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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9일, KTX를 타고 부산을 내려가는 중이다. 연휴에, 연말이 겹쳐 열차는 만원이다.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로 기차 안은 후덥지끈한 기운이 가득 차 있다. 좀 답답하다.
서울역 대합실 TV에서는 ‘화제집중’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화면을 보니 KTX 여승무원들이 집회하는 모습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봤다. 아나운서가 “올해 평택 대추리, KTX 여승무원 문제 등 올해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많다”며 “내년에 모두 잘 해결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2006년, 이제 이틀 남았다. KTX를 타고 내려가는 지금, KTX 여승무원들은 올해 마지막 촛불문화제를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철도공사는 매달 ‘KTX’라는 책자를 찍어 객차에 비치해 놓는다. 지난 11월호 책자에는 ‘전 KTX 승무원 문제, 오해와 진실’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철도공사는 총 3페이지를 할애해 자신의 주장을 자세히도 펼쳤다. 철도공사는 “이들의(KTX 전승무원) 주장만 언뜻 듣고 있으면 이들을 ‘부당노동행위에 저항하여 파업 중 정리해고된, 탄압받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대표적 상징’이라고 오해하기 쉬울 것”이라며 “그러나 이미 성차별이 철폐되고 정규직으로 전환되었으므로 KTX 승무원들의 문제는 더 이상 여성차별의 문제도, 비정규직의 문제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철도공사는 “KTX 여승무원들의 주장, 대부분 사실무근”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철도공사 주장의 핵심은 KTX 여승무원들이 이미 정규직으로 전환되었는데도 이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철도공사의 주장이 사실일까?
IMF 이후 정부는 공공부문에 구조조정을 강요했고, 인력증원을 억제했다. 그러다 보니 공공기관은 인력이 꼭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을 쓰거나, 끊임 없이 외주화를 통해 정규직을 줄여나갔다. 직접 고용된 계약직노동자와 외주회사에 고용된 비정규직노동자들은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 임금과 노동조건에 현격한 차이가 발생했다. 정부가 앞장서서 공공부문부터 삶의 불안에 떠는 비정규직을 늘렸다.
KTX 여승무원들은 현재 철도공사가 직접 고용한 계약직이 아니라, KTX관광레저라는 계열사에 간접고용(외주화)되어 있다. 철도공사는 책자에다가 “KTX 전 승무원들은 현 새마을호 승무원들처럼 공사에서 직접 고용하는 계약직으로 채용하고, 향후 공사 정규직으로 전환해달라는 협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며 “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요구한 것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였다”고 적어놓았다. 이어 철도공사는 “‘정규직화’ 요구를 수용해 계열사의 ‘정규직’을 제시하자 오히려 공사의 ‘비정규직’을 요구했다”며 KTX 여승무원들을 비난했다.
계열사의 ‘정규직’. 빚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정부와 국회는 지난 11월 말 비정규법안을 통과시켰다. 국회를 통과한 법의 내용은 나름 좋게(?) 해석하자면 ‘비정규직’을 인정하되, ‘차별’을 시정해 보자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정부 비정규법안은 △2년 이상 비정규직 고용 시 무기계약화 △합리적인 이유 없이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간의 차별 금지를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철도공사가 열차 승무 업무에 정규직과 공사가 직접 계약한 비정규직을 함께 쓸 경우 이 둘 사이에 임금과 근로조건 등 차별을 둬서는 안 된다. 또 철도공사가 직접고용한 비정규직 승무원을 2년 이상 계약을 계속 할 경우 무기계약으로 전환해야 한다. 철도공사 입장에서 비정규직에게 정규직과 똑 같은 임금을 주고, 2년 계약 이후에 무기계약으로 전환해야 된다는 것은 난감한 일이 아닐까? 그래서 철도공사가 계획하고 있는 것이 직접 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를 계열사로 보내는 것이다. 차별 시정 조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업무를 할 경우 작동되는 내용이다. 같은 회사 내에서 비교 대상이 없어진다면, 승무 업무 전부를 계열사로 위탁할 경우, 계열사 ‘정규직’의 임금을 원청 정규직의 그것보다 절반 뚝 잘라서 주더라도, 이것은 ‘차별’이 아니다. 또한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으로 전환해야 할 일도 당연히 없다.
제조업에서 사내 하청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었을 때, 원청이 압력을 가해 하청업체가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아 노동자들이 노조는 고사하고, 실업자가 되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즉, 계열사의 ‘정규직’이란 비정규직이 가지고 있는 삶의 불안을 치유할 수 있는 조치가 아니다. 오히려 원청이 법망을 피해 교묘하게 차별을 공고히 시키는 적극적인 방안이다. 또 다른 비정규직일 뿐이다. KTX 여승무원들이 철도공사가 제시하는 계열사의 ‘정규직’을 거부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 철도공사의 책자에는 “올해 말까지 새마을호 계약직 승무원도 본인의 희망에 따라 위탁사(계열사)의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밝혔다. 정말 ‘본인의 희망에 따라’ 일이 진행됐을까? 철도공사는 새마을호 여승무원 모두가 KTX 관광레저로 갈 것을 거부하자, 계약이 해지된다는 통보서를 모든 승무원에게 보내는 것을 물론, 가족에게까지 전화를 하면서까지 위탁사의 ‘정규직’이 되라고 강요했다. ‘본인의 희망’이 아니라, ‘공사의 강요와 협박에 따라’서였다. 새마을호 여승무원들도 위탁사(계열사)로 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도 분명히 알고 있다. KTX 여승무원들의 차별과 서러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새마을호 여승무원들은 공사의 강요와 협박에 못 이겨 KTX 관광레저로 가는 것에 동의하는 서류를 작성했다. 하지만 소수지만 일부는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2006년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다.
철도공사 12월호 'KTX' 책자에는 남자 KTX 승무원을 주인공으로 하는 기사가 실렸다. 그는 올해 5월 파업을 하고 있는 KTX 승무원을 대신해 KTX 관광레저에 채용됐다. 훤칠한 몸매에, 얼굴도 잘 생겼다. 그는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정규직다웠다. 사실 그가 실제로 이 직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 기사를 보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기사는 11월호에 실린 ‘KTX 전 승무원, 오해와 진실’의 2탄이다. 공사는 교묘하게 남성을 내세웠다. 그를 통해 철도공사는 ‘KTX 전 승무원의 문제는 더 이상 여성차별도 아니고, 비정규직 문제도 아니다’라고 선전하고 있다.
해를 넘겨가며 투쟁하고 있는 KTX 여승무원, 새해를 앞두고 천막을 친 새마을호 승무원들, 이들의 문제는 최근 통과된 비정규법으로만 따지자면 ‘비정규직’ 문제가 아니다. ‘차별’에 해당되지 않는다. 하지만 법상 차별은 아닐지언정, 삶의 차별은 쓰라리게 존재한다. 이 법은 2007년 7월부터 시행된다. 차별이 합법화될 것이다. 물론 아주 일부는 비정규법의 혜택을 볼 것이다. 지불능력이 있는 대기업에서 업무를 외주화하기 힘들 때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으로 전환시킬 것이다. 우리은행의 사례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도 반쪽짜리 정규직이다. 고용의 불안은 사라졌을지 모르나, 차별은 그대로 유지된다.(사용자가 정리해고라는 시퍼런 칼날을 시도 때도 없이 휘두르는 지금, 실직의 위협에서 자유로운 노동자가 있을까?)
KTX가 300키로로 달린다. 빠르다. 짧아질 대로 짧아진 자본의 시계에 맞춰 살려면 KTX의 속도도 느린 것이 아닐까? 느리지만 좌석이 넉넉한 무궁화가 갑자기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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