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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엘론 머스크

[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엘론 머스크

  • 박상원 자동차 칼럼니스트
  • 입력 : 2009.10.15 16:12

매연 없고 가속 뛰어난 '로드스터' 개발
테슬라, 전기차로 제2의 GM 꿈꾼다

영화배우 레오나르도 디 카프리오, 구글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 백악관 비서실장의 동생이자 할리우드 에이전트인 아리 임마뉴엘의 공통점은? 미국 신생 전기차 회사인 테슬라(Teslar motors)의 로드스터(Roadster) 소유주라는 점이다. GM 부회장인 밥 루츠(Bob Lutz)조차 테슬라의 로드스터를 보고 자신의 연구진에 전기차인 볼트(Volt) 개발을 지시하게 할 만큼 성공을 거두고 있는 테슬라 뒤에는 회사를 '제2의 GM'으로 키우려는 엘론 머스크(Elon Musk·사진)가 있다.

1971년 남아공 출신으로 17살에 홀로 미국으로 이민 온 머스크는 고학 후 아이비 리그인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와튼스쿨을 장학금을 받고 졸업했다. 일찍부터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두각을 나타내 12살에 블라스터라는 자신의 게임을 판매한 적도 있다. 1995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공학박사 과정을 이틀 만에 포기하고 실리콘 밸리에 뛰어든다. 1999년 컴팩(Compaq)과 2002년 이베이(ebay)에 자기 회사인 집투(Zip2)와 페이팔(Paypal)을 매각, 자신의 자산을 1억9000만달러(약 2400억원)까지 불렸다. 이후 그는 IT산업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내연기관 자동차의 뒤를 이어 전기차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 2004년 이후 테슬라를 이끌어 오고 있다.

머스크는 테슬라를 운영하면서 전기차산업에 유리해진 '환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테슬라의 전원은 6831개의 리튬이온 배터리. 전기모터로 구동되는 로드스터는 차체를 스포츠카 전문 메이커 로터스(Lotus), 트랜스미션(변속기)은 보그워너(Borg Warner)로부터 공급받는 등 부품과 제조를 아웃소싱(외주)으로 해결했다. 배터리팩을 비롯한 각종 전기 부품들은 매년 원가가 떨어져 창업 6년째인 2009년 6월에는 대당 마진 30%를 달성,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하게 됐다. 매연이 전혀 없는 로드스터는 성능도 뛰어나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까지 3.7초 만에 도달한다.
테슬라의 전기차 '로드스터'.
테슬라는 한때 경영진끼리의 불협화음에다 파산 루머까지 나도는 등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2009년 초 미국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에서 4억7000만달러(약 5600억원)의 기술자금을 지원받아 재정 상태가 호전됐다. 다만 테슬라 로드스터의 성공을 통해 전기차 대중화의 가능성을 확인한 GM 등 기존의 자동차 대기업과 피스커(Fisker)라는 전기차 경쟁 메이커로부터 거센 추격을 받고 있는 것이 불안요인이다.

머스크는 "테슬라의 성공이 전기차의 대중화를 앞당기는 동기가 됐다면 우선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것"이라고 말한다. 10년 이내로 현재 판매량보다 1000배인 100만대의 전기차 판매를 꿈꾸는 머스크. 테슬라가 그의 말처럼 제2의 GM이 될지 무너진 하나의 도전자로 사라질지, 할리우드에서부터 디트로이트 3(GM·포드·크라이슬러), 워싱턴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이 테슬라와 머스크의 다음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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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가타야마 유타카

[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가타야마 유타카

  • 자동차 칼럼니스트

입력 : 2009.08.28 03:01

닛산의 쇠락은 그가 해고되면서 시작됐다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가타야마는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작고 무능한 일본 닛산을 가차 없이 몰아붙여 결국 뛰어난 회사로 변모시켰다."

1980년대 말 MIT 신입생들의 필독서 중 하나였던 '심판(The Reckoning)'에서 저자 데이비드 핼버스탐(David Halberstam)이 닛산의 미국 진출에 지대한 공헌을 한 가타야마 유타카를 평한 대목이다. 가타야마가 미국 닛산 사장으로 취임했던 1960년대 미국 소비자들은 덩치가 큰 GM·포드 차량에 빠져 있었다. 경제적인 소형 일본차가 미국에서 호응을 얻을 가능성은 요원해 보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불가능해 보였던 일본차의 미국 진출을 성공시킨 사람이 바로 가타야마였다.

가타야마가 닛산 Z카 앞에 섰다. / 닛산의 초대 미국법인 사장으로‘Z카 신화’를 일궈낸 가타야마.
1909년 일본 시즈오카현에서 태어난 그는 1935년 게이오 대학을 졸업하고 닛산에 입사한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에서 처음 자동차 동호회를 조직했을 만큼 차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노조가 장악한 닛산의 사내 문화에 심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노조원 선거에 나가라는 권유를 무시한 이후, 사내에 많은 적을 만들게 된다.

하지만 마케팅 능력이 매우 탁월한 그는 사내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인재였다. 그는 1958년 1만6000㎞를 달리는 호주 랠리경주 참가를 주도했는데, '기술도 없는 닛산이 이미지만 구기는 것은 아니냐'라는 사내 반대를 무릅쓰고 우승, 전후 일본 국민의 자존심을 살리면서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를 시기한 사내 정적(政敵)들은 그에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맡겼는데, 바로 닛산의 미국 진출 임무를 책임질 미국 닛산 초대 사장직이었다. 가타야마는 그 도전을 즐겼다. 당시 미국에서 성공을 거둔 독일 폴크스바겐의 경영을 벤치마킹하고, 고객과 딜러 요구사항을 정확히 파악해 이를 반영했다.

미국시장을 뚫기 위해 틈새시장을 노린 그는 일본 시장에만 치중하려는 본사와 수많은 논쟁 끝에 당시 BMW 1600을 벤치마킹한 510(일본명 블루버드)을 미국에 출시, 2년 만에 미국 내 판매를 3배로 늘리는 대성공을 거둔다.

가타야마에게 최고 영광의 순간은 세계적인 명차 중 하나로 평가받는 닛산 페어레이디(미국명 Datsun 240Z)의 개발과 출시였다.

그는 회사가 주저해 하던 고성능 스포츠카를 미국에 내놓기로 마음먹었다. 보수적 디자인을 강요하는 사내 분위기에 밀려 의기소침해 있던 수석 디자이너 마쓰오 요시히코에게 "싸고 경제적인 차만 만들어서는 해외시장에서 이기기 어려우니, 해외업체들이 우리를 주시할 만큼 놀랍고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야 한다"며 힘을 실어 줬다.

페어레이디는 일본 내수차를 개조해 수출하던 당시 관행을 깨고, 처음으로 해외용으로 따로 개발한 차량으로, 미국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510과 240Z의 성공으로 닛산은 북미에서 선도적인 외국 자동차 회사로 우뚝 솟았지만, 가타야마는 그간의 놀라운 업적에도 불구하고 1975년 사내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해고당한다. 이후 닛산의 혁신성은 빛을 잃어간다. 1983년 미국 자동차 전문지인 '카&드라이버'는 기사에서 "당신은 어디로 갔습니까, 가타야마씨?"라고 쓰며 쇠락해 가는 닛산을 개탄했다.

가타야마는 1998년과 2008년 각각 미국·일본의 자동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되면서 명예를 회복한다. 그러나 파벌과 현상유지에 집착하던 닛산은 이후 미국에서의 심각한 판매악화를 겪으면서, 1998년 프랑스 르노에게 매각되는 비극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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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존 드로리언

조선일보 기사지만 교양 차원에서 펌

 

[박상원의 자동차 인물열전] 존 드로리언

  • 박상원 자동차 칼럼니스트

혁신 없는 GM 몰락… 30년 전 그는 예견했다
 

2009년 6월 1일, 한때 세계 최대 자동차 회사였던 GM은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다음 날 지역 일간지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의 칼럼니스트 탐 월시는 디트로이트 인근 트로이(Troy)시에 있는 한 묘지를 찾아 존 재커리 드로리언(John Zachary DeLorean)이라고 적힌 묘비 앞에 섰다. "존, 누군가가 당신에게 말해줘야 할 것 같아 왔소."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갑자기 빠른 속도로 말했다. "GM이 어제 파산 신청을 했소."

월시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30여년 전, GM의 떠오르는 별이었던 드로리언이 이런 날이 올 것임을 누구보다도 먼저 예견했기 때문이었다.

1982년 10월 26일, LA 국제공항 인근 셰러턴 호텔 501호에서 한 남자가 약 2400만달러(약 312억원)어치 코카인을 소지한 혐의로 체포됐다. 그의 이름이 언론에 공개되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GM의 최연소 브랜드 부문장과 총괄 부사장을 역임한 천재 자동차 엔지니어로, 유력한 사장 후보로 평가받다 갑자기 회사를 나온 인물. 1985년 영화 '백 투더 퓨처'에 선보였던 '드로리언 DMC-12'의 개발자 존 드로리언이었기 때문이다.

존 드로리언과 그가 GM에서 나간 뒤 개발한 자동차 '드로리언 DMC-12'.
영화 백투더퓨처의 드로리언.

그는 1925년 디트로이트에서 루마니아 이민자 아버지와 헝가리 이민자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포드 노조간부로 일했던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주 싸웠고, 드로리언이 17세 때 이혼했다. 가정환경은 불우했지만 학교에선 뛰어났다. 공학석사와 경영학석사(MBA)를 마치고, 패커드 자동차회사에 취직한 뒤 그의 경력은 탄탄대로였다. 4년 만에 개발 책임자가 됐고, GM에 스카우트돼 폰티액(Pontiac)의 차석 엔지니어가 됐다. 수많은 특허를 출원했고, 36세에 수석 엔지니어가 됐다. 미국인들이 그를 기억하는 큰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미국의 첫 머슬카(muscle car·출력을 중시하는 근육질 스포츠카)인 폰티액 GTO를 개발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이미지였던 폰티액 브랜드는 이후 돈 있는 젊은 세대를 끌어들여 성공했다.

드로리언은 폰티액 총괄 책임자가 된 이후에도 실력을 발휘했다. 파이어버드·그랑프리 등 성공작을 내놓았고, GM 브랜드 중 가장 큰 시보레(Chevrolet) 부문장으로 영전한 뒤에도 히트작을 쏟아냈다. 이후엔 GM 그룹의 자동차·트럭 생산총괄 부사장까지 올랐다. 사장도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1973년 48세 나이로 "사회적인 일에 더 신경 쓰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GM을 떠난다.

1979년 그는 비즈니스위크 전직 기자와 함께 자서전 '맑은 날에는 GM의 본사를 볼 수 있다(On a Clear Day You Can See General Motors)'를 출간, 그가 20년간 경험했던 GM의 무능한 관료체제를 신랄히 비판했다. "GM의 경직된 시스템이 독창력을 질식시킨다" "이대로는 혁신이 불가능하다" "GM은 오랫동안 누구보다 차를 많이 팔아 어느 자동차 회사보다도 돈을 많이 벌었지만, 자기들 길만 옳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며 GM 파산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기해 화제를 모았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GM에 밉보였기 때문인지, GM에서 나온 이후 그의 진로는 순탄치 못했다. 1975년 자신이 세운 자동차 회사 DMC(Delorean Motor Company)가 개발한 'DMC-12'라는 스테인리스 스틸 차체로 된 2도어 스포츠카는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크게 호평받았지만, 1981~1982년 심각한 판매난에 빠졌다. 그는 회생 자금을 급히 구하는 과정에서 FBI의 마약 함정수사에 빠지게 됐고, 그는 이것이 GM을 비판한 데에 따른 보복이라고 믿게 됐다. 이후 연방법원에서는 함정수사의 불법성을 들어 그에게 무죄선고를 내렸지만, 결국 그는 DMC 투자가들의 투자금 반환 소송 때문에 1999년 개인파산을 했다. 노년에 재기를 꾀했지만, 2005년 80세 나이로 굵고 화려한 인생을 마쳤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성서 구절처럼 드로리언의 GM 파산 예견은 그의 사망 4년 뒤 현실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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