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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zysztof Kieslowski

Krzysztof Kieslowski







68년 우츠 국립영화학교를 졸업하고 <사진 From the City of Ludz>(1969)이란 기록영화는 데뷔한 후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는 68년 3월의 학생봉기, 70년 12월의 자유화 운동, 76년 노동자 시위사태, 80년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노조 운동, 그리고 81년 야루젤루스키 정권의 계엄령 선포에 이르기 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 폴란드사회가 그렇게 혼란을 겪는 동안 폴란드영화는 부흥기를 맞았다. 70년대 중반 아그네츠카 홀란드, 안토니 크라우즈, 리자드 부가예스키, 마르셀 로진스키등의 감독이 이른바 도덕적 불안의 영화로 정의되는 폴란드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 안제이 바이다 감독 등이 이끌었던 폴란드 유파가 폴란드영화의 현대적인 어법을 발굴해냈다면, 도덕적 불안의 영화 세대는 긍적적인 전망이 보이지 않는 폴란드 현실을 불안하게 짚어냈다. 케에슬로프스키는 물론 도덕적 불안의 영화 경향을 띤 감독 중 한 사람이었다. 이 시기에 만든 가장 뛰어난 작품은 <노동자들 71>로 71년 슈체친에서 일어난 노동자 파업사태를 찍은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첫 극영화는 <어느 당원의 이력서 Personel>(1975). 50분짜리 중편이며 원래 텔레비젼 방영용으로 만든 작품인데, 독일 만하임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지하 폴란드 공산당원이 징계문제로 당 조사위원회에 호출되어 심문받는 과정을 기록영화 형식으로 담았고 50분 동안 심문관과 피심문자의 얼굴 클로즈업만으로 계속 이어가면서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놀라운 작품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본격적인 장편 극영화 데뷔작 <상처 Spokoj>(1976)는 모스크바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키에슬로프스키는 도덕적 불안의 영화세대의 리더로 국내외에서 확실한 주목을 받았다. 현실을 혼란한 마음으로 통찰하던 이 폴란드 감독은 곧 유럽영화계의 자본과 줄이 닿았고 그 계기가 된 것은 바르샤바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십계>연작이다. 84년에 <결말없음 Dlugi Dzien>이란 영화를 만들면서 같이 각본을 쓴 변호사 출신의 크쥐시토프 피시비츠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든 <십계> 연작은 큰 성공을 거뒀다. <십계>가 극장판으로 개봉되는 과정에서 서유럽의 자본이 들어 왓고, 이런 공동작업 시스템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세가지 색> 연작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피시비츠의 조력을 받으면서 키에슬로프스키는 전 유럽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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