는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지만 영혼과 육체가 폐인이 되었고 심장병으로 막노동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아내는 아침부터 밤까지 파출부 일과 식당 일을 했습니다. 참으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무력한 모습을 아내나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엄동설한과 더불어 제 마음은 더 혹독한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 3 절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독서실 운영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로부터 목사직이 박탈된 후 저의 아내와 자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신설동 부근의 동신 독서실을 계약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저를 속인 것이었습니다. 독서실에서는 독서실 실장이 관리를 잘못하여 독서실 내에서 술을 마시고 기타치고 남학생이 여학생을 추행하는등 독서실을 망쳐놓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120명 있다고 했는데 2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해약해 달라고 하였습니다만 계약금 일부를 겨우 돌려 받고 계약금을 포기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둔 후 첫 사업이었는데 잘못 계약한 것 이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정릉에 있는 고명상고 옆 대원독서실을 계약하고 인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수후 한달만에 재개발 지역이 되어 미아리 고개와 아리랑고개 사이에 있는 집들이 철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서실을 소개하는 전문 부동산 업자도 저를 속였던 것입니다.

독서실 주위에 한 쪽 부분만 철거가 되지 않고 주위 전체가 다 철거를 하고 아파트를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년 동안 대원 독서실을 운영했는데 전 가족들이 매달려 고생만 하였습니다. 그나마 철저하게 독서실을관 리하고 운영한다는 소문이 나서 현상유지는 할 수 있었습니다. 대원 독서실을 1년 동안 팔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천지에는 저 같은 바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대원독서실을 폐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증금은 건물주인에게 받았지만 시설비 2천5백만원은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다 날렸습니다. 선풍기 5천원, TV 5천원, 냉장고 1만원, 자판기 3만원을 받고 고물 장사에게 팔고 독서실 의자와 책상은 중고 물품 취급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돈을 주고 철거해야 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교문으로 나오면 학생들을 차에 태워 독서실까지 데려와 공부를 시키고 새벽 2시에 학생들을 집에까지 실어다 주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학습분위기 조성, 청소 등 너무나 힘든 일 이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목사생활을 할 때처럼 정신적인 충격과 스트레스 등이 없었기 때문에 독서실 운영하는 것이 마음은 훨씬 편했습니다. 1년 동안의 대원독서실의 운영은 제가 2번째 속아서 계약하여 2번째로 독서실운영의 피해를 본 것이었습니다. 사회 경험이 없는 저는 또 한 번의 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제 4 절 고시원 운영 중 다시 꿈꾸게 된 목회 길
 

저는 싸고 낡은 고대 옆 고시원을 인수하였습니다. 고시원은 대학생 중심으로 한 생활이기 때문에 밤마다 독서실에서 처럼 중 고등학교 학생들 같이 차로 집에 데려다 주지 않아서 조금 편했습니다. 지옥 같은 공릉동 통일교를 떠나 고시원 옆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동안에 한푼 두푼 적금을 붓고 은행에 예금하고 모은 돈과 상계동 무허가 집을 팔은 돈으로 고시원을 인수하고 집도 전세로 얻었습니다. 고시원 학생들의 식사도 해 주었습니다.

고시원 시설은 낡았지만 대학 내에 저희 고시원에서 시험을 보면 무슨 시험이든지 합격이 잘 된다는소문이 퍼져 많을 때는 60명이 넘어 고시원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I~2년 운영 후 주위에 점점 최신식 고시원이 들어서고 원룸 고시원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저희 고시원은 저희 부부 인건비 정도 수익이 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시, 행시, CPA, 취직시험, 각종 공무원 시험을 치는 학생들에게 아버지 같고 형님 같이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그 낡은 고시원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용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각종시험에 합격되었다고 할 때마다 고시원 원장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습니다. 제가 고시원에서 한 학생, 한 학생을 놓고 기도 하다 보니 각종 시험에 합격을 잘하였던 것입니다. 학생들은 저희 고시원은 행운이 따르는 고시원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고시원 운영 중 임순도 종로 교구장 겸 통일교 부협회장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의 통일교 충성과 저의 사명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분 이셨습니다. 임순도 부협회장이 계실 때 제가 서울 강서 교구 본부 교회를 허허벌판에서 개척하고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 건축을 하고 하나님께 봉헌하는 헌당식도 못한 사실을 임 교구장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배 통일교 목사에게 눈물로 양보했던 서울 강서 교구 본부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서울 강서 교구 본부 목사로 저를 발령을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고난과 눈물, 충성, 한국 최고의 목사로서 실적을 잘 알고 있었던 임순도 부 협회장님은 저를 서울 강서교회 목사로추천해 발령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의 억울함,부정 인사이동, 언제나 통일교 선배 목사에게 양보하고 온갖 폭행과 폭력을 당하며 그 충격으로 심장병 ·담석증 ·위장장애 ·불면증까지 겹쳐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저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하루 하루를 살고 있으면서도 마지막으로 제가 땀과 눈물로 교회 건축을한 강서 교구본부에서 마지막 목회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통일교 목사로 지옥 같은 통일교 목사 생활을 했으면서도 통일교 목사직을 또 소망했습니다. 제 자신이 정신 이상자가아니고서는 어찌 문선명 교주의 쇠사슬에 코를 끼려고 했겠습니까? 저는 너무나 세뇌되어 다시 통일교 목사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소망을 갖고 제가 운영하는 고시원을 매매한다고 바로 광고를 내었습니다. 고시원만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부동산 회사에서 즉각 저의 고시원을 팔아주었습니다. 너무나도 문선명 교주에게 빠져있었던 저는 제 사명이 목사이기 때문에 목회를 해야 한다고 다른 길은 저에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때 고시원을 매도하였던 것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고시원 정리 후 임순도 부협회장과 변함숙 권사를 만나 함께 곽정환 협회장을 찾아갔습니다. 임부회장은 박준철 목사가 서울 강서교구를 개척하여 발전시켜 강서교구 본부를 건축하였는데 헌당식도 못하고 선배 통일교 목사 때문에 강제 인사이동이 된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곽회장은 고향인 경상남도로 가서 목회활동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목사 활동을 해야 한다고 거절했습니다.

곽정환 회장에게 1년 전에도 변함숙 권사님과 함께 곽정환 회장집을 방문하여 서울 강서교회 목사로 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제가 노원교회의 변함숙 권사와 함께 곽정환 회장을 만난 것은 서로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변함숙 권사는 통일교를 초창기에 나오신 분으로 통일교가 이단교회라고 남편이 핍박하고 마침내 이혼까지 당하고 외동딸과 같이 다녔습니다. 문선명은 변권사에게 "변권사는 이름대로 변함없이 참 부모님을 영원히 믿고 충성하는 신앙자이기 때문에 나도 기억하고 있다" 고 하며 칭찬도 하였습니다. 변권사는 문선명의 교주 옷을 만들었고 외동딸은 통일교 합동 결흔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통일교 사업으로 꽃을 팔며 전도를 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일생 동안 재혼도 하지 않고 외동딸을 키워 통일교 합동 결혼식까지 시켜 놓았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 때문에 사랑하는 외동딸이 전도와 꽃팔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변함숙 권사님은 찢어지는 마음과 충격으로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장례를 치른 후 변함숙 권사님의 딸은 교통사고 피해자였기 때문에 소송을 하려고 했습니다.

 가해자는 미국 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통일교 협회에서는 소송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 전도하고 꽃팔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인데 소송을 걸게되면 문선명 교주와 통일교가 미국 사회에서 명예가 훼손된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가 망신을 당한다고 손해배상 소송을 걸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교주와 통일교 협회에서는 변함숙 권사님의 외동딸의 교통사고 보상과 위로금을 단 10원도 주지 않았습니다.

변함숙 권사님은 일생동안 문선명 재림주만 믿고 충성하고 순종하며 직업이라고는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사이비교에 다닌다고 남편에게 이혼 당할 때 위자료로 받은 큰집을 팔아서 일생동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변함숙 권사가 남편과 이혼하고 외동딸과 살 때 변권사님 집에서 3년 동안을 함께 생활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곽 회장님을 만나 억울한 사정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차디차고 냉정한 곽정환 회장은 통일교 최고의 회장자리에 있어서 그런지 저 같은 목사의 말은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통일교 초창기 때는 목회를 조금 했지만 1970년 이후부터 세계 대학생 선교 본부장을 했기 때문에 목회자들과 저는 곽정환 회장을 잘 몰랐습니다. 문선명 교주 세 번 째 아들인 문현진과 곽정환 협회장 딸인 곽정숙은 결혼하였습니다.

큰아들인 문효진은 방탕과 마약, 이혼파경 등으로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둘째 아들인 문흥진은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문교주가 살아있는 처녀와 영혼 결혼시켜 놓고, 죽은 문흥진을 천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21세기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통일교 집단에서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죽은 문흥진이 재림했다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세뇌시키기도 합니다. 세 번째 아들인 문현진이 문선명 교주의 후계자가 되어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곽정환 회장은 홍성표 협회장이 자기 사위를 후계자로 세워서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던 것과 같이 자기 사위인 문현진을 후계자로 세웠습니다. 그 문현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또다시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하여 무자비하게 목사직을 박탈하였습니다.

2000년 9월 18일 세계일보 국제 연수원에서 벌어진 대 사건이 었습니다. 2000년 4월 30일에는 문현진이 통일교 세계 대학생 회장으로 취임을 하였고 전 세계 통일교 부회장 직책까지 갖고 문선명 교주의 지시에 의해 대를 이어 전세계 통일교를 이끌고자 동분서주 하고 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문선명 교주의 명령에 의하여 세계일보 부 회장직에서 박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선명 교주의 후계자인 자기 사위 문현진과 문선명 교주의 부인 한학자를 내세워 모든 실권을 거머쥐었습니다. 곽회장이 문선명 교주로부터 세계일보 부회장직에서도 박탈되었지만 한학자가 문선명 교주의 사후를 생각하라며 강력하게 곽정환 회장을 복직시키라고 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을 다시 세계 일보 부회장으로 임명하라고 남편인 문선명 교주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여 한학자의 힘에 의해 곽회장은 이틀만에 세계 일보 부회장으로 복직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이 한국에 없을 때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 통일교 회사 사장단은 곽정환 회장의 명령과 지시를 받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사망하였을 때를 대비하여 곽정환 회장을 통일그룹 총 회장으로 세웠습니다.

 

 

제 18 장 부산 영도교회

 

제 1 절 부산 영도 통일교로 인사발령
 

저는 서울 고시원을 정리한 후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로 많은 돈을 쓰게 되었습니다. 서울 강서교회로 가는 것으로 알고 고시원을 정리 하였던 것인데 시간이 지난 후 제가 또 큰 실수 한 것을 알았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었던 고시원을 팔고 보니 잘못 결정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남의 고시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이 저를 "출신지인 경상남도에 가서 목사 생활을 하고 오라"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고향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가 되어 가정집에서라도 친척들을 불러 모아놓고 통일교 교인들로 만들어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문선명의 명령 이었습니다.

무슨 빽으로,무슨 부정이 있었는지 저는 알수 없지만 통일교식 법을 지키지 않고 고향에 가지 않고도 서울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만 고향 교회에 가서 목사 생활을 하고 오라는 것 이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저보고 고향에 다녀오라는 말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임순도 부 협회장님도 저보고 잠시만 부산 목회를 하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심장병이 있어서 고려대학 병원에 수 차례 가서 심장, 간, 담석증, 위장, 불면증 등으로 수술과 입원치료를 받았고 집에서 고려대학 병원까지 차로 실려간 해도 있었습니다. 가족들끼리 같이 살아도 힘들었는데 혼자 부산 영도에 가서 제 육신의 병고를 안고 거센 바닷바람과 싸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부산에 곽정환 회장이나 임순도 부 협회장이 고향에 다녀왔다는 조건만 세우면 바로 서울 강서교회 목사나 노원교회 목사로 올라오는 것으로 믿고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취임을 하였습니다.

말이 영도 통일교 취임식이지, 영도 통일교 교인은 제가 갔을 때 실제로 2가정 밖에 없었습니다. 헌금은 교회 운영하는 공과금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부산 통일교 내에서 제일 최하위 교회인 부산 영도 통일교로 저를 추천하여 공문을 올렸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데 1996년 2월 28일날 협회 임종호 총무국장이 저에게 전화를 하여 "부산 정성호 교구장의 전화가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임종호 총무국장은 제가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발령이 났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부산 영도교회 수준이 어떠냐고 임종호 총무국장에게 물었습니다. 임종호 총무국장은 통일교가 어느 곳이나 가난하고 어렵듯이 부산 영도 통일교도 어려우니까 담임 목사가 없는 교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너무나 많은 고통과 가난, 시련에 생지옥과 같은 목회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먼저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시무하라는 말을 임종호 총무국장으로부터 듣기 전에 꿈에서 제가 큰 다리를 건너간 후 예배를 드리려고 몇명이 앉아 있는 광경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예배 장소가 쓰레기와 대변으로 가득 찬 교회였습니다. 저는 꿈에서 그 몇 사람과 쓰레기와 대변을 깨끗이 다 치웠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이 앉아 예배를 드렸는데 나중에는 그  예배 장소가 교인들로 가득 찬 꿈을 꾸었습니다. 꿈을 깨고 바로 다음날 협회 임종호 총무국장으로부터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저를 발령하였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꿈에 보여준 대로 부산 영도라는 곳은 영도다리를 건너가야 하는 섬입니다.

영도교회는 총각 목사도 못하겠다고 도망을 쳐버린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런 곳에 저를 발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의 뜻이 영도교회에 가라는 것이구나! 영도교회 교인 몇 사람을 데리고 교회를 발전시키라는 것이구나!' 라는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부산에는 교인은 많고 교세가 크고 안정된 통일교가 많았습니다. 저보다 합동결혼식을 7~17년을 늦게 한 어린 후배 목사들이 안정된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혀서 더 이상 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 했는데 부산 영도교회 목사로 부임하고 보니 자부심과 긍지는 또 한번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통일교 목사 생활로 문선명 교주에게 죽도록 충성한 것을 생각하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러운 마음이 울컥하고 올라왔습니다. 저는 부산 영도 태종대 절벽바위 위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영도교회는 예배 장소만 있는 교회였습니다. 예배 인원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이고 교인들 헌금도 교회 관리비, 운영비를 하면 꼭 맞는 액수였습니다. 목사 생활비는 꿈도 꿀 수 없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세뇌되어 끌려가면서 하나님이 저를 필요로 하고 영도교회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으로 알고 결단을 한 후 영도교회에 취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1996년 3월 10일에 서울에 가족들을 두고 홀로 부산 영도교회로 가서 자취생활을 하며 목사로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심장병과 만병을 갖고서 옛날 조선시대에 간신들의 모함에 의해 충신들이 귀양갔던 영도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이 영도 섬에서 제가 살아서 서울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첫 기도를 하였습니다. 20년을 서울에서만 목사 활동을 하였는데 우리 나라 남단 부산 지방 영도 섬에 와서 목회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제 이름은 호적에 박준기 라고 되어있습니다. 불꽃 '준' 에,구부러진 낭떠러지 '기' 자 입니다. 뜻을 말씀 드리면 제가 불꽃같이 성공하여 구부러진 낭떠러지에서 항상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열차, 절벽, 나무에서 떨어졌었고, 교통사고로 육신의 팔을 잃어버렸고, 목회에 성공하면 강제 부당 인사이동으로 빼앗기는 아픈 세월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고쳐주셨고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래도 사라(공주)로 고쳐주셨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을 생각하고 박준기를 버리고 박준철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박준철 목사는 교회 건물만 있으면 교회를 부흥발전 시킬 줄 알고 인사발령을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오랜 시간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수택리 연수원에서 전국 통일교 목회자 교육을 하고 난 후 저에게 협회 국장들 앞에서 "부산 영도교회에 가서 성공하고 올라오라","잘 다녀 오라" 고  5번이나 당부하였습니다. 임순도 부협회장도 "부산에 잠시 다녀 오라" 고 하였습니다.

저는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처음부터 100일 기도, 전도, 심방 등 정말 밤낮 없이 교회 발전을 위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로 이적이 일어나고 매 주일마다 새로운 교인들이 입교하여 순식간에 교회가 부흥 되었습니다.

부산 영도 통일교를 목사님도 없이 지키고 있었던 2가정이 있었습니다. 이진상, 하진희 순회사님 가정과 이광철, 이상희 부인회장님 가정으로 2가정이 저의 손발이 되어 죽도록 충성 하셨기에 교회를 부흥 발전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영도구 봉래동(지금현재 봉래 목욕탕 자리)에 신상진, 유신선 부부집에서 문선명이 교회 간판도 없이 방안에서 부흥 집회를 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1953년 12월 24일에서 1954년 1월 14일까지 21일간 문선명 통일교 재림주는 부흥 집회를 밤낮으로 열정을 가지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원리강론을 정리하고 집필하였던 유원효 통일교 2대 협회장 유민효, 유영효, 송도욱장로(문선명 참부모 3대 비서실장), 신상진 유신선 부부, 김영희(여자,Y대학생, 문선명과 김영희는 SEX교리로 혈통 복귀하여 문희진 출생) 등이통일교 문선명 교주 부흥집회에서 통일교에 입교하였습니다. 그들은 최고로 충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통일교에 최고로 충성했던 교인들이 영도교회를 떠난 후 영도 통일교는 폐허가 되었고 47년이 된 영도 통일교는 중간에 폐쇄되는 때가 많았습니다. 많은 통일교 목회자들이 영도 통일교에서 노력했지만 좋은 결과가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부산 시내에서 사업이나 장사에 실패하여 방세가 싼 영도 섬에 와서 잠시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이나 영도 통일교인은 영도 섬에서 살다가 부산 시내에 방 한 칸만 얻을 수 있는 돈만 되면 영도 섬을 떠나 부산 시내로 이사를 갔습니다.

제가 서울 노원 교구본부 철거민 달동네에서 개척할 때도 사업에 실패하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시내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상계동에 와서 살다가 돈을 조금 모으면 교통 좋은 시내로 이사를 가버리곤 했습니다.

서울 노원교회와 같이 영도 통일교도 온갖 정성으로 교인을 만들어 놓으면 이사를 가버리기 때문에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도 통일교에서 모든 악조건을 물리치고 3월 첫 달부터 순식간에 '일요일 예배드리는 교인 2배가 운동' 을 달성하여 교회가 부흥 발전을 하였습니다.

하진희 영도구 통일교 여성연합회장과 이상희 영도 통일교 부인회장과같이 하진희 회장님 자가용을 타고 매일 새벽 1시까지 말씀과 기도하며 전도하였습니다. 하진희 회장님은 사업을 하시는데 시간을 교회 발전에 전부를 투자하셨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님도 야구르트 배달을 하면서 영도구 야구르트 배달원 친목회장과 총무, 서기 등 많은 사람을 통일교 교인으로 전도하였습니 다.

 

제 2 절 부산 영도교회 부흥 발전
 

영도통일교는 지금까지 막다른 골목 안에 갇혀 있는 교회였습니다. 영도교회의 47년의 역사 속에서 사명감과 주인의식으로 사력을 다하여 목사생활을 했던 목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도교회는 47년 동안 단 한 사람의 사명감 있는 통일교 목사가 시무하지 않았기 때문에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던 것입니다. 

영도 통일교에 길이 좁아서 자동차가 한 대도 들어 올 수가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수시로 불법주차 스티커를 받아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저는 교회의 콘크리트 기둥과 이중 대문을 전부 헐어 내어 교인들의 차를 교회 안까지 진입시킬 수 있게 대공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교회와 내부에 페인트칠을 하였습니다. 외부 페인트칠도 영도 통일교 교회 건축 16년만에 처음으로 하였습니다. 화단을 다시 만들고 문 전체를 수리하고 지하실과 창고마다 가득가득 쌓인 쓰레기를 전부 밖으로 끌어내 10 리어카 정도 되는 많은 양을 폐기 처분하였습니다.

제가 영도 통일교에 오기 전에 꿈에 본 그대로 영도 통일교는 쓰레기장 이었습니다. 창문 하나 하나마다 저의 정성을 들여야 했습니다. 그 동안 영도통일교는 독 안에 든 것같이 앞에 2층, 3충 집들이 가로 막혀 공기가 통하지 않고 사각형 안에 갇혀 있어서 도둑을 맞을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영도교회에 시무하면서도 몇 차례 도둑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둑을 잡아서 교육하고 돌려보낸 때도 있고 파출소에 인계하여 부모형제를 불러 집으로 보낸 때도 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교회 안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막혀 있었습니다. 제가 영도교회로 가고 나서 영도와 육지의 새 다리가 만들어진다는 계획 때문에 교회 앞의 2~3층 주택 전체가 헐리게 되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8차선 도로에서도 보이게 시야가 확 트였습니다. 멀리서 보고도 영도 통일교를 알 수 있도록 새로 페인트칠을 하고 교회간판을 달았습니다. 옆의 주택은 도로 보상비를 평당 300만원씩을 받았는데 영도교회의 땅 10평은 도로라는 지목으로 평당 100만원밖에 주지 않갰다고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개인 땅이었는데, 통일교 협회에서나 과거 이곳의 목사는 도로가 만들어 질 때 개인 땅이라고 서류를 만들어 놓지 않고 교회 출입구를 도로라고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보상을 100만원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협회와 통일교 중앙 재단 본부에서는 저에게 지금까지 통일교 대지가 도로로 편입된 것을 재판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보상을 더 받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도로로 된 대지는 보상가격의 3분의 1밖에 받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에서는 2~3일 후에 영도 통일교 대지 10평의 보상 가격 1천만 원을 재단본부에서 받을 것이라고 저에게 통보해 왔습니다. 재단본부와 통일교 협회에서는 저에게 영도 통일교 도로 편입 보상을 관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단돈 100만원이라도 주인 정신을 갖고 노력하여 보상을 더 받아 보겠다고 협회와 재단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협회와 재단은 저에게 손을 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부터 사명의식과 주인정신을 가지고 보상을 더 받기 위해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갖추려고 동사무실과 구청을 뛰어 다녔습니다.

협회에서 통일교 대지를 관리하는 사람이나 재단 본부의 교회 대지 보상책임을 맡은 사람에게 저는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고자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습니다. 사진을 찍고 서류를 꾸며 구청과 과천 종합 청사에 서류를 보내고 하여 다시 감정을 받았습니다.

영도 통일교 대지에 대한 재 감정을 받은 결과 처음에 보상금이 1천 만원으로 결정된 것을 약 2천 4백만 원으로 받았습니다. 평당 보상가격이 1백만원이었는데 2백 40만원 가격으로 보상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협회와 재단에서는 저에게 지금까지 이렇게 승리한 일이 없다며 수고했다고 하였습니다. 재단과 협회 전문가도 못하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저는 1995년 8월 25일 합동 결혼식을 한 36만 쌍 중에서 합동결혼식을했지만 신앙이 없고 교회에 나오지도 않는 사람을 전부 수습하였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고 이혼을 한 가정과 가정이 파탄된 가정도 수습하여 아들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올린 가정을 심방하고 돌볼 때 언제나 제 옆에는 영도교회 이진상 순회사가 있었습니다. 이진상 순회사는 저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여호수아가 모세의 손발이 되었듯이 저의 손발이 되어 애를 썼습니다. 미진상 순회사의 부인인 하진희 회장도 저의 뜻이라면 '아멘!' 하고 무엇이든지 순종하고 따라주었습니다.

제가 영도교회를 떠난지도 2년이 흘렀지만 이진상, 하진희 회장과 이상희 부인회장은 아직도 명절 때와 제 생일에 정성을 모아서 서울에 있는 저에게 선물을 보내곤 합니다. 부모 형제도 이렇게 정성을 모으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 신앙목사생활 30년이 되었지만 통일교 안에서 이진상 순 회사와 하진희 회장과 같은 신앙 자를 아직까지 저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만사람에게 등불이 되는 신앙자 입니다.

이광철 집사와 아내 되는 이상희 영도 통일교 부인 회장도 제가 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상희 부인 회장은 사명의식이 강하고 영도 통일교 어머니로서 새로 전도된 통일교 교인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저는 1996년 3월 9일~1998년 8월 2일까지 약 2년 5개월 동안 영도 통일교에서 혼자 자취를 하면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은 시장을 다녀와 일주일 먹을 김치를 담그고 국 한 솥을 끓여 놓고 매주 불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은 제가 떠날 때까지 영도 통일교 살림과 저의 식사를 맡아서 수고하였습니다. 영도 통일교 부인 교인들도 제가 식사할때 먹으라고 반찬 준비를 많이 해왔습니다.

이진상 순회사와 이광철 회장이 주축이 되어 저에게 중고 자동차를 사주었습니다. 제가 버스를 타고 다니고 심방을 할 때면 영도섬 전체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골목길과 오르막길을 걸어 다니기가 힘에 겨웠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사주셨기 때문에 예배, 기도, 전도, 심방을 자동차로 기동성 있게 많이 하였습니다.

저는 부주의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죽을 뻔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서울집에 자가용을 가지고 오르내릴 때마다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게 되어 졸면서 운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위험천만한 위기의 순간도 많았습니다. 경부 고속도로를 달릴때 빗 길에 미끄러지고 눈길에 미끄러져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습니다.

1998년 음력 1월 6일 문선명 78회 탄신기념 행사를 해야 했습니다. 1월4일날 저는 행사준비를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서울에서 구정 명절이어서 자녀 3명에게 세뱃돈 1만원씩을 주고 나니 제 지갑에는 7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명절에 가족들과 같이 쉬고 1월 4일날 아침에 출발하는데 기름 5만 5천원을 넣고 남은 돈이 1만 5천원 밖에 없었습니다. 고속도로비를 내고 나면 딱 맞게 부산 영도까지 내려갈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서울에는 눈이 안 왔지만 전날 밤에 전남 지방과 충청도 지방에는 눈이 많이 왔었습니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 나서야 부산에 해지기 전에 도착 할 수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오후에 출발하고 싶었지만 추운 겨울이라 빨리 부산 영도까지 도착하려고 아침에 나섰습니다.

서울 집에서 아침 9시에 출발하여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화성(오산) 까지는 눈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눈이 오지 않아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화성 밑으로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체인도 감지 않고 시속 70km로 3차선을 달리다 천안 인터체인지 입구에서 2차선으로 차선변경을 하는 순간 차가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속도로는 큰 버스나 트럭으로 인해 아스팔트에 구덩이가 파져 있었습니다. 제가 100m 거리인 경사진 도로를 미끄러져 내려갈 때 주위에 수많은 차들이 불을 켜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불을 켜고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 고만 기도하였습니다. 차와 같이 미끄러져 내려가면서도 정신을 차려야 산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차가 100m를 지그재그로 밀려 내려가면서도 옆 차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고 마지막에 브레이크를 잡았습니다.

차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방향이었는데 차가 유턴하여 차 머리는 2차선에서 3차선으로 들어와 3차선과 갓 길에 걸쳐져 서울로 가는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살려달라!' 고 기도 하였던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차는 수많은 차들과 연쇄 충돌 하지도 않고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기적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차가 멈춰 섰을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30분을 정신이 없이 멍해 있다가 차에서 내려 차를 뒤로 밀어서 천안 인터체인지 다리밑 눈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부산 방향으로 다시 차를 틀어 3차선으로만 천천히 갔습니다. 영동 밑 추풍령에서 부터는 눈이 쌓여 있지 않아 부산까지 안전하게 내려갔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회에 제가 목사로 부임하여 이진실, 하진희 회장과 이철, 이상희 회장 두 가정을 가지고 영도 통일교에 발전과 부흥을 위하여 심히 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영도 통일교는 2년만에 120명의 교회로 부흥 발전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영도 통일교가 최하위 교회였는데 최고 A급 교회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갔을 때는 총 헌금도 교회 관리비와 공과금 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산의 통일교에서 영도교회 재직회가 목사 생활비를 제일 많이 주게 되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최고 책임자의 말 한마디 약속을 믿고 혼자서 부산 영교로 폐인이 된 몸을 이끌고 내려가 가족들과 떨어져도 영도교회에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돌아오는 것은 약속을 밥먹」기는 통일교 최고 책임자의 배신행위로 또다시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 두 번 속은 것도 아니요, 통일교에서 수없이 많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왜 또 속고 내려왔는지 저는 제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바보 천치라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자책을 해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던 것입니다.

 

제 3 절 죽음의 자리에서 두 천사의 도움으로 구한 생명
 

시간이 흐른 후 제가 서울에서 부산 영도 통일교로 발령을 밭은 것은 저에게는 또 한번의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싸움을 해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심장병과 간, 위장병, 불면증을 기도로서 다스리며 기적같이 죽지 않고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옆에서 돌보아 주어도 제 자신을 지탱할 수 없고 건강이좋지 않아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와서 자취 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혼자서 자취를 하며 빨래와 청소,심방, 전도, 교회 부흥 · 발전, 승공 연합, 각종 세미나, 강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영도교회에서 1996년 3월 10일 취임을 하자마자 매일 3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며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전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제가 혼자서 의 ·식 ·주를 해결한다는 것이 어려웠고 혼자과로를 하며 먹지 못한 상태에서 1인 5역을 한다는 것이 무리였습니다.

그래도 영도교회는 나날이 교인이 늘어나고 발전하며 새로운 교인들이 영도 통일교로 많이 입교하여 넘치는 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저는 신바람이 나게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과로하며 먹지 못하여 1996년4월 20일 독감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심장병에는 독감이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저는 1996년 3월 17일 셋째주 주일 예배 광고 시간에 하나님은 저에게 음성으로 "감기 조심하라" 며 경고 했다고 교인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독감 감기까지도 조심 하라고 알려주고 계신다고 교인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과로하지 말고 음식 조절하여 독감을 주의를 하였어야 했습니다.

1996년 3월 10일~4월 20일까지 40일은 제 몸과 마음 전부를 바쳐 충성한 기간이었습니다. 밤낮 없이 심방하고 전도하고 기도하며 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해 새벽 1시~2시까지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4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 40일 동안을 감기에 걸려 생활해야 했습니다. 누워 잠을 자면 기침이 심하게 나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질식의 순간이 여러 번 있어 책상 의자에 앉아 잠을 자지 않고 살았습니다. 40일은 제가 심장병으로 생사의 기로에서 살기 위한 구원의 몸부림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밥을 한 숟갈 정도밖에 먹을 수 없었고 국물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영도 통일교 교인들에게는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은 감기가 걸린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목사님이 감기가 걸려서 잘 드셔야 된다고 회나 반찬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심장 판막 4개 중 1개가 정지되었고 심부전증으로 식사나 먹은 물을 대소변으로 배출하지 못하였습니다. 심장기능이 저하되어 숨을쉴 수 없고 1층에서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설교나 심방, 전도, 기도는 처음과 같이 열심히 하였습니다. 부산 영도 교인들은 진실하고 인정스러운 마음으로 염소보약, 일반 보약까지 지어 왔습니다. 밥을 먹지 못해서 링겔 주사를 7병이나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몸이 죽음의 기로에 서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호흡 곤란으로 열 발자국도 걸을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몸은 고무풍선 같이 부었기 때문에 65kg에서 85kg이 되었습니다. 저의 배는 만삭이 되어 아기를 낳기 직전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1996년 5월 10일 그 날도 역시 책상에 엎드려 잠시 잠을 자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비몽사몽간에 검은 옷을 입은 4명의 저승사자들이 제게 와서"이제 너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4명이 양쪽에서 저의 팔을 붙들었습니다. 저는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4명에게 끌려가는 중 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명의 천사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천사들은 큰 칼을 빼어들고 4명의 검은 복장을 한 저승사자들에게 저를 데려 갈 수 없다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4명의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에게 칼을 휘둘러 4명을 전부 죽였습니다. 저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저는 2명의 천사에게 "저의 생명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천사들은 저에게 "앞으로 당신이 할 일이 많기 때문에 구해준 것입니다. " 하고는 순식간에 제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저는 비몽사몽간에 깨어나 하나님께서 저를 저승에 데려가지 않고 죽음에서 생명을 구해줄 것을 확신하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상희 부인 회장이나 교인들이 제가 심한 독감에 걸린 1996년 4월 20일 이후부터 반찬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이미 심장병과 간담석증, 위장병, 불면증을 가지고 있는 상태여서 혼자 무모하게 부산 영도교회에 와서 자취 생활 한 것이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너무나 처절하고 비참하며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아내가 옆에서 병간호를 해주어도 목회활동하기가 어려운데 혼자 자취 하면서도 영도교회 부흥발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심전력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심장병이 악화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기 조심하라" 고 저에게 경고를 하였는데도 저는 무관심하게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2명의 천사를 통해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저를 사지에서 생명을 구해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부산에서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 병원으로 갔습니다 응급실에 입원을 하여 응급 처치를 받았습니다. 심장기능이 약화되어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제대로 심장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심장에 고인 물부터 제거하기 위하여 저의 등에 구멍을 뚫어 척추를 관통하고 허파를 지나 호스를 집에 넣고 물부터 빼내었습니다.

병원에서 심장병 치료를 받은 후 부산 영도교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 서울에 저를 아는 분들과 부산 영도 교인들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통일교 황선조 협회장과 부산 교구장인 김용갑에 대하여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통일교로 말미암아 폐인이 되어 심장병으로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 병원으로 입원하였지만 통일교 협회에서는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부산의 김용갑 교구장이 협회에 보고를 하였는데 단 한 사람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병원 수술비를 한푼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잔인한 곳은 없습니다. 김용갑 교구장도 부산에서 서울로 와서 교구장 회의에 참석하면서도 회의만 참석하고 저의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서울 청파동 회의 장소에서 고대 안암 병원은 불과 30분 거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용갑 교구장은 부산 시내 통일교 전체 목사들을 대표하는 지도자입니다. 저는 김용갑 교구장의 부하였습니다.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이 서울까지 한명도 문병을 오지 않았다 할지라도 김용갑 교구장은 서울회의까지 왔으면서도 저의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저와 같이 1972년부터 충북 기동대 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충북 기동대는 통일교 목사가 되기 위한 6개월 훈련과정입니다. 그런 김용갑은 정성호 전임 부산 교구장과 같은 고향 진주 출신이라며 강력하게 협회장에게 추천하여 교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김용갑이 교구장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였습니다.

제가 1996년 3월 9일 부산 교구본부에 들렸을 때 김용갑은 부교회장 이였습니다. 저는 처음 김용갑 얼굴을 보았을 때 계시가 나왔었습니다. 저는 바로 김용갑이 교구장이 된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김용갑은 통일교 협회에서 1월 달에 전국 통일교 교구장 인사이동이 있는데 1년 후에나 있지, 그전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용갑은 이번에 바로 교구장이 되면 감사보답으로 저에게 크게 한턱을 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교구장이 되면 제가 서울에서 영도까지 내려온 것은 제 뜻이 아니라 하늘 뜻이니 제가 서울에 올라갈 때까지 마음이나 상하게 하지 않게 해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그런 예언을 한 후 한달 만인 4월 달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선배 통일교 지도자들과 교구장들을 전 세계 185개국의 국가 메시아로 발령을 하였습니다. 정성호 부산교구장이 떠나면서 김용갑을 부산 교구장으로 협회에 추천하여 교구장이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 후 부산에 내려와 김용갑 교구장에게 병원비를 협회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협회에서 병원비를 받아 주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몇일이 지나서 협회에서 병원비를 지원해 줄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고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서울의 교구장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듣고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에게 날짜를 설명했더니 그때서야 김용갑 교구장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서울 회의에 참석을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이 미안하다고 사과만 하였더라도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원비도 지원해 준다고 약속을 해놓고 왜 지원하지 않느냐고 말을 했더니 그때서야 억지로 조금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일 김용갑 교구장은 제 버릇 개 못 주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충고를 하고 조언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 19장 자살을 결심하고죽음의

 

문턱에 서서
 

제 1 절 족벌왕국에 환멸을 느끼고
 

약속을 어겼던 곽정환 회장은 문선명의 명령으로 한국 통일교 회장에서계 통일교 회장으로 인사발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문선명의 사촌 조카사위인 황선조가 취임을 하였습니다. 황선조는 단 한번도 개척하지 않고 교구장이 되었고, 실적도 공적도 없는데 문선명의 사촌인 문용현 사장의 딸과 합동 결혼식을 하여 하루아침에 한국 통일교 협회장이 되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한국 통일교회 회장직을 물려받은 황선조에게 박준철 영도 목사를 교구장으로 추천하니 문선명 교주에게 보고 드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선조 회장은 저에 대한 실적과 공적(협회장 상 10회, 교구공로 16회, 총 26회 수상, 부흥 교회 건축)을 문선명 교주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황선조 협회장은 그 당시 문선명 교주가 머물고 있는 제주도 영빈관으로 박준철, 양우진(전남 부흥단 단장)을 교구장 후보로 복수 추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곽정환 회장이 추천한 저는 간단히 설명 후 탈락시켰고, 전국 통일교 우수교회 협회장 상을 한차례도 수상하지 못한 양우진을 종로 교구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문선명의 통일제국은 족벌왕국입니다.

저는 점점 더 건강이 악화되어 심장 판막과 심부전증으로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전도활동과 심방활동, 통일교 합동결혼식 행사로 밤낮으로 황동을 하여 밤에 코피를 흘리고 모든 물체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영도 통일교를 총책임지고 있는 이진상 순회사가 정성을 다하여 저를 보살폈고 이상희 부인 회장이 저의 식사 준비에 정성을 다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제 영혼과 육신을 문선명 교주에게 빼앗긴 사실과 건강악화,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무능한 남편이라는 자괴감 때문에 밤마다 괴로워하였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문선명 교주가 참 부모 메시아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 받았다는 새 진리요 성약이라고 주장하는 통일교 원리강론은 김백문 사이비 교주의 교리인 성서신학과 기독교 근본원리를 문선명이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새 진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을 속인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김백문 교리를 이용하여 자칭 재림주가 되고 수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가는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속았다는 배신감에 통곡해야 했습니다.

통일교 전단지 한 장에 청춘을 빼앗기고 저를 30년 동안이나 노예로 삼고 이용한 문선명 교주를 생각하면 제자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미친 사람 같이 밤마다 '부산 영도섬에서 죽어야지' 라는 그 생각으로 머릿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제 2 절 "준철아! 죽지 말아라."
 

저는 문선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배신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밤마다 새벽 4시~5시까지 불면증에 시달리며 새벽 기도 후에야 겨우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차를 몰고 나가 영도 섬을 돌며 절벽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으려고 수십 번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으려고 할 때마다 "죽지 말아라!" 라는 음성이 제 귀에 생생히 들렸습니다.

낮에 전도하며 심방을 하다가도 영도섬 끝에 있는 태종대 유원지 자살바위에 서서 천길 절벽 아래로 뛰어 내리려고 했습니다. 태종대 등대에도, 신선대 절벽 바위에도 여러번을 가서 한 많은 제 인생을 마쳐야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준철아! 죽지 말아라" 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자살하려는 순간 그 음성을 듣고 번번이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때로는 분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를 자해 하기도 하고, 방을 뒹굴며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습니다. 배신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1998년 4월 30일 오후 5시경 자살을 결심하고, 영도 신선대 바위에서 뛰어 내리려는 순간 이었습니다, 지금 까지보다 훨씬 더 크고 뚜렷한 음성이 저를 사로 잡았습니다.

"준철아! 죽지 말아라. 문선명 통일교 집단을 궤멸하여 박준철과 같은 제2의 희생자를 막아라. 이단집단을 궤멸하라."

저는 그 음성에 압도되어 자살하려는 생각을 단념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선명 집단에서 겪은 것을 책으로 써서 이 세상에 문선명의 정체를 폭로하여 수많은 영혼을 구할 결심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이름으로 문선명 집단과 같은 사이비 집단을 궤멸하라는 사명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책이 발행될 때까지 심장병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기도와 약으로 병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제 20장 폭언 폭력 배신으로일괄된

 

통일교 지도자  
 

제 1 절 황선조 회장에게 한 직언
 

황선조 한국 통일교 회장이 전국 통일교회 순회 집회를 하였습니다. 부산교구 본부 교회에는 1998년 4월 14일에 왔습니다. 낮12시부터 부산시내 통일교 목회자 부부들이 황선조 회장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통일교를 배반하고 나갔던 문선명 비서실장인 박정화씨(야록 통일교회사 책을 발행한 저자)와 합의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 중 최고 실적과 공적을 많이 쌓은 목사로 부산교구 목사 대표자로 선정되어 황선조 회장에게 영도교회 발전과 통일교 발전안을 놓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앞으로 한국 통일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직언을 했습니다.

"통일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통일교 기업체를 정리하고 사명감 있는 목사들을 양성하며 통일교 교인들이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말로만 공생 공영 공의주의를 주장하고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실천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47년 동안 통일교회 교인들은 희생의 제물만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는 사회를 위하여 고아원 하나도 없고, 사회인과 통일교 교인들을 하여 양로원도 병원도 하나 없는 무풍지대입니다. 통일교 교인들에게 40년 동안 명령만 하였지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위하여 협회에서 무엇을 해주었습니까? 통일교 목사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도, 통일교 협회에·는 조금도 혜택이 없었습니다. 목회자 자녀 교육비나 노후를 위해서도 신바람 나는 목회가 아닙니다.

저는 서서히 마음정리를 해가고 있었습니다. 생활이 있고 처자식이 있다 보니 빨리 서울로 올라가서 가족과 합하지 않고서는 안되었습니다. 병든 몸을 가지고 홀로 목회하면서 정리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였습니다. 저는 빨리 서울로 올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 2 절 김용갑 교구장의 폭언과 폭행
 

김용갑 교구장은 마침내 회복할 수 없는 사건을 저질렸습니다. 그 날은 1998년 6월 11일 금요일 이였습니다.

문선명은 1998년 6월 13일에 있을 1억 2천만 쌍 합동 결혼식을 위하여모든 통일교인들을 몰아 세웠습니다. 저도 영도 통일교회 미혼남녀들의 합동결혼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동분서주하며 뛰었습니다.

합동결혼에 참석할 예비 신랑 신부의 약혼이 거의 다 성사되고 최종적으로 이상희 부인회장 아들 이봉규와 김영주 장년회장 딸인 김혜진만 제일 늦게 사진으로 약혼이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과 약혼이 되어 일본에서 신랑, 신부 될 사람 사진이 부산 교구 본부에 도착했습니다.

6월 11일 영도 통일교회의 이봉규와 김혜진은 김용갑 교구장의 축도를 받기 위하여 저녁 늦게 교구본부에 갔습니다. 부산 시내 통일교 18명의 목사들은 한 사람도 자기 교회에 미혼 남녀 약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목사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전에는 심방활동을 하였고 오후에는 영도 여성연합 하진희 회장의 부탁으로 악령에 사로잡힌 김숙자씨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김숙자씨에게 남편과 자녀들이 통일교회를 나오면 확실하게 악령을 제거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교회를 빠른 시일 내에 나오지 않으면 김숙자씨가 자살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달 후인 1998년 7월 10일에 김숙자씨는 정말로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 하였습니다. 김숙자씨는 자살시도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의식을 회복하였지만 뇌세포가 많이 파괴되어 정신병원에서 폐인이 되어 가정에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김숙자씨를 만나고 저녁에 영도 통일교회에 돌아와 속회예배를 드렸고 기진맥진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우리 교인의 일이라 책임감을 느끼고 부산 통일교 교구 본부 교회로 갔습니다.

저는 김용갑 교구장에게 이상희 부인회장의 아들인 이봉규의 아내 될 사람과 김영주 장년회장의 딸인 김혜진의 남편 될 사람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진을 보았더니 너무나 착하고 아름다운 신랑, 신부였습니다. 이봉규씨는 19살이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잘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용갑 교구장이 저에게 하는 말이 "영도 통일교회 부인회장 아들인 이봉규는 000네."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모욕적인 욕을 하였습니다. 저는 "둘이 행복하게 잘 살라고 하지 못할 망정 결혼을 파괴하려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래도 김용갑씨는 "김혜진 신랑 될 사람은 키가 너무 작다" 고 또 다시 부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이봉규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에 마음이 상당히 상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밤 10시가 되어 일본에서 온 신랑, 신부 사진을 각자 받았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약혼이 된 신랑, 신부 사진을 보고 마음에 안 들면 파혼하라" 고 5번이나 외쳤습니다. 저는 김용갑 교구장이 말하는 것을 보고 못 마땅 하였습니다.

합동 결혼식을 할 미혼 남녀들은 사진으로 자기의 아내 될 사람과 자기남편 될 사람을 보게 된 것이니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들면 기쁘고 다행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파혼을 해야 되는 상황에서 김용갑 교구장은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였던 것입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기도실에서 약혼 축도를 하기 위하여 신랑, 신부를 모았습니다.

일본이나 필리핀에서 온 신랑, 신부 사진을 한국의 약혼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영도 통일교회 차례7,1 되어 상대방의 사진을 받았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 아들인 이봉규씨 아내 될 사람은 얼굴도 착하고 키도 크고 빠지는 데가 없었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과 이봉규씨는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영주 장년회장 딸인 김혜진씨는 '남편 키가 작네." 하면서 불평을 하였습니다. 김영주 장년회장도 사위 될 사람이 키가 작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신랑 될 사람은 김혜진씨 보다 9cm이나 컸습니다. 저는 김혜진의 키가 작다는 불평 소리에 결혼할 사람이 착하고 진실한 얼굴이고 천생연분이라고 말하고 격려하는 뜻에서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산교구 본부 부인회장이 "영도 또 시작한다. " 라며 빈정거렸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김용갑 교구장이 영도 통일교회 목사인 저에 대해 무수한 비난을 했다는 증거였습니다. 저는 여러 사람 앞에 참을수가 없어서 조용히 밖으로 나왔습니다. 

저는 복도에서 마주친 김용갑씨에게 "어떻게 교인들 신앙 교육을 시켰으면 교인이 다른 교회 목사에게 반말을 씁니까?저는 그 여자 교인을 알지도 못하는데 영도교회 일에 끼여 들어 파혼을 시키려고 합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용갑 교구장은 "영도교회 목사가 잘못하였다" 고 하며 자기 교인만 감싸고 돌았습니다.

저는 다시 기도 실로 들어가 그 부인회장에게 '당신이 누구냐? 영도 또 시작 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시작하느냐? 왜 목사에게 반말을 하느냐?" 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교구 본부 교회 부인 회장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저와 여러 교인들이 "왜 거짓말을 하느냐?" 고 따졌더니 그때서야 시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교구 부인 회장도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였고 교구 부인회장의 남편이 되는 장로도 저에게 내용을 알지 못하고 영도 교회 일을 방해하여 죄송하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밖으로 나와 밤12시가 다 되어 영도 통일교회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남의 교인에게까지 무시당한 데 대한 아픔으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습니다.

다음날인 1998년 6월 12일은 부산 교구 본부 회의실에서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회의 시간에 회의 분위기를 망칠까봐 어제 밤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이 저에게 사과를 하고 서로 화해하고 조용히 처리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용갑 교구장은 저에게 사과를 하지 않자 할 수 없이 어제 밤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동래 허한경 목사와 김진수목사도 교구 본부 부인회장이 잘못한 것이고, 김용갑 교구장이 저에게 잘못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 전체가 "승공 연합 빼앗은 일이나 이번 사건은 김 용갑 교구장이 잘못 했다" 고 저에게 사과를 하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김용갑 교구장은 제가 말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막말로 '알 다했냐?" 하면서응접실 의자에 앉았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병신새끼, 꼴값하네!!" 하며 저에게 욕설을 하였습니다.

그 말 한마디는 저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꽃혀 버렸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교통 사고 후 단 한차례도 '병신새끼' 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였는데 통일교회에 들어와 병신새끼라는 말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나오려고 일어났습니다. 그랬더니 김용갑교구장은 갼자기 의자위로 올라가 저에게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저-'김용갑 교구장의 폭력에 더 이상 때리지 못하도록 넥타이를 잡았을 뿐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래교회 허한경 목사와 부산진교회 김진규 목사가 김용갑 교구장을 말려 걱우 진정이 되었고 저는 교구장실을 나와 버렸습니다. 저는 충격과 심장판막과 심부전증으로 인하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영도 통일교회에 돌아왔지만 몸을 가눌 수도 없었습니댜.

하나님의 뜻을 이끌어내시고자 문선명과 나와의 관계를 구세주 참 부모와 참 아들 효자의 관계에서 서서히 세뇌마취에서 깨어나 사랑과 믿음을 끊고 조금씩 조금씩 문교주에게 절대복종의 자리에서 점차적으로 세뇌에서 깨어나 통일교를 떠나게 만드는 역사를 해오신 것입니다

 

제 3 절 문책인사를 약속한 황선조 회장
 

1998년 6월 13일 1억 2천만 쌍 합동 결흔식을 위하여 영도 통일교회에서 교인들을 합동결혼식 하객으로 총동원하여 서울의 잠실 체육관에 참석하여야 했습니다. 1억 2천만 쌍 합동결혼식이라고 전 세계 언론과 매스컴을 통하여 알렸지만 과장되고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잠실 체육관에서 2천쌍 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3일 동안의 폭언과 폭력을 겪어 몸이 만진창이 되었지만 합동결혼식 행사를 치렀고 서울 집에 있는 자녀들을 보지도 못한 채 영도교회로 내려왔습니다.

1998년 6월 26일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 회의석상에서도 통일교 목사들이 김용갑 교구장에게 영도교회 박준철 목사에게 사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용갑 교구장은 사과를 하겠다고 했지만 사과는커녕 오히려 저를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통일교 콘도인 설악산 일성 콘도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 회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심장병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김용갑 부산 교구장은 설악산에서 황선조 협회장과 김종우 총무국장 등에게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고 오히려 저를 비난하는 말을 하며 저를 인사 조치하여 잘라 버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용갑 교구장의 모두 잘못한 것이 드러나서 저를 인사발령 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김용갑 교구장 자신이 문책 인사로 부산 교구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지혜롭지 못하여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에게 사과하고 조용히 끝내기를 바랬는데 오히려 사건을 황선조 협회장에게까지 끌고 가 일을 확대시킨 것이었습니다. 저는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통일교 협회 김종우 총무국장이 부산 영도교회로 전화를 해주어 알게 되었습니다.

김용갑 부산 교구장은 교만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교구장의 직분을 망각하고 회개하지 않고 사과할 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산 시내 18곳의 통일교회 목사를 책임지고 명령하는 직책이 교구장입니다.

김용갑씨는 18곳의 교회 헌금을 받아 임의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불법이고 공금 횡령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주위의 통일교 목사들이 욕을 얻어먹을 각오를 하고 충고를 하여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1998년 7월 1일 서울 통일교 협회 사무실로 갔습니다. 황선조 통일교 회장을 만나 김용갑 이야기만 듣지 말고 저의 이야기도 듣고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황선조 회장이 화를 내고 격하게 이야기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김용갑 교구장의 잘못을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박준철 목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김용갑 교구장을 문책인사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있는 앞에서 황선조 회장은 김용갑 교구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박준철 목사의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김용갑 교구장이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뒤에 사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그 자리에서 김용갑 교구장에 대한 문책 인사를 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길로 서울 .집에 잠시 들렀다가 부산 영도 통일교회로 내려갔습니다.

 

제 4 절 눈물로 세운 부산 영도 교회를 떠남


저는 이 사건 후 7월 20일에 김종우 협회 총무국장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황선조 회장의 전화가 왔는데 "김용갑 부산 교구장의 잘못을 놓고 문책인사를 하고 박준철 목사도 영도 통일교회를 떠나 서울 시내나 경기도 통일교 목사로 발령을 하면 어떻겠느냐?" 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김용갑 교구장이 부산 교구장에서 면직되고 서울 시내 구단위 교구장으로 문책 인사를 당하는데 전국 교구장들은 이번 사건을 주시 하고 있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통일교 회장의 체면을 보아서 박준철 목사가 황선조 회장의 체면을 세워 달라" 고 하였습니다.

총무국장은 "지금까지 황선조 협회장이 한국 통일교 교구장과 목회자 인사이동을 시키면서 단 한번도 먼저 전화를 하거나 양해를 구한 일은 없는데 박준철 목사가 처음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생사를 넘나들며 전력을 다했던 영도 통일교회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김종우 총무국장은 "황선조 회장이 미국에서 김종우 총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반드시 박준철 목사를 기억 하였다가 내년 1999년 2월 7일 3억 6천만 쌍 합동결혼식 후에 교구장으로 발령을 하겠다고 약속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1998년 6월 설악산 일성 콘도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 총회때 전체 교구장들의 사표를 받아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3억 6천만 쌍 합동결혼식 할 때 실적이 나쁜 교구장들의 사표를 받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를 교구장으로 발령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몇달 동안만 과천교회에서 교인들을 수습하고 너무 어려우면 한 달만 교구장 자리가 나면 바로 저를 발령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2년 5개월 만에 영도 통일교회를 목사로서의 사명을 마치고 죽음의 고개를 넘어 살아서 영도섬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998년 8월 2일 주일날에 영도 통일교회에서 마지막 이임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마지막 이임 예배에서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회에 이진상 하진희 순회사님 가정, 이광철 이상희 회장 가정, 김봉민 사찌꼬 가정, 김옥순씨 가정 등 영도 통일교회 전체 교인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 뿐 이었습니다.

심장병으로 고려대학 병원에 응급실에 2차례나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자살을 30번도 넘게 결심하고 시도하였지만 죽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 했습니다. 영도 통일교회를 떠나며 모든 영도 통일교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뜻은, 저를 문선명 자칭 구세주로 부터 빨리 통일교로 부터 탈출시켜 통일교 궤멸을 시키고자 고난, 시련, 가시밭길을 저는 걸어야 했습니다. 문선명과 저와의 관계가 참부모 구세주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문선명을 불신하게 만들고 정을 끊고 통일교를 떠나게 만들고자 마지막까지 인사문제 폭행 폭언을 당하며 저는 생사를 넘나든 병고와 싸워야 했습니다.

 

제 5 절 과천통일교회에서의 비참한 생활
 

과천교회는 세워진 후 8년 동안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처음엔 처녀 전도사가 목회를 하였고 후임으로는 1992년 3만 쌍 합동결혼식을 한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아 과천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다음은 제가 1982년도 경기 화성 교회에 목사 생활을 하며 합동결혼식을 시키고 신앙 지도를 하였던 이정만씨가 과천교회 목사였습니다.

이정만 과천교회 목사는 교인 20명에 불과한 개척교회에서 교인들이 모이면 언쟁을 벌이고 교인들이 이정만목사와 싸움을 하여 허탈과 배신감으로 통일교 목사직을 사직하였습니다. 이정만 목사는 과천에 온지 3개월 만인 1998년 4월에 과천교회 목사직을 그만두었습니다.

이정만 목사는 진실하고 정직하며 착한 목사입니다. 제가 화성교회 목사로 있을 때도 가장 모범 된 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 신학대학을 다녔지만 통일교 교인으로 학교에 알려져 신학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통일교 선문대학 4학년에 편입하여 신학교를 졸업하여 열심히 목회자의 사명을 가지고 살았던 이정만 목사는 배신감에 통일교 목사직을 버렸습니다.

과천교회 통일교 교인들은 몇 달 동안 목사도 없이 교인 10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저를 그렇게 처참한 과천교회 목사로 발령하였던 것입니다.

그 곳에는 개척도 하지 않고 협회장상을 한번 받지 않고 교회를 부흥시킨 일이나 교회 건축한 일도 없는 교구장이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저는개척, 부흥하여 교회건축을 한 서울 강서교구 본부나 노원교구 본부에 간 후 통일교회를 떠날 생각을 했지만, 과천교회에서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두고 탈퇴할 결심을 하였습니다.

1998년 8월 3일부터 저는 아내와 같이 과천교회를 수습하였습니다. 8월달에 비가 그렇게 많이 왔는데도 비를 맞아 가며 심방활동을 하였습니다. 과천 통일교회는 종교 부지 내에 3층을 분양 받아 2칸으로 막아 교회와 사택을 꾸몄습니다. 70평이라고 하는데 실제 평수는 50평 정도에 불과 했습니 다.

과천교회는 매년 여름만 되면 비가 올 때마다 옥상에서부터 비가 새어 4층 학원으로 쏟아지고 4층 학원을 채운 빗물은 3층 통일교회로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교회에 발목까지 물이 차서 물을 퍼내야 했습니다. 매년 겪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택이나 방에도 비가 새고 교회에 발목까지 물이 차다보니 그 물을 다 퍼내는데는 10일이 넘게 걸렸습니다. 교회에 물을 다 퍼내고 나면 벽에서 물이 나오고 교회 콘크리트에서 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교회 내의 전기는 누전이 되어 매년 여름에는 전기 불을 켤 수 없습니다. 교회에 창문이 없어서 교회에만 들어가면 숨이 막혔습니다.

저는 가는 곳곳마다 통일교회를 부흥 발전시켰으며 교회와 가정적인 생활안정을 지금까지 시켰지만, 과천교회에서는 더 이상 교회를 발전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 자신을 정리해야 했고 가족들의 처절한고통과 가난,배고픔으로 내몰아야 했습니다.

저는 과천교회에서 통일교 목사직을 탈퇴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더 이상 교회를 발전시키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개척교회 마다발전시켰지만 더 이상 수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일을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교회를 발전시켜 가정생활이 안정되는 길을 포기하고 가난을 선택하였습니다. 저의 자녀 대학생 3명의 등록금도 없어서 휴학계를 내고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습니다. 아내는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병든 몸을 이끌고 파출부와 식당 일을 해야 했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킬 능력이 있지만, 가난을 선택해야 했고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위해 교회를 부흥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황선조 회장이 미국에서 한 전화약속도 져버리고, 협회 김종우 총무국장의 약속을 받고 과천으로 왔지만 하나님은 빨리 통일교회를 탈퇴하라는 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 생활비를 4달 동안이나못 받고 자동차 기름값이 없고 버스 탈 돈도 없는 처절한 생활고로 목회자 교육 때도 가지 못하는 비참한 생활 이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참 부모 재림주라는 통일교 교주를 믿어도, 통일교회는 구원이 없고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없는 지옥 그 자체 생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6 절 연속되는 폭행과 폭력과 거짓말들
 

1999년 1월 28일날 문선명 통일교 교주 사돈인 곽정환 통일교 총 회장, 황선조 한국 통일교 회장을 협회 회장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그 곳에 김종우 협회 총무국장도 같이 있었습니다. 2월 7일 3억 6천만쌍 합동결혼식 행사를 위한 준비 모임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통일교 역대 협회장들이 저에게 약속과 신의를 저버리고 배신한 행위와 부당한 인사이동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데 대하여 직언을 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저를 보고 "박준철 목사가 죽던지, 황선조 회장이 죽던지싸워보자" 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동안에 폭력, 폭행을 하다가 이제는 살인까지 할거냐?" 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황선조 회장이 저를 치는 바람에 저는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사이 김종우 협회 총무국장이 저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저는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강제 부정인사와 폭행, 폭력으로 심장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곽정환 회장의 말 한마디를 믿고, 혼자 부산 영도교회목사로 부임하였던 제 어리석음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고향인 경상남도로 가서 잠시 다녀 오라" 고 해서 부산의 영도까지 다녀온 저는 "과천 개척교회 목사로 부임하기 위하여 부산 영도교회까지 간 것이 아닙니다" 라고 곽정환 회장과 황선조 회장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곽정환 회장은 "내가 언제 그랬느냐?" 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곽정환 회장이 저에게 잠시만 부산에 다녀오라고 5번이나 말을 하였고, 임도순 부 협회장도 바로 서울로 원대 복귀하게 될 것이라고 저를 위로해 주었는데 말입니다.

저는 김종우 총무국장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고 물었습니다. 그는 "곽정환 회장의 약속을 황선조 회장이 책임질 이유가 없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선조 회장과 김종우 총무국장은 2월 7일 축복 후 교구장 인사 이동시 최선을 다하여 박준철 목사를 교구장으로 발령하겠다" 고 또 다시 저에게 약속하였습니다.

김종우 총무국장은 "1999년 2월 7일 3억 6천 쌍 통일교 합동결혼식 측복 후 최선을 다하여 교구장으로 발령하겠다" 고 또 다시 약속하였습니다. 저는 그 소리에 눈과 귀가 멀고 영혼까지 멀어 명예 회복을 한 후 통일교를 탈출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에 유린당하며 약속을 지키는 협회장을 한 사람도 못 보았으면서도 속았던 것입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너무나 세뇌되고 교육되어 있었기에 마음으로는 통일교를 탈출 한다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탈출 하지 못하였습니다. 제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럽고 미웠습니다.

 

제 7 절 위장된 합동 결혼식


1999년 2월 7일 3억 6천 쌍 합동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거짓된 숫자임) 저는 과천 통일교회 책임량인 버스 4대에 과천시 대한 노인회 소속인 3단지, 4단지와 문원동 1, 2단지 노인정의 노인들을 태워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으로 갔습니다. 식사대접, 선물 준비, 음료 과일 접대 등을 과천 통일교회 교인들이 준비하였습니다.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에 혹독한 겨울 추위가 몰아쳐 전국에서 몰려온 노인정의 노인들은 추위에 떨며 아수라장을 이루었습니다. 서로 밀고 밀치며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12만 명의 노인들과 통일교 교인이 모였던 것입니다. 출입구에서는 노인정에서 온 노인 12만 명에게 하얀 목도리 한 장씩과 빵을 하나씩 선물하였습니다. 통일교 행사장의 사회자는 하얀 목도리를 목에다 감지 말고 하얀 목도리 끝이 무릎까지 내려오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합동결혼식은 매스컴이나 언론 기자들은 세계 통일교 교인들에게 공중헬기 중치로 방송하기 때문에 노인들까지 하얀 목도리를 어깨에 걸침으로 미혼 신랑, 신부같이 보이게 하기 위한 위장전술이 었습니다.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노인들이 서울 잠실 경기장에 모여 문선명 교주의 거짓된 합동 결혼식장의 들러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 추운 걱울 날씨에 서울까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올라온 것이 아니라 관광 버스를 태워주고 식사를 대접하니까 노인들은 서울까지 올라와서 문선명 교주의 이용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 미혼남녀 전도를 하는 사람에게 한 명당 10~15 만원씩 상금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 교인들은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며 이 엄청난 거짓된 통일교 합동결혼식 행사를 위하여 재산을 바치고 헌금을 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돈을 찍어내는 기계가 아닙니다. 돈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통일교 교인들에게 재산을 갈취하여 2천 쌍도 되지 않는 합동결혼식을 3억6천만 쌍 합동결혼식이라고 주장하며 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문선명은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며 기독교 교인과 통일교 교인을 속이는 사기꾼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 합동결혼식 한 교인은 일생 동안 각종 행사에 매일 동원되어 활동을 해야 합니다. 매일 통일교 활동을 하기 때문에 가정생활은 무관심과 비참함으로 가정생활이 어렵고 힘들며 결국에는 파탄되는 가정도 있습니다. 통일교 교인은 각종 행사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거액 재산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치지 않으면 일생 동안 지옥과 같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며 불안과 공포 속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30년 동안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각종 행사를 주관했고 강의를 했으며 인원을 동원했던 저는 문선명 교주의 일회용 허세 거짓말 행사에 가증스러움과 치가 떨리는 심정입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행사에 지치고 가난한 가정살림에도 재산을 바쳐 헌금을 내야 하는 비극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1999년 2월 7일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올린 이후 지금까지 수 차례의 교구장 인사이동이 있었지만 저는 황선조 회장을 찾아 사정하지 않았습니다. 협회 김종우 총무국장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곽정환회장 도 1월 28일 이후 단 한차례 전화를 하거나 만난 적도 없습니다.

제가 대우받는 자리에 있으면 문선명 집단의 세뇌에서 깨어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저에게 닥치는 끊임없는 폭행 폭언충 격으로 심장병을 얻고 부당한 인사 고난 시련을 통하여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점점 정을 끊고 불신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이였습니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적인 문제와 문교주의 정체, 자녀들의 방탕한 모습과 1998년 1월 IMF로 말미암아 통일그룹이 부도 남으로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국민의 세금인 융자금 1조 7천억을 갚지 않고 전국 통일교 땅과 건물을 경매 처분을 피하기 위하여 통일교 유지재단에서 통일교회로 증여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합동 결혼식한 통일교 교인들을 속이고 지옥간 조상들을 1대부터 120대까지 천국에 보내준다며 거액재산을 착취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에게 죄를 용서해준다는 면죄부 탕감비 1200만원을 바치라고 하여 바쳤고 천국의 황제요, 재림주로서 통일교 교인들을 천국 황족 가족으로 입적 시켜준다고 통일교 교인들을 속여 1만6천달러(2100만원)을 바치게 하였다.

이외에도 매월 통일교 교인들은 십의 삼조 헌금을 바쳐야 하고 문선명 나라 건국기금 매월 17만원을 바쳐야 하며 각종 거액 재산 착취에 통일교 교인들은 자살, 이혼, 가정파탄 등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으로 매일 오전10시부터 통일교 교인들이 동원되어 저녁까지 통일교자금줄인 합동결혼식을 시키기 위하여 골목 골목을 누비며 영혼을 빼앗고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자칭 참 부모 재림주 문선명을 믿고 복종하며 합동결혼식을 해야만이 천국가고 가정천국을 이룬다고 주장하지만 제가 체험한 30년 빼앗긴 세월 동안 생생한 지옥 생활 이였으며 비극적인 한순간의 악연으로 잃어버린 30년 세월 이였습니다.

 

제 8절 비참한 현실의 벽을 넘어선 사투
 

비록 30년의 처절한 삶을 마감하는 결단을 내렸지만 저는 아직도 수돗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집에서 살며 기약이 없는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1층에서 아침저녁으로 수돗물을 틀어 사용하면 2층에 있는 우리 집은 그릇을 씻고 쌀을 씻다가도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식사 준비를 할 수 없습니다. 화장실도 물을 퍼부어야 되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5년 동안 물통에 물을 받아 놓고 사용을 했습니다.

안방은 여름에 비가 올 때면 언제나 비가 흘러내려 물통을 대어야 합니다. 저의 집은 마루에도 비가 흘러내려 물통 여러 개를 놓고 살았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천장이 높아 안방이나 마루에 있어도 성애가 끼고 마루 유리창이 얼어 유리창을 비닐로 막아야 했습니다. 봄이 되어 따뜻해질 때까지 문도 한번 열지 못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추운 겨울에는 제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이 집이 문선명 통일 제국 만큼이나 추운 동토의 집이었습니다.

겨울이면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는 난방이 제대로 안되어 저와 저의 가족들은 옷을 두겹 세겹으로 끼워 입고 자야 했습니다. 심장병에는 감기가 가장 무섭기 때문에 저는 잠바를 2개, 3개를 입고 밤마다 감기에 안 걸리려고 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저는 집에 올라오려면 대문을 들어와 'ㄷ' 자로 된 사각형 길을 와야 집 안으로 들어 올 수 있습니다. 'ㄷ' 자 길을 들어 을 때마다 저와 가족들이 큰 건물을 지을 때 쓰는 강철로 만든 'H Bim'과 비슷한 아슬 아슬한 길을 걸어 2충으로 올라 와야 합니다. 특히 밤에는 어두워서 몸의 중심을 잡고 걸어 올라오기가 어려워 위험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3번이나 지하실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아파트로 이사를 갔더라면 아내와 자녀들을 이토록 추위와 더위에 고생시키지 않고 비참하게 만들지 말았을 것입니다. 이 집은 정화조와 하수구가 바로 연결 시켜져 있어서 세면대 하수구에서 정화조 냄새가 1년 365일을 코를 찌릅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을 떠나 마음의 감옥과 가정생활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길만이 살길입니다. 고통스러운 이 집에서 이사를 가려고 하여도 지금까지 이사를 갈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경제적인 생활고로 가족들은 추위에 떨어야 했고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지옥 같은 집에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한 집은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수돗물이 잘나오고 방이 따뜻해서 조금 살 것 같습니다.

저는 통일 교회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매일 대학 병원에서 조제한 심장약을 아침, 저녁으로 먹고 생명을 이어 갑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기도와 약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이 땅에 태어나 성공과 좌절을 겪으면서 육신의 병고와 빼앗긴 생활로 인하여 비참한 심정 입니다.

문선명 통일교에 빠져 제 고향도 부모, 형제도 버렸습니다. 특히 늙으신 어머니 마저 병마에 시달려 1년 내내 병원에 계셔도 찾아보지 못하는 불효자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이 땅에서 뿌리 뽑는 것이 제 마지막 소망입니다.

저는 참으로 육신의 고통과 싸우며 이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는 그 날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통일교회의 충성꾼 이었던 저는 과천 통일교회 현직 목사직을 탈퇴하고 지옥 같은 통일교회를 탈출합니다. 그러나 저는 통일교회를 탈퇴하는 순간까지 과천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간절한 마음을 갖고 기도 드렸습니다.

저는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 두면 지옥 가고, 통일교를 떠나면 지옥 가는 것으로 믿고 살았습니다. 단 한번의 인연이 단 한장의 통일교 전단지가 30년의 청춘을 빼앗고 지옥 길 이었고 죽음과 같은 삶 이였습니다. 저에게 예수님만이 오직 구주요 성경만이 진리라고 기독교 성도들이 통일교 입교전에 저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26년 동안 제 아내는 문선명 통일교주의 잔인한 인사와 횡포에 불안과 공포, 긴장 속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 세상 천지에 저의 아내같이 알뜰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 한 방울도 아끼고 전기 한 등도 아끼며 근검 절약으로 살았습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청량리 경동시장에 가서 시래기를 줍고 배추 잎 버린 것을 주어다가 김치를 담아 먹습니다. 계란도 깨진 것을 사와 먹습니다. 쌀도 언제나 최하품만 삽니다. 저의 아내와 자녀들은 돈 600원을 아끼려고1시간이 걸리는 거리도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닙니다.

이렇게 피눈물 나게 알뜰하게 살아도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회 목사 아내로서는 살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고 26년 동안 지옥 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충성한 목사 아내의 처절한 생활입니다.

저는 제 아들, 딸에게도 2000년에 들어와 너무 많은 책망과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지울 수 엾는 상처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와 자녀들이 문선명 교주와 저 때문에 이렇게 마음의 지옥과 생활의 지옥에서 살게 된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까지 30년을 빼앗긴 세월 속에서 억울한 생지옥에서 살아온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저의 아내와자녀들에게 억지소리를 하는 때가 많습니다. 저는 자녀들에게도 "음식을 사먹지 말라", "음료수도 사 먹지 말라", '학교도 버스비만 가지고 다녀라" , "등록금도 벌어 가지고 써라" 등 간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녀들에게 하곤 합니다. 자녀들은 안 쓰고 안 먹고 친구도 안 만나고 피눈물나게 사는데도 걸어 다니라고 하고 온갖 고통을 자녀들에게 주어 자녀들이 눈물 흘리는 때가 많습니다.

모든 근심걱정 염려를 제가 한다고 해결 되겠습니까? 주님께 맡기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고 푯대를 향해 달려 가노라고 했던 사도 바울 같이, 통일교 궤멸을 위해 엘리야와 스데반 집사와 같은 심정으로 문선명 집단과 싸워 승리하겠습니다.

 

제 9절 저는 하나님 뿐 아니라 아내와 자녀애게 죄인 입니다.
 

그 동안 저의 아내는 근검 절약을 하여 모았던 돈을 3남매 교육비와 생활비로 모두 써 버렸습니다. 그래서 3남매 자녀들의 대학 학비를 빚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졸업 무렵엔 저의 딸이 문방구에서 종이와 재료를 사다가 장미꽃을 만들었습니다. 손이 얼어서 마루에서 난로를 피워놓고 그 추운 겨울에 손을 불에 녹여가며 하루 종일 손으로 장미꽃을 만들었습니다. 저의 딸은 새벽까지 장미 꽃다발과 장미 바구니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장미 꽃다발과 장미 꽃바구니를 들고 집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서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두딸이 꽃팔이 소녀가 되어 "꽃 사세요!" 라고 외쳤습니다.

K대학교 졸업식에도 꽃을 팔러 갔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장미 꽃다발과 꽃 바구니를 만들어 놓은 것을 저는 학교 앞에 딸들과 같이 갖다 주고 돌아왔습니다. 딸들은 그 곳에서도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고 손을 불어가며 꽃을 사라고 외쳤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와 같이 딸들이 만든 꽃을 가지고 두 딸과 같이 D대 졸업식장에 가서 학생들과 학부형들에게 꽃을 팔았습니다. 통일교 목사가 대학교 졸업식장 앞에 가서 "꽃을 사세요"하고 몇 시간을 외쳤습니다.

저의 딸들은 사회 경험을 하기 위하여 꽃을 만들어 졸업식장에서 꽃팔이 소녀가 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친 것이었습니다. 저의 딸은 지금도 매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서 아끼느라고 학교에서 점심을 굶으면서도 부모에게 옷을 사주고 고기를 사주며 동생들에게도 정성을 베품니다.

저의 아내는 목사 사모지만 아침에서 밤12시까지 파출부 일과 식당 일을 합니다. 저의 아내와 딸은 주택가 대문 앞에 버려진 음료수 병과 신문을 들고 집으로 들어와 모아 놓았다가 많이 모아지면 폐휴지 수집소에 가져가 팔아서 생활비로 보태고 있습니다.

제가 넉넉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가운데 폐품을 수집하여 팔아서 생활에 보태 썼다면 검소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나 저의 가족들은 알뜰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버린 쓰레기, 폐휴지를 모아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적당히 아부하고 또 목회를 열심히 하면 교회가 부흥되어 안정된 이단 집단생활이 되겠지만 저는 예수님 이름만이 나의 구주요 성경만이 진리라고 내 마음속에 각인 되었기에 거짓된 부자보다 가난을 선택 하였습니다.

 

 

제 21 장 목숨을 건 문선명 통일제국 탈출

 

제 1절 "준철아, 붉은 통일교 감옥을 탈출하라."


저는 1996년 3월 17일 날 새벽에·꿈을 꾸었는데'우리나라 지도가 제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러더니 지도가 우리나라 땅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 대 지진이 일어나 산과 들, 집이 땅이 갈라지면서 땅 속으로 들어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갈라진 땅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너무나 놀라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 하였습니다.

제 앞에서도 길이 갈라지고 산이 갈라져 길 가던 사람들이 땅 속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순간 어찌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는데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빨리 네가 있는 그 자리에서 탈출하라."

저는 땅이 갈라지고 수많은 사람이 땅 속으로 사라져 갈 때 극적으로 몇몇 사람들과 같이 갈라진 땅 속에서 결사적으로 기어 나와 산으로 피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의 명령 때문에 수많은 통일교 교인이 고통 당하고 처절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을 꿈에 본 것입니다. 저 자신도 통일교회에서 몇 몇 통일교 교인들과 같이 탈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저에게 1998년 1월 IMF로 통일그룹의 부도로 통일교 기업체가 국가로 넘어가고 몰락할 것과 한국 경제의 파탄으로 IMF가 올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꿈이 시련과 고통,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회를 탈출하라는 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통일교회를 떠나야지' 하면서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때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일교회를 탈출 했다면 제 모든 환경이 달라져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1999년 2월 10일 밤에 또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끝없는 모래사막을 기진맥진하여 가고 있었는데 제 앞에 사각형의 높다란 담을 두른 강철 쇠로 만든 집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밥을 얻어먹고 물을 마시기 위하여 쇠 대문을 통과하여 쇠로 된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쇠문 밖에서 키가 2미터 정도 되는 검은 사람이 쇠문을 잠가버렸습니다. 저는 쇠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밖으로 탈출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은 탈출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 쇠 집을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사각형 안에 갇힌 사람들을 총 지휘하는 붉은 옷을 입은 저 사람의 사슬을 벗어나야 한다" 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였습니다. 저를잡으려고 문선명 교주가 쫓아왔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붉은 쇠 감옥에서 저를 잡으려고 쫓아온다는 것은 사단 마귀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 때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사이비 교주로서 수많은 영혼을 죽이는 지옥으로 끌고 가는 영적 살인마" 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준철아, 너는 빨리 통일교회를 탈출하라. 그 길만이 네가 살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순간 죽을힘을 다하여 쇠로 된 높은 담 장을 기적같이 뛰어넘어 탈출하였던 것입니다.

심장판막증, 심부전증, 담석증, 불면증, 위장장애 등으로 호흡이 곤란i고 계단을 잘못 오르 내리며 사경을 헤매는 저는 어디에서 힘이 솟았는지 다윗과 같고 여호수아와 같은 힘과 용기가 넘쳐 났던 것입니다.

기진맥진 하였던 제가 아니라 이제는 힘이 넘치는 박준철이 되었습니다. 꿈에 사막을 가로질러 도시에 가서 수많은 사람에게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교주에게 받았던 박해와 통일원리의 비 진리성을 놓고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문선명이 제 꿈에 나타날 때마다 "뜻을 위해 일 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를 지금까지 그토록 많이 칭찬해 주고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며 축복한 가짜 재림주 문선명은 그 동안에 저를 통일교회에 끌어들여 이용만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문선명 교주의 세뇌교육에 영혼까지 노예가 되어 살아왔기 때문에 문선명 교주는 저를 이용 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 부모로 믿고 절대신앙, 절대복종, 절대사랑으로 충성할 때는 문선명 교주가 꿈에 나타날 때마다 "네가 최고다" 라고 칭찬 하였습니다.

이제는 제가 문선명 교주에 대한 믿음이 없고 '통일교 목사직을 버리고 탈퇴하여 통일교 궤멸운동을 해야지' 이런 생각을 했을 때 문선명 교주는 저를 붉은 감옥에 가둬놓고 탈출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저를 잡으려고 그토록 역사 하였던 것입니다.

2000년 2월 13일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잠실 체육관에서 4억쌍 1차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저는 과천 노인들을 관광버스 4대에 모시고 거짓된 핵사에 동참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이 되겠다고 노인들이 서명한 것도 아니요, 통일교 교인도 아니며, 합동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아닌데 신랑, 신부로 위장하기 위하여 하얀 목도리 1개씩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문선명은 자기 교세를 과세하기 위하여 언제나 40년 동안 허세를 부려왔습니다.

통일교회는 대외적으로 교인이 많은 것처럼 홍보하지만 안에는 교인들이 텅텅 비어있습니다. 전국 통일교회 교인 전체가 3만 3천 명 재적이고 예배인원은 1만 7천명입니다. (학생포함) 큰 기독교회 한곳의 20분의 1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협회본부 안호열 기획국장은 "통일교 재적인원이 20만명 이며, 예배인원은 재적인원의 10분의 1인 2만명이 통일교 전국 한 주일 예배인원이다" 라고 2002년 7월 12일 서울지방 검찰청 조사실에서 주장하였지만 거짓입니다.

일본에 통일교 교인은 2만명에 불과한 것을 3백만명 이라고 허위 주장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그의 제자들은 언제나 합동결혼식 숫자나 예배 재적 행사숫자를 허위로 부풀려 대외적인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4억 쌍 1차 합동 결혼식은 실제로 신랑과 신부는 극소수 였습니다. 전국에서 끌어 모은 노인들 10만 명은 신랑, 신부가 아닙니다 전국의 노인들을 관광버스에 태워 서울 구경과 식사 제공 및 선물을 제공하기 때문에 참석한 것입니다.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는 각지역 노인정 노인들을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단 한번의 만남으로 노인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이 이용물이 되고 통일교(가정교회)에 입교 하여 영혼을 빼앗기고 지옥길로 끌려 가는 것입니다.

 

 

제 22 장 통일교 과천교회 박준철 현직목사 탈퇴

 

기자회견 54가지 비리폭로

 

제 1절 문선명의 정체와 통일교 비리폭로


저는 드디어 2001년 1월 9일 과천통일교회 현직목사로 있다가 기독교 회관에서 가짜 사이비 참부모 재림주 문선명 교주를 만천하에 고발하면서 탈퇴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박준철이라는 한 인간의 출생과 파멸은 문선명 교주와 만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일순간의 악연으로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세뇌되어 재림주 참부모로 믿고 빼앗긴 30년동안 목숨을 바쳐 폐인이 될 때까지 충성하며 지옥생활을 했던 것을 세상에 고발했던 것입니다.

저는 「빼앗긴 30년, 잃어 버린 30년」책을 통하여 문선명의 정체, 피가름 의식, 혈통복귀 구원의식, 합동결혼식의 비극, 문선명의 사생아 등 합동 결혼식후 통일교 한가정당 1억씩을 착취하는 문선명 교주의 잔악상, 통일교 제국의 실체를 테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공익을 위해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를 방지하기 위해 세상에 폭로해야 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탈퇴기자회견을 연기 할 수 없었습니다 탈퇴준비를 했던 것을 마침내 결단하고 통일교 실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던 것을 일간지와 기독교방송, 기독교 언론 40여 곳을 통하여 2001년 1월 9일부터 2003년 1월 9일까지 900회에 걸쳐 낱낱이 문선명의 정체와 통일교의 비리를 폭로하였습니다.

1200만 기독교 성도들이 문선명 집단에 대하여 이단이라고 제쳐둘 것이 아니라 경각심을 갖고 통일교 궤멸을 위하여 1200만 기독교 교인이 하나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궤멸 하기를 바라고 목숨을 바쳐 통일교 실체를 보도 하였습니다.

저는 1999년 10월 1일을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에서 탈출할 날로 정했지만 제 마음이 약하여 자꾸만 미루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과천교회에 올라오는 즉시 탈퇴할 준비를 하였지만 뜻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번번이 시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혼자라도 탈퇴하여 문선명 통일교 궤멸을 위해 외쳐야 한다는 절박감에 통일교를 탈퇴하여 홀로 외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저의 지팡이가 되 주셨고 저의기도를 들어주시고 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문선명이 인류 역사에 없는 사악한 영혼 사기꾼으로 고발합니다 문선명은 선량한 사람들을 끌어다가 합동결혼식을 시켜놓고 천국 가는 면죄부라며 1억원씩 받고 헌금이라는 미명하에 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거액재산 착취 때문에 자살, 이혼, 가정불화, 처절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극적인 삶입니다. 문선명을 믿고 복종하며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하면 구원받고 가정천국을 이루고 천상천국에 간다고 세뇌시키고 있지만 지옥생활이 바로 통일교 생활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하루라도 빨리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합동 결흔식은 파멸과 죽음, 생지옥과 같고 가난한 결혼생활이 되며 문선명 교주는 영혼 사기꾼이라는 것을 세상에 고발했어야 했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재산 착취범이라는 것을 준비부족으로 세상에 늦게 고발한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갈라디아 1:8 '다른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통일교 문선명 이단집단을 이단사이비집단이요, 문선명은 적그리스도라고 매일 이웃집에 전해주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만 통일교가 이단 사이비집단이라고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 성도가 저에게 단 한번이라도 "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요 사이비 교주" 라고 말해 주었다면 저는 통일교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마음속으로 통일교가 이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씀으로 소리 내어 이웃집이나 만나는 사람마다 통일교는 이단 집단이라고 외쳐주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매일 "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요 사이비 교주" 라고 외치지 않으면 박준철 목사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통일교회에매일 매시간 전도되어 영혼을 빼앗기고 지옥으로 끌려 갈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문선명 집단을 궤멸하여 주십시오.

제가 세뇌된 다음에 통일교가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는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요,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 라고 기독교 성도들이 매일 외쳐서 통일교회에 빠지지 않도록 영혼을 구원해야 할것입니다.

 

제 2절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통일제국의 정체폭로


2001년 1월 9일 15:00시(오후 3시), 한국 기독교회관 2층 예배실에서 통일교 현직 박준철 목사의 탈퇴성명서 기자회견문

 

2001년 1월 9일,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기자회견문. 국민일보, 기독교TV(ch 42), 기독교방송, 극동방송, 크리스찬뉴스위크지, 교회연합신문,한국선교신문 특집보도, 기독공보, 기독신문, 개혁공보 연재, 기독교보, 기독타임스 연재, 기독교 타임스, 장로신문, 침례신문, 크리스찬연합신문, 크리스찬한국신문, 복음신문, 크리스찬신문, 목회자신문, 선교신문, 들소리신문, 뉴스앤조이, 크리스찬데일리뉴스(CDN), 기독교연합신문, 기독교신문,교회와신앙, 현대종교 등 그 외 기독교 모든 교단지와 모든 초교파지에서 문선명 집단 궤멸을 위해 언론사 관계자님께서 사명감을 가지시고 적극적으로 보도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 문선명은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거 역했다.


하나님께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말씀 하였는데,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자신이 인류의 구세주 재림주 참 부모라고 하며 통일교 교인들 앞에 신으로 군림한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은 하나님 이름을 이용하여 기독교 교인들과 통일교 교인을 속이는 최고의 자칭 신이요, 인류역사에 가장 큰 살아 움직이는 우상이다.

 

2. 문선명은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거 역했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경배하지 말라" 말씀하였는데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이 자신에게 경배하게 하는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우상이다. 통일교 교인들은 문선명 사진을 걸어놓고 아침 · 저녁으로 경배하며 예배 때 마다 문선명에게 경배한다 또한 문선명은, 17살에 교통사고로 죽은 문선명의 아들인 문흥진을 천국과 영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문흥진이 재림 부활했다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주장하며 미혹하여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다.

문선명의 청평 천성 왕림 궁전 주위에는 참 생명과 희망을 주는 다섯 나무와 생명수가 있다. 그리고 문선명은 자칭 하나님이 세웠다며 천신 수나무를 만들었다. 사랑나무(수양버들나무), 심정나무(뽕나무), 만물나무(밤나무), 충성나무(소나무), 축복나무(잣나무) 등이 다섯 나무에 속하고, 통일교  교인들은 이 다섯나무에 경배하고 기도한다.

문선명은 일본 천지종교 대만 불교와 하나되어 우상숭배를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 때 마다 불교 스님이 염불을 외우고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우는가 하면 힌두교, 회교, 유사 사이비종교 지도자를 합동 결혼식장에 모아 하나님에게 우상 숭배자 총대회를 한다. 그것이 바로 문선명이 하나님의 대적 원수라는 증거이다.

 

3. 문선명은 십계명의 셋째 계명을 거역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말씀하였는데 문선명은 스스로를 참 부모, 천지부모, 재림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었다. 따라서 문선명은 적그리스도이며 희대의 영혼, 육신을 빼앗는 사기꾼이다. 문선명은 자신과 통일교 교인을 속이고 온갖 무당, 푸닥거리를 하여 스스로 이단 사이비임을 증명하였으며 통일교 교도들을 지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4. 문선명의 통일교 원리강론은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 교리를 훔쳐온 것이다.

 

문선명은 16세(1935년)때에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인계를 받아 재림 주님으로 세워 졌다고 통일교인들에게 강조한다. 그러나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참 부모도 재림주도 아니고 사악한 거짓 선지자다.

문선명은 1939년 경성 상공 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을 하였고 1941년 3월에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고등학교 전기과에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2년후 중퇴 하였다. 1944년에는 한국에 귀국을 하여서 토목 건설회사 전기기사로 취직을 해 있다가 1945년 10월에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에서 성서신학과 기독교 근본원리 교육을 6개월 받고 탈퇴하여, 문선명 자신이 김백문과 같이 사이비 교주 노룻을 하기 위하여 통일교를 만들어서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 교리를 훔쳐온 것이 통일교 원리강론인 것이다. 이런 통일교 원리강론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새로운 진리요, 성약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문선명은 거짓말쟁이다.

문선명이 김백문 교리를 도용하여 재림주 행세를 하듯이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탈퇴한 정명석(JMS)이 통일교 교리를 이용하여 30개론을 만들었다. 정명석은 문선명과 똑같이 사이비교단을 만들어 문선명과 같은 재림주 노릇을 하며 수많은 영혼을 빼앗고 피가름 의식을 치르며 합동결혼식을 하여 교세확장을 꾀하고 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 밑에는 또 다른 사이비 교주 생산공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문선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거짓말이다. 이스라엘 수도원 사이비 교주 김백문의그 교리를 훔쳐 기독교 근본 원리 교리를 6개월 동안 교육받은 문선명이 도용한 것이 사악한 사이비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창조원리, 타락론, 복귀원리, 재림론까지 김백문 교리와 동일하며 원리강론은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고 복종하여 영원한 노예로 세뇌 시키기 위한 것이다.

 

5. 문선명 교주가 메시아요 참 부모라면 자녀들은 통일교 원리에서 주장하는 4대 죄인 원죄, 혈통죄, 연대죄, 자범죄가 없어야 할 것이다.

문선명 자녀들은 죄가 없는 완벽한 인격자가 태어나야 하는 것인데 결혼한 자녀들이 음란죄, 간통죄, 마약 등 온갖 죄를 짓는 것을 볼 때 문선명은 가짜 재림주, 적그리스도, 가짜 부모인 것이다.

(미국 CBS TV방송, KBS 위성TV(2000.09.02방송) - 문선명의 큰아들:문효진과 홍난숙 부부의 결혼, 이혼, 마약, 음란, 파경프로 1시간 방송함)

 

6. 문선명은 이 시대 최고의 혈통복귀 피가름광이요, 가정 파괴범이다.


문선명의 원리 강론 교리는 음란죄, 혈통복귀 피가름 죄를 가장 큰 죄로 강조한다. 그러면서 자신은,혈통복귀, 피가름 역사로 첫번째 부인인 최선길과 그의 아들 문성진을 버리고 이혼하였다. 문선명 교주는 수많은 여인과 간통을 했다.

문선명은 혈통복귀 피가름을 통한 혈통 복귀 원리의식으로 지금까지 처녀와 유부녀를 간음하여 개인과 가정을 파괴시켰다. 이렇게 문선명의 혈통 복귀 의식으로 낳은 자녀만도 18명으로 밝혀졌으며 이것은 문선명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을 저질렀는가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문선명은 천사장 루시엘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이 지의 뿌리가 아니라, SEX로 타락한 것이 선악과요 지의 뿌리이기 때문에 문선명 재림주가 SEX로 타락한 인류를 SEX로 복귀 해야된다는 혈통복귀의식 즉 피가름 의식을 행해야만 구원받고 천국 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선명은 인류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처녀들과 유부녀들은 3일 행사인 혈통복귀 피가름 의식을 치러야 완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여 3일 의식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피가름, 혈대교환, 혈통 복귀 의식으로 3일간 간음, 간통 의식을 치러 수 많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을 간통하여 사생아를 낳고 가정을 파괴하였던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1953 년 12월 24일 밤부터 부산영도 신성묵과 유신희 부부 집에서 21일 동안 부흥집회를 하였다. 부흥집회를 하는 첫날밤에 Y대 여대생 김영희와 혈통복귀 피가름 혈대 교환의식을 통하여 장래가 촉망 받는 여대생의 인생을 파멸시켰다.

그 외에도 문선명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을 혈대교환 의식으로 희생시켜 인생을 파멸시켰고 수많은 가정을 파괴시켰다. 문선명 교주는 희대의 가정파괴범, 패룬범으로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를 통한 혈대교환 혈통복귀로 간음하였으며 하나님도 사탄도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이다.

그 외에도 6~60마리아와의 혈통 복귀의식을 치렀으며, 수많은 가정을 파괴시켰다. 문선명은 현재 부인인 한학자와 1960년 4월 11일 문교주(40세), 한학자(17세)에 어린양 결혼잔치를 하고도 1965년도에 최순주 처녀와 간음혈통 복귀의식을 하여 '박사무엘' (박준경)이라는 사생아를 낳아 길렀다. 미국에서도 간음 혈통 복귀의식으로 '새미' 라는 사생아를 낳아 문선명이 기르고 있다.

 

7.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지옥간 조상귀신을 위해서라며 거액 헌금을 받고 천국행 면죄부를 팔고 있다.

 

그러나 문선명은 자신의 전처인 아내도 전도하지 못하고 이혼하였으며,자식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이비 적그리스도이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에게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서 지옥간 조상들 천국행 표를 사라고 명령하고 천국행 표를 팔고 있다. 1대부터 7대까지는 남편과 아내 직계조상 280만원, 일본축복 가정은 2,000만원, 7대부터 14대 조상, 14대부터 21대 조상까지 일정헌금을 내야 되고 120대 조상까지 천국행 표를 팔고 있는데 특히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에게 조상을 팔아 거액재산을 착취하는 행위를 즉시 중단 시켜야 할 것이다.

문선명은 인류역사에 가장 부도덕한 개인 가정 파괴범이다.

 

8. 문선명 교주는 참가정 순결 운동본부를 만들어 초 · 중 · 고등학교 순결 캠페인을 하고 있다.

 

문선명이 자칭 재림주, 참 부모라면 가장 순결하고 깨끗해야 될 메시아데 오히려 그렇게 수많은 여인들과 혈통복귀 피가름 관계를 갖음으로 하나님, 기독교인, 통일교회와 교인을 속였다.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통일교 교리는 순결을 가장 강조하면서 간통죄를 가장 큰 죄로 여긴다. 그것은 단지 문선명 교주의 교활한 위선이요, 거짓된 행위인 것이다.

통일교 세력확장과 전도 활동목적으로 순결캔디를 학생들에게 먹이며 순결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거짓된 혈통 복귀의식을 감추기 위해 통일교 교인들에게는 음란죄를 가장 큰 죄악으로 교육을 하고 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참으로 가증스러운 사람이다.

 

9.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거액 재산착취의 수단이다.


통일교는 합동결혼식을 하면 구원을 받고 자녀들도 원죄, 혈통죄, 연대죄, 자범죄가 없어진다고 했지만 통일교 교인들은 여전히 죄가 남아 있고 구원받지 못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집단에서는 필리핀, 태국 처녀들을 1천 만원을 주고 데려와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이다. 합동 결혼식 후 7천만원~l억원의 거액 재산을 바쳐야 한다. 통일교 교인들이 문선명 교주에게 내야하는 헌금으로는 죄를 용서해준다는 총 탕감비 1200만원이 있다.

또, 통일교 교인은 문선명 교주의 참 아들 딸이기 때문에 자기 재산을 참부모인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 소유권 이전이라는 뜻의 총 생축 헌금 2100만원, 나라를 위한 구국 헌금 1천만원(성인 6인 가족기준), 지옥간 조상 천국 보내는 헌금 3300만원, 천성 왕림 궁전헌금 320만원, 문선명 비행기 헌금100~1000만원, 병원헌금 160만원, 구국헌금(5인 가족기준) 800만원, 문선명 나라 건국헌금 매월 1인당 17만원, 매월 10의 3조 헌금, 8대 명절헌금, 각종 교회 행사헌금 등 30가지가 넘는다.

따라서 전 재산을 바치고도 빚 더미에 올라 앉은 것이 비극적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인들의 처참한 생활이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 후 일생 동안 천국이 아니라 생지옥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또 합동결혼식 후 문선명을 믿고 복종을 하여도 구원이 없다. 나는 통일교회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눈 감으면 지옥 갈 문선명이 전용비행기가 왠 말인가?

 

10. 문선명은 한국과 일본에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에게 전용 비행기 헌금을 강요하여 2000년 2월 10일에 전용 비행기를 5천만달러에구입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 그룹이 1998년 IMF 때 부도나 멸망하였는데도 통일교 교인 들에게 거액의 재산을 착취하여 초호화판 생활을 하고 있다. 게다가 81세나 되는 문선명 교주는 불쌍하고 가난한 통일교 교인들에게 가정당 100만원에서 1000만원씩의 헌금을 거 두어 전용비행기를 샀다.

과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81세 노인이 통일교 교인들의 피눈물 어린 헌금으로 전용 비행기를 사야만 했는가? 또한 문선명은 각 나라마다 초호화 주택과 최고급 자동차를 구입하여 온갖 호의호식을 하면서 제왕처럼 살고 있다.

통일교 교인들은 피골이 상접하여 죽어가는데도 문선명은 교인들에게 공갈 협박을 하여 거액 재산을 착취하고 문선명의 제국을 세워야 하는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불쌍하고 가련한 처지를 이해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와 통일교 교인들과 더불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교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문선명은 입으로는 사랑과 희생, 봉사, 제물을 외치지만 불쌍한 통일교 교인들의 처절한 피, 땀, 눈물을 먹고 사는 사악한 사이비 교주일 뿐이다.

 

11. 문선명은 자칭 황제 재림주 참 부모라면서 자녀 신앙도 책임 지지 못하는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의 자녀들은 4가지 죄가 없다는데 오히려 그들은 마약, 혈통 복귀 피가름, 이혼,간통으로 타락하여 감옥을 가는 현실이며, 이 세상의 죄인들 보다도 더 많은 죄를 지었다. 그것은 문선명이 자신도 구원을 받지 못한채 죄악을 저질러 하늘에 죄가 닿아 자녀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다.

 

12.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통일교 목사들의 목숨은 하루살이같은 일회용이다.

 

반면에 통일교 목사들은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수 십명에서 백 여명의목사들이 매년 생활고로 목회를 그만두고 통일교회를 이탈하고 있다.

2000년 1월 이후부터 9월말까지 목회를 그만 둔 목회자만도 전국 시 ·군 250명 목회자중 150명이 넘는다.

게다가 전세계 각 나라의 대표자가 되는 국가 메시아 185명을 문선명 교주는 목사 직분을 박탈하고 한국의 시군구 연합회장이라는 직분을 주어 각나라 국가 메시아직에서 박탈시켰으며 월급 50만원씩을 받게하여 가정 생활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2000년 9월 18일에는 전국의 통일교 목사직을 박탈하는 살인적인 인사를 행하였다. 통일교에 충성한 한국 40~60대 목사 217명의 목사직분을 문선명 교주는 박탈하였다. 전국 시군구 통일교 목사가 250명인데 217명이라면 거의 전체 목사들을 파리 목숨같이 짤라 버린 것이다.

통일교 목사들은 일생동안 문선명 교주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아내와 중 고 · 대학생인 자녀들을 데리고 교육비와 생활비, 퇴직금 10원도 받지 못하고 쫓겨 났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개인의 인격과 가정의 행복을 빼앗았다 현재 전국 통일교 목사들은 배신과 분노, 자괴감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인사단행은 예전에도 심심치 않게 이루어졌다. 1981년 10월 20일에 전국 통일교 목사들을 잔인하게 내쫓았고 1988년 6월에도 잔인한 인사이동으로 통일교 목사들의 가정을 파탄시켰으며 1991년 8월 30일에는 전국 통일교 전체 목사 500명을 사전에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단칼에 잘라버렸다.

문선명은 자신에게 충성한 목사들을 상대로 인권말살, 가정파괴, 생활파괴를 한 것이다.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들 가정은 생활을 해야 했는데 문제는 이들 중 중 · 고 · 대학생 의 자녀와 있으며 결혼을 목전에 두고 있는 자녀들이 있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데도 문선명 교주는자신에게 30년간 충성한 통일교 목사들에게 퇴직금 10원도 주지 않고 잔인하게 쫓아내어 버렸던 것이다.

인류 역사에 '네로 황제 , '히틀러' , 어떤 공산주의자도 문선명 교주처럼 이렇게 잔인한 종교 지도자도, 파괴자도 없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그 죄악과, 문선명 교주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3. 잔인한 사이비 교주 문선명은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그룹 내 통일교 회사의 교인들에게 말 한마디 명령으로 100억, 1000억의 거액 헌금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통일교 목사들을 몇 번이나 단칼에 무 자르듯 잘라 버리는 잔인한 폭군이다.

 

하루아침에 가정천국을 외치는 문선명 교주가 통일교 목사들 가정과 통일교 교인가정의 행복추구권을 박탈 시켜 버리는 행위는 참부모가 할 행위가 아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일회용으로 이용당하고 버림을 받았다. 통일교회를 탈퇴한 목사와 교인들은 문선명 교주에게 빼앗긴 세월을 한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문선명은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 또한 문선명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14. 문선명 통일제국을 세우기 위해 각분야 지도자를 포섭하는 행위를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막자.

 

문선명은 통일교인들의 피살을 짜서 정치인, 경제인, 교수,종교인, 언론인을 매수하였다. 그들을 매수하기 위해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통일교 48년 역사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통일교 교인들의 피·눈물을 짜서 각종 국제회의라는 구실로 왕복 항공편,호텔, 각종 만찬, 선물 비용 일체를 받았음은 물론 문선명 본인의 야망과 욕망인 메시아로 인정을 받기 위해 돈을 물 쓰듯이 투자하였다. 통일교 교인들이 장사와 온갖 노동, 파출부 일로 거액 헌금을 하면 문선명은 그 헌금을 물쓰듯 하며 자신을 참부모 재림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와 생활고로 자살하고 가장 파탄이 된 통일교 교인들을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문선명의 죄악은 하나님에게 이미 보고되어 있어서 심판 받을 날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15. 문선명의 아들 문흥진이 17세에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영계의 총사령관으로 해놓고 예수님도 시중을 드는 부하라고 주장하여 기독교를 희롱하고 있다.

 

1200만 기독교 교인은 예수님을 믿고 성경진리를 믿는다면 문선명의 정체를 알고 예수님을 명예훼손죄로 고발하여 사법조치를 해야할 것이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에게 교통사고로 1984년도 1월 2일날 죽은 둘째 아들이 희생의 제물로 간 것이라고 거짓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죽은 문흥진을 통일교 교인들은 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문선명은 지금 청평에 천성 왕림 궁전을 건축해놓고 문흥진을 영계의 총 사령관이라며 살아있는 통일교 처녀와 영혼 결혼을 시켜 놓았다. 참으로 이 지구상에 이런 사이비 집단이 있다는 것을 1200만기독교 성도들은 경각심을 갖고 통일교를 대처해야 할 것이다.

 

16. 문선명 사이비 집단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에게서 공갈 협박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불어넣어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다.

 

1대~120대 지옥에 간 조상을 천국에 보내는 구원헌금으로 무조건3,300만원~5천만원의 거액 재산을 빼앗는다.

 

17 문선명 교주의 하수인 사이비 정치 지도자들을 낙선시키자.


문선명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이 낙선시키자.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의 각종 만찬, 세미나, 남북통일운동, 승공연합, 훈독회 행사장에 참석하여 문선명 교주를 참 부모, 재림주, 구세주라고 격려사, 축사, 극찬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1200만 성직자,성도들이 전국 시 · 군 · 구에서 총궐기 하여 낙선 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18. 문선명은 중풍으로 죽은 혼순애 장모까지 대모라고 칭하여 재림했다고 사기치는 사건.

 

문선명의 장모는 중풍으로 쓰러져 10여 년을 주위사람이 대 ·소변을 받아내야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였다. 문선명은 장모가 죽자 홍씨 대모님이라고 큰 칭호를 내리고 재림하였다고 통일교 교인들을 속이고 있다. 또한 이상길 통일사상 연구원장이 사망하였는데, 이상길이 '하나님의 사자' 라고 하며 통일교 세뇌교육에 이용하고 있다.

 

19, 문선명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는 기독교 목사를 근절하자.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에서는 통일교회의 모든 자금을 투입하여 모든 항공료 ·왕복 차비 ·호텔비용 일체를 부담하며, 기독교 목사 장로를 포섭하고 있다. 통일교 각종 만찬 세미나, 행사장에 참석하여 문선명을 참 부모 재림주로 극찬하는 성직자와 성도들을 회개시키고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것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막대한 자금투자로 만든 기독교 목사·장로 ·종교인 포섭단체

①초 교파 기독교 협의회 회장인 이재석은 문선명의 최초36가정 이며, 핵심 인사이다.

② 한국 8대 종교인 협의회 회장 이재석.

③ 한국 민족 종교 협의회 회장 이재석.

④ 한국 종교 지도자 협의회 회장 이재석.

⑤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 회장 이재석.

⑥ 세계평화 초종교 연합 회장 곽정환(통일교 이인자).

⑦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 회장 곽정환.

⑧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총회 총회장 김광명,

⑨대한예수교장로회 총화총회 총회장 이병옥 등이 통일교에서 세운위장된 기독교 단체이다.

 

20.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각종 만찬, 세미나에 참석하는 언론인.학계 · 문화계 인사들을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이 추방시키자.

 

21. 한국방송 언론의 공익을 위한 것이라면 문집단의 비리를 고발 보도하라. 매일 희생자가 늘어가고 있다.

 

각종 언론 방송에서 통일교 교리비판, 부정부패, 재산착취, 우상숭배, 가정파괴 행위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다시는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22,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 이주계획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IMF때 통일그룹 부도 후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 3만 5천명을 남미 브라질 자르딘에 1억 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만든 새 소망 에덴동산으로 이주할 것을 계획한때도 있었다.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에 초 · 중 · 고 · 대학은 이미 건축 완공을 하였으며, 주택을 건축 중에 있고, 앞으로 50억 평을 더 매입 할 계획이다. 그 50억 평에서 통일교 교인들은 후손 대대로 문선명의 노예가 되어 밀림을 개간하고 농업, 어업, 산업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또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일교인들은 전 재산을 바쳐야 할지도 모른다.

 

23. 문선명 통일교 집단은 세계 각 도시, 건물, 대지를 매입하는데, 금융감독원과 검찰에서는 철저히 조사하여 외화 밀반출 여부를 조사해야 할 것이며 위법을 하였다면 사법조치를 내려야 할 것이다.

 

24. 문선명 통일교 사교 집단은 1998년 IMF직후 통일그룹이 1조 7천억 은행빚을 갚지 못하고 부도되어 파산했을 때 전국 통일교회 대지와 교회,재단을 분리시컥 국민의 재산을 빼돌렸다.

 철저하게 사법부에서 조사하여 위법을 하였다면 종교법인을 박탈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25. 문집단의 청평천성왕림궁전의 의혹을 환경단체는 조사하라.


문선명 사이비 집단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중림리에 1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청평 천성 왕림궁전이라는 건축물을 지어놓고 매주 5천 명~l만 명의세계 각지에 있는 통일교 교인들을 모아서 우상숭배, 세뇌교육, 재산착취, 공갈협박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통일교 교인들은 매주 수 천명이 모여 집회를 하면서 대 · 소변을 보느라고 수도 서울 시민의 식수원을 오염시키고 있다. 환경부와 환경단체는 철저히 조사하여 위법한 사실이 있으면 건축물을 철거하고 사법 조치해야 한다. 통일교 제주 영빈관이나 수택리 영빈관도 조사하여 위법을 하였다면 철거해야 할 것이다.

 

26. 문선명 통일교 집단은 폭행 · 폭력 집단이다.

 

저자의 교회를 빼앗고, 강제 인사부정으로 교구장 직에서 끌어내렸다. 통일교 협회 국장 ·부장 ·평직원까지 수십명이 동원되어 내가 시무하는 서울 노원 교회 안에 밀고 들어와 노원 교회 교인들과 시위와 몸싸움을 했었다. 협회본부에서는 전 김승철 총무국장과 전 김철현 가정국장이 협회 전 직원들 앞에서 저자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하여 그 때의 후유증으로 지금 심장병에 시달리고 있다.

 

27. 저자 주위에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단의 살인적 재산 착취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처절한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가정파탄,별거, 이혼, 자살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가정 파괴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28.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자금줄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 그룹 부도 후에도 초호화 생활과 최고급 외제자동차, 궁전같은 각 나라의 저택을 구입하였다. 통일교 교인 가정당 3백60만원~l천 만원까지 거액 헌금을 거두어 2000년 2월 10일에는 5천만 달러를 주고 개인전용 비행기까지 구입하였다. 문선명 교주는 81살 된 노인이라 저녁에 자다가 아침에 못 일어나면 죽음을 맞아 영계에 갈 수 있는데 무슨 초호화 비행기 (5천만달러/한화 6백억)가 필요한가?

문선명이 그 동안에 지은 죄악으로 억만년 지옥 불에 들어가 살도록 하나님께 고발할 것이다. 통일교 교인들이 처절한 가난 속에서 막노동, 파출부, 식당 일로 모은 거액 헌금을 낭비하는 것이 문선명은 참 부모 재림주가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탄 마귀 사이비 교주라는 증거이다. 

 

29. 저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용서할 수 없다.

 

저는 30년 동안 세뇌되고 마취되어 죽도록 충성했던 잃어버린 그  시간을 찾을 수가 없다. 저는 더 이상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이용 당할 수 없고, 사이비 교단에서 충성할 수 없기 때문에 저의 양심에 따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통일 교회를 탈퇴하고 비리를 폭로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30.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세계 평화 통일당을 창당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그 동안에 각종 정치인들을 포섭하고 세뇌 교육을 시켰다. 문선명 교주는 "2천년 전 예수님이 나라와 백성이 없고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고 강조하면서 문선명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통일당을 창당한 것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최종목적이다.

 

31.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2004년 4월30일까지 전세계 185개국 통일교 교인 총 동원령을 내렸다.

 

대한민국을 통일 제국으로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 목적달성을 위해 통일교 합동 결혼식한 부인들은 전 재산을 바쳐야 되었다. 또한 남편과 초 '중 · 고 · 대학생 자녀를 집에 두고 가정을 떠나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합동 결혼식한 부인 1만 5천명은 전국 시군구에 있는 통일교회에 합동결혼식한 통일교 부인들이 20~70명씩 배치 되어서 목숨을 걸고 미혼남녀를 전도하고 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부인들은 교회에 매월 생활비로 각자 10 만원씩을 지불하며 생활하고 있다. 통일교회에서 합동결혼식한 부부들은 일생동안 각종 전도활동에 동원되어 부부가 별거하는 때가많다. 행복한 가정천국이 아니라 처절한 비극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32,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전국 시군구에서 범 기독교적인 통일교, 사이비종교 반대 뿌리 뽑기운동 귈기대회를 해야 한다.

통일교회 미혼남녀 합동결혼식을 하면 가정이 파탄되고 우상숭배를 하고 재산착취를 당하며 영혼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 통일교회와 사이비 종교 교리 비판과 피해자 폭로 대회도 같이 열어야 글다.

 

33. 세계일보는 통일교인들의 매달 50억 헌금으로 유지되는 적자신문.


문선명 통일교 대변지이며 방패막 역할을 하는 세계일보는, 매월 일본에서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꽃팔이, 생선장사, 막노동을 하여 모은 50억이라는 거액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 돈으로 세계일보 1,200억 융자금 이자를 지불하고 세계일보 사원들의 월급을 주고있다.

세계일보는 통일그룹 부도 후에 6개월 동안 월급을 못 주는 때도 있었다. 게다가 새계일보 기자 월급은 다른 신문사의 절반이다. 세계일보를 폐간하는 길만이 통일교 교인들을 재산 착취에서 해방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34. 문선명은 통일제국을 건설하지만 무너진 통일제국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그룹 부도 후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여 교회와 통일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금융감독원과 통일그룹 주 거래은행이 였턴제일은행은 통일교에 1조 7천억을 환수하라. 국민의 재산을 완전 환수하여 통일그룹을 완전 폐업시컥야 한다. 그 길만이 통일교 교인들이 문선명 사이비교주에게 재산을 빼앗기지 않고 지옥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35.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한국과 일본의 방송언론이 대대적인 비리와 부정을 보도하면 궤멸될 수밖에 없다.

 

전세계 통일교회 운영 자금줄인 한국과 일본 통일교회 교인 재산 착취를 근절시키면 통일교회는 자동적으로 궤멸될 수 밖에 없다. 한국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은 단결하여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궤멸과 악랄한 사이비 교단 궤멸을 위해 외쳐야 한다.

현재 사이비 교단은 300곳이넘고 있다. 300만 사이비 교단의 교인들은 영혼을 빼앗기고 처절한 노예가 되어 지금도 고통 당하고 있다. 그들도 우리 부모 형제요, 이웃이다. 해외선교도 중요하지만 내 나라, 내땅, 내 이웃에 사이비 교주가 나타나 영혼을 빼앗고 이리와 같이 선량한 사람을 파멸시키는 사이비 교주를 궤멸시키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께 무엇을 보고할 것인가? 선각자 된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이 가장 시급하며 사이비 교단 궤멸을 위해 싸우고 외쳐야 한다. 이단교회를 뿌리뽑아야 한다.

 

36.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이 그 동안에도 사이비 종교에 대한 대책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는 사이비 교주와교단이 선량한 영혼을 미혹하여 영혼과 육신을 파멸시키고 간통, 우상 숭배,참부모 재림주라고 자칭하고 거액재산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고 있다.

 

이제는 성경 진리의 말씀대로 사탄 마귀의 화신인 문선명 통일교를 뿌리 뽑기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 사이비 교단과 싸워서 승리해야 한다.

일본 기독교 1%인 120만명인데 통일교 합동결혼식후 거액 재산착취를 집중 언론 방송 보도하여 통일교 교인이 300만명 이라고 재판정에서 거짓증언 하였지만 실제 2만명에 불과하다.

 

37.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그 동안에 통일교 교인들에게 기도 마지막에 "문선명 참 부모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라고 시켰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라고 한다는 것은 상상도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 바뀌어서 통일교 교인들에게 재산착취와 책임강조를 위해 "참부모님의 승리권을 축복으로 이어받은 000목사(교인들은 장로,권사, 집사직분을 넣음)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이 기도 끝마무리를 "축복의 중심가정 000(교인들은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넣음)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라고 한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야말로 자기 자산도 구하지 못하고 자기 자녀들도 구하지 못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는가?

통일교 교인들을 노예로 삼아 지옥으로 끌고 가며 사악한 기도 마무리를 시키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대적이다. 한국 1200만 기독교인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4명 중 1명이 기독교인이다.

통일교인 오전국 총재적 인원이 33000이며 예배는 학생을 포함해서 17000명이다. 기독교인 1200만 목사 성도가 예수님 이름으로 단결하여 궤멸하자. X 통일교회(가정교회)는 예배때 주기도문도 사도신경도 없다.

 

38.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우상숭배, 재산 착취의식은 인류역사의 최대 사기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통일 그룹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통일그룹은 1998년 IMF 때 부도로 망하여 기업체가 국가관리 기업이 되었다. 또한 5,000만 달러를 투자한 오인천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도 하지 못하였으며 실패작이 되어 버렸다. 중국 판다 프로젝트도 통일교 교인들의 고혈인 12억 달러를 투입하였지만 사기 당하여 망해버린 결과가 되었다.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미국 뉴요커 호텔(43층)을 매입하여 운영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미국 워싱턴 D.C 셀라톤 호텔도 적자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파라과이 아메리카노 호텔도 경영이 어렵고, 해양산업도 실패한 입장이다. 미국 워싱턴 타임지는 적자로 부도위기에 있다.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의 고액 헌금이 없으면 그날로 통일교 관련 신문사가 부도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세계일보도 부도직전으로 매월 50억을 한국 ·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이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을 바쳐서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통일교 방패막인 세계일보는 통일교 교인들의 헌금이 끊어지면 운영 자금이 고갈되어 그날로 부도가 날 지경에 이르렸다.

그 외에도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계획하는 것마다 실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문선명 교주의 통일교 목회자 양성기관인 선문대 신학과 학생들도 문선명 교주의 살인적 목회자 인사조치와 통일교 선배 목회자들의 처절한 파멸과 죽음의 길을 보고서 80%도 넘게 목회를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고 있는 실정이다.

문선명 교주가 목회자를 양성한다고 했지만 통일교 목회자는 파리목숨이라는 것을 알고 신학생들도 도망치고 있는 실정이다. 문선명은 하루아침에 전국 통일교 목회자 전체 500명을 사전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잘라 버리는 잔인한 폭력 인사를 몇 번씩이나 서슴지 않고 행하였다.

그래서 통일교 목회자 가정은 처절한 가난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나와 같이 가정이 파탄된 것이다. 통일교회 후배 목회자나 2세 목회자들은 선배 목회자들의 비극적 인 파멸과 박준철 목사의 결과를 되새걱 보아야 할 것이다.

통일제국은 문선명 교주의 야망에서 나온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하나남의 원수요, 전세계 19억명 기독교인의 원수요 한국 1200만 기독교인의 원수다. 통일교회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 고액헌금과 생활고에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교인들의 원수요, 가정파탄, 이혼, 별거로 통일교회를 탈퇴하고 원한이 맺힌 사람들의 원수이다. 통일교 교인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문선명 교주는 하나님의 심판과 역사의 심판, 인류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39.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제국은 구원이 없다.

 

저는 30년 동안 통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제가 존경 할만한 신앙자나 구원을 받았다는 통일교 교인을 만나보지 못했다. 미혼 남녀가 통일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과 아내, 자녀들이 문선명의 노예가 되는 길이며 가난의시작인 것이다. 제2의 박준철이 되는 것이다.

저는 죽도록 충성해도 잔인한 문선명 교주의 사악한 명령과 행위로 폭력 ·폭행을 당하고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되어 폐인이 되었다. 선량한 한국의 미혼 남녀가 문선명 집단에 들어와 인간노예가 되어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보다는 독신으로 혼자 사는 것이 차라리 백배 나을 것이라고생각한다.

 

40. 한국과 일본의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을 천국에 보내준다는 미명하에 거액 재산을 착취하여 1200억을 만들었다고 한다.

 

문선명과 사돈 관계인 통일교 이 인자 곽정환은 D종합금융에 부실 여부도 알아보지 않고 투자했다가 부도나는 바람에 단 10원도 돌려 받지 못하고 날렸다는데 사실인가?

곽정환 회장이 하는 것마다 실패요, 파멸이라고 생각한다. 통일교 교인들은 목숨을 바쳐 거액헌금을 만들어 문선명 교주에게 바치지만 헛된 수고일 뿐이다.

 

41.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기 위하여 브라질에 황족 입적 40일 수련 때 2100만원을 받은 것도 모자라 청평 천성왕림궁전에서 재탕으로 황족 입적수련 21일 수련회에 120만원씩을 받았으며 입적 통일 축복식에서는 70만원씩을 통일교 교인들에게 내라고 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은 처절한 가난, 빛더미에 올라앉는 것이다.

 

42.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최종 목적은 백성과 나라를 세워 통일 제국을 건설하여 황제로 취임식을 하고 군림하는 것이다.

 

문선명의 황제 취임식은이미 1985년 12월 25일에 완료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2001년 1월13일에는한국 청평 천성 왕림궁전에서 전세계 합동결혼식을한 통일교 교인들 3천명을 모아놓고 하나님 왕권 즉위식을 올렸다. 그러나 이 의식은 문선명 황제즉위식이었다. 2003년 1월 1일, 1월 13일에도 청평 천성왕림궁전에서 문선명 우상화 극이 열렸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동토의 왕국인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통일교 교인들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피를 흘리는 희생을 시키고 있다. 사이비교주의 죄악과 말로를 하나님은 보고 계시고, 심판만이 남아있다. 문선명은 지금까지 나라를 위하고 이 민족을 위하여 국제 승공연합 활동과 국민 연합 활동, 기독교 초교파 활동, 세계 언론인 연합활동, 세계 평화교수 협의회, 세계 평화문화연합활동, 국제교육재단, 세계평화 종교연합,국제과학 통일회의, 전국 시 · 군 · 구 통일교회 각 동 · 통 · 반 지역 전도활동, 훈독회 활동, 각종 만찬·세미나 대회, 통일교 합동결혼식 행사 대회,부도난 통일그룹 각종 사업체 활동, 문화단체 활동, 세계평화 초 종교연합활동, 세계 평화여성쳔합 활동, 세계평화청년연합 활동, 세계 평화 정상회의 활동 등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자신을 재림주 참부모 메시아 구세주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 47년 동안 활동을 한 것이다. 그것이 문선명의 최종 활동목적이다.

문선명 교주는 지금까지 인류 구원과 평화와 사랑, 지상천국을 외치고 있지만 자신의 야망과 통일제국을 만들기 위한 욕망으로 통일교 교인들을 처절하게 희생시키고 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가정파괴 우상숭배 지옥에 간 조상의 이름을 팔아 거액의 재산을 빼앗고 있다. 구원을 외치지만 지옥이요 평화와 사랑을 외치지만 저 같이 가정파탄 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문선명은 가련한 통일교 교인들의 영혼을 빼앗아 통일제국을 세우는 이용물일 뿐이다. 통일교회에서 갈라져나간 사이비종파가 정명석(JMS)등이 문선명 교주 밑에서 배운대로 통일교를 떠나 사이비교주 노릇을 하고 있다. 지금 통일교회 출신이단이 30파로 늘어났으며 앞으로 70파, 120파가 넘는 사이비 교파로 늘어나 분열되어 산산조각이 나서 파멸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43. 문선명은 예수, 공자, 석가, 무하멧을 축복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통일교 여인들과 결혼시켰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예수님을 실패자 부하로 격하시키고 예수님을 믿어도 완전구원이 없으며 기독교 교인들이 천국도 갈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도 구하지 못하고 자식들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문선명 자신 만이 참부모 재림주로서 예수를 천국 보낼 권한이 있고 인류와 기독교교인을 천국 보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예수탄생일을 1971년 1월 3일날 계시를 받아 정하고, 통일교 차만숙 권사의 딸인 장정숙을 '성신' 이라고 정하여 예수와 결혼을 시켜 예수님의 명예를 파멸시켜 버렸다. 차만숙 권사의 딸인 장정숙을 일생동안 시집도 가지 못하는 처녀로 만들어 인생을 파멸 시켜 버린 결과가 되었다.

문선명은 통일교 세뇌 교육용으로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이라는 책에 통일교 교인이였던 이상길이 죽어 영계에 가서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예수, 공자, 석가, 무하멧을 만났다고 했다.

예수, 공자, 석가, 무하멧은 문선명 재림주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세미나를 열고 통일교 교리 교육을 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수가 영계에서 지상에 있는 문선명에게 장정숙과 축복결혼을 시켜 주어서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주장하며 통일교 교인들 세뇌 교육용으로 이용하고 있다.

문선명은 1999년 12월 29일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예수 드림 이라고 편지를 보내왔다고 하는데 이것을 통일교 교인들은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공자, 석가, 무하멧도 문선명이 통일교 여인들과 결혼시켜 주었다. 21세기 최첨단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이 때에 문선명과 古 이상길, 김영숙을 내세워 통일교 교인들 아침, 저녁 세뇌교육용으로 활용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문선명의 조상 귀신을 구원해준다고 속이고 거액재산 착취 행위나, 통일교 합동결혼식만 하면 천국간다고 해놓고 이제와서 통일교인을 죄가 많으니 죄를 용서해주는 탕감비 1300만원을 천국행 티켓파는 행위는 문선명은 희대의 사기꾼이다.

이 거짓된 일로 통일교 교인들 거액 재산 착취에 활용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 비극이며 언론과 방송이 대대적으로 보도 해야 한다. 기독교 성직자,1200만 성도들은 통일교회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합동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의 비극을 만천하에 알려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 p,554~572)

김일성이 영계에서 문선명 재림주에게 보내는 편지, 한국 기독교계를 대표한 고 김할란 이화여대 총장이 문선명 재림주에게 보내는 편지를 문선명은 광고하였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문흥진(17세)을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이 영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 아들 문흥진이가 영계에서 문선명에게 보내온 편지를 통하여 문선명을 재림주 참부모로 만들기 일한 웃지 못할 비극적인 조작사건이 통일교내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모든 내용은 예수,공자, 석가,무하짓 위에 문선명 재림주가 존재한다는 인식과 문선명만이 인류를 구원하고 4대 성인을 구원해 준다는 사악하고 조작된 거짓 편지이다.

구세주는 오직 예수님이 아니고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라는 것을 인식시키고자 조작을 하여 불안 공포심을 갖게 하고자 통일교인을 세뇌시키고 있다. 1998년 6월 13일날 3억 6천만 쌍 1차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미국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하면서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무슨 권한으로 90억의 죽은 영흔을 합동결혼식을 시켰는가? 그리고 문선명은 자신의 사돈인 통일교 이인자 곽정환 부부를 내세워 33명의 영계에 간 성인 영혼 결혼을 시켰다.

예수를 1971년도에 장정숙과 결혼시켜 놓고, 또다시 예수와 결혼식을 시켰다. 공자 부인은 이경준 현 선문대 총장, 석가부인은 최원복 전 이대 교수,무하멧 부인은 이정옥(전 세일여행사 사장), 소크라테스와 결혼한 김명희(문선명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처녀출산- 문희진) 지금도 김명희는 매월통일교 협회로부터 60만원의 생활비를 받으며 문선명 교주에게 충성하며 독신으로 살고 있다.

또, 문선명은 1955~1960년. 연대, 이대출신의 문선명 여인들을 영혼 결혼을 시켰다. 각 종교지도자들이 문선명 여인들에게 결혼 축하 예물로 금시계를 바치게 했다. (통일교 월간지인 '통일세계' 1998년 7월호 p.83) 문선명 사이비교주의 사악한 행위는 기독교 파괴와 세계 종교인에 대한 명예를 훼손하였다. 즉시 예수님의 명예를 훼손시킨 문선명을 명예 훼손죄로 고발하여 사법처리 하여야 한다

 

44. 통일교 세뇌 교육용 책인「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의 편지조작 사건,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세뇌 교육용 책인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에 아담 · 하와가 보낸 편지중 "책임 분담을 다하지 못하여 수천 년 동안 고생했으며 언제나 죄인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잘 모시고 있다" 며 1997년 8월 14일에 편지를 보내왔다고 조작하였다. (p.155참조)

노아, 아브라함, 가롯 유다, 세레요한 편지 중에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여 죄송하다" 고 하며 "지옥문이 열릴 날은 문선명 구세주가 열어 줄 것이다" 라고 조작한 사건(1997.08.20)

김일성, 레닌, 히틀러, 뭇솔리니, 이승만(전 대통령), 모세, 김활란(이대전 총장), 박정희(전 대통령) 조작사건. "박정희 대통령이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가 이 나라(영계)오실 때 모든 것에 대해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으며 영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와 영계에서 농사를 짓고 사냥을 다닌 다고 문선명 집단에서 책에 주장하고 있다. 21세기에 문선명 사이비 집단의 조작과 사기성을 알고 고발해야 할 것이다. (1998.06.11)

일본 정치계의 기시(전 수상), 후꾸다(전 수상), 이께다(전 수상), 나까소네 편지 조작사건. 이께다 전 수상의 의견은 "나까소네가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의 협조를 받아 움직이면 일본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 라고 주장하였다. (1998.06.11)

고르바초프는 "문선명 참부모님의 뜻을 잘 알고 있으며 참부모님의 뜻 성취에 적극적인 열정도 갖고 있다" 고 주장하며 죽은 닉슨은 "클린턴의정책과 문선명 재림주 아버님의 뜻이 아주 가깝게 연결되기를 노력하고 혐조하겠다" 고 영계에써 주장하여 조작하였다. (1998.06.11)

16세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교하여 죽은 유관순은 "문선명 참부모님을 영계에서 자랑하고 전세계의 영웅이라고 외치고 있다" 고 주장하몄다. (1999.09.30)

 

※ 영계에서 문선명 재림주님에게 보내온 편지 조작사건.

 


① 예수님이 영계에서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님에게 보내온 메시지


"문선명 아버님께 올립니다. 아버님! 저는 예수라고 합닐다. 아버님! 저를 장여사와축복 영혼결혼을 시컥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아내는 정말 저에게 과분한 여인입니다. 정말 황공합니다. 이제 문선명 참부모님의 뜻을받들어 아름다운 가정을 꾸며 참부모님을 모시고 참부모님의 뜻대로 복귀섭리역사 앞에 열심히 기도하며 노력할 것입니다. 아버님! 예수 지인을 용서하소서. 언젠가는 한이 풀릴 것입니다. 아버님!정말 감사합니다. 예수는제 아내 장여사를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선명 참부모님 ! 만수무강 하옵소서. 천상에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가 아버님께 올립니다. "(1999.12.29) 예수드림

 

② 소크라테스가 문선명 참부모님에게 보내온 메시지


"문선명 참 아버님, 어머님께 드리옵니다. 저를 김명희와 축복결혼을 시컥주어서 감사합니다‥‥‥(생략)‥‥ 옥체 만강하옵소서." 천상에서 소크라테스 올림(1998.08.13)

공자가 참부모님에게 보내온 메시지 등을 조작하였다. 「영계의 실상과 인류의 구세주는 문선명지상생활」의 책을 통하여 통일교 교인들에게 오직교주라는 것을 인식시키고자 이 책을 합동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이 아침 · 저녁으로 읽고 믿고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2002년 1월 1일에 청평 천성왕림궁전에서 통일교 교인들을 모아놓고 "문선명 교주는 하나님의 메시지" 라는 것을 만들어 "나는 만군의 여호와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다. 문선명 참부모는 만왕의 왕이요, 구세주요, 메시아" 라고 말을 하며 하나님이 직접 메시지를 보낸 것같이 조작하였다. 그 자리에서 문선명 교주는 또 다시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교인들은 천국황족 입적을 하려면 재산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문선명 집단이 이 땅에 뿌리뽑힐 때까지 함께 기도하고 반대운동을 하며 다각적으로 대책을 세워 다시는 이 땅에 문선명 집단과 같은 사이비 집단이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45.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2000년 1월 13일에 4억쌍 1차 합동결혼식을 하였다. 신랑 ·신부가극소수였기 때문에 추운 걱울에 있는 10만명 정도의전국 노인들을 잠실 종합운동장에 데려다놓고 무료 관광버스, 식사 대접과선물을 주었다. 실제 합동결혼식을 한 미혼 남녀는 2 천 쌍에 불과하였다.

 

전국 노인들을 흰 목도리를 목에 두르게 하여 행사 때마다 신랑 '신부로 위장한 행위를 하여 세상을 미혹하였다.

2001년 1월 27일에 4억쌍 2차 합동결혼식이라면서 미국 뉴욕 맨해튼UN본부 경제사회 이사회 회의실에서 문선명, 한학자 사이비 교주 부부가 황제 의상을 입고 합동결혼식을 할 210쌍의 미혼남녀를 모아놓고 퉁일교 합동결혼식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전세계, 전 현직 수상, 국왕 정치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그 자리에서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2002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대하였다. 문선명은 개인과 가정의 파괴범이며, 통일교 교인들의 거액재산을 착취하는 사탄 마귀의 형상이다.

이런 사이비교주가 노벨 평화상 후보로 된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인류를 기만하는 가증스러운 일이다. 개인과 가정을 파괴한 문선명, 한학자 부부에게 '세계 NGO 만국평화상' (2000.08.18)을 주었다는 것은 전세계 기독교 교인들의 수치이며 NGO에서 통일교를 축출해야 할 것이다.

문선명은 노벨상에 목숨을 걸고 전략을 세워 또 한번의 세상의 이목을 받는 행위를 하고 싶은 것이다. 1200만 기독교는 UN을 움직이고, 노벨 평화상에 도전하는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재림주 참부모가 아니라면 궤멸 시켜야 할 것인가? 지금 전 성직자와 교인들이 결정 해야되는 순간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또 한번의 통일교 전도용 선전물인 UN에서 2001년 1월 27일에 합동결혼식을 하여 세상을 미혹하고 UN에서 인정한 것과 같이 선전을 하게 한 것이다. 한국 방송언론 각종 기독교 신문에서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합동결혼식이 재산 착취와 파멸의 결혼식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주어야 할 것이다.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은 통일교 미혼 남녀 합동 결혼식을 전국 시 · 군 ·구에서 결사적으로 막아야 할 것이다. 젊은 미혼남녀가 유혹 당하지 않도록 기독교인들은 외쳐야 할 것이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은 우상숭배, 재산착취, 영혼과 육신이 노예가 되어 일생 동안 지옥 같은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통일교회는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이며, 구원이 없는 곳이다.

초대 순교를 당했던 주기철 목사님과 같이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은 영혼을 파멸시키는 사이비 집단의 궤멸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쳐야 할 것이다.

 

46. 문선명의 부인과 그의 자녀들(총 19명)

 

문선명은 개인가정 파괴범이라는 증거- 재림주 참 부모라면 어린양 혼인잔치를 한번만 해야 하는데 문선명은 사악한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수 많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을 파탄시켰다.

문선명은 수많은 여인과 피가름, 혈대교환, 혈통복귀, 간음 의식을 행하여 처녀와 유부녀들의 개인가정을 파탄시켰다. 그 후에 문선명이 40살이 되었을 때 당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인 17세의 한학자와 1960년 3월 16일에 어린양 혼인잔치를 한 후 낳은 14명의 자녀들. (한학자와 결혼하고도 처녀와 간음혈통 복귀 의식으로 사생아를 낳음.)

문선명의 큰아들인 문효진은 홍난숙과 결혼하였으나 마약, 간음, 가정폭력, 전과, 알콜 중독, 포르노 편집증, 이혼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다. 이는 문선명은 거짓된 부모라는 증거이며, 그는 참 부모 재림주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지 1998년 9월 23일자 참고)

문선명의 큰며느리 홍난숙은 미국 CBS 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00분간 그녀의 시아버지인 문선명을 참부모 재림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문선명의 현재 부인 한학자를 통해 출생한 4번째 딸인 문은진은 홍난숙과 같이CBS방송에 출연하여, 부친인 문선명은 구세주, 재림주가 아닌 자신의 아버지일 뿐이라고 말하였으며 자신은 통일교 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문선명의 죄악으로 자식들이 고통 당하고 있으며, 문선명은 오히려 통일교 교인들이 죄악을 많이 범하여 자신의 자식들이 제물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교인들에게 40일, 100일 릴레이 회개 금식 운동을 지시하였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문선명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을 한 숫자를 부부로 쳤을 때, 18억 4천 만명이 통일교 교인 숫자이다. 한 가정 당 자녀를 2명으로 잡았을 때, 통일교 교인 총 숫자는 총 36억 9,604만 명이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전세계 통일교 교인을 모두 합하여도 7만명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기독교 교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가증스러운 거짓 숫자로 하나님을 속이고 인류를 속였다. 문선명 집단의 주장대로라면 전세계 인류 60억 가운데 60%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이라는 숫자가 되는 것이다.

 

47.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교주는 2001년 1월 19일날, 미국 조지 W-부시 대통령 취임식 전야 기념 축하예배를 주체를 하고, 설교를 하였다. 그러기 위해 문선명은 세계 정치, 경제, 문화, 언론, 교육, 종교 지도자들의 세미나, 만찬, 항공료, 호텔경비, 선물 일체를 지불했다. 세계 각 나라 모든 연구단체에 많은 지원금은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이 막노동, 파출부, 꽃팔이 등으로 바친 거액 재산이다.

 

그 돈이 문선명 통일제국을 건설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문선명 교주의 원리강론과 책자는 교계지도자와 미국 정치계의 최고 지도자들, 언론계 지도자들에게 배포하였다.

문제는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레이건 전 대통령이나 닉슨 전 대l통령, 부시전 대통령, 현 조지 W-부시대통령 등을 통일교 신문인 워싱턴 타임지와 UPI통신을 이용하여 정계 지도자들을 움직여 왔다. 조지 W-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을 하루 앞둔 날, 워싱턴 DC에서 문선명을 중심 삼고, 행사가 이루어졌다. 그 때 제임스 메릿 남 침례교 총회장이 축사를 했다.

미국 기독교 보수파 제리 포웰 목사(리버티대학교 총장), 단알규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 전 회장,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래험 목사의 축사가 있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한국의 사이비 통일교회가 모두 없어져도 이미 세계를 움직이는 사이비 교주가 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침묵할 것인가? 문선명 적그리스도의 궤멸을 위해 외칠 것인가? 지금도 문선명은 한국에서 통일교회가 모두 뿌리 뽑힌다고 하여도 세계 185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하는 것에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단결하여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48. 2001년 1월 현재, 한국 문선명 통일교 교인 재적 총 숫자는 3만 5천 명이며, 예배 인원은 1만 7천명이다(어린 학생들 포함.)

 

49. 문선명 집단 신조

 

①유일신(雄一神)이신 창조주掛」造主) 하나님을 인간의 아버지로 믿는다.

② 신 구약(新 · 舊約)성서를 경전(經傳)으로 받든다.

③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이신 예수님을 인간의 구주(救主)인 동시에복귀(復歸)된 선의 조상으로 믿는다.

④ 예수님께서 한국에 재림(再臨)하실 것으로 믿는다.

⑤인류세계(人類世界)는 계림하시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하나의 대가족사회(大家族社會)가 될 것을 믿는다.

⑥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최종목표(最終目標)는 지상(地上)과천상(天上)에서 악(惡)과 지옥(地獄)을 없애고 선(善)과 천국(天國)을 세우는데 있는 것으로 믿는다.

 

50. 나의 맹세(세뇌교육용 매일 아침 저녁으로 살아있는 우상 자칭 아버님 재림주라는 문선명 교주에게 경배하며 낭독하는 내용)

 

①천주의 중심존재로서 아버님의 뜻(창조목적)과 맡겨주신 책임(개성완성)을 완수하며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선의 자녀가 되어 창조 이상 세계에서 영원히 아버님을 시봉하는 참 효자(녀)가 되기를 000는 맹세 하나이다.

②아버님께서 육천년간 제물된 십자가 노정을 참으시며 죽은 oo를참 자녀로서 살리시기 위하여 말씀과 인격과 심정을 주시어 일체가되게 하심으로써 천주의 상속권을 주시려는 거룩한 뜻을 000는 완전히 상속받을 것을 맹세 하나이다.

③원수에게 잃어버린 자녀와 천주를 복귀하기 위하여 아버님께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시고 종의 몸을 쓰시고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시며 000대신 역사 노정을 두시고 원수 사탄을 무찌르시던 무기를 지니고 그들을 완전히 심판할 때까지 아버님의 본을 받아 참 아들 딸 000는 적진을 향하여 용진할 것을 맹세 하나이다.

④아버님께서는 평화와 행복과 자유와 이상의 원천이시며 아버님을 모시려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와 천주는 본성의 인간을 통하여서 만이 심정일체 이상세계를 완결함으로 000는 참 사람이 되어 심정의 세계에서 아버님 대신자가 됨으로써 피조 세계에 평화와 행복과 자유와 이상을 옮겨주고 아버님께 기쁨과 만족을 돌려드리는 참아들 딸이 될 것을 맹세 하나이다.

⑤우리는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주권을 자랑하고 하나의 백성을 자랑하고 하나의 국토를 자랑하고 하나의 언어와 문화를 자랑하고 하나의 부모를 중심한 자녀 됨을 자랑하고 하나의 전통을 이어받을 혈족임을 자랑하고 하나의 심정세계를 이룩하는 역군임을 자랑하고 이를 실현시킬 것을 000는 맹세하나이다.

이러한 의미와 사명을 성취하는데 책임을 지고 생명을 바처 싸울것을
000는 선서하며 맹세하나이다. 선서하며 맹세하나이다. 선서하며 맹세하나이다

서기 1962년 자녀의 날(음 10월 1일)

'나의 맹세'나 '가정맹세'에 나오는 참부모는 자칭 재림주 참부모인 문선명을 지칭하는 말이다.

 

51. 가정맹세(문선명이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에게 '나의맹세' 를 하지말고 '가정맹세' 로 하라고 명령함)

 

①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본향 땅을 찾아 본연의 창조이상인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을 창건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②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모시어 천주의 대표적 가정이 되며 중심적 가정이 되어 가정에서는 효자, 국가에서는 충신, 세계에서는 성인, 천주에서는 성자의 도리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③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사대심정권과 삼대왕권과 황족권을 환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④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의 창조 이상인 천주대 가족을 형성하여 자유와 평화와 통일과 행복의 세계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⑤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매일 주체적 친상세계와 대상적 지상세계의 통일을 향해 전진적 발전을 측진화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⑥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대신 가정으로서 천운을 움직이는 가정이 되어 하늘의 축복을 주변에 연결시키는 가정을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⑦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본연의 철통과 연결된 위하는 생활을 통하여 심정문화 세계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⑧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성약시대를 맞이하여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으로 신, 인, 애 일체이상을 이루어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의 해방권을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 통일교 행사 때나 아침 · 저녁으로 문선명 사진에 경배하며 세뇌 교육용으로 '가정맹세' 를 통일교 교인들이 하고 있다. 통일 교회에서는 문 선명교주가 단상에 올라 을 때 성경을 들고 나오는 일이 없으며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예배나 행사때 일명 가정교회에서는 낭독하지 않는다. 통일교 교회와 통일교인 집에는 통일교 깃발이 걸려있다.

 

52.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각종 8대 명절


① 참부모님 탄신일 : 문선명(1920년 1월 6일(음력)),한학자(1943년 1월 6일(음력))

②참부모넘의 날 : 1960년 3월 1일(음력)

③ 참자년의 날 : 1960년 10월 1일(음력)

④ 참만물의 날 : 1963년 5월 1일(음력)

⑤ 잠하나님의 날 ' 1968년 1월 1일(양력)

⑥ 세계통일국개천일 : 1988년 10월 3일(양력)

⑦ 하나님축복영원선포일(칠일절) : 1991년 7월 1일(양력)

⑧ 7 8절(천지부모 천주안식권 선포일) : 1997년 8월 9일(음력 7월 7일)

 

53. 법무부장관,각 언론사장, 기자, 기독교 성직자와성도들은 이 엄청난 사이비 종교인 통일교를 이대로 방치할 것입니까?

 

문선명의 명령 한 마디에 통일교 교인들이 고통을 당하며 거액 재산착취의식으로 말미암아 처절한 가난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므로 사법부는 조사하여 위법사실이 있을때  법적인 조취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통일교 교인들이 세뇌에서 깨어나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가 없어야 할 것이다.

 

54.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1억이 넘는 거액재산 착취의식의 시작이다.
 

기독교 최고의 전성국가인 한국 땅에서 통일교회가 뿌리가 뽑힐 때까지 기독교 성직자와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일치 단결하여 싸워야 한다. 양심적인 사람 한 명이라도 합동 결혼식이라는 미명하에 통일교회에서 결혼하고 청춘을 빼앗기는 비극적인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전 기독교 성도들이 일심단결을 하여 붉은 적 그리스도인 문선명 통일교 이단 집단이 이 땅에서 멸망할 때까지 예수님 이름으로 외쳐야 할 것이다.

 

 

제 3절 기독교 성도들에 대한 박준철 목사의 호소문


통일교회 궤멸을 위해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전국 시군구 기독교연합회에서 스데반 집사의 심정으로 통일교 궤멸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언론과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이 단결하고 합심하여 기도하며이 땅의 통일교회가 뿌리 뽑힐 때까지 전쟁을 하고, 성경 진리대로 사탄마귀인 통일교회를 없애는데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입니다.

국내의 살인집단 백백교나 용화교, 32명의 목숨을 빼앗은 1987년의 오대양교, 종말론, 휴거론을 주장하는 이장림 집단, 박태선 집단, 문선명 집단에서 집사까지 지냈던 JMS(정명석)등 수많은 사이비종교로 말미암아 이 땅의 수백만 영혼이 사이비교주에게 영혼을 빼앗겼습니다.

특히 이단교회 중 살아있는 우상인 문선명 통일 집단보다 큰 것은 역사에 없습니다. 통일교회를 궤멸시키지 않고서는 이단 교회에 대해서 반대운동을 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한국 기독교회가 이단교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영혼을 말살하는 이단 교회의 참극을 알고있습니다.

1955년대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에서 전 기독교 교인들과 합세하여 통일교회 반대운동을 대대적으로 하였습니다.

기독교 학교였던 연대와 이대에서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부모로 믿고있는 대학교수와 학생들은 "학교를 선택하느냐, 문선명 교주를 선택하느냐" 에 2가지 중 1가지를 선택하라고 학교에서 지시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대학교수와 학생들은 문선명 교주를 믿고 교수직과 학생직을 박탈당하면서 문선명을 따라나온 것입니다. 참으로 사이비교주에게 세뇌되면 부모형제를 버리고 교수직까지도 포기하면서 사이비교주에게 세뇌된 것을 볼 때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55년 3월 24일, 감리교 학교였던 이대는 교수 5명(양윤영, 한충화, 최원복, 김영운, 이정호)과 1955년 5월 11일은 통일교 이단교회 신앙을 함으로 학생 14명이 퇴학 처분되었습니다. 1955년 3월 5일, 박상래 연대교수는 통일교회의 신앙문제로 퇴직 되었습니다.

한국 1200만 기독교 목사와 성도들은 문선명 통일집단이 이단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잘 모릅니다. 기독교가 수 십년 동안을 침묵함으로써 통일교회는 47년 동안 세계 185개국에 통일교회의 원리강론 교리를 전파하여 뿌리를 내렸습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인류역사에 전무 후무한 사악한 사이비 교주요, 우상입니다. 기독교는 통일교회와 전쟁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통일교회와 이단교회를 이단이라고만 생각하고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선명 집단과 같은 이단들이 번성하는 기회로 삼고 문선명이 의도 하는데로 움직여주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진리대로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같이 갈멜산에서 바알신 450명을 궤멸시켰던 역사와 주기철목사의 순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문선명 사이비 종파를 없애야 합니다.

기독교는 통일교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1200만 기독교목사와 성도들이 통일교  궤멸을 위해 외치지 않는다면 누가 문선명 사이비종파를 파멸시키겠습니까? 한국 기독교는 초대교회의 순교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2의 말틴 루터와 같은 심정으로 저는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외치겠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교주를 이 땅에서 기독교 교인들이 단결하여 없애지 않는다면 한국 기독교는 이단교회에 방치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이제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집단의 멸망할 때가 왔습니다. 전 기독교는 사탄 마귀와 가라지요, 영혼을 파멸시키며 가정을 파탄시키는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궤멸시키는데 동참해 주십시오.

이 저서는 일생 동안 문선명 사이비집단을 이길 수 있는 방패요, 무기가 될 것입니다. 이단교회의 정체와 비리를 알 수 있고, 1명의 전도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교재가 될 것입니다.

저의 저서는 한국 기독교 목사와 신학생, 교회 입직자, 평신도와 양심적인 사람들이 구독해야 될 교재입니다. 또한 일생동안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알고, 대처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저의 글을 읽는 분들 가정에 하나님께 영광이요, 은혜와 축복이 넘칠 것입니다.

 

제 4 절 한국 기독교 통일교 대책협의회 설립,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한국 기독교 이단 종파 문제 연구소 설립

 

저는 문선명 사이비 통일교 교주에게 원리강의로 세뇌되고 교육되어 30년 동안 영혼을 빼앗기고 청춘을 빼앗겼습니다. 이제 심장판막증, 심부전증 등으로 인하여 죽음까지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어떠한 핍박과 고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대적이요, 기독교의 원수인 사이비 종교와 교주를 뿌리뽑고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틈타 사이비 교주들이 이 땅에 붉은 용이 되고 늑대가 되어 선량한 영혼을 미혹하여 빼앗고 세뇌시컥 삼키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이비 교주가 만들어짐으로 강간, 우상 숭배, 재산 착취, 가정파탄 등 그 피해가 실제로 혜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납니다.

사이비 교주들은 불쌍하고 선량한 이 땅의 국민들의 영혼을 빼앗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세를 외치며 자칭 재림주 구세주 메시아 참 아버지로 자칭하며 문선명과 같은 이단 사이비교주가 자신의 제국을 세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들은 공갈협박으로 힘없는 교인들을 세뇌시키고 교육시켜 피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끝내는 배반하며 버리는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자기 교인들을 이용하고 쓰레기 버리듯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이 땅에 사이비 종교를 박멸하고 사이비교주를 뿌리뽑는데 앞장서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 땅의 사이비 종교를 박멸하여 뿌리뽑는데 기독교성직자와 성도들이 앞장서신다면 이 땅의 사이비 교주들은 한 사람도 발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 동안에도 사이비 종교에 대한 많은 비판과 기도회를 실시해왔습니다. 그러나 80~90년대 기독교는 사이비 종교를 뿌리뽑는 데 무관심, 무방비, 무책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사이비 교주에게 수많은 영혼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통일교 집단도 이단이라고 제처 둘 것이 아닙니다. 진작 궤멸 운동하여 뿌리를 뽑았더라면 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매일 전도되어 지옥 길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마음 속으로만 통일교가 이단이라고 제쳐둘 것이 아니라 입으로 소리내어 직장이나 내 이웃, 가게 분들에게 "문선명은 사이비교주요 적그리스도요 합동결혼식을 하면 1억씩을 착취하는 사이비집단" 이라고 매일 외쳐야 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이비 종교에 빼앗긴 사랑하는 아들 · 딸을 찾기 위하여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기독교회가 일치 단결하여 사이비 종교근절을 위한 대책을 세우기를 바랍니다. 언론과 기독교회는 연합이 되어 대대적인 사이비 종교 퇴치를 위한 기도회와 캠페인을 매달 전국 시군구 기독교연합회 벌려야 할 것입니다.

 

제 5 절 국제 자살 · 살인 방지 연구소 설립 계획


1998년 5월 1일, 저의 꿈에 하나님의 큰 음성이 "너와같이 분노와 배신감을 갖고 한이 많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마지막 선택하는 길이 자살이다. 너는 네 자신이 자살 시도를 수십 번을 하였듯이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을 바꾸어 주어라. 그러면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수많은 사람이 자살하지 않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새로운 소망을 갖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주어라" 들렸습니다.

그 때 살인 방지 연구소를 설립하라는 마음속의 생각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간증 예배 때 경각심을 갖는 말씀을 증거합니다.

통일교회는 문선명 교주를 믿고 합동결혼식을 하여 가정 천국을 이루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천국이 아닌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 교회 때문에 자살해 죽는 사람이 제 주위에도 있었습니다. 통일교 부산 교구본부에 소속된 36만 쌍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김동수씨도 결혼을 하여 살다가 1998년 5월에 목을 매고 자살해 죽었습니다.

오진수씨와 이인자씨 부부는 1982년도 6,000쌍 합동결혼식을 받았습나다. 1997년 9월 13일날 추석을 목전에 두고 이인자씨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와 통일교에 대한 배신, 합동결혼식의 처절한 생지옥 생활을 뒤로하고 아파트 안방 문고리에 목을 매고 자살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 합동결혼식은 처참한 가정파탄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오진수씨와 이인자씨는 통일교 회사인 일화제약과 통일산업에 근무하며 요령을 부릴 줄 모르고 아부할 줄도 모르는 우직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성실하게 일을 했지만 아부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살다 보니 통일산업에서 53세에 퇴사할 때까지 반장이나 주임 한 번도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진실하고 성실한 교인 이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통일산업에서 근무하면서 IMF 때 부도가나 월급을 11개월이나 받지 못하여 가정생활이 처절한 상태에서도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십의 삼조 헌금, 구국헌금, 160쌍 행사비, 1600쌍 행사비등 각종 통일교 헌금을 내라고 하였고 가정은 파탄 되었습니다.

이인자씨는 착한 성품을 갖고 가정천국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삶을 포기하고 안방 문고리에 목을 매어 죽음으로서 문선명 교주에게 항변하였던 것입니다.

경남 교구장과 사모는 1년 동안 교회 앞에 있는 오진수씨와 이인자씨 가정에 단 한번도 심방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인자씨가 자살을 할 때까지 경남 통일교 교구장은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어도 무관심, 무책임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회에 들어와 오진수씨와 이인자씨가 합동결혼식을 하지 않았다면 가정은 파탄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자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인자씨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지만 자살로 인생을 마치자 너무나 허탈하여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 계기로 자살과 살인 방지 연구소를 설립해야 되겠다고 더욱더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과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저는 자살하려는 한 생명이라도 구할 수만 있다면 그 길을 갈 것입니다.

회사가 부도가 나고 실업자가 되고 가정이 파탄되어 이혼되고 전 가족이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의 원혼을 누가 풀어 줄 것입니까? 저는 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이 외롭고 고독하고 의지할 곳도 없이 모진 인생의 비 바람을 맞으며 마지막 자살을 선택할 때 속수무책 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빠른 시일 내에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사정이 허락하면 자살 살인 방지 연구소를 설립하여 한 생명이라도 구하고 싶습니다.

 

 

 

제 23 장 문선명 통일교 비판

 

 

제 1 절 문선명의 출생과 통일교 창단 배경


문선명은 1920년 1월 6일(음력)에 이북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부 문경유, 모 김경계 사이에서 13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문성명은 1935년 4월 17일 부활절에 예수님을 만나 특별 계시를 받아 재림주 사명 인계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1938년 4월에 경성 상공실무학교 입학, 1941년 2월 25일에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졸업을 하였다. 1944년도에 서울에 있는 가시마구미 토목 건설회사 전기기사로 취직하여 근무하였다.

 

문선명은 1945년 10월부터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섭절리 이스라엘 수도원에서 김백문 교주에게 6개월 동안 기독교 근본원리 교육을 받고 세뇌되어 있다가 서울 상도동에서 교회 인도자로 있다가 문선명 교주는 1946년 6월 6일에 김백문을 배반하고 김백문 사교 교리인 성서신학과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교리로 만들어 평양에 가서 문선명은 재림주 참부모를 자칭하며 기독교를 비판하고 포교 활동을 하였다.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할 정도로 평양은 기독교회가 왕성하였습니다. 평양에서 부터 문선명은 사교교리를 통하여 통일교 포교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양에서 김종화 유부녀 집에서 어린양 혼인잔치를 문선명이 하게 되어 사회혼란 음행죄로 감옥에 가게 되어 1948년 2월 20일에 평양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1948년 4월 7일에 문선명의 재판결과 5년 감옥생활을 언도 받고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이후 1948년 5월 20일에 흥남 감옥소로 이송되어 형무소 생활을 하던 중 터지지 말아야 될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말미암아 문선명이 감옥에서 해방되어 남한으로 피신하여 부산 수정동에서 교회를 하다가 최선길 본부인이 문선명의 피가름 행위, 혈대 교환의식을 참다 못하여 문선명 교주를 폭행함으로 문선명은 부산 범냇골 이라는 산에서 기독교인을 포교하였다.

 

그 이후에도 최선길 본부인이 찾아와 문선명 교주의 부도덕한 행위 때문에 싸움을 하여 문선명 교주는 서울로 도망쳐 올라왔고 서울 성동구 북학동 세대문집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간판을 1954년 5월 3일에 걸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 교주는 온갖 피가름의식과 혈통복귀의식으로 최선길 부인과 불화중 자기 아내도 전도하지 못하고 1957년에 이혼하였다.

 

문교주는 김백문 교리를 훔쳐 1954년 5월 3일에 2대 협회장 '유효원'과 '김원필', '박정화' 등 6인이 정리하여 1957년 8월 15일 통일교 원리해설로 만들었다. 1966년 5월 1일에 통일교 원리 강론으로 책을 출판한 것이다.

 

부산 영도 신상진씨 집에서 통일교 2대 협회장인 유원효 씨와 사촌 유민효, 유영효 3형제가 입교하게 되었다. 유원효는 서울대학교 의대를 다니다가 결핵성 관절염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문선명 교주는 김백문에게 교육받은 그 기독교 근본원리 강의를 유원효 씨에게 다시 통일교 원리로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유원효 씨는 다리가 굳어서 쓸 수 없어 눕거나 의자에 앉아서 문선명 교주의 강의를 밤낮으로 들었다.

 

1954년 2월부터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 교주의 기독교 근본원리 강의를 갖고 문선명 교주와 유원효, 유민효, 유영효 3형제와 이창환(초대 통일교협회장), 김원필, 박정화 이렇게 6명이 종로에 있는 여관에서 하숙을 하며 통일교 교리를 썼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김백문의 강의를 통일교 원리강의로 만드는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그때 6명에게 5만원을 주면서 전세 집을 마련하여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 작업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유원효씨는 매일 원리해설을 정리하였고 유민효씨와 박정화씨는 원리원본을 기록하면서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 교주의 교리가 문제가 많다고 하였다. 유원효 통일교 2대 협회장도 원리해설을 집필하면서 통일교 교리로 사용한다는 것이 모순이 많이 하며, 기독교 근본원리 강론을 이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강론을 고치기 위해 문선명 교주에게 여러 의견을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문선명 교주가 대답을 하지 못하는 부분은 유원효씨 생각대로 원리해설을 썼다.

 

문선명은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어 놓고도 통일교 목사 교인들에게 재림주가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계시 받은 새진리라고 주장하지만 조작된 것이며 거짓이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을 속인 것이다.

 

문선명은 여러 사람이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던 중에 성동구 북학동 391번지 통칭 세대문집이라는 가정집에서 1954년 5월 1일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 협회라는 간판과 통일교 창립을 하게 되었다.

 

통일교 협회 창립일을 1954년 5월 1일로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통일교 창립일은 1954년 5월 3일이다. 김백문이라는 사이비 교주에게 6개월 동안 교육 받은 문선명 교주가 그것을 도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 또 한 사람의 가짜 재림주인 문선명 교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훔쳐온 교리로 1954년 5월 3일, 원리 해설이라는 통일교 원리강의를 선포하고 통일교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유원효 씨와 사촌인 유민효, 유영효 3형제는 통일교에 충성꾼 이었고, 통일교의 산 증인이다. 30가정 최초 합동결혼식을 하였지만 유원효는 1970년사망을 하였고 유민효, 유영효 형제는 문선명 교주가 일생동안 이용하고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버렸다. 그들은 일생 동안 이용만 당하고 통일교를 떠났고 버림받은 것이다.

 

제 2 절 원리 강론은 김백문 교리를 도용한 것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 창조원리, 타락론, 복귀원리, 재림론까지 만들고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한 것이 아니라 사생아이고,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메시아 재림주라고 주장한다.

또한 기독교는 구원이 없는 종교라고 강조하여 오직 구원은 예수가 아닌 문선명 자신만이 재림주로서 구원 해 줄수 있고 성경진리가 아닌 통일교 원리강론 새진리 성약말씀만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혈대교환, 혈통복귀의식, 피가름,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한다고 주장한다.

 

문선명의 통일교 원리강론인 창조원리, 타락론, 복귀 원리, 재림론은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와 동일한 내용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 기독교 근본원리를 문선명이 도용한 것이다.

 

문선명은 통일원리 강론이 성약 말씀이며, 재림주가 계시를 받아쓴 새로운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거짓이다.

 

제 3 절 문선명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비판


(지면관계상 요점만 말씀 드리고 교리전체비판은 다음 책에 논할 것입니다)

 

1. 통일교회의 원리 주장은 새 진리의 필요성과 사명을 역설하고 있다.

 

(요한복음 3:12, 요한복음 16:25)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만이 새진리요, 성약이라고 주장하며 성경은 사명이 끝났고 진리(통일교원리)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반증- (계시록 22:18) '성경진리를 가감하면 생명록에서 이름을 제 할 것이다·(마태복음 5:18) '율법 일점 일획도 가감말라'(요한복음 3:16) '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시며 진리는 성경말씀 뿐이다. '(갈라디아1:8) 성경말씀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자, 저주를 받을 것이다'

 

2.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새 말씀의 사명을 역설하고 있다. (요한복음 16:25, 계시록 5:1, 계시록10:11)

 

통일교 참조원리는 성경의 진리성을 부인하고, 구약과 신약 66권 사명이 끝났다고 주장한다. 예수를 믿어도 진리를 찾아가는 교과서라고 주장한다. 문선명 재림주 시대는 원리강론이 성약이며, 새진리라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성경진리 말씀을 자칭 황제 참부모 재림주라는 세뇌교육용으로 인용 할뿐이다. (요한복음 16:12)

*반증-(요 3:16),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요, 진리는 성경뿐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3. 문선명 사이비 재림주에게만 구원이 있고, 기독교 성경말씀은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반증-(사도행전 4:12, 16:31), 주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4. 원리강론은 창조목적이 문선명 교주를 자칭 재림주 참부모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세기 1:26~31)"

 

반증-(사 43:1, 고전 10:31), 통일교 교리에 하나텀의 이성성상을 주장하는데 문선명 교주가 하나님을 닮아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졌고 몸과 마음 즉 이성성상으로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미 성서에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아 되어진 것을 문선명 교주는 자신이 발명특허나 낸것같이 주잔하지만 거짓이다. 만유원력 수수작용도 되어진 결과를 논하는것이지 새진리가 아니다.

 

5. 통일교 인류역사 종말론은 기독교 종말론과 정면 배치된다.

 

기독교는 성경진리대로 불심판을 믿지만, 통일교 문선명 교주는 불심판을 부정하며 말씀 심판이라고 주장한다. 문선명 교주 자신이 재림주로서 통일교 성약말씀인 원리강론을 새진리라고 주장하며 문선명과 통일교 원리강론을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거짓이다. (벧후 3:10~12)통일교 원리강론에는 진리심판 곧 말씀심판이라고 주장한다. (약 3:6)

"반증- 벧후 3:10~12, 살전 4:16~17, 마태복음 27:52, 마태복음24:29

 

6.구주론은 예수를 실패자요, 예수 십자가를 믿어도 구원이 없으며, 영적 구원만 있고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를 믿어야만 영육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거짓이며 적그리스도이다.

 

기독교 교인들도 문선명 재림주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지만 문선명 자신은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이비 교주이다. (마태복음 16:23)

"반증- (요3:16, 창1:28), '사단아! 물러가라.'(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3:14), (눅 9:31)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시며 십자가 보혈로만이 인류가 죄사함을 받을 수있다.

 

7. 통일교 원리강론 부활론은 예수 십자가 부활을 부정하며 기독교 성도 부활을 부정한다. (살전 4:16)

"반증-(마 27:25, 눅 9:60, 롬 G:23)

 

8. 통일교 원리강론 재림론은 문선명 자신을 재림주로 만들기 위한 교리 이다.

 

① '재림주님은 언제 오시나?' 문선명 교주가 이 땅에 태어난 때이다. (마 24:14, 땅끝까지 천국, 마24:32) 문선명 자신이 참부모 재림주로 태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증-(마 24:36, '그날 그때 모름' , 계 3:3 '도적같이 주님 이 온다' )

 

② '재림주님은 어떻게 오시나?' 재림주는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고 여인의 (마24:30)몸을 통해 태어난 문선명 교주가 재림주라고 주장한다.

"반증-(계 12:5 '철장' , 눅 17:20, 마 7:21 '주의 뜻' )

 

③ '재림주는 어디로 오시나?' 동방 대한민국으로 오신다 (계7:2~3)문선명의 주장과 통일교 원리강론 주장은 언제 오시나? 한국에 재림주가 오고 1920연대에 태어난 문선명 교주(본이름 문용명)만이 재림주라고 통일교 교인들이 받들고 있다. 어떻게 오시나? 재림주는 구름 타고 오는 것이 아니고 여인의 몸을 통하여 낳은 문선명이 재림주 황제 참부모 구세주라고 주장한다.

 

재림주는 어디로 오시나? 극동의 중심 동방삼국인 한국으로 재림주가 온다고 교리적으로 가르치며 통일교 자칭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문선명만이 인류의 구세주 메시아라고 세뇌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참으로 인류역사에 이렇게 날조를 밥 먹듯이 하는 이단 사이비교주는 문선명 밖에 없다.

(마태복음 23:33, 포도원비유)

'동방삼국은 중국, 일본, 한국인데 중국은 신을 부정하는 공산국가 이기 때문에 재림주가 못 오시고, 일본은 천주대신 우상 숭배 국가이기 때문에 재림주가 못 오신다고 주장한다. 재림주는 한국에 오기 싫어도 한국으로 와야 된다고 주장한다. 문선명만이 오직 참부모 재림주라고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반증-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이며 수많은 영혼을 빼앗는 사악한 사이비 교주일 뿐이다. (계시록 12:9 '하늘에서 큰 용이 되어 쫓기니 이는 곧 옛 뱀이요 사단이다. ')

문선명은 본래 이름이 문용명 인데 가운데 '용' 자 '적그리스도용자' 를 빼어버리고 '선' 자를 집어넣어 자신은 태양이다. 문은 달이며 선은 태양,명은 스타(별)이다. (창세기 37:1 요셉의 꿈.)

 

모세 오경과 구약은 촛불에 해당되고 이미 전깃불인 예수님 신약 말씀이 선포됨으로 구약의 사명이 끝났고 문선명의 이름인 태양인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 교주가 재림하심으로 예수님의 사명은 끝났다고 문선명 사이비교주와 통일교 원리강론은 재림론에서 결론을 맺고 있다.

문선명 교주야 말로 하나님의 대적원수이며 전세계 19억 기독교 교인들의 원수요, 한국1200만 기독교 교인들의 원수이며 일순간의 악연으로 통일교회에 빠져 세뇌되어 지옥 길로 가는 사람들의 원수이다. 억울하게 자살하고 이혼, 가정 파탄된 불쌍한 영혼들의 원수요, 박준철 목사의 빼앗긴 30년을 짓밟은 원수가 바로 문선명 교주이다.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은 예수님을 정말 믿고 성경 진리안에 산다면 하나되고 단결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를 막기 위해 문선명 통일교 집단을 뿌리 뽑아야 할 것이다.

 

9. 통일교 원리강론, 타락론은 아담과 하와가 지의 뿌리가 된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하와의 종이었던 천사장 루시엘과 하와가 불륜한 사랑관계로 영적 타락을 하였고 아담과 하와가 불륜한 사랑관계로 육적 타락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되는 재림주 문선명 교주가 인류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복귀해야 된다는 복귀 원리 교리 이다. (창세기 3:I~7)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면 완전구원의식을 치르기 위하여3일 혈통복귀 피가름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반증-(요 1:3, 창2:17),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지요, 성경 어느 구절에도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타락했다는 성경구절이 없는데 통일교 원리강론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타락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예수를 부정하고 성경을 부정한 것이다. 통일교 원리강론은 예수님 성령잉태를 부정하며 사생아요,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간 예수라고 주장한다. 오직 구주는 문선명이라고 주장하지만 적 그리스도요, 사이비 교주일 뿐이다.

 

 

제 4 절 예수, 공자, 석가를 자신의 제자라고 말하는 문선명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지금까지 집회 때마다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 등 역대 정권을 싸잡아 통일교회를 이용하고 배신했다고 온갖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했습니다.

 집회 때마다 "여기에 정보부나 안기부에서 온 사람이 있으면 청와대에 보고하라" 고 온갖 만용을 떨었습니다. 또한 기독교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하며 "문선명을 이단으로 규정짓고 반대하지만 통일교는 성공하고  기독교는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를 반대하기 때문에 심판 받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1950년에 박태선 장로와 나운몽 장로가 문선명과 하나 되었더라면 기독교와의 통일은 1950년에 이루어져 문선명 통일제국을 세웠을 것이 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문선명은 "구약적 복귀패는 박태선이 책임자이고 신약적 복귀패는 나운몽 장로패이다. 복귀패 재림주님은 통일교 신령집단 재림주인 내가 책임자이다. 주님을 위한 기독교가 되어야 하는데 자기 교파 교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망하고 통일교와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승리할 것이다. 기독교가 아무리 반대해도 통일교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승리할 것이다. " 라고 했습니다.

 

문선명은 ''나는 재림주 참부모로서 영계에 가면 참부모 이름이 최고이다. 이 지상에서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고 충성한 사람은 최고의 축복이고 문선명 재림주를 믿고 복종하지 않은 기독교인은 원수가 되어 지옥을 가게 될 것이다 지상에 있는 기독교 교인들에게 문선명 통일교 재림주를 믿으라고 아무리 외쳐도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간다. " 그러면서 문선명은 "석가, 공자, 예수는 내 제자다" 라고 외쳤습니다.

 

통일사상 연구원 원장을 하다가 죽은 이상길의 '영계에서 보내온 편지'라는 책이 있는데 문선명이 인정한 책이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에게는 필독서인 '영계의 실상과 지상 생활 1, 2, 3, 4, 5권' 에 예수님을 저승에서는 한없이 외롭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어 명예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문집단의 통일교 천국 가는 구원 의식인 합동결혼식은 문선명으로부터 용서 기도를 받고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어야 구원받고 천국 간다고 주장하여 영혼결을 시킨 것이다. 예수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1200만 기독교 교인이 매일 궤멸을 위하여 외쳐야 한다.

예수님이 역대 성인들이 문선명 교주를 믿고 구원받고 싶다고 했으며 통일교 구원의식인 영혼결혼을 시켜달라고 했습니까? 참으로 사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문선명을 구세주 참부모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연세가2000세고 문선명은 나이가 83세 입니다. 누가 아버지 입니까?왜 통일교 세뇌용 책에는 문선명 참 부모님이 불효 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예수님이 문교주에게 빌고 있다는데 이런 조작으로 통일교 교인을 세뇌시키는 문집단은 1200만 기독교 목사 성도들이 의분심을 갖고 통일교 집단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교통사고로 죽은 문흥진의 지시를 받고 마호메트, 공자, 석가등 인류 역사에 왔다 갔던 영웅, 열사, 기독교 순교자들이 영계의 총 사령관인 문흥진의 명령과 지시에 복종하고 있다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문선명 재림주가 죽어서 천국 문을 열고 천국에 갈 때 예수님은 구원받는다고, "영계에서 보내온 편지" 에 써 놓았습니다. 참 부모님이 영계에 오셔서 영계를 정리할 때까지 예수님은 기다려야 한다고 책에 써놓고 예수님의 명예를 훼손했습니다.

 

적 그리스도인 문선명의 사주로 통일교 교인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계의 가짜 책을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하게 하고 있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한 통일교 교인들을 각종 공갈 · 협박으로 재산을 착취하는 도구로 이용하곤 있습니다.

 

지금도 사이비 교주에게 미혼 남녀가 매일 통일교 집단에 유혹되어 영혼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로 믿다가 통일교 교인이 통일교를 떠나 문선명한테 배운대로 자신을 재림주라고 칭하며 사이비 교를 창단한 사람도 수십 명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80년까지 통일교 집사일을 했던 JMS(정명석)사이비교주입니다. 정명석 집단에서 20만명이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1만 5천명의 영혼이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중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다가 탈퇴한 주영희 패거리들이 교단을 만들었는데 그는 자기가 재림주고, 2000년 전 세례요한이 예수를 증거 해 주듯이 문선명의 사명은 끝났다고 하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제 24 장 혈통복귀 피가름 집단인

 

문선명 통일교

 

제 1 절 처음부터 혈통복귀집단이 된 통일교


문선명은 통일교 협회창립 일인 1954년 5월 1일 이전인 1953년 12월 24일부터 1954년 1월 14일까지 부산의 신상진, 유신선 씨의 집에서 21일간 밤낮으로 부흥집회를 열었다. 부산시 범냇골(부산시 동구 범6동 1513번지) 산꼭대기 토탐집에서 생활하다가 1953년 3월에 수정동(부산시 동구 수정5동 427번지)에 가정주택을 사서 통일교로 사용하였다.

 

문선명은 사악한 통일교 복귀원리라는 섹스교리로 통일교에 예쁜 여자 교인들과 피가름 구원의식을 치뤘다. 문선명이 복귀 원리라는 미명하에 통일교 여자교인들과 혈대교환 혈통복귀 의식인 섹스를 하는 걸 첫번째 부인 최선길씨가 알았다. 최선길씨는 혈통복귀 의식을 치른 여자교인들을 폭행하고 남편인 문선명의 멱살을 잡고 폭행을 하였다. 문선명은 도망을 쳤고 최선길씨는 수정동 가정 주택 교회에서 생활했던 여자 통일교 교인들을 전부 쫓아내고 수정동 통일교의 집과 가재도구를 1953년 9월에 몽땅 팔아버렷다.

 

문선명은 최선길씨를 피해 이곳저곳을 도망 다니다가 1953년 9월 17일 통일교 본거지를 옮기려고 서울까지 왔다. 그러나 문선명에게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1953년 12월 24일 서울에 있는 문선명에게 부산 영도에 신상진이라는 통일교 교인이 자기 집에서 부흥회를 해달라고 하였다. 부산 시내 전체 통일교 교인 28명이 신상진씨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문선명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12시간 걸리는 완행열차의 기차비가 없어서 올 수가 없자 6마리아의 한 사람인 오명춘 집사가 여비를 급하게 마련해 주어서 서울에서 부산 영도교회까지 올 수 있었다.

 

후일 오명춘 집사는 문선명 교주와 혈통복귀 의식을 치른 후 문선명의 노예가 되어 집을 판대금 거액인 500만원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쳤다. 이 사건으로 오명춘 집사는 가정이 파탄되어 이혼하고 버림받고 결국 문선명 교주에게 까지 버림을 받았다.

 

문선명 교주는 혈통복귀 원리 섹스교리로 말미암아 영도에서도 처녀와 복귀의식을 치러 한 처녀 대학생의 파멸을 가져왔고 그 처녀는 사생아까지 낳았다.

문선명은 서울에 올라와서도 수많은 처녀들과 6마리아, 60마리아를 만들어 혈통복귀 섹스를 통한 의식으로 완전 구원, 사기교리를 실천하였다.

 

서울에서 이성화라는 처녀를 혈대교환, 피가름, 혈통복귀 의식인 섹스로 복귀의식을 치렀다. 이성화 처녀는 후일 아들을 낳는 비극을 가져왔다.

문선명은 40세에 1960년 4월 11일, 몇 번째 부인인지 알 수 없는 어린17세(고등학교 2학년)의 나이 어린 한학자를 아내로 맞아 어린양 혼인잔치를 하여 지금까지 14남매를 낳았다. 한학자와 살면서도 1965년도 최순화라는 처녀와 혈통복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간통하여 박 사무엘(박준경)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미국 이스튼 가든 호화 궁전 저택에서 유럽, 미국의 젊고 예쁜 통일교 여자교인들이 문선명 교주에게 인사를 할 때 끌어안고 키스를 하였다. 문선명 교주와 끌어안고 키스 하는 광경을 본 한학자는 모든 유럽 미국 여자들은 문선명 교주에게 경배 드리고 인사할 때 문선명 교주와 1m 거리로 접근금지를 시키라고 명령하였다.

 

제 2 절 문선명은 혈통복귀교리를 통해 가정을 파괴한다


문선명 교주야말로 이 땅의 혈통복귀 피가름 종교를 창립하여 윤리와 도덕을 파괴시킨 최초의 가정 파괴범입니다.

 

문선명은 자기의 혈통복귀 피가름교리를 위장하기 위하여 타락론을 강조하고 가정의 윤리와 도덕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에게는 간통죄가 가장 큰 죄라고 말합니다. 또한 자신의 섹스교리를 위장하기 위해 선문 대학교에 순결학과를 만들어 놓고 미혼 남녀들이 순결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정정 파괴범이 어떻게 자기를 위장하고 가증스럽게 통일교 교인들을 속이고 국민까지 속인단 말입니까?

 

문선명은 신정순, 이순철, 오명춘, 김안실, 유신선, 임영신 이렇게 6마리아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혈통 복귀하였습니다. 6마리아는 60마리아로 늘어났고 수많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이 문선명 교주의 피가름 혈통복귀의식으로 희생이 되었습니다.

 

문선명은 수많은 처녁들과 유부녀들의 영혼을 빼앗아 자신의 남편보다도 문선명 교주를 더 극진히 모시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일례로 수많은 60마리아 중에 옥상현씨는 원래 장대현 교회의 권사였습니다. 옥상현 권사는 통일원리를 들은 후 장대현 교회에 나가지 않고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라고 믿고 따랐던 여자 교인입니다. 그녀는 문선명 교주와 복귀의식을 치르고 미혹에 빠져 가정이 파탄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옥상현 권사는 문선명 교주와 김종화와 같이 구속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장대현 교회에는 우화섭이라는 장로님이 계셨는데 평양 고무 연맹의 이사장으로 돈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옥상현 권사는 우화섭 장로의 힘으로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으나 문선명 교주는 평양 감옥에서 흥남 감옥소로 이송 되었습니 다.

 

그러자 옥상현 권사는 그 먼 거리를 쫓아가서 돈을 마련하고 사식을 마련하여 문선명 교주의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문선명이 흥남 감옥소에 있을때 옥상현 씨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털실로 짠 것처럼 양말을 만들어 문선명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옥상현씨는 두 딸과 같이 살았는데 그 곳에서 문선명, 문정빈, 김원필씨도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옥상현씨는 문선명 교주의 부산 피난 시절에는 1945년 4월 28일에 결혼한 첫 번째 부인 최선길을 대신해 문선명의 뒷바라지를 다 했습니다. 40년을 문선명을 모시고 그림자 처럼 따라 다녔지만 그녀는 통일교회에서 버림받고 보살핌도 받지 못했습니다. 후회와 처절한 가난으로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제 3 절 통일교는 혈통복귀의식이라는 3일식 피가름행사


통일교에서는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기하급수적으로 릴레이식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복귀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복귀의식을 치른 사람만이 완성된 아담, 하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통일교 원리인 타락론에는 죄의 뿌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되어 죄의 뿌리가 된것이 아니고 아담 하와의 불륜한 사랑관계로 타락된 것이 선악과요 죄의 뿌리라고 통일교 원리 강론 교리는 주장합니다. 따라서 천사장 루시엘이 하와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더럽혀 죄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에 문선명 재림주 메시아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혈통복귀를 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혈통복귀 피가름을 통한 혈통복귀야 말로 모든 인류를 하나님 앞으로 구원한다는 의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동방 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서 그 당시 문선명 교주와 같은 혈통복귀 피가름교주가 나타나 선량한 처녀들과 수많은 가정을 파괴해도 징벌하는 법조인이 없었고, 종교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문선명 교주는 자신의 수재자에게도 복귀의식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제 4 절 문선명이 창안한 혈통복귀 피가름의식


통일교 교인이 많아지자 문선명은 개개인에게 혈통복귀의식을 치를 수가 없었습니다. 점점 세상 이목과 언론의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문선명 교주 자신이 통일교 수 많은 여자들을 모두 혈통 간음 관계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방법을 짜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이 합동결혼식을 할때 포도주인 성주의식을 먼저하게 되는데 이때 포도주에 21가지의 과일즙과 포도주를 넣고 자신의 00을 넣어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는 신랑, 신부에게 혈통 복귀 의식인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입니다. 그 포도주는 문선명 교주의 피와 살을 의미합니다.

 

또한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고 3년 전도기간이 지난 다음 3일 혈통복귀 피가름의식을 함으로 문선명의 혈통을 이어받고 혈통복귀를 한 통일교 교인들은 아담이 지었던 원죄는 물론 조상 대대로 지었던 혈통죄와 형제들이 지었던 연대죄 그리고 자신이 지었던 자범죄가 깨끗해지고 완전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제 5절 문선명 통일교의 혈통복귀 피가름 3일간 복귀 의식

 

다음은 문선명 자신이 처녀와 유부녀들에게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 구원의식을 행한 것 같이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신랑 신부에게 통일교 원리강론 복귀원리 완전구원교리가 3일 행사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라는 증거의 공문이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신랑 신부가 행하는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의식
 

1. 의의


가. 전체 복귀섭리역사를 탕감 복귀하는 실체적인 복귀식(탕감식)이다.

첫째 날은 구약시대(타락한 아담, 구약권)의 복귀식이다.

둘째 날은 신약시대의 예수님 입장을 탕감 복귀하는 의식이다.

셋째 날은 복귀된 신랑으로서 신부를 재창조하는 의식이다.

 

나.문선명 참부모님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는 조건을 세우는 탕감의식으로 아내가 먼저 복귀되어 남편을 다시 낳도록 하는 가정을 외적으로 통과하는 탕감의식이다 내적인 의식이 문선명의 00포도주성주의식 임.

 

2. 준비


가.준비물 : 문선명 참부모님 존영(사진), 심정초 또는 통일초, 성건(수건에 포도주를묻힌 것), 성건을 담는 그릇, 성염(소금),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 행사 식순 등 준비

 

나,본 혈통복귀 피가름 의식은 통일교 합동결혼식 축복 후 40일 동안 부부관계를 하지 않고 성별 생활을 하여 성공한 남편과 아내가 통일교 목사님에게 축도를 받고,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 의식행사를 치르게 된다. 반드시 하루에 1번은 혈통복귀 피가름 행사를 하여야 하며,하루에 2번만 하여도 재 타락한 결과가 되어 죄인이 되는 것이다.

 

다. 3일 혈통복귀 피가름행사에 사용하는 방과 침구일체를 성염(소금)으로 뿌려서 깨끗하게 성별한다.

 

라.신랑 ·신부는 적당한 장소(주로 북쪽)에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 온영(사진)을 모시고 심정초 또는 통일초에 불을 밝힌다.

 

마. 성건(수건에 포도주를 묻힌 것)의식

1) 남편과 아내는 먼저 정성껏 목욕을 한다.

2) 성건을 담근 그릇은 가로 20cm, 세로 10cm, 높이 3cm정도로 하고물은 성건 하나를 적실 정도로만 준비해서 신랑·신부가 서로 완전 나체 상태에서 성건 (수건)으로 몸을 닦은 다음에 그릇에 물이 남지 않도록 한다.

3)성건은 남편과 아내의 것이 바뀌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3일 동안 반드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4)몸을 닦을 때에는 자기가 자기의 몸을 닦아야 하며, 닦는 순서는 머리부터 닦는다.

5)이 의식은 성건으로 몸을 닦아 외적으로 성결케 하는 조건을 세우는 것이다

 

3. 행사


가. 제1일

 

1)성건으로 물을 적셔 몸을 닦은 다음에 다시 양복 또는 하얀 예복을입고, 하나님과 참부모님 존영(사진)에 찬송과 경배를 드리고 가정 맹세를 봉독한다.

2) 아내가 앉고 남편이 아내에게 3배 경배를 드린다(이 때의 아내는 어머니 입장이기 때문에 어머니, 나를 낳아 주십시오 하는 심정으로 경배한다. )

3)아내가 어머니 입장에서 기도한다. (기도내용 : 통일교 축복에 대한감사와 문선명 참부모님 가정의 전통을 상속받는 가정을 이룰 것을결심하고 또한, 어머니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심정을 상속받는 남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4)아내 상위로 사랑행위를 한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남편이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는 의식이다. )

= 참고사항 : 사랑행위(삽입)을 위해서 애무를 해도 된다. 반드시 삽입이 이루어져야 하며 사정을 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정이 안되면(어려우면)사랑행위를 마쳐도 된다. 단, 반드시 삽입은 이루어져야 한다. (주체가 발기가 되지 않아서 삽입이 되지 않을 경우 아내가 남편의 성기를 손으로 잡고 자신의 성기 속으로 밀어 넣어서라도 성공을 시켜야 한다. 사랑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아 시간이 연장될 때에 24시간 이상 경과하면 안 된다. 사랑 행위시 콘돔이나 피임기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

5) 다시 신랑 ·신부는 1회 성행위를 마친 후 다시 정장을 입고 남편이 아내에게 1배 경배를 드린다. (이 때에 남편은 아내에게 "어머니, 나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심정으로 경배한다. )

6) 아내가 두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과 문선명 앞에 첫날 혈통복귀 피가름 혈통복귀 행사를 마쳤다는 보고 및 감사기도를 드린다.

 

나. 제2일 :혈통복귀 피가름행위를 남편이 아래에서 부부관계를 하고,아내가 남편위에서 부부 관계를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1) 첫째날 혈통복귀의식과 둘째날 셋째날 피가름 혈통복귀 의식은 하루한 번만 성교의식을 해야지 통일교 합동결혼식 후 3년 동안 합방을 안해서 정욕이 넘쳐 두번 피가름을 하면 탕감봉으로 매를 맞고 천국 구원의식이 깨어지고 7년동안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

 

다. 제3일


1)제3일째 의식은 남편이 비로소 남자의 주관성을 복귀하는 의식이다.

2)성건의식 후 정장을 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 존전(사진)에 찬송과 경배를 드런다.

3) 남편과 아내가 마주보고 맞절 3배를 한다.

4) 남편이 주관성 복귀된 남자의 입장에서 하나넘 앞에 기도한다. (기도내용 : 남자의 주관성 복귀와 잃었던 조건회복을 감사하는 내용)

5) 아내가 답례기도를 한다.

6)남편 상위로 남편이 3일째에는 혈통복귀 피가름관계를 할 때 아내 위에서 부부관계를 하고, 아내는 남편 밑에서 사랑행위를 한다. 복귀된 아담 가정에서 혈통복귀 피가름로 타락했기 때문에 통일교 복귀 원리인 혈통복귀 피가름로 완전구원을 받은 아담 가정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7)사랑행위 후 성건으로 하체를 닦는다. 닦은 성건은 세탁하지 않고,그대로 말려서 이스라엘 민족이 법궤를 보관하듯이 소중하게 보관하여 자손만대까지 물려준다 그 이유는 완전구원을 받은 중생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8) 정장을 한 후에 남편이 앉고 아내가 남편에게 1배 경배를 드린다.

9)남편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전체 행사의 종료 보고와 절대로 타락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기도 및 3일 행사 성공을 감사하는내용으로 기도한다. )

 

4. 주의사항


가. 3일 행사를 1일이나 2일에 끝내거나 4일 이상해서는 안 된다. 단,3일행사 도 중 불가피한 사유(긴급한 일)로 첫날 행사 후 그 다음날 행사를 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 며칠 뒤 2일째 행사를 할 수는 있다. 기성가정(결혼 후 통일교 입교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합동결혼식을 한 가정)의 경우 나이와 건강의 문제로 계속해서 3일간 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 첫날 행사 후 수일간을 띄워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개월 씩 띄워서 해서는 안된다.

 

나. 성건 사용시 주의사항


1) 마른 성건을 사용해도 안되고 세탁한 성건을 사용 해도 안 된다.

2) 성건을 사용하지 않고 3일 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

3)성건을 서로 바꾸어 사용해도 안되고, 하나의 성건을 둘이서 사용해도 안 된다.

다. 아래와 같이 사랑행위를 한 경우에는 실패가 된다.
1) 첫째 날 둘째 날 남편상위로 사랑행위를 한 경우

2) 셋째 날 아내상위로 사랑행위를 한 경우

3) 삽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행위를 끝낸 경우

4) 본 식 외에 다른 사랑행위를 한 경우

 

라. 3일 행사 첫째 날(둘째 날이나 셋째 날도 해당됨)의 행사를 수일에 걸쳐서 행할 경우도 실패가 된다. 시작된 시간으로부터 24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

 

마. 3일 행사는 반드시 허락하신 목사의 축도를 받은 후에 실시해야 한다

 

바.본 식대로 3일 행사를 하지 못했을 경우 협회 가정국에 상담한 후성별의 탕감조건을 세워야 한다. 그 다음 축도를 받고 성건을 다시지급 받아 3일 행사를 실시한다.

 

사.제1일 제2일 사랑행위 한 후에는 타월로 하체를 닦되 제3일째 날은 반드시 성건으로 하체를 닦은 후 그대로 말려 보관한다.

 

아. 3일 행사중 동일한 일자에 사랑 행위가 중복되지 않도록 한다. 즉,3 일 행사의식이 끝나는 시간과 새로 시작하는 시간이 동일한 날짜에 중복되지 않아야 한다.

 

 

 

제 25 장 문선명은 모든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고

 

파멸시킨다


제 1 절 문선명은 자녀와 가족 구원도 못 시킨 거짓 메시아 이다


문선명은 자신은 하나님이 적그리스도이며 희대의 영혼 사기꾼이다. 첫번째 아내 최선길도 전도하지 못하고 이혼 하였으며 문선명은 혈대교환, 혈통복귀의식, 피가름,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신과 자녀들도 구원하지 못 하였으며 방탕과 음란, 자살, 마약, 이혼, 사고로 자녀들이 죽었다.

문선명의 죄악은 자식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으며 이는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라는 증거이다. 자녀들도 방탕, 마약, 이혼, 동거, 자살, 사고사, 감옥 생활 등으로 고통 당하고 있다. 자신의 자녀들 신앙교육도 책임 지지 못하는 문선명 사이비교주가 인류의 구세주 참부모 재림주라는 것은 거짓이며 영혼 사기꾼이라는 증거이다.

 

문선명이 결혼하여 낳은 여섯 번 째 아들인 문진영(21세)은 1999년 9월26일날 호텔 경영 수업을 위해 미국 네바다주로 가는 길에 있는 '리노'라는도시 호텔에 투숙하던 중 17층 발코니에서 떨어져 자살하였다고, 미국 신문에 대서특필하였습니다. (리노 미국 레바다주 AP=연합뉴스/1999. 11. 11)

그 당시 문진영은 문선명이 수많은 통일교 2세 가운데 뽑은 유화주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유화주에게는 애인이 있었고 그의 애인은 한남동 저택과 미국 문선명 왕국의 저택인 이스튼 가든까지도 찾아가 크나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문진영이는 괴로워 하였습니다. 아기를 하나 낳았지만 별거 하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문진영이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자신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신의 며느리 될 사람의 신앙을 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며느리 후보 중 학벌, 미모만보고 결정하고 맞이하여 결국 사랑하는 아들인 문진영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문선명이 본부인인 첫 번째 부인 최선길과 아들을 버리고 이혼하고 처녀를 피가름하여 사생아를 낳고 그 수많은 가정을 파탄시켰다. 1960년 4월11일 문선명(40세) 부인 한학자(17세)에 자칭 재림주 참부모 어린양 혼인잔치를 하고 낳은 큰아들이 문효진이다.

 

문선명과 한학자 사이에 낳은 큰아들 문효진이 당시 19세, 홍난숙 15세에 결혼하여 5남매를 두고 이혼하였는데 전 며느리 홍씨는 "전 시아버지인문선명 교주는 구세주가 아니며 사기꾼" 이라고 미국 CBS방송에 한 시간 동안 보도 하였습니 다.

 

문선명의 딸 문은진도 "문선명은 자기 아버지일 뿐이지 재림주 구세주가 아니다" 라고 주장 하였습니다 (조선일보, 1998. 10. 08)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며느리 감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그런 부모입니다. 자신의 자녀도 신앙책임을 갖지 못하고 파경을 맞는 자녀들이 있는데 통일교 미혼남녀를 합동결혼식을 시켜 완전 구원해주고 후손대대로 복을 빌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귀중하고 소중한 자식을 죽게 만든 사람이 바로 문선명 교주인 것입니다. 문진영이 죽은 후 통일교회 내에서는 7일 동안 문진영의 죽음을 통일교 교인들에게 숨겼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숨길 수 없어 호텔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발표 하였던 것입니다. 문진영의 죽음은 결국 부모를 잘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처녀인 Y대 여대생 김명희도 간음 간통 복귀의식을 치러 문희진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문희진은 1955년 6월 30알(양력 8월 17일)출생하였고 1969년 8월 1일 14살 때 조치원 부강역에서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유혹으로 통일교인이 된 이득삼과 그 딸 최순화는 문선명 교주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처녀인 최순화와 혈통복귀라는 미명으로 복귀의식을 치러 박 사무엘이라는 사생아 아들을 1965년도에 낳아 길렸습니다.

 

제 2 절 문선명의 둘째 아들 문흥진의 사망


미국에서 1983년 12월말에 문선명의 둘째 아들 문흥진(17세)의 차와 트레일러가 부딪혀 문흥진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문흥진의 시체를 한국에 가져와 1984년 1월 2일 승하식이라며 거창하게 장례를 치렸습니다. 문선명은 1984년 1월 3일 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뉴욕 벨베디아 수련소에서 죽은 문흥진을 위한 애승일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문흥진을 영계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을 세뇌시키기 위하여 재림주 천지부모 행세를 하면서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까지도 신으로 섬기라고 공갈 협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문흥진이 통일교 전체 교인들을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죽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에게 1984련 1월 1일부터 1월 30일까지 금식 철야 회개 기도를 실시하라고 명령하여 실행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죽은 문흥진과 박보희 회장의 살아있는 큰딸 박훈숙을 영혼 결혼시키고 박훈숙을 문훈숙으로 성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1971년에 문선명이 미국 시민권을 가졌을 때 미국성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훈숙은 일생동안 영혼결혼을 하여 살아있는 처녀가 문선명 교주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문선명은 박훈숙에게 죽은 아들 문흥진을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과천교회에 목사로 있으면서 국내의 유명한 사건을 해결한 강창수(가명)라는 형사를 만나 문흥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문흥진이 미국 뉴욕에서 교통사고로 죽기 전 국내에서 과속으로 교통사고를 내어 경찰서에 잡혀 온 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문흥진의 비서 역할을 했던 과장이 강창수 경정을 찾아와 "제발 문흥진의 운전 면허증을 빼앗아 달라" 는 부탁을 한 일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문흥진을 수행하는 비서는 과속으로 차를 운전하는 문흥진이 무섭다고 하며 운전 면허증을 빼앗아 달라고 담당형사에게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떻게 운전하고 다녔는가? 하는 것을 저는 안 보아도 훤히 알 것 같았습니다.

 

제 3 절 재림한 문흥진 노릇한 에지프트


문선명은 통일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문흥진이 죽고 난 후 반드시 이 땅에 재림하여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문흥진이 재림하였다고 떠벌리기 위하여 아프리카 케냐 주재 곽정환 회장과 아프리카 짐바브웨 청년흑인 에지프트와 만났습니다. 에지프트는 1983년부터 통일교 사람들과 접촉한 사람이 었습니다. 짐바브웨 책임자인 어거스틴 마튼 고시와 만나 통일교 원리강의를 듣고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로, 메시아로 믿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문선명은 1987년 에지프트가 적극적이며 설교도 잘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문선명과 곽정환 회장은 에지프트에게 문흥진이 되라고 강요하고 명령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문흥진이 되기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곽정환 회장, 간부들의 설득으로 재림한 문흥진이 되어 통일교 회개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에지프트에게 전세계 통일교회를 다니며 통일교 교인들을 회개시키는 고백식 설교를 하게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을 회개시킨다고 하며 죽은 문흥진이 살아서 재림해서 에지프트에게 영이 들어 왔다고 외쳤습니다. 에지프트를 문흥진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에지프트는 죄있는 통일교 교인들을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에게 죄악을 용서를 받는 조건이라며 죄악의 정도에 따라 몽둥이로 탕감봉이라는 구실로 10대, 7대, 3대, 1대를 무자비 하게 폭행하였습니다.

 

유럽, 아프리카, 남미, 미국, 일본, 한국에서 흑인인 에지프트가 사망한 문흥진이라고 자칭하며 통일교 교인들이 저지른 간통죄, 강간죄, 성 추행죄, 공금 횡령죄, 절도죄, 부부 싸움한 죄를 심판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에게 문선명 교주를 배반한 죄, 욕설한 죄는 몽둥이를 맞아야 용서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공개적으로 에지프트에게 죄악 고백식을 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죽은 문흥진 행세를 하며 전 세계 통일교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죄악을 저지르는 통일교 교인들에게 죄를 용서하여 준다는 면죄부 형식으로 폭행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합동 결혼식 전에 혼전 혈통복귀 피가름 한 것과 합동 결혼식 후 혈통복귀 피가름을 한 것까지도 몽둥이로 폭행을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미국 호화 저락인 이스트 가든에서 에지프트를 불러 환영 만찬회를 열었습니다. 에지프트는 자신을 교통 사고로 죽은 문흥진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문선명 큰아들인 문효진, 셋째 아들인 문현진, 넷째 아들인 문국진은 진짜 문흥진이 재림 한 것이라면 어린 시절에 대하여 말을 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어린 시절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에지프트가 문흥진이라는 것은 거짓이었기 때문에 예언할 능력도 없고 영을 볼 수도 없으며 투시력도 없었습니다. 에지프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문선명, 곽정환, 에지프트 3명은 통일교 교인들의 죄악을 회개시킨다며 사기극, 조작극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협회 최고위층 간부들과 통일그룹 내 기업체 사장들은 에지프트에게 하는 고백식을 피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겹사돈이었던 홍성표 일화사장도 곽정환 회장에게 고백식을 안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곽정환 회장은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겹 사돈인 박보희 총재도 에지프트에게 죄악을 고백하는고백식을 했습니다. 에지프트는 60세가 넘는 박보희 총재를 무차별적으로 폭행 하였습니다. 그래서 박보희 총재는 뇌출혈을 일으컥 뇌수술을 받았고 조지타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습니다.

 

통일교 최초 합동결혼식을 한 36가정(1901년 결혼)부터 6,500가정까지의 모든 축복 가정도 고백식을 하였습니다. 그중 1,800쌍(1975년 결혼) 고백식에 저도 갔습니다.

1988년 12월 18일이었습니다. 그 날 통일교 본부 교회에 1,800쌍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전국에서 모였습니다 1,800쌍 전부가 지를 지었다며 고백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10가지도 넘는 지의 종류 중에 한 가지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1,800쌍 전부가 죄가 있다며 몽둥이로 지를 탕감해 주는 탕감봉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지를 지은 1800쌍 부부는 자리에 앉고 저와 다른 한 목회자가 일어서 있었습니다. 죄악의 조건에 걸리지 않는 저와 다른 목회자는 통일교 죄악 고백식 중 노아 같은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저는 진실과 정직으로 살아 온 목회 길을 회고하며 그 당시 문선명에게 미쳐서 참 부모님께서 저를 지켜 준 것에 대하여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문흥진 행세를 하며 폭력을 행사했던 에지프트는 문선명, 곽정환의 1회용 이용물로 사용되었습니다. 통일교회에서 에지프트를 버림으로 에지프트는 통일교회를 탈퇴했고 문선명 통일 교주는 고백식 후에 문흥진이 에지프트를 떠나 영계로 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1992년 8월 4일 일본 지바시 지바깽 마꾸바리에 있는 국제회의장 대 강당에서 통일교회와 문선명 교주의 문흥진 조작 행사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사이비 교주이고 적 그리스도며 인류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하나님의 대적이라고 문흥진 군 행세를 했던 에지프트가 폭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교 교인들은 이런 내용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 흑인청년 에지프트의 고백식 사건으로 수많은 통일교 교인은 신앙의 타격을 받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부부지간에 간통, 성추행 사건 등이 서로 폭로되어서 왕따가 되고 가정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통일교회 목회자 회의에도 타격을 주었습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에지프트는 교회에 많은 사건을 일으키고 통일교회를 탈퇴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재림주라며 호의호식하는 모습을 보고 에지프트도 사이비 재림주가 되었습니다. 에지프트는 문선명 교주가 하던 것처럼 재림주 노릇을 배웠던 것입니다. 에지프트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에 가서 가루트라는 기독교 종파를 만들어 가짜 재림주가 되어 포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문선명으로 인하여 또 하나의 사이비 교주가 수많은 영혼을 죽이는 재림주가 된 것입니다.

 

제 4 절 문선명과 친인척은 재산착취를 통해 초호화 생활을 누린다.


문선명 교주는 부 문경유, 모 김경계에게 효도하기 위하여 부모가 사망하였는데도 이북에 갔습니다. 이북 김일성이 문선명 교주에게 전세 비행기를 중국까지 내어주어 비행기를 타고 이북에 입국하였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통일교 교인들로부터 거액재산을 착취하여 얼마나 많이 투자 하였겠습니까? 갈 수 없는 이북 평북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고향 땅에 전세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출세하여 개선 장군같이 고향에 가서 죽은 부모에게도 효도하고 형제, 친척들에게도 온갖 선물로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교인1인 당 8만원씩의 돈을 거두어 고향에 땅 30만 평을 마련하고 수백억의 돈을 투자하여 예수님이 탄생한 베들레햄 같이 문선명의 고향 땅인 정주를 평화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남한에 살고 있는 문선명 교주의 사촌 육촌 형제들과 친척들을 통일그룹 사장, 기업체 총 책임자들로 세워 통일그룹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그룹이 망한 후에도 문선명 친척들은 돈을 가지고 초호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 5 절 문선명의 브라질 자르딘 계획


문선명은 통일그룹이 1998년 IMF때 부도가 났는데 전 세계 통일교의 자금줄이 막히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통일교 교인들 가정의 재산 착취 운동에 돌입하였습니다. 문선명은 교인들과 한가족이라고 세뇌 교육을 시키며 부자관계에 네 돈, 내 돈이 따로 없고 아버지 돈이 자식 돈이고, 자식 돈이 아버지 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의 돈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소유권을 이전하라고 하였습니다. 한국의 전통은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인데 어느 누가 자식이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줍니까? 문선명교주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한국과 일본의 통일교 교인들에게 무조건 재산을 자신의 소유로 이전하라는 공문을 내렸습니다. 교인들은 무조건 문선명에게 2,100만원을 총 생축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내야 했습니다.

죄를 용서해주는 천국행 면죄부인 탕감비 1300만원을 바쳐야 되고 조상 구원헌금 수천만원 등 재산을 바치지 않으면 통일교 교인이 아니고 죄인이 되며 지옥을 가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온갖 공갈 협박에도 통일교 교인들은 문선명에게 세뇌가 되고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재산을 바치게 됩니다.

 

문선명은 재산 착취를 통해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통일교 교인은 브라질의 자르딘 40일 수련에 무조건 참석 해야 하며, 만약 40일 수련을 참석하지 않으면 통일교 교인이 아니고 문선명 통일교 제국의 황족의 자격을 박탈한다고 하였습니다. 온갖 공갈 협박으로2,100만원 헌금을 내고 브라질 40일 세뇌교육 수련에 일천만원 경비를 쓰고 참석하는 사람만 문선명 사이비 종교 통일 제국의 황족 자격을 갖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문선명은 1차로 1억 평의 남미의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수련소를 매입하였습니다. 이 땅은 통일교 교인들을 잔인하게 공갈 협박하여 재산을 착취한 돈으로 사들인 것입니다.

 

문선명은 이 땅에 통일교 교인들 세뇌교육을 시키기 위한 교육수련소와 앞으로 50억 평을 매입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리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학교 건물을 건축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이라는 거창한 이름도 붙였습니다. 새 소망 에덴동산은 문선명 통일교 제국의 새 세계, 새 국가 건설을 하여 통일제국을 만들자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나라와 백성이 없었기 때문에 십자에 달려 죽었다고 문선명이 주장합니다. 문선명은 문선명 통일교 제국을 세우기 위하여 2004년 4월30일까지 세워야 한다고 통일교 교인들을 명령하며 독촉하고 있습니다.

 

이미 문선명은 주권 복귀와 조국 광복, 왕권 복귀라는 대명제를 가지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재림주 천지 부모, 통일교 제국의 왕으로 취임을 하였던 것입니다.

 

1차는 새 소망 에덴동산에 새 세계, 새 국가 통일제국 건설이 목적입니다. 2차는 산업 개발을 하여 임업농업 생산환경을 성공하자는 계획입니다. 3차는 공업도시를 만들자는 것이 목적입니다. 4차는 건설업을 육성하는 것이 목적이고 5차는 문화, 예술, 이상세계, 통일제국 건설이 목적입니다.

 

문성명은 한국에서 통일그룹 부도 후 한국 통일교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통일교 교인들을 남미 브라질로 대 이동하는 방대한 계획을 세워 각종학교를 세우고 1억 평 대지를 매입하였던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중심 삼고 애굽이라는 나라에서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여 애굽을 탈출하였고 홍해 바다를 건너 가나안 7족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은 고향 땅을 400년만에 찾게 되었다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역사의 동시성을 반복하고 복귀 섭리역사를 위해서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통일교 교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하면 브라질 자르딘 에덴동산에서 1억 평의 밀림을 무보수로 논과 밭을 개간해야합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세뇌되어있기 때문에 자자손손 영혼의 노예가 되어 죽을 때까지 밀림을 농업도시,공업도시, 상업도시, 어 업도시로 개간하고 건설하여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자신의 욕망과 통일교 제국을 세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엄청난 자원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통일교 교인들에게 부끄러움도 없이 재산의 소유권 이전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에서 세뇌교육을 40일 동안 받았던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은 2,100만원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친다는 각서를 쓰고 무조건 40일 동안 브라질에 가야 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같이 40일 수련을 가는 통일교 교인 부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부부와 같이 천국 황족으로 입적하는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그 기념사진을 10만원씩에 판매하고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에서 40일 수련 세뇌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식사비로 120만원을 바칩니다. 이 나라에서 40일 식사비는 1인당 5만원도 되지 않지만 식사비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한국 통일교 교인들이 외화를 밀 반출하여 브라질에 가져가서 문선명 교주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통일교 교인들 부부가 브라질 40일 세뇌교육 수련을 받기 위해서 가정생활도 할 수 없으며 직장도 퇴직해야 되고 장사도 문을 닫고 브라질에 가야 했습니다 부부왕복 항공경비 등 일 천 만원 정도의 금액이 들어갔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피골이 상접한 일본 통일교 교인과 한국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 2만 쌍을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농장으로 대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한국 통일교 교인 1만 5천 명을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농장으로 대 이주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 재산을 빼앗기 위하여 세뇌 교육을 시켜야 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야망에 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 통일교 교인과 일본 통일교 교인의 집을 팔고 융자를 받아서라도 무조건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교육에 참석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일생 동안 통일교 교세 발전을 위하여 매일 각종 전도 대회와 행사에 일회용 이용물이 되었고 재산을 바쳤습니다. 처절하고 불쌍한 통일교 교인들은 세상에서 돈 벌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통일교 교인이 되려면 계속 행사에 이용당하고 참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직업을 갖고 개인 장사를 할지라도 운영하기가 힘이 듭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일생동안 인생의 밑바닥에서 처절한 가난과 싸우면서 그 날 그 날 식사 끼니를 걱정해야 되는 처지니 자녀 교육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고 있는 통일교 교인들은 재산을 바칠것이 없어 집을 팔고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7천 만원에서 1억원을 바쳐야 했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에 복종하여 거액 재산을 바치기 위해서 통일교 교인들은 막노동을 하고 파출부 일을 하고 식당 일을 하며 매월 분납하는 교인도 있고 처절한 생활입니다.

 

제 6 절 재산착취 수단인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문선명은 1998년 6월 22일~7월 21일까지 30일 교육을 하였습니다. 전세계 각 나라 185개국에 개척 교회를 하고 있는 국가 메시아 148가정인 296명을 포함하여 통일교 최고위층 지도자 600명에게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1차 브라질 자르딘 40일 세뇌교육 때는 7월 22일~8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 2,000명이 참석했습니다.

 

2차 브라질 자르딘 세뇌교육 때는 9월 1일~10월 10일까지 3,400명의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부부가 자녀들을 40일 동안 떼어놓고 1천만 원씩을 교육비를 내고 브라질에서 세뇌교육을 받았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2,100만 원씩을 총 생축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문선명 교주에게 바쳤습니다.

 

3차 세뇌교육 때는 10월 11일~11월 17일까지 700명의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이 참석하였습니다.

 

4차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세뇌교육 때는 11월 18일~12월 28일까지 문선명 교주가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총 15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거듭되는 명령과 지시에 남미 브라질 자르딘 40일 세뇌교육에 우리 부부도 어쩔 수 없이 약 1천만 원 정도의 돈을 내고 세뇌교육에 참석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목사 부부까지도 40일 교육에 참석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목사들은 교육비가 없으면 교인들이 헌금을 마련하여 목사 부부 경비를 지원하여 참석하라" 고 명령 하였습니다.

교인들의 정성으로 경비를 마련하여 저의 부부는 4차 세뇌 교육 때 브라질 자르딘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저의 부부는 문선명 교주와 황족으로 살 수 있다는 입적 사진도 같이 찍었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통일교 교인들이 재산소유권 이전하라는 2100만원을 바치고 오라고 했습니다. 만일 바치지 않은 통일교 교인은 브라질 자르딘에서 40일 교육 등록할 때 2100만원 총생축 헌금을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에게 바칠 것이라는 서약서를 제출하였습니다.

 

5차 때는 1998년 12월 29일~1999년 2월 6일까지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6차 때는 1999년 2월 6일~3월 17일까지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에게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통일교 역사가 있는 한 총탕감비 1300만원이나 총생축헌금 2100만원,조상구원헌금 1대부터 120대 조상까지 수천만원, 10의 3조헌금, 문선명 나라 건국기금 매월 17만원, 8대명절 헌금 등을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은 무조건 바쳐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40일 수련이 회를 거듭할수록 한국과 일본의 통일교 교인들이 적게 오자 말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브라질 자르딘까지 40일 교육을 못 오는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까지도 2,100만원씩을 나에게 바쳐라" 하고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에게 공문으로 명령하였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직장에 다니거나 장사하는 통일교 교인들은 브라질 40일 세뇌 교육을 안 가더라도 집을 팔거나 융자를 받아 총 생축헌금 2,100만원씩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저는 브라질 자르딘에 가서 문선명 교주 부부를 아침 식사할 때 만났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새벽 집회를 마치고 6시 30분에 식사할 때 통일교 교인 경호원 여러 명이 경호를 서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김윤상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 원장과 부원장인 윤정로씨에게 저의 이야기를 하고 아침에 몇 분만이라도 문선명 교주 부부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가 식사를 하는 중에 그 앞에서 땅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 전부는 문선명 앞에 나아갈 때 경배 세 번이나 한 번을 무조건 해야합니다. 그러고는 문선명 교주에게 억울한 강제 인사를 당했던 것을 간단하게 설명 하였습니다.

1991년도 1월 6일 노원 교구 본부에 제가 교구장으로 발령을 받았지만 김봉철 총무국장이 서유암 교회장을 교구장으로 만들기 위하여 노원 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된 저를 강제 박탈시키고 서유암으로 교체 시켜 버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서울 시내 교회 전체 목사들 앞에서 일어나 부당성을 발언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던 것은 제 마음이 상했기 때문에 나갔다고 문선명 교주에게 보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김봉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저를 폭행한 내용이나 충격으로 심장병이 되었다는 내용은 차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저에게 "수련을 잘 받고 가라!" 고 말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르딘 수련 받는 교육생들에게 세뇌 교육을 시킨 후 아침새벽 설교를 하고 6시 30분에 식사를 한 후 바로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을 떠나갔습니다.

저는 브라질까지 간 것은 40일 세뇌 교육 조건도 세우는 것 이었지만 제가 문선명 교주에게 할말을 하기위해 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할 말을 다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문선명 교주는 미국에서 이미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브라질 자르딘 수련소에 와서 문선명 교주의 가족이 되는 황족 입적 사진도 안 찍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뿌리까지 썩은 통일교회는 한국과 일본 통일교회에서 공갈 협박으로 걷어지는 헌금이 없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브라질 자르딘 40일 세뇌교육 수련이나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서의 조상 해원 헌금을 한국과 일본에서 하지 않으면 전 세계 통일교회는 순식간에 쓰러지는 것입니다.

미국 소수의 통일교 교인들과 유럽 극소수의 통일교 교인들, 남미 통일교 교인들, 아시아 통일교 교인들은 절대로 문선명 교주에게 헌금을 바치지 않습니다.

 

오직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만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노예가 되어 재산을 착취당하고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1998년 12월 21일 밤에 브라질 자르딘 수련소까지 와서 통일교 40일 세뇌 교육생들과 하늘나라 천국 황족 입적 사진을 부부끼리 찍어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자칭 재림주로 의자에 앉고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부부는 문선명 교주의 뒤에 서서 황족 입적 사진을 찍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적 수련을 받은 합동 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1천만 원의 경비를 쓰고 2천 1백만원의 재산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쳐야 합니다.

 

브라질 자르딘에서 수련생 전체에게 매일 회개기도와 새벽에 문선명의 기도책을 읽는 훈독회와 세뇌 교육 프로그램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저의 뇌리에서 맴돌 뿐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제국 건설과 주권 복귀, 왕권 복귀가 최종목적입니다.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자르딘 수련은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 재산 착취에 목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이 지구상에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회에서 문선명 교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사악합니다.

 

제 7 절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임을 증명한 사람들


통일교 초창기에는 문선명 교주의 오른팔 격 이였던 통일교회의 충성꾼인 유민효, 유영효, 홍성표, 이진태, 박종화 등 수많은 사람들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36가정 최초 축복을 받고도 통일교를 탈퇴하거나 통일교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같이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던 엄덕문 회장도 초창기 통일교 청파동 시절부터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로 믿고 따랐지만 통일교회를 탈퇴 하였습니다.

 

엄덕문 회장은 문선명 교주의 축복을 받았고 통일교회의 산증인 이었습니다. 엄덕문 회장은 세종 문화회관 설계 등국내 설계의 일 인자로 통일교의 전국 교회를 설계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엄덕문 회장은 문선명 교주의 사이비 성을 알고 통일교회를 탈퇴하고 떠나 지금은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김덕진이라는 음악가는 일본음악 대학에서 공부를 하여 국내에 들어온 사람으로 통일교회 성가 19곡을 작곡한 열렬한 통일교회의 충성꾼 이었습니다.

지금도 통일교회는 김덕진이 작사 작곡한 19곡 성가를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선명 교주는 한국의 성가에는 김덕진 작사, 작곡을 지워 버리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 통일교 성가에만 김덕진 작사, 작곡 19곡이라고 인쇄되어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김덕진과 여자 교인 들에게 아담과 하와 때문에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파탄된 세상을 자신이 완성된 아담으로서 세상의 여성들을 혈통복귀 피가름을 통하여 복귀의식으로 구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여성들을 원래의 모양대로 복귀시키는 혈대 교환, 피가름 의식을 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덕진씨는 복귀원리,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유신선씨와 피가름 의식을 치렸습니다. 김덕진씨는 서울에서 통일교 여자 5명과 릴레이 혈통복귀를 한 것이 일주일 후에는 72명으로 불어났다고 문선명 교주에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또한 문선명 교주는 소생 장성 완성 3일 동안 혈통복귀 피가름관계 행사를 치러야 구원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김덕진씨에게 한번만 혈통복귀 피가름을 하여 혈통복귀를 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문선명 교주와 김덕진 씨는 이 새끼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싸움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김덕진씨는 문선명 교주와 싸운 후 통일교회를 탈퇴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기독교 신학교를 나와 경찰 목사가 되어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오른팔인 박정화씨도 이북 흥남 감옥 에서부터 알게되어 이남에 까지 같이 내려와 초창기 통일교회에 충성한 산 증인 입니다. 그는 문선명 교주의 통일원리가 김백문 교리라고 증거하였고 문선명 교주의 지시에 의해 혈통복귀와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를 실천하여 통일교 여자들과 관계를 많이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지시를 잘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 박정화씨는 문선명의 비서실장으로 수행하면서 일기로 쓴것을 '야록 통일교회사' 라는 책을 저술하려 통일원리가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이며 문선명 교주가 수많은 처녀와 유부녀들을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복귀하여 개인과 가정을 파괴한 문선명 교주라는 것을 폭로하였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통일교 비리 폭로운동이 벌어졌으며 특히 일본에서는 언론과 방송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일본 통일교 활동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황선조 한국 통일교 협회장을 박정화씨와 만나게 하여 자신의 비리와 혈통복귀 피가름 스캔들을 감추고자 하였습니다.

박정화씨는 문선명 교주의 부산 피난 시절부터 비서실장 일을 보면서 문선명 교주와 같이 동행하고 행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문선명 교주와 혈통복귀 피가름한 여자들과 혈통복귀, 혈대 교환을 한 내용을 일기로 써 놓을 수 있었는데 그것을 책으로 발행하여 일본과 한국에 폭로하였던 것입니다.

 

박정화씨는 1998년 1월에 문선명 교주의 잔악성과 통일교 원리가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수백 권의 책을 발송하여 읽게 하였습니다. 다급해진 문선명 교주는 황선조 한국 통일교 회장을 통하여 통일교 교인들의 피살인 거액의 돈을 주고 박정화씨를 매수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박정화씨는 거액의 돈을 받고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야록 책을 통일교회에 팔았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황선조 한국 회장이 1998년 4월 14일 부산 교구 내 통일교 목사 부부 회의석상에서 박정화씨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야록 책을 회수하고 사들였다고 한 말이 사실을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과 저의 부부는 황선조 회장의 그 말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제가 마포교회에 있을 때 전도한 문희숙씨는 1975년 2월 8일날 1,800쌍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하며 짝을 맞추어주어 합동결혼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문희숙씨는 그 남편과 이혼하였습니다. 이혼한 7년후 1982년 10월 14일날 6,000쌍 합동결혼식을 다시 올렸습니다. 문선명은 이혼을 당한 문희숙에게 박철수라는 사람이 최고 좋은 신랑감이라며 또 짝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문희숙씨는 남편과 두 남매를 두었습니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중고등학교 등록금을 내지 못하여 졸업도 시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렸습니다. 문희숙씨는 저에게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을 통곡하며 하소연을 합니다. 문희숙씨는 아무리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불가능하였고, 가난 때문에 두 아들을 고아원에 보내고 싶어도 다 커서 고아원에서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을 중고등학교도 졸업시켜 줄 수 없는 무능한 엄마가 되었다고 통탄하였습니다. 문희숙을 전도한 믿음의 부모인 저는 통일교회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부모로 믿게 한 결과로 이렇게 비참한 가정 파탄을 몰고 온 것에 대하여 제자신 스스로가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문희숙씨는 이제 죽더라도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재림주로 믿지 않을 것이고 통일교를 탈퇴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문희숙씨는 장로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대종교(단군교)에서 통일교회로 입교하였던 이백림 논산할머니에게 전국 통일교 교인들 조상 구원 해원식을 문선명이 명령하여 통일교 조상들을 1973년도에 모두 구원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이 합동결혼식인 축복을 받으면 조상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다시 지옥간 조상을 들고 나와 통일교 교인들을 미혹하여 1대부터120대까지 조상구원 하라고 명령을 내려 실천하는 것은 거액 재산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제 26 장 통일왕국을 꿈꾸는 문선명

 

제 1 절 통반격파를 지시한 문선명


문선명은 1998년 6월 20일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에서 자신이 참부모 재림주로 세뇌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40일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40일 세뇌 교육 중에 문선명 교주의 '원리강론' 과 문선명 교주의 '아버지의 기도 1권부터 12권' 을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서 발행한 죽은 이상길씨의 '영계에서 보내온 편지' 중 1권인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 , 2권인 '인류의 범죄자 누시엘' , 3권인 '새로운 세상' 은 통일교 교인의 재산을 착취하기 위한 세뇌 교육용 교재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 조상이 지옥간 것을 천국으로 보내 준다는 약속을 하고 지를 용서해 준다며 면죄부를 팔아 통일 교인 재산을 빼앗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성약시대 청평역사와 축복가정의 길', '축복가정과 이상천국 I~2권' 등을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 통일교 교인과 일본 통일교 교인을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매일 1시간 씩 전 가족과 친척이 모여 훈독회라는 이름으로 책을 소리 내어 읽습니다 전국적으로 각종세미나,각종 행사,국민연합 세미나 행사를 통하여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기 위한 세뇌교육으로 지속적인 훈독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 교인을 뛰어 넘어 이제는 전국 시군구 면동리까지 국민연합을 조직하여 훈독회를 하고 통반격파를 하라고 명령하며 통일교 교세 확장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지역의 노인들과 유지, 전도 대상자들이 있으면 무조건 문선명 교주의 책을 전달하고 글 읽는 행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2004년 4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 남편과 아내 3만명이 총동원되어 전도 목표를 세워 교세 확장에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남북통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기독교를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통일하여 조국광복을 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주권 복귀를 외치고 왕권 복귀를 외치며 통일교 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대통령은 문선명에게 경배하고 문선명을 남북한 7천만 국민들에게 메시아요 천지 부모가문선명 교주라고 국민들에게 증거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이 나라의 국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1990년 2월 27일날 한남동 문선명 교주의 저택에서 하늘나라 왕권 정착이라는 설교를 통하여 자신이 세상의 천지 부모라고 선포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칭 참부모요, 재림주 메시아라고 주장합니다.

문선명 교주는 1990년 4월 9일~13일까지 제 11회 세계 언론인 대회를 모스크바에서 개최하고 국내에 들어와 4월 30일에 충북 수안보 통일교 호텔인 와이키키 호텔에서 전국 12개 대도시에 수천명의 사람을 모아놓고 참부모 메시아 재림주 선포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문선명 교주는 "전국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통반 격파를 하자" 고 외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책을 훈독회라는 이름으로 통일교 교인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읽게 만들어 문선명 교주가 재림주라고 세뇌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제 2 절 통일제국 건설을 위한 문선명의 음모


문선명은 2004년 4월 30일까지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전 세계에각 나라 국가 메시아 부인들 185명을 한국으로 불러 전국 시군구에 배치하여 국민 연합회장으로 발령을 하였습니다. 통일교회 발전과 실세화를 위한 것입니다. 현지 통일교회 목사와 하나되어 그 지역의 정치인, 경제인, 기독교 교인을 전도하여 통일교회 교인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제는 국가 메시아 185명의 부인들까지 21일 세뇌 교육 후 전국 통일교회에 배치하여 전도활동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가정 생활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부부를 갈라놓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자녀들이 견우와 직년 같이 서로 떨어져 그리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비극적으로 전도 활동을 하여야 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으라고 전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이제 그것도 모자라 통일교 최초 합동결혼식을 한 1961년의 36가정, 1962년의 72가정, 1963년의 124가정, 1968년의 430가정, 1970년의 777가정, 1975년의 1800가정, 1982년의 6000가정, 1987년의 6500가정, 1992년의 3만 가정까지 통일 제국 건설을 위해 가정을 떠나 총 출동하라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 40일 세뇌교육을 다녀와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 2100만원씩을 바친 그런 교인까지도 무조건 청평 천성 왕림궁전 21일 세뇌교육에 참석하여 식사대로 115만원씩을 바쳐야 했습니다. 식사 수준은 21일 식대로 7만원을 받으면 적당한 정도인데, 문선명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에게 천국생활 황족으로 입적한다는 명목으로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2중, 3중으로 입적 수련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늘 황족으로 등록된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사람도 수련을 받아야 합니다.

문선명은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 한국과 일본 합동 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 920명을 모아 통일교회 원리강론보다 한 단계 높은 세뇌 교육을 시켰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불어 넣으며 희생의 제물이 되어 가정을 떠나 전도에 앞장서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지금은 3차 교육생으로 1982년도 6천 가정 합동결혼식을 한 여자 통일교 교인 3천명을 모아놓고 세뇌교육을 21일 동안 시켰습니다. 통일교 부인들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딸을 떠나 가정이 파탄되어도 3년 4개월 동안 문선명 통일교 제국 건설에 목숨을 바쳐 미혼 남녀를 전도하여 합동결혼식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6천 5백 가정도 아내 되는 3천 여명의 여자 교인들이 총동원된 전국 통일교회 미혼남녀를 전도하여 합동결혼식을 시켜 통일제국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공갈협박을 한 것이었습니다.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 교육받던 한국과 일본 합동 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 920명은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총 생축헌금 2100만원과 총 탕감비 1200만원을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재산을 바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만일 재산을 바치지 않으면 교육 받을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36가정~1800가정까지가 1차 교육생이고, 2차 교육생은 6000가정~6500가정까지 21일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합동결혼식을 받은 통일교 교인은 무조건 재산을 바쳐야 되고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떠나 전국 통일교회에 배치되어 계속적으로 교육이 되어집니다.

이 교육을 받은 교인들은 합동결혼식을 했더라도 문선명이 통일교 교인들의 죄를 용서해 천국 보내준다는 면죄부로 가정당 1200만원씩을 바쳐야 합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 바치는 총 생축헌금 2100만원과 1200만원을 합하면 각 가정 당 3300만원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7천 가정만 계산하여도 2천 1백억의 거액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21일 청평 천성 왕림 궁전 황족 입적 세뇌 교육에 참석하면 앞의 사회자와 몇 사람이 북을 치고 각종 악기로 흥을 돋우며 1000명~5000명의 사람들에게 일시에 "악령을 물리치자. 악한 귀신을 성별하자" 고 외치며 머리를 계속 치고 가슴을 두 손으로 계속 치게 합니다.

집회 분위기는 온통 세뇌 분위기이고 회개 분위기입니다. 진짜 나의 악령이 떠나가고 지옥간 조상들이 구원받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세뇌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고 있습니다.

과천교회에도 21일 교육을 받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부인 6명이 왔습니다. 미혼남녀 합동결혼식 대상자를 전도하기 위하여 가정을 버리고 와있는 것입니다. 불쌍한 교인들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야망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통일교 교인들은 탕감복귀와 가인 아벨과 희생의 제물이라는 이름으로 이용당하며 희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2004년 4월 30일까지 통일교 교회의 모든 기관 기업체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의 힘을 모아 한국 전도에 총력을 다하여 미혼 남녀 확보에 주력합니다. 그들에게 합동결혼식을 시켜 문선명 개인의 야망, 통일제국 건설에 이용물로 쓰려고 합니다 모든 통일교 교인이 통반격파와 주권복귀, 조국 광복,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총 출동하였습니다.

2000년 8월 25일 1차 21일 세뇌교육을 받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920명의 부인들이 서울과 수도권 통일 교회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전도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한국과 일본의 부인 2만 명이 한국 통일교회에 집중 배치되어 미혼남녀 합동결혼식에 통일교회 운명을 걸게 되었습니다.

 

제 3 절 문선명 한학자 교주의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


1985년 12월 25일 문선명 교주 부부는 미국 벨베디아에서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사이비 종교의 극치로 말로를 장식하는 초호화판 황제 즉위식 이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 당시에는 세뇌되어 있는 상태여서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을 거행하는 것을 거룩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곳엔 통일교회 최고위 간부들만 참석하였습니다. 부인들은 몇 달 동안을 황제 황후 즉위식을 위하여 이씨 조선의 화려한 황제 비단의복을 몇 달 동안을 준비하였습니다. 황제 왕관도 순금과 비취왕관을 준비하여 머리에 썼습니다.

문선명은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에 몇 억을 사용하여 통일교 교인들의 피살 같은 눈물의 헌금을 낭비하였습니다.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가 아니고서는 자기 과시, 욕망으로 허황된 황제 즉위식을 했겠습니까?

문선명과 12명 자녀,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는 최고급으로 화려한 왕자와공주의 옷을 입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이 세상에서 역사 이래에 없는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을 올렸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황제 즉위식에서 어떤 통일교 고위층 간부도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기 스스로 가짜 참부모요,가짜 재림주요, 가짜 천지부모라는 것을 세계 황제 즉위식을 통해서 알린 것입니다. '저는가짜요' 하고 만천하에 공표 한 것입니다.

비참하고 처절하게 가난한 통일교 교인들은 이 황제 즉위식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꽃팔이, 생선장사, 파출부일, 막노동일 등을 하여 헌금을 했습니다. 문선명이 참 부모라면 자식이 헐벗고 굶주리며 피골이 상접하여 죽어가는데도 그런 돈을 썼겠습니까? 통일교인들은 참 부모라고 하는 문선명을 위하여 헌금을 하며 죽어가는 것입니다. 어찌 참 부모라면 향락, 방탕, 호화사치, 허영심의 극치를 통일교 교인들 앞에서 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문선명은 통일교 교세가 강력해지면 대통령을 하려고 1990년에 통일 가정당을 창당하였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앞으로 한국에서 여자대통령이 나와야 된다고 외칩니다. 문선명 교주의 부인 한학자를 대통령으로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통일 가정당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 가정당 주최로 전국 대 도시에 남북 통일운동 국민연합 이름으로 국내의 정치 지도자들과 시군구 의원 유지들을 초청하여 통일 가정당 대회를 열었으며 2000년 2월 15일 이후에 전국에서 대대적인 통일 가정당 주최로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사활을 걸어놓고 2004년 4월 30일 까지 이 민족을 통일교 제국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 통일교회 전체 교인은 33,000명 정도 뿐이고 예배 인원은 어린 학생 포함하여 17,000여명입니다. 전국 통일교 시 ·군 단위 교역 본부는 246여 곳이고 면 동 단위 교회는 170여 곳입니다. 대학생들 학사 교회는 01곳 뿐입니다.

 

선문대는 통일교가 세운 대학교입니다, 선문대학교 신학과에서는 통일교 목사를 양성합니다. 그러나 1998년도 졸업생 73명중 11명만 목회를 지원하고 62명은 통일교 목사 생활을 하지 않고 포기하였습니다. 통일교 선배 목사들의 비참함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통일교 목회를 보고 포기 한 것입니다. 통일교 목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인 선문대학교 신학과는 이미 사명 있는 목사들을 양성하지 못하는 기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27 장 문선명 통일교 척결을 위한 주장

 

제 1 절 통일교는 사이비 교주의 온상입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 한 명의 출생으로 지금 통일교를 탈퇴한 통일교 출신 이단사이비 교주가 수십명이 되어지고 수많은 영혼을 지옥길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사이비 이들로 인해 수 십만명의 영혼을 빼앗고 살육하는 일이 세계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사이비교주 때문에 엄청난 피해와 파탄, 파멸이 세계 각 나라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 중에 남미 가이아나의 조지타운이라는 도시에서 사이비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와 같이 923명이 집단자살을 한 것은 1978년 11월 21일전 세계 언론을 경악하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독극물 사건의 옴 진리교도 파멸하였습니다.

 

국내에만 하더라도 1925년에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며 재림주 황제라고 칭하고 황제 즉위식까지 올렸던 차경석, 차전자가 70만 명의 자기 교인들의 영혼을 빼앗고 우상숭배 재산 착취로 가정을 파탄시켰습니다. 1930년도에는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가 교인들을 천국에 보내준다고 해놓고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살게 했으며 마지막에는 자기 교인들을 타살시켜 땅속에 수 십구 수 백구씩 파 묻어 버렸습니다.

1960년도에 대전에서 휴거론을 주장했던 박용주는 교인들과 같이 천국에 가는 것으로 알고 하얀 한복을 갈아입고 교회에서 7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않자 에덴 수도원의 박 교주가 자살 함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60년대 사이비 교단을 창설하여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용화교 교주 서백일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수도원의 김백문 교주의 제자였던 전도관, 박태선 장로는 수십만 영혼을 60년대 부터 빼앗아 사단 마귀의 역사를 지금까지도 행하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일어났던 1987년 오대양교도 마지막 파멸 장소로 경기도 용인 남사면을 택하여 교인 32명의 동반타살과 자살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땅에는 사이비 교주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살인과 강간, 우상숭배, 가정파탄, 재산 착취를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동방교, 전도관, JMS의 정명석 교주는 문선명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 문선명 사이비 교주 한 명의 출생으로 지금 통일교를 탈퇴한 통일교 출신의 사이비교주가 30명이 넘습니다. 이들로 인해 수십만 명의 영혼을 빼앗고 살육하는 일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사이비 교주 때문에 엄청난 피해와 파탄, 파멸이 세계 각 나라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 중에 남미 가이아나의 조지타운이라는 도시에서 사이비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와 같이 923명이 집단 자살을 한 것은 1978년 11월 21일전 세계 언론을 경악하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독극물 사건의 옴 진리교도 파멸 하였습니다.

국내에만 하더라도 1925년에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며 재림주 황제라고 칭하고 황제 즉위식까지 올렸던 차경석, 차전자가 70만 명의 자기 교인들의 영혼을 빼앗고 우상숭배 재산착취로 가정을 파탄시켰습니다. 1930년도에는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가 교인들을 천국에 보내준다고 해놓고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살게 했으며 마지막에는 자기 교인들을 타살 시켜 땅속에 수 십구 수 백구씩 파묻어 버렸습니다.

 

1960년도에 대전에서 휴거론을 주장했던 박용주는 교인들과 같이 천국에 가는 것으로 알고 하얀 한복을 갈아입고 교회에서 7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않자 에덴 수도원의 박 교주가 자살함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60년대 사이비 교단을 창설하여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용화교 교주 서백일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수도원의 김백문 교주의 제자였던 전도관, 박태선 장로는 수십만 영혼을 60년대부터 빼앗아 사단 마귀의 역사를 지금까지도 행하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일어났던 1987년 오대양교도 마지막 파멸장소로 경기도용인 남사면을 택하여 교인 32명의 동반타살과 자살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땅에는 사이비 교주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살인과 강간, 우상숭배, 가정파탄, 재산 착취를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동방교, 전도관, JMS의 정명석 교주는 문선명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재림주의 사기성을 배워 가지고 나가 사이비 교단을 창단 하였습니다.

통일교 출신 재림주만 하더라도 혜아릴 수 없이 너무 많아 재림주 사태가 날 정도입니다. 이 땅은 사이비 종교 교주의 천국이요, 재림주 천국입니다.

 

1960~2000년도까지 30년 동안 종교의 자유 국가인 한국에서 수많은 영혼을 빼앗고 살육하는 사이비 교주들이 우후죽순 같이 생겨났습니다.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불쌍한 영혼 수 십, 수 백만명이 사이비 교주의 노예가 되어 지옥으로 끌려 가는데 그 고통의 절박한 소리를 듣고 예수이름으로 구원해 주어야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중동 등 세계 각 나라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영혼을 구하는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국 땅에서 사이비 종교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선량한 국민들의 영혼과 재산을 빼앗고 가정을 파탄 시켜도 기독교회는 사이비 종교에 대한 대책이 미미하고 자신의 교회를 부흥 시키는데만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교주 밑에는 이단 사이비 교주 양성소입니다.

 

사이비 재림주의 사기성을 배워 가지고 나가 사이비교단을 수도 없이 만들어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통일교 출신 재림주만 하더라도 혜아릴 수 없이 너무 많아 재림주 사태가 날 정도입니다. 이 땅은 사이비 종교 교주의 천국이요, 재림주 천국입니다.

 

 

제 2 절 문선명의 앞잡이 노룻을 하는 기독교 교인을 추방해야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종교 포섭 단체로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가 있습니다.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회장인 통일교 이재석 회장을 통해 사이비 기독교 목사, 장로, 기독교 교인들이 각종 물질적 혜택을 받으며 통일교 세력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일찍이 문선명 통일 교주는 기독교 목사, 교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1966년11월 7일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를 조직하여 이재석 (36가정, 통일교 최초 합동결혼식자)을 회장으로 세워 기독교를 가장한 포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만찬, 세미나, 호텔 경비, 해외 왕복 비행기 요금, 이스라엘 성지 순례 등 일체의 경비를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무료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기독교 목사 가운데 통일교 초교파 회원에게는 매월 생활비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협회 예산의 몇 배를 기독교인 포섭에 투자했다고 합니다. 초대의장에는 방부신 목사, 본부장에는 박창번 목사, 상임 이사에는 이재석씨,이사에는 박철수 목사, 총무에는 김융관 목사 등 5명이 초교파 운동 본부를 결성했습니다.

조직이 활성화되지 못하다가 1975년 12월 8일 서울 문화 회관에서 33명의 기독교 각 교파 인사들이 모여 초교파를 재 결성했습니다. 회장에 강흥수목사, 부회장에는 기독교 장로회 증경 총 회장을 포섭하는데 성공한 송흥국, 양풍원 목사, 총무에는 박철수 목사, 장영석, 유영근, 박무신, 박영주목사를 이사로 세우고 통일교 측에서는 이재석을 이사로 세웠습니다.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회원으로 한국 기독교 목사, 장로, 집사, 청년, 평신도를 가입시켰습니다. 모든 경제 지원은 통일교 측에서 담당하고 각 교단 별로 조직을 다시 결성했고, 각 직책 별로 기독교 목사 평신도를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조직으로는 성노회로 각 기독교 교단 성목회를 기독교 교단별로 조직하고 성장회로 기독교 각 교단별로 원리수련, 수양회, 해외여행, 호텔 세미나를 실시하여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성청회로 기독교 각 교단 청년회를 통일교 원리수련을 통해 포교 활동을 했고 성녀회로 기독교 교단별로 온갖 경제적인 지원을 통하여 포섭 활동을 했습니다.

초교파를 통하여 기독교 목사 가운데 통일교 원리수련을 받고 세뇌 교육된 장로교 목사를 문선명 통일교 협회에서 용산교회 목사(나인수)로 발령한 일도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기독교 목사가 통일교 목사로 재직한 일이 있습니다.

 

통일교 문선명 교주는 포교 활동을 목적으로 정치인, 경제인, 종교인, 대학교수, 예술인, 언론인,각계 각층의 유명 인사들을 온갖 세미나,만찬,해외여행, 선물 등으로 유혹하며 통일교 세력으로 끌어들여서 활용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만찬 세미나에 초청하는 것은 영혼을 죽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테복음 16:26)에 판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고 말씀을 했듯이,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통일교 각종 행사장에 발을 끊으십시오. 그것만이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이 문선명 교주로부터 탈출하는 길이고 영혼의 죽음과 지옥 길을 피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1988년 5월 1일 제 34회 협회 창립 기념일에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이 서울 본부 교회에서 문선명에게 경배와 예배를 드리고 목회자 총회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문선명 통일 교주는 전국 통일교 목사들이 자기 고향에 가서 목회를 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또 다시 불안과 공포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목사들도 아내와 자녀들이 있으며 생활기반이 있는 것인데 문선명은 목사들 목숨을 하루살이 파리 목숨처럼 여겨 고향에 가라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 소리는 지옥으로 가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매일 불안과 공포 속에서 목회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무슨 재미로 목회를 하겠습니까?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미국 알래스카나 남미 바닷가에서 일생 동안 낚시질을 하며 고기를 잡았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고기를 잡으면서 '통일교 교인들을 어떻게 요리할까?', '어떻게 재산을 착취할까?' 그 연구만 하고 있습니다.

 

간간이 한국과 세계를 순회하면서 통일교 교인들에게 불안과 공포심을 유발하는 무자비하고 살인적인 인사이동을 시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목사들과 기업체 간부들을 손바닥 뒤집 듯 이동 시켜 생업을 빼앗고 가정 파탄을 일으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곧 죽음인 것입니다.

1988년 6월 1일, 전국 통일교 목사들 총회를 본부교회에서 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교 모든 남편들은 고향으로 가라. 아내는 무조건 친정 고향으로 가라" 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1988년 6월 6일,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한남동 저택에서 통일 그룹 기 업체 과장급 이상과 서울 시내 1교구, 4교구, 목사 전체를 모아놓고 사표를 내라고 했습니다.

서울 목회자들은 서울도 중요하니 목회활동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교인 많은 교회는 다른 교회에 20명씩 나누어주라고 했습니다. 6월 1일 에는 목사 그만두고 고향에 가라고 명령했다가 6월 6일에는 서울 목사 하라고 6일만에 말을 바꾸어서 뒤집어 버린 것입니다. 콩 볶듯이 강제 인사 이동을 또 당했던 것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제국의 제왕이며 공산주의에도 없는 잔인한 인사 정책으로 목을 붙였다 떼었다 온갖 횡포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제 3 절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하는 전 현직 국회의원을 낙선 시켜야합니다.

 

문선명은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정치인들을 각종 세미나, 만찬 장에 초청하여 원리 교육을 시키고 국회의원 선거 당락에 온갖 직악을 저질렸습니다. 180명의 여야 정치인들을 포섭하여 부하로 삼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선명 재림주 교주의 말씀집', '조국 광복' 이라는 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990년 4월 자신이 메시아요, 재림주 참부모라고 선포 했습니다.

정치인 중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면서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하수인이 되어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목숨을 걸고 사이비 정치인을 색출해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각종 행사장과 만찬장에 참석하는 정치인을 철저히 낙선시키는 범 기독교적인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각종 만찬행사 세미나에 참석하는 전 현직국회의원,도지사,시장,군수, 시 ·군 구 의원들을 그냥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1천2백만 기독교 목사, 교인들은 하나님의 대적인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돕는데 선봉장이 되는 사이비 정치인을 용납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문선명은 정권야욕이 있어서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정치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물질적 지원,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온갖 만찬행사에 정치인들을 초대하여 통일교 세력을 과시했습니다.

문선명은 2001년 7월 13일, 국회회관 대강당에서 현직 국회의원 27명과전직 국회의원, 시군구 의원, 통일교 교인 등 600명을 참석시켜 통일교 원리강론을 설파하고 통일교 선전장을 만들었습니다. 1200만 기독교인이 있고 또 국회의원 273명 중 112명이 기독교 장로, 집사인데 통일교의 국회강연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였습니다.

 

저는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 이만신 회장님과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박준철의 이름으로 모든 일간지와 방송, 기독교 언론을 총 동원하여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여 축사와 격려사를 하는 국회의원, 정치 지도자들은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과 합심하여 낙선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2001년 10월 29일부터 11월 8일까지 전국 8대 도시에서 문선명 교주는'천주 평화 통일국' 이라는 이름으로 문선명 제국을 세우자는 정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행사를 하였는데 7월달 행사 때 보다도 정치 지도자들이 극소수로 참석하였습니다. 그것은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의 표를 의식하여 정치 지도자들이 문선명 교주의 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결과로 믿습니다.

2001년 11월 8일, 신라호텔 문선명 집회에 현직 국회의원 몇 명과 전직국회의원 극소수가 참석하여 문선명 강연장이 아닌 별실에서 강연을 듣고 몰래 빠져나가는 정치 지도자들의 실상을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정치지도자들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이 두려워 얼굴을 강연장에 내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박준철 소장은 한기층과 1200만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과 합심하여 문선명 교주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정치지도자들을 반드시 심판을 받게하여 낙선시킬 생각입니다.

저는 2001년 10월 29일부터 11월 8일까지 문선명 집회에 참석하여 격려사, 축사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낙선시키자고 기독교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 하였습니 다.

정치인들은 통일교 집회장에 참석한 노인들이 자신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노인들은 통일교 교인이 아니며 문선명 교주의 이용물입니다. 노인들은 행사에 참석하면 식사를 제공하고 선물을 주기 때문에 행사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전국의 노인들은 투표장에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정치인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를 볼때 사이비 정치인들은 착각하지 마십시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정치인들이 만찬이나 집회에 한번 참석하면 각종 통일교 PR선전 책에 인쇄를 하여 전도용으로 활용하고 자랑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김대중 대통령이 순수한 마음으로 80세 생일에 축전을 보내준 것도 책에 인쇄하여 전국 방방곡곡 시 ·군 ·구 ·면 남북 통일운동국민연합 대회와 훈독회 행사에서 수만 명에게 배포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마치 통일교 교인이 된 것처럼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통일교 목사들, 교인들이 자랑하고 있습니다. 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통일교회를 지원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으며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통일교 교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정치인들에게 10원을 투자했으면 1000원을 뽑는 식입니다. 2000년 1월부터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각종 행사장에 참석한 순수한 정치인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그 정치인들을 자신의 노예로 착각합니다. 계속해서 정치인들을 참석시켜 원리교육과 훈독회를 하여 세뇌교육을 시키고 통일교 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회에 각종 만찬이나 세미나 행사장에 참석하는 한국 정치인들을 1천2백만 기독교 교인은 백 번이라도 그런 정치인을 낙선시키는 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1987년 8월에 전직 국회의원 39명을 강원도 설악산 오색 약수 옆 호텔에 모아놓고 문선명 통일교 재림주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원리 교육을 시켰습니다.

1988년에는 국회의원 선거를 맞이하여 대대적인 경제적 지원, 맥콜 200박스 씩 지원, 통일교 교인과 승공 연합 조직을 총 동원하여 전국 국회의원후보를 지원했습니다. 통일교는 당선 가능성 있는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습니다. 또 전국 통일교회에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정치인 포섭은 계속 되었고 2000년 4월 13일 국회의원 선거에도 후보들이 통일교 통일당 입당원서를 내고 인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입당원서를 내지 않은 사람이라도 통일교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사람은 통일교 측에서 인적 지원을 전폭적으로 해 주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표를 얻고자 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다시는 이 땅의 선량한 국민들을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국정에 임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은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꼭두각시 들러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지지 세력 내지 추종세력으로서 통일교 각종 행사에 이용당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앞으로 철저하게 공개하여 1천2백만 기독교 교인의 이름으로 뿌리를 뽑고 낙선시컥야 합니다.

 

 

제 4 절 기독교회에 부탁의 말씀


지금 이 땅에는 이단 사이비집단이 150파에 약 300만 영혼이 이단 사이비집단에 빠져 지옥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구의 죄입니까?그들은 우리 부모형제입니다. 지옥 길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해주어야 할 책임과 사명이 1200만 기독교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의 미혹에 빠져 영혼과 몸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겨 처절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교인들이 회개하고 기독교로 개종하고자 하여도 기독교 교회로 가기가 힘듭니다. 그들을 교육하고 안정시켜 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현재 전국 시군구 통일교회에서는 통일교 교인들이 참 가정운동 실천 본부 미혼남녀 결혼 상담사 라는 이름으로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은 미혼남녀들을 미혹하여 합동결혼식을 시컥 통일원리로 세뇌교육을 시키고 문선명 교주가 참부모 재림주라고 믿게 만들어 버립니다. 전국교회는 참 가정운동실천 본부와 같은 음성적인 통일교 활동에 미혹되어 불행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막아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회가 좀 더 사이비 종교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세웠더라면 한국은 사이비 종교 천국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이비 교주는 이 땅에서 판을 치고 수많은 영혼을 살인하고 노예로 삼아 지옥으로 끌고 가는 현실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사이비 종교궤멸을 위하여 기독교교회 1년 예산의 100분의 1이라도 쓰지 않겠습니까?기독교회는 사이비 종교 퇴치를 위해서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1천 2백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원수인 사이비 교주와 종교를 박멸해야겠습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 모두 어기는 사이비 교주와 종교를 자기 교단 일이 아니라고 방치하고 있지 않으십니까?기독교회는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예수를 모시며 성경을 바르게 가르쳐야 될 사명과 의무가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 3만명이 집중 배치되었습니다. 그들은 시군구 통일교회에 배치되어 통일교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뿌리뽑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 형제,이웃이 통일교회의 미혹에 빠져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통일원리에 세뇌되고 교육된다면 생명을 구할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자기 교단을 부흥시키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급하게 해결해야 될 문제는 선량한 국민들의 영혼을 사이비 교주로부터 빼앗기지 않게 지켜 주셔야겠습니다.

기독교회 성직자와 교인들은 수많은 거룩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를 파멸시키는 데는 투자를 적게 하고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를 박멸하는 데 근 힘이 될 언론을 많이 이용해주십시오.

앞으로 기독교회에서는 정치인과 지역 유지 시군구 의원들이 통일교 행사에 참석하여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라고 증거하는 행위를 용납하면 안됩니다.

 

범 기독교적인 차원에서 문선명 통일교회를 극찬하는 정치인은 철저하게 가려내어 강력하게 낙선운동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들은 사이비 정치인이요, 하나님의 역적이요,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행위를 하여 통일교회 발전을 위한 공로자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1천 2백만 기독교 교인은 사법부, 언론, 기독교가 연합하여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절대로 위장된 거짓 행사 장소를 대여해 주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대대적인 사이비 교주와 교회 척결 운동에 앞장서 주십시오.

 

문선명 집단의 산 증인인 박준철을 기독교 교회와 신학교, 기도원에 초청하여 간증집회를 1번씩은 꼭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를 간증에 초청해주시면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이단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통일교 집단을 척결하여 희생자를 줄이고 전도하는데 크나큰 도움이 될 줄 믿습니다.

 

 

 

한국교회 1200만의 목사님과 성도들이 섬기는 교회와 가정과 직장, 사업장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저자 박준철 목사 드림

 

 

  <<통일교 집단과 외로운 싸움을 하는박준철 목사를 돕자>>

 

※ 박준철 목사가 기독교 방송 ·언론을 통하여 문선명 집단의 정쳬를 900회 폭로하여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작년대비 10분의 1로 줄였다

 

 

1) 문선명 집단의 합동결혼식은 거액재산을 착취하는 의식이다.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소장이며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저자인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 신앙과 과천교회 현직목사직에서 2001년 1월 9일 기독교회관에서 탈퇴기자회견을 하였다.

박목사는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통하여 문선명의 정체, 비리, 피가름 의식, 합동결혼식 후통일교 교인 한 가정당 7천만원~l억씩을 착취하는 내용을 통일교 공문을통하여 낱낱이 폭로하였다

2) 통일교 재산 착취를 재판부에서 내려보낸 문선명 교주의 명령공문.인정한 내용이며 통일교 교인들에게 (1998년 IMF때 통일그룰이 부도나 국가로 넘어감으로 거액재산착취가 시작됨)


▶ 1,000만원의 결혼 비용 부담

 

▶ 통일교 교인 조상구원금 I~120대 조상까지 2천만원~3천만원1통일교 합동결혼식 후 죄를 용서해 주는 천국행 탕감비 1300만원(한가정당)

 

▶ 총생축헌금 2100만원(문선명은 합동결혼식한 교인들에게 자신은 구세주, 재림주 참부모이며 통일교 교인들은 참 아들 · 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재산 소유권 이전하라는 명령공문)

 

▶ 문선명 비행기 헌금 1백만원~l천만원

 

▶ 구국 헌금 성인가족 5인 X160만원 = 800만원

 

▶ 천성왕림궁전 - 320만원 (가정당)

 

▶ 십의 삼조 헌금

 

▶ 문선명 나라건국기금 매월 17만원 (가정기준)

 

▶ 8대 명절 헌금▶ 그 외 각종 헌금이 혜아릴 수 없이 많음

 

▶ 청평 천성왕림궁전 14층 병원짓는 헌금 가정당 160만원

 

3) 문선명은 사이비 교주요 적그리스도라고 입으로 외치자.

 

저는 처음에 통일교에 입문하여 원리강론을 들었을 때 세뇌되고 마취되어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고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30년동안 통일교의 실체를 직접보고 려으면서 문선명 교주는 재림주 참부모가 아니며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1997년부터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 그 거짓된 사단의 실체들을 샅샅이 파헤치게 된 것입니다.

 

4)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문선명이 김백문 교리를 도용한 것이다

 

문선명은 자칭 재림주 참부모로 자신이 가져왔다는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가 새진리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쓴 성약말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의 원리강론이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와 성서신학을 1946년에 도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5) 문선명 교주는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키는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은 자신이 재림주요 참부모라며 성삼위 하나님을 모독하고 기독교로 가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재림주라는 문선명은 첫 번째 부인 최선길과 1945년 4월 28일에 결혼하여 문성진 아들을 낳고도 그들을 전도하지 못하고 이혼하였으며 많은 처녀들을 피가름 음란의식으로 사생아를 낳게하고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킨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부모, 재림주가 될 수 없습니다.

 

6) 문선명 교주는 자칭 재림주 참부모라면서 자기 자녀들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은 1960년 4월 11일 40세의 나이에 한학자(17세) 여학생과 어린양 혼인잔치를 또 하였고 14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자녀들은 간음, 이혼,자살, 동거, 마약, 감옥생활 둥 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신의 자녀들도 신앙교육을 책임지지 못하고 구원하지 못한 문선명 교주는 재림주가 아니며 적그리스도입니다.

 

7)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천국가는 의식이 아니라 문선명의 자금줄이다.

 

합동결혼식을 저지하자.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에게 총 동원령을 내려 매일 오전10시부터 오후5시까지 골목을 누비며 미흔남녀 전도활동을 하여 약혼을 시키고 1년에 한차례 하는 천국 보내준다는 구원의식인 합동결혼식을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통일교는 합동결혼식한 자들에게 문선명의 명령으로 가정당 7천만원~l억원의 헌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또한 참가정'실천 운동본부라는 미명하에 미혼남녀에게 합동결혼식을 시켜 개인과 가정을 파괴하고, 거액 재산을 착취하여 지옥 같은 삶을 살게 하고 있습니다.

 

8) 문선명 교주의 혈통복귀 3일 피가름의식은 구원이 없다

 

문선명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통하여 성주식과 3일 혈통복귀의식을 치르면 완전구원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저도 1975년 2월 8일에 합동결혼식을 하여 3일 혈통복귀의식을 치렀고 그때는 세뇌되어 구원받은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가정은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에 합동결혼식을 할 사람까지도 구원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통일교회 합동결혼식과 3일 섹스의식을 통해서는 구원이 없었습니다. 2001년 5월27일, 밀링고 대주교가 성마리아와 결혼하고 8월에 가정파탄된 것을 보면 문선명의 합동결혼식은 거짓된 허상일 뿐입니다.

 

9) 문선명 교주의 각종 만찬 세미나장에 참석하는 정치, 경제, 종교 학자 들을 막자.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정치와 경제, 문화, 언론, 종교를 장악하여 문선명 제국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은 성경진리로 사이비인 통일교회와 싸워 승리하자.

 

10) 박준철 목사의 폭로로 통일교 합동결혼식이 작년과 대비하여 10분의 1로 줄었다.

 

박준철 목사는 기독교 신문, 찬송을 통하여 문선명 집단의 정체를 900회 폭로하여 통일교 합동결혼식 2001년 1월 27일에는 통일교 신문인 세계일보에 3만 5천쌍 이라고 보도했으나 2002년 2월 10일에는 3천 5백쌍 이라고 보도하였다.

박목사가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통일교 실체를 폭로함으로 합동결혼식이 작년과 대비하여 10분의 1로 줄었다고 국민일보와 기독교계신문에 보도되었다.

문선명은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에게 종족적인 메시아라는 임명장을 주고 160가정을 전도하라는 총동원 전도명령을 내려놓고 전국 시군구 통일교(일명 가정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을 오전 10시~오후 5시까지 매일 전도활동에 동원하고 있다.

통일교 교인들은 매일 집집마다 방문하며 미혼남녀 합동결혼식을 시키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있는데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차원에서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면 가정당 7천만원~l억씩을 착취하여 천국행 면죄부를 파는 집단이라는 것을 폭로하여 제2의 박준철목사와 같은 희생자를 막아야 할 것이다. 2003년 5월에 있을 합동결혼식을 저지하자.

 

11) 박목사는 문선명 집단으로부터 민사소송에 승소하였다. 형사소송은 매달 진행 중이다. 기도해주자.

 

박준철 목사는 2002년 2월 1일에 문선명 집단과의 법정싸움에서 민사재판이 승소하였다. 문선명 집단에서 민사재판과 같이 형사재판에서도『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을 명예훼손지로 걸어 형사재판이 진행중이다.

2002년 10월 4일 1차 형사재판을 하였으며 11월 1일 2차 형사재판, 12월 6일 3차 형사재판이 열릴 예정이다. 앞으로 매달 1번씩 약 2년 동안 형사재판을 받아야 한다.

일본에는 인구의 1%밖에 안되는 기독교 교인이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되고 단결하여 문선명 통일교집단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처하여 궤멸해 가고있다. 일본 통일교 피해자들이 기독교 변호사들의 무조건적인 무료변론으로 통일교와 재판을 하여 모두 승소하였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이 일본 재판정에서 불법이며 문선명을 믿어도 구원받지 못하고 천국갈 수 없다고 도쿄지방법원에서 2002년 8월 21일 판결하였으며 통일교 피해자 3명에게 9200만원을 청춘보상금으로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한국에 박준철목사와 같은 피해자가 통일교와 재판할 때 1200만 기독교 교인이 예수님 이름으로 단결하고 기도하여 문선명 사이비집단과 싸워 승리해야 할 것이다.

이 재판은 박준철 목사와 문선명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이비 교주와의 싸움이며 기독교와 사이비집단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1200만의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이 이단 사이비 집단을 궤멸해야 할 것이다.

박준철 목사는 문선명 집단과 지금 재판중 인데도 변호사비를 지불하지 못하였으며 활동비나 경제적인 어려움에 홀로 감당해야 되는 외로운 싸움을 하는 박목사에게 기도와 간증예배 초청, 후원헌금이 절실히 지금 필요한 입장이다.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박준철 목사가 문선명 집단과 싸워 승리하고 통일교가 궤멸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12) 박준철 목사를 한국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간증예배에 초청하여 성도들이 전도하게 하자.

 

후원헌금을 보내주자.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김기수 목사와 총무 박영률 목사가 박목사를 위해 민 · 형사재판에 탄원서를 제출해주시고 도와주셨다. 한국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모두 기도해주시고 간증예배에 초청해주신 목사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박목사를 위해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지속적으로 기도해 주시고 간증예배에 초청해 주셔야 성도들이 문선명 집단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전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문집단과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박목사를 돕는 길은 기도와 간증예배 초청하는 일과 후원헌금을 아래구좌로 지원해주셔야 형사재판을 하는 변호사 비용과 활동비 등을 할 수 있습니다.

 

13) 김백문과 문선명, JMS(정명석)은 똑같은 교리이며 사이비 교주밑에 사이비 교주 양성소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김백문 사이비 교주의 기독교 근본원리를 제자였던 문선명이 도용한 것이며, 정명석은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1980년에 탈퇴하여 통일교 원리 강론을 도용하여 30개론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빼앗고 지옥으로 끌고가고 있다. 사이비 교주 밑에는 사이비 교주 생산공장이다.

한국 기독교는 이단사이비집단에 빠진 약 300만의 영혼을 예수 이름으로 구원해야 할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1945년 8월 15일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 사이비집단에 빠졌다. 김백문 교리인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1946년부터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포교하여 영적살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명석도 1980년까지 문선명을 받들다가 탈퇴하여 통일교 원리강론을 도용하여 30개론을 만들어 수많은 청년 대학생을 유혹하여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정명석과 같은 통일교 교인이 통일교를 떠나 사이비 적그리스도 노릇을 하며 사기를 치며 영혼을 빼앗는 사이비 교주만도 20여명이 넘는다. 사이비 교주 밑에는 사이비 교주 양성소이다.

 

14) 문선명 교주 집단에 축사, 격려사, 만찬에 참석하는 정치지도자들은 여 ·야를 막론하고 1200만 기독교 교인이 낙선운동을 하자.

 

15) 문선명 통일교 집단에서 기독교 목사들을 포섭하는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가입된 기독교 목사, 장로를 회개시켜 통일교와의 관계를 끊게 하자.

 

16) 박준철 목사가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문선명 집단이 이단 사이비집단이라는 것을 매일 입으로 외치자.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이 이단시하고 적그리스도라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요, 이단 사이비 교주라고 입으로 외쳐야 궤멸될 것이다.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에 들어갈 때까지 단 한번도 문선명 집단이 이단이라는 소리를 못 들어보고 유혹당하여 통일교회에 입교했고 사악한 전단지 한장 때문에 30년의 지옥생활을 하였으며 청춘을 빼앗기고 심장병과 온갖 병을 얻고 죽음의 자리에서 문선명 집단을 탈퇴하여 궤멸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며,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땅끝까지 증거해야 할 것이다.

 

17) 박준철 목사가 목숨을 걸고 쓴「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구입하여 읽고 문집단을 궤멸하자.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1200만의 한국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을 대표하여 한기총 대표회장 김기수 목사님과 각 교단 총회장 교계지도자 IS명이 범교단적으로 통일교를 대체하기 위하여 책을 추천하였으니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문선명 집단 궤멸필독서로 구입하여 읽고 문선명집단 궤멸을 위해 외치자.

 

 

이 책을 발행하여 문선명 집단궤멸을 위해 사용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 책을 보시는 모든 목사님과 성도들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와 사랑이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http://cafe.naver.com/jubo/2085  , 통일교 문선명 -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 큰샘출판사

http://cafe.naver.com/jubo/1739  , 통일교 문선명  -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박준철 저,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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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문선명 - 문선명은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키는 영혼사기꾼

 
<도서 안내>  http://cafe.naver.com/joyfulsound/347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출간일 : 2002년 05월 10일, 520쪽   정가 : 12,000원 (국내도서-종교)

광화문 교보문고나,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여, 저자 박준철 목사에게 작은 도움이 됩시다.

한국기독교 통일교 대책협의회 후원금  ·국민은행 525201-01-041142 예금주 통일교 대책협의회

 

통일교 박준철 목사의 생생한 증언

 

1. 문선명은 이단사이비 교주요. 적그리스도입니다.

 

2. 문선명은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키는 영혼사기꾼입니다.

 

3. 문선명은 자신의 자녀도 구원못하는 사이비 교주입니다.


4. 합동결혼식은 천국가는 의식이 아니라 지옥 가는 의식입니다.


5. 문선명 통일그룹이 IMF때 부도났습니다. 국민의 세금인 국가빛 1조 7천억을 갚아야 할 것입니다.


6. 문선명 집단은 합동결혼식을 시켜 I억씩의 거액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자금줄인 합동결혼식을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막아야 할 것입니다.


7. KBS. MBC. SBS. EBS공익방송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조장하는 방송을 즉각 중단해야 합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교인이 방송에 출연하여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8. 문선명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여 축사. 격려사 하는 여야 정치 지도자들을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이 단결하여 낙선시켜야 합니다.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에서 시장군수 시구의원들이 통일교 집회에 참석할 수 없게 막아야 할 것입니다.


9. 기독교 목사, 성도들이 통일교 단체인 초교파 기독교협의회나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 총회장 김광명이나 이런 단체에서 주최하는 이스라엘 성지순례 무료여행. 세미나 등에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참석할 수 없도록 적극적으로 막아야 할 것입니다.


10. 문선명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하는 지역의 유지나 노인들을 참석하지 못하도록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에서 막아야 합니다.


11. 전국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 통일교 행사인, 가정교회 순결캠페인, 순결캔디, 참가정 순결운동본부 서명날인, 충효 사상 예절교육 등을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12. 박준철 목사가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문선명 집단이 이단 사이비 집단이라는 것을 매일 입으로 외쳐야 합니다. 박목사는 통일교에 입교 전까지 통일교 집단이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습니다.

-본문중에서-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머리말

죽을 죄인 박준철은 지난 30년 동안 문선명 사이비 이단인 사단의 앞잡이로 살았던 날들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회개합니다. 이제 오직 나의 구주는 예수님 뿐이고, 인류를 구원할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30년동안 통일교에 빼앗긴 지옥 같은 생활의 산 체험과 진실을 세상에 알려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를 막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이 책을 썼습니다.

저는 생애 처음으로 접한 통일교 전도지에 끌려 이단 사이비인 줄도 모르고 통일교에 입문하여 지난 30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문선명 이단 사이비 교주에게 충성하며 최일선 목회자로서 살아왔습니다. 통일교 목회자가 된 후로 언제나 항상 사력을 다하여 무슨 일이든 2등을 하지 않고 1등을 하며,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야 지난 30년이 사단의 종인 문선명 이단 사이비 교주에게 빼앗긴 세월 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통한의 세월을 눈물로 통곡하며 삼위일체 하나님께 회개하며 이 글을 씁니다.

이 책은 제가 통일교회 현직목사로서 30년 동안 매일 일기를 써가며 기록했던 사실들을 토대로 통일교의 실체를 밝히고 문선명의 비리를 세상에 알리는 최초의 저서입니다.

이 저서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실명도 있고 가명도 있습니다. 혹시 본의 아니게 거명되어 선의의 피해가 있으시다면 문선명 사이비 종교의 비리와 잔악상을 알려 다시는 이런 피해자가 없도록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음을 양해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직도 통일교에 빠져 인생을 허송하는 분들이 있다면 즉시 통일교회에서 탈출하여 진정한 행복과 축복 받는 하나님의 안에서 삶을 누리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저에게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동안 체험한 진실과 문선명 교주의 사악한 교리와 음모, 패륜, 가정 파탄, 비진리성을 하나님과 인류에게 고발해야 된다는 사명만이 있습니다.

저는 사이비 집단에 속아 살았던 30년 동안 지옥 같은 생활을 하면서 빼앗긴 청춘과 병든 몸, 파멸된 영혼을 만천하에 고발하지 않고서는 이대로 눈을 감을 수 없기 때문에 세상에 통일교회의 실체를 알리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30년 동안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를 참 부모인 동시에 메시아 구세주인 만 왕의 왕 재림주라고 믿고 복종하며 사랑하였는데 이제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발합니다. 지금 통일교회는 기독교인들이 방심하는 사이에 한국은 물론 일본, 아시아,유럽권까지 침투하여 많은 영혼들을 미혹하여 문선명 개인의 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삼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선명 사이비 교주로 말미암아 인생을 빼앗겨 가정 파탄, 재산 착취를 당하여 온갖 시련과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겉 모습으로는 양의 탈을 썼지만 사이비 교주일 뿐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사랑과 희생, 봉사를 외치지만 말 뿐이고 통일교 교인들의 생활은 처절한 지옥생활과 같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미혹에 빠져 세뇌, 마취, 교육되어 문선명에 끌려 다니는 통일교 교인들이 불쌍합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영혼의 노예가 되었고 그들의 병들고, 지친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픔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저에게 처음부터 오직 구원은 예수님 뿐이요,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고신앙으로 이끌어 주는 성도가 있었다면 30년 동안 지옥생활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통일교가 문선명 개인이 만든 이단 사이비 집단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면 처음부터 발을 내딛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단에 속한 생면부지의 사람이 건내준 한 장의 전단지가 저와 저의 가족의 일생을 결정지었다면, 참되신 하나님의 자녀요 참구원을 주는 기독교회 성도들의 전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수 있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은 처음부터 인류에게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생애 최고의 축복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놀라운 구원을 오직 믿음으로 값없이 선물로 받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땅에 만연된 이단 사이비를 몰아내는 일에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성직자와 1천 2백만 기독교 성도들이 하나로 단결하고, 모든 언론과 지성인들이 합심하여 통일교와 같은 사이비종교를 이 땅에서 뿌리뽑을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추천해주신 한기총 대표회장 김기목사님, 한기총 직전 대표회장 이만신 목사님, 한기총 명예 회장이신 지덕 목사님, 민족 복음화 운동본부 총재이신 신현균 목사님, 전 총신대 총장이신 신학자 김의환 박사님, 한국 기독교 지도자협의회 상임회장이신 신신묵 감독님, 통합교단 총회장이신 최병두 목사님, 기독교 대한 감리회 장광영 감독님, 기독교 대한 성결교 총회장이신 이정복 목사님, 기하성 총회장이신 이재창 목사님, 한기총 총무이신 박영률 목사님, 한기협 대표회장 최재우 목사님, 한기총 이단 사이비 대책 위원장 이용호 목사님, 한기총 이단사이비 상담소장 최삼경 목사님, 한국 기독교 이단문제 연구소 이사장 심영식 장로님 등 범 기독교단 적으로 문선명 이단집단 궤멸을 위해 이 책을 추천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제가 2001년 1월 9일 통일교 현직 목사직을 탈퇴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통일교 비교리성과 비리를 지속적으로 보도해준 모든 기독교 방송과 언론사 관계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제 오직 성삼위 일체되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1,200만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교회의 헌금을 하나님의 대적이며 우상인 문선명과 같은 사이비종교를 뿌리뽑는데 투자해 주십시오. 저에게 기독교회에서 간증집회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모든 성직자와 기독교 성도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2002년 2월 17일

저자 박준철 목사 드림

 





추 천 사‥‥‥‥‥‥‥‥‥‥‥‥‥‥‥‥‥‥‥‥‥‥‥‥‥‥‥‥‥‥‥04
머 리 말‥‥‥‥‥‥‥‥‥‥‥‥‥‥‥‥‥‥‥‥‥‥‥‥‥‥‥‥‥‥‥12


제 1장 나의 유넌 시절과 잃어버린 한쪽날개‥‥‥‥‥‥‥‥‥‥‥‥‥‥‥23
제 1절 나의 어린 시절
제 2절 잊지 못할 억울한 누명
제 3절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중학시절
제 4절 부산 오육군 병원의 생활
제 5절 양보중학교에 복학
제 6절 보상금 15만원이 나의 왼팔이라니
제 7절 고향을 떠나 자활의 길로



제 2장 통일교 전단지 한 장에 빼앗긴 30넌, 잃어버린 30년‥‥‥‥‥‥‥‥35
제 1절 단 한번의 악연으로 통일교 입교
제 2절 천안교회 청년회 부회장
제 3절 새벽 기도 하던 중 영계에 가보고 나서..
제 4절 통일교의 제2차 기동대 활동
 


제 3장 첫 사역인 충북보은 적암교회‥‥‥‥‥‥‥‥‥‥‥‥‥‥‥‥‥‥‥46
제 1절 기적은 일어나고
제 2절 성결교 신학교
제 3절 문교주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의식인 합동결혼식



제 4장 서울 강서교구 ‥‥‥‥‥‥‥‥‥‥‥‥‥‥‥‥‥‥‥‥‥‥‥‥‥52
제 1절 교구본부교회 개척, 부흥, 교회건축
 


제 5장 노원교구 달부 개척교회 제1차 건축
제 1절 그래도 끈질긴 충성
제 2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길
제 3절 제 1차 노원 교회 교회 대지 매입 건축


제 6장 새 생명의 결실인 3남매‥‥‥‥‥‥‥‥‥‥‥‥‥‥‥‥‥‥‥‥‥63
제 1절 첫 딸인 '박은주'
제 2절 아들 '박영진'
제 3절 막내인 '박은영'



제 7장 서을 노원 교구본부‥‥‥‥‥‥‥‥‥‥‥‥‥‥‥‥‥‥‥‥‥‥‥70
제 1절 2차 교회 대지 매입 재건축 성공
 


제 8장 서을 노원 교구에서 경기 화성 교회로 강제로 인사 이동‥‥‥‥‥‥75
제 1절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박길남 교구장의 거짓 약속
제 2절 꿈에 나타난 문선명



제 9장 경기 화성 교회가 전국 통일교 최우수 교회로 부흥‥‥‥‥‥‥‥‥‥80
제 1절 다시 일어선 교회 개척
제 2절 화성 교회 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제 3절 마지막까지도 아버지께 불효
 


제 10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교회로 다시 인사발령‥‥‥‥‥‥‥‥‥‥‥‥‥89
제 1절 통일교에 바친 목숨
제 2절 서울 노원교회에서 3차 발전



제 11장 서울 노원 교회가 한국 통일교 우수 교회로 121회장상 수상‥‥‥‥‥93
제1절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제2절 3차 교회 대지 161평을 매입
 


제 12장 서울 노원교회 교회 건축 ‥‥‥‥‥‥‥‥‥‥‥‥‥‥‥‥‥‥‥‥98
제 1절 1988년도 교회 건축 목표
제 2절 국회의원 당선에 관여한 통일교
제 3절 노원교회 역사적 교회 건축 기공식
제 4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상량식
제 5절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당한 폭력과 폭행
제 6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준공을 완료311



제 13장 통일교 아름다운 교회 헌당식 ‥‥‥‥‥‥‥‥‥‥‥‥‥‥‥‥‥‥114
제 1절 노원교회 3차 교회 건축 헌당식
제 2절 베풀어 준 은혜와 축복을 배반으로 갚은 사람들
 


제 14장 노원교회를 찾은 문선명‥‥‥‥‥‥‥‥‥‥‥‥‥‥‥‥‥‥‥‥‥120
제 1절 자칭 감동받은 문선명



제 15장 서울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 받은 비극적인 사건‥‥‥‥‥‥‥‥‥‥‥122
제 1절 동토의 왕국인 통일 제국의 교구장 임명
제 2절 김승철 총무국장의 인사비리와 폭행사건
제 3절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얻은 심장병



제 16장 빼앗긴 교구장직과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 총무국장과 협회전직원시위대‥133
제 1절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총무국장과 협회직원들
제 2절 나상렬 노원교구장의 배신
제 3절 공릉동 교회의 지옥 같은 생활



제 17장 전국 통일교 목사 전체 500명의 박탈당한 목사직‥‥‥‥‥‥‥‥‥‥141
제 1절 교회사택에서 쫓겨난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
제 2절 7개월 만에 박탈당한 500명의 목사들
제 3절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독서실 운영
제 4절 고시원 운엉 중 다시 꿈꾸게 된 목회 길



제 18장 부산 영도교회‥‥‥‥‥‥‥‥‥‥‥‥‥‥‥‥‥‥‥‥‥‥‥‥‥ 152
제 1절 부산 영도 통일교로 인사발령
제 2절 부산 엉도교회 부흥 발전
제 3절 죽음의 자리에서 두 천사의 도움으로 구한 생명



제 19장 자살을 결심하고 죽음의 문턱에 서서‥‥‥‥‥‥‥‥‥‥‥‥‥‥‥168
제 1절 족벌왕국에 환멸을 느끼고
제 2절 "준철아! 죽지 말아라"



제 20장 폭언 폭력 배신으로 일괄된 통일교 지도자‥‥‥‥‥‥‥‥‥‥‥‥‥171
제 1절 황선조 회장에게 한 직언
제 2절 김용갑 교구장의 폭언과 폭행
제 3절 문책인사를 약속한 황선조 회장
제 4절 눈물로 세운 부산 영도 교회를 떠남
제 5절 과천통일교회에서의 비참한 생활
제 6절 연속되는 폭행과 폭력과 거짓말들
제 7절 위장된 합동 결흔식
제 8절 비참한 현실의 벽을 넘어선 사투
제 9절 저는 하나님 뿐 아니라 아내와 자녀에게 죄인입니다.



제 21장 목숨을 건 문선명 통일제국 탈출 ‥‥‥‥‥‥‥‥‥‥‥‥‥‥‥‥‥‥192
제 1절 '준철아, 붉은 통일교 감옥을 탈출하라.'
 


제 22장 통일교 과천교회 박준철 현직목사 탈퇴 기자회견 54가지 비리폭로 ‥‥‥196


제 1절 문선명의 정체와 통일교 비리폭로
제 2절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통일제국의 정체폭로
제 3절 기독교 성도들에 대한 박준철 목사의 호소문한국 기독교 이단 종파 문제 연구소 설립
제 4절 한국 기독교 통일교 대책협의회 설립,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한국 기독교 이단 종파 문제 연구소 설립
제 5절 국제 자살 ·살인 방지 연구소 설립 계획
 


제 23장 문선명 통일교 비판‥‥‥‥‥‥‥‥‥‥‥‥‥‥‥‥‥‥‥‥‥‥‥‥‥242


제 1절 문선명의 출생과 통일교 창단 배경
제 2절 원리강론은 김백문 교리를 도용한 것
제 3절 문선명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비판
제 4절 예수, 공자, 석가를 자신의 제자라고 말하는 문선명



제 24장 혈통복귀 피가름 집단인 문선명 통일교 ‥‥‥‥‥‥‥‥‥‥‥‥‥‥‥‥254


제 1절 처음부터 혈통복귀집단이 된 통일교
제 2절 문선명은 혈통복귀교리를 통해 가정을 파괴한다
제 3절 통일교는 혈통복귀의식이라는 3일식 피가름행사
제 4절 문선명이 창안한 혈통복귀 피가름의식
제 5절 문선명 통일교의 혈통복귀 피가름 3일간 복귀의식



제 25장 문선명은 모든 사람의 재산물 착취하고 파멸시킨다‥‥‥‥‥‥‥‥‥‥‥265


제 1절 문선명은 자녀와 가족 구원도 못시킨 거짓 메시아이다
제 2절 문선명의 둘째 아들 문흥진의 사망
제 3절 재림한 문흥진 노릇한 에지프트
제 4절 문선명과 친인척은 재산착취를 통해 초호화 생활을 누린다
제 5절 문선명의 브라질 자르딘 계획
제 6절 재산착취 수단인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제 7절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임을 증명한 사람들



제 26장 통일왕국을 꿈꾸는 문선명‥‥‥‥‥‥‥‥‥‥‥‥‥‥‥‥‥‥‥‥‥‥‥285


제1절 통반격파를 지시한 문선명
제2절 통일제국 건설을 위한 문선명의 음모
제3절 문선명 한학자 교주의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



제 27장 문선명 통일교 척결을 위한 주장 ‥‥‥‥‥‥‥‥‥‥‥‥‥‥‥‥‥‥‥292


제 1절 통일교는 사이비 교주의 온상입니다
제 2절 문선명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기독교 교인을 추방해야 합니다
제 3절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하는 전 현직 국회의원을 낙선시켜야 합니다
제 4절 기독교회에 부탁의 말씀

 

통일교 집단과 외로운 싸움을 하는 박준철 목사를 돕자 ‥‥‥‥‥‥‥‥‥‥‥‥305
그림 및 사진 화보 ‥‥‥‥‥‥‥‥‥‥‥‥‥‥‥‥‥‥‥‥‥‥‥‥‥‥‥‥‥313
참고 도서 목록‥‥‥‥‥‥‥‥‥‥‥‥‥‥‥‥‥‥‥‥‥‥‥‥‥‥‥‥‥‥364
저자소개‥‥‥‥‥‥‥‥‥‥‥‥‥‥‥‥‥‥‥‥‥‥‥‥‥‥‥‥‥‥‥‥‥366


 


제 1장 나의 유년시절과 일어버린 한쪽날개

 

제 1절 나의 어린 시절

 

저의 고향은 남한의 명산인 지리산과 어우러져 있는 경남 하동군 양보면 장암리 중하쌍 부락이라는 60호 정도 되는 작은 산골마을입니다

처음에 저희 집은 아버지께서 지리산에서 숯을 구워 시장에 내다 팔아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가산을 꾸려갈 수 없어 중하쌍 부락 건너편에 집이 두 채밖에 안 되는 구덕골의 윗집에서 살았습니다. 저는 바로 그 쓰러져 가는 작은 초가집에서 부친 박복식씨와 모친 정남시씨의 7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이 세상에 햇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남의 농토도 임대해서 농사를 짓고, 산에서 숯도 구워서 팔고, 나무도 해 가지고 시장에 팔아서 끼니를 때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봄에는 쑥을 캐어서 쑥밥을 해 먹고, 산의 소나무껍질을 벗기고 칡을 캐어 먹고, 일본사람들이 거름으로 사용하는 콩기름을 짜고 남은 콩 찌꺼기로 끼니를 때우기도 했습니다. 그 때 우리 7남매는 무밥, 감자밥, 고구마라도 배부르게 먹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산 때문에 아버지는 매일 술로써 시름을 달랬습니다. 그러나 동네에서 제일 인정스러운 분이셨고 일을 할 때에는 동네에서 부지런하기로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 결과 3,500평 의 논밭을 사게 되었고 농사를 지어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가정 환경 탓에 2살 때에는 홍역과 황달로 온몸에 부스럼 이 생기며 사경을 헤맨 때도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언제나 욕심이 많고 고집이 세며, 싸움을 해도 지지 않으려는 승부근성이 있었습니다. 어려운 가정을 탓하지 않고 산에 나무를 하러 다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오전, 오후 각각 한번씩 나무를 하고 풀을 베는 일을 지만, 저는 하루에 세 번씩 일을 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저는 소를 산으로 끌고 다니며 풀을 먹이고, 아침저녁으로 소죽을 끓여서 먹였습니다. 돼지 밥과 닭 먹이를 주는 것도 항상 제 몫 이었습니다. 먼 거리의 우물에서 아침저녁으로 물을 길어오는 것도 저의 일과였습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한 꼬마로 통했습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효도하려고 심부름도 잘하고 팔다리도 주물러드렸습니다. 어쩌다가 돈 10원이라도 생기면 할머니에게 드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그 돈을 모아 놓았다가 저에게 용돈으로 주셨고 엿 장사가 오면 엿도 사 주시고 과자도 사 주셨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에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제 2 절 잊지 못할 억울한 누명

 

초등학교 4년 때 잊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체육을 하고 반 친구들과 같이 교실에 들어오니 '박용진' 선생님이 저를 지목하여 돈 30원을 훔쳤다고 누명을 씌웠습니다. 저는 해명도 못하고 누명을 뒤집어 썼습니다.

박 선생님은 저의 귀를 잡고 운동장으로 끌고 다니면서 어디 에 돈을 숨겼느냐고 호통을 치며 다그쳤습니다. 저는 돈을 훔치지도 않았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오후에 남아 많이 매를 맞았습니다매를 맞은 손과 장딴지가 부어서 며칠 동안 걸을 수 얼을 정도로 아팠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저는 분한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는 왜 변명 한 마디 못하였는지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왜 박용진 선생이 저를 지목하여 누명을 씌워 학생들 앞에서 망신을 시켰는지 지금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며칠 후, 우리 동네에 사는 같은 반 배정순이라는 여학생이 하옥실이가 체육시간에 당번을 하면서 돈 30원을 훔치는 것을 보았다. ' 고 저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며칠이 지난 후여서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누명을 쓴 채 말도 못하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친구들 중에는 병으로 죽는 일이 많았습니다. 절친했던 동네 친구 박준국이 폐병으로 죽었고 이어서 유영이라는 친구도 열병으로 죽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어린 나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같이 뛰어다니며 웃고 떠들며 놀던 친구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맞게 되었을 때 너무나 가슬 아프고 슬펐습니다.

 

제 3 절 한쪽 날개를 잃어버린 중학시절

 

저는 두 학급만 뽑는 양보중학교 시험에 합격하여 1963년 3월부터 집에 서 학교까지 왕복 20리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까밖 고무신을 신고 책 보따리를 허리에 매고 놋쇠 사발에 밥을 넣어 갖고 다떠 서 창피했는데 중학교 때부터는 양은 도시락을 갖고 다녀서 좋았습니다.

집안 일을 하며 학교에 다녔으므로 시간이 모자라 항상 뛰어가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소에게 풀을 먹였고, 겨울에는 새벽부터 소죽을 끓여 먹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새벽부터 집안 일을 하다 보면 아침 식사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물에 밥을 말아서 급하게 먹고 학교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해 가는 1963년 7월 3일 오전 10시, 하동지방에 대홍수가 나서 저희 학생 40명은 수해복구를 하기 위해 군 트럭을 타고 갔습니다.

그런데 콩나물 시루같이 가득 태운 GMC 군 트럭 이 과속을 하다가 장암리에 있는 양보초등학교 앞 작은 개울에서 전복사고를 일으켰습니다. 브레이크도 소용없이 트럭은 개울 위로 날아가 아름드리 벚꽃나무를 두동강이 내며 추락했습니다. '쾅' 하는 순간 차를 타고 있던 학생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차바닥은 순간 피로 넘치고 고통의 신음소리도 가득차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이 사고로 왼쪽편에 탄 13명의 착생들이 심하게 다쳤습니다. 다친 학생들은 하동 읍내 작은 의원으로 후송되었는데 저의 왼쪽 팔도 부서져 버렸습니다. 저는 어깨 죽지까지 뼈만 앙상하게 남고 팔 관절이 부서지고 손바닥까지 뼈가 드러난 것을 보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식을 잃어가면서 저의 왼팔로 피가 쏟아져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며 3일 후에야 깨어나 아버지와 어머니를볼 수 있었습니다

장마 때문에 보리가 썩어 마당에 말리고 있는 중 아버지, 어머니가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그 날 신문에도 우리의 교통사고가 보도 되었습니다. 교통사고는 저의 인생이 온갖 멸시와 천대, 행동의 부자유, 생활의 고통.아픔이 동반된 생지옥 같은 생활이 되는 출발점 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가족은 막 태어난 막내 동생 준서와 그 위로 여동생 영희가 걱우 걸음마 할 정도였습니다. 저의 사고로 어머니가 간병을 하기 위해 병원에 계셨기 때문에 그 때부터 8개월 동안 준서는 젖을 먹지 못하고 영희와 다른 동생들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저는 동생들에게 죄인 같은 심정 입니다. 학생 13명이 다쳤기 때문에 학교 뿐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병 문안을 왔습니다.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도 많이 왔습니다. 지금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폐병으로 돌아가신 영어 선생님이 가장 병 문안을 많이 오셨고 자식이 사고를 당한 것처럼 가슴 아파해 주셨습니다.

하동의원 의사는 아버지에게 저의 팔 관절이 완전히 부서져서 가루가 되었기 때문에 어깨 죽지까지 잘라야 찬다고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팔을 붙여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사는 뼈가 부서진 관절과 팔 뼈들을 모아 대강 붙이고 살을 바늘로 꿰매 놓았습니다. 그러나 팔은 계속 썩어 들어갔습니다. 한 달 동안 하동의원에서 변변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꼼짝 못하고 누워 있다가 부산 오 육군병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 육군병원에 도착해서 처음 진료한 군의관들이 '팔의 뼈가 굳기 전에 병원에 왔더 라면 어느 정도 나을 수 있었을 것을 무지해서 시기를 놓쳤다. '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이 사고 즉시 큰 병원으로 후송해서 치료 하였더라면 어느 정도는 고칠 수 있었을 텐데 한 달간 하동병원에 방치했었기 때문에 치료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습니다. 저는 '제 주위에 스승이나 어른들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큰 병원으로 후송해 팔을 치료 하라는 말을 해 주었더라면. . .' 하는 마음을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제 4 절 부산 오육군 병원의 생활

 

부산 영도다리 옆에 있는 오육군 병원에 8월 1일부터 입원한 후 썩은 부분을 수술로 잘라 내는 일을 수 차례 했습니다. 거듭되는 수술로 팔에 남아있는 살이 없어서 양쪽 허벅지 살을 떼어서 입히는 대 수술을 네 번이나 하였습니다. 그리고 팔을 'ㄱ' 자로 려어 긴 대못 2개로 박아 고정시켰습니다. 수술과 치료 때마다 밀려오는 아픔은 중학교 1학년 학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이였습니다. 오 육군병원에서는 1964년 2월말까지 7개월 정도 지냈습니다.

병원 생활은 어린 저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사고 전에는 마음껏 달리고, 씨름하고, 철봉대에 매달려서 운동했는데 이제 왼쪽 팔을 잃었으니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을 비관하고 학대할 뿐이었습니다. 이런 비관적인 생각 때문에 병원 옥상에올라가 밑을 내려다보며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당시 오 육군병원에는 민간인으로는 저 혼자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군의관과 간호원 뿐 아니라, 군인 아저씨들은 저를 장애자라는 이름대신 '꼬마' 라 부르며 따뜻한 사랑과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지금도 금보다 더한 희망적인 격려의 말씀만 들려준 그 군인아저씨들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1964년 2월말에 오육군 병원을 퇴원하여 하동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사고는 저에게 왼팔을 잃어버린 2급 장애자라는(1999년 5월 28일판정)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절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저는 37년 동안 자존심과 체면 때문에 장애인의 혜택을 받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 모든 자존심과 체면을 버리고 적은 혜택이라도 받기 위해 장애자 등급 판정을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8개월 동안의 고통스러운 병원생활이었지만 사고로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이 됩니다.

 

제 5 절 영보 중학교에 복학

 

그 해 3월에 중학교 1학년에 복학하여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친구들은 2학년인데 저는 1학년이라서 속상했습니다. 건강했던 육신은 어디로 가고 한쪽 팔을 못 쓰는 장애자가 된 제 자신의 모습을 보니 매일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할수 있는 일이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겨울교복을 입을 때는 긴 팔이라서 괜찮았지만 여름교복을 입을 때는 매일 매일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나날이었습니다. 남을 의식하여 팔이긴 흰 내의를 입은 다음 짧은 하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이런 저의 복장은 학교에서나 밖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고 저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혼자 학교를 뛰어 다녀야 했습니다. 체육시간에는 언제나 의자에 앉아서 운동하는 친구들을 바라만 보았습니다. '언제나 1년 전 같이 마음대로 뛰어다니고 운동도 하고 같이 행동할 수있을까?' 하고 생각하였지만 이제는 영원히 불가능한 꿈이 되어버렸습니다.

군 트럭을 같이 탔던 '박상길' 은 사고 즉시 팔을 어깨부분까지 절단을 하였고 그 외 여러 친구들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박상길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끝내는 외롭고 괴로웠는지 술을 먹고 열차사고로 먼저 사망하였습니다. 김순길도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마산 통일산업에 다니며 성실하게 살았는데도 백혈병으로 먼저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순식이도 포크레인을 운전하다가 돌이 날아와 뇌진탕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제 주위의 여러 친구들이 결혼도 못 해보고 저의 곁을 떠났습니다. 저는 팔 때문에 자연적으로 왕따가 되기도 했지만 적극적인 성격을 가진 활동적인 학생으로 자라고자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왜 공부를해야 하는지, 공부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목표가 없었습니다. 저의 장애 때문인지 주위에서 아무도 공부하라는 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공부의 필요성을 못 느꼈습니다. 저는 장애자가 공부를 해도 쓸 곳이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 누군가가 마음의 문을 열어주고 학업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저에게는 집안일 밖에 할 일이 없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소 풀을 먹이고, 퇴비를 해오고 다시 학교 갈 준비를 하여 10리 길을 뛰어갔습니다. 수업을 마치면 집에 돌아와 오후에도 소 풀을 먹이고 펄감도 하고, 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장암리 양조장이나 '방성지기' 주막집에서 술이 취하신 아버님을 밤늦게 집으로 모셔오는 것이 저의 일과였습니다.

아버님이 집에 오시면 술이 깰 때까지 온 가족의 이름을 불러댔습니다. 어머니는 논농사, 밭농사에 허리가 다 휘어질 정도로 일생동안 고생만 하였습니다. 아버님의 술 때문에 참다 못한 어머니가 집을 나가서 며칠을 오지 않아 온 동네사람들이 대방골 못에 가서 물을 빼고 어머니를 찾는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절에 있다가 3일 후에 돌아오셨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술 먹지 않는 집안에 태어나는 것이 그 당시 저의 소원 이었습니다.

한 팔을 못쓰다 보니 나무를 하다가 왼쪽 손목을 낫으로 찍어서 피투성이가 된 때도 있었고 오른 손가락을 찍어서 뼈가 다 나을 정도로 잘라진 때도 있었으며, 겨울에 나무를 하다가 바지에 불이 붙어 무릎을 다 태워서 몇 달을 고생을·한 때도 있었습니다. 풀베기와 나무를 하도 많이 해서 허리에 큰 종기가 나서 치료를 하느라 2달 동안 고생을 한 때도 있었습니다. '정한봉' 에서 풀을 해 오다가 절벽으로 떨어져 죽을 고비도 넘겼으며 땔감 나무를 하다가 7m정도 높이의 나무에서 떨어진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비록 팔 장애를 가졌지만 동네에서 제일 부지런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리타작을 할 때면 보리이삭을 주우러 다녔고, 가을이면 나락이삭을 주우러 다녔습니다. 고구마를 캔 자리에 고구마 이삭을 캐러 다녔습니다. 겨울에는 산에서 나무를 해서 팔기도 했고 장작을 도로까지 날라주고 돈을 번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였지만 일에 미친 사람같이 잠시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저의 학창시절은 학교생활 보다는 가정 일에 더 열심이었습니다.

 

제 6절 보상금 15만원이 나의 왼팔이라니

 

저는 그 당시 군 트럭으로 인한 교통사고를 국가가 보상해 준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저의 어머니 아버지나 동네 친척들도 순박한 산골 사람들이라 알지 못하였습니다. 누구도 저의 한쪽 팔을 잃어버린 현실에 대한 피해보상과 저의 장래에 대한 계획과 대책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저의 한쪽 팔의 장애에 대한 피해보상 보다는 집안 일과 학교 다니는 일에만 매달려야 했습니다. 저는 어리지만 언제나 7남매를 키우기 위하여 밤낮 없이 논밭에서 일하시는 어머님을 도와 어머님의 손발이 되어 드리고자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통사고 브로커가 와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해서 보상금을 받아 주겠다고 하여 아버님과 형님은 소송을 맡겼습니다. 1966년에그 브로커가 다시 와서 처음에는 10만원을 주고 한 달 후에 와서 5만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이 어떻게 되었는지 보상금이 얼마나 나왔는지는
얘기해 주지 않아 아무도 몰랐습니다. 돈 15만원이 나의 왼팔을 대신 하였는데  5만원은 부모님이 쓰시고 10만원은 형님이 쓰고 끝났습니다. 저는 그 당시 어른들의 무지함과 무책임과 무관심을 지금도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1970년에 변호사에게 물어보았더니 시효 3년이 지나 불가능 하다고 하였습니다.

일제 시대의 정신대 피해보상, 6 · 25 전쟁 보상, 월남전 고엽제 피해, 5·18피해도 3년이 지났지만 보상을하고 있습니다. 이 처참한 현실 앞에 왜 3년 시효가 지났다고 피해보상을 받을 수 없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수시로 팔이 아파서 진통제와 약을 사먹고 37년이 지난 지금까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에도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 고아원, 양로원, 장학재단을 설립하겠다는 것이 꿈이 었습니다.

 

제 7 절 고힝을 떠나 자활의 길로

 

저는 서울에 계신 큰 형님의 가구 공장에서 일을 하기로 하고 1968년 2월 21일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하동에서 서울까지 완행기차로 14시간이나 걸려 서울에 도착하엿습니다. 제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이였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양보중학교 위에 있던 절의 주지승은 저에게 '학생은 세상에서 장사를 하면은 큰 부자가 되고, 도를 닦으면 큰 인물이 된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저는 악몽을 꾼 것 같은 지난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큰 부자가 되어 학교도 설립을 하고, 양로원도 운영하고, 고아원도 운영을 하고자 고향을 떠나 낮설은 서울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돈을 벌어 이 사회를 위해 필요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마음으로 형님의 가구 공장에서 1년을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고도 형제지간이라 월급은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 해 겨울 하동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두 번 째로 고향을 떠난 것은 1969년 2월 21일 입니다. 하동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우리나라 중앙 부분인 대전역에 내리자 밤이 되었습니다. 역 옆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지내고 시장구경을 하던 중 큰돈을 투자하지 않고도, 김장사와 미역장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수중에 돈 2만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우연히 만난 사람이 빌려 달라고 하여 7천원을 빌려주고,남은 돈으로 방 값을 내고, 밥을 사 먹는 생활을 하다가 돈이 다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돈 50원으로 국수를 한 다발을 사면 15일 동안 먹을 수있었는데 그것마저 떨어져서 거지 신세가 되어 길에서 가게마다 다니며 빵을 구걸하여 먹고살았습니다.

할 수없이 저는 대전서 청주까지 걸어가며 막노동 일을 찾아 다녔습니다. 청주에서 2일 동안 돈이 없어서 굶다가 재산 목록 1호인 시계를 5백원에 팔았습니다. 청주서 버스를 타고 신탄진까지 와서 신탄진에서 버스비를 아끼려고 걸어서 대전까지 왔는데 헤매다가 보니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자취방에 돌아왔습니다.

또 다시 막일을 찾았지만 일이 없어서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저의자존심과 체면도 배고픔 앞에서는 송두리째 무너져 갔습니다. 집주인에게 밀린 방세 때문에 온갖 욕을 얻어 먹었습니다 구걸하면서 젊은 사람이 무엇을 할 것이 없어서 얻어먹고 사느냐는 비난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돈 빌려 준 집을 찾게 되어 한달 만에 7천원을 받아 대전시장에서 미역과 김을 사서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미역과 김을 팔기 위해 금산장에도 가고, 공주 장에도 가고, 옥천 장에도 가고, 신탄진 장에도 돌아다니는 말그대로 장돌뱅이가 되어 5일장을 부지런히 쫓아 다녔습니다.

돈이 약간 모아지자 나이론 옷장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옷을 고르는 척하다가 자꾸 훔쳐가서 할 수없이 옷장사를 정리 하였습니다. 저는 수도공사를 하는 공사장에서 땅 파는 일을 하다가 겨울에 다시 고향인 하동에 돌아가 가사일을 돌보며 산에서 땔감나무 해오는 생활을 하며 지냈습니다.

1970년 2월 21일 그 동안에 모아두었던 3만원을 가지고 완행열차를 타고 이 번에는 천안에 갔습니다. 여인숙에서 하루 밤을 자고 그 이튿날 천안 방죽거리에 하숙집을 정하고 바로 그 날 서울 중부시장에 가서 김 1박스를 도매로 가져와서 천안, 온양, 진천, 안성, 병천, 오산, 평택 장으로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했습니다. 김 뿐만 아니라 북어도 팔고 미역도 팔며 기반을 닦아 갔습니다. 그리고 쌍용동에 살다가 성정동의 새 양옥집 전세방 한 칸을 얻어 이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매일매일 돈버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장사를 하고 저녁마다 집에 돌아와 돈보따리를 정리하여 돈을 세는 재미에 고달픔도 잊을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돈을 보내고 옷도 사서 부쳐 드렸습니다. 동생들의 책값과 용돈도 보내주었습니다.

매일 외롭고 고달픈 하루의 생활이었지만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꿈에 피곤한 줄도 몰랐습니다. 하루 하루 돈이 불어나는 재미에 희망을 갖고 열심히 장사를 하였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참으로 열심히 살며자립의 기반을 다져갔습니다.

 

 

제 2장 통일교 전단지 한장에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넌


제 1 절 단 한번의 악연으로 통일교 입교

 

저는 1970년 7월 31일. 5일장이 안 서는 날이라 마당 수돗가에서 밀린 빨래를 하고 있던 중,  키가  150cm정도 되는 아주 작고 배가 만삭인 정선자라는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전단지 한 장을 주면서 "밤에 우리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니 와서 들어보세요" 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객지생활에서 외로웠던 저는 그  전단지 한 장에 끌려 내 발로 걸어가 통일교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전단지를 주며 문선명의 통일교를 믿으라는 정선자 씨의 말 한마디가 결국 제 인생을 빼앗고 파멸시켜 버렷습니다.

제가발을 내디딘 천안 통일교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은 단촐한 분위기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40일 하계 전도 기간이 있습니다. 이 기간에는 통일교 부인들이 남편과 자녀를 떠나 전국    각 통일교에 배치되어 전도 활동을 합니다. 천안 통일교에도 처음에 몇 명이 나와 열심히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방학동안에는 부인 전도 대원들이 전도를 했지만 모두 자기 가정으로 돌아갔고 교구 본부인 천안교회는 교인들이 얼마 되지 않아 교회형편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1970년 11월 25일. 777쌍 합동 결혼식을 올린 부인 전도 대원들이 결혼 후에도 남편과 같이 살지않고 3년동안 전도를 하기 위해 천안교회에 전도대원으로 배치되어 왔습니다. 천안 통일교는 지원나온 전도대원들의 전도를 적극적으로 해서 조금씩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김민중 목사는 저에게 열정을 가지고 통일교 교리를 가르치면서 3년 후면 기독교가 통일교로 전부 흡수되고 불교, 유교 등 모든 종교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게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원리 강론인 창조 원리부터 채림론까지 들으면서 문선명이 틀림없이 재림주이며 참부모님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김목사는 3년 안에 종교 통일은 물론 정치, 경제, 언론, 문화까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고 순종하고 따르며 전체가 통일된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믿으면 3년  내에 지상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강의하였습니다.

부인 전도 대원들은 합동 결혼식을 하고도 제일 깨가 쏟아진다는 신혼 초인데도 남편과 살지 않고 문선명 교주를 위해 시간을 바쳐서 전도 활동을 하여 죽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 부모인 문선명에게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 왔다고 기쁜 보고를 드리기 위해 전도 활동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꽁보리밥과 김치만으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저는 가끔 미역을 주면서 미 역국도 끓여 먹게 했습니다.

김민중 목사의 사모는 큰그릇에 빵을 가득 담아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구장 사모가 머리에 빵을 이고 집집마다 돌아 다니며 장사를 하는 것을 보니 통일교 목사의 길을 알 것 같았습니다.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구 본부의 총무 부장인 박무병씨는 호떡 장사를 하여 천안교회의 재정을 돕고 있었습니다. 결혼한 전도 대원들은 생활비를 조금씩 냈지만 교회운영비로서는 너무 부족했습니다. 저도 간간이 교회에 가서 꽁보리 밥과 시래기 국을 먹은 때도 있었습니다.

 

제 2 절 천안교회 청넌회 부회장

 

저는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고아원과 양로원을 운영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5일장을다니며 미역 장사, 김 장사, 건어물 장사를 하여돈 버는 재미에 빠져 있었습니다. 매일 자전거에 미 역과 김을 싣고 안성, 진천, 온양, 오산, 천안장에가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갈 때면 왼쪽 팔을 사용할 수 없어서 오르막을 올라갈 때는겨울에도 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자전거에 짐을 싣고 갈 때 버스나 트럭이 인정사정 없이 저를 스쳐 지나가서 위험한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세찬 바람에 자전거와 육중한 건어물 짐과 같이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는상처를 입을 때도 많았습니다. 힘 들었지만 건어물 장사를 할 때 좋은 장소를 잡았고 저의 열성 때문에 장사가 잘 되었습니다. 제가 장사가 잘되니까 주위 다른 장사들 중에 시기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에게 잘 대해주어서 대인관계도 좋았습니다.

천안 방죽거리에서 자취할 때 시장에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데 밤 9시경에 천안 시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저의 집까지 기독교 목사님 한분이 기진맥진 하여 찾아 왔습니다. 충남 서산에서 교회를 하다가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교회를 떠나 사모와 삼남매를 데리고 여인숙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목사님은 3일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딱한 사정을 듣고 목사님을 자전거에 태우고 천안역 앞 여인숙에 가서 사모님과 자녀들을 데리고 가서 식사 대접을 하고 돈을 조금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떠날 때까지 적은 정성이지만 도움을 드렸습니다.

하루는 장사를 하고 막 돌아와 밥을 지으려고 하는데 멋진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맨 신사가 와서 배가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얼굴도 점잖고 잘생긴 분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분은 열차에서 옆에 앉은 사람이 음료수 한 병을 주어서 마셨더니 수면제를 탄 음료수인지 모르고 잠들게 되었고 일어나 보니 상위 양복과 지갑을 도둑 맞았다고 했습니다. 할 수없이 옥천에서 내려 천안까지 철길로만 걸어올라 왔다고 하였습니다. 집이 서울이기 때문에 먹을 것을 얻어먹고 영등포에 있는 집에까지 걸어서 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분을 모시고 천안 시내까지 가서 식당에서 짜장면을 곱빼기로 사드리고 집에 들어 갈 때 과자와 과일을 얘들에게 사가라고 돈을 조금 드리고 서울행 버스표를사서 보내 드렸습니다. 며칠 후 주인 아주머니 말이 저에게 도움을 받은 분이 서울 올라가서 은혜를 갚기 위해 천안 자취 집에까지 찾아왔다고 했습니다. 저의 자취방은 도로변 옆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일이 많았습니다.

천안 성정동에 살 때는 우연히 홀로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는 화가를알게 되었는데 그 화가도 생활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몇 달 동안 쌀, 라면,반찬을 사다 드렸는데 그때마다 저의 어머니처럼 생각되어서 항상 많이 못사다 드리는 것아 가슴 아팠습니다.

저는 길에서 행려 병자가 쓰러져 있거나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얼마라도 도와주어야 마음이 가벼운 성격 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옷이 없어서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보게 되면 여자 분에게는 시장에 가서 옷을 사다 드리고 남자 분에게는 집에 있는 제 옷을 보따리에 싸 가지고 가서 드린 때도 있었습니다.

저는 사이비 종교인 통일교에 발을 내 디딤이 영혼과 육신을 빼앗기고, 꿈도 청춘도 가정의 모든 것도 빼앗기는 순간인 것을 그땐 몰랐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깨닫고 보니 그것은 악몽의 만남, 죽음의 속삭임, 사단 마귀의 역사였습니다. 그 당시 통일교 교인보다 먼저 기독교 교인이 저의 귀에 통일교는 이단교회라 교육을 했더라면 제가 통일교에 입교하여 인생이 파멸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통일교가 이단교회라고 매일 한명에게라도 외친다면 저같이 어리석은 사람도 이단교회에 빠지는 일이 없이 예수님을 잘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리석게도 통일교가 사이비 종교라는 외침을 통일교 입교 전까지 단 한번도 듣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입교 후에는 이미 통일원리로 세뇌 교육이 되어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재림주로 믿고 섬길 때라서 통일교가 이단교회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 귀에는 기독교 교인이 통일교 반대하는 소리로만 들렸습니다. 저는 진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참 부모님으로 재림주님으로 믿고, 우상으로 섬기며,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는 데 앞장섰고, 문선명을 재림 주님으로 구세주, 참부모, 천지 부모로 증거하는 데 모든 청춘을 바쳤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의 자녀나 형제, 친척, 친구가 지금 사악한 유혹에 빠져 통일교에 입교한다면 저와 같이 파멸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통일교 전도를 막아주십시오.

세계에서 사이비 종교의 천국이 대한민국이라 합니다. 사이비 교주들이 아름다운 금수강산, 지상천국인 이 땅에서 기독교를 모태로 하여 우후죽순같이 생겨났습니다. 살인집단 백백교, 암살 자살집단오대양교, 동방교,전도관 등 약 150파가 넘는 사이비 교주들이 저마다 주님이라고 자칭하며 선량하고양심적인 국민들의 영혼을 빼앗아 영적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인 가정 파탄을 시키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모든 성도는 일치 단결하여 목숨을 걸고 통일교와 사이비 이단을뿌리 뽑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4에 "하나님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 이라" 고 말씀했듯이 하나로 단결만하면 문선명 이단궤멸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와 각 교회에서 저를 간증집회에 초청하여 통일교의 정체와 비리를 알리고 싶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내 이웃을 전도하지 않으면 문선명 통일교 집단에 영혼을 빼앗겨 지옥으로 끌려 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 성도들은 경각심을 갖어야 합니다.

각 지역마다 사이비 종교 박멸운동을 범 기독교 운동으로 활성화시켜 나간다면 이 땅에 다시는 저 같은 희생자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혼을 빼앗는 이단궤멸을 위해 싸워서 승리하라는 기독교 성도들에 대한 지상 명령 입니다.

 

제 3 절 새벽 기도 하던 중 영계에 가보고 나서..

 

1971년 7월 21일. 집에서 새벽기도 중 잠시 입신했습니다. 저의 육신이 방바닥에 쓰러졌는데 "준철아, 준철아, 준철아!" 라며 3번을 부르는 음성이 들렸고 마지막에 제가 "네!" 하고 대답을 했을 때 영혼이 육신에서 이탈하여 공중에 서 있었습니다.

그 음성은 다시 나에게 "준철아, 이 도끼를 받아.!"라고 말할 때 하늘로부터 큰 쇠도끼가 나에게 날아왔고 엉겁결에 오른 손을 내밀어 그 큰 쇠도끼자루를 잡게 되었습니다.

다시 "준철아, 쇠도끼를 잡았느냐?" 라고 묻자 나는 "잡았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더니 "이 세상을 내려다보아. 바짝 마른 나무는 사이비 종교이며 사단 마귀이니 다 짤라 버려라. 푸른 나무는 살아있는 신앙자이니 살려두어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부터 나는 백발 노인이 되어 쇠도끼로 썩은 나무를 베었습니다. 제가 베기를 다하고 땀을 비 오듯이 흘리며 허리를 펴고 일어섰을 때 "준철아, 이제 떠나거라." 라는 큰 음성이 천둥 번개소리 같이 저의 귀에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의 터널이 나오면 그 터널을 통과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저는 그 명령에 따라 터널을 통과하였습니다. 제가 터널을 통과하니 저 세상 영계였습니다. 한참을 그 곳에서 서 있으니 바다 가운데 수중 다리가 있었고,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자가용 한 대가 제 앞으로 왔습니다. 그차에 있던 운전 기사는 천사였는데, 그 천사가 말하기를 "제가 이제부터 모시겠습니다. " 하고 자가용 뒷 자리의 문을 열어주어 저는 차를 타고 끝 없는 길을 달려갔습니다.

마침내 그 차는 바다를 지나 육지에 도달했고 아름다운 궁전 입구에 정지하였습니다. 그 운전기사는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따뜻하고 겸손한 자세로 대해 주셨고, "이제 제가 할 책임은 끝났다" 고 말했습니다. 저를 보고 그 천사 운전기사는 "안녕히 가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곳에l서도 궁전 입구에 있던 남자가 자가용 문을 열어주면서 저에게 "어서 오십시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 하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안내를 받아 호화 찬란한 궁전 제일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올라가 가장 아름다운 방으로 안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향기가 나는 방에 들어갔을 때 강렬한 빛이 있어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저에게는 음성만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하나님을 믿겠느냐!! 천국과 지옥을 믿겠느냐." 하고 여러 가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 곳에서 "이제 준철아 떠나거라" 라고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죽은 나무 사단 마귀를 다 잘라버리고 백발노인이 되어 죽어서 할 일을 다하고 저승에 왔습니다. "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너에게 사명이 있어. 이 세상의 모든 사단 마귀와 죄악을 쇠도끼로 찍어 버려라." 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궁전을 내려와 수중다리를 통과하고 이승과 저승의 터널을 통과하여 내 집으로 들어왔는데 제 육신은 아직도 쓰러져 있었습니다. 영혼이 몸 속으로 들어가자 저는 의식에서 깨어났습니다.

저는 다시 살아난 후 삶과 죽음을 생각하고 제가 죽으면 끝이 아니고 영계의 시작이요 하나님을 믿으면 영생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즉시 정 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끼를 받은 것은 목사의 사명을 받아 사단마귀를 찍어 없애라고 하나님이 저에게 명령한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통일교에 목사과정을 밟아 목사가 되었고 통일교 30년 신앙목사생활 중 생지옥같은 문선명 집단의 생활을 체험한 후 세뇌에서 깨어나 탈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며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단 사이비 교주인 문선명적그리스도를 궤멸하라고 저에게 도끼를 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 이름으로 언론방송을 통하여 보도하고 각 교회에서 간증하는 일이 통일교회를 궤멸하는도끼받은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문보도를 통하여 대대적으로 문선명의 정체와 피가름 의식, 비리를 폭로하여 인류역사에 가장 큰 문선명 적그리스도를 뿌리 뽑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문선명은 1971년 1월 3일, 예수님 탄신일이라고 주장하며 통일교도인 처녀 장정순을 예수님과 결혼시켰습니다. 통일교 원리강의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아니라 제사장 사가랴와 마리아가 관계를 맺어 예수님이 탄생 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의 원리강의에는 '예수를 믿어도 완전구원을 받지 못하며, 실패한 예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이 참 부모요 재림주로서 이 땅에 탄생했기 때문에 예수가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문선명은 1900년 음력 3월 1일을 참부모, 재림주로 섬기는 날로 정했습니다. 문선명의 생일인 1920년1월 6일을 재림주 탄신일로 정한 것을 통일교인들이 세뇌되어 모두 믿듯이 저도 그렇게 믿게 되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목사가 강의하는 대로 모두 수긍하고 받아들이고 따랐습니다. 저는 3년 동안 모진비바람과 추위와 싸우면서 기반을 닦은 장사가 너무나 아까웠지만 물건을 팔고 다 정리하였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의 길이 제가 가야할 사명인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 이었습니다

 

제 4 절 통일교의 제 2차 기동대 활동

 

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목사 가정 인 제2차 기동대에서 6개월 동안 활동하기 위해 순전단 21일 교육에 들어갔습니다. 1972년 11월 21일.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수택리 중앙 수련소에 21일 원리 수련을 받았습니다. 창조원리부터 재림론까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재림주 참부모로 믿고 복종하며 증거하기 위한 세뇌교육 기간 이었습니다.

그 교육 후에 제2차 기동대 대원으로서 충북 순회 전도단 46명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기동단 단장은 임순도씨였습니다. 46명의 대원은 충북지역을 다니면서 6개월 동안 많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매일매일이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고 복종하며 통일교 발전을 위하여 충성을 맹약하는 고된 세뇌교육 훈련기간 이였습니다. 저는 훈련 기간 동안 무엇이든지 1등을 하고자 어떤 순전단 대원들보다도 더욱더 열심히 하였습니다.

추운 겨울에 얼음 목욕도하고, 밤새도록 철야 기도도 하며, 산꼭대기 성지 기도회도 가졌습니다. 저는 특별 헌신대원으로서 전도를 하면서도 연필사업, 성미사업을 했습니다. 1960~1970년대의 통일교는 젊은 청년들과 학생들을 시켜 전국적으로 성미 구걸 사업과 연필사업, 떡 장사등을 하며 성금함을 들고 모금운동을 하였습니다. 크리스마스나 추석, 설 명절 때도 모금 운동을 하였습니다. 저는 모금 운동에 자신 있게 활동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여러 가지 구실로 진행되는 통일교 모금활동에 동참하였습니다.

저는 공부를 하기 위하여 학자금 마련을 위해 헌신사업을 나왔다고 하며 집집마다 쌀과 돈을 달라고 하며 다녔습니다. 시골 동네를 다니면서 집집마다 쌀자루를 가지고 동정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순수하고 착한 시골 아주머니나 할머니들이 동정을 하여 100원, 500원, 1000원을 주었습니다. 연필 한 자루에 쌀을 한 되나 주시는 분도 있고 한 홉 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점심때가 되어 배가 고프면 찬밥이나 국수도 얻어 먹을 때가 많았고,고구마로 점심을 대신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쌀자루에 쌀을 모으면 나중에는 어깨에 둘러매고 다닐 수가 없을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장거리를 갔다가 교회로 돌아 올 때면 밤 10시가 넘고 11시가 될 때도 있습니다. 교회에 도착하면 매일 녹초가 되었습니다. 모금 활동을 끝내고 밤늦게 돌아오면 결과 보고회, 원리강의 듣기, 기도회를 마치면 자정을 넘기기가 일수였습니다. 아무리 늦게 자도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정성스런 기도를 위해 냉수 마찰을 했습니다. 소변을 보면 그 자리에서 얼음이 어는 추운 겨울날에도 이런 일은 쉬지 않았습니다.

새벽 4시 30분부터 5시 30분까지 새벽기도를 하였습니다. 통일교는 각시 군 지역에 하나님이 임재하고 함께 하는 땅이라고 하는 '성지' 를 산꼭대기마다 정해 놓고 성지 기도라는 명목으로 새벽마다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헐벗고 굶주리며 매일매일 극기 훈련하는 심정 이었습니다.

이런 저의 노력으로 6개월의 순전단 졸업 때는 46명 가운데 1등을 했습니다 전도도 106명을 하여 우수상을 받고 개근상도 받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문선명을 믿는다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요, 최고의 은사요, 최고의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6개월 동안 저는 매일 꽁보리밥에 김치만 주어도 감사했고, 한끼는 국수만을 주었는데도 저는 참 부모님, 재림주님이라고 믿었던 문선명의 은혜로 알고 감사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것이 예배, 기도, 전도, 쌀 거두는 성미 모으기, 봉사, 심정교육 생활이었습니다. 저는 코피를 다 쏟으며 6개월 동안 극기훈련을 받음으로서 문선명 통일교의 말단 목사, 교회장 자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고된 훈련으로 피골이 상접하여 극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결국 6개월의 수련 후 하동의 고향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제가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로 부터 탈출할 수 있는 첫 번째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의 사슬은 저를얽어 메기 시작했습니다.

1973년 5월 20일 수료 후 6월 1일날 임순도 단장으로부터 충북 보은군 적암교회로 발령을 했으니 임지로 빨리 와서 목회활동을 하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저는 즉시 충북보은 적암교회로 갔습니다.

저는 통일 원리로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통일교를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때 문선명의 교리에 세뇌되었기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 하였습니다. 통일교를 탈출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기회를 놓친 것이었습니다.



제 3장 첫 사역인 충북보은 적암교회

 

제 1절 기적은 일어나고

 

제가 충북 보은 적암교회에 취임식을 하고 부임했을 때 전임목사는 인수인계도 없이 가버리고 난 뒤였습니다. 저는 통일교 교인들 몇 분을 중심으로 전심전력을 다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4개월만에 교인을 70여명으로 늘렸습니다. 보리 벨 때는 보리를 베 주고, 모심을 때는 못줄도 잡아주고, 가을에는 대추도 따주고, 벼 벨 때는 일손을 도우며, 때에 따라서는 아기도 봐주며 무엇이든 봉사를 했습니다.

적암교회 목사로 취임한 후 매일 끼니때 마다 물을 끓여 밀가루 한 주먹을 집어넣고 간장도 없어 소금으로 간을 해서 먹었습니다. 어쩌다 라면이나 국수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적암교회에 와서 처음으로 밥을 먹은 것은 한달 반 만인 1973년 7월 9일월요일이었습니다. 777가정인 유철재 부목사가 쌀 2되를 성미로 가져 온 것이었습니다. 쌀로 밥을 지어서 맨밥에 간장만 가지고 먹었지만 꿀맛이었습니다. 저는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그 후 교회 옆 땅을 개간하여 돌과 나무를 걷어내고 옥수수를 심어 옥수수 밭을 만들었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상황에서 점심, 저녁이나마 끼니로 때우려고 매일 물을 주고 정성을 다해 길렀습니다. 옥수수 싹이 무릎까지 자라 올라 왔을 때였습니다. 심방 갔다가 오니까 동네 큰 암소와 새끼 송아지가교회에 들어와서 그 옥수수 싹을 잘라먹어 버린 것 이었습니다.

저는 매우 화가 나고 한편으로는 서러웠지만 그래도 남은 옥수수를 잘 길러 충북 청주 본부 교회와 보은 교회에도 한 자루 주었습니다. 그리고 적암교회 교인들과 옥수수 잔치를 벌렸습니다. 남은 것은 저의 아침 저녁 식사대용 양식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적암교회 땅은 통일교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교회땅 120평을 매입하기로 작정하고 헌금을 시작했습니다. 교인들이 3천원을 헌금하였고 나머지 돈은 제가 서울 중부시장에 미역과 김을 사다가 추석 때 각 시장에서 팔아 번 돈을 모았습니다. 또한 보은 속리산 산줄기 인 구봉산에 까지 올라가하루종일 칡덩굴을 잘라서 동네로 가져오면 한 관에 100원씩을 주었는데 매일 칡덩굴을 팔아 300원씩을 벌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대금을 지급하고 대지 120평을 매입 하였습니다.

적암 교회에서의 생활은 저에게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최악의 가난이었고 처절한 생활 이였습니다. 교인들 중에는 1인당 매월 50원을 내는 회비도 내지 못하는 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개의치 않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녁마다 강의를 할 때나 일요 예배, 수요 예배때 온 열정으로 설교를 하다보면 식은땀을 비 오듯이 흘렸습니다. 저는 그래도 죽으면 살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전력을 다했습니다.

 

제 2절 성결교 신학교

 

저는 목회자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신학에 대한 깊이와 교회 예배, 기도, 전도, 교회관리, 행정, 교육 등 모든 것을 제대로 교육받고자 성결신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신학교에서 교수님들은 문선명이 사이비교주며 통일교는 이단교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통일교에 세뇌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먼 달나라 말씀처럼 제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성결신학교에서 6개월 수업 후에 성결교 신학대학교 2학기에 편입했습니다. 당시 학교에는 김응조 학장님, 전영식 학감님, 성기호 교수님(지금의성결대학교 총장님), 조두만 목사님 등 많은 분들의 열정적인 가르침에 감동 받고 많은 배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초조하고 불안한 나날이었습니다. 통일교는 이단이라 했기 때문에 같은 신학생들과 차도 같이 못타고 빨리 타거나 늦게 버스를 타고 4년 동안 다녔습니다.

성결교 교단에서는 저를 장로교회의 전도사로 알고 있었습니다. 전영식 학감님은 저에게 열정적으로 기도도 잘한다며 능력있는 부흥사가 되어 성결교 교단에서 목회 활동을 해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갈 길이 있어 따를 수는 없었지만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성결교 신학교 신학생 시절에 하나님에게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재림 주인가, 적 그리스도인가 간절한 심정으로 100일 단판 기도라도 드려서 하나님께 문선명의 정체를 알려달라고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무지하고 몽매한 저는 문선명을 재림 주, 참 부모로 믿는 데서 벗어나지 못했습니 다.

그러나 지금 생각을 해보니 그 당시 단 한번이라도 통일교에 대해 교수님과 상담을 했더라면, 통일교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기도를 했더라면, 하나님께서 저를 붉은 적 그리스도인 문선명 통일교교주로부터 구원해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 교주의 붉은 철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도 통곡하셨을 것입니다. 저도 지금에야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제 3절 문교주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가는 의식인 합동결혼식

 

1975년 1월 13일. 청파동 통일교구본부 교회에서 전국에서 많은 미혼남녀가 참석한 가운데 집회가 열렸습니다. 미혼남녀를 양쪽으로 두 패로 만들고 가운데 길로 자칭 재림주인 문선명이 왕복을 하면서 미혼남녀의 얼굴 관상을 봅니다. 조상 위로 7대, 아래로 후손 7대 관상을 보고 천 년을 내다보며 가정 천국과 행복한 가정을 꾸며 이혼이 없는 참가정 합동결혼식을 올릴 짝을 맞춘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이 "너, 너 이렇게 만나봐!" 라고 명령하면 미혼남녀는 옆의 만남의 장소에 가서 서로 만나보고 문선명 앞에 와서 경배하고 결혼할 것을 맹세하고 마지막에 약혼 축도식을 받습니다.

이 집회에 참석한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제가 신학 대학을 다니고 있고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하오니 저의 아내로 착한 사람으로 짝을 맞추어 주십시오." 라고 용감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문선명은 "그래? 내가 목사 사모로서 착한 색시감을 찾아 주겠다" 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끝부분까지 미혼 여자들을 둘러보고 맨 마지막에 앉은 이영희씨를 저의 결혼할 대상으로 정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영희씨와 만나 대화를 해보고 결혼 할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이영희씨에게 만나 나는 신학생이라는 것, 앞으로 목회자의 사명을 다할것, 교통사고로 팔에 장애가 있다는 것을 말했을 때 모든 것을 이해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살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이 축복 결흔식이 남편으로써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자녀들 앞에 아버지로써 역할을 다하지못하는 비극의 출발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1975년 2월 8일 서울 장충체육관에는 성대한 통일교 할동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저의 집이나 장인, 장모님 집에서는 통일교를 반대할뿐 아니라, 합동결혼식은 더욱 만류했었습니다. 그러나 장인, 장모님은 결혼식장인 장충체육관에 오셨습니다.

결혼식에서 문선명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 예수님도 축복을 받지 못하였는데 부족한 너희들이 축복을 받아 원죄, 혈통죄, 연대죄, 자범죄도 없는축복 가정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통해 합동 결혼식을 올린 통일교 교인들 가정은 죄 없는 자녀가 탄생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개인천국과 가정천국을 이루어 천국 백성으로써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부부는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통일교 규례에 따라 3년의 전도기간이 있기 때문에 서로 혜어져 살았습니다.

1975년 6월 7일 토요일, 구국세계대회를 위해 각 나라 60개국 대표가 입국했고 1백 20만명이 서울 여의도 광장에 모였습니다. 전국 통일교 교인들은 각 지역의 주민들을 동원하여 여의도 광장으로 모여 극적으로 1백20만명 집회를 성공리에 잘 마쳤습니다. 통일교에서 최초 합동결혼식자(1961년 5월 15일, 36가정)을 박종구 총단장(지금은 고인이 됨)은 "여의도 광장을 가득 채우지 못하면 전국의 목회자와 통일교 교인들은 한강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자." 고 강조하면서 "전국의 기독교 교회에서는 6월 7일에 집회를 못하도록 비가 오라고 금식철야 기도하며 정성을 모으고 있다. " 고 하였습니다.

그날 오전엔 비가 와서 매우 초조했으나 행사를 하는 오후에는 비가 그쳤습니다. 통일교에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통일교에서는 하나님이 문선명 자칭 재림주 편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기독교를 떠났고, 통일교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지금 생각을 해보니 구국세계대회는 문선명이 자기 욕망과 뜻을 관철시키기 위한 행사였습니다.

그 당시 통일교 교인은 1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교세를 자랑하기 위해 1백20만명을 집결하게 한 집회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날 동원된 전국의 교인들의 피눈물이 섞인 헌금으로 승공연합 사람들과 노인들의 식사대접, 관광버스 제공 등 온갖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제 4 장 서울 강서 교구

 

제 1 절 교구본부교회 개척, 부흥, 교회건축

 

1975년 7월 1일 서울 시내 12곳에 통일교 협회 본부에서 12명의 목회자를 추천하여 파송했는데 저는 서울 강서구를 맡게 되었습니다. 교회 마련을 위해 강서구 전지역의 건물을 수소문하고 다녔습니다. 마침내 화곡본동 2층에 교회를 마련하여 9월 1일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협회에서 단 10원도 지원 없이 자비로 교회를 마련 하다보니 경제적인 어려움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감사했습니다. 손에 잡히는 것은 없어도 사명감으로 충만하고 충과 효와 열을 다하겠다는 열정으로 가득 찼습니다. 기필코 교회를 건축하여 크게 부흥하고 넘치는 제단을 만들 것이라고 다짐 하였습니다.

매일 문선명 사진을 걸어놓고 경배드리기, 문선명 교주에게 충성하는 서약인 나의맹세, 가정맹세, 성초기도, 조식금식, 전도, 봉사 생활로 일관 하였습니다. 개척교회이다 보니 교인들은 있어도 교회를 운영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저의 집과 논 600평을 판돈으로 어렵지만 교회를 이끌고 갔습니다.

신학교 등록금 마련, 교통비, 교회운영비, 교회건축 준비, 전도 등 여러가지로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교회건축을 위한 30일, 60일, 120일 조식 금식기도를 했고, 전쟁을 하는 심정으로 피, 땀, 눈물로 정성을 쏟았습니다.

강서교회는 2층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교회 건축을 할 때까지 박현종 430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강서구철거민 동네인 신월동에 18만원짜리 방을 얻어 자취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160명 재적과 120명 예배를 목표로 밤낮 없이 혼자서 1인 5역을하며 전도에 주력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때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을 다하여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였고 그 사람들을 통일교 교인으로 만들기에 몸부림을 쳤습니다.

개척 교회이다 보니 매일매일 목사가 직접 전도하러 다녀야 하고 심방해야 했습니다. 거의가 새로 전도된 교인이다 보니 헌금도 별로 모이지 않아신학 대학 등록금과 교통비와 생활비가 필요해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도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은 원리 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에 각 교회마다 흑판이 필요하였습니다. 저는 교회 운영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흑판은 물론, 자동 스탬프 도장, 책도 팔았습니다. 심지어는 콘크리트 쓰레기통 장사도 직접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기도를 했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 취침 때까지 매일 미친듯이 경배, 나의 맹세, 기도를 하며 살았습니다. 협회에서는 개척교회인데도 교회 전세금이나 교회 운영비, 생활비 등을 단10원도 지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인 5역을 해서라도 교회를 이끌고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76년 1월 1일 문선명은 '자녀로 인한 천국 실현' 이라는 표어를 통일교 교인들에게 내려주었습니다. 저는 강서교회 개척목사로서 한 해를출발하는 첫 시간을 얼마 되지 않은 교인들과 함께 철야 기도로 정성을 모았습니다. 당시 강서구 화곡동은 허허 벌판 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강서교구본부교회 건축을 최우선 목표로 세웠습니다.

문선명은 1975년 12월 31일 오후 8시 15분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통일교 목회자들과 교인에게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서 역사적인 통일교 현시점을 사수하라고 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은 역사적인 결실시대에 통일교 교인들이 죽음으로서 이 민족을 구하고 통일교 발전에 제물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문선명의 시책에 따라 강서교회를 기필코 발전시키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저는 "강서교회 교회건축을 하여 자칭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님이 안식 할 수 있는 강서교회 제단을 만들 수 있게 축복해 주옵소서" 하고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매일 신들린 사람처럼 밥을 먹고 길을 걸어가면서도 기도하였습니다.

매년 1월 3일은 2000여년 전 예수님이 탄생한 날이라고 하여 통일교 교회에서는 예수 탄생 예배를 드립니다. 그날도 저는 새벽 제단에서 예수님 탄생 기도회와 간단한 예배 정성을 모았습니다.

1976년 1월 5일 서울 용산 통일교에서 서울교구의 목사 전체 전진 대회가 있었습니다. 김 영휘 한국협회장과 회의를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강서교회당 건축을 해준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서울 시내에는 대 선배 목사들이 있었지만 거의 전월세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척목사로서 교회건축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 때부터 만사를 제쳐놓고 교회 건축 대지를 사기 위하여 강서구 전체를 돌아 다녔습니다. 부동산 소개소는 거의 다 다녔을 정도로 많이 알아 보았습니다. 교통 좋고 인구도 밀집된 장소 3곳을 정하여 협회에 가져 갔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김수한 건설 대장이 통일교 A타입 교회의 교회는 산꼭대기에 건축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 차례 산꼭대기는 안된다고 간절히 호소하였지만 욕만 얻어먹고 결국은 화곡동 고지대에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정하려던 교통 좋고 인구도 밀집된 대지와 산꼭대기 대지와는 가격 차이가 거의 없었습니다 몇 천 원 차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김수한 건설대장 때문에 산꼭대기에 짓게 되었습니다. 당시 대지 125평의 총 금액은 5백62만5천원이었습니다. 대지 125평에 건평 42평의 예배당을 계획했습니다.

1976년 3월 3일 대지125평을 매입하고 교회 건축 설계를 준비하며 교회건축에 박차를 가하였습니다. 강서교회 옆에 있던 영등포 통일교 정호영 목사에게 교회 건축을 하는 2달 동안 3명만 강서교회에 교회 건축 인부들 식사 준비, 물 길러 오는 것 등을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관할 교회의 건축인데도 거절 하였습니다.

통일교가 천국을 외치며 3년 내에 통일교와 기독교의 통일이 이루어 진다고 하고 문선명이 만 인류에게 재림주로 추앙을 받는다고 하였지만, '사랑과 식구' 라는 말이 허구에 불과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희생,봉사, 탕감 제물이라는 말도 입으로만 외치고 실천하지 못하는 죽은 신앙이라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 교인들이 서로 부를 때 '식구님' 이라고 합니다. 적든 많든 한 솥 밥을 먹는 가족처럼 사랑과 희생을 나누자는 뜻에서 식구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처럼 원리나 사랑을 외치지만 제가 통일교에서 경험한 것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함과 냉정함 뿐이었습니다.

교회당 건축일은 우리 강서교회의 몫이었습니다. 교회 부인 몇이 아이들을 업고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점심 식사 준비를 하였습니다. 저도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인부로 일하였습니다. 벽돌도 나르고, 나무 판자도 자르고,시멘트 일, 페인트칠, 자재 운반, 200m 아래에서 물을 길어 오는 일 둥을 하였습니다. 건축하는 동안 저는 예배와 심방 외에 건축일로 재단과 협회에 뛰어 다니며 여러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 하였습니다. 너무 일이 많고 힘들어 1인 10역을 해도 모자랐습니다. 오진수씨는 강서교구 본부 교회 건축을 위하여 고향 함안에서 강서교회로 와 무보수로 교회 건축 일을 도와줬습니다. 서정수씨도 봉사활동을 너무 많이 하였습니다. 너무나도 착하고 진실한 청년들 이였습니다.

드디어 강서교회가 완공되자 그간의 많은 시련과 고통, 배고픔, 외로움, 기쁨 등 만감이 교차 하였습니다. 그 순간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대지 125평 가격이 560만원 정도였지만 지금은 100배가 넘는 5억 정도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육신을 벗고 영계에 갈 때까지 강서교회에서 목회하여 점점 더 큰 대형 교회로 성장시킬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강서교회를 건축하던 중 여러 가지 일이 많았습니다. 철물점에 가서 못을 사려고 쌀 배달을 온 쌀가게 아저씨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급경사 길을 내려가는데 브레이크가 말을 듣지 않아 순간적으로 도로 옆 시멘트 벽으로 자전거 핸들을 꺽었습니다. 저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지만 벽에 부딪히면서 오른쪽 무릎 위에 뼈가 보일 정도로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습니다. 제가 쓰러지는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자전거 주인은 브레이크가 고장났다고 말하지 않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생명을 구한 것만으로도 감사했습니다. 살덩이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뼈 속까지 심을 박아서 썩지 않게 하고 새 살이 차 오를 때까지 두 달간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붕대로 다리를 싸매고 전과 다름없이 건축 일을 하였습니다. 건축하는 동안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배웠습니다. 벽돌쌓기 시멘트일, 미장일 등 전문 기술자와 비슷하게 일을 많이 했습니다.

피와 땀, 눈물로 사력을 다한 서울의 강서교회 건축은 1976년 6월 10일 성공적으로 완공 하였습니다. 통일교 역사가 21년이 지났지만 당시 서울시내 영구교회는 몇 개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전세, 월세 교회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제일 후배 목회자로써 개척 1년 만에 교회 건축을 완공하게 되어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강서교회에서 1인 10역을 하며 새로 전도된 80여명을 교육시키고 교회를 교인들로 넘치게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1962-1963년대 선배 목사들 5명이 서울로 발령 받아 지방에서 올라와 강제로 강서교회를 빼앗았습니다. 본부에서는 강서교회를 저에게 빼앗아 이영진 목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철거민 달동네인 노원교구본부 상계동 개척 교회를 시작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교회 건축을 했던 강서교구 본부에서 헌당 예배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눈물을 머금고 노원교구본부 개척 교회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후임 이영진 목사는 목회 활동은 하지 않고 버스토큰 가게나 하고 신문 판매를 하였습니다. 저는 박탈감과 충격으로 한동안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은 회의 때 "재주는 곰이 넘고 덕은 엉뚱한 사람이 받는다" 며 저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 때 통일교를 탈출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당시 문선명 통일교를 떠나면 죽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나 식구들은 한 두 번 충격을 받고 상처를 받으면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버리고 통일 교회를 탈출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저는 외골수여서 그때는 문선명을 떠나면 천국을 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가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문선명 통일교를 버리고 미련을 끊으라고 꿈으로 경고하며 감옥에서 탈출하라고 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왜 문선명 통일 교회에 미련을 버리지 않았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저는 바보였습니다. 세번째로 통일교를 탈출할 수 있는 길을 스스로 포기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제 5장 노원교구 본부 개척교회 제 1차

 

건축

 

제 1절 그래도 끈질긴 층성
 

1976년 8월 10일 노원 상계 교회로 부임하였습니다. 앞서서 여러 선배 목회자가 상계동에 교회를 세우려고 왔었지만 너무나 최악의 조건이라 다 실패하고 방 한 칸도 마련하지 못한 채 그만 두었던 곳이었습니다. 저는 작은방에서 상을 강대상으로 삼고 몇 사람과 노원교회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비록 강서교회 일로 마음은 아팠지만 목숨을 다해 몸부림치며 교회발전에 주력했습니다.

김 영휘 한국협회장도 부당한 인사이동에 마음이 아팠는지 상계동 비포장도로의 먼지를 뒤집어쓰시고 직접 찾아 와서 제게 1만 5천원을 주어 쌀과연탄을 샀습니다. 저는 교인을 전도하기 위해 미혼 남녀들을 취직 시켜 주었습니다. 합동 결혼식을 한 사람이라도 실직자는 취직을 시켰습니다.

첫 번째 노원교회 개척을 했던 상계 3동 95-75호 교회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장민수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렵고 힘든 가정적 어려움을 해결 해주고 통일그룹인 일화제약에 취직 시켜 주었습니다. 교회에 잘 나오라고 취직 시켜 주었는데, 처음에는 나왔지만 나중에는 잘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부인은 50분의 1도 되지 않는 1200원을 월정 헌금으로 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회사에서 퇴근 후 교회에 와서는 저의 멱살을잡고 뺨을 때렸습니다. 제가 노원교회 장년 회장인 성영낙 씨에게 '장민수씨가(777쌍 합동결혼식자) 일화제약 내의 이순주(1800 가정) 부인과 연애를 한다' 고 말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일화제약에서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또 성영낙 씨에게 그런 말을 한 일도 없었습니다. 자신의 연애 헛소문의 진상을 알고자 성 영낙 씨에게 다그치니까 자기 교회 목사인 저에게 누명을 씌웠던 것입니다.

장민수 씨는 자초지정을 알아 보지도 않고 갑작스럽게 교회에 들어와서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리고 폭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잘 살게 해주고 취직까지 시켜 주고 살려 주었더니 누명을 씌우고 폭행까지 하다니 웬 일이란 말입니까? 저는 꿈에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살면서 먼저 원인제공을 하여 싸움하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상대방이 언제나 원인제공을 하여 문제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통일교가 천국인줄 알고 신앙생활을 하고 목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제 전부를 바쳐 교인들을 사랑한 결과 돌아온 것은 누명과 폭행과 상처 뿐 이었습니다. 저는 참으로 저는 통일교 문선명을위해 목숨을 바쳐 희생하며 교인들을 사랑한 것 밖에 없습니다.

 

제 2 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길

 

1972년 11월 21일부터 2000년 8월까지 통일교 목사의 길을 걸어오는 동안, 가난은 나의 친구였습니다. 제가 통일교 목회를 하기 전에 장사해서 모은 돈은 작은 집과 땅을 살 정도였습니다. 그 돈을 형님에게 맡겼는데 형님은 제가 사이비종교 목사라고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형님은 가구공장을 했는데, 가서 돈을 달라고 하면 나무 막대기로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폭행했습니다. 저는 이단 교회 거지 목사라고 온갖 핍박을 받아도 문선명 참 부모님을 믿고 견뎟습니다 결혼 반지, 시계는 전당포에 팔아서 교회 생활비로 쓰고 돈이 될 수 있는 책은 중고 서점에 팔아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1975년 12월 23일엔 형님에게 돈을 받으려고 밤 10시까지 형님을 기다리다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날은 발목까지 찰 정도로 눈이 많이 왔습니다. 그때 학생 차비는 25원이었는데 저는 15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버스를 타지 못하고 마포에서 강서교회 옆에 있는 신월동 월세방까지 걸어와야 했습니다. 오는 도중 눈길에 몇 번이고 넘어져 옷이 얼음 덩어리가 되어 도착하였습니다. 저녁도 먹지 못하고 통행금지를 넘긴 새벽 1시에 집에 도착하여 추위에 떨며 방에 들어갔습니다.

연탄불이라도 꺼지지 않았더라면 몸을 녹일 수 있었을 것인데 연탄불은꺼져 있었습니다. 집주인이 구들도 없이 연탄 아궁이만 만들어 저를 속이고 세를 놓았던 것입니다.

구들도 놓지 않고 시멘트만 바르고 도배만 하여 방을 만들었기 때문에 벽에는 고드름이 얼어 있었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추위와 배고픔,고난의 날이었습니다. 노원 교구 본부 개척교회를 시작할 때도 가난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노원교회는 헌금도 없고 몇 명을 가지고 개척 교회를 하였기 때문에 신혼초인 저의 아내 이영희씨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으로 이를 악물어야 했습니다. 끼니를 거르는 비참한 노원교회 생활에 절약을 생명으로 알고 알뜰하게 생활 하였습니다.

아내는 상계동 도깨비 시장에서 버린 배추 잎을 주어다가 김치를 담았습니다. 어쩌다 계란을 사게 되도 깨진 것을 모아 파는 것을 사다 먹었습니다. 쌀도 7~8년 된 정부미로 속은 벌레가 다 파먹고 껍질만 있는 쌀을 헐값에 사다 먹었습니다. 밥을 하면 밥이 죽이 되어버 리고 입에 들어가면 씹은 것도 없이 녹아버렸습니다.

어쩌다 밥이 남으면 점심에 먹을때는 밥이 죽이 되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매일 국수, 라면, 밀가루 수제비를 점심이나 저녁으로 먹었습니다. 저의 자녀들은 먹는 것에 너무나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상계교회에서 서대문 행촌동에 있던 신학교까지 토큰 2개만가지고 다녔습니다. 토큰이 없어서 몇 시간이나 걸어서 갔다가, 걸어서 상계동 교회까지 온 때도 있었습니다. 양가 부모들이 반대하는 결혼을 했기 때문에 양가 부모 형제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협회, 교구에서는 목회자가 아무리 생활이 궁핍해도 단 10원도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서울 교구 내에서 저와 같이 12명의 목사들이 개척을 시작했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다 그만두고 3~4명만 어려운 목사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1978년 2월 23일 성결교 신학교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교인들,부모, 형제들에게 졸업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인만 졸업식에 왔습니다. 그러나 겨우 차비만 있었기 때문에 꽃다발 살돈이 없었습니다. 제게 비상금 5천원이 있어서 아내에게 5천원을 주어 꽃을 사오도록 했습니다. 카메라도 없어서 동료에게 찍어 달라고 하여 한 장을 찍었습니다.

후에 편지로 사진 한장 받은 것이 유일한 졸업식 사진입니다 이제는 그 한장 마저 액자 속에서 곰팡이가 피어 하얗게 되었습니다.

 

제 3절 제 1차 노원 교회 교회 대지 매입 건축

 

1976년 12월 13일 상계3동 95-75호에 대지 20평을 매입하고 교회를 재건축 하였습니다. 1977년 3월 3일 중소기업 은행과의 잘못된 계약에 이의를 제기하여 재판에 승소해서 교회를 영구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교인들 이사짐을 옮겨주고 취업알선, 속옷 빨래 등 온갖 일을 하면서 교회를 위해 목사가 아닌 머슴으로 살았습니다. 진심으로 교인 한 사람 한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밤낮없이 노력한 결과 20평 교회가 가득 차고 넘쳤습니다. 지방 중소도시나 산골에서 통일교를 개척, 부흥시키려 했다면 훨씬 수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도 최악조건인 강서교구본부와 노원교구본부를 개척, 부흥을 시킨 것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승리였습니다.

지방 중소도시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교회 건축을 하였더라면 선배 목사들에게 교회를 빼앗기지 않고 한국 최고의 통일교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제가 서울 최악의 허허벌판에서 개척하여 교회를 부흥발전을 시키면 선배들에게 교회를 빼앗긴 것은, 교회가 서울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바람 잘 날 없는 시련과 처절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통일교 대 선배 목사들을 제치고 크고 좋은 환경의 교회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와 같이 목회를 시작했던 서울시내 교회 12곳이 다 폐쇄되고 3곳만 남은 것은 개척교회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것인지를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제 6장 새생명의 결실인 3남매

 

제 1절 첫 딸 '박은주'

 

1978년 1월 IS일 주일 오후 1시 26분에 첫 딸 은주가 태어랐습니다. 태몽에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 장군이 바로 네 아들이다. " 라고 들었기 때문에 저는 은주가 태어날 때까지도 아들인줄 알았습니다. 교인, 이웃집 사람들도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1월 14일부터 하루종일 진통을 하고 14일 밤에는 밤새도록 진통을 하였지만 아기를 낳을 수가 없었습니다. 통일교회에서는 사단 세계 사람이 아기를 보면 안 된다고, 성별 된 참 부모님의 아들딸은 자연분만 해야 한다고 교육했기 때문에 집에서 아기를 받으려고 했으나 불가능 했습니다.

1월 15일 새벽 상계 3동 도깨비 시장에 있는 40년 된 조산원으로 산모를 데리고 갔습니다. 산모는 기진맥진을 하였습니다. 오전 11시까지 진통을 했지만 아기의 출생을 보지 못하고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교회로 왔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산모에게 가려고 했으나 새 신자가 그 날 따라 두 사람이나 와서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낮 12시 40분까지 마치고 자전거를 타고 조산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때까지도 아기를 낳지 못하고 '조산원' 원장과 산모가 땀을 비오듯 흘리고 있었습니다. 원장님은 40년 동안 아기를 받았어도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병원으로 빨리 후송하지 않으면 산모나 아기가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산모는 기진맥진하여 의식이 희미한 상태고 양수도 밖으로 다 빠져 버린 상태였습니다.

저는 7초대에 성초를 켜놓고 성령 하나님께 산모와 아기를 살려달라고 통곡하며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친 후 4Kg이나 나가는 아기가 나왔습니다. 산모와 아기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진실하게 하나님을 안믿었지만 믿었고, 제 마음속에는 통일교 목사를 하고 문선명에게 세뇌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잘 길러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릴 것을 다짐했습니다.

1980년 10월 5일 오후2시에 두 돌이 된 은주를 잃어버렸습니다. 파출소에 신고도 하고, 동사무소에 가서 박은주를 찾는다는 안내방송도 수 차례 하였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상계동 전체를 오후2시~저녁 7시까지 울면서 찾아다녔습니다.

은주 엄마와 교인들 몇 사람도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은주는 항상 밥만 먹으면 교회 밖으로 나갔고 겁이 없었습니다. 아무데나 아장아장 잘 걸어 다녔습니다. 은주는 아기 때부터 용감하고 겁이 없는 아이였습니다. 그날도 교회를 벗어나 여러 군데를 아장아장 걸어 다니다가 혼자서 새마을시장 구경을 하였나 봅니다.

제가 은주를 찾았을 때는 시장 도로변 독립문 메리야스 가게 진열대 앞에서 구경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저녁 7시여서 제법 어두울 때였습니다. 저는 은주를 찾은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은주 엄마나 교인들도 너무나 감격했습니다. 파출소나 동사무소에서도 다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찾지 못하면 고아원으로 갈 뻔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미쳐 있었기에 문선명씨에게 충성하는 구구 절절의 심정을 직접 웅변원고로 써서 은주에게 주었습니다 은주에게 웅변연습을 시켜 통일교 전국 웅변대회에 나갔습니다. 은주는 1985년 2월25일 참부모님 탄신기념 제26차 전국교구 대항 웅변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고 1987년 2월 3일 국민학생부 자칭 재림주 문선명 부모님 탄신기념 제28차 전국교구 대항 웅변대회에서도 1등을 하였습니다.

은주는 초등 학교 때부터 각종 상을 수없이 많이 받았습니다. 용감하고 인정이 많으며 자상합니다. 은주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용돈, 세배든 등을 알뜰하게 모아서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생활이 어려워 그 돈을 다 썼습니다.

은주가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얼마 되지도 않는 용돈을 모아 양복 한 벌을 사주었습니다. 제가 입을 옷이 없을 때마다 은주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지금까지 양복을 5벌이나 사주었습니다. 은주는 아르바이트를 하여 저의 아내에게도 제가 못해 주는 옷을 해주고 반지도 해주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질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고기를 사오고 약을 사왔습니다.

은주는 밥값을 아끼려고 밥을 굶고 다닐 정도로 자신에게는 알뜰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들, 후배들에게는 어렵게 모은 돈으로 얼마나 많이 베풀고 사는지 모릅니다. 마음씨 곱고 항상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해주는 은주는 우리 집의 효녀 입니다.

 

제 2 절 아들 '박영진'  

 

1979년 5월 12일 오후 1시 29분에 둘째 영진이가 첫 딸이 태어났던 곳에서 진통도 전혀 없이 순산으로 태어났습니다.

영진이가 태어날 무렵 통일교에서 5,000만 달러(한화 400억 정도)를 들여서 '오인천' 이라는 영화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울 시내 목사들과 교인들은 총 동원되어 엑스트라를 하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저도 맥아더 장군과 작전회의를 하는 삼성장군으로 출연하고 이북의 포로로 교회에서 끌려 나오는 역할도 했습니다.

영진이가 태어나는 날에도 영화촬영을 하고 교회로 돌아오는데 벌써 아들 영진이를 낳은 것이었습니다. 이후, 영진이는 황달, 부스럼, 탈장 수술등 너무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영진이가 첫 돌이 지나 걸음마를 할 때 아내와 장모님 생신으로 처갓집에 갔었습니다.

1980년 5월 저 혼자 잠을 자는데 새벽 1시경 하나님의 음성이 저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너의 아들을 빨리 찾아라..."

꿈에 시체를 넣는 관을 보여주는데 시체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꿈에서 깨어나 밤새도록 우리 가정에 우환과 환란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침 일찍 울산에 있는 영진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영진이가 아무 탈이 없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새벽에 영진이가 일찍 일어나 아장아장 걸어서 마루를 나와 부엌을 내려다보다가 새빨간 연탄 아궁이에 거꾸로 머리가 처박혔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부엌에 있던 영진이 엄마가 놀라서 다리와 목을 잡고 영진이를 버쩍 거꾸로 들어 올렸다고 했습니다. I~2초도 안 되는 찰라에 영진이 목숨을 구했습니다.

영진이 엄마가 마당이나 방에 있었더라면 영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얼굴 전체가 화상을 입어 차마 볼 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영진이는 이마에 물집만 잡히고 머리만 조금 태웠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음의 자리에서 영진이의 생명을 구해주셨습니다.

영진이는 어릴 때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습니다. 영진이는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매년 반장,부반장을 했고 우등상도 받았습니다. 중학교 때는 전교 3등으로 장학금을 받아 저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저는 가족들과 노원교구 교인들과 같이 매일 오인천 영화에 출연을 했습니다. 북한군인이 6·25때 소련제 탱크를 몰고 3·8선을 넘어와 우리 가족이 사는 초가집을 송두리째 탱크로 밀어버리는 장면에서 마당에 있던 영진이가 놀라서 울고 아내는 빨래를 너는 역을 하였습니다. 단역 이였지만 그 때는 사명감에 불타 올랐고 감사하는 마음 뿐이였습니다.

그러나 400억을 투자한 오인천 영화는 한국에선 개봉도 못했고 미국에서만 일부 상영이 되었습니다. 400억이면 서울시내 각 동에 1억짜리 빌딩400개를 살 수 있는 돈이었는데 빌딩을 샀으면 지금은 수 천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문선명 주위에 있는 충성꾼들이 끊임없이 일을 저질러 교인들의 피눈물을 짜고 파멸시켜 갔습니다.

통일교에서 추진했던 중국 판다 프로젝트는 항공, 자동차, 공업단지, 도시 등을 만드는 공사도 추진했지만 모두 실패를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4억 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알지만 공사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중간에서 사기 당하고 말았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피눈물 어린 통일교 교인들의 헌금을 사기 쳐서 교인들의 영혼과 육신을 죽이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엄청난 실패와 낭비를 하면서도 그 책임을 통일교 교인들에게 전가시켜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제 3 절 막내 '박은영'

 

1981년 4월 8일 새벽 5시 15분에 둘째 딸 은영이가 태어났습니다. 3남매가 매년 태어나다 보니 아내는 종일 3남매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한 무능한 남편인 저는 아내에게 고통만 안겨 주어 미안한마음뿐이었습니다. 아내는 하루종일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예배, 전도,심방을할뿐 아니라 가난한 살림을 불평 한마디 없이 잘 극복해 나갔습니다.

저는 노원 상계 교회의 발전을 위해 밤낮 없이 뛰어다녔기 때문에 아내는3남매를 키우느라 저녁에는 녹초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녁부터 새벽 기도까지는 제가 교회에서 어린 3남매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기저귀도 빨고,가사 일도 도왔습니다. 연탄불 가는 것은 기본 이었습니다. 그러나 혹독한 고생과 처절한 가난으로 남편과 아버지로써 역할을 다하지 못해 한없이 가슴 아파 했던 날들이었습니다. 은영이는 언제나 언니가 입던 옷을 받아 입었습니다. 영진이가 입던 옷을 은영이가 입었을 때는 벌써 옷이 헤어질 정도로 낡아 버렸지만 은영이는 불평 없이 입었습니다.

1987년 2월 21일 우리 부부가 심방간 사이에 도둑이 교회에 들어와 18만원을 주고 산 카메라와 10만원을 주고 산 카세트를 훔쳐갔습니다. 은주와 영진이는 학교에 가고, 사택에는 7살인 은영이 혼자만 있었습니다. 도둑은 보자기에 물건을 다 싸 가지고 밖으로 나가다가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대형 액자 사진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저의 부부가 심방을 갈 때마다 경배하고 기도하며 돌아와서도 경배하며 잘 다녀왔다고 보고하는 문선명 교주의 대형 액자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은 문선명 교주의 대형 액자를 집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경배하며 기도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하나님의 대적이며 자칭 신이 되어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자기에게 경배하고 기도를 하도록 시키고 있었습니다.

도둑이 문선명 통일교 교주 사진 액자를 떼려고 하자 은영이는 어린 나이인데도 도둑을 발로 걷어찼던 것입니다. 도둑은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그  자리에서 벌렁 넘어졌습니다. 도둑이 일어나 "아! 이 새끼" 하면서 온영이의 목을 졸랐습니다 은영이는 고함을 질렀습니다. 교회 라에서 떡볶이 장사를 하는 할머니가 고함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왔습니다. 떡볶이 할머니가 도둑을 보고 "너 뭐야! 아기 목을 왜 졸라?" 하면서 도둑을 때리자 할머니를 확 밀치면서 쓰러뜨리고는 카메라와 카세트, 라디오를 가지고 도망갔습니다.

추운 겨울이라 두꺼운 목 폴라를 입고 있던 은영이의 목에 깍란 멍과 상처만 조금 나고 무사했습니다. 은영이는 착하게 자라나 걱정, 근심을 끼치지 않고 효도를 잘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반장도 하고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각종 상도 여러 차례 받아서 저희 부부를 기쁘게 했습니다. 처절하게 가난했지만 3남매를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는 자녀로 기르고자 노력했고, 가난하지만 생활비를 쪼개며 자녀 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7 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제 1 절 2차 교회 대지 매입 재건축 성공

 

상계교회는 날로 발전하여 교회에서 모든 교인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가득찼습니다. '김영휘' 한국 협회장도 노원교회에 와 보고 자랑스러워 하며 기뻐하셨습니다. 저는 1978년에 전도 우수 한국협회장상을 받았습니다.

1979년 6월 1일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 코너에 40평을 매입하고 교회재건축을 시작하였습니다. 현 교회 매도 대금과 협회 재단의 지원금으로 한 것입니다. 재건축을 할 때도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하수도 공사, 수도공사, 시멘트 일, 보일러 설치하는 일 등 열 손가락 지문이 없어질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마침내 제 2차 교회 재건축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제일 후배 가정으로써 서울서만 3번째 교회 건축을 한 것이었습니다.

교인들의 정성도 있었지만 사랑, 진실,은혜를 져 버려서 가슴에 못을 박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통일교인들의 신앙적인 배반으로 저는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물질적으로 노원교회 교인을 도와 주었다가 어려움을 겪은 때도 있습니다.

저는 박상수 집사에게 1979년 7월에 50만원을 빌려주었습니다. 그 당시돈 50만원은 상계 전철역앞 무허가 건물 4평 짜리 2채 값이었습니다. 은행 금리정도 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3개월 후 계를 타면 받기로 했습니다. 1개월치 이자를 받고 그 집에 심방을 갔는데 사람이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박집사 부인인 이희선 집사에게 내 돈 내놓으라고 하면서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싸움을 말린 후 박 집사 부인에게 사정을 물어보았습니다.

박상수 집사는 보증금 5만원도 안되는 산꼭대기 집에서 월세 8천원을 내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렵게 살지만 신용을 잘 지킨다고 하여 주위 사람들은 1천만 원이라는 거액을 빌려주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 철저히 신용을 지키면서 비싼 이자를 주기로 하고, 돈을 빌려서 그 돈으로 생활하고 이자를 주며 천 만원이 될 때까지 끌고 왔는데 마지막에 돈을 빌릴 데가 없어 저에게 돈을 빌렸던 것입니다.

저는 박집사 내외에게 그 동안 이자를 원금보다 많이 주었으므로 원금만 갚는 조건으로 하고 장기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박상수 집사에게 빌려 준 돈이 옆집 아주머니에게 빌린 것이었습니다. 저의 돈으로 이자를 매달 주다가 나중에 그 돈을 마련하여 갚았습니다. 박집사는 지방에 가서 집에 오지도 않았습니다. 이희선 집사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고 네 자녀들과 같이 끼니를 거르면서 너무나 많은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나중에 형편이 되면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박집사 자녀들은 너무나 착했습니다. 부모의 잘못으로 자녀들이 고통 당하는 것이 마음이 아팠습니다. 심방할 때 라면 1박스와 과자를 사다 주었습니다. 돈이 될 땐 쌀도 사다 주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지라고 항상 격려해 주었습니다. 박집사는 3년 후 저에게 20만원을 주었습니다. 나머지 30만원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집사가 어디에 살던지 자녀들과 같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교역자와 교인은 절대 금전거래를 하면 시험이 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잠언 6:6)

어처구니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한 때도 있습니다 1960년대 말에 잠시 통일교에 나왔던 김태수씨와 저는 인연을 맺어 노원교회로 다시 나오게 하였습니다. 저는 김태수 씨를 전도하여 교회에 나오게 하기까지 온갖 정성을 들였고 아버지와 형님같이 모셨습니다.

어느 날, 제가 심방 전도를 간 사이에 김태수 씨가 교회에 와서 저의 아내에게 아줌마라며 교회 그만 두고 장사나 해서 먹고 살라고 빈정 거렸습니다. 저의 아내는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인내하며 비록 김태수 씨가 헌금을 하지 못했지만 깍듯이 어른으로 대접하며 모셨습니다. 목사인 제가 얼마나 비참하게 보이고 저의 아내가 불쌍히 보였으면 막말을 하고 장사나 하라고 하면서 무시했겠습니까?

심방 전도에서 돌아온 저는 모욕적인 말을 하고 갔다는 것을 듣고 김태수씨 집으로 갔습니다. 저는 김태수 씨에게 동생 같고 자식 같은 목사와 사모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지는 못하고 사모를 아줌마라고 하고 장사나 해먹고 살라는 등의 그런 모욕적인 막말을 했느냐고 했습니다.

성질 급한 김태수 씨는 교만에 빠져 안하무인격으로 "뭐! 이 새끼? 어린놈이" 하면서 저의 뺨을 세차게 때렸습니다. 저는 아버지 같은 사람과 싸울수가 없어서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있으면싸움이 될 것 같아 저는 그냥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철거민 달동네이고 마음이 강팍한 사람들이 많은 상계 지역이라 할 지라도 저는 죽도록 교인들을 섬기고 사랑으로 축복하며 정을 베푼 죄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로 마음이 강팍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나이 어린 목사이지만 2차례나 억울한 폭행을 당하다 보니 통일교가 천국이라고들 하는데 제겐 지옥 이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교인들이 영혼을 구원받고 달라지기를 바랬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에 들어와서도 세상에 있을 때의 죄 많은 성격을 버리지 못하고 악행만 하였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헐벗고 굶주리는 것은 참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수치와 폭행을 당하고 뺨이나 맞는 역할을 하기 위해 통일교에 입교하여 목사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목숨을 걸고 사명감을 갖고 목회를 한 것이었습니다. 억울해서 눈물이 비오듯 흘러 내렸습니다. 그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부족하고 나이가 어려서 무시당하고 뺨을 맞았다고 생각하며 저 자신을 책망했습니다. 통일교에서 선배 목사가 되고 나이가 많은 목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배반하고 은혜를 져버리는 통일교 교인을 사랑으로 대했습니다.

노원교구 본부 제단에서 귀신 들린 자가 저의 기도로 악귀가 몰러가고 폐병 말기 환자가 역사로 완재되고 아들딸 못 낳는 사람이 기적적으로 자녀를 낳았습니다. 신유의 역사는 노원교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때문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980년 국회의원 선거 때는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에 저의 교회가 건축을 완료할 때였습니다. 국회의원 후보 한 사람이 저를 잘 아는 분과 같이 밤 10시에 교회로 찾아와 돈 봉투를 내밀면서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30분 동안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도와 드리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국회의원 후보는 도봉구와 노원구 관내에서 유일하게 돈을 받지 않은 목사는 박준철 목사라고 하였습니다. 몇 십만원이면 저에게는 거금 이였지만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일생을 그렇게 고지식하고 정직하게 살아왔습니다.

국제 승공연합 강연회 때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항상 행사 때 나오는 행사비를 행사 참석자 식사대접과 수건, 볼펜 등의 선물비용으로 다 사용하였습니다. 그러자 저를 관할하는 이상수 도봉구 목사는 저에게 그 돈을 왜 다 쓰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저보다 사례비를 4배나 많이 받았던 이상수 목사는 행사비를 남겨서 자식들 교육비, 생활비로 사용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이상수 목사는 그 이후 협회 통일교 전도 국장이 되자 목사 사모들을 모아 놓고 단 10원도 공금을 횡령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는 언제나 먹는 것마저도 허락되지 못한 생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제 8장 서울 노원교구에서경기 화성 교회로 강제로

 

인사 이동

 

제 1 절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박길남 교구장의 거짓약속

 

1981년 10월 19일부터 21일까지 수택리 교회 김민중 목사를 모시고 3일간 부흥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서울 노원교회는 이제 교인들이 다 앉을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강제 인사 이동 처사로 충격을 받아 또 한번의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문선명은 서울에 있는 통일교를 집중 발전시키고 통일그룹 내 기업체 구조조정을 한다면서 많은 통일교 교인을 회사에서 퇴사시키는 잔인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통일교는 이단이며, 사이비 종교로 사회에서 인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처럼 발전하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통일교에 교인 한 사람을 전도하여 부흥시킨다는 것은 기독교 이름으로 부흥 시키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목숨을 걸고 교회를 부흥 시켜 넘치게 만들었는데 또 다시 빼앗기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20일 경기 수택리 중앙 연수원에서 목회자 중 1968년에 합동 결혼식을 한 사람 430가정 이상 목회자는 지방 교회에서 서울 교회로 올라와 목회 하라고 인사발령을 했습니다. 당시 서울의 통일교 수는 영구 통일교, 전세교회, 월세 교회 다 합해서 27개밖에 없었습니다.

27개 교회를 400개 교회로 늘리기 위해 통일재단 기관기업체 430가정 이상 되는 사람은 전체가 사표를 내도록 하고 300만원씩 주면서 방 한 칸을 얻어 서울 400개 동 가운데 1동씩을 맡아 교회를 개척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400개 개척교회에서 수십 개로 축소되었습니다. 김민중 목사가 수택리 집회에서 결정이 이렇게 되었다고 말하였을 때 저는 문선명 특유의 잔인성이 또 드러났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통일교 기관 기업체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모든 생활을 박탈 당하고 행복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간부들 가운데 고통 당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정이 파탄되어 통일교를 떠나는 상처받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통일교 기업체 간부들을 강제 퇴직 시켰던 것은 기업체를 살리기 위한 구조 조정 이었습니다.

언제나 이중 인격자인 문선명은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회자도 이용하고 이용 가치가 없으면 가차없이 잔인하게 잘라버립니다. 1981년10월 21일부터 서울 시내 통일교 목사들의 인사 이동 문제로 목회자 전체가 모여 매일 회의를 하였습니다.

박길남 교구장은 "박준철 목사는 교회를 3번이나 개척하여 교회를 건축을 했기 때문에 반드시 부당한 인사 이동을 하지 않고 수도권 안에 위치한 부천이나 부평 교회로 발령을 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다른 목회자들도 박준철 목사는 실적을 많이 쌓았으니 그 동안의 공적을 감안해서 이번에는 억울한 일이 없도록 인사 이동을 시컥야 한다고 보고했습니다.

이재남 한국 협회장은 본부 교회에 주일 예배 때나 설교 때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 같은 사람도 있다고 말한 것을 들었고, 문선명에게도 노원교회의 박준철 목사 공적을 보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사이동 공문에는 약속과 신의를 져버리고 '경기교구 부' 라고 해놓고 임지교회도 없이 저를 잘라 버렸습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이재남 한국 협회장과 수 차례 만나 10시간도 넘게 대화했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김영휘 협회장과 김민중 목사는 문선명이 지방에 있는 목회자를 서울로 올리라고만 했고 서울 시내에 있는 현직 통일교 목사들은 자기 교회에 그대로 시무 하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재남 협회장은 부당한 강제 인사이동을 통해 저를 갈 곳도 없이 잘라버렸던 것입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기관 기업체에 근무하던 430가정 선배들이 너무나 큰충격을 받고 청파동 본부 교회에서 대문 밖에 프랭카드를 크게 걸고 데모를 하였습니다. 본부교회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협회 2인자인 양준기 총무국장은 무차별으로 폭행을 당하고 양준기 협회 총무국장이 병원에 입원하는 불상사가 벌어졌습니다. 이같은 폭력,폭행 사태에 전투 경찰이 투입되어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저는 10월 20일~1982년 1월 17일까지 3개월 동안 '경기교구 부' 라는 인사 발령 때문에 제가 시무 해야 될 교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충격을 받아 병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3개월을 아내와 자녀들과 같이 피눈물을 흘리며 보내야 했습니다. 통일교를 그때라도 탈출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때도 저는 통일교를 떠나면 지옥에 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통일교를 탈퇴하는 것이 죽음 그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슬픔과 고통으로 얼룩진 마음의 충격을 해소할 길이 없어 산 기도도 가보고, 큰 기독교 교회도 가서 기도도 하였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움에서 벗어나려고 하여도 벗어날 수 없고 울분을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문선명을 위하여 제물이 된 저는 한없는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이를 악물고 노력하였습니다. 헤아릴 수없이 많은 성초 기도를 몇 시간씩 눈물로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원리 교육으로 세뇌되어 있어서, 문선명이 메시아요, 재림주라고 믿고 충성하며 재림주를 버릴 수 없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노원 교구에 임지를 받은 사람은 정한길 목사였습니다. 그는 저에게 언제 이사를 가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갈곳이 없기 때문에 갈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정목사는 교회에 취임도 하지 못하고 암으로 죽었습니다.

지옥 같은 노원 교회 대기발령 생활 3개월이 다 되어 가는 1982년 12월30일에 협회에서 가평 교회와 화성 교회(오산교회) 중 선택하여 목회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가평이나 화성(오산)은 교인이 몇 명에 불과하여 생활을 할 수 없고, 이재남 한국 협회장이 약속을 어겨서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억울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노원 교구 예배 수준과 재정 수준으로 수평 이동이라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선명의잔악상을 보면서도 그때는 문선명의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제 2 절 꿈에 나타난 문선명

 

1982년 1월 4일 밤 꿈에 문선명이 나타났습니다. 전국 통일교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하던 중에 산봉우리 5개를 보여주면서 이 산을 개발할 사람이 없느냐고 했는데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문선명이 제 앞에 오더니 "박준철! 네가 이 산 5개를 개발하라" 고 명령했습니다. "네가 임자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삽과 낫을 주었습니다.

꿈을 깬 후 생각을 해보니 산봉우리 5개는 화성(오산)이었습니다. 사명감이 충만한 목회자가 없어서 화성교회(오산교회)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목회자들이 화성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경기 교구에서도 제일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전국 통일교에서도 제일 가난한 교회 중 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이 못난 사람을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가 또 한번 꿈에 현몽을 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화성교회로 가라는 명령 인줄 알고 순종하는 맘으로 죽더라도 오산교회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오산교회로 부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 9장 경기 화성 교회가 전국 통일교 최우수

 

교회로 부흥

 

제 1절 다시 일어선 교회 개척

 

1982년 1월 17일날 배신과 불신 속에서 그동안 닦아놓은 기반을 송두리째 남겨두고 어린 3남매와 처를 데리고 오산교회로 왔습니다. 그리고 1982년 2월 17일에 취임식을 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가는 목사마다 잠시 있다가 떠나버렸습니다. 오죽하면 문선명은 집회를 하면서 오산교회는 사단역사를 하는 곳이니 이름을 진산 교회로 바꿔야 한다고 할 정도엿습니다.

전임목사는 제직당시 승공 연합의 돈 1천2백 만원 때문에 오산교회 교인들과 승공 연합 회원들이 큰 시험에 들었습니다. 전임목사는 오산교회 사택에서 살지 않고 수원에서 살면서 전국을 다니며 양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 있던 목사도 교인이 얼마 되지 않고 헌금도 몇 만원에 불과하여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을 개설하여 그 수익금을 생활비로 썼는데, 이를 알게된 전도 대원 몇 사람이 협회에 올라가 목사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여 문책 인사이동을 시켜 버렸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통일교 목사들이 문선명을 재림주, 참 부모를 믿고 순종하며 목숨을 바친 죄밖에 더 있겠습니까? 저 자신도 불쌍하지만, 너무나도 처절하게 불쌍한 사람들이 통일교 목사들 입니다.

저는 경기 화성교회로 가면서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사단 마귀가 역사를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정성을 들여 빠른 시일 내에 발전을 시키겠다고 굳은 각오로 다짐했습니다. 저는 취임하는 날부터 100일 기도,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 수요예배 개설, 금요 속회예배 개설, 주일학교 개설,중고풍부 예배 개설, 전도, 심방 등을 중심으로 교회의 발전에 온 몸과 마음을 다 쏟았습니다.

노원교구 본부에 있을 때 자전거도 없이 걸어 다니면서 심방과 전도를 하며 봉사 했었습니다. 나중에 오인천 영화 출연료로 받은 2만원으로 중고 자전거 1대를 사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심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속회예배와 전도를 하니 신바람이 났습니다. 노원구 상계1 · 2 · 3 · 4동, 도봉구, 중계동, 하계동, 공릉동까지 자전거를 타고 심방 전도 활동을 했듯이 화성교회에서도 자전거를 활용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화성 관내 17개 읍 면 동에 심방 전도를 다녔습니다. 이렇게 자전거를 계속 타니 새 팬티라도 한 달이 못 가서 엉덩이 부분에 구멍이 나고 헤어져 매달 팬티를 구입해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양쪽 엉덩이에 물집이 생기고 터져서 바지까지 버리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문선명 통일 교주를 위해 매일 밤 12시까지 심방 전도를 했습니다. 새벽 I~2시가 되는 때도 허다하게 많았습니다.

문선명에게 목숨을 걸고 한국 최고의 실적과 공적을 쌓는 한국 통일 교회의 푯대가 되고자 몸부림을 치며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문선명은 집회 때마다 "나는 호랑이니 너희들은 고양이 새끼가 되지 말고 호랑이 새끼가 되어라" 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말이 그 당시에는 꿀같이 달게 느껴졌습니다. 죽더라도 뜻을 위해 죽고 문선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의를 매일 기도로써 다짐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활동을 하여 체력이 극도로 떨어지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의식 불명이 될 정도로 쓰러져 있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교인을 전도할 때나 교인을 심방 할 때면 저는 굶더라도 과자나 음료수를 사 가지고 심방을 했습니다.

화성교회에 교회 총무로 세웠던 추진복 집사가 있었는데 신앙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합동결혼식을 하고 갓난 아들 하나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습니다. 튀김집을 운영했는데 저는 매일 그 집에 가서 축복 기도를 해주며 그 날 심방할 집에 가지고 갈 튀김을 샀습니다. 그 날 심방을 하는 집이 10집이면 10봉지를 사서 자전거에 싣고 다니며 전도하고 심방을 했습니다.

저는 추진복  집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다른 가게에서 사지 않고 그 집에 가서 튀김을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사랑과 정성을 알아주기는 커녕 추진복 집사는 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추진복 집사 집에 가서 조용히 신앙적 인 교육을 시키려고 했는데 첫마디가 욕 이었습니다. 왜 욕을 하냐고 했더니, 자기 가게 식탁을 저를 향해서 밀어 버렸습니다. 그순간 오른손 약지가 식탁에 끼어 큰통증을 느꼇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고 당황하여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크게 부어 올랐습니다 즉시 병원에 가서 뼈를 수술했어야 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20일 동안을 방치했습니다. 손가락은 벌겋게 부어 올라 움직일 수 없었고 뼈까지 아팠습니다. 손가락 겉에만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습니다. 20일이 가도 손가락의 부기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조금씩 부기가 빠지고 괜찮아 졌지만 그날 다친 손가락 하나가 휘어진 채로 굳어 버렸습니다. 즉시 병원에 가서 X-ray 촬영을 하고 손가락을 고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손가락을 제대로 펼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추집사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저는 추집사가 성격 때문에 그런 것으로 알고 용서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집사는 제가 그 날 다쳐서 일생동안 손가락이 구부러진 채로 사는 것을 지금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 추집사는 집에서 닭튀김을 할때 나오는 창자를 그날 그날 모아서 개를 기르는 이건숙 집사에게 주었습니다. 이건숙 집사는 개35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한 마리에 300만원도 넘는 좋은 개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추집사가 쥐를 잡는다고 닭 창자에 쥐약을 버무려서 여러 군데 놓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무의식 중에 쥐약으로 놓았던 닭 창자를 새벽에 일어나 모아가지고 쥐약을 안 넣은 창자와 같은 그릇에 담았습니다. 그것을 몰랐던 이건숙 집사는 아침에 창자를 가져가 35마리 개에게 끓여서 먹였습니다. 그 창자를 먹었던 개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쓰러져 갔습니다. 이건숙 집사가 추진복 집사에게 무엇이 잘못 되었냐고 물었을 때 닭 창자에 쥐를 잡으려고 쥐약을 섞었다고 했습니다.

순간의 실수로 이건숙 집사의 고급 개 35마리가 죽었습니다. 그 일로 추집사는 몇 십 만원을 이건숙 집사에게 보상금으로 물어주고 튀김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 갔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제 2 절 화성 교회 발전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100일 기도를 마치면 2차 100일 기도, 3차 100일 기도로 숨돌릴 여유도 없이 교인들과 합심하여 기도드린 결과 1982년도에 교회가 급성장을 했고 전도 우수 교회로 협회장 상을 받았습니다. 1983년 4월과 9월에는 협회 우수 교회상을 분기별로 수상을 했습니다. 1985년도에도 전국 최우수 협회장상을 교회 우수상과 전도상 까지도 저는 받았습니다.

화성교회에서도 많은 이적기사가 있었습니다. 이준영 씨는 독자였는데 딸만 3명을 낳고 몇 년 동안 아기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다고 이준영씨에게 말했습니다. 얼마후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시어머니나 주위 사람들은 태몽이 또 딸이라고 아기를 지우려고 했습니다. 10달 동안 많은 시험과 시련이 있었지만 저의 말을 믿고 이준영씨는 아기를 지우지 않았습니다. 10달이 되어도 아기가 출생하지 못했는데 11개월이 되었을 때 마침내 건강한 아들을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 전체 앞에서 이준영 씨가 아들을 낳는다고 했는데 11개월이 지난 후 그 가정에 행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몇 대 독자인 강호길 씨도 아들을 낳은 후 통일교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종수 씨는 기독교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는데 악령이 3,000명이나 들어와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정신병원으로 갔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안수 기도도 받았지만 악령이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모든 친척과 가족들이 오산 통일교로 나오는 조건으로 악령을 물리쳐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동안에도 제가 악령을 많이 물리쳤기 때문에 그 가족들과 이종수 씨를 불러다 놓고 찬송가를 부르며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이종수씨는 교회 강대상 앞에서 기도를 받은 후 쓰러졌습니다. 한참후 이종수 씨가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오랜 악령의 시달림과 고통이 끝이 났습니다. 회사에도 복직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독실한 통일교 교인이 되었으며 친척들도 통일교에 모두 나오고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이종수 씨는 점점 더 헌신과 봉사로 충성을 다하여 화성 교회 재정 담당 총무까지 수행을 잘 했습니다.

문흥기라는 사람은 수원 빈센트 병원에서도 포기한 병자였습니다. 이제는 살 수 없다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제가 문흥기 씨를 보았을 때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고 몸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습니다. 의식이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 상태로 임종을 기다리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미 부인과 자녀들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문흥기씨만 교회에 안 나오는 상태여서 의식이 돌아 왔을 때 교회에 나을 것을 간절히 권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저는 기도를 했습니다. 문흥기 씨는 매일 고통으로 아우성 치던 사람이었지만 기도를 받은 그 날 밤에는 편안히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부터 기적같이 기력을 회복하여 걸어 다닐 수 있었고 일주일 후 건강을 회복하여 예배도 참석을 했습니다. 처음 2달은 열심히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러나 석 달째는 되는 주일부터는 일요일마다 막노동일을 나가거나, 교회를 오지 안기 위해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습니다. 저는 온갖 방법으로 문흥기 씨에게 말을 했지만 말을 듣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문흥기 씨는 석달 후 금요일 막노동을 잘 다녀오고 토요일 새벽에 이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회에서 적은 정성을 모아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 외에도 제가 가는 개척 교회마다 이적, 기사, 신유 은사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문선명 재림주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가는 곳마다 스스로 희생 재물이 되어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화성교회도 전국 최하위에서 최상위 교회로 부흥 ·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 3 절 마지막까지도 아버지께 불효

 

소년 시절에 저는 아버지같이 불쌍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결혼하면 능력 있는 남편, 능력있는 아버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존경 받는 아버지, 사랑 받는 아버지가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에 입교한 이후 영혼과 육신을 빼앗기고 언제나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처절한 생활을 했습니다. 어릴 때는 자라서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어 부모에게 효도하겠다는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제대로 부모님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통일교에 들어온 후로 단 한 번도 부모님께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잔인한 문선명의 역사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문선명은 입으로는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외치면서 행동으로는 자신만이 참 부모이며, 육신을 낳아준 부모는 사단의 부모라고 주장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오직 자신만을 참 부모로 섬기라고 강요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1985년 9월 24일 고인이 되셨는데 제가 너무나 불효를 하여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픔니다. 아버지는 추석 명절 직전 화성교회에 오셨습니다. 막걸리 5병을 받아놓고, 사골을 사다가 끓여 국을 만들어 나름대로 아버지를 모실 준비를 했습니다. 서울 큰아들 집에 계시는 아버지를 직접 서울까지 가서 버스로 모셔 왔습니다. 오산 버스 터미널에서 화성 통일교 까지는 IKm 거리도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저는 아버지 팔을 부축을 하여 교회까지 오는데 4차례나 길바닥에 주저 앉아서 쉬었다 오고 해서 겨우 도착했습니다. 교회로 모시고 와서 식사를 대접하고 술도 드렸습니다. 저녁에 주무실때 이불을 펴 드리면서 밤에 방에 있는 술을 많이 잡수시지 마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야, 이 놈아, 내가 술을 안 먹으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주무셨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첫 말씀이 "하동 집에 빨리 가야겠다" 였습니다. 저는 "며칠 저희 집에서 계시기로 하시고 오셨으니 편히 계십시오. 술, 고기와 여러 가지 반찬을 준비해 놓았으니 오래 계세요!" 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님은 "준철아!" 하면서 "술 먹게 용돈이나 많이 달라" 고 했습니다. 아무리 가시지 말라고 말려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저는 다른 때보다 용돈을 조금 더 드렸습니다.

저는 서울로 모셔다 드렸고 아버지는 경남 하동 집에 가셔서 바로 운명을 하셨습니다. 71세로 고인이 되셨습니다. 생전에 아버지는 언제나 저에게 용돈을 많이 달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제대로 용돈을 많이 드리지 못해 아버지께 죄송했습니다.

제가 언제나 목회를 성공하고 교회를 부흥시켜 안정이 되면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교회를 빼앗기고 처절하게 가난한 목사길을 걸었습니다 순리대로 통일교 목사 인사이동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문선명 교주의 명령 한마디에 교역자는 강제로 움직 입니다.

저는 아버님이 저희 집에 온 것이 마지막 오시는 길이고,용돈을 많이 달라는 것이 마지막 말씀인줄 알았다면 빛을 내어서라도 돈을 많이 드렸을텐데 교회가 어렵다보니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날 아버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술을 적게 잡수시라고 했던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일생동안 저는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언제나 불효자였습니다. 성공해서 부모님을 편히 모시겠다는 다짐을 한번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땅 속에 계신 아버지께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불효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아버지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신 후 생전에 아버지 앞에 음식 한번 제대로 해 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이 아파 음식을 대할 때마다 한동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아버님께 못다 한 효도까지 합하여 어머님께 효도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목회 현실은 성공해서 교회가 안정되면 폭력적인 인사이동으로 또다시 지옥 같은 개척 교회 생활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저를 낳아준 육신의 부모는 사단의 피를 이어받은 가짜 부모라고 했습니다. 문선명만이 인류를 구원할 참부 모 재림주라고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제 육신의 부모에게 효도할 경제적인 능력이나 시간이 허락되지않았으며 오직 저를 구원하신 인류의 구세주 문선명 참부모에게 그 당시에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머님께 효도하는 길마저 막아 버렸습니다. 처절한 가난한목사 생활에서 헤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광란의 부당한 인사정책으로 부모님에 효도하는 길마저 잔인하게 막아버렸습니다.

 

 

제 10장 서울 노원 교구본부 교회로다시 인사발령

 

제 1 절 통일교에 바친 목숨



경기 화성교회 목사에서 서울 노원교구 본부교회로 인사 발령을 받은 것은 1986년 5월 1일이였습니다. 만 4년 4개월만에 땀과 눈물로 발전시킨 화성교회를 떠나 서울 노원 교구 본부 교회로 재발령을 받고 5월 18일에 노원교회에 취임했습니다. 노원교구 본부교회로 부임하고 보니 제가 전에 시무할 때 있던 교인 몇 사람만 교회에 나오고 있었습니다. 10여명에 불과한 교인과 매월 14만원 정도가 총 헌금이었습니다. 목사 생활비나 활동비는 없고 10여만원 이상이나 되는 교회 운영비나 관리비도 되지 못했습니다.

저의 생활은 또다시 하루아침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이였습니다. 화성교회에서는 재적 인원 160명에 헌금은 약 200만원이 되었습니다. 통일교 내에서는 최고 A급 교회로 성장을 시킨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전도하고 교회를 부흥시킨다는 것이, 이단 교회라는 이미지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화성교회의 20분의 1도 되지 않은 서울 노원교회로 부임하고 보니 눈물 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혼자라면 밥을 먹지 않고 굶어도 라면이나 국수만 먹어도 괜찮습니다. 버스 차비가 없으면 얼마든지 걸어다닐 수 있습니다. 병이 들어도 병원에 안 갈 수도 있습니다. 가난은 인내와 극기 훈련하는 심정으로 참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라도 통일교 목회를 그만두고 통일교를 탈출 했다면 지옥에서 15년 전에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차라리 없었더라면 저 혼자 고통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아내나 자녀들에게 남편 잘못 만나고 ,아버지 잘못 만나 너무나도 비참하고 가난한 생활을 계속적으로 강요하는 제 자신이 정말 싫었습니다.

제가 서울로 올라 을 때는 강서교구 본부교회로 부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강서 교구는 교회를 건축한 후 헌당 예배도 못 올리고 건축 2달만에 눈물로 떠난 교회였기에 목회 생활을 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강서 교구 본부 교회로 가서 저의 슬픈 과거를 청산하고 한국 통일교에 선봉장이 될 것을 다짐했습니다. 저는 서울 강서교회를 자랑스러운 통일교로 만들 자신이 있었습니다. 협회에서 강서교회로 옮겨 주겠다고 했습니다.

당시 강서교구는 1963년도 합동 결혼식을 한 124가정 진철수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서울 구로교회로 가고 제가 서울 강서교회로 가기로 결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서울 구로교회 목사님이 떠나지 않음으로 제가 강서교회로 취임을 하지 못하고, 서울 노원 교구 본부 교회로 재취임을 하게 된 것이 었습니다.

 

제 2 절 서울 노원교회에서 3차 발전

 

1986년 5월 18일 경기 화성교회를 떠나 서울 노원교회에 취임했습니다. 배고픔, 슬픔, 아픔, 분노, 배신감을 인내로서 극복하며 숨 돌릴 틈도 없이새벽 제단에서부터 수요 예배, 300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예배, 기도,전도, 봉사, 심방을 중심으로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김 영휘 협회장님은 노원교회에서 일생동안 목회를 하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한국 최고의 교회를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1986년 5월에 부임하여 노원교회 교인들과 합심하여 밤낮 없이 목회활동을 한 결과 7개월만인 12월에는 노원교회를 교인들로 가득 채웠습니다. 저는 자전거를 타고 매일 심방과 전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제가 할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을 위해 이사짐을 날라주고, 실직자를 취직시켜 주고, 신유 역사로 귀신 들린 자를 건강하게 완쾌 시켰습니다. 무엇이든지 교인들이 원하면 저는 손과 발이 되어 사명을 다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86년 6월 29일 주일예배에 바쁘신 중에도 김영휘 한국 협회장과 정대화 사모님(회장)이 노원교회에 순회를 오셔서 주일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참 자녀가 되자는 설교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역대 협회장 중 ,저의 능력을 인정해 주시고 시련과 고통 당할 때마다 격려하며 희망, 용기를 주신분은 김 영휘 한국 협회장님 뿐이었습니다.

김 회장님은 저를 가장 염려하며 고통 당할 때마다 저의 억울함과 능력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김 영휘 한국 협회장님은 전국 통일교 순회를 하시면서 목사들에게 서울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와 같이 최악의 조건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성공적인 목회를 해야한다고, 그것이 박목사에게서 배워야 할 점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리석었고 바보였습니다. 하나님 이름을 이용하고 성경을 인용하여 자칭 재림주로 통일제국을 꿈꾸는 가짜 메시아를 저는 자랑하고 증거 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를 위해 통일교를 부흥시키고 발전시켜 수많은 영혼이 이단에 빠지게 하는 일에 저는 앞장섰던 것입니다.

저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한국 통일교 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통일교에 모델이 되고자 노원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일이면 사력을 다하여 일을 했습니다.

통일교 기관, 기업체에 새로운 교인을 전도하여 취직을 시킬 때 부족한 사람들의 취직을 부탁하다 보니 커피, 식사비, 섭외비 등의 경비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직접 냈습니다. 그러면서 부장이나 이사에게 교회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하여 취직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습니다.

가정의 물질적인 고통도 아내와 자식들의 마음의 고통도 외면한 채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교인들을 위해 제 전부를 다 주었습니다. 마음, 몸, 물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습니다. 처절하고 가난한 생활에도 아내나 자녀들보다 교인들을 더 사랑했기에 노원교회도 부흥되고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제 11장 서울 노원 교회가한국 통일교 우수 교회로

 

협회장상 수상

 

제 1절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심정

 

1986년 6월부터 1987년 6월까지 1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고 바쁘게 살았습니다. 교회 재정이 어려워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고 자녀들의 교육비는 밀리기가 일수였습니다. 아내가 절약을 하고 또 절약을 하여도 가정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경기 화성교회에 내려가기 전 노원교회를 개척 할 때는 저의 자녀들이 갓난 아기였기 때문에 교육비는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커서 지출은 많고 수입은 적어 아내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도 꿀 먹은 벙어리같이 할말이 없었습니다. 결혼 전에 저의 아내는 아버지,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들과 같이 넉넉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러나 통일교에 입교하면서 부모와는 담을 쌓았습니다. 딸이 이단 교회에 다닌다고 야단을 치다가 화난 부모님에게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집을 나와 순전단 생활을 한 6개월 동안 부모님이 울면서 찾아와 애걸하며 집으로 가자고 했지만 저의 아내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통일교에 세뇌되어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 불효를 했습니다. 속담에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 떡을 얻어 먹는다' 는 말이 있듯이 부모 말을 듣지 않은 자녀는 불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제 아내가 수없이 많은 역경과 시련을 딛고 가난한 목사 사모로서 살아온 것에 대하여 제가 교회를 부흥시켜 안정이 되면 장인, 장모님께 효도 할 것을 누차 다짐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를 발전시키면 저의 아내나 자녀들이 생활이 안정이 될 것이라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1986년에는 경기 화성교회에서 백 만원 정도 생활비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울 노원교회로 오니 매월 총 헌금이 10만원 남짓 이었습니다. 교인들은 많아도 새 신자이고 철거민 달동네이다 보니 다들 생활이 너무나 어려워 교회 재정도 어려웠습니다.

저는 교회를 급속도로 부흥시켜 매월 30만원의 생활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 비하면 엄청나게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30만원의 생활비를 받으면 십일조 헌금, 감사헌금을 제하고 활동비로 15만원을 써야 했습니다 10만원을 가지고 저의 아내는 자녀 3명 학비, 학원비로 써야 했습니다.

1988년 1월 12일 은주와 영진이 쓴 반성문 중에는 '나는 동생과 먹는 것 때문에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다. ', '나는 누나와 먹는 것 때문에 싸움을 하지 않겠습니다. ' 라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3남매를 바라보며 제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여 오뎅이나 떡볶이도 제대로 먹일 수 없는 현실 앞에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제 2 절 3차 교회 대지 161평을 매입

 

노원교회는 주일 예배에 늦게 오는 교인은 교회 의자에 앉을 자리가 없어 교회 밖 출입구에 서서 예배를 드려야 할 정도로 발전하였습니다. 저는 1987년 1월 1일 하나님의 날 예배 때 교인들에게 선포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3번째 교회 건축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의 모든 기도 내용이 교회건축으로 모아졌습니다.

서울의 강북 교구는 월세 교회가 13곳이나 되고 전세 교회가 11곳이 되었슬니다. 월세금, 전세금도 통일교 협회나 재단에서 지원하기가 어려운 입상이 었습니다. 그러나 노원교회는 단기간에 한국 최고의 부흥과 발전된 교회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박준철 목사가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이루는 부흥사, 단기간에 선배 목사들을 제치고 부흥 시켰다고 문선명에게 보고가 되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단독으로 수차례 만났습니다. 그 당시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인정받고 사랑 받는 것, 단독으로 찾아 뵌 것이 최고의 영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교회 건축을 목표로 1차로 교회 대지를 매입 하기로 했습니다. 하루종일 교회 대지를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에 살 것인가를 길을 가면서도 식사를 하면서도 온통 노원교회 대지 사는 생각만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에 교회 건축 대지 매입을 목표로 매일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협회에서 5월 19일 반 승낙이 떨어졌습니다. 5월 27일부터 6월 8일까지 1차 릴레이금식을 실시했습니다.

6월 5일 리틀엔젤스 예술회관에서 열린 총회에 참석한 김영휘 협회장에게 노원교회 교회 대지 등본 지적도, 도시계획원 등 여러가지 서류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건축에 적절한 3곳을 선정하여 서류를 갖추어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무려 8차례나 문선명에게 "박준철 목사가 그렇게 사명감이 철저하고 가는 곳마다 통일교 목사들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능력이 있는 목회자라면 노원교회 교회 대지를 사 주어야겠구만"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한남동 유엔 빌리지 문선명 저택에 가서 직접 노원교회 교회대지를 사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6월 5일 서울 강북 1교구 책임자로 있는 임순도 교구장에게 밤12시 30분까지 말씀을 드리고 집에 오니 새벽 2시가 되었습니다. 한 순간 한 순간이 바늘 방석이요, 초조하고 긴장과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심장이 떨리는 순간 이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제가 교회 건축을 하여 한 단계 더 크게 발전하느냐, 현재에 그대로 머무르느냐 하는 순간 이었습니다.

6월 6일 서울 강북 교구 총 책임자로 계시는 임순도 교구장 내외분이 상계동에 오셔서 교회 대지로 매입 할 수 있는 몇 곳의 땅을 보았습니다. 6월7일 김영휘 한국 협회장과 임순도 교구장이 문선명에게 박준철의 과거 실적과 사명감, 현재 교회 발전을 1년만에 10배로 발전시킨 것을 간절히 보고를 드렸습니다.

6월 8일 김영휘 회장이 문선명에게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해야 한다고 또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물의 날 행사장에서도 잠시 시간을 내어 노원교회 교회 대지 문제를 김영휘 회장께 말씀 드렸습니다. 6월 12일 협회에 가서 김영휘 회장을 만나 노원교회 교회 대지 매입 문제로 눈물어린 심정으로 또 부탁을 했습니다.

6월 13일 문선명 교주는 노원교회에 161평의 교회 대지를 사라고 2억 2천만원에 싸인을 해주었습니다. 문선명이 2억 2천만 원에 싸인한 것은 통일교 재단 본부의 결정이 아닙니다. 저를 한국 최고의 통일교 부흥사로 인정하고 특별히 문선명이 돈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교회 건축비는 노원교회를 매매하여 마련했습니다 저는 교통과 모든 시설을 감안하여 노원 전철역 옆에 교회대지를 매입했습니다. 저의 꿈에 여러 교회 대지 중상계 2동 380번지 1호 땅을 사라고 땅 모양까지 보였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대지 매입 결재가 결정 났다는 김 영휘 회장의 전화로 듣고 만사를 제치고 버스, 지하철을 타고 청파동 통일교 협회 사무실과 본·곁 교회까지 단숨에 달려갔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김영휘 회장께 감사를 드리면서 죽도록 충성하여 노원교회를 발전시켜 넘치는 노원교회로 만들 것을 약속 드렸습니다.

역사적으로 서울 노원 전철역 옆 380번지에 교회대지를 매입했습니다. 교회 대지 계약금, 중도금, 잔금은 협회와 재단에서 직접 땅 주인과 만나 제가 있는 자리에서 전달을 했습니다. 상계 3동 140번지 4거리 코너 통일 교회는 주위의 부동산에 팔기 위해서 매물로 내어 놓았습니다.

1979년 5월에 처음 노원교회를 지을 때는 총 1천 6백 10만원이 들어갔는데 7천 2백 만원을 받고 팔았습니다. 교회 위치가 좋아 높은 가격에 팔게 되었습니다. 노원교회 매매 대금은 계약금, 중도금, 잔금을 협회와 재단에서 담당자가 와서 돈을 받아 갔습니다. 통일 교회는 교회의 대지 매매, 모든 서류나 부동산 처리는 목사들이 하지만 교회대지를 사고 팔 때 일절 돈을 만지지 않고 협회와 재단에서 전국 통일교 재산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1987년 6월에 교회대지를 매입한 후 노원교회 교인들과 합심하여 연말까지 교회 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12장 서울 노원교회 교회 건축

 

제 1 절 1988년도 교회 건축 목표

 

1988년 노원교회 목표를 교회 건축의 해로 결정하고 1월 1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철야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1월 1일부터 4월 10일까지 교회 건축을 위한 1차 100일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를 드리기로 결정하고 시행을 했습니다.

저는 1월 1일 오전 9시에 문선명 집회에 다녀왔습니다. 문선명 말이 '꿀같이 달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통일교 원리 교육으로 무장되고 세뇌되어 있기에 그렇게 많은 고통과 배신과 속임을 당했으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저는 문선명을 재림주 참 부모님 이라고 증거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통일교 원리 강의를 했습니다. 1월 1일부터 쉬지 않고 전도, 심방을 했습니다. 다른 목회자들은 연휴라고 쉬지만 저는 매년 새해의 첫 시간, 첫 날, 첫달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정성을 드렸습니다.

제 자신이 교회 건축에 미쳐 있었습니다. 협회와 재단을 매일 찾아가서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빨리 해달라고 간절히 말씀 드렸습니다. 초조하고 안타까움만 나날이 더하여 갔습니다.

1988년 5월 1일 통일교 협회 창립 기념일에 노원교회가 전국 통일로 우수 교회 협회장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저는 1년 안에 12명 이상 전도한 목사나 교인들에게 주는 전도상과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을 받았습니다. 제게 상금으로 20만원과 구두 티켓 한 장을 주었습니댜. 그 돈으로 주일날 음식을 장만하여 교인들과 같이 먹었습니다.

1988년 5월 2일 월요일에 한남동 문선명 저택을 방문하였습니다. 새벽기도 후, 문선명에게 선물을 하려고 경동 시장에 가서 최고 품질의 바나나 한 상자와 참외 한 상자를 샀습니다 택시에 싣고 한남동 문선명 저택에 도착 하였습니다. 김영휘 협회장과 사모님이 계셔서 선물을 드리고 문선명에게 교회 건축 문제를 말씀 드리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김영휘 협회장께도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말씀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 답변이 문선명의 승인이 안 나와서 교회 건축 공사를 못 한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를 겪어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문선명이 일화제약에 갔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늘은 결판을 내야겠다는 심정으로 수택리에 있던 일화제약으로 달려갔습니다. 일화제약 건물 옥상에서 문선명 참 부모가 통일교 기업체 사장들과 같이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앞에 나아가 땅바닥에 머리를 대고 경배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문선명 통일 교주는 저를 보시더니 "너 여기 어찌 왔어? 어떻게 왔나?"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 수많은 통일교 목사들 중에 저의 얼굴을 문선명이 알아 주어서 감격했습니다. 문선명이 제 얼굴을 알아준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웠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문제를 눈물로 호소하고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문선명은 교회 건축을 그 자리에서 허락하셨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에게는 먼저 교회 건축 공사를 시작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는 상계 3동 140번지 노원교회 매매 대금으로 빨리 공사를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김영휘 회장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으로부터 빠른 시 일 내에 교회 건축 공사를 할 것을 약속 받고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제 2 절 국회의원 당선에 관여한 통일교

 

문선명 통일교 명령과 지시로 전국 통일교에서 국회의원 후보들을 지원하여 당선시킨 국회의원들을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 집결 시켜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당선사례 감사 인사를 올리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국회의원 후보에게 서명 날인을 받은 후 맥콜 2백 박스를 지원하고 제가 있는 통일교 조직 전체를 가동하여 인적인 지원도 해주었습니다. 노원교회에서 지원했던 그 국회의원 후보는 400여표의 근소한 차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교에서 지원 받아 당선한 국회의원들을 모아놓고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서 2박 3일동안 통일교 원리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지원으로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문선명 교주에게 복종해야 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공갈 협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통일교 입당 원서를 쓰고 문선명 교주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문선명 통일교를 지지하고 찬동한다는 국회의원들은 문선명의 노예인 것입니다. 국회의원 후보 중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충성하겠다는 싸인을 한 국회의원후보를 경제적인 지원, 물질적 지원, 인원 동원 지원을 하여 저도 중진급 국회의원을 당선시킨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중진급  K 국회의원을 만나 문선명 교주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2박 3일 통일교 원리 교육을 받을 것을 간절히 말씀을 드려서 5월 5일 문선명 교주에게 감사 인사 갈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5월 5일 오후 2시에 K당 중앙 당사에 도착하여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기다렸습니다. 국회의원 비서관이 메모지를 저에게 전해 주었는데 국회의원은 총재와 조직 인사관계로 회의 중이기 때문에 문선명에게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K 국회의원이 충주 수안보 통일교 호텔인 와이키키 호텔에 가서 문선명에게 인사도 드리고 2박 3일 통일교 원리 수련을 받고 와야 한다고 설득을 시켰습니다. 비서관이 30분을 여러 곳에 연락을 한 결과 청량리 맘모스 호텔에서 K 총재와 인사회의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잠시 K국회의원을 호텔에서 내려오시라고 하여 K국회의원의 그랜저로 청주 수안보 와이키키 관광호텔까지 2시간만에 갔습니다. 저는 차안에서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위대성, 재림주라는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K국회의원은 자신의 업무가 바쁘기 때문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가서 인사만 드리고 오겠다고 했습니다.

충주 수안보 와이키키 호텔에 도착하니 문선명교주가 도착전이라 곽정환회장, 유종영 회장, 권혁서 교구장에게만 인사를 시켜 드렸습니다. 제가 호텔에 갔을 때 통일교 지원 받은 여야 국회의원 당선자 35명이 2박 3일 통일교 원리 교육을 받기 위해 도착해 있었습니다. 여러 국회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저는 K국회의원과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인사를 드린 후에 그 길로 충주에서 서울 노원교회까지 도착하니 밤 12시 30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위해 사회의 고위층인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인사 시켰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K 국회의원에게 돌아 오면서도 2시간 동안 통일교 원리교육을 하였습니다. K 국회의원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박준철 목사가 제일 끈질긴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K국회의원이 도움을 받았으니 문선명에게 인사를 왔다고 하였지만 K국회의원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붉은 유혹에 말려들고 문선명의 정치적인 야심에 K국회의원은 이용 당했을 뿐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정치적인 야망과 정권 쟁취를 위해 통일당을 창당하고 국회의원을 포섭하여 통일교 교세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차후에 통일교 문선명 교주에게 관련된 사이비 정치 인, 종교인들은 정치 일선에서 낙선운동을 하여 낙선을 시컥 다시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 앞잡이 노릇을 못하게 1200만 기독교 교인은 철저히 막아야 할 것입니다.

 

제 3 절 노원교회 역사적 교회 건축 기공식
 

1988년 5월 6일 금요일 아침 7시부터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노원교회는 제가 철거민 달동네에서 먼지만 일으키는 허허벌판인 상계동 지역에 작은 방안에서부터 몇몇 통일교 교인들과 예배를 시작했던 곳이었습니다. 이제 3번째 노원 교구 본부 교회 건축 기공식을 한다니 감개가 무량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역사적인 날이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70년 된 낡은 집을 허무는데, 집 무너지는 소리가 폭탄 떨어지는 소리같이 컸습니다. 흙으로 된 집이라 무너질 때마다 흙먼지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물을 뿌려도 주위사람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가득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이단 교회를 짓는다는 소문이 교회 주위에 퍼져나가 주위 사람들이 데모를 하였습니다 교회의 옆에 집들이 시기하고 질투하여 항의를 하고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저는 집을 허물기전에 선물을 사서 집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돌렸습니다. 그래도 항의와 시비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바로 옆집에 살던 전과범은 알코을 중독자였는데 매일 수시로 와서 의도적으로 공사를 방해하였습니다. 대낮에 술을 먹고는 낫, 망치를 가지고 와서 공사를 집요하게 방해하였습니다. 수시로 술도 사 먹이고 담배도사 주고 용돈도 주었습니다. 때로는 강하게 말을 해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의 방해는 노원교회 교회완공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술만 먹으면 저를 가슴 아프게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를 짓기 전에 집이 폐허나 다름이 없는 집들이라 아이들이나 동네 불량 청소년들의 놀이 장소로 사용되어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밤중에도 사고가 없는지 와서 돌아보고 가슴을 졸이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집을 다 허물고 나니 속이 후련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후 4시에 통일 재단 김명운 부장으로부터 공사 중단하라는 전화가 왔습니다. 김영휘 협회장의 지시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동안 통일교에서 목사 생활을 하면서 많은 충격을 받아 단련이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가슴이 철렁하였습니다. 저는 즉시 김영휘 협회장을 찾아가 간절히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호소하여 "다시 내일부터 공사 재개 할수 있게 해달라" 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재단에서 공사재개를 시켜주었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 마치면 아침 식사 전부터 교회 건축 공사 현장에 가서 살다시피 하였습니다. 오후에도 전력을 다하여 교회 건축 일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건축 공사는 통일교 회사인 일성 종합 건설회사에서 공사를 하였습니다.

1988년 5월 10일에는 대지 경계선 때문에 시비가 벌어져 주위 집주인들을 모시고 재 측량을 하였고 점심을 후하게 대접해 드렸습니다. 오후에는 주위의 아주머니와 주민들이 통일교 건축 중단하라고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습니다.

5월 30일에는 정득천 상계 2동 민정당 지도장을 만났습니다. 노원교회 주위에 200명 주민들이 통일교 교회 건축 반대 운동 서명해 놓은 것을 수습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구청, 경찰서, 소방서, 동사무실, 파출소, 지역 주민들까지 수습을 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저는 노력하였고 잘 해결이 되었습니다. 저는 통장, 반장 주위에 큰 소리 치는 사람까지 다 접대하고 밤 11시가 넘어 교회에 왔습니다.

저는 노인회 등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하는데 인사해야 될 곳은 정성을 모아 조금씩 성의를 표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하는데 왜 이리시비가 많고 모셔야 될 어른이 많은지, 그 전에도 몇 차례 교회 건축을 하면서 느꼈지만 특별히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에는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처음부터 주위의 반대와 시위 때문에 수습하느라 교회 건축을 완료 할 때까지 너무나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면 교회 건축을 하는데 가서 기도회를 하고 나무 정리,목재 정리, 철근 정리 등 매일 교회 건축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보를 만들고 심방을 하고 속회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국민연합, 승공 연합지부장을 만나 행사를 준비하는 등 1인 5역도 넘는 일을 매일 해 나갔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장을 잠시도 비워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1988년 5월 18일에는 지하공간을 흙으로 메우기 위하여 덤프트럭을 기다리다 잠깐 3동 에 있는 교회에 다녀왔습니다. 그 사이 15톤 덤프 트럭이 와서 지하실 바닥에 새까만 흙이 려인 것을 바닥에 붓고 가버렸습니다. 흙에서 땀새도 나고 하여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교회건축을 하면서 저는 깨끗하고 좋은 자재를 써서 최고의 아름다운 교회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콘크리트 친 공간에 악취가 나는 썩은 검은 흙을 메웠다는 생각을 평생 동안 하고싶지 않았기 때문에 공사를 지연시켰습니다.

오후에 상계동 전체 건축 공사장을 다 다녀 장복 건설 공사장에서 포크레인을 5만원을 주고 빌려 왔습니다. 트럭 2대를 3만원에 빌려서 포크레인으로 썩은 흙을 다 거두어 내어 깨끗한 흙으로 지하실 공간을 매웠습니다. 그땐 정말 속이 시원하고 기뻤습니다. 목수들이나 철근, 콘크리트, 벽돌 기술자들에게 내 집을 짓는다는 주인 정신을 가지고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하였습니다. 6월 7일은 2층 철근 구조물을 제작 하였습니다. 저는 교회 건축에 새벽부터 밤까지 매달렸습니다.

저는 서울 시내 선배목사들의 부러움 속에서 노원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해 교회 건축을 한다는 자부심과 사명감으로 고난 중에도 감사했습니다. 저에게 일성 종합건설회사 현장소장 성하준 씨는 "목사님이 이렇게 철저한 사명감과 주인정신을 가지고 교회 건축공사를 하기 때문에 노원교회가 발전되고, 튼튼한 교회를 건축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현장 소장이나 공사장 인부들이 저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노원교회 교회 건축 후 100년을 내다보았습니다. 제가 욕을 얻어먹더라도 튼튼한 교회를 건축하려고 교회 건축을 철저하게 관리, 감독을 하였습니다.

 

1988년 6월 22일 김영휘 회장과 정대화 사모가 노원교회 교회 건축 공사장을 점검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김영휘 회장은 한국 통일교 협회장을 2회 째 맡고 있었습니다. 김영휘 회장님께 노원교회 교회 건축 설계도가 협회와 재단에서 잘못 설계되어 하나에서부터 백까지를 바르게 고치다 보니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보고를 드렸습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에서 노원교회 교회 건축 설계 잘못으로 수십 차례 뜯어 고쳐야 했습니다.

김영휘 회장님과 교회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지하실 뚜껑을 덮지 않으면 비가 올 때 비가 바로 지하실로 들어간다고 지하실 뚜껑을 해 달라고 하였고 물탱크, 안방, 벽돌도 적 벽돌로 공사를 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옥상에도 루핑을 깔고 검은 기와로 끝내는 것을 좀더 아름답게 구운기와로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담장도 앞면에 미관상 좋지 않은 시멘트로 만든 큰벽돌을 쌓는 것이 설계였는데 붉은 벽돌로 설계 변경을 하였고 대문도 없는 것을 만들었고 사택 올라가는 계단도 시멘트 계단이었는데 고급 계단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 외벽에도 페인트칠 대신 붉은 벽돌로 설계 변경을하였습니다.

한가지 한가지를 설계 변경 할 때마다 언쟁이 벌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협회 본부 간부들과 재단 간부들도 저보고 적당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이 저의 건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는 저의 집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저는 2급 장애를 갖고서도 사지가 멀정한 439곳의 통일교 목사들 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여 노원교회를 전국 우수 교회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건강한 목사들보다 10배, 100배의 고통과 서러움, 외로움, 아픔을 갖고서도 저는 문선명에게 세뇌되어 교회를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어떤 통일교 목사들도 노원 통일교 교인들도 제 사정과 제 심정을 모를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대할 때마다 언제나 온 신경을 저의 팔에 두고있기 때문에 항상 행동을 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의 장애를 모르고 있습니다. 같은 통일교 목사들이 회의할 때나 공석 · 사석에서 반갑다고 갑자기 제 팔을 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왼 팔에 소대를 두툼하게 넣어 오른팔과 같이 크기를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깜짝깜짝 놀라곤 합니다.

저는 목회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해수욕장과 야외 풀장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일생동안 여름에 짧은 소매 옷을 입지 못하고 긴 팔옷만 입고 살면서 여름에는 긴팔 긴옷으로 인해 온몸에 땀띠와 전쟁을 하며 살았습니다. 목사들과 교인들이 "왜 짧은 소매 옷을 입지 않느냐?" 고 물을 태마다 저는 "습관이 되어서 괜찮습니다. "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처럼 단 한 번만이라도 해수욕도 하고 짧은 소매 옷을 입어보는것이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모든 것을 제 운명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전국 통일교 모든 합동 결혼식을 한 부인들에게 고향으로 가서 전도를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아내는 고향으로 옷 보따리를 싸가지고 전도하러 내려갔습니다 전국 통일교 모든 목사 부인들과 합동 결혼식 한 가정의 부인들은 남편과 자식들, 직장, 장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전도하러 갔습니다.

통일교는 지금까지 매년 여름에 40일 하계 전도기간이 있습니다. 그 해에는 6월 7일부터 8월 30일까지 약 3개월 동안부부가 헤어져 살아야했습니다.

모든 통일교 교인은 전도 기간에 전도해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합동 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 가정은 하루 아침에 홀아비가 되어 자녀들과 같이 생활해야 했습니다. 저 혼자서 초등학교 5학년인은주, 3학년인 영진, 1학년인 은영 3남매 학교 보내는 일,빨래하는 일,모든 것을 책임져야 했습니다.

새벽 기도 후에 교회 건축 현장에 가서 어떤 사고가 없는지 돌아보고 기도 후 자전거를 타고 교회에 돌아와 부지런히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고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매일 국제 승공연합, 국민 연합의 조직 관리, 접대, 행사 동원, 세미나,전도 심방 등 저의 몸이 열 개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가쁜 나날이었습니다. 어느 때는 정신이 없고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질 때도 있었습니다. 주위의 통일교 선배 목사들이 제가 통일교 최고의 아름다운 교회를 건축 하니 시기를 해도 저는 참아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모든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에게 가정의 행복과 사랑, 자녀교육, 생업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가라는 명령을 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은 말이 고향이지, 일생동안 통일교에 들어와 처절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였는데 무슨 돈이 있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서 고향으로 이사를 갈 수 있겠습니까?

통일교 목사와 합동 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자기 고향에 가서 문선명 교주가 참 부모요, 메시아 재림 주라고 증거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할 때 저는 가슴이 많이 아팠습니다. 성공을 하고 출세를 해야 고향 생각이 나고, 여유가 있어야 부모 형제들도 찾아 뵙고 여러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게 됩니다.

통일교에서는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주일 예배 한명에 몇 점, 새벽기도 한명에 몇 점, 전도 한명에 몇 점, 수련 한명에 몇 점, 교회 헌금에 몇 점, 통일교 합동 결혼식 하는 미혼 남녀 한명 전도에 몇 점 이렇게 점수제로 하여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미혼 남자한명 전도하는데 10만원을 지불하고 미혼 여자 한명을 전도하는데 15만원을 지불하고 이렇게 전국에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매월 평가제로 지금까지 교회의 등급을 매겼습니다. 이렇게 잔인하고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통일교 목회자의 길이며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교인의 길입니다.

통일교는 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입니다. 각종 행사에 이용되고 그 행사를 위하여 끊임 없이 봉사하며 재산을 투자해야 되는 악순환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고액 재산을 바쳐야 되는 통일교 교인들은 제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든 지경입니다. 저도 그런 통일교 문선명 교주를 만나 일생을 세뇌 되고 마취되어 청춘도 건강도 전부 빼앗겼습니다.

 

제 4 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상량식

 

1988년 6월 28일 상량식을 올리기 위하여 통일 민주당 청원군 위원장인 박동인씨에게 상량판을 받아 노량진 박동화씨에게 갔습니다. 상량판에는 붓글씨로 조국통일 선봉장 박준철 천지인 삼강 입주 상량이라고 썼습니다. 저는 교회로 돌아와 성염(소금)으로 성별을 하고 노원교회 상량식 봉헌기도를 드렸습니다. 사진을 찍고 음식을 교회 주위에 집집마다 돌렸습니다. 그동안 반대했던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1988년 7월 3일에는 통일교 협회 문화부에서 노원교회 부흥과 발전을 취재하고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취재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매월 통일교에서 발행되는 통일세계에 노원교회 기사를 대서특필하기 위하여 유창수 기자가 와서 사진도 찍고 좌담회를 취재하였습니다. 이 기사가 1988년 7월달 통일 세계에 한국 통일교 부흥과 성장교회 탐방이라는 제목을 가지고"내일의 승리를 위해 도약하는 상계교회" 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특집 기사에 저 한 사람의 희생과 봉사로 문선명 통일 교주에게 충성하고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등불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발전한 소식을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에게 알려서 조금이나마 자극제가 되어 전국의 통일교가 발전 하기를 바라는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때로는 지방의 소도시에서 개척하여 부흥을 시켰더라면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랬다면 점점 대도시나 서울로 와서 통일교식 승진을 하였을 것이고 승승장구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일 후배 목사로써 지방중소 도시도 아린 대도시도 아닌 서울 교구에서 개척을 하여 성공을 하다보니 언제나 선배를 위해 강제로 부당한 인사이동을 수 차례나 당하였던 것입니다. 바람 잘 날 없는 서울 교구에서 기적의 개척과 발전, 부흥, 교회건축을 반복하며 상처받고 폭행을 당한 것은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과의 정과 관계를 끊어가는 과정이였습니다. 저는 박대 받고 부당한 인사 이동을 당하며 세뇌에서 점차 깨어나 탈퇴하라는 하나님의 뜻 이었습니다.

 

제 5 절 시련과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당한 폭력과 폭행
 

저보다 직급이 높은 공릉교회에 김수정 목사가 있었는데 저보다 직급이 높은 선배 목사였지만 교회는 2층 30평 전세 교회였습니다. 교인이나 예배헌금이 노원교회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를 시기하고 질투하였습니다. 김목사는 회의를 하면서 때로는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1988년 8월 30일 공릉교회 월말 목회자 회의중에 김수정 목사에게 회의 때 연락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김목사는 저에게 욕설을 하고 폭행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제가 잠시 교회 건축 공사장에서 떠나 심방 하는 사이에 다른 목사들을 데리고 와서 노원교회를 자기 교회로 할 것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목숨을 걸고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 건축을 해 놓으면 선배 목사들이 빼앗았는데 또 저의 노원교회를 빼앗느냐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새끼!뭐 이런 새끼가 있어?너 한 번 맞아볼래? " 하면서 뺨을 때리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고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승창 목사와 여동석 목사가 저를 뒤에서 움직이지 못하게 잡고 김목사는 저를 무차별하게 폭행을 하여 허리를 다치고 가슴을 얻어맞아 입술이 터지고 코피를 흘렸습니다. 저는 한 달 반 동안 온몸이 결리고 허리와 가슴이 아파서 몸을 지탱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회의석상에서 폭행을 당하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매스컴에 날까봐 병원에 입원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놓고 협회의 김영휘 회장님과 김승철 국장, 각과의 국장단을 모시고 김수정 목사를 인사 위원회에 세워달라고 하였습니다. 저와 김목사의 양쪽 말을 듣고 결정을 하시라고 하였습니다. 양쪽 목사 말을 듣고 문책 인사 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목사는 문책 인사를 당한다면서 전세 교회가 아닌 강남의 큰 교회로 인사이동이 되었습니다. 남 잘리는 것을 배 아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여 폭행하는 목사를 예배와 교인이 많고 헌금이 많은 큰 교회로 승진 인사를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목회를 성공하고 능력이 많아도 제게 돌아오는 것은 지옥과 같은 목회 길뿐이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이 교회 건축헌금을 다해도 철거민 지역이라 몇 백만원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헌금을 제일 많이 한 통일교 교인이 50만원 정도였습니다 장로는 20만원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는 문선명까지 층층시하 어른이고 이 눈치 저 눈치 봐야 되는 입장입니다. 교회 목사라 할지라도 합동 결혼식 한 서열 순서대로 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나 대우를 받을 수 없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에 따라 교인이 어느 날 갑자기 목사로 임명을 받는 때도 있고 명령에따라 목사직을 박탈 당하고 교인이 되어 통일교 회사에 근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와 교인은 구분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 목사들은 통일교를 한꺼번에 50명~100명이 그만두고 떠나는 일이 많습니다.

모든 통일교 목사들은 일회용 목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너무 많은 문제가 돌발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매일 매일 협회 지시에 숨이 막힐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 끝까지 차 있을 정도입니다.

저는 노원교회 교회건축을 하면서 내외적으로 영적인 싸움과 함께 교회긴축 공사 과정이 하나하나 진행될 때 전투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성하준 소장은 설계대로 한가지 한가지를 건축해 가야 하는데 건축을 잘 못하였습니다.

잦은 변경으로 매우 힘들었습니다. 재단 본부의 설계 잘못으로 모든 일을 현장에서 고쳐나가려다보니 신경이 날카로워 있었습니다. 제가 협회나 재단에서 노원교회 교회건축을 하는 대로 두었더라면 교회건물은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성하준 소장은 성실하게 일을 잘하고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재단과 협회는 노원교회 목사인 저를 불러서 설계 도면을 만들었더라면 자재를 낭비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많은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와도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나이, 같이 합동 결혼식을 올린 통일교 협회 총무부장인 박석균은 저에게 "노원교회가 네 집이가?그만좀 해라. 적당히 좀 해라." 며 김승철 총무국장 앞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주인정신 없는 박 부장이나 재단 본부 김명운 부장 등에게 온갖 모욕과 무시를 당하며 피눈물로 노원교회를 건축해나갔습니다.

 

제 5 절 노원교회 교회 건축 준공을 완료
 

1988년 9월 29일 제3차 노원교회 건축 이전예배를 드렸습니다. 상계 3동 140번지 사거리코너 노원통일교 시대를 마감하고 상계 2동 380번지 1호의 노원교회로 이사짐을 실어다 날랐습니다. 새벽에 문선명 사진을 모시고 정중히 새로운 교회까지 걸어왔습니다.

교회 대문, 3층 교회, 2층 사무실, 교회 사택, 1층 사무실, 식당, 방, 지하1층 방, 강당, 보일러 기계실 등 교회 전체를 성염(소금)으로 사단을 물리치는 성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무당이 하는 의식을 통일교에서는 하고 있기 때문에 저도 그때는 그 의식대로 소금으로 새로 건축한 교회 전체에 성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새로 건축한노원교회에 이사하는 날 떡 다섯 말을 하여 동사무실,파출소. 이웃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 반대 운동을산 900여명의 서명 날인을 한 집에도 떡을 나누어 드렸습니다.

1988년 10월 10일 교회 대지 161평에 건물 554평, 지하 1층, 지상 3층 교회를 준공하였습니다. 한국 통일교 중 최고로 아름다운 교회로 교회 건축을 하였습니다. 12월 달에는 통일 세계에 표지 모델로 실렸습니다. 지금까지 통일 세계에 표지 모델은 문선명씨 사진이나 통일교 행사 사진 등 이었는데 통일교 30년 역사에 처음으로 노원교회가 표지 모델이 되었던 것입니 다. 그 동안에 저는 장인 장모님에게 효도 한 번을 하지 못하고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서울 박 서방이 노원교회를 개척하여 노원교회에서 3번째 교회 건축을 하고 이사를 했다" 고 울산에서 축하를 하기 위하여 올라 오셨습니다. 그리고 방에 가구가 너무 없다며 2층 절반 40평이 사택이었는데 거기에 장롱, 식탁, 가구 등을 2백만원의 거금을 들여 장만해 주셨습니다.

 

 

제 13장 통일교 아름다운 교회 헌당식

 

제 1 절 노원교회 3차 교회 건축 헌당식
 

1988년 11월 20일 노원교회에서 역사적 헌당식을 올렸습니다. 한국 통일교 김 영휘 회장님과 정대화 사모님 이 참석하셔서 격려사와 축도를 해 주셨고,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 이상덕 전도국장, 심평근 국장, 권혁서 제 1교구장, 김명대 제 4교구장, 김원종 목사 내외분 등 저의 친목회 목사들,서울 시내 선배 목사들이 참석하고 제가 목사로 있었던 경기화 성교회 교인들이 많이 참석하여 노원교회 예배 교회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축하예배 교인들로 가득 찼습니다. 헌당식에는 250명이 넘는 교인들이 와서 축하를 해주었습니다.

저는 이 날을 위하여 살아온 것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당시 모 당의 원내 총무였던 분이 대형 축하 거울도 기증을 하였습니다. 곽정환 세계일보사장, 문승룡 재단이사장 등 많은 전국의 통일 그룹기관 기업체 사장단의 이름으로 축하 화한과 축전을 엄청나게 보내 왔습니다. 저는 부족한 제 자신이 이렇게 통일교의 대표적인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했다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날 하루만큼은 외로운 마음, 배신감, 배고픔도 없이 꿈꾸는 심정 이었습니다.

'노원교회는 저의 피눈물의 교회입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노력과 기적의 교회입니다. 저는 목숨을 걸고 한국 최고의 실적과 공적을 가지고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인정을 받아 노원교회 교회 건축을 완공시킨 것입니다. 이제 저의 책임은 노원교회를 교회가 가득 찰 정도로 넘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나깨나 교회 발전을 위해서 온갖 정성을 드리고 여러 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그 중에 통일교 교인들 가운데 5명에게 상계전철역 앞 벽산아파트 딱지를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딱지는 무허가 건물 4평, 8평 짜리로 30평 짜리나 25평 짜리 아파트 입주권 이였습니다. 조건은 노원교회 발전을 위해서 충성하고 저의 손발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참부모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교회를 만드는데 모든 것을 앞장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줄 모르고 충성할 줄 모르는 그들에게 너무나 큰 사랑과 은혜와 축복을 베풀었습니다.

 

제 2 절 베풀어 준 은혜와 축복을 배반으로 갚은 사람들
 

저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진심을 다해 도와주고도 뺨을 맞는 그런 사람입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제 목숨보다도 더 아꼈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을 제 아내나 자녀들보다도 더 아끼고 제 모든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반이라는 이름으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천국 백성이라는 통일교 교인이라는 이름을 갖고도 자기 목사에게 가슴속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단 말입니까? 은혜 뒤에 시련이 있다는 것을 통일교 목사 생활을 통하여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겪었습니다.

저는 노원 통일교 부흥과 발전을 위하여 통일교에 어른이라고 할 수 있는 통일교 한국협회 김승철 총무국장에게도 상계 전철역 앞 벽산아파트 30평짜리 무허가 건물 딱지를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김승철은 1962년도 문선명 통일 교주로부터 72쌍 합동 결혼식을 한 대 선배였습니다. 교구장도하고 협회의 이인자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북교회로 나가는 김승철 국장에게 문선명 참 부모님의 한을 풀어 드리자고 말씀드리고 저의 손발이 되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노원교회 건축도 하고 교회를부흥시켜야 될 책임과 사명이 있는데 김승철이 와서 노원교회 어린 교인들을 잘 교육시키고 이끌고 가는 신앙자가 되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노원교회에 사랑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 달라고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간절히 부탁 하였습니다. 그때 제가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아파트를 사게 해 주어 이사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박주성 집사에게도 벽산 아파트 딱지를 사주었습니다. 후일 아파트가 완공되어 입주를 하였고노원교회로 김승철 국장부부와 박주성 집사부부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3명 중 2명은 노원교회 발전을 위해 제가 부동산 소개업소 역할까지 하며 아파트를 살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돈만 벌고 이사도 오지 않고 노원교회도 오지 않았습니다.

한 분은 저에게 아파트를 팔아 감사하다고 100만원을 저에게 주었지만 그 100만원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분은 저를 격려해 주시고 희망과 용기를 주시며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 항상 저의 길잡이가 되어주신 분 이었습나다. 저는 말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100만원을 끝까지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노원교회에 있으면서 생애에 최고의 실수를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 김승철 국장에게 아파트까지 살 수 있게 해주며 실질적인 돈을 벌게 해주었습니다. 문선명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 노원교회에 충성을 해달라고 김승철 통일교 협회 총무국장을 성북구 종암동에서 데리고 온 것이 화근이 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자기보다 합동 결혼식을 한 서열순위가 아래인 목사에게는 잘 순종하지 않고 받들지 않습니다. 제가 김승철 국장보다 13년 늦게 합동 결혼식을 한 후배이다 보니 김승철 국장은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노원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방해하며 반대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노원교회 목사 노릇까지 다하였습니다. 무엇이든지 목사인 저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제가 추진하고자 하는 교회 일을 거부하며 불신하였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교회를 불신하는 문성숙 집사, 제가 아파트를 사 주었던 박주성 집사, 제가 40일을 통일교 원리강의를 하며 사랑으로 교육했던 고귀숙 집사 등을 끌어들여 저를 배신하게 했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불신의 주모자가 되어 노원교회에 오지 않고 아파트에서 불신하는 5명과 일요일 대예배를 드렸습니다. 저와 심정 일체가 되어 충성하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어린 교인들을 사랑으로 바르게 신앙교육을 하지 않고 불신의 주모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받게 하고 해주었지만 은혜를 배반하고 노원교회 발전과 부흥을 가로막는 역적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김승철 총무 국장은 문선명 겹사돈인 홍성표 협회장(현재 문선명 통일교 교주와 원수가 되어 자녀들이 이혼하고 통일교를 탈퇴함), 재단 이사장 결재도 받지 않고 4천 만원을 협회에서 불법으로 가져와 2층을 전세 내었습니다. 제가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 직접 4천 만원이 홍성표 협회장 결재를 받은돈인가 물어 보았으나 결재한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그곳에서 목사 노릇을 하고 은혜를 배반한 통일교 교인을 끌어 모아 주일날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김승철 국장은 불법적인 행위를 했기 때문에 교회를 폐쇄하고 돈을 협회에 반납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의 70세 고희기념 잔치를 하라고 전국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에게 지시 하였습니다. 전국 시 ·군 ·구·면 ·동 통일교에서 교인들이 헌금을 하여 지역에 국민연합, 승공연합 노인들을 모아놓고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 부모로 증거하라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47년동안 교회각종 행사와 헌금 강요로 처절한 가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상계1동부터 10동까지 노원교회 교인들을 각 동에 한명씩 구역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1동~상계10동까지 문선명 참 부모 칠순 잔치를 승공연합, 국민 연합 회원을 모셨습니다. 그 동에 사는 통일교 구역장과 교인들이 돈을 내어 잔치를 해 드린 것입니다 잔치를 다 하고 김승철 국장이 책임 지고 있는 상계 5동만 문선명 잔치를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협회에 갔다가 김승철 총무국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전국 통일교에 목사들과 교인들을 진두 지휘하는 사람이 총무국장이고 다른 구역장들은 잔치 다 했으니 문선명 잔치할 돈 10만원을 내달라고 부드럽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왜 어려운데 돈을 걷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총무국장이 전국 통일교에 문선명 참부모 잔치하라고 통일교 목사들에게 명령 해놓고, 그런 말씀을 하면은 어떻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문선명 교주 칠순 잔치 때 자기 교회에 잔치하라고 50만원, 100만원 헌금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은 한국 통일교 이인자 자리에 있으면서 돈 10만원이 아까워서 저에게 야단을 쳤던 것입니다. 그 이후 김승철 국장은 문선명 고희잔치 돈을 내지 않고 간단하게 과일, 떡을 마련하여 잔치를 끝냈습니다. 김승철 국장은 전국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온갖 명령과 지시를 합니다.

김승철 국장은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100일 새벽 제단 기도를 하시오. 40일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하시오. 전도하시오." 등의 명령을 하였지만 김 국장은 노원교회와 100m도 안 되는 거리에 살면서 새벽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도 드리지 않고 아들이 군대에 갔다고 면회 가는 일이 많았습니다. 전도도 하지 않았고 십일조 생활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참으로 김승철 국장을 노원교회로 오게 한 것을 후회하였지만 그것은 때늦은 후회였습니다.

 

 

제 14장 노원교회를 찿은 문선명

 

제 1절 자칭 감동받은 문선명
 

저는 1989년 1월 1일 제22회 참 하나님의 날을 맞이하여 문선명에게 1년 한 해를 충성할 것과 절대 신앙, 절대 복종, 절대 사랑할 것을 맹세 했습니다. 문선명에게 영광을 돌리는 한해가 되자고 100명이 넘는 노원교회 교인들과 모여 철야 기도회를 드렸습니다.

1989년 노원교회 목표를 360명의 재적과 210명의 예배 목표를 세웠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새해를 출발하였습니다. 1989년 1월 9일날, 문선명이 큰아들인 문효진 장남과 문현진 삼남과, 곽정환 회장 등 기관 기 업체 사장단 20여명을 데리고 노원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문선명은 서울 시내 통일교나 전국 통일교 어느 곳에도 방문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 도착하기 30분전에 노원교회로 온다는 소식에 저는 너무나 감격하고 감사했습니다. 문선명을 맞이할 준비하는 시간이 너무나 촉박 하였습니다. 심장이 떨리고 어떻게 모셔야 할지 노원교회 교회건축 브리핑을 어떻게 보고 드려야 할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자칭 재림주 문선명이 노원교회로 오면 식사, 과일, 떡 등의 음식과 음식 담을 그릇, 상 등이 필요한데 모든 것의 준비가 부족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인들에게 급하게 전화 연락을 하여 노원교회로 문선명이 오시니 빨리 오시라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교회대문을 열어놓고 카메라와 필름 준비 청소와 교회 주변 정리 등을 일사천리로 준비 하였습니다. 그러나 준비가 다 되기도 전에 문선명은 통일교 최고위층 교인들과 같이 노원교회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서울 시내 통일 교회의 목사 중 제일 어린 목사였습니다. 그런데도 문선명은 저를 기억하시고 저의 교회를 부흥시키는 능력을 인정하시고 왔던 것입니다. 저는 지하 1층~지상 3층까지 곳곳을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브리핑하였습니다. 2층 사택 쪽으로도 모시고 가 구경을 시켜 드렸습니다. 문선명은 중국의 진시황제 때 9,999칸의 아방궁 같이 노원교회 교회 건물을 잘 하였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기분이 좋았습니다. 문선명에게 교회 전체를 보여 드렸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에 온 것만으로도 영광이었고 축복 이였습니다. 저는 문선명과 같이 찍은 사진을 확대하여 큰 액자에 넣어서 노원교회 교회 계단마다 걸어 놓았습니다.

통일 교회 목사들과 교인들은 문선명 참부모가 제가 목회하고 있는 노원교회에 내방하였다는 것을 안다면 자칭 구세주 문선명이 감화 감동을 받았파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겁니다.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가 노원교회까지 왔다는 것은 통일교 내에서는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가치를 통일교의목사들과 교인들만이 알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문교주에게 세뇌된 상태였기 때문에 노원교회가 자랑스러웠습니다.

1988년 7월 달에는 통일 세계에 노원교회가 한국 통일 교회의 우수 교회로 크게 소개되었습니다. 참으로 어렵고 힘든 고난의 시간들이었지만 기쁨과 감사가 함께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하나님이 문선명까지 노원교회로 왕림하게 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15장 서울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받은

 

비극적인 사건

 

제 1 절 동토의 왕국인 통일 제국의 교구장 임명


1991년 1월 5일, 오전 11시에 노원교구 내의 목사 회의를 권혁철 교구장과 하였습니다. 권교구장이 통일교 협회에서 노원 교구장으로 박준철 목사를 임명했다고 전체 목사들 앞에 발표 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박준철 목사님이 너무나도 많은 실적과 한국 최고의 공적을 가지고도 언제나 선배 통일교 목사들 때문에 교구장 자리에서 밑려났으나, 이제 박준철 목사님이 노원 교구장으로 협회의 임명을 받았으니 소원 풀이를 한 것이라고 축하 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그 당시 이제야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여 기쁜 마음 이었습니다. 선배 목사들인 하계동이나 중계동, 월계동 등 여러 목사들이 저고 교구장이 되었다고 축하 인사를 하였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저에게 말을 하였습니다.

권혁철 교구장이 내일 오후 1시에 서울 시내 각 구 교구장들만 한남동 UN 빌리지 문선명 통일교 교주 저택에서 회의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 저의 아내에게 이번에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아내도 기뻐했습니다.

1991년 1월 6일 새해 첫 주일 예배를 맞아 저는 광고 시간에 전체 교인들 앞에서 어제 홍성표 한국 협회장이 서울 시내 교구장들을 임명하여 저도 교구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오후 1시에 UN 빌리지 문선명 참 부모님 공간에서 교구장들 회의가 있어서 다녀오겠다고 노원교회 교인들에게 보고하였습니다.

통일교는 온갖 아부를 교구장과 협회장에게 해야 출세를 합니다. 저는 출세하기 위해서 통일교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동안에 순수한 통일교 목사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문선명 교주에게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했습니다.

온갖 가시밭길을 피눈물을 흘리며 누명을 쓰고 강제로 부당한 인사 이동을 당하고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심정으로 개척을 하고 성공하기를 반복 하였습니다. 저는 박탈감과 빼앗긴 배신감에 가슴 아픈 때가 있었습니다. 때로는 억울하게 폭행과 폭력을 당하고도 말 한마디 항변하지 못하고 사회에 고발하지 못하는 제 처지가 한없이 미웠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원 교구장이 된 것이었습니다. 노원교회에 모든 교인들이 저와 일심동체가 되어 교회발전과 부흥을 하여 문선명 재림주에게 충성 할 것을 더 더욱 다짐을 하였습니다. 모든 노원교회, 모든 통일교 교인들도 목사에게 교구장이 된 것을 박수로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는 늦었지만 교구장이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 동안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 10회와 교구장상 등 16회 총 26회를 수상 받아 통일교 역사에도 없는 최고의 실적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교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배 후 식사도 하지 않고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성북교회 교구장으로 임명된 김민중 목사님을 제 차로 같이 모시고 갔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가면서 서울 시내 동 책임자인 교회 목사들도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였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제 목사 회의에서는 서울 시내 각 구 단위 교구장들만 회의에 참석하라고 하였는데 동 책임자인 교회장들도 후에 참석 하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김민중 교구장과 같이 한남동 문선명 교주 저택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울 시내 새로 임명받은 22명의 교구장과 교회장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단상에 앉아 있고 통일교 기관 기업체 사장들도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협회 이인자인 김승철 총무국장이 교구장 인사 발령을 다시 발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제 발표한 인사 발령 중 22명의 교구장은 그대로 발령하고 노원 교구장으로 발령 받은 저만 교구장 명단에서 제외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성동구 구의동에 있는 동책임자인 구의교회 서유성 목사를 교구장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저는 순간 심장이 멎고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단 하루 교구장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다가 빼앗긴 것 이었습니다. 저는 배신감을 또 한번 느낌으로 문선명 교주와 멀어질 수 있었습니다.

구의교회 서유성 교회장은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이 전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 부인이 서유성 교회장을 전도하였던 것 입니다. 통일교는 크나큰 모순이요, 폐단이 있습니다. 가장 암적인 일이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영적으로 구원해 주었다고 하여, 믿음의 아들 딸이라고 호칭을 쓰는데 자신이 전도한 사람을 자기 자식 이상으로 통일교에서는 아끼고 사랑합니다.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취직시키고 신앙교육을 시키며 죽을 때까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 기하 급수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자 1년에 12명 이상을 전도한 사람에게는 한국 통일교 협회장 상을 시상하여 통일교 교인들 간에 경쟁을 붙이고 위화감을 조성하였습니다. 저도 전도한 사람이 통일교를 탈퇴한 사람까지 합하면 200명도 넘었습니다.

전도한 사람은 믿음의 아들딸을 출세시키고 생활을 돌보며 통일그룹 내에 회사에 적극적으로 추천하여 취직을 시키는 일까지 책임을 지고 합니다. 저를 전도한 사람은 통일교 송탄교회 박길수 목사 부인 이었는데 그 목사는 자기 교회 부인 회장과 간통을 하여 아내와 자녀들 5명을 다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통일교 부인 회장과 살림을 차렸습니다. 저는 저를 전도한 목사 부부를 가정이 파탄된후단 한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통일교에서 1961년도 통일교 최초 합동 결혼식자인 36가정 곽정환 회장이 저를 전도하였다면 곽 회장이 저를 얼마나 잘 이끌며 출세를 시켰겠습니까? 제가 폭력과 폭행을 당하며 박해받는 통일교를 개척을 하여 성공하면 선배 목사를 위하여 강제로 7번이나 빼앗기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저는 서유성 교회장의 부인이 노원구 상계동의 김승철 총무국장 집에 와서 빨래며 청소, 부엌일등 모든 일을 파출부와 같이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한번은 제가 김승철 국장집에 심방을 하였더니 김승철 국장이 전도한 통일교 교인 몇 십명이 모여 단합 대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전도한 사람중에는 통일 그룹 내에 핵심적 인 자리에 있는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을 1년에 I~2차례씩 전국에서 초청하여 단합대회를 열어 과시를 하는 때가 많았습니다. 자기가 문선명을 믿게 한 통일교 교인들이 이렇게 많다고 세를 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족하고 힘이 없어서 제가 전도한 사람들을모 아 단한번도 단합 대회를 열지 못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는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믿음의 아들 딸이라 하고 전도 받은 사람은 전도해준 사람을 믿음의 부모라고 호칭을 합니다. 통일교 간부들은 그런 단합 대회를 자신의 생일날이나 명절 때를 택하여 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975년 2월 8일날 1,800쌍 합동 결혼식 때 결혼을 했기 때문에 후배 목사로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통일교는 1961년부터 1963년까지 36가정, 72가정, 124가정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이 통일교 최고의 지도자이고 통일 그룹 내 핵심적 인 요직에 있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제 2 절 김승철 총무국장의 인사비리와 폭행사건
 

저는 1991년 1월 6일 첫 주일 오후 문선명 저택에서 전체 목사들 앞에서 일어나 감히 문선명 교주에게 직언을 하였습니다. 제가 언제나 처절하게 개척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건축하면 빼앗고 선배를 위하여 강제로 희생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7번이나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에게 제 충성과 실적과 공적을 보고하였습니다.

저는 통일교는공산주의보다 못하고 적당주의, 형식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I~2년이 있으면 다른 교회로 인사발령을 받아 가는데 왜 땀 흘려 목회를 하겠느냐고 말을 했습니다. 통일교는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력을 다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놓는 목사가 따로 있고 그것을 빼앗고 가로채는 목사가 따로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래서 어떻게 통일교가 발전이 되며 목회자들이 사명의식을 가지고 목회를 하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 답변으로 문선명은 전체 목사들 앞에서 저에게 노원교회 박 목사는 그런 큰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리하고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가는 개척교회마다 교회를 발전시키니 순종하고 다른 교회로 가면 또 교회를 발전시킬 것이고 후손 대대로 자손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흥분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제 자신이 박해받고 억울한 가운데서 가는 곳마다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말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제 목사 회의석상에서 권혁철 교구장이 통일교 협회로부터 저를 노원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고 목사들 앞에서 발표하여 축하인사까지 받았다는 말과 김승철 총무국장이 자기가 전도한 믿음의 아들인 서유성을 교구장으로 저하고 바꿔치기 한 것이라고, 인사부장을 했다고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 없어서 그 말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저는 제 말을 마치자 마자 분노와 배신감, 그 동안 김승철 총무국장의 행위를 생각하며 그 길로 문선명 교주에게 죄송하다고 하고 그 자리에서 노원교회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제가 나오는 중에 문선명 교주가 노원교회 박목사 데리고 오라고 두 세차례 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제 후임 목사로 왔던 엄철상 목사가 승진을 거듭하여 문선명 교주의 총애를 받아 비서실장이라는 요직에 있었는데 저를 붙들고 못 가게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박준철 목사를 데리고 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에 문선명 교주에게 그 동안에 쌓인 분노와 배신감 때문에 심장이 떨려서 터질 것만 같고 흥분하여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 길로 노원교회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저를 교구장 명단에서 빼버린 후 동 단위 통일교 목사들이 자기가 가서 목회 할 곳을 제비뽑기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제일 마지막에 남은 한 곳 노원구의 동 단위인 공릉동 통일교가 제가 시무 해야 할 곳이 되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저를 헐뜯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폭행을 하고 온갖 모함으로 노원교회를 빼앗아 자기가 목사 활동을 할 것이라고 했던 김수정 목사가 있던 곳 이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2층에 30평 전세 교회였고 교세도 노원교회 보다 20분의 1도 되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따로 목사 사택도 없었습니다. 교회 30평안에 5평 정도를 합판으로 막아 작은 방 2개를 만들어 생활을 하여야 했습니다.

저는 순간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힘이 없고 부족하여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을 생각하니 저는 24시간 동안 잠도 오지 않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배신감 때문에 심장이 떨려왔습니다.

저는 매일 매일 미친듯이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제 차를 타고 청평까지 과속으로 달려도 보고 판문점까지 통일로를 죽기살기로 달려도 보았지만 해결할 길이 없었습니다. 도봉산에도 가서 기도도 해 보았지만 해결이 되지 않고 점점 더 고통스러운 나날 이였습니다.

 

제 3 절 무차별적인 폭행으로 얻은 심장병

 

저는 김승철 국장의 인사 부정을 밝히기 위하여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 진실을 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저는 1991년 1월 7일 문선명 통일교 교주 겹사돈인 홍성표 한국 통일교 협회장에게 인사부정을 이야기하고자 한남동UN빌리지 문선명 저택에 찾아갔습니다. 문선명이 한국에 있을 때에는 매일 아침 7시면 통일그룹 내 최고위층 통일교인들 전체가문선명 저택에 모여서 자칭 구세주 문선명에게 경배를 드리고 문안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노원교회에서 경배식과 새벽기도 후 새벽 5시에 그 추운 영하 10도가 넘는 날씨에도 홍성표 협회장을 만나기 위하여 문선명 교주 저택에 찾아갔습니다. 그 동안에는 교회 건축을 위하여 몇 번 김영휘 회장님과 같이 저택 안에 문선명 교주를 만나러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교주 저택에 들어가지 않고 저택 밖에서 홍성표 통일교 협회장이 문선명 교주에게 문안 인사와 경배를 하고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홍성표 협회장의 운전기사와 같이 살을 에이는 칼바람 같은 그 추운 겨울에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아침식사와 점심식사도 하지 않고 홍성표 협회장을 기다렸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부정인사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기 위하여 저를 속이고는 아침 9시경에 다른 통일교 간부의 차를 타고 통일교 협회 사무실로 가버렸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김정수 목사에게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를 피하여 한남동 저택에서 도망 왔다고 말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통일교 폭력집단의 한국 통일교 협회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저는 홍성표 협회장의 운전기사가 저를 속이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문선명 교주와 회의하는 줄 알았습니다 참으로 그 추운 겨울날 하루 종일 식사도 하지 않고 새벽부터 저녁 5시까지 그 긴 시간을 발을 동동 구르며 떨어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 바람이 저를 떨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통일교의 잔인한 폭력과 야비한 홍성표 협회장과 김승철 총무국장의 악한 행위 때문 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1월 8일 강남의 홍성표 협회장 집으로 찾아가 새벽 5시부터 밤7시까지 기다렸습니다. 노원교회 박준철 목사가 만나 뵈러 왔다고 했지만,"협회장이 나가셨다" , "안 들어왔다" 고 계속 말을 반복하였습니다. 홍성표협회장이 저를 만나지 않기 위하여 집에서 운전기사와 서로 연락하며 피하는 것으로 알고 마음도 몸도 얼음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기진맥진하여 노원교회로 돌아왔습니다.

통일교에 입교하여 목숨을 걸고 온갖 박해와 가시밭길을 걸어온 목사의 길이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배신감에 눈물이 한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끝없는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심정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통일교 부정과 충격적인 쇼크로 저는 그만 화병을 얻어 심장병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통일교가 아니라 사람을 파멸시키는 죽음의 교회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겹사돈인 홍성표 합회장은 문선명 교주에게 최고의 충성과 사랑,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협회장 직에서 박탈당하였고 문선명 교주와 원수가 되어 겹사돈도 깨어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뇨와 여러 병으로 바깥 출입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첫째 아들인 문효진과 홍성표 협회장의 첫째 딸인 홍난숙은 결혼을 하였습니다. 홍난숙은 25살의 나이에 이미 5남매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지만 문효진의 마약과 SEX, 감옥, 폭행을 참다 못해 이혼하여 가정이 파탄되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의 아들딸은 문선명 교주와 원수가 되었고 통일교를 탈퇴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아들딸을 바친 홍성표 협회장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있을 것입니다. 홍성표 전 협회장은 당뇨병과 만병으로 거동도제대로 하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 문선명 교주에게 영혼과 육신을 빼앗긴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시 1991년 1월 11일 금요일 아침 9시에 통일교 협회 김승철 총무국장을 만나 눈물로 호소하고자 찾아갔습니다. 저는 그 며칠 동안 쇼크를 받아 매일 심장이 떨리고 숨이 가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조식 금식 기도를 하고 아침 일찍 김승철 국장을 만나기 위하여 청파동 협회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제가 눈물로 호소하는 소리를 김승철 국장은 단칼에 잘라 버렸습니다. 저는 김승철 국장이 노원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불신하는 몇 사람을 회개시키지 않고 끌어 모아서 저를 더 불신하게 한 것에 대한 직언을 하였습니다. 협회에서 교구장으로 발령하고 하루만에 김승철 국장이 전도한 서유성 교회 장을 교구장으로 바꾼 이유와 불법을 저지른 내용을 놓고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김승철 국장에게 왜 인사부정을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동시에 저에게 공갈 협박을 하며,주먹으로 제 뺨을 쳤습니다. 순식간에 제 입이 찢어져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러자 저는 왜 때리느냐고 항의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먹으로 제가슴과 배를 발길로 걷어찼습니다 그리고 두 국장이 합세하여 저를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가하였습니다.

통일교 협회에는 홍성표 협회장만 없고 전 국장과 부장, 과장, 계장, 여직원들까지 모여 박준철 목사의 폭행장면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저를 잔인하게 두 국장이 무차별적으로 폭행하였던 것입니다. 협회 총무국 사무실에서 전체 직원들이 모여들어 저 한 사람을 가운데 놓고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했지만 누구 한 사람 말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폭행을 당하여 몸을 가눌 수 없었습니다 폭력에 대항해 보려고 했지만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한 쪽 팔을 쓰지 못하는 장애 때문에 더 힘들었습니다 저는 몰매를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저의 양복과 와이셔츠는 피범벅이 되었고 옷이 찢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한참을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한 후 이상수 전도국장과 몇 사람이 일방적으로 폭행을 가하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국장을 제지하여 수습이 되었습니다. 저는 몸을 가눌 수도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겨우 협회 총무국을 나와 출입구 계단에 앉아 많은 시간을 보낸 후 겨우 의식을 회복하여 태릉 성심의원에 갔습니다. 병원에서 응급 처치후 4주 진단을 받았습니다.

저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가정국장을 고소하여 감옥에 집어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당시에 마취되고 세뇌되어 문선명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고소하지 못하였습니다. 노원교회 목사가 통일교 최고위층 협회 총무국장과 가정국장에게 부정 인사를 당하고 통일교 협회 사무실에서 무차별적으로 폭행까지 당했다고 신문에 보도되어 통일교가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노원교회에 돌아와 눈물로 몇 달을 보내야 했으며 오랫동안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두 국장의 폭행으로 인하여 저의 머리와 배, 가슴, 옆구리를 걷어차여 그 충격으로 회복할 수 없는 심장병을 얻었습니다. 김승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에게 폭행을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고 양복이 다 찢어진 모습으로 제가 노원교회에 돌아왔을 때도 어린 저의 자녀 3남매와 저희 부부는 절망하며 울었습니다. 매일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는 저를 보고 어린 저의 자녀 3남매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린 저의 자녀 3남매는 통일교 목사들이 사람 패는 깡패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깡패보다도 더한 폭력집단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이 폭행사건은 문선명 자칭 참부모 구세주를 믿고 '절대신앙, 절대복종,절대사랑'하라는 명령을 받고 세뇌되었지만 서서히 문선명 교주로부터 세뇌에서 깨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사랑 받았다면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제16장 빼앗긴 교구장직과 노원교회까지 쳐들어 온

 

김승철 총무국장과 협회 전직원 시위대
 

제 1 절 노원교회까지 쳐들어온 김승철총무국장과 협회 직원들
 

1991년 1월 13일 일요 예배날 이었습니다. 저는 온 몸이 아파서 몸을 가눌 수 없었지만 사력을 다하여 단상에 올라가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노원교회 전체 교회가 가득 찬 가운데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설교를 막 시작한 순간 한국 통일교 이인자 김승철 총무국장, 이상수 전도국장(1962년도 합동 결혼식자), 김철현 가정국장 등 협회 전 국장과 협회 총무부장 박석규, 전도부장 오덕수 등 부장 전체, 과장 전체, 계장전체, 협회 여직원 전체를 총동원하여 왔습니다.

저를 쫓아내고 폭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협회장을 제외한 수십명이 노원교회로 데모를 하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저와 절친했던 신승철 가정부장과 김형길 문화부장은 의리를 지키기 위해 김승철 국장에게 미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승철 가정부장은 후일 간경화로 죽었습니다.

통일교에서 열정을 가지고 문선명 교주를 믿고 충성했던 사람중에 암병이나 심장병, 그 밖의 질병으로 고통 당하는 사람이 제 주위에 많았습니다. 과중한 스트레스와 충격적인 쇼크로 죽은 사람이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의리를 지켜준 신승철 가정부장과 김형길 문화부장에 대해서 그 당시에고맙게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신승철 가정부장은 서울에서 같이 목회를 하며 노원교회 교회 건축 헌당식 때도 축전까지 보내주었습니다. 노원교회 교회 건축 헌당식 때 협회장과 간부들이 거의 왔었습니다. 그러나 협회 총무부장인 박석규와 전도부장인 오덕수는 오지 않았습니다. 헌당식에도 오지 않았던 박석규와 오덕수는 김승철 하수인이 되어 오니 배신감과 분노가치 밀어 올랐습니다.

일촉두발의 순간이었습니다. 교회 예배 시간에 웅성웅성하고 몸싸움이 일어나고 노원교회 교인들과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부터 평직원이 떼거리가 되어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습니다. 저는 예배 설교 단상에서 내려가 112에 전화를 걸어 경찰을 오라고 해서 협회 국장과 부장, 과장, 여직원까지 노원교회 교회에서 밖으로 다 끌어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통일교가 망신당하는 것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는 주일 예배 때 어떻게 설교를 하고 끝마쳤는지 모릅니다 재직 회장과 부인 회장, 충성했던 변함숙 권사 등 전체 식구들과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 이하 협회 직원들과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통일교는 조직이 있었기에 통일교 이인자인 김승철 국장과 국장단, 전 직원들 앞에 노원교회 교인들은 원통하고 분하지만 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여야 했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을 중심으로 문성숙, 고귀숙, 최인자 등은 그 동안에 교회 발전을 가로막고 암적인 역사를 했습니다. 저를 불신하며 김승철 국장과 합세했던 몇 명의 교인들까지 총동원하여 김승철 총무국장은 밀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 교회에서 충성했던 이수성 집사(1970년 합동 결혼식자-777쌍)도 그 자리에서 의리를 저 버리고 저를 배신하였습니다.

노원교회 교구장으로는 김승철 총무국장의 동서인 나상렬 목사(1962년도 72쌍 결혼식자)가 교구장으로 왔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 부인과 나상련 목사 부인은 같은 자매였던 것입니다. 치욕적인 수치와참을 수 없는 분노의 날이었습니다. 이런 악연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참으로 가증스러운 죄악의 역사 앞에 저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고 한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김영휘 회장이 1990년 11월 26일날, 문선명 통일 교주의 명령으로 한국통일교 협회 회장직에서 사임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임으로는 일화 홍성표 사장이 취임을 하였습니다 저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김영휘 협회장은 1970년부터 1990년 11월 26일까지 전국 통일교 목회자들의 형님이었고, 아버지 같이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의 심정과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 이였습니다. 김 영휘 회장님은 중간에 잠시 회장직에서 물러났을 뿐 저는 거의 전부를 김 영휘 협회장을 모시고 목회를 하였습니다.

저는 1991년 1월 13일 홍성표 협회장을 제외한 김승철 총무국장과 각 국장들, 부장, 여직원까지 시위를 벌리며 밀고 들어왔을 때 저는 몇 마디만 하고 2층 사택으로 내려왔습니다. 제 자신이 무력하고 힘이 없는 목회자라는 것을 처절하게 느껴야 했습니다. 3층에서는 김승철 국장이 노원교회 교인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교인들에게 온갖 말로 변명만 늘어놓았습니다.

김승철 협회 총무국장의 감언이설에 속은 노원교회 교인 중 저의 은혜와 사랑을 배반한 몇몇 교인이저에게 직접 시위를 벌렸습니다. 2층 사택의 안방 안에서 3일 동안이나 문을 걸어 잠그고 온갖 행패를 부렸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노원교회의 이수성 집사였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1970년 777쌍 합동 결혼식자인데, 잠시 목회도 하였던 사람입니다. 한쪽 팔을 못 쓰는 장애를 가진 사람입니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후 두 아들을 낳고 아내는 사망하였습니다. 혼자두 아들을 키우며 사는 것을 저는 안타깝게 생각하고 노원교회 어떤 통일교 교인들보다도 불쌍히 보고 긍흘하게 보는 마음으로 사랑하였습니다. 충성하라고 장년 회장 직책까지 임명하였습니다.

저는 이수성 집사의 두 아들을 위하여 자주 심방하였습니다. 갈 때마다 먹을 것을 사다 주었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화물차 한 대로 짐을 실어 나르는 영업을 하였습니다. 이수성 집사가 집에 없을 때도 두 아들을 위해 저는 심방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수성은 저의 은혜와 사랑을 저버리고 김승철 국장과 단번에 짝이 되었습니다. 재직회장, 부인회장, 전 교인이 김승철 총무국장에 대하여 분노하는데 오직 장년 회장인 이수성 집사 혼자만 김승철 총무국장편에 서서 은혜를 배반하는 행위를 하였습니다.

이수성 집사는 목사 사택인 저의 안방으로 들어가 3일 동안을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를 보고 목사라고 하지도 않고 "너는이제 노원교회 목사가 아니다. 노원교회 목사는 나상렬 교구장이다(김승철총무국장 동서 - 1962년 72가정 합동 결혼식자). 박준철, 너는 노원교회에서 나가라" 고 하면서 시위를 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온 집안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은 그 당시의 충격으로 통일교를 떠나버렸습니다. 저의 가족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눈물로 3일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의 부부는 안방에서 못 자고 이불도 없이 마루에서 추운 겨울밤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는 악몽같고 지옥 같은 통일교의 목사 길을 극기 훈련하는 심정으로 인내하고 문선명 교주를 믿으며 충성하고 살아온 날들이 한없이 후회되었습니다.

저는 김승철 총무국장과 김철현 가정국장의 폭행과 인사비리 부정에 대한 쇼크로 심장병을 얻었으며 간을 너무나 못쓰게 되고 과도한 스트레스로 담석증을 얻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위장병도 얻고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사이비 종교 중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종교 같이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잔인하게 인사 부정을 하고 자르는 곳도 없을 것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목사와 회사 직원들이 아내, 자녀들이 있고 행복해야 할 권리가 있는데도,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그룹 내 기업체 통일교 교인들의 회사 직책을 하루아침에 박탈시켜 버립니다. 손바닥 뒤집듯 칼로 생선을 자르듯 목사 직책과 기업체 직책을 박탈하는 살인적인 행위를 생각하니 치가 떨립니다.

저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로부터 잔인한 인사와 간부들에게 폭력 및 폭행을 당하며 언제 심장병으로 쓰러져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문선명 가짜 재림주에게 미쳐 있었습니다.

 

제 2절 나상렬 노원교구장의 배신
 

저는 폭력과 폭행 앞에 항변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제 목숨을 바쳤던 노원교구 본부를 피눈물을 흘리며 떠나야 했습니다. 저는 목회 의욕을 잃어버렸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였습니다. 저는 너무나 자주 충격을 받고 폭행을 당하여 실어증과 심장병, 불면증 합병증으로 지금 현재까지도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하고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이 곤란할 때마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있어야 했습니다. 저는 '심장병으로 죽으면 억울해서 영계에 어떻게 가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현실 앞에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나상렬 교구장에게 당분간 노원교회 목사 사택에 살면서 빠른 시일 내에 노원교구 관할인 공릉동 교회로 가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사짐은 지하실 창고에 쌓아 놓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나상렬 노원 교구장은 대 선배 목사로서 항상 좋은 자리만 차지했기 때문에 강남에 좋은 저택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그런 나상렬 교구장은 강남 집에서 노원교회로 출퇴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나상렬 노원교구장과 약속한대로 노원교회에 잠시 생활했습니다만,나상렬 교구장은 온갖 방해와 여러가지 압력을 행사 하였습니다. 결국에는 나가라고 하는 소리까지 하였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나가겠다고 하였는데도 나상렬은 김승철국장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노원교회 교인들을 동원하여 차마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저에게 하였습니다.

저는 나상렬 교구장의악 랄한 처사에 못견뎌 눈물로 공릉동 2층 전세 교회 내에 있는 합판으로 만든작은 방 2칸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장인 장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셔서 제가 죽을 때까지 노원교회에 교구장으로 있을줄 알고 사준 장롱, 화장대, 장식장 등 온갖 가구들은 공기도 통하지 않는 지하실창고에 다른 이사짐과 함께 쌓아 놓았습니다. 곰팡이가 피고 습기가 차 못쓰게 된 가구와 옷,책은 제가 1년 후 이사를 할 때 버려야 했습니다.

저를 불신한 통일교 교인들은 힘 있는 김승철 총무국장에게 달라붙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노원교회교인들에게 김승철 국장은 그 국장자리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습니다. 그 말은 7개월 만인 1991년 8월 30일에 문선명으로부터 총무국장직을 박탈당하였습니다. 김승철 총무국장은그 후 몇 년 동안 일본의 통일교 선교사 일을 하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사망하였습니다.

 

제 3 절 공릉동 교회의 지옥같은 생활
 

공릉동 교회는 노원교회보다 건물이나 재적인원, 예배인원, 헌금 등이 20분의 1도 되지 않았습니다. 또다시 10여명의 통일교 교인이 있는 개척교회의 목사로서 시무해야 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거지 목사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억울한 일들 때문에 심장병을 얻어 모든 의욕을 잃어 버리고 눈물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저의 아내나 자녀들도 불안과 공포 속에서 지냈습니다. 마음이 너무나 아팠고 괴로움의 나날이었습니다. 가정 분위기는 초상집과 같이 침울하였고 제 자신은 그 동안에 통일교에서 당한 한을 풀 길이 없어 강팍해져 버렸습니다.

제가 어렵고 힘들 때마다 형님같이 저를 이끌어 주셨던 K교구장님이 있었습니다. K교구장님은 자신이 통일교 대 선배 축복 가정 목사였는데도 뺨을 맞고 폭력을 당했다고 하며 제가 폭행을 당한 것을위로해 주었습니다. 유지철 목사도 1981년도 10월 20일, 서울 시내 선배 목사 동원령이 내렸을때 후배 목사인 최정철 목사에게 나무 몽둥이로 무차별적 인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최목사는 피와 땀으로 교회를 개척하여 전세 교회를 마련 하였는데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후임 목사인 유지철 선배 목사에 자기 교회를 빼앗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정철 목사는 나무 몽둥이로 폭력을 행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정철 목사는 능력 있고 교회를 잘 부흥시키는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문선명 교주가 환멸과거짓, 재림 주라는 것을 알고 통일교를 탈퇴하였습니다. 지금은 세상에 나가서 사업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1991년 2월 3일 노원교구 관내인 공릉동 통일교에 취임을 하였습니다. 그 동안 공릉동교회는 비참하고 어려워 목사가 없었습니다. 이 무슨 역사인지 제 목숨을 바쳤던 노원교구 본부교회를 멀리 떠나지 못하고 노원교구 본부교회 지시를 받아야 되는 공릉동 개척교회로 취임식을 해야 했습니다. 매달 월말 회의를 노원교구 본부로 가서 해야 했습니다. 저는 노원교회를 빼앗겼는데 그 곳으로 매달 회의를 가야했습니다. 저는 매달 목사들 월말회의 때가 회의시간이 아니라 고문하는 시간 같았습니다.

월말 목사들 회의시간이 지옥 같았고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헌금이 없기 때문에 생활을 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교인이 아닌 세상 사람이 가끔씩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단 10원의 생활비도 지원해 주지 않았습니다. 저는 자녀 교육과 생활을할 수가 없어 아내가 파출부일과 식당일을 계속하여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공릉동 개척 통일교로 취임을 한 후, 하루아침에 생활과 재정이 파탄 되었습니다. 노원교회 재직 회장이었던 윤승운 장로와 부인 회장 최선례 집사,노원교회의 정신적인 어머니였던 변함상 권사, 저의 동생들이 노원교회를떠나 공릉동교 회로 옮겨 저를 도왔습니다. 그러나 몇 사람을 가지고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저는 심장병과 육신의 병으로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육신의 병도 문제지만 제 영혼의 아픔과 배신감 때문에 목회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제 17장 전국 통일교 목사전체 500명의 박탈당한 목사직

 

제 1절 교회사택에서 쫓겨난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


1991년 8월 30일날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전국의 목사들을 단 한 마디 회의나 상의 없이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자기 친척들을 전도하는 종족적인 메시아 활동을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전국의 통일교 목사 500명 전체를 단칼에 무우 자르듯 목사 직책을 박탈하여 버렸습니다.

전국 통일교를 1991년 8월 30일부로 모두 폐쇄하고 해산한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통일그룹 내, 통일교 합동 결혼식 한 교인은 무조건 통일교 회사에서 퇴사하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 친척들을 전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영업을 하는 통일교 교인이나 세상 회사에 다니는 통일교 교인들도 폐업과 퇴사를하고 고향으로 돌아 가라고 문선명 교주가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그룹 내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통일교 교인들을 강제적으로 퇴사를 시켜구조조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통일교 회사를 살리고자 그렇게 몸부림을 쳤지만 근본적인 회사경영의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통일그룹이 IMF때 부도를 내고 파산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을 박탈당한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교 회사에 다니던 통일교 교인들은 강제 퇴직을 당하여 대 혼란이 벌어졌습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은 불안과 공포, 방황 속에 있어야 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과 더불어 당장 먹고 살 곳이 없었습니다. 목사들은 통일교에서 쫓겨나 거리에 내몰렸습니다 졸지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자녀들이 초 ·중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데 갑작스런 문선명 교주의 명령으로 목사직 박탈이 되어 처절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목사들에게 목사 경력에 따라 돈을 지급해 주었습니다. 통일교 목사 생활 1~5년을 한 목사는 100만원, 5~10년 목사 생활을 한목사는 300만원, 10~15년 목사생활을 한 목사는 300만원, 15년 이상 목사생활을 한 목사는 400만원씩을 지급하였습니다.

서울 시내 5인 가족이 방3칸 정도의 전세방을 얻으려고 하여도 5천 만원 이상을 주어야 전세를 얻을수 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언제나 교회 사택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집이 필요 없었습니다. 통일교목사들은 언제나 처절하게 가난하게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아 놓은 돈도 없었습니다. 매 주일마다 나오는 헌금으로 자녀 교육비와 가정생활 하기도 벅찼습니다. 문선명은 그런 통일교 목사 500명을 졸지에 갈 곳도 없이 교회에서 쫓아내고 엄청난 충격를 주었습니다. 전국 통일교를 폐쇄하고 해산한다고공문으로 전국 통일교와 교인들에게 명령을 시달했습니다. 그러고는 1달만에 전국 통일교를 해산하지 않고 폐쇄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전국 통일교와 교인들에게 공문으로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선명 교주는 위선과 거짓으로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속인 것이었습니다 전국 통일교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 큰아들인 문효진 9세 재림주 체제를 만들기 위하여 문선명 교주와 홍성표 협회장이 현직 목회자들의직책을 박탈시켰던 것입니다 홍성표 협회장은 통일그룹 내 기업체 살리기위 한 작전으로 통일교 교인들을 잘라 낸 것이었습니다. 회사 구조조정과 경영개선을 하려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이 나이가 많고 교회 부흥은 안 시키고 적당주의, 형식주의에 치우쳐 있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70세가 넘는 고령이어서 자식인 문효진을 자신이 살아있을 때 후계자로 세우려고 작전을 한 것이었습니다. 홍성표 협회장이 문선명의 큰아들이며 홍성표 협회장의 첫 번째 사위인 문효진 체제를 만들고자 문선명과 한 짓 이었습니다. 문선명은 홍성표 협회장과 같이 통일교 해산 1달후문효진이 마음대로 명령하고 지시할 수 있도록 젊은 목사체제로 구축하였습니다.

저보다 7년 늦게 합동결혼식을 한 1982년도 6,000쌍 합동 결혼식을 한 젊은 사람만 통일교 목사직을 수행할 수 있게 했습니다. 1982년도 이후 합동 결혼식자인 어린 목사들을 전국 통일교에 목사로 발령했습니다. 문선명은 젊은 통일교 목사들을 모아놓고, 나이 많은 전 통일교 목사들을 멱살잡이를 해서라도 전국 통일교 사택에서 끌어내 쫓아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교주는1991년 1월에 "젊은 통일교 목사들이 힘을 두었다가 어디다 쓸 것이냐?" 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전세금도 자녀 교육비도 집도 없어 당장 갈 곳이 없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당한 나이 많은 통일교 목사들은 젊은 목사 눈치를 보며 한 교회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나이 많은 40대 통일교 목사들은 20대, 30대 젊은 통일교 목사들에게 온갖 모욕과 무시를 당하며 생지옥과 같은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자기 교회의 교인들까지도 전임 목사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전국의 통일교에서 전임목사와 후임 젊은 목사는 갈등을 겪었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문선명에게 하루살이 같이 일생 동안 충성하고 이용물이 되어 목사직에서 박탈당한 후 자신의 고향에도 가지 못하였습니다 통일교 기업체에서 직책을 박탈당하고 회사에서 쫓겨난 통일교 교인도 이사 짐을 싸서 고향에 갈 수 없었습니다. 고향은 커녕 통일교에서 쫓겨난 목사들과 통일교 회사에서 쫓겨난 통일교 교인들은 당장 먹고 살 일이 막막했습니다. 배운 것도 기술도 경험도 없었습니다. 당장 아내와 자녀들은 굶주려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몇몇 통일교 목사들은 빛을 내고 있는 돈을 모아 식당을 했지만 대부분 망해 버렸습니다. 가게를 해도 경험이 없어 실패를 하는 목회자도 있었습니다.

돈이 없는 통일교 목사들은 지하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했고 건설 현장에서 벽돌과 시멘트일, 도배일, 온갖 막노동을 하였습니다. 어떤 통일교 목사들은 목사직 박탈 후 다단계 판매 사업을 하여 빚더미에 올라 앉았습니다. 여러 명의 목사들이 다단계 금융 사기에 걸려들어 거액을 날리고 다단계 금융사기죄로 전과자가 되어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 당한 통일교 목사들은 문선명 한 사람의 죄악으로 졸지에 한참 정상에 서야되는 40대. 50대에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거지가 되며 전과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도처에서 목사직을 박탈당한 목사 가족들이 단칸 지하셋방에서 3대가 같이 살아야 하는 비극적 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목사직을 박탈당한 목사의 아내는 파출부로 신문배달로 식당 종업원으로 막노동 일로 생선장사로 보험 모집원으로 이 세상에 밑바닥 일을 했습니다. 처참하고 가난하며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 2 절 7개월만에 박탈당한 500명의 목사들
 

1991년 9월 1일부터 전국의 통일교 목사 500명과 통일교 회사에서 퇴사한 통일교 교인들과 자영업을하는 통일교 교인은 종족적인 메시아 역할을 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본래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집을 매도하고 전세금을 빼고 하여 완전히 고향으로 이사를 가라는것이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명령 이었습니다. 생업이나 회사생활. 자녀교육은 문선명 교주에게 안중에도 없는 일입니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문선명 사이비 교주만이 그런 공포의 명령을 내릴 수가 있는것입니다.

저도 노원교구 내 공릉동 통일교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들과 같이 목사직을 박탁 당하였습니다 .선배통일교 목사들은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에 최고 충성하고도_그렇게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고 폭헹을 당했는데 왜 가만히 있느냐 ?"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 형제, 친척과 고향 동네 사람들에게 문안인사를 드렸습니다. 경남 하동 고향 땅에 가 고인이 되신 아버닐과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하동 교회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 도착 신청서를 제출하였슴니 다. 그리고 어머님을 뵙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통일교는 모든 교회 일 처리가 명령만 있고 형식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언제나 행사로 시작해서 행사로 끝나버리는 것이 통일교의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47여 년을 통일교는 내실 없이 형식에 치우친 행사만 하였습니다.

경날 하동 고향에 갔던 것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 목사 직분을 박탈당한 목사들은 고향에 있는 통일교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 신청서를 내야 문선명 교주에게 순종했다는 표시가 되기 때문 이었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에서 박탈당한 목사들에게 2~3개월 생활비밖에 되지 않는 1백~4백만원을 퇴직금이라고 주었기 때문 이었습니다. 그것이라도 받아와야 당장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고향에 다녀왔던 것 입니다. 저는 공릉동 통일교에 합판으로 방 3칸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빼앗겨야 했습니다. 공릉동 통일교는 교회 책임자로 처녀 전도사가 왔습니다. 저는 양해를 구하고 겨울을 나고 이사 가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저는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지만 영혼과 육체가 폐인이 되었고 심장병으로 막노동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의 아내는 아침부터 밤까지 파출부 일과 식당 일을 했습니다. 참으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무력한 모습을 아내나 자녀들에게 보여 주어야 했습니다. 엄동설한과 더불어 제 마음은 더 혹독한 추운 겨울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제 3 절 목사직에서 박탈된 후 독서실 운영


저는 문선명 통일교 교주로부터 목사직이 박탈된 후 저의 아내와 자녀들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신설동 부근의 동신 독서실을 계약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저를 속인 것이었습니다. 독서실에서는 독서실 실장이 관리를 잘못하여 독서실 내에서 술을 마시고 기타치고 남학생이 여학생을 추행하는등 독서실을 망쳐놓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120명 있다고 했는데 2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해약해 달라고 하였습니다만 계약금 일부를 겨우 돌려 받고 계약금을 포기하였습니다.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둔 후 첫 사업이었는데 잘못 계약한 것 이었습니다. 저는 또다시 정릉에 있는 고명상고 옆 대원독서실을 계약하고 인수하였습니다. 그런데 인수후 한달만에 재개발 지역이 되어 미아리 고개와 아리랑고개 사이에 있는 집들이 철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독서실을 소개하는 전문 부동산 업자도 저를 속였던 것입니다.

독서실 주위에 한 쪽 부분만 철거가 되지 않고 주위 전체가 다 철거를 하고 아파트를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1년 동안 대원 독서실을 운영했는데 전 가족들이 매달려 고생만 하였습니다. 그나마 철저하게 독서실을관 리하고 운영한다는 소문이 나서 현상유지는 할 수 있었습니다. 대원 독서실을 1년 동안 팔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 천지에는 저 같은 바보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결국 대원독서실을 폐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보증금은 건물주인에게 받았지만 시설비 2천5백만원은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다 날렸습니다. 선풍기 5천원, TV 5천원, 냉장고 1만원, 자판기 3만원을 받고 고물 장사에게 팔고 독서실 의자와 책상은 중고 물품 취급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돈을 주고 철거해야 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마치고 교문으로 나오면 학생들을 차에 태워 독서실까지 데려와 공부를 시키고 새벽 2시에 학생들을 집에까지 실어다 주어야 했습니다.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학습분위기 조성, 청소 등 너무나 힘든 일 이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목사생활을 할 때처럼 정신적인 충격과 스트레스 등이 없었기 때문에 독서실 운영하는 것이 마음은 훨씬 편했습니다. 1년 동안의 대원독서실의 운영은 제가 2번째 속아서 계약하여 2번째로 독서실운영의 피해를 본 것이었습니다. 사회 경험이 없는 저는 또 한 번의 쓴 잔을 마셔야 했습니다.

 

제 4 절 고시원 운영 중 다시 꿈꾸게 된 목회 길
 

저는 싸고 낡은 고대 옆 고시원을 인수하였습니다. 고시원은 대학생 중심으로 한 생활이기 때문에 밤마다 독서실에서 처럼 중 고등학교 학생들 같이 차로 집에 데려다 주지 않아서 조금 편했습니다. 지옥 같은 공릉동 통일교를 떠나 고시원 옆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동안에 한푼 두푼 적금을 붓고 은행에 예금하고 모은 돈과 상계동 무허가 집을 팔은 돈으로 고시원을 인수하고 집도 전세로 얻었습니다. 고시원 학생들의 식사도 해 주었습니다.

고시원 시설은 낡았지만 대학 내에 저희 고시원에서 시험을 보면 무슨 시험이든지 합격이 잘 된다는소문이 퍼져 많을 때는 60명이 넘어 고시원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I~2년 운영 후 주위에 점점 최신식 고시원이 들어서고 원룸 고시원이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저희 고시원은 저희 부부 인건비 정도 수익이 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시, 행시, CPA, 취직시험, 각종 공무원 시험을 치는 학생들에게 아버지 같고 형님 같이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그 낡은 고시원에서도 계속적으로 이용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저는 학생들이 각종시험에 합격되었다고 할 때마다 고시원 원장으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습니다. 제가 고시원에서 한 학생, 한 학생을 놓고 기도 하다 보니 각종 시험에 합격을 잘하였던 것입니다. 학생들은 저희 고시원은 행운이 따르는 고시원이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고시원 운영 중 임순도 종로 교구장 겸 통일교 부협회장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의 통일교 충성과 저의 사명감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분 이셨습니다. 임순도 부협회장이 계실 때 제가 서울 강서 교구 본부 교회를 허허벌판에서 개척하고 교회를 부흥시켜 교회 건축을 하고 하나님께 봉헌하는 헌당식도 못한 사실을 임 교구장은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선배 통일교 목사에게 눈물로 양보했던 서울 강서 교구 본부 교회에 가서 목회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서울 강서 교구 본부 목사로 저를 발령을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고난과 눈물, 충성, 한국 최고의 목사로서 실적을 잘 알고 있었던 임순도 부 협회장님은 저를 서울 강서교회 목사로추천해 발령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동안의 억울함,부정 인사이동, 언제나 통일교 선배 목사에게 양보하고 온갖 폭행과 폭력을 당하며 그 충격으로 심장병 ·담석증 ·위장장애 ·불면증까지 겹쳐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저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하루 하루를 살고 있으면서도 마지막으로 제가 땀과 눈물로 교회 건축을한 강서 교구본부에서 마지막 목회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통일교 목사로 지옥 같은 통일교 목사 생활을 했으면서도 통일교 목사직을 또 소망했습니다. 제 자신이 정신 이상자가아니고서는 어찌 문선명 교주의 쇠사슬에 코를 끼려고 했겠습니까? 저는 너무나 세뇌되어 다시 통일교 목사가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소망을 갖고 제가 운영하는 고시원을 매매한다고 바로 광고를 내었습니다. 고시원만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부동산 회사에서 즉각 저의 고시원을 팔아주었습니다. 너무나도 문선명 교주에게 빠져있었던 저는 제 사명이 목사이기 때문에 목회를 해야 한다고 다른 길은 저에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때 고시원을 매도하였던 것을 지금까지도 후회하고 있습니다.

고시원 정리 후 임순도 부협회장과 변함숙 권사를 만나 함께 곽정환 협회장을 찾아갔습니다. 임부회장은 박준철 목사가 서울 강서교구를 개척하여 발전시켜 강서교구 본부를 건축하였는데 헌당식도 못하고 선배 통일교 목사 때문에 강제 인사이동이 된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곽회장은 고향인 경상남도로 가서 목회활동을 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목사 활동을 해야 한다고 거절했습니다.

곽정환 회장에게 1년 전에도 변함숙 권사님과 함께 곽정환 회장집을 방문하여 서울 강서교회 목사로 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제가 노원교회의 변함숙 권사와 함께 곽정환 회장을 만난 것은 서로 잘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변함숙 권사는 통일교를 초창기에 나오신 분으로 통일교가 이단교회라고 남편이 핍박하고 마침내 이혼까지 당하고 외동딸과 같이 다녔습니다. 문선명은 변권사에게 "변권사는 이름대로 변함없이 참 부모님을 영원히 믿고 충성하는 신앙자이기 때문에 나도 기억하고 있다" 고 하며 칭찬도 하였습니다. 변권사는 문선명의 교주 옷을 만들었고 외동딸은 통일교 합동 결흔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통일교 사업으로 꽃을 팔며 전도를 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일생 동안 재혼도 하지 않고 외동딸을 키워 통일교 합동 결혼식까지 시켜 놓았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 때문에 사랑하는 외동딸이 전도와 꽃팔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변함숙 권사님은 찢어지는 마음과 충격으로 몸을 가눌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장례를 치른 후 변함숙 권사님의 딸은 교통사고 피해자였기 때문에 소송을 하려고 했습니다.

 가해자는 미국 시민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 통일교 협회에서는 소송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통일교에서 전도하고 꽃팔이를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인데 소송을 걸게되면 문선명 교주와 통일교가 미국 사회에서 명예가 훼손된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가 망신을 당한다고 손해배상 소송을 걸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교주와 통일교 협회에서는 변함숙 권사님의 외동딸의 교통사고 보상과 위로금을 단 10원도 주지 않았습니다.

변함숙 권사님은 일생동안 문선명 재림주만 믿고 충성하고 순종하며 직업이라고는 가져보지 않았습니다. 사이비교에 다닌다고 남편에게 이혼 당할 때 위자료로 받은 큰집을 팔아서 일생동안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변함숙 권사가 남편과 이혼하고 외동딸과 살 때 변권사님 집에서 3년 동안을 함께 생활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곽 회장님을 만나 억울한 사정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차디차고 냉정한 곽정환 회장은 통일교 최고의 회장자리에 있어서 그런지 저 같은 목사의 말은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통일교 초창기 때는 목회를 조금 했지만 1970년 이후부터 세계 대학생 선교 본부장을 했기 때문에 목회자들과 저는 곽정환 회장을 잘 몰랐습니다. 문선명 교주 세 번 째 아들인 문현진과 곽정환 협회장 딸인 곽정숙은 결혼하였습니다.

큰아들인 문효진은 방탕과 마약, 이혼파경 등으로 후계자가 되지 못하고 둘째 아들인 문흥진은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문교주가 살아있는 처녀와 영혼 결혼시켜 놓고, 죽은 문흥진을 천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21세기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통일교 집단에서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죽은 문흥진이 재림했다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세뇌시키기도 합니다. 세 번째 아들인 문현진이 문선명 교주의 후계자가 되어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곽정환 회장은 홍성표 협회장이 자기 사위를 후계자로 세워서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던 것과 같이 자기 사위인 문현진을 후계자로 세웠습니다. 그 문현진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또다시 대대적인 인사이동을 하여 무자비하게 목사직을 박탈하였습니다.

2000년 9월 18일 세계일보 국제 연수원에서 벌어진 대 사건이 었습니다. 2000년 4월 30일에는 문현진이 통일교 세계 대학생 회장으로 취임을 하였고 전 세계 통일교 부회장 직책까지 갖고 문선명 교주의 지시에 의해 대를 이어 전세계 통일교를 이끌고자 동분서주 하고 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문선명 교주의 명령에 의하여 세계일보 부 회장직에서 박탈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선명 교주의 후계자인 자기 사위 문현진과 문선명 교주의 부인 한학자를 내세워 모든 실권을 거머쥐었습니다. 곽회장이 문선명 교주로부터 세계일보 부회장직에서도 박탈되었지만 한학자가 문선명 교주의 사후를 생각하라며 강력하게 곽정환 회장을 복직시키라고 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을 다시 세계 일보 부회장으로 임명하라고 남편인 문선명 교주에게 강력하게 주장하여 한학자의 힘에 의해 곽회장은 이틀만에 세계 일보 부회장으로 복직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문선명은 자신이 한국에 없을 때 통일교 목사와 교인들, 통일교 회사 사장단은 곽정환 회장의 명령과 지시를 받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가 사망하였을 때를 대비하여 곽정환 회장을 통일그룹 총 회장으로 세웠습니다.

 

 

제 18 장 부산 영도교회

 

제 1 절 부산 영도 통일교로 인사발령
 

저는 서울 고시원을 정리한 후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로 많은 돈을 쓰게 되었습니다. 서울 강서교회로 가는 것으로 알고 고시원을 정리 하였던 것인데 시간이 지난 후 제가 또 큰 실수 한 것을 알았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생활할 수 있는 터전이었던 고시원을 팔고 보니 잘못 결정한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이미 남의 고시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이 저를 "출신지인 경상남도에 가서 목사 생활을 하고 오라"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고향에 가서 종족적인 메시아가 되어 가정집에서라도 친척들을 불러 모아놓고 통일교 교인들로 만들어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 문선명의 명령 이었습니다.

무슨 빽으로,무슨 부정이 있었는지 저는 알수 없지만 통일교식 법을 지키지 않고 고향에 가지 않고도 서울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만 고향 교회에 가서 목사 생활을 하고 오라는 것 이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저보고 고향에 다녀오라는 말을 여러 번 하였습니다. 임순도 부 협회장님도 저보고 잠시만 부산 목회를 하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심장병이 있어서 고려대학 병원에 수 차례 가서 심장, 간, 담석증, 위장, 불면증 등으로 수술과 입원치료를 받았고 집에서 고려대학 병원까지 차로 실려간 해도 있었습니다. 가족들끼리 같이 살아도 힘들었는데 혼자 부산 영도에 가서 제 육신의 병고를 안고 거센 바닷바람과 싸우며 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부산에 곽정환 회장이나 임순도 부 협회장이 고향에 다녀왔다는 조건만 세우면 바로 서울 강서교회 목사나 노원교회 목사로 올라오는 것으로 믿고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취임을 하였습니다.

말이 영도 통일교 취임식이지, 영도 통일교 교인은 제가 갔을 때 실제로 2가정 밖에 없었습니다. 헌금은 교회 운영하는 공과금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부산 통일교 내에서 제일 최하위 교회인 부산 영도 통일교로 저를 추천하여 공문을 올렸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데 1996년 2월 28일날 협회 임종호 총무국장이 저에게 전화를 하여 "부산 정성호 교구장의 전화가 오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임종호 총무국장은 제가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발령이 났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부산 영도교회 수준이 어떠냐고 임종호 총무국장에게 물었습니다. 임종호 총무국장은 통일교가 어느 곳이나 가난하고 어렵듯이 부산 영도 통일교도 어려우니까 담임 목사가 없는 교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너무나 많은 고통과 가난, 시련에 생지옥과 같은 목회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먼저 걱정부터 앞섰습니다.

그러나 저는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시무하라는 말을 임종호 총무국장으로부터 듣기 전에 꿈에서 제가 큰 다리를 건너간 후 예배를 드리려고 몇명이 앉아 있는 광경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예배 장소가 쓰레기와 대변으로 가득 찬 교회였습니다. 저는 꿈에서 그 몇 사람과 쓰레기와 대변을 깨끗이 다 치웠습니다. 처음에는 몇 명이 앉아 예배를 드렸는데 나중에는 그  예배 장소가 교인들로 가득 찬 꿈을 꾸었습니다. 꿈을 깨고 바로 다음날 협회 임종호 총무국장으로부터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저를 발령하였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꿈에 보여준 대로 부산 영도라는 곳은 영도다리를 건너가야 하는 섬입니다.

영도교회는 총각 목사도 못하겠다고 도망을 쳐버린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그런 곳에 저를 발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의 뜻이 영도교회에 가라는 것이구나! 영도교회 교인 몇 사람을 데리고 교회를 발전시키라는 것이구나!' 라는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부산에는 교인은 많고 교세가 크고 안정된 통일교가 많았습니다. 저보다 합동결혼식을 7~17년을 늦게 한 어린 후배 목사들이 안정된 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혀서 더 이상 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 했는데 부산 영도교회 목사로 부임하고 보니 자부심과 긍지는 또 한번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모욕과 수치를 당하면서도 통일교 목사 생활로 문선명 교주에게 죽도록 충성한 것을 생각하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서러운 마음이 울컥하고 올라왔습니다. 저는 부산 영도 태종대 절벽바위 위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영도교회는 예배 장소만 있는 교회였습니다. 예배 인원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이고 교인들 헌금도 교회 관리비, 운영비를 하면 꼭 맞는 액수였습니다. 목사 생활비는 꿈도 꿀 수 없는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에게 세뇌되어 끌려가면서 하나님이 저를 필요로 하고 영도교회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으로 알고 결단을 한 후 영도교회에 취임식을 하였던 것입니다.

1996년 3월 10일에 서울에 가족들을 두고 홀로 부산 영도교회로 가서 자취생활을 하며 목사로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심장병과 만병을 갖고서 옛날 조선시대에 간신들의 모함에 의해 충신들이 귀양갔던 영도 섬에 도착하였습니다. 저는 "이 영도 섬에서 제가 살아서 서울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첫 기도를 하였습니다. 20년을 서울에서만 목사 활동을 하였는데 우리 나라 남단 부산 지방 영도 섬에 와서 목회를 한다는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제 이름은 호적에 박준기 라고 되어있습니다. 불꽃 '준' 에,구부러진 낭떠러지 '기' 자 입니다. 뜻을 말씀 드리면 제가 불꽃같이 성공하여 구부러진 낭떠러지에서 항상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열차, 절벽, 나무에서 떨어졌었고, 교통사고로 육신의 팔을 잃어버렸고, 목회에 성공하면 강제 부당 인사이동으로 빼앗기는 아픈 세월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고쳐주셨고 열국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래도 사라(공주)로 고쳐주셨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을 생각하고 박준기를 버리고 박준철로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박준철 목사는 교회 건물만 있으면 교회를 부흥발전 시킬 줄 알고 인사발령을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정성호 교구장은 오랜 시간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수택리 연수원에서 전국 통일교 목회자 교육을 하고 난 후 저에게 협회 국장들 앞에서 "부산 영도교회에 가서 성공하고 올라오라","잘 다녀 오라" 고  5번이나 당부하였습니다. 임순도 부협회장도 "부산에 잠시 다녀 오라" 고 하였습니다.

저는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처음부터 100일 기도, 전도, 심방 등 정말 밤낮 없이 교회 발전을 위해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로 이적이 일어나고 매 주일마다 새로운 교인들이 입교하여 순식간에 교회가 부흥 되었습니다.

부산 영도 통일교를 목사님도 없이 지키고 있었던 2가정이 있었습니다. 이진상, 하진희 순회사님 가정과 이광철, 이상희 부인회장님 가정으로 2가정이 저의 손발이 되어 죽도록 충성 하셨기에 교회를 부흥 발전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영도구 봉래동(지금현재 봉래 목욕탕 자리)에 신상진, 유신선 부부집에서 문선명이 교회 간판도 없이 방안에서 부흥 집회를 한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1953년 12월 24일에서 1954년 1월 14일까지 21일간 문선명 통일교 재림주는 부흥 집회를 밤낮으로 열정을 가지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원리강론을 정리하고 집필하였던 유원효 통일교 2대 협회장 유민효, 유영효, 송도욱장로(문선명 참부모 3대 비서실장), 신상진 유신선 부부, 김영희(여자,Y대학생, 문선명과 김영희는 SEX교리로 혈통 복귀하여 문희진 출생) 등이통일교 문선명 교주 부흥집회에서 통일교에 입교하였습니다. 그들은 최고로 충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통일교에 최고로 충성했던 교인들이 영도교회를 떠난 후 영도 통일교는 폐허가 되었고 47년이 된 영도 통일교는 중간에 폐쇄되는 때가 많았습니다. 많은 통일교 목회자들이 영도 통일교에서 노력했지만 좋은 결과가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부산 시내에서 사업이나 장사에 실패하여 방세가 싼 영도 섬에 와서 잠시 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이나 영도 통일교인은 영도 섬에서 살다가 부산 시내에 방 한 칸만 얻을 수 있는 돈만 되면 영도 섬을 떠나 부산 시내로 이사를 갔습니다.

제가 서울 노원 교구본부 철거민 달동네에서 개척할 때도 사업에 실패하거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시내에서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상계동에 와서 살다가 돈을 조금 모으면 교통 좋은 시내로 이사를 가버리곤 했습니다.

서울 노원교회와 같이 영도 통일교도 온갖 정성으로 교인을 만들어 놓으면 이사를 가버리기 때문에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영도 통일교에서 모든 악조건을 물리치고 3월 첫 달부터 순식간에 '일요일 예배드리는 교인 2배가 운동' 을 달성하여 교회가 부흥 발전을 하였습니다.

하진희 영도구 통일교 여성연합회장과 이상희 영도 통일교 부인회장과같이 하진희 회장님 자가용을 타고 매일 새벽 1시까지 말씀과 기도하며 전도하였습니다. 하진희 회장님은 사업을 하시는데 시간을 교회 발전에 전부를 투자하셨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님도 야구르트 배달을 하면서 영도구 야구르트 배달원 친목회장과 총무, 서기 등 많은 사람을 통일교 교인으로 전도하였습니 다.

 

제 2 절 부산 영도교회 부흥 발전
 

영도통일교는 지금까지 막다른 골목 안에 갇혀 있는 교회였습니다. 영도교회의 47년의 역사 속에서 사명감과 주인의식으로 사력을 다하여 목사생활을 했던 목사가 없었던 것입니다. 영도교회는 47년 동안 단 한 사람의 사명감 있는 통일교 목사가 시무하지 않았기 때문에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던 것입니다. 

영도 통일교에 길이 좁아서 자동차가 한 대도 들어 올 수가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수시로 불법주차 스티커를 받아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저는 교회의 콘크리트 기둥과 이중 대문을 전부 헐어 내어 교인들의 차를 교회 안까지 진입시킬 수 있게 대공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교회와 내부에 페인트칠을 하였습니다. 외부 페인트칠도 영도 통일교 교회 건축 16년만에 처음으로 하였습니다. 화단을 다시 만들고 문 전체를 수리하고 지하실과 창고마다 가득가득 쌓인 쓰레기를 전부 밖으로 끌어내 10 리어카 정도 되는 많은 양을 폐기 처분하였습니다.

제가 영도 통일교에 오기 전에 꿈에 본 그대로 영도 통일교는 쓰레기장 이었습니다. 창문 하나 하나마다 저의 정성을 들여야 했습니다. 그 동안 영도통일교는 독 안에 든 것같이 앞에 2층, 3충 집들이 가로 막혀 공기가 통하지 않고 사각형 안에 갇혀 있어서 도둑을 맞을 때가 많았습니다. 제가 영도교회에 시무하면서도 몇 차례 도둑이 들었습니다. 저는 도둑을 잡아서 교육하고 돌려보낸 때도 있고 파출소에 인계하여 부모형제를 불러 집으로 보낸 때도 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교회 안에서 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막혀 있었습니다. 제가 영도교회로 가고 나서 영도와 육지의 새 다리가 만들어진다는 계획 때문에 교회 앞의 2~3층 주택 전체가 헐리게 되었습니다. 영도 통일교는 8차선 도로에서도 보이게 시야가 확 트였습니다. 멀리서 보고도 영도 통일교를 알 수 있도록 새로 페인트칠을 하고 교회간판을 달았습니다. 옆의 주택은 도로 보상비를 평당 300만원씩을 받았는데 영도교회의 땅 10평은 도로라는 지목으로 평당 100만원밖에 주지 않갰다고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개인 땅이었는데, 통일교 협회에서나 과거 이곳의 목사는 도로가 만들어 질 때 개인 땅이라고 서류를 만들어 놓지 않고 교회 출입구를 도로라고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보상을 100만원밖에 받지 못했습니다.

통일교 협회와 통일교 중앙 재단 본부에서는 저에게 지금까지 통일교 대지가 도로로 편입된 것을 재판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보상을 더 받지 못하였다고 말했습니다. 도로로 된 대지는 보상가격의 3분의 1밖에 받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통일교 재단 본부에서는 2~3일 후에 영도 통일교 대지 10평의 보상 가격 1천만 원을 재단본부에서 받을 것이라고 저에게 통보해 왔습니다. 재단본부와 통일교 협회에서는 저에게 영도 통일교 도로 편입 보상을 관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단돈 100만원이라도 주인 정신을 갖고 노력하여 보상을 더 받아 보겠다고 협회와 재단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러나 협회와 재단은 저에게 손을 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때부터 사명의식과 주인정신을 가지고 보상을 더 받기 위해 모든 서류를 완벽하게 갖추려고 동사무실과 구청을 뛰어 다녔습니다.

협회에서 통일교 대지를 관리하는 사람이나 재단 본부의 교회 대지 보상책임을 맡은 사람에게 저는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고자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습니다. 사진을 찍고 서류를 꾸며 구청과 과천 종합 청사에 서류를 보내고 하여 다시 감정을 받았습니다.

영도 통일교 대지에 대한 재 감정을 받은 결과 처음에 보상금이 1천 만원으로 결정된 것을 약 2천 4백만 원으로 받았습니다. 평당 보상가격이 1백만원이었는데 2백 40만원 가격으로 보상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협회와 재단에서는 저에게 지금까지 이렇게 승리한 일이 없다며 수고했다고 하였습니다. 재단과 협회 전문가도 못하는 일을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을 입증해 보였습니다.

저는 1995년 8월 25일 합동 결혼식을 한 36만 쌍 중에서 합동결혼식을했지만 신앙이 없고 교회에 나오지도 않는 사람을 전부 수습하였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고 이혼을 한 가정과 가정이 파탄된 가정도 수습하여 아들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올린 가정을 심방하고 돌볼 때 언제나 제 옆에는 영도교회 이진상 순회사가 있었습니다. 이진상 순회사는 저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여호수아가 모세의 손발이 되었듯이 저의 손발이 되어 애를 썼습니다. 미진상 순회사의 부인인 하진희 회장도 저의 뜻이라면 '아멘!' 하고 무엇이든지 순종하고 따라주었습니다.

제가 영도교회를 떠난지도 2년이 흘렀지만 이진상, 하진희 회장과 이상희 부인회장은 아직도 명절 때와 제 생일에 정성을 모아서 서울에 있는 저에게 선물을 보내곤 합니다. 부모 형제도 이렇게 정성을 모으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 신앙목사생활 30년이 되었지만 통일교 안에서 이진상 순 회사와 하진희 회장과 같은 신앙 자를 아직까지 저는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만사람에게 등불이 되는 신앙자 입니다.

이광철 집사와 아내 되는 이상희 영도 통일교 부인 회장도 제가 잊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상희 부인 회장은 사명의식이 강하고 영도 통일교 어머니로서 새로 전도된 통일교 교인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저는 1996년 3월 9일~1998년 8월 2일까지 약 2년 5개월 동안 영도 통일교에서 혼자 자취를 하면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은 시장을 다녀와 일주일 먹을 김치를 담그고 국 한 솥을 끓여 놓고 매주 불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은 제가 떠날 때까지 영도 통일교 살림과 저의 식사를 맡아서 수고하였습니다. 영도 통일교 부인 교인들도 제가 식사할때 먹으라고 반찬 준비를 많이 해왔습니다.

이진상 순회사와 이광철 회장이 주축이 되어 저에게 중고 자동차를 사주었습니다. 제가 버스를 타고 다니고 심방을 할 때면 영도섬 전체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골목길과 오르막길을 걸어 다니기가 힘에 겨웠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사주셨기 때문에 예배, 기도, 전도, 심방을 자동차로 기동성 있게 많이 하였습니다.

저는 부주의로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죽을 뻔한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서울집에 자가용을 가지고 오르내릴 때마다 불면증에 시달려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게 되어 졸면서 운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위험천만한 위기의 순간도 많았습니다. 경부 고속도로를 달릴때 빗 길에 미끄러지고 눈길에 미끄러져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겼습니다.

1998년 음력 1월 6일 문선명 78회 탄신기념 행사를 해야 했습니다. 1월4일날 저는 행사준비를 위해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서울에서 구정 명절이어서 자녀 3명에게 세뱃돈 1만원씩을 주고 나니 제 지갑에는 7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명절에 가족들과 같이 쉬고 1월 4일날 아침에 출발하는데 기름 5만 5천원을 넣고 남은 돈이 1만 5천원 밖에 없었습니다. 고속도로비를 내고 나면 딱 맞게 부산 영도까지 내려갈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서울에는 눈이 안 왔지만 전날 밤에 전남 지방과 충청도 지방에는 눈이 많이 왔었습니다 서울에서 아침 일찍 나서야 부산에 해지기 전에 도착 할 수 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오후에 출발하고 싶었지만 추운 겨울이라 빨리 부산 영도까지 도착하려고 아침에 나섰습니다.

서울 집에서 아침 9시에 출발하여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화성(오산) 까지는 눈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눈이 오지 않아 괜찮겠구나!' 하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화성 밑으로는 눈이 많이 쌓여 있었습니다. 체인도 감지 않고 시속 70km로 3차선을 달리다 천안 인터체인지 입구에서 2차선으로 차선변경을 하는 순간 차가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고속도로는 큰 버스나 트럭으로 인해 아스팔트에 구덩이가 파져 있었습니다. 제가 100m 거리인 경사진 도로를 미끄러져 내려갈 때 주위에 수많은 차들이 불을 켜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는 불을 켜고 하나님 앞에 '살려달라!' 고만 기도하였습니다. 차와 같이 미끄러져 내려가면서도 정신을 차려야 산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차가 100m를 지그재그로 밀려 내려가면서도 옆 차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고 마지막에 브레이크를 잡았습니다.

차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방향이었는데 차가 유턴하여 차 머리는 2차선에서 3차선으로 들어와 3차선과 갓 길에 걸쳐져 서울로 가는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살려달라!' 고 기도 하였던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차는 수많은 차들과 연쇄 충돌 하지도 않고 부서지지 않았습니다. 기적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차가 멈춰 섰을 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30분을 정신이 없이 멍해 있다가 차에서 내려 차를 뒤로 밀어서 천안 인터체인지 다리밑 눈이 없는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부산 방향으로 다시 차를 틀어 3차선으로만 천천히 갔습니다. 영동 밑 추풍령에서 부터는 눈이 쌓여 있지 않아 부산까지 안전하게 내려갔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회에 제가 목사로 부임하여 이진실, 하진희 회장과 이철, 이상희 회장 두 가정을 가지고 영도 통일교에 발전과 부흥을 위하여 심히 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영도 통일교는 2년만에 120명의 교회로 부흥 발전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영도 통일교가 최하위 교회였는데 최고 A급 교회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 처음에 제가 갔을 때는 총 헌금도 교회 관리비와 공과금 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산의 통일교에서 영도교회 재직회가 목사 생활비를 제일 많이 주게 되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최고 책임자의 말 한마디 약속을 믿고 혼자서 부산 영교로 폐인이 된 몸을 이끌고 내려가 가족들과 떨어져도 영도교회에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돌아오는 것은 약속을 밥먹」기는 통일교 최고 책임자의 배신행위로 또다시 좌절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 두 번 속은 것도 아니요, 통일교에서 수없이 많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왜 또 속고 내려왔는지 저는 제 자신에게 화가 났습니다. 바보 천치라고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자책을 해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던 것입니다.

 

제 3 절 죽음의 자리에서 두 천사의 도움으로 구한 생명
 

시간이 흐른 후 제가 서울에서 부산 영도 통일교로 발령을 밭은 것은 저에게는 또 한번의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싸움을 해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심장병과 간, 위장병, 불면증을 기도로서 다스리며 기적같이 죽지 않고 생명을 이어갔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옆에서 돌보아 주어도 제 자신을 지탱할 수 없고 건강이좋지 않아 쓰러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혼자 부산 영도 통일교 목사로 와서 자취 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혼자서 자취를 하며 빨래와 청소,심방, 전도, 교회 부흥 · 발전, 승공 연합, 각종 세미나, 강의를 해야 한다는 것을 처음에는 단순하게 생각을 했었습니다.

영도교회에서 1996년 3월 10일 취임을 하자마자 매일 3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며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전도 활동을 하였습니다. 제가 혼자서 의 ·식 ·주를 해결한다는 것이 어려웠고 혼자과로를 하며 먹지 못한 상태에서 1인 5역을 한다는 것이 무리였습니다.

그래도 영도교회는 나날이 교인이 늘어나고 발전하며 새로운 교인들이 영도 통일교로 많이 입교하여 넘치는 교회로 발전하였습니다. 저는 신바람이 나게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과로하며 먹지 못하여 1996년4월 20일 독감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심장병에는 독감이 가장 위험한 것입니다

저는 1996년 3월 17일 셋째주 주일 예배 광고 시간에 하나님은 저에게 음성으로 "감기 조심하라" 며 경고 했다고 교인들에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독감 감기까지도 조심 하라고 알려주고 계신다고 교인들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과로하지 말고 음식 조절하여 독감을 주의를 하였어야 했습니다.

1996년 3월 10일~4월 20일까지 40일은 제 몸과 마음 전부를 바쳐 충성한 기간이었습니다. 밤낮 없이 심방하고 전도하고 기도하며 교회 발전과 부흥을 위해 새벽 1시~2시까지 전도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4월 20일부터 5월 30일까지 40일 동안을 감기에 걸려 생활해야 했습니다. 누워 잠을 자면 기침이 심하게 나서 심장이 멎을 것 같은 질식의 순간이 여러 번 있어 책상 의자에 앉아 잠을 자지 않고 살았습니다. 40일은 제가 심장병으로 생사의 기로에서 살기 위한 구원의 몸부림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사투를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는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었으나 나중에는 밥을 한 숟갈 정도밖에 먹을 수 없었고 국물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영도 통일교 교인들에게는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은 감기가 걸린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영도 통일교 교인들은 목사님이 감기가 걸려서 잘 드셔야 된다고 회나 반찬을 준비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미 심장 판막 4개 중 1개가 정지되었고 심부전증으로 식사나 먹은 물을 대소변으로 배출하지 못하였습니다. 심장기능이 저하되어 숨을쉴 수 없고 1층에서 2층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힘에 겨웠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설교나 심방, 전도, 기도는 처음과 같이 열심히 하였습니다. 부산 영도 교인들은 진실하고 인정스러운 마음으로 염소보약, 일반 보약까지 지어 왔습니다. 밥을 먹지 못해서 링겔 주사를 7병이나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몸이 죽음의 기로에 서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호흡 곤란으로 열 발자국도 걸을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몸은 고무풍선 같이 부었기 때문에 65kg에서 85kg이 되었습니다. 저의 배는 만삭이 되어 아기를 낳기 직전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1996년 5월 10일 그 날도 역시 책상에 엎드려 잠시 잠을 자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비몽사몽간에 검은 옷을 입은 4명의 저승사자들이 제게 와서"이제 너는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4명이 양쪽에서 저의 팔을 붙들었습니다. 저는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4명에게 끌려가는 중 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2명의 천사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천사들은 큰 칼을 빼어들고 4명의 검은 복장을 한 저승사자들에게 저를 데려 갈 수 없다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4명의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에게 칼을 휘둘러 4명을 전부 죽였습니다. 저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저는 2명의 천사에게 "저의 생명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천사들은 저에게 "앞으로 당신이 할 일이 많기 때문에 구해준 것입니다. " 하고는 순식간에 제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저는 비몽사몽간에 깨어나 하나님께서 저를 저승에 데려가지 않고 죽음에서 생명을 구해줄 것을 확신하며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상희 부인 회장이나 교인들이 제가 심한 독감에 걸린 1996년 4월 20일 이후부터 반찬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이미 심장병과 간담석증, 위장병, 불면증을 가지고 있는 상태여서 혼자 무모하게 부산 영도교회에 와서 자취 생활 한 것이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습니다.

너무나 처절하고 비참하며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아내가 옆에서 병간호를 해주어도 목회활동하기가 어려운데 혼자 자취 하면서도 영도교회 부흥발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심전력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심장병이 악화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기 조심하라" 고 저에게 경고를 하였는데도 저는 무관심하게 받아 들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2명의 천사를 통해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저를 사지에서 생명을 구해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부산에서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 병원으로 갔습니다 응급실에 입원을 하여 응급 처치를 받았습니다. 심장기능이 약화되어 있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제대로 심장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심장에 고인 물부터 제거하기 위하여 저의 등에 구멍을 뚫어 척추를 관통하고 허파를 지나 호스를 집에 넣고 물부터 빼내었습니다.

병원에서 심장병 치료를 받은 후 부산 영도교회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병원에 입원 중 서울에 저를 아는 분들과 부산 영도 교인들의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통일교 황선조 협회장과 부산 교구장인 김용갑에 대하여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제가 통일교로 말미암아 폐인이 되어 심장병으로 서울 고려대학교 안암 병원으로 입원하였지만 통일교 협회에서는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부산의 김용갑 교구장이 협회에 보고를 하였는데 단 한 사람도 병문안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병원 수술비를 한푼도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잔인한 곳은 없습니다. 김용갑 교구장도 부산에서 서울로 와서 교구장 회의에 참석하면서도 회의만 참석하고 저의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서울 청파동 회의 장소에서 고대 안암 병원은 불과 30분 거리였습니다. 그런데도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용갑 교구장은 부산 시내 통일교 전체 목사들을 대표하는 지도자입니다. 저는 김용갑 교구장의 부하였습니다.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이 서울까지 한명도 문병을 오지 않았다 할지라도 김용갑 교구장은 서울회의까지 왔으면서도 저의 병문안을 오지 않았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저와 같이 1972년부터 충북 기동대 활동을 한 사람입니다. 충북 기동대는 통일교 목사가 되기 위한 6개월 훈련과정입니다. 그런 김용갑은 정성호 전임 부산 교구장과 같은 고향 진주 출신이라며 강력하게 협회장에게 추천하여 교구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김용갑이 교구장이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였습니다.

제가 1996년 3월 9일 부산 교구본부에 들렸을 때 김용갑은 부교회장 이였습니다. 저는 처음 김용갑 얼굴을 보았을 때 계시가 나왔었습니다. 저는 바로 김용갑이 교구장이 된다고 예언하였습니다. 김용갑은 통일교 협회에서 1월 달에 전국 통일교 교구장 인사이동이 있는데 1년 후에나 있지, 그전에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김용갑은 이번에 바로 교구장이 되면 감사보답으로 저에게 크게 한턱을 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으로 교구장이 되면 제가 서울에서 영도까지 내려온 것은 제 뜻이 아니라 하늘 뜻이니 제가 서울에 올라갈 때까지 마음이나 상하게 하지 않게 해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그런 예언을 한 후 한달 만인 4월 달에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선배 통일교 지도자들과 교구장들을 전 세계 185개국의 국가 메시아로 발령을 하였습니다. 정성호 부산교구장이 떠나면서 김용갑을 부산 교구장으로 협회에 추천하여 교구장이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퇴원 후 부산에 내려와 김용갑 교구장에게 병원비를 협회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협회에서 병원비를 받아 주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몇일이 지나서 협회에서 병원비를 지원해 줄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고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서울의 교구장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거짓말을 듣고 배신감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에게 날짜를 설명했더니 그때서야 김용갑 교구장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서울 회의에 참석을 했다고 말하였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이 미안하다고 사과만 하였더라도 이렇게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병원비도 지원해 준다고 약속을 해놓고 왜 지원하지 않느냐고 말을 했더니 그때서야 억지로 조금을 지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일 김용갑 교구장은 제 버릇 개 못 주었습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충고를 하고 조언을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 19장 자살을 결심하고죽음의

 

문턱에 서서
 

제 1 절 족벌왕국에 환멸을 느끼고
 

약속을 어겼던 곽정환 회장은 문선명의 명령으로 한국 통일교 회장에서계 통일교 회장으로 인사발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문선명의 사촌 조카사위인 황선조가 취임을 하였습니다. 황선조는 단 한번도 개척하지 않고 교구장이 되었고, 실적도 공적도 없는데 문선명의 사촌인 문용현 사장의 딸과 합동 결혼식을 하여 하루아침에 한국 통일교 협회장이 되었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한국 통일교회 회장직을 물려받은 황선조에게 박준철 영도 목사를 교구장으로 추천하니 문선명 교주에게 보고 드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선조 회장은 저에 대한 실적과 공적(협회장 상 10회, 교구공로 16회, 총 26회 수상, 부흥 교회 건축)을 문선명 교주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황선조 협회장은 그 당시 문선명 교주가 머물고 있는 제주도 영빈관으로 박준철, 양우진(전남 부흥단 단장)을 교구장 후보로 복수 추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곽정환 회장이 추천한 저는 간단히 설명 후 탈락시켰고, 전국 통일교 우수교회 협회장 상을 한차례도 수상하지 못한 양우진을 종로 교구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와 같이 문선명의 통일제국은 족벌왕국입니다.

저는 점점 더 건강이 악화되어 심장 판막과 심부전증으로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전도활동과 심방활동, 통일교 합동결혼식 행사로 밤낮으로 황동을 하여 밤에 코피를 흘리고 모든 물체가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영도 통일교를 총책임지고 있는 이진상 순회사가 정성을 다하여 저를 보살폈고 이상희 부인 회장이 저의 식사 준비에 정성을 다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제 영혼과 육신을 문선명 교주에게 빼앗긴 사실과 건강악화,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무능한 남편이라는 자괴감 때문에 밤마다 괴로워하였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문선명 교주가 참 부모 메시아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 받았다는 새 진리요 성약이라고 주장하는 통일교 원리강론은 김백문 사이비 교주의 교리인 성서신학과 기독교 근본원리를 문선명이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새 진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을 속인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김백문 교리를 이용하여 자칭 재림주가 되고 수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가는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저는 속았다는 배신감에 통곡해야 했습니다.

통일교 전단지 한 장에 청춘을 빼앗기고 저를 30년 동안이나 노예로 삼고 이용한 문선명 교주를 생각하면 제자신의 어리석음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미친 사람 같이 밤마다 '부산 영도섬에서 죽어야지' 라는 그 생각으로 머릿속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제 2 절 "준철아! 죽지 말아라."
 

저는 문선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배신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밤마다 새벽 4시~5시까지 불면증에 시달리며 새벽 기도 후에야 겨우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 차를 몰고 나가 영도 섬을 돌며 절벽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으려고 수십 번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죽으려고 할 때마다 "죽지 말아라!" 라는 음성이 제 귀에 생생히 들렸습니다.

낮에 전도하며 심방을 하다가도 영도섬 끝에 있는 태종대 유원지 자살바위에 서서 천길 절벽 아래로 뛰어 내리려고 했습니다. 태종대 등대에도, 신선대 절벽 바위에도 여러번을 가서 한 많은 제 인생을 마쳐야 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준철아! 죽지 말아라" 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자살하려는 순간 그 음성을 듣고 번번이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돌아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때로는 분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를 자해 하기도 하고, 방을 뒹굴며 큰 소리를 지르기도 하였습니다. 배신과 절망감에 사로잡혀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1998년 4월 30일 오후 5시경 자살을 결심하고, 영도 신선대 바위에서 뛰어 내리려는 순간 이었습니다, 지금 까지보다 훨씬 더 크고 뚜렷한 음성이 저를 사로 잡았습니다.

"준철아! 죽지 말아라. 문선명 통일교 집단을 궤멸하여 박준철과 같은 제2의 희생자를 막아라. 이단집단을 궤멸하라."

저는 그 음성에 압도되어 자살하려는 생각을 단념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선명 집단에서 겪은 것을 책으로 써서 이 세상에 문선명의 정체를 폭로하여 수많은 영혼을 구할 결심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이름으로 문선명 집단과 같은 사이비 집단을 궤멸하라는 사명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책이 발행될 때까지 심장병이 더 악화되지 않도록 기도와 약으로 병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제 20장 폭언 폭력 배신으로일괄된

 

통일교 지도자  
 

제 1 절 황선조 회장에게 한 직언
 

황선조 한국 통일교 회장이 전국 통일교회 순회 집회를 하였습니다. 부산교구 본부 교회에는 1998년 4월 14일에 왔습니다. 낮12시부터 부산시내 통일교 목회자 부부들이 황선조 회장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통일교를 배반하고 나갔던 문선명 비서실장인 박정화씨(야록 통일교회사 책을 발행한 저자)와 합의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 중 최고 실적과 공적을 많이 쌓은 목사로 부산교구 목사 대표자로 선정되어 황선조 회장에게 영도교회 발전과 통일교 발전안을 놓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앞으로 한국 통일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직언을 했습니다.

"통일교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통일교 기업체를 정리하고 사명감 있는 목사들을 양성하며 통일교 교인들이 신바람 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통일교회가 말로만 공생 공영 공의주의를 주장하고 입으로는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실천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47년 동안 통일교회 교인들은 희생의 제물만 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통일교회는 사회를 위하여 고아원 하나도 없고, 사회인과 통일교 교인들을 하여 양로원도 병원도 하나 없는 무풍지대입니다. 통일교 교인들에게 40년 동안 명령만 하였지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을 위하여 협회에서 무엇을 해주었습니까? 통일교 목사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도, 통일교 협회에·는 조금도 혜택이 없었습니다. 목회자 자녀 교육비나 노후를 위해서도 신바람 나는 목회가 아닙니다.

저는 서서히 마음정리를 해가고 있었습니다. 생활이 있고 처자식이 있다 보니 빨리 서울로 올라가서 가족과 합하지 않고서는 안되었습니다. 병든 몸을 가지고 홀로 목회하면서 정리한다는 것은 너무 무리였습니다. 저는 빨리 서울로 올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제 2 절 김용갑 교구장의 폭언과 폭행
 

김용갑 교구장은 마침내 회복할 수 없는 사건을 저질렸습니다. 그 날은 1998년 6월 11일 금요일 이였습니다.

문선명은 1998년 6월 13일에 있을 1억 2천만 쌍 합동 결혼식을 위하여모든 통일교인들을 몰아 세웠습니다. 저도 영도 통일교회 미혼남녀들의 합동결혼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동분서주하며 뛰었습니다.

합동결혼에 참석할 예비 신랑 신부의 약혼이 거의 다 성사되고 최종적으로 이상희 부인회장 아들 이봉규와 김영주 장년회장 딸인 김혜진만 제일 늦게 사진으로 약혼이 되었습니다. 일본 사람과 약혼이 되어 일본에서 신랑, 신부 될 사람 사진이 부산 교구 본부에 도착했습니다.

6월 11일 영도 통일교회의 이봉규와 김혜진은 김용갑 교구장의 축도를 받기 위하여 저녁 늦게 교구본부에 갔습니다. 부산 시내 통일교 18명의 목사들은 한 사람도 자기 교회에 미혼 남녀 약혼식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목사들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전에는 심방활동을 하였고 오후에는 영도 여성연합 하진희 회장의 부탁으로 악령에 사로잡힌 김숙자씨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김숙자씨에게 남편과 자녀들이 통일교회를 나오면 확실하게 악령을 제거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교회를 빠른 시일 내에 나오지 않으면 김숙자씨가 자살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 달 후인 1998년 7월 10일에 김숙자씨는 정말로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 하였습니다. 김숙자씨는 자살시도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의식을 회복하였지만 뇌세포가 많이 파괴되어 정신병원에서 폐인이 되어 가정에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김숙자씨를 만나고 저녁에 영도 통일교회에 돌아와 속회예배를 드렸고 기진맥진 하였습니다. 그래도 저는 우리 교인의 일이라 책임감을 느끼고 부산 통일교 교구 본부 교회로 갔습니다.

저는 김용갑 교구장에게 이상희 부인회장의 아들인 이봉규의 아내 될 사람과 김영주 장년회장의 딸인 김혜진의 남편 될 사람 사진을 보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사진을 보았더니 너무나 착하고 아름다운 신랑, 신부였습니다. 이봉규씨는 19살이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이 잘 만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용갑 교구장이 저에게 하는 말이 "영도 통일교회 부인회장 아들인 이봉규는 000네."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모욕적인 욕을 하였습니다. 저는 "둘이 행복하게 잘 살라고 하지 못할 망정 결혼을 파괴하려고 그런 말을 하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래도 김용갑씨는 "김혜진 신랑 될 사람은 키가 너무 작다" 고 또 다시 부정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이봉규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에 마음이 상당히 상했지만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밤 10시가 되어 일본에서 온 신랑, 신부 사진을 각자 받았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약혼이 된 신랑, 신부 사진을 보고 마음에 안 들면 파혼하라" 고 5번이나 외쳤습니다. 저는 김용갑 교구장이 말하는 것을 보고 못 마땅 하였습니다.

합동 결혼식을 할 미혼 남녀들은 사진으로 자기의 아내 될 사람과 자기남편 될 사람을 보게 된 것이니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들면 기쁘고 다행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파혼을 해야 되는 상황에서 김용갑 교구장은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였던 것입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기도실에서 약혼 축도를 하기 위하여 신랑, 신부를 모았습니다.

일본이나 필리핀에서 온 신랑, 신부 사진을 한국의 약혼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영도 통일교회 차례7,1 되어 상대방의 사진을 받았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 아들인 이봉규씨 아내 될 사람은 얼굴도 착하고 키도 크고 빠지는 데가 없었습니다. 이상희 부인회장과 이봉규씨는 좋아서 어쩔줄을 몰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영주 장년회장 딸인 김혜진씨는 '남편 키가 작네." 하면서 불평을 하였습니다. 김영주 장년회장도 사위 될 사람이 키가 작다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신랑 될 사람은 김혜진씨 보다 9cm이나 컸습니다. 저는 김혜진의 키가 작다는 불평 소리에 결혼할 사람이 착하고 진실한 얼굴이고 천생연분이라고 말하고 격려하는 뜻에서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부산교구 본부 부인회장이 "영도 또 시작한다. " 라며 빈정거렸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김용갑 교구장이 영도 통일교회 목사인 저에 대해 무수한 비난을 했다는 증거였습니다. 저는 여러 사람 앞에 참을수가 없어서 조용히 밖으로 나왔습니다. 

저는 복도에서 마주친 김용갑씨에게 "어떻게 교인들 신앙 교육을 시켰으면 교인이 다른 교회 목사에게 반말을 씁니까?저는 그 여자 교인을 알지도 못하는데 영도교회 일에 끼여 들어 파혼을 시키려고 합니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용갑 교구장은 "영도교회 목사가 잘못하였다" 고 하며 자기 교인만 감싸고 돌았습니다.

저는 다시 기도 실로 들어가 그 부인회장에게 '당신이 누구냐? 영도 또 시작 한다고 했는데, 무엇을 시작하느냐? 왜 목사에게 반말을 하느냐?" 고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교구 본부 교회 부인 회장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저와 여러 교인들이 "왜 거짓말을 하느냐?" 고 따졌더니 그때서야 시인하였습니다. 그리고 교구 부인 회장도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였고 교구 부인회장의 남편이 되는 장로도 저에게 내용을 알지 못하고 영도 교회 일을 방해하여 죄송하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밖으로 나와 밤12시가 다 되어 영도 통일교회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남의 교인에게까지 무시당한 데 대한 아픔으로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습니다.

다음날인 1998년 6월 12일은 부산 교구 본부 회의실에서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들의 회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회의 시간에 회의 분위기를 망칠까봐 어제 밤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이 저에게 사과를 하고 서로 화해하고 조용히 처리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용갑 교구장은 저에게 사과를 하지 않자 할 수 없이 어제 밤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동래 허한경 목사와 김진수목사도 교구 본부 부인회장이 잘못한 것이고, 김용갑 교구장이 저에게 잘못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 전체가 "승공 연합 빼앗은 일이나 이번 사건은 김 용갑 교구장이 잘못 했다" 고 저에게 사과를 하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김용갑 교구장은 제가 말을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막말로 '알 다했냐?" 하면서응접실 의자에 앉았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병신새끼, 꼴값하네!!" 하며 저에게 욕설을 하였습니다.

그 말 한마디는 저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꽃혀 버렸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교통 사고 후 단 한차례도 '병신새끼' 라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하였는데 통일교회에 들어와 병신새끼라는 말을 처음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나오려고 일어났습니다. 그랬더니 김용갑교구장은 갼자기 의자위로 올라가 저에게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하였습니다. 저-'김용갑 교구장의 폭력에 더 이상 때리지 못하도록 넥타이를 잡았을 뿐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래교회 허한경 목사와 부산진교회 김진규 목사가 김용갑 교구장을 말려 걱우 진정이 되었고 저는 교구장실을 나와 버렸습니다. 저는 충격과 심장판막과 심부전증으로 인하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겨우 영도 통일교회에 돌아왔지만 몸을 가눌 수도 없었습니댜.

하나님의 뜻을 이끌어내시고자 문선명과 나와의 관계를 구세주 참 부모와 참 아들 효자의 관계에서 서서히 세뇌마취에서 깨어나 사랑과 믿음을 끊고 조금씩 조금씩 문교주에게 절대복종의 자리에서 점차적으로 세뇌에서 깨어나 통일교를 떠나게 만드는 역사를 해오신 것입니다

 

제 3 절 문책인사를 약속한 황선조 회장
 

1998년 6월 13일 1억 2천만 쌍 합동 결흔식을 위하여 영도 통일교회에서 교인들을 합동결혼식 하객으로 총동원하여 서울의 잠실 체육관에 참석하여야 했습니다. 1억 2천만 쌍 합동결혼식이라고 전 세계 언론과 매스컴을 통하여 알렸지만 과장되고 거짓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잠실 체육관에서 2천쌍 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3일 동안의 폭언과 폭력을 겪어 몸이 만진창이 되었지만 합동결혼식 행사를 치렀고 서울 집에 있는 자녀들을 보지도 못한 채 영도교회로 내려왔습니다.

1998년 6월 26일 부산 시내 통일교 목사 회의석상에서도 통일교 목사들이 김용갑 교구장에게 영도교회 박준철 목사에게 사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용갑 교구장은 사과를 하겠다고 했지만 사과는커녕 오히려 저를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통일교 콘도인 설악산 일성 콘도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 회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심장병으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김용갑 부산 교구장은 설악산에서 황선조 협회장과 김종우 총무국장 등에게 자기 잘못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고 오히려 저를 비난하는 말을 하며 저를 인사 조치하여 잘라 버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김용갑 교구장의 모두 잘못한 것이 드러나서 저를 인사발령 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김용갑 교구장 자신이 문책 인사로 부산 교구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습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지혜롭지 못하여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에게 사과하고 조용히 끝내기를 바랬는데 오히려 사건을 황선조 협회장에게까지 끌고 가 일을 확대시킨 것이었습니다. 저는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다가 통일교 협회 김종우 총무국장이 부산 영도교회로 전화를 해주어 알게 되었습니다.

김용갑 부산 교구장은 교만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교구장의 직분을 망각하고 회개하지 않고 사과할 줄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산 시내 18곳의 통일교회 목사를 책임지고 명령하는 직책이 교구장입니다.

김용갑씨는 18곳의 교회 헌금을 받아 임의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불법이고 공금 횡령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김용갑 교구장은 주위의 통일교 목사들이 욕을 얻어먹을 각오를 하고 충고를 하여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1998년 7월 1일 서울 통일교 협회 사무실로 갔습니다. 황선조 통일교 회장을 만나 김용갑 이야기만 듣지 말고 저의 이야기도 듣고 판단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황선조 회장이 화를 내고 격하게 이야기하는 분위기 속에서도 김용갑 교구장의 잘못을 낱낱이 보고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박준철 목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김용갑 교구장을 문책인사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있는 앞에서 황선조 회장은 김용갑 교구장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박준철 목사의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김용갑 교구장이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뒤에 사실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그 자리에서 김용갑 교구장에 대한 문책 인사를 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그 길로 서울 .집에 잠시 들렀다가 부산 영도 통일교회로 내려갔습니다.

 

제 4 절 눈물로 세운 부산 영도 교회를 떠남


저는 이 사건 후 7월 20일에 김종우 협회 총무국장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미국에서 황선조 회장의 전화가 왔는데 "김용갑 부산 교구장의 잘못을 놓고 문책인사를 하고 박준철 목사도 영도 통일교회를 떠나 서울 시내나 경기도 통일교 목사로 발령을 하면 어떻겠느냐?" 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김용갑 교구장이 부산 교구장에서 면직되고 서울 시내 구단위 교구장으로 문책 인사를 당하는데 전국 교구장들은 이번 사건을 주시 하고 있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통일교 회장의 체면을 보아서 박준철 목사가 황선조 회장의 체면을 세워 달라" 고 하였습니다.

총무국장은 "지금까지 황선조 협회장이 한국 통일교 교구장과 목회자 인사이동을 시키면서 단 한번도 먼저 전화를 하거나 양해를 구한 일은 없는데 박준철 목사가 처음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생사를 넘나들며 전력을 다했던 영도 통일교회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김종우 총무국장은 "황선조 회장이 미국에서 김종우 총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반드시 박준철 목사를 기억 하였다가 내년 1999년 2월 7일 3억 6천만 쌍 합동결혼식 후에 교구장으로 발령을 하겠다고 약속하겠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1998년 6월 설악산 일성 콘도에서 전국 통일교 목사 총회때 전체 교구장들의 사표를 받아 놓았다고 하였습니다 3억 6천만 쌍 합동결혼식 할 때 실적이 나쁜 교구장들의 사표를 받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저를 교구장으로 발령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몇달 동안만 과천교회에서 교인들을 수습하고 너무 어려우면 한 달만 교구장 자리가 나면 바로 저를 발령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2년 5개월 만에 영도 통일교회를 목사로서의 사명을 마치고 죽음의 고개를 넘어 살아서 영도섬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1998년 8월 2일 주일날에 영도 통일교회에서 마지막 이임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마지막 이임 예배에서 눈물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도 통일교회에 이진상 하진희 순회사님 가정, 이광철 이상희 회장 가정, 김봉민 사찌꼬 가정, 김옥순씨 가정 등 영도 통일교회 전체 교인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감사한 마음 뿐 이었습니다.

심장병으로 고려대학 병원에 응급실에 2차례나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고, 자살을 30번도 넘게 결심하고 시도하였지만 죽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 했습니다. 영도 통일교회를 떠나며 모든 영도 통일교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뜻은, 저를 문선명 자칭 구세주로 부터 빨리 통일교로 부터 탈출시켜 통일교 궤멸을 시키고자 고난, 시련, 가시밭길을 저는 걸어야 했습니다. 문선명과 저와의 관계가 참부모 구세주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문선명을 불신하게 만들고 정을 끊고 통일교를 떠나게 만들고자 마지막까지 인사문제 폭행 폭언을 당하며 저는 생사를 넘나든 병고와 싸워야 했습니다.

 

제 5 절 과천통일교회에서의 비참한 생활
 

과천교회는 세워진 후 8년 동안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처음엔 처녀 전도사가 목회를 하였고 후임으로는 1992년 3만 쌍 합동결혼식을 한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아 과천교회를 떠났습니다. 그 다음은 제가 1982년도 경기 화성 교회에 목사 생활을 하며 합동결혼식을 시키고 신앙 지도를 하였던 이정만씨가 과천교회 목사였습니다.

이정만 과천교회 목사는 교인 20명에 불과한 개척교회에서 교인들이 모이면 언쟁을 벌이고 교인들이 이정만목사와 싸움을 하여 허탈과 배신감으로 통일교 목사직을 사직하였습니다. 이정만 목사는 과천에 온지 3개월 만인 1998년 4월에 과천교회 목사직을 그만두었습니다.

이정만 목사는 진실하고 정직하며 착한 목사입니다. 제가 화성교회 목사로 있을 때도 가장 모범 된 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 신학대학을 다녔지만 통일교 교인으로 학교에 알려져 신학대학을 졸업하지 못하고 통일교 선문대학 4학년에 편입하여 신학교를 졸업하여 열심히 목회자의 사명을 가지고 살았던 이정만 목사는 배신감에 통일교 목사직을 버렸습니다.

과천교회 통일교 교인들은 몇 달 동안 목사도 없이 교인 10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통일교 협회에서는 저를 그렇게 처참한 과천교회 목사로 발령하였던 것입니다.

그 곳에는 개척도 하지 않고 협회장상을 한번 받지 않고 교회를 부흥시킨 일이나 교회 건축한 일도 없는 교구장이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저는개척, 부흥하여 교회건축을 한 서울 강서교구 본부나 노원교구 본부에 간 후 통일교회를 떠날 생각을 했지만, 과천교회에서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두고 탈퇴할 결심을 하였습니다.

1998년 8월 3일부터 저는 아내와 같이 과천교회를 수습하였습니다. 8월달에 비가 그렇게 많이 왔는데도 비를 맞아 가며 심방활동을 하였습니다. 과천 통일교회는 종교 부지 내에 3층을 분양 받아 2칸으로 막아 교회와 사택을 꾸몄습니다. 70평이라고 하는데 실제 평수는 50평 정도에 불과 했습니 다.

과천교회는 매년 여름만 되면 비가 올 때마다 옥상에서부터 비가 새어 4층 학원으로 쏟아지고 4층 학원을 채운 빗물은 3층 통일교회로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교회에 발목까지 물이 차서 물을 퍼내야 했습니다. 매년 겪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택이나 방에도 비가 새고 교회에 발목까지 물이 차다보니 그 물을 다 퍼내는데는 10일이 넘게 걸렸습니다. 교회에 물을 다 퍼내고 나면 벽에서 물이 나오고 교회 콘크리트에서 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교회 내의 전기는 누전이 되어 매년 여름에는 전기 불을 켤 수 없습니다. 교회에 창문이 없어서 교회에만 들어가면 숨이 막혔습니다.

저는 가는 곳곳마다 통일교회를 부흥 발전시켰으며 교회와 가정적인 생활안정을 지금까지 시켰지만, 과천교회에서는 더 이상 교회를 발전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제 자신을 정리해야 했고 가족들의 처절한고통과 가난,배고픔으로 내몰아야 했습니다.

저는 과천교회에서 통일교 목사직을 탈퇴할 준비를 해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더 이상 교회를 발전시키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는 생각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제가 목회하는 개척교회 마다발전시켰지만 더 이상 수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일을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는 교회를 발전시켜 가정생활이 안정되는 길을 포기하고 가난을 선택하였습니다. 저의 자녀 대학생 3명의 등록금도 없어서 휴학계를 내고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습니다. 아내는 아침부터 밤 12시까지 병든 몸을 이끌고 파출부와 식당 일을 해야 했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킬 능력이 있지만, 가난을 선택해야 했고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위해 교회를 부흥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황선조 회장이 미국에서 한 전화약속도 져버리고, 협회 김종우 총무국장의 약속을 받고 과천으로 왔지만 하나님은 빨리 통일교회를 탈퇴하라는 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 생활비를 4달 동안이나못 받고 자동차 기름값이 없고 버스 탈 돈도 없는 처절한 생활고로 목회자 교육 때도 가지 못하는 비참한 생활 이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참 부모 재림주라는 통일교 교주를 믿어도, 통일교회는 구원이 없고 믿음도 사랑도 소망도 없는 지옥 그 자체 생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6 절 연속되는 폭행과 폭력과 거짓말들
 

1999년 1월 28일날 문선명 통일교 교주 사돈인 곽정환 통일교 총 회장, 황선조 한국 통일교 회장을 협회 회장 사무실에서 만났습니다. 그 곳에 김종우 협회 총무국장도 같이 있었습니다. 2월 7일 3억 6천만쌍 합동결혼식 행사를 위한 준비 모임이었습니다.

그 동안에 통일교 역대 협회장들이 저에게 약속과 신의를 저버리고 배신한 행위와 부당한 인사이동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데 대하여 직언을 하였습니다.

황선조 회장은 저를 보고 "박준철 목사가 죽던지, 황선조 회장이 죽던지싸워보자" 고 저에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동안에 폭력, 폭행을 하다가 이제는 살인까지 할거냐?" 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황선조 회장이 저를 치는 바람에 저는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사이 김종우 협회 총무국장이 저의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습니다. 저는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통일교 강제 부정인사와 폭행, 폭력으로 심장병에 걸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곽정환 회장의 말 한마디를 믿고, 혼자 부산 영도교회목사로 부임하였던 제 어리석음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고향인 경상남도로 가서 잠시 다녀 오라" 고 해서 부산의 영도까지 다녀온 저는 "과천 개척교회 목사로 부임하기 위하여 부산 영도교회까지 간 것이 아닙니다" 라고 곽정환 회장과 황선조 회장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곽정환 회장은 "내가 언제 그랬느냐?" 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곽정환 회장이 저에게 잠시만 부산에 다녀오라고 5번이나 말을 하였고, 임도순 부 협회장도 바로 서울로 원대 복귀하게 될 것이라고 저를 위로해 주었는데 말입니다.

저는 김종우 총무국장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고 물었습니다. 그는 "곽정환 회장의 약속을 황선조 회장이 책임질 이유가 없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황선조 회장과 김종우 총무국장은 2월 7일 축복 후 교구장 인사 이동시 최선을 다하여 박준철 목사를 교구장으로 발령하겠다" 고 또 다시 저에게 약속하였습니다.

김종우 총무국장은 "1999년 2월 7일 3억 6천 쌍 통일교 합동결혼식 측복 후 최선을 다하여 교구장으로 발령하겠다" 고 또 다시 약속하였습니다. 저는 그 소리에 눈과 귀가 멀고 영혼까지 멀어 명예 회복을 한 후 통일교를 탈출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통일교회에 유린당하며 약속을 지키는 협회장을 한 사람도 못 보았으면서도 속았던 것입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에게 너무나 세뇌되고 교육되어 있었기에 마음으로는 통일교를 탈출 한다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탈출 하지 못하였습니다. 제 자신이 한 없이 부끄럽고 미웠습니다.

 

제 7 절 위장된 합동 결혼식


1999년 2월 7일 3억 6천 쌍 합동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거짓된 숫자임) 저는 과천 통일교회 책임량인 버스 4대에 과천시 대한 노인회 소속인 3단지, 4단지와 문원동 1, 2단지 노인정의 노인들을 태워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으로 갔습니다. 식사대접, 선물 준비, 음료 과일 접대 등을 과천 통일교회 교인들이 준비하였습니다.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에 혹독한 겨울 추위가 몰아쳐 전국에서 몰려온 노인정의 노인들은 추위에 떨며 아수라장을 이루었습니다. 서로 밀고 밀치며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12만 명의 노인들과 통일교 교인이 모였던 것입니다. 출입구에서는 노인정에서 온 노인 12만 명에게 하얀 목도리 한 장씩과 빵을 하나씩 선물하였습니다. 통일교 행사장의 사회자는 하얀 목도리를 목에다 감지 말고 하얀 목도리 끝이 무릎까지 내려오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합동결혼식은 매스컴이나 언론 기자들은 세계 통일교 교인들에게 공중헬기 중치로 방송하기 때문에 노인들까지 하얀 목도리를 어깨에 걸침으로 미혼 신랑, 신부같이 보이게 하기 위한 위장전술이 었습니다.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노인들이 서울 잠실 경기장에 모여 문선명 교주의 거짓된 합동 결혼식장의 들러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 추운 걱울 날씨에 서울까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올라온 것이 아니라 관광 버스를 태워주고 식사를 대접하니까 노인들은 서울까지 올라와서 문선명 교주의 이용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통일교회에서 미혼남녀 전도를 하는 사람에게 한 명당 10~15 만원씩 상금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통일교 교인들은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며 이 엄청난 거짓된 통일교 합동결혼식 행사를 위하여 재산을 바치고 헌금을 해야 했습니다.

문선명은 돈을 찍어내는 기계가 아닙니다. 돈이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통일교 교인들에게 재산을 갈취하여 2천 쌍도 되지 않는 합동결혼식을 3억6천만 쌍 합동결혼식이라고 주장하며 하였던 것입니다. 참으로 문선명은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며 기독교 교인과 통일교 교인을 속이는 사기꾼입니다.

통일교회에 들어와 합동결혼식 한 교인은 일생 동안 각종 행사에 매일 동원되어 활동을 해야 합니다. 매일 통일교 활동을 하기 때문에 가정생활은 무관심과 비참함으로 가정생활이 어렵고 힘들며 결국에는 파탄되는 가정도 있습니다. 통일교 교인은 각종 행사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거액 재산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치지 않으면 일생 동안 지옥과 같은 마음의 고통을 느끼며 불안과 공포 속에서 생활해야 합니다.

30년 동안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각종 행사를 주관했고 강의를 했으며 인원을 동원했던 저는 문선명 교주의 일회용 허세 거짓말 행사에 가증스러움과 치가 떨리는 심정입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행사에 지치고 가난한 가정살림에도 재산을 바쳐 헌금을 내야 하는 비극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1999년 2월 7일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올린 이후 지금까지 수 차례의 교구장 인사이동이 있었지만 저는 황선조 회장을 찾아 사정하지 않았습니다. 협회 김종우 총무국장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곽정환회장 도 1월 28일 이후 단 한차례 전화를 하거나 만난 적도 없습니다.

제가 대우받는 자리에 있으면 문선명 집단의 세뇌에서 깨어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저에게 닥치는 끊임없는 폭행 폭언충 격으로 심장병을 얻고 부당한 인사 고난 시련을 통하여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점점 정을 끊고 불신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이였습니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적인 문제와 문교주의 정체, 자녀들의 방탕한 모습과 1998년 1월 IMF로 말미암아 통일그룹이 부도 남으로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국민의 세금인 융자금 1조 7천억을 갚지 않고 전국 통일교 땅과 건물을 경매 처분을 피하기 위하여 통일교 유지재단에서 통일교회로 증여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합동 결혼식한 통일교 교인들을 속이고 지옥간 조상들을 1대부터 120대까지 천국에 보내준다며 거액재산을 착취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에게 죄를 용서해준다는 면죄부 탕감비 1200만원을 바치라고 하여 바쳤고 천국의 황제요, 재림주로서 통일교 교인들을 천국 황족 가족으로 입적 시켜준다고 통일교 교인들을 속여 1만6천달러(2100만원)을 바치게 하였다.

이외에도 매월 통일교 교인들은 십의 삼조 헌금을 바쳐야 하고 문선명 나라 건국기금 매월 17만원을 바쳐야 하며 각종 거액 재산 착취에 통일교 교인들은 자살, 이혼, 가정파탄 등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으로 매일 오전10시부터 통일교 교인들이 동원되어 저녁까지 통일교자금줄인 합동결혼식을 시키기 위하여 골목 골목을 누비며 영혼을 빼앗고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자칭 참 부모 재림주 문선명을 믿고 복종하며 합동결혼식을 해야만이 천국가고 가정천국을 이룬다고 주장하지만 제가 체험한 30년 빼앗긴 세월 동안 생생한 지옥 생활 이였으며 비극적인 한순간의 악연으로 잃어버린 30년 세월 이였습니다.

 

제 8절 비참한 현실의 벽을 넘어선 사투
 

비록 30년의 처절한 삶을 마감하는 결단을 내렸지만 저는 아직도 수돗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집에서 살며 기약이 없는 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1층에서 아침저녁으로 수돗물을 틀어 사용하면 2층에 있는 우리 집은 그릇을 씻고 쌀을 씻다가도 수돗물이 나오지 않아 식사 준비를 할 수 없습니다. 화장실도 물을 퍼부어야 되는 곳에 살고 있습니다. 물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5년 동안 물통에 물을 받아 놓고 사용을 했습니다.

안방은 여름에 비가 올 때면 언제나 비가 흘러내려 물통을 대어야 합니다. 저의 집은 마루에도 비가 흘러내려 물통 여러 개를 놓고 살았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천장이 높아 안방이나 마루에 있어도 성애가 끼고 마루 유리창이 얼어 유리창을 비닐로 막아야 했습니다. 봄이 되어 따뜻해질 때까지 문도 한번 열지 못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추운 겨울에는 제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이 집이 문선명 통일 제국 만큼이나 추운 동토의 집이었습니다.

겨울이면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는 난방이 제대로 안되어 저와 저의 가족들은 옷을 두겹 세겹으로 끼워 입고 자야 했습니다. 심장병에는 감기가 가장 무섭기 때문에 저는 잠바를 2개, 3개를 입고 밤마다 감기에 안 걸리려고 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저는 집에 올라오려면 대문을 들어와 'ㄷ' 자로 된 사각형 길을 와야 집 안으로 들어 올 수 있습니다. 'ㄷ' 자 길을 들어 을 때마다 저와 가족들이 큰 건물을 지을 때 쓰는 강철로 만든 'H Bim'과 비슷한 아슬 아슬한 길을 걸어 2충으로 올라 와야 합니다. 특히 밤에는 어두워서 몸의 중심을 잡고 걸어 올라오기가 어려워 위험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는 3번이나 지하실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제가 처음부터 아파트로 이사를 갔더라면 아내와 자녀들을 이토록 추위와 더위에 고생시키지 않고 비참하게 만들지 말았을 것입니다. 이 집은 정화조와 하수구가 바로 연결 시켜져 있어서 세면대 하수구에서 정화조 냄새가 1년 365일을 코를 찌릅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을 떠나 마음의 감옥과 가정생활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길만이 살길입니다. 고통스러운 이 집에서 이사를 가려고 하여도 지금까지 이사를 갈 수 없는 비참한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경제적인 생활고로 가족들은 추위에 떨어야 했고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저는 지옥 같은 집에서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한 집은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수돗물이 잘나오고 방이 따뜻해서 조금 살 것 같습니다.

저는 통일 교회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매일 대학 병원에서 조제한 심장약을 아침, 저녁으로 먹고 생명을 이어 갑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기도와 약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현실이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이 땅에 태어나 성공과 좌절을 겪으면서 육신의 병고와 빼앗긴 생활로 인하여 비참한 심정 입니다.

문선명 통일교에 빠져 제 고향도 부모, 형제도 버렸습니다. 특히 늙으신 어머니 마저 병마에 시달려 1년 내내 병원에 계셔도 찾아보지 못하는 불효자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이 땅에서 뿌리 뽑는 것이 제 마지막 소망입니다.

저는 참으로 육신의 고통과 싸우며 이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는 그 날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통일교회의 충성꾼 이었던 저는 과천 통일교회 현직 목사직을 탈퇴하고 지옥 같은 통일교회를 탈출합니다. 그러나 저는 통일교회를 탈퇴하는 순간까지 과천교회 교인들을 위하여 아침저녁으로 간절한 마음을 갖고 기도 드렸습니다.

저는 통일교 목사직을 그만 두면 지옥 가고, 통일교를 떠나면 지옥 가는 것으로 믿고 살았습니다. 단 한번의 인연이 단 한장의 통일교 전단지가 30년의 청춘을 빼앗고 지옥 길 이었고 죽음과 같은 삶 이였습니다. 저에게 예수님만이 오직 구주요 성경만이 진리라고 기독교 성도들이 통일교 입교전에 저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26년 동안 제 아내는 문선명 통일교주의 잔인한 인사와 횡포에 불안과 공포, 긴장 속에서 추위와 배고픔과 싸우며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 세상 천지에 저의 아내같이 알뜰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 한 방울도 아끼고 전기 한 등도 아끼며 근검 절약으로 살았습니다.

26년이 지난 지금도 청량리 경동시장에 가서 시래기를 줍고 배추 잎 버린 것을 주어다가 김치를 담아 먹습니다. 계란도 깨진 것을 사와 먹습니다. 쌀도 언제나 최하품만 삽니다. 저의 아내와 자녀들은 돈 600원을 아끼려고1시간이 걸리는 거리도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닙니다.

이렇게 피눈물 나게 알뜰하게 살아도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회 목사 아내로서는 살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고 26년 동안 지옥 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이것이 통일교회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충성한 목사 아내의 처절한 생활입니다.

저는 제 아들, 딸에게도 2000년에 들어와 너무 많은 책망과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지울 수 엾는 상처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와 자녀들이 문선명 교주와 저 때문에 이렇게 마음의 지옥과 생활의 지옥에서 살게 된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까지 30년을 빼앗긴 세월 속에서 억울한 생지옥에서 살아온 것에 대한 분노 때문에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저의 아내와자녀들에게 억지소리를 하는 때가 많습니다. 저는 자녀들에게도 "음식을 사먹지 말라", "음료수도 사 먹지 말라", '학교도 버스비만 가지고 다녀라" , "등록금도 벌어 가지고 써라" 등 간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자녀들에게 하곤 합니다. 자녀들은 안 쓰고 안 먹고 친구도 안 만나고 피눈물나게 사는데도 걸어 다니라고 하고 온갖 고통을 자녀들에게 주어 자녀들이 눈물 흘리는 때가 많습니다.

모든 근심걱정 염려를 제가 한다고 해결 되겠습니까? 주님께 맡기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고 푯대를 향해 달려 가노라고 했던 사도 바울 같이, 통일교 궤멸을 위해 엘리야와 스데반 집사와 같은 심정으로 문선명 집단과 싸워 승리하겠습니다.

 

제 9절 저는 하나님 뿐 아니라 아내와 자녀애게 죄인 입니다.
 

그 동안 저의 아내는 근검 절약을 하여 모았던 돈을 3남매 교육비와 생활비로 모두 써 버렸습니다. 그래서 3남매 자녀들의 대학 학비를 빚으로 충당하고 있습니다.

졸업 무렵엔 저의 딸이 문방구에서 종이와 재료를 사다가 장미꽃을 만들었습니다. 손이 얼어서 마루에서 난로를 피워놓고 그 추운 겨울에 손을 불에 녹여가며 하루 종일 손으로 장미꽃을 만들었습니다. 저의 딸은 새벽까지 장미 꽃다발과 장미 바구니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장미 꽃다발과 장미 꽃바구니를 들고 집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가서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며 두딸이 꽃팔이 소녀가 되어 "꽃 사세요!" 라고 외쳤습니다.

K대학교 졸업식에도 꽃을 팔러 갔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장미 꽃다발과 꽃 바구니를 만들어 놓은 것을 저는 학교 앞에 딸들과 같이 갖다 주고 돌아왔습니다. 딸들은 그 곳에서도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고 손을 불어가며 꽃을 사라고 외쳤습니다.

저는 저의 아내와 같이 딸들이 만든 꽃을 가지고 두 딸과 같이 D대 졸업식장에 가서 학생들과 학부형들에게 꽃을 팔았습니다. 통일교 목사가 대학교 졸업식장 앞에 가서 "꽃을 사세요"하고 몇 시간을 외쳤습니다.

저의 딸들은 사회 경험을 하기 위하여 꽃을 만들어 졸업식장에서 꽃팔이 소녀가 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한 몸부림을 친 것이었습니다. 저의 딸은 지금도 매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서 아끼느라고 학교에서 점심을 굶으면서도 부모에게 옷을 사주고 고기를 사주며 동생들에게도 정성을 베품니다.

저의 아내는 목사 사모지만 아침에서 밤12시까지 파출부 일과 식당 일을 합니다. 저의 아내와 딸은 주택가 대문 앞에 버려진 음료수 병과 신문을 들고 집으로 들어와 모아 놓았다가 많이 모아지면 폐휴지 수집소에 가져가 팔아서 생활비로 보태고 있습니다.

제가 넉넉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가운데 폐품을 수집하여 팔아서 생활에 보태 썼다면 검소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나 저의 가족들은 알뜰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버린 쓰레기, 폐휴지를 모아 팔아서 먹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적당히 아부하고 또 목회를 열심히 하면 교회가 부흥되어 안정된 이단 집단생활이 되겠지만 저는 예수님 이름만이 나의 구주요 성경만이 진리라고 내 마음속에 각인 되었기에 거짓된 부자보다 가난을 선택 하였습니다.

 

 

제 21 장 목숨을 건 문선명 통일제국 탈출

 

제 1절 "준철아, 붉은 통일교 감옥을 탈출하라."


저는 1996년 3월 17일 날 새벽에·꿈을 꾸었는데'우리나라 지도가 제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러더니 지도가 우리나라 땅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 대 지진이 일어나 산과 들, 집이 땅이 갈라지면서 땅 속으로 들어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갈라진 땅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너무나 놀라서 그 광경을 목격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보며 안타까워 하였습니다.

제 앞에서도 길이 갈라지고 산이 갈라져 길 가던 사람들이 땅 속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순간 어찌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는데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준철아, 빨리 네가 있는 그 자리에서 탈출하라."

저는 땅이 갈라지고 수많은 사람이 땅 속으로 사라져 갈 때 극적으로 몇몇 사람들과 같이 갈라진 땅 속에서 결사적으로 기어 나와 산으로 피하여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의 명령 때문에 수많은 통일교 교인이 고통 당하고 처절한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을 꿈에 본 것입니다. 저 자신도 통일교회에서 몇 몇 통일교 교인들과 같이 탈출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저에게 1998년 1월 IMF로 통일그룹의 부도로 통일교 기업체가 국가로 넘어가고 몰락할 것과 한국 경제의 파탄으로 IMF가 올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저는 이 꿈이 시련과 고통,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회를 탈출하라는 것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통일교회를 떠나야지' 하면서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 때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통일교회를 탈출 했다면 제 모든 환경이 달라져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1999년 2월 10일 밤에 또 꿈을 꾸었습니다. 제가 끝없는 모래사막을 기진맥진하여 가고 있었는데 제 앞에 사각형의 높다란 담을 두른 강철 쇠로 만든 집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밥을 얻어먹고 물을 마시기 위하여 쇠 대문을 통과하여 쇠로 된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쇠문 밖에서 키가 2미터 정도 되는 검은 사람이 쇠문을 잠가버렸습니다. 저는 쇠문을 열고 다시 밖으로 나가려고 노력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안에서 밖으로 탈출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은 탈출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 쇠 집을 탈출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사각형 안에 갇힌 사람들을 총 지휘하는 붉은 옷을 입은 저 사람의 사슬을 벗어나야 한다" 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였습니다. 저를잡으려고 문선명 교주가 쫓아왔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붉은 쇠 감옥에서 저를 잡으려고 쫓아온다는 것은 사단 마귀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 때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사이비 교주로서 수많은 영혼을 죽이는 지옥으로 끌고 가는 영적 살인마" 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면서 "준철아, 너는 빨리 통일교회를 탈출하라. 그 길만이 네가 살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순간 죽을힘을 다하여 쇠로 된 높은 담 장을 기적같이 뛰어넘어 탈출하였던 것입니다.

심장판막증, 심부전증, 담석증, 불면증, 위장장애 등으로 호흡이 곤란i고 계단을 잘못 오르 내리며 사경을 헤매는 저는 어디에서 힘이 솟았는지 다윗과 같고 여호수아와 같은 힘과 용기가 넘쳐 났던 것입니다.

기진맥진 하였던 제가 아니라 이제는 힘이 넘치는 박준철이 되었습니다. 꿈에 사막을 가로질러 도시에 가서 수많은 사람에게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교주에게 받았던 박해와 통일원리의 비 진리성을 놓고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 동안에 문선명이 제 꿈에 나타날 때마다 "뜻을 위해 일 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저를 지금까지 그토록 많이 칭찬해 주고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며 축복한 가짜 재림주 문선명은 그 동안에 저를 통일교회에 끌어들여 이용만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문선명 교주의 세뇌교육에 영혼까지 노예가 되어 살아왔기 때문에 문선명 교주는 저를 이용 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 부모로 믿고 절대신앙, 절대복종, 절대사랑으로 충성할 때는 문선명 교주가 꿈에 나타날 때마다 "네가 최고다" 라고 칭찬 하였습니다.

이제는 제가 문선명 교주에 대한 믿음이 없고 '통일교 목사직을 버리고 탈퇴하여 통일교 궤멸운동을 해야지' 이런 생각을 했을 때 문선명 교주는 저를 붉은 감옥에 가둬놓고 탈출하지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저를 잡으려고 그토록 역사 하였던 것입니다.

2000년 2월 13일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잠실 체육관에서 4억쌍 1차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저는 과천 노인들을 관광버스 4대에 모시고 거짓된 핵사에 동참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이 되겠다고 노인들이 서명한 것도 아니요, 통일교 교인도 아니며, 합동 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아닌데 신랑, 신부로 위장하기 위하여 하얀 목도리 1개씩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문선명은 자기 교세를 과세하기 위하여 언제나 40년 동안 허세를 부려왔습니다.

통일교회는 대외적으로 교인이 많은 것처럼 홍보하지만 안에는 교인들이 텅텅 비어있습니다. 전국 통일교회 교인 전체가 3만 3천 명 재적이고 예배인원은 1만 7천명입니다. (학생포함) 큰 기독교회 한곳의 20분의 1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협회본부 안호열 기획국장은 "통일교 재적인원이 20만명 이며, 예배인원은 재적인원의 10분의 1인 2만명이 통일교 전국 한 주일 예배인원이다" 라고 2002년 7월 12일 서울지방 검찰청 조사실에서 주장하였지만 거짓입니다.

일본에 통일교 교인은 2만명에 불과한 것을 3백만명 이라고 허위 주장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그의 제자들은 언제나 합동결혼식 숫자나 예배 재적 행사숫자를 허위로 부풀려 대외적인 선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4억 쌍 1차 합동 결혼식은 실제로 신랑과 신부는 극소수 였습니다. 전국에서 끌어 모은 노인들 10만 명은 신랑, 신부가 아닙니다 전국의 노인들을 관광버스에 태워 서울 구경과 식사 제공 및 선물을 제공하기 때문에 참석한 것입니다.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회는 각지역 노인정 노인들을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단 한번의 만남으로 노인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이 이용물이 되고 통일교(가정교회)에 입교 하여 영혼을 빼앗기고 지옥길로 끌려 가는 것입니다.

 

 

제 22 장 통일교 과천교회 박준철 현직목사 탈퇴

 

기자회견 54가지 비리폭로

 

제 1절 문선명의 정체와 통일교 비리폭로


저는 드디어 2001년 1월 9일 과천통일교회 현직목사로 있다가 기독교 회관에서 가짜 사이비 참부모 재림주 문선명 교주를 만천하에 고발하면서 탈퇴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박준철이라는 한 인간의 출생과 파멸은 문선명 교주와 만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일순간의 악연으로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세뇌되어 재림주 참부모로 믿고 빼앗긴 30년동안 목숨을 바쳐 폐인이 될 때까지 충성하며 지옥생활을 했던 것을 세상에 고발했던 것입니다.

저는 「빼앗긴 30년, 잃어 버린 30년」책을 통하여 문선명의 정체, 피가름 의식, 혈통복귀 구원의식, 합동결혼식의 비극, 문선명의 사생아 등 합동 결혼식후 통일교 한가정당 1억씩을 착취하는 문선명 교주의 잔악상, 통일교 제국의 실체를 테러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공익을 위해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를 방지하기 위해 세상에 폭로해야 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탈퇴기자회견을 연기 할 수 없었습니다 탈퇴준비를 했던 것을 마침내 결단하고 통일교 실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던 것을 일간지와 기독교방송, 기독교 언론 40여 곳을 통하여 2001년 1월 9일부터 2003년 1월 9일까지 900회에 걸쳐 낱낱이 문선명의 정체와 통일교의 비리를 폭로하였습니다.

1200만 기독교 성도들이 문선명 집단에 대하여 이단이라고 제쳐둘 것이 아니라 경각심을 갖고 통일교 궤멸을 위하여 1200만 기독교 교인이 하나되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궤멸 하기를 바라고 목숨을 바쳐 통일교 실체를 보도 하였습니다.

저는 1999년 10월 1일을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에서 탈출할 날로 정했지만 제 마음이 약하여 자꾸만 미루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과천교회에 올라오는 즉시 탈퇴할 준비를 하였지만 뜻있는 분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번번이 시기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혼자라도 탈퇴하여 문선명 통일교 궤멸을 위해 외쳐야 한다는 절박감에 통일교를 탈퇴하여 홀로 외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저의 지팡이가 되 주셨고 저의기도를 들어주시고 저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저는 문선명이 인류 역사에 없는 사악한 영혼 사기꾼으로 고발합니다 문선명은 선량한 사람들을 끌어다가 합동결혼식을 시켜놓고 천국 가는 면죄부라며 1억원씩 받고 헌금이라는 미명하에 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거액재산 착취 때문에 자살, 이혼, 가정불화, 처절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극적인 삶입니다. 문선명을 믿고 복종하며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하면 구원받고 가정천국을 이루고 천상천국에 간다고 세뇌시키고 있지만 지옥생활이 바로 통일교 생활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하루라도 빨리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합동 결흔식은 파멸과 죽음, 생지옥과 같고 가난한 결혼생활이 되며 문선명 교주는 영혼 사기꾼이라는 것을 세상에 고발했어야 했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재산 착취범이라는 것을 준비부족으로 세상에 늦게 고발한 것을 가슴아프게 생각합니다.

갈라디아 1:8 '다른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통일교 문선명 이단집단을 이단사이비집단이요, 문선명은 적그리스도라고 매일 이웃집에 전해주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만 통일교가 이단 사이비집단이라고 생각만 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 성도가 저에게 단 한번이라도 "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요 사이비 교주" 라고 말해 주었다면 저는 통일교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마음속으로 통일교가 이단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씀으로 소리 내어 이웃집이나 만나는 사람마다 통일교는 이단 집단이라고 외쳐주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매일 "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요 사이비 교주" 라고 외치지 않으면 박준철 목사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통일교회에매일 매시간 전도되어 영혼을 빼앗기고 지옥으로 끌려 갈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문선명 집단을 궤멸하여 주십시오.

제가 세뇌된 다음에 통일교가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는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요,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 라고 기독교 성도들이 매일 외쳐서 통일교회에 빠지지 않도록 영혼을 구원해야 할것입니다.

 

제 2절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통일제국의 정체폭로


2001년 1월 9일 15:00시(오후 3시), 한국 기독교회관 2층 예배실에서 통일교 현직 박준철 목사의 탈퇴성명서 기자회견문

 

2001년 1월 9일,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기자회견문. 국민일보, 기독교TV(ch 42), 기독교방송, 극동방송, 크리스찬뉴스위크지, 교회연합신문,한국선교신문 특집보도, 기독공보, 기독신문, 개혁공보 연재, 기독교보, 기독타임스 연재, 기독교 타임스, 장로신문, 침례신문, 크리스찬연합신문, 크리스찬한국신문, 복음신문, 크리스찬신문, 목회자신문, 선교신문, 들소리신문, 뉴스앤조이, 크리스찬데일리뉴스(CDN), 기독교연합신문, 기독교신문,교회와신앙, 현대종교 등 그 외 기독교 모든 교단지와 모든 초교파지에서 문선명 집단 궤멸을 위해 언론사 관계자님께서 사명감을 가지시고 적극적으로 보도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 문선명은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거 역했다.


하나님께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말씀 하였는데,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자신이 인류의 구세주 재림주 참 부모라고 하며 통일교 교인들 앞에 신으로 군림한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은 하나님 이름을 이용하여 기독교 교인들과 통일교 교인을 속이는 최고의 자칭 신이요, 인류역사에 가장 큰 살아 움직이는 우상이다.

 

2. 문선명은 십계명의 둘째 계명을 거 역했다.


하나님께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경배하지 말라" 말씀하였는데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이 자신에게 경배하게 하는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우상이다. 통일교 교인들은 문선명 사진을 걸어놓고 아침 · 저녁으로 경배하며 예배 때 마다 문선명에게 경배한다 또한 문선명은, 17살에 교통사고로 죽은 문선명의 아들인 문흥진을 천국과 영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문흥진이 재림 부활했다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주장하며 미혹하여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다.

문선명의 청평 천성 왕림 궁전 주위에는 참 생명과 희망을 주는 다섯 나무와 생명수가 있다. 그리고 문선명은 자칭 하나님이 세웠다며 천신 수나무를 만들었다. 사랑나무(수양버들나무), 심정나무(뽕나무), 만물나무(밤나무), 충성나무(소나무), 축복나무(잣나무) 등이 다섯 나무에 속하고, 통일교  교인들은 이 다섯나무에 경배하고 기도한다.

문선명은 일본 천지종교 대만 불교와 하나되어 우상숭배를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 때 마다 불교 스님이 염불을 외우고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외우는가 하면 힌두교, 회교, 유사 사이비종교 지도자를 합동 결혼식장에 모아 하나님에게 우상 숭배자 총대회를 한다. 그것이 바로 문선명이 하나님의 대적 원수라는 증거이다.

 

3. 문선명은 십계명의 셋째 계명을 거역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말씀하였는데 문선명은 스스로를 참 부모, 천지부모, 재림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었다. 따라서 문선명은 적그리스도이며 희대의 영혼, 육신을 빼앗는 사기꾼이다. 문선명은 자신과 통일교 교인을 속이고 온갖 무당, 푸닥거리를 하여 스스로 이단 사이비임을 증명하였으며 통일교 교도들을 지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4. 문선명의 통일교 원리강론은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 교리를 훔쳐온 것이다.

 

문선명은 16세(1935년)때에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인계를 받아 재림 주님으로 세워 졌다고 통일교인들에게 강조한다. 그러나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참 부모도 재림주도 아니고 사악한 거짓 선지자다.

문선명은 1939년 경성 상공 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을 하였고 1941년 3월에 일본 와세다 대학 부속 고등학교 전기과에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2년후 중퇴 하였다. 1944년에는 한국에 귀국을 하여서 토목 건설회사 전기기사로 취직을 해 있다가 1945년 10월에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에서 성서신학과 기독교 근본원리 교육을 6개월 받고 탈퇴하여, 문선명 자신이 김백문과 같이 사이비 교주 노룻을 하기 위하여 통일교를 만들어서 포교하기 시작하였다.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 교리를 훔쳐온 것이 통일교 원리강론인 것이다. 이런 통일교 원리강론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 받은 새로운 진리요, 성약말씀이라고 주장하는 문선명은 거짓말쟁이다.

문선명이 김백문 교리를 도용하여 재림주 행세를 하듯이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탈퇴한 정명석(JMS)이 통일교 교리를 이용하여 30개론을 만들었다. 정명석은 문선명과 똑같이 사이비교단을 만들어 문선명과 같은 재림주 노릇을 하며 수많은 영혼을 빼앗고 피가름 의식을 치르며 합동결혼식을 하여 교세확장을 꾀하고 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 밑에는 또 다른 사이비 교주 생산공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문선명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쓴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거짓말이다. 이스라엘 수도원 사이비 교주 김백문의그 교리를 훔쳐 기독교 근본 원리 교리를 6개월 동안 교육받은 문선명이 도용한 것이 사악한 사이비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창조원리, 타락론, 복귀원리, 재림론까지 김백문 교리와 동일하며 원리강론은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고 복종하여 영원한 노예로 세뇌 시키기 위한 것이다.

 

5. 문선명 교주가 메시아요 참 부모라면 자녀들은 통일교 원리에서 주장하는 4대 죄인 원죄, 혈통죄, 연대죄, 자범죄가 없어야 할 것이다.

문선명 자녀들은 죄가 없는 완벽한 인격자가 태어나야 하는 것인데 결혼한 자녀들이 음란죄, 간통죄, 마약 등 온갖 죄를 짓는 것을 볼 때 문선명은 가짜 재림주, 적그리스도, 가짜 부모인 것이다.

(미국 CBS TV방송, KBS 위성TV(2000.09.02방송) - 문선명의 큰아들:문효진과 홍난숙 부부의 결혼, 이혼, 마약, 음란, 파경프로 1시간 방송함)

 

6. 문선명은 이 시대 최고의 혈통복귀 피가름광이요, 가정 파괴범이다.


문선명의 원리 강론 교리는 음란죄, 혈통복귀 피가름 죄를 가장 큰 죄로 강조한다. 그러면서 자신은,혈통복귀, 피가름 역사로 첫번째 부인인 최선길과 그의 아들 문성진을 버리고 이혼하였다. 문선명 교주는 수많은 여인과 간통을 했다.

문선명은 혈통복귀 피가름을 통한 혈통 복귀 원리의식으로 지금까지 처녀와 유부녀를 간음하여 개인과 가정을 파괴시켰다. 이렇게 문선명의 혈통 복귀 의식으로 낳은 자녀만도 18명으로 밝혀졌으며 이것은 문선명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을 저질렀는가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문선명은 천사장 루시엘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이 지의 뿌리가 아니라, SEX로 타락한 것이 선악과요 지의 뿌리이기 때문에 문선명 재림주가 SEX로 타락한 인류를 SEX로 복귀 해야된다는 혈통복귀의식 즉 피가름 의식을 행해야만 구원받고 천국 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선명은 인류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처녀들과 유부녀들은 3일 행사인 혈통복귀 피가름 의식을 치러야 완전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여 3일 의식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피가름, 혈대교환, 혈통 복귀 의식으로 3일간 간음, 간통 의식을 치러 수 많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을 간통하여 사생아를 낳고 가정을 파괴하였던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1953 년 12월 24일 밤부터 부산영도 신성묵과 유신희 부부 집에서 21일 동안 부흥집회를 하였다. 부흥집회를 하는 첫날밤에 Y대 여대생 김영희와 혈통복귀 피가름 혈대 교환의식을 통하여 장래가 촉망 받는 여대생의 인생을 파멸시켰다.

그 외에도 문선명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을 혈대교환 의식으로 희생시켜 인생을 파멸시켰고 수많은 가정을 파괴시켰다. 문선명 교주는 희대의 가정파괴범, 패룬범으로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를 통한 혈대교환 혈통복귀로 간음하였으며 하나님도 사탄도 용서할 수 없는 범죄자이다.

그 외에도 6~60마리아와의 혈통 복귀의식을 치렀으며, 수많은 가정을 파괴시켰다. 문선명은 현재 부인인 한학자와 1960년 4월 11일 문교주(40세), 한학자(17세)에 어린양 결혼잔치를 하고도 1965년도에 최순주 처녀와 간음혈통 복귀의식을 하여 '박사무엘' (박준경)이라는 사생아를 낳아 길렀다. 미국에서도 간음 혈통 복귀의식으로 '새미' 라는 사생아를 낳아 문선명이 기르고 있다.

 

7.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지옥간 조상귀신을 위해서라며 거액 헌금을 받고 천국행 면죄부를 팔고 있다.

 

그러나 문선명은 자신의 전처인 아내도 전도하지 못하고 이혼하였으며,자식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이비 적그리스도이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에게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서 지옥간 조상들 천국행 표를 사라고 명령하고 천국행 표를 팔고 있다. 1대부터 7대까지는 남편과 아내 직계조상 280만원, 일본축복 가정은 2,000만원, 7대부터 14대 조상, 14대부터 21대 조상까지 일정헌금을 내야 되고 120대 조상까지 천국행 표를 팔고 있는데 특히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에게 조상을 팔아 거액재산을 착취하는 행위를 즉시 중단 시켜야 할 것이다.

문선명은 인류역사에 가장 부도덕한 개인 가정 파괴범이다.

 

8. 문선명 교주는 참가정 순결 운동본부를 만들어 초 · 중 · 고등학교 순결 캠페인을 하고 있다.

 

문선명이 자칭 재림주, 참 부모라면 가장 순결하고 깨끗해야 될 메시아데 오히려 그렇게 수많은 여인들과 혈통복귀 피가름 관계를 갖음으로 하나님, 기독교인, 통일교회와 교인을 속였다.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통일교 교리는 순결을 가장 강조하면서 간통죄를 가장 큰 죄로 여긴다. 그것은 단지 문선명 교주의 교활한 위선이요, 거짓된 행위인 것이다.

통일교 세력확장과 전도 활동목적으로 순결캔디를 학생들에게 먹이며 순결 강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거짓된 혈통 복귀의식을 감추기 위해 통일교 교인들에게는 음란죄를 가장 큰 죄악으로 교육을 하고 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참으로 가증스러운 사람이다.

 

9.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거액 재산착취의 수단이다.


통일교는 합동결혼식을 하면 구원을 받고 자녀들도 원죄, 혈통죄, 연대죄, 자범죄가 없어진다고 했지만 통일교 교인들은 여전히 죄가 남아 있고 구원받지 못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집단에서는 필리핀, 태국 처녀들을 1천 만원을 주고 데려와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이다. 합동 결혼식 후 7천만원~l억원의 거액 재산을 바쳐야 한다. 통일교 교인들이 문선명 교주에게 내야하는 헌금으로는 죄를 용서해준다는 총 탕감비 1200만원이 있다.

또, 통일교 교인은 문선명 교주의 참 아들 딸이기 때문에 자기 재산을 참부모인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 소유권 이전이라는 뜻의 총 생축 헌금 2100만원, 나라를 위한 구국 헌금 1천만원(성인 6인 가족기준), 지옥간 조상 천국 보내는 헌금 3300만원, 천성 왕림 궁전헌금 320만원, 문선명 비행기 헌금100~1000만원, 병원헌금 160만원, 구국헌금(5인 가족기준) 800만원, 문선명 나라 건국헌금 매월 1인당 17만원, 매월 10의 3조 헌금, 8대 명절헌금, 각종 교회 행사헌금 등 30가지가 넘는다.

따라서 전 재산을 바치고도 빚 더미에 올라 앉은 것이 비극적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인들의 처참한 생활이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 후 일생 동안 천국이 아니라 생지옥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또 합동결혼식 후 문선명을 믿고 복종을 하여도 구원이 없다. 나는 통일교회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눈 감으면 지옥 갈 문선명이 전용비행기가 왠 말인가?

 

10. 문선명은 한국과 일본에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에게 전용 비행기 헌금을 강요하여 2000년 2월 10일에 전용 비행기를 5천만달러에구입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 그룹이 1998년 IMF 때 부도나 멸망하였는데도 통일교 교인 들에게 거액의 재산을 착취하여 초호화판 생활을 하고 있다. 게다가 81세나 되는 문선명 교주는 불쌍하고 가난한 통일교 교인들에게 가정당 100만원에서 1000만원씩의 헌금을 거 두어 전용비행기를 샀다.

과연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81세 노인이 통일교 교인들의 피눈물 어린 헌금으로 전용 비행기를 사야만 했는가? 또한 문선명은 각 나라마다 초호화 주택과 최고급 자동차를 구입하여 온갖 호의호식을 하면서 제왕처럼 살고 있다.

통일교 교인들은 피골이 상접하여 죽어가는데도 문선명은 교인들에게 공갈 협박을 하여 거액 재산을 착취하고 문선명의 제국을 세워야 하는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불쌍하고 가련한 처지를 이해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와 통일교 교인들과 더불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교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문선명은 입으로는 사랑과 희생, 봉사, 제물을 외치지만 불쌍한 통일교 교인들의 처절한 피, 땀, 눈물을 먹고 사는 사악한 사이비 교주일 뿐이다.

 

11. 문선명은 자칭 황제 재림주 참 부모라면서 자녀 신앙도 책임 지지 못하는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의 자녀들은 4가지 죄가 없다는데 오히려 그들은 마약, 혈통 복귀 피가름, 이혼,간통으로 타락하여 감옥을 가는 현실이며, 이 세상의 죄인들 보다도 더 많은 죄를 지었다. 그것은 문선명이 자신도 구원을 받지 못한채 죄악을 저질러 하늘에 죄가 닿아 자녀들이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이다.

 

12.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통일교 목사들의 목숨은 하루살이같은 일회용이다.

 

반면에 통일교 목사들은굶주림을 견디지 못하여 수 십명에서 백 여명의목사들이 매년 생활고로 목회를 그만두고 통일교회를 이탈하고 있다.

2000년 1월 이후부터 9월말까지 목회를 그만 둔 목회자만도 전국 시 ·군 250명 목회자중 150명이 넘는다.

게다가 전세계 각 나라의 대표자가 되는 국가 메시아 185명을 문선명 교주는 목사 직분을 박탈하고 한국의 시군구 연합회장이라는 직분을 주어 각나라 국가 메시아직에서 박탈시켰으며 월급 50만원씩을 받게하여 가정 생활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2000년 9월 18일에는 전국의 통일교 목사직을 박탈하는 살인적인 인사를 행하였다. 통일교에 충성한 한국 40~60대 목사 217명의 목사직분을 문선명 교주는 박탈하였다. 전국 시군구 통일교 목사가 250명인데 217명이라면 거의 전체 목사들을 파리 목숨같이 짤라 버린 것이다.

통일교 목사들은 일생동안 문선명 교주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였는데 하루아침에 사랑하는 아내와 중 고 · 대학생인 자녀들을 데리고 교육비와 생활비, 퇴직금 10원도 받지 못하고 쫓겨 났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개인의 인격과 가정의 행복을 빼앗았다 현재 전국 통일교 목사들은 배신과 분노, 자괴감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러한 인사단행은 예전에도 심심치 않게 이루어졌다. 1981년 10월 20일에 전국 통일교 목사들을 잔인하게 내쫓았고 1988년 6월에도 잔인한 인사이동으로 통일교 목사들의 가정을 파탄시켰으며 1991년 8월 30일에는 전국 통일교 전체 목사 500명을 사전에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단칼에 잘라버렸다.

문선명은 자신에게 충성한 목사들을 상대로 인권말살, 가정파괴, 생활파괴를 한 것이다. 교회에서 쫓겨난 목사들 가정은 생활을 해야 했는데 문제는 이들 중 중 · 고 · 대학생 의 자녀와 있으며 결혼을 목전에 두고 있는 자녀들이 있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데도 문선명 교주는자신에게 30년간 충성한 통일교 목사들에게 퇴직금 10원도 주지 않고 잔인하게 쫓아내어 버렸던 것이다.

인류 역사에 '네로 황제 , '히틀러' , 어떤 공산주의자도 문선명 교주처럼 이렇게 잔인한 종교 지도자도, 파괴자도 없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그 죄악과, 문선명 교주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3. 잔인한 사이비 교주 문선명은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과 통일그룹 내 통일교 회사의 교인들에게 말 한마디 명령으로 100억, 1000억의 거액 헌금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통일교 목사들을 몇 번이나 단칼에 무 자르듯 잘라 버리는 잔인한 폭군이다.

 

하루아침에 가정천국을 외치는 문선명 교주가 통일교 목사들 가정과 통일교 교인가정의 행복추구권을 박탈 시켜 버리는 행위는 참부모가 할 행위가 아니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일회용으로 이용당하고 버림을 받았다. 통일교회를 탈퇴한 목사와 교인들은 문선명 교주에게 빼앗긴 세월을 한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문선명은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하며 하나님 또한 문선명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14. 문선명 통일제국을 세우기 위해 각분야 지도자를 포섭하는 행위를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막자.

 

문선명은 통일교인들의 피살을 짜서 정치인, 경제인, 교수,종교인, 언론인을 매수하였다. 그들을 매수하기 위해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통일교 48년 역사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통일교 교인들의 피·눈물을 짜서 각종 국제회의라는 구실로 왕복 항공편,호텔, 각종 만찬, 선물 비용 일체를 받았음은 물론 문선명 본인의 야망과 욕망인 메시아로 인정을 받기 위해 돈을 물 쓰듯이 투자하였다. 통일교 교인들이 장사와 온갖 노동, 파출부 일로 거액 헌금을 하면 문선명은 그 헌금을 물쓰듯 하며 자신을 참부모 재림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와 생활고로 자살하고 가장 파탄이 된 통일교 교인들을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가? 문선명의 죄악은 하나님에게 이미 보고되어 있어서 심판 받을 날만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15. 문선명의 아들 문흥진이 17세에 교통사고로 죽었는데 영계의 총사령관으로 해놓고 예수님도 시중을 드는 부하라고 주장하여 기독교를 희롱하고 있다.

 

1200만 기독교 교인은 예수님을 믿고 성경진리를 믿는다면 문선명의 정체를 알고 예수님을 명예훼손죄로 고발하여 사법조치를 해야할 것이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에게 교통사고로 1984년도 1월 2일날 죽은 둘째 아들이 희생의 제물로 간 것이라고 거짓 증거하고 있다. 그리고 죽은 문흥진을 통일교 교인들은 신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문선명은 지금 청평에 천성 왕림 궁전을 건축해놓고 문흥진을 영계의 총 사령관이라며 살아있는 통일교 처녀와 영혼 결혼을 시켜 놓았다. 참으로 이 지구상에 이런 사이비 집단이 있다는 것을 1200만기독교 성도들은 경각심을 갖고 통일교를 대처해야 할 것이다.

 

16. 문선명 사이비 집단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에게서 공갈 협박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불어넣어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다.

 

1대~120대 지옥에 간 조상을 천국에 보내는 구원헌금으로 무조건3,300만원~5천만원의 거액 재산을 빼앗는다.

 

17 문선명 교주의 하수인 사이비 정치 지도자들을 낙선시키자.


문선명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이 낙선시키자.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의 각종 만찬, 세미나, 남북통일운동, 승공연합, 훈독회 행사장에 참석하여 문선명 교주를 참 부모, 재림주, 구세주라고 격려사, 축사, 극찬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1200만 성직자,성도들이 전국 시 · 군 · 구에서 총궐기 하여 낙선 운동을 벌여야 할 것이다.

 

18. 문선명은 중풍으로 죽은 혼순애 장모까지 대모라고 칭하여 재림했다고 사기치는 사건.

 

문선명의 장모는 중풍으로 쓰러져 10여 년을 주위사람이 대 ·소변을 받아내야 하고 움직이지도 못하였다. 문선명은 장모가 죽자 홍씨 대모님이라고 큰 칭호를 내리고 재림하였다고 통일교 교인들을 속이고 있다. 또한 이상길 통일사상 연구원장이 사망하였는데, 이상길이 '하나님의 사자' 라고 하며 통일교 세뇌교육에 이용하고 있다.

 

19, 문선명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는 기독교 목사를 근절하자.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단에서는 통일교회의 모든 자금을 투입하여 모든 항공료 ·왕복 차비 ·호텔비용 일체를 부담하며, 기독교 목사 장로를 포섭하고 있다. 통일교 각종 만찬 세미나, 행사장에 참석하여 문선명을 참 부모 재림주로 극찬하는 성직자와 성도들을 회개시키고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것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막대한 자금투자로 만든 기독교 목사·장로 ·종교인 포섭단체

①초 교파 기독교 협의회 회장인 이재석은 문선명의 최초36가정 이며, 핵심 인사이다.

② 한국 8대 종교인 협의회 회장 이재석.

③ 한국 민족 종교 협의회 회장 이재석.

④ 한국 종교 지도자 협의회 회장 이재석.

⑤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 회장 이재석.

⑥ 세계평화 초종교 연합 회장 곽정환(통일교 이인자).

⑦ 한국 종교인 평화회의 회장 곽정환.

⑧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총회 총회장 김광명,

⑨대한예수교장로회 총화총회 총회장 이병옥 등이 통일교에서 세운위장된 기독교 단체이다.

 

20.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각종 만찬, 세미나에 참석하는 언론인.학계 · 문화계 인사들을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이 추방시키자.

 

21. 한국방송 언론의 공익을 위한 것이라면 문집단의 비리를 고발 보도하라. 매일 희생자가 늘어가고 있다.

 

각종 언론 방송에서 통일교 교리비판, 부정부패, 재산착취, 우상숭배, 가정파괴 행위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다시는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22,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 이주계획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IMF때 통일그룹 부도 후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 3만 5천명을 남미 브라질 자르딘에 1억 평의 대지를 매입하여 만든 새 소망 에덴동산으로 이주할 것을 계획한때도 있었다.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에 초 · 중 · 고 · 대학은 이미 건축 완공을 하였으며, 주택을 건축 중에 있고, 앞으로 50억 평을 더 매입 할 계획이다. 그 50억 평에서 통일교 교인들은 후손 대대로 문선명의 노예가 되어 밀림을 개간하고 농업, 어업, 산업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또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통일교인들은 전 재산을 바쳐야 할지도 모른다.

 

23. 문선명 통일교 집단은 세계 각 도시, 건물, 대지를 매입하는데, 금융감독원과 검찰에서는 철저히 조사하여 외화 밀반출 여부를 조사해야 할 것이며 위법을 하였다면 사법조치를 내려야 할 것이다.

 

24. 문선명 통일교 사교 집단은 1998년 IMF직후 통일그룹이 1조 7천억 은행빚을 갚지 못하고 부도되어 파산했을 때 전국 통일교회 대지와 교회,재단을 분리시컥 국민의 재산을 빼돌렸다.

 철저하게 사법부에서 조사하여 위법을 하였다면 종교법인을 박탈시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25. 문집단의 청평천성왕림궁전의 의혹을 환경단체는 조사하라.


문선명 사이비 집단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중림리에 1만명이 들어갈 수 있는 청평 천성 왕림궁전이라는 건축물을 지어놓고 매주 5천 명~l만 명의세계 각지에 있는 통일교 교인들을 모아서 우상숭배, 세뇌교육, 재산착취, 공갈협박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통일교 교인들은 매주 수 천명이 모여 집회를 하면서 대 · 소변을 보느라고 수도 서울 시민의 식수원을 오염시키고 있다. 환경부와 환경단체는 철저히 조사하여 위법한 사실이 있으면 건축물을 철거하고 사법 조치해야 한다. 통일교 제주 영빈관이나 수택리 영빈관도 조사하여 위법을 하였다면 철거해야 할 것이다.

 

26. 문선명 통일교 집단은 폭행 · 폭력 집단이다.

 

저자의 교회를 빼앗고, 강제 인사부정으로 교구장 직에서 끌어내렸다. 통일교 협회 국장 ·부장 ·평직원까지 수십명이 동원되어 내가 시무하는 서울 노원 교회 안에 밀고 들어와 노원 교회 교인들과 시위와 몸싸움을 했었다. 협회본부에서는 전 김승철 총무국장과 전 김철현 가정국장이 협회 전 직원들 앞에서 저자를 무차별적으로 폭행하여 그 때의 후유증으로 지금 심장병에 시달리고 있다.

 

27. 저자 주위에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단의 살인적 재산 착취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처절한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가정파탄,별거, 이혼, 자살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가정 파괴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28.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자금줄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 그룹 부도 후에도 초호화 생활과 최고급 외제자동차, 궁전같은 각 나라의 저택을 구입하였다. 통일교 교인 가정당 3백60만원~l천 만원까지 거액 헌금을 거두어 2000년 2월 10일에는 5천만 달러를 주고 개인전용 비행기까지 구입하였다. 문선명 교주는 81살 된 노인이라 저녁에 자다가 아침에 못 일어나면 죽음을 맞아 영계에 갈 수 있는데 무슨 초호화 비행기 (5천만달러/한화 6백억)가 필요한가?

문선명이 그 동안에 지은 죄악으로 억만년 지옥 불에 들어가 살도록 하나님께 고발할 것이다. 통일교 교인들이 처절한 가난 속에서 막노동, 파출부, 식당 일로 모은 거액 헌금을 낭비하는 것이 문선명은 참 부모 재림주가 아니라,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탄 마귀 사이비 교주라는 증거이다. 

 

29. 저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용서할 수 없다.

 

저는 30년 동안 세뇌되고 마취되어 죽도록 충성했던 잃어버린 그  시간을 찾을 수가 없다. 저는 더 이상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이용 당할 수 없고, 사이비 교단에서 충성할 수 없기 때문에 저의 양심에 따라 모든 것을 포기하고 통일 교회를 탈퇴하고 비리를 폭로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30.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세계 평화 통일당을 창당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그 동안에 각종 정치인들을 포섭하고 세뇌 교육을 시켰다. 문선명 교주는 "2천년 전 예수님이 나라와 백성이 없고 힘이 없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고 강조하면서 문선명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통일당을 창당한 것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최종목적이다.

 

31.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2004년 4월30일까지 전세계 185개국 통일교 교인 총 동원령을 내렸다.

 

대한민국을 통일 제국으로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 목적달성을 위해 통일교 합동 결혼식한 부인들은 전 재산을 바쳐야 되었다. 또한 남편과 초 '중 · 고 · 대학생 자녀를 집에 두고 가정을 떠나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 합동 결혼식한 부인 1만 5천명은 전국 시군구에 있는 통일교회에 합동결혼식한 통일교 부인들이 20~70명씩 배치 되어서 목숨을 걸고 미혼남녀를 전도하고 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부인들은 교회에 매월 생활비로 각자 10 만원씩을 지불하며 생활하고 있다. 통일교회에서 합동결혼식한 부부들은 일생동안 각종 전도활동에 동원되어 부부가 별거하는 때가많다. 행복한 가정천국이 아니라 처절한 비극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32,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전국 시군구에서 범 기독교적인 통일교, 사이비종교 반대 뿌리 뽑기운동 귈기대회를 해야 한다.

통일교회 미혼남녀 합동결혼식을 하면 가정이 파탄되고 우상숭배를 하고 재산착취를 당하며 영혼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 통일교회와 사이비 종교 교리 비판과 피해자 폭로 대회도 같이 열어야 글다.

 

33. 세계일보는 통일교인들의 매달 50억 헌금으로 유지되는 적자신문.


문선명 통일교 대변지이며 방패막 역할을 하는 세계일보는, 매월 일본에서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이 꽃팔이, 생선장사, 막노동을 하여 모은 50억이라는 거액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 돈으로 세계일보 1,200억 융자금 이자를 지불하고 세계일보 사원들의 월급을 주고있다.

세계일보는 통일그룹 부도 후에 6개월 동안 월급을 못 주는 때도 있었다. 게다가 새계일보 기자 월급은 다른 신문사의 절반이다. 세계일보를 폐간하는 길만이 통일교 교인들을 재산 착취에서 해방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34. 문선명은 통일제국을 건설하지만 무너진 통일제국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그룹 부도 후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여 교회와 통일그룹을 운영하고 있다. 금융감독원과 통일그룹 주 거래은행이 였턴제일은행은 통일교에 1조 7천억을 환수하라. 국민의 재산을 완전 환수하여 통일그룹을 완전 폐업시컥야 한다. 그 길만이 통일교 교인들이 문선명 사이비교주에게 재산을 빼앗기지 않고 지옥에서 해방되는 길이다.

 

35.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한국과 일본의 방송언론이 대대적인 비리와 부정을 보도하면 궤멸될 수밖에 없다.

 

전세계 통일교회 운영 자금줄인 한국과 일본 통일교회 교인 재산 착취를 근절시키면 통일교회는 자동적으로 궤멸될 수 밖에 없다. 한국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은 단결하여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궤멸과 악랄한 사이비 교단 궤멸을 위해 외쳐야 한다.

현재 사이비 교단은 300곳이넘고 있다. 300만 사이비 교단의 교인들은 영혼을 빼앗기고 처절한 노예가 되어 지금도 고통 당하고 있다. 그들도 우리 부모 형제요, 이웃이다. 해외선교도 중요하지만 내 나라, 내땅, 내 이웃에 사이비 교주가 나타나 영혼을 빼앗고 이리와 같이 선량한 사람을 파멸시키는 사이비 교주를 궤멸시키지 않는다면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께 무엇을 보고할 것인가? 선각자 된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이 가장 시급하며 사이비 교단 궤멸을 위해 싸우고 외쳐야 한다. 이단교회를 뿌리뽑아야 한다.

 

36.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이 그 동안에도 사이비 종교에 대한 대책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는 사이비 교주와교단이 선량한 영혼을 미혹하여 영혼과 육신을 파멸시키고 간통, 우상 숭배,참부모 재림주라고 자칭하고 거액재산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고 있다.

 

이제는 성경 진리의 말씀대로 사탄 마귀의 화신인 문선명 통일교를 뿌리 뽑기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 사이비 교단과 싸워서 승리해야 한다.

일본 기독교 1%인 120만명인데 통일교 합동결혼식후 거액 재산착취를 집중 언론 방송 보도하여 통일교 교인이 300만명 이라고 재판정에서 거짓증언 하였지만 실제 2만명에 불과하다.

 

37.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그 동안에 통일교 교인들에게 기도 마지막에 "문선명 참 부모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라고 시켰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라고 한다는 것은 상상도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다가 바뀌어서 통일교 교인들에게 재산착취와 책임강조를 위해 "참부모님의 승리권을 축복으로 이어받은 000목사(교인들은 장로,권사, 집사직분을 넣음)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통일교 목회자와 교인들이 기도 끝마무리를 "축복의 중심가정 000(교인들은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을 넣음)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라고 한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야말로 자기 자산도 구하지 못하고 자기 자녀들도 구하지 못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는가?

통일교 교인들을 노예로 삼아 지옥으로 끌고 가며 사악한 기도 마무리를 시키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의 대적이다. 한국 1200만 기독교인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4명 중 1명이 기독교인이다.

통일교인 오전국 총재적 인원이 33000이며 예배는 학생을 포함해서 17000명이다. 기독교인 1200만 목사 성도가 예수님 이름으로 단결하여 궤멸하자. X 통일교회(가정교회)는 예배때 주기도문도 사도신경도 없다.

 

38.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우상숭배, 재산 착취의식은 인류역사의 최대 사기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통일 그룹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통일그룹은 1998년 IMF 때 부도로 망하여 기업체가 국가관리 기업이 되었다. 또한 5,000만 달러를 투자한 오인천 영화는 한국에서 개봉도 하지 못하였으며 실패작이 되어 버렸다. 중국 판다 프로젝트도 통일교 교인들의 고혈인 12억 달러를 투입하였지만 사기 당하여 망해버린 결과가 되었다.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아 미국 뉴요커 호텔(43층)을 매입하여 운영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미국 워싱턴 D.C 셀라톤 호텔도 적자로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파라과이 아메리카노 호텔도 경영이 어렵고, 해양산업도 실패한 입장이다. 미국 워싱턴 타임지는 적자로 부도위기에 있다.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의 고액 헌금이 없으면 그날로 통일교 관련 신문사가 부도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세계일보도 부도직전으로 매월 50억을 한국 ·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이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을 바쳐서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통일교 방패막인 세계일보는 통일교 교인들의 헌금이 끊어지면 운영 자금이 고갈되어 그날로 부도가 날 지경에 이르렸다.

그 외에도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계획하는 것마다 실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심지어 문선명 교주의 통일교 목회자 양성기관인 선문대 신학과 학생들도 문선명 교주의 살인적 목회자 인사조치와 통일교 선배 목회자들의 처절한 파멸과 죽음의 길을 보고서 80%도 넘게 목회를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고 있는 실정이다.

문선명 교주가 목회자를 양성한다고 했지만 통일교 목회자는 파리목숨이라는 것을 알고 신학생들도 도망치고 있는 실정이다. 문선명은 하루아침에 전국 통일교 목회자 전체 500명을 사전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잘라 버리는 잔인한 폭력 인사를 몇 번씩이나 서슴지 않고 행하였다.

그래서 통일교 목회자 가정은 처절한 가난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나와 같이 가정이 파탄된 것이다. 통일교회 후배 목회자나 2세 목회자들은 선배 목회자들의 비극적 인 파멸과 박준철 목사의 결과를 되새걱 보아야 할 것이다.

통일제국은 문선명 교주의 야망에서 나온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하나남의 원수요, 전세계 19억명 기독교인의 원수요 한국 1200만 기독교인의 원수다. 통일교회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 고액헌금과 생활고에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교인들의 원수요, 가정파탄, 이혼, 별거로 통일교회를 탈퇴하고 원한이 맺힌 사람들의 원수이다. 통일교 교인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문선명 교주는 하나님의 심판과 역사의 심판, 인류의 심판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39.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제국은 구원이 없다.

 

저는 30년 동안 통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제가 존경 할만한 신앙자나 구원을 받았다는 통일교 교인을 만나보지 못했다. 미혼 남녀가 통일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과 아내, 자녀들이 문선명의 노예가 되는 길이며 가난의시작인 것이다. 제2의 박준철이 되는 것이다.

저는 죽도록 충성해도 잔인한 문선명 교주의 사악한 명령과 행위로 폭력 ·폭행을 당하고 충격을 받아 심장병이 되어 폐인이 되었다. 선량한 한국의 미혼 남녀가 문선명 집단에 들어와 인간노예가 되어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보다는 독신으로 혼자 사는 것이 차라리 백배 나을 것이라고생각한다.

 

40. 한국과 일본의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을 천국에 보내준다는 미명하에 거액 재산을 착취하여 1200억을 만들었다고 한다.

 

문선명과 사돈 관계인 통일교 이 인자 곽정환은 D종합금융에 부실 여부도 알아보지 않고 투자했다가 부도나는 바람에 단 10원도 돌려 받지 못하고 날렸다는데 사실인가?

곽정환 회장이 하는 것마다 실패요, 파멸이라고 생각한다. 통일교 교인들은 목숨을 바쳐 거액헌금을 만들어 문선명 교주에게 바치지만 헛된 수고일 뿐이다.

 

41.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착취하기 위하여 브라질에 황족 입적 40일 수련 때 2100만원을 받은 것도 모자라 청평 천성왕림궁전에서 재탕으로 황족 입적수련 21일 수련회에 120만원씩을 받았으며 입적 통일 축복식에서는 70만원씩을 통일교 교인들에게 내라고 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는 것은 처절한 가난, 빛더미에 올라앉는 것이다.

 

42.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최종 목적은 백성과 나라를 세워 통일 제국을 건설하여 황제로 취임식을 하고 군림하는 것이다.

 

문선명의 황제 취임식은이미 1985년 12월 25일에 완료하였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2001년 1월13일에는한국 청평 천성 왕림궁전에서 전세계 합동결혼식을한 통일교 교인들 3천명을 모아놓고 하나님 왕권 즉위식을 올렸다. 그러나 이 의식은 문선명 황제즉위식이었다. 2003년 1월 1일, 1월 13일에도 청평 천성왕림궁전에서 문선명 우상화 극이 열렸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동토의 왕국인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통일교 교인들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피를 흘리는 희생을 시키고 있다. 사이비교주의 죄악과 말로를 하나님은 보고 계시고, 심판만이 남아있다. 문선명은 지금까지 나라를 위하고 이 민족을 위하여 국제 승공연합 활동과 국민 연합 활동, 기독교 초교파 활동, 세계 언론인 연합활동, 세계 평화교수 협의회, 세계 평화문화연합활동, 국제교육재단, 세계평화 종교연합,국제과학 통일회의, 전국 시 · 군 · 구 통일교회 각 동 · 통 · 반 지역 전도활동, 훈독회 활동, 각종 만찬·세미나 대회, 통일교 합동결혼식 행사 대회,부도난 통일그룹 각종 사업체 활동, 문화단체 활동, 세계평화 초 종교연합활동, 세계 평화여성쳔합 활동, 세계평화청년연합 활동, 세계 평화 정상회의 활동 등을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자신을 재림주 참부모 메시아 구세주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 47년 동안 활동을 한 것이다. 그것이 문선명의 최종 활동목적이다.

문선명 교주는 지금까지 인류 구원과 평화와 사랑, 지상천국을 외치고 있지만 자신의 야망과 통일제국을 만들기 위한 욕망으로 통일교 교인들을 처절하게 희생시키고 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가정파괴 우상숭배 지옥에 간 조상의 이름을 팔아 거액의 재산을 빼앗고 있다. 구원을 외치지만 지옥이요 평화와 사랑을 외치지만 저 같이 가정파탄 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문선명은 가련한 통일교 교인들의 영혼을 빼앗아 통일제국을 세우는 이용물일 뿐이다. 통일교회에서 갈라져나간 사이비종파가 정명석(JMS)등이 문선명 교주 밑에서 배운대로 통일교를 떠나 사이비교주 노릇을 하고 있다. 지금 통일교회 출신이단이 30파로 늘어났으며 앞으로 70파, 120파가 넘는 사이비 교파로 늘어나 분열되어 산산조각이 나서 파멸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43. 문선명은 예수, 공자, 석가, 무하멧을 축복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통일교 여인들과 결혼시켰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예수님을 실패자 부하로 격하시키고 예수님을 믿어도 완전구원이 없으며 기독교 교인들이 천국도 갈수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도 구하지 못하고 자식들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문선명 자신 만이 참부모 재림주로서 예수를 천국 보낼 권한이 있고 인류와 기독교교인을 천국 보낼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예수탄생일을 1971년 1월 3일날 계시를 받아 정하고, 통일교 차만숙 권사의 딸인 장정숙을 '성신' 이라고 정하여 예수와 결혼을 시켜 예수님의 명예를 파멸시켜 버렸다. 차만숙 권사의 딸인 장정숙을 일생동안 시집도 가지 못하는 처녀로 만들어 인생을 파멸 시켜 버린 결과가 되었다.

문선명은 통일교 세뇌 교육용으로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이라는 책에 통일교 교인이였던 이상길이 죽어 영계에 가서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예수, 공자, 석가, 무하멧을 만났다고 했다.

예수, 공자, 석가, 무하멧은 문선명 재림주를 믿고 구원받으라고 세미나를 열고 통일교 교리 교육을 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예수가 영계에서 지상에 있는 문선명에게 장정숙과 축복결혼을 시켜 주어서 감사하다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주장하며 통일교 교인들 세뇌 교육용으로 이용하고 있다.

문선명은 1999년 12월 29일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예수 드림 이라고 편지를 보내왔다고 하는데 이것을 통일교 교인들은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공자, 석가, 무하멧도 문선명이 통일교 여인들과 결혼시켜 주었다. 21세기 최첨단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이 때에 문선명과 古 이상길, 김영숙을 내세워 통일교 교인들 아침, 저녁 세뇌교육용으로 활용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문선명의 조상 귀신을 구원해준다고 속이고 거액재산 착취 행위나, 통일교 합동결혼식만 하면 천국간다고 해놓고 이제와서 통일교인을 죄가 많으니 죄를 용서해주는 탕감비 1300만원을 천국행 티켓파는 행위는 문선명은 희대의 사기꾼이다.

이 거짓된 일로 통일교 교인들 거액 재산 착취에 활용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 비극이며 언론과 방송이 대대적으로 보도 해야 한다. 기독교 성직자,1200만 성도들은 통일교회의 실체를 알아야 하고 합동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의 비극을 만천하에 알려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 p,554~572)

김일성이 영계에서 문선명 재림주에게 보내는 편지, 한국 기독교계를 대표한 고 김할란 이화여대 총장이 문선명 재림주에게 보내는 편지를 문선명은 광고하였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문흥진(17세)을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이 영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 아들 문흥진이가 영계에서 문선명에게 보내온 편지를 통하여 문선명을 재림주 참부모로 만들기 일한 웃지 못할 비극적인 조작사건이 통일교내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모든 내용은 예수,공자, 석가,무하짓 위에 문선명 재림주가 존재한다는 인식과 문선명만이 인류를 구원하고 4대 성인을 구원해 준다는 사악하고 조작된 거짓 편지이다.

구세주는 오직 예수님이 아니고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라는 것을 인식시키고자 조작을 하여 불안 공포심을 갖게 하고자 통일교인을 세뇌시키고 있다. 1998년 6월 13일날 3억 6천만 쌍 1차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미국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하면서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무슨 권한으로 90억의 죽은 영흔을 합동결혼식을 시켰는가? 그리고 문선명은 자신의 사돈인 통일교 이인자 곽정환 부부를 내세워 33명의 영계에 간 성인 영혼 결혼을 시켰다.

예수를 1971년도에 장정숙과 결혼시켜 놓고, 또다시 예수와 결혼식을 시켰다. 공자 부인은 이경준 현 선문대 총장, 석가부인은 최원복 전 이대 교수,무하멧 부인은 이정옥(전 세일여행사 사장), 소크라테스와 결혼한 김명희(문선명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처녀출산- 문희진) 지금도 김명희는 매월통일교 협회로부터 60만원의 생활비를 받으며 문선명 교주에게 충성하며 독신으로 살고 있다.

또, 문선명은 1955~1960년. 연대, 이대출신의 문선명 여인들을 영혼 결혼을 시켰다. 각 종교지도자들이 문선명 여인들에게 결혼 축하 예물로 금시계를 바치게 했다. (통일교 월간지인 '통일세계' 1998년 7월호 p.83) 문선명 사이비교주의 사악한 행위는 기독교 파괴와 세계 종교인에 대한 명예를 훼손하였다. 즉시 예수님의 명예를 훼손시킨 문선명을 명예 훼손죄로 고발하여 사법처리 하여야 한다

 

44. 통일교 세뇌 교육용 책인「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의 편지조작 사건,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세뇌 교육용 책인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에 아담 · 하와가 보낸 편지중 "책임 분담을 다하지 못하여 수천 년 동안 고생했으며 언제나 죄인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잘 모시고 있다" 며 1997년 8월 14일에 편지를 보내왔다고 조작하였다. (p.155참조)

노아, 아브라함, 가롯 유다, 세레요한 편지 중에서 "사명을 다하지 못하여 죄송하다" 고 하며 "지옥문이 열릴 날은 문선명 구세주가 열어 줄 것이다" 라고 조작한 사건(1997.08.20)

김일성, 레닌, 히틀러, 뭇솔리니, 이승만(전 대통령), 모세, 김활란(이대전 총장), 박정희(전 대통령) 조작사건. "박정희 대통령이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가 이 나라(영계)오실 때 모든 것에 대해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으며 영계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와 영계에서 농사를 짓고 사냥을 다닌 다고 문선명 집단에서 책에 주장하고 있다. 21세기에 문선명 사이비 집단의 조작과 사기성을 알고 고발해야 할 것이다. (1998.06.11)

일본 정치계의 기시(전 수상), 후꾸다(전 수상), 이께다(전 수상), 나까소네 편지 조작사건. 이께다 전 수상의 의견은 "나까소네가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의 협조를 받아 움직이면 일본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 라고 주장하였다. (1998.06.11)

고르바초프는 "문선명 참부모님의 뜻을 잘 알고 있으며 참부모님의 뜻 성취에 적극적인 열정도 갖고 있다" 고 주장하며 죽은 닉슨은 "클린턴의정책과 문선명 재림주 아버님의 뜻이 아주 가깝게 연결되기를 노력하고 혐조하겠다" 고 영계에써 주장하여 조작하였다. (1998.06.11)

16세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교하여 죽은 유관순은 "문선명 참부모님을 영계에서 자랑하고 전세계의 영웅이라고 외치고 있다" 고 주장하몄다. (1999.09.30)

 

※ 영계에서 문선명 재림주님에게 보내온 편지 조작사건.

 


① 예수님이 영계에서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님에게 보내온 메시지


"문선명 아버님께 올립니다. 아버님! 저는 예수라고 합닐다. 아버님! 저를 장여사와축복 영혼결혼을 시컥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아내는 정말 저에게 과분한 여인입니다. 정말 황공합니다. 이제 문선명 참부모님의 뜻을받들어 아름다운 가정을 꾸며 참부모님을 모시고 참부모님의 뜻대로 복귀섭리역사 앞에 열심히 기도하며 노력할 것입니다. 아버님! 예수 지인을 용서하소서. 언젠가는 한이 풀릴 것입니다. 아버님!정말 감사합니다. 예수는제 아내 장여사를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문선명 참부모님 ! 만수무강 하옵소서. 천상에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예수가 아버님께 올립니다. "(1999.12.29) 예수드림

 

② 소크라테스가 문선명 참부모님에게 보내온 메시지


"문선명 참 아버님, 어머님께 드리옵니다. 저를 김명희와 축복결혼을 시컥주어서 감사합니다‥‥‥(생략)‥‥ 옥체 만강하옵소서." 천상에서 소크라테스 올림(1998.08.13)

공자가 참부모님에게 보내온 메시지 등을 조작하였다. 「영계의 실상과 인류의 구세주는 문선명지상생활」의 책을 통하여 통일교 교인들에게 오직교주라는 것을 인식시키고자 이 책을 합동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들이 아침 · 저녁으로 읽고 믿고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2002년 1월 1일에 청평 천성왕림궁전에서 통일교 교인들을 모아놓고 "문선명 교주는 하나님의 메시지" 라는 것을 만들어 "나는 만군의 여호와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다. 문선명 참부모는 만왕의 왕이요, 구세주요, 메시아" 라고 말을 하며 하나님이 직접 메시지를 보낸 것같이 조작하였다. 그 자리에서 문선명 교주는 또 다시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교인들은 천국황족 입적을 하려면 재산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문선명 집단이 이 땅에 뿌리뽑힐 때까지 함께 기도하고 반대운동을 하며 다각적으로 대책을 세워 다시는 이 땅에 문선명 집단과 같은 사이비 집단이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45.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2000년 1월 13일에 4억쌍 1차 합동결혼식을 하였다. 신랑 ·신부가극소수였기 때문에 추운 걱울에 있는 10만명 정도의전국 노인들을 잠실 종합운동장에 데려다놓고 무료 관광버스, 식사 대접과선물을 주었다. 실제 합동결혼식을 한 미혼 남녀는 2 천 쌍에 불과하였다.

 

전국 노인들을 흰 목도리를 목에 두르게 하여 행사 때마다 신랑 '신부로 위장한 행위를 하여 세상을 미혹하였다.

2001년 1월 27일에 4억쌍 2차 합동결혼식이라면서 미국 뉴욕 맨해튼UN본부 경제사회 이사회 회의실에서 문선명, 한학자 사이비 교주 부부가 황제 의상을 입고 합동결혼식을 할 210쌍의 미혼남녀를 모아놓고 퉁일교 합동결혼식을 하였다. 그 자리에서 전세계, 전 현직 수상, 국왕 정치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그 자리에서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2002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대하였다. 문선명은 개인과 가정의 파괴범이며, 통일교 교인들의 거액재산을 착취하는 사탄 마귀의 형상이다.

이런 사이비교주가 노벨 평화상 후보로 된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모독하고 인류를 기만하는 가증스러운 일이다. 개인과 가정을 파괴한 문선명, 한학자 부부에게 '세계 NGO 만국평화상' (2000.08.18)을 주었다는 것은 전세계 기독교 교인들의 수치이며 NGO에서 통일교를 축출해야 할 것이다.

문선명은 노벨상에 목숨을 걸고 전략을 세워 또 한번의 세상의 이목을 받는 행위를 하고 싶은 것이다. 1200만 기독교는 UN을 움직이고, 노벨 평화상에 도전하는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재림주 참부모가 아니라면 궤멸 시켜야 할 것인가? 지금 전 성직자와 교인들이 결정 해야되는 순간이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또 한번의 통일교 전도용 선전물인 UN에서 2001년 1월 27일에 합동결혼식을 하여 세상을 미혹하고 UN에서 인정한 것과 같이 선전을 하게 한 것이다. 한국 방송언론 각종 기독교 신문에서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합동결혼식이 재산 착취와 파멸의 결혼식이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주어야 할 것이다.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은 통일교 미혼 남녀 합동 결혼식을 전국 시 · 군 ·구에서 결사적으로 막아야 할 것이다. 젊은 미혼남녀가 유혹 당하지 않도록 기독교인들은 외쳐야 할 것이다. 통일교 합동 결혼식은 우상숭배, 재산착취, 영혼과 육신이 노예가 되어 일생 동안 지옥 같은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통일교회는사람 살 곳이 못되는 곳이며, 구원이 없는 곳이다.

초대 순교를 당했던 주기철 목사님과 같이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은 영혼을 파멸시키는 사이비 집단의 궤멸을 위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외쳐야 할 것이다.

 

46. 문선명의 부인과 그의 자녀들(총 19명)

 

문선명은 개인가정 파괴범이라는 증거- 재림주 참 부모라면 어린양 혼인잔치를 한번만 해야 하는데 문선명은 사악한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수 많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을 파탄시켰다.

문선명은 수많은 여인과 피가름, 혈대교환, 혈통복귀, 간음 의식을 행하여 처녀와 유부녀들의 개인가정을 파탄시켰다. 그 후에 문선명이 40살이 되었을 때 당시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인 17세의 한학자와 1960년 3월 16일에 어린양 혼인잔치를 한 후 낳은 14명의 자녀들. (한학자와 결혼하고도 처녀와 간음혈통 복귀 의식으로 사생아를 낳음.)

문선명의 큰아들인 문효진은 홍난숙과 결혼하였으나 마약, 간음, 가정폭력, 전과, 알콜 중독, 포르노 편집증, 이혼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다. 이는 문선명은 거짓된 부모라는 증거이며, 그는 참 부모 재림주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지 1998년 9월 23일자 참고)

문선명의 큰며느리 홍난숙은 미국 CBS 방송의 한 프로그램에서 00분간 그녀의 시아버지인 문선명을 참부모 재림주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문선명의 현재 부인 한학자를 통해 출생한 4번째 딸인 문은진은 홍난숙과 같이CBS방송에 출연하여, 부친인 문선명은 구세주, 재림주가 아닌 자신의 아버지일 뿐이라고 말하였으며 자신은 통일교 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문선명의 죄악으로 자식들이 고통 당하고 있으며, 문선명은 오히려 통일교 교인들이 죄악을 많이 범하여 자신의 자식들이 제물이 되었다고 주장하며 교인들에게 40일, 100일 릴레이 회개 금식 운동을 지시하였다. 참으로 가증스러운 일이다.

문선명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을 한 숫자를 부부로 쳤을 때, 18억 4천 만명이 통일교 교인 숫자이다. 한 가정 당 자녀를 2명으로 잡았을 때, 통일교 교인 총 숫자는 총 36억 9,604만 명이 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전세계 통일교 교인을 모두 합하여도 7만명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기독교 교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가증스러운 거짓 숫자로 하나님을 속이고 인류를 속였다. 문선명 집단의 주장대로라면 전세계 인류 60억 가운데 60%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이라는 숫자가 되는 것이다.

 

47.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교주는 2001년 1월 19일날, 미국 조지 W-부시 대통령 취임식 전야 기념 축하예배를 주체를 하고, 설교를 하였다. 그러기 위해 문선명은 세계 정치, 경제, 문화, 언론, 교육, 종교 지도자들의 세미나, 만찬, 항공료, 호텔경비, 선물 일체를 지불했다. 세계 각 나라 모든 연구단체에 많은 지원금은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이 막노동, 파출부, 꽃팔이 등으로 바친 거액 재산이다.

 

그 돈이 문선명 통일제국을 건설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문선명 교주의 원리강론과 책자는 교계지도자와 미국 정치계의 최고 지도자들, 언론계 지도자들에게 배포하였다.

문제는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레이건 전 대통령이나 닉슨 전 대l통령, 부시전 대통령, 현 조지 W-부시대통령 등을 통일교 신문인 워싱턴 타임지와 UPI통신을 이용하여 정계 지도자들을 움직여 왔다. 조지 W-부시 대통령의 취임식을 하루 앞둔 날, 워싱턴 DC에서 문선명을 중심 삼고, 행사가 이루어졌다. 그 때 제임스 메릿 남 침례교 총회장이 축사를 했다.

미국 기독교 보수파 제리 포웰 목사(리버티대학교 총장), 단알규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 전 회장,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래험 목사의 축사가 있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한국의 사이비 통일교회가 모두 없어져도 이미 세계를 움직이는 사이비 교주가 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침묵할 것인가? 문선명 적그리스도의 궤멸을 위해 외칠 것인가? 지금도 문선명은 한국에서 통일교회가 모두 뿌리 뽑힌다고 하여도 세계 185개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하는 것에 기독교 성직자와 교인들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단결하여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48. 2001년 1월 현재, 한국 문선명 통일교 교인 재적 총 숫자는 3만 5천 명이며, 예배 인원은 1만 7천명이다(어린 학생들 포함.)

 

49. 문선명 집단 신조

 

①유일신(雄一神)이신 창조주掛」造主) 하나님을 인간의 아버지로 믿는다.

② 신 구약(新 · 舊約)성서를 경전(經傳)으로 받든다.

③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이신 예수님을 인간의 구주(救主)인 동시에복귀(復歸)된 선의 조상으로 믿는다.

④ 예수님께서 한국에 재림(再臨)하실 것으로 믿는다.

⑤인류세계(人類世界)는 계림하시는 예수님을 중심삼고 하나의 대가족사회(大家族社會)가 될 것을 믿는다.

⑥하나님의 구원섭리(救援攝理)의 최종목표(最終目標)는 지상(地上)과천상(天上)에서 악(惡)과 지옥(地獄)을 없애고 선(善)과 천국(天國)을 세우는데 있는 것으로 믿는다.

 

50. 나의 맹세(세뇌교육용 매일 아침 저녁으로 살아있는 우상 자칭 아버님 재림주라는 문선명 교주에게 경배하며 낭독하는 내용)

 

①천주의 중심존재로서 아버님의 뜻(창조목적)과 맡겨주신 책임(개성완성)을 완수하며 기쁨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선의 자녀가 되어 창조 이상 세계에서 영원히 아버님을 시봉하는 참 효자(녀)가 되기를 000는 맹세 하나이다.

②아버님께서 육천년간 제물된 십자가 노정을 참으시며 죽은 oo를참 자녀로서 살리시기 위하여 말씀과 인격과 심정을 주시어 일체가되게 하심으로써 천주의 상속권을 주시려는 거룩한 뜻을 000는 완전히 상속받을 것을 맹세 하나이다.

③원수에게 잃어버린 자녀와 천주를 복귀하기 위하여 아버님께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시고 종의 몸을 쓰시고 땀은 땅을 위하여 눈물은 인류를 위하여 피는 하늘을 위하여 뿌리시며 000대신 역사 노정을 두시고 원수 사탄을 무찌르시던 무기를 지니고 그들을 완전히 심판할 때까지 아버님의 본을 받아 참 아들 딸 000는 적진을 향하여 용진할 것을 맹세 하나이다.

④아버님께서는 평화와 행복과 자유와 이상의 원천이시며 아버님을 모시려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와 국가와 세계와 천주는 본성의 인간을 통하여서 만이 심정일체 이상세계를 완결함으로 000는 참 사람이 되어 심정의 세계에서 아버님 대신자가 됨으로써 피조 세계에 평화와 행복과 자유와 이상을 옮겨주고 아버님께 기쁨과 만족을 돌려드리는 참아들 딸이 될 것을 맹세 하나이다.

⑤우리는 하나님을 중심한 하나의 주권을 자랑하고 하나의 백성을 자랑하고 하나의 국토를 자랑하고 하나의 언어와 문화를 자랑하고 하나의 부모를 중심한 자녀 됨을 자랑하고 하나의 전통을 이어받을 혈족임을 자랑하고 하나의 심정세계를 이룩하는 역군임을 자랑하고 이를 실현시킬 것을 000는 맹세하나이다.

이러한 의미와 사명을 성취하는데 책임을 지고 생명을 바처 싸울것을
000는 선서하며 맹세하나이다. 선서하며 맹세하나이다. 선서하며 맹세하나이다

서기 1962년 자녀의 날(음 10월 1일)

'나의 맹세'나 '가정맹세'에 나오는 참부모는 자칭 재림주 참부모인 문선명을 지칭하는 말이다.

 

51. 가정맹세(문선명이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에게 '나의맹세' 를 하지말고 '가정맹세' 로 하라고 명령함)

 

①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본향 땅을 찾아 본연의 창조이상인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을 창건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②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을 모시어 천주의 대표적 가정이 되며 중심적 가정이 되어 가정에서는 효자, 국가에서는 충신, 세계에서는 성인, 천주에서는 성자의 도리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③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사대심정권과 삼대왕권과 황족권을 환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④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의 창조 이상인 천주대 가족을 형성하여 자유와 평화와 통일과 행복의 세계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⑤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매일 주체적 친상세계와 대상적 지상세계의 통일을 향해 전진적 발전을 측진화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⑥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대신 가정으로서 천운을 움직이는 가정이 되어 하늘의 축복을 주변에 연결시키는 가정을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⑦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본연의 철통과 연결된 위하는 생활을 통하여 심정문화 세계를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⑧우리 가정은 참사랑을 중심하고 성약시대를 맞이하여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복종으로 신, 인, 애 일체이상을 이루어 지상천국과 천상천국의 해방권을 완성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 통일교 행사 때나 아침 · 저녁으로 문선명 사진에 경배하며 세뇌 교육용으로 '가정맹세' 를 통일교 교인들이 하고 있다. 통일 교회에서는 문 선명교주가 단상에 올라 을 때 성경을 들고 나오는 일이 없으며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을 예배나 행사때 일명 가정교회에서는 낭독하지 않는다. 통일교 교회와 통일교인 집에는 통일교 깃발이 걸려있다.

 

52.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각종 8대 명절


① 참부모님 탄신일 : 문선명(1920년 1월 6일(음력)),한학자(1943년 1월 6일(음력))

②참부모넘의 날 : 1960년 3월 1일(음력)

③ 참자년의 날 : 1960년 10월 1일(음력)

④ 참만물의 날 : 1963년 5월 1일(음력)

⑤ 잠하나님의 날 ' 1968년 1월 1일(양력)

⑥ 세계통일국개천일 : 1988년 10월 3일(양력)

⑦ 하나님축복영원선포일(칠일절) : 1991년 7월 1일(양력)

⑧ 7 8절(천지부모 천주안식권 선포일) : 1997년 8월 9일(음력 7월 7일)

 

53. 법무부장관,각 언론사장, 기자, 기독교 성직자와성도들은 이 엄청난 사이비 종교인 통일교를 이대로 방치할 것입니까?

 

문선명의 명령 한 마디에 통일교 교인들이 고통을 당하며 거액 재산착취의식으로 말미암아 처절한 가난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므로 사법부는 조사하여 위법사실이 있을때  법적인 조취를 강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통일교 교인들이 세뇌에서 깨어나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가 없어야 할 것이다.

 

54.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1억이 넘는 거액재산 착취의식의 시작이다.
 

기독교 최고의 전성국가인 한국 땅에서 통일교회가 뿌리가 뽑힐 때까지 기독교 성직자와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일치 단결하여 싸워야 한다. 양심적인 사람 한 명이라도 합동 결혼식이라는 미명하에 통일교회에서 결혼하고 청춘을 빼앗기는 비극적인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전 기독교 성도들이 일심단결을 하여 붉은 적 그리스도인 문선명 통일교 이단 집단이 이 땅에서 멸망할 때까지 예수님 이름으로 외쳐야 할 것이다.

 

 

제 3절 기독교 성도들에 대한 박준철 목사의 호소문


통일교회 궤멸을 위해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전국 시군구 기독교연합회에서 스데반 집사의 심정으로 통일교 궤멸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언론과 1200만 성직자와 성도들이 단결하고 합심하여 기도하며이 땅의 통일교회가 뿌리 뽑힐 때까지 전쟁을 하고, 성경 진리대로 사탄마귀인 통일교회를 없애는데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것입니다.

국내의 살인집단 백백교나 용화교, 32명의 목숨을 빼앗은 1987년의 오대양교, 종말론, 휴거론을 주장하는 이장림 집단, 박태선 집단, 문선명 집단에서 집사까지 지냈던 JMS(정명석)등 수많은 사이비종교로 말미암아 이 땅의 수백만 영혼이 사이비교주에게 영혼을 빼앗겼습니다.

특히 이단교회 중 살아있는 우상인 문선명 통일 집단보다 큰 것은 역사에 없습니다. 통일교회를 궤멸시키지 않고서는 이단 교회에 대해서 반대운동을 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한국 기독교회가 이단교회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영혼을 말살하는 이단 교회의 참극을 알고있습니다.

1955년대에는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에서 전 기독교 교인들과 합세하여 통일교회 반대운동을 대대적으로 하였습니다.

기독교 학교였던 연대와 이대에서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부모로 믿고있는 대학교수와 학생들은 "학교를 선택하느냐, 문선명 교주를 선택하느냐" 에 2가지 중 1가지를 선택하라고 학교에서 지시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세뇌된 대학교수와 학생들은 문선명 교주를 믿고 교수직과 학생직을 박탈당하면서 문선명을 따라나온 것입니다. 참으로 사이비교주에게 세뇌되면 부모형제를 버리고 교수직까지도 포기하면서 사이비교주에게 세뇌된 것을 볼 때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1955년 3월 24일, 감리교 학교였던 이대는 교수 5명(양윤영, 한충화, 최원복, 김영운, 이정호)과 1955년 5월 11일은 통일교 이단교회 신앙을 함으로 학생 14명이 퇴학 처분되었습니다. 1955년 3월 5일, 박상래 연대교수는 통일교회의 신앙문제로 퇴직 되었습니다.

한국 1200만 기독교 목사와 성도들은 문선명 통일집단이 이단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잘 모릅니다. 기독교가 수 십년 동안을 침묵함으로써 통일교회는 47년 동안 세계 185개국에 통일교회의 원리강론 교리를 전파하여 뿌리를 내렸습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인류역사에 전무 후무한 사악한 사이비 교주요, 우상입니다. 기독교는 통일교회와 전쟁을 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통일교회와 이단교회를 이단이라고만 생각하고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선명 집단과 같은 이단들이 번성하는 기회로 삼고 문선명이 의도 하는데로 움직여주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 진리대로 사탄과 싸워야 합니다. 엘리야 선지자같이 갈멜산에서 바알신 450명을 궤멸시켰던 역사와 주기철목사의 순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문선명 사이비 종파를 없애야 합니다.

기독교는 통일교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1200만 기독교목사와 성도들이 통일교  궤멸을 위해 외치지 않는다면 누가 문선명 사이비종파를 파멸시키겠습니까? 한국 기독교는 초대교회의 순교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제2의 말틴 루터와 같은 심정으로 저는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외치겠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교주를 이 땅에서 기독교 교인들이 단결하여 없애지 않는다면 한국 기독교는 이단교회에 방치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이제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집단의 멸망할 때가 왔습니다. 전 기독교는 사탄 마귀와 가라지요, 영혼을 파멸시키며 가정을 파탄시키는 문선명 사이비교주를 궤멸시키는데 동참해 주십시오.

이 저서는 일생 동안 문선명 사이비집단을 이길 수 있는 방패요, 무기가 될 것입니다. 이단교회의 정체와 비리를 알 수 있고, 1명의 전도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교재가 될 것입니다.

저의 저서는 한국 기독교 목사와 신학생, 교회 입직자, 평신도와 양심적인 사람들이 구독해야 될 교재입니다. 또한 일생동안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알고, 대처할 수 있는 자료가 될 것이며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저의 글을 읽는 분들 가정에 하나님께 영광이요, 은혜와 축복이 넘칠 것입니다.

 

제 4 절 한국 기독교 통일교 대책협의회 설립,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한국 기독교 이단 종파 문제 연구소 설립

 

저는 문선명 사이비 통일교 교주에게 원리강의로 세뇌되고 교육되어 30년 동안 영혼을 빼앗기고 청춘을 빼앗겼습니다. 이제 심장판막증, 심부전증 등으로 인하여 죽음까지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어떠한 핍박과 고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대적이요, 기독교의 원수인 사이비 종교와 교주를 뿌리뽑고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들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종교의 자유를 틈타 사이비 교주들이 이 땅에 붉은 용이 되고 늑대가 되어 선량한 영혼을 미혹하여 빼앗고 세뇌시컥 삼키고 있습니다. 이 땅에 사이비 교주가 만들어짐으로 강간, 우상 숭배, 재산 착취, 가정파탄 등 그 피해가 실제로 혜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납니다.

사이비 교주들은 불쌍하고 선량한 이 땅의 국민들의 영혼을 빼앗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세를 외치며 자칭 재림주 구세주 메시아 참 아버지로 자칭하며 문선명과 같은 이단 사이비교주가 자신의 제국을 세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들은 공갈협박으로 힘없는 교인들을 세뇌시키고 교육시켜 피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끝내는 배반하며 버리는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자기 교인들을 이용하고 쓰레기 버리듯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목숨이 다하는 그 날까지 이 땅에 사이비 종교를 박멸하고 사이비교주를 뿌리뽑는데 앞장서겠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과 함께 하십니다. 이 땅의 사이비 종교를 박멸하여 뿌리뽑는데 기독교성직자와 성도들이 앞장서신다면 이 땅의 사이비 교주들은 한 사람도 발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 동안에도 사이비 종교에 대한 많은 비판과 기도회를 실시해왔습니다. 그러나 80~90년대 기독교는 사이비 종교를 뿌리뽑는 데 무관심, 무방비, 무책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사이비 교주에게 수많은 영혼을 빼앗겼던 것입니다.

통일교 집단도 이단이라고 제처 둘 것이 아닙니다. 진작 궤멸 운동하여 뿌리를 뽑았더라면 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매일 전도되어 지옥 길로 끌려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마음 속으로만 통일교가 이단이라고 제쳐둘 것이 아니라 입으로 소리내어 직장이나 내 이웃, 가게 분들에게 "문선명은 사이비교주요 적그리스도요 합동결혼식을 하면 1억씩을 착취하는 사이비집단" 이라고 매일 외쳐야 할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이비 종교에 빼앗긴 사랑하는 아들 · 딸을 찾기 위하여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다. 기독교회가 일치 단결하여 사이비 종교근절을 위한 대책을 세우기를 바랍니다. 언론과 기독교회는 연합이 되어 대대적인 사이비 종교 퇴치를 위한 기도회와 캠페인을 매달 전국 시군구 기독교연합회 벌려야 할 것입니다.

 

제 5 절 국제 자살 · 살인 방지 연구소 설립 계획


1998년 5월 1일, 저의 꿈에 하나님의 큰 음성이 "너와같이 분노와 배신감을 갖고 한이 많은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 마지막 선택하는 길이 자살이다. 너는 네 자신이 자살 시도를 수십 번을 하였듯이 선량하고 착한 사람들의 마음속 생각을 바꾸어 주어라. 그러면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수많은 사람이 자살하지 않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새로운 소망을 갖고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주어라" 들렸습니다.

그 때 살인 방지 연구소를 설립하라는 마음속의 생각이 계속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간증 예배 때 경각심을 갖는 말씀을 증거합니다.

통일교회는 문선명 교주를 믿고 합동결혼식을 하여 가정 천국을 이루고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천국이 아닌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 교회 때문에 자살해 죽는 사람이 제 주위에도 있었습니다. 통일교 부산 교구본부에 소속된 36만 쌍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김동수씨도 결혼을 하여 살다가 1998년 5월에 목을 매고 자살해 죽었습니다.

오진수씨와 이인자씨 부부는 1982년도 6,000쌍 합동결혼식을 받았습나다. 1997년 9월 13일날 추석을 목전에 두고 이인자씨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와 통일교에 대한 배신, 합동결혼식의 처절한 생지옥 생활을 뒤로하고 아파트 안방 문고리에 목을 매고 자살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 합동결혼식은 처참한 가정파탄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오진수씨와 이인자씨는 통일교 회사인 일화제약과 통일산업에 근무하며 요령을 부릴 줄 모르고 아부할 줄도 모르는 우직한 사람입니다. 언제나 성실하게 일을 했지만 아부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살다 보니 통일산업에서 53세에 퇴사할 때까지 반장이나 주임 한 번도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진실하고 성실한 교인 이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통일산업에서 근무하면서 IMF 때 부도가나 월급을 11개월이나 받지 못하여 가정생활이 처절한 상태에서도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십의 삼조 헌금, 구국헌금, 160쌍 행사비, 1600쌍 행사비등 각종 통일교 헌금을 내라고 하였고 가정은 파탄 되었습니다.

이인자씨는 착한 성품을 갖고 가정천국을 이루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삶을 포기하고 안방 문고리에 목을 매어 죽음으로서 문선명 교주에게 항변하였던 것입니다.

경남 교구장과 사모는 1년 동안 교회 앞에 있는 오진수씨와 이인자씨 가정에 단 한번도 심방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인자씨가 자살을 할 때까지 경남 통일교 교구장은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어도 무관심, 무책임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회에 들어와 오진수씨와 이인자씨가 합동결혼식을 하지 않았다면 가정은 파탄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자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인자씨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지만 자살로 인생을 마치자 너무나 허탈하여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 계기로 자살과 살인 방지 연구소를 설립해야 되겠다고 더욱더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과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저는 자살하려는 한 생명이라도 구할 수만 있다면 그 길을 갈 것입니다.

회사가 부도가 나고 실업자가 되고 가정이 파탄되어 이혼되고 전 가족이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의 원혼을 누가 풀어 줄 것입니까? 저는 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이 외롭고 고독하고 의지할 곳도 없이 모진 인생의 비 바람을 맞으며 마지막 자살을 선택할 때 속수무책 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빠른 시일 내에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사정이 허락하면 자살 살인 방지 연구소를 설립하여 한 생명이라도 구하고 싶습니다.

 

 

 

제 23 장 문선명 통일교 비판

 

 

제 1 절 문선명의 출생과 통일교 창단 배경


문선명은 1920년 1월 6일(음력)에 이북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부 문경유, 모 김경계 사이에서 13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문성명은 1935년 4월 17일 부활절에 예수님을 만나 특별 계시를 받아 재림주 사명 인계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1938년 4월에 경성 상공실무학교 입학, 1941년 2월 25일에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졸업을 하였다. 1944년도에 서울에 있는 가시마구미 토목 건설회사 전기기사로 취직하여 근무하였다.

 

문선명은 1945년 10월부터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섭절리 이스라엘 수도원에서 김백문 교주에게 6개월 동안 기독교 근본원리 교육을 받고 세뇌되어 있다가 서울 상도동에서 교회 인도자로 있다가 문선명 교주는 1946년 6월 6일에 김백문을 배반하고 김백문 사교 교리인 성서신학과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교리로 만들어 평양에 가서 문선명은 재림주 참부모를 자칭하며 기독교를 비판하고 포교 활동을 하였다.

 

한국의 예루살렘이라 할 정도로 평양은 기독교회가 왕성하였습니다. 평양에서 부터 문선명은 사교교리를 통하여 통일교 포교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평양에서 김종화 유부녀 집에서 어린양 혼인잔치를 문선명이 하게 되어 사회혼란 음행죄로 감옥에 가게 되어 1948년 2월 20일에 평양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1948년 4월 7일에 문선명의 재판결과 5년 감옥생활을 언도 받고 감옥생활을 하였습니다.

 

이후 1948년 5월 20일에 흥남 감옥소로 이송되어 형무소 생활을 하던 중 터지지 말아야 될 1950년 6월 25일 전쟁으로 말미암아 문선명이 감옥에서 해방되어 남한으로 피신하여 부산 수정동에서 교회를 하다가 최선길 본부인이 문선명의 피가름 행위, 혈대 교환의식을 참다 못하여 문선명 교주를 폭행함으로 문선명은 부산 범냇골 이라는 산에서 기독교인을 포교하였다.

 

그 이후에도 최선길 본부인이 찾아와 문선명 교주의 부도덕한 행위 때문에 싸움을 하여 문선명 교주는 서울로 도망쳐 올라왔고 서울 성동구 북학동 세대문집에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는 간판을 1954년 5월 3일에 걸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자칭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 교주는 온갖 피가름의식과 혈통복귀의식으로 최선길 부인과 불화중 자기 아내도 전도하지 못하고 1957년에 이혼하였다.

 

문교주는 김백문 교리를 훔쳐 1954년 5월 3일에 2대 협회장 '유효원'과 '김원필', '박정화' 등 6인이 정리하여 1957년 8월 15일 통일교 원리해설로 만들었다. 1966년 5월 1일에 통일교 원리 강론으로 책을 출판한 것이다.

 

부산 영도 신상진씨 집에서 통일교 2대 협회장인 유원효 씨와 사촌 유민효, 유영효 3형제가 입교하게 되었다. 유원효는 서울대학교 의대를 다니다가 결핵성 관절염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문선명 교주는 김백문에게 교육받은 그 기독교 근본원리 강의를 유원효 씨에게 다시 통일교 원리로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유원효 씨는 다리가 굳어서 쓸 수 없어 눕거나 의자에 앉아서 문선명 교주의 강의를 밤낮으로 들었다.

 

1954년 2월부터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 교주의 기독교 근본원리 강의를 갖고 문선명 교주와 유원효, 유민효, 유영효 3형제와 이창환(초대 통일교협회장), 김원필, 박정화 이렇게 6명이 종로에 있는 여관에서 하숙을 하며 통일교 교리를 썼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김백문의 강의를 통일교 원리강의로 만드는 작업을 하였던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그때 6명에게 5만원을 주면서 전세 집을 마련하여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 작업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유원효씨는 매일 원리해설을 정리하였고 유민효씨와 박정화씨는 원리원본을 기록하면서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 교주의 교리가 문제가 많다고 하였다. 유원효 통일교 2대 협회장도 원리해설을 집필하면서 통일교 교리로 사용한다는 것이 모순이 많이 하며, 기독교 근본원리 강론을 이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강론을 고치기 위해 문선명 교주에게 여러 의견을 물었더니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문선명 교주가 대답을 하지 못하는 부분은 유원효씨 생각대로 원리해설을 썼다.

 

문선명은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어 놓고도 통일교 목사 교인들에게 재림주가 하나님으로 부터 직접 계시 받은 새진리라고 주장하지만 조작된 것이며 거짓이다.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을 속인 것이다.

 

문선명은 여러 사람이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던 중에 성동구 북학동 391번지 통칭 세대문집이라는 가정집에서 1954년 5월 1일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 협회라는 간판과 통일교 창립을 하게 되었다.

 

통일교 협회 창립일을 1954년 5월 1일로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통일교 창립일은 1954년 5월 3일이다. 김백문이라는 사이비 교주에게 6개월 동안 교육 받은 문선명 교주가 그것을 도용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다음 또 한 사람의 가짜 재림주인 문선명 교주로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훔쳐온 교리로 1954년 5월 3일, 원리 해설이라는 통일교 원리강의를 선포하고 통일교 간판을 달게 된 것이다.

 

유원효 씨와 사촌인 유민효, 유영효 3형제는 통일교에 충성꾼 이었고, 통일교의 산 증인이다. 30가정 최초 합동결혼식을 하였지만 유원효는 1970년사망을 하였고 유민효, 유영효 형제는 문선명 교주가 일생동안 이용하고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버렸다. 그들은 일생 동안 이용만 당하고 통일교를 떠났고 버림받은 것이다.

 

제 2 절 원리 강론은 김백문 교리를 도용한 것


문선명 사이비교주는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통일교 원리강론 창조원리, 타락론, 복귀원리, 재림론까지 만들고 예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잉태한 것이 아니라 사생아이고,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메시아 재림주라고 주장한다.

또한 기독교는 구원이 없는 종교라고 강조하여 오직 구원은 예수가 아닌 문선명 자신만이 재림주로서 구원 해 줄수 있고 성경진리가 아닌 통일교 원리강론 새진리 성약말씀만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혈대교환, 혈통복귀의식, 피가름,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한다고 주장한다.

 

문선명의 통일교 원리강론인 창조원리, 타락론, 복귀 원리, 재림론은 김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와 동일한 내용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 기독교 근본원리를 문선명이 도용한 것이다.

 

문선명은 통일원리 강론이 성약 말씀이며, 재림주가 계시를 받아쓴 새로운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거짓이다.

 

제 3 절 문선명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비판


(지면관계상 요점만 말씀 드리고 교리전체비판은 다음 책에 논할 것입니다)

 

1. 통일교회의 원리 주장은 새 진리의 필요성과 사명을 역설하고 있다.

 

(요한복음 3:12, 요한복음 16:25)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만이 새진리요, 성약이라고 주장하며 성경은 사명이 끝났고 진리(통일교원리)를 가르쳐주는 교과서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반증- (계시록 22:18) '성경진리를 가감하면 생명록에서 이름을 제 할 것이다·(마태복음 5:18) '율법 일점 일획도 가감말라'(요한복음 3:16) '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시며 진리는 성경말씀 뿐이다. '(갈라디아1:8) 성경말씀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자, 저주를 받을 것이다'

 

2.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새 말씀의 사명을 역설하고 있다. (요한복음 16:25, 계시록 5:1, 계시록10:11)

 

통일교 참조원리는 성경의 진리성을 부인하고, 구약과 신약 66권 사명이 끝났다고 주장한다. 예수를 믿어도 진리를 찾아가는 교과서라고 주장한다. 문선명 재림주 시대는 원리강론이 성약이며, 새진리라고 주장한다. 문선명은 성경진리 말씀을 자칭 황제 참부모 재림주라는 세뇌교육용으로 인용 할뿐이다. (요한복음 16:12)

*반증-(요 3:16),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요, 진리는 성경뿐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3. 문선명 사이비 재림주에게만 구원이 있고, 기독교 성경말씀은 구원이 없다고 주장한다.

*반증-(사도행전 4:12, 16:31), 주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4. 원리강론은 창조목적이 문선명 교주를 자칭 재림주 참부모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창세기 1:26~31)"

 

반증-(사 43:1, 고전 10:31), 통일교 교리에 하나텀의 이성성상을 주장하는데 문선명 교주가 하나님을 닮아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만들어졌고 몸과 마음 즉 이성성상으로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미 성서에 하나님의 창조성을 닮아 되어진 것을 문선명 교주는 자신이 발명특허나 낸것같이 주잔하지만 거짓이다. 만유원력 수수작용도 되어진 결과를 논하는것이지 새진리가 아니다.

 

5. 통일교 인류역사 종말론은 기독교 종말론과 정면 배치된다.

 

기독교는 성경진리대로 불심판을 믿지만, 통일교 문선명 교주는 불심판을 부정하며 말씀 심판이라고 주장한다. 문선명 교주 자신이 재림주로서 통일교 성약말씀인 원리강론을 새진리라고 주장하며 문선명과 통일교 원리강론을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거짓이다. (벧후 3:10~12)통일교 원리강론에는 진리심판 곧 말씀심판이라고 주장한다. (약 3:6)

"반증- 벧후 3:10~12, 살전 4:16~17, 마태복음 27:52, 마태복음24:29

 

6.구주론은 예수를 실패자요, 예수 십자가를 믿어도 구원이 없으며, 영적 구원만 있고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를 믿어야만 영육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거짓이며 적그리스도이다.

 

기독교 교인들도 문선명 재림주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지만 문선명 자신은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이비 교주이다. (마태복음 16:23)

"반증- (요3:16, 창1:28), '사단아! 물러가라.'(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3:14), (눅 9:31)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시며 십자가 보혈로만이 인류가 죄사함을 받을 수있다.

 

7. 통일교 원리강론 부활론은 예수 십자가 부활을 부정하며 기독교 성도 부활을 부정한다. (살전 4:16)

"반증-(마 27:25, 눅 9:60, 롬 G:23)

 

8. 통일교 원리강론 재림론은 문선명 자신을 재림주로 만들기 위한 교리 이다.

 

① '재림주님은 언제 오시나?' 문선명 교주가 이 땅에 태어난 때이다. (마 24:14, 땅끝까지 천국, 마24:32) 문선명 자신이 참부모 재림주로 태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다.

"반증-(마 24:36, '그날 그때 모름' , 계 3:3 '도적같이 주님 이 온다' )

 

② '재림주님은 어떻게 오시나?' 재림주는 구름 타고 오시는 것이 아니고 여인의 (마24:30)몸을 통해 태어난 문선명 교주가 재림주라고 주장한다.

"반증-(계 12:5 '철장' , 눅 17:20, 마 7:21 '주의 뜻' )

 

③ '재림주는 어디로 오시나?' 동방 대한민국으로 오신다 (계7:2~3)문선명의 주장과 통일교 원리강론 주장은 언제 오시나? 한국에 재림주가 오고 1920연대에 태어난 문선명 교주(본이름 문용명)만이 재림주라고 통일교 교인들이 받들고 있다. 어떻게 오시나? 재림주는 구름 타고 오는 것이 아니고 여인의 몸을 통하여 낳은 문선명이 재림주 황제 참부모 구세주라고 주장한다.

 

재림주는 어디로 오시나? 극동의 중심 동방삼국인 한국으로 재림주가 온다고 교리적으로 가르치며 통일교 자칭 목사들과 교인들에게 문선명만이 인류의 구세주 메시아라고 세뇌 교육을 시키는 것이다. 참으로 인류역사에 이렇게 날조를 밥 먹듯이 하는 이단 사이비교주는 문선명 밖에 없다.

(마태복음 23:33, 포도원비유)

'동방삼국은 중국, 일본, 한국인데 중국은 신을 부정하는 공산국가 이기 때문에 재림주가 못 오시고, 일본은 천주대신 우상 숭배 국가이기 때문에 재림주가 못 오신다고 주장한다. 재림주는 한국에 오기 싫어도 한국으로 와야 된다고 주장한다. 문선명만이 오직 참부모 재림주라고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반증-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이며 수많은 영혼을 빼앗는 사악한 사이비 교주일 뿐이다. (계시록 12:9 '하늘에서 큰 용이 되어 쫓기니 이는 곧 옛 뱀이요 사단이다. ')

문선명은 본래 이름이 문용명 인데 가운데 '용' 자 '적그리스도용자' 를 빼어버리고 '선' 자를 집어넣어 자신은 태양이다. 문은 달이며 선은 태양,명은 스타(별)이다. (창세기 37:1 요셉의 꿈.)

 

모세 오경과 구약은 촛불에 해당되고 이미 전깃불인 예수님 신약 말씀이 선포됨으로 구약의 사명이 끝났고 문선명의 이름인 태양인 재림주 참부모 문선명 교주가 재림하심으로 예수님의 사명은 끝났다고 문선명 사이비교주와 통일교 원리강론은 재림론에서 결론을 맺고 있다.

문선명 교주야 말로 하나님의 대적원수이며 전세계 19억 기독교 교인들의 원수요, 한국1200만 기독교 교인들의 원수이며 일순간의 악연으로 통일교회에 빠져 세뇌되어 지옥 길로 가는 사람들의 원수이다. 억울하게 자살하고 이혼, 가정 파탄된 불쌍한 영혼들의 원수요, 박준철 목사의 빼앗긴 30년을 짓밟은 원수가 바로 문선명 교주이다.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은 예수님을 정말 믿고 성경 진리안에 산다면 하나되고 단결하고 예수님 이름으로 제2의 박준철과 같은 희생자를 막기 위해 문선명 통일교 집단을 뿌리 뽑아야 할 것이다.

 

9. 통일교 원리강론, 타락론은 아담과 하와가 지의 뿌리가 된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는 하와의 종이었던 천사장 루시엘과 하와가 불륜한 사랑관계로 영적 타락을 하였고 아담과 하와가 불륜한 사랑관계로 육적 타락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되는 재림주 문선명 교주가 인류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복귀해야 된다는 복귀 원리 교리 이다. (창세기 3:I~7)

그렇기 때문에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면 완전구원의식을 치르기 위하여3일 혈통복귀 피가름의식을 치르는 것이다.

 

"반증-(요 1:3, 창2:17),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한 것이 지요, 성경 어느 구절에도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타락했다는 성경구절이 없는데 통일교 원리강론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타락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예수를 부정하고 성경을 부정한 것이다. 통일교 원리강론은 예수님 성령잉태를 부정하며 사생아요,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간 예수라고 주장한다. 오직 구주는 문선명이라고 주장하지만 적 그리스도요, 사이비 교주일 뿐이다.

 

 

제 4 절 예수, 공자, 석가를 자신의 제자라고 말하는 문선명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지금까지 집회 때마다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전두환 정권, 노태우 정권 등 역대 정권을 싸잡아 통일교회를 이용하고 배신했다고 온갖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했습니다.

 집회 때마다 "여기에 정보부나 안기부에서 온 사람이 있으면 청와대에 보고하라" 고 온갖 만용을 떨었습니다. 또한 기독교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폭언을 하며 "문선명을 이단으로 규정짓고 반대하지만 통일교는 성공하고  기독교는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를 반대하기 때문에 심판 받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1950년에 박태선 장로와 나운몽 장로가 문선명과 하나 되었더라면 기독교와의 통일은 1950년에 이루어져 문선명 통일제국을 세웠을 것이 라고 누차 강조했습니다.

 

문선명은 "구약적 복귀패는 박태선이 책임자이고 신약적 복귀패는 나운몽 장로패이다. 복귀패 재림주님은 통일교 신령집단 재림주인 내가 책임자이다. 주님을 위한 기독교가 되어야 하는데 자기 교파 교단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망하고 통일교와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승리할 것이다. 기독교가 아무리 반대해도 통일교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승리할 것이다. " 라고 했습니다.

 

문선명은 ''나는 재림주 참부모로서 영계에 가면 참부모 이름이 최고이다. 이 지상에서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고 충성한 사람은 최고의 축복이고 문선명 재림주를 믿고 복종하지 않은 기독교인은 원수가 되어 지옥을 가게 될 것이다 지상에 있는 기독교 교인들에게 문선명 통일교 재림주를 믿으라고 아무리 외쳐도 말을 듣지 않은 사람은 지옥에 간다. " 그러면서 문선명은 "석가, 공자, 예수는 내 제자다" 라고 외쳤습니다.

 

통일사상 연구원 원장을 하다가 죽은 이상길의 '영계에서 보내온 편지'라는 책이 있는데 문선명이 인정한 책이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에게는 필독서인 '영계의 실상과 지상 생활 1, 2, 3, 4, 5권' 에 예수님을 저승에서는 한없이 외롭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어 명예를 훼손하고 있습니다.

 

문집단의 통일교 천국 가는 구원 의식인 합동결혼식은 문선명으로부터 용서 기도를 받고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어야 구원받고 천국 간다고 주장하여 영혼결을 시킨 것이다. 예수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1200만 기독교 교인이 매일 궤멸을 위하여 외쳐야 한다.

예수님이 역대 성인들이 문선명 교주를 믿고 구원받고 싶다고 했으며 통일교 구원의식인 영혼결혼을 시켜달라고 했습니까? 참으로 사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문선명을 구세주 참부모라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연세가2000세고 문선명은 나이가 83세 입니다. 누가 아버지 입니까?왜 통일교 세뇌용 책에는 문선명 참 부모님이 불효 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예수님이 문교주에게 빌고 있다는데 이런 조작으로 통일교 교인을 세뇌시키는 문집단은 1200만 기독교 목사 성도들이 의분심을 갖고 통일교 집단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교통사고로 죽은 문흥진의 지시를 받고 마호메트, 공자, 석가등 인류 역사에 왔다 갔던 영웅, 열사, 기독교 순교자들이 영계의 총 사령관인 문흥진의 명령과 지시에 복종하고 있다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세뇌 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문선명 재림주가 죽어서 천국 문을 열고 천국에 갈 때 예수님은 구원받는다고, "영계에서 보내온 편지" 에 써 놓았습니다. 참 부모님이 영계에 오셔서 영계를 정리할 때까지 예수님은 기다려야 한다고 책에 써놓고 예수님의 명예를 훼손했습니다.

 

적 그리스도인 문선명의 사주로 통일교 교인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계의 가짜 책을 만들어 우상 숭배를 하게 하고 있습니다. 불쌍하고 가련한 통일교 교인들을 각종 공갈 · 협박으로 재산을 착취하는 도구로 이용하곤 있습니다.

 

지금도 사이비 교주에게 미혼 남녀가 매일 통일교 집단에 유혹되어 영혼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통일교회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로 믿다가 통일교 교인이 통일교를 떠나 문선명한테 배운대로 자신을 재림주라고 칭하며 사이비 교를 창단한 사람도 수십 명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80년까지 통일교 집사일을 했던 JMS(정명석)사이비교주입니다. 정명석 집단에서 20만명이라고 주장하나 실제로는 1만 5천명의 영혼이 지옥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중 문선명을 재림주로 믿다가 탈퇴한 주영희 패거리들이 교단을 만들었는데 그는 자기가 재림주고, 2000년 전 세례요한이 예수를 증거 해 주듯이 문선명의 사명은 끝났다고 하고 새로운 교회를 만들었습니다.

 

 

 

제 24 장 혈통복귀 피가름 집단인

 

문선명 통일교

 

제 1 절 처음부터 혈통복귀집단이 된 통일교


문선명은 통일교 협회창립 일인 1954년 5월 1일 이전인 1953년 12월 24일부터 1954년 1월 14일까지 부산의 신상진, 유신선 씨의 집에서 21일간 밤낮으로 부흥집회를 열었다. 부산시 범냇골(부산시 동구 범6동 1513번지) 산꼭대기 토탐집에서 생활하다가 1953년 3월에 수정동(부산시 동구 수정5동 427번지)에 가정주택을 사서 통일교로 사용하였다.

 

문선명은 사악한 통일교 복귀원리라는 섹스교리로 통일교에 예쁜 여자 교인들과 피가름 구원의식을 치뤘다. 문선명이 복귀 원리라는 미명하에 통일교 여자교인들과 혈대교환 혈통복귀 의식인 섹스를 하는 걸 첫번째 부인 최선길씨가 알았다. 최선길씨는 혈통복귀 의식을 치른 여자교인들을 폭행하고 남편인 문선명의 멱살을 잡고 폭행을 하였다. 문선명은 도망을 쳤고 최선길씨는 수정동 가정 주택 교회에서 생활했던 여자 통일교 교인들을 전부 쫓아내고 수정동 통일교의 집과 가재도구를 1953년 9월에 몽땅 팔아버렷다.

 

문선명은 최선길씨를 피해 이곳저곳을 도망 다니다가 1953년 9월 17일 통일교 본거지를 옮기려고 서울까지 왔다. 그러나 문선명에게는 돈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1953년 12월 24일 서울에 있는 문선명에게 부산 영도에 신상진이라는 통일교 교인이 자기 집에서 부흥회를 해달라고 하였다. 부산 시내 전체 통일교 교인 28명이 신상진씨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문선명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12시간 걸리는 완행열차의 기차비가 없어서 올 수가 없자 6마리아의 한 사람인 오명춘 집사가 여비를 급하게 마련해 주어서 서울에서 부산 영도교회까지 올 수 있었다.

 

후일 오명춘 집사는 문선명 교주와 혈통복귀 의식을 치른 후 문선명의 노예가 되어 집을 판대금 거액인 500만원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쳤다. 이 사건으로 오명춘 집사는 가정이 파탄되어 이혼하고 버림받고 결국 문선명 교주에게 까지 버림을 받았다.

 

문선명 교주는 혈통복귀 원리 섹스교리로 말미암아 영도에서도 처녀와 복귀의식을 치러 한 처녀 대학생의 파멸을 가져왔고 그 처녀는 사생아까지 낳았다.

문선명은 서울에 올라와서도 수많은 처녀들과 6마리아, 60마리아를 만들어 혈통복귀 섹스를 통한 의식으로 완전 구원, 사기교리를 실천하였다.

 

서울에서 이성화라는 처녀를 혈대교환, 피가름, 혈통복귀 의식인 섹스로 복귀의식을 치렀다. 이성화 처녀는 후일 아들을 낳는 비극을 가져왔다.

문선명은 40세에 1960년 4월 11일, 몇 번째 부인인지 알 수 없는 어린17세(고등학교 2학년)의 나이 어린 한학자를 아내로 맞아 어린양 혼인잔치를 하여 지금까지 14남매를 낳았다. 한학자와 살면서도 1965년도 최순화라는 처녀와 혈통복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간통하여 박 사무엘(박준경)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미국 이스튼 가든 호화 궁전 저택에서 유럽, 미국의 젊고 예쁜 통일교 여자교인들이 문선명 교주에게 인사를 할 때 끌어안고 키스를 하였다. 문선명 교주와 끌어안고 키스 하는 광경을 본 한학자는 모든 유럽 미국 여자들은 문선명 교주에게 경배 드리고 인사할 때 문선명 교주와 1m 거리로 접근금지를 시키라고 명령하였다.

 

제 2 절 문선명은 혈통복귀교리를 통해 가정을 파괴한다


문선명 교주야말로 이 땅의 혈통복귀 피가름 종교를 창립하여 윤리와 도덕을 파괴시킨 최초의 가정 파괴범입니다.

 

문선명은 자기의 혈통복귀 피가름교리를 위장하기 위하여 타락론을 강조하고 가정의 윤리와 도덕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에게는 간통죄가 가장 큰 죄라고 말합니다. 또한 자신의 섹스교리를 위장하기 위해 선문 대학교에 순결학과를 만들어 놓고 미혼 남녀들이 순결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가정정 파괴범이 어떻게 자기를 위장하고 가증스럽게 통일교 교인들을 속이고 국민까지 속인단 말입니까?

 

문선명은 신정순, 이순철, 오명춘, 김안실, 유신선, 임영신 이렇게 6마리아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혈통 복귀하였습니다. 6마리아는 60마리아로 늘어났고 수많은 처녀들과 유부녀들이 문선명 교주의 피가름 혈통복귀의식으로 희생이 되었습니다.

 

문선명은 수많은 처녁들과 유부녀들의 영혼을 빼앗아 자신의 남편보다도 문선명 교주를 더 극진히 모시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일례로 수많은 60마리아 중에 옥상현씨는 원래 장대현 교회의 권사였습니다. 옥상현 권사는 통일원리를 들은 후 장대현 교회에 나가지 않고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라고 믿고 따랐던 여자 교인입니다. 그녀는 문선명 교주와 복귀의식을 치르고 미혹에 빠져 가정이 파탄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옥상현 권사는 문선명 교주와 김종화와 같이 구속되기까지 하였습니다.

 

장대현 교회에는 우화섭이라는 장로님이 계셨는데 평양 고무 연맹의 이사장으로 돈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옥상현 권사는 우화섭 장로의 힘으로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으나 문선명 교주는 평양 감옥에서 흥남 감옥소로 이송 되었습니 다.

 

그러자 옥상현 권사는 그 먼 거리를 쫓아가서 돈을 마련하고 사식을 마련하여 문선명 교주의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문선명이 흥남 감옥소에 있을때 옥상현 씨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털실로 짠 것처럼 양말을 만들어 문선명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옥상현씨는 두 딸과 같이 살았는데 그 곳에서 문선명, 문정빈, 김원필씨도 같이 생활하였습니다.

옥상현씨는 문선명 교주의 부산 피난 시절에는 1945년 4월 28일에 결혼한 첫 번째 부인 최선길을 대신해 문선명의 뒷바라지를 다 했습니다. 40년을 문선명을 모시고 그림자 처럼 따라 다녔지만 그녀는 통일교회에서 버림받고 보살핌도 받지 못했습니다. 후회와 처절한 가난으로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야 했던 것입니다.

 

제 3 절 통일교는 혈통복귀의식이라는 3일식 피가름행사


통일교에서는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기하급수적으로 릴레이식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복귀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했습니다. 복귀의식을 치른 사람만이 완성된 아담, 하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통일교 원리인 타락론에는 죄의 뿌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되어 죄의 뿌리가 된것이 아니고 아담 하와의 불륜한 사랑관계로 타락된 것이 선악과요 죄의 뿌리라고 통일교 원리 강론 교리는 주장합니다. 따라서 천사장 루시엘이 하와를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더럽혀 죄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에 문선명 재림주 메시아가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혈통복귀를 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혈통복귀 피가름을 통한 혈통복귀야 말로 모든 인류를 하나님 앞으로 구원한다는 의식이라고 하였습니다. 동방 예의지국인 대한민국에서 그 당시 문선명 교주와 같은 혈통복귀 피가름교주가 나타나 선량한 처녀들과 수많은 가정을 파괴해도 징벌하는 법조인이 없었고, 종교인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문선명 교주는 자신의 수재자에게도 복귀의식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제 4 절 문선명이 창안한 혈통복귀 피가름의식


통일교 교인이 많아지자 문선명은 개개인에게 혈통복귀의식을 치를 수가 없었습니다. 점점 세상 이목과 언론의 눈치를 보아야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문선명 교주 자신이 통일교 수 많은 여자들을 모두 혈통 간음 관계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방법을 짜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이 합동결혼식을 할때 포도주인 성주의식을 먼저하게 되는데 이때 포도주에 21가지의 과일즙과 포도주를 넣고 자신의 00을 넣어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는 신랑, 신부에게 혈통 복귀 의식인 포도주를 마시게 한 것입니다. 그 포도주는 문선명 교주의 피와 살을 의미합니다.

 

또한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고 3년 전도기간이 지난 다음 3일 혈통복귀 피가름의식을 함으로 문선명의 혈통을 이어받고 혈통복귀를 한 통일교 교인들은 아담이 지었던 원죄는 물론 조상 대대로 지었던 혈통죄와 형제들이 지었던 연대죄 그리고 자신이 지었던 자범죄가 깨끗해지고 완전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제 5절 문선명 통일교의 혈통복귀 피가름 3일간 복귀 의식

 

다음은 문선명 자신이 처녀와 유부녀들에게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 구원의식을 행한 것 같이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신랑 신부에게 통일교 원리강론 복귀원리 완전구원교리가 3일 행사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라는 증거의 공문이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신랑 신부가 행하는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의식
 

1. 의의


가. 전체 복귀섭리역사를 탕감 복귀하는 실체적인 복귀식(탕감식)이다.

첫째 날은 구약시대(타락한 아담, 구약권)의 복귀식이다.

둘째 날은 신약시대의 예수님 입장을 탕감 복귀하는 의식이다.

셋째 날은 복귀된 신랑으로서 신부를 재창조하는 의식이다.

 

나.문선명 참부모님에 의해서 다시 태어나는 조건을 세우는 탕감의식으로 아내가 먼저 복귀되어 남편을 다시 낳도록 하는 가정을 외적으로 통과하는 탕감의식이다 내적인 의식이 문선명의 00포도주성주의식 임.

 

2. 준비


가.준비물 : 문선명 참부모님 존영(사진), 심정초 또는 통일초, 성건(수건에 포도주를묻힌 것), 성건을 담는 그릇, 성염(소금),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 행사 식순 등 준비

 

나,본 혈통복귀 피가름 의식은 통일교 합동결혼식 축복 후 40일 동안 부부관계를 하지 않고 성별 생활을 하여 성공한 남편과 아내가 통일교 목사님에게 축도를 받고, 3일간 혈통복귀 피가름 의식행사를 치르게 된다. 반드시 하루에 1번은 혈통복귀 피가름 행사를 하여야 하며,하루에 2번만 하여도 재 타락한 결과가 되어 죄인이 되는 것이다.

 

다. 3일 혈통복귀 피가름행사에 사용하는 방과 침구일체를 성염(소금)으로 뿌려서 깨끗하게 성별한다.

 

라.신랑 ·신부는 적당한 장소(주로 북쪽)에 문선명 참부모 재림주 온영(사진)을 모시고 심정초 또는 통일초에 불을 밝힌다.

 

마. 성건(수건에 포도주를 묻힌 것)의식

1) 남편과 아내는 먼저 정성껏 목욕을 한다.

2) 성건을 담근 그릇은 가로 20cm, 세로 10cm, 높이 3cm정도로 하고물은 성건 하나를 적실 정도로만 준비해서 신랑·신부가 서로 완전 나체 상태에서 성건 (수건)으로 몸을 닦은 다음에 그릇에 물이 남지 않도록 한다.

3)성건은 남편과 아내의 것이 바뀌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3일 동안 반드시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4)몸을 닦을 때에는 자기가 자기의 몸을 닦아야 하며, 닦는 순서는 머리부터 닦는다.

5)이 의식은 성건으로 몸을 닦아 외적으로 성결케 하는 조건을 세우는 것이다

 

3. 행사


가. 제1일

 

1)성건으로 물을 적셔 몸을 닦은 다음에 다시 양복 또는 하얀 예복을입고, 하나님과 참부모님 존영(사진)에 찬송과 경배를 드리고 가정 맹세를 봉독한다.

2) 아내가 앉고 남편이 아내에게 3배 경배를 드린다(이 때의 아내는 어머니 입장이기 때문에 어머니, 나를 낳아 주십시오 하는 심정으로 경배한다. )

3)아내가 어머니 입장에서 기도한다. (기도내용 : 통일교 축복에 대한감사와 문선명 참부모님 가정의 전통을 상속받는 가정을 이룰 것을결심하고 또한, 어머니의 입장에서 하나님과 참부모님의 심정을 상속받는 남편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4)아내 상위로 사랑행위를 한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남편이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는 의식이다. )

= 참고사항 : 사랑행위(삽입)을 위해서 애무를 해도 된다. 반드시 삽입이 이루어져야 하며 사정을 할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사정이 안되면(어려우면)사랑행위를 마쳐도 된다. 단, 반드시 삽입은 이루어져야 한다. (주체가 발기가 되지 않아서 삽입이 되지 않을 경우 아내가 남편의 성기를 손으로 잡고 자신의 성기 속으로 밀어 넣어서라도 성공을 시켜야 한다. 사랑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아 시간이 연장될 때에 24시간 이상 경과하면 안 된다. 사랑 행위시 콘돔이나 피임기구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

5) 다시 신랑 ·신부는 1회 성행위를 마친 후 다시 정장을 입고 남편이 아내에게 1배 경배를 드린다. (이 때에 남편은 아내에게 "어머니, 나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심정으로 경배한다. )

6) 아내가 두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과 문선명 앞에 첫날 혈통복귀 피가름 혈통복귀 행사를 마쳤다는 보고 및 감사기도를 드린다.

 

나. 제2일 :혈통복귀 피가름행위를 남편이 아래에서 부부관계를 하고,아내가 남편위에서 부부 관계를 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다.

 

1) 첫째날 혈통복귀의식과 둘째날 셋째날 피가름 혈통복귀 의식은 하루한 번만 성교의식을 해야지 통일교 합동결혼식 후 3년 동안 합방을 안해서 정욕이 넘쳐 두번 피가름을 하면 탕감봉으로 매를 맞고 천국 구원의식이 깨어지고 7년동안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

 

다. 제3일


1)제3일째 의식은 남편이 비로소 남자의 주관성을 복귀하는 의식이다.

2)성건의식 후 정장을 하고 하나님과 참부모님 존전(사진)에 찬송과 경배를 드런다.

3) 남편과 아내가 마주보고 맞절 3배를 한다.

4) 남편이 주관성 복귀된 남자의 입장에서 하나넘 앞에 기도한다. (기도내용 : 남자의 주관성 복귀와 잃었던 조건회복을 감사하는 내용)

5) 아내가 답례기도를 한다.

6)남편 상위로 남편이 3일째에는 혈통복귀 피가름관계를 할 때 아내 위에서 부부관계를 하고, 아내는 남편 밑에서 사랑행위를 한다. 복귀된 아담 가정에서 혈통복귀 피가름로 타락했기 때문에 통일교 복귀 원리인 혈통복귀 피가름로 완전구원을 받은 아담 가정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7)사랑행위 후 성건으로 하체를 닦는다. 닦은 성건은 세탁하지 않고,그대로 말려서 이스라엘 민족이 법궤를 보관하듯이 소중하게 보관하여 자손만대까지 물려준다 그 이유는 완전구원을 받은 중생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8) 정장을 한 후에 남편이 앉고 아내가 남편에게 1배 경배를 드린다.

9)남편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전체 행사의 종료 보고와 절대로 타락하지 않겠다는 맹세의 기도 및 3일 행사 성공을 감사하는내용으로 기도한다. )

 

4. 주의사항


가. 3일 행사를 1일이나 2일에 끝내거나 4일 이상해서는 안 된다. 단,3일행사 도 중 불가피한 사유(긴급한 일)로 첫날 행사 후 그 다음날 행사를 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 며칠 뒤 2일째 행사를 할 수는 있다. 기성가정(결혼 후 통일교 입교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합동결혼식을 한 가정)의 경우 나이와 건강의 문제로 계속해서 3일간 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에 첫날 행사 후 수일간을 띄워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개월 씩 띄워서 해서는 안된다.

 

나. 성건 사용시 주의사항


1) 마른 성건을 사용해도 안되고 세탁한 성건을 사용 해도 안 된다.

2) 성건을 사용하지 않고 3일 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

3)성건을 서로 바꾸어 사용해도 안되고, 하나의 성건을 둘이서 사용해도 안 된다.

다. 아래와 같이 사랑행위를 한 경우에는 실패가 된다.
1) 첫째 날 둘째 날 남편상위로 사랑행위를 한 경우

2) 셋째 날 아내상위로 사랑행위를 한 경우

3) 삽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행위를 끝낸 경우

4) 본 식 외에 다른 사랑행위를 한 경우

 

라. 3일 행사 첫째 날(둘째 날이나 셋째 날도 해당됨)의 행사를 수일에 걸쳐서 행할 경우도 실패가 된다. 시작된 시간으로부터 24시간 안에 끝내야 한다.

 

마. 3일 행사는 반드시 허락하신 목사의 축도를 받은 후에 실시해야 한다

 

바.본 식대로 3일 행사를 하지 못했을 경우 협회 가정국에 상담한 후성별의 탕감조건을 세워야 한다. 그 다음 축도를 받고 성건을 다시지급 받아 3일 행사를 실시한다.

 

사.제1일 제2일 사랑행위 한 후에는 타월로 하체를 닦되 제3일째 날은 반드시 성건으로 하체를 닦은 후 그대로 말려 보관한다.

 

아. 3일 행사중 동일한 일자에 사랑 행위가 중복되지 않도록 한다. 즉,3 일 행사의식이 끝나는 시간과 새로 시작하는 시간이 동일한 날짜에 중복되지 않아야 한다.

 

 

 

제 25 장 문선명은 모든 사람의 재산을 착취하고

 

파멸시킨다


제 1 절 문선명은 자녀와 가족 구원도 못 시킨 거짓 메시아 이다


문선명은 자신은 하나님이 적그리스도이며 희대의 영혼 사기꾼이다. 첫번째 아내 최선길도 전도하지 못하고 이혼 하였으며 문선명은 혈대교환, 혈통복귀의식, 피가름,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신과 자녀들도 구원하지 못 하였으며 방탕과 음란, 자살, 마약, 이혼, 사고로 자녀들이 죽었다.

문선명의 죄악은 자식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으며 이는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라는 증거이다. 자녀들도 방탕, 마약, 이혼, 동거, 자살, 사고사, 감옥 생활 등으로 고통 당하고 있다. 자신의 자녀들 신앙교육도 책임 지지 못하는 문선명 사이비교주가 인류의 구세주 참부모 재림주라는 것은 거짓이며 영혼 사기꾼이라는 증거이다.

 

문선명이 결혼하여 낳은 여섯 번 째 아들인 문진영(21세)은 1999년 9월26일날 호텔 경영 수업을 위해 미국 네바다주로 가는 길에 있는 '리노'라는도시 호텔에 투숙하던 중 17층 발코니에서 떨어져 자살하였다고, 미국 신문에 대서특필하였습니다. (리노 미국 레바다주 AP=연합뉴스/1999. 11. 11)

그 당시 문진영은 문선명이 수많은 통일교 2세 가운데 뽑은 유화주와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유화주에게는 애인이 있었고 그의 애인은 한남동 저택과 미국 문선명 왕국의 저택인 이스튼 가든까지도 찾아가 크나큰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문진영이는 괴로워 하였습니다. 아기를 하나 낳았지만 별거 하였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문진영이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자신을 포기했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신의 며느리 될 사람의 신앙을 보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며느리 후보 중 학벌, 미모만보고 결정하고 맞이하여 결국 사랑하는 아들인 문진영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문선명이 본부인인 첫 번째 부인 최선길과 아들을 버리고 이혼하고 처녀를 피가름하여 사생아를 낳고 그 수많은 가정을 파탄시켰다. 1960년 4월11일 문선명(40세) 부인 한학자(17세)에 자칭 재림주 참부모 어린양 혼인잔치를 하고 낳은 큰아들이 문효진이다.

 

문선명과 한학자 사이에 낳은 큰아들 문효진이 당시 19세, 홍난숙 15세에 결혼하여 5남매를 두고 이혼하였는데 전 며느리 홍씨는 "전 시아버지인문선명 교주는 구세주가 아니며 사기꾼" 이라고 미국 CBS방송에 한 시간 동안 보도 하였습니 다.

 

문선명의 딸 문은진도 "문선명은 자기 아버지일 뿐이지 재림주 구세주가 아니다" 라고 주장 하였습니다 (조선일보, 1998. 10. 08)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며느리 감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는 그런 부모입니다. 자신의 자녀도 신앙책임을 갖지 못하고 파경을 맞는 자녀들이 있는데 통일교 미혼남녀를 합동결혼식을 시켜 완전 구원해주고 후손대대로 복을 빌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귀중하고 소중한 자식을 죽게 만든 사람이 바로 문선명 교주인 것입니다. 문진영이 죽은 후 통일교회 내에서는 7일 동안 문진영의 죽음을 통일교 교인들에게 숨겼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숨길 수 없어 호텔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발표 하였던 것입니다. 문진영의 죽음은 결국 부모를 잘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처녀인 Y대 여대생 김명희도 간음 간통 복귀의식을 치러 문희진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문희진은 1955년 6월 30알(양력 8월 17일)출생하였고 1969년 8월 1일 14살 때 조치원 부강역에서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유혹으로 통일교인이 된 이득삼과 그 딸 최순화는 문선명 교주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처녀인 최순화와 혈통복귀라는 미명으로 복귀의식을 치러 박 사무엘이라는 사생아 아들을 1965년도에 낳아 길렸습니다.

 

제 2 절 문선명의 둘째 아들 문흥진의 사망


미국에서 1983년 12월말에 문선명의 둘째 아들 문흥진(17세)의 차와 트레일러가 부딪혀 문흥진은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습니다. 문흥진의 시체를 한국에 가져와 1984년 1월 2일 승하식이라며 거창하게 장례를 치렸습니다. 문선명은 1984년 1월 3일 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뉴욕 벨베디아 수련소에서 죽은 문흥진을 위한 애승일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죽은 문흥진을 영계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을 세뇌시키기 위하여 재림주 천지부모 행세를 하면서 교통사고로 죽은 아들까지도 신으로 섬기라고 공갈 협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문흥진이 통일교 전체 교인들을 위하여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죽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에게 1984련 1월 1일부터 1월 30일까지 금식 철야 회개 기도를 실시하라고 명령하여 실행을 하였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죽은 문흥진과 박보희 회장의 살아있는 큰딸 박훈숙을 영혼 결혼시키고 박훈숙을 문훈숙으로 성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1971년에 문선명이 미국 시민권을 가졌을 때 미국성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훈숙은 일생동안 영혼결혼을 하여 살아있는 처녀가 문선명 교주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문선명은 박훈숙에게 죽은 아들 문흥진을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과천교회에 목사로 있으면서 국내의 유명한 사건을 해결한 강창수(가명)라는 형사를 만나 문흥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문흥진이 미국 뉴욕에서 교통사고로 죽기 전 국내에서 과속으로 교통사고를 내어 경찰서에 잡혀 온 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문흥진의 비서 역할을 했던 과장이 강창수 경정을 찾아와 "제발 문흥진의 운전 면허증을 빼앗아 달라" 는 부탁을 한 일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문흥진을 수행하는 비서는 과속으로 차를 운전하는 문흥진이 무섭다고 하며 운전 면허증을 빼앗아 달라고 담당형사에게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떻게 운전하고 다녔는가? 하는 것을 저는 안 보아도 훤히 알 것 같았습니다.

 

제 3 절 재림한 문흥진 노릇한 에지프트


문선명은 통일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문흥진이 죽고 난 후 반드시 이 땅에 재림하여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문흥진이 재림하였다고 떠벌리기 위하여 아프리카 케냐 주재 곽정환 회장과 아프리카 짐바브웨 청년흑인 에지프트와 만났습니다. 에지프트는 1983년부터 통일교 사람들과 접촉한 사람이 었습니다. 짐바브웨 책임자인 어거스틴 마튼 고시와 만나 통일교 원리강의를 듣고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로, 메시아로 믿게 된 사람이었습니다.

 

문선명은 1987년 에지프트가 적극적이며 설교도 잘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문선명과 곽정환 회장은 에지프트에게 문흥진이 되라고 강요하고 명령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문흥진이 되기 싫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곽정환 회장, 간부들의 설득으로 재림한 문흥진이 되어 통일교 회개 운동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에지프트에게 전세계 통일교회를 다니며 통일교 교인들을 회개시키는 고백식 설교를 하게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을 회개시킨다고 하며 죽은 문흥진이 살아서 재림해서 에지프트에게 영이 들어 왔다고 외쳤습니다. 에지프트를 문흥진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에지프트는 죄있는 통일교 교인들을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에게 죄악을 용서를 받는 조건이라며 죄악의 정도에 따라 몽둥이로 탕감봉이라는 구실로 10대, 7대, 3대, 1대를 무자비 하게 폭행하였습니다.

 

유럽, 아프리카, 남미, 미국, 일본, 한국에서 흑인인 에지프트가 사망한 문흥진이라고 자칭하며 통일교 교인들이 저지른 간통죄, 강간죄, 성 추행죄, 공금 횡령죄, 절도죄, 부부 싸움한 죄를 심판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에게 문선명 교주를 배반한 죄, 욕설한 죄는 몽둥이를 맞아야 용서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공개적으로 에지프트에게 죄악 고백식을 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죽은 문흥진 행세를 하며 전 세계 통일교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죄악을 저지르는 통일교 교인들에게 죄를 용서하여 준다는 면죄부 형식으로 폭행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합동 결혼식 전에 혼전 혈통복귀 피가름 한 것과 합동 결혼식 후 혈통복귀 피가름을 한 것까지도 몽둥이로 폭행을 하였습니다. 문선명은 미국 호화 저락인 이스트 가든에서 에지프트를 불러 환영 만찬회를 열었습니다. 에지프트는 자신을 교통 사고로 죽은 문흥진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문선명 큰아들인 문효진, 셋째 아들인 문현진, 넷째 아들인 문국진은 진짜 문흥진이 재림 한 것이라면 어린 시절에 대하여 말을 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어린 시절에 대해서 단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에지프트가 문흥진이라는 것은 거짓이었기 때문에 예언할 능력도 없고 영을 볼 수도 없으며 투시력도 없었습니다. 에지프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문선명, 곽정환, 에지프트 3명은 통일교 교인들의 죄악을 회개시킨다며 사기극, 조작극을 하였습니다.

 

 통일교 협회 최고위층 간부들과 통일그룹 내 기업체 사장들은 에지프트에게 하는 고백식을 피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겹사돈이었던 홍성표 일화사장도 곽정환 회장에게 고백식을 안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곽정환 회장은 한 마디로 거절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겹 사돈인 박보희 총재도 에지프트에게 죄악을 고백하는고백식을 했습니다. 에지프트는 60세가 넘는 박보희 총재를 무차별적으로 폭행 하였습니다. 그래서 박보희 총재는 뇌출혈을 일으컥 뇌수술을 받았고 조지타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습니다.

 

통일교 최초 합동결혼식을 한 36가정(1901년 결혼)부터 6,500가정까지의 모든 축복 가정도 고백식을 하였습니다. 그중 1,800쌍(1975년 결혼) 고백식에 저도 갔습니다.

1988년 12월 18일이었습니다. 그 날 통일교 본부 교회에 1,800쌍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전국에서 모였습니다 1,800쌍 전부가 지를 지었다며 고백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10가지도 넘는 지의 종류 중에 한 가지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1,800쌍 전부가 죄가 있다며 몽둥이로 지를 탕감해 주는 탕감봉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지를 지은 1800쌍 부부는 자리에 앉고 저와 다른 한 목회자가 일어서 있었습니다. 죄악의 조건에 걸리지 않는 저와 다른 목회자는 통일교 죄악 고백식 중 노아 같은 의인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저는 진실과 정직으로 살아 온 목회 길을 회고하며 그 당시 문선명에게 미쳐서 참 부모님께서 저를 지켜 준 것에 대하여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교통사고로 죽은 문흥진 행세를 하며 폭력을 행사했던 에지프트는 문선명, 곽정환의 1회용 이용물로 사용되었습니다. 통일교회에서 에지프트를 버림으로 에지프트는 통일교회를 탈퇴했고 문선명 통일 교주는 고백식 후에 문흥진이 에지프트를 떠나 영계로 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에지프트는 1992년 8월 4일 일본 지바시 지바깽 마꾸바리에 있는 국제회의장 대 강당에서 통일교회와 문선명 교주의 문흥진 조작 행사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사이비 교주이고 적 그리스도며 인류의 영혼을 파멸시키는 하나님의 대적이라고 문흥진 군 행세를 했던 에지프트가 폭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교 교인들은 이런 내용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짐바브웨 흑인청년 에지프트의 고백식 사건으로 수많은 통일교 교인은 신앙의 타격을 받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부부지간에 간통, 성추행 사건 등이 서로 폭로되어서 왕따가 되고 가정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통일교회 목회자 회의에도 타격을 주었습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에지프트는 교회에 많은 사건을 일으키고 통일교회를 탈퇴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재림주라며 호의호식하는 모습을 보고 에지프트도 사이비 재림주가 되었습니다. 에지프트는 문선명 교주가 하던 것처럼 재림주 노릇을 배웠던 것입니다. 에지프트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에 가서 가루트라는 기독교 종파를 만들어 가짜 재림주가 되어 포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문선명으로 인하여 또 하나의 사이비 교주가 수많은 영혼을 죽이는 재림주가 된 것입니다.

 

제 4 절 문선명과 친인척은 재산착취를 통해 초호화 생활을 누린다.


문선명 교주는 부 문경유, 모 김경계에게 효도하기 위하여 부모가 사망하였는데도 이북에 갔습니다. 이북 김일성이 문선명 교주에게 전세 비행기를 중국까지 내어주어 비행기를 타고 이북에 입국하였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통일교 교인들로부터 거액재산을 착취하여 얼마나 많이 투자 하였겠습니까? 갈 수 없는 이북 평북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고향 땅에 전세 비행기를 타고 갔습니다.

출세하여 개선 장군같이 고향에 가서 죽은 부모에게도 효도하고 형제, 친척들에게도 온갖 선물로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교 교인1인 당 8만원씩의 돈을 거두어 고향에 땅 30만 평을 마련하고 수백억의 돈을 투자하여 예수님이 탄생한 베들레햄 같이 문선명의 고향 땅인 정주를 평화공원으로 만들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남한에 살고 있는 문선명 교주의 사촌 육촌 형제들과 친척들을 통일그룹 사장, 기업체 총 책임자들로 세워 통일그룹을 망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통일그룹이 망한 후에도 문선명 친척들은 돈을 가지고 초호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 5 절 문선명의 브라질 자르딘 계획


문선명은 통일그룹이 1998년 IMF때 부도가 났는데 전 세계 통일교의 자금줄이 막히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통일교 교인들 가정의 재산 착취 운동에 돌입하였습니다. 문선명은 교인들과 한가족이라고 세뇌 교육을 시키며 부자관계에 네 돈, 내 돈이 따로 없고 아버지 돈이 자식 돈이고, 자식 돈이 아버지 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의 돈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며 소유권을 이전하라고 하였습니다. 한국의 전통은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인데 어느 누가 자식이 부모에게 재산을 물려줍니까? 문선명교주는 참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한국과 일본의 통일교 교인들에게 무조건 재산을 자신의 소유로 이전하라는 공문을 내렸습니다. 교인들은 무조건 문선명에게 2,100만원을 총 생축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내야 했습니다.

죄를 용서해주는 천국행 면죄부인 탕감비 1300만원을 바쳐야 되고 조상 구원헌금 수천만원 등 재산을 바치지 않으면 통일교 교인이 아니고 죄인이 되며 지옥을 가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온갖 공갈 협박에도 통일교 교인들은 문선명에게 세뇌가 되고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재산을 바치게 됩니다.

 

문선명은 재산 착취를 통해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통일교 교인은 브라질의 자르딘 40일 수련에 무조건 참석 해야 하며, 만약 40일 수련을 참석하지 않으면 통일교 교인이 아니고 문선명 통일교 제국의 황족의 자격을 박탈한다고 하였습니다. 온갖 공갈 협박으로2,100만원 헌금을 내고 브라질 40일 세뇌교육 수련에 일천만원 경비를 쓰고 참석하는 사람만 문선명 사이비 종교 통일 제국의 황족 자격을 갖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문선명은 1차로 1억 평의 남미의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수련소를 매입하였습니다. 이 땅은 통일교 교인들을 잔인하게 공갈 협박하여 재산을 착취한 돈으로 사들인 것입니다.

 

문선명은 이 땅에 통일교 교인들 세뇌교육을 시키기 위한 교육수련소와 앞으로 50억 평을 매입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추진하고 있습니다.

리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학교 건물을 건축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이라는 거창한 이름도 붙였습니다. 새 소망 에덴동산은 문선명 통일교 제국의 새 세계, 새 국가 건설을 하여 통일제국을 만들자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나라와 백성이 없었기 때문에 십자에 달려 죽었다고 문선명이 주장합니다. 문선명은 문선명 통일교 제국을 세우기 위하여 2004년 4월30일까지 세워야 한다고 통일교 교인들을 명령하며 독촉하고 있습니다.

 

이미 문선명은 주권 복귀와 조국 광복, 왕권 복귀라는 대명제를 가지고 통일교 교인들에게 재림주 천지 부모, 통일교 제국의 왕으로 취임을 하였던 것입니다.

 

1차는 새 소망 에덴동산에 새 세계, 새 국가 통일제국 건설이 목적입니다. 2차는 산업 개발을 하여 임업농업 생산환경을 성공하자는 계획입니다. 3차는 공업도시를 만들자는 것이 목적입니다. 4차는 건설업을 육성하는 것이 목적이고 5차는 문화, 예술, 이상세계, 통일제국 건설이 목적입니다.

 

문성명은 한국에서 통일그룹 부도 후 한국 통일교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통일교 교인들을 남미 브라질로 대 이동하는 방대한 계획을 세워 각종학교를 세우고 1억 평 대지를 매입하였던 것입니다.

 

성경말씀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중심 삼고 애굽이라는 나라에서40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여 애굽을 탈출하였고 홍해 바다를 건너 가나안 7족을 멸망시키고 이스라엘 백성은 고향 땅을 400년만에 찾게 되었다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역사의 동시성을 반복하고 복귀 섭리역사를 위해서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통일교 교인들이 브라질로 이주하면 브라질 자르딘 에덴동산에서 1억 평의 밀림을 무보수로 논과 밭을 개간해야합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세뇌되어있기 때문에 자자손손 영혼의 노예가 되어 죽을 때까지 밀림을 농업도시,공업도시, 상업도시, 어 업도시로 개간하고 건설하여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자신의 욕망과 통일교 제국을 세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 엄청난 자원과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통일교 교인들에게 부끄러움도 없이 재산의 소유권 이전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에서 세뇌교육을 40일 동안 받았던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은 2,100만원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친다는 각서를 쓰고 무조건 40일 동안 브라질에 가야 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같이 40일 수련을 가는 통일교 교인 부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부부와 같이 천국 황족으로 입적하는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그 기념사진을 10만원씩에 판매하고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에서 40일 수련 세뇌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식사비로 120만원을 바칩니다. 이 나라에서 40일 식사비는 1인당 5만원도 되지 않지만 식사비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한국 통일교 교인들이 외화를 밀 반출하여 브라질에 가져가서 문선명 교주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통일교 교인들 부부가 브라질 40일 세뇌교육 수련을 받기 위해서 가정생활도 할 수 없으며 직장도 퇴직해야 되고 장사도 문을 닫고 브라질에 가야 했습니다 부부왕복 항공경비 등 일 천 만원 정도의 금액이 들어갔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피골이 상접한 일본 통일교 교인과 한국 통일교 합동 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 2만 쌍을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농장으로 대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한국 통일교 교인 1만 5천 명을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농장으로 대 이주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 재산을 빼앗기 위하여 세뇌 교육을 시켜야 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야망에 찬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국 통일교 교인과 일본 통일교 교인의 집을 팔고 융자를 받아서라도 무조건 남미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교육에 참석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일생 동안 통일교 교세 발전을 위하여 매일 각종 전도 대회와 행사에 일회용 이용물이 되었고 재산을 바쳤습니다. 처절하고 불쌍한 통일교 교인들은 세상에서 돈 벌 기회가 거의 없습니다.

통일교 교인이 되려면 계속 행사에 이용당하고 참석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직업을 갖고 개인 장사를 할지라도 운영하기가 힘이 듭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일생동안 인생의 밑바닥에서 처절한 가난과 싸우면서 그 날 그 날 식사 끼니를 걱정해야 되는 처지니 자녀 교육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고 있는 통일교 교인들은 재산을 바칠것이 없어 집을 팔고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문선명 교주에게 7천 만원에서 1억원을 바쳐야 했습니다.

문선명의 명령에 복종하여 거액 재산을 바치기 위해서 통일교 교인들은 막노동을 하고 파출부 일을 하고 식당 일을 하며 매월 분납하는 교인도 있고 처절한 생활입니다.

 

제 6 절 재산착취 수단인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문선명은 1998년 6월 22일~7월 21일까지 30일 교육을 하였습니다. 전세계 각 나라 185개국에 개척 교회를 하고 있는 국가 메시아 148가정인 296명을 포함하여 통일교 최고위층 지도자 600명에게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1차 브라질 자르딘 40일 세뇌교육 때는 7월 22일~8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 2,000명이 참석했습니다.

 

2차 브라질 자르딘 세뇌교육 때는 9월 1일~10월 10일까지 3,400명의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부부가 자녀들을 40일 동안 떼어놓고 1천만 원씩을 교육비를 내고 브라질에서 세뇌교육을 받았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2,100만 원씩을 총 생축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문선명 교주에게 바쳤습니다.

 

3차 세뇌교육 때는 10월 11일~11월 17일까지 700명의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이 참석하였습니다.

 

4차 브라질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 세뇌교육 때는 11월 18일~12월 28일까지 문선명 교주가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총 150명이 참석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거듭되는 명령과 지시에 남미 브라질 자르딘 40일 세뇌교육에 우리 부부도 어쩔 수 없이 약 1천만 원 정도의 돈을 내고 세뇌교육에 참석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목사 부부까지도 40일 교육에 참석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목사들은 교육비가 없으면 교인들이 헌금을 마련하여 목사 부부 경비를 지원하여 참석하라" 고 명령 하였습니다.

교인들의 정성으로 경비를 마련하여 저의 부부는 4차 세뇌 교육 때 브라질 자르딘 수련회를 다녀왔습니다. 저의 부부는 문선명 교주와 황족으로 살 수 있다는 입적 사진도 같이 찍었습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통일교 교인들이 재산소유권 이전하라는 2100만원을 바치고 오라고 했습니다. 만일 바치지 않은 통일교 교인은 브라질 자르딘에서 40일 교육 등록할 때 2100만원 총생축 헌금을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에게 바칠 것이라는 서약서를 제출하였습니다.

 

5차 때는 1998년 12월 29일~1999년 2월 6일까지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6차 때는 1999년 2월 6일~3월 17일까지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에게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통일교 역사가 있는 한 총탕감비 1300만원이나 총생축헌금 2100만원,조상구원헌금 1대부터 120대 조상까지 수천만원, 10의 3조헌금, 문선명 나라 건국기금 매월 17만원, 8대명절 헌금 등을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은 무조건 바쳐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40일 수련이 회를 거듭할수록 한국과 일본의 통일교 교인들이 적게 오자 말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브라질 자르딘까지 40일 교육을 못 오는 한국과 일본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까지도 2,100만원씩을 나에게 바쳐라" 하고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에게 공문으로 명령하였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 직장에 다니거나 장사하는 통일교 교인들은 브라질 40일 세뇌 교육을 안 가더라도 집을 팔거나 융자를 받아 총 생축헌금 2,100만원씩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저는 브라질 자르딘에 가서 문선명 교주 부부를 아침 식사할 때 만났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새벽 집회를 마치고 6시 30분에 식사할 때 통일교 교인 경호원 여러 명이 경호를 서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김윤상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 원장과 부원장인 윤정로씨에게 저의 이야기를 하고 아침에 몇 분만이라도 문선명 교주 부부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문선명 교주가 식사를 하는 중에 그 앞에서 땅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 전부는 문선명 앞에 나아갈 때 경배 세 번이나 한 번을 무조건 해야합니다. 그러고는 문선명 교주에게 억울한 강제 인사를 당했던 것을 간단하게 설명 하였습니다.

1991년도 1월 6일 노원 교구 본부에 제가 교구장으로 발령을 받았지만 김봉철 총무국장이 서유암 교회장을 교구장으로 만들기 위하여 노원 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된 저를 강제 박탈시키고 서유암으로 교체 시켜 버렸다고 말하였습니다.

제가 서울 시내 교회 전체 목사들 앞에서 일어나 부당성을 발언하고 밖으로 나가 버렸던 것은 제 마음이 상했기 때문에 나갔다고 문선명 교주에게 보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김봉철 국장과 김철현 국장이 저를 폭행한 내용이나 충격으로 심장병이 되었다는 내용은 차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저에게 "수련을 잘 받고 가라!" 고 말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르딘 수련 받는 교육생들에게 세뇌 교육을 시킨 후 아침새벽 설교를 하고 6시 30분에 식사를 한 후 바로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을 떠나갔습니다.

저는 브라질까지 간 것은 40일 세뇌 교육 조건도 세우는 것 이었지만 제가 문선명 교주에게 할말을 하기위해 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할 말을 다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문선명 교주는 미국에서 이미 화가 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브라질 자르딘 수련소에 와서 문선명 교주의 가족이 되는 황족 입적 사진도 안 찍어 주려고 하였습니다.

 

뿌리까지 썩은 통일교회는 한국과 일본 통일교회에서 공갈 협박으로 걷어지는 헌금이 없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브라질 자르딘 40일 세뇌교육 수련이나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서의 조상 해원 헌금을 한국과 일본에서 하지 않으면 전 세계 통일교회는 순식간에 쓰러지는 것입니다.

미국 소수의 통일교 교인들과 유럽 극소수의 통일교 교인들, 남미 통일교 교인들, 아시아 통일교 교인들은 절대로 문선명 교주에게 헌금을 바치지 않습니다.

 

오직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들만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노예가 되어 재산을 착취당하고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1998년 12월 21일 밤에 브라질 자르딘 수련소까지 와서 통일교 40일 세뇌 교육생들과 하늘나라 천국 황족 입적 사진을 부부끼리 찍어주었습니다.

문선명 교주 부부가 자칭 재림주로 의자에 앉고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부부는 문선명 교주의 뒤에 서서 황족 입적 사진을 찍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입적 수련을 받은 합동 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들은 1천만 원의 경비를 쓰고 2천 1백만원의 재산을 문선명 교주에게 바쳐야 합니다.

 

브라질 자르딘에서 수련생 전체에게 매일 회개기도와 새벽에 문선명의 기도책을 읽는 훈독회와 세뇌 교육 프로그램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저의 뇌리에서 맴돌 뿐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제국 건설과 주권 복귀, 왕권 복귀가 최종목적입니다. 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통일교 교인들의 재산을 빼앗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결국 자르딘 수련은 통일교 합동결혼식 한 교인들 재산 착취에 목적이 있습니다. 참으로 이 지구상에 생지옥과 같은 통일교회에서 문선명 교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사악합니다.

 

제 7 절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임을 증명한 사람들


통일교 초창기에는 문선명 교주의 오른팔 격 이였던 통일교회의 충성꾼인 유민효, 유영효, 홍성표, 이진태, 박종화 등 수많은 사람들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36가정 최초 축복을 받고도 통일교를 탈퇴하거나 통일교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문선명 교주와 같이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했던 엄덕문 회장도 초창기 통일교 청파동 시절부터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로 믿고 따랐지만 통일교회를 탈퇴 하였습니다.

 

엄덕문 회장은 문선명 교주의 축복을 받았고 통일교회의 산증인 이었습니다. 엄덕문 회장은 세종 문화회관 설계 등국내 설계의 일 인자로 통일교의 전국 교회를 설계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엄덕문 회장은 문선명 교주의 사이비 성을 알고 통일교회를 탈퇴하고 떠나 지금은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김덕진이라는 음악가는 일본음악 대학에서 공부를 하여 국내에 들어온 사람으로 통일교회 성가 19곡을 작곡한 열렬한 통일교회의 충성꾼 이었습니다.

지금도 통일교회는 김덕진이 작사 작곡한 19곡 성가를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선명 교주는 한국의 성가에는 김덕진 작사, 작곡을 지워 버리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 통일교 성가에만 김덕진 작사, 작곡 19곡이라고 인쇄되어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김덕진과 여자 교인 들에게 아담과 하와 때문에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파탄된 세상을 자신이 완성된 아담으로서 세상의 여성들을 혈통복귀 피가름을 통하여 복귀의식으로 구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함과 동시에여성들을 원래의 모양대로 복귀시키는 혈대 교환, 피가름 의식을 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김덕진씨는 복귀원리,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로 유신선씨와 피가름 의식을 치렸습니다. 김덕진씨는 서울에서 통일교 여자 5명과 릴레이 혈통복귀를 한 것이 일주일 후에는 72명으로 불어났다고 문선명 교주에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또한 문선명 교주는 소생 장성 완성 3일 동안 혈통복귀 피가름관계 행사를 치러야 구원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김덕진씨에게 한번만 혈통복귀 피가름을 하여 혈통복귀를 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문제로 문선명 교주와 김덕진 씨는 이 새끼라는 소리까지 들으며 싸움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김덕진씨는 문선명 교주와 싸운 후 통일교회를 탈퇴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기독교 신학교를 나와 경찰 목사가 되어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오른팔인 박정화씨도 이북 흥남 감옥 에서부터 알게되어 이남에 까지 같이 내려와 초창기 통일교회에 충성한 산 증인 입니다. 그는 문선명 교주의 통일원리가 김백문 교리라고 증거하였고 문선명 교주의 지시에 의해 혈통복귀와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를 실천하여 통일교 여자들과 관계를 많이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지시를 잘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 박정화씨는 문선명의 비서실장으로 수행하면서 일기로 쓴것을 '야록 통일교회사' 라는 책을 저술하려 통일원리가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이며 문선명 교주가 수많은 처녀와 유부녀들을 혈통복귀 피가름으로 복귀하여 개인과 가정을 파괴한 문선명 교주라는 것을 폭로하였습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대대적인 통일교 비리 폭로운동이 벌어졌으며 특히 일본에서는 언론과 방송을 통하여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일본 통일교 활동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황선조 한국 통일교 협회장을 박정화씨와 만나게 하여 자신의 비리와 혈통복귀 피가름 스캔들을 감추고자 하였습니다.

박정화씨는 문선명 교주의 부산 피난 시절부터 비서실장 일을 보면서 문선명 교주와 같이 동행하고 행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일 문선명 교주와 혈통복귀 피가름한 여자들과 혈통복귀, 혈대 교환을 한 내용을 일기로 써 놓을 수 있었는데 그것을 책으로 발행하여 일본과 한국에 폭로하였던 것입니다.

 

박정화씨는 1998년 1월에 문선명 교주의 잔악성과 통일교 원리가 혈통복귀 피가름 교리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수백 권의 책을 발송하여 읽게 하였습니다. 다급해진 문선명 교주는 황선조 한국 통일교 회장을 통하여 통일교 교인들의 피살인 거액의 돈을 주고 박정화씨를 매수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박정화씨는 거액의 돈을 받고 통일교 문선명 교주의 야록 책을 통일교회에 팔았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황선조 한국 회장이 1998년 4월 14일 부산 교구 내 통일교 목사 부부 회의석상에서 박정화씨에게 엄청난 돈을 주고 야록 책을 회수하고 사들였다고 한 말이 사실을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 통일교 목회자들과 저의 부부는 황선조 회장의 그 말을 똑똑히 들었습니다.

 

제가 마포교회에 있을 때 전도한 문희숙씨는 1975년 2월 8일날 1,800쌍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가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하며 짝을 맞추어주어 합동결혼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문희숙씨는 그 남편과 이혼하였습니다. 이혼한 7년후 1982년 10월 14일날 6,000쌍 합동결혼식을 다시 올렸습니다. 문선명은 이혼을 당한 문희숙에게 박철수라는 사람이 최고 좋은 신랑감이라며 또 짝을 맞추어 주었습니다 문희숙씨는 남편과 두 남매를 두었습니다.

두 아들을 키우면서 중고등학교 등록금을 내지 못하여 졸업도 시킬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까지 이르렸습니다. 문희숙씨는 저에게 통일교회에 들어온 것을 통곡하며 하소연을 합니다. 문희숙씨는 아무리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불가능하였고, 가난 때문에 두 아들을 고아원에 보내고 싶어도 다 커서 고아원에서도 받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을 중고등학교도 졸업시켜 줄 수 없는 무능한 엄마가 되었다고 통탄하였습니다. 문희숙을 전도한 믿음의 부모인 저는 통일교회 문선명 교주를 재림주 참부모로 믿게 한 결과로 이렇게 비참한 가정 파탄을 몰고 온 것에 대하여 제자신 스스로가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문희숙씨는 이제 죽더라도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는 재림주로 믿지 않을 것이고 통일교를 탈퇴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문희숙씨는 장로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대종교(단군교)에서 통일교회로 입교하였던 이백림 논산할머니에게 전국 통일교 교인들 조상 구원 해원식을 문선명이 명령하여 통일교 조상들을 1973년도에 모두 구원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교인이 합동결혼식인 축복을 받으면 조상들은 모두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다시 지옥간 조상을 들고 나와 통일교 교인들을 미혹하여 1대부터120대까지 조상구원 하라고 명령을 내려 실천하는 것은 거액 재산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제 26 장 통일왕국을 꿈꾸는 문선명

 

제 1 절 통반격파를 지시한 문선명


문선명은 1998년 6월 20일 자르딘 새 소망 에덴동산에서 자신이 참부모 재림주로 세뇌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40일 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40일 세뇌 교육 중에 문선명 교주의 '원리강론' 과 문선명 교주의 '아버지의 기도 1권부터 12권' 을 읽으라고 하였습니다.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서 발행한 죽은 이상길씨의 '영계에서 보내온 편지' 중 1권인 '영계의 실상과 지상생활' , 2권인 '인류의 범죄자 누시엘' , 3권인 '새로운 세상' 은 통일교 교인의 재산을 착취하기 위한 세뇌 교육용 교재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 조상이 지옥간 것을 천국으로 보내 준다는 약속을 하고 지를 용서해 준다며 면죄부를 팔아 통일 교인 재산을 빼앗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성약시대 청평역사와 축복가정의 길', '축복가정과 이상천국 I~2권' 등을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을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한국 통일교 교인과 일본 통일교 교인을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교인들은 매일 1시간 씩 전 가족과 친척이 모여 훈독회라는 이름으로 책을 소리 내어 읽습니다 전국적으로 각종세미나,각종 행사,국민연합 세미나 행사를 통하여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기 위한 세뇌교육으로 지속적인 훈독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일교 교인을 뛰어 넘어 이제는 전국 시군구 면동리까지 국민연합을 조직하여 훈독회를 하고 통반격파를 하라고 명령하며 통일교 교세 확장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지역의 노인들과 유지, 전도 대상자들이 있으면 무조건 문선명 교주의 책을 전달하고 글 읽는 행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2004년 4월 30일까지 한국과 일본 통일교 교인 남편과 아내 3만명이 총동원되어 전도 목표를 세워 교세 확장에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남북통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기독교를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통일하여 조국광복을 하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문선명은 주권 복귀를 외치고 왕권 복귀를 외치며 통일교 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대통령은 문선명에게 경배하고 문선명을 남북한 7천만 국민들에게 메시아요 천지 부모가문선명 교주라고 국민들에게 증거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통일교회가 이 나라의 국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1990년 2월 27일날 한남동 문선명 교주의 저택에서 하늘나라 왕권 정착이라는 설교를 통하여 자신이 세상의 천지 부모라고 선포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칭 참부모요, 재림주 메시아라고 주장합니다.

문선명 교주는 1990년 4월 9일~13일까지 제 11회 세계 언론인 대회를 모스크바에서 개최하고 국내에 들어와 4월 30일에 충북 수안보 통일교 호텔인 와이키키 호텔에서 전국 12개 대도시에 수천명의 사람을 모아놓고 참부모 메시아 재림주 선포식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문선명 교주는 "전국 통일교회를 중심삼고 통반 격파를 하자" 고 외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의 책을 훈독회라는 이름으로 통일교 교인들과 지역 주민들에게 읽게 만들어 문선명 교주가 재림주라고 세뇌교육을 시키고 있습니다.

 

제 2 절 통일제국 건설을 위한 문선명의 음모


문선명은 2004년 4월 30일까지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전 세계에각 나라 국가 메시아 부인들 185명을 한국으로 불러 전국 시군구에 배치하여 국민 연합회장으로 발령을 하였습니다. 통일교회 발전과 실세화를 위한 것입니다. 현지 통일교회 목사와 하나되어 그 지역의 정치인, 경제인, 기독교 교인을 전도하여 통일교회 교인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입니다.

이제는 국가 메시아 185명의 부인들까지 21일 세뇌 교육 후 전국 통일교회에 배치하여 전도활동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가정 생활은 상상도 하지 못합니다. 부부를 갈라놓습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자녀들이 견우와 직년 같이 서로 떨어져 그리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비극적으로 전도 활동을 하여야 합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으라고 전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이제 그것도 모자라 통일교 최초 합동결혼식을 한 1961년의 36가정, 1962년의 72가정, 1963년의 124가정, 1968년의 430가정, 1970년의 777가정, 1975년의 1800가정, 1982년의 6000가정, 1987년의 6500가정, 1992년의 3만 가정까지 통일 제국 건설을 위해 가정을 떠나 총 출동하라고 하였습니다.

통일교 브라질 자르딘 새소망 에덴동산 40일 세뇌교육을 다녀와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 2100만원씩을 바친 그런 교인까지도 무조건 청평 천성 왕림궁전 21일 세뇌교육에 참석하여 식사대로 115만원씩을 바쳐야 했습니다. 식사 수준은 21일 식대로 7만원을 받으면 적당한 정도인데, 문선명은 엄청난 폭리를 취하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에게 천국생활 황족으로 입적한다는 명목으로 재산을 갈취하기 위해 2중, 3중으로 입적 수련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늘 황족으로 등록된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사람도 수련을 받아야 합니다.

문선명은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 한국과 일본 합동 결혼식 한 통일교 교인 920명을 모아 통일교회 원리강론보다 한 단계 높은 세뇌 교육을 시켰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불어 넣으며 희생의 제물이 되어 가정을 떠나 전도에 앞장서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지금은 3차 교육생으로 1982년도 6천 가정 합동결혼식을 한 여자 통일교 교인 3천명을 모아놓고 세뇌교육을 21일 동안 시켰습니다. 통일교 부인들은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 딸을 떠나 가정이 파탄되어도 3년 4개월 동안 문선명 통일교 제국 건설에 목숨을 바쳐 미혼 남녀를 전도하여 합동결혼식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6천 5백 가정도 아내 되는 3천 여명의 여자 교인들이 총동원된 전국 통일교회 미혼남녀를 전도하여 합동결혼식을 시켜 통일제국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공갈협박을 한 것이었습니다.

청평 천성 왕림 궁전에 교육받던 한국과 일본 합동 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 920명은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총 생축헌금 2100만원과 총 탕감비 1200만원을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재산을 바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만일 재산을 바치지 않으면 교육 받을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36가정~1800가정까지가 1차 교육생이고, 2차 교육생은 6000가정~6500가정까지 21일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합동결혼식을 받은 통일교 교인은 무조건 재산을 바쳐야 되고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을 떠나 전국 통일교회에 배치되어 계속적으로 교육이 되어집니다.

이 교육을 받은 교인들은 합동결혼식을 했더라도 문선명이 통일교 교인들의 죄를 용서해 천국 보내준다는 면죄부로 가정당 1200만원씩을 바쳐야 합니다. 문선명 교주에게 재산 바치는 총 생축헌금 2100만원과 1200만원을 합하면 각 가정 당 3300만원을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7천 가정만 계산하여도 2천 1백억의 거액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21일 청평 천성 왕림 궁전 황족 입적 세뇌 교육에 참석하면 앞의 사회자와 몇 사람이 북을 치고 각종 악기로 흥을 돋우며 1000명~5000명의 사람들에게 일시에 "악령을 물리치자. 악한 귀신을 성별하자" 고 외치며 머리를 계속 치고 가슴을 두 손으로 계속 치게 합니다.

집회 분위기는 온통 세뇌 분위기이고 회개 분위기입니다. 진짜 나의 악령이 떠나가고 지옥간 조상들이 구원받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세뇌 교육을 철저하게 시키고 있습니다.

과천교회에도 21일 교육을 받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부인 6명이 왔습니다. 미혼남녀 합동결혼식 대상자를 전도하기 위하여 가정을 버리고 와있는 것입니다. 불쌍한 교인들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야망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통일교 교인들은 탕감복귀와 가인 아벨과 희생의 제물이라는 이름으로 이용당하며 희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문선명은 2004년 4월 30일까지 통일교 교회의 모든 기관 기업체 전 세계 통일교 교인들의 힘을 모아 한국 전도에 총력을 다하여 미혼 남녀 확보에 주력합니다. 그들에게 합동결혼식을 시켜 문선명 개인의 야망, 통일제국 건설에 이용물로 쓰려고 합니다 모든 통일교 교인이 통반격파와 주권복귀, 조국 광복,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총 출동하였습니다.

2000년 8월 25일 1차 21일 세뇌교육을 받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한 920명의 부인들이 서울과 수도권 통일 교회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전도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한국과 일본의 부인 2만 명이 한국 통일교회에 집중 배치되어 미혼남녀 합동결혼식에 통일교회 운명을 걸게 되었습니다.

 

제 3 절 문선명 한학자 교주의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


1985년 12월 25일 문선명 교주 부부는 미국 벨베디아에서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사이비 종교의 극치로 말로를 장식하는 초호화판 황제 즉위식 이였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그 당시에는 세뇌되어 있는 상태여서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을 거행하는 것을 거룩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곳엔 통일교회 최고위 간부들만 참석하였습니다. 부인들은 몇 달 동안을 황제 황후 즉위식을 위하여 이씨 조선의 화려한 황제 비단의복을 몇 달 동안을 준비하였습니다. 황제 왕관도 순금과 비취왕관을 준비하여 머리에 썼습니다.

문선명은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에 몇 억을 사용하여 통일교 교인들의 피살 같은 눈물의 헌금을 낭비하였습니다. 문선명이 사이비 교주가 아니고서는 자기 과시, 욕망으로 허황된 황제 즉위식을 했겠습니까?

문선명과 12명 자녀,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는 최고급으로 화려한 왕자와공주의 옷을 입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이 세상에서 역사 이래에 없는 세계 황제 황후 즉위식을 올렸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가 황제 즉위식에서 어떤 통일교 고위층 간부도 카메라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기 스스로 가짜 참부모요,가짜 재림주요, 가짜 천지부모라는 것을 세계 황제 즉위식을 통해서 알린 것입니다. '저는가짜요' 하고 만천하에 공표 한 것입니다.

비참하고 처절하게 가난한 통일교 교인들은 이 황제 즉위식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꽃팔이, 생선장사, 파출부일, 막노동일 등을 하여 헌금을 했습니다. 문선명이 참 부모라면 자식이 헐벗고 굶주리며 피골이 상접하여 죽어가는데도 그런 돈을 썼겠습니까? 통일교인들은 참 부모라고 하는 문선명을 위하여 헌금을 하며 죽어가는 것입니다. 어찌 참 부모라면 향락, 방탕, 호화사치, 허영심의 극치를 통일교 교인들 앞에서 보일 수 있단 말입니까?

 

문선명은 통일교 교세가 강력해지면 대통령을 하려고 1990년에 통일 가정당을 창당하였던 것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앞으로 한국에서 여자대통령이 나와야 된다고 외칩니다. 문선명 교주의 부인 한학자를 대통령으로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통일 가정당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문선명 교주는 통일 가정당 주최로 전국 대 도시에 남북 통일운동 국민연합 이름으로 국내의 정치 지도자들과 시군구 의원 유지들을 초청하여 통일 가정당 대회를 열었으며 2000년 2월 15일 이후에 전국에서 대대적인 통일 가정당 주최로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사활을 걸어놓고 2004년 4월 30일 까지 이 민족을 통일교 제국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 통일교회 전체 교인은 33,000명 정도 뿐이고 예배 인원은 어린 학생 포함하여 17,000여명입니다. 전국 통일교 시 ·군 단위 교역 본부는 246여 곳이고 면 동 단위 교회는 170여 곳입니다. 대학생들 학사 교회는 01곳 뿐입니다.

 

선문대는 통일교가 세운 대학교입니다, 선문대학교 신학과에서는 통일교 목사를 양성합니다. 그러나 1998년도 졸업생 73명중 11명만 목회를 지원하고 62명은 통일교 목사 생활을 하지 않고 포기하였습니다. 통일교 선배 목사들의 비참함과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는 통일교 목회를 보고 포기 한 것입니다. 통일교 목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인 선문대학교 신학과는 이미 사명 있는 목사들을 양성하지 못하는 기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27 장 문선명 통일교 척결을 위한 주장

 

제 1 절 통일교는 사이비 교주의 온상입니다.


문선명 사이비교주 한 명의 출생으로 지금 통일교를 탈퇴한 통일교 출신 이단사이비 교주가 수십명이 되어지고 수많은 영혼을 지옥길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사이비 이들로 인해 수 십만명의 영혼을 빼앗고 살육하는 일이 세계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사이비교주 때문에 엄청난 피해와 파탄, 파멸이 세계 각 나라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 중에 남미 가이아나의 조지타운이라는 도시에서 사이비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와 같이 923명이 집단자살을 한 것은 1978년 11월 21일전 세계 언론을 경악하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독극물 사건의 옴 진리교도 파멸하였습니다.

 

국내에만 하더라도 1925년에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며 재림주 황제라고 칭하고 황제 즉위식까지 올렸던 차경석, 차전자가 70만 명의 자기 교인들의 영혼을 빼앗고 우상숭배 재산 착취로 가정을 파탄시켰습니다. 1930년도에는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가 교인들을 천국에 보내준다고 해놓고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살게 했으며 마지막에는 자기 교인들을 타살시켜 땅속에 수 십구 수 백구씩 파 묻어 버렸습니다.

1960년도에 대전에서 휴거론을 주장했던 박용주는 교인들과 같이 천국에 가는 것으로 알고 하얀 한복을 갈아입고 교회에서 7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않자 에덴 수도원의 박 교주가 자살 함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60년대 사이비 교단을 창설하여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용화교 교주 서백일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수도원의 김백문 교주의 제자였던 전도관, 박태선 장로는 수십만 영혼을 60년대 부터 빼앗아 사단 마귀의 역사를 지금까지도 행하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일어났던 1987년 오대양교도 마지막 파멸 장소로 경기도 용인 남사면을 택하여 교인 32명의 동반타살과 자살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땅에는 사이비 교주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살인과 강간, 우상숭배, 가정파탄, 재산 착취를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동방교, 전도관, JMS의 정명석 교주는 문선명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 문선명 사이비 교주 한 명의 출생으로 지금 통일교를 탈퇴한 통일교 출신의 사이비교주가 30명이 넘습니다. 이들로 인해 수십만 명의 영혼을 빼앗고 살육하는 일이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고 사이비 교주 때문에 엄청난 피해와 파탄, 파멸이 세계 각 나라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사건 중에 남미 가이아나의 조지타운이라는 도시에서 사이비 인민사원의 교주 짐 존스와 같이 923명이 집단 자살을 한 것은 1978년 11월 21일전 세계 언론을 경악하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일본 독극물 사건의 옴 진리교도 파멸 하였습니다.

국내에만 하더라도 1925년에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며 재림주 황제라고 칭하고 황제 즉위식까지 올렸던 차경석, 차전자가 70만 명의 자기 교인들의 영혼을 빼앗고 우상숭배 재산착취로 가정을 파탄시켰습니다. 1930년도에는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가 교인들을 천국에 보내준다고 해놓고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살게 했으며 마지막에는 자기 교인들을 타살 시켜 땅속에 수 십구 수 백구씩 파묻어 버렸습니다.

 

1960년도에 대전에서 휴거론을 주장했던 박용주는 교인들과 같이 천국에 가는 것으로 알고 하얀 한복을 갈아입고 교회에서 7일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올라가지 않자 에덴 수도원의 박 교주가 자살함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60년대 사이비 교단을 창설하여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용화교 교주 서백일 사건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수도원의 김백문 교주의 제자였던 전도관, 박태선 장로는 수십만 영혼을 60년대부터 빼앗아 사단 마귀의 역사를 지금까지도 행하고 있습니다. 대전에서 일어났던 1987년 오대양교도 마지막 파멸장소로 경기도용인 남사면을 택하여 교인 32명의 동반타살과 자살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땅에는 사이비 교주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살인과 강간, 우상숭배, 가정파탄, 재산 착취를 가져왔는지 모릅니다.

 

동방교, 전도관, JMS의 정명석 교주는 문선명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문선명 사이비 교주에게 재림주의 사기성을 배워 가지고 나가 사이비 교단을 창단 하였습니다.

통일교 출신 재림주만 하더라도 혜아릴 수 없이 너무 많아 재림주 사태가 날 정도입니다. 이 땅은 사이비 종교 교주의 천국이요, 재림주 천국입니다.

 

1960~2000년도까지 30년 동안 종교의 자유 국가인 한국에서 수많은 영혼을 빼앗고 살육하는 사이비 교주들이 우후죽순 같이 생겨났습니다.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불쌍한 영혼 수 십, 수 백만명이 사이비 교주의 노예가 되어 지옥으로 끌려 가는데 그 고통의 절박한 소리를 듣고 예수이름으로 구원해 주어야 합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미국,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중동 등 세계 각 나라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영혼을 구하는 사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한국 땅에서 사이비 종교가 제 세상을 만난 듯이 선량한 국민들의 영혼과 재산을 빼앗고 가정을 파탄 시켜도 기독교회는 사이비 종교에 대한 대책이 미미하고 자신의 교회를 부흥 시키는데만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이단 사이비교주 밑에는 이단 사이비 교주 양성소입니다.

 

사이비 재림주의 사기성을 배워 가지고 나가 사이비교단을 수도 없이 만들어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통일교 출신 재림주만 하더라도 혜아릴 수 없이 너무 많아 재림주 사태가 날 정도입니다. 이 땅은 사이비 종교 교주의 천국이요, 재림주 천국입니다.

 

 

제 2 절 문선명의 앞잡이 노룻을 하는 기독교 교인을 추방해야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종교 포섭 단체로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가 있습니다.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회장인 통일교 이재석 회장을 통해 사이비 기독교 목사, 장로, 기독교 교인들이 각종 물질적 혜택을 받으며 통일교 세력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일찍이 문선명 통일 교주는 기독교 목사, 교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1966년11월 7일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를 조직하여 이재석 (36가정, 통일교 최초 합동결혼식자)을 회장으로 세워 기독교를 가장한 포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만찬, 세미나, 호텔 경비, 해외 왕복 비행기 요금, 이스라엘 성지 순례 등 일체의 경비를 문선명 사이비 교주가 무료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기독교 목사 가운데 통일교 초교파 회원에게는 매월 생활비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통일교 협회 예산의 몇 배를 기독교인 포섭에 투자했다고 합니다. 초대의장에는 방부신 목사, 본부장에는 박창번 목사, 상임 이사에는 이재석씨,이사에는 박철수 목사, 총무에는 김융관 목사 등 5명이 초교파 운동 본부를 결성했습니다.

조직이 활성화되지 못하다가 1975년 12월 8일 서울 문화 회관에서 33명의 기독교 각 교파 인사들이 모여 초교파를 재 결성했습니다. 회장에 강흥수목사, 부회장에는 기독교 장로회 증경 총 회장을 포섭하는데 성공한 송흥국, 양풍원 목사, 총무에는 박철수 목사, 장영석, 유영근, 박무신, 박영주목사를 이사로 세우고 통일교 측에서는 이재석을 이사로 세웠습니다.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회원으로 한국 기독교 목사, 장로, 집사, 청년, 평신도를 가입시켰습니다. 모든 경제 지원은 통일교 측에서 담당하고 각 교단 별로 조직을 다시 결성했고, 각 직책 별로 기독교 목사 평신도를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조직으로는 성노회로 각 기독교 교단 성목회를 기독교 교단별로 조직하고 성장회로 기독교 각 교단별로 원리수련, 수양회, 해외여행, 호텔 세미나를 실시하여 세뇌교육을 시켰습니다.

성청회로 기독교 각 교단 청년회를 통일교 원리수련을 통해 포교 활동을 했고 성녀회로 기독교 교단별로 온갖 경제적인 지원을 통하여 포섭 활동을 했습니다.

초교파를 통하여 기독교 목사 가운데 통일교 원리수련을 받고 세뇌 교육된 장로교 목사를 문선명 통일교 협회에서 용산교회 목사(나인수)로 발령한 일도 있습니다. 여러 곳에서 기독교 목사가 통일교 목사로 재직한 일이 있습니다.

 

통일교 문선명 교주는 포교 활동을 목적으로 정치인, 경제인, 종교인, 대학교수, 예술인, 언론인,각계 각층의 유명 인사들을 온갖 세미나,만찬,해외여행, 선물 등으로 유혹하며 통일교 세력으로 끌어들여서 활용하고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만찬 세미나에 초청하는 것은 영혼을 죽음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테복음 16:26)에 판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고 말씀을 했듯이,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통일교 각종 행사장에 발을 끊으십시오. 그것만이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이 문선명 교주로부터 탈출하는 길이고 영혼의 죽음과 지옥 길을 피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1988년 5월 1일 제 34회 협회 창립 기념일에 전국의 통일교 목사들이 서울 본부 교회에서 문선명에게 경배와 예배를 드리고 목회자 총회를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문선명 통일 교주는 전국 통일교 목사들이 자기 고향에 가서 목회를 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전국 통일교 목사들에게 또 다시 불안과 공포심을 심어 주었습니다. 목사들도 아내와 자녀들이 있으며 생활기반이 있는 것인데 문선명은 목사들 목숨을 하루살이 파리 목숨처럼 여겨 고향에 가라는 소리를 했습니다. 그 소리는 지옥으로 가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통일교 목사들은 매일 불안과 공포 속에서 목회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무슨 재미로 목회를 하겠습니까?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미국 알래스카나 남미 바닷가에서 일생 동안 낚시질을 하며 고기를 잡았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고기를 잡으면서 '통일교 교인들을 어떻게 요리할까?', '어떻게 재산을 착취할까?' 그 연구만 하고 있습니다.

 

간간이 한국과 세계를 순회하면서 통일교 교인들에게 불안과 공포심을 유발하는 무자비하고 살인적인 인사이동을 시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교 목사들과 기업체 간부들을 손바닥 뒤집 듯 이동 시켜 생업을 빼앗고 가정 파탄을 일으킵니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곧 죽음인 것입니다.

1988년 6월 1일, 전국 통일교 목사들 총회를 본부교회에서 했습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통일교 모든 남편들은 고향으로 가라. 아내는 무조건 친정 고향으로 가라" 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1988년 6월 6일,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한남동 저택에서 통일 그룹 기 업체 과장급 이상과 서울 시내 1교구, 4교구, 목사 전체를 모아놓고 사표를 내라고 했습니다.

서울 목회자들은 서울도 중요하니 목회활동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대신교인 많은 교회는 다른 교회에 20명씩 나누어주라고 했습니다. 6월 1일 에는 목사 그만두고 고향에 가라고 명령했다가 6월 6일에는 서울 목사 하라고 6일만에 말을 바꾸어서 뒤집어 버린 것입니다. 콩 볶듯이 강제 인사 이동을 또 당했던 것입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통일제국의 제왕이며 공산주의에도 없는 잔인한 인사 정책으로 목을 붙였다 떼었다 온갖 횡포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제 3 절 통일교 행사장에 참석하는 전 현직 국회의원을 낙선 시켜야합니다.

 

문선명은 통일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정치인들을 각종 세미나, 만찬 장에 초청하여 원리 교육을 시키고 국회의원 선거 당락에 온갖 직악을 저질렸습니다. 180명의 여야 정치인들을 포섭하여 부하로 삼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선명 재림주 교주의 말씀집', '조국 광복' 이라는 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1990년 4월 자신이 메시아요, 재림주 참부모라고 선포 했습니다.

정치인 중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면서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하수인이 되어 끌려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200만 기독교 교인은 목숨을 걸고 사이비 정치인을 색출해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교주의 각종 행사장과 만찬장에 참석하는 정치인을 철저히 낙선시키는 범 기독교적인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각종 만찬행사 세미나에 참석하는 전 현직국회의원,도지사,시장,군수, 시 ·군 구 의원들을 그냥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1천2백만 기독교 목사, 교인들은 하나님의 대적인 문선명 통일교 교주를 돕는데 선봉장이 되는 사이비 정치인을 용납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문선명은 정권야욕이 있어서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정치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물질적 지원, 인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온갖 만찬행사에 정치인들을 초대하여 통일교 세력을 과시했습니다.

문선명은 2001년 7월 13일, 국회회관 대강당에서 현직 국회의원 27명과전직 국회의원, 시군구 의원, 통일교 교인 등 600명을 참석시켜 통일교 원리강론을 설파하고 통일교 선전장을 만들었습니다. 1200만 기독교인이 있고 또 국회의원 273명 중 112명이 기독교 장로, 집사인데 통일교의 국회강연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였습니다.

 

저는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 이만신 회장님과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박준철의 이름으로 모든 일간지와 방송, 기독교 언론을 총 동원하여 통일교 집회에 참석하여 축사와 격려사를 하는 국회의원, 정치 지도자들은 1200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과 합심하여 낙선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2001년 10월 29일부터 11월 8일까지 전국 8대 도시에서 문선명 교주는'천주 평화 통일국' 이라는 이름으로 문선명 제국을 세우자는 정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행사를 하였는데 7월달 행사 때 보다도 정치 지도자들이 극소수로 참석하였습니다. 그것은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의 표를 의식하여 정치 지도자들이 문선명 교주의 집회에 참석하지 않은 결과로 믿습니다.

2001년 11월 8일, 신라호텔 문선명 집회에 현직 국회의원 몇 명과 전직국회의원 극소수가 참석하여 문선명 강연장이 아닌 별실에서 강연을 듣고 몰래 빠져나가는 정치 지도자들의 실상을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정치지도자들이 언론에 보도되는 것이 두려워 얼굴을 강연장에 내 놓지 않았던 것입니다.

 

앞으로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박준철 소장은 한기층과 1200만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과 합심하여 문선명 교주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정치지도자들을 반드시 심판을 받게하여 낙선시킬 생각입니다.

저는 2001년 10월 29일부터 11월 8일까지 문선명 집회에 참석하여 격려사, 축사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낙선시키자고 기독교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 하였습니 다.

정치인들은 통일교 집회장에 참석한 노인들이 자신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노인들은 통일교 교인이 아니며 문선명 교주의 이용물입니다. 노인들은 행사에 참석하면 식사를 제공하고 선물을 주기 때문에 행사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전국의 노인들은 투표장에서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정치인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를 볼때 사이비 정치인들은 착각하지 마십시오.

문선명 통일교 교주는 정치인들이 만찬이나 집회에 한번 참석하면 각종 통일교 PR선전 책에 인쇄를 하여 전도용으로 활용하고 자랑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김대중 대통령이 순수한 마음으로 80세 생일에 축전을 보내준 것도 책에 인쇄하여 전국 방방곡곡 시 ·군 ·구 ·면 남북 통일운동국민연합 대회와 훈독회 행사에서 수만 명에게 배포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마치 통일교 교인이 된 것처럼 문선명 사이비 교주와 통일교 목사들, 교인들이 자랑하고 있습니다. 현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통일교회를 지원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으며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통일교 교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정치인들에게 10원을 투자했으면 1000원을 뽑는 식입니다. 2000년 1월부터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각종 행사장에 참석한 순수한 정치인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그 정치인들을 자신의 노예로 착각합니다. 계속해서 정치인들을 참석시켜 원리교육과 훈독회를 하여 세뇌교육을 시키고 통일교 교인으로 만드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 집회에 각종 만찬이나 세미나 행사장에 참석하는 한국 정치인들을 1천2백만 기독교 교인은 백 번이라도 그런 정치인을 낙선시키는 운동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1987년 8월에 전직 국회의원 39명을 강원도 설악산 오색 약수 옆 호텔에 모아놓고 문선명 통일교 재림주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원리 교육을 시켰습니다.

1988년에는 국회의원 선거를 맞이하여 대대적인 경제적 지원, 맥콜 200박스 씩 지원, 통일교 교인과 승공 연합 조직을 총 동원하여 전국 국회의원후보를 지원했습니다. 통일교는 당선 가능성 있는 국회의원 후보들에게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었습니다. 또 전국 통일교회에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것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도 정치인 포섭은 계속 되었고 2000년 4월 13일 국회의원 선거에도 후보들이 통일교 통일당 입당원서를 내고 인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입당원서를 내지 않은 사람이라도 통일교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사람은 통일교 측에서 인적 지원을 전폭적으로 해 주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표를 얻고자 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다시는 이 땅의 선량한 국민들을 대변하는 정치인으로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은 국민의 세금으로 국정에 임하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은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꼭두각시 들러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의 지지 세력 내지 추종세력으로서 통일교 각종 행사에 이용당하는 사이비 정치인들을 앞으로 철저하게 공개하여 1천2백만 기독교 교인의 이름으로 뿌리를 뽑고 낙선시컥야 합니다.

 

 

제 4 절 기독교회에 부탁의 말씀


지금 이 땅에는 이단 사이비집단이 150파에 약 300만 영혼이 이단 사이비집단에 빠져 지옥길을 가고 있습니다. 누구의 죄입니까?그들은 우리 부모형제입니다. 지옥 길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해주어야 할 책임과 사명이 1200만 기독교 성도들에게 있습니다.

사이비 교주의 미혹에 빠져 영혼과 몸을 빼앗기고 재산을 빼앗겨 처절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에 빠진 교인들이 회개하고 기독교로 개종하고자 하여도 기독교 교회로 가기가 힘듭니다. 그들을 교육하고 안정시켜 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현재 전국 시군구 통일교회에서는 통일교 교인들이 참 가정운동 실천 본부 미혼남녀 결혼 상담사 라는 이름으로 전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들은 미혼남녀들을 미혹하여 합동결혼식을 시컥 통일원리로 세뇌교육을 시키고 문선명 교주가 참부모 재림주라고 믿게 만들어 버립니다. 전국교회는 참 가정운동실천 본부와 같은 음성적인 통일교 활동에 미혹되어 불행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막아 주어야 합니다.

 

 

기독교회가 좀 더 사이비 종교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세웠더라면 한국은 사이비 종교 천국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이비 교주는 이 땅에서 판을 치고 수많은 영혼을 살인하고 노예로 삼아 지옥으로 끌고 가는 현실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사이비 종교궤멸을 위하여 기독교교회 1년 예산의 100분의 1이라도 쓰지 않겠습니까?기독교회는 사이비 종교 퇴치를 위해서 이제 일어나야 합니다. 1천 2백만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이 연합하여 하나님의 원수인 사이비 교주와 종교를 박멸해야겠습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 모두 어기는 사이비 교주와 종교를 자기 교단 일이 아니라고 방치하고 있지 않으십니까?기독교회는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예수를 모시며 성경을 바르게 가르쳐야 될 사명과 의무가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는 한국과 일본에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 3만명이 집중 배치되었습니다. 그들은 시군구 통일교회에 배치되어 통일교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조국 광복에 목숨을 바치고 있습니다.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뿌리뽑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모, 형제,이웃이 통일교회의 미혹에 빠져 문선명 사이비 교주의 통일원리에 세뇌되고 교육된다면 생명을 구할 길이 없습니다.

 

 

 

기독교 성직자와 성도들은 자기 교단을 부흥시키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급하게 해결해야 될 문제는 선량한 국민들의 영혼을 사이비 교주로부터 빼앗기지 않게 지켜 주셔야겠습니다.

기독교회 성직자와 교인들은 수많은 거룩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비 종교를 파멸시키는 데는 투자를 적게 하고 있습니다. 사이비 종교를 박멸하는 데 근 힘이 될 언론을 많이 이용해주십시오.

앞으로 기독교회에서는 정치인과 지역 유지 시군구 의원들이 통일교 행사에 참석하여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라고 증거하는 행위를 용납하면 안됩니다.

 

범 기독교적인 차원에서 문선명 통일교회를 극찬하는 정치인은 철저하게 가려내어 강력하게 낙선운동을 실시해야 합니다. 그들은 사이비 정치인이요, 하나님의 역적이요, 거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을 미혹하는 행위를 하여 통일교회 발전을 위한 공로자가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1천 2백만 기독교 교인은 사법부, 언론, 기독교가 연합하여 문선명 통일교 사이비 교주에게 절대로 위장된 거짓 행사 장소를 대여해 주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대대적인 사이비 교주와 교회 척결 운동에 앞장서 주십시오.

 

문선명 집단의 산 증인인 박준철을 기독교 교회와 신학교, 기도원에 초청하여 간증집회를 1번씩은 꼭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저를 간증에 초청해주시면 기독교 목사님과 성도들이 이단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통일교 집단을 척결하여 희생자를 줄이고 전도하는데 크나큰 도움이 될 줄 믿습니다.

 

 

 

한국교회 1200만의 목사님과 성도들이 섬기는 교회와 가정과 직장, 사업장에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저자 박준철 목사 드림

 

 

  <<통일교 집단과 외로운 싸움을 하는박준철 목사를 돕자>>

 

※ 박준철 목사가 기독교 방송 ·언론을 통하여 문선명 집단의 정쳬를 900회 폭로하여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작년대비 10분의 1로 줄였다

 

 

1) 문선명 집단의 합동결혼식은 거액재산을 착취하는 의식이다.

 

문선명 통일교 대책연구소 소장이며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저자인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 신앙과 과천교회 현직목사직에서 2001년 1월 9일 기독교회관에서 탈퇴기자회견을 하였다.

박목사는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통하여 문선명의 정체, 비리, 피가름 의식, 합동결혼식 후통일교 교인 한 가정당 7천만원~l억씩을 착취하는 내용을 통일교 공문을통하여 낱낱이 폭로하였다

2) 통일교 재산 착취를 재판부에서 내려보낸 문선명 교주의 명령공문.인정한 내용이며 통일교 교인들에게 (1998년 IMF때 통일그룰이 부도나 국가로 넘어감으로 거액재산착취가 시작됨)


▶ 1,000만원의 결혼 비용 부담

 

▶ 통일교 교인 조상구원금 I~120대 조상까지 2천만원~3천만원1통일교 합동결혼식 후 죄를 용서해 주는 천국행 탕감비 1300만원(한가정당)

 

▶ 총생축헌금 2100만원(문선명은 합동결혼식한 교인들에게 자신은 구세주, 재림주 참부모이며 통일교 교인들은 참 아들 · 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재산 소유권 이전하라는 명령공문)

 

▶ 문선명 비행기 헌금 1백만원~l천만원

 

▶ 구국 헌금 성인가족 5인 X160만원 = 800만원

 

▶ 천성왕림궁전 - 320만원 (가정당)

 

▶ 십의 삼조 헌금

 

▶ 문선명 나라건국기금 매월 17만원 (가정기준)

 

▶ 8대 명절 헌금▶ 그 외 각종 헌금이 혜아릴 수 없이 많음

 

▶ 청평 천성왕림궁전 14층 병원짓는 헌금 가정당 160만원

 

3) 문선명은 사이비 교주요 적그리스도라고 입으로 외치자.

 

저는 처음에 통일교에 입문하여 원리강론을 들었을 때 세뇌되고 마취되어 문선명 교주를 참부모 재림주로 믿고 충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30년동안 통일교의 실체를 직접보고 려으면서 문선명 교주는 재림주 참부모가 아니며 적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은 1997년부터 집중적으로 연구한 결과 그 거짓된 사단의 실체들을 샅샅이 파헤치게 된 것입니다.

 

4)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문선명이 김백문 교리를 도용한 것이다

 

문선명은 자칭 재림주 참부모로 자신이 가져왔다는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가 새진리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쓴 성약말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문선명의 원리강론이 김백문 기독교 근본원리와 성서신학을 1946년에 도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5) 문선명 교주는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키는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은 자신이 재림주요 참부모라며 성삼위 하나님을 모독하고 기독교로 가장하여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재림주라는 문선명은 첫 번째 부인 최선길과 1945년 4월 28일에 결혼하여 문성진 아들을 낳고도 그들을 전도하지 못하고 이혼하였으며 많은 처녀들을 피가름 음란의식으로 사생아를 낳게하고 개인과 가정을 파탄시킨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부모, 재림주가 될 수 없습니다.

 

6) 문선명 교주는 자칭 재림주 참부모라면서 자기 자녀들도 구원하지 못하는 사이비 교주이다.

 

문선명은 1960년 4월 11일 40세의 나이에 한학자(17세) 여학생과 어린양 혼인잔치를 또 하였고 14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자녀들은 간음, 이혼,자살, 동거, 마약, 감옥생활 둥 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문선명 교주는 자신의 자녀들도 신앙교육을 책임지지 못하고 구원하지 못한 문선명 교주는 재림주가 아니며 적그리스도입니다.

 

7) 통일교 합동결혼식은 천국가는 의식이 아니라 문선명의 자금줄이다.

 

합동결혼식을 저지하자.문선명은 통일교 교인들에게 총 동원령을 내려 매일 오전10시부터 오후5시까지 골목을 누비며 미흔남녀 전도활동을 하여 약혼을 시키고 1년에 한차례 하는 천국 보내준다는 구원의식인 합동결혼식을 위해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통일교는 합동결혼식한 자들에게 문선명의 명령으로 가정당 7천만원~l억원의 헌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또한 참가정'실천 운동본부라는 미명하에 미혼남녀에게 합동결혼식을 시켜 개인과 가정을 파괴하고, 거액 재산을 착취하여 지옥 같은 삶을 살게 하고 있습니다.

 

8) 문선명 교주의 혈통복귀 3일 피가름의식은 구원이 없다

 

문선명은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통하여 성주식과 3일 혈통복귀의식을 치르면 완전구원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저도 1975년 2월 8일에 합동결혼식을 하여 3일 혈통복귀의식을 치렀고 그때는 세뇌되어 구원받은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 합동결혼식한 가정은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에 합동결혼식을 할 사람까지도 구원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통일교회 합동결혼식과 3일 섹스의식을 통해서는 구원이 없었습니다. 2001년 5월27일, 밀링고 대주교가 성마리아와 결혼하고 8월에 가정파탄된 것을 보면 문선명의 합동결혼식은 거짓된 허상일 뿐입니다.

 

9) 문선명 교주의 각종 만찬 세미나장에 참석하는 정치, 경제, 종교 학자 들을 막자.

 

문선명 사이비 교주는 정치와 경제, 문화, 언론, 종교를 장악하여 문선명 제국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1200만 기독교 교인들은 성경진리로 사이비인 통일교회와 싸워 승리하자.

 

10) 박준철 목사의 폭로로 통일교 합동결혼식이 작년과 대비하여 10분의 1로 줄었다.

 

박준철 목사는 기독교 신문, 찬송을 통하여 문선명 집단의 정체를 900회 폭로하여 통일교 합동결혼식 2001년 1월 27일에는 통일교 신문인 세계일보에 3만 5천쌍 이라고 보도했으나 2002년 2월 10일에는 3천 5백쌍 이라고 보도하였다.

박목사가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통일교 실체를 폭로함으로 합동결혼식이 작년과 대비하여 10분의 1로 줄었다고 국민일보와 기독교계신문에 보도되었다.

문선명은 합동결혼식을 한 교인들에게 종족적인 메시아라는 임명장을 주고 160가정을 전도하라는 총동원 전도명령을 내려놓고 전국 시군구 통일교(일명 가정교회)에서 합동결혼식을 한 통일교 교인을 오전 10시~오후 5시까지 매일 전도활동에 동원하고 있다.

통일교 교인들은 매일 집집마다 방문하며 미혼남녀 합동결혼식을 시키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있는데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전국 시군구 기독교 연합차원에서 통일교 합동결혼식을 하면 가정당 7천만원~l억씩을 착취하여 천국행 면죄부를 파는 집단이라는 것을 폭로하여 제2의 박준철목사와 같은 희생자를 막아야 할 것이다. 2003년 5월에 있을 합동결혼식을 저지하자.

 

11) 박목사는 문선명 집단으로부터 민사소송에 승소하였다. 형사소송은 매달 진행 중이다. 기도해주자.

 

박준철 목사는 2002년 2월 1일에 문선명 집단과의 법정싸움에서 민사재판이 승소하였다. 문선명 집단에서 민사재판과 같이 형사재판에서도『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을 명예훼손지로 걸어 형사재판이 진행중이다.

2002년 10월 4일 1차 형사재판을 하였으며 11월 1일 2차 형사재판, 12월 6일 3차 형사재판이 열릴 예정이다. 앞으로 매달 1번씩 약 2년 동안 형사재판을 받아야 한다.

일본에는 인구의 1%밖에 안되는 기독교 교인이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되고 단결하여 문선명 통일교집단에 대해서 강력하게 대처하여 궤멸해 가고있다. 일본 통일교 피해자들이 기독교 변호사들의 무조건적인 무료변론으로 통일교와 재판을 하여 모두 승소하였다.

통일교 합동결혼식이 일본 재판정에서 불법이며 문선명을 믿어도 구원받지 못하고 천국갈 수 없다고 도쿄지방법원에서 2002년 8월 21일 판결하였으며 통일교 피해자 3명에게 9200만원을 청춘보상금으로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한국에 박준철목사와 같은 피해자가 통일교와 재판할 때 1200만 기독교 교인이 예수님 이름으로 단결하고 기도하여 문선명 사이비집단과 싸워 승리해야 할 것이다.

이 재판은 박준철 목사와 문선명과의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이비 교주와의 싸움이며 기독교와 사이비집단과의 싸움이기 때문에 1200만의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이 이단 사이비 집단을 궤멸해야 할 것이다.

박준철 목사는 문선명 집단과 지금 재판중 인데도 변호사비를 지불하지 못하였으며 활동비나 경제적인 어려움에 홀로 감당해야 되는 외로운 싸움을 하는 박목사에게 기도와 간증예배 초청, 후원헌금이 절실히 지금 필요한 입장이다.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교인들이 박준철 목사가 문선명 집단과 싸워 승리하고 통일교가 궤멸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12) 박준철 목사를 한국 교회 목사님과 성도들이 간증예배에 초청하여 성도들이 전도하게 하자.

 

후원헌금을 보내주자.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김기수 목사와 총무 박영률 목사가 박목사를 위해 민 · 형사재판에 탄원서를 제출해주시고 도와주셨다. 한국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모두 기도해주시고 간증예배에 초청해주신 목사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박목사를 위해 한국교회 목사님들이 지속적으로 기도해 주시고 간증예배에 초청해 주셔야 성도들이 문선명 집단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전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문집단과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박목사를 돕는 길은 기도와 간증예배 초청하는 일과 후원헌금을 아래구좌로 지원해주셔야 형사재판을 하는 변호사 비용과 활동비 등을 할 수 있습니다.

 

13) 김백문과 문선명, JMS(정명석)은 똑같은 교리이며 사이비 교주밑에 사이비 교주 양성소이다.

 

 통일교 원리강론 교리는 김백문 사이비 교주의 기독교 근본원리를 제자였던 문선명이 도용한 것이며, 정명석은 통일교 교인 이였다가 1980년에 탈퇴하여 통일교 원리 강론을 도용하여 30개론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빼앗고 지옥으로 끌고가고 있다. 사이비 교주 밑에는 사이비 교주 생산공장이다.

한국 기독교는 이단사이비집단에 빠진 약 300만의 영혼을 예수 이름으로 구원해야 할 것이다.

문선명 교주는 1945년 8월 15일 김백문 이스라엘 수도원 사이비집단에 빠졌다. 김백문 교리인 기독교 근본원리를 도용하여 1946년부터 통일교 원리강론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포교하여 영적살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정명석도 1980년까지 문선명을 받들다가 탈퇴하여 통일교 원리강론을 도용하여 30개론을 만들어 수많은 청년 대학생을 유혹하여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다.

정명석과 같은 통일교 교인이 통일교를 떠나 사이비 적그리스도 노릇을 하며 사기를 치며 영혼을 빼앗는 사이비 교주만도 20여명이 넘는다. 사이비 교주 밑에는 사이비 교주 양성소이다.

 

14) 문선명 교주 집단에 축사, 격려사, 만찬에 참석하는 정치지도자들은 여 ·야를 막론하고 1200만 기독교 교인이 낙선운동을 하자.

 

15) 문선명 통일교 집단에서 기독교 목사들을 포섭하는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가입된 기독교 목사, 장로를 회개시켜 통일교와의 관계를 끊게 하자.

 

16) 박준철 목사가 1200만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것은 문선명 집단이 이단 사이비집단이라는 것을 매일 입으로 외치자.

 

문선명 사이비 교주를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이 이단시하고 적그리스도라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문선명 교주는 적그리스도요, 이단 사이비 교주라고 입으로 외쳐야 궤멸될 것이다.

박준철 목사는 통일교에 들어갈 때까지 단 한번도 문선명 집단이 이단이라는 소리를 못 들어보고 유혹당하여 통일교회에 입교했고 사악한 전단지 한장 때문에 30년의 지옥생활을 하였으며 청춘을 빼앗기고 심장병과 온갖 병을 얻고 죽음의 자리에서 문선명 집단을 탈퇴하여 궤멸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구주는 예수님이며, 진리는 성경밖에 없다는 것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땅끝까지 증거해야 할 것이다.

 

17) 박준철 목사가 목숨을 걸고 쓴「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구입하여 읽고 문집단을 궤멸하자.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책을 1200만의 한국 기독교 목사들과 성도들을 대표하여 한기총 대표회장 김기수 목사님과 각 교단 총회장 교계지도자 IS명이 범교단적으로 통일교를 대체하기 위하여 책을 추천하였으니 목회자들과 성도들은 문선명 집단 궤멸필독서로 구입하여 읽고 문선명집단 궤멸을 위해 외치자.

 

 

이 책을 발행하여 문선명 집단궤멸을 위해 사용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이 책을 보시는 모든 목사님과 성도들 가정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와 사랑이 영원토록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http://cafe.naver.com/jubo/2085  , 통일교 문선명 -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 큰샘출판사

http://cafe.naver.com/jubo/1739  , 통일교 문선명  -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박준철 저,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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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문선명 - 재림 메시아의 정체

퍼온글 출처 : http://cafe.naver.com/jubo/2085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2인,  239 p , 1996.3 ,  큰샘출판사

 

 

이 책은 한국에서 발생한 가장 악랄한 사이비종교, 통일교(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문선명교주의 복귀(復歸)라는 미명으로 혼음, 섹스, 혈대교환(血代交換) 실천(처녀잉태, 유부녀)과 그 실제 경험했던 실화를 적나라하게 밝혀 놓은 책이다.

 

그 비극의 섹스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통해서 구원(복귀) 받는다는  사이비종교 통일교집단에 빠져 인생을 망치고 가정파괴를 당한 사실과, 어린양잔치라고 처녀들을 미혹 잉태시켜 놓고 책임을 회피당한 비극의 여인들.

 

유부녀와 결혼(어린양 혼인잔치) 소동을 일으켜 5년 실형을 받고 흥남감옥 노무자였던 문교주의 죄수번호 596.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환(血代交換)의식과 통일교 복귀(復歸)라는 구원방법, 문교주 체포와 혼음(섹스)관계 조사와 거짓말 증언들.

 

문교주에게 몸도 맘도 재산도 다 빼앗긴후 (유부녀) 여인들의 비참한 말로.

나의 부끄러운 체험들 (섹스, 혈대교환 실천 내용).

황금에 눈이먼 문교주의 노동력 착취와 문씨족벌 체제운영.

문교주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별짓을 다한다.

김백문의 원리를 도용, 문교주의 것으로 만든 사이비, 이단교리.

통일교 창설 전후 최초로 문교주와 13년간 함께 생활해 왔던 저자의 산 글이다.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타종교인, 일반 시민들에게도 사이비 종교(틀일교)를 알기쉽게 체험한 사실 그대로 밝혀 놓은 책이다.

 

 

 

머 리 말

나는 1985년부터 이 원고를 쓰기 시작 하였다.

「야록. 통일교회사」라고 표제도 정했다. 일본식으로 말한다면 우선「도큐메토. 통일교회사」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목적은 문선형과13년간에 걸쳐 행동을 함께 해 온 기록을 분명하게 기록해서 그 허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이다.

재림메시아를 자칭하는 문선명이 아마도 종교인에게 있을 수 없는행위를 통일교회 창설의 전후 나는 가장 잘알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도대체 신변에 많은 여성을 두어 시중들게 하며 복귀원리를 명목으로 유부녀이건 학생이건 닥치는 대로 섹스를 해서 임신시킨 처녀를 일본으로 밀항 시켜서 아기를 낳게한 사실등 인간으로서 용서 받을 일이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문선명의 수제자였고 결과적으로 그녀들이 행복 해 주었으면 하고 원리의 가르침을 믿고 지켜 볼수 밖에 없었다. 문선명의 악행을 지나치게 알고난후 나는 1962년 그의 비열한 배신으로 인연을 끊고 탈회 하였다.

그리고 거의 20년후 이제서야 대간부가 된 당시의 동료나 부하의 요청에 따라 본부교회에 발길을 다시 옮겨 놓게 되었다. 교회측의 기대는 나를 귀중한 옛날의 산 증인으로서 이용 하는 것. 다만 일정한 범위안에서만 신자들 앞에서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옥중에서 남하할때의 문선명의 고생한 이야기등)

나에게도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통일교회의 그 이후와 고락을 함께했던 많은 신자들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것이 글속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비극 투성이었다.

원리를 믿고 문선명에게 따르면 행복하게 된다던 여자식구들은 내일 먹을 양식도 궁핍하고 어려워서 산 시체와 같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문선명이 때문에 가련한 고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원고에 착수한 동기는 거기에 있으며 그녀들 또한 하루라도 빨리 출판을 재촉하였고, 내가 아는 바로는 젊었을 시절의 그녀들은 모두 풍부한 재산가로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문선명이 달러 붙은 것이지만 정조를 빼앗기고, 재산을 잃고, 가족과 흩어지고, 아이들과도 소원해진 현재의 그녀들은 홀로 쓸쓸한 노후를 보내는 길 밖에없다.

그 원인과 과정 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사실을 공포할 의무와 책임을 통감하게 되었다. 유서 대신에 생명을 걸고 써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새삼 생명도 아깝지는 않지만 출판을 실현하기 전에 죽음을 당해서는 목적 수행이 어렵다. 그러한 이유로 원고를 조금씩 써 놓아 가면서 나는 때가 올 것을 기다리며 바라고 있었다.

때는 흐르고 착실한 크리스관의 장로로서 인망있는 김영삼 대통령이탄생했다. 김대통령의 용단으로 지금 한국은 눈부신 속도로 정계는 물론 각계각층의 정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도 때에 오랜 세월의 염원이 이루어져서 나는 정말로 기뻐하고 있다.

출판에 있어서는 6000매에 이르는 원고 정리 분류, 번역, 집필, 편집과 대단한 작업이 계속 되였는데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돌린다.

나는 이책의 인세를 문선명에게 희생이 되어 노후로 고생하는사람들의 구제에 힘이 되어 진다면 기부할 작정이다.

끝으로 진정한 행복은 멀어지고 원한을 풀지 못하고 돌아가신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희생자」들의 영령에게 깊은 기도를올리고 싶습니다.

1993.10      박정화

 

 

 

차  례

머리말   6

제1장 옥증에서 만난 사나이   15

재림 메시아로 믿고 17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 17

죄수번호 596 문용명(文龍明) 22

총반장으로 임명되고 24

해와는 왜 하반신을 강추었나 26

예수와 6인의 여인들 30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판(血代交換)을 34

평양을 소란케 한 이단자 39

최초의 체포 구속 39

유부녀와의 결흔소동으로 징역5년 41

한국전쟁과 대공습 42

김일성 은사 44

제2장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45

평양에서 서울로 47

불량배에게 다리를 절골 당했다 47

문용명(文龍明)과의 재회 48
가족을 이북에 버리고 문선생을 따랐다 49
죽을때까지 함께하자던 사나이의 약속 50
악전고투의 피난길 52
겨우 서울에 도착하다 54

서울에서 부산으로 56
제2의 피난행 56
경주에서의 작별 58
생활에 쫓긴 문선생이 찾아옴 60
평양에서 온 옥상현과의 재회 62


제3장 통일교회의 창립전후  67

여자신도 들의 열의  69
부산 수정동교회 69
최선길(문교주의 본처) 부인의 큰난동 70
경찰서에서 전기고문 74
하늘의 뜻에 관한 시험 75
노한 이순철의 남편 76

부산 영도(影島)의 집회 80
여자대학생 김영희의 비극 80
수사기관에 쫓기는 나날 83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 창립 85
유효원이 원리해설을 집필 85     

통일교회 창립의 날 89
이화여자대학사건 무렵 91
교수와 학생들의 대거 입교 91
김덕진(金德振)이라는 사나이 92
대구에서 또 전기고문 93
푸로마이드의 제작판매 95
3대째의 비서역 송도욱 98
잠시 숨을 돌리며 99
간부 체포 사건의 진상 100
문선명의 체포 犯0
조사의 촛점은 혼음관계 軸3
간부 5인을 기소 If15
수사의 손길에서 도피 107


제4장 희생당한 여인들   109

대공로자 옥상현의 말로 111

머리카락으로 짠 양말 112
주인 우하섭 장로의 탄식 113
문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재산도 1또
퇴원해도 갈곳이 없다 117

박봉식과 오명춘 121

부부가 문선명에게 헌신 121
남편 송도욱의 불륜 122

탁월한 인격자 박봉식 123
큰돈을 바친 오명춘 124
식모살이라도 해서 살아야지 126

김종화(金鐘和)의 눈물과 분노 128

문용명(文龍明)을 죽이고 싶다 128

6마리아의 비극 130

유부녀 여섯을 빼았다 130
신정순, 이순철, 오명춘, 김안실, 유신희, 임영신 131
6마리아 아니라 60마리아 137


연인을 빼앗기고 살해되고 140

김원덕(金元德)이란 사나이 140
신비적인 낭만 141
아름다운 부인과 진수성찬 143
이상한 예지능력 144
제자의 연인을 빼앗은 문선명(文鮮明) 146

제5장 재림메시아의 정체    149

원리와 실천의 모순 151
나의 수기는 진실의 기록 151
아무것도 모르는 신자들 152
문선명이 무슨 메시아 154
정득은(T得恩)과의 이상한 관계 157
체포도 당연한 섹스포교 159

색과 욕과 돈과 162
남편의 돈을 훔쳐 오라 162
왜 죄없는 아이들이 죽는가 164
복귀(泌購)라고 하는 미명으로 섹스 165
않은 가정이 파괴 되다 167
여자의 원한은 여름에도 서리를 169
처녀에게 낳게한 아이들 170

배신한자는 누구냐 173
문선명의 소개장 173
악착같은 노동력착취 174
문의 아들 흥진과 효진 176
삭제된 창시자의 이름 178
사건이 생겼다 바로 피하라 180
배신자는 문선명이다 182

제6장 진짜 사탄은 문선명이다     185

산증인의 이용가치 187
재혼서 신천지로 187
병으로 쓰러지다 189
오래간만에 만난 간부 189
통일교회 창림의 산증인 191
문선명의 거린말과 일본의 신자 193
원리는 김백문(金百文)의것 도용 195
이복형제 결혼 의혹 197
원리대로 실천한 김덕진(金德振) 198

36가정의 역할     200

속출한 재림메시아들의 대책 200
희생된 공로자 204
문선명보다 뛰어난 인격자-유효원 204
재정을 이룩한 실업가-유효민 206
화제의 다보탑을 수출한 일신석재사장-유효영
문선명의 부정과 범죄 209
김영희의 비참 211
또 한사람의 어머니 214
나의 부끄러운 체험 215
붉은용(龍)이 세상을 미혹 216


제7장 우리들이 체험한 사실    219

유효민-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221
유신희-6마리아의 한사람 이었다 227
김덕진-섹스릴레이 실천자 232

참고사항  *는 가명표시 입니다.
 

 

제 1장 옥중에서 만난 사나이         17


 

재림 메시아로 믿고


나는 북한의 내무성에 소속된 제 2여단 제 1대대 제 3중대장으로서 1947년 5월부터 황해도 해주에서 철도보안대의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해 12월 1일 같은 여단의 제 2대대장으로 승진발령을 받아 황해도 사리원의 큰 기지로 옮겼다.

일본의 조선통치시대에 만주 신경(현재 중국)의 공업전문학교 토목과를 졸업한 나는 만주국 관사(길림성)를 거쳐 일본군의 공병대 중위로서 중대장으로 근무한 경험도 있고 북한에서는 말하자면 엘리트로서 장래가 촉망되어 있었다.

그런데 착임해서 얼마 않되는 5월 7일 엉뚱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제 2대대의 제 3중대장으로서 황해도 신막에 근무하고 있던 허정이란 사람이 엉뚱하게도 군의 차량으로 상인들의 물자를 수송해 주고 돈을 받기도 하고 여성들의 모발등 북의 상품을 남쪽 한국측에 파는 암매상에 협력하고 있던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체포된 허정은 2월 2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또 대대장인 나는 부하의 부정 행위에 대한 감독 불충분이란 것으로 책임을 물어 직무태만죄로 징역 3년형에 선고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평양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흥남 특별 노무자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2월 2일 35세 때의 일이다.


흥남 특별 노무자 수용소


이송된 우리들 약 100명의 죄수들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2인1조로 팔목을 툴여서 흡사 소나 돼지처럼 화물열차에 쓸어 넣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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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4시간 멈쳤다가는 달리고 달렸다가는 멈추는 화물차속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한잠도 못잔 채 날이 밝을 무렵인 새벽 4시경에 학교운동장 같은 광장에 도착하였다. 끄집어 내려서 주변을 보니까 무장한 간수나 경찰관들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어서 개미새끼도 빠저나가지 못할 정도로 엄중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이 흥남의 특별노무자수용소, 속칭 흥남감옥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였다.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는 강제노동의 지옥인 것이다. 우리들은 먼저 들어와 있던 죄수들과 함께 좁은 방에 32명씩 동거하도록 인원수가 할당되어 집어 넣어졌다. 7시가 되니까 조반이 나왔다.

콩, 좁쌀, 보리쌀, 옥수수 등을 뭉친 조그만 주먹밥인데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것 처럼 엉성했다. 이가 엉망으로 빠진 그릇에 국이 담겨져 나왔는데 두 서너 조각의 미역이 둥둥 뜬 소금기가 좀 있는 그런 국이었다. 어제부터 한방울의 물도 입에 대지 못한 채로 흔들림 속에 담겨온 몸 동아리는 지치고 지쳐서 속은 공복인데도 식욕이 나지 않는다.


장차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며 멍청하니 있자니까 옆의 사내가 기운이없구먼 못먹겠으면 내나 먹지 하며 내 밥에 손을 대더니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린다. 깜짝 쉴 사이도 없을  만큼 감옥의 엄격함을 실감케 하는 기분이 들었다.


8시 "전원노동이다"하는 간수의 큰소리에 떠밀려서 운동장으로 나오니까 1,500명 정도의 죄수들이 집합되어서 정문을 향해서 정령하고 정좌하게 하였다. 소좌의 계급장을 단 소장이 이송되어 온 신입 죄수들에게 소대의 규칙등 수용소의 작업에 대한 설명과 주의사항을 들려주고는 전원 출발이 라는 것이다.


죄수들은 두사람씩 손을 묶고 4열로 나란히 정면에서 부터 나가기 시작하였다. 정면 좌우에는 간수가 줄지어 늘어싫고 완장을 단 "총반장"이 죄수들을 점검 인수하였다. 두사람씩 손을 묶게 하는 것은 역시 도망방지 때문인 것이다.

수용소에서 조선 질소 비료 주식회사(구 일본질소) 흥남 공장까지는 약 4킬로의 거리가 된다. 이날부터 비가 오나 눈이 쌓이거나 우리들은 매일 걸어서 감옥과 공장을 왕복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횐 암모니아비료 가루가 산처럼 괌인 곳에서 10인 1조가 되어 비료포대의 가마니에 하루, 1,300포대를퍼 넣어야 하는 책임량(노루마)을 할당받았다. 산더미 같은 비료앞에 저울이 놓여 있고 공장측의 검량원이 중량을 달기 위해서 앉아 있다.


작업의 순서는 이러하였다. 우선 한사람이 빈 가마니를 잡고 아구리를 벌리면 두사람이 삽으로 비료를 두번 정도 퍼 넣는다. 그래서 40킬로가 되면은 다른 한사람이 가마니를 저울대에서 내려놓고 남은 6인이 그것을 운반해다가 새끼로 음어서 포장을 한다. 10인 1조의 작업이므로 한 사람이라도 태만하거나 서투르거나 하면 조 전체의 책임량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원이 반장한테 된통 혼나게 되므로 10인은 서로서로 격려하기도 하고 감시 하기도 하는 것이다. 눈깜벅거릴 틈도 없을 정도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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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은 아침 8시에 시작되고 낮참 쉬는게 30분 저녘 5시에 끝나는데 매일 8시간반의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극심한 노동을 한일도없었고, 6개월간이나 평양에서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서 이 중노동을 참아 낸다고 하는 것은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감옥생활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여러가지 끔찍한 가혹행위를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버티어 내기 때문에 하루의 일을 마치면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별하기 조차 어려운 상태로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 의지로 똑똑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 저녁때가 되면 하루의 작업량을 검사하고 인수를 점검한 후에 아침이 왔을 때와 똑같이 두사람씩 손을 매고 4열로 늘어서서 4키로나 되는 수용소길을 걸어서 돌아온다.


그때는 제발로 걸은 것인지 어떤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문에서 재차 인수점검을 한후에 운동장에 정열해서 정리하고 나면 또 주의사항이 설명된다. 그리고 면회를 허락받은 사람들이 면회실로 간 후에야 각자 제방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불과 4톨평정도의 좁은 방에 32명이나 쓸어 넣어 하루종일 작업을 해서 땀 투성이가 된 몸뚱이를 씻지도 못하고 고단하다고 두러 누울수도 없는 상태로 그대로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감옥생활이란 것을 통감하게 하였다.


저녁밥은 조반과 같이 여러가지 잡곡이 섞인 주먹밥 한 덩어리와 소금기가 있는 국물 한그릇뿐, 식욕이라곤 전혀 없지만 서도 내일의 작업을 생각하면 먹어 두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같은 방의 동배들도 지쳐 있음인지 모두 험악한 얼굴들이다. 죄명 또한 가지가지였다. 취침은 밤 10시이지만 좁은 방에서 머리와 다리를 서로 어긋매겨 잔다. 서로의 다리가 옆 사람의 머리나배위에 걸쳐지는 일도 있었지만 32인이 억지로 옆으로 누울 수가 있었다. 변기는 방의 구석에 놓여 있었는데 아침이 되면 일제히 서로 쓰려고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대소동이 벌어진다.


이리하여 중노동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무사히 출소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기로 및장을 정한 나이지만 어느새 손과 발에는 군살이 박혀있었다. 나는 비료포대를 새끼줄로 끓어내는 요령만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해서 큰 곤욕을 치렀다. 다른 사람들이 두포대를 묶을 동안에 나는 한포대도 제대로 못 묶는 때도 있었다. 동료들의 싸늘한 눈길을 느끼며 책임량을 다하지 못해서 폐를 끼친 때가 제일 괴로웠다.


그리고 더욱 더 참을수 없는 것은 배가 고파 죽을지경인 것이다 감방의 다락에는 면회가 있었던 사람들이 차입받은 미수가루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훔쳐 먹으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한들 여기까지 와서 도둑질을 해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으로 자제하였다.

배가 고파서 잠을 이를 수가 없을 때 미수가루 봉지를 쳐다 본체로 밤을 새운 일도 여러번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일어나니까 어제 밤에 미수가루를 도적맞았다고 모두들 떠들석 하였다. 훔친자가 눈에 띄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자루 돌림으로 패댔다. 이러한 꼴은 징역생활이라고 하기 보다 아귀지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30인이 넘게 쳐 박혀진 방안에서는 몇일에 한번씩 그야말로 큰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것은 쳐 박혀진 인간최후의 순간이 것이다. 배만 앙상하게 남아서 숨도 제대로 못쉬는 상태로 쇠약한 사람이 한 주먹의 밥을 소중하게 움켜 편채로 속에 들어 있는 콩알을 집어서 넣으려는 순간 죽는 사람도 있었다. 옛말에 자식이 죽은 때나 부모가 돌아가신 때보다도 더 서럽고 매정한 것은 배가 고픈 때다 라는 말이 있다. 먹는다고 하는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나는 몸소 절실히 체험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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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되박의 미수가루는 양복한벌과 맞바꿀 정도로 귀중품이었다. 매월 집에서 면회를 와서 차입을 받는 사람은 그런대로 견디어 나가는데 면회나 차입이 전혀 없는 사람의 경우는 언제라도 죽음과 직면해 있는 상황이었다.


죄수번호 596. 문용명(文龍明)


나의 작업은 여전히 서틀러서 차마 볼수없던지 조장이 가마니의 아구리를 벌리는 일이나 삽으로 비료를 가마니에 퍼 놓는 일로 돌려 주었으나 어느 것이고 제대로 익숙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40키로의 비료가 든 가마니의 짐 꾸리기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내 옆에 10인의 조원 가운데서도 훨씬 건장해 보이는 30세가량의 사나이가 와서 "가르쳐 들이지요"하고 말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자기의 일거리를 가볍게 해치우면서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더욱 일에 익숙해져서 훌릉하게 해 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건강해서 힘은 있었으므로 몇일 동안 계속해서 가르쳐 주는 바람에 그럭저럭 한사람 몫의 작업 책임량을 해낼 수가있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나보다 반년정도 먼저 흥남감옥으로 후송되어 온 듯해서 소내의 사정이나 물물교환으로 살아가는 지혜등 여러가지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지옥에서 부처님 만나기란 바로 이런 것인가. 나는 괴롭고 쓰라린감옥의 중노동속에서 비로서 따뜻한 사람의 마음씨에 접하게 되었고 절망속에서 어렴풋이 희망이 보이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는 방이 달랐으므로 작업이 끝나고 만원이 된 방으로 돌아오면 공복의 쓰
라림과 잠을 푹 자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그래도 아침이 되어 비료공장의 일터로 나가면 그 사람과 같이 일을 할 수있다. 지옥과 같은 곳에서나마 서로간에 마음을 주고 받을 수가있게 되었으므로 한 시간이라도 빨리 일터로 나가는 것이 기다려지곤 했다.


아침 8시 운동장으로 나가면 나는 서둘러서 그 사람을 찾아서 그뒤에 앉는다. 점검이 끝나면 그사람과 2인 1조가 되어 비료공장까지 손을 묶고 걸을수가 있다. 지금까지는 비오는 날 같은 때는 그야말로 죄수생활의 비참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도보행진이었는데 어느새 나에게는 그 사람과 매일 아침 만나서 함께 일을 하는 것이 옥중에서 그나마 즐거운 일과였다.


이렇게 20일 정도 지난 어느날 초반 회색 옷에 갓을 쓴 백발노인이꿈속에 나타나 나의 이름을 부르며, "네가 매일 함께 도와주고 거둬주는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그 분은 무척 친절하고 좋은 분이므로 함께 지내고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노인은 "그분은 네가 어릴때부터 배워 온 성경에 장차 이세상에 오신다고 가르쳐 온 재림주(메시아)이시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깊은 잠에 떨어진 동료들이 있을 뿐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하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지워져서 돌아가신 후 삼일 후에 부활되어 40일간 이곳 저곳에서 재림하였다. 그리고 감람산(성경에 나오는 산)에서 여러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실 때 예수님은 "너희들은 어찌하여 하늘을 처다 보는가, 나는 이처럼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이 머지 않아또 재림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재림주라고 하는 꿈이 마음에 걸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도록 생각하고 있었으나 복잡한 심경으로 조반을 마쳤다. 나는 어느 때와 같이 운동장으로 나아가 그사람 뒤에 앉았다. 그리고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해서 무슨 일인가를 물어 보고자 하였다.
그런데 내가 말을 걸기 전에 그가 별안간 돌아보면서

"간밤에 꿈을 꾸었지요 꿈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말 하던가요"라고 묻는 것이다.

어떻게 그가 알고 있는 것민지 이상 하였지만 나는"재림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29세로 나이로는 7년이나 손아래 이었지만 반드시 "선생"이라고 존경해서 부르게 되었으며 그 사람도 "정화"라고 나의 이름을 불러서 점점 친근감을 느끼면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 사람이 죄수번호 596을 단 문용명 이었다.


총반장으로 임명되고

 

그로부터 15일정도 지난 어느날 아침 집회에서 "919번 소장실로 오도록"호출되었다.

919번은 나의 죄수번호이다. 무슨 일일까?나는 겁에 질린 채 가보니까 소장은 나를 쳐다보고 "어제 총반장이 만기로 출옥하였으므로 지금부터는 네가 전죄수의 총반장으로 복무하라."


이곳에는 1,500명의 죄수가 수용되어 있다. 10인에 1인, 조장 18을 파악하는 것이 반장, 총반장은 I5인의 반장을 소관하고 매일의 작업배치나 분담을 자치적으로 결정하는 등 전죄수의 대표로서 크나 큰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아니된다.


소장은 죄수전원의 경력 이나 기내기록을 본 후에 전문학교 출신으로서 군의 대대장을 한일이 있는 나를 골라 "후임은 너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역을 맡을것인가 말것인가를 망서렀으나 문선생의 권고도 있고 해서 맡기로 하였다.


총반장이 되니까 여러가지 것을 알게 되었다. 죄수들이 가장 바라는 작업은 취사이고, 다음은 수용소내의 잡역, 선반공장 선반공으로 이어지고 끝으로 비료공장 순이다. 선반공도 중노동이지만, 일하면서 철가공의 기술을 취득할 수 있다고 하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비료공
.장에서의 가마니 작업은 오직 힘이들 뿐이고 아무것도 이점이 없는 최저 최악의 중노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일 3식이란 작으나마 주먹밥 한덩어리와 소금국 한그릇만으로는 몸둥이가 견델 수가 없는 것이다. 조악한 식사때문에 영양실조자가 속출하고 과로와 허기로 한달이면 100명 정도가 죽어갔다.

단순하게 계산한다면 1년 남짓해서 전감한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흥남수용소에는 그 보충을 위해서 매월 100명 정도의 죄수가 각지의 형무소에서 후송되어 오고 있었다. 총반장이 되고 나면 사내에서는 자유가 꽤 통하므로 기회를 엿보아서는 문선생을 찾아가 잡담을 하기도 하고 되도록이면 편안한 작업으로 회부될 수 있도록 손을 쓰기도하였다. 어쨋거나 꿈속의 노인에게서 계시를 받아 내가 꿈에 본것을 먼저 알고 있던 이상스런 힘에 놀란 나에게는 문선생은 바로 재림주라고, 나는 믿게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반장인 주흥식이 묘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담당의 죄수가 병이 들었는데 내일이 어떨지 알수없을 정도의 중태인데 주반장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 죄수는 일본의 식민지시대에 큰 화물선의 선장으로서 전세계를 누비고 다딘는데, 전쟁이 끝 나고서는 고향인 여수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에 있는 친척을 방문했을때 공교롭게도 죄를 범해서 체포 투옥되게 되 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가 죽기 직전에 비단보에 그려진 지도와 무엇인가 영문으로 쓴 종이 쪽지를 주반장에게 건네 주었다. 얼마 안있어 그는 죽고 말았는데 영문을 읽을줄 모르는 주반장은 그후 영문을 아는 반공사상의 죄수중 김진수목사에게 번역을 해달래서 그것을 받았다. 그 종이쪽지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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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뒤편에 있는 묘지 가운데 이런이들의 무덤이 있다. 그 앞에서 세번째 어린이 무덤속에 시가 수억원의 보석이 들어있는 상자를 자기가 묻었다. 이제 나의 명은 다한것 같으니까 주반장에게 들이는 것이니 남쪽에 갈 기회가 있거든 꼭 찾아내시오"


주반장은 이와같은 이야기를 하고 나서 "총반장은 나보다 먼저 출소할 것이니까꼭 남쪽의 여수에 가서 그것을 찾아내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나에게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였으므로 나는 그대로 문선생에게 전했다.


나는 그후 남한에 살게 되었으나 여수는 가본일도 없고 또 이야기는 깨끗이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2년후의 부산시대, 문선생은 친구와 둘이서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여수로 가서 필연적으로 찾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묘지장소는 알아 냈으나 가장 중요한 아이의 묘는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문선생은 여수에 갔던 일조차 나에겐 말하지 않았다.


훨씬 뒤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을때 나는 진짜 재림주라면 보석상자 정도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선생의 정체에 대해서 새로운 의혹을 갖게하는 자료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재림메시아, 문선명의 정체·.·"그것만이 이 책의 주체이며, 나의 고백의 주안인 것이지만 이무렵 무지한 나는 그저 오로지 문용명을 존경하고 믿고 있었다.


해와는 왜 하반신을 감추었나


총반장의 완장을 단 나는 작업장으로 가는 죄수의 점검과 죄수들의 작업 배치를 정한 후에는 대수로운 일거리도 없이 자유롭게 지낼수가 있었다. 그래서 빈 가마니를 쌓아 놓은 창구로 문선생을 불러내서 그에게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문선생의 이야기는 유아세례를 받아서 젊었을때에는 교회 집사로도 일했고, 조금은 성경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 할수 있는 나에게도 이해는 커념 대단히 반발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예를들면 세례요한은 들녘 에서 가죽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어가면서 수도를 했고 "천국이 가까와오니까 회개하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자기의 책임 분담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을 잘리어 죽음을 당한것이다 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기독교에서는 세례요한은 아주 훌릉한 인물로 가르치고 있는 만큼 나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더욱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책임을 다 할수가 없었다. "


"예수님은 본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처지는 아니었다"등 등으로 말한다.


내가 더욱 더 충격 받을 이야기를 들은것은 잊어 지지도 않는 1950년 3월 29일 토요일의 일이 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와서 여느때처럼 두사람씩 손을 묶은 죄수들 1,500명을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 오직 땅만 보고 비료공장으로 서둘렀다. 도착한 후에 총반장인 나는 아마 10분정도 전원의·점검과 작업배치를 정했다.

그무렵 문선생에게는 빈 가마니에 짚을 넣어두는 일로 병자나 노인들이 할 수있는 손쉬운 작업을 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서 "총반장으로서 볼일이 있으니 잠간만 오세요"라고 불러내서 조용한 창고 속의 빈 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인 그 위에 올라가서 둘이서 마주보고 앉았다.

총반장에게는 작업장에서도 이러한 자유가 인정되어 있어서 간수나 죄수도 이의를 하는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몇 시간이라도 이야기 할수가 있었다.


사회질서 문란죄로 5년의 형을 받고 복역중인 문용명은 죄수번흐596, 부하 잘못으로 인한 책임을 물어 직무태만죄로 징역 3년인 나는 죄수번호 919, 두사람의 죄수는 서로 마주보고 596은 이야기를 하고 919는 열심히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해가며 중요한 대목은 메모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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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이야기는 성경의 "창세기"부분이었다.

창세기의 요지는 6000년전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사람으로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며 에덴의 동산에 살게 하였다. 그리고 걸맞는 반려를 만들기 위해서 아담이 자고 있을 때 아담의 갈빗대 한개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해와'이다.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만은 따 먹어서는 안된다고 명하였으나 뱀이 해와를 꼬였기 때문에 해와는 드디어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고 남편인아담에게도 권해서 먹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금단의 나무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발견된 때에는 부끄러운듯 무화과의 잎으로 하체를 가리우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해와를 만든 목적은 해와가 성숙하면 이세상에 죄없는 자손을 번식 시키려고 그랬던 것인데, 하나님을 배반한 두 사람은 얼마 안돼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죄를 범하고 더럽혀진 아담은 땀 흘러 일하지 않으면 살아 갈수 없게 되었고, 해와는 해산하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가인과 아벨의 형제가 태어났는데 얼마 안가서 형인 가인은 동생인 아벨을 죽이게 되어 이 세상에 처음으로 죄인이 된 것이다.

이상이 성경에 씌어져 있는 것이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온 해석인 것이다.

그런데 문선생은 "성경의 이러한 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세계의 크리스챤들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문선생의 해석은 이러하다. 해와를 꾀인 뱀이란 천사장 루시엘의 이름인데 루시엘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감언으로 미 성숙한 해와를 유혹해서 금단의 나무 열매를 따먹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루시엘은 해와와 섹스를 한것이다.

그리고 처녀성을 범행당한 해와는 하나님께 발각되기 전에 사탄의 피로 더럽혀진 몸 그대로 남편인 아담과도'성교를 했다.

지금까지는 금지 되었던 실과를 따 먹은것이 죄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들켰을 때 왜 해와는 무화과의 잎으로 하반신을 가리운 것일까?

사람은 몸에 상처가 나면 상처에 반창고 같은 것을 붙여서 아물게 하는데 그것과 같은 논리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이 금지시킨 성행위을 하고 깨끗했을 하반신에 상처가 생겨 그래서 무화과의 잎으로 그 부분을 가리운 것이다 해와는 그패 까지 나체로 있어도 부끄러움을 모르지 않았던가.

그것은 말하자면 하반신의 성기부분으로 성행위를 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부분에 죄가 있으니까 하반신을 가리운 것이다.


지금도 남자가 여자와 성행위를 하고자 노력하며 만족한 성행위가 되면 "어디어디의 처녀(부인)를 따 먹었다"고 표현 하는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랑 신부가 결흔식을 올리고 정정당당하게 첫날밤을 지내도 다음날 가족들 앞에 모양을 나타낼때 어던지 모르게 마음속에 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6천년 전에 천사장 루시엘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처녀인 해와와 성행위를 할 때에 "색큼"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미숙한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성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미숙한 과실을 따 먹으면 색큼한 맛이 나는 것도 미숙한 해와와 천사장 루시엘이 성행위를 함으로서 "색큼"함을 느낀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죄없는 인간을 세상에 번식시키려고 하였는데 천사장 루시엘 때문에 그 목적을 방해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가인이 그의 동생인 아벨을 죽임으로서 이 세상에 죄인의 번식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절대로 방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죄악이 가득해 있던 소돔과 고모라에는 불로 심판하고 노아때에는 홍수로 심판하였다. 그래도 죄 악으로 가득한 인간을 구제할 수는 없었으므로 유대 땅에 2천년전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예수를 탄생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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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탄생케 한 목적은 그 4천년전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간세계를 창조 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제2의 아담으로서 탄생시켜, 제1의 아담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했던 목적을 실현 시키고자 한 때문이다.


예수와 6인의 여인들


그리고 예수는 3십년간 요셉의 집에서 목수일을 하면서 켰고, 30세가 되어서 예수는 구세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예수는 12 제자를 골라 제2의 아담으로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케 하기 위해서 우선,

첫째로 자기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성행위를 해서 제1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겼던것을 되찾아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달성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와같은 하늘의 섭리를 알지 못해서 육신의 자식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아서 예수와성교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예수가 행한 기적은 가나안 잔치집에 가서 결혼 축하를 하기 위해서 어머니인 마리아와 함께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것이다.


그 집의 술이 없어졌으므로 어머니 마리아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예수와 의논하였다. 말하자면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수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에게 부탁한것이다.

그때 예수는 마리아에게 "여인이여, 당신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요"라고 말했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성행위 할 생각은 전혀 없이 이웃집의 잔치집에서 포도주를 만들것만을 원하였으므로 정말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으로 말 한것이다.

성모마리아가 예수와 성교를 한다고 하는 것은 제1의 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되돌려 빼앗아 온다고 하는 복귀의 원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마리아가 모자협조(모자간의 성교)를 하지 않았으므로 예수가 순혈을 이어 받을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후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 자매를 대단히 사랑하였고, 그녀들도 예수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막달라 마라아와 결혼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인가롯 유다의 연인으로서 곧 결혼할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인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 하였으므로 유다는 질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의 매제인 마르다 마리아와 유다를 결혼시키고, 자기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다는 예수에게 반역해서 예수를 로마의 병정에게 은화30냥에 몰래 팔아 넘기게 되었는데 실은 돈이 욕심이 나서 판것이 아니라 자기의 여인을 예수에게 빼앗긴것을 질투해서 판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데리고 각지를 돌고 있을때 일행은 수가촌이라는동네에 이르러 제자들과 먹을것을 찾고 있었다. 그사이 예수는 고단해서 우물가에 앉아서 쉬고 있을때 사마리아의 여인이 물을 뜨려고 왔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당신의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라고 말했다.


여인이 대답이 없음으로 예수는 "당신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어서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물을 한잔 청하고 채차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물을 내가 마시면 또 목이 마른다.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물은 당신속에서 생수와 같이 영원히 흐르게 된다. "(주=성경과는 역순이지 만 문선명의 이야기대로)

예수는 이 사마리아의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예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기때문에 실현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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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느때 세리와 바리새인의 사람들(성경에는 세리와 바리새인의사람이 제일 악인으로 되어 있는듯 하다) 이 간통한 여인을 예수앞에 데려왔다. 예수가 "이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말하면 모세의 계율에 간통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으므로 모세의 계율에 상반되는 것이되고, 또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면 예수가 언제고 "죄 있는 자가 있거든 일곱번씩 칠십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쳤던 말이 거짓이 된다.

참으로 거북살스런 문제로서 대답하기가 난감한 것이었는데 이때 예수는 아무 말도하지 않고 땅에 글자를 썼다. 사람들이 다가가서 보니까 거기에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죄없는 자가 있거든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쓰여 있었다.

모여있던 많은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 죄를 지고 있었으므로 하나 둘 다 사라지고 예수와 여인만이 남았다.

거기서 예수는 여인에게 말했다.

"나도 당신을 용서하는 것이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도록 하라" 이때에도 또 예수는 복귀섭리에 따라 이 여인과 성교를 해야만 했었는데도 실현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음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나병환자가 있는 시몬의 집에 갔을 때의 일, 모두들 식사를 하고 있을때 한 여인이 귀중한 향유가 든 항아리를 가지고 와서 감동의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었다. 여자는 머리털로 발의 눈물을 밖고나서 예수의 발위에 기름을 부었다.

 제자들은 "어째서 귀중한 기름을 그렇게 함부로 쓰는가 그것을 많은 돈을 받고 판다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쓸수 있을 테낀데"라고 그여인을 비난하였다.

예수는 "그 여인을 책망하는 것은 그만해라 그 여인은 나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해 주었으니까"라고 말했다.

예수는 이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때에도 또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으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질머지고 십자가에서 죽어 갔으므로서 그 피의 댓가로 죄인이 깨끗하게 되어 구원한다고 하는것처럼 모두 믿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창조의 이상을 옳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제2의 아담으로서 이세상에 예수를 탄생시킨 것은 제 1의 아담이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도로 찾아서 본래대로 돌려 놓기 위한 것이고 요컨대 복귀섭리를 실현하는 사명을 달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가 복귀섭리를 위해서 이세상에 탄생 한것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예수가 성모마리아와 최초의 성교를 한다고 하는 죄없는 피를 전하게 되기 위한 중요한 의식의 챤스를 예수에게 주지 않았다.

첫째로 필요한 "모자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서 예수는 이상에 태어났어도 복귀섭리를 다하지 못하였고 결흔조차 하지 못한 동안에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


예수는 재림을 약속한 최후의 기도때에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한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십시요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으나 이것은 죽는것을 두려워 해서가 아니라 제2의 아담으로서 이 세상에 와 빼앗긴 해와를 되돌려 받지 못한 채로 어머니들에게 복귀섭리의 실천(성교)도 못한채로 죽는것이 허전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즉음으로서 그 피의 대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 되였다고 하는 해석이 을다고 한다면 그러한 기도를 했을리가 없다.


예수는 육적으로는 실패하였으나, 영적으로는 승리해서 재림이라고 하는 숙제를 남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 재림주(메시아)는 어디로 와서 어떻게해서 인간을 구제하는 것인가? 구름을 타고 감람산을 통해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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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지 않다 동방에 있는 나라, 횐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고, 4계절이 분명한 나라, 동쪽에서 해가 뜨는 나라, 그것은 우리들의 대한민국이고, 이 나라에 재림하기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재림주는 제3의 아담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예수가 하지 못했던 복귀섭리를 이세상에서 실천해서 인간의 6천년간 죄악의 역사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고 사탄의 피로 더렵혀진 인간의 피를 성스러운 하나님의 피와 교환 함으로서 이 세상을 영원히 죄와는 관계가 없는 세
계로 하는것이 하나님의 참된 뜻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주의 사명으로서 잃어버린 해와의 순결을 되찾아 만인 앞에서 처녀와 "어린양찬치"를 행하고 참된부모 아담과 해와에 의해서 전세계의 인간의 피가 더럽히지 않은 피와 교환되게 되는 것이다.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환(血代交換)을

 

부모님이 같은 기독교 신자이신 집안에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교회 집사 까지한 경험이 있는 나는 문선생의 성경해석에는 귀를 의심하고 머리를 갸우뚱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반면 꿈속에서 "문선생이야 말로 재림의 메시아다"라고 하는 계시를 받은 나는 반신 반의 하면서도 차츰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선생님은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이며,어떻게 해서 이상의 천국을 완성시켜 나아가실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것은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달성하지 못했던 여인들과의 복귀다.

우선 천사장 루시엘의 성교로 인해서 빼앗겼던 것을 그것과 같은 방법으로 남편이 있는 부인 6인 즉 6인의 마리아를 빼앗음으로서 되돌려 놓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것은 복귀섭리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하지 않으면 안될 숙제이고, 목숨을 걸고라도 해내지 않으면 안될 중대한사명인 것이다.


나는 놀랍고도 반발을 느끼면서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남편이 있는 유부녀와 더구나 여섯 사람씩이나 유부녀와 성교를 한다고 하는것은 그 남편에게 죽임을 당할 염려가 많고, 설혹 남편들이 모른다고 하더라도 간통은 하나님이 가르침이신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이나라의 법률에서도 유부녀와 성교하면 간통죄가 됩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수 있습니까?

아니야 걱정할것 없네 머지않아 세상은 극도로 성이 문란해지네 길바닥에 남녀가 천연덕스럽게 성교를 하게 되고 통행인은 그것을 보더라도 지금의 악수하는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을것이며, 이상스럽게 느낄것도 없게 된다.

또 그무렵이 되면 인간의 심리상태도 달라져서 자기의 처나 연인이 다른 남자와 성교를 하더라도 노한다던지 질투를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복귀원리를 들은 여인들은 복귀를 받고 싶어서(성교를 하고 싶어서)자기들이 자원해서 오게 된다. 그 시기가 오면 재림 메시아는 6인의 유부녀를 마리아로서 남편에게서 빼앗아 더렵혀진 사탄의 피를 정화하기 위해 피를 교환하는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을 "혈대교환(血代交換)" (주=말하자면 "피 나눔"이라고 하는것.후술)이라고 하는 것인데 복귀의 의식인 성교에는 지금의 사단의 세상과는 달라서 일정한 규정이 있다.

재림메시아가 유부녀의 더렵혀진 사단의 피를 정화하여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하기 위해서 복귀의 의식으로서 행하는 성교는 메시아가 위에서 3회씩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것은 소생, 장성, 완성의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6마리아와 도합 18회의 성교에 의해서 유부녀들은 마리아로서 환생하는 것이다.

6마리아를 복귀시키면 재림의 메시아는 다음에 성교경험이 없는 처녀를 골라서 해와로 정해 "어린양잔치의식"(정식 결혼)을 한다.

아담의 대리인 메시아와 해와는 참아버지, 참어머니이며, 그 두사람에게서 태어나는 자손은 영원히 죄가 없는 선한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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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세상을 6천년전에 하나님이 창조하려고 하였던 이상의 원점으로 돌려 놓을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 이 세상에는 천사장 루시엘에게 해독을 입은 사단의 피를 받은 인간이 50억인이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전부를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최초에 재림 메시아에게 복귀된 여인은 다른 남자의 식구(신자를 말한)와 여자가 2회 위에서 "소생, 장성, 완성"의 3회에 걸쳐 복귀를 해 줄수가 있다.


복귀를 받은 남자식구는 다른 여자 식구들과 여자가 위에서 2회, 아래에서 1회 성교를 해서 복귀시킨다. 또 그 여자식구가 다른 남자 식구에게 여자가 위에서 2회, 아래에서 1회 성교를 해서 복귀 시킨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넓혀가게 되는 것이다.

다만, 복귀를 받으면 그전에 7년간은 "성별"(성교를 하지 않는 기간)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복귀를 받을 자격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만큼 7개월간의 성별만으로 가능하며, 그 후에는 훨씬 짧아져서 7일간만의 성별로 남여 서로 복귀를 받을 자격을 주게 될것이다.

나는 거기서 이 세상에는 국적도 언어도 피부색도 이상도 다르다. 이만큼 다수의 사람들이 있고, 한국 뿐이라면 또 몰라도 어떻게 그렇게 될수가 있는것인가"고 물었다.

문선생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조건만 만들어 놓으면 국적, 민족, 언어 따위와는 관계없이 실행할 수 있다"고 답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들은 세계각국에서 동쪽에서 해가 뜨고, 횐옷을 입은 4계절 나라에 재림한 메시아 아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몰려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진정한 부모 밑에서 온 세계의 인간이 하나의 가족처럼 되어서 국적이나 언어 따위에 관계없이 전세계가 가깝게 된다. 한국인이 아프리카에 가고 싶을 때에는 아프리카의 어디라도 갈수있고, 어느집이고 찾아가서 그집에서 하루고 몇일이고 지낼수 있게 된다.

또 그집에 있는 모든물건을 자기의 물건처럼 사용 할 수도 있다. 양껏 먹고 즐겁게 마셔도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 있는 혹인이 한국에 오더라도 몇일씩이고 묵을수 있고 우리들의 물건을 무엇이던 자기의 물건처럼 쓸수가 있으며, 좋을대로 먹고 마시더라도 누구도 군소리를 할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의 사단의 세상에서는 모든 물자나 돈을 사단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용방법이 틀렸던것 이다.

참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식구들은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단의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이나 돈은 참 부모와 함께 있는 식구들이 가령 그것을 훔쳐서 썼다 하여 그것이 세속의 법률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된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 것이었던 물자나 돈을 사단이 탈취해서 썼던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적으로 대단한 고통도 없어지고 모든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어서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갈수있게 된다.

지금 우리들 죄수 1,500인이 하루 온종일 노동해서 겨우 될수있는 일거리도 그때가 되면 한사람이 3시간만 일하면 모두 될수있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 삼아 3시간 정도만 하면 되게 되는 것 이다.

그리고 알라스카와 같이 추운 지방의 식구들은 하고 싶으면 일년내내 따뜻한 하와이와 같은 경치좋은 곳에 와서 자유롭게 먹고, 마시고,서로 사랑 할 수가 있다. 만약 그것이 싫증이 나면 4계절이 뚜렷한 한국과 같은 나라에 와서 즐길수가 있다. 또 일본과 같이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 가서 자유롭게 구경하고 생활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기가 반듯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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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사람들이 '참 아담'과 '참 해와'라고 하는 두사람의 부모의 자식이 되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문선생은 '원화원이상 (圓和園理想)" 이라고 한다.


현재 형무소 안에서 고생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그것은 꿈속의 또 꿈과 같은 이야기라서 나는 그저 명청하게 듣고만 있었다. 옥중에서 나는 총반장이란 처지를 이용해서 시간을 벌어 가지고 문선생에게서 몇 주간에 걸쳐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생각한다면 그로서는 형편이 좋은 전도였고 포교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창조원리'나 '복귀원리'는 실은 그가 가르침을 받은 김백문이나 이용도의 이론의 복사판이었을 뿐아니라 몽땅 받아다 파는 식의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훨씬 후에야 알았다.

또 복귀라고 하는 명목의 성행위로 문선생이 얼마나 많은 여성을 불행하게 하였는가, 그자신이 얼마나 음난하고 방자한 성욕에 탐익 하였는가를 이 책속에서 밝혀두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반면에 사회악이라고 말 할수 있다. 복귀의 진실을 고발하는 나 자신, 실은 문선명의 명령에 따라 많은 여성과 복귀한 사실도 있다.

여하한 이제 한동안 무지했던 나와 문선명의 당시의 관계를 읽어 주십시요.

 

평양을 소란케 한 이단자

 

그날도 나는 죄수들과 함께 작업장으로 나가서 작업배치를 한 후에 문션생과 함께 조용한 창고로 가서 빈 가마니가 쌓여 있는 곳에서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긴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은 서울에서 평양까지 오게된 동기와 평양에 와서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 때문에 사회질서 문란죄라고 하는 죄명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되었는가를 들었다.

나의 꿈속에서는 분명하게 문선생은 재림 메시아라고 하는 계시를 받았다. 나의 해석으로는 재림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종말의 날에 심판을 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추수 할때에 잘 익은 곡식은 알뜰히 수확하고, 제때에 여물지 못한 것이나 쭉정이 같은것은 불에 태워 버리는것 처럼, 재림메시아의 심판에 따라 참된 신자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믿지않은 사람들은 지옥으로 떨어트려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메시아의 사명이라고 성서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문선생과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감옥에서 이와같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긴 시간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최초의 체포 구속

 

문선생은 서울의 영등포구 상도동에 살고 있을때 김 백문이 라고 하는 사람이 지도하고 있는 이스라엘 수도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김백문의 성경의 원리해석을 배워 나가던 중에 그 원리에 흠뻑 빠저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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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하나님으로 부터의 계시를 받아 북한으로 가도록 말이 있었다고 한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1946년 6월6일의 일이었다.

그 당시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고 전체가 거의 공산주의로 물들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문선생은 그러한 시기에 처자를 서울에 남겨둔채, 배낭 하나만을 짊어지고, 38선을 넘어서 평양으로 왔다.

평양으로 와서 맨 먼저 정득은(T得恩)이란 여인을 만났다. 의기 상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를 받은 평양성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것에 합의하고 서로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때 문선생은 26세 , 정득은은 40세정도였다.

두 사람은 평양시 상수구리의 검은다리에 있던 정득은의 집에서 원리를 전도해 나가기로 하였다. 며칠이 채 못가서 이집에는 열성적인 신자들이 10명이 넘게 모여들었다. 여기서 문씨는 처음으로 창조원리에 대해서 강의를 하였다.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알아 차리고 해와를 유혹해서 타락시킨 일, 예수의 모친이었던 마리아가 모자협조(성교)를 하지 않아서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죽게 되었다.
예수는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것은 아니었으나, 십자가위에서 육체는 죽어 버리고 영혼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된 것이므로 또 재림할 것을 약속한 것이라는등‥‥

이때 모인 신자는 정득은, 옥상현*, 지승도, 정선옥*, 김인주, 김종화등의 여성과 김원필, 정명선, 차상순 등이었다.

문선생이 집회를 열고, 성경해석의 원리를 강의하면 특히 여인들은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모양을 보고 근처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 하였던것 같다.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열사람 남짓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든가 소리를 지르던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선생에게 말을 시키면 창조원리와 타락원리의 강의 그리고 복귀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 6천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누구던지 울면서 기도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이와같은 집회가 허용 될리가 없다. 근처의 사람들이나 기성교회의 신자들, 특히 교회의 목사와 장노들은 문선생의소행을 이단시하였다.

이 이상스러운 집회를 하고 있다고 경찰에 고발하였기 때문에 문선생은 평양으로 와서 2개월째인 1946년 8월2일 대동보안서에 체포되어 약 100일간 구속되었다. 그간에 가혹한 고문을 받아 한잠도 못자게 하든가, 식사를 2일도 주지 않는등, 학대를 받었으나 특별한 죄가 없었기 때문에 석방되었다. 그때 문선생은 꽤 쇠약해 있었으나, 신자들의 도움과 한약의 덕분으로회복하였다고 한다.

 


유부녀와의 결혼소동으로 징역5년


문선생은 그후 경창리에 있는 김종화(金鍾和)라는 열렬한 여신자의집에 머물렀는데, 그녀의 남편인 정명선과 세자녀가 있는 가정이었다.

이집에서 문선생은 복귀원리를 실현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있는 부인네를 천사장 루시엘이 해와를 빼앗아 성교를 한것과 같이 빼앗아서 하필 남편과 아이들이 옆에 있는 방에서 김종화와 동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문선생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김종화와 "어린양잔치"(정식결혼)을 하기로 하였다. 신자들은 쌀을 거두어 떡을 만들고 양복과 이불을 만드는 등 푸짐하게 의식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매일같이 사람을 모아 놓고는 울면서 기도하다가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시끌벅끌하며 밤중까지 떠들석했다. 그위에 남편이나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지붕밑에서 동거하고 있다. 그것이 이번에는 결혼식을 올린다고 큰 소란을 떨고 있는 것이니까 그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잠자코 있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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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1948년 2월 22일 문선생이하 전원이 체포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선생은 사회질서 문란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로 오게 된것이다.

(6월 20일)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김종화는 징역 1년의 실형으로 복역하고, 옥상현은 그녀의 집이 상당한 재산가였으므로 2개월 만에 석방 되었다고 한다. 또 몇해 후에 남한 서울에 피난하고 있던 김종화를 찾아가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서, 나는 당시의 진상을 들어 보았다.

믿음을 잃고 쉬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문선명의 이야기와는 달라서 흥미 진진한 것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대공습


1950년에 접어들자 형무소안은 한층 더 엄중해졌다. 비료공장의 작업장은 웬일인지 유안분이 돌처럼 굳어져서 일에 능률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책임량(노루마)은 증량일로 이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일을 하여도 달성되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 더구나 노동시간은 1시간이 연장되어 6시에 종업이 된다. 참으로 "죽으라"고 하는것 같았다.


1,500인의 죄수중에서 매월 100인정도는 툭특 쓸어져 죽어서 공장의 노동자들은 매일 장사를 치르는 것으로서 일과가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죽은사람의 인수만큼 죄수가 평양형무소에서 확실하게 보충되어 왔다.
젊은 간수들이 많이 줄어 든것을 알아차린 것은 5월경 이었다.


아무래도 사원들이 "이 것은 비밀이지만‥‥라고 말하면서 소근거리며 "소련쪽으로 비료를 운반해 간 배가 돌아올 때에는 고사포 같은 무기를 잔뜩 싣고 오곤 한다. 아마도 곧 전쟁이 시작되는것은 아닐까"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수용소내의 경계나 작업소내의 감시가 한층 더 엄해졌고 죄수들은 큰소리로 이야기를 할수없는 분위기가 계속되어 있었는데 6월 25일 드디어 전쟁이 시작 되었다.


북한의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서 남진하여 3일후에는 서울이 함락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죄수들을 연령별로 나누어 군대로 보내서 위험한 최전선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뜬 소문이 나돌았을 때에는 불안한 나머지 수용소 안이 크게 떠들석 하였다. 그런 가운데 8월1일 오전 11시 비료공장의 상공을 UN군의 비행기가 약30분이나 정찰하고 갔다.


나는 군대시절의 경험에서 계호계장인 간수에게 "여기는 틀림없이 폭격 당합니다. 수용소쪽이 안전할 테이니까 죄수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진언하였으나 전쟁을 모르는 간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할수없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가요란하게 공급경보의 싸이렌이 올렸다.


UN군의 B29가 공습해서, 12시경부터 약4시간 비료공장은 맹렬한 폭탄비의 세례를 받았다. 북한 산골 옥수수 농사짓던 농민이었던 간수들은 넋이 빠져서 우왕좌왕 할뿐이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만약 또 폭격이 있더라도 국제법상 형무소나 수용소는 폭격하지 않을터이다. 안심하고 수용소로 가기를 서두르자, 간수들은 죄수가 전원 따라오는지 뒤에서 감독해 주시오라고 큰 소리로 지시하고 선두로 달려서 수용소로 돌아왔다.


비료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총 인원수는 8천명 정도 이었고, 죄수는 1,500명이었는데 돌아와서 조사해보니까 죄수의 사망자는 불과 70명, 공장 전체로서는 약 3천 7백명 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다.
참으로 무서운 대공습이었다 수용소로 돌아온 나는 서둘러 문선생을 찾아 폭격으로 다친데나 없나 하고 걱정 하였는데 상처 하나없이 무사하였다.

 

김일성 은사


북한이 김일성 정권의 수립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서 독립하였는데(1948) 은사로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던 나는 대공습 다음날(50년 8월 2일) 간신히 형기를 마치고 지옥의 수용서에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하늘 아래인데도 공장안과 밖은 이렇게도 다른 것인가를 눈물이 넘쳐 흐르는 생각으로 하늘을 바라 보았다. 오전 10시경이었다. 비료 공장 옆을 지나보니 폭격당한 흔적의 비참한 광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기 저기 있는 큰 구덩이에서 시체가 산산히 흩어진 살점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이 공장속에서 문선생은 오늘도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을 것인가고 생각하니까 자기 혼자서만 먼저 석방 된것이 면목이 없었다. 출옥의 인사차 갔을 때에 문선생은 "평양에 가거든 경창리에 살고 있는 김종화를 찾아서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라 고 전해 주시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종화 여인은 문선생과 결혼하려고 하였다가 투옥 당하게 된 원인이 된 바로 그 유부녀인 것이다.

홍남의 도로는 인민군의 군수물자를 실은 트럭이 많이 달리고 있었다. 인민군은 선제공격으로 승리하여 서울을 점령한것 같았다. 지금은 전쟁중인 것이다. 평양행 군용트럭을 세워서 사정을 말하였더니 평양까지 태워다 주게 되었다.

 

 

제2장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평양에서 서울로

 


불량배에게 다리에 절골 당했다.

 


폭격을 피해서 산길을 뛰기도 하고 도중에서 자기도 하며 평양에 도착한 것은 3일 뒤였다. 공습을 피해서 교회로 소개되어 있던 가족과 합류한 다음날, 나는 김종화 여인의 집을 찾았으나 찾을수가 없었다. 그 무렵 한국군은 인민군에 밀려 1950년 8월 18일에는 부산으로 한
국정부가 옮겨가 있었다.

북의 공산당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평양시내는 전승분위기로 넘쳐 있었으나 9월 15일에 UN군이 인민군의 배후를 찔러 인천으로 상륙, 전황은 뒤집혔다. UN군의 진격은 재빨라서
9월 하순에는 한국군과 UN군이 평양에 입성하였다.

그러한 어느날 나는 보안대라고 자칭하는 무법자들 일당에게 둘러싸였다. 본바닥의 불량배들로서 북이 오면 북을 맞이하고 남이 오면 남에 꼬리를 치는 패거리들 이었다.

"너는 북조선 군의 대대장을 지낸 진짜 공산당원이니까 죽인다. 죽어라 !!』몇사람이 나에게 달려들어 망치로 내다리를 쳤다. 발목뼈가 부러져서 나는 움직일수 없게 되었다. 마침 지나가던 한국군 헌병대의 찝차에 구조되어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직무태만
죄로 투옥 되었던 것을 알게 되어 석방되었다.

이러한 곳에서 살해 당하는가 싶어서 한때는 죽음을 각오하였던 만큼 '정말 사람에게는 무엇이 행운을 가져 오는지 알수 없다'고 무심결에 실소한 일도 있었다. 그때 유치장에 남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중죄인들은 모두 총살 당한것 같다.

전쟁으로 시내의 병원은 어디고 제대로 되는것이 없었다. 유도가 5단이었던 나는 할 수 없이 약국에서 적당한 약을 구해서 먹고 부러진 발목에는 응급조치로 나무쪽을 대서 묶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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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명(文龍明)과의 재회


10월 27일 김원필과 문정빈이 나를 찾아 왔다. 문선생은 출옥해서 10월 24일에 평양에 도착하여 나를 찾고 있었으므로 데릴러 왔다는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서 기쁘고 반가워서 말조차 잘나오지 않았다.

나는 리야커에 실려서 얕은 언덕받이에 있는 옥상현의 집으로 갔더니 문선생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순간 나와 문선생은 손을 잡고 울어버렸다. UN군에 의해서 흥남감옥이 10월 14일에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 문선생은 10일 동안이나 걸어서 평양으로 온것같다.


옥상현의 자택은 일본식 주택으로 부지가 수백평이나 되고, 집이 여러채 서있어서 큰 부자임에 틀림없었다. 옥상현과 딸 정애, 정순, 문선생, 김원필, 문정빈, 그리고 나까지 7인이 한 가족처럼 생활하였다.

일주일정도 지나니까 옥상현의 남편인 우하섭의 가족전원이 피난 나갔던 서울에서 돌아 왔으므로 우리들은 쓰고 있던 방을 비워 주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모두들 의논한 결과 서성리 라고 하는 곳에 있는 방을 하나 빌리기로 하고 그 다음날에 이사를 했다. 문선생과 김원필, 문정빈 그리고 나까지 4인이 함께 살게 되었다.

문선생은 그사이 아는이의 안부를 찾아 들락거렸고, 김원필에게 자기의 출옥을 알리는 일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또 평양에서는 1950년 12월2일 시내전역의 시민에게 피난명령이 내렸다. 그것은 중국군이 대량으로 투입되어 인해저술로 거센 파도(노도)처럼 몰려오고 있기 때문에 한국군과 UN군이 일단 후퇴 하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는 조선반도의 맨 북쪽까지 쫓겨 갔던 북조선 인민군과 그것을 지원하는 중국지원군(10월 25일에 참전)의 전진은 예상외로 빨랐던 것 같다. 그날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의 탄약고가 폭격 당해서 밤새도록 폭발하는 바람에 한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족을 이북에 버려두고 문선생을 따랐다.


우리들은 남쪽으로 피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리골절 상처가 다 났지 않은 나는, 걸을수가 없었기 때문에 상수구리에 있는 누님댁에서 자전거를 가져다가 나는 그것을 타고 김원필은 뒤에서 밀고 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1950년 12월 4일 10시경에 평양을 출발하였다. 계절은 겨울이였으나 아직 그렇게 춥지는 않았으므로 피난 하기에는 비교적 장해는 없었다. 도중 대동군에 있는 나의 본집에 들려 가기로 하였다.

우리집에 도착하니까 가족은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가 부자유한 다리를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남으로 출발한다는 것은 온가족이 "엄청난 무리"라고 크게 반대하였다.
조카인 정근은 "삼춘이 그 다리로 어떻게 남으로 피난 갈려고 생각하는가"하면서 필사적으로 말리려고 하였다. 문선생은 우리가족을 납득시키려고 평양성을 눈앞에 바라 보이지만 북에서는 목적을 달성 할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뜻에 따라 일단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설명하였다.


나는 옥중에서 맺은 사나이의 약속으로 문선생과 함께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마음 속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미 80세가 되신 어머님께 작별 인사를 들인 뒤에 처에게 가족들 일을 부탁하였다. 그때 맏딸 효순이가 나와서 "나도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를 돌보면서남쪽으로 따라 가겠다"고 눈물을 흘렸으나 문선생이 말렸다. 문선생은 흥남에서 같이 온 문정빈과도 나중에 기회를 봐서 남쪽으로 오라고 타일러 우리집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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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후방에는 중공군이 물밀듯이 멀려오므로 우리들은 되도록 빨리 대동강을 건너야 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정근에게 부탁해서 그날 밤중에 배로 남충면 효남리로 건널 수 있었다.
그날 밤은 근처에 있는 누님댁에서 묵었다. 남쪽으로 피난하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다음날 아침인 12월 5일 누님이 마련해준 식량을 자전거에 싣고 나는 타고 김원필은 밀면서 출발하였다.
누님은 문선생을 목사라고 생각하고, 목사님 제발 제 동생을 잘부탁드립니다 라고 머리를 숙여 인사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후 43년간 가족과의 만남은 사라져 가는 꿈같고 아내와 다섯 아이들은 어떻게들 하고 있는지 )


죽을때까지 함께 하자던 사나이의 약속


남쪽으로 내려 가는 피난길은 사람들로 넘쳐 있었다. 피난민들은 저 마다 손을 잡고 그야
말로 몇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서서히 남쪽으로 남쪽으로 걷고 있었다. 우리들은
역포를 거쳐 용연면에 들어서서 12시경에야 가학리 에 도착하였다.서쪽에서는 폭격기의 공습과 총격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날은 흐려 있어서 해가 아직지지 않았는데도 해가
넘어 간것처럼 어두었다. 오늘은 앞으로 더 가는것을 체념하고 숙소를 찾아서 쉬기로 하자는 문선생 지시로 우리들은 근처의 마을에 들러 초입에 있는 농가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아무도 살고 있는것 같지 않았다. 가재도구는 있었으나 아마도 주인은 남쪽으로 피난해 갔는지 부및에 가보니까 쌀은 물론 김치, 간장, 된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말로 인류최후의 날이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세상은 이제부터 어떻게 되어가는 것일까? 가구와, 살림도, 의복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가족만이 증발해 버린것 같다. 피난 도중에 쉬려고 맨 처음에 들어간 집의 광경을 보고 나는 여러가지 것을 생각케 하였다
원필이가 저녘 준비를 해서 가져 왔다. 횐 쌀밥에 물김치를 차린 밥상이었다. 우리들은 감사의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하였다 문선생이 "정화는 다리가 부러져서 고생하고 있지만 좀 있으면 낳을것이다. 또 자유롭게 걸을 수 있을 터이니 안심하시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가족들을 생각해서 쓸쓸해 보였던지 "우리들은 지금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는 것이다. 다만 피난하기 위한 길만은 아니다. 평양성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 세상에 창조하려고 한 것인데, 나를 감옥으로 보냈기 때문에 허사가 된것이다.
남쪽에서 다시 한번 해내는 것이야"라고 격려해 주었다. 쌀 뒤주 위에 가지런히 개서 올려져 있었던 이불을 펴고 누됐으나, 나는 아무리해도 잠이 들수가 없었다. 원필은 피곤한지 바로 잠이 들었으나 문선생도 한동안 잠이 안 오는것 같았다. 이제 부터의 계획이라
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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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부터 한평생 문용명(본명)과 박정화는 고락을 함께하고 영원히 같이 살자"고 옥중에서 서로 맹서하였기 때문에 정다운 고향을 떠나서 사랑하는 가족들 부모, 형, 그리고 처 다섯식구 들(17살 장남,15살 차남, 13살의 3남 , 10살의 큰 딸, 다섯살 4남)과 헤어져서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내 일생은 모두 재림 메시아로 믿고 있는 문선생에 맡긴것이다.

역시 나도 고단했던 가보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가깨어 보니 벌써 아침해가 떠 있었다.


피난 길에 우리들의 복장은 문선생은 횐 명주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검은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일본 식민지시대의 말기를 생각케 하는 검은빛의 반공두건을 쓰고 있었다. 흡사 봉건시대의 부인들이 입고 있던 당의와 같은 느낌인데 얼굴 앞 부분만이 보일뿐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겉차림뿐만 아니라, 여인과 같은 음성이였으므로, 진짜 여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작업복 상하에 일본군의 구두를 신고 머리 에는 누런 방한모를 쓰고 있었다.
외국제의 밝은 자전거에 짐을 싫고 다리가 불편한 내가 걸터 앉아 핸들을 쥐고, 원필과 문선생이 교대로 뒤에서 밀고 있던 모습이 아마도 기묘하게 보였을 것이리라.
 

악전고투의 피난 길


남쪽으로의 길은 간선도로를 가면 비교적 평탄하고 수월하겠지만 미헌병이 여기저기 서 있어서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결국 피난민이 통행할 수 있는곳은 좁고 기복이 많은 옆길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피난민의 수는 늘고 그야말로 인산 인해 좁은 길에 넘쳐나고 있었다. 남으로 가기만 하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보증도 아무것도 없건만 그래도 무언간에 희망을 가지고 사람들은 남쪽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었다.


평양을 떠날때 의복이나 살림을 한짐씩 싸짊어지고 피난길에 올랐으나 그짐도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 들었다. 줄곳 걷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지쳐 그리 대수롭지 않은 물건들은 자꾸 내버려 피난길 20일 정도 된 때에는 짐들은 거의 줄어졌다. 피로가 겹친 몸에는 한 겨울의 추위가 한층 더 느껴졌다. 따뜻한 곳을 찾아서 풀위에 눈이 녹아있는 곳이 눈에 띄이면 주저 않았다가 쉬엄쉬엄 걸었다. 그래도 잠 자리와 식사 걱정만은 대단하지 않았다.


그날도 조금 일찍이 숙소를 찾아서 쉬기로 하고 가까운 마을로 들어갔다. 어느집에 들어가니까 꽤 잘 살던 집처럼 보였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살림살이와 식량은 놓아둔 채였다. 방을 정하고 한참 쉬고 나서 원필이 저녘밥을 마련해 주어서 세사람이 식사를 했다.  아픈 다리로 이대로 부산까지 갈수 있을런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우리들은 점점 늘어가는 피난민에 섞여서 남으로 남으로 향하였다.


그 도중에 광주근처에 각도가 거의 30도정도는 되는 가파른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는 150M정도로 길어서 자전거를 밀고 올라 갈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내가 자전거에 타고 원필이 아무리 힘껏 민다 해도 그리 쉽사리 올라 갈수 없었다. 조금 올라간듯 하면 미끄러져서 자전거가 뒤로 나 자빠지고 만다.


주위에는 피난민이 가득차서 저마다 앞을 다투어 먼저 가려고 하였다. 이대로 하다가는 아무리 해도 나아갈수 없겠다고 생각한 나는 나 때문에 문선생과 원필도 남쪽으로 못가게 된다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서 문선생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안 되겠오 나를 두고 앞으로 가시오 나는 여기서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나의 운명에 따르겠오." 그했더니 문선생은 화를 내며

"당신과 나는 죽음까지 함게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금후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살자 걱정말게 !! 라고 말해 원필에게 자전거를 끌게 하고 나를 업고서 고개를
넘었다. 감격 한 나는 문선생을 믿고 따라 가기로 다시금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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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서을에 도착하다.


우리들 세사람은, 그후 남쪽으로 온 피난민속에 공산군이 섞여 있을것 이라고 하는 정보에 따른 UN군의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여럿이 죽는 고초를 겪기도 하고, 이의 등살에 견디기 힘들었던 어려운 고비를 참고 넘어서 사리원, 하성, 동해주, 청단, 내성, 용매도, 영양, 토성,장서를 거치고 임진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들어가 마포를 지나서 서울로 향하였다.


12월 27일 눈이 퍼블는 속에 얼어붙은 한강을 미끄러지고 구르면서 건너서 24일만에 우리들 세 사람은 꿈에 본 서울에 당도 하였다. 우리들은 우선 영등포구 흑석동에 있는 곽이라고 하는 사람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문선생의 옛날의 친우였던 곽이란 사람은 이미
부산쪽으로 피난해서 그 집은 빈집이 되어 있었다.

이집은 2층집인데 양옥집이고, 가재도구가 그대로 놓아둔 채로였다. 할수없이 우리들은
이 빈집에서 한동안 지내기를 하였다. 서울은 문선생이 학생시절부터 살아서 신앙적인 면으로도 여러가지 것을 체험 해온 제2의 고향이었다.

그 곳에서 문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후 한동안 하숙을 하고 있었다. 이기봉이라고 하는 할머니 한테 찾아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렇게 반갑게 대해 주지 않는 것이
다. 그 후에도 몇 사람 옛 친구를 찾아 갔으나, 문선생의 꼴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들의 모양이 거지같이 보였든지 그리 친절하게 대해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무렵 서울시민은 국민방위군요원에게 물겨 다니고 있었다. 나는 또 다리가 부자유스러워서 걸리지 않았지만, 문선생과 원필 두 사람은 무조건 끌려갔다. 세사람이 사선을 넘어 평양에서 겨우 서울에 닿았는데 이것은 또 어떻게 된 것인가. 나만 홀로 남겨지고 금후의 일이 걱정인데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서울은 낯선 고장으로, 아는 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곳이다. 더구나 전쟁 중이다. 문선생이 찾아가도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가령 내가 찾아간다 하더라도 나 같은 것에 동정 해 줄리가 없다.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무것도 떠 오르지 않았다. 문 선생만을 믿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문선생과 원필은 국민방위군의 자체검사에서 불학격이 되어 돌아와서 세사람은 또 흑석동의 곽씨의 자택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새해가 밝아 1951년 1월 2일, 서울전역에 퇴거명령이 내려졌다. 공산군이 가까이 까지 남하해 온 것이다. 우리들은 또 피난길에 나서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 이번의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지금까지 검문을 받던지 할 때에는, 우선 먼저 증명서의 제시를 요구 받았다. 그런것을 생각해서, 나는 가까이 있는 치안대를 찾았다. 유홍이라고 하는 치안대의 대장이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서 우리들은 "피난민증명서"를 한통씩 만들어 줄것을 요청하였더니 친절하게 증명서를 발행해 줄뿐만 아니라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위로의 말까지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 때의 기분은 지금껏 잊을수가 없다.

평양에서 마련해 가지고온 돈도 모두 떨어졌으므로 우리들은 할수없이 곽노필씨 집에 남아있던 양복이나 돈이 됨직한 것을 자전거 뒤에 싣고 서울을 출발하였다.만약 그대로 남겨 두었다 하더라도, 인민군이나 중국군이 처들어 온다면 아무것도 남아 나지 않을것은 명백하였다. 사실 서울은 1월4일 재차 공산군에게 제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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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산으로

 


제2의 피난행



우리들은 1월3일 이번에는 부산을 행해서 500키로의 피나길에 올랐다. 두번째의 피난인 것이다. (1·4후퇴 때)
자전거에 타고 그저 밀려 다니는 꼴이 었지만, 자유를 찾아가는 희망의 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서울을 출발해서 부터 우리들은 부산까지 경부선을 따라 가지않고 중앙선을 따라 가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나의 숙부가 되는 정기수씨가 제천이라는 곳에 살고 있어서 그곳을 들러 가면 여러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성남을 지나서 이천으로 향하였다. 이번에는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피난 때와는 달리 모르는 피난민들끼리 줄을 짓기도 하고, 또 무더기로 몰려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끼리라든가, 가족들끼리 함께 이동해 가는 것이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그의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에는 거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빈 집이 눈에 띄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집에 가서 하루밤 쉬어 가기를 부탁하면 쾌히 들어주어 방을 빌려서 쉴 수가 있었다. 빈 방이 없을 때에는 부엌이나 헛간 같은 데서도 쉬어 갈 수가 있었다. 쉴 장소가 마련되면 다음은 가지고 은 쌀로 식사를 마련해서 먹고 자는것 뿐이 었다.

제2의 피난때에는 전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 가짐에도 얼마간의 여유가 생겨서 그렇게 서둘지 않고 느긋하게 갈수가 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일찌감치 마을에 찾아들고 서둘러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잘하는 방법인 것이다. 가지고 있던 쌀이 떨어 졋으므로 가까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렸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갔는지 상점은 거의 닫혀 있었다. 그러나 우려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이 작은 마을 가운데 있는 큰 집을 찾아가서 곽씨집에서 가지고 온 양복 한벌을 꺼내서 집에있는 할머니에게 건네고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70은 넘은 듯한 기품좋은 할머니는 우리들이 측은하게 보였던지 아니면 양복이 탐이 났던지, 팔 뒤주를 열고 쌀 한말 가량을 주었다.

장호원, 원주를 거쳐 제천으로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 헤맨 숙부의 집은 이미 피난해서 빈집이 되어 있어 맥이 쪽빠졌지만, 그래도 앞으로나아가 조령(새재)의 마루턱에 도착하였을때 UN군의 헌병이 "피난민은 도로로 가서는 안된다"고 제지를 당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걷기 힘든 산길을 갈수 밖에는 없었는데, 그 무렵에는 나의 다리도 거의 나아갔으므로 산길이라도 악을 써서라도 걸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별안간 UN군의 헌병이 문선생과 원필을 강제적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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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세번째 이별이 되는 것인가 하고 나는 무척 불안하였다. 처음에는 북에서 피난할때 보안대에 연행되었다. 다음에는 서울에서 국민방위군에게 연행되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또 혼자 남게 된 것이다.

그러한 곳에 혼자 남겨 지더라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매우 걱정 스러웠는데 한참 만에야 두사람이 돌아왔다. UN군의 군용 차에서 작업을 시켰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 길 이었으므로 나 혼자서도 갈수 있을것 같았다.

"여기서 부터는 지팡이를 버리고 걸어서 가자"고 문선생이 말했다.

두달 가까이나 지팡이에 의지해서 자전거에 타기도 하고 네리기도 하였으므로 아직 자신은 없었지만 다부지게 마음먹고 지장이를 버리고 보니가 지팡이가 없이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후의 길을 나는 혼자서 걸어 다닐수 있었다. 단양, 점촌, 풍기, 안동, 의성으로 피난길은 이어졌다.


경주에서의 작별


경주에 도착한것은 저녘때였다. 시내에는 피난민이 넘쳐 있었고 비어있는 방은 여간해서 찾아 볼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사방을 헤매서 겨우 시내의 로서리를 거처 쉴만한 집을 찾아냈다. 현관문을 판자로 X형으로 막어 놓은 집인데 그집을 찾아 가니까 30세가량의 젊은 사람이 나왔다. 우리들이 방문한 이유를 물었으므로 "판자로 문판을 막어 놓았기에 아무도 안사는것 같아서 하루밤 쉬어 가려고 생각 한것이다"하고 하였더니 안으로 들여 보내주었다.
집안을 살펴 보니까 판자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공장같은데 집 주인의 설명으로는 "밥상"을 만들고 있었는데 전쟁 때문에 직공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공장을 폐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방을 빌린 후에 원필은 저녘 반찬거리를 사려고 시장으로 나아갔다. 어항이 있는 포항이 가까이 있어서 오징어를 세마리 사다가 죽을 쑤었다. 원필이 방을 빌려 준 주인에게 죽 한구릇을 가져갔더니, 뒤에 그집 아주머니가 "이러한 죽은 어떻게 쑨것이냐"고 물어 원필이 설명을 하니까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오징어로 족을 쓸 때에는 먹장을 떼내고서 죽을 쑤는 거예요. 그냥 하신거죠"

우리들은 어두운 곳에서 먹었기 때문에 그런것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는데 아주머니가 가져 온 죽을 보니까 과연 새까만 것이었다. 그것을 그냥 먹었는가 하고 생각하고 우리들은 서로 웃고 말았다.

이집의 주인은 황해도가 고향인데 자기는 어렸을 때에 경주로 살러와서 생활을 위해서"밥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어른들은 지금도 북에 계시고 자기의 가족들만이 이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장만영이라고 3일간 이집에서 쉬었다. 식사는 물론 우리들이 만들어 먹었다. 그래도 피난민이 넘쳐서 한곳에 오래동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주인에게 "우리들은 오늘 부산쪽으로 갑니다"라고 인사를 하니까 젊은 사람은 가도 괜찮을터이지만‥‥하면서 그는 나를 가르쳐 말했다. "당신은 제일 나이도 많는것 같고 몸도 쇠약한것 같다 부산에 가더라도 피난민으로 꽉 차 있을 터이니까 두사람이 먼저 가서 자리잡은 다음에 당신도 가면 좋지 않은가"

여기까지 문선생과 원필이 함께 사선을 넘어왔으므로 나는 "아니야 나도 부산으로 가겠다"고 말했더니 문선생은 "이집 주인의 마음씨가 고맙다"고 말하고 "정화 자네는 이곳에
있으면서 좀더 기다리게, 우리들이 부산으로 가서 자리 잡히면 연락할 것이니까. 그때 또 서로 합쳐서 큰 일을 하기로 하세나"

이려하여 나는 경주에 장만영써 집에 남고 문선생, 원필은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때의 나의 심경은 무척 복잡하였다. 피난도중 문 선생과 함께 사선을 몇 차례나 넘어 왔는데,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려고 하는 위대한 일거리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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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떨어진 나의 심경은 서러워서 함께 가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했으나 피난길은 한 사람이라도 적은 편이 수월한 것이 라고 생각해서 잠시의 이별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후에 문 선생이 경주로 왔을때 들은 바로는, 이때는 울산까지 걸어가서 울산에서 처음으로 기차를 탈 수 있었다고 한다. 기차는 기차였지만 화물 차량의 지붕까지 사람이 타고 있는 상황에서 간신히 화칸 부근에 탈수 있어서 부산의 초량역에 겨우 내렸다는 것이다. 그날이 1951년 1월 20일 이였다고 한다.


생활에 쫓긴 문선생이 찾아옴


나는 혼자서 경주에 남아 장만영씨 집에 식객이 되었다. 4월이 되어 날씨도 따뜻해졌다. 식객도 오래 되었기에 무슨 짓이라도 해서 밥값 정도는 치러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어느날 주인과 의논하였는데

"전쟁중에는 만들어도 별로 팔리지도 않으니까 공장을 페쇄하고 있다"하는 것이었으나, "밥상만 만들어 준다면 내가 자전거에 싣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팔아 올 터이니 해보지 않겠오"라고 내가 권하였더니 주인도 그러 할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전부터 공장에서 일하던 아들과 식객 노릇을 하고 있던 피난민 나와 주인등 셋이서 밥상을 만드기 시작하였다.

나는 한번에 20개씩 자전거에 싫고 포항으로도 가고, 영천으로도 가고, 또 울산에도 갔다. 익숙하지 못한 장사였지만 싣고 나간 밥상은어떻게든 다 팔렷으므로 그 대금을 주인에게 넘겨 주었다. 경주 주변에는 사방에 시장이 있었다 영천에도, 울산에도, 포항에도 언양에도, 감포에도, 경주에서 2,30키로 거리에 있었으므로 5일마다 서는 장이 그 시장에 매일같이 밥상을 실어다 팔았다.

또 저녘때가 되면 그집의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가정교사 노릇도
하였고 식객으로 지내는 동안의 밥값 정도는 특특히 한 셈이다.

이렇게 지내고 있는 동안 그 다음해의 3월 7일 별안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문선생이 부산에서 오셨다. 그 기쁨이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군용 모포 한장으로 공장에서 기거하고 있는 나로서는 문선생을 환영할 방도가 없었다. 주인이 돈을 내주어서 저녘 식사만은 접대를 하였으나 밤에 나무조각 투성이의 방에서 주무시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선생은 그동안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나 금후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꿈과 같은 이야기 뿐이었다. 흡사 몇 십년만에 만나 밤이 깊도록 둘이서 이야기를 했고, 다음날 문선생은"오늘은 부산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내 기분 같아서는 여기에 방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여기서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 할만한 활동을 해서 문선생과 함께 있고 싶은 심정 이었지만 아직 상황이 좋지 못해서 할 수 없는 노릇 이었다.
마침 그날은 울산에 장이 서는 날이라서 문선생과 같이 기차로 가기로 하였다 오전중 내가 시장에서 밥상을 팔고 있는것을 문선생은 보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문선생은 기차로 부산으로 떠났다. 밥상이 많이 팔리면 용돈 이래도 드릴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하필 그날은 웬일인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경주에서 헤어지고서 1년만의 재회이었는데 문선생을 전송하고 돌아온 나는 정말로 깊은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무엇이든 장사를 해서 자금을 마련해 가지고 부산으로 가서 문선생과 함께 위대한 사업 달성에 힘쓰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원필은 식당에서 일하고 있고, 문선생 자신은 일본의 공업학교에 함께 유학하였던 동창생 집에 식객으로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계시기에 무척 불편 하실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실은 이때, 그는 나에게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상태를 보러 온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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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만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수 있을까 하는 것을 나는 늘상 생각해 왔다. 날마다 변함없이 밥상을 운반해다가 시장에서 파는 것이 내 일의 전부였다. 이러한 일거리라도 열심히 붙잡고 있으면 기회 가 찾아을 것이 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 고 여기서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것일까? 아니면 집어 치우고 부산으로 가는 편이 났지 않을까도 생각 하였으나 아직 피난민으로 가득한 부산으로 간다 한들 별 볼일이 없을것 같이 생각되어 좀더 경주에 있기로 하였다.


평양에서 온 옥상현과의 재회


공산군에 의해서 2년전의 1월4일 재차 함락된 서울은 꼭 두달후의 3월 4일 UN군이 탈환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이무렵 일진일퇴 하면서도 간신히 전황은 시드러 들기 시작해서 휴전협정의 준비가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민간인의 사상자만도 남북 합해서 2백만명 이상, 이산가족도 일천만명을 넘는다고
하여 국민간에 불안과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있었다.

그러한 1953년 봄 부산에서 저 옥상현 할머니가 경주로 나를 찾아와서 오랜만에 대면하였다 평양에서 피난 할때에 헤어져서 서로 알길이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가웠다.
옥상현은 그녀의 피난 이야기와 부산의 문선생의 안부와 식구들을 키우는 일에 열중하고 원리를 책으로 만들기 위해서 원고를 써냈다는것, 흥남감옥 당시에 이야기 했던 원리를 정리해서 출판해야 하겠다고 항상 문선생이 이야기 하던 것을 생각하고 이렇게 엄청난 피난 생활 중에도 기어히 써 냈구나 하고 감격하였다.

하루 빨리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해서 원리를 출판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전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옥상현의 장남이 군인용 트럭을 가지고 온 덕분으로 가족전원이 무사히 남쪽으로 올수 있었던 것이다. 자리잡히면 부산에서 함께 일할수 있게 하루 속히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문선생과 함께 6,000년전의 하나님의 뜻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할때가 이제 곧 다가 올것 등등 열심히 이야기 하였다 원필은 지금 미군부대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범일동에 교회를 마련하여 새로 입교한 식구들이 원리를 들으려고 모여들게 되었고, 평양에 있던 식구들도 부산으로 와 있다고 한다. 교회의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문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왔던것 같다.

옥상현은 하루밤을 같이 지내고 다음날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동만 있다가 이요한 이라고 하는 목사가 나를 찾아 왔다. 부산에 있는 문선생이 보냈다고 하는 것이었다 방으로 안내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새로운 식구들이 많이 모여와서 원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으므로 박정화씨도 선생이 계시는 부산으로 발리 오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하나넘을 위한 위대한 사업에 전진할 시기가 지
금 막 왔다고 가슴이 벅차 있었다.

그 다음날 이목사는 부산으로 돌아갔다. 나도 곧 부산으로 간다고 문선생에게 전하도록 부탁을 하고 혼자서 생각하였다. 저 흥남감옥에서 문선생이 빈 가마니 위에 앉아서 눈을 감은채 신비의 세계를 변화하게 할 이상, 즉 "원화원 이상(圓和園理想)"의 세계를 실현시키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나에게 말한 것을 생각 하였다. 그 때의 전경이 눈에 아물 거렸다. 희망의 세계가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

죄악이 없는 세계, 그리고 질투, 음모, 배신, 전쟁 같은 것이 없는 세계, 그 이상세계의 회원만 된다면 노동은 취미로서 하루에 세시간 정도만 하면 된다.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갈 수 있게 되고, 회원 집에 가면 자고, 먹고, 쓰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받는것 보다는 주는것을 기뻐하는 세계, 남을 책망하지 않으며, 존경을 받기 보다는 존경
하는것을 기뻐하는 세계, 이 이상세계가 지구의 구석 구석까지 넓혀져서 우리들은 어느 나라와도 마음이 상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가까운 여기 지금 부산에서 고생하고 계신"문용명 선생"에 의해서 완성 될것을 생각한다면 감사할 뿐이다.


나는 한시바삐 부산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마음에 재촉을 받았다.

 

 

제3장  통일교회의 창립전후

 


여신도들의 열의

 

부산 수정동 교회

 

나, 박정화는 1953년 5월 15일 새로 사드린 부산 수정동의 집으로 문선생을 찾아갔다. 문선생은 대단히 반가워 하며 그간의 경과와 금후의 계획에 관해서 자세히 들려 주었다.
마침내 위대한 사업을 위해서 일 할때가 왔다. 마음 단단히 힘써 나아가자고 문선생은 말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많이 들려 주었던 6,000년의 역사의 과정, 창조원리, 타락원리, 복귀윈리, 재림예수의 사명과 그 자세등을 종이에 써 가면서 개인교수 하는것 처럼 가르쳐 주
었다.
문선생은 어느새 이름자의 용(龍)을 떼고 문선명(文鮮明)으로 바꿔 쓰고 있었다.
그 당시 동거하고 있었던 주된 식구들은 김원필, 정성옥 강옥실*,옥상현*, 지승도, 이기환, 이봉운, 이수경과 그가족, 문선생의 처, 최선길과 장남인 성진, 이요한 목사등 이었다. 새로 들어온 식구로 예배에만 참가하고 있던 사람들은 신정순, 김안실, 김재책, 김복순과 그가족, 오명춘 등이었다. 장남은 별로치고라도 김원필, 이봉운, 이수경,이요한 외 에는 모두 여자이다.

당시 김원필은 미군부대에서 일 하고 있었는데, 저녘때가 되면 미군들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데 울산에서 왔다는 젊은 부부가 새로 들어 왔다. 어느날 그 부부는 하루종일 전도하러 나가서 밤이 늦어서야 돌아왔는데, 성령에 열중한 나머지 딴 사람같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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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날밤은 월식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그 부부는 하늘에서 빛이 비쳤다고 큰 소리를 지르며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월식이라 설명을 해서 간신히 진정하게 한일도 있었지만 또 어느날오후 지승도, 옥상현*, 이기환 등이 영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너무나도 신비스러움에 홀려서 실신한 일도 있었다.

몇일후에 문선생 이 나를 불렀다.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서든지 경제적기반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어떠한 사업을 하면 좋을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요. 무슨 좋은 사업이 없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던 때에 알고 지내던 김동기라는 사람을 만나서 의논하였다.
그foT더니 그는 "친구와 공동으로 전매청에 새끼를 납품하는 계약을 체결 하였으나 자금이 딸려서 계약량의 남어지를 납품하지 못하게 되였다고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돈을 받지 못하게 되는데‥‥라고 말하면서 나머지의 납품을 나에게 맡겨도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반가워서 이 이야기를 문선생에게 전했다.

문선생은 곧 부인 식구들이 헌납한 귀금속 따위를 처분해서 37,000원이란 자금을 마련되었다. 그 돈으로 새끼를 생산하고 있는 삼천포의 흥해로 가서 새끼를 사다가 부산전매청의 창고에 납품하고 납품서를 받는것이 나의 일과로 되어 농촌에 몇일씩 묵으면서 "새끼"를 사
모아 가지고 화물차에 실어 운반하고, 또 삼천포에서 배편으로 운반하기도 하였다 6월 20일경에 일을 시작해서 새끼를 생산하는 농가를 찾아 다니며 계약잔량을 거의 다 채워가고 있었다.


최선칠(문교주의 본처) 부인의 큰난동


그러던 어느날, 삼천포로 이봉운 장로가 별안간 예고없이 찾아 왔다. 이장로는 수정동의 교회에 큰 일이 벌어지고 있오이다.최선길씨가 문선명선생이 부인 식구들과 복귀의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난동을 벌려 식구들을 전부 내쫓아 버렸다.
그리고 수정동의 교회를 최씨가 가재도구채 팔아 치워서, 교회가 없어져 집회도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되도록 빨리 돌아가십시다.
그래서 나는 급히 각지를 돌며 새끼 계약잔량을 조달해서 전매청에 완납하는 절차를 취했다. 계약조건과 새끼의 매입가격과 경비를 계산해 보니까 30,000원이나 이익이 남은 것을 알았다.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 오니까 문선생은 최선길에게서 도망치듯 주된 식구들을 데리
고 서울로 가고(9월17일), 원필도 영도(부산교외 마을, 열심인 식구의 집에 있고, 전도의 거점이 되어 있었다)로 도망갔다라고 한다.

이봉운장노는 대지공원에 판자집을 한채 사서 그리로 이사해서 거기서 임시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수정동 교회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들어 와서 살고 있었다. 최선길의 대 난동으로 부산의 수정동 교회는 어처구니 없이 날라가 버린 것이다. 나는 하는 수없이 여관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서울로 갔다.
서울에 있는 식구들에게 물어서, 청진동에 있는 문선생을 심방 하였더니 반가이 맞아 주었다. 불문곡직 하고 나는 그동안 새끼 납품결과를 보고하고 내일 부산으로 가서 납품서를 받아오면, 전매청에서 돈을 받을 수 있게 되고,그 이익은 30,000만원 정도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때 청진동에 문선생과 함께 있던 사람은 옥상현*, 신정순*, 양윤신*, 오명춘*, 이순철*.이 성화* 등 7-8인인데 여자 식구들 뿐이 었다. 나는 그다음날 기차를 타고 부산의 전매청지점에서 납품서를 받아 들고, 또 기차를 타고 되짚어 서울로 돌아왔다.

문선생에게는 낮 12시에 도착한다고 전보를 처 놓았으므로 그길로 바로 청진동 집으로 직행하니까 문선생도 여자식구들도 어디론가 가고 없어서 행방을 알수가 없었다. 그대신 최선길이 혼자 지켜 앉았고 최부인은 가재도구 같은것을 전부 처분하기 위해서 짐을 싸기도 하였다.

문선생 앞으로 보낸 나의 전보를 보고 나라면 문선생의 거처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재도구 중에는 문선생의 성경과 찬송가, 그리고 놀라운것은 원필이 정서한 원리원본까지 들어 있지 않은가. 나는 필사적으로 최부인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찾으면 선생 계신 곳을 알수 있을 터이고 알게되면 반드시 연결 할것이니 성경과 원리원본 만은 나에게 돌려두세요. 최 부인이 나에게그 서 류들을 건네 주었음으로 가지고 돌아 갈수가 있었다. 만약 그때 원리원본을 되돌려 받지 못했더라면 나중에 원리해설을 정리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후 옥상현*, 신정순등과 만났으나 그녀들도 문선생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녀들이 내가 서울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물어 보게 되면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문선명의 복귀 의식이란 미명을 빌어 눈에 넘치는 난맥상을 이룬 성교로 화가 치민 최 선길 부인은 수정동 교회에서 대난동을 피워서 여자 식구들을 두들겨 내 쫓았다. 겁을 먹은 문선명은 여자들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해서 청진동에 있는 으슥한 집을 빌어서 여인들과 살았다.

그러나 그것도 겨우 1주일만에 최부인에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내가 부산의 전매청지점에서 돌아오기 직전 문선명은 혼비 백산할 지경이 되어 여자들을 사방으로 분사시키고 목숨보다는 귀중하게 여기는 원리원본의 초고도 그대로 놓아둔채, 최 부인에게서 도망쳐 버린것이다. 여자식구들에게 포위되어 산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소란한 "여국나라"를 의미 한다.
왜냐하면 문선명을 둘러싼 여자 식구들은 복귀원리에 따라 몸을 내놓으면 소생, 장성, 완성, 복귀에 미달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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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문선명 선생으로 우러러 그 원리를 맹신하고 있던 나는, 때로는 복귀의 실제현장인 성교를 목격하기도 하고, 실제 의식에 걸맞지 않는 여자식구들의 광기나 교성을 직접 보았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메시아로서의 임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한편 아무리 생각해도 모른것은 무엇때문에 수차에 걸쳐 꼬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최부인에게서 도망을  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메시아라면 처 앞에서라도 당당하게 하면 좋을텐데, 처 한사람 전도를 못하고서 어떻게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새삼 솟아 난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렇게도 귀중한 전도에는 없어서는 아니 되는 원리원본을 내 팽개 치고 줄행랑을 처버린 문선명에게 언행 불일치의 의심을 품게 된것도 사실이 었다.


청진동에서 도망친 문선명은 또 다른 곳에서 여자들과 함께 지냈는데, 그것이 또 엉뚱한 사건으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경찰서에서 전기고문


그날은 청계천에 있는 여관에서 일박하기로 하였다. 마침 잠이 들 무렵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까 "이방에 박정화라고 하는 자가 묵고 있는가"고 말한다.

"내가 박정화요" 말하자 종로경찰서의 형사라고 말하면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며 묻고 싶은것이 있으니 경찰서까지 같이 갑시다라고 말한다. 갑작 스런 일이라서 영문을 몰랐지만 따라 갈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당신은 모든것을 다알고 있을 것이다.

문선명은 지금 어디 있는지 바른대로 대라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므로 "모른다"고 할수 밖에 없었다. 이쪽 저쪽에서 질문이 있었으나 "정 말 모른다"고 대답하였더니  그 형사는 "그러면 알도록 해주지"라고 하더니 밧데리를 가져왔다. 그리고 밧데리에 연결되어 있는 두 줄의 전기선을 나의 양손 엄지 손가락에 붙잡아 매고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몸 전체에 이상한 고통이 흐르더니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이래도 모른다고 할테냐!고 하면서 점점 더 세게 돌렸다. 온몸이 찌릿 찌릿 경련을 이르켜 내 몸이 내몸이 아닌것 갔았다. 손잡이를 돌리다가는 그치고, 그치다가는 돌리면서 욕설을 퍼 웃기도 하고 때로는 간사한 목소리로 말 하기도 하는등 거의 3시간 정도나 짓궂게 계속 당했다 나는 "죽일려거든 죽여라 모르는 것은 모를 뿐이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랬니 옆방에서 계급이 높은듯한 이가 나와서 "말씨를 듣자니까 평양사람 같은데, 그런가?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 하였다.
그 사람은 나도 평양 출신이요. 동난이 끝난 후에 남쪽으로 와서 경찰서에 근무하고 있오, 그리고 고문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심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풀어주라고 해서 고문을 중시시켰다. 아침까지 심문을 받고 아침 아흡시가 지 나서 야 겨우 석방 되었다.


하늘의 뜻에 관한 시험


경찰서에서 나온 나는 씁쓸한 조반을 먹은후에 엄덕문을 찾아서 YMCA 옆에 있는 3층집으로 갔다. 그때 거기에 건축설계 사무소를 열고 있었다. 내가 서울로 온것을 그는 무척 반가워 하며 문선생 있는 곳을 지도를 그려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전매청 볼일을 끝마치고 나는 그날 저및무렵 문선생을 만나러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옥상현 등 부인 식구들에게 붙들려서 나와 같이 문선생한테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경찰에서도 찾고 있고 해서 지금은 도저히 무리라고 말해서 어떻게든지 설득하려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마침 그때 소낙비가 퍼못기 시작했다. 그여들이 우왕 좌왕하고 있는 틈에 나는 버스에 뛰어 오르고 말았다. 안양에서 내려서 1키로쯤 가면 길가쪽으로 남향 받이의 작은 집 한채가 있다고 들었으므로 곧바로 찾을수가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니까 문선생과 이순철이 같이 있다가 무척 반가히 맞이해 주었다. 우선 나는 전매청 관계의 업무의 경과와 어제 있었던 경찰의 사건을 간단히 보고 하였다.


그후에 문선생에게 이순철이 만든 하늘의 계시에 관한 시험을 받도록 말하였다. 문제를 보고 답을 썼더니 문선생이 "좋아 합격이다"라고 말하고 어제 엄덕문도 시험을 받았다 그도 합격하였으므로,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장남이고,정화는 다음에 합격 하였으니까 차남이다 라고 말했다. 그때 이철순은 영계의 계시라고 이불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방 가득히 솜이 널려 있었고 그것을 자기전에 치우는 것이 큰일이었다 (후술)


노한 이순철*의 남편

 

나는 이틀동안 그곳에서 지내고 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이순철*의 남편이 눈에 쌍불을 켜고 문선생을 찾으려고 사방 여러곳에 수배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금 이대로 지금 집에 있는것은 위험해서 그 다음날 나와 함께 문선생과 이순철*세사람이 부산으로 가게 되었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었으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산까지의 직행표를 살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안양에서 수원까지 가서 일박, 그후 대전, 대구, 마산에서 각각일박, 5일만에 겨우 부산에 도착하였다. 우선 세사람이서 서면에 있는 거제여관에 한동안 유숙하기도 하였다.

그 이틀후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도록 고생하며 부산까지 왔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김안미라고 하는 여자 식구가 여관까지 찾아 왔다. 그녀는 6마리아(문선명이 복귀한 유부녀중-후술)의 한사람이었는데, -문선생이 뒤에 6마리아가 된 이순철만을 데리고, 부산쪽으로 내 뺀 것을 괘심하게 생각하고 여기까지 이를 잡듯 찾아 왔다고 하는 것이다. 김안미 와 이순철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자기들의 영적인 지위다툼으
로 여자끼리의 싸움이 더욱 귀찮게 되었다. 알기쉬운 이야기로 질투의 불꽃이었다.

나는 김안미 를 불러내서 문선생의 상황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지금 매우 복잡한 상태에 놓여 있어서 틈만 생기면 사단이 언제라도 참소 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하시려고 하는 계획의 장애가 된다. 선생은 한동안 이대로 부산에 계실 모양이니까 우선 조웅히 하는것이 좋겠다고 간청하였더니 김안미는 노한 채로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들은 부산에서 5일동안 유숙하고 또 서울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오명춘*이 손을 써서 친척집을 빌어서 문선생과 신당동 중택에 있는 어느집에 살게 되었다. 이순철*은 자기집에 돌아갔으나 노한 남편에게 두들겨 맞아서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고 백인제병원에 입원하였다.

문선생과 나와 오명춘*과 함께 병원으로 문병을 갔으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예감 들어서 다시 오기로하고 바로 돌아섰다. 나중에 오명춘써 말에 의하면 문선생과내가 병원을 나온 즉시, 이순철의 남편이 들어가 "지금 나간 남자들은 문션명과 박정화가 아닌가"고 다그치는 바람에 어물어물 둘러대느라고 혼이 났다고 한다.

만약 그때, 남편이 문선생과 마주쳤다고 하면 큰 사건이 일어날것은 틀림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선생을 둘러 싼 여자 문제가 여기 저기 일어나 그야말로 나도 손들고 말 지경  이었다.

복귀원리를 구실로 삼아 유부녀던, 처녀던, 눈에 나타나는 여인들은 조만간에 문선생과 성교하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남편되는 자나 부모들은 노할 것이다. 그중에는 어머니와 두딸까지 세사람과 관계를 한일도 있다.

대사건으로 되지 않았던 것은, 이것도 하나님의 가호 라고나 할까?

이동안에 청진동 집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이렇다. 부산에 있던 문선명이 서울로 도망처온
뒤에 본처인 최선길은 남편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서 청진동으로 찾아왔다.부산에서는 최선길이 부인 식구들을 모두 내쫓고 문선명이 자유롭게 나갈 수 없도록 해서 화장실에 가는것 까지도 엄하게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마침 흥남 감옥에 있을 때의 제자이던 김원덕이 문선명을 찾아왔다. 이 모양을 보고  그는 성진의 어머니이며 본처인 최선길에게 이러한 것을 해서는 안된다고 화를 내고 문선명을 끄집어 냈던 모양이다. 최선길이 김원덕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은 것은 그 당시 치안국에 근무하고 있던 현직 경찰관이었던 김원덕이 문선명이 무슨 일이 있어서 연행되게 되면 바로 석방해 주던 전예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믿지 않는 남편을 서울까지 쫓아 온 최부인은 청진동 집에 내가 와있으면 문선명의 거처를 알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라갈 작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청진동 집에서 도망친 직후 문선명은 이순철과 서울역 앞에있는 여관으로 가서 영적인 의식이란 명목으로 처녀인 이성화와 복귀의식을 행하였다.
요컨대 세사람은 거기서 영적인 의식이 아닌 육체적인 의식 즉 성교를 하였을 뿐인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복귀의식은 그 옆에서 다른 식구가 증인으로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 날은 이순철이 증인으로서 협력하였다. 이성화는 처녀였으므로 절차는 "어린양 잔치 (묵시 록 21장 9절)"를 올려서 말하자면 정식으로 결흔해서 문선명의 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순철은 이성화에게 이때 "미래의 어머니께"라고 말하며 값비싼 금반지까지 선물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당사자인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들은 것이니까 틀림 없는 일이다.

 

 

부산 영도(謄島) 집회

 


여자대학생 린영희의 비극

 

그 무렵 나는 대구를 거점으로해서 문선생과 함께 이곳 저곳 식구들에게 원리강의를 하기  위해서 각지로 나돌아 다니고 있었다. 또 문선생의 지시로 부산이나 서울에 가서 식구들에게 문선생 이야기를 전하기로 하였다. 그 당시는 아직 기차여행이 대단히 힘든 시대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꼭 12시간이 걸렀다. 추풍령에서 부터 대구까지는 군사상 차내의 등불을 모두 꺼 버렷으므로 캄캄하였다.

한밤중이 되면 난방까지도 꺼 버렸고, 창유리도 거의 깨져 있어서 겨울에는 대단히 추웠다. 유리가 없는 창에서는 연료로 쓰는 석탄의 연기나 냄새가 스며들어 터널에 들어갔을 때에는 질식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문선생과 함께 있던 어느날, 부산의 이봉운 장로에게서 "부산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자 방도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부산까지 와 주십시오"라고는 하지만 부산까지의 여비가 없어서 난처하게 있는 터에 마침 오명춘 집사가 왔다. 그녀가 여비를 마련해 주어서 그날밤 문선생과 함께 다음날 아침 8시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봉운장로를 위시해서 10여인의 식구들이 마중을 나왔다. 문선생이 부산까지 왔으므로 모두 기뻐하며 인사를 한후, 택시로 시내의 영도로 갔다. 이 날은 1953년 12월 24일이었다.

안내된 곳은 허술한 집이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넓직한 방이었고 잘 정리되어 있어서 식구들의 성의가 나타나 있었다. 이집 주인은 신성묵이란 사람인데 유신희와 부부였다.

아침을  마치고 문선생은 여느때와 같이 원리강의를 시작하였다. 유효원이란 사람은 결핵성 고관절 유착으로 굳어 버려 앉아 있을수가 없어서 누워서 강의를 듣고있었다. 이 사람은 무척 과민한 성격인듯 누구 옆에서 기침을 하면 표정으로 그것을 제지하기도 하였다.

28인 가량이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방안은 무척 조용해서 엄숙한 분위기였다. 식사 이외에는 휴식시간도 없이 강의는 밤중 한시, 두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듣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는 시종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날 처음으로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은 유효원, 유효영의 형제, 신성묵,유신희 부부, 김관성, 차집사등.

식구들은 신정순, 옥상현, 이기환, 지승도, 양윤신, 오명춘, 이봉운장로, 그리고 가족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 김 영희*라고 하는 여자대학생이 처음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그녀는 교인인 양윤식의 질녀로 연세대학 학생이었다. 성적이 우수해서 장래성이 있는 학생 이었으므로 대학 총장에게도 귀염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언더우드 총장이 귀국할 때 그녀에게 1년분의 학비를 선사해주었다. 그러한 큰돈을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숙모인 양윤신에게 전액을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양윤신은 식구들의 경제사정이 대단히 말이 아니었으므로 교회를 위해서 문선생께 몽땅 바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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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이 시작되고 돈을 전부 써 버린것을 안 김영희는 노했다. 그래서 숙모가 다니는 교회가 어떠한 교회이고 무엇을 가르치며 선생이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고나서 항의하려고, 아침부터 밤까지 꼼짝을 하지 많고 그녀는 문선생의 강의 를 듣고 있었다.


밤중에 폐회가 되어 참가자의 태반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집 단칸 방에서 문선생과 남자 두사람, 옥상현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김영희의 여자 5인이 함께 자게 되었다.
이것이 부산 영도 집회의 첫날밤이었다.
실은 여기서 처음으로 밝히는 바이지만 김영희는 이날밤 문선명과 성교를 한 것이다.
같은 방의 맨 아래목에 문선명, 그다음에 나, 그리고 여섯사람의 여인들이 이름은 든 순으로 누웠다.  나는 고단했으나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는데 묘한 기척에 눈이 띄었다. 내 옆에 누워있던 문선명의 자리에서 비명소리도 허덕임 소리와도 같은  여자의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것도 반대편 끝쪽에 누었던 김영희의 소리였다. 문선명의 성교를 여러차례 목격해온 나지만 이것은 정말로 놀랐다.
복귀원리로 설득을 당한 그녀가 먼저 그했는지 몰래 문선명이 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것이 복귀의 의식 따위가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약한 처지로서의 나로서는 잠자코 옆의 행위에 자는 척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다른 5인의 여자들은 한사람은 마리아이고, 다른 4인도 이미 문선명과 관계가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후술한다.

또 그후 김영희는 문선명의 아이를 임신해서 실로 비참한 인생 첫발을 걷게 되었다.


수사기관에 쫓기는 나날


그 다음날도 똑같이 선생은 강의를 하였고, 유효원은 열심히 메모를 해 가면서 듣고 있었다. 수염을 기르고 있던 김관성은 한방의라고 자기 소개를 한 사람인데 역시 열심히 듣고 있었다. 집주인인 신성묵도 강의에 빨려 들고 있었다.

그의 처 유신희도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후에 서울로 가서 문선생에게 복귀를 받게 되었다. 약 3주간이 지나니까 식구들은 문선생의 강의를 되풀이해서 듣고 있어서 찬송가와 기도를 할때에는 딴 사람 같아서 성령이 충만해서 큰 소리로 울기도 하였다. 이집에서는 사람이 모이면 아침부터 저녘까지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해서 곧 근처 사람들의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고,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수사기관에 조사를 부탁하였다는 소문도 들려 왔다.

뿐만 아니라 또 평양에서의 식구의 가족 중에서 남으로 와서 검사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어서 기회만 있으면 선생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어서 부산영도의 집회를 중지 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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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 무렵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한테 쫓기는듯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나와 문선생은 여기 저기를 돌면서, 고심하고 있는 식구들과 그가족을 격려 하고 있었지만 겨우 방을  얻더라도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문선명이 어디 어디에 있다고 하는 소문이 나서, 수사기관에서 사람이 조사를 받는 상황이 계속되곤 하였다.

이유는 문선생이 이전에 북한에서 사회질서 문란죄로 복역한 사실이 있어서 남쪽으로 가서도 또 고치지 못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것이, 북에 있던 식구의 가족들이 남으로와서 수사기관에 들어간 사람이 보복을 겸해서, 뒤쫓아 다니고  있기 때문 이었다.

식사는 동대문에 있는 이창환의 형이 경영하고 있는 대중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종로에 있는 여관에서 숙박하면서 작업하는 날이 열흘쯤 계속되었다. 우리들은 어떠한 괴로움도 참아 낼수 있었으나,여관주인과 식당주인들은 왜 그런지 우리들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대구에 있는 문선생을 찾아가 사정을 보고 하였더니, 5만원을 내 주면서 부산에서 간 양윤신과 함께 방을 마련해서 유효원과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곧 서울로 돌아와서 성동구 북학동에 방을 빌려 우선 되는대로 본거지로 삼았다.

이곳에 숙식을 같이 하고 있던 식구는 나, 유효원, 유효민 세사람 이었다. 이창환은 날마다  와 있었고,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 옥상현,이기환 등 여자식구들도 매일같이 와서 여러가지 일을 협력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선생이 별안간 대구에서 서울로 왔다.
그런데 바로 그날밤 시경에서 왔다고 하는 6~7인의 남자가 신분증명서를 보이면서 시경까지 같이 가자고 말한다. 거기에 있던 전원이 연행되었는데 특별히 이렇다할 조사도 받은것이 없고, 일반적인 종교문제에 대해서 물었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통행금지 시간이 되여, 그날합은 시경에서 자고 아침에 돌아온 일이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연행사건 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양윤신과 함께 여러가지 가재도구를 사러 갔다. 이렇게 함께 장을 보노라니까 그녀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양여사는 년령이 나보다 훨씬 아래였다. 인생은 길어야 할 터인데도 그녀는 몇해후에 나보다 앞서 죽고 말았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에게도 알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그녀가 우리들의 교회에 들어 와서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복귀 받으려고 그녀는 대단히 노력한 사람이었다.
식구들이 점점 늘어나 이제까지 쓰던 방으로는 식구들 전원이 함께 일하면서 지내기가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같은 북학동에 있는 대문이 셋이 나 있는 큰 집으로 옮겼다.
문선생은 그집의 남쪽에 따로 방을 빌렸다. 식구들이 많이 모여서, 부산에 있던 이수경, 김상철과 이창환도 함께 있었다. 이즈음에 유효원 동생 효영씨가 조기 잡이를 하던 차에 금빛 같은 조기를 한 가마니 갖어와 식구들이 포식한 일도 있다. 또 잊을수 없는 일이 하나가 있다.

어느 정치가가 지능이 좀 떨어지는 딸을 한사람 우리들의 교회로 데려고 왔다. 이 교회에  한동안 맡겨 두면 낳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덟살 된 그 아이는 식사를 하고 있노라면 꼭 똥을 싸기 때문에 모두들 큰 일이었다.
그래도 함께 기도를 받던지 하면 기적이 일어 날지도 모르겠다고 우리들도 생각해서 열심히 참고 견디어 봤다. 그러나 1년이 경과해도 상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서 부모들은 그
아이를 데려가고 말았다.

이 무렵 이수경은 우리들 식구의 생활비 때문에 일하러 나가서 사진에 색을 칠하는 작업을 해서 돈을 벌어 온일도 있다. 이창환은 교회의 전도문을 영문으로 작성해서 세계각국의 유명한 인사들, 특히 유명한 목사등 백여명에게 발송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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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다 동쪽 나라에 재림메시아가 왔다. 숭배하자. 의심스러운 자는 기도를 통해서 들어 봅시다. 그리고 문장 끝머리에 이창환 자신의 사진을 붙여서 발송하였다.
이러한 작업으로 아침부터 저녘까지 분주 하였다. 유효원은 매일 원리해설 집필에 몰두하고 있었고 유효민과 나는 줄곧 원리 원본을 베껴 쓰고 있었다. 유효원이 어느때 「이 원리는 모순이 잔뜩 있어서 잘 모르는 곳이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나에게 말했다. 둘이서 문선명에게 철저히 질문 하였더니 그는 대답을 못하였다.

유효원은 뒷일은 하늘에 맡길수 밖에 없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자기류로 집필하였다. 김상
철은 이무렵 영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하게 되어 여권 수속을 하는 서류를 써 달라고 나에게 부탁 하기에 써준 일이 있다. 김재근(대구할머니)이라고 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대구에서 서울로 와서 한 겨울에도 우물가에 가서 냉수를 퍼끼었는 일을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늦으신 분이라서 병이라도 나면 안된다고 염려 하였지만, 무척 건강해서 열심히 견디고 있었다.
이 무렵 부산에서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하던 송도욱이란 사람이 입교 하였다. 병역을 기피하고 있던 김원필은 영도의 송도욱의 집 이층에 방을 하나 빌려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당시 부산에는 식구들은 그리 많지 않으나 서울에서는 낮에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 이순철, 김인주등의 부인 식구가와 있었지만 임영신이란 미망인이 새로 유효민의 전도로 들어 왔다. 그녀에게는 어린딸이 있었는데 부산의 송도욱의 집에 맡겨서 길러 달라고 하였다. 임영신은 식구들의 식사 준비를 돕고 있었다.

이 당시는 식구들의 생활비가 큰 일이었다. 유효민은 본래 사진업을 해서 솜씨도 좋았으므로 시내나 지방을 돌아 다니면서 각지의 여러 유적지를 사진으로 찍어다가, 그것을 푸로마이드로 만들어서 파는 장사를 생각해 냈다. 우선 닥치는대로 해 보니까 예상외로 잘 팔렸으므로 우리들은 푸로마이드 제작에 온 힘을 쏟게 되었다.

나는 사진에 광택을 내는 일을 담당하여 밤중까지 작업을 하였다. 임명신도 부엌일이 끝나면 바로 사진을 씻는 일에 열중하었다. 식구들이 힘을 합해서 푸르마이드를 대량으로 제작 하였다. 이 일이 적중해서 한꺼번에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 식구들의 생활비를 모두 충당 할수 있게 되었다

1954년 5월3일 성동구 북학동 391에 있었던 교회에서 문선생을 중심한 이창환, 유효원, 김상철, 박정화, 유효민의 다섯 사람이 에워싸고 있었다. 드디어 문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전세계에 원리를 포교하기 위한 일을 개시하는 날이 왔다.

우리들은 어떠한 명칭으로 하면 좋을까 하고 의논 하는데 우선 세계의 기독교를 통일 한다고 하는 목적에 알맞게 "세계기독교통일"이라고 하는 머리글자를 붙이기로 하였다. 그 다음을 "심령협회"로 할것인가 신령협회"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논이 있었지만 나는"신령협회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해서 최종적으로 "신령협회"로 결정 된 것이다

이리하여 원리를 내세워서 전세계의 기독교를 통일하려고 하는 종교단체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 統一神靈協會)"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창립되게 된 것이다. 초대협회장에는 여러가지 의논한 결과 이창환이 취임 하였다 그런데 그는 3개월만에 탈퇴하고 말았다.
(주=현재는 5월1일이 창립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5월3일 이었던 것이다.)

 

이화여자대학 사건무렵

 

교수와 학생들의 대거입교

 

서울의 명문교 이화여자대학의 음악교수 양문영*이 입교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녀는 3일간 文씨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더니 기적이 일어나서 성령이 충만한 그녀는 별안간 지금까지 사단에서 가로막했던 벽을 차고 떠들어 대면서 발로 벽을 걷어 차는등 크게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그 후 신당동의 양문영 여사의 집에서 유효원이 매일같이 원리해설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이화여자대학의 기숙사 사감인 한충화가 입교해 왔다. 또 같은 대학의 영문과 교수 최원복과 김영운, 연세대학의 교수 박상래 ,학생인 유경규, 황환채, 오승택도 입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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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서울로 온 식구중에 유신희라고 하는 여성이 있었다. 저 영도집회때 집을 빌려  준 신성묵의 처이다. 그녀는 어느날밤 교회 옆에 방을 빌려살고 있던 文씨의 방을 찾아가 방을 노크하니까 누구냐고 가만히 묻기에 신희입니다 라고 이름 대자 들어오라고 하여 안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복귀의 실천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때에는 이미 복귀를 받았던 김인주가 복귀에 대한것을 귀뜸 하였다. 김인주에게 권유를 받은 유신희는 용기를 내서 복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후에 유신희는 여러 남성 식구들과 복귀를 하였다. 나도 실은 유신희와 복귀를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바로 뒤에 등장하는 김 덕진과도 복귀를 하고, 나아가 김 덕진은 다른 여성과 복귀 하고 그 여성은 또 . .  별안간 70몇 사람의 바퀴가 되고 말았다. 그후 목사가 된 김덕진은 너무나도 난맥을 이룬 통일교회의 섹스를 스스로 고발하고 책으로 해서 발표하겠다고 선언하여 큰 소동이 일기도 하였었다.
(후술)


김덕진(金德振)이란 사나이

 

그 무렵 나는 매일밤 10시경까지 사진의 광택을 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검은 UN군 코트를 입은 청년이 찾아와서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여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물으니까, 김덕진이라고 하며 북쪽의 숭실전문학교의 문과 출신으로, 간첩죄로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을구형 받었으나 판결은 무기징역으로 복역중에 재심에서 무죄가 되어 남쪽의 동촌육군형무소에서 나온 길이라고 한다. 그리고 형무소 안에서 만난 이석빈이란 사람이 문선생에게 전해달라며 "아버님께"라고 쓴 편지 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를 문선생이 있는 양문영의 자택으로 안내 하였다. 그에게는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작곡과 작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입교하자 마자 곧 성가(찬송가)의 작곡과 작사를 하기도 해서 문선생도 그 음악적 재능을 칭찬하고, 식구들 중에서 제1번으로 문선생에게서 양복을 얻어 입는 영광을 맞았다.
식구들도 늘었다. 김찬균, 정린정, 안창성, 강정원, 차만춘, 이소담, 유광렬, 이진태, 박승규, 이월성, 김원민, 황은자, 지생연, 유동회 등이다.

그 다음에 들어온 이는 지원대, 안정국, 김순화, 신미식,정대화, 김주화, 이관선, 이기석, 박봉애, 남궁철, 이영일, 최정순,이인복, 김화영, 김정은, 사길자, 박영숙, 서명진, 이정호, 김영휘 등이다.

교수에 이어서 이화여자대학 학생도 많이 입교 하고 있었으나, 이단적인 신앙을 이유로 14인이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전에 교수들은 사표를 내고 퇴직하고 있었다) 퇴학이 된 학생은 신미식,사길자, 김정은, 서명진, 박승규, 정대화, 박영숙, 박승희, 이계순
정원, 최순화, 김숙자 들이다.


대구에서 또 전기 고문

 

본부교회는 다음해인 1955년 1월 북학동에서 같은 성동구의 흥인동에 있는 새 집으로 이사 하였고, 또 다시 3개월 후인 4월 27일 중구의 장충동으로 옮겼다.
이전하고 얼마 안되는 5월 13일 교회로 치안국의 형사 2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교회에 스며들어 우리들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고 경찰의 수사관도 버티고 있었다. 경찰의 수사에는  꽤 익숙해 있는 편이었지만 이번만은 좀 다르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수사관이 투입되어 있었다.

그러한 긴박감을 알지 못하고 지방에서 온 나이든 여자 식구들은 기가나서 떠들거나 날뛰고 있어 상황을 이야기하고 주의를 한일도 있었다.

대구에 있는 문선생 한테로 가서 이 상황을 보고 하고 금후의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서 나는 서울역으로 나아갔다. 그때 역에는 김영희*가 와 있었고 황환채등이 전송하러 나와 있었다. 나는 김영희가 부산에 가는 목적을 알고 있었으므로 대구까지 함께 가기로 하였다.

앞에서도 기술 하였지만 김영희는 연세대학의 학생시절에 부산의 영도에서 문선명에게 정조를 때앗긴 여성이다. 자세한것은 후술 하겠지만 이때 그녀의 배는 출산 직전이어서 제법 눈에 띄이고 있었다.
연세대 재학중인 오승택도 함께 일본에서 출산을 돕기 위해 부산에서 밀항하려는 참이었다. 그리고 대단한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대구에 도착해서 우선 이요한 목사의 집을 찾았더니 방은 텅비어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서둘러 나왔으나 어디서 지켜보고 있던 형사가 나와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면서 이집에는 무슨 목적으로 찾아 왔느냐. 이목사와는 어떠한 관계이냐. 문선명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느냐 등을 물어 왔다. 신분증명서를 제시 하라고 해서 보여 주었더니 당신이 박정화 인가라고 말하였다.

대구경찰서까지 연행되어 밤새도록 조사를 받았다 그 내용은 나라면 문선생이 있는 거처를 알터이니까 대라고 하는 것이였다. 나는 정말 몰랐으므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라고 말했다. 만약 알았다 하더라도 나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밤 10시경에 연행되어서 아침 10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그때도 밧데리를 양쪽 엄지손가락에 연결하는 전기고문을 받았다 서을에서 한차례, 지금이 두번째였다.
그후 경찰서에서 나와서 들은 이야기지만, 내 바로 뒤에 김안실의 형이 경찰이 있는것을 모르고 이목사를 찾아 왔다가 내가 붙잡혀 간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그때 문선생은 이목사와 대구의 식구들을 데리고 용문산에 가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서 피할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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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로마이드 제작판매

 

이 무렵 유효민의 제안으로 전국울 순회 하면서 명소의 경치나 유적등을 촬영한 사진과 서울의 거리나 배우들을 찍은 사진을 푸로마이드로 해서 판매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말하였다.
사진촬영과 현상기술, 재료구입 등은 본업인 유효민이 담당하고, 암실에서의 작업을 김원필, 유효영, 이수경이 도왔다. 흥인동의 본부교회는 단독 주택 이었으므로 방이 다섯이나  있고, 응접실과 부엌을 겸한 방까지 있었다. 푸로마이드의 제작과 원리강의를 하는 장소로서는 대단히 편리한 곳이었다. 정원에는 나무도 있고 대단히 좋은 집이었다.


이집으로 이사와서 부터 입교하는 사람도 불어나서 통일교회는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그때에 신문이나 소문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통일교회에 한번 들어가면 어찌된 방법인지는 몰라도 2~3 일에 세뇌되어 가족을 버리고 입교하게 된다. 소문에는 교회의 내막을 조사하려고 작은 방에 빨간 불이 켜져 있어서 밤새도록 사람이 드나 드는 것을 보고  저 방이 사람을 홀리게 해서 유혹하는 장소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그 방은 사진제작 하는 암실이었다.


푸로마이드 제작은 밤중에 사진에 광택을 내는 작업을 해서 날이 밝기전 완성해 놓았다. 새벽녘이 되어 통행금지가 해제 되는 것을 기다려서 제일착으로 거리에서 담배 라이타 돌을  행상하는 전쟁 고아들이 와 도매 떼기로 사기 때문에 푸로마이드는 곧 모두 팔려 나가고 말았다.
이렇게 푸로마이드가 잘 팔려서 제법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교회에서는 매일 70-80명 가량의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어서 그 때문에 매일 같이 쌀 한가마 정도의 밥을 해댔다. 당시의 부인 식구들에게는 엄청난 고생이었을 것이고, 식사비도 꽤 많이 들고 있었다.

그러한 경제적인 지원은 전부 이 푸로마이드 판매로 충당하고 있었다. 서울 거리에는 한동안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피난민의 노천상들이 그때까지는 널판지 위에 미국담배를 올려 놓고 팔고 있었는데, 그것 대신에 몇 백 종류나 되는 푸로마이드 사진을 올려놓고  팔고 있을 즈음 노점 상인들이 거리 구석구석에 늘어나 사진 판매수입에 재미보게 되었다.


어떤 날 아침은 광택작업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나가보니까 남자 세사람이 원리를 들으러 왔다고 하면서 서있었고 맨앞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 바로 김인철이었다.


이 사람과는 내가 북조선의 내무성 제2여단에서 해주 중대장을 하고 있을때 잘 알던 사이였다. 그는 운수 주식회사의 해주지점장으로 근무하면서 해주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다. 내가 그 여관에 약 두달동안 투숙하고 있을때, 두 사람은 술 친구가 된 사이였다.


우연히 이러한 곳에서 만 날줄은 정말로 몰랐다 서로 반가워서 어쩔줄을 몰랐다. 서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바도 있었다. 만약 그가 북조선군의 38선 부근에서 대대장을 근무한 나의 전력을 밀고 한다면, 수사당국은 북의 간첩용의자라고 하는  구실로 나를 구속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페를 끼치게 되고 중대한 영향이  될 것이다.
우선 이일을 먼저 문선생에게 보고 하고, 다음은 그의 행동에 주의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인철은 열심히 교회에 다녀서 중요한 간부가 되였고 나의 과거의 일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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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0년 가량 지난뒤 그를 만날 기회가 있을 때, 당시의 나의 심경을 고백해서 서로
간에 크게 웃은 일이 있었다.


3대째의 비서역 송도욱(宋道旭)

 

부산 영도에서 입교한 송도욱 집사는 살충제 행상 방문 소독을 하던 사람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만주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해온 사람이다. 교육은 대단스레 받은것이  없었으나 짜임새 있는 체격, 대나무를 쪼갠듯한 성격에 행동력이 있고 판단력도 있었다.

문선생의 비서역은 우선 내가 오랫동안 맏았었고, 그 뒤를 유효민이 맡아 주었다. 그리고 3대째가 송도욱이 었다.

그는 송비서에서 송장로로 승격, 동시에 문선생과 함께 보좌 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내가 서진 광산에 있을 때 (후술) 그는 문선생의 심부름 와서 온갖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자랑끼(뽐내고자) 어린 태도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잘난
체 하며 큰 소리를 치고 뽐내는 말을 함부로 해서 나는 정석천 장로 앞에서 송장로에게 충고한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지방을 순회할때 순진하고 얌전한 식구들을 놀래키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허풍을 떨지 못하도록 충고를 하였다.
그때의 일이 흡사 어제일 처럼 생각되는데 지금은 송장로도 정장로도 돌아가셧다. 하늘나라에 오르셔서 지금쯤 어떻게 하고 계실까?당시의 식구 중에서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은 서울의 김영도씨로서 해방후 상해에서 귀국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송기주, 조동석, 김병욱,유효
원, 송도욱, 정석천, 유경규, 신정순 양윤신, 김재근, 라순렬, 이기환의 손으로 그 밖에도 부인 식구들이 몇 사람인가 죽었다.

잠시 숨을 돌리며

 

흥인동 교회에서 푸로마이드 사진 작업을 하고 있을 때이다. 프로마이드 판돈 가운데서 500원 정도를 떼어 가지고 토요일 저녁때가 되면 유효영, 나, 이수경 등과 함께 작업의 피로도  풀겸, 동대문 시장으로 나가서 노천에서 부인들이 다라에 돼지고기나 순대를 파는 것을 사 먹었다.

 맛있는 안주감으로 맛있는 소주를 한잔쯤 곁들인다. 그러면 기운이 나는듯 했다. 일에 몰려 피로해지면 토요일이 되면 돼지고기와 순대로 기운을 차리자고 서로 격려하기도 했었다. 그것도 역시 어느덧 엊그제 일 같이 생각이 난다.
정말로 시간의 흐름이란 흐르는 물과 같이 빠르구나 푸로마이드의 제작에는 무엇보다도 유효민의 두뇌와 기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사진 기술에 무지한 나는 푸로마이드의 제작이나 판매 따위는 아이들의 장난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었는데 막상 시작해 보니까 예상외로 수입이 많았다. 또 대량 생산에 필요한 재료 같은 것을 그때 그때 맞추어서 정확하게 요령 있게 구입하는 유효민의 치밀한 계획성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흥인동 시대의 식구들은 교회의 확장을 도모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열심히 작업하는 것으로서 버티어 갔던 것이다.
또 그후 유효민이 발명해서 특허를 얻은 "산탄 공기총"의 대량 생산에도 성공하였다.

이때 들어온 수입은 단위가 틀릴 정도로 커서 몇 십억 이 나 되었다.

지금은 탈퇴해서 식구는  아니지 만, 유효민은 라순열 (지금은 고인)과 결혼하여 36가정의 일원으로서 축복(결혼)을 받은 사람인데 3남매의 아이들이 있다.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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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 체포 사건의 진상

 

문선명의 체포


이화여자대학의 5인의 교수(양문영*, 한충화, 최원복, 김영운, 이정호), 이화여자대학생 14인 뿐만 아니라 연세대학의 교수 박상래등이 대거 입교하면서 부터, 이화여자대학 측에서는 이 사태에 분개해서 수사 기관에 고소하여 그 진상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앞에도 썼지만 1955년 4월 27일에 본부 교회가 장충동으로 이전한 뒤에 5월 13일 검찰에서 수사원 한사람과 치안국 특수 정보과에서 형사 두사람이 교회에 왔다. 그들은 교회에 스며들어 원리 강의를 듣고 그것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또 출입하는 식구들의 신원을 검문도 하고 일상생활에 관해서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 두달 동안 우리 식구들과 침식을 함께 하면서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경찰 출신의 조동석을 통해서 경찰의 수사 방침을 알아 본 결과 문선생을 비롯하여 몇 사람의 간부가 구속 될 것이 예측되었다.
문선생은 삼각산 밑에 임시로 빌린 집에서 박상래와 같이 숨어살고있었는데, 7월1일 최종 방침을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모이게 했다. 나, 유효원, 유효민, 조동석, 노동휘, 이순철, 오명춘, 김인주,신정순 등이 문선생 있는 곳으로 가서 여러 가지 대책을 상의하였다.
그때 이순철은 선생님을 경찰에 넘길 수는 없습니다. 한동안 일본에 가 계시도록 하면 어떨까요? 하고 주장하였다. 자금도 모두 준비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말이 나와서 좀처럼 방침이 서지 못했다. 결국 이번에는 도망칠 수도 없을 것 같으니 우리들이 경찰로 가는 편이 금후를 위해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서 그렇게 결정하였다.
그 무렵 입이 가벼워서 문제가 되었던 김덕진은 이순철, 김인주 두사람이 감시하기로 하고 중구 산림동에 집 한채를 빌려서 살도록 하였다. 나도 그 방에서 3일간 감시역으로서 함께 있었다.
1955년 7월 4일 드디어 문선생이 구속되었다.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두달 이상의 내탐과 수사가 있었다. 치안국 특수 정보과의 경감이담당관이었는데, 우선 당시의 협회장 유효원이 조사를 받았다.

협회장에 대해서는 원리의 내용에 관한 조사가 있었다. 원리의 어떠한 부분이 대학교수나 대학생들에게 학교를 떠나게 하여 통일 교회에 입회하게 하였는가?통일 교회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신앙하고 있는가?
등에 관해서 하루종일 조사를 받았다.
다음에는 내가 조사 받았다. 문선명과의 관계는 언제부터인가?흥남감옥에서 함께 있었을 때의 상황은?등등을 물었으므로 앞에 쓴 바와같이 (제1장) 요약해서 말했다. 전에는 문용명 이었었는데 왜 부산으로 와서부터 문선명으로 개명하였는가?를 물었으나 나로서는 모른다고 대답해 두었다.

우리들이 어떤 죄가 성립하는가를 수사당국이 검토하고 있을 무렵 , 한가지 문제가 떠 올라왔다.
북에서 온 사람들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시민증이 발급되지 못하는 것인데 어째서 문선명은 가지고 있는 것인가? 나이도 속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 조사 때에는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인데, 그후 문선생이 자기의 증명서의 작성 경위에 의해서 추궁되자 매우 곤경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날 나는 치안국으로 출두해서 북학동 교회 시절, 동회 사무장에게 부탁해서 신청 서류를 준비하고, 내가 선생의 시민증을 만들어 냈다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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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됫돈을 주어서 매수해 가지고 "위조한 서류"로 발행된 것이다. 내 시민증도 그때 만들었다. 나이를 속였다는 것은 병역기피 때문이었다. 뿐만아니라 거기서 많은 신자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드는 비용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고 질문을 받았다.
·프로마이드"를 제작 · 판매해서 그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 다음에는 경제담당은 누구이며 조직은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 고 물었다.
경제의 담당자는 나 박정화이고, 선생의 지시에 따라 모든것을 처리해 왔다. 푸로마이드에 관해서는 사진관을 했던 유효민이 재료의 구입이나 제작을 위해서 전력을 다 하였고, 요효영, 김원필, 이수경, 박정화등이 도와 주워서 아침까지 완성해 놓으면 새벽녘에 소매인들이 와서 모두 도매로 떼어 갔다. 그 돈을 생활비로 쓸수가 있었다.

그후 드디어 간통문제(혼음관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신자인 부인네들이 박정화는 대사단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 고 물었을 때에는 정말 난처하였다. 내가 잠자코 있으려니까 담당관이 큰소리로 역정을 내면서 당신은 문선명과 오랫동안 같이 있었으니까 그가 하는 행위를 다 보았을 것이다.
그것을 모두 말하시오. 문선명은 재림 메시아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것처럼 그도 죄값으로 죽는다고 하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정말인가 대답하시오 하며 책상을 치며 윽박질렀다.
나는 내가 대사단이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들은바가 없다. 식구들의 부인네들이 어째서 그러한 말을 했는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고 대답했다. 그했더니 담당관은 대구에서 온 신자의 김채근 할머니가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을 자기들의 조사관이 듣고 왔다 당신이 모를이가 없다 고 말했다.

이 문제는 그 다음날 대구 할머니가 하나넘의 계시를 받았기 때플에 그대로 말한것 뿐이다라고 하는 것을 자진해서 치안국에 출두하여 담당관에게 설명하였다.


이무렵 박정화는 대사단이다 라는 소리가 일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문선명의 일을 속속드리 알고도 남음이 있는 내가, 만약 수사당국에 말한다면 문선명은 절대로 온전하게 있을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재림 메시아인 문선생"은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며, 그래서 그 열쇠를 쥐고 있는 박정화는 사단이라고 순진한 할머니들의 발상이었다.

그만큼 문선명의 구속은 식구들에게는 위기감을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 7장의 유효민의 항목 참조)
그 참뜻을 알았다면 담당관은 더욱 철저하게 집중적으로 나에게 불도록(사실을) 하였을 것이다.


조사의 촛점은 혼음관계


혼음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엄하게 집중적인 조사가 계속되었다.

담당관은 점점 깊은 곳을  찾아 내게 되어, 당신들의 원리에 따르면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성교를 하고 해와는 또 다시 아담과 성교를 함으로서 원죄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원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죄없는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 이세상에 나타나서 그사람에 의한 성교가 행해지면 그 죄가 깨끗해진다. 요컨데 복귀 한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정말인가?

그 원리에 따라서 문선명은 여자들에게 자기가 재림 메시아니까, 자기와 섹스를 함으로서 복귀된 인간이 된다고 말하여 많은 여성 특히 유부녀들과 섹스를 하고 있는것 같다.

당신은 그것을 목격한 일이 있는가"고 추궁당했다. 물른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원리문제에 관해서는 협회장의 유효원이 담당하고 있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그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경제부문을 담당하고 있어서 그러한 일은 생각해 본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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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생을 감옥에 있을 무렵부터 믿고 따랐을 뿐이다. 많은 여성 특히 유부녀와 섹스를 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본일도 들은 일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랬더니 담당관은, 당신들의교회에는 두갈래 의견이 있는것 같다.

하나는 원리를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들, 문선명과의 섹스로 피를 바꿔 넣음으로 해서 진정한 복귀가 되어 죄와는 관계가 없는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난다. 이와같은 부부에게서 태어난 자손들이 이세상을 지배 할 때에만, 완전복귀된 에덴의 동산과 같이 죄없는 세상이 된다고 하는 것을 믿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문선명도 우리들과 같은 인간으로서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문경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째서 그가 죄없는 원죄와 관계가 없는 재림메시아가 되어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할 수 있어서 복귀 시킬 수가 있는가 라고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먼 문선명도 결국 원죄를 이어받은 타락한 인간이지, 하나님은아니며, 복귀(섹스)로 사람을 구제한다고 하는 따위의 일은 할 수 없다 고 하는 의견인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섹스로 복귀가 된다" 않된다 하는 이야기는 누군가 꾸며내서 퍼뜨린 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없다.
문선생은 북한에 있을때에 대관절 무엇을 했는가, 또 남쪽으로 피난해 와서 부산이나, 대구에서도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은 일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일이었던가 알고 있는가?

문선명은 북쪽에 계실때 기독교의 성경원리를 연구하고 있었고, 새로운 진리를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기성교회의 신자들이 많이 몰려왔다.

그 신자들의 가족이 남쪽으로 피난와서 문선생이 부산, 대구등지에서 성경 원리의 이야기를 전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수사기관에 통고해서 그 때문에 다소의 문제가 생긴것 같다.
그렇다면 문선명에게는 처자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거요.

부인은 최 선길과 장남인 성진군이 있오, 극히 최근까지 부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서울에 와 있을거요. 그 부인이 문선명이 여러 여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산에서도 그랬지만, 또 서울에 와서 집안살림을 모두 때리치워 버리고 여인들이 오는 것을 방해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가?

이것은 혼음관계의 증거가 될만한것 아닌가?

부인이 부산에서 서울로와 그러한 짓을 한 것은 사실 이지만 단지 신앙의 문제로 일어난 것이지 절대로 섹스관계라고 하는 것은 있을수 없다. 그러한 사실은 없다.


간부 5인을 기소

 

나의 다음으로 남자 식구로서 유효민과 유효영이 조사를 받았다. 김원필이 그 다음에 조사를 받았는데 그는 지금까지 병역을 기피하고 있어서 그것이 문제가 됐다.

그리고 부인 식구들이 조사가 시작되었다. 옥상현이 맨 먼저 조사를 받았다. 여성의 조사는 낮에만 하였고, 하루에 한사람씩 조사해 갔다.
신정순*, 오영춘*, 양윤신등이 차례로 조사를 받았다 그내용은 모두혼음관계 (섹스관계)의 사실 수사였다.

5일에는 김원필이 구속되고 6일에는 유효민 유효영이 13일에는 유효원이 그리고 18일에는 여자인 이성화가 구속되었다.

결국 문선생을 포함해서 다섯분이 구속된 셈 이다.
그 당시 교회의 섭외담당은 노정우, 조동석 두사람이 담당하고 있었다. 조동석이 치안국에 나아가 박 정화선생이 구속되면 몇십명이나 되는 식구들의 생활에 영향이 있으니까 우선 보류해 주었으면 한다.

검찰에서 출두명령이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출두시킬 터이니라고 약속한 덕에 나는 구속되지 않았다.
이때 문선생은 중부경찰서의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중부 경찰서에는 김덕진의 처남 김선환이 경찰관으로 있어서 비교적 간단하게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이 성화*는 아직 젊었기 때문에 담당관의 혼음관계 조사에서 유도심문에 걸려 구속되게 되었으나, 부친이 끈질긴 교섭으로 기소는 되지 않고 일주일 후에는 석방 되었다.

1955년 7월 29일 남자 5인은 전원 병역기피만으로 기소되었다.
검찰에서 출두명령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조 동석은 나에게로 와서 치안국에는 미국에서거짓말 탐지기가 도입되어 있어서 혹시 박선생이 치안국에 또 끌려가서 조사를 받게 된다면 이제까지 숨겨져 있던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이 폭로된다면 큰일이니까 재판이 끝날때까지 어디던지 숨어 있는것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선생님도 꼭 찬성하실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빨리 숨을것을 제안 하였다.
나는 생각끝에 그 제안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수사의 손길에서 도피


그리고 문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장충동교회의 문선생의 책상 서랍속에 5만원짜리 수표가 있는데 여차할 때에는 쓰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마산으로 가서 마산 국립결핵요양원에 있는 양윤신을 찾아 갔다.
마산요양원에는 그 당시 양윤신이 간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약 보름동안 거기서 식객 노릇을 했다.
내가 마산에 있을때, 별안간 이원주라고 하는 사람이 그의 동생인 이덕순, 부산에서 온 신성묵과 박봉식, 거기에다가 양윤신의 친딸 김정숙 등과 함께 찾아왔다. 모두 우리들의 교회의 교인들이었다.
우리들은 언제나 모이면 서울서의 문선생과 간부들의 재판에 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열흘 정도 지나고 나서 이원주는 어디론가 가 버렸는데 한참 뒤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이원주가 별안간 자기만이 재림 메시아 이고, 문선명은 재림 메시아가 아니다 라고 말하고 나선것이다.

그의 집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전부 믿었고 낮이나 밤이나 울면서 기도하였다.
이원주는 원리를 악용해서 양여사의 딸 김정숙을 비롯하여 여러명의 여성과 실제로 복귀의 섹스를 하면서 하늘의 원한을 풀어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등 떠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여사는 혼비백산해서 요양원 일도 못하게 되어 그 요양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가 서울로 집을 빌려서 이사 하였으므로 나도 대구로 이동하였다.
대구로 이사는 하였으나 여기에도 교회가 있어서 도망해서 숨어 있는 몸이라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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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친척이 살고 있는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여기서 신문을 읽으면서 서울 지방검찰청의 재판동향을 알수 밖에 없었다.
1955년 9월 20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윤학로 재판장, 강서룡 검사에 의한 일심공판이 열렸고, 같은해 10월 4일에 결심공판에서 문선생은 무죄로 선고되었다.

이 보도를 신문에서 읽고 문선생을 모신 사람으로서 무척 반가웠다. 유효원은 벌금 오천원 유효민, 유효영 두사람은 제2국민병법위반 (병역기피죄)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어 석방되었다. 김원필만이 병역기피죄로 징역 1년의 실형을 받았다.

이때의 조사목적은, 복귀라고 하는 혼음(섹스)의 사실관계의 입증이었다.

그러나 부인 식구들이 자기들의 부끄1러운 이야기를 할 리가 없고, 그 남편들도 또 남자의 체면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문 선명을 고소하지 않았다. 결국 관계자 전원이 위증하였기 때문에 문 선명은 살아난 것이다.

부인 식구들이 문 선명과 섹스관계에 있었던 것은 물론 사실이다.

 

 

제4장 희생당한 여인들

 

 

대공로자 옥 상현의 말로

 


전항까지 나는 당시의 사실들을 일기나 메모를 기초로하여 기술하였다. 경찰둥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서 겨우 살려놓은 몇권의 일기도 이제와서는 귀중한 기록이다.

옥중에서 재림 메시아라고 믿고 "선생"이라고 부르며 맹종해온 나의 어리석은 발자취나 심정을 모두 기술해서 고백했다. 글 속에 등장하는 "문선명 선생"의 행동은 모두 사실이다.

우직한 군인이었던 나는 "선생"과의 약속을 지켜서 북쪽에 부모도 처도 다섯명의 아이들도 남겨두고 남하해서 "선생"의 충실한 분신으로서 노력해 왔다.

그런데 "선생"측에서 어느날 별안간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는 제자를 배신한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나이 였는지도 모른다

마을에서 쪽 떨어진 깊은 산속의 광산 사장이란 직함이 붙여져서 돌아치게 한 나는 몇해 동안을 보수도 없이 일만 하였다. 그리고 나와 교대라도 하는 것처럼 등장해서 통일 교회속에서 차츰 세력을 키워가는 군사정권의 무엇인가 괴상한 냄새를 옆눈질로 보았다.


문선명 선생은 어느새 내마음 속에서 더 이상 목숨을 바쳐서 지킬 가치도 없는 단순한 문선명으로 되버리고 말았다.
전항까지는 그래도 "문씨" 라고 쓸 수가 없어서 "선생"으로 기술하였으나, 이항부터는 모두  "문 용명" , "문 선명"으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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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으로 짠 양말

 

이제와서 생각하면 맨처음에 문 선명과 관련이 있던 여성으로서 인상에 남는것은 옥 상현*이었다. 흥남 감옥중에 있었던 문 용명(당시)에게서 자주 들었다.
그 당시는 평양에서 흥남까지의 차표를 입수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 파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옥 상현은 차표를 사기 위해서 밤새도록 늘어서서 문 용명 을 면회하기 위해서 고생끝에 손에 넣을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문 용명에게 차입하기 위해서 미수가루를 정성껏 만들고, 겨울이 되면 속옷을 털실로 짜고 습을 넣어서 수용소까지 그 먼 길을 면회하러 다녓다. 여름에는 미수가루와 엿을  만들어서 때로는, 엿을 말랑말랑하게 해서 미수가루에 개가지고 가져오기도 하고, 삼베 옷을 만들어 오기도 하였다.

영양을 위해서 간유를 사 먹으라고 돈까지 주고 갔다고 한다. 자기와 피도 섞여있지 않은 사람에게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남득이 되지 않았다. 내·사정과 비교해 본다면 나에게는 어머니도 계시고 처도 있지만, 3개월이나 4개월에 한번 면회오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녀는 자주 면회를 와서 언제나 여러가지 준비물을 가져오는 데는 나는 놀랄수 밖에 없었다.
나와 문 용명은 감옥 안에서 서로 아무일이고 의논하고 무엇이고 숨기는 것이 없었다. 어느날 그가 말했다.

"옥 상현이 자기의 머리카락을 짤라서 털실과 함께 짠 양말을 가져다 주었다. "

옛말에 진정한 은혜를 받은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의 머리카락을 짤라서 그것으로 신을 삼아 은혜에 보답하였다고 했다지만 그러한 사람이 실제로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머리가 숙여질 뿐이었다.

그 여성은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헌신적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문 용명 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가 가져온 미수가루등 을 나누어 주어서 그저 고맙게 먹었을 따름이다.

6 · 25동란이 시작되고 UN군의 북진으로 문용명은 10월 14일(1950) 출옥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죄수이였던 문 정빈과 함께 걸어서 열흘만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후, 나는 처음으로 옥상현의 집에서 그녀와 만났다. 옥상현의 자택은 상당한 부자집 같았고, 큰 마당이 있고, 집이 여러채 틀어서 있었다. 딸인 우정애, 우정순 자매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문씨의 신자였던 김원필은 사단의 집(자기집을 지칭)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며
식객으로 있었다.

옥상현이 치워준 방에서 문용명, 나, 문정빈, 김원필의 네 사람이 숙박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닷새쯤 지낼 무렵, 서울로 피나했던 가족 전원이 돌아왔다.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아침을 마치고 옥 상현과 남편인 우 하섭 장로가 성경을 들고 인사차 왔다.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이니 함께 예배를 올립시다 라고 말했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였으며, 우하섭(禹夏燮) 장로가 성경을 낭독하고 설교하였다.
그는 평양의 장대현 교회의 장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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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우하설 장로의 탄식

 

그날 오후 우장로가 나에게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그의 방으로 갔다. 자기는 평양고무연맹의 이사장인데 당신의 동서에 해당하는 정황고무의 최내봉씨를 잘 알고 있다. 서로 절친한 사이다

얘기거리는 딴것이 아니고, 처와 문 용명의 관계되는 일이었다. 자기는 교회의 장로이고, 처인 옥 상현도 권사로서 교회에 열심히 시무하고 있는데 남쪽에서 왔다고 하는 청년이 이상스런 설교를 하고서 부터, 처가 몇주일간 이 집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원만한 부부로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는데 별안간 처가 자기와 동침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이들은 다 자랐고 기독교의 장로집에서 이러한 이상한 것을 겉으로 들어내 놓고 따질수도 없고해서 처음에는 오랜기간에 걸쳐 설득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아무러 해도 허사였다고 한다.

훌릉했던 처가 틈만나면 돈을 챙겨가지고 문 용명을 위해서 나갔다.
경제적 여유도 있고 해서 조금쯤은 어떠냐 싶어서 처음에는 생각만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빨리 부부가 전과같이 사이좋게 살고 싶어서 그것을 기대하고 열심히 기도하였으나 헛일 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청년을 비롯하여 저의 처까지 전원이 경찰에 구속 되고 말았다.
우장로는 평양 시내에서는 얼굴도 잘 알려져 있다. 체면도 있고 해서 경찰에 가서 구속한  이유를 조사였더니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 김종화라고 하는 유부녀와 그 청년이 "어린양 잔치"라고 하며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어서 이웃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구속되게 된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았다.

우장로는 자기의 얼굴이 있어서 겉으로는 나서지 못하고 조카에게 부탁해 경찰과 연락을  하고 처인 옥 상현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그 청년이 문 용명인데 자기는 그가 감옥에 있으니까 안심하고 있었다. 처가 저렇게 먼 흥남 수용소 까지 면회를 다니고 있어서 처음에는 그만두도록 설득한 일도 있었지만 결국은 듣지 않아서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박형도 예수를 믿는 크리스챤 이니까 문 용명과 같은 사나이와 함께 행동하면 언젠가는 벌을 받은것은 물론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매우 힘들게 될것이오. 문 용명 같은 사람과는 함께 행동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문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재산도

 

문 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채산도 다 바쳐온 옥 상현은 6 · 25동란으로 남쪽으로 피난해 부산에 들어가 개명한 문 선명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면서 굶주렸던 문 선명의 생활기반을 마련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서울 흥인동으로 교회가 이사한 후의 일이다.
푸로마이드 제작에 성공해서 경제적인 상황도 상당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합숙한 교인들은 전원이 홀아비 살림이어서 옥상현이 선두가 되어 세탁을 하고 있었다.
식구들 양복이나 속옷 등을 넣어 두었다 각자가 자기의 것을 자기
의 상자에서 꺼내서 갈아입고 있었는데, 그 상자가 자그만치 24개나 되었다. 그 때의 옥상현의 고생은 필 설로 다할수 없을 것이었다고 생각 된다.
훨씬 뒤의 이야기인데, 문선명과 결별하고나서 나는 부산으로 가서 주택건설 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권 창정이란 박사가 찾아왔다.
자기도 집을 한체사고 싶은데 살수 있느냐고 하여 나는 그의 신청을 받아 들였고, 그는신청금을 내고 돌아갔다. 그후에 옥 상현이 찾아와서 자기의 둘째 아들을 건설현장에 써줄  수 없느냐고 한다. 사원은 필요치 않았지만 옥 상현의 부탁이기도 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부터 그 아들을 고용해서 1년 남짓 함께 일 한일이 있다.

주택건설이 끝날 무렵 목사가 된 우 장로의 말에 의하면 「집사람 옥 상현에게 마음 돌리라고 일렀지만 허사였고 결국 이혼 할수 밖에 없었다. 그후 자기는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어 지금 조그만 교회에 시무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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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와 이흔후 교회 부인 집사와 재혼 했단다. 또 사위인 권창정 박사는 자기 사위인데, 사위가 신청한 주택은 자기의 집인데 좀 보여달라고 하여 완성된 주택을 보여주며 장시간 이야기 했다.

문선명이 처 최선길이 남편이 여자관계로 행패를 부려 그주위에 있기가 거북 스럽게 됐다. 그래서 초창기 문선명의 됫바라지는 옥상현이가 맡아했다.
부산 수정동 교회시절에는 네번씩이나 쫓겨 다니게 되었다. 그것은본처 최선길이 문선명이 있는 곳에 모여드는 부인 식구를 질투하고 집에 가재도구를 팔아 치우고 모여드는 사람들을내 몰기 때문에 하는수 없이 다른데로 뺑소니 이사갈 수 밖에 없었다.
새로 이사 가면 문선명 처가 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끈질기게 추적 하다가 기발한 생각을  하였다. 옥상현 친척집에 가정부에게 돈을 주고 옥상현이 찾아오면 그뒤를 밝게 하여 미행에 성공했었다. 그것이 성공해서 새집을 찾아내 가지고 또 한차례 반복해서 큰 소란을 피웠다.

결국에는 식구들 전원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게 된 것이다.
그때 부인은 두번 다시 큰소란은 떨지 않겠다고 하는 것으로서 석방되었다. 그후로는 교회에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는 약속이었으나, 그 뒤 수정동 집에서도 최선길 부인은  또 같은 짓을 했다. 가재도구는 물론 집까지 팔아 치우고 문 선명은 서울로 도망쳐 버렸다.

이번에는 서울의 청진동의 작은 집으로 거점을 옮겼으나 어떻게 알아 냈는지 이집에도 최부인이 찾어와서 또 똑같이 가재도구는 물론 문 선명의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문 선명이 원리 원본책도 집어 던지고 도망친 것은 이때 일이다.
그 때 문 선명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옥 상현은 문 선명이 없어져서 무척 걱정하였다. 내가 혼자서 문 선명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니까 밤중에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에서 내 소매를 잡고 함께 가고 싶다라고 울었으나 나는 거절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 일 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서울에서는 문선명에게 체포영장이 떨어져서 옥 상현을 데리고 갔다가 도중에서 경찰에게 심문이라도 받는다면 큰 일이어서 할수 없었던 것이다.
옥 상현은 한동안 대구 교회에서 살면서 문 선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유 효원을 부산에서 서올로 데리고 와서 북학동에 방을 빌렸을때, 대구에 있는 옥 상현을 서울로 불렀다.

그때부터 또 그녀는 문 선명과 식구들의 생활을 몽땅 돌보게 되었다.
 

7·4사건으로 문 선명이 경찰에 구속되었을 때의 옥 상현의 슬퍼하는 모습은 참아 볼수가 없을 정도였다.
매일 단식하고 기도하며 마음속으로 부터 슬퍼하며 우는 모습은 옆에서 보고 있는 우리들도 머리가 숙여 질 것 같았다.
그후 청파동으로 이사한 후에도 쪽 교회의 살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동안 교회를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옥 상현은 교회 에서 쫓겨나고 없었다.
 

어느날 유 효민에게 옥 상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옥 상현이 유 효민에게로 와서 돈을 좀 빌려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옥 상현의 딸인 우 정애양이 와서 또 돈을 백 칠십만원만 빌려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었다는 것이다.

돈을 빌려 주었으나 갚아주지 않더라고 하는 것과 옥 상현은 그후  몇 차례나 돈을 꾸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걸어 왔지만 그 이상은 빌려 줄 수가 없어서 거절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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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해도 갈 곳이 없다.

 


옥 상현은 1946년 11월 6일 48세 때에 평양에서 문 선명과 만났다,

문 선명 은 그때 27세로 21세나 연상이 었다.

북으로 갔던 문 선명의 복귀원리를 믿고 육체관계를 가졌다. 제일 최초의 마리아 이다.
 

그 당시부터 문 선명을 따라서 약 40년간 몸도 마음도 재산도 바쳐서 보살펴 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 터에 강산이 네번이나 바뀌는 세월이었다. 그렇게 오랜동안 문 선명의 옆에서 시종을 들던 사람이었다.
한 순간도 문 선명과 떨어져서는 못 살아갈 것 같은 옥 상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옥 상현의 사정을 들어보면 교회가 노인 식구들을 전부 내쫓기로 하였기 때문에 그녀도 30수년간 다니던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교회에서 쫓겨날때, 단 일천만원의 돈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장사 밑천도 되지 못하는 금액이다.

딸 내외에게 주택자금의 일부로 빌려준것 같은데, 먼 곳에서는 교회에도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교회에 다니기 위해서, 교회 근처에 작은 방을 하나 빌려서 거기서 살고 있
다고 하는데 참으로 어이 없고 마음 아픈 이야기였다.

만약 내가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어서 사업이라도 하고 있었더라면, 살만한 집 한채 정도는 마련해 주고 싶고, 매달 적어도 생활비 정도의 돈을 보내주고 싶었다. 아흔몇살이나 되는 큰 공로자가 교회 떠난 사람에게 돈을 빌리러 다닌다니 눈물이 나을 정도로 불쌍한 이야기가 아닌가?

1985년 8월 16일 일승일(一勝一)을 선언하였다. 과거의 모든 죄를 전부 용서하고 사단을 복종시켜 그후에는, 사단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상으로 복귀시켜 모든 축복이 통일교회의 식구들에게 가져와 준다고 본부 교회의 송 영석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이야기 보다는 우선 옥 상현과 같은 사람에게 집 한채 라도 주워서 생활에 곤란하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라고 생각하였다.

옟날, 흥남의 옥중에서, 문 선명에게서 원리나 "원화원이상"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가슴이 벅차서 그것이 어느때 쯤 되는 것 인가요 라고 물었다.

그때 문 선명이 "7년후에는 그 시기가 온다"고 대답하던 것을 어제 일 처럼 기억 하고 있다.

그로부터 벌써 40년이 지났다.

분명히 문 선명 자신은 큰 돈을 벌어 놓았을지 모르지만 꿈같은 이야기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1993년 5월경 이었다.

유 효민으로부터 나에게 연락이 있었는데 옥 상현이 지금 인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중인데 문병을 가자고 하는 것이다.

나와 유 효민은 인천 가좌동"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서 옥 상현을 문병하고 왔다. 올해에 96세라고 한다.
이미 병은 다 나아서 건강 하였으므로 병원에서도 퇴원하라고 말하고 있다지만 퇴원해도갈 곳이 없어서 병원에 눌러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 효민이 돈을 대서, 아파트를 빌려서 퇴원 시키고저 하였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통일 교회측이 서둘러 방을 빌려서 퇴원시키고 말았다.

문 선명을 일생동안 떠 받쳐온 옥 상현의 노후가 이렇게도 비참하게 된 것을 보니까 정말로 슬펏다.

그러나 옥 상현 뿐만 아니라 이와같이 희생된 사람은 아직도 몇백명이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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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봉식과 오 명춘

 

부부가 문 선명에게 헌신


내가 문 선명과 함께 부산 영도로 신성묵, 유 신회 부부의 집을 찾아 간 것은 1953년 12월  24일이었다. 새로 입교한 사람은 유 효원, 유 효민,유 효영, 신 성묵 부부, 김 관성, 최 집사
등, 섬유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최집사는 3개월 후에는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송 도욱, 박 봉식 부부가 들어 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본래 신앙이 돈독한 사람 들이어서 다음해 봄, 송부처는 서올로 올라와서 교회의 헌신자가 되었다.
송집사는 그리 교육은 받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튼튼한 몸매를 하고 있는 커다란 사나이로 대쪽을 쪼갠듯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등 여러가지 일을 해 온 사람이었다. "해방"후 귀국해서 부산에서 박 봉식과 결혼하였다.
 

원만한 부부생활로 딸이 하나 태어났다. 세사람이 생활하기 위해서 송 도욱은 가정 방문을 하면서, 살충제 약을 팔기도 하고, 약을 뿌리기도 하였다.

처의 박 봉식은 부산의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원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장사를 집어치우고 부부가 문 선명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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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집은 작은 판자집이었는데, 이층에 방이 하나 비어 있어서 김 원필이 거기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끔 김 원필을 찾아 갔었다.

서울에서 부산간 기차 여행에 터널을지날때는 석탄연기가 들어와서 양복이 그 끄럼으로 새까맣게 돼버린다. 어느 때인가는 내가 입고 있던 스프링 코트가 베이지 빛이었는데 검정색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박 봉식은 밤중에 그렇게 새까맣게 된 코트를 세탁해서 말려 가지고, 아침에 서울로 돌아갈 무렵에는 새옷과 똑같이 빳빳하게 입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을수가 없다.

송 장로 부부의 딸은 매우 성격이 활발하여서 문 선명이 그녀가 마음에 들어 그녀에게 가야금을 사주어 배우게 했다. 그리고 교회의 모임이라던가 친목을 위한 식구들의 모임이 있을때는 그녀에게 가야금을 타고 창을 부르게 했다.
그후 어떤 청년과 열열한 연애 중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축복해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결국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 당시 처음에는 내가 비서역으로
문 선명과 함께 돌아 다녔는데 유 효민이 입교하고, 나서부터는 그가 비서역이 되었다. 그후, 문 선명은 그 비서역을 유 효민으로부터 송 도욱으로 바꾸고. 또 송집사는 장로로 승진하였다.


남편 송도욱의 불륜

 

서울로 올라 온 박봉식 은 경상남도 거 창을 비 롯한 각지 에서 통일교회의 원리를 전도하는 순회전도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남편인 송장로에게 큰 문제가 일어 나게 되었다.
그 무렵 서진 광산에 있던 나는 볼일이 있어 군산에 갔다. 김모에게사정을 설명하고 월명동에 있던 김모 집에 약 일주일동안 머물러 있은 일이 있었다. 이집은 군산의 교회로도 쓰고 있어서 김모씨의 부인과는 전부터 아는 사이 였다.

닷새째 되던 어느날, 밖에서 볼일을 마치고 김모의 집으로 돌아가니까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부인이 정신적으로 약간 이상한 상태로 되어 있어서, 「자기를 복귀시켜 달라」고 나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남자를 보면 누구에게나 「복귀하고 싶다」고 중얼대고 있었다. 원리 이야기에 열중하게 되면, 이러한 상황으로 되는것은 자주있던 일이었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나는 몇번이고 이와같은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 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 광산으로 돌아오자 마자 서울의 유효원협회장에게 연락을 하였다. 그래서 송 장로가 군산으로 나가서 부인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 갔다. 노량진(교회를 떠난 임영신 집)집이 있어서 거기서 부인의 병을 치료하기로 하였다. 송장로 혼자서는 그녀를 돌 볼 수 없기 때문에 오명춘과 함께 지내면서 돌보기로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송장로와 오명춘과는 서로 좋아하게 되고 말았다. 부인은 회복 되었으나 송장로와 오집사는 서로가 헤어질수 없는 관계가 되어 있어서 결국은 문선명에게서 축복을 받고 함께 지내게 되었다.


탁월한 인격자 박봉식

 

나는 박봉식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원리에서부터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송도욱과 박봉식은 부부로서 문선명한테 와서 식구가 된것 이다. 송장로는 문선명의 비서가 되었고, 박집사는 그때까지 하던 집 일을 모두 걷어치우고 전도에만 전념하였다.

문선명이 축복을 하는 것이라면 박집사와 송장로가 축복을 받는것이 상식적으로나 원리적으로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오집사와 송장로가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두사람의 동거를 인정 했다고 하는것이 되지 않는가. 이것은 여러가지 면으로 모순되고 있다.
문선명 이 축복을 하였다고 하니까 달리 아무말도 말할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박집사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문제였다 망연하게 어깨를 떨군 그녀의 심정을 살필 수 있다. 축복을 받은 후, 한동안 지나서 송 장로는 간 암에 걸려서 대단히 고생스러운 생활을 보냈으며, 수술을 받았으나 개복한 때에는 이미 상당히 진전되어 있어서 배를 꿰맬수도 없는 상태에서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박집사가 임종하는 옆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듣고, 나는 그녀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송 장로가 젊은 여자와 축복을 받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죽음의 자리 옆에 있었다고 하니, 현여라고 해야 옳을지, 열녀라고 해야 옳을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송장로가 죽고 난 뒤에, 함께 축복을 받았던 오집사도 병이 들어 꿈속에 송 장로가 나타나서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고 신음 하였다고 한다.
이, 병이든 오집사를 ,박집사가 또 몇달동안 함께 살면서 간병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저 머리가 숙여 질뿐이었다.


큰 돈을 바친 오명춘


문선명은 옥상현 등과 함께 부산에서 네차례나 집을 옮겨 다녓는데, 이때의 비용은 모두 오명춘 집사가 내 준 것이었다.

오집사는 장리욱박사의 친척이나, 김안실 같은분에게도 전도해서 입교하게 하였고, 이순철도 신정순도 신정순의 딸 이성화 성례와 양윤신에게도 전도하였다.
교회의 초기에 매우 중요했던 부인 간부의 대부분은 오집사가 전도한사람들이다.
그 후, 문선명이 이순철의 복귀라고 말하며,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을 때에, 집을 빌릴 돈도 없었는데, 오 집사가 신당동에 사는 자기의 매제에게 돈을 건네 주며, 문선명이 살만한  방을 주선해 주었다.
이화대학사건이 터져서 문선명을 위시하여 간부들이 구속되었는데 이때의 뒷바라지도 오집사가 맡았었다.

그 때문에, 자기의 집을 팔아서 그 대금 오백만원을 고스란히 문선명에게 드려 미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문선명이 구속된 뒤에 섭외비를 염출하기 위해서 조그마한 가계를 원효로에다 열고 신정순등과 함께 경 영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온 이익으로 문선명이나 간부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문선명이나 내가 돈이 필요하게 되면 반드시 오집사가 마련해 주었다. 부산의 영도로 처음에 갔을 때도 그러하였다.
그 당시 문선명은 한푼도 없어서 곤경에 있을때 오집사가 여비를 마련해서 가져다 주었고, 그 돈으로 부산으로 갈수 있었고, 유씨네 삼형제가 입교하게 되면서 부터 교회의 기초가 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오명춘은 그 후 미국으로 가서 의사가 된 아들한테서 살고 있었는데 83년에 한국에 돌아 왔을때, 오명춘은 딸 장혜숙에게 주려고 응담을 하나 가지고 왔다. 그 당시로서는 백오십만원 상당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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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효민을 통해서, 딸이 장혜숙의 집으로 오도록 전달이 왔다.

찾아 갔더니 그 웅담을 나에게 건네주며 딸에게는 또 기회가 있으면 사서 줄수 있으니까 우선 지금은 이것을 잡수시고 기운을 차려 보십시오. 박선생님은 병환이 나서도 필요한 사람 이니까 이것을 드리는 것이에요 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문선명이나 교회와 나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문선생은 박선생님을 더
욱 아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선생은 지금 서울에 계실 터이니까 두 분이서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라고 약속해 주었다.
그때 옛날 자기집을 팔아서 조달한 오백만원은 지금첫 한푼도 갚아 주지 않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당시의 오백만원은 지금으로서는 오천만원 이상이 되는 셈이다.

나는 웅담을 고맙게 받아, 그것을 먹고나서 한달만에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명춘은 여러가지로 노력해 주었으나, 물론 문선명한테서는 전화도 없었다.

이와 같이 최초의 교회의 식구들은 함께 고생해 온 일도 있어서 서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도와주곤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만 잘난체하고 있는 문선명은, 원리의 공론만을 앞세우고 인간성이라고 하는것은 찾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식모살이라도 해서 살아야지


그런데 옥상현이 행적도 비쳤지만 본부교회는 몸과 마음을 몽땅 문선명과 교회에 바치고, 돈도 집도 없는 "박봉식"을 나가라고 내 몰았다. 그 후 박봉식은 갈 곳이 없어서 대단히 불쌍한 지경이 되었다.

박봉식은 청평 통일교 수련소로 가서 산에 천막을 치고 기도 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몇일이 못가서 그것을 안 수련소 관리인이 와서 또 몰아내고 말았다고 한다. 박봉식은 할 수 없이 다시 시내로 나와서 먹고 살기위한 참기름 장사를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선 교회의 간부의 집을 찾았다. 원식구인 박봉식이 부탁하면 한집에서 한명쯤이야 참기름을 사 줄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 다녔던 것이다. 맨 처음에 협회장 부인 한테 가서 참기름 한병을 내 놓고 진짜 참기름이니 시장에서 파는 값으로 한 병만 사달라고 부탁  하였다.

그했더니 그 부인이 통일교회의 식구가 참기름 따위나 팔다니 너무나 창피하니까 그만두라고 말하며, 박봉식을 내 쫓아버렸다.

그리고 또 원협회장의 집을 찾아 갔더니, 먼저 집에서 당한것과 같이 문전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박봉식은 통일교회 간부들에게는 사랑이라고 하는것은 한조각도 없는 참으로 냉정한 사람들이다 라고 한숨 지었다.
 

그래서 협회장의 부인이 두 사람이나 다 거절하는 것을 보면 다른곳에 간들 어차피 헛수고 일것이라고 참기름 장사를 체넘해 버리고 말았다. 살어가기 위해서는 통일교회 따위를 기대  할 것이 아니라 식모살이던, 무엇이던 해 나가야 겠다고 그 박봉식은 쓸쓸히 말했다.

 

 

김종화(金鐘和)의 눈물과 노여움

 


문용명을 죽이고 싶다


평양으로 간 문선명은 미완성이라서 엉터리 같은 원리를 설교해 신자를 모으고 있었다. 가련하게도 옥상현은 그 무렵부터의 희생자인데, 더 한사람 써두지 않으면 않될 사람이 있다.
 

그것은 문선명이 투옥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된 유부녀 김종화의 사건이다.

흥남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먼저 출소하는 나에게 그는 평양 경창리에 있는 김종화의 집을 찾아 가서 내가 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정화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여 나는 출소하자 바로 그곳으로 갔으나, 이미 피난길을 떠난후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
다.

문선명의 열렬한 신자가 되어 주인과 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방에서 문선명과 동침해서 드디어는"어린양의 잔치"를 올리는 소란을 피워서 체포되어 징역 일년의 형을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리의 이론에서 말하자면 6마리아(유부녀)를 복귀한 뒤에 오는"어린양의 잔치(정식결혼)"는 상대가 더러움이 없는 처녀가 되여야 한다.

어째서 남편이나 자식이 있는 유부녀를 선택한단 말인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문선명에게는 서울에 두고 온 처자도 있다.

내가 서울에서 간신히 찾아 냈을때, 김종화는 이문동에 살면서 집사로서 기성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정명선은 파고다 공원앞에 코롬비아 라고 하는 구듯방을 경영하고 있었다.

내가 김종화를 방문 하였을때, 그녀는 그때의 일을 후회 하면서 사단이 나를  유혹해서 죽을때 까지 참회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때는 이름을 문용명에서 문선명으로 바꾼것을 모르고‥‥그녀는 말했다. 문용명은 엄청난 대사단인데, 나는 흠뻑 속았습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많이 만든 나쁜 사람이예요.

박선생도 빨리 그만두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커다란 눈물 방울을 흘리면서 울었다.

평양시절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나의 남편은 내가 하는 행동을 그늘에서 야속하게 생각 하였을뿐 어째서 성을 내지 않았을까요.

자기의 처와 저남자가 매일 같은 방에서 함께 자며 복귀를 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섹스를 하고 있는것을 옆에서보면서 어째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나중에 그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것을 알고 그때 나는 너무나도 큰죄를 범하고 말았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나는 김종화 집사에게 더 한번 물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매일밤
섹스를 한다는 것이, 그 당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때는재림 메시아라고 믿었고, 그 남자에게 미쳐서 그 사람과 섹스를 하는때에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천국으로 올라 가는 듯한 심경 이었습니다.
 

문용명이 지금 서울에 있는데 더 한번 만나 볼 용의는 없는가, 하고 물어 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면서 엄청나게 큰 죄를 범한 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므로 대사단의 문용명은 나와 같은 유부녀나 처녀들을 교묘한 말로 범하고, 많은 사람을 죄의 구렁텅이로 떨어트리고 있어요.

어떻게 또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겠어요 라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세상에서 더 이상 우리들에게 한것 같은 죄를 두번다시 그가 범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다. 그 남자를 죽이고 싶도록 원망하고 있어요.

그녀는 그야말로 불처럼 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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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마리아의 비극

 


유부녀 여섯을 빼앗다
 


나 박정화는 1953년 5월 15일 경주에서 피난생활을 끝마치고 부산 수정동에 마련한 교회에서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원리강의를 들었다.
그 내용은 흥남 수용소에서 문선명이 나에게 "원화원이상"에 관해서 이야기 한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었다.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6마리아"의 부분이었다.

평양 시절은 그렇다 치고, 식구들 가운데서 6마리아로서 복귀를 받은 사람들은 제일 첫번째가 신정순, 그리고 오명춘, 이순철, 김안실, 강옥실, 정전옥의 순이라고 문선명은 이야기 했다.

그 후 한동안 지나서 이 6마리아의 얼굴생김이 바뀌었다.

그 이유는 강옥실과 정선옥에게는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남편이 있는 유부녀 가 아니면 6마리아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 이었다.
문선명은 이 두사람 대신으로 유신희, 임영신을 6마리아로 선택 하였다.

6마리아 자격이 있는것은 유부녀라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형체가 없는 하나님은,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성숙하면, 형체있는 인간의아담으로 재림하여 아담과 해와가 결혼해서 더렵혀 지지 않은 자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자손이 이 세상에 번식 함으로서 이 세상을 선한 죄 없는 사회  할 것을 '창조이상'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해와를 유혹해서 따먹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사단의 것이 되어, 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범죄한 천사의 사랑의 대상인 유부녀를 빼았음으로서, 사단에게 더럽혀진 피를 깨끗이 하는 '복귀섭리의 의식'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문선명 은 설명하였다.
문선명은 나에게 복귀하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 복귀의 방법이란, 지금까지의 사탄의 세상에서는 섹스를 할때에 남자가 위로 되고, 여자가 아래로 되었지만, 복귀를 할 때에는 두번 까지는 여인이 위로되고 남자가 아래로 되는 것이고, 세번째는 남자가 위에서 행위 한다.

그래서 소생, 장성, 완성으로 3회에 걸쳐서 복귀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것이다.

특히, 나는 문선명의 섹스에 의해서 복귀된 여자와 최초로 섹스를 해서,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내가 문선명에게 제일 신뢰 받는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6마리아 들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를 추적해 보자.

 

신 정 순*

 

자산가인 이순모의 처였던 신정순은 내가 1953년 5월 IS일에 부산의 수정동 교회에 갔을 때부터 두 사람의 아들을 데리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같은해 12월 24일 문선명이 직접 원리강의를 하기 위해서 부산영도의 집회에 갔을때 그는 나에게 정화 너는 장래 신정순과 이상적인 상대(부부)가 되어서 우리 교회의 경제 문제를 해결 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 한 일이 있다.

그런데 문선명은 이 신정순의 장녀로 처녀인 이성화를 장래에 해와가 될 사람이라고 말하고 범하였는데, 김영희 사건으로 그 거짓말이 탄로나고 말았다.

또 둘째딸인 성례도 문선명한테 복귀를 받다, 아이까지 낳게되었다. 신정순은 6마리아가 된것으로서, 문선명의 곁에서 영원히 평화로운 생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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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부산 초량동에 있던 집을 팔아서 문전명에게 바쳤다. 내가 부산에서 새끼장사를 시작 하였을때 그 자금을 마련해준 것도 역시 신정순 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된 두 딸의 모녀 3인이 문선명과 섹스를 했다고 하는 사실은 신정순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궁암에 걸려 몇해 후에 죽고 말았다.

저 세상으로 간 신정순은 지금의 문선명을 어떻게 보고 있을 것인가?

 


이 순 철*


이순철은 내가 경주의 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의 수정동교회로 갔을 무렵, 오명춘의 전도로  입교하게 되어 문선명의 복귀를 받고부터 쪽 그에게 따라 다닌다.

이순철의 남편은 당시 관세청의 간부였다.

그녀는 남편몰래 많은 재산을 문선명에게 헌금 하였다.

문선명이 대단히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에, 우리들이 안양, 부산 등지를 돌아 다녔다는 것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그 후의 이순철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어느날 노동휘가 나를 찾아 와서 아침 예배에 가자고 재촉한다.

청파동 교회로 예배를 가니까, 마침 문선명이 나와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선명이 별안간 지금 수택리(경기도 소재) 총포공장을 건축하고 있는데, 오늘밤 안으로 그 총포공장을 완성 시키시오 라고 명령 하는 것 이었다.
급작스러운 일 이라서 건축 일꾼을 모은다는 것이 큰일 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천호동에 주택을 건설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축일꾼 18명을 트럭에 태워 실어다가 밤샘 작업을 해서 어거지로 그 공사를 완료시켰다.
작업이 끝나서 돌아 가려고 하는데, 이순철이 느딘없이 찾아와서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같이 가자고 해,그이를 따라 가니까 통일 산업 주식회사의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방을  빌려서 살고 있는데, 방안에는 다 날가 빠진 헌이불과, 꾸겨진 양복등, 겨우 몇가지 가재도구가 놓여 있을뿐, 그렇게 화려한 생활을 하던 이순철이 왜 이다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그에게 어째서 이런데 와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으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문선생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로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아 백방으로 생각 끝에 할 수없이 통일산업에는 문선생이 하루에 한번은 꼭 온다고 하기에 이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매일 문선생이 오는 길에 기다리고 있다가 먼발치에서 나마 얼굴 만이라도 뵙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선생은 차로 오기때문에 내가 서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  다른 길로 가 버리고 맙니다 라고 이야기 한다.


그녀는 이 슬픈 사정을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 내가 와 있다는 것을 듣고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세시간 동안이나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한 이순철은 문선명에게 재산도 자기의 몸도 모두 바쳤다고, 남편에게서는 이혼당하고, 자식들은 남편에게로 따라가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문선명을 만나고 싶어서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문선명은 어째서 이다지도 냉정하게 배신 할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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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재림메시아를 자칭한 사나이의 할 수 있는 일인가.

우리들은 손을 맞잡고 한 없이 울었다.

이날부터 한달 후에 오명춘 집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명춘이 혼자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순철은 그 한 많은 인생을 마치고, 이세상에서 사라졋다고 하는 것이다.

그 옛날 문선명은 밤에나 낮에나 이순철 없이는 못 살것 같이 굴더니만, 이제 와서는 이순철이 문선명을 만나고 싶어서 수택리 총공장 근처로 이사까지 와서 문선명을 기다렸는데  얼굴 한번 마주대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 버리고 말다니 ‥‥

저 세상에서 이순철은 문선명을 얼마나 원망하며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인가?

 

오 명 춘*


오명춘은 제주도에 피난 생활 중에서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부산에서 문선명의 원리를 듣고 감격해서 복귀를 받은 뒤에도 문선명이 어려운일이 생기면 이 오명춘 집사가 전부 해결해 주었다.

집을 판 대금 5백만원을 몽땅 문선명에게 바쳐서 남편과는 이혼하고, 아이들은 남편한테로 가 버려서, 혼자서 문선명을 위해서 살아 왔다.

이 오명춘 집사의 이야기는 앞에서도 자세히 썼으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해 둔다.

 그 후 오명춘집사는 교회에 못있게 돼서, 지금은 필립핀에 있는 아들을 찾아간 것이다. 서
울에 살고 있는 딸도 문선명으로부터 합동결혼 을 받었으나 이상이 맞지 않아 이혼하고 말았다.

이제 새삼 자기의 집으로 오는 것을 그리 반가워 할 이가 없다.

유효민과 내가, 올 봄에 오명춘을 찾아 갔더니 그 딸 한데서도 나가 달라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지금쯤은 낮선 나라에서 어떠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것인가?

유효민과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사람들을 장래 남은 인생을 평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서 서로 노력 할 것을 약속 하였다.

 


김 안 설*


김안실은 내가 부산의 수정동 교회에 있을 때에 오명춘 집사에 전도되어 입교했다. 문선명으로부터 원리를 듣고 복귀를 받은 뒤에는, 신정순과 같이 유효원 등을 열심히 전도한 장본인이다.
김안실은 장리욱씨의 자부인데, 남편은 의사였고 미국으로 가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김안실은 남편이 유학중 아이들과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열심히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김안실은 문선명을 제일 사랑하고 있었다. 그 후, 김안실의 남편은 미국에서 귀국해서, 서울 청량리에 병원을 개업하였다.

한동안은 남편과 살고 있었지만 역시 문선명을 못 잊겠다며 교회로 돌아왔다. 문선명에게서 복귀를 받을 당시의 김안실은 30세 가량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문선명은 그 젊은 안실이가 마음에 들어서, 내가 서울에서 부산에 갈때마다 반드시 편지를 써서 내가 그것을 전해주는 책임을 맡았다. 지금 다 나이든 이 사람을 문선명은 돌아다 보지도 않는다.

이제 새삼 남편한테도 돌아갈수도 없어서 혼자서 방을 빌려 가지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리치고 또 혼인 중매로 직업화 하다시피 홀홀 단신 쓸쓸한 인생살이를 하고 있다.

유효민과 나는 이와같이 문선명과 통일교회에 배신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책임을 지고 남은 인생을 보낼수 있도록 노력 할것을 결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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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신 희*


유신희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도 밝혔기에 여기에는 지금의 상태만을 간단히 말해둔다.


고아원에 어린것들을 맡겼던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다 졸업하고 제집도 마련하고, 교회집사 일도 잘보고 장사도 잘되여, 사회에 모범 청년층에 속한다.

그러나 유신희씨는 아들들 집에 살 면목도 없고, 아이들도 어머님 모시기가 서먹하다 하여  구로동에 방을 두칸 빌려서 바느질 일을 해 가면서 겨우 살아 가고 있는 형편이다.

과거 눈이 멀어서 문에게 속은것을 한탄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날그날 고생
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이 사람에 관해서는 유효민과 나는 도와 줄 것을 약속 하였다. (제 7장 참조)

 


임 영 신 *


서울의 북학동 교회에서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가 창립될 무렵 신정순이 임영신의 집을 알려주어서 유효민의 전도로 임영신은 통일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임영신은 다섯살쯤 되는 딸이 하나 있었고 혼자사는 몸인고로 가볍게 교회로 들어올수 있어서 푸로마이드 사진을 추운 겨울철에도 우물물로 수세작업을 하여 열심히 도왔다.

이 또한 문선명 이 누구보다도 매우 사랑을 받아왔다.

교회가 발전하여 여러번 이사를 했고 용산구 청파동 시절 문선명은 남녀 이상상대 설교를 한참 역설할 때다. 교회 교인들은 이심전심으로 임영신은 자기와의 이상상대의 꿈이 깨진줄 알고 탈교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시내모처에 단신으로 생활중 교회에서 친숙하게 지내던 딸을 만난 인연으로 그딸 아버지 재산가 이순모의 끈질긴 구애끝에 다시 부부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 번창하여 재벌급에 들었다.

그 사장도 병사로 아들하나 낳고 또 과부가 되었다. 미망인이 된후 많은 사업체를 전처 장남에게 물려 주고 외롭게 아들하나 바라보며 외롭게 살고 있다.

그리고 한동안 어느 예능인과 결혼하였으나, 그 사람과도 이혼해서 또 독신이 되어, 자기의 가정부 아줌마와 같이 살고 있다.

또 자기가 낳은 아들도 어머니를 보살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도 사이가 좋았던 이순모와의 결혼생활 무렵 시간만 있으면 가만히 불러내서 만나고 하던 문선명도 임영신 만은 전연 돌아 보지 않았다. 지금은 방 한칸을 빌려서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유효민과 함께 그녀를 만났는데, 그 생활 형편은 쌀 살돈이 없을 정도로 궁색하였다.
문선명은 복귀 한다는 명목으로 몸뎅이 를 유린하는 것은 물론 재산까지 전부 들어 먹고는 급기야는 차 내버리는 것이었다.

 


6마리아가 아니라 60마리아


문선명은 한 학자와 "어린양의 잔치 의식"을 행하고 학자가 참 어머니라고 떠들어대고 있지만, 이 대표적인 6마리아 이외도 문선명에게 농락 당하고 재산까지 도적 맞은 여성은 몇 십명이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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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에게 배신 당하고 버려져서 지금은 60-80세가 된 할머니들은 인생 여한을 품은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와같이 정도에 넘치는 행위는 인간의 상식에서 보던지, 종교가의 입장에서 보던지 간에 절대로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며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파탄을 가져 올것으로 필연적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문선명 이야 말로 진짜 대 사단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한 6마리아라고 하는것은 모두 재산가의 아내뿐이었고, 가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2천년전에 예수는 그가 만났던 간통한 여인, 향유의 여인등 육인의 여자와 섹스를 하지 못했기에 예수는 죽었다.

육인의 유부녀를 복귀하는 것은 원리의 근본이다 등등으로 말한 문선명의 이야기는 실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 악용한 함정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케 된다.

사실 그들은 문선명의 호색적인 섹스의 포로가 되어 미쳐서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문선명 한테로 달려와서 돈이나 재산이 확실하게 문선명의 손아귀에 모였다.

그리고 빨아 먹을 만큼 발아 먹은 뒤에는 돈있는 여인을 찾아내서 6마리아의 이름으로  꾀였던 것이다.

정말 그대로 풍부했던 그녀들은 하나같이 허수아비 빈 털털이와 같이 되어 버림을 당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도 사랑도 없다. 문선명의 색과 금욕의 가련한 희생자의 죽음만이 남았다.

더욱이 해마다 새로운 마리아로 교체해서 볼일이 끝난 마리아는 자꾸만 버려 치워서 두번  다시 돌보지 않는 것이다.

6마리아란 무서운 함정에 빠진 여성들의 대명사로서 그 이면에는 실로 몇십명, 몇백명이라고 하는 희생자의 예비군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의 재산이나 자금이 없었다면 통일교회가 발족해서 발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를  아는 내가 첫번째 증인이다.

예를들어 이북에 원적을 둔 황모 중년 부인은 통도 크고, 뱃장도 좋아서 자기의 것을 다 바치고 남에 돈도 잘 들러다 댓다. 그래서 사랑을 받게 되니 인신이 아닌가. 자기 돈도 다 떨어지고 하여 문에게 낙태 수술비를 달라고 했더니 무정하게도 딱 잡아 떼며 노발대발 울면서 탈교선언에 겁이나 유 부장이 문교주에 이야기 해서 수술비를 얻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교회에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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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빼앗기고 살해되고

 

김 원덕 이란 사나이

 

부산의 교회에서 노여움이 치밀어 미친듯 했던 최선길 부인에게서 문선명을 구출해낸 김원덕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시대에 육군사관학교 포병과를 나와서 일본군에 복무하던중, 포병소위 로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후 그는 북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포병사령관 무정의 한쪽 팔 노릇을 하며 근무하면서  북조선의 비밀을 몇차례 남쪽에 흘려 보냈다.

이 사실이 사령관인 무정이 군사회의로 중국에 가있는 동안에 폭로 되었다. 당초 사형을 선고받아 집행되는 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김원덕은 명랑한 성격으로 솔직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냥 사형의 집행을 기다리는 정도라면 죽는편이 났다고 결심하고 옥중에서 자살을 도모 하였다.

다행이도 그것은 미수에 그쳤고 수갑을 찬채로 독방에 들어 있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귀국한 무정장군은 자기의 한쪽 팔이었던 부하가 사형을 선고 받아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을 알았다.

무정장군은 고급 군사기관에 입김을 넣어서 그가 신원보증을 한다는 조건으로 김원덕의 사형은 4년 8개월의 형으로 감형된 것이었다. 감형 통고를 받은 김원덕은 평양 형무소에서 홍남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위기일발로 총살을 면한 김원덕과는 내가 홍남 수용소에서 총반장이 된 후에 문선명으로부터 소개되어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세사람은 친형제처럼 문선명을 중심으로 모든것을 의논하면서 쓰라린 상황을 극복해 왔다. 또 김원덕과 나는 북쪽의 평남 대동군 용연면 출신이어서 서로 가까운 이웃 마을의 출신이라고 하는 점에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김원덕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 남쪽으로 피난하여 경찰의 치안국 외사계의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통일교회가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을때 김원덕이 나타나서 문선명을 끌어 낸 것인데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최선길은 차마 반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비적인 낭만


어느날 김원덕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좀 샘이나는 듯한 그의 사랑 로맨스이다.
그 몇일전 김원덕은 부산에 볼일이 있어서 용산역에서 야간열차를 탓다. 그는 상등석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 품위 있어 보이는 부인이 몇사람의 경찰관에게 둘러싸여서 같은 기차에 타려고 하였다.
그녀의 복장이나 전송나온 사람들을 보니까 어던지 모르게 고급관리의 부인이 여행을 떠나는것 같이 보였다.
그부인은 공교롭게도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수원역을 지나 대전역을 지났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때때로 보는 정도로 그대로 부산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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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 지나자,
그 부인은 한국의 유명한 시한구로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내는 흐르고 있어서 옟 물이 남아 있을수가 없다. 사람도 이와 같아서 한번 흘러 버리면 또 다시는  못 돌아오네 라고 하는 내용의 노래를 김원덕의 옆 얼굴을 보면서 작은 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 소리는마치 선녀가 노래하는 것 처럼 들렸다.
다시 한번 부인을 뜯어 보니까, 그 모양은 엄숙하게 보였으나 또 정이 넘쳐 흐르는 듯 하기도해서 한동안은 함부로 말을 건낼수도 없어그저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러나 김원덕도 만고풍상을 경험해온 사나이다.

그대로 위축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얼굴 생김새로는 자신도 있었으므로 큰맘 먹
고 말을 걸었다고 한다. 실례합니다. 당신은 용산역에서 보았습니다만, 부산에는 여행으로 가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은, 용산역 가까이에서 알미늄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부산에는 볼일이 있어서 가는 길입니다.

그로부터 부산역에 도착하기 까지는 아직 세신간이 있었으나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열심히 이야기에 빠졌다. 야간열차 속에서 알게 된이 부인과 김원덕은 완전히 호흡이 맞아서 그날 어떤 곳에서 만날것을 약속하고, 부산역에서 헤어졌다.

약속한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같이 하였는데 그 부인은 그에게 마치 연인에게 대하는것첨럼 행동하였다. 그녀의 행동에는 일본여성 처럼 사교적인 여자티가 넘쳐 흘러서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태도와 행동에 도취한 김원덕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 후에 영화를 보러 갔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어느쪽이라고 할것도 없이  이심전심으로 어느 호텔로 발걸음을 옴겼다. 이날 둘이서 맺은 사랑은 도저히 말로서는 설명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김원덕은 부산에서 볼일을 마치면 다음날 야간 열차로 서울로 올 예정이었으나, 그 부인과 같이 있으니까 한 주일이 금방 춘몽으로 어제 서울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 이었다.

 

아름다운 부인과 진수성찬

 

그리고 오늘 그녀의 자택으로 갈 약속을 한 것인데 자기 혼자서 가기는 쪽스러워서 박선생님도 같이 가셨으면 합니다 라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호기심이 생겨 김원덕과 함께 열두시에 용산시장으로 갔다. 철길을 건너서니 공지가 있는데 서쪽으로는 옛날 모리나가 제과의 공장이 있었고, 그 동남쪽으로 단충집이 있었다.

일본사람이 살던 헌집이라서 그다지 깨끗한 집은 아니었다.

현관으로 가니까 문패에는 "윤청정심(尹淸淨心)"이라고 책어 있었다.

두 사람이 현관에 들어서자 20세 가량의 두 여인이 나와서 우리를안내해 주었다. 첫방에는 큰 불단이 있고, 그 중앙에는 순금인지 도금인지 잘 모르겠으나 황금빛 불상이 놓여 있고, 좌우에 놓인 놋쇠 촛대에는 밝은 낮인데도 불이 켜져있다.

다음방은 자리가 열개도 더 깔릴만큼 큰 방이었는데 객실인것 같았다.

그곳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한참만에 여인이 정중하게 차를 날라다 주었다.
이 집의 구조를 보고 있는데, 옆의 문이 열리며 향수와 같은 냄새가풍겨왔다.

대단히 좋은 향기로서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중년부인이 들어와 앉으면서 그녀는 얼굴을 약간 숙여서 미소지으며 그리고 인사를 하였다.

김선생 흔자서 오시라고 말 한것인데 이렇게 누추한 곳에 선생님까지 오셔서 정말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 목소리는 밝고도 대단히 깨끗하였다. 40대 후반 정도로보였는데 매우품위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김원덕에게 소개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인사 하였다. 무엇인가 마음까지 관통된듯한 분위기였다. 마음을 진정하고 맞아서 그 부인을 다시 보니까 머리는 빗어올려 쪽을 짓고 긴비취 비녀를 꽃고 옛날의 궁전에서나 쓴듯한 금빛장식에 빨간 댕기를 드리우고 있었다. 감색저고리에 엷은 옥색치마를 입은 모양은 멋진 우리의 전통 정식 복장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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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첫날밤을 맞이하는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듯한 모양이었다. 부인의 안내로 옆의 방으로 갔더니 고급요리집과 같은 한식요리상이 놓여 있고 은제의 주전자에는 노오란 빛갈의 술이 들어 있어서 한잔 드시지요 라고 은제 술잔으로 한잔 받은 술은그야말로 최고의 가슴설레임 이 아닌가!

중국의 시인 이백은 장강폭 아래서 술을 마시며, "삼천자 높이에서 똑바로 떨어지는 물은, 흡사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과 같구나"라는 시를 읊었다.
나도 그러한 기분으로 술을 마시고 안주를 들었다.


이상한 예지능력

 

그 부인은 금강산에서 10년간 수업해서 이 세상일은 무엇이고 내다 볼 수가 있어서 사람의운명을 점칠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여명을 판단 할 수도 있고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그 사람의 당선을예언 할 수 있게 되고, 대학의 입학시험 때에는 그 사람의 합격 여부도 알수 있게 되었다고한다.

그 덕분으로 그녀가 경영하고 있는 알루미늄 그릇의 제조공장은 그녀로서는 본업이 아니라 부업으로 된것 같다고 한다. 그녀의 참 목적은 불쌍한 고아들 특히 여자 고아를 길러 대학교육까지 받게해서 사회에 내 놓는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길러낸 여자 아이들을 전원 이화여자대학을 졸업시켜, 현재 돌보고 있는 고아는 17명 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고 있자니까, 감히 얼굴을 들고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국회의원 선거때가 되면, 이 부인집에는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대학의 입학시험때도 역시 같다고 하는것이었다.

우리들은맛있는 성찬을 잘 먹고 이상한 그 부인의 이 야기 를 듣고 또 오십시요 라고 전송을 받으며 그집을 나셨다
김원덕씨를 연인으로 삼았다고 내비치면서 그녀는 김씨에게 부인이있어도 관계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자기를 사랑해 주고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서로가 좋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세속적인 감각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김원덕과 나는 그집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김원덕의 덕분으로 나는 언제고 성찬을 먹을 수 있어서 한 동안은 괜참은 생활을 보냈고, 서로간에 친하게 되니까, 나는 불단에 놓여 있는 싱싱한 과실을 마음대로 집어 먹어도 실례되지 않을 만큼 친숙해겼다.
재림 메시아의 아버지와 함께 있으니까 생명이 없는 불단 앞에 이러한 물건을 놓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부인은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항상 주의 깊게 들었던 것 같다.
그 후 그 부인 윤여사는 김여사라고 하는 다른 부인을 사이에 넣어서 토목 건축회사를 설립하여 김원덕을 사장으로 앉혔다.

 회사의 명칭은 윤여사가 "운흥공사"라고 명명한 이름인데, 구름처럼 일어난다고 하는 의미였다. 사장이 된 김원덕은 토목건축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경영은 그리 잘되지 못해서 얼마 못가서 이 회사의 간판을 내리게 되고 말았고, 그후에도 또 여러가지 사업으로 김원덕과 윤여사는 협력하였으나 운이 없는 탓인지 그리 잘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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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한동안 윤여사는 불단의 과일을 먹을때에 말한 그 말의의미를 물어왔기에 설명하였더니 꼭한번 그 선생을 만나보고 싶다고 윤여사가 말하지 않는가 !

나는 김원덕과 의논하여 문선명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 하였더니 만나도 상관없다고 말하여 1954년 10월 25일 오후 6시에 신당동 양문영여사의 자택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 다음날 윤여사에게 그 일을 전하였더니 그녀는 대단히 기뻐 하였다.


제자의 연인을  빼앗은 문선명

 

약속의 날, 김원덕과 나는 윤여사를 데리고 양여사의 자택에 안내하였다. 양문영, 신정순, 오명춘, 옥상현, 지승도, 이순천, 이기환, 양윤신, 등의 여자 식구들과 유효원, 유효민. 이수경, 김원태등이 모였다.
그때의 윤여사는 최고의 한국정장으로 몸을 싸서 흡사 신부가 신랑집으로 첫날밤을 맞으려 들어가는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본 식구들 특히 부인 식구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
인사를 나눈 후에 윤여사는 자기의 영적인 눈으로 선생을 우러러 뵈오니까 참 어머니가될 여인이 없어서 근심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제가 신부로서 신랑인 선생님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라고, 당돌하게 첫 인사를 하여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날은 예수가 세사람의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간 때와 같은 분위기가 되어, 문선명도 원리강의를 밤새도록 이야기 했다.
또 윤여사는 시를 노래하고 창을 불렀다. 그 소리는 그 집의 주인이며 이화여자대학의 음악교수인 양문영 여사가 들어도 놀랄 정도였다.
그 당시는 문선명에 대한 감시가 엄하게 되어 있었다. 밤 열두시가 되면 통행금지가 되어있어 다음 기회에 또 만날것을 약속하고 그 밤은 다 헤어졌다.
일주일 정도지난 어느날, 문선명이 별안간 유효민과 같이 윤여사의 집을 찾아 왔다. 김원덕과 나는 문선명이 오는것을 몰랐으므로 대단히 놀랐다. 윤여사는 정성을 다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문선명을 접대 하였다.

문선명도 신랑이 신부집에 간것 같은 태도로 윤여사와 앉아 있었다.
또 윤여사는 성경에 나오는 신랑을 맞이하러 가기 위해서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신부가 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것 같은 분위기였다.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나와 김원덕은 밤도 깊었으므로 문선명과 유효민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이날밤 문선명은 윤여사와 복귀 (섹스)를 했다고 한다.
김원덕은 북에서 피난하여 남으로 올때 살곳이 없었던 문선명을 자기의 셋집에 한동안 머물러 있게 하기도 하고, 부산에서 문선명이 곤난한 상황에 놓였을때, 선두에 서서 몇번씩해결해 주었다. 그 김원덕이 자기의 사랑하는 연인 윤청정심과 문선명에게 배신 당한 심경이되어 그후 문선명을 피하게 되었다.

문선명은 송도욱 장로를 비서역으로 하고 부터는 자주 윤여사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1955년 7월 4일 문선명이 경 찰에 구속되고 부터는 윤여사도 한동안 우리들의 통일교회 와는 발을 끈었다.
김원덕은 그 후에도 몇차례 나와 만나서 문선명에 대한 원한과 노여움을 말했고 나는 열심히 복귀원리를 설명해서 문선명을 감쌌으나 김원덕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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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인이 있는 가운데 어째서 자기의 제자가 사랑하는 연인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 뺏아서 가는가. 선생은 나를 바보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짓을 하는 선생에게 어떻게 복종할 수 있는가?

통일교회의 원리가 아무리 훌륭해도, 자기는 더 믿을 기분도 없다.

선생 아니 문선명을 용서 할 수 없다.

문선명은 종교의 이름을 빌어서 여자를 속이는 사기꾼이다.

김원덕은 군인출신답게 외골수인 데가 있어, (나도 그렇지만) 정말로 격분했다.

그래서 문선명이란 사나이는 발정한 개다.

음수다 라고 뱃속에서 짜내듯이 매도했다.

김원덕의 억울함은 잘 알기 때문에 나는 그 이상 댓구할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해뒤의 일, 윤여사, 식모, 양녀(대학생딸)의 일가 3인이 누군가에 의해서 타살당한 사건이 생겨서 큰 소란이 되었다. 경찰도 필사적으로 수사를 한 모양이지만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그 전까지도 문선명과 윤여사의 사이는 계속되고 있었고, UN군의 인천상륙으로 6 25동란이 유리하게 된것을 찬양하는 영화 "오오 인천" 의 준비가 두 사람 공동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윤여사의 돌연한 죽음으로 자금이 나오지 않아서 중단되었다.

김원덕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어, 나도 당시 경찰의 조사를 받다 그의 소재를 물었었다.
그 후 김원덕과는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어, 나도 슬적 모양새를 살펴 보았으나 김원덕 자신도 그 사건에는 대단히 놀라고 있고 둘이서 진짜 범인 찾기의 연상게임을 한 일도 있다.

김원덕한테는 전혀 변한 것이 없어서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러던 그는 죽어서 이미 3년이 되었다.

 

 

제5장  재림 메시아의 정체

 

원리와 실천의 모순

 

나의 수기는 진실의 기록

 


나는 흥남수용소에서 문선명을 알았고, 1년 6개월을 같이 생활 하였다. 6.25동란으로 출옥한 그와 두달간에 걸쳐서 남쪽으로 피딘하여 평양에서 서울 부산까지 왔다.

한동안 나는 경주에 있었고 문선명은 부산에 있었다.

그와 채차 합류하고서도 이 세상의 창조의 역사와 타락의 원인, 그리고 이 세상을 복귀시켜 하나님이 구원한 깨끗한 세상의 창조 목적대로 되돌리는 원리를 듣게 되었다.

원리의 주인공인 재림 메시아 참부모의 이름 아래 통일교회는 이제야 세계 백수십개 국가에 퍼져 있다. 진정한 어머니인 해와가 된다고 하는 것으로 한 사람을 선택하여 "어린양의 잔치(정식결혼)"를 행하고 열한사람의 아이들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그 첫번째 아들을 아버지 문선명의 후계자로 하고자 하는 세습체제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문선명은 각국의 학자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소개 되었다. 그를 위대한 인물로서 존경하고 있는듯한 책도 있다. 나는 그러한 책은 거의 읽었으나 그러한 책은 문선명이 지금까지 그 목적과 실천을 어떠한경과로 해 왔느냐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쓰지 않고 있다.

다만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 만을 쓴, 겉치례 만의 내용 이었다.

그러한 책에 책에 씌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나도 비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이 책에서 써 온 것은, 문선명과 같이 있으면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행동해 온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 했다고 단언해 두고 싶다.

문선명이 흥남수용소에서 시간만 있으면 나에게 이야기한 "원리"는 부산 수정교회에서 원고로 써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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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원리원본'이다 (이것은 종이에 연필로 쓴 것인데, 이것을 대구에 와있던 정선옥이 보관하고 있었고, 내가 서진광산에 있을때 박애자가 가져다 주었다. 그때 내가 공책에 베껴쓴 것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
 

이 원리원본을 기초로해서, 두뇌가 뛰어난 유효원이 '원리해설'(原理解說)을 썼다.


그리고 이 '원리원본'과 '원리해설'이 통일교회의 기초가 되어 문선명이 세계 백수십개 나라에 진출하게 되는 기초가 된 것이다. 이 원리원본과 원리해설을 전부 인용 할 수는 없으므로, 우선 요약해 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자들


그러나 이 '원리해설'에는 그 원리와 실천과의 모순되는 것이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를 몇 항목만 지적해 둔다.


어느나라에도 그 역사의 시초에는 신화가 있다.

우리 한국이나 한반도에는 단군을 비롯한 건국의 신화가 있다.

일본에는 천조대신이 있고,

중국에는 덕왕형제 11인 등이 있다.

그런데 내가 따랐던 문선명은 한나라의 국조가 아니라, 세계의 재림 메시아라고 한다.

지금까지 출판된 많은 책 가운데는 문선명을 구세주라고 쓴 것도 있다.

문선명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계를 통일 하려고 주장 하고 있으나 내가 믿어온 재림메시아는 점점 그 모양이 커감에 따라, 그 원리와 실천이 점점 상반 되어 가는듯한 느낌이 드는것을 어찌하라.

2천년전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간 예수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있다.

문선명은 제3의 아담 참부모로서, 통일교회 교인은 물론 온 세계 사람들로 부터 추앙받아 백수십개 나라에 넓혀져 있다.

그러나 식구라고 불리는 통일교회의 신자가 되더라도, 사단의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와 생활에 변화된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나빠지던가 비명의 죽음을 맞은 사람도 있다.

나는 그점에 대하여 계속 의문을 가져왔다.

많이 있는 통일교회 관계의 출판물 가운데 실제로 내가 읽은것에는, 통일교회는 이러한 윤곽의 교회이며, 그 교주인 문선명은 원리라고 하는 교리에 나오는 재림메시아 이다 라고 하는정도의 표면적인 것밖에 씌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문제는 문선명이 얼마만큼 재림메시아 로서의 역활을 다 하고 있는가.

구세주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가 하고 하는 것으로 귀결 된다.

그런데 뻔뻔스러운 문선명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지금부터도 계속해서 희생 시키려고 하고 있음으로, 더 이상 잠잠코 보고 있을 수 만은 없다고 생각되어, 이책을 쓰기로 한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통일교회 교인들은, 지금도 백수십개 나라에서 문선명을 참아버지로 생각하고, 한학자를 참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이 세계가 통일될 것을 매일 같이 기원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나도 문선명이 진짜 재림메시아가 되어서 이 세상을 구원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는 식구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만약 문선명이 재림메시아가 아니고, 요한 묵시록 20장에 씌여 있는대로 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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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고 한다면, 진짜 참 신부와 어린양의 잔치를 올려 참부모가 되여, 열 한사람의 아이들을 출산하고 있는데, 어째서 참 부모한테서 남은 아이들이 두명씩이나 교통사고로 죽어 갔는가.

또 다른 여자에게 출산시켜 입적한 세사람 가운데 한사람도 사고로 죽었다.

"요한묵시록 21장 4절"에는 사람의 눈에서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신다.

이미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부르첫음도 아품도 없다.

먼저 것이 지나가 버렷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다.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면, 복귀 원리대로 어린양의 잔치를 행해서 이 세계의 모든것을 해방하는 날짜 까지 정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세상은 그대로인 것인가.

 원죄의 근원을 모두 없애고 복귀의 의식을 거쳐 참부모가 되었을 터인데 어째서 거기서 태어난 어린 자식들이 죽어 가는가.

 또 그 자손들 가운데는 부끄러운 스캔들을 일으켜서 언짢은 소문까지 내는 자도 있다.

나는 문선명이 원죄를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 왔는가.

원리대로 실천하였는가? 등에 관해서 밝혀두고 싶다.

문선명의 장래는 하나님 만이 결정 할 수 있는 문제 이다.

나는 다만 문선명이 발표한 원리에 근거해서 그 원리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함께 살고 있었던 때의 사실에 대해서 써 보려고 생각한다.


문선명이 무슨 메시아 !

 

여기서 다시 한번 문선명의 원리를 복습해 두자.

 

(창조원리) -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흙으로 사랄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인간이 되었다.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며 에덴의 동산에 두어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쓸쓸해 보여서 그가 자고 있는 동안에 그의 갈비대의 하나를 빼어 여인을 만들었다 그 이름을 해와라고 하며 아담과 함께 에덴의 동산에서 세상의 모든것을 지배하도록 하였다.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 따 먹어도 좋으나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만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명령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경고하였다.

 


(타락원리) - 해와가 성숙한 뒤 하나님이 모양이 있는 아담의 몸에 임재하여, 해와와 함께 사랑해서, 즉 섹스를 해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됨으로 거기에서 부터 생겨나는 죄없는 아들에 의해서 자손이 번영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천사장 루시엘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해와를 유혹해서 섹스를 하고 말았다.
또 해와에게 아담과도 섹스를 하도록 시켰으므로, 이것이 타락한 사단 루시엘의 혈통 세계가 되었다.

 

 

(복귀원리) - 이와같이 성숙하지 않은때에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섹스를 한 것으로 인해서 인간이 타락케 된 것이다.
그때 해와와 아담이 나무열매를 따 먹었다면 죄를 범한 입을 감추었어야 할 터인데 하나님  앞에서 두 사람은 부끄러워서 무화과의 잎으로 하체를 감추었으므로 섹스를 한것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도 인간은 신체에 상처가 생기면 그것을 가리우려고 하는것이 본성인데 부끄럽다고 하체를 가리우는 것은, 그곳에서 범죄하였음을 자증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이 타락한 것을 어떻게 복귀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해와에게 사단의 피가 흘러들어간 것으로서 ,아담과 해와는에덴 동산 땅을 파며 해와는 아이를 낳는 해산의 고통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 게 되었다.
그 후, 아담과 해와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 두 사람이 인간의 시조가 된것이다. 가인이그 아우인 아벨을 죽였으므로 이것이 에덴 동산에서 최초의 살인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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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복귀하면 이 세상이 깨끗하게 될 것인가 여기서 문선명은 이 복귀의 실천을 하기 위해서 많은 장해를 뛰어 넘어 왔다.

그의 그 원리와 실천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복귀를 설명하면 해와가 성숙하지 않았을 때에 천사장 루시엘이 섹스를 해서 해와의 정조를 빼앗았기 때문에 이 죄악을 깨꽃이 하기 위해서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복귀를 실현하는데 우선 하나님과 같이 더렵혀 지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서 루시엘 에게서 정조를 빼앗긴 해와와 같은 여인과 루시엘이 해와와 섹스한것과 같이 이 두 사람이 섹스를 하는것이 펼요하게 된다.

그리고 루시엘은 해와 위에 올라타고 섹스를 하였으므로, 지금 이 사단의 세상에서도 똑같이 남자가 위로 타고 섹스를 하는 것이 보통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복귀 할 때에는 남자가 밑이 되고 여자가 위에 올라타고 섹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같은 이치로 문선명은 이러한 체위로 복귀의 실천을 계속하고있다.

하나님과 동격으로 복귀할 수 있는 사람은 말 할것도 없이 문선명 이라고 원리 에서는 단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선명은 왜 죄 없는 하나님과 동격의 입장에서 복귀 시킬수가 있는가.

문선명이 이 사단의 제상에서 극히 평범한 가정에 태어난 것에서부터 생각하자면, 도저히 납득 할 수없는 일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납득되는 부분이 없다.

한번 더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흥남 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을 문선명과 같이 지냈다. 이 수용소에서의 1년 6개월간은 외부생활의 16년 정도에 해당되는 기간이라고 서로 간에 이야기 하곤 했다.

그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문선명이 16세때 (1935년), 부활절 전날밤, 예수가 꿈속에 나타나 예수가 달성 하고자 하였던 일을 하지 못한채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므로, 당신이 나 대신 그 사명을 완수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선명도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몇번이나 부탁을 하였으므로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이 예수에게서 부탁 받았다고 하는 것은 후에, '원리'에서 말하는 '복귀'의 실천이며, 섹스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의 여부는 본인 밖에 알지 못하는 이야기 이므로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예수의 꿈을 봤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있을 터이고, 꿈속의 말씀에 의한 예수의 이야기 한 것이, 이렇게 엉뚱한 섹스 복귀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무래도 이해 할 수 없다.


정득은 과의 이상한 관계

 

1955년(소화30년) 7월 4일, 문선명 등이 체포되어 중부경찰서의 유치장에 수감 되었을때 평양시절의 정득은 이 찾아와서 나에게 그녀의 집까지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註 :
이 할머니도 또 이상한 존재로서, 좀 길어지지 만 주의해서 읽어 보시오)

나도 마침 그당시 문선명의 평양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김종화를 찾던 중이어서 정득은이 살고 있는 집 까지 가기로 하였다.

50세가 되는 정득은은 원효로 3가에 조그만 집을 빌려서 살고 있었다. 여기서 1주일을 함께 지냈다. 그리고 문선명이 서울에서 평양에 도착한 후의 정득은 과의 신비(?)에 싸인 생활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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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득은 은 북녁의 평안북도에서 한때 번성하였던 이웅도 목사, 황국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복중교 와도 관계는 없었다.

다만 기독교를 믿고 있었는데, 1946년 6월 6일 하늘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내용은 지금 38선을 넘어서 한 청년이 가방 하나를 메고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그 청년은 하나님이 중요한 책무를 지워서 이세상에 보낸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 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평양으로 향하고 있으니, 나가서 그 사람을 맞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 했다는 것이다.

정득은 은 부랴 부랴 남쪽으로 찾아 갔더니, 사동이라고 하는 곳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릭구삭 하나를 멘 청년이 이쪽을 향해서 왔다. 그것이 문선명(당시는 문용명)이었다.

정득은은 그의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한 후에 자기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정득은의 자택은 만수대 밑에 있었다.

문선명을 안내하여 온 정득은은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는것.

선생이 오는것을 알고 마중하러 갔던 것을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득은은 자기가 여호와에게서 성모로서 인정 받았으므로 문선명과 섹스를 하면 문선명은 신과 동격의 입장이 되어 타락한 부부의 입장에 있는 여인들을 복귀 시킬수가 있게 된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문선명이 밑으로 가고, 정득은 은 그 위에 올라타서 소생, 장성, 완성의 3회의 섹스를 하였다.

미 복귀의 실천공식과 방법은 흡사 문선명의 원리와 같다.

성모 마리아 대신에 성스러운 정득은 파 복귀를 한 것으로서, 문선명은 온전한 하나님 처럼 죄 없는

정득은 은 꿈속에서 여호와와 섹스를 하였으므로 자기는 성모라고 말한다.

너무나도 잘 꾸며진 이야기지만, 문선명의 한쪽 팔과 같은 입장에 있던 당시의 나는 오직놀랄 뿐이며 감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창조, 타락, 복귀의 원리도 완성되 있지 않았을 때에, 원리도 모르고 문선명과는 처음대면의 정득은 이 도저히 생각 할 수 없다.
 

앞뒤의 사정으로 보아 두 사람이 육체관계는 있었던 듯 하지만 아무래도 후에 억지로 끌어다 붙인 조작된 이야기라고 나는 지금 믿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평양으로 갔을 무렵의 문선명의 행동이, 원리를 무시한 엉망 진창인데가있다. 생활안정을 위해서 필사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당시의(후에도 그렇지만) 그의 무기는 미완성의 괴상스러운 원리론과, 그것에 빠져서 몰려드는 여인들에 대한 섹스공격 밖에 없지 않았을까 ?

백보를 앙보해서, 만약 그것이 진실이었다면, 통일교회의 인쇄물은 어째서 이 (정득은의 대기적)에 관한 것을 한 줄을 쓰지 않았을까 ?


체포도 당연한 섹스포교


평양시 대의 이야기를 계속하자.

이 후, 문선명은 나최섭의 집으로 옮겼고 다음에는 경창리에 있는 정명선, 김종화 부부의 집으로 가서 거기서 예배를 올리게 되었다. 이미 섹스관계가 있었던 지승도 옥상현들과의 여러가지 갈등이 있어서 정득은 은 독립해서 다른 신자를 모아놓고 예배를 올리고 있었다.

또 여기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그 내용은, 여자 신자들이 제각기 문선명과 섹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간에 자기만이 문선명을 낳은(영적으로 이세상에 낳은) 성스러운 어머니다 라고 하는 주장이 얽히고 설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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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데, 신자이었던 여자들이 문선명과 섹스 함으로서, 문선명에게 복귀할 자격을 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밝힌 바이지만 그 후의 문선명은 김종화의 집에서 남편인 정명선과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부녀인 김종화와 같이 살았다.
그리고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그 유부녀와 "어린양의 잔치"를 구실 삼아 결혼 한다는 소동을 피워서 경찰에 체포되어 사회질서 문란죄(社會秩序 紊亂罪)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흥남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거기서 문선명은 나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것에 관해서, 통일교회의 출판물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문선명이 복역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기성 기독교 교단의 투서와 공산당의 종교 말살정책으로 인해서 내무성에 구속되어 공판서 5년의 형을 받았다
이것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것은 독자들은 이해 하실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공산당이 실제로 종교 말살정책을 행하였다면 기성 그리스도 교단이 질시할 여유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옥상현 남편인 우하섭은 그 무렵 평양 장대현 교회의 신망있는 장로였다.
또, 이 3개월전인 1946년 8월에도 문선명은 북조선의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후에 겨우 석방되었다.
통일교회는 이것도 원인은 신도를 빼앗긴 목사들의 반감과 질투로 고발 당했다고 하고 있으나, 똑같이 분에 넘치는 섹스포교의 결과였다.
나는 이 책에서 남쪽의 한국(부산, 대구, 서울)을 중심으로 문선명과 함께 걸은 발자취와 생긴 일들을 써 왔으나, 문선명은 이미 평양시절에 다수의 여성을 섹스로 식구를 삼아 항상몸 주면서 신봉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여성을 역시 6마리아 논법으로 꾀어내서 육체와 금품을 뜯어 냈던 것이다.

 

 

색과 욕과 돈과

 

남편의 돈을 훔쳐 오라

1955년 7월 4일 문선명은 서울시 경찰에 구속 되었는데 재판에서 무죄로 선고되어 석방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통일교회는 죄없는 사람이 구속 되었으나, 그 후 사실이 밝혀져 석방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당시 문선명과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있었던 내가 그간의 사정이나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문선명은 실제로 여러가지 많은 죄 를 범 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의 기민한 대책으로 경찰의 조사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았던 것과, 위증이나 거짓으로 뒷말을 맞추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던 덕분에 무죄로 되어 석방 되었던 것이다.
통일교회는 그 사실을 감추고 있지만, 내 자신도 위증을 해서 교인들의 말문을 맞추기에손 쓰느라고 뛰었고 증거인멸을 행 했던 것이니까 틀림없다.

사실로 말하면, 재림주로 믿었을 때 어떻게 허락없이 재림주의 연령을 내 마음대로 올릴수 있겠는가. 이건 생각도 못할 일이다.

재림주 문과 의논해서, 허락아래 연령을 올려서, 제 2국민병을 기피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태산 같지만 가령 이순철이라고 하는 유부녀를 자기는 재림 메시아 이니까 자기와 복귀 하면 당신도 6마리아 의 한 사람 예수의 마리아로 된다고 속여서 섹스를 했다.

훌릉한 간통죄 이다.

또, 이 세상을 사단이 주물르고 있으나, 이 세상의 모든 재산은 본래 하나님 것이므로, 사단이 쓰고 있는것, 남편의 돈이나 집에 있는 재산은 전부 훔쳐서라도 나에게 헌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이 이상적인 세계로 되며 하나님은 수천배도 넘는 행운을 주실 것이다.
이 이야기를 믿어 이순철은 자꾸만 가져다 바쳤다.

어느 때에는 문선명에게 강요되어 당시의 미국달러 1만 5천불이나 되는 돈을 집에서 끄집어내서, 그돈으로 두달동안 문선명을 마음껏 놀아나게 하였다.
드디어 남편도 노해서 팔방으로 손을 써서 찾고 있었다.

절도의 훌륭한 공범이다.

이것이 어찌하여 죄가 안 될 것인가.

남펀이 경찰에 그런 이야기를 안하고, 간통죄로 고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디어 냈을 뿐이다. 다른 마리아의 남편들도 모두 그러했다.

또 처녀인 딸들에게, 문선명은 나의 처가 되면 세계의 진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해서 믿게 하고, 속임수 섹스를 했었다.
이러한 수법으로 김영희라고 하는 여자 대학생도 이성화도 속아서 문선명과 섹스를 했었다.

쾌락에 빠지고 결흔을 구실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청순한 처녀들을 범한 문선명이 어째서 죄가 되지 않았을까?

식구들의 눈물어린 심정을 통일교회는 생각해야 할 것 이다

 

왜  죄없는 아이들이 죽는가

 

그리고 나는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탈세라고 하는 죄명으로 미국의 형무소에 투옥 되었던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요한 묵시록 21장 3~4에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살며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스스로 사람과 함께 계셔서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신다.

이미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부르짖음도 아픔도 없다.

먼저 것이 이미 지나가 버렷기 때문이다 라고 쓰어져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것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 재림 메시아 시다.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그했던 것 처럼, 미국에서의 사건도 6천년간 하나님의 희망이었던 복귀의 실천을 하고 있어서 사단 세상의 법률에 걸려서 투옥되는 것은 원리의 예정에 있다고 문선명은 말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원리대로, 처녀를 신부로 맞이하여 "어린양의 잔치"를 행해서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였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는 교통사고로 또는다른 형태로 죽은자 들도 있고, 세상에 여러가지 좋지 못한 소문을 퍼트리고 있는 장본인도 있는 것은 무슨 이치일까?

문선명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왜 그런지 당연한 사실을 왜곡해서 선전하며 전도하고 있다. 그 때문에 도리어 문선명의 장래는 점점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라고생각한다.

나는 문선명이 원리의 실천이라고 말하면서 하고 있던 행위를 옆에서 직접 보아온 사람으로서, 그 사실을 명확하게 하여 .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인가?

아니면 남달리 여색을 좋아하는 돈벌이 주의자인가 라고 하는 것을 밝혀둘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문선명이 하나님과 동격으로 복귀된다고 하는 근거는 성스러운 어머니 ! 정득은이 재림메시아 로서의 문선명을 낳은것과, 문선명이 16세때의 4월 17일 부활절의 전날밤 꿈속에서 예수가 나는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복귀의 임무를 다 하지 못했다.

당신이 그 대신 제3의 아담으로서 재림 메시아의 임무를 다 해 주기 바란다 라고 말했다는것(통일교회의 신문에도 명기 되어 있다)의 두 가지를 들수 있다.

만약 그대로 문선명이 하나님의 실체로서 복귀의 임무를 실천 하였다면, 창조 당시의 에덴의 동산이 복귀되어, 통일교회의 교인들은 참 부모와 함께 눈물도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복귀(復歸)라고 하는 미명으로 섹스


우선 6마리 아 복귀문제에서 부터 생각해 보자.

사탄에 의해서 해와를 빼았긴 것 때문에, 하나님은 6천년 동안이나 노여움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나넘은 해와를 도로 찾기 위해서 제2의 아담인 예수를 이 세상에 보냈으나, 예수의 생모인 마리아는 예수를 자기의 아들로 밖에 생각지 않고, 자기의 아들이 우선 어머니와 섹
스를 하기 위해서 생겨 났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 (註 - 이와같이 어머니와 아들이 섹스 하는것을 원리에서는 '모자협조'라고 한다. )

그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고 원리는 설명하고 있다.

또 원리원본에는, 가롯 유다의 연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가 빼앗아 복귀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원한을 없애기로 되어 있었는데, 유다가 이에 복종하지 않고 은화 30냥을 받고 예수를 팔았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예수가 복귀하려고한 6여인의 마리아를 복귀 시켰더라면 원리대로 실천되게 되는 것이라고, 나도 이해 하였었다.

그런데 6인의 마리아를 복귀시킨 후에도 문선명은 손에 닿는대로 몇십명이 넘는 여인을 복귀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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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들면 이화여자대학의 사감 선생이었던 한충화는 문선명에게 복귀된 후에 결국 섹스의 마수에 빠져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어 문선명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무렵 볼일이 생겨서 문선명과 전주에 있을 때, 미인 여자와 만나게 되어 그 여성과 복귀하는 것을 나는 바로 옆에서 보았다. 그것이 그녀였다.

한충화는 열열한 크리스챤으로서 미망인이 되어 사무엘 이라고 하는 벙어리 아이를 데리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었는데,그 '원리'에 속아서 문선명에게 자기의 몸을 제공 하는것이 하나님의 뜻 이라고 믿고 기뻐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선명이 또 다른 여자와 복귀하고 있는것을 알자, 그 길로 서울로 돌아와서 문선명과 결별하였을 뿐아니라, 그곳이 더럽혀 졋다고 자궁 수술까지 하였단다.

그때 까지의 자기의 경솔한 행동과 섹스에 미쳐있던 문선명에게 정조를 빼앗긴 것을 후회하면서 그 뒤 얼마 안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누구 때문이며, 누구의 죄라고 말 할수 있을 것인가?

1955년 이화여자대학의 5인의 교수가 퇴직하도록 추궁하여 사표를 내고, 14인의 학생이 학교에서 를겨나게 되었다. 이일은 역시 문선명과 교수와 학생과의 복귀 사건에 얽혀 있던 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부산 수정동시대에 이미 6마리아는 결정되어 있었으며, 섹스의 실천도 끝났던 것이다. 그런데도 또 새로운 마리아를 복귀 시키려고해 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복귀를 한다고 하는 것만이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여성 식구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고 ,또 원리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여인들에게는 무작정 복귀를 받는 일에만 필사적인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통일교회에 대해, 외부에서는 통일교회에서는 벗고, 춤추며 한번 입교하면 마취에 걸려서 두번다시 올수 없도록 해 버린다 고 하는 소문이 널리 퍼져 가게 된 것이다.


많은 가정이 파괴되다.

 

그래서 실제로 문선명의 원리의 이야기를 듣고, 타락원리와 복귀원리를 들음으로서, 각계 각층에서 와있던 사람들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 왔다.

지금까지 아이들과 함께 평화로운 생활을 해온 부부와 처가 통일교회에 들어가고 나서는 옷을 벗는 것도, 남편과의 섹스도 거부하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람들은 문선명에게 바치는 경제 문제만도 골머리를 앓았다 .

그래서 결국 이혼하게 되고, 문선명의 원리에 따라 가정생활이 파탄나게 된다.

경제적 기반이 없는 가정에서는, 더욱이 믿기만 하던 남편이 처에게 절망해서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고 말게 된다.

그 당시 통일교회의 섭외부장이었던 김인철은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는것이 큰일의 하나였다.

이와같이 파탄된 가정 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도 170가정 이나 된다.

그 당시 문션명으로부터 복귀를 받기는 하였으나, 문선명의 행위를 보고 체험하고서는 저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오직 색에 미친 행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여인들은 남편에게는 모르는체 하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이 여인들의 심경은 지금쯤 어떠할 것인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 식구들은 그래도 모든 것을 바쳐서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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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당시 통일교회의 어느 남자식구로부터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문선명 선생의 복귀는, 그야말로 엄숙한 것이 겠지요.

 그때는 웃으면서, 그러믄요 하나님이니까 라고 대꾸해 두었으나, 재림메시아의 복귀의 의식인 만큼 엄숙한 것이라고 상상 하는것도 당연 하겠지,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하나님 이었어야 할 문선명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앞에두고 입 맛을 다시는 개같이 되어굶주림에서 해갈이나 된듯이 섹스를 했을뿐이다.


오로지 성욕 불덩어리 같았다.

사실 문선명은 정력이 뛰어 나서 하루밤에 열번 한 일도 있다고 한다.

본처였던 최선길의 말이니까 이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복귀를 받을 때의 부인 식구들도 그렇다. 순수했던 여성들이니까 당연 하겠지만 멋대로 너브러져서 곧 기를 쓴다.

큰 소리를 지르며 실신한 사람도 있다.

내가 돌봐 주었으니까 이것도 틀림 없는 사실이다.

사단을 부정하고 있는 문선명의 복귀라지만, 결국은 사단 세상의 섹스와 무엇 하나도 다를것이 없다.

그러한 문선명의 정체를 재발리 눈치채고 가정으로 복귀한 부인네들은 정말로 현명하였다. 

그녀들은 엄청난 피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원한은 여름에도 서리를


그런데 문선명은 지금 자기가 재림메시아 진정한 아버지가 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복귀한 식구들의 뒷바라지는 하나도 해 주지 않는다.
외국 특히 일본과 미국에서 참 아버지로 군림하게 되어, 일본에서는 영감상법(靈感商法) 따위로 반사회적으로 돈을 들어 모아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희생이 되어온 사람들에게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문선명을 원망하면서 통일교회를 나서는 여성이 날마다 늘어 가고있는 상황이다.

문선명은 장래 어떠한 방법으로 무슨 원리를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 갈 것인가 ?

미국의 목사들에게 원리의 비디오 테이프를 35만개나 만들어서 발송 하였는데 그것으로 이런 것이 방지되게 될 것인가?

미국의 목사들이 원리설명회란 명목으로 세계각국을 방문하여 몇억원이란 돈을 쓰면서 포교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을 방지 할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미국, 한국의 유명한 학자들에게 비싼 원고료를 주고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 구세주로서 치켜 올리려고 하고 있지만, 한국의 속담에 여자의 원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註 - 이것은 음력이니까 5, 6월은 한 여름이다)고 하는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청춘시절에 문선명에게 복귀되었던 여인들은 재산을 전부 털어 넣고, 남편한테는 이혼 당하고 자식들과도 헤어져서 지금은 폭삭 늙어 버렸다.

이 사람들은 거의 식모를 두고 살았을 만큼 넉넉한 가정의 부인들이었는데 재림주! 문선명을 맞아서 그에게 모든것을 바쳐 버리고 지금은 먹고 지내는 것도 옹색해서 자기(자신)가 식모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사람이 몇 십명이나 된다.

또 원한을 품은채 일생을 보낸 사람들은 몇백명이나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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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여인들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 보려고 생각 하였으나, 나의 경제적인 사정둥 여러가지 문제로 실현 하지 못해서 참으로 민망하게 생각한다.


처녀에게 낳게 한 아이들


원리 중에서 제일 중요시 되는 참어머니가 되는 처녀의 선택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 했
다고 생각한다. 참 아버지로 자칭하는 문선명과 어린양의 잔치를 올리는 사람이 참어머
니가 된다고 하는 것인데 , 그의식에 따라서 에덴의 동산을 타락전의 상태로 되돌려서 하
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원죄를 뿌리에서 부터 뽑아버린 후에, 또 죄없는 깨끗한 세상으로 되돌려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이, 영원히 참 부모를 모시고 살아 갈수 있는 세상이 창조 된다고 하는것이 원리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참어머니인 처녀 한사람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또 알기 힘든 문제가 많이 있다. 문선명이 평양에 있을 무렵 정명선 씨의 처이며 아이들의 어머니인 김종화가 "어린양의흔인 잔치"의 상대로서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문선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징역 5년의 선고를 받아 문선명이 흥남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는 것은 몇차레나 썼다.

부산 영도의 신성묵의 자택에서는 김영회라고 하는 처녀를 복귀 시켰으나 그 후에도 관계를 계속해서 김 영희는 임신하였다.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문선명은 오승택이란 학생에게 연애한 것처럼 연극을 꾸며 김영희와 함께 일본으로 밀항 시켰다. 김영희는 일본에서 문선명의 아들을 낳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살게 되었다.

또 더욱이 이성례 라고 하는 처녀와도 복귀하여, 남자아이를 낳게 했다. 서울로 와서는 6마리아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문선명은 신부인 처녀를 선택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이성화를 서울역 앞의 여관에서 복귀한 것이다.

이성화는 그 후 자기가 참 어머니 후보의 첫번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의 공범은 이순철이었다.

이성화를 선동한 그녀는 신부 참어머니로 선택되어 복귀한 증표로서 금반지를 만들어 이 가련한 처녀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선명은 이 처녀들을 모두 버리고 홍순애의 딸 한학자와 "어린양의 잔치"를 올려, 한학자가 참 어머니가 된다고 말하며 결혼했다.

지금은 많은 통일교회 관계의 출판물 중에서 참 아버지로 되어있는 문선명과 참 어머니로 되어있는 한학자와 함께 살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 한다는 목표를 걸고, 여러 단체와 많은 경제력을 동원해서 문선명을 옥중의 구세주라고 치켜 세워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로서 돋보이게 하기위한 여러 가지 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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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한자는 누구냐

 

문선명의 소개장

 


다음에는 경제문제의 내정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앞에서도 쓴 바와 같이 1953년 내가 서울로 올라 왔을 무렵은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려고 해도 기차의 3등석 자리의 여비도 없어서 여자 식구들이 준 돈으로 겨우 왕복 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 후, 서울시 북학동에 집을 전세임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고 유효민의 제안으로 푸로마이드 사진을 제작 판매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되어서 교회를 흥인동으로 옳겼다. 식구들도 점점 늘어서 통일교회는 번창해가고 있었다.

그해(1955년)에 7.4 사건 (이화대학 퇴학퇴직사건)으로 문선명과 간부 다섯명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문선명이 출옥한 후에 청파동 (현재 통일교회 본부가 있다)으로 일본식으로 지은 이층집을 사서 본부교회를 이전하였다.

그 후 나는 문선명한테서 수고 하였소 한동한 서진광산으로 가서 쉬십시오 라고 말하기에 그가 써주는 소개장을 가지고 서진광산으로 가게 되었다. 1956년 7월 나는 거기서 생각해 보지도 앉았던 광산의 책임자가 되어 몇 달간을 지내게 되었다.

이 서진광산은 통일교회의 간부였던 정석천이 기부해서 문선명의 소유가 되고, 그가 직접 경영하고 있던 광산이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후에 또 쓰기로 하겠다.

내가 광산에 가 있는 동안 유효민은 산탄 공기총을 발명해서 특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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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기총을 제작 해 보니까 꽤 성능이 뛰어 났으므로 본격적으로 제작 · 판매하게 되어
통일교회 의 경제적인 기반을 굳혔다.


악착같은 노동착취

 

그 당시 문선명의 친척으로서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문성균이 처음인데 문선명이 찝차를 구입한 때에 운전수로 들어왔다. 그 다음이 문용선 인데 정석천 장로가 경영하고 있던 아산의 토기 공장에 가서 일하고 있었다. 문선명의 친척은 이 두사람 이외에는 한사람도 없었다.

그 이전에 내가 문선명과 부지런히 일하고 있을 무렵에 문선명의 친척은 한사람도 없었고 이름조차 들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현재 문선명의 친척들이 통일 교회의 경제를 좌우하는 상황이 되어 있어서 내부에서도 큰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원리에 반하는 것이다.

 문선명은 그전부터 이세상의 모든 돈과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남편의 돈을 훔쳐다가 나에게 헌금 하더라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에 있
는 돈을 훔쳐다가 우리에게 써 버렸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법률로서는 죄가 되지만 하나님의 법률로서는 죄가 안된다고 식구들에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식구들은 양심의 가책 같은것은 조금도 느끼지 않고 남편의 지갑에서 돈을 몰래 가져다가 문선명에게 쏟아 부었다. 그 덕분으로 오늘날의 통일교회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렇게 식구들이 고생해서 경제적인 토대를 만들어 놓은곳에 문선명의 친척들이 뛰어 들어와서 경제를 주무르며 자유자제로 쓰면서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반면 최초의 단계에서 경제적인 토대를 만드느라고 고생한 사람들은 거의 탈퇴 하든가 쫓겨 나고 있다.

현재 그 당시의 사람으로 남아 있어서 경제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것은 일성종합건설의 사장을 거쳐 작년(1992년)부터 일신석재로 옮겨 간 이수경 사장과 일화식품의 김원필 사장 뿐이다. 이수경은 당시 아직 열여덟살 정도라 문선명의 뒷일은 아무것도 몰랐다.

또 북에서 우리들과 함께 남하 하였을 때는 22세 정도였던, 김원필은 문선명 이 죽으라고 말하면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충실한 심복이었다.

 공기총 제작을 시작한 무렵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입교함으로 가정이 산산조각이 되어 고아원으로 보내져서 거기서 키워진 15~6세의 아이들이 수택리에 있던 통일산업(주) 예화공기총 제작소의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통일산업 당시의 사장은 김인철)

그 인원수는 350명 정도였으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그들에게 지불된 돈은 한달에 단
돈 500원 이었다. (일본 엔화로 환산하면 겨우 100엔정도-1965년 당시) 이것은 엄청난 노동력 착취로써 말도 되지않는 실례이다.

어느때 지금은 고인이 된 김희옥 집사의 17세된 아들이 고아원에서 도망해 나와서 어머니를 찾아 통일교회로 왔다. 그리고 이 모자가 서울에서 주택건설의 공사를 하고 있는 나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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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아들이 통일산업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듣지 않아서 박선생 한테서 써 주실수 없겠습니까? 하고 부탁을 한다. 176

아들은 통일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혹사해서 참을수가 없어서 도망쳐 온 것이었다. 이 사실을 내가 그 아들을 사원으로 쓰고 있을 때에 들은 이야기임으로 틀림없다.


문의 아들 흥진과 효진


1983년 문선명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를 돌며 강연을 한 일이 있다. 그때 문선명의 아들 문흥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그 이유로서 통일교회는 문선명선생이 숭공강연을 하고 있을때 사단이 문선명선생을 죽이
려고 노렸으나 그것을 안 아들 문홍진이 아버지의 대신으로 죽었다 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문선명선생이 그 아들을 청년영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므로 그는 영계의 청년들을 데리고 지구로 내려와서 문선명선생의 재림메시아 활동을 도와 협력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이미 하나님이 모든것을 해결 하는 것을 기다릴수 밖에 없는데 이야기에는 후일담이 있다. (후술)

문선명과 그의처 한학자는 이 세상에 군림한 참아버지 어머니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원리에서는 죄도 더러움도 없을 터인데 교통사고로 별안간 죽기도 하며 사단과 똑같이 행동하는 나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 참부모가 낳은 문효진의 스캔들은 통일교회의.내부 뿐만 아니고 사회적으로도여러가지 소문이 흘러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통일교회에서는 아들 문 효진은 한겨울에 문선명 선생이 결정한 성지 성스러운 땅에서 40일간 단식 철야기도를 함으로서 참회하여 문효진의 인격은 깨끗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효진은 문선명 한학자 부부의 장남인데 성화사에서 출판한 성공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문효진의 시집을 읽어 보면, 그를 그의 아버지 문선명의 후계자로서 만들어 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명백한 것이다.
이 또한 이해 할수 없는 문제이다. 지금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자기의 정권을 아들인 김정일에게 넘기려고 하고 있는 모양인데 공산주의 체제의 세습이란 믿을수 없는 폭거와 같은것을 통일사단의 세상에서 당당하게 행해 지고 있는 세습체제를 답습해서 아들의 문효진에게 재림메시아의 권력을 넘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세상을 구할수 있는 이는 문선명선생 밖에 없다고 하는 책을 쓴 김은우 박사는 책이름을 바꾸어서 이 세상을 구할수 있는 이는 문효진 선생밖에 없다고 하는 책을 출판 할 것인가?

또 일본인의 아스기요시는 옥중의 구세주 문선명이라고 하는 책명을 청년구세주 문효진이라고 바꿀 것인가?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느 사람에게서 들었다.
축복을 받은 가정의 제2세들이 40일간 청평기도원에서 집회를 하고 있을때의 일이다.
문효진의 주최로 1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출석해 있었다. 옛날부터 식구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36가정 이요한 목사가 원리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별안간 문효진이 나타나서 집회에 모여있던 사람들 앞에서 이요한 목사를 끌어내리며 아버지 문선명이 쓴 원리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대단히 노했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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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모여있던 식구들은 문선명의 후계자인 그가 참회하기 전의 본래의 불량자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하고 말했다고 한다. 북조선에서 김일성이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정권을 넘기려고 한다는 것으로온 세계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거기에 곁들여 한국에도 통일교회의 문선명이 자기의 아들에게 재림메시아의 자격과 권한을 넘긴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기만 하다.

통일교회는 이제까지 막대한 자금으로 문선명을 재림메시아라고 선전해 왔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일본인 나스기요시가 쓴 옥중의 구세주 구세주 나타나다등 많은 책이 출판되고 있다.

나스기요시가 돈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통일교회의 체질에서 보아 많은 돈을
써서라도 그 아들에게 전권을 넘기는 구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한 원리 어디를 읽어도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고 한다면 그 아들에게 재림 메시아 를 계승 시킨다고 하는 원리는 없다.

이와같은 통일교회의 내용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 그때의 편의주의로 멋대로 이유를 붙여서 상식으로는 생각 할 수 없는것, 인간의 도리에 맞지 않는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히 하여야 할 원리에 맞지 않는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니까 무섭다.

 


삭제된 창시자의 이름


더욱이 또 통일교회는 역사를 바꿔쓰며 태연하게 거짓을 쓴다. 통일교회의 태동기에서 부터 오랜동안 문선명을 믿고 문선명을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수고해 온 많은 식구들을 거저 내 쫓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사단으로 딱지를 부쳐서 명예도 푸라이드도 빼앗아 버리고 배신자라는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이러한 사람을 많이 알고 있지만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이므로 그 중에서 일부만 소개한다.

우선 나 박정화 자신의 문제부터 기술하기로 한다.

통일교회사(상권)에 실려 있는 나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다.

박정화가 누님집에 다만 개 한마리가 남아있는 빈 집에 혼자 있을때 김원필이 찾아 가서 다쳐서 다리를 질질 끌고 있는 박정화를 자전거에 태워서 문선명과 함께 피난해 왔는데 그 선생을 박정화가 서진광산 시절에 배신하고 통일교회에서 나가 버린 것이다.

이와같이 통일교회에 기록되어 있는 박정화는 배신자로 되어있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느냐의 한마디다. 이것은 모든 진상을 똘똘 싸서 감추고 문선명의 우상화 하도록 꾸며 붙인 거짓 기록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그 진상을써 두고자 한다.

우선 지금까지의 요점을 정리 한다면 북에서 피난 할 때의 경과(제2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나는 가족을 버리고 다쳐서 상처를 입은 몸에 채찍을 가하면서 문선명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일생동안 고락을 같이 하자고 한 옥중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그후로는, 문선생을 도와 경제적인 문제로 말로서 다 할수 없을 정도의 고생을 해 왔다. 문선생과 유부녀의 복귀라고 하는 섹스에서 생기는 갖가지 충돌에도 내가 대처 하였고 여러가지 고생을 겹쳐 가면서도 살아 왔다.

문선명과 함께 있던 7년간에 두번씩이나 경찰의 전기고문까지 받았다.

최대의 고비 7. 4사건에서는 5인의 간부가 체포된 중에 수사당국의 끈질긴 심문에 대해서 나는 온갖 수단을 구사해서 문선명의 죄상을 숨기고 무죄가 되도록 노력하였는데 이것도 통일교회의 기록에는 아무런 죄도 없었던 문선명선생은 구속 되었으나 무죄로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식구들의 덕분이었던 것은 앞에서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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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회는 문선명의 신격화에 열중하였으나 1년6개월간의 감옥생활이나 부산의 수정동에서 서울의 청파동에 이르는 7년간 문선명의 한쪽 팔 노룻을 하며 함께 지낸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문선명의인격은 신격적이란 어림도 없고 회노애락이 심하며 금욕과 호색가인
점 만이 유별나서 정말로 사단 세계의 사나이였다.

기상이 약한 문선명은 내가 경찰에서 최초의 고문을 받았을 무렵 누가 그를 찾아 가면 항상 피하기가 일쑤여서 안절부절 불안해 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나가서 용건을 듣곤하였다.

너무나도키가작고 약골처럼 보여서 이 사단의 세상을 맑고 깨끗한 세상으로 복귀해서 본래
의 에덴의 동산을 되살아 나도록 하려는 선생이 어째서 그렇게도 쩔쩔매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한일로 이 우주나 세계를 복귀시킬수가 있겠습니까 고 몇번 문선생에게 말한 일이 있다.
여러가지 고생을 거쳐 내 이름으로 빌린 서울시 북학동 집에서 "세계 기독교 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였다.

1954년 5월 3일의 일이다.

이것도 또 통일교회에서는 무슨 일인지 날짜를 5월 1일로 고쳐서 발표하고 있다.
이때의 출석한 간부는 문선명, 이창환, 박정화, 유효원, 유효민, 김상철의 6인으로 이 6인을 통일 교회의 창시자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통일교회의 관련 출판물에는 박정화라고 하는 이름은전연 나오지 않는다. 제일로 오래된 나에게 "배신자" 딱지를 붙여서 말살해 버린 것이다.


사건이 생겼다 바로 피하라

 

사실은 전혀 다르다. 배신 한것은 문선명 자신이었다.

그것은 내가 서진광산에 있을때의 일이다.

서진광산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날 조동석이 찾아와서 지금 서울에서 사건이 일어나서 선생은 도망갔고, 그때에 문선명 말이 곧바로 광산에 있는 박정화한테 가서 빨리 다른곳으로 도망하도록 전하시오.

만약 경찰이 광산까지 가서 박정화를 체포해서 취조 당할때에 심하게 고문이라도 당해서 박정화가 나의 일을 고백하게 되면 큰일난다고 지시 한 모양이 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어디를 도망하면 좋을까. 이러한 산 속도 위태롭다고 하는것은 당연히 서울의 교회도 식구들집도 위험하다. 이것 저것 생각한 끝에 우선은 문선명을 만나서내 몸가짐을 어떻게 한면 좋을지 의논 해 보려고 생각했다.
조동석에게 선생님의 행방을 물었더니, 짚차를 타고 충무에 있는 용화사라고 하는 절에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듣고 나는 곧바로 그곳으로 가기로 하였다.
광산 주변 산중에 사는 화약주임인 전종만에게 여비를 빌려 가지고 출발하여 밤중 열두시에 충무에 도착했다.
여기서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 그날은 용화사까지 갈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숙소를 정해서 일박하고 아침 일찍이 용화사에 갔더니 정말로 한발차이로 문선명이 송도욱 장로와 조일청, 송병호 등 네사람이 같이 제주도 방면으로 출발한 뒤였다.
절 마당에는 문선명등이 타고 있던 찝차 타이아의 흔적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언제까지 어떻게 해야만 좋은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만 좋은가? 앞일이 막막하다.
어찌할 바를 모른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경찰을 경계하면서 서울로 갔다.
그리고 은밀히 여기에 있으며 연락을 기다림이라고 문선명에게 전해지도록 수배했다.
나는 문선명으로부터의 연락을 열심히 기다렸으나, 한달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서울역전의 지저분한 간이 숙박시설에서 하루에 빵 한개를 씹으면서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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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는 문선명이다

 

한달이상 기다려도 문선명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나는 의심스러운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내가 서진광산으로 간것은 1956년 3월 28일, 7.4사건으로 체포되었던 문선명이 무죄로 된것은 전년의 10월 4일, 약 9개월 뒤의 일이다. 당초에 7~8인의 광부가 있어서 문선명으로 부터 필요경비도 송금되고 있었다.
그 무렵 서울 청파동의 본부에 갔던 나는 새로 입교했다고 하는 육군장교 두사람을 문선명 에게서 소개 받았다. 박보희와 한상국이었다.
그때 문선명은 박정화는 처음부터 같이 해온 한쪽 팔로서 넘버2의 사나이요. 당신들은 박정화한테서 여러가지를 배우시라고 그들에게 나를 소개 했고 두사람 모두그 3년후에 일어난 박정회 장군에 의한 군사정권 구테다(1961년)로 초대 KCIA(한국중앙정보부)장이 된 김종필의 심복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또다른 군인 두사람이 더 들어온 듯 했으나, 나는 만나지 않았다. 또 박보회는 그후 미국으로 가서 활약하여 통일교회의 제2인자로 올라섰다. 그리고 두사람은다같이 36가정의 축복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안되서 문선명으로부터의 송금이 뚝 끊겼다. 아무리 청구해도 기다려도 송금은 없었다 .원래부터 적자이어서 자금이 없었으니까 광산개발은 무리임으로 작업을 중지하고 갱부들은 돌아가도록 하였다.

뒤에 남은것은 서울에서 온 김덕진과 대구에서 거들어 주려고 와 있던 여자식구 세사람뿐 한 동안은 매식을 하면서 견디고 있었으나 얼마 안되어 바닥이 들어나서 끼니도 거르게 되었다.

너무나도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서 밥짓는 아주머니는 대구로 가고 말았다. (그리고 탈퇴 한
것 같다. )

김덕진도 서울로 철수해 버렸고 단지 흘로 남은 나에게 같은 마을에 사는 화약주임인 전종만이 때때로 놀러 올 뿐이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위태로우니 바로 피하라고 문선명의 심부름으로 조동석이 온 것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도망쳐 버린다면 이제 아무도 없게된다. 충무시로 출발하기 전에 됫치닥거리와 정리하는것 만은 얌전하게 끝내기로 하였다. 전 화약주임에게는 발동기를 한대 주고 여비를 조달했던 것이다. 훨씬 뒤 에 안 일인데 ,이때의 사건은 다시 문선명을 둘러싼 복잡한 여성관계가 원인이었다.

내가 산속의 광산에서 먹을것에 어려움을 려고 있던 수년 동안에 통일교회는 미국으로 진출하고, 일본에도 통일교회를 창립시켰다.
(1959년 10월 2일) 더욱이 60년 4월 11일 문선명은 한학자라고 하는 처녀 와 또다시 "어린양 잔치"로 결혼하였다.

그리고 3쌍 합동 성혼식(동년 4월 16일)  33조 합동성혼식(1961년 5월 15일)과 소위 36가정의 조직을 만들었다.

36가정의 신부들의 자격은 원칙으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들로 만들었다.

36가정의 신부들의 자격은 원칙으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어야 했으나 기성가정도 있었다.

이제까지의 경위를 지나치게 알고, 문선명의 여성관계도 상세하게 알고 있는 나는 역시 거북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나를 섬 (島)유배가 아닌 산유배로 긍지에 몰아놓고, 먹는지 마시는지의 상황으로까지 몰아놓고 그 동안에 문선명은 야망을 채우기 위해서 모순 투성이 원리를 추진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때에 또다시 일어난 여자사건으로 쫓기던 그가 광산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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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화를 도망가게 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경찰이 또 고문을 해서 박정화에게 불게 한다면 큰일이다라고 일부러 삼복중에 광산으로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해 낸것 만으로도 문선명이 나를 과거의 사람으로 취급하려 했던 참뜻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문선명은 나를 오래도록 살게 하기 위해서, 도망치라고 한것은 아니다.

자기가 오래도록 살아 남기 위해서 나를 과거의 우리에 가두어 버린채 도망치도록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만은 신장 개점한 통일교회의 안방자리에 나를 돌아오지 못하도록 찬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된것은 정말 훨씬 뒤에서야 알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당시의 나는 하루 한개의 빵조각으로 허기를 채우며 살아가면서 한여름의 땀에 흠뻑 젖는 간이숙박시설에서 한달 이상을 문선명으로 부터의 연락이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1962년 8월의 일이다.

이것은 사실이며 거짓이 아니다.
나는 결단코 문선명 을 배신하지 않았다.

배신한것은 문선명 이다.

 

 

제6장  진짜 사단은 문선명이다

 

산 증인의 이용가치

 

재혼해서 신천지로

 

나는 문선명에게 배신 당하고, 서울역전의 간이 숙박시설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나를 구해 준것은 엄덕문씨 였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가서 주택건설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일본 와세다 대학의 건축과 출신으로서 지금은 세계의 건축가 100명중의 한 사람)
그래도 나는 문선명 한테서 한번쯤은 무슨 연락이 있을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으나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문선명으로부터 단한번의 연락도 없었다. 문선명은 하나님과는 다른 속된 성격의 사나이라는 것을 남들보다 훨씬 더 알고 있는 나였다.

그래도 하늘에 맹세하고 출발한 분신으로서 일해온 나를 절대로 방치 할 리가 없다. 흥남의 옥중에서 「생사를 같이하자」고 맹세 하고 여기까지 서로 도와 가며, 생명을 걸고온 두사람이다.

마음 한구석에 그것을 믿고 있던 나였으니, 14년간에 걸쳤던 문선명과의 인연도 이것이 마지막이고 자나 깨나 나의 인생이었던, 통일교회에서도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이무렵 나는 엄덕문의 누이동생과 결혼 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로서 훌릉한 인물 이었는데 6·25동란으로 북의 인민군에게 집앞에서 사살 되었다. 아이들이 세사람 있었다.
나는 또 가정을 갖게 되어 땅에 발을 붙이고 제3의 인생을 내 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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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의 인생은 북조선시대  제2의인생은 흥남 형무소에서 통일교회 시대이다. 이때 나는 45세 처는 37세였다.
그로부터 10년간 나는 부산에서 주택건설 사업에 몰두하였다. 당초부터 계획 했던 300동의 주택건설과 아파트건축도 끝내서 무사히 책임을 다 할 수가 있었다.
다음 약10년은 통일교회의 식구였던 사람으로부터 부탁을 받아 매립공사에 협력하였다. 중국 신경공업고등학교 토목과 출신으로 군의공병대에 있었던 나로서는 토목공사는 전문분야이다.
많은 작업원(인부)을 지휘 감독하며 즐겁게 일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직책상 부하들과 친목의 술을 매일 호쾌하게 퍼 마셨다. 그런데 그것이 않 좋았다


병으로 쓸어지다

 

1981년 나는 뇌일혈로 쓰러져서 약 두달 동안 인천 기독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처의 오빠 엄덕문의 처 고희용과 누님의 엄순태가 나에게 「당신과 문선명 선생과는 하늘이 맺어준 깊은 인연이 있으므로 통일교회에서 떠나서는 않됩니다. 떠났기 때문에 당신은 병에 걸린 것이니까, 지금 부터라도 참회해서 통일교회로 되돌아 오시오」라고 권했다.

나도 생각지 않았던 병으로 조금은 마음이 약해 있던 상황이었다.

진실한 크리스찬 이었지만 신앙심이 얇어져이었던지도 모른다.
나는 인천 송도에 있던 나의집 뒷산에 들어가 3개월간 기도 하였다.
내가 기도 한 것은 「지금까지의 나의 살아온 방법이 옳바른 것이었던가 아닌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또 「병이 든 이몸으로 지금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 가면 좋은가」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계속 하였다. 병의 후유증으로 부자유한 몸이 된 나였으나, 사업의 제1선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시간만은 넉넉히 있었다.

통일교회의 그 뒷일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열심히 모이는 식구들의 근처의 통일교회에 가서 그들과 이야기라도 나누며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도록 노력하자고 생각하게 되였다.
내가 다리를 움직일수 있을만한 때의 인천지구교회의 목사는 문흥권 이라고한다. 몇 달 동안인가 다니고 있던 어느날 예배가 끝난 뒤에, 어느 중년의 여인이 나에게 인사를 하며 나를 아시겠습니까 하고 그녀는말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대구교회에있던 류권사의 딸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선진광산에 있으면서 대구교회까지 예배를 다니고 있을때 아직 고교생이었던 류집사의 딸이었다

지금은 이곳 교구장인 문홍권목사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류권사라는 사람은 신앙심이 두터워서 여러가지 고생을 경험하면서도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모두 교회에 다녔던 사람인데 그 아이들은 모두 교회의 임원이 되어 있었다.
1983년 나이 들은 식구들의 위로여행을 겸해서 성지순례 여행을 가게 되었다. 70세의 나도 노인식구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 하였다. 그 때 류권사와 20년만에 만나서 그동안의 이야기와 아이들이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서울의 본부교회에서 연락이 온것은 여행에서 돌아 온 무렵인데 중요한 의논할 것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서울로 와 주십시오 라고 한다.

 

오랜간만에 만나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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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에 있는 그랜드호텔의 커피숍에 당시 승공연맹의 회장이었던 김인철과 국제부장 겸 섭외를 담당한 안병일, 김덕진목사, 유효민, 그리고 나, 다섯 사람이 모였다.

이 날 본부교회가 나에게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 한 이유는,「김덕진의 행동을 억제 할수 있는것은 박선생 밖에 없으므로, 어떻게 좀 설득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김덕진 목사는 경찰의 유치장에서 용의자나 피해자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설교해서 솔직하고 평온한 심경이 되도록 하는 전도 사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김덕진은 전술 한바와 같이 작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통일교회의 식구였을때 통일교회에서 애창하는 성가 20여곡을 작사작곡한중, 성가편집사 유효민씨가 19곡만을 발취 게재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통일교회가 그 노래를 작자의 이름도 게재하지 않고 무단으로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수만부나 인쇄를 해서 판매 하였다.
그 출판권과 저작권의 문제를 제기 하기 위해서 김목사가 용산경찰서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협회장인 이재석을 고소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김목사는 그가 통일교회에 있을무렵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복귀를 받은 유신회 한테서 복귀의 섹스를 받은 뒤에 릴레이식으로 그도 열사람이 넘는 여인들을 복귀 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복귀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복귀하고 그 복귀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복귀 시키면 섹스의 둘레가 점점 넓어져서 온 세계의 인간이 모두 복귀하게 된다.

그에게는 이 복귀원리의 실천의 실천 방법에 관해서 자기의 체험을 그대로 쓴 원고를 각 신문에 발표하고 싶다고 하는 의향도 있었다. (제7장참조) 동시에 5천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동을 민사재판에 걸어 김덕진 목사가 5백만원의 공탁금을 내서 「성가」의 가창 금지처분을 신청할 계획도 있었다.

김 목사는 이러한 계획을 변호사와 의논해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날 회합이 이루어 졌던 것이다.
나는 김덕진과 친하고 그의 심정이나 노여움도 잘 이해 할 수 있었으나, 한 식구들로서 통일교회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좀 더 통일교회의 꼴을 두고 보자. 문제제기는 아무때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라고 김덕진을 설득시켜 우선 소송을 중지 시킬 수가 있었다.
그 때 안병일과 김인철이 나에게 「박선생 당신은 인천에 있는 것보다 서울 본부로 오는것이 좋겠오」라고 말해서 그로부터 3년간 나는 본부교회로 나오게 되었다.

 

통일교 창립의 산증인

 

서울의 본부교회에서는 가장 고참인 원로인 나에게 어떤 직책이라도 붙여 주려고 이것저것 제안해 왔으나 나는 모두 거절 하였다.

통일교회의 태동기에서 부터 관여 해 온 한 사람인 나는, 나이먹고 늙은 식구로서 통일교회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 되는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협력은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낳은 자식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어버이의 심경이기도 하였다.
나는 1981년에서 5년간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몸과 마음을 다해 기도도 했다. 또 통일교회에는 「박정화는 재림 메시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산증인」으로 선전되어 이곳 저곳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일본에도 가서 십 수개소에서 40회에 걸쳐 약 5천명 앞에서 강연도 했다.
다만 나의 증언에는 반드시 조건이 붙었다.
강연하는 내용은 「흥남감옥에서 남쪽으로 피난 한것 까지」로. 그 이외의 것은 말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요컨대 문선명이 얼마나 고난의 길을 넘고 넘어온 위대한 인물인가 를 많은 사람에게 인상 깊게 심어 주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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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복잡한 심경 이었지만 사실 있었던 그대로를 이야기 했다.
그래도 나는 통일교회의 열렬한 식구는 좋아 했다.
어떤 종교도 그러하지만 위의 간부는 썩어 있어도, 말단의 신자는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1985년 7월 8일 나는 통일 신학교 학생회장들의 요청으로 「피난길을 실현했다.

문선명과 함께 평양에서 부산까지 내려갔던 피난과정을 재현 하기위해서 임진강에서 영등포까지 걸어 주었으면 하는 부탁 이었다.

나는 임진강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것을 부자유한 몸으로 18키로의 거리를 도보로 강행했다.
이 때문에 발이 부어 올라서 병원에 다니게 되었다.

74세라고 하는 나이 에다가 너무나도 장시간을 걸었기 때문에 혈액의 순환이 나빠져
서 옛날에 골절했던 부위가 부어 올라 오는 것이 아닌가?

병원에서는 이 부어 오른 독이 뱃속으로 돌면 위험하다고 겁을 준다.

맨 처음 치료에서 약값이 2만원 침값이 5천원 교통비 4천원등 약 3만원인데 완치 하기 까지 나의 경제 형편으로는 지불이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학생회장에게 연락 해 보았으나 아무런 답변도 없었으므로 하는수 없이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간직해 두였던 수표를 은행에 넣고 한달에 백만원이란 비용을 들여서 겨우 치료할 수 있었다.
통일신학교의 교장 이었던 이요한 목사에게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치료비의 분담을 사정해 보았으나 이목사도 「자기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고 냉정하게 거절 당하고 말았다.
이요한목사 정도의 고참도 이렇게도 명확한 문제를 「어떻게도 할 수 없다 」고 한것은 사람을 이용 할 만큼 이용하고 다음은 쓰고 버리듯 하는 문선명의 체질과 독재 지배가 변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83년의 어느날 통일교회의 국제부에서 나에게 연락이 있었다.
「잠깐 물어 보고 싶은것이 있으니 와 주십시요」하고 하는 것이었다.
가 보았더니 「중앙일보」에 실린 사진을 보여 주며 이 사진을 알고 있는가 하고 국제부장의 안병일이 물어 왔다.
그 사진은 머리카락이 짧은 사람이 겨울용 방한모자를 쓰고 무엇인가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을 업고서 바지를 걷어 올리고 냇물을 건너고 있는 사진 이었다. 이 사진은 문선명선생이 박선생을 등에 업고 시냇물을 건너고 있는 사진이 아닙니까 하고 안병일이 물어 왔다.
나는 그 당시는 사진을 찍을만한 여유 같은 것도 없었고, 선생한데 업혀서 냇물을 건넌일은 없소 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국제부에 있던 직원들도 아무말도 못하고 이 건은 그것으로 끝났다고 나는 생각 했었다.
그런데 그해 5월 나는 일본에 가게 되었다. 동경 시부야의 본부교회로 안내되어 갔더니 아랫층 응접실에 걸려 있는 문선명 선생의 초기의 발자취 라고 하는 전시장에 중앙일보에 실렸던 사진을 벽의 크기만큼 확대한 것이 걸려 있었다. 일본 본부교회 간부들이 몰려와서 그사진 앞에 나를 세워 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 사진에 대해서 그들이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미국에 있는 문선명이 이사진을 맨 처음에 보고, 이것은 내가 피난할 때에 박정화를 업고 한겨울 추운때에 맨발로 냇물을 건너는 장면이다 라고 이야기 한듯 하다.


그 장본인이 왔다고 해서 일본에 있는 식구들이 감격해서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으면 하고 부탁을 했다.
한국의 통일교회의 국제부에서 말한 것 처럼 이런 사진은 촬영한 일이 없오. 문선명선생이 나를 등에 업고 맨발로 내를 건넌 일은 없다고.

말해 버린다면 문선명이 거짓말을 한것이 된다.

그렇게되면 일본의 식구들은 실망한것이 틀림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할수 없이 거짓말을 할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용매도에 있을때 청룡반도에서 돌아을 때에 만조되어 할 수없이 선생한테 업혀서 건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 15.6인 정도의 식구가 따라와서 우리들의 모양을 사진으로 찍어 놓았다. 이승만대통령의 부인 후란체스카여사가 동란의 사진을 수집하고 있어서 중앙일보에 제공한 것이겠지오 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식구들은 감격해 있었으나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대단히 괴로웠다.
이 사진이 또 1985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의 「비화6 25=정일권회상록」에 기재 되었는데 중앙일보에 실었던것 보다도 훨씬 또렸하게 보였다.
그 사진을 보니까 찍혀져 있는 것이 문선명과 내가 아닌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사실이 아닌것을 사실인것 처럼 만들어 내는 것은 통일교회로서는 극히 보상적인 것으로서 그들이 선전하는 때의 상투적인 수단인것이다.


원리는 김백문(金百文)의것 도용


서울의 본부에 나가게 되면서 부터 나는 창립당시에 수고한 많은 식구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탈퇴한 사람도 많고 또 그속에서 버티고있는 사람도 있었다. 년로(늙으신)한 부인들이 더욱 불쌍했다.
복귀원리를 구실로 문선명에게 몸을 마구 짓밟히고 재산도 가족도 잃고 생활에 어려운 처지가 되어 버린 그 사람들은 문선명을 원망하며 이런 인생으로 만들어 버린 하나님도 나쁘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통일교회는 표면적으로는 대단한 세력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 같았으나,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돈에 얽힌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1984년 7월 20일 문선명은 탈세한 죄로 아메리카 커네티같주의 렌단베리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함께 수감되어 5개월 가까이나 형무소에서 문선명과 생활한 일본인 가미야마(챠ㄴU)(그후. 일본 통일협회의회장에 취임 92년)은 형무소에서의 문선명 선생의 태도는 훌륭했다는 등으로 발표했으나, 그것은 문선명이 형무소에 들어가는 일이 세번째로서 이미 길이잘 들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 이야기다.

흥남에서는 평양의 여성들과의 성문란한 행위로 사회질서 문란죄, 서울에서는 식구들의 위증과 우리들의 필사적인 행동으로 증거인멸을 한 덕택에 무죄로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대로 라면 장기형이 되는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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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탈세사건 외에도, 부동산취득을 둘러 싼 미묘한 소문도 얽혀있다. 1년을 넘게 옥중에서 보내고 다음해 8월 20일에 석방 되었으나, 통일교회는 문선명선생은 사실 무근이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35만명이나 되는 미국의 목사에게 통일원리의 비디오나 책을 증정하며 막대한 돈을 써서 출소잔치를 하는것 보다도 좀더 발밑을 비쳐보는 행동이야말로 진짜 원리가 아니었을까.

더구나 통일교회가 보배처럼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창조, 타락, 복귀의 원리」는 문선명의 발안(發案)이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 밑에 최선길 부인과 다니고 있던 문선명이 김백문의 논리를 그
대로 도용 한 것이다.

되는데로 외워서 논리일관이 되지 못한채, 종이에 연필로 쓴 문선명의 메모를 유효민이 정서해서 정리 하고, 유효원이 논리에 모순없이 구성 한 것이다.
통일교회의 원리는 죽은 유효원이 진짜이며, 원칙대로 하자면 오직 유효원이 진짜 교주이다. 그 큰 은혜를 입은 유효원의 우수한 두뇌와 인격을 질투한 문선명은 그 후 갖은 수단으로 몹쓸짓을 곁드려서 드디어는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도 있다. (후술)

통일교회의 원리는 문선명이 김백문의 는리를 도용해서 유효원이 정리해 낸 것이라고 내가 지적하는 근거는, 김백문 저작 「기독교 근본원리와 성신신학」을 읽으면 일목요연하다.


이복헝제 결혼 의혹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어느 때인가 부산에 있는 송병호 가족이 별안간 나에게 전화를 해서 부산의 대학병원에 송사장이 입원중인데, 박선생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송사장은 위독한 상태 입니다 라고 말한다. 나는 바로 달려 가고 싶었으나 그때는 나도 마침 병이 들어서 몸을 가누기 조차 어려운 형편 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 병이 웬만하면 곧 찾아 가리다 라고 말하였는데, 3일후에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다.

이 죽은 송사장이 생전에 몇차례 나에게 문선명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일이 있다.
문선명의 처인 학자 이외의 여자에게서 난 아들과, 간부의 딸이 결혼했는데 이것은 남매결혼이 아닌가?
그 간부 부인은 9세의 차이가 크게 있어서 웬만해서는 결혼의 상대가 될수 없는 터 인데 ,
36가정 (후술)의 하나로 되었다.
실은 그때 그처는 문선명과의 복귀로 임신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적당한 식구가 없어서 김영희나 이성례의 경우처럼 부탁 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할수 없이 한 간부에게 맡겨서 문선명이 임신시킨 식구와 결혼 시켰던 모양이다.
문선명의 아들인 그남자 아이와, 간부와 그의처 두사람 사이에서 낳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문선명의 아이인 딸이 결혼 하는 것은 남매 결혼이 틀림없다.

한국의 관습상 남매결혼이란 말도 되지 않는 것으로서 있어서는 않되는 일이다. 나는 열심이 그렇지 않다. 무슨 착오 이겠지 하고 그를 이해 시키려고 애썼다.

이 송사장은 부산에서 내가 문선명을 소개 해서 식구가 되었다. 서울의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출신으로 매우 친하게 지내고있었다. 부산의 세관과장을 퇴직하고 나서 통관사무소를 경영한 사장이었다
통일교회가 드디어「원리해설」을 출판하게 되었을때 내가 부탁해서 50만원의 자금을 내 준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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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 동안은 왜 열심으로 나오는식구로서 제법 많은 헌금도 하였는데, 문선명이란 남자의 정체를 보고는 크게 실망했다고 노해서 탈퇴해 버렸으나 그후에도 문선명의 일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 송사장이 자신을 가지고 사실이다 라고 말한 이상 나는 반론 할 수 없었다.
또 당시는 광산에 있어서 36가정의 경위를 몰랐던 나에게는 또 반론의 재료도 없었다.

 

원리대로 실천한 김덕진(金德振)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복귀문제로 무어라 해도 기록에 남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앞에서도 기술한 바 있는 김 덕진의 문제이다.
서진광산 시절에 조동석이 서울에서 김덕진을 데리고 대구로 왔다는연락이 있어서 내가 대구로 가니까, 문선명이 김덕진은 서울에 문제가 많으니까 광산에 있는 박정화 한테로
데려 가라고 명령해서 데리고 왔다고 한다. 김덕진은 본래 음악에 재능이있는 예술가로서 솔직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나는 김덕진과 같이 광산으로 돌아 왔으나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깊은 산골에 오게된 경유를 그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문선명의 원리를 듣고, 문선명 한테 복귀를 받은 여자 한테서 자기도 복귀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도 다른 여인에게 복귀 해 주었는데, 그것은 원리대로 실천 한것 뿐이다 라고 말한다. 문선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 유신희 한테서 김덕진은 원리대로 세차례에 걸쳐 복귀를 받은 모양이다.

그 유신희 한테서 복귀를 받은 그는 종로 5가의 엄순태의 집에서 5인의 여자들을 복귀 시켰다 .그 여자들이 또다른 남자들을 복귀시켜 불과 한주일동안에 70여명의 남녀가 복귀 의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점점 넓혀져 갔던바 복귀라고 하는 남녀의 섹스 소문이 협회장인 유효원이나 문선명의 귀에 들어갔다.
그 결과 문제의 김덕진을 서진광산의 나있는 곳으로 추방해서 두번 다시 서울에 나타나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광산으로 온 김덕진은 광산의 굴속에는 들어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 혼자 처 밖혀
서 오직 열심히 원리에 근거한 작사나 작곡을 하고 있었다. 나는 김덕진에게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정직하게 말해 주었으면 하고 물었더니 나는 원리대로 실천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당신은 원리대로 실천 한것이니까 당신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약 2년간 나는 그와함께 대화했다.
김덕진은 문선명 한테서 오는 송금이 뚝 끊겨서 먹을것도 없을 때, 또 서울로 가서 재차 복귀의 실천을 하기 시작 했다.

또 유효원이 나에게 연락이 왔으므로, 나는 서울로 가서 복귀의 실천을 하고 있던 김덕
진을 대구로 데려와서 현재의 부인과 결혼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김덕진은 원리대로 실천한 것 뿐이다. 무엇이 나쁘다고 할 것인가?
문선명은 원리의 설교를 해서 일일이 셈 할 수 없을 정도의 가정을 파괴하였으며 김덕진도 문선명의 원리대로 실천 했을 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을 산속의 광산에 가두어 두고, 서울에는 두번다시 나타나지 못 하도록 강금한 것은 이해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때의 나로서는어떻게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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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가정의 역할

 

속출한 재림 메시아들의 대책

 

도리켜 생각해 본다면, 원리대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 남자 식구를 복귀시켜 그남자 식구들이 또 다른 여자식구를 복귀 시킨다고 하는 방식으로 이세상의 전인간을 복귀하여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은 당연 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중에 「나만이 재림 메시아다. 저 문선명은 엉터리고 사단이다」라고 부르짖어 자기의 복귀를 받지 않으면 진짜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몇 사람씩 각곳에 출현해서 그사람에게서 복귀를 받고자 모여드는 신자들도 늘어 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되니까 문선명 은 생각끝에 「36가정」이 란것을 생각해 냈다.

문선명이 세계의 인간을 모두 복귀해서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므로이 36가정만을 직접복귀(혈대교환)시키기로 한것이다.

그 후에는 진정한 부모가 「성수」를 뿌려서 새로 결혼하는 신부에게 축복을 준다고 하는 형태로 바꾸어 「합동결혼식」을 하기로 한것이다.

36가정이라고 하는것은 이러한 경로로 만들어 진 것인데 그러면 왜 36인가?

「구약시대」의 12지파,「신약시대」의 예수의 12제자, 그리고 문선명의 원리를 「성약시대」라고 해서 12제자, 합계 36가정을 택하여 빼앗긴 종적(縱的)인역사를 횡적(橫的)으로 벌려 놓코, 탕감복귀 한다는 조건만을 세워 구약, 신약, 성약과 전세계를 탕감복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36인의 신부는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나 상대가 아니고서는 자격 이 없다고 되어 있다.

복귀라고 하는 것은 섹스를 뜻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혈대교환(血代交換)」이다.

제2의 아담인 예수가 이루지 못했던것을, 제3의 아담(요컨대 문선명)이 이세상에 재림해서,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한다.

이것은 요컨대 메시아가 세계의 대표로서 6인의 마리아와, 36가정의 아내들과 섹스를 하면, 더러워진 피가 깨끗하게 된다고하는 것인데, 이 의식을 혈대교환(血代交換)이라고 한다.

그리고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한 36가정에서 태어 나는 아이들은, 죄없는 하나님의 자녀 뿐이며 이러한 사람들이 세계에 널리 퍼짐으로써 죄악이 없는 세상에 태어 난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에는 36가정과 6마리아와 같이 문선명과 직접 간접복귀의 혈대교환(血代交換)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 한다. 제아무리 식성좋은 문선명이라도 전부 먹어 치울 수 없는 많은 수 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문선명이「성수」를 뿌림으로서 그것에 대신하고 있으며 섹스 3회의 방법은 그대로 하고 있다.

또 일본에서는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피나누기 라는 표현으로 인식되고 있는것 같은데, 통일교회에는 피나누기란 말은 없다. 어디에선가 잘못 전해진 것이 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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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6가정은 혈대관계를 한 신성한 가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통일교회의 식구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어떠한 중요한 일이 생기면 대개 이 36가정에서 그 책임자를 선임하게 된다고 하는 중요한 지위 에 있다. 이 가정에서 어느 한쪽이 사망한 가정이 5가정 또 탈퇴한 가정이 9가정이 있다.
이들 14가정의 존재가, 문선생의 원리의 어디엔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생각케 해 준다.

원리에 의하면, 잃어버린 해와를 도로찾고, 6마리아도 도로 찾는다면,참부모와 함께 살수 있게 되어서 타락했던 인간이 창조 본래의 인간으로 회복되고, 그 원리대로 생각하면 두번다시 이세상에는 이 36가정과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죽음도 없고, 고통도 없고, 타락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되는데,어찌하여 이 36가정중의 14가정이 죽든지 탈회 하던지 하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그 원리에 잘못이 있음으로써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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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된 공로자

 

또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 라고 한다면, 초기(처음)부터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양말을 짜 신긴 옥상현*, 자기 인생의 절반 이상을 문선명에게 바쳐 충성한 96세나 되는 그녀가 셋방살이로 겨우살아가고 있는 상황을 문선명은 무슨짓을 해서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본래 송도욱 장로의 처 였던 박봉식집사의 경우를 보자.

문선명이 송도욱 장로와 오명춘* 집사를 결혼 시켰기 때문에, 홀로 되고 말았다.
그후 남편도 곧 죽고, 갈곳이 없어진 박봉식 집사는 교회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늙은이는 더이상 소용없다고 하는 교회의 방침으로 교회에서도 쫓겨나서 먹고 살기도 어렵게 되었다. 열심히 문선명을 받들어 온 여인들을 어째서 이다지도 몰인정하게 못본체 내버려 둘 수가 있을까?

초기에 자기가 복귀 시킬 때에는 좋아서 함부로 아무짓이나 하고 그 젊음과 아름다움과 돈이 없어 지니까 곧바로 따돌려 치우고, 다른 여자에게로 옮겨가서 두번다시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것은 원리에 써 있지 않다.

이것을 여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 박정화처럼 부러진 다리를 끌며 함께 남쪽으로 피난 해 온 사람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만들어서 배신자로 소문을 퍼트려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원고를 완성해서 진상을 밝혀야겠다고 결심 했다.
아무리 생각 해봐도 내가 문선명을 배신 한것이 아니라, 문선명이 나를 배신 한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선명보다 뛰어난 인격자-유효원

 

다음에는 유효원씨에 대해서 밝혀 두고자 한다.

이것을 근거로 유효원이 구성 집필한「원리해설」를 완성 할 뿐만아니라, 불구의 몸으로 정력을 다해서 전도사 양성에 밤낮이 따로 없이 충성을 다했으며, 36가정을 선정 할 때에는 그가 고생해서 각자의 짝 짓기를 결정하는 임무를 수행 했다.

유효원은 구 경성제국대학의 의학과 중퇴자로 자기가 환자의 몸 인데도, 자기병에 대해서는 자제히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 결핵성 고관절염으로 다리뼈와 환도뼈가 유착되어 앉을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수술을 받으면 완치가 안될 몸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것을 알고 있는 문선명이 와서 하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수술하도록 명령 하였다.
문선명은 그때 그래도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것은 하늘의 명령에 거역하는 것이다 라고 까지 말했다고 한다.
유효원은 울면서 수술 하는것을 거부 하였다.
자기는 주사로 살아가는데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고 나에게 의논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문선명한테는 거역하지 못하고 할수없이 수술을 받아 그대로 죽고 말았다.
이때의 문선명의 비정한 행실은 내부에서도 간접살인 이다 라고 까지 말했을 정도이다.
유효원의 장례식이 끝나고 산에서 돌아온뒤 교회에서 간부들이 모여 않은 자리에서 효원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었나 했더니 죽었구먼 !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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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가 좋은 인격자로 신자들의 인기가 대단 하였던 유효원에게 문선명은 많은 비밀을 지령하고 후에 위험 한 존재 임을 느끼고 유효원을 거세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또 당시 미국에 있던 대간부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36가정의 멤버였던 이기석, 박종구(주.이 두사람은 당시 이미 죽었었다) 두 사람은 영계에서 대단히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유효원씨는 제일 말석에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그는 통일세계 라고 하는 잡지에 이 기사를 기재하고 청평기도원에서도 발표 하였다. 참으로 죽은 사람에 대해 가혹한 매질이 아닐수 없다.

유효원이야 말로 통일교회 최대의 공로자인데도 볼일이 끝나면 들어덤벼서 못살게 굴고는 죽은 다음에도 매질을 하는 것이다.


재정을 이룩한 실업가 - 유호민


유효민의 이야기도 해 두어야겠다.

유효민은 초기에 경제적 사정이 대단히 어려웠을 때에 푸로마이드 사진을 제작 판매하는 아이디어를 발휘해 당시의 식구들의 생활을 지탱시켜 주는등, 통일교회의 발전에 공헌한사람이다.
또 산탄공기총을 발명하여 그것을 제조 판매 함으로서 통일교회의 경제적인 토대를 이룩한 공로자,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통일산업주식회사」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 공헌자인 유효민에게는 주권을 단 천주를 주었을뿐(후에 다 회수하였지 만) 공기총의 발명특허권 (실용신안국제특허 )은 문선명의 명의로 기증하는 것으로 공증되어 조립부장이라는 직책만을 부여했다.
유효민은 그후 을지로의 예화 공기총 센타에서 백구섭에게 영업부장 일을 맡기고 계속 밖에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30원짜리 차값까지도 영수증을 요구 할정도로 무섭게 감시를 당했다고 한다. -문선명의 지시였을 것이지만, 나와 같은 모양으로 그를 통일교회에서 몰아내려고 한 수작이었다고 생각된다.

드디어 유효민은 통일교회와 인연을 끊고 1972년에 탈퇴하고 말았다. 나의 다음으로 그림자 같은 존재가 탈퇴 한다고 하는것은 유효민이 두번째이다.

이와같이 가장 최초의 비서였던, 박정화를 배신하고, 두면째 유효민을 못견디게 굴어서 탈회 시키고 ,제3의 송도욱이나 교회최고의 두뇌이자 공로자인 유효원을 사망케 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인지, 문선명의 계획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문선명과 같이 있었던 1953년에서 1956년에 서진광산으로 갈때까지의 말하자면 통일교회 발전의 제일 고생한 무렵에는 문선명의 친척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후에도 도중에 문성균, 문용선, 문승룡 두사람이 들어 왔을 뿐이고, 통일교회의 경제가 커 지니까, 거의 대부분의 경제지배를 문선명의 친척 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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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가 아닌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것은, 문선명 자신이다. 통일교회의 재산을 안심 할수 있는 자기의 친척에게 넘겨서 장래의 생활기반을 확립하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제7장 참조)


화제의 다보탑을 수출한 일신석재사장-유호영


나는 어느때 일신석재사장인 유효영(註 - 92년에 그만두고 탈회)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유효영의 이야기로는 자기가 경영하고 있는「일신석재주식회사」에서 열심히 지혜를 짜서 연구한 결과 다보탑을「100분의 16」크기로 축소 한 것을 제작해서 일본에 판매하여본 결과 예상외로 수출이 잘되 매월 20억원 상당을 수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수입에 탐이난 문승룡(문선명의 6촌)은 다보탑 제조부문은 자기가 그 나머지 부분만을 유효영 사장이 담당하는 공장 분활 경영안을 끈길기게 요구했다. 다보탑부분의 수입이 회사 전체 수입의 95%나 차지했다.
지금까지 참고 견디어 온 나에게는 5%만을 건네주고 남어지 95%를 문승룡이 가로 채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림도 없는 생각이다.

이회사 일신석재는 유효영사장이 사장겸 목수겸 노동자로 스스로 청소까지 해가며 여기까지 키워 온 회사이다.
그런데도 전연 관계가 없었던 사람이 뛰어들어 빼앗으려고 하니까 어림도 없는 짓이다 라고 말하며 유효영은 크게 싸웠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부산-대구-서울시대, 북조선에서의 형무소 시대의 일을 생각 하였다.
그 당시는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라고 우러러보며 원리를 듣고 새로운 식구를 모으기에 필사적 이었다. 이 식구들과 함께 원리 그대로의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매일처럼 노동했다 여성들은 재산도 질투도 생각지 않고 원리에만 열심이었다. 자아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오로지 원리의 달성을 기원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력하였다.


문선명의 부정과 범죄

그런데 그다지도 어려웠던 시대가 지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까 들어보지도 못했던 문선명의 친척들이 몰려 들어 차지하고 문선명 일족의 천하가 되어 버렸다.
문선명은 박모라고 하는 사람에게 자금을 건네주고 그 박의 명으로 몰래 부동산을 구입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세무서의 조사에 들통나 자그만치 1억 2친만원의 막대한 세금부과에 놀란 박이 밝힘으로 통일교회의 문선명이 부동산을 부정으로 구입하고 있던것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행위 가 메시아를 자칭하는 사나이가 할짓인가?

문선명 이 탈세관계로 미국의 형무소에서 복역한 그것도 통일교회에 발표대로 「문선명선생은 아무 죄도 없는데 복역했다. 」고 하는것이 된다. 그 복역하고 있을때에도 막대한 돈을 마구 뿌리며 지내고 있다고 폭로되었는데, 타인의 명의로 부동산을 부정구입 하는 맞잡이나 돈이 되는 기업은 거의 문선명의 친적에게 빼앗기고 있는 현실을 볼때 대관절 이것이 종교 단체인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선명이 나에게 이야기 해 준 원리와 이상세계 그리고 그 이상세계의 공생 공의(共生公義)주의 시대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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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일족의 「더 돈을 보내라」「빨리 현금을 보내라」고 하는 소리가 되어 세계로 날은다. 특히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통일교회의 실태를 모르는 식구들이 이상세계의 실현을 믿고 돈 수집에 열심히 뛰어서 영감상법(靈感商法) 이라고 하는 반사회적인 큰문제로 발전했다.
초창기의 노고를 알지 못하는 일족이 저지른 폐해(弊害)라고 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법에 저촉되 어 훔치더라도 하나님은 용서해 준다」고 여자식구를 꾀어서 문선명의 친척인체 하는 말투로 물욕 금전욕에 한층 더 박차를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한국은 일제지배로 피해를 받았다. 그 일본에 원한을 갚기 위해서도 일본의 돈을 싹싹 긁어 내야 한다고 문선명이 호언하고 있던 사실(여러사람의 간부가 들은바 있다)을 일본의 순수한 교인들은 알고 있을것인가?

원리의 이상사회등은 꿈같은 이야기일뿐 재림메시아의 아버지는 별것 아닌 허상에 불과 하다는 것을 빨리 알아야할 것이다.


도대체 통일교회 란 무엇인가?

종교인가?

단순히 배금 기업체인가?

문선명 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메시아를 자칭 하고 있을뿐이라면 원리 는 어떻게 된 것 인가?

문선명의 행위가 원리에 따라서 복귀를 한 것이라고 한다면 원리대로 6인의 마리아로 충분하지 않은가?

6인의 마리아의 정조를 빼앗앗을 뿐만아니라 그외에 더 복귀라고 하는 명목으로 헤아릴수 없을 정도의 많은 여성을 범하고 재산을 착취 한것은 용서할 수 없다.
참 어머니로 한다고 속여서 처녀인 이성화를 서울역전의 여관에서 범하고 또 이순철도 같은 구실로서 범하고 그밖에 김영희라고 하는 처녀도 같은 구실로 복귀해서 임신 시켜서 학생 이였던 그녀의 인생을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것은 재림 메시아를 자칭하는 문선명의크나큰 범죄이며 통일교회로서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김영희의 비찰


연세대학교의 우수한 학생이었던 김영희의 경우를 특기하면 김영희를 임신 시킨것을 알게 된 문선명은 자기의 입장이 위태로울 것을 두려워해서 그녀를 같은 대학의 학생으로서 교인이 된 순수한 청년 오승택과 함께 일본으로 가도록 계획을 꾸몄다.

외국에서의 생활을 보장 한다고 약속해서 부산에서 일본으로 탄피를 밀수출하는 작은 배
에 숨겨서 밀항했던 것이다. (이 비용은 오군이 등록금으로 아버지를속여 받은것)
일본에서의 두 사람은 언어도 통하지 않고 밀항자의 몸으로 입원도 할수가 없어서 극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해산 하였다. 젊은 오승택은 갓난애기의 탯줄을 자기의 이발로 끊고 애기를 출산 시켰다고 한다.

가지고 왔던 얼마 안되는 돈은 다 써버렸고 문선명 한테서의 생활비도 오지 않아 기다리다 지쳐버린 오승택은 일본으로 밀항시킬때 문선명이 부를 때까지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있었지만, 문선명한테로 돌아 오기 위해서 또 다시 밀항을 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대단한 고생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우선 오청년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직접 문선생에게 이야기 해서 생활비를 얻어낼 예정 이었다.

오승택은 문선명을 만나서 자기들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 하고 생활비를 구하였더니 문선명은 이것을 한마디로 거절 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가혹한 이야기는 들어 본 일이 없다. 보통사람이라도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에게 이와같은 처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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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재림 메시아」라고 하는 그사람이 자기가 책임을 지는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다지도 비정한 배신을 태연하게 당하였으므로 오승택은 몹시 노하여 그길로 지금첫 재림메시아로 믿고 우러러 오던 문선명과 결별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때 문선명은 그런 돈은없다. 너희들이 생각해서해 ! 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문선명 옆에 있었으므로 잘 기억하고 있다.
문선명의 말에 오승택은 노발대발 하며 무슨 말인가? 잘 기억해 두라!
너는 사단이다 ! 하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가고 말았다.
김영희가 임신한 당시 연세대학교에서 입교한 세사람의 학생 가운데 사정을 듣고 상의를 받은 오승택이 문선명 메시아와 통일교회를 위하는 것 이라고 믿고서 내가 맡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크리스챤인 부모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고 부산에서 김영희와 만나서 소형 어선을 타고 일본 규슈로 밀항한 것이다.

 오청년이 노해서 뛰쳐나갈때 그자리에 7,8인이 있었으나 누구도 내심으로는 괘심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나는 그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동 ·서도 모르는 일본에서 김영희는 오로지 돈을 가지고 돌아을 오승택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동안의 나날은 김영희와 그 간난애기(문희진)에게는 그 고생 이야말로 대단한 것 이었다.

그러 한 김영희 모자를 일본 오오무라 수용소에서 발견한 한국인의 황모씨가 그녀를 한국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돈도 여권도 없는 김영희는 오오무라 수용소에서 3개월간이나 수용 되었다고 한다.
김영희가 아이를 데리고 돌아 왔으므로 문선명은 할수 없이 아이만은 자기의 호적에 입적 시켰다 아이의 이름은 "문희진" 이라고 한다.

이 아이는 황모라고 하는 사람의 부인이 숨겨서 양육하고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죽어 버렸다.

중학교 여름 방학때 하기 전도 나간다고 큰 학생을 따라 나갔다가 무더운 때라 객차에 오를때 두손으로 붇잡고 오르는 난간을 붇잡고 뒤로 잔득 느러져 시원하게 바람을 쏘이다가 역에 들어갈때 역 시설물에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으로 죽었다.

이사건에 대해선 영계가서 소년들을 동원하러 영계에 갔다고 미화 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 이외에는 「어린양의 잔치」를 거행한다는 구실로 처녀인 이성녀를 복귀해서 그녀에게도 아이를 낳게 했다.
그 아이도 어느 간부의 아들로서 양육 되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다.

이러한 일이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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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사람의 어머니


납득되지 않는 사실은 그밖에도 있다. 최원복의 문제이다.
이 사람은 「7.4사건」때에 문선명이 구속되어 교수들이 사표를 내고 졸업반 대학생들이 퇴학을 당하는 소란이 일어 났을때에 우연히 나와 만날 기회가 있어서 대단히 걱정을 해 준 사람이다.
「나도 힘이 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수가 없네요」하며 아쉬워 했다.
그녀는 이미 통일교회에 입교해서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그후 가정도 버리고 문선명 한테로 달려 왔다.
무슨 일에서인지 식구들은 최원복을 「어머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어머님」이라고 하는것은 원리의 어느곳에 나오는 것일까?

6인의 마리아는 예수가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는데, 그것을 못했으므로 예수는 죽었다. 그래서 제3의 아담이 이세상에 와서, 6인의 유부녀를 마리아로 복귀시킨다고 하는 구실로 문선명이 섹스를 하고 그 육체도 재산도 빼앗았다.

그리고 처녀 한사람을 선택하여 「어린양의 잔치」라고 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문선명과 처인 한학자를 「참아버지」「참어머니」라고 부르게 한다.

참어머니는 이미 있는데도 「최원복어머니」라는 명칭은 원리가운데 어디에서 끄집어 낸 이론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선명은 6인의 마리아를 선택 하였고 그중에서 한사람을 특별히 어머니 라고 부르게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문선명 자신이 좋아서 열을 내고 있는 여인 이었으니까, 어머니 라고 이름을 붙인것 뿐이리라. 대단한 이야기다.
나중에 말하자면 문선명의 처인 한학자의 어머니 홍순애가 「미국에가 있는 최원복은 2호다. 첩이다」라고 어린아이들에게 충동질해서 비상수습책으로 선화예술 학교의 교장으로 최원복을 한국으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이 학교는 박보희의 동생 박노희가 이사장으로 있었는데 교장이란 명칭도 다만 겉치레
의 이야기일뿐 문선명이 당황해서 붙여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원리」를 내세우며 뒤로 돌아서면 전연 종교인 답지 않은 문선명의 언동은 여전히 변함없이 여자문제나 부동산의 부정구입 탈세사건 「남의 돈을 훔쳐 와도 하나님은 용서 한다」고 하는 교사등, 일일이 다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이지만, 한가지만 더 나의 체험을 써두고자 한다.


나의 부끄러운 체험

 

나는 제3장에서 문선명으로부터 이순철이 만든 영계의 역사에 관한 시험을 치라는 이순철이 강요에 문제를 보고 답을 썼더니 「됐어 합격」이야 라고 말했다고 썼는데, 사실은 이때 문선명의 눈앞에서 6마리아의 한사람인 이순철과 섹스를 하도록 명령을 받았던 터였다.
 

나는 이미 문선명이 복귀한 6마리아 중 한사람 한테서 복귀를 받았으므로 문선명의 원리에 말하자면 유자격자였다.
그런 나에게 문선명은 이순철과 이자리에서 하라고 재촉했다. 메시아의 명령에는 따를 수 밖에 없어 나는 그 자리에서 이순철과 섹스를 하고 「합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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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술한 바와 같이 남편 몰래 집에서 많은 돈을 가지고 나온 이순철은 격노한 남편한테 쫓기고 있었다.
그래서 위험을 느낀 문선명과 이순철과 함께 여기저기 도피하며 5박을 하면서 부산으로 간것인데 그때도 같은 것을 명령 받았다.

남편의 노여움을 모른체 두사람은 이순철이 가지고 온 돈으로 호화스런 강산유람의 여행을 했다. 그리고 매일밤 두사람의 섹스를 문선명은 나에게「보라」고 말하며 「자네도 하게」라고 명령했다. 거기에는 종교도 없었고 원리도 없었다.

성욕에 놀아난 남녀 세사람이 귀신들린 광란의 성희가 아닌가!

문선명이 말하는 복귀의 정체를 나는 그때 실증이 나도록 체험 하였다.

또 부산의 영도의 밤 비좁은 방에서 자고 있는 나의 옆에서 문선명은「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돼 잠잘코 있어」라고 말했다.

재림메시아라고 자칭 하려면 원리대로 하였을 뿐이지, 왜 감추려고 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해못할것이 많이 있지만 원리를 앞세워 가장하고 해괴한 복귀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피할런지!

 

붉은 용(龍)이 세상을 미혹

 

자칭 재림메시아의 문선명은 그원리를 김백문으로 부터 배워가지고 평양으로가서 파렴치한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어 실형을 받고 복역한 후에 서울로 왔다.
1954년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 여러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통일교회는 점점 성장해서 일본에는 최봉춘(일본이름 니시가와)을 밀항시켜 해외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또 김상철과 김영운이 미국에 포교하여 미국에서도 식구들은 문선명을 아버지로 우러러 재림메시아로 믿고 있다.

그러나 오늘에서 원리와는 관련이 없는 문선명의 행동으로 많은여성들과 남성들이 희생되어 죽은 시체가 가득 쌓인 속에서 원한의 소리가 들려 오는듯 하다.

그리고 지금은 「복귀 실천의 비밀」이나 「실천의 치부」를 알지 못하는 철부지 교인을 전면에서 내세워서 가면을 쓰고 있다.

미국의 형무소에 들어 갔던것을 영광된 큰 기적등으로 선전하여 옥중에 있었어도 막대한 돈을 쓰고 있었다. 그 돈은 여러 식구들이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귀 한 돈인 것이다.

수년전 미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여신자가 한국 인삼차를 팔기 위해서 흑인촌을 찾아 갔다가 집단으로 윤간을 당하고 죽음을 당했다.

흑인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도로에 그 시체를 끌어 내다가 차로 몇차례 깔고 뭉개버린 사건 이었는데 시체의 주머니에서 통일교회 회원증이 나와서 신원이 판명되었다.

이와같이 비참한 희생으로 들어온 돈을 물쓰듯 써버리면서 문산명은 재림메시아를 자칭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식구들이 총동원되어 영감상법(靈感商法)이나 초코렛 껌팔기로 술취한 사람들의 희롱을 받아가면서 돈을벌어, 그돈을 전부 문선명 한테로 보내진다.

그렇게 보내진 돈을 쓰는 명목으로 문선명은 엉뚱한 계획을 꾸며 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국제 하이웨이 건설계획」이다 현해탄에 해저터널을 통해서 일본, 한국 , 중국, 러시아,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 하이웨이를 만들자고 하는 것이다.

통일교회의 내부에서 조차 「실현 불가능」이라고 실소의 소리가 있는데도 말이다.

재림메시아! 문선명이 이세상에 나타나서 국제 하이웨이를 건설하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한다는 거야!

국제 하이웨이건설 같은 것을 계획하기 전에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해서 참 부모가 되어있을 터인데, 그 재림 메시아는 무엇보다도 죄악이없는 세상을 만들어서 에덴의 동산을 복귀해 놓는것이 본래의 그가 할일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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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은 미국의 신문이나 매스컴에서 자기를 「목사」라고 자칭했다. 문선명은 신학교에 다닌 일도 없고, 목사로서의 안수 받은 일도 없다.

만일 통일교회 계열의 신학교에서 얻은 자격이라면, 질문이 있다.

문선명은 처음 부터 자기는 재림 메시아이며, 제3의 아담이다. 그리고 자기의 할 일은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통해서 본래 그대로의 죄없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것이 사명이다 라고 계속 말해 왔다.

그렇다면 재림 메시아가 목사로 변신해서 어떻게 해서 사명을 다 할수 있는가 !

스스로 지 금까지의 속임수는 말 할것도 못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

문선명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 와서 이름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성경의 「요한계시록 12:91에 이 세상에는 끝날에 붉은 용이 나타나서, 이세상을 미혹케 한다고 씌어져 있다.

자기의 이름에 용(龍)이 들어있는 문용명(文龍明)은 그것에 착안해서, 서둘러 이름을 문선명으로 바꾼 것이 었다.

이것은 자기 가 붉은용=사단 임을 인정 한것이 된다. 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천하에 내밝혀 쓴 이 고백에 거짓은 없다.

문선명 이야 말로 진짜 사단이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 붉은용 문선명으로 인해서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이상, 기만 당하거나 희생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해서 나는 이 원고를 목숨을 걸고 발표 할 결심을 한 것이다.

 

 

진짜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속에서 부터 기원하는 바이다.

 


「1985년 8월 31일 - 1993년 9월30일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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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증언-우리들이 체험한 사실

 

 

통일교회의 경제적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유호민-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문선명의 초대 비서적 이었던 박정화씨의 뒤를 이어 2대의 비서역 사촌간인 유효원, 유
효영 형제와 함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간판을 걸고 발족에서부터 기반 만들기에 크게 공헌

 이화여자대학사건으로 문선명과 옥고 동참
자이며, 36가정의 멤버, 1972년 탈회, 현재
서울거주, 회사사장, 현 72세


나는 통일교회가 정식으로 창립되기 전의 1954년 1월 4일에 부산에서 사촌인 유효원, 유효영과 함께 문선명의 추종자가 되었다.

박정화씨는 그 무렵 식구(신자)의 중심적 존재로서 문선명의 한 팔로서 활동하고 있었고, 나 또한 대단히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는 문교주가 박정화씨를 밖으로 멀리 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원인은 박정화씨는 너무나 문교주의 비밀을 지나치게 알고 있는 처지다. 만약 그가 수사당국에 모든 것을 폭로하게 되면 문선명 선생은 중죄로 될 것은 물론 그가 반대하면 문교주의 모든 행각이 다 탄로 나므로 이 사회에서 파렴치범으로 이 땅에 있을 곳이 없게 된다.
그러니까 박정화는 요주의 인물로서 교인 식구들이 접근치 못하도록, 박정화의 비리에 대한 뉴앙스를 풍겼다. (전매청에 새끼 남품한 돈을 잘라 먹었다는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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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속에서 박씨를 「대구의 할머니들이 박정화는 대사단이다」라고 꿈의 계시를 받았다고 ,귀속말로 퍼뜨렀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박정화씨를 멀리 하기 위한 구실이며, 뒤에서 문선명이 시킨 음모였다고 생각한다.
박씨는 문선명의 여자관계나 돈 출처 문제를 너무나도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소외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상투적 수단이고 나의 경우도 그러 했다.

내가 처음 성경원리를 들을 무렵, 문선명을 위시해서 모인 식구들은 , 그날 먹을 것도 어려운 형편이어서 북한에 있을 때에 사진관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나는 푸로마이드를 제작 판매 하는 일을 제안했다.

이것이 적중해서 하루에 일만 장이나 매상이 있었다.
한장에 7원 전후로 도매한 것을 학교에 못가는 전쟁고아들이 담배나 라이타돌 등을 판자에 넣어 행상하는 때가 유행이 되었다. 10원씩에 팔고 매일 7만원정도씩이나 현금수입이 되었으므로 부엌사정은 단번에 해결하였다.

박정화씨가 말한 바와 같이 남자 식구들은 작업을 분담해서 일을 하고, 여자 식구들은 가위로 잘라서 정리하는 일에 몰두 하였다. 이 일은 2년정도 계속되 었다고 생각한다.
공기총은 1961년부터 시작하여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서 일본에 수출하였으나 공장도 가격으로 1정에 1만원(지금이라면 30만원)에 15만정 이상이 팔렸다.도합 15억원 이었으니까 통일교회에서는 꽤 큰 재원이 되었다.

산탄 공기총을 발명한 내가 「통일산업」의 사장이 되지 못했던 것은 소위 7.4사건(이화여대 14인 퇴학사건)문교주와 옥고를 같이 치렀음으로 전과 기록으로 총포제조 허가조건에 하자가 있었다.

그래서 김인철씨가 사장 문선명의 6촌 문승룡이 공장장,그 아우가 생산부장이 되고 발명자인 나는 "조립부장" 이라고 하는 세상에 유래없는 기묘한 직 책을 받았다.
총의 제 2차특허권은 문교주 지시로 문선명의 명의로 양도 공증까지하였다.

주요간부는 문선명 친척들 뿐, 그들은 한사람이 한대의 차를 가지고 화려하게 타고 돌아다녔으나, 나는 도보를 걸어다닐 수 밖에 없었다.
신앙보다 친척중심의 돈벌이 주의 라고 밖에 생각 할수 없는 입장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은 더욱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나에게 「당신은 사진에 솜씨가 있으니까 사진관이나 안해보려나」농담 말이, 사진관이나 하고 있을 그런 기분이라면 나 혼자서도 된다.
나는 이렇게 강한 반발을 느줬다.

요컨대 이것은 공기총사업도 궤도에 올라셨고 또 문교주의 여자관계도 지나치게 알게 되여 산탄공기총을 발명한 나도 더이상 필요 없으니 그만두라고 하는 암시 아닌가!

1971년 어느날 나는 미국에서 막 귀국한 문선명을 만나서 여러가지 의논을 해 보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측근중에 어머니라고 호칭하는 최원복에게 연락을 하였더니 효민씨라면 시간을 정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와서 만나면 될 것입니다 라고 전화로 통화되어 가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럿이 문교주 중심으로 모여 있는데 예전과 같이 끼여 들었다. 통금시간 12시가 다가 옴으로 한사람 두사람 다 집으로 돌아가고 단둘이 남았다.
그때 뒷문으로 훌적 나가 길래 화장실 가나보다 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다시 들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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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온순한 나라 하더 라도 이 것만은 머리가 화끈거렸다. 전신이 막 뜨거워지며 열이 나고 떨려오는 것을 자신으로서도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나는 문선명이나 통일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온갖 노력과 봉사를 다해 옥고 동참상, 모범상, 14년공로상, 전도상등 교회에 상주하며, 그림자처럼 어디든지 모셨지만 단 한가지라도 가르침에 상반된다든가, 폐를 끼 친 일은 없다.
다만 경제문제나 여자문제를 너무나도 지나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문선명 쪽에서 나를 께름직하게 여기고 배신한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확실하게 인연을 끊고 탈회 하였다.

박정화씨의 체험과 너무나 꼴이 같아서 나는 그의 억울함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본질을 이야기 할 사건에 관해서 나는 한가지 더 구체적 인 것을 증언 해두고 싶다.

그것은 1955년의 「7 4사건」문선명과 우리들 간부가 체포되 었던 사건인 것이다.

7월 4일의 문선명에 이어서 6일에 나도 체포되었다.

체포이유는 「병역기피용의」우리들 북한에서 남으로 나온 피난민에게는 호적이 없었으므로 신분증명서를 만들어 받을 때에 「제 2국민병」으로서의 병역을 면하기 위해서 실제연령보다 5-6세 정도 올려(연상으로)신고 하였었다.
그것이 위반이라고 하는 것인데 문선명 자신도 박정화씨에게 지시해서 위조시키고 있었다.
우리들은 말을 맞추어서 위조에 협력하였다고 공술 하였으나 한편에서 문선명은 자기는 모르는 사이에 제자들이 맘대로 한것 이라고 책임회피하고 있었다.
하나님과 같이 모시는 입장에서 우리들 제자가 그의 연령을 함부로 변경 한다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다. 실제로는 모든 것을 문선명의 지시 에 따랐을 뿐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 「병력기피」용의는 문선명 이하의 간부를 체포해서 취조하기 위한구실이고 실은 「간음과 혼음」을 조사할 목적이었다.

수사관의 질문은 날이 갈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당신들은 부부사이는 어떠한가?
당신부인들과 동침은 언제했나?
한주일에 몇번씩 이나 하는가?
한달에는 몇번이나 했나?

여자 신자들과는 몇번이나 했는가 병 역기 피 와는 관계가 없는가· .

남의 사생활 문제를 집요하게 심문하는 형사에게 큰소리로 대들고 수사관과 입씨름을 한일도 있었다. 그러나 수사관의 조사는 끈질겨서 책상 위에는 문선명과 여자식구들이 관계를 도표로 그린 그림을 놓아두고 섹스관계의 확인을 하는 것이아닌가 ?

나는 시종일관 모른다. 없다고 버티었으나 내심으로는 그 정확함에 탄복하였다 유치장안에 있는 우리들은 밖의 상황을 잘몰랐으나 박정화씨들의 은폐공작의 결과인지 조사를 받은 여성들은 나는 문선명선생과 그런 짓을 한 일이 없고, 나는 꿈에서 섹스는 하였다 등등으로 적당이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경찰은 거의 정확하게 문선명을 둘러싼 여성들의 성관도를 쥐고는있었으나 본인의 친고나 남편으로부터의 고소가 없었고 이사건으로 문교주는 3개월만에 무죄선고로 풀려 났다.
그래서 「7.4사건」은 단순한 병역기피문제가 아니라 통일교회의 안방 깊숙이 숨겨져 있는 섹스문제의 수사가 경찰의 노리는 바였는데 통일교회가 말하는 「아무 것도 아닌 사실무근의 혐의」가 아니라 간신이 문교주와 혼음 사실이 천하에 공포되는 것을 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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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때 체포되었던 간부의 유치번호는 문선명 390번, 유효원380번, 유효영 1709번 ,나는 1175번 이었다.

김원필도 체포되어 그만이 1년 실형의 판결을 받고 수감 되었다. 하여간 통일교회와 결별하여 두고 두고 냉정하게 문선명이나 협회의 실정을 보니까, 여러가지 모순과 이념이 눈에 띈다.
인류역사의 대세는 분명히 민주주의의 흐름인데도 불구하고 통일교회의 체질은 신앙과 관계없이 문선명에게 아부하는 무리들만 주위에 둘러 있는 독재체제 이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을 어거지로 되돌려서 문명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식구들이 몸을 깍아서 모은 거액의 돈은 문선명 한사람이 관리하고 있어서 어디에 얼마만큼 숨겨 두고 있는지, 현재의 최고 간부들도 모르고 있다.

비민주적인 횡포로서 독재일방의 역사를 거슬러간다. 또 통일교회의 인쇄물에는 어느 것이나 문선명선생이 1948년에 북한에서 체포된것은 공산당의 종교말살정책에 의해서 내무성에 구속 되었던 것이라고 판에 박은 듯이 거짓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북쪽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진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공산주의가 싫어서 1947년 8월 사진관도 각종기계도 그대로 두고 28세때 혼자서 월남했다.
그때까지 나는 선천북교회의 집사였다
그런데 그때 기독교 탄압 같은 것은 없었다.

이것은 통일교회의 거짓의 역사이며 박정화씨가 자세히 쓴 바와 같다.
또 이책 가운데에 소개 되어 있는 것처럼 나자신도 말하자면 36가정의 한사람이지만, 그저 원리만 앞세웠을 뿐 ,으시 대고 폼만재지 아무런 섭리도 없는 일당 독재 체제이다.
그래도 그당시는 부부의 짝짓기를 신중히 생각해서 종로의 유명한 백운학(관상가) 또 이명학(사주가)에게 찿아가 짝짓기 궁합을 맞춰 달라고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최근의 합동결혼식은 마치 마작판의 마작말패 섞드시 남의 인권을 아무렇게나 적당히 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이래서야 참부모가 정해주는 이상상대 축복이 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성스러운 축복 행복한 꿈이 채 가시기전에 여기 저기서 이흔소동이 발생하고 있으니 과연 땅에서 재림주에게 축복 받은것이 하늘에서도 영원한 부부가 될 수 있을까? 그 책임은 또 누가 져야 하는가?

 


유신희 - 6마리아의 한 사람 이었다.

 

1954년부터 수년간 6마리아의 한사람. 문선명의 원리를 믿고 복귀를 받아, 5-6인의 남
성과도 복귀의 실천을 했다.
지금 회고하면 「참으로 어리석었다. 」고 후회하며, 「문선명은 죽어 마땅한 남자다」라고 단언한다.

 

-유신희씨는 부산 영도에서 남편인 신성묵씨와 다섯 아이들과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때 근처에 살고 있던 사촌오빠 유효원의 권유로 문선명의 포교집회에 방을 빌려 주셨던 것이지요.

유 :그렇습니다. 1953년 12월 24일이었읍니다. 처음에도 3일간만 쓰겠다는 약속 이었읍니다만 결국 25일간이나 되고 말았읍니다. 그때 사촌오빠인 유효원, 효영형제, 그리고'유효민등 머리가 좋은 오빠들이 믿게 되므로 우리들 부부도 덩달아 믿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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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 메시아의 위대한 사람이 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세히는 이해하지 못하였었지만, 오빠들이 전부 믿어 우리부부도 덩달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후에 부부가 서울로 가셨군요? 아이들은 어떻게 하셧읍니까?

유 :남편이 먼저 집을 나갔으므로 내가 가족회의 처럼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하였읍니다. 「아빠도 엄마도 재림주가 오셔서 대단히 바쁘게 되었다. 그래서 너회들의 뒷바라지를 할 수 없게 되었구나‥‥」
위 아이는 중학교 2학년생이었고 제일 끝의 막내딸은 아직 여섯살 이었읍니다만, 다섯 아이들이 이해해 주어서 서로 손잡고 고아원으로 보냈읍니다.
정 말로 해서는 않될 짓을 했읍니다.
그로부터 7년동안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벌써 40년이나 지났읍니 다만 지금 아이들은?

유 :모두 기독교신자로서 그저 얌전하게 잘 지내고 있읍니다. 그래도 막내딸하고는 자주 충돌이 있읍니다. 어머니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대단히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나를 책망 한답니다.

 

-문선명과 복귀의 섹스를 한 여성으로서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인터뷰에 응해준 사람은 아마도 유신회씨가 처음이 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지금의 심정은?

유 :지금까지 침묵해 온것은 아이들에게 북귀의 사실이 알려지는것이 부끄럽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벌써 나이가 나인만큼 참을 수 있읍니다만은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사실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기는 합니다만은 나같이 미혹
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죽기보다 어려운 이 사실을 밝혀야 겠다는 결심을 한 바입니다.

 

-문선명과의 복귀에 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해 주십시요?

유 :여자 식구 한사람한테 꾀임에 빠져서 밤늦게 캄캄한 문선명의 방으로 갔읍니다.
거 기서 복귀를 받은 것입니다. 나의 경우는 극히 짧은 시간에 깜딱 할 사이에 끝났읍니다. 사단의 피를 밝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 두번 더 복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었읍니다만은 나는 한번 만으로 끝냈읍니다.

 

-그것은 왜?

유 : 문선명은 여러 여자와의 관계가 많아서 다음에는 언제 내 차례가 돌아 올런지도 몰랐고 또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피난민 시절에 그것은 다름 아닌 범냇골(지금은 성지로 명명 , 통일교 교인들이 세계 각처에서 참배 하러옴) 당시 나는 근처에 살고 있는 터이여서, 우리 아버님과 문선생은 매일 등산 산책을 하는 처지여서 어느날과 같이 나도 손을 잡고 아침 등산 하던중 문선명이 철부지 나를 움막으로 끌고 들어가 성폭행을 해 많은 출혈이 심했었다고 울면서 이야기 하여‥‥ 아무리 복귀라 하는 명분 이라지만 타락이니 복귀니 전혀 귀가 열리지 않은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가 있읍니까?
그래서 나는 두번 복귀를 단념 했읍니다.

 

-문션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다음 유씨는 몇사람의 남성과 복귀를 하였지요.

유 : 그때는 문선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 여성은 다른 남성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쳐서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6인의 남성과 복귀 했읍니다

-그래서 유씨는 6마리아의 한사람이었다고 박정화씨가 썼던데요.

유 : 6마리아의 이야기는 듣기는 하였읍니다만 누가 그런지는 알지 못하였읍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처지 인지 나는 잘 몰랐읍니다.나 보다 훌릉한 여인들이 많이 있었고 문선명의 주위에는 항상 세사람 정도가 바짝 붙어 있어서 나와는 격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
각하고 있었으니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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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사람 이 란 누구인가요?

유 :신정순*, 이순철*, 양윤신*씨 들입니다. 문선명이 유난히도 귀여워했고 후에 재산을 노리고 재벌과 결혼시킨 임영신이 들어 온 것은 그 뒤의 일 입니다.

문선명은 차례 차례로 새 여성을 신변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하는데 같은 여성들 끼리 특탁거리는 일은 없었읍니까?

유 :있었지요. 여자들 끼리니까 질투나 독점욕은 당연히 있읍니다. 그래서 여자들 끼리 심한 싸움이 있을때에는 문선명이 그러한 여자를 때 린 일도 있었읍니다.
그리고 육체도 재산도 빼앗고 볼일이 끝난 여인은 계속 주변에서 내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내 쫓긴 중의 한사람 입니다.

 

-6마리아는 그때 그때의 정원으로 적당이 교체가 되어 결국은 재산이나 새로운 여 인이 목표 이었던가요. 신구교체는 문선명의 독단으로 행해 졌읍니까?

유: 우리들은 옆의 일도 몰랐었읍니다. 그래서 어느땐 그 주위에서 쫓겨난 여자만도 다섯사람이나 되어서 서로 이야기 한일도 있읍니다. 그 정보교환으로 알았읍니다만 실로 여러 여자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것입니다.
처녀를 임신시켜서 아이를 낳게 하기도 하고 유부녀나 어머니와 딸들의 정조를 닥치는 대로 짓밟아서 가족이 풍지박산이 되기도 하고 유복했던 사람이 재산을 빼았겨서 빈털털이가 되기도 하고

 

-여러가지 비극이 셀수 없을 정도로 속출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모두가 참말로 분개 하였었읍니다.

유 : 그렇다고 생각 합니다. 사람이 모여 있을 어느땐가 원리의 설명을 내 사촌오빠인 유효원이 열심히 땀을 흘려가면서 열심히 강의하고 있는데 문선명은 여성들과 히히덕 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 신자들에게는 유효원쪽이 존경을 받았고 인기가 있었읍니다.
그 유효원 오빠는 수술을 받지 않았더라면 좀더 오래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의학부 출신답게 자기 병을 잘 알고 있어서 수술을 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싫어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선명은 병 따위는 진짜 메시아라면 고칠수 있을게다고 말 할것을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러 한 소리도 있었읍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유효원씨에게 무리하게 수술을 시켜서 죽게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기가 높은 효원씨에게 정상의 자리를 빼앗길 일도 없게 되어 문선명은 모름지기 안심 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 보고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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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이제 생각 하는것은 「한(恨)」그것인데 정말로 후회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할말이 없읍니다 나도 정말 바보 였읍니다. 좀더 현명 하였더라면 그때에 선악의 구별이 섰을 터인데 어리석었기 때문에 이렇게 돼 버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남편과도 이흔하고 아이들과도 떨어져서 혼자서 조용히 살고 있읍니다. 나뿐만 아니라 그 무렵 문선명의 신변에서 봉사하게 한 여성으로서 행복하게 된 사람은 한사람도 없읍니다.
모두 문선명의 사기에 속아서 몸도 마음도, 재산도 바치고 걸레가 되어 당장 내일 생활에도 곤난을 겪고있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러한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 할때 우리들의 소원은 단 한가지.문선명은 재림 메시아가 아니다. 죽어 맞당한 사나이 하루라도 랄리 죽었으면 하는 인간이다 라고 하는것 뿐입 니다.

 

 


김덕진 -섹스릴레이의 실천자

 

평양 숭설전문학교 출신.
일본의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일도 있고 음악의 외길틀 걸음.
통일교회에서 애청중인 성가 19골을 작곡,
문선명의 가르침대로, 섹스원리를 실천한 산증인
현대 서울 계주.
경찰목사.
현 80세

 

나는 어느 한국육군의 고급 장교의 보신을 위한 모략으로 북의 스파이로 몰려서 유엔군 제1형무소에 무기징역수(438번)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것이 사실무근인 것으로 증명되어
1954년 11월 27일에 무죄로 석방이 되었읍니다.
그래서 출소 할때 형무소에서 내가 노래를 가르쳐주고 있던 이석빈이란 남자가 자기는 재 림주 문선명의 제자 이므로 출소해서 서울로 가거던 찾아서 바드시 이 편지를 전해 주십시요 라고 하며 한통의 편지를 맡겼다.
봉투곁에 「아버님전상서」 뒷면에는 제자 이석빈 이라고 써 있었읍니다.

누이동생 집에서 한동안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 그럼 문선명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그 당시는 아직 통일교회 따위는 아무도 몰랐었다. 거처를 모르고서는 편지를 건네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친한 친구인 중부경찰서장에게 부하에게 명해서 빨리 찾아주게나 하고 부탁하였읍니다.
보잘것 없는 작은 집을 찾아 가서 나는 이런 사람인데 형무소 안에서 이런 편지를 맡아 가지고 왔다고 말하니까 문선명을 만나게 해주더군요.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여성이 선생님 예배 시간 입니다 예배를 하셔야· .
그리고 나에게도 함께 어떻습니까 하기에 같이 참가 하였지요.

 

좁은곳인데 풍금도 아무 것도 없었읍니다. 처음에 노래한 찬송가란 것이6천년 한이 맺힌 싸움의 동산 승리의 월계관을 찾아 구하여‥‥ 문선명이 작사 하였다고 하는 「복귀의 낙원」이라던가 이 세상을 에덴의 동산으로 복귀한다고 하는것 같은 가사였는데 웬일인지 그 노래를 일본의군함 행진곡의 곡조로 노래하고 있는 거예요. 놀란 나는 끝난 뒤에 말
해 주었읍니다.

세계를 통일하는 살아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한국인의 원수인 일본국의 그것도 가장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군함 행진곡으로 자작의'찬송가를 부른다는것은 무슨 일이요? 이렇게 바보스러운일이 어디에 있오?
어찌 당신이 재림메시아란 말이요? 여러가지 질문을 하였더니 문선명은 얼굴을 벌겋게 하고 있더니만 김선생 부탁이 있오. 내가 작사 한것이 또 다른것도 있으니‥‥ 라고 말하며 나에게 작곡을 부탁 하였읍니다.
즉석에서 좋다고 대답하고 그후 약 2,3년간에 나는 통일교회의 성가를 작곡하였읍니다. 문선명 작사가 5곡, 유효원 작사가 1곡, 나의 작사가 13곡 모두 19곡이 나의 작곡인데 지금도 전 세계의 통일교회에서 열심히 불리우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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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만든 성가책에는 「작사, 작곡, 김덕진을 지워 버렸고 다만 일본책에는 문선명 작사, 김덕진 작곡」이 5곡과, 「작사, 작곡 김덕진」14곡 모두 19곡이 실려 있읍니다.
 

잠깐 이야기는 조금 뒤로 돌아 갑니다만,

문선명을 방문했던 다음날 부터 아름다운 여성들이 매제의 집으로나를 찾아 오게 되었읍니다. 김선생님 저희들의 교회로 다니시지요 하는 것 이었읍니다. 작곡을 맡은것도 있고 해서 다니기 시작 하였더니 대우가 좋았다.

모두들 같이 푸로마이드 사진을 만들고 있었고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도하고 있는 신자도 있던 시대였다. 그렇게 가난한 속에서 나에게 신사복을 여러벌 만들어 주어서 즐거워서 열심히 작곡을 한 셈이지요.
그러는 동안에 싫어도 문전명의 원리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6천년전 에덴의 동산에서 아직 고교생 정도의 나이로 미성숙했던 해와을 사단의 천사장 루시엘이 범하고 말았다.
이것이 세상에 악을 가져온 원죄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눈에는 눈을 이에는 이로 이번에는 사단을 속이고 세상의 여성들을 복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문선명은 젊었을 시절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재림메시아 임으로 섹스로 파탄이 된 세상을 자기가 여성과 섹스 하는것으로 원래의 모양으로 복귀시켜 혈대교환(피갈음)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겉으로 내세울수 없는 비밀의 원리임으로 대외적인 설교에서는 그 비유로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기전에 하나님에게 「될수 있으면 이잔을 피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원리 에서는 하나님은 95%까지 는 인간을 인도하여 주시지 만 나머지5%로는 인간자신이 생각해서 해결 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에게도 하나님은 자기가 해결 하라고 발하였으므로 피의 눈물을 흘리는 수고끝에 깨달았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 하 이 원리를 재빨리 나는 깨달은 것이지요. 인간의 몸을 쓴 하나님(문선명)의 섹스의 무리를 점점 널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희망을 성취하는 것이 된다.

원래가 불량해서 청춘주식회사사장을자칭하며 아색을 탐미하고 있던 나는 딱 집히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죄가 아니고 좋은 일이라고 학생시절에 일본에서 다방의 여자들을 유혹해서 그날밤에 범한 경우 같은것은 죄의식을 느낄때도 있었는데·그렇지만 통일교회의 복귀원리는 열심히 섹스에 전념하면 전념할수록 하나넘의 섭리가 성취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문선명으로부터 복귀받은 유신회씨에서 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피」를 나누어 받기로 한것이다 지금은 이미 할머니가되어 늙었지만 당시의 유신희씨는 대단한 미인이었고 머리가 좋은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문선명이 가르쳐 준 원리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다른 남성 에게 넘겨줘 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래서 「김덕진선생 보세요 내가 복귀해 들이지요‥‥」라고 말하며 그녀 쪽에서 다가 왔다. 물른 나도승락했다. 그리하여 나는 유신희씨와고맙게 섹스를 했읍니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몸이었는데도 욕구불만도 있었던지 몰라도 불량하고 오입쟁이로 여러 여성과 경험해 온 나의 기교에 이미 흐물흐물하게 돼서 즐거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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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중에 제일 좋았어요 문선명선생 보다 몇 십배나 더 좋았어요」라고 말하면서요.

복귀원리의 실천 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이미 보통 남녀의 섹스 그대로여서 여자가 위라던가 아래라던가는 관계 없어요.

그후에도 다른 여성과 좋을대로 했다.

원리의 책을 쓴 유효원씨들 처럼 온순하고 꼼꼼한 사람들은 문선명이 자기가 범해서 복귀시킨 누구 누구와 자라고 지시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바보들이예요.

나는 달랴요. 95%는 하나님의 가르침이지만 남어지 5%는 자기가 찾아야 합니다.

문선명과 섹스를 한 여인은다른 남자와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해야만 한다.

 

남자는 제2의 여자와 하고 여자는 제3의 남자와 하며 그래서 제4의 여자에게로 릴레이식으로 해간다.

이렇게해서 넓혀 가는것이 원리 아닙니까?

그렇게 함으로서 온세계의 남녀가 하나님의 혈통으로 사단에게 빼앗긴 전인류, 즉 사단혈통의 세계를 하나님편으로 복귀해야 사단의 발판을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문선명이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순풍에 돛단배처럼 유효원 협회장이 답답한 고지식쟁이를 비웃으면서 하나님의 뜻도 이루고 성적만족도 느끼며 동분서주 하면서 쾌락의 나날을 보냈지요.
서울은 물론 대구에서도 부산에서도 깨끗하고 예쁜이들만을 엄선해서 15-6인과 관계했을 거 예요.
서울에서 내가 5인의 여성과 섹스 한짓이 일주일 후에는 자그만치 72인의 그룹이 되었다더군요.

 

이것도 훌릉한 원리실천의 성과이지요.
그런데 문선명 이나 유효원씨가 안된다고 말했읍니다.
그 이유는 메시야 문선생 한테서 받는 복귀의 섹스는 소생, 장성, 완성의 원리로 3회 섹스 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는 아직 1회 밖에 하지 않은 유신희와 했으니까 무효다.

몇백사람에게 둘레를 넓혀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성질이 났어요 이 새끼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 라고 사단이 해와를 범했을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단을 이기는데는 조건만 맞으딘 되는게 아닌가.

그런데 문선명과 3회하지 않으면, 여성은 복귀가 안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 개새끼야 라고 노해서 싸움을 했어요.
그런일이 있은후에 나는 대구로 가서 영신중고등학교의 음악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문선명의 수제자 였던 박정화씨가 대구로 찾아온것 입니다.

문선명이 대구의 미인 신도 우옥례와 나를 정식으로 결혼 시켜서 무마 하라고 지시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여성과 문은 섹스를 한 사이 입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어는 곳에서 이석빈(형무소에서 같이 복역함)과 공교롭게 만났읍니다. 형무소에서 나에게 문선명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던 그사람입니다.
이석빈은 출옥한 후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지금은 대구시내의 작은교회의 전도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이 기회에 당신도 자기와 같이 일반여성과 재혼해서 하나님앞에 용서를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는 것이 어떠 하겠는가?

박정화씨 협조해 주었으므로 이석빈이 근무하는 교회의 장로의 장녀 강혜환 집사와 나는 재혼 하였읍니다. 가난했던 내가 결흔식에서 입을 옷이없어서 박정화씨 한테서 빌린것
이었읍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 나는 대단히 행복하고 75세때에 귀여운 손자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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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해서 2년째 되던해에 우리들 부부는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해서 나는 성동고등학교의 음악교사가 되었고 밤에는 신학교의 생도로서 공부 하였읍니다.
마침 그무렵 친구인 김경래씨(현재는 한국기독교 총회 사무국장)가 신문기자로서 「통일교회의 정체」라고 하는 기사를 크게 쓴 것입니다.
그 신문기사를 읽었다던가 생각지도 않았던 부인이 나를 찾아 왔는데 정말 깜짝 놀랬읍니다.


그 부인이란 문선명의 본처였던 최선길씨 였읍니다. 최여사는 문선명의 인격이나 통일교회의 성의 난맥을 알고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흔하고 가련하게도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때 최여사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읍니다. 김선생님 이 기회에 문션명이란 남자가 재림주가 아니라는것은 물론 사람도 아닌 무서운 독사 같은 자식 이라는 것을 온 세계에 알립시다.

 

문선명은 호색가로서 성욕이 장성해 내가 문과 결흔해서 자식(문성진)을 낳기 까지 부부관계를 매일밤 10회이상 해도 기운이 펄펄났었다.

 이것은 그가 뱀처럼 이상하게 정력이 강한 때문입니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였다.

 

통일교회는 종교가 아닙니다.

 

음란한 섹스교단일 뿐입니다.

 

문선명과 싸움을 하고서 대구로 옮길때 까지 나는 박정화씨가 있었던 광산으로 쫓겨 간 일이 있었다. 1년반 정도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부터 친구들이 빌려준 방에서 남자 6인 여자 3인이 즐겁게「복귀게임」을 한일이 있읍니다 통일교회의 원리를 실천 한것 뿐이지만거기에는 종교다운 것은 하나도 없었읍니다.

 

나는 깨 달았읍니다.

 

문선명의 섹스원리는 잘못된것 이란는것을.

 

그는 이 원리를 내 세워서 어머니와 그의딸 형제를 범하고 끝의 딸에게는 아이까지도 낳게 하고 있읍니다. 극악 무도한 행위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 겠읍니까?

이번에야말로 문선명도 통일교회도 하나님의 제재를 받을 때가 왔읍니다.

그리고 많은 희생자 들에게 그죄를 보상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자신도 불량청년시대에 죄를 짓고 통일교회에 들어 와서는 원리를 미끼로 제멋대로 음행을 자행 한 죄는 몇천만가지 엄 벌을 받는다 해도 할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부터 통회하며 열심히 경찰목사로서의 사명과 고아들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읍니다

 

 

http://cafe.naver.com/jubo/2085  , 통일교 문선명 -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 큰샘출판사

http://cafe.naver.com/jubo/1739  , 통일교 문선명  -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박준철 저,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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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문선명 - 희생당한 여인들, 많은 가정이 파괴

퍼온글 출처 : http://cafe.naver.com/jubo/2085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2인,  239 p , 1996.3 ,  큰샘출판사

 

 

이 책은 한국에서 발생한 가장 악랄한 사이비종교, 통일교(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문선명교주의 복귀(復歸)라는 미명으로 혼음, 섹스, 혈대교환(血代交換) 실천(처녀잉태, 유부녀)과 그 실제 경험했던 실화를 적나라하게 밝혀 놓은 책이다.

 

그 비극의 섹스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통해서 구원(복귀) 받는다는  사이비종교 통일교집단에 빠져 인생을 망치고 가정파괴를 당한 사실과, 어린양잔치라고 처녀들을 미혹 잉태시켜 놓고 책임을 회피당한 비극의 여인들.

 

유부녀와 결혼(어린양 혼인잔치) 소동을 일으켜 5년 실형을 받고 흥남감옥 노무자였던 문교주의 죄수번호 596.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환(血代交換)의식과 통일교 복귀(復歸)라는 구원방법, 문교주 체포와 혼음(섹스)관계 조사와 거짓말 증언들.

 

문교주에게 몸도 맘도 재산도 다 빼앗긴후 (유부녀) 여인들의 비참한 말로.

나의 부끄러운 체험들 (섹스, 혈대교환 실천 내용).

황금에 눈이먼 문교주의 노동력 착취와 문씨족벌 체제운영.

문교주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별짓을 다한다.

김백문의 원리를 도용, 문교주의 것으로 만든 사이비, 이단교리.

통일교 창설 전후 최초로 문교주와 13년간 함께 생활해 왔던 저자의 산 글이다.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타종교인, 일반 시민들에게도 사이비 종교(틀일교)를 알기쉽게 체험한 사실 그대로 밝혀 놓은 책이다.

 

 

 

머 리 말

나는 1985년부터 이 원고를 쓰기 시작 하였다.

「야록. 통일교회사」라고 표제도 정했다. 일본식으로 말한다면 우선「도큐메토. 통일교회사」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목적은 문선형과13년간에 걸쳐 행동을 함께 해 온 기록을 분명하게 기록해서 그 허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이다.

재림메시아를 자칭하는 문선명이 아마도 종교인에게 있을 수 없는행위를 통일교회 창설의 전후 나는 가장 잘알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도대체 신변에 많은 여성을 두어 시중들게 하며 복귀원리를 명목으로 유부녀이건 학생이건 닥치는 대로 섹스를 해서 임신시킨 처녀를 일본으로 밀항 시켜서 아기를 낳게한 사실등 인간으로서 용서 받을 일이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문선명의 수제자였고 결과적으로 그녀들이 행복 해 주었으면 하고 원리의 가르침을 믿고 지켜 볼수 밖에 없었다. 문선명의 악행을 지나치게 알고난후 나는 1962년 그의 비열한 배신으로 인연을 끊고 탈회 하였다.

그리고 거의 20년후 이제서야 대간부가 된 당시의 동료나 부하의 요청에 따라 본부교회에 발길을 다시 옮겨 놓게 되었다. 교회측의 기대는 나를 귀중한 옛날의 산 증인으로서 이용 하는 것. 다만 일정한 범위안에서만 신자들 앞에서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옥중에서 남하할때의 문선명의 고생한 이야기등)

나에게도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통일교회의 그 이후와 고락을 함께했던 많은 신자들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것이 글속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비극 투성이었다.

원리를 믿고 문선명에게 따르면 행복하게 된다던 여자식구들은 내일 먹을 양식도 궁핍하고 어려워서 산 시체와 같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문선명이 때문에 가련한 고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원고에 착수한 동기는 거기에 있으며 그녀들 또한 하루라도 빨리 출판을 재촉하였고, 내가 아는 바로는 젊었을 시절의 그녀들은 모두 풍부한 재산가로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문선명이 달러 붙은 것이지만 정조를 빼앗기고, 재산을 잃고, 가족과 흩어지고, 아이들과도 소원해진 현재의 그녀들은 홀로 쓸쓸한 노후를 보내는 길 밖에없다.

그 원인과 과정 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사실을 공포할 의무와 책임을 통감하게 되었다. 유서 대신에 생명을 걸고 써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새삼 생명도 아깝지는 않지만 출판을 실현하기 전에 죽음을 당해서는 목적 수행이 어렵다. 그러한 이유로 원고를 조금씩 써 놓아 가면서 나는 때가 올 것을 기다리며 바라고 있었다.

때는 흐르고 착실한 크리스관의 장로로서 인망있는 김영삼 대통령이탄생했다. 김대통령의 용단으로 지금 한국은 눈부신 속도로 정계는 물론 각계각층의 정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도 때에 오랜 세월의 염원이 이루어져서 나는 정말로 기뻐하고 있다.

출판에 있어서는 6000매에 이르는 원고 정리 분류, 번역, 집필, 편집과 대단한 작업이 계속 되였는데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돌린다.

나는 이책의 인세를 문선명에게 희생이 되어 노후로 고생하는사람들의 구제에 힘이 되어 진다면 기부할 작정이다.

끝으로 진정한 행복은 멀어지고 원한을 풀지 못하고 돌아가신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희생자」들의 영령에게 깊은 기도를올리고 싶습니다.

1993.10      박정화

 

 

 

차  례

머리말   6

제1장 옥증에서 만난 사나이   15

재림 메시아로 믿고 17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 17

죄수번호 596 문용명(文龍明) 22

총반장으로 임명되고 24

해와는 왜 하반신을 강추었나 26

예수와 6인의 여인들 30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판(血代交換)을 34

평양을 소란케 한 이단자 39

최초의 체포 구속 39

유부녀와의 결흔소동으로 징역5년 41

한국전쟁과 대공습 42

김일성 은사 44

제2장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45

평양에서 서울로 47

불량배에게 다리를 절골 당했다 47

문용명(文龍明)과의 재회 48
가족을 이북에 버리고 문선생을 따랐다 49
죽을때까지 함께하자던 사나이의 약속 50
악전고투의 피난길 52
겨우 서울에 도착하다 54

서울에서 부산으로 56
제2의 피난행 56
경주에서의 작별 58
생활에 쫓긴 문선생이 찾아옴 60
평양에서 온 옥상현과의 재회 62


제3장 통일교회의 창립전후  67

여자신도 들의 열의  69
부산 수정동교회 69
최선길(문교주의 본처) 부인의 큰난동 70
경찰서에서 전기고문 74
하늘의 뜻에 관한 시험 75
노한 이순철의 남편 76

부산 영도(影島)의 집회 80
여자대학생 김영희의 비극 80
수사기관에 쫓기는 나날 83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 창립 85
유효원이 원리해설을 집필 85     

통일교회 창립의 날 89
이화여자대학사건 무렵 91
교수와 학생들의 대거 입교 91
김덕진(金德振)이라는 사나이 92
대구에서 또 전기고문 93
푸로마이드의 제작판매 95
3대째의 비서역 송도욱 98
잠시 숨을 돌리며 99
간부 체포 사건의 진상 100
문선명의 체포 犯0
조사의 촛점은 혼음관계 軸3
간부 5인을 기소 If15
수사의 손길에서 도피 107


제4장 희생당한 여인들   109

대공로자 옥상현의 말로 111

머리카락으로 짠 양말 112
주인 우하섭 장로의 탄식 113
문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재산도 1또
퇴원해도 갈곳이 없다 117

박봉식과 오명춘 121

부부가 문선명에게 헌신 121
남편 송도욱의 불륜 122

탁월한 인격자 박봉식 123
큰돈을 바친 오명춘 124
식모살이라도 해서 살아야지 126

김종화(金鐘和)의 눈물과 분노 128

문용명(文龍明)을 죽이고 싶다 128

6마리아의 비극 130

유부녀 여섯을 빼았다 130
신정순, 이순철, 오명춘, 김안실, 유신희, 임영신 131
6마리아 아니라 60마리아 137


연인을 빼앗기고 살해되고 140

김원덕(金元德)이란 사나이 140
신비적인 낭만 141
아름다운 부인과 진수성찬 143
이상한 예지능력 144
제자의 연인을 빼앗은 문선명(文鮮明) 146

제5장 재림메시아의 정체    149

원리와 실천의 모순 151
나의 수기는 진실의 기록 151
아무것도 모르는 신자들 152
문선명이 무슨 메시아 154
정득은(T得恩)과의 이상한 관계 157
체포도 당연한 섹스포교 159

색과 욕과 돈과 162
남편의 돈을 훔쳐 오라 162
왜 죄없는 아이들이 죽는가 164
복귀(泌購)라고 하는 미명으로 섹스 165
않은 가정이 파괴 되다 167
여자의 원한은 여름에도 서리를 169
처녀에게 낳게한 아이들 170

배신한자는 누구냐 173
문선명의 소개장 173
악착같은 노동력착취 174
문의 아들 흥진과 효진 176
삭제된 창시자의 이름 178
사건이 생겼다 바로 피하라 180
배신자는 문선명이다 182

제6장 진짜 사탄은 문선명이다     185

산증인의 이용가치 187
재혼서 신천지로 187
병으로 쓰러지다 189
오래간만에 만난 간부 189
통일교회 창림의 산증인 191
문선명의 거린말과 일본의 신자 193
원리는 김백문(金百文)의것 도용 195
이복형제 결혼 의혹 197
원리대로 실천한 김덕진(金德振) 198

36가정의 역할     200

속출한 재림메시아들의 대책 200
희생된 공로자 204
문선명보다 뛰어난 인격자-유효원 204
재정을 이룩한 실업가-유효민 206
화제의 다보탑을 수출한 일신석재사장-유효영
문선명의 부정과 범죄 209
김영희의 비참 211
또 한사람의 어머니 214
나의 부끄러운 체험 215
붉은용(龍)이 세상을 미혹 216


제7장 우리들이 체험한 사실    219

유효민-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221
유신희-6마리아의 한사람 이었다 227
김덕진-섹스릴레이 실천자 232

참고사항  *는 가명표시 입니다.
 

 

제 1장 옥중에서 만난 사나이         17


 

재림 메시아로 믿고


나는 북한의 내무성에 소속된 제 2여단 제 1대대 제 3중대장으로서 1947년 5월부터 황해도 해주에서 철도보안대의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해 12월 1일 같은 여단의 제 2대대장으로 승진발령을 받아 황해도 사리원의 큰 기지로 옮겼다.

일본의 조선통치시대에 만주 신경(현재 중국)의 공업전문학교 토목과를 졸업한 나는 만주국 관사(길림성)를 거쳐 일본군의 공병대 중위로서 중대장으로 근무한 경험도 있고 북한에서는 말하자면 엘리트로서 장래가 촉망되어 있었다.

그런데 착임해서 얼마 않되는 5월 7일 엉뚱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제 2대대의 제 3중대장으로서 황해도 신막에 근무하고 있던 허정이란 사람이 엉뚱하게도 군의 차량으로 상인들의 물자를 수송해 주고 돈을 받기도 하고 여성들의 모발등 북의 상품을 남쪽 한국측에 파는 암매상에 협력하고 있던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체포된 허정은 2월 2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또 대대장인 나는 부하의 부정 행위에 대한 감독 불충분이란 것으로 책임을 물어 직무태만죄로 징역 3년형에 선고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평양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흥남 특별 노무자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2월 2일 35세 때의 일이다.


흥남 특별 노무자 수용소


이송된 우리들 약 100명의 죄수들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2인1조로 팔목을 툴여서 흡사 소나 돼지처럼 화물열차에 쓸어 넣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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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4시간 멈쳤다가는 달리고 달렸다가는 멈추는 화물차속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한잠도 못잔 채 날이 밝을 무렵인 새벽 4시경에 학교운동장 같은 광장에 도착하였다. 끄집어 내려서 주변을 보니까 무장한 간수나 경찰관들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어서 개미새끼도 빠저나가지 못할 정도로 엄중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이 흥남의 특별노무자수용소, 속칭 흥남감옥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였다.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는 강제노동의 지옥인 것이다. 우리들은 먼저 들어와 있던 죄수들과 함께 좁은 방에 32명씩 동거하도록 인원수가 할당되어 집어 넣어졌다. 7시가 되니까 조반이 나왔다.

콩, 좁쌀, 보리쌀, 옥수수 등을 뭉친 조그만 주먹밥인데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것 처럼 엉성했다. 이가 엉망으로 빠진 그릇에 국이 담겨져 나왔는데 두 서너 조각의 미역이 둥둥 뜬 소금기가 좀 있는 그런 국이었다. 어제부터 한방울의 물도 입에 대지 못한 채로 흔들림 속에 담겨온 몸 동아리는 지치고 지쳐서 속은 공복인데도 식욕이 나지 않는다.


장차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며 멍청하니 있자니까 옆의 사내가 기운이없구먼 못먹겠으면 내나 먹지 하며 내 밥에 손을 대더니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린다. 깜짝 쉴 사이도 없을  만큼 감옥의 엄격함을 실감케 하는 기분이 들었다.


8시 "전원노동이다"하는 간수의 큰소리에 떠밀려서 운동장으로 나오니까 1,500명 정도의 죄수들이 집합되어서 정문을 향해서 정령하고 정좌하게 하였다. 소좌의 계급장을 단 소장이 이송되어 온 신입 죄수들에게 소대의 규칙등 수용소의 작업에 대한 설명과 주의사항을 들려주고는 전원 출발이 라는 것이다.


죄수들은 두사람씩 손을 묶고 4열로 나란히 정면에서 부터 나가기 시작하였다. 정면 좌우에는 간수가 줄지어 늘어싫고 완장을 단 "총반장"이 죄수들을 점검 인수하였다. 두사람씩 손을 묶게 하는 것은 역시 도망방지 때문인 것이다.

수용소에서 조선 질소 비료 주식회사(구 일본질소) 흥남 공장까지는 약 4킬로의 거리가 된다. 이날부터 비가 오나 눈이 쌓이거나 우리들은 매일 걸어서 감옥과 공장을 왕복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횐 암모니아비료 가루가 산처럼 괌인 곳에서 10인 1조가 되어 비료포대의 가마니에 하루, 1,300포대를퍼 넣어야 하는 책임량(노루마)을 할당받았다. 산더미 같은 비료앞에 저울이 놓여 있고 공장측의 검량원이 중량을 달기 위해서 앉아 있다.


작업의 순서는 이러하였다. 우선 한사람이 빈 가마니를 잡고 아구리를 벌리면 두사람이 삽으로 비료를 두번 정도 퍼 넣는다. 그래서 40킬로가 되면은 다른 한사람이 가마니를 저울대에서 내려놓고 남은 6인이 그것을 운반해다가 새끼로 음어서 포장을 한다. 10인 1조의 작업이므로 한 사람이라도 태만하거나 서투르거나 하면 조 전체의 책임량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원이 반장한테 된통 혼나게 되므로 10인은 서로서로 격려하기도 하고 감시 하기도 하는 것이다. 눈깜벅거릴 틈도 없을 정도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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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은 아침 8시에 시작되고 낮참 쉬는게 30분 저녘 5시에 끝나는데 매일 8시간반의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극심한 노동을 한일도없었고, 6개월간이나 평양에서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서 이 중노동을 참아 낸다고 하는 것은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감옥생활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여러가지 끔찍한 가혹행위를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버티어 내기 때문에 하루의 일을 마치면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별하기 조차 어려운 상태로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 의지로 똑똑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 저녁때가 되면 하루의 작업량을 검사하고 인수를 점검한 후에 아침이 왔을 때와 똑같이 두사람씩 손을 매고 4열로 늘어서서 4키로나 되는 수용소길을 걸어서 돌아온다.


그때는 제발로 걸은 것인지 어떤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문에서 재차 인수점검을 한후에 운동장에 정열해서 정리하고 나면 또 주의사항이 설명된다. 그리고 면회를 허락받은 사람들이 면회실로 간 후에야 각자 제방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불과 4톨평정도의 좁은 방에 32명이나 쓸어 넣어 하루종일 작업을 해서 땀 투성이가 된 몸뚱이를 씻지도 못하고 고단하다고 두러 누울수도 없는 상태로 그대로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감옥생활이란 것을 통감하게 하였다.


저녁밥은 조반과 같이 여러가지 잡곡이 섞인 주먹밥 한 덩어리와 소금기가 있는 국물 한그릇뿐, 식욕이라곤 전혀 없지만 서도 내일의 작업을 생각하면 먹어 두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같은 방의 동배들도 지쳐 있음인지 모두 험악한 얼굴들이다. 죄명 또한 가지가지였다. 취침은 밤 10시이지만 좁은 방에서 머리와 다리를 서로 어긋매겨 잔다. 서로의 다리가 옆 사람의 머리나배위에 걸쳐지는 일도 있었지만 32인이 억지로 옆으로 누울 수가 있었다. 변기는 방의 구석에 놓여 있었는데 아침이 되면 일제히 서로 쓰려고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대소동이 벌어진다.


이리하여 중노동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무사히 출소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기로 및장을 정한 나이지만 어느새 손과 발에는 군살이 박혀있었다. 나는 비료포대를 새끼줄로 끓어내는 요령만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해서 큰 곤욕을 치렀다. 다른 사람들이 두포대를 묶을 동안에 나는 한포대도 제대로 못 묶는 때도 있었다. 동료들의 싸늘한 눈길을 느끼며 책임량을 다하지 못해서 폐를 끼친 때가 제일 괴로웠다.


그리고 더욱 더 참을수 없는 것은 배가 고파 죽을지경인 것이다 감방의 다락에는 면회가 있었던 사람들이 차입받은 미수가루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훔쳐 먹으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한들 여기까지 와서 도둑질을 해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으로 자제하였다.

배가 고파서 잠을 이를 수가 없을 때 미수가루 봉지를 쳐다 본체로 밤을 새운 일도 여러번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일어나니까 어제 밤에 미수가루를 도적맞았다고 모두들 떠들석 하였다. 훔친자가 눈에 띄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자루 돌림으로 패댔다. 이러한 꼴은 징역생활이라고 하기 보다 아귀지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30인이 넘게 쳐 박혀진 방안에서는 몇일에 한번씩 그야말로 큰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것은 쳐 박혀진 인간최후의 순간이 것이다. 배만 앙상하게 남아서 숨도 제대로 못쉬는 상태로 쇠약한 사람이 한 주먹의 밥을 소중하게 움켜 편채로 속에 들어 있는 콩알을 집어서 넣으려는 순간 죽는 사람도 있었다. 옛말에 자식이 죽은 때나 부모가 돌아가신 때보다도 더 서럽고 매정한 것은 배가 고픈 때다 라는 말이 있다. 먹는다고 하는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나는 몸소 절실히 체험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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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되박의 미수가루는 양복한벌과 맞바꿀 정도로 귀중품이었다. 매월 집에서 면회를 와서 차입을 받는 사람은 그런대로 견디어 나가는데 면회나 차입이 전혀 없는 사람의 경우는 언제라도 죽음과 직면해 있는 상황이었다.


죄수번호 596. 문용명(文龍明)


나의 작업은 여전히 서틀러서 차마 볼수없던지 조장이 가마니의 아구리를 벌리는 일이나 삽으로 비료를 가마니에 퍼 놓는 일로 돌려 주었으나 어느 것이고 제대로 익숙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40키로의 비료가 든 가마니의 짐 꾸리기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내 옆에 10인의 조원 가운데서도 훨씬 건장해 보이는 30세가량의 사나이가 와서 "가르쳐 들이지요"하고 말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자기의 일거리를 가볍게 해치우면서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더욱 일에 익숙해져서 훌릉하게 해 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건강해서 힘은 있었으므로 몇일 동안 계속해서 가르쳐 주는 바람에 그럭저럭 한사람 몫의 작업 책임량을 해낼 수가있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나보다 반년정도 먼저 흥남감옥으로 후송되어 온 듯해서 소내의 사정이나 물물교환으로 살아가는 지혜등 여러가지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지옥에서 부처님 만나기란 바로 이런 것인가. 나는 괴롭고 쓰라린감옥의 중노동속에서 비로서 따뜻한 사람의 마음씨에 접하게 되었고 절망속에서 어렴풋이 희망이 보이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는 방이 달랐으므로 작업이 끝나고 만원이 된 방으로 돌아오면 공복의 쓰
라림과 잠을 푹 자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그래도 아침이 되어 비료공장의 일터로 나가면 그 사람과 같이 일을 할 수있다. 지옥과 같은 곳에서나마 서로간에 마음을 주고 받을 수가있게 되었으므로 한 시간이라도 빨리 일터로 나가는 것이 기다려지곤 했다.


아침 8시 운동장으로 나가면 나는 서둘러서 그 사람을 찾아서 그뒤에 앉는다. 점검이 끝나면 그사람과 2인 1조가 되어 비료공장까지 손을 묶고 걸을수가 있다. 지금까지는 비오는 날 같은 때는 그야말로 죄수생활의 비참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도보행진이었는데 어느새 나에게는 그 사람과 매일 아침 만나서 함께 일을 하는 것이 옥중에서 그나마 즐거운 일과였다.


이렇게 20일 정도 지난 어느날 초반 회색 옷에 갓을 쓴 백발노인이꿈속에 나타나 나의 이름을 부르며, "네가 매일 함께 도와주고 거둬주는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그 분은 무척 친절하고 좋은 분이므로 함께 지내고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노인은 "그분은 네가 어릴때부터 배워 온 성경에 장차 이세상에 오신다고 가르쳐 온 재림주(메시아)이시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깊은 잠에 떨어진 동료들이 있을 뿐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하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지워져서 돌아가신 후 삼일 후에 부활되어 40일간 이곳 저곳에서 재림하였다. 그리고 감람산(성경에 나오는 산)에서 여러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실 때 예수님은 "너희들은 어찌하여 하늘을 처다 보는가, 나는 이처럼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이 머지 않아또 재림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재림주라고 하는 꿈이 마음에 걸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도록 생각하고 있었으나 복잡한 심경으로 조반을 마쳤다. 나는 어느 때와 같이 운동장으로 나아가 그사람 뒤에 앉았다. 그리고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해서 무슨 일인가를 물어 보고자 하였다.
그런데 내가 말을 걸기 전에 그가 별안간 돌아보면서

"간밤에 꿈을 꾸었지요 꿈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말 하던가요"라고 묻는 것이다.

어떻게 그가 알고 있는 것민지 이상 하였지만 나는"재림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29세로 나이로는 7년이나 손아래 이었지만 반드시 "선생"이라고 존경해서 부르게 되었으며 그 사람도 "정화"라고 나의 이름을 불러서 점점 친근감을 느끼면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 사람이 죄수번호 596을 단 문용명 이었다.


총반장으로 임명되고

 

그로부터 15일정도 지난 어느날 아침 집회에서 "919번 소장실로 오도록"호출되었다.

919번은 나의 죄수번호이다. 무슨 일일까?나는 겁에 질린 채 가보니까 소장은 나를 쳐다보고 "어제 총반장이 만기로 출옥하였으므로 지금부터는 네가 전죄수의 총반장으로 복무하라."


이곳에는 1,500명의 죄수가 수용되어 있다. 10인에 1인, 조장 18을 파악하는 것이 반장, 총반장은 I5인의 반장을 소관하고 매일의 작업배치나 분담을 자치적으로 결정하는 등 전죄수의 대표로서 크나 큰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아니된다.


소장은 죄수전원의 경력 이나 기내기록을 본 후에 전문학교 출신으로서 군의 대대장을 한일이 있는 나를 골라 "후임은 너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역을 맡을것인가 말것인가를 망서렀으나 문선생의 권고도 있고 해서 맡기로 하였다.


총반장이 되니까 여러가지 것을 알게 되었다. 죄수들이 가장 바라는 작업은 취사이고, 다음은 수용소내의 잡역, 선반공장 선반공으로 이어지고 끝으로 비료공장 순이다. 선반공도 중노동이지만, 일하면서 철가공의 기술을 취득할 수 있다고 하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비료공
.장에서의 가마니 작업은 오직 힘이들 뿐이고 아무것도 이점이 없는 최저 최악의 중노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일 3식이란 작으나마 주먹밥 한덩어리와 소금국 한그릇만으로는 몸둥이가 견델 수가 없는 것이다. 조악한 식사때문에 영양실조자가 속출하고 과로와 허기로 한달이면 100명 정도가 죽어갔다.

단순하게 계산한다면 1년 남짓해서 전감한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흥남수용소에는 그 보충을 위해서 매월 100명 정도의 죄수가 각지의 형무소에서 후송되어 오고 있었다. 총반장이 되고 나면 사내에서는 자유가 꽤 통하므로 기회를 엿보아서는 문선생을 찾아가 잡담을 하기도 하고 되도록이면 편안한 작업으로 회부될 수 있도록 손을 쓰기도하였다. 어쨋거나 꿈속의 노인에게서 계시를 받아 내가 꿈에 본것을 먼저 알고 있던 이상스런 힘에 놀란 나에게는 문선생은 바로 재림주라고, 나는 믿게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반장인 주흥식이 묘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담당의 죄수가 병이 들었는데 내일이 어떨지 알수없을 정도의 중태인데 주반장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 죄수는 일본의 식민지시대에 큰 화물선의 선장으로서 전세계를 누비고 다딘는데, 전쟁이 끝 나고서는 고향인 여수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에 있는 친척을 방문했을때 공교롭게도 죄를 범해서 체포 투옥되게 되 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가 죽기 직전에 비단보에 그려진 지도와 무엇인가 영문으로 쓴 종이 쪽지를 주반장에게 건네 주었다. 얼마 안있어 그는 죽고 말았는데 영문을 읽을줄 모르는 주반장은 그후 영문을 아는 반공사상의 죄수중 김진수목사에게 번역을 해달래서 그것을 받았다. 그 종이쪽지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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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뒤편에 있는 묘지 가운데 이런이들의 무덤이 있다. 그 앞에서 세번째 어린이 무덤속에 시가 수억원의 보석이 들어있는 상자를 자기가 묻었다. 이제 나의 명은 다한것 같으니까 주반장에게 들이는 것이니 남쪽에 갈 기회가 있거든 꼭 찾아내시오"


주반장은 이와같은 이야기를 하고 나서 "총반장은 나보다 먼저 출소할 것이니까꼭 남쪽의 여수에 가서 그것을 찾아내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나에게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였으므로 나는 그대로 문선생에게 전했다.


나는 그후 남한에 살게 되었으나 여수는 가본일도 없고 또 이야기는 깨끗이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2년후의 부산시대, 문선생은 친구와 둘이서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여수로 가서 필연적으로 찾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묘지장소는 알아 냈으나 가장 중요한 아이의 묘는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문선생은 여수에 갔던 일조차 나에겐 말하지 않았다.


훨씬 뒤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을때 나는 진짜 재림주라면 보석상자 정도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선생의 정체에 대해서 새로운 의혹을 갖게하는 자료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재림메시아, 문선명의 정체·.·"그것만이 이 책의 주체이며, 나의 고백의 주안인 것이지만 이무렵 무지한 나는 그저 오로지 문용명을 존경하고 믿고 있었다.


해와는 왜 하반신을 감추었나


총반장의 완장을 단 나는 작업장으로 가는 죄수의 점검과 죄수들의 작업 배치를 정한 후에는 대수로운 일거리도 없이 자유롭게 지낼수가 있었다. 그래서 빈 가마니를 쌓아 놓은 창구로 문선생을 불러내서 그에게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문선생의 이야기는 유아세례를 받아서 젊었을때에는 교회 집사로도 일했고, 조금은 성경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 할수 있는 나에게도 이해는 커념 대단히 반발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예를들면 세례요한은 들녘 에서 가죽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어가면서 수도를 했고 "천국이 가까와오니까 회개하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자기의 책임 분담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을 잘리어 죽음을 당한것이다 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기독교에서는 세례요한은 아주 훌릉한 인물로 가르치고 있는 만큼 나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더욱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책임을 다 할수가 없었다. "


"예수님은 본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처지는 아니었다"등 등으로 말한다.


내가 더욱 더 충격 받을 이야기를 들은것은 잊어 지지도 않는 1950년 3월 29일 토요일의 일이 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와서 여느때처럼 두사람씩 손을 묶은 죄수들 1,500명을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 오직 땅만 보고 비료공장으로 서둘렀다. 도착한 후에 총반장인 나는 아마 10분정도 전원의·점검과 작업배치를 정했다.

그무렵 문선생에게는 빈 가마니에 짚을 넣어두는 일로 병자나 노인들이 할 수있는 손쉬운 작업을 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서 "총반장으로서 볼일이 있으니 잠간만 오세요"라고 불러내서 조용한 창고 속의 빈 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인 그 위에 올라가서 둘이서 마주보고 앉았다.

총반장에게는 작업장에서도 이러한 자유가 인정되어 있어서 간수나 죄수도 이의를 하는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몇 시간이라도 이야기 할수가 있었다.


사회질서 문란죄로 5년의 형을 받고 복역중인 문용명은 죄수번흐596, 부하 잘못으로 인한 책임을 물어 직무태만죄로 징역 3년인 나는 죄수번호 919, 두사람의 죄수는 서로 마주보고 596은 이야기를 하고 919는 열심히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해가며 중요한 대목은 메모를 하기도 했다.

28

이날의 이야기는 성경의 "창세기"부분이었다.

창세기의 요지는 6000년전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사람으로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며 에덴의 동산에 살게 하였다. 그리고 걸맞는 반려를 만들기 위해서 아담이 자고 있을 때 아담의 갈빗대 한개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해와'이다.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만은 따 먹어서는 안된다고 명하였으나 뱀이 해와를 꼬였기 때문에 해와는 드디어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고 남편인아담에게도 권해서 먹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금단의 나무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발견된 때에는 부끄러운듯 무화과의 잎으로 하체를 가리우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해와를 만든 목적은 해와가 성숙하면 이세상에 죄없는 자손을 번식 시키려고 그랬던 것인데, 하나님을 배반한 두 사람은 얼마 안돼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죄를 범하고 더럽혀진 아담은 땀 흘러 일하지 않으면 살아 갈수 없게 되었고, 해와는 해산하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가인과 아벨의 형제가 태어났는데 얼마 안가서 형인 가인은 동생인 아벨을 죽이게 되어 이 세상에 처음으로 죄인이 된 것이다.

이상이 성경에 씌어져 있는 것이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온 해석인 것이다.

그런데 문선생은 "성경의 이러한 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세계의 크리스챤들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문선생의 해석은 이러하다. 해와를 꾀인 뱀이란 천사장 루시엘의 이름인데 루시엘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감언으로 미 성숙한 해와를 유혹해서 금단의 나무 열매를 따먹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루시엘은 해와와 섹스를 한것이다.

그리고 처녀성을 범행당한 해와는 하나님께 발각되기 전에 사탄의 피로 더럽혀진 몸 그대로 남편인 아담과도'성교를 했다.

지금까지는 금지 되었던 실과를 따 먹은것이 죄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들켰을 때 왜 해와는 무화과의 잎으로 하반신을 가리운 것일까?

사람은 몸에 상처가 나면 상처에 반창고 같은 것을 붙여서 아물게 하는데 그것과 같은 논리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이 금지시킨 성행위을 하고 깨끗했을 하반신에 상처가 생겨 그래서 무화과의 잎으로 그 부분을 가리운 것이다 해와는 그패 까지 나체로 있어도 부끄러움을 모르지 않았던가.

그것은 말하자면 하반신의 성기부분으로 성행위를 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부분에 죄가 있으니까 하반신을 가리운 것이다.


지금도 남자가 여자와 성행위를 하고자 노력하며 만족한 성행위가 되면 "어디어디의 처녀(부인)를 따 먹었다"고 표현 하는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랑 신부가 결흔식을 올리고 정정당당하게 첫날밤을 지내도 다음날 가족들 앞에 모양을 나타낼때 어던지 모르게 마음속에 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6천년 전에 천사장 루시엘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처녀인 해와와 성행위를 할 때에 "색큼"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미숙한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성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미숙한 과실을 따 먹으면 색큼한 맛이 나는 것도 미숙한 해와와 천사장 루시엘이 성행위를 함으로서 "색큼"함을 느낀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죄없는 인간을 세상에 번식시키려고 하였는데 천사장 루시엘 때문에 그 목적을 방해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가인이 그의 동생인 아벨을 죽임으로서 이 세상에 죄인의 번식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절대로 방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죄악이 가득해 있던 소돔과 고모라에는 불로 심판하고 노아때에는 홍수로 심판하였다. 그래도 죄 악으로 가득한 인간을 구제할 수는 없었으므로 유대 땅에 2천년전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예수를 탄생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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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탄생케 한 목적은 그 4천년전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간세계를 창조 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제2의 아담으로서 탄생시켜, 제1의 아담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했던 목적을 실현 시키고자 한 때문이다.


예수와 6인의 여인들


그리고 예수는 3십년간 요셉의 집에서 목수일을 하면서 켰고, 30세가 되어서 예수는 구세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예수는 12 제자를 골라 제2의 아담으로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케 하기 위해서 우선,

첫째로 자기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성행위를 해서 제1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겼던것을 되찾아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달성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와같은 하늘의 섭리를 알지 못해서 육신의 자식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아서 예수와성교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예수가 행한 기적은 가나안 잔치집에 가서 결혼 축하를 하기 위해서 어머니인 마리아와 함께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것이다.


그 집의 술이 없어졌으므로 어머니 마리아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예수와 의논하였다. 말하자면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수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에게 부탁한것이다.

그때 예수는 마리아에게 "여인이여, 당신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요"라고 말했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성행위 할 생각은 전혀 없이 이웃집의 잔치집에서 포도주를 만들것만을 원하였으므로 정말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으로 말 한것이다.

성모마리아가 예수와 성교를 한다고 하는 것은 제1의 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되돌려 빼앗아 온다고 하는 복귀의 원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마리아가 모자협조(모자간의 성교)를 하지 않았으므로 예수가 순혈을 이어 받을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후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 자매를 대단히 사랑하였고, 그녀들도 예수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막달라 마라아와 결혼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인가롯 유다의 연인으로서 곧 결혼할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인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 하였으므로 유다는 질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의 매제인 마르다 마리아와 유다를 결혼시키고, 자기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다는 예수에게 반역해서 예수를 로마의 병정에게 은화30냥에 몰래 팔아 넘기게 되었는데 실은 돈이 욕심이 나서 판것이 아니라 자기의 여인을 예수에게 빼앗긴것을 질투해서 판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데리고 각지를 돌고 있을때 일행은 수가촌이라는동네에 이르러 제자들과 먹을것을 찾고 있었다. 그사이 예수는 고단해서 우물가에 앉아서 쉬고 있을때 사마리아의 여인이 물을 뜨려고 왔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당신의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라고 말했다.


여인이 대답이 없음으로 예수는 "당신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어서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물을 한잔 청하고 채차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물을 내가 마시면 또 목이 마른다.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물은 당신속에서 생수와 같이 영원히 흐르게 된다. "(주=성경과는 역순이지 만 문선명의 이야기대로)

예수는 이 사마리아의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예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기때문에 실현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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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느때 세리와 바리새인의 사람들(성경에는 세리와 바리새인의사람이 제일 악인으로 되어 있는듯 하다) 이 간통한 여인을 예수앞에 데려왔다. 예수가 "이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말하면 모세의 계율에 간통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으므로 모세의 계율에 상반되는 것이되고, 또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면 예수가 언제고 "죄 있는 자가 있거든 일곱번씩 칠십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쳤던 말이 거짓이 된다.

참으로 거북살스런 문제로서 대답하기가 난감한 것이었는데 이때 예수는 아무 말도하지 않고 땅에 글자를 썼다. 사람들이 다가가서 보니까 거기에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죄없는 자가 있거든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쓰여 있었다.

모여있던 많은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 죄를 지고 있었으므로 하나 둘 다 사라지고 예수와 여인만이 남았다.

거기서 예수는 여인에게 말했다.

"나도 당신을 용서하는 것이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도록 하라" 이때에도 또 예수는 복귀섭리에 따라 이 여인과 성교를 해야만 했었는데도 실현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음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나병환자가 있는 시몬의 집에 갔을 때의 일, 모두들 식사를 하고 있을때 한 여인이 귀중한 향유가 든 항아리를 가지고 와서 감동의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었다. 여자는 머리털로 발의 눈물을 밖고나서 예수의 발위에 기름을 부었다.

 제자들은 "어째서 귀중한 기름을 그렇게 함부로 쓰는가 그것을 많은 돈을 받고 판다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쓸수 있을 테낀데"라고 그여인을 비난하였다.

예수는 "그 여인을 책망하는 것은 그만해라 그 여인은 나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해 주었으니까"라고 말했다.

예수는 이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때에도 또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으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질머지고 십자가에서 죽어 갔으므로서 그 피의 댓가로 죄인이 깨끗하게 되어 구원한다고 하는것처럼 모두 믿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창조의 이상을 옳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제2의 아담으로서 이세상에 예수를 탄생시킨 것은 제 1의 아담이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도로 찾아서 본래대로 돌려 놓기 위한 것이고 요컨대 복귀섭리를 실현하는 사명을 달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가 복귀섭리를 위해서 이세상에 탄생 한것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예수가 성모마리아와 최초의 성교를 한다고 하는 죄없는 피를 전하게 되기 위한 중요한 의식의 챤스를 예수에게 주지 않았다.

첫째로 필요한 "모자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서 예수는 이상에 태어났어도 복귀섭리를 다하지 못하였고 결흔조차 하지 못한 동안에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


예수는 재림을 약속한 최후의 기도때에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한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십시요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으나 이것은 죽는것을 두려워 해서가 아니라 제2의 아담으로서 이 세상에 와 빼앗긴 해와를 되돌려 받지 못한 채로 어머니들에게 복귀섭리의 실천(성교)도 못한채로 죽는것이 허전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즉음으로서 그 피의 대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 되였다고 하는 해석이 을다고 한다면 그러한 기도를 했을리가 없다.


예수는 육적으로는 실패하였으나, 영적으로는 승리해서 재림이라고 하는 숙제를 남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 재림주(메시아)는 어디로 와서 어떻게해서 인간을 구제하는 것인가? 구름을 타고 감람산을 통해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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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지 않다 동방에 있는 나라, 횐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고, 4계절이 분명한 나라, 동쪽에서 해가 뜨는 나라, 그것은 우리들의 대한민국이고, 이 나라에 재림하기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재림주는 제3의 아담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예수가 하지 못했던 복귀섭리를 이세상에서 실천해서 인간의 6천년간 죄악의 역사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고 사탄의 피로 더렵혀진 인간의 피를 성스러운 하나님의 피와 교환 함으로서 이 세상을 영원히 죄와는 관계가 없는 세
계로 하는것이 하나님의 참된 뜻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주의 사명으로서 잃어버린 해와의 순결을 되찾아 만인 앞에서 처녀와 "어린양찬치"를 행하고 참된부모 아담과 해와에 의해서 전세계의 인간의 피가 더럽히지 않은 피와 교환되게 되는 것이다.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환(血代交換)을

 

부모님이 같은 기독교 신자이신 집안에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교회 집사 까지한 경험이 있는 나는 문선생의 성경해석에는 귀를 의심하고 머리를 갸우뚱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반면 꿈속에서 "문선생이야 말로 재림의 메시아다"라고 하는 계시를 받은 나는 반신 반의 하면서도 차츰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선생님은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이며,어떻게 해서 이상의 천국을 완성시켜 나아가실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것은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달성하지 못했던 여인들과의 복귀다.

우선 천사장 루시엘의 성교로 인해서 빼앗겼던 것을 그것과 같은 방법으로 남편이 있는 부인 6인 즉 6인의 마리아를 빼앗음으로서 되돌려 놓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것은 복귀섭리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하지 않으면 안될 숙제이고, 목숨을 걸고라도 해내지 않으면 안될 중대한사명인 것이다.


나는 놀랍고도 반발을 느끼면서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남편이 있는 유부녀와 더구나 여섯 사람씩이나 유부녀와 성교를 한다고 하는것은 그 남편에게 죽임을 당할 염려가 많고, 설혹 남편들이 모른다고 하더라도 간통은 하나님이 가르침이신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이나라의 법률에서도 유부녀와 성교하면 간통죄가 됩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수 있습니까?

아니야 걱정할것 없네 머지않아 세상은 극도로 성이 문란해지네 길바닥에 남녀가 천연덕스럽게 성교를 하게 되고 통행인은 그것을 보더라도 지금의 악수하는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을것이며, 이상스럽게 느낄것도 없게 된다.

또 그무렵이 되면 인간의 심리상태도 달라져서 자기의 처나 연인이 다른 남자와 성교를 하더라도 노한다던지 질투를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복귀원리를 들은 여인들은 복귀를 받고 싶어서(성교를 하고 싶어서)자기들이 자원해서 오게 된다. 그 시기가 오면 재림 메시아는 6인의 유부녀를 마리아로서 남편에게서 빼앗아 더렵혀진 사탄의 피를 정화하기 위해 피를 교환하는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을 "혈대교환(血代交換)" (주=말하자면 "피 나눔"이라고 하는것.후술)이라고 하는 것인데 복귀의 의식인 성교에는 지금의 사단의 세상과는 달라서 일정한 규정이 있다.

재림메시아가 유부녀의 더렵혀진 사단의 피를 정화하여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하기 위해서 복귀의 의식으로서 행하는 성교는 메시아가 위에서 3회씩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것은 소생, 장성, 완성의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6마리아와 도합 18회의 성교에 의해서 유부녀들은 마리아로서 환생하는 것이다.

6마리아를 복귀시키면 재림의 메시아는 다음에 성교경험이 없는 처녀를 골라서 해와로 정해 "어린양잔치의식"(정식 결혼)을 한다.

아담의 대리인 메시아와 해와는 참아버지, 참어머니이며, 그 두사람에게서 태어나는 자손은 영원히 죄가 없는 선한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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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세상을 6천년전에 하나님이 창조하려고 하였던 이상의 원점으로 돌려 놓을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 이 세상에는 천사장 루시엘에게 해독을 입은 사단의 피를 받은 인간이 50억인이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전부를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최초에 재림 메시아에게 복귀된 여인은 다른 남자의 식구(신자를 말한)와 여자가 2회 위에서 "소생, 장성, 완성"의 3회에 걸쳐 복귀를 해 줄수가 있다.


복귀를 받은 남자식구는 다른 여자 식구들과 여자가 위에서 2회, 아래에서 1회 성교를 해서 복귀시킨다. 또 그 여자식구가 다른 남자 식구에게 여자가 위에서 2회, 아래에서 1회 성교를 해서 복귀 시킨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넓혀가게 되는 것이다.

다만, 복귀를 받으면 그전에 7년간은 "성별"(성교를 하지 않는 기간)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복귀를 받을 자격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만큼 7개월간의 성별만으로 가능하며, 그 후에는 훨씬 짧아져서 7일간만의 성별로 남여 서로 복귀를 받을 자격을 주게 될것이다.

나는 거기서 이 세상에는 국적도 언어도 피부색도 이상도 다르다. 이만큼 다수의 사람들이 있고, 한국 뿐이라면 또 몰라도 어떻게 그렇게 될수가 있는것인가"고 물었다.

문선생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조건만 만들어 놓으면 국적, 민족, 언어 따위와는 관계없이 실행할 수 있다"고 답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들은 세계각국에서 동쪽에서 해가 뜨고, 횐옷을 입은 4계절 나라에 재림한 메시아 아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몰려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진정한 부모 밑에서 온 세계의 인간이 하나의 가족처럼 되어서 국적이나 언어 따위에 관계없이 전세계가 가깝게 된다. 한국인이 아프리카에 가고 싶을 때에는 아프리카의 어디라도 갈수있고, 어느집이고 찾아가서 그집에서 하루고 몇일이고 지낼수 있게 된다.

또 그집에 있는 모든물건을 자기의 물건처럼 사용 할 수도 있다. 양껏 먹고 즐겁게 마셔도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 있는 혹인이 한국에 오더라도 몇일씩이고 묵을수 있고 우리들의 물건을 무엇이던 자기의 물건처럼 쓸수가 있으며, 좋을대로 먹고 마시더라도 누구도 군소리를 할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의 사단의 세상에서는 모든 물자나 돈을 사단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용방법이 틀렸던것 이다.

참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식구들은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단의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이나 돈은 참 부모와 함께 있는 식구들이 가령 그것을 훔쳐서 썼다 하여 그것이 세속의 법률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된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 것이었던 물자나 돈을 사단이 탈취해서 썼던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적으로 대단한 고통도 없어지고 모든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어서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갈수있게 된다.

지금 우리들 죄수 1,500인이 하루 온종일 노동해서 겨우 될수있는 일거리도 그때가 되면 한사람이 3시간만 일하면 모두 될수있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 삼아 3시간 정도만 하면 되게 되는 것 이다.

그리고 알라스카와 같이 추운 지방의 식구들은 하고 싶으면 일년내내 따뜻한 하와이와 같은 경치좋은 곳에 와서 자유롭게 먹고, 마시고,서로 사랑 할 수가 있다. 만약 그것이 싫증이 나면 4계절이 뚜렷한 한국과 같은 나라에 와서 즐길수가 있다. 또 일본과 같이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 가서 자유롭게 구경하고 생활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기가 반듯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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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사람들이 '참 아담'과 '참 해와'라고 하는 두사람의 부모의 자식이 되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문선생은 '원화원이상 (圓和園理想)" 이라고 한다.


현재 형무소 안에서 고생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그것은 꿈속의 또 꿈과 같은 이야기라서 나는 그저 명청하게 듣고만 있었다. 옥중에서 나는 총반장이란 처지를 이용해서 시간을 벌어 가지고 문선생에게서 몇 주간에 걸쳐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생각한다면 그로서는 형편이 좋은 전도였고 포교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창조원리'나 '복귀원리'는 실은 그가 가르침을 받은 김백문이나 이용도의 이론의 복사판이었을 뿐아니라 몽땅 받아다 파는 식의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훨씬 후에야 알았다.

또 복귀라고 하는 명목의 성행위로 문선생이 얼마나 많은 여성을 불행하게 하였는가, 그자신이 얼마나 음난하고 방자한 성욕에 탐익 하였는가를 이 책속에서 밝혀두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반면에 사회악이라고 말 할수 있다. 복귀의 진실을 고발하는 나 자신, 실은 문선명의 명령에 따라 많은 여성과 복귀한 사실도 있다.

여하한 이제 한동안 무지했던 나와 문선명의 당시의 관계를 읽어 주십시요.

 

평양을 소란케 한 이단자

 

그날도 나는 죄수들과 함께 작업장으로 나가서 작업배치를 한 후에 문션생과 함께 조용한 창고로 가서 빈 가마니가 쌓여 있는 곳에서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긴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은 서울에서 평양까지 오게된 동기와 평양에 와서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 때문에 사회질서 문란죄라고 하는 죄명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되었는가를 들었다.

나의 꿈속에서는 분명하게 문선생은 재림 메시아라고 하는 계시를 받았다. 나의 해석으로는 재림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종말의 날에 심판을 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추수 할때에 잘 익은 곡식은 알뜰히 수확하고, 제때에 여물지 못한 것이나 쭉정이 같은것은 불에 태워 버리는것 처럼, 재림메시아의 심판에 따라 참된 신자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믿지않은 사람들은 지옥으로 떨어트려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메시아의 사명이라고 성서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문선생과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감옥에서 이와같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긴 시간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최초의 체포 구속

 

문선생은 서울의 영등포구 상도동에 살고 있을때 김 백문이 라고 하는 사람이 지도하고 있는 이스라엘 수도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김백문의 성경의 원리해석을 배워 나가던 중에 그 원리에 흠뻑 빠저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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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하나님으로 부터의 계시를 받아 북한으로 가도록 말이 있었다고 한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1946년 6월6일의 일이었다.

그 당시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고 전체가 거의 공산주의로 물들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문선생은 그러한 시기에 처자를 서울에 남겨둔채, 배낭 하나만을 짊어지고, 38선을 넘어서 평양으로 왔다.

평양으로 와서 맨 먼저 정득은(T得恩)이란 여인을 만났다. 의기 상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를 받은 평양성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것에 합의하고 서로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때 문선생은 26세 , 정득은은 40세정도였다.

두 사람은 평양시 상수구리의 검은다리에 있던 정득은의 집에서 원리를 전도해 나가기로 하였다. 며칠이 채 못가서 이집에는 열성적인 신자들이 10명이 넘게 모여들었다. 여기서 문씨는 처음으로 창조원리에 대해서 강의를 하였다.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알아 차리고 해와를 유혹해서 타락시킨 일, 예수의 모친이었던 마리아가 모자협조(성교)를 하지 않아서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죽게 되었다.
예수는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것은 아니었으나, 십자가위에서 육체는 죽어 버리고 영혼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된 것이므로 또 재림할 것을 약속한 것이라는등‥‥

이때 모인 신자는 정득은, 옥상현*, 지승도, 정선옥*, 김인주, 김종화등의 여성과 김원필, 정명선, 차상순 등이었다.

문선생이 집회를 열고, 성경해석의 원리를 강의하면 특히 여인들은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모양을 보고 근처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 하였던것 같다.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열사람 남짓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든가 소리를 지르던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선생에게 말을 시키면 창조원리와 타락원리의 강의 그리고 복귀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 6천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누구던지 울면서 기도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이와같은 집회가 허용 될리가 없다. 근처의 사람들이나 기성교회의 신자들, 특히 교회의 목사와 장노들은 문선생의소행을 이단시하였다.

이 이상스러운 집회를 하고 있다고 경찰에 고발하였기 때문에 문선생은 평양으로 와서 2개월째인 1946년 8월2일 대동보안서에 체포되어 약 100일간 구속되었다. 그간에 가혹한 고문을 받아 한잠도 못자게 하든가, 식사를 2일도 주지 않는등, 학대를 받었으나 특별한 죄가 없었기 때문에 석방되었다. 그때 문선생은 꽤 쇠약해 있었으나, 신자들의 도움과 한약의 덕분으로회복하였다고 한다.

 


유부녀와의 결혼소동으로 징역5년


문선생은 그후 경창리에 있는 김종화(金鍾和)라는 열렬한 여신자의집에 머물렀는데, 그녀의 남편인 정명선과 세자녀가 있는 가정이었다.

이집에서 문선생은 복귀원리를 실현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있는 부인네를 천사장 루시엘이 해와를 빼앗아 성교를 한것과 같이 빼앗아서 하필 남편과 아이들이 옆에 있는 방에서 김종화와 동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문선생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김종화와 "어린양잔치"(정식결혼)을 하기로 하였다. 신자들은 쌀을 거두어 떡을 만들고 양복과 이불을 만드는 등 푸짐하게 의식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매일같이 사람을 모아 놓고는 울면서 기도하다가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시끌벅끌하며 밤중까지 떠들석했다. 그위에 남편이나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지붕밑에서 동거하고 있다. 그것이 이번에는 결혼식을 올린다고 큰 소란을 떨고 있는 것이니까 그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잠자코 있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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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1948년 2월 22일 문선생이하 전원이 체포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선생은 사회질서 문란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로 오게 된것이다.

(6월 20일)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김종화는 징역 1년의 실형으로 복역하고, 옥상현은 그녀의 집이 상당한 재산가였으므로 2개월 만에 석방 되었다고 한다. 또 몇해 후에 남한 서울에 피난하고 있던 김종화를 찾아가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서, 나는 당시의 진상을 들어 보았다.

믿음을 잃고 쉬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문선명의 이야기와는 달라서 흥미 진진한 것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대공습


1950년에 접어들자 형무소안은 한층 더 엄중해졌다. 비료공장의 작업장은 웬일인지 유안분이 돌처럼 굳어져서 일에 능률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책임량(노루마)은 증량일로 이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일을 하여도 달성되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 더구나 노동시간은 1시간이 연장되어 6시에 종업이 된다. 참으로 "죽으라"고 하는것 같았다.


1,500인의 죄수중에서 매월 100인정도는 툭특 쓸어져 죽어서 공장의 노동자들은 매일 장사를 치르는 것으로서 일과가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죽은사람의 인수만큼 죄수가 평양형무소에서 확실하게 보충되어 왔다.
젊은 간수들이 많이 줄어 든것을 알아차린 것은 5월경 이었다.


아무래도 사원들이 "이 것은 비밀이지만‥‥라고 말하면서 소근거리며 "소련쪽으로 비료를 운반해 간 배가 돌아올 때에는 고사포 같은 무기를 잔뜩 싣고 오곤 한다. 아마도 곧 전쟁이 시작되는것은 아닐까"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수용소내의 경계나 작업소내의 감시가 한층 더 엄해졌고 죄수들은 큰소리로 이야기를 할수없는 분위기가 계속되어 있었는데 6월 25일 드디어 전쟁이 시작 되었다.


북한의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서 남진하여 3일후에는 서울이 함락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죄수들을 연령별로 나누어 군대로 보내서 위험한 최전선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뜬 소문이 나돌았을 때에는 불안한 나머지 수용소 안이 크게 떠들석 하였다. 그런 가운데 8월1일 오전 11시 비료공장의 상공을 UN군의 비행기가 약30분이나 정찰하고 갔다.


나는 군대시절의 경험에서 계호계장인 간수에게 "여기는 틀림없이 폭격 당합니다. 수용소쪽이 안전할 테이니까 죄수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진언하였으나 전쟁을 모르는 간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할수없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가요란하게 공급경보의 싸이렌이 올렸다.


UN군의 B29가 공습해서, 12시경부터 약4시간 비료공장은 맹렬한 폭탄비의 세례를 받았다. 북한 산골 옥수수 농사짓던 농민이었던 간수들은 넋이 빠져서 우왕좌왕 할뿐이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만약 또 폭격이 있더라도 국제법상 형무소나 수용소는 폭격하지 않을터이다. 안심하고 수용소로 가기를 서두르자, 간수들은 죄수가 전원 따라오는지 뒤에서 감독해 주시오라고 큰 소리로 지시하고 선두로 달려서 수용소로 돌아왔다.


비료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총 인원수는 8천명 정도 이었고, 죄수는 1,500명이었는데 돌아와서 조사해보니까 죄수의 사망자는 불과 70명, 공장 전체로서는 약 3천 7백명 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다.
참으로 무서운 대공습이었다 수용소로 돌아온 나는 서둘러 문선생을 찾아 폭격으로 다친데나 없나 하고 걱정 하였는데 상처 하나없이 무사하였다.

 

김일성 은사


북한이 김일성 정권의 수립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서 독립하였는데(1948) 은사로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던 나는 대공습 다음날(50년 8월 2일) 간신히 형기를 마치고 지옥의 수용서에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하늘 아래인데도 공장안과 밖은 이렇게도 다른 것인가를 눈물이 넘쳐 흐르는 생각으로 하늘을 바라 보았다. 오전 10시경이었다. 비료 공장 옆을 지나보니 폭격당한 흔적의 비참한 광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기 저기 있는 큰 구덩이에서 시체가 산산히 흩어진 살점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이 공장속에서 문선생은 오늘도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을 것인가고 생각하니까 자기 혼자서만 먼저 석방 된것이 면목이 없었다. 출옥의 인사차 갔을 때에 문선생은 "평양에 가거든 경창리에 살고 있는 김종화를 찾아서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라 고 전해 주시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종화 여인은 문선생과 결혼하려고 하였다가 투옥 당하게 된 원인이 된 바로 그 유부녀인 것이다.

홍남의 도로는 인민군의 군수물자를 실은 트럭이 많이 달리고 있었다. 인민군은 선제공격으로 승리하여 서울을 점령한것 같았다. 지금은 전쟁중인 것이다. 평양행 군용트럭을 세워서 사정을 말하였더니 평양까지 태워다 주게 되었다.

 

 

제2장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평양에서 서울로

 


불량배에게 다리에 절골 당했다.

 


폭격을 피해서 산길을 뛰기도 하고 도중에서 자기도 하며 평양에 도착한 것은 3일 뒤였다. 공습을 피해서 교회로 소개되어 있던 가족과 합류한 다음날, 나는 김종화 여인의 집을 찾았으나 찾을수가 없었다. 그 무렵 한국군은 인민군에 밀려 1950년 8월 18일에는 부산으로 한
국정부가 옮겨가 있었다.

북의 공산당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평양시내는 전승분위기로 넘쳐 있었으나 9월 15일에 UN군이 인민군의 배후를 찔러 인천으로 상륙, 전황은 뒤집혔다. UN군의 진격은 재빨라서
9월 하순에는 한국군과 UN군이 평양에 입성하였다.

그러한 어느날 나는 보안대라고 자칭하는 무법자들 일당에게 둘러싸였다. 본바닥의 불량배들로서 북이 오면 북을 맞이하고 남이 오면 남에 꼬리를 치는 패거리들 이었다.

"너는 북조선 군의 대대장을 지낸 진짜 공산당원이니까 죽인다. 죽어라 !!』몇사람이 나에게 달려들어 망치로 내다리를 쳤다. 발목뼈가 부러져서 나는 움직일수 없게 되었다. 마침 지나가던 한국군 헌병대의 찝차에 구조되어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직무태만
죄로 투옥 되었던 것을 알게 되어 석방되었다.

이러한 곳에서 살해 당하는가 싶어서 한때는 죽음을 각오하였던 만큼 '정말 사람에게는 무엇이 행운을 가져 오는지 알수 없다'고 무심결에 실소한 일도 있었다. 그때 유치장에 남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중죄인들은 모두 총살 당한것 같다.

전쟁으로 시내의 병원은 어디고 제대로 되는것이 없었다. 유도가 5단이었던 나는 할 수 없이 약국에서 적당한 약을 구해서 먹고 부러진 발목에는 응급조치로 나무쪽을 대서 묶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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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명(文龍明)과의 재회


10월 27일 김원필과 문정빈이 나를 찾아 왔다. 문선생은 출옥해서 10월 24일에 평양에 도착하여 나를 찾고 있었으므로 데릴러 왔다는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서 기쁘고 반가워서 말조차 잘나오지 않았다.

나는 리야커에 실려서 얕은 언덕받이에 있는 옥상현의 집으로 갔더니 문선생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순간 나와 문선생은 손을 잡고 울어버렸다. UN군에 의해서 흥남감옥이 10월 14일에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 문선생은 10일 동안이나 걸어서 평양으로 온것같다.


옥상현의 자택은 일본식 주택으로 부지가 수백평이나 되고, 집이 여러채 서있어서 큰 부자임에 틀림없었다. 옥상현과 딸 정애, 정순, 문선생, 김원필, 문정빈, 그리고 나까지 7인이 한 가족처럼 생활하였다.

일주일정도 지나니까 옥상현의 남편인 우하섭의 가족전원이 피난 나갔던 서울에서 돌아 왔으므로 우리들은 쓰고 있던 방을 비워 주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모두들 의논한 결과 서성리 라고 하는 곳에 있는 방을 하나 빌리기로 하고 그 다음날에 이사를 했다. 문선생과 김원필, 문정빈 그리고 나까지 4인이 함께 살게 되었다.

문선생은 그사이 아는이의 안부를 찾아 들락거렸고, 김원필에게 자기의 출옥을 알리는 일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또 평양에서는 1950년 12월2일 시내전역의 시민에게 피난명령이 내렸다. 그것은 중국군이 대량으로 투입되어 인해저술로 거센 파도(노도)처럼 몰려오고 있기 때문에 한국군과 UN군이 일단 후퇴 하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는 조선반도의 맨 북쪽까지 쫓겨 갔던 북조선 인민군과 그것을 지원하는 중국지원군(10월 25일에 참전)의 전진은 예상외로 빨랐던 것 같다. 그날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의 탄약고가 폭격 당해서 밤새도록 폭발하는 바람에 한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족을 이북에 버려두고 문선생을 따랐다.


우리들은 남쪽으로 피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리골절 상처가 다 났지 않은 나는, 걸을수가 없었기 때문에 상수구리에 있는 누님댁에서 자전거를 가져다가 나는 그것을 타고 김원필은 뒤에서 밀고 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1950년 12월 4일 10시경에 평양을 출발하였다. 계절은 겨울이였으나 아직 그렇게 춥지는 않았으므로 피난 하기에는 비교적 장해는 없었다. 도중 대동군에 있는 나의 본집에 들려 가기로 하였다.

우리집에 도착하니까 가족은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가 부자유한 다리를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남으로 출발한다는 것은 온가족이 "엄청난 무리"라고 크게 반대하였다.
조카인 정근은 "삼춘이 그 다리로 어떻게 남으로 피난 갈려고 생각하는가"하면서 필사적으로 말리려고 하였다. 문선생은 우리가족을 납득시키려고 평양성을 눈앞에 바라 보이지만 북에서는 목적을 달성 할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뜻에 따라 일단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설명하였다.


나는 옥중에서 맺은 사나이의 약속으로 문선생과 함께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마음 속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미 80세가 되신 어머님께 작별 인사를 들인 뒤에 처에게 가족들 일을 부탁하였다. 그때 맏딸 효순이가 나와서 "나도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를 돌보면서남쪽으로 따라 가겠다"고 눈물을 흘렸으나 문선생이 말렸다. 문선생은 흥남에서 같이 온 문정빈과도 나중에 기회를 봐서 남쪽으로 오라고 타일러 우리집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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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후방에는 중공군이 물밀듯이 멀려오므로 우리들은 되도록 빨리 대동강을 건너야 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정근에게 부탁해서 그날 밤중에 배로 남충면 효남리로 건널 수 있었다.
그날 밤은 근처에 있는 누님댁에서 묵었다. 남쪽으로 피난하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다음날 아침인 12월 5일 누님이 마련해준 식량을 자전거에 싣고 나는 타고 김원필은 밀면서 출발하였다.
누님은 문선생을 목사라고 생각하고, 목사님 제발 제 동생을 잘부탁드립니다 라고 머리를 숙여 인사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후 43년간 가족과의 만남은 사라져 가는 꿈같고 아내와 다섯 아이들은 어떻게들 하고 있는지 )


죽을때까지 함께 하자던 사나이의 약속


남쪽으로 내려 가는 피난길은 사람들로 넘쳐 있었다. 피난민들은 저 마다 손을 잡고 그야
말로 몇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서서히 남쪽으로 남쪽으로 걷고 있었다. 우리들은
역포를 거쳐 용연면에 들어서서 12시경에야 가학리 에 도착하였다.서쪽에서는 폭격기의 공습과 총격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날은 흐려 있어서 해가 아직지지 않았는데도 해가
넘어 간것처럼 어두었다. 오늘은 앞으로 더 가는것을 체념하고 숙소를 찾아서 쉬기로 하자는 문선생 지시로 우리들은 근처의 마을에 들러 초입에 있는 농가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아무도 살고 있는것 같지 않았다. 가재도구는 있었으나 아마도 주인은 남쪽으로 피난해 갔는지 부및에 가보니까 쌀은 물론 김치, 간장, 된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말로 인류최후의 날이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세상은 이제부터 어떻게 되어가는 것일까? 가구와, 살림도, 의복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가족만이 증발해 버린것 같다. 피난 도중에 쉬려고 맨 처음에 들어간 집의 광경을 보고 나는 여러가지 것을 생각케 하였다
원필이가 저녘 준비를 해서 가져 왔다. 횐 쌀밥에 물김치를 차린 밥상이었다. 우리들은 감사의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하였다 문선생이 "정화는 다리가 부러져서 고생하고 있지만 좀 있으면 낳을것이다. 또 자유롭게 걸을 수 있을 터이니 안심하시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가족들을 생각해서 쓸쓸해 보였던지 "우리들은 지금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는 것이다. 다만 피난하기 위한 길만은 아니다. 평양성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 세상에 창조하려고 한 것인데, 나를 감옥으로 보냈기 때문에 허사가 된것이다.
남쪽에서 다시 한번 해내는 것이야"라고 격려해 주었다. 쌀 뒤주 위에 가지런히 개서 올려져 있었던 이불을 펴고 누됐으나, 나는 아무리해도 잠이 들수가 없었다. 원필은 피곤한지 바로 잠이 들었으나 문선생도 한동안 잠이 안 오는것 같았다. 이제 부터의 계획이라
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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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부터 한평생 문용명(본명)과 박정화는 고락을 함께하고 영원히 같이 살자"고 옥중에서 서로 맹서하였기 때문에 정다운 고향을 떠나서 사랑하는 가족들 부모, 형, 그리고 처 다섯식구 들(17살 장남,15살 차남, 13살의 3남 , 10살의 큰 딸, 다섯살 4남)과 헤어져서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내 일생은 모두 재림 메시아로 믿고 있는 문선생에 맡긴것이다.

역시 나도 고단했던 가보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가깨어 보니 벌써 아침해가 떠 있었다.


피난 길에 우리들의 복장은 문선생은 횐 명주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검은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일본 식민지시대의 말기를 생각케 하는 검은빛의 반공두건을 쓰고 있었다. 흡사 봉건시대의 부인들이 입고 있던 당의와 같은 느낌인데 얼굴 앞 부분만이 보일뿐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겉차림뿐만 아니라, 여인과 같은 음성이였으므로, 진짜 여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작업복 상하에 일본군의 구두를 신고 머리 에는 누런 방한모를 쓰고 있었다.
외국제의 밝은 자전거에 짐을 싫고 다리가 불편한 내가 걸터 앉아 핸들을 쥐고, 원필과 문선생이 교대로 뒤에서 밀고 있던 모습이 아마도 기묘하게 보였을 것이리라.
 

악전고투의 피난 길


남쪽으로의 길은 간선도로를 가면 비교적 평탄하고 수월하겠지만 미헌병이 여기저기 서 있어서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결국 피난민이 통행할 수 있는곳은 좁고 기복이 많은 옆길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피난민의 수는 늘고 그야말로 인산 인해 좁은 길에 넘쳐나고 있었다. 남으로 가기만 하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보증도 아무것도 없건만 그래도 무언간에 희망을 가지고 사람들은 남쪽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었다.


평양을 떠날때 의복이나 살림을 한짐씩 싸짊어지고 피난길에 올랐으나 그짐도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 들었다. 줄곳 걷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지쳐 그리 대수롭지 않은 물건들은 자꾸 내버려 피난길 20일 정도 된 때에는 짐들은 거의 줄어졌다. 피로가 겹친 몸에는 한 겨울의 추위가 한층 더 느껴졌다. 따뜻한 곳을 찾아서 풀위에 눈이 녹아있는 곳이 눈에 띄이면 주저 않았다가 쉬엄쉬엄 걸었다. 그래도 잠 자리와 식사 걱정만은 대단하지 않았다.


그날도 조금 일찍이 숙소를 찾아서 쉬기로 하고 가까운 마을로 들어갔다. 어느집에 들어가니까 꽤 잘 살던 집처럼 보였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살림살이와 식량은 놓아둔 채였다. 방을 정하고 한참 쉬고 나서 원필이 저녘밥을 마련해 주어서 세사람이 식사를 했다.  아픈 다리로 이대로 부산까지 갈수 있을런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우리들은 점점 늘어가는 피난민에 섞여서 남으로 남으로 향하였다.


그 도중에 광주근처에 각도가 거의 30도정도는 되는 가파른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는 150M정도로 길어서 자전거를 밀고 올라 갈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내가 자전거에 타고 원필이 아무리 힘껏 민다 해도 그리 쉽사리 올라 갈수 없었다. 조금 올라간듯 하면 미끄러져서 자전거가 뒤로 나 자빠지고 만다.


주위에는 피난민이 가득차서 저마다 앞을 다투어 먼저 가려고 하였다. 이대로 하다가는 아무리 해도 나아갈수 없겠다고 생각한 나는 나 때문에 문선생과 원필도 남쪽으로 못가게 된다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서 문선생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안 되겠오 나를 두고 앞으로 가시오 나는 여기서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나의 운명에 따르겠오." 그했더니 문선생은 화를 내며

"당신과 나는 죽음까지 함게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금후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살자 걱정말게 !! 라고 말해 원필에게 자전거를 끌게 하고 나를 업고서 고개를
넘었다. 감격 한 나는 문선생을 믿고 따라 가기로 다시금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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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서을에 도착하다.


우리들 세사람은, 그후 남쪽으로 온 피난민속에 공산군이 섞여 있을것 이라고 하는 정보에 따른 UN군의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여럿이 죽는 고초를 겪기도 하고, 이의 등살에 견디기 힘들었던 어려운 고비를 참고 넘어서 사리원, 하성, 동해주, 청단, 내성, 용매도, 영양, 토성,장서를 거치고 임진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들어가 마포를 지나서 서울로 향하였다.


12월 27일 눈이 퍼블는 속에 얼어붙은 한강을 미끄러지고 구르면서 건너서 24일만에 우리들 세 사람은 꿈에 본 서울에 당도 하였다. 우리들은 우선 영등포구 흑석동에 있는 곽이라고 하는 사람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문선생의 옛날의 친우였던 곽이란 사람은 이미
부산쪽으로 피난해서 그 집은 빈집이 되어 있었다.

이집은 2층집인데 양옥집이고, 가재도구가 그대로 놓아둔 채로였다. 할수없이 우리들은
이 빈집에서 한동안 지내기를 하였다. 서울은 문선생이 학생시절부터 살아서 신앙적인 면으로도 여러가지 것을 체험 해온 제2의 고향이었다.

그 곳에서 문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후 한동안 하숙을 하고 있었다. 이기봉이라고 하는 할머니 한테 찾아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렇게 반갑게 대해 주지 않는 것이
다. 그 후에도 몇 사람 옛 친구를 찾아 갔으나, 문선생의 꼴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들의 모양이 거지같이 보였든지 그리 친절하게 대해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무렵 서울시민은 국민방위군요원에게 물겨 다니고 있었다. 나는 또 다리가 부자유스러워서 걸리지 않았지만, 문선생과 원필 두 사람은 무조건 끌려갔다. 세사람이 사선을 넘어 평양에서 겨우 서울에 닿았는데 이것은 또 어떻게 된 것인가. 나만 홀로 남겨지고 금후의 일이 걱정인데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서울은 낯선 고장으로, 아는 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곳이다. 더구나 전쟁 중이다. 문선생이 찾아가도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가령 내가 찾아간다 하더라도 나 같은 것에 동정 해 줄리가 없다.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무것도 떠 오르지 않았다. 문 선생만을 믿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문선생과 원필은 국민방위군의 자체검사에서 불학격이 되어 돌아와서 세사람은 또 흑석동의 곽씨의 자택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새해가 밝아 1951년 1월 2일, 서울전역에 퇴거명령이 내려졌다. 공산군이 가까이 까지 남하해 온 것이다. 우리들은 또 피난길에 나서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 이번의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지금까지 검문을 받던지 할 때에는, 우선 먼저 증명서의 제시를 요구 받았다. 그런것을 생각해서, 나는 가까이 있는 치안대를 찾았다. 유홍이라고 하는 치안대의 대장이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서 우리들은 "피난민증명서"를 한통씩 만들어 줄것을 요청하였더니 친절하게 증명서를 발행해 줄뿐만 아니라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위로의 말까지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 때의 기분은 지금껏 잊을수가 없다.

평양에서 마련해 가지고온 돈도 모두 떨어졌으므로 우리들은 할수없이 곽노필씨 집에 남아있던 양복이나 돈이 됨직한 것을 자전거 뒤에 싣고 서울을 출발하였다.만약 그대로 남겨 두었다 하더라도, 인민군이나 중국군이 처들어 온다면 아무것도 남아 나지 않을것은 명백하였다. 사실 서울은 1월4일 재차 공산군에게 제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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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산으로

 


제2의 피난행



우리들은 1월3일 이번에는 부산을 행해서 500키로의 피나길에 올랐다. 두번째의 피난인 것이다. (1·4후퇴 때)
자전거에 타고 그저 밀려 다니는 꼴이 었지만, 자유를 찾아가는 희망의 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서울을 출발해서 부터 우리들은 부산까지 경부선을 따라 가지않고 중앙선을 따라 가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나의 숙부가 되는 정기수씨가 제천이라는 곳에 살고 있어서 그곳을 들러 가면 여러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성남을 지나서 이천으로 향하였다. 이번에는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피난 때와는 달리 모르는 피난민들끼리 줄을 짓기도 하고, 또 무더기로 몰려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끼리라든가, 가족들끼리 함께 이동해 가는 것이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그의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에는 거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빈 집이 눈에 띄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집에 가서 하루밤 쉬어 가기를 부탁하면 쾌히 들어주어 방을 빌려서 쉴 수가 있었다. 빈 방이 없을 때에는 부엌이나 헛간 같은 데서도 쉬어 갈 수가 있었다. 쉴 장소가 마련되면 다음은 가지고 은 쌀로 식사를 마련해서 먹고 자는것 뿐이 었다.

제2의 피난때에는 전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 가짐에도 얼마간의 여유가 생겨서 그렇게 서둘지 않고 느긋하게 갈수가 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일찌감치 마을에 찾아들고 서둘러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잘하는 방법인 것이다. 가지고 있던 쌀이 떨어 졋으므로 가까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렸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갔는지 상점은 거의 닫혀 있었다. 그러나 우려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이 작은 마을 가운데 있는 큰 집을 찾아가서 곽씨집에서 가지고 온 양복 한벌을 꺼내서 집에있는 할머니에게 건네고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70은 넘은 듯한 기품좋은 할머니는 우리들이 측은하게 보였던지 아니면 양복이 탐이 났던지, 팔 뒤주를 열고 쌀 한말 가량을 주었다.

장호원, 원주를 거쳐 제천으로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 헤맨 숙부의 집은 이미 피난해서 빈집이 되어 있어 맥이 쪽빠졌지만, 그래도 앞으로나아가 조령(새재)의 마루턱에 도착하였을때 UN군의 헌병이 "피난민은 도로로 가서는 안된다"고 제지를 당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걷기 힘든 산길을 갈수 밖에는 없었는데, 그 무렵에는 나의 다리도 거의 나아갔으므로 산길이라도 악을 써서라도 걸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별안간 UN군의 헌병이 문선생과 원필을 강제적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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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세번째 이별이 되는 것인가 하고 나는 무척 불안하였다. 처음에는 북에서 피난할때 보안대에 연행되었다. 다음에는 서울에서 국민방위군에게 연행되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또 혼자 남게 된 것이다.

그러한 곳에 혼자 남겨 지더라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매우 걱정 스러웠는데 한참 만에야 두사람이 돌아왔다. UN군의 군용 차에서 작업을 시켰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 길 이었으므로 나 혼자서도 갈수 있을것 같았다.

"여기서 부터는 지팡이를 버리고 걸어서 가자"고 문선생이 말했다.

두달 가까이나 지팡이에 의지해서 자전거에 타기도 하고 네리기도 하였으므로 아직 자신은 없었지만 다부지게 마음먹고 지장이를 버리고 보니가 지팡이가 없이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후의 길을 나는 혼자서 걸어 다닐수 있었다. 단양, 점촌, 풍기, 안동, 의성으로 피난길은 이어졌다.


경주에서의 작별


경주에 도착한것은 저녘때였다. 시내에는 피난민이 넘쳐 있었고 비어있는 방은 여간해서 찾아 볼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사방을 헤매서 겨우 시내의 로서리를 거처 쉴만한 집을 찾아냈다. 현관문을 판자로 X형으로 막어 놓은 집인데 그집을 찾아 가니까 30세가량의 젊은 사람이 나왔다. 우리들이 방문한 이유를 물었으므로 "판자로 문판을 막어 놓았기에 아무도 안사는것 같아서 하루밤 쉬어 가려고 생각 한것이다"하고 하였더니 안으로 들여 보내주었다.
집안을 살펴 보니까 판자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공장같은데 집 주인의 설명으로는 "밥상"을 만들고 있었는데 전쟁 때문에 직공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공장을 폐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방을 빌린 후에 원필은 저녘 반찬거리를 사려고 시장으로 나아갔다. 어항이 있는 포항이 가까이 있어서 오징어를 세마리 사다가 죽을 쑤었다. 원필이 방을 빌려 준 주인에게 죽 한구릇을 가져갔더니, 뒤에 그집 아주머니가 "이러한 죽은 어떻게 쑨것이냐"고 물어 원필이 설명을 하니까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오징어로 족을 쓸 때에는 먹장을 떼내고서 죽을 쑤는 거예요. 그냥 하신거죠"

우리들은 어두운 곳에서 먹었기 때문에 그런것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는데 아주머니가 가져 온 죽을 보니까 과연 새까만 것이었다. 그것을 그냥 먹었는가 하고 생각하고 우리들은 서로 웃고 말았다.

이집의 주인은 황해도가 고향인데 자기는 어렸을 때에 경주로 살러와서 생활을 위해서"밥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어른들은 지금도 북에 계시고 자기의 가족들만이 이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장만영이라고 3일간 이집에서 쉬었다. 식사는 물론 우리들이 만들어 먹었다. 그래도 피난민이 넘쳐서 한곳에 오래동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주인에게 "우리들은 오늘 부산쪽으로 갑니다"라고 인사를 하니까 젊은 사람은 가도 괜찮을터이지만‥‥하면서 그는 나를 가르쳐 말했다. "당신은 제일 나이도 많는것 같고 몸도 쇠약한것 같다 부산에 가더라도 피난민으로 꽉 차 있을 터이니까 두사람이 먼저 가서 자리잡은 다음에 당신도 가면 좋지 않은가"

여기까지 문선생과 원필이 함께 사선을 넘어왔으므로 나는 "아니야 나도 부산으로 가겠다"고 말했더니 문선생은 "이집 주인의 마음씨가 고맙다"고 말하고 "정화 자네는 이곳에
있으면서 좀더 기다리게, 우리들이 부산으로 가서 자리 잡히면 연락할 것이니까. 그때 또 서로 합쳐서 큰 일을 하기로 하세나"

이려하여 나는 경주에 장만영써 집에 남고 문선생, 원필은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때의 나의 심경은 무척 복잡하였다. 피난도중 문 선생과 함께 사선을 몇 차례나 넘어 왔는데,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려고 하는 위대한 일거리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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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떨어진 나의 심경은 서러워서 함께 가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했으나 피난길은 한 사람이라도 적은 편이 수월한 것이 라고 생각해서 잠시의 이별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후에 문 선생이 경주로 왔을때 들은 바로는, 이때는 울산까지 걸어가서 울산에서 처음으로 기차를 탈 수 있었다고 한다. 기차는 기차였지만 화물 차량의 지붕까지 사람이 타고 있는 상황에서 간신히 화칸 부근에 탈수 있어서 부산의 초량역에 겨우 내렸다는 것이다. 그날이 1951년 1월 20일 이였다고 한다.


생활에 쫓긴 문선생이 찾아옴


나는 혼자서 경주에 남아 장만영씨 집에 식객이 되었다. 4월이 되어 날씨도 따뜻해졌다. 식객도 오래 되었기에 무슨 짓이라도 해서 밥값 정도는 치러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어느날 주인과 의논하였는데

"전쟁중에는 만들어도 별로 팔리지도 않으니까 공장을 페쇄하고 있다"하는 것이었으나, "밥상만 만들어 준다면 내가 자전거에 싣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팔아 올 터이니 해보지 않겠오"라고 내가 권하였더니 주인도 그러 할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전부터 공장에서 일하던 아들과 식객 노릇을 하고 있던 피난민 나와 주인등 셋이서 밥상을 만드기 시작하였다.

나는 한번에 20개씩 자전거에 싫고 포항으로도 가고, 영천으로도 가고, 또 울산에도 갔다. 익숙하지 못한 장사였지만 싣고 나간 밥상은어떻게든 다 팔렷으므로 그 대금을 주인에게 넘겨 주었다. 경주 주변에는 사방에 시장이 있었다 영천에도, 울산에도, 포항에도 언양에도, 감포에도, 경주에서 2,30키로 거리에 있었으므로 5일마다 서는 장이 그 시장에 매일같이 밥상을 실어다 팔았다.

또 저녘때가 되면 그집의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가정교사 노릇도
하였고 식객으로 지내는 동안의 밥값 정도는 특특히 한 셈이다.

이렇게 지내고 있는 동안 그 다음해의 3월 7일 별안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문선생이 부산에서 오셨다. 그 기쁨이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군용 모포 한장으로 공장에서 기거하고 있는 나로서는 문선생을 환영할 방도가 없었다. 주인이 돈을 내주어서 저녘 식사만은 접대를 하였으나 밤에 나무조각 투성이의 방에서 주무시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선생은 그동안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나 금후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꿈과 같은 이야기 뿐이었다. 흡사 몇 십년만에 만나 밤이 깊도록 둘이서 이야기를 했고, 다음날 문선생은"오늘은 부산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내 기분 같아서는 여기에 방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여기서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 할만한 활동을 해서 문선생과 함께 있고 싶은 심정 이었지만 아직 상황이 좋지 못해서 할 수 없는 노릇 이었다.
마침 그날은 울산에 장이 서는 날이라서 문선생과 같이 기차로 가기로 하였다 오전중 내가 시장에서 밥상을 팔고 있는것을 문선생은 보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문선생은 기차로 부산으로 떠났다. 밥상이 많이 팔리면 용돈 이래도 드릴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하필 그날은 웬일인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경주에서 헤어지고서 1년만의 재회이었는데 문선생을 전송하고 돌아온 나는 정말로 깊은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무엇이든 장사를 해서 자금을 마련해 가지고 부산으로 가서 문선생과 함께 위대한 사업 달성에 힘쓰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원필은 식당에서 일하고 있고, 문선생 자신은 일본의 공업학교에 함께 유학하였던 동창생 집에 식객으로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계시기에 무척 불편 하실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실은 이때, 그는 나에게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상태를 보러 온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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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만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수 있을까 하는 것을 나는 늘상 생각해 왔다. 날마다 변함없이 밥상을 운반해다가 시장에서 파는 것이 내 일의 전부였다. 이러한 일거리라도 열심히 붙잡고 있으면 기회 가 찾아을 것이 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 고 여기서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것일까? 아니면 집어 치우고 부산으로 가는 편이 났지 않을까도 생각 하였으나 아직 피난민으로 가득한 부산으로 간다 한들 별 볼일이 없을것 같이 생각되어 좀더 경주에 있기로 하였다.


평양에서 온 옥상현과의 재회


공산군에 의해서 2년전의 1월4일 재차 함락된 서울은 꼭 두달후의 3월 4일 UN군이 탈환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이무렵 일진일퇴 하면서도 간신히 전황은 시드러 들기 시작해서 휴전협정의 준비가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민간인의 사상자만도 남북 합해서 2백만명 이상, 이산가족도 일천만명을 넘는다고
하여 국민간에 불안과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있었다.

그러한 1953년 봄 부산에서 저 옥상현 할머니가 경주로 나를 찾아와서 오랜만에 대면하였다 평양에서 피난 할때에 헤어져서 서로 알길이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가웠다.
옥상현은 그녀의 피난 이야기와 부산의 문선생의 안부와 식구들을 키우는 일에 열중하고 원리를 책으로 만들기 위해서 원고를 써냈다는것, 흥남감옥 당시에 이야기 했던 원리를 정리해서 출판해야 하겠다고 항상 문선생이 이야기 하던 것을 생각하고 이렇게 엄청난 피난 생활 중에도 기어히 써 냈구나 하고 감격하였다.

하루 빨리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해서 원리를 출판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전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옥상현의 장남이 군인용 트럭을 가지고 온 덕분으로 가족전원이 무사히 남쪽으로 올수 있었던 것이다. 자리잡히면 부산에서 함께 일할수 있게 하루 속히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문선생과 함께 6,000년전의 하나님의 뜻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할때가 이제 곧 다가 올것 등등 열심히 이야기 하였다 원필은 지금 미군부대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범일동에 교회를 마련하여 새로 입교한 식구들이 원리를 들으려고 모여들게 되었고, 평양에 있던 식구들도 부산으로 와 있다고 한다. 교회의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문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왔던것 같다.

옥상현은 하루밤을 같이 지내고 다음날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동만 있다가 이요한 이라고 하는 목사가 나를 찾아 왔다. 부산에 있는 문선생이 보냈다고 하는 것이었다 방으로 안내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새로운 식구들이 많이 모여와서 원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으므로 박정화씨도 선생이 계시는 부산으로 발리 오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하나넘을 위한 위대한 사업에 전진할 시기가 지
금 막 왔다고 가슴이 벅차 있었다.

그 다음날 이목사는 부산으로 돌아갔다. 나도 곧 부산으로 간다고 문선생에게 전하도록 부탁을 하고 혼자서 생각하였다. 저 흥남감옥에서 문선생이 빈 가마니 위에 앉아서 눈을 감은채 신비의 세계를 변화하게 할 이상, 즉 "원화원 이상(圓和園理想)"의 세계를 실현시키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나에게 말한 것을 생각 하였다. 그 때의 전경이 눈에 아물 거렸다. 희망의 세계가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

죄악이 없는 세계, 그리고 질투, 음모, 배신, 전쟁 같은 것이 없는 세계, 그 이상세계의 회원만 된다면 노동은 취미로서 하루에 세시간 정도만 하면 된다.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갈 수 있게 되고, 회원 집에 가면 자고, 먹고, 쓰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받는것 보다는 주는것을 기뻐하는 세계, 남을 책망하지 않으며, 존경을 받기 보다는 존경
하는것을 기뻐하는 세계, 이 이상세계가 지구의 구석 구석까지 넓혀져서 우리들은 어느 나라와도 마음이 상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가까운 여기 지금 부산에서 고생하고 계신"문용명 선생"에 의해서 완성 될것을 생각한다면 감사할 뿐이다.


나는 한시바삐 부산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마음에 재촉을 받았다.

 

 

제3장  통일교회의 창립전후

 


여신도들의 열의

 

부산 수정동 교회

 

나, 박정화는 1953년 5월 15일 새로 사드린 부산 수정동의 집으로 문선생을 찾아갔다. 문선생은 대단히 반가워 하며 그간의 경과와 금후의 계획에 관해서 자세히 들려 주었다.
마침내 위대한 사업을 위해서 일 할때가 왔다. 마음 단단히 힘써 나아가자고 문선생은 말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많이 들려 주었던 6,000년의 역사의 과정, 창조원리, 타락원리, 복귀윈리, 재림예수의 사명과 그 자세등을 종이에 써 가면서 개인교수 하는것 처럼 가르쳐 주
었다.
문선생은 어느새 이름자의 용(龍)을 떼고 문선명(文鮮明)으로 바꿔 쓰고 있었다.
그 당시 동거하고 있었던 주된 식구들은 김원필, 정성옥 강옥실*,옥상현*, 지승도, 이기환, 이봉운, 이수경과 그가족, 문선생의 처, 최선길과 장남인 성진, 이요한 목사등 이었다. 새로 들어온 식구로 예배에만 참가하고 있던 사람들은 신정순, 김안실, 김재책, 김복순과 그가족, 오명춘 등이었다. 장남은 별로치고라도 김원필, 이봉운, 이수경,이요한 외 에는 모두 여자이다.

당시 김원필은 미군부대에서 일 하고 있었는데, 저녘때가 되면 미군들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데 울산에서 왔다는 젊은 부부가 새로 들어 왔다. 어느날 그 부부는 하루종일 전도하러 나가서 밤이 늦어서야 돌아왔는데, 성령에 열중한 나머지 딴 사람같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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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날밤은 월식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그 부부는 하늘에서 빛이 비쳤다고 큰 소리를 지르며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월식이라 설명을 해서 간신히 진정하게 한일도 있었지만 또 어느날오후 지승도, 옥상현*, 이기환 등이 영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너무나도 신비스러움에 홀려서 실신한 일도 있었다.

몇일후에 문선생 이 나를 불렀다.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서든지 경제적기반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어떠한 사업을 하면 좋을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요. 무슨 좋은 사업이 없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던 때에 알고 지내던 김동기라는 사람을 만나서 의논하였다.
그foT더니 그는 "친구와 공동으로 전매청에 새끼를 납품하는 계약을 체결 하였으나 자금이 딸려서 계약량의 남어지를 납품하지 못하게 되였다고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돈을 받지 못하게 되는데‥‥라고 말하면서 나머지의 납품을 나에게 맡겨도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반가워서 이 이야기를 문선생에게 전했다.

문선생은 곧 부인 식구들이 헌납한 귀금속 따위를 처분해서 37,000원이란 자금을 마련되었다. 그 돈으로 새끼를 생산하고 있는 삼천포의 흥해로 가서 새끼를 사다가 부산전매청의 창고에 납품하고 납품서를 받는것이 나의 일과로 되어 농촌에 몇일씩 묵으면서 "새끼"를 사
모아 가지고 화물차에 실어 운반하고, 또 삼천포에서 배편으로 운반하기도 하였다 6월 20일경에 일을 시작해서 새끼를 생산하는 농가를 찾아 다니며 계약잔량을 거의 다 채워가고 있었다.


최선칠(문교주의 본처) 부인의 큰난동


그러던 어느날, 삼천포로 이봉운 장로가 별안간 예고없이 찾아 왔다. 이장로는 수정동의 교회에 큰 일이 벌어지고 있오이다.최선길씨가 문선명선생이 부인 식구들과 복귀의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난동을 벌려 식구들을 전부 내쫓아 버렸다.
그리고 수정동의 교회를 최씨가 가재도구채 팔아 치워서, 교회가 없어져 집회도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되도록 빨리 돌아가십시다.
그래서 나는 급히 각지를 돌며 새끼 계약잔량을 조달해서 전매청에 완납하는 절차를 취했다. 계약조건과 새끼의 매입가격과 경비를 계산해 보니까 30,000원이나 이익이 남은 것을 알았다.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 오니까 문선생은 최선길에게서 도망치듯 주된 식구들을 데리
고 서울로 가고(9월17일), 원필도 영도(부산교외 마을, 열심인 식구의 집에 있고, 전도의 거점이 되어 있었다)로 도망갔다라고 한다.

이봉운장노는 대지공원에 판자집을 한채 사서 그리로 이사해서 거기서 임시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수정동 교회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들어 와서 살고 있었다. 최선길의 대 난동으로 부산의 수정동 교회는 어처구니 없이 날라가 버린 것이다. 나는 하는 수없이 여관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서울로 갔다.
서울에 있는 식구들에게 물어서, 청진동에 있는 문선생을 심방 하였더니 반가이 맞아 주었다. 불문곡직 하고 나는 그동안 새끼 납품결과를 보고하고 내일 부산으로 가서 납품서를 받아오면, 전매청에서 돈을 받을 수 있게 되고,그 이익은 30,000만원 정도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때 청진동에 문선생과 함께 있던 사람은 옥상현*, 신정순*, 양윤신*, 오명춘*, 이순철*.이 성화* 등 7-8인인데 여자 식구들 뿐이 었다. 나는 그다음날 기차를 타고 부산의 전매청지점에서 납품서를 받아 들고, 또 기차를 타고 되짚어 서울로 돌아왔다.

문선생에게는 낮 12시에 도착한다고 전보를 처 놓았으므로 그길로 바로 청진동 집으로 직행하니까 문선생도 여자식구들도 어디론가 가고 없어서 행방을 알수가 없었다. 그대신 최선길이 혼자 지켜 앉았고 최부인은 가재도구 같은것을 전부 처분하기 위해서 짐을 싸기도 하였다.

문선생 앞으로 보낸 나의 전보를 보고 나라면 문선생의 거처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재도구 중에는 문선생의 성경과 찬송가, 그리고 놀라운것은 원필이 정서한 원리원본까지 들어 있지 않은가. 나는 필사적으로 최부인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찾으면 선생 계신 곳을 알수 있을 터이고 알게되면 반드시 연결 할것이니 성경과 원리원본 만은 나에게 돌려두세요. 최 부인이 나에게그 서 류들을 건네 주었음으로 가지고 돌아 갈수가 있었다. 만약 그때 원리원본을 되돌려 받지 못했더라면 나중에 원리해설을 정리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후 옥상현*, 신정순등과 만났으나 그녀들도 문선생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녀들이 내가 서울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물어 보게 되면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문선명의 복귀 의식이란 미명을 빌어 눈에 넘치는 난맥상을 이룬 성교로 화가 치민 최 선길 부인은 수정동 교회에서 대난동을 피워서 여자 식구들을 두들겨 내 쫓았다. 겁을 먹은 문선명은 여자들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해서 청진동에 있는 으슥한 집을 빌어서 여인들과 살았다.

그러나 그것도 겨우 1주일만에 최부인에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내가 부산의 전매청지점에서 돌아오기 직전 문선명은 혼비 백산할 지경이 되어 여자들을 사방으로 분사시키고 목숨보다는 귀중하게 여기는 원리원본의 초고도 그대로 놓아둔채, 최 부인에게서 도망쳐 버린것이다. 여자식구들에게 포위되어 산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소란한 "여국나라"를 의미 한다.
왜냐하면 문선명을 둘러싼 여자 식구들은 복귀원리에 따라 몸을 내놓으면 소생, 장성, 완성, 복귀에 미달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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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문선명 선생으로 우러러 그 원리를 맹신하고 있던 나는, 때로는 복귀의 실제현장인 성교를 목격하기도 하고, 실제 의식에 걸맞지 않는 여자식구들의 광기나 교성을 직접 보았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메시아로서의 임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한편 아무리 생각해도 모른것은 무엇때문에 수차에 걸쳐 꼬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최부인에게서 도망을  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메시아라면 처 앞에서라도 당당하게 하면 좋을텐데, 처 한사람 전도를 못하고서 어떻게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새삼 솟아 난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렇게도 귀중한 전도에는 없어서는 아니 되는 원리원본을 내 팽개 치고 줄행랑을 처버린 문선명에게 언행 불일치의 의심을 품게 된것도 사실이 었다.


청진동에서 도망친 문선명은 또 다른 곳에서 여자들과 함께 지냈는데, 그것이 또 엉뚱한 사건으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경찰서에서 전기고문


그날은 청계천에 있는 여관에서 일박하기로 하였다. 마침 잠이 들 무렵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까 "이방에 박정화라고 하는 자가 묵고 있는가"고 말한다.

"내가 박정화요" 말하자 종로경찰서의 형사라고 말하면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며 묻고 싶은것이 있으니 경찰서까지 같이 갑시다라고 말한다. 갑작 스런 일이라서 영문을 몰랐지만 따라 갈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당신은 모든것을 다알고 있을 것이다.

문선명은 지금 어디 있는지 바른대로 대라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므로 "모른다"고 할수 밖에 없었다. 이쪽 저쪽에서 질문이 있었으나 "정 말 모른다"고 대답하였더니  그 형사는 "그러면 알도록 해주지"라고 하더니 밧데리를 가져왔다. 그리고 밧데리에 연결되어 있는 두 줄의 전기선을 나의 양손 엄지 손가락에 붙잡아 매고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몸 전체에 이상한 고통이 흐르더니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이래도 모른다고 할테냐!고 하면서 점점 더 세게 돌렸다. 온몸이 찌릿 찌릿 경련을 이르켜 내 몸이 내몸이 아닌것 갔았다. 손잡이를 돌리다가는 그치고, 그치다가는 돌리면서 욕설을 퍼 웃기도 하고 때로는 간사한 목소리로 말 하기도 하는등 거의 3시간 정도나 짓궂게 계속 당했다 나는 "죽일려거든 죽여라 모르는 것은 모를 뿐이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랬니 옆방에서 계급이 높은듯한 이가 나와서 "말씨를 듣자니까 평양사람 같은데, 그런가?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 하였다.
그 사람은 나도 평양 출신이요. 동난이 끝난 후에 남쪽으로 와서 경찰서에 근무하고 있오, 그리고 고문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심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풀어주라고 해서 고문을 중시시켰다. 아침까지 심문을 받고 아침 아흡시가 지 나서 야 겨우 석방 되었다.


하늘의 뜻에 관한 시험


경찰서에서 나온 나는 씁쓸한 조반을 먹은후에 엄덕문을 찾아서 YMCA 옆에 있는 3층집으로 갔다. 그때 거기에 건축설계 사무소를 열고 있었다. 내가 서울로 온것을 그는 무척 반가워 하며 문선생 있는 곳을 지도를 그려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전매청 볼일을 끝마치고 나는 그날 저및무렵 문선생을 만나러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옥상현 등 부인 식구들에게 붙들려서 나와 같이 문선생한테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경찰에서도 찾고 있고 해서 지금은 도저히 무리라고 말해서 어떻게든지 설득하려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마침 그때 소낙비가 퍼못기 시작했다. 그여들이 우왕 좌왕하고 있는 틈에 나는 버스에 뛰어 오르고 말았다. 안양에서 내려서 1키로쯤 가면 길가쪽으로 남향 받이의 작은 집 한채가 있다고 들었으므로 곧바로 찾을수가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니까 문선생과 이순철이 같이 있다가 무척 반가히 맞이해 주었다. 우선 나는 전매청 관계의 업무의 경과와 어제 있었던 경찰의 사건을 간단히 보고 하였다.


그후에 문선생에게 이순철이 만든 하늘의 계시에 관한 시험을 받도록 말하였다. 문제를 보고 답을 썼더니 문선생이 "좋아 합격이다"라고 말하고 어제 엄덕문도 시험을 받았다 그도 합격하였으므로,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장남이고,정화는 다음에 합격 하였으니까 차남이다 라고 말했다. 그때 이철순은 영계의 계시라고 이불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방 가득히 솜이 널려 있었고 그것을 자기전에 치우는 것이 큰일이었다 (후술)


노한 이순철*의 남편

 

나는 이틀동안 그곳에서 지내고 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이순철*의 남편이 눈에 쌍불을 켜고 문선생을 찾으려고 사방 여러곳에 수배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금 이대로 지금 집에 있는것은 위험해서 그 다음날 나와 함께 문선생과 이순철*세사람이 부산으로 가게 되었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었으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산까지의 직행표를 살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안양에서 수원까지 가서 일박, 그후 대전, 대구, 마산에서 각각일박, 5일만에 겨우 부산에 도착하였다. 우선 세사람이서 서면에 있는 거제여관에 한동안 유숙하기도 하였다.

그 이틀후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도록 고생하며 부산까지 왔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김안미라고 하는 여자 식구가 여관까지 찾아 왔다. 그녀는 6마리아(문선명이 복귀한 유부녀중-후술)의 한사람이었는데, -문선생이 뒤에 6마리아가 된 이순철만을 데리고, 부산쪽으로 내 뺀 것을 괘심하게 생각하고 여기까지 이를 잡듯 찾아 왔다고 하는 것이다. 김안미 와 이순철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자기들의 영적인 지위다툼으
로 여자끼리의 싸움이 더욱 귀찮게 되었다. 알기쉬운 이야기로 질투의 불꽃이었다.

나는 김안미 를 불러내서 문선생의 상황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지금 매우 복잡한 상태에 놓여 있어서 틈만 생기면 사단이 언제라도 참소 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하시려고 하는 계획의 장애가 된다. 선생은 한동안 이대로 부산에 계실 모양이니까 우선 조웅히 하는것이 좋겠다고 간청하였더니 김안미는 노한 채로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들은 부산에서 5일동안 유숙하고 또 서울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오명춘*이 손을 써서 친척집을 빌어서 문선생과 신당동 중택에 있는 어느집에 살게 되었다. 이순철*은 자기집에 돌아갔으나 노한 남편에게 두들겨 맞아서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고 백인제병원에 입원하였다.

문선생과 나와 오명춘*과 함께 병원으로 문병을 갔으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예감 들어서 다시 오기로하고 바로 돌아섰다. 나중에 오명춘써 말에 의하면 문선생과내가 병원을 나온 즉시, 이순철의 남편이 들어가 "지금 나간 남자들은 문션명과 박정화가 아닌가"고 다그치는 바람에 어물어물 둘러대느라고 혼이 났다고 한다.

만약 그때, 남편이 문선생과 마주쳤다고 하면 큰 사건이 일어날것은 틀림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선생을 둘러 싼 여자 문제가 여기 저기 일어나 그야말로 나도 손들고 말 지경  이었다.

복귀원리를 구실로 삼아 유부녀던, 처녀던, 눈에 나타나는 여인들은 조만간에 문선생과 성교하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남편되는 자나 부모들은 노할 것이다. 그중에는 어머니와 두딸까지 세사람과 관계를 한일도 있다.

대사건으로 되지 않았던 것은, 이것도 하나님의 가호 라고나 할까?

이동안에 청진동 집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이렇다. 부산에 있던 문선명이 서울로 도망처온
뒤에 본처인 최선길은 남편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서 청진동으로 찾아왔다.부산에서는 최선길이 부인 식구들을 모두 내쫓고 문선명이 자유롭게 나갈 수 없도록 해서 화장실에 가는것 까지도 엄하게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마침 흥남 감옥에 있을 때의 제자이던 김원덕이 문선명을 찾아왔다. 이 모양을 보고  그는 성진의 어머니이며 본처인 최선길에게 이러한 것을 해서는 안된다고 화를 내고 문선명을 끄집어 냈던 모양이다. 최선길이 김원덕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은 것은 그 당시 치안국에 근무하고 있던 현직 경찰관이었던 김원덕이 문선명이 무슨 일이 있어서 연행되게 되면 바로 석방해 주던 전예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믿지 않는 남편을 서울까지 쫓아 온 최부인은 청진동 집에 내가 와있으면 문선명의 거처를 알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라갈 작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청진동 집에서 도망친 직후 문선명은 이순철과 서울역 앞에있는 여관으로 가서 영적인 의식이란 명목으로 처녀인 이성화와 복귀의식을 행하였다.
요컨대 세사람은 거기서 영적인 의식이 아닌 육체적인 의식 즉 성교를 하였을 뿐인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복귀의식은 그 옆에서 다른 식구가 증인으로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 날은 이순철이 증인으로서 협력하였다. 이성화는 처녀였으므로 절차는 "어린양 잔치 (묵시 록 21장 9절)"를 올려서 말하자면 정식으로 결흔해서 문선명의 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순철은 이성화에게 이때 "미래의 어머니께"라고 말하며 값비싼 금반지까지 선물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당사자인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들은 것이니까 틀림 없는 일이다.

 

 

부산 영도(謄島) 집회

 


여자대학생 린영희의 비극

 

그 무렵 나는 대구를 거점으로해서 문선생과 함께 이곳 저곳 식구들에게 원리강의를 하기  위해서 각지로 나돌아 다니고 있었다. 또 문선생의 지시로 부산이나 서울에 가서 식구들에게 문선생 이야기를 전하기로 하였다. 그 당시는 아직 기차여행이 대단히 힘든 시대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꼭 12시간이 걸렀다. 추풍령에서 부터 대구까지는 군사상 차내의 등불을 모두 꺼 버렷으므로 캄캄하였다.

한밤중이 되면 난방까지도 꺼 버렸고, 창유리도 거의 깨져 있어서 겨울에는 대단히 추웠다. 유리가 없는 창에서는 연료로 쓰는 석탄의 연기나 냄새가 스며들어 터널에 들어갔을 때에는 질식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문선생과 함께 있던 어느날, 부산의 이봉운 장로에게서 "부산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자 방도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부산까지 와 주십시오"라고는 하지만 부산까지의 여비가 없어서 난처하게 있는 터에 마침 오명춘 집사가 왔다. 그녀가 여비를 마련해 주어서 그날밤 문선생과 함께 다음날 아침 8시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봉운장로를 위시해서 10여인의 식구들이 마중을 나왔다. 문선생이 부산까지 왔으므로 모두 기뻐하며 인사를 한후, 택시로 시내의 영도로 갔다. 이 날은 1953년 12월 24일이었다.

안내된 곳은 허술한 집이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넓직한 방이었고 잘 정리되어 있어서 식구들의 성의가 나타나 있었다. 이집 주인은 신성묵이란 사람인데 유신희와 부부였다.

아침을  마치고 문선생은 여느때와 같이 원리강의를 시작하였다. 유효원이란 사람은 결핵성 고관절 유착으로 굳어 버려 앉아 있을수가 없어서 누워서 강의를 듣고있었다. 이 사람은 무척 과민한 성격인듯 누구 옆에서 기침을 하면 표정으로 그것을 제지하기도 하였다.

28인 가량이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방안은 무척 조용해서 엄숙한 분위기였다. 식사 이외에는 휴식시간도 없이 강의는 밤중 한시, 두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듣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는 시종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날 처음으로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은 유효원, 유효영의 형제, 신성묵,유신희 부부, 김관성, 차집사등.

식구들은 신정순, 옥상현, 이기환, 지승도, 양윤신, 오명춘, 이봉운장로, 그리고 가족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 김 영희*라고 하는 여자대학생이 처음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그녀는 교인인 양윤식의 질녀로 연세대학 학생이었다. 성적이 우수해서 장래성이 있는 학생 이었으므로 대학 총장에게도 귀염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언더우드 총장이 귀국할 때 그녀에게 1년분의 학비를 선사해주었다. 그러한 큰돈을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숙모인 양윤신에게 전액을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양윤신은 식구들의 경제사정이 대단히 말이 아니었으므로 교회를 위해서 문선생께 몽땅 바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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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이 시작되고 돈을 전부 써 버린것을 안 김영희는 노했다. 그래서 숙모가 다니는 교회가 어떠한 교회이고 무엇을 가르치며 선생이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고나서 항의하려고, 아침부터 밤까지 꼼짝을 하지 많고 그녀는 문선생의 강의 를 듣고 있었다.


밤중에 폐회가 되어 참가자의 태반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집 단칸 방에서 문선생과 남자 두사람, 옥상현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김영희의 여자 5인이 함께 자게 되었다.
이것이 부산 영도 집회의 첫날밤이었다.
실은 여기서 처음으로 밝히는 바이지만 김영희는 이날밤 문선명과 성교를 한 것이다.
같은 방의 맨 아래목에 문선명, 그다음에 나, 그리고 여섯사람의 여인들이 이름은 든 순으로 누웠다.  나는 고단했으나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는데 묘한 기척에 눈이 띄었다. 내 옆에 누워있던 문선명의 자리에서 비명소리도 허덕임 소리와도 같은  여자의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것도 반대편 끝쪽에 누었던 김영희의 소리였다. 문선명의 성교를 여러차례 목격해온 나지만 이것은 정말로 놀랐다.
복귀원리로 설득을 당한 그녀가 먼저 그했는지 몰래 문선명이 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것이 복귀의 의식 따위가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약한 처지로서의 나로서는 잠자코 옆의 행위에 자는 척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다른 5인의 여자들은 한사람은 마리아이고, 다른 4인도 이미 문선명과 관계가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후술한다.

또 그후 김영희는 문선명의 아이를 임신해서 실로 비참한 인생 첫발을 걷게 되었다.


수사기관에 쫓기는 나날


그 다음날도 똑같이 선생은 강의를 하였고, 유효원은 열심히 메모를 해 가면서 듣고 있었다. 수염을 기르고 있던 김관성은 한방의라고 자기 소개를 한 사람인데 역시 열심히 듣고 있었다. 집주인인 신성묵도 강의에 빨려 들고 있었다.

그의 처 유신희도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후에 서울로 가서 문선생에게 복귀를 받게 되었다. 약 3주간이 지나니까 식구들은 문선생의 강의를 되풀이해서 듣고 있어서 찬송가와 기도를 할때에는 딴 사람 같아서 성령이 충만해서 큰 소리로 울기도 하였다. 이집에서는 사람이 모이면 아침부터 저녘까지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해서 곧 근처 사람들의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고,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수사기관에 조사를 부탁하였다는 소문도 들려 왔다.

뿐만 아니라 또 평양에서의 식구의 가족 중에서 남으로 와서 검사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어서 기회만 있으면 선생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어서 부산영도의 집회를 중지 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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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 무렵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한테 쫓기는듯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나와 문선생은 여기 저기를 돌면서, 고심하고 있는 식구들과 그가족을 격려 하고 있었지만 겨우 방을  얻더라도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문선명이 어디 어디에 있다고 하는 소문이 나서, 수사기관에서 사람이 조사를 받는 상황이 계속되곤 하였다.

이유는 문선생이 이전에 북한에서 사회질서 문란죄로 복역한 사실이 있어서 남쪽으로 가서도 또 고치지 못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것이, 북에 있던 식구의 가족들이 남으로와서 수사기관에 들어간 사람이 보복을 겸해서, 뒤쫓아 다니고  있기 때문 이었다.

식사는 동대문에 있는 이창환의 형이 경영하고 있는 대중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종로에 있는 여관에서 숙박하면서 작업하는 날이 열흘쯤 계속되었다. 우리들은 어떠한 괴로움도 참아 낼수 있었으나,여관주인과 식당주인들은 왜 그런지 우리들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대구에 있는 문선생을 찾아가 사정을 보고 하였더니, 5만원을 내 주면서 부산에서 간 양윤신과 함께 방을 마련해서 유효원과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곧 서울로 돌아와서 성동구 북학동에 방을 빌려 우선 되는대로 본거지로 삼았다.

이곳에 숙식을 같이 하고 있던 식구는 나, 유효원, 유효민 세사람 이었다. 이창환은 날마다  와 있었고,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 옥상현,이기환 등 여자식구들도 매일같이 와서 여러가지 일을 협력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선생이 별안간 대구에서 서울로 왔다.
그런데 바로 그날밤 시경에서 왔다고 하는 6~7인의 남자가 신분증명서를 보이면서 시경까지 같이 가자고 말한다. 거기에 있던 전원이 연행되었는데 특별히 이렇다할 조사도 받은것이 없고, 일반적인 종교문제에 대해서 물었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통행금지 시간이 되여, 그날합은 시경에서 자고 아침에 돌아온 일이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연행사건 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양윤신과 함께 여러가지 가재도구를 사러 갔다. 이렇게 함께 장을 보노라니까 그녀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양여사는 년령이 나보다 훨씬 아래였다. 인생은 길어야 할 터인데도 그녀는 몇해후에 나보다 앞서 죽고 말았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에게도 알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그녀가 우리들의 교회에 들어 와서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복귀 받으려고 그녀는 대단히 노력한 사람이었다.
식구들이 점점 늘어나 이제까지 쓰던 방으로는 식구들 전원이 함께 일하면서 지내기가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같은 북학동에 있는 대문이 셋이 나 있는 큰 집으로 옮겼다.
문선생은 그집의 남쪽에 따로 방을 빌렸다. 식구들이 많이 모여서, 부산에 있던 이수경, 김상철과 이창환도 함께 있었다. 이즈음에 유효원 동생 효영씨가 조기 잡이를 하던 차에 금빛 같은 조기를 한 가마니 갖어와 식구들이 포식한 일도 있다. 또 잊을수 없는 일이 하나가 있다.

어느 정치가가 지능이 좀 떨어지는 딸을 한사람 우리들의 교회로 데려고 왔다. 이 교회에  한동안 맡겨 두면 낳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덟살 된 그 아이는 식사를 하고 있노라면 꼭 똥을 싸기 때문에 모두들 큰 일이었다.
그래도 함께 기도를 받던지 하면 기적이 일어 날지도 모르겠다고 우리들도 생각해서 열심히 참고 견디어 봤다. 그러나 1년이 경과해도 상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서 부모들은 그
아이를 데려가고 말았다.

이 무렵 이수경은 우리들 식구의 생활비 때문에 일하러 나가서 사진에 색을 칠하는 작업을 해서 돈을 벌어 온일도 있다. 이창환은 교회의 전도문을 영문으로 작성해서 세계각국의 유명한 인사들, 특히 유명한 목사등 백여명에게 발송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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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다 동쪽 나라에 재림메시아가 왔다. 숭배하자. 의심스러운 자는 기도를 통해서 들어 봅시다. 그리고 문장 끝머리에 이창환 자신의 사진을 붙여서 발송하였다.
이러한 작업으로 아침부터 저녘까지 분주 하였다. 유효원은 매일 원리해설 집필에 몰두하고 있었고 유효민과 나는 줄곧 원리 원본을 베껴 쓰고 있었다. 유효원이 어느때 「이 원리는 모순이 잔뜩 있어서 잘 모르는 곳이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나에게 말했다. 둘이서 문선명에게 철저히 질문 하였더니 그는 대답을 못하였다.

유효원은 뒷일은 하늘에 맡길수 밖에 없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자기류로 집필하였다. 김상
철은 이무렵 영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하게 되어 여권 수속을 하는 서류를 써 달라고 나에게 부탁 하기에 써준 일이 있다. 김재근(대구할머니)이라고 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대구에서 서울로 와서 한 겨울에도 우물가에 가서 냉수를 퍼끼었는 일을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늦으신 분이라서 병이라도 나면 안된다고 염려 하였지만, 무척 건강해서 열심히 견디고 있었다.
이 무렵 부산에서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하던 송도욱이란 사람이 입교 하였다. 병역을 기피하고 있던 김원필은 영도의 송도욱의 집 이층에 방을 하나 빌려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당시 부산에는 식구들은 그리 많지 않으나 서울에서는 낮에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 이순철, 김인주등의 부인 식구가와 있었지만 임영신이란 미망인이 새로 유효민의 전도로 들어 왔다. 그녀에게는 어린딸이 있었는데 부산의 송도욱의 집에 맡겨서 길러 달라고 하였다. 임영신은 식구들의 식사 준비를 돕고 있었다.

이 당시는 식구들의 생활비가 큰 일이었다. 유효민은 본래 사진업을 해서 솜씨도 좋았으므로 시내나 지방을 돌아 다니면서 각지의 여러 유적지를 사진으로 찍어다가, 그것을 푸로마이드로 만들어서 파는 장사를 생각해 냈다. 우선 닥치는대로 해 보니까 예상외로 잘 팔렸으므로 우리들은 푸로마이드 제작에 온 힘을 쏟게 되었다.

나는 사진에 광택을 내는 일을 담당하여 밤중까지 작업을 하였다. 임명신도 부엌일이 끝나면 바로 사진을 씻는 일에 열중하었다. 식구들이 힘을 합해서 푸르마이드를 대량으로 제작 하였다. 이 일이 적중해서 한꺼번에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 식구들의 생활비를 모두 충당 할수 있게 되었다

1954년 5월3일 성동구 북학동 391에 있었던 교회에서 문선생을 중심한 이창환, 유효원, 김상철, 박정화, 유효민의 다섯 사람이 에워싸고 있었다. 드디어 문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전세계에 원리를 포교하기 위한 일을 개시하는 날이 왔다.

우리들은 어떠한 명칭으로 하면 좋을까 하고 의논 하는데 우선 세계의 기독교를 통일 한다고 하는 목적에 알맞게 "세계기독교통일"이라고 하는 머리글자를 붙이기로 하였다. 그 다음을 "심령협회"로 할것인가 신령협회"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논이 있었지만 나는"신령협회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해서 최종적으로 "신령협회"로 결정 된 것이다

이리하여 원리를 내세워서 전세계의 기독교를 통일하려고 하는 종교단체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 統一神靈協會)"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창립되게 된 것이다. 초대협회장에는 여러가지 의논한 결과 이창환이 취임 하였다 그런데 그는 3개월만에 탈퇴하고 말았다.
(주=현재는 5월1일이 창립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5월3일 이었던 것이다.)

 

이화여자대학 사건무렵

 

교수와 학생들의 대거입교

 

서울의 명문교 이화여자대학의 음악교수 양문영*이 입교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녀는 3일간 文씨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더니 기적이 일어나서 성령이 충만한 그녀는 별안간 지금까지 사단에서 가로막했던 벽을 차고 떠들어 대면서 발로 벽을 걷어 차는등 크게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그 후 신당동의 양문영 여사의 집에서 유효원이 매일같이 원리해설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이화여자대학의 기숙사 사감인 한충화가 입교해 왔다. 또 같은 대학의 영문과 교수 최원복과 김영운, 연세대학의 교수 박상래 ,학생인 유경규, 황환채, 오승택도 입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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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서울로 온 식구중에 유신희라고 하는 여성이 있었다. 저 영도집회때 집을 빌려  준 신성묵의 처이다. 그녀는 어느날밤 교회 옆에 방을 빌려살고 있던 文씨의 방을 찾아가 방을 노크하니까 누구냐고 가만히 묻기에 신희입니다 라고 이름 대자 들어오라고 하여 안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복귀의 실천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때에는 이미 복귀를 받았던 김인주가 복귀에 대한것을 귀뜸 하였다. 김인주에게 권유를 받은 유신희는 용기를 내서 복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후에 유신희는 여러 남성 식구들과 복귀를 하였다. 나도 실은 유신희와 복귀를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바로 뒤에 등장하는 김 덕진과도 복귀를 하고, 나아가 김 덕진은 다른 여성과 복귀 하고 그 여성은 또 . .  별안간 70몇 사람의 바퀴가 되고 말았다. 그후 목사가 된 김덕진은 너무나도 난맥을 이룬 통일교회의 섹스를 스스로 고발하고 책으로 해서 발표하겠다고 선언하여 큰 소동이 일기도 하였었다.
(후술)


김덕진(金德振)이란 사나이

 

그 무렵 나는 매일밤 10시경까지 사진의 광택을 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검은 UN군 코트를 입은 청년이 찾아와서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여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물으니까, 김덕진이라고 하며 북쪽의 숭실전문학교의 문과 출신으로, 간첩죄로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을구형 받었으나 판결은 무기징역으로 복역중에 재심에서 무죄가 되어 남쪽의 동촌육군형무소에서 나온 길이라고 한다. 그리고 형무소 안에서 만난 이석빈이란 사람이 문선생에게 전해달라며 "아버님께"라고 쓴 편지 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를 문선생이 있는 양문영의 자택으로 안내 하였다. 그에게는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작곡과 작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입교하자 마자 곧 성가(찬송가)의 작곡과 작사를 하기도 해서 문선생도 그 음악적 재능을 칭찬하고, 식구들 중에서 제1번으로 문선생에게서 양복을 얻어 입는 영광을 맞았다.
식구들도 늘었다. 김찬균, 정린정, 안창성, 강정원, 차만춘, 이소담, 유광렬, 이진태, 박승규, 이월성, 김원민, 황은자, 지생연, 유동회 등이다.

그 다음에 들어온 이는 지원대, 안정국, 김순화, 신미식,정대화, 김주화, 이관선, 이기석, 박봉애, 남궁철, 이영일, 최정순,이인복, 김화영, 김정은, 사길자, 박영숙, 서명진, 이정호, 김영휘 등이다.

교수에 이어서 이화여자대학 학생도 많이 입교 하고 있었으나, 이단적인 신앙을 이유로 14인이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전에 교수들은 사표를 내고 퇴직하고 있었다) 퇴학이 된 학생은 신미식,사길자, 김정은, 서명진, 박승규, 정대화, 박영숙, 박승희, 이계순
정원, 최순화, 김숙자 들이다.


대구에서 또 전기 고문

 

본부교회는 다음해인 1955년 1월 북학동에서 같은 성동구의 흥인동에 있는 새 집으로 이사 하였고, 또 다시 3개월 후인 4월 27일 중구의 장충동으로 옮겼다.
이전하고 얼마 안되는 5월 13일 교회로 치안국의 형사 2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교회에 스며들어 우리들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고 경찰의 수사관도 버티고 있었다. 경찰의 수사에는  꽤 익숙해 있는 편이었지만 이번만은 좀 다르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수사관이 투입되어 있었다.

그러한 긴박감을 알지 못하고 지방에서 온 나이든 여자 식구들은 기가나서 떠들거나 날뛰고 있어 상황을 이야기하고 주의를 한일도 있었다.

대구에 있는 문선생 한테로 가서 이 상황을 보고 하고 금후의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서 나는 서울역으로 나아갔다. 그때 역에는 김영희*가 와 있었고 황환채등이 전송하러 나와 있었다. 나는 김영희가 부산에 가는 목적을 알고 있었으므로 대구까지 함께 가기로 하였다.

앞에서도 기술 하였지만 김영희는 연세대학의 학생시절에 부산의 영도에서 문선명에게 정조를 때앗긴 여성이다. 자세한것은 후술 하겠지만 이때 그녀의 배는 출산 직전이어서 제법 눈에 띄이고 있었다.
연세대 재학중인 오승택도 함께 일본에서 출산을 돕기 위해 부산에서 밀항하려는 참이었다. 그리고 대단한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대구에 도착해서 우선 이요한 목사의 집을 찾았더니 방은 텅비어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서둘러 나왔으나 어디서 지켜보고 있던 형사가 나와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면서 이집에는 무슨 목적으로 찾아 왔느냐. 이목사와는 어떠한 관계이냐. 문선명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느냐 등을 물어 왔다. 신분증명서를 제시 하라고 해서 보여 주었더니 당신이 박정화 인가라고 말하였다.

대구경찰서까지 연행되어 밤새도록 조사를 받았다 그 내용은 나라면 문선생이 있는 거처를 알터이니까 대라고 하는 것이였다. 나는 정말 몰랐으므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라고 말했다. 만약 알았다 하더라도 나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밤 10시경에 연행되어서 아침 10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그때도 밧데리를 양쪽 엄지손가락에 연결하는 전기고문을 받았다 서을에서 한차례, 지금이 두번째였다.
그후 경찰서에서 나와서 들은 이야기지만, 내 바로 뒤에 김안실의 형이 경찰이 있는것을 모르고 이목사를 찾아 왔다가 내가 붙잡혀 간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그때 문선생은 이목사와 대구의 식구들을 데리고 용문산에 가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서 피할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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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로마이드 제작판매

 

이 무렵 유효민의 제안으로 전국울 순회 하면서 명소의 경치나 유적등을 촬영한 사진과 서울의 거리나 배우들을 찍은 사진을 푸로마이드로 해서 판매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말하였다.
사진촬영과 현상기술, 재료구입 등은 본업인 유효민이 담당하고, 암실에서의 작업을 김원필, 유효영, 이수경이 도왔다. 흥인동의 본부교회는 단독 주택 이었으므로 방이 다섯이나  있고, 응접실과 부엌을 겸한 방까지 있었다. 푸로마이드의 제작과 원리강의를 하는 장소로서는 대단히 편리한 곳이었다. 정원에는 나무도 있고 대단히 좋은 집이었다.


이집으로 이사와서 부터 입교하는 사람도 불어나서 통일교회는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그때에 신문이나 소문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통일교회에 한번 들어가면 어찌된 방법인지는 몰라도 2~3 일에 세뇌되어 가족을 버리고 입교하게 된다. 소문에는 교회의 내막을 조사하려고 작은 방에 빨간 불이 켜져 있어서 밤새도록 사람이 드나 드는 것을 보고  저 방이 사람을 홀리게 해서 유혹하는 장소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그 방은 사진제작 하는 암실이었다.


푸로마이드 제작은 밤중에 사진에 광택을 내는 작업을 해서 날이 밝기전 완성해 놓았다. 새벽녘이 되어 통행금지가 해제 되는 것을 기다려서 제일착으로 거리에서 담배 라이타 돌을  행상하는 전쟁 고아들이 와 도매 떼기로 사기 때문에 푸로마이드는 곧 모두 팔려 나가고 말았다.
이렇게 푸로마이드가 잘 팔려서 제법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교회에서는 매일 70-80명 가량의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어서 그 때문에 매일 같이 쌀 한가마 정도의 밥을 해댔다. 당시의 부인 식구들에게는 엄청난 고생이었을 것이고, 식사비도 꽤 많이 들고 있었다.

그러한 경제적인 지원은 전부 이 푸로마이드 판매로 충당하고 있었다. 서울 거리에는 한동안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피난민의 노천상들이 그때까지는 널판지 위에 미국담배를 올려 놓고 팔고 있었는데, 그것 대신에 몇 백 종류나 되는 푸로마이드 사진을 올려놓고  팔고 있을 즈음 노점 상인들이 거리 구석구석에 늘어나 사진 판매수입에 재미보게 되었다.


어떤 날 아침은 광택작업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나가보니까 남자 세사람이 원리를 들으러 왔다고 하면서 서있었고 맨앞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 바로 김인철이었다.


이 사람과는 내가 북조선의 내무성 제2여단에서 해주 중대장을 하고 있을때 잘 알던 사이였다. 그는 운수 주식회사의 해주지점장으로 근무하면서 해주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다. 내가 그 여관에 약 두달동안 투숙하고 있을때, 두 사람은 술 친구가 된 사이였다.


우연히 이러한 곳에서 만 날줄은 정말로 몰랐다 서로 반가워서 어쩔줄을 몰랐다. 서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바도 있었다. 만약 그가 북조선군의 38선 부근에서 대대장을 근무한 나의 전력을 밀고 한다면, 수사당국은 북의 간첩용의자라고 하는  구실로 나를 구속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페를 끼치게 되고 중대한 영향이  될 것이다.
우선 이일을 먼저 문선생에게 보고 하고, 다음은 그의 행동에 주의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인철은 열심히 교회에 다녀서 중요한 간부가 되였고 나의 과거의 일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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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0년 가량 지난뒤 그를 만날 기회가 있을 때, 당시의 나의 심경을 고백해서 서로
간에 크게 웃은 일이 있었다.


3대째의 비서역 송도욱(宋道旭)

 

부산 영도에서 입교한 송도욱 집사는 살충제 행상 방문 소독을 하던 사람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만주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해온 사람이다. 교육은 대단스레 받은것이  없었으나 짜임새 있는 체격, 대나무를 쪼갠듯한 성격에 행동력이 있고 판단력도 있었다.

문선생의 비서역은 우선 내가 오랫동안 맏았었고, 그 뒤를 유효민이 맡아 주었다. 그리고 3대째가 송도욱이 었다.

그는 송비서에서 송장로로 승격, 동시에 문선생과 함께 보좌 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내가 서진 광산에 있을 때 (후술) 그는 문선생의 심부름 와서 온갖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자랑끼(뽐내고자) 어린 태도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잘난
체 하며 큰 소리를 치고 뽐내는 말을 함부로 해서 나는 정석천 장로 앞에서 송장로에게 충고한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지방을 순회할때 순진하고 얌전한 식구들을 놀래키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허풍을 떨지 못하도록 충고를 하였다.
그때의 일이 흡사 어제일 처럼 생각되는데 지금은 송장로도 정장로도 돌아가셧다. 하늘나라에 오르셔서 지금쯤 어떻게 하고 계실까?당시의 식구 중에서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은 서울의 김영도씨로서 해방후 상해에서 귀국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송기주, 조동석, 김병욱,유효
원, 송도욱, 정석천, 유경규, 신정순 양윤신, 김재근, 라순렬, 이기환의 손으로 그 밖에도 부인 식구들이 몇 사람인가 죽었다.

잠시 숨을 돌리며

 

흥인동 교회에서 푸로마이드 사진 작업을 하고 있을 때이다. 프로마이드 판돈 가운데서 500원 정도를 떼어 가지고 토요일 저녁때가 되면 유효영, 나, 이수경 등과 함께 작업의 피로도  풀겸, 동대문 시장으로 나가서 노천에서 부인들이 다라에 돼지고기나 순대를 파는 것을 사 먹었다.

 맛있는 안주감으로 맛있는 소주를 한잔쯤 곁들인다. 그러면 기운이 나는듯 했다. 일에 몰려 피로해지면 토요일이 되면 돼지고기와 순대로 기운을 차리자고 서로 격려하기도 했었다. 그것도 역시 어느덧 엊그제 일 같이 생각이 난다.
정말로 시간의 흐름이란 흐르는 물과 같이 빠르구나 푸로마이드의 제작에는 무엇보다도 유효민의 두뇌와 기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사진 기술에 무지한 나는 푸로마이드의 제작이나 판매 따위는 아이들의 장난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었는데 막상 시작해 보니까 예상외로 수입이 많았다. 또 대량 생산에 필요한 재료 같은 것을 그때 그때 맞추어서 정확하게 요령 있게 구입하는 유효민의 치밀한 계획성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흥인동 시대의 식구들은 교회의 확장을 도모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열심히 작업하는 것으로서 버티어 갔던 것이다.
또 그후 유효민이 발명해서 특허를 얻은 "산탄 공기총"의 대량 생산에도 성공하였다.

이때 들어온 수입은 단위가 틀릴 정도로 커서 몇 십억 이 나 되었다.

지금은 탈퇴해서 식구는  아니지 만, 유효민은 라순열 (지금은 고인)과 결혼하여 36가정의 일원으로서 축복(결혼)을 받은 사람인데 3남매의 아이들이 있다.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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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 체포 사건의 진상

 

문선명의 체포


이화여자대학의 5인의 교수(양문영*, 한충화, 최원복, 김영운, 이정호), 이화여자대학생 14인 뿐만 아니라 연세대학의 교수 박상래등이 대거 입교하면서 부터, 이화여자대학 측에서는 이 사태에 분개해서 수사 기관에 고소하여 그 진상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앞에도 썼지만 1955년 4월 27일에 본부 교회가 장충동으로 이전한 뒤에 5월 13일 검찰에서 수사원 한사람과 치안국 특수 정보과에서 형사 두사람이 교회에 왔다. 그들은 교회에 스며들어 원리 강의를 듣고 그것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또 출입하는 식구들의 신원을 검문도 하고 일상생활에 관해서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 두달 동안 우리 식구들과 침식을 함께 하면서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경찰 출신의 조동석을 통해서 경찰의 수사 방침을 알아 본 결과 문선생을 비롯하여 몇 사람의 간부가 구속 될 것이 예측되었다.
문선생은 삼각산 밑에 임시로 빌린 집에서 박상래와 같이 숨어살고있었는데, 7월1일 최종 방침을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모이게 했다. 나, 유효원, 유효민, 조동석, 노동휘, 이순철, 오명춘, 김인주,신정순 등이 문선생 있는 곳으로 가서 여러 가지 대책을 상의하였다.
그때 이순철은 선생님을 경찰에 넘길 수는 없습니다. 한동안 일본에 가 계시도록 하면 어떨까요? 하고 주장하였다. 자금도 모두 준비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말이 나와서 좀처럼 방침이 서지 못했다. 결국 이번에는 도망칠 수도 없을 것 같으니 우리들이 경찰로 가는 편이 금후를 위해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서 그렇게 결정하였다.
그 무렵 입이 가벼워서 문제가 되었던 김덕진은 이순철, 김인주 두사람이 감시하기로 하고 중구 산림동에 집 한채를 빌려서 살도록 하였다. 나도 그 방에서 3일간 감시역으로서 함께 있었다.
1955년 7월 4일 드디어 문선생이 구속되었다.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두달 이상의 내탐과 수사가 있었다. 치안국 특수 정보과의 경감이담당관이었는데, 우선 당시의 협회장 유효원이 조사를 받았다.

협회장에 대해서는 원리의 내용에 관한 조사가 있었다. 원리의 어떠한 부분이 대학교수나 대학생들에게 학교를 떠나게 하여 통일 교회에 입회하게 하였는가?통일 교회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신앙하고 있는가?
등에 관해서 하루종일 조사를 받았다.
다음에는 내가 조사 받았다. 문선명과의 관계는 언제부터인가?흥남감옥에서 함께 있었을 때의 상황은?등등을 물었으므로 앞에 쓴 바와같이 (제1장) 요약해서 말했다. 전에는 문용명 이었었는데 왜 부산으로 와서부터 문선명으로 개명하였는가?를 물었으나 나로서는 모른다고 대답해 두었다.

우리들이 어떤 죄가 성립하는가를 수사당국이 검토하고 있을 무렵 , 한가지 문제가 떠 올라왔다.
북에서 온 사람들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시민증이 발급되지 못하는 것인데 어째서 문선명은 가지고 있는 것인가? 나이도 속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 조사 때에는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인데, 그후 문선생이 자기의 증명서의 작성 경위에 의해서 추궁되자 매우 곤경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날 나는 치안국으로 출두해서 북학동 교회 시절, 동회 사무장에게 부탁해서 신청 서류를 준비하고, 내가 선생의 시민증을 만들어 냈다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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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됫돈을 주어서 매수해 가지고 "위조한 서류"로 발행된 것이다. 내 시민증도 그때 만들었다. 나이를 속였다는 것은 병역기피 때문이었다. 뿐만아니라 거기서 많은 신자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드는 비용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고 질문을 받았다.
·프로마이드"를 제작 · 판매해서 그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 다음에는 경제담당은 누구이며 조직은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 고 물었다.
경제의 담당자는 나 박정화이고, 선생의 지시에 따라 모든것을 처리해 왔다. 푸로마이드에 관해서는 사진관을 했던 유효민이 재료의 구입이나 제작을 위해서 전력을 다 하였고, 요효영, 김원필, 이수경, 박정화등이 도와 주워서 아침까지 완성해 놓으면 새벽녘에 소매인들이 와서 모두 도매로 떼어 갔다. 그 돈을 생활비로 쓸수가 있었다.

그후 드디어 간통문제(혼음관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신자인 부인네들이 박정화는 대사단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 고 물었을 때에는 정말 난처하였다. 내가 잠자코 있으려니까 담당관이 큰소리로 역정을 내면서 당신은 문선명과 오랫동안 같이 있었으니까 그가 하는 행위를 다 보았을 것이다.
그것을 모두 말하시오. 문선명은 재림 메시아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것처럼 그도 죄값으로 죽는다고 하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정말인가 대답하시오 하며 책상을 치며 윽박질렀다.
나는 내가 대사단이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들은바가 없다. 식구들의 부인네들이 어째서 그러한 말을 했는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고 대답했다. 그했더니 담당관은 대구에서 온 신자의 김채근 할머니가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을 자기들의 조사관이 듣고 왔다 당신이 모를이가 없다 고 말했다.

이 문제는 그 다음날 대구 할머니가 하나넘의 계시를 받았기 때플에 그대로 말한것 뿐이다라고 하는 것을 자진해서 치안국에 출두하여 담당관에게 설명하였다.


이무렵 박정화는 대사단이다 라는 소리가 일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문선명의 일을 속속드리 알고도 남음이 있는 내가, 만약 수사당국에 말한다면 문선명은 절대로 온전하게 있을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재림 메시아인 문선생"은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며, 그래서 그 열쇠를 쥐고 있는 박정화는 사단이라고 순진한 할머니들의 발상이었다.

그만큼 문선명의 구속은 식구들에게는 위기감을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 7장의 유효민의 항목 참조)
그 참뜻을 알았다면 담당관은 더욱 철저하게 집중적으로 나에게 불도록(사실을) 하였을 것이다.


조사의 촛점은 혼음관계


혼음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엄하게 집중적인 조사가 계속되었다.

담당관은 점점 깊은 곳을  찾아 내게 되어, 당신들의 원리에 따르면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성교를 하고 해와는 또 다시 아담과 성교를 함으로서 원죄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원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죄없는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 이세상에 나타나서 그사람에 의한 성교가 행해지면 그 죄가 깨끗해진다. 요컨데 복귀 한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정말인가?

그 원리에 따라서 문선명은 여자들에게 자기가 재림 메시아니까, 자기와 섹스를 함으로서 복귀된 인간이 된다고 말하여 많은 여성 특히 유부녀들과 섹스를 하고 있는것 같다.

당신은 그것을 목격한 일이 있는가"고 추궁당했다. 물른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원리문제에 관해서는 협회장의 유효원이 담당하고 있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그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경제부문을 담당하고 있어서 그러한 일은 생각해 본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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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생을 감옥에 있을 무렵부터 믿고 따랐을 뿐이다. 많은 여성 특히 유부녀와 섹스를 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본일도 들은 일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랬더니 담당관은, 당신들의교회에는 두갈래 의견이 있는것 같다.

하나는 원리를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들, 문선명과의 섹스로 피를 바꿔 넣음으로 해서 진정한 복귀가 되어 죄와는 관계가 없는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난다. 이와같은 부부에게서 태어난 자손들이 이세상을 지배 할 때에만, 완전복귀된 에덴의 동산과 같이 죄없는 세상이 된다고 하는 것을 믿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문선명도 우리들과 같은 인간으로서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문경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째서 그가 죄없는 원죄와 관계가 없는 재림메시아가 되어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할 수 있어서 복귀 시킬 수가 있는가 라고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먼 문선명도 결국 원죄를 이어받은 타락한 인간이지, 하나님은아니며, 복귀(섹스)로 사람을 구제한다고 하는 따위의 일은 할 수 없다 고 하는 의견인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섹스로 복귀가 된다" 않된다 하는 이야기는 누군가 꾸며내서 퍼뜨린 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없다.
문선생은 북한에 있을때에 대관절 무엇을 했는가, 또 남쪽으로 피난해 와서 부산이나, 대구에서도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은 일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일이었던가 알고 있는가?

문선명은 북쪽에 계실때 기독교의 성경원리를 연구하고 있었고, 새로운 진리를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기성교회의 신자들이 많이 몰려왔다.

그 신자들의 가족이 남쪽으로 피난와서 문선생이 부산, 대구등지에서 성경 원리의 이야기를 전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수사기관에 통고해서 그 때문에 다소의 문제가 생긴것 같다.
그렇다면 문선명에게는 처자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거요.

부인은 최 선길과 장남인 성진군이 있오, 극히 최근까지 부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서울에 와 있을거요. 그 부인이 문선명이 여러 여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산에서도 그랬지만, 또 서울에 와서 집안살림을 모두 때리치워 버리고 여인들이 오는 것을 방해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가?

이것은 혼음관계의 증거가 될만한것 아닌가?

부인이 부산에서 서울로와 그러한 짓을 한 것은 사실 이지만 단지 신앙의 문제로 일어난 것이지 절대로 섹스관계라고 하는 것은 있을수 없다. 그러한 사실은 없다.


간부 5인을 기소

 

나의 다음으로 남자 식구로서 유효민과 유효영이 조사를 받았다. 김원필이 그 다음에 조사를 받았는데 그는 지금까지 병역을 기피하고 있어서 그것이 문제가 됐다.

그리고 부인 식구들이 조사가 시작되었다. 옥상현이 맨 먼저 조사를 받았다. 여성의 조사는 낮에만 하였고, 하루에 한사람씩 조사해 갔다.
신정순*, 오영춘*, 양윤신등이 차례로 조사를 받았다 그내용은 모두혼음관계 (섹스관계)의 사실 수사였다.

5일에는 김원필이 구속되고 6일에는 유효민 유효영이 13일에는 유효원이 그리고 18일에는 여자인 이성화가 구속되었다.

결국 문선생을 포함해서 다섯분이 구속된 셈 이다.
그 당시 교회의 섭외담당은 노정우, 조동석 두사람이 담당하고 있었다. 조동석이 치안국에 나아가 박 정화선생이 구속되면 몇십명이나 되는 식구들의 생활에 영향이 있으니까 우선 보류해 주었으면 한다.

검찰에서 출두명령이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출두시킬 터이니라고 약속한 덕에 나는 구속되지 않았다.
이때 문선생은 중부경찰서의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중부 경찰서에는 김덕진의 처남 김선환이 경찰관으로 있어서 비교적 간단하게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이 성화*는 아직 젊었기 때문에 담당관의 혼음관계 조사에서 유도심문에 걸려 구속되게 되었으나, 부친이 끈질긴 교섭으로 기소는 되지 않고 일주일 후에는 석방 되었다.

1955년 7월 29일 남자 5인은 전원 병역기피만으로 기소되었다.
검찰에서 출두명령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조 동석은 나에게로 와서 치안국에는 미국에서거짓말 탐지기가 도입되어 있어서 혹시 박선생이 치안국에 또 끌려가서 조사를 받게 된다면 이제까지 숨겨져 있던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이 폭로된다면 큰일이니까 재판이 끝날때까지 어디던지 숨어 있는것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선생님도 꼭 찬성하실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빨리 숨을것을 제안 하였다.
나는 생각끝에 그 제안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수사의 손길에서 도피


그리고 문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장충동교회의 문선생의 책상 서랍속에 5만원짜리 수표가 있는데 여차할 때에는 쓰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마산으로 가서 마산 국립결핵요양원에 있는 양윤신을 찾아 갔다.
마산요양원에는 그 당시 양윤신이 간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약 보름동안 거기서 식객 노릇을 했다.
내가 마산에 있을때, 별안간 이원주라고 하는 사람이 그의 동생인 이덕순, 부산에서 온 신성묵과 박봉식, 거기에다가 양윤신의 친딸 김정숙 등과 함께 찾아왔다. 모두 우리들의 교회의 교인들이었다.
우리들은 언제나 모이면 서울서의 문선생과 간부들의 재판에 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열흘 정도 지나고 나서 이원주는 어디론가 가 버렸는데 한참 뒤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이원주가 별안간 자기만이 재림 메시아 이고, 문선명은 재림 메시아가 아니다 라고 말하고 나선것이다.

그의 집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전부 믿었고 낮이나 밤이나 울면서 기도하였다.
이원주는 원리를 악용해서 양여사의 딸 김정숙을 비롯하여 여러명의 여성과 실제로 복귀의 섹스를 하면서 하늘의 원한을 풀어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등 떠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여사는 혼비백산해서 요양원 일도 못하게 되어 그 요양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가 서울로 집을 빌려서 이사 하였으므로 나도 대구로 이동하였다.
대구로 이사는 하였으나 여기에도 교회가 있어서 도망해서 숨어 있는 몸이라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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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친척이 살고 있는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여기서 신문을 읽으면서 서울 지방검찰청의 재판동향을 알수 밖에 없었다.
1955년 9월 20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윤학로 재판장, 강서룡 검사에 의한 일심공판이 열렸고, 같은해 10월 4일에 결심공판에서 문선생은 무죄로 선고되었다.

이 보도를 신문에서 읽고 문선생을 모신 사람으로서 무척 반가웠다. 유효원은 벌금 오천원 유효민, 유효영 두사람은 제2국민병법위반 (병역기피죄)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어 석방되었다. 김원필만이 병역기피죄로 징역 1년의 실형을 받았다.

이때의 조사목적은, 복귀라고 하는 혼음(섹스)의 사실관계의 입증이었다.

그러나 부인 식구들이 자기들의 부끄1러운 이야기를 할 리가 없고, 그 남편들도 또 남자의 체면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문 선명을 고소하지 않았다. 결국 관계자 전원이 위증하였기 때문에 문 선명은 살아난 것이다.

부인 식구들이 문 선명과 섹스관계에 있었던 것은 물론 사실이다.

 

 

제4장 희생당한 여인들

 

 

대공로자 옥 상현의 말로

 


전항까지 나는 당시의 사실들을 일기나 메모를 기초로하여 기술하였다. 경찰둥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서 겨우 살려놓은 몇권의 일기도 이제와서는 귀중한 기록이다.

옥중에서 재림 메시아라고 믿고 "선생"이라고 부르며 맹종해온 나의 어리석은 발자취나 심정을 모두 기술해서 고백했다. 글 속에 등장하는 "문선명 선생"의 행동은 모두 사실이다.

우직한 군인이었던 나는 "선생"과의 약속을 지켜서 북쪽에 부모도 처도 다섯명의 아이들도 남겨두고 남하해서 "선생"의 충실한 분신으로서 노력해 왔다.

그런데 "선생"측에서 어느날 별안간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는 제자를 배신한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나이 였는지도 모른다

마을에서 쪽 떨어진 깊은 산속의 광산 사장이란 직함이 붙여져서 돌아치게 한 나는 몇해 동안을 보수도 없이 일만 하였다. 그리고 나와 교대라도 하는 것처럼 등장해서 통일 교회속에서 차츰 세력을 키워가는 군사정권의 무엇인가 괴상한 냄새를 옆눈질로 보았다.


문선명 선생은 어느새 내마음 속에서 더 이상 목숨을 바쳐서 지킬 가치도 없는 단순한 문선명으로 되버리고 말았다.
전항까지는 그래도 "문씨" 라고 쓸 수가 없어서 "선생"으로 기술하였으나, 이항부터는 모두  "문 용명" , "문 선명"으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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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으로 짠 양말

 

이제와서 생각하면 맨처음에 문 선명과 관련이 있던 여성으로서 인상에 남는것은 옥 상현*이었다. 흥남 감옥중에 있었던 문 용명(당시)에게서 자주 들었다.
그 당시는 평양에서 흥남까지의 차표를 입수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 파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옥 상현은 차표를 사기 위해서 밤새도록 늘어서서 문 용명 을 면회하기 위해서 고생끝에 손에 넣을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문 용명에게 차입하기 위해서 미수가루를 정성껏 만들고, 겨울이 되면 속옷을 털실로 짜고 습을 넣어서 수용소까지 그 먼 길을 면회하러 다녓다. 여름에는 미수가루와 엿을  만들어서 때로는, 엿을 말랑말랑하게 해서 미수가루에 개가지고 가져오기도 하고, 삼베 옷을 만들어 오기도 하였다.

영양을 위해서 간유를 사 먹으라고 돈까지 주고 갔다고 한다. 자기와 피도 섞여있지 않은 사람에게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남득이 되지 않았다. 내·사정과 비교해 본다면 나에게는 어머니도 계시고 처도 있지만, 3개월이나 4개월에 한번 면회오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녀는 자주 면회를 와서 언제나 여러가지 준비물을 가져오는 데는 나는 놀랄수 밖에 없었다.
나와 문 용명은 감옥 안에서 서로 아무일이고 의논하고 무엇이고 숨기는 것이 없었다. 어느날 그가 말했다.

"옥 상현이 자기의 머리카락을 짤라서 털실과 함께 짠 양말을 가져다 주었다. "

옛말에 진정한 은혜를 받은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의 머리카락을 짤라서 그것으로 신을 삼아 은혜에 보답하였다고 했다지만 그러한 사람이 실제로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머리가 숙여질 뿐이었다.

그 여성은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헌신적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문 용명 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가 가져온 미수가루등 을 나누어 주어서 그저 고맙게 먹었을 따름이다.

6 · 25동란이 시작되고 UN군의 북진으로 문용명은 10월 14일(1950) 출옥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죄수이였던 문 정빈과 함께 걸어서 열흘만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후, 나는 처음으로 옥상현의 집에서 그녀와 만났다. 옥상현의 자택은 상당한 부자집 같았고, 큰 마당이 있고, 집이 여러채 틀어서 있었다. 딸인 우정애, 우정순 자매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문씨의 신자였던 김원필은 사단의 집(자기집을 지칭)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며
식객으로 있었다.

옥상현이 치워준 방에서 문용명, 나, 문정빈, 김원필의 네 사람이 숙박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닷새쯤 지낼 무렵, 서울로 피나했던 가족 전원이 돌아왔다.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아침을 마치고 옥 상현과 남편인 우 하섭 장로가 성경을 들고 인사차 왔다.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이니 함께 예배를 올립시다 라고 말했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였으며, 우하섭(禹夏燮) 장로가 성경을 낭독하고 설교하였다.
그는 평양의 장대현 교회의 장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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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우하설 장로의 탄식

 

그날 오후 우장로가 나에게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그의 방으로 갔다. 자기는 평양고무연맹의 이사장인데 당신의 동서에 해당하는 정황고무의 최내봉씨를 잘 알고 있다. 서로 절친한 사이다

얘기거리는 딴것이 아니고, 처와 문 용명의 관계되는 일이었다. 자기는 교회의 장로이고, 처인 옥 상현도 권사로서 교회에 열심히 시무하고 있는데 남쪽에서 왔다고 하는 청년이 이상스런 설교를 하고서 부터, 처가 몇주일간 이 집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원만한 부부로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는데 별안간 처가 자기와 동침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이들은 다 자랐고 기독교의 장로집에서 이러한 이상한 것을 겉으로 들어내 놓고 따질수도 없고해서 처음에는 오랜기간에 걸쳐 설득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아무러 해도 허사였다고 한다.

훌릉했던 처가 틈만나면 돈을 챙겨가지고 문 용명을 위해서 나갔다.
경제적 여유도 있고 해서 조금쯤은 어떠냐 싶어서 처음에는 생각만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빨리 부부가 전과같이 사이좋게 살고 싶어서 그것을 기대하고 열심히 기도하였으나 헛일 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청년을 비롯하여 저의 처까지 전원이 경찰에 구속 되고 말았다.
우장로는 평양 시내에서는 얼굴도 잘 알려져 있다. 체면도 있고 해서 경찰에 가서 구속한  이유를 조사였더니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 김종화라고 하는 유부녀와 그 청년이 "어린양 잔치"라고 하며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어서 이웃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구속되게 된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았다.

우장로는 자기의 얼굴이 있어서 겉으로는 나서지 못하고 조카에게 부탁해 경찰과 연락을  하고 처인 옥 상현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그 청년이 문 용명인데 자기는 그가 감옥에 있으니까 안심하고 있었다. 처가 저렇게 먼 흥남 수용소 까지 면회를 다니고 있어서 처음에는 그만두도록 설득한 일도 있었지만 결국은 듣지 않아서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박형도 예수를 믿는 크리스챤 이니까 문 용명과 같은 사나이와 함께 행동하면 언젠가는 벌을 받은것은 물론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매우 힘들게 될것이오. 문 용명 같은 사람과는 함께 행동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문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재산도

 

문 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채산도 다 바쳐온 옥 상현은 6 · 25동란으로 남쪽으로 피난해 부산에 들어가 개명한 문 선명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면서 굶주렸던 문 선명의 생활기반을 마련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서울 흥인동으로 교회가 이사한 후의 일이다.
푸로마이드 제작에 성공해서 경제적인 상황도 상당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합숙한 교인들은 전원이 홀아비 살림이어서 옥상현이 선두가 되어 세탁을 하고 있었다.
식구들 양복이나 속옷 등을 넣어 두었다 각자가 자기의 것을 자기
의 상자에서 꺼내서 갈아입고 있었는데, 그 상자가 자그만치 24개나 되었다. 그 때의 옥상현의 고생은 필 설로 다할수 없을 것이었다고 생각 된다.
훨씬 뒤의 이야기인데, 문선명과 결별하고나서 나는 부산으로 가서 주택건설 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권 창정이란 박사가 찾아왔다.
자기도 집을 한체사고 싶은데 살수 있느냐고 하여 나는 그의 신청을 받아 들였고, 그는신청금을 내고 돌아갔다. 그후에 옥 상현이 찾아와서 자기의 둘째 아들을 건설현장에 써줄  수 없느냐고 한다. 사원은 필요치 않았지만 옥 상현의 부탁이기도 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부터 그 아들을 고용해서 1년 남짓 함께 일 한일이 있다.

주택건설이 끝날 무렵 목사가 된 우 장로의 말에 의하면 「집사람 옥 상현에게 마음 돌리라고 일렀지만 허사였고 결국 이혼 할수 밖에 없었다. 그후 자기는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어 지금 조그만 교회에 시무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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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와 이흔후 교회 부인 집사와 재혼 했단다. 또 사위인 권창정 박사는 자기 사위인데, 사위가 신청한 주택은 자기의 집인데 좀 보여달라고 하여 완성된 주택을 보여주며 장시간 이야기 했다.

문선명이 처 최선길이 남편이 여자관계로 행패를 부려 그주위에 있기가 거북 스럽게 됐다. 그래서 초창기 문선명의 됫바라지는 옥상현이가 맡아했다.
부산 수정동 교회시절에는 네번씩이나 쫓겨 다니게 되었다. 그것은본처 최선길이 문선명이 있는 곳에 모여드는 부인 식구를 질투하고 집에 가재도구를 팔아 치우고 모여드는 사람들을내 몰기 때문에 하는수 없이 다른데로 뺑소니 이사갈 수 밖에 없었다.
새로 이사 가면 문선명 처가 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끈질기게 추적 하다가 기발한 생각을  하였다. 옥상현 친척집에 가정부에게 돈을 주고 옥상현이 찾아오면 그뒤를 밝게 하여 미행에 성공했었다. 그것이 성공해서 새집을 찾아내 가지고 또 한차례 반복해서 큰 소란을 피웠다.

결국에는 식구들 전원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게 된 것이다.
그때 부인은 두번 다시 큰소란은 떨지 않겠다고 하는 것으로서 석방되었다. 그후로는 교회에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는 약속이었으나, 그 뒤 수정동 집에서도 최선길 부인은  또 같은 짓을 했다. 가재도구는 물론 집까지 팔아 치우고 문 선명은 서울로 도망쳐 버렸다.

이번에는 서울의 청진동의 작은 집으로 거점을 옮겼으나 어떻게 알아 냈는지 이집에도 최부인이 찾어와서 또 똑같이 가재도구는 물론 문 선명의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문 선명이 원리 원본책도 집어 던지고 도망친 것은 이때 일이다.
그 때 문 선명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옥 상현은 문 선명이 없어져서 무척 걱정하였다. 내가 혼자서 문 선명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니까 밤중에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에서 내 소매를 잡고 함께 가고 싶다라고 울었으나 나는 거절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 일 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서울에서는 문선명에게 체포영장이 떨어져서 옥 상현을 데리고 갔다가 도중에서 경찰에게 심문이라도 받는다면 큰 일이어서 할수 없었던 것이다.
옥 상현은 한동안 대구 교회에서 살면서 문 선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유 효원을 부산에서 서올로 데리고 와서 북학동에 방을 빌렸을때, 대구에 있는 옥 상현을 서울로 불렀다.

그때부터 또 그녀는 문 선명과 식구들의 생활을 몽땅 돌보게 되었다.
 

7·4사건으로 문 선명이 경찰에 구속되었을 때의 옥 상현의 슬퍼하는 모습은 참아 볼수가 없을 정도였다.
매일 단식하고 기도하며 마음속으로 부터 슬퍼하며 우는 모습은 옆에서 보고 있는 우리들도 머리가 숙여 질 것 같았다.
그후 청파동으로 이사한 후에도 쪽 교회의 살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동안 교회를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옥 상현은 교회 에서 쫓겨나고 없었다.
 

어느날 유 효민에게 옥 상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옥 상현이 유 효민에게로 와서 돈을 좀 빌려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옥 상현의 딸인 우 정애양이 와서 또 돈을 백 칠십만원만 빌려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었다는 것이다.

돈을 빌려 주었으나 갚아주지 않더라고 하는 것과 옥 상현은 그후  몇 차례나 돈을 꾸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걸어 왔지만 그 이상은 빌려 줄 수가 없어서 거절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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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해도 갈 곳이 없다.

 


옥 상현은 1946년 11월 6일 48세 때에 평양에서 문 선명과 만났다,

문 선명 은 그때 27세로 21세나 연상이 었다.

북으로 갔던 문 선명의 복귀원리를 믿고 육체관계를 가졌다. 제일 최초의 마리아 이다.
 

그 당시부터 문 선명을 따라서 약 40년간 몸도 마음도 재산도 바쳐서 보살펴 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 터에 강산이 네번이나 바뀌는 세월이었다. 그렇게 오랜동안 문 선명의 옆에서 시종을 들던 사람이었다.
한 순간도 문 선명과 떨어져서는 못 살아갈 것 같은 옥 상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옥 상현의 사정을 들어보면 교회가 노인 식구들을 전부 내쫓기로 하였기 때문에 그녀도 30수년간 다니던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교회에서 쫓겨날때, 단 일천만원의 돈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장사 밑천도 되지 못하는 금액이다.

딸 내외에게 주택자금의 일부로 빌려준것 같은데, 먼 곳에서는 교회에도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교회에 다니기 위해서, 교회 근처에 작은 방을 하나 빌려서 거기서 살고 있
다고 하는데 참으로 어이 없고 마음 아픈 이야기였다.

만약 내가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어서 사업이라도 하고 있었더라면, 살만한 집 한채 정도는 마련해 주고 싶고, 매달 적어도 생활비 정도의 돈을 보내주고 싶었다. 아흔몇살이나 되는 큰 공로자가 교회 떠난 사람에게 돈을 빌리러 다닌다니 눈물이 나을 정도로 불쌍한 이야기가 아닌가?

1985년 8월 16일 일승일(一勝一)을 선언하였다. 과거의 모든 죄를 전부 용서하고 사단을 복종시켜 그후에는, 사단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상으로 복귀시켜 모든 축복이 통일교회의 식구들에게 가져와 준다고 본부 교회의 송 영석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이야기 보다는 우선 옥 상현과 같은 사람에게 집 한채 라도 주워서 생활에 곤란하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라고 생각하였다.

옟날, 흥남의 옥중에서, 문 선명에게서 원리나 "원화원이상"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가슴이 벅차서 그것이 어느때 쯤 되는 것 인가요 라고 물었다.

그때 문 선명이 "7년후에는 그 시기가 온다"고 대답하던 것을 어제 일 처럼 기억 하고 있다.

그로부터 벌써 40년이 지났다.

분명히 문 선명 자신은 큰 돈을 벌어 놓았을지 모르지만 꿈같은 이야기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1993년 5월경 이었다.

유 효민으로부터 나에게 연락이 있었는데 옥 상현이 지금 인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중인데 문병을 가자고 하는 것이다.

나와 유 효민은 인천 가좌동"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서 옥 상현을 문병하고 왔다. 올해에 96세라고 한다.
이미 병은 다 나아서 건강 하였으므로 병원에서도 퇴원하라고 말하고 있다지만 퇴원해도갈 곳이 없어서 병원에 눌러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 효민이 돈을 대서, 아파트를 빌려서 퇴원 시키고저 하였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통일 교회측이 서둘러 방을 빌려서 퇴원시키고 말았다.

문 선명을 일생동안 떠 받쳐온 옥 상현의 노후가 이렇게도 비참하게 된 것을 보니까 정말로 슬펏다.

그러나 옥 상현 뿐만 아니라 이와같이 희생된 사람은 아직도 몇백명이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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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봉식과 오 명춘

 

부부가 문 선명에게 헌신


내가 문 선명과 함께 부산 영도로 신성묵, 유 신회 부부의 집을 찾아 간 것은 1953년 12월  24일이었다. 새로 입교한 사람은 유 효원, 유 효민,유 효영, 신 성묵 부부, 김 관성, 최 집사
등, 섬유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최집사는 3개월 후에는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송 도욱, 박 봉식 부부가 들어 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본래 신앙이 돈독한 사람 들이어서 다음해 봄, 송부처는 서올로 올라와서 교회의 헌신자가 되었다.
송집사는 그리 교육은 받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튼튼한 몸매를 하고 있는 커다란 사나이로 대쪽을 쪼갠듯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등 여러가지 일을 해 온 사람이었다. "해방"후 귀국해서 부산에서 박 봉식과 결혼하였다.
 

원만한 부부생활로 딸이 하나 태어났다. 세사람이 생활하기 위해서 송 도욱은 가정 방문을 하면서, 살충제 약을 팔기도 하고, 약을 뿌리기도 하였다.

처의 박 봉식은 부산의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원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장사를 집어치우고 부부가 문 선명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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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집은 작은 판자집이었는데, 이층에 방이 하나 비어 있어서 김 원필이 거기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끔 김 원필을 찾아 갔었다.

서울에서 부산간 기차 여행에 터널을지날때는 석탄연기가 들어와서 양복이 그 끄럼으로 새까맣게 돼버린다. 어느 때인가는 내가 입고 있던 스프링 코트가 베이지 빛이었는데 검정색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박 봉식은 밤중에 그렇게 새까맣게 된 코트를 세탁해서 말려 가지고, 아침에 서울로 돌아갈 무렵에는 새옷과 똑같이 빳빳하게 입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을수가 없다.

송 장로 부부의 딸은 매우 성격이 활발하여서 문 선명이 그녀가 마음에 들어 그녀에게 가야금을 사주어 배우게 했다. 그리고 교회의 모임이라던가 친목을 위한 식구들의 모임이 있을때는 그녀에게 가야금을 타고 창을 부르게 했다.
그후 어떤 청년과 열열한 연애 중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축복해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결국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 당시 처음에는 내가 비서역으로
문 선명과 함께 돌아 다녔는데 유 효민이 입교하고, 나서부터는 그가 비서역이 되었다. 그후, 문 선명은 그 비서역을 유 효민으로부터 송 도욱으로 바꾸고. 또 송집사는 장로로 승진하였다.


남편 송도욱의 불륜

 

서울로 올라 온 박봉식 은 경상남도 거 창을 비 롯한 각지 에서 통일교회의 원리를 전도하는 순회전도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남편인 송장로에게 큰 문제가 일어 나게 되었다.
그 무렵 서진 광산에 있던 나는 볼일이 있어 군산에 갔다. 김모에게사정을 설명하고 월명동에 있던 김모 집에 약 일주일동안 머물러 있은 일이 있었다. 이집은 군산의 교회로도 쓰고 있어서 김모씨의 부인과는 전부터 아는 사이 였다.

닷새째 되던 어느날, 밖에서 볼일을 마치고 김모의 집으로 돌아가니까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부인이 정신적으로 약간 이상한 상태로 되어 있어서, 「자기를 복귀시켜 달라」고 나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남자를 보면 누구에게나 「복귀하고 싶다」고 중얼대고 있었다. 원리 이야기에 열중하게 되면, 이러한 상황으로 되는것은 자주있던 일이었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나는 몇번이고 이와같은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 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 광산으로 돌아오자 마자 서울의 유효원협회장에게 연락을 하였다. 그래서 송 장로가 군산으로 나가서 부인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 갔다. 노량진(교회를 떠난 임영신 집)집이 있어서 거기서 부인의 병을 치료하기로 하였다. 송장로 혼자서는 그녀를 돌 볼 수 없기 때문에 오명춘과 함께 지내면서 돌보기로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송장로와 오명춘과는 서로 좋아하게 되고 말았다. 부인은 회복 되었으나 송장로와 오집사는 서로가 헤어질수 없는 관계가 되어 있어서 결국은 문선명에게서 축복을 받고 함께 지내게 되었다.


탁월한 인격자 박봉식

 

나는 박봉식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원리에서부터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송도욱과 박봉식은 부부로서 문선명한테 와서 식구가 된것 이다. 송장로는 문선명의 비서가 되었고, 박집사는 그때까지 하던 집 일을 모두 걷어치우고 전도에만 전념하였다.

문선명이 축복을 하는 것이라면 박집사와 송장로가 축복을 받는것이 상식적으로나 원리적으로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오집사와 송장로가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두사람의 동거를 인정 했다고 하는것이 되지 않는가. 이것은 여러가지 면으로 모순되고 있다.
문선명 이 축복을 하였다고 하니까 달리 아무말도 말할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박집사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문제였다 망연하게 어깨를 떨군 그녀의 심정을 살필 수 있다. 축복을 받은 후, 한동안 지나서 송 장로는 간 암에 걸려서 대단히 고생스러운 생활을 보냈으며, 수술을 받았으나 개복한 때에는 이미 상당히 진전되어 있어서 배를 꿰맬수도 없는 상태에서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박집사가 임종하는 옆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듣고, 나는 그녀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송 장로가 젊은 여자와 축복을 받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죽음의 자리 옆에 있었다고 하니, 현여라고 해야 옳을지, 열녀라고 해야 옳을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송장로가 죽고 난 뒤에, 함께 축복을 받았던 오집사도 병이 들어 꿈속에 송 장로가 나타나서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고 신음 하였다고 한다.
이, 병이든 오집사를 ,박집사가 또 몇달동안 함께 살면서 간병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저 머리가 숙여 질뿐이었다.


큰 돈을 바친 오명춘


문선명은 옥상현 등과 함께 부산에서 네차례나 집을 옮겨 다녓는데, 이때의 비용은 모두 오명춘 집사가 내 준 것이었다.

오집사는 장리욱박사의 친척이나, 김안실 같은분에게도 전도해서 입교하게 하였고, 이순철도 신정순도 신정순의 딸 이성화 성례와 양윤신에게도 전도하였다.
교회의 초기에 매우 중요했던 부인 간부의 대부분은 오집사가 전도한사람들이다.
그 후, 문선명이 이순철의 복귀라고 말하며,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을 때에, 집을 빌릴 돈도 없었는데, 오 집사가 신당동에 사는 자기의 매제에게 돈을 건네 주며, 문선명이 살만한  방을 주선해 주었다.
이화대학사건이 터져서 문선명을 위시하여 간부들이 구속되었는데 이때의 뒷바라지도 오집사가 맡았었다.

그 때문에, 자기의 집을 팔아서 그 대금 오백만원을 고스란히 문선명에게 드려 미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문선명이 구속된 뒤에 섭외비를 염출하기 위해서 조그마한 가계를 원효로에다 열고 신정순등과 함께 경 영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온 이익으로 문선명이나 간부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문선명이나 내가 돈이 필요하게 되면 반드시 오집사가 마련해 주었다. 부산의 영도로 처음에 갔을 때도 그러하였다.
그 당시 문선명은 한푼도 없어서 곤경에 있을때 오집사가 여비를 마련해서 가져다 주었고, 그 돈으로 부산으로 갈수 있었고, 유씨네 삼형제가 입교하게 되면서 부터 교회의 기초가 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오명춘은 그 후 미국으로 가서 의사가 된 아들한테서 살고 있었는데 83년에 한국에 돌아 왔을때, 오명춘은 딸 장혜숙에게 주려고 응담을 하나 가지고 왔다. 그 당시로서는 백오십만원 상당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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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효민을 통해서, 딸이 장혜숙의 집으로 오도록 전달이 왔다.

찾아 갔더니 그 웅담을 나에게 건네주며 딸에게는 또 기회가 있으면 사서 줄수 있으니까 우선 지금은 이것을 잡수시고 기운을 차려 보십시오. 박선생님은 병환이 나서도 필요한 사람 이니까 이것을 드리는 것이에요 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문선명이나 교회와 나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문선생은 박선생님을 더
욱 아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선생은 지금 서울에 계실 터이니까 두 분이서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라고 약속해 주었다.
그때 옛날 자기집을 팔아서 조달한 오백만원은 지금첫 한푼도 갚아 주지 않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당시의 오백만원은 지금으로서는 오천만원 이상이 되는 셈이다.

나는 웅담을 고맙게 받아, 그것을 먹고나서 한달만에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명춘은 여러가지로 노력해 주었으나, 물론 문선명한테서는 전화도 없었다.

이와 같이 최초의 교회의 식구들은 함께 고생해 온 일도 있어서 서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도와주곤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만 잘난체하고 있는 문선명은, 원리의 공론만을 앞세우고 인간성이라고 하는것은 찾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식모살이라도 해서 살아야지


그런데 옥상현이 행적도 비쳤지만 본부교회는 몸과 마음을 몽땅 문선명과 교회에 바치고, 돈도 집도 없는 "박봉식"을 나가라고 내 몰았다. 그 후 박봉식은 갈 곳이 없어서 대단히 불쌍한 지경이 되었다.

박봉식은 청평 통일교 수련소로 가서 산에 천막을 치고 기도 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몇일이 못가서 그것을 안 수련소 관리인이 와서 또 몰아내고 말았다고 한다. 박봉식은 할 수 없이 다시 시내로 나와서 먹고 살기위한 참기름 장사를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선 교회의 간부의 집을 찾았다. 원식구인 박봉식이 부탁하면 한집에서 한명쯤이야 참기름을 사 줄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 다녔던 것이다. 맨 처음에 협회장 부인 한테 가서 참기름 한병을 내 놓고 진짜 참기름이니 시장에서 파는 값으로 한 병만 사달라고 부탁  하였다.

그했더니 그 부인이 통일교회의 식구가 참기름 따위나 팔다니 너무나 창피하니까 그만두라고 말하며, 박봉식을 내 쫓아버렸다.

그리고 또 원협회장의 집을 찾아 갔더니, 먼저 집에서 당한것과 같이 문전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박봉식은 통일교회 간부들에게는 사랑이라고 하는것은 한조각도 없는 참으로 냉정한 사람들이다 라고 한숨 지었다.
 

그래서 협회장의 부인이 두 사람이나 다 거절하는 것을 보면 다른곳에 간들 어차피 헛수고 일것이라고 참기름 장사를 체넘해 버리고 말았다. 살어가기 위해서는 통일교회 따위를 기대  할 것이 아니라 식모살이던, 무엇이던 해 나가야 겠다고 그 박봉식은 쓸쓸히 말했다.

 

 

김종화(金鐘和)의 눈물과 노여움

 


문용명을 죽이고 싶다


평양으로 간 문선명은 미완성이라서 엉터리 같은 원리를 설교해 신자를 모으고 있었다. 가련하게도 옥상현은 그 무렵부터의 희생자인데, 더 한사람 써두지 않으면 않될 사람이 있다.
 

그것은 문선명이 투옥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된 유부녀 김종화의 사건이다.

흥남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먼저 출소하는 나에게 그는 평양 경창리에 있는 김종화의 집을 찾아 가서 내가 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정화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여 나는 출소하자 바로 그곳으로 갔으나, 이미 피난길을 떠난후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
다.

문선명의 열렬한 신자가 되어 주인과 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방에서 문선명과 동침해서 드디어는"어린양의 잔치"를 올리는 소란을 피워서 체포되어 징역 일년의 형을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리의 이론에서 말하자면 6마리아(유부녀)를 복귀한 뒤에 오는"어린양의 잔치(정식결혼)"는 상대가 더러움이 없는 처녀가 되여야 한다.

어째서 남편이나 자식이 있는 유부녀를 선택한단 말인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문선명에게는 서울에 두고 온 처자도 있다.

내가 서울에서 간신히 찾아 냈을때, 김종화는 이문동에 살면서 집사로서 기성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정명선은 파고다 공원앞에 코롬비아 라고 하는 구듯방을 경영하고 있었다.

내가 김종화를 방문 하였을때, 그녀는 그때의 일을 후회 하면서 사단이 나를  유혹해서 죽을때 까지 참회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때는 이름을 문용명에서 문선명으로 바꾼것을 모르고‥‥그녀는 말했다. 문용명은 엄청난 대사단인데, 나는 흠뻑 속았습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많이 만든 나쁜 사람이예요.

박선생도 빨리 그만두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커다란 눈물 방울을 흘리면서 울었다.

평양시절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나의 남편은 내가 하는 행동을 그늘에서 야속하게 생각 하였을뿐 어째서 성을 내지 않았을까요.

자기의 처와 저남자가 매일 같은 방에서 함께 자며 복귀를 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섹스를 하고 있는것을 옆에서보면서 어째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나중에 그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것을 알고 그때 나는 너무나도 큰죄를 범하고 말았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나는 김종화 집사에게 더 한번 물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매일밤
섹스를 한다는 것이, 그 당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때는재림 메시아라고 믿었고, 그 남자에게 미쳐서 그 사람과 섹스를 하는때에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천국으로 올라 가는 듯한 심경 이었습니다.
 

문용명이 지금 서울에 있는데 더 한번 만나 볼 용의는 없는가, 하고 물어 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면서 엄청나게 큰 죄를 범한 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므로 대사단의 문용명은 나와 같은 유부녀나 처녀들을 교묘한 말로 범하고, 많은 사람을 죄의 구렁텅이로 떨어트리고 있어요.

어떻게 또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겠어요 라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세상에서 더 이상 우리들에게 한것 같은 죄를 두번다시 그가 범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다. 그 남자를 죽이고 싶도록 원망하고 있어요.

그녀는 그야말로 불처럼 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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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마리아의 비극

 


유부녀 여섯을 빼앗다
 


나 박정화는 1953년 5월 15일 경주에서 피난생활을 끝마치고 부산 수정동에 마련한 교회에서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원리강의를 들었다.
그 내용은 흥남 수용소에서 문선명이 나에게 "원화원이상"에 관해서 이야기 한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었다.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6마리아"의 부분이었다.

평양 시절은 그렇다 치고, 식구들 가운데서 6마리아로서 복귀를 받은 사람들은 제일 첫번째가 신정순, 그리고 오명춘, 이순철, 김안실, 강옥실, 정전옥의 순이라고 문선명은 이야기 했다.

그 후 한동안 지나서 이 6마리아의 얼굴생김이 바뀌었다.

그 이유는 강옥실과 정선옥에게는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남편이 있는 유부녀 가 아니면 6마리아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 이었다.
문선명은 이 두사람 대신으로 유신희, 임영신을 6마리아로 선택 하였다.

6마리아 자격이 있는것은 유부녀라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형체가 없는 하나님은,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성숙하면, 형체있는 인간의아담으로 재림하여 아담과 해와가 결혼해서 더렵혀 지지 않은 자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자손이 이 세상에 번식 함으로서 이 세상을 선한 죄 없는 사회  할 것을 '창조이상'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해와를 유혹해서 따먹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사단의 것이 되어, 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범죄한 천사의 사랑의 대상인 유부녀를 빼았음으로서, 사단에게 더럽혀진 피를 깨끗이 하는 '복귀섭리의 의식'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문선명 은 설명하였다.
문선명은 나에게 복귀하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 복귀의 방법이란, 지금까지의 사탄의 세상에서는 섹스를 할때에 남자가 위로 되고, 여자가 아래로 되었지만, 복귀를 할 때에는 두번 까지는 여인이 위로되고 남자가 아래로 되는 것이고, 세번째는 남자가 위에서 행위 한다.

그래서 소생, 장성, 완성으로 3회에 걸쳐서 복귀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것이다.

특히, 나는 문선명의 섹스에 의해서 복귀된 여자와 최초로 섹스를 해서,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내가 문선명에게 제일 신뢰 받는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6마리아 들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를 추적해 보자.

 

신 정 순*

 

자산가인 이순모의 처였던 신정순은 내가 1953년 5월 IS일에 부산의 수정동 교회에 갔을 때부터 두 사람의 아들을 데리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같은해 12월 24일 문선명이 직접 원리강의를 하기 위해서 부산영도의 집회에 갔을때 그는 나에게 정화 너는 장래 신정순과 이상적인 상대(부부)가 되어서 우리 교회의 경제 문제를 해결 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 한 일이 있다.

그런데 문선명은 이 신정순의 장녀로 처녀인 이성화를 장래에 해와가 될 사람이라고 말하고 범하였는데, 김영희 사건으로 그 거짓말이 탄로나고 말았다.

또 둘째딸인 성례도 문선명한테 복귀를 받다, 아이까지 낳게되었다. 신정순은 6마리아가 된것으로서, 문선명의 곁에서 영원히 평화로운 생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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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부산 초량동에 있던 집을 팔아서 문전명에게 바쳤다. 내가 부산에서 새끼장사를 시작 하였을때 그 자금을 마련해준 것도 역시 신정순 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된 두 딸의 모녀 3인이 문선명과 섹스를 했다고 하는 사실은 신정순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궁암에 걸려 몇해 후에 죽고 말았다.

저 세상으로 간 신정순은 지금의 문선명을 어떻게 보고 있을 것인가?

 


이 순 철*


이순철은 내가 경주의 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의 수정동교회로 갔을 무렵, 오명춘의 전도로  입교하게 되어 문선명의 복귀를 받고부터 쪽 그에게 따라 다닌다.

이순철의 남편은 당시 관세청의 간부였다.

그녀는 남편몰래 많은 재산을 문선명에게 헌금 하였다.

문선명이 대단히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에, 우리들이 안양, 부산 등지를 돌아 다녔다는 것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그 후의 이순철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어느날 노동휘가 나를 찾아 와서 아침 예배에 가자고 재촉한다.

청파동 교회로 예배를 가니까, 마침 문선명이 나와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선명이 별안간 지금 수택리(경기도 소재) 총포공장을 건축하고 있는데, 오늘밤 안으로 그 총포공장을 완성 시키시오 라고 명령 하는 것 이었다.
급작스러운 일 이라서 건축 일꾼을 모은다는 것이 큰일 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천호동에 주택을 건설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축일꾼 18명을 트럭에 태워 실어다가 밤샘 작업을 해서 어거지로 그 공사를 완료시켰다.
작업이 끝나서 돌아 가려고 하는데, 이순철이 느딘없이 찾아와서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같이 가자고 해,그이를 따라 가니까 통일 산업 주식회사의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방을  빌려서 살고 있는데, 방안에는 다 날가 빠진 헌이불과, 꾸겨진 양복등, 겨우 몇가지 가재도구가 놓여 있을뿐, 그렇게 화려한 생활을 하던 이순철이 왜 이다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그에게 어째서 이런데 와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으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문선생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로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아 백방으로 생각 끝에 할 수없이 통일산업에는 문선생이 하루에 한번은 꼭 온다고 하기에 이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매일 문선생이 오는 길에 기다리고 있다가 먼발치에서 나마 얼굴 만이라도 뵙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선생은 차로 오기때문에 내가 서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  다른 길로 가 버리고 맙니다 라고 이야기 한다.


그녀는 이 슬픈 사정을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 내가 와 있다는 것을 듣고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세시간 동안이나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한 이순철은 문선명에게 재산도 자기의 몸도 모두 바쳤다고, 남편에게서는 이혼당하고, 자식들은 남편에게로 따라가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문선명을 만나고 싶어서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문선명은 어째서 이다지도 냉정하게 배신 할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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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재림메시아를 자칭한 사나이의 할 수 있는 일인가.

우리들은 손을 맞잡고 한 없이 울었다.

이날부터 한달 후에 오명춘 집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명춘이 혼자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순철은 그 한 많은 인생을 마치고, 이세상에서 사라졋다고 하는 것이다.

그 옛날 문선명은 밤에나 낮에나 이순철 없이는 못 살것 같이 굴더니만, 이제 와서는 이순철이 문선명을 만나고 싶어서 수택리 총공장 근처로 이사까지 와서 문선명을 기다렸는데  얼굴 한번 마주대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 버리고 말다니 ‥‥

저 세상에서 이순철은 문선명을 얼마나 원망하며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인가?

 

오 명 춘*


오명춘은 제주도에 피난 생활 중에서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부산에서 문선명의 원리를 듣고 감격해서 복귀를 받은 뒤에도 문선명이 어려운일이 생기면 이 오명춘 집사가 전부 해결해 주었다.

집을 판 대금 5백만원을 몽땅 문선명에게 바쳐서 남편과는 이혼하고, 아이들은 남편한테로 가 버려서, 혼자서 문선명을 위해서 살아 왔다.

이 오명춘 집사의 이야기는 앞에서도 자세히 썼으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해 둔다.

 그 후 오명춘집사는 교회에 못있게 돼서, 지금은 필립핀에 있는 아들을 찾아간 것이다. 서
울에 살고 있는 딸도 문선명으로부터 합동결혼 을 받었으나 이상이 맞지 않아 이혼하고 말았다.

이제 새삼 자기의 집으로 오는 것을 그리 반가워 할 이가 없다.

유효민과 내가, 올 봄에 오명춘을 찾아 갔더니 그 딸 한데서도 나가 달라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지금쯤은 낮선 나라에서 어떠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것인가?

유효민과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사람들을 장래 남은 인생을 평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서 서로 노력 할 것을 약속 하였다.

 


김 안 설*


김안실은 내가 부산의 수정동 교회에 있을 때에 오명춘 집사에 전도되어 입교했다. 문선명으로부터 원리를 듣고 복귀를 받은 뒤에는, 신정순과 같이 유효원 등을 열심히 전도한 장본인이다.
김안실은 장리욱씨의 자부인데, 남편은 의사였고 미국으로 가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김안실은 남편이 유학중 아이들과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열심히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김안실은 문선명을 제일 사랑하고 있었다. 그 후, 김안실의 남편은 미국에서 귀국해서, 서울 청량리에 병원을 개업하였다.

한동안은 남편과 살고 있었지만 역시 문선명을 못 잊겠다며 교회로 돌아왔다. 문선명에게서 복귀를 받을 당시의 김안실은 30세 가량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문선명은 그 젊은 안실이가 마음에 들어서, 내가 서울에서 부산에 갈때마다 반드시 편지를 써서 내가 그것을 전해주는 책임을 맡았다. 지금 다 나이든 이 사람을 문선명은 돌아다 보지도 않는다.

이제 새삼 남편한테도 돌아갈수도 없어서 혼자서 방을 빌려 가지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리치고 또 혼인 중매로 직업화 하다시피 홀홀 단신 쓸쓸한 인생살이를 하고 있다.

유효민과 나는 이와같이 문선명과 통일교회에 배신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책임을 지고 남은 인생을 보낼수 있도록 노력 할것을 결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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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신 희*


유신희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도 밝혔기에 여기에는 지금의 상태만을 간단히 말해둔다.


고아원에 어린것들을 맡겼던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다 졸업하고 제집도 마련하고, 교회집사 일도 잘보고 장사도 잘되여, 사회에 모범 청년층에 속한다.

그러나 유신희씨는 아들들 집에 살 면목도 없고, 아이들도 어머님 모시기가 서먹하다 하여  구로동에 방을 두칸 빌려서 바느질 일을 해 가면서 겨우 살아 가고 있는 형편이다.

과거 눈이 멀어서 문에게 속은것을 한탄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날그날 고생
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이 사람에 관해서는 유효민과 나는 도와 줄 것을 약속 하였다. (제 7장 참조)

 


임 영 신 *


서울의 북학동 교회에서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가 창립될 무렵 신정순이 임영신의 집을 알려주어서 유효민의 전도로 임영신은 통일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임영신은 다섯살쯤 되는 딸이 하나 있었고 혼자사는 몸인고로 가볍게 교회로 들어올수 있어서 푸로마이드 사진을 추운 겨울철에도 우물물로 수세작업을 하여 열심히 도왔다.

이 또한 문선명 이 누구보다도 매우 사랑을 받아왔다.

교회가 발전하여 여러번 이사를 했고 용산구 청파동 시절 문선명은 남녀 이상상대 설교를 한참 역설할 때다. 교회 교인들은 이심전심으로 임영신은 자기와의 이상상대의 꿈이 깨진줄 알고 탈교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시내모처에 단신으로 생활중 교회에서 친숙하게 지내던 딸을 만난 인연으로 그딸 아버지 재산가 이순모의 끈질긴 구애끝에 다시 부부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 번창하여 재벌급에 들었다.

그 사장도 병사로 아들하나 낳고 또 과부가 되었다. 미망인이 된후 많은 사업체를 전처 장남에게 물려 주고 외롭게 아들하나 바라보며 외롭게 살고 있다.

그리고 한동안 어느 예능인과 결혼하였으나, 그 사람과도 이혼해서 또 독신이 되어, 자기의 가정부 아줌마와 같이 살고 있다.

또 자기가 낳은 아들도 어머니를 보살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도 사이가 좋았던 이순모와의 결혼생활 무렵 시간만 있으면 가만히 불러내서 만나고 하던 문선명도 임영신 만은 전연 돌아 보지 않았다. 지금은 방 한칸을 빌려서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유효민과 함께 그녀를 만났는데, 그 생활 형편은 쌀 살돈이 없을 정도로 궁색하였다.
문선명은 복귀 한다는 명목으로 몸뎅이 를 유린하는 것은 물론 재산까지 전부 들어 먹고는 급기야는 차 내버리는 것이었다.

 


6마리아가 아니라 60마리아


문선명은 한 학자와 "어린양의 잔치 의식"을 행하고 학자가 참 어머니라고 떠들어대고 있지만, 이 대표적인 6마리아 이외도 문선명에게 농락 당하고 재산까지 도적 맞은 여성은 몇 십명이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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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에게 배신 당하고 버려져서 지금은 60-80세가 된 할머니들은 인생 여한을 품은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와같이 정도에 넘치는 행위는 인간의 상식에서 보던지, 종교가의 입장에서 보던지 간에 절대로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며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파탄을 가져 올것으로 필연적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문선명 이야 말로 진짜 대 사단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한 6마리아라고 하는것은 모두 재산가의 아내뿐이었고, 가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2천년전에 예수는 그가 만났던 간통한 여인, 향유의 여인등 육인의 여자와 섹스를 하지 못했기에 예수는 죽었다.

육인의 유부녀를 복귀하는 것은 원리의 근본이다 등등으로 말한 문선명의 이야기는 실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 악용한 함정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케 된다.

사실 그들은 문선명의 호색적인 섹스의 포로가 되어 미쳐서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문선명 한테로 달려와서 돈이나 재산이 확실하게 문선명의 손아귀에 모였다.

그리고 빨아 먹을 만큼 발아 먹은 뒤에는 돈있는 여인을 찾아내서 6마리아의 이름으로  꾀였던 것이다.

정말 그대로 풍부했던 그녀들은 하나같이 허수아비 빈 털털이와 같이 되어 버림을 당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도 사랑도 없다. 문선명의 색과 금욕의 가련한 희생자의 죽음만이 남았다.

더욱이 해마다 새로운 마리아로 교체해서 볼일이 끝난 마리아는 자꾸만 버려 치워서 두번  다시 돌보지 않는 것이다.

6마리아란 무서운 함정에 빠진 여성들의 대명사로서 그 이면에는 실로 몇십명, 몇백명이라고 하는 희생자의 예비군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의 재산이나 자금이 없었다면 통일교회가 발족해서 발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를  아는 내가 첫번째 증인이다.

예를들어 이북에 원적을 둔 황모 중년 부인은 통도 크고, 뱃장도 좋아서 자기의 것을 다 바치고 남에 돈도 잘 들러다 댓다. 그래서 사랑을 받게 되니 인신이 아닌가. 자기 돈도 다 떨어지고 하여 문에게 낙태 수술비를 달라고 했더니 무정하게도 딱 잡아 떼며 노발대발 울면서 탈교선언에 겁이나 유 부장이 문교주에 이야기 해서 수술비를 얻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교회에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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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빼앗기고 살해되고

 

김 원덕 이란 사나이

 

부산의 교회에서 노여움이 치밀어 미친듯 했던 최선길 부인에게서 문선명을 구출해낸 김원덕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시대에 육군사관학교 포병과를 나와서 일본군에 복무하던중, 포병소위 로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후 그는 북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포병사령관 무정의 한쪽 팔 노릇을 하며 근무하면서  북조선의 비밀을 몇차례 남쪽에 흘려 보냈다.

이 사실이 사령관인 무정이 군사회의로 중국에 가있는 동안에 폭로 되었다. 당초 사형을 선고받아 집행되는 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김원덕은 명랑한 성격으로 솔직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냥 사형의 집행을 기다리는 정도라면 죽는편이 났다고 결심하고 옥중에서 자살을 도모 하였다.

다행이도 그것은 미수에 그쳤고 수갑을 찬채로 독방에 들어 있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귀국한 무정장군은 자기의 한쪽 팔이었던 부하가 사형을 선고 받아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을 알았다.

무정장군은 고급 군사기관에 입김을 넣어서 그가 신원보증을 한다는 조건으로 김원덕의 사형은 4년 8개월의 형으로 감형된 것이었다. 감형 통고를 받은 김원덕은 평양 형무소에서 홍남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위기일발로 총살을 면한 김원덕과는 내가 홍남 수용소에서 총반장이 된 후에 문선명으로부터 소개되어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세사람은 친형제처럼 문선명을 중심으로 모든것을 의논하면서 쓰라린 상황을 극복해 왔다. 또 김원덕과 나는 북쪽의 평남 대동군 용연면 출신이어서 서로 가까운 이웃 마을의 출신이라고 하는 점에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김원덕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 남쪽으로 피난하여 경찰의 치안국 외사계의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통일교회가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을때 김원덕이 나타나서 문선명을 끌어 낸 것인데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최선길은 차마 반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비적인 낭만


어느날 김원덕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좀 샘이나는 듯한 그의 사랑 로맨스이다.
그 몇일전 김원덕은 부산에 볼일이 있어서 용산역에서 야간열차를 탓다. 그는 상등석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 품위 있어 보이는 부인이 몇사람의 경찰관에게 둘러싸여서 같은 기차에 타려고 하였다.
그녀의 복장이나 전송나온 사람들을 보니까 어던지 모르게 고급관리의 부인이 여행을 떠나는것 같이 보였다.
그부인은 공교롭게도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수원역을 지나 대전역을 지났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때때로 보는 정도로 그대로 부산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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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 지나자,
그 부인은 한국의 유명한 시한구로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내는 흐르고 있어서 옟 물이 남아 있을수가 없다. 사람도 이와 같아서 한번 흘러 버리면 또 다시는  못 돌아오네 라고 하는 내용의 노래를 김원덕의 옆 얼굴을 보면서 작은 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 소리는마치 선녀가 노래하는 것 처럼 들렸다.
다시 한번 부인을 뜯어 보니까, 그 모양은 엄숙하게 보였으나 또 정이 넘쳐 흐르는 듯 하기도해서 한동안은 함부로 말을 건낼수도 없어그저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러나 김원덕도 만고풍상을 경험해온 사나이다.

그대로 위축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얼굴 생김새로는 자신도 있었으므로 큰맘 먹
고 말을 걸었다고 한다. 실례합니다. 당신은 용산역에서 보았습니다만, 부산에는 여행으로 가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은, 용산역 가까이에서 알미늄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부산에는 볼일이 있어서 가는 길입니다.

그로부터 부산역에 도착하기 까지는 아직 세신간이 있었으나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열심히 이야기에 빠졌다. 야간열차 속에서 알게 된이 부인과 김원덕은 완전히 호흡이 맞아서 그날 어떤 곳에서 만날것을 약속하고, 부산역에서 헤어졌다.

약속한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같이 하였는데 그 부인은 그에게 마치 연인에게 대하는것첨럼 행동하였다. 그녀의 행동에는 일본여성 처럼 사교적인 여자티가 넘쳐 흘러서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태도와 행동에 도취한 김원덕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 후에 영화를 보러 갔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어느쪽이라고 할것도 없이  이심전심으로 어느 호텔로 발걸음을 옴겼다. 이날 둘이서 맺은 사랑은 도저히 말로서는 설명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김원덕은 부산에서 볼일을 마치면 다음날 야간 열차로 서울로 올 예정이었으나, 그 부인과 같이 있으니까 한 주일이 금방 춘몽으로 어제 서울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 이었다.

 

아름다운 부인과 진수성찬

 

그리고 오늘 그녀의 자택으로 갈 약속을 한 것인데 자기 혼자서 가기는 쪽스러워서 박선생님도 같이 가셨으면 합니다 라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호기심이 생겨 김원덕과 함께 열두시에 용산시장으로 갔다. 철길을 건너서니 공지가 있는데 서쪽으로는 옛날 모리나가 제과의 공장이 있었고, 그 동남쪽으로 단충집이 있었다.

일본사람이 살던 헌집이라서 그다지 깨끗한 집은 아니었다.

현관으로 가니까 문패에는 "윤청정심(尹淸淨心)"이라고 책어 있었다.

두 사람이 현관에 들어서자 20세 가량의 두 여인이 나와서 우리를안내해 주었다. 첫방에는 큰 불단이 있고, 그 중앙에는 순금인지 도금인지 잘 모르겠으나 황금빛 불상이 놓여 있고, 좌우에 놓인 놋쇠 촛대에는 밝은 낮인데도 불이 켜져있다.

다음방은 자리가 열개도 더 깔릴만큼 큰 방이었는데 객실인것 같았다.

그곳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한참만에 여인이 정중하게 차를 날라다 주었다.
이 집의 구조를 보고 있는데, 옆의 문이 열리며 향수와 같은 냄새가풍겨왔다.

대단히 좋은 향기로서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중년부인이 들어와 앉으면서 그녀는 얼굴을 약간 숙여서 미소지으며 그리고 인사를 하였다.

김선생 흔자서 오시라고 말 한것인데 이렇게 누추한 곳에 선생님까지 오셔서 정말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 목소리는 밝고도 대단히 깨끗하였다. 40대 후반 정도로보였는데 매우품위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김원덕에게 소개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인사 하였다. 무엇인가 마음까지 관통된듯한 분위기였다. 마음을 진정하고 맞아서 그 부인을 다시 보니까 머리는 빗어올려 쪽을 짓고 긴비취 비녀를 꽃고 옛날의 궁전에서나 쓴듯한 금빛장식에 빨간 댕기를 드리우고 있었다. 감색저고리에 엷은 옥색치마를 입은 모양은 멋진 우리의 전통 정식 복장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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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첫날밤을 맞이하는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듯한 모양이었다. 부인의 안내로 옆의 방으로 갔더니 고급요리집과 같은 한식요리상이 놓여 있고 은제의 주전자에는 노오란 빛갈의 술이 들어 있어서 한잔 드시지요 라고 은제 술잔으로 한잔 받은 술은그야말로 최고의 가슴설레임 이 아닌가!

중국의 시인 이백은 장강폭 아래서 술을 마시며, "삼천자 높이에서 똑바로 떨어지는 물은, 흡사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과 같구나"라는 시를 읊었다.
나도 그러한 기분으로 술을 마시고 안주를 들었다.


이상한 예지능력

 

그 부인은 금강산에서 10년간 수업해서 이 세상일은 무엇이고 내다 볼 수가 있어서 사람의운명을 점칠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여명을 판단 할 수도 있고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그 사람의 당선을예언 할 수 있게 되고, 대학의 입학시험 때에는 그 사람의 합격 여부도 알수 있게 되었다고한다.

그 덕분으로 그녀가 경영하고 있는 알루미늄 그릇의 제조공장은 그녀로서는 본업이 아니라 부업으로 된것 같다고 한다. 그녀의 참 목적은 불쌍한 고아들 특히 여자 고아를 길러 대학교육까지 받게해서 사회에 내 놓는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길러낸 여자 아이들을 전원 이화여자대학을 졸업시켜, 현재 돌보고 있는 고아는 17명 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고 있자니까, 감히 얼굴을 들고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국회의원 선거때가 되면, 이 부인집에는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대학의 입학시험때도 역시 같다고 하는것이었다.

우리들은맛있는 성찬을 잘 먹고 이상한 그 부인의 이 야기 를 듣고 또 오십시요 라고 전송을 받으며 그집을 나셨다
김원덕씨를 연인으로 삼았다고 내비치면서 그녀는 김씨에게 부인이있어도 관계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자기를 사랑해 주고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서로가 좋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세속적인 감각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김원덕과 나는 그집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김원덕의 덕분으로 나는 언제고 성찬을 먹을 수 있어서 한 동안은 괜참은 생활을 보냈고, 서로간에 친하게 되니까, 나는 불단에 놓여 있는 싱싱한 과실을 마음대로 집어 먹어도 실례되지 않을 만큼 친숙해겼다.
재림 메시아의 아버지와 함께 있으니까 생명이 없는 불단 앞에 이러한 물건을 놓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부인은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항상 주의 깊게 들었던 것 같다.
그 후 그 부인 윤여사는 김여사라고 하는 다른 부인을 사이에 넣어서 토목 건축회사를 설립하여 김원덕을 사장으로 앉혔다.

 회사의 명칭은 윤여사가 "운흥공사"라고 명명한 이름인데, 구름처럼 일어난다고 하는 의미였다. 사장이 된 김원덕은 토목건축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경영은 그리 잘되지 못해서 얼마 못가서 이 회사의 간판을 내리게 되고 말았고, 그후에도 또 여러가지 사업으로 김원덕과 윤여사는 협력하였으나 운이 없는 탓인지 그리 잘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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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한동안 윤여사는 불단의 과일을 먹을때에 말한 그 말의의미를 물어왔기에 설명하였더니 꼭한번 그 선생을 만나보고 싶다고 윤여사가 말하지 않는가 !

나는 김원덕과 의논하여 문선명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 하였더니 만나도 상관없다고 말하여 1954년 10월 25일 오후 6시에 신당동 양문영여사의 자택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 다음날 윤여사에게 그 일을 전하였더니 그녀는 대단히 기뻐 하였다.


제자의 연인을  빼앗은 문선명

 

약속의 날, 김원덕과 나는 윤여사를 데리고 양여사의 자택에 안내하였다. 양문영, 신정순, 오명춘, 옥상현, 지승도, 이순천, 이기환, 양윤신, 등의 여자 식구들과 유효원, 유효민. 이수경, 김원태등이 모였다.
그때의 윤여사는 최고의 한국정장으로 몸을 싸서 흡사 신부가 신랑집으로 첫날밤을 맞으려 들어가는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본 식구들 특히 부인 식구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
인사를 나눈 후에 윤여사는 자기의 영적인 눈으로 선생을 우러러 뵈오니까 참 어머니가될 여인이 없어서 근심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제가 신부로서 신랑인 선생님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라고, 당돌하게 첫 인사를 하여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날은 예수가 세사람의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간 때와 같은 분위기가 되어, 문선명도 원리강의를 밤새도록 이야기 했다.
또 윤여사는 시를 노래하고 창을 불렀다. 그 소리는 그 집의 주인이며 이화여자대학의 음악교수인 양문영 여사가 들어도 놀랄 정도였다.
그 당시는 문선명에 대한 감시가 엄하게 되어 있었다. 밤 열두시가 되면 통행금지가 되어있어 다음 기회에 또 만날것을 약속하고 그 밤은 다 헤어졌다.
일주일 정도지난 어느날, 문선명이 별안간 유효민과 같이 윤여사의 집을 찾아 왔다. 김원덕과 나는 문선명이 오는것을 몰랐으므로 대단히 놀랐다. 윤여사는 정성을 다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문선명을 접대 하였다.

문선명도 신랑이 신부집에 간것 같은 태도로 윤여사와 앉아 있었다.
또 윤여사는 성경에 나오는 신랑을 맞이하러 가기 위해서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신부가 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것 같은 분위기였다.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나와 김원덕은 밤도 깊었으므로 문선명과 유효민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이날밤 문선명은 윤여사와 복귀 (섹스)를 했다고 한다.
김원덕은 북에서 피난하여 남으로 올때 살곳이 없었던 문선명을 자기의 셋집에 한동안 머물러 있게 하기도 하고, 부산에서 문선명이 곤난한 상황에 놓였을때, 선두에 서서 몇번씩해결해 주었다. 그 김원덕이 자기의 사랑하는 연인 윤청정심과 문선명에게 배신 당한 심경이되어 그후 문선명을 피하게 되었다.

문선명은 송도욱 장로를 비서역으로 하고 부터는 자주 윤여사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1955년 7월 4일 문선명이 경 찰에 구속되고 부터는 윤여사도 한동안 우리들의 통일교회 와는 발을 끈었다.
김원덕은 그 후에도 몇차례 나와 만나서 문선명에 대한 원한과 노여움을 말했고 나는 열심히 복귀원리를 설명해서 문선명을 감쌌으나 김원덕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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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인이 있는 가운데 어째서 자기의 제자가 사랑하는 연인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 뺏아서 가는가. 선생은 나를 바보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짓을 하는 선생에게 어떻게 복종할 수 있는가?

통일교회의 원리가 아무리 훌륭해도, 자기는 더 믿을 기분도 없다.

선생 아니 문선명을 용서 할 수 없다.

문선명은 종교의 이름을 빌어서 여자를 속이는 사기꾼이다.

김원덕은 군인출신답게 외골수인 데가 있어, (나도 그렇지만) 정말로 격분했다.

그래서 문선명이란 사나이는 발정한 개다.

음수다 라고 뱃속에서 짜내듯이 매도했다.

김원덕의 억울함은 잘 알기 때문에 나는 그 이상 댓구할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해뒤의 일, 윤여사, 식모, 양녀(대학생딸)의 일가 3인이 누군가에 의해서 타살당한 사건이 생겨서 큰 소란이 되었다. 경찰도 필사적으로 수사를 한 모양이지만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그 전까지도 문선명과 윤여사의 사이는 계속되고 있었고, UN군의 인천상륙으로 6 25동란이 유리하게 된것을 찬양하는 영화 "오오 인천" 의 준비가 두 사람 공동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윤여사의 돌연한 죽음으로 자금이 나오지 않아서 중단되었다.

김원덕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어, 나도 당시 경찰의 조사를 받다 그의 소재를 물었었다.
그 후 김원덕과는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어, 나도 슬적 모양새를 살펴 보았으나 김원덕 자신도 그 사건에는 대단히 놀라고 있고 둘이서 진짜 범인 찾기의 연상게임을 한 일도 있다.

김원덕한테는 전혀 변한 것이 없어서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러던 그는 죽어서 이미 3년이 되었다.

 

 

제5장  재림 메시아의 정체

 

원리와 실천의 모순

 

나의 수기는 진실의 기록

 


나는 흥남수용소에서 문선명을 알았고, 1년 6개월을 같이 생활 하였다. 6.25동란으로 출옥한 그와 두달간에 걸쳐서 남쪽으로 피딘하여 평양에서 서울 부산까지 왔다.

한동안 나는 경주에 있었고 문선명은 부산에 있었다.

그와 채차 합류하고서도 이 세상의 창조의 역사와 타락의 원인, 그리고 이 세상을 복귀시켜 하나님이 구원한 깨끗한 세상의 창조 목적대로 되돌리는 원리를 듣게 되었다.

원리의 주인공인 재림 메시아 참부모의 이름 아래 통일교회는 이제야 세계 백수십개 국가에 퍼져 있다. 진정한 어머니인 해와가 된다고 하는 것으로 한 사람을 선택하여 "어린양의 잔치(정식결혼)"를 행하고 열한사람의 아이들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그 첫번째 아들을 아버지 문선명의 후계자로 하고자 하는 세습체제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문선명은 각국의 학자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소개 되었다. 그를 위대한 인물로서 존경하고 있는듯한 책도 있다. 나는 그러한 책은 거의 읽었으나 그러한 책은 문선명이 지금까지 그 목적과 실천을 어떠한경과로 해 왔느냐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쓰지 않고 있다.

다만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 만을 쓴, 겉치례 만의 내용 이었다.

그러한 책에 책에 씌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나도 비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이 책에서 써 온 것은, 문선명과 같이 있으면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행동해 온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 했다고 단언해 두고 싶다.

문선명이 흥남수용소에서 시간만 있으면 나에게 이야기한 "원리"는 부산 수정교회에서 원고로 써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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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원리원본'이다 (이것은 종이에 연필로 쓴 것인데, 이것을 대구에 와있던 정선옥이 보관하고 있었고, 내가 서진광산에 있을때 박애자가 가져다 주었다. 그때 내가 공책에 베껴쓴 것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
 

이 원리원본을 기초로해서, 두뇌가 뛰어난 유효원이 '원리해설'(原理解說)을 썼다.


그리고 이 '원리원본'과 '원리해설'이 통일교회의 기초가 되어 문선명이 세계 백수십개 나라에 진출하게 되는 기초가 된 것이다. 이 원리원본과 원리해설을 전부 인용 할 수는 없으므로, 우선 요약해 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자들


그러나 이 '원리해설'에는 그 원리와 실천과의 모순되는 것이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를 몇 항목만 지적해 둔다.


어느나라에도 그 역사의 시초에는 신화가 있다.

우리 한국이나 한반도에는 단군을 비롯한 건국의 신화가 있다.

일본에는 천조대신이 있고,

중국에는 덕왕형제 11인 등이 있다.

그런데 내가 따랐던 문선명은 한나라의 국조가 아니라, 세계의 재림 메시아라고 한다.

지금까지 출판된 많은 책 가운데는 문선명을 구세주라고 쓴 것도 있다.

문선명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계를 통일 하려고 주장 하고 있으나 내가 믿어온 재림메시아는 점점 그 모양이 커감에 따라, 그 원리와 실천이 점점 상반 되어 가는듯한 느낌이 드는것을 어찌하라.

2천년전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간 예수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있다.

문선명은 제3의 아담 참부모로서, 통일교회 교인은 물론 온 세계 사람들로 부터 추앙받아 백수십개 나라에 넓혀져 있다.

그러나 식구라고 불리는 통일교회의 신자가 되더라도, 사단의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와 생활에 변화된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나빠지던가 비명의 죽음을 맞은 사람도 있다.

나는 그점에 대하여 계속 의문을 가져왔다.

많이 있는 통일교회 관계의 출판물 가운데 실제로 내가 읽은것에는, 통일교회는 이러한 윤곽의 교회이며, 그 교주인 문선명은 원리라고 하는 교리에 나오는 재림메시아 이다 라고 하는정도의 표면적인 것밖에 씌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문제는 문선명이 얼마만큼 재림메시아 로서의 역활을 다 하고 있는가.

구세주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가 하고 하는 것으로 귀결 된다.

그런데 뻔뻔스러운 문선명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지금부터도 계속해서 희생 시키려고 하고 있음으로, 더 이상 잠잠코 보고 있을 수 만은 없다고 생각되어, 이책을 쓰기로 한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통일교회 교인들은, 지금도 백수십개 나라에서 문선명을 참아버지로 생각하고, 한학자를 참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이 세계가 통일될 것을 매일 같이 기원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나도 문선명이 진짜 재림메시아가 되어서 이 세상을 구원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는 식구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만약 문선명이 재림메시아가 아니고, 요한 묵시록 20장에 씌여 있는대로 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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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고 한다면, 진짜 참 신부와 어린양의 잔치를 올려 참부모가 되여, 열 한사람의 아이들을 출산하고 있는데, 어째서 참 부모한테서 남은 아이들이 두명씩이나 교통사고로 죽어 갔는가.

또 다른 여자에게 출산시켜 입적한 세사람 가운데 한사람도 사고로 죽었다.

"요한묵시록 21장 4절"에는 사람의 눈에서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신다.

이미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부르첫음도 아품도 없다.

먼저 것이 지나가 버렷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다.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면, 복귀 원리대로 어린양의 잔치를 행해서 이 세계의 모든것을 해방하는 날짜 까지 정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세상은 그대로인 것인가.

 원죄의 근원을 모두 없애고 복귀의 의식을 거쳐 참부모가 되었을 터인데 어째서 거기서 태어난 어린 자식들이 죽어 가는가.

 또 그 자손들 가운데는 부끄러운 스캔들을 일으켜서 언짢은 소문까지 내는 자도 있다.

나는 문선명이 원죄를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 왔는가.

원리대로 실천하였는가? 등에 관해서 밝혀두고 싶다.

문선명의 장래는 하나님 만이 결정 할 수 있는 문제 이다.

나는 다만 문선명이 발표한 원리에 근거해서 그 원리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함께 살고 있었던 때의 사실에 대해서 써 보려고 생각한다.


문선명이 무슨 메시아 !

 

여기서 다시 한번 문선명의 원리를 복습해 두자.

 

(창조원리) -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흙으로 사랄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인간이 되었다.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며 에덴의 동산에 두어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쓸쓸해 보여서 그가 자고 있는 동안에 그의 갈비대의 하나를 빼어 여인을 만들었다 그 이름을 해와라고 하며 아담과 함께 에덴의 동산에서 세상의 모든것을 지배하도록 하였다.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 따 먹어도 좋으나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만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명령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경고하였다.

 


(타락원리) - 해와가 성숙한 뒤 하나님이 모양이 있는 아담의 몸에 임재하여, 해와와 함께 사랑해서, 즉 섹스를 해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됨으로 거기에서 부터 생겨나는 죄없는 아들에 의해서 자손이 번영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천사장 루시엘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해와를 유혹해서 섹스를 하고 말았다.
또 해와에게 아담과도 섹스를 하도록 시켰으므로, 이것이 타락한 사단 루시엘의 혈통 세계가 되었다.

 

 

(복귀원리) - 이와같이 성숙하지 않은때에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섹스를 한 것으로 인해서 인간이 타락케 된 것이다.
그때 해와와 아담이 나무열매를 따 먹었다면 죄를 범한 입을 감추었어야 할 터인데 하나님  앞에서 두 사람은 부끄러워서 무화과의 잎으로 하체를 감추었으므로 섹스를 한것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도 인간은 신체에 상처가 생기면 그것을 가리우려고 하는것이 본성인데 부끄럽다고 하체를 가리우는 것은, 그곳에서 범죄하였음을 자증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이 타락한 것을 어떻게 복귀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해와에게 사단의 피가 흘러들어간 것으로서 ,아담과 해와는에덴 동산 땅을 파며 해와는 아이를 낳는 해산의 고통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 게 되었다.
그 후, 아담과 해와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 두 사람이 인간의 시조가 된것이다. 가인이그 아우인 아벨을 죽였으므로 이것이 에덴 동산에서 최초의 살인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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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복귀하면 이 세상이 깨끗하게 될 것인가 여기서 문선명은 이 복귀의 실천을 하기 위해서 많은 장해를 뛰어 넘어 왔다.

그의 그 원리와 실천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복귀를 설명하면 해와가 성숙하지 않았을 때에 천사장 루시엘이 섹스를 해서 해와의 정조를 빼앗았기 때문에 이 죄악을 깨꽃이 하기 위해서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복귀를 실현하는데 우선 하나님과 같이 더렵혀 지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서 루시엘 에게서 정조를 빼앗긴 해와와 같은 여인과 루시엘이 해와와 섹스한것과 같이 이 두 사람이 섹스를 하는것이 펼요하게 된다.

그리고 루시엘은 해와 위에 올라타고 섹스를 하였으므로, 지금 이 사단의 세상에서도 똑같이 남자가 위로 타고 섹스를 하는 것이 보통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복귀 할 때에는 남자가 밑이 되고 여자가 위에 올라타고 섹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같은 이치로 문선명은 이러한 체위로 복귀의 실천을 계속하고있다.

하나님과 동격으로 복귀할 수 있는 사람은 말 할것도 없이 문선명 이라고 원리 에서는 단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선명은 왜 죄 없는 하나님과 동격의 입장에서 복귀 시킬수가 있는가.

문선명이 이 사단의 제상에서 극히 평범한 가정에 태어난 것에서부터 생각하자면, 도저히 납득 할 수없는 일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납득되는 부분이 없다.

한번 더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흥남 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을 문선명과 같이 지냈다. 이 수용소에서의 1년 6개월간은 외부생활의 16년 정도에 해당되는 기간이라고 서로 간에 이야기 하곤 했다.

그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문선명이 16세때 (1935년), 부활절 전날밤, 예수가 꿈속에 나타나 예수가 달성 하고자 하였던 일을 하지 못한채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므로, 당신이 나 대신 그 사명을 완수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선명도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몇번이나 부탁을 하였으므로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이 예수에게서 부탁 받았다고 하는 것은 후에, '원리'에서 말하는 '복귀'의 실천이며, 섹스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의 여부는 본인 밖에 알지 못하는 이야기 이므로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예수의 꿈을 봤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있을 터이고, 꿈속의 말씀에 의한 예수의 이야기 한 것이, 이렇게 엉뚱한 섹스 복귀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무래도 이해 할 수 없다.


정득은 과의 이상한 관계

 

1955년(소화30년) 7월 4일, 문선명 등이 체포되어 중부경찰서의 유치장에 수감 되었을때 평양시절의 정득은 이 찾아와서 나에게 그녀의 집까지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註 :
이 할머니도 또 이상한 존재로서, 좀 길어지지 만 주의해서 읽어 보시오)

나도 마침 그당시 문선명의 평양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김종화를 찾던 중이어서 정득은이 살고 있는 집 까지 가기로 하였다.

50세가 되는 정득은은 원효로 3가에 조그만 집을 빌려서 살고 있었다. 여기서 1주일을 함께 지냈다. 그리고 문선명이 서울에서 평양에 도착한 후의 정득은 과의 신비(?)에 싸인 생활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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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득은 은 북녁의 평안북도에서 한때 번성하였던 이웅도 목사, 황국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복중교 와도 관계는 없었다.

다만 기독교를 믿고 있었는데, 1946년 6월 6일 하늘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내용은 지금 38선을 넘어서 한 청년이 가방 하나를 메고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그 청년은 하나님이 중요한 책무를 지워서 이세상에 보낸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 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평양으로 향하고 있으니, 나가서 그 사람을 맞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 했다는 것이다.

정득은 은 부랴 부랴 남쪽으로 찾아 갔더니, 사동이라고 하는 곳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릭구삭 하나를 멘 청년이 이쪽을 향해서 왔다. 그것이 문선명(당시는 문용명)이었다.

정득은은 그의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한 후에 자기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정득은의 자택은 만수대 밑에 있었다.

문선명을 안내하여 온 정득은은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는것.

선생이 오는것을 알고 마중하러 갔던 것을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득은은 자기가 여호와에게서 성모로서 인정 받았으므로 문선명과 섹스를 하면 문선명은 신과 동격의 입장이 되어 타락한 부부의 입장에 있는 여인들을 복귀 시킬수가 있게 된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문선명이 밑으로 가고, 정득은 은 그 위에 올라타서 소생, 장성, 완성의 3회의 섹스를 하였다.

미 복귀의 실천공식과 방법은 흡사 문선명의 원리와 같다.

성모 마리아 대신에 성스러운 정득은 파 복귀를 한 것으로서, 문선명은 온전한 하나님 처럼 죄 없는

정득은 은 꿈속에서 여호와와 섹스를 하였으므로 자기는 성모라고 말한다.

너무나도 잘 꾸며진 이야기지만, 문선명의 한쪽 팔과 같은 입장에 있던 당시의 나는 오직놀랄 뿐이며 감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창조, 타락, 복귀의 원리도 완성되 있지 않았을 때에, 원리도 모르고 문선명과는 처음대면의 정득은 이 도저히 생각 할 수 없다.
 

앞뒤의 사정으로 보아 두 사람이 육체관계는 있었던 듯 하지만 아무래도 후에 억지로 끌어다 붙인 조작된 이야기라고 나는 지금 믿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평양으로 갔을 무렵의 문선명의 행동이, 원리를 무시한 엉망 진창인데가있다. 생활안정을 위해서 필사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당시의(후에도 그렇지만) 그의 무기는 미완성의 괴상스러운 원리론과, 그것에 빠져서 몰려드는 여인들에 대한 섹스공격 밖에 없지 않았을까 ?

백보를 앙보해서, 만약 그것이 진실이었다면, 통일교회의 인쇄물은 어째서 이 (정득은의 대기적)에 관한 것을 한 줄을 쓰지 않았을까 ?


체포도 당연한 섹스포교


평양시 대의 이야기를 계속하자.

이 후, 문선명은 나최섭의 집으로 옮겼고 다음에는 경창리에 있는 정명선, 김종화 부부의 집으로 가서 거기서 예배를 올리게 되었다. 이미 섹스관계가 있었던 지승도 옥상현들과의 여러가지 갈등이 있어서 정득은 은 독립해서 다른 신자를 모아놓고 예배를 올리고 있었다.

또 여기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그 내용은, 여자 신자들이 제각기 문선명과 섹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간에 자기만이 문선명을 낳은(영적으로 이세상에 낳은) 성스러운 어머니다 라고 하는 주장이 얽히고 설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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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데, 신자이었던 여자들이 문선명과 섹스 함으로서, 문선명에게 복귀할 자격을 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밝힌 바이지만 그 후의 문선명은 김종화의 집에서 남편인 정명선과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부녀인 김종화와 같이 살았다.
그리고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그 유부녀와 "어린양의 잔치"를 구실 삼아 결혼 한다는 소동을 피워서 경찰에 체포되어 사회질서 문란죄(社會秩序 紊亂罪)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흥남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거기서 문선명은 나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것에 관해서, 통일교회의 출판물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문선명이 복역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기성 기독교 교단의 투서와 공산당의 종교 말살정책으로 인해서 내무성에 구속되어 공판서 5년의 형을 받았다
이것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것은 독자들은 이해 하실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공산당이 실제로 종교 말살정책을 행하였다면 기성 그리스도 교단이 질시할 여유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옥상현 남편인 우하섭은 그 무렵 평양 장대현 교회의 신망있는 장로였다.
또, 이 3개월전인 1946년 8월에도 문선명은 북조선의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후에 겨우 석방되었다.
통일교회는 이것도 원인은 신도를 빼앗긴 목사들의 반감과 질투로 고발 당했다고 하고 있으나, 똑같이 분에 넘치는 섹스포교의 결과였다.
나는 이 책에서 남쪽의 한국(부산, 대구, 서울)을 중심으로 문선명과 함께 걸은 발자취와 생긴 일들을 써 왔으나, 문선명은 이미 평양시절에 다수의 여성을 섹스로 식구를 삼아 항상몸 주면서 신봉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여성을 역시 6마리아 논법으로 꾀어내서 육체와 금품을 뜯어 냈던 것이다.

 

 

색과 욕과 돈과

 

남편의 돈을 훔쳐 오라

1955년 7월 4일 문선명은 서울시 경찰에 구속 되었는데 재판에서 무죄로 선고되어 석방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통일교회는 죄없는 사람이 구속 되었으나, 그 후 사실이 밝혀져 석방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당시 문선명과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있었던 내가 그간의 사정이나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문선명은 실제로 여러가지 많은 죄 를 범 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의 기민한 대책으로 경찰의 조사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았던 것과, 위증이나 거짓으로 뒷말을 맞추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던 덕분에 무죄로 되어 석방 되었던 것이다.
통일교회는 그 사실을 감추고 있지만, 내 자신도 위증을 해서 교인들의 말문을 맞추기에손 쓰느라고 뛰었고 증거인멸을 행 했던 것이니까 틀림없다.

사실로 말하면, 재림주로 믿었을 때 어떻게 허락없이 재림주의 연령을 내 마음대로 올릴수 있겠는가. 이건 생각도 못할 일이다.

재림주 문과 의논해서, 허락아래 연령을 올려서, 제 2국민병을 기피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태산 같지만 가령 이순철이라고 하는 유부녀를 자기는 재림 메시아 이니까 자기와 복귀 하면 당신도 6마리아 의 한 사람 예수의 마리아로 된다고 속여서 섹스를 했다.

훌릉한 간통죄 이다.

또, 이 세상을 사단이 주물르고 있으나, 이 세상의 모든 재산은 본래 하나님 것이므로, 사단이 쓰고 있는것, 남편의 돈이나 집에 있는 재산은 전부 훔쳐서라도 나에게 헌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이 이상적인 세계로 되며 하나님은 수천배도 넘는 행운을 주실 것이다.
이 이야기를 믿어 이순철은 자꾸만 가져다 바쳤다.

어느 때에는 문선명에게 강요되어 당시의 미국달러 1만 5천불이나 되는 돈을 집에서 끄집어내서, 그돈으로 두달동안 문선명을 마음껏 놀아나게 하였다.
드디어 남편도 노해서 팔방으로 손을 써서 찾고 있었다.

절도의 훌륭한 공범이다.

이것이 어찌하여 죄가 안 될 것인가.

남펀이 경찰에 그런 이야기를 안하고, 간통죄로 고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디어 냈을 뿐이다. 다른 마리아의 남편들도 모두 그러했다.

또 처녀인 딸들에게, 문선명은 나의 처가 되면 세계의 진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해서 믿게 하고, 속임수 섹스를 했었다.
이러한 수법으로 김영희라고 하는 여자 대학생도 이성화도 속아서 문선명과 섹스를 했었다.

쾌락에 빠지고 결흔을 구실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청순한 처녀들을 범한 문선명이 어째서 죄가 되지 않았을까?

식구들의 눈물어린 심정을 통일교회는 생각해야 할 것 이다

 

왜  죄없는 아이들이 죽는가

 

그리고 나는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탈세라고 하는 죄명으로 미국의 형무소에 투옥 되었던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요한 묵시록 21장 3~4에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살며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스스로 사람과 함께 계셔서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신다.

이미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부르짖음도 아픔도 없다.

먼저 것이 이미 지나가 버렷기 때문이다 라고 쓰어져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것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 재림 메시아 시다.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그했던 것 처럼, 미국에서의 사건도 6천년간 하나님의 희망이었던 복귀의 실천을 하고 있어서 사단 세상의 법률에 걸려서 투옥되는 것은 원리의 예정에 있다고 문선명은 말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원리대로, 처녀를 신부로 맞이하여 "어린양의 잔치"를 행해서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였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는 교통사고로 또는다른 형태로 죽은자 들도 있고, 세상에 여러가지 좋지 못한 소문을 퍼트리고 있는 장본인도 있는 것은 무슨 이치일까?

문선명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왜 그런지 당연한 사실을 왜곡해서 선전하며 전도하고 있다. 그 때문에 도리어 문선명의 장래는 점점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라고생각한다.

나는 문선명이 원리의 실천이라고 말하면서 하고 있던 행위를 옆에서 직접 보아온 사람으로서, 그 사실을 명확하게 하여 .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인가?

아니면 남달리 여색을 좋아하는 돈벌이 주의자인가 라고 하는 것을 밝혀둘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문선명이 하나님과 동격으로 복귀된다고 하는 근거는 성스러운 어머니 ! 정득은이 재림메시아 로서의 문선명을 낳은것과, 문선명이 16세때의 4월 17일 부활절의 전날밤 꿈속에서 예수가 나는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복귀의 임무를 다 하지 못했다.

당신이 그 대신 제3의 아담으로서 재림 메시아의 임무를 다 해 주기 바란다 라고 말했다는것(통일교회의 신문에도 명기 되어 있다)의 두 가지를 들수 있다.

만약 그대로 문선명이 하나님의 실체로서 복귀의 임무를 실천 하였다면, 창조 당시의 에덴의 동산이 복귀되어, 통일교회의 교인들은 참 부모와 함께 눈물도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복귀(復歸)라고 하는 미명으로 섹스


우선 6마리 아 복귀문제에서 부터 생각해 보자.

사탄에 의해서 해와를 빼았긴 것 때문에, 하나님은 6천년 동안이나 노여움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나넘은 해와를 도로 찾기 위해서 제2의 아담인 예수를 이 세상에 보냈으나, 예수의 생모인 마리아는 예수를 자기의 아들로 밖에 생각지 않고, 자기의 아들이 우선 어머니와 섹
스를 하기 위해서 생겨 났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 (註 - 이와같이 어머니와 아들이 섹스 하는것을 원리에서는 '모자협조'라고 한다. )

그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고 원리는 설명하고 있다.

또 원리원본에는, 가롯 유다의 연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가 빼앗아 복귀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원한을 없애기로 되어 있었는데, 유다가 이에 복종하지 않고 은화 30냥을 받고 예수를 팔았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예수가 복귀하려고한 6여인의 마리아를 복귀 시켰더라면 원리대로 실천되게 되는 것이라고, 나도 이해 하였었다.

그런데 6인의 마리아를 복귀시킨 후에도 문선명은 손에 닿는대로 몇십명이 넘는 여인을 복귀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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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들면 이화여자대학의 사감 선생이었던 한충화는 문선명에게 복귀된 후에 결국 섹스의 마수에 빠져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어 문선명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무렵 볼일이 생겨서 문선명과 전주에 있을 때, 미인 여자와 만나게 되어 그 여성과 복귀하는 것을 나는 바로 옆에서 보았다. 그것이 그녀였다.

한충화는 열열한 크리스챤으로서 미망인이 되어 사무엘 이라고 하는 벙어리 아이를 데리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었는데,그 '원리'에 속아서 문선명에게 자기의 몸을 제공 하는것이 하나님의 뜻 이라고 믿고 기뻐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선명이 또 다른 여자와 복귀하고 있는것을 알자, 그 길로 서울로 돌아와서 문선명과 결별하였을 뿐아니라, 그곳이 더럽혀 졋다고 자궁 수술까지 하였단다.

그때 까지의 자기의 경솔한 행동과 섹스에 미쳐있던 문선명에게 정조를 빼앗긴 것을 후회하면서 그 뒤 얼마 안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누구 때문이며, 누구의 죄라고 말 할수 있을 것인가?

1955년 이화여자대학의 5인의 교수가 퇴직하도록 추궁하여 사표를 내고, 14인의 학생이 학교에서 를겨나게 되었다. 이일은 역시 문선명과 교수와 학생과의 복귀 사건에 얽혀 있던 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부산 수정동시대에 이미 6마리아는 결정되어 있었으며, 섹스의 실천도 끝났던 것이다. 그런데도 또 새로운 마리아를 복귀 시키려고해 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복귀를 한다고 하는 것만이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여성 식구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고 ,또 원리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여인들에게는 무작정 복귀를 받는 일에만 필사적인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통일교회에 대해, 외부에서는 통일교회에서는 벗고, 춤추며 한번 입교하면 마취에 걸려서 두번다시 올수 없도록 해 버린다 고 하는 소문이 널리 퍼져 가게 된 것이다.


많은 가정이 파괴되다.

 

그래서 실제로 문선명의 원리의 이야기를 듣고, 타락원리와 복귀원리를 들음으로서, 각계 각층에서 와있던 사람들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 왔다.

지금까지 아이들과 함께 평화로운 생활을 해온 부부와 처가 통일교회에 들어가고 나서는 옷을 벗는 것도, 남편과의 섹스도 거부하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람들은 문선명에게 바치는 경제 문제만도 골머리를 앓았다 .

그래서 결국 이혼하게 되고, 문선명의 원리에 따라 가정생활이 파탄나게 된다.

경제적 기반이 없는 가정에서는, 더욱이 믿기만 하던 남편이 처에게 절망해서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고 말게 된다.

그 당시 통일교회의 섭외부장이었던 김인철은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는것이 큰일의 하나였다.

이와같이 파탄된 가정 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도 170가정 이나 된다.

그 당시 문션명으로부터 복귀를 받기는 하였으나, 문선명의 행위를 보고 체험하고서는 저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오직 색에 미친 행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여인들은 남편에게는 모르는체 하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이 여인들의 심경은 지금쯤 어떠할 것인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 식구들은 그래도 모든 것을 바쳐서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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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당시 통일교회의 어느 남자식구로부터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문선명 선생의 복귀는, 그야말로 엄숙한 것이 겠지요.

 그때는 웃으면서, 그러믄요 하나님이니까 라고 대꾸해 두었으나, 재림메시아의 복귀의 의식인 만큼 엄숙한 것이라고 상상 하는것도 당연 하겠지,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하나님 이었어야 할 문선명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앞에두고 입 맛을 다시는 개같이 되어굶주림에서 해갈이나 된듯이 섹스를 했을뿐이다.


오로지 성욕 불덩어리 같았다.

사실 문선명은 정력이 뛰어 나서 하루밤에 열번 한 일도 있다고 한다.

본처였던 최선길의 말이니까 이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복귀를 받을 때의 부인 식구들도 그렇다. 순수했던 여성들이니까 당연 하겠지만 멋대로 너브러져서 곧 기를 쓴다.

큰 소리를 지르며 실신한 사람도 있다.

내가 돌봐 주었으니까 이것도 틀림 없는 사실이다.

사단을 부정하고 있는 문선명의 복귀라지만, 결국은 사단 세상의 섹스와 무엇 하나도 다를것이 없다.

그러한 문선명의 정체를 재발리 눈치채고 가정으로 복귀한 부인네들은 정말로 현명하였다. 

그녀들은 엄청난 피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원한은 여름에도 서리를


그런데 문선명은 지금 자기가 재림메시아 진정한 아버지가 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복귀한 식구들의 뒷바라지는 하나도 해 주지 않는다.
외국 특히 일본과 미국에서 참 아버지로 군림하게 되어, 일본에서는 영감상법(靈感商法) 따위로 반사회적으로 돈을 들어 모아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희생이 되어온 사람들에게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문선명을 원망하면서 통일교회를 나서는 여성이 날마다 늘어 가고있는 상황이다.

문선명은 장래 어떠한 방법으로 무슨 원리를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 갈 것인가 ?

미국의 목사들에게 원리의 비디오 테이프를 35만개나 만들어서 발송 하였는데 그것으로 이런 것이 방지되게 될 것인가?

미국의 목사들이 원리설명회란 명목으로 세계각국을 방문하여 몇억원이란 돈을 쓰면서 포교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을 방지 할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미국, 한국의 유명한 학자들에게 비싼 원고료를 주고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 구세주로서 치켜 올리려고 하고 있지만, 한국의 속담에 여자의 원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註 - 이것은 음력이니까 5, 6월은 한 여름이다)고 하는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청춘시절에 문선명에게 복귀되었던 여인들은 재산을 전부 털어 넣고, 남편한테는 이혼 당하고 자식들과도 헤어져서 지금은 폭삭 늙어 버렸다.

이 사람들은 거의 식모를 두고 살았을 만큼 넉넉한 가정의 부인들이었는데 재림주! 문선명을 맞아서 그에게 모든것을 바쳐 버리고 지금은 먹고 지내는 것도 옹색해서 자기(자신)가 식모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사람이 몇 십명이나 된다.

또 원한을 품은채 일생을 보낸 사람들은 몇백명이나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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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여인들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 보려고 생각 하였으나, 나의 경제적인 사정둥 여러가지 문제로 실현 하지 못해서 참으로 민망하게 생각한다.


처녀에게 낳게 한 아이들


원리 중에서 제일 중요시 되는 참어머니가 되는 처녀의 선택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 했
다고 생각한다. 참 아버지로 자칭하는 문선명과 어린양의 잔치를 올리는 사람이 참어머
니가 된다고 하는 것인데 , 그의식에 따라서 에덴의 동산을 타락전의 상태로 되돌려서 하
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원죄를 뿌리에서 부터 뽑아버린 후에, 또 죄없는 깨끗한 세상으로 되돌려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이, 영원히 참 부모를 모시고 살아 갈수 있는 세상이 창조 된다고 하는것이 원리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참어머니인 처녀 한사람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또 알기 힘든 문제가 많이 있다. 문선명이 평양에 있을 무렵 정명선 씨의 처이며 아이들의 어머니인 김종화가 "어린양의흔인 잔치"의 상대로서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문선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징역 5년의 선고를 받아 문선명이 흥남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는 것은 몇차레나 썼다.

부산 영도의 신성묵의 자택에서는 김영회라고 하는 처녀를 복귀 시켰으나 그 후에도 관계를 계속해서 김 영희는 임신하였다.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문선명은 오승택이란 학생에게 연애한 것처럼 연극을 꾸며 김영희와 함께 일본으로 밀항 시켰다. 김영희는 일본에서 문선명의 아들을 낳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살게 되었다.

또 더욱이 이성례 라고 하는 처녀와도 복귀하여, 남자아이를 낳게 했다. 서울로 와서는 6마리아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문선명은 신부인 처녀를 선택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이성화를 서울역 앞의 여관에서 복귀한 것이다.

이성화는 그 후 자기가 참 어머니 후보의 첫번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의 공범은 이순철이었다.

이성화를 선동한 그녀는 신부 참어머니로 선택되어 복귀한 증표로서 금반지를 만들어 이 가련한 처녀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선명은 이 처녀들을 모두 버리고 홍순애의 딸 한학자와 "어린양의 잔치"를 올려, 한학자가 참 어머니가 된다고 말하며 결혼했다.

지금은 많은 통일교회 관계의 출판물 중에서 참 아버지로 되어있는 문선명과 참 어머니로 되어있는 한학자와 함께 살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 한다는 목표를 걸고, 여러 단체와 많은 경제력을 동원해서 문선명을 옥중의 구세주라고 치켜 세워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로서 돋보이게 하기위한 여러 가지 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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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한자는 누구냐

 

문선명의 소개장

 


다음에는 경제문제의 내정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앞에서도 쓴 바와 같이 1953년 내가 서울로 올라 왔을 무렵은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려고 해도 기차의 3등석 자리의 여비도 없어서 여자 식구들이 준 돈으로 겨우 왕복 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 후, 서울시 북학동에 집을 전세임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고 유효민의 제안으로 푸로마이드 사진을 제작 판매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되어서 교회를 흥인동으로 옳겼다. 식구들도 점점 늘어서 통일교회는 번창해가고 있었다.

그해(1955년)에 7.4 사건 (이화대학 퇴학퇴직사건)으로 문선명과 간부 다섯명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문선명이 출옥한 후에 청파동 (현재 통일교회 본부가 있다)으로 일본식으로 지은 이층집을 사서 본부교회를 이전하였다.

그 후 나는 문선명한테서 수고 하였소 한동한 서진광산으로 가서 쉬십시오 라고 말하기에 그가 써주는 소개장을 가지고 서진광산으로 가게 되었다. 1956년 7월 나는 거기서 생각해 보지도 앉았던 광산의 책임자가 되어 몇 달간을 지내게 되었다.

이 서진광산은 통일교회의 간부였던 정석천이 기부해서 문선명의 소유가 되고, 그가 직접 경영하고 있던 광산이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후에 또 쓰기로 하겠다.

내가 광산에 가 있는 동안 유효민은 산탄 공기총을 발명해서 특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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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기총을 제작 해 보니까 꽤 성능이 뛰어 났으므로 본격적으로 제작 · 판매하게 되어
통일교회 의 경제적인 기반을 굳혔다.


악착같은 노동착취

 

그 당시 문선명의 친척으로서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문성균이 처음인데 문선명이 찝차를 구입한 때에 운전수로 들어왔다. 그 다음이 문용선 인데 정석천 장로가 경영하고 있던 아산의 토기 공장에 가서 일하고 있었다. 문선명의 친척은 이 두사람 이외에는 한사람도 없었다.

그 이전에 내가 문선명과 부지런히 일하고 있을 무렵에 문선명의 친척은 한사람도 없었고 이름조차 들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현재 문선명의 친척들이 통일 교회의 경제를 좌우하는 상황이 되어 있어서 내부에서도 큰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원리에 반하는 것이다.

 문선명은 그전부터 이세상의 모든 돈과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남편의 돈을 훔쳐다가 나에게 헌금 하더라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에 있
는 돈을 훔쳐다가 우리에게 써 버렸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법률로서는 죄가 되지만 하나님의 법률로서는 죄가 안된다고 식구들에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식구들은 양심의 가책 같은것은 조금도 느끼지 않고 남편의 지갑에서 돈을 몰래 가져다가 문선명에게 쏟아 부었다. 그 덕분으로 오늘날의 통일교회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렇게 식구들이 고생해서 경제적인 토대를 만들어 놓은곳에 문선명의 친척들이 뛰어 들어와서 경제를 주무르며 자유자제로 쓰면서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반면 최초의 단계에서 경제적인 토대를 만드느라고 고생한 사람들은 거의 탈퇴 하든가 쫓겨 나고 있다.

현재 그 당시의 사람으로 남아 있어서 경제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것은 일성종합건설의 사장을 거쳐 작년(1992년)부터 일신석재로 옮겨 간 이수경 사장과 일화식품의 김원필 사장 뿐이다. 이수경은 당시 아직 열여덟살 정도라 문선명의 뒷일은 아무것도 몰랐다.

또 북에서 우리들과 함께 남하 하였을 때는 22세 정도였던, 김원필은 문선명 이 죽으라고 말하면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충실한 심복이었다.

 공기총 제작을 시작한 무렵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입교함으로 가정이 산산조각이 되어 고아원으로 보내져서 거기서 키워진 15~6세의 아이들이 수택리에 있던 통일산업(주) 예화공기총 제작소의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통일산업 당시의 사장은 김인철)

그 인원수는 350명 정도였으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그들에게 지불된 돈은 한달에 단
돈 500원 이었다. (일본 엔화로 환산하면 겨우 100엔정도-1965년 당시) 이것은 엄청난 노동력 착취로써 말도 되지않는 실례이다.

어느때 지금은 고인이 된 김희옥 집사의 17세된 아들이 고아원에서 도망해 나와서 어머니를 찾아 통일교회로 왔다. 그리고 이 모자가 서울에서 주택건설의 공사를 하고 있는 나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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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아들이 통일산업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듣지 않아서 박선생 한테서 써 주실수 없겠습니까? 하고 부탁을 한다. 176

아들은 통일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혹사해서 참을수가 없어서 도망쳐 온 것이었다. 이 사실을 내가 그 아들을 사원으로 쓰고 있을 때에 들은 이야기임으로 틀림없다.


문의 아들 흥진과 효진


1983년 문선명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를 돌며 강연을 한 일이 있다. 그때 문선명의 아들 문흥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그 이유로서 통일교회는 문선명선생이 숭공강연을 하고 있을때 사단이 문선명선생을 죽이
려고 노렸으나 그것을 안 아들 문홍진이 아버지의 대신으로 죽었다 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문선명선생이 그 아들을 청년영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므로 그는 영계의 청년들을 데리고 지구로 내려와서 문선명선생의 재림메시아 활동을 도와 협력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이미 하나님이 모든것을 해결 하는 것을 기다릴수 밖에 없는데 이야기에는 후일담이 있다. (후술)

문선명과 그의처 한학자는 이 세상에 군림한 참아버지 어머니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원리에서는 죄도 더러움도 없을 터인데 교통사고로 별안간 죽기도 하며 사단과 똑같이 행동하는 나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 참부모가 낳은 문효진의 스캔들은 통일교회의.내부 뿐만 아니고 사회적으로도여러가지 소문이 흘러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통일교회에서는 아들 문 효진은 한겨울에 문선명 선생이 결정한 성지 성스러운 땅에서 40일간 단식 철야기도를 함으로서 참회하여 문효진의 인격은 깨끗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효진은 문선명 한학자 부부의 장남인데 성화사에서 출판한 성공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문효진의 시집을 읽어 보면, 그를 그의 아버지 문선명의 후계자로서 만들어 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명백한 것이다.
이 또한 이해 할수 없는 문제이다. 지금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자기의 정권을 아들인 김정일에게 넘기려고 하고 있는 모양인데 공산주의 체제의 세습이란 믿을수 없는 폭거와 같은것을 통일사단의 세상에서 당당하게 행해 지고 있는 세습체제를 답습해서 아들의 문효진에게 재림메시아의 권력을 넘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세상을 구할수 있는 이는 문선명선생 밖에 없다고 하는 책을 쓴 김은우 박사는 책이름을 바꾸어서 이 세상을 구할수 있는 이는 문효진 선생밖에 없다고 하는 책을 출판 할 것인가?

또 일본인의 아스기요시는 옥중의 구세주 문선명이라고 하는 책명을 청년구세주 문효진이라고 바꿀 것인가?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느 사람에게서 들었다.
축복을 받은 가정의 제2세들이 40일간 청평기도원에서 집회를 하고 있을때의 일이다.
문효진의 주최로 1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출석해 있었다. 옛날부터 식구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36가정 이요한 목사가 원리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별안간 문효진이 나타나서 집회에 모여있던 사람들 앞에서 이요한 목사를 끌어내리며 아버지 문선명이 쓴 원리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대단히 노했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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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모여있던 식구들은 문선명의 후계자인 그가 참회하기 전의 본래의 불량자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하고 말했다고 한다. 북조선에서 김일성이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정권을 넘기려고 한다는 것으로온 세계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거기에 곁들여 한국에도 통일교회의 문선명이 자기의 아들에게 재림메시아의 자격과 권한을 넘긴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기만 하다.

통일교회는 이제까지 막대한 자금으로 문선명을 재림메시아라고 선전해 왔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일본인 나스기요시가 쓴 옥중의 구세주 구세주 나타나다등 많은 책이 출판되고 있다.

나스기요시가 돈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통일교회의 체질에서 보아 많은 돈을
써서라도 그 아들에게 전권을 넘기는 구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한 원리 어디를 읽어도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고 한다면 그 아들에게 재림 메시아 를 계승 시킨다고 하는 원리는 없다.

이와같은 통일교회의 내용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 그때의 편의주의로 멋대로 이유를 붙여서 상식으로는 생각 할 수 없는것, 인간의 도리에 맞지 않는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히 하여야 할 원리에 맞지 않는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니까 무섭다.

 


삭제된 창시자의 이름


더욱이 또 통일교회는 역사를 바꿔쓰며 태연하게 거짓을 쓴다. 통일교회의 태동기에서 부터 오랜동안 문선명을 믿고 문선명을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수고해 온 많은 식구들을 거저 내 쫓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사단으로 딱지를 부쳐서 명예도 푸라이드도 빼앗아 버리고 배신자라는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이러한 사람을 많이 알고 있지만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이므로 그 중에서 일부만 소개한다.

우선 나 박정화 자신의 문제부터 기술하기로 한다.

통일교회사(상권)에 실려 있는 나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다.

박정화가 누님집에 다만 개 한마리가 남아있는 빈 집에 혼자 있을때 김원필이 찾아 가서 다쳐서 다리를 질질 끌고 있는 박정화를 자전거에 태워서 문선명과 함께 피난해 왔는데 그 선생을 박정화가 서진광산 시절에 배신하고 통일교회에서 나가 버린 것이다.

이와같이 통일교회에 기록되어 있는 박정화는 배신자로 되어있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느냐의 한마디다. 이것은 모든 진상을 똘똘 싸서 감추고 문선명의 우상화 하도록 꾸며 붙인 거짓 기록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그 진상을써 두고자 한다.

우선 지금까지의 요점을 정리 한다면 북에서 피난 할 때의 경과(제2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나는 가족을 버리고 다쳐서 상처를 입은 몸에 채찍을 가하면서 문선명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일생동안 고락을 같이 하자고 한 옥중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그후로는, 문선생을 도와 경제적인 문제로 말로서 다 할수 없을 정도의 고생을 해 왔다. 문선생과 유부녀의 복귀라고 하는 섹스에서 생기는 갖가지 충돌에도 내가 대처 하였고 여러가지 고생을 겹쳐 가면서도 살아 왔다.

문선명과 함께 있던 7년간에 두번씩이나 경찰의 전기고문까지 받았다.

최대의 고비 7. 4사건에서는 5인의 간부가 체포된 중에 수사당국의 끈질긴 심문에 대해서 나는 온갖 수단을 구사해서 문선명의 죄상을 숨기고 무죄가 되도록 노력하였는데 이것도 통일교회의 기록에는 아무런 죄도 없었던 문선명선생은 구속 되었으나 무죄로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식구들의 덕분이었던 것은 앞에서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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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회는 문선명의 신격화에 열중하였으나 1년6개월간의 감옥생활이나 부산의 수정동에서 서울의 청파동에 이르는 7년간 문선명의 한쪽 팔 노룻을 하며 함께 지낸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문선명의인격은 신격적이란 어림도 없고 회노애락이 심하며 금욕과 호색가인
점 만이 유별나서 정말로 사단 세계의 사나이였다.

기상이 약한 문선명은 내가 경찰에서 최초의 고문을 받았을 무렵 누가 그를 찾아 가면 항상 피하기가 일쑤여서 안절부절 불안해 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나가서 용건을 듣곤하였다.

너무나도키가작고 약골처럼 보여서 이 사단의 세상을 맑고 깨끗한 세상으로 복귀해서 본래
의 에덴의 동산을 되살아 나도록 하려는 선생이 어째서 그렇게도 쩔쩔매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한일로 이 우주나 세계를 복귀시킬수가 있겠습니까 고 몇번 문선생에게 말한 일이 있다.
여러가지 고생을 거쳐 내 이름으로 빌린 서울시 북학동 집에서 "세계 기독교 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였다.

1954년 5월 3일의 일이다.

이것도 또 통일교회에서는 무슨 일인지 날짜를 5월 1일로 고쳐서 발표하고 있다.
이때의 출석한 간부는 문선명, 이창환, 박정화, 유효원, 유효민, 김상철의 6인으로 이 6인을 통일 교회의 창시자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통일교회의 관련 출판물에는 박정화라고 하는 이름은전연 나오지 않는다. 제일로 오래된 나에게 "배신자" 딱지를 붙여서 말살해 버린 것이다.


사건이 생겼다 바로 피하라

 

사실은 전혀 다르다. 배신 한것은 문선명 자신이었다.

그것은 내가 서진광산에 있을때의 일이다.

서진광산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날 조동석이 찾아와서 지금 서울에서 사건이 일어나서 선생은 도망갔고, 그때에 문선명 말이 곧바로 광산에 있는 박정화한테 가서 빨리 다른곳으로 도망하도록 전하시오.

만약 경찰이 광산까지 가서 박정화를 체포해서 취조 당할때에 심하게 고문이라도 당해서 박정화가 나의 일을 고백하게 되면 큰일난다고 지시 한 모양이 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어디를 도망하면 좋을까. 이러한 산 속도 위태롭다고 하는것은 당연히 서울의 교회도 식구들집도 위험하다. 이것 저것 생각한 끝에 우선은 문선명을 만나서내 몸가짐을 어떻게 한면 좋을지 의논 해 보려고 생각했다.
조동석에게 선생님의 행방을 물었더니, 짚차를 타고 충무에 있는 용화사라고 하는 절에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듣고 나는 곧바로 그곳으로 가기로 하였다.
광산 주변 산중에 사는 화약주임인 전종만에게 여비를 빌려 가지고 출발하여 밤중 열두시에 충무에 도착했다.
여기서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 그날은 용화사까지 갈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숙소를 정해서 일박하고 아침 일찍이 용화사에 갔더니 정말로 한발차이로 문선명이 송도욱 장로와 조일청, 송병호 등 네사람이 같이 제주도 방면으로 출발한 뒤였다.
절 마당에는 문선명등이 타고 있던 찝차 타이아의 흔적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언제까지 어떻게 해야만 좋은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만 좋은가? 앞일이 막막하다.
어찌할 바를 모른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경찰을 경계하면서 서울로 갔다.
그리고 은밀히 여기에 있으며 연락을 기다림이라고 문선명에게 전해지도록 수배했다.
나는 문선명으로부터의 연락을 열심히 기다렸으나, 한달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서울역전의 지저분한 간이 숙박시설에서 하루에 빵 한개를 씹으면서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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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는 문선명이다

 

한달이상 기다려도 문선명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나는 의심스러운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내가 서진광산으로 간것은 1956년 3월 28일, 7.4사건으로 체포되었던 문선명이 무죄로 된것은 전년의 10월 4일, 약 9개월 뒤의 일이다. 당초에 7~8인의 광부가 있어서 문선명으로 부터 필요경비도 송금되고 있었다.
그 무렵 서울 청파동의 본부에 갔던 나는 새로 입교했다고 하는 육군장교 두사람을 문선명 에게서 소개 받았다. 박보희와 한상국이었다.
그때 문선명은 박정화는 처음부터 같이 해온 한쪽 팔로서 넘버2의 사나이요. 당신들은 박정화한테서 여러가지를 배우시라고 그들에게 나를 소개 했고 두사람 모두그 3년후에 일어난 박정회 장군에 의한 군사정권 구테다(1961년)로 초대 KCIA(한국중앙정보부)장이 된 김종필의 심복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또다른 군인 두사람이 더 들어온 듯 했으나, 나는 만나지 않았다. 또 박보회는 그후 미국으로 가서 활약하여 통일교회의 제2인자로 올라섰다. 그리고 두사람은다같이 36가정의 축복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안되서 문선명으로부터의 송금이 뚝 끊겼다. 아무리 청구해도 기다려도 송금은 없었다 .원래부터 적자이어서 자금이 없었으니까 광산개발은 무리임으로 작업을 중지하고 갱부들은 돌아가도록 하였다.

뒤에 남은것은 서울에서 온 김덕진과 대구에서 거들어 주려고 와 있던 여자식구 세사람뿐 한 동안은 매식을 하면서 견디고 있었으나 얼마 안되어 바닥이 들어나서 끼니도 거르게 되었다.

너무나도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서 밥짓는 아주머니는 대구로 가고 말았다. (그리고 탈퇴 한
것 같다. )

김덕진도 서울로 철수해 버렸고 단지 흘로 남은 나에게 같은 마을에 사는 화약주임인 전종만이 때때로 놀러 올 뿐이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위태로우니 바로 피하라고 문선명의 심부름으로 조동석이 온 것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도망쳐 버린다면 이제 아무도 없게된다. 충무시로 출발하기 전에 됫치닥거리와 정리하는것 만은 얌전하게 끝내기로 하였다. 전 화약주임에게는 발동기를 한대 주고 여비를 조달했던 것이다. 훨씬 뒤 에 안 일인데 ,이때의 사건은 다시 문선명을 둘러싼 복잡한 여성관계가 원인이었다.

내가 산속의 광산에서 먹을것에 어려움을 려고 있던 수년 동안에 통일교회는 미국으로 진출하고, 일본에도 통일교회를 창립시켰다.
(1959년 10월 2일) 더욱이 60년 4월 11일 문선명은 한학자라고 하는 처녀 와 또다시 "어린양 잔치"로 결혼하였다.

그리고 3쌍 합동 성혼식(동년 4월 16일)  33조 합동성혼식(1961년 5월 15일)과 소위 36가정의 조직을 만들었다.

36가정의 신부들의 자격은 원칙으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들로 만들었다.

36가정의 신부들의 자격은 원칙으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어야 했으나 기성가정도 있었다.

이제까지의 경위를 지나치게 알고, 문선명의 여성관계도 상세하게 알고 있는 나는 역시 거북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나를 섬 (島)유배가 아닌 산유배로 긍지에 몰아놓고, 먹는지 마시는지의 상황으로까지 몰아놓고 그 동안에 문선명은 야망을 채우기 위해서 모순 투성이 원리를 추진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때에 또다시 일어난 여자사건으로 쫓기던 그가 광산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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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화를 도망가게 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경찰이 또 고문을 해서 박정화에게 불게 한다면 큰일이다라고 일부러 삼복중에 광산으로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해 낸것 만으로도 문선명이 나를 과거의 사람으로 취급하려 했던 참뜻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문선명은 나를 오래도록 살게 하기 위해서, 도망치라고 한것은 아니다.

자기가 오래도록 살아 남기 위해서 나를 과거의 우리에 가두어 버린채 도망치도록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만은 신장 개점한 통일교회의 안방자리에 나를 돌아오지 못하도록 찬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된것은 정말 훨씬 뒤에서야 알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당시의 나는 하루 한개의 빵조각으로 허기를 채우며 살아가면서 한여름의 땀에 흠뻑 젖는 간이숙박시설에서 한달 이상을 문선명으로 부터의 연락이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1962년 8월의 일이다.

이것은 사실이며 거짓이 아니다.
나는 결단코 문선명 을 배신하지 않았다.

배신한것은 문선명 이다.

 

 

제6장  진짜 사단은 문선명이다

 

산 증인의 이용가치

 

재혼해서 신천지로

 

나는 문선명에게 배신 당하고, 서울역전의 간이 숙박시설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나를 구해 준것은 엄덕문씨 였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가서 주택건설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일본 와세다 대학의 건축과 출신으로서 지금은 세계의 건축가 100명중의 한 사람)
그래도 나는 문선명 한테서 한번쯤은 무슨 연락이 있을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으나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문선명으로부터 단한번의 연락도 없었다. 문선명은 하나님과는 다른 속된 성격의 사나이라는 것을 남들보다 훨씬 더 알고 있는 나였다.

그래도 하늘에 맹세하고 출발한 분신으로서 일해온 나를 절대로 방치 할 리가 없다. 흥남의 옥중에서 「생사를 같이하자」고 맹세 하고 여기까지 서로 도와 가며, 생명을 걸고온 두사람이다.

마음 한구석에 그것을 믿고 있던 나였으니, 14년간에 걸쳤던 문선명과의 인연도 이것이 마지막이고 자나 깨나 나의 인생이었던, 통일교회에서도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이무렵 나는 엄덕문의 누이동생과 결혼 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로서 훌릉한 인물 이었는데 6·25동란으로 북의 인민군에게 집앞에서 사살 되었다. 아이들이 세사람 있었다.
나는 또 가정을 갖게 되어 땅에 발을 붙이고 제3의 인생을 내 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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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의 인생은 북조선시대  제2의인생은 흥남 형무소에서 통일교회 시대이다. 이때 나는 45세 처는 37세였다.
그로부터 10년간 나는 부산에서 주택건설 사업에 몰두하였다. 당초부터 계획 했던 300동의 주택건설과 아파트건축도 끝내서 무사히 책임을 다 할 수가 있었다.
다음 약10년은 통일교회의 식구였던 사람으로부터 부탁을 받아 매립공사에 협력하였다. 중국 신경공업고등학교 토목과 출신으로 군의공병대에 있었던 나로서는 토목공사는 전문분야이다.
많은 작업원(인부)을 지휘 감독하며 즐겁게 일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직책상 부하들과 친목의 술을 매일 호쾌하게 퍼 마셨다. 그런데 그것이 않 좋았다


병으로 쓸어지다

 

1981년 나는 뇌일혈로 쓰러져서 약 두달 동안 인천 기독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처의 오빠 엄덕문의 처 고희용과 누님의 엄순태가 나에게 「당신과 문선명 선생과는 하늘이 맺어준 깊은 인연이 있으므로 통일교회에서 떠나서는 않됩니다. 떠났기 때문에 당신은 병에 걸린 것이니까, 지금 부터라도 참회해서 통일교회로 되돌아 오시오」라고 권했다.

나도 생각지 않았던 병으로 조금은 마음이 약해 있던 상황이었다.

진실한 크리스찬 이었지만 신앙심이 얇어져이었던지도 모른다.
나는 인천 송도에 있던 나의집 뒷산에 들어가 3개월간 기도 하였다.
내가 기도 한 것은 「지금까지의 나의 살아온 방법이 옳바른 것이었던가 아닌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또 「병이 든 이몸으로 지금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 가면 좋은가」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계속 하였다. 병의 후유증으로 부자유한 몸이 된 나였으나, 사업의 제1선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시간만은 넉넉히 있었다.

통일교회의 그 뒷일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열심히 모이는 식구들의 근처의 통일교회에 가서 그들과 이야기라도 나누며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도록 노력하자고 생각하게 되였다.
내가 다리를 움직일수 있을만한 때의 인천지구교회의 목사는 문흥권 이라고한다. 몇 달 동안인가 다니고 있던 어느날 예배가 끝난 뒤에, 어느 중년의 여인이 나에게 인사를 하며 나를 아시겠습니까 하고 그녀는말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대구교회에있던 류권사의 딸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선진광산에 있으면서 대구교회까지 예배를 다니고 있을때 아직 고교생이었던 류집사의 딸이었다

지금은 이곳 교구장인 문홍권목사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류권사라는 사람은 신앙심이 두터워서 여러가지 고생을 경험하면서도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모두 교회에 다녔던 사람인데 그 아이들은 모두 교회의 임원이 되어 있었다.
1983년 나이 들은 식구들의 위로여행을 겸해서 성지순례 여행을 가게 되었다. 70세의 나도 노인식구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 하였다. 그 때 류권사와 20년만에 만나서 그동안의 이야기와 아이들이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서울의 본부교회에서 연락이 온것은 여행에서 돌아 온 무렵인데 중요한 의논할 것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서울로 와 주십시오 라고 한다.

 

오랜간만에 만나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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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에 있는 그랜드호텔의 커피숍에 당시 승공연맹의 회장이었던 김인철과 국제부장 겸 섭외를 담당한 안병일, 김덕진목사, 유효민, 그리고 나, 다섯 사람이 모였다.

이 날 본부교회가 나에게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 한 이유는,「김덕진의 행동을 억제 할수 있는것은 박선생 밖에 없으므로, 어떻게 좀 설득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김덕진 목사는 경찰의 유치장에서 용의자나 피해자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설교해서 솔직하고 평온한 심경이 되도록 하는 전도 사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김덕진은 전술 한바와 같이 작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통일교회의 식구였을때 통일교회에서 애창하는 성가 20여곡을 작사작곡한중, 성가편집사 유효민씨가 19곡만을 발취 게재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통일교회가 그 노래를 작자의 이름도 게재하지 않고 무단으로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수만부나 인쇄를 해서 판매 하였다.
그 출판권과 저작권의 문제를 제기 하기 위해서 김목사가 용산경찰서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협회장인 이재석을 고소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김목사는 그가 통일교회에 있을무렵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복귀를 받은 유신회 한테서 복귀의 섹스를 받은 뒤에 릴레이식으로 그도 열사람이 넘는 여인들을 복귀 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복귀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복귀하고 그 복귀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복귀 시키면 섹스의 둘레가 점점 넓어져서 온 세계의 인간이 모두 복귀하게 된다.

그에게는 이 복귀원리의 실천의 실천 방법에 관해서 자기의 체험을 그대로 쓴 원고를 각 신문에 발표하고 싶다고 하는 의향도 있었다. (제7장참조) 동시에 5천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동을 민사재판에 걸어 김덕진 목사가 5백만원의 공탁금을 내서 「성가」의 가창 금지처분을 신청할 계획도 있었다.

김 목사는 이러한 계획을 변호사와 의논해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날 회합이 이루어 졌던 것이다.
나는 김덕진과 친하고 그의 심정이나 노여움도 잘 이해 할 수 있었으나, 한 식구들로서 통일교회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좀 더 통일교회의 꼴을 두고 보자. 문제제기는 아무때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라고 김덕진을 설득시켜 우선 소송을 중지 시킬 수가 있었다.
그 때 안병일과 김인철이 나에게 「박선생 당신은 인천에 있는 것보다 서울 본부로 오는것이 좋겠오」라고 말해서 그로부터 3년간 나는 본부교회로 나오게 되었다.

 

통일교 창립의 산증인

 

서울의 본부교회에서는 가장 고참인 원로인 나에게 어떤 직책이라도 붙여 주려고 이것저것 제안해 왔으나 나는 모두 거절 하였다.

통일교회의 태동기에서 부터 관여 해 온 한 사람인 나는, 나이먹고 늙은 식구로서 통일교회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 되는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협력은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낳은 자식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어버이의 심경이기도 하였다.
나는 1981년에서 5년간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몸과 마음을 다해 기도도 했다. 또 통일교회에는 「박정화는 재림 메시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산증인」으로 선전되어 이곳 저곳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일본에도 가서 십 수개소에서 40회에 걸쳐 약 5천명 앞에서 강연도 했다.
다만 나의 증언에는 반드시 조건이 붙었다.
강연하는 내용은 「흥남감옥에서 남쪽으로 피난 한것 까지」로. 그 이외의 것은 말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요컨대 문선명이 얼마나 고난의 길을 넘고 넘어온 위대한 인물인가 를 많은 사람에게 인상 깊게 심어 주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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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복잡한 심경 이었지만 사실 있었던 그대로를 이야기 했다.
그래도 나는 통일교회의 열렬한 식구는 좋아 했다.
어떤 종교도 그러하지만 위의 간부는 썩어 있어도, 말단의 신자는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1985년 7월 8일 나는 통일 신학교 학생회장들의 요청으로 「피난길을 실현했다.

문선명과 함께 평양에서 부산까지 내려갔던 피난과정을 재현 하기위해서 임진강에서 영등포까지 걸어 주었으면 하는 부탁 이었다.

나는 임진강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것을 부자유한 몸으로 18키로의 거리를 도보로 강행했다.
이 때문에 발이 부어 올라서 병원에 다니게 되었다.

74세라고 하는 나이 에다가 너무나도 장시간을 걸었기 때문에 혈액의 순환이 나빠져
서 옛날에 골절했던 부위가 부어 올라 오는 것이 아닌가?

병원에서는 이 부어 오른 독이 뱃속으로 돌면 위험하다고 겁을 준다.

맨 처음 치료에서 약값이 2만원 침값이 5천원 교통비 4천원등 약 3만원인데 완치 하기 까지 나의 경제 형편으로는 지불이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학생회장에게 연락 해 보았으나 아무런 답변도 없었으므로 하는수 없이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간직해 두였던 수표를 은행에 넣고 한달에 백만원이란 비용을 들여서 겨우 치료할 수 있었다.
통일신학교의 교장 이었던 이요한 목사에게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치료비의 분담을 사정해 보았으나 이목사도 「자기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고 냉정하게 거절 당하고 말았다.
이요한목사 정도의 고참도 이렇게도 명확한 문제를 「어떻게도 할 수 없다 」고 한것은 사람을 이용 할 만큼 이용하고 다음은 쓰고 버리듯 하는 문선명의 체질과 독재 지배가 변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83년의 어느날 통일교회의 국제부에서 나에게 연락이 있었다.
「잠깐 물어 보고 싶은것이 있으니 와 주십시요」하고 하는 것이었다.
가 보았더니 「중앙일보」에 실린 사진을 보여 주며 이 사진을 알고 있는가 하고 국제부장의 안병일이 물어 왔다.
그 사진은 머리카락이 짧은 사람이 겨울용 방한모자를 쓰고 무엇인가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을 업고서 바지를 걷어 올리고 냇물을 건너고 있는 사진 이었다. 이 사진은 문선명선생이 박선생을 등에 업고 시냇물을 건너고 있는 사진이 아닙니까 하고 안병일이 물어 왔다.
나는 그 당시는 사진을 찍을만한 여유 같은 것도 없었고, 선생한데 업혀서 냇물을 건넌일은 없소 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국제부에 있던 직원들도 아무말도 못하고 이 건은 그것으로 끝났다고 나는 생각 했었다.
그런데 그해 5월 나는 일본에 가게 되었다. 동경 시부야의 본부교회로 안내되어 갔더니 아랫층 응접실에 걸려 있는 문선명 선생의 초기의 발자취 라고 하는 전시장에 중앙일보에 실렸던 사진을 벽의 크기만큼 확대한 것이 걸려 있었다. 일본 본부교회 간부들이 몰려와서 그사진 앞에 나를 세워 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 사진에 대해서 그들이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미국에 있는 문선명이 이사진을 맨 처음에 보고, 이것은 내가 피난할 때에 박정화를 업고 한겨울 추운때에 맨발로 냇물을 건너는 장면이다 라고 이야기 한듯 하다.


그 장본인이 왔다고 해서 일본에 있는 식구들이 감격해서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으면 하고 부탁을 했다.
한국의 통일교회의 국제부에서 말한 것 처럼 이런 사진은 촬영한 일이 없오. 문선명선생이 나를 등에 업고 맨발로 내를 건넌 일은 없다고.

말해 버린다면 문선명이 거짓말을 한것이 된다.

그렇게되면 일본의 식구들은 실망한것이 틀림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할수 없이 거짓말을 할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용매도에 있을때 청룡반도에서 돌아을 때에 만조되어 할 수없이 선생한테 업혀서 건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 15.6인 정도의 식구가 따라와서 우리들의 모양을 사진으로 찍어 놓았다. 이승만대통령의 부인 후란체스카여사가 동란의 사진을 수집하고 있어서 중앙일보에 제공한 것이겠지오 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식구들은 감격해 있었으나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대단히 괴로웠다.
이 사진이 또 1985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의 「비화6 25=정일권회상록」에 기재 되었는데 중앙일보에 실었던것 보다도 훨씬 또렸하게 보였다.
그 사진을 보니까 찍혀져 있는 것이 문선명과 내가 아닌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사실이 아닌것을 사실인것 처럼 만들어 내는 것은 통일교회로서는 극히 보상적인 것으로서 그들이 선전하는 때의 상투적인 수단인것이다.


원리는 김백문(金百文)의것 도용


서울의 본부에 나가게 되면서 부터 나는 창립당시에 수고한 많은 식구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탈퇴한 사람도 많고 또 그속에서 버티고있는 사람도 있었다. 년로(늙으신)한 부인들이 더욱 불쌍했다.
복귀원리를 구실로 문선명에게 몸을 마구 짓밟히고 재산도 가족도 잃고 생활에 어려운 처지가 되어 버린 그 사람들은 문선명을 원망하며 이런 인생으로 만들어 버린 하나님도 나쁘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통일교회는 표면적으로는 대단한 세력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 같았으나,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돈에 얽힌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1984년 7월 20일 문선명은 탈세한 죄로 아메리카 커네티같주의 렌단베리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함께 수감되어 5개월 가까이나 형무소에서 문선명과 생활한 일본인 가미야마(챠ㄴU)(그후. 일본 통일협회의회장에 취임 92년)은 형무소에서의 문선명 선생의 태도는 훌륭했다는 등으로 발표했으나, 그것은 문선명이 형무소에 들어가는 일이 세번째로서 이미 길이잘 들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 이야기다.

흥남에서는 평양의 여성들과의 성문란한 행위로 사회질서 문란죄, 서울에서는 식구들의 위증과 우리들의 필사적인 행동으로 증거인멸을 한 덕택에 무죄로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대로 라면 장기형이 되는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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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탈세사건 외에도, 부동산취득을 둘러 싼 미묘한 소문도 얽혀있다. 1년을 넘게 옥중에서 보내고 다음해 8월 20일에 석방 되었으나, 통일교회는 문선명선생은 사실 무근이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35만명이나 되는 미국의 목사에게 통일원리의 비디오나 책을 증정하며 막대한 돈을 써서 출소잔치를 하는것 보다도 좀더 발밑을 비쳐보는 행동이야말로 진짜 원리가 아니었을까.

더구나 통일교회가 보배처럼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창조, 타락, 복귀의 원리」는 문선명의 발안(發案)이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 밑에 최선길 부인과 다니고 있던 문선명이 김백문의 논리를 그
대로 도용 한 것이다.

되는데로 외워서 논리일관이 되지 못한채, 종이에 연필로 쓴 문선명의 메모를 유효민이 정서해서 정리 하고, 유효원이 논리에 모순없이 구성 한 것이다.
통일교회의 원리는 죽은 유효원이 진짜이며, 원칙대로 하자면 오직 유효원이 진짜 교주이다. 그 큰 은혜를 입은 유효원의 우수한 두뇌와 인격을 질투한 문선명은 그 후 갖은 수단으로 몹쓸짓을 곁드려서 드디어는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도 있다. (후술)

통일교회의 원리는 문선명이 김백문의 는리를 도용해서 유효원이 정리해 낸 것이라고 내가 지적하는 근거는, 김백문 저작 「기독교 근본원리와 성신신학」을 읽으면 일목요연하다.


이복헝제 결혼 의혹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어느 때인가 부산에 있는 송병호 가족이 별안간 나에게 전화를 해서 부산의 대학병원에 송사장이 입원중인데, 박선생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송사장은 위독한 상태 입니다 라고 말한다. 나는 바로 달려 가고 싶었으나 그때는 나도 마침 병이 들어서 몸을 가누기 조차 어려운 형편 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 병이 웬만하면 곧 찾아 가리다 라고 말하였는데, 3일후에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다.

이 죽은 송사장이 생전에 몇차례 나에게 문선명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일이 있다.
문선명의 처인 학자 이외의 여자에게서 난 아들과, 간부의 딸이 결혼했는데 이것은 남매결혼이 아닌가?
그 간부 부인은 9세의 차이가 크게 있어서 웬만해서는 결혼의 상대가 될수 없는 터 인데 ,
36가정 (후술)의 하나로 되었다.
실은 그때 그처는 문선명과의 복귀로 임신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적당한 식구가 없어서 김영희나 이성례의 경우처럼 부탁 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할수 없이 한 간부에게 맡겨서 문선명이 임신시킨 식구와 결혼 시켰던 모양이다.
문선명의 아들인 그남자 아이와, 간부와 그의처 두사람 사이에서 낳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문선명의 아이인 딸이 결혼 하는 것은 남매 결혼이 틀림없다.

한국의 관습상 남매결혼이란 말도 되지 않는 것으로서 있어서는 않되는 일이다. 나는 열심이 그렇지 않다. 무슨 착오 이겠지 하고 그를 이해 시키려고 애썼다.

이 송사장은 부산에서 내가 문선명을 소개 해서 식구가 되었다. 서울의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출신으로 매우 친하게 지내고있었다. 부산의 세관과장을 퇴직하고 나서 통관사무소를 경영한 사장이었다
통일교회가 드디어「원리해설」을 출판하게 되었을때 내가 부탁해서 50만원의 자금을 내 준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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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 동안은 왜 열심으로 나오는식구로서 제법 많은 헌금도 하였는데, 문선명이란 남자의 정체를 보고는 크게 실망했다고 노해서 탈퇴해 버렸으나 그후에도 문선명의 일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 송사장이 자신을 가지고 사실이다 라고 말한 이상 나는 반론 할 수 없었다.
또 당시는 광산에 있어서 36가정의 경위를 몰랐던 나에게는 또 반론의 재료도 없었다.

 

원리대로 실천한 김덕진(金德振)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복귀문제로 무어라 해도 기록에 남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앞에서도 기술한 바 있는 김 덕진의 문제이다.
서진광산 시절에 조동석이 서울에서 김덕진을 데리고 대구로 왔다는연락이 있어서 내가 대구로 가니까, 문선명이 김덕진은 서울에 문제가 많으니까 광산에 있는 박정화 한테로
데려 가라고 명령해서 데리고 왔다고 한다. 김덕진은 본래 음악에 재능이있는 예술가로서 솔직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나는 김덕진과 같이 광산으로 돌아 왔으나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깊은 산골에 오게된 경유를 그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문선명의 원리를 듣고, 문선명 한테 복귀를 받은 여자 한테서 자기도 복귀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도 다른 여인에게 복귀 해 주었는데, 그것은 원리대로 실천 한것 뿐이다 라고 말한다. 문선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 유신희 한테서 김덕진은 원리대로 세차례에 걸쳐 복귀를 받은 모양이다.

그 유신희 한테서 복귀를 받은 그는 종로 5가의 엄순태의 집에서 5인의 여자들을 복귀 시켰다 .그 여자들이 또다른 남자들을 복귀시켜 불과 한주일동안에 70여명의 남녀가 복귀 의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점점 넓혀져 갔던바 복귀라고 하는 남녀의 섹스 소문이 협회장인 유효원이나 문선명의 귀에 들어갔다.
그 결과 문제의 김덕진을 서진광산의 나있는 곳으로 추방해서 두번 다시 서울에 나타나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광산으로 온 김덕진은 광산의 굴속에는 들어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 혼자 처 밖혀
서 오직 열심히 원리에 근거한 작사나 작곡을 하고 있었다. 나는 김덕진에게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정직하게 말해 주었으면 하고 물었더니 나는 원리대로 실천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당신은 원리대로 실천 한것이니까 당신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약 2년간 나는 그와함께 대화했다.
김덕진은 문선명 한테서 오는 송금이 뚝 끊겨서 먹을것도 없을 때, 또 서울로 가서 재차 복귀의 실천을 하기 시작 했다.

또 유효원이 나에게 연락이 왔으므로, 나는 서울로 가서 복귀의 실천을 하고 있던 김덕
진을 대구로 데려와서 현재의 부인과 결혼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김덕진은 원리대로 실천한 것 뿐이다. 무엇이 나쁘다고 할 것인가?
문선명은 원리의 설교를 해서 일일이 셈 할 수 없을 정도의 가정을 파괴하였으며 김덕진도 문선명의 원리대로 실천 했을 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을 산속의 광산에 가두어 두고, 서울에는 두번다시 나타나지 못 하도록 강금한 것은 이해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때의 나로서는어떻게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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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가정의 역할

 

속출한 재림 메시아들의 대책

 

도리켜 생각해 본다면, 원리대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 남자 식구를 복귀시켜 그남자 식구들이 또 다른 여자식구를 복귀 시킨다고 하는 방식으로 이세상의 전인간을 복귀하여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은 당연 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중에 「나만이 재림 메시아다. 저 문선명은 엉터리고 사단이다」라고 부르짖어 자기의 복귀를 받지 않으면 진짜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몇 사람씩 각곳에 출현해서 그사람에게서 복귀를 받고자 모여드는 신자들도 늘어 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되니까 문선명 은 생각끝에 「36가정」이 란것을 생각해 냈다.

문선명이 세계의 인간을 모두 복귀해서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므로이 36가정만을 직접복귀(혈대교환)시키기로 한것이다.

그 후에는 진정한 부모가 「성수」를 뿌려서 새로 결혼하는 신부에게 축복을 준다고 하는 형태로 바꾸어 「합동결혼식」을 하기로 한것이다.

36가정이라고 하는것은 이러한 경로로 만들어 진 것인데 그러면 왜 36인가?

「구약시대」의 12지파,「신약시대」의 예수의 12제자, 그리고 문선명의 원리를 「성약시대」라고 해서 12제자, 합계 36가정을 택하여 빼앗긴 종적(縱的)인역사를 횡적(橫的)으로 벌려 놓코, 탕감복귀 한다는 조건만을 세워 구약, 신약, 성약과 전세계를 탕감복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36인의 신부는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나 상대가 아니고서는 자격 이 없다고 되어 있다.

복귀라고 하는 것은 섹스를 뜻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혈대교환(血代交換)」이다.

제2의 아담인 예수가 이루지 못했던것을, 제3의 아담(요컨대 문선명)이 이세상에 재림해서,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한다.

이것은 요컨대 메시아가 세계의 대표로서 6인의 마리아와, 36가정의 아내들과 섹스를 하면, 더러워진 피가 깨끗하게 된다고하는 것인데, 이 의식을 혈대교환(血代交換)이라고 한다.

그리고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한 36가정에서 태어 나는 아이들은, 죄없는 하나님의 자녀 뿐이며 이러한 사람들이 세계에 널리 퍼짐으로써 죄악이 없는 세상에 태어 난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에는 36가정과 6마리아와 같이 문선명과 직접 간접복귀의 혈대교환(血代交換)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 한다. 제아무리 식성좋은 문선명이라도 전부 먹어 치울 수 없는 많은 수 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문선명이「성수」를 뿌림으로서 그것에 대신하고 있으며 섹스 3회의 방법은 그대로 하고 있다.

또 일본에서는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피나누기 라는 표현으로 인식되고 있는것 같은데, 통일교회에는 피나누기란 말은 없다. 어디에선가 잘못 전해진 것이 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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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6가정은 혈대관계를 한 신성한 가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통일교회의 식구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어떠한 중요한 일이 생기면 대개 이 36가정에서 그 책임자를 선임하게 된다고 하는 중요한 지위 에 있다. 이 가정에서 어느 한쪽이 사망한 가정이 5가정 또 탈퇴한 가정이 9가정이 있다.
이들 14가정의 존재가, 문선생의 원리의 어디엔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생각케 해 준다.

원리에 의하면, 잃어버린 해와를 도로찾고, 6마리아도 도로 찾는다면,참부모와 함께 살수 있게 되어서 타락했던 인간이 창조 본래의 인간으로 회복되고, 그 원리대로 생각하면 두번다시 이세상에는 이 36가정과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죽음도 없고, 고통도 없고, 타락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되는데,어찌하여 이 36가정중의 14가정이 죽든지 탈회 하던지 하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그 원리에 잘못이 있음으로써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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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된 공로자

 

또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 라고 한다면, 초기(처음)부터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양말을 짜 신긴 옥상현*, 자기 인생의 절반 이상을 문선명에게 바쳐 충성한 96세나 되는 그녀가 셋방살이로 겨우살아가고 있는 상황을 문선명은 무슨짓을 해서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본래 송도욱 장로의 처 였던 박봉식집사의 경우를 보자.

문선명이 송도욱 장로와 오명춘* 집사를 결혼 시켰기 때문에, 홀로 되고 말았다.
그후 남편도 곧 죽고, 갈곳이 없어진 박봉식 집사는 교회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늙은이는 더이상 소용없다고 하는 교회의 방침으로 교회에서도 쫓겨나서 먹고 살기도 어렵게 되었다. 열심히 문선명을 받들어 온 여인들을 어째서 이다지도 몰인정하게 못본체 내버려 둘 수가 있을까?

초기에 자기가 복귀 시킬 때에는 좋아서 함부로 아무짓이나 하고 그 젊음과 아름다움과 돈이 없어 지니까 곧바로 따돌려 치우고, 다른 여자에게로 옮겨가서 두번다시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것은 원리에 써 있지 않다.

이것을 여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 박정화처럼 부러진 다리를 끌며 함께 남쪽으로 피난 해 온 사람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만들어서 배신자로 소문을 퍼트려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원고를 완성해서 진상을 밝혀야겠다고 결심 했다.
아무리 생각 해봐도 내가 문선명을 배신 한것이 아니라, 문선명이 나를 배신 한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선명보다 뛰어난 인격자-유효원

 

다음에는 유효원씨에 대해서 밝혀 두고자 한다.

이것을 근거로 유효원이 구성 집필한「원리해설」를 완성 할 뿐만아니라, 불구의 몸으로 정력을 다해서 전도사 양성에 밤낮이 따로 없이 충성을 다했으며, 36가정을 선정 할 때에는 그가 고생해서 각자의 짝 짓기를 결정하는 임무를 수행 했다.

유효원은 구 경성제국대학의 의학과 중퇴자로 자기가 환자의 몸 인데도, 자기병에 대해서는 자제히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 결핵성 고관절염으로 다리뼈와 환도뼈가 유착되어 앉을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수술을 받으면 완치가 안될 몸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것을 알고 있는 문선명이 와서 하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수술하도록 명령 하였다.
문선명은 그때 그래도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것은 하늘의 명령에 거역하는 것이다 라고 까지 말했다고 한다.
유효원은 울면서 수술 하는것을 거부 하였다.
자기는 주사로 살아가는데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고 나에게 의논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문선명한테는 거역하지 못하고 할수없이 수술을 받아 그대로 죽고 말았다.
이때의 문선명의 비정한 행실은 내부에서도 간접살인 이다 라고 까지 말했을 정도이다.
유효원의 장례식이 끝나고 산에서 돌아온뒤 교회에서 간부들이 모여 않은 자리에서 효원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었나 했더니 죽었구먼 !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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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가 좋은 인격자로 신자들의 인기가 대단 하였던 유효원에게 문선명은 많은 비밀을 지령하고 후에 위험 한 존재 임을 느끼고 유효원을 거세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또 당시 미국에 있던 대간부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36가정의 멤버였던 이기석, 박종구(주.이 두사람은 당시 이미 죽었었다) 두 사람은 영계에서 대단히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유효원씨는 제일 말석에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그는 통일세계 라고 하는 잡지에 이 기사를 기재하고 청평기도원에서도 발표 하였다. 참으로 죽은 사람에 대해 가혹한 매질이 아닐수 없다.

유효원이야 말로 통일교회 최대의 공로자인데도 볼일이 끝나면 들어덤벼서 못살게 굴고는 죽은 다음에도 매질을 하는 것이다.


재정을 이룩한 실업가 - 유호민


유효민의 이야기도 해 두어야겠다.

유효민은 초기에 경제적 사정이 대단히 어려웠을 때에 푸로마이드 사진을 제작 판매하는 아이디어를 발휘해 당시의 식구들의 생활을 지탱시켜 주는등, 통일교회의 발전에 공헌한사람이다.
또 산탄공기총을 발명하여 그것을 제조 판매 함으로서 통일교회의 경제적인 토대를 이룩한 공로자,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통일산업주식회사」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 공헌자인 유효민에게는 주권을 단 천주를 주었을뿐(후에 다 회수하였지 만) 공기총의 발명특허권 (실용신안국제특허 )은 문선명의 명의로 기증하는 것으로 공증되어 조립부장이라는 직책만을 부여했다.
유효민은 그후 을지로의 예화 공기총 센타에서 백구섭에게 영업부장 일을 맡기고 계속 밖에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30원짜리 차값까지도 영수증을 요구 할정도로 무섭게 감시를 당했다고 한다. -문선명의 지시였을 것이지만, 나와 같은 모양으로 그를 통일교회에서 몰아내려고 한 수작이었다고 생각된다.

드디어 유효민은 통일교회와 인연을 끊고 1972년에 탈퇴하고 말았다. 나의 다음으로 그림자 같은 존재가 탈퇴 한다고 하는것은 유효민이 두번째이다.

이와같이 가장 최초의 비서였던, 박정화를 배신하고, 두면째 유효민을 못견디게 굴어서 탈회 시키고 ,제3의 송도욱이나 교회최고의 두뇌이자 공로자인 유효원을 사망케 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인지, 문선명의 계획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문선명과 같이 있었던 1953년에서 1956년에 서진광산으로 갈때까지의 말하자면 통일교회 발전의 제일 고생한 무렵에는 문선명의 친척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후에도 도중에 문성균, 문용선, 문승룡 두사람이 들어 왔을 뿐이고, 통일교회의 경제가 커 지니까, 거의 대부분의 경제지배를 문선명의 친척 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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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가 아닌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것은, 문선명 자신이다. 통일교회의 재산을 안심 할수 있는 자기의 친척에게 넘겨서 장래의 생활기반을 확립하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제7장 참조)


화제의 다보탑을 수출한 일신석재사장-유호영


나는 어느때 일신석재사장인 유효영(註 - 92년에 그만두고 탈회)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유효영의 이야기로는 자기가 경영하고 있는「일신석재주식회사」에서 열심히 지혜를 짜서 연구한 결과 다보탑을「100분의 16」크기로 축소 한 것을 제작해서 일본에 판매하여본 결과 예상외로 수출이 잘되 매월 20억원 상당을 수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수입에 탐이난 문승룡(문선명의 6촌)은 다보탑 제조부문은 자기가 그 나머지 부분만을 유효영 사장이 담당하는 공장 분활 경영안을 끈길기게 요구했다. 다보탑부분의 수입이 회사 전체 수입의 95%나 차지했다.
지금까지 참고 견디어 온 나에게는 5%만을 건네주고 남어지 95%를 문승룡이 가로 채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림도 없는 생각이다.

이회사 일신석재는 유효영사장이 사장겸 목수겸 노동자로 스스로 청소까지 해가며 여기까지 키워 온 회사이다.
그런데도 전연 관계가 없었던 사람이 뛰어들어 빼앗으려고 하니까 어림도 없는 짓이다 라고 말하며 유효영은 크게 싸웠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부산-대구-서울시대, 북조선에서의 형무소 시대의 일을 생각 하였다.
그 당시는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라고 우러러보며 원리를 듣고 새로운 식구를 모으기에 필사적 이었다. 이 식구들과 함께 원리 그대로의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매일처럼 노동했다 여성들은 재산도 질투도 생각지 않고 원리에만 열심이었다. 자아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오로지 원리의 달성을 기원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력하였다.


문선명의 부정과 범죄

그런데 그다지도 어려웠던 시대가 지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까 들어보지도 못했던 문선명의 친척들이 몰려 들어 차지하고 문선명 일족의 천하가 되어 버렸다.
문선명은 박모라고 하는 사람에게 자금을 건네주고 그 박의 명으로 몰래 부동산을 구입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세무서의 조사에 들통나 자그만치 1억 2친만원의 막대한 세금부과에 놀란 박이 밝힘으로 통일교회의 문선명이 부동산을 부정으로 구입하고 있던것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행위 가 메시아를 자칭하는 사나이가 할짓인가?

문선명 이 탈세관계로 미국의 형무소에서 복역한 그것도 통일교회에 발표대로 「문선명선생은 아무 죄도 없는데 복역했다. 」고 하는것이 된다. 그 복역하고 있을때에도 막대한 돈을 마구 뿌리며 지내고 있다고 폭로되었는데, 타인의 명의로 부동산을 부정구입 하는 맞잡이나 돈이 되는 기업은 거의 문선명의 친적에게 빼앗기고 있는 현실을 볼때 대관절 이것이 종교 단체인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선명이 나에게 이야기 해 준 원리와 이상세계 그리고 그 이상세계의 공생 공의(共生公義)주의 시대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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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일족의 「더 돈을 보내라」「빨리 현금을 보내라」고 하는 소리가 되어 세계로 날은다. 특히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통일교회의 실태를 모르는 식구들이 이상세계의 실현을 믿고 돈 수집에 열심히 뛰어서 영감상법(靈感商法) 이라고 하는 반사회적인 큰문제로 발전했다.
초창기의 노고를 알지 못하는 일족이 저지른 폐해(弊害)라고 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법에 저촉되 어 훔치더라도 하나님은 용서해 준다」고 여자식구를 꾀어서 문선명의 친척인체 하는 말투로 물욕 금전욕에 한층 더 박차를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한국은 일제지배로 피해를 받았다. 그 일본에 원한을 갚기 위해서도 일본의 돈을 싹싹 긁어 내야 한다고 문선명이 호언하고 있던 사실(여러사람의 간부가 들은바 있다)을 일본의 순수한 교인들은 알고 있을것인가?

원리의 이상사회등은 꿈같은 이야기일뿐 재림메시아의 아버지는 별것 아닌 허상에 불과 하다는 것을 빨리 알아야할 것이다.


도대체 통일교회 란 무엇인가?

종교인가?

단순히 배금 기업체인가?

문선명 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메시아를 자칭 하고 있을뿐이라면 원리 는 어떻게 된 것 인가?

문선명의 행위가 원리에 따라서 복귀를 한 것이라고 한다면 원리대로 6인의 마리아로 충분하지 않은가?

6인의 마리아의 정조를 빼앗앗을 뿐만아니라 그외에 더 복귀라고 하는 명목으로 헤아릴수 없을 정도의 많은 여성을 범하고 재산을 착취 한것은 용서할 수 없다.
참 어머니로 한다고 속여서 처녀인 이성화를 서울역전의 여관에서 범하고 또 이순철도 같은 구실로서 범하고 그밖에 김영희라고 하는 처녀도 같은 구실로 복귀해서 임신 시켜서 학생 이였던 그녀의 인생을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것은 재림 메시아를 자칭하는 문선명의크나큰 범죄이며 통일교회로서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김영희의 비찰


연세대학교의 우수한 학생이었던 김영희의 경우를 특기하면 김영희를 임신 시킨것을 알게 된 문선명은 자기의 입장이 위태로울 것을 두려워해서 그녀를 같은 대학의 학생으로서 교인이 된 순수한 청년 오승택과 함께 일본으로 가도록 계획을 꾸몄다.

외국에서의 생활을 보장 한다고 약속해서 부산에서 일본으로 탄피를 밀수출하는 작은 배
에 숨겨서 밀항했던 것이다. (이 비용은 오군이 등록금으로 아버지를속여 받은것)
일본에서의 두 사람은 언어도 통하지 않고 밀항자의 몸으로 입원도 할수가 없어서 극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해산 하였다. 젊은 오승택은 갓난애기의 탯줄을 자기의 이발로 끊고 애기를 출산 시켰다고 한다.

가지고 왔던 얼마 안되는 돈은 다 써버렸고 문선명 한테서의 생활비도 오지 않아 기다리다 지쳐버린 오승택은 일본으로 밀항시킬때 문선명이 부를 때까지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있었지만, 문선명한테로 돌아 오기 위해서 또 다시 밀항을 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대단한 고생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우선 오청년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직접 문선생에게 이야기 해서 생활비를 얻어낼 예정 이었다.

오승택은 문선명을 만나서 자기들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 하고 생활비를 구하였더니 문선명은 이것을 한마디로 거절 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가혹한 이야기는 들어 본 일이 없다. 보통사람이라도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에게 이와같은 처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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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재림 메시아」라고 하는 그사람이 자기가 책임을 지는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다지도 비정한 배신을 태연하게 당하였으므로 오승택은 몹시 노하여 그길로 지금첫 재림메시아로 믿고 우러러 오던 문선명과 결별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때 문선명은 그런 돈은없다. 너희들이 생각해서해 ! 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문선명 옆에 있었으므로 잘 기억하고 있다.
문선명의 말에 오승택은 노발대발 하며 무슨 말인가? 잘 기억해 두라!
너는 사단이다 ! 하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가고 말았다.
김영희가 임신한 당시 연세대학교에서 입교한 세사람의 학생 가운데 사정을 듣고 상의를 받은 오승택이 문선명 메시아와 통일교회를 위하는 것 이라고 믿고서 내가 맡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크리스챤인 부모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고 부산에서 김영희와 만나서 소형 어선을 타고 일본 규슈로 밀항한 것이다.

 오청년이 노해서 뛰쳐나갈때 그자리에 7,8인이 있었으나 누구도 내심으로는 괘심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나는 그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동 ·서도 모르는 일본에서 김영희는 오로지 돈을 가지고 돌아을 오승택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동안의 나날은 김영희와 그 간난애기(문희진)에게는 그 고생 이야말로 대단한 것 이었다.

그러 한 김영희 모자를 일본 오오무라 수용소에서 발견한 한국인의 황모씨가 그녀를 한국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돈도 여권도 없는 김영희는 오오무라 수용소에서 3개월간이나 수용 되었다고 한다.
김영희가 아이를 데리고 돌아 왔으므로 문선명은 할수 없이 아이만은 자기의 호적에 입적 시켰다 아이의 이름은 "문희진" 이라고 한다.

이 아이는 황모라고 하는 사람의 부인이 숨겨서 양육하고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죽어 버렸다.

중학교 여름 방학때 하기 전도 나간다고 큰 학생을 따라 나갔다가 무더운 때라 객차에 오를때 두손으로 붇잡고 오르는 난간을 붇잡고 뒤로 잔득 느러져 시원하게 바람을 쏘이다가 역에 들어갈때 역 시설물에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으로 죽었다.

이사건에 대해선 영계가서 소년들을 동원하러 영계에 갔다고 미화 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 이외에는 「어린양의 잔치」를 거행한다는 구실로 처녀인 이성녀를 복귀해서 그녀에게도 아이를 낳게 했다.
그 아이도 어느 간부의 아들로서 양육 되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다.

이러한 일이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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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사람의 어머니


납득되지 않는 사실은 그밖에도 있다. 최원복의 문제이다.
이 사람은 「7.4사건」때에 문선명이 구속되어 교수들이 사표를 내고 졸업반 대학생들이 퇴학을 당하는 소란이 일어 났을때에 우연히 나와 만날 기회가 있어서 대단히 걱정을 해 준 사람이다.
「나도 힘이 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수가 없네요」하며 아쉬워 했다.
그녀는 이미 통일교회에 입교해서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그후 가정도 버리고 문선명 한테로 달려 왔다.
무슨 일에서인지 식구들은 최원복을 「어머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어머님」이라고 하는것은 원리의 어느곳에 나오는 것일까?

6인의 마리아는 예수가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는데, 그것을 못했으므로 예수는 죽었다. 그래서 제3의 아담이 이세상에 와서, 6인의 유부녀를 마리아로 복귀시킨다고 하는 구실로 문선명이 섹스를 하고 그 육체도 재산도 빼앗았다.

그리고 처녀 한사람을 선택하여 「어린양의 잔치」라고 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문선명과 처인 한학자를 「참아버지」「참어머니」라고 부르게 한다.

참어머니는 이미 있는데도 「최원복어머니」라는 명칭은 원리가운데 어디에서 끄집어 낸 이론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선명은 6인의 마리아를 선택 하였고 그중에서 한사람을 특별히 어머니 라고 부르게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문선명 자신이 좋아서 열을 내고 있는 여인 이었으니까, 어머니 라고 이름을 붙인것 뿐이리라. 대단한 이야기다.
나중에 말하자면 문선명의 처인 한학자의 어머니 홍순애가 「미국에가 있는 최원복은 2호다. 첩이다」라고 어린아이들에게 충동질해서 비상수습책으로 선화예술 학교의 교장으로 최원복을 한국으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이 학교는 박보희의 동생 박노희가 이사장으로 있었는데 교장이란 명칭도 다만 겉치레
의 이야기일뿐 문선명이 당황해서 붙여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원리」를 내세우며 뒤로 돌아서면 전연 종교인 답지 않은 문선명의 언동은 여전히 변함없이 여자문제나 부동산의 부정구입 탈세사건 「남의 돈을 훔쳐 와도 하나님은 용서 한다」고 하는 교사등, 일일이 다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이지만, 한가지만 더 나의 체험을 써두고자 한다.


나의 부끄러운 체험

 

나는 제3장에서 문선명으로부터 이순철이 만든 영계의 역사에 관한 시험을 치라는 이순철이 강요에 문제를 보고 답을 썼더니 「됐어 합격」이야 라고 말했다고 썼는데, 사실은 이때 문선명의 눈앞에서 6마리아의 한사람인 이순철과 섹스를 하도록 명령을 받았던 터였다.
 

나는 이미 문선명이 복귀한 6마리아 중 한사람 한테서 복귀를 받았으므로 문선명의 원리에 말하자면 유자격자였다.
그런 나에게 문선명은 이순철과 이자리에서 하라고 재촉했다. 메시아의 명령에는 따를 수 밖에 없어 나는 그 자리에서 이순철과 섹스를 하고 「합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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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술한 바와 같이 남편 몰래 집에서 많은 돈을 가지고 나온 이순철은 격노한 남편한테 쫓기고 있었다.
그래서 위험을 느낀 문선명과 이순철과 함께 여기저기 도피하며 5박을 하면서 부산으로 간것인데 그때도 같은 것을 명령 받았다.

남편의 노여움을 모른체 두사람은 이순철이 가지고 온 돈으로 호화스런 강산유람의 여행을 했다. 그리고 매일밤 두사람의 섹스를 문선명은 나에게「보라」고 말하며 「자네도 하게」라고 명령했다. 거기에는 종교도 없었고 원리도 없었다.

성욕에 놀아난 남녀 세사람이 귀신들린 광란의 성희가 아닌가!

문선명이 말하는 복귀의 정체를 나는 그때 실증이 나도록 체험 하였다.

또 부산의 영도의 밤 비좁은 방에서 자고 있는 나의 옆에서 문선명은「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돼 잠잘코 있어」라고 말했다.

재림메시아라고 자칭 하려면 원리대로 하였을 뿐이지, 왜 감추려고 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해못할것이 많이 있지만 원리를 앞세워 가장하고 해괴한 복귀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피할런지!

 

붉은 용(龍)이 세상을 미혹

 

자칭 재림메시아의 문선명은 그원리를 김백문으로 부터 배워가지고 평양으로가서 파렴치한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어 실형을 받고 복역한 후에 서울로 왔다.
1954년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 여러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통일교회는 점점 성장해서 일본에는 최봉춘(일본이름 니시가와)을 밀항시켜 해외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또 김상철과 김영운이 미국에 포교하여 미국에서도 식구들은 문선명을 아버지로 우러러 재림메시아로 믿고 있다.

그러나 오늘에서 원리와는 관련이 없는 문선명의 행동으로 많은여성들과 남성들이 희생되어 죽은 시체가 가득 쌓인 속에서 원한의 소리가 들려 오는듯 하다.

그리고 지금은 「복귀 실천의 비밀」이나 「실천의 치부」를 알지 못하는 철부지 교인을 전면에서 내세워서 가면을 쓰고 있다.

미국의 형무소에 들어 갔던것을 영광된 큰 기적등으로 선전하여 옥중에 있었어도 막대한 돈을 쓰고 있었다. 그 돈은 여러 식구들이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귀 한 돈인 것이다.

수년전 미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여신자가 한국 인삼차를 팔기 위해서 흑인촌을 찾아 갔다가 집단으로 윤간을 당하고 죽음을 당했다.

흑인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도로에 그 시체를 끌어 내다가 차로 몇차례 깔고 뭉개버린 사건 이었는데 시체의 주머니에서 통일교회 회원증이 나와서 신원이 판명되었다.

이와같이 비참한 희생으로 들어온 돈을 물쓰듯 써버리면서 문산명은 재림메시아를 자칭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식구들이 총동원되어 영감상법(靈感商法)이나 초코렛 껌팔기로 술취한 사람들의 희롱을 받아가면서 돈을벌어, 그돈을 전부 문선명 한테로 보내진다.

그렇게 보내진 돈을 쓰는 명목으로 문선명은 엉뚱한 계획을 꾸며 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국제 하이웨이 건설계획」이다 현해탄에 해저터널을 통해서 일본, 한국 , 중국, 러시아,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 하이웨이를 만들자고 하는 것이다.

통일교회의 내부에서 조차 「실현 불가능」이라고 실소의 소리가 있는데도 말이다.

재림메시아! 문선명이 이세상에 나타나서 국제 하이웨이를 건설하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한다는 거야!

국제 하이웨이건설 같은 것을 계획하기 전에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해서 참 부모가 되어있을 터인데, 그 재림 메시아는 무엇보다도 죄악이없는 세상을 만들어서 에덴의 동산을 복귀해 놓는것이 본래의 그가 할일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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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은 미국의 신문이나 매스컴에서 자기를 「목사」라고 자칭했다. 문선명은 신학교에 다닌 일도 없고, 목사로서의 안수 받은 일도 없다.

만일 통일교회 계열의 신학교에서 얻은 자격이라면, 질문이 있다.

문선명은 처음 부터 자기는 재림 메시아이며, 제3의 아담이다. 그리고 자기의 할 일은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통해서 본래 그대로의 죄없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것이 사명이다 라고 계속 말해 왔다.

그렇다면 재림 메시아가 목사로 변신해서 어떻게 해서 사명을 다 할수 있는가 !

스스로 지 금까지의 속임수는 말 할것도 못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

문선명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 와서 이름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성경의 「요한계시록 12:91에 이 세상에는 끝날에 붉은 용이 나타나서, 이세상을 미혹케 한다고 씌어져 있다.

자기의 이름에 용(龍)이 들어있는 문용명(文龍明)은 그것에 착안해서, 서둘러 이름을 문선명으로 바꾼 것이 었다.

이것은 자기 가 붉은용=사단 임을 인정 한것이 된다. 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천하에 내밝혀 쓴 이 고백에 거짓은 없다.

문선명 이야 말로 진짜 사단이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 붉은용 문선명으로 인해서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이상, 기만 당하거나 희생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해서 나는 이 원고를 목숨을 걸고 발표 할 결심을 한 것이다.

 

 

진짜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속에서 부터 기원하는 바이다.

 


「1985년 8월 31일 - 1993년 9월30일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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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증언-우리들이 체험한 사실

 

 

통일교회의 경제적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유호민-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문선명의 초대 비서적 이었던 박정화씨의 뒤를 이어 2대의 비서역 사촌간인 유효원, 유
효영 형제와 함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간판을 걸고 발족에서부터 기반 만들기에 크게 공헌

 이화여자대학사건으로 문선명과 옥고 동참
자이며, 36가정의 멤버, 1972년 탈회, 현재
서울거주, 회사사장, 현 72세


나는 통일교회가 정식으로 창립되기 전의 1954년 1월 4일에 부산에서 사촌인 유효원, 유효영과 함께 문선명의 추종자가 되었다.

박정화씨는 그 무렵 식구(신자)의 중심적 존재로서 문선명의 한 팔로서 활동하고 있었고, 나 또한 대단히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는 문교주가 박정화씨를 밖으로 멀리 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원인은 박정화씨는 너무나 문교주의 비밀을 지나치게 알고 있는 처지다. 만약 그가 수사당국에 모든 것을 폭로하게 되면 문선명 선생은 중죄로 될 것은 물론 그가 반대하면 문교주의 모든 행각이 다 탄로 나므로 이 사회에서 파렴치범으로 이 땅에 있을 곳이 없게 된다.
그러니까 박정화는 요주의 인물로서 교인 식구들이 접근치 못하도록, 박정화의 비리에 대한 뉴앙스를 풍겼다. (전매청에 새끼 남품한 돈을 잘라 먹었다는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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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속에서 박씨를 「대구의 할머니들이 박정화는 대사단이다」라고 꿈의 계시를 받았다고 ,귀속말로 퍼뜨렀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박정화씨를 멀리 하기 위한 구실이며, 뒤에서 문선명이 시킨 음모였다고 생각한다.
박씨는 문선명의 여자관계나 돈 출처 문제를 너무나도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소외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상투적 수단이고 나의 경우도 그러 했다.

내가 처음 성경원리를 들을 무렵, 문선명을 위시해서 모인 식구들은 , 그날 먹을 것도 어려운 형편이어서 북한에 있을 때에 사진관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나는 푸로마이드를 제작 판매 하는 일을 제안했다.

이것이 적중해서 하루에 일만 장이나 매상이 있었다.
한장에 7원 전후로 도매한 것을 학교에 못가는 전쟁고아들이 담배나 라이타돌 등을 판자에 넣어 행상하는 때가 유행이 되었다. 10원씩에 팔고 매일 7만원정도씩이나 현금수입이 되었으므로 부엌사정은 단번에 해결하였다.

박정화씨가 말한 바와 같이 남자 식구들은 작업을 분담해서 일을 하고, 여자 식구들은 가위로 잘라서 정리하는 일에 몰두 하였다. 이 일은 2년정도 계속되 었다고 생각한다.
공기총은 1961년부터 시작하여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서 일본에 수출하였으나 공장도 가격으로 1정에 1만원(지금이라면 30만원)에 15만정 이상이 팔렸다.도합 15억원 이었으니까 통일교회에서는 꽤 큰 재원이 되었다.

산탄 공기총을 발명한 내가 「통일산업」의 사장이 되지 못했던 것은 소위 7.4사건(이화여대 14인 퇴학사건)문교주와 옥고를 같이 치렀음으로 전과 기록으로 총포제조 허가조건에 하자가 있었다.

그래서 김인철씨가 사장 문선명의 6촌 문승룡이 공장장,그 아우가 생산부장이 되고 발명자인 나는 "조립부장" 이라고 하는 세상에 유래없는 기묘한 직 책을 받았다.
총의 제 2차특허권은 문교주 지시로 문선명의 명의로 양도 공증까지하였다.

주요간부는 문선명 친척들 뿐, 그들은 한사람이 한대의 차를 가지고 화려하게 타고 돌아다녔으나, 나는 도보를 걸어다닐 수 밖에 없었다.
신앙보다 친척중심의 돈벌이 주의 라고 밖에 생각 할수 없는 입장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은 더욱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나에게 「당신은 사진에 솜씨가 있으니까 사진관이나 안해보려나」농담 말이, 사진관이나 하고 있을 그런 기분이라면 나 혼자서도 된다.
나는 이렇게 강한 반발을 느줬다.

요컨대 이것은 공기총사업도 궤도에 올라셨고 또 문교주의 여자관계도 지나치게 알게 되여 산탄공기총을 발명한 나도 더이상 필요 없으니 그만두라고 하는 암시 아닌가!

1971년 어느날 나는 미국에서 막 귀국한 문선명을 만나서 여러가지 의논을 해 보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측근중에 어머니라고 호칭하는 최원복에게 연락을 하였더니 효민씨라면 시간을 정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와서 만나면 될 것입니다 라고 전화로 통화되어 가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럿이 문교주 중심으로 모여 있는데 예전과 같이 끼여 들었다. 통금시간 12시가 다가 옴으로 한사람 두사람 다 집으로 돌아가고 단둘이 남았다.
그때 뒷문으로 훌적 나가 길래 화장실 가나보다 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다시 들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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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온순한 나라 하더 라도 이 것만은 머리가 화끈거렸다. 전신이 막 뜨거워지며 열이 나고 떨려오는 것을 자신으로서도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나는 문선명이나 통일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온갖 노력과 봉사를 다해 옥고 동참상, 모범상, 14년공로상, 전도상등 교회에 상주하며, 그림자처럼 어디든지 모셨지만 단 한가지라도 가르침에 상반된다든가, 폐를 끼 친 일은 없다.
다만 경제문제나 여자문제를 너무나도 지나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문선명 쪽에서 나를 께름직하게 여기고 배신한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확실하게 인연을 끊고 탈회 하였다.

박정화씨의 체험과 너무나 꼴이 같아서 나는 그의 억울함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본질을 이야기 할 사건에 관해서 나는 한가지 더 구체적 인 것을 증언 해두고 싶다.

그것은 1955년의 「7 4사건」문선명과 우리들 간부가 체포되 었던 사건인 것이다.

7월 4일의 문선명에 이어서 6일에 나도 체포되었다.

체포이유는 「병역기피용의」우리들 북한에서 남으로 나온 피난민에게는 호적이 없었으므로 신분증명서를 만들어 받을 때에 「제 2국민병」으로서의 병역을 면하기 위해서 실제연령보다 5-6세 정도 올려(연상으로)신고 하였었다.
그것이 위반이라고 하는 것인데 문선명 자신도 박정화씨에게 지시해서 위조시키고 있었다.
우리들은 말을 맞추어서 위조에 협력하였다고 공술 하였으나 한편에서 문선명은 자기는 모르는 사이에 제자들이 맘대로 한것 이라고 책임회피하고 있었다.
하나님과 같이 모시는 입장에서 우리들 제자가 그의 연령을 함부로 변경 한다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다. 실제로는 모든 것을 문선명의 지시 에 따랐을 뿐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 「병력기피」용의는 문선명 이하의 간부를 체포해서 취조하기 위한구실이고 실은 「간음과 혼음」을 조사할 목적이었다.

수사관의 질문은 날이 갈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당신들은 부부사이는 어떠한가?
당신부인들과 동침은 언제했나?
한주일에 몇번씩 이나 하는가?
한달에는 몇번이나 했나?

여자 신자들과는 몇번이나 했는가 병 역기 피 와는 관계가 없는가· .

남의 사생활 문제를 집요하게 심문하는 형사에게 큰소리로 대들고 수사관과 입씨름을 한일도 있었다. 그러나 수사관의 조사는 끈질겨서 책상 위에는 문선명과 여자식구들이 관계를 도표로 그린 그림을 놓아두고 섹스관계의 확인을 하는 것이아닌가 ?

나는 시종일관 모른다. 없다고 버티었으나 내심으로는 그 정확함에 탄복하였다 유치장안에 있는 우리들은 밖의 상황을 잘몰랐으나 박정화씨들의 은폐공작의 결과인지 조사를 받은 여성들은 나는 문선명선생과 그런 짓을 한 일이 없고, 나는 꿈에서 섹스는 하였다 등등으로 적당이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경찰은 거의 정확하게 문선명을 둘러싼 여성들의 성관도를 쥐고는있었으나 본인의 친고나 남편으로부터의 고소가 없었고 이사건으로 문교주는 3개월만에 무죄선고로 풀려 났다.
그래서 「7.4사건」은 단순한 병역기피문제가 아니라 통일교회의 안방 깊숙이 숨겨져 있는 섹스문제의 수사가 경찰의 노리는 바였는데 통일교회가 말하는 「아무 것도 아닌 사실무근의 혐의」가 아니라 간신이 문교주와 혼음 사실이 천하에 공포되는 것을 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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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때 체포되었던 간부의 유치번호는 문선명 390번, 유효원380번, 유효영 1709번 ,나는 1175번 이었다.

김원필도 체포되어 그만이 1년 실형의 판결을 받고 수감 되었다. 하여간 통일교회와 결별하여 두고 두고 냉정하게 문선명이나 협회의 실정을 보니까, 여러가지 모순과 이념이 눈에 띈다.
인류역사의 대세는 분명히 민주주의의 흐름인데도 불구하고 통일교회의 체질은 신앙과 관계없이 문선명에게 아부하는 무리들만 주위에 둘러 있는 독재체제 이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을 어거지로 되돌려서 문명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식구들이 몸을 깍아서 모은 거액의 돈은 문선명 한사람이 관리하고 있어서 어디에 얼마만큼 숨겨 두고 있는지, 현재의 최고 간부들도 모르고 있다.

비민주적인 횡포로서 독재일방의 역사를 거슬러간다. 또 통일교회의 인쇄물에는 어느 것이나 문선명선생이 1948년에 북한에서 체포된것은 공산당의 종교말살정책에 의해서 내무성에 구속 되었던 것이라고 판에 박은 듯이 거짓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북쪽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진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공산주의가 싫어서 1947년 8월 사진관도 각종기계도 그대로 두고 28세때 혼자서 월남했다.
그때까지 나는 선천북교회의 집사였다
그런데 그때 기독교 탄압 같은 것은 없었다.

이것은 통일교회의 거짓의 역사이며 박정화씨가 자세히 쓴 바와 같다.
또 이책 가운데에 소개 되어 있는 것처럼 나자신도 말하자면 36가정의 한사람이지만, 그저 원리만 앞세웠을 뿐 ,으시 대고 폼만재지 아무런 섭리도 없는 일당 독재 체제이다.
그래도 그당시는 부부의 짝짓기를 신중히 생각해서 종로의 유명한 백운학(관상가) 또 이명학(사주가)에게 찿아가 짝짓기 궁합을 맞춰 달라고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최근의 합동결혼식은 마치 마작판의 마작말패 섞드시 남의 인권을 아무렇게나 적당히 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이래서야 참부모가 정해주는 이상상대 축복이 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성스러운 축복 행복한 꿈이 채 가시기전에 여기 저기서 이흔소동이 발생하고 있으니 과연 땅에서 재림주에게 축복 받은것이 하늘에서도 영원한 부부가 될 수 있을까? 그 책임은 또 누가 져야 하는가?

 


유신희 - 6마리아의 한 사람 이었다.

 

1954년부터 수년간 6마리아의 한사람. 문선명의 원리를 믿고 복귀를 받아, 5-6인의 남
성과도 복귀의 실천을 했다.
지금 회고하면 「참으로 어리석었다. 」고 후회하며, 「문선명은 죽어 마땅한 남자다」라고 단언한다.

 

-유신희씨는 부산 영도에서 남편인 신성묵씨와 다섯 아이들과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때 근처에 살고 있던 사촌오빠 유효원의 권유로 문선명의 포교집회에 방을 빌려 주셨던 것이지요.

유 :그렇습니다. 1953년 12월 24일이었읍니다. 처음에도 3일간만 쓰겠다는 약속 이었읍니다만 결국 25일간이나 되고 말았읍니다. 그때 사촌오빠인 유효원, 효영형제, 그리고'유효민등 머리가 좋은 오빠들이 믿게 되므로 우리들 부부도 덩달아 믿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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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 메시아의 위대한 사람이 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세히는 이해하지 못하였었지만, 오빠들이 전부 믿어 우리부부도 덩달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후에 부부가 서울로 가셨군요? 아이들은 어떻게 하셧읍니까?

유 :남편이 먼저 집을 나갔으므로 내가 가족회의 처럼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하였읍니다. 「아빠도 엄마도 재림주가 오셔서 대단히 바쁘게 되었다. 그래서 너회들의 뒷바라지를 할 수 없게 되었구나‥‥」
위 아이는 중학교 2학년생이었고 제일 끝의 막내딸은 아직 여섯살 이었읍니다만, 다섯 아이들이 이해해 주어서 서로 손잡고 고아원으로 보냈읍니다.
정 말로 해서는 않될 짓을 했읍니다.
그로부터 7년동안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벌써 40년이나 지났읍니 다만 지금 아이들은?

유 :모두 기독교신자로서 그저 얌전하게 잘 지내고 있읍니다. 그래도 막내딸하고는 자주 충돌이 있읍니다. 어머니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대단히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나를 책망 한답니다.

 

-문선명과 복귀의 섹스를 한 여성으로서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인터뷰에 응해준 사람은 아마도 유신회씨가 처음이 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지금의 심정은?

유 :지금까지 침묵해 온것은 아이들에게 북귀의 사실이 알려지는것이 부끄럽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벌써 나이가 나인만큼 참을 수 있읍니다만은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사실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기는 합니다만은 나같이 미혹
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죽기보다 어려운 이 사실을 밝혀야 겠다는 결심을 한 바입니다.

 

-문선명과의 복귀에 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해 주십시요?

유 :여자 식구 한사람한테 꾀임에 빠져서 밤늦게 캄캄한 문선명의 방으로 갔읍니다.
거 기서 복귀를 받은 것입니다. 나의 경우는 극히 짧은 시간에 깜딱 할 사이에 끝났읍니다. 사단의 피를 밝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 두번 더 복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었읍니다만은 나는 한번 만으로 끝냈읍니다.

 

-그것은 왜?

유 : 문선명은 여러 여자와의 관계가 많아서 다음에는 언제 내 차례가 돌아 올런지도 몰랐고 또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피난민 시절에 그것은 다름 아닌 범냇골(지금은 성지로 명명 , 통일교 교인들이 세계 각처에서 참배 하러옴) 당시 나는 근처에 살고 있는 터이여서, 우리 아버님과 문선생은 매일 등산 산책을 하는 처지여서 어느날과 같이 나도 손을 잡고 아침 등산 하던중 문선명이 철부지 나를 움막으로 끌고 들어가 성폭행을 해 많은 출혈이 심했었다고 울면서 이야기 하여‥‥ 아무리 복귀라 하는 명분 이라지만 타락이니 복귀니 전혀 귀가 열리지 않은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가 있읍니까?
그래서 나는 두번 복귀를 단념 했읍니다.

 

-문션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다음 유씨는 몇사람의 남성과 복귀를 하였지요.

유 : 그때는 문선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 여성은 다른 남성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쳐서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6인의 남성과 복귀 했읍니다

-그래서 유씨는 6마리아의 한사람이었다고 박정화씨가 썼던데요.

유 : 6마리아의 이야기는 듣기는 하였읍니다만 누가 그런지는 알지 못하였읍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처지 인지 나는 잘 몰랐읍니다.나 보다 훌릉한 여인들이 많이 있었고 문선명의 주위에는 항상 세사람 정도가 바짝 붙어 있어서 나와는 격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
각하고 있었으니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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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사람 이 란 누구인가요?

유 :신정순*, 이순철*, 양윤신*씨 들입니다. 문선명이 유난히도 귀여워했고 후에 재산을 노리고 재벌과 결혼시킨 임영신이 들어 온 것은 그 뒤의 일 입니다.

문선명은 차례 차례로 새 여성을 신변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하는데 같은 여성들 끼리 특탁거리는 일은 없었읍니까?

유 :있었지요. 여자들 끼리니까 질투나 독점욕은 당연히 있읍니다. 그래서 여자들 끼리 심한 싸움이 있을때에는 문선명이 그러한 여자를 때 린 일도 있었읍니다.
그리고 육체도 재산도 빼앗고 볼일이 끝난 여인은 계속 주변에서 내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내 쫓긴 중의 한사람 입니다.

 

-6마리아는 그때 그때의 정원으로 적당이 교체가 되어 결국은 재산이나 새로운 여 인이 목표 이었던가요. 신구교체는 문선명의 독단으로 행해 졌읍니까?

유: 우리들은 옆의 일도 몰랐었읍니다. 그래서 어느땐 그 주위에서 쫓겨난 여자만도 다섯사람이나 되어서 서로 이야기 한일도 있읍니다. 그 정보교환으로 알았읍니다만 실로 여러 여자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것입니다.
처녀를 임신시켜서 아이를 낳게 하기도 하고 유부녀나 어머니와 딸들의 정조를 닥치는 대로 짓밟아서 가족이 풍지박산이 되기도 하고 유복했던 사람이 재산을 빼았겨서 빈털털이가 되기도 하고

 

-여러가지 비극이 셀수 없을 정도로 속출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모두가 참말로 분개 하였었읍니다.

유 : 그렇다고 생각 합니다. 사람이 모여 있을 어느땐가 원리의 설명을 내 사촌오빠인 유효원이 열심히 땀을 흘려가면서 열심히 강의하고 있는데 문선명은 여성들과 히히덕 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 신자들에게는 유효원쪽이 존경을 받았고 인기가 있었읍니다.
그 유효원 오빠는 수술을 받지 않았더라면 좀더 오래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의학부 출신답게 자기 병을 잘 알고 있어서 수술을 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싫어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선명은 병 따위는 진짜 메시아라면 고칠수 있을게다고 말 할것을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러 한 소리도 있었읍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유효원씨에게 무리하게 수술을 시켜서 죽게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기가 높은 효원씨에게 정상의 자리를 빼앗길 일도 없게 되어 문선명은 모름지기 안심 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 보고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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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이제 생각 하는것은 「한(恨)」그것인데 정말로 후회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할말이 없읍니다 나도 정말 바보 였읍니다. 좀더 현명 하였더라면 그때에 선악의 구별이 섰을 터인데 어리석었기 때문에 이렇게 돼 버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남편과도 이흔하고 아이들과도 떨어져서 혼자서 조용히 살고 있읍니다. 나뿐만 아니라 그 무렵 문선명의 신변에서 봉사하게 한 여성으로서 행복하게 된 사람은 한사람도 없읍니다.
모두 문선명의 사기에 속아서 몸도 마음도, 재산도 바치고 걸레가 되어 당장 내일 생활에도 곤난을 겪고있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러한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 할때 우리들의 소원은 단 한가지.문선명은 재림 메시아가 아니다. 죽어 맞당한 사나이 하루라도 랄리 죽었으면 하는 인간이다 라고 하는것 뿐입 니다.

 

 


김덕진 -섹스릴레이의 실천자

 

평양 숭설전문학교 출신.
일본의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일도 있고 음악의 외길틀 걸음.
통일교회에서 애청중인 성가 19골을 작곡,
문선명의 가르침대로, 섹스원리를 실천한 산증인
현대 서울 계주.
경찰목사.
현 80세

 

나는 어느 한국육군의 고급 장교의 보신을 위한 모략으로 북의 스파이로 몰려서 유엔군 제1형무소에 무기징역수(438번)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것이 사실무근인 것으로 증명되어
1954년 11월 27일에 무죄로 석방이 되었읍니다.
그래서 출소 할때 형무소에서 내가 노래를 가르쳐주고 있던 이석빈이란 남자가 자기는 재 림주 문선명의 제자 이므로 출소해서 서울로 가거던 찾아서 바드시 이 편지를 전해 주십시요 라고 하며 한통의 편지를 맡겼다.
봉투곁에 「아버님전상서」 뒷면에는 제자 이석빈 이라고 써 있었읍니다.

누이동생 집에서 한동안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 그럼 문선명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그 당시는 아직 통일교회 따위는 아무도 몰랐었다. 거처를 모르고서는 편지를 건네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친한 친구인 중부경찰서장에게 부하에게 명해서 빨리 찾아주게나 하고 부탁하였읍니다.
보잘것 없는 작은 집을 찾아 가서 나는 이런 사람인데 형무소 안에서 이런 편지를 맡아 가지고 왔다고 말하니까 문선명을 만나게 해주더군요.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여성이 선생님 예배 시간 입니다 예배를 하셔야· .
그리고 나에게도 함께 어떻습니까 하기에 같이 참가 하였지요.

 

좁은곳인데 풍금도 아무 것도 없었읍니다. 처음에 노래한 찬송가란 것이6천년 한이 맺힌 싸움의 동산 승리의 월계관을 찾아 구하여‥‥ 문선명이 작사 하였다고 하는 「복귀의 낙원」이라던가 이 세상을 에덴의 동산으로 복귀한다고 하는것 같은 가사였는데 웬일인지 그 노래를 일본의군함 행진곡의 곡조로 노래하고 있는 거예요. 놀란 나는 끝난 뒤에 말
해 주었읍니다.

세계를 통일하는 살아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한국인의 원수인 일본국의 그것도 가장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군함 행진곡으로 자작의'찬송가를 부른다는것은 무슨 일이요? 이렇게 바보스러운일이 어디에 있오?
어찌 당신이 재림메시아란 말이요? 여러가지 질문을 하였더니 문선명은 얼굴을 벌겋게 하고 있더니만 김선생 부탁이 있오. 내가 작사 한것이 또 다른것도 있으니‥‥ 라고 말하며 나에게 작곡을 부탁 하였읍니다.
즉석에서 좋다고 대답하고 그후 약 2,3년간에 나는 통일교회의 성가를 작곡하였읍니다. 문선명 작사가 5곡, 유효원 작사가 1곡, 나의 작사가 13곡 모두 19곡이 나의 작곡인데 지금도 전 세계의 통일교회에서 열심히 불리우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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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만든 성가책에는 「작사, 작곡, 김덕진을 지워 버렸고 다만 일본책에는 문선명 작사, 김덕진 작곡」이 5곡과, 「작사, 작곡 김덕진」14곡 모두 19곡이 실려 있읍니다.
 

잠깐 이야기는 조금 뒤로 돌아 갑니다만,

문선명을 방문했던 다음날 부터 아름다운 여성들이 매제의 집으로나를 찾아 오게 되었읍니다. 김선생님 저희들의 교회로 다니시지요 하는 것 이었읍니다. 작곡을 맡은것도 있고 해서 다니기 시작 하였더니 대우가 좋았다.

모두들 같이 푸로마이드 사진을 만들고 있었고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도하고 있는 신자도 있던 시대였다. 그렇게 가난한 속에서 나에게 신사복을 여러벌 만들어 주어서 즐거워서 열심히 작곡을 한 셈이지요.
그러는 동안에 싫어도 문전명의 원리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6천년전 에덴의 동산에서 아직 고교생 정도의 나이로 미성숙했던 해와을 사단의 천사장 루시엘이 범하고 말았다.
이것이 세상에 악을 가져온 원죄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눈에는 눈을 이에는 이로 이번에는 사단을 속이고 세상의 여성들을 복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문선명은 젊었을 시절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재림메시아 임으로 섹스로 파탄이 된 세상을 자기가 여성과 섹스 하는것으로 원래의 모양으로 복귀시켜 혈대교환(피갈음)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겉으로 내세울수 없는 비밀의 원리임으로 대외적인 설교에서는 그 비유로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기전에 하나님에게 「될수 있으면 이잔을 피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원리 에서는 하나님은 95%까지 는 인간을 인도하여 주시지 만 나머지5%로는 인간자신이 생각해서 해결 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에게도 하나님은 자기가 해결 하라고 발하였으므로 피의 눈물을 흘리는 수고끝에 깨달았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 하 이 원리를 재빨리 나는 깨달은 것이지요. 인간의 몸을 쓴 하나님(문선명)의 섹스의 무리를 점점 널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희망을 성취하는 것이 된다.

원래가 불량해서 청춘주식회사사장을자칭하며 아색을 탐미하고 있던 나는 딱 집히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죄가 아니고 좋은 일이라고 학생시절에 일본에서 다방의 여자들을 유혹해서 그날밤에 범한 경우 같은것은 죄의식을 느낄때도 있었는데·그렇지만 통일교회의 복귀원리는 열심히 섹스에 전념하면 전념할수록 하나넘의 섭리가 성취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문선명으로부터 복귀받은 유신회씨에서 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피」를 나누어 받기로 한것이다 지금은 이미 할머니가되어 늙었지만 당시의 유신희씨는 대단한 미인이었고 머리가 좋은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문선명이 가르쳐 준 원리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다른 남성 에게 넘겨줘 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래서 「김덕진선생 보세요 내가 복귀해 들이지요‥‥」라고 말하며 그녀 쪽에서 다가 왔다. 물른 나도승락했다. 그리하여 나는 유신희씨와고맙게 섹스를 했읍니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몸이었는데도 욕구불만도 있었던지 몰라도 불량하고 오입쟁이로 여러 여성과 경험해 온 나의 기교에 이미 흐물흐물하게 돼서 즐거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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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중에 제일 좋았어요 문선명선생 보다 몇 십배나 더 좋았어요」라고 말하면서요.

복귀원리의 실천 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이미 보통 남녀의 섹스 그대로여서 여자가 위라던가 아래라던가는 관계 없어요.

그후에도 다른 여성과 좋을대로 했다.

원리의 책을 쓴 유효원씨들 처럼 온순하고 꼼꼼한 사람들은 문선명이 자기가 범해서 복귀시킨 누구 누구와 자라고 지시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바보들이예요.

나는 달랴요. 95%는 하나님의 가르침이지만 남어지 5%는 자기가 찾아야 합니다.

문선명과 섹스를 한 여인은다른 남자와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해야만 한다.

 

남자는 제2의 여자와 하고 여자는 제3의 남자와 하며 그래서 제4의 여자에게로 릴레이식으로 해간다.

이렇게해서 넓혀 가는것이 원리 아닙니까?

그렇게 함으로서 온세계의 남녀가 하나님의 혈통으로 사단에게 빼앗긴 전인류, 즉 사단혈통의 세계를 하나님편으로 복귀해야 사단의 발판을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문선명이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순풍에 돛단배처럼 유효원 협회장이 답답한 고지식쟁이를 비웃으면서 하나님의 뜻도 이루고 성적만족도 느끼며 동분서주 하면서 쾌락의 나날을 보냈지요.
서울은 물론 대구에서도 부산에서도 깨끗하고 예쁜이들만을 엄선해서 15-6인과 관계했을 거 예요.
서울에서 내가 5인의 여성과 섹스 한짓이 일주일 후에는 자그만치 72인의 그룹이 되었다더군요.

 

이것도 훌릉한 원리실천의 성과이지요.
그런데 문선명 이나 유효원씨가 안된다고 말했읍니다.
그 이유는 메시야 문선생 한테서 받는 복귀의 섹스는 소생, 장성, 완성의 원리로 3회 섹스 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는 아직 1회 밖에 하지 않은 유신희와 했으니까 무효다.

몇백사람에게 둘레를 넓혀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성질이 났어요 이 새끼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 라고 사단이 해와를 범했을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단을 이기는데는 조건만 맞으딘 되는게 아닌가.

그런데 문선명과 3회하지 않으면, 여성은 복귀가 안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 개새끼야 라고 노해서 싸움을 했어요.
그런일이 있은후에 나는 대구로 가서 영신중고등학교의 음악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문선명의 수제자 였던 박정화씨가 대구로 찾아온것 입니다.

문선명이 대구의 미인 신도 우옥례와 나를 정식으로 결혼 시켜서 무마 하라고 지시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여성과 문은 섹스를 한 사이 입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어는 곳에서 이석빈(형무소에서 같이 복역함)과 공교롭게 만났읍니다. 형무소에서 나에게 문선명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던 그사람입니다.
이석빈은 출옥한 후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지금은 대구시내의 작은교회의 전도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이 기회에 당신도 자기와 같이 일반여성과 재혼해서 하나님앞에 용서를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는 것이 어떠 하겠는가?

박정화씨 협조해 주었으므로 이석빈이 근무하는 교회의 장로의 장녀 강혜환 집사와 나는 재혼 하였읍니다. 가난했던 내가 결흔식에서 입을 옷이없어서 박정화씨 한테서 빌린것
이었읍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 나는 대단히 행복하고 75세때에 귀여운 손자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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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해서 2년째 되던해에 우리들 부부는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해서 나는 성동고등학교의 음악교사가 되었고 밤에는 신학교의 생도로서 공부 하였읍니다.
마침 그무렵 친구인 김경래씨(현재는 한국기독교 총회 사무국장)가 신문기자로서 「통일교회의 정체」라고 하는 기사를 크게 쓴 것입니다.
그 신문기사를 읽었다던가 생각지도 않았던 부인이 나를 찾아 왔는데 정말 깜짝 놀랬읍니다.


그 부인이란 문선명의 본처였던 최선길씨 였읍니다. 최여사는 문선명의 인격이나 통일교회의 성의 난맥을 알고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흔하고 가련하게도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때 최여사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읍니다. 김선생님 이 기회에 문션명이란 남자가 재림주가 아니라는것은 물론 사람도 아닌 무서운 독사 같은 자식 이라는 것을 온 세계에 알립시다.

 

문선명은 호색가로서 성욕이 장성해 내가 문과 결흔해서 자식(문성진)을 낳기 까지 부부관계를 매일밤 10회이상 해도 기운이 펄펄났었다.

 이것은 그가 뱀처럼 이상하게 정력이 강한 때문입니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였다.

 

통일교회는 종교가 아닙니다.

 

음란한 섹스교단일 뿐입니다.

 

문선명과 싸움을 하고서 대구로 옮길때 까지 나는 박정화씨가 있었던 광산으로 쫓겨 간 일이 있었다. 1년반 정도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부터 친구들이 빌려준 방에서 남자 6인 여자 3인이 즐겁게「복귀게임」을 한일이 있읍니다 통일교회의 원리를 실천 한것 뿐이지만거기에는 종교다운 것은 하나도 없었읍니다.

 

나는 깨 달았읍니다.

 

문선명의 섹스원리는 잘못된것 이란는것을.

 

그는 이 원리를 내 세워서 어머니와 그의딸 형제를 범하고 끝의 딸에게는 아이까지도 낳게 하고 있읍니다. 극악 무도한 행위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 겠읍니까?

이번에야말로 문선명도 통일교회도 하나님의 제재를 받을 때가 왔읍니다.

그리고 많은 희생자 들에게 그죄를 보상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자신도 불량청년시대에 죄를 짓고 통일교회에 들어 와서는 원리를 미끼로 제멋대로 음행을 자행 한 죄는 몇천만가지 엄 벌을 받는다 해도 할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부터 통회하며 열심히 경찰목사로서의 사명과 고아들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읍니다

 

 

http://cafe.naver.com/jubo/2085  , 통일교 문선명 -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 큰샘출판사

http://cafe.naver.com/jubo/1739  , 통일교 문선명  -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박준철 저,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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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 문선명 - 죄수번호 '596' 문용명(文龍明) 5년형, 흥남교도소

퍼온글 출처 : http://cafe.naver.com/jubo/2085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2인,  239 p , 1996.3 ,  큰샘출판사

 

 

이 책은 한국에서 발생한 가장 악랄한 사이비종교, 통일교(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문선명교주의 복귀(復歸)라는 미명으로 혼음, 섹스, 혈대교환(血代交換) 실천(처녀잉태, 유부녀)과 그 실제 경험했던 실화를 적나라하게 밝혀 놓은 책이다.

 

그 비극의 섹스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통해서 구원(복귀) 받는다는  사이비종교 통일교집단에 빠져 인생을 망치고 가정파괴를 당한 사실과, 어린양잔치라고 처녀들을 미혹 잉태시켜 놓고 책임을 회피당한 비극의 여인들.

 

유부녀와 결혼(어린양 혼인잔치) 소동을 일으켜 5년 실형을 받고 흥남감옥 노무자였던 문교주의 죄수번호 596.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환(血代交換)의식과 통일교 복귀(復歸)라는 구원방법, 문교주 체포와 혼음(섹스)관계 조사와 거짓말 증언들.

 

문교주에게 몸도 맘도 재산도 다 빼앗긴후 (유부녀) 여인들의 비참한 말로.

나의 부끄러운 체험들 (섹스, 혈대교환 실천 내용).

황금에 눈이먼 문교주의 노동력 착취와 문씨족벌 체제운영.

문교주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별짓을 다한다.

김백문의 원리를 도용, 문교주의 것으로 만든 사이비, 이단교리.

통일교 창설 전후 최초로 문교주와 13년간 함께 생활해 왔던 저자의 산 글이다.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타종교인, 일반 시민들에게도 사이비 종교(틀일교)를 알기쉽게 체험한 사실 그대로 밝혀 놓은 책이다.

 

 

 

머 리 말

나는 1985년부터 이 원고를 쓰기 시작 하였다.

「야록. 통일교회사」라고 표제도 정했다. 일본식으로 말한다면 우선「도큐메토. 통일교회사」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목적은 문선형과13년간에 걸쳐 행동을 함께 해 온 기록을 분명하게 기록해서 그 허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이다.

재림메시아를 자칭하는 문선명이 아마도 종교인에게 있을 수 없는행위를 통일교회 창설의 전후 나는 가장 잘알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도대체 신변에 많은 여성을 두어 시중들게 하며 복귀원리를 명목으로 유부녀이건 학생이건 닥치는 대로 섹스를 해서 임신시킨 처녀를 일본으로 밀항 시켜서 아기를 낳게한 사실등 인간으로서 용서 받을 일이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문선명의 수제자였고 결과적으로 그녀들이 행복 해 주었으면 하고 원리의 가르침을 믿고 지켜 볼수 밖에 없었다. 문선명의 악행을 지나치게 알고난후 나는 1962년 그의 비열한 배신으로 인연을 끊고 탈회 하였다.

그리고 거의 20년후 이제서야 대간부가 된 당시의 동료나 부하의 요청에 따라 본부교회에 발길을 다시 옮겨 놓게 되었다. 교회측의 기대는 나를 귀중한 옛날의 산 증인으로서 이용 하는 것. 다만 일정한 범위안에서만 신자들 앞에서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옥중에서 남하할때의 문선명의 고생한 이야기등)

나에게도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통일교회의 그 이후와 고락을 함께했던 많은 신자들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것이 글속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비극 투성이었다.

원리를 믿고 문선명에게 따르면 행복하게 된다던 여자식구들은 내일 먹을 양식도 궁핍하고 어려워서 산 시체와 같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문선명이 때문에 가련한 고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원고에 착수한 동기는 거기에 있으며 그녀들 또한 하루라도 빨리 출판을 재촉하였고, 내가 아는 바로는 젊었을 시절의 그녀들은 모두 풍부한 재산가로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문선명이 달러 붙은 것이지만 정조를 빼앗기고, 재산을 잃고, 가족과 흩어지고, 아이들과도 소원해진 현재의 그녀들은 홀로 쓸쓸한 노후를 보내는 길 밖에없다.

그 원인과 과정 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사실을 공포할 의무와 책임을 통감하게 되었다. 유서 대신에 생명을 걸고 써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새삼 생명도 아깝지는 않지만 출판을 실현하기 전에 죽음을 당해서는 목적 수행이 어렵다. 그러한 이유로 원고를 조금씩 써 놓아 가면서 나는 때가 올 것을 기다리며 바라고 있었다.

때는 흐르고 착실한 크리스관의 장로로서 인망있는 김영삼 대통령이탄생했다. 김대통령의 용단으로 지금 한국은 눈부신 속도로 정계는 물론 각계각층의 정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도 때에 오랜 세월의 염원이 이루어져서 나는 정말로 기뻐하고 있다.

출판에 있어서는 6000매에 이르는 원고 정리 분류, 번역, 집필, 편집과 대단한 작업이 계속 되였는데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돌린다.

나는 이책의 인세를 문선명에게 희생이 되어 노후로 고생하는사람들의 구제에 힘이 되어 진다면 기부할 작정이다.

끝으로 진정한 행복은 멀어지고 원한을 풀지 못하고 돌아가신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희생자」들의 영령에게 깊은 기도를올리고 싶습니다.

1993.10      박정화

 

 

 

차  례

머리말   6

제1장 옥증에서 만난 사나이   15

재림 메시아로 믿고 17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 17

죄수번호 596 문용명(文龍明) 22

총반장으로 임명되고 24

해와는 왜 하반신을 강추었나 26

예수와 6인의 여인들 30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판(血代交換)을 34

평양을 소란케 한 이단자 39

최초의 체포 구속 39

유부녀와의 결흔소동으로 징역5년 41

한국전쟁과 대공습 42

김일성 은사 44

제2장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45

평양에서 서울로 47

불량배에게 다리를 절골 당했다 47

문용명(文龍明)과의 재회 48
가족을 이북에 버리고 문선생을 따랐다 49
죽을때까지 함께하자던 사나이의 약속 50
악전고투의 피난길 52
겨우 서울에 도착하다 54

서울에서 부산으로 56
제2의 피난행 56
경주에서의 작별 58
생활에 쫓긴 문선생이 찾아옴 60
평양에서 온 옥상현과의 재회 62


제3장 통일교회의 창립전후  67

여자신도 들의 열의  69
부산 수정동교회 69
최선길(문교주의 본처) 부인의 큰난동 70
경찰서에서 전기고문 74
하늘의 뜻에 관한 시험 75
노한 이순철의 남편 76

부산 영도(影島)의 집회 80
여자대학생 김영희의 비극 80
수사기관에 쫓기는 나날 83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 창립 85
유효원이 원리해설을 집필 85     

통일교회 창립의 날 89
이화여자대학사건 무렵 91
교수와 학생들의 대거 입교 91
김덕진(金德振)이라는 사나이 92
대구에서 또 전기고문 93
푸로마이드의 제작판매 95
3대째의 비서역 송도욱 98
잠시 숨을 돌리며 99
간부 체포 사건의 진상 100
문선명의 체포 犯0
조사의 촛점은 혼음관계 軸3
간부 5인을 기소 If15
수사의 손길에서 도피 107


제4장 희생당한 여인들   109

대공로자 옥상현의 말로 111

머리카락으로 짠 양말 112
주인 우하섭 장로의 탄식 113
문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재산도 1또
퇴원해도 갈곳이 없다 117

박봉식과 오명춘 121

부부가 문선명에게 헌신 121
남편 송도욱의 불륜 122

탁월한 인격자 박봉식 123
큰돈을 바친 오명춘 124
식모살이라도 해서 살아야지 126

김종화(金鐘和)의 눈물과 분노 128

문용명(文龍明)을 죽이고 싶다 128

6마리아의 비극 130

유부녀 여섯을 빼았다 130
신정순, 이순철, 오명춘, 김안실, 유신희, 임영신 131
6마리아 아니라 60마리아 137


연인을 빼앗기고 살해되고 140

김원덕(金元德)이란 사나이 140
신비적인 낭만 141
아름다운 부인과 진수성찬 143
이상한 예지능력 144
제자의 연인을 빼앗은 문선명(文鮮明) 146

제5장 재림메시아의 정체    149

원리와 실천의 모순 151
나의 수기는 진실의 기록 151
아무것도 모르는 신자들 152
문선명이 무슨 메시아 154
정득은(T得恩)과의 이상한 관계 157
체포도 당연한 섹스포교 159

색과 욕과 돈과 162
남편의 돈을 훔쳐 오라 162
왜 죄없는 아이들이 죽는가 164
복귀(泌購)라고 하는 미명으로 섹스 165
않은 가정이 파괴 되다 167
여자의 원한은 여름에도 서리를 169
처녀에게 낳게한 아이들 170

배신한자는 누구냐 173
문선명의 소개장 173
악착같은 노동력착취 174
문의 아들 흥진과 효진 176
삭제된 창시자의 이름 178
사건이 생겼다 바로 피하라 180
배신자는 문선명이다 182

제6장 진짜 사탄은 문선명이다     185

산증인의 이용가치 187
재혼서 신천지로 187
병으로 쓰러지다 189
오래간만에 만난 간부 189
통일교회 창림의 산증인 191
문선명의 거린말과 일본의 신자 193
원리는 김백문(金百文)의것 도용 195
이복형제 결혼 의혹 197
원리대로 실천한 김덕진(金德振) 198

36가정의 역할     200

속출한 재림메시아들의 대책 200
희생된 공로자 204
문선명보다 뛰어난 인격자-유효원 204
재정을 이룩한 실업가-유효민 206
화제의 다보탑을 수출한 일신석재사장-유효영
문선명의 부정과 범죄 209
김영희의 비참 211
또 한사람의 어머니 214
나의 부끄러운 체험 215
붉은용(龍)이 세상을 미혹 216


제7장 우리들이 체험한 사실    219

유효민-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221
유신희-6마리아의 한사람 이었다 227
김덕진-섹스릴레이 실천자 232

참고사항  *는 가명표시 입니다.
 

 

제 1장 옥중에서 만난 사나이         17


 

재림 메시아로 믿고


나는 북한의 내무성에 소속된 제 2여단 제 1대대 제 3중대장으로서 1947년 5월부터 황해도 해주에서 철도보안대의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해 12월 1일 같은 여단의 제 2대대장으로 승진발령을 받아 황해도 사리원의 큰 기지로 옮겼다.

일본의 조선통치시대에 만주 신경(현재 중국)의 공업전문학교 토목과를 졸업한 나는 만주국 관사(길림성)를 거쳐 일본군의 공병대 중위로서 중대장으로 근무한 경험도 있고 북한에서는 말하자면 엘리트로서 장래가 촉망되어 있었다.

그런데 착임해서 얼마 않되는 5월 7일 엉뚱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제 2대대의 제 3중대장으로서 황해도 신막에 근무하고 있던 허정이란 사람이 엉뚱하게도 군의 차량으로 상인들의 물자를 수송해 주고 돈을 받기도 하고 여성들의 모발등 북의 상품을 남쪽 한국측에 파는 암매상에 협력하고 있던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체포된 허정은 2월 2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또 대대장인 나는 부하의 부정 행위에 대한 감독 불충분이란 것으로 책임을 물어 직무태만죄로 징역 3년형에 선고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평양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흥남 특별 노무자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2월 2일 35세 때의 일이다.


흥남 특별 노무자 수용소


이송된 우리들 약 100명의 죄수들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2인1조로 팔목을 툴여서 흡사 소나 돼지처럼 화물열차에 쓸어 넣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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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4시간 멈쳤다가는 달리고 달렸다가는 멈추는 화물차속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한잠도 못잔 채 날이 밝을 무렵인 새벽 4시경에 학교운동장 같은 광장에 도착하였다. 끄집어 내려서 주변을 보니까 무장한 간수나 경찰관들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어서 개미새끼도 빠저나가지 못할 정도로 엄중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이 흥남의 특별노무자수용소, 속칭 흥남감옥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였다.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는 강제노동의 지옥인 것이다. 우리들은 먼저 들어와 있던 죄수들과 함께 좁은 방에 32명씩 동거하도록 인원수가 할당되어 집어 넣어졌다. 7시가 되니까 조반이 나왔다.

콩, 좁쌀, 보리쌀, 옥수수 등을 뭉친 조그만 주먹밥인데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것 처럼 엉성했다. 이가 엉망으로 빠진 그릇에 국이 담겨져 나왔는데 두 서너 조각의 미역이 둥둥 뜬 소금기가 좀 있는 그런 국이었다. 어제부터 한방울의 물도 입에 대지 못한 채로 흔들림 속에 담겨온 몸 동아리는 지치고 지쳐서 속은 공복인데도 식욕이 나지 않는다.


장차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며 멍청하니 있자니까 옆의 사내가 기운이없구먼 못먹겠으면 내나 먹지 하며 내 밥에 손을 대더니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린다. 깜짝 쉴 사이도 없을  만큼 감옥의 엄격함을 실감케 하는 기분이 들었다.


8시 "전원노동이다"하는 간수의 큰소리에 떠밀려서 운동장으로 나오니까 1,500명 정도의 죄수들이 집합되어서 정문을 향해서 정령하고 정좌하게 하였다. 소좌의 계급장을 단 소장이 이송되어 온 신입 죄수들에게 소대의 규칙등 수용소의 작업에 대한 설명과 주의사항을 들려주고는 전원 출발이 라는 것이다.


죄수들은 두사람씩 손을 묶고 4열로 나란히 정면에서 부터 나가기 시작하였다. 정면 좌우에는 간수가 줄지어 늘어싫고 완장을 단 "총반장"이 죄수들을 점검 인수하였다. 두사람씩 손을 묶게 하는 것은 역시 도망방지 때문인 것이다.

수용소에서 조선 질소 비료 주식회사(구 일본질소) 흥남 공장까지는 약 4킬로의 거리가 된다. 이날부터 비가 오나 눈이 쌓이거나 우리들은 매일 걸어서 감옥과 공장을 왕복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횐 암모니아비료 가루가 산처럼 괌인 곳에서 10인 1조가 되어 비료포대의 가마니에 하루, 1,300포대를퍼 넣어야 하는 책임량(노루마)을 할당받았다. 산더미 같은 비료앞에 저울이 놓여 있고 공장측의 검량원이 중량을 달기 위해서 앉아 있다.


작업의 순서는 이러하였다. 우선 한사람이 빈 가마니를 잡고 아구리를 벌리면 두사람이 삽으로 비료를 두번 정도 퍼 넣는다. 그래서 40킬로가 되면은 다른 한사람이 가마니를 저울대에서 내려놓고 남은 6인이 그것을 운반해다가 새끼로 음어서 포장을 한다. 10인 1조의 작업이므로 한 사람이라도 태만하거나 서투르거나 하면 조 전체의 책임량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원이 반장한테 된통 혼나게 되므로 10인은 서로서로 격려하기도 하고 감시 하기도 하는 것이다. 눈깜벅거릴 틈도 없을 정도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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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은 아침 8시에 시작되고 낮참 쉬는게 30분 저녘 5시에 끝나는데 매일 8시간반의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극심한 노동을 한일도없었고, 6개월간이나 평양에서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서 이 중노동을 참아 낸다고 하는 것은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감옥생활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여러가지 끔찍한 가혹행위를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버티어 내기 때문에 하루의 일을 마치면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별하기 조차 어려운 상태로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 의지로 똑똑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 저녁때가 되면 하루의 작업량을 검사하고 인수를 점검한 후에 아침이 왔을 때와 똑같이 두사람씩 손을 매고 4열로 늘어서서 4키로나 되는 수용소길을 걸어서 돌아온다.


그때는 제발로 걸은 것인지 어떤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문에서 재차 인수점검을 한후에 운동장에 정열해서 정리하고 나면 또 주의사항이 설명된다. 그리고 면회를 허락받은 사람들이 면회실로 간 후에야 각자 제방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불과 4톨평정도의 좁은 방에 32명이나 쓸어 넣어 하루종일 작업을 해서 땀 투성이가 된 몸뚱이를 씻지도 못하고 고단하다고 두러 누울수도 없는 상태로 그대로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감옥생활이란 것을 통감하게 하였다.


저녁밥은 조반과 같이 여러가지 잡곡이 섞인 주먹밥 한 덩어리와 소금기가 있는 국물 한그릇뿐, 식욕이라곤 전혀 없지만 서도 내일의 작업을 생각하면 먹어 두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같은 방의 동배들도 지쳐 있음인지 모두 험악한 얼굴들이다. 죄명 또한 가지가지였다. 취침은 밤 10시이지만 좁은 방에서 머리와 다리를 서로 어긋매겨 잔다. 서로의 다리가 옆 사람의 머리나배위에 걸쳐지는 일도 있었지만 32인이 억지로 옆으로 누울 수가 있었다. 변기는 방의 구석에 놓여 있었는데 아침이 되면 일제히 서로 쓰려고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대소동이 벌어진다.


이리하여 중노동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무사히 출소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기로 및장을 정한 나이지만 어느새 손과 발에는 군살이 박혀있었다. 나는 비료포대를 새끼줄로 끓어내는 요령만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해서 큰 곤욕을 치렀다. 다른 사람들이 두포대를 묶을 동안에 나는 한포대도 제대로 못 묶는 때도 있었다. 동료들의 싸늘한 눈길을 느끼며 책임량을 다하지 못해서 폐를 끼친 때가 제일 괴로웠다.


그리고 더욱 더 참을수 없는 것은 배가 고파 죽을지경인 것이다 감방의 다락에는 면회가 있었던 사람들이 차입받은 미수가루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훔쳐 먹으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한들 여기까지 와서 도둑질을 해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으로 자제하였다.

배가 고파서 잠을 이를 수가 없을 때 미수가루 봉지를 쳐다 본체로 밤을 새운 일도 여러번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일어나니까 어제 밤에 미수가루를 도적맞았다고 모두들 떠들석 하였다. 훔친자가 눈에 띄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자루 돌림으로 패댔다. 이러한 꼴은 징역생활이라고 하기 보다 아귀지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30인이 넘게 쳐 박혀진 방안에서는 몇일에 한번씩 그야말로 큰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것은 쳐 박혀진 인간최후의 순간이 것이다. 배만 앙상하게 남아서 숨도 제대로 못쉬는 상태로 쇠약한 사람이 한 주먹의 밥을 소중하게 움켜 편채로 속에 들어 있는 콩알을 집어서 넣으려는 순간 죽는 사람도 있었다. 옛말에 자식이 죽은 때나 부모가 돌아가신 때보다도 더 서럽고 매정한 것은 배가 고픈 때다 라는 말이 있다. 먹는다고 하는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나는 몸소 절실히 체험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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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되박의 미수가루는 양복한벌과 맞바꿀 정도로 귀중품이었다. 매월 집에서 면회를 와서 차입을 받는 사람은 그런대로 견디어 나가는데 면회나 차입이 전혀 없는 사람의 경우는 언제라도 죽음과 직면해 있는 상황이었다.


죄수번호 596. 문용명(文龍明)


나의 작업은 여전히 서틀러서 차마 볼수없던지 조장이 가마니의 아구리를 벌리는 일이나 삽으로 비료를 가마니에 퍼 놓는 일로 돌려 주었으나 어느 것이고 제대로 익숙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40키로의 비료가 든 가마니의 짐 꾸리기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내 옆에 10인의 조원 가운데서도 훨씬 건장해 보이는 30세가량의 사나이가 와서 "가르쳐 들이지요"하고 말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자기의 일거리를 가볍게 해치우면서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더욱 일에 익숙해져서 훌릉하게 해 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건강해서 힘은 있었으므로 몇일 동안 계속해서 가르쳐 주는 바람에 그럭저럭 한사람 몫의 작업 책임량을 해낼 수가있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나보다 반년정도 먼저 흥남감옥으로 후송되어 온 듯해서 소내의 사정이나 물물교환으로 살아가는 지혜등 여러가지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지옥에서 부처님 만나기란 바로 이런 것인가. 나는 괴롭고 쓰라린감옥의 중노동속에서 비로서 따뜻한 사람의 마음씨에 접하게 되었고 절망속에서 어렴풋이 희망이 보이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는 방이 달랐으므로 작업이 끝나고 만원이 된 방으로 돌아오면 공복의 쓰
라림과 잠을 푹 자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그래도 아침이 되어 비료공장의 일터로 나가면 그 사람과 같이 일을 할 수있다. 지옥과 같은 곳에서나마 서로간에 마음을 주고 받을 수가있게 되었으므로 한 시간이라도 빨리 일터로 나가는 것이 기다려지곤 했다.


아침 8시 운동장으로 나가면 나는 서둘러서 그 사람을 찾아서 그뒤에 앉는다. 점검이 끝나면 그사람과 2인 1조가 되어 비료공장까지 손을 묶고 걸을수가 있다. 지금까지는 비오는 날 같은 때는 그야말로 죄수생활의 비참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도보행진이었는데 어느새 나에게는 그 사람과 매일 아침 만나서 함께 일을 하는 것이 옥중에서 그나마 즐거운 일과였다.


이렇게 20일 정도 지난 어느날 초반 회색 옷에 갓을 쓴 백발노인이꿈속에 나타나 나의 이름을 부르며, "네가 매일 함께 도와주고 거둬주는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그 분은 무척 친절하고 좋은 분이므로 함께 지내고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노인은 "그분은 네가 어릴때부터 배워 온 성경에 장차 이세상에 오신다고 가르쳐 온 재림주(메시아)이시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깊은 잠에 떨어진 동료들이 있을 뿐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하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지워져서 돌아가신 후 삼일 후에 부활되어 40일간 이곳 저곳에서 재림하였다. 그리고 감람산(성경에 나오는 산)에서 여러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실 때 예수님은 "너희들은 어찌하여 하늘을 처다 보는가, 나는 이처럼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이 머지 않아또 재림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재림주라고 하는 꿈이 마음에 걸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도록 생각하고 있었으나 복잡한 심경으로 조반을 마쳤다. 나는 어느 때와 같이 운동장으로 나아가 그사람 뒤에 앉았다. 그리고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해서 무슨 일인가를 물어 보고자 하였다.
그런데 내가 말을 걸기 전에 그가 별안간 돌아보면서

"간밤에 꿈을 꾸었지요 꿈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말 하던가요"라고 묻는 것이다.

어떻게 그가 알고 있는 것민지 이상 하였지만 나는"재림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29세로 나이로는 7년이나 손아래 이었지만 반드시 "선생"이라고 존경해서 부르게 되었으며 그 사람도 "정화"라고 나의 이름을 불러서 점점 친근감을 느끼면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 사람이 죄수번호 596을 단 문용명 이었다.


총반장으로 임명되고

 

그로부터 15일정도 지난 어느날 아침 집회에서 "919번 소장실로 오도록"호출되었다.

919번은 나의 죄수번호이다. 무슨 일일까?나는 겁에 질린 채 가보니까 소장은 나를 쳐다보고 "어제 총반장이 만기로 출옥하였으므로 지금부터는 네가 전죄수의 총반장으로 복무하라."


이곳에는 1,500명의 죄수가 수용되어 있다. 10인에 1인, 조장 18을 파악하는 것이 반장, 총반장은 I5인의 반장을 소관하고 매일의 작업배치나 분담을 자치적으로 결정하는 등 전죄수의 대표로서 크나 큰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아니된다.


소장은 죄수전원의 경력 이나 기내기록을 본 후에 전문학교 출신으로서 군의 대대장을 한일이 있는 나를 골라 "후임은 너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역을 맡을것인가 말것인가를 망서렀으나 문선생의 권고도 있고 해서 맡기로 하였다.


총반장이 되니까 여러가지 것을 알게 되었다. 죄수들이 가장 바라는 작업은 취사이고, 다음은 수용소내의 잡역, 선반공장 선반공으로 이어지고 끝으로 비료공장 순이다. 선반공도 중노동이지만, 일하면서 철가공의 기술을 취득할 수 있다고 하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비료공
.장에서의 가마니 작업은 오직 힘이들 뿐이고 아무것도 이점이 없는 최저 최악의 중노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일 3식이란 작으나마 주먹밥 한덩어리와 소금국 한그릇만으로는 몸둥이가 견델 수가 없는 것이다. 조악한 식사때문에 영양실조자가 속출하고 과로와 허기로 한달이면 100명 정도가 죽어갔다.

단순하게 계산한다면 1년 남짓해서 전감한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흥남수용소에는 그 보충을 위해서 매월 100명 정도의 죄수가 각지의 형무소에서 후송되어 오고 있었다. 총반장이 되고 나면 사내에서는 자유가 꽤 통하므로 기회를 엿보아서는 문선생을 찾아가 잡담을 하기도 하고 되도록이면 편안한 작업으로 회부될 수 있도록 손을 쓰기도하였다. 어쨋거나 꿈속의 노인에게서 계시를 받아 내가 꿈에 본것을 먼저 알고 있던 이상스런 힘에 놀란 나에게는 문선생은 바로 재림주라고, 나는 믿게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반장인 주흥식이 묘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담당의 죄수가 병이 들었는데 내일이 어떨지 알수없을 정도의 중태인데 주반장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 죄수는 일본의 식민지시대에 큰 화물선의 선장으로서 전세계를 누비고 다딘는데, 전쟁이 끝 나고서는 고향인 여수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에 있는 친척을 방문했을때 공교롭게도 죄를 범해서 체포 투옥되게 되 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가 죽기 직전에 비단보에 그려진 지도와 무엇인가 영문으로 쓴 종이 쪽지를 주반장에게 건네 주었다. 얼마 안있어 그는 죽고 말았는데 영문을 읽을줄 모르는 주반장은 그후 영문을 아는 반공사상의 죄수중 김진수목사에게 번역을 해달래서 그것을 받았다. 그 종이쪽지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26

"여수 뒤편에 있는 묘지 가운데 이런이들의 무덤이 있다. 그 앞에서 세번째 어린이 무덤속에 시가 수억원의 보석이 들어있는 상자를 자기가 묻었다. 이제 나의 명은 다한것 같으니까 주반장에게 들이는 것이니 남쪽에 갈 기회가 있거든 꼭 찾아내시오"


주반장은 이와같은 이야기를 하고 나서 "총반장은 나보다 먼저 출소할 것이니까꼭 남쪽의 여수에 가서 그것을 찾아내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나에게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였으므로 나는 그대로 문선생에게 전했다.


나는 그후 남한에 살게 되었으나 여수는 가본일도 없고 또 이야기는 깨끗이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2년후의 부산시대, 문선생은 친구와 둘이서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여수로 가서 필연적으로 찾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묘지장소는 알아 냈으나 가장 중요한 아이의 묘는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문선생은 여수에 갔던 일조차 나에겐 말하지 않았다.


훨씬 뒤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을때 나는 진짜 재림주라면 보석상자 정도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선생의 정체에 대해서 새로운 의혹을 갖게하는 자료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재림메시아, 문선명의 정체·.·"그것만이 이 책의 주체이며, 나의 고백의 주안인 것이지만 이무렵 무지한 나는 그저 오로지 문용명을 존경하고 믿고 있었다.


해와는 왜 하반신을 감추었나


총반장의 완장을 단 나는 작업장으로 가는 죄수의 점검과 죄수들의 작업 배치를 정한 후에는 대수로운 일거리도 없이 자유롭게 지낼수가 있었다. 그래서 빈 가마니를 쌓아 놓은 창구로 문선생을 불러내서 그에게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문선생의 이야기는 유아세례를 받아서 젊었을때에는 교회 집사로도 일했고, 조금은 성경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 할수 있는 나에게도 이해는 커념 대단히 반발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예를들면 세례요한은 들녘 에서 가죽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어가면서 수도를 했고 "천국이 가까와오니까 회개하라"고 말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자기의 책임 분담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을 잘리어 죽음을 당한것이다 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기독교에서는 세례요한은 아주 훌릉한 인물로 가르치고 있는 만큼 나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더욱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책임을 다 할수가 없었다. "


"예수님은 본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처지는 아니었다"등 등으로 말한다.


내가 더욱 더 충격 받을 이야기를 들은것은 잊어 지지도 않는 1950년 3월 29일 토요일의 일이 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와서 여느때처럼 두사람씩 손을 묶은 죄수들 1,500명을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 오직 땅만 보고 비료공장으로 서둘렀다. 도착한 후에 총반장인 나는 아마 10분정도 전원의·점검과 작업배치를 정했다.

그무렵 문선생에게는 빈 가마니에 짚을 넣어두는 일로 병자나 노인들이 할 수있는 손쉬운 작업을 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서 "총반장으로서 볼일이 있으니 잠간만 오세요"라고 불러내서 조용한 창고 속의 빈 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인 그 위에 올라가서 둘이서 마주보고 앉았다.

총반장에게는 작업장에서도 이러한 자유가 인정되어 있어서 간수나 죄수도 이의를 하는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몇 시간이라도 이야기 할수가 있었다.


사회질서 문란죄로 5년의 형을 받고 복역중인 문용명은 죄수번흐596, 부하 잘못으로 인한 책임을 물어 직무태만죄로 징역 3년인 나는 죄수번호 919, 두사람의 죄수는 서로 마주보고 596은 이야기를 하고 919는 열심히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해가며 중요한 대목은 메모를 하기도 했다.

28

이날의 이야기는 성경의 "창세기"부분이었다.

창세기의 요지는 6000년전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사람으로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며 에덴의 동산에 살게 하였다. 그리고 걸맞는 반려를 만들기 위해서 아담이 자고 있을 때 아담의 갈빗대 한개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해와'이다.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만은 따 먹어서는 안된다고 명하였으나 뱀이 해와를 꼬였기 때문에 해와는 드디어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고 남편인아담에게도 권해서 먹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금단의 나무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발견된 때에는 부끄러운듯 무화과의 잎으로 하체를 가리우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해와를 만든 목적은 해와가 성숙하면 이세상에 죄없는 자손을 번식 시키려고 그랬던 것인데, 하나님을 배반한 두 사람은 얼마 안돼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죄를 범하고 더럽혀진 아담은 땀 흘러 일하지 않으면 살아 갈수 없게 되었고, 해와는 해산하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가인과 아벨의 형제가 태어났는데 얼마 안가서 형인 가인은 동생인 아벨을 죽이게 되어 이 세상에 처음으로 죄인이 된 것이다.

이상이 성경에 씌어져 있는 것이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온 해석인 것이다.

그런데 문선생은 "성경의 이러한 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세계의 크리스챤들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문선생의 해석은 이러하다. 해와를 꾀인 뱀이란 천사장 루시엘의 이름인데 루시엘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감언으로 미 성숙한 해와를 유혹해서 금단의 나무 열매를 따먹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루시엘은 해와와 섹스를 한것이다.

그리고 처녀성을 범행당한 해와는 하나님께 발각되기 전에 사탄의 피로 더럽혀진 몸 그대로 남편인 아담과도'성교를 했다.

지금까지는 금지 되었던 실과를 따 먹은것이 죄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들켰을 때 왜 해와는 무화과의 잎으로 하반신을 가리운 것일까?

사람은 몸에 상처가 나면 상처에 반창고 같은 것을 붙여서 아물게 하는데 그것과 같은 논리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이 금지시킨 성행위을 하고 깨끗했을 하반신에 상처가 생겨 그래서 무화과의 잎으로 그 부분을 가리운 것이다 해와는 그패 까지 나체로 있어도 부끄러움을 모르지 않았던가.

그것은 말하자면 하반신의 성기부분으로 성행위를 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부분에 죄가 있으니까 하반신을 가리운 것이다.


지금도 남자가 여자와 성행위를 하고자 노력하며 만족한 성행위가 되면 "어디어디의 처녀(부인)를 따 먹었다"고 표현 하는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랑 신부가 결흔식을 올리고 정정당당하게 첫날밤을 지내도 다음날 가족들 앞에 모양을 나타낼때 어던지 모르게 마음속에 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6천년 전에 천사장 루시엘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처녀인 해와와 성행위를 할 때에 "색큼"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미숙한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성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미숙한 과실을 따 먹으면 색큼한 맛이 나는 것도 미숙한 해와와 천사장 루시엘이 성행위를 함으로서 "색큼"함을 느낀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죄없는 인간을 세상에 번식시키려고 하였는데 천사장 루시엘 때문에 그 목적을 방해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가인이 그의 동생인 아벨을 죽임으로서 이 세상에 죄인의 번식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절대로 방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죄악이 가득해 있던 소돔과 고모라에는 불로 심판하고 노아때에는 홍수로 심판하였다. 그래도 죄 악으로 가득한 인간을 구제할 수는 없었으므로 유대 땅에 2천년전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예수를 탄생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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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탄생케 한 목적은 그 4천년전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간세계를 창조 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제2의 아담으로서 탄생시켜, 제1의 아담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했던 목적을 실현 시키고자 한 때문이다.


예수와 6인의 여인들


그리고 예수는 3십년간 요셉의 집에서 목수일을 하면서 켰고, 30세가 되어서 예수는 구세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예수는 12 제자를 골라 제2의 아담으로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케 하기 위해서 우선,

첫째로 자기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성행위를 해서 제1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겼던것을 되찾아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달성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와같은 하늘의 섭리를 알지 못해서 육신의 자식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아서 예수와성교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예수가 행한 기적은 가나안 잔치집에 가서 결혼 축하를 하기 위해서 어머니인 마리아와 함께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것이다.


그 집의 술이 없어졌으므로 어머니 마리아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예수와 의논하였다. 말하자면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수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에게 부탁한것이다.

그때 예수는 마리아에게 "여인이여, 당신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요"라고 말했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성행위 할 생각은 전혀 없이 이웃집의 잔치집에서 포도주를 만들것만을 원하였으므로 정말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으로 말 한것이다.

성모마리아가 예수와 성교를 한다고 하는 것은 제1의 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되돌려 빼앗아 온다고 하는 복귀의 원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마리아가 모자협조(모자간의 성교)를 하지 않았으므로 예수가 순혈을 이어 받을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후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 자매를 대단히 사랑하였고, 그녀들도 예수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막달라 마라아와 결혼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인가롯 유다의 연인으로서 곧 결혼할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인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 하였으므로 유다는 질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의 매제인 마르다 마리아와 유다를 결혼시키고, 자기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다는 예수에게 반역해서 예수를 로마의 병정에게 은화30냥에 몰래 팔아 넘기게 되었는데 실은 돈이 욕심이 나서 판것이 아니라 자기의 여인을 예수에게 빼앗긴것을 질투해서 판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데리고 각지를 돌고 있을때 일행은 수가촌이라는동네에 이르러 제자들과 먹을것을 찾고 있었다. 그사이 예수는 고단해서 우물가에 앉아서 쉬고 있을때 사마리아의 여인이 물을 뜨려고 왔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당신의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라고 말했다.


여인이 대답이 없음으로 예수는 "당신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어서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물을 한잔 청하고 채차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물을 내가 마시면 또 목이 마른다.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물은 당신속에서 생수와 같이 영원히 흐르게 된다. "(주=성경과는 역순이지 만 문선명의 이야기대로)

예수는 이 사마리아의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예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기때문에 실현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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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느때 세리와 바리새인의 사람들(성경에는 세리와 바리새인의사람이 제일 악인으로 되어 있는듯 하다) 이 간통한 여인을 예수앞에 데려왔다. 예수가 "이 여인을 용서해 주라"고 말하면 모세의 계율에 간통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으므로 모세의 계율에 상반되는 것이되고, 또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면 예수가 언제고 "죄 있는 자가 있거든 일곱번씩 칠십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쳤던 말이 거짓이 된다.

참으로 거북살스런 문제로서 대답하기가 난감한 것이었는데 이때 예수는 아무 말도하지 않고 땅에 글자를 썼다. 사람들이 다가가서 보니까 거기에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죄없는 자가 있거든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쓰여 있었다.

모여있던 많은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 죄를 지고 있었으므로 하나 둘 다 사라지고 예수와 여인만이 남았다.

거기서 예수는 여인에게 말했다.

"나도 당신을 용서하는 것이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도록 하라" 이때에도 또 예수는 복귀섭리에 따라 이 여인과 성교를 해야만 했었는데도 실현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음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나병환자가 있는 시몬의 집에 갔을 때의 일, 모두들 식사를 하고 있을때 한 여인이 귀중한 향유가 든 항아리를 가지고 와서 감동의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었다. 여자는 머리털로 발의 눈물을 밖고나서 예수의 발위에 기름을 부었다.

 제자들은 "어째서 귀중한 기름을 그렇게 함부로 쓰는가 그것을 많은 돈을 받고 판다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쓸수 있을 테낀데"라고 그여인을 비난하였다.

예수는 "그 여인을 책망하는 것은 그만해라 그 여인은 나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해 주었으니까"라고 말했다.

예수는 이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때에도 또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으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질머지고 십자가에서 죽어 갔으므로서 그 피의 댓가로 죄인이 깨끗하게 되어 구원한다고 하는것처럼 모두 믿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창조의 이상을 옳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제2의 아담으로서 이세상에 예수를 탄생시킨 것은 제 1의 아담이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도로 찾아서 본래대로 돌려 놓기 위한 것이고 요컨대 복귀섭리를 실현하는 사명을 달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가 복귀섭리를 위해서 이세상에 탄생 한것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예수가 성모마리아와 최초의 성교를 한다고 하는 죄없는 피를 전하게 되기 위한 중요한 의식의 챤스를 예수에게 주지 않았다.

첫째로 필요한 "모자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서 예수는 이상에 태어났어도 복귀섭리를 다하지 못하였고 결흔조차 하지 못한 동안에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


예수는 재림을 약속한 최후의 기도때에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한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십시요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으나 이것은 죽는것을 두려워 해서가 아니라 제2의 아담으로서 이 세상에 와 빼앗긴 해와를 되돌려 받지 못한 채로 어머니들에게 복귀섭리의 실천(성교)도 못한채로 죽는것이 허전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즉음으로서 그 피의 대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 되였다고 하는 해석이 을다고 한다면 그러한 기도를 했을리가 없다.


예수는 육적으로는 실패하였으나, 영적으로는 승리해서 재림이라고 하는 숙제를 남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 재림주(메시아)는 어디로 와서 어떻게해서 인간을 구제하는 것인가? 구름을 타고 감람산을 통해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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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지 않다 동방에 있는 나라, 횐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고, 4계절이 분명한 나라, 동쪽에서 해가 뜨는 나라, 그것은 우리들의 대한민국이고, 이 나라에 재림하기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재림주는 제3의 아담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예수가 하지 못했던 복귀섭리를 이세상에서 실천해서 인간의 6천년간 죄악의 역사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고 사탄의 피로 더렵혀진 인간의 피를 성스러운 하나님의 피와 교환 함으로서 이 세상을 영원히 죄와는 관계가 없는 세
계로 하는것이 하나님의 참된 뜻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주의 사명으로서 잃어버린 해와의 순결을 되찾아 만인 앞에서 처녀와 "어린양찬치"를 행하고 참된부모 아담과 해와에 의해서 전세계의 인간의 피가 더럽히지 않은 피와 교환되게 되는 것이다.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환(血代交換)을

 

부모님이 같은 기독교 신자이신 집안에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교회 집사 까지한 경험이 있는 나는 문선생의 성경해석에는 귀를 의심하고 머리를 갸우뚱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반면 꿈속에서 "문선생이야 말로 재림의 메시아다"라고 하는 계시를 받은 나는 반신 반의 하면서도 차츰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선생님은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이며,어떻게 해서 이상의 천국을 완성시켜 나아가실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그것은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달성하지 못했던 여인들과의 복귀다.

우선 천사장 루시엘의 성교로 인해서 빼앗겼던 것을 그것과 같은 방법으로 남편이 있는 부인 6인 즉 6인의 마리아를 빼앗음으로서 되돌려 놓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것은 복귀섭리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하지 않으면 안될 숙제이고, 목숨을 걸고라도 해내지 않으면 안될 중대한사명인 것이다.


나는 놀랍고도 반발을 느끼면서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남편이 있는 유부녀와 더구나 여섯 사람씩이나 유부녀와 성교를 한다고 하는것은 그 남편에게 죽임을 당할 염려가 많고, 설혹 남편들이 모른다고 하더라도 간통은 하나님이 가르침이신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고 쓰여 있습니다.

또 이나라의 법률에서도 유부녀와 성교하면 간통죄가 됩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수 있습니까?

아니야 걱정할것 없네 머지않아 세상은 극도로 성이 문란해지네 길바닥에 남녀가 천연덕스럽게 성교를 하게 되고 통행인은 그것을 보더라도 지금의 악수하는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을것이며, 이상스럽게 느낄것도 없게 된다.

또 그무렵이 되면 인간의 심리상태도 달라져서 자기의 처나 연인이 다른 남자와 성교를 하더라도 노한다던지 질투를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복귀원리를 들은 여인들은 복귀를 받고 싶어서(성교를 하고 싶어서)자기들이 자원해서 오게 된다. 그 시기가 오면 재림 메시아는 6인의 유부녀를 마리아로서 남편에게서 빼앗아 더렵혀진 사탄의 피를 정화하기 위해 피를 교환하는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을 "혈대교환(血代交換)" (주=말하자면 "피 나눔"이라고 하는것.후술)이라고 하는 것인데 복귀의 의식인 성교에는 지금의 사단의 세상과는 달라서 일정한 규정이 있다.

재림메시아가 유부녀의 더렵혀진 사단의 피를 정화하여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하기 위해서 복귀의 의식으로서 행하는 성교는 메시아가 위에서 3회씩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것은 소생, 장성, 완성의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6마리아와 도합 18회의 성교에 의해서 유부녀들은 마리아로서 환생하는 것이다.

6마리아를 복귀시키면 재림의 메시아는 다음에 성교경험이 없는 처녀를 골라서 해와로 정해 "어린양잔치의식"(정식 결혼)을 한다.

아담의 대리인 메시아와 해와는 참아버지, 참어머니이며, 그 두사람에게서 태어나는 자손은 영원히 죄가 없는 선한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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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세상을 6천년전에 하나님이 창조하려고 하였던 이상의 원점으로 돌려 놓을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 이 세상에는 천사장 루시엘에게 해독을 입은 사단의 피를 받은 인간이 50억인이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전부를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최초에 재림 메시아에게 복귀된 여인은 다른 남자의 식구(신자를 말한)와 여자가 2회 위에서 "소생, 장성, 완성"의 3회에 걸쳐 복귀를 해 줄수가 있다.


복귀를 받은 남자식구는 다른 여자 식구들과 여자가 위에서 2회, 아래에서 1회 성교를 해서 복귀시킨다. 또 그 여자식구가 다른 남자 식구에게 여자가 위에서 2회, 아래에서 1회 성교를 해서 복귀 시킨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넓혀가게 되는 것이다.

다만, 복귀를 받으면 그전에 7년간은 "성별"(성교를 하지 않는 기간)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복귀를 받을 자격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만큼 7개월간의 성별만으로 가능하며, 그 후에는 훨씬 짧아져서 7일간만의 성별로 남여 서로 복귀를 받을 자격을 주게 될것이다.

나는 거기서 이 세상에는 국적도 언어도 피부색도 이상도 다르다. 이만큼 다수의 사람들이 있고, 한국 뿐이라면 또 몰라도 어떻게 그렇게 될수가 있는것인가"고 물었다.

문선생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조건만 만들어 놓으면 국적, 민족, 언어 따위와는 관계없이 실행할 수 있다"고 답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들은 세계각국에서 동쪽에서 해가 뜨고, 횐옷을 입은 4계절 나라에 재림한 메시아 아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몰려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진정한 부모 밑에서 온 세계의 인간이 하나의 가족처럼 되어서 국적이나 언어 따위에 관계없이 전세계가 가깝게 된다. 한국인이 아프리카에 가고 싶을 때에는 아프리카의 어디라도 갈수있고, 어느집이고 찾아가서 그집에서 하루고 몇일이고 지낼수 있게 된다.

또 그집에 있는 모든물건을 자기의 물건처럼 사용 할 수도 있다. 양껏 먹고 즐겁게 마셔도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 있는 혹인이 한국에 오더라도 몇일씩이고 묵을수 있고 우리들의 물건을 무엇이던 자기의 물건처럼 쓸수가 있으며, 좋을대로 먹고 마시더라도 누구도 군소리를 할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의 사단의 세상에서는 모든 물자나 돈을 사단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용방법이 틀렸던것 이다.

참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식구들은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단의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이나 돈은 참 부모와 함께 있는 식구들이 가령 그것을 훔쳐서 썼다 하여 그것이 세속의 법률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된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 것이었던 물자나 돈을 사단이 탈취해서 썼던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적으로 대단한 고통도 없어지고 모든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어서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갈수있게 된다.

지금 우리들 죄수 1,500인이 하루 온종일 노동해서 겨우 될수있는 일거리도 그때가 되면 한사람이 3시간만 일하면 모두 될수있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 삼아 3시간 정도만 하면 되게 되는 것 이다.

그리고 알라스카와 같이 추운 지방의 식구들은 하고 싶으면 일년내내 따뜻한 하와이와 같은 경치좋은 곳에 와서 자유롭게 먹고, 마시고,서로 사랑 할 수가 있다. 만약 그것이 싫증이 나면 4계절이 뚜렷한 한국과 같은 나라에 와서 즐길수가 있다. 또 일본과 같이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 가서 자유롭게 구경하고 생활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기가 반듯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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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사람들이 '참 아담'과 '참 해와'라고 하는 두사람의 부모의 자식이 되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문선생은 '원화원이상 (圓和園理想)" 이라고 한다.


현재 형무소 안에서 고생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그것은 꿈속의 또 꿈과 같은 이야기라서 나는 그저 명청하게 듣고만 있었다. 옥중에서 나는 총반장이란 처지를 이용해서 시간을 벌어 가지고 문선생에게서 몇 주간에 걸쳐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생각한다면 그로서는 형편이 좋은 전도였고 포교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창조원리'나 '복귀원리'는 실은 그가 가르침을 받은 김백문이나 이용도의 이론의 복사판이었을 뿐아니라 몽땅 받아다 파는 식의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훨씬 후에야 알았다.

또 복귀라고 하는 명목의 성행위로 문선생이 얼마나 많은 여성을 불행하게 하였는가, 그자신이 얼마나 음난하고 방자한 성욕에 탐익 하였는가를 이 책속에서 밝혀두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반면에 사회악이라고 말 할수 있다. 복귀의 진실을 고발하는 나 자신, 실은 문선명의 명령에 따라 많은 여성과 복귀한 사실도 있다.

여하한 이제 한동안 무지했던 나와 문선명의 당시의 관계를 읽어 주십시요.

 

평양을 소란케 한 이단자

 

그날도 나는 죄수들과 함께 작업장으로 나가서 작업배치를 한 후에 문션생과 함께 조용한 창고로 가서 빈 가마니가 쌓여 있는 곳에서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긴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은 서울에서 평양까지 오게된 동기와 평양에 와서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 때문에 사회질서 문란죄라고 하는 죄명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되었는가를 들었다.

나의 꿈속에서는 분명하게 문선생은 재림 메시아라고 하는 계시를 받았다. 나의 해석으로는 재림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종말의 날에 심판을 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추수 할때에 잘 익은 곡식은 알뜰히 수확하고, 제때에 여물지 못한 것이나 쭉정이 같은것은 불에 태워 버리는것 처럼, 재림메시아의 심판에 따라 참된 신자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믿지않은 사람들은 지옥으로 떨어트려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메시아의 사명이라고 성서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문선생과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감옥에서 이와같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긴 시간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최초의 체포 구속

 

문선생은 서울의 영등포구 상도동에 살고 있을때 김 백문이 라고 하는 사람이 지도하고 있는 이스라엘 수도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김백문의 성경의 원리해석을 배워 나가던 중에 그 원리에 흠뻑 빠저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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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하나님으로 부터의 계시를 받아 북한으로 가도록 말이 있었다고 한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1946년 6월6일의 일이었다.

그 당시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고 전체가 거의 공산주의로 물들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문선생은 그러한 시기에 처자를 서울에 남겨둔채, 배낭 하나만을 짊어지고, 38선을 넘어서 평양으로 왔다.

평양으로 와서 맨 먼저 정득은(T得恩)이란 여인을 만났다. 의기 상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를 받은 평양성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것에 합의하고 서로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때 문선생은 26세 , 정득은은 40세정도였다.

두 사람은 평양시 상수구리의 검은다리에 있던 정득은의 집에서 원리를 전도해 나가기로 하였다. 며칠이 채 못가서 이집에는 열성적인 신자들이 10명이 넘게 모여들었다. 여기서 문씨는 처음으로 창조원리에 대해서 강의를 하였다.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알아 차리고 해와를 유혹해서 타락시킨 일, 예수의 모친이었던 마리아가 모자협조(성교)를 하지 않아서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죽게 되었다.
예수는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것은 아니었으나, 십자가위에서 육체는 죽어 버리고 영혼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된 것이므로 또 재림할 것을 약속한 것이라는등‥‥

이때 모인 신자는 정득은, 옥상현*, 지승도, 정선옥*, 김인주, 김종화등의 여성과 김원필, 정명선, 차상순 등이었다.

문선생이 집회를 열고, 성경해석의 원리를 강의하면 특히 여인들은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모양을 보고 근처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 하였던것 같다.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열사람 남짓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든가 소리를 지르던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선생에게 말을 시키면 창조원리와 타락원리의 강의 그리고 복귀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 6천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누구던지 울면서 기도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이와같은 집회가 허용 될리가 없다. 근처의 사람들이나 기성교회의 신자들, 특히 교회의 목사와 장노들은 문선생의소행을 이단시하였다.

이 이상스러운 집회를 하고 있다고 경찰에 고발하였기 때문에 문선생은 평양으로 와서 2개월째인 1946년 8월2일 대동보안서에 체포되어 약 100일간 구속되었다. 그간에 가혹한 고문을 받아 한잠도 못자게 하든가, 식사를 2일도 주지 않는등, 학대를 받었으나 특별한 죄가 없었기 때문에 석방되었다. 그때 문선생은 꽤 쇠약해 있었으나, 신자들의 도움과 한약의 덕분으로회복하였다고 한다.

 


유부녀와의 결혼소동으로 징역5년


문선생은 그후 경창리에 있는 김종화(金鍾和)라는 열렬한 여신자의집에 머물렀는데, 그녀의 남편인 정명선과 세자녀가 있는 가정이었다.

이집에서 문선생은 복귀원리를 실현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있는 부인네를 천사장 루시엘이 해와를 빼앗아 성교를 한것과 같이 빼앗아서 하필 남편과 아이들이 옆에 있는 방에서 김종화와 동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문선생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김종화와 "어린양잔치"(정식결혼)을 하기로 하였다. 신자들은 쌀을 거두어 떡을 만들고 양복과 이불을 만드는 등 푸짐하게 의식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매일같이 사람을 모아 놓고는 울면서 기도하다가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시끌벅끌하며 밤중까지 떠들석했다. 그위에 남편이나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지붕밑에서 동거하고 있다. 그것이 이번에는 결혼식을 올린다고 큰 소란을 떨고 있는 것이니까 그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잠자코 있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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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1948년 2월 22일 문선생이하 전원이 체포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선생은 사회질서 문란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로 오게 된것이다.

(6월 20일)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김종화는 징역 1년의 실형으로 복역하고, 옥상현은 그녀의 집이 상당한 재산가였으므로 2개월 만에 석방 되었다고 한다. 또 몇해 후에 남한 서울에 피난하고 있던 김종화를 찾아가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서, 나는 당시의 진상을 들어 보았다.

믿음을 잃고 쉬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문선명의 이야기와는 달라서 흥미 진진한 것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대공습


1950년에 접어들자 형무소안은 한층 더 엄중해졌다. 비료공장의 작업장은 웬일인지 유안분이 돌처럼 굳어져서 일에 능률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책임량(노루마)은 증량일로 이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일을 하여도 달성되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 더구나 노동시간은 1시간이 연장되어 6시에 종업이 된다. 참으로 "죽으라"고 하는것 같았다.


1,500인의 죄수중에서 매월 100인정도는 툭특 쓸어져 죽어서 공장의 노동자들은 매일 장사를 치르는 것으로서 일과가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죽은사람의 인수만큼 죄수가 평양형무소에서 확실하게 보충되어 왔다.
젊은 간수들이 많이 줄어 든것을 알아차린 것은 5월경 이었다.


아무래도 사원들이 "이 것은 비밀이지만‥‥라고 말하면서 소근거리며 "소련쪽으로 비료를 운반해 간 배가 돌아올 때에는 고사포 같은 무기를 잔뜩 싣고 오곤 한다. 아마도 곧 전쟁이 시작되는것은 아닐까"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수용소내의 경계나 작업소내의 감시가 한층 더 엄해졌고 죄수들은 큰소리로 이야기를 할수없는 분위기가 계속되어 있었는데 6월 25일 드디어 전쟁이 시작 되었다.


북한의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서 남진하여 3일후에는 서울이 함락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죄수들을 연령별로 나누어 군대로 보내서 위험한 최전선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뜬 소문이 나돌았을 때에는 불안한 나머지 수용소 안이 크게 떠들석 하였다. 그런 가운데 8월1일 오전 11시 비료공장의 상공을 UN군의 비행기가 약30분이나 정찰하고 갔다.


나는 군대시절의 경험에서 계호계장인 간수에게 "여기는 틀림없이 폭격 당합니다. 수용소쪽이 안전할 테이니까 죄수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진언하였으나 전쟁을 모르는 간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할수없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가요란하게 공급경보의 싸이렌이 올렸다.


UN군의 B29가 공습해서, 12시경부터 약4시간 비료공장은 맹렬한 폭탄비의 세례를 받았다. 북한 산골 옥수수 농사짓던 농민이었던 간수들은 넋이 빠져서 우왕좌왕 할뿐이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만약 또 폭격이 있더라도 국제법상 형무소나 수용소는 폭격하지 않을터이다. 안심하고 수용소로 가기를 서두르자, 간수들은 죄수가 전원 따라오는지 뒤에서 감독해 주시오라고 큰 소리로 지시하고 선두로 달려서 수용소로 돌아왔다.


비료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총 인원수는 8천명 정도 이었고, 죄수는 1,500명이었는데 돌아와서 조사해보니까 죄수의 사망자는 불과 70명, 공장 전체로서는 약 3천 7백명 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다.
참으로 무서운 대공습이었다 수용소로 돌아온 나는 서둘러 문선생을 찾아 폭격으로 다친데나 없나 하고 걱정 하였는데 상처 하나없이 무사하였다.

 

김일성 은사


북한이 김일성 정권의 수립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서 독립하였는데(1948) 은사로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던 나는 대공습 다음날(50년 8월 2일) 간신히 형기를 마치고 지옥의 수용서에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하늘 아래인데도 공장안과 밖은 이렇게도 다른 것인가를 눈물이 넘쳐 흐르는 생각으로 하늘을 바라 보았다. 오전 10시경이었다. 비료 공장 옆을 지나보니 폭격당한 흔적의 비참한 광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기 저기 있는 큰 구덩이에서 시체가 산산히 흩어진 살점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이 공장속에서 문선생은 오늘도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을 것인가고 생각하니까 자기 혼자서만 먼저 석방 된것이 면목이 없었다. 출옥의 인사차 갔을 때에 문선생은 "평양에 가거든 경창리에 살고 있는 김종화를 찾아서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라 고 전해 주시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종화 여인은 문선생과 결혼하려고 하였다가 투옥 당하게 된 원인이 된 바로 그 유부녀인 것이다.

홍남의 도로는 인민군의 군수물자를 실은 트럭이 많이 달리고 있었다. 인민군은 선제공격으로 승리하여 서울을 점령한것 같았다. 지금은 전쟁중인 것이다. 평양행 군용트럭을 세워서 사정을 말하였더니 평양까지 태워다 주게 되었다.

 

 

제2장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평양에서 서울로

 


불량배에게 다리에 절골 당했다.

 


폭격을 피해서 산길을 뛰기도 하고 도중에서 자기도 하며 평양에 도착한 것은 3일 뒤였다. 공습을 피해서 교회로 소개되어 있던 가족과 합류한 다음날, 나는 김종화 여인의 집을 찾았으나 찾을수가 없었다. 그 무렵 한국군은 인민군에 밀려 1950년 8월 18일에는 부산으로 한
국정부가 옮겨가 있었다.

북의 공산당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평양시내는 전승분위기로 넘쳐 있었으나 9월 15일에 UN군이 인민군의 배후를 찔러 인천으로 상륙, 전황은 뒤집혔다. UN군의 진격은 재빨라서
9월 하순에는 한국군과 UN군이 평양에 입성하였다.

그러한 어느날 나는 보안대라고 자칭하는 무법자들 일당에게 둘러싸였다. 본바닥의 불량배들로서 북이 오면 북을 맞이하고 남이 오면 남에 꼬리를 치는 패거리들 이었다.

"너는 북조선 군의 대대장을 지낸 진짜 공산당원이니까 죽인다. 죽어라 !!』몇사람이 나에게 달려들어 망치로 내다리를 쳤다. 발목뼈가 부러져서 나는 움직일수 없게 되었다. 마침 지나가던 한국군 헌병대의 찝차에 구조되어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직무태만
죄로 투옥 되었던 것을 알게 되어 석방되었다.

이러한 곳에서 살해 당하는가 싶어서 한때는 죽음을 각오하였던 만큼 '정말 사람에게는 무엇이 행운을 가져 오는지 알수 없다'고 무심결에 실소한 일도 있었다. 그때 유치장에 남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중죄인들은 모두 총살 당한것 같다.

전쟁으로 시내의 병원은 어디고 제대로 되는것이 없었다. 유도가 5단이었던 나는 할 수 없이 약국에서 적당한 약을 구해서 먹고 부러진 발목에는 응급조치로 나무쪽을 대서 묶어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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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명(文龍明)과의 재회


10월 27일 김원필과 문정빈이 나를 찾아 왔다. 문선생은 출옥해서 10월 24일에 평양에 도착하여 나를 찾고 있었으므로 데릴러 왔다는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서 기쁘고 반가워서 말조차 잘나오지 않았다.

나는 리야커에 실려서 얕은 언덕받이에 있는 옥상현의 집으로 갔더니 문선생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순간 나와 문선생은 손을 잡고 울어버렸다. UN군에 의해서 흥남감옥이 10월 14일에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 문선생은 10일 동안이나 걸어서 평양으로 온것같다.


옥상현의 자택은 일본식 주택으로 부지가 수백평이나 되고, 집이 여러채 서있어서 큰 부자임에 틀림없었다. 옥상현과 딸 정애, 정순, 문선생, 김원필, 문정빈, 그리고 나까지 7인이 한 가족처럼 생활하였다.

일주일정도 지나니까 옥상현의 남편인 우하섭의 가족전원이 피난 나갔던 서울에서 돌아 왔으므로 우리들은 쓰고 있던 방을 비워 주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모두들 의논한 결과 서성리 라고 하는 곳에 있는 방을 하나 빌리기로 하고 그 다음날에 이사를 했다. 문선생과 김원필, 문정빈 그리고 나까지 4인이 함께 살게 되었다.

문선생은 그사이 아는이의 안부를 찾아 들락거렸고, 김원필에게 자기의 출옥을 알리는 일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또 평양에서는 1950년 12월2일 시내전역의 시민에게 피난명령이 내렸다. 그것은 중국군이 대량으로 투입되어 인해저술로 거센 파도(노도)처럼 몰려오고 있기 때문에 한국군과 UN군이 일단 후퇴 하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는 조선반도의 맨 북쪽까지 쫓겨 갔던 북조선 인민군과 그것을 지원하는 중국지원군(10월 25일에 참전)의 전진은 예상외로 빨랐던 것 같다. 그날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의 탄약고가 폭격 당해서 밤새도록 폭발하는 바람에 한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족을 이북에 버려두고 문선생을 따랐다.


우리들은 남쪽으로 피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리골절 상처가 다 났지 않은 나는, 걸을수가 없었기 때문에 상수구리에 있는 누님댁에서 자전거를 가져다가 나는 그것을 타고 김원필은 뒤에서 밀고 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1950년 12월 4일 10시경에 평양을 출발하였다. 계절은 겨울이였으나 아직 그렇게 춥지는 않았으므로 피난 하기에는 비교적 장해는 없었다. 도중 대동군에 있는 나의 본집에 들려 가기로 하였다.

우리집에 도착하니까 가족은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가 부자유한 다리를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남으로 출발한다는 것은 온가족이 "엄청난 무리"라고 크게 반대하였다.
조카인 정근은 "삼춘이 그 다리로 어떻게 남으로 피난 갈려고 생각하는가"하면서 필사적으로 말리려고 하였다. 문선생은 우리가족을 납득시키려고 평양성을 눈앞에 바라 보이지만 북에서는 목적을 달성 할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뜻에 따라 일단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설명하였다.


나는 옥중에서 맺은 사나이의 약속으로 문선생과 함께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마음 속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미 80세가 되신 어머님께 작별 인사를 들인 뒤에 처에게 가족들 일을 부탁하였다. 그때 맏딸 효순이가 나와서 "나도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를 돌보면서남쪽으로 따라 가겠다"고 눈물을 흘렸으나 문선생이 말렸다. 문선생은 흥남에서 같이 온 문정빈과도 나중에 기회를 봐서 남쪽으로 오라고 타일러 우리집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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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후방에는 중공군이 물밀듯이 멀려오므로 우리들은 되도록 빨리 대동강을 건너야 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정근에게 부탁해서 그날 밤중에 배로 남충면 효남리로 건널 수 있었다.
그날 밤은 근처에 있는 누님댁에서 묵었다. 남쪽으로 피난하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다음날 아침인 12월 5일 누님이 마련해준 식량을 자전거에 싣고 나는 타고 김원필은 밀면서 출발하였다.
누님은 문선생을 목사라고 생각하고, 목사님 제발 제 동생을 잘부탁드립니다 라고 머리를 숙여 인사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후 43년간 가족과의 만남은 사라져 가는 꿈같고 아내와 다섯 아이들은 어떻게들 하고 있는지 )


죽을때까지 함께 하자던 사나이의 약속


남쪽으로 내려 가는 피난길은 사람들로 넘쳐 있었다. 피난민들은 저 마다 손을 잡고 그야
말로 몇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서서히 남쪽으로 남쪽으로 걷고 있었다. 우리들은
역포를 거쳐 용연면에 들어서서 12시경에야 가학리 에 도착하였다.서쪽에서는 폭격기의 공습과 총격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날은 흐려 있어서 해가 아직지지 않았는데도 해가
넘어 간것처럼 어두었다. 오늘은 앞으로 더 가는것을 체념하고 숙소를 찾아서 쉬기로 하자는 문선생 지시로 우리들은 근처의 마을에 들러 초입에 있는 농가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아무도 살고 있는것 같지 않았다. 가재도구는 있었으나 아마도 주인은 남쪽으로 피난해 갔는지 부및에 가보니까 쌀은 물론 김치, 간장, 된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말로 인류최후의 날이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세상은 이제부터 어떻게 되어가는 것일까? 가구와, 살림도, 의복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가족만이 증발해 버린것 같다. 피난 도중에 쉬려고 맨 처음에 들어간 집의 광경을 보고 나는 여러가지 것을 생각케 하였다
원필이가 저녘 준비를 해서 가져 왔다. 횐 쌀밥에 물김치를 차린 밥상이었다. 우리들은 감사의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하였다 문선생이 "정화는 다리가 부러져서 고생하고 있지만 좀 있으면 낳을것이다. 또 자유롭게 걸을 수 있을 터이니 안심하시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가족들을 생각해서 쓸쓸해 보였던지 "우리들은 지금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는 것이다. 다만 피난하기 위한 길만은 아니다. 평양성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 세상에 창조하려고 한 것인데, 나를 감옥으로 보냈기 때문에 허사가 된것이다.
남쪽에서 다시 한번 해내는 것이야"라고 격려해 주었다. 쌀 뒤주 위에 가지런히 개서 올려져 있었던 이불을 펴고 누됐으나, 나는 아무리해도 잠이 들수가 없었다. 원필은 피곤한지 바로 잠이 들었으나 문선생도 한동안 잠이 안 오는것 같았다. 이제 부터의 계획이라
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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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부터 한평생 문용명(본명)과 박정화는 고락을 함께하고 영원히 같이 살자"고 옥중에서 서로 맹서하였기 때문에 정다운 고향을 떠나서 사랑하는 가족들 부모, 형, 그리고 처 다섯식구 들(17살 장남,15살 차남, 13살의 3남 , 10살의 큰 딸, 다섯살 4남)과 헤어져서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내 일생은 모두 재림 메시아로 믿고 있는 문선생에 맡긴것이다.

역시 나도 고단했던 가보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가깨어 보니 벌써 아침해가 떠 있었다.


피난 길에 우리들의 복장은 문선생은 횐 명주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검은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일본 식민지시대의 말기를 생각케 하는 검은빛의 반공두건을 쓰고 있었다. 흡사 봉건시대의 부인들이 입고 있던 당의와 같은 느낌인데 얼굴 앞 부분만이 보일뿐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겉차림뿐만 아니라, 여인과 같은 음성이였으므로, 진짜 여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작업복 상하에 일본군의 구두를 신고 머리 에는 누런 방한모를 쓰고 있었다.
외국제의 밝은 자전거에 짐을 싫고 다리가 불편한 내가 걸터 앉아 핸들을 쥐고, 원필과 문선생이 교대로 뒤에서 밀고 있던 모습이 아마도 기묘하게 보였을 것이리라.
 

악전고투의 피난 길


남쪽으로의 길은 간선도로를 가면 비교적 평탄하고 수월하겠지만 미헌병이 여기저기 서 있어서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결국 피난민이 통행할 수 있는곳은 좁고 기복이 많은 옆길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피난민의 수는 늘고 그야말로 인산 인해 좁은 길에 넘쳐나고 있었다. 남으로 가기만 하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보증도 아무것도 없건만 그래도 무언간에 희망을 가지고 사람들은 남쪽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었다.


평양을 떠날때 의복이나 살림을 한짐씩 싸짊어지고 피난길에 올랐으나 그짐도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 들었다. 줄곳 걷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지쳐 그리 대수롭지 않은 물건들은 자꾸 내버려 피난길 20일 정도 된 때에는 짐들은 거의 줄어졌다. 피로가 겹친 몸에는 한 겨울의 추위가 한층 더 느껴졌다. 따뜻한 곳을 찾아서 풀위에 눈이 녹아있는 곳이 눈에 띄이면 주저 않았다가 쉬엄쉬엄 걸었다. 그래도 잠 자리와 식사 걱정만은 대단하지 않았다.


그날도 조금 일찍이 숙소를 찾아서 쉬기로 하고 가까운 마을로 들어갔다. 어느집에 들어가니까 꽤 잘 살던 집처럼 보였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살림살이와 식량은 놓아둔 채였다. 방을 정하고 한참 쉬고 나서 원필이 저녘밥을 마련해 주어서 세사람이 식사를 했다.  아픈 다리로 이대로 부산까지 갈수 있을런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우리들은 점점 늘어가는 피난민에 섞여서 남으로 남으로 향하였다.


그 도중에 광주근처에 각도가 거의 30도정도는 되는 가파른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는 150M정도로 길어서 자전거를 밀고 올라 갈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내가 자전거에 타고 원필이 아무리 힘껏 민다 해도 그리 쉽사리 올라 갈수 없었다. 조금 올라간듯 하면 미끄러져서 자전거가 뒤로 나 자빠지고 만다.


주위에는 피난민이 가득차서 저마다 앞을 다투어 먼저 가려고 하였다. 이대로 하다가는 아무리 해도 나아갈수 없겠다고 생각한 나는 나 때문에 문선생과 원필도 남쪽으로 못가게 된다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서 문선생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안 되겠오 나를 두고 앞으로 가시오 나는 여기서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나의 운명에 따르겠오." 그했더니 문선생은 화를 내며

"당신과 나는 죽음까지 함게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금후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살자 걱정말게 !! 라고 말해 원필에게 자전거를 끌게 하고 나를 업고서 고개를
넘었다. 감격 한 나는 문선생을 믿고 따라 가기로 다시금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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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서을에 도착하다.


우리들 세사람은, 그후 남쪽으로 온 피난민속에 공산군이 섞여 있을것 이라고 하는 정보에 따른 UN군의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여럿이 죽는 고초를 겪기도 하고, 이의 등살에 견디기 힘들었던 어려운 고비를 참고 넘어서 사리원, 하성, 동해주, 청단, 내성, 용매도, 영양, 토성,장서를 거치고 임진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들어가 마포를 지나서 서울로 향하였다.


12월 27일 눈이 퍼블는 속에 얼어붙은 한강을 미끄러지고 구르면서 건너서 24일만에 우리들 세 사람은 꿈에 본 서울에 당도 하였다. 우리들은 우선 영등포구 흑석동에 있는 곽이라고 하는 사람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문선생의 옛날의 친우였던 곽이란 사람은 이미
부산쪽으로 피난해서 그 집은 빈집이 되어 있었다.

이집은 2층집인데 양옥집이고, 가재도구가 그대로 놓아둔 채로였다. 할수없이 우리들은
이 빈집에서 한동안 지내기를 하였다. 서울은 문선생이 학생시절부터 살아서 신앙적인 면으로도 여러가지 것을 체험 해온 제2의 고향이었다.

그 곳에서 문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후 한동안 하숙을 하고 있었다. 이기봉이라고 하는 할머니 한테 찾아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렇게 반갑게 대해 주지 않는 것이
다. 그 후에도 몇 사람 옛 친구를 찾아 갔으나, 문선생의 꼴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들의 모양이 거지같이 보였든지 그리 친절하게 대해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무렵 서울시민은 국민방위군요원에게 물겨 다니고 있었다. 나는 또 다리가 부자유스러워서 걸리지 않았지만, 문선생과 원필 두 사람은 무조건 끌려갔다. 세사람이 사선을 넘어 평양에서 겨우 서울에 닿았는데 이것은 또 어떻게 된 것인가. 나만 홀로 남겨지고 금후의 일이 걱정인데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서울은 낯선 고장으로, 아는 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곳이다. 더구나 전쟁 중이다. 문선생이 찾아가도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가령 내가 찾아간다 하더라도 나 같은 것에 동정 해 줄리가 없다.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무것도 떠 오르지 않았다. 문 선생만을 믿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문선생과 원필은 국민방위군의 자체검사에서 불학격이 되어 돌아와서 세사람은 또 흑석동의 곽씨의 자택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새해가 밝아 1951년 1월 2일, 서울전역에 퇴거명령이 내려졌다. 공산군이 가까이 까지 남하해 온 것이다. 우리들은 또 피난길에 나서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 이번의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지금까지 검문을 받던지 할 때에는, 우선 먼저 증명서의 제시를 요구 받았다. 그런것을 생각해서, 나는 가까이 있는 치안대를 찾았다. 유홍이라고 하는 치안대의 대장이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서 우리들은 "피난민증명서"를 한통씩 만들어 줄것을 요청하였더니 친절하게 증명서를 발행해 줄뿐만 아니라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위로의 말까지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 때의 기분은 지금껏 잊을수가 없다.

평양에서 마련해 가지고온 돈도 모두 떨어졌으므로 우리들은 할수없이 곽노필씨 집에 남아있던 양복이나 돈이 됨직한 것을 자전거 뒤에 싣고 서울을 출발하였다.만약 그대로 남겨 두었다 하더라도, 인민군이나 중국군이 처들어 온다면 아무것도 남아 나지 않을것은 명백하였다. 사실 서울은 1월4일 재차 공산군에게 제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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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산으로

 


제2의 피난행



우리들은 1월3일 이번에는 부산을 행해서 500키로의 피나길에 올랐다. 두번째의 피난인 것이다. (1·4후퇴 때)
자전거에 타고 그저 밀려 다니는 꼴이 었지만, 자유를 찾아가는 희망의 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서울을 출발해서 부터 우리들은 부산까지 경부선을 따라 가지않고 중앙선을 따라 가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나의 숙부가 되는 정기수씨가 제천이라는 곳에 살고 있어서 그곳을 들러 가면 여러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성남을 지나서 이천으로 향하였다. 이번에는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피난 때와는 달리 모르는 피난민들끼리 줄을 짓기도 하고, 또 무더기로 몰려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끼리라든가, 가족들끼리 함께 이동해 가는 것이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그의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에는 거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빈 집이 눈에 띄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집에 가서 하루밤 쉬어 가기를 부탁하면 쾌히 들어주어 방을 빌려서 쉴 수가 있었다. 빈 방이 없을 때에는 부엌이나 헛간 같은 데서도 쉬어 갈 수가 있었다. 쉴 장소가 마련되면 다음은 가지고 은 쌀로 식사를 마련해서 먹고 자는것 뿐이 었다.

제2의 피난때에는 전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 가짐에도 얼마간의 여유가 생겨서 그렇게 서둘지 않고 느긋하게 갈수가 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일찌감치 마을에 찾아들고 서둘러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잘하는 방법인 것이다. 가지고 있던 쌀이 떨어 졋으므로 가까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렸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갔는지 상점은 거의 닫혀 있었다. 그러나 우려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이 작은 마을 가운데 있는 큰 집을 찾아가서 곽씨집에서 가지고 온 양복 한벌을 꺼내서 집에있는 할머니에게 건네고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70은 넘은 듯한 기품좋은 할머니는 우리들이 측은하게 보였던지 아니면 양복이 탐이 났던지, 팔 뒤주를 열고 쌀 한말 가량을 주었다.

장호원, 원주를 거쳐 제천으로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 헤맨 숙부의 집은 이미 피난해서 빈집이 되어 있어 맥이 쪽빠졌지만, 그래도 앞으로나아가 조령(새재)의 마루턱에 도착하였을때 UN군의 헌병이 "피난민은 도로로 가서는 안된다"고 제지를 당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걷기 힘든 산길을 갈수 밖에는 없었는데, 그 무렵에는 나의 다리도 거의 나아갔으므로 산길이라도 악을 써서라도 걸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별안간 UN군의 헌병이 문선생과 원필을 강제적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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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세번째 이별이 되는 것인가 하고 나는 무척 불안하였다. 처음에는 북에서 피난할때 보안대에 연행되었다. 다음에는 서울에서 국민방위군에게 연행되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또 혼자 남게 된 것이다.

그러한 곳에 혼자 남겨 지더라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매우 걱정 스러웠는데 한참 만에야 두사람이 돌아왔다. UN군의 군용 차에서 작업을 시켰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 길 이었으므로 나 혼자서도 갈수 있을것 같았다.

"여기서 부터는 지팡이를 버리고 걸어서 가자"고 문선생이 말했다.

두달 가까이나 지팡이에 의지해서 자전거에 타기도 하고 네리기도 하였으므로 아직 자신은 없었지만 다부지게 마음먹고 지장이를 버리고 보니가 지팡이가 없이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후의 길을 나는 혼자서 걸어 다닐수 있었다. 단양, 점촌, 풍기, 안동, 의성으로 피난길은 이어졌다.


경주에서의 작별


경주에 도착한것은 저녘때였다. 시내에는 피난민이 넘쳐 있었고 비어있는 방은 여간해서 찾아 볼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사방을 헤매서 겨우 시내의 로서리를 거처 쉴만한 집을 찾아냈다. 현관문을 판자로 X형으로 막어 놓은 집인데 그집을 찾아 가니까 30세가량의 젊은 사람이 나왔다. 우리들이 방문한 이유를 물었으므로 "판자로 문판을 막어 놓았기에 아무도 안사는것 같아서 하루밤 쉬어 가려고 생각 한것이다"하고 하였더니 안으로 들여 보내주었다.
집안을 살펴 보니까 판자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공장같은데 집 주인의 설명으로는 "밥상"을 만들고 있었는데 전쟁 때문에 직공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공장을 폐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방을 빌린 후에 원필은 저녘 반찬거리를 사려고 시장으로 나아갔다. 어항이 있는 포항이 가까이 있어서 오징어를 세마리 사다가 죽을 쑤었다. 원필이 방을 빌려 준 주인에게 죽 한구릇을 가져갔더니, 뒤에 그집 아주머니가 "이러한 죽은 어떻게 쑨것이냐"고 물어 원필이 설명을 하니까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오징어로 족을 쓸 때에는 먹장을 떼내고서 죽을 쑤는 거예요. 그냥 하신거죠"

우리들은 어두운 곳에서 먹었기 때문에 그런것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는데 아주머니가 가져 온 죽을 보니까 과연 새까만 것이었다. 그것을 그냥 먹었는가 하고 생각하고 우리들은 서로 웃고 말았다.

이집의 주인은 황해도가 고향인데 자기는 어렸을 때에 경주로 살러와서 생활을 위해서"밥상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어른들은 지금도 북에 계시고 자기의 가족들만이 이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장만영이라고 3일간 이집에서 쉬었다. 식사는 물론 우리들이 만들어 먹었다. 그래도 피난민이 넘쳐서 한곳에 오래동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주인에게 "우리들은 오늘 부산쪽으로 갑니다"라고 인사를 하니까 젊은 사람은 가도 괜찮을터이지만‥‥하면서 그는 나를 가르쳐 말했다. "당신은 제일 나이도 많는것 같고 몸도 쇠약한것 같다 부산에 가더라도 피난민으로 꽉 차 있을 터이니까 두사람이 먼저 가서 자리잡은 다음에 당신도 가면 좋지 않은가"

여기까지 문선생과 원필이 함께 사선을 넘어왔으므로 나는 "아니야 나도 부산으로 가겠다"고 말했더니 문선생은 "이집 주인의 마음씨가 고맙다"고 말하고 "정화 자네는 이곳에
있으면서 좀더 기다리게, 우리들이 부산으로 가서 자리 잡히면 연락할 것이니까. 그때 또 서로 합쳐서 큰 일을 하기로 하세나"

이려하여 나는 경주에 장만영써 집에 남고 문선생, 원필은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때의 나의 심경은 무척 복잡하였다. 피난도중 문 선생과 함께 사선을 몇 차례나 넘어 왔는데,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려고 하는 위대한 일거리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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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떨어진 나의 심경은 서러워서 함께 가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했으나 피난길은 한 사람이라도 적은 편이 수월한 것이 라고 생각해서 잠시의 이별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후에 문 선생이 경주로 왔을때 들은 바로는, 이때는 울산까지 걸어가서 울산에서 처음으로 기차를 탈 수 있었다고 한다. 기차는 기차였지만 화물 차량의 지붕까지 사람이 타고 있는 상황에서 간신히 화칸 부근에 탈수 있어서 부산의 초량역에 겨우 내렸다는 것이다. 그날이 1951년 1월 20일 이였다고 한다.


생활에 쫓긴 문선생이 찾아옴


나는 혼자서 경주에 남아 장만영씨 집에 식객이 되었다. 4월이 되어 날씨도 따뜻해졌다. 식객도 오래 되었기에 무슨 짓이라도 해서 밥값 정도는 치러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어느날 주인과 의논하였는데

"전쟁중에는 만들어도 별로 팔리지도 않으니까 공장을 페쇄하고 있다"하는 것이었으나, "밥상만 만들어 준다면 내가 자전거에 싣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팔아 올 터이니 해보지 않겠오"라고 내가 권하였더니 주인도 그러 할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전부터 공장에서 일하던 아들과 식객 노릇을 하고 있던 피난민 나와 주인등 셋이서 밥상을 만드기 시작하였다.

나는 한번에 20개씩 자전거에 싫고 포항으로도 가고, 영천으로도 가고, 또 울산에도 갔다. 익숙하지 못한 장사였지만 싣고 나간 밥상은어떻게든 다 팔렷으므로 그 대금을 주인에게 넘겨 주었다. 경주 주변에는 사방에 시장이 있었다 영천에도, 울산에도, 포항에도 언양에도, 감포에도, 경주에서 2,30키로 거리에 있었으므로 5일마다 서는 장이 그 시장에 매일같이 밥상을 실어다 팔았다.

또 저녘때가 되면 그집의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가정교사 노릇도
하였고 식객으로 지내는 동안의 밥값 정도는 특특히 한 셈이다.

이렇게 지내고 있는 동안 그 다음해의 3월 7일 별안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문선생이 부산에서 오셨다. 그 기쁨이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군용 모포 한장으로 공장에서 기거하고 있는 나로서는 문선생을 환영할 방도가 없었다. 주인이 돈을 내주어서 저녘 식사만은 접대를 하였으나 밤에 나무조각 투성이의 방에서 주무시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선생은 그동안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나 금후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꿈과 같은 이야기 뿐이었다. 흡사 몇 십년만에 만나 밤이 깊도록 둘이서 이야기를 했고, 다음날 문선생은"오늘은 부산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한다.

내 기분 같아서는 여기에 방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여기서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 할만한 활동을 해서 문선생과 함께 있고 싶은 심정 이었지만 아직 상황이 좋지 못해서 할 수 없는 노릇 이었다.
마침 그날은 울산에 장이 서는 날이라서 문선생과 같이 기차로 가기로 하였다 오전중 내가 시장에서 밥상을 팔고 있는것을 문선생은 보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문선생은 기차로 부산으로 떠났다. 밥상이 많이 팔리면 용돈 이래도 드릴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하필 그날은 웬일인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경주에서 헤어지고서 1년만의 재회이었는데 문선생을 전송하고 돌아온 나는 정말로 깊은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무엇이든 장사를 해서 자금을 마련해 가지고 부산으로 가서 문선생과 함께 위대한 사업 달성에 힘쓰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원필은 식당에서 일하고 있고, 문선생 자신은 일본의 공업학교에 함께 유학하였던 동창생 집에 식객으로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계시기에 무척 불편 하실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실은 이때, 그는 나에게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상태를 보러 온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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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만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수 있을까 하는 것을 나는 늘상 생각해 왔다. 날마다 변함없이 밥상을 운반해다가 시장에서 파는 것이 내 일의 전부였다. 이러한 일거리라도 열심히 붙잡고 있으면 기회 가 찾아을 것이 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 고 여기서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것일까? 아니면 집어 치우고 부산으로 가는 편이 났지 않을까도 생각 하였으나 아직 피난민으로 가득한 부산으로 간다 한들 별 볼일이 없을것 같이 생각되어 좀더 경주에 있기로 하였다.


평양에서 온 옥상현과의 재회


공산군에 의해서 2년전의 1월4일 재차 함락된 서울은 꼭 두달후의 3월 4일 UN군이 탈환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이무렵 일진일퇴 하면서도 간신히 전황은 시드러 들기 시작해서 휴전협정의 준비가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민간인의 사상자만도 남북 합해서 2백만명 이상, 이산가족도 일천만명을 넘는다고
하여 국민간에 불안과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있었다.

그러한 1953년 봄 부산에서 저 옥상현 할머니가 경주로 나를 찾아와서 오랜만에 대면하였다 평양에서 피난 할때에 헤어져서 서로 알길이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가웠다.
옥상현은 그녀의 피난 이야기와 부산의 문선생의 안부와 식구들을 키우는 일에 열중하고 원리를 책으로 만들기 위해서 원고를 써냈다는것, 흥남감옥 당시에 이야기 했던 원리를 정리해서 출판해야 하겠다고 항상 문선생이 이야기 하던 것을 생각하고 이렇게 엄청난 피난 생활 중에도 기어히 써 냈구나 하고 감격하였다.

하루 빨리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해서 원리를 출판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전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옥상현의 장남이 군인용 트럭을 가지고 온 덕분으로 가족전원이 무사히 남쪽으로 올수 있었던 것이다. 자리잡히면 부산에서 함께 일할수 있게 하루 속히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문선생과 함께 6,000년전의 하나님의 뜻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할때가 이제 곧 다가 올것 등등 열심히 이야기 하였다 원필은 지금 미군부대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범일동에 교회를 마련하여 새로 입교한 식구들이 원리를 들으려고 모여들게 되었고, 평양에 있던 식구들도 부산으로 와 있다고 한다. 교회의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문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왔던것 같다.

옥상현은 하루밤을 같이 지내고 다음날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동만 있다가 이요한 이라고 하는 목사가 나를 찾아 왔다. 부산에 있는 문선생이 보냈다고 하는 것이었다 방으로 안내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새로운 식구들이 많이 모여와서 원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으므로 박정화씨도 선생이 계시는 부산으로 발리 오시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것이 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하나넘을 위한 위대한 사업에 전진할 시기가 지
금 막 왔다고 가슴이 벅차 있었다.

그 다음날 이목사는 부산으로 돌아갔다. 나도 곧 부산으로 간다고 문선생에게 전하도록 부탁을 하고 혼자서 생각하였다. 저 흥남감옥에서 문선생이 빈 가마니 위에 앉아서 눈을 감은채 신비의 세계를 변화하게 할 이상, 즉 "원화원 이상(圓和園理想)"의 세계를 실현시키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나에게 말한 것을 생각 하였다. 그 때의 전경이 눈에 아물 거렸다. 희망의 세계가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

죄악이 없는 세계, 그리고 질투, 음모, 배신, 전쟁 같은 것이 없는 세계, 그 이상세계의 회원만 된다면 노동은 취미로서 하루에 세시간 정도만 하면 된다.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갈 수 있게 되고, 회원 집에 가면 자고, 먹고, 쓰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받는것 보다는 주는것을 기뻐하는 세계, 남을 책망하지 않으며, 존경을 받기 보다는 존경
하는것을 기뻐하는 세계, 이 이상세계가 지구의 구석 구석까지 넓혀져서 우리들은 어느 나라와도 마음이 상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가까운 여기 지금 부산에서 고생하고 계신"문용명 선생"에 의해서 완성 될것을 생각한다면 감사할 뿐이다.


나는 한시바삐 부산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마음에 재촉을 받았다.

 

 

제3장  통일교회의 창립전후

 


여신도들의 열의

 

부산 수정동 교회

 

나, 박정화는 1953년 5월 15일 새로 사드린 부산 수정동의 집으로 문선생을 찾아갔다. 문선생은 대단히 반가워 하며 그간의 경과와 금후의 계획에 관해서 자세히 들려 주었다.
마침내 위대한 사업을 위해서 일 할때가 왔다. 마음 단단히 힘써 나아가자고 문선생은 말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많이 들려 주었던 6,000년의 역사의 과정, 창조원리, 타락원리, 복귀윈리, 재림예수의 사명과 그 자세등을 종이에 써 가면서 개인교수 하는것 처럼 가르쳐 주
었다.
문선생은 어느새 이름자의 용(龍)을 떼고 문선명(文鮮明)으로 바꿔 쓰고 있었다.
그 당시 동거하고 있었던 주된 식구들은 김원필, 정성옥 강옥실*,옥상현*, 지승도, 이기환, 이봉운, 이수경과 그가족, 문선생의 처, 최선길과 장남인 성진, 이요한 목사등 이었다. 새로 들어온 식구로 예배에만 참가하고 있던 사람들은 신정순, 김안실, 김재책, 김복순과 그가족, 오명춘 등이었다. 장남은 별로치고라도 김원필, 이봉운, 이수경,이요한 외 에는 모두 여자이다.

당시 김원필은 미군부대에서 일 하고 있었는데, 저녘때가 되면 미군들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데 울산에서 왔다는 젊은 부부가 새로 들어 왔다. 어느날 그 부부는 하루종일 전도하러 나가서 밤이 늦어서야 돌아왔는데, 성령에 열중한 나머지 딴 사람같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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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날밤은 월식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그 부부는 하늘에서 빛이 비쳤다고 큰 소리를 지르며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월식이라 설명을 해서 간신히 진정하게 한일도 있었지만 또 어느날오후 지승도, 옥상현*, 이기환 등이 영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너무나도 신비스러움에 홀려서 실신한 일도 있었다.

몇일후에 문선생 이 나를 불렀다.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서든지 경제적기반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어떠한 사업을 하면 좋을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요. 무슨 좋은 사업이 없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던 때에 알고 지내던 김동기라는 사람을 만나서 의논하였다.
그foT더니 그는 "친구와 공동으로 전매청에 새끼를 납품하는 계약을 체결 하였으나 자금이 딸려서 계약량의 남어지를 납품하지 못하게 되였다고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돈을 받지 못하게 되는데‥‥라고 말하면서 나머지의 납품을 나에게 맡겨도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반가워서 이 이야기를 문선생에게 전했다.

문선생은 곧 부인 식구들이 헌납한 귀금속 따위를 처분해서 37,000원이란 자금을 마련되었다. 그 돈으로 새끼를 생산하고 있는 삼천포의 흥해로 가서 새끼를 사다가 부산전매청의 창고에 납품하고 납품서를 받는것이 나의 일과로 되어 농촌에 몇일씩 묵으면서 "새끼"를 사
모아 가지고 화물차에 실어 운반하고, 또 삼천포에서 배편으로 운반하기도 하였다 6월 20일경에 일을 시작해서 새끼를 생산하는 농가를 찾아 다니며 계약잔량을 거의 다 채워가고 있었다.


최선칠(문교주의 본처) 부인의 큰난동


그러던 어느날, 삼천포로 이봉운 장로가 별안간 예고없이 찾아 왔다. 이장로는 수정동의 교회에 큰 일이 벌어지고 있오이다.최선길씨가 문선명선생이 부인 식구들과 복귀의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난동을 벌려 식구들을 전부 내쫓아 버렸다.
그리고 수정동의 교회를 최씨가 가재도구채 팔아 치워서, 교회가 없어져 집회도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되도록 빨리 돌아가십시다.
그래서 나는 급히 각지를 돌며 새끼 계약잔량을 조달해서 전매청에 완납하는 절차를 취했다. 계약조건과 새끼의 매입가격과 경비를 계산해 보니까 30,000원이나 이익이 남은 것을 알았다.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 오니까 문선생은 최선길에게서 도망치듯 주된 식구들을 데리
고 서울로 가고(9월17일), 원필도 영도(부산교외 마을, 열심인 식구의 집에 있고, 전도의 거점이 되어 있었다)로 도망갔다라고 한다.

이봉운장노는 대지공원에 판자집을 한채 사서 그리로 이사해서 거기서 임시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수정동 교회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들어 와서 살고 있었다. 최선길의 대 난동으로 부산의 수정동 교회는 어처구니 없이 날라가 버린 것이다. 나는 하는 수없이 여관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서울로 갔다.
서울에 있는 식구들에게 물어서, 청진동에 있는 문선생을 심방 하였더니 반가이 맞아 주었다. 불문곡직 하고 나는 그동안 새끼 납품결과를 보고하고 내일 부산으로 가서 납품서를 받아오면, 전매청에서 돈을 받을 수 있게 되고,그 이익은 30,000만원 정도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때 청진동에 문선생과 함께 있던 사람은 옥상현*, 신정순*, 양윤신*, 오명춘*, 이순철*.이 성화* 등 7-8인인데 여자 식구들 뿐이 었다. 나는 그다음날 기차를 타고 부산의 전매청지점에서 납품서를 받아 들고, 또 기차를 타고 되짚어 서울로 돌아왔다.

문선생에게는 낮 12시에 도착한다고 전보를 처 놓았으므로 그길로 바로 청진동 집으로 직행하니까 문선생도 여자식구들도 어디론가 가고 없어서 행방을 알수가 없었다. 그대신 최선길이 혼자 지켜 앉았고 최부인은 가재도구 같은것을 전부 처분하기 위해서 짐을 싸기도 하였다.

문선생 앞으로 보낸 나의 전보를 보고 나라면 문선생의 거처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재도구 중에는 문선생의 성경과 찬송가, 그리고 놀라운것은 원필이 정서한 원리원본까지 들어 있지 않은가. 나는 필사적으로 최부인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찾으면 선생 계신 곳을 알수 있을 터이고 알게되면 반드시 연결 할것이니 성경과 원리원본 만은 나에게 돌려두세요. 최 부인이 나에게그 서 류들을 건네 주었음으로 가지고 돌아 갈수가 있었다. 만약 그때 원리원본을 되돌려 받지 못했더라면 나중에 원리해설을 정리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후 옥상현*, 신정순등과 만났으나 그녀들도 문선생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녀들이 내가 서울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물어 보게 되면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문선명의 복귀 의식이란 미명을 빌어 눈에 넘치는 난맥상을 이룬 성교로 화가 치민 최 선길 부인은 수정동 교회에서 대난동을 피워서 여자 식구들을 두들겨 내 쫓았다. 겁을 먹은 문선명은 여자들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해서 청진동에 있는 으슥한 집을 빌어서 여인들과 살았다.

그러나 그것도 겨우 1주일만에 최부인에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내가 부산의 전매청지점에서 돌아오기 직전 문선명은 혼비 백산할 지경이 되어 여자들을 사방으로 분사시키고 목숨보다는 귀중하게 여기는 원리원본의 초고도 그대로 놓아둔채, 최 부인에게서 도망쳐 버린것이다. 여자식구들에게 포위되어 산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소란한 "여국나라"를 의미 한다.
왜냐하면 문선명을 둘러싼 여자 식구들은 복귀원리에 따라 몸을 내놓으면 소생, 장성, 완성, 복귀에 미달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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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문선명 선생으로 우러러 그 원리를 맹신하고 있던 나는, 때로는 복귀의 실제현장인 성교를 목격하기도 하고, 실제 의식에 걸맞지 않는 여자식구들의 광기나 교성을 직접 보았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메시아로서의 임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한편 아무리 생각해도 모른것은 무엇때문에 수차에 걸쳐 꼬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최부인에게서 도망을  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메시아라면 처 앞에서라도 당당하게 하면 좋을텐데, 처 한사람 전도를 못하고서 어떻게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새삼 솟아 난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렇게도 귀중한 전도에는 없어서는 아니 되는 원리원본을 내 팽개 치고 줄행랑을 처버린 문선명에게 언행 불일치의 의심을 품게 된것도 사실이 었다.


청진동에서 도망친 문선명은 또 다른 곳에서 여자들과 함께 지냈는데, 그것이 또 엉뚱한 사건으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경찰서에서 전기고문


그날은 청계천에 있는 여관에서 일박하기로 하였다. 마침 잠이 들 무렵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까 "이방에 박정화라고 하는 자가 묵고 있는가"고 말한다.

"내가 박정화요" 말하자 종로경찰서의 형사라고 말하면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며 묻고 싶은것이 있으니 경찰서까지 같이 갑시다라고 말한다. 갑작 스런 일이라서 영문을 몰랐지만 따라 갈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당신은 모든것을 다알고 있을 것이다.

문선명은 지금 어디 있는지 바른대로 대라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므로 "모른다"고 할수 밖에 없었다. 이쪽 저쪽에서 질문이 있었으나 "정 말 모른다"고 대답하였더니  그 형사는 "그러면 알도록 해주지"라고 하더니 밧데리를 가져왔다. 그리고 밧데리에 연결되어 있는 두 줄의 전기선을 나의 양손 엄지 손가락에 붙잡아 매고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몸 전체에 이상한 고통이 흐르더니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이래도 모른다고 할테냐!고 하면서 점점 더 세게 돌렸다. 온몸이 찌릿 찌릿 경련을 이르켜 내 몸이 내몸이 아닌것 갔았다. 손잡이를 돌리다가는 그치고, 그치다가는 돌리면서 욕설을 퍼 웃기도 하고 때로는 간사한 목소리로 말 하기도 하는등 거의 3시간 정도나 짓궂게 계속 당했다 나는 "죽일려거든 죽여라 모르는 것은 모를 뿐이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랬니 옆방에서 계급이 높은듯한 이가 나와서 "말씨를 듣자니까 평양사람 같은데, 그런가?고 묻길래 "그렇다"고 대답 하였다.
그 사람은 나도 평양 출신이요. 동난이 끝난 후에 남쪽으로 와서 경찰서에 근무하고 있오, 그리고 고문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심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풀어주라고 해서 고문을 중시시켰다. 아침까지 심문을 받고 아침 아흡시가 지 나서 야 겨우 석방 되었다.


하늘의 뜻에 관한 시험


경찰서에서 나온 나는 씁쓸한 조반을 먹은후에 엄덕문을 찾아서 YMCA 옆에 있는 3층집으로 갔다. 그때 거기에 건축설계 사무소를 열고 있었다. 내가 서울로 온것을 그는 무척 반가워 하며 문선생 있는 곳을 지도를 그려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전매청 볼일을 끝마치고 나는 그날 저및무렵 문선생을 만나러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옥상현 등 부인 식구들에게 붙들려서 나와 같이 문선생한테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경찰에서도 찾고 있고 해서 지금은 도저히 무리라고 말해서 어떻게든지 설득하려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마침 그때 소낙비가 퍼못기 시작했다. 그여들이 우왕 좌왕하고 있는 틈에 나는 버스에 뛰어 오르고 말았다. 안양에서 내려서 1키로쯤 가면 길가쪽으로 남향 받이의 작은 집 한채가 있다고 들었으므로 곧바로 찾을수가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니까 문선생과 이순철이 같이 있다가 무척 반가히 맞이해 주었다. 우선 나는 전매청 관계의 업무의 경과와 어제 있었던 경찰의 사건을 간단히 보고 하였다.


그후에 문선생에게 이순철이 만든 하늘의 계시에 관한 시험을 받도록 말하였다. 문제를 보고 답을 썼더니 문선생이 "좋아 합격이다"라고 말하고 어제 엄덕문도 시험을 받았다 그도 합격하였으므로,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장남이고,정화는 다음에 합격 하였으니까 차남이다 라고 말했다. 그때 이철순은 영계의 계시라고 이불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방 가득히 솜이 널려 있었고 그것을 자기전에 치우는 것이 큰일이었다 (후술)


노한 이순철*의 남편

 

나는 이틀동안 그곳에서 지내고 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이순철*의 남편이 눈에 쌍불을 켜고 문선생을 찾으려고 사방 여러곳에 수배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금 이대로 지금 집에 있는것은 위험해서 그 다음날 나와 함께 문선생과 이순철*세사람이 부산으로 가게 되었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었으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산까지의 직행표를 살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안양에서 수원까지 가서 일박, 그후 대전, 대구, 마산에서 각각일박, 5일만에 겨우 부산에 도착하였다. 우선 세사람이서 서면에 있는 거제여관에 한동안 유숙하기도 하였다.

그 이틀후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도록 고생하며 부산까지 왔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김안미라고 하는 여자 식구가 여관까지 찾아 왔다. 그녀는 6마리아(문선명이 복귀한 유부녀중-후술)의 한사람이었는데, -문선생이 뒤에 6마리아가 된 이순철만을 데리고, 부산쪽으로 내 뺀 것을 괘심하게 생각하고 여기까지 이를 잡듯 찾아 왔다고 하는 것이다. 김안미 와 이순철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자기들의 영적인 지위다툼으
로 여자끼리의 싸움이 더욱 귀찮게 되었다. 알기쉬운 이야기로 질투의 불꽃이었다.

나는 김안미 를 불러내서 문선생의 상황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지금 매우 복잡한 상태에 놓여 있어서 틈만 생기면 사단이 언제라도 참소 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하시려고 하는 계획의 장애가 된다. 선생은 한동안 이대로 부산에 계실 모양이니까 우선 조웅히 하는것이 좋겠다고 간청하였더니 김안미는 노한 채로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들은 부산에서 5일동안 유숙하고 또 서울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오명춘*이 손을 써서 친척집을 빌어서 문선생과 신당동 중택에 있는 어느집에 살게 되었다. 이순철*은 자기집에 돌아갔으나 노한 남편에게 두들겨 맞아서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고 백인제병원에 입원하였다.

문선생과 나와 오명춘*과 함께 병원으로 문병을 갔으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예감 들어서 다시 오기로하고 바로 돌아섰다. 나중에 오명춘써 말에 의하면 문선생과내가 병원을 나온 즉시, 이순철의 남편이 들어가 "지금 나간 남자들은 문션명과 박정화가 아닌가"고 다그치는 바람에 어물어물 둘러대느라고 혼이 났다고 한다.

만약 그때, 남편이 문선생과 마주쳤다고 하면 큰 사건이 일어날것은 틀림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선생을 둘러 싼 여자 문제가 여기 저기 일어나 그야말로 나도 손들고 말 지경  이었다.

복귀원리를 구실로 삼아 유부녀던, 처녀던, 눈에 나타나는 여인들은 조만간에 문선생과 성교하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남편되는 자나 부모들은 노할 것이다. 그중에는 어머니와 두딸까지 세사람과 관계를 한일도 있다.

대사건으로 되지 않았던 것은, 이것도 하나님의 가호 라고나 할까?

이동안에 청진동 집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이렇다. 부산에 있던 문선명이 서울로 도망처온
뒤에 본처인 최선길은 남편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서 청진동으로 찾아왔다.부산에서는 최선길이 부인 식구들을 모두 내쫓고 문선명이 자유롭게 나갈 수 없도록 해서 화장실에 가는것 까지도 엄하게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마침 흥남 감옥에 있을 때의 제자이던 김원덕이 문선명을 찾아왔다. 이 모양을 보고  그는 성진의 어머니이며 본처인 최선길에게 이러한 것을 해서는 안된다고 화를 내고 문선명을 끄집어 냈던 모양이다. 최선길이 김원덕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은 것은 그 당시 치안국에 근무하고 있던 현직 경찰관이었던 김원덕이 문선명이 무슨 일이 있어서 연행되게 되면 바로 석방해 주던 전예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믿지 않는 남편을 서울까지 쫓아 온 최부인은 청진동 집에 내가 와있으면 문선명의 거처를 알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라갈 작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청진동 집에서 도망친 직후 문선명은 이순철과 서울역 앞에있는 여관으로 가서 영적인 의식이란 명목으로 처녀인 이성화와 복귀의식을 행하였다.
요컨대 세사람은 거기서 영적인 의식이 아닌 육체적인 의식 즉 성교를 하였을 뿐인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복귀의식은 그 옆에서 다른 식구가 증인으로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 날은 이순철이 증인으로서 협력하였다. 이성화는 처녀였으므로 절차는 "어린양 잔치 (묵시 록 21장 9절)"를 올려서 말하자면 정식으로 결흔해서 문선명의 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순철은 이성화에게 이때 "미래의 어머니께"라고 말하며 값비싼 금반지까지 선물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당사자인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들은 것이니까 틀림 없는 일이다.

 

 

부산 영도(謄島) 집회

 


여자대학생 린영희의 비극

 

그 무렵 나는 대구를 거점으로해서 문선생과 함께 이곳 저곳 식구들에게 원리강의를 하기  위해서 각지로 나돌아 다니고 있었다. 또 문선생의 지시로 부산이나 서울에 가서 식구들에게 문선생 이야기를 전하기로 하였다. 그 당시는 아직 기차여행이 대단히 힘든 시대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꼭 12시간이 걸렀다. 추풍령에서 부터 대구까지는 군사상 차내의 등불을 모두 꺼 버렷으므로 캄캄하였다.

한밤중이 되면 난방까지도 꺼 버렸고, 창유리도 거의 깨져 있어서 겨울에는 대단히 추웠다. 유리가 없는 창에서는 연료로 쓰는 석탄의 연기나 냄새가 스며들어 터널에 들어갔을 때에는 질식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문선생과 함께 있던 어느날, 부산의 이봉운 장로에게서 "부산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자 방도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부산까지 와 주십시오"라고는 하지만 부산까지의 여비가 없어서 난처하게 있는 터에 마침 오명춘 집사가 왔다. 그녀가 여비를 마련해 주어서 그날밤 문선생과 함께 다음날 아침 8시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봉운장로를 위시해서 10여인의 식구들이 마중을 나왔다. 문선생이 부산까지 왔으므로 모두 기뻐하며 인사를 한후, 택시로 시내의 영도로 갔다. 이 날은 1953년 12월 24일이었다.

안내된 곳은 허술한 집이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넓직한 방이었고 잘 정리되어 있어서 식구들의 성의가 나타나 있었다. 이집 주인은 신성묵이란 사람인데 유신희와 부부였다.

아침을  마치고 문선생은 여느때와 같이 원리강의를 시작하였다. 유효원이란 사람은 결핵성 고관절 유착으로 굳어 버려 앉아 있을수가 없어서 누워서 강의를 듣고있었다. 이 사람은 무척 과민한 성격인듯 누구 옆에서 기침을 하면 표정으로 그것을 제지하기도 하였다.

28인 가량이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방안은 무척 조용해서 엄숙한 분위기였다. 식사 이외에는 휴식시간도 없이 강의는 밤중 한시, 두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듣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는 시종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날 처음으로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은 유효원, 유효영의 형제, 신성묵,유신희 부부, 김관성, 차집사등.

식구들은 신정순, 옥상현, 이기환, 지승도, 양윤신, 오명춘, 이봉운장로, 그리고 가족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 김 영희*라고 하는 여자대학생이 처음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그녀는 교인인 양윤식의 질녀로 연세대학 학생이었다. 성적이 우수해서 장래성이 있는 학생 이었으므로 대학 총장에게도 귀염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언더우드 총장이 귀국할 때 그녀에게 1년분의 학비를 선사해주었다. 그러한 큰돈을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숙모인 양윤신에게 전액을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양윤신은 식구들의 경제사정이 대단히 말이 아니었으므로 교회를 위해서 문선생께 몽땅 바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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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이 시작되고 돈을 전부 써 버린것을 안 김영희는 노했다. 그래서 숙모가 다니는 교회가 어떠한 교회이고 무엇을 가르치며 선생이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고나서 항의하려고, 아침부터 밤까지 꼼짝을 하지 많고 그녀는 문선생의 강의 를 듣고 있었다.


밤중에 폐회가 되어 참가자의 태반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집 단칸 방에서 문선생과 남자 두사람, 옥상현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김영희의 여자 5인이 함께 자게 되었다.
이것이 부산 영도 집회의 첫날밤이었다.
실은 여기서 처음으로 밝히는 바이지만 김영희는 이날밤 문선명과 성교를 한 것이다.
같은 방의 맨 아래목에 문선명, 그다음에 나, 그리고 여섯사람의 여인들이 이름은 든 순으로 누웠다.  나는 고단했으나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는데 묘한 기척에 눈이 띄었다. 내 옆에 누워있던 문선명의 자리에서 비명소리도 허덕임 소리와도 같은  여자의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그것도 반대편 끝쪽에 누었던 김영희의 소리였다. 문선명의 성교를 여러차례 목격해온 나지만 이것은 정말로 놀랐다.
복귀원리로 설득을 당한 그녀가 먼저 그했는지 몰래 문선명이 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것이 복귀의 의식 따위가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약한 처지로서의 나로서는 잠자코 옆의 행위에 자는 척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다른 5인의 여자들은 한사람은 마리아이고, 다른 4인도 이미 문선명과 관계가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후술한다.

또 그후 김영희는 문선명의 아이를 임신해서 실로 비참한 인생 첫발을 걷게 되었다.


수사기관에 쫓기는 나날


그 다음날도 똑같이 선생은 강의를 하였고, 유효원은 열심히 메모를 해 가면서 듣고 있었다. 수염을 기르고 있던 김관성은 한방의라고 자기 소개를 한 사람인데 역시 열심히 듣고 있었다. 집주인인 신성묵도 강의에 빨려 들고 있었다.

그의 처 유신희도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후에 서울로 가서 문선생에게 복귀를 받게 되었다. 약 3주간이 지나니까 식구들은 문선생의 강의를 되풀이해서 듣고 있어서 찬송가와 기도를 할때에는 딴 사람 같아서 성령이 충만해서 큰 소리로 울기도 하였다. 이집에서는 사람이 모이면 아침부터 저녘까지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해서 곧 근처 사람들의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고,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수사기관에 조사를 부탁하였다는 소문도 들려 왔다.

뿐만 아니라 또 평양에서의 식구의 가족 중에서 남으로 와서 검사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어서 기회만 있으면 선생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어서 부산영도의 집회를 중지 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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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 무렵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한테 쫓기는듯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나와 문선생은 여기 저기를 돌면서, 고심하고 있는 식구들과 그가족을 격려 하고 있었지만 겨우 방을  얻더라도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문선명이 어디 어디에 있다고 하는 소문이 나서, 수사기관에서 사람이 조사를 받는 상황이 계속되곤 하였다.

이유는 문선생이 이전에 북한에서 사회질서 문란죄로 복역한 사실이 있어서 남쪽으로 가서도 또 고치지 못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것이, 북에 있던 식구의 가족들이 남으로와서 수사기관에 들어간 사람이 보복을 겸해서, 뒤쫓아 다니고  있기 때문 이었다.

식사는 동대문에 있는 이창환의 형이 경영하고 있는 대중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종로에 있는 여관에서 숙박하면서 작업하는 날이 열흘쯤 계속되었다. 우리들은 어떠한 괴로움도 참아 낼수 있었으나,여관주인과 식당주인들은 왜 그런지 우리들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대구에 있는 문선생을 찾아가 사정을 보고 하였더니, 5만원을 내 주면서 부산에서 간 양윤신과 함께 방을 마련해서 유효원과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곧 서울로 돌아와서 성동구 북학동에 방을 빌려 우선 되는대로 본거지로 삼았다.

이곳에 숙식을 같이 하고 있던 식구는 나, 유효원, 유효민 세사람 이었다. 이창환은 날마다  와 있었고,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 옥상현,이기환 등 여자식구들도 매일같이 와서 여러가지 일을 협력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선생이 별안간 대구에서 서울로 왔다.
그런데 바로 그날밤 시경에서 왔다고 하는 6~7인의 남자가 신분증명서를 보이면서 시경까지 같이 가자고 말한다. 거기에 있던 전원이 연행되었는데 특별히 이렇다할 조사도 받은것이 없고, 일반적인 종교문제에 대해서 물었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통행금지 시간이 되여, 그날합은 시경에서 자고 아침에 돌아온 일이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연행사건 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양윤신과 함께 여러가지 가재도구를 사러 갔다. 이렇게 함께 장을 보노라니까 그녀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양여사는 년령이 나보다 훨씬 아래였다. 인생은 길어야 할 터인데도 그녀는 몇해후에 나보다 앞서 죽고 말았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에게도 알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그녀가 우리들의 교회에 들어 와서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복귀 받으려고 그녀는 대단히 노력한 사람이었다.
식구들이 점점 늘어나 이제까지 쓰던 방으로는 식구들 전원이 함께 일하면서 지내기가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같은 북학동에 있는 대문이 셋이 나 있는 큰 집으로 옮겼다.
문선생은 그집의 남쪽에 따로 방을 빌렸다. 식구들이 많이 모여서, 부산에 있던 이수경, 김상철과 이창환도 함께 있었다. 이즈음에 유효원 동생 효영씨가 조기 잡이를 하던 차에 금빛 같은 조기를 한 가마니 갖어와 식구들이 포식한 일도 있다. 또 잊을수 없는 일이 하나가 있다.

어느 정치가가 지능이 좀 떨어지는 딸을 한사람 우리들의 교회로 데려고 왔다. 이 교회에  한동안 맡겨 두면 낳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덟살 된 그 아이는 식사를 하고 있노라면 꼭 똥을 싸기 때문에 모두들 큰 일이었다.
그래도 함께 기도를 받던지 하면 기적이 일어 날지도 모르겠다고 우리들도 생각해서 열심히 참고 견디어 봤다. 그러나 1년이 경과해도 상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서 부모들은 그
아이를 데려가고 말았다.

이 무렵 이수경은 우리들 식구의 생활비 때문에 일하러 나가서 사진에 색을 칠하는 작업을 해서 돈을 벌어 온일도 있다. 이창환은 교회의 전도문을 영문으로 작성해서 세계각국의 유명한 인사들, 특히 유명한 목사등 백여명에게 발송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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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다 동쪽 나라에 재림메시아가 왔다. 숭배하자. 의심스러운 자는 기도를 통해서 들어 봅시다. 그리고 문장 끝머리에 이창환 자신의 사진을 붙여서 발송하였다.
이러한 작업으로 아침부터 저녘까지 분주 하였다. 유효원은 매일 원리해설 집필에 몰두하고 있었고 유효민과 나는 줄곧 원리 원본을 베껴 쓰고 있었다. 유효원이 어느때 「이 원리는 모순이 잔뜩 있어서 잘 모르는 곳이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나에게 말했다. 둘이서 문선명에게 철저히 질문 하였더니 그는 대답을 못하였다.

유효원은 뒷일은 하늘에 맡길수 밖에 없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자기류로 집필하였다. 김상
철은 이무렵 영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하게 되어 여권 수속을 하는 서류를 써 달라고 나에게 부탁 하기에 써준 일이 있다. 김재근(대구할머니)이라고 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대구에서 서울로 와서 한 겨울에도 우물가에 가서 냉수를 퍼끼었는 일을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늦으신 분이라서 병이라도 나면 안된다고 염려 하였지만, 무척 건강해서 열심히 견디고 있었다.
이 무렵 부산에서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하던 송도욱이란 사람이 입교 하였다. 병역을 기피하고 있던 김원필은 영도의 송도욱의 집 이층에 방을 하나 빌려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당시 부산에는 식구들은 그리 많지 않으나 서울에서는 낮에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 이순철, 김인주등의 부인 식구가와 있었지만 임영신이란 미망인이 새로 유효민의 전도로 들어 왔다. 그녀에게는 어린딸이 있었는데 부산의 송도욱의 집에 맡겨서 길러 달라고 하였다. 임영신은 식구들의 식사 준비를 돕고 있었다.

이 당시는 식구들의 생활비가 큰 일이었다. 유효민은 본래 사진업을 해서 솜씨도 좋았으므로 시내나 지방을 돌아 다니면서 각지의 여러 유적지를 사진으로 찍어다가, 그것을 푸로마이드로 만들어서 파는 장사를 생각해 냈다. 우선 닥치는대로 해 보니까 예상외로 잘 팔렸으므로 우리들은 푸로마이드 제작에 온 힘을 쏟게 되었다.

나는 사진에 광택을 내는 일을 담당하여 밤중까지 작업을 하였다. 임명신도 부엌일이 끝나면 바로 사진을 씻는 일에 열중하었다. 식구들이 힘을 합해서 푸르마이드를 대량으로 제작 하였다. 이 일이 적중해서 한꺼번에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 식구들의 생활비를 모두 충당 할수 있게 되었다

1954년 5월3일 성동구 북학동 391에 있었던 교회에서 문선생을 중심한 이창환, 유효원, 김상철, 박정화, 유효민의 다섯 사람이 에워싸고 있었다. 드디어 문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전세계에 원리를 포교하기 위한 일을 개시하는 날이 왔다.

우리들은 어떠한 명칭으로 하면 좋을까 하고 의논 하는데 우선 세계의 기독교를 통일 한다고 하는 목적에 알맞게 "세계기독교통일"이라고 하는 머리글자를 붙이기로 하였다. 그 다음을 "심령협회"로 할것인가 신령협회"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논이 있었지만 나는"신령협회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해서 최종적으로 "신령협회"로 결정 된 것이다

이리하여 원리를 내세워서 전세계의 기독교를 통일하려고 하는 종교단체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 統一神靈協會)"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창립되게 된 것이다. 초대협회장에는 여러가지 의논한 결과 이창환이 취임 하였다 그런데 그는 3개월만에 탈퇴하고 말았다.
(주=현재는 5월1일이 창립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5월3일 이었던 것이다.)

 

이화여자대학 사건무렵

 

교수와 학생들의 대거입교

 

서울의 명문교 이화여자대학의 음악교수 양문영*이 입교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녀는 3일간 文씨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더니 기적이 일어나서 성령이 충만한 그녀는 별안간 지금까지 사단에서 가로막했던 벽을 차고 떠들어 대면서 발로 벽을 걷어 차는등 크게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그 후 신당동의 양문영 여사의 집에서 유효원이 매일같이 원리해설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이화여자대학의 기숙사 사감인 한충화가 입교해 왔다. 또 같은 대학의 영문과 교수 최원복과 김영운, 연세대학의 교수 박상래 ,학생인 유경규, 황환채, 오승택도 입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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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서울로 온 식구중에 유신희라고 하는 여성이 있었다. 저 영도집회때 집을 빌려  준 신성묵의 처이다. 그녀는 어느날밤 교회 옆에 방을 빌려살고 있던 文씨의 방을 찾아가 방을 노크하니까 누구냐고 가만히 묻기에 신희입니다 라고 이름 대자 들어오라고 하여 안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복귀의 실천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때에는 이미 복귀를 받았던 김인주가 복귀에 대한것을 귀뜸 하였다. 김인주에게 권유를 받은 유신희는 용기를 내서 복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후에 유신희는 여러 남성 식구들과 복귀를 하였다. 나도 실은 유신희와 복귀를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바로 뒤에 등장하는 김 덕진과도 복귀를 하고, 나아가 김 덕진은 다른 여성과 복귀 하고 그 여성은 또 . .  별안간 70몇 사람의 바퀴가 되고 말았다. 그후 목사가 된 김덕진은 너무나도 난맥을 이룬 통일교회의 섹스를 스스로 고발하고 책으로 해서 발표하겠다고 선언하여 큰 소동이 일기도 하였었다.
(후술)


김덕진(金德振)이란 사나이

 

그 무렵 나는 매일밤 10시경까지 사진의 광택을 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검은 UN군 코트를 입은 청년이 찾아와서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여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물으니까, 김덕진이라고 하며 북쪽의 숭실전문학교의 문과 출신으로, 간첩죄로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을구형 받었으나 판결은 무기징역으로 복역중에 재심에서 무죄가 되어 남쪽의 동촌육군형무소에서 나온 길이라고 한다. 그리고 형무소 안에서 만난 이석빈이란 사람이 문선생에게 전해달라며 "아버님께"라고 쓴 편지 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를 문선생이 있는 양문영의 자택으로 안내 하였다. 그에게는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작곡과 작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입교하자 마자 곧 성가(찬송가)의 작곡과 작사를 하기도 해서 문선생도 그 음악적 재능을 칭찬하고, 식구들 중에서 제1번으로 문선생에게서 양복을 얻어 입는 영광을 맞았다.
식구들도 늘었다. 김찬균, 정린정, 안창성, 강정원, 차만춘, 이소담, 유광렬, 이진태, 박승규, 이월성, 김원민, 황은자, 지생연, 유동회 등이다.

그 다음에 들어온 이는 지원대, 안정국, 김순화, 신미식,정대화, 김주화, 이관선, 이기석, 박봉애, 남궁철, 이영일, 최정순,이인복, 김화영, 김정은, 사길자, 박영숙, 서명진, 이정호, 김영휘 등이다.

교수에 이어서 이화여자대학 학생도 많이 입교 하고 있었으나, 이단적인 신앙을 이유로 14인이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전에 교수들은 사표를 내고 퇴직하고 있었다) 퇴학이 된 학생은 신미식,사길자, 김정은, 서명진, 박승규, 정대화, 박영숙, 박승희, 이계순
정원, 최순화, 김숙자 들이다.


대구에서 또 전기 고문

 

본부교회는 다음해인 1955년 1월 북학동에서 같은 성동구의 흥인동에 있는 새 집으로 이사 하였고, 또 다시 3개월 후인 4월 27일 중구의 장충동으로 옮겼다.
이전하고 얼마 안되는 5월 13일 교회로 치안국의 형사 2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교회에 스며들어 우리들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고 경찰의 수사관도 버티고 있었다. 경찰의 수사에는  꽤 익숙해 있는 편이었지만 이번만은 좀 다르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수사관이 투입되어 있었다.

그러한 긴박감을 알지 못하고 지방에서 온 나이든 여자 식구들은 기가나서 떠들거나 날뛰고 있어 상황을 이야기하고 주의를 한일도 있었다.

대구에 있는 문선생 한테로 가서 이 상황을 보고 하고 금후의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서 나는 서울역으로 나아갔다. 그때 역에는 김영희*가 와 있었고 황환채등이 전송하러 나와 있었다. 나는 김영희가 부산에 가는 목적을 알고 있었으므로 대구까지 함께 가기로 하였다.

앞에서도 기술 하였지만 김영희는 연세대학의 학생시절에 부산의 영도에서 문선명에게 정조를 때앗긴 여성이다. 자세한것은 후술 하겠지만 이때 그녀의 배는 출산 직전이어서 제법 눈에 띄이고 있었다.
연세대 재학중인 오승택도 함께 일본에서 출산을 돕기 위해 부산에서 밀항하려는 참이었다. 그리고 대단한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대구에 도착해서 우선 이요한 목사의 집을 찾았더니 방은 텅비어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서둘러 나왔으나 어디서 지켜보고 있던 형사가 나와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면서 이집에는 무슨 목적으로 찾아 왔느냐. 이목사와는 어떠한 관계이냐. 문선명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느냐 등을 물어 왔다. 신분증명서를 제시 하라고 해서 보여 주었더니 당신이 박정화 인가라고 말하였다.

대구경찰서까지 연행되어 밤새도록 조사를 받았다 그 내용은 나라면 문선생이 있는 거처를 알터이니까 대라고 하는 것이였다. 나는 정말 몰랐으므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라고 말했다. 만약 알았다 하더라도 나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밤 10시경에 연행되어서 아침 10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그때도 밧데리를 양쪽 엄지손가락에 연결하는 전기고문을 받았다 서을에서 한차례, 지금이 두번째였다.
그후 경찰서에서 나와서 들은 이야기지만, 내 바로 뒤에 김안실의 형이 경찰이 있는것을 모르고 이목사를 찾아 왔다가 내가 붙잡혀 간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그때 문선생은 이목사와 대구의 식구들을 데리고 용문산에 가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서 피할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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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로마이드 제작판매

 

이 무렵 유효민의 제안으로 전국울 순회 하면서 명소의 경치나 유적등을 촬영한 사진과 서울의 거리나 배우들을 찍은 사진을 푸로마이드로 해서 판매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말하였다.
사진촬영과 현상기술, 재료구입 등은 본업인 유효민이 담당하고, 암실에서의 작업을 김원필, 유효영, 이수경이 도왔다. 흥인동의 본부교회는 단독 주택 이었으므로 방이 다섯이나  있고, 응접실과 부엌을 겸한 방까지 있었다. 푸로마이드의 제작과 원리강의를 하는 장소로서는 대단히 편리한 곳이었다. 정원에는 나무도 있고 대단히 좋은 집이었다.


이집으로 이사와서 부터 입교하는 사람도 불어나서 통일교회는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그때에 신문이나 소문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통일교회에 한번 들어가면 어찌된 방법인지는 몰라도 2~3 일에 세뇌되어 가족을 버리고 입교하게 된다. 소문에는 교회의 내막을 조사하려고 작은 방에 빨간 불이 켜져 있어서 밤새도록 사람이 드나 드는 것을 보고  저 방이 사람을 홀리게 해서 유혹하는 장소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그 방은 사진제작 하는 암실이었다.


푸로마이드 제작은 밤중에 사진에 광택을 내는 작업을 해서 날이 밝기전 완성해 놓았다. 새벽녘이 되어 통행금지가 해제 되는 것을 기다려서 제일착으로 거리에서 담배 라이타 돌을  행상하는 전쟁 고아들이 와 도매 떼기로 사기 때문에 푸로마이드는 곧 모두 팔려 나가고 말았다.
이렇게 푸로마이드가 잘 팔려서 제법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교회에서는 매일 70-80명 가량의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어서 그 때문에 매일 같이 쌀 한가마 정도의 밥을 해댔다. 당시의 부인 식구들에게는 엄청난 고생이었을 것이고, 식사비도 꽤 많이 들고 있었다.

그러한 경제적인 지원은 전부 이 푸로마이드 판매로 충당하고 있었다. 서울 거리에는 한동안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피난민의 노천상들이 그때까지는 널판지 위에 미국담배를 올려 놓고 팔고 있었는데, 그것 대신에 몇 백 종류나 되는 푸로마이드 사진을 올려놓고  팔고 있을 즈음 노점 상인들이 거리 구석구석에 늘어나 사진 판매수입에 재미보게 되었다.


어떤 날 아침은 광택작업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나가보니까 남자 세사람이 원리를 들으러 왔다고 하면서 서있었고 맨앞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 바로 김인철이었다.


이 사람과는 내가 북조선의 내무성 제2여단에서 해주 중대장을 하고 있을때 잘 알던 사이였다. 그는 운수 주식회사의 해주지점장으로 근무하면서 해주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다. 내가 그 여관에 약 두달동안 투숙하고 있을때, 두 사람은 술 친구가 된 사이였다.


우연히 이러한 곳에서 만 날줄은 정말로 몰랐다 서로 반가워서 어쩔줄을 몰랐다. 서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바도 있었다. 만약 그가 북조선군의 38선 부근에서 대대장을 근무한 나의 전력을 밀고 한다면, 수사당국은 북의 간첩용의자라고 하는  구실로 나를 구속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페를 끼치게 되고 중대한 영향이  될 것이다.
우선 이일을 먼저 문선생에게 보고 하고, 다음은 그의 행동에 주의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인철은 열심히 교회에 다녀서 중요한 간부가 되였고 나의 과거의 일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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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0년 가량 지난뒤 그를 만날 기회가 있을 때, 당시의 나의 심경을 고백해서 서로
간에 크게 웃은 일이 있었다.


3대째의 비서역 송도욱(宋道旭)

 

부산 영도에서 입교한 송도욱 집사는 살충제 행상 방문 소독을 하던 사람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만주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해온 사람이다. 교육은 대단스레 받은것이  없었으나 짜임새 있는 체격, 대나무를 쪼갠듯한 성격에 행동력이 있고 판단력도 있었다.

문선생의 비서역은 우선 내가 오랫동안 맏았었고, 그 뒤를 유효민이 맡아 주었다. 그리고 3대째가 송도욱이 었다.

그는 송비서에서 송장로로 승격, 동시에 문선생과 함께 보좌 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내가 서진 광산에 있을 때 (후술) 그는 문선생의 심부름 와서 온갖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자랑끼(뽐내고자) 어린 태도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잘난
체 하며 큰 소리를 치고 뽐내는 말을 함부로 해서 나는 정석천 장로 앞에서 송장로에게 충고한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지방을 순회할때 순진하고 얌전한 식구들을 놀래키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허풍을 떨지 못하도록 충고를 하였다.
그때의 일이 흡사 어제일 처럼 생각되는데 지금은 송장로도 정장로도 돌아가셧다. 하늘나라에 오르셔서 지금쯤 어떻게 하고 계실까?당시의 식구 중에서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은 서울의 김영도씨로서 해방후 상해에서 귀국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송기주, 조동석, 김병욱,유효
원, 송도욱, 정석천, 유경규, 신정순 양윤신, 김재근, 라순렬, 이기환의 손으로 그 밖에도 부인 식구들이 몇 사람인가 죽었다.

잠시 숨을 돌리며

 

흥인동 교회에서 푸로마이드 사진 작업을 하고 있을 때이다. 프로마이드 판돈 가운데서 500원 정도를 떼어 가지고 토요일 저녁때가 되면 유효영, 나, 이수경 등과 함께 작업의 피로도  풀겸, 동대문 시장으로 나가서 노천에서 부인들이 다라에 돼지고기나 순대를 파는 것을 사 먹었다.

 맛있는 안주감으로 맛있는 소주를 한잔쯤 곁들인다. 그러면 기운이 나는듯 했다. 일에 몰려 피로해지면 토요일이 되면 돼지고기와 순대로 기운을 차리자고 서로 격려하기도 했었다. 그것도 역시 어느덧 엊그제 일 같이 생각이 난다.
정말로 시간의 흐름이란 흐르는 물과 같이 빠르구나 푸로마이드의 제작에는 무엇보다도 유효민의 두뇌와 기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사진 기술에 무지한 나는 푸로마이드의 제작이나 판매 따위는 아이들의 장난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었는데 막상 시작해 보니까 예상외로 수입이 많았다. 또 대량 생산에 필요한 재료 같은 것을 그때 그때 맞추어서 정확하게 요령 있게 구입하는 유효민의 치밀한 계획성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흥인동 시대의 식구들은 교회의 확장을 도모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열심히 작업하는 것으로서 버티어 갔던 것이다.
또 그후 유효민이 발명해서 특허를 얻은 "산탄 공기총"의 대량 생산에도 성공하였다.

이때 들어온 수입은 단위가 틀릴 정도로 커서 몇 십억 이 나 되었다.

지금은 탈퇴해서 식구는  아니지 만, 유효민은 라순열 (지금은 고인)과 결혼하여 36가정의 일원으로서 축복(결혼)을 받은 사람인데 3남매의 아이들이 있다.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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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 체포 사건의 진상

 

문선명의 체포


이화여자대학의 5인의 교수(양문영*, 한충화, 최원복, 김영운, 이정호), 이화여자대학생 14인 뿐만 아니라 연세대학의 교수 박상래등이 대거 입교하면서 부터, 이화여자대학 측에서는 이 사태에 분개해서 수사 기관에 고소하여 그 진상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앞에도 썼지만 1955년 4월 27일에 본부 교회가 장충동으로 이전한 뒤에 5월 13일 검찰에서 수사원 한사람과 치안국 특수 정보과에서 형사 두사람이 교회에 왔다. 그들은 교회에 스며들어 원리 강의를 듣고 그것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또 출입하는 식구들의 신원을 검문도 하고 일상생활에 관해서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 두달 동안 우리 식구들과 침식을 함께 하면서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경찰 출신의 조동석을 통해서 경찰의 수사 방침을 알아 본 결과 문선생을 비롯하여 몇 사람의 간부가 구속 될 것이 예측되었다.
문선생은 삼각산 밑에 임시로 빌린 집에서 박상래와 같이 숨어살고있었는데, 7월1일 최종 방침을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모이게 했다. 나, 유효원, 유효민, 조동석, 노동휘, 이순철, 오명춘, 김인주,신정순 등이 문선생 있는 곳으로 가서 여러 가지 대책을 상의하였다.
그때 이순철은 선생님을 경찰에 넘길 수는 없습니다. 한동안 일본에 가 계시도록 하면 어떨까요? 하고 주장하였다. 자금도 모두 준비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말이 나와서 좀처럼 방침이 서지 못했다. 결국 이번에는 도망칠 수도 없을 것 같으니 우리들이 경찰로 가는 편이 금후를 위해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서 그렇게 결정하였다.
그 무렵 입이 가벼워서 문제가 되었던 김덕진은 이순철, 김인주 두사람이 감시하기로 하고 중구 산림동에 집 한채를 빌려서 살도록 하였다. 나도 그 방에서 3일간 감시역으로서 함께 있었다.
1955년 7월 4일 드디어 문선생이 구속되었다.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두달 이상의 내탐과 수사가 있었다. 치안국 특수 정보과의 경감이담당관이었는데, 우선 당시의 협회장 유효원이 조사를 받았다.

협회장에 대해서는 원리의 내용에 관한 조사가 있었다. 원리의 어떠한 부분이 대학교수나 대학생들에게 학교를 떠나게 하여 통일 교회에 입회하게 하였는가?통일 교회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신앙하고 있는가?
등에 관해서 하루종일 조사를 받았다.
다음에는 내가 조사 받았다. 문선명과의 관계는 언제부터인가?흥남감옥에서 함께 있었을 때의 상황은?등등을 물었으므로 앞에 쓴 바와같이 (제1장) 요약해서 말했다. 전에는 문용명 이었었는데 왜 부산으로 와서부터 문선명으로 개명하였는가?를 물었으나 나로서는 모른다고 대답해 두었다.

우리들이 어떤 죄가 성립하는가를 수사당국이 검토하고 있을 무렵 , 한가지 문제가 떠 올라왔다.
북에서 온 사람들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시민증이 발급되지 못하는 것인데 어째서 문선명은 가지고 있는 것인가? 나이도 속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 조사 때에는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인데, 그후 문선생이 자기의 증명서의 작성 경위에 의해서 추궁되자 매우 곤경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날 나는 치안국으로 출두해서 북학동 교회 시절, 동회 사무장에게 부탁해서 신청 서류를 준비하고, 내가 선생의 시민증을 만들어 냈다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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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됫돈을 주어서 매수해 가지고 "위조한 서류"로 발행된 것이다. 내 시민증도 그때 만들었다. 나이를 속였다는 것은 병역기피 때문이었다. 뿐만아니라 거기서 많은 신자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드는 비용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고 질문을 받았다.
·프로마이드"를 제작 · 판매해서 그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 다음에는 경제담당은 누구이며 조직은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 고 물었다.
경제의 담당자는 나 박정화이고, 선생의 지시에 따라 모든것을 처리해 왔다. 푸로마이드에 관해서는 사진관을 했던 유효민이 재료의 구입이나 제작을 위해서 전력을 다 하였고, 요효영, 김원필, 이수경, 박정화등이 도와 주워서 아침까지 완성해 놓으면 새벽녘에 소매인들이 와서 모두 도매로 떼어 갔다. 그 돈을 생활비로 쓸수가 있었다.

그후 드디어 간통문제(혼음관계)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신자인 부인네들이 박정화는 대사단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 고 물었을 때에는 정말 난처하였다. 내가 잠자코 있으려니까 담당관이 큰소리로 역정을 내면서 당신은 문선명과 오랫동안 같이 있었으니까 그가 하는 행위를 다 보았을 것이다.
그것을 모두 말하시오. 문선명은 재림 메시아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것처럼 그도 죄값으로 죽는다고 하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정말인가 대답하시오 하며 책상을 치며 윽박질렀다.
나는 내가 대사단이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들은바가 없다. 식구들의 부인네들이 어째서 그러한 말을 했는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고 대답했다. 그했더니 담당관은 대구에서 온 신자의 김채근 할머니가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을 자기들의 조사관이 듣고 왔다 당신이 모를이가 없다 고 말했다.

이 문제는 그 다음날 대구 할머니가 하나넘의 계시를 받았기 때플에 그대로 말한것 뿐이다라고 하는 것을 자진해서 치안국에 출두하여 담당관에게 설명하였다.


이무렵 박정화는 대사단이다 라는 소리가 일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문선명의 일을 속속드리 알고도 남음이 있는 내가, 만약 수사당국에 말한다면 문선명은 절대로 온전하게 있을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재림 메시아인 문선생"은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며, 그래서 그 열쇠를 쥐고 있는 박정화는 사단이라고 순진한 할머니들의 발상이었다.

그만큼 문선명의 구속은 식구들에게는 위기감을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 7장의 유효민의 항목 참조)
그 참뜻을 알았다면 담당관은 더욱 철저하게 집중적으로 나에게 불도록(사실을) 하였을 것이다.


조사의 촛점은 혼음관계


혼음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엄하게 집중적인 조사가 계속되었다.

담당관은 점점 깊은 곳을  찾아 내게 되어, 당신들의 원리에 따르면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성교를 하고 해와는 또 다시 아담과 성교를 함으로서 원죄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원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죄없는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 이세상에 나타나서 그사람에 의한 성교가 행해지면 그 죄가 깨끗해진다. 요컨데 복귀 한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정말인가?

그 원리에 따라서 문선명은 여자들에게 자기가 재림 메시아니까, 자기와 섹스를 함으로서 복귀된 인간이 된다고 말하여 많은 여성 특히 유부녀들과 섹스를 하고 있는것 같다.

당신은 그것을 목격한 일이 있는가"고 추궁당했다. 물른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원리문제에 관해서는 협회장의 유효원이 담당하고 있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그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경제부문을 담당하고 있어서 그러한 일은 생각해 본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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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생을 감옥에 있을 무렵부터 믿고 따랐을 뿐이다. 많은 여성 특히 유부녀와 섹스를 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본일도 들은 일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랬더니 담당관은, 당신들의교회에는 두갈래 의견이 있는것 같다.

하나는 원리를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들, 문선명과의 섹스로 피를 바꿔 넣음으로 해서 진정한 복귀가 되어 죄와는 관계가 없는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난다. 이와같은 부부에게서 태어난 자손들이 이세상을 지배 할 때에만, 완전복귀된 에덴의 동산과 같이 죄없는 세상이 된다고 하는 것을 믿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문선명도 우리들과 같은 인간으로서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문경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째서 그가 죄없는 원죄와 관계가 없는 재림메시아가 되어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할 수 있어서 복귀 시킬 수가 있는가 라고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먼 문선명도 결국 원죄를 이어받은 타락한 인간이지, 하나님은아니며, 복귀(섹스)로 사람을 구제한다고 하는 따위의 일은 할 수 없다 고 하는 의견인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섹스로 복귀가 된다" 않된다 하는 이야기는 누군가 꾸며내서 퍼뜨린 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없다.
문선생은 북한에 있을때에 대관절 무엇을 했는가, 또 남쪽으로 피난해 와서 부산이나, 대구에서도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은 일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일이었던가 알고 있는가?

문선명은 북쪽에 계실때 기독교의 성경원리를 연구하고 있었고, 새로운 진리를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기성교회의 신자들이 많이 몰려왔다.

그 신자들의 가족이 남쪽으로 피난와서 문선생이 부산, 대구등지에서 성경 원리의 이야기를 전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수사기관에 통고해서 그 때문에 다소의 문제가 생긴것 같다.
그렇다면 문선명에게는 처자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거요.

부인은 최 선길과 장남인 성진군이 있오, 극히 최근까지 부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서울에 와 있을거요. 그 부인이 문선명이 여러 여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산에서도 그랬지만, 또 서울에 와서 집안살림을 모두 때리치워 버리고 여인들이 오는 것을 방해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가?

이것은 혼음관계의 증거가 될만한것 아닌가?

부인이 부산에서 서울로와 그러한 짓을 한 것은 사실 이지만 단지 신앙의 문제로 일어난 것이지 절대로 섹스관계라고 하는 것은 있을수 없다. 그러한 사실은 없다.


간부 5인을 기소

 

나의 다음으로 남자 식구로서 유효민과 유효영이 조사를 받았다. 김원필이 그 다음에 조사를 받았는데 그는 지금까지 병역을 기피하고 있어서 그것이 문제가 됐다.

그리고 부인 식구들이 조사가 시작되었다. 옥상현이 맨 먼저 조사를 받았다. 여성의 조사는 낮에만 하였고, 하루에 한사람씩 조사해 갔다.
신정순*, 오영춘*, 양윤신등이 차례로 조사를 받았다 그내용은 모두혼음관계 (섹스관계)의 사실 수사였다.

5일에는 김원필이 구속되고 6일에는 유효민 유효영이 13일에는 유효원이 그리고 18일에는 여자인 이성화가 구속되었다.

결국 문선생을 포함해서 다섯분이 구속된 셈 이다.
그 당시 교회의 섭외담당은 노정우, 조동석 두사람이 담당하고 있었다. 조동석이 치안국에 나아가 박 정화선생이 구속되면 몇십명이나 되는 식구들의 생활에 영향이 있으니까 우선 보류해 주었으면 한다.

검찰에서 출두명령이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출두시킬 터이니라고 약속한 덕에 나는 구속되지 않았다.
이때 문선생은 중부경찰서의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중부 경찰서에는 김덕진의 처남 김선환이 경찰관으로 있어서 비교적 간단하게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이 성화*는 아직 젊었기 때문에 담당관의 혼음관계 조사에서 유도심문에 걸려 구속되게 되었으나, 부친이 끈질긴 교섭으로 기소는 되지 않고 일주일 후에는 석방 되었다.

1955년 7월 29일 남자 5인은 전원 병역기피만으로 기소되었다.
검찰에서 출두명령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조 동석은 나에게로 와서 치안국에는 미국에서거짓말 탐지기가 도입되어 있어서 혹시 박선생이 치안국에 또 끌려가서 조사를 받게 된다면 이제까지 숨겨져 있던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이 폭로된다면 큰일이니까 재판이 끝날때까지 어디던지 숨어 있는것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선생님도 꼭 찬성하실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빨리 숨을것을 제안 하였다.
나는 생각끝에 그 제안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수사의 손길에서 도피


그리고 문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장충동교회의 문선생의 책상 서랍속에 5만원짜리 수표가 있는데 여차할 때에는 쓰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마산으로 가서 마산 국립결핵요양원에 있는 양윤신을 찾아 갔다.
마산요양원에는 그 당시 양윤신이 간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약 보름동안 거기서 식객 노릇을 했다.
내가 마산에 있을때, 별안간 이원주라고 하는 사람이 그의 동생인 이덕순, 부산에서 온 신성묵과 박봉식, 거기에다가 양윤신의 친딸 김정숙 등과 함께 찾아왔다. 모두 우리들의 교회의 교인들이었다.
우리들은 언제나 모이면 서울서의 문선생과 간부들의 재판에 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열흘 정도 지나고 나서 이원주는 어디론가 가 버렸는데 한참 뒤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이원주가 별안간 자기만이 재림 메시아 이고, 문선명은 재림 메시아가 아니다 라고 말하고 나선것이다.

그의 집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전부 믿었고 낮이나 밤이나 울면서 기도하였다.
이원주는 원리를 악용해서 양여사의 딸 김정숙을 비롯하여 여러명의 여성과 실제로 복귀의 섹스를 하면서 하늘의 원한을 풀어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등 떠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여사는 혼비백산해서 요양원 일도 못하게 되어 그 요양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가 서울로 집을 빌려서 이사 하였으므로 나도 대구로 이동하였다.
대구로 이사는 하였으나 여기에도 교회가 있어서 도망해서 숨어 있는 몸이라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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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친척이 살고 있는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여기서 신문을 읽으면서 서울 지방검찰청의 재판동향을 알수 밖에 없었다.
1955년 9월 20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윤학로 재판장, 강서룡 검사에 의한 일심공판이 열렸고, 같은해 10월 4일에 결심공판에서 문선생은 무죄로 선고되었다.

이 보도를 신문에서 읽고 문선생을 모신 사람으로서 무척 반가웠다. 유효원은 벌금 오천원 유효민, 유효영 두사람은 제2국민병법위반 (병역기피죄)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어 석방되었다. 김원필만이 병역기피죄로 징역 1년의 실형을 받았다.

이때의 조사목적은, 복귀라고 하는 혼음(섹스)의 사실관계의 입증이었다.

그러나 부인 식구들이 자기들의 부끄1러운 이야기를 할 리가 없고, 그 남편들도 또 남자의 체면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문 선명을 고소하지 않았다. 결국 관계자 전원이 위증하였기 때문에 문 선명은 살아난 것이다.

부인 식구들이 문 선명과 섹스관계에 있었던 것은 물론 사실이다.

 

 

제4장 희생당한 여인들

 

 

대공로자 옥 상현의 말로

 


전항까지 나는 당시의 사실들을 일기나 메모를 기초로하여 기술하였다. 경찰둥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서 겨우 살려놓은 몇권의 일기도 이제와서는 귀중한 기록이다.

옥중에서 재림 메시아라고 믿고 "선생"이라고 부르며 맹종해온 나의 어리석은 발자취나 심정을 모두 기술해서 고백했다. 글 속에 등장하는 "문선명 선생"의 행동은 모두 사실이다.

우직한 군인이었던 나는 "선생"과의 약속을 지켜서 북쪽에 부모도 처도 다섯명의 아이들도 남겨두고 남하해서 "선생"의 충실한 분신으로서 노력해 왔다.

그런데 "선생"측에서 어느날 별안간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는 제자를 배신한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나이 였는지도 모른다

마을에서 쪽 떨어진 깊은 산속의 광산 사장이란 직함이 붙여져서 돌아치게 한 나는 몇해 동안을 보수도 없이 일만 하였다. 그리고 나와 교대라도 하는 것처럼 등장해서 통일 교회속에서 차츰 세력을 키워가는 군사정권의 무엇인가 괴상한 냄새를 옆눈질로 보았다.


문선명 선생은 어느새 내마음 속에서 더 이상 목숨을 바쳐서 지킬 가치도 없는 단순한 문선명으로 되버리고 말았다.
전항까지는 그래도 "문씨" 라고 쓸 수가 없어서 "선생"으로 기술하였으나, 이항부터는 모두  "문 용명" , "문 선명"으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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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으로 짠 양말

 

이제와서 생각하면 맨처음에 문 선명과 관련이 있던 여성으로서 인상에 남는것은 옥 상현*이었다. 흥남 감옥중에 있었던 문 용명(당시)에게서 자주 들었다.
그 당시는 평양에서 흥남까지의 차표를 입수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 파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옥 상현은 차표를 사기 위해서 밤새도록 늘어서서 문 용명 을 면회하기 위해서 고생끝에 손에 넣을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문 용명에게 차입하기 위해서 미수가루를 정성껏 만들고, 겨울이 되면 속옷을 털실로 짜고 습을 넣어서 수용소까지 그 먼 길을 면회하러 다녓다. 여름에는 미수가루와 엿을  만들어서 때로는, 엿을 말랑말랑하게 해서 미수가루에 개가지고 가져오기도 하고, 삼베 옷을 만들어 오기도 하였다.

영양을 위해서 간유를 사 먹으라고 돈까지 주고 갔다고 한다. 자기와 피도 섞여있지 않은 사람에게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남득이 되지 않았다. 내·사정과 비교해 본다면 나에게는 어머니도 계시고 처도 있지만, 3개월이나 4개월에 한번 면회오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녀는 자주 면회를 와서 언제나 여러가지 준비물을 가져오는 데는 나는 놀랄수 밖에 없었다.
나와 문 용명은 감옥 안에서 서로 아무일이고 의논하고 무엇이고 숨기는 것이 없었다. 어느날 그가 말했다.

"옥 상현이 자기의 머리카락을 짤라서 털실과 함께 짠 양말을 가져다 주었다. "

옛말에 진정한 은혜를 받은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의 머리카락을 짤라서 그것으로 신을 삼아 은혜에 보답하였다고 했다지만 그러한 사람이 실제로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머리가 숙여질 뿐이었다.

그 여성은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헌신적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문 용명 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가 가져온 미수가루등 을 나누어 주어서 그저 고맙게 먹었을 따름이다.

6 · 25동란이 시작되고 UN군의 북진으로 문용명은 10월 14일(1950) 출옥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죄수이였던 문 정빈과 함께 걸어서 열흘만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후, 나는 처음으로 옥상현의 집에서 그녀와 만났다. 옥상현의 자택은 상당한 부자집 같았고, 큰 마당이 있고, 집이 여러채 틀어서 있었다. 딸인 우정애, 우정순 자매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문씨의 신자였던 김원필은 사단의 집(자기집을 지칭)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며
식객으로 있었다.

옥상현이 치워준 방에서 문용명, 나, 문정빈, 김원필의 네 사람이 숙박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닷새쯤 지낼 무렵, 서울로 피나했던 가족 전원이 돌아왔다.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아침을 마치고 옥 상현과 남편인 우 하섭 장로가 성경을 들고 인사차 왔다.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이니 함께 예배를 올립시다 라고 말했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였으며, 우하섭(禹夏燮) 장로가 성경을 낭독하고 설교하였다.
그는 평양의 장대현 교회의 장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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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우하설 장로의 탄식

 

그날 오후 우장로가 나에게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그의 방으로 갔다. 자기는 평양고무연맹의 이사장인데 당신의 동서에 해당하는 정황고무의 최내봉씨를 잘 알고 있다. 서로 절친한 사이다

얘기거리는 딴것이 아니고, 처와 문 용명의 관계되는 일이었다. 자기는 교회의 장로이고, 처인 옥 상현도 권사로서 교회에 열심히 시무하고 있는데 남쪽에서 왔다고 하는 청년이 이상스런 설교를 하고서 부터, 처가 몇주일간 이 집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원만한 부부로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는데 별안간 처가 자기와 동침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이들은 다 자랐고 기독교의 장로집에서 이러한 이상한 것을 겉으로 들어내 놓고 따질수도 없고해서 처음에는 오랜기간에 걸쳐 설득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아무러 해도 허사였다고 한다.

훌릉했던 처가 틈만나면 돈을 챙겨가지고 문 용명을 위해서 나갔다.
경제적 여유도 있고 해서 조금쯤은 어떠냐 싶어서 처음에는 생각만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빨리 부부가 전과같이 사이좋게 살고 싶어서 그것을 기대하고 열심히 기도하였으나 헛일 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청년을 비롯하여 저의 처까지 전원이 경찰에 구속 되고 말았다.
우장로는 평양 시내에서는 얼굴도 잘 알려져 있다. 체면도 있고 해서 경찰에 가서 구속한  이유를 조사였더니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 김종화라고 하는 유부녀와 그 청년이 "어린양 잔치"라고 하며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어서 이웃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구속되게 된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았다.

우장로는 자기의 얼굴이 있어서 겉으로는 나서지 못하고 조카에게 부탁해 경찰과 연락을  하고 처인 옥 상현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그 청년이 문 용명인데 자기는 그가 감옥에 있으니까 안심하고 있었다. 처가 저렇게 먼 흥남 수용소 까지 면회를 다니고 있어서 처음에는 그만두도록 설득한 일도 있었지만 결국은 듣지 않아서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박형도 예수를 믿는 크리스챤 이니까 문 용명과 같은 사나이와 함께 행동하면 언젠가는 벌을 받은것은 물론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매우 힘들게 될것이오. 문 용명 같은 사람과는 함께 행동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문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재산도

 

문 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채산도 다 바쳐온 옥 상현은 6 · 25동란으로 남쪽으로 피난해 부산에 들어가 개명한 문 선명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면서 굶주렸던 문 선명의 생활기반을 마련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서울 흥인동으로 교회가 이사한 후의 일이다.
푸로마이드 제작에 성공해서 경제적인 상황도 상당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합숙한 교인들은 전원이 홀아비 살림이어서 옥상현이 선두가 되어 세탁을 하고 있었다.
식구들 양복이나 속옷 등을 넣어 두었다 각자가 자기의 것을 자기
의 상자에서 꺼내서 갈아입고 있었는데, 그 상자가 자그만치 24개나 되었다. 그 때의 옥상현의 고생은 필 설로 다할수 없을 것이었다고 생각 된다.
훨씬 뒤의 이야기인데, 문선명과 결별하고나서 나는 부산으로 가서 주택건설 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권 창정이란 박사가 찾아왔다.
자기도 집을 한체사고 싶은데 살수 있느냐고 하여 나는 그의 신청을 받아 들였고, 그는신청금을 내고 돌아갔다. 그후에 옥 상현이 찾아와서 자기의 둘째 아들을 건설현장에 써줄  수 없느냐고 한다. 사원은 필요치 않았지만 옥 상현의 부탁이기도 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부터 그 아들을 고용해서 1년 남짓 함께 일 한일이 있다.

주택건설이 끝날 무렵 목사가 된 우 장로의 말에 의하면 「집사람 옥 상현에게 마음 돌리라고 일렀지만 허사였고 결국 이혼 할수 밖에 없었다. 그후 자기는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어 지금 조그만 교회에 시무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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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와 이흔후 교회 부인 집사와 재혼 했단다. 또 사위인 권창정 박사는 자기 사위인데, 사위가 신청한 주택은 자기의 집인데 좀 보여달라고 하여 완성된 주택을 보여주며 장시간 이야기 했다.

문선명이 처 최선길이 남편이 여자관계로 행패를 부려 그주위에 있기가 거북 스럽게 됐다. 그래서 초창기 문선명의 됫바라지는 옥상현이가 맡아했다.
부산 수정동 교회시절에는 네번씩이나 쫓겨 다니게 되었다. 그것은본처 최선길이 문선명이 있는 곳에 모여드는 부인 식구를 질투하고 집에 가재도구를 팔아 치우고 모여드는 사람들을내 몰기 때문에 하는수 없이 다른데로 뺑소니 이사갈 수 밖에 없었다.
새로 이사 가면 문선명 처가 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끈질기게 추적 하다가 기발한 생각을  하였다. 옥상현 친척집에 가정부에게 돈을 주고 옥상현이 찾아오면 그뒤를 밝게 하여 미행에 성공했었다. 그것이 성공해서 새집을 찾아내 가지고 또 한차례 반복해서 큰 소란을 피웠다.

결국에는 식구들 전원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게 된 것이다.
그때 부인은 두번 다시 큰소란은 떨지 않겠다고 하는 것으로서 석방되었다. 그후로는 교회에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는 약속이었으나, 그 뒤 수정동 집에서도 최선길 부인은  또 같은 짓을 했다. 가재도구는 물론 집까지 팔아 치우고 문 선명은 서울로 도망쳐 버렸다.

이번에는 서울의 청진동의 작은 집으로 거점을 옮겼으나 어떻게 알아 냈는지 이집에도 최부인이 찾어와서 또 똑같이 가재도구는 물론 문 선명의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문 선명이 원리 원본책도 집어 던지고 도망친 것은 이때 일이다.
그 때 문 선명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옥 상현은 문 선명이 없어져서 무척 걱정하였다. 내가 혼자서 문 선명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니까 밤중에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에서 내 소매를 잡고 함께 가고 싶다라고 울었으나 나는 거절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 일 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서울에서는 문선명에게 체포영장이 떨어져서 옥 상현을 데리고 갔다가 도중에서 경찰에게 심문이라도 받는다면 큰 일이어서 할수 없었던 것이다.
옥 상현은 한동안 대구 교회에서 살면서 문 선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유 효원을 부산에서 서올로 데리고 와서 북학동에 방을 빌렸을때, 대구에 있는 옥 상현을 서울로 불렀다.

그때부터 또 그녀는 문 선명과 식구들의 생활을 몽땅 돌보게 되었다.
 

7·4사건으로 문 선명이 경찰에 구속되었을 때의 옥 상현의 슬퍼하는 모습은 참아 볼수가 없을 정도였다.
매일 단식하고 기도하며 마음속으로 부터 슬퍼하며 우는 모습은 옆에서 보고 있는 우리들도 머리가 숙여 질 것 같았다.
그후 청파동으로 이사한 후에도 쪽 교회의 살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동안 교회를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옥 상현은 교회 에서 쫓겨나고 없었다.
 

어느날 유 효민에게 옥 상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옥 상현이 유 효민에게로 와서 돈을 좀 빌려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옥 상현의 딸인 우 정애양이 와서 또 돈을 백 칠십만원만 빌려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었다는 것이다.

돈을 빌려 주었으나 갚아주지 않더라고 하는 것과 옥 상현은 그후  몇 차례나 돈을 꾸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걸어 왔지만 그 이상은 빌려 줄 수가 없어서 거절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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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해도 갈 곳이 없다.

 


옥 상현은 1946년 11월 6일 48세 때에 평양에서 문 선명과 만났다,

문 선명 은 그때 27세로 21세나 연상이 었다.

북으로 갔던 문 선명의 복귀원리를 믿고 육체관계를 가졌다. 제일 최초의 마리아 이다.
 

그 당시부터 문 선명을 따라서 약 40년간 몸도 마음도 재산도 바쳐서 보살펴 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 터에 강산이 네번이나 바뀌는 세월이었다. 그렇게 오랜동안 문 선명의 옆에서 시종을 들던 사람이었다.
한 순간도 문 선명과 떨어져서는 못 살아갈 것 같은 옥 상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옥 상현의 사정을 들어보면 교회가 노인 식구들을 전부 내쫓기로 하였기 때문에 그녀도 30수년간 다니던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교회에서 쫓겨날때, 단 일천만원의 돈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장사 밑천도 되지 못하는 금액이다.

딸 내외에게 주택자금의 일부로 빌려준것 같은데, 먼 곳에서는 교회에도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교회에 다니기 위해서, 교회 근처에 작은 방을 하나 빌려서 거기서 살고 있
다고 하는데 참으로 어이 없고 마음 아픈 이야기였다.

만약 내가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어서 사업이라도 하고 있었더라면, 살만한 집 한채 정도는 마련해 주고 싶고, 매달 적어도 생활비 정도의 돈을 보내주고 싶었다. 아흔몇살이나 되는 큰 공로자가 교회 떠난 사람에게 돈을 빌리러 다닌다니 눈물이 나을 정도로 불쌍한 이야기가 아닌가?

1985년 8월 16일 일승일(一勝一)을 선언하였다. 과거의 모든 죄를 전부 용서하고 사단을 복종시켜 그후에는, 사단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상으로 복귀시켜 모든 축복이 통일교회의 식구들에게 가져와 준다고 본부 교회의 송 영석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이야기 보다는 우선 옥 상현과 같은 사람에게 집 한채 라도 주워서 생활에 곤란하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라고 생각하였다.

옟날, 흥남의 옥중에서, 문 선명에게서 원리나 "원화원이상"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가슴이 벅차서 그것이 어느때 쯤 되는 것 인가요 라고 물었다.

그때 문 선명이 "7년후에는 그 시기가 온다"고 대답하던 것을 어제 일 처럼 기억 하고 있다.

그로부터 벌써 40년이 지났다.

분명히 문 선명 자신은 큰 돈을 벌어 놓았을지 모르지만 꿈같은 이야기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1993년 5월경 이었다.

유 효민으로부터 나에게 연락이 있었는데 옥 상현이 지금 인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중인데 문병을 가자고 하는 것이다.

나와 유 효민은 인천 가좌동"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서 옥 상현을 문병하고 왔다. 올해에 96세라고 한다.
이미 병은 다 나아서 건강 하였으므로 병원에서도 퇴원하라고 말하고 있다지만 퇴원해도갈 곳이 없어서 병원에 눌러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 효민이 돈을 대서, 아파트를 빌려서 퇴원 시키고저 하였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통일 교회측이 서둘러 방을 빌려서 퇴원시키고 말았다.

문 선명을 일생동안 떠 받쳐온 옥 상현의 노후가 이렇게도 비참하게 된 것을 보니까 정말로 슬펏다.

그러나 옥 상현 뿐만 아니라 이와같이 희생된 사람은 아직도 몇백명이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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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봉식과 오 명춘

 

부부가 문 선명에게 헌신


내가 문 선명과 함께 부산 영도로 신성묵, 유 신회 부부의 집을 찾아 간 것은 1953년 12월  24일이었다. 새로 입교한 사람은 유 효원, 유 효민,유 효영, 신 성묵 부부, 김 관성, 최 집사
등, 섬유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최집사는 3개월 후에는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송 도욱, 박 봉식 부부가 들어 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본래 신앙이 돈독한 사람 들이어서 다음해 봄, 송부처는 서올로 올라와서 교회의 헌신자가 되었다.
송집사는 그리 교육은 받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튼튼한 몸매를 하고 있는 커다란 사나이로 대쪽을 쪼갠듯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등 여러가지 일을 해 온 사람이었다. "해방"후 귀국해서 부산에서 박 봉식과 결혼하였다.
 

원만한 부부생활로 딸이 하나 태어났다. 세사람이 생활하기 위해서 송 도욱은 가정 방문을 하면서, 살충제 약을 팔기도 하고, 약을 뿌리기도 하였다.

처의 박 봉식은 부산의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원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장사를 집어치우고 부부가 문 선명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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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집은 작은 판자집이었는데, 이층에 방이 하나 비어 있어서 김 원필이 거기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끔 김 원필을 찾아 갔었다.

서울에서 부산간 기차 여행에 터널을지날때는 석탄연기가 들어와서 양복이 그 끄럼으로 새까맣게 돼버린다. 어느 때인가는 내가 입고 있던 스프링 코트가 베이지 빛이었는데 검정색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박 봉식은 밤중에 그렇게 새까맣게 된 코트를 세탁해서 말려 가지고, 아침에 서울로 돌아갈 무렵에는 새옷과 똑같이 빳빳하게 입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을수가 없다.

송 장로 부부의 딸은 매우 성격이 활발하여서 문 선명이 그녀가 마음에 들어 그녀에게 가야금을 사주어 배우게 했다. 그리고 교회의 모임이라던가 친목을 위한 식구들의 모임이 있을때는 그녀에게 가야금을 타고 창을 부르게 했다.
그후 어떤 청년과 열열한 연애 중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축복해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결국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 당시 처음에는 내가 비서역으로
문 선명과 함께 돌아 다녔는데 유 효민이 입교하고, 나서부터는 그가 비서역이 되었다. 그후, 문 선명은 그 비서역을 유 효민으로부터 송 도욱으로 바꾸고. 또 송집사는 장로로 승진하였다.


남편 송도욱의 불륜

 

서울로 올라 온 박봉식 은 경상남도 거 창을 비 롯한 각지 에서 통일교회의 원리를 전도하는 순회전도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남편인 송장로에게 큰 문제가 일어 나게 되었다.
그 무렵 서진 광산에 있던 나는 볼일이 있어 군산에 갔다. 김모에게사정을 설명하고 월명동에 있던 김모 집에 약 일주일동안 머물러 있은 일이 있었다. 이집은 군산의 교회로도 쓰고 있어서 김모씨의 부인과는 전부터 아는 사이 였다.

닷새째 되던 어느날, 밖에서 볼일을 마치고 김모의 집으로 돌아가니까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부인이 정신적으로 약간 이상한 상태로 되어 있어서, 「자기를 복귀시켜 달라」고 나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남자를 보면 누구에게나 「복귀하고 싶다」고 중얼대고 있었다. 원리 이야기에 열중하게 되면, 이러한 상황으로 되는것은 자주있던 일이었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나는 몇번이고 이와같은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 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 광산으로 돌아오자 마자 서울의 유효원협회장에게 연락을 하였다. 그래서 송 장로가 군산으로 나가서 부인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 갔다. 노량진(교회를 떠난 임영신 집)집이 있어서 거기서 부인의 병을 치료하기로 하였다. 송장로 혼자서는 그녀를 돌 볼 수 없기 때문에 오명춘과 함께 지내면서 돌보기로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송장로와 오명춘과는 서로 좋아하게 되고 말았다. 부인은 회복 되었으나 송장로와 오집사는 서로가 헤어질수 없는 관계가 되어 있어서 결국은 문선명에게서 축복을 받고 함께 지내게 되었다.


탁월한 인격자 박봉식

 

나는 박봉식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원리에서부터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송도욱과 박봉식은 부부로서 문선명한테 와서 식구가 된것 이다. 송장로는 문선명의 비서가 되었고, 박집사는 그때까지 하던 집 일을 모두 걷어치우고 전도에만 전념하였다.

문선명이 축복을 하는 것이라면 박집사와 송장로가 축복을 받는것이 상식적으로나 원리적으로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오집사와 송장로가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두사람의 동거를 인정 했다고 하는것이 되지 않는가. 이것은 여러가지 면으로 모순되고 있다.
문선명 이 축복을 하였다고 하니까 달리 아무말도 말할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박집사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문제였다 망연하게 어깨를 떨군 그녀의 심정을 살필 수 있다. 축복을 받은 후, 한동안 지나서 송 장로는 간 암에 걸려서 대단히 고생스러운 생활을 보냈으며, 수술을 받았으나 개복한 때에는 이미 상당히 진전되어 있어서 배를 꿰맬수도 없는 상태에서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박집사가 임종하는 옆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듣고, 나는 그녀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송 장로가 젊은 여자와 축복을 받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죽음의 자리 옆에 있었다고 하니, 현여라고 해야 옳을지, 열녀라고 해야 옳을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송장로가 죽고 난 뒤에, 함께 축복을 받았던 오집사도 병이 들어 꿈속에 송 장로가 나타나서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고 신음 하였다고 한다.
이, 병이든 오집사를 ,박집사가 또 몇달동안 함께 살면서 간병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저 머리가 숙여 질뿐이었다.


큰 돈을 바친 오명춘


문선명은 옥상현 등과 함께 부산에서 네차례나 집을 옮겨 다녓는데, 이때의 비용은 모두 오명춘 집사가 내 준 것이었다.

오집사는 장리욱박사의 친척이나, 김안실 같은분에게도 전도해서 입교하게 하였고, 이순철도 신정순도 신정순의 딸 이성화 성례와 양윤신에게도 전도하였다.
교회의 초기에 매우 중요했던 부인 간부의 대부분은 오집사가 전도한사람들이다.
그 후, 문선명이 이순철의 복귀라고 말하며,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을 때에, 집을 빌릴 돈도 없었는데, 오 집사가 신당동에 사는 자기의 매제에게 돈을 건네 주며, 문선명이 살만한  방을 주선해 주었다.
이화대학사건이 터져서 문선명을 위시하여 간부들이 구속되었는데 이때의 뒷바라지도 오집사가 맡았었다.

그 때문에, 자기의 집을 팔아서 그 대금 오백만원을 고스란히 문선명에게 드려 미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문선명이 구속된 뒤에 섭외비를 염출하기 위해서 조그마한 가계를 원효로에다 열고 신정순등과 함께 경 영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온 이익으로 문선명이나 간부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문선명이나 내가 돈이 필요하게 되면 반드시 오집사가 마련해 주었다. 부산의 영도로 처음에 갔을 때도 그러하였다.
그 당시 문선명은 한푼도 없어서 곤경에 있을때 오집사가 여비를 마련해서 가져다 주었고, 그 돈으로 부산으로 갈수 있었고, 유씨네 삼형제가 입교하게 되면서 부터 교회의 기초가 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오명춘은 그 후 미국으로 가서 의사가 된 아들한테서 살고 있었는데 83년에 한국에 돌아 왔을때, 오명춘은 딸 장혜숙에게 주려고 응담을 하나 가지고 왔다. 그 당시로서는 백오십만원 상당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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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효민을 통해서, 딸이 장혜숙의 집으로 오도록 전달이 왔다.

찾아 갔더니 그 웅담을 나에게 건네주며 딸에게는 또 기회가 있으면 사서 줄수 있으니까 우선 지금은 이것을 잡수시고 기운을 차려 보십시오. 박선생님은 병환이 나서도 필요한 사람 이니까 이것을 드리는 것이에요 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문선명이나 교회와 나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문선생은 박선생님을 더
욱 아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선생은 지금 서울에 계실 터이니까 두 분이서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라고 약속해 주었다.
그때 옛날 자기집을 팔아서 조달한 오백만원은 지금첫 한푼도 갚아 주지 않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당시의 오백만원은 지금으로서는 오천만원 이상이 되는 셈이다.

나는 웅담을 고맙게 받아, 그것을 먹고나서 한달만에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명춘은 여러가지로 노력해 주었으나, 물론 문선명한테서는 전화도 없었다.

이와 같이 최초의 교회의 식구들은 함께 고생해 온 일도 있어서 서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도와주곤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만 잘난체하고 있는 문선명은, 원리의 공론만을 앞세우고 인간성이라고 하는것은 찾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식모살이라도 해서 살아야지


그런데 옥상현이 행적도 비쳤지만 본부교회는 몸과 마음을 몽땅 문선명과 교회에 바치고, 돈도 집도 없는 "박봉식"을 나가라고 내 몰았다. 그 후 박봉식은 갈 곳이 없어서 대단히 불쌍한 지경이 되었다.

박봉식은 청평 통일교 수련소로 가서 산에 천막을 치고 기도 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몇일이 못가서 그것을 안 수련소 관리인이 와서 또 몰아내고 말았다고 한다. 박봉식은 할 수 없이 다시 시내로 나와서 먹고 살기위한 참기름 장사를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선 교회의 간부의 집을 찾았다. 원식구인 박봉식이 부탁하면 한집에서 한명쯤이야 참기름을 사 줄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 다녔던 것이다. 맨 처음에 협회장 부인 한테 가서 참기름 한병을 내 놓고 진짜 참기름이니 시장에서 파는 값으로 한 병만 사달라고 부탁  하였다.

그했더니 그 부인이 통일교회의 식구가 참기름 따위나 팔다니 너무나 창피하니까 그만두라고 말하며, 박봉식을 내 쫓아버렸다.

그리고 또 원협회장의 집을 찾아 갔더니, 먼저 집에서 당한것과 같이 문전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박봉식은 통일교회 간부들에게는 사랑이라고 하는것은 한조각도 없는 참으로 냉정한 사람들이다 라고 한숨 지었다.
 

그래서 협회장의 부인이 두 사람이나 다 거절하는 것을 보면 다른곳에 간들 어차피 헛수고 일것이라고 참기름 장사를 체넘해 버리고 말았다. 살어가기 위해서는 통일교회 따위를 기대  할 것이 아니라 식모살이던, 무엇이던 해 나가야 겠다고 그 박봉식은 쓸쓸히 말했다.

 

 

김종화(金鐘和)의 눈물과 노여움

 


문용명을 죽이고 싶다


평양으로 간 문선명은 미완성이라서 엉터리 같은 원리를 설교해 신자를 모으고 있었다. 가련하게도 옥상현은 그 무렵부터의 희생자인데, 더 한사람 써두지 않으면 않될 사람이 있다.
 

그것은 문선명이 투옥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된 유부녀 김종화의 사건이다.

흥남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먼저 출소하는 나에게 그는 평양 경창리에 있는 김종화의 집을 찾아 가서 내가 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정화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여 나는 출소하자 바로 그곳으로 갔으나, 이미 피난길을 떠난후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
다.

문선명의 열렬한 신자가 되어 주인과 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방에서 문선명과 동침해서 드디어는"어린양의 잔치"를 올리는 소란을 피워서 체포되어 징역 일년의 형을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리의 이론에서 말하자면 6마리아(유부녀)를 복귀한 뒤에 오는"어린양의 잔치(정식결혼)"는 상대가 더러움이 없는 처녀가 되여야 한다.

어째서 남편이나 자식이 있는 유부녀를 선택한단 말인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문선명에게는 서울에 두고 온 처자도 있다.

내가 서울에서 간신히 찾아 냈을때, 김종화는 이문동에 살면서 집사로서 기성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정명선은 파고다 공원앞에 코롬비아 라고 하는 구듯방을 경영하고 있었다.

내가 김종화를 방문 하였을때, 그녀는 그때의 일을 후회 하면서 사단이 나를  유혹해서 죽을때 까지 참회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때는 이름을 문용명에서 문선명으로 바꾼것을 모르고‥‥그녀는 말했다. 문용명은 엄청난 대사단인데, 나는 흠뻑 속았습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많이 만든 나쁜 사람이예요.

박선생도 빨리 그만두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커다란 눈물 방울을 흘리면서 울었다.

평양시절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나의 남편은 내가 하는 행동을 그늘에서 야속하게 생각 하였을뿐 어째서 성을 내지 않았을까요.

자기의 처와 저남자가 매일 같은 방에서 함께 자며 복귀를 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섹스를 하고 있는것을 옆에서보면서 어째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나중에 그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것을 알고 그때 나는 너무나도 큰죄를 범하고 말았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나는 김종화 집사에게 더 한번 물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매일밤
섹스를 한다는 것이, 그 당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때는재림 메시아라고 믿었고, 그 남자에게 미쳐서 그 사람과 섹스를 하는때에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천국으로 올라 가는 듯한 심경 이었습니다.
 

문용명이 지금 서울에 있는데 더 한번 만나 볼 용의는 없는가, 하고 물어 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면서 엄청나게 큰 죄를 범한 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므로 대사단의 문용명은 나와 같은 유부녀나 처녀들을 교묘한 말로 범하고, 많은 사람을 죄의 구렁텅이로 떨어트리고 있어요.

어떻게 또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겠어요 라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세상에서 더 이상 우리들에게 한것 같은 죄를 두번다시 그가 범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다. 그 남자를 죽이고 싶도록 원망하고 있어요.

그녀는 그야말로 불처럼 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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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마리아의 비극

 


유부녀 여섯을 빼앗다
 


나 박정화는 1953년 5월 15일 경주에서 피난생활을 끝마치고 부산 수정동에 마련한 교회에서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원리강의를 들었다.
그 내용은 흥남 수용소에서 문선명이 나에게 "원화원이상"에 관해서 이야기 한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었다.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6마리아"의 부분이었다.

평양 시절은 그렇다 치고, 식구들 가운데서 6마리아로서 복귀를 받은 사람들은 제일 첫번째가 신정순, 그리고 오명춘, 이순철, 김안실, 강옥실, 정전옥의 순이라고 문선명은 이야기 했다.

그 후 한동안 지나서 이 6마리아의 얼굴생김이 바뀌었다.

그 이유는 강옥실과 정선옥에게는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남편이 있는 유부녀 가 아니면 6마리아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 이었다.
문선명은 이 두사람 대신으로 유신희, 임영신을 6마리아로 선택 하였다.

6마리아 자격이 있는것은 유부녀라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형체가 없는 하나님은,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성숙하면, 형체있는 인간의아담으로 재림하여 아담과 해와가 결혼해서 더렵혀 지지 않은 자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자손이 이 세상에 번식 함으로서 이 세상을 선한 죄 없는 사회  할 것을 '창조이상'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해와를 유혹해서 따먹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사단의 것이 되어, 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범죄한 천사의 사랑의 대상인 유부녀를 빼았음으로서, 사단에게 더럽혀진 피를 깨끗이 하는 '복귀섭리의 의식'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문선명 은 설명하였다.
문선명은 나에게 복귀하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 복귀의 방법이란, 지금까지의 사탄의 세상에서는 섹스를 할때에 남자가 위로 되고, 여자가 아래로 되었지만, 복귀를 할 때에는 두번 까지는 여인이 위로되고 남자가 아래로 되는 것이고, 세번째는 남자가 위에서 행위 한다.

그래서 소생, 장성, 완성으로 3회에 걸쳐서 복귀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것이다.

특히, 나는 문선명의 섹스에 의해서 복귀된 여자와 최초로 섹스를 해서,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내가 문선명에게 제일 신뢰 받는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6마리아 들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를 추적해 보자.

 

신 정 순*

 

자산가인 이순모의 처였던 신정순은 내가 1953년 5월 IS일에 부산의 수정동 교회에 갔을 때부터 두 사람의 아들을 데리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같은해 12월 24일 문선명이 직접 원리강의를 하기 위해서 부산영도의 집회에 갔을때 그는 나에게 정화 너는 장래 신정순과 이상적인 상대(부부)가 되어서 우리 교회의 경제 문제를 해결 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 한 일이 있다.

그런데 문선명은 이 신정순의 장녀로 처녀인 이성화를 장래에 해와가 될 사람이라고 말하고 범하였는데, 김영희 사건으로 그 거짓말이 탄로나고 말았다.

또 둘째딸인 성례도 문선명한테 복귀를 받다, 아이까지 낳게되었다. 신정순은 6마리아가 된것으로서, 문선명의 곁에서 영원히 평화로운 생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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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부산 초량동에 있던 집을 팔아서 문전명에게 바쳤다. 내가 부산에서 새끼장사를 시작 하였을때 그 자금을 마련해준 것도 역시 신정순 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된 두 딸의 모녀 3인이 문선명과 섹스를 했다고 하는 사실은 신정순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궁암에 걸려 몇해 후에 죽고 말았다.

저 세상으로 간 신정순은 지금의 문선명을 어떻게 보고 있을 것인가?

 


이 순 철*


이순철은 내가 경주의 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의 수정동교회로 갔을 무렵, 오명춘의 전도로  입교하게 되어 문선명의 복귀를 받고부터 쪽 그에게 따라 다닌다.

이순철의 남편은 당시 관세청의 간부였다.

그녀는 남편몰래 많은 재산을 문선명에게 헌금 하였다.

문선명이 대단히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에, 우리들이 안양, 부산 등지를 돌아 다녔다는 것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그 후의 이순철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어느날 노동휘가 나를 찾아 와서 아침 예배에 가자고 재촉한다.

청파동 교회로 예배를 가니까, 마침 문선명이 나와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선명이 별안간 지금 수택리(경기도 소재) 총포공장을 건축하고 있는데, 오늘밤 안으로 그 총포공장을 완성 시키시오 라고 명령 하는 것 이었다.
급작스러운 일 이라서 건축 일꾼을 모은다는 것이 큰일 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천호동에 주택을 건설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축일꾼 18명을 트럭에 태워 실어다가 밤샘 작업을 해서 어거지로 그 공사를 완료시켰다.
작업이 끝나서 돌아 가려고 하는데, 이순철이 느딘없이 찾아와서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같이 가자고 해,그이를 따라 가니까 통일 산업 주식회사의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방을  빌려서 살고 있는데, 방안에는 다 날가 빠진 헌이불과, 꾸겨진 양복등, 겨우 몇가지 가재도구가 놓여 있을뿐, 그렇게 화려한 생활을 하던 이순철이 왜 이다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그에게 어째서 이런데 와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으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문선생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로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아 백방으로 생각 끝에 할 수없이 통일산업에는 문선생이 하루에 한번은 꼭 온다고 하기에 이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매일 문선생이 오는 길에 기다리고 있다가 먼발치에서 나마 얼굴 만이라도 뵙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선생은 차로 오기때문에 내가 서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  다른 길로 가 버리고 맙니다 라고 이야기 한다.


그녀는 이 슬픈 사정을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 내가 와 있다는 것을 듣고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세시간 동안이나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한 이순철은 문선명에게 재산도 자기의 몸도 모두 바쳤다고, 남편에게서는 이혼당하고, 자식들은 남편에게로 따라가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문선명을 만나고 싶어서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문선명은 어째서 이다지도 냉정하게 배신 할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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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재림메시아를 자칭한 사나이의 할 수 있는 일인가.

우리들은 손을 맞잡고 한 없이 울었다.

이날부터 한달 후에 오명춘 집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명춘이 혼자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순철은 그 한 많은 인생을 마치고, 이세상에서 사라졋다고 하는 것이다.

그 옛날 문선명은 밤에나 낮에나 이순철 없이는 못 살것 같이 굴더니만, 이제 와서는 이순철이 문선명을 만나고 싶어서 수택리 총공장 근처로 이사까지 와서 문선명을 기다렸는데  얼굴 한번 마주대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 버리고 말다니 ‥‥

저 세상에서 이순철은 문선명을 얼마나 원망하며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인가?

 

오 명 춘*


오명춘은 제주도에 피난 생활 중에서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부산에서 문선명의 원리를 듣고 감격해서 복귀를 받은 뒤에도 문선명이 어려운일이 생기면 이 오명춘 집사가 전부 해결해 주었다.

집을 판 대금 5백만원을 몽땅 문선명에게 바쳐서 남편과는 이혼하고, 아이들은 남편한테로 가 버려서, 혼자서 문선명을 위해서 살아 왔다.

이 오명춘 집사의 이야기는 앞에서도 자세히 썼으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해 둔다.

 그 후 오명춘집사는 교회에 못있게 돼서, 지금은 필립핀에 있는 아들을 찾아간 것이다. 서
울에 살고 있는 딸도 문선명으로부터 합동결혼 을 받었으나 이상이 맞지 않아 이혼하고 말았다.

이제 새삼 자기의 집으로 오는 것을 그리 반가워 할 이가 없다.

유효민과 내가, 올 봄에 오명춘을 찾아 갔더니 그 딸 한데서도 나가 달라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지금쯤은 낮선 나라에서 어떠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것인가?

유효민과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사람들을 장래 남은 인생을 평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서 서로 노력 할 것을 약속 하였다.

 


김 안 설*


김안실은 내가 부산의 수정동 교회에 있을 때에 오명춘 집사에 전도되어 입교했다. 문선명으로부터 원리를 듣고 복귀를 받은 뒤에는, 신정순과 같이 유효원 등을 열심히 전도한 장본인이다.
김안실은 장리욱씨의 자부인데, 남편은 의사였고 미국으로 가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김안실은 남편이 유학중 아이들과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열심히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김안실은 문선명을 제일 사랑하고 있었다. 그 후, 김안실의 남편은 미국에서 귀국해서, 서울 청량리에 병원을 개업하였다.

한동안은 남편과 살고 있었지만 역시 문선명을 못 잊겠다며 교회로 돌아왔다. 문선명에게서 복귀를 받을 당시의 김안실은 30세 가량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문선명은 그 젊은 안실이가 마음에 들어서, 내가 서울에서 부산에 갈때마다 반드시 편지를 써서 내가 그것을 전해주는 책임을 맡았다. 지금 다 나이든 이 사람을 문선명은 돌아다 보지도 않는다.

이제 새삼 남편한테도 돌아갈수도 없어서 혼자서 방을 빌려 가지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리치고 또 혼인 중매로 직업화 하다시피 홀홀 단신 쓸쓸한 인생살이를 하고 있다.

유효민과 나는 이와같이 문선명과 통일교회에 배신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책임을 지고 남은 인생을 보낼수 있도록 노력 할것을 결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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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신 희*


유신희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도 밝혔기에 여기에는 지금의 상태만을 간단히 말해둔다.


고아원에 어린것들을 맡겼던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다 졸업하고 제집도 마련하고, 교회집사 일도 잘보고 장사도 잘되여, 사회에 모범 청년층에 속한다.

그러나 유신희씨는 아들들 집에 살 면목도 없고, 아이들도 어머님 모시기가 서먹하다 하여  구로동에 방을 두칸 빌려서 바느질 일을 해 가면서 겨우 살아 가고 있는 형편이다.

과거 눈이 멀어서 문에게 속은것을 한탄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날그날 고생
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이 사람에 관해서는 유효민과 나는 도와 줄 것을 약속 하였다. (제 7장 참조)

 


임 영 신 *


서울의 북학동 교회에서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가 창립될 무렵 신정순이 임영신의 집을 알려주어서 유효민의 전도로 임영신은 통일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임영신은 다섯살쯤 되는 딸이 하나 있었고 혼자사는 몸인고로 가볍게 교회로 들어올수 있어서 푸로마이드 사진을 추운 겨울철에도 우물물로 수세작업을 하여 열심히 도왔다.

이 또한 문선명 이 누구보다도 매우 사랑을 받아왔다.

교회가 발전하여 여러번 이사를 했고 용산구 청파동 시절 문선명은 남녀 이상상대 설교를 한참 역설할 때다. 교회 교인들은 이심전심으로 임영신은 자기와의 이상상대의 꿈이 깨진줄 알고 탈교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시내모처에 단신으로 생활중 교회에서 친숙하게 지내던 딸을 만난 인연으로 그딸 아버지 재산가 이순모의 끈질긴 구애끝에 다시 부부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 번창하여 재벌급에 들었다.

그 사장도 병사로 아들하나 낳고 또 과부가 되었다. 미망인이 된후 많은 사업체를 전처 장남에게 물려 주고 외롭게 아들하나 바라보며 외롭게 살고 있다.

그리고 한동안 어느 예능인과 결혼하였으나, 그 사람과도 이혼해서 또 독신이 되어, 자기의 가정부 아줌마와 같이 살고 있다.

또 자기가 낳은 아들도 어머니를 보살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도 사이가 좋았던 이순모와의 결혼생활 무렵 시간만 있으면 가만히 불러내서 만나고 하던 문선명도 임영신 만은 전연 돌아 보지 않았다. 지금은 방 한칸을 빌려서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유효민과 함께 그녀를 만났는데, 그 생활 형편은 쌀 살돈이 없을 정도로 궁색하였다.
문선명은 복귀 한다는 명목으로 몸뎅이 를 유린하는 것은 물론 재산까지 전부 들어 먹고는 급기야는 차 내버리는 것이었다.

 


6마리아가 아니라 60마리아


문선명은 한 학자와 "어린양의 잔치 의식"을 행하고 학자가 참 어머니라고 떠들어대고 있지만, 이 대표적인 6마리아 이외도 문선명에게 농락 당하고 재산까지 도적 맞은 여성은 몇 십명이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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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에게 배신 당하고 버려져서 지금은 60-80세가 된 할머니들은 인생 여한을 품은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와같이 정도에 넘치는 행위는 인간의 상식에서 보던지, 종교가의 입장에서 보던지 간에 절대로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며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파탄을 가져 올것으로 필연적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문선명 이야 말로 진짜 대 사단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한 6마리아라고 하는것은 모두 재산가의 아내뿐이었고, 가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2천년전에 예수는 그가 만났던 간통한 여인, 향유의 여인등 육인의 여자와 섹스를 하지 못했기에 예수는 죽었다.

육인의 유부녀를 복귀하는 것은 원리의 근본이다 등등으로 말한 문선명의 이야기는 실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 악용한 함정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케 된다.

사실 그들은 문선명의 호색적인 섹스의 포로가 되어 미쳐서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문선명 한테로 달려와서 돈이나 재산이 확실하게 문선명의 손아귀에 모였다.

그리고 빨아 먹을 만큼 발아 먹은 뒤에는 돈있는 여인을 찾아내서 6마리아의 이름으로  꾀였던 것이다.

정말 그대로 풍부했던 그녀들은 하나같이 허수아비 빈 털털이와 같이 되어 버림을 당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도 사랑도 없다. 문선명의 색과 금욕의 가련한 희생자의 죽음만이 남았다.

더욱이 해마다 새로운 마리아로 교체해서 볼일이 끝난 마리아는 자꾸만 버려 치워서 두번  다시 돌보지 않는 것이다.

6마리아란 무서운 함정에 빠진 여성들의 대명사로서 그 이면에는 실로 몇십명, 몇백명이라고 하는 희생자의 예비군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의 재산이나 자금이 없었다면 통일교회가 발족해서 발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를  아는 내가 첫번째 증인이다.

예를들어 이북에 원적을 둔 황모 중년 부인은 통도 크고, 뱃장도 좋아서 자기의 것을 다 바치고 남에 돈도 잘 들러다 댓다. 그래서 사랑을 받게 되니 인신이 아닌가. 자기 돈도 다 떨어지고 하여 문에게 낙태 수술비를 달라고 했더니 무정하게도 딱 잡아 떼며 노발대발 울면서 탈교선언에 겁이나 유 부장이 문교주에 이야기 해서 수술비를 얻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교회에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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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빼앗기고 살해되고

 

김 원덕 이란 사나이

 

부산의 교회에서 노여움이 치밀어 미친듯 했던 최선길 부인에게서 문선명을 구출해낸 김원덕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시대에 육군사관학교 포병과를 나와서 일본군에 복무하던중, 포병소위 로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후 그는 북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포병사령관 무정의 한쪽 팔 노릇을 하며 근무하면서  북조선의 비밀을 몇차례 남쪽에 흘려 보냈다.

이 사실이 사령관인 무정이 군사회의로 중국에 가있는 동안에 폭로 되었다. 당초 사형을 선고받아 집행되는 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김원덕은 명랑한 성격으로 솔직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냥 사형의 집행을 기다리는 정도라면 죽는편이 났다고 결심하고 옥중에서 자살을 도모 하였다.

다행이도 그것은 미수에 그쳤고 수갑을 찬채로 독방에 들어 있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귀국한 무정장군은 자기의 한쪽 팔이었던 부하가 사형을 선고 받아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을 알았다.

무정장군은 고급 군사기관에 입김을 넣어서 그가 신원보증을 한다는 조건으로 김원덕의 사형은 4년 8개월의 형으로 감형된 것이었다. 감형 통고를 받은 김원덕은 평양 형무소에서 홍남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위기일발로 총살을 면한 김원덕과는 내가 홍남 수용소에서 총반장이 된 후에 문선명으로부터 소개되어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세사람은 친형제처럼 문선명을 중심으로 모든것을 의논하면서 쓰라린 상황을 극복해 왔다. 또 김원덕과 나는 북쪽의 평남 대동군 용연면 출신이어서 서로 가까운 이웃 마을의 출신이라고 하는 점에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김원덕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 남쪽으로 피난하여 경찰의 치안국 외사계의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통일교회가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을때 김원덕이 나타나서 문선명을 끌어 낸 것인데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최선길은 차마 반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비적인 낭만


어느날 김원덕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좀 샘이나는 듯한 그의 사랑 로맨스이다.
그 몇일전 김원덕은 부산에 볼일이 있어서 용산역에서 야간열차를 탓다. 그는 상등석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 품위 있어 보이는 부인이 몇사람의 경찰관에게 둘러싸여서 같은 기차에 타려고 하였다.
그녀의 복장이나 전송나온 사람들을 보니까 어던지 모르게 고급관리의 부인이 여행을 떠나는것 같이 보였다.
그부인은 공교롭게도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수원역을 지나 대전역을 지났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때때로 보는 정도로 그대로 부산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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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 지나자,
그 부인은 한국의 유명한 시한구로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내는 흐르고 있어서 옟 물이 남아 있을수가 없다. 사람도 이와 같아서 한번 흘러 버리면 또 다시는  못 돌아오네 라고 하는 내용의 노래를 김원덕의 옆 얼굴을 보면서 작은 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 소리는마치 선녀가 노래하는 것 처럼 들렸다.
다시 한번 부인을 뜯어 보니까, 그 모양은 엄숙하게 보였으나 또 정이 넘쳐 흐르는 듯 하기도해서 한동안은 함부로 말을 건낼수도 없어그저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러나 김원덕도 만고풍상을 경험해온 사나이다.

그대로 위축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얼굴 생김새로는 자신도 있었으므로 큰맘 먹
고 말을 걸었다고 한다. 실례합니다. 당신은 용산역에서 보았습니다만, 부산에는 여행으로 가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은, 용산역 가까이에서 알미늄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부산에는 볼일이 있어서 가는 길입니다.

그로부터 부산역에 도착하기 까지는 아직 세신간이 있었으나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열심히 이야기에 빠졌다. 야간열차 속에서 알게 된이 부인과 김원덕은 완전히 호흡이 맞아서 그날 어떤 곳에서 만날것을 약속하고, 부산역에서 헤어졌다.

약속한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같이 하였는데 그 부인은 그에게 마치 연인에게 대하는것첨럼 행동하였다. 그녀의 행동에는 일본여성 처럼 사교적인 여자티가 넘쳐 흘러서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태도와 행동에 도취한 김원덕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 후에 영화를 보러 갔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어느쪽이라고 할것도 없이  이심전심으로 어느 호텔로 발걸음을 옴겼다. 이날 둘이서 맺은 사랑은 도저히 말로서는 설명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김원덕은 부산에서 볼일을 마치면 다음날 야간 열차로 서울로 올 예정이었으나, 그 부인과 같이 있으니까 한 주일이 금방 춘몽으로 어제 서울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 이었다.

 

아름다운 부인과 진수성찬

 

그리고 오늘 그녀의 자택으로 갈 약속을 한 것인데 자기 혼자서 가기는 쪽스러워서 박선생님도 같이 가셨으면 합니다 라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호기심이 생겨 김원덕과 함께 열두시에 용산시장으로 갔다. 철길을 건너서니 공지가 있는데 서쪽으로는 옛날 모리나가 제과의 공장이 있었고, 그 동남쪽으로 단충집이 있었다.

일본사람이 살던 헌집이라서 그다지 깨끗한 집은 아니었다.

현관으로 가니까 문패에는 "윤청정심(尹淸淨心)"이라고 책어 있었다.

두 사람이 현관에 들어서자 20세 가량의 두 여인이 나와서 우리를안내해 주었다. 첫방에는 큰 불단이 있고, 그 중앙에는 순금인지 도금인지 잘 모르겠으나 황금빛 불상이 놓여 있고, 좌우에 놓인 놋쇠 촛대에는 밝은 낮인데도 불이 켜져있다.

다음방은 자리가 열개도 더 깔릴만큼 큰 방이었는데 객실인것 같았다.

그곳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한참만에 여인이 정중하게 차를 날라다 주었다.
이 집의 구조를 보고 있는데, 옆의 문이 열리며 향수와 같은 냄새가풍겨왔다.

대단히 좋은 향기로서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중년부인이 들어와 앉으면서 그녀는 얼굴을 약간 숙여서 미소지으며 그리고 인사를 하였다.

김선생 흔자서 오시라고 말 한것인데 이렇게 누추한 곳에 선생님까지 오셔서 정말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 목소리는 밝고도 대단히 깨끗하였다. 40대 후반 정도로보였는데 매우품위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김원덕에게 소개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인사 하였다. 무엇인가 마음까지 관통된듯한 분위기였다. 마음을 진정하고 맞아서 그 부인을 다시 보니까 머리는 빗어올려 쪽을 짓고 긴비취 비녀를 꽃고 옛날의 궁전에서나 쓴듯한 금빛장식에 빨간 댕기를 드리우고 있었다. 감색저고리에 엷은 옥색치마를 입은 모양은 멋진 우리의 전통 정식 복장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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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첫날밤을 맞이하는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듯한 모양이었다. 부인의 안내로 옆의 방으로 갔더니 고급요리집과 같은 한식요리상이 놓여 있고 은제의 주전자에는 노오란 빛갈의 술이 들어 있어서 한잔 드시지요 라고 은제 술잔으로 한잔 받은 술은그야말로 최고의 가슴설레임 이 아닌가!

중국의 시인 이백은 장강폭 아래서 술을 마시며, "삼천자 높이에서 똑바로 떨어지는 물은, 흡사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과 같구나"라는 시를 읊었다.
나도 그러한 기분으로 술을 마시고 안주를 들었다.


이상한 예지능력

 

그 부인은 금강산에서 10년간 수업해서 이 세상일은 무엇이고 내다 볼 수가 있어서 사람의운명을 점칠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여명을 판단 할 수도 있고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그 사람의 당선을예언 할 수 있게 되고, 대학의 입학시험 때에는 그 사람의 합격 여부도 알수 있게 되었다고한다.

그 덕분으로 그녀가 경영하고 있는 알루미늄 그릇의 제조공장은 그녀로서는 본업이 아니라 부업으로 된것 같다고 한다. 그녀의 참 목적은 불쌍한 고아들 특히 여자 고아를 길러 대학교육까지 받게해서 사회에 내 놓는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길러낸 여자 아이들을 전원 이화여자대학을 졸업시켜, 현재 돌보고 있는 고아는 17명 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고 있자니까, 감히 얼굴을 들고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국회의원 선거때가 되면, 이 부인집에는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대학의 입학시험때도 역시 같다고 하는것이었다.

우리들은맛있는 성찬을 잘 먹고 이상한 그 부인의 이 야기 를 듣고 또 오십시요 라고 전송을 받으며 그집을 나셨다
김원덕씨를 연인으로 삼았다고 내비치면서 그녀는 김씨에게 부인이있어도 관계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자기를 사랑해 주고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서로가 좋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세속적인 감각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김원덕과 나는 그집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김원덕의 덕분으로 나는 언제고 성찬을 먹을 수 있어서 한 동안은 괜참은 생활을 보냈고, 서로간에 친하게 되니까, 나는 불단에 놓여 있는 싱싱한 과실을 마음대로 집어 먹어도 실례되지 않을 만큼 친숙해겼다.
재림 메시아의 아버지와 함께 있으니까 생명이 없는 불단 앞에 이러한 물건을 놓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부인은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항상 주의 깊게 들었던 것 같다.
그 후 그 부인 윤여사는 김여사라고 하는 다른 부인을 사이에 넣어서 토목 건축회사를 설립하여 김원덕을 사장으로 앉혔다.

 회사의 명칭은 윤여사가 "운흥공사"라고 명명한 이름인데, 구름처럼 일어난다고 하는 의미였다. 사장이 된 김원덕은 토목건축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경영은 그리 잘되지 못해서 얼마 못가서 이 회사의 간판을 내리게 되고 말았고, 그후에도 또 여러가지 사업으로 김원덕과 윤여사는 협력하였으나 운이 없는 탓인지 그리 잘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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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한동안 윤여사는 불단의 과일을 먹을때에 말한 그 말의의미를 물어왔기에 설명하였더니 꼭한번 그 선생을 만나보고 싶다고 윤여사가 말하지 않는가 !

나는 김원덕과 의논하여 문선명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 하였더니 만나도 상관없다고 말하여 1954년 10월 25일 오후 6시에 신당동 양문영여사의 자택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 다음날 윤여사에게 그 일을 전하였더니 그녀는 대단히 기뻐 하였다.


제자의 연인을  빼앗은 문선명

 

약속의 날, 김원덕과 나는 윤여사를 데리고 양여사의 자택에 안내하였다. 양문영, 신정순, 오명춘, 옥상현, 지승도, 이순천, 이기환, 양윤신, 등의 여자 식구들과 유효원, 유효민. 이수경, 김원태등이 모였다.
그때의 윤여사는 최고의 한국정장으로 몸을 싸서 흡사 신부가 신랑집으로 첫날밤을 맞으려 들어가는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본 식구들 특히 부인 식구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
인사를 나눈 후에 윤여사는 자기의 영적인 눈으로 선생을 우러러 뵈오니까 참 어머니가될 여인이 없어서 근심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제가 신부로서 신랑인 선생님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라고, 당돌하게 첫 인사를 하여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날은 예수가 세사람의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간 때와 같은 분위기가 되어, 문선명도 원리강의를 밤새도록 이야기 했다.
또 윤여사는 시를 노래하고 창을 불렀다. 그 소리는 그 집의 주인이며 이화여자대학의 음악교수인 양문영 여사가 들어도 놀랄 정도였다.
그 당시는 문선명에 대한 감시가 엄하게 되어 있었다. 밤 열두시가 되면 통행금지가 되어있어 다음 기회에 또 만날것을 약속하고 그 밤은 다 헤어졌다.
일주일 정도지난 어느날, 문선명이 별안간 유효민과 같이 윤여사의 집을 찾아 왔다. 김원덕과 나는 문선명이 오는것을 몰랐으므로 대단히 놀랐다. 윤여사는 정성을 다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문선명을 접대 하였다.

문선명도 신랑이 신부집에 간것 같은 태도로 윤여사와 앉아 있었다.
또 윤여사는 성경에 나오는 신랑을 맞이하러 가기 위해서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신부가 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것 같은 분위기였다.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나와 김원덕은 밤도 깊었으므로 문선명과 유효민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이날밤 문선명은 윤여사와 복귀 (섹스)를 했다고 한다.
김원덕은 북에서 피난하여 남으로 올때 살곳이 없었던 문선명을 자기의 셋집에 한동안 머물러 있게 하기도 하고, 부산에서 문선명이 곤난한 상황에 놓였을때, 선두에 서서 몇번씩해결해 주었다. 그 김원덕이 자기의 사랑하는 연인 윤청정심과 문선명에게 배신 당한 심경이되어 그후 문선명을 피하게 되었다.

문선명은 송도욱 장로를 비서역으로 하고 부터는 자주 윤여사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1955년 7월 4일 문선명이 경 찰에 구속되고 부터는 윤여사도 한동안 우리들의 통일교회 와는 발을 끈었다.
김원덕은 그 후에도 몇차례 나와 만나서 문선명에 대한 원한과 노여움을 말했고 나는 열심히 복귀원리를 설명해서 문선명을 감쌌으나 김원덕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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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인이 있는 가운데 어째서 자기의 제자가 사랑하는 연인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 뺏아서 가는가. 선생은 나를 바보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짓을 하는 선생에게 어떻게 복종할 수 있는가?

통일교회의 원리가 아무리 훌륭해도, 자기는 더 믿을 기분도 없다.

선생 아니 문선명을 용서 할 수 없다.

문선명은 종교의 이름을 빌어서 여자를 속이는 사기꾼이다.

김원덕은 군인출신답게 외골수인 데가 있어, (나도 그렇지만) 정말로 격분했다.

그래서 문선명이란 사나이는 발정한 개다.

음수다 라고 뱃속에서 짜내듯이 매도했다.

김원덕의 억울함은 잘 알기 때문에 나는 그 이상 댓구할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해뒤의 일, 윤여사, 식모, 양녀(대학생딸)의 일가 3인이 누군가에 의해서 타살당한 사건이 생겨서 큰 소란이 되었다. 경찰도 필사적으로 수사를 한 모양이지만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그 전까지도 문선명과 윤여사의 사이는 계속되고 있었고, UN군의 인천상륙으로 6 25동란이 유리하게 된것을 찬양하는 영화 "오오 인천" 의 준비가 두 사람 공동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윤여사의 돌연한 죽음으로 자금이 나오지 않아서 중단되었다.

김원덕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어, 나도 당시 경찰의 조사를 받다 그의 소재를 물었었다.
그 후 김원덕과는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어, 나도 슬적 모양새를 살펴 보았으나 김원덕 자신도 그 사건에는 대단히 놀라고 있고 둘이서 진짜 범인 찾기의 연상게임을 한 일도 있다.

김원덕한테는 전혀 변한 것이 없어서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러던 그는 죽어서 이미 3년이 되었다.

 

 

제5장  재림 메시아의 정체

 

원리와 실천의 모순

 

나의 수기는 진실의 기록

 


나는 흥남수용소에서 문선명을 알았고, 1년 6개월을 같이 생활 하였다. 6.25동란으로 출옥한 그와 두달간에 걸쳐서 남쪽으로 피딘하여 평양에서 서울 부산까지 왔다.

한동안 나는 경주에 있었고 문선명은 부산에 있었다.

그와 채차 합류하고서도 이 세상의 창조의 역사와 타락의 원인, 그리고 이 세상을 복귀시켜 하나님이 구원한 깨끗한 세상의 창조 목적대로 되돌리는 원리를 듣게 되었다.

원리의 주인공인 재림 메시아 참부모의 이름 아래 통일교회는 이제야 세계 백수십개 국가에 퍼져 있다. 진정한 어머니인 해와가 된다고 하는 것으로 한 사람을 선택하여 "어린양의 잔치(정식결혼)"를 행하고 열한사람의 아이들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그 첫번째 아들을 아버지 문선명의 후계자로 하고자 하는 세습체제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문선명은 각국의 학자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소개 되었다. 그를 위대한 인물로서 존경하고 있는듯한 책도 있다. 나는 그러한 책은 거의 읽었으나 그러한 책은 문선명이 지금까지 그 목적과 실천을 어떠한경과로 해 왔느냐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쓰지 않고 있다.

다만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 만을 쓴, 겉치례 만의 내용 이었다.

그러한 책에 책에 씌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나도 비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이 책에서 써 온 것은, 문선명과 같이 있으면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행동해 온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 했다고 단언해 두고 싶다.

문선명이 흥남수용소에서 시간만 있으면 나에게 이야기한 "원리"는 부산 수정교회에서 원고로 써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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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원리원본'이다 (이것은 종이에 연필로 쓴 것인데, 이것을 대구에 와있던 정선옥이 보관하고 있었고, 내가 서진광산에 있을때 박애자가 가져다 주었다. 그때 내가 공책에 베껴쓴 것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
 

이 원리원본을 기초로해서, 두뇌가 뛰어난 유효원이 '원리해설'(原理解說)을 썼다.


그리고 이 '원리원본'과 '원리해설'이 통일교회의 기초가 되어 문선명이 세계 백수십개 나라에 진출하게 되는 기초가 된 것이다. 이 원리원본과 원리해설을 전부 인용 할 수는 없으므로, 우선 요약해 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자들


그러나 이 '원리해설'에는 그 원리와 실천과의 모순되는 것이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를 몇 항목만 지적해 둔다.


어느나라에도 그 역사의 시초에는 신화가 있다.

우리 한국이나 한반도에는 단군을 비롯한 건국의 신화가 있다.

일본에는 천조대신이 있고,

중국에는 덕왕형제 11인 등이 있다.

그런데 내가 따랐던 문선명은 한나라의 국조가 아니라, 세계의 재림 메시아라고 한다.

지금까지 출판된 많은 책 가운데는 문선명을 구세주라고 쓴 것도 있다.

문선명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계를 통일 하려고 주장 하고 있으나 내가 믿어온 재림메시아는 점점 그 모양이 커감에 따라, 그 원리와 실천이 점점 상반 되어 가는듯한 느낌이 드는것을 어찌하라.

2천년전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간 예수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있다.

문선명은 제3의 아담 참부모로서, 통일교회 교인은 물론 온 세계 사람들로 부터 추앙받아 백수십개 나라에 넓혀져 있다.

그러나 식구라고 불리는 통일교회의 신자가 되더라도, 사단의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와 생활에 변화된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나빠지던가 비명의 죽음을 맞은 사람도 있다.

나는 그점에 대하여 계속 의문을 가져왔다.

많이 있는 통일교회 관계의 출판물 가운데 실제로 내가 읽은것에는, 통일교회는 이러한 윤곽의 교회이며, 그 교주인 문선명은 원리라고 하는 교리에 나오는 재림메시아 이다 라고 하는정도의 표면적인 것밖에 씌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문제는 문선명이 얼마만큼 재림메시아 로서의 역활을 다 하고 있는가.

구세주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가 하고 하는 것으로 귀결 된다.

그런데 뻔뻔스러운 문선명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지금부터도 계속해서 희생 시키려고 하고 있음으로, 더 이상 잠잠코 보고 있을 수 만은 없다고 생각되어, 이책을 쓰기로 한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통일교회 교인들은, 지금도 백수십개 나라에서 문선명을 참아버지로 생각하고, 한학자를 참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이 세계가 통일될 것을 매일 같이 기원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나도 문선명이 진짜 재림메시아가 되어서 이 세상을 구원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는 식구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만약 문선명이 재림메시아가 아니고, 요한 묵시록 20장에 씌여 있는대로 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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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고 한다면, 진짜 참 신부와 어린양의 잔치를 올려 참부모가 되여, 열 한사람의 아이들을 출산하고 있는데, 어째서 참 부모한테서 남은 아이들이 두명씩이나 교통사고로 죽어 갔는가.

또 다른 여자에게 출산시켜 입적한 세사람 가운데 한사람도 사고로 죽었다.

"요한묵시록 21장 4절"에는 사람의 눈에서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신다.

이미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부르첫음도 아품도 없다.

먼저 것이 지나가 버렷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다.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면, 복귀 원리대로 어린양의 잔치를 행해서 이 세계의 모든것을 해방하는 날짜 까지 정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세상은 그대로인 것인가.

 원죄의 근원을 모두 없애고 복귀의 의식을 거쳐 참부모가 되었을 터인데 어째서 거기서 태어난 어린 자식들이 죽어 가는가.

 또 그 자손들 가운데는 부끄러운 스캔들을 일으켜서 언짢은 소문까지 내는 자도 있다.

나는 문선명이 원죄를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 왔는가.

원리대로 실천하였는가? 등에 관해서 밝혀두고 싶다.

문선명의 장래는 하나님 만이 결정 할 수 있는 문제 이다.

나는 다만 문선명이 발표한 원리에 근거해서 그 원리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함께 살고 있었던 때의 사실에 대해서 써 보려고 생각한다.


문선명이 무슨 메시아 !

 

여기서 다시 한번 문선명의 원리를 복습해 두자.

 

(창조원리) -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흙으로 사랄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인간이 되었다.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며 에덴의 동산에 두어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쓸쓸해 보여서 그가 자고 있는 동안에 그의 갈비대의 하나를 빼어 여인을 만들었다 그 이름을 해와라고 하며 아담과 함께 에덴의 동산에서 세상의 모든것을 지배하도록 하였다.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 따 먹어도 좋으나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만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명령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경고하였다.

 


(타락원리) - 해와가 성숙한 뒤 하나님이 모양이 있는 아담의 몸에 임재하여, 해와와 함께 사랑해서, 즉 섹스를 해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됨으로 거기에서 부터 생겨나는 죄없는 아들에 의해서 자손이 번영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천사장 루시엘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해와를 유혹해서 섹스를 하고 말았다.
또 해와에게 아담과도 섹스를 하도록 시켰으므로, 이것이 타락한 사단 루시엘의 혈통 세계가 되었다.

 

 

(복귀원리) - 이와같이 성숙하지 않은때에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섹스를 한 것으로 인해서 인간이 타락케 된 것이다.
그때 해와와 아담이 나무열매를 따 먹었다면 죄를 범한 입을 감추었어야 할 터인데 하나님  앞에서 두 사람은 부끄러워서 무화과의 잎으로 하체를 감추었으므로 섹스를 한것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도 인간은 신체에 상처가 생기면 그것을 가리우려고 하는것이 본성인데 부끄럽다고 하체를 가리우는 것은, 그곳에서 범죄하였음을 자증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이 타락한 것을 어떻게 복귀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해와에게 사단의 피가 흘러들어간 것으로서 ,아담과 해와는에덴 동산 땅을 파며 해와는 아이를 낳는 해산의 고통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 게 되었다.
그 후, 아담과 해와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 두 사람이 인간의 시조가 된것이다. 가인이그 아우인 아벨을 죽였으므로 이것이 에덴 동산에서 최초의 살인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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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어떻게 복귀하면 이 세상이 깨끗하게 될 것인가 여기서 문선명은 이 복귀의 실천을 하기 위해서 많은 장해를 뛰어 넘어 왔다.

그의 그 원리와 실천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복귀를 설명하면 해와가 성숙하지 않았을 때에 천사장 루시엘이 섹스를 해서 해와의 정조를 빼앗았기 때문에 이 죄악을 깨꽃이 하기 위해서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복귀를 실현하는데 우선 하나님과 같이 더렵혀 지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서 루시엘 에게서 정조를 빼앗긴 해와와 같은 여인과 루시엘이 해와와 섹스한것과 같이 이 두 사람이 섹스를 하는것이 펼요하게 된다.

그리고 루시엘은 해와 위에 올라타고 섹스를 하였으므로, 지금 이 사단의 세상에서도 똑같이 남자가 위로 타고 섹스를 하는 것이 보통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복귀 할 때에는 남자가 밑이 되고 여자가 위에 올라타고 섹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같은 이치로 문선명은 이러한 체위로 복귀의 실천을 계속하고있다.

하나님과 동격으로 복귀할 수 있는 사람은 말 할것도 없이 문선명 이라고 원리 에서는 단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선명은 왜 죄 없는 하나님과 동격의 입장에서 복귀 시킬수가 있는가.

문선명이 이 사단의 제상에서 극히 평범한 가정에 태어난 것에서부터 생각하자면, 도저히 납득 할 수없는 일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납득되는 부분이 없다.

한번 더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흥남 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을 문선명과 같이 지냈다. 이 수용소에서의 1년 6개월간은 외부생활의 16년 정도에 해당되는 기간이라고 서로 간에 이야기 하곤 했다.

그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문선명이 16세때 (1935년), 부활절 전날밤, 예수가 꿈속에 나타나 예수가 달성 하고자 하였던 일을 하지 못한채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므로, 당신이 나 대신 그 사명을 완수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선명도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몇번이나 부탁을 하였으므로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이 예수에게서 부탁 받았다고 하는 것은 후에, '원리'에서 말하는 '복귀'의 실천이며, 섹스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의 여부는 본인 밖에 알지 못하는 이야기 이므로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예수의 꿈을 봤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있을 터이고, 꿈속의 말씀에 의한 예수의 이야기 한 것이, 이렇게 엉뚱한 섹스 복귀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무래도 이해 할 수 없다.


정득은 과의 이상한 관계

 

1955년(소화30년) 7월 4일, 문선명 등이 체포되어 중부경찰서의 유치장에 수감 되었을때 평양시절의 정득은 이 찾아와서 나에게 그녀의 집까지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註 :
이 할머니도 또 이상한 존재로서, 좀 길어지지 만 주의해서 읽어 보시오)

나도 마침 그당시 문선명의 평양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김종화를 찾던 중이어서 정득은이 살고 있는 집 까지 가기로 하였다.

50세가 되는 정득은은 원효로 3가에 조그만 집을 빌려서 살고 있었다. 여기서 1주일을 함께 지냈다. 그리고 문선명이 서울에서 평양에 도착한 후의 정득은 과의 신비(?)에 싸인 생활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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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득은 은 북녁의 평안북도에서 한때 번성하였던 이웅도 목사, 황국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복중교 와도 관계는 없었다.

다만 기독교를 믿고 있었는데, 1946년 6월 6일 하늘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내용은 지금 38선을 넘어서 한 청년이 가방 하나를 메고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그 청년은 하나님이 중요한 책무를 지워서 이세상에 보낸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 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평양으로 향하고 있으니, 나가서 그 사람을 맞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 했다는 것이다.

정득은 은 부랴 부랴 남쪽으로 찾아 갔더니, 사동이라고 하는 곳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릭구삭 하나를 멘 청년이 이쪽을 향해서 왔다. 그것이 문선명(당시는 문용명)이었다.

정득은은 그의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한 후에 자기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정득은의 자택은 만수대 밑에 있었다.

문선명을 안내하여 온 정득은은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는것.

선생이 오는것을 알고 마중하러 갔던 것을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득은은 자기가 여호와에게서 성모로서 인정 받았으므로 문선명과 섹스를 하면 문선명은 신과 동격의 입장이 되어 타락한 부부의 입장에 있는 여인들을 복귀 시킬수가 있게 된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문선명이 밑으로 가고, 정득은 은 그 위에 올라타서 소생, 장성, 완성의 3회의 섹스를 하였다.

미 복귀의 실천공식과 방법은 흡사 문선명의 원리와 같다.

성모 마리아 대신에 성스러운 정득은 파 복귀를 한 것으로서, 문선명은 온전한 하나님 처럼 죄 없는

정득은 은 꿈속에서 여호와와 섹스를 하였으므로 자기는 성모라고 말한다.

너무나도 잘 꾸며진 이야기지만, 문선명의 한쪽 팔과 같은 입장에 있던 당시의 나는 오직놀랄 뿐이며 감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창조, 타락, 복귀의 원리도 완성되 있지 않았을 때에, 원리도 모르고 문선명과는 처음대면의 정득은 이 도저히 생각 할 수 없다.
 

앞뒤의 사정으로 보아 두 사람이 육체관계는 있었던 듯 하지만 아무래도 후에 억지로 끌어다 붙인 조작된 이야기라고 나는 지금 믿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평양으로 갔을 무렵의 문선명의 행동이, 원리를 무시한 엉망 진창인데가있다. 생활안정을 위해서 필사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당시의(후에도 그렇지만) 그의 무기는 미완성의 괴상스러운 원리론과, 그것에 빠져서 몰려드는 여인들에 대한 섹스공격 밖에 없지 않았을까 ?

백보를 앙보해서, 만약 그것이 진실이었다면, 통일교회의 인쇄물은 어째서 이 (정득은의 대기적)에 관한 것을 한 줄을 쓰지 않았을까 ?


체포도 당연한 섹스포교


평양시 대의 이야기를 계속하자.

이 후, 문선명은 나최섭의 집으로 옮겼고 다음에는 경창리에 있는 정명선, 김종화 부부의 집으로 가서 거기서 예배를 올리게 되었다. 이미 섹스관계가 있었던 지승도 옥상현들과의 여러가지 갈등이 있어서 정득은 은 독립해서 다른 신자를 모아놓고 예배를 올리고 있었다.

또 여기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그 내용은, 여자 신자들이 제각기 문선명과 섹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간에 자기만이 문선명을 낳은(영적으로 이세상에 낳은) 성스러운 어머니다 라고 하는 주장이 얽히고 설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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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데, 신자이었던 여자들이 문선명과 섹스 함으로서, 문선명에게 복귀할 자격을 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밝힌 바이지만 그 후의 문선명은 김종화의 집에서 남편인 정명선과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부녀인 김종화와 같이 살았다.
그리고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그 유부녀와 "어린양의 잔치"를 구실 삼아 결혼 한다는 소동을 피워서 경찰에 체포되어 사회질서 문란죄(社會秩序 紊亂罪)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흥남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거기서 문선명은 나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것에 관해서, 통일교회의 출판물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문선명이 복역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기성 기독교 교단의 투서와 공산당의 종교 말살정책으로 인해서 내무성에 구속되어 공판서 5년의 형을 받았다
이것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것은 독자들은 이해 하실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공산당이 실제로 종교 말살정책을 행하였다면 기성 그리스도 교단이 질시할 여유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옥상현 남편인 우하섭은 그 무렵 평양 장대현 교회의 신망있는 장로였다.
또, 이 3개월전인 1946년 8월에도 문선명은 북조선의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후에 겨우 석방되었다.
통일교회는 이것도 원인은 신도를 빼앗긴 목사들의 반감과 질투로 고발 당했다고 하고 있으나, 똑같이 분에 넘치는 섹스포교의 결과였다.
나는 이 책에서 남쪽의 한국(부산, 대구, 서울)을 중심으로 문선명과 함께 걸은 발자취와 생긴 일들을 써 왔으나, 문선명은 이미 평양시절에 다수의 여성을 섹스로 식구를 삼아 항상몸 주면서 신봉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여성을 역시 6마리아 논법으로 꾀어내서 육체와 금품을 뜯어 냈던 것이다.

 

 

색과 욕과 돈과

 

남편의 돈을 훔쳐 오라

1955년 7월 4일 문선명은 서울시 경찰에 구속 되었는데 재판에서 무죄로 선고되어 석방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통일교회는 죄없는 사람이 구속 되었으나, 그 후 사실이 밝혀져 석방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당시 문선명과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있었던 내가 그간의 사정이나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문선명은 실제로 여러가지 많은 죄 를 범 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의 기민한 대책으로 경찰의 조사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았던 것과, 위증이나 거짓으로 뒷말을 맞추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던 덕분에 무죄로 되어 석방 되었던 것이다.
통일교회는 그 사실을 감추고 있지만, 내 자신도 위증을 해서 교인들의 말문을 맞추기에손 쓰느라고 뛰었고 증거인멸을 행 했던 것이니까 틀림없다.

사실로 말하면, 재림주로 믿었을 때 어떻게 허락없이 재림주의 연령을 내 마음대로 올릴수 있겠는가. 이건 생각도 못할 일이다.

재림주 문과 의논해서, 허락아래 연령을 올려서, 제 2국민병을 기피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태산 같지만 가령 이순철이라고 하는 유부녀를 자기는 재림 메시아 이니까 자기와 복귀 하면 당신도 6마리아 의 한 사람 예수의 마리아로 된다고 속여서 섹스를 했다.

훌릉한 간통죄 이다.

또, 이 세상을 사단이 주물르고 있으나, 이 세상의 모든 재산은 본래 하나님 것이므로, 사단이 쓰고 있는것, 남편의 돈이나 집에 있는 재산은 전부 훔쳐서라도 나에게 헌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이 이상적인 세계로 되며 하나님은 수천배도 넘는 행운을 주실 것이다.
이 이야기를 믿어 이순철은 자꾸만 가져다 바쳤다.

어느 때에는 문선명에게 강요되어 당시의 미국달러 1만 5천불이나 되는 돈을 집에서 끄집어내서, 그돈으로 두달동안 문선명을 마음껏 놀아나게 하였다.
드디어 남편도 노해서 팔방으로 손을 써서 찾고 있었다.

절도의 훌륭한 공범이다.

이것이 어찌하여 죄가 안 될 것인가.

남펀이 경찰에 그런 이야기를 안하고, 간통죄로 고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디어 냈을 뿐이다. 다른 마리아의 남편들도 모두 그러했다.

또 처녀인 딸들에게, 문선명은 나의 처가 되면 세계의 진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해서 믿게 하고, 속임수 섹스를 했었다.
이러한 수법으로 김영희라고 하는 여자 대학생도 이성화도 속아서 문선명과 섹스를 했었다.

쾌락에 빠지고 결흔을 구실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청순한 처녀들을 범한 문선명이 어째서 죄가 되지 않았을까?

식구들의 눈물어린 심정을 통일교회는 생각해야 할 것 이다

 

왜  죄없는 아이들이 죽는가

 

그리고 나는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탈세라고 하는 죄명으로 미국의 형무소에 투옥 되었던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요한 묵시록 21장 3~4에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살며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스스로 사람과 함께 계셔서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신다.

이미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부르짖음도 아픔도 없다.

먼저 것이 이미 지나가 버렷기 때문이다 라고 쓰어져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것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 재림 메시아 시다.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그했던 것 처럼, 미국에서의 사건도 6천년간 하나님의 희망이었던 복귀의 실천을 하고 있어서 사단 세상의 법률에 걸려서 투옥되는 것은 원리의 예정에 있다고 문선명은 말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원리대로, 처녀를 신부로 맞이하여 "어린양의 잔치"를 행해서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였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는 교통사고로 또는다른 형태로 죽은자 들도 있고, 세상에 여러가지 좋지 못한 소문을 퍼트리고 있는 장본인도 있는 것은 무슨 이치일까?

문선명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왜 그런지 당연한 사실을 왜곡해서 선전하며 전도하고 있다. 그 때문에 도리어 문선명의 장래는 점점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라고생각한다.

나는 문선명이 원리의 실천이라고 말하면서 하고 있던 행위를 옆에서 직접 보아온 사람으로서, 그 사실을 명확하게 하여 .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인가?

아니면 남달리 여색을 좋아하는 돈벌이 주의자인가 라고 하는 것을 밝혀둘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문선명이 하나님과 동격으로 복귀된다고 하는 근거는 성스러운 어머니 ! 정득은이 재림메시아 로서의 문선명을 낳은것과, 문선명이 16세때의 4월 17일 부활절의 전날밤 꿈속에서 예수가 나는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복귀의 임무를 다 하지 못했다.

당신이 그 대신 제3의 아담으로서 재림 메시아의 임무를 다 해 주기 바란다 라고 말했다는것(통일교회의 신문에도 명기 되어 있다)의 두 가지를 들수 있다.

만약 그대로 문선명이 하나님의 실체로서 복귀의 임무를 실천 하였다면, 창조 당시의 에덴의 동산이 복귀되어, 통일교회의 교인들은 참 부모와 함께 눈물도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복귀(復歸)라고 하는 미명으로 섹스


우선 6마리 아 복귀문제에서 부터 생각해 보자.

사탄에 의해서 해와를 빼았긴 것 때문에, 하나님은 6천년 동안이나 노여움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나넘은 해와를 도로 찾기 위해서 제2의 아담인 예수를 이 세상에 보냈으나, 예수의 생모인 마리아는 예수를 자기의 아들로 밖에 생각지 않고, 자기의 아들이 우선 어머니와 섹
스를 하기 위해서 생겨 났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 (註 - 이와같이 어머니와 아들이 섹스 하는것을 원리에서는 '모자협조'라고 한다. )

그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고 원리는 설명하고 있다.

또 원리원본에는, 가롯 유다의 연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가 빼앗아 복귀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원한을 없애기로 되어 있었는데, 유다가 이에 복종하지 않고 은화 30냥을 받고 예수를 팔았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예수가 복귀하려고한 6여인의 마리아를 복귀 시켰더라면 원리대로 실천되게 되는 것이라고, 나도 이해 하였었다.

그런데 6인의 마리아를 복귀시킨 후에도 문선명은 손에 닿는대로 몇십명이 넘는 여인을 복귀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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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들면 이화여자대학의 사감 선생이었던 한충화는 문선명에게 복귀된 후에 결국 섹스의 마수에 빠져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어 문선명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무렵 볼일이 생겨서 문선명과 전주에 있을 때, 미인 여자와 만나게 되어 그 여성과 복귀하는 것을 나는 바로 옆에서 보았다. 그것이 그녀였다.

한충화는 열열한 크리스챤으로서 미망인이 되어 사무엘 이라고 하는 벙어리 아이를 데리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었는데,그 '원리'에 속아서 문선명에게 자기의 몸을 제공 하는것이 하나님의 뜻 이라고 믿고 기뻐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선명이 또 다른 여자와 복귀하고 있는것을 알자, 그 길로 서울로 돌아와서 문선명과 결별하였을 뿐아니라, 그곳이 더럽혀 졋다고 자궁 수술까지 하였단다.

그때 까지의 자기의 경솔한 행동과 섹스에 미쳐있던 문선명에게 정조를 빼앗긴 것을 후회하면서 그 뒤 얼마 안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누구 때문이며, 누구의 죄라고 말 할수 있을 것인가?

1955년 이화여자대학의 5인의 교수가 퇴직하도록 추궁하여 사표를 내고, 14인의 학생이 학교에서 를겨나게 되었다. 이일은 역시 문선명과 교수와 학생과의 복귀 사건에 얽혀 있던 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부산 수정동시대에 이미 6마리아는 결정되어 있었으며, 섹스의 실천도 끝났던 것이다. 그런데도 또 새로운 마리아를 복귀 시키려고해 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복귀를 한다고 하는 것만이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여성 식구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고 ,또 원리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여인들에게는 무작정 복귀를 받는 일에만 필사적인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통일교회에 대해, 외부에서는 통일교회에서는 벗고, 춤추며 한번 입교하면 마취에 걸려서 두번다시 올수 없도록 해 버린다 고 하는 소문이 널리 퍼져 가게 된 것이다.


많은 가정이 파괴되다.

 

그래서 실제로 문선명의 원리의 이야기를 듣고, 타락원리와 복귀원리를 들음으로서, 각계 각층에서 와있던 사람들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 왔다.

지금까지 아이들과 함께 평화로운 생활을 해온 부부와 처가 통일교회에 들어가고 나서는 옷을 벗는 것도, 남편과의 섹스도 거부하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람들은 문선명에게 바치는 경제 문제만도 골머리를 앓았다 .

그래서 결국 이혼하게 되고, 문선명의 원리에 따라 가정생활이 파탄나게 된다.

경제적 기반이 없는 가정에서는, 더욱이 믿기만 하던 남편이 처에게 절망해서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고 말게 된다.

그 당시 통일교회의 섭외부장이었던 김인철은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는것이 큰일의 하나였다.

이와같이 파탄된 가정 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도 170가정 이나 된다.

그 당시 문션명으로부터 복귀를 받기는 하였으나, 문선명의 행위를 보고 체험하고서는 저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오직 색에 미친 행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여인들은 남편에게는 모르는체 하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이 여인들의 심경은 지금쯤 어떠할 것인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 식구들은 그래도 모든 것을 바쳐서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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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당시 통일교회의 어느 남자식구로부터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문선명 선생의 복귀는, 그야말로 엄숙한 것이 겠지요.

 그때는 웃으면서, 그러믄요 하나님이니까 라고 대꾸해 두었으나, 재림메시아의 복귀의 의식인 만큼 엄숙한 것이라고 상상 하는것도 당연 하겠지,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하나님 이었어야 할 문선명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앞에두고 입 맛을 다시는 개같이 되어굶주림에서 해갈이나 된듯이 섹스를 했을뿐이다.


오로지 성욕 불덩어리 같았다.

사실 문선명은 정력이 뛰어 나서 하루밤에 열번 한 일도 있다고 한다.

본처였던 최선길의 말이니까 이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복귀를 받을 때의 부인 식구들도 그렇다. 순수했던 여성들이니까 당연 하겠지만 멋대로 너브러져서 곧 기를 쓴다.

큰 소리를 지르며 실신한 사람도 있다.

내가 돌봐 주었으니까 이것도 틀림 없는 사실이다.

사단을 부정하고 있는 문선명의 복귀라지만, 결국은 사단 세상의 섹스와 무엇 하나도 다를것이 없다.

그러한 문선명의 정체를 재발리 눈치채고 가정으로 복귀한 부인네들은 정말로 현명하였다. 

그녀들은 엄청난 피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원한은 여름에도 서리를


그런데 문선명은 지금 자기가 재림메시아 진정한 아버지가 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복귀한 식구들의 뒷바라지는 하나도 해 주지 않는다.
외국 특히 일본과 미국에서 참 아버지로 군림하게 되어, 일본에서는 영감상법(靈感商法) 따위로 반사회적으로 돈을 들어 모아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희생이 되어온 사람들에게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문선명을 원망하면서 통일교회를 나서는 여성이 날마다 늘어 가고있는 상황이다.

문선명은 장래 어떠한 방법으로 무슨 원리를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 갈 것인가 ?

미국의 목사들에게 원리의 비디오 테이프를 35만개나 만들어서 발송 하였는데 그것으로 이런 것이 방지되게 될 것인가?

미국의 목사들이 원리설명회란 명목으로 세계각국을 방문하여 몇억원이란 돈을 쓰면서 포교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을 방지 할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미국, 한국의 유명한 학자들에게 비싼 원고료를 주고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 구세주로서 치켜 올리려고 하고 있지만, 한국의 속담에 여자의 원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註 - 이것은 음력이니까 5, 6월은 한 여름이다)고 하는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청춘시절에 문선명에게 복귀되었던 여인들은 재산을 전부 털어 넣고, 남편한테는 이혼 당하고 자식들과도 헤어져서 지금은 폭삭 늙어 버렸다.

이 사람들은 거의 식모를 두고 살았을 만큼 넉넉한 가정의 부인들이었는데 재림주! 문선명을 맞아서 그에게 모든것을 바쳐 버리고 지금은 먹고 지내는 것도 옹색해서 자기(자신)가 식모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사람이 몇 십명이나 된다.

또 원한을 품은채 일생을 보낸 사람들은 몇백명이나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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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여인들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 보려고 생각 하였으나, 나의 경제적인 사정둥 여러가지 문제로 실현 하지 못해서 참으로 민망하게 생각한다.


처녀에게 낳게 한 아이들


원리 중에서 제일 중요시 되는 참어머니가 되는 처녀의 선택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 했
다고 생각한다. 참 아버지로 자칭하는 문선명과 어린양의 잔치를 올리는 사람이 참어머
니가 된다고 하는 것인데 , 그의식에 따라서 에덴의 동산을 타락전의 상태로 되돌려서 하
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 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 사회의 원죄를 뿌리에서 부터 뽑아버린 후에, 또 죄없는 깨끗한 세상으로 되돌려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이, 영원히 참 부모를 모시고 살아 갈수 있는 세상이 창조 된다고 하는것이 원리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참어머니인 처녀 한사람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또 알기 힘든 문제가 많이 있다. 문선명이 평양에 있을 무렵 정명선 씨의 처이며 아이들의 어머니인 김종화가 "어린양의흔인 잔치"의 상대로서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문선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징역 5년의 선고를 받아 문선명이 흥남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는 것은 몇차레나 썼다.

부산 영도의 신성묵의 자택에서는 김영회라고 하는 처녀를 복귀 시켰으나 그 후에도 관계를 계속해서 김 영희는 임신하였다.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문선명은 오승택이란 학생에게 연애한 것처럼 연극을 꾸며 김영희와 함께 일본으로 밀항 시켰다. 김영희는 일본에서 문선명의 아들을 낳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살게 되었다.

또 더욱이 이성례 라고 하는 처녀와도 복귀하여, 남자아이를 낳게 했다. 서울로 와서는 6마리아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문선명은 신부인 처녀를 선택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이성화를 서울역 앞의 여관에서 복귀한 것이다.

이성화는 그 후 자기가 참 어머니 후보의 첫번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의 공범은 이순철이었다.

이성화를 선동한 그녀는 신부 참어머니로 선택되어 복귀한 증표로서 금반지를 만들어 이 가련한 처녀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선명은 이 처녀들을 모두 버리고 홍순애의 딸 한학자와 "어린양의 잔치"를 올려, 한학자가 참 어머니가 된다고 말하며 결혼했다.

지금은 많은 통일교회 관계의 출판물 중에서 참 아버지로 되어있는 문선명과 참 어머니로 되어있는 한학자와 함께 살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 한다는 목표를 걸고, 여러 단체와 많은 경제력을 동원해서 문선명을 옥중의 구세주라고 치켜 세워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로서 돋보이게 하기위한 여러 가지 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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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한자는 누구냐

 

문선명의 소개장

 


다음에는 경제문제의 내정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앞에서도 쓴 바와 같이 1953년 내가 서울로 올라 왔을 무렵은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려고 해도 기차의 3등석 자리의 여비도 없어서 여자 식구들이 준 돈으로 겨우 왕복 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 후, 서울시 북학동에 집을 전세임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고 유효민의 제안으로 푸로마이드 사진을 제작 판매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되어서 교회를 흥인동으로 옳겼다. 식구들도 점점 늘어서 통일교회는 번창해가고 있었다.

그해(1955년)에 7.4 사건 (이화대학 퇴학퇴직사건)으로 문선명과 간부 다섯명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문선명이 출옥한 후에 청파동 (현재 통일교회 본부가 있다)으로 일본식으로 지은 이층집을 사서 본부교회를 이전하였다.

그 후 나는 문선명한테서 수고 하였소 한동한 서진광산으로 가서 쉬십시오 라고 말하기에 그가 써주는 소개장을 가지고 서진광산으로 가게 되었다. 1956년 7월 나는 거기서 생각해 보지도 앉았던 광산의 책임자가 되어 몇 달간을 지내게 되었다.

이 서진광산은 통일교회의 간부였던 정석천이 기부해서 문선명의 소유가 되고, 그가 직접 경영하고 있던 광산이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후에 또 쓰기로 하겠다.

내가 광산에 가 있는 동안 유효민은 산탄 공기총을 발명해서 특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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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기총을 제작 해 보니까 꽤 성능이 뛰어 났으므로 본격적으로 제작 · 판매하게 되어
통일교회 의 경제적인 기반을 굳혔다.


악착같은 노동착취

 

그 당시 문선명의 친척으로서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문성균이 처음인데 문선명이 찝차를 구입한 때에 운전수로 들어왔다. 그 다음이 문용선 인데 정석천 장로가 경영하고 있던 아산의 토기 공장에 가서 일하고 있었다. 문선명의 친척은 이 두사람 이외에는 한사람도 없었다.

그 이전에 내가 문선명과 부지런히 일하고 있을 무렵에 문선명의 친척은 한사람도 없었고 이름조차 들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현재 문선명의 친척들이 통일 교회의 경제를 좌우하는 상황이 되어 있어서 내부에서도 큰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원리에 반하는 것이다.

 문선명은 그전부터 이세상의 모든 돈과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남편의 돈을 훔쳐다가 나에게 헌금 하더라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에 있
는 돈을 훔쳐다가 우리에게 써 버렸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법률로서는 죄가 되지만 하나님의 법률로서는 죄가 안된다고 식구들에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식구들은 양심의 가책 같은것은 조금도 느끼지 않고 남편의 지갑에서 돈을 몰래 가져다가 문선명에게 쏟아 부었다. 그 덕분으로 오늘날의 통일교회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렇게 식구들이 고생해서 경제적인 토대를 만들어 놓은곳에 문선명의 친척들이 뛰어 들어와서 경제를 주무르며 자유자제로 쓰면서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반면 최초의 단계에서 경제적인 토대를 만드느라고 고생한 사람들은 거의 탈퇴 하든가 쫓겨 나고 있다.

현재 그 당시의 사람으로 남아 있어서 경제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것은 일성종합건설의 사장을 거쳐 작년(1992년)부터 일신석재로 옮겨 간 이수경 사장과 일화식품의 김원필 사장 뿐이다. 이수경은 당시 아직 열여덟살 정도라 문선명의 뒷일은 아무것도 몰랐다.

또 북에서 우리들과 함께 남하 하였을 때는 22세 정도였던, 김원필은 문선명 이 죽으라고 말하면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충실한 심복이었다.

 공기총 제작을 시작한 무렵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입교함으로 가정이 산산조각이 되어 고아원으로 보내져서 거기서 키워진 15~6세의 아이들이 수택리에 있던 통일산업(주) 예화공기총 제작소의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통일산업 당시의 사장은 김인철)

그 인원수는 350명 정도였으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그들에게 지불된 돈은 한달에 단
돈 500원 이었다. (일본 엔화로 환산하면 겨우 100엔정도-1965년 당시) 이것은 엄청난 노동력 착취로써 말도 되지않는 실례이다.

어느때 지금은 고인이 된 김희옥 집사의 17세된 아들이 고아원에서 도망해 나와서 어머니를 찾아 통일교회로 왔다. 그리고 이 모자가 서울에서 주택건설의 공사를 하고 있는 나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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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아들이 통일산업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듣지 않아서 박선생 한테서 써 주실수 없겠습니까? 하고 부탁을 한다. 176

아들은 통일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혹사해서 참을수가 없어서 도망쳐 온 것이었다. 이 사실을 내가 그 아들을 사원으로 쓰고 있을 때에 들은 이야기임으로 틀림없다.


문의 아들 흥진과 효진


1983년 문선명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를 돌며 강연을 한 일이 있다. 그때 문선명의 아들 문흥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그 이유로서 통일교회는 문선명선생이 숭공강연을 하고 있을때 사단이 문선명선생을 죽이
려고 노렸으나 그것을 안 아들 문홍진이 아버지의 대신으로 죽었다 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문선명선생이 그 아들을 청년영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므로 그는 영계의 청년들을 데리고 지구로 내려와서 문선명선생의 재림메시아 활동을 도와 협력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이미 하나님이 모든것을 해결 하는 것을 기다릴수 밖에 없는데 이야기에는 후일담이 있다. (후술)

문선명과 그의처 한학자는 이 세상에 군림한 참아버지 어머니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원리에서는 죄도 더러움도 없을 터인데 교통사고로 별안간 죽기도 하며 사단과 똑같이 행동하는 나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 참부모가 낳은 문효진의 스캔들은 통일교회의.내부 뿐만 아니고 사회적으로도여러가지 소문이 흘러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통일교회에서는 아들 문 효진은 한겨울에 문선명 선생이 결정한 성지 성스러운 땅에서 40일간 단식 철야기도를 함으로서 참회하여 문효진의 인격은 깨끗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효진은 문선명 한학자 부부의 장남인데 성화사에서 출판한 성공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문효진의 시집을 읽어 보면, 그를 그의 아버지 문선명의 후계자로서 만들어 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명백한 것이다.
이 또한 이해 할수 없는 문제이다. 지금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자기의 정권을 아들인 김정일에게 넘기려고 하고 있는 모양인데 공산주의 체제의 세습이란 믿을수 없는 폭거와 같은것을 통일사단의 세상에서 당당하게 행해 지고 있는 세습체제를 답습해서 아들의 문효진에게 재림메시아의 권력을 넘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세상을 구할수 있는 이는 문선명선생 밖에 없다고 하는 책을 쓴 김은우 박사는 책이름을 바꾸어서 이 세상을 구할수 있는 이는 문효진 선생밖에 없다고 하는 책을 출판 할 것인가?

또 일본인의 아스기요시는 옥중의 구세주 문선명이라고 하는 책명을 청년구세주 문효진이라고 바꿀 것인가?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느 사람에게서 들었다.
축복을 받은 가정의 제2세들이 40일간 청평기도원에서 집회를 하고 있을때의 일이다.
문효진의 주최로 1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출석해 있었다. 옛날부터 식구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36가정 이요한 목사가 원리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별안간 문효진이 나타나서 집회에 모여있던 사람들 앞에서 이요한 목사를 끌어내리며 아버지 문선명이 쓴 원리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대단히 노했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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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모여있던 식구들은 문선명의 후계자인 그가 참회하기 전의 본래의 불량자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하고 말했다고 한다. 북조선에서 김일성이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정권을 넘기려고 한다는 것으로온 세계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거기에 곁들여 한국에도 통일교회의 문선명이 자기의 아들에게 재림메시아의 자격과 권한을 넘긴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기만 하다.

통일교회는 이제까지 막대한 자금으로 문선명을 재림메시아라고 선전해 왔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일본인 나스기요시가 쓴 옥중의 구세주 구세주 나타나다등 많은 책이 출판되고 있다.

나스기요시가 돈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통일교회의 체질에서 보아 많은 돈을
써서라도 그 아들에게 전권을 넘기는 구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한 원리 어디를 읽어도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고 한다면 그 아들에게 재림 메시아 를 계승 시킨다고 하는 원리는 없다.

이와같은 통일교회의 내용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 그때의 편의주의로 멋대로 이유를 붙여서 상식으로는 생각 할 수 없는것, 인간의 도리에 맞지 않는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히 하여야 할 원리에 맞지 않는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니까 무섭다.

 


삭제된 창시자의 이름


더욱이 또 통일교회는 역사를 바꿔쓰며 태연하게 거짓을 쓴다. 통일교회의 태동기에서 부터 오랜동안 문선명을 믿고 문선명을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수고해 온 많은 식구들을 거저 내 쫓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사단으로 딱지를 부쳐서 명예도 푸라이드도 빼앗아 버리고 배신자라는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이러한 사람을 많이 알고 있지만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이므로 그 중에서 일부만 소개한다.

우선 나 박정화 자신의 문제부터 기술하기로 한다.

통일교회사(상권)에 실려 있는 나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다.

박정화가 누님집에 다만 개 한마리가 남아있는 빈 집에 혼자 있을때 김원필이 찾아 가서 다쳐서 다리를 질질 끌고 있는 박정화를 자전거에 태워서 문선명과 함께 피난해 왔는데 그 선생을 박정화가 서진광산 시절에 배신하고 통일교회에서 나가 버린 것이다.

이와같이 통일교회에 기록되어 있는 박정화는 배신자로 되어있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느냐의 한마디다. 이것은 모든 진상을 똘똘 싸서 감추고 문선명의 우상화 하도록 꾸며 붙인 거짓 기록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그 진상을써 두고자 한다.

우선 지금까지의 요점을 정리 한다면 북에서 피난 할 때의 경과(제2장)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나는 가족을 버리고 다쳐서 상처를 입은 몸에 채찍을 가하면서 문선명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일생동안 고락을 같이 하자고 한 옥중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그후로는, 문선생을 도와 경제적인 문제로 말로서 다 할수 없을 정도의 고생을 해 왔다. 문선생과 유부녀의 복귀라고 하는 섹스에서 생기는 갖가지 충돌에도 내가 대처 하였고 여러가지 고생을 겹쳐 가면서도 살아 왔다.

문선명과 함께 있던 7년간에 두번씩이나 경찰의 전기고문까지 받았다.

최대의 고비 7. 4사건에서는 5인의 간부가 체포된 중에 수사당국의 끈질긴 심문에 대해서 나는 온갖 수단을 구사해서 문선명의 죄상을 숨기고 무죄가 되도록 노력하였는데 이것도 통일교회의 기록에는 아무런 죄도 없었던 문선명선생은 구속 되었으나 무죄로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식구들의 덕분이었던 것은 앞에서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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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교회는 문선명의 신격화에 열중하였으나 1년6개월간의 감옥생활이나 부산의 수정동에서 서울의 청파동에 이르는 7년간 문선명의 한쪽 팔 노룻을 하며 함께 지낸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문선명의인격은 신격적이란 어림도 없고 회노애락이 심하며 금욕과 호색가인
점 만이 유별나서 정말로 사단 세계의 사나이였다.

기상이 약한 문선명은 내가 경찰에서 최초의 고문을 받았을 무렵 누가 그를 찾아 가면 항상 피하기가 일쑤여서 안절부절 불안해 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나가서 용건을 듣곤하였다.

너무나도키가작고 약골처럼 보여서 이 사단의 세상을 맑고 깨끗한 세상으로 복귀해서 본래
의 에덴의 동산을 되살아 나도록 하려는 선생이 어째서 그렇게도 쩔쩔매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한일로 이 우주나 세계를 복귀시킬수가 있겠습니까 고 몇번 문선생에게 말한 일이 있다.
여러가지 고생을 거쳐 내 이름으로 빌린 서울시 북학동 집에서 "세계 기독교 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였다.

1954년 5월 3일의 일이다.

이것도 또 통일교회에서는 무슨 일인지 날짜를 5월 1일로 고쳐서 발표하고 있다.
이때의 출석한 간부는 문선명, 이창환, 박정화, 유효원, 유효민, 김상철의 6인으로 이 6인을 통일 교회의 창시자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통일교회의 관련 출판물에는 박정화라고 하는 이름은전연 나오지 않는다. 제일로 오래된 나에게 "배신자" 딱지를 붙여서 말살해 버린 것이다.


사건이 생겼다 바로 피하라

 

사실은 전혀 다르다. 배신 한것은 문선명 자신이었다.

그것은 내가 서진광산에 있을때의 일이다.

서진광산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날 조동석이 찾아와서 지금 서울에서 사건이 일어나서 선생은 도망갔고, 그때에 문선명 말이 곧바로 광산에 있는 박정화한테 가서 빨리 다른곳으로 도망하도록 전하시오.

만약 경찰이 광산까지 가서 박정화를 체포해서 취조 당할때에 심하게 고문이라도 당해서 박정화가 나의 일을 고백하게 되면 큰일난다고 지시 한 모양이 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어디를 도망하면 좋을까. 이러한 산 속도 위태롭다고 하는것은 당연히 서울의 교회도 식구들집도 위험하다. 이것 저것 생각한 끝에 우선은 문선명을 만나서내 몸가짐을 어떻게 한면 좋을지 의논 해 보려고 생각했다.
조동석에게 선생님의 행방을 물었더니, 짚차를 타고 충무에 있는 용화사라고 하는 절에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듣고 나는 곧바로 그곳으로 가기로 하였다.
광산 주변 산중에 사는 화약주임인 전종만에게 여비를 빌려 가지고 출발하여 밤중 열두시에 충무에 도착했다.
여기서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 그날은 용화사까지 갈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숙소를 정해서 일박하고 아침 일찍이 용화사에 갔더니 정말로 한발차이로 문선명이 송도욱 장로와 조일청, 송병호 등 네사람이 같이 제주도 방면으로 출발한 뒤였다.
절 마당에는 문선명등이 타고 있던 찝차 타이아의 흔적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언제까지 어떻게 해야만 좋은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만 좋은가? 앞일이 막막하다.
어찌할 바를 모른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경찰을 경계하면서 서울로 갔다.
그리고 은밀히 여기에 있으며 연락을 기다림이라고 문선명에게 전해지도록 수배했다.
나는 문선명으로부터의 연락을 열심히 기다렸으나, 한달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서울역전의 지저분한 간이 숙박시설에서 하루에 빵 한개를 씹으면서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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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자는 문선명이다

 

한달이상 기다려도 문선명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나는 의심스러운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내가 서진광산으로 간것은 1956년 3월 28일, 7.4사건으로 체포되었던 문선명이 무죄로 된것은 전년의 10월 4일, 약 9개월 뒤의 일이다. 당초에 7~8인의 광부가 있어서 문선명으로 부터 필요경비도 송금되고 있었다.
그 무렵 서울 청파동의 본부에 갔던 나는 새로 입교했다고 하는 육군장교 두사람을 문선명 에게서 소개 받았다. 박보희와 한상국이었다.
그때 문선명은 박정화는 처음부터 같이 해온 한쪽 팔로서 넘버2의 사나이요. 당신들은 박정화한테서 여러가지를 배우시라고 그들에게 나를 소개 했고 두사람 모두그 3년후에 일어난 박정회 장군에 의한 군사정권 구테다(1961년)로 초대 KCIA(한국중앙정보부)장이 된 김종필의 심복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또다른 군인 두사람이 더 들어온 듯 했으나, 나는 만나지 않았다. 또 박보회는 그후 미국으로 가서 활약하여 통일교회의 제2인자로 올라섰다. 그리고 두사람은다같이 36가정의 축복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안되서 문선명으로부터의 송금이 뚝 끊겼다. 아무리 청구해도 기다려도 송금은 없었다 .원래부터 적자이어서 자금이 없었으니까 광산개발은 무리임으로 작업을 중지하고 갱부들은 돌아가도록 하였다.

뒤에 남은것은 서울에서 온 김덕진과 대구에서 거들어 주려고 와 있던 여자식구 세사람뿐 한 동안은 매식을 하면서 견디고 있었으나 얼마 안되어 바닥이 들어나서 끼니도 거르게 되었다.

너무나도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서 밥짓는 아주머니는 대구로 가고 말았다. (그리고 탈퇴 한
것 같다. )

김덕진도 서울로 철수해 버렸고 단지 흘로 남은 나에게 같은 마을에 사는 화약주임인 전종만이 때때로 놀러 올 뿐이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위태로우니 바로 피하라고 문선명의 심부름으로 조동석이 온 것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도망쳐 버린다면 이제 아무도 없게된다. 충무시로 출발하기 전에 됫치닥거리와 정리하는것 만은 얌전하게 끝내기로 하였다. 전 화약주임에게는 발동기를 한대 주고 여비를 조달했던 것이다. 훨씬 뒤 에 안 일인데 ,이때의 사건은 다시 문선명을 둘러싼 복잡한 여성관계가 원인이었다.

내가 산속의 광산에서 먹을것에 어려움을 려고 있던 수년 동안에 통일교회는 미국으로 진출하고, 일본에도 통일교회를 창립시켰다.
(1959년 10월 2일) 더욱이 60년 4월 11일 문선명은 한학자라고 하는 처녀 와 또다시 "어린양 잔치"로 결혼하였다.

그리고 3쌍 합동 성혼식(동년 4월 16일)  33조 합동성혼식(1961년 5월 15일)과 소위 36가정의 조직을 만들었다.

36가정의 신부들의 자격은 원칙으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들로 만들었다.

36가정의 신부들의 자격은 원칙으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어야 했으나 기성가정도 있었다.

이제까지의 경위를 지나치게 알고, 문선명의 여성관계도 상세하게 알고 있는 나는 역시 거북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나를 섬 (島)유배가 아닌 산유배로 긍지에 몰아놓고, 먹는지 마시는지의 상황으로까지 몰아놓고 그 동안에 문선명은 야망을 채우기 위해서 모순 투성이 원리를 추진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때에 또다시 일어난 여자사건으로 쫓기던 그가 광산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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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화를 도망가게 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경찰이 또 고문을 해서 박정화에게 불게 한다면 큰일이다라고 일부러 삼복중에 광산으로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해 낸것 만으로도 문선명이 나를 과거의 사람으로 취급하려 했던 참뜻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문선명은 나를 오래도록 살게 하기 위해서, 도망치라고 한것은 아니다.

자기가 오래도록 살아 남기 위해서 나를 과거의 우리에 가두어 버린채 도망치도록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만은 신장 개점한 통일교회의 안방자리에 나를 돌아오지 못하도록 찬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된것은 정말 훨씬 뒤에서야 알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당시의 나는 하루 한개의 빵조각으로 허기를 채우며 살아가면서 한여름의 땀에 흠뻑 젖는 간이숙박시설에서 한달 이상을 문선명으로 부터의 연락이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1962년 8월의 일이다.

이것은 사실이며 거짓이 아니다.
나는 결단코 문선명 을 배신하지 않았다.

배신한것은 문선명 이다.

 

 

제6장  진짜 사단은 문선명이다

 

산 증인의 이용가치

 

재혼해서 신천지로

 

나는 문선명에게 배신 당하고, 서울역전의 간이 숙박시설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나를 구해 준것은 엄덕문씨 였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가서 주택건설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일본 와세다 대학의 건축과 출신으로서 지금은 세계의 건축가 100명중의 한 사람)
그래도 나는 문선명 한테서 한번쯤은 무슨 연락이 있을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으나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문선명으로부터 단한번의 연락도 없었다. 문선명은 하나님과는 다른 속된 성격의 사나이라는 것을 남들보다 훨씬 더 알고 있는 나였다.

그래도 하늘에 맹세하고 출발한 분신으로서 일해온 나를 절대로 방치 할 리가 없다. 흥남의 옥중에서 「생사를 같이하자」고 맹세 하고 여기까지 서로 도와 가며, 생명을 걸고온 두사람이다.

마음 한구석에 그것을 믿고 있던 나였으니, 14년간에 걸쳤던 문선명과의 인연도 이것이 마지막이고 자나 깨나 나의 인생이었던, 통일교회에서도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이무렵 나는 엄덕문의 누이동생과 결혼 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로서 훌릉한 인물 이었는데 6·25동란으로 북의 인민군에게 집앞에서 사살 되었다. 아이들이 세사람 있었다.
나는 또 가정을 갖게 되어 땅에 발을 붙이고 제3의 인생을 내 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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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의 인생은 북조선시대  제2의인생은 흥남 형무소에서 통일교회 시대이다. 이때 나는 45세 처는 37세였다.
그로부터 10년간 나는 부산에서 주택건설 사업에 몰두하였다. 당초부터 계획 했던 300동의 주택건설과 아파트건축도 끝내서 무사히 책임을 다 할 수가 있었다.
다음 약10년은 통일교회의 식구였던 사람으로부터 부탁을 받아 매립공사에 협력하였다. 중국 신경공업고등학교 토목과 출신으로 군의공병대에 있었던 나로서는 토목공사는 전문분야이다.
많은 작업원(인부)을 지휘 감독하며 즐겁게 일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직책상 부하들과 친목의 술을 매일 호쾌하게 퍼 마셨다. 그런데 그것이 않 좋았다


병으로 쓸어지다

 

1981년 나는 뇌일혈로 쓰러져서 약 두달 동안 인천 기독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처의 오빠 엄덕문의 처 고희용과 누님의 엄순태가 나에게 「당신과 문선명 선생과는 하늘이 맺어준 깊은 인연이 있으므로 통일교회에서 떠나서는 않됩니다. 떠났기 때문에 당신은 병에 걸린 것이니까, 지금 부터라도 참회해서 통일교회로 되돌아 오시오」라고 권했다.

나도 생각지 않았던 병으로 조금은 마음이 약해 있던 상황이었다.

진실한 크리스찬 이었지만 신앙심이 얇어져이었던지도 모른다.
나는 인천 송도에 있던 나의집 뒷산에 들어가 3개월간 기도 하였다.
내가 기도 한 것은 「지금까지의 나의 살아온 방법이 옳바른 것이었던가 아닌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또 「병이 든 이몸으로 지금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 가면 좋은가」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계속 하였다. 병의 후유증으로 부자유한 몸이 된 나였으나, 사업의 제1선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시간만은 넉넉히 있었다.

통일교회의 그 뒷일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열심히 모이는 식구들의 근처의 통일교회에 가서 그들과 이야기라도 나누며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도록 노력하자고 생각하게 되였다.
내가 다리를 움직일수 있을만한 때의 인천지구교회의 목사는 문흥권 이라고한다. 몇 달 동안인가 다니고 있던 어느날 예배가 끝난 뒤에, 어느 중년의 여인이 나에게 인사를 하며 나를 아시겠습니까 하고 그녀는말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대구교회에있던 류권사의 딸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선진광산에 있으면서 대구교회까지 예배를 다니고 있을때 아직 고교생이었던 류집사의 딸이었다

지금은 이곳 교구장인 문홍권목사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류권사라는 사람은 신앙심이 두터워서 여러가지 고생을 경험하면서도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모두 교회에 다녔던 사람인데 그 아이들은 모두 교회의 임원이 되어 있었다.
1983년 나이 들은 식구들의 위로여행을 겸해서 성지순례 여행을 가게 되었다. 70세의 나도 노인식구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 하였다. 그 때 류권사와 20년만에 만나서 그동안의 이야기와 아이들이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서울의 본부교회에서 연락이 온것은 여행에서 돌아 온 무렵인데 중요한 의논할 것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서울로 와 주십시오 라고 한다.

 

오랜간만에 만나 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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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에 있는 그랜드호텔의 커피숍에 당시 승공연맹의 회장이었던 김인철과 국제부장 겸 섭외를 담당한 안병일, 김덕진목사, 유효민, 그리고 나, 다섯 사람이 모였다.

이 날 본부교회가 나에게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 한 이유는,「김덕진의 행동을 억제 할수 있는것은 박선생 밖에 없으므로, 어떻게 좀 설득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김덕진 목사는 경찰의 유치장에서 용의자나 피해자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설교해서 솔직하고 평온한 심경이 되도록 하는 전도 사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김덕진은 전술 한바와 같이 작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통일교회의 식구였을때 통일교회에서 애창하는 성가 20여곡을 작사작곡한중, 성가편집사 유효민씨가 19곡만을 발취 게재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통일교회가 그 노래를 작자의 이름도 게재하지 않고 무단으로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수만부나 인쇄를 해서 판매 하였다.
그 출판권과 저작권의 문제를 제기 하기 위해서 김목사가 용산경찰서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협회장인 이재석을 고소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김목사는 그가 통일교회에 있을무렵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복귀를 받은 유신회 한테서 복귀의 섹스를 받은 뒤에 릴레이식으로 그도 열사람이 넘는 여인들을 복귀 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복귀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복귀하고 그 복귀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복귀 시키면 섹스의 둘레가 점점 넓어져서 온 세계의 인간이 모두 복귀하게 된다.

그에게는 이 복귀원리의 실천의 실천 방법에 관해서 자기의 체험을 그대로 쓴 원고를 각 신문에 발표하고 싶다고 하는 의향도 있었다. (제7장참조) 동시에 5천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동을 민사재판에 걸어 김덕진 목사가 5백만원의 공탁금을 내서 「성가」의 가창 금지처분을 신청할 계획도 있었다.

김 목사는 이러한 계획을 변호사와 의논해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날 회합이 이루어 졌던 것이다.
나는 김덕진과 친하고 그의 심정이나 노여움도 잘 이해 할 수 있었으나, 한 식구들로서 통일교회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좀 더 통일교회의 꼴을 두고 보자. 문제제기는 아무때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라고 김덕진을 설득시켜 우선 소송을 중지 시킬 수가 있었다.
그 때 안병일과 김인철이 나에게 「박선생 당신은 인천에 있는 것보다 서울 본부로 오는것이 좋겠오」라고 말해서 그로부터 3년간 나는 본부교회로 나오게 되었다.

 

통일교 창립의 산증인

 

서울의 본부교회에서는 가장 고참인 원로인 나에게 어떤 직책이라도 붙여 주려고 이것저것 제안해 왔으나 나는 모두 거절 하였다.

통일교회의 태동기에서 부터 관여 해 온 한 사람인 나는, 나이먹고 늙은 식구로서 통일교회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 되는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협력은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낳은 자식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어버이의 심경이기도 하였다.
나는 1981년에서 5년간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몸과 마음을 다해 기도도 했다. 또 통일교회에는 「박정화는 재림 메시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산증인」으로 선전되어 이곳 저곳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일본에도 가서 십 수개소에서 40회에 걸쳐 약 5천명 앞에서 강연도 했다.
다만 나의 증언에는 반드시 조건이 붙었다.
강연하는 내용은 「흥남감옥에서 남쪽으로 피난 한것 까지」로. 그 이외의 것은 말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요컨대 문선명이 얼마나 고난의 길을 넘고 넘어온 위대한 인물인가 를 많은 사람에게 인상 깊게 심어 주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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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복잡한 심경 이었지만 사실 있었던 그대로를 이야기 했다.
그래도 나는 통일교회의 열렬한 식구는 좋아 했다.
어떤 종교도 그러하지만 위의 간부는 썩어 있어도, 말단의 신자는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1985년 7월 8일 나는 통일 신학교 학생회장들의 요청으로 「피난길을 실현했다.

문선명과 함께 평양에서 부산까지 내려갔던 피난과정을 재현 하기위해서 임진강에서 영등포까지 걸어 주었으면 하는 부탁 이었다.

나는 임진강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것을 부자유한 몸으로 18키로의 거리를 도보로 강행했다.
이 때문에 발이 부어 올라서 병원에 다니게 되었다.

74세라고 하는 나이 에다가 너무나도 장시간을 걸었기 때문에 혈액의 순환이 나빠져
서 옛날에 골절했던 부위가 부어 올라 오는 것이 아닌가?

병원에서는 이 부어 오른 독이 뱃속으로 돌면 위험하다고 겁을 준다.

맨 처음 치료에서 약값이 2만원 침값이 5천원 교통비 4천원등 약 3만원인데 완치 하기 까지 나의 경제 형편으로는 지불이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학생회장에게 연락 해 보았으나 아무런 답변도 없었으므로 하는수 없이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간직해 두였던 수표를 은행에 넣고 한달에 백만원이란 비용을 들여서 겨우 치료할 수 있었다.
통일신학교의 교장 이었던 이요한 목사에게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치료비의 분담을 사정해 보았으나 이목사도 「자기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고 냉정하게 거절 당하고 말았다.
이요한목사 정도의 고참도 이렇게도 명확한 문제를 「어떻게도 할 수 없다 」고 한것은 사람을 이용 할 만큼 이용하고 다음은 쓰고 버리듯 하는 문선명의 체질과 독재 지배가 변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83년의 어느날 통일교회의 국제부에서 나에게 연락이 있었다.
「잠깐 물어 보고 싶은것이 있으니 와 주십시요」하고 하는 것이었다.
가 보았더니 「중앙일보」에 실린 사진을 보여 주며 이 사진을 알고 있는가 하고 국제부장의 안병일이 물어 왔다.
그 사진은 머리카락이 짧은 사람이 겨울용 방한모자를 쓰고 무엇인가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을 업고서 바지를 걷어 올리고 냇물을 건너고 있는 사진 이었다. 이 사진은 문선명선생이 박선생을 등에 업고 시냇물을 건너고 있는 사진이 아닙니까 하고 안병일이 물어 왔다.
나는 그 당시는 사진을 찍을만한 여유 같은 것도 없었고, 선생한데 업혀서 냇물을 건넌일은 없소 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국제부에 있던 직원들도 아무말도 못하고 이 건은 그것으로 끝났다고 나는 생각 했었다.
그런데 그해 5월 나는 일본에 가게 되었다. 동경 시부야의 본부교회로 안내되어 갔더니 아랫층 응접실에 걸려 있는 문선명 선생의 초기의 발자취 라고 하는 전시장에 중앙일보에 실렸던 사진을 벽의 크기만큼 확대한 것이 걸려 있었다. 일본 본부교회 간부들이 몰려와서 그사진 앞에 나를 세워 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 사진에 대해서 그들이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미국에 있는 문선명이 이사진을 맨 처음에 보고, 이것은 내가 피난할 때에 박정화를 업고 한겨울 추운때에 맨발로 냇물을 건너는 장면이다 라고 이야기 한듯 하다.


그 장본인이 왔다고 해서 일본에 있는 식구들이 감격해서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으면 하고 부탁을 했다.
한국의 통일교회의 국제부에서 말한 것 처럼 이런 사진은 촬영한 일이 없오. 문선명선생이 나를 등에 업고 맨발로 내를 건넌 일은 없다고.

말해 버린다면 문선명이 거짓말을 한것이 된다.

그렇게되면 일본의 식구들은 실망한것이 틀림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할수 없이 거짓말을 할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용매도에 있을때 청룡반도에서 돌아을 때에 만조되어 할 수없이 선생한테 업혀서 건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 15.6인 정도의 식구가 따라와서 우리들의 모양을 사진으로 찍어 놓았다. 이승만대통령의 부인 후란체스카여사가 동란의 사진을 수집하고 있어서 중앙일보에 제공한 것이겠지오 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식구들은 감격해 있었으나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대단히 괴로웠다.
이 사진이 또 1985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의 「비화6 25=정일권회상록」에 기재 되었는데 중앙일보에 실었던것 보다도 훨씬 또렸하게 보였다.
그 사진을 보니까 찍혀져 있는 것이 문선명과 내가 아닌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사실이 아닌것을 사실인것 처럼 만들어 내는 것은 통일교회로서는 극히 보상적인 것으로서 그들이 선전하는 때의 상투적인 수단인것이다.


원리는 김백문(金百文)의것 도용


서울의 본부에 나가게 되면서 부터 나는 창립당시에 수고한 많은 식구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탈퇴한 사람도 많고 또 그속에서 버티고있는 사람도 있었다. 년로(늙으신)한 부인들이 더욱 불쌍했다.
복귀원리를 구실로 문선명에게 몸을 마구 짓밟히고 재산도 가족도 잃고 생활에 어려운 처지가 되어 버린 그 사람들은 문선명을 원망하며 이런 인생으로 만들어 버린 하나님도 나쁘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통일교회는 표면적으로는 대단한 세력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 같았으나,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돈에 얽힌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1984년 7월 20일 문선명은 탈세한 죄로 아메리카 커네티같주의 렌단베리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함께 수감되어 5개월 가까이나 형무소에서 문선명과 생활한 일본인 가미야마(챠ㄴU)(그후. 일본 통일협회의회장에 취임 92년)은 형무소에서의 문선명 선생의 태도는 훌륭했다는 등으로 발표했으나, 그것은 문선명이 형무소에 들어가는 일이 세번째로서 이미 길이잘 들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 이야기다.

흥남에서는 평양의 여성들과의 성문란한 행위로 사회질서 문란죄, 서울에서는 식구들의 위증과 우리들의 필사적인 행동으로 증거인멸을 한 덕택에 무죄로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대로 라면 장기형이 되는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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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탈세사건 외에도, 부동산취득을 둘러 싼 미묘한 소문도 얽혀있다. 1년을 넘게 옥중에서 보내고 다음해 8월 20일에 석방 되었으나, 통일교회는 문선명선생은 사실 무근이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35만명이나 되는 미국의 목사에게 통일원리의 비디오나 책을 증정하며 막대한 돈을 써서 출소잔치를 하는것 보다도 좀더 발밑을 비쳐보는 행동이야말로 진짜 원리가 아니었을까.

더구나 통일교회가 보배처럼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창조, 타락, 복귀의 원리」는 문선명의 발안(發案)이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 밑에 최선길 부인과 다니고 있던 문선명이 김백문의 논리를 그
대로 도용 한 것이다.

되는데로 외워서 논리일관이 되지 못한채, 종이에 연필로 쓴 문선명의 메모를 유효민이 정서해서 정리 하고, 유효원이 논리에 모순없이 구성 한 것이다.
통일교회의 원리는 죽은 유효원이 진짜이며, 원칙대로 하자면 오직 유효원이 진짜 교주이다. 그 큰 은혜를 입은 유효원의 우수한 두뇌와 인격을 질투한 문선명은 그 후 갖은 수단으로 몹쓸짓을 곁드려서 드디어는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도 있다. (후술)

통일교회의 원리는 문선명이 김백문의 는리를 도용해서 유효원이 정리해 낸 것이라고 내가 지적하는 근거는, 김백문 저작 「기독교 근본원리와 성신신학」을 읽으면 일목요연하다.


이복헝제 결혼 의혹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어느 때인가 부산에 있는 송병호 가족이 별안간 나에게 전화를 해서 부산의 대학병원에 송사장이 입원중인데, 박선생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송사장은 위독한 상태 입니다 라고 말한다. 나는 바로 달려 가고 싶었으나 그때는 나도 마침 병이 들어서 몸을 가누기 조차 어려운 형편 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 병이 웬만하면 곧 찾아 가리다 라고 말하였는데, 3일후에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다.

이 죽은 송사장이 생전에 몇차례 나에게 문선명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일이 있다.
문선명의 처인 학자 이외의 여자에게서 난 아들과, 간부의 딸이 결혼했는데 이것은 남매결혼이 아닌가?
그 간부 부인은 9세의 차이가 크게 있어서 웬만해서는 결혼의 상대가 될수 없는 터 인데 ,
36가정 (후술)의 하나로 되었다.
실은 그때 그처는 문선명과의 복귀로 임신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적당한 식구가 없어서 김영희나 이성례의 경우처럼 부탁 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할수 없이 한 간부에게 맡겨서 문선명이 임신시킨 식구와 결혼 시켰던 모양이다.
문선명의 아들인 그남자 아이와, 간부와 그의처 두사람 사이에서 낳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문선명의 아이인 딸이 결혼 하는 것은 남매 결혼이 틀림없다.

한국의 관습상 남매결혼이란 말도 되지 않는 것으로서 있어서는 않되는 일이다. 나는 열심이 그렇지 않다. 무슨 착오 이겠지 하고 그를 이해 시키려고 애썼다.

이 송사장은 부산에서 내가 문선명을 소개 해서 식구가 되었다. 서울의 연희전문학교(현재의 연세대학교)출신으로 매우 친하게 지내고있었다. 부산의 세관과장을 퇴직하고 나서 통관사무소를 경영한 사장이었다
통일교회가 드디어「원리해설」을 출판하게 되었을때 내가 부탁해서 50만원의 자금을 내 준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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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 동안은 왜 열심으로 나오는식구로서 제법 많은 헌금도 하였는데, 문선명이란 남자의 정체를 보고는 크게 실망했다고 노해서 탈퇴해 버렸으나 그후에도 문선명의 일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 송사장이 자신을 가지고 사실이다 라고 말한 이상 나는 반론 할 수 없었다.
또 당시는 광산에 있어서 36가정의 경위를 몰랐던 나에게는 또 반론의 재료도 없었다.

 

원리대로 실천한 김덕진(金德振)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복귀문제로 무어라 해도 기록에 남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앞에서도 기술한 바 있는 김 덕진의 문제이다.
서진광산 시절에 조동석이 서울에서 김덕진을 데리고 대구로 왔다는연락이 있어서 내가 대구로 가니까, 문선명이 김덕진은 서울에 문제가 많으니까 광산에 있는 박정화 한테로
데려 가라고 명령해서 데리고 왔다고 한다. 김덕진은 본래 음악에 재능이있는 예술가로서 솔직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나는 김덕진과 같이 광산으로 돌아 왔으나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깊은 산골에 오게된 경유를 그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문선명의 원리를 듣고, 문선명 한테 복귀를 받은 여자 한테서 자기도 복귀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도 다른 여인에게 복귀 해 주었는데, 그것은 원리대로 실천 한것 뿐이다 라고 말한다. 문선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 유신희 한테서 김덕진은 원리대로 세차례에 걸쳐 복귀를 받은 모양이다.

그 유신희 한테서 복귀를 받은 그는 종로 5가의 엄순태의 집에서 5인의 여자들을 복귀 시켰다 .그 여자들이 또다른 남자들을 복귀시켜 불과 한주일동안에 70여명의 남녀가 복귀 의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점점 넓혀져 갔던바 복귀라고 하는 남녀의 섹스 소문이 협회장인 유효원이나 문선명의 귀에 들어갔다.
그 결과 문제의 김덕진을 서진광산의 나있는 곳으로 추방해서 두번 다시 서울에 나타나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광산으로 온 김덕진은 광산의 굴속에는 들어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 혼자 처 밖혀
서 오직 열심히 원리에 근거한 작사나 작곡을 하고 있었다. 나는 김덕진에게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정직하게 말해 주었으면 하고 물었더니 나는 원리대로 실천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당신은 원리대로 실천 한것이니까 당신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약 2년간 나는 그와함께 대화했다.
김덕진은 문선명 한테서 오는 송금이 뚝 끊겨서 먹을것도 없을 때, 또 서울로 가서 재차 복귀의 실천을 하기 시작 했다.

또 유효원이 나에게 연락이 왔으므로, 나는 서울로 가서 복귀의 실천을 하고 있던 김덕
진을 대구로 데려와서 현재의 부인과 결혼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김덕진은 원리대로 실천한 것 뿐이다. 무엇이 나쁘다고 할 것인가?
문선명은 원리의 설교를 해서 일일이 셈 할 수 없을 정도의 가정을 파괴하였으며 김덕진도 문선명의 원리대로 실천 했을 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을 산속의 광산에 가두어 두고, 서울에는 두번다시 나타나지 못 하도록 강금한 것은 이해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때의 나로서는어떻게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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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가정의 역할

 

속출한 재림 메시아들의 대책

 

도리켜 생각해 본다면, 원리대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 남자 식구를 복귀시켜 그남자 식구들이 또 다른 여자식구를 복귀 시킨다고 하는 방식으로 이세상의 전인간을 복귀하여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은 당연 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중에 「나만이 재림 메시아다. 저 문선명은 엉터리고 사단이다」라고 부르짖어 자기의 복귀를 받지 않으면 진짜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몇 사람씩 각곳에 출현해서 그사람에게서 복귀를 받고자 모여드는 신자들도 늘어 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되니까 문선명 은 생각끝에 「36가정」이 란것을 생각해 냈다.

문선명이 세계의 인간을 모두 복귀해서 혈대교환(血代交換)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므로이 36가정만을 직접복귀(혈대교환)시키기로 한것이다.

그 후에는 진정한 부모가 「성수」를 뿌려서 새로 결혼하는 신부에게 축복을 준다고 하는 형태로 바꾸어 「합동결혼식」을 하기로 한것이다.

36가정이라고 하는것은 이러한 경로로 만들어 진 것인데 그러면 왜 36인가?

「구약시대」의 12지파,「신약시대」의 예수의 12제자, 그리고 문선명의 원리를 「성약시대」라고 해서 12제자, 합계 36가정을 택하여 빼앗긴 종적(縱的)인역사를 횡적(橫的)으로 벌려 놓코, 탕감복귀 한다는 조건만을 세워 구약, 신약, 성약과 전세계를 탕감복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36인의 신부는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나 상대가 아니고서는 자격 이 없다고 되어 있다.

복귀라고 하는 것은 섹스를 뜻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혈대교환(血代交換)」이다.

제2의 아담인 예수가 이루지 못했던것을, 제3의 아담(요컨대 문선명)이 이세상에 재림해서,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한다.

이것은 요컨대 메시아가 세계의 대표로서 6인의 마리아와, 36가정의 아내들과 섹스를 하면, 더러워진 피가 깨끗하게 된다고하는 것인데, 이 의식을 혈대교환(血代交換)이라고 한다.

그리고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한 36가정에서 태어 나는 아이들은, 죄없는 하나님의 자녀 뿐이며 이러한 사람들이 세계에 널리 퍼짐으로써 죄악이 없는 세상에 태어 난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에는 36가정과 6마리아와 같이 문선명과 직접 간접복귀의 혈대교환(血代交換)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 한다. 제아무리 식성좋은 문선명이라도 전부 먹어 치울 수 없는 많은 수 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문선명이「성수」를 뿌림으로서 그것에 대신하고 있으며 섹스 3회의 방법은 그대로 하고 있다.

또 일본에서는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피나누기 라는 표현으로 인식되고 있는것 같은데, 통일교회에는 피나누기란 말은 없다. 어디에선가 잘못 전해진 것이 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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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36가정은 혈대관계를 한 신성한 가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통일교회의 식구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어떠한 중요한 일이 생기면 대개 이 36가정에서 그 책임자를 선임하게 된다고 하는 중요한 지위 에 있다. 이 가정에서 어느 한쪽이 사망한 가정이 5가정 또 탈퇴한 가정이 9가정이 있다.
이들 14가정의 존재가, 문선생의 원리의 어디엔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생각케 해 준다.

원리에 의하면, 잃어버린 해와를 도로찾고, 6마리아도 도로 찾는다면,참부모와 함께 살수 있게 되어서 타락했던 인간이 창조 본래의 인간으로 회복되고, 그 원리대로 생각하면 두번다시 이세상에는 이 36가정과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죽음도 없고, 고통도 없고, 타락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되는데,어찌하여 이 36가정중의 14가정이 죽든지 탈회 하던지 하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그 원리에 잘못이 있음으로써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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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된 공로자

 

또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 라고 한다면, 초기(처음)부터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양말을 짜 신긴 옥상현*, 자기 인생의 절반 이상을 문선명에게 바쳐 충성한 96세나 되는 그녀가 셋방살이로 겨우살아가고 있는 상황을 문선명은 무슨짓을 해서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본래 송도욱 장로의 처 였던 박봉식집사의 경우를 보자.

문선명이 송도욱 장로와 오명춘* 집사를 결혼 시켰기 때문에, 홀로 되고 말았다.
그후 남편도 곧 죽고, 갈곳이 없어진 박봉식 집사는 교회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늙은이는 더이상 소용없다고 하는 교회의 방침으로 교회에서도 쫓겨나서 먹고 살기도 어렵게 되었다. 열심히 문선명을 받들어 온 여인들을 어째서 이다지도 몰인정하게 못본체 내버려 둘 수가 있을까?

초기에 자기가 복귀 시킬 때에는 좋아서 함부로 아무짓이나 하고 그 젊음과 아름다움과 돈이 없어 지니까 곧바로 따돌려 치우고, 다른 여자에게로 옮겨가서 두번다시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것은 원리에 써 있지 않다.

이것을 여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 박정화처럼 부러진 다리를 끌며 함께 남쪽으로 피난 해 온 사람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만들어서 배신자로 소문을 퍼트려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원고를 완성해서 진상을 밝혀야겠다고 결심 했다.
아무리 생각 해봐도 내가 문선명을 배신 한것이 아니라, 문선명이 나를 배신 한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선명보다 뛰어난 인격자-유효원

 

다음에는 유효원씨에 대해서 밝혀 두고자 한다.

이것을 근거로 유효원이 구성 집필한「원리해설」를 완성 할 뿐만아니라, 불구의 몸으로 정력을 다해서 전도사 양성에 밤낮이 따로 없이 충성을 다했으며, 36가정을 선정 할 때에는 그가 고생해서 각자의 짝 짓기를 결정하는 임무를 수행 했다.

유효원은 구 경성제국대학의 의학과 중퇴자로 자기가 환자의 몸 인데도, 자기병에 대해서는 자제히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 결핵성 고관절염으로 다리뼈와 환도뼈가 유착되어 앉을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수술을 받으면 완치가 안될 몸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것을 알고 있는 문선명이 와서 하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수술하도록 명령 하였다.
문선명은 그때 그래도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것은 하늘의 명령에 거역하는 것이다 라고 까지 말했다고 한다.
유효원은 울면서 수술 하는것을 거부 하였다.
자기는 주사로 살아가는데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고 나에게 의논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문선명한테는 거역하지 못하고 할수없이 수술을 받아 그대로 죽고 말았다.
이때의 문선명의 비정한 행실은 내부에서도 간접살인 이다 라고 까지 말했을 정도이다.
유효원의 장례식이 끝나고 산에서 돌아온뒤 교회에서 간부들이 모여 않은 자리에서 효원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었나 했더니 죽었구먼 ! 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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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가 좋은 인격자로 신자들의 인기가 대단 하였던 유효원에게 문선명은 많은 비밀을 지령하고 후에 위험 한 존재 임을 느끼고 유효원을 거세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또 당시 미국에 있던 대간부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36가정의 멤버였던 이기석, 박종구(주.이 두사람은 당시 이미 죽었었다) 두 사람은 영계에서 대단히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유효원씨는 제일 말석에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그는 통일세계 라고 하는 잡지에 이 기사를 기재하고 청평기도원에서도 발표 하였다. 참으로 죽은 사람에 대해 가혹한 매질이 아닐수 없다.

유효원이야 말로 통일교회 최대의 공로자인데도 볼일이 끝나면 들어덤벼서 못살게 굴고는 죽은 다음에도 매질을 하는 것이다.


재정을 이룩한 실업가 - 유호민


유효민의 이야기도 해 두어야겠다.

유효민은 초기에 경제적 사정이 대단히 어려웠을 때에 푸로마이드 사진을 제작 판매하는 아이디어를 발휘해 당시의 식구들의 생활을 지탱시켜 주는등, 통일교회의 발전에 공헌한사람이다.
또 산탄공기총을 발명하여 그것을 제조 판매 함으로서 통일교회의 경제적인 토대를 이룩한 공로자,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통일산업주식회사」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 공헌자인 유효민에게는 주권을 단 천주를 주었을뿐(후에 다 회수하였지 만) 공기총의 발명특허권 (실용신안국제특허 )은 문선명의 명의로 기증하는 것으로 공증되어 조립부장이라는 직책만을 부여했다.
유효민은 그후 을지로의 예화 공기총 센타에서 백구섭에게 영업부장 일을 맡기고 계속 밖에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30원짜리 차값까지도 영수증을 요구 할정도로 무섭게 감시를 당했다고 한다. -문선명의 지시였을 것이지만, 나와 같은 모양으로 그를 통일교회에서 몰아내려고 한 수작이었다고 생각된다.

드디어 유효민은 통일교회와 인연을 끊고 1972년에 탈퇴하고 말았다. 나의 다음으로 그림자 같은 존재가 탈퇴 한다고 하는것은 유효민이 두번째이다.

이와같이 가장 최초의 비서였던, 박정화를 배신하고, 두면째 유효민을 못견디게 굴어서 탈회 시키고 ,제3의 송도욱이나 교회최고의 두뇌이자 공로자인 유효원을 사망케 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인지, 문선명의 계획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문선명과 같이 있었던 1953년에서 1956년에 서진광산으로 갈때까지의 말하자면 통일교회 발전의 제일 고생한 무렵에는 문선명의 친척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후에도 도중에 문성균, 문용선, 문승룡 두사람이 들어 왔을 뿐이고, 통일교회의 경제가 커 지니까, 거의 대부분의 경제지배를 문선명의 친척 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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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가 아닌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것은, 문선명 자신이다. 통일교회의 재산을 안심 할수 있는 자기의 친척에게 넘겨서 장래의 생활기반을 확립하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제7장 참조)


화제의 다보탑을 수출한 일신석재사장-유호영


나는 어느때 일신석재사장인 유효영(註 - 92년에 그만두고 탈회)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유효영의 이야기로는 자기가 경영하고 있는「일신석재주식회사」에서 열심히 지혜를 짜서 연구한 결과 다보탑을「100분의 16」크기로 축소 한 것을 제작해서 일본에 판매하여본 결과 예상외로 수출이 잘되 매월 20억원 상당을 수출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수입에 탐이난 문승룡(문선명의 6촌)은 다보탑 제조부문은 자기가 그 나머지 부분만을 유효영 사장이 담당하는 공장 분활 경영안을 끈길기게 요구했다. 다보탑부분의 수입이 회사 전체 수입의 95%나 차지했다.
지금까지 참고 견디어 온 나에게는 5%만을 건네주고 남어지 95%를 문승룡이 가로 채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림도 없는 생각이다.

이회사 일신석재는 유효영사장이 사장겸 목수겸 노동자로 스스로 청소까지 해가며 여기까지 키워 온 회사이다.
그런데도 전연 관계가 없었던 사람이 뛰어들어 빼앗으려고 하니까 어림도 없는 짓이다 라고 말하며 유효영은 크게 싸웠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부산-대구-서울시대, 북조선에서의 형무소 시대의 일을 생각 하였다.
그 당시는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라고 우러러보며 원리를 듣고 새로운 식구를 모으기에 필사적 이었다. 이 식구들과 함께 원리 그대로의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매일처럼 노동했다 여성들은 재산도 질투도 생각지 않고 원리에만 열심이었다. 자아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오로지 원리의 달성을 기원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력하였다.


문선명의 부정과 범죄

그런데 그다지도 어려웠던 시대가 지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까 들어보지도 못했던 문선명의 친척들이 몰려 들어 차지하고 문선명 일족의 천하가 되어 버렸다.
문선명은 박모라고 하는 사람에게 자금을 건네주고 그 박의 명으로 몰래 부동산을 구입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세무서의 조사에 들통나 자그만치 1억 2친만원의 막대한 세금부과에 놀란 박이 밝힘으로 통일교회의 문선명이 부동산을 부정으로 구입하고 있던것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행위 가 메시아를 자칭하는 사나이가 할짓인가?

문선명 이 탈세관계로 미국의 형무소에서 복역한 그것도 통일교회에 발표대로 「문선명선생은 아무 죄도 없는데 복역했다. 」고 하는것이 된다. 그 복역하고 있을때에도 막대한 돈을 마구 뿌리며 지내고 있다고 폭로되었는데, 타인의 명의로 부동산을 부정구입 하는 맞잡이나 돈이 되는 기업은 거의 문선명의 친적에게 빼앗기고 있는 현실을 볼때 대관절 이것이 종교 단체인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선명이 나에게 이야기 해 준 원리와 이상세계 그리고 그 이상세계의 공생 공의(共生公義)주의 시대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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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 일족의 「더 돈을 보내라」「빨리 현금을 보내라」고 하는 소리가 되어 세계로 날은다. 특히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통일교회의 실태를 모르는 식구들이 이상세계의 실현을 믿고 돈 수집에 열심히 뛰어서 영감상법(靈感商法) 이라고 하는 반사회적인 큰문제로 발전했다.
초창기의 노고를 알지 못하는 일족이 저지른 폐해(弊害)라고 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법에 저촉되 어 훔치더라도 하나님은 용서해 준다」고 여자식구를 꾀어서 문선명의 친척인체 하는 말투로 물욕 금전욕에 한층 더 박차를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한국은 일제지배로 피해를 받았다. 그 일본에 원한을 갚기 위해서도 일본의 돈을 싹싹 긁어 내야 한다고 문선명이 호언하고 있던 사실(여러사람의 간부가 들은바 있다)을 일본의 순수한 교인들은 알고 있을것인가?

원리의 이상사회등은 꿈같은 이야기일뿐 재림메시아의 아버지는 별것 아닌 허상에 불과 하다는 것을 빨리 알아야할 것이다.


도대체 통일교회 란 무엇인가?

종교인가?

단순히 배금 기업체인가?

문선명 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메시아를 자칭 하고 있을뿐이라면 원리 는 어떻게 된 것 인가?

문선명의 행위가 원리에 따라서 복귀를 한 것이라고 한다면 원리대로 6인의 마리아로 충분하지 않은가?

6인의 마리아의 정조를 빼앗앗을 뿐만아니라 그외에 더 복귀라고 하는 명목으로 헤아릴수 없을 정도의 많은 여성을 범하고 재산을 착취 한것은 용서할 수 없다.
참 어머니로 한다고 속여서 처녀인 이성화를 서울역전의 여관에서 범하고 또 이순철도 같은 구실로서 범하고 그밖에 김영희라고 하는 처녀도 같은 구실로 복귀해서 임신 시켜서 학생 이였던 그녀의 인생을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것은 재림 메시아를 자칭하는 문선명의크나큰 범죄이며 통일교회로서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김영희의 비찰


연세대학교의 우수한 학생이었던 김영희의 경우를 특기하면 김영희를 임신 시킨것을 알게 된 문선명은 자기의 입장이 위태로울 것을 두려워해서 그녀를 같은 대학의 학생으로서 교인이 된 순수한 청년 오승택과 함께 일본으로 가도록 계획을 꾸몄다.

외국에서의 생활을 보장 한다고 약속해서 부산에서 일본으로 탄피를 밀수출하는 작은 배
에 숨겨서 밀항했던 것이다. (이 비용은 오군이 등록금으로 아버지를속여 받은것)
일본에서의 두 사람은 언어도 통하지 않고 밀항자의 몸으로 입원도 할수가 없어서 극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해산 하였다. 젊은 오승택은 갓난애기의 탯줄을 자기의 이발로 끊고 애기를 출산 시켰다고 한다.

가지고 왔던 얼마 안되는 돈은 다 써버렸고 문선명 한테서의 생활비도 오지 않아 기다리다 지쳐버린 오승택은 일본으로 밀항시킬때 문선명이 부를 때까지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있었지만, 문선명한테로 돌아 오기 위해서 또 다시 밀항을 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대단한 고생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우선 오청년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직접 문선생에게 이야기 해서 생활비를 얻어낼 예정 이었다.

오승택은 문선명을 만나서 자기들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 하고 생활비를 구하였더니 문선명은 이것을 한마디로 거절 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가혹한 이야기는 들어 본 일이 없다. 보통사람이라도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에게 이와같은 처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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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재림 메시아」라고 하는 그사람이 자기가 책임을 지는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다지도 비정한 배신을 태연하게 당하였으므로 오승택은 몹시 노하여 그길로 지금첫 재림메시아로 믿고 우러러 오던 문선명과 결별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때 문선명은 그런 돈은없다. 너희들이 생각해서해 ! 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문선명 옆에 있었으므로 잘 기억하고 있다.
문선명의 말에 오승택은 노발대발 하며 무슨 말인가? 잘 기억해 두라!
너는 사단이다 ! 하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가고 말았다.
김영희가 임신한 당시 연세대학교에서 입교한 세사람의 학생 가운데 사정을 듣고 상의를 받은 오승택이 문선명 메시아와 통일교회를 위하는 것 이라고 믿고서 내가 맡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크리스챤인 부모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고 부산에서 김영희와 만나서 소형 어선을 타고 일본 규슈로 밀항한 것이다.

 오청년이 노해서 뛰쳐나갈때 그자리에 7,8인이 있었으나 누구도 내심으로는 괘심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나는 그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동 ·서도 모르는 일본에서 김영희는 오로지 돈을 가지고 돌아을 오승택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동안의 나날은 김영희와 그 간난애기(문희진)에게는 그 고생 이야말로 대단한 것 이었다.

그러 한 김영희 모자를 일본 오오무라 수용소에서 발견한 한국인의 황모씨가 그녀를 한국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돈도 여권도 없는 김영희는 오오무라 수용소에서 3개월간이나 수용 되었다고 한다.
김영희가 아이를 데리고 돌아 왔으므로 문선명은 할수 없이 아이만은 자기의 호적에 입적 시켰다 아이의 이름은 "문희진" 이라고 한다.

이 아이는 황모라고 하는 사람의 부인이 숨겨서 양육하고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죽어 버렸다.

중학교 여름 방학때 하기 전도 나간다고 큰 학생을 따라 나갔다가 무더운 때라 객차에 오를때 두손으로 붇잡고 오르는 난간을 붇잡고 뒤로 잔득 느러져 시원하게 바람을 쏘이다가 역에 들어갈때 역 시설물에 머리를 부딪쳐 뇌진탕으로 죽었다.

이사건에 대해선 영계가서 소년들을 동원하러 영계에 갔다고 미화 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 이외에는 「어린양의 잔치」를 거행한다는 구실로 처녀인 이성녀를 복귀해서 그녀에게도 아이를 낳게 했다.
그 아이도 어느 간부의 아들로서 양육 되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다.

이러한 일이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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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사람의 어머니


납득되지 않는 사실은 그밖에도 있다. 최원복의 문제이다.
이 사람은 「7.4사건」때에 문선명이 구속되어 교수들이 사표를 내고 졸업반 대학생들이 퇴학을 당하는 소란이 일어 났을때에 우연히 나와 만날 기회가 있어서 대단히 걱정을 해 준 사람이다.
「나도 힘이 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수가 없네요」하며 아쉬워 했다.
그녀는 이미 통일교회에 입교해서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그후 가정도 버리고 문선명 한테로 달려 왔다.
무슨 일에서인지 식구들은 최원복을 「어머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어머님」이라고 하는것은 원리의 어느곳에 나오는 것일까?

6인의 마리아는 예수가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는데, 그것을 못했으므로 예수는 죽었다. 그래서 제3의 아담이 이세상에 와서, 6인의 유부녀를 마리아로 복귀시킨다고 하는 구실로 문선명이 섹스를 하고 그 육체도 재산도 빼앗았다.

그리고 처녀 한사람을 선택하여 「어린양의 잔치」라고 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문선명과 처인 한학자를 「참아버지」「참어머니」라고 부르게 한다.

참어머니는 이미 있는데도 「최원복어머니」라는 명칭은 원리가운데 어디에서 끄집어 낸 이론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선명은 6인의 마리아를 선택 하였고 그중에서 한사람을 특별히 어머니 라고 부르게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문선명 자신이 좋아서 열을 내고 있는 여인 이었으니까, 어머니 라고 이름을 붙인것 뿐이리라. 대단한 이야기다.
나중에 말하자면 문선명의 처인 한학자의 어머니 홍순애가 「미국에가 있는 최원복은 2호다. 첩이다」라고 어린아이들에게 충동질해서 비상수습책으로 선화예술 학교의 교장으로 최원복을 한국으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이 학교는 박보희의 동생 박노희가 이사장으로 있었는데 교장이란 명칭도 다만 겉치레
의 이야기일뿐 문선명이 당황해서 붙여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원리」를 내세우며 뒤로 돌아서면 전연 종교인 답지 않은 문선명의 언동은 여전히 변함없이 여자문제나 부동산의 부정구입 탈세사건 「남의 돈을 훔쳐 와도 하나님은 용서 한다」고 하는 교사등, 일일이 다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이지만, 한가지만 더 나의 체험을 써두고자 한다.


나의 부끄러운 체험

 

나는 제3장에서 문선명으로부터 이순철이 만든 영계의 역사에 관한 시험을 치라는 이순철이 강요에 문제를 보고 답을 썼더니 「됐어 합격」이야 라고 말했다고 썼는데, 사실은 이때 문선명의 눈앞에서 6마리아의 한사람인 이순철과 섹스를 하도록 명령을 받았던 터였다.
 

나는 이미 문선명이 복귀한 6마리아 중 한사람 한테서 복귀를 받았으므로 문선명의 원리에 말하자면 유자격자였다.
그런 나에게 문선명은 이순철과 이자리에서 하라고 재촉했다. 메시아의 명령에는 따를 수 밖에 없어 나는 그 자리에서 이순철과 섹스를 하고 「합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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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술한 바와 같이 남편 몰래 집에서 많은 돈을 가지고 나온 이순철은 격노한 남편한테 쫓기고 있었다.
그래서 위험을 느낀 문선명과 이순철과 함께 여기저기 도피하며 5박을 하면서 부산으로 간것인데 그때도 같은 것을 명령 받았다.

남편의 노여움을 모른체 두사람은 이순철이 가지고 온 돈으로 호화스런 강산유람의 여행을 했다. 그리고 매일밤 두사람의 섹스를 문선명은 나에게「보라」고 말하며 「자네도 하게」라고 명령했다. 거기에는 종교도 없었고 원리도 없었다.

성욕에 놀아난 남녀 세사람이 귀신들린 광란의 성희가 아닌가!

문선명이 말하는 복귀의 정체를 나는 그때 실증이 나도록 체험 하였다.

또 부산의 영도의 밤 비좁은 방에서 자고 있는 나의 옆에서 문선명은「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돼 잠잘코 있어」라고 말했다.

재림메시아라고 자칭 하려면 원리대로 하였을 뿐이지, 왜 감추려고 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해못할것이 많이 있지만 원리를 앞세워 가장하고 해괴한 복귀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피할런지!

 

붉은 용(龍)이 세상을 미혹

 

자칭 재림메시아의 문선명은 그원리를 김백문으로 부터 배워가지고 평양으로가서 파렴치한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어 실형을 받고 복역한 후에 서울로 왔다.
1954년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 여러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통일교회는 점점 성장해서 일본에는 최봉춘(일본이름 니시가와)을 밀항시켜 해외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또 김상철과 김영운이 미국에 포교하여 미국에서도 식구들은 문선명을 아버지로 우러러 재림메시아로 믿고 있다.

그러나 오늘에서 원리와는 관련이 없는 문선명의 행동으로 많은여성들과 남성들이 희생되어 죽은 시체가 가득 쌓인 속에서 원한의 소리가 들려 오는듯 하다.

그리고 지금은 「복귀 실천의 비밀」이나 「실천의 치부」를 알지 못하는 철부지 교인을 전면에서 내세워서 가면을 쓰고 있다.

미국의 형무소에 들어 갔던것을 영광된 큰 기적등으로 선전하여 옥중에 있었어도 막대한 돈을 쓰고 있었다. 그 돈은 여러 식구들이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귀 한 돈인 것이다.

수년전 미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여신자가 한국 인삼차를 팔기 위해서 흑인촌을 찾아 갔다가 집단으로 윤간을 당하고 죽음을 당했다.

흑인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도로에 그 시체를 끌어 내다가 차로 몇차례 깔고 뭉개버린 사건 이었는데 시체의 주머니에서 통일교회 회원증이 나와서 신원이 판명되었다.

이와같이 비참한 희생으로 들어온 돈을 물쓰듯 써버리면서 문산명은 재림메시아를 자칭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식구들이 총동원되어 영감상법(靈感商法)이나 초코렛 껌팔기로 술취한 사람들의 희롱을 받아가면서 돈을벌어, 그돈을 전부 문선명 한테로 보내진다.

그렇게 보내진 돈을 쓰는 명목으로 문선명은 엉뚱한 계획을 꾸며 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국제 하이웨이 건설계획」이다 현해탄에 해저터널을 통해서 일본, 한국 , 중국, 러시아,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 하이웨이를 만들자고 하는 것이다.

통일교회의 내부에서 조차 「실현 불가능」이라고 실소의 소리가 있는데도 말이다.

재림메시아! 문선명이 이세상에 나타나서 국제 하이웨이를 건설하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한다는 거야!

국제 하이웨이건설 같은 것을 계획하기 전에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해서 참 부모가 되어있을 터인데, 그 재림 메시아는 무엇보다도 죄악이없는 세상을 만들어서 에덴의 동산을 복귀해 놓는것이 본래의 그가 할일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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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은 미국의 신문이나 매스컴에서 자기를 「목사」라고 자칭했다. 문선명은 신학교에 다닌 일도 없고, 목사로서의 안수 받은 일도 없다.

만일 통일교회 계열의 신학교에서 얻은 자격이라면, 질문이 있다.

문선명은 처음 부터 자기는 재림 메시아이며, 제3의 아담이다. 그리고 자기의 할 일은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통해서 본래 그대로의 죄없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것이 사명이다 라고 계속 말해 왔다.

그렇다면 재림 메시아가 목사로 변신해서 어떻게 해서 사명을 다 할수 있는가 !

스스로 지 금까지의 속임수는 말 할것도 못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

문선명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 와서 이름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성경의 「요한계시록 12:91에 이 세상에는 끝날에 붉은 용이 나타나서, 이세상을 미혹케 한다고 씌어져 있다.

자기의 이름에 용(龍)이 들어있는 문용명(文龍明)은 그것에 착안해서, 서둘러 이름을 문선명으로 바꾼 것이 었다.

이것은 자기 가 붉은용=사단 임을 인정 한것이 된다. 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천하에 내밝혀 쓴 이 고백에 거짓은 없다.

문선명 이야 말로 진짜 사단이 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 붉은용 문선명으로 인해서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이상, 기만 당하거나 희생되는 것을 방지 하기 위해서 나는 이 원고를 목숨을 걸고 발표 할 결심을 한 것이다.

 

 

진짜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속에서 부터 기원하는 바이다.

 


「1985년 8월 31일 - 1993년 9월30일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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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증언-우리들이 체험한 사실

 

 

통일교회의 경제적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유호민-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문선명의 초대 비서적 이었던 박정화씨의 뒤를 이어 2대의 비서역 사촌간인 유효원, 유
효영 형제와 함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간판을 걸고 발족에서부터 기반 만들기에 크게 공헌

 이화여자대학사건으로 문선명과 옥고 동참
자이며, 36가정의 멤버, 1972년 탈회, 현재
서울거주, 회사사장, 현 72세


나는 통일교회가 정식으로 창립되기 전의 1954년 1월 4일에 부산에서 사촌인 유효원, 유효영과 함께 문선명의 추종자가 되었다.

박정화씨는 그 무렵 식구(신자)의 중심적 존재로서 문선명의 한 팔로서 활동하고 있었고, 나 또한 대단히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는 문교주가 박정화씨를 밖으로 멀리 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원인은 박정화씨는 너무나 문교주의 비밀을 지나치게 알고 있는 처지다. 만약 그가 수사당국에 모든 것을 폭로하게 되면 문선명 선생은 중죄로 될 것은 물론 그가 반대하면 문교주의 모든 행각이 다 탄로 나므로 이 사회에서 파렴치범으로 이 땅에 있을 곳이 없게 된다.
그러니까 박정화는 요주의 인물로서 교인 식구들이 접근치 못하도록, 박정화의 비리에 대한 뉴앙스를 풍겼다. (전매청에 새끼 남품한 돈을 잘라 먹었다는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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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속에서 박씨를 「대구의 할머니들이 박정화는 대사단이다」라고 꿈의 계시를 받았다고 ,귀속말로 퍼뜨렀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박정화씨를 멀리 하기 위한 구실이며, 뒤에서 문선명이 시킨 음모였다고 생각한다.
박씨는 문선명의 여자관계나 돈 출처 문제를 너무나도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소외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상투적 수단이고 나의 경우도 그러 했다.

내가 처음 성경원리를 들을 무렵, 문선명을 위시해서 모인 식구들은 , 그날 먹을 것도 어려운 형편이어서 북한에 있을 때에 사진관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나는 푸로마이드를 제작 판매 하는 일을 제안했다.

이것이 적중해서 하루에 일만 장이나 매상이 있었다.
한장에 7원 전후로 도매한 것을 학교에 못가는 전쟁고아들이 담배나 라이타돌 등을 판자에 넣어 행상하는 때가 유행이 되었다. 10원씩에 팔고 매일 7만원정도씩이나 현금수입이 되었으므로 부엌사정은 단번에 해결하였다.

박정화씨가 말한 바와 같이 남자 식구들은 작업을 분담해서 일을 하고, 여자 식구들은 가위로 잘라서 정리하는 일에 몰두 하였다. 이 일은 2년정도 계속되 었다고 생각한다.
공기총은 1961년부터 시작하여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서 일본에 수출하였으나 공장도 가격으로 1정에 1만원(지금이라면 30만원)에 15만정 이상이 팔렸다.도합 15억원 이었으니까 통일교회에서는 꽤 큰 재원이 되었다.

산탄 공기총을 발명한 내가 「통일산업」의 사장이 되지 못했던 것은 소위 7.4사건(이화여대 14인 퇴학사건)문교주와 옥고를 같이 치렀음으로 전과 기록으로 총포제조 허가조건에 하자가 있었다.

그래서 김인철씨가 사장 문선명의 6촌 문승룡이 공장장,그 아우가 생산부장이 되고 발명자인 나는 "조립부장" 이라고 하는 세상에 유래없는 기묘한 직 책을 받았다.
총의 제 2차특허권은 문교주 지시로 문선명의 명의로 양도 공증까지하였다.

주요간부는 문선명 친척들 뿐, 그들은 한사람이 한대의 차를 가지고 화려하게 타고 돌아다녔으나, 나는 도보를 걸어다닐 수 밖에 없었다.
신앙보다 친척중심의 돈벌이 주의 라고 밖에 생각 할수 없는 입장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은 더욱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나에게 「당신은 사진에 솜씨가 있으니까 사진관이나 안해보려나」농담 말이, 사진관이나 하고 있을 그런 기분이라면 나 혼자서도 된다.
나는 이렇게 강한 반발을 느줬다.

요컨대 이것은 공기총사업도 궤도에 올라셨고 또 문교주의 여자관계도 지나치게 알게 되여 산탄공기총을 발명한 나도 더이상 필요 없으니 그만두라고 하는 암시 아닌가!

1971년 어느날 나는 미국에서 막 귀국한 문선명을 만나서 여러가지 의논을 해 보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측근중에 어머니라고 호칭하는 최원복에게 연락을 하였더니 효민씨라면 시간을 정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와서 만나면 될 것입니다 라고 전화로 통화되어 가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럿이 문교주 중심으로 모여 있는데 예전과 같이 끼여 들었다. 통금시간 12시가 다가 옴으로 한사람 두사람 다 집으로 돌아가고 단둘이 남았다.
그때 뒷문으로 훌적 나가 길래 화장실 가나보다 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다시 들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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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온순한 나라 하더 라도 이 것만은 머리가 화끈거렸다. 전신이 막 뜨거워지며 열이 나고 떨려오는 것을 자신으로서도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나는 문선명이나 통일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온갖 노력과 봉사를 다해 옥고 동참상, 모범상, 14년공로상, 전도상등 교회에 상주하며, 그림자처럼 어디든지 모셨지만 단 한가지라도 가르침에 상반된다든가, 폐를 끼 친 일은 없다.
다만 경제문제나 여자문제를 너무나도 지나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문선명 쪽에서 나를 께름직하게 여기고 배신한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확실하게 인연을 끊고 탈회 하였다.

박정화씨의 체험과 너무나 꼴이 같아서 나는 그의 억울함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본질을 이야기 할 사건에 관해서 나는 한가지 더 구체적 인 것을 증언 해두고 싶다.

그것은 1955년의 「7 4사건」문선명과 우리들 간부가 체포되 었던 사건인 것이다.

7월 4일의 문선명에 이어서 6일에 나도 체포되었다.

체포이유는 「병역기피용의」우리들 북한에서 남으로 나온 피난민에게는 호적이 없었으므로 신분증명서를 만들어 받을 때에 「제 2국민병」으로서의 병역을 면하기 위해서 실제연령보다 5-6세 정도 올려(연상으로)신고 하였었다.
그것이 위반이라고 하는 것인데 문선명 자신도 박정화씨에게 지시해서 위조시키고 있었다.
우리들은 말을 맞추어서 위조에 협력하였다고 공술 하였으나 한편에서 문선명은 자기는 모르는 사이에 제자들이 맘대로 한것 이라고 책임회피하고 있었다.
하나님과 같이 모시는 입장에서 우리들 제자가 그의 연령을 함부로 변경 한다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다. 실제로는 모든 것을 문선명의 지시 에 따랐을 뿐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 「병력기피」용의는 문선명 이하의 간부를 체포해서 취조하기 위한구실이고 실은 「간음과 혼음」을 조사할 목적이었다.

수사관의 질문은 날이 갈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당신들은 부부사이는 어떠한가?
당신부인들과 동침은 언제했나?
한주일에 몇번씩 이나 하는가?
한달에는 몇번이나 했나?

여자 신자들과는 몇번이나 했는가 병 역기 피 와는 관계가 없는가· .

남의 사생활 문제를 집요하게 심문하는 형사에게 큰소리로 대들고 수사관과 입씨름을 한일도 있었다. 그러나 수사관의 조사는 끈질겨서 책상 위에는 문선명과 여자식구들이 관계를 도표로 그린 그림을 놓아두고 섹스관계의 확인을 하는 것이아닌가 ?

나는 시종일관 모른다. 없다고 버티었으나 내심으로는 그 정확함에 탄복하였다 유치장안에 있는 우리들은 밖의 상황을 잘몰랐으나 박정화씨들의 은폐공작의 결과인지 조사를 받은 여성들은 나는 문선명선생과 그런 짓을 한 일이 없고, 나는 꿈에서 섹스는 하였다 등등으로 적당이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경찰은 거의 정확하게 문선명을 둘러싼 여성들의 성관도를 쥐고는있었으나 본인의 친고나 남편으로부터의 고소가 없었고 이사건으로 문교주는 3개월만에 무죄선고로 풀려 났다.
그래서 「7.4사건」은 단순한 병역기피문제가 아니라 통일교회의 안방 깊숙이 숨겨져 있는 섹스문제의 수사가 경찰의 노리는 바였는데 통일교회가 말하는 「아무 것도 아닌 사실무근의 혐의」가 아니라 간신이 문교주와 혼음 사실이 천하에 공포되는 것을 면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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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때 체포되었던 간부의 유치번호는 문선명 390번, 유효원380번, 유효영 1709번 ,나는 1175번 이었다.

김원필도 체포되어 그만이 1년 실형의 판결을 받고 수감 되었다. 하여간 통일교회와 결별하여 두고 두고 냉정하게 문선명이나 협회의 실정을 보니까, 여러가지 모순과 이념이 눈에 띈다.
인류역사의 대세는 분명히 민주주의의 흐름인데도 불구하고 통일교회의 체질은 신앙과 관계없이 문선명에게 아부하는 무리들만 주위에 둘러 있는 독재체제 이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을 어거지로 되돌려서 문명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식구들이 몸을 깍아서 모은 거액의 돈은 문선명 한사람이 관리하고 있어서 어디에 얼마만큼 숨겨 두고 있는지, 현재의 최고 간부들도 모르고 있다.

비민주적인 횡포로서 독재일방의 역사를 거슬러간다. 또 통일교회의 인쇄물에는 어느 것이나 문선명선생이 1948년에 북한에서 체포된것은 공산당의 종교말살정책에 의해서 내무성에 구속 되었던 것이라고 판에 박은 듯이 거짓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북쪽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진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공산주의가 싫어서 1947년 8월 사진관도 각종기계도 그대로 두고 28세때 혼자서 월남했다.
그때까지 나는 선천북교회의 집사였다
그런데 그때 기독교 탄압 같은 것은 없었다.

이것은 통일교회의 거짓의 역사이며 박정화씨가 자세히 쓴 바와 같다.
또 이책 가운데에 소개 되어 있는 것처럼 나자신도 말하자면 36가정의 한사람이지만, 그저 원리만 앞세웠을 뿐 ,으시 대고 폼만재지 아무런 섭리도 없는 일당 독재 체제이다.
그래도 그당시는 부부의 짝짓기를 신중히 생각해서 종로의 유명한 백운학(관상가) 또 이명학(사주가)에게 찿아가 짝짓기 궁합을 맞춰 달라고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최근의 합동결혼식은 마치 마작판의 마작말패 섞드시 남의 인권을 아무렇게나 적당히 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이래서야 참부모가 정해주는 이상상대 축복이 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성스러운 축복 행복한 꿈이 채 가시기전에 여기 저기서 이흔소동이 발생하고 있으니 과연 땅에서 재림주에게 축복 받은것이 하늘에서도 영원한 부부가 될 수 있을까? 그 책임은 또 누가 져야 하는가?

 


유신희 - 6마리아의 한 사람 이었다.

 

1954년부터 수년간 6마리아의 한사람. 문선명의 원리를 믿고 복귀를 받아, 5-6인의 남
성과도 복귀의 실천을 했다.
지금 회고하면 「참으로 어리석었다. 」고 후회하며, 「문선명은 죽어 마땅한 남자다」라고 단언한다.

 

-유신희씨는 부산 영도에서 남편인 신성묵씨와 다섯 아이들과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때 근처에 살고 있던 사촌오빠 유효원의 권유로 문선명의 포교집회에 방을 빌려 주셨던 것이지요.

유 :그렇습니다. 1953년 12월 24일이었읍니다. 처음에도 3일간만 쓰겠다는 약속 이었읍니다만 결국 25일간이나 되고 말았읍니다. 그때 사촌오빠인 유효원, 효영형제, 그리고'유효민등 머리가 좋은 오빠들이 믿게 되므로 우리들 부부도 덩달아 믿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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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 메시아의 위대한 사람이 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세히는 이해하지 못하였었지만, 오빠들이 전부 믿어 우리부부도 덩달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후에 부부가 서울로 가셨군요? 아이들은 어떻게 하셧읍니까?

유 :남편이 먼저 집을 나갔으므로 내가 가족회의 처럼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하였읍니다. 「아빠도 엄마도 재림주가 오셔서 대단히 바쁘게 되었다. 그래서 너회들의 뒷바라지를 할 수 없게 되었구나‥‥」
위 아이는 중학교 2학년생이었고 제일 끝의 막내딸은 아직 여섯살 이었읍니다만, 다섯 아이들이 이해해 주어서 서로 손잡고 고아원으로 보냈읍니다.
정 말로 해서는 않될 짓을 했읍니다.
그로부터 7년동안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벌써 40년이나 지났읍니 다만 지금 아이들은?

유 :모두 기독교신자로서 그저 얌전하게 잘 지내고 있읍니다. 그래도 막내딸하고는 자주 충돌이 있읍니다. 어머니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대단히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나를 책망 한답니다.

 

-문선명과 복귀의 섹스를 한 여성으로서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인터뷰에 응해준 사람은 아마도 유신회씨가 처음이 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지금의 심정은?

유 :지금까지 침묵해 온것은 아이들에게 북귀의 사실이 알려지는것이 부끄럽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벌써 나이가 나인만큼 참을 수 있읍니다만은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사실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기는 합니다만은 나같이 미혹
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죽기보다 어려운 이 사실을 밝혀야 겠다는 결심을 한 바입니다.

 

-문선명과의 복귀에 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해 주십시요?

유 :여자 식구 한사람한테 꾀임에 빠져서 밤늦게 캄캄한 문선명의 방으로 갔읍니다.
거 기서 복귀를 받은 것입니다. 나의 경우는 극히 짧은 시간에 깜딱 할 사이에 끝났읍니다. 사단의 피를 밝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 두번 더 복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었읍니다만은 나는 한번 만으로 끝냈읍니다.

 

-그것은 왜?

유 : 문선명은 여러 여자와의 관계가 많아서 다음에는 언제 내 차례가 돌아 올런지도 몰랐고 또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피난민 시절에 그것은 다름 아닌 범냇골(지금은 성지로 명명 , 통일교 교인들이 세계 각처에서 참배 하러옴) 당시 나는 근처에 살고 있는 터이여서, 우리 아버님과 문선생은 매일 등산 산책을 하는 처지여서 어느날과 같이 나도 손을 잡고 아침 등산 하던중 문선명이 철부지 나를 움막으로 끌고 들어가 성폭행을 해 많은 출혈이 심했었다고 울면서 이야기 하여‥‥ 아무리 복귀라 하는 명분 이라지만 타락이니 복귀니 전혀 귀가 열리지 않은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가 있읍니까?
그래서 나는 두번 복귀를 단념 했읍니다.

 

-문션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다음 유씨는 몇사람의 남성과 복귀를 하였지요.

유 : 그때는 문선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 여성은 다른 남성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쳐서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6인의 남성과 복귀 했읍니다

-그래서 유씨는 6마리아의 한사람이었다고 박정화씨가 썼던데요.

유 : 6마리아의 이야기는 듣기는 하였읍니다만 누가 그런지는 알지 못하였읍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처지 인지 나는 잘 몰랐읍니다.나 보다 훌릉한 여인들이 많이 있었고 문선명의 주위에는 항상 세사람 정도가 바짝 붙어 있어서 나와는 격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
각하고 있었으니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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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사람 이 란 누구인가요?

유 :신정순*, 이순철*, 양윤신*씨 들입니다. 문선명이 유난히도 귀여워했고 후에 재산을 노리고 재벌과 결혼시킨 임영신이 들어 온 것은 그 뒤의 일 입니다.

문선명은 차례 차례로 새 여성을 신변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하는데 같은 여성들 끼리 특탁거리는 일은 없었읍니까?

유 :있었지요. 여자들 끼리니까 질투나 독점욕은 당연히 있읍니다. 그래서 여자들 끼리 심한 싸움이 있을때에는 문선명이 그러한 여자를 때 린 일도 있었읍니다.
그리고 육체도 재산도 빼앗고 볼일이 끝난 여인은 계속 주변에서 내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내 쫓긴 중의 한사람 입니다.

 

-6마리아는 그때 그때의 정원으로 적당이 교체가 되어 결국은 재산이나 새로운 여 인이 목표 이었던가요. 신구교체는 문선명의 독단으로 행해 졌읍니까?

유: 우리들은 옆의 일도 몰랐었읍니다. 그래서 어느땐 그 주위에서 쫓겨난 여자만도 다섯사람이나 되어서 서로 이야기 한일도 있읍니다. 그 정보교환으로 알았읍니다만 실로 여러 여자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것입니다.
처녀를 임신시켜서 아이를 낳게 하기도 하고 유부녀나 어머니와 딸들의 정조를 닥치는 대로 짓밟아서 가족이 풍지박산이 되기도 하고 유복했던 사람이 재산을 빼았겨서 빈털털이가 되기도 하고

 

-여러가지 비극이 셀수 없을 정도로 속출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모두가 참말로 분개 하였었읍니다.

유 : 그렇다고 생각 합니다. 사람이 모여 있을 어느땐가 원리의 설명을 내 사촌오빠인 유효원이 열심히 땀을 흘려가면서 열심히 강의하고 있는데 문선명은 여성들과 히히덕 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 신자들에게는 유효원쪽이 존경을 받았고 인기가 있었읍니다.
그 유효원 오빠는 수술을 받지 않았더라면 좀더 오래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의학부 출신답게 자기 병을 잘 알고 있어서 수술을 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래서 싫어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선명은 병 따위는 진짜 메시아라면 고칠수 있을게다고 말 할것을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러 한 소리도 있었읍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유효원씨에게 무리하게 수술을 시켜서 죽게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기가 높은 효원씨에게 정상의 자리를 빼앗길 일도 없게 되어 문선명은 모름지기 안심 하였을 것입니다.

 

-지금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 보고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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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이제 생각 하는것은 「한(恨)」그것인데 정말로 후회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할말이 없읍니다 나도 정말 바보 였읍니다. 좀더 현명 하였더라면 그때에 선악의 구별이 섰을 터인데 어리석었기 때문에 이렇게 돼 버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남편과도 이흔하고 아이들과도 떨어져서 혼자서 조용히 살고 있읍니다. 나뿐만 아니라 그 무렵 문선명의 신변에서 봉사하게 한 여성으로서 행복하게 된 사람은 한사람도 없읍니다.
모두 문선명의 사기에 속아서 몸도 마음도, 재산도 바치고 걸레가 되어 당장 내일 생활에도 곤난을 겪고있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러한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 할때 우리들의 소원은 단 한가지.문선명은 재림 메시아가 아니다. 죽어 맞당한 사나이 하루라도 랄리 죽었으면 하는 인간이다 라고 하는것 뿐입 니다.

 

 


김덕진 -섹스릴레이의 실천자

 

평양 숭설전문학교 출신.
일본의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일도 있고 음악의 외길틀 걸음.
통일교회에서 애청중인 성가 19골을 작곡,
문선명의 가르침대로, 섹스원리를 실천한 산증인
현대 서울 계주.
경찰목사.
현 80세

 

나는 어느 한국육군의 고급 장교의 보신을 위한 모략으로 북의 스파이로 몰려서 유엔군 제1형무소에 무기징역수(438번)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것이 사실무근인 것으로 증명되어
1954년 11월 27일에 무죄로 석방이 되었읍니다.
그래서 출소 할때 형무소에서 내가 노래를 가르쳐주고 있던 이석빈이란 남자가 자기는 재 림주 문선명의 제자 이므로 출소해서 서울로 가거던 찾아서 바드시 이 편지를 전해 주십시요 라고 하며 한통의 편지를 맡겼다.
봉투곁에 「아버님전상서」 뒷면에는 제자 이석빈 이라고 써 있었읍니다.

누이동생 집에서 한동안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 그럼 문선명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그 당시는 아직 통일교회 따위는 아무도 몰랐었다. 거처를 모르고서는 편지를 건네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친한 친구인 중부경찰서장에게 부하에게 명해서 빨리 찾아주게나 하고 부탁하였읍니다.
보잘것 없는 작은 집을 찾아 가서 나는 이런 사람인데 형무소 안에서 이런 편지를 맡아 가지고 왔다고 말하니까 문선명을 만나게 해주더군요.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여성이 선생님 예배 시간 입니다 예배를 하셔야· .
그리고 나에게도 함께 어떻습니까 하기에 같이 참가 하였지요.

 

좁은곳인데 풍금도 아무 것도 없었읍니다. 처음에 노래한 찬송가란 것이6천년 한이 맺힌 싸움의 동산 승리의 월계관을 찾아 구하여‥‥ 문선명이 작사 하였다고 하는 「복귀의 낙원」이라던가 이 세상을 에덴의 동산으로 복귀한다고 하는것 같은 가사였는데 웬일인지 그 노래를 일본의군함 행진곡의 곡조로 노래하고 있는 거예요. 놀란 나는 끝난 뒤에 말
해 주었읍니다.

세계를 통일하는 살아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한국인의 원수인 일본국의 그것도 가장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군함 행진곡으로 자작의'찬송가를 부른다는것은 무슨 일이요? 이렇게 바보스러운일이 어디에 있오?
어찌 당신이 재림메시아란 말이요? 여러가지 질문을 하였더니 문선명은 얼굴을 벌겋게 하고 있더니만 김선생 부탁이 있오. 내가 작사 한것이 또 다른것도 있으니‥‥ 라고 말하며 나에게 작곡을 부탁 하였읍니다.
즉석에서 좋다고 대답하고 그후 약 2,3년간에 나는 통일교회의 성가를 작곡하였읍니다. 문선명 작사가 5곡, 유효원 작사가 1곡, 나의 작사가 13곡 모두 19곡이 나의 작곡인데 지금도 전 세계의 통일교회에서 열심히 불리우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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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만든 성가책에는 「작사, 작곡, 김덕진을 지워 버렸고 다만 일본책에는 문선명 작사, 김덕진 작곡」이 5곡과, 「작사, 작곡 김덕진」14곡 모두 19곡이 실려 있읍니다.
 

잠깐 이야기는 조금 뒤로 돌아 갑니다만,

문선명을 방문했던 다음날 부터 아름다운 여성들이 매제의 집으로나를 찾아 오게 되었읍니다. 김선생님 저희들의 교회로 다니시지요 하는 것 이었읍니다. 작곡을 맡은것도 있고 해서 다니기 시작 하였더니 대우가 좋았다.

모두들 같이 푸로마이드 사진을 만들고 있었고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도하고 있는 신자도 있던 시대였다. 그렇게 가난한 속에서 나에게 신사복을 여러벌 만들어 주어서 즐거워서 열심히 작곡을 한 셈이지요.
그러는 동안에 싫어도 문전명의 원리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6천년전 에덴의 동산에서 아직 고교생 정도의 나이로 미성숙했던 해와을 사단의 천사장 루시엘이 범하고 말았다.
이것이 세상에 악을 가져온 원죄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눈에는 눈을 이에는 이로 이번에는 사단을 속이고 세상의 여성들을 복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문선명은 젊었을 시절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재림메시아 임으로 섹스로 파탄이 된 세상을 자기가 여성과 섹스 하는것으로 원래의 모양으로 복귀시켜 혈대교환(피갈음)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겉으로 내세울수 없는 비밀의 원리임으로 대외적인 설교에서는 그 비유로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기전에 하나님에게 「될수 있으면 이잔을 피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원리 에서는 하나님은 95%까지 는 인간을 인도하여 주시지 만 나머지5%로는 인간자신이 생각해서 해결 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에게도 하나님은 자기가 해결 하라고 발하였으므로 피의 눈물을 흘리는 수고끝에 깨달았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 하 이 원리를 재빨리 나는 깨달은 것이지요. 인간의 몸을 쓴 하나님(문선명)의 섹스의 무리를 점점 널펴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희망을 성취하는 것이 된다.

원래가 불량해서 청춘주식회사사장을자칭하며 아색을 탐미하고 있던 나는 딱 집히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죄가 아니고 좋은 일이라고 학생시절에 일본에서 다방의 여자들을 유혹해서 그날밤에 범한 경우 같은것은 죄의식을 느낄때도 있었는데·그렇지만 통일교회의 복귀원리는 열심히 섹스에 전념하면 전념할수록 하나넘의 섭리가 성취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문선명으로부터 복귀받은 유신회씨에서 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피」를 나누어 받기로 한것이다 지금은 이미 할머니가되어 늙었지만 당시의 유신희씨는 대단한 미인이었고 머리가 좋은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문선명이 가르쳐 준 원리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다른 남성 에게 넘겨줘 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래서 「김덕진선생 보세요 내가 복귀해 들이지요‥‥」라고 말하며 그녀 쪽에서 다가 왔다. 물른 나도승락했다. 그리하여 나는 유신희씨와고맙게 섹스를 했읍니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몸이었는데도 욕구불만도 있었던지 몰라도 불량하고 오입쟁이로 여러 여성과 경험해 온 나의 기교에 이미 흐물흐물하게 돼서 즐거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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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중에 제일 좋았어요 문선명선생 보다 몇 십배나 더 좋았어요」라고 말하면서요.

복귀원리의 실천 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이미 보통 남녀의 섹스 그대로여서 여자가 위라던가 아래라던가는 관계 없어요.

그후에도 다른 여성과 좋을대로 했다.

원리의 책을 쓴 유효원씨들 처럼 온순하고 꼼꼼한 사람들은 문선명이 자기가 범해서 복귀시킨 누구 누구와 자라고 지시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바보들이예요.

나는 달랴요. 95%는 하나님의 가르침이지만 남어지 5%는 자기가 찾아야 합니다.

문선명과 섹스를 한 여인은다른 남자와 혈대교환(血代交換)을 해야만 한다.

 

남자는 제2의 여자와 하고 여자는 제3의 남자와 하며 그래서 제4의 여자에게로 릴레이식으로 해간다.

이렇게해서 넓혀 가는것이 원리 아닙니까?

그렇게 함으로서 온세계의 남녀가 하나님의 혈통으로 사단에게 빼앗긴 전인류, 즉 사단혈통의 세계를 하나님편으로 복귀해야 사단의 발판을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문선명이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순풍에 돛단배처럼 유효원 협회장이 답답한 고지식쟁이를 비웃으면서 하나님의 뜻도 이루고 성적만족도 느끼며 동분서주 하면서 쾌락의 나날을 보냈지요.
서울은 물론 대구에서도 부산에서도 깨끗하고 예쁜이들만을 엄선해서 15-6인과 관계했을 거 예요.
서울에서 내가 5인의 여성과 섹스 한짓이 일주일 후에는 자그만치 72인의 그룹이 되었다더군요.

 

이것도 훌릉한 원리실천의 성과이지요.
그런데 문선명 이나 유효원씨가 안된다고 말했읍니다.
그 이유는 메시야 문선생 한테서 받는 복귀의 섹스는 소생, 장성, 완성의 원리로 3회 섹스 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는 아직 1회 밖에 하지 않은 유신희와 했으니까 무효다.

몇백사람에게 둘레를 넓혀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성질이 났어요 이 새끼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 라고 사단이 해와를 범했을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단을 이기는데는 조건만 맞으딘 되는게 아닌가.

그런데 문선명과 3회하지 않으면, 여성은 복귀가 안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 개새끼야 라고 노해서 싸움을 했어요.
그런일이 있은후에 나는 대구로 가서 영신중고등학교의 음악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문선명의 수제자 였던 박정화씨가 대구로 찾아온것 입니다.

문선명이 대구의 미인 신도 우옥례와 나를 정식으로 결혼 시켜서 무마 하라고 지시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여성과 문은 섹스를 한 사이 입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어는 곳에서 이석빈(형무소에서 같이 복역함)과 공교롭게 만났읍니다. 형무소에서 나에게 문선명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던 그사람입니다.
이석빈은 출옥한 후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지금은 대구시내의 작은교회의 전도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이 기회에 당신도 자기와 같이 일반여성과 재혼해서 하나님앞에 용서를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는 것이 어떠 하겠는가?

박정화씨 협조해 주었으므로 이석빈이 근무하는 교회의 장로의 장녀 강혜환 집사와 나는 재혼 하였읍니다. 가난했던 내가 결흔식에서 입을 옷이없어서 박정화씨 한테서 빌린것
이었읍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 나는 대단히 행복하고 75세때에 귀여운 손자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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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해서 2년째 되던해에 우리들 부부는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해서 나는 성동고등학교의 음악교사가 되었고 밤에는 신학교의 생도로서 공부 하였읍니다.
마침 그무렵 친구인 김경래씨(현재는 한국기독교 총회 사무국장)가 신문기자로서 「통일교회의 정체」라고 하는 기사를 크게 쓴 것입니다.
그 신문기사를 읽었다던가 생각지도 않았던 부인이 나를 찾아 왔는데 정말 깜짝 놀랬읍니다.


그 부인이란 문선명의 본처였던 최선길씨 였읍니다. 최여사는 문선명의 인격이나 통일교회의 성의 난맥을 알고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흔하고 가련하게도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때 최여사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읍니다. 김선생님 이 기회에 문션명이란 남자가 재림주가 아니라는것은 물론 사람도 아닌 무서운 독사 같은 자식 이라는 것을 온 세계에 알립시다.

 

문선명은 호색가로서 성욕이 장성해 내가 문과 결흔해서 자식(문성진)을 낳기 까지 부부관계를 매일밤 10회이상 해도 기운이 펄펄났었다.

 이것은 그가 뱀처럼 이상하게 정력이 강한 때문입니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였다.

 

통일교회는 종교가 아닙니다.

 

음란한 섹스교단일 뿐입니다.

 

문선명과 싸움을 하고서 대구로 옮길때 까지 나는 박정화씨가 있었던 광산으로 쫓겨 간 일이 있었다. 1년반 정도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부터 친구들이 빌려준 방에서 남자 6인 여자 3인이 즐겁게「복귀게임」을 한일이 있읍니다 통일교회의 원리를 실천 한것 뿐이지만거기에는 종교다운 것은 하나도 없었읍니다.

 

나는 깨 달았읍니다.

 

문선명의 섹스원리는 잘못된것 이란는것을.

 

그는 이 원리를 내 세워서 어머니와 그의딸 형제를 범하고 끝의 딸에게는 아이까지도 낳게 하고 있읍니다. 극악 무도한 행위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 겠읍니까?

이번에야말로 문선명도 통일교회도 하나님의 제재를 받을 때가 왔읍니다.

그리고 많은 희생자 들에게 그죄를 보상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자신도 불량청년시대에 죄를 짓고 통일교회에 들어 와서는 원리를 미끼로 제멋대로 음행을 자행 한 죄는 몇천만가지 엄 벌을 받는다 해도 할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부터 통회하며 열심히 경찰목사로서의 사명과 고아들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읍니다

 

 

http://cafe.naver.com/jubo/2085  , 통일교 문선명 - 야록 통일교회사 (野緣 統一敎會史), 박정화 외, 큰샘출판사

http://cafe.naver.com/jubo/1739  , 통일교 문선명  -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박준철 저, 도서출판 진리와 생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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