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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9/13
    말과 의무
    habia
  2. 2007/09/12
    불안과 할 일
    habia
  3. 2007/09/11
    가상적 감상
    habia
  4. 2007/09/09
    눈과 노리 수(1)
    habia
  5. 2007/09/07
    색과 육감(1)
    habia
  6. 2007/09/06
    황금과 행복
    habia
  7. 2007/09/05
    나의 첫 판소리 녹음
    habia
  8. 2007/09/05
    여자를 돕는 이유
    habia
  9. 2007/09/04
    거지왕자와 정체성
    habia
  10. 2007/09/03
    한류의 허상
    habia

말과 의무

인간은 원숭이와 비슷할 때부터 많은 단어를 만들어 왔고 지금도 만들어 내고 있다. 모든 단어들은 상대적 단어가 있고 그 단어로 비교함이나 말 장난으로 그 의미를 더 할 수 도 있고 덜 할 수 도 있다. 이것은 어떤 개인의 인생 경험과 지식 차이가 다르고 말 하는 사람의 그것들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생지옥을 경험하였거나 그 처참함과 여기에 대한 분노를 마음으로 느껴보며 슬퍼하였든 사람의 천당에 대한 느낌은 이것을 모르고 하늘을 생각하는 것이나 그들의 꿈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옥도 천태만상이요 천국도 억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모두를 어떻게 하나로 만들 수 있을까? 여기에 나는 우리나라 대표 시인이자  철학자이신 봉래 양사언선생의 시로부터 찾아 본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르리 없건 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나는 여기에서 오른다고 하는 것은 더 밑으로 내려가 보아야 더 크게 올려 볼 수 있는 이상의 방향으로 본다. 겸손하여 지면 보이는 것들. 힘이 없어지면 보이는 것들. 미끄러떨어지면 보이는 것, 아프면 보이는 것들,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지면 내가 그랬을 것, 여기에 세상의 모든 단어를 모두 다 열거 할 수 있다.

극과 극은 하나라고 막연한 말 들을 하고 있는 요지음 나는 극과 극은 깨달음의 도구이지 하나로 볼 수 있는 처세술의 도구는 아니라고, 그리고 격차의 진미는 각자가 찾아 내야 할 첫 의무 이라고 말 하고 싶다. 우리가 단어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힘은 실천 속에서 온다. 태초 후에 몸바쳐 싸우시든 조상들과 후세대의 정의로운 싸움으로 오는 한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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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과 할 일

많은 사람들이 안전 제일주의로 살려고 한다. 내일 할 일들이 거의 정해져 있다. 그렇다고 불안 함이 없을까? 불안함은 첫째 미래를 모르고 있는 것으로부터 온다. 그렇다고 미래가 모두 정해져 이룰 수 있다거나 모두 미래의 섬세함을 안다면 아무 재미가 없을 것이다. 즉 내가 예측한 것이 맞아 들어가는군, 거참 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나중에는 이것은 남도 할 수 있는 누워서 콩 먹기이니 나의 존재에 대한 회의가 오고 말 것이다.

지금을 알려고 하면 한순간 앞을 재어보는 미래의 가능성을 눈치챔 말고도 현재 찾아지는 진리나 지식을 접하고 찾는데 게으르지 말아야 하고 이를 정돈 할 줄도 알아야 한다. 

둘째로 불안은 정돈이 안되어 있는 복잡한 환경이나 더러운 환경과 이를 다룰 줄 모르는 속에서 온다. 끝으로는 자신의 내적 불안이라고 도 할 수 있는 항시적 불안이다. 이것은 자신의 몸 건강상태에 직접관계가 있다고 도 할 수 있지만 무엇을 억지로 붙잡아 보려는 자기 불신이라고 도 할 수 있다. 보통 불안과 화는 쌓을수록 물에 빠지듯 남의 도움이 필요하다.

불안을 없애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떻게 자신을 분석하여 볼 수 있을까? 무슨 일부터 하여야 할까? 내가 그런 능력이 스스로 있을까? 왜 그놈의 것이 자꾸 되 살아나 엉뚱한 성(씅)을 사랑해야 할 님들과 내 자신 에게 풀어보려고 할까?

나는

있다고 한다. 우선 내가 안전하게 제어 할 수 없었든 것을 보면서 화를 내는 것은 바보다. 내가 이해 할 수 없는 어처구니 없는 것도 막 일어난 직후에는 사회가 공론화하여 해결 할 때까지는 그래라고 하여야 한다. 둘째는 내가 하여야 할 일 중에 제일 어려운 문제나 일에 제일 먼저 손을 대기 시작하여 다른 것들 보다 먼저 끝내려고 하여야 그 다음 일이 쉬워진다.

셋째는 응급치료다. 마싸지 또는 청소로 나는 해결한다. 아니면 남의 이야기를 들어 이것 저것 시도하여 본다. 청소엔 생활공간의 공기 가구 밑 구강 눈 얼굴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마싸지는 운동으로 대신 할 수 도 있다. 마싸지는 한살배기 아기가 모래에서 어떻게 하나를 보면 여러가지를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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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적 감상

우리가 눈을 뜨든 감든 어떤 그림을 허공에 그려보는 것을 가상이다 또는 상상하여 영상을 만들다 라고 하거나 구상 한다고 도 한다. 거의 모든 작가들이나 화가들 그밖에 수 없는 다른 예술과 발명과 창작 언론 등이 이것을 거치지 않는 것이 없다. 그저 그대로 무엇을 옮겨 다른 미디아에 옮기는 것도 작가의 그 무엇에 대한 해석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결국 가상 없는 실상이란 카메라나 녹음기도 다잡지 못한다.  동서남북 위 아래의 전체적 분위기를 표현 할 수 있는 미디아는 아직 없기 때문이다. 즉 말과 미디아가 표현하려는 그 무엇은 전체 진리의 지극히 일부로 만 표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실상적 가상 또는 허상적 부분실상 이라고 해보자.

그리고 전달되는 창의 크기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미디아의 기록방법과 그것을 열어보는 창 이 있는 기계와 이의 프로그램은 각각 다르다. 여기에 독자와 관람자의 정서와 나이 교육정도 등의 다양성, 관람장소, 시각, 환경 등등 말 할 수 없이 많은 조건들에 의하여 허상이 생겨날 수 있다고 할 수 있게 된다. 그럼 어떻게 모자라는 허상적 작품이나 이것을 연출하고 연주할 때 부족함이거나 왜곡된 진실을 더큰 진실로 극대화 할 수 있을까?

첫째로 의심 하여야 할 것은 작가가 작품완성 자체를 위하여 거짓을 넣었을 가능성을 갖고 보는 것이다. 대부분 교회 설교가 여기에 속한다. 너는 하지 말라 이다. 다음은 작가가 너무 소침하고 의기 양양하게 어떤데 몰두 되어 있지 않았을까를 점검하는 것이다. 그리고 작가의 덕성을 살펴보고 역사성의 배경과 그의 덕성을 비교하여 보는 것이다. 보통 끝에 대안 제시가 추상적이거나 자기 오만에 빠진 것들이다. 눈 감자가 여기에 속한다.

셋째로 작품이 우물 안 개구리이거나 어떤 민족적 자만을 가져오는데 그치기가 쉽다. 즉 목적이 너무 뻔한 것이거나 아예 없이 비판하는 것들이다.

나는 어떤 음악을 감상 할 때 항상 부족한(그저 비판만 하고 있을) 표현 부분을 내가 원하는 음악적 이상(아이디알)으로 즉 더 완전한 아름다음으로 거의 동시에  만들어 연주하는 듯 나 자신의 표현을 가상하여 감상한다. 이런 예술적 표현을 언제 다시 가상 할 수 있을까.나는 언젠가 나의 딸이 피아노로 내가 원하는 이상으로 음악을 만들고 있을 때 자연인 천둥이 함께 하면서 더 극치의 음악적 분위기를 만들어 내든 것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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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노리 수

본다는 것은 그저 멍하니 그저 보다 와 좀더 시선을 만들어 의지적으로 어떠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다 와 좀더 가까이 들여다보다 라고 구별 할 수 있다. 이 셋 중에 그저 보다 와 바라보다 사이는 눈 깜짝하는 사이에 서로 교차하면서 오가지만 보통 멍하게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지금 어떤 무엇을 바라보는 것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읽고 있다는 말도 된다.

본다는 것은 눈을 감고 있든 뜨고 있든 두뇌에 그려지는 영상이 있음을 실감 하는 것 이라고 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꿈에서 보이든 것을 깨어 없앤다 또는 눈 감고 본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

또 다른 눈이 더 있다. 이것은 활동적 눈이라고 도 할 수 있는 눈이다. 우리는 잠이 깨거나 눈을 뜨면 곧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엄격히 말하면 눈을 굴려 생각을 시작한다. 그 다음에 그 생각이 주체적인 나의 몸을 움직이면서 어떤 다른 동작으로 이어간다. 그리고 온종일 이러한 동작들 속에서 또는 동작들을 하면서 주변과 세계를 보며 동물적이거나 사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연출적 살핌 즉 자아 또 나라고 도 한다. 즉 잘 때는  내 몸이 의식을 갖고 있지 않는 것 만큼 내 몸이라 고 하기 도 어렵고, 내 몸은 있어도 나는 없다고 도 할 수 있다.

활동적

눈이 보는 객체가 사람일 경우는 우선 눈 대화라는 것이 있다. 우선 우리의 눈과 더 큰 눈이라고 할 수 있는 몸은 거울 같은 역할을 한다. 그래서 그는 나를 눈 안에 갖고 있고 나는 그를 갖게 된다. 즉 자아는 확대되어 간다. 이때 나와 그, 그리고 주변을 함께 보고 있는 나 자신을 보는 삼자의 눈이 생길 수 있다. 이것으로 내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 가를 보면 그를 언제 앞지르거나 일부러 질 수 있는 쓸  눈이 발전 된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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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과 육감

색은 3가지 원색과 이것을 합쳐 만들어 지는 다른 여러 가지 색들이 있다. 여기에 나는 의미를 부여해 본다. 대부분 빨강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정열이라고 들 한다. 나는 이것을 불이라고 도 한다. 다음엔 노랑인데 어떤 사람은 질투라고 하지만 나는 기쁨이라고 한다. 나는 또 빛이라고 도 한다. 파랑은 빨강의 상대적인 색으로 무겁고 춥고 타지않았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세 색을 팔랑개비 낱개에 각각 같은 비율로 칠하여 햇빛처럼 밝은 빛 아래서 힘껏 돌려 정면으로 보면 흰색과 같은 빛이 되어 감을 본다. 이는 마치 프리즘으로 햇빛을 나누면 세가지 외에 더 많은 무지개 색이 되는 것을 반대로 하여 흰빛을 만든다고 도 할 수 있음을 증명 하는 것이다. 태양은 붉은 불덩어리 지만 멀리부터 오기에 빛이 무색화 되어 밝음으로 만 보일 뿐이다.

지금

까지 색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빛이 있는 조건 아래에서다. 빛이 없으면 모든 색의 물질은 검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삼원색의 페인트 물질을 골고루 섞으면 까망에 가까워 진다. 이것은 원색들이 그만큼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색은 빛 아래서 서로 상대 적이다.

어떤 색을 어떤 색으로 보느냐에 달려 느낌이 달라 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오렌지 색이 중립이라고 한다. 즉 오렌지 색을 오래 보고 있다 다른 어떤 색을 볼 때 그 색이 주는 느낌이 진정한 그 색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주변의 여러 색의 벽들에게서 반사 되어 온 색깔 먹은 빛이 그 어떤 색의 물질표면(쌤풀)으로 들어가는 정도를 무시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물론 태양 빛도 계절 날씨 시각 구름의 다양성에 따라 붉은 정도가 틀려 진다. 쌤플에는 여러 종류의 표면이 있고 어느 곳에 놓고 어디에 서서 어느 각도로 보느냐에 또 틀려 보인다.

이렇게

우리의 눈은 무쌍하게 시시 각각 색에 물들어 변화하고 있다. 아침에 잘 골라 어울렸든 옷이나 색이 저녁에 어느 장소에선 아니올시다 다.  그것은 즉 색으로 미래를 짐작해볼 줄 알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미래를 보는 육감, 미래를 저울 질 하는 용기다.

옆의 나의 넥타이는 직접 그려 만든것이며 나의 딸 야외 결혼식때 들었든 꽃들 색과 일치 하였지요.

 

그동안 활동하시는 진보 운동 하시는 분들께 오늘 아침에 잡은 태양 빛을 선물합니다다. 높고 짙은 보기 드문 안개 속에서 보였든 촬영 가능한 태양이었읍니다. 쌘프란시스코입니다. 쉬었다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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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과 행복

요즘 대부분의 영업적 이익에 몰두한 영상 또는 활자 언론들과 상당한 인터넷과 사실이든 소설이든 이것을 영화화 한 것 모두가 황금과 관계 있는 것으로 기승을 부린다. 가난이나 희생 속에서 겸손해지고 투쟁하면서 아름다워 지는 말은 옛 것이 되어 가고 있다. 이것과 관계 있는 쎅스(황금으로도 살 수 있는 정치력의 퇴폐에 이용되는 또는 유명해지려는 사람들과 이들의 성 관계 혹은 부부 맺기, 음행한 마음으로 뒹구는 동물적 사람 이야기나 유혹과 싸우는 아름다움이나 속음 등), 스포츠(최고 선수에게 돈 몰아 주거나 외국에 들락 거리기), 교회의 번창(여성의 예쁜 사람들을 앞에 앉혀 놓고 돈 거두어 1% 빼고 교회 안에 황금 쌓고 모여 웅성대기), 폭력(돈 가진 사람의 우쭐댐이나 똑같이 구는 밑 주먹, 그림 속이니까 깨버려도 되는 그들의 무기 이야기와 이들 장면들과 게임), 황금으로 만든 정객이나 언론들이 어렵게 사는 형제 나라 거짓으로 흉보기, 억울함 호소나 독립투쟁이나 민중항쟁을 폭도로 몰기 등등도 여기 속한다. 거짓은 폭력 중에 보이지 않을뿐 폭력의 핵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과연 이렇게 하면서 행복할까? 대한민국은 자살률이 세계 최고라니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 아닌 것으로 자살하게끔 내버려두는 것을 우리 손으로 막을 수 있을까? 첫째로 윗 물이 맑아지도록 정치인을 지성 있는 사람이나 힘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속이지 않을 사람들로 골라야 하며, 마음을 사기 위하여 경제니 주권이니 허풍 떠는 사람도 조심해야 한다. 작은 것도 감추려 하면 완전 검증을 요구해야 한다. 벼룩이 용이 되거나 왕의 옷을 입어도 집에 쳐 박혀 저녁 식사에 어르신네 들을 불러 꼬마 대하듯 포도주로 묶어두지 말고 들에 나가 삽질을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이웃나라와 화해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거지 취급하며 못 주게 하다  자기는 더 주겠다고 하는 것은 화해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하는 말이다.

이제

돈 없이 돈을 이기는 또 다른 것을 찾아보자. 첫째로 돈의 노예가 되어 간 위의 썩은 나무들을 멀리하도록 여러 프로그램을 개발 하여야 한다. 제일 첫째로 환기 잘 되는 운동 시설이 무척 많아야 한다. 일일 장터 대신 정치 토론 장이 저 학년부터 장려 되어야 한다. 밤에 실외 연극장소나 밝은 만남의 장소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학벌 위주에서 탈피하여 아이디어의 공동개발을 통한 소유권의 공유를 장려하고, 잉여에 대한 자본주의 독식을 막고 노동자와 국내 자본주와의 타당성 있는 자산 분배 및 재투자를 장려하여 외국 자본의 침입을 막으며, 제일 중요한 것은 실패한 사람들 끼리 만나 아무 걱정 없이 수개월 수년씩 놀면서도 아이디어를 생산하여 맡길 뱅크가 있거나 재생할 일거리를 찾아 주는 것이다. 물론 문화 쇄신을 통한 정신적 재훈련 센터 프로그램이 우선인 것을 말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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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판소리 녹음

 

나의 판소리 사철가를 들어 보세요.

 위의 파일이 안올라 갔네요. //blog.daum.net/habia 에  가서 "나의 첫 판소리 녹음"을 찾아 habia-pansori.wav 를 다운로드 하세요.

 

저자 habia( 손자가 나를 불러주는 할아버지의 준말, 손녀는 하부아 라고 부르지요)가 풍물을 배워 발표하는 모습

 

 

East Bay 의 Oakland 에서 풀뿌리들이 세운 청년문화원에서 저자가 사랑가를 처음 배워 부르고 있다.

 

아래의 나의 첫 판소리(사철가) 녹음은 지난 일년이상 혼자의 창법 발굴로 9/4/07부른 것이다.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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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돕는 이유

첫째 그리고 언제나 그들을 예뻐지게 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사랑하면 되는 일이다. 둘째는 소녀다움을 원해서다. 이것은 가볍다는 말과 같다. 동격 됨과 서로의 같음을 나눔으로 가능하다. 셋째는 명랑함을 바래서다. 이것은 실수와 모자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줌으로 가능하다. 어른이 되면서 바래는 것은 정숙함이다. 이것은 아무때나 누구에나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함께 낭만같은 욕심을 부려 보는 꿈과 같은 것이다.

나는 젊었을 때 여자에게서 사랑의 편지를 받은 적도 있고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한적도 여러 번 있다. 이것은 내가 준비도 되어 있지 않으면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표현을 쉽게 다른 말로 해 버린 것이었다. 사랑은 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선 위의 셋째 이유를 채워 줄 수 있는 자질을 갖추어야 원하는 아름다움, 소년 소녀다움, 그리고 낭만이라고도 하는 명랑함을 함께 찾고 가질 수 있다. 그러기에 첫째 이유의 해결책인 사랑함은 자신의 자질 갖추기로 대신할 수 있는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내가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자질을 찾아내고 기를 수 있을까? 그것은 각기 그의 독특한 멋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없는 무에서 조금씩 생겨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남의 소위 영적 축복으로는 불가능하다. 우선 부모나 누구의 사랑을 받는 것이 바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답이라든지 찾으면 찾아지는 남을 사랑 할 수 있는 기회에 참여 함으로 사랑하는 경력과 사랑하는 용기가 불어 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함의 보답이요 자질의 더하기다. 나는 미쏘의 대리전쟁 후에 어려웠든 어머니의 고난에 동참하며 속으로 울면서 자랐다. 슬플 때면 뒷산에 올라 크게 노래 부르고 내려오곤 하면서 노래를 멋있게 정력적으로 하곤 했다.

그럼 본론인 정숙함을 찾아보자. 이것은 교육, 재력, 명예, 직업과는 무관하다. 어느 정도는 선천 미라고 할까? 우아함이라고도 하는 이 것은 자신 안에 가두어 두고 못 찾아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숙 미와는 또 다르다. 성숙 미는 생리 등 여자가 갖는 고통의 반복 기간의 연속으로 오기도 하지만 운동 신경의 발달 등 자연스러운 여유의 미 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숙함은 이보다 더 높은 꿈과 이들의 실천 속에서 자라는 멋이라고 하면 어떨까. 모친의 정숙함을 딸이 조금씩 닮을 수도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무대에서 몸을 흔들지 않아도 귀 옆으로 살짝 보이는 연모 사모하고 싶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이것은 나의 력량 밖의 꿈이다. 나는 이 성숙함보다는 정숙함과 그 외에 위의 세가지 여자를 돕는 이유에서 남자 됨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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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왕자와 정체성

거지왕자와 정체성

요즘 남한 정치 쇼엔 패를 지어 상대방을 점잖게 무슨 파다 하고 깎아 내리고 올려 주기 바쁘다. 이것은 좀 우습다.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내가 어디 속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방향에는 어디로부터 보느냐에 따라 어느쪽이 결정된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들 같다. 거지왕자(왼쪽에 있다 오른 쪽으로 확 나라가버린 사람)를 나보다 아직 왼쪽이라 우겨댄다. 상당히 부러운가 보다. 훌쩍 뛰어 넘어 다른 쪽으로 가겠다고 하고 있으니 거지왕자도 웃을 것이다.  그것이 그것인 장소에서 왼쪽으로 떨어질지 오른쪽으로 떨어질지 그 뛸 실력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좌우가 분명했다. 그러나 오늘 날엔 노동자의 복지가 향상되었고 건강을 포함한 사회복지제도가 좋아졌기에 좌우의 차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 국가의 주체성을 좌우로 평가하기도 곤란하여 졌다. 한 국가의 종주국도 주체성을 문제 삼고 늘어질 수 없는 때가 오고있기  때문이다. 이젠 한탕 공부하여 살아 남는 길 밖에 없는 세계 안으로 가고 있는 듯 하다. 꼭 그럴까? 그렇지 않다. 다른 나라에 있는 풀뿌리운동이 한 국가의 주체성을 찾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왼쪽 바른쪽을 뛰어넘을 때 가능함을 보았다(예:처음에는 1.5세가 주를 이루든 진보적 단체에서만 시작한 미주내에서의 최근 위안부 결의안 미의회 통과 운동과 이의 발전적 결실을 볼 때).

요즘 거지왕자의 해외 포도청이 한미 엪튀의 미국의회 통과를 위하여 풀뿌리들을 찾아볼까 하고 큰 도시를 찾아 다니고 있다. 이 엪튀가 우리 나라의 좌우의 차이를 넓힐 복지 특히 건강보험제도를 해칠 것은 살짝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말 하지 않으면서다. 언제 진보운동을 중심으로 좌우가 그게 그거지 하면서 한마음으로 서로의 간격을 좁히면서  그동안 좌우 간격으로 인하여 많은 애국자와 풀뿌리들까지 희생시킨 국가보안법 등을 고쳐 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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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허상

한류의 허상

신문은 사진 더하기 말이며, 영상매체는 이것 외에 소리로 된 말을 사용하고 움직이는 사진들을 사용하며 여기에 음악을 더 넣는 것이 보통이다. 대부분 이 두 매체는 한류(한국 사람이나 한국 피가 섞임이 무엇으로 든지 세계에서 인정 됨)로 도배질 하느라 바쁘다. 나도 뭐 하나 만들어 가지고 나가야지 하게끔 한다. 아니면 국내에서 한탕 하여 200만불 주택을 해외에 투자 할 수도 있게 하고 있다. 또 수 많은 여행객들이 해외로 소풍을 나가 한탕 쓰는 것도 한류인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로 뻗자 뻗어나가자 한다. 인터넷 매체역시 여기 뻔쩍 저기 뻔쩍 눈 잡기에 바쁘다. 어느 한곳 우리의 순수한 옛 것을 찾고 보수하고 개혁하고 개량하여야 할 제목을 찾기 힘들다. 정말 한류의 핵심이어야 할 문화 교과서 하나도 없지만 꾸밀 내용도 찾지 않고 있다. 민주화와 통일문학, 여성 정치 사회 참여, 환경 운동, 토착종교와 민중 종교의 합작 가능성, 판소리의 현대화 가능성,  풀 굿의 다양성 등이 현대 대중음악에 끼친 점등..모두 풀뿌리들의 참여 몫이 되고 만다,

정부나 국회 역시 한탕 예산을 늘리고 우선 꿔서 쓰면서 궁극적으로 국민의 빚을 늘리기에 바쁘다. 문화 발전의 필수 조건인 사상의 중립을 못 지키는 종교인과 예술인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누가 이 거대한 궤도차를 굴리고 있을까?

이번 북한의 수해 복구를 위하여 정부는 강남의 집 한 채 값을 주겠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고수하고 그곳에는 우리나라의 실형 문화재만 해도 엄청나게 많고 무형 문화재도 많다. 이것과 이들의 침수에 의한 복구만 해도 엄청난 지원이 필요 할 것인데도 아양 곳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남)한류는 우리 조상들이 만들고 지켜온 것과 먼 허상을 만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누가 이것을 끌고 나가고 있을까?

이것은 한탕 공부를 하여 때낸 학벌 군들의 놀고 먹기에도 근거한다. 해외에 나가면 즐비하게 큰 대학마다 한국학이다 뭐다 하며 외국인들을 위에 모셔 놓고 삼성이나 현대등 굴지 회사 등을 다닥거려(어떤 주먹들인지는 몰라도) 수 천만불 씩 받아 쓰면서 현지 운동가들을 불러 논문이다 연구원이다 하면서 종주국의 착취 연구를 하게 하고 있다. 남한의 대통령이나 정객들도 여기에 불러 사상 정검을 시키고 옆에서 씨큐리티(안보) 레코드를 틀어댄다. 옛날에는 평화 봉사단이 한국에 나가서 한국어를 공부한 후에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하든 일을 이렇게 쉽게 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을 위하는 척 하는 한국계 미국인들이다. 왜정 때는 하더라도 숨어서 했을 일 들이다.

한류는 민족적인 것으로 의미를 축소해야 할 것이다. 외국을 모방하는 것은 제외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류는 통일 지향적이고 과거의 잘못된 오점을 씻어 내는 것이라야 한다. 최근 쌘프란시스코의 한국일보 미주판(8/30/07)에서 한국의 날 퍼레이드 및 민속축제 참관 이웃커뮤니티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한국하면 연상되는 것으로 거의 반이 한국전쟁을 들었고 서울올림픽, 월드컵 등이 나머지 였다. 현정치 대통령으로 김대중(24),김정일(20),김일성(17), 노무현(14) 등으로 분단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통일 행보로 우리나라를 빛냈으면 한다. 이래야 문화도 산 문화가 될 것 아닐까? 이젠 통일 한류로 탈 바꿈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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