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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uble Life of Veronique

베로니카의 이중생활(The Double Life of Veronique)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을 때. 혹은 아무런 이유없이 한없이 슬퍼질 때 우리는 가끔 이런 질문을 하게됩니다.

이 세상에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구나 한번쯤은 가져봤을 이러한 질문을 바탕으로 이 영화는 전개됩니다.
같은날 같은때에 서로 다른 국가에서 태어난 두 사람 베로니카와 베로니크. 서로 자라온 환경은 다르지만 
둘은 자라면서 본능적으로 또하나의 자신이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하지만 음악회에서의 뜻하지 않게 베로니카는 죽게되고 베로니크는 알 수 없는 상실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근원 모를 빛이 자신의 주위에서 멤돌고 있다는 것을 본 후에는 항상 자신과 함께하는 베로니카의 영혼을 느끼게 되고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됩니다.하나 둘씩 자신에게 배달되는 베로니카의 유품을 통해 베로니카는 다시 현실로 다가와 베로니크와 함께 합니다. 그리고 인형극을 하는 알렉상드르를 통해 베로니크는 베로니카의 실존을 알 게 됩니다만...






누구나 한번쯤은 가벼봤음직한 단순한 질문을 통해 크쥐쉬도프 키에슬롭스키는
동화같은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갑니다.

갈색톤의 무채색 화면, 유리구슬을 통해 왜곡되어진 아름다운 주위풍경, 자연스런 영상을
일으키는 단조의 음악과 영상의 완벽한 조화.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한편의 아름다운 영상시로 우리의 마음속에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글:주하의 영화이야기중에서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동구와 서구의 베로니카란 이름을 지닌 두 여성의 삶을 평행으로 이어붙여 개인의 정체성과 동구와 유럽의 현실, 그리고 삶을 재현하는 영화매체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놀라운 표현의 깊이를 담은 작품이었다. 그러나 <베로니카으 이중생활>의 섬세하고 화려한 형식미에 매혹당했던 사람들은 <세가지 색>연작에서 키에슬로프스키의 운명론적인 도식이 너무 지루하게 남용되고 있다고 불평했다. 키에슬로프스키는 본질적으로 비관적인 운명론자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근대적인 이상을 모티브로 한 <세가지 색>은 인간의 본성이 그런 이상들과 충돌하는 게 아닌가라는 우울한 진단으로 가득 차 있다. <세가지 색> 연작의 첫 번째 편인 <블루 Blue>(1993)는 자유를 상징하는 블루를 화면의 기조로 깔고 죽은 남편에 대한 기억 때문에 방황하는 여성의 이야기로, 자유를 얻기 위해 사랑의 감정을 버리려고 노력하다가 마침내 사랑을 택한다는 내용이며 <화이트 White(1994)는 평등을 상징하는 흰색의 의미대로 사랑하기 위해 평등해지려고 노력하는 동구와 서구의 남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더 많은 소유를 전제로 한 터에 평등에 기초한 사랑이 가능한 것인가라는 것을 오히려 의심쩍게 묻는다. 박애를 상징하는 빨간색을 모티브로 한 <세가지 색>의 완결편 <레드 Red>(1994)는 더 많은 소유가 답이 아니라면 더 많은 사랑이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을 탐색하지만 우연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않은 인간의 조건을 차갑게 바라볼 뿐이다.


출처:영화연대



키에슬로프스키의 신비스럽고 시적인 새로운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에 대한 모든 것을 이해하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들다. 그러나 곧 좌절을 맛보게 된다. 모든 부분들은 완전히 딱 아귀가 맞지 않는다. 어쨋는 이는 모아서 맞추어야 하는 퍼즐은 아니다. 이는 일종의 로맨스이다. 우리 모두가 언제 한번 쯤 생각해 보았을 순간에 관한; 또 다른 내가 어디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만나적은 있을까... 왜 나는 나- 혹은 내가 아는 누군가와 똑 닮은 얼굴을 가진 초상화를 전시회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을까?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시카고 선 타임즈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은 에로티시즘과 멜랑콜리 사이의 어딘가를 떠도는 연약하고 최면에 걸린 듯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이는 헨리 제임스의 무시무시하고 결론이 없는 괴기 소설 같은 혹은 Borges의 시적인 미궁같은 분위기를 가진 고요하고 우울한 퍼즐같은 영화이다. 당신이 완전한 존재가 아닌 무언가 부족한 존재처럼, 혹은 뿌연 유리를 통해 일식을 보는 것처럼, 또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붕괴되어 심장이 한번 뛰는 사이에 모든 것이 당신의 눈 앞에 전광석화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키에슬로프스키는 결코 그의 이야기에 결론을 내지 않는다. 그리고.. 그래야 할 것 같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음악은 으시으시한 단조 음계로 작곡된 매혹적이며 시적인 작품이다. 관객에게 주는 효과는 미묘하나 매우 현실적이다. 음악을 통해 이 영화는 우리를 완전히 그들의 세계로 끌어 당기며 현실로 돌아온 후에도 우리 자신의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영화는 상상한 것보다 훨씬 풍요로우며 놀라운 작품이다.


워싱턴 포스트



. 첫장면 - 베로니카의 노래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고 페이드인 되면 한 아름다운 여성이 노래 부르는 모습이 클로즈업 됩니다. 그녀는 바로 폴란드에 살고 있는 베로니카입니다. 노래를 공부하는 학생인 그녀는 길가에서 친구들과 함께 노래를 부릅니다. 베로니카는 비를 맞으며 혼자서 끝까지 노래를 하는데 베로니카의 목소리(실제로는 Elzbieta Towarnicka라는 여성이 부릅니다.)는 얇은 미성이라기보다는 다소 굵은 목소리로 영혼을 울리는 듯한 깊은 음색


이 곡은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의 스코어 중 유일하게 단조가 아닌 장조로 다른 곡에 비해 밝은 느낌을 줍니다. 이 곡은 그녀가 다른 장소에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지만 공통점을 지닌, 또 다른 자아라 할 수 있는 베로니끄를 만날 것이라는 암시를 줍니다. 그대는 오리라(Tu viendras)는 제목처럼





베로니카와 베로니끄를 이어주는 끈 친구를 따라갔다 우연히 지휘자의 눈에 띄어 발탁이 된 베로니카는 공연에서 폴란드 작곡가 반 덴 부덴마이어의 E 단조를 위한 협주곡을 노래하게 됩니다. 심장에 문제가 있던 베로니카는 이 노래를 부르다 무대에서 숨을 거둡니다.





인형, 또는 베로니카의 죽음 어느날, 베로니끄는 인형극 공연을 보게됩니다. 이 때 흘러나오는

피아노곡이 바로 인형(Les Marionnettes)입니다. 다른 곡과 마찬가지로 역시 단조인 이 곡은

어둡고 슬픈 곡조를 특징으로 합니다.


인형이 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다가 숨을 거두는데 이것은 바로 노래공연을 하다 숨을 거두는 베로니카의 모습에 대한 상징이며 이 때 흘러나오는 인형이라는 피아노곡은 줄에 매달려 조정이 되는 인형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는 분신의 존재를 나타냅니다.





인형, 또는 베로니카의 부활 발레를 하다 숨을 거두었던 인형은 날개를 달고 천사로 부활합니다. 이 때 피아노곡이 멈추고 E 단조를 위한 협주곡이 흘러나옵니다. 베로니카와 베로니끄를 연결해 주는 끈의 역할을 하는 이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인형이 부활하는 장면은 죽었던 베로니카가 베로니끄로 환생하는 동시에 이 인형극을 바라보는 베로니끄가 또 다른 자아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아에 눈을 뜨는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Zbignew Preisner


촘촘하게 짜여진 상징으로 이루어진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에서 즈비그뉴 프라이즈너의 음악은 감독과의 긴밀한 관계만큼이나 영화의 표현방식과 주제에 완전히 녹아들어 기능하고 있습니다. 복화술사란 말처럼 프라이즈너는 음악으로 키에슬롭스키의 얘기를 해주고 있는 것이죠. 앞서 살펴보았던 <파워 오브 원>에서 한스 짐머의 음악은 파워풀한 느낌으로 영화의 주제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주로 떠맡고 있었던데 반해, 이 영화에서는 풀롯과 표현방식,주제의 구현에서 음악과 영화가 거의 하나라 할 정도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히 위 3번에서 살펴본 인형극 장면에서 두드러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꼼꼼히 살펴보면서 음악과 영화가 얼마나 치밀하게 융합할 수 있는지에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85년부터 서로 친구로서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긴밀한 그 둘이 서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거의 완전하게 이해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런 점에서 이 둘은 단순히 많은 영화에서 같이 작업한다기보다 음악과 영화라는 서로 다른 표현수단을 가지고 같은 것을 표현한 아주 드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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